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크밤

달빛조각사 06

3학년2반 | 2022.01.20 07:31:07 댓글: 0 조회: 487 추천: 0
분류인터넷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3615
달빛조각사 6권


절망의 평원에서 진행하게 된 프레야 교단의 의뢰!
조각 변신술로 오크들과 합류하고, 다크 에르의 성을 공략하라!
바르칸 데모프를 추종하는 네크로맨서들을 소탕하는 퀘스트를 하던 위드는 약간의 자비심을 발휘했다. 마지막 순간에 네크로맨서들을 살려준 것이었다.
혹시나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 때문이었는데 그 덕분에 난이도 A급의 퀘스트가 발생했다.
불사의 군단.
리치 샤이어가 이끄는 언데드 군단과의 전쟁이었다.
오크와 다크 엘프들과의 연합으로 불사의 군단을 물리쳐야 한다.
네크로맨서 바라볼과 왕실 깃들, 병사들이 위드의 대답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위드는 답했다.

"오크들과 다크 엘프들의 힘을 합친다고 해도 불사의 군단을 어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다."

-다시 한 번 확인하겠습니다. '샤이어가 이끄는 불사의 군단' 퀘스트를 받아들이지 않으시겠습니까? 미공개 직업인 네크로맨서들의 등장과도 연계된 퀘스트입니다.

"나는 불사의 군단과 싸우지 않겠다."

-퀘스트를 거부하셨습니다.

"그런......"

바라볼이 현저히 실망한 얼굴을 했다.

"대장님! 대장님의 결정을 믿울 수가 없습니다."

평소에 위드를 열심히 추종하던 부관이나 베커들이 격렬하게 항의해 왔다.
왕실 기사들도 차갑게 돌변했다.

"정의에 대해서 모르는 자로군! 기사도를 배워 본 적은 있는 건가?"

"약한 이를 돕고 악인을 처단한다. 하기야 조각사 주제에 기사도를 논한다는 자체가 무리지!"

병사들과 기사들의 충성도와 친밀도가 한순간에 상당히 떨어졌다.

"설마 이런 결정을 내리실 줄이야."

"신앙심이 투철한 위드 님이 악의 세력을 방관하시다니...믿을 수가 없군."

프레야 교단에서 파견 나온 사제들도 위드를 기피하기 시작했다.
한순간에 모든 이의 미움을 받게 된 위드!
그런데 네크로맨서 바라볼이 다시 말을 이었다.

"자네는 아직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 모양이로군. 불사의 군단은 우리 네크로맨서들만이 아니라 전 대륙이 관련된 일이라고 할 수 있네."

"나는 모르는 일이다."

"자네만이 우리들을 이끌 수 있다고 본다 그러니 우리와 함께 싸워 주게."

띠링!

-샤이어가 이끄는 불사의 군단
세상에 숨겨진 비사!
바르칸 데모프를 배후에서 조종하고, 그를 어둠의 길로 빠뜨렸던 자는 제자인 샤이어였다. 그날의 전투 이후로 샤이어는 리치가 되어 불산의
군단을 재건하기 위해 몸부리쳤다.
그리하여 다시금 만들어진 불사의 군단!
오크들과 다크 엘프들은 살아남기 위해 전쟁을 그치고 서로 협력할 것이다.
모든 힘을 다 모아서 불사의 군단의 진격을 막고, 샤이어를 처단하라.
난이도: A
보상: 바르칸의 마법서
퀘스트 제한: 30일 내로 불사의 군단이 전쟁을 개시함.

"......"

위드는 잠시 어이 없는 눈으로 바라볼을 보았다.
퀘스트를 거절했는데도 다시금 제안한 것이다.
프레야 교단에 헤레인의 잔을 반환하였을 때부터 거의 강제적으로 파고의 왕관과 관련된 의뢰를 받아야 했다.
절망의 평원의 네크로맨서들을 처단하라는 임무도 그와 연계된 케스트였다.
갈수록 어려워지는 퀘스트! 위드는 고개를 저었다.

"싫다. 나와는 관련이 없는 일이다."

-다시 한 번 확인하겠습니다. '샤이어가 이끄는 불사의 군단' 퀘스트를 받아들이지 않으시겠습니까? 미공개 직업인 네크로맨서들의 등장과도 연계된 퀘스트입니다.
케스트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에슨 패널티가 부여될 수 있습니다.

"어허, 이렇게까지 말을 했는데도 아직도 모르는군. 전대륙이 관련된 일이야. 여기서 도망친다면 우리들처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음지의 인간이 되어야 할 걸세. 사람들은 그대의 졸렬함과 용기 없음을 비웃겠지."

네크로맨서 바라볼은 한껏 음침한 어조로 말했다.
오싹!
위드의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한기.
일단 말을 담그면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다.
프레야의 대신관이 그랬듯이 바라볼도 집욯ㄴ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명성을 하락시킨다는 협박을 서슴없이 한다.
여기서 보통 사람이라면 못 이기는 척 퀘스트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심지가 굳은 이라면 절대로 퀘스트를 받아들이지 않고 지나 버렸을 수도 있다. 그 대가가 명성의 추락으로 이어지겠지만,
자신의 소신을 꿋꿋이 지키기 위해서라면 못 할 이유도 없다.
그런데 위드는 협박에 약했다.
어떻게 올린 명성이던가. 그것을 모두 날릴 수는 없다.

"불사의 군단을 무찌르는 게 내 일생일대의 소원이었습니다. 리치와 죽지 않는 언데드 군단이 이 땅을 더럽히지 않도록 싸우겠습니다."

-퀘스트를 수락하셨습니다.





화르르르.
진흙과 화마가 휩쓸고 간 다크 엘프의 성채.
오크들을 막기 위해 다크 엘프들이 사용한 정령술과 마법으로 인한 피해로 곳곳에 구덩이가 파여 있었다.
수만 명도 거뜬히 거주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성채에는 오크들과 다크 엘프들이 분주하게 짐을 나르면서 움직였다.

"취췻. 엘프. 놀지 말고 그쪽의 돌을 들어라."

"알았다, 오크."

"힘 좋은 내가 먼저 든다. 취익!"

오크들과 아크 엘프들은 힘을 합쳐서 복구 작업을 개시했다.
네크로맨서들이 전면에 나서고, 사제들과 왕실 기사들이 불사의 군대에 대해서 알렸다. 그러자 다크 엘프와 오크들은 극적인 화해를 이루었다.
분사의 군대는 모든 종족의 적이었다.
과거 바르칸 데모프가 지휘하던 그들은 살아 있는 어떤 존재도 용납하지 않았다고 한다. 죽은 다크 엘프들을 되살려서 언데드 헌터로, 오크들은 좀비로 만들었다.
다크 엘프들은 무엇보다도 일족을 제일 소중하게 여긴다.
자존심 강한 오크들도 그들이 좀비가 되는 것을 모욕이라 여겼다.

"취익, 췩! 우리들은 흙으로 돌아간다. 취췩. 죽어서는 다리 펴고 쉬어야 된다."

두 종족은 불사의 군단과 싸우기로 동맹을 맺고 성채를 복구하고 있었다.
프레야의 사제들, 왕실 기사들과 병사들도 복구 작업에 동참했다.

"여기가 비었잖아!"

"이쪽을 좀 더 튼튼히 받쳐."

"이곳의 지반은 너무 약하다."

호스람과 데일은 병사들을 데리고 성채를 꼼꼼히 점검했다.
오크들은 힘은 좋아서 돌이나 무거운 것을ㅇ은 잘 나르지만 인간들의 손길이 들어가야 훨씬 더 짜임새가 있다.
고고하고 괴팍한 다크 엘프들은 일을 시켜도 정령술을 이용해서 대충대충 때우기 일쑤였다.
위드는 성채의 가장 높은 곳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았다.
무겁고 심각한 얼굴로!

"대장님께서 불사의 군단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 전략을 만드시는 것 같군."

"역시 우리 대장님이야."

부란이나 베커는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렸다.
그러나 위드의 머릿속에는 1달 후면 다가올 전쟁은 전혀 들어 있지 않았다.

'어디 보자. 우선 전리품으로 획득한 아이템들이......'

공성전의 와중에서 다크 엘프들을 죽이고 얻은 전리품의 가격 계산에 한창이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싸움이 가장 치열한 때에도 적 한 번, 아이템 한 번을 보았다. 바닥에 중요한 아이템이 떨어져 있으면 가차없이 몸을 날렸고,
화살에 맞아도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돈을 위한 필사적인 투쟁!
진공청소기처럼 무기나 장비들을 긁어모았다.
이제 얻은 아이템을 계산할 시간이었던 것이다.

"감정."

오크 대장 굴취의 글레이브: 내구력 69/80. 공격력 25~51.
오크 대장이 들고 싸우던 글레이브.
무거워서 휘두르기가 쉽지 않지만, 망치와 같은 묵직한 타격을 줄 수 있다.
제한: 힘 350. 레벨 180.
옵션: 흉성 +20. 힘 +10. 민첩 -30.
공격 정확도가 25% 하락함.
치명적인 일격은 2배의 효과를 갖는다.

우선 첫 번째로 감정해 본 아이템은 그다지 쓸모가 없었다.

'글레이브는 잘 팔리지 않으니까.'

아주 특이한 무기를 찾는 마니아들도 있지만 효율성의 측면만을 볼 때 좀처럼 택하기 힘든 무기였다.
일반 게임이라면 어떻게든 쓸 수 있을지 모른다. 올려 놓은 스킬과 스탯이 전부라면 말이다.
그러나 로열 로드에서는 실제로 몸을 움직여야 했다.
무기는 말 그대로 도구일 뿐이니 가능한 자신의 손에 익숙한 것을 사용한다.
그렇기에 오크들의 무기인 글레이브는 구매자가 나오기도 힘들고, 옵션도 일반적으로 잘 팔리는 무기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보통 적을 얼리는 등 부수적인 마법 공격을 가하거나, 공격력이 뛰어나면서 가벼운 검이 제일 큰 인기를 끌었던 것이다.
위드는 글레이브는 대충 처분하기로 하고, 나머지 물건들을 살폈다.
오크들의 방어구 5개, 에르들의 머리띠 둘, 의복 일곱 벌이 있었다.
평범한 아이템들이지만 엘프들의 옷은 저항력을 키워 주고 정령과의 친화력을 올려 주기 때문에 인기리에 팔리는 물건이었다.

'좋았어. 일단 오늘의 일당은 달성했군.'

위드는 쾌재를 부르면 농땡이를 피웠다.
아무리 노가다를 전문적으로 잘한다고 해도 돌을 나르기는 싫었다. 공사판에서도 벽돌 등을 나르는 일은 힘들고 고생스럽지 않던가.
오크들이나 엘프들, 병사들까지 열심히 일을 한다.
이럴 때에는, 숨어 있는 건 그리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한창 일을 할 때에는 오히려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서 상념에 잠겨 있으면 된다.

"우리는 대장님만 믿으면 돼."

"대장님께서는 불사의 군단과 싸워서 이기실 거야."

병사들의 오해로 인한 추앙을 받는 위드!
첨탑 위에 서 있던 위드의 시선이 더욱 폼을 잡기 위해 먼 곳으로 향했다.
유로키나 산맥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구름이 강처럼 밑에서 흘렀다.
산과 산이 겹겹이 이어진 곳에는 골짜기처럼 공간이 있다.
그 사이에 구름들이 흐르고 있었다.
다크 엘프의 성채가 있는 곳은 산맥에서도 제일 높은 편이라서 공기가 희박해 쉽게 지치기도 한다.
춥고 메마른 지역.
일분 산맥에는 눈이 덮힌 곳도 있다.
해가 조금씩 떨어지면서 하늘에 붉은 노을이 진다. 그런데 그 노을마저도 구름의 아래에 있어서 신비로운 빛깔이 전체적으로 퍼져 나갔다.
위드는 그 광경들을 살피다가 조용히 로그아웃했다.






이현이 캡슐에서 나와 제일 먼저 한 것은 아이템 거래 사이트에 들르는 것이었다.

"오크의 글레이브를 찾는 사람이 있어? 굴취의 글레이브는 그나마 얼마라도 건질 수 있겠군. 엘프의 머리띠 가격은 희소성
때문에 조금씩 오르고 있고...엘프의 활을 주워야 비싼 값에 팔아먹을 텐데."

이현은 안타까움에 땅을 치고 후회했다.
다크 게이머로서의 자각!

'나는 아직도 멀었구나!'

공성전에서의 승리를 위해 굳이 그가 성문을 부술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구매자가 많은 활을 들고 있는 다크 엘프를 하나라도 더 잡았어야 했다.
그리하여 최소한 하나의 활이라도 줍는다면 다크 ㄱ이머로서의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는 것이다.

'너무 몰두해서 탈이야.'

이현은 푸욱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서 꾸준히 각 아이템들의 가격과 정보들을 확인했다. 주식 투자하는 사람들이 매일 자신이 보유한 종목의 가격을 확인하는
것처럼 획득한 아이템의 매매가를 살피는 것이었다.
보통 다른 이들이 경매에 내놓은 아이템들도 거의 순식간에 매각이 확정되어 버렸다. 그런 게시 글들도 이현은 꼼꼼하게 살폈다.
혹시라도 어떤 몬스터에게 획득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면 나중에 참고가 되는 것이다
신규로 올라온 아이템들의 글을 확인한 이현은 로열 로드 사이트에 접속했다.

황제가 되기 위한 길. 꿈이 열리는 대륙. 로열 로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로열 로드의 홈페이지.
이현은 상단에 있는 명예의 전당을 클릭하고 접속했다.
그의 계정 아이디를 입력하고 들어가자 공간이 하나 만들어져 있었다.
하필이면 제일 아래쪽 눈에 띄지 않는 곳!
이현은 자신이 퀘스트를 했던 동영상을 통째로 올려싿.
본래 보기 좋도록 군더더기는 삭제를 하거나, 아미녀 편집을 하는 게 보통이어싿. 그런데 이현에게는 따로 동영상을 편집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없었다.
어둠의 경로.
소위 말하는 불법 루트는 각 저작권을 가진 프로그램 회사에 의해 전부 막히고, 동영상 편집 그로그램을 구매하려면 최소한 몇만 원을 내야 했다.
그런데 프로그램을 구매한다고 해도 그런 작업을 할 정도로 컴퓨터가 좋지도 않았다.

"굴러가 주는 것만으로도 다행스럽지."

오늘 사망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는 컴퓨터는 덜덜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현은 동영상을 올리고 잠을 청했다.





사람들은 오늘도 로열 로드의 명예의 전당에 접속했다.
명예의 전당은 매일 수백만 명의 접속자를 기록할 정도로 인기 있는 코너였다. 물론 대다수는 명예의 전당 아랫부분에는 관심조차 갖지 않았다.
유명한 유저, 레벨이 높은 이들은 명예의 전당에서도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오늘은 헤르메스 길드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그리피스라는 유저는 아직도 바다에서 해적질을 하고 있나?"

일부 유저들의 경우에는 살인, 도적질, 해적질을 하며 자신의 영상을 올리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들의 거침없는 행보에 짜릿한 대리 만족을 느끼기도 해싿.
그래서인지, 이현이 올렸던 동영상은 사람들의 손을 타지 않았다. 최초로 명예의 전당에 올라온 이와 기존부터 있었던 이들 사이의 현격한 이름값의 차이였다.
그러던 때에 어느 누가 이현의 동영상을 클리해 보고 기겁을 하고 말았다.

"맙소사!"

그가 놀란 것은 동영상의 용량과 길이였다.

"19시간 49분자리 동영상이잖아!"

그는 황당한 나머지 동영상을 종료하고 로열 로드의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새로 명예의 전당에 올라온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명예의 전당에 신규로 들어온 이가 무려 19시간짜리 플레이 영상을 올렸다!
로열 로드의 게시판에는 많은 유저들이 있었다.
이들은 대번에 이현을 비웃었다.

-초보인가 보네요.
-초보가 여기에 글을 쓸 수는 없죠. 명예의 전당에 올라온 게 기뻤나 봐요.
-그래도 전혀 편집도 안 하고 올리다니 영 성의가 없군요.
-아마 1명도 안 볼 걸요.

이현의 일은 그들에게도 그저 웃도 넘길 일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최초로 동영상을 클릭했던 이는 궁금증을 이기지 못했다 잠깐이지만 봤던 동영상이 잊히지가 않았다.

"무슨 산악 같은 곳이었는데... 거기에 무슨 오크들이 수도 없이 많던데."

얼핏 보아서는 제대로 알 수 없었으나 다크 엘프들, 오크들이 있었던 것 같았다.

"시간 낭비하는 셈 치지 뭐."

그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이현의 동영상을 다시 보았다.
어차피 마땅히 할 일도 없었고, 재미가 없으면 바로 꺼 버리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30분 후.
그는 로열 로드 게시판에 다시 글을 올렸다.


19시간 49분자리 동영상. 꼭 찾아보십시오. 긴말 앖겠습니다. 최고입니다. 저는 빨리 한 번 훑어보았는데, 다시 제대로 보러 갑니다.


그의 글을 보고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다.
일부는 동영상을 찾아서 플레이하기도 했다.
대다수는 별로 의미를 두지 않은 행위, 한번 속아 주자는 정도에 불과했다.

"요즘도 낚시 글이 유행인가?"

"아마 올린 사람 본인일 거야. 아이디는 달라도 친구이거나 아니면 가족의 계정으로 쓴 글이겠지."

"뭐 재미없으면 악플이나 달면 되고....."

그런데 이현이 올린 동영상에는 오크가 나왔다.
오크 카라취!
아주 건장하고, 근육질로 몸을 장식한 오크였다.
못생기고 굵은 뻐드렁니가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의 흉물이었다.

ㅡ 산맥의 아침. 붉은 해가 떠오르고, 거센 바람이 분다. 취췻. 구름도 다가올 전투를 예감하는지 무거워 보이고, 나는 다크 엘프들과의 최전선에 서 있다. 취! 싱그러운 아침에 나는 희망을 품는다. 취취췻. 우리의 용기와 승리를 향한 열망. 버리기에는 고귀한 정신. 영혼. 나는 노래하고 싶다. 추이익! 저 다크 엘프들이 강하다면 더욱 노래를 부르라. 우리의 승리를 기원하는 노래를. 모두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승리할 수 있으리라.

오크의 황당한 독백에 사람들은 배를 잡고 웃었다.

"이게 뭐야, 도대체."

"무슨 블랙 코미디인가?"

그러면서 금방 사람들은 빠져 들고 말았다.
오크 카라취가 있는 주변은 산의 안개로 자욱했다. 그런데 해가 뜨면서 점점 그 안개가 걷히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타나는 오크들.

"오크다."

"오크들이 엄청 많아."

"저기가 대체 어디지?"

-취이익! 취익!
-쿠와아아!

오크의 독백에 이어서 오크 대군의 포효!
안개가 완전히 걷혔다.
무려 40만 마리의 오크들이 유로키나 산맥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다크 엘프와의 공성전을 개시한다.
다크 엘프들은 정령술과 마법을 이용해서 대적했다.
오크들은 압도적인 수를 이용해서 밀어붙인다

"무슨 영화를 보는 것 같다."

"이런 스케일의 전투가 있다니......."

사람들이 보아 온 것은 유저들낄의 공성전이 대다수였다.
현란한 마법들이 쏟아지지만 그뿐이다. 대체로 박력이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오크들이 물밀듯이 공격을 하고, 다크 엘츠들은 필사적으로 막아 낸다.
오크들이 기름을 끼얹고 불을 붙이자 성벽이 검은 연기를 내며 타오른다. 일부 오크들은 기름통을 걲로 뒤집어쓰고 스스로 불에 타 죽기도 했다.
성벽을 억지로 기어오르는 오크들.
다크 엘프들이 쏘는 화살이 하늘을 덮었다.

"재밌다."

"최고인데......!"

사람들은 매우 만족하면서 동영상을 보았다.
마치 하나의 판타지 영화를 보는 것처럼 각 종족 간의 필사적인 전투를 구경하는 것이었다.
글레이브가 박살이 날 정도의 괴력!
다크 엘프 여럿을 물리칠 정도의 박력과 투지!
힘센 오크는 막무가내로 글레이브를 휘둘렀다.
압도적인 힘을 바탕으로 온 전신을 함께 움직였다.
폭발적인 에너지가 느껴지고, 때때로 글레이브의 신묘한 움직임은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 냈다.
가상현실이 만들어진 이후로 모든 격투기들은 최대의 호황을 누렸다. 가상현실에서 움직이는 유저들이 검사가 되고 권사가 되었으니,
그만큼 무기나 전투에 관심들이 많아진 것이다.

"어떻게 저렇게 움직일 수 있지?"

"주변 전체를 보고 전투를 이끌어 내고 있어."

"이 오크가 있는 곳에서부터 전투의 흐름이 미묘하게 바뀌는 것 같은데."

오크가 싸우는 모습은 구경하는 사람들의 혼을 완전히 쏙 빼 놓았다.
거기서 동영상이 그냥 끝났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매우 만족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동영상은 거기에서 끝이 나지 않았다.
그 흉악하게 생긴 오크가 병사들, 사제들과 합류하는 것이었다.

"말도 안돼!"

"저게 그러면 유저였단 말이야?"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오크와 다크 엘프의 전쟁.
그런데 이 모든 것이 한 유저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그 중심에 있었다.
그 흉악한 오크는 사제들과 병사들을 이끌고 네크로맨서의 신전으로 진입했다.
전후의 배경은 잘 몰랐지만, 그곳이 굉장히 중요한 장소라는 것 정도는 분위기로 알 수 있었다.
그때 그 흉악한 오크의 모습이 인간으로 변했다. 이 또한 사람들은 몰랐지만, 조각 변신술을 해제한 탓이었다.
그런데 신전의 내부는 너무 어두웠고, 동영상이 보여 주는 각도가 뒤쪽이라서 얼굴은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네크로맨서 바라볼과의 대화.

-평생 신의 섭리를 믿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이 순리라면, 나는 따를 준비가 되어 있다. 나를 죽여라.

바라볼이 무릎을 꿇는다.
네크로맨서들도 마찬가지로 무릎을 꿇었다.
사람들은 드디어 네크로맨서를 죽일 것을 기대했다.

"어서 죽여!"

"이게 무슨 퀘스트인지 궁금하다. 진짜."

"이런 규모의 퀘스트라면 보상은 뭐 줄까?"

사람들은 완전히 몰입해서 동영상을 보고 있었다.
영화와는 다르게 정말 자신들이 체험하는 기분이었다.
명예의 전당에 올라온 동영상들은 대체로 몬스터를 사냥하는 것들이 많다. 명성이 높은 이들만 명예의
전당에 들어올 자격이 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노하우라고 할 수 있는 퀘스트를 잘 공개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 만큰 위드가 올려놓은 동영상은 신선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동영상에 나온 주인공은 무엇인가 갈등하더니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말하라, 네크로맨서들이여. 너희들이 생각하는 신의 섭리가 무엇이며, 잘못 끼운 단추는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나를 죽이지 않는 것인가, 프레야의 종.
-나는 종이 아니다. 그리고 너희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라. 나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있는가?
-우리들은...아니다! 너희들이 우리의 이야기를 믿어 줄 리가 없다. 꺼져라, 프레야의 종들! 지옥에 가서도 너희들을 저주하겠노라.
-........

동영상의 주인공은 잠시 침묵하더니 말문을 열었다.

-기회를 주겠다. 믿음과 신뢰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너희들이 진실한 말을 한다면 나 역시 너희들을 믿어 주겠다.
-정말인가? 약속할 수 있는가?
-그렇다. 그러나 다만 너희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뿐이지. 너희들을 죽이지 않겠다는 약속은 아니다.

바라볼은 잠시 망설이더니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니 이야기해 주겠다. 세상은 바르칸 데모프 님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다. 바르칸 데모프 님은
불사의 방법에 대해 연구를 하던 진실한 마법사였다. 그런데.......

바라볼은 분개하며 말했다.

-샤이어라는 자는 간악한 술수를 이용해 바르칸 님을 어둠의 힘에 종속시켰다. 그러면서 불사의 연구를 엉뚱한
방향으로 활용하여 언데드 군단을 만들어 냈다. 죽어도 금방 되살아나는 언데드 군단! 어둠의 마나의 힘에 빠져
버린 바르칸 님은 언데드 군단과 함께 이성을 잃고 세상을 파괴했다. 샤이어는 각 어둠의 세력과 결탁해서 불사의
군단을 이끌었지. 바르칸 님의 옆에서 혈겁을 일으키는 데 동참했던 우리 네크로맨서들의 스승들 또한 이 죄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리라. 우리들은 벨제뷔트의 신전에 있는 고서적에서 이러한 사실을 알아내고, 피와 죽음을 연구하는
네크로맨서로서 모든 것을 원래대로 만들려고 한다. 어둠의 마나에 잠식된 바르칸 님을 정상으로 되돌리고, 이 모든 악의 근원인 샤이어를 처단하는 것이다.

그리고 드러나 진실과 퀘스트의 완료. 새로운 시작.
난이도 A의 퀘스트가 새롭게 뜬 것이었다.
그것도 아직 열리지 않은 미지의 직업 네크로맨서와 관련된 퀘스트.

"네크로맨서다!"

"이 사람이 퀘스트에 성공하면 네크로맨서의 직업을 선택할 수 있게 되는 거야?"

"마법사의 상위 전직 퀘스트가 떴다!"

동영상은 마지막으로 복구 작업이 한참인 다크 엘프의 성채를 보여 주며 끝이 났다.







이현은 오늘도 일찍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과 5시간 정도를 잤을 뿐이지만, 세상은 상당히 바뀌어 있었다.
정확히는 로열 로드 홈페이지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아무도 관심을 갖고 있지 않던 명예의 전당 하단부에 오른 동영상이 모든 것을 뒤흔들어 놓았다.

"오크들의 퀘스트!"

"다크 엘프와 벌이는 저런 전투는 생전 처음 봤어."

"오크로 변신을 할 수 있다니...마법사 4차 전직에 있는 폴리모프 마법이 아닐까?"

"설마. 아무래도 무슨 도구를 이용하는 것일 거야."

"몸을 바꿀 수 있는 아이템이라면 최소한 유니크 급이겠군."

사람들은 무수한 추측들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알려지지 않은 조각 변신술은 그들의 상식을 초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현이 퀘스트를 진행한 장소 자체가 그들에게는 전혀 생소한 곳이었다. 산과 골짜기들이 한도 없어 펼쳐져 있고, 구름이 그 아래에 있다.

"대체 저곳이 어디야!"

"일단 중앙 대륙은 아닌데......"

"사람들이 많이 사는 큰 성, 도시의 주변에는 저런 지형이 없잖아!"

사람들은 이현이 퀘스트를 진행한 곳을 알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여기에는 웬만큼 로열 로드를 했다는 이들이 총동원되었다. 그들 중에서는 각종 분야에 있어서 두각을 드러낸 이들이 많았다.

-나무들을 보면 우선 아주 춥거나 더운 기후에 있는 땅은 아닙니다.
-고산 지대인 점을 감안하고, 일단 저런 품종의 나무들이 있으려면.......
-산의 정상 부분에는 눈이 덮여 있군요.
-북부나 남부는 확실히 아닙니다.
-벌레나 새들의 움직임. 현재 베르사 대륙에는 가을이 찾아왔죠. 동영상에서 날아다니는 철새들의 움직임을 보고 판단해 볼 때에는......

심지어는 오크 연구가도 나타났다.

-저는 여러 판타지 소설을 즐겨 보았습니다.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오크들! 강인하고 단순한 이 종족들은 저를 아주
매료시켰지요. 후후후. 여태껏 오크를 연구했다는 이야기를 하면 다들 무시하고 귀찮아하더군요. 그렇지만 저는
믿고 있었습니다. 이 오크들이야말로 판타지의 꽃임을! 생각해 보십시오. 오크가 없다면 이 판타지 세상이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오크 연구가는 한껏 거드름을 피우면서 말을 이었다.

-오크들은 종족적인 특성에 따라서 콧바람이 조금씩 다릅니다. 취익. 취-익. 취이익. 추익. 취익-. 어디에 어떤
식으로 강세를 두느냐에 따라서 서식지나 유래들을 살필 수 있습니다.

이 특이한 오크 연구가가 다른 이들의 관심을 받은 것은 물론이었다.

-그러면 제가 알려 드리겠습니다. 현재까지 밝혀진 베르사 대륙의 87개 종족 오크들의 콧바람과 외모 등을 주로
살펴볼 때에 동영상에 나온 오크들은 동부 출신인 것이 분명합니다. 브랜트 왕국의 오크들이 일부 비슷한 콧소리를 내었습니다.

그런데 오크 연구가의 말은 금방 이의 제기를 받았다.

-오크들의 무기나 활동력을 볼 때에는 아닙니다. 브랜트 왕국의 오크들은 레벨이 140정도에 불과합니다.
여기 동영상에 나오는 오크들은 상당수가 200도 넘어 보이는데요.
-저도 오크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그렇지만 레벨이 350을 넘습니다. 그런 만큼 많은 몬스터를 사냥해
봤는데요. 여기에 나온 오크들만큼 강한 녀석들을 본 적은 없습니다. 저런 오크들이 떼로 덤벼들면 무시무시하겠는데요.
-소름이 쫘악 끼치죠!

오크 연구가는 잠시 후에 다시 글을 올렸다.

-저도 브랜트 왕국 오크들이라는 확신을 가진 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브랜트 왕국의 오크들과 약간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모입니다. 다만 동영상에 자주 나오는 흉악한 범죄자형 오크만은 어디서 나왔는지 도저히
모르겠군요. 그 오크의 인상을 보고 있자니 오크에 대한 오만 정이 다 떨어졌습니다. 밥맛도 뚝 떨어졌고요.

오크 영구가의 발표가 있은 이후로, 동영상에 나온 지역을 추측하는 일들은 더욱 활발해졌다.
그러나 이현에게는 전혀 별개의 일.
이현은 컴퓨터를 켜서 명예의 전당에 접소해 보고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조회수가 겨우 7만도 되지 않네."

명예의 전당에 있는 다른 동영상들은 조회수가 수백만이 넘는다. 헤르메스 길드나, 바드레이의 동영상은 1억을 초과했다.
특히나 바드레이가 전사의 탑에서 공인ㄷ받는 장면은 무려 17억 번이 넘는 조회수를 자랑하고 있었다.

"7만이라면 아무것도 아니잖아."

이현은 낙담하고 있었지만, 명예의 전당을 잘 아는 이라면 절대로 동감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아직 동영상을 올린 지 5시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
명예의 전당 하단에 위치한 데다 길이가 너무 길어 한동안 아무도 보질 않았다.
입 소문을 타기 시작한 것은 겨우 3시간 전부터. 그때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접속을 하고 있었다.
동영상의 길이가 길어서 중요 부분만 보고 다시 제대로 시청을 하고 있는 탓에 조회수가 쉽게 늘어나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점점 소문이 퍼지면서 많은 이들이 찾아오고 있었다.
총조회수가 얼마나 될지, 또한 어떤 파급 효과를 불러일으킬지는 아무도 몰랐다.


















천공의 도시 라비아스.
그곳에 숨겨져 있는 많은 어데드의 던전 중 한 곳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녀는 처음에 어두운 던전에 나타나서 당황한 듯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곧 예전의 감각을 되찾았다.

"라이트! 패스트 워쿠."

빛을 불러서 어둠을 밝히고, 빨리 걸을 수 있는 이동 마법을 시전한다.
마법사인가 싶었지만 허리에는 검을 차고 있기도 했다. 비록 가벼운 소검 계열의 무기지만 찌르는 공격만큼은 매섭다.
등에는 활까지 메었다. 그리고 소매에는 성직의 표시가 달려 있다.
육체를 이용한 공격과 마법, 치료 등 다방면으로 못하는 것이 없는 직업.
그녀의 정체는 샤먼이었다.
다인! 위중한 수술을 받기 위해서 떠났던 그녀가 돌아온 것이다.
"여긴 변함이 없네."
다인은 눈을 빛냈다.
오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녀 앞에서는 듀라한이 한 손에 머리를 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여인이여, 물어볼 것이 있다."

듀라한은 잔뜩 느끼하게 말을 건넸다.
공포의 기사라고는 하지만 다인에게 알 수 없는 친근감을 가졌던 것이다.

"말해 봐!"

"나는 지금 머리를 찾고 있다. 내 머리가 어디에 있는지 보았다면 알려 다오."

머리를 들고서 머리를 찾는 공포의 기사!

다인은 해답을 알려 주기로 했다.

"입 다물어."

"뭐라고 하였는가?"

"지금 패 줄께!"

다인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사정없이 듀라한의 머리를 두들겼다.
과거에 언데드를 사냥하기 싫어하던 그녀는 없다. 수술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온 그녀에게 듀라한은 몬스터일 뿐이었다.
권사는 아니더라도 주먹 스킬을 익히고 있고, 화살 솜씨도 제법 뛰어나다.
치료 계열도 있고, 저주나 공격 마법도 익혔다.
검술까지도 수준급인 그녀!
어느 것 하나 대성하기 힘들고, 대성한다고 해도 본래 직업들만큼의 위력을 발휘할 수는 없는 직업이 샤먼이었다.
하지만 다방면에 재능을 가진 그녕의 직업은 활용하기에 따라서 어떠한 전투에서도 뛰어난 효율을 보인다.
가히 잡캐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경지.
위드의 캐릭터의 시초가 이곳에 있었다.
다인은 주먹질로 시작해서 발 차기, 검술을 이어서 사용하며 듀라한을 신나게 패 주었다.

"내 머리, 내 머리! 머리가 너무 아프다."

"병원에서만 갇혀 있었더니 스트레스가...조금만 이해해줘. 금방 끝날 거야. 블러드 커즈!"

그러면서 피 계열의 저주 마법을 사용했다.
어둠의 몬스터인 듀라한에게 저주는 곧 축복!
두들겨 맞아 꺼져 가던 생명을 회복하고 나서 더욱 실컷 맞아야 했다.
치료하고 패는 무서움.
차라리 바로 죽이기라도 하지. 치료를 해 가면서 때리니 듀라한으로서는 원통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다인은 한참 듀라한을 패다가 마지막에는 화살을 쏘아서 잡았다.
오랜만에 발휘해 본 실력!
주먹질이나 검술, 궁술, 마법까지 그대로였다.
그 대상이 된 듀라한이 불쌍할 정도.

"역시 내 실력은 그리 녹슬지 않았네."

다인은 기쁘게 웃었다.
과거에 로열 로드를 할 때에도 레벨보다는 스킬에만 신경을 쓰던 그녀였다. 몬스터를 치료하고 싸우던 일을 반복하다 보니, 비정상적으로 스킬의 레벨이 높아졌다.

"반가워! 듀라한, 스켈레톤들아!"

다인은 혼자서 산책 삼아 언데드의 던전을 돌아다녔다. 그러면서 직접 몸을 움직였다. 오랜만에 돌아온 로열 로드의 공기와 분위기에 흠뻑 빠져 취해 버린 것이다.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다시 한 번의 숨을 쉬고, 한 끼의 식사라도 하고 싶었다.
삶이 얼마나 환상적으로 아름다운지는 아파 본 사람들만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 띄는 몬스터들은 보이는 족족 두들겨 맞아야 했다.
스켈레톤 워리어, 스켈레톤 나이트들.
수술을 받기 직전에도 스켈레톤들이 떠올랐다.
위험도가 높은 수술. 수술 도중에 죽는 경우도 허다했다. 죽게 되어서 혹시라도 뼈다귀만 남는다면 이런 식이 되지 않을까 하고 걱정했던 것이다.
그렇게 돌아다녀 보는 언데드의 던전!
기억 속에는 황량하기만 짝이 없던 공간이었다.
회색과 흑색의 종유석들이 매달려 있거나 부서져 있는 천연 동굴.
그런데 곳곳에 조각상들이 만들어져 있었다.

라비아스의 무명 석인을 보셨습니다.
라비아스에 알 수 없는 조각상들이 생겨났다!
그리운 추억의 향기를 물씬 풍기고 있는 조각상들은 위험한 던전에서 휴식과 재충전을 향한 이정표가 되어 줄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발견되지 않은 이 조각상들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조각사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생명력과 마나가 25% 늘어납니다.
이동속도가 10% 빨라집니다.
조각상 인근의 몬스터 공격력이 5% 줄어듭니다.

"조각상?"

다인은 추억 속의 공간에 조각품들이 놓여 있는 데에 기분이 나빴다.

"뭐 이런 게 다 있어."

막 돌아서려는 순간이었다.
문득 그 조각상들의 모습이 익숙했다.
새치름한 표정과 살짝 치켜뜬 눈, 화가 나면 소매부터 걷어 올리는 다혈질!
여자는 다인을 꼭 그대로 닮아 있었ㄷㄴ 것이다.

"설마......"

다인은 남자를 살폈다. 그러자 자신이 수술을 받기 전에 만났던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마지막에 로열 로드를 하면서 가슴 깊이 새겨 두었던 사람.
당시에 다인은 한 사람과 환상적인 파티 플레이를 했다.
샤먼의 다양한 특기들이 위드의 강력한 공격력과 합쳐져서 그들은 언데드가 나오는 던전들을 휩쓸고 다녔다.

"위드구나."

다인의 눈가에서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나온다.

"훌쩍. 다신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수술을 받기 전에 백 번쯤은 상상했다.
새로운 생명을 찾으면 기쁘게만 살겠다고. 울지 않겠다고.
그러나 지금 흘리는 눈물은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의 눈물이었다.
그렇게 수술을 받으러 떠나면서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저 완전히 잊힌 존재가 되어서, 누구도 자신이 존재했는지조차 모르는 줄만 알았다.
그런데 그녀를 기억해 준 사람이 있었다.
그녀의 모습을 조각품으로 만들어 놓은 사람이 있었다.
가슴이 저릿저릿 울렸다.
심장이 쿵쾅거리면서 뛰고, 손기 가늘게 떨린다.
온몸으로 벅찬 감동을 표현하던 다인의 시선이 머문 곳은 조각상 아래에 쓰인 많은 낙서들이었다.
비뚤배뚤 어린애들이 쓴 것처럼 보이는 조악한 글씨체.

검치. 천상천아 유아독존!
검둘치. 일인지하 만인지상.
검삼치 다녀감.
검사치. 스승님을 모시게 된 것은 제 인생의 영광입니다.
검오치. 여자 친구 구합니다. 아직 30대 후반밖에 안 됐습니다.
......
검백구십사치. 배고파요. 누구 보리빵 좀 빌려주실 분.
......
검삼백이십일치. 어제도 굶어 죽었다.
검삼백이십이치. 우리의 작은 몬스터가 아니라 식량이다.
......
검삼백사십오치. 애인 구함. 조건 다 필요 없음. 요리 스킬만 익히고 있으면 됨.
......
검오백오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제 이름은 검오백오치입니다. 귀염둥이 막내라고도 하지요. 핫핫핫.








그렇게 다인은 언데드의 던전을 한 바퀴 돌았다.
오랜만에 보는 듀라한이나 스켈레톤과의 전투를 이끌고, 위드가 만들어 놓은 라비아스의 무명 석인들도 찾았다.
다인과 위드가 밥을 먹었던 장소, 쉬었던 장소들에는 어김없이 두 사람의 조각품들이 만들어져 있다.

"대단해. 이런 조각상이라니......"

다인의 눈이 맑은 물기를 머금었다. 사소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가슴이 아파 올 정도로 감격스러웠다. 그렇게 하나도 남김없이 조각상들을 보았다.
감상에 젖은 그녀가 천천히 계속해서 던전을 돌아다니고 있을 때였다.

"크크크. 여긴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장소다."

"사자들이 몸을 누이는 곳. 안식의 장소."

"목숨을 버리도록 해라. 영원한 휴식으로 안내해 주겠다."

3마리의 스켈레톤들!
가끔씩 출몰하는 몬스터들은 아주 다부지게 패서 잡았다.
여기에는 절대로 인정사정이 없었다.
그녀의 평온을 방해한 죄로 뼈마디를 분질러 주었다. 하지만 꼭 스켈레톤들의 잘목이라고만 볼 수도 없는 일이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영역을 지키려고 했을 뿐인데, 다인이 일부러 돌아다니면서 그들을 팼으니까!
조각상이 만들어지지 않은 곳도 그랬거니와 조각상 근처에 탐스럽게 모여 있는 몬스터들은 어김없이 다인의 방문을 받았다.
그녀는 온갖 스킬을 난무하면서 몹들을 사냥했다. 샤먼의 특성이 가득 실린 공격으로 몬스터들을 제압했다.
그녀가 던전을 나온 것은 약 이틀 뒤여싿.



"여기가 천공의 도시에요?"

"응. 얼마 전에 모험가들이 새로 발견한 곳이래. 바란 마을에서 공을 세운 사람들만 여기에 올라올 수 있다고 해."

라비아스에는 모험가들이 꽤나 많이 있었다.
다인이 활동할 때에는 위드 외에는 보질 못했지마느 그 사이에 이곳도 유저들의 모험에 의해서 밝혀진 것이다.
하늘 위의 도시.
구름이 흘러가는 경치나 상공에서 바람을 맞는 기분이 그만이라서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오는 장소였다.
레벨이 낮은 관광객들은 여길 오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라비아스가 유명해지고, 공식적으로 왕국에도 알려지자 귀족들의 방문도 잦았다. 로자임 왕국의 귀족들, 인근의 브랜트 왕국들의 귀족들도 이곳을 곧잘 다녀간다.
이들을 안전하게 데려오기 위해 별도로 호위하는 퀘스트가 생겨날 정도다.

"사람이 많네."

다인은 천천히 도시 안을 걸었다. 그러자 다양한 종류의 조인족들이 보인다.

"끼룩끼룩. 처음 보는 얼굴이군. 우리 마을에 놀러 왔나?"

도톰한 볼을 가진 새 할아버지가 다인을 향해 부리를 달싹이며 말을 걸어왔다.
그 외에 많은 조인족들.
크로우는 날개를 푸드덕거리고 있었다.

"당신, 인간 중에서 강한 축에 드나? 아무래도 제법 유명해 보이는데 내 부탁이나 하나 들어주지. 여기 라비아스에는 재수 없는 언데드들이 아주 많거든."

"약초를 캐는 법 정도는 알고 있겠지? 모른다면 내가 가르쳐 줄 테니 붉은 약초를 200개 정도 캐 줄 수 있을까? 그 약초는
북쪽 동굴의 구석을 보면 있을 거야. 캐낼 때에는 뿌리를 다치지 않게 조심해야 해."

시굴도 있었다.
다인은 다양한 조인족들을 만나 봤지만, 어떤 조인족도 그녀를 기억하고 있진 못하였다.
달리 새 머리라고 하는 게 아니다. 건망증이 심한 조인족들은 다인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한가롭게 돌아다니던 중, 다인은 문득 위드가 보고 싶어졌다.

'어딘가에서 모험을 하는 중이겠지. 레벨도 많이 높아졌을까?'

연락을 해 보고 싶었다.
살아서 돌아온 기쁨을 나누고 싶다!
하지만 연락할 수단이 없었다. 수술을 하러 가면서 일부러 친구 등록을 해제해 놓았다. 만약에 그녀가 영영 접속하지 못하게 되면
그 사실을 알지 못하게, 미련을 갖지 않도록 친구 등록을 끊은 것이다.
우드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만 수천 명이 넘을 테니 직접 만나 보고 친구로 등록하지 않는다면 연락할 수단은 막힌 셈이었다.

'뭐, 괜찮아. 인연이 된다면 언제든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런데 만나더라도 함게 다니지 못한다면 슬프겠지?'

레벨의 차이가 너무 벌어져 있을 테니 만나더라도 이야기밖에 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리 큰 걱정거리는 아니었다.
그녀가 가진 스킬들의 수준은 레벨에 비해서 대단히 높았다. 레벨은 낮더라도 스킬들이 강하니 어느 정도 빠르게 쫓아갈 수 있다.

'무엇보다 이제는 마음껏 할 수 있어. 죽는다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돼. 내게는 시간이 있으니까.'

그때 혼자서 서 있는 다인을 보고, 몇 명의 여자들이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혼자시면 우리와 함게 모험을 하지 않을래요? 제 이름은 그라티, 바람의 정령술사에요."

다인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험!
사냥!
좀 더 강해지고 싶고, 많이 돌아다니고 싶었다.

'베르사 대륙, 라비아스, 몬스터가 있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나 좋아요.'




검치 들의 레벨은 그다지 빨리 오르지 못했다. 그 발단은 피라미드 건설 때문이었다.

"끙차!"

"삼백사, 힘 좀 더 내봐."

"알겠습니다. 사형!"

열심히 피라미드의 돌 쌓기를 하던 그들에게 의뢰가 들어온 것이다.
근처의 꽃 가게를 하는 셀리나라는 예쁜 주민이 와서 말했다

"실은 저희 집이 지금 많이 허술해서 그런데, 보수를 좀 해 주시겠어요?"

띠링!

셀리나의 집 짓기
세리보그 성에는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허름한 집들이 많다. 셀리나의 집을 새로 지어 준다면 그녀의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난이도: D
보상: 셀리나의 친구
퀘스트 제한: 일정 수준의 명성. 건축에 대한 경험이 있어야 함.

원래는 잘 하지 않는 친분 퀘스트였다.
보상이라고는 그저 셀리나와의 친밀도뿐!
막 로열 로드를 시작하여 4주 동안 성에서 나가지 못할때에는 가끔 하지도 한다.
그러나 어느 정도 게임을 하는 법을 익히면 그 후로는 포상에 따라 움직이기 마련이었다.
돈을 많이 주거나, 경험치나 아이템을 지급하거나!
하물며 건축 의뢰는 여러모로 몸도 많이 움직여야 하고 고된 퀘스트가 아니던가.
그러나 검치 들은 셀리나를 보며 마구 달려들었다.

"제발 저를 시켜 주세요!"

"머슴처럼 부려만 주십쇼!"

"집요? 궁전처럼 지어 드리겠습니다!"

셀리나의 아름다운 용모에 반한 나머지, 마구 달려둘어서 퀘스트를 받으려고 아우성이었던 것이다.
뒤늦게 검둘치와 검삼치 들도 나타났다.
그들은 등에 집을 짓기 위한 각종 도구들을 산더미처럼 짊어지고 있었다.
사범이나 수련생들이나, 연애를 위한 처절한 몸부림은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500명이나 되는 인부들이 동원되어서 지을 정도로 꽃 가게의 규모가 그린 큰 것은 아니었다.
하루나 이틀 정도마 바짝 일한다면 충분히 도로 만든 집을 지을 수 있었다.
이미 피라미드를 통해 건축에 대해서 익숙해진 검치 들! 공사판 현장엣어 일했던 이들도 많아서,
꽃 가게 정도는 식은 죽 먹기로 끝낼 수 있었다. 그러나 검치 들은 셀리나의 집을 매우 느리게 지었다.

"여기 묵이라도 좀 마시고 하세요."

"하하핫! 고맙습니다."

"뭘 이런 걸 다......"

셀리나가 무언가를 내올 때마다 검치 들은 그녀와 한마디의 말이라도 해 보고 싶어서 난리였다.
그녀가 없을 때에는 일부러 일손을 잠시 놓았다가, 나중ㅇ ㅔ그녀가 나타났을 때에만 열심히 일하는 척을 했다.
약 10일간 꽃 가게를 짓고 있을 때였다. 아무리 농땡이를 피운다고 해도 점점 꽃 가게는 완성이 되어 갔다.
검일백오치가 슬픈 얼굴에 잠겨 있었다.
그에게 검삼치가 다가갔다.

"무슨 일이냐?"

"아, 검삼치 사범님! 실은... 이제 이 가게를 완성하면 셀리나를 못 만나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게 그렇게도 슬펐던 것이냐?"

"예. 저도 압니다. 셀리나는 우리 같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저는 그녀가 좋습니다.
착한 마음씨와 미소가 너무나도 좋습니다. 뭘 많이 바라는 건 아닙니다. 그저 한 일주일이라도 더 함께 있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검일백오치는 셀리나와의 이별을 슬퍼했다.
그러자 검삼치는 검을 뽑아 들며 씨익 웃었다.

"멍청한 놈! 이러면 되는 것이다."

검삼치는 맹렬히 검을 휘둘러서 기껏 지어 놓은 꽃 가게를 마구 부숴 버렸다.
그러자 소란에 모여든 검치 들이 박수를 쳤다.

"역시 사범님이십니다."

"최고입니다!"

"그런 묘안이 있었군요!"

검치 들은 열심히 꽃 가게를 만들고 부수길 반복했다. 그러나 셀리나가 보는 앞에서 가게를 부술 수는 없어서 결국 완성이 되고야 말았다.
예쁘고 아담한 꽃 가게를 만들어 준 검치 들은 구슬프게 울었다.

"흑흑."

"이제 더 이상 셀리나와 같이 지내지 못하겠구나."

"어린 시절, 12명한테 두들겨 맞을 때도 안 나오던 울음이 지금 나오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셀리나의 꽃 가게를 지어 준 이후로 세라보그 성의 여러 주택이나 가게로부터 집을 지어 달라는 의뢰가 들어오는 것이었다.
검치 들이 일을 고르는 기준은 단순했다.
몸매 좋고 얼굴 예쁜 여자들의 일들만 도맡아서 했다.

"보상 따위는 없어도 돼!"

"내 한 방울의 땀은 그녀의 웃음을 보기 위한 것이다."

"히죽. 그녀가 날 보고 웃었어!"

검치 들은 열심히 공사판을 전전하며 많은 벽돌을 쌓았다.
오로지 여자들을 보기 위하여, 그런 숭고한 뜻으로 열심히 집을 지었다.
세라보그 성에서는 갈색으로 그을린 웃통을 벗어 헤친 인부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피라미드 때부터 계산해 본다면 어마어마한 양의 돌을 쌓았을 것이다.
띠링!

-반복 행동에 따라서 건축가 계열 스킬, 벽돌 쌓기와 땅 파기를 습득하셨습니다.
벽돌 쌓기 1(0%): 벽돌을 가지런히 쌓아 집을 짓는다. 숙련도가 띠어난 이는 아무리 많은 벽돌이라도 가지런히 쌓을 수 있다.
삽질 1(0%): 땅을 빠르게 파낼 수 있다.

건축가의 스킬들!
생산직으로 분류하기는 상당히 힘든 직업으로, 아직까지는 전직하는 방법이 밝혀지지 않았다.
위드가 뛰어난 손재주로 요리나 대장일, 재봉 들을 익힌 것처럼 검치 들은 노가다를 통해 건축가 스킬을 배우고 만 것이다.
벽돌 쌓기와 삽질은, 다른 것은 몰라도 스탯 힘을 크게 늘려 주었다.
건축가 스킬을 올리기 위하여, 그리고 의뢰를 해결하기 위하여 검치 들은 열심히 삽질을 하고 벽돌을 쌓았다.
그 결과 3달 만에 로자임 왕국 출신의 미녀들과는 모조리 친해져 버리는 기염을 토해 냈다.
검치 들은 그때부터 열심히 거리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검사백십구치 오라버니!"

"저번에 지어 주신 집은 참 고마워요, 검십오치 오빠!"

사람들은 모두 검치 들이 하는 기행에 어이가 없었다.
오직 검치 들만이 할 수 있는 일!





몇 달이 지나자, 열심히 로자임 왕국 미녀 주민들의 집을 지어 준 검치 들은 꽤나 유명해졌다.
그때부터는 각 귀족들이 찾아왔다.

"명성을 듣고 왔네. 이쪽 분야에서는 꽤나 유명하다고 하지? 나의 저택을 지어 주게. 성대한 집을 지어 준다면 섭섭하지 않은 보답을 해주지."


귀족 아리아스 남작의 저택 건축
알이라스 남작은 로자임 왕국의 수도 근처에서 꽤나 큰 마을을 소유하고 있다.
마을 시장의 활성화로 인해 많은 돈을 벌어들인 그는 이번에 새로 저택을 완성하여.....


"거절한다."

-퀘스트를 거부하셨습니다.

검치 들은 채 들어 보지도 않고 퀘스트를 받지 않겠노라고 거부했다.

"우리가 네 하인이냐?"

"우리한테 그런 막일을 맡기려고 하다니 어림도 없지!"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고 해도 그런 일은 하고 싶지 않아."

검치 들은 배가 뒤룩뒤룩 튀어나온 알리아스 남작을 보며 비웃어 주었다. 그러나 다른 예쁜 마을 여인이 부탁하자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맡겨만 주십쇼!"

"최선을 다해서 지어 드리겠습니다."

검치 들은 그렇게 열심히 막일을 했다.
그러면서 스킬들을 수련하고, 틈틈이 주변의 던전들을 다니면서 사냥도 했다.
그러다가 모든 검치 들이 레벨 220을 넘었다.

"스탯창!"

캐릭터 이름: 검오백오치 성향: 무
레벨: 220 직업: 무예인
칭호: 없음 명성: 1632
생명력: 27060 마나: 4402
힘: 850 민첩: 455
체력: 230
지혜: 65 지력: 40
투지: 130 지구력: 120
인내력: 180 매력: 20
카리스마: 60 통솔력: 30
행운: 5 신앙: 10
공격력: 1340 방어력: 195
마법 저항 불: 20% 물: 20%
대지: 20% 흑마법: 20%


그때 검치에게 무명의 도전자가 찾아왔다.
가벼운 방어구에 망토를 하나 착용한 떠돌이!
검치는 매우 가뿐하게 그를 이겨 주었다. 그러자 떠돌이는 말했다.

"그대는 조금씩 완성되어 가는 무예인이군. 그대와 그대 동료들의 명성은 나도 들은 적이 있다. 여인을 도우며 지낸다지? 나는 평생을 무예를 갈고닦으며 살아왔다."

나타난 떠돌이는 바로 검치 들과 같은 직업을 가진 자. 무예인이었다.
떠돌이는 이어서 말했다.

"강해진다는 것의 의미를 알고 있나? 검만 갈고닦아서는 부족해. 나를 꺾었으니 더 넓은 세상을 보고 경험한 후 돌아와라. 그러면 진정한 강함으로 안내해 주겠다."

띠링!

무사 수행
세상을 어지럽히는 몬스터들을 사냥하고,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구하라.
여인과 소녀들을 구하고 기사도를 이 땅에 바로 세워라.
베르사 대륙을 여행하면서 많은 것을 보고 돌아온다면 진정한 무예인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난이도: 상위 직업 전직 퀘스트
보상: 개발이 가능한 스킬
퀘스트 제한: 직업 무예인 제한. 악명이 없어야 함.


검치를 비롯하여 검오백오치까지 골고루 떠돌이들이 찾아왔다.
검치는 이제 결단을 내려야 할 때임을 알았다.

"모두 들어라. 지금까지 우리는 이 로열 로드를 하면서 함께 뭉쳐 다녔다."

"......"

검치 들의 진중한 눈빛!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스승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우리들이 뭉쳐서 다닐 때에는 무서운 것이 없었지. 모두가 우리를 두려워하고 피했다.ㅏ 우리는 하나라서 더욱 강하다."

검치 들이 던전에서 사냥을 하면, 대다수의 유저들은 욕을 하며 떠났다.
몬스터들을 독식하고, 예쁜 여성 유저들만 있으면 훔쳐보고! 요리를 하기 위해 냄새만 피우면 달려들어서 맛있는
밥을 한 끼라도 얻어먹기 위해서 안간힘을 다하는 검치 들!
그들이 나타나면 아무리 북적대던 곳이라도 삽시간에 한적한 사냥터로 변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제는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해야 할 때다. 각자 대륙을 떠돌면서 협행을 하고, 강한 몬스터들을 꺾어라. 앞으로 6개월 후, 로자임 왕국에서 다시 만나도록 하자."

"알겠습니다. 스승닙!"

"훗날 뵙겠습니다."

"건강하십시오. 스승님!"

검치 들은 각자 인사를 하고 길을 떠났다.
보리 빵이 들어 있는 작은 배낭 하나가 짐의 전부였다. 실상 가지고 떠날 것도 그리 없었다.
전 대륙으로 흩어지게 된 검치 들!
스승과 제자의 애틋한 헤어짐이었지만, 떠나는 제자들은 얼굴 가득 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제야 좀 배불리 먹겠구나.'

'배고파서 죽을 뻔했네.'

'어서 토끼라도 사냥해서 구워 먹자.'

검치 들은 무사 수행을 위해 뿔뿔이 흩어져 로자임 왕국을 떠났다.





한국 대학교의 수시 전형!
프로게이머 전형으로 원서를 넣을 때만 해도 별로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합격하고 나니 더 큰 고민이 생겼다.

"어쩌지 오빠한테 사실대로 말을 해야 하는데......"

이혜연은 서류 합격 통지서를 들고 이리저리 갈등했다.
한국 대학교의 면접날은 바로 오늘이었다. 그러나 자린고비인 이현이 대학교에 가서 면접을 보려고 할 리가 없다.

"미룰 수도 없고 어떻게 해서든 데려가야 하는데......"

이혜연은 한참이나 고뇌에 빠졌다가, 결국 수를 썼다.
정면 승부!
이혜연은 이현의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오빠, 할 말 있어. 오늘 한국 대학교에 면접을 보러 가야 해."

이혜연이 그렇게 말을 했을 때에, 이현은 한창 명예의 전당을 들여야보고 있었다.

"면접? 무슨 면접인데?"

"대학교 입학 면접 말이야."

"뭐야? 정말이니?"

이현은 화들짝 놀랐다.
난데없는 한국 대학교의 면접이라니!
이혜연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했다.

"그게...사실 내가 원서를 썼거든. 꼭 정시로만 대학을 가야 한다는 법도 없어서...요즘은 수시로도 많이 들어가."

이현도 수시로 대학을 들어갈 수 있다는 얘기는 들어 보았다. 오히려 정시보다 수시로 합격하는 아이들이 더 많다고 했다.
이현은 바싹 긴장한 채 물었다.

"그래서?"

"원서를 보냈는데 합격해 버렸어. 허락도 없이 일을 저질러서 미안해. 오빠."

이혜연은 사과를 하면서, 이현이 크게 화를 내더라도 감수할 작정이었다. 제멋대로 굴었다고 야단을 친다고 해도 변명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이현은 덥석 이혜연의 손을 잡았다.

"면접이라면 서류는 통과된 거니?"

"응. 서류 전형에서 통과한다고 무조건 합격되는 건 아니지만, 거의 그렇다고 볼 수 있는데....."

"잘됐다!"

이현은 환하게 웃었다.
지금까지의 고생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리는 것처럼 기뻤다.
서로의 입장 차이가 있다 보니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혜연이 한 말들!
한국 대학교에 면접을 보러 가야 한다는 말을 듣고 이현은 자신의 입학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고등학교 중퇴 이후로 검정고시도 간신히 치른 그이니, 대학에 들어간다고는 애초에 고려조차 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당연히 이혜연이 한국 대학교 수시 모집에 합격한 줄로만 알았다.

"정말 잘됐어. 그래서 면접일이 언제인데?"

이혜연은 왠지 조금 불안해졌다.
잏ㄴ의 반응이 예상과는 달랐다.

'그래도 화를 내는 것보단 좋긴 한데......'

이혜연은 머뭇거리다 말했다.

"오늘이야."

"응?"

"지금 면접을 보러 가야 해. 딱 3시간 남았어."

"그게 정말이야?"

이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동생의 대학교 면접이라는 생각에 컴퓨터를 끄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어서 준비하자. 내가 데려다 줄게."





한국 대학교의 가상현실학과.
이현은 아낌없이 택시를 타고 한국 대학교에 도착했다. 평소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혜연이가 가상현실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구나.'

자세한 것은 몰라도 요즘 들어 각광받는 학문이라는 것을 뉴스 등에서 본 것 같았다.

'가상현실이라면 아무래도 내가 잘 아는 편이니 도와줄 수도 있겠군.'

이현은 쾌재를 부르면서 면접 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

"괜찮아. 다 잘될 거야."

여동생의 손도 꼭 잡아 주면서 말이다.
이혜연도 이때쯤에는 대충 상황을 눈치 챘다.

'오해를 하고 있구나.'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사실대로 고백을 할 수는 없다.

'오빠 성격에 그대로 돌아가자고 할 거야.'

이혜연은 일단 조용히 있기로 했다. 이미 수레바퀴는 굴러가고 있었다.
때가 되면 일은 알아서 터지는 것이고, 당장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
졸지에 거짓말을 하게 된 이혜연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나중에 뒷감당을 할 생각을 하니 막막하기만 했다.

"괜찮아?"

"응. 괜찮아, 오빠."

"땀을 많이 흘린다"

"긴장해서 그런가 봐."

"혹시라도 아프면 얘기를 해."

본의 아니게 속이고 있는 마당이니 긴장으로 흘리는 땀인데, 이현은 걱정을 해 주고 있었다.
이혜연의 눈빛이 영악하게 빛났다.

'아! 그러면 되겠구나.'

면접 시간이 3분 앞으로 다가오자 이혜연은 두 손으로 배를 잡았다.

"오빠."

"왜, 왜 그러니?"

"나 배 아파.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아침에 먹은 게 체했나 봐."

"그건......"

시간이 없었다.
이현은 이토록 중요한 순간에 화장실을 가겠다는 여동생을 말리고 싶었다.

"참을 수 없겠어?"

"아이참, 면접 보는 도중에 실례를 하는 것보단 낫잖아."

"그야 그렇긴 한데... 그러면 빨리 다녀와야 된다."

"알았어, 오빠."

"면접에 늦으면 안 돼."

"금방 다녀올게."

이혜연은 화장실로 가는 척하면서 몰래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것도 모르고 이현은 초조하게 어서 여동생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의자에서 일어나 복도를 서성이고, 연방 시계를 쳐다봤다.
1분. 2분......
마음 같아서는 시간을 멈추게 만들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다.

'혜연이의 미래가 걸린 일인데... 하필이면 배탈이 나다니, 다 내 책임이다. 아까 먹은 밥에 분명 뭔가 이상한 게 있었던 거야.'

긴장감으로 손끝이 가늘게 떨려 올 지경이었다.
화장실로 간 이혜연은 3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았고, 교수들과의 면접 시간이 다가왔다.
여자 조교가 와서 말했다.

"면접을 보러 오신 분이죠? 교수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제 여동생이 아직 오지를 않아서 그러는데 몇 분만 기다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입학 면접부터 늦어 버리다니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이현은 잔뜩 인상을 쓰고 말했고, 조교는 그 얼굴을 보며 가슴이 떨렸다.
독한 눈빛!
어떻게든 기다려 주지 않는다면 한바탕 뒤집어엎겠다는 이현의 다집이 보였던 것이다.

"아, 알겠습니다. 교수님들께 그렇게 전해 드릴께요."

대답을 하면서도 조교는 의아하기 짝이 없었다.

'여동생은 왜 기다리는 거지? 어차피 면접 당사자밖에는 못 들어갈 텐데......'

10여분이 지났지만, 이혜연은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 그녀는 은밀히 조교를 만나고 있었다.

"부탁 좀 드릴께요. 화장실에서 저를 만났는데 제가 배가 아파서 도저히 시간에 못 맞출 것 같다고,
오빠한테 대신 면접실로 들어가서 면접을 봐 달라고 해 주시겠어요?"

"예?"

"그렇게만 말씀해 주시면 돼요. 그러면 오빠가 면접을 볼거에요."

조교는 정말 이상한 남매라고 생각했다.
면접을 보기 전에 여동생이 와야 한다면서 기다리고 있는 이현도 이해가 안 갔고, 정작 그 여동생이 하는 말도 이상했다.
어쨌든 교수님들은 면접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참이다.

"그렇게만 전해 주면 됩니까?"

"네. 부탁드려요."

조교가 이현에게 가서 말했다.

"이제는 면접을 보러 들어가셔야 됩니다."

"여동생이 안 왔는데......"

"여동생 분을 화장실에서 만났습니다. 배가 아파서 시간을 못 맞출 것 같다고, 오빠 분에게 면접실로 들어가
달라고 하는군요. 그리고 교수님들께서도 더는 기다리실 수 없습니다. 더 늦어지면 탈락으로 처리하신다고 합니다."

"그건 안 됩니다. 그러면 제가 면접을 보겠습니다."

조교는 영문을 몰랐지만, 어쨌든 이현이 면접을 보겠다니 허락했다.

"따라오세요."

결국 이현은 여동생 없이 혼자 면접장으로 들어갔다.
5명의 교수들이 어떤 서류들을 보고 있었다.

'여동생의 원서를 보고 있겠구나.'

실제로는 이현 본인의 원서였다.
이현이 사정을 말하기도 전에 원서를 읽어 보던 교수들이 질문을 했다.

"우리 학교에 지원을 하게 된 특별한 동기라도 있습니까?"

"장래가 유명한 학교라고 생각해서입니다."

"다른 학교들은 유망하지 않다는 뜻인가요?"

교수들은 집요하게 캐물어 보았다.
이현의 대답은 간단하기 짝이 없었다.

"그건 아닙니다. 그러나 시설이나 교수진이 제일 확실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군요."

교수들은 너무나도 교과서적인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쓸데없이 요란하지는 않군.'

'기초를 중요시한다는 건가.'

'별로 면접에 성의 있는 태도는 아니군. 면접 시간에도 늦더니......'

그런데 이현이 불쑥 말했다.

"사실 제 여동생은 정말 착한 아이입니다."

"네?"

"여동생이 어릴 때에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이현은 자신의 가족사를 줄줄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혜연의 면접이니만큼 당연히 최대한 여동생의 이야기를 해 줘야 했다. 한국 대학교를 지원하고 선택한
이유도 본래는 여동생에게 물어야 할 것인데 자신이 대신 대답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이현이었다.

'한국 대학교! 절대로 놓칠 수 없다. 내 여동생의 미래가 걸린 일이야.'

그래서 여동생이 면접실로 들어올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서 어릴 때에 고생한 이야기부터 늘어놓기 시작한
것이다. 그와 가족들이 어떻게 살아왔고, 여동생이 어떤 식으로 자라 왔는지 말이다.
그런데 여동생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필히 이현 본인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채업자들에게 위협을 당하던 일. 어떻게든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싸웠던 일. 돈을 벌기 위해서 주유소에서
시작하여서 안 해 본 일들이 없던 것들까지 모두 말했다.
교수드은 묵묵히 이현의 말을 경청했다.
보통의 면접과는 한참이나 달랐다.
일반적인 면접에서는 교수들이 질문을 던지면 응시자가 대답하는 형식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현이 두서없이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하고, 교수진은 듣기만 한다.

"...그리고 지금은 로열 로드를 하고 있습니다. 1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쳤고 이제는 어느 정도 안정적이 기반을 다졌습니다.
다른 게임들의 경우에는, 더 재미있는 게임이 나온다면 얼마든지 옮겨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상현실을 기반으로 한 로열
로드는 다릅니다. 직접 숨 쉬고, 움직이고, 행동하면서 만들었던 많은 추억들이 있습니다. 최소한 10년은 끄덕없을 게임이라고 봅니다.
여동생의 대학 등록금은 지금 수조롭게 모으고 있고, 어떻게 해서든 납부 날짜에 늦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이제는 교수들도 이현이 무언가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엉뚱한 면접자가, 본인이 아니라 여동생의 면접인 줄로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교수들은 그에 대해서 하나같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교수들이 물었다.

"그러면 가상현실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유치한 질문이 되겠지만, 가상현실과 현실을 어떻게 구분하고 있습니까?"

이현의 대답은 간견했다.

"가상현실과 현실을 나누는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봅니다."

"호오, 그래요? 그 이유를 말씀해 보시지요."

교수들은 기껏해야 가상의 세계와 현실은 구분되는 것이라거나, 아니면 완벽한 가상현실을 만드는 것이 꿈이라는 대답을 예상했다.

그런데 이현의 독특한 대답에 흥미가 있었다.

"로열 로드나 지금 서 있는 이곳이나 저에게 있어서 현실이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죠."

"가상현실과 현실이 같다는 뜻입니까?"

"예. 치열하고 살고, 일하고,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 안에서 이룬 것들은 지금의 저에게 도움이 됩니다.
가상현실이라고 해서 삶이 가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식을 얻을 수 있고, 돈을 벌 수 있습니다. 어디서든 노력하며 산다면 저에게는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이혜연 학생이 어떤 사람인지 충분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결과는 추후 통보해 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이현이 나가고 난 뒤에 교수들은 회의에 들어갔다.

"생활력이 강하군요."

"요즘 시대에 이 정도로 가족을 먼저 생각하는 이는 흔치 않겠지요."

"가상현실이 발달하면서 가족의 의미가 퇴색되고 있는데, 좋은 심성을 가졌습니다."

"가상현실에 대한 지식도 폭넓은 편입니다."

"다양한 삶의 경험은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교수들은 한참 이야기를 나눴다. 이현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면 모두 합의하실 것으로 알겠습니다."

교수들은 이현의 원서에 합격이라는 도장을 찍었다.



"휴우, 겨우 끝내고 나왔구나."

이현은 간신히 면접을 마치고 나왔다. 나와서 생각하니 정말 무슨 대답을 했는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잘되어야 할 텐데......"

이현은 여동생을 찾았다.
그새 화장실에서 나왔는지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동생은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이현이 다가가자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면접은 어떻게 됐어?"

"응? 그게......"

이현은 여동생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 하필이면 그때에 배가 아플 게 뭔가.

"나름대로 내가 잘 설명하기는 했는데... 지금이라도 들어가서 사정을 이야기하고 다시 면접을 보자."

"무슨 사정?"

"당사자가 면접을 봐야지. 내가 말주변이 없어서 실수라도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이혜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속인 것을 화내거나 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자신이 면접을 못 본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지 않은가

'설마 아직도 모르는 거야?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이혜연은 우선 대충 맞장구를 쳐 주었다.

"괜찮아. 오빠가 잘했으리라 믿어. 그리고 지금 또다시 면접을 본다고 하면 그게 더 이상할 수도 있잖아."

"그야 그렇지만....그래. 이미 지나간 일인데 미련을 갖지 말자."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대학교 정문을 빠져나올 때, 문득 이혜연이 잠시 멈칫했다.

"왜?"

"나 놓고 온 게 있는 것 같아!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오빠."

"그래."

이혜연은 바로 학교로 들어가서 조교를 만났다. 그리고 할머니가 있는 병원으로 우편 수령지를 바꾸어 놓았다.







처음 가 본 영화관

원래 이현은 여동생과 함께 집으로 가려고 했다. 평소처럼 볼일을 다 보았으니 집에 돌아가서 로열 로드를 할 작정이었다.
퀘스트가 코앞이었으니 준비하는 데에 시간이 모자라서 최근에는 도장도 빠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한국 대학교의 면접! 경사 중의 경사다. 이렇게 중요한 날을 그냥 보낼 수는 없지.'

이현은 마음을 굳게 먹고 지갑을 보았다.
빳빳한 푸른색의 지폐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서 현금을 넉넉하게 출금해 왔다.

"혜연아."

"응?"

"우리 영화 보자."

이현은 지금까지 영화관을 가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최초로 시도를 하는 것이었다.

"정말?"

이혜연은 믿을 수 없었다.
그녀의 오빠가 어떤 사람이던가! 길에서 흘리는 돈이 아깝다면서 버스도 타지 않는 자린고비였다. 군것질이나, 하다못해 꼭 필요한 학용품도 사지 않았다.
그런데 영화관을 가자는 것이다.

"그래. 재밌는 영화 보자."

이현의 강력한 의지 속에서 둘은 영화관으로 향했다.
상영관이 여러 개인 멀티플렉스 영화관.
대형 쇼핑몰과 연계되어서 방문객들이 끊이지 않는 장소였다.
이현은 영화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다.

"대단하다."

그는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는 장소에 사람이 이렇게나 ㅁ낳다니!
완전히 별천지에 온 것만 같았다.

"오빠, 영화가 정말 재밌나 봐."

"그러게. 어서 보러 가자."

이혜연도 사실 영화관은 처음이었다.
용돈은 상당히 넉넉히 받는 편이었지만, 어떻게 버는 돈인지 알기 때문에 허투루 쓴 적이 없다. 친ㄱ들이
영화관을 가자고 해도 가지 않고 버티다 보니 영화관에 와 본 건 처음이었다.

"영화가 많네."

"가장 최근에 개봉한 대작이 뭐지?"

"<착하지 말자>. 거지 포스터에 그렇게 쓰여 있어."

"그거 보자. 재미있겠다."

이현과 이혜연은 한참이나 헤맨 끝에 표를 샀다.
처음에는 극장 안에 들어가면서 돈을 내면 되는 줄만 알았다. 그런데 매표소에서 따로 표를 구매해야 했다.

"이런 식이었군. 뭐 이럴 줄 알고 있었어. 이래야 정상이지."

이현은 돌연 미소를 머금었다. 자신감에 찬 미소였다. 그러면서 만 원짜리 2장을 당당히 내밀었다.

"<착하지 말자> 2장요."

영화관에 온 자긍심!
문화인이라는 데 대한 만족감!
지금 이 순간만큼은 거금이 나가는데도 아깝지 않았다. 사실은 아깝긴 했지만, 그래도 돈을 쓰는 보람이 있었다.
직원은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3시 30분. <착하지 말자> 성인 2장. 맞으십니까?"

"네."

"할인 카드나 적립 카드가 있으십니까?"

"네?"

이현은 당황하고 말았다.
할인 카드와 적립 카드!
이름만 들어도 상당히 의미심장한 단어였다.

"그게 뭐죠?"

"아, 네. MK캐쉬백이나 이동 통신사 카드, 신용카드 할인이 가능하십니다."

"그, 그게 얼마나 할인이 되는 건지......"

이현이 머뭇거리면서 물었다.
그러자 직원은 더욱 상냥하게 웃었다. 올해의 미소상에 뽑힐 만큼 환한 미소였다.

"1인단 2천원입니다."

"......"

그때에 드러난 이현의 썩은 미소!
영화 티켓이 7천원이니 2천원의 할인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1인단 2천원이라면 총 4천원이나 할인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한데 이현에게는 그런 카드가 없었다.
적립 카드가 없는 도매 시장을 주로 이용했고, 신용카드는 발급 요건이 되지 못한다.
뚜렷한 직업이 없는 데다, 사채는 모두 갚았지만 그 기록이 남아서 신용카드가 발급되지 않았다.
하다못해 휴대폰도 없었다.

"혜연아."

도움을 청하는 눈빛으로 여동생을 보았지만, 그녀도 고개를 젓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휴대폰도 가지고 있지 않은 고등학생이 무슨 카드를 가지고 있겠는가.
결국 이혜연은 이현의 팔을 잡아끌었다.

"오빠. 우리 그냥 영화 보지 말자."

그 순간, 이현은 영화를 반드시 보고 싶어졌다.
돌이켜보니 가족끼리 단란하게 영화를 본 기억도 없는 것이다.

'오빠가 되어서 동생 영황 한 편 못 보여 주고 살았구나.'

양심의 가책이 느껴져서 서슴없이 2만원을 직원에게 건네줬다.
그 당당함!

"<착하지 말자>. 할인, 적립 없이 2장 부탁드립니다."

"좋은 자리로 정해 드리겠습니다, 손님."

극장 직원은 재미있다는 듯이 남매를 보다가 남아 있던 자리 중에 좋은 자리를 택해 주었다.
3시 30분이 되려면 아직 1시간 20분 정도가 남았다. 이현은 여동생과 함께 영화관 내를 돌아다녔다.
종합 오락실과, 팝콘과 오징어등을 살 수 있는 상점들이 있었다.

'오징어 값이 거의 영화 값의 절반이군. 팝콘은 뭐가 이리 비싼 거야.'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가격이었다.
영화관에서 파는 팝콘 가격과 콜라 가격이 어떻게 정작 영화 표보다 더 비쌀 수 있는가!
이현은 주변의 사람들이 오락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며, 여동생을 이끌었다.

"시간이 될 때까지 오락이나 하고 있자."

"그래, 그럼."

둘은 사람들을 따라 오락실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이현은 경악을 거듭했다.

'오락 한판이 1천원이 넘는다니......'

로열 로드가 대세로 자리 잡은 세상이었다.
가상현실에서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 그런데 단지 화면이 나오고 손으로 작동시키는 구형 기계에서 단순
오락을 하는 데에 1천원씩을 받았다. 그것도 현금을 내는 게 아니라 오락실의 입구에서 목걸이를 지급해 준다
나갈 때에 그 목걸이에 찍힌 금액을 계산하고 나가는 것이다. 이는 딱 돈이 삽시간에 나가기에 좋은 환경이었다.

'이런 도둑놈들!'

이현은 안타까움에 한숨이 나왔다.
마음 편히 오락도 할 수 없는 세상이었다.
천정부지로 뛰어오른 물가!
피땀 흘려서 번 돈을 오락 몇 판에 날려 버리기에 좋았다.

"오빠, 우리 무슨 게임 할까?"

"저, 저걸로 하자."

이현이 가리킨 것은 제일 싸 보이는 오락이었다.
테니스 게임의 일종으로, 둘이 경쟁을 하면서 상대방을 이기는 것이었다.
오락을 하는데 이현의 손이 덜덜 떨렸다.
아주 잠까 노는 것인데도 돈이 나간다
이것은 최대의 공포였다.
돈이 주머니에서 술술 빠져나가는 아픔, 끔찍한 고통!
아마 영화사상 가장 무서운 스릴러를 본다고 하여도 이토록 두렵진 않으리라.
이현은 동생과 오락을 몇 판 했다.
제일 싼 500원짜리 게임.
상식적으로 1시간을 넘게 버텨야 하는데 한 게임에 2분도 걸리지 않는다.
동생과 둘이 하니까 이겨도 손해!
져도 돈이 나가는 건 당연했다.
이현은 얼굴에 경직된 미소를 지었다.

"이거 재미없네. 다른 게임 하자."

"그래, 오빠."

이현은 이제 경쟁을 하지 않는 게임을 찾았다.

'기왕이면 기고 오래 할 수 있는 걸로...바로 거저다!'

비행기 게임을 찾아낸 것이다.
비행기를 조종해서 미사일을 쏘며 적기를 격추시키는 게임이다.
20세기 때부터 간단한 조작 방법과 게임성으로 크게 유행해서, 사람들이 여전히 즐기고 있는 고전 게임.

"이것 해 보자."

이현은 신나게 게임기 앞에 앉았다.
둘이 함께 할 수 있는 게임이라서 목걸이를 대고 1천원을 결제했다.

'이걸로 1시간을 버틴다!'

첫번째 미션은 적의 항공모함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적기들을 격추시키면서 보무도 당당히 날아가는 아군의 비행기!
어렵지 않게 승리를 거두었다.
그런데 두번째 미션에서부터는 알 수 없는 우주인들이 나왔다.
엄청나게 빠른 UFO를 타고 화면을 가득 뒤덮는 레이저 빔을 발사하는 우주선들!
미사일은 유도탄이라서, 아무리 피해도 쫓아와싸.

"커헉!"

이현은 거친 숨을 내뱉었다.
완전히 당한 것이다. 이토록 어려운 게임이 있다니!
비행기가 격추될 때마다 생살이 찢어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깔깔! 너무 재밌어!"

그나마 이현이 참을 수 있었던 것은 여동생이 활짝 웃으면서 즐기고 있어서였다.

'동생이 좋아하니까.'

비행기 게임을 한 번씩 하고, 이제는 색다른 게임을 찾았다.
틀린 그림 찾기!
이거야말로 정말로 오랫동안 할 수 있는 게임이다.
우선 굳이 2명분의 돈을 낼 필요가 없다.
1명만 하고, 2명이 동시에 하나의 화면을 보면서 찾으면 되지 않던가.
스테이지 10단계까지 성공하면 곰 인형도 준다고 한다.
그러나 눈이 충혈되도록 틀린 그림을 찾으면서, 이현은 이번에도 심한 배신감을 느껴야 했다.
이쑤시개 통 속에서 빠진 이쑤시개 1개 찾기!
매우 까다로운 도전이었지만 이현은 해냈다.
돈, 인형을 위하여!
그런데 그다음 단계는 더욱 난이도가 높았다.
모래사장에서 빠진 모래알 찾기!
숲에서 무늬 다른 나뭇잎 찾기!
세계 지도에서 없는 섬 하나 찾기!
개미굴에서 다리 4개 달린 개미 찾기!
완전히 좌절하게 만드는 미션들만 나오는 것이었다.
제한 시간 내에 못 찾으면 생명이 하나씩 죽어들고, 그러면 돈을 넣고 다시 이어서 할 수 있었다.
이편은 실패할 때마다 금액을 결제했고, 틀린 그림 찾기는 무서운 속도로 돈을 먹어치우고 있었다.
그러나 이현은 끈기로 해냈다.
투입하는 돈만큼 독기가 어렸다.

'무조건 다 찾아 버리겠다.'

어느새 들어간 돈이 인형의 값을 훨씬 초과할 정도가 됐다. 그럼에도 관문을 하나씩 뚫고 있었다.
그렇게 간 최종 스테이지.
이현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기다렸다.
마침내 다음 관문이 나타났다.
은하수에서 별 찾기!

'컥!'

이현은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다. 최소한 수만 개의 별 가운데에 어떤 별이 빠져 있는지 어떻게 알 것인가.

'당했구나!'

틀린 그림을 다 찾으면 순진하게 곰 인형을 줄 거라고 믿었던 자신이 바보 같았다.
하긴 언제 제대로 일이 풀린 적이 있었나 싶었다.

'로열 로드에서나 여기서나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구나.'

이현은 그때부터는 그냥 단순하고 할 만한 게임을 찾기로 했다.
그러나 정말로 오래 할 수 있는 게임들이 별로 없었다.
간단한 오락들도 2명이 승부를 결정짓는 경우에는 일찍 끝났다.

'좀 더 돈을 안 들이고 오래 할 수 있는 게임은 없을까?'

그때에 이현은 동생이 춤을 추는 게임을 동경 어린 시선으로 보는 것을 느꼈다.
게임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작은 방 안에 들어간다.
그 안에서 지시에 따라 동작을 취하면, 관련된 모든 행동은 중앙의 스크린으로 나온다.
춤으로 배틀을 하며, 점수를 따서 경쟁하는 게임이었다.

'어렵겠군.'

이현은 눈이 핑핑 돌 정도로 빠르게 나오는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이들이 신기하게만 보였다.
손을 움직이고, 발을 지면에서 스치듯 움직일 때마다, 리듬을 타는 몸은 현란한 춤 동작이 되어서 더욱 멋지게 스크린에 나타난다.
춤을 추는 대결!
그들의 주변에는 여고생, 여중생들이 모여서 연방 감탄을 터트리고 있었다.

"오빠도 한번 해 봐."

"그럴까?"

이현은 춤에 대해서는 완전히 백지상태! 그런데 하겠다고 나섰다.
동생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기도 했고, 속셈은 따로 있기도 했다.

'줄이 늘어서 있군. 그러면 저 줄을 기다리기만 해도 15분은 금방 가겠다.'

한번에 끝나더라도 오히려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그런 속셈으로 이현은 춤을 추기 위해 늘어선 줄 끝에 가서 섰다. 미리 줄을 서 있는 이들은 대부분 남자들이었다.
귀걸이나 목걸이를 하고, 최신 헤어스타일을 한 남학생들.

'촌놈이 오는군.'

'하는 법이나 알고 있을까?'

'무시해 버릴까.'

'아냐. 창피나 주자.'

남학생들은 은근히 눈짓으로 의기투합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이현과 이혜연에게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들이 오락실 안으로 들어온 순간, 이혜연의 미모에 다들 가슴이 설레였다.
여고생다운 풋풋함과 귀여운 매력이 있었다.
그런데 옆에는 어리버리하고 오락실도 처음 와 보는 것 같은 이현이 있지 않은가.
싸구려 게임만 하면서도 밝게 웃는 이혜연을 보면서 다들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어디 망신이나 실컷 당해라.'

줄을 서 있던 남학생들은 일부러 자리를 비켜 주었다.
그 덕에 금새 이현의 순서가 찾아왔다.

"오빠, 잘해!"

"그래. 열심히 할게."

이현은 작은 방으로 들어가서 쭈뼛거렸다.
어디에 목걸이를 대고 계산을 하는지도 몰랐고, 춤의 종류도 선택할 수 없었다.
각 지역에 따른 춤이나, 시대별로 다양한 춤들이 있었지만 그 근본적인 지식이 완전히 부족했던 것이다.
결국 이현은 아무것이나 선택했다.
프리 스타일.
익스트림 댄스.
공교롭게도 최고 난이도를 자랑하는 춤이었다.
각 춤들의 가장 어려운 동작들만 모아 놓고, 이를 상징하는 화살표들을 빠른 속도로 정확히 눌러야 한다.
그런 만큼 최고 수준의 실력자들만 선택할 수 있는 춤이었다.

"뭐야, 저 초보자."

"계산을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익스트림 댄스를 택했어."

"완전히 망신이군."

밖에서 스크린을 통해서 보고 있던 이들은 대놓고 이현의 행동을 비웃었다.
실제 게임이 시작되고 나서도, 이현은 그들의 생각대로 엉뚱한 행동들을 보였다. 게임을 할 줄 모르니 상대방의 춤을 과도하게 의식했다.

'그대로 따라 하면 창피는 안 당할 테지.'

익숙하지 않은 춤 동작들을 따라 하려니 몸에 힘이 가득 들어가서 지시대로 움직이려다가 손과 발이 꼬이기도 하고, 심지어 넘어지기도 했던 것.
각종 화살표와 지기 사항들은 이현이 허우적거리는 사이에도 빠르게 지나갔다.
일정한 시간 내에 그곳을 지정하고 눌러야 되는데 이게 쉬운 일이 아니다.
까다로운 동작들을 이행하면서 마음이 앞서다 보니 벌어진 일이었다.
이현의 캐릭터가 가진 생명력이 빠르게 줄어들었다.
배경은 인파로 가득한 클럽의 댄스장.
상대방은 현란한 춤 솜씨를 보이면서, 이현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현이 조금씩 달라졌다.

'춤이다. 그런데 나는 춤을 어떻게 추는지 모른다.'

모르는 것을 갑자기 잘할 수는 없다.
리듬을 타고 음악을 느끼는 게 어떤 건지는 알지 못했다. 춤을 추는 일들을 그저 대단한 문화인으로만 여겼다.
그러나 몸을 움직이는 것이라면 자신이 있었다.

'나는 검을 휘두르고 있는 것이다. 검이 내 손에 없어도 좋다. 상대방의 발걸음이 내게로 다가오면 한 걸음 물러나고,
반대의 경우에는 다가간다. 손은 적과 싸우고 있다. 주먹을 쥐어서 적을 향해 내지르기도 하고, 손바닥으로 상대방을 쳐 내기도 한다.'

이현의 동작들이 그때부터 바뀌었다.
과도하게 긴장하고 있던 몸이 풀렸다. 손과 발이 제 갈 곳을 찾았다.
억지로 타인의 행동을 따라 하는 게 아니라, 그때그때 나오는 화살표들을 지시대로 정확히 타격했다.
손을 펴내고, 두 다리를 움직여서 목표를 눌렀다. 발 차기를 하고, 허리를 뒤틀어서 몸을 회전시켰다. 팔은 아주 빠르게
움직였다. 주먹과 팔꿈치가 매우 정확한 속도로 동작하면서 화살표들을 격타한다.
이현의 움직임은 곧 스크린을 통해서 나왔다.

"뭐, 뭐지?"

"전부 엑설런트야."

"한 박자도 놓치지 않고 있어."

이현의 동작은 춤이라고 볼 수도 없었다.
단지 아주 정확하고 빠르게 화살표를 타격하고 있을 뿐!
그런데 스크린에 나오는 캐릭터는 최고의 댄스를 보여 주었다.
이현의 동작들도 곧 예사롭지 않게 바뀌었다.

'생각만큼은 어렵지 ㅇ낳아.'

춤과 관련된 동작들.
그것은 음악과도 관련이 있었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보면서 육체가 지시 사항을 뒤따른다.
처음 하는 동작들이었지만, 곧 흐름을 타고 움직였다.
그러면서 이현의 캐릭터는 딱 1칸의 생명력을 남기고 기사회생하여 상대방을 압도했다.
로열 로드에서 인내력을 올리기 위하여 일부려 두들겨 맞으면서 사냥하던 방식 그대로 승리를 거둔 것이었다.

"뭐야. 저 사람?"

진 쪽에서는 완전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오나전히 초보자인 것 같더니 금새 능숙하게 동작들을 취한다.
춤과 비슷하게 화살표를 누르지는 않았다. 익스트림 댄스에서는 워낙에 빠르게 움직여야 했기 때문에 춤을 추듯이
의도적으로 흐느적거리는 건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현의 움직임은 춤을 연상케 만드는 부분들이 많았다.
놀라운 속도로 몸이 흐름을 타면서 한없이 아름답게 움직인다.

"와아. 굉장하다!"

"진짜 잘 추네!"

여중생과 여고생들은 환호를 했다. 그러자 다른 도전자들이 금방 나타난다.
이현의 인기를 끊어 놓기 위해서! 하지만 이현은 싸울수록 익숙해졌다.
각 동작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조금 알게 되었다.
음악의 흐름을 타니 몸이 저절로 위치를 취하면서 화살표들을 가격했다.
그것으로 이현은 무려 10연승을 차지했다. 실은 그 이상도 가능했지만 영화 시간이 다 된 것이다.
이현이 방에서 나왔을 때에는 다들 그를 신가한 괴물 보듯이 했다. 촌스럽다면서 비난하던 소리는 모두 쏙 들어갔다.
어떠한 동작이라도 어김없이 취한다.
그리고 이현의 움직임에는 미묘한 부분이 있어서, 주변인들의 시선을 빨아들이는 힘이 있었다.
마치 몸이 움직이면 그곳에 화살표가 나타난다고 할까.
이현은 여동생을 보며 말했다.

"영화 보러 가자."

"응."

이윽고 시작된 영화 시간.
이현과 이혜연은 푹신한 좌석에 앉아서 영화를 감상했다.
사실 영화는 그다지 재미없었다. 한국 영화의 단순한 스토리, 전형적인 패턴을 따랐다.
뒷골목의 남자들.
싸움을 좋아하고, 우정을 중요시한다.
그런데 각 조직을 키워서 성장하고 난 이후에는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대립니다.
예쁘게 생긴 여자 주인공이 1명 나오면서 그녀와 관련된 삼각관계까지!
어린 시절의 친구들은 번뇌했다.
우정과 권력.
마지막에는 주인공이 끝까지 믿었던 친구가 배신을 했다.
여자와 돈,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끝내 배신의 칼을 등 뒤에서 꽂았다.
그때에 남자 주인공의 대사.

-나는 울려도 된다. 하지만 내가 사랑한 그 애만큼은 울리지 마라.

피를 철철 흘리면서 말하는 대사에 비장미가 있었다.
중간에 전혀 뜬금없이 귀신이 나오기도 하고, 형사들이 개입하면서 난감한 스토리로 빠지기도 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마무리가 되었다.

"이 스토리는 뭐야."

"과장 광고로 신고라도 해야 되는 거 아닐까?"

"작가가 발로 썼나 봐."

"근데 무슨 이런 단순한 영화가 2시간 동안이나 하지?"

"정말 재미없다."

관객들은 하나같이 상당한 혹평을 퍼부었다. 영화 사이트에서 좋은 평들을 보고 와서 당했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영화 제작사에서 사람들을 풀어서 좋은 평들을 올리면, 아무래도 관중들이 늘어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이혜연은 그저 오빠와 함께 영화를 본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돈을 아끼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상 추억다운 추억이 없었다. 매달 쪼들리는 생활을 하다 보니 어디로 놀러 가 본 적도 없었다.
이렇게 영화관에 와서 함께 영화를 보는 것만도 충분히 즐거웠다.
영화의 내용이 다소 식상하다고 해서 그 즐거움이 반감되진 않았다.

"오빠, 어땠어? 영화가 좀 이상하긴 했지?"

그러면서 옆자리를 돌아본 이혜연은 깜짝 놀랐다.
이현이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정과 배신!
남자다운 이야기였다.
그러면서 화면 가득 벌어진 박력 있는 전투들은 이현의 몸을 절로 들썩거리게 만들었다.
2시간 동안 완전히 몰입해서 영화를 보았다.
영화가 끝나고, 영화를 제작한 이들의 이름이 올라가는데도 이현은 일어나지 못했다.

"남자 주인공 너무 멋있다. 이런 스토리의 영화가 있다니. 영화도 정말 재미있는 거구나."

"......"


영화를 보고, 이현과 이혜연이 거리로 나왔을 때에는 거의 6시가 다 되었을 무렵이었다.

"오빠, 배고프다. 이제 집에 가자."

이혜연이 그렇게 말했으나, 이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우리 밥 먹고 들어가자."

무려 외식!
집에서 고추장에 밥 비벼 먹거나, 정 배가 고프면 검술 도장에 간다.
바쁜 일이 없는 날이면 검술 도장에 꼬박꼬박 나가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그곳에 가면 한 끼는 공짜로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
그런데 자린고비 이현이 먼저 외식을 말했다. 평소답지 않은 일이었다. 그만큼 이혜연이 한국 대학교 면접을 본 일을 크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럼 어디서 먹을까?"

이혜연도 기뻐했다. 영화를 본 것만으로는 사실 적이 미진함을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이렇게 영화를 보고 밖에사 식사를 하는 일이 없다 보니 그녀도 무척이나 기대가 되었다.

"그런데 어디서 먹지?"

이현과 이혜연은 거리를 거닐었다. 평소에 외식을 해 본 적이 없었으니 어디서 밥을 먹어야 할 지도 몰랐다.
이혜연이 주변에 있는 분식집을 가리켰다.

"저기 떡볶이 맛있대. 내 친구들이 가 보고 다들 맛있다고 했어. 김밥이나 튀김, 오뎅도 잘해."

"그래?"

이혜연이 가리킨 곳은 작은 분식 가게였다. 평소라면 이 정도도 성찬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현은, 오늘만큼은 무언가 특별한 것을 먹여 주고 싶었다.
그래서 크게 용기를 냈다.
그들이 있는 곳은 시내의 한가운데, 영화를 보러 나오다보니 시내 중심가였다.

"우리 저곳 가자. 저기 레스토랑에서 먹어 보자."

이현이 가리킨 곳은 호텔이었다.

"호텔 레스토랑? 저긴 굉장히 비쌀 텐데......"

"걱정마. 매일은 아니라도 한 번 사 줄 정도의 돈은 있어."

이혜연은 벌써부터 호주머니 사정이 걱정되었다. 하지만 이현은 호기를 부리면서 아무 걱정 하지 말라며 동생을 이끌고 들어갔다.


호텔의 고층에 위치해서 탁 트인 전망. 야경이 한눈에 펼쳐지고 있었다.
이현과 이혜연은 창가 쪽의 좋은 자리를 잡아싿.

'과연 호텔 레스토랑은 다르구나.'

레스토랑이 주는 고급스러운 분위기에 압도당했다.
값비싸 보이는 인테리어에, 직원들의 표정에는 웃음과 친절이 넘친다 깜끔한 그들의 대접을 받으면서 맛있어 보이는 요리를 먹는 이들의 인상에는 부티가 흘렀다.
의자는 편안하고, 모든 것들이 손님 위주다.
주변의 장식들도 비싼 물품 외에는 없는 것 같았다.

'한 번쯤은 이런 곳에서 밥을 사 줘야지. 두 번은 아니더라도, 오늘 같은 날은 크게 무리를 해 보자.'

이현은 호주머니 사정을 떠올렸다.

'20만원을 출금해서 택시비로 좀 쓰고, 영화도 보고, 오락도 좀 했지. 그래도 아직 13만원은 남아 있을 거야.'

기껏해야 밥 한 끼였다.
그래도 이현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주변을 둘러봤다.
바다 가재 코스 요리를 먹고 있는 테이블이 눈에 띄었다.
그 순간 이현은 순식간에 원가 계산을 끝냈다.

'재료값으로 한 4만원 들었겠군. 그래도 이런 호텔이니까 인건비나 이윤을 고려해서 7만원은 받겠지?'

여러모로 살펴볼 때에 밥 한 끼에 7만원 정도라며 과한 소비이긴 하지만, 오빠가 되어서 못 사 줄 형편도 아니다.
좀 더 열심히 로열 로드를 할 생각을 하며 이현은 잔뜩 긴장하고 있는 여동생을 달래듯 말했다.

"괜찮아. 오늘 많이 먹으렴. 우리들도 이런 곳에 한번쯤은 와 봐야지."

"그래도 여긴 비싸 보이는데... 그냥 나가서 김밥이나 먹자, 오빠."

이현도 사실 이런 고급 레스토랑을 와 본 건 처음이라서 만만치 않게 긴장을 했지만, 들어와 보고 난 이후에는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비싸 봐야 로자임 왕국의 왕실에 있는 예술품들만은 못하다.'

잠시 후에 여종업원이 와서 메뉴를 펼쳐 주었다.

"무엇을 시키시겠습니까? 오늘의 주방장 추천 요리로는 굴 소스를 곁들인 오마르 새우에......"

"제가 직접 보고 고를께요."

"네, 그러십시오, 손님."

이현은 느긋하게 메뉴를 보았다.
우선은 가격 확인!
바다 가재가 포함된 A코스 요리 12만원.
원가상으로는 4만원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이는데 엄청난 폭리였다.

'뭐가 이렇게 비싸!'

이현은 가격을 보고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그래도 A코스는 싼 편이었다. 그 이상으로 비싼 요리들이 즐비했다.
20만원짜리, 30만원짜리, 와인이나 양주가 포함된 식사는 50만원을 넘기도 했다.
이현이 가진 돈으로는 와인 한 병도 못먹는 것이었다.
호텔 레스토랑의 살인적인 가격!
각종 서비스와 최고급 재료들을 사용하며, 요리사 역시 최고 수준이다. 인테리어 비용까지 식사에 다 포함된 셈이었으니 가격은 비쌀 수밖에 없다.
다만 그 가격의 수준이 이현의 예상 폭을 훨씬 초과한 것이다.

'이 돈을 내고는 도저히 못 먹겠다.'

돈이 너무나도 아까웠던 나머지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순간 이현은 본능적으로 여동생을 살폈다. 둘의 눈이 딱 마주쳤다.
그녀는 매우 불안해하고 있었따.

'안돼 여기까지 데리고 왔는데, 비싸다고 다시 나가는 일은 있을 수 없어.'

아무리 돈이 없어도, 돈이 없는 티를 내면서 궁핍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고등학생에게 식당에서 쫓겨난 기억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이현은 판단했다.
다행히 A코스 요리는 12만원이니 1만원 정도의 여윳돈은 남을 듯 싶었다.

"혜연아, 바다 가재 괜찮지?"

"응. 괜찮긴 한데......"

"그럼 A코스로 주세요."

"두 분 모두 같으 것을 시키시겠습니까?"

"예."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이현은 모르고 있었다.
호텔 레스토랑에서는 메뉴에 찍힌 가격에 봉사료와 부가세가 각각 10%씩 붙는다는 것을.
그러면 실질적으로는 13만원을 초과하는 가격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나마 작은 부분이었다.
가격대가 워낙에 비싸서 당연히 두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A코스 요리의 1인분이 12만원 이었다. 그러므로 실질적으로 이현이 시킨 요리의 가격은 25만원을 훌쩍 초과했다.

"맛있는 음식이 나올 거야. 많이 먹어."

"오빠.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괜찮아. 이 정도의 돈은 있어."

이현은 호주머니를 툭툭 쳤다.
곧 음식들이 나왔다. 최고의 주방장이 신선한 재료들로 만들어서 내놓은 요리들.

"와! 정말 맛있어."

"그래. 맛있구나."

이현은 음식이 주는 풍미를 만끽했다.
요리 자체의 맛은 로열 로드에서 그가 만드는 것들과 그리 큰 차이는 없다.
해산물은 특히 그의 주 전공이 아니던가.
보관이 어렵고 쉽게 상한다. 재료 값도 비싸서 자주 먹을 수 있는 건 아니어도 효과가 커서 전투를 할 때에는 곧잘 먹는 요리였다.



레스토랑의 근처 테이블에서는 대인 고등학교의 교복을 입은 여고생 2명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와! 이 고기 정말 맛있어!"

"소스도 나쁘지 않은데."

"이번에 프랑스에서 왔다는 주방장이 요리 잡지에 자주 나오는 인물이래."

"그래서 그렇구나."

"다음 주에 또 오자."

집이 부유하기도 했지만, 미식가였던 그녀들은 가끔씩 돈을 모아서 이곳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에 최고로 행복하다!
이런 좌우명으로 뭉친 그녀들은 학교가 일찍 끝난 날은 맛집들을 돌아다니는게 취미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그녀들의 눈에 다른 테이블에서 활달하게 웃으며 식사를 하고 있는 이혜연이 보였다.

"어? 혜연이 아냐?"

"그러게."

"앗! 저건 쟤 친오빠잖아."

이혜연은 그녀들과 가장 절친한 친구였다.
사실 학교 내에서 이혜연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활동력 강하고, 공부 잘하고, 운동 실력도 뛰어난 편이다. 타고난 리더십이 있어서 다른 여고생들은 언제나 그녀를 중심으로 뭉쳤다.
다만 굉장한 짠순이라서 절대로 쇼핑이나 외식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어쭈. 그러면서 자기 오빠랑은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단 말이지.'

이선예의 눈이 장난기로 빛났다.
이혜연이 얼마나 자기 오빠를 자랑하고 다녔는지 모른다. 친구들은 다 설마 설마 했다. 유독 완벽해 보이는 그녀가 오빠를 심하게 따른다면서 놀리기도 했다.
그런데 축제에 친오빠가 나타났다.
친구들은 다들 저런 평범해 보이는 사람이 무슨 자랑거리가 되냐면서 뒤에서 쑥덕였다. 나중에 대인 고등학교의 중퇴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돈 이후로는 더욱 그랬다.
그런데 공주 세트를 단숨에 뚫어 버리는 광경을 보고, 대인 고등학교 최고의 인기인으로 떠올랐다.
미끄러운 외나무다리를 가볍게 걸어서 넘고, 날아오는 물풍선을 바람이 흐르는 듯한 발차기로 격파한다. 끝에는 솔개처럼
뛰어올라 가볍게 벽을 넘는 것으로 공주 세트를 최단시간에 돌파했다.
마지막에 철창을 열고 동생을 구해 주던 모습은 얼마나 늠름하던가!
그 일이 있었던 이후로 이현은 단연 대인 고등학교 여고생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다만 오빠의 일이라면 물불을 안 가리는 이혜연 때문에 감히 접근한 사람은 없었지만.
이선예가 소곤거리듯이 말했다.

"우리 저쪽으로 합석하자."

"혜연이 성질 알면서... 그래도 괜찮을까?"

"괜찮아. 자기 오빠 앞에서는 절대 화 안 내."

이선예는 확신을 가지고 일어나서 이혜연의 자리로 다가와 그녀를 덥석 끌어안았다.

"와, 이런 곳에서 만나네! 우리 같이 앉아도 돼?"

"......"

갑작스러운 친구들의 등장에 이혜연은 마구 인상을 썼다.

"너희들!"

역시나 예상을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 이혜연의 앙칼진 모습.
이선예는 서둘러서 이현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저희들은 혜연이 반 친구들이랍니다. 합석을 해도 될까요?"

"어서 와라. 얼마든지 되지."

여동생의 친구들이라면 같은 테이블에 앉는 정도는 상관이 없었다. 오히려 여러모로 잘해 주고 싶었다.

"저 진짜!"

이혜연이 눈살을 찌푸리면서 노려보았지만, 이선예는 방글방글 웃었다.

"지금 표정 관리 안 되고 있다. 혜연아. 그래도 괜찮아?"

"쳇!"

이혜연은 어쩔수 없다는 듯이 손을 들었다. 한창 가족끼리의 행복한 순간에 불청객들의 방문이 달갑지 않았다. 그러나 금방 표정을 풀어야 했다.
앞에는 오빠가 앉아 있지 않던가.
화를 내는 것도 나중의 일이었다.

'학교에서 보자! 너희들, 죽었어!'

그녀들의 사정이 어떻든 간에, 이현으로서는 여동생의 친구들을 보아서 기뻤다.
다양한 만찬들이 나오면서, 네 사람은 느긋하게 식사를 즐겼다.

'그래도 학교생활은 잘하고 있구나.'

이현은 여동생이 원만한 학교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기분 나쁘지 않았다. 매일 로열 로드에서 사냥을 하느라 지친 마음에도 휴식이 되었다.

"와! 예쁘다."

식사를 하는 도중에, 근처의 창가 테이블 옆으로 얼음 조각상이 운반되어 오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이벤트를 하나 봐."

이현도 힐끗 고개를 돌려서 조각상을 보았다.
곱게 땋은 댕기 머리에, 한복을 단아하게 차려입은 여인상이었다.

'나쁘지 않군.'

얼음 조각상에 대해 경험이 조금 있는 이현으로서는 그 조각상이 굉장히 뛰어난 솜씨로 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느낌이 생생하면서도 부드럽다. 거장의 손길이 들어가있군.'

이렇게 이현과 동생들이 조각상을 보고 있을 때, 여종업원이 다가왔다.

"손님들, 이벤트 때문에 약간 시끄럽습니다. 어르신들의 결혼기념일 파티를 준비하는 중이라서요. 조금만 이해해 주세요. 죄송합니다."

"우리들은 괜찮습니다."

뒷자리에서 약간의 수선스러움이 있었지만, 이현은 동생과 함께 느긋한 식사를 마쳤다. 그리고 마지막 후식으로 나온
과일과 아이스크림까지 먹어 치운 후에, 네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잘 먹었다."

"정말 맛있네."

계산을 하기 위해 카운터로 간 네 사람.
이선예와 송미영이 먼저 ㅗㄴ을 냈다.
그다음에 이현이 계산을 하기 위해 지갑을 꺼냈을 때였다.
우르르르! 쨍그랑!
뒤에서 무언가 격하게 깨지는 소리가 났다.



V호텔 레스토랑.
매니저와 종업원들은 아침부터 VIP고객을 맞기 위해 분주한 준비를 했다.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부자.
맨손으로 시작해서 자수성가하여 큰 부를 이룬 강 회장이 저녁 식사를 예약한 것이다.
평번한 저녁 식사라면 주방장과 매니저들만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 되겠지만, 오늘은 특별했다. 소문난 애처가인
강회장이 그의 부인과 함께 결혼 40주년 기념 식사를 한다고 한다.
그런 만큼 호텔에서도 많은 준비를 했다.
우선 강 회장 부인의 취향에 따라 미술품들을 벽에 걸고, 바닥의 양탄자를 새로 깔았다.
국내외의 유명한 밴드가 연주회를 열기로 하고, 1천개의 촛불로 장식한 기념 케이크도 제작되었다.
요리 준비에도 만전을 기했다.
각 재료들은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외국의 산지에서부터 비행기로 공수를 해 오고, 주방에도 비상이 걸렸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것은 결혼을 기념하는 이벤트였다.
강 회장 부인이 젊었을 때에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특별한 조각품으로 만들기 위해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얼음 조각사를 섭외하여 작품을 만들었다.
이름하여 얼음 미인 상!
북극의 만년빙으로 만든 얼음 조각상이었다.
백옥처럼 빛나는 표면.
과거 20대의 한참 예쁘던 시절의 얼굴을 얼음으로 만들어냈다.
얼음의 표면은 거친 면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 불빛들이 굴절되고 반사되면서 그윽한 자태를 드러낸다.

"예쁘다."

"강 회장님은 소문난 애처가이시니 이런 이벤트를 준비하실 수 있는 거야."

호텔 종업원들은 부러움 속에서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었다.
강 회장 내외가 식사를 하는 테이블 앞에 얼음 미인 상을 갖다 놓으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퀴를 단 판 위에 실어 운반을 하고 설치하던 도중에, 이것이 이끄러져서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와장창 깨지고 말았다.





믿을 놈 하나 없다.

"이걸 어떻게 할 거야!"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이면 다야?"

얼음 조각상이 깨진 사건은 호텔의 총지배인까지 불러오게 만들었다.
호텔에서 직접 경영하는 레스토랑이라서 이 사안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는 인물이 소식을 듣고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총 지배인은 땅바닥에 떨어져서 산산조각 난 얼음 덩어리들을 절망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조각상의 목이 뚝 부러져 있었다. 코나 입, 눈 부분도 손상이 심해서 조각품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외에 여러 부분들도 부서지고 깨어져서, 얼음 미인 상은 예전의 형체만 그럭저럭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강 회장님의 진노를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리고 특급 VIP인 강 회장님이 우리 서비스에 대해서 만족하지 못했다는 소문이
나기라도 하면, 우리 호텔의 매출은 크게 줄어들고 말 거야."

지금이라도 어떻게든 수선을 해 보는 것이......"

"수선? 이 얼음들을 무슨 수로 수선한단 말이야? 이벤트를 전면 취소해. 요리사들은 각자 최고의 요리를 준비해서 강 회장님을
만족시킬 수 있도록 하고, 매니저들은 서비스의 질로 승부할 수 있도록 해 보자."

총지배인은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해 보려고 했다. 하지만 직원들은 안절부절못할 뿐이었다.

"이 이벤트는 강 회장님이 직접 준비하신 겁니다. 그리고 우리 호텔에서 장식을 하기로 한 것이고요."

"그래서 최소할 수 없단 말이야?"

"예. 저희들 마음대로 취소할 수가 없습니다. 강 회장님께 미리 양해를 드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총지배인님."

"어휴."

총지배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호텔리어에서부터 고객을 감동시키는 정성 어린 서비스로 지배인이 된 그녀의 나이는 30대 후반이었다.
호텔의 살림을 맡아 하면서 숱한 어려움들을 겪었지만, 지금과 같은 난관은 처음이었다.
강 회장이 어떤 사람이던가.
애처가의 대표라고 할 만한 사람이었다. 결혼 40주년 이벤트를 호텔 축의 잘못으로 망친 것을 알게 되면 불같이 화를 내며 가만 있지 않을 것이다.
총지배인은 얼굴을 찡그렸다.
이 사태를 수습할 수 있는 방안이 없었다. 그나마 최대한 악화되지 않기 위해 노력할 뿐이었다.

"그러면 조각사를 구해! 어떻게든 시간 내로, 강 회장님이 도착하기 전에 이 얼음들을 최대한 고쳐 놔. 부서진 부분들은 어떻게든 다듬고, 얼음도 붙이도록 해."

"하지만 시간이 30분도 남지 않았습니다."



이현과 이혜연 등은 그 소란을 지켜보고 있었다.
처음에 얼음이 들어왔을 때부터 굉장히 예쁜 조각품이라서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조각상이 깨지면서 발생한 일련의 사태들로 인해 레스토랑은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ㅇㅆ다.
지배인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통에, 바닥에는 온통 얼음 조각들이 굴러다녔다.
문제를 일으킨 직원들은 창백한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했다. 눈물이 뚝뚝 흐르기도 했다.
그때, 안됐다는 듯이 그들을 보고 있던 이혜연이 무심코 말했다.

"오빠, 오빠 직업이 조각사라고 했잖아. 그러면 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전설의 달빛 조각사!
이현이 로열 로드를 하고 있다면서 잠시 설명을 해 준 적이 있었다.
그걸 이혜연은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계산대 앞에 있던 직원들은 그 말을 놓치지 않았다.

"손님. 손님께서 조각사라고요? 그러면 제발 저희들을 조금 도와주세요."

"......"

이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새에 이야기를 들은 직원들이나 총지배인까지 달려왔다.
그들은 처음에는 너무 어린 이현을 보고 미심쩍어 했다. 하지만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조각사란 직업은 현실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는 직업이 아니다. 구하려고 한다면 못 구할 리야 없겠지만, 어떻게 30분만에 이곳으로 데려온단 말인가.
총지배인이 사정했다.

"제발 저희들을 좀 도와주세요."

"얼음 조각을 복구할 수 있도록 부탁드립니다."

직원들.
정복을 입은 남성들과 여성드의 요구에 이현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수락했다.
남들이 일으킨 사고의 책임을 왜 그가 져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지금은 여동생이 보고 있었다. 최소한 여동생의 앞에서 몰인정한 인간이 되고 싶진 않았다.



강회장 내외는 정확히 30분 후에 도착했다. 비서와 수행원들과 함께였다.
완고한 고집이 느껴지는 노인인 강회장과 그의 부인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왔다.
예약해 놓은 음식들이 깜끔하게 세팅되어 있고, 지배인들은 미소 띤 얼굴로 그들을 맞이했다.

"좋은 시간 되십시오."

자리에는 100개가 넘는 촛불들이 켜져 있었다.

"고맙네. 허허. 그보다도 주문한 것은?"

"예. 곧 도착할 것입니다."

강회장은 오늘따라 유난히 기분이 좋았다. 그의 부인이 기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40년간의 결혼 생활을 함께하면서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오늘은 이 모든 일들을 기념하는 자리다.
강회장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어서 준비해 주게. 지금 식사를 하면서 아내를 놀래 주고 싶어."

"예.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지배인은 등 뒤로는 식음땀을 흘리면서도 얼굴에는 친절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종업원들이 하나씩 음식을 내오고 밴드가 밝고 경쾌한 음악을 연주한다.
식사가 시작될 무렵, 강회장은 은근슬쩍 웃으며 그의 부인에게 물었다.

"즐겁지 않소?"

"네, 즐거워요. 아주 분위기가 좋은 레스토랑이네요."

아내의 대답에 강회장은 쑥스러운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리 대기업을 거느린 오너라고 해도, 아내 앞에서는 청년 시절의 마음과 다를 바가 없다.
그는 40년간 행복한 결혼 생활을 보낸 것이야말로 기업 활동에 전념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라고 믿고 있었다.
강회장의 부인의 얼굴이 은은한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주름살로 가득한 얼굴인데도 웃음기가 떠올랐다.

"그런데 나이 들어서 이런 곳을 와 보니 어색하기만 해요."

"당신은 여전히 젊어. 앞으로 자주 오도록 하자고."

점점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준비한 이벤트는 언제 시작하는 것이지? 아내를 깜짝 놀라게 만들어 주고 싶었는데......'

강회장은 비서에게 힐끗 눈치를 주었다.
이미 그에게 식사 시간 전에 조각상을 테이블 앞에 놔두라고 지시했었다. 젊은 시절 아내의 모습을 앞에 두고 식사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직도 조각상은 앞에 없었다.

'뭘 하느라 늦어지고 있는 거야?'

점점 시간이 지났다.
간단한 수프를 비롯한 전채 요리가 끝나고, 본격적인 음식들이 나온다.
그때에야 얼음이 나왔다.
사람의 키보다 훨씬 큰 얼음 덩어리!
전혀 조각도어 있지 않은 사각형의 얼음 그 자체였다.
종업원들은 강회장 내외가 식사를 하는 테이블 바로 앞에까지 얼음을 운반해 왔다.

'뭐야, 이건.'

강회장의 얼굴이 불쾌하게 찌푸려졌다.
그가 주문했던 것은 세계에서 이름난 조각사의 작품이었다. 무언가 일이 잘못된 것을 느낀 것이다.

'무슨 사고가 벌어지지 않고서야.'

테이블 아래에 있는 양탄자에 시선이 미쳤다.
제법 치운다고 치운 모양이지만, 흥건하게 젖어 있는 양탄자.

'설마... 얼음이 깨졌다?'

강회장은 화를 내며 일어나려고 했다.
그때 이현이 나타났다. 그는 망치와 정을 비롯한 조각 도구를 들고 있었다.
처음에는 얼음 조각상을 복구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미 충격이 전체로 퍼져서 균열이 가 있는 상태였다.
조각상을 다시 똑바로 세울 수조차 없었다. 목이 떨어지고 얼굴도 파손이 심해서, 복구를 한다고 해도 도저히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없었다.
결국 레스토랑에서는 30분간 얼음을 준비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했고, 이것을 구해 왔다.
전혀 조각되어 있지 않은 통짜 얼음이었다.


이현은 조각 도구를 들고 얼음 앞에 었다. 차가운 얼음 덩어리는 한기를 내뿜고 있었다.
조각사에게 재료는 무엇보다 소중한 작품의 기본이 되는 것이다.
이현은 장갑을 끼지 않은 손으로 얼음을 어루만졌다.
차가움이 전해진다.
도도하고, 깨지지 않은 거친 덩어리!

'별로 다르지 않아.'

모라타 지방에서 만들었던 얼음의 성질과 그다지 차이가 없었다.

'그렇다면 나도 할 수 있다.'

현실에서 조각상을 만드는 건 처음이다.
긴장된 순간이었다. 일을 하지 않겠다면 모르지만, 시작한 이상 최선을 다해야 한다.
깡! 깡! 깡!
이현은 정을 이용해서 조심스럽게 얼음 덩어리를 깎아냈다.
과거 강회장 부인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는 알지 못한다. 당시의 사진을 갖고 있지도 않았고, 잠깐 본 조각상의 미묘한 얼굴을 기억할 수도 없었다.
눈매나 코의 높이에 따라 전체적인 인상이 확 바뀌기도 하는게 여자의 얼굴이다. 그러니 대충 기억나는 대로 조각을 할 수는 없다
이현은 강회장 부인의 현재 모습을 조각하기 시작했다.
조각사는 대상에 대한 이해심을 가져야만 한다.
강회장 부인은 과연 주름진 얼굴을 창피해할 것인가?
시간이 지나면서 나이가 든 모습이, 어디 나서기에 부끄러울까. 젊었을 때의 아름다움을 영원토록 간직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슬플까.
이렇게 자신을 사랑해 주는 남편과 함께 40년을 살았다. 그런데 과거 처녀 적의 용모가 그리울까.
세월의 흐름에 따라 주름진 얼굴은 창피한 게 아니다.
40년간을 함께 살아온 남편에게 보내는 믿음과 애정.
늘 좋은일만 있을 수는 없었다. 고난을 겪으면서 마음고생도 많았다. 그러면서도 아이들을 키워 내고, 사업이 어려울 때를 대비해서 억척스럽게 살아왔다.
고생도 했지만 보람도 있었으리라.
인생에서 제일 행복했던 건 40년 전의 예뻤던 시절이 아니다.
지금 이곳에서 함께 식사를 하며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는 할머니의 조각을 조금씩 완성해 갔다.
이현의 섬세한 손길이 움직일 때마다 깎여 가는 얼음 조각은, 많은 이들의 시선을 모았다. 레스토랑과 호텔의 직원들도 조마조마하면서 지켜보고 있었다.
조각사라고 해서 급한 마음에 일단은 일을 맡겼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안심이 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주변의 테이블에서는 이혜연과 함께 그녀의 친구들고 구경을 하고 있었다.


강회장은 처음에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호텔 측의 미흡한 준비에 대해서 질타를 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현이 조각상을 즉석에서 깎기 시작하면서 잠시 참기로 했다.
화가 줄어든 게 아니었다.
그의 아내가 호기심 어린 눈길로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가뜩이나 결혼 40주년 이벤트가 망가진 마당이니, 아내가 보고 싶어 한다면 그냥 놔두고 싶었다.

'어디 무슨 짓을 하나 보자. 그러나 형편없을 경우에는 각오해야 할 것이다.'

강회장은 매우 불편한 마으으로 앉아 있었다. 그러나 조각상이 조금씩 만들어지면서, 그 불쾌하던 기분이 사르르 풀어졌다.
조각상은 아내의 현재를 그리고 있었다.
그녀의 행복한 마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감탄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었다.

"여보."

강회장은 아내의 손을 꼭 붙잡았다.
늙고 쭈글쭈글한 노인의 손이었지만, 언제나 잡아 왔던 익숙한 손이다.

'만약에 이 손이 없었더라면 나는 어떻게 살았을까.'

강회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떤 여자를 만났더라도 지금처럼 행복하지는 않았으리라.
나이 들면서 머리카락도 허옇게 세고 미모도 예전과는 비할 바가 아니다. 그래서 오랜만에 과거의 그녀가 얼마나
예뻤는지를 보여 주고 싶었지만, 이제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오히려 예뻤던 그녀보다 지금이 더욱 사랑스러운 것을 느꼈다.



강회장과 그의 부인은 조각상이 완성될 때까지 끈질기게 기다렸다.
몇몇 손님들은 식사를 마치고도 돌아가려 하지 않고 조각상이 만들어지는 것을 봤다.

"여기 레몬주스입니다."

"과일을 좀 가져왔습니다. 편안하게 봐 주세요."

종업원들은 여러 간식거리들을 손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면서 그들도 틈틈이 조각상에 시선을 던졌다.

"저런 게 조각품이구나."

"조각품이라면 그냥 예쁘게 깎아 놓는 장식품인 줄만 알았는데......"

조각술에 대해 문외한이던 그들마저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이현은 이마와 등에서 흥건히 땀을 흘리며 조각을 하고 있었다.
차가운 얼음을 조각하는데 땀이 난다. 얼음이 녹지 않게 하기 위해서 주변에는 드라이아이스로 온도를 낮추었는데도 땀이
절로 흘렀다. 그만큼 조각품을 만드는데 심취한 것이다.
검술을 펼칠 때에만 열중하는 건 아니었다. 하나의 예술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 작품에 몰두해야 한다.
이현은 어느덧 조각품이 주는 느낌에 따라서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구상하고 기술을 이용하는 시기는 이미 지났다. 감정의 흐름에 따라,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조각상을 깎았다.

"놀라워."

"일을 맡겼던 그 조각사보다 나은 것 같아."

호텔의 직원들은 일전에 깨진 조각상을 보았지만, 지금 이현이 만드는 조각품이 그보다 훨씬 수준 높아 보였다.
조각술의 기법이나 섬세한 손길은 확실히 이현이 모자랄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수준의 차이가 몇 단계는 날 것이다.
조각의 세말함에서도 비교할 바가 아니다.
실제로 조각품은 조금 투박하고, 완볍하지는 않은 느낀이었다. 그러나 이현이 만드는 조각품에는 마음이 가득 묻어 나오고 있었다.
좋은 조각품은 나름의 느낌이 전해진다.
대상이 가진 매력이나 감정이 전달됨으로써 형용하기 힘든 감화에 젖게 만든다.
작업을 맡았던 최고의 조각사는 단지 젊었을 때에 환하게 웃고 있는 여서의 사진을 보고 만들었을 뿐이다.
그는 당연히 명서에 걸맞게 최선을 다했다. 당신의 여인이 가진 매력을 듬뿍 실어서 조각상을 만들었다.
하지만 조각상을 만들면서 특별한 감정을 싣지는 않았다.
그의 실력이 모자란 게 아니라 먼 곳에서,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의 조각품을 만들면 그럴 수밖에 없다.
반면에 이현은 강회장의 부인 사랑과, 40년이라는 긴 시간, 할머니의 눈빛을 보며 조각품을 만들고 있었다.
그 감정에 취해서 신들린 듯이 조각술을 펼치고 있었다. 그 마음을 조각품에 담기 위해서.
조각사란 예술적이 직업이었다.
최고의 예술품은 있을지라도 최고의 조각사는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조각품이 완성된 순간에, 레스토랑 안에서는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울려 퍼졌다.
손님들과 호텔 직원들이 한마음으로 치는 감탄의 ㅂ가수였다.
완고한 강회장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40년간 그를 지켜보며, 사랑하면서 살아온 한 여인의 일생.
현재 제일 행복해하는 그녀가 얼음 조각상이 되어 눈앞에 있었던 것이다.


이현은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서 완전히 지쳐 있었다.
강회장은 이현의 손을 덥석 잡았다.

"고맙네. 정말 멋진, 내 인생에서 최고로 멋진 조각품이네. 앞으로도 이 조각품보다 더 멋진 것을 볼 수는 없을 것이네."

강회장은 활짝 웃고 있었다. 정말로 진심을 담아서 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이현이 고개를 저었다.

"제가 만든 조각품보다 훨씬 아름다우신 분이 옆에 계시지 않습니까?"

적당한 아부!
이현의 본능이 발동되기 시작한 것이다.
조각상을 완성하는 순간에 다시 본 정신이 돌아왔다.

'내가 지금 뭘 한 것이지?'

몇 시간 동안 고생을 해서 조각품을 만들었다.
차가운 얼음을 조각하는 바람에 손에서는 거의 감각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이곳이 로열 로드였다면 최소한 명작은 되어 줄 만한 작품을 만들었다.
스탯과 명성!
현실에서 조각술을 펼친 것은 처음이지만, 조각숙 숙련도를 올릴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이다.

'아니야. 아직은 끝나지 않았다.'

이현은 눈치를 보았다.
강회장은 한눈에 보아도 거물이었다. 수행 비서들만 여럿이고, 이런 큰 호텔의 지배인들이 눈치를 보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런 강회장의 기분이 조각품으로 인해서 좋다면? 절대 그냥 넘어갈 리가 없ㄷ!
이현의 말에 강회장은 물론이고, 아내마저 웃음을 지었다.
그들 부부에게 기분 좋은 말을 들려준 이들은 참으로 많았다. 그런 그들의 아첨이 간사하게 느껴졌다면,
지금은 열심히 조각을 해 준 이현의 말이라 모든 것이 좋게 들렸다.
특히 강회장의 기분이 더욱 좋았다.
본인을 칭찬하기보다도 아내를 칭찬하는 것이 더욱 그를 들뜨게 만들었다.
강회장은 이현의 손을 더욱 힘주어 잡았다.

"정말 고맙네. 이렇게 나의 결혼기념일을 위해서 노력해 주다니 말일세."

강회장은 이현에게 무척이나 감사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이현은 겸양의 말을 했다.

"아닙니다. 저는 그저 조각사로서 어르신의 부인을 조각해 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제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저에게 이런 기회를 주신 호텔 측과 회장님께 감사의 말을 드려야 합니다."

겸손은 최고의 미덕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진정한 겸손이 아닌, 오히려 자신의 공을 더욱 부추기기 위한 겸손!
상대방을 적당히 치켜세우면서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이끌어 가기 위한 발언들이었다.
그때 호텔의 총지배인이 나섰다.

"회장님, 이분은 본래 이번 일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실은 저희 레스토랑의 손님입니다."

"총지배인, 그게 무슨 소린가? 난 이 사람이 우리의 결혼 기념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서 온 줄 알았는데."

"그게... 사실은 준비한 조각품에 약간의 사고가 있었습니다."

총지배인은 설치 과정에서 얼음 조각품이 바닥에 떨어져서 박살이 난 사연을 솔직히 말했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강회장은 재 말을 잇지 못했다.
하마터면 망칠 뻔했던 결혼기념일이 매우 큰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
그때 이현이 입을 열었다. 아주 절묘한 순간이었다.

"식사가 끝나셨다면, 이제 이 조각상을 그만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그게 무슨 소린가?"

"여러분들에게는 그저 조각상일 뿐이지만, 저에게는 혼신의 힘을 다한 작품입니다. 이토록 만족한 작품도 흔치 않지요.
저의 작품이 쓰레기통에 버려지거나 무의미하게 사라지는 것을 참을 수 없으니, 제가 가져갔으면 합니다."

"그건......"

조각품의 미적 가치나, 실질적으로 예술 계통에서 일하는 이들이 얼마나 높은 평가를 내릴지는 미지수인 조각상이다.
하지만 강회장 부부에게는 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 되었다.
옆에서 아내가 강회장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평소 조용한 성품인 그녀로서는 잘 하지 않는 행동이었다. 강회장은 아내의 뜻을 바로 헤아릴 수 있었다.

'잘못하면 두고두고 구박을 당하겠구나.'

만약에 이 조각상을 그냥 놔두고 집에 가 버린다면, 그만큼 눈치 없는 일도 없었따.
강회장은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우리에게도 이제 이 조각상은 무척이나 소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네. 오랫동안 소중히 보관하고 싶네. 이렇게 하지.
자네가 조각한 이 얼음 조각상을 내가 구입하겠네."

그러면서 강회장은 지갑에서 1장의 수표를 꺼내서 건넸다. 물론 이현은 사양했다.

"돈을 원하고 한 일이 아닙니다. 두분이 너무나도 잘 어울리셔서, 그리고 행복해 보여서 시작한 일이었습니다. 만약에 두분이

서로를 보는 눈이 이렇게 정겹지 않았다면 중간에 그만두었을 것입니다. 어르신이 부럽습니다. 저도 나중에 어르신과 같은 가정을 꾸미는게 꿈이 되었습니다."

입에 바른 겸양.
그러면서도 끝까지 아부 신공!
아부는 분위기와 사기가 제일 중요했다.
아내 앞에서 이토록 자신의 위신을 세워 주다니 감격스러울 뿐이다.
강회장은 지갑에서 수표 1장을 더 꺼냈다.

"그러지 말고 받아 주게. 내 최소한의 성의라네."

"그렇지만 내키지 않는 것이... 정 그러시다면 조각상을 두분께 선물로 그냥 드리겠습니다. 저도 기념으로 조각을 한 셈 치지요."

두번째의 거절.
이것으로 체면을 차리는 것은 끝났다.

"난 그렇게 몰염치한 사람은 아니네. 돈을 대가라고 지불하는게 아니라네. 이런 식으로라도 감사의 뜻을 표시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 고마움을 표현할 수 있겠는가. 늙은이에게 빚을 지우지 말고 꼬 받아 주시게."

이현은 강회장이 거듭 내미는 수표를, 어른이 주는 돈이라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받아 들었다. 그러면서도 수표에 적힌 동그라미의 개수는 정확히 확인했다.
돈을 받음과 동시에 확인한 액수.
수표는 500만원짜리 2장이었다.

'역시 돈 냄새가 솔솔 나더라니......'

통 큰 회장답게 무려 1천만원이라는 거액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놓은 것이다.
그리고 강회장은 아내와 함께 떠났다. 아마도 두사람은 정말 즐거운 결혼기념일 저녁을 보냈을 것이다.
일을 마치고 나서 이현은 오랫동안 기다려 준 여동생에게 향했다.

"미안. 시간이 오래 걸렸지?"

"아냐, 오빠. 정말 좋은 구경이었어."

이혜연의 친구들도 모두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감탄과 놀라움, 존경이 뒤섞인 눈빛이었다.
이현은 여동생을 데리고 다시 계사낻로 향했다. 그곳에는 지배인들이 모여 있었다.
막 돈을 꺼내려고 하는 이현에게, 총지배인은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저희 호텔의 은인에게 어떻게 돈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조각술, 진심으로 잘 봤습니다.
별것 아니지만 나중에 찾아오시면 무료로 레스토랑과 호텔을 이용하시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물론 동반하신 분도 무료입니다."

"그래도......"

"저희들의 성의입니다. 그냥 받아 주세요."

호텍 측에서는 강회장과 같은 거물 손님을 놓치지 않게 되었으니, 이현에게 주는 약간의 보상은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강회장이 화가 나서 호텔을 나가 버렸다면, 본인은 물론이고 그의 기업 사람들이 모두 호텔에 찾아오지 않게 된다.
그러면 사실 호텔의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닌 것이다.




"하나, 둘!"

"검에 실린 힘이 약하다. 하체 운동 100회 실시!"

정일훈은 도장에서 검술을 가르치는 중이었다.

'로열 로드의 성과가 나쁘지 않군.'

현대에 검을 들고 싸울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특히나 도장에 있는 수련생들의 경우는 더욱 힘들었다.
일반인들과는 확연히 차이가 있는 그들이, 목검이라도 휘두른다면 이건 보통 사건이 아닌 것이다.
억울한 일, 올바르지 못한 일.
힘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참기란 매우 힘들었다.
실제로 수련생들 중에는 그런 식으로 사고를 치고, 조직등으로 들어간 이들도 제법 되었다.

'로열 로드가 나름대로의 분출구 역할을 하고 있어.'

몬스터와 싸우고 또 강해지는 건, 단순한 수련생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일이었다.
일상적인 만족만이 아니라, 검술에서도 확연히 두드러진 변화가 보인다.
사람을 상대로 대련에 익숙해진 검이 몬스터들과 싸우면서 다양하게 바뀌었다. 철저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임기응변에 능하게 되고, 생각지도 못한 틈을 유도해 내기도 한다.
사람들끼리 대련을 할 때에는 위험성 때문에라도 오랜 시간 싸우지 못한다. 그런데 로열 로드에서는 원 없이
마음껏 싸울 수 있었으니 수련생들에게는 최고의 조건인 것이다.
따르릉!
그때에 전화벨이 울렸다.
정일훈은 조용히 수화기를 들었다. 목소리도 낮게 깔았다.

"사범 정일훈입니다."

정일훈의 꿈은 예쁘고 착한 여자를 만나서 장가가는 일이다. 사범이라면 믿음직스럽고 든든해 보여서 여자들이 좋아한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음성은 그가 잘 아는 것이었다.

"형, 저 이현입니다."

"오, 그래! 모슨 일이냐?"

"제가 밥 한 끼 사려고 하는데요."

"그래?"

정일훈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짠돌이 이현이 밥을 사다니, 상상도 못할 일이지 않은가.

"도장으로 올거냐? 중국집에 배달시킬까? 난 짬뽕 정도면 괜찮아 군만두라도 하나 더 채겨 주면 고맙고."

"아닙니다. 우리 외식을 하죠."

"그래? 그러면 어디로 나갈까."

"V호텔의 위치는 알고 계시죠?"

"호, 호텔?"

정일훈은 말을 더듬었다.

"위치는 알고 있지만, 거기는 무슨 일로?"

"V호텔로 오세요. 제가 밥 사겠습니다."

"그, 그래. 알았다!"

정일훈은 혹시라도 이현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서둘러 나갈 채비를 갖추려고 했다.
그런데 이현이 한마디를 더 하는 것이다.

"도장 식구들도 다 데려오세요. 정말 흔치 않은 기회니까요. 흐흐흐."



정일훈은 수련생과 사범들을 총집합시켜서 호텔로 향했다. 조용히 바둑을 두고 있던 관장 안현도도 합류했다.
보통때에는 있는 듯 없는 듯 하다가도, 먹는 일에는 귀신같이 끼어드는 안현도였다.

"호텔이라......"

"예. 호텔로 오라고 했습니다."

"뭐 맛있는게 있으려나? 자주 가던 곳이라 입맛은 잘 맞겠다만."

"관장님 그쪽이 아니라 이쪽인데요."

"......"

안현도가 사범들, 수련생들은 위풍당당하게 호텔로 걸어갔다. 기품을 지키기 위해서 한 발자국씩 느긋하게 걷는 걸음은 당연히 아니었다.
빠르고 경쾌하게!
거의 달리다시피 하며 걸어가는 수련생들.
1명의 낙오자도 없이 호텔로 들어갔다.

"이, 이게 무슨......"

경비들이 제지하려고 했지만, 이들은 바람처럼 달렸다. 이윽고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했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는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수련생들의 눈이 매서워졌다.
안현도는 여유롭게 말했다.

"얘들아, 요즘은 일부러라도 계단을 이용한다더구나."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안현도는 제자들을 이끌고 걸어서 20층에 있는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거기에는 이현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스승님."

"그래. 배가 고프구나. 밥은 어디에 있느냐?"

"들어가셔서 드시면 됩니다."

"마음대로 먹어도 되느냐?"

"예. 전부 무료입니다."

"그것 참 마음에 드는구나."

레스토랑의 지배인과 종업원들은, 이현이 아는 사람을 데려올 테니 푸짐하게 한 상 차려 달라고 했을 때에 쉽게 승낙을 했다.
주방장은 할 수 있는 최고의 요리를 준비하고, 종업원들도 최선의 서비스를 다짐하며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나 문을 열고 안현도와 사범들, 수련생들이 들어오자 종업원들의 얼굴은 잿빛이 되었다.
무려 500명이 넘는 인원이 아닌가!
그들은 테이블을 전부 차지하고 신나게 음식을 먹어댔다.

"여, 여기 와인이 나왔습니다. 부르고뉴 지방의 99년 빈티지로......"

벌컥벌컥!
종업원들이 글라스에 와인을 따르기가 무섭게 막걸리 마시듯이 펑펑 마셔 댔다.

"이거 맛있다. 한 잔 더요!"

"......"

"여기 고기볶음 50인분 더!"

"음식이 감짓 맛나게 왜 이렇게 늦게 나와!"

"우리 배터지게 먹어보자. 모두 공짜다. 공짜!"

한창 검술 훈련으로 허기가 졌던 수련생들과 사범들은 아예 허리띠를 풀어 놓고 거침없이 먹고 마셨다.
그때 안현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들 들어라. 우리는 무예를 수련하는 사람으로서, 과식은 그리 좋지 않다."

종업원들과 지배인들은 희망 어린 눈으로 안현도를 보았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더욱 좌절할 수 밖에 없었다.

"1인당 10인분씩만 먹자."

"옛, 스승님!"

500명이 10인분씩!
1인분에 7,000원짜리 고기 뷔페에 온 사람들처럼 마음껏 음식을 먹은 그들 덕에, 레스토랑의 모든 식자재는 동나 버리고 말았다.

"꺼억! 이제 좀 배가 부르ㄴ."

"맛있게 잘 먹었다."

정신없이 요리를 하고 서빙을 하던 종업원들은 완전히 허탈해져서, 어서 수련생들이 나가 주기만을 바랐다.
그런데 그들은 여전히 1명도 빠짐없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대체 왜?'

최종범이 머쓱한 얼굴로 물었다.

"근데 후식은 언제 나오나요?"

옆에서 마상범도 한마디 했다.

"매일매일 이렇게 먹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







영화를 보고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 거의 처음 있는 바깥나들이를 마치고 이현과 이혜연은 집에 들어왔다.
둘 모두 거의 기진맥진해 있었다.

'차라리 검을 5시간 동안 휘두르고 말겠다.'

이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남들은 잘도 놀고 돌아다니는데, 왜 이렇게 힘들단 말인가.
영화를 보는 일도 힘들고, 시내를 돌아다니는 것은 금방 지치게 만들었다.
게다가 레스토랑에서는 조각도 했다. 얼음을 깎아 조각상을 만드는 일은 정말로 힘들었다. 잠깐도 한눈팔 수 없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하루의 일과도 모두 마치고 이제는 집으로 돌아왔다.

"잘 자, 오빠."

"그래. 너도 잘 자라."

동생이 잠자리에 들고 나서, 이현은 다시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평소라면 씻고 로열 로드에 접속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가 볼 곳이 있었다.
심야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향한 이현은, 야간 근무를 하는 담당 간호사를 찾아 물었다.

"할머니는요?"

"주무시고 계세요. 암세포 때문에 통증을 완화하기 위한 약을 드셔서, 지금 들어가셔도 환자 분이 깨어나긴 힘들 거에요."

"그래도 들어가 보겠습니다."

이현은 병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작은 병실. 침상 위에 누워 곤히 잠든 할머니가 보였다. 몸에는 각종 의료 장비들이 붙어 있었다.
이현은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기쁜 소식이 있어서 왔습니다."

"......"

할머니는 옅은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들어 있었다.
심장 박동 등을 체크하는 기기들도 그대로 일정한 패턴을 그리고 있었다.
약의 효과 때문에 아마도 7시간은 그대로 잠에 빠져 들어 깨어나지 못하리라.

"오늘 혜연이가 한국 대학교의 면접을 봤어요. 솔직히 약간의 사고가 있어서 합격할지 아니면 떨어질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좋은 일이지요?"

"......"

"벌써 19살이 되었습니다. 그날로부터 14년이 지났습니다. 제 등에 업혀서 부모님이 어디 있냐고 묻던 그 애가 이제 어엿한 숙녀가 되었습니다."

이현은 잠이 든 할머니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그동안 참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이제는 정말 즐겁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땐 많이 힘들었죠. 당장 먹을 것도 없어서,
할머니는 한 사람의 입이라도 줄이기 위해 혜연이를 포기하자고 하셨죠. 그래서 고아원에 보내려고 하셨습니다."

옛날 일이었지만, 여동생은 고아원에 갈 뻔했던 적이 있었다. 이현은 그때 사흘간 밥을 먹지 않고 시위하면서 여동생을 고아원에 보내는 것을 반대했다.

"할머니는 저더러 후회하실 거라고 했죠. 그리고 실제로 밥도 먹기 힘들어 끼니를 거를 때도 참 많았습니다. 할머니는 늘
제가 양보만 한다고 혜연이를 미워하셨습니다. 혜연이 때문에 제가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다고... 혜연이만 없다면 제가
훨씬 행복했을 거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습니다."

할머니는 여동생을 미워했다. 여동생 때문에 이현이 고생을 한다면서 매번 야단을 쳤다. 별것 아닌 일로 심하게 잔소리를 하기도 했다.
여동생이 한때 방황을 했던 것도 이유가 있었다.

"저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때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겁니다. 우리는 한가족이니까요."

잠든 할머니의 대답은 없었지만, 이현은 훨씬 마음이 편해졌다.
10년 넘게 가슴에 밎이 되어 있던 말을 모두 했다.
집으로 돌아온 이현은 몸을 씨고 캡슐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로열 로드에 접속했다.




유로키나 산맥 다크 엘프의 성!
무너진 성벽이 복구되고, 오크들이 물자를 옮겨 오고 있었다. 리치 샤이어가 이끄는 불사의 군단과의 전쟁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위드는 접속을 종료했을 때처럼 인간의 모습으로 다크 엘프의 성에 나타났다. 온 사방이 공사판이었다.

"취이익!"

"취췻. 일을 열심히 하는 오크들은 착한 오크다."

"그쪽의 돌을 더 높이 쌓자!"

"얼마나 높이 쌓나? 취!"

"높이, 높이! 취치치칫 하늘까지 닿도록!"

오크들은 무식하게 큰 바위들을 날랐다. 여럿이서 바위를 잔뜩 들고 와서 탑처럼 쌓아 올리는 것이었다.
와르르르!

"취에엑!"

"꽤엑. 오크 살려!"

그러나 비대하게 쌓아 올린 바위 탑들은 무너지기 일쑤였고, 오크들은 그 밑에 깔려서 신음을 했다.
다크 엘프들은 오크들과 조금 달랐다. 나름대로 지성이란 것이 있는 만큼 그들은 머리를 굴렸다

"오크들이 열심히 일을 한다."

"우리는 놀아도 되겠군."

"우리들은 엘프다. 힘이 없지."

"당연히 그렇다."

농땡이를 열심히 피우는 다크 엘프들.
위드가 잠시 자리를 비운 새 복구 작업은 개판 5분 전으로 치달아 있었다.
돌무더기가 여기저기 질서 없이 흩어져 있고, 전투를 위해 모아 온 물자들도 곳곳에 쌓인 채 방치되어 있다.
성의 파괴된 부분들에서는 오크들이 난장판을 피웠다.
짐승들을 잡아 와서 다크 엘프와 함께 구워먹는 것이었다.
다크 엘프들은 구운 요리에 소금을 뿌렸다.
일반 엘프들은 살아 있는 생명을 죽여서 만든 고기를 먹지 않는다.
그러나 다크 엘프들에게는 그러한 규율이 없었다.
애초에 타락한 엘프들의 피부가 검게 변해 다크 엘프가 되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엘프치고는 어지간히 야만적인 종족인 것이다.

"이것이 소금의 위력이다. 미개한 오크들."

"과연... 취이잇. 이렇게 소금을 뿌려 먹으니 더 맛있다."

오크와 다크 엘프들은 언데드와 싸운다는 명목으로 극적인 화해를 이루었다. 함게 술을 마시며 고기를 구워 먹는다.
워낙에 많은 오크들과 다크 엘프들이 모여 있기에 성안은 시장통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런 무식하고 게으른 놈들을 데리고 불사의 군단과 싸워야 하다니......'

위드의 뒷골이 심하게 아파 왔다.

"대장님! 저희들이 맡은 바 임무를 완수하였습니다."

그때에 나타난 부란과 베커, 호스람, 데일! 왕실 기사들과 사제들까지.

'그래도 이놈들이 있으니 최소한의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는 건가? 만약에 이 퀘스트에 실패하더라고 이 녀석들만
무사히 로자임 왕국으로 돌려보내면 왕실 공헌도를 획득할 수 있다. 공헌도로 아이템을 얻을 수 있는 것이지!'

공헌도는 곧 돈과 연결이 된다.
위드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한 병사들이었다.
그런데 부관이 말했다.

"말씀하신 대로 마을 인근에 있던 저희들의 보급품을 모두 이곳으로 옮겼습니다."

"잘했다."

언제 봐도 믿음직스러운 부란이었다.
처음으로 함께했던 리트바르 마굴에서도 베커와 함게 위험한 정찰대 임무를 수행했다.
믿고 신뢰하는 부란!
그런데 그 부란이 가리킨 곳에는 보급품이 거의 없었다.
아니, 있기는 있다. 병사들이 착용하는 병장기와 화살, 단검, 철퇴, 이런 종류의 무기들은 많았다.
다만 정작 중요한 술병들이 모조리 사라진 것이었다.
절망의 평원에 도착한 이후로, 위드는 유로키나 산맥을 마음껏 헤맸다.
그러면서 채집한 각종 산열매들! 뱀과 귀한 약초들!
양질의 재료들만 활용해 담근 술은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꿀맛 그 자체였다. 아니, 어쩌면 더 먹기 위해서 다른 1명을 죽이려고 들지도 모른다.
새벽의 맑은 이슬을 모아서 빚어낸 각종 술들.
위드가 만든 술병이 몽땅 사라진 것이다.

"내 술병들이 어디로 갔지? 아직 옮겨 오지 않은 거겠지. 아마 그렇겠지?"

"그게......"

부란은 주저하면서 오크들을 가리켰다.

"저놈들이 전부 마시고 있습니다. 말리려고는 했는데......"

그러자 위드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
절망의 평원에 술이 있을 리 없다. 오크들이 술을 만들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고로 오크들이 마시고 있는 술은 위드의 것이다.

"맛있다. 취익!"

"킁킁! 이게 무슨 냄새야."

영롱하고 맑은 술이 오크의 주둥이로 마구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커헉!"

위드는 생살이 찢어지는 드한 고통에 피를 토하고 싶었다.
어떻게 담근 술이던가.
한 병씩 빚을 때마다 위드는 기원했다.

'부디 성공해서 많은 돈을 벌게 해 다오.'

술을 담가서 팔면 상당한 돈을 벌 수 있다.
몇 개월간 제대로 숙성시켰으니 그 맛과 효과는 두말하면 잔소리이리라.
짬짬이 위드가 빚어낸 술들이 이제는 수백 병에 이르렀다.
사냥을 통해 얻은 귀한 아이템이야 따로 보관을 하였지만, 술의 경우에는 미처 다 넣을 곳이 없어서 병사들을 통해 관리를 하도록 지시했다.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이럴 수가......"

위드는 망연자실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오크들은 빠르게 술을 마시고 있었다. 병 입구에서 찰랑거리던 진한 푸른색 술들이 밑바닥을 보인다.
텅 빈 술병들이 주위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있었다.
술이 모조리 사라졌다. 돈이 날아갔다.

"아아아!"

안타까움에 탄식하는 위드!
오크들과 다크 엘프들은 육포까지도 뜯고 있었다.
그 육포들 역시 위드가 만든 것이었다.
이미 말리기에도 때가 늦어서, 술이 남아 있는 병도 거의 없고 육포들이 담긴 바구니도 텅텅 비었다.

'술이나 음식은 다시 만들면 된다.'

그래도 위드는 희망을 가졌다.
아무튼 병사들이 있다.
비록 술이나 전투를 위한 보급품들은 제법 잃어버렸다고 해도 충성스러운 병사들은 잃어버리지 않았다.

"죄, 죄송합니다. 오크들이 억지로... 딸꾹!"

상황을 설명하던 중, 부란이 심하게 딸꾹질을 한다.
그때야 위드는 병사들을 제대로 살펴보았다.
다리는 비틀거리고, 얼굴을 붉게 달아올라 있다.
과도한 음주로 인한 현상이었다.

"이건......!"

그제야 모든 상황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부란과 베커 들은 명령대로 전투 물자를 옮기던 도중에 술병들을 발견하게 되었으리라.

"술이다."

"어떻게 하지?"

"뭘 어떻게 해. 지금은 대장님이 없잖아."

"꿀꺽! 맛있겠다."

"한 모금 정도는 괜찮겠지?"

"이렇게나 많은데......"

"어서 마시자!"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다는 말처럼, 토리도와 싸울 때 단단히 술맛을 알게 된 병사들이다.
그래도 병사들은 처음에는 정말 딱 한 모금만 마시려고 했다

"입에 쫙쫙 붙는구나."

"아! 너무 맛있다."

한 모금이 한 병이 되고, 한 수레가 되는 것은 금방이었다.
일을 저지른 병사들은 취기에 정신이 오락가락했지만, 그 와중에도 위드에 대한 두려움은 남아 있었다.

"이것, 오크들이 마신 걸로 하자."

"오크들에게 줘 버리자."

그렇게 밑천을 드러내 버린, 애지중지 담근 술들!

"정말 이런 것들을 데리고 불사의 군단과 싸워야 하다니......"

위드는 한숨이 나왔다.





인터넷에서는 난리가 나고 있었다.
아침과 낮이 되면서 로열 로드의 홈페이지에 접속하는 인원이 대폭 늘어났다.
그들은 언제나처럼 명예읜 전당에 접속해 보고는 완전히 매료되어 버린 것이다.

-오크들의 정체를 밝혀 봅시다.
-대체 폴리모프를 할 수 있는 도구나 마법은 무엇이 있을까요?
-마법사 연합에서 나왔습니다. 네크로맨서로의 전직이 언제쯤 풀리게 될지 알 수 있겠습니까?
-이미 전직을 했던 사람들도 네크로맨서가 될 수 있나요?

마법사들에게는 절박한 일이었다.
새로운 직업이 열리게 되면, 그것은 곧 새로운 마법을 익힐 수 있다는 뜻. 마법사에게는 마법만큼 소중한 것이 없기에, 그들은 어떻게든 정보를 원했다.
마법사들은 로열 로드를 운영하는 유니콘사에 무수히 많은 문의를 올렸다.

-퀘스트의 진행에 대해서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어떻게 어떤 식으로 해야 이런 직업 의뢰를 받을 수 있죠?

-네크로 맨서의 직업과 특성을 공개해 주세요.

그러나 유니콘사의 답변은 간단했다.

-유저에 의해서 진행되는 퀘스트는 본사라고 해도 함부로 열람하고 공개할 수 없습니다. 네크로맨서의 특성은 직업이
열리게되면 알 수 있습니다. 만약 퀘스트가 실패한다면 직업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유니콘사는 개인 정보 보호라는 명분으로 일체의 진행 상황들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자 더욱 안달이 난 유저드은 각종 사이트를 습격했다.
KMC미디어, CTS미디어, 온 방송국, 디지털 미디어, LK 게임.
국내외의 게임을 주로 방송하는 방송사들에 열화와 같은 시청자 의견을 써낸 것이었다.



KMC미디어에서는 제작자 회의를 열었다.
젊은 일선 기획자들이나 PD들이 참여해서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고, 방송 아이템이나 편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특별한 일이 발생했다.
방송국장이 직접 회의에 참가한 것이다.

"게시판이 난리입니다. 강 부장,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국장은 시청자들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KMC미디어의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그리고 수만 건의 게시물들을 보았다.
하나같이 어떤 퀘스트에 대해서 방송을 해 달란 의견이었다.

"명예의 전당에 새로운 동영상이 하나 올라왔습니다."

"그래요? 대체 무슨 동영상이기에 이 난장판이 벌어졌지요?"

방송국을 최초로 오픈하고 나서, 동시간대에 시청률 1위가 되었을 때에도 이런 사단은 일어나지 않았다.
강 부장은 곤혹스러운 듯이 자신의 대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퀘스트 같습니다."

"무슨 퀘스트요? 겨우 퀘스트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들뜨게 만들었다니 어이가 없군요."

국장이 고개를 갸웃할 때에, 젊은 연출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희들도 지금 그 내용을 다루려고 하던 참이었습니다. 준비해 둔 동영상이 있으니 국장님도 보시죠."

"그럴까요?"

회의실에는 각종 영상을 볼 수 있는 최첨단 기자재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전 방향 입체 사운드 장치나, 전면의 벽 전체에 나오는 영상들.
방송국의 회의실이니 당연한 설비들이었다.
동영상이 흘러나오는 동안, 국장과 부장을 비롯하여 각 기획자들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한참 만에 국장이 말했다.

"이것, 꼭 우리가 잡아야 됩니다."

"물론입니다. 국장님."

강 부장이나 기획자들도 모두 동감이었다.
눈앞의 오크들과의 전투만 고려한 것이 아니었다.
오크로의 변신이나 신비한 퀘스트.
미지의 지역에서의 모험.
이러한 모든 것들을 감안한다면 단지 한차례의 방송만으로 끝낼 일이 아니다.
강 부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런데 다른 방송국들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여러 곳에서 계약 제의를 할 것 같습니다."

"어렵다는 뜻인가요?"

"아닙니다. 다만 다른 방송국들과 경쟁을 해야 하니 그만큼 계약 조건을 높여 줘야지요."

문제는 언제나 돈이었다.

"우리는 많은 돈을 쓸 수는 없습니다."

국장의 말에 좌중에는 무거운 침묵이 돌았다.
KMC미디어는 처음부터 자본이 두터운 회사는 아니었다.
아직 신생 방송국으로서 수입이 생길 때마다 적극적으로 투자를 하고 있으니, 시청률이 높다고 해도 여유 자금이 많지는 않았다.
강 부장이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국장님, 올해 우리 방송자의 재무 사정이 그렇게까지 나쁘진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꾸준히 흑자도 내고 있는 걸로 아는데요."

"계약할 돈이 없는 건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타 방송사를 압도할 정도로 파격적인 계약금을 걸면서까지 데려오진 못합니다."

국장의 말에 기획자들은 금새 의기소침해졌다.
열심히 의욕을 가지고 일을 하려고 해도, 당장 눈에 보이는 현실이 발목을 잡았다.
작은 방송사로서 여기저기 돈 들어갈 곳이 많다 보니 늘 예산에 얽매여 사는 것이었다.
KMC미디어의 사훈.
돈 적게 들여도 재미만 있으면 된다!
필사적인 생존을 위한 방법이었다.
기획자들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더 성장하기 위해서는 투자도 필요한 건데......'

'이렇게 큰 이슈가 된 사건들은 늘 CTS미디어에 뺏기기만 하다니.'

그런데 국장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좋은 계약을 젯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예?"

"인센티브 계약. 파격적인 계약금은 주지 못하더라고, 흥행에 성공한다면 실적에 따라서 광고 수익금을 분배해 줄 수 있다는 겁니다."

현재 로열 로드의 시청률은 연일 최고치를 갱신하고 있다.
로열 로드의 이용자들이 갈수록 늘어나며서 방송국 시청률도 연달아 상승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광고 판매 단가도 오르고 수입 또한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5% 이상 시청률이 상승한다면 일정 비율만큼의 광고 수익금을 분배해 줄 수 있을 겁니다 방송만이 아니라, 이 퀘스트와 관련된
프로그램을 홈페이지에서 다운로드받을 겨우에 내는 돈은 계약에 따라 분배해 준다고 하면 잡을 수 있겠지요?"

KMC미디어는 아직 규모가 작은 방송국이기에 가능한 방법이었다.
강부장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반드시 계약을 따 보겠습니다. 국장님."






명예의 전당에 올려놓은 동영상을 보는 사람이 많을수록 유니콘사에서 홍보비 명목으로 받게 되는 현찰도 늘어난다.
지금까지 아이템만을 팔아 돈을 벌던 이현에게 그러한 방식은 생소한 것이었다.

"사람만 많이 봐 준다면 거의 거저 돈을 버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데... 역시 편집을 해서 올렸어야 하나."

늦었지만 이제라도 편집 프로그램을 구입해야 할지 이현이 주저하고 있을 때에 유니콘 본사의 홍보부도 만만치 않은 난리가 나 있었다.

"설마 그 유저가 이런 퀘스트를 하고 있었을 줄이야."

"대단하군요."

장윤수 팀장을 비롯한 홍보부의 요인들은 전략운영실에서 나온 사람들과 함께 동영상을 보았다.
로열 로드를 원활하게 홍보하기 위해서 게임 내용을 숙지하는 것은 필수였다.
전략운영실에서는 어떠한 직접적인 업무도 하지 않는다.
각 퀘스트들에 대한 내용들을 이해하고, 전체적인 배경 스토리들을 공부한다.
각 왕국들의 역사!
도시의 발전도와, 중요 인물들의 배경.
유저들의 성장.
이런 것들을 바캉으로 향후 베르사 대륙의 향방이 어디로 흘러갈지를 전망하는 것이 전략운영실의 업무였다.

"벌써 이렇게까지 퀘스트를 진행하다니, 매우 빠른 속도입니다."

"문제는 없을까요?"

"괜찮습니다. 전체적인 밑그림에서 볼 때 바르칸의 등장은 겨우 스토리의 2할 정도에 불과하니까요. 아직 바르칸까지 퀘스트가 이어진 것도 아니고요. 다만......"

"다만?"

"이것으로 언데드의 세력이 창궐한다면 게임 내의 상황이 조금 바뀔 수도 있을 것 같군요. 지금까지는 왕국에 있는 기존
세력들로부터 힘의 축이 조금씩 유저들에게 넘어가던 시기였습니다."

NPC들이 차지하고 있던 유명한 성이나 요새들, 마을을 비롯한 광산이나 사업장들의 소유권이 바뀌고 있었다.
유저들이나 길드들이 힘을 합쳐서 공성전을 통해 소유권을 빼앗거나 아니면 공헌도를 높여서 차지하는 식이었다.
왕국이 수도나 수도 인근의 대도시 등은 아직 유저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았지만 중앙 대륙의 상당수 성들은 이미 유저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바르칸의 퀘스트와 무슨 관련이 있지요?"

장윤수 팀장이라고 해서 게임 스토리를 잘 아는 건 아니기 때문에,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따.
전략 운영실에서 나온 손일강 실장은 활짝 웃었다

"아주 재밌게 된 거죠. 바르칸이 완전히 부활하고 언데드 세력이 힘을 받는다면, 이 양상이 많이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언데드들은 생명체를 증오합니다."

"그야 그렇죠."

"일반 마을이나 성들이 언데드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겠지요. 시체들이 많아지는 공성전을 벌일 때에도 언데드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수비와 공격 양쪽 모두를 증오하며 활약을 하게 될 것입니다. 적을 제압하는 것만이 아니라 언데드에 의한 반격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얘깁니다."

"만에 하나의 경우, 언데드가 마을이나 성을 차지할 수도 있습니까?"

"충분히 가능한 얘기입니다. 언데드들도 베르사 대륙을 구성하는 집단 중의 하나이니까요. 언데드가 차지한 왕국은 각종 몬스터들이
들끓고 치안이 사라지겠죠. 이것을 정화할 수 있다면 유저들에게는 큰 공헌도를 세울 수 있는 기회도 될 겁니다"

"위기와 동시에 기회가 찾아오는군요."

"예. 물론 스토리상으로 개척되지 않은 북부 대륙의 왕국들은 이미 언데드의 손아귀에 떨어져 있습니다만... 아무튼 앞으로 전체적인
난이도가 상승하게 될 테고, 언데드들을 자주 보게 되겠군요."








카리취의 질주!

하벤 왕국의 수도 아렌 성의 어느 선술집.
더러운 인상을 가진 볼크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동전을 가지고 놀던 종업원이 입구에서 질문을 던졌다.

"용건은?"

"휴식."

"5쿠퍼다. 편히 쉬어라."

일반적인 선술집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우선 종업원이 반말을 사용하며, 용건을 따로 분류해서 고객들을 대한다.
볼크는 선술집 안을 둘러보다가 대충 빈자리에 앉았다. 음료는 기본으로 나오는 과일 주스를 마셨다.
남들은 5쿠퍼짜리 음료를 마시는 이들을 초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볼크는 무려 레벨이 367이나 되는 초고레벨의 유저였다.
볼크뿐만이 아니다.
선술집에 있는 유저들의 레벨은 평균적으로 300이 넘는다. 각 길드, 혹은 성을 가진 세력이라고 해도 레벨 300이
넘는 이들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을 감안한다면 이곳이 정말 독특한 장소인 것이다.
다크 게이머 연합에서 지정한 선술집!
바로 다크 게이머들이 휴식을 취하는 장소였다.
쪼오옥.
볼크는 과일 주스를 소중히 아껴서 마셨다.
달콤한 이 맛. 온몸의 피로를 씻어 내 주는 것말 같은 맛이다.
주면에도 그처럼 바로 앞에 놓인 음식과 음료를 찔끔찔끔 아껴서 먹는 이들이 많았다.
다크 게이머에게 캐릭터가 소유한 돈은 바로 자본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므로 한 푼도 허투루 쓰지 못한다.
일부 다크 게이머들은 레벨이 높아진 이후로 흥청망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말로는 한결같이 좋지 못했다.

"바랑 기병대가 반란군에 가입했다는군."

"라옴 마을이 몬스터의 습격을 받았어. 용병들을 구하고 있다고 해."

선술집 내에서 다크 게이머들은 종종 최신 정보를 교류하곤 했다.

"청부가 있어. 109개의 피의 제단 퀘스트를 안내해 주는 사람에게 3천 골드를 준다는군. 해 볼 텐가?"

"인원수는?"

"갓 레벨 190이 된 이들 다섯."

"5천 골드 이상이면 고려해 본다고 전해."

선술집은 청부를 주고받는 역할을 맡아서 했다.
유저들은 특수한 경로를 통해 다크 게이머들에게 청부를 한다. 다크 게이머들은 필요에 따라 이러한 청부를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거절했다.
베르사 대륙의 지하 경제를 움직이는 이들!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로열 로드는 전 세계적으로 즐기는 게임이 되었다.
다크 게이머의 숫자 역시 최소한 20만에 달한다.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고, 돈과 아이템이 있는 곳에만 나타나는 다크 게이머들이다.
따로따로 뿔뿔이 행동하지만 그 저력만큼은 어느 곳에도 뒤지지 않는 곳.

'이곳은 여전히 변함이 없군.'

볼크는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는 한때의 아름다운 과거를 떠올렸다.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다. 그녀를 위해서 게임을 시작했다. 그녀와 함께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 정이 많이 들었고 그녀가 없는 인생은 살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에게 고백하는 날!
로자임 왕국에서 만난 조각가에게 꽃다발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을 했다.
나무로 만든 생생한 꽃다발의 효과는 최고였고, 그녀는 곧 볼크와 결혼식을 올렸다.
인생이 좋았던 것은 바로 이때까지였다.
그녀나 볼크나 모두 로열로드에 1년 이상 푹 빠져 있었다.
사실은 서로에게 빠져서 함께 돌아다니느라 거의 사회생활을 하지 않았다.
직장에서도 잘리고 새로 취직을 하기도 난감한 상황!
부부가 할 수 있는 것은 로열 로드 뿐이었다.

"여보, 우리 돈 많이 법시다."

"아이템 많이 주워 와요!"

"당신도!"

완전한 부부 다크 게이머의 탄생이었다.
아내는 성직자의 수행 퀘스트를 하느라 바빠서 볼크 혼자 돌아다니면서 사냥과 퀘스트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례합니다. 직업과 레벨이 어떻게 되십니까?"

볼크 혼자서 앉아 있자, 다크 게이머들 몇 명이 다가왔다.
동료를 구하는 이들!
혼자서 하기 힘든 사냥을 할 때에는 이곳에서 동료를 찾을 수 있다.
물론 수익 배분이나 역할 분담은 철저해야 한다.
만약에 자신의 몫을 다하지 못하거나 무리한 욕심을 부려 남의 것을 가로챈다면, 다크 게이며 연합에 기록이 된다.
심한 경우에는 척살령이 떨어지는데, 그러면 모든 다크 게이머들이 적으로 돌변한다.
볼크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지금은 먼 곳에서 돌아와서 혼자 있고 싶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몇몇 제의를 하던 이들이 사과와 함께 물러섰다.
다크 게이머들에게는 이곳 선술집이 유일한 안식처다. 평화롭게 쉴 수 있는 하나의 장소. 그런 만큼 타인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 규칙이었다.
덜컥.
볼크가 한동안 쉬고 있는데 선술집의 문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1명의 유저가 나타났다.
그는 다크 게이머가 아니었다. 구분하는 법은 상당히 단순했다 복장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대체로 다크 게이머들은 효율을
가장 중요시하고, 동시에 남들의 눈에 잘 띄는 화려한 장비를 입지 않는 편이었으니까.
종업원이 그에게 물었다.

"용건은?"

"비밀."

"......"

가끔 이런 이들이 있다
세상의 비밀이란 비밀은 혼자 다 짊어진 것처럼 행동하는 이들.
새로 선술집 안에 들어온 이는 여러 테이블을 오가면서 다크 게이머들과 귓속말을 나누었다.
몇몇 다크 게이머들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다른 이들은 고개를 끄덕여서 승낙의 표시를 드려냈지만, 남자는 추가로 몇 마디를 물어본 후에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거절당한 이들은 조금의 불만도 표시하지 않았다. 오히러 그 남자를, 대단하다는 듯이 존경 어린 눈으로 보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기에 그러지?'

그남자는 얌전히 앉아있는 볼크에게도 다가왔다.

"난이도 A급 비전 퀘스트. 할 마음이 있나?"

"......"

볼크는 잠시 침묵했다.
난이도 A의 퀘스트라면 현재 나오는 것 중 최고가 아닌가.
다크 게이머들이 거절을 당한 것도 이해가 갔다.

"웬만해서는 힘들 텐데."

"우리 길드에서 자체적으로 인원을 준비했다. 모자란 인원만 용병으로 구한다."

"길드?"

"진홍의 날개."

현재 베르사 대륙 서열 10위 안에 드는 길드.
요새와 성을 7개나 소유하고 있는, 중앙 대륙의 터줏대감과도 같은 길드였다.

'그렇다면 승산은 있겠군.'

볼크는 구미가 당겼다.
혼자서 하던 사냥에도 질리던 참이었다.

"제한 레벨은?"

"350정도면 되겠지."

"......"

"고민하기 전에, 자격은 되나?"

"충분히"

"잘됐군. 기본 보수는 2만 골드다. 임무 도중 죽었을 경우의 배상금은 5만. 유적 탐험이 20일 이상 진행될 경우에는 하루에 2천 골드씩 더 주지."

"조건이 너무 좋은데......"

"대신 유적에서 발굴한 아이템의 소유권은 모두 우리 쪽에 있다. 퀘스트의 진행과 필요한 물자 등을 전부 우리가
충당하고 있으니 무리한 얘기는 아닐 거라 본다. 또한 너희들의 목숨은 알아서 챙겨야 된다."

한마디로 죽거나 살거나 상관없는 방패막이로 쓰겠다는 소리였다.

'스콜피온 왕의 유적이라......"

보상이나 모험에 구미가 당겼던 볼크는 참여하기로 결심했다.





페일과 메이런!
커플은 눈부신 활약을 벌였다.

"급소 쏘기!"

동시에 몬스터의 심장과 인중을 노리는 화살 공격!
궁수와 레이저의 합동 공격 후에는 이리엔의 신성 마법이 뒤를 따랐다.

"신성한 빛으로 악의 무리에게 올바른 세상을 보여 주세요. 세인트 블라인드!"

이리엔의 손에서 흰빛이 나와 몬스터의 눈에 전해졌다.
그녀의 신성 마법은 사실 잔인하기 짝이 없었다.
몬스터의 눈을 환한 빛으로 막아 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눈이 멀어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노릇.

"쿠에에엑!"

두 발로 걸어 다니는 올챙이 비슷한 몬스터가 괴로워했다.
세인트 블라인드는 약간의 데미지도 준다. 악의 속성을 가진 몬스터에게만 사용할 수 있다는 제약을 가지고 있지만,
마나 소비도 적고 데미지도 주는 데다 눈을 멀게 만들어 공격하기 쉽게 해주는 좋은 마법이었다.
이리엔이 레벨 200을 넘기고 사제로 전직한 다음에 얻은 스킬이다.

"거침없이 타오르는 불길이여, 몽땅 태워 버려랏. 파이어 필드!"

로뮤나도 만만치 않았다.
광역 화염계 마법!
정령의 호수 지하에는 조금이라도 물과 관련된 몬스터들이 많이 나온다.
이들에게 불의 속석을 가진 마법은 상극이었다.
몸의 수분을 말려서 큰 데미지를 주는 것이다.
화염 계열을 전문적으로 익힌 로뮤나에게 정령의 호수는 최고의 사냥터였다.

"내 강철 주먹 맛 좀 봐랏!"

수르카는 드디어 권사의 꿈이라고 할 수 있는 스킬을 배웠다.
마나를 모아서 떨어져 있는 적을 때릴 수 있는 스킬!
마나 소모가 많고, 궁수들처럼 먼 거리까지 피해를 주지는 못한다. 그래도 열 걸음 안까지는 고스란히 데미지를 주었다.
그리고 화령과 제피, 마판!
이들 중에서 화령은 파티에서 특히 환영을 받았다.
이리엔이나 로뮤나, 수르카, 메이런은 모두 여자다 보니 본래부터 죽이 잘 맞았다.
사냥을 하고 쉴 때나 몬스터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에는 할 일이 없다!
여자들은 대화를 나누었다.

"어제 제가 했던 방송 이야기를 해 드릴까요?"

미주알고주알.
메이런은 그녀가 진행한 방송 이야기를 장장 3시간에 걸쳐서 했다. 실제 방송 시간은 1시간이었는데,
여러 준비 과정의 이야기나 연예인들을 만났던 인들을 죄다 늘어놓는 것이다.
그것으로 끝이냐면 아니다.
아직 시작도 안 했다.

"저는 동아리에서 봉사 활동을 나가거든요."

"우리 학교에서는......"

로뮤나나 이리엔은 여대생답게 동아리 이야기나 학과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겨우 1년 다니고 휴학을 했는데 무슨 할 얘기가 그렇게 많은지 끝도 없었다.
수르카는 여고생이지만 여러 다양한 취미, 독서나 프라모델 수집, 패션 등에 관심이 많았다.
평소에도 만만치 않은 수다를 떨던 그녀들에 화령은 곧바로 적응했다. 밀라노, 베니스, 로마, 런던,
뉴욕 등 전 세계를 돌아다닌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좌중을 순식간에 이끌어가게 된 것이다.
다섯 여자들은 극심한 수다로 완전한 화합을 이루었다.
화령은 춤으로 적들을 공략한다. 그러나 제피는 언제나 몬스터와 싸우는 최전방에 서야 했다.
낚시꾼의 막강한 생명력으로 적의 공격을 방어해 냈다.
파티에 방어를 전담하는 기사나 워리어가 없어서, 낚시꾼인 제피가 그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제일 힘든 일을 맡게 된 제피!
그는 무지막지한 생명력으로 적들의 분노에 찬 공격을 막아 내야 했다.

"제피 님은 참 든든해요."

"낚시꾼이 이렇게 전투를 잘할 줄은 몰랐어요."

"낚시만 하셨다기에 처음에는 굉장히 약할 줄 알았는데, 엄청나요!"

은근히 아부하는 동료들!
처음의 여리고 순수하던 그들은 없었다.
위드를 알고 난 이후로 그들은 변했다.
칭찬과 아부!
위드에게서 배운 기술은 오늘도 가공할 위력을 발휘했다. 소위 세상 사는 법을 익힌 셈이다.
그 와중에도 마판의 존재감은 언제나 미약했다. 전투를 할 때면 있는지 없는지 구분을 하기 힘들 정도로.
그러나 전투가 끝나면 곧장 튀어나와서 잡템들을 계산했다.
마판은 검치 들과 일행들의 잡템을 도맡아 처리하면서 큰 상인으로 거듭나는 중이었다.



다크 엘프의 성채.
위드가 다시 접속한 이상, 그 지휘력은 다크 엘프들이나 오크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통솔력!
한 부대나 군대를 다스릴 수 있는 이 능력은, 오랫동안 자리를 비울수록 조금씩 감소한다.
위드는 임시지만 불사의 군단과 싸우기 위해 오크와 다크 엘프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 그리고 위드의 통솔력은 거의 짝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높은 편이었다.

"놀! 지! 말! 고! 모! 두! 일! 해! 라!"

스킬: 사자후를 사용하셨습니다.
사자후 스킬의 영향 범위에 있는 모든 아군의 사기가 200% 상승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혼란 상태가 해제됩니다.
5분간 통솔력이 205% 추가 적용됩니다.

"취익! 일하자. 일."

"일을 해야 된다. 취췻."

일부는 부족으로 돌아갔다고 해도, 10만이 넘는 오크들이 남아 있었다.
이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성벽을 쌓고, 다시금 물자들을 운반했다.
부대를 지휘하는 능력에는 통솔력 외에도 각기 선호하는 능력치들을 반영했다.
오크들의 경우에는 투지와 칼스마가 뛰어난 이를 좋아했다. 타고난 호전성 때문에 전투에서 물러서지 않는 이를 따르는 것이다.
위드의 투지는 그렇지 않아도 높은 편이기에, 오크들을 부리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다크 엘프의 경우에는 조금 더 까다로워서, 지식, 지혜, 자연과의 친화도, 매력, 예술 등을 골고루 반영했다.

"우리를 다스릴 정도로 똑똑하진 않지만 불과 대지를 상당히 이해할 줄 아는 인간이군."

"떨어지는 낙엽이 전하는 이야기를 알고 있나? 예술성이 있어 보이는군. 그렇다면 너의 명령에 따르도록 하겠다."

요리와 약초학을 익히면서 부가적으로 얻은 능력이 자연과의 찬화력이었다.
높은 예술 스탯과 친화도 덕분에 다크 엘프들을 지휘할 수 있었다.
다크 엘프들은 마법 함정들을 만들고, 인라지 마법을 써서 순식간에 성 주변에 나무들이 자라게 만들었다. 웅장한
가지들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고, 나무 줄기는 굵게 자랐다.
일부 나무들에는 가시가 달려 있다. 천연 성벽의 역학을 해 주는 나무들이었다.
어떤 나무들에는 주렁주렁 열매들도 달렸다. 오크들이 먹어 치우는 식량이 엄청나므로 보급의 역할도 할 수 있을 것이리라.
뱀파이어 토리도와 데스 나이트 반 호크는 큰 줄기만 잡아 주고 알아서 활동하도록 했다.
이들은 이른바 대장 몬스터들이다.
각자 부하를 거느릴 수 있고 혈족을 구성할 수 있다.
토리도에게는 사라졌던 진혈의 뱀파이어 족을 부활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데스 나이트 반 호크는, 부하들을 다시금 모아서 데스 나이트 부대를 완성하도록 했다.
이에는 이!
이쪽도 강력한 언데드 군단을 거느리는 것이다.
모두들 불사의 군단과의 전쟁을 열심히 준비할 때에, 위드는 오크들이 쌓아 놓은 바위 탑으로 향했다.
그리고 바위들을 조각했다.
다크 엘프들!
정령술을 펼치는 다크 엘프들의 형상을 즉석에서 조각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불의 정령 카사를 다루며 오크들을
불태우던 다크 엘프들의 위풍당당한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위드의 손길은 과감하고 거침이 없었다.
조각품이 완성되어 가자 주변에 다크 엘프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인간이 우리를 조각해 주고 있다."
"사람들은 우리를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애정이 담긴 조각품을 만들어 주다니."

띠링!

걸작! 종족 다크 엘프 상을 완성하셨습니다!
명인이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는 조각사의 작품!
전투를 좋아하고 야만적인 다크 엘프들은 가끔 세상에 존재를 드러낸다. 이들의 정령술은 패도적이라고 할 만큼 공격적이라 일반 엘프들과는 비교가 된다.
예술적 가치:120
특수 옵션: 다크 엘프 상을 바라본 이들은 생명력과 마나 회복 속도가 하루 동안 3% 증가한다.
이동속도 25% 상승.
달리기를 할 때에는 추가적으로 5% 더 빨라진다.
힘 10 감소. 민첩 20 증가.
지력 10 증가. 지혜 10 증가.
시야가 1.5배로 확장되고, 정령술의 스킬이 한 단계 높아진다.
다른 조각품과 중복 적용되지 않음.
지금까지 완성한 걸작의 숫자: 7

-조각술 스킬의 숙련도가 향상되었습니다.

-명성이 41 올랐습니다.

-지구력이 1 상승하셨습니다.

-지력이 1 상승하셨습니다.

-인내력이 3 상승하셨습니다.


이제 걸작은 쉽게 만들 수 있었지만, 명성이나 스탯은 잘 오르지 않았다.
조각품으로 올리는 스탯은 우선 경지에 따라 달라진다.
명성이 낮을 때에 명작이나 걸작을 만들면 명성이 대폭 늘ㅇ난다. 스킬이 부족할 때에 조각술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세심하게 만들면 스탯을 많이 늘려 준다.
인내력이나 지구력들은 거대한 동상을 몇날 며칠 밤을 새워서 만들 때에 많이 늘어나는 스탯이었다.
그런데 하루 정도 고생해서 만든 조각품에는 별달리 스탯이 붙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지구력이나 인내력이 이런 식으로 늘어나는 것은 조각사만의 특권이라고 볼 수 있었다.

"스킬 확인. 조각술!"

중급 조각술 9 (28%): 조각을 할 수 있다. 아름다운 조각품은 고가에 팔리기도 한다. 여자의 환심을 사기에 좋다.

조각술이 중급 9레벨에 도달한 지도 한참이나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전투와 퀘스트에 전념하느라 숙력도가 거의 오르지 않았다.
오크로 전투를 하면서 조각 검술을 간간이 써준 덕에 그나마 이 정도의 숙련도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좋아. 조각품을 몇 개 더 만들어야겠군."

위드는 그 외에 오크들의 흉상들도 조각했다. 글레이브를 난폭하게 휘두르는 모습이었다.
그러자 오크들의 투지와 용맹을 상승시켜 주는 걸작 조각품이 나왔다.
이젠 웬만한 조각품들은 실패하는 일이 없었다.




KMC미디어의 강 부장은 초조하기 짝이 없었다.
명예의 전당에 동영상이 공개된 지도 벌써 사흘째!

"반드시 우리와 계약을 해야 하는데......"

오늘로 강 부장은 동영상을 올린 이에게 계약을 제의하는 메일을 다섯 통째 보냈다.
물론 KMC미디어의 대표 명의로 보냈다.
퀘스트와 전투 영상의 독점적인 공개.
하지만 아직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대체 메일 확인은 안 하는 건가? 싫으면 싫다고 답장을 보내 줘야 할 것 아냐. 젠장!"

강 부장은 분통을 터트렸다.
유니콘 사의 개인 정보 보호는 매우 엄격한 탓에, 연락처나 주소지는 방송국의 요청이라고 해도 알려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찌 되었든 메일로만 연락을 취해야 하는데 상대가 메일을 열어 보지조차 않는 것이었다.

"로열 로드의 시간을 감안하면 이제 앞으로 4일 후면 퀘스트가 시작되고 말 텐데......"

강 부장은 촉박한 시간 때문에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벌써 KMC미디어 측에 요청하는 시청자들의 의견이 10만건을 넘었다.
한국 날짜로 5일 후에 벌어질 대규모 퀘스트.
생중계까지는 아니더라도 거기에 맞춰서 방송을 하고 싶은데 전혀 연락도 받지 않고 있으니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갈수밖에 없었다.



아침 일찍 여동생을 학교로 보내고 잠깐 남은 여유 시간.
이현은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에 접속했다. 먼저 둘러본 곳은 아이템 거래 사이터였다.

당신을 다크 게이머 연합으로 초대합니다.

여전히 다크 게이머 연합에서는 집요한 초대장을 보내온다 이미 가입한 것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이현은 초대장을 바로 삭제해 버리고 아이템의 시세로 눈길을 돌렸다.

"어디... 시세가 제법 올라갔나?"

절망의 평원에 있으면서 야금야금 모아 놓운 짐들이, 무게를 8할이나 줄여 주는 마법 배낭 7개에 가득 찼다.
대다수는 팔지 못한 장비들이었다.
유배자의 마을에서 거래하기에는 가격을 제대로 안 쳐 주고, 실제 현금으로 판매할 정도로 좋은 아이템은 구매자가 안 나타난다.
아이템을 팔아 현금을 벌기 위해서는 경매 게시 글을 올리고 낙찰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구보다 더 중요한 게 물건의 인수였다 누구도 절망의 평원까지 와서 아이템을 사 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큰 성 주변에서 사냥을 하는 다크 게이머들도 많았다.
아이템이 나오면 언제나 판매할 수 있도록 고객들의 근처에서 사냥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해서는 좋은 아이템을 줍기 힘들었다.

'다크 게이머를 하려며 어쩔 수 없이 모헙을 해야 한다.'

큰 성 부근의 던전들은 이미 유저들로 인해 북적거리고 있고 몬스터들도 많지 ㅇ낳다.
사냥을 위해서는 좀 더 멀리 나갈 필요가 있다
그래서 대체로 사람들이 많은 도시 근처에 있는 다크 게이머들은 사실 중수, 혹은 하수들이다. 어떤 아이템 하나 주워서 판매하면 그것을 두고두고 자랑하는 이들!
아이템 거리 자체가 이제는 합법화되고 양지로 올라왔기 때문에 일반인들 가운데에도 자신에게 쓸모없는
물건들을 판매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만큼 아이템에 무래와 매각이 활발하게 이루어지지만, 실질적으로 고가의 아이템은 거의 거래되지 않았다.
주로 많이 사용하는 도검류로, 초보나 중하수들이 쓰는 무기들이 제일 많이 거래되는 형편이었다.
이들은 엄밀히 말해서 다크 게이머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진정한 다크 게이머들은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일부러 모습을 드러내 놓고 활동하는 경우가 드물다.
로열 로드에서는 최초로 깬 퀘스트나, 혹은 처음 진입한 사냥터에서 경험치와 보상을 많이 받을 수 있다.
미발견 지역과 퀘스트.
목숨을 걸고 들어가서 아이템을 노린다.
다크 게이머들이야말로 돈과 모험을 쫓는 이들이었다.
그런 이유로 인해 괜찮은 아이템은 가끔씩 모아서 판매하지만, 그때의 수익금이 진짜 짭짤한 것이다.
게임 시간으로 절망의 평원에서 보낸 몇 개월간, 이현은 아이템을 상당히 많이 모을 수 있었다.
그런데 눈앞의 퀘스트가 바빠서 아직도 처분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중에 비싸게 팔려야 될 텐데......"

경매 글을 올리진 않았더라도 아이템의 시세는 대충 정해져 있었다.
글레이브가 15만원.
오크의 방어구들은 5만원에서 10만원.
엘프의 의복들은 40만원을 넘는 정도였다.
다른 이들도 많이 판매하는 물건들은 거의 정해진 가격대가 형성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현이 올려놓은 물건들은 위드라는 명성 때문에 가격이 더 튀었다.
지난번에도 시세로 약 300만원정도 되는 아가사의 검이 350만원에 팔렸다.
500원, 501원, 502원......
1원씩 올라가던 경매 글은 쉽게 끝이 나지 않아, 시세인 300만원을 넘어서고도 계속 가격이 올라가서 끝내 350만원에 마감이 된 것이다.
하지만 늘 그런 행운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정상적인 가격으로는 총 650만원 정도인가."

이현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절망의 평원에서 사냥을 한 지 3달. 퀘스트를 끝내기 전에는 텔레포트 게이트를 사용할 수 없어서 무작정 장비들을 모아 놓기만 했다.
그 아이템의 가격이 전부 합쳐 650만원이라면, 그리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1달에 200만원을 조금 넘는 수입. 이 정도로는 부족해. 내년이면 혜연이가 대학을 가야 되는데......"

대학에 들어가면 학비나 옷값, 교과서 값 등으로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갈지 모를 일이었다.

"역시 유로키나 산맥에서는 돈이 잘 벌리지 않는군."

나름대로 레벨도 올리고 명성도 많이 늘렸지만 아이템 획득은 별로였다.
돈을 만들기 위해서는 적당한 가격에 팔 만한 아이템들을 많이 획득해야 하는데, 줍는 것들이 대부분 오크나 다크 엘프의 장비였으니 시세가 높지 않았다.

"이번 퀘스트만 마치고 가능한 빨리 절망의 평원을 떠야겠군."

이현은 경매 글을 잠시 훑어보았다.
마법의 대륙의 그 위드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예전에 올려놓은 경매 글에는 여전히 수천 개씩의 댓글들이 달라붙고 있었다.

-실망입니다. 어디서 잠수를 타고 계십니까? 가끔 소식이라도 알려 주세요.
-프레야의 성기사단에 가입하시고 원정을 다녀오셨어요? 북부에 새로운 퀘스트들이 많이 생가고 있다던데요.
-성기사단에 대해서 알려 주세요. 어떻게 가입을 해야 하나요?

지난번 아가사의 검을 매각한 이후, 다들 이현이 프레야의 기사가 된 줄로 착각하고 있었다.

"헤레인의 잔이나 파고의 왕관을 되찾아 오던 퀘스트도 명예의 전당에 등록하면 괜찮겠군."

이현은 경매 글에 달린 댓글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프레야의 성물을 반환하는 퀘스트는 NPC들의 입 소문을 통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그런 만큼,
그 퀘스트를 올린다면 명예의 전당에서 상당한 조회수를 차지할 수 있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돈, 돈이 역시 최고지. 흐흐흐."

음침하게 웃는 이현.
오크 카리취의 행세를 하면서 비열한 웃음과 이기적인 입꼬리 흘리기가 매우 익숙해지고 말았다.

"크흐흐흐."

모니터를 보며 웃는 그에게서는, 돈에 대한 숨길 수 없는 탐욕이 묻어 나왔다.
잠시 후 이현은 로열 로드의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명예의 전당에 들어갔다.
조회수는 이미 1천 5백만을 넘었다.
댓글들도 수십만에 달했다.
어떻게 이런 퀘스트를 얻었느냐는 물음에서부터, 캐릭터의 직업이나 레벨을 물어보는 댓글까지 다양했다.
기대 이상의 뜨거운 반응이었다.
이현은 그저 약간의 조회수라도 얻어서 부업이라도 될 정도의 수입만 거두면 만족이었다.
그런데 그가 보기에도 이런 조회수는 정말로 흔치 않았다.

"괜찮네."

그러나 여전히 큰 기대는 갖지 않았다.
길이가 19시간이 넘을 정도로 긴 동영상인 만큼 한 번에 다 못보고 중목해서 본 조회수들도 다수 있으리라.

"어쨌든 돈은 받아 봐야 아는 거니까. 얼마나 받게 될지 나중에 알 수 있겠지."

이현은 댓글들을 잠시 보다가 컴퓨터 창을 닫아 버렸다.
메일함을 열어 볼까도 했지만, 그만두었다.
메일 역시 만 통이 넘게 쌓여 있었던 것이다.
퀘스트에 대한 질문이나 노하우를 알려 달라는 메일들. 각 길드에 대한 가입 의뢰나 한 번만 사냥에 데리고 다녀 달라는 요청 메일들까지,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
메일함을 열어 읽는 동안에도 수십 통씩 쌓일 지경이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이현은 메일함을 아예 열어 보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지끈! 쿵쾅!
다크 엘프의 성에서는 전투준비가 한창이었다.
성은 하루가 다르게 보수 공사가 마무리되고 추가적인 확장을 거듭한다.
오크들이 쌓는 성벽은 네겹, 다섯 겹이 되었고, 산의 아래에서부터 장벽이 겹겹이 쳐졌다.
산 전체를 전투를 위한 요샐 만드는 작업이었다.
일부 떠나갔던 오크들은 부족들을 데리고 다시 돌아왔다.
오크의 장접이 무엇인가.
무서울 정도의 번식력에 있다!
40만의 오크들 중에서 전투로 죽은 이들이 6만 정도나 되었지만, 돌아올 때에는 50만으로 숫자가 불어나 있었다.
오크 장로나 오크 로드들은 위드에게 말했다.

"취익. 취익! 다른 오크들에게도 말했다. 때려도 안 죽는 놈들. 취췻! 그놈들과 싸우기 위해서 더 온다. 많이 온다. 우리 오크들!"

오크들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거의 100만에 가까운 오크들이 결전의 날에 모인다고 한다.
다크 엘프들도 부족들을 소환했다.
유로키나 산맥에 흩어져 사는 소수 부족들.
다크 엘프의 경우에는 워낙에 은밀한 탓에 뛰어난 암살자들이 많다. 체력은 낮아도 암습에 능한 암살자들은 큰 도움이 되리라.
약하 로자임 왕국의 병사들은 제쳐 놓더라도 네크로맨서들, 뱀파이어 로드 토리도까지 있으니 이쪽의 전력도 만만치는 않다.
그럼에도 위드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불사의 군단의 강함!
그것은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다는 점이다.
이들을 완전히 죽이기 위해서는 신성 마법으로 정화하거나, 아니면 되살아나지 못하도록 잿더미로 만들어 버려야 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금방 당시 살아나고, 오히려 죽은 아군까지 적이 되어 버린다.
다크 엘프와 오크 100만 마리가 전부 언데드가 되어서 일어난다면 그것은 완전히 퀘스트 실패였다.
사실상 그렇게까지 상황이 악화된다면 이 불사의 군단의 위력은 웬만해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커지고 만다.
언데드의 특성상, 일정 규모를 넘어가면 그 숫자를 죽이기가 매우 힘들어지는 것이다.

"사제들은 나를 따라와라."

위드는 사제들과 함께 산을 내려왔다.
그가 성채를 떠나는 것을 본 네크로맨서들이 바로 뛰쳐나왔다.

"그대여, 우리의 약속을 잊었는가? 불사의 군단을 물리쳐 주겠다는 그대의 말을 우리는 믿고 있다네."

위두가 도망칠까 봐 걱정하는 것이었다.
평소에 얼마나 신뢰를 주지 못하였으면 그런 걱정을 하나 싶었지만, 위드는 사실 지금이라도 발을 빼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하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전투를 위해서는 준비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알겠네. 그러나 반드시 돌아와야 할 것이네."

"알고 있습니다."

위드는 간신히 네크로맨서들을 떼 놓고 절망의 평원에 있는 동굴로 향했다.
텔레포트 게이트가 있는 동굴 속!

"사제들은 텔레포트 게이트를 작동시켜라."

"예."

두터운 신앙심을 가진 사제들은 마나를 모아서 텔레포트 게이트를 가동시켰다.
위드는 곧 빛과 함께 사라졌다.



"170레벨 바드가 파티 구합니다."

"원숭이 숲으로 사냥 함게 가실 분!"

"빙정의 갑옷 세트 저렴하게 팝니다. 더울 때 입으면 시원해요."

"조각사가 파티 구합니다. 제발 파티 가입 좀 시켜 주세요. 은혜는 잊지 않을게요."

파앗!
소므렌 자유도시.
위드가 나타난 곳은 사람들이 장사를 벌이는 한복판이었다.

'여전히 사람들이 우글거리는군.'

예전과 다른 점이라면 가끔씩 조각사나 화가, 도공처럼 생산직 캐릭터들이 눈에 띈다는 것이었다.
위드가 만든 피라미드를 보고 시작을 한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그렇게 거창한 물건을 사람들과 함께 만드는 것은 짜릿한 일이었으니까.
예술가라고 천시받던 이들이 대거 늘었다. 하지만 그들의 대다수는 곧 게임을 접어야 했다.
조각사라고 해서 딱히 좋은 점도 없다.
우선 초반에 사냥이 너무나도 힘들다.
위드는 수련소에서 올린 스탯과 스킬 덕분에 다소 편하게 사냥을 했지만, 다른 조각사들은 약할 수 밖에 없다.
또한 지금도 딱히 달빛 조각사라는 직업 자체가 검사보다 아주 강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조가굼을 만들면서 조금씩 스탯을 늘린다 전투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진 않더라고 인내력, 지구력과 같은 스탯들은 점점 빛을 발하니까.
그러면서 손재주 스킬을 크게 키워서 다른 직업들의 생산 스킬도 중금까지 올렸다. 요리 스킬은 이제 중급 5레벨이고,
낚시는 중급 1레벨, 대장일과 재봉은 중급 2레벨이었다.
이 정도로 독하게 노가다를 하지 않을 거라면 조각사라는 직업은 이도저도 아닌 직업이 된다. 호깃라도 정말 예숨품을 만들고 싶어서 선택한 것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그러한 이유로 인해서 각 길드에서 전략적으로 키워 주는 배부른 조각사들을 제외한 대다수가 여전히 고난의 길을 걷고 있었다.
위드는 열심히 파티를 구하는 조각사에게 다가갔다.
아직 어린 소년이었다.
울상을 짓고 간절하게 파티를 구하고 있었다.
위드는 소년을 보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과거에 고생했던 기억이 한꺼번에 떠오른 것이다.

"수고가 많구나."

진심이 어린 한마디에, 소년은 고개를 들었다.

"형도 조각사에요?"

위드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조각품을 만들다보면 빛을 보는 날도 있을 거야."

"저 벌써 열흘 동안 조각품만 만들었어요. 나뭇조각만 봐도 신물이 올라올 정도에요. 여우나 토끼도 수천개씩 만들었는데, 더 이상 얼마나 노가다를 해야 되는데요?"

조각사에 대한 정보가 많이 공개되어 있지 않아서 소년도 위드와 같은 시행착오를 겪고 있었다.
그나마 소년처럼 조각사로서 열심히 노력을 한 경우도 흔치 않은 편.
위드는 자신이 깨달은 조각사의 성장법을 아낌없이 알려주었다.

"한 번 만든 건 가능한 자주 만들지 마라. 그리고 열흘 정도로는 모자라. 착각하지 마. 예술은 노가다가. 노가다를 열심히 한다면 남부럽지 않게 성장할 수 있을 거야. 힘내라."

"엉엉!"

소년은 끝내 서럽게 울고 말았다.

"조각사가 정말 하기 싫어요."

"나도 그 마음 이해한다."

과거에 이곳에서 여러 종류의 장사도 했던 위드는, 누가 알아볼까 봐 조용히 얼굴을 가리고 프레야의 교단으로 향했다.
교단 앞에는 헌금을 하고 축복을 받기 위해서 길게 늘어서 있는 줄이 보였다.

"새치기 하지 마세요!"

"줄 좀 똑바로 서요."

몰려 있는 유저들로 인해서 신전은 여전히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위드도 조용히 뒤에 줄을 서려고 했다. 그런데 위두가 다가서자, 교단을 지키던 경비병들이 창을 들고 달려 나왔다.

"어라?"

"죄를 지은 사림인가?"

경비병들은 웬만한 일에는 꿈쩍도 안 하는 경우가 보통이었으니까.
허겁지겁 다가온 경비병이 위드에게 말했다.

"오셨군요. 이쪽으로 오시지요."

명성이 높아지고, 프레야 교단에 공헌도를 많이 쌓은 덕분에 경비병들도 알아볼 정도가 된 것이다.
위드는 경비병과 함게 대신관을 만나러 갔다.





탈로크의 갑옷

대신관이 있는 곳 주변에는 성기사들과 고위 사제들이 도열해 있었다.
위드는 그들의 앞에 가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임무에 대해서 보고할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절망의 평원에 있는 유배자들은 우리의 깊은 우환거리가 아닐 수 없소 그대에게 주어진 막중한 의무를 끝냈는가?"

대신관이 질문을 던졌다.
위드는 그들에게 다크 엘프의 성에 있는 네크로맨서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오! 그런 일이 있었군. 그런 사연이 있었다면 그대의 선택은 올바른 것이었네."

대신관은 위드가 네크로맨서들을 처치하지 않은 것을 이해해 주었다.

"그 어떤 말로도, 우리의 부탁을 받아 먼 곳까지 가서 고생을 하는 자네에 대한 감사를 표현할 수 없네. 프레야 여신님께서 그대에게 은총을 내리실 것이야."

대신관은 위드의 머리를 가볍게 어루만져 주었다.


절망의 평원에 사는 유배자들 완료
네크로맨서들은 긍지와 자존심을 버리지 않았따.
어둠의 힘에 이끌려서 인성을 잃어버린 바르칸과 리치 샤이어는 더이상 네트로맨서의 존경의 대상이 아니다.
불사의 군단과 싸우며 그릇된 일을 바로잡으려는 용기는 교단의 사제들까지도 감탄하게 만들었다.


-명성이 1,800 올랐습니다.

-프레야 교단과의 우호도가 42가 되었습니다.

-프레야 교단의 공적치가 1,900 상승했습니다. 교단의 공적치는 종교상태창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프레야 교단의 공적치: 7,202
종교 단체와의 공적치는 마물을 퇴치하는 것과, 관련된 퀘스트를 완수하는 것으로 상승한다.

-신앙이 60 상승하였습니다.

-레벨이 오르셨습니다.

-레벨이 오르셨습니다.

-레벨이 오르셨습니다.


3개의 레벨과 상당한 양의 공적치!
위드의 레벨도 거의 300에 육박하고 있는 만큼, 예전처럼 레벨이 한꺼번에 오르는 일은 없다. 그렇다고 해도 상당한 양의 경험치를 획득하였다.
위드는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
경험치야 어쨌든 당연히 받는 것이었고, 중요한 것은 아이템이었으니까.
대신관이 말했다.

"그대의 공은 이제 우리 교단의 모든 재산을 털어 주어도 모자랄 것이네."

참으려고 했지만,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지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절망이 평원까지 가서 생고생을 했는데 그쯤은 해 줘야지!'

대신관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만 우리 교단은 너무 가난하고, 가진 보물이 그리 많지 않네. 그러므로 어떤 물걸을 받고 싶은지 말해 주며 좋겠군."

프레야 교단의 부는 상상을 초월한다.
베르사 대륙의 요지마다 신전이 세워져 있다. 각 신전들은 넓은 농토와 광산들을 보유하고 있고, 또 신자들이 기부하는 돈은 또 얼마던가.
포션을 판매하고 축복을 내려 주면서 받는 헌금도 만만치 않은 액수였다.
성기사들이나 사제들은 사냥을 통해 획득한 골드에 따라 일정한 액수를 매번 바쳐야 했다.
그런 돈더미 위에 올라앉으 프레야 교단에 돈과 보물이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무엇을 받아야 하나!'

위드는 순간 고민에 빠져 들고 말았다.
사냥을 위해서는 공격력이 뛰어난 검이 제일 중요하다. 하지만 로자임 왕국에서 받은 로트의 검이 있었다.
게다가 교단에서 나오는 무기류들은 보통 대부분 공격력이 빈약하다.
일전에 프레야 교단에서 받은 아가사의 검만 해도 신성력을 발휘하는 특수한 능력이 있지만, 검 자체의 공격력은 약한 편이지 않았던가.

'역시 방어력이 좋은 갑옷을 선택해야 하나.'

교단의 갑옷.
각종 신성 마법들이 영구적으로 깃들어서 뛰어난 방어력을 자랑한다.
위드야 무식할 정도로 몬스터에게 두들겨 맞으면서 인내력을 키워서 방어력이 뛰어난 편이지만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다.
최대한 안 맞고 싸우려고 하고, 또한 갈수록 몬스터의 공격력이 강해지다 보니 좋은 갑옷을 구하려고 한다.
검과 함께 방어구는 언제나 가격이 높은 아이템 중의 하나였다.
위드는 생각을 정리한 후에 입을 열었다.

"적들로부터 제 몸을 지킬 수 있는 갑옷을 원합니다."

"그대가 원하는 것을 지급해 줄 것이오."

대신관은 성기사들로쿠터 탈로크의 갑옷을 가져오도록 지시했다.

'탈로크의 갑옷?'

위드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 보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실로 수많은 아이템 정보들이 들어 있었다. 각종 돈 되는 아이템들은 거의 다 외우고 있고, 웬만한 아이템들의 이름도 최소한 한 번씩은 들어 보았다.
그런 위드에게도 탈로크의 갑옷은 생소한 것이었다.
잠시 후, 성기사들이 붉은 모포로 받친 갑옷을 들고 왔다.
새하얀 갑옷에는 은은한 광채가 어려 있었다. 게다가 붉은 수실로 프레야의 문양이 박음질되어 있다.
그 갑옷을 보는 순간 위드의 눈이 번쩍! 크게 뜨였다.

'비싸 보인다!'

아직 아이템의 정보를 확인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모양이나 광택이 보통이 아니다.
저것을 입고 광장을 돌아다닌다면 대번에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될 정도였다.
자고로 아이템의 가격에는 희소성이나 생김새가 크게 작용한다.
고급품이라면 고급품에 맞는 품위가 존재해야 한다. 그래야 더 많은 값을 받을 수 있다.
일단 외관만으로는 완벽한 합격점이었다.

"그대의 공로에 보닫하는 의미로 탈로크의 갑옷을 내리겠네. 소중히 써 주시기 바라네."

"몬스터와 싸우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프레야 교단에서 제게 내린 은혜를 잊지 않고, 이 갑옷을 제 몸처럼 아끼겠습니다."

적당한 필요성을 이야기하며 아부를 떤다!
위드는 두 팔로 냉큼 갑옷을 받아 들었다. 묵직한 무게가 느껴졌다.

"감정!"


탈로크의 믿음 갑옷: 내구력 150/150. 방어력 85
라호만 탄광에서 나온 미스릴로 만들어진 갑옷.
대륙의 이름난 드워프 대장장이 탈로크가 프레야 교단에 은혜를 갚기 위해 만들었다. 굉장한 방어력을 자랑하고,
무게가 가벼워서 활동하기 편하다. 착용자에게 멈추지 않는 투지와 고귀한 인성을 부여해 준다.
대신관의 하사품.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음.
제한: 레벨 350. 힘 600.
옵션: 신앙 +100. 명성 +300.
힘 +40. 민첩 +30.
매력 +25. 투지 +40.
마나의 최대치를 15% 늘려 줌.
마법의 피해를 10% 감소.
혼란과 공포 마법으로부터 면역.
드워프들의 호감을 얻음.
라호만 탄광에서 나온 미스릴의 속성에 따라서 지하에서는 검게 변한다.


아이템의 정보를 확인하는 순간 위드으 ㅣ입이 떡 벌어졌다.
그 벌어진 입은 한동안 다물어지지 않았다.
유니크 급 아이템!
다양하게 붙은 옵션이나 방어력은 거의 최고 수준이었다.
여기에 대장장이 스킬로 방어구 닦기를 쓴다면 20% 정도의 방어력 상승효과가 있다. 그렇다면 방어력이 100을 넘게 되는 것이다.

'대박이다!'

레벨이 낮아서 아직 입을 수 없다는 점만 뺀다면 아주 훌륭한 아이템이었다.
위드는 재빨리 탈로크의 갑옷을 챙기고 나서 말했다.
아직 그가 프레야의 교단에 온 용건은 끝나지 않았다.

"대신관님! 리치 샤이어와 불사의 군단, 그들의 전력은 막강합니다. 저의 노력으로 다크 엘프와 오크들이
힘을 합해서 막기로 하였지만 아직 우리들은 부족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프렝의 교단에 정식으로 성기사단 파병을 요청합니다."

원군 요청!
굳이 로자임 왕국으로 돌아온 데에는 혹시라도 프레야 교단의 힘을 빌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네크로맨서 바라볼의 말에 따르면 그들의 군세를 실로 막강하다.
바르칸이 이끌지 않아 위력이 약화되었다고는 하나, 레벨 300이 넘는 둠 나이트가 5천이 넘는다.
둠 스카우트, 둠 위자드, 둠 서번트!
각종 고위 몬스터들이 즐비하고, 리빙 데드 아처, 구울, 좀비, 망령, 해골, 온갖 언데드들을 이끌고 있다.
대신관은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

"그러한 일이라면 응당 많은 힘이 필요하겠지. 그러나 우리 교단에는 지금 그러한 무력이 없네. 그대가 구한
모라타 비앙을 안정화하는 데에 모든 힘을 기울이고 있는 실정일세. 아무리 불사의 군단을 막는 일이 중차대하다고 해도, 어느 하나를 버리는 선택을 할 수는 없네."

원군 요청은 이런 식으로 거절을 당하고 말았다.
성기사나 사제들이 충분하지 않다는 데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대신관은 그냥 위드를 돌려보내지 않았다.

"절망의 평원에서 기필코 불사의 군단을 막을 수 있겠는가?"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교단의 성물인 헤레인의 잔을 빌려 주도록 하겠네."

헤레인의 잔.
위드가 최초로 프레야 교단과 인연을 맺을 수 있도록 해준 보물이었다.
물을 잔에 담아 두기만 해도 성수로 변하는 성물.

"원래대로라면 성직에 종사하는 이들만 다룰 수 있지만, 그대는 우리 프레야 교단의 은인.
여신의 은총이 있다면 헤레인의 잔을 쓸 수 있을 것일세. 그리고 그대가 해 주어야 할 막중한 일들이 아주 많아.
현재 처리하고 있는 바쁜 임무들을 마치면 언제든 교단으로 찾아오시게."

위드는 헤레인의 잔을 받아 든 후 텔레포트 게이트를 타고 절망의 평원으로 향했다.




소므렌 자유도시의 프레야 교단에는 여전히 축복을 받고자 하는 유저들이 줄지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좀 전에 경비병이 데려간 사람은 누굴까?"

"입구를 지키는 말단 경비병이 모셔 갈 정도라면 공헌도나 영향력이 꽤 큰 인물일 거야."

"교단에 큰돈을 기부한 사람일지도 모르지."

"에이, 그건 아닐걸. 입고 있던 허름한 옷들을 보면, 거지에 가까웠잖아."

"그건 그래."

줄을 서서 기다리느라 지루했던 사람들은 잡담을 늘어놓았다. 그러다가 돌연 경비병들이 다시 나오자, 사람들은 긴장했다.
경비병들이 이렇게 자주 나오는 일도 드물었던 것이다.
그런데 경비병들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자네들은 위드라는 모험가를 알고 있나? 이제는 알아둬야 할 것 같아. 이번에 절망의 평원으로 떠나서 네크로맨서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었다고 하지 않던가.

-탐욕스럽고 더러운 오크들과, 자기밖에 모르는 다크 엘프들을 뚫고 네크로맨서들을 만나신 거지.

-그분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자비심으로 네크로맨서들을 살려 주어, 더욱 큰일을 하도록 이끄셨다.

-위드님은 이제 우리 교단의 큰 은인이 되겠지.


경비병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경비병들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들으니, 무언가가 떠올랐던 것이다.

"명예의 전당이다. 명예의 전당에서 봤던 퀘스트가 지금 보고됐다!"

"프레야 교단의 퀘스트였어."

"그러면 방금 전에 우리 앞을 지나갔던 사람이 바로......"

"그 퀘스트를 진행한 사람이야."

"그런데 이름이 위드잖아."

"설마 동명이인?"

"설마가 아니야. 불사의 군단과의 전쟁. 진혈의 뱀파이어족을 물리치는 것에 이은 연계 퀘스트다!"

"위드! 마법의 대륙의 그 위드다!"

사람들은 난리 법석을 피웠다.
다른 이들은 모르더라도, 게임을 하는 이들에게 위드라는 이름은 전설이었다.
그 위드가 프레야 교단에서 진혈의 뱀파이어족을 퇴치한 사건을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방금 전 그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

"나는 몰라."

"누구 얼굴 본 사람이 없는 거야?"

"너무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으니......"

"워낙 평범한 옷차림이기도 했고."

"기다리자. 위드가 나올 때까지 진을 치고 기다리자!"

소므렌 자유도시의 주민들과 병사들, 사제들이 일제히 위드의 이야기를 퍼트렸다.
소문이 퍼져 나가면서 프레야의 교단 앞에는 어마어마한 인파의 장사진이 쳐졌다.
그러나 위드는 이미 텔레포트 게이트를 타고 절망의 평원으로 떠나 버린 후였다.




성수는 언데드에게 치명적인 효과를 보인다.
그 성수를 무한히 만들어 낼 수 있는 헤레인의 잔을 임대 형식으로 빌렸지만, 이것만으로는 불사의 군단을 막을 수 있다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적을 약화시킬 수는 있다. 그러나 이걸로 이길 수는 없어."

위드는 냉정한 판단을 내렸다.
언데드들을 잡는 데에는 최고의 직업이라고 할 수 있는 성기사들이 없었다. 사제들도 겨우 100명으로는 너무나도 모자랐다.
마나가 부족해서, 오크들에게 축복을 전부 걸어 주기도 힘들 것이다.
사제나 성기사들이 없다면 언데드를 물리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역시 무기가 필요해. 오크나 다크 엘프들을 무장시킬 만한 무기가 있어야 돼."

난이도 A급의 퀘스트인 만큼 적당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크들이 들고 있는 글레이브나 다크 엘프들의 화살은 언데드에게 그리 효과적이지 않다.
하지만 이것은 그야말로 금단의 과실이나 다름이 없는 일이다. 엄청난 돈이 나가는 일인 만큼 답을 알고도 실행하기가 힘들었다.

"은! 그래도 역시 은으로 만든 무기가 필요해!"

사악한 것을 물리치는 은!
다크 엘프나 오크들이 은으로 만든 무기로 무장한다면 아군의 전력은 2배 이상으로 늘어나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만약 은 무기까지 샀는데 퀘스트에 실패한다면 위드는 빈털터리 신세가 되는 것이다.

"이래서 퀘스트를 포기하고 싶었는데......"

위드는 눈물을 머금고 결심했다.

"투자다. 위험을 감수해야 더 큰 이득이 돌아오는 법이지."

위드는 마판에게 귓속말을 보냈따.

-마판님. 지금 자리에 계십니까?

언제나 접속해 있는 폐인 상인!
마판에게 귓속말을 보내자마자 대답이 전해져 왔다.

-예. 골라! 골라! 어떤 물푸이든 싸게 삽니다. 원하시는 물건은 저렴하게 구매 대행해 드립니다. 잡템도 다 사요!
손님. 무슨일로 연락을 주셨습니까? 마판 상회를 찾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친절하게 모시겠습니다.

-......

눈물어린 상인의 고행 길!
여전히 잡템을 구매하고, 물품들을 파는 일에 여념이 없는 마판이었다.
실상 어느 정도 규모의 상단까지 운영하면서 꽤나 돈을 만질 수도 있다. 대부분의 상인들은 그러한 길로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마판은 끈질기게 상인 기술에 전념했다.
위드를 쫓아다니고 검치 들에게 아부를 하면서 열심히 상인의 길을 걸었다.

'자본은 나를 떠날 수 있어도, 기술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기술 하나 익히면 평생 편하게 산다는 신념 아래 상인 스킬의 향상을 위해 노력하는 마판.
그런데 그새 마판에게도 많은 발전이 있었던 듯싶었다.
흥얼거리는 말투에는 상인의 억양이 배어 나올 정도였던 것이다.

-앗! 위드 님입니까?

마판은 곧바로 다시 귓속말을 보냈다.
귓속말을 보낸 사람이 위드인 줄 알고 놀라서 뒤늦게 다시 말을 걸어온 것이었다.

-예. 저 위드입니다.

-아직도 살아 계셨군요. 흑흑.

-......

마판은 다짜고짜 눈물을 쏟아 냈다.
동료들은 이번에야말로 위드가 죽은 줄로 알았다.
절망의 평원에서는 아직까지 아무도 살아서 돌아온 적이 없다고 알려져 있다. 게다가 난이도 B급의 의뢰까지 안고 떠난 위드였으니 이제는 죽을 줄로 안 것이다.
마판은 위드가 죽는다는 데에 200골드를 걸었다.
그런데 페일이나 다른 일행들은 전부 생존한다는 데에 돈을 걸었다.
잡초 같은 생명력으로 어떻게든 살 것이라고 확고한 믿을을 가졌던 것.
마판은 돈을 잃었지만 금방 웃으며 귓속말을 했다.

-아무튼 살아 계셔서 다행입니다. 페일 님도 많이 걱정했어요. 수르카 님이나 로뮤나, 이리엔, 화령, 제피 님도 위드님의 얘기를 자주 하고 있죠.

-지금 다들 모여 있습니까?

-예. 저만 빼고요. 정령의 호수에서 사냥을 하고 있는데, 이곳의 경험치가 꽤 짭짤한 편이라서요.

위드가 없는 사이에 일행들도 사냥을 하고 있었다.

-검치 님은 어찌 지내죠?

-아! 그분들은 각자 무사 수행을 하신다고 로자임 왕국을 떠났습니다. 위대한 모험가가 되기 위햐여 뿔뿔이 흩어지시던 그분들의 마지막 모습은 일품이었죠.

-무사 수행이라... 재미있겠군요.

사고뭉치들의 여행!
검치 들이 어마어마하고, 상상도 못 할 기행들을 벌이게 될 것임을 위드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마판이 웃으며 말을 전해 왔다.

-아무튼 절망의 평원에서도 잘 지내시는 것 같으니 다행이네요. 그곳의 퀘스트는 잘 해결하고 계시지요?

-그럭저럭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퀘스트의 진행을 위해서 은으로 된 무기를 좀 구매했으면 하는데요. 은화살과 제련할 수 있는 순은이 많이 필요합니다.

-아, 대장간에 가면 재료로 쓰는 은을 살 수 있을 것 같네요. 은화살도 어렵지는 않고요.

로자임 왕국처럼 변방의 큰 성들은 기본적으로 무기 재료등을 많이 비축해 두고 있다.

-그러면 찾아서 구매를 좀 해 주세요.

-예. 페일 님이 좀비를 만나면 은화살을 자주 쓰시던데, 언데드 몬스터와 전투라도 치르실 모양이죠? 얼마나 사 드릴까요?
위드 님은 원래 사냥을 한번 하면 단단히 준비하고 가시는 분이니 한 5천개, 아니면 1만개 정도면 되겠습니까?

재료의 질에 따라서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은 화살 1개는 보통 2실버 정도였다.
일반인에게는 상상하기 힘든 물량이었지만, 위드는 그만큼 사냥을 무식하게 하니 마판이 지레짐작하여 많이 부른 것이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넉넉히 200골드 정도면 되겠다고 계산까지 마쳤다.
그러나 위드의 말은 그의 상상을 초월했다.

-은 화살 200만개. 그리고 은으로 된 제일 싼 제련 재료들을 많이 구매해 주십시오. 최소한 5만개 정도의 무기에 은을 씌울 수 있도록요.

-......

마판에게서 한동안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열심히 계산을 하기에 바빴다.
100실버가 모여서 1골드가 된다.
개당 2실버인 은화살 200만개라면 4만 골드!
무기의 경우에는 은으로 씌우는데에 아무리 싼 재료를 쓰더라도 최소한 60실버는 필요했다. 제일 싸구려 은을 아주 조금만
입힌다고 해도 5만개의 무기라면 무려 3만 골드가 드는 것이다.

-그, 그렇게 많은 양을......

-구할 수 있습니까?

-은 화살 200만개. 무기 5만개에 씌울 만큼의 순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기에...알겠습니다. 당장 움직이도록 하죠!




마판에게 무기 재료 구입 대행을 맡긴 후, 위드는 그에 대해서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상점에서 판매하는 재료의 물량은 한계가 있지만, 지금까지 위드를 보고 배운 마판은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시작부터 안되는 일은 없다.
안 되면 되게 하라.
노력하고 생각하라. 돈은 절대 그냥 들어오지 않는다.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야 한푼이라도 더 번다.
미래에 벌 수 있는 돈보다 지금 더 벌어야 한다.

물량을 채우기 위해서는 로자임 왕국의 여러 대장간에 아침마다 가서 은을 구매하고, 사냥을 통해 얻은 유저들로부터 은붙이를 사야 했다.
언데드 몬스터에게 치명적인 효력을 발휘하는 은 화살과 순은이지만, 뒤집어서 본다면 언데드를 사냥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별로 필요하지 않은 물건이었다. 중앙 대륙만큼 사람이 많지 않은 로자임 왕국인지라, 굳이 묘지 등을 찾아다니는 이들은 드물었다.
부지런한 성격에 구매 스킬이 남다른 이상, 어렵지 않게 물량을 졷라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전 재산 7만 5천 골드가 팍 줄어 버리겠구나.'

위드는 생돈이 날아가는 아픔에 탄식을 하고 싶었다.
주문한 무기 재료들을 구입한다면 최소한 7만 골드 이상은 써야 했다.
그러나 안타까움도 잠시!
위드는 금새 의욕을 회복했다.

"그래, 돈! 돈이야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생기는 것이지!"

돈을 써야 하는 고통이 아무렇지도 않은게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나도 큰 충격 때문이었다.
위드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애써 돈에 대해서는 잊으려고 했다.
친구가 넘어져서 무릎팍이 깨졌을 때에도 나지 않던 눈물! 그런데 땅을 샀을 때에는 펑펑 쏟아지던 바로 그 눈물이었다.

"하지만 이것으로도 모자라!"

위드는 아직도 부족했다. 목이 말랐다.
절망의 평원에는 하나의 세력이 더 있었따.
유배자의 마을.
절망의 평원 곳곳에 흩어져 있지만, 다크 엘프와 오크들만으로는 모자라다. 인간인 그들이 가세해야 전투가 훨씬 편해질 것이다.

"은으로 만든 무기를 가져와야 되니까 로자임 왕국에도 다녀와야 해."

위드는 자하브의 조각칼을 꺼냈다.
이윽고 단단하고 갈라짐이 없는 좋은 재질의 바위를 고른후 위드는 그 앞에 서서 잠시 생각했다.

"아무래도 달리는 데에는 치타가 제격이겠지?"

날렵한 치타!
치타로 변신해서 달린다면 절망의 평원을 금새 지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지도도 가지고 있으니까.
샤샤샥!
위드는 매우 재빠른 솜씨로 바위를 가르며 치타를 조각했다.
몸통은 가늘고 길게 만들고, 제일 중요한 4개의 다리는 말처럼 길쭉길쭉하게 했다.

"다리가 길어야 빨리 달릴 수 있을 거야."

꼭 키가 크다고 달리기를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이들보다는 어른들이 훨씬 더 잘 달리지 않던가!
띠링!


명작! 네발짐승 상을 완성하셨습니다!
위대함에 가까워지는 조각사!
그의 명성은 대륙 널리 퍼져 있을 정도이다.
예술이란 꼭 정형화될 필요는 없는 것!
한때 확실한 무엇만이 예술 작품으로 느껴지던 시대도 있었다.
그러나 예술의 발달에 따라 다양한 시도들이 전개되었다. 추상적인 느낌에 따라 만든 것들도, 아주 안목이 뛰어난 이들에게는 더없는 작품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예술적 가치: 3,100
특수 옵션: 짐승 상을 본 이들은 생명력과 마나 회복 속도가 하루 동안 25% 증가한다.
이동속도 20% 상승.
전 스탯 10 상승.
볼 때마다, 확정되지 않은 9가지 특성이 랜덤하게 적용됨.
짐승의 포효 발동.
다른 조각품과 중복 적용되지 않음.
지금까지 완성한 명작의 숫자: 4


-조각술 스킬의 숙련도가 향상되었습니다.

-명성이 320 올랐습니다.

-예술 스탯이 6 상승하셨습니다.

-인내가 3 상승하셨습니다.

-지구력이 2 상승하셨습니다.

-짐승 상의 소유권은 위드 님에게 있습니다. 향후 짐승 상에 생명을 부여할 수 있다면, 그는 위드 님에게 충성을 바치게 될 것입니다.

-명작 조각품을 만든 대가로 전 스탯이 1씩 추가로 상승합니다.


추상적인!
예술의 발달에 따라!
한마디로 위드가 만든 짐승 상은 볼품이 없었다.
치타 상을 만들려고 하였지만, 실제로는 말처럼 다리가 길고 몸통도 길쭉한 알 수 없는 짐승이었다.
머리는 치타인데 몸은 거의 낙타에 가깝다고 할까.
소 뒷걸음질 치다가 개구리 잡은 격이었다.
대충 만들었는데 일부러 만들려고 해도 쉽지 않은 명작이 나온 것이다.
그 덕분에 숙력도가 12%나 올라 조각술이 9레벨 43%가 되었다.

"아무튼 명작이니 됐지."

위드는 크게 만족했다.
스스로 뛰어난 조각가라고 자부했다면 작품에 집착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위드는 젯밥에 더 관심이 많았다.
자고로 예술이란 이래야 되는 것이다.
어쩌면 역사란 당시에 살아 본 자신이 아니면 모르는 것. 피카소가 꼭 추상화를 그리고 싶어서 그렸는지 누가 아는가. 위대한 음악가가 실수로 만든 음악이 세기의 명곡이 될 수도 있다.
예술이란 해석하기 나름이고, 관점에 따라 다른 것이었다.

"지금 이 작품이 이래도 한 100년 뒤에는 상당히 뛰어난 작품으로 인정을 받을 수도 있는 거지. 100년으로 안 되면 한 300년, 아니 1만 년쯤 뒤에라도."

대충 자기 합리화를 끝낸 위드는 짐승 상을 보며 스킬을 사용했다.

"조각 변신술!"

-조각 변신술을 사용합니다.

조각술에 대한 무한한 애정은, 그 조각품과 조각사를 서로 닮게 만든다!
위드의 몸이 털로 뒤덮이고, 팔과 다리가 가늘고 길어졌다.
곧 2개의 팔과 2개의 다리를 가진 인간이 아니라, 네발로 달리는 낙타 비슷한 동물로 변신을 마쳤다.

-몸의 형태가 바뀌면서 현재 착용하고 있는 장비들의 상당수가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가죽으로 된, 특수 제작한 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종족이나 형태에 따라 필요한 장비를 새로 구하십시오.


-조각 변신술의 영향으로 민첩과 인내력이 증가합니다.
카리스마와 통솔력이 최저 수준으로 하락합니다.
예술 스탯이 절반으로 줄어듭니다.
지구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조각 변신술이 풀릴 때까지 유효합니다.


네발짐승이 된 만큼 지구력도 대폭 늘었다.

"좋아. 유배자의 마을까지 달리는 거다."

위드는 땅바닥에 엎드려서 질주를 시작하려고 했다.

"네발 뛰기!"


네발 뛰기: 이동 계열 스킬.
체력과 마나를 소모하여, 두 발로 달리는 것보다 약 60%의 속도를 더 낼 수 있다.
바람을 정면으로 받고 달릴 때에는 체력의 소모가 30% 추가로 늘어난다. 바람을 등지고 달릴 때에는 20%의 속도가 추가로 늘어난다.
험준한 산악 지형에서는 스킬의 사용이 불가능하며, 초원이나 평원에서는 추가로 80%의 이동속도가 가산된다.


과거에 다론의 조각술을 배우면서, 조각품에 대한 이해를 할 때 얻었던 스킬이었다.
처음에는 과연 쓸모가 있을까 싶었던 스킬.
위드의 앞발이 앞으로 움직였다.
그러자 뒷발이 금새 따라온다.
다다다다닥!
네발을 모두 이용해 가공할 속도로 달리는 위드!
한 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평원의 풍경이 휙휙 빠르게 지나갔다.
보통 인간이라면 제발로 달리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을 수 밖에 없다. 앞발이 나감과 동시에 뒷발이 나가고,
어떤 때에는 앞발을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 자체도 잊어버린다.
왼쪽 앞발과 뒷발 오른쪽 앞발과 뒷발.
앞발과 뒷발이 같이 나아가니 무척 우스꽝스럽게 기우뚱 거린다.
네발 달린 짐승들이 걸을 때에는 의외로 복잡하다.
왼쪽 앞발이 먼저 성큼 가고, 오른쪽 뒷발이, 오른쪽 앞발이, 왼쪽 뒷발이 움직여야 한다.
적절한 간격과 균형, 힘의 분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날렵한 동작이 나올 수 없었다.
그러나 위드는 사슴과 말 등의 행동을 열심히 따라 하면서 네발 달리기 스킬을 몸으로 습득하고 있었던 것.
다다다닥.
가공할 속도로 질주하는 위드.
처음에는 모든 것이 잘되어 가는 듯했다. 하지만 곧 크나큰 문제점이 보였다.

"이럴수가......"

미처 계산하지 못한 시행착오가 있었다.
위드는 다 큰 인간이었다.
엎드려서 걸음마를 하듯이 네발로 달리기!
빠른 속도로 달리고는 있지만, 걸음마로 몇날 며칠을 달릴 생각을 하니 아득하기만 하다.

"노가다면 안 될 게 없어!"

처음에는 그런 생각도 해 봤다. 독하게 달리면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목이 너무나도 아팠다.
속도가 빠른 만큼 고개를 바짝 들고 정면을 주시하며 달려야 한다.
어디 그뿐이던가. 오래 달리니 발바닥도 너무나 아프다.

-날카로운 돌맹이르 밟아 생명력이 3 하락합니다.

-금속 조각을 밟아 생명력이 10 하락합니다.

여기까지의 부작용도 그럭저럭 참을 수 있었다.
대장장이 스킬을 이용해서 말굽이라도 만들면 충격이 조금은 줄어들 테니까.
문제는 체력이었다.
치타나 말, 그 어떤 동물이든 지구력이 그렇게 뛰어나지는 않다. 속도는 굉장히 빠르지만 최고
속력이 유지되는 시간은 매우 짧다. 나머지는 빈둥거리면서 물이나 마시고 어슬렁 거리는 것이다.

-체력이 떨어져서 달릴 수 없습니다.

겨우 10분!
전속력을 내서 달린 시간이었다.
나머지는 네발로 천천히 어슬렁거리면서 움직여야 했다.
걸을 때마다 엉덩이가 흔들거리고, 숨이 가빠 왔다.
도저히 안되겠는지, 위드는 마침내 자리에 멈춰 섰다.

"헉헉! 이건 정말 사람이 할 짓이 아니야."

절망의 평원을 네발로 달려서 가로지르겠다는 것은 답답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때그때는 빠르더라도 체력이 떨어졌을 때에는 답이 안나온다.

"조각 변신술 해제!"

위드는 조각 변신술을 해제하고 다시금 조각품을 만들었다.
타조처럼 두 발로 달리는 동물!
그런 건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이번에 만드는 대상은 무난한 오크의 형태였다.
다만 기존에 만들었던 오크 카리취의 몸이 일반 오크들보다 훨씬 비대하고 근육질로 이루어져 있다면, 이버에는 깡마른 오크를 조각했다.
피죽도 못먹고 자란 것처럼 비쩍 마른 몰골에, 꼭 필요한 근육만이 붙어 있다.
몸무게를 최대한 줄이고 키도 적당히 작게 만들었다.
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처럼 조각을 했다.
무론 인상만은 오크 카리취 그래로였다. 얼굴만 봐도 하루 종일 기분이 상하고, 눈빛이 마주치는 순간 세상을 다 때려 부수고 싶다.
위드에게는 지상에서 가장 못생긴 오크를 만드는 재능이 있었다.
띠링!


걸작! 작은 괴물 오크 상을 완성하셨습니다.
위대한 조각사의 고뇌 어린 작품!
번뇌와 좌절감을 듬뿍 담아 만든 세기의 역작!
있어서는 안 될 흉물이지만, 음울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이 어딘가 숨겨진 비밀이 있는 듯도 하다.
예술적 가치: 1
특수 옵션: 오크 조각상을 바라본 이들은 생명력과 마나 회복 속도가 하루동안 5% 증가한다.
이동 속도 18% 상승.
지력 20 하락. 매력 100 하락.
힘 10 증가. 민첩 5증가.
우는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만들 수 있다.
담력이 낮은 이들은 이 오크 상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심하게 위축된다.
다른 조각품과 중복 적용되지 않음.
지금까지 완성한 걸작의 숫자: 9

-명성이 80 올랐습니다.

-지구력이 2 상승하셨습니다.

-지력이 1 상승하셨습니다.

-투지가 1 상승하셨습니다.


조각품이 완성되자 위드는 곧바로 스킬을 시전했다.

"조각 변신술!"

키가 작아지고 얼굴이 작은 오크 카리취로 변한다.
털이 길게 자라고 몸이 비쩍 말랐다.

-몸의 형태가 바뀌면서 혀재 착용하고 있는 장비들의 상당수가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철판 갑옷을 입으실 수 있습니다.
종족이나 형태에 따라 필요한 장비를 새로 구하십시오.

-조각 변신술의 영향으로 민첩과 인내력이 증가합니다.
지력과 지혜가 최저 수준으로 하락합니다.
예술 스탯이 절반으로 줄어듭니다.
지구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조각 변신술이 풀릴 때까지 유효합니다.

"취이익!"

작은 오크 카리취!
역시나 단순한 것이 제일 좋다.
예술적인 가치 따위는 없어도, 무식한 것이 편하다.
위드는 뒤뚱뒤뚱, 절망의 평원을 열심히 달리기 시작했다.








과거의 인연

베르사 대륙의 역사책에서는 사라진 젲왕.
벨소스 라 데우스 3세.
진홍의 날개 길등서는 왕국의 역사서를 통해서 그 단서를 발견했다.

"숨겨진 뭔가 있는 것 같아요."

"어디 한번 조사해 보자."

길드에서는 그 단서를 기초로 조사에 착수했다.
역사를 잘 아는 NPC들을 찾아다니고, 관련자들을 통해 증언을 모았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자료와 증언, 퀘스트는 점점 높은 곳까지 올라가고 있었다.
나중에는 마셀 왕국의 백작에게까지 향했다.
상당히 인색하고 음모와 술수가 뛰어나단든 평가를 받는 그레스 백작은 몰래 임무를 내렸다.

"벨소스 왕에게는 많은 보물이 있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검은 뿔피리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었다고 하지.
그것을 입수해서 내게 주면 섭섭하게 대하진 않을 것이야. 다만 이 일을 누구도 할 수 없게 처리해 주게."

띠링!

돌아오는 왕의 그림자
강대한 영역을 지배했던 패왕은 므소스 계속 아래에 잠들어 있다.
한때 절대적인 권력을 가졌던 그의 무덤에는 금와 은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보검과 마법 아이템들이 가득하다. 그러나 왕의 유적은 외인의 접근을 원치 않으리라.
그곳에성 뿔피리를 가져와서 그레스 백작에게 넘기면 큰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난이도: A
보상: 유적의 보물
퀘스트 제한: 유적 내에서는 마법 사용 불가능.

어지간한 퀘스트는 NPC와의 대화나 사냥을 통해 나타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어떤 몬스터를 잡아 오면, 그 몬스터를 잡아 줘서 고맙다고 돈잉나 아이템을 준다.
그게 아니라면 어떤 물품의 운송 의뢰나 호위 임무, 마굴을 평정하라는 임무 등도 있었다.
이게 가장 간단한 퀘스트의 전형이라면, 진홍의 날개에서는 직접 조사를 통해서 숨겨진 퀘스트를 발견한 것이었다.

"찾았다! 왕의 유적이다!"

난이도 A급 의뢰!
유적이 있는 장소와 내부 지도까지 습득할 수 있었다.
진홍의 날개에서는 기뻐하면서도 그 비밀이 퍼져 나가지 않도록 입단속에 힘썼다.

"헤르메스 길드, 거기에 바드레이가 있다고 해도 우리 길드가 이 퀘스트만 성공한다면 세력을 역전시킬 수 있어!"

길드장 테로스는 확신에 차서 소리쳤다.
우후죽순 난립하던 길드들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이제 큰 세력 아래에 모인다.
난세의 기운이 다가오고 있었다.
각 거대 길드에서는 세력을 규합하기 위해서 총력전을 펼치고 있었다. 이럴 때에 길드의 명예를 크게 높일 만한 퀘스트를 찾은 것이다.
진홍의 날개에서는 고레벨 유저들을 모두 소환했다. 레벨 330 이상의 유저들만 무려 200명이 넘는다. 그리고 용병으로 다크 게이머들도 데려왔다.
그들은 최소한 레벨 350 이상으로 50명을 섭외했다.
고레벨 250여 명의 유저들!
이들이 죽기라도 한다면 진홍의 날개의 전력 6할 이상이 일거에 사라지는 것이다.
최소한 베르사 대륙의 시간으로 4일간은 접속을 하지 못한다. 그럴 때에 타 세력에서 성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그런 만큼 진홍의 날개에서는 최대한 비밀을 유지하는 데 주의를 했다.
고레벨 유저들을 불러들일 때에는 단순한 친목 대회라고 했으면, 유적의 위치도 비밀 장소에 도착해서야 알려 주었다.

"우린 이 유적을 파헤칠 것이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이 퀘스트는 난이도 A급이다. 죽는 이들이 없도록 각별히 조심하자. 1명이라도 죽는다면 그건 우리 길드 전체의 큰 손실이다. 게일."

"예. 길드장."

"선두의 수색대를 이끌어라."

"옛! 맡겨 주십시오."

테로스는 게일에게 중요한 수색 임무를 맡겼다.
수색대는 도둑을 위주로 해서 함정을 해제하고 몬스터를 찾아내는 작업을 한다.

"본대는 내가 이끌겠다."

테로스는 길드원들을 데리고 유적의 탐험에 나섰다. 레벨의 고저를 따지지 않고 성직자들 100여 명이 후방 부대에 배속되어 있었다.
전사들은 약할 경우 전투에 도움이 안 되지만, 치료 부대는 다소 수준이 뒤떨어지더라도 위급할 때에 도움이 된다.

"조심해라."

"절대 하나도 놓치지 마!"

유적의 내부에는 위험한 마수 몬스터들이 들끊고, 강력한 함정들도 나타났다.
레벨 300이 넘는 전사 계열 직업이 손도 못 써보고 죽을 정도로 위력이 강한 함정들이 몇 미터마다 설치되어 있었다.
일반적인 던전에 이 정도로 함정이 많다면, 다들 들어오기를 꺼릴 것이다.
몬스터들의 수준도 매우 높아서, 처리하기 까다로운 마수들이 다수 등장했다.
다크 게이머들의 상당수가 함정에 빠져 죽고, 길드원들도 30명 넘게 사망했다.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다. 다소이 희생은 있지만 계속 전진하자."

그러나 진홍의 날개 길드에서는 막대한 희생을 무릅쓰고 유적의 중심부를 향해 계속해서 나아갔다.
닼 게이머들은 돌아가려고 했지만, 계약에 묶여서 빠져 나갈 수가 없었다. 죽음 수당을 2배로 올려 주는 대가로 유적을 계속 개척하기로 했다.
그러나 정작 유적의 내부로 들어갔을 때 진홍의 길드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왕이 유적에는 입구가 별도로 있었던 것이다.
붉은 스콜피온이 새겨진 입구!
입구 앞에는 제단이 하나 많들어져 있고, 문에는 고대 문자가 쓰여 있었다.

"이 문자를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테로스의 말에 마법사들과 성직자들이 나섰다.
마법사들은 고대어를, 성직자들은 신성 문자를 해석할 수 있다. 그 외의 더욱 다양한 문자들은 모험가나 언어학자들이 이해할 수 있다.
다행스럽게도 진홍의 날개에서 최고의 마법사인 샤브론이 아는 문자였다.

"바론 문자로군요."

"마법사의 문자와는 뭐가 다르지?"

"원칙적으로 뿌리는 룬어에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법사들보다는 주술사들이 썼다는 문자입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약간씩 변형되어 있고, 암호화하기 위해 일부의 글자들이 바뀌어 있죠. 혹시나 해서 그 문자를 배워 두었는데 이처럼 쓸모가 있군요."

"어서 읽어 보게."

샤브론은 신중하게 고대의 문자를 해석했다.


벨소스 왕의 유적을 깨우기 위해서는 존경심이 필요하다. 왕이 사랑했던 스콜피온의 조각품 7개를 가져와야만 입구가 열리리라.


돌아보니 제단 위에는 붉은색 원석들 7개가 놓여 있었다.

"조각품?"

진홍의 날개 길드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당황하고 말았다.
테로스는 즉각 길드 채널을 통해 전체 메시지를 날렸다.
유적의 내부와 외부를 지키고 있는 전사들, 각 왕국과 대륙 전체에 퍼져 있는 길드원들이 볼 수 있는 메세지였다.

-조각사다. 스콜피온을 조각할 수 있는 조각사를 찾아라!






로자임 왕국의 세라보그 성.
일부 유저들이 동쪽 성문을 통해 나가고 있었다.

"와! 굉장하다."

"플루토 님을 비롯해서 하이신스 님까지......"

"원정대장은 오베른 님이야."

"오늘도 절망의 평원으로 진출하는 구나."

성 근처에서 사냥을 하던 유저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마물 토치를 위한 원정대!
지속적으로 유저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레베링 높아진 결과, 자신감이 생겨 드디어 절망의 평원 탐험에 나선 것.

"부럽다. 우린 언제쯤 저렇게 사냥을 해 보나."

"됐어. 사냥해서 레벨이나 올리자 저기에 속하려면 최소한 레벨이 250은 넘어야 돼."

"250! 중앙 대륙에는 꽤 많지만, 순수하게 우리 왕국에서 시작한 사람이라면 1%도 안 되는 소수잖아."

"그러니까 고수지."

원정대는 유저들의 부러움을 한껏 받으면서 성문을 나왔다.
척척척!
발검음까지 딱딱 맞춰서 걸었다.
수많은 유저들의 존경과 추앙을 받으면서 말이다.


세라보그 성에서 출발한 원정대는 곧 동쪽 국경에 다다랐다.

"여기서부터는 조심해야 합니다."

원정대장의 말에 대원들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벽을 넘으면 본격적으로 몬스터들이 많아지는 지역이다.

"세라보그 성에서 충분히 확인을 해 보셨겠지만, 마지막으로 개인 보급품이나 무기들을 점검해 보세요."

원정대장은 먼저 자신의 무기부터 점검을 해 봤다.
대체로 대장은 통솔력이 뛰어난 워리어가 맡는 게 정석이었다.
통솔력이 뛰어난 이 밑에 있으면 경험치도 소량이나마 더 획득하고, 또 개인의 능력들도 조금씩 상승한다.
절망의 평원에서 하는 사냥은 매우 난이도가 높은 만큼 오베른이라는 유명한 워리어가 대장을 맡았다.

"이상 없습니다."

"준비 끝났어요."

"어서 가죠!"

마지막 확인 후에 원정대는 조심스럽게 진군했다.
로자임 왕국의 국경에는 장벽이 만들어져 있었다. 절망의 평원으로부터 몬스터의 진입을 막기 위한 방어벽.

"와! 이런 곳이 있을 줄이야."

"멋진 장관이로군요."

절망의 평원 원정대에 처음 속한 이들이 감탄을 터트렸다.
그러나 오베른이나 플루토, 하이신스 들은 슬쩍 웃을 뿐이었다.

"좀 더 가다 보면 이보다 더한 절경들도 많이 보시게 될 겁니다. 벌써부터 놀라지 마세요."

원정대에서도 관록이 있는 이들 세 사람은 절망의 평원에서의 사냥만 다섯 번째가 넘었다.
원정대는 국경을 넘어 절망의 평원을 향하여 천천히 걸었다. 그런데 국경을 넘은지 얼마 되지도 않아 대규모 몬스터의 무리와 조우했다.
영혼 없는 늑대들.
ㄹ벨은 200이하였지만 수백 마리로 이루어진 무리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몬스터였다.

"성공을 취합시다. 마법사 부대. 공격!"

"파이어 볼트!"

"윈드 커터!"

"치료의 손길!"

30명으로 이루어진 원정대는 곧바로 마법을 시전했다.
늑대들이 있는 곳에서 얼음과 불꽃이 작렬한다.

"크아아아!"

오베른의 고함 소리!
사자후와는 조금 다르게 생명력이나 체력을 올려 주는 함성이었다.

"더 다가오기 전에 칩시다!"

오베른을 비롯한 워리어와 팔라딘들은 메이스를 휘두르며 늑대들에게 달려들었다.

"독이 있습니다. 물리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언제 어디서 몬스터들이 뛰어나올지 모르니 각자 생명력과 마나 관리는 철저히 해 주셔야 됩니다. 죽더라도 그것은 본인의 책입니다."

싸우는 도중에도 원정대원들은 서로 주의를 주었다.
자신들이 알아낸 몬스터의 특성을 공유하면서 전투를 이끌었다
아무리 국경 너머의 몬스터라고 해도, 원정대원들은 각자 왕국에서 한가락씩 하는 이들이었다.

"어딜 감히!"

"너희들에게 죽을 정도라면 오지도 않았어!"

마법사들은 보란 듯이 마법을 난사하고, 전투 계열 직업들은 철퇴와 검으로 늑대들을 내리찍었다. 사제들은 치료의 손길을 마구 퍼부었다.
깨갱 깽! 낑낑낑!
숫자가 줄어든 늑대들은 꼬리를 말았다.
대다수의 늑대들이 죽고, 일부는 멀리 평원으로 다려 도망쳤다.

"이야! 이겼다!"

"그래도 절망의 평원의 몬스터라 그런지 쉽지 않군요."

"모두들 수고하셨습니다. 그러면 잠시 쉬죠."

신나게 늑대들을 잡은 후, 원정대는 마나를 회복하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늑대를 잡아 떨어진 돈이나 장비들은 대충 알아서 나눠 가졌다.

"가죽은 어떻게 할까요?"

"고기나 늑대의 이빨 같은 것들은요?"

처음 원정대에 참여한 사람들이 질문을 했지만, 대부분은 아이텐에 관심도 갖지 않았다.

"주워 봐야 짐만 됩니다."

"잡템이나 가죽류는 돈도 얼마 안 돼요. 뭐, 필요하신 분 있으시면 집으시고요."

오베른의 말에 사람들은 잡템들을 그대로 버려두었다.

"뭐, 주워봐야 배낭만 차지하니까."

"귀찮게 무거운 거 들 필요 없지."

늑대의 가죽이나 이빨, 고기들은 너저분하게 평원에 널리채 방치되었다.
원정대는 잠시 휴식을 위한 후에 또 다른 사냥을 하기 위해 움직였다.

"다들 조심합시다!"

"1명도 죽지 않도록 하죠."

원정대가 100미터쯤 움직였을 때였다.
멀리 절망의 평원 쪽에서부터 하나의 점이 나타났다.
조금씩 커지는 점! 그것은 매우 빠른 속도로 원정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맨 처음에 그 이상한 형체를 발견한 것은 시력이 뛰어난 궁수들이었다.

"몬스터다!"

"몬스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모두 전투대형으로!"

긴장을 풀지 않고 있던 원정대원들은 일사불란하게 전투를 준비했다.
마법사는 주문을 외우고 궁수들은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도둑들은 단검을 쥐고 슬쩍 몸을 감추었다. 암습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조금씩 커지던 점이 이윽고 형체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뭐야, 오크잖아!"

"무지 마른 오크네."

피골이 앙상하게 마른 오크가 헉헉대며 달려오고 있었다.
옷차림은 누더기나 다름이 없고 갑옷 위에는 먼지가 두텁게 쌓여 있다.
다다닥!

"취익!"

다다닥!

"취익!"

세 발자국에 정확히 한 번씩 콧소리를 내면서 말이다.
오크는 등에 몇 개나 되는 큰 배낭도 메고 있었다.

"이 근처에는 오크가 나온 적이 없는데......"

"저 오크는 어디서 왔을까요?"

"그리고 짐들은 다 뭐죠?"

이사라고 하는 것처럼 배낭을 메고 여행을 다니는 오크라니!
원정대원들은 그런 것을 들어 본 적도 없었다.
오베른과 원정대원들이 어이없어 할 때에, 오크가 그들을 힐끗 쳐다보았다.
완전히 피곤에 전 눈동자.
썩은 동태ㅢ 눈빛이 이러하리라.

"취이익!"

그러고는 귀찮다는 듯이 원정대를 멀찍이 돌아서 계속 달렸다.
영문은 알 수 없었지만, 원정대원들은 그 모습에서 왠지 연민을 느꼈다.
달리는 걸음, 내딛는 한 발자국이 천 근이라도 되는 것처럼 힘들게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오크의 눈이 유달리 반짝인 것은 바로 원정대가 버려 놓은 잡템들을 보았을 때!
오크는 잡템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와 몸을 날려 떼굴떼굴 굴렀다.

"뭘 하는 걸까요?"

"정말 이상한 오크네."

"미친 오크인 것 같아요."

원정대원들이 무심코 보고 있을 때에 신기한 일이 벌어 졌다.
오크가 구르고 지나간 곳의 잡템들이 눈 깜짝할 새에 사라진 것이다. 오크는 오른손으로는 늑대의 이빨과 가죽들을, 왼손으로는 살코기들을 챙겼다.
3실버!
잡초들 사이에 떨어진 은화 3개를 보는 오크의 눈빛은 열흘간 굶은 승냥이의 그것과도 같았다.

"취이익!"

3실버를 주운 오크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계속 달렸다.
오크가 향하는 곳은 로자임 왕국의 방향이었다.





"이제 거의 도착했군."

오크의 정체는 바로 위드였다.
위드는 깡마른 오크 카리취로 변신해서 열심히 달려 절망의 평원을 횡단하였다.
위드가 제일 먼저 방문한 곳은 유로키나 산맥에서 가까운 유배자의 마을이었다.
위드의 설득에, 그곳의 주민들은 불사의 군단과이 전쟁에 참여하기로 했다.

"오크는 싫지만, 불사의 군단이 침략한다면 아무도 살아남지 못하겠지. 우리가 일구고 있는 땅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싸울 것일세."

유배자의 마을에서는 최대한 많은 전사와 대장장이를 모아서 유로키나 산맥으로 보내기로 했다.
다른 유배자의 마을들도 사정은 그리 다르지 않았다. 대부분 불사의 군단과의 전쟁에 참여하기로 했다.
이처럼 그들을 설득하는 자체는 어렵지 않았지만, 문제는 이동이었다.
절망의 평원 각 지역에 흩어져 있는 유배자의 마을을 일일이 방문해야 하는 것이다.

'힘들어 죽겠다.'

노가다로 단련된 위드조차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을 정도의 일이었다.
맨몸으로 최대한 무게를 줄이고 달려도 힘든데, 깡마른 오크 카리취의 조각상은 조각 변신술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니 어디에 버릴 수도 없다.
게다가 배낭의 무게가 등을 짓누르고, 다리는 자신의 몸이 아닌 것만 같다.
처음 며칠간은 그나마 조금 괜찮았다.
체력도 정상이었고 평원을 달리는 것도 재미가 있었다.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 될 위험한 몬스터들!
그 몬스터들을 멀리서 피해 가는 것도 나름대로 스릴이 넘치는 일이었다.
절망의 평원이 10대 위험 지역 중에 하나로 선정된 것은 정보가 부족한 탓이 크다.
평원의 어느 곳에서 고레벨 몬스터들이 나오는지 아는 이들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위드에게는 절망의 평원의 지도가 있다.
평원에 퍼져 있는 유배자의 마을과 몬스터들 그리고 결정적으로 들어가서는 안 될 위험 지역에 대한 정보까지 세밀하게 적혀 있는 지도!
이 지도를 보며 감당할 수 없는 몬스터 서식지는 피해서 달렸으니 그리 심하게 위험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영역을 벗어나서 제멋대로 활개 치며 돌아다니는 떠돌이 몬스터만 조심한다면 대체로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다.
평원이 위험하다는 것은, 멋모르고 들어와서 강한 몬스터들에게 도륙당한 이들이 퍼트린 말들이었다.
하지만 일단 길은 알고 있다고 해도, 위드는 시간에 쫓기는 몸이었다.
20일내로 돌아가야 했으니 최대한 먼 거리를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어느 정도 체력이 있을 때에는 큰 체력 소모를 무릅쓰고 네발로 달렸다.
네발로 질풍처럼 내달리는 깡마른 오크 카리취!
몬스터를 최대한 피하기 위해서 24시간 주위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했다.
음식도 달리면서 먹을 정도였다.
그러면서 과도하게 체력을 소모했더니 병에 걸리고 말았다.

-과로하셨습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지나침 체력을 소진하였으므로 온몸에 힘이 빠집니다.
체력이 저하되고, 힘과 민첩이 하락합니다.
충분한 휴식을 권해 드립니다.
만약 휴식을 취하지 않을 때에는 과로사하실 수도 있습니다.

감기에 이어서 과로사까지!
평원에서 저무는 해를 바라보며 씁쓸하게 쓰려져서 죽는다면 얼마나 비참할 것인가.
아마 달리기로 과로사한 최초의 사람이 될지도 몰랐다.
그러나 위드는 이 메시지를 보고 화가 났다.

'그동안은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구나!'

나름대로 노가다 정신으로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야 이런 메시지를 보다니! 지금까지의 나태한 삶, 어중간하게 노력했던 생활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의욕은 머릿속에 남아 있을 뿐.
쏴아아아!
비가 내렸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폭우가 쏟앚ㅆ다.
절망의 평원 전체에서 쏟아져 내리는 장대비!
메마른 대지가 수분을 머금었다.
웃자란 풀들이 싱그러움을 발산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위드에게도 장관이었다.
장대비 속을 달리면서 그간의 열기를 식혀 주는 좋은 효과를 내기도 했던 것!
그러나 비가 그치지를 않았다.
쏴아아! 쏴아아! 쏴아아아아아!
무려 사흘 밤낮으로 내리는 비였다.
대지 위에 물웅덩이가 생기고 심지어는 급류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엄청나게 불어난 물이 강물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위드는 물에 휩쓸려 가지 안히 위해 안간힘을 다해야 했다. 누구 도와달라고 할 사람도 없다.
평원에서 오로지 혼자만 있었으니 도움을 청할 곳도, 숨을 곳도 없다.
땅은 진창으로 바뀌고, 그 안에서 힘든 발걸음을 옮기는 위드!
본래 로열 로드에서의 기후 변화는 매우 지독하다.
그렇기 때문에 각종 정보 사이트에서는 기후에 대해서 토론을 벌일 정도였다. 하지만 위드가 다니는 곳은 아직 제대로 된 탐험이 이루어지지 않은 영역.
지도만 들고 있을 뿐이지 어떠한 자료도 없었다.

"겨울...싫다! 취이이익. 여름도... 진짜 싫어! 그냥 봄과 가을이 최고다."
위드는 수없이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걸었다.
그렇게 비를 맞으면서 걷자 몸에서 힘이 빠지고 열이 났다. 이때 충분히 휴식을 취해야 했지만, 이 메시지를 무시했다.

'과로쯤이아 아무것도 아니지.'

위드는 더 열심히 달렸다.
시간이 촉박했으니 더욱 서둘러야 했다.
그러면서 몸을 함부로 대했더니 금방 결과가 나왔다.
달리는 속도가 느려지고 배낭이 점점 무겁게 느껴진다.
눈 밑에는 시커먼 다크 서클이 생기고, 얼굴빛은 파리하게 변했다.

-중증 과로에 걸리셨습니다.
체력의 회복이 중단되고, 생명력이 조금씩 하락합니다.
과로사를 막기 위해서는 반드시 휴식을 취해 주셔야 합니다.

절망의 평원 한가운데에서 과로사를 하다니@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위드는 약초를 씹었다. 체력 회복에 좋은 약초를 먹으면서 억지로 피곤한 몸을 이끌었다.
과로로 힘겨운 몸을 이끌면서 달려와 겨우 로자임 왕국에 6일만에 도착을 했다.
세라보그 성이 눈에 둘어온 것은 정확히 7일 만이었다.

"조각 변신술 해제!"

위드는 오크 상태를 해제한 채로 잠시 성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살아서 돌아온 것이 기적과도 같았다.
절망의 평원을 횡단하는 건 그만큼 위험한 일이었다.
몬스터를 피해서 오는 게 위험한 게 아니라, 과로로 죽지 않는 것이.
위드는 성문 앞에 한참이나 멍하니 앉아 있었다.
온몸에 힘이 풀려서 일어날 수도 없을 정도였다.
주변을 지나던 유저들! 특히 여성 유저들은 위드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힘내세요."

"열심히 사세요, 아저씨. 절대 삶의 희망을 버리면 안 돼요!"

"......"

굴욕!
남들은 거지가 아니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위드는 조용히 동전을 챙겼다.

'3실버 14쿠퍼 벌었군.'

중학교에 다닐 때에는 정말 먹을 것이 없었다.
정부에서 매달 조금씩 나오는 돈으로는 여동생을 입히고 배불리 먹이기에도 벅찬 시절이었다.
그때는 쓰레기까진 아니더라도, 근처 편의점에서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들을 얻어 먹어야 했다. 그런 기억이 있는 위드에게 돈은 언제나 가치있는 것이었다.

"끄응!"

위드는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나도 지쳤다.
로열 로드의 가상현실 시스템이 이토록 제대로 만들어졌을 줄이야.
육체적인 것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상당히 피로했다.
7일간 묵묵히 달리기만 하다니, 웬만큼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버티기 힘든 기간이었다. 만약 네발 뛰기 스킬을 사용하지 않았더라면 더 많은 시간이 걸렸으리라.
위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는 성안으로 들어가야 할 때였다.




위드는 마판과의 약속 장소인 중앙 분수대로 향했다.
로자임 왕국의 유저들은 이전보다 확실히 늘어나 있었다. 이제는 중앙 대륙과 비교해도 그다지 사람이 없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특히 변경의 국가 중에서도 로자임 왕국의 인구 증가율은 경이로울 정도였다.
신규로 시작하는 유저들의 상당수가 로자임 왕국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사자 괴물 상의 효과가 컸다.
명작 사자 괴물 상은 여러 회복 능력을 비롯해서 능력치를 상승시켜 준다. 성문 근처에서 간단한 몬스터를
사냥하는 이들에게 이 사자 괴물 상의 효과는 말할 필요도 없는 것!
게다가 로자임 왕국에는 아직 미개척 지역도 많고 한창 모험이 강조되고 있으니, 이곳에서 시작하는 유저들이 더욱 늘어나는 것이다.
물론 그리 오래갈 것 같진 않았다.

'다른 왕국이나 제국에도 조각가나 화가, 예술가들이 나타난다면 유저들은 다시 분산되겠지.'

사자 괴물 상으로 인하여 조각사라는 직업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다. 예술과 관련된 직업들이 다시금 관심을 받게 되었다.
이들이 다른 왕국에서 명작이나 걸작을 만들면 로자임 왕국만의 이점이 사라진다. 그때가 되면 초보가들은 다시 분산될
것이고, 예술을 바탕으로 한 직업들도 정착될 것이다.

"위드님! 여기입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는 사이, 중앙 분수대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마판이 기다리고 있다가 손을 흔들었다.

"와! 정말 오랜만이네요. 여기 주문하신 물건들을 모아왔습니다."

마판은 뛰어난 상인답게 모든 준비를 마쳐 놓고 있었다.

"은 화살 200만개, 은으로 된 제련 재로도 충분히 구했습니다. 약 6만개 정도의 무기에 은도금을 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무려 10대 분량의 마차에 적재된 장비들.

"이래저래 싸게 사들여서 구매에 쓴 돈이 6만 5천 골드입니다. 7만골드로 계약을 했지만 원금 정도만 주셔도 되는데요. 이 금액은 외상으로 할까요?"

그러면서 마판은 슬슬 눈치를 보았다.
사실 위드 덕분에 직접 얻은 소득도 크지만, 페일 등의 파티와 검치 들을 알게 되어 수입이 상당히 늘었다.
이번에도 구매를 하면서 거래 스킬이 상당히 늘어나지 않았던가.
그런 만큼 거금의 구매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할인이나 분할 상환 요청도 받아 줄 작정이었다. 그동안의 친분이 있으니 본전만 쳐도 불만이 없었다.
그런데 위드는 고개를 저었다.

"7만골드. 전액 현금으로 지불하겠습니다."

"헉! 정말요?"

위드야 물론 알부자였다. 충분히 7만골드를 낼 수 있다. 하지만 마판은 더욱 그럴수록 불안해졌다.
대체 왜 이러는가!
위드가 이런 일을 할 때에는 절대로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위드는 한마디를 더했다.

"다만 착불로, 물건 수령지에서 전액을 드리도록 하죠."

"......"

마판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나마도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어차피 마차 10대 분량의 물건들을 위드가 직접 옮기진 못할 테니까, 어느 정도는 예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어디로 보내 드릴까요?"

"절망의 평원."

"......"

"유로키나 산맥."

"......"

"10일 내로 보내 주셔야 됩니다."

"커헉!"

마판은 끝내 피를 토하고 말았다.
마판은 절대로 절망의 평원으로 가지 않겠다고 버텼지만, 위드가 준 지도에 혹해서 가기로 했다.
절망의 평원 지도!
이것이 있다면 안전한 지역만 거쳐서 가면 되니 그리 위험하진 않을 것이다.

'잘됐어! 유배자의 마을이라니, 더 큰 상인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회다.'

아직 다른 상인들이 찾지 않는 마을들과의 거래를 시작한다면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으리라.
명성과 돈. 양쪽 모두 얻을 수 있는 기회였다.

"서둘러야겠군요."

마판은 허겁지겁 보급을 마치고 즉시 절망의 평워느올 항했다.
위드는 따로 길을 가기로 했다.
텔레포트 게이트에는 무게 제한이 걸려 있지만, 큰 짐을 들고 있지 않은 혼자라면 곧장 절망의
평원까지 날아갈 수 있다. 그러나 다시근 절망의 평원을 횡단하면서 남아 있는 유배자의 마을을 방문해야 했던 것이다.
위드는 볼일을 조금 보고 마구간을 들러서 말을 1마리 구입한 뒤에 성문으로 향했다.

파아앗!
빛과 함께 포탈을 타고, 붉은 옷차림을 한 미녀와 대머리의 수도승이 도착했다.

"여기에 조각가가 나타났다고?"

"그런 소문이야, 일단은. 일부러 사람을 풀어놓은 보람이 있었네."

"귀찮구, 조각품 하나 사기도. 우리들이 하찮은 조각품따위를 사려고 로자임 왕국까지 왔다면 아무도 믿지 않을걸. 그 빌어먹을 퀘스트만 아니었어요, 젠장!"

"후훗. 이제 막바지잖아. 우적의 내부에만 들어가면 우리가 얻고자 하는 걸 얻을 거야."

프시케와 마커는 대로를 활보했다.
최고급 벨벳으로 만들어진 붉은 로브로 육감적인 몸을 감싸고 있는 프시케와, 거대한 도를 들고 다니는 마커.
그들의 특색 있는 복장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설마... 저 사람들......"

"적염의 마녀와 도광이다."

"저들이 로자임 왕국에는 왜 나타난 거지?"

여기저기에서 놀라 외치는 소리.
그만큼 그들이 유명인이라는 뜻이리라.
프시케와 마커는 익숙한 듯, 주변인들에게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압도적인 힘과 박력이, 일부러 보여 주려고 하지 않아도 울룩불룩한 근육으로 나타난다.
머리마저 근육으로 이루어져서 전혀 고민이나 생각 따위를 하지 않을 것 같은 마커였지만 잊지 못하는 일들도 있었다.

"프시케, 예전에 우리가 했던 게임 말이야."

"응?"

"그때의 그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마커, 네가 말하는 사람이라면 역시 위드밖에 없겠지."

"그래. 나에게 유일하게 굴욕감과 패배감을 맛보게 만들었던 놈."

"내게도 마찬가지였어."

현재 로열 로드를 플레이하는 고수들 중에는 한때 마법의 대륙 유저들이 많았다.
마법의 대륙에서는 수많은 강자들이 위드를 찾았다.
아직 파헤치지 않은 비밀들이 위드에 의해 개척되고, 가장 강한 사냥터에서 혼자 사냥을 하는 그의 명성이 너리 퍼져 나갔을 무렵이다.
마커와 프시케도 열심히 위드의 뒤를 따라다녔던 이들이었다.
그들은 멀리서 그의 사냥을 지켜봤다.
유스운 이야기지만, 위드는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 같았다.
던전의 진입로에서부터 모든 몬스터들을 죽이고 들어간다. 강한 몬스터들을 죽이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의 추종자들은 윋가 남겨 놓은 흔적들을 보며 전율했다.
검을 휘두르면 하나의 생명이 명멸한다.
당시의 위드는 정말로 무서웠다.
싸우고 투쟁하고 쟁취한다.
그래서 다들 위드를 흑기사라고 불렀다.
어느새 프시케와 마커는 동쪽 성문 근처에 도착했다.

"정보에 의하면 조각가가 있는 곳이 이 근처라고 했는데......"

"바로 저기 있네."

프시케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서는 위드가 말을 타고 떠나려고 하는 중이었다.


위드는 말을 잘 쓰다듬었다.
절망의 평원에서 올 때에는 그렇게 고생을 했지만, 돌아갈 때에는 말을 타고 갈 수 있다.
물론 절망의 평원에도 야생마들이 뛰어놀았다.
기사나 용병!
이런 직업들은 어디서든 야생마를 잡아서 길들일 수 있다.
승마술을 이용한다면 같은 말이라도 매우 빠른 속도로 달리게 하는 게 가능했다.
그러나 조각사에게는 말과 관련된 스킬이 따로 없었다.
참고로 드루이드들은 스피릿 오브 울프, 달리는 속도를 빠르게 하는 마법을 시전할 수 있고, 바드는 노래로 더 빨리 움직일 수 있다. 그러나 조각사는......

'오로지 노가다의 직업이지.'

위드는 절망의 평원을 달리면서 이제야말로 조각사란 직업에 대해 진정한 이해를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랴! 어디 가 보자!'

위드가 애지중지 말을 몰고 나가는데, 길을 막는 두 사람이 있었다.
프시케와 마커.
적염의 마녀와 도광.
프시케가 입을 열었다.

"혹시 조각사가 맞나요?"

"제 직업이 맞지만, 무슨 용건이라도 있습니까?"

위드는 번거로운 일은 질색이었고, 지금은 시간도 없었다.
프시케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맞게 찾아온 것 같네요. 피라미드를 조각하셨죠. 혹시 전갈 모양의 조각품도 파나요. 젊은 아저씨?"

"글쎄요. 예전에 저의 조각품을 사 주신 분인 것 같은데, 미안하지만 기념품은 이제 더 이상 만들어 드리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몇 실버 벌기 위해서 시간을 쓸 수는 없었다.
공돈이라면 사양하지 않는 위드였지만, 그 시간에 직접 사냥을 하는 편이 돈을 더 많이 획득할 수 있ㅇㅆ다.

"저희들이 아주 급한 사정이 있어서 그래요. 꼭 필요해서 그러는데, 만들어 주시면 안될까요?"

"안 됩니다. 다른 조각사를 찾아보시죠."

위드는 딱 잘라 거절했다.
아예 더 이상 그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도 않은 듯한 태도였다.
그런데 프시케가 작은 보석을 내밀었다.

"다른 조각사라면 저희도 많이 알아보고 왔어요. 아마도 그쪽 분은 최소한 중급 조각술을 익히고 계실 테죠.
이건 조각술 스킬이 중급에 올라야만 깎을 수 있는 조각품이에요."

일이 더더욱 번거로워지고 있었다.

"제 스킬의 수준이 낮아서 곤란합니다. 지금은 시간도 없고요."

"어려운 줄은 알지만 부탁드려요. 다 알고 왔으니, 저희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 주신다면 이 보석을 드릴께요."

반짝반짝 빛을 내는 붉은색 루비!
보석 거래를 해 본 경험이 있기에 위드는 시세에 아주 밝은 편이었다.

'판다면 최소한 400골드는 받겠구나. 주인만 잘 만나면 500골드에도 팔 수 있는 보석이다.'

그렇지 않아도 7만 골드나 되는 거액이 나가서 속이 쓰리던 상황!
약간이나마 보충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위드는 곧바로 말에서 내렸다.

"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만들 수 있습니다. 꼭 저에게 맡겨주세요!"

프시케와 마커는 조금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보석을 보여 주자마자 완전히 돌변하는 사람이라니! 그러나 위드에게는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 7개만 만들어주면 좋겠네요. 지금 바로 가능하죠?"

"헛, 7개나요?"

"왜요, 좀 많은가요?"

프시케가 살짝 걱정스러운 눈으로 묻자, 위드는 슬픈 눈빛을 했다.

"아시다시피 저는 예술가입니다. 예술을 진심으로 사랑하기에 험난한 조각사라는 직업을 선택할 수 있었지요.
다 똑같은 전갈을 만들더라도, 독창적인 느낌이나 기법을 가미하기 위해서는 많은 정성이 필요한 법이랍니다."

위드의 눈빛은 맑고 깨끗했다.
마치 도를 닦는 사람처럼, 평생을 예술에 바치 사람과도 같은 눈빛이었다.
한 푼이라도 더 받기 위한 아부와 필요할 때마다 나오는 예술가 정신!
이것이야말로 가난한 조각사의 삶을 그나마 윤택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아!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그러면 전갈을 만들어 주시는 수고비로 보석을 1개 더 드리죠. 이 재료를 가지로 만들어 주실 수 있겠죠?"

프시케는 7개의 붉은 원석을 건네주었다. 그 순간 그녀는 주위의 시선에 무척 신경을 쓰고 있었다.
옆에서 도광은 칼자루에 손을 올렸다. 수상쩍은 움직임이라도 보인다면 즉시 위드를 베어 버릴 참이었다.
위드는 받아 든 원석을 잠시 살펴보았다.

'이걸 깎으려면 중급 조각술이 필요하지. 내게는 자하브의 조각칼이 있으니까 그전에라도 가능했겠지만.'

초급 조각술일 때에는 상당히 까다로워서 건드리기도 힘든 원석이었다.

"옛, 손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생생하게 살아 있는 듯한 전갈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위드는 오랜만에 재신이 강림했다고 기뻐하면서 작업을 시작했다.
프시케와 마커의 영향인지, 주변에는 다른 사람들이 다가오지도 않았다.

"그런데 마커."

"왜, 프시케?"

"그도 지금 이 게임을 하고 있지 않을까? 위드 말이야."

위드?
열심히 조각품을 깎고 있는 위드의 손이 잠깐 멈칫했다. 그러나 곧 익숙하게 다시 조각을 한다.
이 넓은 세상에 꼭 자신의 이야기란 법은 없는 것이다. 단지 이름만 같은 다른 사람일 수도 있으니까.

"음, 그럴 수도 있지. 마법의 대륙의 계정을 팔았다고 들었으니 어쩌면 이 게임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어.
인터넷상의 소문으로는, 그가 이 게임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프레야 교단의 성기사가 되었다는군.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말이야."

"개과천선이라도 한 것인가? 거치적거리는 것은 닥치는대로 치워 버렸던 그 흑기사가."

위드의 손이 잠깐 또다시 떨렸다. 그리고 슬며시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의 얼굴을 보았다.
마커가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그를 꼭 한번 만나 보고 싶었는데......"

"알고 있어, 마커. 네가 2년 전에 이 게임을 시작할 때 마지막까지 망설였던 이유가 그와의 승부를 마무리짓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최고로 꼽히는 그를 한 번은 꺾어 보고 싶었지."

"마법의 대륙을 했던 사람들이라면 모두 마찬가지 심정이었을 거야."

"절대적인 전장의 카리스마 위드, 그를 내 발아래에 두고 싶었지. 하고 있다면 그를 만나고 싶군. 아니,
꼭 만나게 될거야. 대륙은 넓지만 만날 사람들은 반드시 만나게 되어 있으니."

"만나면 어떻게 할 건데?"

"반갑게 인사를 나누어야지. 그를 만나면 아주 반가울 테니까."

"호호호."

프시케가 고소를 터트린다.

"나와 생각이 같네. 나 역시 그를 만나게 된다면,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싶어."

"최소한 천 번 정도는 죽여 줘야지."

위드의 조각하는 손길이 매우 빨라졌다. 거의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조각칼을 놀리는 그의 모습은, 저의 자하브가 현신할 것만 같았다.

"조각사님, 천천히 하셔도 되는데......"

"아닙니다."

위드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조각품을 완성해서 프시케에게 보여 주었다.

"아주 잘 만드셨네요."

프시케는 전갈 조각품을 모두 받아 잘 챙긴 후에 보석을 내고 셈을 치렀다.

"이제 드디어 그곳에 들어가게 되는군."

"그래, 어서 가도록 하자."

볼일을 마친 마커와 프시케가 돌아서서 걸어간다.
그들이 멀어지고 나자 위드는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휴우! 역시 마법의 대륙을 했다는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하지 말아야겠다.'

당시의 높았던 명성만큼이나 위드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인물도 한둘이 아니리라. 어쨌거나 덤벼드는 자들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죽여 주었으니.
마커와 프시케도 그때 이름을 몇번 들어 보긴 했다. 하지만 가상현실을 통해 실물과 같은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기묘한 동행

로자임 왕국의 용무를 마치고 다시 절망의 평원을 횡단하는 위드!
이번엔은 말을 타고 있었다.
갈색 말.
길가에는 윤기가 좔좔 흐르고 날렵한 발목과 근육질의 몸을 가진, 가격은 비싼 편이 아니지만 널리 애용되는 말이었다.
괜히 겉멋만 든 사람들이 백마나 흑마를 이용하는 법이다.
위드는 철저하게 자린고비 정신을 발휘해서 갈색 말을 구입했다.

"좋아. 달리자. 어서 달리는 거야!"

따가닥! 따가닥!
경쾌한 소리를 내며 말이 질주한다.
말은 평원ㅇ서 그 이동 능력이 최대로 발휘된다.
산악 지형이나 늪지에서는 거의 효과를 보기 힘들지만, 지금은 질풍처럼 달리고 있었다.

"과연 돈값을 하는군."

위드는 이래서 사람들이 말을 사서 타는구나 생각했다.
돈은 쓴 만큼 돌아온다!
그렇기에 위드는 생각했다.

"역시 과감한 투자만이 살길이야."

겨우 3골드짜리 갈색 말을 사고도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위드의 자린고비 정신의 결정체였다.
과연 말은 걷거나 달리는 것과는 비할 바 없이 빨랐다.
단 하루 만에 국경에 도착하고, 이틀째부터는 절망의 평원을 달렸다.
평원에서부터 위드는 말을 특이하게 움직였다.
동서남북 어디로도 탁 트인 평원에서, 일부러 남도쪽으로 5시간쯤 말을 몰았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부터는 다시 북동쪽으로 말을 몰았다.
결국 동쪽으로 나아가고는 있지만, 지그재그로 움직이면서 쓸데없는 시간을 낭비한 것이다.
그렇게 몇 시간을 나아가자 절망의 평원에서 사냥을 하는 원정대를 만났다.
오베른을 비롯하여 지친 원정대원들이 둥글게 앉아서 쉬고 있었다.
그들은 잔뜩 경계심을 키우고 있던 도중에, 말을 타고 달려오는 위드를 보았다.

"세상에....."

"이곳에 오는 사람이 있다니!"

오베른 들은 모두들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절망의 평원에 들어오고 난 이후 그들은 끊임없이 몬스터와 전투를 치렀다.
다들 로자임 왕국에서는 한가락씩 한다고 뻐기면서 전투의 치열함을 경험해 보고 싶다 했지만, 절망의 평원에서는 그 말이 속으로 쏙 들어갔다.
엄청나게 강한 몬스터들!
어비스 나이트, 스톰 캐스터, 베놈 로드, 다크 랜서, 나이트 로드!
레벨 350이 넘는 몬스터들이 절망의 평원에 널려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평원에 있는 괴수들이나 맹수들!
함정을 파고 숨어 있는 기습형 몬스터, 흡혈 식물들.
가끔씩은 레벨 400대가 넘는 놈들도 출몰한다.
오만가지 위험이 도사리는 지역이었다.
그런 곳에서 사냥을 하고 있는 만큼 원정대의 눈빛은 하루만에 거무죽죽하게 죽어 있었다.
오베른들은 위드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위헙합니다. 이곳은 절망의 평원인데... 지금이라도 어서 말을 돌려서 돌아가십시오! 원하다면 우리들이 안전한 곳까지 데려다 주겠습니다."

오베른은 상당히 예의가 바르고 매너가 좋았다. 몬스터의 공격을 받으며 타인을 지켜 주는 워리어는, 대체로 듬직한 성품을 가진 이들이 택하는 직업니다.
그러나 위드는 성격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 사실 아주 나쁜 편에 속한다고 할 수 있었다.
위드는 그대로 말을 타고 원정대가 있는 곳을 지나쳐 버렸다.
완전하 무시였다.
물론 그들이 회수하지 않은 잡템과 가죽들!
그것은 말을 타고서도 몸을 굽혀서 모조리 집어 갔다.
두 다리로 안장에 몸을 지탱하고 허리가 끊어지도록 수그리는 위드.

'반드시 집어야 돼!'

돈에 대한 이글거리는 욕망!
위드는 잡템들을 주우면서 그대로 말을 타고 평원을 내달렸다.

"어? 그냥 가 버리네."

"목숨이 아깝지 않은 걸까요?"

원정대원들은 위드를 보며 다들 의아해했다.

"뭐, 죽는 법도 가지가지니까."

"이런 식으로 여행이나 모험을 즐기는 사람도 1~2명쯤은 있겠죠."

그러나 오베른이나 플루토 등의 의견은 조금 달랐다.
그저 죽으러 가는 것으로 보기에는 위드의 행동이 다소 미심쩍었던 것이다.
오베른의 머릿속에 스쳐 가는 생각.
처음 절망의 평원에 진입해서 혼을 잃어버린 늑대를 사냥하였을 때에도 오크 1마리가 지나가면서 잡템을 주워 갔다.

"설마......"

마침 플루토도 오베른을 보고 있었다.

"그 오크가!"

"진짜로 유저였나?"

"유저라면 역시......"

"오크 유저라면 지금 떠오르는 건 1명 밖에 없죠."

그때에는 다른 원정대원들도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차렸다.
그들 역시 로열 로드에 푹 빠져 사는 사람들이었으니까.

"명예의 전당!"

"동영상에 나온 오크다!"

"전혀 다른 몸매라서 몰랐던 거야! 저 더러운 인상을 보니 확실해."

"그렇게 추악하고 야비하게 생긴 오크는 없으니까!"

"퀘스트 장소가 바로 절망의 평원이었다!"




위드는 말을 타고 달리면서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이곳까지 오는 내내 원정대원의 흔적이 평원에 널려 있었다.
그들이 줍지 않고 버린 각종 잡템들.
눈에 보이는 곳에 있었지만 위드는 주우러 갈 수가 없었다. 혼자서는 감히 가기 힘들 정도로 위험한 몬스터들이 있는 영역이었기에!
실상 원정대원들은 절망의 평원에서도 몬스터가 가장 많은 곳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본래 평원은 아무것도 없는 듯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각 몬스터마다 영역이 있어서, 그곳을 침범하면 그들의 공격을 받는다.
흡사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힌 몬스터들의 영역.
위드의 경우에는 지도를 가지고 있으니 교묘하게 피해서 그 경계선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러다 ]
보니 말을 모는데에도 복잡하게 이리저리 경로를 구성해야 했지만 말이다.
평원을 달린 지 꼬박 하루가 지났을 때부터는 말의 입에서 거품이 흘러나왔다.
말도 과로를 한 것이다.
오크 카리취의 조각상이 든 배낭까지 옆구리에 달고 있었으니, 말은 더더욱 빨리 지쳤다.
코통 주인이라면 수고했다고 갈기라도 쓰다듬어 주고, 당근이라도 하나 먹일지 모른다. 물론 넉넉한 휴식도 주었으리라.

"더 달려. 넌 할 수 있어. 달리기 위해 태어난 종족이 자신의 한계조차 확인하지 않느다는 건 너무 슬픈 일이 아니겠니?"

퍼벅!
히히힝!
위드는 말에 사정없이 박차를 가했다. 그러자 말은 조금 더 힘을 내서 달렸다. 실로 죽을힘을 다하는 것이엇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않아서 말은 또 기진맥진했다.

"고생이 많지? 조금만 더 가면 돼. 도착하면 편히 쉬도록 하자."

그 말을 믿고 말은 더 열심히 달렸다.
위드의 카리스마, 통솔력, 지휘 능력이 가엾은 말에게도 영향을 미친 것이다. 강력한 신뢰에 바탕하여, 말은 어서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 달렸다.
그러나 한참을 달려도 위드는 쉬게 해 주지 않았다.

"조금만 더 가자."

말은 달렸다.

"거의 다 왔어."

말은 쉬지도 못하고 계속 달렸다.

"이젠 조금만 가면 돼."

악독 주인의 정도를 넘어서서 가히 벼룩의 간까지 빼먹을 수준!
혹사당한 말은 발을 절뚝이다가 힘없이 쓰러졌다.
말을 오래 타기 위해서는 지칠 때마다 휴식을 취하게 만들고, 먹이도 주고 돌봐야 한다.
그런데 위드는 말에게 충분한 휴식을 줄 정도로 시간이 넉넉하지 않았으니, 마른 수건을 쥐어짜 내듯이 최대한 탄 것이었다.

"이제 넌 자유다. 네가 가고 싶은 곳이면 어디든 가도 돼. 잘 살아라."

위드는 잠시 말을 다독여 주고는 배낭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깡마른 오크 카리취의 조각상이었다.
말이 다시 체력을 찾을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으니 다시 오크로 변신해서 달리려는 것이었다.

"조각 변신술!"



로자임 왕국까지 오는 데에 7일.
말을 죽어라 혹사시킨 덕분에 체력의 소모 없이 상당히 머 거리를 올 수 있었다.

"취이익! 취익!"

오크로 변신하여 열심히 달리는 위드.
그럼에도 시간은 넉넉하지 않았다.
로자임 왕국으로 갈 때에는 중앙 쪽에 있는 유배자의 마을을 방문했고, 이번에는 변방 지역의 마을들을 거져 가야 했다.
돌아가는 거리 때문에 최소한 12일은 달려야 했다.

"그래도 아직 퀘스트까지는 15일이 남아 있으니까."

이대로라면 무난하게 유로키나 산맥으로 돌아갈 수 있을듯싶다.
그렇게 평원을 열심히 달리는데, 문득 저 앞 언덕 위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위드를
정면으로 보고 있는 게 아니라 등지고 서 있어서 뒷모습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인간? 여기에 유저가 올 리는 없고... 마을 주민인가 보군. 췻!"

유배자의 마을은 절망의 평원 곳곳에 자리를 잡고 흩어져 있다.
마을 주민들은 몬스터들이 가득한 이곳에서 사냥이나 농사를 하며 살아가고 있읐으니, 그들을 발견한다고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취이익, 근처에 마을이 있었나?"

위드는 별 생각 없이 지나치려고 했다.
점점 다가갈수록, 그 사람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가냘픈 등.
허리까지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라.

'여자로군.'

비록 뒷모습에 불과하지만 참 아름답다는 느낌이 들었다.
언덕 위에 서서 황혼을 바라보는 여인.
어쩌면 소녀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것뿐!
다다다다닥!
열심히 달리는 위드!
조금씩 여인이 가까워지고는 있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일정 거리 이상 접근하지 않은 채로 그대로 지나가려고 했던 것!
여인이 있는 곳은 언덕 위였다.
위드도 언덕을 넘어가야 했다.
아주 가까운 거리는 아니라서 상관은 없지만 어쨌든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조금씩 언덕을 오르면서 위드는 이상한 광경을 보았다.
전면에 황소를 닮은 거대한 전사가 달려들고 있었다.
쿵쿵쿵!

'평원의 사냥꾼!'

절망의 평원에 주로 출몰하는 사냥꾼.
평원의 전 지역에 걸쳐서 활동하며, 따로 고정된 영역권이 없다 살아 있는 인간을 사냥하고, 몬스터도 눈에 띄는 대로 죽인다.
바바리안이 저주를 받아 변한 것이라고 전해지는 이 몬스터의 레벨은 320정도.
기본적인 생명력이 높고, 검을 부딪칠 때마다 상대의 체력을 빼앗아 간다.
그런 이유로 굉장히 상대하기 까다로운 몬스터였다.
위드도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상대였다.

"젠장. 검 갈거나 방어구 닦기를 하나도 써 놓지 않았는데......"

열심히 달려오고만 있었으니 제대로 전투준비를 갖추었을리가 없다.
유용한 생산 스킬을 미리 써 놓고 싸우는 것과 그러지 않은 것과는 차이가 컸다.
평지에서 만났더라면 미리 알고 저 멀리 돌아갔거나 피했을 텐데, 하필이면 언덕을 올라오느라 시야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런데 평원의 사냥꾼은 위드를 노리는 것이 아니었다.
앞서서 언덕에 있던 여인!
그녀를 노리고 뛰어오고 있었다.

'잘됐다. 이 시간에 어서 도망을... 아니야, 피할 수 없다.'

위드는 그 틈을 타서 자리를 피할까도 생각했지만, 평원의 사냥꾼은 집요한 면이 있다.
목표물을 끝까지 추적한다.
내내 달려오느라 지쳐 있는 위드로서는 체력이 떨어져 있어서 도망칠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려운 싸움이 될 테니 그럴 바에야 속전속결이 나았다.
위드의 머리가 재빨리 회전했다.
상대에게는 큰 빈틈이 있었다.

'저 여자를 칠 때에 허점을 공격한다.'

사냥꾼이 여인을 향해 큰 창을 휘둘렀다.
위드는 그 틈을 타서 글레이브를 뽑아 들어 높이 치켜들었다. 최대한 힘을 집중하여 사냥꾼에게 큰 타격을 입히려는 것이었다.
여기까지는 위드의 계산대로였다. 그런데 여인은 그대로 당하지 않았따.
어느새 여인이 검을 뽑아 들었다.
눈부신 빛과 함께 뽑혀 나온 검.
그 검이 폭사하듯이 쏘아져 나가 수십 개의 검광으로 변해서 사냥꾼을 난도질했다.
놀라운 스킬. 엄청난 쾌검이었다.
겁도 없이 덤벼들던 사냥꾼은 대번에 생명력을 전부 잃고 절명했다. 그리고 여인이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위드는 정말로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녀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너무나도 잘 아는 얼굴!
그녀는 바로 서윤이었던 것이다.

"취, 취익!"

위드는 글레이브를 머리 위로 든 채로 굳어 버렸다.
겉보기에는 완전히 흉악하게 생긴 깡마른 오크가 그녀를 덮치기 직전의 상황이었다.



로자임 왕국을 떠난 서윤은 먼 길을 떠나 절망의 평원까지 왔다.
광전사.
모든 종류의 무기와 격투술에 능하며 전투 시간이 길어질수록 진가가 드러나는 직업. 쉽게 지치지 않고 피를 볼수록 힘과 생명력이 늘어난다.
즉 전투가 오래 지속될수록 강해지는 특이한 직업이었다.
서윤은 자신의 직업처럼, 미친 듯한 전투를 벌였다.
절망의 평원에서는 아예 낮과 밤이 따로 없었다.
해가 떠 있을 때에는 일부러 몬스터를 찾아다녔고, 밤에는 더욱 강한 몬스터들이 그녀의 냄새를 맡고 모여들었다.
전투, 전투, 전투!
그녀가 지나간 곳에는 몬스터의 시체만이 남았다.
가끔은 길을 잃고 몬스터의 소굴로 들어가는 바람에 죽기도 있다. 로열 로드가 열리고 난 이후로
지금까지 오로지 전투만 해온 그녀였지만 끝도 없는 몬스터의 합공에는 감당이 되지 않았던 것.
그러나 그녀는 다시 살아나면 또다시 전투를 했다.
천천히 몬스터들을 유인하고 하나씩 처리하면서 싸웠다.
그래도 반드시 죽을 수 밖에 없는 모모한 전투는 가능하면 하지 않았다.
죽어서 레벨이나 스킬 숙련도가 떨어지는 것은 그녀에게 별달리 아쉽지도 않았다. 애초에 레벨이나 스킬 숙련도 같은 것은 무시한 채로 싸우고 있는 그녀였기 때문에.
다만 죽게 되면 24시간 동안 다시 접속을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최대한 죽지 않으려고 애썼다.
마음속에 진 응어리를 풀어 버리기 위한 전투!
그저 몬스터를 상대로 싸우고 싸울 뿐인 그녀의 눈이 차가운 빛을 발했다.

'적이야.'

서윤의 눈이 한기를 품고 가까이 다가온 오크를 보았다.
그녀는 전투를 치르면서 긴장을 늦추었던 적이 없었다.
그녀의 손이 검을 잡았다.



서윤.
위드는 그녀를 보는 순간 몸이 딱 굳어 버렸다.
예쁘다. 과거에도 이미 보았지만 다시 보니 정말 눈을 어디로 두어야 할지 모를 정도의 아름다움이었다.

'인간이 이렇게 예쁠 수 있다니......'

얼굴에서 광채가 일어나는 듯했다.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는 눈과 코와 입이 한없는 매력을 발산한다.
서윤을 이처럼 아주 가까운 곳에서 다시 보게 된 순간, 위드는 절망감을 느꼈다.
그동안 만들었던 조각품들, 그것들은 실제 그녀의 외모에 훨씬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가능하다면 하루 종일이라도 서윤의 얼굴을 이렇게 가깝게 보고 싶었다. 절대로 질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한시라도 빨리 도망쳐야 했다.
지금까지 지은 죄가 한둘이 아니다.
다시는 만난 일이 없을 거라 믿고 그녀를 모델로 삼아 만든 조각상이 셀 수도 없을 지경이지 않은가!
평원의 사냥꾼을 일격에 보내 버린 것처럼 허락도 없이 조각상을 만든 게 들키면 위드도 그 신세가 되지 말란 법이 없다.
아무리 위드가 강해졌다고 해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서윤은 고레벨이었다.
당시에 그녀가 착용하고 있던 아이템들은 모두 300초반의 물건들.
1년 넘게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 사냥을 해 왔다면 굉장히 높은 레벨이 되어 있으리라.

'큰일이다.'

게다가 누가 보아도 지금은 아주 묘했다.
오크가 여인을 덮치려는 상황이었다.
위드는 침을 꿀꺽 삼켰다. 물론 입이 있으니 말을 해서 변명을 할 수도 있다.

"취, 취이익!"

그런데 급하니까 말이 안 나오는 오크의 육체!

"취취췻!"

"취췩."

"취이이이잇!"

말을 하려고 할 때마다 위드는 열심히 서윤에게 침만 튀기고 있었다.
화악!
성누의 몸에서 뚜렷한 어떤 기운이 밀려든다.
살갗을 저미는 듯한 느낌.
저릿저릿한 압박감과 위축되는 몸.
그것은 바로 살기였다.








위드는 불현듯, 신분을 밝힌다고 해도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사 자신이 위드라고 밝힌다고 치자!
그래도 저 사악하고 차가운 서윤이 살기를 거두고 살려 준다는 보장이 없다.
아름다운 장미에는 가시가 있는 법.
그녀는 살인자였다.
처음 만났을 때 이미 살인자의 표시를 달고 있었다.
로열 로드에서 최초로 만난 살인자.

'절망의 평원에서, 다신 볼 일이 없을 것 같던 사람을 만나다니.'

교관의 통나무집에서 바비큐 파티를 할 때에 단 한 번 만나 봤다. 첫인상은 아름답지만, 차가워서 말 한마디 붙이기도 힘든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나 조각술을 펼치면서 그녀의 얼굴을 수없이 형상화했다.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얼굴.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그대로 머릿속에 남아 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상상 속에서 더욱 다양한 얼굴 표정들을 연구하게 되었다.
서윤의 외모!
그것은 어떤 연예인보다도 아름다웠다.

"취익!"

위드는 당당하게 눈을 부릅떴다. 그러면서 서윤을 강하게 노려봤다.
상대가 살인자라면 인간이라는 것을 밝힌다고 해도 살려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니, 오히려 잘됐다고 덤빌지도 모른다.

'이길 수 있을까?'

악으로 깡으로 싸운다고 해도 레벨이 깡패고, 아이템이 연장이다.
딱 보니까 레벨이 거의 70쯤은 차이가 나고, 아니템의 차이는 그 이상이다.

'몇 달 전에 바드레이가 370이었지. 바드레이야 지금쯤이면 적어도 390은 되었을 테고, 이 여자는 그보다 약간은 낮을 거야. 그래도 거의 최고 수준의 고수!'

위드는 웬만큼 레벨이 높은 이들은 무서워하지 않았다.
부족한 전투 능력은 스탯과 조각술, 생산 스킬로 보완한다!
로열 로드에서 돈을 벌려고 하는 위드에게 최대의 적은 살인자들이다.
이들은 강도나 다름이 없다
베르사 대륙에서 선량하게 모험을 하고 착실히 아이템을 모으려는 위드를 죽이고 아이템을 강탈하는 악독한 이들!
그러나 뒤치기 4인조와도 싸워서 이긴 적이 있었던 만큼, 살인자들을 겁냈던 적은 없었다.
그러나 서윤만큼은 꽤나 까다로운 상대였다.
저쪽도 수련관을 통과했으니 스탯에서의 우위를 자랑할 수 없다.
아무리 위드가 열심히 전투를 하며 고생을 했다고 해도, 레벨 차이가 심한 이상 스킬의 숙련도도 하늘과 땅 차이이리라.
갈수록 레벨을 올리기 힘들어지는 만큼, 고수가 될수록 스킬 차이는 더욱 심한 것이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지금은 위드의 숨겨진 힘이라고 할 수 있는 검 갈기, 방어구 닦기의 스킬을 하나도 쓰지 못한 상황이었다.
또한 전투 계열 직업일 경우에는 더욱 상위의 스킬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어떤 면으로 보나 불리한 상황!
위드는 그럴수록 더욱 눈에 힘을 주었다.
일단 뭔가 있는 척해 보이자! 강한 척을 하자!
그다음에는 기회를 봐서 최대한 빨리 도망을 치자!
즉 36계 줄행랑의 계획을 세우고 허세를 부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서윤이 알아서 검을 거두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갈 길을 간다.
위드로서는 당연히 알 길이 없었다.
몬스터와 수없이 싸워 온 서윤이었지만, 먼저 덤비지 않은 적을 공격한 적은 없음을!
위드의 눈빛을 보고 살기가 느껴지지 않자 검을 거두고 갈 길을 가는 것이었다.
위드도 멍하니 있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기서 이럴 시간이 없다.'

유로키나 산맥을 향하여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서윤도 움직이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들의 방향은 같았다.



위드와 서윤은 그날 이후로 우연치 않게 한 번 더 만났다.
이틀간 꼬박 달렸더니 서윤이 먼저 도착해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그게 무척이나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사정을 알고 나니 별일도 아니었다.
위드의 경우에는 몬스터의 영역이나 숲, 산과 같은 장소를 최대한 피해서 달린다.
유배자의 마음도 방문해야 했다.
당연히 길도 복잡하고, 더 먼 거리를 달려야 했다.
그에 비해서 서윤은 한 방향으로 걷는다. 몬스터가 나오면 싸우고 경험치와 돈까지 획득한다. 굳이 달리지 않더라고 빠리 이동할 수가 있었다.

"취, 취익!"

위드는 억울했다.
그토록 죽어라 달렸는데도 겨우 비슷한 거리밖에 오지 못하다니!
그것도 서윤은 사냥을 하면서 실속도 상당히 챙기고 있는데, 그는 오로지 달리기만 했던 것이다.
때마침 둘이 만난 장소는 유노프 협곡이었다.
이곳에서부터는 어쩔 수 없이 함께 가야 했다.
서윤은 졸래졸래 쫓아오는 오크에게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자신의 길만을 걸었다.


유토프 협곡!
절망의 평원 북쪽에 있는 협곡이었다.
이 쌍둥이 산이야말로 일종의 관문과도 같은 곳이다.
절망의 평원의 북부와 동부를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관문!
이곳을 통하지 않는다면 엄청나게 먼 거리를 돌아가야 했다. 아니면 산을 넘어야 하는데, 산등성이로 이동을 한다면 2배는 더 힘든 길을 가야 한다.

"시간 때문이라도 그럴 수는 없지, 취익!"

위드는 유노프 협곡으로 가기로 했다.
서윤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라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지만,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한다면 그리 위험하진 않으리라.
문제는 몬스터였다.
이 협곡에는 예티라는 거인 몬스터가 있다.
특이하게도 예티는 추운 지방에 주로 산다.
몸이 흰 털로 덮여 있고, 빙한 계열의 공격에 강한 내성을 가졌다.
이 몬스터의 레벨은 대략 340정도!
본래는 쌍둥이 산에서 살았지만 쫓겨나서 협곡에 서식하게 되었다고 한다.
평원에서 사냥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는 이 예티라는 몬스터를 넘어야만 하는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췩! 예티를 뚫고 가는 수밖에."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왔다.
그런데 앞서 가는 서윤이 검광을 번뜩이면 예티들이 추풍 낙엽처럼 떨어지고 만다.

"과연 강하군."

절망의 평원을 달리면서 웬만한 몬스터들은 죄다 피해 갔지만, 유노프 협곡만큼은 돌아갈 수가 없어 위드로서도 예티들과의 전투를 각오하고 있었다.
목숨을 건 전투!
각종 생산 스킬들을 최대한 적용하고 싸우면 힘들게 예티를 이길 정도는 되었다.
전투 시에 생명력을 최저까지 떨어뜨리는 위드 특유의 방식을 동원하지 않아도 아슬아슬하게 이길 수 있었다.
그런데 서윤은 상당히 쉽게 사냥을 했다. 파괴력 강한 스킬들을 응용하면서 가법게 예티를 요리하고 있었다.
레벨이 더 높으니 비슷한 몬스터를 더 쉽게 잡는 것이야 당연한 일.
위드가 중점적으로 본 것은 검술이었다.
로열 로드는 가상현실 게임이다. 아무리 능력치가 높더라도 다루는 이가 미숙하다면 실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다.
흔히 선택하는 직업인 권사와 검사이 싸움이 좋은 예였다.
검을 든 이는 어떻게든 간격을 유지하고 쌍려 한다. 권사는 한 발자국이라도 더 다가가서 거리를 좁히려고 한다.
레벨과 스킬의 숙련도가 같다고 할 때에는 싸우는 방식이나 임기응변 등에 따라 천차만별의 결과가 나올 수 있다.
몸을 움직이는 법을 제대로 알고 있지 않다면, 레벨에 상관없이 약한 몬스터에게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그 레벨이 될 때까지 스스로 사냥을 해서 올린 거시라면 스킬의 조화는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고 봐야 한다.
그럼에도 제대로 된 싸움꾼, 혹은 위드처럼 본격적으로 검술을 배운 이를 만나면 여지없이 깨지는 경우가 많다.
스스로 가지고 있는 능력을 얼마나 활용할 수 있는지도 또 다른 실력 중의 하나였다.

'제법이군.'

서윤의 검술!
위드처럼 체계적이지는 않았다.
위드의 검술은 딱히 흠을 잡기 어려울 정도였다.
모든 부위의 근육들을 적절히 활용하여 힘을 집중시키고, 공격과 방어를 일체화한다.
가끔씩 미쳐서 날뛸 때에는 아예 공격 일변도라서 많은 허점을 노추시키지만, 무지막지한 공격으로 방어의 효과까지 얻을 수 있는 복잡하고 어려운 검술이었다.
서윤은 많이 달랐다.
수비와 공격을 함께 생각하지 않았다. 적의 허점이 보이면 공격하고, 적이 공격하면 방어한다.
즉흥적으로 움직이거나 아니면 무수한 경험에 바탕해서 휘두르는 검이다. 당연히 그 경험들은 몬스터들과 싸우면서 쌓았을 테고, 그로 인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서윤은 부르러웠다.
마치 춤을 추듯이 부드러운 몸. 유연하고 셈세하다. 여자들만이 펼칠 수 있는 검술을 구사하고 있었다.
위드는 사이사이 서윤의 표정을 곧잘 살폈다.

'사냥을 즐기고 있을 거야!'

말 한마디 없이 오만한 서윤은 당연히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로 검을 휘두르고 있으리라.
이런 하찮은 몬스터들 따위는 적수가 되지 않는다는 자신감!
굳게 다문 입에, 차가운 눈빛.
그런데 위드는 무언가 상상과는 다름을 느꼈다.
무표정한 얼굴, 차갑고 예쁜 얼굴 속에는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가슴 아파하고 있었다.
첫 만남에서는 몰랐지만, 조각을 해 보면서 그녀의 마음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람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면서 이제야 눈에 들어오는 감정들이었다.

'왜 슬퍼하는 거지?'

위드는 조금 더 지켜보았다.
여전히 약간은 사심이 담겨 있었다. 아무래도 이렇게 가까이에서 서윤을 볼 기회는 흔한 것이 아니다.
이만큼 예쁜 여자를 본 적도 없지만, 그녀를 조각해서 한 번도 실패했던 적이 없었다.
그렇게 좀 더 지켜보고 나서 위드는 한 가지 사실을 더 알게 되었다.
서윤은 절대로 얼굴을 공격하지 않았다.
예티는 2미터가 넘는 거구다. 서윤의 키는 167정도로 아무래도 예티보다는 약간 작다.
그러나 그녀는 검을 들고 있었다. 얼굴이나 머리를 공격하는 것이 조금도 어렵지 않다.
위드의 경우에는 얼굴이나 머리를 곧잘 공격했다. 방어가 취약한 급소이기 때문에 큰 피해를 줄 수 있다.
그런데 서윤은 얼굴에 검을 휘두르지 않는다. 심지어는 얼굴을 잘 쳐다보지도 않았다.
눈부신 쾌검, 그리고 강한 스킬로 빨리 적을 죽이는 데에 몰두할 뿐이었다.

'표정을 안 보려는 것인가? 고통스러워하는 몬스터의 일그러진 얼굴을... 설마, 그건 아니겠지.'


위드는 서윤의 뒤를 쫓아다니면서 몇몇 예티들과 싸웠다. 주로 뒤에서 다가오는 적들을 맡았다.

"취익, 이 경험치들!"

예티의 가죽은 상등품으로, 고가에 팔린다. 흰 털복숭이 동물이다 보니 희귀하다는 이유도 있지만, 그 가죽 옷을 입으면 아주 따뜻하기 때문이었다.

"취치치칫!"

'이것들만 잘 주우면 감기와는 영원히 이별이다.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돈을 벌어야지.'

위드는 열심히 사냥을 하며 가죽들을 수집했다.

"......"

서윤은 자신만의 싸움을 하면서도 위드를 찾지 않았다. 철저한 무관심이었다.
가끔 뒤를 돌아볼 때에도, 그저 위드가 어디쯤 있나 확인하는 정도였다.
성ㄴ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위드는 당연히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예전에도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오크 카리취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 더더욱 말을 건낼 리는 없으리라.
무시무시한 서윤의 뒤를 쫓고 있으니 당연히 겁이 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절대로 서윤이 그를 해치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이 생겨났다.
서윤은 자신과 상관없는 일에는 철저하게 무관심하며, 겉보기와는 달리 그렇게 냉정한 성격은 아니었다.
얼굴을 공격하지 않는 것이나 새끼를 가진 예티는 일부러라도 피해 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 점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면 살인자였던 건 어떻게 된 거지? 그리고 굳이 저렇게 차가운 표정을 지으면서 돌아다닐 필요는 없을 텐데.'

궁금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위드도 남의 일에는 그리 간섭하고 싶지 않았던 만큼 자신의 몫에 해당하는 예티들만 사냥했다.
가죽을 챙기고, 돈을 줍고, 아이템을 획득하고!
그러면서 열심히 유노프 협곡을 이동했다.
협곡에서는 주변의 다른 길로 빠질 수가 없다 보니, 한번 들어서면 어쩔 수 없이 끝까지 가야 했다.
통과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4일.
서윤은 식사 때마다 보리 빵을 꺼내서 먹었다.
오래되어 딱딱한 검은 빵!
로자임 왕국에서 샀음 직한 그런 빵이었다. 돌덩어리를 씹는 것처럼 맛도 없고, 단지 포만감만 채우는 용도이리라.
위드는 그런 서윤을 존경했다.

'역시 생활비를 줄이려면 음식비부터 아껴야 돼. 저런 절약 정신이 있어야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어. 자본이 힘이다. 돈은 벌수록 쌓아 두어야 계속 남는 거야.'

그러나 굳이 위드도 보리 빵을 먹을 필요는 없었다.
요리 스킬 덜분에 어디서든 음식 조달이 가능했다. 약간의 조미료 값만 쓴다면 거의 헐값에 식사를 할 수 있었다.
현실에서도 쓸 수 있는 것이 요리이기 때문에, 또한 각종 능력을 강화할 수 있기에 요리를 배운 건 맞다. 하지만 한 푼이라도 더 아끼자는 목적도 있었다.
위드는 불을 피워 사냥을 통해 얻은 예티의 고기를 나무 꼬챙이에 꽂아 구웠다. 고기를 골고루 돌려 가며 구우면서 소금도 뿌렸다.
지글지글.
간단한 요리지만 구수한 향기를 풍기며 익었다.

"취익!"

고기가 익자 위드는 양손으로 잡고 뜯어 먹었다.
오크 카라취의 모슨 그대로!
앙상한 오크가 고기를 열심히 뜯고 있었다.

-포만감이 상승하고 있습니다.
체력이 40% 늘어납니다.
생명력이 15% 상승합니다.
괴력을 지닌 예티의 고기를 먹음으로써 일정 시간 동안 힘이 증가합니다.

중급 요리사의 솜씨!
남들은 한 그릇을 만들어도 정성과 기교를 가득 부리면서 한다. 그만큼 제대로 만든 요리가 스킬의 숙련도를 올려 주는 것이다.
위드의 경우에는 노가다로 수많은 요리를 해 왔던 만큼 남다른 기술이 있었다.
간단한 요리도 맛있게 만드는 법.
고기를 제대로 골고루 익혀서 먹는 법.
위드가 만든 고기 요리는 단순히 구웠을 뿐이지만, 그래서 더욱 맛이 있었다. 스탯도 상당히 늘려 준다.

"......"

그렇게 열심히 고기를 뜯어 먹던 위드는 무심코 서윤을 보았다. 보리빵을 금방 먹고 혹시라도 이동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싶어서 살펴본 것이다.
협곡에는 위험한 예티들이 있는 만큼, 그리 마음이 맞지 않는 상대라도 여행 동무가 있는 편이 나으니까.
그런데 서윤은 물끄러미 위드를 보고 있었다. 정확히 그녀의 시선이 머무른 것은 고기였다.
향긋한 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위드의 입으로 들어가고 있는 예티의 고기!

"취익!"

위드는 곧바로 예티의 고기를 서윤에게 넘겨주었다.
법은 멀고 칼은 가깝다.
어차피 고기야 예티를 사냥하면 계속 얻을 수 있고, 나무를 때서 굽는 것이니 돈이 들지도 않았다.
그때부터 서윤은 식사 때마다 물끄러미 그를 보았고, 위드는 조용히 고기를 구웠다. 여행을 하는 동안 서윤의 전속 요리사가 된 것이다.
실로 간악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처럼 마른 오크까지 등쳐 먹으려고 하다니... 역시 살인자는 어디가 달라도 다르군.'





유노프 협곡을 통화하는 내내, 위드와 서윤은 아무말도 없이 길을 걸었다.
요리를 해서 나누어 먹고, 체력이 떨어지면 적당히 눈치를 봐 가며 휴식을 취한다.
평원을 달리는 것이 아니라 예티를 사냥하면서부터는 적절히 체력 관리도 해주어야 했다.
처음에는 한 100미터는 떨어져서 움직였지만, 그 거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좁혀졌다.
전투를 할 때에는 위드가 먼저 50미터까지 다가갔다. 혹시라도 예티들이 한꺼번에 공격을 가한다면 위험할
수 있으니까 기왕이면 서윤과 가까운 곳에서 싸우려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식사를 할 때에는 30미터 정도로 좁혀졌다.
이 거리도 그리 가까운 편은 아니다.
예티의 고기를 건네줄 때만 근처까지 다가가고, 식사는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서 했다. 각자 안전한 곳에서 주위를 경계하면서 음식을 먹는 것이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휴식을 취할 때에는 20미터 거리까지도 가까워졌다.
이때부터는 전투도 그 정도의 거리를 두고 각자 나눠서 했다.
위드에게는 서윤을 살피기 가장 적절한 거리였다.

"......"

전투를 마친 서윤이 잠시 서 있다가 하프 플레이트 아머를 벗었다.
상반신을 덮고 있는 튼튼한 갑옷!
위드가 몇 번이나 눈독을 들이고 있던 비싸 보이는 갑옷이다. 하프 플레이트 아머의 안에는 사슬을 이어 만든 체인 메일을 입고 있었다.
갑옷 속의 갑옷이다.

'역시 전투 계열 직업이군.'

위드는 부러움을 감추지 않았다.
기사나 혹은 전투 계열의 직업들은, 입을 수 있는 갑옷의 종류도 다양하고 많다. 체인 메일 안에도,
가죽으로 되어 가벼운 레더 아머나 천을 덧대어 만든 갬버슨 아머를 입을 수 있는 것이다.
세 가지 종류의 갑옷을 겹쳐 입는 셈이므로 막대한 방어력을 자랑하게 된다.
단점이라면, 무거운 갑옷 때문에 많은 스탯을 힘에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다. 힘이 모자라면 쉽게 지칠뿐더러 민첩이 줄어들게 된다.
위드의 경우에도, 대장장이 기술이 중급에 오르면서 어떤 갑옷이든 제한 없이 입을 수는 있게 되었다.
하지만 따로 힘이나 민첩을 늘려 주고 갑옷을 입는 스탯이 없어서, 기사들처럼 세 벌씩 겹쳐 입을 수는 없었다.
무리해서 입으면 방어력은 좋아지겠지만, 그만큼 공격력이 약해질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을 하며 새삼 아쉬움에 눈물 짓는 위드 앞에서, 하프 플레이트 아머를 벗어 든 서윤은 가만히 갑옷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리할 때가 되었나?'

그렇지 않아도 갑옷은 여기저기 금이 가고, 부서진 부분이 많았다.

"취익!"

위드는 조용히 다가가서 갑옷을 붙잡았다. 당연히 아무 생각 없이 저지른 짓이다.
본래 함께 다니는 이들의 갑옷을 수리해 주면서 살아오지 않았던가.
그러네 갑옷을 잡는 순간, 서윤에게서 날카로운 살기가 뻗어 나왔다.

"취, 취익!"

감히 날치기를 하려는 파렴치한 오크로 낙인찍힌 것!
살기 위해, 위드는 갑옷을 최대한 빨리 수리해서 서윤에게 돌려주었다.
서윤은 멀쩡해져서 돌아온 갑옷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최대 내구력이 늘어나 있고, 깨진 부위들이 완전히 새것처럼 깨끗하게 변했다.
그러자 서윤은 체인 갑옷도 벗어 주었다.
위드는 체인 갑옷도 수리를 해 주고, 그 후로는 레더 아머도 수선을 해 주었다.
레더 아머를 벗었을 때에는, 서윤의 옷차림이 많이 가벼워졌다.
그때에는 위드도 사실 남자인지라 조금 눈길이 갔지만, 감히 대놓고 볼 수는 없었다.
목숨은 아까웠으니까.
이후부터 위드는 수리와 요리를 전담하는 오크가 되어 서윤과 함께 길을 걸었다.
실상 위드 정도 되는 요리나 수리 스킬이라면, 지능지수가 낮은 오크에게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엘프나 드워프,
혹은 호빗 중에는 중급 요리나 중급 수리를 익힌 이가 나올 수도 있지만 오크로서는 정말 '절대로' 없다고 해도 무방한 것이다.
그러나 서윤은 그다지 의구심을 갖지 않는 듯했다.
아주 특이한 오크라는 정도?
혹은 전혀 다른 이에 대해서 궁금해하지 않았다.
위드도 굳이 인간임을, 정확히는 자신을 밝힐 필요는 없으므로 그대로 알리지 않고 길을 걸었다.
그런데 그녀가 로그아웃을 할 때에는 할 일이 없었다.
서윤은 현실 시간으로 4시간에 한 번 정도의 일정하게 로그아웃을 했다. 아마도 식사를 하거나 휴식을 취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한번 나가면 2시간 정도를 들어오지 않았다.
위드의 경우 밥은 최대한 빨리 때우고 있는데 말이다.
그나마 잠도 불사의 군단과의 전쟁을 위하여 희생을 하는 중이었다. 매일 2시간씩도 자지 않고 거의 철야를 하고 있었다.

'혼자서 협곡을 지나기에는 다소 무리이니 이 시간을 어떻게든 활용해야겠군.'

위드는 그날그날 조각술을 펼쳤다.
서윤이 없는 동안 혼자서 앞서서 걷는다면 조금 일직 도착할 수는 있지만, 오히려 죽을 위험도 높아진다.
예티들은 때때로 두셋 이상이 한꺼번에 다니는 만큼,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만약 죽기라고 한다면 24시간 동안 접속 불가!
그러면 베르사 대룩의 시간으로 4일 정도를 날리는 셈이었다.
안전함 길이 가장 빠른 길이다. 자칫하다가는 크게 돌아가야 할 수도 있기에, 위드는 무리해서 욕심을 부리진 않았다.

"역시 시간을 때우는 데에는 조각술만 한 게 없어."

위드가 만들어 본 조각품의 종류도 이제는 수도 없이 다양해졌다.
각종 몬스터를 비롯하여 성, 풍경, 사람, 용, 심지어는 왕의 무덤을 위하여 스핑크스까지 만들어 보았다.
그런데도 이번에 만드는 것은 역시 서윤이었다.

"가까이에서 본 느낌들을 조각하도록 하자."

처음에 만든 서윤의 조각품은 다분히 살기가 넘쳐흘렀다.
적과 싸우는 냉정한 면모!
검을 휘두르는 여전사를 조각했다.
띠링!

걸작! 미녀 검사 상을 완성하셨습니다!
그의 손을 거치고 나면 모든 것이 작품이 된다!
황량한 평원에서 만들어진 미모의 여인.
그러나 차가운 그녀의 얼굴에는 적을 향한 분노가 깃들어 있다.
예술적 가치:260
특수 옵션: 미녀 검사 상을 바라본 이들은 생명력과 마나 회복 속도가 하루 동안 4% 증가한다.
이동 속도 5% 상승.
힘 10 증가. 민첩 10 증가.
지력 3 증가. 지혜 3 증가.
검술 스킬을 쓰면 적에게 10%의 추가적인 피해를 입힌다.
남성의 경우 투지가 상승함.
다른 조각품과 중복 적용되지 않음.
지금까지 완성한 걸작의 숫자: 10


-조각술 스킬의 숙련도가 향상되었습니다.

-명성이 19 올랐습니다.

-지구력이 2 상승하셨습니다.

-예술이 1 상승하셨습니다.

-인내력이 3 상승하셨습니다..


조각술 스키릐 숙련도 향상!
위드는 작품을 만들자마자 곧바로 확인부터 했다.

"스킬 확인. 조각술!"

중급 조각술 9(46%): 조각을 할 수 있다. 아름다운 조각품은 고가에 팔리기도 한다. 여자의 환심을 사기에 좋다.

걸작을 만들었는데도 숙련도는 고자 ㅈ3% 정도밖에 늘어나지 않았다.

"실패작이군. 걸작 중에서는 잘못 만든 거야. 어디서 실수를 한 걸까?"

걸작을 만드는 것은, 그냥 대충 조각술을 좀 펼치고 성공하는 게 아니다. 작은 조각품을 만들더라고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
전투야 설렁설렁 하더라고 이길 수 있지만, 조각술은 자칫 방심하다가는 명성이 떨어지는 실패작이 나오게 된다.
그러므로 사소한 조각품 하나를 만들더라도 실패하지 않기 위해 30분 이상 공들여야 하고, 지금처럼 작정하고 작품을
조각하려고 한다면 게임 시간으로 한나절은 족히 걸렸다. 아주 세밀한 부분ㅇ도 정성을 쏟고, 작품에 대한 이해를 담아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이다.
빙룡 상이나 피라미드처럼 크기가 크다면 일주일 이상 걸리는 경우도 있다.

"내가 뭔가를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위드는 그때부터 서윤이 없는 시간 동안 그녀의 조각품을 만들었다.
냉정하고 차분한 검사의 모습!
걸작이 되어 숙련도가 4% 늘어났다.

"조각품에 대한 이해가 모자란 건가? 왜 이 정도밖에 숙련도가 늘어나지 않지?"

그다음 날도 위드는 조각품을 만들었다.
이번에도 그녀의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담았다.
세상에서 찾아보기 힘든 극치의 미!
노을을 바라보며 하염없는 상념에 잠김 그녀의 자태를 그려 냈다.
그윽하고 촉촉한 눈빛, 오똑한 콧날, 슬픈 눈망울.
무언가를 한없이 그리워하는 여인을 조각해 냈다.

"이, 이건 힘들다!"

위드는 조각품을 만들면서 처음으로 엄청난 어려움을 느꼈다.
손놀림이 익숙햊고 난 이후부터는 조각술 스킬의 효과 덕분에 어느 정도 쉽게 생각하고 있던 게 사실이었다.
그런데 조각술이란, 알면 알수록 더욱 거대한 벽이 느껴졌다.

"이 정도로 어렵다니......"

몇 번이나 서윤을 조각해 봤건만, 그녀를 조각하는 일이 다시금 어려워진다.
그녀를 옆에서 지켜보고 알아 갈수록, 그리고 그녀의 매력을 담아서 표현하고자 할수록 또 다른 힘겨움이 있었던 것이다.
코의 높이가 조금만 달라져도, 혹은 눈초리가 쳐져도 전체적인 인상이 바뀐다.
조각품을 만들면서 위드는 서윤이 정말로 예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조각품!
이번에는 명작으로 완성되어서 숙련도가 13% 늘었다.
실상 조각술의 숙련ㄷ는 날이 갈수록 상승 폭이 둔화되고 있었다. 특히 큰 과정을 넘어설 때에는, 특별한 무언가를 만들지 않는다면 그 관문을 넘어가기 힘들다.
초급에서 중급이야 듀라한을 조각하는 정도로 되었지만, 고급이 되려면 뛰어난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역시 걸작으로는 고급 조각술에 오르기 힘들어. 지금 숙련도는 63%. 앞으로 명작을 3~4개는 만들어야 되는데......"


위드는 그때부터 서윤의 일거수일투족을 좀 더 철저히 지켜보았다.
전투를 할 때만이 아니라 평상시, 음식을 먹을 때에나 잠시 앉아 있을 때의 자세까지도 꼼꼼히 살폈다.
조각사로서 그의 눈썰미는 남다른 것이었다.
못생긴 오크에게 염탐을 당하고 있는 서윤!
평상시의 그녀였다면 사람과 이렇게 가까이에서 여행을 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사람들을 보는 것마저도 힘들어서 한적한 곳을 찾았던 그녀이기 때문이다.
집요하게 그녀를 쫓아다니던 남자들도 인해 원치 않은 싸움도 많았다. 말을 하지 않으면서 오해와 불신이 생기고, 그러면서 살인자가 되었다.
만일 위드가 남자라는 걸 알았다면 불편해서 함께하지 못했으리라.
오크! 오크였기에 서윤은 마음 놓고 있을 수 있었다. 평상시 사람들이 없을 때의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몬스터가 나타나면 싸우고, 따뜻하 햇살이 비치는 곳에서 잠든다. 여전히 무표정하지만 촉촉한 눈빛으로 떨어지는 낙엽을 보기도 했다.
계곡 물이 흐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도 했다.
다소곳하게 앉아 있는 그녀.
그녀가 갑자기 머리에 꽃을 꽂았다.
본인도 모르게 한 일이었다.
그때 위드는 숨이 막혀서 죽을 뻔했다!

"....."

아름다워서! 그리고 너무나도 당혹스러워서!
살인자로서 무섭기만 한 서윤이었는데, 이처럼 여린 면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러다가 주변에 지나가는 다람쥐 가족을 보았다.
조금 큰 다람쥐 2마리와 새끼 다람쥐 1마리.
서윤은 자신의 양 무릎을 끌어안고 슬픈 눈으로 동물들을 보았다.

"그래, 이거야!"

위드는 다시금 조각에 대한 열정에 불타올랐다.
어쩌면 지금까지 큰 착오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조각술이란 쉽게 단정 지어서는 안 되는 거야. 어느 한 사람을 안다는 것도 그렇게 단편적인 모습만 봐서는 안 되는 거지."

조각품을 만들면서 그 이면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서윤의 다양한 표정을 연구하면서 여러 다른 모습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다.

"그녀가 주는 느낌을 조각하자. 차가운 모습, 살기에 찬 모습, 어느 한 기분에 취하거나
예쁜 외모에만 신경 쓸 것이 아니야. 뭘 만들어야 할지에 대한 고민보다는, 그냥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조각을 해 보자. 내가 느끼고 보는 서윤을 있는 그대로 조각해 보는 거야."

위드의 조각칼이 바삐 움직였다.
외모만을 조각하는 것은 그나마 쉬운 일에 속하지만, 이목구비의 조화와 그녀만의 느낌을 완성하는 일은 어렵다.
지금까지 알았던 서윤을 모조리 잊어버리고, 그녀가 전해 주는 마음을 조각했다.
서윤이 다람쥐 부부를 애틋하게 바라보는 풍경.
아름다운 미녀가 주인공인 조각품이 아니라, 인간적인 느낌을 그려 냈다. 그런데 서윤만을 조각하는 것은 왠지 모르게 허전했다.
그녀 주변의 장소가 너무나도 황량한 것이다.
느낌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서는 주변도 약간은 손을 봐야할 필요성이 있다.

"그녀도 여자니까 아무래도 꽃을 조각해 주는 편이 좋을 거야."

위드는 우선 서윤이 머리에 꽂았던 꽃을 세밀하게 조각했다. 그런 다음에는 주위의 바위들을 대상으로 작업을 개시했다.
조각상 주변에 만발한 꽃들을 조각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이 커지면서 서윤이 접속할 때까지는 도저히 시간을 맞추기가 힘들어졌다.

"포기할 수도 없고.. 여기서 멀출 수도 없다."

내친김에 조각칼을 계속 움직였다. 그런데 서윤은 그다음날 내내 접속을 하지 않았다.

"잠을 자는 것이구나."

위드는 지금이 현실에서 밤 시간인 것을 알았다.
어차피 유노프 협곡도 이제 거의 끝 지점에 도달했으니, 서윤이 없더라도 혼자서 가기에는 무리가 없다.
그가 불사의 군단과 전투를 벌일 유로키나 산맥은 협곡에서도 한참 안쪽!
그저 무작정, 정처 없이 떠도는 서윤과는 이것으로 이별이 될 가능성이 높다.

"아직 접속을 하려면 시간이 꽤 남아 있군. 지금까지 쓴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최고의 조각품을 만들어 봐야겠다."

위드는 마음을 편히 먹고 조각칼을 움직였다.




새마을 갱생병원의 차은희 박사.
그녀는 아침부터 서윤의 몸 상태를 점검하고 있었다.

"요즘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니? 로열 로드도 좀 쉬어 가면서 하도록 해."

"......"

서윤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차은희 박사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말을 따르게 될 것임을.
대답이 없으니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을 아껴 주는 사람의 말을 거스르지는 않는 서윤이었다.
다만 자신을 표현하지 않을 뿐.
좋아하고 싫어하고, 그러한 감정을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말을 잃어버린 데에는 심리 치료도 별로 효과가 없고, 이제 슬슬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 할까?'

차은희 박사는 고민에 빠져 들었다.
로열 로드가 주는 심리적인 안정 효과는 현실을 도피하고 싶은 이에게 적당했다.
환희와 유쾌함, 유희!
삶의 즐거움을 알게 해 준 다음에, 현실에서도 조금씩 바꾸어 가려고 했다.
행복해지고 싶어 한다면 이미 마음의 병은 회복기에 들어간 것이다. 괴롭고 슬프기만 한 기억들을 잊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그런데 로열 로드에서도 답답하고 지내고 있을 뿐, 아직 가시적인 성과가 없었다.

'역시 강제로라도 치료를 개시해야 할까? 서윤이처럼 내면의 의지가 강하고 밖으로 나오기 두려워하는
사람은 스스로 떨치고 나오는 게 제일 좋아. 약이나 최면술 등으로 정신을 치료하려고 하면 역효과가 발생할지도 모르는데.'

정신과 의사로서 제일 두려운 것은 환자가 점점 폐쇄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서윤은 이미 그러한 길을 걷고 있었다.

'표현하려고 하지 않으니, 마음의 병이 어느 정도인디 감을 잡기도 어렵다. 그나마 원래 착하고 순수하던
애라서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나지는 않아 안심이지만, 불안하기도 해. 도무지 알을 하지 않으니까'

그러는 사이에 어느덧 식사 시간이 되어 서윤은 거실로 향했다.
서윤이 머무르고 있는 병실은 새마을 갱생 벙신병원에서도 최고급의 특실인 만큼, 당연히 식사를 하는 장소가 따로 있었던 것이다.
병실의 특징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어 환자가 아플 경우에는 음식을 가져오기도 했지만, 서윤은 거실로 나가서 식사를 했다.

"어디,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볼까?"

차은희 박사는 캡슐의 영상을 재생했다.
서윤의 로열 로드 플레이 동영상!
언제나 몬스터만 사냥하기에 기대했던 심리 치료 효과가 나타나진 않았지만, 그래도 지켜보는 맛은 있었다.
서윤은 레벨이 높아질수록 더욱 강한 몬스터들이 우글거리는 곳으로 향했다.
인간을 저주하고 증오하는 온갖 몬스터들이 덤벼들고, 서윤은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 싸운다.
광전사는 싸우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 강해진다. 그렇기에 서윤은 몬스터들이 전별하기 전까지 물러나지 않았다.
피가 난무하고 각종 아이템이 즐비한 현장!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화끈하게 싸우는 서윤은 광전사, 혹은 전장의 여신과도 같았다.
그야말로 스트레스 해소는 확실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전투 신을 볼 때마다 차은희도 로열 로드가 하고 싶어졌다.

"역시 서윤이 레벨이 높긴 높네. 절망의 평원에서 사냥도 다 하고."

차은희는 몇 번이나 감탄했다.
그녀라면 꼼짝도 못하고 죽었을 긴박한 상황에서도 ,서윤은 곧잘 전투를 승이로 이끌었다.
단순히 레벨이 높아서만은 아니었다.
수없이 많은 전투를 하면서 몸으로 익힌 경험과 생존 본능, 전투법이 있기 때문이었다.

"밥을 먹고 오기 전에 조금 빨리 돌려 봐야지."

차은희는 동영상의 속도를 빠르게 했다.
서윤은 절망의 평원을 이동하고 간간이 나오는 몬스터만 잡고 있었다.
단조로운 이동.
그런데 평상시와는 다른 일이 벌어졌다.
두두두두!
서윤이 가만히 휴식을 취하는데 평원의 사냥꾼이 달려온 것이었다. 게다가 뒤에서는 못생긴 오크 1마리가 접근하고 있었다.

"저런... 협공을 당해서 서윤이가 위험했구나."

그러나 차은희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이때 죽었다면 훨씬 빨리 로그아웃했을 테니까.
그런데 그다음에 이어진 상황은, 황당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절망의 사냥꾼을 죽이고, 오크와 눈이 마주쳤다.
둘은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더니, 서윤이 먼저 검을 거두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러려니 했다.
서윤은 굳이 덤비지 않는 몬스터를 일부로 죽일 정도로 잔인한 성격은 아니니까.
그런데 오크와는 그 후에도 한 번 더 만났다.
그러더니 나중엔 함게 사냥을 하고 요리를 해서 고기도 나누어 주는 게 아닌가. 수리도 해 주고 손빨래도 한다.
혼자 다니기 좋아하는 서윤인 만큼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지만, 상대가 오크라서 의외로 편하게 다니는 모양이었다.

"저번에 수련소의 교관과도 그럭저럭 친하게 지냈지. 오코나 몬스터들과는 잘 어울리는 건가. 오크라니 참 좋네.
부하처럼 데리고 다니면서 여러 가지 일도 맡길 수 있고. 나도 저런 오크나 1마리 구해 볼까? 아니, 잠깐만!"

이 순간, 차은희는 절대 냉정할 수 없었다.

"오크! 저게 무슨 오크야? 인간이잖아, 유저야!"

전투가 끝나면 아이템을 줍고, 약초를 몸에 바르고, 붕대를 감는 오크?
찾아보면 있을 수도 있다. 베르사 대륙에서는 가능하다.
마법에 걸린 고블린이나, 혹은 특수한 보스 몬스터들의 경우에는 뛰어난 인공지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심리학을 전공한 차은희는 사소한 부분까지도 주의 깊게 보았다.
몸짓이나 눈빛, 태도의 변화.
전투를 할 때의 심리 변화.
어떤 대상에 대한 과도한 집착!

"설마......"

차은희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이 몸을 떨었다.
명예의 전당에서 봤던 그 동영상!
그녀는 확신했다. 이 오크가 바로 그 동영상에 나온 오크임을.

"저렇게 돈을 밝히는 오크가 둘일 리가 없잖아!"

차은희는 가슴이 탁 막혀 오는 것만 같았다.
서윤이 그 오크 유저와 함께 사냥을 하는 건 물론 대단하다. 하지만 그보다, 그녀 또한 로열 로드의 마니아였다.

"전투가 이제 2일도 남지 않았는데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차은희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주변에 활짝 피어난 꽃들.
바위와 돌을 이용해서 세밀하게 가공한 꽃들은 실제 모습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
나비가 날아다니고 싱그러운 향기가 물신 풍기는 그런 꽃밭!
그러나 돌을 이용해서 조각한 꽃밭이기에 색이 달랐다.
회색 바위, 흰 바위, 검은 바위.
무늬가 있거나 층층이 다른 돌을 이용해 만든 꽃도 있었다.
그렇게 돌로 만들어진 꽃밭이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꽃밭에서 열심히 조각술을 펼치고 있는 위드.

"그런데 이건 뭔가 이상한데......"

조각품이 완성되어 갈수록, 서윤의 애틋한 눈빛은 막 울음이 쏟아질 것만 같은 표정으로 그려졌다. 절대로 울 것 같지 않은 그녀인데......
위드가 느낀 감정에 따르다 보니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건 너무 우울하다.
예쁜 그녀가 눈물을 흘리려고 하니 주위의 꽃들도 죽어 버리는 기분이다. 위드마저도 기분이 울적해지려고 했다.

"그냥 웃게 만들자. 눈은 이미 조각해 버렸지만 나머지는 웃게 만들자! 현재와 내가 바라는 형상 모두를 하나의 조각상에 함께 넣는 것이다."

위드는 전체적인 인상과 표정을 완성했다.
눈물을 흘리지만 환하게 웃고 있는 서윤의 조각상!
띠링!
완성되는 순간 위드의 눈앞에 메시지창이 떴다.

-만드신 조각품의 이름을 정해 주십시오.

"이름을 정하라고?"

지금까지는 이런 적이 없었다.
위드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말했다.

"서윤."

-서운이 맞습니까?

"그렇다."

대작! 서윤 상을 완성하셨습니다!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주는 신비의 조각상.
엠비발렌트.
양변적인 감정을 가진 조각상은 궁극의 경지에 도전하려고 하는 재능 넘치는 젊은 조각사으 ㅣ손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예술적 가치: 8,700
특수 옵션: 서윤 상을 본 이들은 생명력과 마나 회복 속도가 하루 동안 40% 증가한다.
이동속도 20% 상승.
전 스탯 30 상승.
두 가지 속성이 30% 상승.
하루 동안 공격에 특수한 대지의 공격력이 부여됨.
조각상에서 특수한 향기가 나서 상처가 빨리 치유됨.
특정인에게 양도할 경우, 조각품이 주는 모든 부분에서 20%의 추가적인 효과를 보임.
단 이럴 경우 다른 이들에게는 효과가 60% 감소함.
다른 조각품과 중복 적용되지 않음.
지금까지 완성한 대작의 숫자: 1

-조각상에 대한 이해 스킬 레벨이 1 상승하였습니다.

-고급 손재주 스킬의 레벨이 2가 되었습니다. 도구나 손을 이용하는 능력이 추가로 8% 증가하며, 다양한 분야에 걸쳐서 영향을 주게 됩니다.

-명성이 1,680 상승하셨습니다.

-예술 스탯이 65 상승하셨습니다.

-인내가 7 상승하셨습니다.

-지구력이 4 상승하셨습니다.

-매력이 40 상승하셨습니다.

-서윤 상의 소유권은 위드 님에게 있습니다. 향후 조각상에 생명을 부여할 수 있다면 위드 님에게 충성을 바치게 될 것입니다.

-대작 조각품을 만든 대가로 전 스탯이 3씩 추가로 상승합니다.


대작 조각품!
위드가 상상한 그 이상의 작품이 만들어진 것이다.

"대박이다!"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수많은 예술품들! 그 중에서도 여자를 그리고 조각한 것들이 가장 많은 것은, 아마도 여자 자체가 그만큼 복잡하고 아름답다는 뜻이리라.
그런데 대작 조각품을 만든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조각술의 숙련도가 마침내 한 단계의 벽을 넘었다.

-중급 조각술 스킬의 레벨이 10이 되어 고급 조각술 스킬로 변화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재질을 깎 아 내거나 무늬를 새길 수 있습니다.

-직업 스킬 조각술이 고급이 되었습니다.
직업 전설의 달빛 조각사에 대한 영향으로 현재 보유하고 있는 스킬과 스탯에 변화를 줍니다.

-조각 검술 스킬의 효과가 30% 추가로 증가합니다. 조각 검술에 부가적인 능력이 부여되었습니다.
조각 검술의 마나 소비량이 절반으로 줄어듭니다.

-조각술이 다른 생산 스킬에 연계됩니다.
대장장이 스킬과 연계되어 청동이나 청 조각품을 만들 수 있게 됩니다. 형틀에 쇳물을 부어 만드 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조각품들은, 단단하고 오랜 수명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요리 스킬과의 연계로, 만드는 요리들이 훨씬 생동감 있고 맛있어집니다. 자유로운 음식의 표현은 예술적인 아름다움을 보여 주게 될 것입니다.
재봉 스킬과의 연계로, 만들어진 옷들에 다양한 장식들을 붙여 넣을 수 있습니다. 일반적이지 않 은 옷들을 제작할 수 있게 됩니다.
전 스탯이 20포인트씩 늘어납니다.

-명성이 600 올랐습니다.

-예술 스탯이 20 상승하셨습니다.

-특수 조각사 마스터 스킬. 달빛 조각술을 배우실 수 있습니다. 달빛 조각술을 고급 조각술을 기반 으로 합니다.
걸작, 명작, 대작의 다음 등급으로 숨겨진 예술 작품을 조각하실 수 있습니다.
달빛 조각품!
대자연을 이용한 조각으로, 적과 싸우고 동료를 지킬 수 있습니다.
고독하고 그윽한 정취를 가진 예술가와 사랑하는 연인이 좋아할 것입닏.
달빛 조각술에 대한 힌트는 예술가 길드로부터 얻으십시오.


중급 조각술이 마침내 고급으로 진화했다.

"으하하하하!"

위드는 통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조각사로서, 조각술 스킬이 고급에 달한 것보다 즐거운 일이 어디에 있을 것인가.
대장일처럼 다소 대중적인 생산 스킬은 이미 고급을 익힌 이가 나왔을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조각사로서는 최초였다.
베르사 대륙에서 유일무이한 최고의 조각사!

"역시 내가 조각사의 길을 걸은 것은 후회하지 않을 선택이었어!"

위드는 세상을 다 가진 듯이 굴었다. 그러나 금방 정신이 들었다.

"여기서 이럴 때가 아니지."

언제 서윤이 돌아올지 모른다.
대작 조각품은 멀리서도 눈에 띌 정도로 특수한 광채가 어린다. 조각술이 주는 특별한 효과였다.
그녀가 돌아온다면 그녀를 조각한 자신이 발각될지도 몰랐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이 그녀를 조각했던가.
그 사실들이 전부 탄로 난다면 서윤은 위드를 가만두지 않으리라.

"어, 어서 튀자!"

위드는 조각품을 내버려 두고 열심히 도망쳤다.
대작 조각품을 만들고, 조각술이 고급에 오른 위대한 조각사!
그러나 몰래 도망쳐야 하는 신세였다.


서윤은 베르사 대륙의 시간으로 늦은 밤에 접속을 했다. 그녀는 나타난 순간부토 의식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크!
어느덧 며칠을 함께하면서 익숙해진 오크였다.
가끔 밥도 해 주고 수리도 해주는 등, 여러모로 쓸모가 많았다.
그러네 아무리 살펴봐도 오크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떠났구나.'

오크와 함께 있었다고 해서 마음을 나누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빈자리가 유독 컸다.
이제 그녀는 다시 혼자가 된 것이다.
서윤은 천천히 갑옷과 검을 뽑아 든 뒤에 떠나려고 했다.
유노프 협곡을 빠져나가서 몬스터가 있는 곳으로 가고가 했다. 그런데 향기를 맡았다.

"......?"

서윤은 향기에 이끌려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꽃밭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조각상.
미소를 띤 조각상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조각상은 그녀를 꼭 빼닮았다.

"......"

너무나도 생소한 광경에, 서윤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울고... 있다? 내가?'

거울을 보는 것만 같았다.
너무나도 흡사하게 생긴 그녀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건 내가 아니야. 나는 울어 본 적이 없어. 적어도 내 기억에는......'

눈물을 흘려 본 지가 언제인지, 까마득하기만 했다.
서윤은 강해지고 싶었다.
어릴 때부터 슬픈 일이 있으면 가슴에 묻었다. 고통과 아픔을 외면한 것이다.
타인과 말을 하지 않고, 아무런 교류도 나누지 않으면 혼자만의 세상에서 안전할 수 있다.
눈물을 흘릴 필요도 없다.
아픔을 내색하면 모든 게 산산조각 나서 무너질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 한없이 담담한 날들이 이어졌다.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는 그녀의 시간들이었다.
어느덧 말을 하는 걸 두려워하게 되고, 누군가와 친해지는 걸 무서워한다. 타인과 한마디 말도 나누지 않으면서 자신을 감추려고만 했다.
자신이 사랑받고 있지 않다는 현실을 지우려고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려 하지 않았다.
다가오는 이들을 불신하고 의심하면서 살아왔다.
그렇게 잊고 살면 슬프지 않을 수 있었다.
기쁘지도 않고, 딱히 감정적이 될 필요도 없은 시간들.
그런데 조각상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을 보니 한없이 슬퍼졌다.
가슴이 비명을 질러 대고, 무덤덤하게 스쳐 보냈던 시간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

서윤은 자신의 얼굴에 손을 대어 보았다. 하염없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로열 로드 홈페이지의 명예의 전당!
시간이 지날수록 한층 가열된 초조와 긴장감이 흘렀다.

-불사의 군단과의 전쟁 날짜가 다가오고 있어요.

-과연 그 오크는 퀘스트를 완수할 수 있을까요? 난이도가 무려 A급인데요.

-그 얼굴을 좀 보세요. 흉악하잖아요. 무슨 일이 생겨도 깰 겁니다.

-완수하겠죠. 완수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전 마법사거든요.

-저도 마법사입니다. 괜히 어려운 흑마법사 계열을 선택해서 고생만 진탕 하고 있었는데, 꼭 네크로맨서가 되고 싶습니다.

-네크로맨서에 대한 정보 좀 알려 주세요.

-좀 느긋하게 기다려 보세요.

-혹시 새로운 소식을 알고 계신 분이 없나요?

불을 지펴 놓기라도 한 것처럼 활활 타오르는 게시판!
그곳에서는 수많은 논쟁과 이야기들이 불거져 나왔다. 몇분 만에 새로운 게시 글이 수백 개씩 작성될 정도였다.
수십만명이 게시판을 들락거리면서 수시로 글을 작성하고 읽는다. 혹시라도 명예의 전당에 동영상을 올려놓은
'그'에 대한 소식이라도 들을까 싶어서 몇 분 간격으로 계속 찾아왔다.
마법사들의 경우에는 자신들과 무관한 일도 아니었기에 더욱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아아. 어서 결과를 알고 싶어요. 마법사라면 모두들 제 마음과 같겠죠?

-전 결과도 궁금하지만, 과정도 못지않게 보고 싶군요. 불사의 군단과의 대규모 전쟁! 이것은 일반적인 공성전과는 차원이 다를거에요.

-그동안의 공성전이 꽤 시시하기는 했죠. 대부분 너무 빨리 끝났잖아요. 일방적인 경우도 많았구요.

-전사들의 돌격! 그리고 상대방 대표의 암살. 제일 편한 길이지만 보는 입장에서는 시시하죠.

-확실히 어느 한쪽이 힘의 우위를 가지고 있을 때만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고요.

공성전에 대한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어느 정도 세력이 있는 측에서, 막 터전을 잡고 힘을 키워 가려는 곳을 쳐서 빼앗는다!
상당수의 전쟁은 확실히 이길 수 있는 경우에만 진행이 되었다.

-어서 동영상을 보고 싶어요.

-아직도 각 방송사의 방송 예정표에 안 뜬 건가요?

-어느 방송사에서 방송을 하게 될지...... 명예의 전당에 올라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건 아니겠죠?

-설마요.

-그런데 방송사들은 대체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죠?

그때 게시판에 새로운 소식들이 떴다.

-여러분! 소므렌 자유도시에서 위드라는 유저가 퀘스트를 완수했습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이 위드는 바로 마법의 대륙을 했던 위드입니다.

-마법의 대륙의 위드요?

-그가 로열 로드를 한다는 말은 들어 봤는데, 프레야의 성기사라면서요.

-예. 그런 줄로만 알았죠. 그런데 이번에 그가 해결한 의뢰가 네크로맨서의 퇴치 퀘스트였다고 합니다.

-진혈의 뱀파이어족을 퇴치하고 파고의 왕관을 되찾는 것에 이은 연계 퀘스트!

-그러면 그 오크의 정체는......

-위드입니다. 위드가 오크가 되어서 불사의 군단과 싸우는 것입니다!

그 순간, 명예의 전당의 글들은 폭주를 했다.
몇 분 만에 수백, 수천 건들의 글이 올라온다.
마법의 대륙이 가진 위력.
한때 가장 인기 있었던 이 게임은 이미 그 자리를 넘겨주었지만, 당시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그가 마법의 대륙에서 보여 준 카리스마를 누구도 잊지 못할것입니다.

-폭풍처럼 몬스터를 휩쓸던 흑기사.

-각 스킬의 조합, 운용, 끊이지 않는 전투, 지형지물의 이용, 타협하지 않는 정신. 위드는 모든 게이머들의 우상과도 같은 사람입니다.

-영원히 깨어지지 않을 관물들이 모두 위드에 의해서 한때의 전설로만 남게 되었죠.

마법의 대륙을 했던 이들의 찬양의 글이 자자하게 올라왔다.
몇몇은 의문을 던지기도 했다.

-위드가 누군데요?

-위드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에요?

-위드를 모르다니, 2년 전부터 로열 로드를 하신 모양이군요. 적어도 마법의 대륙의 유저라면 다들 압니다. 위드가 어떤 기록을 세웠는지.

-저는 예전에 위드의 뒤를 따라다닌 적이 있습니다. 그때의 이야기를 들려드리죠. 당시 그는 로젠다의 폐허로 들어갔죠.
지옥의 파수꾼 켈베로스가 장악하고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사냥을 했습니다. 어마어마한 일이었죠.

-레벨이 높다면 가능한 일이잖아요?

-예. 그렇긴 합니다. 하지만 그 전까지는 마법의 대륙에서 누구도 그곳에서 사냥을 하지 못했습니다. 위드가 최초로 그곳에서
사냥을 한 겁니다. 마법의 대륙 유저들이라면 경악을 금치 못할 일이었죠. 그래서 저는 그가 사냥하는 것을 따라다니면서
구경을 했습니다. 모든 몬스터를 악착같이 죽이고, 조금의 허점도 보이지 않는 철저한 전투. 싸움이 시작되면서 그는 야수로
돌변한 듯이 몬스터를 휩쓸어 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닙니다.

-뭐가 남았는데요?

-놀라면 안 됩니다. 그는 무려 200시간 동안 연속으로 사냥을 했던 겁니ㅏ.

-200시간!


로열 로드를 하면서 어느 정도 노가다에 도가 튼 인물들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스스로 게임을 잘한다고 자부하는
이들도 많다. 일단 사냥을 시작하면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로 게임에 푹 빠졌던 경험을 누구나 한 번쯤은 가지고 있으리라.
하지만 위드가 200시간 동안 사냥을 한 것은 그야말로 전설이었다.
그 외에도 속속들이 정보들이 들어왔다.

-저희들은 절망의 평원에서 사냥을 하던 사람들입니다. 중앙대륙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리 강하지 않더라도,
로자임 왕국에서는 꽤 유명한 편이죠. 저희들은 절망의 평원에서 깡마른 오크를 만났습니다.

-오크 카리취! 몸매는 말랐지만 얼굴과 인상은 똑같았습니다.

-불사의 군단과의 전쟁은 바로 절망의 평원에서 진행되는 것이었습니다.


명예의 전당에 오는 거의 모든 유저들이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런데 아직까지 아무소식도 전해지지 않은 게 더욱 궁금증을 자극했다.
오히려 누가 모든 걸 확실히 밝혀 놓았더라면 이 정도는 아니었으리라.



KMC미디어의 간판 코너인 '베르사 대륙 이야기'.
오늘도 신혜민과 오주완이 입담을 과시하면서 발 빠르게 정보들을 알려 주었다.

"현재 미스릴의 가격이 오르고 있습니다. 미스릴 광산을 보유하고 있는 해적 길드에서는 가격을 20% 올리기로 결정하여 많은 원성을 받고 있습니다."

"무기를 강화하는 법! 현재까지 나온 강화석들의 효과는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알고 계세요? 중급 대장장이가 있다면 공격력이 크게 강해질 수도 있음을."

"루튼 왕국과 토르 왕국 사이의 새로운 무역로가 개척되었습니다. 잃어버린 숲을 통과하는 길이네요,
붉은 늑대 길드가 이곳에 출몰하는 강력한 몬스터를 소탕하고 길을 만들었습니다. 이곳을 통과하고자
하는 상단들은, 교역 이득의 1할에 해당하는 세그을 내면 이용하실 수 있겠습니다."

"교역 수입의 1할이라고 해도 단축되는 시간을 감안하면 많은 유저들이 이용하겠군요."

"바로 그 점입니다. 당분간 붉은 늑대 길드에서는 많은 수입을 거둘 것으로 보입니다. 해당 길드에 가입하려고 하는 유저들도 많이 늘었다고 합니다."

베르사 대륙 이야기.
처음에는 각 몬스터의 정보나 사냥터 이야기, 유저들이 택할 수 있는 직업 정도만 소개하면 되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정치와 사회, 경제 분야에 대한 이야기들도 많이 나왔다. 각 세력들이 경쟁을 하면서부터, 베르사 대륙의 역학 구도가 복잡해진 것이다.
그 때문에 2부에서는 각계의 전문가들이 참여했다.
오늘 베르사 대륙 이야기의 2부는 불사의 군단과의 전쟁 퀘스트였다.

"한마디로 난이도가 너무 높습니다. 많은 분들이 기대를 하고 계시겠지만, 퀘스트는 아마 실패하고 말 겁니다."

군사 전문가인 이용한이 자신 있게 말했다. 그는 나름대로 근거도 가지고 있었다.

"전쟁은 숫자 싸움이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병사를 가지고 있느냐보다는, 그 병사들이
내 명령을 얼마나 잘 따라 주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오크나 다크 엘프, 인간도 아닌 다른 종족들을 데리고 불사의 군단과 싸우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용한은 단정 지어서 말했다.
옆에 있던 한길섭도 비슷한 의견을 내놓았다. 그는 로열 로드의 서열 300위 안에 드는 랭커였다.

"맞습니다. 이종족들을 지휘하기 위해서는 통솔력이 필요한데, 그들을 데리고 과연 전투나 수행할 수 있을까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오크나 다크 엘프를 데리고 불사의 군단과 싸우는 건 무모한 짓입니다. 저라면 이미 도망을 쳤을지도 모릅니다."

"한 개인이 진행하기는 어려운 규모의 퀘스트죠. 메르사 대륙 상위 50위 내에 있는 길드들은 이번
퀘스트에 어떤 도움 요청도 받지 못했습니다. 저희 붉은 용병 길드에서도 아무런 요구 사항도 받지 못했고요. 그러니 당연히 실패하고 말 겁니다."

"어쩌면 오크나 다크 엘프들이 전멸하고, 그들이 모두 언데드화되어서 다른 왕국을 침공하는 게
예정된 전개일지도 모르죠. 현재까지 추정된 바, 난이도 B급의 의뢰는 매우 강력한 특정 단체를
소탕하거나 이에 준하는 까다로운 관문을 넘어야 합니다. 그런데 난이도 A급은 실행 여하에 따라서 베르사 대륙의 전체적인 역학 구도가 바뀔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불사의 군단이 출현한다면 그곳에는 저희 붉은 용병 길드가 방어선을 칠 예정입니다."

퀘스트의 성공 여부에 대해서 토론회를 열기로 되어 있었는데, 모두가 반대 의견만을 이야기했다.
몇몇 고위 랭커들은 이를 자신의 길드를 홍보하는 장으로 쓰기도 했다.
신혜민은 인상을 찌푸렸다.


"모두들 기다리고 있는 퀘스트가 성공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인가요?"

"성공요? 그 퀘스트는 이미 끝난 것일지도 모릅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어쩌면 그는 퀘스트를 포기하고 이미 도망친 것 아닐까요?"

하나같이 실패를 말하는 전문가들.
그러나 그들은 곧 어마어마한 항의 글에 직면해야 했다.
인터넷상에서 위드를 아는 사람들! 또한 네크로맨서의 전직에 대해 기대를 품고 있는 이들로부터 원색적인 욕을 얻어 먹어야 했던 것이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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