시크밤

유성의 인연/히가시노 게이고 (41)

개미남 | 2019.06.16 10:04:17 댓글: 0 조회: 437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3937885
유성의 인연/히가시노 게이고


2 - 16.

다이스케에게서 작전이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고이치는 진한 한숨을 토해냈다. 노트는 도가미 가의 서고에 넣어두었다고 했다. 이상적이다. 라고 고이치는 생각했다.
"역시 시즈나는 대단해. 유키나리가 마음에 걸려서 혹시 망설이지나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야말로 완전 쓸데없는 걱정이었어. 지금 시즈나 픽업해서 그쪽으로 돌아갈게. 오랜만에 셋이서 건배나 하자구." 다이스케의 목소리는 신이 나 있었다.
"조심해서 와." 고이치는 말하고 나서 전화를 끊었다. 컴퓨터 앞에서 팔짱을 꼈다.
남은 문제는 어떻게 그 노트를 경찰의 눈에 띄도록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 노트의 정체는 레시피 모음집이었다. 어릴 적 정든 내 집을 떠나올 때, 아버지의 소중한 유품으로 꺼내온 것이었다. 다이스케와 시즈나의 기억 속에 낙인처럼 찍혀 있는,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하야시라이스를 만드는 방법도 그 노트에 적혀 있었다.
그것을 발견해낸다면 경찰은 이번에야말로 도가미 마사유키의 체포에 나서줄 것이라고 고이치는 예상했다. 물론 도가미는 부정할 것이다. 자신은 본 적도 없는 물건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그에게 압도적으로 불리하다. 그 노트가 아리아케 유키히로가 직접 기록한 것이라는 점은 분명 쉽게 증명될 것이다. 게다가 그 기록대로 하야시라이스를 만들면 <도가미 정>의 대표 요리와 똑같은 맛이 나온다는 것도 곧바로 판명될 것이다.
어떻게 그 노트를 입수했는가. 경찰은 그 점을 집중 추궁할 것이다. 도가미 마사유키는 물론 대답할 수가 없다. 그 자신도 알지 못하는 일이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경찰에서는 그런 식으로 생각해주지 않는다. 살해 현장에서 훔쳐냈다. 라는 가장 타당한 결론을 내릴 것이다. 미리 확보된 금시계의 지문이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물증이 되는 것이다.
도가미 마사유키로서는 여우에 홀린 듯한 기분일 것이다. 14년 동안 숨겨왔던 흉악한 범죄가 왜 이제 와서 이런 식으로 폭로되는지, 영문도 모른 채 체포되는 것이다. 누군가의 덫에 걸려들었다는 생각을 하겠지만 그는 어떻게도 손쓸 방도가 없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도가미가 깨끗이 자백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다양한 상황 증거가 갖춰지더라도 도가미가 부인하는 한, 검찰도 기소까지는 갈 수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다음은 경찰을 믿을 수밖에 없다고 고이치는 생각했다. 자신들이 이렇게까지 밥상을 다 차려주었으니 어떻게든 물증을 찾아내주기만을 기도하는 심정이었다. 가시와바라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때였다. 눈앞에 놓인 휴대전화가 울렸다. 액정화면을 들여다보고 흠칫 놀랐다. 바로 가시와바라가 걸어온 전화였던 것이다.
전화를 연결하여 "네." 하고 대답했다.
"고이치 군인가? 나야, 가시와바라."
"네, 뭔가 진전이 있었어요?" 그때까지 그 생각에만 빠져 있었던 탓에 적잖이 성급하게 묻고 말았다.
"응, 그것 때문에 잠깐 이야기할 게 있어. 자네, 지금 집에 있나?"
"예, 집에 있는데요."
"그럼 잠깐 나 좀 만나줄래? 10분이면 돼."
"좋습니다. 어디로 갈까요?"
"아냐, 내가 그쪽으로 갈게. 실은 바로 근처에 와 있어."
"옛?" 바짝 식은땀이 나는 것을 고이치는 느꼈다.
"다른 볼일 때문에 이 근처까지 왔어. 지금 자네 맨션 근처야. 305호실이라고 했던가?"
고이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너머로 앞길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가시와바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저기, 방이 엄청 지저분한데요."
가시와바라가 나지막하게 웃었다.
"거, 좀 지저분하면 어때? 아니면 형사가 집에 들어오는 게 싫은가?"
"아,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뒤, 곧바로 다이스케에게 전화를 넣었다. 하지만 전파가 닿지 않는지 부재 중 메시지만 흘러나왔다.
별수 없이 문자라도 보내려고 했을 때였다. 도어폰의 차임벨이 울렸다. 이어서 노크 소리. "어이, 고이치. 나야." 가시와바라의 목소리였다.
고이치는 가슴이 철렁했다. 집 근처가 아니었다. 가시와바라는 맨션 현관문 바로 앞에서 전화를 한 것이었다.
다이스케와 시즈나에게 연락할 여유는 없었다. 고이치는 수납장을 열고 이런 때를 위해 준비해둔 프라다 백을 꺼내 침대 위에 내던졌다. 안에 있던 화장품이며 소소한 물건들이 비어져 나왔다.
현관 신발장에서 여자 샌들을 꺼내 내려놓고 그 대신 다이스케의 스니커는 안에 감췄다.
다시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이, 고이치 군."
고이치는 신발장 뒤에 감춰진 스위치를 잽싸게 눌러놓고 현관문을 열었다.
"여어." 가시와바라가 슬쩍 손을 쳐들었다. 갈색 점퍼 차림이었다.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
"그건 괜찮은데, 정말 집 안이 너저분해서‥‥‥."
"그런 건 상관없어. 자네 생활태도를 감시하러 온 것도 아니고." 그렇게 말하며 안으로 들어서던 가시와바라의 시선이 현관에 놓인 여성용 샌들로 향했다. 거기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방에 두 개의 침대가 나란히 놓인 것을 보고 역시 질문을 던져왔다. "혼자 사는 거 아니었나?"
"아, 동거라고 할 정도는 아니구요." 고이치는 말했다. "가끔 들러서 자고 가는 정도예요."
"그것 때문에 침대를 하나 더 들여놨단 말이야?"
"침대는 원래부터 두 개였어요. 처음에 이 방을 친구랑 둘이 빌렸거든요. 둘 다 월급이 시원찮아서 혼자서는 임대료를 낼 수가 없어서요."
"그 친구는?"
"결혼해서 나갔어요. 침대는 그냥 두고. 더블배드를 샀대요." 그렇게 말하면서 고이치는 침대에 어질러져 있던 화장품이며 자질구레한 물건을 프라다 백에 다시 집어넣었다. "어디든 편한 곳에 앉으세요. 좁아터진 곳이라 미안합니다만."
가시와바라는 주위를 둘러본 뒤, 낮은 테이블 옆에 책상다리를 틀고 앉았다.
"자네, 그 여자하고 결혼은 안 해?"
고이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도 그렇지만 그쪽도 결혼은 생각해본 적도 없을걸요?"
"그 여자는 몇 살?"
"스물셋, 아니. 스물넷이던가? 알게 된 지 아직 반년밖에 안 됐어요." 고이치는 냉장고에서 우롱차 페트병을 꺼내 두 개의 유리잔에 따랐다.
"그렇다면 아직 결혼 얘기를 하기는 빠르겠군." 가시와바라는 관찰하는 시선으로 실내를 둘러보고 있었다.
다이스케가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만한 물건은 이 방 안에 하나도 없을 터였다. 사기를 업으로 삼게 된 뒤로 항상 철저히 조심해왔던 것이다. 이렇게 해두면 혹시 경찰이 다이스케를 잡으러 오더라도 고이치는 동생과 연락도 없고 행방도 모른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고이치는 가시와바라에게도 다이스케와 함께 산다는 것이나 시즈나를 자주 만난다는 건 감춰두고 싶었다. 두 동생만은 경찰과 되도록 거리를 두게 하자는 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
"근데, 할 얘기라는 게 뭐예요?" 고이치는 가시와바라에게 물어보며 우롱차가 든 유리잔을 테이블에 놓았다
"고마워." 가시와바라는 우롱차를 꿀꺽 마셨다.
"그 뒤로 동생하고는 연락해봤어?"
역시 그 일이구나. 하고 고이치는 생각했다.
"아직요. 연락은 해봤는데 그쪽에서 아무 소리도 없어서요."
"잘 살고 있나?"
"글쎄요." 고이치는 고개를 외로 꼬면서 대답했다.
"그 녀석, 매사 대충대충 넘어가는 성격이라 착실하게 일하는 거 같지 않아요. 그래서 좀 혼을 냈더니 녀석이 먼저 연락을 끊더라고요. 얼굴 마주하면 또 잔소리나 들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봐요."
"자네가 어렸을 때부터 보호자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가시와바라가 절절한 어조로 말했다.
"다이스케의 증언이 필요합니까?" 고이치가 먼저 물어보았다.
"필요할 수도 있다고 할까. 아직 정확하게는 말하기가 어려워."
"며칠 전에 수사에 약간 진전이 있다고 하셨죠? 그 뒤로는 어떻습니까?"
가시와바라는 얼굴을 찌푸리며 "끄응" 신음을 올렸다.
"단서로 보이는 것들이 여러 가지 발견된 건 사실이야. 우리도 그걸 바탕으로 수사를 진행하고 있어. 하지만 아무래도 결정타가 나오질 않는단 말이야. 어쨌든 14년이나 지난 옛날 일이고 보니 이게 좀."
"의심이 가는 인물은 있어요?"
여기서도 가시와바라는 시원스럽게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음, 있기는 한데. 아직 참고인 단계. <아리아케>와의 관련성도 아직 정확하지 않고. 솔직히 지금 손을 놓은 상태야."
"그런 사람이 있다면 일단 가택수색을 해보면 되는 거 아니예요?"
"가택수색?" 가시와바라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왜?"
"사건과 관계가 있는 물건을 감춰놓았을지도 모르잖아요. 그걸 찾아내면 되는 거겠죠?"
고이치가 말하는 모습을 가시와바라는 예리한 눈빛으로 가만히 응시해왔다. 하지만 곧바로 그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더니 입가도 함께 풀어졌다.
"사건 발생 직후라면 모르지만 지금 단계에서 범인이 증거가 될 만한 물건을 보관하고 있을 리가 없지. 아마 진즉에 처분했을 거야."
"만일 처분할 수 없는 것이라면요? 이를테면 범인에게 큰 가치가 있는 것이라든가."
"가치? 돈이 되는 물건이라는 뜻이야?"
"그게 아니고요. 물건의 가치라는 건 사람마다 다르잖아요? 다른 사람에게는 쓰레기처럼 보여도 어떤 사람에게는 중요한 물건인 경우도 있죠. 그런 것을 범인이 훔쳐냈을 가능성도 있을텐데요."
하지만 가시와바라는 애매한 표정이었다. "글쎄." 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고이치는 답답했다. 아무래도 수사가 답보 상태에 빠진 모양이었다. 경찰이 적극적으로 움직일 만큼 상황 증거가 갖춰지지 못했다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고이치는 코로 심호흡을 하고 나서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 <도가미 정>이라는 양식당에 대해 물어보셨지요?"
가시와바라가 얼굴을 들었다. "뭔가 생각이 났어?"
"그런 건 아니구요. 아무래도 그 양식당이 마음에 걸려서 내가 나름대로 조사해봤어요."
"어허. 이봐. 우리 사정 좀 봐줘. 그때도 말했지? 아직 그 식당이 이번 사건과 관계가 있는지 없는지도 확실하지 않아. 그러니 괜히 이상한 감정은 품지 말라고 부탁했잖아? 수사는 경찰에 맡겨달라고." 가시와바라의 말에는 쓸데없는 짓을 하지 말라는 비난의 여운이 있었다.
"아뇨. 무슨 대단한 일도 아니에요. 어떤 식당인지 인터넷으로 조사해보고, 한 번 먹으러 가본 것뿐이에요."
고이치의 설명을 듣고도 가시와바라의 떨떠름한 얼굴은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런 거 해봤자 아무 도움도 안 돼. 자네 힘을 빌리고 싶을 때는 우리 쪽에서 정식으로 부탁할게. 그러니 제발 앞서가는 짓은 하지 말아줘."
"나도 잘 알아요. 나 역시 수사를 방해하고 싶지 않다구요. 하지만 한 가지. 말해두고 싶은 게 있어요. <도가미 정>에서 요리를 먹어본 느낌 말인데요."
"요리를 먹어본 느낌?" 가시와바라는 의아한 눈빛이었다. "무슨, 알아낸 것이라도 있었어?"
"<도가미 정>의 요코하마 본점에 가서 하야시라이스를 먹어봤어요. 근데 굉장히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비슷하다니?"
"우리 식당 맛하고 비슷했어요. 아버지가 만들던 하야시라이스와 거의 흡사하더라고요. 완전히 똑같은 맛은 아니지만, 약간 바꾼 정도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이런 느낌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고이치는 실제로 요코하마 간나이의 <도가미 정> 본점에서 하야시라이스를 먹어보았다. 사쿠라기초에 있던 첫 가게에서는 <아리아케>의 하야시라이스를 바꾸는 일 없이 그대로 내놓았던 게 아닐까. 하는 것이 고이치의 추리였다.
"그러니까 하야시라이스의 맛을 보건대 자네 아버지 가게와 <도가미 정>이 관련이 있다. 그런 말을 하는 건가?" 가시와바라가 말했다.
"네. 맞아요. 내 지나친 생각인지도 모르지만."
"흠, 하야시라이스라‥‥‥." 가시와바라의 시선이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
그러니 도가미의 집 어딘가에 <아리아케>의 레시피 노트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ㅡ. 고이치는 그것까지 말해버리고 싶었지만, 역시 그 말만은 꾹 참기로 했다.

다이스케가 시즈나를 픽업한 것은 도쿄 역 옆이었다. 라이트 밴을 운전하여 몬젠나카초의 맨션으로 향했다. 조수석에 앉은 시즈나는 창밖을 바라볼 뿐, 내내 말이 없었다.
"왜 시큰둥한 표정이야? 작전이 드디어 성공적으로 끝났는데 신나는 얼굴 좀 해보셔." 핸들을 조작하며 다이스케가 말했다.
"좀 피곤해서 그래. 적의 집에까지 들어갔었는데 당연하잖아?" 김빠진 말투로 시즈나는 대답했다.
"그렇긴 하겠지만, 무슨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도 있나 싶어서."
"아무것도 없어. 말했잖아. 다 끝났다고?"
"응." 다이스케는 대답하고 입을 다물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씻어낼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역시 괴로운 모양이구나. 다이스케는 시즈나의 심정을 생각하며 가슴이 아팠다. 진심으로 좋아하게 된 사람과 이제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그의 가족을 구렁텅이에 빠뜨릴 덫을 쳐놓고 온 셈이었다. 룰루랄라 신이 날 리가 없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함께 맨션으로 향했다. 계단으로 3층까지 올라가는 동안, 시즈나는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305호실 앞에 도착해 호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하지만 열쇠 구멍에 꽂아넣기 직전에 시즈나의 손이 잽싸게 다가와 다이스케의 손목을 잡았다.
왜 그러느냐고 말하려는 그를 향해 시즈나가 고개를 저었다. 둘째손가락을 입에 대고 다른 한쪽 손으로는 현관문 위쪽을 가리켰다.
다이스케는 흠칫 놀랐다. 현관문 위의 쌀알만한 크기의 발광 다이오드가 깜빡거리고 있었다.
숨을 죽이고 시즈나와 얼굴을 마주 보았다. 둘이서 고개를 끄덕이고 발소리를 죽여 복도를 다시 돌아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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