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크밤

碧血剑 1-4

3학년2반 | 2022.01.14 08:07:43 댓글: 0 조회: 284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2210

* 제 1 권 *

- 4 - 금사검(金蛇劍)과 미소년(美少年)

원승지는 13살 때에 우연하게도 그 철제 상자를 발견했던 것인데, 몇 년 전부터 이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장춘구와 대머리의 상황을 보고 있자니, <금사비급>속에 무슨 중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18년 동안이나 계속해서 찾았을 리가 없을 것이고, 찾은 후에 또 이처럼 목숨을 걸고 싸우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비급 속엔 무엇이 쓰여져 있을까?)
한 번 이런 생각이 들자, 궁금증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그는 침대 밑구석에 처박혀 있는, 먼지로 뒤덮인 그 작은 상자를 찾아내었다. 이 상자는 어찌나 작은지 장춘구와 대머리조차도 발견하지 못했었다. 두 사람은 큰 철제 상자 속의 가짜 비급을 보고는 미친 듯이 기뻐 날뛰었었다.
원승지는 철제 상자를 열어 진짜 금사비급을 꺼내어 탁자 위에 놓았다 책을 펴서 자세히 읽어보니, 앞쪽은 공격 단련 비결과 비밀 무기를 다루는 심법(心法)으로, 사부와 목상도인이 이미 가르쳐준것과 대동소이(大同小異)했다. 대강 훑어보니, 그의 지혜로는 깨닫지 못한 곳이 꽤 있었으나, 수법이 음험하고도 흉악하다는 것만은 이미 잘 알 수 있었다.
생각해 보건데 이번 모험은 적의 비루한 간계를 꿰뚫는 것이다. 이후에 강호를 두루 다닐 때, 어느때 어느 장소에서 흉악한 적을 만나지 안으리란 보장도 없다. 또 그런 자들의 수법이 비록 스스로에게는 사용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되겠지만, 지피지기면 적을 물리치고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이기에 비급 속의 심법을 자세히 연구하기로 했다.
하나하나 읽어 가자니 뜻밖에서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세상에는 원래 이런 종류의 악한들에게는 흉악한 방법이 있는 것이지만, 이것은 정말 보통 사람으로서는 생각도 못할 것들이었다. 예를 들면, 장춘구와 대머리가 민약(悶藥)을 써서 사람을 혼미케하니 절대로 도라고 말할 수 없다.
읽어가기를 삼일 째, 그는 비급에 실린 무술이, 그가 이제까지 배워 온 것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화산파의 무술과는 전혀 다를 뿐 아니라, 이전에 그의 사부에게서는 들어보지도 못한 것들로서 그야말로 기상천외(奇想天外)하였다. 무술학의 요지는 정반대이지만, 그 속엔 도리어 적을 이기고 승리를 제어하는 묘미가 담겨져 있었다. 그는 일례를 통달하면 백례를 통달할 수 있어, 무술에 있어서는 이미 조예가 깊었기에 또다른 무술을 익힐 때에도 즉각 이해할 수 있었다. 비급에 실린 무술은 생각할수록 괴상하여 한 번 배우기 시작하니 결코 그만 둘 수가 없었다.
단련을 시작한지 20여일. 그는 그만 난관에 부딪치게 되었다. 비급 속에는 여러 비결을 자세히 써 놓았으나, 기본 자세는 무형의 것이었다. 비결은 간단했으나 격식을 알지 못해 그는 다만 간략히 넘어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시 금사비급을 읽어 내려가면서, 이 검법을 금사(金蛇)라고 한 것이며, 금사랑군(金蛇郞君)은 정말 중시해야 한다는 것과, 반드시 몸을 보전할 곳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 무술 격식을 처음에는 조금도 몰랐기 때문에 굽히고, 오르내리고, 찌르고, 쪼개는 사이에도 순조롭지 않았다. 격식은 아무 쓸모가 없을 것 같았다. 몇 번 시도해 보다가 돌연 금사랑군이 묻혀 있는 동굴의 벽에 허술한 그림이 있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혹이 이것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미치자 역시 참을 수 없었다. 그는 곧 벙어리를 부르고, 밧줄과 횃불을 챙겨 가지고 동굴로 향했다. 다행히 동굴 입구는 크게 부서져 있어서 곧장 들어갈 수가 있었다. 횃불을 들어 벽을 비추며 나아가니 드디어 벽화가 나타났다. 마침내 비급 속의 비법 형상이 해결되었다. 그는 매우 기뻐하며 그림을 횃불로 비쳐 의심되는 권법은 직접 시도하면서 얼마 동안 권법의 형상을 머리 속에 익혔다. 그리고 나서 금사랑군의 묘 앞에서 두 번의 절을 올리며 그가 남긴 책이 가르쳐 준 무술에 감사했다.
그가 나가려고 몸을 일으킬 때였다. 한 순간, 동굴 벽에 칼자루가 보였다.
옛날의 그것이었다. 그때는 나이도 어리고 힘도 부족해서 빼낼 수가 없었지만, 칼자루를 꽉 잡고 힘을 주니 찌익 소리를 내며 검이 드러났다.
갑자기 온 몸이 오싹해지는 한기가 느껴졌다. 검의 형상은 더욱 괴이하게 보였다. 예전에 보았던 금사추(金蛇錐)와 흡사했다. 검을 바로 잡으니 마치 한 마리의 뱀이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뱀의 꼬리는 칼자루가 되고 뱀의 머리는 칼끝인데, 뱀의 혀가 갈라지는 것처럼 칼끝도 갈라졌다. 검은 금빛 찬란했다.
손으로 잡으니 과연 묵직했다. 황금과 그 밖의 다섯 가지 금속으로 주조된 것으로, 검신에는 혈흔마저 남아 있었다. 매끄러운 비취빛을 발하는 것이 정말로 괴이했다.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두려움이 일었다.
(생각해 보면, 금사랑군의 무술이 이처럼 강한 것이었다. 지금 쥐고 있는 검이 강호를 횡행, 이미 몇 사람의 피를 삼켜 버렸는지는 짐작도 못할 일이다.
이 비취빛 혈흔은 그 누구의 선혈이었을까? 어진 의사(義士)였을까, 간사한 악한일까? 아니면 수천 명의 피가 응집된 것일까?)
슬쩍 칼을 움직여 보니 곧 금사검법이 떠올랐다. 칼끝이 갈라지는 것을 모아서 찌를 수 있고 적의 칼을 박살내 버릴 수도 있는 것이었다. 금사검법의 불가사의한 비법에다 이 금사검을 더한다면 정말로 대단한 검술이 될 것이다.
정신없이 휘두르다 문득 동굴 벽을 스쳤는데 암석 조각이 우두둑 떨어졌다.
금사검이 그토록 예리함에 기쁘고 놀라웠다.
(금사랑군은 내게 이 보검을 준다는 말을 남기지 않았다. 보검을 보고 있노라면 내 것으로 삼고 싶지만 역시 욕심을 버리고 그의 옛 주인을 따르도록 해야겠다!)
칼을 다시 힘껏 벽에 꽂았다. 꽂고 나자 칼이 비록 예리했으나 보이는 것은 칼자루에 지나지 않았다. 칼이 미미하게 움직이며 검 위의 비취빛 혈흔에 횃불 빛이 비치자, 마치 살아 있는 뱀이 꿈틀거리며 석벽을 뚫고 들어가려는 것 같이 보였다.
다시 벽을 보니, <중대하고 보배스러운 비술을 주노니, 나의 문에 들어와서는 화를 만나도 원망해서는 안된다>라고 쓰였는데, 무의식중에 놀라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이 금사 선배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평생 동안 얼마나 세상을 놀라게 했을까? 그런데 어째서 이런 산 속의 동굴에서 죽음을 맞이했을까?) 금사검을 꽂고 생각하니, 자기의 무술은 이 괴이한 협객에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절실했다. 그러자 금사비급의 무술에 더욱 마음이 끌렸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에 대한 친근감마저 생겼다. 그는 동굴을 나와 20여일 동안 미급 속의 무예를 연마했다. 그 중에 금사추의 수법은 더욱 기묘하였다. 목상도인의 비밀 무기 심법과는 천차만별이었다.
마지막 3장은 구전으로 내려오는 비결로 빽빽히 들어찼다. 앞면을 참조해서 보니, 변화무쌍하고 심오한 점은 있었으나 대부분 이해할 수가 없었다. 3장의 비결을 자세히 읽으며 이틀 동안 고심한 끝에 그는 그 중에 모순이 두드러진 점과 다른 것과 뭔가 유관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급을 다시 자세히 읽어보니 그 비결은 자신이 이미 습독하고 이해한 것이었다. 그는 다시 산의 동굴로 들어가서 벽의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여전히 수수께끼였다.
이날 저녁, 그는 비결을 연구하느라고 밖에도 나가지 않았다. 시종 잠을 이루지 못하며 창밖에 달빛이 온 세상을 은빛으로 비추는 것을 본 뿐이었다. 홀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천지의 무술을 다 익혔는데 이 금사비급 때문에 산중에서 2개월 여를 지냈으니 사부님께서 기다리실 것이 걱정된다. 사부님은 전에 금사랑군의 사람됨이 괴하고 그의 책은 무익하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호기심이 발동하여 책의 무술을 익혔지만 사부님께서는 좋아하지 않으실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내가 이토록 고심하면서 이 무술의 난해한 점을 해결할 필요가 있을까?) 그러나 그의 무예가 이 같은 경지에 이르렀다해도 심오한 무술은 도저히 풀 수가 없었다.
[눈으로 보지 말자. 그것을 태워 버려야겠다.]
그는 마음을 정하고 등불에 불을 붙여 미급을 태웠다. 그러나 오랫동안 태웠어도 그 책의 겉장은 약간 검게 그을렸을 뿐 불이 붙지 않았다. 그는 이상하게 생각하며 살펴보았다. 책 속의 글자는 여전했다. 그는 두 손에 힘을 주어 당겨 보니 겉장은 검은 금실로 짜여진 두 겹의 조직이었다. 그는 칼로 겉장을 갈라 다시 불을 붙였다. 이번에도 불꽃이 발갛게 달아오르며 바야흐로 금사랑군의 필생의 업적이 한 줌의 재로 화하려 했다.
그가 다시 겉장을 보니 좁은 사이로 두 장의 편지가 감춰져 있었다.
한 장에는 <귀중한 보물지도>라고 쓰여 있는데, 그 옆에는 수많은 기호로 된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지도 뒤에는 <보물을 찾아 금 10만냥을 주라>고 적혀 있었다. 편지 끝에는 작을 글씨로 <진기한 보물을 쉽게 얻을 수 있겠는가? 보물을 중히하고 이별을 가벼이 하면 우환이 크게 후회할 것이다!> 한참을 골똘히 생각해 보았지만 그 뜻이 분명치 않았다.
다른 편지에는 무술 비결이 빽빽히 쓰여 있었는데, 미급 속의 이해되지 않는 곳을 참조해 보니 환히 알 수 있었다. 과연 묘미가 무궁했다.
하늘의 달을 보고 있자니, 금사비급의 무술의 심오함이 마치 마음속에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것 같이 떠오르고 찌꺼기 마저 없는 옹달샘 밑을 보는 것 같았다. 곧 아침해가 떠오르고 정신이 들었다. 이 무술은 번복되는 곳이 많고 기교가 많은 것 같았다. 금사랑군의 천성이 그렇게 평이한 것도 일부러 어렵게하여 사람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을 좋아했던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이렇게 고심한 끝에 그는 금사랑군의 무술에 정통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부와 목상도인이 가르쳐 준 무술도 더욱 심도있게 향상되었다.
그는 두 장의 편지를 태우다가 문득 금사랑군의 계책에 탄복했다. 미급 속에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남겨 놓은 까닭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 본의를 탐색케하여 마침내 감춰 둔 보물지도를 찾아내게 함이었다. 만약 미급이 평범한 사람의 손에 들어갔다면 무술의 정교함도 연구하지 못했을 것이며, 십중팔구 지도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두 장의 편지를 다시 겉장 속에 끼워 넣었다. 그리고 다시 산 속의 동굴로 가서 금사검을 연마한 후 검을 제자리에 다시 꽂았다.
이틀이 지난 후 원승지는 행장을 갖추고 벙어리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와 산에서 10년을 함께 지냈으므로 막상 떠나려고 하니 매우 슬펐다. 대위와 소괴는 마음이 잘 통했다. 그가 떠나려 하자 컹컹거리며 말렸다. 원승지는 더욱 헤어지는 것이 가슴 아팠다. 벙어리는 이들을 데리고 산밑까지 전송해 주면서 비로소 눈물을 흘렸다.
원승지는 그간 무예만을 닦고 있다가 하산했기 때문에 보고 듣는 모든 것이 신기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백성들의 옷이 남루하고 얼굴은 굶주려서 누렇게 뜬 것 뿐이었다. 100여리를 가니 그곳 백성들이 산중에서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을 하고 있었다. 그는 수중에 사부님이 남기신 은 두냥을 지녔으나 그것으로 음식마저 사 먹을 곳이 없어 무술로써 새나 짐승을 잡아먹을 뿐이었다.
수일을 걸어가서 마침내 산서(山西)지방에 들어섰다. 그곳에서 굶주린 백성이 굶어 죽은 시체를 게걸스럽게 뜯어먹고 있었는데 차마 볼 수가 없어 황급히 지나쳤다. 읍에서는 굶주린 백성의 큰 무리가 소리 높여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의 어미를 먹고 그의 어미를 입고, 문을 열어 츰왕을 맞이한다. 츰왕은 곡식을 거두지 아니한다. 아침에 거두어 가고 저녁에도 거두어 가니, 가난을 구하기 어렵네. 모든 이들은 문을 열어 츰왕의 다스림을 기뻐하자.] 관병 한 명이 10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와서 소리쳤다.
[너희들이 그토록 모반의 노래를 부르니 목숨이 아깝지 않느냐?] 관병들은 채찍을 휘두르면서 군중을 난타했다.
굶주린 백성들은 여전히 외쳤다.
[츰왕이 오지 않으면 모두 굶어 죽는다. 우리 모두 일어나자!] 한 무리가 일어나 관병을 붙잡으니 어떤 이들은 때리고, 어떤이들은 메어쳐서 10여명의 군사들은 모두 곧 맞아 죽고 말았다.
원승지는 속으로 생각했다.
(츰왕의 정세가 날로 더해가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다. 백성들은 끼니를 이을 수 없으니 관에 반발할 뿐이겠지.)
한 굶주린 이에게 물었다.
[여보게, 츰왕이 어디 계시는지 알고 있다면 가르쳐 주게. 내 그에게 가서 몸을 의탁하려네.]
그러자 백성은 말했다.
[듣자하니 츰왕은 휘하에 대군을 거느리고 양릉(襄陵)과 문희(聞喜)일대에 계시다는데 오래지 않아 이리로 온다고 합니다. 우리들 대부분도 그에게 가서 그의 휘하에 들어가려 합니다.]
원승지가 또 물었다.
[방금 부른 노래가 참 듣기 좋던데 그 밖에 또 있소?] 굶주린 이가 말했다.
[많지요. 그것은 모두 츰왕의 부하 이공자가 지은 것입니다.] 그는 몇 곡을 더 불렀는데 모두 관을 모독하고 츰왕을 맞이하는 것이었다.
원승지는 들은대로 길을 따라가다가 황화 연변에서 츰왕의 소부대와 마주쳤다. 인솔하던 대장은 츰왕을 찾아 왔음을 듣고 지체없이 이자성의 진중으로 사람을 보냈다. 츰왕은 신검선원 목인청의 제자가 왔다는 말을 듣고, 바쁜 근무 중에도 친히 나와 그를 접견했다. 원승지는 그의 기상과 태도가 위엄 있고 온화한 것에 매우 탄복했다. 츰왕은 그의 사부가 강남에 있으며, 평소에 사랑하는 제자를 많이 칭찬했다. 또한 그는 원승지를 중히 여기며 조치할 뜻을 비쳤다. 원승지는 사부님이 없다는 말을 듣자 문득 불편해졌다. 다시 최추산에 대해 물었다. 목인청과 함께 강남 소항(蘇杭) 등지로 군량미를 조달하러 갔다고 했다. 원승지가 사부님의 뒤를 따르겠다고 하자 그는 쾌히 응락했다. 츰왕은 말리지 않고 장군 이암에게 접대케 하고 은 50냥을 여비로 내주었다. 원승지는 감사해 하며 그것을 받았다.
이암은 츰왕이 데리고 있는 장수였지만, 서생 차림이어서 유생(儒生)같았다.
그는 전 병서상부 이정백(李精白)의 아들로, 당대 거인(擧人:과거의 급제)이었으나 재해민을 구제하였다고 해서 현관과 부호들의 모함으로 옥에 갇혔다. 한 여협객이 그의 사람됨을 앙모하여 재해민을 이끌고 옥을 공격, 그를 구출해 낸 것이었다. 그녀는 붉은 옷을 좋아하여 사람들은 홍낭자라고 부른다 했다.
이암은 이곳으로 피해 와서 모반에 가담치 않을 수 없었기에 홍낭자와 부부지연(夫婦之緣)을 맺고 츰왕의 휘하로 들어왔다. 그리고 땅을 고루 나눠 갖고 세금을 면해 주어 백성을 잘 다스릴 것을 건의했다. 츰왕은 그의 말에 동조했고 그를 급히 등용했다. 츰왕은 본시 굶주린 백성의 하나로, 모반의 무리를 모은 사람이다. 모반하려는 것도 일시적으로 다만 배고픔을 면하려는 것이었다. 원대한 포부도 없이 이르는 곳마다 약탈을 일삼으니, 인심을 얻지 못하였다. 때로는 이기고 때로는 패하면서 사방을 떠돌아 다녔다. 이암이 들어오고 이자성이 군기를 바로 잡고 살육과 간음을 엄금하자, 곧 크게 군세를 떨치게 되었다.
이자성은 군을 엄히 정비하는 한편, 많은 노래를 지어 사람들로 하여금 부르게하여 사방에 퍼뜨렸다. 백성들의 굶주림은 면한 길 없는데, 관청에는 그나마 식량을 빼앗아가니 <츰왕이 오면 식량을 바치지 않는다>는 것을 듣고 모도 그를 기다렸다. 이 때문에 츰왕의 군사는 아직 오지 않았는데 성의 외호는 이미 파괴되어 있었다.
이암은 독사(督師) 원숭환을 존경하고 있다가 그의 아들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서로 예를 다해 진중에서 영접하였다.
부인 홍낭자도 나오도록 하였다. 홍낭자는 자태가 뛰어나고 아름다웠다. 세 사람이 자리를 같이 하였다. 원승지는 무예 말고는 아는 바가 없었는데, 이암과 홍낭자는 그에게 천하의 대세를 말해 주었다. 그의 안목이 확 트이는 것 같았다. 이암의 진중에서 3일을 머물다가 작별을 고했다. 원승지는 이암의 풍모에 이끌려 그를 모방하고 싶었다. 그래서 서생의 의복을 사서 서생처럼 차려 입고 사부를 찾아 길을 떠났다.
강남 지방은 부유했다. 비록 백성을 학대하고 탐관오리는 있었지만, 백성들은 배불리 먹었고 진진(秦晋)의 굶주림에 비하면 이곳은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그는 식사를 한 후 동으로 가는 배를 타려고 부두로 나갔다. 강변에 큰 배가 정박해 있는 것을 보고 물으니, 부유한 상인이 금화를 싣고 절강에 가서 물건을 구입하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는 그 배에 타기로 했다. 뱃노인은 뱃삯을 요구하고, 물건을 실은 거상 용덕인(龍德隣)에게 의논했다. 용덕인은 그가 일개 서생인 것을 보고 쉽게 승선을 허락했다. 뱃노인이 삿대를 빼고 출항을 하려 하자 갑자기 부두에서 황급히 뛰어오며 소리치는 소년이 있었다.
[뱃노인! 영주에 급한 일이 있는데 편리 좀 봐 주십시오. 저 한 사람만 태워 주십시오!]
원승지는 음색이 맑고 고운 것을 듣고 고개를 들어보니 놀람을 금할 수 없었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소년이 있다니!]
그는 17, 8세 가량 되었으며 푸른 장삼을 입고 있었는데 머리엔 백옥을 붙인 푸른 두건을 쓰고 있었다. 의복은 우아했으며 등에는 흰 보따리를 메고 있었다. 얼굴은 하얗고 투명한 홍조를 띄고 있는데 참으로 준수했다. 용덕인도 이 소년의 차림이 화려하고 인물이 출중함을 보고는 호감을 느껴 뱃노인에게 발판을 놓게하고 그를 배에 오르도록 했다.
푸른 옷의 소년이 배에 오르자 배가 약간 기우뚱했다. 원승지는 그의 몸이 수척에 불과 100근 정도 될 것 같은데 움직이는 것이 200근 무게는 족히 실은 듯하자 이상하다고 여겼다.
(그의 배낭은 별로 크지도 않은데 어쩐 일일까?)
소년이 올라탄 후 배는 곧 출발했다.
그 소년은 선실로 들어와서 용덕인과 원승지에게 인사를 하고 자신의 이름은 온청(溫靑)인데 어머님의 병환으로 급히 돌아가는 길이라 했다. 그는 용인덕은 마음에 두지 않고 두 눈을 떠서 원승지를 훑어보았다.
[원형(袁兄)의 말을 들으니 이곳 분 같지 않습니다.] [소생은 원래 광동 사람으로 섬서(陝西)에서 조금 살았지요. 강남은 생전 처음입니다.]
원승지는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온청은 다시 물었다.
[절강에 무슨 볼일이 계십니까?]
[나는 친구를 찾아가는 길입니다.]
그때 갑자기 두 척의 작은 배가 이 배의 양옆을 쏜살같이 지나갔다. 온청의 눈에는 작은 배가 돌아간 것을 주시했지만 앞산에 가리워져 볼 수는 없었다.
점심 식사에 용덕인은 두 사람을 초대했다. 원승지는 밥을 세대 접이나 먹고 닭, 생선, 야채 등도 적지 않게 먹었는데, 온청은 한 그릇만 먹었다. 그러나 태도가 아주 우아했다.
식사를 마치자 물결을 가르며 두 척의 작은 배가 또 다가 왔다. 한 척의 뱃머리에 거한이 서서 눈을 부릅뜨고 큰 배를 바라보았다. 온청은 눈썹을 모로 세우고 만면에 노기를 띄웠다.
원승지는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그는 어째서 이 작은 배를 보고는 성을 내는 것일까?] 온청은 곧 무엇을 깨달은 듯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머금고 얼굴을 온화하게 바꾸었다. 그는 선원이 가져온 차를 홀짝거리듯 마시더니 차 맛이 떫은 듯 이마를 찡그리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저녁이 되자, 배는 한 읍에 정박했다. 원승지는 연안을 거닐어 보려 했는데 용덕인은 배의 선실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온청 역시 입을 삐죽거리며 경멸하듯 말했다.
[이런 황량한 땅에 뭐 볼 것 있다고!]
마치 그가 보지 못한 세상을 비웃는 것 같았다. 원승지는 이 소년이 매우 거만하다는 것을 알았으나 탓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강남의 경치가 좋고 산수가 뛰어나, 화산의 웅혼하고 험준함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도중에서는 유람을 즐길 수가 없었으므로 한가롭게 거닐었다. 그리고는 술 몇 잔을 마시고 비파를 하나 사 가지고 배로 돌아왔다.
용덕인과 온청을 청해 함께 식사를 하려 했는데, 그들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
원승지 역시 옷을 벗고 잠을 청했다.
한밤중이었다. 홀연히 멀리서 휘파람 소리가 은은하게 울렸다. 원승지는 즉시 일어났다. 그리고는 사부님이 강호에서는 여러 가지 변고가 일어난다고 한 말을 생각해 냈다. 조용히 옷을 걸치고 정황을 살피기로 했다. 오래지 않아 급히 노젓는 소리가 들리고 하류에서 배가 올라오고 있었다. 온청이 이불 속에서 날카로운 장검을 꺼내 들고 뱃머리로 뛰어가는 것이 보였다.
원승지는 놀랐다.
[그는 해적의 밀정으로 큰 장사 용덕인을 해치려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방관할 수 없지!]
목인청은 산을 떠날 때 세상의 어려움은 마음과 몸으로는 다스릴 수 없으니, 장검을 지니고 눈을 부릅뜨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사부의 분부를 따라 비수를 지녔다. 평소 단련했던 장검은 화산에 두고 왔으니 지금은 이 비수만을 품고 몸을 일으켰다.
작은 배가 다가왔고 뱃머리에서 한 사람이 거칠게 소리를 질렀다.
[온! 너는 강호의 의기(義氣)가 생각나냐? 생각나지 않냐?] 온청이 소리쳤다.
[생각은 뭐고, 생각나지 않는냐는 또 무슨 소리냐?]
[우리들은 힘들게 구강(九江)을 따라 내려왔다. 네가 도중에서 도둑놈을 죽이지 않았느냐?]
이때 용덕인은 놀라서 머리를 들었다. 네 척의 배에서는 이글거리는 횃불과 배 안이 가득하게 사람들도 많았다. 사람마다 손에 칼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는 덜덜 떨었다. 원승지는 이미 그간의 사정을 들었기 때문에 차분히 그를 위로했다.
[두려워하지 말아요. 당신 일은 아니니까!]
[그..., 그들은 내 재물을 빼앗으러 온...... 강도가 아닙니까?] 용덕인의 목소리는 떨고 있었다.
온청이 소리쳤다.
[천하의 재물은 천하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하는데, 이 황금이 어떻게 너희들 것이더냐?]
그러자 그가 외쳤다.
[속히 2000냥을 가지고 와라! 나눠야 될게 아니냐! 우리들 쌍방이 1000냥씩 나누면 네게도 이로울 것이다!]
온청이 소리쳤다.
[뭣, 네 맘대로?]
작은 배의 두 거한은 화를 내며 외쳤다.
[사형, 어째서 쓸때없는 입씨름을 하는 거요? 그는 1000냥의 금을 원치 않아, 그렇다면 그에게 줄 것도 없어!]
그러더니 곧 칼을 들고 큰 배로 올라탔다.
용인덕은 그들의 말을 들으며 온 몸을 떨다가 두 거한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는 혼비백산하여 중얼거렸다.
[원..., 원상공. 강도가... 강도가, 빼앗으려... 빼앗으려고 해!] 원승지는 그를 자기 뒤로 끌어 세웠다.
[두려워 마시오.]
온청은 몸을 기울여 왼발을 날려 크게 소리지르고는, 왼쪽 사람은 강물로 차고 오른손에 들고 있던 칼로 동시에 목을 쳤다. 다른 거한도 칼을 내려쳤는데, 그는 장검을 살짝 비켜 예봉을 피하더니 쨍하고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어깨의 칼로서 물리쳤다. 두 거한 모두 눈 깜짝할 사이에 뱃머리에서 사라졌다.
온청은 차갑게 웃으며 소리쳤다.
[사형, 이 쓸개빠진 놈들을 이승엔 오지 못하게 해!] 앞에 있는 거한이 대답했다.
[가서 이 노인과 오겠다!]
작은 배에서 두 사람이 용을 쓰며 건너오는 것을 온청은 차갑게 바라볼 뿐이었다. 다 사람은 찔린 사람들을 데리고 갔다.
사(沙)노인이 소리쳤다.
[우리 용유방(龍游幇)과 너희 석량파(石樑派)는 원래 하수(河水)에 와서 우물물을 침범치 않았다. 우리에게 너의 오대조의 얼굴이 있으니, 네가 어려움을 당하지 않는 것은 우리들 덕분이다.]
원승지는 석량파라는 말을 듣자 순간 오싹해졌다.
(그날 화산에 온 장춘구가 스스로를 석량파라 하지 않았던가?) 온청은 말했다.
[너는 내게 허울 좋은 말을 하지 마라. 주먹으로 싸울테냐, 칼로 하겠느냐?] 사노인은 크게 노했다.
[너는 도대체 강호의 규칙을 따르겠느냐, 따르지 않겠느냐?] 온청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내 좋을 대로 할 뿐이니 무슨 쓸데없는 말이냐?] 사노인은 크게 외쳤다.
[우리 용유방은 이미 예를 다했는데 네가 그렇게 말하면 쌍방의 협조가 깨어질 뿐이다. 너의 오조는, 다시는 우리에게 다수로써 소수를 기만하거나 큰 것으로 작은 것을 기만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원승지는 이 말을 들으니 온청의 어떤 오조는 매우 두려운 존재인 것 같았다.
온청은 웃으며 말했다.
[너의 그 알량한 무예를 가지고 나를 당하겠느냐?]
원승지는 쌍방이 서로 양보하지 않음을 보자 손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양측의 말을 들어 보건대, 용유방이 황금을 훔쳤는데 중간에서 온청이 빼앗아 달아나자 급히 쫓아와 반분하자는 것이었다. 온청이 승선했을 때 배가 기우뚱한 움직임도 배낭속에 2000냥의 황금이 감춰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생각해 보면 쌍방 모두가 비정상이어서, 자신의 무예를 감추고 수수방관할 뿐이었다.
사노인은 큰 군도로 바람을 일으키며 배로 뛰어 올라왔고 10여명의 거한들도 뒤따라 뛰어 올라와 그를 에워쌌다.
사노인이 말했다.
[너의 석량파의 무예가 강남에서 독보적이라 하지만 사씨의 무예 맛 좀 봐야겠다!]
온청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
[너 혼자 덤빌테냐, 아니면 너희 모두 덤빌테냐?]
사노인은 말했다.
[너는 사람 볼 줄을 모르는 구나! 너희 배에는 다른 친구들이 더 있을 것인데 모두 나와서 강호의 친구들이 사가가 떳떳했음을 증언하게 하라!] 그는 머리를 선실 입구로 내밀고 말했다.
[선실에 계신 분들 좀 나오시오!]
거한 두 명이 선실로 들어가서 원승지와 용덕인에게 말했다.
[우리 형님께서 좀 나오시랍니다.]
용덕인은 온 몸을 떨며 아무 소리도 못했다.
원승지가 말했다.
[그들끼리 싸우려는 것이니 우리는 다만 증인일 뿐, 뭐 신경쓸일 있겠습니까? 나갑시다.]
그는 용덕인을 잡아끌고 뱃머리로 나왔다.
온청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한마디했다.
[너는 귀신이 되어 나갈 것이다. 자, 덤벼라!]
두 개의 칼이 마주 부딪쳤다. 사노인은 덩치는 컸지만 몸놀림은 아주 민첩했다. 그는 나는 듯이 몸을 돌려 온청을 향해 내리쳤다. 온청이 날렵하게 피하며 다시 공격했으나 다만 칼 등을 칠 뿐이었다.
온청이 소리쳤다.
[재주껏 덤벼 봐라. 나는 네 사정을 봐 주지 않을 테니까.] 장검을 휘두르며 이렇게 외치자, 사노인은 잠시 한 눈을 팔다가 <으악!> 하고 소리쳤다. 문득 소매가 찢기고 어깨에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몇 마디 욕지거리를 퍼부으면서 다시 군도를 휘둘렀다. 온청은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장검은 푸른빛을 발하면서 이미 상대방의 몸에 가 있었다. 원승지는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보며 온청의 무술이 한 수 위임을 알아차렸다. 사노인의 검은 육중하고 위엄 있었으나 검법에 있어는 많이 밀려다. 온청은 기교로써 그를 밀어붙이며 기선을 잡았다. 사노인은 땀을 뻘뻘 흘리며 가쁜 호흡을 내 쉬었다. 그러나 몸놀림이 어느새 처음처럼 날렵하지가 못했다.
부딪치는 칼 놀림 중에서 온청은 <얍!> 소리를 내며 사노인의 다리를 찔렀다. 그는 안색이 변하며 서너 걸음 물러나더니 오른손을 들어 투골(透骨)을 세 개나 던졌다. 온청은 두 개를 검으로 막고, 하나는 피하였다. 그런데 그것이 하필이면 원승지의 가슴을 향해 날아왔다. 온청은 옆 사람을 다치게 할 것 같아 크게 놀랐다. 원승지는 다만 왼손 두 손가락으로 가벼이 투골을 잡았다. 사노인과 함께 온 거한들은 모두 손에 횃불을 들고 있어, 뱃머리를 환하게 비추고 있으므로 주위는 마치 대낮과도 같았다.
온청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기술이 뛰어 나십니다. 당신은 정녕 무예를 착실히 닦으셨군요!] 사노인은 온청이 원승지를 보고 놀라워하는 틈을 타서 투골 세 개를 던졌다.
원승지가 소리쳤다.
[온형, 조심해!]
온청이 급히 머리를 돌리니 투골 세 개는 불과 세척 앞에 와서 꽂혔다. 만약 그가 주의를 주지 않았다면 하나는 피했을지 몰라도 두 개는 어림없었을 것이다. 하나는 머리 옆으로 지나가고 두 개는 칼로 막았다. 온청은 원승지에게 몸을 돌려 사의를 표하고는 장검을 세워 곧장 사노인을 내리쳤다.
사노인은 단번에 찌르지는 못했으나 그의 발풍도(潑風刀)를 떨어뜨릴 뻔하게 되었다. 온청은 그의 끈기를 탓하며 전력으로 달려들었다. 다시 수차례 부딪힌 후 사노인은 오른쪽 어깨를 찔리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발풍도를 갑판에 떨어뜨렸다. 온청은 한 걸음 나가 그의 오른쪽 다리를 냅다 찔렀다. 사노인은 처참하게 절규하며 죽어 갔다. 그의 부하들은 기절초풍하여 사노인을 구하려 했다. 온청은 검을 휘둘러 삽시간에 7, 8명을 죽여 버렸다.
원승지가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
[온형, 그만하십시오!]
그러나 온청은 들은 척도 않고 계속 검을 휘둘러 두 녀석을 더 해쳤다. 나머지는 그의 포악함을 보고 급히 강물로 뛰어 들어 몸을 피했다. 온청은 검을 들어 사노인의 머리와 두 다리를 베고는 그의 머리와 시신을 강물로 던져 버렸다.
원승지는 매우 불쾌했다. 이겼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행동은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머리를 돌려 용덕인을 보니 그 역시 놀라서 온몸이 굳어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강에 뛰어든 용유방은 급히 배에 올라타고는 노를 저어 쏜살같이 하류로 내려갔다.
원승지는 물었다.
[그들이 네 재물을 빼앗으려 했지만, 빼앗기지도 않았는데 어째서 그렇게 많은 목숨을 해쳤느냐?]
온청은 흰자위를 보이며 말했다.
[당신은 지금 그들의 비겁하고도 악랄함을 보지 않았어요? 만일 내가 그들의 수중에 들어갔다면 더 지독했을 것이오. 당신은 내 생명을 구했다고 생각하지 마시오. 그것은 다른 사람도 할 수 있는 일이니.... 나는 마음에 두지 않겠소.]
원승지는 묵묵히 듣고 있으면서 그가 매우 냉정한 소년이라고 생각했다. 온청은 칼의 혈흔을 닦아 내고 칼집에 꽂았다.
그리고는 원승지에게 인사치레를 건네었다.
[원형이 마침 내게 경고해 주어, 내가 투골을 피했으니 사실은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원승지는 얼굴이 발그레해진 채 역시 절을 하고 무언의 답을 던졌다. 이미 소년은 예를 갖출 때는 더없이 정중해졌다. 흉악할 때는 맹수처럼 사나워지는 그였는데, 도대체 어느 것이 본성일까?
온청은 선원을 불러 뱃머리의 혈흔을 씻어 내도록 일렀다. 선원은 방금 혈투를 본 까닭에, 한마디 불평도 없이 갑판을 씻고 돛대를 씻어 내고는 출항을 서둘렀다.
그는 또한 선원을 불러서 용덕인에게 술과 안주를 갖다 주도록 했다. 주객이 전도되어도 한참이나 전도되었다. 그리고는 원승지와 함께 뱃머리에 나와 달을 감상하는 것이었다.
그는 조금 전에 혈투나 무예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몇 잔의 술만 들었다.
[달은 언제 뜨려나 술을 들어 하늘에 물어 본다. 쳇, 푸른 하늘은 달을 붙잡을 수 없어. 달이 언제 뜨기는, 나오고 싶으면 나오고 나오기 싫으면 나오지 않은 걸. 원형, 안 그래요?]
그는 혼자 중얼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원승지는 그의 흥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다만 그 나름대로 흥얼거릴 뿐이었다. 그는 어릴 때 몇 년 동안 책에 빠져 있었는데, 목인청에게 무예를 익힌 후부터는 근년에 비록 우연히 한 권을 읽었지만 정상적인 공부는 하지 못했다. 그래서 문자에 대해서는 한이 맺혀 있었다.
온청이 말했다.
[원형, 달은 밝고 바람은 맑으니, 우리 연구([肉+燕]句: 여러 사람이 한 귀씩 지어 시를 이룸)를 하는 것이 어때요?]
[연구? 연구가 뭐지? 나는 할 줄 몰라.]
온청은 픽 웃고는, 대신 원승지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갑자기 작은 배는 파란을 일으키며 빨리 저어 갔다. 온청의 안색이 변하더니 이내 냉소를 띄고는 다만 술을 마실 뿐이었다.
배는 순조롭게 하류로 내려갔는데 순식간에 두 척이 다가왔다. 온청은 술잔을 내려놓고 갑자기 몸을 날려 두 발로 돛대를 몇 번 쳐서 후미로 떨어뜨리고는 선원의 손에서 키를 빼앗아 힘껏 잡아 당겼다. 배가 왼쪽으로 기울면서 곧장 작은 배와 부딪힐 것 같았다. 작은 배는 황급히 피하려고 했지만, 큰 소리와 함께 두 배는 이미 부딪히고 있었다.
원승지는 <아이쿠!> 하면서 작은 배 안의 세 사람이 큰 배 뱃머리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동작이 꽤나 빨랐다. 이때 작은 배는 이미 뒤집어져 있었다. 원승지는 원래 작은 배에 다섯 사람이 있는 것을 보았는데, 이 세 사람을 제외하고 두 사람중 하나는 키를 잡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노를 잡고 있었다.
이 두사람은 제대로 뛰지 못해 물에 빠져서 <사람 살려!> 하고 외치면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이 일대의 물살은 매우 급했다. 더구나 캄캄한 밤중에 물에 빠진 것은 정말이지 재수 없는 일이었다.
원승지는 온청의 악랄하고도 무자비함을 저주하면서, 두 사람이 물 위로 떠오를 때를 기다려 돛줄을 끊고 뱃전에서 몸을 날려 강물로 뛰어 들었다. 한 손으로 한 사람씩 물에 빠진 자들의 머리를 잡고, 이빨로 물고 있는 밧줄의 힘을 빌어서 강 표면에 올가미를 던져 두 사람을 배로 끌어 당겼다. 이때 그는 혼원공을 썼던 것이다. 목상도인이 가르쳐 준, 몸을 가볍게 하는 무공도 사용했다. 네 사람이 크게 소리쳤다. 한 사람은 온청으로, 그는 이미 후미에서 뱃머리로 왔으며, 나머지 셋은 작은 배에서 올라온 사람들이었다.
원승지가 두 사람을 내려놓고 달빛 아래 세 사람을 보니 한 사람은 50여세의 수척한 노인이었다. 듬성듬성 수염이 나 있었으며, 또 한사람은 중년의 거한으로, 기골이 장대했다. 나머지 한 사람은 30전후의 부인이었다.
그 노인은 조용히 말했다.
[몸놀림이 준수합니다. 존함을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스승은 누구십니까?] 원승지는 주먹을 싸쥐며 대답했다.
[성은 원입니다. 이 두 사람이 물에 빠져 위험한 것을 보고 구한 것입니다.
선배님, 면전에서 실례를 무릅쓰고 비천한 무예 솜씨를 썼으니 너무 화내지 마시고 그렇게 보지도 마십시오.]
그 노인은 원승지가 매우 겸손한 것을 보고 의외라고 여기는 눈치였다. 그러나 온청에게는 차갑게 대답했다.
[얘는 갈수록 대담해지는구나. 그러나 이렇게 훌륭히 도와주는 사람이 있으니 다행이다. 이분은 너의 친구냐?]
온청은 얼굴이 빨개지며 노기를 띠었다.
[나는 당신을 어른으로 받들 터이니 당신도 나를 존중해 주시오!] 원승지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들 태도를 보니, 전부 정상이 아니니 뒤죽박죽이 되지 않도록 해야겠다.)
그는 곧 명랑한 소리로 말했다.
[이 온형과는 평수(萍水)에서 만나서 교분을 맺은지 얼마되지 않습니다. 일이 있으면 좋게 상의해서 불필요하게 칼과 창으로 화기(和氣)를 깨지 않도록 합시다.]
노인은 말이 없었지만, 온청은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당신은 두렵다면, 몸조심이나 신경 쓰시오!]
(이 소년은 정말 뻑뻑하군.)
원승지는 이렇게 생각하며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노인은 원승지의 말을 듣고 그가 온청의 친구가 아님을 알고 기뻐했다.
[원형이 저 온(溫)의 무례함을 따르지 않으니 잘됐소. 일이 수습되기를 기다려 우리 함께 이야기해 보면 좋은 친구가 될 것 같소.] 꽤 의미 있는 말이었다. 원승지는 대답치 않고 절을 한 후 온청의 뒤로 물러났다.
노인이 온청에게 물었다.
[너처럼 어린애기 일을 이렇게 어렵게 만들어 놓다니. 나는 너를 때렸을 뿐인데, 너는 그에게 달려들어 그의 생명을 어떻게 했지?] 온청이 대답했다.
[나는 혼자인데, 당신들은 수많은 거한들을 떼지어 몰려 왔소. 당신 같으면 어떻게 했겠어요? 아니, 다른 사람 같으면 어떻게 했을까요? 아마도 몇 사람은 당신들 다수가 소수를 기만한다고 비웃었을 것입니다. 사정이란 금을 주고도 수습이 가능한 것입니다. 내가 흐트러 뜨리지 않고 간수 잘한 것이 잘못인가요?]
그의 어조는 뚜렷하고 분명하였다. 노인은 그에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때 부인이 돌연 양이마를 찡그리며 말했다.
[꼬마야, 너의 온가 사람들은 갈수록 너를 예의없게 가르치는구나. 나는 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생각하는데 누가 너를 이렇게 만들었느냐?] 온청이 대압했다.
[어른도 어른다와야 하고 겉치레 만으로도 잘 되지 않을 것이오.] 노인은 크게 노해 오른손으로 쾅하고 치니 뱃머리의 탁자가 박살이 났다.
온청이 입을 열었다.
[노인장의 무예가 어떠한지는 이미 알고 있으니, 그 하찮은 무술을 가지고 어찌 후배 앞에서 놀리 수 있겠는가? 당신이 무술을 더 배우고 싶으면 우리 할아버지께로 가보시오.]
노인은 화를 냈다.
[너는 네 조상에게 머리도 들 수 없다. 네 할아버지는 어떤분이냐? 그들이 재주가 있었다면 여자로 하여금 너같이 쓸모없는 인간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온청의 안색은 참담하게 변하더니 칼자루를 쥐고 있는 손이 덜덜 떨렸다.
노인과 부인은 도리어 크게 웃었다. 원승지는 온청이 눈물을 흘리며 비분을 참지 못함을 보았다. 그리고 자기에 비해 노련한 그가 어떻게 격한 눈물을 흘릴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이 노인은 공연히 부모 얘기를 꺼내서, 아직 어려서 분별력이 없는 소년을 울리는 것인가?)
이렇게도 생각했다. 그는 본래 쾌히 두 사람 일에 끼어들지 않겠다고 했는데, 온청이 속는 것을 보자 힘이 되어 주고 싶었다.
노인은 음산하게 말했다.
[울면 무슨 소용있겠니? 가서 금을 가져 오너라. 우리가 쓰려는 것이 아니고 사노인의 미망인에게 줄 것이야. 이 원형도 반분해야 마땅하다고 했어.] 원승지는 급히 손을 저었다.
[나는 그러지 않았소!]
온청은 겁을 집어 먹고 울먹였다.
[나는 결단코 주지 않겠어!]
그 거한은 코웃음을 치며, 이미 돛을 걷었는데도 배가 순조롭게 나아가는 것을 보고 뱃머리의 큰 닻을 들어서 공중에서 한 번 도리고 강 연안으로 던졌다. 그 닻은 철로 단련된 것으로써 족히 200근은 되는데, 그 무거운 것을 저렇게까지 멀리 던지는 것을 보니 과연 대단한 힘이었다. 돛을 강 연안으로 던지자 배가 멈췄다.
거한이 말했다.
[거져 올테냐, 가져오지 않을테냐?]
온청은 소매끝으로 눈물을 닦았다.
[좋아, 당신들에게 주겠어.]
그는 선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두 손에 배낭을 들고 나왔는데 얼른 보기에도 묵직해 보였다.
그 거한이 열려고 하자 온청이 소리쳤다.
[아니, 이렇게 해야 쉬워요!]
손에 힘을 주어, 배낭에서 바람처럼 꺼내 물 속에 풍덩 던져 버렸다.
[너희들은 나를 죽이고 금을 차지하려고 했지? 잊지 말아!] 거한은 소리를 지르며 칼을 빼어 그를 찔렀다.
온청은 배낭에서 이미 칼을 꺼냈기 때문에 두 칼이 부딪쳤다.
노인이 소리쳤다.
[그만!]
거한은 물러났다.
노인은 눈을 흘기며 냉소를 머금고 말했다.
[과연 용에서 용나고 봉황에서 봉황나니 그 아비에 그 아들이로다. 오늘 네가 내 앞에서 방자하게 굴었겠다?]
그는 돌연 일어나 온청 앞에 섰다. 온청은 칼을 휘두르며 찔렀으나, 노인은 빈손으로 나와서 손으로 바람을 일으키는데 힘이 대단했다. 온청은 비록 칼을 들고 있었으나 점점 밀렸다. 10여합을 부딪힌 후, 온청은 내장을 노인의 손아귀에 잡히고는 검을 떨어 뜨렸다. 노인은 발끝으로 검을 집어서 왼손으로는 칼자루를 잡고 오른손으로는 칼끝을 쥐었다. 그리고 두 손으로 둥글게 해서는 쨍그랑 검을 두동강 내버렸다. 온청이 놀랐다.
노인이 말했다.
[오늘 네 몸에 표시를 남겨 두는 것은 네가 훗일 나의 위력을 잊을까 해서이다.]
그는 끊어진 칼을 들고 그의 얼굴에 대었다. 온청은 피할 수 없이 그의 얼굴에 새기는 것을 견디어야 했다.
원승지는 생각했다.
(손을 쓰지 않으면 온청의 얼굴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게 돼!) 주머니에서 동전 한 닢을 꺼내 노인의 손안에 있는 칼을 던졌다. <쨍!!> 소리를 내며 노인의 손은 살짝 움직였고 그것은 끊어진 검을 맞추어 손에서 떨어지게 했다. 온청은 놀랐으나 내심 기뻐하며 원승지의 뒤로 와서 그가 보호해 주기를 기대했다.
노인의 이름은 영채(榮彩), 용유방의 맹주다. 석량파의 오조 여칠(呂七)선생 등을 제외하면 무술에 따를 자가 없었다. 그는 맨손으로 매도 잡을 수 있으니 칼을 절단내는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 작은 비밀무기가 맞고 떨어지니 평생의 대치욕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자의 손은 어떻게 된 것이지?]
거한과 부인은 이미 황금이 강물 속으로 사라진 것도 잊어 버리고 멍해 있었다.
부인이 말했다.
[어른, 가시지요. 이 원형을 만났으니 오늘은 저 아이를 용서 하시지요.] 온청이 소리쳤다.
[저들의 본성은....... 저들은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하다구요. 그렇지요?]
원승지는 이마를 찡그리고 이들과 헤어지기가 어려워진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에게 틈을 보이지 않기로 했다. 부인은 한패가 될 것을 제의했지만 그것을 거절하자 만면에 노기를 띠었다.
영채는 내려가며 말했다.
[그대의 무예는 정말 뛰어나오. 오늘 만난 것도 인연이니 권법을 겨러봄이 어떨까?]
그는 매를 맨손으로 잡는 힘을 20여년 동안 닦아왔기에 꽤 자신이 있었고 비밀무기 사용기술도 좋았기에 권법에서는 그에게 질 수 없었다.
원승지는 깊이 생각했다.
[노인장의 권법은 이미 보았는데요.... 이 소년은 흉악하고 교활한데 어째서 그에게 금을 맡겼습니까?]
영채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는 매우 훌륭해.]
한마디를 남기고 옷깃을 바로했다.
[원형, 함께 가시지요!]
영채는 온청에게 만은 눈을 부릅뜨고 한마디 했다.
[오늘은 네게 나의 가르침을 베푼 날이다.]
온청이 말했다.
[당신들의 악랄함을 알았어. 무술이 뛰어나면 감히 덤비지 못하며 찍소리도 못하고 돌아가는구나!]
그는 다른 사람에게는 마음쓰지 않고 원승지가 그들과 함께 갈까봐 겁이 났다. 이미 원승지의 무술이 경지에 달하여 영채는 적수가 아님을 알았다.
영채가 화를 내며 말했다.
[이 원형은, 나이는 어리지만 사귈만하니 우리 함께 갑시다. 두려워할 것 없소.]
원승지는 대답했다.
[노인장께서는 그렇게 보시니 우습군요.]
원승지는 말했다.
[안심하시오.]
온청은 차갑게 말했다.
[그들은 강자에겐 굽신 거린다구요. 당신을 데려가 용파(龍派)의 맹주로 삼겠어요!]
영채는 노기충천하여 그의 뺨을 때리고 원을 향해 외쳤다.
[우리 한 번 겨뤄 보자!]
그리하여 두 사람은 맞붙었다. 실제 원승지의 무예가 한 수 위였지만, 그는 영채의 이 지방에서의 명성을 생각해서 일부러 져주기로 했다.
영채는 득의만만해서 연안의 부하들 중 유씨 형제들에게 온청이 강에 빠뜨린 황금을 찾게 했다. 그들은 강물로 뛰어들어 황금을 찾았다. 유씨 형제들이 잠수해서 금을 찾아내자 거한과 부인이 뛰어 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헤엄을 칠 줄 몰랐고 유씨 형제들이 구하기엔 너무 멀리 있었다.
그때 온청은 닻을 거두어 배를 돌렸다. 그러자 영채는 크게 노하며 물에 뛰어 들었다. 원승지가 그들을 구하려 하자 온청이 대들었다.
[당신은 대체 나를 도와주시려는 겁니까? 저 노인을 구하려는 겁니까?] 그는 못내 아쉬운 듯 허우적 거리는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주에 도착하자, 원승지는 용인덕에게 감사해하며 선원에게 은 5천을 주었다. 선원은 생전에 그렇게 많은 돈을 처음 만지는 것이 어서 극구 사양했다.
그러나 원승지와 온청의 힘이 살인도 불사할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말없이 받았다.
온청은 배낭에서 금을 꺼내 반분한 후 한 묶음은 자기가 갖고 나머지는 원승지에게 주었다.
[당신 것이에요.]
하며 그는 훌쩍 떠나버렸다.
원승지는 형주를 거쳐 난가산(欄柯山) 부근의 석량읍에 이르렀다. 석량이라 함은 난가산 두 봉우리 사이에 기둥처럼 끼어 있는 것에서 유래하였다.
원승지는 마을 어귀에서 한 농부를 만나 물었다.
[여보시오. 온가(溫家)는 어디에 있습니까?]
농부는 놀라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모릅니다.]
얼굴에는 증오의 빛이 역력했다.
원승지는 또 음식점으로 들어가 물었다. 그 주인도 냉담하게 대답했다.
[노형은 온가집에 무슨 볼 일이 있습니까?]
원승지가 다시 덧붙였다.
[나는 단지 어떤 물건을 돌려 받으려 합니다.]
주인장은 냉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당신은 그들의 친구군요. 그렇다고 왜 굳이 내게 묻습니까?] 원승지는 그들이 이렇게 냉담하게 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어린아이를 불러 몇 푼 쥐어 주면서 온가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그 아이도 역시 화를 내며 말했다.
[온가집요? 바로 저 큰 집이에요. 저는 같이 안가겠습니다.] 원승지는 그제서야 온가가 이 지방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있음을 알아 차렸다. 원승지가 온가의 집앞에 당도하기도 전에, 그 집앞에서는 일대 수라장이 벌어지고 있었다.
농민이 삽과 괭이를 들고 집앞에 있는 밭에서 큰 소리를 외쳐대었다.
[당신들이 사람을 때려 중상을 입혔으며, 생명을 보전하기가 어렵게 되었으니 나도 그만둘 수 없어요. 온가놈들, 빨리 나와 목을 내 놓아라!] 사람들 중에는 7, 8명의 부녀자들도 섞여 있는데 머리를 풀고 땅에 앉아 울고 있었다.
원승지는 그쪽으로 건너갔다.
[형씨! 당신들은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소?]
[아! 당신은 길을 가는 상공이군요. 이곳 온가의 횡포 마을입니다. 어제 시골로 내려와 세를 걷어갔는데, 정가들이 며칠만 여유를 달라고 애원하자, 그들은 사람들을 벽에다 밀어붙여 중상을 입힌 것입니다. 정씨의 아들, 손자들이 그들에게 대항하자, 몰매를 때려 전신에 상처를 입혔어요. 세 사람 모두 회생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지주들이 악랄하지 않습니까? 상공께서 이를 잘 처리해 주십시오.]
이렇게 말하는 사이에, 여러 농민들은 더욱 시끄럽게 소란을 피웠다. 어떤 사람이 괭이를 들고 문을 거세게 찍어 대었다. 어떤 사람들은 돌을 담에 던지기도 했다. 그러자 갑자기 대문이 열리면서 한 무리 사람들의 그림자가 나왔다. 농민들이 우물쭈물하는 사이 이미 7, 8명은 그들을 잡혀서 2, 3장 밖으로 나가 떨어졌고 머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원승지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은 정말 훌륭한 솜씨구나!)
주의 깊게 그를 살폈다. 그 사람의 몸집은 빼빼하면서 길었고 누그스럼한 얼굴에 눈썹이 윗쪽으로 치켜져 있었다. 얼굴 표정은 아주 날렵하고 강해 보였다.
그 사람이 큰 소리로 외쳤다.
[너희들, 이 짐승만도 못한 녀석들아! 어쩌자고 여기에 와서 일을 벌이는 거냐! 죽고 싶어 환장을 했나?]
여러 사람들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그 사람은 앞으로 걸어와 다시 몇 사람을 잡아서 집어 던졌다. 원승지가 그가 사람을 던지는데 마치 허수아비를 던지는 것처럼 전혀 힘들지 않은 것을 보았다. 그는 이 사람이 온청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만일 저 사람과 온청이 같이 있다면 영채등도 대적할 수 없고 자기의 장점도 나타낼 수 없으리라고 판단했다.
사람들 중에 세 명의 농부들이 앞으로 나와 큰 소리로 항의했다.
[너희들은 사람들을 이렇게 해도 되는 것이냐? 우리들이 비록 가난하지만 가난한 사람들도 역시 사람이다!]
그러자 빼빼 마른 사람이 냉소하며 대답했다.
[이놈들! 너희들은 아직도 맛을 덜 봤냐?]
몸을 획 돌리는 동시에 중년 농부의 뒷덜미를 잡고 던져 버리니, 그는 동쪽 담장에 부딪치며 힘없이 떨어졌다. 이때 두 명이 젊은 청년 농부가 괭이를 들고 덤벼들어 그의 머리를 때렸다. 그 마른 사람은 왼손으로 획 잡아채었다. 두 개의 괭이가 하늘을 향해 날아가고, 곧 두 사람의 가슴을 문쪽 기간석(旗稈石)위로 던졌다. 원승지는 이 사람들이 농민들을 괴롭히는 것을 보자 심히 화가 치밀었으나, 그의 무공이 대단함을 보고는 만약 이 일에 휘말려 들어가면 더욱 복잡해질 것 같아 그들의 일이 다 끝나는 대로 온청을 만나 황금을 교환한 뒤 즉시 움직이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마른 사람이 뛰어 들었다. 앞에 있는 세 사람을 담 모퉁이에 있는 돌에다 내동댕이 치니 죽지 않으면 심한 중상을 입을 것이다. 이때 원승지는 의협심이 자극되어 어떤 화가 생길지 생각도 않으며 앞으로 몸을 날려 왼손으로 중년 농부의 오른쪽 정강이를 붙잡아 땅에다 놓고 <악왕신전(岳王神箭)>법으로 몸을 마치 화살처럼 빨리 날려 두 사람의 청년 농부의 등을 붙잡아 세우고 가볍게 놓았다. 이 악왕신전법은 목상도사가 전한 경공절기(輕功絶技)로 몸의 빠르기로는 어느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것. 그는 본래 쉽게 나타내려 하지 않았지만, 급히 사람을 구하는 일에는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온씨집의 위치도 알았으니 저녁에 다시 올라 와서 금을 건네주기로 했다. 그래서 마른 사람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세 사람의 농부는 거의 죽은 듯 누워 있어 아무런 소리도 못내고, 그 자리에 멍청하게 있었다. 깡마른 사람이 그의 이와 같은 무공을 보고는 깜짝 놀라며 세 사람을 던지는 수법이 극히 신속했음에 속으로 두려워했다. 그러나 던지는 방향이 같지 않았다.
그가 몸을 돌려 가는 것을 보고 급히 쫓아가 그의 어깨를 쳤다.
[친구! 조심하시오!]
등을 치는 방법은 <대력천근중수법(大力千斤重手法)>이었다.
원승지는 피하지 않아 어깨에 약간 통증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의 중수법을 풀려면 오히려 반격하지 않는 것이다.
마른 사람이 깜짝 놀라며 거듭 말했다.
[당신은 이 사람들을 불러 왔는데 나와 무슨일이라도 있습니까?] 원승지가 예를 갖추며 대답했다.
[대단히 미안하오. 형제들이 인명에 대해 시끄럽게 굴며 모두가 번거롭게 하기에 무례하게 그들을 도운 것뿐이오. 이것은 죄를 지은 것이나 노형의 무공이 이렇게 높은데 이 농민들과 같이 보실 필요가 있겠소?] 마른 사람이 그가 겸손하게 말하는 것을 듣고 잠시 적의를 좀가라 앉히는 듯 되물었다.
[존함이 뉘시옵니까? 이곳은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원승지도 겸손하게 대답했다.
[저는 원가입니다. 온씨 성을 지닌 친구가 있는데, 여기에 묶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사람이 대답했다.
[나도 온가인데 선생은 누구를 찾으시는지요?]
[온청, 온상공을 찾으려 합니다.]
그 사람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아직 흩어지지 않은 수십명의 농민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너희들, 아직도 죽고 싶은 거냐! 빨리 꺼져 버려!]
농민들은 원승지와 마른 사람의 대화와 또 두 사람의 무공을 보았기 때문에 더 이상 머무르지 못하고 뿔뿔이 헤어졌다. 그들은 멀리 도망가면서 큰 소리로 욕을 퍼부어댔다. 멀리 갈수록 그 욕은 소리로 변해버렸는데, 원승지는 사투리 때문에 무슨 욕을 하는지 몰랐다. 마른 사람은 상관하지 않고 원승지에게 권했다.
[집에 들어가 차 한잔 하시지요.]
원승지는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큰 대청이 있었는데 가운데 액자 위에 크게 세 글자가 쓰여 있었다. <세덕당(世德堂)>이라는 글자였다.
모든 설비가 깊이 고려하여 지은 것으로, 호화롭고 운치가 흘렀다. 마른 사람이 원승지에게 수좌(首座)에 앉게 한 후 하인에게 차를 가져오라고 했다. 여윈 사람은 끊임없이 원승지의 스승과 누구의 무공을 전수했는지를 물었다. 어투는 비록 겸손하고 공손했지만 그러나 원승지는 그가 적의를 품고 있음을 느꼈다.
[온청을 뵙고 그에게 물건을 전해 주고 싶습니다.]
[온청은 내 사제(舍弟)이며, 저는 온정이오. 사제는 지금 출타 중이며 곧 돌아올 겁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원승지는 이런 행동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더구나 백성들을 이용물로 삼아 무리들과 왕래하는 것은 싫었다. 그러나 온청은 이미 부재중이니 어쩔 수 없이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온정과는 실제로 별로 할 말도 없어, 둘은 침묵하여 앉아 있었다. 모두 무료함을 느꼈다. 정오까지 기다렸는데도 온청은 돌아오지 않았다. 온정은 하인을 시켜 밥을 가져오게 했는데 아주 진수성찬이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갔다.
원승지는 더 참을 수 없어, (이곳도 온청의 집안이니 금덩이를 여기에 놓아도 될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황금 보따리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이것은 동생의 물건이오. 번거롭겠지만 형씨가 전해 주십시오.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바로 이때 홀연 떠들썩한 웃음소리가 밖에서 들려 왔다. 모두 여자들의 소리로 그 중에는 온청의 웃음소리도 섞여 있었다. 온정이 알려줬다.
[사제가 돌아왔습니다.]
원승지가 나가려고 하자 온정이 말했다.
[형씨, 조금만 더 기다리십시오.]
원승지는 그의 얼굴빛을 보니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온청은 돌아오지 않았다. 온정은 대청으로 들어와, 사제가 옷을 갈아 입으로 갔으니 곧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원승지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온청이란 자는 정말 여자스럽군. 손님이 온 것을 보고는 옷을 갈아입다니!) 다시 한참을 기다리자 온청이 내당에서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자색 장삼을 입고 허리에는 황색으로 된 거위형 허리띠를 매고 머리에는 명주를 둘렀다. 얼굴엔 가득히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원형! 이곳을 왕림해 주셔서 참으로 영광입니다.]
[온형이 잊고 간 이 물건을 돌려 드리려고 왔습니다.] 그러자 온청이 노기띤 소리로 한마디했다.
[그대는 나를 멸시하는 거요!]
원승지가 공손히 대답했다.
[온형! 전혀 그럴 의도는 없소. 단지 이것을 받을 수 없을 뿐이오. 그럼 그만 가보겠습니다.]
그리고는 일어나 온정과 온청에게 각각 고개 숙여 예를 갖추었다.
온청이 그의 소매를 붙잡으며 말렸다.
[갈 수 없어요!]
원승지는 깜짝 놀랐다. 온정의 얼굴빛도 변해 있었다.
한밤중인데 창 밖에서 문득 통쾌한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원승지는 이곳에 온후부터는 잠을 잘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금방 잠에서 깨었다. 내다보니 어떤 사람이 창 밖에 앉아 웃으며 지껄이고 있었다.
[달 밝고 바람 서늘한 좋은 밤이구나. 원형은 배반할 염려가 없으니 얼마나 좋으냐.]
원승지는 온청의 말을 듣고 호기심이 생겨 밖으로 나갔다. 과연 밝은 달빛이 물에 비쳐 은가루를 뿌려 놓은 것 같았다. 창 밖에 있는 어떤 사람이 머리를 수그리고 있었는데 마치 방안을 살피고 있는 것 같았다.
[좋아, 내가 옷을 입고 나오지.]
그리고는 생각하기를, (이 사람은 사람을 끄는 힘이 있구나. 이 깊은 밤에 어째서 이러고 있을까?)
하고는 옷을 입고 나서 비수를 허리에 감춘 뒤 밖으로 나갔다.
온청이 나무에서 뛰어내리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함께 갑시다.]
그는 땅에서 대나무 바구니를 집어들었다. 원승지는 그의 술수가 무엇인지를 몰랐으나 어쨌든 함께 나갔다.
두 사람은 천천히 뒷산을 향해서 걸었다. 산은 그리 높지는 안았으나 나무가 울창하고 사방이 옅은 안개로 덮여 있었다. 두 사람은 연한 풀을 밟으며 걸었으나 발자욱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산 꼭대기에 올라가니 시원한 바람이 불고 꽃향기가 온통 그윽하였다. 멀리 바라보니 붉은색과 백색이 어울려 멋진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원승지가 감탄하며 말했다.
[정말 신선이 사는 곳 같구나.]
온청이 곁에서 대답하였다.
[이 꽃들은 모두 내가 직접 기른 것들입니다. 어머니와 소국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이곳에 들어 올 수가 없소.]
온청이 바구니를 들고 천천히 걸어갔다. 원승지는, 처음에는 경계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으나 꽃과 달을 보니 모두 사라져 버렸다.
모퉁이를 돌아가니 조그만 정자가 하나 있었다. 온청은 원승지에게 돌 위에 앉으라고 권하고 바구니를 열어 작은 술병과 술잔 두 개를 꺼내어 가득히 따르면서 말했다.
[이곳에서는 고기를 먹지 못합니다.]
원승지가 술안주를 보니 과연 모두 채소와 과일 종류뿐이었다.
온청은 또 바구니에서 퉁소를 꺼내 들었다.
[제가 한 곡조 불어 보겠습니다.]
원승지가 고개를 끄덕이자 온청이 천천히 퉁소를 불기 시작했다. 원승지는 음률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매우 아름답고 부드러운 음색이라고 느껴졌다.
온청이 한 곡을 불고나니 싱긋 웃었다.
[당신은 어떤 곡조를 좋아하십니까? 제가 당신을 위해 불어 드리고 싶어요.]
원승지가 긁적거리며 대답하였다.
[내가 아는 곡조는 아무것도 없소. 아무튼 당신은 아는 것도 많고, 어쩌면 그렇게 총명합니까?]
온청이 명랑하게 웃었다.
그는 다시 퉁소를 가다듬어 들고서 한 곡을 더 불어 주었다. 이번에는 더욱 아름다운 곡이었다. 그 음률은 사람의 마음속에 파고들어 마치 신선의 세계에 있는 듯이 느껴지게 하였다.
이때 원승지는 근처에서 꽃향기 이외에 엷은 화장품 냄새를 맡았다. 원승지는 사실 이 사람의 장부의 기개 같은 것은 별로 없지만, 그의 외모가 그런 대로 준수한데, 어째서 분 같은 것을 바르고 있는 것일까 하고 궁금하게 생각하였다.
원승지가 생각에 잠겨 있자, 온청이 물었다.
[당신은 내 퉁소 소리가 별로 좋지 않은가 보군요?]
원승지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온청은 또 퉁소를 입에 가져갔다. 이번에는 그 음색이 너무나도 처량하였다. 원승지도 정신을 똑바로 차려 듣고 있는데 갑자기 퉁소 소리가 멎었다. 그리고는 문득 온청이 그 통소를 분질러 두 토막이 나게 하였다.
원승지가 깜짝 놀라서 그에게 물었다.
[아니! 왜 그러십니까?]
온청은 고개를 숙인 채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원래 누구에게도 내 퉁소 소리를 들여 주지 않습니다. 그들은 칼만 휘두를 줄 알지 이 소리는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원승지가 조급하게 말했다.
[나는 당신을 속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정말 소리가 좋았습니다. 정말입니다.]
온청은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내일 떠나면 다시는 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내가 어찌 더 이상 이것을 볼 수가 있겠습니까?]
그는 잠시 끊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내 성격이 좋지 않은 것을 내가 잘 알죠. 그러나 저도 어쩔 수가 없군요....
당신이 나를 싫어하시는 것도 나는 압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원승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잠자코 있었다. 온청이 또 말을 이었다.
[이제 당신은 영원히 여기에 올 수 없고, 나 또한 당신을 볼 수가 없겠지요.]
그의 말뜻을 잘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매우 가슴을 아프게 하는 말이라서 원승지는 감동하여 대답하였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나는 전혀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당신은 지금, 내가 당신을 싫어할 것이라고 말하였는데, 그것은 전혀 오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온청이 낮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래요?]
원승지는 그런 그를 지켜보며 계속 이야기했다.
[내가 보기에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도대체 무슨 일인지 좀 말해 줄 수 있습니까?]
온청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말씀드리죠. 그러나 당신이 나를 더욱 싫어 할까 봐 두렵군요.] 원승지는 고개를 저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온청은 천천히 얘기를 시작했다.
[좋습니다. 말씀드리죠. 저의 어머니께서는 처였을 때 누구에겐가 속아서 저를 낳았습니다. 그 사람은 나를 낳자마자 도망갔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가 없는 사생아입니다.]
여기까지 얘기한 그는 말을 잇지 못하고 어느덧 눈물을 흘렸다. 원승지가 달래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그렇다고 당신과 당신 어머니가 이상한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이 나쁠 뿐이죠.]
이 말에 용기를 얻었는지, 온청이 겨우 말을 이었다.
[그... 그는, 나의 아버지입니다. 사람들... 사람들은 뒤에서 나와 어머니에게 욕을 한답니다.]
원승지가 조금은 흥분하여 말했다.
[어디 그렇게 무례한 사람들이 있습니까. 내가 도와 드리죠. 이제야 제가 모든 것을 알겠습니다. 나는 당신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나의 진정한 친구입니다. 나는 반드시 다시 당신을 만나러 오겠습니다.] 온청은 이 말에 크게 기뻐하였다.
원승지는 그의 기뻐하는 얼굴을 보고 자기 역시 따라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당신을 만나러 온다는 것이 그렇게도 좋은 가요?] 온청은 문득 그의 손을 잡았다.
[당신, 정말 꼭 오시는 거죠?]
원승지는 맹세하듯 거듭 강조했다.
[나는 결코 당신을 속이지 않을 겁니다.]
그때 갑자기 등뒤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원승지는 놀라서 일어났다. 어떤 사람이 냉냉하게 중얼거렸다.
[벌써 3경이 넘었습니다. 여기서 도둑모의라도 하는 겁니까?] 그 사람은 바로 온정이었다. 그는 화를 내면서 손을 허리에 대고 마치 큰 죄라도 지은 사람에게 하듯이 소리를 쳤다.
온청도 그를 보자, 노기를 띄우며 말했다.
[왜 왔습니까?]
온정이 대답했다.
[너 자신한테 좀 물어 보지 그래?]
온청이 소리를 높였다.
[나와 원형은 여기에서 달을 감상하고 있었소. 누가 당신을 청하기라도 했나요? 여기는, 어머니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어요. 셋째 할아버지 말씀을 듣지도 못했나요?]
그러자 온정이 원승지를 손으로 가르키며 물었다.
[저 사람은 그럼 어떻게 왔지?]
온청이 대답했다.
[내가 청했어요. 당신은 상관하지 마시오.]
원승지는 두 형제가 서로 기분이 상한 것 같아 불안하였다. 그래서 좋은 말로 했다.
[이제 달 구경은 다했으니, 모두 가서 쉬도록 합시다.] 그러자 온청은 완강하게 고집을 부렸다.
[나는 가지 않겠습니다. 당신도 거기 그냥 좀 앉으십시오.] 원승지가 머뭇거리며 다시 주저 앉았다.
온정은 땅만 내려다 보고 아무 말도 없다가 원승지를 증오가 가득찬 눈으로 쳐다보았다.
온청이 화가 난 듯 투덜거렸다.
[이 꽃들은 모두 내가 직접 기른 것이야. 그러니 보지 마시오.] 온정이 대답했다.
[나는 이미 다 보았으니, 이제 냄새나 좀 맡아야 되겠소.] 그리고는 코로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온청은 화가 나서 벌떡 일어나 찔레꽃 몇 송이를 꺾어 팽개치고는 훌쩍였다.
[너는 나를 속였다! 찔레꽃을 망치는 것이 너는 그렇게도 좋으냐?] 온정은 얼굴이 굳어지며 가다가 말고 다시 고개를 돌려 한마디했다.
[내가 너를 생각해서 말하는 건데, 나를 이렇게 대하면 안된다. 원승지는 광동 야만인이니 더 이상 가까이 하지 마라. 너... 너는 사생아......!] 온청은 여전히 울면서 대답했다.
[네가 나를 생각해 준다고? 너는 지금 나를 멸시하고 있잖아. 나는 원형과 여기 있을테니, 너는 할아버지께 가서 모두 물어 봐라! 너는 아주 훌륭하게 태어난 줄 아느냐?]
온정은 더 이상 대꾸 없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푹 숙인채 돌아갔다.
온청은 정자에 돌아와 앉았다. 얼마쯤 시간이 지난 뒤 원승지가 물었다.
[어째서 당신 형에게 그렇게 행동을 합니까?]
온청이 대답했다.
[그는 진짜 형이 아닙니다. 나의 어머니가 온가인데, 외가 쪽이죠. 그는 나의 어머니 당형의 아들이죠. 만약 내가 아버지가 있고 집이 있다면 더 이상 이 집에 살지 않아도 되고, 다른 사람에게 멸시 받지 않아도 될 텐데.......] 여기까지 말하고는 그는 또 눈물을 흘렸다.
원승지가 달랬다.
[내가 보기엔 그 사람도 당신을 좋게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도리어 당신이 그를 나쁘게 생각하는 건 아닌지요?]
온청은 갑자기 부드러운 얼굴로 웃음을 보였다.
[나는 그를 나쁘게 보지 않습니다. 그가 오히려 날뛰는 것입니다.] 원승지는 그가 울다가 웃다가 하는 것을 보고, 조금은 이상하게 생각되기도 하였으나 자기의 신세를 생각하고는 오히려 동병상련(同病相憐)의 감정을 느꼈다.
[제 아버지는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때 내 나이 7살이었고, 나의 어머니도 그해에 돌아가셨습니다.]
온청이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당신은 원수를 갚았습니까?]
원승지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나는 정말 불행.......]
[당신이 원수를 갚을 때 나도 반드시 돕겠습니다.]
원승지는 그 말에 감격하여 상대방의 손을 움켜잡았다. 온청이 계속 뒷말을 이었다.
[당신은 나보다 훨씬 강합니다. 그러나 나도 도움이 될 때도 있을 것이니, 마땅한 계제만 된다면 반드시 당신을 돕겠습니다.]
원승지는 감격스러운 어조로 받았다.
[당신은 정말 훌륭합니다. 나는 일년 동안 거의 친구가 없었는데, 지금 이렇게 당신을 만나다니.......]
온청이 숙연히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나는 성격이 좋지 않습니다. 아마 당신에게 폐 끼치는 일도 많을 것입니다.]
원승지가 호쾌하게 웃었다.
[나는 이미 당신을 친구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깊은 마음도 이미 알고 있으니 더 이상 개의치 마십시오.]
온청은 기쁜 얼굴로 수긍했다.
[그러면 저는 안심하겠습니다.]
원승지는 그의 태도가 조금전과 전혀 다르게 변한 것을 보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내가 하는 말을, 온형은 들어주시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나는 세 사람의 말만 듣습니다. 첫째는 어머니이고, 둘째는 셋째 외할아버님이고, 그리고는 바로 당신입니다.]
원승지도 마음속에 있는 말을 꺼내었다.
[당신이 나를 이렇게 믿어 주지만, 사실 다른 사람의 말도 옳으니 들을 건 모두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온청은 단호했다.
[나는 듣지 않겠습니다. 비록 사람들 말이 옳다고 해도 나는 그들의 말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원승지가 웃으면서 달래었다.
[당신은 정말 어린아이 같군요. 당신 지금 몇 살입니까?] [18살입니다. 당신은요?]
[나는 당신의 두 배쯤 됩니다.]
그러자 온청이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나는 친형이 없습니다. 우리 아주 의형제를 맺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원승지는 갑자기 듣는 말이기도 하거니와 무슨 큰일이라도 생길 것을 염려하여 얼른 대답할 수가 없었다.
온청은 그가 대답하지 않는 것을 불쾌하게 여겼는지 갑자기 일어나 정자에서 달려나갔다. 원승지는 놀라서 황급히 그 뒤를 쫓아가며 물었다.
[온형제, 내가 화나게 했습니까?]
온청은 그의 <형제>라는 말을 듣더니 기쁜 얼굴로 대답했다.
[당신은 나를 싫어하지 않는군요. 그럼 어떻게 사람들에게 형제가 된 것을 알리죠?]
원승지가 말했다.
[자! 그렇다면 우리 여기서 맹세하기로 하지!]
두 사람은 달을 보고 꿇어앉아 어떤 외로움도 함께 할 것을 맹세했다. 온청은 일어나서 원승지에게 절을 하고 씩씩하게 <큰형!> 하고 불렀다. 원승지도 마주 절을 했다.
[너는 나의 동생이다. 자, 지금은 너무 늦었으니 오늘은 그만 가서 자기로 하자.]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왔다.
다음날 아침, 원승지가 아침을 먹고 있는데 온청이 방으로 들어섰다.
[형님, 밖에 어떤 여자가 와서 금을 요구하는데 함께 나가 봅시다.] 원승지가 좋다고 했다. 두 사람이 대청 입구에 왔을 때였다. 발걸음 소리가 급하게 들려 왔다. 대청으로 들어가니 온정이 점을 치는 젊은 여자를 상대로 무술을 단련하고 있었다. 옆에는 두 명의 노인이 지켜보고 있었다. 한명은 막대기를 가지고 있었다. 다른 한명은 공수를 하였다. 온청이 막대기를 가진 노인에게 다가가 뭐라고 귓속말을 하였다. 그 노인은 원승지를 자세하게 뜯어 보고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소녀는 대략 18, 9세쯤 되어 보였다. 용모가 수려하였으나 대련 때에 법도가 엄하였다. 원승지는 그녀의 검법이 볼수록 의아하였다.
그 소녀가 장검으로 온정의 어깨를 겨누고 앞으로 나가자 그가 즉각 반격하였다. 그런데 그 속력이 너무나 빨라 그 소녀의 장검이 온정의 단도를 떨어뜨렸다. 온정도 빨랐지만, 그 소녀는 더욱 빨라서 상대가 안되었다. 온정이 놀라 뒤로 몇 발자욱 물러섰다. 소녀는 앞으로 곧장 나가 장검을 휘두르며 민첩하게 공격하였다.
원승지는 이미 그녀의 무예가 대단하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온청도 소녀가 온정의 적수가 못된다는 것을 알았는지 냉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온가의 무예는 물건이나 공격하면 딱 알맞겠다!]
소녀가 다시 칼을 움켜쥐고 공격을 하자 온청은 더욱 분발하여 한칼 한칼 결연히 내리치며 공격하였다. 형세가 바뀌어 이번에는 소녀가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원승지는 정세의 급박함을 보고, 갑자기 두 사람 사이로 뛰어들었다. 두 사람의 싸움은 어찌나 긴장되었는지 숨돌릴 틈도 없는 것 같았다. 날카로운 칼이 달리는 소녀의 몸을 내리쳤다. 온청이 놀라서 소리쳤다. 두 노인도 모두 일어났으나 나와서 도와주지는 않았다. 원승지는 오른손으로 온청의 팔을 붙잡아 가볍게 밀고 왼손으로는 소녀의 팔을 붙잡아 끌어 그를 넘어뜨렸다. 사람들은 놀라서 소리도 지르지 못하였다.
원승지가 소녀에게 말했다.
[아가씨는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할 말이 있습니다.] 그 소녀는 화가 나서 말했다.
[당신들과는 상대하지 않겠습니다. 겨뤄보고 싶은 사람은 돈을 가지고 오시오.]
원승지가 대답했다.
[아가씨, 날 이상히 여기지 마시오. 누구에게서 사사를 받았는지 좀 알고 싶습니다.]
그러자 그 소년는 비웃는 듯한 소리로 대답했다.
[귀찮게 굴지 마십시오. 제발!]
그러더니 곧장 밖으로 나가 버렸다.
원승지가 뒤따라가며 말을 붙였다.
[가지 마시오. 내가 당신을 돕겠소.]
그러자 소녀는 멈춰서며 물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원승지가 정색을 하고서 대답했다.
[나는 원가라는 사람이오.]
그러자 소년는 상대방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갑자기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그럼, 혹시 안대랑이라는 사람을 아십니까?] 원승지는 그 말에 갑자기 몸을 떨며 손을 마주 쥔 채 급히 되물었다.
[나는 원승지요. 그러면 당신은 소혜?]
소녀는 대답 대신 원승지의 손을 왈칵 잡으며 외쳤다.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은 승지오라버니이시군요!] 원승지는 남녀가 유별하다는 생각이 나서 얼굴을 붉히며 손을 놓았다. 온청도 이것을 보고 얼굴이 굳어졌다.
온청이 한마디했다.
[원형이 누구입니까? 원래 이자성이 파견했던 사람 아닙니까?] 원승지가 대답했다.
[나와 츰왕은 인연이 깊습니다. 이 아가씨와도 대대로 친분이 있습니다. 두 분이 왜 싸우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서로 화해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안소혜가 대신 말했다.
[승지오라버니, 그들은 당신의 친구입니다. 만약 돈을 준다고 해도 일체 받지 않겠습니다.]
이때 온청이 냉담하게 잘라 말했다.
[그렇게 쉽게 되겠습니까?]
원승지가 온청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동생, 당신에게 소개하겠습니다. 이분은 안소혜입니다. 우리는 어릴 때 함께 자랐는데, 10년 동안을 만나지 못했었습니다.]
온청은 못마땅한 듯이 안소혜를 쳐다보기만 할뿐 인사는 커녕 말도 걸지 않았다. 원승지는 다만 감개무량한 얼굴로 안소혜에게 물었다.
[어떻게 나를 알아 봤지?]
안소혜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 눈썹 위의 상처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어릴 때 나쁜 사람이 나를 해치려고 할 때 나를 구해 주셨잖아요. 그걸 벌써 잊어버렸습니까?] 원승지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날 우리들은 소꿉장난을 하며 놀고 있었지.......] 온청은 화가 나서 무뚜뚝하게 말했다.
[당신들은 그러니까 죽마고우로군요. 나는 이만 가야겠습니다.] 원승지가 황급하게 그를 잡아 당겼다.
[잠깐만 기다리시오. 소혜야! 그런데 너는 어째서 이분의 형님과 싸웠지?] 안소혜가 우물쭈물하였다.
[나와... 최사형.......]
원승지가 황급히 다그쳐 물었다.
[최사형? 최추산 숙부 말이냐?]
안소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그는 최추산 숙부의 조카입니다. 우리는 츰왕의 군량을 점동까지 호송하고 있었는데, 그 사람이 빼앗아 갔던 겁니다.]
그의 시선은 온청을 가리키고 있었다.
원승지는 순간 마음이 어지러워졌다. 최추산, 안대랑, 안소혜 이 세 사람은 모두 옛날부터 잘 아는 사이 아닌가? 당연히 그들을 도와야 했다. 하물며 츰왕이 천리밖에서부터 황금과 군량을 강남으로 운송한다는 것은 기필코 무슨 중대한 일이 있는 것이다. 그는 인의를 중히 여기는 사람인데, 어찌 돕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당장 마음을 정하고 난 승지가 온청에게 물었다.
[동생, 당신은 나의 얼굴을 봐서라도 황금을 이 아가씨에게 돌려주시오.] 그러자 온청이 고개를 저었다.
[먼저 우리 할아버지를 만나서 말하세요.]
원승지는 그의 할아버지를 찾아가 인사를 올렸다. 막대기를 가진 노인이 반겨 주었다.
[아! 원형, 들어오시오. 온청에게 들으니, 원형의 무공이 뛰어나다고 하던데, 보아하니 과연 훌륭하더구료.]
온청이 옆에서 설명했다.
[이분이 셋째 할아버지이십니다.]
또 다른 노인을 소개하였다.
[이분은 다섯째 할어비지이십니다.]
한 사람은 온방산이고, 한 사람은 온방오라고 이름까지 알려주었다. 원승지는 이 두 사람이 석량파의 다섯 우두머리 중 둘이라는 걸 알았다. 셋째 할아버지의 무예는 온청이나 온정보다 더 뛰어나다고 들었었다. 그래서 그는 소리를 높여 말했다.
[셋째 할아버지! 다섯째 할아버지!]
두 노인은 똑같이 겸손해 했다.
[그렇게 부르는 것은 당치도 않소이다.]
두 노인의 안색이 그리 즐거워 보이지는 않았다.
원승지는 은근히 화가 나서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나의 아버지는 청에 대항한 명장으로 요동의 장군이셨다. 나와 당신들의 손자는 의형제를 맺었는데, 그럴수가 있는가.)
그래서 온청에게 말했다.
[이 아가씨의 금을 동생이 직접 돌려주시오.]
온청은 화를 머금은 얼굴로 말했다.
[당신은 아가씨, 아가씨 하면서 우리를 안심시키려 하지 마시오!] 원승지가 달래었다.
[동생, 우리들은 의리를 중히 여기라고 배웠습니다 이 금은 마땅히 츰왕의 것인데, 돌려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두 노인은 그 황금이 이렇게 중대한 일에 쓰일 것인지는 모르고 그저 어느 거부의 물건인 줄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안소혜와 원승지의 말을 듣고는 불안해 했다. 그들은 이미 츰왕의 세력이 얼마나 큰지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황금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어떤 후환이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온방산이 웃으며 대답했다.
[원형의 얼굴을 봐서라도 돌려주도록 합시다.]
온청이 황급히 가로막았다.
[안됩니다! 그건!]
원승지가 답답해서 외쳤다.
[너는 나와 의형제까지 맺어 놓고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 그러자 온청이 부르르 떨었다.
[당신이 원한다면 나의 모든 것을 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저 아가씨가 와서 무례하게 행동했으니 절대로 돌려주지 않겠다 그거요!] 안소혜가 걸어와서 그에게 항의를 했다.
[당신은 어째서 그럴 수가 없다는 거요? 당장에 돌려주세요!] 온청이 원승지를 보며 흥정하듯 외쳤다.
[당신은 이 여자를 도울거요? 아니면 나를 도울거요?] 원승지는 잠깐 주저하였다.
[나는 아무도 돕지 않습니다. 단지 사부의 말씀을 들을 따름이오] [사부? 당신의 사부가 도대체 누구요?]
[나의 사부는 츰왕의 군대에 있지.]
온청이 화를 내었다.
[흥! 결국은 그녀를 돕겠다는 거로군요? 그러면 내가 금을 훔쳐 왔으니, 당신도 내 손에서 훔쳐 가시오. 사흘 이내에 가져가야지, 사흘이 지나도 가져가지 않으면 나는 더 이상 두지 않고 하루에 몽땅 써 버리겠소.] 원승지는 놀라며 그에게 되물었다.
[이렇게 많은 황금을 어떻게 하루에 다 쓴다는 것이야?] [어렵지 않습니다. 큰 길에 내다 놓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나눠가지라고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원승지는 기가 막혀 그의 옷자락을 끌며 말했다.
[동생, 나와 저리 좀 갑시다.]
두 사람은 대청의 구석으로 갔다. 원승지가 그를 달래었다.
[어제 너는 내 말을 듣겠다고 해 놓고서 어째서 반나절도 안돼서 이렇게 변했단 말이냐?]
온청은 고개를 숙였다.
[당신이 나에게 잘 대해 주었으니, 나도 당연히 당신의 말을 들어야 하겠지요.]
원승지가 다시 물었다.
[내가 그럼 너에게 잘못한 거라도 있느냐? 정말 금을 못 돌려주겠단 말이냐?]
온청은 눈 주위가 붉어지며 말했다.
[당신이 한사코 그 여자만 보호하려고 하니, 어찌 제가 마음을 놓을 수 있겠습니까? 또 츰왕의 돈을 어떻게 다 써 버리겠습니까? 돌려주지 않으면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평생 동안 나를 상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말을 하고 나서 그는 눈물을 흘렸다.
원승지는 그의 말에 기분이 우울해졌다.
[너와 나는 의형제를 맺은 사이고, 그녀와 나는 옛날부터 아는 사이이다. 나는 둘을 똑같이 대하는 거지. 결코 달리 생각해 본적이 없다. 그런데 너는 왜 자꾸만 그러느냐?]
온청은 즉각 내뱉듯이 말했다.
[나는 당신이 똑같이 보는 것이 싫습니다. 더 말할 필요 없으니 내 말대로 사흘 내에 다시 훔쳐 가란 말이오!]
원승지는 그의 손을 잡고 잠시 달래 봤으나 온청은 끝내 손을 뿌리치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원승지는 안소혜와 함께 그 집을 나와 농가를 빌려 묵으면서 금을 잃게 된 경위를 물었다.
원래 금을 호송하던 사람은 모두 세 명이었는데, 중간에 어떤 일을 만나 그들과 헤어지고 나서 온청을 만났다는 것이다.
안소혜가 원승지에게 물었다.
[승지오라버니, 몇 년 동안을 그래 어디서 무엇을 하셨나요?] 원승지가 웃으며 대답했다.
[매일 매일 무술을 단련했다. 그 이외에는 전혀 한 일이 없어.] [당신의 무예가 그렇게 강하니 아까도 나를 가볍게 넘어뜨렸겠죠?] [너는 어떻게 화산파의 검법을 할 줄 아느냐? 누가 너에게 가르쳐 주었지?] 안소혜는 눈 주위가 붉어지며 고개를 숙이고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대답했다.
[바로 최사형에게서 배웠습니다. 그는 화산파입니다.] 원승지는 의외의 말에 놀라서 물었다.
[그의 상처는 어떻게 되었느냐? 그리고 너는 얼마나 고생을 했느냐?] [그가 상처를 입었다구요? 그는 사람들에게 알리지도 않고 먼저 떠나갔습니다.]
원승지는 그녀의 아픈 곳을 건드리는 것 같아 더 이상 묻지를 않았다.
5경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두 사람은 금을 훔치러 갔다. 원승지가 살금살금 지붕 위로 올라가 보니, 대청에 불을 환히 밝히고 온방산 온오방이 함께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온정과 온청은 옆에 서 있었다. 원승지는 황금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그들의 말을 엿들어 보려고 바싹 긴장하고 있었다. 그때 온청이 웃으면서 고개를 들어 지붕 위를 쳐다보며 말했다.
[금은 바로 여기에 있으니, 수완이 있다면 와서 가져가도 좋소!] 그러자 안소혜가 원승지의 옷을 잡아당기며 속삭였다.
[그는 이미 우리가 온 것을 알고 있나 봅니다.]
원승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보니 온청이 탁자 아래서 두 개의 보따리를 꺼내어 탁자 위에다 올려놓고 그것을 풀었다. 황금은 촛불 아래서 더욱 휘황찬란하게 빛났다. 온청과 온정도 이젠 칼을 옆에 놓고 그 옆에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한참을 기다렸으나, 네 사람은 조금도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오늘밤에는 훔칠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고 숙소로 되돌아 왔다.
다음날 밤에도 두 사람은 다시 훔치러 갔다. 그러나 여전히 네 사람이 지키고 있었다. 단지 두 노인만이 바뀌었고, 5형제중 나머지 세 사람은 어두운 곳에 숨어 있었다.
원승지가 안소혜에게 말했다.
[저들 중 무예가 능한 자는 숨어 있으니 조심해라!]
안소혜는 머리를 끄덕이며 마음을 굳게 다지고는 아래로 뛰어 내렸다. 그녀는 집 뒤의 부엌으로 가서 불씨를 찾아 집 옆에 쌓여 있던 건초 더미에 불을 붙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불길이 하늘에 치솟았다. 집안이 어수선해지고, 장정들은 물을 퍼 나르며 불을 끄려고 야단이었다.
두 사람이 대청으로 왔을 때, 불빛은 여전히 밝았다. 네 사람은 어느새 보이지 않았다. 안소혜가 기뻐하며 말했다.
[그들은 불을 끄러 갔군요!]
두 사람이 탁자 아래로 손을 뻗으려고 했을 때였다. 갑자기 발이 아래로 빠졌다. 원승지는 재빨리 몸을 빼냈다. 그리고는 안소혜를 힘껏 끌어 당겼으나 그는 붙잡지를 못했다. 발 아래는 푹 빠지는 장치가 되어 있었다. 그는 대청 안에 있는 서까래를 붙잡았으나 미끄러져 내려 서까래 끝을 밟고 섰다. 이때, 마루 바닥이 잠시 덜컹 걷히면서 안소혜는 밑으로 갇혀 버렸다.
원승지는 놀라서 밖으로 뛰쳐나와 대청 바닥을 살피며 그를 구할 방법을 강구하였다. 원승지가 다시 지붕 위로 뛰어 올라 바라보니, 지붕위에는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원승지는 첩첩히 둘러 싸여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으나 곧 정신을 집중시켰다.
그런데 그 사람들 틈에서 다섯 노인들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온방산과 온방오가 엎드려 절을 하자, 다른 사람들도 모두 고개를 숙였다. 우두머리인 듯한 사람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5형제는 외진 고향에 있었을 때 츰왕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하하하!]
원승지도 마주 절을 하고 나서 대답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온청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이분들은 대사부님들이십니다. 한 분은 둘째 사부님이시고, 한 분은 넷째이십니다.]
원승지는 그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했다.
석량파의 5대 사부 중 첫째인 온방달, 둘째인 온방의, 그리고 넷째인 온방시는 인사를 받아 주었으나, 여전히 예의가 없었다. 온방의가 노기를 띤 목소리로 외쳤다.
[너는 나이도 어린데 담이 크기도 하구나! 감히 우리 집에 불을 지르다니!] 원승지가 말했다.
[그것은 진정 죄송하고 송구한 행동이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불이 크게 번지지 않아 정말 다행입니다. 내일 다시 와서 여러분께 백배 사죄를 드리겠습니다.]
온정의 할아버지 온방시는 몸이 크고 말라 온정과 매우 흡사하였다. 그가 원승지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하였다.
[백배사죄? 어린 녀석이 간도 크게 감히 석량파를 어지럽히다니! 너의 사부는 대체 누구냐?]
원승지가 대답했다.
[저의 사부님은 지금 츰왕의 군대에 계십니다. 만약 여러분께서 츰왕의 금을 돌려주시면 내일 사부님에게 편지를 띄워 은혜를 전하겠습니다.] 온방의가 조급하게 되물었다.
[너의 사부가 대체 누구냐?]
원승지가 다시 대답했다.
[사부님께서는 사람이 적은 한적한 곳에 계십니다. 감히 이름을 댈 수가 없습니다.]
이번엔 온방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말할 수 없다고? 설마 우리를 속이려는 것은 아니겠지? 남양아, 이 녀석에게 자백을 받아 내거라!]
군중 속에서 대답을 하며 나오는 사람이 있었다. 약 40세 정도 되어 보였는데, 바로 온방의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는 앞으로 나와 원승지를 한 대 갈겼다. 꽤 힘이 들어가 있었다.
원승지는 빠져나가기 힘들겠다고 생각하면서 공격을 막고 있었다. 그는 계속 숨쉴 틈도 없이 공격하다가 원승지의 한 방에 즉각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온방오가 그를 손짓해 불렀다.
그는 안으로 들어갔다가 잠시 후에 다시 얼굴이 붉어진 채 나와서 재차 덤벼들었다.
원승지는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서서 공격을 기다리다가, 몸을 슬쩍 뒤로 피하고는 왼발로 가볍게 찼다. 온남양은 힘없이 앞으로 꼬꾸라졌다. 그는 원승지를 노려보다가 그냥 물러가 버렸다.
이때 온청이 갑자기 나타나 온방의의 귀에 대고 뭐라고 속삭였다.
[둘째 사부님, 그는 나와 의형제를 맺었습니다. 크게 상처 입히지는 마십시오.]
그러자 온방의가 그를 크게 나무랐다.
[못난 녀석 같으니라구!]
온청은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대답해 주십시오!]
온방의가 손을 빼며 소리쳤다.
[넌 가 보아라!]
온청은 불안한 듯이 서 있다가 마지못해 몇 발자욱 자리에서 물러났다.
온방의가 조용히 나서며 말했다.
[어서 고해라!]
원승지는 결연하게 대답했다.
[말할 수 없습니다.]
온방의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정말로 네가 사부의 이름을 대지 못하겠느냐?]
원승지는 그의 노기띤 얼굴을 보고 대답했다.
[나의 무예에도 한계가 있으니, 오히려 한 수 배우고 싶습니다.] 온방의가 결연히 소리쳤다.
[좋다, 시작해라!]
원승지는 정중하게 절을 하고 웃옷을 벗어 지붕 위에 걸쳐 놓고는 소리를 지르며 온방의의 머리를 공격하였다. 온방의는 머리를 숙여 가볍게 피하고 손으로 옷을 움켜 쥔 채 매가 공격하듯 덤벼들었다. 원승지는 그에게 여유를 주지 않고 몸을 돌려 사납게 등을 공격하였다.
온방의는 그가 뛰어 오르려고 하자, 오른손에 힘을 모아 강풍으로 기습하였다. 마치 소매에서 긴 뱀이 뻗어 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곧 그 기세도 사라지고 말았다.
원승지는 몸을 돌려 웃으면서 우뚝 섰다. 온청이 그의 몸놀림이 기묘한 것을 보고 좋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고는 황급히 손으로 입을 막았다.
온방의는 견식도 넓었으나, 소매를 이용하는 권법은 어느 파에서 나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원승지는 제 1권법은 화산파의 호장법이었고, 제 2권법은 목상의 권법에서 변화되어 나온 것이었고, 제 3권법은 금사의 금사비급에서 얻는 것이었다.
온방달 등 5형제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온방의는 얼굴이 온통 붉어졌다. 그는 눈썹을 치켜세우고는 돌연히 공격을 해 왔다. 달빛 아래에서 원승지가 그의 머리를 보니, 열기가 뻗쳐 올랐으나 발 동작은 오히려 둔하여 이상해 보였다. 그러나 그는 자기 문파를 해친 것에 대해 매우 화가 나서, 가장 평범한 호행전법을 사용했다. 그러나 이 권법은 무예를 배우는 사람이면 누구나 단련하는 것이었다.
온방의는 비록 손놀림이 빠르지는 않았으나 큰 힘을 품고 있었다. 8, 9차례 권법으로 공격을 당하고 나서 원승지는 문득 상대방의 장풍에서 열기가 느끼고 그의 손바닥을 보니, 중심에서 붉은 피가 흘렀다. 달빛 아래서 보니 더욱 참담하여 무섭기까지 하였다. 예전에 원승지가 사부에게서 들은 바로는 이런 장력(掌力)은 실제로 평범하나 그 힘이 점점 강해진다고 들었다.
한창 싸우고 있을 때였다. 온방의가 갑자기 오른팔에 통증을 느끼고 급히 피하여 보니, 팔에 붉은색이 선명하게 많이 부어 있었다. 온방의는 몹시 화가 났으나 다시 계속 싸울 수가 없었다.
온방산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원형은 비록 나이는 어리나 무예가 뛰어나서 쉽게 쓰러뜨릴 수가 없군요.
오히려 저희들이 당신에게 한 수 배워야 되겠습니다.]
원승지가 대답했다.
[제가 어떻게 감히 상대가 되겠습니까?]
온방산이 호탕하게 웃으며 전했다.
[당신은 정말 담이 크십니다. 자! 모두 도장으로 갑시다!] 그러면서 먼저 가볍게 땅으로 뛰어 내리자 사람들도 모두 뒤따랐다. 원승지도 사람들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온청이 그의 옆으로 오서 가만히 말했다.
[지팡이 속에는 무기가 들어 있습니다.]
원승지가 은연중 놀라 뭐라고 하려 하자 온청은 이미 온정에게 무슨 얘기를 듣고 있었다.
[이봐, 광동 야만인이 어떠냐? 지금 항복하는 것이 좋을걸?] 온정이 빈정거렸다.
[둘째 사부님께서는 너를 총애하고 있는데, 그분을 화나게 해서 무슨 좋은 일이 있겠느냐?]
온청이 냉담하게 돌아서며 더 이상 상대하지 않았다. 도장은 굉장히 넓었다.
수십 개의 횃불로 대낮같이 밝았다.
이 집안은 남자나 여자나 모두 무예를 익힌 사람들이다. 셋째 대사부와 손님, 그리고 심지어 어린아이까지도 모두 도장에서 나왔다.
제일 나중에 중년의 여자와 소국도 함께 나왔다. 온청이 소리 높여 <어머니> 하고 부르자, 그 여인은 조심스러운 얼굴로 온청을 바라보았다.
온방산이 무기를 세워 놓은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는 어쩐 무기를 고르겠느냐?]
온청이 원승지의 눈을 쏘아보며 물었다.
[셋째 사부님은 후배들을 가장 사랑하십니다. 절대로 당신을 다치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온방산은 이 말을 듣고 더욱 통증을 느꼈다. 그의 어머니가 나섰다.
[청아, 가만히 있거라.]
온방산은 온청을 보고 말했다.
[너는 어떻게 되는지만 보고 있거라. 원형, 어떤 무기를 쓰겠소?] 원승지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그의 옆에 6, 7세 되는 남자아이가 장난감 물건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형형색색으로 칠해져 있었고 긴칼의 반정도 길이였다. 그는 아이에게로 걸어가서 그에게 말했다.
[얘, 아가야. 나에게 그 칼을 좀 빌려주겠니?]
그 어린아이는 생긋 웃으며 그 칼을 원승지에게 내밀었다.
원승지는 그것을 받고 나서 온방산에게 말했다.
[후배가 감시 선배와 진짜 무기를 가지고 맞설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이 목검을 사용하겠습니다.]
그는 상대방의 눈을 쏘아보며 겸손하게 대답했다.
온방산은 이 말을 듣자 손과 발을 흔들며 호탕하게 웃었다.
[내가 무예를 익히고 나서부터 이런 웃기는 일은 처음이다. 좋다! 네 뜻이 정녕 그렇다면 내 철봉으로 목검을 조각나게 해주마!]
그는 와락 소리를 지르며, 먼저 원승지의 허리를 공격해 왔다. 눈 깜짝 사이에 원승지는 철봉에 맞아 쓰러지고, 목검은 땅에 떨어졌다. 온방산은 다시 그의 급소를 공격할 태세를 취하였다.
원승지는 아까 온청이 지팡이에 무기를 숨겨져 있다고 말해 준 것이 생각났다. 원승지는 공격을 피하며 목검을 쥐고 다시 대항하였다.
온방산의 손놀림과 동작은 어찌나 민첩하고 신속한지 원승지도 감탄할 지경이었다.
두 사람의 대결은 더욱 격렬해져 갔다. 온방산의 철봉은 <쉬익쉬익> 바람소리를 내며 마루 바닥을 쳐서 갈라지게 했고, 사람들은 모두 그 소리에 깜짝깜짝 놀랐다. 원승지는 그런 중에도 나비처럼 가볍게 움직이며, 민첩하게 목검을 휘둘러 상대를 위협했다.
이렇게 막상막하로 접전이 계속되자, 온방산은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여기서는 자기가 가장 철봉을 잘 다루어 감히 덤빌 자가 없었는데, 오늘 이렇게 까마득한 후배에게도 이기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정말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옆에서 구경하는 사람들도 싸움이 더욱 더 격렬해지자 점점 뒤로 물러나 벽에 모두 붙어 섰다.
원승지가 무술을 닦고 하산한 후로 이렇게 강한 상대를 만나 본 적이 없었다. 또한번 목검과 철봉이 서로 부딪쳤다. 두 사람은 조금도 양보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원승지는 쉽게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하고 잠시 멈추었다. 그러자 온방산이 더욱 힘을 가하여 공격했다. 원승지는 왼손으로 철봉의 끝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목검을 들고 온방산의 오른쪽 어깨를 내리쳤다.
온방산은 놀라서 소리를 질렀으나, 철봉은 이미 원승지에게로 빼앗긴 뒤였다.
원승지는 자신의 의형제인 온청의 외할아버지이며 어른이신 그를 이기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목검을 줍고 나서 철봉도 돌려주었다. 그런데 온방산이 또 지팡이를 휘두르며 공격했다. 원승지는 이미 물러났는데 어째서 노인이 이렇게 이해를 하지 못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지팡이의 끝부분에서 철못이 튀어나와 그의 몸을 공격하자, 그는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온청은 세태의 위급함을 보고 안색이 변하였다.
그러나 원승지는 목검을 휘둘러 철못을 모두 땅에 떨어뜨렸다. 이것은 화산검법으로 <공작개병>이라고 불렀다. 원승지는 숨겨진 무기를 부수고 목검을 치켜들고는 철봉 끝을 거세게 눌렀다. 목검은 비록 약하기는 하였지만 노인은 그 힘을 당하지는 못하였다.
온방산이 철봉을 땅에 떨어뜨리자 원승지가 잽싸게 그것을 발로 밟았다. 온방산이 힘을 다해 빼내려고 하였으나 그것은 역부족이었다. 사방에서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생전 처음 보는 이 사태에 모두 깜짝 놀랐다.
원승지가 발을 치우자, 온방산은 안색이 변하면서 두 손으로 철봉을 들어 지붕 위로 던져 버렸다.
[이 무기들을 너의 목검과 바꾸자!]
원승지는 그가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씩씩거리는 것을 보고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이것은 당신이 내게 준 것이다. 철봉과 바꿀 수는 없다!) 지붕 위에서 기왓장의 조각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때 온방시가 나서며 말했다.
[젊은 사람이 무기를 다루는 실력이 뛰어나군. 그러면 나와 표창으로 겨뤄 보는 것이 어떤가?]
그는 허리에서 가죽끈을 풀어 등을 걸었다. 가죽끈에는 표창 24개가 꽂혀 있었는데, 모두 날카로워 보였다. 원승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면 선배님께 한 수 배우겠습니다.]
그는 목검을 어린아이게게 돌려주었다.
온씨 집안의 사람들은 셋째 사부의 표창이 얼마나 날카롭고 민첩한 동작인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도장 밖으로 흩어져 문밖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온방시가 표창을 던졌다. 그것은 번개처럼 날아갔다. 그의 표창은 더욱이 쇳소리를 내서 보는 사람들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원승지는 두 개의 동전을 꺼내어 왼손에 하나, 오른손에 하나씩 들고 표창을 던졌다. 먼저 왼손에 있는 동전을 던지고 표창을 날려 그것을 조각나게 했다. 오른손의 동전도 연달아 바닥으로 떨어졌다. 표창보다는 동전이 훨씬 작고 가벼웠으나, 표창은 그것을 정확히 맞추었던 것이다. 그러자 온방시의 안색도 변하며 원승지와 같은 네 개의 동전을 맞추어 떨어뜨렸다. 그러자 원승지는 오른손에 여섯 개, 왼손에 여섯 개, 합이 12개의 표창을 손에 쥐고, 창을 세워 놓은 곳을 향했다. 그러고는 연달아 12개를 정확하게 사이사이에 끼워 넣었다.
온방달은 원승지의 재주가 비상한 것을 보고 분명히 훌륭한 사람의 제자일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때 갑자기 다섯 사부가 일제히 원승지의 주위에 몰려들며 험상궂게 물었다.
[너는 금사도적파가 아니냐?]
원승지의 칼을 쓰는 수법은 분명히 <금사비법>이었다. 다섯 형제들의 태도가 험악하게 나오자 원승지는 흠칫 놀라서 물러섰다. 그가 뭐라고 대답을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밖에서 세 사람이 들어왔다. 그 중 하나는 안소혜였다.
두 명의 남자가 그녀를 묶어서 포로로 데리고 있었다. 원승지는 그녀를 구하려고 한 마리의 학이 하늘을 나르듯이 날아 밖으로 나왔다. 온방달과 온방의가 무기를 가지고 즉각 추적해 왔다.
원승지는 곧장 안소혜에게로 가서 두 명의 남자들을 쓰러뜨렸다. 원승지가 소혜의 손에 있던 결박을 풀어주자 안소혜는 기뻐서 소리쳤다.
[승지오라버니, 고맙습니다!]
그때 온방달이 노기가 충천하여 살기까지 띤 채 밖으로 나왔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나와 5형제들 뒤에 섰다.
온방달이 원승지를 가리키며 험악하게 물었다.
[금사도적은 어디에 있느냐? 빨리 말하라!]
원승지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화내지 마시고, 좋은 말로 하십시오.]
그러자 온방의가 버럭 화를 내었다.
[금사는 어디에 있느냐, 너는 그 사람이 보낸 것이지?] 원승지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금사랑이란 사람을 본적도 없는데, 어떻게 그나 나를 보냅니까?] 온방의가 다시 물었다.
[그 말이 사실이냐?]
[내가 어떻게 당신을 속이겠습니까? 도대체 금사랑과 내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까?]
그러자 다섯 형제의 안색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러나 여전히 의심하는 것 같았다. 온방달이 나섰다.
[네가 끝내 금사가 숨어 있는 곳을 말하지 않는다면 오늘 석량을 나갈 생각은 아예 하지 말아라!]
원승지는 속으로 생각했다.
(너희들이 나에게 입을 열게 하다니 소용없는 짓이다. 또한 너희들이 금사랑군을 말할 때마다 <금사도적>이라고 부르니, 더욱 말할 수 가 없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공손하게 말했다.
[저와 금사는 아무 관계도 없고, 얼굴도 본 적도 없습니다. 그리고 어디에 있는지도 정녕 모릅니다.]
온씨 다섯형제들은 앞을 다투어 물었다.
[누군지도 모른다고?]
[십여년 동안을 두고 우리는 단 하루도 그를 찾아 않은 날이 없었다.] [그 도적은 이미 폐인이 되었는데, 누가 그를 두려워하겠는가?]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빨리 말하라!]
원승지가 틈을 보아 담담하게 웃으면서 물었다.
[당신들은 정말로 그를 보길 원합니까?]
온방달이 한 걸음 나서며 대답했다.
[그렇다!]
원승지가 다시 웃으며 그에게 물었다.
[그를 보아서 뭘 합니까?]
온방달이 드디어 화를 내었다.
[이봐, 지금 누구를 놀리는 것이냐? 빨리 말하라!]
원승지가 천천히 대답했다.
[여러분은 건강하니 아마 몇 년 후에 만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는 이미 죽었지만.......]
이 말을 듣고는 모두들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러자 온청이 다급하게 말했다.
[어머니, 어떻게 하죠?]
원승지가 고개를 돌려보니, 그 중년 부인의 얼굴이 창백하고, 입술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온방산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업보(業報)이니라.]
온방의가 온청에게 한마디했다.
[청아, 어서 어머니를 모시고 들어가거라. 여기서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게.......]
온청이 울면서 말했다.
[무엇이 추합니까? 어머니가 지금 아버지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상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원승지는 그 말에 놀라서 주춤하다가 물었다.
[그의 어머니가 금사의 아내입니까? 그렇다면 온청이 그의 아들입니까?] 온방산이 더 듣기 싫다는 듯 온청을 꾸짖었다.
[누가 네 아버지냐? 왜 이런 망말을 하느냐? 너 어서 들어가지 못하겠느냐?]
온청은 어머니를 부축하여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그 부인이 낮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너는 원상공에게 내일 밤에 보기를 청한다고 말씀드리거라.] 온청이 원승지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아직 하루가 남았으니 내일 밤에 다시 훔치러 오시오. 당신은 모두를 속였소!]
그리고는 자기 어머니를 부축하여 안으로 들어갔다.
원승지가 안소혜에게 고개를 돌렸다.
[가자!]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왔다. 온방오가 입구에 서 있다가 그들을 손으로 막으며 말했다.
[잠깐 당신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소.]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내일 다시 오겠소.]
그러나 온방오는 막무가내였다.
[금사는 어디서 죽었소? 그가 죽었을 때 누가 옆에 있었소?] 원승지가 말하였다.
[나도 친구에게 전해 들었는데, 그는 광동 밖의 외딴 섬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그는 여기까지 말하고 잠시 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들 파에 장춘구라는 사람과 또, 머리가 벗겨진 사람이 있습니까? 그들 형제는 정확하게 알고 있을 것이니, 그들에게 물어 보면 모든 것이 분명해질 것이오. 그러니 나에게 더 이상 묻지 마시오.]
원승지와 안소혜는 농가로 돌아왔다. 안소혜는 원승지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였다. 그리고 못 견디겠다는 듯이 말했다.
[최사형은 항상 그의 사부를 대단한 것처럼 칭찬했는데, 제가 보기에는 당신이 훨씬 훌륭한 것 같아요.]
원승지가 그 말에 다시 물었다.
[최형의 이름은 무엇이냐? 그리고 그의 사부는 대체 누구지?] 안소혜가 숙연히 대답했다.
[이름은 최희민이고, 별명은 무슨 <복호금강>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사부는 화산파 사부의 제자이고, 별명은 <동필철산반>이라고 합니다. 나는 이 별명을 듣고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답니다.]
다음날 밤에 원승지는 안소혜를 농가에 남겨 두고 혼자 온가의 집으로 갔다. 불도 밝히지 않아 주위는 온통 암흑 천지였다. 멀리서 퉁소소리가 들렸다.
원승지는 온청이 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통소소리를 따라 찔레꼿이 핀 산으로 올라갔다.
산 위에 올라와 정자를 바라보니, 거기에는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달빛이 있어도 안개가 자욱하여 분명하지는 않았으나, 두 사람 모두 여자였다. 원승지는 그쪽으로 다가가다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온청은 여기에 없구나.)
라고 생각했을 때, 한 여자가 퉁소를 불기 시작했는데 그 곡조는 바로 그날 밤 온청이 불어주던 처량한 그 곡조였다. 그는 누군가 자세히 보려고 몇 발자국을 다가섰다. 그때였다. 퉁소를 불던 여자는 정자 밖으로 내려서며 조용히 불렀다.
[형님!]
원승지가 문득 놀라 그를 자세히 보니, 그는 바로 온청이었다. 그는 멍하니 잠시 있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너..., 너는.......]
온청이 잔잔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는 사실 여자랍니다. 제가 당신을 속인 것을 불쾌히 생각하지 마세요.] 그리고는 정중하게 원승지에게 절을 하였다. 원승지도 문득 절을 하고 나서 생각하니 그 동안 이상했던 점들이 한꺼번에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온청은 다소곳이 말했다.
[나는 온청청이라고 합니다. 저번에는 청자 하나를 일부러 빼었었지요.] 그는 살짝 웃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사실은 하청청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여자 옷으로 바꿔 입은 그녀는 매우 아름다웠다. 원승지는 어떻게 오랫동안 자기를 깜쪽같이 속였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어릴때를 제외하고는 단지 안대랑과 안소혜와 같이 지냈을 뿐이다. 그후 화산에서 무예를 닦은 10년 동안은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온청이 남장(男裝)을 하고 있는 것도 알아차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온청청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제 어머니가 여기 계신데, 당신과 얘기를 하고 싶어하십니다.] 원승지는 정자 안으로 들어가 그에게 절을 하며 말했다.
[백모님, 원승지 인사드립니다.]
그 중년 부인은 곧 일어나서 원승지의 인사를 받았다.
[무슨 말씀을요.]
그녀는 눈도 많이 부어 있고 안색도 창백하여 매우 가슴아파하고 있다는 것이 역력하였다. 원승지는 묵묵히 다음을 기다렸다.
청청의 어머니가 한참 후에야 낮은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그..., 그는, 정말 죽었습니까? 원상공께서 직접 보셨습니까?] 원승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가 다시 물었다.
[원상공께서, 청청에게 잘 대해 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나는 결코 나의 아버지나 숙부들처럼 그렇지는 않습니다. 저...., 그가 죽을 때를 얘기해 주실 수 있습니까? 누가 그를 죽였습니까? 죽을 때 그의 고통은 심하지 않았습니까?]
여기까지 말하고는, 그는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원승지도 금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단지 그의 사부에게서 전해 들었을 뿐이었다. 이 사람의 성격이 뭔가 이상하기는 했으나 일에 대해서는 철저했고, 옳고 그름이 분명하였었다. 그러나 <금사비급>의 무술을 익히고 난 후에는 사람들이 그를 존경했으나 그는 오히려 사부를 몰라보았던 것이다. 어젯밤에 온씨 5형제들이 금사를 <교활한 놈>이라고 욕한 것도 생각해 보면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원승지는 청청의 어머니에게 말했다.
<저는 금사와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얘기를 하자면 그분과 나는 같이 무술을 익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이 죽은 후의 일은 나쁜 사람들이 그의 유골을 파내어 갈까 봐 절대로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청청의 어머니가 슬픔에 겨워 몸을 돌렸다. 청청이 그녀를 안으며 말했다.
[어머니, 너무 슬퍼 마세요.]
잠시 후에 청청의 어머니가 슬픔을 억누르며 다시 말했다.
[나는 그가 우리 모녀를 만나러 오기를 18년이나 고통을 참으며 기다렸는데....... 그는 이미 먼저 가 버렸군요. 청청은 아버지의 얼굴도 한 번도 보지 못했구요.]
원승지는 숙연하였다.
[백모님,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그분은 지하에서 편히 잠들어 계실 것입니다. 그의 유골도 제가 좋은 곳에 묻어 드렸습니다.]
청청의 어머니가 다시 말했다.
[당신의 큰 은혜를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그리고는 일어서서 다시 정중하게 절을 하고는 또 청청에게도 절을 하라고 시켰다.
[청청, 빨리 원상공에게 절을 드려라.]
청청이 땅에 엎드려 절을 하자, 원승지가 황급히 무릎을 굽혀 마주 답례하였다. 청청의 어머니가 다시 물었다.
[우리에게 남긴 유서는 없는지 모르겠군요?]
원승지는 자뭇 주저하면서 물었다.
[무례하지만, 혹시 백모님의 이름이 <의(義)>자를 쓰십니까?] 청청의 어머니가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맞습니다. 어떻게 그걸 아십니까? 그러면 그..., 그가 유서를 남겼군요. 혹시 원상공께서 그걸 가지고 계십니까?]
청청의 어머니는 이미 흥분하고 있었다.
원승지가 막 대답을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정자의 난간이 쓰러지는 바람에 그는 옆으로 뛰어 올랐다. 온의(溫義) 모녀는 놀라서 숨도 쉴 수가 없었다. 원승지는 찔레꽃 무더기 속에서 한 사람을 끌어내어 정자로 갔다. 원승지가 그의 혈을 누르자 그는 손발을 늘어뜨리고 꼼짝하지 않았다.
청청이 설명했다.
[일곱번째 백부이십니다.]
온의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원상공, 그분을 놓아주십시오. 온씨 문중에서 우리 모녀에게 잘해 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원승지가 그 사람의 혈을 풀어 주자 그는 곧 깨어났다. 그는 어젯밤에 원승지와 싸웠던 온남양(溫南楊)이었다. 그는 온방의 아들로, 그 형제중 일곱째였다.
온청청이 화를 내며 말했다.
[백부, 우리가 여기서 얘기하는 것을 왜 엿듣습니까? 그것이 정녕 대장부가 할 일입니까?]
온남양은 이 말을 듣자 그 나름대로 화가 나서 덤벼들려고 하다가, 세 사람을 뚫어지게 노려보고는 스스로 가버렸다. 그러나 몇 발자욱 못가서 그는 험상ㄱ게 외쳤다.
[체면도 모르는 것아! 네가 아무리 남자 행세를 해도 소용없다!] 온의는 괴로운 듯 또 눈물을 흘렸다. 청청은 모욕을 참고 쫓아가 그에게 말했다.
[백부, 그런 말씀을 함부로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온남양이 차갑게 대답했다.
[네가 그럼, 천한 몸이 아니란 말이냐? 할아버지들께서 불러오라고 하셨다.
어떻게 할 테냐?]
온청청이 소리를 더 높였다.
[왜 우리의 말을 엿들은 것입니까?]
온남양이 여전히 냉정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알지도 못하는 외간 남자를 끌어들여 <우리>라고 부르다니.... 네가 지금 온씨 문중에 먹칠을 하고 있어!]
청청도 화가 나서 얼굴까지 빨갛게 물들이며 자기 어머니를 돌아보았다.
[어머니! 백부의 말씀을 들으셨죠?]
그러자 온의가 침착하게 말했다.
[일곱째, 이리 오시오. 내 할 얘기가 있소.[
온남양이 성큼 성큼 정자로 걸어와 원승지와 어느 만큼 거리를 두고 섰다.
온의가 한마디했다.
[우리 모녀가 다섯 할아버지와 여러 형제들의 보살핌을 받은 것도 이미 10여 년이 훨씬 지났습니다. 하가(夏家)에 대한 일은 아직 청청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그 분도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더 이상 숨길 필요도 없습니다.
이 일은 일곱째가 잘 알고 있으니, 원상공과 청청에게 얘기 좀 하십시오.] 온남양은 몹시 화를 내며 대답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합니까? 당신의 일은 당신이 직접 말하시오.] 온의가 한숨을 푹 쉬고 나서 조용하게 말했다.
[좋습니다. 그는 일곱째의 생명을 구했소.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다면....... 온씨 문중의 사람이라면....... 모두 그렇게 잊어버리다니.......] 온남양이 어금니를 깨물며 대답했다.
[그가 나의 생명을 구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가 왜 나를 구했습니까? 좋습니다. 내가 시원하게 말을 하죠. 당신이 말하면 혹시 거짓말을 할지도 모르니까요.]
청청이 화가 나서 끼어 들었다.
[어머니가 왜 거짓말을 합니까?]
온의가 그녀를 붙잡으며 침착하게 말했다.
[말하도록 그냥 놔 둬라.]
온남양은 자리에 앉아서 처음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원형, 청청과 내가 어떻게 금사를 아는지 지금부터 얘기하겠습니다. 당신들도 그가 얼마나 지독했는지를 미리 알아두십시오.]
청청이 중간에서 가로채었다.
[당신이 그를 무작정 나쁘게 말한다면 나는 듣지 않겠습니다.] 그는 손으로 귀를 막았다.
온의가 조용히 그에게 타일렀다.
[청청아, 들어봐라. 돌아가신 아버지가 비록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하나 온가에 비하면 백배 낫다는 것을.......]
온남양이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도 그렇다고 온가인 것을 잊지는 마시오.]
온의는 고개를 들어 먼 곳을 응시하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나는 이미 온가가 아니지.......]

- 계속
원제: 벽혈검(碧血劍) / 김용(金庸)

추천 (0) 선물 (0명)
IP: ♡.75.♡.93
23,498 개의 글이 있습니다.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조회
단밤이
2024-01-17
1
191
단밤이
2024-01-17
1
170
단밤이
2024-01-17
1
171
단밤이
2024-01-16
1
183
단밤이
2024-01-16
1
190
단밤이
2024-01-16
1
179
단밤이
2024-01-16
1
162
단밤이
2024-01-16
1
241
단밤이
2024-01-15
0
180
단밤이
2024-01-14
0
180
단밤이
2024-01-13
0
193
뉘썬2뉘썬2
2024-01-13
2
331
뉘썬2뉘썬2
2024-01-13
2
360
단밤이
2024-01-12
1
291
단밤이
2024-01-12
2
643
단밤이
2024-01-11
2
281
단밤이
2024-01-10
4
861
단밤이
2024-01-08
0
235
단밤이
2024-01-07
1
568
단밤이
2024-01-06
2
799
단밤이
2024-01-06
2
562
단밤이
2024-01-05
0
193
단밤이
2024-01-04
0
211
뉘썬2뉘썬2
2024-01-04
1
334
뉘썬2뉘썬2
2024-01-04
1
319
단밤이
2024-01-03
1
240
단밤이
2024-01-02
0
222
단밤이
2024-01-02
0
243
단밤이
2024-01-02
0
191
단밤이
2024-01-01
1
267
모이자 모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