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소봉전기(14)-古龙

핸디맨남자 | 2021.11.18 09:10:54 댓글: 0 조회: 761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24913

12. 상관비연의 죽음과 육소봉의 위기

밤이 깊었다.

방안의 공기는 차고 냉랭했다.

육소봉과 상관비연의 대화는 시간의 흐름도 잊은 채 계속되었다. 정곡을 찌르는 듯한 육소봉의 날카로운 질문에 아름다웠던 상관비연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졌다.

육소봉이 물었다.

"그러니까 당신에게 금붕왕조의 재산을 자기네 함철산에게로 다시 가져와달라고 설득했던 것이로군? 누구든 그 엄청난 재산을 가지게 된다면, 금방이라도 두각을 나타낼 수 있을 테니까."

상관비연이 대꾸했다.

"난 다른 사람이 가만히 앉아서 남의 공을 가로채는 게 싫었어요."

"그래서 당신은 애인과 함께 묘책을 생각해 내게 되었군."

"처음엔 그 늙고 어리석은 대금붕왕만 죽일 작정이었어요. 한데, 우리가 변장시켜서 보낸 사람으로 상관단봉을 속일 순 없었죠. 아무리 교묘히 변장시켰더라도···"

"그래서 당신은 아예 상관단봉까지 함께 죽여 버리게 된 것이로군."

"그래요."

"두 사람은 너무도 닮았고 당신은 또 어려서부터 그녀의 목소리를 흉내 낼 수 있었으니, 공주 행세를 하기엔 딱 알맞았겠군, 그래. 그 재미가 어땠나?"

상관비연이 말했다.

"별 재미는 없었어요."

육소봉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이런 종류의 비밀을 당연히 그 말 많은 꼬마에게 알리고 싶지는 않았을 거고, 그래서 줄곧 설아를 속여 왔던 것이로군. 우습게도 설아는 오히려 당신이 상관단봉의 독수에 걸렸다고 오해하게 되었고 말이지."

상관비연이 한탄스레 말했다.

"그 어린년은 말도 많을 뿐 아니라, 일도 많이 저지르고 다니죠."

육소봉이 말했다.

"난 당신이 왜 직접 곽휴 일당을 찾아가지 않았는지가 궁금했다오."

상관비연이 말했다.

"대금붕왕에게는 분명 비밀스런 표식이 있는데, 그것은 당시 함께 도망갔던 신하들만이 알고 있어서, 누가 그의 인척으로 변장을 하더라도 그 늙은여우 같은 곽휴를 속일 순 없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기 때문이에요."

"당신은 그때도 그가 발가락이 여섯 개라는 사실을 몰랐소?"

상관비연이 말했다.

"몰랐었으니까 감히 모험을 하지 않았죠."

육소봉이 말했다.

"그래서 당신들은 먼저 사람 하나를 뽑아 당신들 대신 그 늙은 여우를 죽이러 보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게 됐던 것이로군."

상관비연이 말했다.

"그래요."

육소봉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허나 그런 사람을 찾기란 결코 쉽진 않았을 거요. 왜냐하면 그는 곽휴 일당을 죽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천성적으로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더러운 성격도 갖고 있어야 할 테니까."

상관비연이 말했다.

"그런 사람을 찾는 건 확실히 어렵더군요. 당신 외에는 다른 사람이 전혀 생각나지 않았어요."

육소봉이 장탄식하며 쓰게 웃었다.

"보아하니 나 같은 사람이 이 세상엔 그다지 많지 않은가 보군."

상관비연이 말했다.

"또한 당신이 진정으로 원해서 손을 쓰게 만드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이었어요."

육소봉이 말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기 좋아할 뿐 아니라,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려는 노새 같은 성질도 좀 가지고 있지." 상관비연은 그 말에 소리내어 웃었다.

"당신이 그토록 자기 자신을 잘 이해하고 있는지는 몰랐네요."

"당신들은 일부러 구혼수 일당을 통해 날 방해하려고 했지. 당신들은 어떤 사람이 내일을 못하게 하면 할수록 난 일부러 더 하려고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으니까 말야."

상관비연이 웃으며 말했다.

"산서성의 노새 역시 그렇답니다."

육소봉이 말했다.

"후에 당신들은 일부러 소추우와 독고방을 죽여 내게 경고했지. 같은 이유로."

"그건 그들이 이미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당신이 그 오래된 무덤에서 노랫가락으로 우리를 유인하고, 일부러 대야에 몇 가닥의 머리카락을 남겨놓았던 것도, 오직 화만루로 하여금 당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믿게끔 하기 위해서였나?"

"그것 역시 당신들이 다시는 그 어린 년의 말을 믿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어요."

육소봉이 말했다.

"당신은 설아가 창 밖에서 몰래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그녀의눈앞에서 유여한을 죽였지?"

상관비연이 차갑게 말했다.

"그 어린년은 나와 유여한이 일부러 짜고서 그녀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극이라는 것을 당연히 알 수 없었죠."

육소봉이 말했다.

"유여한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보게 되면, 우리는 더더욱 그녀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게 될 테고 말이지."

육소봉이 다시 한숨을 쉬더니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불쌍하게도 유여한이 살아서 나타난 것을 보았을 때, 그녀의 표정은 정말 살아 있는 귀신이라도 만난 듯했었지. 감히 말도 못하고 얌전히 그를 따라갔으니 말이야."

상관비연이 말했다.

"그 어린년을 가두어놓아야 한다는 것을 일찍 알았어야 했는데 안타깝게도 "

육소봉이 말했다.

"안타깝게도 그간 당신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던 데다가 당신 역시 우리가 돌아와 그녀를 못 보면 더욱 의심을 하게 될까봐 걱정했겠소."

상관비연이 냉소적으로 말했다.

"어떤 때 난 당신이 바로 내 마음속에 들어와 앉아 있는 것처럼 생각돼요. 마치 내 생각을 전부 다 알고 있는 것 같아요."

육소봉이 말했다.

"당신은 일부러 또 화만루 앞에 한번 나타났죠. 죄명을 곽휴에게 뒤집어씌우기 위해서 말이야."

"맞아요."

육소봉이 탄식하며 말했다.

"난 당신이 어떻게 그를 속였는지 이상하오. 그는 특별한 귀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코 역시 특별해서, 설사 당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하더라도 당신의 냄새는 맡을 수 있었을 텐데"

모든 사람의 몸에는 다른 사람과 구분되는 특유의 체취가 있어서 말소리보다도 더 쉽게 구별되기도 한다.

상관비연이 말했다.

"그건 내가 매번 그를 만날 때마다 일부러 몸에 아주 진한 향수를 뿌려놓았다가, 상관비연의 신분으로 나타날 때는 그 향기를 깨끗이 없애버렸기 때문이에요."

육소봉이 말했다.

"주도면밀하군, 그래."

상관비연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난 여자예요. 여자란 위험한 모험은 원치 않죠."

"그렇다면 당신은 왜 유여한이 날 죽이러 가기를 원했소?"

상관비연이 유유히 말했다.

"당연히 당신은 그 이유를 알 텐데요."

육소봉이 말했다.

"당신에게 더 이상 쓸모가 없으니까 내 손을 빌려 그를 죽일 생각을 했단 말인가?"

상관비연이 숨을 길게 내쉬더니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사실 당신이 살인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진작 알았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면 함철산 역시 내가 손쓸 필요도 없었을 텐데 말예요."

상관비연이 나타나면서부터 곁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던 유여한은 갑자기 사람이 변한 것처럼 아주 조용해졌다.

매번 유여한이 그녀를 볼 때면, 그의 외눈에서는 아주 부드러운 빛이 발산되곤 했었다.

육소봉과 상관비연의 대화는 날카로운 비수처럼 유여한의 가슴을 찔러왔다.

그는 떨면서 말했다.

"당신, 당신은 정말 내가 죽기를 원했었소?"

상관비연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차갑게 말했다.

"사실 당신은 진작에 죽었어야 해요. 당신 같은 사람이 살아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유여한이 말했다.

"그렇지만 당신은, 예전의 당신은··· "

상관비연이 말했다.

"예전에 내가 했던 말들은 당연히 전부 당신을 속이기 위한 것이었소. 설마 당신은 내가 정말로 당신을 좋아한다고 여기진 않았겠죠?"

유여한의 온몸은 차디차게 얼어붙은 듯 꼼짝 않고 그곳에 서서 멍청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는데, 그 외눈에는 원망이 가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서글픈 애정으로 충만하였다. 그리곤 얼마 지나서야 가볍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맞는 말이오. 당신이 정말로 날 좋아할 리는 없소. 나 역시 잘 알고 있었다오. 난 단지 줄곧 나 자신을 속이면서 내 마음을 다독여왔던 것뿐이오."

상관비연이 말했다.

"그렇게 미련한 바보는 아니군요."

유여한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손을 돌려 칼을 뽑아 자신의 가슴에 퍽 꽂았다.

칼끝은 마침내 그의 가슴을 뚫고 등 뒤에서 선명한 핏줄기를 뿜게 하더니 벽면을 붉게 물들였다.

그러나 그의 얼굴엔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그에게는 이러한 행위가 고통이 아니라 오히려 즐거움인 듯이 보였다.

그의 눈에서는 갑자기 빛이 돌았고 갑자기 웃더니 혼자 중얼거렸다.

"죽음은 원래 괴로운 일이 아니었소. 그대 앞에서 죽을 수 있으니 난 오히려 ··· "

그는 말을 채 끝맺지도 못하고 쓰러졌다.

육소봉은 그를 막지 않았다. 아니 막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한 사람이 편안히 죽을 수 있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는 확실히 살아 있는 것보다 더 나은 일이기도 했다.

"다정(多情)은 예로부터 부질없는 한을 남긴다더니··· 그는 정말 정이 많은 사람이었는데 정을 잘못 사용한 것이 애석할 따름이오."

육소봉은 상관비연을 보며 갑자기 이 무정한 여인에 대한 말할 수 없는 혐오감을 느꼈다.

이러한 느낌은 괴로움이 아니라 혐오감, 바로 독사를 만났을 때 사람들이 느끼는 그런 잔인한 느낌이었다.

육소봉이 차갑게 말했다.

"당신도 바보 같은 일을 저질렀군."

상관비연이 말했다.

"?"

"당신은 그를 죽음에까지는 내몰지 말았어야 했소."

"어째서죠?"

"그가 살아 있었다면 적어도 내가 당신을 죽이는 비극까지는 가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오."

상관비연이 다급히, 그러나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날 죽이겠다구요? 당신이, 잔인하게 날 죽여요?"

"난 분명히 살인은 피해왔고 더더욱 여인을 죽이는 일은 싫소. 그러나 당신은 예외요."

상관비연이 비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된 마당에, 당신은 왜 아직도 손을 쓰지 않죠?"

육소봉이 말했다.

"난 급하지 않소!"

상관비연이 교태를 부리며 말했다.

"당신은 당연히 급하지 않겠죠. 어쨌든 난 이미 도망갈 수 없는데다가, 당신은 분명 내게 물어볼 말도 있을 테니까요."

"당신도 바보는 아니군."

상관비연이 말했다.

"당신이 내게 묻고 싶은 건 내가 어떻게 당신이 쫓아오기 전에 먼저 유여한으로 하여금 늙은이의 발가락 하나를 잘라오게 시킬 수 있었는가 하는 거죠?"

육소봉이 말했다.

"그 점이라면 나 역시 물을 필요도 없소."

"이미 알고 있단 말예요?"

"비둘기는 당연히 사람보단 빠르니까."

상관비연이 말했다.

"당신은 정말 똑똑하군요."

육소봉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원래 이 비밀은 엽수주가 알게 해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상관비연이 말했다.

"당신은 단지 그녀에게만 얘기했나요?"

"그렇소."

상관비연이 말했다.

"당신은 아무 뜻 없이 말한 건가요. 아니면 일부러 그녀를 시험해 볼 생각이었나요?"

육소봉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난 결코 그녀를 해칠 생각은 없었소. 그녀 역시 가련한 사람이니까."

상관비연은 갑자기 냉소하며 말했다.

"당신은 사람을 잘못 봤어요. 그 여자는 비록 겉보기에는 진실해 보이지만, 사실은 타고난 창녀예요."

육소봉이 말했다.

"단지 그녀가 당신이 좋아한 사람을 좋아했다는 이유 때문에 그렇단 말이오?"

상관비연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유여한을 이용한 것처럼 그녀를 이용했을 뿐이에요."

육소봉이 말했다.

"엽수주가 이 비밀을 그에게 말해 주었고, 그는 곧 비둘기를 이용해서 당신에게 알려온 것이군."

상관비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표정을 아주 부드럽게 고치면서 말했다.

"검은 비둘기는 원래 우리들의 연애편지를 보낼 때 쓰던 것이었지요. 지금처럼 또 다른 쓰임이 있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가 이미 구혼수와 철면판관을 시켜 그 대신 일을 처리하도록 했다면, 설마 그가 바로 청의루의 주인이란 말은 아니겠지?"

"맞춰 봐요."

"모르겠소."

"설마 내가 말해줄 것이라고 생각하나요?"

육소봉이 말했다.

"지금은 물론 내게 말해줄 리가 없겠지."

상관비연이 말했다.

"앞으로도 내 입으로 말해줄 리는 없어요. 당신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영원히 알 수 없을 거예요."

육소봉이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여자이니까."

상관비연이 말했다. 다가오는데

"여자니까 또 뭐가 어떻다는 거예요?"

육소봉이 차갑게 말했다.

"당신같이 아름다운 여인이 만일 코가 잘려나간다면 분명 아주 못생겨 보이겠지."

상관비연이 엉겁결에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당신, 당신이 설마 잔인하게 내 코를 자르겠다는 건가요?"

육소봉이 당당히 말했다.

"만약 내 마음이 아주 연약하다고 짐작했다면 그건 착각이오."

상관비연이 놀라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만일 그가 어떤 사람인지 당신에게 알려주지 않는다면 당신이 내 코를 잘라버리겠다 이건가요?"

"먼저 코를 자르고 그 다음엔 귀를 자르겠소."

상관비연이 비웃으며 말했다.

"당신의 입에서 그렇게 흉한 소리가 나오다니. 당신이 절대 그런 분이 아니라는 걸 알아요."

육소봉이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그렇다면 시험해 보겠소?"

상관비연이 말했다.

"당신은 시험도 못 해볼 거예요. 왜냐면 당신은 절대로 코 없는 친구를 좋아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다행히 당신은 이미 내 친구가 아니오."

상관비연이 말했다.

"비록 난 아니지만 화만루와 주정은 친구잖아요."

육소봉의 안색이 또 한 번 변했다.

상관비연이 유유히 말했다.

"당신이 만일 내 코를 자른다면 그들은 아마도 머리조차 온전치 못할 거예요. 머리 없는 것이 코 없는 것보다 더 보기 싫지 않겠어요?"

육소봉이 그녀를 노려보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상관비연이 말했다.

"당신은 이것이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하세요?"

육소봉이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설마 화만루가 당신에게 또 속아 넘어갔다는 것을 나더러 믿으라는 거요?"

상관비연이 말했다.

"난 그를 한 번 속여 봤으니 두 번 역시도 가능하단 말이죠."

"바보만이 한 사람한테 두 번 씩이나 속아 넘어가는 법이오. 그는 절대 바보가 아니오."

"하지만 그는 정이 많은 사람이에요. 바보는 두 번 속아 넘어가는 것이 고작이지만, 정이 많은 사람은 백번이라도 속아 넘어가는 법이랍니다."

육소봉이 말했다.

"설마 주정도 정이 많은 사람이란 말이오?"

상관비연이 말했다.

"그는 아니에요. 하지만 그는 너무나 게으르지요."

육소봉이 말했다.

"게으른 사람에게도 장점은 있지."

"?"

"게을러서 움직이는 것조차 싫어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속아 넘어갈 수 있겠소?"

상관비연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같이 게으른 사람을 속이기란 확실히 쉽진 않지요. 다행히 그의 주변엔 좋은 친구들이 몇 사람 있기 때문에 그에게 은표를 보내서 그것으로 그를 속일 수 있었답니다."

육소봉은 이제 웃지 않았다.

상관비연이 갑자기 말했다.

"당신은 당연히 그가 자기 친구 때문에 머리를 선물하는 것을 가만 보고 있지는 않겠죠? 더군다나 아주 아리따운 여주인(노반랑)이 그와 함께 죽는다면 말이죠."

육소봉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여주인은 항상 주인보다 더 게을렀는데 이번엔 어찌 왔단 말이오?"

상관비연이 말했다.

"그녀는 당신이 반드시 구해주러 올 것을 알았기 때문에 당신을 기다린 것이지요."

육소봉이 말했다.

"그녀가 어디에서 날 기다렸단 말이오?"

상관비연이 말했다.

"알고 싶어요?"

"아주 궁금하오."

"내가 당신을 모시고 갈 것 같나요?"

"그럴 리 없겠지."

"틀렸어요. 내가 만일 당신을 모셔갈 맘이 없었다면 왜 당신에게 알려줬겠어요?"

육소봉이 말했다.

"적어도 지금은 날 데려갈 리 없지 않소."

상관비연이 말했다.

"당신은 정말 똑똑하군요."

육소봉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 친구가 아주 게으른데다가 바보인 것이 안타까울 뿐이오."

상관비연이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당신의 친구들이니, 당연히 그들을 구하러 가야만해요." 육소봉이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생각중이오."

상관비연이 음흉스럽게 말했다.

"뭘 생각해요?"

"난 먼저 당신이 원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보고서 따라가겠소."

상관비연이 말했다.

"내가 당신에게 바라는 일은 아주 쉬운 일뿐이랍니다."

"무슨 일이오?"

"단지 내 대신 사람을 죽여주면 되는 거예요. 당신에게 살인은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요."

육소봉이 말했다.

"그것 역시 당신이 내게 어떤 사람을 죽여 달라는 것인가를 먼저 알아야만하겠소."

상관비연이 말했다.

"당신이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누구요?"

"서문취설!"

육소봉이 소리 내서 웃었다.

"당신은 나더러 지금 그 사람을 죽여 달라는 거요? 아니면 그 사람이 날 죽이기를 원하는 거요?"

상관비연이 말했다.

"당연히 당신이 그 사람을 죽이길 바라지요. 그는 날 모욕했다구요. 그 사람처럼 날 모욕한 사람은 여태껏 한 사람도 없었어요."

육소봉이 말했다.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죽이고 싶단 말이오? 여자들의 소견이란 정말 좁단 말이야. 내가 만일 그를 죽이지 못하고 도리어 내가 그에게 죽임을 당한다면?"

상관비연이 말했다.

"그건 당신이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당신이 황천길로 가면 분명 여러 친구들이 당신과 함께 갈 테니까요."

육소봉이 탄식하며 말했다.

"보아하니 난 이미 다른 선택을 할 여지가 없는 것 같군."

"맞아요. 조금도 없어요."

"그가 죽든 내가 죽든 당신은 어찌 되어도 모두 기쁘겠군 그래."

상관비연이 말했다.

"양심상 말하자면 가령 당신들 둘이 모두 죽는다 해도, 난 상심할 까닭은 없어요."

육소봉이 말했다.

"당신이란 사람에게도 양심이란 게 있소?"

상관비연이 말했다.

"당연히 있죠. 그러니까 난 당신이 그를 죽여서 그의 목숨 하나로 화만루등 세 사람의 목숨과 바꾸길 바라는 거예요."

육소봉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이 거래는 그다지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닌 것 같은데, 난 그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있으니 안타깝군."

상관비연이 담담히 말했다.

"당신은 분명 그를 찾아낼 수 있어요."

육소봉이 말했다.

"내가 어떻게 찾소?"

상관비연이 말했다.

"그날 그가 손수청을 데리고 갔으니, 당연히 손수청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는 무슨 방도를 사용했을 거예요."

육소봉이 말했다.

"그가 가끔은 사람을 구하기도 하는구려."

상관비연이 말했다.

"그러니까 그는 지금 분명히 손수청을 치료할 수 있는 곳에 있을 거예요. 그 부근에서 치료할 수 있을 만한 곳은 당신도 당연히 알 거구요."

육소봉이 말했다.

"하지만 죽은 사람은 치료할 필요가 없지 않소."

상관비연이 말했다.

"맞아요."

육소봉이 말했다.

"그러니 이 점도 물어봐야만 되겠소. 손수청이 당신의 비봉침에 맞은 후에 그를 치료할 방도가 있소?"

상관비연이 쌀쌀맞게 말했다.

"그녀가 맞은 건 비봉침이 아니라 비연침이에요. 그건 본디 구할 방도가 없지만 서문취설은 아마도 그녀를 살려낼 거예요."

육소봉이 말했다.

"어떻게?"

상관비연이 말했다.

"비연침의 독은 보통 암기와는 달라서 비연침을 맞은 후 가만히 누워 있으면 분명 죽게 되어요."

"그래서 석수설은 죽었군."

상관비연이 말했다.

"하지만 서문취설은 도리어 손수청을 데리고 온 산을 헤매고 다녔어요.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그녀의 독성이 발산되어 살아날 가능성이 생기는 거죠."

육소봉이 말했다.

"그날 당신은 몰래 그녀를 쏜 후에도 자리를 뜨지 않았었군."

상관비연이 웃으며 말했다.

"당신 같은 고수들 앞에서 내가 어찌 도망갈 수 있겠어요? 그래서 난 아예 그곳에 드러누워서 당신들이 날 찾아 쫓아갔을 때도 계속 보고만 있었어요."

육소봉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 정말 간도 크군!"

상관비연이 말했다.

"난 당신들이 감히 내가 그곳에 그냥 머물러 있으리라곤 생각 못할 줄 이미 알았어요."

육소봉이 말했다.

"당신은 우리들이 모두 가버린 후에야 나온 거로군?"

상관비연이 말했다.

"그때는 화만루 혼자 있었죠. 그가 날 절대로 의심 못할 것도 알았어요. 가령 내가 눈을 검다고 하고 검은 것을 희다고 해도, 그는 믿지 않을 수 없겠죠."

육소봉이 말했다.

"어째서?"

상관비연이 웃으며 말했다.

"왜냐하면 그는 날 좋아하니까요. 남자가 여자에게 빠지게 되면 정말 어쩔 방법이 없는 거예요."

육소봉이 말했다.

"당신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가 속임수에 빠져도 당연하다는 거요?"

상관비연이 말했다.

"그건 자기 스스로가 진정으로 원한 것이고, 내가 그 사람더러 반드시 날 좋아해 달라고 한 것도 아니니까 저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죠."

육소봉이 갑자기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내가 지금 당신에게 해줄 말은 딱 한 가지뿐이오."

상관비연이 말했다.

"말해 보세요."

육소봉이 말했다.

"뒤를 돌아보시오, 내 말이 무슨 말인가 알게 될 거요."

상관비연이 고개를 돌리자, 자기의 온몸이 갑자기 검고 어두운 큰 동굴 안으로 떨어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방안은 어두웠는데, 한 사람이 조용히 그 어둠 속에 서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화만루!"

상관비연은 마침내 참지 못하고 불렀다.

화만루의 표정은 오히려 담담했다. 고통이나 분노도 전혀 없는 듯했다.

상관비연은 그를 보면서 놀라 물었다.

"당신, 당신이 어떻게 이곳엘 왔죠?"

화만루는 담담히 말했다.

"걸어왔소."

상관비연이 말했다.

"그렇지만 난, 난 분명히 당신의 혈도를 막아놓았었는데!"

화만루가 말했다.

"다른 사람이 당신의 혈도를 누를 때, 당신이 만일 진기를 그 혈도 부근에 밀어 넣을 수 있다면, 조금 후엔 아마도 막힌 혈도를 뚫을 방법을 알게 될 것이오. 난 마침 그 방법을 좀 알고 있었을 뿐이오."

상관비연이 말했다.

"설마 내가 당신에게 손쓸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단 말인가요? 그래서 당신은 미리 준비를 하고 있었단 말인가요?"

화만루가 잘라 말했다.

"난 내 친구가 날 구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이러 가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는다오."

상관비연이 말했다.

"당신은 내가 좀 전에 한 말을 모두 들었겠군요."

화만루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화나지 않았나요?"

화만루가 담담히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소. 거기에다가, 당신은 확실히 나더러 당신을 좋아해 달라고 한 적이 없소."

화만루의 마음속에는 단지 사랑이 있을 뿐, 원망이 없었기 때문에 아주 평온하고 부드러워 보였다.

상관비연의 얼굴엔 낙망의 빛이 역력했다.

육소봉도 그를 보고 있다가 가볍게 탄식하며 말했다.

"이 사람은 정말 군자로군."

화만루가 웃으며 말했다.

"군자와 바보는 어떤 때엔 별 차이가 없는 법이라네."

육소봉이 말했다.

"주인은?"

화만루가 말했다.

"주인은 당연히 여주인과 함께 있지."

육소봉이 말했다.

"그들은 왜 오지 않나?"

화만루가 말했다.

"그들은 설아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중이네."

육소봉이 씁쓸하게 말했다.

"보아하니 그들이 속임수에 빠질 시간이 가까웠구만, 그래."

사실 육소봉은 그들이 왜 오지 않는지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를 위해 속임수에 빠진 것이므로, 그는 그들을 보면 좀 무안한 맘이 들 게 뻔했다. 그들은 결코 그가 무안함을 느끼길 원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설아 역시 그의 언니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았으므로 이런 상황에서 만난다면 서로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상관비연은 마침내 길게 한번 탄식하더니 말했다.

"당신이 방금 한 얘기를 이제야 알겠어요."

"?"

상관비연이 말했다.

"내가 한 일은 아주 미련한 짓이었어요."

육소봉이 물었다.

"?"

"난 줄곧 당신들을 바보라고 여겼었는데, 진짜 바보는 바로 나였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어요."

그녀는 또 한 번 장탄식하더니 말했다.

"그렇지만 당신이 정말로 내 코를 잘라버렸다면 그가 누군지 말 안 했을 거예요."

육소봉이 말했다.

"그 사람도 본래 정이 많은 사람이겠지."

상관비연이 처량하게 웃으며 말했다.

"한 여자가 한 남자에게 빠져도 그것 역시 대책 없는 일이에요."

화만루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맞는 말이오."

상관비연이 말했다.

"정말로 난 당신에게 미안할 뿐이에요. 만일 당신이 날 죽인다 해도 이젠 당신을 탓하지 않겠어요!"

화만루가 말했다.

"난 당신을 해칠 생각이 전혀 없소."

상관비연이 말했다.

"당신은 내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세요?"

화만루가 말했다.

"별로, 아무것도."

상관비연은 감동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은 날 그냥 놓아주겠다는 건가요?"

화만루는 아무런 말도 않고 갑자기 몸을 돌려 천천히 걸어 나갔다. 육소봉 역시 한숨을 쉬더니 의외로 그의 뒤를 따라 나갔다.

상관비연은 놀라 그들을 보더니 갑자기 큰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지금 분명 내가 그를 찾아갈 것을 알고 일부러 날 놓아주곤 몰래 따라오려는 거죠!"

육소봉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담담히 말했다.

"난 그렇게 할 필요가 없소."

상관비연이 말했다.

"어째서죠?"

육소봉이 말했다.

"왜냐하면 난 그가 누구인지 이미 알기 때문이오."

상관비연은 안색이 바뀌며 큰소리로 말했다.

"그가 누구인지 당신이 안다고요? 그가 누구죠?"

육소봉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은 채 화만루를 뒤쫓아서 어두운 복도를 걸어 나가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집은 한 조각의 어둠이었다.

상관비연 혼자 그 어둠 속에 서 있다가 갑자기 온몸을 떨기 시작했다. 냉기 때문인가. 아니면 공포 때문인가? 화원은 어둠 속에 잠겨 고요했고, 바람결에 묻어나는 꽃향기는 황혼 전보다도 더욱 짙어진 듯했다. 십여 개의 추성(秋星)이 막 솟아올랐다가는 구름에 곧 가려졌다.

화만루는 천천히 한 떨기 월계화 앞까지 걸어 나가서야 비로소 가볍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그녀는 가련한 여자야."

육소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화만루는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잊은 것처럼···.

화만루가 말했다.

"모든 사람은 잘못을 저지를 때가 있는 법이지. 그녀가 비록 잘못을 저질렀다고는 하지만···"

육소봉은 그의 말을 자르고 말했다.

"잘못을 저지르면 벌을 받아야 한다네. 누가 잘못을 저지르던 지간에 모두 대가를 치러야 해."

화만루가 말했다.

"하지만 자네는 그녀를 놓아주었잖나."

육소봉이 말했다.

"그건 아마도 어떤 사람이 분명 그녀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네."

화만루가 말했다.

"누가? 그녀의 애인이?"

육소봉이 말했다.

"애인은 아니야. 그는 정이 없는 사람이야."

화만루가 말했다.

"자네는 정말로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나?"

"아니."

화만루가 말했다.

"그녀가 말한 것이 그럼 정말이란 말인가? 자네는 몰래 그녀를 따라갈 생각인가?"

육소봉은 웃으며 말했다.

"비록 군자는 아니네만 내가 한 말에 책임을 못 질 정도는 아니네."

화만루가 말했다.

"자네가 그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또 그녀를 쫓아가지도 않는다면, 자네는 그냥 그렇게 신경 쓰지 않고 내버려둘 작정이란 말인가?"

육소봉이 말했다.

"내버려둘 수야 없지."

화만루가 말했다.

"난 자네 생각을 이해 못하겠네."

육소봉이 말했다.

"내가 그 사람을 찾아가지 않는다 해도 그 사람은 반드시 날 찾아올 걸세."

"자신 있나?"

"적어도 백에 칠십 정도는 자신이 있네."

화만루가 말했다.

"그래?"

육소봉이 말했다.

"그는 분명히 내가 이미 그 사람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 어찌 날 살려두고자 하겠는가?"

화만루가 말했다.

"자네가 좀 전에 일부러 그렇게 말한 것은 자네를 찾아오게 하기 위해서였나?"

육소봉이 말했다.

"내가 그렇게 말한 것은 상관비연 또한 구하기 위해서였다네."

화만루가 말했다.

"자네가 과연 그가 누군지 알고 있다면, 그가 상관비연을 죽여 입을 막을 필요가 없다는 거군."

육소봉이 또 웃으며 말했다.

"적어도 지금 제일 먼저 죽어야 할 사람은 상관비연이 아니라 바로 나이지."

화만루가 말했다.

"단지 자네가 좀 전에 한 말을 그가 듣지 못한 것이 애석하군."

육소봉이 말했다.

"그는 들었다네!"

화만루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자네는 설마 조금 전에 그가 여기에 있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는 지금도 분명히 이곳에 있을 것이네."

화만루가 말했다.

"그러니까 그는 언제든지 나타날 수 있고, 언제든지 자네를 죽일 수 있다는 것이군."

육소봉이 말했다.

"맞네."

화만루가 말했다.

"하지만 자네는 별로 신경 쓰는 것 같지 않구먼."

육소봉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 가장 큰 장점이지. 그러나···"

그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갑자기 화만루의 안색이 변하는 것을 보았다.

화만루는 결코 쉽게 놀라서 얼굴이 변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육소봉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무슨 일인가?"

화만루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피비린내!"

육소봉이 말했다.

"무슨 피! 누구의 피란 말인가?"

화만루가 말했다.

"상관비연의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그것은 상관비연의 피였다.

그녀의 인후는 이미 절단되었고, 피는 아직 굳지 않았다. 그녀의 굳어 버린 얼굴에는 놀람과 공포가 가득했는데, 대금붕왕이 죽을 때의 표정과 흡사했다.

확실히 그녀 또한 자기 자신을 죽이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결국 독수에 걸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녀는 죽으면서도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의 애인인가? 아니면 정이 없는 사람인가? 사람은 없고 단지 한조각 어둠만이 있을 뿐이었다.

바람결에 묻어나는 피비린내는 아주 짙었다.

화만루가 어둔 얼굴로 말했다.

"그가 역시 그녀를 죽였군!"

육소봉이 신음을 토했다.

"으음!"

화만루가 말했다.

"그는 자네가 한 말을 전혀 믿지 않았던 모양이야."

육소봉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으음!"

화만루가 말했다.

"당장 상관비연을 죽여 입을 막았으니, 세상엔 이제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사람이 없는 것이네."

육소봉이 말했다.

"그렇군."

화만루가 말했다.

"그러니 자네도 영원히 그를 찾지 못하겠는데."

"난 다만 누가 잘못을 저질렀든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알뿐이네."

화만루가 암연히 말했다.

"상관비연은 확실히 그 대가를 치렀네만, 그녀를 죽인 사람은?"

그녀를 죽인 사람은 이미 어둠 속에 사라져버렸다. 아마 영원히 어둠 속에 묻혀 있을지도 모른다.

육소봉은 갑자기 화만루의 손을 꽉 쥐더니 말했다.

"주인은?"

주인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본디 그들을 가두어놓았던 지하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래된 붉은 탁자는 바닥에 뒤엎어져 있고 탁자 위의 주전자와 잔은 모두 깨져 있었다.

육소봉이 말했다.

"그들은 한바탕 싸웠던 것이 분명하군."

화만루가 말했다.

"자네는 그 사람이 와서 주정 등을 끌고 갔다고 생각하나?"

육소봉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보아하니 그는 나 때문에 마음이 놓이지 않아 주정 등을 데리고 가 날 위협하고자 하는 모양이야."

화만루가 말했다.

"그가 순식간에 그들을 끌고 갈 수 있었던 걸로 보아 무공이 절대로 자네에게 뒤떨어지지 않을 걸세."

육소봉이 말했다.

"누가 뭐라나, 그의 무공이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한 적 없네."

화만루가 말했다.

"이렇게 무공이 높은 사람은 몇 없다네."

육소봉이 말했다.

"그러나 그는 실수한 거야."

화만루가 말했다.

"그렇지, 그는 쓸데없는 짓을 해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육소봉이 말했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그가 실수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 것에 다름없지." 화만루가 탄식하며 말했다.

"내가 말했지 않았나.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른다고."

육소봉이 말했다.

"잘못을 저지르면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은 누구든지 마찬가지라네."

집은 무덤처럼 조용했다.

열 명이나 되는 사람이 조용히 앉아 육소봉을 바라보고 있었다. 범대선생, 간이선생, 시정칠협과 산서애는 이미 엄청나게 술을 많이 마시고 술상을 물렸다.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다보면 취하기 전에 술상을 물리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주 정신이 말짱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취한 빛이 전혀 없고 오히려 기괴한 표정을 띠고 있었다. 그중 산서애의 표정은 더욱 어두운 빛을 띠고 있었다.

그는 육소봉을 응시하다가 갑자기 말했다.

"자네는 정말로 이 사건의 주모자가 그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육소봉이고개를 끄덕이자 산서애가 이어 말했다.

"자신 있나?"

육소봉은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우리는 친구이고, 저는 당신들과 그의 관계도 알고 있습니다. 제가 자신이 없다면 왜 당신들을 찾아왔겠습니까?"

산서애는 두 주먹을 불끈 쥐더니 갑자기 책상을 쾅, 내리치고는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곽천청이 정말로 이 일을 저질렀다면 나는 지금부터 그와의 모든 관계를 끊어버리겠소!"

범대선생이 차갑게 말했다.

"하지만 난 아직도 그가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다고 믿지 않소."

육소봉이 말했다.

"저도 마찬가지로 믿을 수 없었습니다만, 그 이외에는 다른 사람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범대선생이 말했다.

"그래?"

육소봉이 말했다.

"그만이 순식간에 주정 등 세 명을 제압할 수 있습니다."

범대선생이 말했다.

"이유가 충분치 않네."

육소봉이 말했다.

"그렇다면 그만이 금붕왕조의 비밀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염철산이 가장 신임하는 사람이니까요."

범대선생이 말했다.

"그것 역시 불충분해."

육소봉이 말했다.

"그만이 이 사건에서 이득을 얻는 사람입니다. 염철산이 죽었으니 주광보기각은 이제 그의 것이 되었어요."

염철산은 곽휴와 마찬가지로 늙은 악당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그가 태감이라는 것을 의심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육소봉이 말했다.

"그의 신분과 무공을 가지고 다른 일을 꾸미지 않았다면 무엇 때문에 염철산 같은 사람의 부하가 되려고 했겠습니까?"

이 점은 범대선생조차 부인할 수 없었다.

육소봉이 말했다.

"강호에선 청의제일루가 뜻밖에도 주광보기각 안에 있다는 것을 생각해 낼 수 있는 사람이 절대로 없습니다!"

산서애가 놀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청의제일루가 주광보기각 안에 있다는 건가?"

육소봉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독고일학이 이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왔던 것이고, 그래서 곽천청이 먼저 그의 내공이 소실되었다는 핑계를 대고는 그를 서문취설의 손에 죽게 만든 것입니다."

이때 화만루는 줄곧 곁에 앉아 있다가 넌지시 말했다.

"손수청, 석수설 역시 그 비밀을 얘기하려고 했기 때문에 상관비연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산서애가 말했다.

"그녀들이 만일 이 비밀을 알았다면, 마수진과 엽수주는 어째서 모르고 있었단 말이오?"

육소봉이 말했다.

"그녀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산서애가 말했다.

"허나 그녀들은 여전히 살아 있지 않소?"

육소봉이 말했다.

"엽수주가 아직 살아 있는 것은, 상관비연처럼 그녀 또한 영준하고 무공 높은 곽천청과 사랑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산서애가 말했다.

"마수진은?"

육소봉이 말했다.

"만약 제 추측이 틀리지 않다면 그녀 또한 반드시 곽천청의 손에 죽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엽수주가 그녀를 죽였을 가능성도 있구요."

산서애가 말했다.

"그가 자네의 목표를 바꾸기 위해 산 뒤의 그 작은 누각을 얘기해서 자네가 곽휴를 찾아가게 했던 것이로군."

육소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가 그 작은 누각에서 죽든 아니면 곽휴가 제 손에 죽든, 이 일은 모두 끝나게 되는 것이고, 그는 이 순간부터 아무런 걱정이 없게 되는 것이지요!"

산서애가 말했다.

"그렇지만 그는 자네가 그 괴팍한 노인과 아주 오래된 친구라는 것을 전혀 생각지 못했었군."

육소봉이 말했다.

"그는 이 일의 결과를 알고 싶었기 때문에 엽수주더러 바깥에서 기다리며 소식을 알아오라고 했지요."

산서애가 말했다.

"단지 한 사람만이 자네들이 곽휴를 찾아가려는 것을 알았지."

육소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지만 엽수주는 한마디 잘못 말한 것이 있었습니다."

산서애가 말했다.

"그녀가 무슨 말을 잘못 했나?"

육소봉이 말했다.

"그녀는 독고일학과 석수설의 시체를 매장하기 위해서 그곳에 남아 있겠다고 말했지요."

산서애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독고일학은 한 장문의 신분인데 어찌 그렇게 대충 매장할 수 있다는 말이오?"

육소봉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엽수주는 어쨌든 현명하고 양심 있는 여자여서 어떻게 거짓말을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산서애는 한숨을 내쉬더니 씁쓸히 웃으며 말했다.

"자네 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건 확실히 쉬운 일이 아니야."

육소봉이 말했다.

"하지만 전 그녀 앞에서 발가락 여섯 개의 비밀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곧장 곽천청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었지요. 주광보기각과 곽휴의 누각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으니까요."

산서애가 말했다.

"그래서 곽천청만이 이렇게 빨리 그녀의 소식을 얻을 수 있었던 게로군."

육소봉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산서애가 말했다.

"자네는 일부러 이 비밀을 그녀에게 알려준 것인가, 아니면 아무 뜻 없이 그랬나?"

육소봉은 직접 대답하지 않고서 웃으며 말했다.

"저는 당시 그녀가 그곳에 나타나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것만 느끼고 있었을 뿐입니다. 저는 좀 이상하다고만 느꼈지요."

산서애가 그를 보면서 또 탄식하더니 말했다.

"자네를 육소봉이라고 불러서는 안 되는 거였어. 자네는 한 마리 작은 여우일세."

육소봉도 탄식하면서 말했다.

"하지만 전 도리어 곽천청을 존경합니다. 그는 정말 아주 생각이 주도면밀하고, 냉철한 두뇌의 소유자여서 이 사건을 바둑에 비유하자면 상대방의 모든 수를 전부 계산하고 있던 셈이니까요."

산서애가 말했다.

"단지 그가 최후의 한걸음을 잘못 내디딘 것이 애석할 뿐이군 그래."

육소봉이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쯤 잘못을 저지르기 마련입니다. 그 또한 사람이니까요."

범대선생이 돌연 차갑게 웃더니 말했다.

"설령 그가 최후의 한 수를 잘못 두지 않았다 하더라도 자네는 여전히 그를 찾아낼 수 있었겠지." ‘

육소봉이 말했다.

"적어도 그때는 확실치 않았었습니다."

범대선생이 말했다.

"지금은?"

육소봉이 말했다.

"지금도 완전히 확신은 못합니다. 백에 구십 정도라고 할까요."

범대선생이 말했다.

"자네는 왜 우리들을 찾아온 건가?"

육소봉이 말했다.

"당신들은 저의 친구들이고, 전 절대로 그와 싸우지 않겠노라고 당신들과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범대선생이 말했다.

"우리는 이미 친구 사이가 아니지 않나!"

육소봉이 말했다.

"아직은 친구이기 때문에 제가 온 것입니다."

범대선생이 말했다.

"자네의 약속을 거두어 가기 위해서 말인가?"

육소봉이 말했다.

"누가 잘못을 저질렀든, 모두 대가는 치러야합니다. 곽천청도 마찬가지구요!"

범대선생이 말했다.

"자네는 설마 우리더러 자네를 도와 그를 죽이러 가자는 건 아니겠지?"

"전 단지 당신들이 그에게 가서 내일 해가 뜰 때 제가 청풍관에서 그를 기다리겠노라는 말을 전해 주십사 하는 것뿐입니다!"

범대선생이 말했다.

"좋네."

그는 갑자기 몸을 날리더니 눈에 날카로운 빛을 발하며 육소봉을 응시했다.

"덤비게나!"

육소봉이 말했다.

"덤비다니요? 무슨 말씀인지?"

범대선생이 말했다.

"출수(出手) 하게!"

육소봉이 말했다.

"제 말을 믿지 않는단 말입니까?"

범대선생이 말했다.

"난 단지 곽천청이 천금문의 장문이라는 것을 알 뿐이네. 범천의는 바로 천금문의 제자일세."

육소봉이 말했다.

"그래서 당신은!"

범대선생이 말했다.

"그래서 나 범천의가 살기 위해선 다른 사람이 곽천청을 죽이러 가게 할 수가 없다는 거네."

산서애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대의를 위해서는 부모 형제도 돌보지 말라고 했는데, 자네는 이 말을 들어보지 못했나?"

범대선생이 미소를 날리며 말했다.

"들어는 봤지만, 난 이미 전부 잊어버렸다네!"

간이선생 또한 천천히 일어나면서 말했다.

"우리는 본디 흑백이 불분명하고 경중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지."

만두를 팔던 사람이 갑자기 큰소리로 말했다.

"이런 인간은 죽어야 마땅하다!"

간이선생이 말했다.

"맞네. 죽어야 마땅해."

만두를 파는 사람이 말했다.

"단지 애석한 것은 나 포우아도 바로 그런 종류의 인간이라는 것이지."

간이선생이 말했다.

"그러니 너 역시 죽어야겠군."

포우아가 말했다.

"죽어야 마땅하지. 그것도 지금 당장 죽어야 마땅해."

그는 갑자기 뛰어올라 표창처럼 곧장 담으로 돌진해갔다.

그러나 그는 벽으로 돌진하지 않고 육소봉의 가슴에 와 부딪쳤다. 육소봉은 그의 앞을 막아섰다.

포우아는 공중으로 높이 솟아 몸을 돌려 두 발을 대들보 위에 딛고는, 곧장 석판을 잘라 갔으나, 석판을 자르지는 못하고 한 손이 그의 가슴을 가볍게 쓰다듬는 것을 느낄 뿐이었다. 그가 단정히 똑바로 서자 바로 코앞에 큰 키에 고상하면서도 안색이 창백한 한 사람을 마주하게 되었다.

곽천청!

모든 사람은 전부 멍청해졌다. 육소봉조차도 얼이 빠졌다. 곽천청이 이 시간에, 이 장소에 나타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가 나타나리라고 감히 누가 생각했겠는가.

곽천청의 안색은 비록 창백했지만 표정은 아주 냉정했다.

포우아는 두 주먹을 꽉 쥐고는 떨면서 말했다.

"자네, 자네는 왜 날 죽이지 못하게 하는가?"

곽천청이 말했다.

"당신은 죽어야 합니까?"

포우아가 이빨을 물며 말했다.

"난 죽어야만 해."

"당신들이 만일 전부 죽어야만 한다면 천금문 전체가 사라져야 한다는 뜻도 됩니다. 그러길 원하는 건 아니겠죠?"

포우아는 아주 멍청해졌다.

곽천청이 말했다.

"천금문이 당신들에게 무공을 전수한 것은, 당신들 스스로 죽으라고 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포우아가 말했다.

"그러나 당신은 "

곽천청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당신들과 무슨 관계지요. 다른 일 때문이라면 당신들 전부가 모두 죽어버린다 해도 전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포우아가 말했다.

"그러나 지금 자네는 "

곽천청이 말했다.

"지금 전 다만 당신들이 저를 위해 죽기를 원치 않을 뿐입니다. 후에 어떤 만두 파는 사람이 저를 위해 죽었다는 말이 퍼지기라도 한다면 나 곽천청은 죄인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는 갑자기 가슴 속에서 면죽패를 꺼내서는 뚝 짤라 버리며 말했다.

"나 곽천청은 재산도 있고 세력도 있습니다. 전 이미 이렇게 가난한 장문을 맡을 생각이 없어졌으니, 지금부터 저와 당신들 천금문은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만일 누가 또다시 감히 저를 천금문 문하라고 말한다면, 전 그의 혀를 먼저 잘라버리고, 또 그의 두 발을 절단 내겠습니다.

포우아는 그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눈이 붉어지면서 땅바닥에 엎드려서는 대성통곡하기 시작했다.

산서애의 눈도 붉어져서 갑자기 하늘을 바라보며 미친 듯이 웃더니 말했다.

"좋다. 곽천청. 넌 결국 곽씨 성을 가진 자로, 간신히 이 곽씨 성을 모독하지 않았어."

곽천청은 그들을 한번 쳐다보지도 않은 채, 천천히 몸을 돌려 육소봉을 응시했다. 육소봉도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육소봉이 갑자기 길게 탄식하면서 말했다.

"왜 자네였나? 공교롭게도 왜 하필 자네란 말인가?"

곽천청이 차갑게 말했다.

"자네 같은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영원히 알 수 없을 걸세."

육소봉이 말했다.

"난 자네가 뭔가 아주 놀라운 큰일을 할 것으로 알고 있었다네. 자네는 아버지의 큰 그늘 아래에서 한평생 보낼 생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일을 하리라곤 상상할 수 없었네."

곽천청이 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일이 바로 큰일이네. 나 곽천청 이외에 누가 또 해낼 수 있단 말인가!"

육소봉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확실히 다른 사람은 할 수 없지."

곽천청이 말했다.

"자네 외에는 내 일을 망칠 수 있는 사람도 없지!"

그는 갑자기 하늘을 쳐다보며 길게 탄식하더니 말했다.

"이 세상에 나 곽천청이 있는 이상, 자네, 육소봉은 살아 있을 수 없어!"

"그래서."

"그래서 우리 두 사람 사이에선 결국 한 사람이 죽지 않으면 안 되네. 허나 자네가 죽을지 내가 죽을지는 모르겠군."

육소봉은 길게 탄식하더니 말했다.

"내일 해가 뜰 때면 아마 알게 될 걸세."

곽천청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매일 매일에는 내일이 있으니, 내일의 약속을 오늘로 바꾼들 어떠하랴?"

그는 갑자기 몸을 돌려 문 밖으로 사라져 갔고, 단지 그의 냉담한 소리만이멀리서 들려왔다.

"오늘 황혼 무렵에 청풍관 밖에서 자네를 기다리고 있겠네!"

황혼, 청풍관.

청풍관은 푸른 산 위에 있었는데, 푸른 산 위의 하늘은 이미 석양에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안개도 없이 옅은 흰 구름이 멀리 어렴풋하게 떠 있는 것이 마치 안개처럼 보였다. 바람이 한 차례 불자 푸른 소나무 사이의 갈 까마귀들이 놀라 날면서 서쪽 하늘을 한번 빙, 감돌았다. 석양은 더욱 옅어졌다. 저녁 빛이 대지를 자욱하게 덮어갔다. 육소봉은 온 산에 창망한 저녁 빛을 마주 대하자 마음이 저녁 빛보다도 더더욱 무거웠다.

화만루 역시 아주 적막한 듯 탄식하며 말했다.

"곽천청은 아직 안 왔는가!"

"그는 분명 올걸세."

"난 그가 이런 사람이라곤 생각지 못했다네. 그는 본래 이런 일을 해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육소봉이 침울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는 공교롭게도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네."

"이건 아마 그가 너무 교만해서 모든 사람을 다 이기려 할 뿐만 아니라 자기 아버지까지도 이기려는 생각 때문에 그리된 것이지."

"교만함은 본디 아주 멍청하고 어리석은 것이지."

사람들이 너무 교만해지면 분명 어리석은 일을 저지르게 되는 법이다.

화만루가 말했다.

"역시 교만하기 때문에 그는 자기의 책임을 미룰 생각을 하지 않는 거라네."

육소봉은 한참 침묵하더니 갑자기 물었다.

"자네가 만일 나라면 그를 놓아주겠나?"

"난 자네가 아닐세."

육소봉은 길게 탄식하더니 말했다.

"다행히 자네는 내가 아니지, 나 역시 자네가 아니고."

화만루는 더 이상얘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청풍관, 그 오래되고 무거운 대문이 막 열렸다. 황의를 입은 도동이 등롱을 들고서 걸어 나왔다. 또 한 사람이 그 뒤에 서 있었는데, 곽천청이 아니라 황포도인이었다.

이 도인은 커다란 도포를 입었는데 머리는 이미 반백이었고 얼굴에는 아주 엄숙한 표정을 띠고서 가벼운 걸음으로 걸어왔다. 보아하니 무공은 전혀 연마하지 않은 듯 보였다. 그는 사방을 한번 둘러보더니 곧장 육소봉에게로 걸어와 예를 갖추고 말했다.

"시주께서는 육소봉 공자가 아니신지요?"

육소봉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포장께서는?"

"빈도는 청풍이라고 합니다. 이 작은 도관의 주지이지요."

"도장께서는 곽천청의 친구가 아니십니까?"

"곽시주와 빈도는 바둑 친구로, 매달 빈도가 있는 이곳에 와서 며칠씩 머물곤 했습니다."

"지금 그 사람은?"

청풍의 얼굴에는 갑자기 아주 이상한 표정이 떠올랐다.

"빈도가 이곳에 온 것은 바로 시주를 모시고 그를 만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어디에 있는지요?"

청풍이 느릿느릿 말했다.

"그는 빈도의 방에서 기다린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작은 뜰은 아주 고요했고 반쯤 열린 창 안에는 향불 연기가 가득했고, 가벼운 바람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문은 잠그지 않고 닫아만 둔 채였다.

육소봉은 작은 뜰을 지나갔다. 청풍이 문을 밀자 곽천청이 보였다. 그러나 곽천청은 영원히 그를 볼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곽천청은 청풍도인의 침대에 죽어 있었다. 침대 옆의 책상 위에는 벽옥으로 무늬를 새겨 놓은 잔이 있었는데 그 잔에는 아직도 술이 남아 있었다.

독주가! 곽천청의 얼굴은 회색빛이었고, 눈과 코, 입에는 아직도 깨끗이 닦아놓은 혈흔을 볼 수 있었다.

육소봉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청풍도인의 표정은 아주 참담했다.

"그가 왔을 때, 전 그가 어제 다 못둔 그 바둑을 두러 온 줄 알았었습니다. 그에게 새로운 묘수가 있는 줄 알고 그 수를 어떻게 피해 갈까 생각하고 있었죠. 그가 오늘 바둑을 둘 마음이 없다고 말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는 단지 술만 마시고자 했습니까?"

청풍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제야 빈도는 그의 표정이 이상하고, 마음이 무겁게 보이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또 그는 계속 한 숨 지으며 무언가 중얼거리더군요."

"그가 무슨 말을 했습니까?"

"그는 인생 백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다는 말을 하는 것 같더군요. 또 이 세상에 이미 곽천청이 있는데 왜 공교롭게도 또 많은 육소봉이 나타나야 하는가 하는 말도 했습니다."

육소봉은 쓰게 웃다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이 술은 당신이 마련해준 것인가요?"

"술은 이곳에 있던 것입니다만, 술잔은 그가 직접 가져왔지요. 그는 천성적으로 결벽증이 심해 다른 사람이 썼던 물건을 사용치 않았어요."

육소봉은 술잔을 들어 냄새를 맡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과연 술잔에 독이 있군요."

"그는 몇 차례 술잔을 들었다가 다시 놓곤 했습니다. 마치 어려운 문제를 만나 결정을 못 내리고 있는 듯했지요. 빈도가 그를 이상하다고 생각할 때, 그가 갑자기 하늘을 보며 세 번 크게 웃더니 술을 모두 마셔버렸습니다."

이 근심 가득한 도인은 두 손을 모아 합장하더니 우울하게 말했다.

"빈도는 그가 그처럼 젊은데 세상을 버리리라곤 정말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눈에는 이미 눈물이 맺히는 듯했다.

육소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잠시 시간이 지나서야 깊게 탄식하면서 말했다.

"그가 또 다른 사람의 얘기는 하지 않던가요?"

"없었습니다."

"주정의 이름을 들먹이지 않던가요?"

"아니요."

침상 옆에는 두다 만 바둑판이 놓여 있었다.

청풍이 중얼거렸다.

"세상일이 아주 변화무상하군요. 이 바둑판은 여전히 있는데 그 사람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누가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육소봉이 갑자기 말했다.

"그는 검은 돌을 두었습니까?"

"빈도는 언제나 그에게 한 수를 양보했었지요."

육소봉은 검은 바둑돌을 쥐고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내려놓으며 말했다.

"제가 그 대신 한수 두겠습니다."

청풍이 처연히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두면 검은 돌이 지고 맙니다."

"이것 외에는 달리 둘 곳이 없습니다."

"이 판은 본래 그가 진 것입니다. 그 역시 알고는 있었습니다만, 줄곧 인정하지 않으려 했을 따름이지요."

육소봉이 먼 곳을 응시하면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허나 그는 이제 결국 패배를 인정했지요. 바둑은 바로 인생과 같아서 한수만 잘못 두면 지고 마니까."

청풍은 갑자기 소매를 휘둘러 그 두다만 바둑판을 어지러뜨리고는 유유히 말했다.

"인생은 바로 바둑과 마찬가지니, 이기고 지는 것에 연연해할 필요가 뭐있겠습니까?"

"만일 진지할 필요가 없다면 또 이 바둑은 뭐하러 두겠습니까?"

청풍은 그를 한번 보고, 두 손을 모아 합장하더니 천천히 눈을 감고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바람이 한차례 불어 창문을 열어젖혔다. 밤은 이미 대지를 자욱이 덮고 있었다.

육소봉은 침상에 누워 가슴 위에 놓인 술잔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 술잔은 그의 가슴에 오랫동안 놓여 있었으나, 지금까지 전혀 마시지 않은 채 그대로 두고 있었다. 그는 술을 마실 생각이 전혀 없는 듯이 보였다.

화만루가 말했다.

"자네 지금 주정을 생각하고 있나?"

육소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람은 죽게 되면 마음이 선해지는 법이지. 곽천청이 이미 죽기로 결심했던 바니, 반드시 더 이상 살인이라는 업보를 저질렀을 리가 없네. 지금 그들은 아마도 무사히 집에 돌아갔을 거야."

이 말은 육소봉을 위로하는 말일뿐 아니라, 그 자신을 위로하는 말이기도 했다. 육소봉은 마치 듣지 않는 듯했다.

화만루가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어찌 되었든 이 시합은 결국 자네가 이긴 셈이네."

육소봉은 갑자기 한번 길게 탄식하더니 말했다.

"허나 최후의 한 수는, 나 자신이 둔 게 아니야."

"자네 뜻대로 두어진 것이 아니란 말인가?"

"아니네."

그는 또 쓰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 난 비록 이기긴 했어도, 진 것 보다 더 괴롭다네."

화만루 역시 길게 탄식하며 말했다.

"그는 왜 이 남은 바둑을 다 두려 하지 않았을까?"

"그 스스로 이미 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겠지. 마치 어제 역시 바둑을 다 두려하지 않았던 것처럼 "

이 말을 다 마치는 순간, 육소봉은 갑자기 침상에서 뛰어 올랐다. 가슴 위의 술잔이 땡그랑, 하고 떨어지더니 땅에 떨어져 깨져버렸다.

화만루는 그가 여태까지 자기의 잔을 깨뜨리지 않으려 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이 말을 전부 잊어버린 듯 멍하게 놀라서 그곳에 서있었다. 단지 몸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통 떨리고 있음을 느낄 뿐이었다.

화만루는 그가 왜 그러는지 전혀 묻지 않았다. 화만루는 그가 스스로 말해 줄 것을 알고 있었다.

육소봉이 갑자기 말했다.

"어제도 그는 바둑을 다 두지 않았지?"

"그렇지."

"어제도 그는 청풍관에서 바둑을 두었지?"

화만루의 안색도 변했다.

육소봉이 말했다.

"상관비연이 만일 그의 손에 죽었다면, 그가 어떻게 어제 저녁에 이곳에서 바둑을 둘 수 있었을까?"

상관비연은 수백 리 밖에 있었으니, 설사 곽천청에게 기다란 날개가 있었다 하더라도 하루 동안 갔다올 방법은 없는 있었다. 상관비연은 바로 어제 저녁에 죽었으니까.

화만루는 손발이 차가와짐을 느끼며 탄식하듯 말했다.

"우리가 혹시 그를 오해한 것이 아닐까?"

육소봉은 두 주먹을 꽉 쥐고 말했다.

"적어도 상관비연은 그의 손에 죽은 것이 아니네."

"왜 그는 변명을 하지 않았을까?"

"그가 나와 청풍관에서 만나기로 한 것은 바로 그 도인이 어제 자신과 청풍관에서 바둑을 두고 있었음을 증명해 주길 바랐기 때문일 거야."

"그가 혼자 변명해 보았자 자네가 전혀 믿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겠지."

"안타깝게도 그는 변명할 기회조차 없게 되었군."

"그렇다면, 그는 당연히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던 게 아니지 않은가?"

"절대로 아니지."

"그렇다면 누가 그를 죽였을까?"

"그를 죽인 사람은 바로 상관비연을 죽인 사람과 동일범일 거야."

"그 사람이야말로 이 사건의 진정한 주모자고."

"그렇지."

"청풍도인 역시 그에게 매수당했군. 그의 거짓말을 도와주었으니."

"출가한 사람도 사람은 사람이니까."

"그렇다면 청풍도인은 분명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겠군!"

육소봉은 길게 탄식하며 말했다.

"그러니 난 지금 청풍도인이 아직 살아 있기만을 바랄 뿐이네."

그러나 그의 바람은 무너졌다. 그들이 다시 청풍관에 돌아왔을 때, 청풍관은 이미 한줌의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도망갈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단 한명도.

사나운 불길은 무정했다. 불을 지른 사람은 더욱 무정했다. 그 사람이 누구란 말인가? 청풍관은 산의 앞쪽에 있었고, 곽휴의 작은 누각은 산의 뒤편에 있었다. 산 앞쪽은 한 줌의 잿더미로 변해버렸으나, 산 뒤편은 여전히 평화롭고 고요했다.

문 앞에는 '미시오'라는 글자가 여전히 붙어 있었다. 육소봉은 문을 열고 화만루와 함께 걸어 들어갔다. 이것은 그가 두 번째로 이 산문을 들어가는 것이었고, 최후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산 중턱엔 아무 것도 없이 비어 있었다. 그 셀 수도 없이 많던 보물과 병기들은 모두 기적처럼 보이지를 않았다. 산 중턱 가운데에 낡은 멍석을 깔은 작은 돌탁자가 있었는데 곽휴는 맨발인 채로 푸른 옷을 입고 책상다리를 하고서는 그 멍석 위에서 아주 좋은 향기가 나는 술을 데우고 있었다.

육소봉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서 돌계단으로 걸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번엔 제가 아주 시간을 잘 맞춰서 온 것 같습니다."

곽휴 역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나 이번엔 별로 이상할 게 없군. 내게 좋은 술이 있기만 하면 자네가 곧 찾아오는 게 말일세!"

"그러나 전 도리어 좀 이상하게 생각되는데요."

"뭐가 말인가?"

"당신이 일부러 좋은 술로 절 꾀어내는 게 아닌가 싶거든요."

곽휴가 큰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어쨌든 좋은 술이니 자네가 옷을 더럽혀도 상관없다면 여기 앉아 한 잔 들게나."

"겁나는데요."

곽휴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자네가 겁이 난다고?"

"옷이 더럽혀질까봐 겁내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이 겁난다는 건가?"

"제가 곽천청처럼 그 술을 한잔 마시고 나면 다른 사람이 대신 이 바둑대국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말입니다."

곽휴가 그를 쳐다보는 눈빛이 칼집에서 꺼내든 칼처럼 변했다. 그러나 더 이상 아무 말도 없이 천천히 술 한 잔을 따라 천천히 마셔버렸다.

육소봉 역시 더 이상 아무 말도 않았다. 그는 이 말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앞에 있는 사람은 똑똑한 사람이니, 똑똑한 사람에게 얘기할 때는 한마디면 충분한 까닭이었다.

잠시 후, 곽휴가 큰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보아하니 자네를 속일 수는 없는 모양이야."

"그러니 당신도 더 이상 절 속이실 필요가 없습니다."

"자네는 어떻게 내가 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나?"

육소봉이 탄식하며 말했다.

"전 원래 생각지 못했었습니다. 처음부터 잘못 생각했었죠."

"그래?"

"전 당신과 염철산, 독고일학 모두가 피해자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오직 곽천청만이 이 사건에서 이득을 얻은 줄 알았지요."

"지금은?"

"지금엔 이 사건에서 정말로 이득을 얻은 사람은 단 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곽휴가 말했다.

"그게 바로 나라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인 것입니다!"

곽휴가 또 술을 따랐다.

"대금붕왕이 죽었으니, 이 세상에 당신에게 금붕왕조에 대한 빚을 청산하라고 독촉할 사람은 더 이상 없게 되었지요."

곽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원래 내게는 전혀 빚 독촉을 하질 않았어. 그런데 요즘 돈을 너무 펑펑 쓰더라구. 돈 버는 고통도 모르는 사람이 말이야."

"그래서 당신은 그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거로군요!" ‘

곽휴가 차갑게 말했다.

"그런 사람은 죽어야 마땅한 거네!"

"그러나 그가 죽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죠. 독고일학과 염철산 역시 그의 재산을 나눠 갖기를 바랬으니까."

"그 재산은 원래 내 것이었네! 나만이 그것을 고생스럽게 모으고 그것을 점점 늘려나갔으니 절대 다른 사람과 나눠 가질 수는 없었어!"

"그래서 그들 역시 죽어야 마땅하다 이건가요?"

"죽지 않으면 안되지!"

육소봉은 탄식하며 말했다.

"그 재산은 사실 서른 명이 평생을 사용한다 해도 다 못 쓸 재산입니다. 당신은 이미 이렇게 나이가 많이 들었는데, 설마 그것들을 무덤에 갖고 가려는 것은 아니겠죠?"

곽휴가 그를 노려보며 차갑게 말했다.

"자네에게 만일 부인이 있다면, 그 부인을 다른 사람과 함께 소유하려 하겠는가?"

"그건 완전히 다른 별개의 문제입니다."

"내게는 그 두 가지가 완전히 똑같다네. 이 재산은 바로 내 부인과 같으니, 죽는다 해도 절대 다른 사람이 사용하게 할 수는 없어!"

"그래서 당신은 우선 곽천청과 상관비연을 이용해서 대금붕왕을 죽이고, 나를 이용해서 독고일학과 염철산을 죽이게 했군요."

"자네를 찾을 생각은 원래 없었다네. 허나 자네 외에 이 일을 맡을 다른 사람은 정말 생각나질 않았어."

육소봉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그 말은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건 정말일세."

"저야 제가 원해서 당신의 함정에 걸려들었다고는 하지만 곽천청은요? 그 같은 사람이 어떻게 당신의 미끼에 걸려들었지요?"

"그건 내가 그런 게 아니라네."

"그럼 상관비연이?"

곽휴가 웃으며 말했다.

"자네는 설마 그녀가 남자들에게 아주 매력 있는 여인이라는 사실을 느끼지 못했나?"

옆에서 화만루가 쓴웃음을 지었다.

육소봉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당신은 또 어떻게 상관비연을 유혹했지요?"

곽휴가 유유히 말했다.

"내가 비록 늙은이이긴 하나 여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정도는 된다네. 내게는 여자가 절대로 거절 못할 어떤 물건이 있으니까."

"어떤 물건이오?"

"내 보석들이지."

그는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계속 말했다.

"세상에 보석을 좋아하지 않는 여자란 없다네. 세상에 미녀를 좋아 하지 않는 남자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말야."

"그렇다면 당신은 그 보석들을 상관비연에게 나눠 주기로 약속하고서 그녀에게 곽천청을 유혹하도록 시킨 건가요?"

곽휴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들 모두는 그녀의 애인이 곽천청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구만. 그녀가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은 바로 이 늙은이라는 것은 생각지 못하고 말야."

육소봉이 흥분된 어조로 소리치며 말했다.

"그녀가 사랑한 것은 당신이 아니라 당신의 보석이오!"

곽휴가 웃으며 말했다.

"그게 무슨 차이가 있다는 건가. 어쨌든 내게 있어서 그녀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어."

"당신은 일찍부터 이 일이 끝난 후엔 그녀를 죽여 입을 막을 계획이었군요?"

"내 재산을 다른 사람과 나눠 가질 수는 없다고 내가 말했지 않나?"

"그래서 당신은 고의로 육발의 비밀을 나에게 이야기해서 내가 그녀를 죽이길 원했던 거로군요."

육소봉이 다시 말했다.

"곽천청조차도 당신이 이 사건의 진정한 주모자라는 것을 몰랐단 말입니까?"

"당연히 몰랐지. 알았다면 그가 왜 상관비연 대신 한사코 목숨을 내걸려고 했겠는가?"

"그러나 내가 도리어 상관비연을 놓아주리라고는 당신 역시 생각지 못했지요."

"그러니 내가 직접 손을 쓸 수밖에 없었어."

"곽천청은 결코 바보가 아니니, 상관비연의 죽음을 알고는 이 사건에 반드시 주모자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래서 나와 청풍관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후에 곧장 당신을 찾아온 것이군요."

"그는 분명 바보는 아니네만, 똑똑한 사람도 바보 같은 일을 저지를 때가 있다는 것이 애석할 뿐이네."

"확실히 그는 당신을 찾아오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니 그도 죽어야 했지."

"당신은 그를 죽인 후에야 그를 청풍관으로 보냈군요."

"청풍관의 재산은 내 것이니, 언제든지 내가 거둬들일 수 있네."

"그래서 당신이 청풍도인에게 당신의 거짓말에 협조해 달라고 부탁했을 때 그가 감히 거절하지 못한 거군요."

곽휴가 유유히 말했다.

"출가한 사람이 거짓말을 했으니 당연히 죽어야 마땅하지!"

"당신은 저로 하여금 곽천청이 죄가 두려워서 죽은 것으로 생각하게 해서, 제가 이 사건에서 손을 떼기를 바랐던 거고요!"

곽휴가 탄식하며 말했다.

"난 분명히 자네가 더 이상 이 일에 관여하지 않기를 바랐다네. 안타깝게도 그 말 많은 도사가 자네를 해쳤어!"

"그가 저를 해쳤다구요?"

"난 그가 어제 저녁 바둑을 두었다는 얘기를 듣고서, 조만간 자네가 이 빈틈을 눈치 챌 것을 알게 되었지."

"그래서 당신은 아예 청풍관에 불을 질러 태워버린 것이군요."

"그 땅은 다른 용도로 쓸 생각이었는데"

"당신에게는 그 사람들 역시 모두 그 땅과 마찬가지였겠죠. 단지 당신이 사용하는 도구에 불과할 뿐이었으니까."

"그러니 내가 그들을 살리고 싶으면, 그들이 살 수 있는 것이고, 내가 그들을 죽이고 싶으면, 그들은 반드시 죽어야만 하는 걸세!"

육소봉이 말했다.

"당신은 내가 당신에게 이용당하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죠?"

"모든 사람에게는 약점이 있는 법이네. 자네가 그들의 약점을 알 수만 있다면 누구든 이용할 수 있다네!"

"저의 약점이 무엇인데요?"

곽휴가 쌀쌀맞게 말했다.

"자네의 약점은 바로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는 것을 너무 좋아한다는 거야!"

그러자 육소봉은 탄식하며 말했다.

"그래서 제가 당신과 한패가 되어 당신 대신 서문취설과 약속해서 당신을 도와 염철산과 독고일학을 죽이게 한 것이군요?"

"자네는 모든 일을 다 잘해냈지. 곽천청이 죽은 후에 손을 떼려고만 했다면 지금부터 자네는 언제든지 나의 좋은 술을 마실 수도 있고 어려운 일에 부딪힐 때면 나의 재산을 나눠 가질 수도 있었을 거야."

육소봉이 탄식하며 말했다.

"제가 지금도 손을 떼지 않고 있음이 안타까울 뿐이군요."

곽휴 역시 탄식하며 말했다.

"자네는 내가 왜 이곳의 물건을 다 옮기려는지 알 수 있을 거야."

육소봉은 알지 못했다.

곽휴가 이어 말했다.

"왜냐하면 난 이곳을 자네의 무덤으로 이미 준비해 놓았기 때문이야."

"이곳이 무덤이라니, 너무 넓은데요."

곽휴가 유유히 말했다.

"육소봉이 청의제일루 밑에 묻힐 수 있다면, 죽어도 유감이 없겠지."

"청의제일루가 과연 여기라니, 상관비연은 적어도 진실을 말하긴 했군요."

"애석하게도 다른 사람들이 청의제일루가 이곳에 있다고 말하면 할수록 자네는 도리어 더더욱 믿지 않았지."

"그렇다면 당신은 당연히 청의 백팔루의 총우두머리겠군요?"

곽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총우두머리라는 그 말은 정말 발음이 듣기 좋구만. 난 그 말 듣기를 아주 좋아한다네."

"설마 당신의 돈을 세는 소리보다도 더 좋다는 겁니까?"

곽휴가 담담히 말했다.

"난 돈을 세지 않네. 내 돈은 세어봤자 다 셀 수가 없거든."

육소봉이 또 탄식하며 말했다.

"당신이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 이제야 알겠습니다."

"알기야 하겠지만 자네는 안타깝게도 죽을 때까지 배우지 못할 걸세."

"난 돈을 무덤에 가지고 갈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곽휴가 박장대소하며 말했다.

"좋아, 아주 좋아."

"아주 좋다구요?"

곽휴가 웃으며 말했다.

"듣자하니 자네는 항상 엄청난 은표를 지니고 다닌다고 하고, 또 한 번에 적어도 오천 냥 정도를 쓴다고 하더군."

육소봉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그 오천 냥의 은표가 이제 당신 수중에 들어가겠군요."

"자네는 돈을 무덤에 갖고 갈 생각이 없다고 했으니 자네가 죽은 후에 내가 그 은표를 꺼내갖겠네."

"당신은 죽은 사람의 돈조차도 원합니까?"

"어떤 돈이든 모두 원하는 것, 이것이 바로 돈 버는 비결 중 하나라네."

"안타깝게도 전 아직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무덤 안에 들어와 있지."

"당신은 저를 죽일 자신이 있습니까?"

"누구든 무덤에 들어온 이상 살아서 나갈 생각은 하지 말아야지."

그를 노려보는 육소봉의 눈에선 검광과 같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곽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손이 근질근질한가?"

"확실히 조금은요."

곽휴가 유유히 말했다.

"허나 난 자네와 겨룰 맘이 전혀 없다네. 난 이미 죽게 된 사람과는 싸우는 걸 좋아하지 않았어."

그가 가볍게 돌 책상을 한번 누르자 갑자기 쾅, 하는 소리가 나면서 위에서부터 거대한 철 울타리가 내려와 그 돌 책상을 덮었다.

육소봉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당신은 언제 새가 되었죠? 왜 자신을 새장 안에 가두는 겁니까?"

"웃기나?"

"아주 우습군요."

"내가 가버리고 나면 그렇지 않을 걸세. 사람이 곧 죽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떤 일이든 우습게 느껴질 리가 없으니까."

"내가 이제 굶어 죽게 되었다는 겁니까?"

곽휴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가버리고 나면, 이곳엔 먹을 것이라곤 자네와 자네 친구의 살점뿐이고, 마실 거라곤 자네들의 피밖에 남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당신이 어떻게 나가죠?"

"이곳의 유일한 출구는 바로 내가 앉아 있는 이 책상 아래에 있네. 확신하네만 내가 간 후에 이 출구는 막혀버릴 걸세."

육소봉은 안색이 변하며 억지로 웃으려 애쓰면서 말했다.

"난 아마 그 길로 나갈 수 없을 것 같군요."

"자네가 들어온 산의 문은 바깥에서만 열 수 있다네. 확신컨대 자네 대신 밖에서 문을 열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야."

"당신은 또 무엇을 확신할 수 있나요?"

곽휴가 웃으며 말했다.

"내가 자네의 은표를 가져가기 위해 당연히 돌아올 것이라는 것."

육소봉이 웃으며 말했다.

"지금 내 주머니 안에는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나요?"

곽휴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보아하니 자네는 죽어도 조금의 이득조차 내게 양보하지 않으려나보군."

"간신히 아셨군요."

"다행히 가져갈 것이 있긴 있네."

"뭐죠?"

"적어도 자네들이 입은 옷을 벗겨 내서 잡화점에 팔면 조금은 남길 수 있지 않겠나."

"푼돈마저 원한단 말입니까?"

"돈은 항상 좋은 거라네. 아예 없는 것보다는 푼돈이라도 있는 게 낫지."

"좋아요. 당신에게 드리지요."

그는 갑자기 손을 휘둘러 십여 개의 동전을 몰래 숨긴 강풍으로 곽휴를 향해 날렸다.

곽휴가 움직이지도 않고 피하지도 않은 채 이 동전들이 철 울타리를 뚫고 들어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가 손을 휘두르자, 열두 개의 동전이 돌연 전부 그의 손바닥 안에 떨어졌다. 이 노인의 수상(手上) 공력의 오묘함은 육소봉조차 감동받게 했다.

"멋진 솜씨요!"

곽휴는 열두 개의 동전을 매우 조심스럽게 집어넣더니 미소 지으며 말했다.

"돈을 집어넣을 땐 내 무공이 특별히 더 좋아지지."

"안타깝게도 이 무공이 저보다는 좀 손색이 있는 듯하군요."

곽휴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자네가 설마 날 격분시켜 뛰쳐나가 자네와 한판 싸움을 벌이도록 유도하는 것은 아니겠지?"

"바로 그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 생각을 버렸으면 좋겠구만."

"당신은 죽어도 나오지 않을 겁니까?"

"내가 설사 나가려 한다 해도 이미 나갈 수가 없게 되었다네."

"어째서요?"

"이 철 울타리는 잘 정련된 철로 만들어진 것으로 순량이 천구백팔십 근이라네. 설사 철을 진흙처럼 자를 수 있는 칼이 있다 하더라도 자를 수 없는데, 더더군다나 그런 칼은 신화, 전설 속에서나 가능한 법 아니겠나?"

"천구백팔십 근의 철 새장이나 당연히 아무도 들어 올릴 수 없겠군요."

"절대로 없지."

"그러니 당신이 나올 수 없을 뿐 아니라, 내가 들어갈 수도 없다는 거군요."

"그러니 자네는 내가 가는 것을 보고 있다가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거지."

"당신이 먼저 이 철 새장으로 자기를 덮은 것은 내가 당신과 싸우는 게 무서웠기 때문이오?"

"난 이미 늙어 여자와 침대 위에서 하는 일도 흥미가 없는데 하물며 싸움이라니?"

육소봉이 화만루의 어깨를 쓰다듬더니 탄식하며 말했다.

"보아하니 이제 우린 죽을 수밖에 없는 모양이네!"

화만루는 의외로 웃으면서 담담히 말했다.

"보아하니 이것이 바로 그의 마지막 한 수인 모양이야!"

"자네는 그의 한수가 정말 대단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나보군."

"허나 우린 아직 한 수를 두지 않았네. 우리에게는 아직 한 사람이 남아 있거든."

"누구지?"

"자네는 주정을 잊었나?"

육소봉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잊지 않았네."

화만루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서 자네가 지금까지도 계속 웃을 수 있었구먼····."

"그래서 자네는 조금도 조급해 하지 않았고 말이야."

"그는 원래 이곳에 주정을 묶어 놓아선 안 되는 거였지."

"맞아."

곽휴의 안색이 거의 변하여 참지 못하고 말했다.

"주정이 이곳에 있는 게 또 뭐가 어떻다는 건가?"

육소봉이 담담히 말했다.

"뭐가 어떻다는 건 아닙니다. 단지 공교롭게도 노대사의 제자라는 것 밖에는요."

곽휴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노대사?"

"당신도 노대사가 바로 노반조사의 제자이자, 이 세상에서 기관 제작의 제일인자라는 것을 당연히 알 겁니다."

"자네, 자네··· "

그는 말을 끝맺지 못하더니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육소봉은 한숨을 내몰아 쉬었다. 그런데 그 외에도 또 다른 사람이 한 숨을 쉬고 있음을 발견했다. 한숨을 쉰 사람은 화만루가 아니라 바로, 상관설아와 여주인이었다. 그녀들은 한숨을 쉬면서 걸어왔는데 얼굴에 모두 봄꽃처럼 환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상관설아가 말했다.

"보아하니 당신 말이 맞는 것 같네요. 이 사람은 정말 두 손이 있네요?"

여주인은 더욱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러니 그는 세상에 하나뿐인 육소봉이지."

육소봉은 쓴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당신들이 줄곧 나오지 않은 것은 내 손이 두 개인지 아닌지를 보려고 기다렸던 것인가요?"

상관설아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우리들은 본래 당신이 이번에는 절대로 저 늙은 여우를 상대할 방법이 없을 줄 알았어요. 당신이 최후의 한 수를 남겨 놓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질 못했답니다."

여주인이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다.

"당신의 이번 최후의 한 수는 정말 아주 오묘했어요."

상관설아가 말했다.

"이 새장은 보래 그가 당신을 상대하기 위한 거였죠. 그런데 자신이 도리어 새장에 갇혔으니··· 자신이 그러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질 못 했을 거예요."

육소봉 역시 웃으며 말했다.

"이 한 수를 바로 '청군입옹(자기가 놓은 함정에 자기가 걸려든다는 뜻)'이라고 부르지."

여주인이 아주 맑은 눈빛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

"당신은 이 방법을 어떻게 생각해냈죠?"

육소봉이 유유히 말했다.

"전 본래 천재니까요."

상관설아가 말했다.

"혹시 당신은 들어오기 전에 이미 그가 그 길로 도망가려 한다는 속셈을 눈치 채고 그 길을 미리 막아 놓았던 건 아닌가요?"

육소봉은 대답하지 않았다.

여주인 또한 참지 못하고 물었다.

"왜 대답하지 않나요? 도대체 무슨 방법을 사용한 거죠?"

육소봉이 돌연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상관설아가 말했다.

"왜죠?"

육소봉이 웃으며 말했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 절초 하나를 남겨 놓고자 하는 법이니, 당신들 같은 여인네들 앞에선 더더욱 알려 줄 수 없어요."

그는 늙은 여우처럼 웃더니 갑자기 말했다.

"저의 절초를 만일 당신들이 배워 사용할 수 있게 된다면, 이후에 제가 무슨 낙으로 살겠습니까?"

사람들이 다 가버리자 화만루 역시 참지 못하고 물었다.

"자네는 도대체 어떤 방법을 사용한 건가? 왜 그들에게 알려주려 하지 않는 거지?" 육소봉의 대답은 아주 기묘했다.

"왜냐하면 나 역시도 모르기 때문이야."

화만루가 놀라 말했다.

"그 입구가 어떻게 그렇게 갑자기 막혔는지 자네 역시 모르겠다고?"

"그렇다네."

화만루는 놀라 멍청해졌다.

"아마도 기관이 갑자기 고장 났기 때문일 거야. 아마 어떤 늙은 쥐가 저도모르는 새에 뛰어 들어가 기관을 막아버린 것이거나 "

그는 깊은 생각에 잠기며 조용히 말했다.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일까? 단지 하늘만 알겠지. "

"단지 하늘만 안다고?"

육소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네는 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결국 막 성공하려는 순간 실패하게 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나?"

"모르겠네."

"하늘이 그들의 최후를 미리 준비해 놓고 미리 기다리기 때문일 걸세. 그렇기에 그들의 계획이 아무리 교묘해도 아무 소용이 없게 되는 거지."

"그래서 이 최후의 한 수 역시 그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바로 하늘의 뜻이라는 것이로군."

"맞네."

화만루가 돌연 유쾌하게 웃었다.

"왜 웃는가? 내 말이 믿기지 않는 건가?"

화만루가 웃으며 말했다.

"자네는 설마 내가 정말로 믿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육소봉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왜 내가 진실을 말할 땐 사람들은 오히려 믿지 않으려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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