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의 인연/히가시노 게이고 (42)

개미남 | 2019.06.16 10:06:32 댓글: 0 조회: 888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3937887
유성의 인연/히가시노 게이고


2 - 17.

"흠, 꽤 재미있는 이야기로군." 가시와바라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말했다. "역시 요리사의 아들다워. 바라보는 관점이 전혀 다르다니까. 아니지, 바라보는 게 아니라 혀로 느끼는 관점이라고 해야겠군. 하야시라이스의 맛에 착안하여 추리하다니." 장난기 어린 말투였지만 그 눈빛은 진지했다.
"수사에 도움이 안 될까요?" 고이치가 물었다.
"글쎄, 맛이라는 건 주관적인 것이라서 말이야."
"그럴까요? 맛은 만드는 순서나 재료 선정 방법에 따라 결정이 돼요. 그게 서로 동일하다면 뭔가 관련이 있다고 할 수도 있잖아요? 하야시라이스를 만드는 방법은 식당마다 다 다르거든요. 저마다 특별한 노하우가 있다고요. 중요한 부분은 극비사항이기도 해요. 그만큼 맛이 흡사한 걸 보면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똑같은 게 아닌가 싶은데." 고이치는 자신이 불끈 흥분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가시와바라가 이 힌트에 주목해주지 않으면 정말 곤란한 것이다.
가시와바라는 팔짱을 낀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우선 그 이야기를 들고 서에 들어가볼게. 혹시 어딘가에 써먹을 만한 생각인지도 모르니까."
형사는 뭔가 뜨뜻미지근한 말투였다. 그것이 고이치를 답답하게 했지만, 더 이상 깊이 있는 의견을 내놓는 것은 위험했다.
"단지 말이지. 모처럼 해준 충고에 찬물을 끼얹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지금 수사가 제대로 된 방향으로 나가는 건지, 좀 묘한 상황인 것도 사실이야."
가시와바라의 말에 고이치는 미간을 좁혔다. "무슨 말씀이시죠?"
"조금 전에 단서 비슷한 것이 발견되었다고 했지? 14년 전에는 그 사건과 관련된 증거를 경찰에서 거의 찾아내지 못했는데, 지금 이때서야 우연한 기회에 상황 증거 비슷한 것이 줄줄이 터져나오는 거야. 그래서 우리도 힘이 나서 수사를 재개했지. 하지만 수사를 하면 할수록 그 상황 증거가 정말 믿을 만한 건지 뭔지. 이게 자꾸만 마음에 걸린단 말이야."
고이치는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뺨이 팽팽하게 긴장되는 게 느껴졌다.
"이상한 말씀을 하시네요. 그 상황 증거라는 건 경찰이 찾아낸 거 아닙니까? 아니면 갑자기 새로운 증인이 나오기라도 했어요?"
"맞아. 경찰이 찾아낸 거지. 하기무라 형사 알지? 그 친구가 찾아낸 것도 있어."
"그럼, 경찰이 스스로 발견한 증거를 의심한다는 겁니까? 그건 좀 얘기가 이상하죠."
"아닌 게 아니라 자네 말이 맞아. 하지만 증거가 발견된 경위 자체가 의심스럽다면 어떻게 되지? 나는 말이야. 아무래도 누군가 경찰을 유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가시와바라가 담담하게 한 그 말에 고이치는 몸이 후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온몸에서 땀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누가 그런 짓을 한다는 거죠?"
"모르겠어. 이 사건과 관계된 사람인지도 모르고. 단순한 장난 범죄인지도 모르지. 아무튼 그럴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는 얘기야." 가시와바라가 고이치의 눈을 지그시 응시해왔다. 내면을 탐색하는 듯한 시선으로 느껴져서 고이치는 얼굴을 돌려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시선을 회피한다면 모든 일이 말짱 꽝이 될 것 같아서 애써 마주 쏘아보았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가 뭐예요? 무슨 확실한 근거라도 있습니까?"
"근거? 그렇게 말하니 내가 할 말이 없군. 굳이 말하자면 경험과 감이라고 할까? 시효 직전에 이렇게 많은 단서가 발견된다는 건 역시 부자연스러운 일이야. 이거, 영 설득력이 부족한 말이네만."
아닌 게 아니라 이해할 만한 설명이 아니었다. 고이치로서는 경찰이 부자연스럽게 느끼지 않도록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왔다.
"게다가 결국은 물증이 필요해." 가시와바라는 말했다. "지금까지 발견된 상황 증거가 혹시 진실이라고 해도 현재 드러난 것만으로는 아무도 체포할 수 없어. 이 사람 이외에 범인은 있을 수 없다. 라는 결정적인 것이 있어야 한다고. 그런 의미에서는 다이스케의 증언조차 결정적인 물증이 되지 못해."
고이치는 놀라서 눈을 둥그렇게 떴다.
"어째서요? 다이스케의 목격 증언에는 기대를 안 한다는 말이에요?"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났어. 상대가 사람을 잘못 본 거라고 우겨버리면 그걸로 끝이야. 누군가를 범인이라고 단정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증거가 필요하거든." 그렇게 말하더니 가시와바라는 손목시계에 시선을 던지며 몸을 일으켰다. "이거, 바쁠 텐데 너무 오래 있었군. 오늘은 여자친구 안 오는 날인가?"
"아, 예. 오늘은 아마 안 올 거예요."
"그래? 유감이군. 기다리면 잠깐 볼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는데."
가시와바라는 현관에서 구두를 신고 고이치 쪽을 돌아보았다.
"과거의 사건에 언제까지고 묶여 있는 건 자네에게 그리 좋은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아직 젊으니까 이제는 장래 일도 좀 생각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이런 말 해봤자 그 일을 잊는다는 건 무리겠지만."
"맞는 말씀이세요." 고이치는 대답했다. "그 사건을 잊는다는 건 무리예요. 장래 일을 생각하는 건 범인이 잡힌 다음이죠."
가시와바라는 한숨을 내쉬더니 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수사, 잘 부탁드립니다." 고이치는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가시와바라를 배웅하고 고이치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와의대화를 되짚어보았다.
누군가 경찰을 유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ㅡ.
설마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상황 증거건 뭐건 사건과 연결될 만한 것을 찾아내면 경찰은 눈이 벌게져서 그것을 바탕으로 수사를 해줄 거라고만 생각했다.
가시와바라로서도 물론 확실한 근거가 있어서 하는 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래도 진실을 간파하고 있는 걸 보면 역시 베테랑 형사의 경험과 감이라는 건 함부로 볼 게 아니었다.
어쩌면 가시와바라는 경찰을 유도하고 있는 자가 고이치라고 의심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일부러 집에까지 찾아와 반응을 확인했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증거는 잡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꼬리를 잡히지 않았다는 자신이 고이치에게는 있었다.
문제는 지금까지 입수한 상황 증거에 대해 의문을 품은 사람이 가시와바라뿐인가. 하는 점이었다. 수사의 지휘권을 쥔 사람이 그와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고이치와 동생들의 계획은 이미 파탄이 났다는 이야기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다. 누가 경찰을 교란시켰는지, 그 점에만 수사진의 관심이 집중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가시와바라가 현관에서 남기고 간 말이 고이치의 귀에 되살아났다. 모는 것을 다 간파한 상태에서 "이제 그런 짓은 하지 마라" 하고 암암리에 타이른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말이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궁지에 몰린 듯한 기분이 들어 고이치는 머리를 부여잡고 뒤척였다. 그때, 도어 키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이치는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문이 천천히 열리고 다이스케가 빠끔히 들여다보았다.
"괜찮은 거야?" 작은 소리로 물어왔다.
"응." 고이치는 대꾸하며 침대에서 내려섰다.
"경고등, 알아봤냐?"
"하마터면 문을 열 뻔했어. 시즈나가 먼저 눈치를 채고 알려주더라고."
다이스케의 뒤를 이어 시즈나도 들어왔다. 그녀는 도가미의 집에 다녀온 그대로인 듯, 한껏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가시와바라 형사가 왔었어" 고이치는 말했다.
"그래서?" 다이스케가 불안한 기색을 보였다.
"너한테 연락했느냐고 묻더라. 아직 못했다고 버티기는 했는데."
"그밖에는? 수사 진행 상황에 대해 뭔가 말했어?"
"결정적인 게 약간 부족하다고 했어. 정확한 물증이 있으면 좋겠대."
"그렇다면 이제 완벽한 거 아니야? 전화로도 말했지만, 시즈나가 해냈어. 레시피 작전. 완전 성공이야."
고이치는 고개를 끄덕이고 시즈나를 보았다.
"시즈나. 정말 잘했다. 고생했지?"
"뭐, 고생이랄 것까지야." 그녀는 어깨를 으쓱 쳐들었다. "다른 작전에 비하면 시시한 정도였어. 기회를 노려서 노트 하나만 감춰놓으면 되는데, 뭘. 돈 뜯어내는 일보다 훨씬 간단했어."
일부러 강한 척 말하는 시즈나의 얼굴을 보며 고이치는 가슴이 아팠다. 그녀는 어느 때보다 더 정성껏 화장한 모습이었지만 그 표정에 광채라고는 없었다.
"이제 남은 건 경찰이 가택수색에 들어가기를 기다리는 것 뿐인가?" 시즈나와는 대조적으로 다이스케는 목소리가 경쾌했다. "지금까지는 모두 형의 계산대로 술술 풀린 느낌이지?"
"맞아." 고이치는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불안한 마음따위 입에 올릴 수가 없었다.

하기무라가 생맥주 잔을 기울이던 참에 점퍼 차림의 가시와바라가 가게에 들어왔다. 하기무라는 테이블에서 손으로 신호를 보냈다.
"어, 수고." 가시와바라는 맞은편 자리에 앉으면서 말했다. 물수건으로 손과 얼굴을 닦은 뒤, 여점원에게 생맥주를 주문했다.
"오늘은 어디 다녀오셨어요?" 하기무라가 물었다.
"다른 사건 때문에 도쿄에 갔었어. 너저분한 사건의 뒤처리. 관할서에서는 시효 직전의 사건에만 전념할 수도 없는 형평이야."
가시와바라의 맥주가 나왔다. 두 사람은 말없이 잔을 마주쳤다.
"그쪽은 어때? 뭔가 진전이 있었어?" 가시와바라가 물었다.
하기무라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이렇다 할 수확 없음. 도가미가 사쿠라기초에서 식당을 하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 인간관계를 조사해봤는데 <아리아케>와의 관련은 잡히지를 않아요. 거꾸로 아리아케 부부 쪽에서도 살펴봤는데 거기서도 도가미와의 접점은 전혀 안 보입니다. 완전히 막다른 벽이에요."
"그럼 양쪽을 연결하는 건 역시 그 사설 도박장뿐인가?"
하기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방 <썬라이즈>. 거기서 도가미와 아리아케 유키히로가 만났다는 건 우선 틀림이 없어요.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형태로든 교류가 있었을 거예요. 어딘가에 분명 그 흔적이 남아 있을 텐데. 이게 14년이나 지난 일이고 보니 영 쉽질 읺네요."
가시와바라는 삶은 풋콩에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입에 넣지 않고 손끝으로 만지작거리기만 하고 있었다.
"그 지문은 어땠어? 사건 현장에서 채취된 지문과 도가미의 지문을 대조해본다고 했었지?"
여기서 하기무라는 속 시원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잔을 기울이며 고개를 저었다.
"감식반에서 엄청 애를 써준 모양인데, 일치하는 지문은 발견하지 못했어요. 도가미가 <아리아케>를 찾아간 게 범행 당일 뿐이었다면 그럴 가능성이 더 높긴 하지요. 범행 때는 장갑을 끼고 있었을 테니까요."
"거참, 아쉽군. 이소베 씨는 뭐래?" 가시와바라는 하기무라의 상사 이름을 댔다.
"지금 이대로는 어떻게도 움직여볼 도리가 없다는 의견이에요. 자백을 시키려고 해도 공격할 증거가 너무 적다고요."
가시와바라가 드디어 풋콩을 입에 넣었다.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더니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사체는 아직 안 떴지?"
"사체요?"
"DVD 가게에 숨어든 좀도둑의 사체 말이야. 보트로 먼바다에 나가 감쪽같이 사라졌잖아."
"아, 그러고 보니 사체가 떠올랐다는 말은 없었어요. 하긴 뭐, 바다는 넓으니까요."
"바다 고기들의 먹잇감으로 사라졌나, 아니면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 없었나‥‥‥."
"뭐라고요?" 하기무라가 물었다. "무슨 뜻이에요? 역시 위장 자살이라는 말인가요?"
"아니, 아무것도 아냐."
"그게 위장 자살이어서 도둑놈이 살아 있다고 해도 이 사건에 플러스가 될 건 없어요. 훔쳐낸 물건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자는 아무것도 모를 테니까요."
"하지만 나는 그 도둑놈을 좀 만나보고 싶군." 가시와바라가 말했다. "그 유서에 대한 반응은 아직 어디서도 들어온 게 없어?"
"해안에서 발견된 유서 말이죠? 아무 반응도 없을 거예요. 신원을 파악했다는 말도 못 들었어요."
"그래." 가시와바라는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가시와바라가 왜 새삼스럽게 잔챙이 절도범에 대해 신경을 쓰는지 하기무라는 알 수 없었다. 물론 절도범이 훔쳐낸 물건에서 차례차례 새로운 사실이 판명되었고 마침내 도가미 마사유키까지 더듬어간 것이기는 하지만 절도범 자체는 <아리아케> 사건과는 아무 관계도 없을 터였다.
"가시와바라 씨 쪽은 어떠셨어요? 뭔가 수확이 있었습니까?"
하기무라의 물음에 가시와바라는 즉석에서 고개를 저었다.
"아까도 말했잖아. 별 볼일 없는 사건으로 내돌리는 통에 내 맘대로 움직여볼 시간도 없어."
"그러시군요‥‥‥."
"자질구레한 사건만 줄줄이 터지고, 정말 답답하네. 당연한 일이지만 위쪽에서야 결과가 나오기 쉬운 사건부터 처리하려고 들잖아. 서장은 옛날 옛적 사건에는 아예 관심도 없어. 시효가 성립되어도 자기 책임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지 뭔지."
그야말로 상사가 이해를 해주지 않아 괴롭다는 듯한 말투였지만, 하기무라에게는 그런 가시와바라 본인이 요즘 들어 이 사건에 대한 열의가 사그라진 것처럼 보였다. 오늘 이 자리에서 만나자는 것도 하기무라가 먼저 청한 것이었다.
"근데 그 식당에서 뭐 좀 먹어봤어?" 가시와바라가 물어왔다.
"그 식당이라뇨?"
"<도가미 정> 말이야. 자네 본부 쪽에서는 가깝잖아?"
"아, 그 식당요? 아뇨, 아직 못 먹어봤는데?"
"그래?"
"그게 왜요?"
"아냐. 한 번 먹으러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아서. 하야시라이스가 자랑거리라는 모양이야."
"좋지요. 언제든 함께 가시죠."
가시와바라는 고개를 끄덕이고 맥주잔을 비웠다. 점원을 부르더니 모듬 생선회와 생맥주를 추가로 주문했다.
그 모습을 보며 하기무라는, 역시 예전과는 뭔가 다르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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