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몬드 -손원평 작 (6)

호수 | 2021.09.14 20:07:00 댓글: 0 조회: 796 추천: 0
분류연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03606


17.
시내는 인파로 술렁였다. 여느 크리스마스이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버스를 탄지 얼마 안돼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는 거였다. 길은 끝없이 막혔고 라디오에선 심년 만의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되겠다며, 크리스마스인 내일까지 폭설이 이어질 거라는 멘트가 흘러나왔다. 내 기억에도 내 생일에 눈이 내린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흩날리는 눈은 빠른 시간 동안 무서울 정도로 쌓여 갔고 도시를 삼킬 것처럼 끝없이 쏟아졌다. 잿빛이었던 도시의 풍경이 부드러워졌다. 그래서인지 버스에 탄 사람들도 꽉 막힌 도로 사정에 대해 별로 불만이 없었다. 모두들 흘린 것처럼 창밖을 내다보거나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 댈 뿐이었다.
- 냉면을 먹어야 겠다.
할멈이 툭 뱉었다.
- 거기다 뜨끈한 고기만두.
엄마가 짭짭, 소리를 냈다.
- 거기다 뜨거운 육수 추가요.
내가 이렇게 덧붙이자 모녀는 마주 보며 헤헤 웃었다. 얼마 전 내가 왜 사람들은 겨울에는 냉면을 잘 먹지 않느냐고 물은 걸 떠울린 모양이었다. 어쩌면 엄마와 할멈은 내가 그렇게 묻는 게 냉면이 ' 먹고 싶어요' 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졸다 깨길 반복하다 겨우 버스에서 내린 우리는 청계천을 따라 하염없이 걸었다. 이제 세상은 온통 하얗기만 했다. 고개를 들자 허연 눈송이들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떨어지고 있었다. 엄마는 소리를 지르며 어린아이처럼 하늘을 향해 혀를 내밀고 눈을 받아먹었다. 할멈이 예전에 가본적 있다는 골목길 안쪽 오랜 전통의 냉면집은 사라지고 없었다. 바지 끝단을 적신 물기가 점점 위로 올라와 종아리가 차가워질 때쯤 우리는 엄마가 스마트폰으로 간신히 찾은 냉면집에 들어갔다. 즐비한 커피 전문점 사이에 있는 프랜차이즈 냉면집이었다.
평양식이라고 커다랗게 써 붙인 대로, 면발은 이가 닿기 무섭게 뚝뚝 끊어졌지만 그뿐이었다. 육수에선 누린내가 났고 왕만두에선 탄내가, 냉면에선 사이다 맛이 났다. 냉면을 처음 먹어보는 사람이라도 알아챌수 있을 정도로, 공들이지 않은 가벼운 맛이었다. 그런데도 할멈과 엄마는 그릇을 싹싹 비웠다. 때로는 맛보다 분위기가 식욕을 돋게 하나보다. 그날은 물론 눈 때문이였다 할멈과 엄마의 얼굴엔 시종일관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나는 커다란 얼음 덩이를 입안에 넣고 굴렸다.
- 생일 축하한다.
할멈이 말했다.
- 태여나 줘서 고마워.
엄마가 내 손을 조물거리며 덧붙혔다. 생일 축하해. 태어나 줘서 고마워. 어딘지 식상한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해야 하는 날들이 있는 거다.

다음 행선지를 정하지 않은 채 우리는 일어섰다. 할멈과 엄마가 계산을 하는 사이 나는 카운터 앞에 놓인 바구니에서 자두맛 캔디를 보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바구니 안에는 누가 먹고 남긴 자두맛 캔디의 빈 껍질이 덩구러니 하나 놓여 있었다. 내가 그걸 만지작거리자 종업원이 미소를 지으 며 사탕을 가져다 줄테니 조금 기다리라고 했다.
할멈과 엄마가 먼저 바깥으로 나깠다. 여전히 눈은 펄펄 내리고 있었고 엄마는 뭐가 그리 좋은지 깡충깡충 뛰며 손을 뻗어 눈송이를 잡으려 애썼다. 할멈은 그런 엄마를 보며 배를 잡고 웃다가 창 너머로 나를 향해 환한 웃음을 보냈다. 종업원이 다가와 커다란 사탕 봉지를 뜯었다. 작은 바구니에 선물처럼 날개의 켄디들이 넘치도록 쏟아졌다.
- 괜찮죠? 크리스마스이브니까.
나는 두 주먹 가득 사탕을 움켜쥔채 종업원에게 물었다. 종업원은 조금 머뭇거리더니 이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창밖에선 여전히 엄마와 할멈이 웃고 있었다. 두 여자 앞으로 거리 공연을 펼치는 혼성 합창단의 행렬이 길게 지나갔다. 모두들 빨간 산타 모자를 쓰고 빨란 망토를 두른 채 캐럴을 부르고 있었다. 노엘 노엘 노엘 노엘. 이스라엘 왕이 나셨네. 나는 양쪽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사탕 봉지의 뾰족한 감촉을 느끼며 문을 향해 다가갔다.
그 순간 여러 사람이 동시에 함성을 내질렀다. 케럴 소리가 잦아들었다. 또다시 이어진 함성은 몇 개의 비명으로 갈라졌다. 합창단의 대열이 흐트러져 있었다. 사람들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급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유리문 너머에서 한 남자가 하늘을 향해 무언가를 찔러대고 있었다. 우리가 가게에 들어오기 전부터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정장 차림의 남자였다. 차림새와 달리 한 손엔 칼이. 한 손엔 망치가 들려 있었다. 남자는 내리는 눈을 모두 찌르겠다는 듯 격한 몸짓으로 양손을 휘둘렀다. 그가 합창단을 향해 다가갔고 몇 사람이 급히 전화기를 꺼내는 모습이 보였다.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그이 눈이 엄마와 할멈에게서 멈췄다. 그가 방향을 틀었다. 할멈이 엄마를 잡아 끌었다. 다음 순간 믿을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남자가 엄마의 머리 위로 망치를 내리 찍었다. 한번, 두번, 세번,네번.
엄마가 바닥에 피를 흩뿌리며 나동그라졌다. 나는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 문을 밀었지만 할멈이 소리를 지르며 몸으로 막아섰다. 남자는 망치를 땅에 떨구곤 다른 손에 쥔 칼로 공기를 몇차례 벴다. 나는 유리문을 쾅쾅 두드렸지만 할멈은 고래를 저으며 온 힘을 다해 문을 막았다. 할멈은 거의 울다시피 하면서 내게 무언가를 반복해 말했다. 그러는 동안 할멈의 뒤로 남자가 다가왔다. 뒤를 돌아 남자를 본 할멈이 커다랗게 포효했다. 하지만 단 한번뿐이었다. 할멈의 거대한 등이 내 눈앞을 가렸다. 유리에 피가 튀었다. 빨갛게. 더 빨갛게. 내가 할 수있는 거라곤 점점 더 빨개지는 유리문을 바라보는 것뿐이였다. 그러는 동안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저 멀리 얼어 있는 전경들이 보였다. 마치 남자와 엄마와 할멈이 한 편의 연국이라도 벌이고 있다는 듯 모두들 꼼짝 않고 바라보기만 했다. 모두가 관객이었다. 나도 그중하나였다.

18.
희생자들은 모두 남자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남자는 매우 전형적인, 보통의 삶을 살던'소시민' 이었다. 그는 사 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중소기업에서 십사 년간 영업직으로 일하다가 경기 침체로 갑작스런 구조 조정을 당했다. 퇴지금으로 치킨집을 차렸지만, 이 년이 지나지 않아 문을 닫았다. 그러는 와중에 빚을 얻었고 가족은 그를 떠났다. 그 후 남자는 집 안에서만 생활했는데 그 시간이 자그마치 삼녀 하고도 반이었다. 그는 반지하 방에 기거하며 근처 슈퍼에서 물건을 사거나 어쩌다 구립 도서관에 들리는 것 말고는 일절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가 도서관에서 대출한 책들은 무술이나 호신술, 칼 쓰는 방법에 관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와 달리 집에서 발견된 책들은 성곡의 법칙이나 긍정을 습관화하는 방법이 담긴 자기 계발서들이었다. 남자의 초라한 책상 위에는 보란듯이 크고 커친 필체로 쓴 유서가 놓여 있었다.

오늘 누구든지 웃고 있는 사람은 나와 함께 갈 것입니다.

남자의 일기장에는 그가 세상을 중오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즐거울 것 없는 세상에서 미소를 땐 채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살의를 느낀다는 암시도 여러 차례 기록되어 있었다. 남자의 삶과 기록들이 점차 수면 위로 떠오르자, 대중의 관심은 사건 자체보다 그가 왜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사회적 조명으로 바뀌었다. 남자의 삶이 자기네들의 삶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 중년 남자들은 비탄에 빠져 탄식했다. 남자에 대한 동정 여론이 퍼지기 시작했고, 초점은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대한민국의 현실로 옮겨 갔다. 누가 죽었는지 같은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사건은 얼마간 뉴스를 장식했고 기사엔' 누가 이 남자를 살인자로 만들었나' , '웃으면 죽어야 하는 나라, 대한민국' 따위의 표제가 붙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품이 꺼지드이 그마저도 사람들의 입에 더는 오르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열흘이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건 엄마였다. 하지만 뇌가 깊은 잠에 빠져 다시 깨여날 가능성이 무척 낮았고 깨어난다 하더라도 내가 알던 엄마가 아닐거라고 했다. 희생자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합동 장례식을 치렀다. 나만 빼고는 모두가 울고 있었다. 처참하게 죽어 버린 가족 앞에 선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법한 몸짓과 표정으로.
장례식장에 온 여경 하나는 유족들에게 절을 하다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고 한번 터진 울음은 멈출 줄을 몰랐다. 조금 뒤 나는 그녀가 복도 끝에서 나이 많은 남자 경찰에게 혼나고 있는 걸 봤다. 앞으로 이런 일은 부지기수로 보게 될거야. 그러니까 무뎌지는 법을 터득해야 해. 순간 그와 내 눈이 마주쳤다. 그가 하던 말을 멈췄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꾸벅 인사를 하곤 화장실로 향했다.
사흘간의 장례 내내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는 나를 두고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다양한 추측을 하며 속닥거렸다. 너무 충격을 받아서 그럴 거야. 아직 어리니 뭘 알겠어. 엄마도 죽은 거나 다름없고 이제 고아나 마찬가진데 실감이 안 나니 저러지.
남들은 내게 슬픔이나 외로움, 막막함을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안에는 감정 대신 질문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엄마와 할멈은 뭐가 그렇게 우스워서 깔깔댔던 걸까.
만약 그 일이 없었다면 우린 냉면집을 나와 어디로 향했을까.
그 남자는 왜 그랬을까.
텔레비전을 부수거나 거울을 깨뜨리지 않고 왜 사람을 죽인걸까.
왜 더 늦기 전에 누군가가 나서서 도와주지 않았을까.
왜.

하루에도 수만 번씩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원점으로 회귀해 처음부터 되풀이됐다. 하지만 내가 아는 답은 하나도 없었다. 경찰이나 근심 어린 표정의 심리 상담사에게도 내 마음속의 질문들을 털어놓아 보았다. 그들이 무었이든 말해도 좋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대부분은 침묵했고 몇몇은 말하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어 버렸다. 하긴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이 없으니 그럴법도 했다. 할멈도 그 남자도 모두 죽어 버렸다. 엄마는 영원히 말할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므로 내 질문에 대답한 답은 영원히 사라졌다. 나는 질문을 입 밖에 내는 걸 그만 두기로 했다.
분명한 건, 엄마와 할멈이 사라졌다는 사실이었다. 할멈은 영혼과 육신이 모두, 엄마는 껍데기만 남은 채로, 이제 내가 아닌 누구도 두 사람의 인생을 기억하지 못할 거다. 그러므로 나는 살아남아야 했다.
장례가 끝난 다음. 정확히 내 생일로 부터 여드레 후, 나는 한 살을 더 먹었다. 그렇게 나는 열일곱이 되었다. 이제 완전히 혼자였다. 남은 건 엄마의 헌 책방에 쌓인 무수한 책 뿐이었다. 그 외에는 대부분의 것이 사라졌다. 더는 집안에 연등과 반짝이는 전구를 달 필요도, 희로애락애오욕을 외울 일도, 내 생일에 밥을 먹으러 인파를 뚫고 시내까지 나올 이유도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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