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꺽정 화적편 8

3학년2반 | 2022.01.11 07:55:32 댓글: 0 조회: 614 추천: 0
분류연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1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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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함흥 고리백정의 손자구 양주 쇠백정의 아들일세. 사십평생에 멸시두
많이 받구 천대두 많이 받았네. 만일 나를 불학무식하다구 멸시한다든지 상인해
물한다구 천대한다면 글공부 안한 것이 내 잘못이구 악한 일 한것이 내 잘못이
니까 이왕 받은 것보다 십 배, 백 배 더 받더래두 누굴 한가하겠나. 그 대신 내
잘못만 고리면 멸시 천대를 안 받게 되겠지만 백정의 자식이라구 멸시 천대하는
건 죽어 모르기 전 안 받을 수 없을 것인데, 이것이 자식 점지하는 삼신할머니
의 잘못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가문 하적하는 세상 사람의 잘못이니까 내가 삼신
할머니를 탓하구 세상 사람을 미워할밖에. 세상 사람이 임금이 다 나보다 잘났
다면 나를 멸시천대하더래두 당연한 일루 여기구 받겠네. 그렇지만 내가 사십
평생에 임금으루 쳐다보이는 사람은 몇을 못 봤네. 내 속을 털어놓구 말하면 세
상 사람이 모두 내 눈애 깔보이는데 깔보이는 사람들에게 멸시 천대를 받으니
어찌 분하지 않겠나. 내가 도둑눔이 되구 싶어 된 것은 아니지만, 도둑눔 된 것
을 조금두 뉘우치지 않네. 세상 사람에게 만분의 일이라두 분풀이를 할 수 있구
또 세상 사람이 범접 못할 내 새상이 따루 있네. 도둑눔이라니 말이지만 첨말
도둑눔들은 나라에서 녹을 먹여 기르네. 사모 쓴 도둑눔이 시굴 가면 골골이 다
있구 서울 오면 조정에 득실득실 많이 있네. 윤원형이니 이량이니 모두 흉학한
날도둑눔이지 무언가. 모두 같은 까까중이까지 사모 쓴 도둑눔 틈에 끼어서 착
실히 안몫릉 보니 장관이지. 이런 말을 다 하자면 한아 없으니까 거만두겠네. 자
네가 지금 내 본색을 안 바에는 인제 고만 자네하구 작별인데, 이 세상에서 다
시 안날는지 모르는 마지막 작별에 말없이 일어서기가 섭섭애서 내 속에 있는
말을 대강 하네. 그러구 내 종적을 자네가 헌사할 리는 만무하지만 혹시 한두
사람에게라두 말한 것이 드러나면 오입쟁이 임선달 대신 도둑눔 괴수 임꺽정이
가 자네를 보러올는지 모르니 그리 알구 조심하게.”
꺽정이가 말을 점잖게 하느라고 한참씩 생각해 가며 띄엄띄엄 말하여 거의 평
생 처음으로 조리 있게 긴말을 다한 뒤 슬며시 일어나서 의관을 다시 차리었다.
“나는 가네.”
꺽정이가 소홍이를 굽어보며 말할 때 이때까지 그린 듯 앉아 있던 소홍이가 별
안간 꺽정이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왜 붙드나, 할 말이 있나?” “녜.” “무
슨 말인가?” “나하구 같이 가세요.” “어디를 같이 가?” “어디든지 선다님
가시는 데 나도 가겠세요.” “내 사정이 자네하구 같이 갈 수 없는걸.” “그럼
나를 죽이고 가세요.” “무슨 까닭에 죽이라구 지다위하나?” “선다님이 죽인
다면 나는 웃고 주겠세요.” “내가 사람 죽이기에 이골이 났어두 웃구 죽는 사
람은 못 죽이겠네.” “나를 버리고는 못 가실 테니 나는 몰라요.” “자네가 나
를 따라가면 막이 도둑눔의 첩노릇을 하게 될 테니 자네 전정을 망치지 않겠세
요.”
꺽정이가 안참 우두머니 서 있다가 펄썩 소홍이 앞에 주저앉아서 두 손을 잡고
얼굴을 들여다보며 “자네 정을 내가 저버리지 않음세.” 하고 말하였다.
이날 밤에 꺽정이가 소홍이 집에서 자는데 두 사람이 다같이 정에 겨워서 잠이
오지 아니하여 건밤을 새웠다. 이튿날 식전 일어나기 전 베개 위에서 꺽정이가
소홍이더러 “나는 오늘 시굴 가겠네.” 하고 말하니 소홍이가 대번에 “나는
어떻게 하구요?” 하고 물었다. “어수선한 일을 다소간 정돈해 놓구 자네를 데
려감세.” “이야기할 게 많으니 며칠 더 기시다 가셔요.” “급한 볼일이 있어.
” “무슨 볼일이에요?” “그건 묻지 말게. 자, 고만 일어나세.”
꺽정이가 소흥이 집에서 자리조반 먹고 바로 남소문 안으로 와서 한온이보고
윤지숙이에게 분풀이할 것을 대강 이야기하고 박씨, 원씨, 김씨 세 집으로 돌아
다니며 급한 일이 생겨서 시골을 간다고 말하고 서울서 떠나서 길에서 하룻밤
자고 그 이튿날 청석골로 돌아왔다.
꺽정이가 도회청에서 두령, 두목, 졸개 들의 문안을 차례로 다받고 난 뒤 늙은
오가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괴상히 여겨서 옆교의에 앉은 서림이를 돌아보며
“오두령은 어디 병이 났소?” 하고 물으니 “오드령 부인이 병환이 나서 대단
하시다구 광복서 기별이 와서 오두령이 허생원을 데리구 가셨습니다. 가신 지
벌써 삼사 일 됐습니다.”
서림이가 대답하였다. “무슨 병이랍디까?” “저녁밥 자신 것이 눌려서 병이
났다니까 아마 관격이겠지요.” “그럼 대단친 않은 게지.” “글쎄, 모르겠습니
다.” “조용히 의논 좀 할 일이 있으니 사랑으루들 갑시다.”
꺽정이가 도회청에서 자기 사랑으로 올라오는데, 신불출이, 관능통이 두 시위
는 좌우에서 부축하고 서림이, 배돌석이, 곽오주, 길막봉이, 김산이 다섯 두령은
뒤를 따랐다.
꺽정이가 신임 봉산군수 윤지숙이 괘씸한 것을 여러 두령에게 말하고 도임 행
차 습격할 계책을 서림이보고 의논하였다. 서림이의 말이 목하 청석골서 큰일을
내는 것이 재미 적은 것은 고사하고 봉산 구관 박응천이 청속골 길을 피함인지
해주 가서 인궤를 감사에게 바치고 연안, 배천길로 서울을 올라갔단 말이 있으
므로, 신관도 십의 팔구 먼저 해주 가서 감사에게 연명하고 해주서 봉산으루 가
기가 쉬운즉 일하기는 좀 불편하나 고양, 파주, 장단 등지에 가서 목을 지키는
것이 실수 없으리라고 하여 꺽정이가 그 말을 옳게 듣고 고양 혜음령에 가서 정
상갑이, 최판돌이패를 데리고 목을 지키기로 작정하고 혜음령에 갈 사람을 정하
려고 하는데, 여러 두령이 너도 나도 다 가겠다고 자원하였다.
“내가 지정할 걸 왜들 떠드니냐? 가만히 있거라.” 꺽정이가 여러 두령을 꾸
짖고 “돌석이 막봉이 산이 세 사람은 나하구 같이 혜음령에 가구 오주는 서종
사와 같이 여기 남아 있거라.” 하고 말을 일렀다.
곽오주는 입만 실쭉할 뿐이지 아무 말도 않고 서림이는 고개를 비틀고 있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곽오주에게 성화를 받고 남아 있기가 싫든지 “임진 대적하러
가는 것이 아닌 바엔 대장께서 친히 가실 것이 없지 않습니까? 제가 한번 몸을
받아가지고 가면 어떠하오리까?”
꺽정이의 의향을 품하여 보았다. “그래두 좋겠지만 내가 가야 분풀이를 톡톡
히 하지.” “작죄한 놈을 치죄할 때 손수 매질한다구 화풀이가 더 됩니까?”
“서종사가 봉산군수하구 내리 척을 짓구 싶소? 아무리나 내 대신 가보우.”
서림이에게 꺽정이의 허락이 떨어지자, 곽오주가 혼잣말로 “대장 형님이 서
종사 말을 저렇게 잘 듣다간 언제든지 큰코 다칠 때 있을걸.” 하고 중얼거려서
“무어야?” 하고 꺽정이가 소리를 질렀다.
봉산군수 도임 행차를 습격할 자리와 습격하러 갈 사람이 다 작정된 뒤에 서
림이가 졸개를 내보내서 탑고개 동민에게 봉산 신연 하인이 지나가는 것을 보거
든 즉시 와서 고하라고 기별하였더니, 어제 벌써 지나갔다고 회보가 들어와서
서림이는 배돌석이, 길막봉이, 김산이 세 두령과 같이 불불이 떠날 준비를 차리
었다.
꺽정이가 신불출이와 곽능통이도 같이 가라고 허락하여 네 두령 두시위 여섯
사람 일행이 모두 장사치들 모양을 차리기로 하고 물건짐들을 만드는데, 신불출
이, 곽능통이, 두 사람 질 짐에는 왕래 길양식을 갈라넣고, 서림이, 배돌석이, 김
산이 세 사람 질 짐에는 갈아 입을 의복과 용 쓸 무명을 조금씩 나눠넣고, 길막
봉이 짐은 칼, 활, 화살, 철편 등 병장기로 속을 채웠다.
이 날은 해가 이미 저물어서 떠날 준비만 다 해놓고 이튿날 식전에 일찍이들
청석골서 떠났다. 여섯 사람이 청석골서 떠나던 날 임진나루 못 미처 동자원 화
서 자고 이튿날 식전 나룻가에 왔을 때, 강 건너의 배가 좀처럼 오지 아니하여
사장에들 앉아서 한동안 늘어지게 쉬었다. 기다리기 진력이 날 지경에 배가 겨
우 건너와서 타기까지 하였으나 사공이 행인 더 오기를 바라고 배를 띄우지 아
니하여 서림이가 “여보, 고만 갑시다.” 하고 재촉하니 사공은 못 들은 체하고
있었다. “우리 여섯이 선가를 특별 후히 줄 테니 어서 띄우.” 사공이 서림이를
흘낏 돌아보며 “얼마나 줄라구 특별히 준다우?” 하고 물었다. “내가 선가 선
셈하지.” 서림이가 자기 짐에서 서총대 무명 한 필을 꺼내서 “자, 이거 설가루
받으우.” 하고 사공을 주었다. 서총대 무명이 백목만 못한 낮은 무명이지만, 그
때 시세가 한 필 가지고 쌀을 서너 말 바꿀 수 있었다. 사공이 하루 종일 배질
하여도 쌀 서너 말거리가 생길지 말지 한 것을 한번에 받았으니 입이 딱 벌려져
야 옳건만, 이 사공 역심 보아라 매매 교환에 많이 쓰는 닷새 무명을 “이거 석
새 아니오?” 새를 낮잡아 시뜻하에 말하였다. “선가루 부족하우?” “부적한
게 아니라 북덕무명이라두 새가 너무 굵단 말이오.” “자, 갑시다.” “녜.”
사공이 삿대를 질렀다. 배가 깊은 물에 나와서 삿대를 뉘어놓고 노질을 시작
한 뒤 사공이 서림이를 보고 “멀리 벌이를 나가시우?” 하고 물어서 “그렇소.
” 서림이가 대답하니 “별이들 잘해서 우리 같은 놈두 좀 먹여 살리시구려.”
말하고 껄껄 웃었다. “혼자 먹구 살 생각이 아니니까 배 한번 타는데 무명 한
필씩 주지 않소.” “서총대 한 필이 무어가 많소? 삼사십 년 전 같으면 쌀이
여덜 아홉 말이니까 많다구두 하겠지만.” “서 말 쌀은 어디요?” “전에는 닷
새 한 필이면 명주 한 필하구 맞바꾸든 것이 지금은 안집명주 한 필을 바꾸재두
너덧 필 드는구려. 시세가 얼마나 틀렸소.” “명주 한 필하구 맞바꿀 때를 봤
소?” “우리 여남은 살 적 일인데 보다뿐이오?” “연세가 올에 몇이시우?”
“쉬지근해진 지가 한참 됐소.” “아들은 몇이나 두었소?” “아들 하나 있던
것은 멀리 갔구 어린 손자새끼들뿐이오.”
이런 수작을 하는 중에 배가 나루터 각까이 와서 사공이 다시 삿대질을 하기
시작하였다. 서림이가 배에서 내릴 때 사공더러 “쉬 또 봅시다.” 하고 인사하
니 사공은 “녜.” 대답한 뒤 “언제든지 한 필씩만 주시우. 그러면 밤배라두 내
드리리다.” 말하고 또다시 껄껄 웃었다.
여섯 사람이 파주에 가까운 서작포를 거의 다 왔을 때 행차 하나가 앞에서 오
는데 기구가 굉장치는 아니하나 전배, 후배 사령들이 늘어선 것이 관행차가 분
명하였다. “저게 봉산 아니까?” “글쎄, 그런 것 같소.” “그럼 낯패났구려.”
“어제 파주서 자구 오는 모양이지.” “우리가 그저께쯤 혜음령 가 앉아야 될
뻔했군.” “여기서 만났으니 저걸 어떻게 하우?” “참말루 봉산이면 우리두
여기서 되돌아서는 수밖에 없지.”
여섯 사람이 길을 비키느라고 길 옆 수풀 아래 와 서서 수군수군들 지껄이는
중에 행차가 앞으로 지나가는데, 진사립 쓰고 남철릭 입고 안장마 위에 높이 앉
아서 거드럭거리는 양반은 원인 것 같고, 갓을 숙여 쓰고 반부담을 타고 뒤에
떨어져 가는 사람은 신연 이방인 것 같았다. 서림이가 김산이더러 봉산 신연 행
차인가 물어보라고 하여 김산이가 길로 나와서 반부담 뒤에 따라가는 군노를 보
고 “이 행차가 봉산 신연행차 아니오?” 하고 물으니 군노는 말없이 고개를 끄
떡하였다.
혜음령으로 장맞이하러 가는 봉산군수를 중로에서 만나서 예정하고 온 일이
다 틀리게 되니 다른 다섯 사람이 서림이만 치어다보는 것은 고사하고 서림이까
지도 별로 좋은 계책이 생각나지 않아서 눈살을 찌푸리고 쓴입맛을 다시다가 다
섯 사람을 보고 “봉산 일행이 오늘 장단 가서 중화하구 송도 가서 숙소할 것이
요, 봉산으루 바루 갈 것 같으면 내일 청석골서 일을 톡톡히 할 수 있지만 해주
루 간다면 오늘 송도 가기 전에 일을 색책으루라두 해야 할 텐데, 심복골패를
불러내서 대추포 근처에서 해보거나 어룡포패를 모아 가지구 널무니 안에서 해
봤으면 좋겠지만, 지금은 다 불급될 테니 소용없는 말이구 하는 수 없이 우리
임진 가서 배탈 때 흔단을 내서 봉산군수를 망신이나 한번 시키는 수밖에 없겠
소.” 하고 말하였다. 다섯 살마 중에 배돌석이가 "그러면 일이 싱겁지 않소." 말
하고 또 신불출이가 "대장께 죄책을 당하지 않을까요?" 말하는 것을 서림이는
“일이 벌써 짭짤하게 되기 틀린 걸 하는 수 있소. 그러구 우리가 잘못해서 일
이 예정대루 안 됐을새 죄책을 당하지.” 하고 두 사람의 말을 함께 대답한 뒤
“봉산군수를 아주 놓쳐버리면 닭 쫓던 개 울 쳐다보게 될 테니 얼른들 뒤쫓아
갑시다.” 하고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 났다. 여섯 사람이 봉산군수를 멀찍이 뒤
따라오는 중에 서림이가 김산이를 보고 “김두령, 한 걸음 앞서 가서 혹시 봉산
으루 바루 가나 좀 물어보시우.”
말을 일러서 김산이가 봉산 행차 뒤를 바짝 가까이 쫓아가서 맨뒤에 가는 군
노와 느런히 같이 가며 서로 접어하는데, 이방이 말위에서 뒤를 돌아보며 군노
를 꾸짖어서 군노는 달음질하여 앞으로 나가고 김산이만 뒤떨어졌다가 일행과
같이 섞이게 되었다. “물어봤소?” 서림이 묻는 말에 김산이는 “해주 감영으
루 간답디다.” 하고 대답하였다.
봉산군수 행착가 임진나루터에 다 와서 군수는 말을 세우고 강색을 바라보고
이방은 말에서 내려와서 이것저것 보살피고 사령과 군노들은 먼저 와서 배 기다
리는 행인들을 모두 뒤로 몰ㄹ아내었다. 여섯 사람이 나중 와서 한옆에 짐들을
벗어놓고 웅긋쭝긋 서 있다가 배가 떠나게 되자마자, 봉산군수보다 먼저 배에
오르려고 각각 짐짝들을 치켜들고 쫓아들어갔다. 사령, 군노 들이 일변 소리질러
야단치며 일변 가로막고 떠다밀었다. “이놈들아, 눈깔이 없느냐?” “다리 뼉다
귀들을 퉁겨놓기 전에 얼른 저리 나가거라!”
일부러 흔단을 내려고 하는 사람들이 곱게 오지 않는 말을 곱게 받을 리가 만
무하다. “너눔들이 임진 나룻배 도차지냐?” “양반 떼세 작작 해라, 이놈들아.
그중의 서림이는 봉산군수의 골을 한껏 지르려고 “쇠뿌러기가 천신만고해서
원 맛을 보니까 맘에 곧 대국천자나 한 상싶은 게지. 되지 못하게 기광두 부린
다.” 하고 큰소리로 떠들었다. 배 탈 준비로 말에서 내려섰는 봉산군수 윤지숙
이 서림이의 떠드는 소리를 듣고 과연 화가 충천하게 나서 “그놈들, 모두 잡아
묶어라!” 하고 호령하니 이방이 원님 뒤를 받아서 “그놈들을 잡아묶으랍신다.
빨리 거행해라!” 하고 소리를 질렀다. 사령, 군노 들이 여섯 사람을 붙들려고
달려드는데, 길막봉이가 짐짝을 땅에 놓고 다섯 사람 앞에 나서서 달려드는 관
속들을 가로막았다. 서림이가 자기 짐을 내던지고 길막봉이 짐을 들어다 놓고
잽싸게 묶은 것을 풀고 덮은 것을 열어젖혔다. 짐 속에 병장기가 가득 든 것을
윤지숙이 내려다보고 장사치들이 도둑놈의 패인 줄을 짐작하고 하인 손에서 고
삐를 뺏듯이 잡아채서 말을 칩떠 타며 곧 혼자 오던 길로 도망질을 쳤다.
봉산 관속들이 원님의 도망하는 것을 보고 모두 각각 들고뛰었다. “배두령,
빨리 군수놈을 쫓아가서 혼뜨검을 내구 오시우.”
서림이가 말하여 배돌석이는 장달음을 놓아서 윤지숙의 뒤를 쫓았다.
윤지숙이 어마지두 놀란 바람에 정신 없이 말을 놓아 도망하다가 놀란 마음이
조금 가라앉으며 곧 도망하는 것이 창피한 생각이 나서 처음에 말을 천천히 걸
리고 나중에 말을 아주 멈추고 나루터로 도로 갈까말까 망설이는 중에 “이놈,
게 있거라!”
호통 소리가 뒤에서 들려서 고개를 돌이키고 쫓아오는 놈을 돌아보는데 한쪽
광대뼈에서 딱 소리가 나며 정신이 잠시 아찔하였다. 어느 결에 고개는 앞으로
돌아왔고 한손능 올라거서 광대뼈는 눌렀었다. 뒷덜미와 등줄기와 양쪽 어깻죽
지가 뜨끔뜨끔할 때 비로소 광대뼈에도 돌팔매를 얻어맞은 줄 짐작하였다. 안장
위에 납작 엎드려서 한손으로 말갈기를 움켜잡고 또 한손으로 말고빼를 잡아채
었다. 말이 별안간 뒤를 솟치며 냅다 뛰어서 하마터면 떨어질 것을 말 잘 타는
덕으로 겨우 면하였다. 닫는 말에 태질을 할텐데 채찍이 없어 성화가 났었다. 돌
팔매 치는 놈이 뒤쫓아오지 않는 것도 모르고 엎드린 채 오는 중에 몸이 거북하
여 꼿꼿이 일어앉아서 허리를 재며 둘러보니 서작포 동네가 바로 지척에 있었
다. 동네 앞에 박힌 샘물가에서 푸성귀를 씻는 여편네들이 “아이구 저거 웬일
이야?” “아까 지나가시든 원님인데 어디서 저렇게 되셨을까?” “피투성이가
되셨네, 아이구 가엾어라.”
지껄이는 소리들을 듣고 자기 앞을 살펴본즉 손바닥에도 피요, 철릭 앞섶에도
피요, 말갈기에까지 핀데 갈기의 피는 손에서 묻은 모양이었다. 얼굴이 보기 흉
악할 것을 생각하고 말을 세우고 샘에 내려와서 손을 씻고 손수건을 물에 적시
어서 아픈 광대뼈만 빼놓고 얼굴을 닦고 철릭 앞섶을 대강 문지르는데, 여편네
들이 물도 뻔질 떠주고 얼굴에 닦을 데도 가르쳐 주고 철릭 앞섶도 문지르기 좋
도록 잡아당겨 주었다. 샘물 흘러가는 도랑에 와서 물을 먹는 말이 저도 씻겨
달라는 듯이 뒤를 돌려대는데 보니, 한편 뒷다리 불그러진 마디에 돌팔매를 맞
아서 피가 비쳤었다.
윤지숙은 한 시각이라도 빨리 파주목사를 찾아보고 말하려고 서작포에서 잠깐
지체하고 바로 파주읍으로 달려갔다.
봉산군수 도임 행차와 장사치로 변장한 적당 사이에 시비 나는 광경을 임진나
루 진군 수십명이 목도들 하였건만, 관원도 무섭고 적당도 무서운 까닭에 말썽
스러운 일에는 참견 않는 것이 제일이란 듯이 슬슬 다 피하고 더구나 다른 행인
들은 나루터 근처에도 오지 아니하였다.
서림이 등 다섯 사람이 나루터를 차지하다시피 하고 있다가 윤지숙이를 쫓아
갔던 배돌석이가 돌아온 뒤에 강을 건너가려고 사공을 부르니 사공들이 다 어디
가서 숨었는지 대답이 없었다. 여섯 사람 중 김산이가 조금 배를 저을 줄 안다
고 하여 그대로 어떻게 건너가 보려고 배들을 타고 김산이 시켜 배를 띄우게 할
즈음에, 언덕 위에서 배를 가만 놓아두라고 부르짖는 소리가 나서 쳐다들 본즉
건너올 때 무명 한 필 받은 사공이 거기 서 있었다. 내려오라고 손짓하여도 내
려오지 아니하여 서림이가 쫓아올라갔다. “칼을 가지구 와서 겨누면서 가자구
하면 내가 건너다주리다.”
사공의 말이 뒤에 발뺌거리 장만인 줄 서림이는 선뜻 짐작하고 사공을 붙들고
서서 배를 내려다보며 “신시위 곽시위, 환두 하나씩 가지구 이리들 올라오.”
하고 소리쳤다. 사공이 서림이더러 “이번에두 선가는 후히 내야 하우.” 하고
말하여 서림이는 웃으면서 건너올 때의 곱절로 무명 두 필을 주마고 허락하였
다. 신불출이와 곽능통이가 올라와서 서림이 시키는 대로 날이 번쩍번쩍하는 환
도들을 빼어들고 사공을 양쪽에서 잡아 끌고 내려왔다.
여섯 사람이 임진나루를 건너서 장단길로 오다가 길에서 심복골 패의 괴수 노
릇하는 사람을 만나서 그 사람에게 술대접을 받게 되었는데, 술 먹으며 이야기
들 하는 동안에 해가 저물어서 그날 밤 심복골서 자고 이튿날 청석골로 돌아오
는 길에 봉산군수가 장단읍에 와서 숙소하고 간 것과 파주 병방이 장교, 사령
삼사십 명을 영솔하고 장단까지 배행한 것을 장단읍내 사람에게 이야기 듣고 알
았다.
여섯 사람이 청석골 떠난 지 사흘 만에 되돌아왔다. 이렇게 빨리들 올 줄 생
각 못한 꺽정이는 여섯이 사랑 앞으로 들어오는 것을 방안에서 내다보고 “웬일
들이야?” 하고 괴이쩍게 물었다. 여섯 사람 중 두 시위는 마루에 서고 네 두령
은 방에 들어와서 각각 꺽정이에게 문안을 한 뒤, 서림이가 전에 앉던 자리에
와 앉아서 날짜 불급으로 일이 예정과 같이 되지 못한 사연을 말하니 꺽정이가
화가 나서 서림이의 말을 끝까지 다듣지도 않고 “대신 간다구 주적대구 가서
일을 그 따위루 하구 왔어!” 하고 큰소리로 꾸짖었다. “날짜 불급니야 어떻게
하는 수 있습니까?” “중로에서 만났으면 만난 데서 해볼 게지 날짜가 무슨 놈
의 날짜야!” “졸지에 중로에서 만나서 일을 어떻게 할 수가 있어야지요.” “
관속들은 후두둘겨 쫓아버리구 윤가놈을 말께서 끌어내려서 대번에 쳐죽이든지
쳐죽이지 않으면 어디 한 군데 병신이라두 만들어 보내지 그걸 못해!” “백주
대로에 그런 일 하기는 어렵지 않습니까?” “하기 어려우면 숫제 고만두지 임
진까지 무어하러 따라와?” “배 탈 때 시비를 붙어가지구 망신을 주는 숩ㄲ에
별도리가 없을 줄루 생각이 들었었습니다.” “윤가놈이 얼뜬 게 도망질을 쳐서
제가 제 망신을 했지 만일 임진 진군들하구 합력해 가지구 잡으러 들었으면 어
떻게 할 뻔했소? 어디 말 좀 해보라구.” “하여튼 이번에 윤가가 망신두 톡톡
히 했지만 배두령 돌팔매에 혼두 단단히 났을 줄 압니다.” “그래두 잘했다구
하는 말인가?” “잘했단 말씀은 아니올시다.” “담당하구 간 일을 잘못하구
왔으면 석고대죄라두 할 것이지 뻔뻔스럽게 무슨 말인고!”
꺽정이의 언성은 처음보다 낮아져서 예삿말 소리와 거의 다름이 없으나 기색
은 점점 더 험하여 바로 보기가 어려웠다. 꺽정이의 화가 꼭뒤까지 난 때는 이
러하였다. 만일 기색을 살피지 않고 언성만 듣고 화가 가라앉은 줄로 알았다가
는 큰코 다치는 수가 많다. 서림이는 이것을 잘 아는 까닭에 꺽정이의 말대로
석고대죄를 하는 것이 화받이가 덜 될 줄 생각하고 “이번 일이 잘못된 건 모두
제 죄올시다. 다른 사람은 죄가 없습니다. 이것만은 통촉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 말하고 곧 일어나 밖으로 나와서 공석을 갖다가 계하에 깔고 공석위에 꿇어
엎드렸다. 서림이가 대죄를 드리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없든지 다른 사람들도
모두 계하에 내려가서 서림이와 같이 굴복들 하였다. 여섯 사람이 대죄하는 것
을 보고 꺼ㅗㄱ정이의 기색이 비로소 적이 풀리었다. “서종사는 도중에 유공한
사람이라 서종사루 봐서 모두 용서하니 그리 알구 다들 일어나거라.”
꺽정이가 여섯 사람의 일 잘못한 것은 곧 용서하였으나 윤지속에게 분풀이 톡
톡히 못한 것은 끝내 마음에 불쾌하였다. 불쾌하게 며칠 동안 지내는 중에 소홍
이를 보고 싶은 생각이 불현듯이 나서 또다시 서울을 올라가려고 내일쯤 떠나겠
다고 여러 두령에게 말까지 하였을 때, 황천왕동이가 광복산에서 와서 오두령
부인이 오늘 새벽에 상사 났다고 흉보를 전하였다.
오두령의 마누라가 서체로 몹시 앓고 난 뒤 지위가 져서 병병하는 중에 오두
령이 토끼 한 마리를 붙들어와서 점심에 토끼고기를 볶아먹었는데, 그것이 체하
였던지 저녁때부터 토사를 시작하여 밤중까지 쉴 새 없이 토하고 사하고 진기가
다 빠져서 새벽에 숨이 지는데 마치 거품 잣듯 하였다 하고, 허생원이 처음에
보고 곽란에 땀난 것이 좋지 않다고 꺼리면서 약 몇 첩 쓰다가 나중에는 맥의
위기가 떨어져서 구할 수 없다고 약도 쓰려고 하지 아니하여 오두령이 허생원의
멱살을 잡고 날치기까지 하였고, 오두령이 마누라의 송장을 뻗쳐놓고 갖은 넋두
리를 다하며 몸부림을 쳐서 수시도 할 수 없는 까닭에 여러 사람이 다른 방으로
끌고 와서 붙들고 있다시피 하고 박두령 부인이 친모녀와 다름없다고 머리를 푸
는데 배두령 부인도 수양딸은 일반이라고 박두령 부인과 같이 발상을 하였다고,
황천와동이가 초상 전후의 듣고 본것을 꺽정이 이하 여러 두령에게 대강 이야기
한 뒤 꺽정이를 보고 “이두령 형님이 형님께 여쭈라구 하는 말이 있습디다. 우
리 중 초종 치르는 절차를 잘 알 사람이 서종사니 서종사를 곧 보내주셨으면 좋
겠구, 또 박두령이 의루 맺은 사위래두 남과는 다르니 장전에 오두룩 기별해 주
셨으면 좋겠구, 그러구 법석을 차릴래두 광복서는 중을 청할 수 없으니 여기서
청해 보내주셨으면 좋겠다구 합디다.” 하고 말하니 꺽정이는 고개를 끄덕끄덕
하였다. “법석 벌일 중을 속히 보내주셔야 할걸요.”
서림이의 말을 듣고 꺽정이가 황천왕동이더러 “네가 내일 쌍봉사에 가서 주
장중을 찾아보구 내 말루 법석시킬 중들을 곧 보내달라구 해라.” 하고 말을 일
렀다. “저는 내일 식전에 광복으루 가야겠는걸요.” “왜?” “수의가 여기 있
다구 가지구 오라구 합디다.” “수의는 다른 아이 해보내지 네가 꼭 가지구 갈
거 무어 있니?” “대소렴이 급하다구 오늘루 다녀오라구까지 말하는데요.” “
오두령 내외 미리 짜둔 관이 여기 있을 텐데 관두 네가 지구 갈테냐?” “그걸
누가 지구 가요? 광복서두 그런 말들을 하기에 내가 못한다구 말했세요. 우선
쓸 관은 거기서 박판으루라두 째이구 미리 짜둔 관은 여기 와서 쓴다구 합디다.
” “여기 와서 쓰다니?” “죽은 이가 전번 앓을 때 죽거든 청석골 갖다 묻어
달라구 미리 유언을 했다나요. 그래서 장사는 여기 와서 지내기루 한답디다.”
“오두령이 자기 신후지지 정하기 겸해서 여기 갖다 묻으려구 하는 게지. 굳이
그렇게 하구 싶다면 막을 건 없지만 죽어서 땅속에 묻히는 것만두 상팔잔 줄을
모르는 소리다.”
꺽정이의 서글픈 말끝에 다른 두령들은 모두 회심하여 하는데 곽오주 혼자 데
시근도 않게 여기며 “사람이 한번 죽으면 고만이지 죽은 뒷일을 누가 아우. 달
구질을 하거나 먼가래를 치거나 까막까치 밥이 되거나 죽은 사람이 알배때기가
무어요?” 하고 무뚝뚝한 말소리로 지껄이었다. 꺽정이가 서글프게 웃으면서 “
네 말이 옳다.” 하고 말하니 “형님이 내 말두 옳게 들으실 때가 있네.” 하고
곽오주는 어른에게 칭찬받은 아이들처럼 좋아하였다.
꺽정이가 서울길을 중지하고 청석골 앉아서 광복산 초상 뒷일을 보아주었다.
천신산 쌍봉사 중들을 청해다가 서림이, 배돌석이 두 사람더러 데리고 가라고
하고, 황천왕동이를 수의 갖다 두고 다시 오라고 하여 평안도 박유복이에게 기
별하러 보내고, 김산이를 주장시켜서 장사 때 소입될 물품을 미비가 없도록 미
리 준비하게 하는데, 장삿날 하루는 두령, 두목, 졸개를 죄다 흰옷 입히고 두건
쓰인다고 의차 무명과 두건감 북포를 많이 구해들이게 하였다. 모든 준비에 광
복산 기별을 들어야 할 일도 있고 또 청석골서 기별해 줄 일도 있어서 걸음 잘
걷는 황천왕동이를 두 쪽에 내어도 부족할 판인데, 평안도를 넉넉잡고 닷새에
다녀온다고 말하고 간 사람이 닷새 곱절 열흘이 다 되도록 오지 아니하여 혹시
중로에서 무슨 일이 생겼는지 몰라서 꺽정이가 궁금한 마음을 참지 못하여 두목
중 영리한 사람 하나를 다시 평안도에 보내려고 하던 차에 열흘 되던 날 저녁때
황천왕동이와 박유복이가 동행하여 들어왔다.
황천왕동이가 박유복이 가서 있는 양덕 고수덕을 이틀에 찾아가고 하루를 묵
고 박유복이와 같이 떠나서 이레 만에 들어온 까닭에 내왕 열흘이 걸린 것이었
다. 꺽정이가 황천왕동이더러 먼저 오지 않았다고 꾸지람하는데, 박유복이가 칠
백여 리 먼길을 혼자 오기 심심해서 먼저 오려고 하는 것을 억지로 붙들어서 동
행하였다고 황천왕동이의 발을 빼주어서 꺽정이의 꾸지람이 길지 아니하였다.
박유복이가 평안도에 가서 맹산 두무산에는 삼십여 간 큰 집 한 채와 삼간 초
막 열 채를 지어놓았고, 고수덕에는 큰 집을 방금 짓는 중인데 떠나오던 전날
상량하였고, 성천은 회산에 터만 보아두었었다. 박유복이의 역사시킨 이야기를
꺽정이가 다 들은 뒤에 “네가 압ㅅ다구 일들을 흥뚱거리지나 아니할까?” 하고
물으니 “다들 제 일루 알구 하니까 그럴 리 없습니다.”
박유복이가 대답하였다. “회산에 마저 집을 짓자면 앞으루두 달포 넘어 걸리
겠구나.” “한 달 걸리다뿐입니까? 그런데 부비 쓰라구 주신 무명으루 고수덕
역사를 겨우 마치게 되구 회산 부비는 통으루 턱이 없습니다. 그 동안 부비 쓴
하기를 한벌 닦아다가 보시게 할 것인데 총총히 떠나오느라구 못 해가지구 왔습
니다.” “부비야 드는 대루 쓰는 게지. 회산 역사에 쓸 부비가 없으면 보내주든
지 가지구 가든지 네 생각대루 해라, 그러구 네가 가지구 쓰는데 하기는 봐 무
어하겠니? 이 뒤에라두 일부러 하기 닦아올 것 없다.” “형님댁 일두 아니구
도중 일을 그렇게 해서 쓰겠습니까?” “고지식한 사람이다.” “고지식하다시
니 말씀이지만 저의 이종매가 양덕읍 근처에서 사는데 사는 꼴이 망측합디다.
그래서 상목 몇 필 손쓰구 싶은 걸 못 썼습니다.” “네 생각엔 그게 잘한 일인
상싶으냐?” “역사를 다하구 남는 것이면 집어주구 와서 말씀해두 좋겠지만 역
사에 쓸 것두 부족한데 집어줄 수가 있습니까.” “네가 몇 필 손썼으면 그 동
안 역사를 중지하게 되었을까. 그만 변통성이 없으니까 고지식한 사람이란 말이
다. 이 담에 갈 때 한몫 따루 가지구 가서 너의 이종매를 발빈시켜 주어라.” “
집을 지어서 비어두면 못쓸 텐데 그걸 어떻게 하실랍니까? 두무산 집두 지금 비
어 있습니다. 고수덕 집이 다 된 뒤에 저의 이종매를 빌려주어두 좋겠습니까?”
“그건 안된다. 각처 집 있는 데는 아주 졸개들을 십여 명씩 보내둘 테다.” “
그것들 먹구 입을 건 여기서 일일이 대주시렵니까?” “저이들더러 벌이해 먹으
라지, 그걸 누가 귀찮게 대준단 말이냐? 벌이를 할 수 없다면 따비밭이라두 일
구라지.” “두무산에서 일껀 지어놓은 새집을 텅 비어놓구 나오는데 맘에 공연
히 애석한 생각이 나든구먼요. 그래서 고수덕 집이 다 되거든 이종매라두 들여
볼까 생각했었습니다.”
박유복이는 꺽정이와 이런 이야기를 하다가 꺽정이 사람에서 자고 디튿날 또
다시 황천왕동이와 동행하여 광복산으로 갔다.
오가 마누라의 초상은 광복산에서 입관하고 성복하고 법석하고 그곳에 초빈하
여 두었다가 장삿날 며칠 전기하여 청석골로 운구하여 왔다. 서림이가 날을 볼
줄 알아서 장택도 내고 또 산을 볼 줄 안다고 장지도 잡았다. 초종부터 양례까
지 모든 절차를 서림이가 분별하는데, 아는 것도 있거니와 모르는 것도 알거냥
하여 성복날을 택일하는 것이 좋다고 사일을 늘려서 육일에 시키고 칠월 보름께
초상이 나고 팔월 초승에 장사를 지내서 그 동안이 한 이십 일 될까말까 한데,
유월이장이라니 달만 넘으면 장사지내는 것이 예법이라고 말하고, 명정은 오두
령 부인 원주원씨지구라고 쓰고 관상은 명정같이 갖추쓰지 않아도 좋다고 그저
원씨지구라고만 썼다. 이런 일이 한두가지 아니었으나, 다른 두령들은 모두 서종
사가 어련히 잘 알아하랴 믿고 의심하지 아니하였다.
장삿날 하관시가 사시라 한낮이 되기 전에 평토하고 제 지내고 봉분까지라도
만들 것인데, 오가로 하여 일이 얼마가 늦어졌다. 매사에 뒤스럭스럽고 혼감스러
운 오가의 버릇이 슬픔에도 나타나서 하관하고 횡대를 덮으려고 할 때, 광중에
뛰어 들어가서 관 위에 드러누우며 자기를 함께 묻어 달라고 부르짖었다. 일하
는 졸개들이 뫼셔 내려다 못하여 두령들이 끌어내는데 발버둥이를 쳐서 횡대턱
을 많이 헐었다. 간신히 끌어내 놓은 오가가 횡대를 미처 다 덮기 전에 또 뛰어
들어가서 횡대 위에 누워서 디굴디굴 굴었다. 꺽정이가 오가의 하는 꼴을 보려
고 일하는 졸개들더거 “오두령 소원대루 고려장을 지내 드려라.” 말하고 졸개
들이 주저하는 것을 “왜 빨리 끌어묻지 못하느나!” 하고 호령하였다. 어느 영
이라고 거역하랴. 가래질이 시작되었다. 삼물 반죽한 것이 아랫도리에 떨어질 때
는 오가가 눈을 뜨고 번듯이 누워 있더니 윗도리에 떨어지자 눈을 감고 모로 누
웠다. 박유복이가 차마 보다 못하여 광중에 들어가서 “망령부리지 말구 나가십
시다.” 하고 손을 잡아 일으키니 오가는 순순히 일어나서 박유복이 끄는 대로
못 이기는 체하고 끌려나왔다. 달구질꾼들이 구슬픈 노래를 먹이고 받을 때 벌
써 한낮이 지났었다.
꺽정이는 여러 두령들보다 먼저 산에서 내려와서 사랑에 누워있는 중에 이봉
학이와 서림이가 서로 웃고 지껄이며 사랑으로 들어왔다. 꺽정이가 일어 앉으며
“무어 우스운 일이 있어?” 하고 물으니 “오두령 이야기를 하구 웃었습니다.
” 이봉학이가 대답하였다. “오두령이 또 무슨 해거를 부렸나?” “아니오. 그
저 혼나간 사람처럼 멀거니 앉았습디다.” “그럼 무에 우스워?” “서종사가
실없은 말루 사람을 웃깁니다.” “무슨 실없은 말? 나두 좀 듣구 웃어봅시다.”
꺽정이가 서림이를 보고 말하였다. “남편 죽는 데 따라 죽는 여편네를 열녀
라구 하니 안해 죽는데 따라 죽는 사내는 열남이 아니겠습니까. 오두령이 박두
령의 헤살루 죽지는 못했어두 그만하면 열남으루 치구 정문을 세워 줘두 좋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오두령 집에 정문 세울 공론을 했습니다.”
서림이의 실없은 말을 이봉학이는 되풀이로 듣고도 허리를 잡도록 우스운데
꺽정이는 겨우 빙그레할 뿐이었다. “형님, 열남 정문이란 말이 우습지 않습니
까?” “그 열남이 며칠 가랴. 소첩이나 하나 얻어주면 허겁지겁할 테지.” “오
두령 나이 올에 쉰셋이라두 젊은 사람같이 피둥피둥하니까 앞으루 사람이 있어
야 할걸요.” “십여 년 아래 되는 나버더두 외려 젊어 보이니까.” “젊어 보일
는진 몰라두 이마의 주름살은 형님보다 되려 적을 겝니다.” “내 이마의 주름
살은 노래의 선생님버더 더했으니까 말할것두 없지.” “형님은 아이 적부터 상
을 찌푸리기 잘하셔서 주름살이 일찍 굳었세요.” “그게 백정의 아들인 표적이
다.” “유복이가 두어 달 객지 고생에 이마의 주름살이 갑지기 많아졌습디다.”
이봉학이가 말을 달리 돌리자, 서림이가 곧 그 말끝을 달아서 “박두령의 고
생을 이두령께서 좀 나눠 하시면 어떨까요?” 하고 꺽정이보고 물었다. “이번
에 평안도를 바꿔 보내란 말이오?” “그랬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당치 않
은 소리요. 일을 시키던 사람이 마저 시켜야지.” “그러면 이두령께서 황주까지
만 같이 가셔두 좋겠습니다.” “좋은 일이 대체 무어요?” “대접받구 공노자
쓰구 여사에 쓸 부비까지두 뜯어가지구 갈 도리가 있습니다.”하고 서림이가 그
도리를 자세히 말하니 꺽정이는 고개를 연해 끄덕거리었다. “유복이 혼자 가선
안될까?”“박두령은 너무 변사가 없어서 일을 잡기가 쉽습니다.” “내가 유복
이를 데리구 가보구 싶소.” “대장께서 가셔두 좋지만 윤지숙이를 보시구 화를
내시면 낭패 아닙니까.” “윤지숙이의 술을 얻어먹으면 화가 있더래두 풀리겠
소.” “그럼 한번 행차해 보시지요.” 이때 마침 다른 두령들이 산에서 내려오
는데 박유복이는 오가를 데리고 가고 오지 아니 하여 꺽정이가 박유복이를 불러
다가 언제 떠날라느냐 물어서 속히 떠나겠다는 말을 들은 뒤 “속히라구 할 것
없이 내일 곧 떠나두룩 하구 그러구 서종사하구 의논해서 행장을 차리게 해라.
”하고 말을 일렀다.
황해감사 전전 등내는 평산 사람 신희복이니 선산과 전장이 평산 사매천에 있
어서 청석골패에게 보복을 받기 쉬운 까닭에, 청석골패가 관하 각군에 횡행하여
도 어름어름하여 덮어두고 지내다가 마침내 대계를 만나서 갈려갔고, 전 등내는
성명이 이탁이니 조정에서 별택하여 보낸 인물인만큼 천품이 관후하되 무능하지
않고 처사가 원만하나 풍력이 있어서 꺽정이도 다소간 기탄하는 마음이 없지 아
니하여 진즉 갈려지기를 바랬는데, 십육 삭 만에 겨우 갈리고 그 대에 유지선이
감사로 난 지 이때 이삭 미만인데 사람은 딱쇠요, 속은 먹통이라고 선성이 나서
관하 이십사관 수령 중에 벌써부터 코아래 진상할 물품을 구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평산부사 장효범이 감영에 가서 연명하고 온 뒤 한번 조용히 이방을 불러가지
고 “이애 이번 관찰사 사또는 무엇이든지 인정으로 드리는 걸 좋아하신다는데
누가 보든지 선뜻 눈에 뜨일 만한 물건이 무엇이 좋겠느냐?”하고 의논성 있게
물었다. “글쎄올시다. 골의 소산이 변변한 게 있어야 합지요.” “그렇기에 너
더러 좀 생각해 보란 말이다.” “보산 청숫돌은 황해도 내에서 나는 데가 여
기 외엔 우봉 뿐이올시다. 귀한 물건입지요만, 그것만 가지구는 안 되겠습지요.
” “그럼 그까지 숫돌이 무어 눈에 뜨일 게 있느냐.” 이방이 고개를 기울이고
한참 생각하다가 “일등 사냥꾼들을 뽑아가지구 호랭이 사냥을 시켜서 호피를
보내면 어떠하오리까?”하고 의견을 내서 부사에게 취품하니 부사는 “그거 좋
겠다.”하고 말한 뒤 “그러면 사냥을 네가 맡아서 시키두룩 해라!”하고 분부하
였다.
이삼 일 지난 뒤 일없는 저녁때 부사가 이방을 불러서 사냥 시키는 이야기를
듣는 중에, 관노 하나가 삼문 밖에서 들어와서 통인방으로 가는 모양이더니 얼
마 만에 수통인이 동헌방에 나와서 “감사 사또의 종제 됩시는 유도사 나리와
감사 사또의 친척 됩시는 박참봉 나리가 평양 구경을 가시는 길에 오늘 읍에 와
서 숙소를 하시는데 밤에 잠깐 들어와 뵈옵겠다구 하인을 보내셨답니다.”하고
부사께 말씀을 아뢰었다. “감사 사또의 사촌과 친척이 읍에 왔단 말이냐?” “
녜.” 부사가 이방을 보고 “네가 친히 가서 전갈을 해라. 원로에 안녕히는 오셨
습니까구, 석후에 내가 나가 뵈입겠습니다구.”하고 말을 일렀다.
이방이 하인을 따라나와서 사처방 앞에 들어서자마자 깜짝 놀라고, 한참 만에
문안을 드리고 부사의 전갈을 옮기었다. 방안의 양반 한 분이 하인을 불러서 가
까이 들어와 섰는 그 집 사람들을 밖으로 내물리고 이방과 한동안 수작하였다.
이방이 다시 관가에 들어와서 부사께 답전갈을 여쭌 뒤 “이번 손님을 잘 대접
해 보내시면 보람이 호피만 못지않을 둣 하외다.”하고 말하니 부사는 고개를
끄덕이었다. “저녁 전에 다담상 하나를 내보내시는 게 좋을 것 같소이다.” “
빨리 관청색을 불러서 지금 다담 한 상을 차려 내보내구 이따나 나가 있을 때
주안상 하나를 잘 차려 내보내라구 일러라.” 저녁 전에 다담상을 내보낼 때 부
사가 통인에게 전갈하여 보내고 저녁 후에 부사가 통인 두엇만 데리고 걸어서
사처를 찾아나왔다.
부사가 통인 하나를 먼저 들여보내서 연통하여 사처방에 파탈하고 앉았던 양
반들이 분분히 의관을 정제하고 부사를 나와 맞았다. 선후를 서로 사양하다가
유도사는 부사의 앞을 서고 박참봉은 부사의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와서 각각
좌정한 뒤 초면인사들을 하였다. 감사의 종제 유일선은 나이 사십 세요, 감사의
척제 박대중은 나이 삼십구 세라 부사의 연배들이었다. 인사 수작을 마치고 부
사가 방안을 둘러보며 “방이 대단 비좁구려.”하고 말하니 “그래두 이 집에선
이 방이 제일 크다는갑디다.” 유도사가 대답하였다. “어째 이런 집에 사처를
정하셨소?” “사처를 빌려준다니까 아무 데나 들었지요.” “내게루들 들어가
서 주무시는 게 좋겠소.” “하룻밤 자구 갈 텐데 번폐스럽게 옮길 것 없소.”
“주무실 때 다시 나오시더래두 내게 들어가서 이야기를 하십시다.” 부사가 유
도사와 박참봉을 끌고 도로 관가로 들어왔다. 동헌방 아랫목에 널찍널찍 자리를
잡고 앉은 뒤에 부사가 유도사를 보고 “평양 구경을 가시는 길이라지요?”하고
물었다. “녜, 그렇소.” “해주소 평양을 가자면 재령이나 봉산으루 나가는 게
직로인데 어째 이리 작로들이 되셨소?” “해주서 가는 길이 아니구 서울서 가
는 길이오.” “어째 해주를 안 가시구 평양을 가신단 말씀이오?” “종형 도임
할 때 따라가서 해주는 구경했소.” “평양을 가실 테면 해주서 바루 가시지 왜
서울을 올라갔다 다시 가시우? 해주 평양간은 불과 삼백 리 길인데 해주서 서울
삼백팔십 리, 서울서 평양 오백오십 리, 근 천리길을 둘러가신단 말이오? 길 다
니기를 매우 좋아하시는 모양이구려.” “해주 갔을 때는 평양 구경이 염두에두
없었소. 서울을 올라간 뒤에 평안감사의 놀러 내려오란 서간을 받아보구 불현듯
이 구경갈 생각이 나서 저 사람을 끌구 나선 길이오. 저 사람이 해주를 가지로
라구 하니까 평양 구경하구 해주루 갈까 생각하우.” “평양감사와 친하시우?”
“녜, 우리 동네 어른이오.” 부사와 유도사 사이에 이런 수작이 있은 뒤 주인
손 세 사람이 여러 가지 세상 이야기들을 하였는데, 세 사람이라야 박참봉은 간
간이 한두 마디씩 말참례를 할 뿐이었다.
왕세자 관례가 가까웠는데 세자빈 간택은 말썽없이 되었는지 서원부원군이 자
기 딸의 시누이 황씨가 색시를 억지로 간택에 뽑히게 하느라고 색시의 사주를
협작으로 고쳤다는 소문이 낭자하나 정말 그런 짓을 하였을까, 하여간 서원부원
군 까닭으로 간택에 말썽이 생긴 모양인데 예조 거행이 태만하다고 예조의 판서
이하 여러 관원이 모두 대계를 만났으니 일이 우습다고 서울 소문도 이야기를
하고, 금년 한재가 심하여 팔도가 다 흉년인 모양이나 양서는 연년 흉년에 백성
이 살 수 없을 지경이라고 시골 연사도 이야기를 하고, 또 칠월 이후로 꽁지 달
린 별이 자주 보이던 중에 사오 일 전 팔월 초하룻날 밤 사경 오경에 별똥 누는
것이 사방에서 비오듯 하였으니 이것이 필시 좋지 못할 징조라고 재변도 이야기
를 하였다. 어느 사이에 밤이 들었다. 부사가 통인을 불러서 주안상을 들이라고
분부하였다. 한동안 지난 뒤에 떡벌어지게 차린 주안상을 통인들이 맞들어 들여
왔다. 처음에는 통인들이 술잔을 부었으나 송도 순배로 잔을 연해 돌려서 여남
은 잔 돌려먹은 뒤부터는 술잔을 친히들 부어서 서로 주고받고 하였다. 부사가
술이 엔간히 취하였을 때 유도사와 박참봉을 돌아보며 “여보게, 우리 서루 허
교들 하세.”하고 말하니 사람이 진득해 보이는 박참봉은 되려 선뜻 “좋은 말
일세.”하고 대답하는데 호걸 남자로 생긴 유도사는 허허 웃기만 하고 대답이
없었다. “노형은 나하구 허교하기가 싫소?” 부사의 뇌까리는 말도 유도사는
대척 않고 또 허허 웃기만 하여 부사가 성이 나서 “말이 말 같지 않소? 어째
웃소?”하고 시비를 차리었다. 유도사가 천연덕스럽게 “호반 친구가 좀 창피하
지만 터줌세.”하고 말하여 부사는 더욱 성이 나서 “창피라니 봉변이로군.” 볼
멘소리를 하며 술자리에서 뒤로 물러나 앉았다. “우리더러 술을 고만 먹으란
말인가? 주인 된 도리에 그럴 수가 있나. 이 사람 이리 들어앉게.” “홍당지쪽
들이 호반을 업신여기드니 남행뿌스러기까지 차차루 못된 본을 떠가거든. 아니
꼬운 일두 다 많지.” “자네 속시원하게 말할까? 나두 투필한 사람일세.”“무
어야? 그럼 호반 친구란 웬 소린가?” “자네 성내는 게 우스워서 그런 소리를
해봤지.” “그러면 내가 벗하자는 데 왜 웃었나?” “우리들이 황해감사의 결
찌가 아니라면 평산부사가 초면에 벗을 하자겠나? 그래서 웃었네.” “에 이 사
람, 알 만한 처지면 일면여구지 초면 구면이 왜 있을까.” 성이 났던 부사가 그
동안에 석연하게 풀리어서 “자, 술이나 더 먹세.”하고 다시 술자리로 들어앉았
다.
술이 식어서 다시 데워 오고 또 술이 없어져서 새로 들여왔다. 주인과 손이
권커니잣거니 술들을 먹는 중에 밤이 깊어져서 시중드는 통인들 눈에 잠이 가득
하였다. 통인들이 손님을 민주고주만 여길 때에 술상이 겨우 끝이 났다. 부사가
유도사더러 “여기 볼 건 별루 없지만 이삼 일 놀다 가게.”하고 말하니 박참봉
이 먼저 “아니야, 내일 가야 해.” 대답하고 유도사는 그 다음에 “앞으루 갈
길이 머니까.”하고 박참봉 대답에 주를 달았다. “그래 내일 꼭 떠날 텐가?”
“떠나겠네.” “그럼 아침들이나 나하구 같이 먹구 느직해서 떠나게.” 유도사
가 그럴듯이 하다가 “여기서 늦게 떠나면 내일 숙소참이 없을걸요.”하는 박참
봉의 말을 듣고 “아침까지 같이 먹으나마나 마찬가지니 그대루 일찍 떠나겠네.
”하고 부사에게 대답하였다. “자네들이 일찍 떠나면 나는 식전 조사 까닭에
나가 보기두 어려우니 그건 너무 섭섭하지 않은가?” “이담에 서울서 만나세그
려.” “앞으루 만날 날이야 많겠지만 이대루 작별하기가 섭섭하단 말일세. 평양
서 어느 때쯤 해주루 오겠나? 해주 올 때를 알면 하인이라두 하나 보냄세.” “
평양 가서 며칠 묵게 될지 그건 가봐야 알겠나.” “기생 놀이채 줄 건 자네가
뒤대려나?” “어렵지 않은 일일세. 그 대신 해주 와서 종씨 영감께 공송이나
잘 해주게.” “평산 술값을 해주 가서 낼 테니 염려 말게.” 부사와 유도사가
마주 보고 웃는데 박참봉도 옆에서 따라 웃었다.
유도사와 박참봉이 사처에 나와 자고 이튿날 식전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통
인 하나가 나와서 밤 사이 안녕히들 주무셨느냐 부사의 전갈로 묻고 가고, 소세
하고 조반들 먹을 때 관노 하나가 상목 열 필 묶은 것을 지고 나오는데 이방이
따라나와서 약소하나마 객지 비용에 보태 쓰라고 부사의 전갈을 옮긴 뒤 따로
은근히 원로에 조심들 하라고 당부하고 가고, 떠날 임시에 장교 둘이 부사의 몸
을 받아가지고 전송하러 나와서 멀리 보산역말까지 배행하였다.
보산역말에 사는 사냥꾼 들이 호랑이를 잡으려고 성악산 기슭에 함정을 파놓
았었는데, 이날 식전에 함정을 가서 본 뒤 호랑이 발자국을 찾으려고 산속으로
한동안 돌아다니다가 집으로들 돌아오는 길에 양반의 행차를 만나서 길을 비키
었다. 행차의 기구는 장할 것이 없어서 안장마 하나, 반부담 하나, 마부 둘, 하인
둘 뿐이나 마부와 하인들의 길을 휩쓰는 것과 말탄 양반들의 거드럭 거리는 품
이 무슨 별성 행차만 못지아니하였다. 사냥꾼들이 그 행차를 지내놓고 오면서
“나는 꼭 속았네.” “나두 처음엔 서울 양반들로 알았어.” “안장말 타구 앞
에 가는 게 대장이지?” “대장이 친히 나갈 젠 무슨 큰일 하러 가는가베.” 이
런 말들을 서로 지껄이었다. 사냥꾼들이 보산역말을 다 와서 주막거리를 지나가
다가 안면 있는 장교들이 주막 마루에 앉았는 것을 보고 한 사람이 먼저 인사성
으로 “어째들 나오셨소?”하고 묻자, 다른 한 사람이 곧 그 뒤를 대어서 장난
조로 “누구를 잡으러 나왔소?”하고 물었다. 장교 한 사람이 눈을 흘겨 뜨고
바라보며 “자네가 걸렸다네.”하고 말하는데, 말하는 것이 조금도 거짓 같지 아
니하여 그 사냥꾼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나타났다. “내가 무슨 죄가 있어서
걸려요?” “자네 어떤 양반님네게 발악한 일이 있나?” “그런 일은 꿈에두 없
소.” “그래두 어떤 양반이 자네를 치죄해 달라구 원님께 청한 모양이든데 ”
“그 눈깔 빠질 놈의 양반이 대체 누구요?”“그건 몰라.”“읍내 싸전 고샅 신
생원댁 아니오?” 그 사냥꾼이 한참 생각해 보다가 물었다. “신생원께 무슨 작
죄를 했나?” “신생원이 이월 초생에 장끼 한 마리 사먹은 값을 이때까지 안주
기에 요전에 가서 말 몇 마디 한 일은 있소.” “필시 불공설화를 한 겔세그려.
” “아주 떼먹을 테냐구 말한 것밖에 불공스럽게 한 말이 없소.” “양반들 앞
에 기침 한번 크게 한 것두 죄루 몰면 죄가 되니까 장끼 값 조른 것이 죄가 되
어 잡혔는지두 모르겠네.” “그만 일에 잡아갈 것 무엇 있소? 인정으루 모면을
좀 시켜 주구려.” “자네 대신 우리더러 넙치가 되란 말인가? 그건 안 되겠네.
” “공연히 그러지 마시우.” “공연히라니 자네가 예사루 걸렸으면 우리가 둘
씩 나오겠나 생각해 보게.” “술 한턱 낼 테니 인정 좀 쓰시우.” “글쎄, 안
된다니까 그래.” “집에 산저담이 두 보 있는데 신발값으루 한 보씩 드리리다.
” 이때껏 손으로 입을 막고 앉았던 다른 장교가 입에서 손을 떼고 그 사냥꾼더
러 “나는 자네가 꽤 약은 줄 알았더니 얼뜨기가 짝이 없네그려.”하고 웃음 반
말 반으로 말하는데, 먼저 장교가 동무 장교 어깨를 툭 치며 “입아귀를 닳려서
간신히 얻어놓은 산저담을 자네가 터쳐버리네그려.” 말하고 둘이 함께 껄껄 웃
었다. 잡혀 갈까 겁이 났던 사냥꾼이 장교에게 놀림받은 줄을 깨닫고 “예 여보,
사람을 그렇게 속인단 말이오?” 하고 책망하니 “인사 잘못하면 더러 속아 싸
지.” 그 장교가 대꾸하였다. “내가 무얼 인살 잘못했소?” “무얼 잘못했느냐
가르쳐 줄까? 우리를 보구 안녕히 나오셨습니까 인사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무슨
일루 나오셨습니까 인사할 것이지, 누구를 잡으러 나왔소가 무언가? 우리는 사
람만 잡으러 다니는 사람인가?” 동무 일을 염려하여 가지 않고 섰던 다른 사냥
꾼이 장교들 앉은 마루 끝에 와서 걸터앉으며 “참말 무슨 일루들 나오셨소?”
하고 물으니 “서울 손님 전송하러 왔네.” 사람 순직란 장교가 대답하였다. “
서울 손님은 어디 갔소?” “지금 자네네들 오는 길에 말타구 가는 양반들을 만
났겠지. 그 손님들일세.” “그 손님들이 누구요?” “새 감사의 지친들이라네.
” 놀림받은 사냥꾼이 마루 앞에 와 서 있다가 이 장교의 말을 듣고 하하 웃고
서 “잘 속았소. 잘 속았어. 남을 속이드니 잘코사니요.” 놀리던 장교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빈정거리었다. “무어야 속다니?” “그게 서울 손님 아닙디다.” “
서울 손님이 아니라니 무슨 소린가?” “청석골 대장입디다.” “꺽정이란 말인
가?” “두번 말할 거 있소.” “거짓뿌렁 아니지?” “나는 누구처럼 거짓뿌렁
할 줄 모루.” “자네두 적당과 한통속일 겔세그려.” “누굴 죽일라구 그런 말
을 하시우? 나하구 저사람하구 금교역말 아는 친구를 찾아갔을 때 두석산 속에
사냥을 나갔다가 적굴에 잡혀가서 그날 사냥한 토끼 두 마리, 노루 한 마리 다
뺏기구 목숨만 살아나온 일이 있소.” 장교들이 사냥꾼의 말을 듣고 보산서 즉
시 읍으로 들어오고 읍에 들어오는 길로 바로 관가에 들어가서 부사께 이 사연
을 아뢰었다. 부사는 어이가 없어서 한참 동안 말을 못하다가 급하게 전인을 띄
워서 서흥부사에게 기별해 줄까 생각하고 이방을 불러서 의논하니 이방의 말이
사냥꾼의 종없는 말을 준신할 수도 없거니와, 설혹 준신할 만하더
라도 도적 괴수가 평산 왔을 때 잡지 못하고 서흥이나 봉산에 가서 잡히게 되면
공은 남에게 밀어주고 우세는 혼자 차지하시게 되는 셈이니 숫제 서흥, 봉산, 황
주 각군에서는 어떻게들 하나 두고 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하여 부사가 이
방의 말을 옳게 듣고 감사의 사촌이 도적의 괴수란 말을 쓸어 덮어두고 말았다.
유도사의 일행은 평산서 떠나던 날 서흥 와서 숙소하였다. 사처 잡고 들어앉은
뒤, 평산서와 같이 하인 하나를 관가에 들여보내서 석후에 부사를 찾아본다고
선성을 놓았더니 부사가 그 하인을 불러들여서 여러 가지 말을 물어본 뒤 “내
가 감기 기운이 있어서 나가 뵈입든 못하나 석후에 들어들 오시면 만나 뵈입겠
다구 가서 말씀해라.” 일러보내고 따로 통인 하나도 내보내지 않는 것이 벌써
평산 같은 후대는 바라기가 어려웠다. 하인이 관가에 다녀나와서 부사가 여러
가지 말을 묻더라고 말할 때, 무슨 말을 묻더냐고 유도사가 물어보았다. “택호
가 무엇이냐, 나리들 연세가 얼마시냐, 어디를 가시느냐, 감영에서 오시느냐, 서
울서 오시느냐, 서울댁 동명이 무었이냐 별 걸 다 묻습디다.” “그래 다 대답했
느냐?” “묻는 대루 다 대답했습지요. 서울댁 동명을 물을 때 남소문 안이라구
대답했솝드니 부사가 남소문 안을 잘 모르는지 남소문 안이야 하구 고개를 비틀
어 꽂습디다.” “밖에 나가 있거라.” 하인을 내보낸 뒤 유도사는 박참봉을 보
고 “하인들이 제멋대루 수습 없이 지껄이지 못하게 조용히 한번 일러두게.”
하고 말하였다. 저녁밥들 먹고 한동안 지난 뒤 유도사와 박참봉이 부사를 만나
러 관가로 들어왔다. 부사가 망건은 안 쓰고 탕건 위에 갓만 쓰고 웃옷까지 입
고도 처네를 두르고 앉아 있다가 손들이 방안에 들어서는 것을 보고 비로소 통
인들의 부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때 서흥부사 김연은 환진갑 다 지난 노
인이라 술이 취한 것 같은 불그레한 얼굴에 은실을 늘인 것 같은 흰 수염이 서
로 비치어서 풍신이 좋았다. 무과 출신의 일개 수령이로되 풍신은 훌륭한 노재
상과 같았다. 박참봉은 그 풍신 대접으로라도 절 한번 하고 싶었으나, 유도사 하
는 대로 따라 그대로 앉아서 입인사를 하였다. “노형 연기가 올해 몇이시오?”
“내 나인 몇 살 안됩니다. 갓 마흔입니다.” “저 노형은?” “서른아홉입니다.
” “나는 올에 예순일굽이오.” 부사가 하인에게 물어본 나이들을 다시 묻고
또 자기의 나이를 분명히 말하는 속에 나이 자세하는 티가 보이었다. 연치가 이
십세 이상 틀리니 연존장인데 인사할 때 절 않고 입인사하고 자칭을 시생이라
하지 않고 나라고 하는 것이 감사의 친척이라고 방자히 교부리는 것이거나, 그
렇지 않으면 자기를 호반이라고 나삐 대접하는 것이거니 주인은 손들을 미타하
게 여기고 낫살 먹었다고 바로 거드름을 부리는 것이 어쭙지 않고 같지 않아서
손들은 주인을 괘씸하게 생각하여 수작이 잘 어울리지 않는 까닭에 주인 손 세
사람이 한참씩 덤덤히 앉아 있었다.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같이 우두머니 앉았는
것이 싱겁기가 짝이 없어서 유도사가 사처로 나가겠다고 말을 내니 부사는 주인
된 체면에 안되었던지 “술들이나 한잔씩 자시구 나가시지. 나는 감기루 먹지
못하지만.” 대작 않고 술을 먹이려고 하였다. 부사가 옆에 섰는 통인더러 약주
한 상 차려 드리게 하라고 이르는 것을 유도사가 고만두라고 말하고 박참봉과
함께 일어났다. 이튿날 식전에도 부사가 전갈 한번 아니하였다. 유도사가 하인
을 보내서 이방을 불러다가 “너의 원님께 가서 상목 십여 필만 우리를 꾸어주
시면 우리가 서울 가서 부쳐 드리거나 해주 감영에서 보내 드리두룩 하마구 말
씀 좀 해라. 용처는 말씀 안해두 좋겠지만 평양 가서 쓸 것이다.” 토색을 하였
더니 이방이 관가에 들어가서 한동안 늘어지게 있다가 서총대 무명 다섯 필을
가지고 나와서 “상목 십여 필은 갑자기 변통할 수가 없어 못 보내 드리니 미안
합니다구 이것이 약소하나마 노비에 보태 씁시사구.” 부사의 전갈을 하자마자,
곧 유도사는 큰소리로 하인들을 불러서 이방을 맨땅에 잡아 꿇리고 “우리가 너
의 골에 비럭질을 왔더래두 대접을 이렇게는 못할 게다. 너는 죄가 없지만 매를
좀 맞아라. 그러구 너의 원님께 가서 죄없이 매맞았다구 하소연해라.” 하고 꾸
중한 뒤 하인들을 호령하여 이방은 멍석말이 매로 매를 십여 개 치고 서총대 무
명은 이방 보는 데서 짓밟아 버리게 하였다. 유도사가 이방을 사이에 넣고 부
사를 욕보인 뒤 바로 서흥서 떠나서 봉산으로 향하였다. 칠십 리 길이 그다지
멀지도 않거니와 늦게 떠난 가량 하고 길을 조여온 까닭에 봉산읍에 들어올 때
해가 아직 높이 있었다. 장터 길가집 하나를 골라서 사처를 정하고 이때까지 해
온 전례대로 하인을 관가에 들여보내서 저녁 후에 군수를 찾겠다고 선성
을 놓게 하였더니, 하인이 나올 때 아전 하나가 따라나와서 문안하고 저의 말로
안전께서 지금 아무 일도 없으시니 곧 들어가서 만나시는 게 좋겠다고 하여 유
도사와 박참봉이 그 아전을 앞세우고 저녁 전에 관가로 들어왔다. 군수 윤지숙
이 얼굴은 깨끗하게 생겼으나 왼쪽 광대뼈에 고약을 붙여서 육냥이 틀려 보이었
다. 초면의 인사 수작들이 끝난 뒤에 군수가 유도사를 보고 해주서 오느냐, 봉산
을 처음 오느냐, 서울집이 어느 동네냐, 서울 누구를 아느냐 모르느냐, 이런 말
을 대답하기 성가시도록 가지가지 물어서 유도사는 대강대강 대답하고 군수의
묻는 말이 그친 틈에 “얼굴에 고약을 붙이셨으니 면종이 나셨소?” 하고 물으
니 군수가 구렁이 담 넘어가듯 “대단친 않으나 뼈끝이 되어서 잘 낫지 않는구
려.” 대답하고 더 캐어묻지 못하게 하는 의사인지 얼른 다른 수작을 꺼내었다.
“사처를 조용한 처소로 옮기면 어떻겠소?” 군수가 묻는데 “옮겨두 좋구 안
옮겨두 좋소.” 유도사가 두통싸게 대답한즉 군수는 옮기라고 더 권하지 않고
수통인을 불러서 “내가 아까 이른 말 있지? 그대루 지휘해라.” 하고 분부하였
다. 밑도끝도 없는 군수의 분부가 다담상을 미리 일러둔 것이려니 유도사는 지
레짐작하였더니, 다담상은 소식이 없고 방안은 어두워서 촛불을 켜게 되었다. 유
도사가 박참봉을 돌아보며 사처로 나가자고 말하니 군수가 손을 내저으며 “가
만히들 기시우. 좀 이따 나하구 같이 새 사처루 갑시다.” 하고 말하였다. “새
사처라니?” “사처를 옮겨두 좋다구 하시지 않았소?” “글쎄, 옮겨두 좋지만
인제 언제 옮기겠소.” “내가 새 사처를 정하구 행구를 옮기라구 일러놓았소.”
군수의 하는 짓이 좀 건방지나 후의인 것은 틀림없는 듯하여 “우리가 절에 간
색시 꼴이 되었구려.” 하고 유도사는 웃었다. 거미구에 수통인이 들어와서 저의
원님께 “분부대루 거행했소이다.” 하고 여쭈니 군수가 고개를 끄덕인 뒤 유도
사와 박참봉을 보고 “새루 정한 사처가 어떤가 우리 같이 가봅시다.” 하고 먼
저 일어나서 유도사와 박참봉도 군수를 따라 일어섰다. 새로 정한 사처란 동헌
뒤에 있는 책실인데 방 둘, 마루 하나 있는 조용한 딴채집이었다. 깨끗한 새 자
리를 깔고 청심박이 대초를 켜놓은 책실 큰 방에 들어와서 군수가 유도사와 박
참봉을 돌아보며 “사처방이 어떻소? 맘에들 드시우?” 하고 물은 다음에 “관
청 음식두 맛깔지 않지만 그래두 장터 음식버더는 좀 나을 듯해서 사처는 이리
옮기구 하인들만 먼저 잡은 사처에서 묵게 하려구 맘을 먹구 들어오시기들 전에
미리 일러두었었소.” 하고 말하여 유도사는 웃으면서 “손들을 편하게 해주는
건 후대지만 손들을 놀리듯이 속인 건 박대니 치사해야 옳소, 원망해야 옳소?”
하고 우스개로 대답하였다. 군수가 뒤따라온 통인더러 저녁상을 곧 들이라고 말
하여 얼마 아니 있다가 저녁밥 두 반상이 들어와서 유도사와 박참봉이 먹기 시
작한 뒤 군수는 동헌으로 올라갔다. 저녁 후에 군수가 올라오라고 청하여 유도
사와 박참봉이 동헌에 와서 보니 기생이 여럿이 있었다. 주인과 손이 정당한 담
화를 하는 것보다 기생들과 섞여 허튼 수작을 많이 하는 중에 어느덧 밤이 들었
다. 군수가 기생들을 시켜서 주안상을 들이게 한 뒤 주인과 손이 다 같이 의관
을 파탈하고 술을 먹기 시작하였는데, 술과 안주는 평산 폭만 못하면 못하지 나
을 것이 없으나 시중드는 계집들의 희고 보드라운 손이 술맛을 돋아서 유도사와
박참봉은 마음이 흐뭇들 하였다. 얼굴 반주그레한 기생 둘을 하나는 유도사에게,
또 하나는 박참봉에게 수청들라고 군수가 일러서 그 기생들이 유도사와 박참봉
에게 각각 특별히 친근하게 굴었다. 박참봉은 마음이 흐뭇한 중 일층 더 흐뭇하
였으나, 유도사는 자기에게 돌아온 기생이 눈에 들지 않는 건 아니지만 자기 마
음대로 고르라지 않고 몫을 지어 주는 것이 마음에 시쁘었다. 군수가 술이 거나
하게 취한 뒤부터 같지 않은 흰소리를 많이 하여 듣기에 괴란할 지경이나 극진
한 대접을 받는 처지에 구태여 무안 줄 것이 없어서 유도사는 한손 놓고 흥흥
코대답하였다. 군수가 건방진 수작도 많이 하고 실없는 소리도 간간이 하되 평
산부사 장효범과 같이 허교는 청하지 아니하므로 유도사가 먼저 “여보게, 우리
벗하세그려.” 하고 말한즉 군수는 선뜻 대답을 아니하고 한참 생각하다가 “내
가 이때까지 문관이나 남행하구 벗한 일이 없는데 자네들하구는 벗하겠네. 나루
는 파격일세.” 하고 대답하였다. “자네가 문관과 남행을 나삐 보나?” “피장
파장이지.” “왼 세상이 다 호반을 나삐 보는 걸 자네가 혼자 높이 보면 높아
지나?” “호반이 어째 나쁜가? 까닭 모를 일이니 까닭을 알거든 말 좀 해보게.
” “호반에 사람 같은 것이 없는 까닭이겠지.” “무엇이야? 호반
에 사람이 없다니! 그런 말 함부루 못하네. 우리 태조대왕께서두 여조 호반이실
세.” “누가 고려 적 일 말하나. 지금 세상 말이지.” “근세루 말하더래두 우
선 정국원훈 평성부원군이 호반이 아닌가. 올 사월에 돌아간 장판윤장이 어떠한
인물인 건 자네들 들어라두 알겠지. 그러구 지금 양산 군수 장필무 같은 사람은
세상에서 잘 모르지만 일대인걸일세. 그런데 오십지년에 일개 군수루 썩네 썩어.
그 외에두 남치근 남포장이며 김세한 김병사며 호반에 인물 많지. 문관이나 남
행을 두름을 엮으면 그런 인물 하나를 당할 줄 아나? 호반에 사람이 없다니 그
게 말인가, 무언가.” 군수는 얼굴에 핏대를 올리고 떠드는데 유도사는 웃으며
듣다가 “윤지숙 윤봉산두 그 인물 틈에 한몫 끼겠네그려.” 하고 조롱하여 말
하니 “이 사람이 누굴 놀리는 셈인가.” 하고 군수가 골을 펄쩍 내었다. “주인
이 골을 내면 손이 미안스럽지 않은가.” “조롱을 받구 골 안낼 사람이 어디
있담?” “조롱이 무슨 조롱인가. 자네가 그래 인물루 남치근이나 김세한이만
못하단 말인가?” “내 말을 거기 얹을 까닭이 무언가?” “자네루 해서 말이
났거든.” “호반을 보구 호반에 사람이 없다구 말하니 그게 사람을 파깡청이
맨드는 수작이 아닌가.” “나두 호반 명색일세.” “아니 자네가 투필했단 말인
가?” “그랬네.” “그러면 그렇지. 자네 같은 사내다운 사내가 호반 출신이 아
니라면 변이지. 그런데 내가 서울 있을 때 자네 말을 영 못 들었어. 하여튼 우리
가 만나기가 늦었네.” 군수의 얼굴에 화기가 가득하여졌다. “자네들 여기서 며
칠 놀다 가게. 나두 도임한 지가 얼마 안 돼서 아직 구경을 못했지만 이 골에
좋은 경치가 많다네.” “평양에다가 가마구 기별한 날짜가 있어서 곧 가야겠네.
” “딴 소리 말게. 못 가네.” “아니야. 곧 가야해.” “내일 하루만이라두 더
묵어가게.” “그럼 내일 좋은 경치나 구경시켜 주게.” 유도사와 박참봉은 봉
산서 하루 묵기루 작정하고 이날 밤 닭 울녘까지 군수와 같이 술들을 먹었다.
구경 다닐 공론이 처음 났을 때, 유도사가 기생들더러 어디 구경이 제일 좋으냐
물었더니, 혹은 봉황대가 유명하다고 말하고 혹은 양익봉이 기특하다고 말하고
또 혹은 수동이 신기하다고 말하고 그 외에도 나한동 경치가 좋다, 영천 약물이
좋다, 부엉바위 용추가 좋다, 좋다고 말하는 데가 하도 많아서 하루에는 다 구경
할 가망이 없었다. 군수는 구경을 숫제 그만두고 환취루에서 하루 놀자고 하는
것을 유도사가 이왕이니 어디든지 구경을 가자고 말하여 휴류성과 신룡담을 구
경하고 봉황대까지 나가서 대 아래서 천렵하고 놀다가 오기로 작정들 하였다.
이튿날 아침 전에 군수가 이날 공사를 대강 마치고 아침이 지난 뒤, 봉황대
아래서 천렵하고 점심 먹도록 준비를 차려놓으라고 분부하여 아전, 사령, 관노,
관비 십여 명 사람을 봉황대로 바로 보내는데, 술시중할 기생들과 심부름할 통
인들도 먼저 가서 등대하고 있으라고 함께 보내고, 군수는 유도사, 박참봉 두 손
과 같이 말들을 타고 마부, 하인 육칠 명을 데리고 휴류성으로 향하였다. 군수의
말은 부연 털에 손바닥 같은 붉은 점이 듬성듬성 박힌 얼룩인데, 귀가 뾰족하고
눈이 모진 것이 열기가 있어 보이고 다리가 날씬하고 굽이 높은 것이 걸음을 잘
하게 생겨서 말 볼 줄 아는 사람이면 누가 보든 탐낼 만하고, 유도사의 말은 절
따요, 박참봉의 말은 백따인데 절따는 잘생기진 못하였어도 그대로 탈 만하지마
는 백따는 모색만 깨끗할 뿐이지 몸이 질둔하게 생긴데다가 서흥서 봉산으로 오
는 길에 길을 보지 않고 한눈팔다가 돌 사닥다리에서 굽 하나를 몹시 접질리더
니 그 굽을 아직도 아껴 딛고 안장까지 제 것이 아니라 등에 잘 맞지 않는지 몸
을 연해 뒤흔들었다. 읍 밖에 나온 뒤부터 탄 사람들이 모두 자견을 하여 말들
이 견마잡이에게 성가심을 받지 않게 되니, 얼룩이가 절따, 백따와 한데 섭쓸려
가기 창피하다는 듯이 들고 달아나서 절따는 쫓아가려고 가탈걸음을 걷다가 네
굽까지 놓고 백따는 허덕허덕하다가 고만 지쳐버려서 까많게 뒤떨어졌다. 군수
가 손들과 하인들을 뒤떨어뜨리고 혼자 쮜가는 것이 체모에 틀려서 말을 억제하
여 세우고 기다리는 중에 유도사가 쫓아와서 말을 멈추며 곧 “자네 말 나 좀
빌려주게.” 하고 청하였다. “빌리다니 바꿔 타잔 말인가?” “아니 평양까지
타구 가게 빌려달란 말일세.” “내 말은 말을 썩 잘 타는 사람이 아니면 타기
가 어려운걸. 놈이 성질이 순하지 않아서 견마를 잡히면 걸음을 안 걷구 자견을
하면 제어하기 어렵구 사람 애먹이네.” “그건 염려 말구 빌려만 주게.”“그러
구 내가 쉬 감영에를 갈 텔세.”“언제 갈 텐가? 내일 모레는 안 가겠지.” “얼
굴의 고약만 떼어버리면 곧 갈 테야.” “내가 평양 가서 하인 하나를 곧 올려
보낼 테니까 이틀 가구 이틀 오구 넉넉잡구 닷새 동안만 빌려주게.”“빌려준대
두 자네가 잘 탈는지 모르겠네.” “봉황대까지 가는데 나하구 말을 바꿔 타새.
그럼 알겠지.” “어디 그렇게 해보세.”
군수와 유도사가 다 각기 말께서 내릴 때 마부와 하인들이 쫓아오고 다시 얼
마 동안 지난 뒤에 박참봉이 겨우 따라왔다.
유도사가 군수의 말을 바꿔 타고 혼자 달려오는데 길을 몰라서 마산 가는 길
로 얼마를 오다가 길가의 농군에게 물어서 길 잘못 든 줄을 알고 길을 자세히
배워가지고 오느라고 지체도 많이 하고 길도 많이 돌았건만, 휴류성에 올 때 뒤
에 떨어졌던 일행과 어금버금 같이 왔다. 휴류성은 신라 적에 쌓았다는 옛성이
라 석축이 태반이나 무너졌었다. 성자리를 대강 둘러보고 신룡담으로 향하려고
할 때 군수가 유도사더러 “이번에는 빨리 달리지 말고 천천히 걸려보게.” 취
재보듯 말하는 것이 유도사 마음에 아니꼬웠으나, 말을 빌릴 욕심에 군수의 말
대로 천천히 걸리었다. 빨리 가려고 애쓰는 말을 빨리 가지 못하게 제어하는데
수단이 익숙하여 순하지 않은 말이 순한 말같이 잘 복종하였다. “자네 말타는
것이 법수가 있네. 내 말을 빌려줄 테니 닷새 기한은 넘기지 말게. 내가 말을 하
루 한번 못 보면 맘이 한구석이 빈 것 같애.” “나두 말을 사랑하는 까닭에 자
네가 사랑하는 말을 빌려준다는 것이 조만 정분이 아닌 줄 짐작하네.”
유도사와 군수는 길이 좁고 넓은 것을 따라서 말을 앞으로 세우기도 하고 또
나란히 세우기도 하며 신룡담까지 같이 왔다.
용추의 물 깊이는 으레 명주실이 몇 꾸리씩 풀리는 법이라 침침한 물 밑에 잠
겨 있는 용을 사람의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더러운 물건이 용추에 빠질 때 물
밖으로 밀어내는 것이 용의 조화라고 한다. 이것은 어느 용추든지 도항정 매일
반이나 신룡담의 용은 다른 데 이무기와 달라서 신통을 부리고 영검을 보인다고
신룡담사란 사당집까지 지어놓고 일군 백성이 모두 위하는 것이 다른 용추에는
별로 없는 일이었다. 일행이 신룡담에서 지체한 뒤에는 바로 봉황대로 나오는데
관하인들을 앞에 내세워서 길을 치우며 나왔다.
봉황대는 이름이 높이 난 가량하면 경치가 실상 하치않으나 서흥강과 은파천
의 여러 줄기가 얼기설기 얽혔다가 재령강과 합하여 굽이쳐서 흐르는 곳에 넓은
들이 봉산, 재령 두 골에 걸쳐 열리어서 대 위에 높이 서서 사방을 바라볼 때,
눈앞을 가로막는 것이 없어 시원하였다. 시원한 맛에 박참봉은 주저앉는 것을
유도사와 군사가 다같이 내려가자고 재촉하여 물가에 차일 치고 자리 깔아놓은
곳으로 내려와서 기생들의 소리도 듣고 기생들과 우스개도 하다가 고기잡이들이
그물질로 잡아낸 펄펄 뛰는 생선을 회 만들어서 술안주도 하고 지지미로 밥반찬
도 하여 점심밥들을 달게 먹었는데, 그중 유도사는 군수나 박참봉보다 몇 곱절
많이 먹었다. 군수가 유도사를 보고 “자네 원력이 세지?” 하고 물으니 유도사
는 웃으면서 “글쎄, 장정 한둘은 거느릴 수 있겠지.” 하고 대답하였다. “자네
신익 신첨사를 아나?” “나는 안면 없어. 그건 왜 묻나?” “그가 원력이 장사
지.” “기운꼴이나 쓰면 세상에선 으레 장사라구 하느니.” “아니 신첨사는 참
말 장사야.” “그가 장산 것을 자네 눈으루 본 일 있나?” “내 눈으루 본 일
은 없지만 그가 장사루 발신하게 된 것은 다들 잘 아는 일이니까.”
유도사는 신첨사의 내력을 알지 못하지만, 군수가 다들 잘 아는 일이라고 말
하는 것을 묻기가 창피하여 말을 더 하지 아니하는데 박참봉이 군수더러 “다들
안대두 나는 모르니 어디 신첨사 이야기 좀 들어보세.” 하고 말하였다. “신첨
사가 일개 무명씨 신선달루 청파 배다리 옆에서 살 때 어느 날 병판 행차가 나
오는데, 신선달이 길에 나섰다가 벽제 소리를 듣구 길을 비킨다는 것이 미처 잘
비키지 못해서 전배 기수에게 욕을 보구 분하니까 그 기수를 번쩍 들어서 개굴
창에다 처박았더라네. 다른 병판 같았다면 신선들을 초죽음시켰겠지. 그때 병판
유전 유판서는 호기 있는 양반이라 신선달을 일부러 불러보구 문안에 들어오는
길루 위에 아뢰구서 바루 선천을 터주었다네. 그래 신선달이 선전관을 얻어 했
네. 그런데 또 작년 재작년 오월인가베. 위에서 농사짓는 걸 보시려구 서교에 거
둥합셨는데 별안간 광풍이 일어나며 위에서 앉아 기신 막차의 차일끈이 끊어져
서 차일이 한편으루 넘어백히는 것을 신선전이 마침 가까이 있다가 끊어진 끈을
붙잡아 캥겨서 넘어백히지 않았다네. 그래 벼슬이 자꾸 올라서 지금 어디 첨사
루 있네. 위에서 장사루 압셔서 특별히 발탁해 줍시니까 얼마 안 가서 병수사를
할 겔세.” “그까지 힘이 무에 장사란 말인가?” “저 사람 보게. 장정 하나 번
쩍 들어서 동댕이치는 것두 그리 쉽지 않지만 바람이 쓰러뜨리는 차일을 한손으
로 붙들어서 바루 세우는 게 여간 기운 가지구 될 줄 아나? 더구나 궐내 차일이
어디 이 따위 차일인가. 유착스럽게 크지.” “우리 형님에게 대면......” “이 사
람들아.”
유도사가 박참봉의 말을 물질뜨리고 “경치 구경 하러 와서 이야기하구 앉았
는 건 기생 데리구 떡먹는 거나 마찬가지 운치 없는 짓일세. 밖에 나가서 시원
한 바람이나 쏘이세.” 하고 먼저 일어서니 박참봉도 따라 일어섰다.
군수가 손들과 같이 물가에 와서 거니는데 기생, 통인들도 뒤를 따라다니었다.
다시 그물질을 시키고 고기 잡는 구경을 하다가 저녁때 다 되어서 읍으로들 들
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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