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조각사 17

3학년2반 | 2022.01.22 07:59:11 댓글: 0 조회: 565 추천: 0
분류인터넷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4263

-달빛 조각사 17권




1.위드의 악명
2.마법 검의 대장장이
3.모라타의 영주
4.1쿠퍼의 감동
5.서윤의 집 방문
6.아이의 조각품
7.여자아이의 일생
8.다인과의 조우
9.고독한 방랑자
10.바드레이와의 악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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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드의 악명>





위드가 이동 포탈을 타고 모라타의 광장에 도착했을 때에는 수많은 인파가 모여 있었다.
광장에서 물건을 사거나 팔고,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모여 있는 사람들.
베르사 대륙의 북부가 모험 지역으로 조명받으면서 모라타는 더 크게 번성하고 있었다.

"이쪽 좀 봐 주세요!"
"위드 님, 위드 님! 저희와 같이 사냥해요."
"마법의 대륙의 위드가 정말 본인인가요?"

가까이 접근하려고 하는 사람도 많았고, 진짜 위드가 맞느냐면서 통곡의 강 퀘스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
로 아우성이었다.
성벽에도 사람들이 올라가서 위드를 향해 손을 흔들고 환호를 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영웅을 반기듯이, 그렇게 위드의 귀환을 반기고 있었다.
로자임 왕국에서 싸구려 조각품을 팔던 그 시절이 아닌 것이다.
위드는 팔짱을 끼고 시선으로 턱을 치켜들며 거드름을 피웠다.

"훗, 사람들이 많이 늘었군."

태연한 척, 전혀 놀라지 않은 척, 이 정도의 사람들은 당연한 척 대해야 한다.
위드는 느닷없이 사자후를 터트렸다.

"갔노라. 싸웠노라. 벌었노라!"
"우와아아아아아아!"

모라타 광장이 떠나갈 것만 같은 함성이 일시에 터져 나왔다.

"엄청 벌고 왔대!"
"이무기! 이무기를 사냥한 아이템을 저희에게 보여 주세요!"
"위드! 위드! 위드!"

사이비 교주를 능가하는 인기였고, 주체할 수 없는 환희의 절정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베르사 대륙에서 꾸고 있는 희망과 꿈!
남들이 잡아 보지 못한 몬스터를 사냥하고, 경험한 적 없는 퀘스트를 수행하고 위드가 돌아왔기 때문이다.
모라타의 병사와 프레야 교단의 기사들이 출동하여 수습에 나서고 나서야 간신히 소란이 진정되었다.
프레야 교단의 기사들이 위드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사악한 엠비뉴 교단을 물리쳐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프레야 교단의 은인이
며 역사에 남을 모험가를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위드는 의연하게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조금의 고생도 하지 않았는데요. 엠비뉴 교단과의 싸움은 지나치게 시시했
습니다. 찌는 듯한 한 여름에 은행에 들어가서 낮잠 자기보다 쉬웠습니다."

은행에서 낮잠을 자고 대형 서점에서는 만화책을 본다.
위드가 청소년기를 유익하게 보낼 수 있었던 훌륭한 문화 시설들이었다.
동네에 은행은 몇 개씩이나 있었으니 아무 때나 가서 편히 이용할 수 있는 휴식 공간인 것이다. 손님들을 위한 최
신 잡지까지 분류별로 갖추어 놓기도 했다.
은행원들이 가끔 뒷담화를 하기도 했지만, 그것 정도는 가뿐히 무시한다!
나이 드신 경비 아저씨와 친해져서 커피 한 잔과 함께 요즘 젊은 것들에 대한 깊이 있는 담론까지 나누었던 위드
다.

"기사들이 예를 취하고 있어."
"정말 정중하게 대하잖아."

군중이 수군거렸다.
성기사들이 위드를 대하는 모습을 보며 배가 아플 정도로 질투가 나고 부러웠다.
광장에서 장사를 하던 상인들이나 전사들 누구도 갑자기 포탈이 생성되더니 위드가 튀어나올 줄은 정녕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프레야의 기사들이 저렇게 친절한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아."
"상대가 위드라서 그런 거겠지?"
"당연한 이야기지."

프레야의 기사들까지 광장에 배치되면서, 무작정 다가오려고 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흠."

위드는 소란이 조금 진정된 사이에 광장을 훑어보았다.
봉지에 가득 담은 콩나물들처럼, 광장은 인파로 빼곡했다.

'유저들이 정말 많이 늘었군.'

광장에서 노점을 열고 앉아 있는 상인들을 보면서 떠오르는 세금 생각!

'세금을 올려야 될까 말아야 될까. 소득세를 1%만 더 올려도 엄청난 돈이......'

위드는 총력을 쏟아서 계산에 돌입했다.
수학은 못했지만 현찰에 대한 더하기 빼기는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었다.

'아니야, 아니야. 아직은 너무 일러. 벌써 세금 징수에 혈안이 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면 나중에
세금 폭탄을 때릴 수가 없게 되는데.'

얼굴빛이 파리하게 변했다가, 죽을상이 되기도 한다.
세금을 올리면서도, 안 올린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묘안이 필요했다.
위드가 깊이 고뇌하는 모습에 유저들도 점점 조용해졌다. 표정만 보아서는 정말 큰 우환거리라도 안고 있는 모습
이었다. 때로 얼굴을 찡그릴 때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기도 했다.
이곳에는 위드를 만나 본 사람도 있고, 이야기로만 들었던 사람들도 많다.

"조각품을 팔면서 푼돈에 연연했던 게 다 가식이었던거야?"
"위장술이 보통이 아니야. 킹 히드라를 사냥할 정도의 고레벨 유저면서 저렇게 정체를 숨기고 다
녔다니 말이야."
"전신 위드. 표정을 보니 기분이 나빠져서 우리를 다 쓸어버리는 거 아니야?"
"마법의 대륙에서는 조금의 소란이나 번거로움도 반기지 않던 고독한 전사였다고 하던데......"

흥분이 가라앉으니 사람들은 오싹한 기분마저 들었다. 마법의 대륙에서의 위드가 너무나도 악명 높은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광장 구석에서는 상인들이 눈치 없이 떠들고 있었다.
상인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은 마법의 대륙에서의 위드의 악행들!

"수일아, 정말 그렇게 사람들을 잘 죽였어?"
"응. 위드의 못된 짓들은 말도 못 할 지경이었지. 나도 다섯 번이나 죽었거든."
"무슨 일로 죽었는데? 그럼 위드와는 원수 관계겠네?"

위드도 젊은 상인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마법의 대륙 시절 자신의 이야기였으니 깊은 관심이 갔다.
군중이 생각하고 있는 인식에 따라서 세금도 변동시킬 수 있으니 중요한 이야기였다.

"별다른 특별한 이유는 없었어. 상점에서 물건을 오래 사서 기다리게 한다면서 한 번, 개울가에
서 마주쳤다고 한 번, 그가 사냥하고 있는 던전에 들어섰다고 한 번. 나머지 두 번은 그의 악행
을 참다못해 단체로 연합군이 조성되어서 싸우다가 죽었지."
"고작 그런 이유로 사람들을 죽여?"
"그냥 죽인 것도 아니야. 말 그대로 대학살이었찌. 투항하는 사람이나 부상자도 남겨 두지 않았
으니까."

마법의 대륙에서 위드의 악명은 몬스터에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
유저들에게도 무자비한 살육자였다.
극에 이른 레벨과 신기의 스킬 운용, 유니크 아이템 등을 가진 최강자.
도전자들이 재기할 수 없을 정도로 짓밟아 버리고, 눈에 거슬리는 이들은 일단 죽여 버린다.

'인간과 몬스터에 차이를 두지 않았지.'

위드는 마법의 대륙 시절을 간단히 회상했다.
따로 적수를 기억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말 닥치는 대로 죽였다. 몬스터를 죽이는데 인간이라고 해서 살려 둘 까닭
을 전혀 찾지 못했던 것.
고레벨 유저라면서 거들먹거리는 이들은 일부러 부딪쳐서 시비라도 걸어 죽였다.
거대 길드의 세력? 안중에도 없었다.

'단합이 아무리 잘되더라도 서너 번 죽여 주면 해결됐지.'

길드 하나를 본보기 삼아서 철저히 부숴 버린다.
그 후에 비난이 거세어지고 여론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그러면 다시 박살을 낸다.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베어 버렸다.
그런 일이 수차례 반복되면 다른 길드들도 알아서 움츠러들기 마련.
연합군이 몇 차례 조직된 적이 있지만 던전으로 유인하고, 각개격파해서 섬멸했다.
위드는 영악하게 싸웠다.
혼자의 힘으로 집단을 상대하는 건 사실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지형지물을 이용하고, 아이템을 아끼지 않고 활용하며, 적들을 야금야금 죽이는 사신!
상인이 물었다.

"그런데도 위드란 이름이 그렇게 나쁘게만 남아 있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마법의 대륙 유저들
중에서는 위드를 욕하는 사람이 많지 않잖아."

설명하던 상인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의 대륙이 점점 인기를 잃어 가고 있을 때였으니까, 새로움이 필요하기도 했고, 그때까지
영구 미해결 퀘스트들이 그에 의해 깨지고, 미궁들이 돌파당하고, 불가해의 던전이 가진 비밀들
이 풀어 헤쳐지고 극도로 강한 몬스터들이 사냥당하는 걸 보면서 대리 만족을 느끼지 않았던 사
람이 누가 있었을까?"

사람들이 위드를 미워하지만은 않았다.
로열 로드에서도 위드는 무모하기 짝이 없는 사냥과 퀘스트들을 했다. 실제로는 높은 명성 탓에 거절을 해도 어쩔
수 없이 의뢰들을 받게 된 것이지만.
온갖 죽을 고생을 다해 가면서 아슬아슬하게 깨곤 했지만, 다른 이들은 중간 과정 없이 미화된 결말만을 본다.
세력 확대에 열을 올리는 길드나, 반복되는 사냥이 지겨운 유저들에게 위드는 신선한 한 줄기 빛과도 같았다.
위드와는 완전히 적대적이던 길드나 유저들조차도 그 점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콧대 높던 길드들조차도 위드와 시비가 걸리지 않을까 두려워서 완전히 피해 다녔지."
"그 정도였어?"
"모두가 경원시하면서도, 죽으면서도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었어. 적어도 이름이라도 각인시켜
주고 싶었던."
"굉장한 분위기를 풍겼었나 보네."
"사냥터에서 사냥을 하고 있는데 근처에 위드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미칠 듯한 소름
끼치는 느낌은,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모를 거야."

한창 동료들과 함께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며 사냥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때 인근에 위드가 등장한다.
침묵과 전율이 흐르는 분위기.
퀘스트나 몬스터가 문제가 아니라, 위드가 무엇을 하는지 궁금해서 파티를 이탈해서 그곳에 가고 싶을 정도였다.
실제로 위드의 행동에 관심을 갖고 쫓아다니다가 죽은 이들도 일일이 세기 힘들 정도였다.

"마법의 대륙을 하다 보면 절망적이던, 도저히 가능해 보이지 않던 퀘스트들에 도전하고, 아무도
들어가지 않는 곳을 조금도 겁내지 않고 위드가 들어갔다는 소식들을 듣게 되곤 했지."
"실패할 때도 있었을 텐데?"
"물론. 꽤 많이 실패하기도 했을 거야. 하지만 결국에는 성공했지. 위드가 지나간 던전들에는 몬
스터의 잔해만 남아 있었고, 최고의 순간들이 벌어졌겠지."

마법의 대륙에서 위드가 수립한 기록은 두고두고 퍼질 정도였다.

"그게 위드였구나."
"들으면 들을수록 놀랍고 굉장하네. 역시 직접 경험한 사람에게 들어야 이야기는 재미가 있어."
"마법의 대륙에서의 절대자 위드. 그 사람이 저기 있는 모라타의 영주란 말이지."

군중의 존경 어린 눈빛!
위드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들었다.
푸른빛을 내는 이동 포탈이 고요히 빛을 뿜어내는 가운데 잡고 있는 긴장감.
극심한 번뇌와 갈등, 유혹과 싸워서 이겨 내고야 말았다.

"아직은 아니야. 세금이란 슬금슬금 올려야 하지. 사람들이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갑자기 세율을 올리면 큰 저항에 부딪치고 만다.

"명분도 필요해. 세금을 꼭 올려야 했구나. 올릴 수밖에 없었겠구나, 이해할 수 있는 명분! 그게
없다면 세금을 올리더라도 납득하지 못할 거야."

탐욕을 극복한 위드는 배낭을 땅에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위드가 개인적으로 사치를 하는 금액은 전혀 없었다. 남들처럼 고급 식당을 가거나, 여성 유저들에게 밥 한 끼 사
준 적도 없다. 조각 도구들이나 대장장이용품도 사냥을 통해서 획득하거나 수렵을 통해 자급자족해서 쓴다.
훗날의 이득을 위하여 모라타에 투자하는 자금이 막대하였으니 돈이 많이 필요했다.
음머어어어!
울음소리와 함께 포탈을 통해서 순한 인상의 소가 등장했다.
짐을 나르는 용도로도 사용되는 누렁이.
누렁이의 등에도 배낭이 한가득이다.
통곡의 강 부근에서 사냥하면서 획득한 잡템들.
미리 준비했던 배낭들이 가득 차서, 재봉 스킬을 이용해 새로 큼지막하게 만든 배낭들도 그득그득했다.

"여기 어디쯤 있었을 텐데......"

위드는 배낭을 뒤적여서 검을 뽑았다.
시퍼렇게 날이 갈려 있는 검!

"날이면 날마다 오는 잡템이 아닙니다! 잡템 팔고, 옷이나 갑옷, 무기류도 소량 판매합니다!"
잡템 판매 개시!



무겁게 가라앉았던 광장의 분위기가 풀어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에이, 뭐야 물건 팔잖아."
"괜히 놀랐네."

위드가 쌓은 악명이 너무도 컸고, 모라타의 병사들과 기사들까지 튀어나오다 보니 분위기가 경직되어 있었다. 검
까지 뽑으니 가슴이 덜컥 내려앉을 정도로 놀랄 수밖에 없다
위드에 대한 관심은 그대로였지만 심각함이 사라지고 소란스러우면서도 자유분방한 광장 특유의 분위기가 돌아왔
다.

"저기요."

근처에서 장사를 하던 상인이 용감하게 말을 걸었다.
위드는 이동 포탈의 앞에, 광장의 정중앙에 누렁이와 함께 자리를 잡고 있었다.

"예."
"진짜 전신 위드가 맞으세요?"
"후후,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위드는 부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물어봤던 상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닌가 보구나."
"아니라고 하지?"
"응. 아니래."
"......"

상인들의 제멋대로 판단이었다.
반면에 위드가 마법의 대륙 전쟁의 신인 바로 그라고 믿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
위드의 모험을 방송국 등을 통해서 직접 본 사람들의 생각이 다르고, 스스로의 레벨이나 직업에 따라서도 다르게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어느 쪽이든 확신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상인들은 위드와 누렁이가 가지고 있는 배낭을 보면서 욕심을 냈다.

"그런데 잡템이 꽤 많으시네요."
"사냥을 부지런히 했으니까요."

위드는 잡템을 늘어놓으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아직은 손님이 오지 않고, 장사를 준비하고 있는 단계였다.
상인이 늘어놓은 잡템들을 탐욕스러운 시선으로 보며 제안했다.

"혹시 그 잡템 저한테 전부 파실래요? 가격은 괜찮게 쳐 드릴게요."

위드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직접 팔겠습니다."
"상인인 제가 처분하는 게 나을 텐데요. 장사란 그리 쉬운게 아닙니다."

상인이 충고를 해 주었지만, 위드가 이를 귀담아들을 필요는 없었다.
그에게 장사란 10대 초반부터 이골이 난 일이었다. 시장에서 나물을 팔던 할머니를 따라다니면서부터 배웠으니까!

"케르탑의 더듬이! 블랙 와일드보어의 송곳니! 아무에게나 팔지 않습니다. 잡템이라고 해도 싸지
는 않으니까, 그냥 보고만 가세요."

위드는 몰려 있는 유저들에게 호객 행위를 개시했다.

"더듬이? 송곳니? 무슨 잡템들이기에 가치가 이렇게 높은 거야?"

잡화점에 판매했을 때에 얻는 가치가 환상적이었던 것이다.
위드가 통곡의 강 주변에서 사냥을 하며 모은 독점적인 잡템들이었다. 아직 이동 포탈로 통곡의 강에 넘어간 사람
이 없으니, 지금으로써는 최초의 상품, 특산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동 포탈로 등장한 위드를 보며 군중은 묻고 싶은 게 무척이나 많았다.
퀘스트와 전신 위드에 대해서!
하지만 잡템들을 늘어놓기 시작하자 호기심 많은 군중보다는 물건을 구매하고 싶은 사람들이 먼저 몰려들었다.
상인들과 마법사들은 더듬이를 감정해 보고 크게 놀랐다.
뇌전을 증폭시킬 수 있는 마법 스태프의 재료. 인챈터에게 가져다주면 황금보다도 비싼 값을 받을 수 있는 더듬이
였다.
마법사는 정보를 확인하자마자 소리쳤다. 그가 지불할 수 있는 최대치였다.

"제가 사겠습니다! 더듬이는 개당 350골드까지 구매할 수 있습니다. 전량 구매요!"
"저는 533골드로 구입합니다."
"539골드!"
"540골드에 삽니다."
"555골드로 제가 가진 돈만큼 매입합니다."

잡템의 가치는 일반적으로 정해져 있다.
상인들의 경우에는 회계 스킬을 이용하여 유저들로부터 구입한 물품을 상점에 더 비싸게 판매한다. 친밀도나 공헌
도, 마을 발전을 위해 내놓은 기부금 등에 따라 더 높은 가격을 받을 수도 있었다.
마법사들은 직접 가공하여 대장장이에게 넘겨줄 수도 있다.

"570골드에 삽니다!"

배가 유독 볼록하게 나온 넉살 좋아 보이는 상인이 외쳤다.

"580골드!"
"600골드에 전량 구매할게요."

희귀 잡템을 최초로 상점에 팔면 소득이 크다.
회계 스킬의 증가와 명성을 얻기 위한 구매!
위드는 상인들에게도 바가지를 씌웠다.
위드가 가지고 있던 더듬이는 620골드에 전량 낙찰, 송곳니는 320골드였다. 상점에 판매할 수 있는 가격에 비해
높은편이라서 만족스러웠다.
상인들도 돈은 좀 들였지만 특산품을 팔지 않고도 명성과 함께 스킬을 올릴 수 있으니 이득이었다.
위드는 다른 배낭을 꺼냈다.

"자, 여기 엠비뉴 고단의 머리띠입니다. 인도자의 동맹 퀘스트를 하면서 획득한 전리품들! 기념품
으로 가지고 싶은 분들은 줄을 서세요. 15골드씩에 판매합니다."

엠비뉴 교단의 마크가 새겨져 있는 머리띠. 방어력 3 외에 옵션은 거의 붙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비싼 잡템들을 팔다가 꺼내 놓은, 상대적으로 저렴한 물건들이었다.

"저거 좋아 보인다."
"제가 살게요."
"저도 1개 주세요."

위드는 군중에게 기념품 팔듯이 팔아먹었다.

'역시 열기가 확 올라 있을 때에 팔아 치워야지.'

할인이나 특별 사은 판매라는 명목으로 5개를 사면 하나씩 끼워 주었다.
머리띠도 순식간에 품절!

"그럼 다음 물건으로......"

위드가 속속 내놓은 물품들은 중요도가 훨씬 떨어지는 잡템들!
언데드의 사냥으로 얻은 전리품들. 뼈와 해진 의복류, 녹슨 장검 등의 무기들이었다.
녹슨 무기들은 한계 내구력 자체가 낮아지고, 언데드들이 사용하면 급속도로 약화된다.
위드의 근처에서 장사를 하던 상인들은 할인점 마감 특판처럼 불티나게 팔리는 모습에 부러워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손님."

위드는 말끔하게 검 갈기 스킬과 방어구 닦기 스킬을 이용하여 겉은 번드르르하게 해 줬다.

"간직하면 행운이 찾아오는 기념품입니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에요. 오늘 이후로 물건
이 동나면 더 이상 팔지 않아요."

장비로 쓰기에는 어림도 없는 물건들을 팔아 치우는 자리. 스켈레톤의 다리뼈가 무려 1골드에 팔린다.
누렁이는 빈 배낭들을 등에 지고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그러더니 기다리고 있는 사람과의 접선을 위해 모라타 광
장에서 으슥한 골목길로 들어갔다.
로브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음험한 사내가 골목길 안에 있었다.

"네가 누렁이구나. 말은 많이 들었다."
음머어어어어!
"물건은 여기. 수익 배분은 정확히 6대 4라고 위드 님에게 전해 다오."

누렁이는 말을 알아듣고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빈 배낭에 가득 잡템을 실었다.
골목길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자. 그의 정체는 마판이었다.

"잡템들을 비싸게 팔아 치울 기회를 놓칠 수 없지."

보통의 잡템들까지 기념품으로 위장하여 더 많이 팔아먹기 위한 전략.
위드는 뼈에는 조각칼로 이름까지 새겨 주었다.

행복하세요. 위드.

즐거운 사냥 되시길 바랍니다. 위드.

언데드 군주 바르칸 데모프, 그와의 격전을 회상하며. 위드.

솔직히 말해서 바르칸과는 싸우지도 않았다.
방대한 언데드 무리 중에서 떨어져 나온 일부를 야만족들을 데리고 제압했을 뿐!



로열 로드의 게시판에는 전신 위드가 화제에 올랐다.
마법의 대륙에서 그가 해결한 퀘스트들을 나열하면서 존경을 표시하는 몇 명이 있었다.
하지만 악행에 대한 더 많은 사람들의 제보도 등장했다.

-장비 얼마 주고 샀냐고 물어봤는데 죽이더군요!
-상점에서 새치기했다고 죽였습니다.
-그래도 위의 두 분은 이유라도 있었잖아요. 저는 위드가 사냥하려던 던전에 먼저 있었다고 죽였습
니다.
-하품했다고 죽였어요.
-그냥 남자라고 죽였습니다.
-저는 열두 번이나 죽었습니다. 마을. 광장, 사냥터 가릴 것 없이 만날 때마다요. 나중에 억울해서
물어보니 이름이 마음에 안 들었다던데요.
-이름이 뭐였는데요?
-위드바보똥개요.
-죽일 만하네요.

위드의 악행들이 어마어마하게 쏟아져 나온다.
게시판의 비중이 위드에게 향해 있었다. 평소에 관심을 갖던 다른 사안들이 묻힐 정도였다.

-저는 위드에게 서른 번 넘게 죽어 봤습니다. 독하게 덤볐거든요.
-서른 번? 그 정도로 나서시는 겁니까? 저는 쉰 번도 넘게 죽었어요. 위드를 끝까지 괴롭히던 밤토
리를 기억하는 사람들도 많을걸요.
-밤토리 님. 위드에게는 한칼거리도 안 되었을걸요?
-후훗. 윗분들, 싸우지 마세요. 여러분이 아무리 자주 죽었다고 해도 저만 하겠습니까? 저로 말씀
드리자면 마법의 대륙에서 상위 50위 안에 들던 랭커였습니다. 희귀 아이템 아페잔의 서클릿도 들
고 있었어요. 저를 죽인 위드가 그 아페잔의 서클릿을 가져가서 착용했습니다.
-부럽군요.
-위드에게 아이템을 빼앗기시다니... 위드가 그 아이템 오랫동안 썼나요?
-흑룡을 사냥할 때도 착용하고 있던 아이템입니다. 크하하!

어긋난 자긍심!
위드가 워낙에 유명한 유저이다 보니 관련되었던 유저들도 고레벨이 많았다.
로열 로드에서 행적을 잘 드러내지 않던 유저들도 게시글을 올린다. 명예의 전당에 올라간 유저들도 과거 마법의
대륙 시절의 경험담을 올리면서 위드에 대한 전설들이 속속 추가되었다.
도둑 출신으로, 위드를 끝까지 몰래 따라가면서 던전 탐험을 했던 유저의 기록은 일품이었다.

-가장 빠른 속도의 돌파! 몬스터들의 무리에 둘러싸여서 겁 없이 헤치고 가던 장면들은 몸이 오싹
할 정도였습니다.
전투 능력도 능력이지만 그처럼 일절 군더더기 없는 효율성은 일찍이 본 적이 없습니다.
상처를 입고 함정에 빠져도 끝없이 전진하던 위드였지요.
-무슨 던전이었나요?
-보스급 몬스터는 뭐가 나왔죠?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중간에 위드에게 발각당해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위드는 외롭게 사냥터를 전전하면서 자잘한 시비들에 휘말리지 않았다.
눈에 거슬리면 죽일 뿐이다.
길드들도 덤비면 죽이고, 귀찮으면 죽인다.
무자비한 악명을 널리 쌓게 된 계기였다.



CTS미디어에서는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베르사 대륙에 정보 조직을 깔았다.

"뉴스에서 뒤처지면 안 돼. 연예인들에 대한 방송보다도 뉴스가 훨씬 중요해."

로열 로드를 하는 유저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로열 로드를 즐기지 않는 사람이 미개인 취급을 받을 정도다.
아프리카와 중동, 남미에서의 열풍도 대단했다.
아랍권의 왕족이나 브라질의 마약상조차도 로열 로드에 푹 빠져 있을 정도라고 하니 말 다 한 셈!
해외 유저들이 일시에 쏟아져 들어오면서 상당한 혼란이 벌어질 것 같았지만, 그들은 조용히 새로운 세상을 즐겼
다.
레벨업이나 아이템 수집과 같은 극단적인 성장에 매달리는 사람들은 일부에 불과했다.
대륙의 중부와 서부, 북부 지역에 정착했다.
몬스터나 이종족으로 새로운 세계를 즐기는 데에도 거부감이 없는 유저들이 많았다.
CTS미디어에서 주력으로 밀고 있는 '베르사 대륙의 영웅들' 은 세계 각국으로 통역이 되어 방송될 정도였다.
로열 로드가 성장하면서 관련 방송사들의 매출도 급신장하고 있었다.

"뉴스만큼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도 없어. 간판 프로그램은 뉴스가 될 수밖에 없어!"

CTS미디어는 경쟁사들보다 먼저, 그리고 훨씬 좋은 조건에 해외 방송사들과 계약을 체결했다.
모회사가 세계적인 다국적기업이라는 점을 이용해 그 인맥을 적극 동원하였기 때문이다.
판권 계약으로 막대한 자금이 유입되고, 매출액에 따라서 일정한 로열티도 지급받기로 했다.
해외 유저들이 구입하는 캡슐과 이용 요금뿐만이 아니라 방송 산업이 확대되면서, 로열 로드가 대한민국의 커다란
수입원이 되려 하고 있었다.
상업적인 마케팅에 대한 부분은 CTS가 단연 앞서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렇게 번 돈을 로열 로드에 재투자했다.
유니콘의 주식 지분을 늘려서 이사회에서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였다. CTS뿐만 아
니라 모그를 전체라고 해도 유니콘에 비하면 매출액이나 현금 수입이 상대가 안 될 정도였다.
세계 경제계에서 유니콘의 위상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었는데, 초창기부터 주식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만 돈벼락을
맞은 뒤였다.
CTS미디어에서는 로열 로드의 정보 습득을 위해 기자들을 파견하고 유저들에게 투자했다.
성주들을 비롯하여 핵심 유저들을 큰돈으로 회유하는 것이다.

"우리 방송사에서만 독점 취재를 할 수 있게 해 주면 좋겠습니다."

대부분의 유저들은 돈 앞에 쉽게 흔들렸다.

"정말 이 정도로... 이렇게 돈을 받아도 되는 건가요?"
"물론입니다. 그리고 다스리는 영토 내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정보들을 제공해 주시고, 가능한
다른 방송사 요원들의 활동도 막아 주셨으면 합니다."

지역을 다스리는 길드들에는 어려운 부탁이 아니었다.
정체를 숨기고 활동하는 다른 방송사 기자들의 이동까지 전면 봉쇄하는 것은 무리다. 하지만 공개적으로 다른 방
송사에서 취재 활동을 하는 정도는 얼마든지 막아 줄 수 있는 일이었다.
길드들이 욕을 먹는 것도 하루 이틀 이야기도 아니라서 그쯤은 어려운 부탁도 아니다.

"알겠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CTS미디어 측에서는 베르사 대륙의 많은 중소 영주들과 협약을 맺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세력이 큰 길드들과의 협상은 쉽게 진행되지 않았다.
한 지방의 패자들은 여러 수입원을 가지고 있었다.
세금, 군소 길드로부터의 상납 금액, 사냥터 이용료, 무기와 방어구 판매 등으로 많은 이윤 창출이 이루어지고 있
었던 것이다.
명문 길드들은 이미 상업적으로 물들어서, 작지 않은 규모의 기업을 운영하는 수준이었다.

"계약 금액이 적군요."
"저희는 이 정도의 금액에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방송사 부장들의 연락도 무시할 정도로 성장했다.
가상현실이라지만 베르사 대륙의 큰 영주들은 그만한 권력과 힘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방송사조차도 그러한 영주들을 함부로 거스르지 못했다.
그들의 비위를 거스른다면 취재가 잘 이루어질 수 없었기에, 약자의 입장에 처했다.
대형 길드들의 악행도 함부로 보도를 못 할 정도였다.

"중부 대륙은 그럭저럭 모두 연락을 취했고... 남부와 서부는 어느 정도나 진행되었지?"
"오늘내일 중으로 연락처가 파악된 유저들에 대해서는 섭외가 끝납니다."
"그들의 반응은 어떤가?"
"중앙 대륙에서의 거래 내용이 소문난 덕분인지 결정이 빠릅니다. 거대 길드들이 많아서 섭외가 금
방 될 것 같습니다."
"나쁘지 않은 소식이군."

베르사 대륙의 서부는 다른 지역들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중부에는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 국가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비옥한 토지와 광산, 인구를 자랑하는 강국들이다.
동부에는 잠재력이 뛰어난 신흥 국가들이 자리를 잡았고, 남부는 마법이 발달했다.
북부는 막 개척과 모험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시점이었다.
베르사 대륙의 면적이 워낙 넓기에 중앙 대륙에서도 세세한 곳까지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다.
서부는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강해서 출신 민족에 따라서 주로 가입하는 길드들이 결정된다.
다른 지역에서는 특정 도시나 마을에서 시작했더라도 사냥터를 옮기는 것만으로도 영향권을 벗어날 수 있었지만
초원과 사막지대가 많은 서부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강한 전사들은 혈연으로 맺어진 유목 민족들이 많아서 강한 결속력을 자랑한다.
중앙 대륙에서 떠돌이를 자처하지 않는다면 대부분은 출신 민족에 따라서 길드가 결정되었다.
중앙 대륙과의 힘에서의 비교는 열세였지만, 길드 개개의 영토 크기와 인원수는 적지 않은 편이다.

"그건 다행이군. 북부로는 누가 연락을 취하지?"

CTS미디어의 회의실에서 전무가 직접 회의를 주재하고 있었다.

"북부라면 대표적으로 위드의 모라타가 있습니다. 과거 우리와는 거래 관계도 있었지요."
"누가 연락을 했었지? 담당자가 누구야?"
"회장 비서실의 윤나희 씨입니다."
"회장 비서실에서 직접 연락을 취했다니, 왜?"
"마법의 대륙 계정 구입이 회장님께서 직접 결정을 했던 사안이지 않습니까. 8인의 영웅들 프로그
램의 섭외도 그녀가 맡았습니다."
"그때가 참 아쉽군. 그대로 계속 방송을 했었다면 대박이었을 텐데......"

8인의 영웅들은 그럭저럭 괜찮은 시청률을 거두었다.
하지만 초반의 반응이 좋지 않았다고 해서 위드를 출연 중단시키고 말았다.
그 후에 위드는 진혈의 뱀파이어와 불사의 군단, 본 드래곤과의 전투 등에서 승리했다.
경장사인 KMC미디어에서 방송을 한 일로 인해서 담당 PD가 사표를 쓰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CTS미디어의 회장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위드에게는 일단 나희 씨가 연락을 하도록 하지."
"그렇게 조치하겠습니다."





<마법 검의 대장장이>





위드로 인하여 유명해진 드워프 장인들의 도시 쿠르소에는 많은 유저들이 방문하고 있었다. 복원된 켄델레브의 물
의 조각품을 보며 감탄도 하고, 멋진 무기와 방어구를 구경하기도 한다.

"하, 돈이 조금만 더 있어도 사고 싶은데...... 드워프 아저씨, 깎아 주시면 안 되나요?"
"한 푼도 안 돼."

흥정을 하는 드워프와 유저들을 쉽게 만나 볼 수 있었다.
쿠르소에서 드워프들이 파는 물건들은 장신구라고 해도 굉장히 비싸서 쉽게 구입을 마음먹을 수가 없다. 상인들에
게는 보석이나 금보다도 유용한 교역품이다. 어느 마을에 가서도 팔 수 있고, 또 주인만 잘 만난다면 가격을 높여
서 받기 좋았기 때문이다.
번잡해진 것을 좋아하는 드워프들도 있었지만, 일부는 대장간에서 나오지도 않고 작품을 만드는 데 몰두했다.

"흐음."

파비오는 완성된 검을 숫돌에 갈았다.
슥삭슥삭.

『검을 날카롭게 갈았습니다.
검 갈기 스킬 발동!
공격력이 41% 증가합니다. 』

검 갈기 스킬!
위드만이 쓸 수 있는 스킬이 아니라, 중급 대장장이라면 터득할 수 있는 기술이다. 물론 재봉을 배운 적도 없던
파비오는 다림질이나 손빨래 등의 기술은 알지 못하였다.

"꽤나 날카롭게 갈아졌군."

파비오는 검을 이리저리 돌려 보며 흠집을 찾으려고 했다. 수염 난 드워프의 얼굴이 그대로 비칠 정도로 매끈한
검신!
대장장이로서 베르사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유저가 파비오였다. 그의 특기는 갑옷이나 방패 제작으로 알려져 있는
데, 실제로는 검을 만드는 걸 숨기고 있었다.
가끔 그가 만들어 놓은 검이 세상에 흘러 나갈 때마다 한바탕 난리가 났다. 검을 만든 대장장이를 찾는다면서 추
적까지 벌어질 정도였다.
보통의 대장장이와는 차원이 다른 수준의 무기류!
어느 정도 고레벨에 오르면 사냥을 통해서 획득하는 게 보통이었지만, 파비오가 정성을 다해서 만든 검들은 수많
은 유저들이 쟁탈전을 벌일 정도였다.
명검 한 자루가 있으면 사냥 속도가 달라진다. 로열 로드에서 무기나 방어구에 대한 집착은 무시무시할 정도였던
것이다.
파비오는 검을 만들어서 가끔 치기로 세상에 내보내기는 하였지만, 자신의 행적이라는 것을 철저히 숨겼다. 은거
하고 있는 대장장이 정도로 착각할 수 있도록 숨어서 활동했다.

"검 갈기 스킬은 참 좋단 말이야."

파비오는 만족스러운 듯이 완성된 검을 내려놓았다.
일시적이지만 공격력을 증가시켜 준다.
고급 대장장이 스킬 8레벨, 고급 검 갈기 스킬 6레벨을 익히면서 검의 공격력을 최대 85%까지도 끌어올릴 수 있
었다.
다만 그렇게 되면 부작용도 크다.

"예기를 지나치게 키우면 검의 내구도가 잘 떨어지고 쉬이 상하게 되지."

무난하게 사용하더라도 40% 정도의 공격력은 문제없다.

"완성된 검이란 참으로 아름다워."

현실에서 평범한 월급쟁이였던 그는 로열 로드가 생기자 곧바로 매료되었다.
여러 직업들이 있었지만 그를 움직였던 것은 대장장이.
초창기에 로열 로드는 혼란 그 자체였다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유저들이 토끼와 싸우는 법조차 잘 몰랐다. 오크
1마리가 등장하면 마을 입구까지 도망치고, 수십 명이 죽어 나가는 일도 예사로 벌어졌다.
평범한 장검 한 자루가 엄청난 부러움과 질시를 받던 시절이다.
파비오는 대장장이를 택하기로 했다.

"좋은 결정이었어."

전투의 일선으로 뛰어들지는 못하지만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남보다 빠른 결정과 집중을 통해서 대장장이 스킬을 향상시켰다.
드워프 마을에서 가장 뛰어난 대장장이가 되면서부터는 일감이 끊이지 않았다. 도시에까지 이름이 나니 그에게 일
을 맡기려고 멀리에서부터 손님들이 찾아온다.
대장장이는 항상 수요보다는 공급이 모자란 직업이다.
최상급의 대장장이라면 말할 나위도 없는 것.
엄청난 수고료를 받으면서 돈을 모았고, 광물들을 구입해서 방어구를 만드는 데 투입했다.
화로 앞에서 망치를 두들기며 시뻘겋게 달군 철을 재련하는 직업.
고독한 일이지만 작품들을 만들면서 버텼다.
최고의 재료들을 바탕으로, 높은 수준들의 유저들과 계약을 맺고 그들에게 방어구들을 공급한다.
텔레비전에 출연하면서 그의 지지자들도 엄청나게 늘었다.
초보 대장장이들에게는 우상과도 같은 존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파비오는 길드 '아이언로드'의 실제 지배자이기도 했다. 길드를 관장하면서 장비들을 만들
어 주었다.
적보다는 친구가 많고, 유무형의 영향력까지 쥐고 있었다. 드워프 종족의 유저라면 그이 한마디를 거부할 이가 많
지 않은 것이다.

"대장장이의 보람은 그래도 좋은 무기를 만드는 데 있지."

쨍그랑!

파비오는 만들어진 검을 옆에 대충 던져 놓았다.
주변에는 검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이번에도 생각처럼 좋은 검은 만들어지지 않았군. 무엇이든 자를 수 있는 최강의 검. 베르사 대륙
에 우뚝 설 수 있는 검을 만들어야 돼."

대장장이의 비기!
파비오는 대장장이의 길을 걸으면서 특수한 기술들을 터득했다.

『고급 광물질 제련 3(25%) : 각종 재료가 되는 광석을 불순물 없이 완전히 정제하여 사용하는
기술이다.
대장장이로서의 바탕을 키워 주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불과 바람, 금속의 의지를 깨달아야 함.

광물질 제련은 대장장이의 비기로서 가장 먼저 습득했던 스킬.
파비오가 철혈의 대장장이로 전직하면서 배운 기술이었다.

"크흐흐,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그 전직 과정은 치가 떨렸지."

대장장이로 전직하기 위해서 대장간에서 죽어라 고생을 했다.
그저 남들처럼 대장장이 길드에 가서 무기나 방어구 몇 개 만들어 보면 전직할 수 있었는데도 그러지 않았다.
눈으로 보고, 직접 손으로 두들겨 보고 전직하고 싶은 마음에 로열 로드의 초창기에 대장간에서 1달이 넘는 아까
운 시간 동안 잡일을 했다.
그 지긋지긋한 과정을 거쳐서 얻게 되었던 전직 퀘스트!

"대장장이의 애환과 눈물 퀘스트는 평생 잊지 못할 거야."

다리 짧은 드워프로서 부지런히 몇 개의 마을을 뛰어다니면서 의뢰를 성공하여 전직했다. 그리고 대장간에 정식으
취직하여 퀘스트들을 받았다.
대장장이 퀘스트는 길드가 아니라 대장간에서도 얻고 수행할 수 있었다.
하나가 아니라 여러 종류의 장비들을 만들어 보았다.
닥치는 대로 퀘스트를 수행하면서 명성을 쌓고, 돈을 벌었다. 그러면서 퀘스트를 통해서 장비 개량 스킬을 습득했
다.

『고급 장비 개량 1(16%) : 대장장의 손에서 장비의 잠재력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수많은 실패작들을 통해 장비들을 바꾸어 놓을 수 있으리라.

파비오를 유명하게 만든 기술!
이 스킬을 배웠을 때가 그가 중급 대장장이가 되었을 무렵이었다.
실력의 서 푼은 감추라는 말이 있다.
베르사 대륙에서는 패권 다툼이 끊임없이 일어나는지라 실력을 함부로 공개하면 시비에 휘말리거나 목숨을 잃기
쉬웠다.
파비오는 장비 개량을 통해서 방어구들을 강화시켜 주면서 검도 강화시켜 줄 수 있다는 사실은 일부러 숨겼다.
검까지 강화했다면 당시로써는 돈을 쓸어 담을 수 있었을 것이다. 방어구 개량만을 통해서도 그 전에 1달에 벌던
금액을 하루에도 벌었던 것이다.
대장장이가 상인을 제외하면 꽤 돈을 잘 버는 직업에 속한다고 해도, 엄청난 수입이었다.
하지만 대장장이에게 그만한 능력이 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대장장이를 택하게 될 것이다.

"경쟁자들이 늘어나고, 나를 한시도 편하게 놔두지 않겠지."

파비오는 적당한 수준에서 방어구들만 개량해 주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대장장이 스킬의 끝, 그리고 최고의 무기와 방어구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장비 개량 스킬을 통해서 돈을 번 이후로는 광석들을 무제한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토르 왕국의 미스릴 광산, 철광산, 은 광산을 통째로 구입하기까지 했다.
대장장이 스킬이 고급에 올랐다.
그리고 퀘스트와, 인연이 닿아서 획득한 대장장이의 비기.

『초급 에고 소드 제작 8(49%) : 장비에 영혼을 불어 넣을 수 있음.
다만 많은 양의 마나와 특수한 영혼이 필요함.
무덤가에서 만들면 효과가 좋다.

에고 소드.
파비오는 시험작으로 가지고 있던 검들에 영혼을 부여해 봤다.

띠링!

『소유하고 있는 모든 마나가 사용됩니다.
검에 자아가 부여되었습니다.
검의 속성이 변합니다.
공격력 17% 감소.
내구력 65% 감소.
마법적인 특성이 생겼습니다.
에고 소드 제작 스킬과 대장장이의 마법력에 따라서 공격력과 내구력 감소 수치가 줄어들며,
마법적인 특성이 더 많이 부여됩니다.

『수련의 검 : 내구력 25/25. 공격력 31-46.
기초적인 장검이다.
균형이 잘 잡혀 있으며, 양질의 철을 담금질하여 만들었다.
(제작 무기.
대장장이 스킬이 고급에 오른 이에게만 보이는 무기의 특성.
대장장이 파비오가 만든 작품.
에고 소드.
고블린의 영혼이 봉인되어 있다.
영혼은 깨어나지 못한 상태임.)
제한 : 레벨 180.
검사, 기사, 워리어 계열 한정.
옵션 : 번개 속성 데미지 2.
행운 15.

에고 소드라고 하여 굉장한 기대를 했다.
뭔가 거창한, 대단한 물건이 나올 것을 예상했던 탓!

"대실패작이로군."

파비오는 미간을 찌푸렸다.
에고 소드는 스스로 자아를 갖추고 사냥을 통해 점점 성장하는 무기다. 예를 들어 공격력이 40이던 검이, 사냥을
하면서 70이나 80이 된다. 스스로 생각해서 일정한 방어 마법도 펼칠 수 있다.
무기의 한계를 뛰어넘는 스킬!
하지만 심각한 단점이 존재했다.
그냥 만드는 검보다 공격력과 내구력이 너무 많이 감소 한다.

"마법적인 특성도 별게 아니야."

파비오는 순수한 대장장이라서 대부분의 스탯을 힘과 민첩, 체력, 집중력에 투자했다. 강하고 정밀하게 망치질을
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지식과 지혜가 낮아서인지 마나의 양도 보잘것없었꼬, 마법은 배우지도 않았다. 그 때문인지 완성된 에고 소드는
기초적인 수준의 마법밖에는 펼칠 수 없었다.
보유하고 있는 마나양도 소량이었다.
가장 중요한 자아 역시, 스스로 말을 하거나 지난 전투를 기억하지는 못했다.
에고 소드 제작 스킬이 낮고 마법적인 성취가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파비오는 시험 삼아서 딸을 시켜 만들어진 에고 소드를 몰래 팔아 치웠다.
에고 소드의 성장을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초보나 중급 유저들이 대충 사용하다가 내팽개치는 신세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에고 소드라고 해도 겉보기로는 1개나 2개 정도의 방어형 옵션이 붙은 매직 아이템 정도밖에 안 되었던 것이다.
1명은 이상한 일이라면서 게시판에 글을 올리기도 했다.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제가 길에서 주운 이 무기는 번개의 힘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최소 공격력 31에서 46.
번개 데미지 2가 붙은 물건이었는데요, 이 주일 동안 사냥을 하고 나서 수리를 위해서 감정을 해
봤는데 공격력이 1씩 올랐습니다. 그리고 번개 데미지도 3으로 늘었어요.
이제 다른 검으로 옮겨 탈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에 대한 답글들.

-단기 기억상실.
-술 적당히 드세요.
-그 검, 저 좀 보여 주실 수 있을까요? 그냥 달라는 건 아니고, 꼭 돌려 드립니다.
-없이 사는 초보인데 300골드에 파세요.

"에고 소드 제작은 최소한 중급이나 고급이 아니라면 빛을 보기 어렵겠군."

드워프는 천성적으로 대장 기술을 타고난 종족이지만 마법적인 능력이 열악해서 어울리지 않는 스킬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엘프 대장장이나 혹은 인간 대장장이라면 조금 더 나은 에고 소드를 만들 수 있으리라.
파비오는 매우 아깝지만 에고 소드 제작은 포기하고 있었다.

『초급 마법 검 제작 1(3%) : 마법 검을 만들 수 있다.
완성된 마법 검은 재료의 특성에 따라서 특수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음.
마법을 각인하여 사용할 수 있다.

파비오가 현재 가장 중점을 두고 기대하고 있는 스킬!

"최고의 마법을 각인한 검을 만드는 거야."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마법력을 가진 재료는 던전의 깊숙한 장소나 고대의 몬스터들을 잡으면 소량 얻을 수 있다. 그 재료들을 가지고
궁극의 마법 검을 만들기 위해서 매진하는 것이다.

"진정한 마법 검은 마법사가 아니라 대장장이가 만드는 것이지."

마법사가 검에 마나를 모두 투입해서 몇 번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을 부여할 수는 있다. 하지만 대장장이는 그런 마
법이 각인되어 있는 검을 창조한다.
파비오가 무수히 많은 대장장이 퀘스트들을 섭렵하고 나서 발견한 의뢰를 깨고 얻은 비기였다.

『마법 검의 대장장이
악룡 케이베른을 증오하던 드워프 대장장이의 비술.
일반적인 검으로는 악룡의 피부에 생채기를 낼 수도 없고, 마법으로 드래곤과 싸우려는
것도 무모한 짓. 드워프 대장장이는 검을 찔러 넣은 후에 마법으로 폭발시키는 것만이
악룡을 사냥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마법 검을 제조하는 비법을 획득하기 위하여 드워프 대장장이가 사라진 던전을 탐험하라.
난이도 : 대장장이 직업 퀘스트.
제한 : 드워프 대장장이 한정.

비밀리에 길드를 이끌고 가서 깬 직업 의뢰였다.
마검은 일반적인 검보다 공격력이 강하고, 또 피를 흡수할 때마다 살기를 더하며 성장한다. 에고 소드 같은 부작
용도 덜해서, 무기용 검을 위해서라면 어쩌면 더 나은 방법이 될지도 모른다.
땅땅땅!
파비오는 묵묵히 강철을 두들겼다.

"절대의 무기, 완전에 가까운 방어구, 이것들이야말로 대장장이를 베르사 대륙의 중심에 우뚝 세
울 수 있으리라."

지금 이 순간에도 베르사 대륙의 다른 대장장이들이 구슬땀을 흘리고 있을 테니 쉴 수가 없다.
파비오는 드넓은 베르사 대륙에서 자신을 억제하고 숨기고 잇는 진정한 거인의 한 사람이었다.



붉은용병 길드.
베르사 대륙에 국가를 가리지 않고 세력을 떨치고 있는 길드였다.
레벨 280이 넘는 용병들만 가입이 허가되었다.
각국에 용병 길드의 지점을 두고 운영하고 있으며, 풍족한 네미르 호숫가 유역의 영지 전체를 장악하고 있다.
보유한 성이 5개, 마을이 28개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의 패자였다.
네미르 호숫가에 가장 가까운 하륜 성에서 붉은용병 길드의 회합이 이루어졌다.

"전쟁의 신 위드라."
"길드장, 토벌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붉은용병 길드의 수장인 마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위드라면 토벌해 줄 이유가 충분하지."

전신 위드와 싸워서 승리했다는 영광!
베르사 대륙 전체의 패권을 도모하는 붉은용병 길드로서는 탐이 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고개를 저으면서 반대하는 용병들도 있었다.

"마법의 대륙에서부터 용병들의 우상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용병들을 대표하는 우리가 그를 토벌
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명분이 필요합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를 공격한다면 남의 것을 빼앗는 도적단과 다를 게
뭡니까?"
"명분이 뭐가 중요합니까. 명예를 생각해야지요! 전신 위드와 싸워 이겼다는 명예를 얻을 기회입
니다."
"명예가 될지 혹은 오명이 될지는 지켜봐야 알 일이죠."

상급 용병 20명은 각자의 입장에서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말다툼을 벌였다.
용병 길드의 수장인 마렌도 처음에는 위드를 토벌하는 데 욕심이 났지만, 반대 발언들을 들으면서 약간은 머뭇거
릴 수밖에 없었다.
영광이 있기는 할 것이다.
전신 위드를 죽인 유저라는 타이틀은 매우 매력적이었으니까.
반면 위드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는 유저들의 반감도 함께 얻게 되리라.
마법의 대륙 출신의 유저들도 위드를 싫어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로열 로드에서 그의 인기는, 일반 유저들 사이에
서 최절정을 달린다.
명성만큼으로는 공인된 최강자인 헤르메스 길드의 바드레이와 같은 반열에 오를 정도다.
불가능한 퀘스트들을 공략하면서 유저들로부터 우상시되고 있는 위드를 친다는 게 반드시 길드에 이득이 될지는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상급 용병 중의 1명인 나프겔이 말했다.

"길드 전체가 나서서 전신 위드를 짓밟아 주는 게 도대체 어떤 명예를 얻을 기회라는 겁니까? 여
러분 중에서 일대일로 싸워 위드를 이길 자신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

그러자 좌중 전체가 조용해졌다.
마렌조차도 섣불리 말할 수는 없는 문제였다.
위드는 스스로의 레벨이나 스킬을 공개한 적이 없다.

"그가 일반적인 조각사라고 봐서는 곤란할 것입니다. 누가 팔랑카 전투에서 위드처럼 싸울 수 있
습니까?"
"......"

아무리 봐도 승산이 희박한 전투에서 검을 들고 그토록 활개를 칠 수 있는 건, 정신적인 부분의 강인함이었다. 일
반 유저들이 위드에게 열광하는 건, 모든 걸 던지고 도전할 수 있는 그 용기 때문일 것이다.

"전투 능력만을 놓고 볼 때, 여기서 그와의 승부를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그
리고 진짜 직업이 조각사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나프겔, 그 말은......?"
"그의 직업이 조각사라고 방심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네크로맨서 마법을 사용하고 육체적인
전투 능력을 보여 주는 등,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으니까요."

마렌도 로열 로드 전체에서 50위권 안에 드는 랭커였지만 상대의 능력을 전혀 몰랐다.
본 드래곤과 싸울 때 보여 주었던 전투 능력을 감안하고, 그가 완수한 퀘스트들을 돌이켜 보면 솔직히 매우 부담
스러웠다.

'우리는 길드를 이끌고 가서 싸우지. 그렇게 혼자서 퀘스트를 할 자신은... 솔직히 없다. 그리고
레벨을 떠나 전투적인 감각도 나보다 최소한 몇 배나 위야.'

위드에 대한 정보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변수가 많은 일대일 전투에서 패배하기라도 한다면 피해가 막심하리라.
마렌 정도의 랭커가 죽으면 하락하는 레벨과 숙련도를 다시 올리기는 무척이나 어렵다. 랭커들끼리의 숨 막힐 듯
한 경쟁 관계에서 도태될 수도 있는 것이다.
게다가 위드와의 싸움은 분명 방송사도 나설 테고, 동영상도 올라오게 될 것이다.
그 전장에서 패배한다면 명예도 함께 잃어버릴 수 있다는 부담감도 가져야 했다.
마렌의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이미지!

'우리 길드원들이 짚단처럼 우르르 베이고, 아이스 드래곤이나 불사조, 와이번... 그리고 만의
하나 네크로맨서 마법들까지 사용한다면 매우 골치가 아파.'

네크로맨서 마법의 위력은 공인된 바가 있다.
직접 키워 보니 체력도 약하고 성장시키기 까다로운 직업이라고 불평들이 거세었지만, 위드가 방송을 통해서 보여
준 전율적인 모습들 때문에 전직하는 사람들이 많은 직업이다.

'네크로맨서의 마법에... 전쟁의 신이라고 불리기에 모자람이 없는 전투 능력.'

위드가 잔혹한 웃음을 머금고 마렌의 목을 공개적으로 베어 버리는 장면.

"으음."

마렌은 함부로 나설 수가 없었다.

"진다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그래도 만약의 경우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으니 어려운 문제로군."
"게다가 북부까지 원정대를 보내면 호시탐탐 우릴 노리고 있는 다른 길드들에 좋은 기회를 선사
하는 꼴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붉은 용병 길드는 세력이 큰 만큼 적들도 많다. 주력부대를 무한정 밖으로 내돌릴 수 없는 처지였다.

"위드를 잡으려다가 우리 길드가 공격을 받을 수도 있단 말인가요?"
"충분히요. 북부까지 전투부대를 보내는 동안 영토는 취약해질 수밖에 없죠. 다른 길드들의 입장
에서는, 위드를 잡았다는 명예보다는 실익이 큰 우리의 영토를 노리는 게 합리적인 판단 아니겠
습니까?"

경쟁하고 있는 용병 길드들도 많은데, 그들이 연합하여 공격을 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
붉은용병 길드로서는 여러모로 고민되는 일이었다.



위드는 잡템들을 다 처분하고 나서 몇 가지만을 남겨 놓았다.
소피아의 거창이나 대형 크리스털 원석, 조르디아의 직인, 다이아몬드, 이스렌의 마법 무구는 따로 주인을 찾을
작정이었다.

"대형 크리스털 원석은 조각술로 가공한 다음 대형 장식장을 만들어서 귀족들에게 팔아먹으면 괜
찮겠고... 빛의 조각술을 펼칠 때에 써먹어도 나쁘지 않겠지. 나머지 물건들은 경매나 다크 게이
머 연합을 통해서 넘겨야겠군."

대형 크리스털로 만든 화장대와 식탁!
북부에서는 처분하기 어려운 물품이 되겠지만 중앙 대륙의 왕국에서는 매우 비싼 가격에 팔 수 있는 고급 물품이
었다.
위드는 잡다한 물품들을 판매하고 나서 누렁이와 함께 모라타의 거리로 걸음을 옮겼다.
주민들이 알아보고 먼저 인사를 했다.

"영주님 오셨습니까."
"영주님, 이번에도 대단한 의뢰를 성공하셨다고 하던데... 나중에 꼭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아들
녀석이 커서 꼭 영주님처럼 되고 싶다고 합니다."
"모라타 백작님, 린틀 왕국의 상인입니다. 유명한 분을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통곡의 강에서 쌓은 어마어마한 명성 때문에 중앙 대륙의 NPC에게도 뜨거운 반응이었다.

"저희 집 마당에 사과가 탐스럽게 열렸습니다. 가장 맛있는 사과를 영주님을 위해서 아껴 놨으니
꼭 드셔 보세요."

사과를 바구니째로 건네주는 아낙네!
시장에 가지고 나가서 판매하려던 과일 바구니인데 영주를 보자 덥석 줘 버린 것이다.
위드는 과일 바구니를 받아서 빨갛게 잘 익은 사과를 와삭 깨물어 먹었다.

"누렁아, 너도 한 알 먹어라."

누렁이에게는 벌레 먹은 사과를 던져 주었다.
황소는 혀를 내밀어서 핥다가 입을 크게 벌리고 와작와작 깨물어 먹었다.
위드는 근엄하게 교훈을 내렸다.

"누렁아, 사람이란 말이지,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서로 돕는 거야. 이런 게 다 평소에 쌓은 인덕
때문이 아니겠냐?"

누렁이는 전혀 믿지 않았지만 그저 고개를 끄덕이면서 바구니에 든 사과를 받아먹느라 여념이 없었다.
모라타는 지난번에 왔을 때와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영주성으로 향하는 길목에 튼튼하게 세워진 다리에는 신비로운 무늬들이 조각되어 있다. 조각사나 예술가, 화가
들이 모라타에 와서 도시를 풍요롭게 만들고 있었다.

"상가 짓습니다!"
"화가 데려가 주세요."
"조각사 참여합니다. 천장을 맡을게요!"

건축 퀘스트가 발생하면 예술가들이 너도나도 동참하여 아름다운 건물을 짓는다.
맑은 강과 호수가 있는 모라타에는 갈수록 볼거리들이 늘어났다.
모라타의 첨탑에는 광장에서 볼 수 있도록 커다란 장식품까지 걸려 있었다.
모험가 스펜슨의, 앙키아의 머리 장식!

『귀부인 앙키아의 머리 장식 : 내구력 80/80. 도시 장식품.
고고학적인 가치가 뛰어난 금장식품이다.
옵션 : 마을 전체의 상업 발전 속도 2% 증가.
모험 계열 경험치 1.5% 증가.

스펜슨은 로열 로드에서도 굉장히 뛰어난 모험가였는데, 그가 북부에 와서 발굴한 머리 장식을 모라타에 진열해
놓은 것이다.
모험가들은 특수한 종류의 발굴품들을 마을에 배치하거나 공개할 수 있다. 매우 비싼 가격으로 팔기도 하지만, 마
을에 기증하면 명성이 대대적으로 증가한다.
마을 사람들과의 친밀도가 순식간에 높아지는 효과도 있고, 물건도 매우 저렴하게 살 수 있다.
웬만한 상인들보다도 훨씬 좋은 가격에 구입해 들이는 물건, 게다가 술집에서 종업원에게 인기 또한 최고!
주민들이 일부러 찾아와서 퀘스트를 의뢰하기도 한다.
스펜슨은 향후 모라타가 북부의 중심 도시로 성장할 것을 전망하고 발굴품을 놔둔 것이다.
오랜만에 돌아온 모라타에서는 생생한 모험의 활기가 느껴졌다.

"예쁘다."
"여기 오길 잘했지?"
"응. 분위기 좋다."

경치 좋은 다리나 건물 주변에는 바퀴벌레 커플들이 많이 보이는 것도 변화였다.
막초보자들이 모라타에서 시작하게 되면서부터 커플들이 많이 생겼다.
토끼나 여우를 함께 사냥하면서 다져진 사랑!
초보자들은 모라타에서 막대한 물품들을 소비하고 판매하면서 경제 발전의 주축이 되었다.
베르사 대륙의 동부인 로자임 왕국이 그랬듯이 초보자들의 유입만큼 마을을 활기 넘치게 해 주는 요인은 없다. 초
보자용 복장에 목검, 보리 빵 10개를 아껴 먹으면서 마을 내에서 퀘스트를 하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활력으로 가득한 즐거운 도시 모라타!
위드가 자리를 비운 동안 성장이 눈부신 정도였다.
초보자들이 생겨나면서 가게들도 빠르게 늘어났다. 싸구려 잡동사니 가게들이 아니라, 꽤나 번듯한 고급 상점들이
었다.
상인이나, 집을 건설하고 싶어 하던 사람들도 처음에는 예술에는 인색했다.

"그런 게 무슨 도움이 된다고......"
"그냥 빨리빨리 지어 주기나 하쇼. 창고나 좀 넓게 지어 줘."

그런데 예술적으로 뛰어난 디자인을 가진 건축물들은 훨씬 장사가 잘된다.
같은 잡화점이라고 하여도 아름다운 건축물에 있는 가게에 사람이 몰리게 되자, 모라타에는 조각과 그림에 투자하
는게 사치가 아니게 되었다.
조각사와 화가, 건축가 들이 모여들어서 도시를 더없이 화려하게 가꾸었다.

"오늘 연주할 곡은 <고블린 던전에서의 하룻밤>이라는 곡입니다."

거리의 모퉁이마다 연주를 위한 작은 무대도 꾸며져 있다.
계단 5개 정도의 협소한 공간에서 바드들이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한다. 예술가들의 도시 로디움에서나 볼 수
있었던 광경이다.
모라타에서는 예술가와 바드, 건축가 들이 존중을 받고 있었다.
위드가 피땀 흘려 모은 돈을 마을 장로가 예술에 마구잡이로 투입한 결과였다.
다른 도시나 성에서는 문화 발전 비용이 0%, 혹은 기껏해야 1%에 불과했지만 모라타는 10배가 넘는 자금을 투입
하고 있는 것이다.
초보 바드들도 많고, 베르사 대륙에 이름깨나 날리는 바드들의 방문으로 인해 생동감 있는 음악이 모라타의 매력
적인 요소가 되었다.
술집과 대장간, 무기 상점, 방어구 상점도 초보자들부터 유저들로 인해서 인산인해였다.
축제를 하는 것처럼 거리에 유저들이 많았다.

"그동안 얼마나 변했는지 궁금하군. 지역 정보 창!"

띠링!

『모라타 지역
니플하임 제국에 소속되어 있던 지방.
베르사 대륙의 북부에서 가장 융성하고, 지속적으로 발달하고 있는 지역이다.
상인들의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상점에 손님이 많다.
막 기지개를 펴고 있는 예술이 관광객들을 끌어모으고 있다.
문화로 인하여 더 많은 인구가 유입되고 있으며, 일자리들을 만들어 낸다.
새로 유입되는 인구는 모든 일에 적극성을 보이고 있다.
군사력 : 47 경제력 : 821 문화 : 1,130
기술력 : 310 종교 영향력 : 89 지역 정치 : 22
인근 지역에 대한 영향력 : 41%
구 니플하임 제국의 영향력 : 3.6%(영향력은 군사. 경제. 문화. 기술. 종교. 인구. 의뢰
들의 분야와 관련이 깊음)
도시 발전도 : 106 위생 : 41 치안 : 69%
상수도 시설이 깨끗하게 정비되었고, 주택들이 신규로 건설되었다.
하지만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주민들의 요구를 채워 주기에는 역부족.
신규 주민들은 치안에 더 큰 투자를 하기 바란다.
그들은 더 넓은 지역까지 마을의 영역을 넓히고 몬스터들에 대한 토벌 횟수를 늘리고 싶어
함.
오래전에 벌어졌던 축제를 희미하게 기억하는 주민들이 있다.
다수의 조각품들이 주민의 삶을 행복하게 해 주고 있다.
그림 작품들은 다소 미흡하다.
예술가들에 대한 끝없는 신뢰와 지원은 마을의 품위를 높여 주었다. 주민들은 다른 마을들
보다 많은 예술품들에 대해 긍지를 가지게 되었으며, 관련 길드들에 대한 투자를 계속하기
를 바란다.
재봉 산업의 기술들이 과거로부터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신입 재봉사들이 많이 등장해서 미래에 대한 전망이 밝다.
철을 다루는 기술은 아직 기초적이며, 무기나 방어구를 제작하는 대장장이들이 많이 미숙함.
지역 신앙으로는 프레야를 믿고 있다.
주민들의 신앙은 굳건하여 쉽게 변심하지 않을 것이다.
프레야 교단의 영향을 받아 적당한 향락과 풍요로움을 좋아하며, 근면한 특징을 보인다.
특산품 : 가죽과 천. 예술품.
영토 전체 인구 : 168,101.
매달 세금 수입 : 178,045골드.
마을 운영비 지출 내역 : 군사력 5%, 경제 발전 32%, 문화 투자 비용 14%, 의뢰 및 몬스터
토벌 9%, 마을 보수 31%, 프레야 교단에 헌금 9%.

인구의 증가, 상업의 발달, 용병과 모험가 들으 유입으로 인한 폭발적인 세금의 증가!

"훗."

위드는 무표정한 얼굴을 했다.
입꼬리가 올라가려고 하고, 웃음을 참느라 얼굴 근육에 경련이 일어나려고 했다. 너무 기뻐서 땅바닥을 떼굴떼굴
구르고 싶었지만 이럴 때일수록 더욱 영주로서 지켜 줘야 하는 체통이 있다.

"별거 아니군. 쯧쯧... 이렇게 낙후된 시골이라니 말이야."

눈썹을 찡그린 채 볼을 실룩거리는 썩은 표정으로 즐거워 하는 위드!
프레야 교단에의 헌금이 매달 15%에서 9%로 줄어든 게 특히 좋았다.

"수입 액수가 늘어나면서 자동적으로 조절된 것 같군."

헌금이 더 많아졌지만, 수입이 늘어나니 비율은 줄어들었다.
예산이 늘어나면서 문화 투자 비용과 군사력, 경제 발전, 마을 보수 등이 꾸준히 이루어진다. 초보자들까지 폭발
적인 증가세에 있으니 어엿한 중견 도시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사람들의 숫자에 비해서 아직 세금을 많이 거두고 있지는 못하지만......"

위드가 있는 길거리에도 100명 중에 86명 정도는 초보자였다.
낮은 세금과 모험, 사냥터에 대한 텃세도 없고, 빛의 탑등의 조각품. 모라타가 주는 긍정적인 느낌으로 초보 유저
들이 급증하고 있다.

"이 초보자들의 레벨이 오르면 오를수록 세금은 폭발적으로 증가할 거야!"

미래에 대한 장밋빛 희망.
영주들이 품을 수 있는 긍정적인 생각이었다.
모라타에도 당연히 단점은 많았다.
프레야 교단을 제외하고 다른 교단들이 없다.
성직자를 선택하고 싶은 유저들에게는 선택의 폭이 좁은 게 매우 아쉬운 부분이었다.
기술의 발달이 덜 되었고, 대장장이들이 많지 않아서 무기와 방어구의 품질이 낮다. 매일 만들어지는 수량도 제한
적이라서, 아침이면 무기점과 방어구점의 물품들이 동날 정도였다.
상점용 초급 무기들도 웃돈을 주고 거래해야 될 정도라서 초보자들의 불만이 대단했다.
그 틈새시장을 노린 마판이 무기 수입을 주로 하면서 큰돈을 버는 중이었다.
위드는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부족한 만큼 나중에 대장장이도 많이 늘어나겠지."

무게의 조율이나 갑옷의 정비, 강화 등을 하려면 대장장이의 존재는 필수!
모라타에서 대장장이는 성직자만큼이나 존경받고 있으니 점점 많아지리라.
여러 부족한 부분에도 불구하고, 모험을 좋아하는 초보자들은 서로를 도우면서 성장하고 있었다.
위드는 마을의 영역 밖으로도 발걸음을 옮겨 보았다.
곡창지대에서는 밀과 보리 등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프레야 교단의 사제들이 풍요의 축복을 내린 밀들은, 허리
가 휘도록 알갱이들을 달았다.
근처의 산 등으로 곡괭이를 들고 채광에 나서는 인부들도 상당수였다.

"한 푼이라도 벌어야지."
"돈이 있어야 살지, 원."
"무기값이 이렇게 비싸서야 사냥도 마음대로 못 하겠잖아."
"무기값은 그나마 나은 거야. 방어구값은 정말 말도 못 할 수준이라니까."
"휴, 괜히 방어력에 민감한 워리어를 택했나 봐. 그냥 프레야 교단의 사제나 하는 건데."

초보자들도 곡괭이를 들고 광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곡괭이질은 굳이 광부가 아니라도 누구나 할 수 있다. 건장한 체격의 워리어나 검사, 기사 후보생이라면 말할 것
도 없다.
돈을 벌기 위하여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탄광으로 향하는 초보자들.

"매우 바람직한 광경이야."

위드의 입꼬리가 드디어 올라갔다.
완벽하게 재현된 썩은 미소!
착취가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건 모라타의 경제가 건전하다는 증거나 다를 바 없다.





<모라타의 영주>





윤나희는 무척 기대하고 있었다.

"그분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구나."

이현과의 대면!
세 번이나 전화 통화로 계약을 할 수는 없으니 이번에는 약속을 잡은 후에 그녀가 직접 계약서를 들고 가려고 했
다.
그녀는 회장 비서실에서 근무할 정도의 재원이었음에도 이현만큼 강한 인상을 남겨 주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이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떨렸다.

"30억은 거리의 푼돈처럼 생각하는 사람이야."

첫 번째 전화 통화에서 그는 30억 9천만 원이라는 거금에 계정이 낙찰되었다고 알려 주었는데도 퉁명스럽게 전화
를 끊었따.
이것이야말로 윤나희가 선망해 오던 강한 남성상의 표본이 아니던가!
그때 받았던 신선한 충격이 아직도 잊히지 않았다.
8인의 영웅들 프로그램 섭외도 그녀가 전담하면서 길지 않은 대화를 나누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이현의 레벨은 219밖에 안 됐다.
윤나희도 로열 로드의 유저였는데, 오히려 그녀가 더 높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우습게 보았던 것도 잠깐이었다.
진혈의 뱀파이어 퀘스트, 불사의 군단과의 전쟁 퀘스트, 본 드래곤 사냥, 엠비뉴 요새 함락에 이르기까지!
윤나희는 그의 모습을 다른 방송사의 영상을 통해서만 접했다.
오크 카리취로서 뭇 오크들과 다크 엘프들을 지휘하던 그 늠름함이란 어찌나 멋지던지!
윤나희는 오크 카리취의 사진을 크게 인쇄해서 벽에 붙여 놓을 정도의 광팬이기도 했다.

"으음, 갑자기 전화를 해도 될까?"

불쑥 아무렇지도 않게 전화를 했던 윤나희였다.
회장 비서실이라는 자리와, 그녀 정도의 여성이라면 누구든 반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이현에게 전화를 하려니 떨려서 쉽게 통화를 할 수 없었다.
윤나희는 마음을 가다듬고 이현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벨이 두 번도 올리기 전에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달칵!

"안녕하세요, 윤나희입니다. 저를 기억하시죠?"

다정하면서도 녹아들 것처럼 달콤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만약에 상대가 이현이 아니면 어떻게 할지를 잠깐 고
민햇지만, 다행히 전화를 받은 사람은 맞았다.

-누군데요?

이현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전화기를 통해서 들렸다.
이미 긴장하고 있던 윤나희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제가 윤나희인데요."

세 번째의 통화이니 이름쯤은 기억을 해 줄 거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런데요?
"......"
-바쁜데 자꾸 전화하지 마세요.

띠이이이이이.
그리고 전화를 끊어 버린 이현이었다.



위드가 과거에 빛의 탑을 조각했던 언덕은 대낮에도 방문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빛의 탑을 보면서 저
녁까지 기다리려는 관광객들이었다.
언덕에는 위드가 만들어 놓은 여러 조각품들이 있고, 초보 조각사들도 실력을 발휘해서 빈자리에 예술품들을 만들
어 놓았다.
훌륭한 조각 공원이라고 할 만하다.
베르사 대륙에서 이미 빛의 공원으로 꽤 유명해진 언덕이었다.
더구나 언덕에서 보이는 모라타 마을과 영주성의 풍경!
예쁜 건축물들과 프레야 여신상 등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위드는 누렁이와 함께 그 자리에 올랐다.

"모라타 영주다."
"영주? 그러면 빛의 탑을 조각한 조각사잖아."
"전신 위드다."

위드가 언덕에 올라가면서 그를 알아본 관광객들이 속속 소리쳤다.
위드는 그들을 지나쳐서 조각품 언덕에 자리를 잡고 조각칼을 꺼냈다.

'퀘스트에 필요한 무언가를 만들어야 돼.'

인도자의 동맹 퀘스트를 하면서도 한계를 느꼈다.
조각사이기 때문에 남들보다 스탯은 높지만 전투 능력은 다소 떨어진다. 조각 검술이나 다른 스킬들로 만회하더라
도 앞으로 수행해야 할 퀘스트에 비하면 안심이 안 될 상황.

'인도자의 권능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고, 바르칸이든 킹 히드라든, 그런 적이 또 나타난다면
무조건 진다.'

위드가 가지고 있는 밑천을 전부 동원하여 싸웠던 전투다.
지팡이에 있던 인도자의 권능도 다 소모해 버렸고, 안식의 동판의 내구력도 떨어져서 죽음의 선고를 남발할 수도
없다. 2단계 3단계 퀘스트도 해야 되는데 가지고 있는 밑천이 고갈된 셈이었다.
기껏 죽을 고생을 하여 S급 난이도 퀘스트와 1단계 목표를 완수했는데 2단계, 3단계에서 실패한다면 이보다 더 억
울한 일은 없는 것이다.



사각사각.
조각칼을 움직일 때마다 바위들이 잘려 나간다.
위드가 만들려고 생각해 놓은 조각품들이 많이 있었다.
프레야 교단은 다른 종교를 배척하지 않는다. 그래서 상성이 좋은 루의 신상부터 만들 작정이었다.
루의 교단은 밝음을 숭상하고, 어둠을 틈타 습격하는 몬스터들과는 천적 관계였다.
치안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라도 루의 신상이 있으면 나쁘지 않으리라.

'거대 조각상, 내구력이 좋아야 하니 기초 재료는 바위로 만들어야 돼.'

위드는 빠르게 조각품의 토대가 되는 바위를 잘랐다.
빛의 탑과 비슷한 크기로 만들어지는 조각품!
루의 조각상은 베르사 대륙 각지에 세워져 있었다. 프레야 여신상처럼 막연한 생김새가 아니라서 조각을 하는 데
긴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정말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부터지."

위드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재료가 아까워서 식은땀이 바싹바싹 마를 정도였지만 조각품에는 투자가 필요했다.
고급 조각술 6레벨.
조각품을 조금만 더 만들면 곧 7레벨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정말 아깝지만......"

위드는 엠비뉴 요새에서 입수했던 금속 파편들을 분류했다. 강도가 높은 대장장이용 재료들은 제외하고, 깨진 금
조각들을 녹였다.

"아이고, 아까운 것......"

누런 빛깔을 내며 완성된 금물.
대장장이 스킬이 향상될 때마다 얇게 금을 바를 수 있다.
전문용어로는 도금!

"이 정도로는 절반도 못 바를 텐데......"

위드가 가진 금 조각들을 다 녹여도 거대 조각상에 전부 칠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불순물들을 좀 섞어 볼까?"

위드는 고개를 저었다.
금의 순도가 낮아지면 조각품에도 타격을 줄 테니까.

"금은 무조건 24k야."

위드는 고대 금화와, 사냥을 통해서 획득했던 금괴들도 넣어서 녹였다.

"아이고, 이 아까운 것."

막대로 휘저을 때마다 금물이 형용할 수 없는 광채를 내면서 저어진다.
멀건 된장국만 젓던 위드에게는 호강 아닌 호강이었다.
관광객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지금 조각사 위드가 대형 조각상을 만드는 거야?"
"금을 통째로 뒤집어씌우려나 봐."

루의 신상을 과연 어떤 모습으로 만들어 낼지에 대한 궁금증.
그것이 무엇이든, 완성되기 직전에 기대 심리가 가장 증폭되기 마련이다.
피라미드, 빛의 탑, 프레야 여신상 등의 조각품을 만든 위드였으므로 관광객들은 갈수록 늘어 갔다.

"모라타에서 얼마나 많은 세금을 거두었으면 조각품에 저런 투자를 할 수가 있는 거지?"
"역시 영주들이 엄청나게 돈이 많은 거겠지."
"다 사기꾼에 도둑놈들이라니까. 북부에 유저들이 몰리면서 돈을 얼마나 많이 벌었겠어?"

갑부로 보고 부러워하는 이들까지 등장했다. 하지만 위드의 명성은 거대했다.

"우리 영주님을 비난하지 마세요!"
"맞아요. 우리 영주님이 얼마나 낮은 세율을 유지하시는데요."
"사비를 털어서 조각품들을 만들고, 폐허나 다름없던 모라타에 건물들을 올려 주신 분이에요. 이
런 훌륭하신 영주님에게......"
"시장에서 여러분에게 물건을 파실 때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고 하는 이유도 모르죠? 흑흑."

착해 보이는 여성 초보자는 위드에 대한 비난에 눈물까지 보이면서 변호를 했다.

"그 한 푼을 더 받아서 모라타에 투자를 하려는 거예요. 다 우리를 위해서라고요!"

살아 있는 성인, 주민들과 유저들을 아끼는 훌륭한 영주라면서 감싸 주는 유저들!
위드는 관광객들의 논란에는 관심도 갖지 못할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한 방울이라도 흘리면 안 된다."

황금 도금 작업에 모든 정성을 쏟았다.
어릴 때부터 집에서 도배와 장판을 하면서 이력이 나 있었다. 배달을 하고 남은 신문지를 겹겹이 붙여 한겨울을
나기도 했다.

"도배는 민첩하게! 절대 중복되어서는 안 돼. 우둘투둘 튀어나오거나 비뚤어진 부분이 있어서는
곤란하지."

도배를 했던 경험을 되살려서 도금을 한다.
물론 두 가지 작업의 차이는 상당히 컸다. 도금은 금을 얇게 펴서 발라야 했으니 훨씬 어려운 난이도.
하지만 부족한 부분은 스킬들의 보조를 받아서 메웠다.
조악한 그림 실력이었지만 미리 그림 그리기 스킬을 올려 놓은 덕분에 붓질에도 약간의 효과가 있었다.
이윽고 머리 부분이 다 칠해졌다.
그러자 루의 신상의 머리가 햇빛을 받아서 금빛 광채를 낸다.
눈에는 푸른 보석을 박았다.
금방이라도 찰랑거릴 것 같은 금색 머리에, 먼 곳을 응시하는 푸른 눈동자.
오연한 태양신의 조각상이 머리부터 점점 아래로 내려가며 만들어지고 있었다.

"오오."
"너무 멋지다."

조각상이 완성되는 광경은 관광객들을 통해서 인터넷으로도 실시간으로 방송되었다.
위드가 만들어 낸 루의 황금 신상.
대형 활과 화살까지 들고 있는 장엄한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보통 조각사라면 신상만 만들기도 벅찼겠지만, 이제 위드는 대형 조각품에 이력이 생겼다.
큰 조각품을 만들 때에도 미리 여분을 남겨 놓아서 장비까지 함께 조각한 것이다.

띠링!

『루 교단의 신상을 완성하셨습니다!
두터운 신앙심을 가지고 있는 조각술계의 거목, 조각사 위드가 탄생시킨 또 하나의 대표작.
베르사 대륙의 신들 중의 하나로, 태양을 상징하는 루의 신상이 완성되었다.
순수한 금으로 씌워진 이 작품은 루 교단에서 소중히 여기게 될 것이다.
예술적 가치 : 거장 조각사 위드의 작품.
9,112.
특수 옵션 : 루의 신상을 본 이들은 밝은 곳에서 생명력과 마나 회복 속도가 하루 동안
23% 증가한다.
루의 성직자들은 하루 동안 신성력이 12% 증가한다. 신성 마법의 실패 확률도
감소한다.
루의 성기사들은 믿음의 힘으로 사기가 하락하지 않으며, 용기가 최대치로 증
가한다.
힘 12 상승.
체력의 최대치 20% 증가.
생명력 최대치 25% 증가.
사냥 시 하루 동안 아이템 획득 확률 7% 증가.
다른 조각품과 중복 적용되지 않음.
지금까지 완성한 종교적인 조각품의 숫자 : 1

-조각술 스킬의 숙련도가 향상되었습니다.
-고급 손재주 스킬의 레벨이 7이 되었습니다. 도구나 손을 이용하는 능력이 추가로 8% 증가하며,
다양한 분야에 걸쳐서 영향을 주게 됩니다.
-명성이 499 올랐습니다.
-예술 스탯이 35 상승하셨습니다.
-힘이 3 상승하셨습니다.
-종교적인 조각품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루의 교단에 대한 친밀도가 높아지고, 그들로부터 은총을
받게 될 것입니다. 루의 사제들이 모라타에 방문할 확률을 높여 줍니다.
-종교적인 조각품을 만든 대가로 전 스탯이 2씩 추가로 상승합니다.

종교적인 조각품을 만드는 데 성공!
위드의 조각술 스킬 숙련도는 7레벨까지 17% 정도만이 남아 있었다.

"대작 1개나 2개 정도면 충분하겠군."

조각술은 갈수록 성장이 느려졌지만 충분히 욕심이 날 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프레야 여신상과 루의 신상을 조각해 놓았으니 상성이 나쁜 다른 신의 조각품들은 만들지 못한다.

"바위를 이용한 대형 조각품은 이 정도면 됐어."

밤의 신상이나 도둑의 신상, 바바리안의 신상 등은 시간도 많이 걸리고 모라타에는 어울리지 않으리라.
괜히 도둑들을 위한 신상을 조각해 놓았다가 치안이 하락하고 도둑들이 늘어나기라도 하면 큰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바바리안의 신상도 그들의 종족이 있는 장소가 아니라면 그 건장한 체격으로 인해서 주민들이 무서워했으니 무리.

"상관없겠지. 조각할 물품들은 많이 있으니까."

위드는 조각칼을 거꾸로 잡았다.
루의 신상을 보기 위하여 관광객들이 많이 몰리고 있으니, 이제는 더 늦기 전에 요리를 해야 할 시간이었다.



"위드가 모라타의 영주라니!"

모라타에서 사냥과 모험을 즐기던 유저들.
사냥 파티의 상당수는 위드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더 강한 몬스터와 퀘스트를 위해서 중앙 대륙에서 북부로 왔다.
관광객들이나 막 시작한 초보들은 전신 위드에 대해서 크게 개의치 않았다. 위드가 유명한 사람이라는 건 알지만
그다지 관심이 생기지는 않는다.
하지만 전사들에게 위드란 존경의 대상이거나 뛰어넘고 싶은 경쟁자다.

"위드를 보러 가죠."
"혹시 위드가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

소식은 일찍 접했지만, 북부에서도 꽤 먼 곳의 사냥터까지 원정을 나갔기 때문에 귀환이 늦었다.
사냥터에서 방금 돌아온 전투 파티는 마을에서 위드의 행적을 수소문했다.
위드에 대해서 알고 있는 상인이 있었다.

"영주 위드요?"
"네, 그 위드요."
"아, 구경하러 오셨구나. 저쪽 바위산에서 조각품을 만들어요."
"조각품요?"
"네, 무척 오래 걸리고 지루한 작업이니까 웬만하면 모레쯤 가 보세요."

상인의 말에 전사 혼은 고개를 갸웃했다.

"조각품을 만든다고?"

성기사 빌레오가 살짝 긴장되는 목소리로 답했다.

"직업이 조각사란 말도 있더군."
"모라타의 영주가 조각사라는 얘기는 나도 들었어. 하지만 조각사라니 말이 안 되잖아. 적어도 우
리가 봤던 위드는 그런 성격은 아니었는데."

마법의 대륙에서 위드에게 꽤 많이 죽었던 그들이다.
물론 마법의 대륙에서 그들의 레벨은 중수를 조금 넘는 정도라서, 길드와 함께 싸울 때 정도나 낄 수 있었다.
더없이 효과적으로 적들을 학살하던 위드의 모습!
혼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조각사라니... 소문과는 달리 전신 위드가 아닌 거 아니야?"

워리어 갈릭이 먼저 발걸음을 떼었다.

"보면 알 수 있겠지. 여기서 우리가 이렇게 얘기해 봐야 헛수고 아니겠나?"

혼, 빌레오, 갈릭을 비롯한 7명의 사냥 파티는 바위산으로 향했다.
모라타에서도 수위에 꼽히는 유저들이 모인 파티!
성직자의 레벨도 300이 넘었는데, 사제복이 휘날리도록 뛰었다.
모라타에 머무른 지도 상당히 오래되어서 조각품들이 있는 바위산의 위치는 잘 알았따. 빛의 탑이 있어서 그들도
모라타에 오면 반드시 들르는 장소였다.

"우리가 거점으로 머무르고 있던 마을의 영주가 전신 위드라니 정말 상상외로군."
"그보다도 그가 만든 조각품들을 보면서 사냥을 했다니, 고마워해야 되는 건가."

머릿곳이 둔기로 후려 맞은 것처럼 복잡했다.
바위산으로 향하는 길에는 많은 관광객들과 초보 유저들이 있었다.
얼굴 가득 웃음꽃을 피우면서 바위산으로 걸음을 옮기는 초보 유저들!

"와, 진짜 최고야."
"모라타에서 시작하기를 너무너무 잘했다니까. 이런 조각품들을 보면서 사냥할 수 있는 건 우리밖
에 없을걸."

초보 유저들의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혼이 시작한 마을은 황량한 광산촌. 남들보다 빨리 성장하기 위해서 일부러 인적이 뜸한 광산촌을 택했다.
나중에 대도시로 가기는 했지만, 그곳에서도 예술품들을 보았던 기억은 별로 없다.
로자임 왕국에 피라미드의 조각품이 만들어졌다는 소문을 듣고는 약간 부러워하기도 했다.
부족한 게 많은 초보들에게 조각품들의 감동이 있다면 얼마나 크게 도움이 되겠는가.

"빛의 탑만 해도 엄청났는데 말이지."

혼이 포함된 파티는 바위산으로 오르는 행렬의 뒤를 따랐다.
바위산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고, 하필 해가 저물려고 할 무렵이었다.
한밤의 빛의 탑은 명물 중의 명물이라고 할 수 있으니 모라타에 있는 유저들이라면 반드시 찾는다. 마법사들은 줄
을 서지 않고 플라이 마법을 활용하여 날아가며 부러움을 샀다.
갈릭이 제안했다.

"이렇게 갈 게 아니라 우리도 날아가지."
"그렇게 할까?"

마법사 이스턴이 플라이 마법을 외워서 파티원들을 공중으로 띄웠다.
그러자 몰려드는 유저들.

"마법사님, 저도 플라이 마법 좀 어떻게 안 될까요?"
"저희도 띄워 주세요! 마법사님, 부탁드립니다."
"마법사님."

이스턴은 플라이 마법만으로도 인기인이 되었다. 유명 스타들에 못지않을 정도였다.
이스턴의 근처에 수많은 유저들이 모인 것을 공중에서 확인한 혼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끼리 먼저 가세."

깔끔하게 이스턴을 포기한 것이다.

"마법사이니 알아서 따라오겠지."

파티원들은 플라이 마법을 통해서 공중으로 산을 올랐다.
바위산에는 빛의 탑 외에도 또 다른 대형 조각품이 완성되어 있었다.
파티원 중 1명인 루의 성직자 하인스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

"이곳에 루의 신상이......"

조각품의 효과!
신앙이나 신성 마법에 미치는 효과 때문에 하인스에게는 모라타에서 사냥을 할 때의 효율이 훨씬 높아지게 될 것
이다.
프레야 교단의 성직자들은 이미 이 효과를 누리고 있다.
여신상의 주변에서 축복이나 치료 마법을 펼치면 효과도 다른 때보다 훨씬 커졌다.
프레야의 여신관 모임.
남성 사제 연합.
풍요의 길드.
모라타 내에 모임이나 관련 길드들도 다수 생길 정도였다.

"루의 성직자들이 모라타로 많이 오겠구나."

성직자들이나 성기사들이 많아지면 정식으로 신전이 세워질 날도 머지않으리라.

"위드는 어디에 있는 거지?"

혼이 빛의 탑 부근을 눈으로 훑어보았다.
어둑어둑한 밤인 데다 관광객들이나 모라타의 유저들이 너무 많아서 분간을 하기가 어려웠다.
빌레오가 어느 한 지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곳에 있는 거 아닌가?"

사람들이 줄을 서서 무언가를 사 먹는 장소에만 유별나게 횃불들이 밝혀져 있었다.

"일단 가 보지."

혼과 빌레오 등은 하늘을 날아서 그 장소에 착지했다.
눈에 잘 띄는 곳에 음식 메뉴들을 보여 주는 현수막이 커다랗게 걸려 있었다.

"저것 좀 보게."
"응?"

드래곤 탕 120골드
킹 히드라 자장면 100골드
스켈레톤 뼈다귀 해장국 13골드

드래곤구이 (1인분 150그램) 380골드
킹 히드라구이 (1인분 100그램) 80골드
원산지 표시 : 통곡의 강 유역산. 신선한 고기만 취급합니다.

"헉!"

요금도 요금이지만, 내용물들이 일행을 충격에 빠뜨렸다.

"자, 자! 쌉니다, 싸요! 여러분, 이런 고기 드셔 본 적이 없을 겁니다. 드래곤 미트! 드래곤의 고
기로 만든 얼큰한 탕입니다."

호객 행위를 하는 주방장의 말소리가 들렸다.

"너무 비싼데."
"그래도 언제 이런 고기를 먹어 보겠어?"
"맞아, 드래곤 탕이라니 죽인다. 그렇지?"

손님들은 줄을 서서 요리들을 받아 가고 있었다.
테이블도 없이 그릇을 가져오면 떠 주는 열악한 구조였다.

"설마 여기에 위드가 있을까?"

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불행히도 그 추측은 사실이었다.
빌레오가 줄을 서서 기다리던 손님들에게 물어보고 나서 진실을 말해 주었던 것이다.

"주방장이 위드라고 하네."
"전신... 위드라고?"
"그건 모르겠고, 모라타의 영주 위드는 맞아."
"확실한가?"
"위드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많더군."

모라타의 주민들은 프레야 여신상이라는 초거대 조각품을 만들면서 노역에 동원되었다.
좋은 말로 하면 퀘스트에 동참한 것이었지만, 그 때문에 위드의 얼굴을 잘 알았다.

"조각품을 만들고 있다더니 웬 음식인가?"
"루의 신상을 완성하면서 관광객들이 정말 많이 모였다네. 모라타의 주민들이나 유저들도 위드를
보기 위해서 이곳에 왔고. 바위산에 유저들이 엄청나게 몰리지 않았던가?"

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보기에도 이 정도의 인파는 왕국의 수도 같은 대도시 외에는 없었다.
북부의 모라타에서 이런 인파라면 정말 굉장한 일이다.

"그래서 모인 사람들에게 대접하는 의미로 오늘부터 요리를 판다는군."
"요리라니... 이렇게 비싼 요리를 누가 사 먹을 수 있는데?"
"위드는 싸게 판매하려고 했지만 유저들이 이 정도 가격은 받아야 한다고 말한 것 같네. 놀라지
말게. 드래곤의 고기를 1킬로그램 먹으면 무려 체력이 20, 생명력 최대치가 120, 힘이 7이나 늘
어난다고 하지 않는가."

혼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부릅떴다.

"그게 정말이란 말인가. 요리로 그런 일이 가능해?"
"벌써 효과를 본 사람이 많이 있다는군."
"킹 히드라나 드래곤의 고기라면 몇 골드를 받더라도 비싼 건 아니지."

혼과 갈릭 등은 납득할 수 있는 일이라고 여겼다. 오히려 귀한 요리를 먹어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스탯들을 올려 놓으면 두고두고 혜택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우리도 일단 줄을 서 볼까?"
"그러지. 언제 드래곤 고기를 먹어 보겠나. 스탯도 올려 준다는데, 이런 기회에 먹지 않으면 두고
두고 후회할 거야."

혼과 갈릭, 빌레오 등이 줄을 섰다.
스탯 욕심은 직업 여하를 막론하고 극심했다.
마법사들에게는 지혜와 지식이 가장 중요하지만, 근력과 민첩성을 향상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도 망설이지 않는
다.
몸보신에는 직업 구분이나 남녀노소가 없는 것!
그렇게 음식을 사 먹기 위한 손님들이 점점 늘어 가고 있었다.



말 그대로 드래곤이 헤엄치고 지나간 것 같은 탕!
킹 히드라의 엄청난 고기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장에, 면발은 밀가루를 쓴 자장면!
스켈레톤 뼈다귀 해장국에는 살점도 거의 붙어 있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힘이나 민첩, 체력 같은 스탯을 1개나 2개씩은 올려 주었다.
최고급 요리 재료인 이무기나 히드라의 고기가 가진 효과를 요리 스킬이 보완해 주기 때문이었다.
위드는 폭리를 취하면서 엄청난 양의 요리들을 제조했다.
군대 취사병이 와서 보고는 감동받을 정도의 양이었다.

"역시 장사는 처음이 힘들어. 잘되기 시작하면 밀려드는 손님 때문에 정신이 없지."

사업의 가장 큰 곤란함은 세금!
하지만 모라타에서는 정상적으로 세금을 납부하더라도 결국은 위드의 호주머니로 돌아오게 되어 있었다.
위드는 모라타의 주민들을 고용해서 주방 일을 돕도록 했다.
손님이 몰려드는 대박 집은 요리를 만드는 게 아니라 돈을 만든다.
잘되기만 한다면 음식 장사만큼 많은 이윤이 나는 업종도 흔치 않다.
더구나 지금처럼 바가지를 듬뿍 씌울 수만 있다면!

-요리 스킬의 숙련도가 상승하셨습니다.

요리 스킬도 중급 6레벨에서 지금은 두 단계나 올라서 8레벨이었다.
통곡의 강에서 열심히 술을 담그면서 숙련도를 쌓았다.
이미 7레벨을 앞두고 있던 상황이었지만 킹 히드라나 이무기의 고기 자체가 워낙에 귀하고 좋은 음식이라서 요리
스킬의 숙련도도 쑥쑥 올랐다.
심지어 이무기의 고기는 사재기 현상까지 벌어지고 있었다.
고기의 양이 미리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서로 사 가려고 난리다.

"위드 님, 여기 7인분만 주세요."
"제가 12인분 삽니다."

빙룡이 얼린 고기를 누렁이를 통해서 수입!
고기를 녹이자마자 불티나게 팔린다.
모닥불을 피워서 직접 구워 먹는 이들 때문에 바위산에는 고기 굽는 연기가 사방에서 피어올랐다.

"이무기 사골 국물도 팝니다."

무려 열두 번 우려내서 기름도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사골 국물 전격 판매!
고기를 팔 때에는 빼놓을 수 없는 음료도 준비되어 있었다.

"왕이슬 30골드, 백년주 80골드. 수량이 제한되어 있으므로 빨리 구입해 주세요."

뱀파이어 토리도에게 잡혀서 석상이 되었던, 꽃을 키우는 소녀 프리나가 술을 판매했다.
위드는 이참에 담가 놓은 술도 몽땅 팔아 치우고 있었다.
개별 판매보다는 식당 판매가 더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폐허가 된 엠비뉴 요새에 모험가들이 도착했다.

"으음, 여기가 그 격전지로군."
"뭔가 나올 것만 같은 으스스한 분위기예요."

혼과 빌레요, 갈릭 등이 통곡의 강 유역으로 이동한 것은 저녁 무렵이었다.
어제 그들은 히드라 고기, 이무기 고기 들을 더 이상 스탯이 오르지 않을 정도로 잔돈까지 탈탈 털어서 먹었다.

"많이 드시는군요. 특별히 고기 한 근에 20실버씩 깎아 드리겠습니다. 아주 귀한 고기니까 맛있
게 드세요."

위드의 말을 들었을 때는 물론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치사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도 아니지만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은 저쪽!
음식을 먹고 나서는 이동 포탈을 이용하려고 했다. 하지만 모라타의 병사들과 성기사들이 막고 있었다.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혼은 정중하게 물었다.

"저희가 어떤 의뢰를 수행해야 합니까. 혹시 퀘스트가 있습니까?"

이동 포탈의 사용을 허락받기 위한 질문에 병사들은 고개를 저었다.

"사용 요금을 내야 합니다."
"요금요?"
"일인당 350골드입니다."

고기를 먹느라 가진 돈을 다 써 버린 혼과 일행은 난처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혼이 일행을 보며 물었다.

"어쩌지?"
"뭘 어떻게 해. 돈을 만들어 봐야지."

마법사 이스턴이 주섬주섬 돈주머니를 뒤적였다.
평소 마법 물품 제작을 통해 쏠쏠한 돈벌이를 했던 그였지만 고기를 먹으면서 술까지 마신 덕에 주머니가 텅 비어
있었다.

"하는 수 없지. 이번 기회에 안 쓰는 물건이나 처분하세."
"그럴까?"
"그래, 이번에 배낭 정리나 하도록 하지."

일행은 모라타에서 예전에 사용했던 검과 갑옷, 따로 챙겨 두었던 광석 등을 팔았다.
기념 삼아 간직하고 있던 물품들을 팔아서 사냥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동 포탈 요금이 다소 비싼 것은 사실이지만, 더 좋은 사냥터를 위해서라면 충분히 지불할 만한 금액이었다.
그렇게 마탈로스트 교단의 신전으로 이동하여 엠비뉴 요새까지 찾아왔다.
무너진 성벽과 탑,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해골 무더기.
강가에 안개까지 끼어서 으스스한 밤이었찌만 혼 일행처럼 이동 포탈을 통해서 온 유저들이 80명 넘게 있었다.
새롭고 위험한 탐험을 개시한다는 흥분으로 가득한 여행자들은 통곡의 강 근처에 와서 방송에서 보았던 격전지 엠
비뉴 오새를 둘러보았다.

"사냥에 필요한 물품들 팝니다. 각종 잡템들 고가에 매입합니다."

엠비뉴 오새 입구에는 어느새 상인 마판이 와서 노점을 차렸다.
고레벨 유저들만을 대상으로 한 장사였기에 마진이 상당하리라.

"전사 데려가실 분. 몸을 사리지 않고 싸우겠습니다."
"비테세입니다. 저 아시는 분만 데려가 주세요."

혼자 온 유저들은 이곳에서 파티들을 구하고 있었다.
혼 일행은 파티원을 구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끼리 사냥을 하려고 했다.
그때 평원 쪽에서 위드가 걸어왔다. 검은 망토를 펄럭이면서 엠비뉴 요새를 향해서 일직선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위드가 도착해서 폐허 속 요새를 구경하고 있는 이들에게 입을 열었다.

"여러분, 혹시... 퀘스트 필요하지 않으신가요?"
"......?"
"제가 받고 있는 퀘스트 공유해 드립니다. 난이도 B급의 의뢰입니다."

위드가 해결하기에는 애매한 난이도였다.
지하라서 조각 생명체들을 잔뜩 끌고 갈 수도 없고, 또 내부에 미로가 있어서 시간이 제법 많이 잡아먹힐 것이기
때문.

"무슨 퀘스트인가요?"

금발의 여자 정령사 1명이 호기심을 갖고 물었다.
전신 위드.
아직 의견이 분분하지만, 상당수가 전쟁의 신이라고 믿고 있는 인물의 퀘스트였다.

"마탈로스트 교단의 포로 구출 퀘스트입니다. 제가 하고 있는 연계 퀘스트의 일부죠."
"정말요?"

위드가 연계 퀘스트를 공유해 주더라도 중간에 끼어든 이들은 처음부터 진행한 게 아니라서 후속 퀘스트를 받지는
못한다. 하나의 퀘스트가 종료되면 그걸로 끝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는 제안이었다.
여기에 온 이들은 대부분 부활의 군대와도 관련이 있는 마탈로스트 교단에 대한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데이몬드, 부활의 군대와 관련이 있는 장소였지?"
"맞아. 그랬던 것 같아."

위드가 엠비뉴 교단의 음모를 저지하면서, 부활의 사제들은 죽은 원혼들을 바탕으로 마물들을 일으킬 수 없게 되
었다. 엠비뉴 교단과의 싸움뿐만이 아니라 위드의 모험가로서의 명예가 더욱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 탓에 현재 부활의 군대는 세력이 더 커지지 못하고 오데인 요새에서 지루한 공방전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퀘스트의 위치는 어디인데요?"
"바로 이곳, 지하 감옥입니다."
"정말요?"

정령술사를 비롯하여, 엠비뉴 요새에 있던 유저들은 서둘러 위드에게 다가왔다.
매우 좋은 퀘스트였기에 기꺼이 공유를 받으려고 하는 것!

"공유 부탁드려요, 위드 님!"
"고맙습니다. 어렵게 받으신 퀘스트를 나누어 주셔서요."

감사의 인사를 하는 그들을 향해 위드가 웃으며 말했다.

"단, 소정의 참가비를 받습니다. 800골드입니다."
"......"

난이도 B급의 마탈로스트 교단과 관련된 의뢰!
연계 퀘스트는 이어지지 않더라도 경험치나 명성을 포함한 다른 퀘스트의 보상들은 받을 수 있다.
끊임없는 삥 뜯기와 바가지요금으로 돈을 벌고 있는 위드!





<1쿠퍼의 감동>





위드는 탐험대가 마탈로스트 교단의 퀘스트를 처리하는 동안에도 조각품을 만들었다. 엠비뉴 요새의 지하는 거대
던전으로 변해 있었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해결될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조각품의 세계는 끝이 없군."

수천 년에 걸쳐서 발전과 변혁이 이루어져 온 조각술.
미술과 함께 예술의 기초라고 할 수 있다.
위드가 가볍게 만드는 조각품은 사슴, 토끼, 양, 늑대, 여우 들이었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많이 만들었던 놈들이야."

로자임 왕국에서 단돈 몇 쿠퍼에 기념품을 만들어 팔던 시절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쿠퍼를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즐기고 싶은 꿈을 꾸었던 초보 시기.
당시에는 기초적인 수준의 조각술로 특징들만을 귀엽게 따서 조각했다.

"기념품은 단순하고 앙증맞을수록 잘 팔렸어."

무게가 부담되지 않도록 가벼운 것은 필수.
하지만 지금 위드가 만드는 사슴이나 여우는 달랐다.

"이제 진짜 늑대와 사슴을 만들어 봐야지."

위드는 사슴을 실제보다도 3배나 큰 크기로 형태를 다듬었다. 그것도 화강암이나 감람석 같은 귀한 석재료들을 사
용해서였다.
사슴의 맹하고 순진무구한 영롱한 눈빛에 둥그런 코, 날씬한 몸과 다리들을 진짜처럼 무려 이틀에 걸쳐서 조각했
다.

띠링!

『꽃사슴상을 완성하셨습니다.
조각사의 열정이 배어 있는 작품.
평범한 짐승을 조각했지만, 조각사의 숙달된 기교와 정성으로 만들어져 있다.
창조적인 발상이나 새로운 시도가 엿보이지 않아서 다소 아쉬움.
하지만 대륙에 무수히 많은 사슴 상들 중 단연 발군이라고 할 만하다.
멀리서 보면 진짜 사슴으로 착각하고 늑대가 달려오기 충분할 정도로 세밀하게 표현된
작품이다.
예술적 가치 : 거장 조각사 위드의 작품.
72.
특수 옵션 : 꽃사슴 상을 본 이들은 하루 동안 행운이 27% 증가한다.
인근 지역에 사슴의 번식률을 350% 증가시킴.
늑대들의 번식률도 230% 증가시킴.
사슴들의 가죽의 질과 음식 재료들이 향상됨.
사슴들의 지능이 향상되어서 몬스터에게 쉽게 사냥당하지 않음.
대규모 사슴 떼의 출몰 가능성을 증가시킴.

-조각술 스킬의 숙련도가 향상되었습니다.
-명성이 6 올랐습니다.
-예술 스탯이 2 상승하셨습니다.

사슴 조각상은 조각한 적도 많았고 흔했기 때문에 예술적 가치는 별로였다. 그럼에도 옵션들은 위드가 노렸던 그
대로였다.

"막초보 시절에는 사슴만큼 사냥하기 쉬운 짐승도 없지."

사람에 대한 공포가 없기에 가까이 접근해도 가만히 있고, 고기와 가죽까지 얻을 수 있는 유익한 짐승이다.
흑곰이나 여우를 조각할 때에는 나름대로 조금 더 신경을 썼다.
흑곰은 매우 사납게 앞발로 나무를 후려치는 장면을 표현하고, 여우는 꼬리가 9개나 되는 구미호!
모라타 인근을 배회하는 흑곰의 번식력이 증가했다.
여우들도 더 영악해지고, 많아졌다.
초보자들이 사냥할 몬스터들이 풍성하게 늘어나고 있었다.

"가죽이나 고기 등은 다시 돌아와서 모라타의 살림을 늘려 주겠지."

재봉 기술이 뛰어난 모라타의 특성상 동물 가죽들은 비싸게 팔리리라.
돈에 쪼들리는 초보자들에게는 매우 긍정적인 현상!

"나눌수록 커지는 기쁨이라고 할까."

모라타에 소속된 유저들이 부유해질수록 착취할 것도 많아진다.
위드는 그런 의미로 동물의 조각상들을 세웠다.
조각사라는 직업을 최대한 활용하여, 도시에 어마어마한 변화를 주고 있었다.

음머어어어!

누렁이 덕분에 모라타에서 키우는 소들도 빠르게 증가했다.
뱀파이어들이 지배할 당시만 하더라도 소들은 있지도 않았다. 목축업은커녕, 마을 장로가 고구마를 캐서 먹을 정
도로 식량 사정이 열악하였던 것이다.
그 후 상인들이 몇 마리씩 데려온 소들이 양치기와 농부, 조련사 등의 직업을 택한 유저들에 의해서 키워지고 있
었다.
축사들이 지어지고, 신선한 풀들을 먹으며 자라나던 소들에게 변화가 생겼다.
밤이면 축사에서 소들이 교배를 한다.
더구나 축사에 누렁이가 들어갔다 나오면 암소들의 100% 임신!
튼튼한 우량 새끼 소들이 태어난다.
북부를 유랑하던 소들이 떼를 지어서 모라타로 몰려오기도 했다.
누렁이야말로 진정한 황소의 제왕!
들소나 물소 등도 늘어나서 사냥감들도 많아졌다.
하지만 위드가 정말 신경을 써서 만들려고 하는 조각품은 동물들이 아니었다.

"특별한 조각품들을 만들어야지."

청동이나 구리, 잡철들을 이용한 초거대 조각품!
중급 대장장이 스킬이면 잡템이나 헐값에 팔리는 무기들을 화로에 넣어서 쉽게 원재료를 추출할 수 있다.
위드는 귓속말을 보냈다.

@마판 님.
@예.
@조달할 물건이 있습니다.
@뭡니까, 말씀만 하세요.
@무기나 방어구, 혹은 금속류 잡템 무제한 매입해 주세요. 1골드 이하짜리로요.
@어렵지도 않은 일이군요. 그런데 수량은 정말 모을 수 있는 대로 모으기만 하면 되는 겁니까?
@예.
@저기, 수수료는요?

마판이 민감한 문제를 꺼내 들었다.
친한 사이라고 해도 공짜로 장사를 할 수는 없는 법!
그러나 위드에게서 돈을 뜯어내기란 쉽지 않은 일임을 마판은 잘 알고 있었다.

@수수료는, 돈을 벌 수 있는 정보로 드리겠습니다.

때로 상인에게는 좋은 정보가 금보다도 나을 때가 있다.
어린 꼬마에게도 사기를 쳐서 돈을 뜯어내는 위드가 말하는 정보라면 틀림없을 것.

@알겠습니다. 믿고 추진하죠.

마판은 소유하고 있는 상점들을 이용하여 금속류 잡템들을 매입했다.
잡템들을 편하게, 적절한 가격에 팔 수 있으니 초보자들에게는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근데 상인이 왜 싸구려 무기와 방어구를 이렇게 많이 구입하지?"
"모라타 영주의 의뢰래. 모라타 영주가 초보자들을 위해서 행한 조치야."
"역시. 세금도 낮고 사냥터에 대한 텃세도 없는 모라타구나. 중앙 대륙에 비하면 정말 천국이라
고 할 만하네."

영주에 대한 호의적인 반응들이 속출했다.
마판은 그렇게 모은 잡템들을 인공 호수에 있는 프레야 여신상 주변에 쌓았다.
산더미처럼 쌓인 잡템들.
현실의 폐차장이나 고철상을 방불케 할 정도로 대단한 규모였다.
위드는 모라타의 대장장이들을 동원해 거대 화로를 제작했다.
영주로서의 권력을 남용!
유저들이 주문한 무기나 방어구 제작 의뢰가 상당히 늦춰지겠지만 조각품을 만들기 위해서라는 소문에 원성은 없
었다. 조각품이 만들어지면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 알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직업과 관련이 있는 조각품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도 상당수였다.
그러나 위드는 어떤 조각품을 만들지 이미 정해 놓았다.

"굉장히 많은 양의 쇳물이 필요하겠군."

대장장이들을 동원하여서 여러 광석들의 원료들을 추출해낸다.
위드는 그렇게 뽑아낸 원료들 중에 황동을 사용하기로 했다.
황동은 색이 예쁘고 가격이 싸서 널리 애용되는 초보자용 무기 재료!
사실 레벨이 20만 되어도 황동 무기들은 잡화점에 팔거나 버려 버리는 게 일반적이었다. 내구력도 안 좋고 공격력
도 부실하며, 전투 중에 깨지는 일도 허다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조각술 재료로는 감지덕지지."

조각품에는 딱히 내구력이 중요한 부분은 아니다.
일단 거대 조각품인 만큼 두께가 엄청나기 때문에 내구력이나 파손에 대한 걱정은 거의 없었다.
황동처럼 색깔이 아름다울수록 오히려 좋다고 할 수 있다.

"흙꾼아."
"절대적 카리스마 위드 님 만세!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주인님."

위드를 창조주로서 지극히 신뢰하고 따르는 땅의 정령!

"네가 도와줄 일이 있다."
"뭐든 시켜만 주십시오. 이 한 몸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따르겠습니다."

정신교육이 철저하게 되어 있는 흙꾼이었다.
위드는 흙꾼을 향해 명령했다.

"진흙 모아 와."
"......"
"많이 모아 와야 된다."

땅의 정령을 소환해서 시키는 임무가 겨우 진흙 모으기였다.

"예, 주인님."

흙꾼이는 순식간에 엄청난 양의 진흙을 구해 왔다. 자잘한 알갱이들의 고운 흙에 호수의 맑은 물을 섞은 진흙.
늪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였다.
위드가 두 팔을 걷고 나섰다.

"그럼 작업하자."
"어떤 식으로 작업해야 됩니까?"
"밑에서부터 쌓아야지. 기초공사를 제대로 해야 돼."

진흙이라면 가장 자신이 있는 재료였다.
어릴 때 비만 오면 흙을 이용해서 집이나 댐을 만들고 놀았다.
어린아이들의 유희라고 할 수 있는 흙장난!

'돈도 안 들고, 비만 오면 얼마든 할 수 있었지.'

장마철에 쏟아지는 비를 맞으면서 묵묵히 진흙 놀이를 하던 소년이 성장해서 위드가 되었다.
그 경력은 공사장에서도 증명된 바가 있었다.
시멘트와 모래, 물을 섞을 때의 탁월한 비율 조절!
욕실의 균열에 매끈하게 발라 주는 실리콘.
흙장난을 통해서 얻은 경험들인 것이다.

"역시 인간은 어릴 때 모든 잠재력이 개발되는 거라니까."

위드는 경험을 살려 진흙으로 초거대 금형을 제작했다.
무려 아파트 12층 정도의 높이!
흙꾼이를 통해서 흙을 쌓아 올리고, 삽자루로 다지고 조각칼로 문질러서 제작한 형태였다.
문제는 아무리 가격이 싼 황동이라고 해도 이 속을 통째로 다 채우려면 들어가는 돈이 엄청나리라는 것.

"흙꾼아."
"예, 주인님!"
"찜질방 좋아해?"
"찜질방이 뭡니까?"
"황토 찜질방이라고, 그런 거 있어. 원래 땅의 정령이니 열기에 죽지도 않을 테고...... 뭐든 첫
경험이 중요한 법이지. 친구들 데리고 들어가."

위드는 흙꾼이를 협박해서 초대형 금형의 속을 채우도록 지시했다.
그러고 나서 황동의 원료를 부었다.
땅땅땅!
진흙을 깨자 등장하는 초거대 황동 조각품!
흙꾼이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조각품이었다.
날렵하고 거대한 도마뱀의 형상.
퇴화된 것처럼 작은 발을 가지고 있는 블랙 이무기!
아직 완성품이 아니라 세밀하게 형태를 더 다듬어야 했다.

"머리를 조각하기는 편하겠군."

위드는 전리품으로 획득한 이무기의 머리를 보면서 섬세하게 머리를 조각했다.

"감정!"

『블랙 이무기 프레이키스의 머리 : 내구력 1,671/3,200.
이무기의 머리이다.
알 수 없는 힘이 간직되어 있다.
함부로 다루면 곤란할 듯하다.
옵션 : 특수한 제작물에 반응할 수 있음.

사실 이무기의 머리는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아직 알 수 없었다.

"이런 고레벨 몬스터들이 잡힌 적이 거의 없으니까."

레벨 400대의 보스급 몬스터도, 길드가 통째로 몰려가도 승산을 장담하기 어렵다.
설혹 승리하더라도 막대한 손실을 입은 후!
킹 히드라조차도 사냥된 적이 없었으니 블랙 이무기를 죽인 건 위드가 최초였다.
위드는 이무기의 머리와 날개, 몸통, 발가락까지 세심하게 조각을 마쳤다.
직접 싸움을 했던 상대였기에, 잔인하고 야비한 면모까지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이무기는 날개를 활짝 펼친 채 기다란 목을 비틀어 들고 있었다.
살기가 느껴지는 눈동자와 주둥이로, 아래에 있는 이들을 노려보는 조각품!

띠링!

-만드신 조각품의 이름을 정해 주십시오.

"음."

위드는 잠시 조각품을 살펴보았다.
블랙 이무기와의 전투가 고스란히 떠오를 정도로, 느낌이 살아 있는 조각품이다.

"많이 강한 이무기."

-많이 강한 이무기가 맞습니까?

"맞아."

띠링!

『지고한 몬스터 조각품, 대작 많이 강한 이무기를 완성하셨습니다!
불후의 조각사가 만든 대작!
금속을 이용하여 탄생시킨 조각품.
더 폭넓은 방식의 조각품을 만들기 위하여 대장장이 스킬을 배우는 조각사들에게는
훌륭한 본보기가 될 만한 작품.
통곡의 강에서 사냥당한 블랙 이무기 프레이키스를 조각했다.
생전의 프레이키스의 모습을 완벽하게 복원한 작품.
베르사 대륙에 큰 패악을 끼쳤던 이무기는 이제 조각품으로 남았다.
조각품으로 블랙 이무기 프레이키스의 강대함을 추억할 수 있으리라.
예술적 가치 : 진실 어린 작품의 길을 걷고 있는 이의 작품.
10,921.
특수 옵션 : 많이 강한 이무기 상을 본 이들은 생명력과 마나 회복 속도가 하루 동안
31% 증가한다.
모든 스탯 15 증가.
지혜, 지식 스탯 54 상승.
뱀류 몬스터들의 출현을 급증시킴.
몬스터들의 침략 행위를 절반으로 줄여 줌.
던전 내에서 도둑과 암살자 들의 발소리를 37% 줄여 주며, 은신 스킬의
효과를 높여 줌.
다른 조각품과 중복 적용되지 않음.
지금까지 완성한 대작의 숫자 : 6

-조각술 스킬의 숙련도가 향상되었습니다.
-손재주 스킬의 숙련도가 향상되었습니다.
-조각품에 대한 이해의 스킬 레벨이 1 상승하였습니다.
-명성이 912 올랐습니다.
-예술 스탯이 17 상승하셨습니다.
-지구력이 3 상승하셨습니다.
-인내가 19 상승하셨습니다.
-지혜가 7 상승하셨습니다.
-대작 조각품을 만든 대가로 전 스탯이 3씩 추가로 상승합니다.

"스킬 확인 조각술!"

『조각술 고급 6(99%) : 조각을 할 수 있다. 아름다운 조각품은 고가에 팔리기도 한다.
영예로운 조각품들을 만들며, 대륙에 이름을 떨칠 수 있다.
여자의 환심을 사기에 좋다.

조각술 스킬의 레벨이 한 단계 오르기까지는 겨우 1%의 숙련도만이 남았다.

"걸작이나 명작 하나 정도면 되겠군."

조각술 스킬이 잘 오르지 않는다고 해도 그 정도라면 충분하다는 계산.
그렇게도 올리기 어렵던 조각술 스킬이 7레벨이 되면, 마스터까지는 단 3단계만 남겨 두는 셈이다.
위드는 흔하고 값도 싼 구리를 이용하여 킹 히드라의 조각품도 만들었다.
웅장한 크기로 제작된 걸작 킹 히드라.
프레야 여신상 옆에 만들어져서 미묘하게 느껴진다.
아리따운 여신의 애완동물, 위험한 일이 생기면 그녀를 구해 줄 것 같은 수호 생명체.
아니면 여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비열한 킹 히드라!
오른쪽에는 블랙 이무기의 조각품이 만들어지고, 왼쪽에는 머리가 9개인 킹 히드라가 제작되었다.
모라타의 명물들이 더욱 늘어나면서 위드의 조각술 스킬 레벨도 올랐다.

-고급 조각술 스킬의 레벨이 7로 상승했습니다. 조각술이 놀랍도록 섬세하고 세밀해집니다.
예술에 대한 안목이 넓어지면서 지식과 지혜 스탯이 52 증가합니다.
매력이 39 늘어납니다.

결코 배신하지 않는 조각술 스킬이었다.
마스터에 가까워지면서 스킬이 한 단계씩 오를 때마다 늘어나는 효과가 상당했다.
눈에 띄는 변화 외에도, 빛의 조각술을 사용할 때 색감이 더 다채로워지는 등 다양한 방면에 영향을 끼쳤다.

"남아 있는 강철들도 모두 써 버려야겠군."

어차피 이미 녹인 재료들이라서, 위드는 이참에 거대한 방어구들을 제작하기로 했다. 킹 히드라와 블랙 이무기의
몸통에 걸칠 수 있는 갑옷들이었다.

"대장장이 스킬을 위해서도 새로운 시도를 해 봐야지."

잡철들을 녹여서 만든 원료로 간단한 장검 따위를 만들어 봐야 숙련도도 거의 오르지 않는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거대 몬스터들이 사용할 수 있는 방어구들을 제작했다.

"나중에 돈이 필요하면 다시 녹여서 팔기도 편하고 말이야."

대장장이들 중에 돈이 궁한 이들은 실제로 많이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검이나 방어구를 만들었다가 다시 녹여 버린다.
고생과 수고를 헛되게 만드는 일 같지만, 살 사람을 찾지 못하거나 귀한 원료로 실망스러운 물품을 만들었을 때
처리하는 방법.

『어마어마한 크기의 갑옷 : 내구력 2,060/2,060. 방어력 269.
재주가 뛰어난 대장장이가 만든 작품.
예술적인 심미안을 가지고 있는 이가 만든 물건이다.
엄청난 방어력을 가지고 있지만 너무 크고 무거워서 쓸모는 많지 않을 것 같다.
은과 미스릴이 섞여서 약간의 마법 저항력을 가지고 있다.
제한 : 힘 1,980.
대형 몬스터 전용.
몸통 둘레 170미터 이상.
옵션 : 민첩 -210.
거의 파손되지 않음.
소형 무기에 대한 절대적 방어력.
마법 저항 + 3%.

-대장장이 스킬의 레벨이 중급 4레벨로 상승했습니다. 만들어진 아이템들의 공격력과 방어력이
일정 수치만큼 증가합니다. 공성 무기의 사정거리와 정밀도가 개선됩니다.
-망치질을 하면서 힘이 2 올랐습니다.
-특별한 방어구를 제작하여 명성이 13 올랐습니다.

드디어 대장장이 스킬이 중급 4레벨이 되었다.
위드는 킹 히드라의 갑옷에 이어서, 이무기용 갑옷은 얇게 만들었다.

"두께가 1센티를 넘지 않도록 해야지."

이 정도라고 해도 두껍고 무거운 편이었지만 원료를 아끼기 위해서였다.
마판을 통해 구입해서 산처럼 쌓아 놓았던 재료들이 거의 소진되어 버리고 난 후였던 것이다.
매일 여신상 앞에 와서 조각품 만드는 것을 구경하던 초보자들이나 성직자, 성기사를 포함한 유저들은 줄어드는
잡템에 기가 질릴 정도였다.

"그 많던 잡템을 다 썼어."
"정말 괴물은 괴물이다. 모라타의 영주가 노가다의 화신이라더니 거짓말이 아니야."

모라타에서 시작하는 초보자들은 성벽 너머의 여신상과 2개의 초대형 몬스터 상들을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잡템들을 이용하여 만들었다는 조각품들은, 초보자들에게 노가다의 귀감이 되고 있었다.
이제 위드가 모라타에 만들려고 계획해 놓았던 조각품들은 다 완성되었다.
밀린 빨래를 해치운 것처럼 개운한 기분.
그런데 아직까지도 엠비뉴 요새의 지하 감옥에 간 탐험대의 임무 완수 보고는 전해지지 않았다. 매우 복잡한 미궁
이고 함정들도 많이 설치되어 있어, 희생자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럼 미루어 두었던 의뢰나 해결해야겠군."

1쿠퍼짜리, 딸의 조각품 의뢰.
이 의뢰를 위하여 다크 게이머 연합에 무려 4,000골드나 내고 리튼 왕국의 만돌과 그의 아내의 조사까지 완료했다

"의뢰비가 1쿠퍼라고 해도 대충 해서는 안 될 일이야."

위드는 최상의 재료로 그들의 아이를 조각해 줄 작정이었다.
재료는 이무기와 히드라의 가죽!

"어차피 흠집 때문에 갑옷이나 로브로 만들 수는 없을거야."

온전한 부분의 가죽들을 이용해서 귀여운 여자아이의 인형을 만든다.
대장장이 스킬만 조각술에 활용하는 게 아니었다. 재봉을 이용하여 실제와 같은 인형들을 만들어 낸다.
조각술에는 한계가 없다. 무궁무진한 상상력이 조각술의 원천이 된다.

"조각사로서의 자존심을 걸고, 최소한 대작의 조각품을 만들어 내야지."

솔직히 따로 기대하는 바가 있기도 했다.

"의뢰비 1쿠퍼. 후후후후!"

만돌은 미스릴 부츠까지 신고 있던 부르주아 유저다. 원래 집에 돈이 많거나, 아니면 레벨이 굉장히 높다는 뜻이
리라.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겠지. 미스릴 부츠는 돈을 주고 사더라도 레벨이 되지 않으면 착용할 수
없는 아이템이니까."

아내와 가족을 끔찍이 사랑하는 유형이기도 하다. 1쿠퍼만 달란다고 정말 그 돈만 줄 리는 만무한 것!
착한 일을 하며 겸손하게 행동하면 복이 온다.
위드는 만돌의 미스릴 부츠에 흑심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서윤의 집 방문>





양념반프라이드반의 일상.
꼬꼬댁.
닭 벼슬도 근엄하게 자라고 토종닭으로서의 커다란 풍채도 갖추었다.
그는 정원을 산책하며 별미로 지렁이들을 잡아먹었다.

"서윤아, 식사 왔다."

서윤이 먹는 음식도 같이 나누어 먹으면서 생명의 위협도 없이 평안하게 사는 삶이 행복하기 짝이 없다.
잘 가꿔진 분재들 사이에 앉아서 꾸벅꾸벅 조는 행복감!
배부르고 등 따뜻하니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일상이었다.
서윤이 애정 어린 손길로 쓰다듬어 주면 몸을 비비기까지 한다.
닭으로서는 더없이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하지만 서윤은 항상 미안했다.

'함께 있어 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녀가 캡슐 안에 있거나 학교에 갔을 때 양념반프라이드반은 혼자였기 때문이다.
꼬꼬꼬꼬.
머리를 앞뒤로 흔들며 병원의 정원을 산책하는 양념반프라이드반.
서윤은 생각했다.

'친구를... 데려다 줄게.'



중간고사, 축제, 체육대회도 끝나고 이제 여름방학도 이주일 남짓만이 남았다.
이현은 끊임없는 불만으로 구시렁거렸다.

"무슨 대학교가 이래. 군 복무 기간도 줄어드는 마당에 대학교도 3년, 아니면 2년으로 안 되나?"

비싼 등록금을 앞으로도 3년 6개월이나 더 내야 한다니 앞날이 캄캄했다.
포로수용소나 감옥에서 형기가 줄어드는 죄수의 심정이 이와 같으리라.

"대학교를 졸업한다고 해서 졸업 연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외국계 회사에 100% 취직을 시켜
주는 것도 아니고, 의료보험을 평생 무상으로 제공해 주는 것도 아니고......"

대학의 허구성에 대한 끝없는 성찰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대학교 앞에 있는 번화가에 술집과 캡슐방, 식당 들을 보면서 교육계와 국가의 장래까지 걱정되었다.

"학교 앞에는 전부 논밭이나 갯벌이 있어야 돼. 배고프면 나이 든 어르신들의 모내기를 거들어
드리고 새참 얻어먹고, 가을에는 추수 일손도 도와줄 수 있잖아. 갯벌은... 항상 유익한 식량
창고지. 배를 얻어 타고 가서 그물도 걷어 줄 수 있고 말이야."

갯벌에서는 삽 한 자루면 식사가 해결되리라.
신선한 굴이나 낙지 등을 잡아서 초장에 찍어 먹으면 된다.
밀물과 썰물을 이용하여 그물을 쳐서 물고기도 잡을 수 있으니 일석이조!

"따로 구내식당을 만들 필요도 없는 건데......"

전원 교육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독서를 하며 낚시를 즐기는 대학생들, 그리고 매운탕을 끓이면서 싹트는 우정.
대학가 앞에는 술집과 미용실, 옷 가게, 네일 아트점 대신에 낚시 할인 마트만 있으면 될 것이다.
이현은 평소처럼 점심시간에 잔디 광장에 가서 자리에 놓여 있는 도시락을 먹었다. 그 옆에는 서윤이 앉아서 함께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이현이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서 입에 넣었다.

'음, 맛있군.'

김밥에서 시작된 도시락은 초밥류까지 섭렵하고, 오늘은 떡갈비였다.

'뜨끈뜨끈해. 아직 식지도 않았군.'

이현은 보온을 위해 열선이 깔려 있는 도시락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했다. 갈비를 원 없이 먹어 본다는 게 행복할
뿐이었다.

'이런 게 떡갈비의 맛이구나.'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에는 점심값을 내지 않아서 구내식당을 이용할 수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밥을 안 먹을 수는 없으니 몰래 눈치를 보면서 식판을 들고 갔다. 목구멍으로 편하게 넘어가
지 않는 눈칫밥을 먹으면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같은 반 친구들이 부모님이 정성껏 싸 주신 도시락을 뜯어 먹고 있을 때에 얼마나 부러웠던가.

"......"

이현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서 서윤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짧게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던 것이다.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그녀의 웃는 얼굴이었지만, 볼 수 있는 기회란 정말로 흔치 않다. 그래도 처
음 프레야 여신상을 만들었을 때처럼 차갑고 냉정하던 서윤의 인상은 거의 사라진 후였다.
서윤은 보리차까지 가져와서 잔에 따라서 이현에게 주었다.

"음, 고마워."

이현은 보리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자꾸 나물 같은 것만 주워 먹지 말고 너도 떡갈비 1개 먹을래?"

뭔가를 받았을 때는 공짜가 있을 리 없다.
괜히 떡갈비를 나눠 먹고 싶어서 보리차를 따라 주는 등 선심을 쓰는 척하려는 간악한 계산속!

'최근 들어서 조금 착해진 것 같은데......'

도시락을 몰래 놔두는 사람이 사윤, 그녀라는 것을 모르는 이현은 엄청난 권력을 쥔 사람처럼 행동했다.
서윤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먹는 모습만 봐도 배가 불렀던 것이다.
이현이 다시 물었다.

"그럼 떡갈비 2개?"
"......"
"3, 3개 줄까?"

보리차 한 잔으로 대체 얼마나 우려내려는 것인지, 일그러진 표정!
한때 서윤과 같이 도시락을 나누어 먹으면서 그녀가 김밥을 닥치는 대로 먹었던 시절이 있다.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이현은 한숨을 쉬었다.

'나는 소인배가 아니야. 가끔은 베풀어 주기도 해야지.'

어릴 때 숟가락만 들고 친구들에게 가서 얻어먹은 적이 있다.
그 서글픈 심정을 떠올리면서 서윤의 입장을 적극 이해해 줄 수 있었다.

"그냥 편한 대로 먹어. 난 고기는 많이 먹어 본 적이 없으... 아니, 잘 안 먹으니까. 네가 먹고
싶은 만큼 먹어."

이현은 떡갈비 1개를 집어서 서윤의 밥통 위에 올려 주었다.
서윤이 조심스럽게 입을 벌리고 그 떡갈비를 먹었다.
정신을 앗아 가 버릴 것만 같은 예쁜 광경이다.
잠시 그 광경을 바라보던 이현도 떡갈비를 먹었다.
와구와구.
떡갈비처럼 맛있는 반찬을 많이 줄 수는 없다.

"이거 왜 이렇게 맛있지? 무슨 고기가 입에서 녹네, 녹아."

편하게 먹으라고 한 뒤에 양손으로 쥐고 갈비를 마구 뜯고 있는 모습!
이현은 도시락을 밥알 1개 남겨 놓지 않고 깨끗하게 비웠다.
물론 마지막에는 서윤이 먹을 몫으로 떡갈비 1개를 남겨 놓기까지 했다.
스스로도 만족할 만큼 깔끔한 뒷정리였다.

'떡갈비를 3개나 먹었으면 불만은 없겠지.'

그리고 평소처럼 도시락과 함께 놓인 쪽지를 읽기 위해 꺼냈다.

"오늘도 맛있게 먹어 주어서 고맙다는 얘기를 하려는 걸까? 누군지 몰라도 참 다정한 아가씨야."

그러나 이현이 꺼낸 쪽지에는 보통 때와는 다른 문구가 적혀 있었다.

부탁이 있어요.
오늘 수업 끝나고 시간 있으세요?

베일에 싸여 있던, 점심을 해 주는 우렁 각시의 소원이었다.
그녀가 요리한 밥을 얼마나 맛있게 먹었던가. 점심시간만 되면 입안에 군침이 돌았다.
오늘은 고맙게도 떡갈비까지 얻어먹은 참이었다.
서윤이 맑은 눈으로 이현의 반응을 주시하고 있었다.

"나도 누군지 궁금했던 차에 잘됐군."

고마운 마음에 이현은 답장을 썼다.

경영대 3층 B07 강의실에서 4시에 수업이 끝납니다. 오실 수 있으면 오세요.



수업 시간이 끝나 갈 무렵 이현은 조금씩 경계심이 생겼다.

"과연 어떤 여자일까?"

요리 솜씨로 봐서는 훌륭했다.

"고급 재료들을 너무 아끼지도 않고 사용하고 도시락도 브랜드만 쓰는 점이 결점이지만, 나쁜 여
자는 아닐 것 같아."

이현에게는 이미 환상 속의 우렁 각시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후후."

최상준이나 박순조, 이유정을 비롯한 다른 아이들도 이현에게 도시락을 싸 주는 우렁 각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
다. 오늘 마침 그녀가 나타난다고 하니 궁금증을 해결할 절호의 기회였다.
최상준이 어림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에이, 형! 딱 보면 몰라요? 그렇게 도시락이나 가져다주는 여자애가 괜찮을 리가 없잖아요. 요
즘 세상에 정상인은 아니에요. 유정아, 안 그래?"
"솔직히... 1달 넘게 도시락을 자리에 놔두면서도 아직까지 모습을 안 드러낸 건 이상하긴 해요.
너무 크게 기대하진마요, 오빠."
"형, 유정이 말 들었죠? 우렁 각시 같은 이야기는 동화책에나 나오는 거라니까요. 어디 노처녀
교수나, 사회봉사 단체에서 나온 걸 수도 있죠."

이현은 그래도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밥을 해 준다는 건 그에게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먹을 음식에 정성을 쏟는 애가... 근본적으로 나쁜 애일 리가 없어."

이현의 대인 관계도 그다지 정상적인 편은 아니다.
받은 만큼은 베푼다.
도시락을 싸 주었으니 좋은 애라는 단순 명백한 결론!

"그럼 수고 많으셨습니다. 과제 준비는 빈틈없이 해 오세요."

교수가 강의실을 나가고, 학생들은 주섬주섬 가방을 정리한다. 하지만 이현과 그의 주변에는 여전히 학생들이 모
여 앉아 있었다.

"과연 어떤 사람이 올까?"
"나이 많은 노처녀라고 봐. 어쩌면 체육학과 학생일지도 몰라."

이현만 보면 절도 있게 인사를 하는 체육, 무도 계열 학생들을 일컬어 하는 말이었다.
출입구 근처에서 밖으로 나가려던 학생들이 무언가에 얼어붙은 듯이 제자리에 섰다.

"헉! 서윤 선배님이다."
"어라, 선배님이 이다음 강의를 들었었나?"

한국 대학교의 공인된 여신!
서윤이 강의실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더없이 화사한 초록빛 드레스를 입은 채로, 한 손에는 도시락을 들고 있었다.

"그러면 설마......"

학생들의 안면 근육이 일그러졌다.
오늘 이현에게 도시락을 싸 주던 사람이 오기로 한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신님의 도시락을 저 형이 매일 무참히 입에 넣었던거야?"
"이런 비극이!"

충격과 도탄에 빠진 남학생들!
이현도 뭔가 크게 속은 기분이었다.
서윤과 이래저래 자주 만나면서 초기의 어색함이나 경계심은 많이 줄어들었다. MT와 축제를 거치고, 점심도 같이
먹으면서 나름대로 친해졌다고 할 수도 있다.
가끔 서윤이 뒤통수를 치기는 했지만, 이제 웃으면서 넘길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서윤이 도시락의 주인이었다니,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꿍꿍이로......'

일단 의심부터 하는 이현이었다.
도시락을 먹으면서 무방비 상태로 경계를 하지 않는 잘못을 저질렀다.

'그래!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어. 무이자로 열흘간 대출을 해 준다는 사금융회사에 속는 것과 다
름없는 미련한 행위였어.'

방심했던 실책에 대한 격렬한 반성!
서윤이 다가와서 쪽지를 내밀었다.

부탁 들어줄 거죠?

이현의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이 떨렸다.

'이 순간을 노리고 있었구나! 그것도 1달도 넘게......'

돼지도 잘 먹인 후에 도축을 한다.
도시락을 많이 먹여 놓고, 그것을 약점 잡아서 무리한 부탁을 하려는 속셈!
하지만 이현은 빚을 지고 살고 싶지는 않았다. 빚이란 이자를 치며 늘어나서 결국은 헤어 나올 수 없는 수렁이 되
어 버린다.

"적절하고, 가능한 범위 내에서의 부탁이라면... 들어줄게."

그녀는 다행이라는 듯이 미리 준비해 놓았던 쪽지를 꺼냈다.

양념반프라이드반에게 친구가 필요해요.

"양념반프라이드반?"

이현은 머리를 갸웃했다.
그 독특한 이름은 집에 키우는 닭들이 대대로 이어 가는 이름이 아니던가.
금방 MT때 가져갔던 닭을 이야기한다는 걸 깨달았다.

"닭이 필요해?"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현은 숨 막힐 듯한 긴장감을 숨기지 않고 다시 물었다.

"달걀을 낳을 수 있는 암탉으로?"

서윤은 그저 친구를 데려다 주려고 했을 뿐이었다. 암수 구분에 대해서는 사전에 생각한 적이 없다.
하지만 양반이가 수컷이니 기왕이면 암컷을 데려오는 편이 나으리라.
서윤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현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더없이 괴로운 표정을 억지로 참고 있는 것이다.

'씨암탉이 더 비싼데... 특히 지금 키우고 있는 놈은 저번에 산에서 주운 도라지도 반 뿌리나
먹어 치운 놈인데.'

그래도 도시락 가격을 계산해 보면, 닭 1마리는 그다지 비싼 게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현은 긍정적으로 답했다.

"알았어. 뭐... 내일 가져올게."

그런데 서윤이 고개를 짓는 것이었다.

직접 보고 데려오고 싶어요.

미리 준비한 쪽지의 내용에 이현은 잠깐 생각해 보다가 수락했다.

"좋아. 직접 골라도 돼."

서로 간에 믿음이 부족하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도시락을 많이 싸 왔으니 가장 좋은 닭으로 골라 가고 싶은 모양이로군. 제일 영양가 높고 비싼
닭으로 말이야.'

닭들은 잘 키워서 우량하기 짝이 없었다. 씨암탉들은 금방 달걀을 낳고도 날개를 퍼덕거리면서 날아다닐 정도였다
시장에 내다 팔더라도 시세에 별 차이 없이 다 고만고만한게 닭의 가격이라, 집에 오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이현은 서윤과 함께 집까지 걸었다.
거리에서 그녀를 본 남자들은 멍하니 서서 몇 번이나 눈을 비비며 다시 쳐다보았다.
남자들도 여자들도 그들로부터 눈을 떼지 못했다.
너무나 아름다운 서윤을 보면서, 믿을 수 없어 하는 모습이었다.
서윤에게 일단 시선을 빼앗긴 그들은, 도저히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옆에 함께 걷고 있는 남자를 살폈다.

'도대체 어떤 행운아가 저런 여자와 함께 다니는 거야?'

이현은 지극히 평범했고, 적당히 목이 늘어난 티셔츠와 물빠진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왜 저런 놈과... 무슨 약점이라도 잡힌 걸까?'
'부자야! 틀림없이 집이 부자야. 어린 나이에 수천억대 자산가이거나, 상속받은 재산이 엄청날
거야.'
'사랑의 힘은 위대하군.'

시샘과 질시의 눈빛들이 쏟아졌지만 이현은 그럴 때마다 꿋꿋했다.

"세상은 외모가 전부가 아니야. 마음이 중요하지."

서윤의 정체를 그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악독하고 잔인하며, 비열하기까지 하다.
인간성으로는 최악!
얼굴이 호흡곤란을 일으킬 정도로 예쁘다고 해서 거기에 넘어가면 절대로 안 되는 것.

"여자란 요리를 좀 잘한다고, 돈이 많다고, 날씬하고 몸매 좋고 예쁘다고, 옷 좀 잘 입고, 머리
가 똑똑하다고 해서 좋은 게 아니니까."

한국 대학교에 입학할 정도면 머리도 수재라고 봐야 된다.
수업을 함께 들으면서도 서윤은 교재에 있는 연습 문제 정도는 너무도 간단히 풀어 버렸다. 강의 진도가 나가지
않은 부분들도 금방 이해하고 해결해 버린다.

"어디로 보나 내가 아깝지."

이현은 뻔뻔하게 얼굴을 들고 걸었다.
서윤은 의외로 잘 걸어서 따라왔다. 하이힐을 신지 않은 이유도 있었지만 걸음걸이도 빠른 편이었다.
단지 이현의 집에 간다는 설렘에 그녀의 얼굴은 딱 보기 좋을 정도로 상기되어 있었다. 남자의 집을 방문하는 게
처음이기도 했고, 어떤 닭을 친구로 데려가야 할지에 대해 행복한 기대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여기야."

이현은 한적한 주택가로 와서 자신의 집 문을 차곡차곡 열었다.
무려 7개나 되는 대문 잠금장치!
비밀번호에, 카드 키까지 별도로 있어야 했다.
서윤이 문가로 다가오자, 이현은 몸으로 입구를 막았다.

"미리 말해 두지만 집에 들어가서 함부로 이것저것 만지면 안 돼. 어디에 뭐가 있는지 다 알거
든?"

의심하고 도둑 취급까지 하는 이현!
일단 외부인을 들이는 경우가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
최지훈이 이혜연과 만나면서 가끔 방문한 적은 있지만, 가전제품의 수리가 끝나고 난 후에는 잘 데려오지 않았다.
이현은 바싹 경계하고 있었다.
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
"일단 들어와."

서윤은 대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왈왈왈!
송아지만 한 큰 개가 잽싸게 뛰어와서 배를 깔고 귀엽게 짖는다. 커다란 체구에 걸맞지 않는 앙증맞은 울음소리였
다.
이혜연이 직접 이름을 붙여 주었던 몸보신의 애교!
이현은 다급하게 설명했다.

"키우고 있는 개야. 엄청 위험한 녀석이라서 가까이하지 않는 편이 안전해."

서윤이 고운 손을 내밀자 몸보신은 꼬리까지 맹렬하게 흔들었다.
개의 후각은 인간보다 만 배 이상이나 된다.
서윤의 몸에서 은은하게 풍기는 떡갈비의 향기 그리고 예전에 떠난 양념반프라이드반의 냄새를 맡고 친근하게 지
내려고 하는 것이다.
개들이 개장수를 보고 본능적으로 경계하는 것처럼, 서윤을 보더니 그 선한 느낌에 달려들어서 환영의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서윤의 주변에서 팔짝팔짝 뛰고 꼬리를 흔들면서 적극적으로 환영의 인사를 표시했다.
이현이 고함을 질렀다.

"워, 워! 이러지 마라, 보신아, 또 사람 물려고 그러지? 지난주에도 1명 물어서 입원시켰잖아.
안 돼. 저리 가!"

왈왈.
몸보신은 꼬리만 흔들다가 자신의 집으로 얌전히 돌아갔다.
사람을 문 적 있다는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고도 순하기 짝이 없는 몸보신.

'닭은 시장에서 몇천 원이지만 개는 20만 원은 받을 수 있는데! 어림도 없어!'

몸보신은 유별나게 살이 포동포동하게 잘 오르고 운동도 되어 있어서 육질이 좋다.
개장수가 와서 35만 원에 팔라고 했는데도 안 팔았는데 서윤에게 주기란 너무도 아깝다.

"......"

서윤이 잰걸음으로 철망이 쳐져 있는 울타리로 다가갔다.
철망 안에는 토끼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서윤이 연필로 쪽지에 빠르게 글을 썼다.

만져 봐도 돼요? 저 토끼 이렇게 가까이 보는 건 처음이에요.

"만져 봐. 참, 토끼가 새끼를 낳은 지 얼마 안 되니 주의해."

새끼요? 어디에요?

"우리 안에 있어."

서윤은 햄버거를 처음 먹어 보는 어린아이처럼 토끼들을 신기한 듯이 보았다.
이현은 위생에 대해서는 결벽증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라서, 토끼 울타리 안은 매우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토끼들이 먹을 풀들이 푸짐하게 쌓여 있고, 그늘로 가려진 구석에서는 몸통이 손가락 두세 마디 정도밖에 되지 않
는 새끼 토끼들이 꼬물거린다.
새끼인데도 길쭉한 귀에, 바닥에서 깡충거리려고 뒷다리들을 움직이는 모습!

"아아아."

서윤의 입가에서 노래하듯이 흘러나오는 감탄사!
예쁘고 맑은 속삭임 같았다.
토끼장에 달라붙어서 눈을 반짝이며 구경하고 있는 그녀.
새끼들이 겁을 먹을까 봐 만지지는 못하고, 너무나도 아쉬워하는 표정이었다.

"만져도 돼."
"......"

하지만 서윤은 선뜻 손을 대지 못했다.

"괜찮아. 아직 눈도 안 뜬 새끼야."

서윤이 걱정하는 건 그런 이유는 아니었지만, 이현은 울타리로 손을 넣어서 새끼를 꺼냈다.

"자."

서윤의 손바닥에 내려 주니, 새끼 토끼는 미약하게 뒷발을 차며 꼬물거렸다.
서윤은 소중한 듯이 새끼 토끼를 보듬고 쓰다듬었다. 그러나 금방 토끼우리에 넣어 놓았다.
새끼 토끼가 불안해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 후에도 서윤은 토끼우리를 떠나지 않고 하염없이 쪼그려 앉아 있었다.

'설마 달라고 하는 건 아닐 테지!'

이현의 경각심은 갈수록 더해졌다. 여동생이 아직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집에 여자와 단둘이라니... 무조건 조심해야지!'

남자와 여자.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었다.
이현이 단호하게 말했다.

"어서 닭 보러 가자!"

최대한 토끼들로부터 떼어 놓기 위한 속셈이 역력했다.
서윤은 아직 눈도 못 뜬 새끼 토끼들을 계속 보고 싶었다.
어미 토끼와 함께 웅크리고 있는 귀여운 모습에 반하고 만 것이다.
당근을 볼에 가득 물고 있는 어미 토끼의 천연덕스러운 모습.
하지만 토끼들이 편안하게 쉴 수 있도록, 서윤은 아쉬움을 가득 남긴 채 닭이 있는 뒤뜰로 향했다.
꼬꼬댁.
꼬끼오!
나무를 타고 새처럼 날아다니는 토종닭들.
땅에는 병아리들이 아장아장 걸어 다니고 있었다.
이현과 함께 처음 보는 서윤이 오자 재빨리 구석이나 나무 위로 피했다.
적극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구석에 숨어서 머리만 내밀고 인간들의 동향을 살피면서 나오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서윤은 양념반프라이드반을 통해 닭의 습성에 익숙했다.
준비해 온 떡갈비를 잘게 찢어 바닥에 뿌렸다.
꼬꼬꼬꼬꼬꼬꼬꼬!
나무와 수풀 사이에서 맹수처럼 튀어나와서 쪼아 먹는 닭들. 병아리들도 질세라 작은 부리로 갈비를 찢어 먹고 있
었다.
서윤은 닭과 병아리 들을 어루만졌다.
낯선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떡갈비로 금방 친해져서 그녀의 곁을 떠날 줄을 모른다.

'나를 좋아해 주고 있어.'

서윤은 어쩔 줄 모르면서 행복이 가득한 눈빛으로 닭들을 만졌다.
이현은 비참했다.

'내가 먹던 도시락의 떡갈비와 똑같은 것을......'

닭과 같은 음식을 먹게 된 신세!
그래도 표정이 거의 없던 서윤이 닭들과 있으면서 굉장히 즐거워 보이는 기색에 덩달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말없이 가만히 눈치만 보고 다가오지 못하던 그녀가, 닭들과 있으면서 눈가에 눈물이 맺힐 정도로 감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현의 콧날까지 괜히 시큰해졌다.

'여동생에게 처음으로 치킨을 튀겨 줄 때보다도 기분이 이상하군.'

서윤이 아주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걸 인정하기가 스스로도 쉬운 건 아니었다.

'그녀가 나쁘든 혹은 좋은 사람이든... 나와 가까이할 수는 없어.'

현실적으로 너무 다른 환경에서 살고 있었다.
그녀가 입고 잇는 옷 한 벌의 가격이 대충 어느 정도인지 이현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브랜드 옷들도 10만 원이 넘는데... 저렇게 좋은 원단에 따임이라는 브랜드,
디자인이면 15만 원은 되겠지!'

가정 형편에서 너무 큰 차이가 난다. 서윤 정도라면 자신과는 비교도 안 되는 훌륭한 남자가 좋아하리라.

'자격을 갖춘 그런 남자가 나타나겠지.'

정효린이나 다른 여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현은 큰 결심을 내렸다.

"대충 1마리 골라. 괜찮은 녀석이 있으면... 2마리 골라도 돼."

행복한 듯 닭들을 만지던 서윤이 기쁜 눈으로 돌아보았다.
정말이냐고 묻는 눈빛!
이현은 멀리 다른 곳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까짓 닭 정도로...... 2마리든 3마리든 아무것도 아니야."

웬일로 통 큰 배포를 보여 주는 이현이었다.
닭 1마리로 도시락값을 대체하기에는 여전히 빚진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서윤은 3마리를 골랐다.
그녀가 닭을 고를 때마다 이현의 얼굴은 핏기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창백해졌다.

'저 녀석은 씨암탉인데... 그리고 백숙 녀석에, 나중에 큰 닭의 기질이 보이는 토실토실한 병아리
까지!'

씨암탉은 물론 귀한 존재였다.
훗날 여동생이 시집을 가서 남편을 데려오면 잡아 주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까지 닭들은 계속 번식을 할 테고, 다른 씨암탉도 2마리나 남아 있으니 괜찮으리라.
그럼에도 서윤이 씨암탉을 고르는 순간 가슴 한 귀퉁이가 떨어져 나가는 슬픔과 아픔이 느껴졌다.
이현은 서글프게 말했다.

"포장... 해 줄게."

서윤이 데려가기 편하게 끈으로 닭들의 다리와 목을 묶어서 서로 연결시켰다.
닭 썰매처럼 모양새가 괴상하기 짝이 없었지만 서윤은 끈을 받아 쥐었다.
그녀가 쪽지에 글씨를 썼다.

정말 고마워요. 무리한 부탁이었는데도 들어줘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야. 이 정도야 뭐. 필요하면 1마리 더......"

이현은 급히 말을 바꾸었다.

"다음에 병아리로 1마리 더 가져가도 돼."

정말요?

"......"

준다고 하니 덥석 받으려고 하는 서윤!
이현은 쪽지로 대화를 나누면서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말을 안 하지?'

그를 놀리기 위하여 일부러 말을 할 줄 안다는 사실을 숨긴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MT에서도 축제에서도, 단 한 번도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없다.
점심을 함께 먹으면서도 말을 하지 않던 모습.
사실 도시락에 쪽지를 남겨 두고, 그 후로 쪽지를 통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굉장한 진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로열 로드에서는 딱 한마디였지만 무척이나 듣기 좋은 음성이었는데, 실제로는 목소리가 매우
칼칼하거나 뭐 그런거겠지?'

이현이 서윤을 배웅해 주기 위하여 마당을 다시 나가려고 할 때에 보신이가 끙끙대면서 다가왔다.
서윤도 몸보신이 귀여운지 쉽게 걸음을 떼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이현이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호, 혹시 이 개 마음에 들어?"
"......?"
"보신이도... 데려갈래?"

이현의 충격적인 변화!
복날을 위하여 애지중지 길러 온 몸보신까지 서윤에게 주겠다는 것이다.

정말로 데려가서 키워도 돼요?

"이 개가 너를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데려가서 키워도 돼."

서윤은 무엇보다도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다는 말에 더없이 기뻐하는 기색이었다. 그녀는 놀라움과 감동에 눈물을
뚝뚝 흘리기까지 했다.
이현이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이 녀석 많이 먹으니까 밥은 자주 주는 게 좋아. 밥그릇은 작은 걸로 주면 엎어 버리니까 큰 걸
로 마련해 주고, 비오는 날에는 마당에서 뛰어놀게 해 줘. 밤에는 묶어 놓지 마. 쥐나 족제비 등
을 사냥하거든. 낮잠은 2시간 정도 자는데, 데리고 놀고 싶으면 이름을 불러 줘. 그러면 알아서
깨. 무나 당근을 좋아하니까 가끔 주도록 하고......"

애인을 떠나보내는 것처럼 구구절절한 설명.

'심장이 생으로 뽑히는 것 같구나.'

이현은 극심한 괴로움을 느끼면서도 결정을 돌이키지 않았다.
선물을 줄 때에는 아까운 기색을 보여 줘서는 안 된다.
줄 때 제대로 주는 것이 뇌물!

'S급 난이도의 두 번째, 세 번째 퀘스트. 솔직히 나로서는 깨기가 거의 불가능할 거야.'

조각술 스킬을 올리기 위한 노가다를 하고는 있다. 하지만 퀘스트의 성공을 장담할 수는 없다.

'야만족들과의 동맹이나 인도자의 권능, 죽음의 선고. 그리고 운도 많이 따라 주어서 1단계 퀘스
트는 완수할 수 있었지.'

퀘스트에서 매번 그런 행운이 따라 주기를 바랄 수는 없다.

'2단계, 3단계는 더 어려울 거야.'

앞으로는 맨땅에 부딪쳐야 되는 절박하고 고독한 처지!

'함께할 수 있다면......'

서윤이 같이 퀘스트에 참여해 준다면 훨씬 든든하다고 할 수 있었다.

정말 고마워요.

이현의 집 앞에는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고급 외제 차들이 즐비하게 주차되어 있었다.
서윤의 경호원들이 와서 대기하고 있는 것이다.
검은색 정장을 입은 경호원들이 차의 뒷문을 열어 주었다.
닭들과 몸보신은 뒷자리에 탑승했다.
경호원과 기사까지 딸린 억대의 자동차에 탑승하는 호강을 누리는 닭과 개!
이현은 입가에 쓰라린 속내를 감추는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배웅했다.

"잘 가. 다음에 또 놀러 와."

그러자 차에 타려던 서윤이 멈칫하더니 잠시 망설이다가 쪽지에 무언가를 적는 것이었다.

정말 또 놀러 와도 될까요?

"......"

이현은 할 말을 잃어버리는 상황이란 바로 이런 때임을 깨달았다.
이만큼 챙겨 주었는데도 여전히 아쉬움이 있다는 뜻이 아닌가!

'설마 또 오기야 하겠어. 보통 하는 말처럼 그저 예의상 해 보는 소리겠지.'

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 나면 아무 때나 편하게 놀러 와."

고맙습니다. 다음에 봐요.

서윤이 승용차에 타고, 경호원들과 함께 떠났다.
차들이 떠나고 난 후에 대문 앞에서 가만히 서 있던 이현은 한숨을 쉬었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여러 일들을 하며 악덕 사장들을 만났을 때 느꼈던 감정이 다시금 떠오른다.

"진짜, 있는 것들이 더하다니까."

소중한 교훈도 얻었다.

"역시 여자들과 만나면 안 돼."

데이트 비용.
여자를 만나면 이래저래 돈이 든다.
서윤에게 밥을 사 주거나 커피를 마시거나, 놀이 공원에 함께 간 것도 아니다.
하지만 닭값과 개값!

"여자는 돈을 모으는 데 적이야. 적."

이현은 이를 갈았다.
그녀에 대한 악감정이 다시 생겨나고 있었다.



서윤의 병실은 동물 농장을 연상시켰다.
따뜻한 밥에 고기를 먹고 나서 늘어진 몸보신과, 살판이 난 듯 홰를 치며 날아다니는 닭들.
노란 병아리도 삐악거리면서 병실을 싸돌아다니고 있다.

"......"

서윤은 의자에 앉아서 책을 읽었다.
《개가 좋아하는 먹이》.
《개 팔자가 상팔자》.
《개가 짖을 때는 이유가 있다》.
애완용 개를 키우기 위한 지침서들이었다.
서윤의 병실에는 전용 운동장이 딸려 있을 뿐만 아니라 4개나 되는 방과 서재, 간단한 음료들을 마실 수 있는 홈
바까지 꾸며져 있다.
몸보신과 닭들에게는 천국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멍멍!
몸보신은 창밖을 내다보며 짖기도 했다.
넓지는 않았지만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았으니, 신선한 바깥공기가 필요했던 것이리라.
서윤은 외출 준비를 했다.

'《개 팔자가 상팔자》란 책을 보면 꼬박꼬박 산책을 시켜 주어야 한다고 했어.'

서윤이 몸보신의 목에 개 줄을 채웠다.
몸보신은 혀를 내밀어서 손을 핥으며 얌전하게 있었다.
복날의 개의 운명을 극적으로 변화시켜 준 새 주인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고 있었던 것!
간호사들은 믿기 어렵다는 듯이 서윤을 보았다.

"예전보다... 많이 밝아진 것 같아요."
"그러게요. 얼굴색이 화사해진 느낌이죠? 전에도 정말 예뻤는데 지금은 여자라도 반할 지경이에
요."

간호사들은 수많은 노력에도 마음의 문을 닫아 잠그고 있던 서윤이 이렇게 갑자기 나아질 줄은 몰랐다.
차은희도 그 점에 대해서는 이현의 자질을 인정해야 했다.

"정말 착한 남자야."

로열 로드에서 사냥을 함께하는 동료들은 그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아마 그 따뜻한 마음씨가 서윤의 얼어붙은 가슴을 녹였겠지?"

정일훈에게도 이현에 대해서 많은 말을 들었다.
요즘 세상에 가족을 위해서 그렇게 헌신하는 사내가 몇 명이나 되겠는가!
로열 로드에 빠져서 산다는 점을 단점으로만 볼 수는 없는 이유였다.

"서윤이 억지로 가던 학교를 즐거워해. 정말 많이 나아졌구나."

닭과 강아지를 기르는 건 매우 긍정적인 신호였다.
애완동물을 기르면서 사랑을 쏟는다면 마음을 완전히 열날도 머지않았으리라 짐작되었다.
이제 서윤은 곧잘 쪽지로 의사 표현도 하는 단계까지 이르렀던 것.
결정적인 계기가 생겨서 말문이 트이기만 하면 된다.

"드디어 회장님께 보고를 할 시간이 된 걸까?"

차은희는 서윤의 아버지에게 연락을 해야 했다.
그는 항상 경호원들을 통해서 딸에 대한 보고를 받고 있었다. 머지않아 서윤의 마음이 치유되고, 말을 할 수도 있
을거라는 소식을 듣는다면 틀림없이 기뻐하리라.





<아이의 조각품>





"위드 님은 정말 천재야!"

마판은 스무 대나 되는 대형 마차를 끌고 통곡의 강 유역을 지나고 있었다.
야만족 마을에서 교역을 하기 위해서 짐마차를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캬오오오."
"싱싱한 인간. 먹잇감이다."

다수의 몬스터들이 마차를 따라왔지만, 빙룡과 불사조에 의해 전멸했다.
마판은 마차들을 몰고 무사히 베자귀 부락에 도착했다.
남녀노소, 베자귀 부족이 모였다.

"빨리빨리 사라 해! 싸고 저렴한 물건 왔다 해. 늦으면 살거 없다. 싸게 팔 때 많이 사라 해."

마판이 가져온 물품은 모라타에서 만든 무기와 방어구, 피혁 제품 그리고 식료품들!
어린 여자 베자귀 부족이 마음에 드는지 구리로 된 귀걸이를 잡았다.

"이거 얼마예요?"

마판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거 무지 비싼 거다."
"알아요. 비쌀 거 같아요. 제가 가진 거는 가죽밖에 없는데요. 아니면 송곳니나......"

블랙 와일드보어의 송곳니와 가죽.
모라타에서 수백 골드는 족히 받을 수 있는 물건들이었다.
마판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건 이 지역에서 사냥하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거잖아."

악덕 상인의 표본을 보여 주는 마판!
머리카락이 몇 개 있지도 않은 베자귀 부족 소녀가 울상을 지었다.

"히잉, 꼭 사고 싶은데......"
"그럼 가죽 세 장에 팔아 줄게."
"고맙습니다, 상인 오빠!"

마판은 미개한 야만족과의 교역을 통해서 가죽과 재료 아이템들을 사 모았다.
최초의 교역자로서 엄청난 폭리를 취하는 것이다.
위드에게서 배운, 미개한 야만족들을 등쳐 먹는 방법!
여기서 구한 가죽들은 굉장히 귀한 재료들이다. 통곡의 강 주변 사냥감들의 가죽이라서, 모라타에 가져가기만 해
도 특산품 대우를 받는다.
게다가 모라타의 우수한 기술로 가공을 하면 멋진 로브와 방어구가 탄생하는 것이다.



위드는 1쿠퍼의 의뢰에 쓸 조각품을 만들기 위해 영주성의 개인 방에서 바느질을 했다.
이무기의 가죽을 하얗게 탈색시켜서 어린아이의 몸통을 만들었다.

"사람의 피부가 흰색은 아닌데......"

둔한 색감 때문에 살색을 만드는 자체부터 스트레스!
위드는 진정한 재봉사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가죽이나 천을 다루는 솜씨는 상당히 뛰어나다. 하지만 염색에 대해서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던 탓이다.

"활용도만 좋으면 되었지. 색감은 그리 필요 없으니까!"

옷들은 디자인도 중요한 요소지만, 일단 방어력이나 다른 옵션만 좋으면 금방 팔려 나간다. 염색이야 옷을 구입하
고나서 다른 염색사에게 해도 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어린아이의 피부색을 만드는 작업부터 난관이었다.

"너무 어리게 만들 필요도 없어."

갓난아이.
백일도 안 된 어린아이는 오히려 그 슬픔만을 떠올리게 만들기 쉽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 테니 두 살이나 세 살 정도로 하자."

말썽을 막 부리기 시작할 나이였다.

"얼굴만 봐도 꿀밤을 쥐어박아 주고 싶고, 왜 낳아서 고생을 하나 후회되고... 그러면서도 가장
예쁜 시기지."

마음을 정리하고, 아이와의 마지막 이별을 위하여 만드는 조각품이니 명랑한 표정이 좋으리라.
예술적 가치가 아니라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조각품. 세세한 표현보다는 포근한 느낌이면 된다. 따뜻함을 보여
줄 수 있는 조각품이 필요했다.

"내게 그런 실력은 없지만......"

위드는 잊고 싶은 기억이나 슬픔도 결국은 시간이 추억으로 만들어 준다는 걸 경험으로 배웠다.
경이로운 조각품으로 아픔과 그리움을 모두 감싸 안아 주기를 기대하는 건 위드에게 너무 무리한 일이었다.
진정 뛰어난 조각사라고 해도,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는 있어도 슬픔을 중화시켜 줄 수는 없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 계기를 만들어 주는 정도겠지."

위드는 흑요석을 세공하여 만든 눈동자로 인형의 눈을 붙였다.
여동생이 어릴 때에는 공장에서 만들던 인형 때문에 장난감들은 남부럽지 않게 많았다.
남자아이라면 비행기나 배, 자동차, 로봇 등 여러 다양한 장난감들을 원했겠지만 여동생이라서 아기자기한 취향을
가졌다.
동물들의 인형을 보면 한없이 좋아했다.

"유별나게 곰 인형을 좋아했지."

아이들이 인형을 좋아하는 건 동심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리라.

"아이의 조각품만이 아니라... 더 많은 인형들을 만들어야 겠어."

위드는 아이 혼자 있는 것은 쓸쓸하다고 생각했다. 최소한 대작의 조각품을 만들 작정이었지만, 그것으로는 많이
허전하다.
영원한 작별의 인사를 나누어야 하는데 아이의 인형만 덩그라니 있으면 부모의 가슴은 찢어지도록 슬프리라.

"아이 인형이 있는 장소를 가득 채울 수 있는 조각품. 아이들이 좋아하는 거라면 무엇이든지 만
들어야겠군."

여자아이가 좋아할 만한 물건은 전부 만든다.
촛불로 예쁘게 꾸미고, 눈사람 등도 어떻게든 만들 수 있었다.

"빙룡의 피부 가루 좀 벗겨 내면 돼!"

조각사란 의외로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직업이었다.

『이무기의 가죽 : 내구력 30/30.
생산 스킬 재봉과 관련된 아이템.
궁극의 재봉 재료.
옷이나 장비를 만들기에는 너무 귀한 물건이다. 마나의 힘이 깃들어 있으며 독에 대한
저항력을 갖게 해 주고 암흑 계열의 힘을 증폭시켜 준다.
이무기의 가죽은 보통의 재봉술과 재봉 도구로는 다룰 수 없다.
명장의 반열에 오른 재봉사에게는 더없이 귀한 경험과 명품을 만들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전투의 흔적이 가죽에 고스란히 남아 있어서 가치가 다소 훼손되어 있다.
물품으로 제작하려면 별도의 수선을 필요로 함.
최상급 재봉 아이템.
옵션 : 암흑 계열의 힘을 증폭시켜 줌.
마나의 최대치를 20,000 증가시켜 줌.
독에 대한 저항력을 가져서 쉽게 중독되지 않게 된다.
매우 가벼운 소재.

최상급 재봉 아이템을 단지 인형을 만드는 데 사용한다.
구멍도 나 있고 흠집도 많았지만, 여행자를 위한 튜닉이나 마법사의 로브로 만들어도 수만 골드는 받을 수 있는
재료들이 거침없이 절단되어 인형으로 재탄생했다.

띠링!

『토끼 봉제 인형을 만드셨습니다.
손으로 아름다움을 빚어내는 조각사의 새로운 도전!
희귀한 가죽을 재료로 해서 토끼 인형을 만들었다.
조각술계의 새로운 혁명의 창조자 위드는 도전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예술적 가치 : 거장 조각사 위드의 작품.
309.
특수 옵션 : 토끼 봉제 인형을 가지고 있으면 점프력이 5% 증가함.
봉제 인형을 보여 주는 것만으로도 아이들과의 친밀도 상승.
거대토끼족과의 우호를 높일 수 있다.

-조각술 스킬의 숙련도가 향상되었습니다.
-재봉 스킬의 숙련도가 향상되었습니다.
-명성이 12 올랐습니다.
-예술 스탯이 3 상승하셨습니다.
-행운이 1 상승하셨습니다.

거대토끼족은 아직 발견된 적이 없다.
설원에 산다는 설족들처럼, 구전을 통해 내려오는 이야기속에만 존재하는 종족!
봉제 인형으로 조각품을 만들어서 조각술 스킬의 숙련도가 0.9%나 올랐다.

"조각술 스킬 레벨이 7에 오르고 나서는 걸작을 만들어도 이 정도의 숙련도는 얻지 못할 줄 알았
는데......"

대형 조각품이나 바위 조각품에 치우쳐 있던 게 술수인 것 같았다.
조각술은 끊임없이 새로운 변화와 시도를 거듭해야 발전할 수 있다. 만들고 싶은 주제와 작품들이 쌓이고 쌓여서
쉴 수가 없게 만드는 게 조각술의 세계!
위드도 인간인 이상 만드는 조각품들이 어느 정도는 정해져 있었다. 익숙한 조각품들을 주로 만들려고 하고, 점점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게 된다.
서윤의 조각품을 한동안 만들다가 대형 조각품으로 옮겨 갔는데, 타성에 젖어서 만드는 조각품으로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위드는 다정하고 친근한 표정의 동물 인형들 30개 정도를 완성해서 가지런히 놓았다.
사자, 코끼리, 곰, 치타, 코뿔소 등의 맹수 인형들이 귀여운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인형이라면 역시 사악하고 눈알이 번들거려야 제맛인데......"

위드의 취향에는 심각하게 맞지 않았지만, 어쨌든 아이들을 위한 것들이다.
가죽으로 만든 인형 중에서 걸작이 5개나 나왔다.
재봉 스킬이 연관되어 만든 인형이라서, 천과 가죽을 붙여서 만든 완성도는 상당했다.
위드의 손재주는 엄청난 내구력을 자랑한다.
진짜 코끼리가 와서 짓밟아도 뽀송뽀송한 내구도, 심지어는 화염 마법으로 태워도 멀쩡할 인형들의 탄생이었다.
멋모르고 가지고 놀던 아이들이 불에 타면서도 멀쩡한 인형을 보고 침을 흘리면서 경악하게 될지도 모를 수준!

"인형은 튼튼하지 말아야 한다는 편견을 버려야 돼!"

위드는 더 많은 동물 인형들을 만들면서 인형 제작에 대한 기본을 익혔다.
틀을 깨는 상상력도 본격 발휘되었다.
다람쥐 가족 인형들이 맷돌을 돌려 큰 도토리를 부수는 모습. 도토리묵을 만들어서 먹으려는 것이었다.
토끼들은 당근 수프를 만들어서 헤엄치고 다니고 있다.

"작품명은 다람쥐와 토끼 요리사들이 어울리겠군."

걸작이었다.
나중에 요리 스킬을 발휘해서 진짜 도토리묵과 당근 수프까지 채워 넣으면 완벽하리라.
원숭이 인형들은 집단으로 바나나 껍질을 까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모닥불을 피우고, 원숭이 연인을 유혹하
는 아찔하고 관능적인 춤.
장난기 많은 원숭이들이 바닥에 바나나 껍질을 깔아 놓아서 넘어지고 미끄러지는 익살스러운 광경도 연출했다.

"작품명은 발랑 까진 원숭이 축제."

이번에는 명작이 나왔다.
나무를 깎아 만든, 원숭이들이 악기를 다루는 모습이 깜찍했다.

"그다음으로는......"

동물, 동물, 동물들.
남자아이가 대상이었다면 자동차나 배, 비행기 등의 조각품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자아이를 위한 조각
품이어야 했다.

"여자아이들은 동물 인형을 좋아하니까!"

덮어 놓고 무식할 장도로 많은 동물 인형들을 만든다.
노가다에는 면역이 되어 있어서, 수백 개를 만들어 내고도 지칠 줄을 몰랐다.

"완벽하게 하나의 방을 인형으로 가득 채울 수 있도록... 그 아이가 절대 불행하지 않았다고, 행
복했다는 걸 느낄 수 있게 해야지."

지금 만드는 인형들은 곁가지에 불과할 뿐.
최고의 작품을 위해서는 특별한 인형을 만들어야 한다.
위드가 만들었던 그 어떤 작품보다도 더 대단한 대작. 진정한 초대작을 만들어야 했다.



모라타에 근접해 있는 트리반 마을.
니플하임 제국 시절에는 자작이 거느리던 영지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생사와 계피가 많이 나오며, 넓은 곡창지대까지 소유한 축복받은 영토였다.
하지만 혹독한 북부의 추위가 지나가고 난 이후에 남은 것은 황무지와 폐허뿐이었다.
몬스터들도 많아서, 수시로 마을을 노략질했다.
들개들 따위가 습격을 하고 나면 마을에 식량이 거의 남아 나지도 못했다.
스티렌 길드가 이곳에 정착했다.

"땅을 파! 돌멩이들을 빼내고 씨앗을 심어야 하니 서둘러야 해."

스티렌의 지휘 아래에 30여 명의 길드원들이 곡괭이질을 하고 있었다. 땅을 개간하고 씨앗을 뿌리기 위해서였다.

"젠장, 노르망 왕국에서는 그래도 스티렌 길드 하면 초보자들도 알아주었는데 이게 무슨 꼴이야."
"일을 해 줄 주민이 없으니 어쩔 수 없잖아. 지금은 모라타에서 전부 수입하고 있으니 말이야."

스티렌 길드가 트리반 마을에 정착한 것은 베르사 대륙의 시간으로 5개월 전쯤!
북부의 개척 붐이 막 불었을 무렵에 스티렌 길드는 일찍 터전을 옮겼다.
현재는 북부의 마을과 영지들이 중앙 대륙에서 대규모로 건너온 유저들과 길드들에 의해서 다스려지고 있었다.
스티렌 길드는 정착할 마을을 정할 때 조건을 그다지 고려하지 않았다.

"부동산은 입지야. 기름진 땅? 넓은 들판? 혹은 산을 끼고 있는 지형? 다 필요 없어. 모라타에만
가까우면 돼."

당시는 모라타가 북부의 유망한 마을로 떠오르고 있을 무렵이었다.
스티렌이 보아도 전망이 밝았다.

"북부 대륙의 중심지라는 이점. 상인들의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유저들도 모여들고 있어.
앞으로 북부는 모라타가 중심이 될 거야."

스티렌의 전망대로였다.
모라타는 영주의 과감한 투자와 사람들의 유입에 힘입어서 무서운 속도로 발전을 거듭했다.
스티렌 길드에서 필요한 물품들을 구입하기 위하여 모라타 마을로 갈 때마다 천지가 개벽하는 변화들을 볼 수 있
었다.
빛의 탑과 약간의 조각품만 있던, 폐허나 다를 바가 없던 모라타 마을에 마차가 달릴 수 있을 정도로 번듯한 길이
뚫리고 건물들이 새로 지어졌다. 화려함은 없지만 분수대가 있는 넓은 중앙 광장도 생겼다.
광장에서는 전사들과 마법사, 기사, 모험가 들이 퀘스트와 사냥을 함께할 파티원을 구한다.
분수대 주변에 빼곡하게 몸을 붙이고 앉아 장사를 하는 상인들을 보면서 스티렌은 눈물이 나올 정도로 부러웠다.

"우리 트리반 마을도... 나중에는 이렇게 되고 말 거야."

모라타 영주의 직업은 조각사였으니 희망은 있었다.

"조각품이 초창기에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효과는 있겠지. 하지만 우리 스티렌 길드가 사냥터 정보
등을 공개하면 모두 이쪽으로 오게 될걸."

스티렌 길드는 던전을 발굴하고 몬스터들의 정보들을 공개했다.
많은 유저들이 와서 사냥하고 정착하라는 의미였다.

"와, 여기가 트리반 마을이야? 제대로 찾아왔네."
"사냥하자!"

전사 파티들이 우르르 방문했다.
모라타와 그리 먼 거리도 아니었기 때문에 말을 타고 빠르게 올 수 있었다.
하지만 밤이면 그들은 다시 모라타로 돌아갔다.

"빛의 탑 구경하러 가자."
"출출하네. 모라타에 가서 밥이나 먹지."

주변 도시의 한계였다.
그들은 던전과 사냥터에서 돈을 벌어서, 소비는 모라타에 돌아가서 하는 것이다.

"잡템도 모라타에서 팔자."
"응, 모라타에는 상인들이 많아서 제값을 받을 수 있어."

잡템마저도 트리반 마을에서 팔지 않는다.
스티렌의 마을 운영은 적자였지만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마을을 개발하는 일인데... 초창기에 이 정도 어려움쯤이야 예상했던 수준에 불과하지."

10만 골드를 추가로 털어서 투자했다.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마을의 집들을 새로 짓고 광장도 만들었다. 하지만 유저들은 여전히 오지 않아서, 유령
마을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일 거야. 직접 모라타로 가서 홍보라도 해 보자."

스티렌은 길드원 듀마와 함께 모라타 마을로 갔다.

"트리반 마을에서 사실 분 구합니다. 스티렌 길드가 평화롭게 지배하는 마을입니다. 각종 편의를
지원해 드리며, 소정의 정착금도 지원합니다."

그들과 비슷한 처지인 듯, 눈물의 호객 행위를 하는 다른 길드들도 발견할 수 있었다.

"호움 마을로 오실 모험가 분들 환영합니다. 아직은 미흡한 점이 많지만 우리 페로이 길드가......"
"케아트 마을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트리반 마을이 조금 나아졌을 때, 모라타는 건물과 사람들이 더 많아져 있었다.
프레야 여신상이 완공되고, 인공 호수가 생겨났다.
영주가 직접 술집을 확장하고, 전투 계열의 길드들까지 세웠다.
초보자들의 유입까지 가능해지면서 하루가 다르게 커지는 모라타 지역이다.
영주성과 마을, 돌로 된 성벽을 넘어서 비어 있던 공터들에 상점들과 집들이 만들어질 정도로 확장 속도가 엄청났
다.
모라타에 처음 방문한 이들을 압도하는 판자촌!

"으으, 정말 굉장하군."

스티렌은 그래도 낙천적이었다.
모라타가 발전하고 있다는 것은 북부로 향하는 사람들의 관심도 많아지고 있다는 뜻!
모라타가 좋아진다면 트리반 마을에도 점점 이주민이 많아질 것이다.

"도시의 발전이란 그런 거니까. 일단 한 곳을 집중 개발해서 발전시키면, 그 근처의 지역들도 혜
택을 받는 거야."

도시 정비와 행정학 등을 배운 적이 있는 스티렌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모라타는 영주성이 있는 마을뿐만 아니라 주변 지역까지 포함하는 굉장히 넓은 땅이다.

"영주가 직접 지역을 다스리지도 않고 장로에게 위임했으니 그 구멍이 어딘가 생기겠지."

스티렌은 인맥을 통해 성과 마을을 다스리는 다른 길드들의 사정에도 어느 정도 밝았다.
마을의 대표자는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는 자리를 비우지 않는다. 장로나 다른 귀족에게 위임하면 쓸모없는 곳에
지출이 심하기 때문이다.
모라타는 중앙 대륙에서는 상상하지도 못할 정도로 문화 예술 분야에 대한 지출액이 컸다.

"좋았어. 모라타에도 구멍이 있다. 문화 예술에 투자하고 있으면 낭비가 심해서 금방 무너지고
말 거야."

스티렌은 길드의 천문학적인 자금을 끌어모아 대장간들을 늘리고 관련 기술들을 발전시키는 데 무려 78만 골드를
투자 했다.
대장장이들의 도시로 마을을 엄청나게 개발하고 있는 것이다.
전투 계역 길드, 마법 계열 길드도 만들면서 유저들을 끌어오기 위하여 힘썼다.

"트리반 마을처럼 북부에서 기술 발전도가 높은 장소는 없어. 얼마 뒤면 여기도 모라타 이상으로
커지고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겠지."

스티렌은 길드원들과 함께 그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설렘으로 인하여 밤잠도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는 동안 모라타에서는 문화가 발전하면서 사람들이 즐거워하기 시작했다. 사냥과 관광, 모험, 퀘스트에 지친
사람들이 노래와 조각품, 그림, 예술을 편안하게 만끽한다.
문화는 많은 돈이 들지도 않았다.
토끼들을 재롱 부리게 만드는 사육사나 광대, 잡템들을 진열해 놓고 자랑하는 유저도 있다.
모라타의 유저들이 기뻐했다.

띠링!

-트리반 마을 주민 중 35명이 모라타로 이주를 하고 있습니다.
주민들의 불만이 거셉니다.

주민들은 스티렌에게 와서 따졌다.

"왜 우리 마을은 모라타처럼 번화하지 못했지요, 영주님?"
"마을에 아이들이 갖고 놀 것이 없습니다."
"고된 일을 마치고 나서도 삶의 의욕이 없습니다. 여기는 너무 삭막한 마을 같아요."

문화의 뒤처짐으로 인한 주민들의 불만족 심화 현상이었다.
모라타의 주민들은 갈수록 늘어나는데, 총인구가 3,000명도 되지 않는 트리반 마을의 사람 수는 갈수록 줄어든다.
병사들의 충성도도 떨어지고, 작업의 능률도 오르지 않는다.
주민들이 줄어들면 생산성이 하락해서 겨우 개간한 논밭을 그냥 놀리고, 광산에서 자원도 캐지 못한다.
주민들의 감소에 따라서 퀘스트들도 자연히 사라지는 경우들이 생겼다.
기껏 고생해서 퀘스트를 해결하고 왔떠니, 보상을 해 줘야 할 상점 주인이 사라지고 말았다.
황당한 상황에 빠진 유저들이 주민들을 향해 물었더니 대답이 걸작이었다.

"무기점 아저씨? 이번에 모라타로 이주했지요. 새로 자리를 잡기가 쉽진 않겠지만, 거기는 사람들
이 참 살고 싶어 하는 마을이라고 해요. 저요? 저도 곧 모라타로 갈 거예요. 맡긴 일을 완수하고
싶으면 모라타로 가 보세요."

띠링!

-트리반 마을 주민 중 23명이 모라타로 이주를 하고 있습니다.
주민들은 종교 시설을 원합니다.

"프레야 여신님을 보고 싶습니다. 다행히 옆 마을에 여신상이 있으니 그곳에서 여생을 마치겠습
니다."
"신앙의 축복을 받고 있는 모라타의 친구들은 얼마나 행복할까요? 모라타로 가는 길은 여신과 가
까이하는 일이 될 거예요!"

주민들의 이탈이 계속됐다.
북부에서 방랑하는 유민들에게 돈과 식량을 주어서 트리반 마을에 정착시켰더니 이사를 가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마을의 인구는 3,000의 언저리를 오고 갈 뿐, 늘어나지를 못했다.
지금까지 영주들이 고민하는 부분은 경제력과 기술력, 군사력에 대해서였다. 문화에 대해서는 천시하고, 거들떠보
지도 않았다.
바드들이 많이 방문하면 소란스럽고 귀찮다면서 푸대접을 하기도 했다.
문화가 오르면 어디에 쓰겠는가!
관련 시설들에 대한 유지비나 건설 비용을 다른 곳에 투자하는 게 훨씬 이득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대륙의 다른 곳들은 그 생각에 바뀜이 없었지만, 스티렌이야말로 문화의 위력을 절실히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가장 걱정하던 안 좋은 소식까지 전해졌다.

"길드장님, 모라타의 영주 위드가 돌아왔다고 합니다."

길드원의 보고에 스티렌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어디 가서 죽지도 않고 돌아왔단 말이냐?"
"예. 지금 루의 신상을 만들고 있다는데요."
"허어... 또 조각품을 만들다니!"

스티렌은 고개를 저었다.
도시 발전에 있어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조각사와 경쟁하는 것만큼 무모한 일이 없다.
그런데 천금을 준다고 해도 다른 대안이 없었다.
베르사 대륙에는 위드처럼 뛰어난 조각사도 없을뿐더러, 조각품을 만들 때마다 일대 파장이 일어나니 이웃 영주로
서는 죽을 맛이었다.

"그런데 새로운 소식도 들어왔습니다."
"무슨 소식?"
"모라타 영주의 정체가 전신 위드라고 합니다."
"뭐라고?"

전신 위드!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두려운 이름이었다.
스티렌 역시 마법의 대륙에서 잔뼈가 굵은 유저였다. 마법의 대륙에서의 위드의 악랄한 카리스마를 직접 겪어 보
았다.
죽이고, 빼앗고,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다.
오를 수 없는 산을 보는 것처럼 막막함까지 안겨 주던 전신 위드.

"정말 전신 위드란 말이냐?"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럴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합니다."
"본인의 입으로 밝혔어?"
"맞다고 하던데요."
"......"
"몇몇 방송들의 뉴스 채널에서도 전신 위드가 모라타의 영주일 가능성이 거의 100%라고 말하고 있
습니다."

스티렌은 한동안 침묵했다.
전신 위드의 성정은 지극히 잔혹하고, 도전자를 용납하지 않는다. 모라타 부근에 영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초토
화를 시키고도 남을 인물이다.
중앙 대륙에서 거친 늑대들을 피해 왔더니 하필이면 호랑이 굴 옆인 것이다.
스티렌에게 마법의 대륙에서의 악몽이 다시 떠오르려고 했다.
그러자 길드원이 다소 위안이 되는 말을 했다.

"소문이 항상 맞는 건 아닙니다. 그리고 반대되는 의견도 많습니다."
"뭔데?"
"우선 전신 위드와 제법 관련이 있기는 할 거랍니다. 아이스 드래곤이나 프레야 교단과의 관계 등
여러 정황들을 보아서요. 하지만 본인인지 아닌지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설혹 전신 위드가 맞다고 해도,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지요. 혼자서 감히 우리 길드에 도전할
수 있겠습니까?"

스티렌에게는 기다려 온 반가운 말이었다.

"맞아. 전신 위드라고 해도 겁날 게 없다. 게다가 진짜 직업이 조각사라면, 어떻게 보면 전화위복
이고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지?"
"우리에게도 기회는 있는 거죠."

스티렌은 모라타에 대하여 원대한 야망을 품고 있었다.
트리반 마을을 성장시켜서 병사들을 징집하고, 길드원과 함께 무력으로 모라타를 점령한다!
스티렌 길드는 함께 북부에 정착한 고레벨 유저들만 600명이 넘었다. 중앙 대륙에서 용병들까지 구한다면 2,000
명 정도의 군대를 편성할 수 있다.
모라타의 모든 것을 가지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위드라고 해도... 이번만은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마법의 대륙에서의 기록이 여기서 끊어지
게 될 거야. 그리고 만약 전신 위드가 아니라면 더 볼 것도 없겠지."
"맞습니다, 길드장님!"
"그럼 계획을 싱행시키기 위해서 어서 모라타에 가서 주민들이나 좀 꼬여 와."
"......"



위드는 재봉 스킬과 조각술 스킬을 발전시키면서 인형 만들기에 전념했다.

"인형도 하나의 전문 분야라고 할 수 있으니까."

최초로 만든 작품이 일정한 수준 이상에 오르면 숙련도나 명성을 크게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여러 개를 만들다 보
면 전문적인 익숙함이 쌓여서 스킬 레벨이나 숙련도의 영향이 커지기도 했다.
검사가 마법을 쓰는 게 어설프고, 대장장이들이 수십 가지 무기를 다 만들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조각사는 그 모든 부분을 아우를 수 있는 잡종 캐릭터의 최고 극점에 있는 직업이기는 했다.

"어린아이의 인형이라."

위드는 수십 개의 실패를 맛보았다.
완벽한 대작, 신이 빚어낸 것 같은 작품은 만들 수 없다. 그런 환상을 가지기에는 스스로의 미천한 실력을 잘 알
고 있기 때문.
하지만 본인이 봤을 때 모자란 면이 있어서는 안 되었다.

"어린 여자아이. 사랑스럽고, 맑고, 평화로운 어린아이의 인형."

위드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산처럼 쌓였던 킹 히드라와 이무기의 가죽들이 줄어들어 간다.
청동이나 철을 재료로 했다면 다시 녹여서 쓸 수도 있지만, 가죽 재료들은 재활용하지 못하고 폐기 처분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티 없이 밝은 어린아이를 만들기도 어렵지만, 밝음에는 어둠이 따라오기 마련이지."

아이를 낳지 못한 부모 입장에서는 심장이 조각조각 끊어지는 아픔이리라.
그렇다고 해서 울며 절규하는 아이를 만든다면 슬픔이 한없이 더해지리라.

"대작. 대작을 만들어야 하는데......"

위드는 혼란에 빠졌다.
어떤 작품을 만들어야 할지부터 고민이 심해지는 상황이었다.

"서윤의 어린 모습을 추측해서 만들까?"

현실적인 도피처!
화령이나 이리엔의 어린 모습을 조각하더라도 무난할 것 같다.
하지만 위드는 금방 잘못을 뉘우치며 고개를 저었다.

"그 만돌이라는 유저가 나를 믿고 맡긴 일이야. 대충 때우는 걸로 해서는 안 돼."

이렇게 답을 찾기 힘든 고민을 할 바에는 차라리 퀘스트가 훨씬 쉬울 것 같았다.
인형들을 만들면서 쌓인 숙련도도 7레벨 36%나 되었다.
스킬 레벨과 표현력은 경험이 쌓이면서 늘어나더라도, 주제를 올바르게 정하지 못하면 안 되는 것이다.

"무리한 욕심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여자아이를 조각하고 싶다."

위드의 고민이 갈수록 깊어졌다.
퀘스트를 공유받고 엠비뉴의 지하 감옥으로 떠난 원정대로부터 연락도 없으니 더욱 인형만 꿰맸다.
무수한 실패만을 반복하면서 무언가를 만들려고 하고 있었다.


인형, 인형, 인형, 인형!

"으아아악!"

이현은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밤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큰 고민이었다.

"인형 때문에 괴로워할 일은 다시는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어린 소녀의 인형들.

"그냥 동상으로 만들까? 금이나 은을 이용해서라도 만들어 주면......"

도피처들이 떠올랐지만 그렇게 피하고 싶지 않았다.
그간 쌓였던 조각품에 대한 신뢰를 산산이 배신해 버리는 행위였다.

"의뢰받은 조각품도 만들지 못하고 넘어갈 수는 없어."

어렵다고 해서 포기하는 건 그의 방식이 아니다.
어떻게 해서든 방법을 찾아야만 하는 것!
이현은 머리를 식히기 위해서 시장으로 향했다. 새벽 시장에는 채소와 고기 등을 사고파는 사람들로 인해서 생기
가 넘쳤다.
하지만 그런 생기들 속에서도 어린 여자아이의 조각품은 떠오르지 않았다.

"산부인과나 유아원에 가 볼까?"

어린아이들을 볼 수 있는 장소지만, 아이의 생김새를 모르고 있지는 않았다.

"수시로 기저귀를 갈아 줘야 되고, 배고파하고, 잠드는 악마들이지."

어떤 여자아이의 인형을 만들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현은 사진관 앞을 지나갔다.
어린아이들의 돌 사진이나 결혼한 부부들의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현은 오랫동안 그 사진들을 구경하면서 깨달음을 얻었다.

"조각사로서 대상을 느끼고 볼 수 있는 건 그저 작품뿐일거야. 부모의 입장이라면 많이 다르겠지."

평범한 사진 한 장에 담겨 있는 아기에게도 인생이 있을테고, 또한 부모에게는 정말로 소중한 작품이 되리라.
이현은 부모의 입장에서, 여자아이에게 작별을 한다고 생각해 보았다.
갓난아이의 인형을 두고 작별하는 부모의 미어지는 가슴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

"어린아이의 인형을 만든다는 전제 자체가 잘못되어 있었어!"

이현이 별안간 소리쳤다.
부모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이미 가장 분명한 해답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여자아이의 일생>





위드는 킹 히드라와 이무기의 가죽들을 진열해 놓았다.
동물 인형들을 만들고, 실패작인 어린아이의 인형을 제작하고 나서도 상당히 많은 양이 남았다.
가죽 중에서도 가장 좋은 것들로만 남겨 놓았다.
예술품이란 항상 처음 만드는 게 가장 좋지도 않고, 마지막의 것이 완성도가 높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감정이 움
직이지 않는 조각품은 상대방에게 어떤 감동도 주지 못한다.
정말 만들어야 할 조각품이 생길지도 몰라서 아껴 놓은 최상급의 재료들!

"인형을 40개는 만들 수 있겠군. 아쉬운 대로 이거면 충분하겠어."

위드는 가죽을 잘라서 갓난아기의 조각품부터 시작했다.
막 태어난 여자아이.
피부는 쪼글쪼글하고, 정말 갓 태어난 것처럼 울상을 짓고 있다.
크기는 한 손으로 안을 수 있을 만큼 작았다.

"태어난 지 몇 시간 만의 생명. 어머니의 배 속에서 나와서 세상을 처음 접한 아기야."

위드는 만돌과 그의 아내에 대한 정보들을 이미 입수한 후였기에 부모들의 생김새를 조금은 고려해서 인형을 만들
었다.
그렇다고 해서 갓난아기에게 특별한 특징까지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좋아. 일단 첫 번째는 되었고."

위드는 아기의 인형을 내려놓고, 다시 가죽을 들었다.
이제는 두 번째의 인형을 만들어야 한다.
인형을 만드는 위드의 손길은 매우 조심스러웠다.

"갓난아기야. 첫해에는 걸음마를 시작하고, 변화도 심할 때지. 부모의 입장에서는 언제나 걱정이
될 수밖에 없는 시기일 거야."

만돌 부부가 낳았을 여자아이의 미래를 상상하면서 매우 긴장되게 인형을 만든다.

"옷도 필요해."

갓난아기의 인형은 깨끗한 천을 이용해 덮어 놓았다면, 이제는 재봉으로 아기 옷까지 만들어서 입혔다.
돌잔치를 하면서 까르륵 웃고 잇는 여자아이의 인형 완성!

"이제는 엄마와 아빠도 알고... 그렇게 자라나는 시기지."

다음에 만드는 인형은 약간 더 성장해 있었다.
키도 커지고, 손가락과 발가락도 길어진다.
머리카락도 붙여서 귀여운 댕기 머리를 했다.

"말도 배우고, 슬슬 말썽꾸러기가 될 나이."

네 번째로 만드는 인형에는 유치원복을 입혔다.
깜찍한 옷과 가방까지 메고 있는 어린 학생의 인형.
다섯 번째 인형은 쑥쑥 자라서 초등학교에 입학할 시기였다.
지금까지는 앳되고 귀엽기만 한 꼬마 어린아이였다면, 여섯 번째부터는 조금이나마 여성스러운 매력도 갖췄다.

"동네 남자아이들이 치마깨나 들춰 보고 싶을, 미소가 예쁜 그런 아이로 성장하겠지."

말썽 부리고, 골목대장처럼 뛰어놀던 여자아이가 매력적으로 자란다. 장난기 어린 눈매는 여전하지만 키도 크고
눈빛도 맑았다.
그 뒤로도 완성된 인형마다 키도 커지고 머리카락도 자랐다.
남자들이 선호하는 긴 생머리부터 발랄한 커트 머리까지, 헤어스타일도 여러 번 변했다.

"이것도 제법 심한 노가다로군."

조각 재료 상점에서 머리카락을 사 와서 심어야 했지만 그래도 무언가를 만든다는 보람에 힘든 줄을 몰랐다.
열네 번째의 인형부터는 어느덧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되었다.
굉장히 활발하고 수다스러울 것 같은 여자애로 자랐다.
불쑥 남자 친구를 소개시켜 주러 집에 데리고 올 것처럼 발그레한 볼이나 애교 섞인 표정들.
머리띠나 목걸이 같은 액세서리들도 세공을 통해서 어여쁘게 제작해 주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책가방과 교복 정도면 되었지만 이제는 여대생인 것이다.
여자의 생명과도 같은 구두와 가방도 만들어 주어야 했다.

"그래도 사치는 안 돼!"

가지고 다니는 물품들은 저렴한 토끼 가죽 정도로 타협을 봤다. 그럼에도 세련된 여대생의 느낌이 났다.
표정과 옷과 전체적인 느낌과 향기와 어우러지는 액세서리들.
부모가 자식을 아끼듯이 정성껏 세공해서, 여학생은 실제 인물처럼 사랑스러웠다.
조각품을 만드는 시간이 굉장히 길어졌지만, 위드는 혼신을 다해서 집중하느라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열일곱 번째의 인형부터는 시간의 흘러감을 누구도 잡을 수 없는 것처럼, 작고 보살펴 주어야 했던 갓난아이가 직
장에 취직했다.
열여덟 번째 인형은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한 자원봉사도 나갔다.
열아홉 번째의 인형에서는 남자 친구를 데려왔고, 스물한 번째의 인형에서는 드디어 결혼식도 치렀다.
듬직하고 배려 깊은 남편의 인형까지 함께 만들어서, 한 쌍의 원앙처럼 잘 어울리는 커플이었다.
하객들도 사슴이나 토끼 가죽 등으로 만들어 그들의 미래를 축하해 주었다.
스물세 번째의 인형에서는 아기도 낳았다.
단란한 가정을 이루어서 살아간다.
남편과 함께 설거지도 하고, 빨래와 청소, 직장도 다니면서 행복하게 살아간다.
인형들이 완성될 때마다 여자는 나이를 먹고, 곱던 얼굴에 주름살이 생기면서 세월의 흔적이 역력해졌다.
아이를 키우고, 남편과 함께 사는 인형들.

"너무나 빨라, 사람의 삶이란 콩나물 머리처럼 쑥쑥 자라고 다시 되돌리지 못한다고 하지만, 그래
도 너무도 아쉬워."

보석처럼 빛나던 어리고 앳된 시간을 지나서 인형이 먹어가는 시간에도 가속도가 붙는다.
서른여섯 번째가 넘어서부터는 인형이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자식들이 자라서 취직을 하고 결혼도 했기 때
문이다.
할머니가 되어서 낮잠을 자고, 책을 읽고, 손자 손녀에게 줄 목도리를 만든다.
그렇게 많던 이무기의 가죽과 히드라의 가죽들이 바닥을 드러냈다.
마흔한 번째의 인형은 행복하게 조용히 눈을 감았다. 가족들과 함께 있는 장소에서였다.
위드는 인형을 다 만들고 나서 진한 허탈함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가죽도 다 떨어지고, 이제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다.

-만드신 조각품의 이름을 정해 주십시오.

위드가 조각칼을 움직이지도 않고 그대로 서 있기만 하자 떠오르는 메시지 창.
인형의 일생을 다룬 조각품이 끝난 것이다.
위드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이름을 정하지 않겠다."

지금만큼은 조각품에 어떤 이름도 붙이고 싶지 않았다.

-이름을 정하지 않으면 조각사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을 수 있고, 미완성의 작품으로 남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좋습니까?

"상관없어. 내가 만들 자격이 안 되는 작품이었어."

띠링!

『이름이 정해지지 않은 신화적인 조각품
신이 시기한 정도의 재능과 노력을 갖춘 조각사가 세상에 던지는 선물!
인간의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조각품에 담았다.
조각사의 완벽한 실력은 꼼꼼한 바느질에서도 느낄 수 있다.
단 한 올의 틀어짐이나 털 빠짐도 없이 완전무결한 바느질.
어떤 조각사가 이토록 신비로운 작품을 만들 수 있었을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예술적 가치 : 조각술의 축복이다.
대륙의 조각술을 한 단계 발전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리라.
24,610.
특수 옵션 :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신화적인 작품을 본 이들은 생명력과 마나 회복 속도가
하루 동안 32% 증가한다.
하루 동안 생명력과 마나의 최대치가 30% 증가한다.
하루 동안 축복 마법의 효과 강화.
모든 스탯 20 증가.
민첩과 용기 7% 추가로 증가.
이동속도 30% 증가. 먼 거리로 갈수록 움직이는 속도가 빨라져서 시간을 단축
할 수 있음.
조각상이 위치한 도시나 지역의 출생률이 100% 증가.
주민들의 폭력적인 성향이 감소함. 치안에는 매우 큰 도움이 되지만, 전사와
군인 들의 자연적인 증가가 줄어든다.
생명력이 영구적으로 500 증가.
인간 종족의 지혜와 지식이 최대 15까지 영구적으로 증가.
다른 조각품과 중복 적용되지 않음.
미완의 신화적인 작품.

-조각술 스킬의 숙련도가 대폭 향상되었습니다.
-손재주 스킬의 숙련도가 대폭 향상되었습니다.
-조각품에 대한 이해의 스킬 레벨이 1 상승하였습니다.
-작품을 만든 예술가가 알려지지 않음으로 인해서 명성이 2 올랐습니다.
-예술 스탯이 89 상승하셨습니다.
-인내가 41 상승하셨습니다.
-매력이 26 상승하셨습니다.
-지혜가 10 상승하셨습니다.
-미완의 신화적인 작품을 만든 대가로 전 스탯이 5씩 추가로 상승합니다.
-조각술의 축복. 탄생과 죽음에 대한 작품을 만들어서 일주일 동안 전투와 연관된 스탯이 8% 늘
어납니다. 마나의 최대치와 회복력이 65% 늘어납니다.

위드의 머릿속이 멍해질 정도의 보상이었다.
조각사가 검사나 다른 직업보다 못하다는 편견을 이제는 완전히 버려야 될 것 같았다.

"스킬 확인 조각술!"

『조각술 고급 7(65%) : 조각을 할 수 있다. 아름다운 조각품은 고가에 팔리기도 한다. 영예
로운 조각품들을 만들며 대륙에 이름을 떨칠 수 있다.
여자의 환심을 사기에 좋다.
베르사 대륙의 예술계를 이끌 수 있는 수준이다.
독보적인 이 조각사의 실력을 따라올 수 있는 후인이 없는 점이 안
타깝다.

조각술 스킬 숙련도가 무려 29%나 늘었다.
정성을 다한 덕분에 위드도 이해가 안 갈 정도의 작품을 창조하고 만 것이다.

"고작 인형들을 만들었을 뿐인데......"

위드는 깊이 있는 깨달음을 얻었다.
아이들이나 여성들이 인형을 예뻐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가치 있는 명품들을 찾아내는 본능!
간신히 1쿠퍼의 의뢰를 위한 인형들을 만들었지만 아직 미흡함이 있었다.
완성된 인형들의 개수가 상당히 많다.
작업실로 사용하는 영주성의 너저분한 공간에 일단 만들어 놨는데, 만돌이나 그의 아내가 편하게 볼 수 있도록 다
른 장소로 옮겨야 한다.
모라타 성의 빈방을 이용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아이를 위한 공간이 별도로 있어야 돼."

위드는 작게 속삭였다.

"귓속말, 채팅 제한 해제."

띠링!

-귓속말 제한이 해제되었습니다.
-길드 채팅 제한이 해제되었습니다.

모라타로 돌아오면서 닫아 두었던 귓속말과 채팅을 해제했다.
제한을 해 놓은 상태에서는 길드 채팅이 들리거나 보이지 않고, 상대방이 귓속말을 걸었을 때에는 허가를 해 주어
야만 들렸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위드를 찾고 있었기 때문에 해 놓았던 조치였다.

사비나:어서 때려!
에드윈:좀 덜 팼어요.
핀:귀찮게 상당히 버티네.
에드윈:그래도 거의 잡은 것 같아요.

황야의여행자 길드는 특별한 사냥터에 있는 것 같았다.
위드는 길드의 내용은 대충 무시했다. 채팅 제한이 해제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잠수를 타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으
니까.

-파보 아저씨.

북부 원정대에서 만났던 건축가 파보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무척 오랜만이지만 이용 가능한 유저들은 절대 잊지
않는다.

'건축가로서 상당한 수준이었지.'

모라타에서 프레야 여신상을 구경하기 좋은 여신의 계단까지 만들면서 활약하고 있는 건축가가 파보였다.

-위드! 자네 아닌가.

파보도 위드를 잊지 않고 있었다. 모라타의 영주이니 당연히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어디 계십니까?
-모라타에 있지. 자네가 돌아와서 조각상을 만들고 있다는 소문은 들었네. 광장에서 상점 하나를
개업해 주느라 가보지도 못하고, 미안하네.
-일은 슬슬 끝나셨나요?
-문만 달아 주면 돼. 빨리 하면 1시간 내로 끝날 것 같아.
-가스톤 아저씨는요?
-같이 일하고 있지. 지금 천장화랑 벽화를 그리고 있는데, 마무리 작업 중이야.
-잘됐군요. 제가 부탁드릴 의뢰가 하나 있는데요, 집을 지어 주셨으면 합니다.
-모라타의 영주가 집이 필요한가?

파보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기색이었다.
영주성을 가지고 있는 위드에게 집이 필요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물건의 보관이나 침실에서의 휴식 등, 영주성
을 이용할 수 있지 않은가.

-사실은... 조각품을 놔둘 공간이 필요합니다.
-그래? 그러면 넓은 창고가 딸린 집이면 되겠는가?
-창고보다는, 방에 진열할 수 있도록 누추하지 않은 집을 지어 주셨으면 합니다.
-어려운 일이 아니지, 조각품들은 어디에 있는가?
-영주성에 있습니다. 경비병들에게 조각품들이 있는 장소로 들어올 수 있도록 출입을 허가하라고
지시하겠습니다.
-알겠네. 오늘 저녁쯤 가도록 하지. 의뢰 비용은 작품을 보고 나서 결정하지.
-고맙습니다.

위드가 파보와의 대화를 마쳤을 즈음에는 혼이라는 유저로부터의 귓속말도 전해졌다.

-지하 감옥 원정대의 혼입니다. 던전의 탐험이 거의 끝났습니다.
-마탈로스트 교단의 포로들을 발견했습니까?
-예. 일단 1명을 찾았고, 다른 포로들도 이 부근에 있다고 합니다.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저도 곧 가겠습니다.

위드도 퀘스트를 위해 지하 감옥으로 가야 할 때였다.



모라타와 이동 포탈이 연결되어 있는 통곡의 강 유역!
S급 난이도의 두 번째 퀘스트와, 마탈로스트 교단의 포로 구출 퀘스트들을 진행해야 할 장소다.
위드가 누렁이와 같이 다시 통곡의 강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근처에 집단으로 모여 잇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저 사람이 위드......"
"전쟁의 신이라고 불리는 그 사람이야?"
"쉬잇! 조용히 말해. 들을지도 모르니 조심해!"

모라타에 있는 친구들로부터 위드가 조각품을 그만 만들고 통곡의 강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구경하기 위
하여 미리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북부에 있는 상당수의 고레벨 유저들은 통행료를 내고 통곡의 강 주변에서 사냥을 하고 있었다.
모라타와의 이동 거리나 몬스터의 수준을 감안한다면 이보다 좋은 사냥터는 없다고 할 수 있다.
간혹 하나의 파티가 용감하게 북부의 깊숙한 장소로 들어가는 경우도 있지만, 조금만 잘못하면 파티원 전체가 전
멸하는 일이 허다하다.
언제라도 주변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통곡의 강이야말로 괜찮은 사냥터였던 것이다.
위드는 차갑고 냉정한 눈빛으로 유저들을 돌아보았다.

'사람이 상당히 많군.'

모라타에서는 음식과 잡템이나 팔던 어수룩한 영주였지만, 사냥터에서도 그럴 수는 없다. 벌써부터 도전적인 눈빛
으로 위드를 노려보는 인물들이 꽤 있었던 것이다.
이 고레벨 유저들이 한꺼번에 덤벼든다면 위드라고 할지라도 죽음을 면치 못한다.
네크로맨서의 마법서나 탈로크의 갑옷, 고대의 방패, 콜드림의 데몬 소드 등 유니크 최상급 아이템들을 가지고 있
기에 더욱 민감했다.

'여기는 모라타가 아니야.'

모라타에서는 병사나 기사 들 때문에 위드에게 도전한다는 것은 꿈도 못 꾼다. 만약 누가 영주에게 검을 뽑아 든
다면, 병사들로 진압을 해 버리거나 프레야 교단의 기사들이 철저히 부숴 버린다.
하지만 사냥터에서는 어떤 일이든 벌어질 수 있다.
살인자들을 만나서 아이템을 떨어뜨릴 수도 있는 것.
위드는 얕보이지 않기 위해서 사람들을 보며 태연한 척을 했다.

"쓰레기들이 널려 있군."
"......"

군중은 침묵했다.
그들이 상상했던 전신 위드.
마법의 대륙에서의 최강자에 걸맞은 오만함이었다.

"사냥도 하지 않고 나를 보기 위해서 여기서 기다린 건가? 몬스터들이 널려 있는데... 쯧쯧."

위드는 혀를 차면서 대놓고 무시했다.
모라타에서 위드로부터 음식이나 조각품 들을 구입했던 사람들조차도 전혀 달라진 태도에 당혹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

'이 모습이 진정한 위드일지도......'
'초보자들이나 개인에게는 자상하게 대해 주는 건가? 집단으로 모여 있는 우리는 오히려 비난을
하고...... 외유내강의 그런 사람일지도 모른다.'

고레벨 유저들이 200명도 넘게 모여 있는데 대놓고 무시하는 배포.
원래 레벨이 300대만 넘어도 자존심은 하늘을 찌른다.
여기저기 쌓아 놓은 인맥이나 사냥 시에 발휘하는 무력은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베르사 대륙이 넓기에 유저들의 숫자도 어마어마하지만, 상위권으로 갈수록 그 숫자는 줄어든다. 레벨 300대라면
어디 가서도 무시당할 수준은 아니었다. 명문 길드에도 들어갈 수 있고, 중소 길드에서는 목소리 좀 낼 수 있는 그
런 위치다.
고레벨 유저들의 자존심이나 긍지는 산처럼 높았지만, 감히 여기서 위드를 향해 반발하는 사람은 없었다.
혼자였다면 덤빌지도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들이 가만히 있으니 나설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위드가 태연한 몇 마디의 말로 좌중을 장악해 버린 것이다.

"한심하군."
"......"

사람들은 한마디의 대꾸도 하지 못했다.
어느새 위드가 이렇게 말하는 게 자연스럽게 되었다.
모라타에서는 친절하지만 모여 있는 고레벨 유저들을 향해서는 지극히 오만한 성정을 드러낸다.
언젠가부터 꿈꾸어 왔던 절대 강자의 위용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계속된 무시에 반감도 가졌다. 싸움터를 전전하면서 강해진 그들은 독불장군처럼 행동하는
위드에게 투쟁심이 생겼다.
죽더라도 영광이라고,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억눌려 있던 군중 사이에 미묘한 변화의 분위기가 흐른다.
그때 위드가 사자후를 터트렸다.

"빙룡! 불사조! 내가 왔는데 왜 와서 인사를 하지 않느냐!"

천둥 벽력처럼 퍼지는 소리.
위드의 부름에, 저 멀리에서부터 빙룡과 불사조가 날개를 넓게 펼치고 날아온다.
몸집만으로는 드래곤에 버금가는 크기,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서운 생명체였다.
빙룡과 불사조는 하늘을 향해 한차례 울부짖고는 바위산을 찾아 내려앉았다.
후와아아앙!
끼야아아!
산의 바위에 균열이 가고 모래들이 떨어진다.

"주인, 불러서 왔다."
"주인님, 왔습니다."

빙룡의 외모는 잘생겼다. 드래곤답게 무게감이 있고, 세련된 눈매에 날렵한 주둥이!
불사조는 새 특유의 무관심하면서 냉정한, 그러면서도 모든 걸 불살라 버릴 것 같은 폭발력이 잠재되어 있다.
그런 빙룡과 불사조가 공손하게 위드를 향해 머리를 조아린다.

"우우."
"엄청나다."

군중은 난폭할 것 같은 2마리의 신수를 길들여 부려 먹는 위드에게서 자신들과는 다른 어떤 벽을 느꼈다.
불평불만에 소심하고 겁 많은 빙룡과, 은근히 멍청해서 사고를 치는 불사조! 짜증과 괴롭힘으로 이들을 부려 먹는
위드와의 관계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굉장해 보일 뿐이다.
빙룡과 불사조가 고개를 조아리는 장면을 보고서도 위드에게 도전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리라.

"멍청한 놈들. 너희만 보면 화가 나는구나."

위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빙룡과 불사조는 아무 반발도 없이 수긍하는 모습이었다.

'또 무슨 더러운 성질머리를 부리려고 하는 것일까.'
'그냥 무시하자. 뭔가 우리가 잘못한 게 있겠지.'

위드가 말한다.

"무능하고 쓸모없는 놈들."

빙룡과 불사조는 괜한 죄책감과 미안함에 눈동자를 뒤룩 굴리며 눈치를 살폈다.
잔소리를 할 때마다 무언가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말대꾸를 하며 대들면 짜증과 잔소리가 훨씬 오래 가니, 이
유를 묻거나 따지지 않는다. 이번에도 그러려니 하고 알아서 기고 있었다.
위드는 귀찮다는 듯이 빙룡과 불사조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꼴도 보기 싫으니 썩 꺼져!"

빙룡과 불사조는 해방이라는 생각에 날개를 활짝 펼치고 날아갔다.
위드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빨리 멀리 떨어져야 한다.
바위산이 흔들리고 광폭한 바람이 불 정도로 재빠른 도주였다.
군중의 기세가 더욱 가라앉았다.
위드를 향해 경쟁심이나 투지보다는 부러움과 존경의 눈빛을 보여 주고 있었다.
베르사 대륙에서도 쉽게 적수를 찾기 힘든 빙룡과 불사조를 이렇게 무시하니, 자신들을 향한 무시도 어느덧 당연
하게 여기게 되는 것.
위드는 엠비뉴 요새가 있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탈로스트 교단의 포로 구출 퀘스트.
엠비뉴 요새의 지하에는 엄청난 규모의 미로와 함께 몬스터들이 떼로 모여 있었다.

'이런 던전을 뚫기 위해서는 혼자보다는 2명이 낫지.'

중독이나 저주 마법에 대한 우려 때문에 동료가 1명이나 2명 정도는 있는 편이 효과적이었다.



파보는 삽자루를 들고 가스톤과 함께 흑색 거성으로 걸어갔다.

"영주님의 의뢰를 하기 위하여 오셨습니까?"

창을 들고 영주성을 지키던 경비가 물었다.
건축 허가 때문에 파보는 영주성에 자주 오는 편이고 친밀도도 쌓아 놓았기 때문에 경비가 알아본 것이다.

"예, 그렇습니다."
"영주님께서는 작품을 보관할 수 있는 집을 지어 달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조각품들이 있는 장소
로 안내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경비를 따라서 파보와 가스톤은 영주성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보통 때에는 들어가지 못하던 영주의 개인 공간이다.
벽에는 흔한 전시품 하나 걸려 있지 않았고, 금은보화 등은 구경도 할 수 없었다.

"특별한 건 없군."

가스톤이 실망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화가인 그는 훌륭한 예술 작품을 감상하면 예술 스탯이나 안목이 오른다.
예술 계열의 직업들에게는 많은 작품들을 감상하려고 하는 것이야말로 자연스러운 욕망이었다.

"이 방입니다."

경비병이 닫혀 있는 영주의 방들 중 하나를 열었다.
그 순간!
방 안에서 찬란한 빛이 쏟아졌다.

『신화적인 조각품을 발견하셨습니다.
탄생과 죽음!
드워프들이 재주를 시기하고, 왕들이 전쟁을 벌여서라도 손에 넣고 싶어 할 작품을
최초로 발견하셨습니다.
작품을 만든 조각사는 자기의 이름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 발견으로 명성이 1,290 올랐습니다.
-신화적인 조각품의 발견자의 칭호를 획득하셨습니다.
조각품을 발견한 이야기를 선술집에서 한다면 무제한으로 술과 음식을 공짜로 마실 수 있게 됩니
다.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귀족들과 왕족들은 당신의 방문을 환영하고, 이야기를 간절하게 듣고 싶어
할 것입니다.

문을 열자마자 올리기 그렇게 힘들던 명성이 1,000이 넘게 증가했다.
파보와 가스톤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이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신화적인 조각품을 보셨습니다.
예술의 꽃.
경이로운 예술품이라고 할 만한 작품.
이름을 알리지 않은 조각사는 자신의 솜씨를 발휘하여 탄생과 죽음이라는 주제로 조각
품을 만들었다. 그의 조각품을 보고 이해하는 자에게는 인생의 축복이 함께할 것이다.
생명력과 마나, 체력의 회복 속도가 32% 늘어납니다.
생명력과 마나 최대치 30% 증가.
전 스탯 20 상승.
민첩과 용기가 추가로 늘어납니다.
이동속도가 30% 빨라집니다. 먼 거리를 이동할 때의 효과는 더욱 큽니다.
살아 있는 기쁨을 만끽하게 됨으로써 생명력이 영구적으로 500 증가합니다.
지혜가 낮아서 작품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지혜와 지식이 영구적으로 2 늘어납니다.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주 관람하고, 세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건축가란 직업은 의외로 지혜가 높아야 했다.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간단한 마법도 사용할 줄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지혜와 지식으로도 작품을 이해하기에는 부족했다.
파보의 경우에는 이 정도로 그쳤지만, 가스톤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충격을 받았다.

-신화적인 조각품을 감상함으로 인하여 예술 스탯이 47 올랐습니다.

예술 스탯의 엄청난 증가.
마법사의 경우, 스승의 가르침을 받는 제자는 훨씬 빨리 성장할 수 있다.
하지만 예술가들은 오로지 작품으로 스스로를 증명한다!
빛 속에 진열되어 있는 인형들은 가죽 인형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실제처럼 보였다.
입고 있는 복장, 특히 단추들까지도 정확하게 만들어져서 조금의 어긋남도 없다.

"이 조각품들이 위드의 진정한 실력이라니......"

인형들을 만든 조각사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모라타의 영주 위드가 아니고 누가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위드가 영주성에 있는 작품들을 위한 집을 지어 달라고 했으니 확실했다.
파보가 떨리는 음성으로 위드를 향해 귓속말을 보냈다.

-자, 자네, 지금 바쁜가?

위드의 대답은 금방 돌아왔다.

-괜찮습니다. 말씀하세요.
-궁금한 게 하나 있네.
-뭡니까?
-왜 이 조각품을 만들고 나서 이름을 공개하지 않았나? 덕분에 발견자의 명성을 얻을 수 있었네
만......

파보와 가스톤에게는 고마우면서도 매우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었다. 이런 조각품을 만들었다면 응당 자랑을 하고
알려야 될 게 아닌가.
가스톤이 신화적인 작품을 그렸다면 사방에 떠벌리고 다녔을 것이다.

-창피해서요.
-아니, 뭐가 창피한데?
-너무 부족하고 미흡한 실력이라, 이름을 밝히기가 민망해서......
-허억.

이런 신화적인 조각품을 만들고 이름조차 붙이기 창피하다니!
위드의 겸손함에는 숨이 턱턱 막힐 정도였다.





<다인과의 조우>





파보는 건축가로서 위대한 야망을 품었다.
주택 건설, 상업 건물 등의 건설에는 지금까지 이골이 나 있다.
모라타의 주택 취향은 꽤나 다양한 편이었다.
다른 부유한 왕국에서는 자기 집을 가지려면 고레벨 유저이거나 돈이 많아야 했다. 남들에게 꿀리지 않을 정도의
별장이나 고급 주택을 지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라타에는 대표적인 주택 양식이 있다.
판잣집!
간편하게 지을 수 있고, 건설 비용이나 유지 비용도 거의 들지 않는다.
비바람을 겨우 막을 정도로 부실한 판잣집이었지만 너무도 많았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혼자 창피할 이유도 없다.
초보자들도 목재를 구해 오면 직접 지을 수 있으니 레벨이 20이나 30 정도만 되어도 집부터 마련했다.
내 집 마련의 소중한 꿈을 쉽게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집을 마련한 초보자들은 잘 사용하지 않는 장비나 물품 들을 집에 놔두고, 친구들을 불러서 파티도 벌인다.
고향이고, 집까지 있으니 초보자들이 성장한 후에도 모라타를 떠날 수 없는 중대한 이유였다.
원래 판잣집은 많이 건설하면 치안과 위생을 심각하게 하락시키기 때문에 건설 허가를 잘 내주지 않는 편이다.
다른 도시에서는 땅값도 비싸서 집을 지으려면 막대한 돈이 들었다.
하지만 모라타의 땅값은 저렴한 편이고, 치안과 위생도 좋은 축에 들었다. 영주가 비싼 수로를 만들고 자경단을
조직하였으며, 프레야 교단의 영향으로 빈민 구제가 원활하게 이루어져서 도둑들이 거의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곳만큼 판잣집이 최적화된 마을도 없어."

파보는 판잣집을 상당히 많이 지었다.
그가 지은 판잣집은 튼튼하고, 내부 공간도 잘 나오게 해서 인기가 높았다.
막 지은 판잣집에는 나름대로 정취도 있다.
시간이 오래 흐르면 노후화가 진행되어서 썩거나 부서져 빗물이 새지만, 새것 같은 판잣집은 그럭저럭 살 만했다.
중앙 대륙에서 건너온 모험가나 상인, 돈 많은 유저들은 고급 주택을 원했다.

"모라타가 내려다보이는 장소에 집을 지어 주시오. 창고를 넓게 지어야 되고, 자재들도 비싼 걸
써 주시오."

고급 주택이나 상업 건물의 수요도 많은 편이라서 파보는 열심히 일을 했다.
그가 직접 지은 수천여 채의 판잣집과 백여 채의 고급 별장들, 모라타의 다리와 상업 건물들이 명물로 자리를 잡
았다.

"설계와 건설 스킬, 이 두 가지가 요즘에는 다 잘 늘어나지 않고 있다."

판잣집의 숙련도는 미미했다.
상업 건물이나 별장을 완공했을 때 얻는 명성의 획득이나 숙련도의 성장도 갈수록 줄어들고 있었다.

"진짜 굉장한 작품을 하나 만들어야겠어."

파보는 모라타에 대한 애정이 지극히 높았다.
건축가로서 많은 건물들을 짓고 이를 상인들과 주민들이 이용하고 있으니 자신의 도시처럼 정이 갔다.

"제대로 된 건물을 지어 보자."

때마침 위드의 의뢰야말로 건축가로서의 도전에 불을 지른 격이었다.
탄생과 죽음을 다룬 조각품.
그리고 수많은 인형들을 위한 건축 작품을 만들어야 했다.

"중급 설계!"

띠링!

-설계를 시작합니다.

파보의 앞에 설계도가 반투명한 3차원 영상으로 떠올랐다.
마나를 이용하여, 실제로 집을 만드는 것처럼 벽과 기둥을 세워 보고 내부도 장식할 수 있다.
초급 설계 스킬에서는 전체적인 크기도 제약이 있고, 재료들도 다양하지 못하다.
건축과 설계 스킬은 서로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것이었다.
건축에 활용한 자재와 새로운 양식들이 설계 스킬에 즉각 영향을 주면서 성장시킬 수 있었다.
설계를 통해서는 가구의 배치나 집의 구조 등을 완성한다.
설계도를 만들고 나면 인부들을 통해 지시를 내릴 수도 있었다.
파보의 설계 스킬은 중급 3레벨.
성을 건축할 정도는 아니지만, 어지간히 넓은 건물과 정원 쯤이라면 충분히 만들 수 있다.

"호화 별장 3개도 함께 만들었던 실력이지."

파보는 설계 도면을 거대한 구조물로 만들었다.
위드는 인형들을, 어떤 한 아이를 위해서 만들었다고 했다.

"그 숭고한 뜻을... 실망시키지 않도록 해야겠지."

위드가 허락한 예산은 1,980 골드!
빠듯하게 집 한 채 정도 지을 수 있는 돈이다.
하지만 아끼지 않고 재료들을 투입하여 공사를 벌일 작정이었다.

"대륙에서 좋은 나무와 꽃 들을 가져와서 정원을 꾸미자. 정원은 2,000평 정도로 하고, 건축면적
은 최소 1만 평은 되어야겠지."

초고급 랜드마크 건물을 목표로, 일찍이 만들어 본 적이 없는 규모와 설계를 했다.
상인 다음으로 돈이 많다는 건축가로서의 자신을 털어서 모라타를 상징할 만한 건물을 세워 볼 작정인 것이다.

"예술가로서의 위드에게 조각품을 전시할 만한 공간이 하나도 없었다는 게 말이 안 되지."

위드의 조각품들을 진열하여, 주민들과 여행자들이 볼 수 있게 한다.
파보는 공사를 개시했다.
일거리가 워낙에 거대했기 때문에 바로 작업에 착수한 것이다.



페일은 일행과 함께 던전에서 사냥을 하던 중이었다. 그때 위드로부터 귓속말이 왔다.

-지하 감옥에서 사냥을 해야 됩니다. 조금 위험할지도 모르겠는데, 사람 1명 정도만 보내 주세요.

엠비뉴 요새의 지하 감옥은 매우 복잡했다.
사냥하고 있는 파티들도 있고, 몬스터들도 부지기수로 널려 잇다. 독을 사용하는 몬스터도 있다고 했으므로 무턱
대고 싸우기는 곤란했다.

-알겠습니다.

페일은 귓속말을 마치고 나서 일행을 향해 말했다.

"위드 님이 사람 1명을 보내 달라는군요."
"제가 갈까요?"

화령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뜸 나섰다.
그녀로서는 오랜만에 위드와 함께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칠리가 없다.

"화령 님이라면 위드 님도 당연히 반기실 겁니다. 하지만 독을 해제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는데요. 이리엔, 너도 갈래?"
"내가 가면 여기는 어쩌려고?"
"우리끼리 어떻게든 해 볼게. 다인 님도 있으니 괜찮을거야."

페일의 파티는 모라타에서 꽤 많은 의뢰들을 수행했다.

'고대 흉갑의 제조 비법'이 담긴 책자도 얻으면서 사냥과 퀘스트를 병행하고 있었다.
지금 하고 있는 퀘스트는, 난이도는 C급이라도 공격력이 매우 강한 몬스터들이 기습을 해 오는 위험한 던전에서의
사냥이었다.

"화령 님이 가시는데 나까지 가면 남은 사람들이 위험하지 않겠어?"
"글쎄. 제피 님이 얼마나 버티느냐에 달려 있긴 하지만 확실히 좀 위험하기는 하겠지?"

워리어나 기사가 없는 파티이다 보니 던전 탐험을 할 때마다 조마조마한 게 사실이었다.
제피가 방어를 전담하기는 해도, 덤벼 오는 몬스터들의 숫자가 많을 때는 곤란을 겪었다.
화령이 혼란의 춤이나 매혹의 춤으로 몬스터를 교란시켰는데, 그녀와 이리엔이 동시에 없으면 탐험에 큰 지장이
생기리라.

"제가 갈게요."

다인이 몽둥이를 들고 나섰다.
샤먼은 잡캐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직업!
타격력도 가지고 있었으므로 몬스터가 정상이 아닐 때에는 흠씬 두들겨 주는 게 그녀의 특기였다.
다인은 몽둥이를 휘두르며 가끔 중얼거리곤 했다.

"역시 매질은 손맛이야. 이 쥐어 패는 맛이 없으면 사냥을 하는 즐거움이 없다니까."

모라타에 있는 샤먼으로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그녀는 페일의 일행에 속해서 도움을 주던 중이었다.
제피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인 님이라면 믿을 수 있죠. 해독, 치료도 가능하시니까요. 화령 님과 다인 님이 같이 가셔서
도움을 주면 되겠네요."

지하 감옥으로 갈 사람이 정해지고 나서는 유린이 위드가 설명하는 대로 그림을 그렸다.
어두컴컴한 감옥의 입구, 위드의 옆에 유린과 다인, 화령이 함께 서 있는 그림.
그림 이동술의 장점으로 여러 명을 한꺼번에 옮길 수도 있었다.
물론 한 장의 그림에 사람들을 모두 그려야 하기 때문에 터무니없을 정도로 많은 인원의 이동은 불가능했다. 마나
의 제약으로 인해서 너무 깊은 지하로의 이동도 하지 못했다.

"그림 이동술!"

유린과 화령, 다인이 그림으로 빨려 들듯이 사라졌다.



지하 감옥의 입구.
위드가 기다리고 있는 장소에 물결치듯이 갑자기 나타난 유린과 화령, 다인.

음머어어어!

누렁이가 반갑다는 듯이 순한 얼굴로 인사를 했다.
수컷이었고, 예술 생명체의 특성상 아름다운 사람을 좋아했다.

"어머, 잘생기고 늠름한 수소네."

화령이 누렁이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다.
누렁이가 순박한 표정으로 주둥이를 벌리고 기뻐하는 찰나였다.

"오빠, 이 녀석 몇 근이나 나가?"
"최우량 한우야. 꽃등심 같은 특부위들은 조금씩 더 추가해 놨어."
"맛있겠다. 푹 고아서 사골 국물에 밥 말아 먹으면 그만일텐데."

위드의 앞이라고 장난을 치는 유린!
누렁이의 안색이 거무죽죽하게 죽었다.
그러는 사이에 위드와 다인이 서로를 보았다. 다인은 모라타에서 받았던 저주의 여파로 인하여 얼굴이 알아보기
힘들게 변해 있는 상태였다.
저주를 풀 수도 있었지만 위드가 어떤 모습으로 지내는지를 보기 위해서 내버려 두었다.
다인이 먼저 허리를 가볍게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말씀은 많이 들었어요."

오랜만에 만나 복잡한 심경을 숨기면서 건네는 인사였다.
위드는 짤막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조각사 위드입니다. 페일 님이 소개하신 샤먼 분이로군요."
"다인이에요."

위드의 눈가에 이채가 스쳤다.
페일의 일행에 다인이라는 샤먼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이상한 우연의 일치라고 여겼다.

"다인이라... 그리고 샤먼이라고요."
"왜요?"

위드는 무언가를 털어 버리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냥 옛날 기억이 조금 떠올라서요."
"어떤 기억인데요?"
"그냥... 저 혼자 가지고 있는 추억입니다. 지금은 긴말을 나눌 수 있는 시기가 아니군요."

위드는 라비아스에서의 씁쓸한 기억을 떠올린 탓에 냉정하게 말했다.
그가 지하 감옥 입구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구경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마탈로스트 교단
의 신전에서부터 따라온 사람들도 있다.
용병 스미스를 데리고 목적지까지 빨리 도착하는 편이 나으리라.

"이야기는 다음에 나누고, 지하 감옥부터 들어가도록 하죠."

위드는 검을 뽑아 들고 전진했다.
검 갈기나 방어구 닦기의 스킬들은 미리부터 사용해 놓았으니 거칠 게 없었다.
다인이 몽둥이르 ㄹ휘두르면서 주문을 외웠다.
힘 강화, 민첩성 증가, 이동속도, 공격 속도, 피부까지 단단하게 만들어 주는 주문의 효과가 위드에게 씌워졌다.
보통의 샤먼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효과.
위드의 힘이 230이 넘게 늘어나고, 이동속도 등도 매우 빨라졌다.
무거운 짐을 덜어 놓은 것처럼 온몸에 힘이 넘쳐흐른다.
체력과 민첩성이 올라서 바람처럼 달릴 수 있고, 절벽과 절벽 사이를 뛰어넘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치타처럼 달릴 수도 있을 것 같은 느낌!

'굉장한 샤먼이군.'

위드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모라타에서 첫손에 꼽히는 샤먼이라더니, 스킬의 숙련도가 보통이 아니었다.



"엄청난 지하 던전이로군. 이렇게 깊을 줄은 몰랐어."

전사 혼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엠비뉴의 지하 감옥은 방대한 규모를 자랑했다. 복잡한 미로와 여러 실험물들.
몬스터들의 수준도 높은 축에 들었고, 함정도 부지기수였다.
파티에 있는 도둑 유저가 함정들은 다 해체하였지만, 마탈로스트 교단의 사제들이 묶여 있는 장소까지 길을 헤매
면서 이십오 일이 넘게 걸렸다.
마탈로스트 교단의 포로 구출 퀘스트를 함께 받은 유저들은 40명이 넘었고, 레벨들도 꽤 높은 편이었다. 탐험가와
정령술사 등의 도움이 있었기에 이 방대한 던전을 샅샅이 뒤져서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
성기사 빌레오가 말했다.

"엠비뉴의 요새 아래에 있는 지하 감옥이라... 정말 보통 던전이 아니었어. 위드는 언제쯤 올까?"

마법사 이스턴이 한가롭게 모닥불을 피우며 대꾸했다.

"모라타에서 출발했다고 들었으니 한 닷새 정도 걸리지 않겠어?"

갈릭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빨리?"

본인들이 고생한 것에 비해서는 너무 빠른 도착이라는 뜻.

"우리가 길을 알려 주었잖아. 함정들도 다 해체해 놓았으니까 나흘이나 닷새 정도면 무난히 올 수
있겠지. 더 늦어질 수도 있겠지만 말이야."

혼은 파티의 리더로서 결정을 했다.

"그러면 우리도 시간을 낭비할 수 없으니 이 부근에서 사냥이나 하면서 기다리고 있도록 하자."
"그럴까?"
"주위를 둘러봐. 다른 사람들도 다 사냥을 하고 있잖아."

지하 감옥에는 몬스터들이 상당히 많았다.
빛이 안 드는 장소라서 흉측한 괴물들이나 엠비뉴의 저주를 받은 생명체들이 살고 있다.
수준도 상당히 높은 편.
레벨 350대의 몬스터들이 주로 나왔다.

"서두르면 닷새 내로 올 수 있겠지."



위드는 지하 감옥의 입구를 지키는 암흑 기사들을 향해 접근했다.
전설적인 조각품을 만들어서 감상하고 샤먼의 스킬까지 적용되어서, 나는 듯이 빠르게 움직였다.

"상대할 적은 암흑 기사 열다섯입니다."

엠비뉴 교단의 수문장들.
데메테르 교단의 파문 사제도 암흑 기사들을 돕고 있는데, 지하 감옥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들부터 처
리해야 한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통곡의 강 유역에서 사냥하던 파티가 일정 수 이상 모이면 수문장들과 싸우는 게 일반적이었다
최소한 20명 정도는 모여야 안심하고 싸울 수 있는 암흑 기사들!
위드는 화령과 다인, 유린을 데리고 싸우려고 했다.

'사람이 너무 많으면 번거롭기나 하지.'

혼자 사냥을 할 때도 많았으니 이 정도의 동료가 있다면 충분하고도 남는다.
인원수가 늘어나면 잡템까지도 분배해야 하는데 그때의 고통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

"뭐야, 저 사람들끼리 사냥을 하려고 가는 거야? 미친 건가?"
"방송에서 봤잖아. 굉장히 강한 거 말이야."
"도와주는 야만족들이 많았으니까 퀘스트에 성공했던거지."
"우리가 같이 싸워야 지하 감옥에 들어갈 수 있을 텐데......"
"일단 두보 보자. 필요하면 도와 달라고 하겠지."

전쟁의 신 위드.
그의 동료가 될 수 있다는 흥분을 감추지 않고 구경꾼들은 멀리서 지켜보았다.
물론 부른다면 당장 뛰쳐나가서 도와주고, 힘을 과시할 수 있으리라.
위드와 같이 파티를 맺는 것도 대단한 영예였기 때문이다.
화령이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기사들의 레벨이 어느 정도나 돼요?"
"330대 초반가량. 엘리트 암흑 기사들은 380 정도 됩니다."

엘리트 암흑 기사는 이곳에 없었지만 위드는 일단 설명 했다.

"기사들이 굳은 심지를 가지고 있으면 매혹의 춤에 잘 안 걸려들 텐데요."

화령의 매력이라면 누렁이도 꼬리를 흔들 정도였다.
댄서로서 필수적인 매력 스킬 외에도 옷과 액세서리의 조합, 화려하고 자극적인 춤으로 교태를 흘리면 넘어가지
않는 남자들이 없는 것이다.

"제가 생명력이 적어서요. 암흑 기사 정도 수준의 몬스터한테 맞으면 금방 죽어 버릴 텐데 괜찮
을까요?"
"제가 먼저 진열을 흩트려 놓을 테니 그 후에 춤을 추세요."
"위드 님만 믿을게요."

암흑 기사들이 위드를 알아보고 반응했다.

"우리 교단의 적."
"신앙의 근거지를 무너뜨리고, 대신관님을 죽음에 이르게 만든 역적이다."
"간교한 세 치 혀로 미개한 야만족들을 꾀어내어 신성한 뜻을 떠받드는 우리에게 도전했던 그
악독한 녀석이 왔다."

암흑 기사들은 격렬한 비난과 함께 돌진했다.
기사들의 돌격!
기사들은 일대일의 승부를 고집하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명예와 긍지가 있기 때문에, 기사들에게 일대일로 싸우
자는 제안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위드에게는 그러한 규칙이 통하지 않았다. 엠비뉴 교단과는 양립할 수 없는 적대적인 관계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철컥철컥철컥.
갑옷의 관절들이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덤벼 오는 암흑 기사들의 돌격은 무시무시했다.
기사들의 돌격은 일찍이 킹 히드라의 두꺼운 몸뚱이에도 상처를 입힐 정도였다. 막대한 갑옷의 하중이 실려 있기
에, 방패를 들고 막더라도 체력과 생명력이 뚝뚝 떨어진다. 충격으로 인해 몸이 마비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러나 위드에게도 방어 스킬은 있었다.
눈 질끈 감기!
시야를 제한함으로써 인내력과 맷집을 키우는 워리어들의 기술.
그것뿐만이 아니라,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달빛 조각 검술도 공격과 방어가 일체화된 스킬이었다.
오로지 공격 스킬로 사용할 때에는 적의 방어를 무시하고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다. 재료 그 자체를 조각하는 조각
사의 특성과, 빛을 다룰 줄 아는 기술 덕분이었다.
빛을 이용하여 적의 눈을 부시게 하거나 몸 전체에 둘러서 방어적인 용도로 사용하는 것도 가능했다.
마법 공격에 비해서 물리적인 타격을 잘 막지 못하며 마나의 소비가 빠르다는 단점도 있기는 했지만, 위드가 시험
삼아 써 본 결과는 가공할 정도였다.
위드가 몸 전체에 빛을 두르고 날개를 펼친 상태로 몬스터들이 군집한 사이를 꿰뚫는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빠르게 다가오는 몬스터들을 향한 정확한 검술!
빛을 쏘아 내서 맞힐 수도 있지만 그러면 마나의 소비가 너무나도 극심해진다.
직접 검을 휘둘러서 베어 버리는데도 몬스터들을 초토화 시키는 데에 잠깐의 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케르탑 7마리!
정상적으로 싸워서는 한참이 걸렸을 전투였는데 불과 30-40초 만에 싱겁게 종료될 정도였다.
물론 체력과 마나를 거의 다 소모해서, 전투가 끝나고 나서는 한참을 쉬어야 했다.
생명을 부여한 빛의 날개를 이용하여 몬스터들을 우회하거나 뒤에서 역습을 가할 수도 있었다. 활용 가능한 전투
법은 무궁무진했다.
하지만 위드는 그런 최선을 다하는 전투를 벌일 일이 거의 없었다.
엠비뉴 요새를 함락시킬 때가 가장 큰 전투 기회였지만, 소환된 바르칸이나 킹 히드라, 이무기 등이 기대 이상으
로 잘 싸워 주었기 때문이다.
킹 히드라의 목을 한꺼번에 자를 때에나 잠깐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려고 했지만 지쳐서 싱겁게 끝을 내 버렸다.

"사냥이 식상해, 시시해."

위드 스스로의 성장에 따라서 웬만한 전투는 지루할 정도였다.
최선을 다하는 전투는 인내나 맷집까지 올릴 수는 없다. 최고의 사냥 효율을 위해서는 부딕이하게 희생시켜야 할
부분도 있는 셈이었다.
지하 감옥에 몬스터는 널려 있다고 한다.
전투가 계속 이어질 게 예상될수록 마나를 소모하는 스킬에 의존해서는 안 되는 법.

"흙꾼아, 내 주변의 땅을 진흙으로 만들어라."

대지의 정령이 눈 깜짝할 사이에 소환되었다.
위드가 직접 만들어서 신선하고, 소환에 따른 마나 소모도 적고, 말도 잘 듣는 정령이었다.
마나의 회복 속도가 매우 빨라진 지금은 정령들 정도는 얼마든지 쓸 수 있었다.

"베르사 대륙 최고의 미남인 위드 님의 명령을 받아서 왔습니다. 지금 바로 대지를 진흙으로 만들
겠습니다."

다른 정령들은 거만하고, 소환 의식에도 상당히 시간을 끌었다. 정령술사와의 친밀도가 높은 편이어도 말을 잘 듣
는 경우가 드물다.
하지만 흙꾼이는 부르는 즉시 튀어나온다.
기사들이 돌격하는 대지가 금방 발목까지 잠기는 진흙탕으로 변했다.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나뒹굴로, 늪처럼 변
한 장소에서 허우적거렸다.

"뭐야, 저 정령은?"
"대지의 정령인가? 금방 나타났어!"

흙꾼이를 본 사람들의 놀라워하는 반응이었다.

"절대적 카리스마 위드 님 만세! 명령을 수행했습니다. 더 시키실 일이 없습니까? 뭐든 저를 부려
주세요."

위드가 적선하듯이 말했다.

"너도 같이 싸우자."
"고맙습니다, 주인님.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땅속 깊이 간직하겠습니다."

흙꾼이는 흙더미를 일으켜서 암흑 기사들을 덮쳤다.
흙이라서 공격력이라고는 별로 없었지만 속에 바위들이 교묘하게 숨겨져 있어서 암흑 기사들이 상대하지 않을 수
가 없다.
흙꾼이는 정령치고는 마나이 소모도 적은 편이었다.
지금의 위드에게는 마나가 넘쳐 나는 샘과 같았으니 아낄 필요도 없다.

"흙꾼아, 내 마나를 얼마든 써도 좋다."
"영광입니다, 주인님."

콰과과광!
흙 줄기가 화산처럼 하늘로 비산한다.
암흑 기사들이 허벅지까지 땅에 잠겨서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늪 속으로 위드가 뛰어들었다.
그가 내딛는 장소마다 단단한 땅이 되어서 걷는 데 불편함은 없었다.

"엠비뉴 교단의 원수!"
"잘 왔다. 너를 베어 주마."

암흑 기사들은 흙더미로 인해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위드를 향해서 검을 휘둘렀다.
구인 기사들이었지만 다리가 흙 속에 잠겨 있는 탓에 키가 얼추 비슷했다.
암흑 기사들이 경황없이 휘두르는 흙 묻은 검.
위드가 휘두르는 검이 아름다운 소리를 내며 암흑 기사들의 검을 연속해서 타고 흐른다.
타라라라랑!
암흑 기사들이 몰려 있던 장소에, 눈보라가 갈라지듯이 길이 뚫렸다.

"본 커터!"
"샤프니스 블레이드!"
"일루전 소드!"

암흑 기사들의 검이 빛나면서 스킬들이 시전되었다.
상대의 뼈를 깎아 내는 공격력 강화 스킬!
예리함으로 힘을 집중시켜서 관통하는 스킬!
암흑 기사들은 검을 분리해서 5개나 만드는 스킬까지 사용했다.
위드를 둘러싸고 암흑 기사들의 공격이 날아들었다.
위드는 격하게 몸을 틀었다.
맨몸에 적중당하면 치명상을 입히는 본 커터를 피하고, 일직선으로 찔러 오는 검은 몸을 뒤로 뒤집어서 피한다.
간신히 피하고 났더니 5개의 분리된 검의 공격.
위드의 눈이 번뜩였다.

'이런 스킬에는 반드시 허점이 있다.'

힘과 공격력을 분산시킨다는 결정적 단점!

"소드 댄스."

위드는 민첩하게 발을 움직이면서 검을 휘둘러서 5개의 공격을 모두 쳐 내었다.

"크윽!"

암흑 기사는 공격이 깨진 것만으로도 큰 수치를 느끼는 듯 했다. 높은 자존심을 접고 합동 공격을 했음에도 불구
하고 위드를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본 커터!"
"계속 공격해라!"

위드는 암흑 기사들 사이에서 진흙탕의 미꾸라지처럼 활개를 쳤다.
그들 사이에 뛰어들고 난 이후에는 스킬들을 활용하지 못하도록 적들을 이용하여 살이 닿듯이 근접 거리에서 움직
였다.

'근접전이야말로 최고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지.'

검사들이야 초창기부터 스킬들을 사용한다.
검기를 거침없이 날리고, 파공참 같은 원거리 공격 스킬도 사용했다. 화려한 효과에, 그만한 위력을 보인다.
고레벨로 오를수록 공격력만큼은 끝내주는 직업이었다.
사냥에서 각광받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반면에 위드는 대부분의 전투를 조각 검술 하나 믿고 몸으로 때웠다. 최소한의 마나 소모로 스킬과 맷집을 향상시
킬수 있는 근접전으로 성장을 해 왔다.
기사들이 빠르고 날카롭다고는 해도 경험이 쌓여서 웬만큼은 피할 수 있었다.

'더구나... 사형들이나 스승님의 검보다는 훨씬 느리다.'

발동작만 보아도 공격이 얼추 어느 쪽으로 향할지 짐작하게 된다.
위드는 암흑 기사들의 위치와 공격 방향을 머릿속에 넣고 그들 사이에서 움직였다.

'빠르고 부드러우면 다수와 싸우더라도 무너지지 않는다.'

검을 흘리고 쳐 내면서 파고든다.
위드의 중급 7레벨에 오른 검술 스킬은 전투의 기본이 되었다.
암흑 기사들보다 검술 스킬이 높았기에, 정확한 타격점을 두들기면 상대방의 공격 스킬들이 해제되어 버리는 경우
가 많았다.

"트리플!"

위드는 지극히 최소한의 스킬만을 사용하면서 암흑 기사들을 스치듯 베고 지나갔다.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는 조각 검술은 구경꾼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 숨겼다. 실력의 상당 부분은 발휘하지 않
는 편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조각 검술은 보통의 몬스터보다 매우 강한 몬스터를 상대할 때에 효과적이고, 특히 기사나 워리어 들을 베어 버릴
때 최적이다.

"으윽!"
"빠져나갔다."

암흑 기사들은 둔중한 신음을 질렀지만 쓰러지지는 않았다.
기사들이 상대하기 까다로운 이유로,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있어 굉장한 방어력과 생명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
이다.
하지만 피해는 작은 상처로 끝나지 않았다.
위드의 검이 악마를 베었다던 데몬 소드인 탓이다.

-데몬 소드의 빙결의 저주.
몸의 일부가 얼어붙어서 힘과 민첩성이 크게 하락합니다.
얼음 속성의 데미지가 매초마다 35씩 생명력을 저하시킵니다.

-데몬 소드의 깨진 암석의 저주.
착용하고 있는 방어구에 균열이 발생해서 내구도가 연속해서 하락됩니다.
방어력이 저하됩니다.

-데몬 소드의 몽마의 저주.
악령들이 달라붙어서 착시 현상을 일으키며, 정신력이 약해진 이의 육체를 급속도로 붕괴시킵니다.

위드의 난입으로 인해 암흑 기사들은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만들어진 빈틈을 이용해 화령이 기사들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매혹의 춤!"

클럽이나 나이트의 무대에서나 볼 수 있는 관능적인 부비부비!
화령의 몸이 스치고 지나가면 암흑 기사들은 얼어붙은 듯이 자리에 멈췄다. 흐릿한 눈동자로 침을 흘리고 정신을
놓아 버리기도 했다.
화령도 못 보던 사이에 엄청나게 성장해서, 그녀가 춤을 추면 나비가 날아다니고 꽃들이 흩뿌려졌다.

"댄서는 항상 우아해야 돼!"

꽃 뿌리기 스킬까지 덤으로 사용하고 있는 그녀!
화령이 춤을 추면서 지나가는 자리마다 유혹적인 향기가 났다.
10명도 넘는 암흑 기사가 매료되어 싸울 의욕을 잃어버리는 건 잠깐이었다.

"크아아악!"

위드는 방어력이 약한 사제부터 가볍게 사냥했다.
사제들은 레벨이 높더라도 생명력이 적어서 죽이는 게 금방이었다.
사제를 처리했을 무렵에는 화령의 활약으로 인해서 위드를 공격하는 암흑 기사들이 셋으로 줄어 있었다.

"너무 쉽군."

위드와 화령은 손발이 척척 맞았다.
위드는 암흑 기사들 3명의 공격을 간단히 흘리면서 적극적으로 반격을 가했다.

-치명적인 일격이 터졌습니다.

그럴 때마다 정확한 타격들!
위드는 악마를 베었던 콜드림의 데몬 소드를 효과적으로 이용했다.
데몬 소드는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 준 꼴이었다.
힘과 공격력을 바탕으로 해서 치명적인 일격을 맞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잘한 상처들을 많이 낸다. 7개나 중첩되
는 데몬 소드의 저주를 통해서 암흑 기사들을 심하게 약화시켜 놓은 다음에 숨통을 끊어 놓았다.
위드는 입고 있는 갑옷이 무겁기만 한 짐으로 느껴질 만큼 환상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구경꾼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이게 뭐야?"
"사람이 어떻게 저런 식으로 움직일 수 있지? 암흑 기사들의 공격이 보이는 거야?"
"저건 보인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냐. 휘둘리는 검을 중간에 쳐서 방향을 바꾸어 놓고 있잖
아."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믿을 수 없는 장면들이 속출했다.
초보 워리어나 기사 들은 대부분의 공격을 맷집과 스킬, 방어구를 믿고 맞으면서 싸운다. 어느 정도 실력이 쌓였
더라도 방패를 이용해서 막거나 무기를 앞세워서 막아 내는 정도다.
위드는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간격으로 적의 공격을 피해내고, 급소들을 찌르고 빠졌다.
그나마 이 정도도 위드가 실력을 많이 억제하고 있는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사람들은 스스로에 대한 극심한 회
의와 좌절감에 빠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베르사 대륙의 유명한 검사들이 싸우는 동영상도 이 정도는 아니었어."
"그래도, 공포심이란 게 아예 없는 건가? 저런 상황에서 어떻게 앞으로 뛰어들 수가 있지?"
"난 와이번을 타고 싸울 때 알아봤잖아. 저런 전투가 위드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거라니까!"

구경꾼들이 생각해 오던 그 이상의 전투가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위드의 자연스러운 동작 하나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높은 레벨이나 스킬에 의존해서 싸웠다면 이렇게 놀라지 않았겠지만, 몸놀림 자체가 예술이었다.
전투를 즐기고, 모든 움직임들을 지배하고 있는 듯한 싸움의 장면들.
유저들은 현재 위드가 하는 행동들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잘 알았다.

"스탯이나 스킬, 모든 게 최적화되어 있어."
"자신이 가진 전부를 전투에 동원하고 있잖아."

고레벨 유저들의 평범한 수준은 캐릭터의 기술을 잘 활용하는 정도였다. 여러 공격 기술들을 상황에 맞게 파악하
고, 싸워서 승리한다.
그에 비해서 위드는 전투를 위하여 태어난 인간처럼 정확한 판단력과 움직임을 보인다.
같은 캐릭터라고 해도 어떤 식으로 싸우느냐에 따라서 전투에서의 활약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격투 게임에서 같
은 능력의 캐릭터를 가지고 싸워도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나는 것처럼 말이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암흑 기사들이 검을 휘두르는 중심부로 뛰어들지도 않을 것이고, 그 검을 맞혀서 흘리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 전에 무리하게 암흑 기사들과 싸우지 않고 안전하게 동료들을 더 모으는 편을 택하리라.
위드의 전투를 보면 거침없이 돌격해서 구경하는 사람들의 피를 뜨겁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열광하게 만들고, 전투에 몰입되게 했다.

"암흑 기사가 10명이 넘어. 근데 정말 4명이서 사냥을 하고 있네. 레벨이 300대 후반의 파티라
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저기 화가를 좀 봐! 레벨 30 제한이 있는 튜닉을 입고 있잖아."
"진짜 레벨이 50도 안 되는 거야?"
"직업이 화가잖아. 싸움에도 안 끼어. 낙서만 하고 있어."

유린은 격식 있게 장엄한 갑옷을 입고 위압감까지 갖춘 암흑 기사들을, 못난 원시인처럼 그리고 있었다.
덥수룩한 수염에 튀어나온 코털, 갑옷 대신 입고 있는 건 쫄쫄이 타이츠.

"샤먼이 장비하고 있는 무기도 좋은 건 아닌데?"
"모라타에서는 굉장히 유명한 샤먼이야. 예전에 한번 같이 파티를 한 적도 있지만... 레벨은 25
0도 안 돼."
"그런데도 암흑 기사들을 사냥한단 말이야? 위드가 있다고는 해도 말도 안 돼."
"샤먼도 대단하고, 댄서가 저렇게 전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건 처음 봐. 나도 저렇게 매력적
인 댄서와 함께 춤을 출 수 있었으면......"

구경꾼들의 찬사가 이어지고 있을 때, 위드의 표정은 심드렁했다.

'지루하군.'

암흑 기사들의 능력은 대단한 편이었다.
기사였고, 방심할 수 없도록 둔중하고 묵직한 공격을 퍼붓는다.
예전에 레벨이 300이었을 때라면 객관적으로 자기보다 강한 몬스터라고 신이 나서 사냥을 했으리라.
하지만 위드의 레벨은 370이나 되었으니 그럭저럭 편하게 잡을 만했다.
다른 이들에게는 딱 적당한 적수들이, 불리한 상황에서 발버둥을 치며 성장해 왔던 위드에게는 졸릴 뿐이었다.

'너무 약해.'

암흑 기사들 여럿을 한꺼번에 사냥하고 나서도 이 정도는 시시하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위드는 지하 감옥으로 들어가고 나서도 가볍게 몬스터들을 도륙했다. 화령이 잠을 재워 주니 허무할 정도로 간단
히 몬스터들을 사냥할 수 있었다.
구경꾼들이 많아서, 맷집을 키우기 위해서 암흑 기사들에게 일부러 맞아 주지도 못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지금은 조각품을 만들고 난 후라 생명력과 마나의 회복 속도도 엄청난 수준이라서, 여간해서는 싸우고 또 싸워도
지치지를 않는다.
위드의 앞에 엠비뉴 교단의 몽크들이 등장했다.
주먹이나 발 차기를 주 무기로 하는 제법 빠르고 고강한 무리.
위드는 조각 검술에 다른 스킬을 덧씌웠다. 조각 검술은 순수하게 검술 자체에 적용되는 기술이기 때문에 가능한
공격이었다.

"15연환참격."

퍼버버버버버버버버버벅!
거침없이 달려들어서 검으로 사정없이 후려 팬다.
일절 자비도 없고, 아량도 베풀지 않았다.

"해머 피스트!"

몽크들이 간신히 주먹을 뻗으면 그 정도는 서서 맞아 주었다.
위드의 장비도 상당한 것들이라서 몽크들의 주먹에 몇 대 맞는 정도는 거뜬했다.

"지금 때렸냐?"

위드의 눈가가 씰룩였다.
어설프게 맞아서는 인내나 맷집도 오르지 않는다.
스탯이 오르지도 않는데 굳이 참으면서 맞아야 할 필요가 없는 상황!

"15연환참격!"

빠바바바바바바바박!
잔인하게 몽크들을 후려 팼다.
이리 패고 저리 패고 쫓아가서 패고, 죽기 직전에 스킬을 시전한 게 아까워서 한 대라도 더 팬다.
검이 난무하면서 몽크들을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구경꾼들에게는 엠비뉴 교단의 몽크들이 불쌍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마나이 회복 속도가 너무 빨라서 스킬을 써도 금방 다시 찼다.

"위드! 이곳까지 오다니......! 너의 더러운 악명은 많이 들었다. 엠비뉴 교단의 복수를 내가 해
주겠다."

엘리트 암흑 검사가 지하 감옥에서 망토를 펄럭이며 다가왔다.
위드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따면 흥분과 긴장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을지도 모른다.

"엘리트 암흑 검사, 너도 잘 나왔다. 소드 카이저!"

엘리트 암흑 검사의 공격을 피하고 그대로 맞받아쳐서 발동시키는 최고의 공격 스킬!

"크윽!"

엘리트 암흑 검사가 보잘것없이 벽면으로 내팽개쳐졌다.

-거대한 충격으로 엘리트 암흑 검사가 공황 상태에 빠졌습니다.

위드는 검을 들어서 후려갈겼다.

"그러게 뭐하러 나타나, 얼른 죽어라. 죽어! 죽어!"

엘리트 암흑 검사는 어깨 보호대를 내놓고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다.

"장비!"

위드가 혀를 내밀어 아랫입술을 핥았다.
탐욕으로 입술이 마르고 목에 갈증이 일어나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은 검술 스킬이나 공격 스킬 숙련도 그리고 경험치나 모아 봐야겠군!"

퍼버버벅!
뻑! 쾅! 우당탕!

"꽤액!"

촥촥촥촥촥촥!
방어력을 위한 스탯을 올릴 생각을 하지 않고 사냥에만 전념하니 남는 것이라고는 몬스터들의 끔찍한 잔해뿐이었
다.
뒤를 따라오던 구경꾼들이 점점 거리를 두고 멀어졌다.

"우으......"
"이래서 위드가 지나간 장소에는 몬스터들의 씨가 말랐다고 하는 거였구나."
"저런 더러운 성격이었따니. 한 놈도 안 살려 주고 패고 패고 계속 패잖아."
"방금 봤어? 이미 죽은 몬스터가 땅에 쓰러지기 전에 세대나 더 때렸어."
"몬스터를 저런 식으로 때려잡는 사냥법은 처음 봐."
"악명이 헛소문이 아니었떤 거야."

구경꾼들은 부산을 떨면서 물러났다.
이렇게 더러운 성질머리를 가지고 사냥을 하는 인간에 대한 두려움!
멀찌감치 물러나긴 했어도 위드가 말하는 소리가 아직 그들에게까지 들렸다.
다섯 무리 정도의 암흑 기사와 엠비뉴 교단의 수행자들을 처리하고 나서 나누는 대화였다.

"전투를 더 빨리하죠."
"어떻게요?"
"화돌이들, 나와."

넘치는 마나로 인해 상급 불의 정령들이 여덟이나 소환되었다.
이글거리며 붉게 타오르는 몸을 가진 정령들은 위드를 향해 넙죽 엎드리고, 불꽃 쇼를 일으키면서 애교를 부렸다.
정령에 대한 지배력이 극에 달한 모습이다.

"부르셨습니까, 이 하늘 아래 가장 뛰어나신 우리의 창조자이시여!"
"너희 불장난 좀 하자. 이쪽 통로 끝에서부터 차례대로 불을 질러라."
"알겠습니다, 주인님."

위드는 복잡한 지하 감옥의 막힌 길들에 대해 원정대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다. 통로 안에는 함정도 있고, 몬스
터들도 득실득실했다.

"반드시 확인해 보고, 사람이 없는 장소만 골라서 불을 지르도록 해."

위드는 주의를 주었다.
파티들이 사냥을 하는 장소에 불을 질렀따가 혹시 그들이 죽기라도 하면 살인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목숨을 바쳐서 명령을 수행하겠습니다. 저희를 잊지 않고 임무를 맡겨 주셔서 지극한 영광입니
다."

지하 감옥의 막혀 있는 통로들에는 암흑 기사와 몬스터들이 쌓여 있었다.

"쿠에."
"끅끅끅."

몬스터들이 있는 통로의 건조하던 공기가 점점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끄에에에에!"

침을 힐리면서 괴로워하는 몬스터들!
막혀 있는 통로에서부터 폭발적으로 불길이 일어나기 시작하자 그들은 고함을 지르면서 밖으로 뛰쳐나왔다.

"수확이다. 15연환참격!"

위드는 화염에 휩싸인 몬스터들이 나오는 족족 때려잡았다.
숙련된 농부의 낫질처럼 몬스터들의 목과 머리, 급소 등을 정확하게 노린다.

"역시 사냥은 이 맛이지."

위드의 앞에서 몬스터들이 우후죽순 죽어 나갔다.
몬스터들이 회색빛으로 변하면서 잡템과 장비들이 떨어지면 그 와중에도 비싼 것들을 분류해서 챙기고 누렁이의
등에 올렸다.
바쁘기 짝이 없는 손놀림이었다.

"크아! 진짜 말도 안 돼."
"이런 식으로 사냥을 하는 게 가능하긴 한 거야?"

구경꾼들은 이런 사냥은 처음 봤다.
보통의 사냥 파티라면 통로나 광장의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사냥을 하기 마련이었다. 잡담도 나누고, 음식도 만들
어 먹고, 휴식도 취하면서 말이다.
몬스터들이 나타나는 속도가 느리면, 이동을 하면서 더 많은 사냥을 한다.
이럴 때 파티의 리더는 도둑이나 모험가, 암살자 등이 맡았다. 몬스터들의 흔적을 살피고 쫓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파티원들의 상태를 고려하면서 몬스터들을 잘 찾아내는게 리더의 능력이었다.
즉, 지형을 알고 몬스터들의 특징을 파악하면서 사냥의 효율을 높이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위드는 달랐다.
사냥의 범위가 좁은 통로나 한자리에 고정된 게 아니었다.
이 거대한 지하 감옥, 던전의 특성을 감안해서 주변 일대를 사냥의 범위에 넣어 버렸다.

"경험치가 진짜 끝내주게 오르겠다."
"잡템 좀 봐. 사냥하는 속도가 빠르니 아이템들도 무진장 떨어지고 있어."

구경꾼들에게는 한없이 부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
위드의 마나 회복 속도가 빨라졌기 때문에 보여 줄 수 있는 사냥법이었다. 아무리 체력과 마나를 잘 보전하면서
싸우는 위드의 방식이라고 해도 엄연히 한계는 있엇던 것이다.
감당하기 벅차고 까다로운 몬스터는 화령이 매혹의 춤으로 재워 놓고 정리하였으니 편하기도 했다.
다인은 샤먼으로서 훌륭한 실력을 갖춘 덕분에 전투에 매우 효과적인 도움을 주었다. 암흑 기사들의 공격을 더 정
확하게 끊을 수 있도록, 민첩성도 늘어나고 힘도 세졌다.
다인 덕분에도 전투가 편해지고 한결 쉬워졌다.



지하 감옥에서 사냥하던 파티 하나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휴우."

워리어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씻어 내었다.

"여기의 몬스터들은 수준이 엄청나군."

성직자도 구겨진 사제복을 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대충 자리에 주저앉았다.

"모라타로 돌아가면 친구들에게 자랑을 해야겠어. 여기 지하 감옥에서 사냥을 하고 있다고 말이
야."
"동료들을 데려오면 더 좋은 사냥을 할 수 있을 텐데......"
"풋. 그런 말 하지마. 우리처럼 짭짤하게 경험치를 올리면서 사냥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지 않을
테니 말이야."
"2시간 동안 일곱 번이나 싸웠어. 굉장한 전과지."
"올해 내에 가장 속도감이 있는 전투로군. 몬스터들이 많이 나와서, 사냥을 위해서는 정말 좋은
장소야."
"이번에는 파티원이 7명밖에 안 되어서 조금 역부족인 감이 있긴 해. 다음에는 공격력이 강한 마
법사와 검사를 1명씩 더 추가해서 제대로 사냥을 해 보자."

환담을 나누면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포악한 엠비뉴의 이단 사냥꾼 11명이 통로에서 접근해 오고 있었다.
파티원들이 무기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쉴 틈을 주지 않는군."
"어떻게 할까. 아직은 거리가 조금 있는데 도망칠까?"

걱정스럽게 의견들을 나누고 있을 때였다.
이단 사냥꾼들이 있는 장소로 커다란 생명체와 사람들이 접근했다.
시커먼 탈로크의 갑옷과 투구, 장갑 등을 착용하고 있는 남자 1명이 재빨리 달려왔다. 뒤를 이어서 늙은 용병 1명
과 3명의 여자들이 크고 건장한 검은 소를 타고 움직이고 있었다.

"매혹의 춤!"

소에서 내린 댄서가 춤을 추며 이단 사냥꾼들을 흩트려 놓았다.
샤먼은 마법을 사용했다.

"흔들리는 눈, 공포를 증폭시켜 가장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게 하라."

이단 사냥꾼들의 정신력은 취약하기 이를 데 없다. 게다가 남자였기 때문에 화령이 춤에 쉽게 시선을 빼앗긴다.
그 틈을 파고들어 다인의 숙련도 높은 마법이 발동되었다.
다인은 누렁이의 등에서 내리지도 않았다.

"엠비뉴 신이시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내가 이단이다. 나를 심판하라!"

이단 사냥꾼들이 절규하고 있을 때, 위드가 검을 휘둘렀다.

"15연환참격!"

후퇴도 중단도 없는 검술.
전진하면서 힘을 더하는 검술로, 이단 사냥꾼들의 약점 부분들만 정확하게 베어 버렸다.
다인의 강화 마법으로 인해서 힘과 민첩성, 전반적인 전투 능력이 증폭되어 있었다.

"15연환참격!"

집단 사냥을 위해서 효과적인 스킬을 거침없이 사용하면서 이단 사냥꾼들을 몰아붙인다.
이단 사냥꾼들이 전열을 가다듬고 무기들을 휘둘렀지만 속수무책.
위드의 검이 베고 지나갈 때마다 저주에 걸려 몸이 불에 타거나 벌레들이 들끓고 머리카락들이 실뱀으로 변했다.
전투가 끝나니 누렁이에서 내린 유린이 간단히 잡템들을 주웠다.

"달려!"

이단 사냥꾼들을 순식간에 처치한 그들은 다음 목적지를 향하여 뛰어갔다.
등장과 사냥, 이동이 전광석화처럼 이루어진 파티!
멀리서부터 후끈한 열기와 함께 몬스터들이 쿵쾅대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 몬스터들의 무리로 향하더니 순식간에
싸우고 또 다른 장소로 움직였다.
원래 그 자리에서 사냥을 하던 사람들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이단 사냥꾼들을 이렇게 빨리 잡다니...... 검사의 발놀림을 봤어? 스킬이라고 해도, 어떻게
그런 각도로 적에게 뛰어들 수가 있지? 너무도 쉽게 적의 배후로 돌아가서 칼질을 했잖아. 몇 대
얻어맞기는 했지만."
"꼭 귀찮아서 일부러 맞아 주는 거 같기도 하던데?"

그들이 떠나고 5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위드와 누렁이 등이 등장했던 방향의 통로에서 우르르 사람들이 몰려왔다.
통곡의 강 부근에서부터 따라오고 있는 구경꾼들이었다.

"저기요."
"예?"
"방금 위드와 동료들이 지나기지 않았어요?"
"위드요?"
"전신 위드요. 이쪽 방향으로 안 지나갔어요?"

중요한 걸 놓친 듯이 발을 동동 구르면서 다그치듯 말하는 젊은 전사!

"그런 사람 모르는데... 아, 검은 소를 타고 온 파티가 이단 사냥꾼을 잡고 지나가긴 했는데요."
"이단 사냥꾼!"

함께 왔던 다른 구경꾼들도 물었다.

"몇 명이나 되었는데요?"
"11명요."
"11명이나! 잡는 데는 몇 분이나 걸렸어요?"
"글쎄요. 시간을 뭐라고 말해야 될지...... 정말 잠깐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서요."
"그래도 꼭 말해 주세요."
"대략 2분에서 3분 정도?"
"그렇게 빨리!"

구경꾼들은 환호하면서 위드와 누렁이 들이 사라진 쪽으로 달려갔다.

"뭐야, 방금?"
"설마... 위드가 그 위드였어? 전신 위드! 그가 지하 감옥에서 사냥을 하고 있는 거야!"



다인은 숨 가쁘게 위드를 따라다니면서 느낄 수 있었다.

'정말... 많이 성장했구나.'

라비아스에서 만났던 조각사, 동료도 없이 혼자 사냥하는 모습이 딱해 보여서 함께하자고 청했다. 조각사라는 직
업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몬스터와 혼신을 다해서 싸우던 모습에서 강한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몬스터에게 일부러 얻어맞으면서까지 인내력을 올리던 그 조각사가 지금은 대장장이, 재봉 스킬까지 활용했다.
라비아스에서도 그녀를 위해 음식을 해 주곤 했다. 못 보던 사이에 요리 스킬도 중급까지 올라 있었다.
누렁이라는 이름의 수소도 끌고 다녔다.

"이 미련한 소."
음머어어어어!
"유린아, 남은 물감 있으면 누런색으로 칠해 버려."
음머어어어어어어!

거듭된 전투 후에 잠시 쉬는 동안, 누렁이라는 이름을 붙인 조각 생명체와 티격태격하는 모습도 유쾌했다.
유린과 화령도 맞장구를 치며 놀았다.

"오빠, 어차피 먹을 건데 뭐하러 색칠해."
"제주도의 흑돼지가 영양가도 높고 맛있다던데, 그냥 검은 상태로 놔둬요."
음머어어!

애처롭고 구슬프게 우는 누렁이.
하지만 항상 박대만 받는 것은 아니었다.
식사 시간이 되면 위드는 언데 구해 온 건지 몰라도 꽤 영양가 높은 건초를 주었다. 유린은 그녀가 가지고 있던
약초들을 먹여 주었고, 물을 떠서 얼굴과 몸을 씻겨 주는 친절한 화령이었다.



지하 감옥에서의 사냥 이틀째!
다른 사람은 잠이 든 새벽 시간에 위드는 일찍 일어나서 접속해 있었다.
접속을 해제하고, 던전의 깊은 곳으로 이동을 하면서 구경꾼들도 더 이상 따라오지 못했다.
사람들이 없는 틈을 타서 빛의 조각품을 다루는 연습을 하고 있는 위드!
다인도 일찌감치 접속을 해서, 단둘뿐이었다.
위드는 묵묵히 빛의 조각품에만 몰두했다.
묵직한 공기가 둘 사이에 흘렀다.

'지금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야.'

다인이 먼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저기요."
"예?"

위드의 무뚝뚝하고 경계심 많은 반응.
라비아스에서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던전에서 우연히 만난 것뿐인데도 혹시 잡템을 훔치는 건 아닌지 의심부
터 했다.

"지금 만드는 조각품을 뭐예요?"

위드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오색찬란한 빛들이 어울리고 있었다.
하나의 빛만 이용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색채들이 엉키고 뒤섞이면서 무수한 변화를 일으켜 낸다.
팔을 튀면 늘어나고, 손목을 꺾으면 현란하게 빛들이 비산한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연습용일 뿐이죠."

위드가 만들어 내는 건 마네킹처럼 점점 사람의 형상을 갖추고 있었다.
다인은 옆에 가만히 앉아서 빛의 조각술을 사용하는 걸 구경하기만 했다.
빛을 가닥가닥 이용하여서 형상을 만들려니 보통 어려운게 아니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색채들이 있었기에 그것들이 어울리게 하는 것도 까다로운 일.
다인은 대화 중단에 따른 무거운 침묵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말을 걸었다.

"혹시 좋아하는 여자 있어요?"

물어 놓고 나서 내심 뜨끔했다.
모라타에 화령의 얼굴을 바탕으로 프레야 여신상을 만들어 놓은 걸 본 이후로 내내 궁금했던 걸 물은 것이다.
다인은 여전히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해 주기를 바랐다.
위드는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다인은 애써 실망스러운 기분을 억누르고 답했다.

"네, 그렇군요. 괜한 걸 물어서 실례했어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위드는 다시 조각품에 전념했다.
집중력이 강하고, 쉬는 시간에도 조각품을 만들었다지만 보통 때와는 달리 유별나게 이상한 태도였다.
다른 사람이 있는 장소에서 대화를 거는데도 무시한 적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인은 위드가 했던 말들로 인해 심란해서 알아차리지 못했다.

'우리는 이미 한 번 이별을 겪었으니까. 그가 나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괜찮아.'

다인은 콩닥거리는 가슴을 억누르고 다시 말을 걸었다.

"그럼... 예전에 좋아했던 여자는 있어요?"

때로는 돌발적이고, 구울 등을 치료해 줄 정도로 엉뚱한 면이 많은 그녀였지만 굉장히 용기를 낸 질문이었다.
위드의 손가락이 잠시 멈췄다.
작은 떨림과 긴장감.
하지만 금방 억누르고 대답했다.

"좋아했던 여자는 없습니다."
"세상에!"

다인은 애써서 웃음을 지었다.

"그럼 한 번도 누구한테 좋아한다는 말도 해 본 적이 없는거예요, 단 한 번도?"
"예. 좋아했던 여자가 없으니까요."

다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 비정하게 뒤통수를 치는 남자가 있을 줄이야.

"그랬군요. 저는 잠시 할 일이 생겨서 이만 나가 봐야겠어요."

위드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그렇게 하세요."
"그럼......"

다인이 로그아웃했다.

"휴우."

위드는 빛의 조각술을 거두었다.
눈을 현혹하던 빛들이 사라지고, 던전 안이 어두워졌다.
위드가 물을 끓이고 요리를 준비하기 위하여 피워 놓았던 모닥불만 타닥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타오를 뿐이다.

"누렁아."
음머어어어!

맨바닥에 앉아 있던 누렁이가 머리를 들고 대답했다.

"방금 그녀가 누구인지 아니?"
음머어!

누렁이는 짧은 꼬리를 바닥에 탁탁 치면서 귀를 기울였다. 모른 척하고 있으면 엄청난 잔소리를 들을지도 몰랐으
니까.
위드가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내 첫사랑이란다."

남자에게는 평생 잊지 못하는 첫사랑. 시간이 흘러도 첫사랑과의 추억은 잊을 수가 없다.

"다인이라고... 직업은 샤먼이야. 라비아스에서 처음 만났지."

처음 그녀의 외모만 봤을 때는 알아보지 못했다.
저주로 인하여 외모가 많이 바뀌어 버리고 난 후였던 것.
하지만 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 주고, 무엇이든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정도로 대화가 즐겁던 그녀였다. 인사와,
몇 마디의 말만으로도 그녀의 느낌이 났다.
샤먼으로서 독보적이라고 할 수 있는 스킬 숙련도나, 여러 보조 마법들을 걸어 주는 순서도 그대로였다.
보조 마법을 걸어 주는 샤먼은 버릇처럼 편한 순서대로 걸었을 뿐이리라. 하지만 받아들이는 위드의 입장에서는
그 보조 마법이 발휘되는 순간 그녀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다인. 그녀였어. 어떻게 내가 좋아했던 그녀를 잊어버릴수가 있을까?"

그녀들이 있을 때에는 내색하지 않았던 위드의 속마음이었다.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수술을 마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
었으니 과거는 잊고 싶은 걸까? 왜 그녀가 내게 알은척을 하지 않는지 모르겠지만 어떤 사정이나
이유가 있겠지."

누렁이는 맑고 큰 눈으로 위드를 쳐다보았다.
순박한 눈동자에, 어깨가 축 늘어진 채 슬퍼하는 한 남자의 영상이 들어왔다.





<고독한 방랑자>





검치 들은 오크 마을과 로자임 왕국의 수련장 교관으로 나뉘어서 취직했다. 낮은 월급이라서 따로 일하려는 사람
들이 없었기에 그들은 간단히 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검치 들은 취직 이후로 수련장의 운영을 전적으로 맡았다.

"검을 배우고 싶은 자들이여, 수련장으로 오라!"

하지만 대다수의 유저들은 심드렁한 반응이었다.

"수련장? 거기는 허수아비를 치는 곳인데."
"뭐하러 일부러 검술을 배우는 귀찮은 일을 해. 그냥 나가서 싸우다 보면 알아서 익혀지는데."

초보자들에게도 비웃음을 받는 검치 들!
그래도 초보 유저들의 상당수가 호기심을 가지고 수련장에 찾아왔다.
막 시작했을 때에는 4주간 도시와 마을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수련장에도 들러 본 것이다.

"검은 이렇게 쥐고... 강하게 휘두르기보다는 정확하게 휘둘러야 됩니다. 무작정 검만 앞세우지
말고, 몬스터의 행동을 보고 그 빈틈을 공격해야 하는 것입니다."

검치 들은 도장에서의 경험이 많았기에 초보자들을 편안하게 가르쳤다.

"수련장에 가면 싸우는 법을 가르쳐 준대."
"배울 필요 있어?"
"배우면 확실히 낫다더라. 배운 사람이랑 안 배운 사람이랑은 사냥에서 완전히 달라."

광장에서 파티원을 모집하는 구호들도 바뀔 정도였다.

"검사 모집합니다. 수련장에서 하루라도 배우고 오신 분만 받습니다."

대부분의 초보 유저들의 전투 능력은 아무래도 떨어지는 게 사실이었다. 현실에서 격렬한 육체적인 활동, 싸움을
해 봤을리가 없고, 재빠른 몬스터들에 당황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검치 들에게 검을 쓰는 법을 배우고 나면 확실히 사냥이 쉬워진다.
몬스터마다 상대하는 대응 방법을 가르쳐 주었으니, 다른 왕국에서도 유저들이 찾아와서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였
다.
검치 들이 강의를 할 때마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렸다.
500명, 1,000명의 초보 유저들이 좌정을 해서 그들의 시범을 보고 하는 말을 들었다.

"검이 날카롭죠? 무서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제대로 배운 검은 자신과 동료를 지켜 주기 때문입
니다."

검오백일치의 강의는 부드러웠다.
도장에서도 거의 막내뻘이라서 나름 애교도 있고, 형들을 모실 줄도 알았다. 어른들에게는 조카처럼 친근하고, 어
린 학생들에게는 형이나 오빠처럼 다정했다.

"멋있다."
"생긴 건 조금 험악해도 좋은 사람인 것 같아."

남자가 멋져 보일 때는 자기 일에 충실할 때!
도장에서 땀에 젖어 검술에 매진하는 사범들과 수련생들은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다만 여자들이 그것을 볼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

오크 마을의 교관으로 활동하는 검사십구치는 검을 휘두르며 시범을 보였다. 초보자들이 따라 할 수 있도록 느리
게 움직여 주어야 했다.

"취이익. 잘 안 돼요, 교관님."

암컷 오크들은 특유의 출렁이는 뱃살과 엉덩이로 인해서 동작이 쉽지 않았다.
그때마다 수련생 교관들이 투입되었다.

"이쪽을 이렇게......"

허리를 가볍게 잡거나, 손목을 잡고 검의 궤적을 따라서 그려 준다.
자련스럽게 발생하는 접촉!
교관으로 활동하는 검치 수련생들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맺혔다.

"교관님, 참 든든해요."
"시간이 되시면 저희와 같이 사냥을 나가 주실 수 있어요? 취췻."

암컷 오크들의 요청에도 흔쾌히 승낙했다.

"물론이죠."

교관들은 그녀들과 사냥을 하면서 싸우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리에취예요. 췩. 다음에 또 뵐 수 있을까요?"
"저는 검사십구치입니다."

검치 들이 그토록 바라던 친구 등록도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쉬는 시간에 도장에 구경 가도 돼요?"
"우리, 놀이 공원에서 데이트해요."

적극적인 여성 유저들로 인해서 풋풋한 만남을 이어 가는 수련생들도 탄생했다.
용감하게 데이트를 마친 수련생들이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그녀와 놀이 공원을 갔는데... 후후. 사형들, 사제들, 놀라지 마세요! 제가 먼저 손을 잡았습니
다."
"사십구치! 너 미쳤냐? 그러다 따귀라도 맞으면 어떻게 하려고......"
"제가 일부러 그랬겠습니까? 분수 구경을 하면서 어쩌다 손이 닿았는데요, 가만히 있기에 잡았습
니다."
"가만히 있었다고?"
"뭐랄까, 손을 잡아도 된다는 묘한 감정의 교류 같은 게 있었다고 할까요."
"그런 게 있어? 그냥 잡고 뺨 맞는 게 아니라?"
"경험자만이 알 수 있는 느낌이란 거죠."

연애 선배들의 가르침들을 받으며 연애의 꿈을 불태우는 사범과 수련생 들.
여성 유저들만 그들에게 검술을 배우는 것은 아니었다. 여성들만큼이나 많은 남자들이 단체로 그들에게 검을 쓰는
법을 익혔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수련장에 몰려든다.
검술 스킬이 고급에 이르고 나서부터 교관으로서의 능력에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다.
검술 시범을 보이면서 가르침을 주면, 초보자들은 그 검술을 따라 한다. 그것만으로도 초보들은 검술 스킬의 숙련
도가 상당히 빨리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제자를 자처하는 초보 유저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저를 가르쳐 주십시오, 교관님!"
"사냥을 하고 싶습니다. 저희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세요."
"오늘 강의 시간은 언제인가요?"

검술 스킬을 올려 준다는 말에 사람들이 엄청나게 모였다.
4주가 지나서 마을 밖으로 나가 사냥을 하던 사람들도 수련장으로 돌아왔다.
레벨 200이 넘는 중수 유저들도 상당히 많은 편이었다.
허수아비나 세워져 있던 수련장이, 검치 들에 의해 실전 무술을 위한 배움의 장으로 바뀐 것이다.
수련생들은 사람이 많아져서 귀찮기도 했지만, 배우려는 열의만 있으면 제자로 받아들였다.
완전 초보들은 가진 돈이 없어도 제자로 거두었다.

"정식 제자로의 입관비는 보리 빵 9개다."
"커헉!"
"배고픔을 모르면 진정한 투사가 될 수 없다. 굶주림이야말로 인간의 근본적인 강함을 일깨워 주
는 것이다."

남녀노소.
검치 들의 제자가 베르사 대륙에 퍼지고 있었다.
건장한 어깨와 형형한 눈빛 그리고 그들끼리의 암묵적인 대화가 로자임 왕국과 유로키나 산맥에서는 통했다.
왼쪽 가슴에 검을 새겨 넣은 무리는 광장에서 동료들을 찾았다.

"반갑소."
"오랜만이군. 수련장에서 한번 봤던 거 같소. 사냥 가시겠소?"
"좋소. 그런데 나이가?"
"열아홉."
"동갑이로군. 항렬은 어찌 되시는지?"
"스승님이 검삼백팔십오치 님이시오만."
"저는 검사백십칠치 님에게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사형."

검치 들은 로자임 왕국과 유로키나 산맥에서 검의 스승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검치 들은 베르사 대륙 최강의 몬스터들을 사냥하는 야망도 잊지 않았다.

"우리도 체면이 있지. 1달 내로 본 드래곤이나 이무기 같은 놈 한번 잡아 봐야 되지 않겠냐?"

교관을 하면서도 틈틈이 사냥을 하고, 검술 스킬을 올리는데에도 매진한다.
검술 스킬은 자신보다 강한 몬스터와 싸우면서 극복하면 다소 빨리 올릴 수 있었다.
검치 들은 쉽게 사냥할 수 있는 약한 몬스터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대부분의 명성을 순수하게 사냥으로 올렸다.
터무니없이 날카로운 절벽도 검치 둘만 모이면 평지가 된다.

"사형, 심심한데 여기나 올라가 볼까요?"
"재밌겠군."

검치 들은 유로키나 산맥의 절벽을 오르면서 정신력을 고취시켰다. 일부러 어려운 험지들을 다녀 보는 소중한 경
험을 얻을 수 있는 기회였다.
검사치와 검오치는 한 걸음 내딛기도 어려운 절벽가의 능선을 따라 걸었다.

"오치야."
"예, 사형."
"여기서 떨어지면 죽을까?"

산 중턱에 구름이 걸려 있을 정도로 아찔한 높이였다.
검오치는 절벽가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살 겁니다. 중간에 나 있는 나무들의 가지를 붙잡고, 반탄력으로 몸을 튕길 수 있겠어요. 그 다
음에 소검을 바위에 꽂고 쭉 미끄러지면 되겠죠."
"흠, 역시 이 정도로는 안 죽겠지?"
"그럼요."
"심심한데 여긴 뛰어내려 볼까?"

다른 이들이 들으면 경악할 만한 말들을 서슴지 않고 했다.
만의 하나 죽는다면 패널티로 스킬 숙련도 감소에 레벨 하락, 입고 있는 장비까지 잃어버릴 수 있음에도 거리낌이
없는 것이다.
검오치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았다.

"재밌겠는데요?"
"내가 먼저 뛴다."

검사치는 짧은 거리였지만 전력 질주를 하더니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바람처럼 자유롭게 살면서 도전을 맛보는 그들이었다.



위드는 지하 감옥에 들어가고 나서 사흘 만에 마탈로스트 교단의 포로들이 감금되어 있는 장소에 도착했다.
순전히 돌파하는 데에만 집중했다면 훨씬 더 기간을 단축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근 지역 몬스터들의 씨를 말리면서 전진을 했으니 시간이 더디어졌다.
위드 혼자만의 공격력이라면 그 많은 몬스터들을 물리치는 데 좀 더 시간이 걸렸겠지만 누렁이의 전투 참여도 큰
도움이 되었다.
순박한 누렁이라서 평원에서는 주로 위드가 탑승하여 말처럼 이용할 때가 많았다.
말처럼 질주하면서 전투를 하면 그것만으로도 경험치와, 달리기에 대한 숙련도가 올랐다.
달릴 공간이 그리 넓지 않은 던전에서는 잡템을 실어 놓는 용도로 주로 활용된다.
그러나 이번에 누렁이는 스스로 활용 가치를 찾았다.
화령이 매혹의 춤으로 재워 놓은 암흑 기사들에게 다가가서 힘껏 뒷발로 걷어찬다.
황소 뒷발차기!
무지막지한 힘으로 힘껏 걷어차이면 암흑 기사들이 무참히 나뒹굴었다.
소드 카이저의 공격 못지않았다.
막대한 타격을 받은 암흑 기사들은 다인과 화령이 몽둥와 소검으로 찔러도 단숨에 죽어 버릴 정도였다.
그녀들이 암흑 기사나 이단 사냥꾼, 수행자, 기타 몬스터들을 누렁이와 함께 처리하게 되면서 사냥의 효율이 더욱
좋아졌다.

음머어어어!

몬스터들이 뒷발에 차일 때마다 싸움소처럼 승리를 만끽하는 누렁이였다.

"잘했어, 누렁아."

다인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니 짧은 꼬리를 치며 좋아했다.
위드가 다인에 대해서 약간은 슬픈 하소연을 늘어놓았지만, 그것쯤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다인과도 친하게 지냈
다.
괜히 소귀에 경 읽기라는 속담이 있는 게 아닌 것이다.
위드는 전투의 속도가 더 빨라진 것을 짤막하게 평가했다.

"겨우 풀값 정도나 하는군."

칭찬에는 한없이 인색한 위드!
누렁이가 성실하게 배낭도 싣고 다니고 전투에도 참여하니 조금은 긍정적인 말도 나왔다.

"요즘은 한우 시세가 어떻게 하지? 고기값을 비싸게 쳐주는 사람이 나타나기 전에는 안 파는 게
좋겠어."

지하 감옥의 돌파!
매우 큰 미로였지만 위드는 중간에 헤매지도 않았다.
다른 사람이 이미 탐험을 한 던전이라서 흙꾼이를 통해 전체적인 길을 알아내고 정확하게 달려온 것이다.
마탈로스트 교단의 사제들은 시커멓게 때가 낀 사제복을 입고 초췌해져 있었다.

"그대는 누구시오?"
"엠비뉴 교단을 물리치고, 여러분을 데리러 왔습니다."

위드는 마탈로스트 교단의 신물을 보여 주었다. 그제야 믿는 사제들이었다.

"왜 이제야 우리를 구해 주러 온 것이오?"
"헐, 늙은 우리는 영영 여기에 갇혀서 죽는 줄만 알았소."

오히려 빨리 구해 주지 않았다고 성화였다.
퀘스트를 성실하게 이행하지 않으면 이런 불만들이 뜬다.
위드도 변명할 이야기들은 많았다.

'조각품 만들고, 잡템 팔아먹고, 퀘스트 팔아먹고 나서 최대한 빨리 왔어. 나로서는 최선을 다한
거야.'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에게 당당할 수 있는 자부심!
다른 유저들이라면 인내심이 부족하고 염치도 모른다며 늙은 사제들에게 화를 낼 수도 있었겠지만 위드는 그러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엠비뉴의 잔당이 숨어 있을지도 몰라서 안전하게 모시느라 그랬습니다. 일단 저희
와 함께 나가시지요."

늙은 사제들도 고객이었으니 친절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어쨌든 구하러 와 줘서 고맙소."

사제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의 발목에 묶여 있는 쇠뭉치 같은 형구들은 위드가 도둑이 아니더라도 간단히 풀어낼 수 있었다.
대장장이 스킬을 이용하여 아예 해체를 해 버린 것이다.
좋은 철의 원료를 얻을 수 있는 기회였으니 놓칠 리가 없었다.

"우리도 풀어 주세요!"

마탈로스트 교단의 사제들이 감금되어 있는 장소에는 다른 포로들도 많이 묶여 있었다.
드워프, 엘프, 바바리안, 북부에 소규모로 흩어져 있는 사냥꾼 종족들.
35명이나 되는 인원들이 있었다.
위드는 그들도 모두 풀어 주었다.
그때쯤 마탈로스트 교단의 포로 구출 퀘스트를 받고 근처에서 사냥을 하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뭐야, 벌써 왔어?"
"어떻게 이렇게 빨리 왔지?"

기가 막혀 하는 퀘스트 참여자들.
위드라고 해도 설마 이렇게 빨리 도착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이제는 지하 감옥 밖으로 나가야 할 때였다.

감옥을 벗어나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지하 감옥에 따라 들어왔던 구경꾼들이 요소요소에서 사냥을 하고 있었고, 퀘스트에 참여하고 있는 유저들이 몬스
터들을 청소해서 빠르게 벗어날 수 있었다.

"우리를 구해 주어서 고맙소."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더 늦기 전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잠시만 기다려 주겠소?"
"예. 의로운 일이라면 언제든지 기다리겠습니다."

위드와 퀘스트 참여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탈로스트 교단의 사제들은 신전으로 가서 청소를 하고 불을 밝혔다.
그리고 통곡의 강의 원혼들을 위로하는 의식을 치렀다.
쏴아아아아!
그러자 정체되고 탁하던 통곡의 강의 물결이 하류를 향해서 도도하게 흘렀다.

띠링!

『마탈로스트 교단의 포로 구출
통곡의 강이 되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억울한 죽음을 당한 영혼들의 눈물로 흐르는 강!
마탈로스타 교단의 사제들은 탐욕에 치우쳤던 과오를 뉘우치고 영혼들을 인도하는
일을 재개할 것입니다.

-마탈로스트 교단에 대한 공헌도가 2,700 올랐습니다.
-레벨이 오르셨습니다.
-통곡의 강이 정화되면서 명성이 320 늘어납니다.
-신앙이 37 증가합니다.
-행운이 4 증가합니다.

제법 상당한 보상이었다.
죽음으로 인도하는 마탈로스트 교단이 다시 활동하게 되었으니 그로 인한 보상들.
위드는 포로들을 구하기 위하여 지하 감옥을 탐험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귀찮은 임무들은 다른 유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도 레벨이 1개 올랐다.
다른 유저들, 유린이나 다인은 10개에서 20개씩의 레벨이 늘었다. 막대한 경험치를 보상으로 얻은 덕분이었다.

"야호!"
"최고다, 이 퀘스트!"

참여했던 성직자에게는 어떤 보물과도 교환하기 힘든 큰 보상이 따르는 퀘스트였다.
위드는 남들의 레벨업에 배 아파 하지 않았다.
레벨이 오르면 물론 더 강해진다. 하지만 그보다는 스탯이나 스킬의 숙련도가 중요했다.
레벨만 빨리 올린다면 결국, 높아진 레벨에 비해서 능력이 뒤떨어지게 된다. 그로 인해서 성장이 더디어지게 되니
멀리 돌아가는 편이 오히려 빠른 셈.
퀘스트 완료로 인한 변화로, 황토빛으로 탁하고 오염되어 있던 통곡의 강이 점점 맑아졌다.

-통곡의 강이 점점 제 역할을 하게 됨으로써 베르사 대륙에 불안의 씨앗이 줄어듭니다.
죽음으로 인해 생명력이 저하되고 불행해질 확률이 13% 감소합니다.
네크로맨서들은 언데드들을 일으킬 때에 조금 더 많은 마나를 필요로 하게 될 것입니다.

늙은 용병 스미스가 무겁게 입을 떼었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이었군. 마탈로스트 교단. 베르사 대륙을 해롭게만 만드는 그런 교단인 줄 알
았는데......"

띠링!

『노인 스미스의 두 번째 궁금증 완료
주정뱅이 노인 스미스는 사보이도 백작의 정체와 마탈로스트 교단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호기심 많은 늙은 용병인 그는 과거의 찝찝하던 기억 중의 하나를 떨쳐 낼 수 있으리라. 』

-명성이 260 올랐습니다.
-니플하임 제국의 대리인 퀘스트의 요건이 완성되었습니다.

A급 난이도 퀘스트의 해결.
스미스를 데리고 통곡의 강 정화와 엠비뉴 교단의 추격자들과의 싸움 등을 진행했다. 사보이도 백작에 대한 궁금
증 해결만이 아니라, 전체적인 연계 퀘스트의 일부라고 봐야 했다.
늙은 용병 스미스가 말했다.

"그럼 아무 때나 내가 있던 술집으로 오게. 내게 많은 술을 주었던 자네였으니 한잔 정도 사 줄
수 있겠지. 내가 아는게 제법 되니,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보게나."

가난한 용병 스미스의 터무니없이 빈약한 보상이었다. 지금까지 그가 퍼마셨던 와인이나 브랜디의 양이 얼마나 되
었던가.
그러나 위드는 따지지 않았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명성 때문에 무리한 퀘스트들을 많이 받았다.
보상이 클 때도 있지만 반대로 적을 때도 있는 것.
넉넉한 마음으로 이해하려고 했다.

'오늘은 악몽을 꾸겠군.'

대신에 일기장에 스미스에 대한 욕을 구구절절이 써 놓으리라 다짐했다.

"어르신과 함께할 수 있어서 많은 경험들을 얻었습니다. 베르사 대륙을 더 이상 함께 여행할 수
없어서 유감입니다."

용병 스미스는 듬성듬성 빠진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늙은 나는 이제 술집으로 돌아가야 될 때지. 모험은 젊을 때에 한 것으로 충분하다네. 더 이상
은 궁금증이 있더라도 직접 몸을 움직이지는 못할 것 같아. 그래, 이제 내겐 용병패도 필요가 없
겠지. 자네엑 주겠네."

-프로암 연합 길드의 S급 용병패를 획득하였습니다.

위드는 주는 선물이나 뇌물을 거절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감정!"

『프로암 연합 길드 용병패 : 내구도 30/30.
청동으로 만든 용병패.
등급 : S
옵션 : 용병 길드의 모든 의뢰를 원하는 대로 수행할 수 있다.
의뢰 비용을 200% 더 받을 수 있다.

용병들에게는 소중한 보물이라고 할 수 있는 용병패.
용병이 아니더라도 퀘스트를 받기 위해서 용병 길드를 많이 이용하는 편이었다.

'팔아먹어도 괜찮겠군.'

용병패의 희소성까지 감안한다면 엄청난 가격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마탈로스트 교단의 포로 구출 퀘스트를 함께 진행했던 유저들이 웅성거리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
는 일이었다.
늙은 용병 스미스는 선물을 하나 더 주었다.

"이것도 받게."

위드는 이번에도 날름 받아 들었다.
직인이 있는 부분이 옥으로 되어 있고, 금으로 세공된 황금빛 드래곤을 손잡이처럼 잡고 쓸 수 있는 고풍스러운
도장이었다.
꽤 오래된 물건으로, 빛깔이 요즘 물건 같지는 않았다.
옥으로 도장을 찍는 부분도 일부가 부서져 있었다.

"감정!"

『알 수 없는 도장 : 내구도 3/20.
매우 귀한 물건이다.
굉장히 뛰어난 조각사가 만들었다.
늙은 용병 스미스가 밀린 술값에도 불구하고 팔지 않은 물건.
오랜 시간과 전란 등을 거치면서 약간 파손이 있다.
옵션 : 특별한 행운이 부여됨.

위드가 고개를 들었다. 범상치 않은 물건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게 뭡니까?"
"용병 시절에 사보이도 백작의 저택에서 주운 물건이지. 이 도장을 얻은 이후로 행운이 찾아오는
것 같아서 귀하게 간직하고 있었는데... 자네가 쓰게."
"감사히 받겠습니다."

위드는 주머니에 도장을 넣었다.

띠링!

-니플하임 제국 황실의 보물을 입수하셨습니다.

사전에 예상했던 대로였다.

'이걸로 니플하임 제국의 대리인 퀘스트가 이어지겠군.'

물건의 유래를 정확히 알아보려면 조금 더 심도 깊은 감정이 필요했다.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지.'

위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통곡의 강이 변화된 것을 보면서 신기해하는 유저들이 많았다. 베르사 대륙에 역사적인 변화를 일으키게 될 테니
귓속말을 바쁘게 보내는 모습들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레벨이 4개나 올랐어. 명성도 많이 올랐어."
"정말? 젠장. 나도 퀘스트나 받아서 할걸. 지하 감옥에서의 사냥이 짭짤하다면서?"

마탈로스트 교단의 포로 구출 퀘스트를 받아서 했던 유저들이 기뻐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위드는 그들을 향해 말했다.

"여러분."
"......?"
"마탈로스트 교단의 포로를 구출한 걸로 퀘스트가 끝난게 아닙니다."
"연계 퀘스트였어요?"
"그럼 또 퀘스트를 공유해 주실 거예요?"

위드는 인심 좋은 시골 아저씨처럼 얼굴 가득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요. 함께 시작한 퀘스트인데 끝까지 같이 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마탈로스트 교단의 연계 퀘스트!
마탈로스트 교단의 사제들이 위드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한시름 놓긴 했짐나 아직도 해야 될 일이 너무 많이 남아 있군. 교단을 바로잡기 위해서 새로운
신도들도 뽑아야 하고......"
"아직도 이 근처에 엠비뉴 교단을 따르는 자들이 남아 있을 거라는 불안감이 들어."

엠비뉴 교단 11지파의 파멸, 마탈로스트 교단의 숙원으로 이어지는 의뢰들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엠비뉴의 잔당. 꽤 세력이 큰 무리가 남아 있을 테니 그들을 완전히 물리쳐 줘야 할 테지. 그리
고 마탈로스트 교단의 숙원으로는 많은 신도들을 받아들여서 다른 교단 못지않은 성세를 이루고
싶을 테고 말이야.'

눈치로 봐서 대충 어떤 의뢰들이 남았는지 알 수 있었다.
모라타에도 나쁜 일은 아니다.
마탈로스트 교단은 상당한 신성력을 가진 전투적인 집단!
지하 감옥을 탈출할 때 보여 준 치유, 축복, 신성 공격 마법이라면 신도가 되려는 사람들은 꽤 많은 것이다.
초보자들에게도 통곡의 강으로 향하는 이동 포탈을 이용하게 해 준다면, 마탈로스트 교단의 부흥이야말로 모라타
를 위해서도 좋은 셈!
연계 퀘스트라고는 해도, 엠비뉴 요새를 무너뜨리고 마탈로스트 교단의 포로까지 구출하면서 단물은 다 빠진 의뢰
였다. 위드는 직접 퀘스트를 수행하는 대신에 이 자리에 있는 다른 이들에게 의뢰들을 공유해 줄 작정이었던 것이
다.

"와아!"
"모라타의 영주, 전신 위드 님이 연계 퀘스트를 공유해 주신다."
"모라타의 영주 만세!"

통곡의 강을 보면서 부러움을 감추지 못하던 사람들이 급히 모여들었다.

"저에게 공유해 주세요!"
"저요! 저부터요!"

어미 새가 잡아 온 지렁이를 입을 쩌억 벌리고 받아먹기를 바라는 아기 새들의 모습!
위드가 말했다.

"단, 소정의 참가비가 998골드......"
"......"
"......"

잔잔한 침묵이 흘렀다.
위드의 말이 널리 퍼질 뿐이었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에요. 친구나 동료를 2명 이상 데려온 사람에게는 30골드 깎아
줍니다. 7명 이상이 신청하면 단체 할인도 해 드립니다."

바가지는 틀림없는 바가지였다.
한여름 휴가철에 바닷가에서 폭리를 취하는 것처럼,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바가지!
화령만 예쁜 미소를 지으면서 기뻐하고 있었다.

"어쩜 좋아! 위드 님은 어렵게 받은 퀘스트도 남한테 막 공유해 주고, 너무 착하셔서 탈이라니까."





<바드레이와의 악연>





엠비뉴 교단 11지파의 파멸은 난이도 B급의 의뢰였다.

"우와아!"
"우리, 엠비뉴 교단의 전투부대와 싸우는 거야?"
"너무 위험한 거 아닐까?"
"정말 재밌겠다."

위드는 퀘스트를 팔아먹고 무려 13만 골드나 벌어 버렸다.
모라타에서 연락을 받고 뒤늦게 온 사람들에게, 저녁까지 퀘스트를 팔아먹었다.
철저한 현금 장사!
누렁이가 질펀한 엉덩이를 실룩실룩 흔들면서 기뻐했다.

음머어어어어어어!

주인이 부자면 쑥이라도 한 뿌리 씹게 해 줄 거라는 기대에서였다.
그러나 위드는 매정했다.

"보리 빵도 비싸서 명절이나 되어야 겨우 부스러기나 주워 먹을 판에... 쑥? 먹고 죽으려고 해도
없어. 나중에 고기에 섞어 줄게. 한우 쑥 야채 비빔밥!"

큰 눈동자를 끔뻑이며 서러워하는 누렁이였지만, 하루 이틀의 일도 아니다.
그래도 위드가 건초는 항상 잘 준비해 주었고, 유린이나 화령으로부터 약초도 얻어먹었다. 따로 불만은 없지만 일
부러 배고픈 듯이, 굶주려서 힘이 없는 것처럼 늘어졌다.
막 생명을 얻고 나서는 건장한 체격과 힘을 가져서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해야 했던가.
누렁이에게도 삶의 지혜가 쌓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이걸 감정해 봐야 할 때로군."

위드는 용병 스미스로부터 받은 도장을 꺼냈다.
생김새로 보아서 대충 용도는 짐작이 간다.
조르디아의 직인처럼, 영주나 귀족 들이 자신을 증명하는 도장이리라.
위드는 드래곤이 있는 부분을 어루만지며 조각품의 특별한 점들을 살폈다.

"감정!"

『알 수 없는 황제의 옥새 : 내구도 3/20.
베르사 대륙의 역사와 함께한 귀한 옥새.
실력의 한계를 짐작하기 어려운 조각사가 만들었다.
파손되어 완전한 상태는 아니다.
예술적 가치 : 39,600
옵션 : 기품 +60.
카리스마 +25.
소유자의 육체에 해로운 모든 마법들에 대한 저항력 50%.
귀족들과 기사들을 주눅 들게 만들 수 있음.

띠링!

-알 수 없는 황제의 옥새를 자세히 살핌으로 인해서 예술 스탯이 49개 올랐습니다.

위드도 명작이나 대작의 조각품을 많이 만든 실력 있는 조각사다.
그의 조각품이 완성될 때마다 베르사 대륙이 떠들썩하게 달아오르지 않았던가.

"커억!"

그런 위드조차도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굉장한 작품!
옥으로 된 넓적한 도장 면과 하늘로 날아오를 것 같은 황금빛 드래곤은 생동감과 조형미를 갖추고 있었다.

"낡아서... 정말 많이 만져서 닳은 느낌은 있지만 굉장히 뛰어난 작품이야."

손이 닿는 부분은 심하게 때가 타고 무늬들도 많이 사라졌다. 긴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러운 품격까지 더해졌다.
옥과 황금.
재료의 특성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만든 도장이다.
손상되지 않은 부분은 위드조차도 세공하지 못할 정도의 기술력으로, 세밀했다.
멀리서 보면 때가 탄 황금빛 드래곤이었지만, 눈에 가까이 대고 보면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듯한 느낌이다.

"보통 작품이 아닌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의 조각품을 과연 누가 만들 수 있었지?"

어렴풋이 짐작이 가는 사람은 있었다.
황제의 옥새라면 귀하게 간직될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
그럼에도 이렇게 닳을 정도로 긴 세월을 버텨 온 옥새다.
위드에게 어떤 영상이 흘러들었다.
조각품에 간직된 추억이었다.



평범한 천 옷을 입은 노인이 조각을 하고 있었다.
드넓은 대전에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지극히 공손하게 부복하여 있다.
사각사각.
노인의 조각칼 아래에 황금 드래곤의 형상이 만들어지고 있다.
시간조차도 숨을 죽인 듯이 서서히 조각칼이 움직인다.
더할 곳은 더하고, 뺄 곳은 뺀다.
그저 평범한 손놀림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만들어지고 있는 황금 드래곤은 눈을 뗄 수 없을 정도의 존귀함을
가지고 있었다.
조각칼이 움직일 때마다 자칫 실수라도 해서 이 위대한 작품이 훼손되지는 않을지 걱정이 된다.
하지만 조각칼이 지나가고 나면, 그 소심함조차 비웃어 줄 정도로 점점 완전에 가까운 조각상으로 바뀌어 가고 있
다.
보물!
찬연한 아름다움으로 소유하고 있는 이의 품격조차도 높여 줄 것 같은 황금빛 드래곤과 인장.
옥새의 탄생이었다.

"이것이 나를 상징하는 물건이 되리라."

도장을 만든 노인이 그렇게 선포했다. 그러자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외쳤다.

"폐하의 뜻을 받듭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대전 너머에 잇는 수많은 조각품들!
인간과 비슷하지만 우월한 신체 조건을 가지고 있는 조각품, 짐승들의 조각품, 새들의 조각품, 몬스터들을 닮은
조각품 들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주인님의 뜻을 받듭니다!"



검치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내가 나이를 먹어도 너무 먹었어. 여자를 만나는 것도 늙으니 힘들구나."

사범들이나 수련생들은 오크들이나 다크 엘프, 인간들을 만나서 그럭저럭 어울리고 있었다. 여자 친구도 만들고,
파티 사냥도 했다.

"검십육치도 여자 친구와 손을 잡았다는데."
"언제?"
"삼십칠 일 만이래."
"우와, 빠르다! 그렇게 빨리 진도를 나가도 되는 거야?"
"정말 빠른 놈은 따로 있지. 검사백일치는 벌써 팔짱 끼고 영화관도 갔어."
"커허, 영화관까지! 유별나게 영화 같은 거 싫어하던 녀석이잖아. 영화 보다가 코 골면서 잠들지
는 않았나?"
"액션 영화를 봤다더군. 영화가 끝나고 나서 벽돌 깨기랑 2단 돌려 차기를 보여 주니까 여자애가
든든하다고 좋아했다고 해."

수련생들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전설 같은 연애담들은 희망을 주었다.
몇 번 만나지도 않아서 연락이 끊어지거나 친구 등록이 취소되거나 아니면 미안하다는 문자가 오는 경우도 많았지
만.

"휴, 그런 것도 다 젊을 때의 일이지."

검치는 수련생들의 열정이 부러웠다.
사범들 정도만 되어도 어떻게 여자를 만나 볼 수 있었으리라. 아저씨에게 오빠가 되는 것은 요즘 세상에서는 금방
이었으니까.
하지만 검치는 어엿한 중년이라서 어린 소녀들이나 여자들과 많이 어색했던 것이다.
물론 검치의 레벨은 200대 후반에 불과했지만, 전투 능력 만큼은 가공할 수준이라서 어떤 파티에서든 환영을 받았
다. 검치가 광장에 가기만 하면 서로 영입하려고 들었다.
단지 사냥터에서의 분위기가 곤란했을 뿐이다.

"저기, 검치 님."
"......"

꼬박꼬박 붙여 주는 존댓말.
젊고 어린 파티원들은 서로 반말을 하면서 친근하게 지내고 있었지만 검치가 그들과 어울리기는 쉽지 않았던 것.
검치는 본인과 연령대가 비슷한 여자를 찾아보려고 했다.

"로열 로드의 세계에는 온갖 사람들이 다 모여드니까 어려운 일은 아닐 거야."

30대나 40대 초반도 물론 많이 있었다. 도시나 마을에 가면 매우 흔히 만날 수 있다.
남자들이 낚시를 하면, 아마도 그 아내로 보이는 사람이 매운탕을 끓여 주었다.

"여보, 매운탕 드시고 하세요."

무척이나 훈훈한 광경이었다.
상점을 차려서 장사를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어린 자식들이 가끔 무기나 방어구, 잡동사니 들을 사러 온다.

"아들아, 화살 20골드에 사 줄래?"
"엄마, 무슨 그런 심한 농담을 하세요?"
"여보, 우리 아들 집 나간대요."
"그래. 부모로서 이삿짐센터 정도는 불러 주는 게 도리겠지?"

부모로서 과감하게 자식들에게 바가지를 씌워 주는 다정한 모습들.
검치는 마을과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방랑했다.
황야에서 덤비는 몬스터들을 도륙하기도 하고, 검 한 자루를 들고 몬스터들의 소굴에도 뛰어들었다.

"젊었을 때는 이런 짓도 참 많이 해 보았지."

검을 입에 물고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배가 고프면 맑은 강의 깊은 곳에서 생선들을 베었다.
물의 흐름과 힘을 이기고 검을 휘둘러서 고기를 잡기란 정말로 어렵다. 하지만 검치는 오히려 쉽게 성공시켰다.
억지로 밀어내지 않고, 급류의 흐름을 따라가서 생선들을 잡았기 때문이다.

띠링!

-검술 스킬의 숙련도가 향상되었습니다.

생선을 잡으면서도 검술 스킬이 올라간다.
레벨이 높은 몬스터는 아니었지만, 장소의 특성상 검술 스킬을 얻을 수 있는 모양이었다.
검술 스킬도 조각술처럼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성장했다.

"이렇게 된 바에야......"

검치는 물 위로 떠올라서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강물로 들어갔다.
파라라라라라라!
검치가 한 호흡에 휘두르는 검이 생선의 몸을 스치고 지나간다.
잘게 저미어서 회를 뜨는 검술!
생선은 산 채로 눈을 끔뻑이면서 회가 되고 있었다. 그것도 수중에서!
검치의 눈빛에 미안함이 어렸다.

'잔인해서 못 할 짓이로군.'

검술 실력을 제대로 발휘한 적이 언제였던가.
삶과 죽음을 일수유에 가르던 그때 이후로는 최선을 다한 적이 없다.
로열 로드조차도 여흥에 불과하였을 뿐이다.
녹슬지 않은 검술 실력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였는데, 생선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었다.
검치는 토끼나 다람쥐, 사슴 같은 초식동물은 베르사 대륙에서도 거의 사냥하지 않았다.

'먹지도 않을 것을... 무의미한 살생을 할 필요가 없겠지.'

검치는 미안한 마음에 생선들에게 붕대를 감아 주었다.
신기에 달한 검술로 인해서 아직 살아 있는 생선들이었다.

"푸하!"

그리고 강물 위로 올라와서 하류로 발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를 정해 놓은 게 아니라,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발걸음이었다.
강의 하류에도 사람들이 있었다.
낚싯대를 들어 올린 중년 남자와 부인의 대화가 들렸다.

"여, 여보."
"왜요?"
"우리 지금... 회를 낚았어!"

붕대가 거의 떨어져 나간, 살아 있는 메기가 그들의 낚싯대의 미끼를 물고 올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이 참 어렵구나."

검치는 큰 고목나무 아래에 주저앉았다.
검술 스킬은 고급 6레벨 89%.
믿기지 않는 속도의 성장으로, 검술 스킬의 마스터도 그리 머지않은 단계였다.
하지만 레벨을 올리고 검술 스킬을 연마한다고 해서 무슨 보람이 있겠는가.

"나이 먹은 게 죄지. 혼자서 돌아다니는 아줌마는 없을까?"

처음 보는 여자에게 친한 척 말을 붙여 보기도 어색했다. 말을 걸어도 되는지 고민하면서 관찰하고 있으면 남편이
와서 데리고 가는 경우를 두어 번 당하고 나니 의욕도 안 생길 정도였다.
검치가 자책하고 있을 때, 십 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애가 다가왔다.

"아저씨, 여기서 뭘 하세요?"
"......"

검치는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가라는 뜻으로 손을 휘휘 저었다.
유저로 보이는 인간 여자아이는 상당히 귀엽고 예쁜 편이었다.

'사냥터나 물어보거나 하겠지.'

평소라면 친절하게 대답을 해 주었으리라.
깜찍하고 어린 여자애를 어떻게 해 보려는 나쁜 의도가 아니라, 작은 도움이라도 주기 위해서였다.

'제피도 조언을 했었지. 여자와 대화를 많이 나누는 게 중요하다고.'

사실 여자애가 먼저 말을 걸었던 게 검치의 인생에서 몇 번이나 되었던가.
덩치가 있어서 여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는 없는 외모다.
하지만 그보다는 눈빛이나 기세가 정상인과는 차원이 달랐기 때문에 폭력배들이라고 해도 알아서 피해 간다.
지금은 다 그만두고 싶은 심정이라서 혼자 있고 싶었다.
하지만 여자아이는 다른 장소로 갈 생각이 없는지 검치의 앞에 앉았다.

"저기 아저씨, 혼자세요?"

검치는 살짝 고개만 끄덕였다.

'일부러 계속 묻는 걸 보니 뭐라도 팔아 보려는 상인인가? 아니면 도움을 바라는 거? 대충 쓸 만
한 무기 정도 남는 게 있으면 줘야겠군.'

여자아이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물었다.

"저희와 함께 사냥하실래요?"

짐작했던 것과 다른 이야기에 검치가 약간의 호기심을 드러냈다.

"지금 파티에 초대하는 거니?"

수련생들을 향해서는 짧고 엄격한 말투만을 고집했다.
여자아이가 놀라지 않게 하려고 했지만, 이성과 대화를 나눈 경험이 많지 않아서 더욱 낮게 깔리는 중후한 목소리
나쁘지 않은 반응에 여자아이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함께 사냥해요, 네?"
"글쎄다. 귀찮은데...... 사냥터 추천 정도라면 해 줄 수 있다."
"로자임 왕국에서 여기까지 왔는데요. 저희끼리만 사냥하기에는 좀 벅차거든요."
"허어."

결국 검치는 이 귀여운 여자아이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 뭐 따로 할 일도 없으니 잠깐 같이 싸워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지.'

여자아이가 도움을 바라고 와서 일부러 친근하게 굴었다해도 그 정도는 봐줄 작정이었다.
검치가 별생각 없이 물었다.

"다른 일행은?"
"2명이에요. 우리 엄마랑 막내 이모요. 엄마 직업은 정령술사고 이모 직업은 소환술사예요."

여자들은 정령이나 소환물들이 귀엽다고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령술사, 소환술사. 그리고 이 아이의 직업은 마법사 정도 되나? 3명이서 사냥하기가 어렵긴
하겠군.'

일행이 있는 장소로 걸어가면서도 여자아이의 수다는 계속 이어졌다.

"아빠는 일하느라 바빠서 같이 못 놀아 줘요. 막내 이모는 대학교 졸업하고 유학 다녀오느라 아
직 남자 친구가 없어요."

왠지 막내 이모에 대해서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 여자아이.

"직업은 회계사거든요. 올해 서른두 살인데 공부에 빠져서 남자 친구 사귀어 본 적도 없어요.
예쁘고 날씬하고 성격도 좋아요. 우리 엄마랑은 나이 차가 많이 나서 저랑은 어릴때부터 언니처
럼 같이 놀기도 했어요."
"그랬구나."
"근데 눈이 높아서... 선 자리에도 몇 번 나갔는데요, 웬만한 남자들은 남자로 보이지도 않는다
고 하면서 바로 일어났어요."
"높겠지."

검치는 무덤덤하게 말을 받아 주었다. 그리고 여자아이의 일행이 있는 장소에 도착했다.
큰 개를 닮은 정령을 데리고 있는 차분해 보이는 중년 여성 1명 그리고 단아한 얼굴의 30대 초반의 여성.
여자아이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이모는 사내다운 남자를 좋아해요. 격투기도 좋아하고요."
"......!"



헤르메스 길드이 정도 담당 암살자 스티어.
광범위하게 퍼진 연락 조직들을 바탕으로 베르사 대륙의 동향을 주시하는 게 그의 임무였다.

"북부의 모라타 영주가 전신 위드일 가능성이 높다라......"

스티어는 상부에 보고할 필요성이 있는 사안이라고 여겼다.
바드레이는 현재 하벤 왕국의 쥬벨린 던전에 있다. 몬스터가 쏟아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사냥터였다.
하벤 왕국뿐만이 아니라, 베르사 대륙의 어디를 뒤져 보더라도 유저들에게 최악의 사냥터로 손꼽히는 곳.
바드레이는 귓속말이나 길드 채팅 창도 꺼 놓고 쥬벨린이라는 거구의 주술사를 사냥하기 전에는 나오지 않겠다고
했다.

"어떻게 할까요, 스티어 님."

정보 담당 부하가 물었다.
바드레이는 대부분의 시간을 동료들과 함께 던전 안에서 보냈다. 사냥이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스티어는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이 직접 가야겠지. 길드 병단에 인원 요청을 해. 총수 바드레이 님을 만나기 위해서
던전에 들어간다."

스티어와 30명의 헤르메스 길드원은 던전으로 들어갔다.
모두 레벨이 360이 넘었지만, 몬스터의 수준이 너무도 높은 쥬벨린의 던전이라서 움츠러들지 않을 수 없었다.
5명이 사망하는 우여곡절 끝에 겨우 바드레이가 있는 장소에 도착했다.
바드레이는 12명의 친위대와 함께 무기를 정비하고 쉬고 있었다.
휴식을 취하는 장소 주변에는 몬스터의 사체들이 널려 있고 악취가 풍겼다.

"바드레이 님."
"무슨 일로 스티어 자네가 여기까지 왔지?"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바드레이는 흥미롭다는 얼굴이었다.
최상급의 아이템들로 전신을 무장하고 있는 그는 베르사 대륙에서 최강자로 군림하는 이답게 여유가 넘쳤다.

"전신 위드의 일입니다."
"위드라......"

바드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이야기라면 자네가 여기까지 찾아올 만도 하겠지."
"위드의 정체가 드러났습니다. 모라타의 영주인 것 같습니다. 물론 아직은 이해가 안 되는 부분
도 많습니다만."
"어떤 점이지?"
"로자임 왕국에서 시작한 유저로 추정되는데, 로열 로드를 시작한 지 1년 6개월도 지나지 않았다
는 겁니다. 이게 좀 이해가 안 됩니다. 그리고 더 황당한 것은 조각사가 부업이라는 겁니다."
"부업?"
"그의 전투 능력을 감안한다면 조각사라는 직업은 사실이 아닐 거라 생각됩니다. 그런데도 취미
로 한 조각술이 대작을 만들고, 대륙을 떠들썩하게 할 수준이라는 겁니다."

취미로 만든 조각품이 피라미드에 빛의 탑, 여신상이라고 판단했던 것!

"호오, 대단한데?"
"조각사가 부업이었어? 이야! 나 그 녀석이 만든 조각품 보고 완전히 감탄했는데."

바드레이의 동료들이 한마디씩 떠들었다.

"그러고 보니 위드라면 우리의 후배라고 할 수도 있지."
"아, 마법의 대륙에서?"
"우리가 떠나고 6개월 정도 후에 지존의 자리에 올랐으니까 말이야."
"우리가 마법의 대륙에서 지존이었던 적이 있지. 그것도 꽤 오랫동안."

친위대는 반가운 듯이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은 마법의 대륙에서부터 서로 아는 사이였다.
마법의 대륙에서 유명한 성들을 지배하고 있던 성주 출신들!
바드레이는 마법의 대륙에서도 최고의 성주였다.

"그때가 그립기도 하군."
"뭘. 나는 별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 이 베르사 대륙의 맑은 공기와 직접 몸을 움직이면서 싸
울 수 있는 장점을 놓치고 싶지 않거든."
"나도 돌아가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꽤 재미있던 시간들이었어."

잦은 전쟁과 다툼으로 미운 정이 들게 된 성주들은 로열 로드가 생긴다는 말을 듣고 한자리에 모였다.
마법의 대륙의 인기는 정점을 지났고, 명백하게 쇠락하는 중이었다. 한 지역의 패자들이었던 그들은 그 부분을 매
우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성주들에게는 실질적으로 매달 엄청난 양의 아이템과 골드가 들어온다. 일반 직장인으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거
금을 벌어들였다.
성주들은 단체를 유지하면서 수입을 올리는 다크 게이머의 대부들이었다.
그들은 회합을 통해서 하나의 결론에 이르렀다.
로열 로드로의 이전.
성주들은 세력을 그대로 이끌고 로열 로드로 넘어왔다.
이것이 헤르메스 길드의 탄생 비화였다.

"우리가 떠나고 나서 위드가 엄청나게 유명해졌어."
"우리도 포기한 퀘스트나 던전들을 정복했다지? 이반포르테 섬의 미궁까지 파헤쳤다는 소식을 듣
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정말 굉장한 유저야. 물론 바드레이가 그대로 마법의 대륙에 남아 있었다면 호락호락하게 자리를
넘겨주었을 리는 없겠지만 말이야."

바드레이는 친위대의 대화를 들으면서 웃기만 했다.
헤르메스 길드의 서열에 따른 명령 체계는 엄격하지만, 친위대에만은 통용되지 않는다.
바드레이와 성주 출신의 친위대는 헤르메스 길드를 설립한 장본인들이었다.
그들은 협약을 통해 가장 강한 사람이 총수의 자리에 올라서 다른 이들을 다스리도록 했다.
율법은 친위대 중에서 언제라도 바드레이보다 강한 사람이 나타나면 그가 곧 총수가 되는 것.
그래서 로열 로드 초창기에 헤르메스 길드의 총수는 몇 번 바뀌었다.
바드레이나 친위대나, 선의의 경쟁을 통해 더 빨리 강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경쟁을 하는 중간 과정에서 완전히 도태된 성주들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로열 로드는 직접 몸을 움직여야 하고, 매우 빠른 판단력과 감각을 가져야 한다. 낙오된 성주들은 대리인을 통해
서 길드의 영향력을 유지했다.
헤르메스 길드는 마법의 대륙에 기원을 두고 있는 최고의 길드였다. 위드에 대해서도 여러 경로를 통해서 정보를
입수 하고 있었다.

"마법의 대륙과 위드라......"

바드레이는 상념에 젖은 듯한 얼굴이 되었다. 그에게는 흔히 찾아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

"스티어."
"예, 총수님."
"북부를 계속 주시하라."
"알겠습니다."
"그러나 필요 이상으로 일을 키울 필요는 없다."
"그 말씀은?"

스티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평소 헤르메스 길드는 조금이라도 반항의 기미가 보이는 상대들은 처참하게 짓밟아 주었다.
암살자들을 파견해서 중요 요인들을 척살하거나 매수한다. 전투 병단을 파병해서 마을과 성을 불태우는 등 잔혹한
일도 서슴지 않았다.

"그럴 가치도 없다. 우리가 나서기도 전에 먼저 먹이를 노리는 하이에나들에게 잡아먹히게 될
테니까."

스티어는 잠시 생각해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총수님의 말이 맞습니다. 데이몬드가 이끄는 부활의 군대도 곧 그쪽으로 향하게 될 겁니다."

부활의 군대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결국 오데인 요새를 넘지 못하고 후퇴를 결정, 중앙 대륙에서의 영토는 급격히 위축되고 있었다.
부활의 군대는 더 이상 중앙 대륙에서 버티지 못한다.
북부에는 아직 강한 왕국이 없으니 그곳을 노리기 위해 철수하는 것이다.
위드와는 원한 관계도 있었다.
마탈로스트 교단의 퀘스트를 통해서 부활의 군대를 저지한 큰 공로를 세운 게 바로 위드였기 때문이다.
바드레이가 말했다.

"위드가 유명하기는 하지. 하지만 가지고 있는 명성은 패배를 겪으면 그만큼이나 빨리 사라지게 될
것이다. 몰락도 한순간이지."

사냥을 통한 스킬 상승과 레벨업 그리고 세력 확장!
바드레이는 퀘스트와 방송 출연에 대해서는 보여 주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높은 레벨과 세력
이야말로 다른 유저들을 두렵게 만들고, 명령에 복종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바드레이는 친위대와 함께 사냥을 마치고 나서 휴식 시간동안 과가에 대한 생각에 잠겼다.

"마법의 대륙이라."

뜻을 함께하는 성주들과 함께 마법의 대륙을 접었다.
로열 로드에 대한 정보들을 일찍 입수하면서 미리 몸을 만들고 준비를 하여야 했다. 하지만 간간이 심심풀이로 마
법의 대륙에 몰래 접속했다.
캐릭터는 그대로 남아 있었으니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마법의 대륙은 그의 청춘을 바친 게임이었다.
쇠락해 가고는 있었지만 깊은 정이 들어서 그만둘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위드에 대한 소문을 게임 내에서 접하게 되었다. 바드레이가 떠나고 난 이후 최강의 자리에 등극했다
는 소문.

"전쟁의 신 위드. 지금 마법의 대륙에서는 그 위드가 최고지."
"바드레이가 접속을 안 하니, 여우가 날뛰는 건가?"
"그 반대야. 바드레이보다도 훨씬 뛰어나다고 봐야 해. 바드레이는 사냥하지 못했던 드래곤도 혼
자 잡을 뿐만 아니라, 던전들도 혼자서 탐험하거든."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말이야?"
"바드레이는 절대 못하던 일이지."

바드레이는 자존심이 상했다. 소문을 곧이곧대로 믿는 성격은 아니라서 넘겨 버렸지만, 그래도 기분은 더러웠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운명의 장난인지, 혼자서 던전에서 사냥을 하던 와중에 위드를 만나게 되었다.
바드레이는 그의 장비와 이름을 보자마자 소문의 위드임을 직감했다.
마법의 대륙은 키보드로 말을 쳐야 되는 게임이었다.

"네가 위."

위드냐라는 말을 미처 다 치기도 전이었다.
상대가 공격 스킬을 발동시켰다.
던전에서 만나면 가차 없이 공격을 하는 위드였기 때문!
바드레이는 허겁지겁 방어 스킬들을 활용하고 도망쳐야 했다.
생명력을 300 정도 남기고 간신히 도주할 수 있었다.
절대 최강자로 군림하던 바드레이에게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의 날이었다.
바드레이는 생명력과 마나를 완전히 회복하고, 최고급 장비들의 손질까지 마치고 나서 다시 위드에게 도전했다.

"나는 바드레이다. 위드, 너의 목을 베어 주마."

미리 쳐 놨던 대사를 재빨리 입력했지만 상대는 반응이 없었다.
그는 바드레이가 누구인지도 몰랐고, 관심조차 없었기 때문.
위드는 평범하게 공격 스킬을 발동시킬 뿐이었다.
그렇게 벌어진 전투에서 바드레이는 말할 수 없는 벽을 느꼈다.
현재의 그로서는 절대 오를 수 없을 만큼 높고 두꺼운 요새를 대하는 느낌이었다.
위드는 그가 사용한 연계 스킬들을 모조리 풀어 헤쳤다.
장비와 레벨에서는 큰 차이가 없는데 스킬의 운용에서 지고 들어갔다.
바드레이가 어떤 공격을 시도하든 간에 빠르게 대응하고 역습을 가한다.
망망대해를 대하는 것 같은 절망감 속에서 패배를 경험 했다.
바드레이는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마법의 대륙 최강자라는 자부심이 산산조각이 난 것이다.
잠깐 쉬었던 기간이 있기는 했어도, 마법의 대륙을 한 경력을 따지면 절대 질 수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바드레이는 다섯 번이나 몰래 위드를 쫓아가서 다시 싸움을 걸였다.
하지만 결과는 매번 똑같았다.
스킬의 운용이나 전투법을 바꾸어 보아도 너무 쉽게 파훼해 버린다.
위드의 레벨은 점점 오르고, 장비는 만날 때마다 좋아졌다.
격차가 심한 몬스터들은 사냥을 해도 경험치를 거의 주지 않는다. 바드레이는 한계라고 생각했던 레벨을 넘어, 그
는 스스로 사냥터를 개척해서 궁극의 경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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