碧血剑 3-2

3학년2반 | 2022.01.16 07:51:12 댓글: 0 조회: 304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2691

* 제 3 권 *

- 2 - 중상묘략(中傷妙略)

안대인이 교활하게 웃으면서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그 동안 너를 찾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이대로 놓아 줄 듯 싶더냐? 자, 이제 우리 서로 옛 회포를 풀어 보기로 해볼까?] 안대인은 어느새 양발로 문을 걷어찼다. 순간 문빗장이 딸깍 끊어져 버렸다.
원승지는 그가 문을 차는 소리만 듣고서도 그의 무공이 대단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안대낭이 순간적으로 뽑아 든 칼날이 어둠 속에서 번쩍 빛났다.
[좋아, 네가 나를 죽이려 하는구나!]
안대인은 말을 이렇게 하면서도 집안에 다른 사람이 있을까 두려워 선뜻 들어서지를 못하고, 문 밖에 선 채 안대낭과 빈손으로 맞서 싸웠다. 원승지는 천천히 기어 가까이 가서 눈을 크게 뜬 채 싸움을 구경하고 있었다.
안대인의 무공은 과연 출중하였다. 어둠 속에서 휘둘러지는 칼소리만을 듣고서도 이리저리 피해가면서, 입으로는 끊임없이 이런저런 잡스런 말로 안대낭을 조소하고 있었다. 안대낭도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서 마구 욕을 퍼부면서 칼을 휘둘러대었다.
한바탕을 싸우더니, 어느덧 안대인은 손을 뻗어 느닷없이 안대낭의 몸을 어루만졌다. 안대낭은 더욱 분노하여 칼을 휘둘러 상대방의 목을 내리치려 하였다. 그러나 안대인은 순간적으로 몸을 피하면서 한 발자욱 더 접근해 안대낭의 팔을 비틀어 잡았다. 그리고 힘을 주어 비틀자 그녀의 칼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안대인은 비틀어 잡은 그녀의 양손을 양 무릎 위에다 올려놓고 그녀를 꼼짝 못하게 해 놓았다.
원승지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안씨의 말투로 보아서는 곧바로 그녀를 해칠 것 같지 않으니, 조금 더 망을 보다가 손을 쓰는 것이 좋겠다.)
안대인은 미친 듯이 웃어 제꼈다. 안대낭은 계속해서 욕을 퍼붓고 있었다.
그 틈을 타서 원승지는 몸을 숙여 얼른 문 안으로 잠입했다. 가만가만 벽을 더듬어 <벽호유장공(壁虎遊牆功)>을 사용, 위로 붕 떠오른 다음 대들보 위에 사뿐히 올라 앉았다.
[호로삼, 어서 들어가 불을 켜.]
안대인의 목소리였다. 호로삼은 문 밖에서 불기둥을 만든 다음, 칼을 뽑아 든 채 몸을 도사렸다. 그리고는 등불로 먼저 문안을 비쳐 보았다. 그리고선 몸을 굽혀 돌덩이를 집어서 집안으로 던졌다. 한참동안 아무소리가 없자 그는 마침내 안으로 들어가 탁자 위에 있는 촛대에 불을 붙였다.
안대인은 안대낭을 비틀어 안은 채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호로삼을 시켜 안대낭의 손과 발을 밧줄로 묶도록 했다.
[다시는 나를 안보겠다고 하더니 어떠냐? 자, 날 봐라! 백발이 몇 개나 더 늘어난 것 같으냐?]
안대낭은 눈을 감은 채 아무 대꾸가 없었다.
원승지는 대들보 위에서 밑으로 내려다 보았다. 안대인의 얼굴은 자세히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이미 중년이 지났음에도 이목구비가 수려한 것은 틀림없었다. 아마도 젊은 시절엔 필시 미남이어서 안대낭과 잘 어울리는 한쌍이었으리라.
안대인은 손으로 안대낭의 얼굴을 만지면서 웃음띤 어조로 말했다.
[음, 십년이 넘도록 못 보았지만 얼굴은 아직도 백옥처럼 희고 부드럽구나!]
그리고는 얼굴을 돌렸다.
[넌 나가 있어.]
호로삼은 비실비실 웃으며 나가서 밖으로 문을 걸어 잠구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바라보았다. 잠시 후, 안대인은 탄식조로 말했다.
[소혜는 어디있지? 나는 요 몇 년 동안 날마다 그 애 생각만 했었어.] 안대낭은 여전히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안대인이 말했다.
[너와 나는 젊은 부부였지. 다만 둘 다 성질이 드세어서 한 번 돌아선 이후로 이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는데 이제는 처음처럼 다정하게 살아가도록 하자.]
잠시 시간을 보낸 뒤 그는 다시 말했다.
[네가 보듯이 난 십여 년을 홀로 지내왔다. 그 동안 한순간이라도 너를 잊은 적은 없었어. 너도 설마 부부의 정이 한 조각도 안 남았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지?]
그러자 안대낭이 소리쳐 대답했다.
[우리 아버지와 오빠가 어떻게 죽었는지 너는 아직 잊지 않았겠지?] 안대인이 탄식하며 말했다.
[장인어른과 처남은 금의위가 죽인 것임에는 틀림없어. 그러나 나도 단칼에 한 척에 탄 사람들을 다 죽일 수는 없었어. 금의위 중에는 좋은 사람이 있고 나쁜 사람도 있었어. 나는 단지 왕을 위해 일했을 뿐이고, 그 일 또한 광종요조(光宗耀祖)의 체면에 관계되는 일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안대낭이 잘라 말했다.
[아니야, 아니야.....!!]
안대낭은 문득 고개를 떨구고 흑흑 거렸다.
잠시 후, 안대인은 화제를 바꾸어 말을 이었다.
[난 소혜가 보고싶다. 사람을 시켜 그 애를 데려와라. 무엇 때문에 너는 이리 숨고 저리 피해가며 줄곧 내가 그 애를 볼 수 없게 만드는 거지?] 안대낭이 모처럼 만에 대답했다.
[난 벌써 그 애에게 말했어요. 네 아버지는 벌써 죽었다고 네 아버지는 기개 높고 할 일이 많은 사람이었으나 아깝게도 단명했노라고.] 안대낭의 어조에는 분노가 가득 서려 있었다.
[왜 그 애를 속이는 거지? 또 어째서 나를 그토록 저주하는 거야?] [그 애의 아버지는 원래 기상이 드높은 의인이었다. 하지만 우리집 식구들은 내가 그 사람에게 시집가는 것을 반대했다. 그러나 난 혼자서 몰래 집을 빠져 나와 그 사람을 따라 나섰다. 그것은.......]
안대낭은 여기까지 말하고선 또 목소리가 흐느낌으로 변하더니 아까보다 더욱 치를 떨면서 말했다.
[너는 나의 좋은 남편을 죽였다. 그래서 난 절 죽이지 않고서는 내 분을 풀 수가 없어!]
안대인이 혀를 찼다.
[어? 이거 참 괴상한 노릇이군. 내가 바로 너의 남편인데, 어째서 내가 너의 남편을 해쳤다고 말하는 거지?]
안대낭이 싸늘하게 돌아보았다.
[내 남편은 본래 혈기에 찬 호한이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익만을 쫓아서 아내도 싫다, 딸자식도 싫다고 했다. 또 그저 어떻게 하면 높은 관리가 되어볼까, 돈이나 벌어볼까 궁리나 하고....... 그러한 내 옛남편은 이미 죽은지 오래다. 난 다시 그를 볼 수 조차 없어.]
원승지는 그 얘기를 듣고 있자니 측은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안대낭이 다시 말했다.
[내 남편은 안검청(安劍淸)이라 불리는 사람, 본래 강호의 뛰어난 호인이었다. 그런데 이런 금의위의 연락병 안대인이란 작자에게 죽지 않았느냐? 내 남편의 은사 초대도(楚大刀) 초로권사(楚老拳師)도 안대인이 관록을 탐하여 죽인 사람이다. 초로권사의 부인과 딸을 모두 다 너, 안대인이 죽였단 말이다.] 안대인, 안검청은 화가 나서 부르짖었다.
[이제 그만해 둬!]
그러나 안대낭은 계속해서 외쳤다.
[이런 짐승 같은 양심을 가진 인간아! 스스로 한 번 생각해 보아라!] 안검청이 대답했다.
[관부가 초대도에게 가서 묻는다면, 꼭 그를 곤경에 처하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왜 칼을 뽑아 나를 죽이려 했지? 그의 부인이나 딸도 모두 자살을 한 것인데 누구를 탓하는 것이냐?]
[그래, 초대도는 눈을 뽑혔다. 누가 그에게 이렇게도 좋은 제자를 받아들여 가르치라고 했을까? 그 제자가 춥고 배고파 죽을 지경이 되었을 때, 초대도는 그를 살려주고 무예까지 가르치고 또 키워서 결혼시켜 아내까지 얻게 해주었어.......]
안대낭의 어투는 갈수록 노기가 서렸다. 안검청은 주먹으로 책상을 쾅 두드리면서 말했다.
[오늘 너와 만난 이 기쁨을 어디에다 비교하겠느냐? 그런데 하필 그 죽은 사람 얘기를 꺼내서 뭘 하자는 것이냐?]
안대낭이 대답했다.
[나를 죽이려면 죽여 봐. 나는 계속 얘기를 할 거야.] 원승지는 두 사람의 대화 중에서 당시의 상황을 짐작했다. 안검청은 초대도가 키웠는데 훗날 그는 부귀를 탐하여 사부일가를 죽였던 것이다. 안검청은 금의위의 연락병 임부를 맡았는데, 안대낭의 부친과 오빠는 모두 금의위에게 당해 죽었다. 안대낭의 분노는 그래서 끝내 남편과도 헤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예전에 호로삼이 소혜를 빼앗으러 왔을 때, 안대낭이 이리저리 피해다닌 것은 모두 이 짐승 같은 혹독한 안대인 때무이었다. 원승지는 속으로 생각했다.
(당시 안대인은 은사 일가가 죽음을 당할 때의 상황은 분명히 아주 참혹했었으리라. 이 사람은 죽어 마땅한 인간이다. 그러나 안대낭이 아직도 그에게 부부의 정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 정녕 함부로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원승지는 좀 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어보고 그를 죽일 것인지 어쩔 것인지 결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입을 봉한 채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런데 잠시 후,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 왔다. 안검청은 칼을 뽑아들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사람이 도착했을 때 만약 소리를 지르면 네가 내 마누라라 해도 소용없을 줄 알아!]
안대낭이 코방귀를 뀌면서 대답했다.
[또 한 사람을 죽이려는 군.]
안검청은 부인의 성질을 이미 잘 알고 있었으므로 칼로 휘장을 쳐내려서 그것으로 안대낭의 입을 틀어막았다. 안검청은 안대낭을 침대 위에 눕혀 놓고 휘장을 내린 다음, 문 뒤에 가서 숨었다.
원승지는 그가 몰래 독수(毒手)를 휘두르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비록 오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른다 할지라도 안대낭은 좋은 사람이었다. 원승지는 대들보 위에서 먼지에다 침을 묻히며 섞어 조그만 진흙덩이를 만든 다음, 촛불을 향해 던졌다.
그러자 <획!> 소리가 나면서 촛불이 꺼졌다. 안검청은 중얼중얼 뭐라고 욕을 해댔다. 원승지는 그가 불기둥을 손으로 더듬어 찾는 사이 살며시 아래로 내려와서 방 밖으로 빠져 나왔다. 집 모퉁이에는 금의위 한사람이 칼을 카고 땅에 엎드려서 온 신경을 집중, 집 안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원승지는 그에게 접근해 가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사람이 왔다.]
그러자 그 금의위도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음, 빨리 엎드려.]
원승지는 문득 그의 혈도(穴道)를 눌렀다. 그리고는 외투를 벗겨서 몸 위에 걸치고선 다시 그의 옷자락을 잘라 내어 얼굴을 가리고 두 눈만 보이게 했다.
그런 후 그 사람을 들어서 문 쪽에다 던져 버렸다.
어둠 속의 말발굽 소리는 더욱 커졌다. 드디어 말이 집 앞에 다다르자 말 위에서 내려선 사람이 손바닥을 세 번 쳤다. 그러자 안에 있던 안검청도 손뼉을 세 번 치고는 불을 밝힌 뒤 문 뒤에 몸을 숨겼다. 문 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칼을 들어 힘껏 내리쳤다. 사람의 머리통이 떼구르르 한쪽으로 굴렀고 잘려진 목에선 선혈이 낭자했다. 불빛 아래서 머리통을 잠시 내려보니 대경실색하게도 자기의 동료가 아닌가! 그는 미친듯이 돌아서며 누군가를 부르려고 하였다. 그때였다. 문밖에서 두건을 쓴 검객이 느닷없이 들어와 그의 혈도를 눌렀다. 그리고는 손을 뒤집어 그의 머리 대추혈(大推穴)을 때리니 그곳이 바로 몸의 수족삼양과 독맥(督脈)이 모이는 곳이었다.
원승지는 여유있게 그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 가볍게 땅바닥에 내려놓고는 문 밖에 보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침대쪽으로 가서 안대낭을 부축하여 손발을 묶은 밧줄을 풀어 주었다.
[안숙모님, 제가 당신을 구하러 왔습니다!]
안대낭은 그가 금의위 옷을 걸치고 얼굴에는 두건을 두른 것을 보자 의아해 하며 물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때 밖에서 다섯 사람이 급히 뛰어 들었다. 먼저 한 사람이 안대낭과 인사를 나눈 다음 방안의 상황을 발견하고는 놀라서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서 버렸다. 문 밖의 금의위는 들어온 사람이 많음을 보고 안검청 혼자서 피해를 입을까 걱정이 돼, 일찌감치 두 사람이 들어가 칼을 뽑아 휘둘렀다.
원승지가 나아가 손바닥으로 어깨죽지를 내리치니, 두 명의 금의위의 어깨뼈가 그대로 절단되어 버렸다. 문 박의 적은 계속 들어왔다. 원승지는 손으로 잡아서 하나씩 하나씩 해치워 밖으로 내던졌다. 어떤 사람은 들어서기가 무섭게 맞아 나가 떨어졌다. 눈 깜짝할 새에 때려 눕혀진 열두 명의 금의위와 내정 시위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쳐 버렸다.
원승지는 내리 드리워진 천을 잘라 내어 안검청의 귀에다 쑤셔넣고, 시체에서 옷 두 벌을 벗겨내어 그 머리위에 몇 겹으로 쌌다. 즉 그가 아무소리도 못듣고 아무것도 못보게 한 것이었다. 그런 다음 자기 얼굴에 썼던 두건을 벗고서 다섯 명 중의 한 사람을 향해 말했다.
[형님! 안녕하십니까? 츰왕도 안녕하신지요?]
그 사람은 한동안 멍해 있다가는 이내 하하 웃으면서 원승지의 손을 잡고서 흔들어 댔다. 그 사람은 바로 츰왕 수하의 대장이며 원승지와 결의형제를 맺은 이암(李岩)이었다.
원승지는 뜻하지도 않게 옛친구 두 사람까지 구한 셈이었다.
그는 몹시 흡족하여 고개를 돌려 안대낭에게 말했다.
[안숙모님, 아직도 저를 기억하실 수 없는지요?]
숭정(崇楨) 16년 6월, 원승지가 안대낭의 집을 떠난 것이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의 일이다. 그때에 꼬마아이가 커서 어른이 되었으니 안대낭이 알아볼 수 있겠는가?
원승지는 속옷 주머니에서 당시 안대낭이 주었던 금팔찌를 꺼내 보였다.
[항상 이것을 몸에 지니고 다녔었어요.]
안대낭은 갑자기 무엇이 생각나는 듯이 그를 불 앞으로 끌어 비춰 보았다.
과연 그의 왼쪽 눈썹 위에 희미한 칼자국 흉터가 있었다. 안대낭은 놀라움과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쳤다.
[오! 얘야, 네가 이렇게 큰 줄이야! 거기다가 그렇게도 훌륭한 무술까지 익혀 왔다니!]
원승지는 여전히 침작하게 말했다.
[절강(浙江)에서 제가 소혜동생을 보았어요. 그 애도 많이 컸더군요.] 안대낭은 한숨을 내쉬었다.
[모르는 새에 애들이 이렇게 커 버리고, 세월은 참 빠르기도 하구나!] 그러면서 안대낭은 땅바닥에 있는 남편을 보면서 탄식조로 말했다.
[네가 와서 날 구해 주리라곤 정말로 꿈에도 상상 못했구나!] 그 두 사람의 옛날 일을 모르는 이암은 그녀가 원승지를 부를 때 <얘야, 얘야> 하자 그저 두 사람이 친척 관계인 줄로만 알고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정말 큰일 날 뻔했군요. 제가 츰왕의 명을 받들고 하북에 와서 몇 사람을 만나기로 했었는데, 금의위의 전갈이 어찌나 빠른지, 어떻게 풍문을 들었는지 모르겠으며 벌써 여기까지 와서 잠복해 있었으니.] 원승지가 대답했다.
[형님, 친구분들은 곧 오십니까?]
이암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벌서 멀리서 말굽 소리가 들려 왔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이것이 아니더냐?]
그는 문으로 나간 지 얼마 안되어 곧 세 사람을 데리고 들어왔다. 세 사람중 한 사람은 유방량(劉芳亮), 한 사람은 전견수(田見愁)였다. 모두 성봉장회(聖峯帳會)에서 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 두 사람은 아직 원승지를 몰라 보았지만, 원승지는 아직도 그들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성이 후(侯)씨로서, 태산대회에서 본 적이 있었다. 세 사람과 이암은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후씨 성을 가진 사람이 원승지를 향해 공손히 절을 하며 말했다.
[맹주, 안녕하십니까?]
이암과 안대낭이 똑같이 말했다.
[두 사람이 전부터 알던 사이였소?]
후씨가 대답하였다.
[원맹주는 일곱 성의 총맹주였고, 여러 형제들은 그의 명령을 받들었습니다.]
이암이 웃으며 말했다.
[아! 내가 하남에서 일을 할 때 동쪽의 소식이 모두 두절되었었는데 알고보니 그런 큰 일이 있었군요. 참으로 기쁘고 반가운 일입니다.] 원승지가 대답했다.
[이것은 지난 날의 얘기입니다. 좋은 친구들끼리 높여주는 뜻으로 이런 칭호를 주었을 뿐이지. 사실 어디 가당치나 한 것입니까?] 그러자 후씨가 말했다.
[맹주께서는 무공이 뛰어나고 견문이 넓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인의(仁義)와 무림(武林) 중 어느 한가지인들 존경하지 않을 일이 있어야지요.] 이암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즉시 츰왕의 명령을 전하였다.
즉, 이자성(李自成)은 하남(河南) 여주에서 병부상서(兵部尙書) 손전정(孫傳庭)이 이끄는 관병 십여만 명을 대파하고 당관까지 진격해 들어갔던 것으로, 이암에게 비밀리에 하북으로 와서 영웅들과 연락, 호응할 것을 명하였던 것이다.
후씨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맹주, 당신이 어떻게 할 것인가 말해 보시오.]
원승지가 입을 열었다.
[츰왕의 의거는 천하 호걸들이 자연적으로 도와 일어난 것이오. 소신은 곧장 소식을 전하러 가겠소. 우리 일곱 성이 호한들이 호탕하게 한바탕 나서 봅시다!]
여섯 사람은 얼굴들을 활짝 펴고 호탕하게 웃었다.
이암이 한마디 했다.
[관군의 부패는 극에 달했소이다. 의병이 나타나기만 하면 그것은 썩은 나무를 뽑는 것과 같고 대나무가 갈라지듯 그 기세가 무너져 버릴 것이오. 목전의 문제는 오직 한가지 뿐이오.]
원승지가 물었다.
[그게 무엇이오?]
[방금 급보를 받았는데, 서양홍이(西洋洪夷)의 대포 열 대가 당관에 도착해서 손전정에게 전해진다고 합니다. 손의 병사는 이미 투지가 없어져 별로이긴 하지만, 그래도 홍이대포의 위력이 적지 않습니다. 한 번 쏘면 수백명이 동시에 죽는 터라 큰 우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원승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열 대의 대포는 저도 오는 도중에 보았습니다. 확실히 두려워할 만한 물건인 것임에 틀림없었지요. 그 위력이 굉장하던데, 배로 그것을 산해관(山海關)으로 끌고 가서 만청(滿淸)을 타도하려는 것이 아닙니까?] 이암이 거들었다.
[대포는 만리 먼 곳으로부터 운반해 온 것입니다. 듣기로는 본래 산해관으로 옮겨가서 청의 병사를 방비하는데 쓰려는 것이었지만, 츰왕이 매번 승리를 거두는 바람에 조정의 생각이 바뀌어 그 열대의 대포를 남쪽인 당관에 보냈다고 합니다.]
원승지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황제는 백성을 보호하고 외적을 막는데 치중한다는데 형님 생각은 어떠합니까?]
이암이 대답했다.
[일단 대포가 당관에 닿았으면 우리가 공격할 때에 필히 몸으로 그 대포를 막아내야만 할 것입니다. 비록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 손실은 무척 클 것이오.......]
원승지가 다시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도중에서 그를 막아야만 합니다.] 이암이 손뼉을 치며 기뻐하였다.
[이번 일은 분명히 형제들의 노고가 클 것이오. 큰 공을 한 번 세워 보도록 합시다.]
원승지가 신음조로 대답했다.
[서양 병사의 무기는 정말로 위력이 대단합니다. 여러분들도 이미 보았을 것이지만, 대포를 가로채려면 필시 좋은 묘방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또한 일의 성사 여부도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천하의 기운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힘을 다해 임무를 수행해서 츰왕의 위세를 우러러 볼 수 있도록 일단 성공을 한다면 그것은 만민의 흥복이 될 것입니다.] 모인 사람들은 또 한차례 계획을 의논하고, 원승지는 이암의 부인에 대한 안부를 물었다.
[그녀는 하남에 있는데, 평상시에도 자주 당신 얘기를 하곤 하더군.] 안대낭이 끼어들며 말했다.
[이장군의 부인은 진짜 여자중의 여걸입니다. 얘야, 그런데 너는 마음에 점찍어 둔 사람이라도 있느냐?]
원승지는 청청을 생각하며 얼굴을 붉혔다. 그래서 미소를 짓고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안대낭은 탄식하는 소리로 말했다.
[너같은 훌륭한 인재를 그래 어느 집 규수가 복이 있어 맞이할지 모르겠구나.]
안대낭은 갑자기 소혜가 생각이 났다.
(소혜와 저 애는 어릴 적에 어려움을 같이 나누었다. 저 애가 내 사위가 되어 준다면 소혜 역시 진정으로 죽는 날까지 이 사람을 의지할 수 있을텐데.
하지만 소혜가 그 바보같은 최희민과 좋아 지내니. 그것을 가리켜 제 눈에 안경이라고 하는 것이겠지.......)
유, 전, 후 세 사람은 그들이 개인적인 얘기를 하는 것을 듣고 더 이상 끼어들지 않고 일어서서 작별인사를 했다. 후씨 성을 가진 후비문(侯飛文)이 말했다.
[맹주, 내일 아침 일찍 제가 부하 몇 명을 데리고 와서 명령을 듣기로 하지요.]
[좋아요!]
원승지의 대답과 함께 세 사람은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
이암과 원승지는 천하대세에 관해 오래도록 이야기하였다. 애기를 하면 할수록 의기가 투합 되었다.
원승지는 국사의 흥쇠와 시국의 변화무쌍에 관해 깊이 알고 있는 이암의 얘기를 듣자니 한마디 한마디가 그에게 어떤 깨달음을 갖게함을 느꼈다. 동방대백(東方大白)과 금계삼창(金[(谿-谷)+(椎-木)]三唱)까지 얘기하고서도 두 사람의 흥은 깨질 줄을 몰랐다.

## 무슨 한자(漢字)가 수학공식 같지요?
##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한계인걸.

이암이 작은 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안대낭!]
안대낭이 고개를 들었다.
[그 사람은 어떻게 처리하시렵니까?]
안대낭은 아직도 마음이 산란한 듯 고개만 흔들어 댈 뿐 대답이 없었다.
이암은 그녀가 혼자서는 결단하기 힘들 것이라고 여기고 더 이상 상관할 일이 아니므로 일이 아니므로 원승지를 향해 말했다.
[자, 우리는 떠나도록 하지.]
곧 원승지가 대답했다.
[제가 형님을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두 사람과 안대낭은 이별의 인사를 나누고 그곳에서 떠났다.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약 7, 8마장 정도 걸어나왔다.
이암이 문득 입을 열었다.
[자네가 이렇게 천리를 배웅한다 해도 언젠가 한 번은 이별을 할 것이니, 이젠 돌아가도록 하게나.]
원승지는 그와 의기가 서로 투합한 터라서 헤어지기가 섭섭했다. 그러자 이암이 말했다.
[츰왕의 대사를 이룬 후, 자네와 나는 함께 시골에 은거하면서 술로서 회포를 풀도록 하세. 앞으로의 날도 많이 있을 테니까.......] 원승지가 기쁘게 대답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 좋겠습니까!]
원승지는 이암이 말을 타고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저 멀리 사라질 때까지 눈시울을 적시면서 작별을 하였다. 한참이 지난 후에 다시 숙소로 되돌아 왔다. 되돌아와서 보니, 후비문이 이미 수십명의 무사들을 데리고 숙소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청청과 벙어리, 홍승해 등은 보이지 않았다.
아구와 일중(一衆)도 그 많은 무리들 속에 보였고, 대호족 무사들은 아무런 요동의 기색도없이 방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원승지가 후비문에게 한마디했다.
[후형님, 몇 명의 무사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가서 조사해 주십시오. 그 서양군대가 가져온 대포가 북으로 향하는지 남으로 향하는지를 알아보도록 하시고, 곧바로 소식을 주도록 하시지요.]
그는 곧 세 명의 무사들을 데리고 드디어 숙소를 떠났다. 후비문이 떠나자 마자 사천광과 정청죽 두사람이 숙소로 달려왔다.
[원상공께서 돌아오셨군요!]
원승지가 채 대답을 하기도 전에 청청과 벙어리 그리고 홍승해가 뒤따라 들어왔다.
청청의 멋진 머리카락은 바람에 산발이 되어 있었고 얼굴은 불그스레하게 상기된 채 원승지를 보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어째서 이제야 돌아오셨어요?]
원승지는 그제서야 사람들이 마음을 졸여가며 자신을 기다렸다는 것을 알고 어제 저녁 일을 자세히 얘기해 주었다.
청청은 고개를 숙인채 한 마디의 말도 없었다. 원승지는 그녀의 심기가 좋지 않음을 알고 그녀를 한족으로 이끌고 갔다.
[내가 청청의 마음을 너무 걱정케 했구나. 청청이 이형을 못 뵌 것이 참으로 안타깝구나. 동생에겐 이제 오빠가 또 한 사람 생긴 셈이야!] 청청이 비록 여자의 몸이긴 해도 원승지는 항상 그녀를 <청청 동생>이라고 불렀다.
청청이 대답했다.
[오빠는 양심도 없어요. 오빠는 이곳에서 무엇을 하실 계획인가요?] 원승지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정말 미안하군. 다음 번엔 다시는 걱정시키지 않겠어.] 청청이 되물었다.
[다음 번에 다른사람이 오빠를 걱정하겠죠. 제가 그땐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죠?]
원승지가 이상하다고 여기며 역시 되물었다.
[응? 그건 누구를 말하는 거지?]
청청은 더 이상 말없이 자기의 방으로 홀연이 돌아가 버렸다. 그리고는 정오가 되어도 그녀는 밥도 먹으로 나오지 않았다.
원승지는 주인을 불러서 점심을 그녀의 방에 들여보내도록 했다. 그러나 왜 그녀가 그렇게 화가 났는지를 몰랐기에 밥이나 먹은 후에 가서 사과를 하리라 마음 먹었다. 어쨌든 그녀가 그렇게 화가 나고 조급해 하는 것이 자기로 인한 것이라고 여기니 문득 마음속으로 감독되기도 하였다.
그때였다. 숙소의 주인이 밥상을 들도 돌아와 말했다.
[아가씨는 방에 안 계십니다.]
원승지는 깜짝 놀라 들었던 젓가락을 떨어뜨리고 그녀의 방으로 달려갔다.
과연 그녀가 없었을 뿐더러 그녀의 칼과 옷가지 마져도 남아 있지를 않았다.
그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아니, 화가나서 나갔다면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녀는 항상 일에 부딪히면 마음을 다치곤 하니, 참으로 맘을 놓을 수가 없단 말야. 하지만 큰 일을 눈앞에 놓고 있는 나로서는 직접 찾아 볼 수도 없는 문제이고.......) 생각다 못한 그는 홍승해를 불러 그녀를 찾으로 나서도록 하였다. 그리고 분부하기를, 만일 그녀를 만나거든 어떻게든지 달래서 데리고 오도록 하였다.
저녁 무렵이었다. 후비문이 말을 타고 급히 돌아왔다.
[서양군대가 남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빨리 쫓아가도록 합시다.] 원승지는 서둘러 일어나서 벙어리에게 숙소에 남아 철상자를 지키도록 하고 자신은 정(程), 사(沙), 호(胡), 철(鐵) 네 사람과 후비문 등 하북군대를 이끌고 걸음을 재촉, 그 대포를 쫓으로 나갔다.
3일째 되는 날 아침, 원승지 일행이 작은 마을을 지날 때였다.
문득 10대의 대포가 주막집 옆에 있고 각각 포 옆에는 여섯명의 서양병사들이 총을 차고 지키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일행들은 좋아서 서로를 쳐다보고 싱긋 웃었다.
철나한이 입을 열었다.
[아유, 배고파! 이거 못 참겠는데.......]
원승지가 대답했다.
[좋아! 우리가 저 주막으로 가서, 저들 서양군관들의 행동거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일행들은 곧바로 주막으로 들어갔다.
철나한이 앞장서 윗층으로 올라서다가 깜짝 놀라서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아니! 이건?]
몇 명의 서양들이 청청에게 총을 겨누고 그의 손가락 끝을 막 잡아당기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쪽에는 두 명의 서양군관인 피터와 레이먼, 그리고 서양여자 제크린이 앉아 있었다.
원승지는 재빨리 책상보 한 장을 잡아당겨 힘차게 서양병사들을 향해 던져서 그들을 덮었다. 그리고 몸을 앞으로 날려서 청청의 어깨를 눌러 함께 엎드렸다.
소동이 한바탕 지나가고 발사된 총알은 책상에 가서 꽂혔다.
원승지가 총이 두렵다고 생각하며 외쳤다.
[모두들 아래층으로 내려가라!]
동시에 그는 청청을 부축하고 일행들과 함께 창문을 통하여 아래층으로 뛰어 내렸다.
레이먼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권총으로 아래층을 향해 마구 쏘아댔다. 그때 철나한이 <아이쿠>하는 소리를 질렀다. 돌아보니 엉덩이에 총을 맞고 땅에 쓰러져 있었다. 사천광이 서둘러 그를 부축하고, 모두들 함께 말을 타고 남쪽으로 달렸다.
당시의 서양무기는 사용이 불편하여 한 번 또다시 화약총알을 집어넣어야만 했으므로 서양군은 한방도 맞추지 못하고 일행은 멀리 떠난 뒤였다.
원승지와 청청은 한 말을 같이 타게 되었으므로 말을 달리면서 한편으로 말을 건냈다.
[왜 서양군과 싸웠지? 대체 무엇 때문에?]
청청이 시무룩하니 대답했다.
[낸들 아나요?]
원승지는 그녀의 얼굴색이 뾰루퉁해져 있음을 보고 다른 사정이 있음을 짐작하여 그저 미소만 짓고 더 묻지를 않았다.
청청은 3일 동안 낮과 밤을 헤매다가 지금 이 순간, 그를 다시 만났으니 마음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20리 정도를 달리니 한 읍이 나타났다. 일행들은 말에서 내렸다. 호계남이 작은 칼로 철나한의 살 속에 박힌 탄환을 빼내었다. 철나한은 빼낼 때 죽는다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 계속 원제: 벽혈검(碧血劍) / 김용(金庸)
옮김: 김선국(金善國;sm1109)

* 제 3 권 *

- 2 - 중상묘략(中傷妙略)

청청은 원승지를 잡아 끌어 책상 한쪽에 앉히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누가 그 여자를 그렇게 요괴처럼 떡칠을 해 놓았는지, 팔도 다 드러내놓고 화장을 요란하게 하고, 정말 창피한 줄도 모르나봐요!] 원승지는 뭘 보고서 그러는지 몰라 두리번거리다가 다시 물었다.
[누구 말이지?]
[그 서양 여자 말이에요.]
[그것이 또 청청의 일을 그르쳤던가?]
그녀가 모처럼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못보겠어요. 두 개의 동전으로 귀걸이를 만들어 건 것도 이상스레 반짝거리고요.]
원승지는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이 우스워 킥킥 웃었다.
[청청, 넌 정말 간섭할 일도 많구나! 또 다음은 뭐가 어떻더냐?] 청청이 겸연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나와 칼싸움을 해서 진 그 서양군이 내게 총을 겨눈다고 했어요. 난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그냥 속으로 <또 나와 겨루러 드는구나.> 하고만 생각하고서 <좋아, 한 번 겨뤄보자. 내가 너를 두려워 할 줄 아느냐?> 하고 채비를 갖출 때 당신이 들어왔지요.]
[그런데 왜 혼자서 길을 떠났지?]
청청은 계속 웃음거리를 얘기하려 했는데 이 말을 듣자마자 곧 침울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흥! 그런 걸 또 내게 물으려고 해요? 자신이 한 일도 모르는 주제에!] 원승지가 의아해서 대답했다.
[정말 모르겠어, 도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었지?]
청청은 그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아니, 들은 체도 아니했다.
원승지는 그녀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계속 추궁하여 묻는다면 절대로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별관심이 없는 척하면 스스로 참지 못해서 도리어 자기가 말해 버리는 그런 성격인 것을.......
그래서 원승지는 문득 화제를 바꾸어 말했다.
[서양군의 무기가 어마어마하더구나. 만일 청청이 그것을 이용하는 방법만 안다면 그들의 대포를 손쉽게 뺏아 올 수 있을 텐데.......] 청청이 뾰로퉁하게 대답했다.
[누가 그런 얘기를 하자고 했나요?]
원승지가 싱긋 웃었다.
[좋아. 이 일은 가서 사천광과 상의하지.]
원승지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청청이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갈 수 없어요. 아직 얘기가 끝나지 않았단 말이에요.] 원승지는 픽 웃으며 다시 앉았다. 한참 후 청청이 입을 열었다.
[오빠의 그 소혜동생은요?]
원승지가 대답했다.
[그날 헤어진 이후로 아직 보지 못했어. 혹시 그녀가 어디있는지 모르겠어?]
청청이 여전히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오빠는 소혜의 엄마와 하룻밤을 얘기하고도 아쉬워하며 헤어졌는데, 분명히 소혜 얘기도 했을 거 아니에요?]
원승지가 깜짝 놀랐다.
(아! 그녀가 이것 때문에 화가 나 있었구나!)
그는 상대방을 살살 달래기 시작했다.
[청청에 대한 내 마음을 아직까지도 모른단 말이야?] 청청은 그 말에 귀언저리가 빨개지면서 얼른 고개를 돌려버렸다.
원승지가 다시 이었다.
[오늘 이후, 난 절대로 청청과 헤어지지 않을거야. 그러니 이젠 안심해!] 청청이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오빠는 그 소혜 동생과 그렇게도 친하면서.......]
원승지가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내가 어릴 적이었어. 그녀의 어머니는 나를 자기 자식처럼 잘대해 주셨어.
당연히 나는 감동했지. 다시 말하지만, 소혜와 내 사부의 조카와 친하게 지낸 걸 모르는 바 아니잖니?]
청청은 입을 삐죽거리고선 다시 말했다.
[그 최씨 성을 가진 애 말이에요? 그 녀석은 바보스럽고 또 멍청한데다가 생긴 것도 지지리도 못났고, 한데 어째서 소혜는 좋아하지요/] 원승지가 웃으며 대답했다.
[쌍의 모든 것들이 제 눈에 안경인 격이야. 그럼 이 원씨 성을 가진 바보스럽고 멍청하고 못생긴 녀석을 청청은 왜 좋아하는 거지?] 청청은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면서 말했다.
[오해하지 말아요. 누가 오빠를 좋아한다고 했어요.] 이렇게 얘기가 오가는 동안 두 사람은 더욱 가깝게 느끼고 있었다.
[가서 밥이나 먹지.]
청청은 일어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한가지만 더 묻겠어요. 오빠가 말한 그 아구라는 아가씨는 얼마만큼 예뻐요?]
원승지가 냉정하게 말했다.
[그녀가 예쁘든지 밉든지 그것이 청청과 무슨 상관이지? 그 사람은 비밀에 붙여져야 하니 우리는 입조심을 해야만 해.]
청청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리만 했다.

x x x x
두 사람은 다시 일행들이 모여있는 탁자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 사천광과 정청죽 등과 함께 어떻게 대포를 뺏아 올 것인가를 의논했다.
호계남이 의견을 내놓았다.
[오늘 저녁, 아우를 시켜 염탐을 해 오게 한 다음, 기회를 틈타 몇 개의 총을 가져오도록 합시다. 오늘 저녁 몇 개, 내일 저녁 몇 개, 이렇게 계속해서 다 훔쳐 오면 그땐 그들이 무서울 이유가 하나도 없을 게 아니오?] 원승지가 나섰다.
[이 계획은 당신과 제가 함께 가서 살펴보고 결정하도록 합시다.] 사천광이 눈을 크게 떴다.
[맹주께서 어떻게 친히 나가십니까? 아우들을 내보내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원승지가 대답했다.
[나는 무기의 용법을 자세히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훔쳐 오더라도 만약의 경우 서양군에게 사용할 수가 있을 것이 아니겠어요?] 일행들은 모두들 그렇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청청이 끼어들었다.
[원승지 오빠는 그 서양여자가 한 번 더 보고 싶어서 가려고 하는거에요.] 일행들은 그 말에 모두 박장대소를 했다.

x x x x
그날 오후, 원승지와 호계남은 말을 타고 나가서 서양군대를 멀리서 지켜보았다. 그들이 객사에 투숙하는 것을 보고 밤 삼경까지 기다렸다가 그곳의 담을 넘어 들어갔다. 들어서자, 곧 병사들이 총쏘는 소리와 장탄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새어나왔다.
두 사람은 소리가 나는 방 창문 밑으로 가서 엎드렸다. 창 틈 사이로 안을 내다 보았더니 두 서양군관이 장검으로 격투를 하는 중이었다.
원승지는 그 두 사람이 한 방안에서 싸우는 것을 부하들은 관전만하고 있다는 것이 퍽 기이하게 여겨졌다.
수십차례 칼이 오고가더니 문득 레이먼의 공격이 날카로와지기 시작했다.
피터는 뒤로 물러설때도 있지만 그의 태도는 매서우리만치 침착했다. 그러나 공격을 할 대는 성난 야수와 같이 무서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이가 많은 군관인 레이먼이 피했다.
결투가 끝난 것이었다. 피터가 칼집에 칼을 꽂아 넣자 레이먼이 느닷없이 그를 반격해왔다. 피터는 칼을 빼서 레이먼의 손에서 칼을 떨어뜨리게 하고는 그 칼을 발로 밟은 다음, 자기의 칼 끝으로 상대방의 흉부를 가리키며 뭐라고 몇 마디를 중얼거리고는 칼을 다시 꽂았다.
레이먼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는 혼잣말로 뭐라고 중얼중얼 욕을 해대더니 칼을 칼집에 꽂아 책상 위에 던지고는 휭하니 밖으로 나가 버렸다. 자기 방으로 와서도 그는 계속 욕을 해대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웃음을 띠우면서 철봉을 하나 집어들더니 자기 침대 밑의 땅을 파기 시작했다.
원승지와 호계남은 이제 그곳을 떠날 생각이었는데, 그가 땅을 파는 것을 보자 그가 땅 속에 무엇을 묻으려는지 보기로 했다.
그는 약 두 자쯤 깊이를 파내려가더니 재빨리 총탄을 묻고는 그 구멍을 메워 버렸다. 그리고선 표시가 나지 않게 주위를 진흙으로 덮고서 싱긋 웃더니 방을 나섰다.
원승지와 호계남은 그것이 궁금해졌다. 도대체 그가 무슨 서양 요괴법을 쓰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레이먼은 다시 방안으로 들어왔다. 피터는 그의 뒤에 서 있었다.
레이먼이 계속 뭐라고 하자 피터는 그냥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갑자기 레이먼이 피터의 따귀를 철썩 소리가 나게 후려갈겼다.
피터는 화가나서 칼을 뽑았다. 두 사람은 다시 격투를 벌였다. 레이먼은 점점 발걸음을 움직여, 파놓았던 구멍쪽으로 피터를 유도하였다.
원승지는 깜짝 놀랐다.
(저 사람이 결투에서 이기지 못하게 되니 결국 함정을 만들어 놓고 사람을 암살하려 드는 것이로구나.)
원승지는 그 두사람에 대해 아무런 악의가 없었는데 레이먼의 사악함을 보게 되자 자신도 모르게 의협심이 발동했다.
레이먼은 몇 차례 칼을 휘두르면서 계속 침대쪽으로 피터를 몰아갔다. 피터가 칼을 한 번 휘두르면 레이먼은 두 걸음을 물러섰다. 마침내 피터의 오른발이 함정 위를 디디게 되었다.
[아앗!!]
피터는 외마디 소리를 치면서 앞으로 꼬꾸라졌다.
레이먼은 칼을 빼서 그의 조끼를 찔렀다. 곧 등으로부터 가슴으로까지 칼날을 관통하여 찌르려고 하고 있었다.
원승지는 미리 예상했던 바이므로 급히 창을 밀어 제끼고 몸을 날려 들어갔다. 그리고는 금사검(金蛇劍) 머리부분에 있는 뱀 혓바닥 모양의 갈고리에 레이먼의 칼을 걸어 잡아 당겼다.
피터는 간신히 위기를 벗어나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른발도 이미 함정에서 빠져났다.
레이먼은 자기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겁도 먹고 화가 나기도 해서 이버에는 칼을 세워들고 원승지를 찌르려고 했다.
원승지는 냉소를 머금고 금사검을 좌우로 흔들었다. <띵띵띵!> 하는 소리와 함께 레이먼의 칼이 토막토막 끊겼다. 잠시 사이에 아주 짧은 토막칼이 되어버렸다.
레이먼은 그저 멍청이 보고만 있었다. 원승지는 그의 팔목을 꽉 잡고 비틀었다. 그의 몸통이 순식간에 자신이 파논 함정으로 들어가 버렸다.
원승지는 <하하!>웃고는 창밖으로 뛰어나가 버렸다.
호계남은 그를 뒤쫓아 나오며 재미있어했다.
[원상공, 보세요!]
그러면서 두 손을 들어 3개의 권총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원승지가 이상히 여겨 물었다.
[어디서 가져온 것이지?]
호계남은 창 안을 향해 가리켰다. 원래 원승지가 피터를 구할 때 호계남도 따라 들어가, 세 사람이 정신없는 틈을 타서 그 서양군관의 소유물인 3개의 권총을 훔쳐 온 것이었다.
원승지가 감탄한 듯 한마디했다.
[참으로 신이 내려주신 손이로구나.]
두 사람은 일행과 다시 합세하였다. 청청이 권총 하나를 가지고 놀다가 무의식 중에 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자욱해 졌다.
사천광이 그녀 앞에 앉아 있었는데 다행히도 행동이 민첩하여 다치진 않았으나 머리에 쓴 두건이 땅에 떨어졌고 온 얼굴이 화약가루로 범벅이 되었다.
청청은 대경실색하여 계속 미안하다고 했다. 사천광은 어리둥절해 있었다.
[참 대단하군!]
일행들은 나머지 두 개의 권총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총 속에는 탄약이 장전되어 있었다.
정청죽이 입을 열었다.
[화약은 원래 중국의 것이오. 우리는 폭죽을 터뜨려 사냥을 하는 데 썼었지만 서양사람들이 배워가서는 사람을 죽이는데 사용하기 시작했지요. 저 서양군대는 백 명 정도 되는데 그렇다면 총도 백개는 넘게 가지고 있다는 거지요.
이거 재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무기의 굉장함을 알고 있었으므로 저들과 대항할 수 없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아무말도 없이 의기소침하여 더 이상 아무 대책도 세우지를 못했다.
호계남이 말했다.
[원상공, 내게 묘안이 하나 있는데 해야 좋을지 어쩔지 잘 모르겠소.] 철나한이 웃으며 되물었다.
[너도 별 뾰쪽한 수가 없을 텐데?]
원승지가 입을 열었다.
[호형이 말하시오. 어디 좀 들어 봅시다.]
호계남은 웃으면서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청청은 다듣고 나자 박수를 치며 동의했다. 사천광 등도 각자 묘안을 제출하였다.
원승지는 이것저것 생각하더니, 그 계획을 실행해야겠다고 느끼고, 마음속에 결정을 내렸다.
그 서양여자 제크린의 아버지는 본시 오문포도아(墺門葡萄牙)국의 군관이었는데 이미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이번에 대포를 운송하는 배를 타고 귀국을 하려는 것이었으므로, 대포를 운반하는 군대를 따라 북상하여 천진에 가서 다시 배를 타려는 것이었다.
피터는 그녀의 부친의 부하이며 제크린과는 사랑하는 사이였다.
레이먼은 포국(葡國) 본토에서 제크린을 보자마자 즉시 그녀의 사랑을 빼앗아겠다고 마음먹었다.
결과, 자신이 비록 계급은 높을지라도 풍류가 있고 옆의 사람을 상관치 않는데다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곤 했으므로, 피터의 분노를 일으켜서 드디어 도전장을 받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칼싸움을 할 때, 너무 조급한데다 실수를 하고 또 음흉한 계획까지 세웠으나 원승지에게 발각되고 말았던 것이다.
피터는 그가 상사이므로 어떻게 하지는 못했지만 전보다 더욱 조심스럽게 레이먼을 감시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이들은 이날 대촌장(大村莊) 만공촌(萬公村)에 도착해서 그 마을의 <만씨종사(萬氏宗祠)에서 묵기로 하였다.
잠이 들어 밤중이 되었을 때였다. 갑자기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려 왔다. 보초를 서고 있던 서양병사들이 들어와 마음에 불이 났다고 말했다.
레이먼과 피터는 급히 일어나 불기운을 보니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그는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려 화약들을 사당 밖으로 끌어내도록 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정신없이 물통으로 불을 끄고 있었고 수십명의 장사들은 사당 안으로 들어가 이곳저곳에 물을 뿌리고 있었다.
레이먼이 왜 그러냐고 원인을 묻자 마을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대답하였다.
[이곳은 우리들 조사(祖師)님들의 사당이므로 먼저 물을 뿌려놔야 불이 더 번지지를 않을 것 아니오?]
레이먼은 그럴듯하다고 여기고 더 이상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그때였다. 마을 사람들이 손으로 물을 뿌리고 또 한편에선 손에 물통을 들고서 화약고를 향해가고 있었다.
서양병사들은 창을 들고 사람들을 마구 때려눕혔지만, 하나를 쫓고 나면 또 하나가 연이어 오므로 도저히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사당 안팎의 화약통과 대포와 창 등 무기 중 무엇하나 젖지 않은 것이 없었고 따라서 불기운은 점점 꺼져가고 있었다.
소란스러운 가운데 새벽이 왔다. 레이먼과 피터는 마을사람들의 행동에 이상한 기미를 깨닫고는 화약이 모두 젖은 것을 보자 이 지방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빨리 이 곳을 빠져나가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하고 막 명령을 내리려 할 즈음이었다. 전령이 와서 어제 저녁 혼란 중에 화약마차를 끄는 말들이 몽땅 없어졌다고 보고하였다.
레이먼은 벌떡 일어나 그를 말채찍으로 마구 때리면서 화풀이를 하였다. 그리고 곧 철통사(鐵通四)에게 명하여 병사들을 모두 마을 가운데로 모이게 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렇게 큰 마을에 가축이라곤 한 마리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모두들 소문을 듣고서 자기네 가축들을 숨겨 버렸기 때문이었다.
가축없인 한발짝도 화약을 옮길 수가 없는 실정이었다. 할 수 없이 레이먼은 피터에게 전통사를 데리고 앞마을 가서 가축들을 모아 오도록 했다. 레이먼은 병사들을 감독하여 화약통을 열고 화약들을 꺼내어 햇빛에 말렸다.
해거름녘이 되어서야 화약이 말랐다. 병사들이 막 통속으로 화약을 집어 넣으려 할 때였다. 갑자기 민가로부터 수십개의 횃불이 화약더미로 던져지더니 여기저기서 폭음과 함께 화약연기가 하늘을 찔렀다...
서양병사들은 혼비백산, 놀라 달아나고 이리저리 우왕좌왕하는 바람에 순식간에 화약통 근처는 수라장으로 변했다.
레이먼은 병사들에게 명령하고 민자꽂으로 화살을 쏘게 하였으나 연기 때문에 수십 명의 장사들이 숲속으로 도망쳐 버리는 것으로 그쳤을 뿐이었다. 레이먼은 화약을 점검해 보니 이미 십중팔구가 불에 타 없어졌다.
3일째 되는 날 오후, 피터가 수십 필의 말을 모아 이끌고 돌아와서 겨우 대포를 끌게 하였다.
며칠이 또 지났다. 하루는 협곡을 지나게 되었는데 깎아지른 듯 한 길이 하나 나 있을 뿐 아슬아슬한 행군이었다.
레이먼과 피터는 병사들에게 지시하여 대포 하나에 열명의 병사로 하여금 앞에서 당기고 뒤에서 밀게하여 산길을 지나가게 하였다. 대포가 굴러 떨어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산길은 갈수록 험해졌다. 병사들은 죽을 각오를 하고 전력을 다해 대포를 밀어 올라갔다. 산이 움푹 들어간 부분에 이르렀을 때였다. 갑자기 수십개의 화살이 <씩! 씩!> 소리를 내며 날아왔다.
수 십명의 명사들은 모두 그 자리에서 화살에 맞아 쓰러졌다. 또 수십개의 화살은 말들의 등에 가서 꽂혔다.
짐승들은 고통을 이기지 못해 급격히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 아무리 붙잡으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대포 한 대의 중량이 수천근이 되고 보면, 그걸 끌고 떨어지는 속도는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거기다가 길에는 갑자기 함정이 생겨서 적지 않은 말들이 그속으로 빠져 떨어졌다. 또한 홀연히 굉음이 들리더니 끝에 있던 두 대의 대포가 거꾸로 미끄러 떨어져 멀찌기 산아래로 굴러가 버렸다.
수명의 병사들이 눌려 죽고, 앞쪽의 8대의 대포도 역시 낙엽처럼 굴러 떨어졌다.
병사들은 적이 누구인지 돌아볼 겨를조차 없이 이리저리 흩어져 숨었다. 어떤 사람은 비탈쪽으로 도망치다가 대포가 굴러 떨어져 내려오는 소리를 듣고 놀라 피하느라 게곡으로 몸을 던지기도 하였다.
열 대의 대포는 구르고 굴러서 점점 속도를 빨리하여 앞에서 끌고 달려 떨어지는 말을 깔아 뭉게 죽였다. 그 죽는 꼴이란 차마 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
잠시 후, 땅을 흔드는 굉음소리와 함께 열 대의 대포는 모두 계곡 속으로 쳐박혀 버리고 말았다.
레이먼과 피터는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제크린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벌서 기절해 있었다. 두 사람은 그녀를 일으켜 정신을 차리게 해놓고, 다시 병사들을 모아 적에게 대항했다.
그러나 적은 이미 언덕 위에 깊은 구덩이를 파고 그 속에서 공격해 오고 있었으므로 아무리 이쪽에서 반격을 해도 별 소용이 없었다. 도리어 그들은 쉬지않고 화살을 쏘아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두 시간여의 싸움을 계속했지만 서양병사들은 끝내 포위망을 뚫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레이먼이 단안을 내렸다.
[우리의 화약이 이제는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어떻게 해서든지 뚫고 나가야만 해!]
피터가 대답했다.
[전통사가 가서, 저 도적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물어보도록 해!] 레이먼이 외쳤다.
[저들과 무엇을 흥정하겠다는 거지? 네가 못한다면 내가 뚫고 나가겠다!] 피터가 대답했다.
[저 도적들의 활 솜씨는 보통이 넘습니다. 무엇 때문에 쓸데없는 만용을 하시렵니까?]
레이먼은 제크린을 힐끗 쳐다보고는 몹시 기분나빠하면서 침을 퉤 뱉아내고서는 욕을 해댔다.
[비겁한 놈! 더러운 놈!]
피터 역시 얼굴이 샛노랗게 화가 나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저 도적들을 물리치고 나서 네가 무례했던 대가를 맛보게 해 주겠어!] 레이먼은 벌떡 일어나면서 소리쳤다.
[용기있는 남자는 모두 날 따르라!]
피터가 빈정거렸다.
[레이먼 상사님, 죽을 길을 찾아나설 생각이신가요?] 병사들은 레이먼을 따라나서는 길이 곧 죽는 길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누가 감히 그를 따라 객기를 부리겠는가? 레이먼은 칼을 들고서 계속 외쳐댔지만 따라나서는 숫자는 극소수였다.
그때였다. 화살 하나가 어디선가 날아와 그의 가슴에 푹 꽂혔다. 그는 순식간에 엎어지더니 곧 죽어버렸다.
피터와 병사들은 산속 도랑 속으로 몸을 피하였다. 아직도 그들은 예리한 무기를 가지고 있으므로 아무도 감히 접근을 못했다.
하루 낮, 하루 밤을 그렇게 버티면서 그들은 그저 관군이 와서 구해지기만을 희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의 관병의 부패란 이루 말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만일 전령을 파견하면 공문이 오고가고 또 보여줘야 하고 다시 논의를 해야만 하니 적어도 보름은 족히 걸리므로 언제쯤 관군이 와서 그들을 구해 줄 수 있을 것인가? 이틀째 저녁, 병사들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할 수 없이 스스로 항복을 하고야 말았다..
전통사가 큰 소리로 외쳤다.
[우리는 항복하겠다. 서양사람이 투항한다고 말했다.] 산언덕 위에서 한 사람이 마주 외쳤다.
[그렇다면 무기들을 모두 던져라!]
피터가 대답했다.
[무기는 던질 수가 없다.]
상대방은 조용히 이렇다할 공격도 없었다. 얼마후 병사들은 무기를 한 곳에 모아 쌓아놓고 먹을 것도 좀 달라고 외쳐댔다.
양쪽 산언덕에서 뭐라고 명령하는 신호소리가 들리더니, 구덩이 속으로부터 수백명의 무사들이 일어서 나와 서양병사들 앞에 가 섰다.
그 중에 몇 명이 다가왔다.
피터가 자세히 살펴본 즉 예전에 자기의 생명을 구해 준 사람도 거기 끼어 있었다. 피터는 자신의 칼을 뽑아 몇 발짝 나서더니 두 손으로 그것을 받쳐들고 원승지에게 건네주었다. 항복의 표시였다. 피터는 그래도 이 사람에게는 항복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원승지는 그가 이렇듯 깍듯이 예의를 갖추어 항복하는 것을 보고는 놀라서 두 손으로 마구 저으면서 전통사에게 말했다.
[당신이 저 사람에게 말하시오. 서양 대포를 갖다가 만일 중국의 국토를 방위하는데 쓰고 외적을 막는다면, 우리는 그것으로 감사드리고 우리의 친구로 받아들이겠다고요.]
전통사는 그 말을 곧 통역하여 주었다. 피터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손을 내밀어 원승지를 잡았다.
원승지가 한마디 했다.
[당신들이 동관으로 가는 것은 황제를 도와 백성들을 죽이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다!]
피터가 대답했다.
[정말 중국 백성들을 치려는 것입니까? 난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원승지는 그의 얼굴색이 진실됨을 보고는 그 말이 사실임을 알았다.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우리 중국의 모든 백성들은 여러모로 힘듭니다. 먹을 것도 없어요. 그래서 그저 어떤 사람이고 나타나서 황제를 타도하고 그리고 이 어려움을 벗어나길 바랄 뿐이지요. 황제는 그것이 두려워 당신네들의 대포를 이용해서라도 백성들을 죽이려는 것이오.]
피터가 대답했다.
[저도 가난한 집안의 출신이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의 고초를 알만큼 알지요. 난 당장에 우리의 나라로 돌아가고 싶소.]
원승지가 선선히 말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병사들을 데리고 가시지요.] 피터는 곧 자기 부하들을 보았다.. 원승지는 술과 고기를 내오게하여 서양병사들을 배불리 먹여주었다. 피터는 원승지에게 손을 들어 경의를 표하고는 일어섰다.
[왜 무기는 안 가져 가지요?]
전통사가 원승지의 질문을 통역하였다. 피터는 이상하게 여기면서 대답했다.
[그것은 당신네들의 전리품이오. 당신은 우리를 놓아주면서도 우리에게 돈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당신의 그 큰 아량에 감사할 따름이오.]
원승지가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은 이미 대포도 다 잃었는데, 총마저 가져가지 않는다면 돌아가 상관에게 더 큰 벌을 받을까 그게 걱정이오. 모두 가져 가시오.] 피터가 숙연히 대답했다.
[당신은, 우리가 당신네들을 쏘아버릴까 두렵지도 않소?] 원승지가 <하하!> 웃으며 대답했다.
[대장부가 한 번 뱉은 말은, 달리는 말도 잡기 어려운 법이오. 우리 중국 사람들은 신의를 서로 비교하기를 좋아하오. 이미 당신이 호한이라고 여겼는데 무엇을 더 이상 의심하겠소?]
피터는 연신 감사해 하면서 병사들을 시켜 무기를 챙겨들게 하고 떠났다.
그들은 돌아가는 길에 깊이 생각하였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가 존경스러웠다.
병사들에게 잠시 쉬라고 얘기한 다음, 그는 전통사와 같이 돌아와 품속에서 천으로 된 주머니를 하나 꺼내어 원승지에게 건네주었다.
[대장! 대장이 이처럼 호걸이시니 예의로써 내게 있는 이 물건을 드립니다.]
원승지가 그 주머니를 열어보니 접히고 접힌 두꺼운 종이가 들어 있었다.
펼쳐보니 다름아닌 지도였다. 그 지도에는 대해중의 한 섬이 그려져 있고, 그림위에는 꼬불꼬불한 글자가 잔뜩 쓰여져 있었다.
피터가 설명했다.
[이것은 남방해상의 한 섬인데, 육지에서 천리나 떨어져 있습니다. 그 섬은 기후가 따뜻하고 물자가 풍부하여 마치 천당과 같지요. 제가 항해할 때는 그곳을 지나지요.]
원승지가 물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이 지도를 나에게 주시지요?]
피터가 대답했다.
[당신네들이 여기서 이렇게 힘든 생활을 하느니 보다는 중국의 백성들을 그곳으로 이끌고 가서 편히 사는 것이 낫지 않겠소?]
원승지는 속으로 웃으며 생각했다.
(당신이 외국사람으로 마음이 좋기는 하지만, 우리 중국이 얼마나 크고 얼마나 많은 억만의 대중이 있는지는 모르시는구료. 더 큰 섬이라 해도 살 수 없을 것이오.)
그러면서 물었다.
[그 섬에는 사람이 살지 않습니까?]
피터가 대답했다.
[어떤 때는 서반아의 해적이 드나들기도 하지만 또 어떤 때는 조용하지요.
당신과 같은 영웅호걸들은 죽어 마땅한 그런 해적 따위가 두렵지는 않을 것이오.]
원승지는 그의 성의를 알고는 감사히 여기고 지도를 받자, 피터는 작별을 하고 다시 떠났다.
전통사가 몸을 돌리자, 마침 그곳에 따라왔던 청청이 손을 내밀어 그의 귀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다음에 당신을 만날 때는 행운이 있기를 빈다. 다시 한 번 우리 동포를 속일 때는 너의 목숨이 위태로울 줄 알아!]
전통사가 귀를 만지며 대답했다.
[소인 다시는 안하겠습니다.]
그의 이는 대여섯개나 빠져 있어서 말을 하는대도 바람이 빠졌다. 그래서인가? 마치 <소인 다시 잘하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원승지는 일행들을 이끌고 계곡으로 내려가 대포들을 살펴보았다. 10대의 대포가 서로 부딪쳐서 박살이 난 상태였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이 되버린 것이었다. 그는 흙으로 그것을 덮어 버렸다.
원승지는 대승리를 거두었으므로 후비문 등과 어울려 한나절이나 통음을 하고 헤어졌다.
다음날, 그들은 다시 벙어리와 홍승해 등과 다시 북경을 향해 출발 하였다.

- 계속 원제: 벽혈검(碧血劍) / 김용(金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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