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크밤

碧血剑 4-2

3학년2반 | 2022.01.17 07:16:20 댓글: 0 조회: 291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2823

* 제 4 권 *

- 2 - 무사의 첫사랑

[그것은 20여 년전의 일이었다. 그때 나는 지금 너의 나이만큼 크지 않았었다. 너의 아버지께서는 막 도임하여 교주의 자리에 있었는데, 그는 나를 파견하여 만묘산장(萬妙山莊)의 장주로 삼아 그쪽의 사굴(蛇窟)을 관리하게 하셨다. 그날 나는 할 일이 없어서 혼자 뒷산으로 가서 새를 잡으며 놀았단다.]
하철수가 말참견을 하였다.
[고모님, 장주 노릇을 하면서도 새를 잡으며 놀아요?] 하홍약이 흥 소리를 내었다.
[내가 방금 말했지! 그때 나는 아직도 어린애였다고. 나는 두 마리의 물총새를 잡아서 마음이 굉장히 기뻤단다. 돌아올 때 사굴 옆을 지나가는데 갑자기 숲속에서 스르륵 하는 소리가 울리는 것을 들었다. 도망가는 뱀이 있다는 것을 알고 급히 쫓아갔지.
과연 한 마리의 오화(五花)뱀이 밖을 향해 유유히 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우리들의 뱀굴 안에 뱀들은 잘 길들여져서 이제까지 도망간 적이 없었는데 이 오화뱀은 바깥으로 나가서 계속 쫓아만 갔다. 그 오화뱀은 숲속 뒤쪽에 이르더니 한 사람을 향하여 건너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고개를 들어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깜짝 놀랬다.]
하철수가 물었다.
[뭘 했는데요?]
하홍약이 이를 갈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이 곧 전생의 업보였다. 그는 내 인생 속의 마귀였다.] 하철수가 급히 물었다.
[그 사람이 바로 금사랑군이었습니까?]
하홍약이 헛기침을 했다.
[그때는 나도 역시 그가 누구인지를 몰랐다. 단지 그가 눈매가 밝고 아주 잘생긴 소년이었다는 것만을 알았어. 손안에는 뱀을 유도하는 한 다발의 불이 붙어있는 향쑥을 들고 있었지. 처음부터 오화뱀은 향기로운 냄새를 맡고 그에 의해 유인되어 나온 것이었어. 그는 나를 보자 웃었다.]
하철수도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고모님은 그때 아주 예쁘셨다니까 그는 틀림없이 반했을 거에요.]
하홍약은 제지랄 하고 투덜거렸다.
[나는 네게 진실된 과거를 말하고 있는데 장난하려고 하는 줄 아니? 내가 그때 그를 보았을 때는 그는 모르는 사람이었고, 그가 뱀에게 물릴까 두려웠다. 그래서, <여보세요, 그 뱀은 독이 있어요. 움직이지 마세요. 제가 잡을께요.> ㅎ더니 그는 웃으면서 등으로부터 하나의 나무상자를 땅에 내려 놓더라. 상자의 모서리 위에는 하나의 얇은 밧줄에 살아서 뛰고 있는 개구리를 한 마리 묶어 넣았더구나. 오화뱀은 그 개구리가 먹고 싶어서 천천히 나무상자 안으로 들어가 막 머리를 뻗어 물으려 했지. 그때 그 소년이 밧줄을 잡아 당겼지. 그러자 상자 덮개가 덮어졌지.
오화뱀은 미끄러지며 몸을 안정시키려 하였으나 그 소년의 두 손가락이 이미 오화뱀의 목을 집어 들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그의 수법은 비록 우리들과는 달랐으나 손가락으로 집는 부위는 조금도 차이가 나지 않았다. 오화뱀은 유순하게도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보고는 그가 전문가라는 것을 알고 곧 마음을 놓았었다.] 하철수가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쯧쯧쯧, 고모님께서는 생전 처음보는 사람을 보고 곧 그렇게 관심을 가지셨군요.]
청청이 말참견을 하였다.
[이봐요, 말참견 좀 하지 않을 수 없어요? 노인이 말씀하시는 것 좀 계속 들읍시다.]
하철수가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넌 듣기 싫다고 말하지 않았니?]
청청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 갑자기 듣고 싶어졌는데 이젠 들어도 되지요?] 하철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내가 말참견하지 않으마.]
하홍약이 문득 그녀를 한 번 돌아보았다. 그러나 입은 계속 놀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저 사람이 누군가? 어찌도 이렇게 대담한가? 여기까지 와서 우리들의 뱀을 잡아? 설마 오독교의 위명을 모르지는 않겠지?> 하는 의심이 생겼다. 또 그를 보자니, 오른손에 하나의 짧은 쇠로된 방망이를 들고 있었는데 그걸 오화뱀의 입 주변으로 뻗치더라. 오화뱀은 얼른 물었지만 내가 가까이 가서 보니 그것은 원래 쇠로 된 방망이인데 중간은 텅텅 비었고 오화뱀은 입안의 독액이 끊임없이 흘러 나와 철관을 가득 채우는 거야.
나는 그때 비로소 알았지. 뱀의 독을 훔치기 위해 온 것이었구나! 요 며칠 사이에 뱀굴안의 많은 뱀들이 먹이를 통 먹지 않아 마르고 또 게을러진 것도 알고보니 그 때문이었던 거였다. <여보세요. 빨리 내려 놓아요!> 하고 나는 소리쳤지. 동시에 복사관(伏蛇管)을 꺼내어 쉬하고 한 번 불었지. 그가 이상한 소리에 고개를 들어 보는 순간, 그 오화뱀이 목을 비틀며 곧 그의 손가락 위를 물었다. 그는 급히 오화뱀을 던져 버리고 나무상자를 열어서 해독약을 꺼내려 하였다.]
[당신은 정말 담이 크군요.]
[나는 급히 서둘러 앞으로 나갔지. 그런데 그의 무공이 어찌나 신기한지, 그는 가볍게 한 번 움직였는데 나는 곧바로 첫 접선에서 넘어지고 말았다.......]
청청이 다시 말참견을 하였다.
[당연하지. 당신이 어떻게 그 분의 적수가 될 수 있었겠어요?] 하홍약은 흰 눈을 한 번 뒤집으며 바라보았다.
[그러나 우리 오화뱀의 독성은 과연 대단해서 그가 해독약을 꺼내도록 두지를 않았다. 물린 곳이 이미 독이 퍼져서 그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나는 갑자기 마음이 너그러워져서 속으로 <이렇게 나이가 어린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애석하고, 또한 무공이 뛰어난 사람이라 더욱 애석하다> 고 생각하였다.
하철수가 장단을 쳤다.
[그래서 고모님은 곧 그를 구하기 위해 돌아가서 그를 몰래 감춰 놓고 약을 가져다가 그에게 먹여 해독을 해줬고, 그의 상처가 다 나아가자 곧 그를 사랑하게 된 것이죠?]
하홍약은 변명하지 않았다.
[그의 상처가 다 낫기도 전에 나는 이미 그에게 마음을 허락했다. 그때까지는 오독교 안의 사람들 모두가 나를 좋아했는데도 어찌 된 노릇인지 나는 그들을 거들떠 보지도 않고 이 사람에 대해서만 정신이 뒤집히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단다. 3일이 지나자 그 사람의 몸에 있던 독이 제거되었다. 나는 그에게 이곳에 와서 무엇을 했느냐고 물었다. 그는 내가 그의 생명을 구해주었다고 말하면서 어떤 일도 나를 속이려 하지 않았다. 그는 성이 하(夏)씨였다. 신변에 깊고 깊은 원한을 가졌는데, 적수는 무공이 너무도 강하고 또한 무리들의 세력이 커서 원수를 갚는데 자신이 없었다는 거다. 오독교가 독약을 면밀히 연구함이 천하에 손꼽힌다는 것을 듣고는 그래서 급히 운남(雲南)으로 와서 오독교의 공격을 배우려.......]
그녀가 여기까지 말하자 원승지와 청청은 비로소 모든 것을 명백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금사랑군과 오독교는 이와 같이 서로 교제하게 된 것이었다. 그가 독약을 취한 까닭은 자연히 그 의도가 석량파 온씨를 대항하려 한 것에 있음도 알게 되었다.
하홍약이 뒤를 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몰래 엿보아 독약을 제련하는 비결을 배우거나 우리들의 뱀굴 안에 있는 독사의 독약을 훔쳐 제련하여 암살 무기로서 원수를 대항하려 하였다고 했다. 또 이틀이 지나자 그의 상처가 매우 좋아져 나에게 인사하고 떠나려 하였다. 나는 말릴 수가 없어서 두 개의 큰 병에 독사의 독약을 넣어 그에게 주었다. 그는 나에게 이 초상을 그려 주었다. 나는 그에게 원수를 갚는 일에 어떤 위험함이 따를지 모르지만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당신의 무공은 아직도 수준 이하여서 거들어 줄 수 없다고 잘라서 말했다. 나는 그에게 원수를 갚은 후에 다시 나를 찾아 오라고 했지. 그러며 그에게 언제 올 것이냐고 물었다. 그는 그것은 말하기 어렵다면서 그가 원수를 갚으려면 아주 예리한 칼이 부족한데, 듣기에 아미파(峨嵋派)에 진산(鎭山)의 보배인 보검이 있으니 먼저 사천성(四川省)의 아미산으로 가서 그 검을 훔쳐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정말 그 검이 있는지 없는지는 알지 못하니 있다 하더라도 어느때 훔칠 수 있는가 역시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원승지는 여기까지 듣고서 속으로 생각했다.
(금사랑군은 일을 하는데 정말로 모든 걸 돌아보지 않고 오직 원수를 갚는 것만을 위해서 무엇이든지 한 사람이었구나.) 하홍약은 스스로 또 탄식하였다.
[그때에는 머리가 멍청해서 단지 그가 나와 함께 있게 될 날만을 기대하였다. 나는 아주 미친 것 같아 어떤 일도 두려워하지 않고 할 수 없는 일도 오히려 해내려 하였다. 나는 그를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가야겠다고 느꼈으며, 위험하면 할수록 마음은 더욱 쾌활해졌다. 곧 그를 위해 죽는 것이 또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었지. 아, 나는 그때에 정말로 귀신에게 홀린 것 같았다. 나는 그에게 내가 한 자루의 보검이 있는 것을 아는데, 칼 끝이 예리함은 비교될 만한 것이 없어서 어떤 병기도 부딪치면 곧 끊어져 버린다고 했다. 그는 기뻐서 뛰어 일어나며 그게 어느 곳에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것은 바로 우리 오독교에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금사검이라고 일러 주었다.]
원승지는 여기까지 듣고 마음이 떨려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몸에 숨겨져 있는 금사검을 만졌다.
(설마 이 검이 필경 오독교의 것이었는가?)
하홍약은 계속해서 말했다.
[나는 그에게 그 검은 우리 교파의 세 가지 보물 가운데의 하나로, 대리현(大里縣) 영사산(靈蛇山)의 독룡동(毒龍洞)안에 숨겨져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곳은 우리 교의 5대 분파의 중요한 장소로서 동굴 바깥은 매우 엄하게 지키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자기를 데리고 가서 훔쳐 나올 것을 요구했다. 단지 한 번만 빌려 원수를 갚은 후에는 반드시 돌려 줄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의 부단한 요구에 나는 마음이 약해져서 오라버니의 명패를 훔쳐갖고는 그를 데리고 독룡동굴로 갔다. 지키는 사람은 명패를 보고는 곧 우리들을 들어가도록 해주었단다.]
하철수가 마른 침을 삼켰다.
[고모님, 당신이 설마 감히 옷을 입고 독룡동굴에 들어가지는 않았겠지요?]
하홍약은 천정을 바라보았다.
[당연히 그럴 수가 없었지.......]
청청은 말참견하며 물었다.
[왜 옷을 입고는 그 독룡동굴에 들어가지 못하지요?] 하홍약은 흥 하고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하철수가 설명했다.
[하공자, 그 독룡굴 안에는 수천만 가지의 학정(鶴頂) 독사가 자라고 있어서.... 동굴에 들어가는 사람이 몸의 어느 한군데라도 독사약을 바르지 않아 학정독사에 물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들 독사는 너무 특이해서 한 번 물리면 세 걸음도 못 가서 죽게되니 가장 무서운 것들이다. 그러므로 동굴에 들어가는 사람은 반드시 옷을 벗고 온몸에 독사약을 발라야 한다.]
청청이 혀를 찼다.
[너희들 오독교의 일은 정말, 정말.......]
하홍약이 말했다.
[정말 무엇이냐? 만약 이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독룡동굴에 들어갈 수 있겠느냐? 그래서 나는 옷을 모두 벗고 온몸에 독사약을 바르고, 그에게도 또한 약을 발라 주었다. 그는 등을 바를 수가 없어서 내가 그를 도와 발라 주었다. 두 어린 남녀가 몸에 옷도 안 걸치고 동굴에서 서로 약을 발라주었는데 최후에는 또한 어떤 좋은 일을 하지 않을 수 있었겠느냐? 하물며 내가 일찍이 그에게 마음을 기울이고 있었으니....... 이렇게 하여 그만 난 그에게 몸을 주어 버렸단다.]
청청은 이 말을 듣자 이마를 불같이 하고서는 갑자기 침대 밑의 두 사람이 생각나서 곧 손발로 침대 바닥을 마구 두들겼다.
하철수가 웃으며 말했다.
[하공자, 지금 뭐하시오?]
청청은 화내어 외쳤다.
[둘이서 추태를 부렸다는 것이 원망스러워서 그렇소!] 하홍약은 아주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내가 추태를 부렸다고? 그것 또한 좋다. 우리 달자 집안의 자식들은 본래 너희 한(漢)나라 사람처럼 그렇게 품행이 지저분하지는 않다. 나는 곧 그를 데리고 동굴 안의 석문을 열고서 들어갔다. 금사검과 그 나머지 두 보물이 석룡의 입안에 놓여 있었는데, 그는 석룡에 뛰어 올라 곧 그 검을 집어 들었다. 그때 그는 마음이 불량하여 나머지 두 보물도 집어 들었다. 그것이 곧 24매금사추(24枚金蛇錐)와 보물지도였다.]
그녀는 여기까지 말하고는 눈을 감더니 옛 일을 깊이 회상하는 듯 잠시 있다가 후르르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가 세 가지 보물을 가진 것을 보고 곧 일이 좋지 않게 될 것을 깨닫고서 그의 금사추와 지도를 용의 입에 돌려 놓으라고 졸랐었다.]
청청은 일찍이 그것이 곧 건문황제(建文皇帝)의 보물지도라는 것을 알고 일부러 물었다.
[그게 어떤 지도죠? 우리 아버지는 오로지 원수만을 갚으려고 생각하고 계셨는데, 당신들 오독교 지도가 무슨 쓸모가 있었겠어요?]
하홍약이 대답했다.
[나 역시 어떤 지도인지는 모른다. 그것은 우리 교파에서 몇 십년 내려온 보물지도라는 것뿐, 그리고 그는 원수를 갚은 후 반드시 세 가지 보물을 돌려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그가 가 버린 후 나는 매일 그를 생각하고 지냈다. 그러나 2년동안 아무 소식도 없었다. 그런데 강호의 전언(傳言)에 따르면 강남에 괴협(怪俠)이 한명 나타나 괴검을 사용하여 금추를 잘 써 사람을 다치게 한다고 들었다. 그의 별명은 금사랑군이라는 것도....... 나는 확실히 그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그가 원수를 갚지 않았나하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오래 지나지 않아 교주는 읫미이 일어났던 모양이더라. 그래서 마침내 세 보물을 잃어버렸음을 알고 조사 해내고는 나에게 스스로 결단하도록 강요했다.
그 결과 나는 결국 이 모양이 되었다.]
청청이 한마디 했다.
[대체 왜 그렇게 되었지요?]
하홍약은 분노를 머금고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하철수가 소리를 낮추어 입을 열었다.
[그때는 우리 아버지가 교주였는데 비록 자기 친동생이 이런 일을 범했다 해도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므로 고모는 교리의 규범대로 뱀굴에 들어가 수많은 뱀들에게 물어 뜯기는 벌을 받았다. 고모의 얼굴이 저렇게 된 것 역시 그때 뱀에게 물린 것 때문이다.]
청청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그것은 정말 미안한 일이군요. 나는 그것만은 몰랐어요.]
하홍약은 그녀를 한 번 흘겨보더니 콧방귀를 뀌었다.
하철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는 치료한 후에 곧 쫓겨나 구걸을 하게 되었다. 우리 교리의 규범에 의하면 중죄를 지은 사람은 삼십년 동안 반드시 구걸하며 목숨을 부지해야만 한다. 그러나 돈 한 푼, 쌀 한 줌의 도둑질도 허용되지 않으며 또한 동료 무림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청해서도 안되기 때문이다.]
청청은 말없이 하홍약에게 시선을 주었다.
[만일 내 아버지가 정말로 당신을 그렇게 하셨다면, 그것만은 정녕 그 분이 나빴군요.]
하홍약은 허무하게 천정을 올려다 보았다.
[나는 수천만 번 뱀에게 물려 이 모양이 되었다. 그리고 30년을 구걸하는 벌을 감당했다. 나는 모두 즐겁게 받아들였다. 그날 내가 그와 함께 독룡동굴로 간 것부터가 어쩌면 운명이었으니 그가 꼭 나를 해쳤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 그가 나를 해쳤다는 것은, 그가 나의 은혜를 져버리고 오히려 박정하게 떠나버린 것이었다. 그때 나는 정말이지 그에게 정이 들대로 들었었다. 그래서 구걸하면서까지 강남을 찾아가서 그를 만나려고 했었다. 내가 절강의 경내에 다다랐을 때, 그가 구주(歐洲)에서 원수를 죽였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러나 끝내 신출귀몰하는 그를 도저히 만나 볼 수가 없었다. 먼 훗날 금화(金華)에서 그를 만나게 됐을 때는 이미 그가 어떤 사람에게 잡혀 있는 몸이었다. 너는 그를 잡은 사람이 누구였는지 알겠느냐?]
하철수가 고개를 저었다.
[구주에 있는 사람들입니까?]
하홍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다! 그 사람들은 바로 방금 네가 보았던 그 온가 집안의 몇몇 늙은이들이었다.]
하철수와 청청은 동시에 <아!> 하고 소리를 질렀다. 하철수는 온씨 집안의 네 늙은이가 이 일과 연관이 있는 줄은 전혀 생각치 못했던 것이다. 청청 역시 외조부들이 북경에 왔다는 말을 듣고는 그 나름대로 놀랐다.
하홍약이 다시 뒷말을 이었다.
[나는 몇 번이고 독을 먹여 적을 죽이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항상 그를 이용해 독을 방비하는가 하면 음식을 먹고 차를 마시는데는 모두 그가 먼저 시험삼아 먹어보도록 했었다. 이렇게 되어 나는 어떻게 할 방도를 찾지 못했었다. 그들은 그를 압송하여 북쪽으로 가는 도중이었는데, 후에 안 일이지만 그에게 지도를 내 놓으라고 강요하는 것임을 알았다. 한 번은 내가 기회를 만들어 그와 몇 마디를 나누었는데 그는 이미 몸의 근맥(筋脈)이 적들에 의해 끊어져서 이미 폐인이 되어 있었다. 또한 상대방의 무공은 높고 강해서 나 한사람으로서는 결코 그들을 당해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오로지 살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그것은 상대방을 따돌린 뒤 화산으로 가는 것 뿐이라는 것이었다.] 하철수가 물었다.
[화산에 가서 뭘 하시려는 건데요?]
[그가 말하길, 천하에 단 한 사람만이 자신을 구할 수 있는데 그가 곧 화산파의 장문인 신검선원(神劍仙遠) 목인청(穆人淸)이라는 것이었다.]
원승지는 여전히 침대 밑에서 가슴을 띠게 하는 이야기를 돋고 있었다. 그 역시 마음속 깊이 형용해 낼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금사랑군이 한 행위에 대한 원망인지, 애석함인지, 연민인지.......
더구나 때 아닌 곳에서 스승의 이름을 듣게 되니 정신을 집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청청 역시 하홍약이 원승지의 스승을 거론하자 더욱 주의하여 들었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그에게 목인청이 어떤 사람인지를 물어 보았다. 그는 천하에서 둘도 없는 군법과 검법이 높은 도인이라고 하였다. 그는 그때까지도 목인청을 전혀 본 적도 없었지만, 평소에 이 사람이 정직하고 의를 중시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 매우 흠모해 왔다는 것이었다. 틀림없이 손을 써서 자기를 구해 줄 것이라고 하면서....... 그는 또 온가의 다섯 늙은이가 쓰는 오행진법(五行陣法)은 사실 굉장하다고 했다. 거기에 공동파의 도인들이 돕고 있으니 이 목씨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그들을 물리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나에게 빨리 화산에 가서 목도인에게 울며 도움을 청해 달라고 부탁했었다. 나는 즉시 좋다고 하고 마음속으로 방법까지도 정했다. 그것은 만약 목도인이 나를 상대하려 하지 않는다면 나는 곧 그의 앞에서 검을 휘둘러 자결이라도 하려는 계획이었다. 차라리 내가 죽더라도 그를 구해 내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때 적들이 우리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고 있어 그와 나는 다시 헤어져야만 했다. 하도 섭섭해서 그의 옷속을 더듬어보니 아주 꼼꼼하게 수가 놓여진 향기가 나는 작은 주머니가 문득 만져졌다. 그 속에 하필 한 묶음 여인의 머리카락과 금비녀가 들어있을 줄 어찌 알았겠느냐? 나는 화가나서 온몸을 떨며 누구의 것이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는 말하려 하지 않았다. 나는 만약에 그것을 말하지 않으면 목도인에게 도움을 청하러 가는 일을 그만두겠다고 했다. 그래도 그는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오, 그 거만한 태도! 보아라. 자, 저 녀석의 저 모습! 곧 그 애비의 그때의 자세와 조금도 다를 바 없구나!]
그녀는 갑자기 목소리를 싸늘하게 바꾸며 손가락으로 청청을 가리켰다.
[나는 그에게 강요해서라도 알아보려 했지만 그 사이 지키는 사람이 돌아와 버렸다. 나는 화가 굉장히 났었다. 내가 그를 위해 이런 고초를 견디어 냈는데도 그에겐 오히려 나를 내팽개치고 다른 애인이 있었다니! 그 사람들이 화산에 올라갈 때 나는 목도인을 찾으러 가지 않고 몰래 그를 지키는 자들에게 독을 먹이고 또 은혜를 배반한 그 사람조차 독을 먹여 죽이려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 두 명의 도사만을 죽였다. 그리고 나머지 온씨 사람들이 주의를 게을리 했을 때 나는 그를 구해내고 금사검과 금사추도 모두 훔쳐냈었다. 그리고 그를 산굴 속에 숨겨 놓았다. 온씨 집안의 몇 형제들은 아무리 찾아봐도 그가 보이지 않자 서로를 의심하여 저희들끼리 한바탕 다투었었다. 그리고 천천히 산을 뒤졌다. 이렇게 되자 이들은 결국 목도인의 화를 불러 일으키게 되었다. 목도인은 암암리에 절기(絶技)의 무공을 펼쳐 그들로 하여금 모두 놀라 화산을 내려가게 한 뒤 자기도 역시 뒤따라 하산했다.
이날 저녁, 나는 그 은혜를 배반한 도둑놈에게 어서 애인의 이름을 밝히라곤 채근했다. 그는 만일 사실대로 이름을 말하면, 틀림없이 내가 그 여자를 찾아내어 해칠 것이 분명하다고 여겼던지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더구나 그땐 그의 무공이 이미 사라졌으니, 그가 설령 서둘러 가더라도 그녀를 보호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그가 한없이 미워서 3일동안 계속해서 가시나무로 그를 채찍질했다.]
청청이 소리를 질렀다.
[당신, 우리 아버지를 그처럼 괴롭혔다니!]
하홍약이 냉소하였다.
[그건 그 스스로가 화를 자초한 것이다. 내가 더 심하게 때리면 때릴수록 그는 더 크게 웃었으니 말이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내 얼굴이 뱀에게 물려 추해졌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고 지금까지 줄곧 진심으로 나를 좋아해 본 적이 없다는 거였다.
그리고 독룡동굴 안에서의 일은 단지 그가 장난한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는 평생 동안 몇 명의 여인과 놀아났는지 모르나 진정으로 그가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단 하나 그의 약혼녀 한 사람뿐이라는 거였다. 그가 말하길, 자기 약혼녀는 아름답고 부드럽고 또 순진하여 나에 비하면 백배는 좋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한마디를 할 때마다 그를 한 대씩 때렸다. 내가 한 대 때리면 그때마다 그는 곧 그 여인을 한마디씩 자랑하였다. 그의 온몸에는 성한 곳이 없을 정도가 됐는데도 여전히 웃으면서 자랑을 그치지 않는 거였다. 3일째 되는 날은 우리 모두가 탈진해 있었다. 나는 하도 배가 고파 과일을 따먹고 왔다. 돌아올 때 보니 그는 굴 앞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는 내가 굴 문을 향해 한 발짝만 내딛으면 곧 칼을 휘두르겠다고 외쳤다. 그는 비록 무공을 상실했었으나 금사보검을 들고 있어서 나는 감히 들어가지 못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그 여자의 이름과 주소를 말해 준다면 들어가지 않겠거니와 은혜를 배반했던 것까지도 용서해 주고 또 폐인이 되었지만 앞으로도 여전히 그를 잘 보살피고 시중들겠다고 하였다.
그랬더니 그는 <하하> 하고 크게 웃으면서 그가 그 여자를 사랑하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강렬하다는 거였다.]
하철수가 측은한 목소리로 물었다.
[고모님, 그런데도 그냥 그렇게 죽게 했습니까?]
하홍약이 콧방귀를 뀌었다.
[흥! 그렇게 쉽게 그를 죽게 내버려 둬? 며칠이 지난 뒤 배가고파 완전히 기진맥진해 졌길래 내가 굴속으로 들어가 그의 두 발을 부러뜨려 버렸다.]
청청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서 그를 때리려 덤볐으나 하철수가 손을 뻗어 가볍게 그의 어깨 언저리를 두드려 움직일 수가 없었다.
[화내지 말아라. 고모님이 말하는 것을 끝까지 들어 보자꾸나.]
하홍약이 다시 뒤를 이었다.
[화산은 아주 높고 험준하다. 양 다리가 부러진 그는 틀림없이 내려갈 수가 없다고 생각하고 나는 곧 하산하여 그의 애인의 소식을 묻고 다녔다. 나는 그 천한 년을 잡아 그의 얼굴을 나보다 더 추하게 만든 다음 데려다가 그에게 보여주고 그가 여전히 그녀를 자랑하고 칭찬할 수 있는가를 시험해 보려고 했었다. 대여섯 달이나 찾아다녔지만 결국 아무 소식도 얻지를 못하였다. 나는 그간 목도인이 산으로 돌아와 나와 마주 서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렇게 되면 정녕 큰 일이었다. 그날 나는 그 목도인이 암암리에 펼친 무공을 측량할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 은혜를 배반한 놈이 그에게 도움을 청한 뒤에 내가 다시 화산으로 돌아가면 정말 나는 방법이 없었으니 말야. 그런데 내가 화산에 돌아갔을 때 그는 이미 종적을 감춘 뒤였다. 어디로 가 버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꼭대기에서부터 모든 곳을 두루두루 찾아보았으나 아무 흔적도 없었다. 목도인이 그를 구해 줬는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가 버렸는지는 끝내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십여년 이래 강호에서 다시는 그의 소식조차 듣지를 못했다. 나는 남쪽과 북쪽 등 사방팔방을 다 다녔으나 역시 이 양심도 없는 나쁜 놈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원승지는 그녀가 가슴 가득히 원한을 품고서 여기까지 말하는 것을 듣고 금사랑군이 스스로 그 산굴의 입구를 막은 것은 원수가 반드시 다시 돌아올 것과 그의 무공은 완전히 상실되어서 상대에게 대항할 방법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는 사람의 은혜를 져 버리는 것은 의롭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구원을 청하는 것이 부끄럽다는 것을 생각하고 굴 속에서 자살한 것이 분명했다. 갑자기 하홍약이 소리를 높여 청청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흥! 그런 그가 너 같은 잡것을 남겨 놓았다니! 대네 네 어미의 이름이 뭐냐? 무어라고 불러? 네가 말하지 않으면 이번에는 네 눈알을.......]
청청이 피식 웃었다.
[하하! 이 흉악한 여우! 우리 아버지가 말씀하신 게 정말 맞구나! 우리 어머니는 당신보다 일천배, 아니 일만배는 더 좋은 사람이야!]
하홍약은 화가 나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두 손을 내밀었다. 어느새 열 개의 손톱이 청청의 얼굴을 잡으려 다가서고 있었다. 청청이 급히 움츠리고 이불로 그녀의 머리를 덮었다. 하철수는 손을 뻗어 하홍약을 가로막았다.
하홍약이 노하여 외쳤다.
[네가 저 애에게 제 부모의 소재를 말해 주도록 한다면 나는 지금이라도 모두 용서하겠다.]
하철수가 대답했다.
[고모님! 우리는 지금 대사를 눈 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모님은 오히려 사적인 원한 때문에 이곳저곳에서 화를 불러 일으키시려고 하십니까? 선도파의 일 또한 고모님께서 하신 게 아닙니까?]
하홍약이 코웃음을 쳤다.
[흥! 그놈 황목도인이 다른 사람들에게 엉터리 소리를 했잖느냐? 제까짓게 무슨 금사랑군을 안다고 지껄여? 공교롭게도 내 귀에 들리게 된 거야! 그래서 나는 그 은혜를 배반한 놈이 숨은 곳을 그 자에게 물어 보려 했던 것이다.]
하철수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고모님이 요 몇 년 동안 황도인을 가두고 그에게 많은 형벌을 가했는데도 그는 끝내 말을 하지 않았잖아요. 아마 정말로 모르는 것 같아요. 그러니 다른 사람들과 더 많은 원수를 질 필요가 없는 것 아닙니까?]
원승지와 초원아는 몰래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선도파와 오독교의 관계가 어떻게 맺어지게 된 것이고, 또 황목도인은 결코 죽지 않았다는 것과, 아직도 그들에게 잡혀 갇혀 있다는 것 등을 알아내게 된 셈이었다.
하홍약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원가 녀석은 우리들의 금사검을 가지고 있다. 또 금사추를 사용해서 우리들의 부하를 죽였다. 생각컨데 지도 역시 틀림없이 그의 손안에 있을 것 같구나. 너는 교주된 몸으로 왜 방법을 취하지 않니?]
하철수가 대답했다.
[좋아요. 알았어요! 고모님, 이젠 나가서 잠시 쉬세요.] 하홍약은 일어서며 엄중하게 경고했다.
[나는 이제 모든 것을 너에게 말했다. 나의 계략을 이용하든 말든, 나로 하여금 복수를 하게 하든 말든 모두 너에게 맡기겠다.]
하철수는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하홍약이 돌아서려다 덧붙였다.
[너도 나와라! 따로 너에게 할말이 있다.]
[여기에서 말씀해도 되잖아요?]
[아니다. 여기서는 안돼!]
원승지는 두 사람이 방을 걸어 나가는 것을 보았다. 발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급히 서둘러 침대 밑을 빠져 나오면서 작은 소리로 말하였다.
[청청! 어서 가자.]
청청은 화난 눈으로 초원아를 쏘아보았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있었고 얼굴에도 적지않는 먼지가 묻어 있었다.
[당신들 두 사람은 거기 숨어서 뭘 했어요?]
초원아는 멍하니 두 볼이 붉어지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원승지가 다시 재촉했다.
[빨리 일어나! 그들은 좋지 않은 생각을 하고 있어. 그들은 청청을 해치려고 한단 말야.]
청청이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죽는게 차라리 낫지! 나는 안 갈 거에요.]
원승지가 급히 다그쳤다.
[돌아가서 천천히 말해도 되잖아. 왜 여기서 하필 말썽을 피어?]
[나는 꼭 말썽을 피워야 되겠어요.]
원승지는 청청을 인격적으로 대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사태는 사뭇 급박한데 이렇게 시간을 소비하면 끝내 빠져 나갈 방법이 없지 않을까? 게다가 황제에게 큰일이 발생할 것 등을 우려하니 아찔했다.
[청청, 왜 이러는 거야?]
이렇게 말하면서 한편으론 손을 뻗어 그를 잡아 당겼다. 청청은 별안간에 초원아가 우물쭈물하며 부끄러워하는 표정을 다시 훑어보았다. 그녀와 원승지가 침대 밑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숨어 있었으니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속상해 했다. 또 자기가 원승지의 주변에 없을 때, 두 사람이 얼마나 가깝게 지냈을까를 생각하니,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그녀는 왼손을 움켜쥐고 오른손으로 그를 무섭게 긁어 버렸다. 원승지는 전혀 방비를 하지 않았었다. 그는 손등이 긁히자 깜짝 놀랐다. 곧 네 갈래의 핏자국이 선명했다.
[청청, 왜 이렇게 소란을 피우는 거지?]
그녀가 앙칼지게 대들었다.
[나는 소란을 좀 피워야겠어요.]
그러면서 솜이불을 뒤집어 썼다. 안타까운 원승지는 속으로 발을 굴렀다.
초원아가 입을 열었다.
[원상공! 하아가씨를 지키고 계십시오. 나는 잠시 나갔다가 오겠어요.]
원승지가 이상스럽게 여기며 물었다.
[초아가씨 또 어디를 간다는 거요?]
초원아는 대답하지 않고서 창문을 밀어젖히고 뛰쳐 나갔다. 원승지는 침대에 앉아서 청청의 몸을 가볍게 밀었다. 그녀는 몸을 뒤집어 얼굴을 벽쪽으로 향했다. 정말 그녀를 어떻게 할 방도를 없었기 때문이다. 하철수 패거리들이 돌아와 독을 먹일까 우려되었다. 원승지가 다시 좋은 말로 타이르려 하는데 갑자기 문 앞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얼른 대들보로 뛰어 올라 그 위에 누웠다. 하철수가 다시 들어와서 빗장을 닫고 천천히 침대 옆으로 걸어왔다. 원승지는 두 자루의 금사추를 빼 들었다. 그녀가 청청을 해치려는 행동만 보이면 즉시 금사추를 던져 그녀를 구하기 위해서다. 하철수는 뚫어지게 청청의 뒷모습을 보며 작은 소리로 한마디 했다.
[잠시 너하고 할말이 있다.]
청청은 고개를 돌렸다.
[우리 고모님께서 네 아버지에 대한 정이 깊다는 걸 너도 알았을 것이다. 그분이 천한 사람인가?]
청청이 그녀가 묻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몰라 멍하니 바라보았다.
[열렬히 사랑한다는 것이 왜 천한 것이겠소?]
그리고는 목소리를 높여 토를 달았다.
[은혜를 배반하는 것, 이것이 바로 천한 것이오.]
하철수는 그녀가 말한 이 말이 고의적으로 원승지에게 들려주기 위한 것임을 모르고 마음속으로 크게 기뻐하였다. 그는 곧 얼굴이 빛났다.
[너의 아버지와 우리 고모님과는 연분이 닿질 않았는데, 그것을 탓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는 죽어 가면서 조차 너의 어머니가 있는 곳을 말하려 하지 않았고 목숨을 걸고 그녀를 보호했다.
정말이지 사랑이 깊고 의리가 있는 사람 아닌가?]
청청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나 세상에는 애석하게도 우리 아버지 같은 사람이 많지 않아요.]
[만약에 이런 사람이 있다면,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상대를 보호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너는 어떻게 하겠니?]
청청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럴 복이 없는 것 같소.]
[나는 이전에 고모님이 왜 그렇게 사랑에 빠져 있으며, 또 한 남자에게 그렇게 쉽게 무너졌는지 이해하지를 못했었다. 나는...
나는..., 그래 나는 너에게 무엇을 바라지 않는다. 네가 나를 기억해도 좋고 잊어도 좋다.]
그는 이 한마디를 끝에 고개를 떨구고는 홀연히 나가 버렸다.
청청은 여전히 침대 위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가 말한 것이 대체 무슨 의미인지를 확실히 알지를 못하였다. 원승지는 홀연히 땅에 내려서서 싱긋 웃었다.
[멍청한 아가씨야. 그녀는 지금 청청에게 반했군 그래.] 청청이 깜짝 놀라는 얼굴을 했다. 원승지가 덧붙였다.
[그녀는 청청이 남자인 걸로 알고 있어.]
청청은 하철수가 요 며칠 자기에 대한 표정과 말하는 것을 더듬어 보았다. 과연 정(情)을 가득 품은 행동이었다. 사실 그녀는 청청을 보자마자 곧장 반해서 정신이 흐려진 것이 분명했다. 또 하홍약은 그 나름대로 온 가슴 가득히 원한이 차 있어 노기(怒氣)가 충천하였다. 이 두 여자는 견식(見識)이 넓고 많았는데, 하나는 사랑에 빠져 있고 하나는 한(恨)을 품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남장을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원승지가 웃으며 대답했다.
[청청이 그 오독교주에게 장가들면 그만이지!]
그때 창문들이 울리며 초원아가 뛰어 들어왔다. 뒤에는 나입여가 따라왔다. 청청은 곧 안색을 침울하게 바꾸고 웃는 얼굴을 거두어 버렸다. 초원아가 원승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원상공! 당신의 큰 힘에 도움을 입어 내 원한은 이미 갚았습니다. 내일 일찍 저는 금릉(金陵)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제 아버님께서 나날이 더욱 당신을 존경하고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또 나사형에게 독비검법을 전수해 주셨으니 곧 그의 사부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둘이 당신에게 바라는 일이 하나 있어요.]
원승지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서두르지 말게. 우선 궁을 빠져 나간 다음 말하세.] 초원아가 못을 박았다. 그녀가 말하기를, [아닙니다. 당신이 이 일을 처리해 주셔야만 합니다. 다른 게 아니고 나를 나사형과 짝지어 주십시오.]
그녀가 이 말을 하자 원승지와 청청이 깜짝 놀란 것은 물론이려니와 나입여까지도 더욱 크게 놀라서 말을 더듬었다.
[사매, 너... 너 지금 무슨 말 하는 거지?]
초원아가 덧붙였다.
[당신은 저를 좋아하지 않나요?]
나입여는 온 얼굴이 빨개졌다.
[나는...... 나는.......]
청청은 어느새 화났던 얼굴이 가라앉고 있었다. 의심과 질투도 모두 사라졌다.
[좋아요! 두 분 축하 드립니다.]
원승지는 초원아가 자기와 관계가 깨끗하다는 것을 표명하기 위하여 이 한쪽 팔 밖에 없는 사형에게 시집가겠다는 말을 꺼내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청청의 의심을 없앰으로써 자기의 은덕(恩德)을 보답하려는 뜻이었으니 고맙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청청은 이미 그의 뜻을 확실히 알게 되자 자뭇 부끄러워서 초원아의 손을 덥석 잡았다.
[동생! 내가 동생에게 너무 무례했어! 나를 욕하지 말아 줘.] 초원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어찌 언니를 탓하겠어요?]
그러면서도 방금 받았던 오해를 생각하며 자신도 모르게 허탈한 눈물을 흘렸다. 청청도 그와 함께 눈시울을 적셨다. 그때 갑자기 문 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7, 8명이나 되는 소리였다.
원승지가 손짓을 하자 나입여는 몸을 솟구쳐 창틀을 열어 젖혔다.
하철수가 문 밖에서 큰소리로 말하는 게 들렸다.
[도대체 누가 교주요?]
하홍약이 매섭게 외쳤다.
[네가 교율(敎律)에 의해 일을 하지 않으니 이렇게 되는거야.
우리들은 할 수 없이 다른 교주를 세워야겠다.]
한 남자가 끼어 들었다.
[그 녀석은 우리 교의 원수인데 교주께서는 그를 그토록 보호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그 원가라는 사람한테 먼저 우리 형제들을 치료하여 구하게 한 뒤 그 녀석을 돌려줍시다. 교주는 단지 사람을 돌려주는 것만 응했지. 그게 살았거나 죽었거나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잖습니까?]
하철수가 대답했다.
[내가 당신들에게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누가 감히 이리 건너왔느냐?]
다른 남자가 한마디했다.
[우리들이 저 녀석을 요리한 다음 다시 와서 우리의 빚을 갚겠소.]
곧 발소리가 울리며 문 쪽으로 달려왔다. 그때 갑자기 처참하게 부르짖는 소리가 들렸다. 곧 한 사람이 쓰러졌다. 생각컨데 하철수에 의해서 상처를 입은 것 같았다. 원승지는 손을 휘둘러 세 사람으로 하여금 빨리 궁을 빠져 나가도록 하였다.
나입여가 먼저 창을 뛰어 넘어 나갔고, 초원아와 청청도 뒤따라 뛰어 넘어 나갔다. 문 밖에는 여전히 병사들이 서로 교전하고 있었다. 오독교의 교도들이 결국은 안으로부터 반란을 일으켜서 교주와 싸우게 된 것이다. 얼마 싸우지 않아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어떤 사람이 방문을 걷어차고 들어왔다. 원승지도 몸을 날려 창문 밖으로 피해 나갔다. 그 사람은 단지 원승지의 뒷모습만을 보고는 소리쳤다.
[빨리들 와라. 빨리들 와! 저 녀석이 도망친다!]
하철수도 깜짝 놀라서 싸움을 멈추고 방으로 달려 들어왔다.
그러나 창문이 열려 있고 침대 위는 이미 깨끗했다. 곧바로 뒤따라 창문을 뛰어 나갔다. 저만큼 사람의 그림자 하나가 나무 숲에 얼씬거렸다. 그는 급히 그림자를 쫓아 갔다. 쫓아가면서도 그는 청청이 궁을 나가도록 호위하여 자기 수하의 독수(毒手)에 의해서 시중드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지 않게 하자고 생각하였다.

x x x x

한편, 원승지 뒤에는 오독교의 교도들도 뒤따라왔다. 그는 얼마쯤 거리를 두고 사람들이 자기를 쫓아오도록 유도하였다. 그리고 어화원(御花園)을 몇 바퀴 돈 후 청청이 이미 궁을 빠져 나갔으리라 생각되어 즉시 궁 안으로 피해 숨어 들었다. 문에 들어서자 마자 문득 꽃 향기가 가득하였다. 그는 손이 가는 대로 하나의 문짝을 열어 젖히며 문 뒤에 숨었다.
자신도 모르게 귓볼이 달아 올랐다. 원래 방 안은 비단으로 화려하게 둘러쳐졌고, 주렴은 부드럽게 드리워져 있었다. 또 아황색 융단 위에는 크게 붉은 색의 장미가 수놓아져 있었다. 창가의 탁자 위에는 여자가 쓰는 화장품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도처에는 정교하게 모든 물건들이 배치되어 있어 황제빈비(嬪妃)의 침궁 같았다.
(이곳에 있다가는 정말 큰일이겠구나.)
그가 속으로 생각하고 다시 물러나려 하는데 갑자기 문 밖에서 발걸음 소리와 함께 몇몇 소녀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만일 지금 뛰어 나가면 바로 만나게 되겠지. 소리가 나면 궁안은 소란스러워져 조화순의 간사한 계략은 틀림없이 연기될 것이다. 그러니 살짝 몸을 돌려 미인목단도(美人牧丹圖)가 그려져 있는 병풍 뒤에 숨어야겠구나.)
곧 방문이 열리더니 네 명의 궁녀가 한 여자를 인도하며 들어오는 목소리였다.
[전하, 편히 쉬십시오. 아니면 책을 더 보시렵니까?] 궁녀의 목소리였다.
(그래, 공주의 침궁(寢宮)이구나. 빨리 잠이나 들거라. 아무 책도 보지 말고.)
공주는 음하는 소리를 내고는 침대 위에 앉았다. 목소리가 매우 곱고 아름다왔다. 한 궁녀가 다시 한마디했다.
[약간 향기나 나게 끓일까요?]
공주는 또 음하고 대답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푸른 연기와 감미로운 향기가 그윽해졌다.
원승지는 눈이 어슴푸레해지며 몸이 피곤해짐을 느꼈다. 자뭇 배가 고픈 느낌도 들었다.
공주가 입을 열었다.
[화필(畵筆)을 가져오고...... 너희들은 이제 나가거라.] 원승지는 약간 이상하다고 느꼈다.
(어찌된게 이 소리는 귀에 익은 것 같은데?)
그녀가 그림을 그린다는데 과연 얼마 동안이나 그리게 될지 궁금했다.
궁녀들은 곧 단청색의 화구를 잘 배치해 놓고 공주를 향하여 예를 행하고는 방을 물러갔다.
방안은 더없이 조용했다. 어쩌다가 향로에 있는 단향(檀香)이 가벼웁게 타는 소리만이 있을 뿐이어서 원승지는 더욱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문득 공주가 길게 탄식하는 소리가 들리었다.

푸르고 푸른 그대 옷이여, 오래도록 내 마음에 있네.
나를 가지도 못하게 하고, 돌아오지 않으니
그대는 어찌 대를 이으려고 하지 않는가?
푸르고 푸른 그대의 패, 오래도록 나의 사념 안에 있네.
나를 가지도 못하게 하고, 돌아오지도 않으니
그대는 어찌된 일인가요?
성안에 두루 다닌다 하나
하루하루 못 보는 마음 슬프기 그지없네.

원승지는 그녀의 곱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듣고는 매우 나이가 어린 소녀라고 짐작했다. 그는 비록 이 고시(古詩)의 본래 뜻은 잘 모르지만 <하루하루 못 보는 마음 슬프기 그지없네> 라는 한 구절을 듣고는 사모하는 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생각할수록 그녀의 목소리는 귀에 익었다. 깊이 생각해보던 그는 문득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나는 강호의 무예인으로 평생 경사(京師)에 들어가 본 적도 없는데, 또 이렇게 금지옥엽의 공주를 만난 적도 없었는데....... 어찌 되었든 그녀의 음성은 내가 알고 있는 사람과 닮은 데가 많구나!)
공주는 책상 곁으로 다가왔다. 단지 종이 소리만이 들려왔다.
색을 배합하여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원승지는 매우 지루하여 찬찬히 방안을 살폈다. 방문은 공주와 가까이 있는데 닫혀있으며, 창문 앞의 주렴은 낮게 드리워져 있어 그것을 뚫지 않고는 결코 나갈 수가 없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자 공주가 나른해진 허리를 펴며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다시 2, 3일만 그리면 이 그림은 완성이 되겠구나. 나는 매일매일 이렇게 심혈을 기울여 그 사람을 생각하건만 그는 한순간이라도 나를 생각이나 하는지?)
그녀는 그림을 의자 위에 놓더니, 그 의자를 침대 앞에 옮겨 놓았다.
(당신은 그림에서만 나와 함께 하고 있군요.)
그녀는 옷, 요대를 풀고는 침대로 올라가 어느덧 잠이 들었다.
원승지는 호기심이 일었다. 대체 공주가 생각하는 인물이 누구일까? 그는 머리를 내밀어 초상화를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대경실색 하였다. 그림 속의 인물은 원승지 자신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정신을 차려 자세히 보니 그림 속의 사람은 면 양(陽)의 푸른 장삼(長衫)을 입고 소항(小缸)의 푸른 요대를 매고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림 속의 사람은 오히려 자기에 비해서 조금 더 준수한 것 같았다. 자신은 원래가 강호의 민간인 기질을 타고났다. 지금은 비록 옥면주순(玉面朱脣)의 준수한 풍채로 바뀌었으나 용모는 결국 달라짐이 없었다. 허리에 드리운 사검(蛇劍)은 금빛이 찬란했다.

## 책에는 옥면주순에서 '순'자를 <辱;수치 욕> 으로 썼는데 ## 내용상으로 <脣;입술 순>이 어울릴 것 같아서 바꿨습니다.

그는 공주가 그린 초상화가 꼭 자기라고는 여기지 않았지만 뭔가 비슷하다는 느낌만은 틀림없었다. 공주는 사람의 인기척을 들었는지, 손을 뻗어 머리의 옥비녀를 뽑더니 몸도 돌리지 않은 채 소리나는 쪽으로 던졌다.

- 계속
원제: 벽혈검(碧血劍) / 김용(金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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