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히가시노 게이고 (1)

개미남 | 2019.06.18 10:30:45 댓글: 0 조회: 1319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3939002
악의/히가시노 게이고




사건 - 노노구치 오사무의 수기



1.

사건이 일어난 날은 4월 16일, 화요일이었다.
그날 나는 오후 3시 반에 집을 나서서 히다카 구니히코의 집으로 향했다. 히다카의 집은 내가 사는 곳에서는 전차로 역 하나의 거리였다. 역에서 잠깐 버스를 타야 하지만 그래도 걷는 시간까지 합해 20분이면 도착할 수 있었다.
평소에 나는 별다른 볼일 없이도 히다카의 집을 자주 드나들었지만 그날은 특별한 용건이 있었다. 아니, 그보다 그날을 놓치면 당분간 그를 만날 수가 없었다.
히다카의 집은 말끔하게 구획이 정리된 주택지 안에 있었다. 차례차례 늘어선 집들은 한결같이 고급주택이었다. 게다가 간간이 호화주택이라고 할 만한 저택도 눈에 띄었다. 이 근방은 예전에는 잡목이 들어찬 숲이어서 그 나무들을 그대로 정원수로 살려둔 집이 많았다. 담장 안으로 너도밤나무며 상수리나무가 무성하게 자라서 길 쪽에까지 짙은 그림자를 떨구고 있었다.
이 도로만 해도 그리 좁은 편이 아닌데 이 일대는 모두 일방통행이었다. 안전성 확보도 동네의 수준을 나타내는 한 가지 조건이라고나 할까.
몇 년 전 히다카에게서 이쪽으로 집을 샀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역시나 하고 생각했다. 이 도시에서 자란 아이들에게 이 동네에 산다는 건 희망사항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히다카의 집은 호화주택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부부 둘이서 살기에는 분명 너무 큰 집이라는 생각이 드는 저택이었다. 팔작지붕(합각지붕) 같은 부분은 전통가옥풍이지만 출창이 있고 현관이 아치형이거나 2층 창문에 플라워 박스 등이 있는 점은 서양식 디자인의 건축이었다. 이건 아마도 부부 양쪽의 의견을 똑같이 반영하여 지은 결과일 것이다. 아니, 담장이 벽돌담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부인쪽의 의견이 더 많이 반영되었다고 봐야 할까. 그녀는 유럽의 고성 같은 집에서 살고 싶다고, 예전에 그런 말을 비친 적이 있었다.
아차, 정정해야겠군. 부인이 아니다. 전 부인이다.
그 벽돌담을 따라 들어가 역시 양옆에 벽돌을 높직하게 쌓아 올린 대문 앞에 서자 나는 인터폰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응답이 없었다. 문틈으로 들여다보니 주차장에 히다카의 사브 자동차가 없었다. 외출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시간을 어떻게 때울까 생각하다가 퍼뜩 벚나무가 떠올랐다. 히다카의 집 정원에는 천엽벚나무 한 그루가 있어서 지난번에 찾아왔을 때에는 30퍼센트쯤 피어 있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열흘 가까이 지났는데 지금은 어찌 되었을까.
남의 집이기는 하지만 친구라는 입장을 앞세워 널름 들어가 보기로 했다. 현관으로 들어가는 길이 중간에서 갈라져 건물 남쪽으로 이어졌다. 그 위를 걸어 정원으로 돌아 들어갔다.
벚꽃은 그새 많이 떨어져버렸지만 아직 기분 좋게 바라볼 만큼은 꽃잎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감상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그곳에 낯선 여자가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여자는 허리를 숙이고 땅바닥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면바지에 스웨터 차림이었다. 손에는 하얀 천 같은 것을 들고 있었다.
"저어." 나는 말을 건넸다. 여자는 화들짝 놀란 기색이었다. 이쪽을 돌아보더니 소스라치듯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 죄송해요." 여자는 말했다. "이게 바람에 날려 이 댁 정원으로 넘어와서요. 집에 아무도 안 계신 거 같아 실례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러더니 손에 든 것을 내보였다. 그것은 하얀 모자였다.
여자는 삼십대 후반으로 보였다. 눈도 코도 입도 자그마한, 수수한 얼굴의 여자였다. 안색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모자가 날릴 만큼 강한 바람이 불었던가?
나는 약간 의심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열심히 바닥을 살펴보고 계셨던 것 같은데요?"
"네에. 저기, 잔디가 너무 예뻐서 손질을 어떻게 하시는지 궁금해서요."
"흐음. 아뇨, 나는 잘 모릅니다. 여기는 친구 집이거든요."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 집 주인이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다.
"정말 죄송했어요."
여자는 머리를 한 차례 숙이더니 내 옆을 지나 대문 쪽으로 나갔다.
그리고 5분쯤 지났을까. 주차장 쪽에서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히다카가 돌아온 모양이었다.
나는 현관 쪽으로 돌아갔다. 감색 사브가 후진하면서 주차장으로 들어서는 참이었다. 운전석의 히다카가 나를 알아보고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리에 씨도 웃으며 인사를 해주었다.
"아, 미안해. 잠깐 쇼핑하려고 나갔는데 길이 막혀서 말이지. 아휴, 힘드네." 차에서 내리자마자 히다카는 얼굴 앞에서 손을 내저었다. "오래 기다렸어?"
"아냐, 별로. 자네 정원 벚나무를 내 마음대로 구경하고 있었어."
"이제 많이 떨어졌지?"
"조금. 그래도 정말 근사한 나무야."
"꽃이 피어 있을 때는 좋은데 그 다음이 문제야. 작업실 창문이 바로 옆이라서 꿈틀거리는 벌레가 가끔 들어온다니까."
"저런, 저런. 하지만 당분간은 여기서 작업할 일도 없잖아?"
"응. 그놈의 벌레지옥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놓이네, 뭐, 어쨌거나 안으로 들어가자고. 아직 커피 한잔 마실 정도의 그릇들은 남아 있어."
아치형의 현관 밑을 지나 우리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실내는 거의 다 정리되어 있었다. 벽을 장식했던 그림도 사라졌다.
"짐은 다 꾸렸어?" 나는 히다카에게 물었다.
"작업실만 빼고는 대충 끝났어. 하긴 거의 다 이삿짐센터에 맡겼으니까 나는 별로 한 일도 없지만."
"오늘 밤에는 어디서 잘 거야?"
"일단 호텔을 잡아뒀어. 크라운 호텔.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여기서 자야 할 거 같아."
나와 히다카는 그의 작업실로 들어갔다. 5평 남짓한 넓이의 방이었다. 컴퓨터와 책상, 거기에 작은 책장 하나가 있을 뿐, 휑뎅그렁했다. 나머지 가구는 이미 포장했을 터였다.
"그럼 내일까지 보내야 할 원고가 아직 남아 있는 모양이지?"
내 질문에 히다카는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재 1회분이 남았어. 오늘 밤 안에 팩스로 보내주기로 했지. 그래서 아직 전화는 해지 수속을 못했어."
"소메이 출판사 쪽 월간지?"
"응."
"앞으로 몇 매나 써야 하는데?"
"30매. 뭐, 어떻게든 될 거야."
의자는 두 개가 남아 있어서 책상 모서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곧바로 리에 씨가 커피를 내왔다.
"밴쿠버 쪽 날씨는 어떻지? 아무래도 여기보다는 춥겠지?" 나는 두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위도가 전혀 다르잖아. 여기보다는 춥지."
"하지만 한여름에는 시원하다니까 나는 그게 고맙네요. 에어컨을 켠 방에서만 지내면 몸이 영 안 좋거든요."
"시원한 방에서 원고도 슬슬 잘 써진다면 좋겠는데. 뭐, 아마 그렇게는 안 되겠지?" 히다카가 싱글싱글 웃었다.
"노노구치 씨도 꼭 놀러오세요. 여기저기 안내해드릴 수 있게 제가 준비할 테니까요."
"고마워요. 꼭 한번 가지요."
"그럼 천천히 얘기하세요." 리에 씨는 방을 나갔다.
히다카는 커피잔을 든 채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정원을 바라보았다.
"저 벚꽃이 활짝 핀 것을 보고 갈 수 있어서 다행이야" 그는 말했다.
"내년부터는 꽃이 예쁘게 피면 사진을 찍어서 캐나다로 보내줄게. 아참. 그쪽에도 벚나무가 있던가?"
"흠.모르겠네. 이번에 가서 살게 될 집 근처에는 없었던 것 같아." 그렇게 말하고 히다카는 커피를 마셨다.
"근데 아까 좀 이상한 여자가 정원에 있었어." 나는 약간 망설였지만 역시 알려주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말을 하기로 했다.
"이상한 여자?" 히다카가 미간을 좁혔다.
나는 조금 전에 보았던 여자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러자 처음에는 의아한 표정을 짓던 히다카의 얼굴이 점차로 헤실헤실 풀려가는 것이었다.
"고케시 인형(팔다리 없는 둥글고 긴 몸통에 머리가 동그란 여자아이 모양의 채색 목각인형ㅡ역주) 같은 얼굴을 한 여자 아니었어?"
"음, 그래. 듣고 보니 그렇군." 비유가 정확했기 때문에 나는 웃음이 났다.
"니미라고 했던가? 이웃집에 사는 여자야. 언뜻 젊게 보이지만 아마 마흔 살이 넘었을 거야. 중학생 정도의 아들이 있거든. 그야말로 철딱서니 없는 중학생 녀석이지. 남편은 도통 집에 붙어 있지 않는 것 같더라고. 아마 어딘가 지방의 직장에 혼자 내려간 모양이라는 게 리에의 추리야."
"꽤 자세히 아는데? 친한 사이야?"
"그 여자하고? 천만의 말씀." 히다카가 창문을 열자 모기장 덧문만 남았다. 부드럽게 바람이 들어왔다. 바람에는 잎사귀 냄새가 스며들어 있었다. "그 반대야." 히다카는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그 여자한테 원한을 산 것 같아."
"원한? 이거 보통 일이 아니네. 무엇 때문에?"
"고양이."
"고양이? 고양이가 뭘 어쨌는데?"
"그 여자가 기르던 고양이가 얼마 전에 죽은 모양이야. 길가에 쓰러져 있었다는군. 수의사에게 보였더니 독을 먹은 게 아니냐고 했다는데?"
"그 일하고 자네가 무슨 관계가 있는데?"
"내가 독을 넣은 경단을 뿌려놓아서 고양이가 그걸 먹은 게 아니냐고 의심하는 모양이야."
"자네가? 그 여자는 왜 그런 생각을 했지?"
"그게 아주 걸작이라니까." 히다카는 하나 남은 책장에서 월간지를 뽑아오더니 한가운데쯤을 펼쳐서 내 앞에 놓았다. "이 글을 읽었대."
그것은 반 페이지 정도의 수필이었다. 제목은 <인내의 한계>. 옆에 히다카의 얼굴 사진이 나란히 실려 있었다. 나는 그 수필을 대충 훑어보았다. 글의 내용은, 내놓고 기르는 고양이 때문에 큰 피해를 입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침에 나가 보면 정원에 반드시 고양이 똥이 어질러져 있고 주차장 자동차의 보닛에는 고양이 발자국이 점점이 찍혀 있다. 화분의 꽃이며 잎사귀를 뜯어먹기도 한다. 흰색과 갈색의 점박이 고양이가 범인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대책을 세울 도리가 없다. 페트병을 주욱 늘어놓아 보기도 했지만 전혀 효과가 없어서 그야말로 인내의 한계에 도전하고 있는 나날이다. 대충 그런 내용이었다.
"죽은 고양이가 흰색과 갈색의 점박이였어?"
"음. 뭐, 그렇다는군."
"거참."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의심을 받을 만도 하네."
"지난주였던가? 그 여자가 험악한 얼굴을 하고 우리 집에 쳐들어왔었어. 차마 독을 뿌리지 않았느냐는 말은 안 했지만 거의 그 비슷한 뜻의 말을 하더라고. 우리는 그런 짓 안 합니다. 하고 리에가 화가 나서 돌려보냈지만, 오늘 정원을 오락가락했다는 걸 보니 아직도 의심을 하는 모양이군. 혹시 독이 든 경단이 떨어져 있지 않나 하고 조사했겠지."
"꽤 끈질긴 여자로군."
"그런 쪽 취향을 가진 여자들은 다 그래."
"자네가 당분간 캐나다에 가서 살게 되었다는 건 모르는 모양이지?"
"아니, 리에가 그 여자한테 얘기했어. 우리는 다음 주부터 한참 동안 밴쿠버에 가서 살기로 했다. 그러니 댁의 고양이가 어지간히 말썽을 피워도 이제 조금만 더 참으면 될 일이라고 포기하고 지냈을 뿐이다. 라고 말해줬대. 안 그런 것 같아도 리에가 꽤 성질이 있거든." 히다카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리에 씨 말이 맞네. 자네들이 서둘러 굳이 그 고양이를 죽일 이유는 없는 거니까."
그런 내 말에 왠지 히다카는 곧바로 동의하지 않았다. 여전히 느물느물 웃으면서 창밖을 바라보며 커피를 다 마시고 나서야 불쑥 말했다. "내가 했어."
"엣?" 그가 한 말의 의미를 얼른 알아듣지 못해서 나는 되물었다. "뭐라고?"
그는 커피잔을 책상에 내려놓고 그 대신 담배와 라이터를 집었다.
"내가 그 고양이를 죽였다고. 독 경단을 정원에 뿌려뒀었어. 설마 그게 그렇게 잘 먹힐 줄은 생각도 못했지만."
그 말을 듣고서도 여전히 나는 히다카가 농담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느물느물 웃고는 있었지만 농담을 할 때의 표정은 아니었다.
"독 경단 같은 걸 어떻게 만들어?"
"별 거 아냐. 캣푸드에 농약을 섞어서 정원에 던져둔 것뿐이야. 버르장머리 없이 자란 고양이는 뭐든 덥석 다 집어먹는 모양이야."
히다카는 담배를 입에 물더니 불을 붙여 맛있다는 듯 연기를 토해냈다. 방충망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에 그 연기는 금세 흩어졌다.
"왜 그런 짓을 했어?" 나는 물었다. 그리 좋은 마음은 아니었다.
"이 집, 아직 임대인을 못 찾았다는 얘기는 했었지?" 약간 진지한 얼굴이 되어 그는 말했다.
"응."
히다카 부부는 자신들이 캐나다에 가 있는 동안 이 집을 남에게 빌려줄 생각이었다.
"부동산중개소가 계속 임대인을 찾아주기로 했는데, 지난번에는 약간 신경 쓰이는 소리를 하더라고."
"어떤 소리를?"
"집 앞에 페트병을 늘어놓은 건 이미지가 안 좋다는 거야. 그야말로 고양이한테 시달리는 집이라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라나 봐. 아닌 게 아니라 그래서야 아무도 집을 빌리겠다고 나서지 않겠지."
"그럼 그런 건 치워버리면 되잖아?"
"그래서야 본질적인 해결이 안 되지. 집을 빌리겠다는 사람이 이 집을 보러 왔을 때, 정원에 고양이 똥이 여기저기 어질러져 있으면 어떻겠어? 그나마 우리가 있을 때는 청소라도 할 수 있지만 내일부터는 아무도 없잖아. 정말 어지간히 향기로운 냄새를 풀풀 풍기실 거야."
"그래서 죽였어?"
"이건 기르는 사람한테 책임이 있는 거야. 그걸 그 니미라는 여자는 전혀 이해를 못하는 것 같아." 히다카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서 껐다.
"그거. 리에 씨는 알고 있어?"
내가 묻자 그는 한쪽 뺨으로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알 리가 있어? 여자라는 건 원래 고양이를 좋아하는 경우가 많거든. 사실을 말하면 아마 나를 악마 취급할걸?"
무어라 대꾸할 말이 없어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때마침 전화벨이 울렸다. 히다카가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아, 안녕하세요? 슬슬 전화가 걸려올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예. 예정대로 됩니다. ……하하하. 내가 너무 잘 알지요? 지금 시작할 참입니다. ……그렇죠. 오늘 밤 안에는 어떻게든 될 거예요. ……예. 그럼 다 쓰는 대로 바로 보내지요. ……아뇨. 그게요. 이 전화는 내일 오전까지밖에 쓸 수가 없어요. 그러니 내 쪽에서 전화하도록 하겠습니다. ……예. 호텔에서요. 자, 그럼 또 연락하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편집자야?"라고 나는 물었다.
"응. 소메이 출판사의 야마베 씨. 내 원고 늦는다는 건 항상 똑같지만 역시나 이번만은 애가 타는 모양이지? 아무튼 여기서 나를 놓쳤다가는 모레는 내가 일본에 없거든."
"그럼 방해가 되지 않도록 나는 그만 실례해야겠네." 나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때였다. 인터폰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세일즈맨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리에 씨가 복도를 걸어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서 노크 소리가 났다.
"응. 무슨 일이야?"라고 히다카가 말했다.
문이 열리고 리에 씨가 우울해 보이는 얼굴을 내밀었다.
"후지오 씨가 찾아오셨는데……."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히다카의 얼굴이 스콜을 앞둔 하늘처럼 흐려졌다.
"후지오……, 후지오 미야코?"
"응. 오늘 안으로 꼭 해야 할 말이 있다고 하는데?"
"어휴, 이것 참." 히다카는 입술을 깨물었다. "분명 우리가 캐나다에 간다는 얘기를 어디서 들은 모양이네."
"바쁘시다고 그냥 돌려보낼까?"
"흠, 글쎄."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아냐, 만나자."라고 말했다. "우리 쪽으로서도 이참에 매듭을 지어두는 게 속이 시원하지. 이 방으로 안내해줘."
"그건 좋은데……." 리에 씨는 조심스러운 눈치로 내 쪽을 쳐다보았다.
"아, 나는 그만 일어날 겁니다."라고 나는 말했다.
"죄송해요." 리에 씨는 말하면서 문 거너편으로 사라졌다.
"참 난처하네" 히다카가 한숨을 섞어 말했다.
"후지오라니. 후지오 마사야의?"
"응. 그 여동생이야." 그는 약간 길게 자란 머리를 긁적였다. "돈이라도 좀 집어달라는 이야기라면 간단한데, 책을 회수하라거나 완전히 새로 써달라는 얘기에는 도저히 응할 수 없어."
발소리가 들려왔다. 히다카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복도가 어두워서 미안해요." 리에 씨의 목소리에 이어 노크소리가 들렸다.
"예." 히다카의 대답이었다.
"후지오 씨예요." 문을 열고 리에 씨가 말했다.
그녀 뒤에는 이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긴 머리의 여자가 서 있었다. 여대생이 취업면접을 볼 때 입을 듯한 정장 차림이었다. 갑작스러운 방문이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예의만은 지키려고 애를 쓴 것처럼 느껴졌다.
"자, 나는 이만." 나는 히다카에게 말했다. 모레는 가능하면 배웅을 나가겠다는 말을 하려다가 꿀꺽 삼켰다. 후지오 미야코를 묘하게 자극하는 결과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히다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리에 씨의 배웅을 받으며 히다카의 집을 나섰다.
"서둘러 가시게 해서 미안해요." 손을 맞대고 한 눈을 찡긋하면서 죄송하다는 듯 그녀는 말했다. 몸집이 작고 마른 체형이어서 그런 식의 몸짓을 하면 소녀 같은 분위기가 났다. 도저히 삼십이 넘은 나이로는 보이지 않았다.
"모레는 공항으로 배웅을 나가지요."
"바쁘지 않으세요?"
"괜찮아요. 자, 그럼."
"안녕히 가세요." 리에 씨는 말하고 내가 다음 모퉁이를 돌아설 때까지 배웅을 해주었다.

ㅡ 계속하여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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