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크밤

추리소설모음 2

3학년2반 | 2022.01.27 09:46:10 댓글: 0 조회: 661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5461

실에 묶인 참새



Alice Scanlan Reach



5월의 어느날 아침, 잠에서 깬 해리 포춘은 에디를 죽여야 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에디는 올해 55살인 해리의 누나 에디스의 별명이다. 사람들은 그녀의 남
자같은 걸음걸이와 까치집 같은 반백의 머리, 그리고 굵고 낮은 목소리에다
가 심술이 덕지덕지 붙은 얇은 윗입술 위에 뚜렷하게 보이는 콧수염을 보고
는 남자 이름으로 별명 한번 잘 지었다고 말하곤 했다.
해리는 누나를 증오했다. 지금까지 살면서 에디의 모습과 목소리가 혐오스
럽지 않았던 때는 단 한번도 없었다. 그 혐오감은 해리가 대여섯 살 쯤 밖
에 안된 어느날 오후부터 시작되었다. 에디는 우거진 잡초 속에서 어디를
다쳤는지 퍼덕거리고 있는 황갈색 참새 한마리를 발견했다. 해리는 에디가
판자 조각과 철사로 새장을 만들고 지푸라기와 잔디를 뜯어 새장 안을 꾸미
는 것을 정신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에디는 새장을 다 만들고 나더니 해리
에게 해바라기씨 한 주먹과 지렁이 한 두마리, 그리고 양재기에 물을 좀 떠
오라고 명령하듯이 말했다.
에디는 참새를 새장 안에 넣고 문을 잠그며 말했다.
"네가 잘 보살피면 이 새는 나을수 있을꺼야."
해리는 에디가 시킨 대로 열심히 새를 돌보았다. 1주일쯤 후에 상처가 -그
상처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는 듯 참새는 짹짹거리며 울기도
하고 새장안을 깡총거리며 뛰어다니기도 했다.
"자, 이제 새가 날아가는지 보자."
어느 날 에디가 말했다.
그녀는 웃으며 새장문을 열였다. 참새는 새장 밖으로 뛰어나와 날개를 편
치고 하늘을 향해 잠시 날아오르다가 갑자기 땅에 툭 떨어져 버렸다. 잠시
후에야 해리는 참새가 왜 땅에 떨어졌는지를 알 수 있었다. 에디가 그다지
길지 않은 실을 참새의 한쪽 발목에 묶어놓은 것이다. 에디는 계속 깔깔거
리며 마치 고기를 낚아 올리듯 실을 감아서 참새를 잡아 발목의 실을 풀지
않은 채 다시 새장에 집어넣었다.
해리가 풀어달라고 울면서 애원했지만, 얻어맞기만 했다. 에디는 매일 참
새를 못살게 굴었다. 참새에게 잠시 동안 자유를 주는 척 하다가 무자비하
게 실을 잡아당겨 다시 새장에 가두곤 했다. 어느 날 아침, 물과 모이를 주
려고 새장에 갔을 때, 참새가 실을 풀어보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오히려 그
실에 몸이 꽁꽁 묶여 있는 것을 보고 해리는 엉엉 울었다. 해리는 아마도
그때부터 지신이 에디의 잔인한 실에 묶여 있는 무기력한 참새 신세가 된게
아닌가 싶었다.
18살이 되어서 해군에 지원했을때, 해리는 다시는 누나와 상종을 하지 않
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독일 잠수함이 해리가 탄 잠수함 뿐만 아니라 해
리의 다리까지 박살내고 말았다. 상이 군인 병원에서 1년을 지내고 나서 해
리는 절룩거리며 읍에서 15마일이나 떨어진 낡고 우중충한 시골집으로 되돌
아왔다.
해리가 돌아오자 에디는 응석받이가 되지 않겠다고 몇마리 되지도 않는 닭
과 채소를 키우게 하는 등, 철저히 부려먹었고, 매달 해리 앞으로 나오는
연금도 가로챘다.
해리는 텔레비젼이라도 있으면 이렇게까지 외롭고 힘들지는 않을꺼라고 생
각했다.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에 내기만 하면 에디는 미친듯이 화를 냈다.
"입에 풀칠할 돈도 없는데 넌 입만 벌리면 텔레비젼 타령이냐? 내가 그렇
게 멍청하지 않다면 라디오라도 고쳐서 들을수 있을꺼야!"
해리는 입을 다물수 밖에 없었다. 전쟁전에 만들어진 라디오를 고쳐보려고
여러 번 시도해 보았지만, 고칠 수 없었다. 가끔씩 무슨 소리가 들리다가도
곧 멈춰 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해리의 여윈 어깨가 곧게 펴지고 그의 창백하게 푸른 눈이 흥분으
로 반짝이는 날이 1주일에 단 하루 있었는데, 바로 토요일이었다. 저녁을
먹고 나서 뒤룩뒤룩 살이 찐 에디는 트럭에 타고 해리에게 빨리 운전석에
타라고 재촉하였다. 그들의 목적지는 늘 똑같았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
에 있는 제스 스낼 보안관의 집이었다. 그 집에는 보안관과 그의 아내 아이
다, 그리고 아이들 여럿이 살고 있었다. 해리는 그 집에 에디를 내려주고는
읍으로 나가서 선술집을 찾아갔는데, 술집 문을 들어서면 보안관이 제일 머
저 반겨주었다.
"그래, 이제 오는군. 시간까지 정확하고 말이야."
보안관은 모두 들으라는 듯이 큰소리로 떠들었다.
"여자에게 쥐어사는 해리, 자네가 왔구만!"
그러고 나서 사람들은 10분동안 해리와 그의 누나에 대한 농담을 해댔다.
하지만 해리는 개의치 않았다. 이 아늑한 선술집의 따뜻한 분위기와 남자들
만의 우정, 그리고 비록 자신을 비웃는 것일지라도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너
무나 좋았다. 해리는 언제나 미소를 지으며 바에 앉아 에디를 태우러 가야
할 시간까지 맥주를 두어 잔 마시며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렇게
아무런 변화도 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해리는 에디의 손에서 풀려나기 위해 그녀를 아주 없애버릴 날짜와 시간
까지 정해 놓고 있었다. 그는 그 기적이 일어난 날 이후부터 그렇게 마음
먹었다. 90마일 떨어진 리지웨이에 사는 사촌 루시가 에디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다. 에디는 1주일 내내 얼굴에 교활하면서도 점잖은 표정을 지으며 편
지 내용을 밝히지 않았다.
"루시가 내가 좀 왔으면 좋겠다."
에디는 해리 앞에서 미지근한 콩스프를 떠먹으며 마치 중대 발표라도 하듯
이 말했다.
"그랬군."
"한 1,2주일 있다가 올꺼야. 어쩌면 3주 정도 될지도 몰라."
"으흥."
"텔레비젼이라도 사야 네가 심심하지 않겠구나."
해리는 갑자기 죽그릇을 밀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에디의 큰 눈이 놀라
서 더 커졌다.
"저녁은 다 먹은 거냐?"
"많이 먹었어."
해리는 부엌 문을 열고 절름거리며 마당 끝으로 걸어갔다. 에디가 해리에
게 즐거움이나 희망을 주는 척하다가 취소한 적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에디는 해리가 작으나마 편안함과 평화 같은것을 얼마나 원하고 있는지 너
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번에는 나를 바보로 만들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해리는 만족감을 느
꼈다. 에디는 자신이 숨겨놓은 루시의 편지를 해리가 찾아서 읽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루시는 에디에게 놀러오라고 편지를 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어려운 불을 좀 끄게 돈 좀 빌려달라는 내용이었다. 보나마나 에디는 거절
할 게 뻔했다.
해리는 무작정 걸어가다가 바람에 부드럽게 흔들리는 잔디에 벌렁 누웠다.
루시가 정말 에디를 초대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에디가 몇주일이 아니라 영
원히 사라져 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잔디에서 신선하고 향긋한 냄새가 났
다. 해리는 오랫동안 잔디에 누워 향긋한 풀냄새를 맡으며 별을 쳐다보았
다.
그 다음주 토요일 해리가 보안관 집으로 에디를 태워다 주려고 운전석에
앉았을때, 에디는 자리에 앉기도 전에 떠벌이기 시작했다.
"아이다도 내가 짐을 싸들고 루시에게 갔다오는 것이 좋겠다고 하더라.
그래서 나도 갈 생각이야."
해리는 겉눈질로 에디의 얼굴에 떠오른 음흉한 미소를 보았다. 에디는 아
이다 부인이 하지도 않은 얘기까지 꾸며대면서 즐거워 하고 있었다. 그리고
에디는 동생이 자신의 거짓말에 속고 있는 줄 알고 있었다. 해리가 정말로
자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리라 믿을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
에는 실을 묶어 놓은 참새처럼.....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한 해리의 머릿속에는 며칠전 밤에 잔디에 누워 했
던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에디를 어떻게 해치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었
다. 해리는 그 방법을 생각하다가 지쳐서 잠이 들었다. 어떻게, 어떻
게.....
그런데 그 다음주에 읍내의 선술집에 갔을때 또 하나의 기적이 일어났다.
"어이, 해리!"
보안관이 큰소리로 불렀다.
"자네가 에디와 잠시 헤어지게 되었다고 내 마누라가 그러더군. 섭섭해서
어떻게 하나?"
술집 안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웃음을 터뜨렸다.
"뭐 하면서 지낼꺼야?"
보안관이 아픈곳을 찔렀다.
또 다시 폭소가 터졌다. 이번에는 비꼬듯 충고하는 사람도 있었고, 해리가
불구라는 것을 놀리듯이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해리는 사람들 말소리가 귀에 들리지 않았다. 너무나 멋진 생각이 떠올라
서 심장이 방망이질 치기 시작했고, 맥주를 조금 흘리기까지 했다. 어떻게
해치울지 생각이 난것이다!
웃음소리가 가라앉을 때 쯤에는 손도 떨리지 않았다. 해리는 맥주를 쭉 들
이키고 일어서서 트럭으로 갔다. 읍을 떠나 인적이 없는 곳까지 트럭을 몰
고 가서 차를 길가에 세우고 시동을 껐다. 그리고 어둠 속에 앉아서 세세한
부분까지 계획을 세웠다. 1주일을 아니, 2주일을 더 기다리기로 했다. 에디
가 거짓말을 계속하면서 그 사악한 놀이를 계속할지 두고 보기로 했다.
그 다음주 토요일, 선술집에 들어가니 보안관이 또 큰소리로 불렀다.
"자네, 이제 곧 자유라면서? 아이다 말이 에디가 곧 떠난다고 했다는
군."
"네. 곧 떠날 겁니다."
해리는 조용히 맥주를 마시며 대답했다.
해리는 그날 밤 정해진 시간에 에디를 태우러 갔다. 에디가 트럭에 타고
나서 한참동안 오누이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해리가 침묵을 깨고
말했다.
"선술집에서 보안관을 우연히 만났는데, 누나가 곧 떠날거라고 아이다 부
인이 말했다더군."
에디는 콧방귀를 뀌었다.
"너 귀가 어떻게 된거 아니냐? 내가 루시 한테 놀러갈거라고 골백번도 더
말했는데 말야."
"그래, 말했었지. 하지만 아이다 부인에게 말한줄은 몰랐어."
"너한테도 얘기 했었잖아! 오늘 밤 아이다에게 한번 더 말한것 뿐이야."
"그랬었나?"
"물론이지."
"그럼 정말로 떠나는 거야?"
"아니면.....내가 왜 그런 소리를 하고 다니겠니?"
에디의 입가에 교활한 미소가 떠올랐다.
해리는 날아갈 듯이 기분이 좋았다. 그는 트럭을 차고에 넣고 나서 운전석
밑에 숨겨 두었던 망치를 들고 에디 뒤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
"내가 가면 좀 섭섭하겠다."
에디는 시치미를 떼며 모자와 코트를 벽에 걸기 위해 돌아섰다.
"섭섭하다러도...."
해리는 망치를 휘둘러 에디의 말을 막았다. 망치를 계속해서 휘둘러 에디
가 영원히 말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휘파람을 불어가면서 차근
차근 뒤처리를 하기 시작했다. 일을 다 끝내고 나자 새벽이 되었다.아무런
흔적도 없이 깨끗이 치우고 에디를 마당 끝에 있는 폐쇠된 우물 속에 안전
하게 묻어버렸다.


해리는 그 다음 주 토요일에 선술집으로 들어가면서 보안관이 놀려대기도
전에 먼저 소리쳤다.
"에디가 드디어 리지웨이로 떠났어요."
해리는 맥주를 한 잔 주문했다.
"그랬나? 그 노처녀가 정말 갈 줄은 몰랐는데, 자네 트럭도 너무 낡았고
말이야."
보안관은 휘파람을 불며 말했다.
"트럭요?"
해리는 머리를 저었다.
"지난 수요일에 내가 직접 6시 15분 버스를 태워서 보냈어요. 가방 2개
하구요."
해리는 실제로 에디의 소지품들을 거의 모두 다 싸서 에디가 쉬고 있는 곳
에 같이 묻어주었다. 술집 안이 갑자기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 졌다. 그
러나 해리는 너무나 즐거운 나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자네가 에디를 버스에 태워 보냈다고? 지난 수요일에?"
보안관이 천천히 말했다.
"네."
"정말인가?"
"그럼요, 물론이죠!"
해리는 씨익 웃었다.
"이번에 상이연금이 나오면 텔레비젼을 제일 먼저 사야겠어요."
해리는 행복한 생각이 하나 더 떠올랐다.
"생각해 보니까, 텔레비젼에 라디오, 전축까지 사면 아주 환상적이겠는데
요."
술집 안은 여전히 조용했다. 해리는 보안관이 옆에 다가서는 것을 어렴풋
이 느꼈다.
"자네 아직도 라디오를 고치지 못한 모양이군, 해리?"
해리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6개월 동안 찍 소리 한번 안 했어요."
"그럼, 자넨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겠군."
해리는 어리둥절해져서 보안관을 쳐다보았다.
"뭘 몰랐다는 겁니까?"
"파업이 있었다는 소식 말일세. 지난주 일요일부터 여기서 나가거나 들어
온 버스는 한대도 없었어."
보안관은 해리의 어깨를 단단히 움켜 쥐었다.
"자, 에디를 보냈다면 어디로 보낸거야, 해리. 어디로?"
해리는 할 말을 잊은 채 입을 벌리고 보안관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머릿속
에는 한가지 생각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실에 묶인 참새.......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구 효서



맘씨 좋은 김반장, 진급되자마자 모호한 사건을 맡았다.
'미해결 사건의 해결사','아프리오리한 추리력'으로 소문난 그도 이번 사건만
은 만만치 않다. 그럴 수 밖에, 그는 지금까지 기묘한 사건들을 숱하게 해결
해 왔고, 그래서 고속 승진했으며, 따라서 그에게는 늘 남들이 손 못대는 사
건만 주어지게 됐었으니, 어떤 사건을 맡든 처음엔 항상 막막했다.
"차라리 주민 백명도 안 되는 절해고도에서 수사관 노릇했으면 좋겠다."
사건을 맡을 때마다 그가 하는 푸념이다.
이번 사건은 스물 일곱살 먹은 한 청년의 투신사체로부터 시작된다.
도시 중앙을 흐르는 강에는 네 개의 교량이 있다. 제 2교량 서북쪽 난간에서
청년이 떨어졌다. 고수부지 보도블럭에 머릴 부딪히고 즉사, 사망 추정시간
그 날 오후 10시.
자살이나 타살이냐는 논란이 있었다. 사체의 신원은 컴퓨터 조회로 쉽게 밝
혀졌다. 성명, 나이, 현주소는 그가 소지하고 있던 신분증에서 이미 밝혀졌다
. 처음엔 자살 쪽으로 의견이 기울었다.
"부모가 없어요. 학력이 모자라 일자리도 제대로 구할 수 없었죠. 어제도 오
전 내내 자기 방에서 전화만 기다리다 전화받고 나간거예요. 실업자였죠. 뭐.
"
신분증에 기록된 현주소는 그의 사글세 집이었다. 셋방 주인의 말로는 그가
아침도 굶었을 거라고 말했다. 셋방 주인의 말은 시체부검 결과와도 일치했다
.
"비관자살이군."
곁에서 듣고 있던 유주임이 선뜻 중얼거렸다. 그러자, 셋방 주인이 손사래를
쳤다.
"그럴리 없어요. 불우하긴 했지만 얼마나 명랑한 성격이었는 데, 얼굴이 잘
생기고 마음씨가 착해서 따르는 여자들도 많았는 걸요."
"아하, 그랬습니까?"
김반장이 웃었다. 유주임의 무의식적인 중얼거림으로 단서를 잡게 된 김반장
은 흐뭇한 눈으로 유주임을 바라 보았다.
김반장도 이미 타살쪽으로 심증을 굳히고 있었다. 청년의 점퍼에는 점퍼말고
도 구두칼, 손수건, 열쇠꾸러미, 필기도구따위의 잡다한 것들이 들어 있었고,
<SHE'S GONE> 이 들어있는 블랙 서배쓰 테이프와 전날 낸 전화요금 영수증이
보였던 것.
글쎄, 아무리 훌륭한 민주 사회 시민이라지만 곧 죽을 건데 전화요금같은
걸 낼까.
김반장은 유주임에게 청년이 근무했던 직장을 한바퀴 돌아오라고 지시했다.
유주임은 의료보험조합과 국민연금관리공단을 들러 청년이 다녔던 직장을 체
크한 뒤 네시간 만에 일을 마쳤다.
"하, 이 친구 직장에서 여직원들한테 인기가 대단했더군요. 죽었다는 소릴
듣자 마자 그냥 사무실이 울음바다가 되던데요."
"쓸데없는 농담말고 뭐 짚히는 거 있어?"
유주임은 청년이 최근까지 만났던 한 여자 애길했다.
"둘인 죽자사자 좋아했는 데 여자 부모가 반대했다. 이러면 결과는 뻔한 거
아닙니까?"
유주임이 말했다.
"어떤 여잔데?"
김반장이 물었고,
"5선 국회의원 딸입니다."
유주임이 대답했다.
"골치 아프겠군."
김반장은 두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골치 아플 게 뭐 있습니까. 신분 차이, 계급 차이, 그래서 갈등, 죽여야겠
다. 쾅, 이거 아닙니까?"
"이 사람아, 그렇게 간단하면 수사관이 왜 필요하겠나? 헤어지라고 청년에게
경고해도 안 들으니까 뒤에서 밀었을 수도 있쟎아?"
김반장이 말했다.
"5선 국회의원이요?"
유주임이 놀랐다.
그 5선 국회의원은 도시에서 20킬로나 떨어진 곳에 중세의 성같은 집을 짓고
살았다. 원로 정치가의 가정을 수사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유별나기로 소문난 국회의원 아니던가.
"김반장은 우리 딸이 그따위 무뢰한을 좋아했다고 아무렇게나 믿는 모양인데
, 어ㄳ든 수사하는 건 좋소. 하지만 명확한 이유없이 나와 내 가족에게 불이
익을 준다면 그건 고스란히 당신께 돌아갈 테니 알아서 하시오."
"실례된 질문입니다만 사건 당일 오후 11시에 의원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김반장은 그의 시퍼런 서슬 앞에서 질문했다.
"당신은 이 나라 정치에 대해선 전혀 모르는 사람같군. 그 날 대회장에 있었
소이다. 그 날 날치기 통과가 있었던 날이지 않소?"
"그렇군요."
일단 그 정도로 후퇴하고 김반장은 다음날 보좌관을 만났다. 5선씩이나 한 국
회의원이 직접 범행을 저질렀으리라곤 애초부터 생각치 않았다. 그럼 누구겠
는가. 더구나 그 국회의원은 언젠가부터 자기 딸이 보좌관에 대해 예의바르지
못하다고 꾸중을 해 왔다는 정보를 김반장은 갖고 있었다.
"선생은 국회의원의 딸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데 제 생각이 틀립니까?
"
김반장이 보좌관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부인하진 않겠습니다, 그러나 질투가 나서 내가 그놈을 해치웠다고 생각하
는 건 설마 아니겠죠?"
"딸이 선생께 무례하게 군다고 의원께서 야단치기 시작한 게 그 청년이 나타
나기 전입니까, 아니면 그 ㄳ니까?"
김반장은 그의 대답을 무시하고 다시 물었다.
"ㄳ니다."
그가 대답했다.
"선생이 딸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으면서도 의원께서는
청년이 나타난 후에야 선생에게 그런 호의르르 베풀기 시작했군요. 맞습니까?
"
"의원님께서 절 이용했다고 감히 생각하는 모양인데, 당사자를 만나보면 당
신의 추리가 얼마나 개똥같은 건지 스스로 깨달을 수 있을거요."
다음날 김반장은 당사자인 딸을 만났다. 문제가 복잡해진 건 그때부터였다.
"그치에 관한 거라면 더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청년에 대한 딸의 태도는 단호하고 냉랭했다. 더이상의 질문은 용납하지 않았
다. 김반장은 돌아와 유주임을 닥달했다.
"둘이서 죽자사자 좋아했다며? 도대체 어디서 그런 엉뚱한 소릴 듣고 와서 날
낭패스럽게 만드는 거야?"
"어떻게 나오던가요?" 유주임이 물었다.
"여자쪽은 숫제 얼음덩이야. 청년의 짝사랑이었어. 자살이 맞아. 젠장!"
김반장은 더이상의 수사를 계속할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했다.
"그럴리가요. 둘이서 굉장히 뜨거운 사이라는 걸 증언할 사람이 많이 있다구
요. 사건 이틀 전에도 산장에서 둘이 만나 사랑을 나누는 걸 본 사람이 있어요."
"그렇담 유주임이 책임지고 딸을 데려다 산장 주인과 대질을 시켜."
"좋습니다. 그야 어렵지 않지요."
그들은 딸을 데리고 예의 산장으로 달려갔다. 딸은 대단히 성가셔하면서도 선
선히 따라왔고, 보좌관은 바짝 긴장한 채 그녀 곁에서 떨어질 줄을 모랐다.
"지난 24일, 이 여자분이 여기에 묵은 적이 있습니까?"
유주임이 산장 주인에게 물었다.
"물론입니다. 한 청년하고 함께였읍죠. 그 청년 이름은 아마 숙박부에 적혀 있
을 겁니다."
"다정해 보였습니까?"
이번에는 김반장이 물었다.
"물론입니다. 둘은 무척 사랑하는 사이같았습니다. 산장지기 20년이면 그런 정
도는 한 눈에 알아보죠. 도토리묵과 약초가 든 쌀막걸리를 달라고 해서 제가 직
접 갖다주었지요. 그런데 사랑하는 사이긴 한데 뭔가 큰 걱정이 있는 것처럼 보
였습니다. 제 직감으로는 부모의 반대에 부딪힌 것 같았지만 말입니다. 둘 다 울
고었거든요."
"이곳에 온 적이 있습니까?"
김반장이 딸에게 물었다. 딸은 묵묵부답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보좌관
역시 사랑하는 여자가 청년과 함께 하룻밤 묵었다는 말을 듣고도 크게 놀라지 않
았다. 질투심도 없는 이상한 위인이구만, 하고 유주임은 생각했다.
사건은 수수께끼로 치닫고 있었다.
청년과 딸은 굉장히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걸 증명해 줄 사람은 산장지기뿐만
아니라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청년의 존재는 커녕 그의 죽음에 대
해서도 시큰둥한 반응만 보이고 있다. 지극히 사랑하는 것처럼 행동해야 했던 다
른 동기가 있었다는 말인데....
전혀 다른 성격의 사건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유주임은 땅이 꺼질 것 같은 한
숨을 내쉬었다.
"분명 이 여자분이 맞지요?"
김반장은 산장지기에게 거듭 물었다.
"분명합니다. 제 눈을 의심치 않습니다."
산장지기가 대답했다.
"첨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다니 참 힘들군요."
산을 내려오며 유주임이 허탈하게 말했다.
"사건은 항상 너무 어렵지 않으면 너무 쉽기 마련이지. 생각해봐. 자네 첨엔
뭐랬었나. 이번 사건은 예상 외로 싱겁게 끝날 것 같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미궁 속으로 빠져 들지 않았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김반장은 조금도 걱정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본부에 돌아 와 어디론가 전화를 하고 나서야 김반장은 대단히 화가 난 얼굴로
유주임을 나무랐다.
"그 따위로 덜렁대면 내일 당장 파트너를 바꾸겠어. 도대체 기초조사를 한 거
야 안 한거야? 지금 당장 국회의원의 주소지에 가서 그 집 주민등록 등본 한 통
떼와!"
유주임은 엉덩이가 불이 나게 뛰어가 등본을 뗐고, 주민등록번호, 앞 여섯자리
수가 같은 사람이 둘이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라자빠졌다.
수색영장을 발급받아 의원집에 들이닥친 김반장은 감금돼있던 쌍동이 딸을 구
해냈고, 보좌관으로부터 범행일체를 자백받았다.
그러나 5선 의원이 직접 범행에 관여했는 지의 여부는 금방 밝혀 낼 수 없었
다. 골치 아픈 청년이 나타난 후로 그가 갑자기 보좌관편이 되어 딸과의 관계를
후원했다는 것 하며, 이제는 의원의 의도대로 딸 곁에서 청년도 보좌관도 깨끗이
없어져 버리게 되었다는 것 하며, 딸을 강제로 감금시켰었던 점들은 그가 범행을
유도했다는 심증을 굳히게 했으나, 물증은 전혀 없었다.
"딸이 조신하지 못해 애비가 외출을 잠시 금지시킨 것도 우리나라에선 죄가 되
오?"
라고 그는 강변할 뿐이었다. 당장엔 물증이 없지만 수사를 계속하면 머지 않아
증거를 잡을 수 있을 거라고 믿고 김반장은 5선 의원의 행적을 체크하는 데 게을
리 하지 않았다.
어쨌든 김반장은 또다시 훌륭한 점수를 따게 되어 동료 수사관들로부터 부러움
을 샀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내게 됐어요?"
라고 물으면,
"그런 생각 지극히 자연스러운 거 아냐? 너무 복잡하게만 생각하는 생활을 하
다 보니까 의외로 상식적인 것에 깜깜할 때가 있어. 솔직히 말하면 이번 공로도
여섯살짜리 딸얘에게 있지. 잘 풀리지 않는 사건이 있으면 난 우리 애에게 동화
처럼 얘기해 주지. 그럼 그 애가 아주 쉽게 답을 말할 때가 있거든. 일이 잘 풀
리지 않는다 싶으면 자네들도 애들에게 물어 보라구. 애들의 직관은 대단해."
라고 그는 대답했다.
"어찌 됐건 간에 김반장님은 머지 않아 또 진급하실 겁니다. 유능한 사람은 시
기에 관계없이 승진해야 하는 거니까."
동료들은 이렇게 말했고, 아니나다를까 이틀 후에 때아닌 특별 인사이동이 단
행되었다. 예상했던 대로 김반장한테였다.
김반장은 인사명령서를 받아들었다. 괘씸도로 전출을 명한다고 적혀 있었다.
괘씸도란 인구 백 명도 안 되는 서해의 절해고도였다.




벽을 뚫고 다니는 사나이

by 마르셀 에이미


몽마르트르의 도르상 거리 75번지 2호에 뒤띠욀이라 이름의 뛰어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벽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아주 특이한 재능을 가지고 있
었다. 등기부의 삼등 공무원인 그는 늘 코안경을 끼고 조그만 수염을 기르
고 있었다.
마흔 세 살에 접어들었을 때 뒤띠욀은 우연한 기회에 자기에게 그러한 특
이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 저녁이었다. 그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 갑자기 불이 나갔다. 그는
어둠 속에서 잠시 이곳 저곳을 더듬었다. 불이 다시 들어 왔을 때 그는 아
파트 방 밖 4층에 나와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뒤띠욀은 어
찌된 영문인가 한동안 생각했다. 방문이 안에서 잠겨 있었으므로 도저히 있
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설마 그럴 리가 있을라구.' 생각하면서 그는 벽을 통해서 그의 방으로 들
어가기로 결심했다. 그의 몸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쉽게 벽을 뚫고 지
나갔다.
전혀 바라지도 않았던 이 괴상한 능력은 그때까지 평범한 생활을 해오던
뒤띠욀에게는 매우 당혹스럽기도 하고 거추장스러운 것이기도 했다. 이튿날
뒤띠욀은 동네 의사를 찾아갔다.
의사는 뒤띠욀에게 극도로 과로할 것과 쌀가루와 반인반마(반은 인간,반은
말)의 호르몬을 섞어 만든 알약을 지어 주면서 1년에 두 개 꼴로 먹으라고
지시했다.
첫번째 알약을 복용한 뒤 뒤띠욀은 나머지 알약을 책상 서랍에 넣어두고는
곧 잊어버렸다. 또 그의 공무원 생활은 과로라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서 그
의 괴상한 능력은 1년 후에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만일 그의 생활을 뒤바꾸어 놓을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던들 뒤띠욀은 자기
의 괴상한 능력을 시험해 보려는 유혹을 받지 않고 평범히 늙어 갔으리라.
사건이란 그가 근무하는 등기부의 과장이 레뀌에라는 사람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첫 날부터 새 과장은 뒤띠욀의 코안경과 검은 턱수염을 매우 아니
꼽게 보고는 그를 아주 지저분한 고물로 취급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골치
아픈 일은 새 과장이 사무실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겠다고 작정한 때문이
었다.
그는 아침이면 그 일로 걱정을 하면서 직장에 나갔고 밤이면 이불 속에서
새 과장의 개혁에 대해 꼬박 15분 동안씩 고민을 하였다.
하루는 새 과장이 자기의 개혁에 방해가 된다고 하여 뒤띠욀을 어두컴컴한
골방으로 쫓아 내었다. 그 방문에는 '시원하게 처리함'이라고 써 있었다.
뒤띠욀은 그러한 모욕을 말없이 받아들였지만 집에서 신문을 볼 때 마다 레
뀌에 과장이 피비린내 나는 사건의 희생자였으면 하고 바라게 되었다.
또 하루는 과장이 뒤띠욀이 쓴 편지를 휘두르면서 방으로 뛰어들더니 고래
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 걸레 같은 것을 다시 쓰란 말야! 우리과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이 말할
수 없는 걸레 같은 것을 다시 쓰란 말야!"
뒤띠욀은 말대꾸 해보려고 했으나 과장은 우뢰 같은 목소리로 그를 낡은
진드기로 취급하고는 편지를 구겨서 그의 얼굴에 내던졌다. 뒤띠욀은 참을
수 밖에 없었으나 속으로는 슬며시 부아가 치밀었다.

자기 방에 혼자 남은 뒤띠욀은 열이 오르면서 별안간 새 과장을 골려 줄
방법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옳지'하고 그는 자기의 방과 과장의 방을
가로 막은 벽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머리만 과장의 방 벽에 솟아나
도록 조심했다.
과장은 책상에 않아 일에 몰두하다가 갑자기 자기 사무실에서 기침하는 소
리를 들었다. 눈을 들자 말할 수 없는 놀라움과 함께, 사냥에서 잡은 짐승
의 박제 모양으로 벽에 붙어 있는 뒤띠욀의 머리를 발견했다.
그뿐이랴! 그 머리는 살아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가는 쇠사슬이 달린 코
안경 너머로 뒤띠욀의 머리는 그에게 증오의 눈길을 던지고 있었다. 더군다
나 이제는 말도 하는 것이 아닌가!
"여보 레띠욀 과장. 당신은 깡패요, 야비한 망나니란 말이요."
무서움에 입을 딱 벌린 과장은 이 유령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급기야
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복도로 뛰어나가 뒤띠욀의 골방까지 달려갔다.
뒤띠욀은 벽을 통해 자기 방으로 되돌아와 조용하고 부지런한 모습으로 일
하는 체 하였다. 과장은 한참 동안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몇마디 중얼
거린 다음 제 방으로 돌아갔다. 겨우 자리에 앉자마자 뒤띠욀의 머리가 또
다시 벽에 나타났다.
"여보시오. 당신은 깡패요, 불한당에다 야비한 망나니란 말이요."
이 하루 낮 동안에만도 그 무서운 머리는 벽위에 스물 세 번이나 나타났
다. 재미를 붙인 뒤띠욀은 과장에게 욕을 퍼붓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
다. 그는 은근히 협박을 지껄였고, 무덤에서 나오는 듯한 목소리에 악마와
같은 웃음을 섞어서 소리쳤다.
"가루가루! 늑대귀신 늑대귀신! 늑대의 털! 끼르르 낄! 올빼미 뿔! 끼르르
낄!"
불쌍한 과장은 날이 갈수록 얼굴이 하얘졌다. 머리카락은 곤두섰으며 식은
땀을 주르르 흘렸다. 첫 날만 0.5Kg의 몸무게가 빠졌다. 다음 주에는 포오
크로 수우프를 먹고 순경을 보고는 거수경례까지 하는 버릇을 갖기 시작했
다. 2주째 초에는 결국 구급차가 그를 정신병원으로 실어갔다.
레뀌예 과장의 손에서 벗어난 뒤띠욀은 단순히 벽을 드나드는 것만으로 만
족 못하고 새로운 모험에의 욕망이 일어났다.
뒤띠욀이 손을 댄 첫번 강도 사건은 파리시의 세느강 오른 쪽에 있는 큰
은행에서 일어났다. 여러 개의 벽과 담을 통해서 그는 금고 속을 뚫고 들어
가 주머니에 돈을 가득 채워 넣었다. 그는 나오기 전에 '가루가루'라고 빨
간 분필로 표시를 해 두었다.

다음 날 아침, 모든 신문마다 은행강도 사건과 함께 '가루가루'라고 쓴 글
씨가 큼지막하게 실렸다. 일주일이 채 못되어 '가루가루'는 모든 사람들의
입에 올려졌다. 사람들은 그토록 귀신 같이 경찰을 우롱하는 이 천재적인
강도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가루가루'는 밤마다 은행과 보석상을 휩쓸면서 그의 신출귀몰한 솜씨를
알렸다. 유명한 뷰르디갈라의 다이아몬드 사건과 파리 은행 강도 사건이 있
은 뒤로 사람들의 열광은 광란상태까지 이르렀다. 내무부 장관은 사임해야
했고 등기부 장관도 자리를 물러났다.
이제는 파리시의 최대의 부자가 된 뒤띠욀은 여전히 사무실에서는 착실히
일을 했다. 그는 아침마다 동료들이 자기가 전날 밤 세운 공적에 대해 말하
는 것을 남몰래 즐거워 했다.
"그 가루가루 말이야! 참 멋있는 친구야. 천재에다 초인간의 능력을 가졌
단 말이야!"
어느 날 뒤띠욀은 그 이상 비밀을 간직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프
랑스 은행 강도사건을 보도한 신문을 둘러싸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료
들을 바라보고는 그는 수줍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게들. 가루가루란 바로 날세"
뒤띠욀의 둥딴지 같은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동료들은 놀림감으로 그에게
'가루가루'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그런 며칠 후 '가루가루'는 평화 거리에 있는 한 보석상에서 순찰경관에게
붙잡혔다. 벽으로 들어가서 순찰경관을 피하는 것쯤은 쉬운 일니었으나 뒤
띠욀은 일부러 체포되기를 바랬다. 그것은 자신이 바로 '가루가루'라는 것
을 동료들에게 확인시켜 줄 욕심 때문이었다.
동료들은 그 이튿날 신문에 '가루가루'인 뒤띠욀의 사진을 보았을 때 크게
놀라고 말았다. 그들은 천재적인 친구를 알아보지 못했음을 크게 후회하면
서 두;디욀과 같이 조그만 턱수염을 길러 그에게 존경을 표시하였다.
체포된 뒤띠욀은 쌍떼 교도소에 갇혔다. 그는 운명이 자신에게 너무 관대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도서의 벽돌은 그에게 있어 벽을 통과하는 능력을
최대로 발휘할 수 있는 멋진 욜감일 뿐이었다. 그가 투옥된 바로 다음 날
교도관들은 뒤띠욀이 감방 벽에 못을 하나 박고, 거기에다 교도소장의 금시
계를 걸어 놓은 것을 보고는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교도소장의 금시계가
어떻게 감방까지 왔는지를 교도관들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교도관들은 금시계를 주인에게 되돌려 주었지만, 이튿날 교도소장의 책꽂
이에 꽂혀 있던 삼총사의 제 1권과 함께 다시 '가루가루'의 머리맡에서 발
견되었다. 기가 막힐 일이었다. 쌍떼 교도소의 직원들은 기진맥진 했다.
그뿐만 아니었다. 교도관들은 어디에서 날아드는지 알 수 없는 발길질을
곳곳에서 받는다고 투덜대었다. 마치 벽에 발이 달린 것 같다고 말들을 했
다.

'가루가루'가 감금된지 일주일이 되었을 때 교도소장은 자기 사무실 책상
위에 다음과 같은 편지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교도소장 귀하. 소생은 삼총사 제 2권의 독서를 완료한 길이오며, 오늘
밤 11시 25분에서 11시 35분 사이에 탈옥할 예정이옵니다. 가루가루>
그날밤 물샐틈 없는 감시에도 불구하고 뒤띠욀은 11시 30분에 탈옥하였다.
이튿날 아침 시민들에게 알려진 '가루가루'의 탈출소식은 도처에서 열광을
일으켰다.
탈옥한 뒤띠욀은 새로운 강도 사건을 벌여 놓고도 버젖이 몽마르뜨 거리를
걸어다녔다. 사흘 뒤에 그는 한 카페에서 친구들과 포도주를 마시고 있다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다시 쌍떼 교도소로 압송되어 세 겹 자물쇠로 갇힌 '가루가루'는 그날 밤
으로 탈주하여 교도소장의 아파트의 빈 방에서 하루 밤을 잤다.
모욕을 당한 교도소장은 더욱 감시를 철저히하고 빵 한 조각으로 식사를
시키는 형벌을 주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소용이 없었다. '가루가루'는
한 낮 즈음 교도소 옆에 있는 식당에 가서 커피를 마신 다음 교도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소장님이세요.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감옥을 나오면서 소장님
지갑을 집어 온다는 것을 깜박 잊었어요. 식대를 지불 못해 꼼짝달싹 못하
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보내서 계산을 치러 주시겠습니까?"
교도소장은 몸소 달려갔고, 갖은 욕설을 내뱉으며 노발대발 했다. 자존심
을 상한 뒤띠욀은 그날 밤으로 탈출하여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번에는
그도 조심을 하여 검은 턱수염을 깍고 코안경을 조가비테 안경으로 바꾸었
다.

뒤띠욀은 점차 자기의 명성에 대해 싫증나기 시작했다. 쌍떼 교도소의 벽
을 뚫고부터는 벽으로 드나드는 것에 신물이 났다. 가장 두꺼운 벽도 그에
게는 한낱 병풍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이집트의 피라밋 한 복판이나 뚫고 들어가 보았으면 하고 꿈꾸기 시
작했다. 멋진 모험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집트 여행 계획을 짜면서 그는
우표수집과 영화구경 그리고 몽마르뜨를 산보하는 것으로 하루하루를 보냈
다.
그런 어느 날 오후 뒤띠욀은 15분 간격으로 두 번 르삑 거리에서 만난 한
금발 미녀를 갑자기 사랑하게 되었다. 그는 우표수집과 영화구경 그리고 이
집트 여행계획을 즉시로 잊어버렸다.
뒤띠욀은 금발 미녀에게 집으로 찾아가겠노라고 말했다. 금발 미녀는 집안
이 엄격해서 찾아 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그런 것 쯤
은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고는 그날 밤으로 그 여자의 집의 벽과 담을 뚫고
들어가 금발 미녀와 만났다.
며칠 후 뒤띠욀은 매우 심한 두통으로 고통을 받았다. 서랍 속에서 아스피
린 모양의 알약을 발견하고는 아침에 한 알 오후에 한 알을 먹었다.
그날 밤 뒤띠욀은 금발 미녀와 장래를 약속하고는 헤어져 나오면서 그 여
자의 집과 벽을 뚫고 들어 갔다. 그는 허리와 어깨에 평소와는 다른 아주
익숙치 않은 마찰감을 느꼈다.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분명히 마찰감은 담을 뚫고 들어가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아직도 유동적이기는 하지만 끈적끈적해 가며, 애를 쓸 때마다 더욱
몸에 부딪혀 오는 물질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온몸이 벽의 한가운데에 완전히 들어간 후 뒤띠욀의 몸은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공포에 떨면서 그는 갑자기 그날 먹은 두알의 알약을 생각
해 냈다. 아스피린이라고 생각했던 그 알약은 사실 작년에 의사가 처방해준
알약이었다. 약의 효과가 극심한 피로와 겹쳐서 갑자기 나타났던 것이다.

뒤띠욀은 벽의 내부에 엉겨 붙은 것처럼 되어 버렸다. 그는 지금도 그 벽
속에 돌 화석이 되어 있는 채로 있다.
파리시의 소음이 가라앉은 뒤 조용한 시각에 사람들은 무덤 저 편에서 들
려오는 듯한 은은한 목소리를 듣는데 그 소리를 사람들은 몽마르트르 언덕
네거리에서 부는 바람의 하소연으로 여긴다.
사실 그것은 그 영광스러운 생애의 마지막을 슬퍼하는 '가루가루' 뒤띠욀
의 울음소리인 것이다.

- The End -




끝 (The End)
by 프레드릭 브라운 (Fredric Brown)

존즈 교수는 오랜 세월 동안 시간 이론의 연구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교수가 딸에게 말했다.
"그래서 나는 열쇠가 될 방정식을 발견했단다. 시간은 하나의 <자리>야.
내가 만든 이 기계는 그 <자리>를 꺼꾸로 할 수도 있지."
교수는 기계의 버튼을 눌렀다.
"이제 시간은 꺼꾸로 움직일 것이다."
"것이다 움직일 꺼꾸로 시간은 이제."
눌렀다 버튼을 기계의 교수는.
"있지 수도 할 거꾸로 <자리>를 그 기계는 이 만든 내가. <자리>야 하나의
시간은 발견했단다 방정식을 될 열쇠가 나는 그래서."
말했다 딸에게 교수가 날 어느.
있었다 하고 연구를 이론의 시간 동안 세월 오랜 교수는 존즈.

- The End -





20세기 발명기담(Great Lost Discoveries)

by 프레드릭 브라운(Fredric Brown)


제 1화: 잠입술(Invisbility)

20세기가 되자 세가지 위대한 발견이 이루어졌는데, 슬프게도 그 발견은
상실되고 말았다. 이 세가지 발견 가운데 하나가 잠입술의 비결이다.
잠입술의 비결은 1909년에 아치볼트 플레이터가 발견했다. 그는 에드워드
7세가 설탄 압드 엘 크림 궁전으로 파견한 사절로서, 설탄은 오스만 제국과
관계가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소국의 군주였다.
아마튜어이지만 열성적인 생물학자 플레이터는 생쥐에게 여러 가지 혈청을
주사하여 돌연변이를 일으키는 어떤 종류의 주사액을 발견하려고 실험을 거
듭하고 있었다. 이윽고 3019마리째의 쥐에게 주사를 놓았을 때, 그 쥐가 홀
연히 사라져 버렸다. 쥐는 아직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는 손안에 그 존재
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털도 발톱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 쥐를 살짝
우리 속에 넣어두었다. 그러자 두 시간 뒤에 다시 건강한 모습으로 나타났
던 것이다.
다시 주사액의 양을 늘려 살험해 본 결과, 24시간까지는 쥐를 투명하게 해
둘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보다 양을 더 늘리면 쥐는 병이 나거나
풀이 죽었다. 또한 사라졌을 동안 죽이면 그 쥐는 죽는 순간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는 사실도 알았다.
자신의 발견이 중대한 것이라는 점을 자각한 플레이터는, 대영제국에 사표
를 제출하고 하인에게 휴가를 준 다음 실험실에 파묻혀 자기 스스로를 실험
대 위에 올려놓고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2,3 분 동안만 사라질 수 있도록
소량의 주사액을 놓는 데서부터 시작하여 자신의 내성이 쥐와 똑같아질 때
까지 실험을 거듭했다. 24시간 이상 모습을 감출 수 있는 주사를 맞았을 때
는 그도 몸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또 몸의 어느 부분이나 모두---입을 다
물고 있으면 틀니도---보이지 않게 되지만, 중요한 것은 알몸이어야 한다는
것도 발견했다. 옷은 육체와 함께 사라져주지 않았다.
플레에터는 정직한 사람이었고 어느 정도 여유있는 생활을 하고 있었으므
로 범죄에 대한 일은 생각지도 않았다. 그는 영국으로 돌아가 이 발견을 황
제폐하의 정부에 보고하여, 첩보기관이나 전쟁에 도움을 주게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우선 그전에 한 번쯤 재미삼아 장난을 해보기로 했다. 그가 전에
재직했던 설탄의 궁전에는 할렘이 있었는데, 엄중한 감시 아래 접근을 못하
게 했으므로 그는 전부터 그곳에 대해 호기심을 품고 있었다. 안에 들어가
살짝 들여다보면 어떨까?
그러나 그는 자신의 발견에 대하여 뭔가 걱정스러운 일---끈질기게 마음에
달라붙어 도저히 떼어버릴 수 없는 그 무엇을 느꼈다. 어떤 일로 자칫 잘못
하다가는 ... 그러나 머릿속에서는 거기서 한 발자국도 앞으로 더 나가지
않았다. 꼭 한 번 시험해 볼 칠요가 있었다.
그는 알몸이 되어 최대한으로 몸을 숨길 수 있는 양의 주사를 놓았다. 그
리고 무장한 환관 앞을 지나 할렘으로 들어가는 일은 아주 간단했다. 50여
명의 미녀들이 한낮의 일과로서 팔다리와 몸을 아름답게 유지하기 위해 향
유와 향수를 바르는 등 몸을 가꾸고 있는 광경을 바라보며, 그는 즐거운 오
후를 보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한 사카시아 여인이 그의 눈길을 끌었다. 남자라면 누구
나 생각하는 일을 그도 생각했다. 만일 밤까지 이곳에 머물러---다음날 오
후까지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어 있었으므로 절대로 안전했다--- 그 여자에
게서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면 그 여자가 어느 방에서 자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다음 불이 꺼진 뒤 그 여자 방으로 숨어들어가면 그녀는 틀림
없이 설탄의 고마운 행차로 여길 것이다.
그는 그녀를 지켜보고 있다가 들어간 방을 확인하였다. 무장한 환관이 한
사람 커튼으로 칸막이한 문 앞에 서 있고, 나머지는 침실 입구에 한 사람씩
서서 감시하고 있었다. 클레에터는 그녀가 완전히 잠이 들 때까지 기다렸
다. 그리고 환관이 복도 쪽을 쳐다보고 있어 커튼의 움직임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순간에 슬쩍 안으로 들어갔다. 복도의 불빛은 흐릿했다. 그러나 침
실은 캄캄했다. 그는 조심조심 손으로 더듬어 가까스로 침대를 찾아냈다.
살금살금 손을 내밀어 잠들어 있는 여자를 만졌다. 그러자 여자는 비명을
질렀다.(설탄은 절대로 밤에 후궁을 찾는 일이 없었다. 수많은 후궁들가운
데 한 사람, 때로는 몇 사람을 자기 방으로 불러들이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갑자기 밖에 있던 환관이 안으로 뛰어들어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잠입술
에서 단 한가지 성가신 것은 바로 이것이었구나...하고 그는 그제야 깨달았
다. 어둠 속에서는 잠입술이 아무 도움도 주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으로 들은 것은 칼이 휙 공중을 가르는 소리였다.

- The End -




20세기 발명기담(Great Lost Discoveries)

by 프레드릭 브라운(Fredric Brown)


제 2화: 불사신(Invulnerability)

지금은 상실된 위대한 발견 가운데 두 번째 것은 불사신의 비결이다. 이것
은 1952년 미국 해군의 레이다 전문 사관인 폴 히켄돌프 중위가 발견하였
다. 그 기계는 일종의 전자장치로,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있을 만큼 작은
상자 속에 들어 있었다. 상자의 버튼을 누르면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일종의 에너지 권에 싸이게 된다. 그 에너지야말로 히켄돌프의 우수한 계산
눙력으로도 거의 산출해 낼 수 없을 만큼 무한한 것이었다.
또 이 에너지 권은 높은 열이나 많은 양의 방사능도 일체 통과시키지 않았
다. 남녀를 불문하고 또 아이든 동물이든, 이 에너지 권에 들어가 있는 생
물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수소폭탄이 터져도 문제없이 견뎌낼 수 있으며
상처 하나 입지 않는다고 히켄돌프 중위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수소폭탄의 폭발은 없었지만, 그 발명이 완성되었을 무렵 우연히
그는 태평양을 넘어 에니웨록 환초로 향하는 순향함급 배에 타고 있었다.
그런데 이 배는 목적지에서 최초의 수폭 실험에 참가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히켄돌프 중위는 행방을 감추기로 결심했다. 표적으로 삼은 섬에 숨어서
수소폭탄이 터질 때 그 자리에 있어 보기로 한 것이다. 만일 폭발 뒤에도
상처 하나 입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이 발명이 효력이있다는 것, 사상 최강
의 무기에 대해 방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백일하에 입증할 수 있지 않겠는
가?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는 감쪽같이 몸을 숨겨, 초(秒)를 세는 동안에
아주 가까이까지 기어가 수소폭탄이 폭발하는 순간에는 폭발지점에서 불과
몇 야드 안 떨어진 곳에 있었다.
예상은 보기좋게 들어맞아서 중위는 찰과상도 타박상도 화상도 전혀 입지
않았다.
그러나 히켄돌프 중위는 단 한가지, 어떤 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그것이 일어난 것이다.
그는 탈출할 겨를도 없는 속도로 지표에서 날아가 궤도에도 오르지 않고
곧장 위로 올라갔다. 49일 뒤 중위는 태양에 낙하했다. 그래도 상처하나 입
지 않았지만, 불행하게도 이미 오래 전에 숨져 있었다. 중위를 감싸고 함께
날아온 에너지 권에는 불과 두세 시간 몫의 공기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
리하여 그의 발명은 인류에게서 상실되어 버렸다. 적어도 20세기 동안에는.

- The End -



20세기 발명기담(Great Lost Discoveries)

by 프레드릭 브라운(Fredric Brown)


제 3화: 不老不死의 묘약(Immortality)

20세기에 발견되어 상실된 비법의 남은 한 가지는 불로불사의 비결이다.
발견자는 모스크바의 이름없는 화학자 이반 이바노비치 스메타코프스키.
1978년의 일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떻게 발견되었는지, 또 시험해 보기도
전에 효력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그 점에 대해서는 아무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그것은 오로지 스메타코프스키가 두가지 이유에서 이 발견
에 두려움을 품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이 비법을 세상에 내놓기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비록 상대가 자기 나
라 정부일지라도 일단 넘겨주면 비밀은 마침내 철의 커텐에서 새나와 큰 혼
란을 불러일으킬 것이다.소련정부는 무슨 일에나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가
지고 있지만, 그보다 미개하고 질서없는 여러나라에서는 불로불사의 약으로
인한 인구 증대를 피할 수 없을 것이며, 그로 인해 그들은 반드시 공산권의
여러 문명국을 위협하게 될 것이다.
또한 스메타코프스키는 스스로 그것을 복용하기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왜
냐하면 자신이 정말 불로불사의 몸이 되고 싶어하는지 확신을 가질 수 없었
기 때문이다. 소련 안에 있는 현재의 상태에서도---국외의 사정은 제쳐놓는
다 하더라도---영원히 또는 무기한으로 살아갈 가치가 정말 있는 것일까?
그리하여 그는 결심이 설 때가지 당분간 그것을 아무에게도 주지 않고, 도
자기도 사용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는 완성한 1회분의 약을 지니고 다녔다. 그것은 녹지 않는 작은
캡슐에 든 소량의 약으로, 입 안에 넣어둘 수도 있었다. 그는 그것을 틀니
옆에 붙여놓았다. 이렇게 해두면 틀니와 볼 사이에 끼어서 자칫 잘못하여
삼켜버릴 염려도 없었다. 그리고 일단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입 안에 손
을 넣어 엄지손톱으로 캡슐을 터뜨리면 불로불사의 몸이 될 수 있는 것이
다.
이윽고 그렇게 결심할 날이 찾아왔다. 그가 폐렴에 걸려 모스크바 병원에
실려갔을 때의 일이었다. 그가 자고 있는 줄만 알고 의사와 간호사가 나눈
대화를 들은 스메타고프스키는 자기가 두세 시간 안에 죽는다는 사실을 알
았다.
물론 불사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지 모르는 일이지만 죽음의 공포는
불사에 대한 공포보다 한층 더 컸다. 그리하여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을 나
가자 그는 곧 캡슐을 터뜨려 약을 삼켰다.
죽음이 눈 앞에 다가와 있었으므로 그는 약의 효력이 제대로 발휘되어 목
숨을 건질 수 있기를 기도했다.
약은 확실히 효력이 있었다. 그러나 효력을 나타냈을 때는 이미 혼수상태
에 빠져서 의식이 몽롱했다.
그 뒤로 3년. 1981년이 되어도 이 환자는 계속 몽롱한 혼수상태에 빠져 있
었다. 러시아 인 의사들도 마침내 이 병상에 진단을 내려 더 이상 신경쓰지
않게 되었다.
분명히 스메타코프스키는 어떤 종류의 불로불사 약을 삼켰지만, 의사들은
그것을 검출해 낼 수가 없었다. 분석할 수도 없었다.---그러나 약은 앞으로
영원히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무기한으로 그를 죽음에서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 약으로 인해 그를 폐렴으로 끌어넣은 세균, 즉 그의
몸을 좀먹고 있는 폐렴 쌍구균도 불사가 되어 영원히 그 수명을 유지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자 의사들은 현실적이기 때문에, 이 환자를 끝없이 돌
보는 성가신 짐을 질 필요가 없다는 듯이 일찌감치 그를 묻어 버렸다.

- The End -




장갑 낀 손



제임스 홀딩

"녀석은 공갈범이었습니다."
그레이브스 경감은 불쾌한 듯 자그마한 코에 주름을 지으며 말했다.
"그토록 불쾌한 적이 없을 정도지요. 내 마음대로 하란다면, 놈을 살해한
인간에게 비난이나 처벌은 커녕 감사장을 주어 마땅하다고 하겠소."
골라이트리는 난로를 등지고 선채, 바지 주머니 속의 동전을 짤랑짤랑 만
지작 거리며 듣고 있다가 뜻밖이라는 얼굴로 경감을 쳐다보았다.
"공갈범이라뇨? 신문 기사에는 그런말이 없던데요."
"신문에 날리가 없지요, 이번 살인사건에서 발견된 중요한 단서 중의 하나
니까요. 신문에 실리거나 하면 일이 점점 어렵게 되거든요."
"과연 그렇겠군요."
골라이트리는 말하더니 아직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덧붙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무슨 근거로 클리포드가 공갈범이라고 하시는지 저로서
는 잘 모르겠는데요."
"간단한 일입니다. 그의 침실에 걸린 그림뒤에 비밀금고가 있었지요. 그
안에서 피해자 리스트가 발견됐습니다. 클리포드에게 지불한 금액과 날짜가
개인별로 기록되어 있더군요. 대단한 증거물이지요."
"그렇군요."
골라이트리는 동의했다.
"수긍이 갑니다.....그런데 경감께서는 무슨 용건으로 오셨는지요. 짐작이
안 가는군요."
"제가 선생을 만너러 온 이유 말입니까? 골라이트리씨. 클리포드의 리스트
에는 선생의 이름도 있었습니다. 눈이 튀어나올 정도의 금액을 청구받고 있
으시더군요."
"아하, 그랬었군요."
골라이트리는 한때는 호화로웠던 방을 서글픈 듯이 둘러보았다. 지금은 손
질을 하지 않아서 모든것이 먼지투성이었다.
"털어놓고 말하자면, 클리포드가 죽어서 속이 후련합니다."
"선생뿐만 아니라 피해자 전부가 그러더군요. 아니, 클리포드의 내막을 들
려주면 누구라도 우선은 그런 말을 하지요. 우리는 한 사람씩 만나서 사정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해하시리라 생각합니다만, 피해자 전원이 살인용의자
리스트에 올라있는 상태랍니다."
"그렇다면 아직 범인을 모른다는 뜻이겠군요?"
"현재로서는 그렇습니다. 클리포드의 피해자 모두가 살인이 있던 날 밤에
알리바이가 완전합니다."
경감은 괴로운 듯 말하고는, 살피는 듯한 시선으로 골라이트리를 바라보았
다.
"당신도 알리바이가 있으신지요? 골라이트리씨."
순간 골라이트리는 움찔하는것 같았다.
"지난주 토요일 밤이었지요?"
"아닙니다. 금요일 밤 열시 에서 열두시 사이입니다."
"금요일이었습니까? 잠깐 생각 좀 해봐야겠군요. 에...."
골라이트리는 미간을 찌푸리고 기억을 더듬더니 이윽고 빙그레 웃었다.
"그래요! 내게도 알리바이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
면 그날 함께 있었던 여자의 이름은 밝힐수 없습니다. 클리포드가 저를 협
박한 것도 그 여성과의 관계 때문이었지요, 다만 이것만은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만, 그 여성은 신분이 높은 분으로 아직까지 스캔들에 휘말린
적이 없습니다. 나로서도 괴로운 일입니다만 이해해 주시겠지요?"
경감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잘 알겠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 경찰이 쫓고 있는 수사의 선이 막혀버
린다면, 그때는 선생이 말한 '꼭 필요한 경우'에 해당됩니다. 그점만은 명
심하셔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골라이트리는 머리를 숙여 보였다.
"그런데,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아서는 뭔가 단서를 잡고 계신것 같은데
요?"
"한가지 있지요. 범인은 클리포드를 죽이고 도망갈때 바깥 쪽 창문턱에 피
묻은 지문을 남겨 놓았습니다."
"피묻은 지문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신문에 실렸듯이 클리포드는 책갈피를 자르는 페이퍼 나이프
에 찔려 죽었습니다. 살인 현장을 피바다였지요..."
골라이트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둔해서 잘 알아듣지 못하겠는데.....그런 지문이 남아 있었다
면.....그 지문으로 범인의 신원을 알아낼 수 있지 않습니까?"
경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선명하게 남아 있기만 한다면 확실한 단서가 됩니다만, 유감스럽게
도 그 핏자국 지문은 선명한 것과는 거리가 멀답니다. 아주 희미했지요. 설
령 그 지문이 선명했다 하더라도 문제가 어려워 지는건 역시 마찬가지 였겠
지만요."
"어렵게 되다니, 무엇이 말입니까?"
"그 창문 턱에 지문을 남긴 녀석은 장갑을 끼고 있었으니까요."
골라이트리는 좀 놀란듯 했다.
"장갑이라고요? 그렇다면 아무리 흔적이 남아 있다 해도 소용이 없겠군요.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잖습니까?"
"힘들게 되었다고 했지 모른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경감은 단호히 말했다.
"장갑을 끼고 있었다 해도 그 흔적으로부터 중요한 정보를 얻어 낼수 있었
으니까요."
"경찰의 수사능력에는 정말 감탄하지 않을 수 없군요. 대체 장갑 낀 손자
국에서 어떤것을 알 수 있었습니까?"
경감은 손가락을 꼽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우선 클리포드 살해범이 끼고 있던 장갑은 상당한 고가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고배율로 확대해서 살펴보았지요. 그 장갑은 섬유 제품으로
실로 짜서 만든 것이었고, 재질은 보통 면사가 아니라 최상품 실크였습니
다. 둘째로, 바느질 솜씨가 매우 훌륭했고 공이 많이 들었다는 거지요. 그
래서 우리의 감식결과, 그 장갑은 수제품이며 그중에서도 특별 주문품이라
고 단정지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물건을 만들 만한곳은 전통있는 맞춤집이
라는것도요."
"참으로 탄복할 일이로군요."
"나 자신도 과학 수사의 발전에 가끔 놀라지요."
경감은 기분좋은 듯이 말했다.
"아뭏튼 지금 말씀드린 특징에 의한 수사방침이 정해졌지요."
"그래서 그선을 쫓아 수사를 하겠군요."
"그렇습니다. 내가 직접 시내를 샅샅이 조사했습니다. 베이커 스트리트에
서 조금 들어간 곳에서 모든 조건에 들어맞는 장갑 맞춤집을 찾아냈지요.
그 집에서 그 특제 장갑을 맡들었다는 것도 확인했고, 필요한 때는 언제라
도 증언을 해주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장갑은 여러켤레 만들지 않겠습니까?"
골라이트리의 질문에 그레이브스 경감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게 그렇지가 않더군요. 제가 말한 장갑은 오직 한 켤레밖에 만들지 않
았답니다. 몇년 전에 단 한 켤레만요. 게다가 다행스럽게도 그것을 주문한
고객의 이름과 주소를 적은 장부가 남아있었습니다."
"사실입니까? 그것 참 행운이었군요, 경감. 하지만 당신에게는 행운이었지
만 내게는 그렇지가 못하군요."
골라이트리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씁쓸하게 웃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대체로 수사가 종결될지 어떨지는 손을 보면 판별한 수 있는 시점까지 와
있다는 말이군요."
그레이브스 경감은 미안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으시다면....보여주시겠습니까?"
골라이트리는 동전을 만지작 거리던 동작을 멈추고 바지 주머니에서 천천
히 양손을 뻬내더니 그레이브스 경감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오른손은 손가
락이 여섯 개 였다.




존 딕슨 카를 읽은 사나이


윌리엄 브리튼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지만 에드가 골트의 인생은 그 나이 열두살 때 동네
대본점에서 무심코 존딕슨 카의 <테니스 코트의 살인>을 집어 들었을 때 그
목표와 방향이 정해졌다. 그날 저녁밥을 먹은 뒤 그는 책을 들고 앉아 잠자
리에 들 시간까지 읽었다. 종내는 책을 몰래 자기 방까지 들고 가 이불속에
서 회중 전등을 비쳐가며 읽었다.
다음날 대본점에 책을 반납하러 가서는 카가 쓴 다른책 <아라비안 나이트
살인>을 빌려왔다. 이것을 다 읽는데는 이틀이 걸렸는데 - 보모가 회중 전
등을 압수했기 때문이다. 일주일도 못되어 그는 대본점에 비치된 존 딕슨
카의 추리소설을 모조리 독파했다. 마지막 책을 끝낸 날 우울했던 그의 기
분은, 좋아하는 작가가 '카터 딕슨'이라는 필명으로도 책을 썼다는 사실을
알고는 곧 밝아졌다.
다음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에드가는 '기디언 휄 박사''헨리 메리베일 경'
등의 명탐정을 따라, 존 딕슨 카 및 카터 딕슨의 명의로 된 모든 밀실 사건
을 섭렵했다. <겁이 무언지 모르는 사나이>를 읽던 중 저자가 슬슬 사건을
해명할 때가 되었을 즈음, 고등학교 물리시간에 배운 도피점의 지식을 이용
하여 한 발 앞서 수수께끼를 풀었을때는 정말 그 기쁨이란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에드가가 중대한 결단을 내린것은 십중팔구 그 때였으리
라.
이 몸 에드가 골트 께서는 언젠가는 밀실 살인을 행해 보리라. 그 방면의
대가인 딕슨 카 본인 조차도 아리숭하게 만들 그런 범행을.
고아였기에 에드가는 버몬트의 한갓진 구석 다 쓰러져 가는 큼직한 집에서
삼촌과 함께 살았다. 집에는 추리 작가에게는 혜택이랄 수 있는 서재뿐만
아니라, 현대식 주책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몇가지 시설도 있었다. 그렇
지만 서재의 창문들은 빗장을 지르게 되어 있었고, 안으로 열리게 된 5센티
미터 두께의 떡갈나무 문 또한 양쪽 벽에 단단히 박힌 두개의 강철 고리 사
이로 육중한 나무 빗장을 질러 넣어야만 잠길수 있도록 되어있었다. 비밀
통로 같은 건 없었다. 요컨대 이 방은 카의 명탐정 중 누구라도 만족시킬
만 했으며, 에드가에게는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었다.
희생자는 물론 삼촌인 다니엘이 될 터였다. 편리하게도 늘 곁에 있을 뿐만
아니라, 에머슨의 '자립철학'의 신봉자였던 까닭에 조카인 에드가 또한 그
와 같은 행복한 상태를 이루도록 돕고자, 머지 않은 장래에 이 ㄳ은이를 자
기 뜻에 맞춰 인생길을 걷게 하려고 작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에드가는 삼촌이 평생 쌓아올린 부정 축재를 마음껏 탐닉할 준비가 100퍼
센트 되어 있었으므로, 노인데가 유언장을 변경하기 전에 그를 해치우는 것
은 전적으로 본인 마음먹기에 달린 일이었다.
이와 같은 사정으로 해서 이른 봄의 어느 화창한 날, 에드가는 서재의 벽
난로 속에 들어서서 검댕이를 뒤집어써 가며 굴뚝 안쪽을 반짝반ㄳ 닦고 있
었다.
굴뚝은 물론 에드가가 밀실에서 탈주하는 수단이었다. 그것은 그의 날씬한
몸이 빠져 나가기에 딱 좋으리만큼 넓었으며, 청소하기에 편하도록 안쪽에
쇠사다리가 달려 있었다. 굴뚝을 통한 탈주 경로는 에드가를 다소 실망시켰
던, <세개의 관>에 실린 저 유명한 밀실 강의에서 기디언 휄 박사가 그런
방법은 제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이용가능한 유일한 탈출구였기
에, 에드가는 존 딕슨 카 조차도 틀림없이 인정할 수있도록 이를 멋지게 이
용할 계획을 생각해 냈다. - 어쩌면 에드가 어르신네도 본인의 범죄에 관해
기술한 책을 한권 증정받게 될지도 모른다. 카의 <에드먼드 고드프리 경 살
해>와 같은.
자신이 즉각 범행의 용의자로 의심받으리라는 점에 대해서는 에드가는 걱
정을 하지 않았다. 그의 준비 작업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 다니엘 삼촌
은 사업차 출장중이고, 요리사와 정원사는 휴가중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범
행이 일어났을때, 에드가는 나무랄 데 없는 증인을 둘이나 확보하고 있을
터였다. 이 몸은 고사하고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범인이 될 가능성이 없노라
고 증언해 줄 사람을.
굴뚝 청소를 마치자 에드가는 양동이 하나 가득한 물을 부엌으로 가져가
하수구로 흘려 버렸다. 그리고 나서 온몸을 구서구석 씻어 검댕을 없애고
는, 이불장으로 가서 새로 빨아놓은 이불호청을 꺼내 가지고 서재로 되돌아
갔다. 이불 호청으로 온몸을 감싸고는 쇠사다리를 오르기 시작했다. 꼭대기
에 이르자 다시 내려오면서, 툭하면 걸음을 멈추고 일부러 이불호청을 굴뚝
안 벽에 문질러 댔다. 서재로 돌아나오자 창문으로 가서는, 이불 호청을 벗
어 햇빛에 쳐들어 보았다. 주름은 좀 갔지만 여전히 하얗게 반짝이고 있다.
에드가는 싱긋 웃으며 이불 호청을 뚜껑달린 광주리에 넣었다. 그리고는 이
충으로 올라가서 굴뚝 옆 다락방의 창문 걸쇠를 벗겨 놓았다. 이것이 끝나
자 자기 방으로 돌아와, 범행을 위해 특별히 선택한 의상으로 갈아입었다-
흰 와이셔츠에 흰 바지, 그리고 흰 운동화 차림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벽에
걸린 기병대용 군도를 내려 서재로 가져가서는, 어두컴컴한 구석에 세워 놓
았다.
준비는 거의 완료되었다.
그날 이른 저녁 음악실의 소파에서, 에드가는 삼촌이 귀가하는 소리를 들
었다.
"에드가, 집에 있냐?"
뉴잉글랜드 지방 특유의 콧소리를 내는 다니엘 삼촌의 음성은 200년 동안
명맥을 이어온 버몬트의 모든 조상을 대변하고 있었다.
"저 여기있어요. 삼촌, 음악실이요."
"또냐?"
문틈으로 들여다 보며 다니엘은 말했다.
"넌 그게 탈이란 말이다, 이놈아. 세상에 나가 출세할 생각은 않고, 허구
헌 날 그 놈의 기타나 두드려 대니....이놈아, 일이 먼저야. 대성공을 하려
면 일밖에 없어."
"삼촌도 참, 하루종일 일 때문에 뛰어다녔는 걸요. 끝난 지 한시간도 안됐
단 말예요."
"아무튼 내가 유언장에 관해 말한 건 정말이란 걸 명심해. 그렇지 않아도
오늘 저녁 스토퍼가 놀러오면 그 문제를 얘기할 생각이다."
다니엘 삼촌과 레뮤얼 스토퍼, 그리고 해롤드 크라울리 의사가 주말마다
벌이는 브리지 게임에, 내기키는 않았찌만 인원수를 채우기 위해 대개는 에
드가도 끼었는데, 이 게임조차도 '계획'의 일부로 들어 있었다. 완전 범죄
일지라도 그 완벽함을 보아줄 목격자를 필요로 하는 법이다.
얼마 후 에드가가 서재의 벽난로에 장작을 한아름씩 세번 갖다놓고, 마지
막으로 주머니에서 꺼낸 작은 병을 땔감에 보탰을 때- 현관문을 두드리는
육중한 노커 소리가 세번 울렸다. 이것을 시보로 삼아 그는 시계를 맞췄다.
일곱시 정각이다.
"손님들을 음악실로 안내하고 편히 모셔라."
다니엘 삼촌이 일렀다.
"마실것을 대접하고 게임 준비를 해 놔. 내 곧 가마."
"왜 손님들이 늘 삼촌을 기다려야 하죠?"
에드가가 물었다. 제 딴에는 이마를 찌푸린다는 게 능글맞은 표정이 되어
있었다.
"내가 원한다면 저 사람들은 언제까지라도 기꺼이 기다릴 게다. 자기들의
수입이 대부분 어디서 나오는지 잘 알고 있으니까."
이리하여 에드가가 세운 계획의 일부가 또 한번 멋지게 들어맞았던 것이
다.
낡은 저택에 들어서며 레뮤얼 스토퍼는, 늘 그렇듯이 다니엘 삼촌의 막대
한 재산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것이라면 무엇이든 노골적으로 헐뜯기 시작
했다.
"흰 옷에 흰 신발이라. 온통 하얗구만."
그는 에드가의 옷차림을 보고 빈정댔다.
"자네 꼭 식당 웨이터 같네 그려."
"그 친구 말에 신경쓸거 없네."
바깥에서 다른 음성이 말했다.
"좋은데 뭘그래. 테니스 치고 있었나?"
크라울리 의사가 흐느적거리며 들어와서는 상냥하게 웃었다. 그를 보면 에
드가는 언제나 큼직한 해파리가 생각났다.
"꼬마한테 알랑거려 봤자 이젠 소용없어."
스토퍼가 말렸다.
"다니엘은 오늘밤 유언장을 바꿀 생각이라구."
"그래?"
크라울리는 놀랐다.
"그거 안됐는걸, 꼬마, 아니 자네."
"그렇습니다. 삼촌도 이미 그 결정에 대해서 말해 주셨지요."
에드가는 말했다.
"저도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이 마당에 동기를 너무 눈에 띄게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손님들을 음악실로 안내하면서, 에드가는 평소와는 달리 그들을 서재쪽으
로 끌고 갔다. 대수롭지 않은 것 같지만중대한 변경이다. 그는 문앞에서 소
리쳤다.
"삼촌, 크라울리 선생님과 스토퍼 아저씨가 오셨는데요."
"알고있어."
다니엘이 으르렁거렸다.
"음악실로 모셔라. 내 곧 갈테니까."
이것으로 두 손님은 다니엘 삼촌이 펄펄 살아있는 것을 목격한 셈이다. 이
제 준비 완료였다.
음악실에 가자 에드가는 술을 따르고 게임 준비를 했다. 그러더니 문득 눈
을 크게 뜨며 손가락을 딱 튀겼다. 방금 뭔가 생각난 사람의 표정을 완벽하
게 연기한 것이다.
"카드를 이층에 두고 왔나 봐요. 가서 가져올께요."
그리고는 손님들의 대답도 듣지 않고 방을 나갔다.
일단 문을 나서자 에드가의 걸음은 빨라졌다. 8초 후에는 서제 문 앞에 이
르렀다. 삼촌의 놀란 얼굴은 무시하고 구석에서 칼을 집얻들고는 성큼성큼
삼촌이 앉아있는 책상 앞으로 갔다. 다니엘은 아직도 손에 신문을 든 채로
였다.
"너 이게 무슨...?"
한마디 말도 없이 에드가는 칼을 뻗어 힘껏 삼촌을 찔렀다. 칼끝은 다니엘
의 칠면조 같은 목을 턱 바로 밑에서 뚫고 들어가, 목을 관통하여 의자 등
에 박혔다. 노인의 몸은 그대로 고정되었다. 카아의 <뉴게이트의 신부>에
비슷한 장면이 있던 것이 생각나, 에드가는 쿡쿡 웃었다.
그는 몇 초 동안 칼을 쥔채 그대로 있었다. 이윽고 조심스레 죽은이의 맥
을 짚어 보았다. 없었다. 살인은 계획대로 정확히 수행된 것이다- 70초 만
에.
서둘러 벽난로로 가자 에드가는 아까 미리 놓아 두었던 작은 병을 집어들
었다. 그리고는 풍성하게 쌓여있는 장작과 불쏘시게를 헤치고 들어가, 난로
앞의 큼직한 칸막이를 제자리에 밀어다 놓고는, 굴뚝을 오르기 시작했다.
꼭대기에 이르자 시계를 보았다. 스토퍼와 크라울리 곁을 떠나온 지 2분이
경과하고 있었다.
굴뚝 옆 지붕 위에 서서, 에드가는 병 속에서 작은 종이 쪽지를 몇게 꺼냈
다. 이것은 2차 대전 당시의 파괴공작에 관한 책을 보고, 거기 적힌 제조법
대로 그 자신이 직접 만든것이었다. '명함'이라고 일컬어진 이들 종이쪽은
공기중에 노출되면 이내 불이 붙도록 되어 있었다. 전쟁중 그들은 이것을
비행기에서 뿌려 적의 밀밭에 불을 질렀던 것이다. 에드가는 불붙는 시간이
한결 단축되도록 만들었으므로, 이 종이쪽들이 서재의 벽난로에 떨어질 즈
음에는 불이 붙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종이쪽들을 굴뚝 아래로 떨어뜨리고 잠시 기다렸다. 애 쓴 보람이 있
어서 이윽고 일진의 뜨뜻한 바람이 굴뚝을 통해 불어 올라왔다. 3분 10초.
정확히 예정대로다.
에드가는 경사진 지붕을 따라 움직여 조각으로 장식된 큼직한 처마 밑에
이르렀다. 거기 다락방 창문이 있었다. 지붕 가장자리에서 조심스럽게 조금
씩 발을 옮기며, 창을 밀어올리고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먼지나 흙이 옷에
묻지 않도록 주의하면서.....이윽고 자기 방으로 가서는 미리 놓아 둔 새
카드를 집어 들고는, 발소리도 요란하게 층계를 내려가 음악실로 갔다. 그
는 방을 나간지 5분이 좀 못 되어 다시 두 손님과 어울렸다. 역시 예정 그
대로다.
에드가는 잠시나마 자리를 비운데 대해 사과하며, 검댕하나 묻지 않은 자
기 옷을 살펴보고는 내심 흐믓했다. 어떻게 이몸이, 바야흐로 연기를 풀풀
뿜어대고 있는 굴뚝속을 방금 지나온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랴.
곧 스토퍼가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이 친구 대체 뭘 하는거야?"
"가서 데려와야 겠군."
크라울리도 말했다.
두사람이 일어서자 에드가는 보란듯이 하품을 했다.
"전 여기 그냥 있겠습니다."
태연한 척 애썼지만 가슴은 두방망이질을 치고 있었다.
존 딕슨 차도 나를 자랑스럽게 여길 거야- 스토퍼와 크라울리가 방을 나가
자 에드가는 생각했다. 그는 이 범죄의 수사과정에서 무슨 초자연 이론 따
위가 끼여들지 않기를 바랐다. <화형 법정>을 읽을때 해결부에서 마술을 강
조한 걸 보고는 실망했던 기억을 떠올렸던 것이다.
'이상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고함소리도 문을 부수는 소리도 들려오지 않
았다. 두 노친데가 육중한 서재 문을 뚫고 들어가려면 무언가 소리가 나야
할게 아닌가. 그러나 걱정할 것은 없었다. 계획은 완벽해서 물샐틈 없었으
니까. 이야말로......
음악실 문간에 레뮤얼 스토퍼가 모습을 드러냈다. 피곤하고 지친 몰골이었
다. 손에는 다니엘 삼촌의 책상에서 꺼내 온 권총을 들고 있었다.
"삼촌의 재산이 그렇게도 탐나던가?"
스토퍼는 물었다. 충격과 분노로 떨리는 음성이었다.
"그래서 일을 저질렀나?"
일순간이었지만 에드가는 스토퍼가 어떻게 그리도 빨리 서재에 들어갈 수
있었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러자 불현듯 짚이는게 있었다. 화살같이
흘러가는 한순간, 정신병자로 행세하면 혹시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모처럼 계획한 완전범죄를 누가 인정해 주
랴. '휄 박사'는 이제 날 어떻게 볼것인가? '헨리 메이베일 경'은 또 뭐라
고 할까? 아니, '존딕슨 카'본인은 어떻게 생각할까?
밀실 살인이랍시고 저지른 범인이 문을 잠그는 것을 잊었다면, 대관절 사
람들은 뭐라고 할까?



스테이크(Unfortunately)

by 프레드릭 브라운(Fredric Brown)



랠프 NC-5는 앨크투르스(목동자리에서 가장 큰 별)의 제 4혹성을 관측장치
에 잡아놓고 후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계산기가 나타낸 자리에
있었다. 앨크투르스의 혹성 가운데 이 제4혹성에만 생물이 생존 할 수 있
다. 아니, 현재 생물이 생존하고 있는 혹성으로, 이웃 성좌까지 여러 광년
의 거리가 있다.
랠프 NC-5는 식량이 필요했다---연료와 물의 걱정은 없었지만, 명왕성의
병참부가 그의 정찰 로켓에 식량을 실을 때 실수를 한 것이다---우주편람에
의하면 앨크투르스 혹성의 주민들은 우호적이라고 한다. 무엇이든 그가 바
라는 것을 제공해 줄 것이다.
우주편람은 그 점을 분명히 명시해 주고 있다. 그는 자동착륙 조종장치를
맞추기도 귀찮아, 다시 한 번 앨크투르스 인에 관해서 쓴 짧은 귀절을 읽어
보았다.
앨크투르스 인은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아주 우호적이다. 그 별에 착륙한
비행사는 팔요한 것을 요구하기만 하면 된다. 그들은 군말없이 순순히 제공
해 준다. 그리고 그들과의 대화는 필담(筆談)으로 해야 한다. 그들에게는
성대도 청각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어를 읽고 쓰는 일은 비교적 능숙
하다.

닷새 동안이나 부족한 식량으로 지냈고, 요 이틀 동안에는 완전히 음식과
인연을 끊고 지냈으므로 우선 무엇을 먹을까 생각하니 랠프 NC-5의 입 안에
군침이 돌았다. 병참부가 로켓의 저장실에 식량을 실을 때 잘못을 저질렀다
는 것을 그가 발견한지 이미 1주일이 되어 있었다.
음식---맛있는 음식이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랠프 NC-5는 착륙했다. 열 두명 가량의 앨크투르스 인이 다가왔다.---분명
히 그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키 12피트에 팔이 여섯 개나 있고, 빛깔은 선명한 진홍빛이었다. 그 중에
서 지도자가 인사를 하고 종이와 연필을 그에게 주었다.
그는 갑자기 자기가 바라는 것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는 허둥지둥 적어
서 종이를 돌려주었다.
그들은 그것을 차례차례 돌려가며 읽었다.
그러더니 느닷없이 덤벼들어 그를 붙잡아서 양쪽 팔을 묶었다. 그리고 그
들은 랠프를 스테이크(Stake-말뚝)에 붙들어매고 둘레에 나무며 나뭇가지들
을 갖다 쌓았다. 그리고 한 사람이 불울 붙였다.
그는 비명을 지르고 항의했으나 그들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본디 귀가 없
는 것이다. 그는 너무 고통스러워 소리를 질렀지만, 이윽고 그 비명도 끊어
지고 말았다.
앨크투르스 인은 영어를 읽고 쓰는 데 상당히 능숙하다고 기록한 우주편람
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이 철자에는 서투르다는 것을 생략해 놓았
었다. 그것만 써놓았더라면 랠프 NC-5는 갓 구워진 스테이크(Steak) 같은
것은 절대로 바라지 않았을텐데....
- The End -





마술 반지 (The Ring Of Hans Carvel)

by 프레드릭 브라운(Fredric Brown)


* 라블레의 작품에서--약간 현대적으로 다듬은 이야기

옛날 프랑스에 한스 칼베르라는 사나이가 있었습니다. 한스는 나이를 좀
먹기는 했지만 보석상으로서 부자였습니다. 한스는 일을 열심히 했으며, 교
양이 있을 뿐만 아니라 호감이 가는 사나이였습니다. 또 한편 여자라면 정
신을 못 차리는 형편이었습니다. 별로 금욕생활을 한 것도 아니고, 이렇다
하게 기회를 놓친 것도 아닌데 어찌된 일인지 이 나이가 되도록 독신이었습
니다. <이 나이>란 늙어서 한창인 60살로 해둡시다. 무엇이 한창인지는 제
쳐두고....
이 나이에 한스는 어떤 대관의 딸과 사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젊고 발랄한
미인으로 임금님 앞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처녀였습니다.
한스는 그 처녀와 결혼했습니다.
더 바랄나위없는 행복한 신혼의 몇 주일이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한스의
걱정은, 이 아름다운 아내가 너무 지나치게 발랄한 것이 아닌가, 좀 지나치
게 기운찬 게 아닌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한스가 아내에게 바칠 수 있는 것---얼마든지 있는 돈 이외의 것---이 어
쩌면 아내를 만족시킬 만큼 충분하지 못한지도 모릅니다. 그런지도 모른다
고? 아니, 사실이 그러했습니다.
이러한 한스의 의심은 이윽고 아내가 사랑의 영위를 몇 사람의---어쩌면
그 이상의---젊은 남자들과 접촉하는 것으로써 채우고 있다는 사실로 확인
되었습니다.
한스는 괴로와했습니다. 사실 그는 밤마다 미칠 듯한 악몽에 시달렸습니
다. 어느날 밤 꿈 속에서 한스는 악마와 이야기를 했습니다. 악마에게 자기
의 고민을 털어놓고 <무엇이라도 좋으니> 뭔가 아내의 정절을 보장해 줄 수
있는 것을 옛부터의 대상(代償)과 바꿔줄 수 없겠느냐고 말했습니다.
꿈속의 악마는 두말없이 승낙하고 말했습니다.
"마술의 반지를 주지. 잠이 깨면 자네 손가락에 있을 걸세. 자네가 이 반
지를 끼고 있는 한 아내는 자네 허가 없이 몰래 바람을 피우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걸세"
악마는 사라지고 한스 칼베르는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그 반지를 끼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악마의 약속은 정
말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젊은 아내도 똑같이 잠이 깨어 뭔가 초조해 하고 있더니 이윽고 한
스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손가락은 안돼요. <잘못 생각한 거에요>"

- The End -



보복 우주선대 (Vengeance Fleet)

by 프레드릭 브라운(Fredric Brown)


그들은 암흑의 우주에서 상상할 수도 없는 거리를 날아 찾아왔다. 그리고
금성 상공에서 집결하여 이 혹성을 파괴했다. 이 혹성에 있는 2백 50만명의
인간과 지구에서 온 입식자는 눈 깜짝할 사이에 죽어버렸고, 금성에 서식하
고 있던 식물과 동물도 운명을 함께했다.
그들의 병기는 이 갑작스러운 불운을 겪은 혹성의 대기 그 자체를 태워서
흩뜨러뜨릴 만한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었다. 금성에는 이것을 물리칠 만한
준비도 없었고 무방비상태인데다 적이 너무도 갑자기 쳐들어와 신속하고 파
괴적인 성과를 올렸으므로, 꼼짝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태양을 등지고 다음 혹성인 지구를 향해 떠났다. 그러니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지구에서는 방위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물론 침략자가 태양
계에 돌입한 지 몇분 안에 준비가 갖추어진 것은 아니다. 그 당시 2820년의
지구는 화성에 건설한 식민지와 교전상태에 있었으므로 그 싸움을 위한 방
위태세였다. 화성의 식민지에는 본국인 지구의 반가량이나 인구가 증가했으
며, 마침 이 무렵에는 독립전쟁이 한창 심했을 때였다. 금성이 습격을 받았
을 때, 지구와 화성의 우주선대는 전투를 위해 달 근처로 이동해 있었다.
그러나 이 전투는 역사상 그 예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빨리 끝났다. 갑자
기 전투를 멈춘 지구와 화성의 연합 우주선대는 침략자를 물리치기 위해 출
격했다가 지구와 금성 사이에서 적을 만났다. 이쪽은 수에 있어 압도적으로
우세했으므로 침략자의 우주선대는 우주에서 산산히 부서져 완전히 소멸했
다.
그리고 24시간 안에 지구의 수도 알브켈크에서는 화성과 지구 사이의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화성의 독립을 승인하고, 양쪽이 영구동맹을 맺어 외적
의 침략에 대처한다는 조건 아래 체결된 확고하고 항구적인 평화조약이었
다. 바야흐로 화성과 지구는 태양계 안에서 사람이 살 수 있는 오직 두 개
의 혹성이었다. 그리고 이미 보복 우주선대의 계획도 짜여 있었다. 적의 근
거지를 찾아내어 그들이 다른 선대를 내보내기 전에 전멸시키자는 것이었
다.
지구와 그 상공 2,3 천 마일을 순찰 중인 우주선에 설치된 계기가 외적의
칩입을 탐지하였으나 금성을 구원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계기는 외적이 온
방향을 나타내주었으나 정확한 거리를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아뭏든 적이
아주 먼 곳에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먼 거리를 찾아왔다는 사실만을 나타
내주고 있었다.
만일 C 플러스 동력장치---즉 우주선이 빛의 속도보다 몇 배나 빠른 속력
을 낼 수 있게 하는 동력장치---가 때마침 발명되지 않았다라면 갈 수도 없
을 정도로 먼 거리였다. 이 장치는 아직 이용된 일이 없었다. 왜냐하면 지
구나 화성은 모두 최대한의 자원을 두 별 사이의 전쟁에 투입했고 초광속을
내려면 방대한 거리가 필요했으므로, C 플러스 동력장치는 태양계 안에서는
아무 잇점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 비로소 이것을 이용할 명확한 목적이 생겼다. 적의 본국인 혹
성을 공격하여 완전히 소멸시키기 위해서 지구와 화성은 협력하여 양측의
기술을 합쳐 C 플러스 동력장치를 설치한 우주선대를 만들었다. 그 완성을
보기까지 10년니 걸렸다. 그리고 다시 적의 본거지에 도착하려면 10년이 걸
릴 것으로 추정되었다.
수는 많지 않지만, 아주 강력하게 무장한 보복 우주선대는 2830년에 화성
항을 출발했다. 그러나 그 뒤로 아무 소식도 없었다.
1세기나 지난 뒤에야 보복 우주선대의 운명이 밝혀졌다. 위대한 역사가이
며 수학자인 존 스펜서 4세의 연역적 추론에 의해 비로소 해명된 것이다.
스펜서는 이렇게 썼다.
"초광속으로 진행하는 물체가 시간에 역행한다는 사실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바이며 또 알려진 지도 오래 되었다. 그러므로 보복 우주선대는 우리
의 개념에 의하면 출발하기도 전에 목적지에 도착한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의 차원은 미지수이다. 그러나 그 보복
우주선대의 경험에서 역행적으로 추론할 수는 있다. 우주는 적어도 한 방향
에 있어서는 C의 C승(乘) 마일의 원주이던가 아니면 직경이다. 이 두가지의
뜻은 똑같다. 10년 동안 그 우주선대는 공간에서는 전진하고 시간에서는 역
행하며 186, 334, 186, 334마일의 거리를 진행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 우주
선대는 일직선으로---말하자면 우주를 일주하고 10년 전의 출발 지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최초로 만난 혹성을 파괴하고 다음 목표로 향하던 도중에
제독은 갑자기 진상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공격해 오는 우주선대
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지구와 화성의 연합선대가 그들 앞에 도착하는 순간
에 공격중지 명령을 내렸을 것이다.
참으로 경탄할 만한 일은---언뜻 보기에는 모순된 것 같지만 보복 우주선
대가 제독 바알로의 인솔을 받고 있었으며, 그 바알로가 동시에 지구 대 화
성 전쟁 때 활약한 지구선대의 제독이엇고, 또 지구와 화성이 일체가 되어
침략자로 지목되는 상대를 쳐부수던 때 활약하던 보복 우주선대의 제독이었
다는 사실, 또 그날 두 선대에 탑승했던 다른 승무원도 뒤에는 보복선대의
승무원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만일 바알로 제독이 항행이 끝날 무렵에, 즉 금성을 파괴하기 전에 그 혹
성이 사실은 금성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어떤 사태가 일어났을 것인가를 생
각해 보는 것도 매우 흥미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추측은 무익하다. 제
독은 그런 일을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금성을 파괴하
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면 그는 복수를 위해 출격한 우주선대의 제독으로
서 그 자리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 과거를 바꾸는 일은 불가능하다"

- The End -






독신 귀족
원 작: 코넌 도일(1859-1930)
제 1 장


세인트 사이먼 경의 결혼과 그 뜻하지 않은 파국에 대한
이야기는 벌써 끝나, 그 불행한 신랑이 속한 상류사회에서
도 이미 화제에 오르지 않게 되었다. 새로운 스캔들이 잇
달아 생겨 사람들의 흥미를 끌고 참신한 사건의 추이가 화
제의 씨앗이 되어 4년 전의 드라마 따위는 거들떠보지 않
게 된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세상은 아직 이 사건의 진상을 모르
고 있는 게 확실하며, 또 사건 해결에 있어 내 친구 셜록
홈즈의 역할이 컸으므로 그의 회상록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비록 간단하게나마 이 특별할 만한 사건을 다루어야겠다고
생각된다.
내가 결혼하기 2,3주일 전---- 아직 홈즈와 함께 베이커
거리의 하숙에 살고 있었던 무렵 어느 날, 오후의 산책에
서 돌아온 홈즈는 그 앞으로 온 편지가 한 통 책상 위에
얹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날은 별안간 비가 올 듯이 흐려지고 강한 가을바람마
저 불기 시작했으므로 나는 하루 종일 집에 틀어박혀 있었
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종군했을 때, 종군 기념으로 한
쪽 다리에 넣은 채로 둔 지제일 탄환 상처자국이 끈질기게
욱신욱신 아프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는 안락의자에 앉아 맞은편 의자에 두 발을 얹고 산더
미 같은 신문을 옆으로 밀치고 책상 위에 놓인 봉투의 커다
란 문장과 머리글자를 바라보며 대체 어느 귀족에게서 온
것일까 멍하니 생각하고 있었다.
홈즈가 돌아왔으므로 나는 말을 건넸다.
「여, 고귀하신 분으로부터 편지가 왔다네. 아침에 온 것은
아마 생선가게와 세관원으로부터였었지?」
그는 싱글벙글하며 대답했다.
「음, 그렇다네. 나한테 오는 편지는 가지각색이어서 즐겁
지. 허술한 편지일수록 대개 재미 있네. 이 편지는 아무래
도 고맙지 않은 초대장일 거야. 왜 있잖나. 남에게 거짓말
이나 하품을 하도록 해놓고서 기뻐하는 사교라는 것 말일
세.」
그는 봉함을 뜯고 편지 글로 대충 눈을 달렸다.
「아니, 이건 뜻밖에 재미있는 일이 될 것 같은데 !」
「그럼, 초대장이 아닌가 ?」
「아닐세, 분명히 일을 의뢰하는 편지야.」
「그리고 의뢰자는 귀족이란 말이지.」
「그렇네, 영국의 일류 명문일세.」
「허, 그거 축하하네.」
「거드름부리며 말하는 건 아니지만. 나로서는 의뢰자의 신
분보다 일의 재미가 더 중요하지. 하지만 이번 조사는 어쩌
면 재미 있을 것 같네. 요즘 자네는 신문을 꼼꼼히 읽고 있
는 모양이던데 ?」
「그렇다네.」 나는 구석의 신문더미를 가리키며 침울한 목
소리로 대답했다. 「할 일이 없어서 말이야.」
「잘되었네. 나에게 정보를 제공해 주게. 나는 범죄기사와 사
람찾는 광고가 실리는 안내란밖에 읽지 않아. 특히 안내란은
도움되는 것이 많지. 여보게, 요즘 뉴스를 꼼꼼히 뒤쫓고 있
었다면 세인트 사이먼 경의 결혼식 기사도 읽었을 테지.」
「음, 읽고말고. 아주 재미 있었네.」
「그거 잘되었군. 이 편지는 세인트 사이먼 경에게서 온 것이
라네. 지금 읽어줄 테니 그 대신 자네는 신문을 뒤져 사건에
관계되는 기사를 모두 가르쳐주게. 알았나. 읽겠네.....」


셜록 홈즈 귀하
백워터 경의 이야기로는, 귀하의 사려판단은 절대로
믿을 수 있다고 합니다. 내 결혼식에 관련되어 생긴
불행한 사건에 대해 귀하를 찾아가 의논드리고 싶습니다.
이 사건에서는 경찰국의 레스트레이드 경감이 수고하
고 있읍니다만, 귀하의 도움을 비는 일에경감도 반대하
지 않으며 얼마쯤 도움되는 바가 있으리라고 말하고 있
습니다.
4시에 방문하겠으니, 만일 다른 약속이 있더라도 이것
은 아주 중대한 사건이니만큼 그 약속을 연기시키고 꼭
기다려주시도록 부탁드리겠습니다.
경백

「글보브너 저택에서 부쳤군. 거위 깃털 펜으로 썼는데,
사이먼 경의 오른손 새끼손가락 바깥쪽이 딱하게도 잉크로
더렵혀졌구면.」
홈즈는 말하면서 편지를 접었다.
「4시라고 했지. 지금 3시로군. 한시간 있으면 올 걸세.
그럼, 그동안 자네 도움을 얻어 사건의 경과를 급히 조사
해 두세. 자네는 그 신문을 추려서 관계있는 기사를 날짜
순서로 맞춰주지 않겠나. 나는 의뢰자의 신원을 조사할 테
니까.」
홈즈는 맨틀피스 옆의 참고서 책꽂이에서 빨간 표지의 책을
한 권 뽑아냈다.
「아, 이것이로군.」
그는 앉아서 무릅 위에 그것을 펼쳤다.
「로버트 월싱검 드 비어 세인트 사이먼----밸모럴 공작의
둘째아들. 음, 문장 바탕은 하늘색이고 검은 중간 띠 위쪽
에 세 개의 마름쇠를 그린 무늬일세. 1846년에 태어남. 올
해 41살이니 결혼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나이로군. 전내각에
서 식민차관을 지냈구면.
아버지인 공작은 전직 외무대신. 플랜태지닛 왕실(1154~
1399년에 이르는 약 250년 동안의 영국 중세 왕조) 직계로
외가에는 튜더 왕실(웨일즈의 귀족 오웬 튜더에서 비롯되어
1485년 헨리 7세가 왕조를 열고 1603년 엘리자베스 여왕의
죽음으로 끊어짐)의 피가 흐르는 모양일세.
흠, 이것만으로는 그리 쓸모 없는걸. 워트슨, 구체적인 자료
는 자네가 주어야 될 것 같네.」
「필요한 자료는 곧 발견될 걸세. 모두 최근의 일이고, 나는
흥미를 가지고 일었으니까. 자네는 다른 사건에 손대고 있으
므로 쓸데없는 일로 방해해선 안된다고 여겨 이야기하지 않
았던 거라네.」
「아, 글로브너 스퀘어의 가구운송사건 말인가 ? 그것은 벌
써 해결했네. 하기야 처음부터 짐작하고 있었지만. 자, 발췌
가 되었으면 어서 가르쳐주게.」
「내가 알고 있는 한 이 보도가 맨처음 나온 것일세. 모닝
포스트의 소식란 기사인데, 날짜는 보다시피 몇 주일 전이야」

밸모럴 공작의 둘째아들 로버트 세인트 사이먼 경은 미합중
국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 시에 사는 앨로이 시어스 도
런 씨의 외딸 해티 도런 양과 약혼. 소문에 의하면 가까운
시일 안에 화촉을 밝힌다는 소식임.

「.....이것뿐일세.」
「간단명료하군.」
홈즈는 말라빠진 긴다리를 난로불 쪽으로 뻗었다.
「같은 주의 사교계 신문 하나에 좀더 자세히 나와 있었을 터
인데. 아, 이것이군......」

오늘날 결혼시장에 있어서의 자유무역적 결혼제도가 국산품
에 대해 매우 부당한 결과를 낳고 있는 현상에 대해 보호정
책을 취할 필요가 머지않아 외쳐지게 되리라.
대영제국 명문 집안 지배권은 지금 대서양 저편에서 오는 아
름다운 사촌들 손으로 차례차례 옮겨져가고 있다.
지난주에도 한 아름다운 침입자가 훌륭히 영예의 관을 차지
해 요즘의 이 경향에 현저한 한 예를 더했다.
즉 20년 동안 큐핏의 화살을 단연코 얼씬 못하게 했던 세인트
사이먼 경이 캘리포니아 주 부호의 아름다운 딸 해티 도런양
과 머잖아 결혼한다고 발표했던 것이다.
웨스트버리 저택의 성대한 피로연에서도 고상한 기품과 아름
다움으로 눈길을 끌었던 도런 양은 외딸로, 지참금이 넉넉히
여섯 자리 숫자에 이르며 앞으로 더욱 막대한 유산을 받게 되
리라 믿어지고 있다.
한편 밸모럴 공작이 요 몇 해 동안 비장의 그림을 팔려고 내
놓고 있는 일은 공공연한 비밀이고 세인트 사이먼 경도 바티
무어에 영지를 좀 소유하고 있을 뿐이므로, 이 결혼이 캘리포
니아의 여상속인을 공화국 부인의 몸에서 일약 영국 귀족으로
뛰어오르게 한다 하더라도 그녀만 이득을 얻는다고 할 수 없
음은 명백한 일이다.

「그밖에 또 있나 ?」
「있고말고, 많이 있다네. 모닝 포스트 지의 기사에는 결혼식
이 하노버 스퀘어의 세인트 조지 교회에서 가족적으로 올려지
고, 참석자는 친한 친구 몇 명으로 제한되며, 결혼식이 끝나
면 앨로이시어스 도런 씨가 가구째 손에 넣은 랭카스터 게이
트의 저택으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씌어 있네.
그리고 이틀 뒤, 즉 이번 수요일 신문에는 결혼식이 거행되
며 신혼여행은 피터즈필드 옆 백워터 경의 영지에서 보내게
되리라고 간단히 나와 있어. 이것이 신부가 실종하기까지의
모든 기사라네.」
「무엇이 생기기까지라고 ?」 홈즈는 놀라서 되물었다.
「신부가 사라지기까지란 말일세.」
「언제 사라졌나 ?」
「피로연 자리에서.」
「흠, 뜻밖으로 재미있군. 그야말로 극적이 아닌가.」
「음, 나도 예삿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네.」
「결혼식 전에 사라지는 일은 흔히 있고, 신혼여행 중에도 때
때로 있지. 하지만 이렇듯 멋들어지게 사라진 것은 생각나지
않는걸. 그때의 상황을 자세히 들려주게.」
「기사는 몹시 불완전하다네.」
「둘이서 생각하면 얼마쯤 보충할 수 있겠지.」
「불완전하나마 어제 아침신문에 <귀족의 결혼식에 괴사건 발
생>이라는 표제까지 달려 있으니 그걸 읽겠네.」


로버트 세인트 사이먼 경 집안은 그의 결혼식에 즈음하여 생
긴 세상에 보기드믄 애처로운 사건 때문에 몹시 낭패해 있다.
어제의 여러 신문에 보도된 대로 결혼식은 그저께 아침에 올
려졌었다. 그동안 이에 관련된 이상한 소문이 떠돌고 있었는
데, 이것이 사실임이 겨우 확인되었다. 사이먼 경의 친구들이
사건의 소문을 없애려 애썼으나 이 사건은 이미 사회의 관심
의 촛점이 되어 있다. 바야흐로 일반의 화제나 다름없는 것을
무시하려고 애쓰는 건 아무 이익도 없는 짓이라고 할 수 있
으리라.
하노버 스퀘어의 세인트 조지 교회에서 올려진 결혼식은 아
주 조촐하여 신부의 아버지 앨리이시어스 도런 씨, 밸모럴 공
작부인, 백워터 경, 신랑의 동생 유스터스 경과 누이동생 클
리어러 세인트 사이먼 양 및 앨리시어 위싱턴 양만이 참석했
다. 결혼식이 끝난 뒤 모두들은 랭카스터 게이트의 앨로이시
어스 도런 저택에 마련된 피로연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때 세인트 사이먼 경에게 정당한 요구를 가지고 있다는 이
름을 알 수 없는 한 부인이 그들을 뒤따라 저택안으로 억지로
들어가려 하여 한바탕 옥신각신이 벌어졌다. 창피스러운 소
동이 잠시 있은 뒤 집사와 하인들이 가까스로 쫓아냈다.
신부는 다행히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가 이 불쾌한 방해 광경
을 보지 못했으나, 참석자들과 더불어 피로연 자리에 잠깐 나
와 있더니 별안간 기분이 좋지 않다고 하며 자기 방으로 물러
갔다.
그리하여 그대로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므로 걱정된 아버지가
데리러 가서 하녀에게 물어본즉, 신부는 방에 잠시 들렀을
뿐 외투와 모자를 가지고 곧 복도를 달려나갔다는 것이었다.
한 하인이 그런 옷차림을 한 부인이 집에서 나가는 것을 보
았지만, 신부는 피로연에 참석 중이므로 설마 신부일 줄 생각
지 못했다고 말했다.






대실패 (Fatal Error)

by 프레드릭 브라운(Fredric Brown)



월터 백스터씨는 오래 전부터 범죄소설과 추리소설을 열심히 일고 있는 편
이었다. 그러므로 자기 큰아버지를 죽이려고 결심했을 때, 조그마한 실수도
범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러한 실수를 피하려면 첫째 줄거리가 단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철저하게 단순해야 한다. 모호한 알리바이는 만들어내지 말 것. 복잡한 수
법도 안된다. 용의자도 필요없다.
그런데 잠깐---가벼운 용의자는 어떻까? 그것도 아주 단순한 녀석이라면.
가는 길에 큰아버지네 돈을 몽땅 훔쳐오는 게 좋겠군. 그렇게 하면 절도범
이 죽인 것으로 알겠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자신이 큰아버지의 유일한
상속자니까 혐의를 받을 게 뻔한 일이다.
월터는 들키지 않도록 고심하여 작은 쇠지렛대를 손에 넣었다. 이것은 흉
기 겸 도구로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신중하게 아주 세밀한 일에 이르기
까지 계획을 짰다. 하나라도 실수를 범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 점에서는
스스로도 확신이 있었다. 그는 세심한 주의를 하여 일을 결행할 밤과 시간
을 정했다.
쇠지렛대 덕택으로 창문은 소리도 내지 않고 감쪽같이 열 수 있었다. 그는
거실로 들어갔다. 침실로 통하는 문이 열려 있었으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므로 곧 강도짓을 해치우기로 마음먹었다. 큰 아버지가 늘 돈을 넣어
두는 장소도 알고 있었다. 손을 댄 흔적이 나도록 흩뜨려놓아야만 한다. 달
이 밝아서 발밑이 잘 보였다. 그는 발소리를 죽여가며...

두 시간 뒤 집으로 돌아오자 월터는 급하게 옷을 벗고 잠자리로 기어 들었
다. 이 범죄는 내일 아침까지 경찰에 발견될 염려가 없다. 그러나 그보다
빨리 발각된다 하더라도 문제는 없었다.
돈도 쇠지렛대도 다 치웠다. 수백 달러의 돈을 처분하기는 매우 어려웠지
만 그것이 몸의 안전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었고, 5만 달러, 아니 그 이상
의 상속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 왔나?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문 앞
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보안관과 부보안관이 거침없이 들어왔다.
"월터 백스터요? 당신의 체포영장이오. 옷을 입고 같이 가줘야겠소."
"나의 체포영장이라고요? 대체 내가 무엇을 했다는 거요?"
"가택침입및 절도죄---당신의 큰아버님이 문 앞에서 보고 있었으므로 당신
이라는 것을 안 거요. 당신이 나갈 때까지 보고 있다가 경찰에 와서 증언하
고..."
월터 백스터의 입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결국 그는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완전범죄를 꾀했는데, 훔치는 데만 열중한 나머지 큰아버지를 죽인다는 중
요한 일을 잊어버렸던 것이다.

- The End -





환상살인

by 정건섭
최용일의 손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그는 피 묻은 손을 닦지도 않은 채 이
른 새벽 깊이 잠들어 있는 박동호의 집 대문을 정신 없이 두들기고 있었다.
동호의 집 대문에는 피자국이 어지럽게 찍혔다.
선잠을 깨어 눈을 부성부성한 채 대문을 열던 동호가 이 모습을 보고 소스
라쳐 놀랐다.
"아니 이게 왠일이야. 자네 손에 그게 무슨 피야....자 빨리 들어와."
"동...동호...난...난 사람을 죽였어. 그것도...내...내 아내를...흐흐
흑..."
용일이는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하고 그대로 땅바닥에 주저물러 앉았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동호호는 실실한 채 쓰러져 있는 용일이를 부축하여 응
접실로 들어갔다. 용일은 커피를 한 잔 타 먹이고 손에 묻은 피를 조심스
럽게 닦아 준 후에야 비로소 정신이 드는지 멍한 표정으로 동호를 바라보
았다.
"어떻게 된거야. 자네가 부인을 죽이다니. 그게 사실이야?"
"모르겠어. 어떻게 된 건지. 아내가...자다 말고."
용일이는 숨을 돌린 뒤 동호에게 지난 밤 일어났던 일을 차근차근 들려주
었다. 잠결에 용일이는 싸늘한 기분을 느꼈다는 것이다. 초저녁부터 몸이
좋지 않다고 누워 있는 아내를 깨웠다. 술에 취해 집에 들어온 것이 밤 10
시, 밖에서 외식을 하자고 전화를 걸었지만 아내는 도무지 일어날 힘이
없다고 했다. 집에 돌아온 용일이는 싫다는 아내를 깨워 억지 정사(情事)를
즐겼고 그대로 잠에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아내가 자다 말고 내게 덮쳐온거야...손에는 식칼이 쥐어져 있
었어. 시퍼런 칼날이 목을 후비며 들어오고 있었어. 난...본능적으로 몸을
빼돌려 아내 손에 쥐어져 있는 식칼을 빼앗았지. 그리고는 나도 정신을 잃
었어. 아니 이성을 잃은거야. 빼앗은 칼로 아내에게 덤벼 마구 찔렀어. 난
아내 목을 향해 칼을 꽂고 아내가 나무 토막 쓰러지듯 쓰러졌을 때에 야
비로소 정신을 차린거야...아내는...아내는 죽고 말았어...흐흐흐...이제
난 어쩌지..."
용일이는 머리털을 쥐어뜯으며 단말마 같은 오열을 토해 내고 있었다.
"야. 용일아, 정신 차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지."
혹 이웃집에서라도 들을세라 유리 창문까지 꼭꼭 걸어잠근 후 울부짖고 있
는 용일이를 소파에 뉘었다. 그러나 동호로서도 이 갑작스러운 사태를 어
떻게 대처해 나가야 할지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형제보다도 더 가깝다고
소문이 자자한 사이였다. 어릴때부터 지금까지 함께 자라 온 죽마고우였다.
선뜻 112 다이얼에 손가락이 가지지가 않았다.
'어쩐다? 어차피 살인사건은 세상에 알려지게 될 것이고 강력한 용의자로
용일이는 추적을 당할 것이고, 내가 만일 숨겨 주었다가는 범인 은닉죄로
함께 처벌을 받을 것이고...그렇다고 이 상황에서 경찰에 알린다는 것은
친구간에 너무나 잔인한짓거리가 아닌가.'
다행스러운 것은 이 큰 집에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직까지 결혼하지
않고 싱글로 살아온 동호는 건넌방을 세 주기는 했지만 추석 명절이라고
고향으로 내려갔고 혼자서 덩그마니 이 큰 집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동호는 우선 용일이를 진정시킨 뒤 몇 알의 수면제를 먹게 했다. 우선 그
의 비명이나 오열이 밖으로 새어나가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고 또 하나의 이
유는 잠을 재워서 마음을 가라앉히지 않으면 안 되겠지 때문이었다. 약에
취해 쓰러져 있는 용일이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고 있을 때 또 밖에서 차
임벨 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형사들이 달려온 것인가?'
동호의 등에는 식은땀이 주르르 흐르고 있었다. 소파에는 손에 피가 묻은
용일이가 누워 있고 밖에서는 계속 차임벨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동호는
늘어진 용일이를 끌어다 골방에 우겨박았다. 그리고 크고 둔탁한 자물동을
꽉 채워 버렸다. 특별히 가택 수색을 하지 않는 이상 쉽게 찾을 수는 없
을 것이다.
동호는 울렁거리는 가슴을 진정하며 대문 앞으로 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아...아악..."
동호는 기겁을 하며 비명을 질렀다. 머리를 마구 흐트린 채 목과 옷에 피
가 질펀한 용일이의 아내가 서 있었던 것이다.
"귀신이다."
생각하는 순간 동호는 대문을 꽝 닫아 버렸지만 용일이의 부인은 한 발짝
앞서 마당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희뿌연 가을 안개 속에 피투성이가 된 두
번째 인물의 등장에 동호는 오금이 저려 제대로 말도 못하고 있었다. 그
녀는 갑자기 동호의 팔뚝을 휘꺽어 잡아당겼다.
"동호씨...여기 우리 남편이 오지 않았습니까? 네, 이리로 왔죠?"
"네? 용일이가요? 아네요..."
"우리 남편 여기 오지 않았느냐구요?"
"안...안 왔는데...당신은 귀신?"
"아! 아이구 죄송해라. 이 꼴 좀 봐. 죄송해요. 갑자기 생긴 일이라."
용일이의 아내는 귀신도 아무것도 아닌 아내 실제의 모습이었다. 안내되고
들어온 용일의 아내는 지난 밤 있었던 일을 다시 들려주기 시작했다.
"참 어처구니없어서, 세상에 이럴 수가 있어요?"
옷을 여며 입지 않아 가슴이 반쯤이나 노출된 용일이의 부인은 소파에 앉
아 다리를 꼬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남편 용일이의 태도에 변화가 온 것은 한 달이 넘었다는 것이었다. 신경쇠
악에 걸린 사람처럼 밤마다 헛소리를 질러대고 울부짖으며 밤을 세우고 그
러다가 아침만 되면 또 언제 그랬더냐싶게 멀쩡한 정신으로 출근한다고 했
다. 용일이의 아내는 걱정이 태산 같아 약도 지어다 먹여 보고 소문난 무
당을 불러 굿도 해보았지만 증세에는 조금도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밤에 질러대는 비명소리 때문에 처음에는 인근 아파트에서 항의도 해왔지
만 그것이 병적인 상태에서 지르는 소리임을 알고 난 후부터는 어느 누구
도 집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고 일체 왕래도 끊어져 외톨이가 된 상태라
는 것이었다.
"정말 이상하게 행동했어요. 하도 걱정이 되어 직장 상사도 만나 보았어
요. 회사에서 일하는 건 어떻냐, 동료들과는 잘 어울리느냐 등등 여쭤 보았
죠."
"그랬더니요?"
"역시 직장에서도 문제는 있었어요. 아래 직원들이 잘 정리해온 서류를 팽
개치며 이게 뭐냐고 야단치기가 일쑤였구요, 아침 회의에 중요한 안건을
놓고 토의하는데 갑자기 껄껄대며 웃기도 하구요, 회사에서도 요즈음 최
과장 좀 돈게 아니냐는 등 어떤 여자한테 실연당해 히스테리컬해진 게 아니
냐는 둥 별의별 소문이 다 돌고요, 사장님은 아무래도 안 되겠다, 눈치 보
아 휴직 시키든 사표를 받든 무슨 결말을 내야 할 게 아니냐며 아주 못마
땅하게 생각한다는군요. 병원엘 가자고 해도, 휴양을 좀 가보라고 해도, 병
원에 입원을 하라고 해도 아주 막무가내로 고집을 피며 꼼짝을 안해요."
동호는 조금 전 용일이가 대문을 두드리며 뛰어 들어오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분명히 이상이 있는 것 같은 태도였다. 그 초점 잃은 눈동자 하며
핏기를 잃은 창백한 얼굴하며 아내를 칼로 찔러 죽였다고 허둥대던 모습,
그러나 죽었다던 아내는 모기 물린 자리 하나 없이 용일이가 묻힌 피가 잔
뜩 덮어쓰고 나타나지 않았는가.
동호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미묘한 웃음을 입가에 흘리고 있었다.
"그 다음은요?"
"아무래도 정신병원에 정식으로 입원시켜야 할까봐요. 글쎄 조금 전에
는..."
"아. 잠깐만요..."
동호는 부인의 말을 막은 다음 이곳 저곳으로 전화를 걸어 친우들을 불러
모았다. 아무리 사태가 사태라 할지라도 반나의 모스으로 앉아 있는 친우
부인과 단둘이 앉아 있는 것도 불편하려니와 용일이의 이런 모습을 보고 혼
자 해결할 일도 아니라고 판단한 때문이였다.
잠시 후 두어 명의 평소 가까운 친우들이 놀라운 표정으로 모여 들었다.
"뭐? 용일이가 아주 돌았다고?"
"부인이 죽었어? 누가 죽인거야?"
"용일이가 피투성이가 되어서 죽었다고?"
잠결에 들은 대로 떠들던 친우들을 앉혀놓고는 동호는 처음 상황부터 다시
설명하기 시작했다.
"자, 사건은 이렇게 된거야. 지금부터 부인께서 조금 전 집에서 있었던 일
을 말씀하실테니 잘 들어보고 방법을 강구해 나가도록 하지. 자 말씀하시
죠."
부인은 찻잔에 남아 있는 식은 커피를 홀짝 들이마시고 다시 말을 이어가
기 시작했다.
"글쎄 조금 전에는요, 자다가 말고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벽력같이 고함
을 지르지 뭐예요."
"고함을요? 뭐라고...."
"들어보세요. 갑자기 날더러 눈을 부릅뜨며 네년이 날 죽이려했지...하며
부엌으로 뛰어 들어가 안에서 문을 잠그고 쥐죽은 듯 숨소리도 내지 않고
숨어 있었어요. 이때 밖에서 쿵쾅 거리는 소리가 나서 살그머니 문틈으로
내다 보았더니..."
"..."
"아, 글쎄 남편이 칼을 들고 두리번거리며 날 찾아 헤매지 뭐예요. 창고
속에 숨어 있어 얼른 눈에 띄지 않았으니 이번에는 제가 취미로 기르는 꿩
의 목을 움켜잡지 뭐예요."
남편은 꿩의 목을 움켜쥐더니'네년이 숨으면 얼마나 숨어 있을 줄 알았어'
하며 꿩의 목을 단칼에 잘랐다고 했다.
"내가 너무 놀라 뛰쳐나갔어요. '여보, 여보, 왜 이래, 정신 좀 차려, 이
건 꿩이예요 꿩, 나는 여기 있어요. ' 하며 남편의 팔뚝에 매달렸죠. 꿩의
피가 흥건한 두 손으로 남편은 내 목을 눌렀어요. 내 목에 피는 그때 묻은
거예요. "
부인은 손에 달라붙은 꿩의 피를 소파에 썩썩 문지르며 말을 이어갔다.
"남편이 제 목을 누르다가 자기 힘에 부쳤는지 털썩 주저물러앉아 날 물끄
러미 바라보더니 '넌 누구야'하기에 '내가 당신 부인 아네요?' 했더니 '내
마누라는 내가 죽였어 너 날 잡으러 왔지, 난 잡히기 싫어' 하며 밖으로
뛰어나가지 뭐예요. 저도 곧바로 뒤따라 왔죠. 공연히 동호씨만 놀라게 해
드렸나봐요. 죄송해요."
한참이나 생각에 잠겨 있는 동호는 결심을 굳혔는지 부인을 일단 집으로
돌려보내자는 제의를 했다.
"사실 용일이는 저 골방에 있습니다. 너무 흥분해 있어서 제가 가지고 있
던 수면제를 몇 알 먹여 재웠죠. 그러니 걱정 마시고 돌아가세요. 뒷처리는
저희들이 할테니."
동호와 친우들은 부인을 돌려보내고 다시 용일이가 있는 창고로 들어갔다.
동호는 냉장고에서 얼음을 꺼내 물을 타서 용일이의 얼굴에 들어부었다.
"여...여기가 어디야..."
"용일아 임마, 정신 좀 차려. 여긴 동호네 집이야 동호네 집."
"여기가? 내가 왜 여기 와 있지?"
"네가 부인을 죽였다며 이리로 왔잖아..."
"내가?"
흐리멍텅한 눈으로 동호를 바라보는 용일이의 눈은 평소의 그가 아니었다.
"이봐. 어떻게 된거야. 자네 부인은 자네가 부인을 찌른 것이 아니고 꿩의
목을 잘랐다고 하던데...."
"거, 거짓말이야, 난 아내를 찔렀어. 이것 봐. 아내를 찌르다가 내가 다친
상처야."
용일은 이제사 정신을 차렸는지 기억을 더듬으며 또 설명하기 시작했다.
"분명히 아내가 나한테 덤볐어. 아내는 지금 거짓말하고 있는거야. "
"거짓말? 아내가..."
"아내가 칼을 들고 덤비기에 내가 빼앗아 찔렀지. 아내는 아마 내가 칼로
찌르는 순간 꿩으로 막았을지 몰라. 꿩이 죽고 피가 뛰어서 내가 엉겁결
에 놀랐고 그래서 아내가죽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지. 하여튼 나한테 덤
빈 것은 아내가 먼저였어. 아내는...아내는 또 날 죽이려 들거야, 날 살
려줘...날 숨겨줘."
용일은 또 쓰러지며 눈을 까뒤집고 졸도해 버렸다. 용일이의 말도 논리성
은 있었다. 용일이의 친우 덕호가 의견을 피력하기 시작했다.
"용일이의 말이 맞는지도 몰라. 부인이 무슨 일인가로 용일이를 찔러 죽이
려다가 실패했고 용일이가 칼을 휘두르자 꿩의 목을 나꿔채 흔들며 방어하
다가 꿩이 대신 죽어 주었는지도 모르지. 그리고 다급하니까 그런 거짓말
을 했는지도...안 그래?"
덕호의 의견에도 일리는 있었다. 사건이란 양측의 논리가 다 성립되고 또
그것이 상반될 때에는 객관적으로 냉정히 비판해 볼 필요도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현실적으로 죽은 사람이 없다는 것이 큰 다행이었지만 이대로 덮
어 주고 넘어가면 언제 이렇게 또 누가 죽어갈지 예측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 어떻게 한다?"
"확인하는 방법밖에 없지."
"어떻게...우리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어. 이미 지나간 일인데."
동호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경찰을 부를 입장이 아니야. 우리가 용일이의 집을 방문하는 거지.
과연 꿩의 모가지가 잘려 있나, 또 이웃집에서 평소 용일의 태도를 어떻게
보고 있나 그런 것을 확인하자는거야."
"좋다 가자. 가서 확인하자."
의견일치를 본 친우들은 다시 용일이가 살고 있는 아파트를 찾아갔다. 침
대에 쓰러져 있던 부인이 부시시 일어나 문을 열어 주었다.
일행은 차마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었다. 잘라진 ㄳ의 모가지가 바닥에 나
뒹굴고 있었고 사방에 ㄳ의 피가 튀겨 있었다. 살림살이도 마구 흐트러져
있었다.
덕호가 동호에게 귀엣말로 소곤거렸다.
"우리가 올 것을 눈치채고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게 아닐까?"
"설마?"
"설마가 아니야, 꽤 많은 여자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는 것이지."
"그럼 방법은 한 가지밖에 안 남았군."
일행은 다시 이웃 아파트를 찾아나서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908호 회용일씨 친구 되는 사람입니다. 용일이가 좀 이상해
졌다기에 혹 이웃에서 아시는가 해서."
첫째 집은 문을 쾅 닫고 상대도 해주지 않았다. 몇 집을 돌아서 겨우 아주
머니 한 분이 대답해 주었다.
"저, 최용일씨 말씀하시는 거죠?"
"네, 좀 이상하다는..."
"어휴...말도 마세요. 이 근처 피해 안 본 사람이 없어요. 한번은 새벽 두
시나 되었을까? 글쎄 벨이 계속 울려대기에 문을 열었더니...어휴 세상에
멀쩡한 사람이 팬티바람으로 서가지고 왜 안에서 문을 잠궈 들어가지 못하
게 하느냐고 야단이지 뭐예요. 그뿐인가요, 건듯하면 우는 소리, 고함 소
리...말도 못해요."
아파트 경비원까지 같은 내용의 발언이었다. 밤중에 아무 아파트나 인터폰
으로 대달라고 해서 욕을 해대는 바람에 곤욕을 치른일이 한두번이 아니라
는 것이었다.
"말도 마슈, 그 사람 아주 돌았어요. 글씨 밤만 되면 웬일이데유....어휴
기차라...시상에 부인이 불상도 허지."
나이가 많은 경비원은 혀를 차고 있었다. 이제 모든 것은 밝혀진 셈이었
다.
"용일이에게 문제가 있군. 어떻하지, 병원에 입원시키는 게 상책인데."
"그래도 부인과 의논은 해보아야 할 거 아냐."
"맞아, 보호자 승낙이 있어야 해."
일행은 다시 용일의 집으로 갔다. 용일이가 구석에 잔뜩 웅크리고 앉아 있
었다. 강제로 끌어다가 부인 앞에 앉혔다.
"어유, 이거 미안해서 어째요. 글쎄...세상에 내 팔자도...."
남편을 앞에 놓고 한창이나 흐느껴 울던 부인이 손님 대접 한다고 과일을
가져왔다. 용일이는 부인이 깍는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사과를 잘라 대접에 받쳐 친우들에게 내미는 순간 용일이가 소리를 지르며
바라보고 있었다.
"이년, 너 죽여 버리고 말테야."
식칼의 새파란 칼 끝이 가슴을 후비고 들어갔다. 순간적인 일이었다. 가슴
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 것은 억울하게도 막 사과를 집이 입에 넣으려는 동
호였다.
쓰러진 동호는 두어 번 발버둥치다가는 그대로 숨을 끊고 말았고 용일은
피 묻은 칼을 움겨쥐고 벌렁 자빠지며 입에 게거품을 물었다.
"글쎄요, 상황으로 보아 가해자는 정신에 이상이 있던 게 틀림 없습니다.
"
정신과 담당의사 박용규는 형사 정인용을 바라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
었다.
"심장을 정확히 찔러 일격에 죽기는 했습니다만 가해자는 오래전부터 정신
질환을 앓고 있던 것이 틀림없고 또 주민들과 이웃의 증언도 그랬습니다.
단순 살인자 취급을 할 수는 없습니다."
"일단 진단이 나온 후에 정신병원으로 입원시켜야겠죠?"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정신착락으로 인한 살인은 일반 살인자와 같이 취급하지 않는다.
용일이는 국립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멍청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기도
하고 또 때로는 혼자 이불 속에서 흐느껴 울기도 했다.
6개월이 지난 후 친우들은 처음으로 면회란 것을 할 수가 있었다. 처음보
다 아주 좋아진 얼굴이었다. 그러나 정신상태가 완전히 맑아진 것 같지는
않았다. 친우들은 될수록 자극적인 말은 하지 않았다. 물론 동료인 동호를
살해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것이 고의가 아닌 것이기 때문에 이
들의 마음은 더욱 아팠는지도 몰랐다.
"기분은 좀 어때?"
"많이 좋아졌어, 마음이 편한 것 같아."
"이왕에 입원을 한 것이니까 아주 완치되거든 나와."
"...글쎄...내가..."
그는 멍하니 앉아 있다가는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우리 집사람이 자살했어, 어제."
"어제? 아니 오늘 아침에도 만나고 왔는데...큰일이군."
친우들은 안스러운 마음으로 용일이를 돌아보며 무거운 발길을 옮겼다.
다시 2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정신병원에 입원한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모두 살이 통통하게 쩠다. 사람들
은 힘든 세상 잊고 살기 때문이라고 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그쪽 신
선놀음 아니냐고 했다. 그러나 용일이는 왜인지 자꾸만 수척해졌다. 그러
나 몸이 수척해진 것만큼 병은 호조를 보이고 있었다. 병원측에서 퇴원해
도 좋다는 연락이 왔다.
아내는 마중 나오지 않았다.
'흠, 그럴테지, 지금쯤은 한껏 겁에 질려 있을걸, 이번에는 네차례니까.'
용일이는 밑도 끝도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택시에 몸을 맡겼다. 친우들에
게는 연락하지 않았다. 퇴원하면 무엇인가 조용히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
이었다. 어쩌면 이번에는 아내가 죽어 줘야 할 차례인지도 모른다고 생각
했다.
발가벗은 아내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고 그때마다 용일이의 가슴을 활화
산처럼 뜨거운 불길이 콱콱 솟아오르고 있었다. 용일이는 눈을 감으며 애써
환상을 지우려 했지만 그때마다 그런 영상은 더 분명하고 확실하게 떠올랐
다.
'운명이야, 우리 모두의 비극이지.'
아파트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서는 순간 용일이는 아내의 눈에서 분명한
공포를 보았다. 그것은 가슴으로까지 이어져 그가 무엇인가에 쫓기듯 질려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여...여보, 언제 왔어..."
"시끄러워, 가만 있게 둬. 아무 말도 하기 싫으니까."
용일이는 고함을 질러 아내의 입을 틀어막았다. 자식 하나 없는 석녀인 부
인은 뒤로 돌아앉아 어깨를 흐느끼며 울기 시작했다. 담배만 푹푹 죽여 대
는 용일이는 이런 아내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어쩔 작정이죠, 동호씨는 칼로 찔러 죽였고 난 말려 죽일 생각인가요?"
"말려 죽여? 흠, 그럴는지도 모르지."
"왜요, 이유가 뭐예요?"
지난 2년 반 동안의 길고 긴 병원 생활은 그야말로 피나는 자신과의 싸움
이었다. 울부짖는 환자, 밤새워 껄껄대는 환자, 그리고 바보처럼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환자, 장군이 되었다면서 벽을 향해 고함을 치는 환자, 이런
틈바구니 속에서 연출해 낸 정신 병자 역할은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고
통이었다.
때로는 정말 용일이 자신도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그뿐만의 고통이 아니
었다. 가슴에 칼을 꽂고 눈을 허옇게 뒤집어쓰고 죽어가는 동호의 모습이
눈에서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때마다 혀를 물기도 하고 아무도 모르게 준비한 송곳으로 허벅지를 찔러
정신을 가다듬기도 했다.
'여기서 물러선 수는 없다. 조금만 더 참으면 된다. 다음 코스는 퇴원이
다. 그리고 밤마다 아내를 악몽에 시달리게 만드는 것이다. 흠, 제 손으로
자결이라도 할 수 있다면 본인으로서는 행복한 편이지.'
또 아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용일이가 병원에 입원하기 한 달 전, 8월의
무더위가 막바지에 이르는 저녁, 이상할이만큼 머리가 어지러워 약국에서
약을 사먹고 일찍 조퇴를 했다. 당연히 있어야할 아내가 보이지 않았다.
그날따라 왜 그런지 불길하고 음산한 예감ㅁ이 온몸에 달라붙어 떨어질 줄
을 몰랐다. 그렇다고 이웃에 물어보며 쫓아다닐 입장도 못 되었다.
용일이는 어지러운 머리를 애써 누르며 택시를 타고 시외로 빠졌다. 집에
있기가 답답했던 것이다. 교외로 나오면 좀 나으려나 했던 두통은 시간이
갈수록 심해지기만 했다. 구토증까지 일어났다.
북한산성을 지나 일영 유원지에 이르러 차를 멈추게 하고 근처 유원지로
나갔다. 만일 이때 최용일이 유원지로만 가지 않았다면 최용일은 물론이려
니와 용일이의 부인과 동호의 운명은 훨씬 다른 방향으로 흘렀을지도 모르
는 일이었다.
아내는 박동호에게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날씬한 허리에는 동호의 왼팔이
휘감겨 있었다. 용일이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이가 없어 적적하니 가끔
꽃꽃이 공부나 하러 가겠다며 외출하던 아내였다. 측은하게까지 보이기도
했다. 오죽 허전하면 꽃꽃이를 다 배우러 다니랴. 허나,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결코 '오죽이나'가 아니었다.
남편인 자신의 눈을 피해, 그것도 용일이가 하ㄳ같이 믿고 있는 아내와 친
구가 이 활기찬 유원지에 팔짱를 끼고 걷는 것이다.
피가 거꾸로 치솟아올랐지만 이성과 냉정으로 꽉꽉 눌러놓고 있었다. 하기
는 그런 차가운 이성이 아니었다면 병원에서의 그 길고 긴 투쟁을 이겨내지
못했으리라.
맥주도 마시고 걷기도 하고 나무 그늘에 앉아 가벼운 키스도 하는 동안 용
일이는 온몸을 뜯어가며 울분을 참아내고 있었다.
"자기 어쩔거야."
"어쩌긴, 나도 어차피 홀몸인데."
"우리 그이는?"
"그이? 용일이 말야? 거 참 귀찮구만. 그냥 떼어놀 수도 없고."
"이렇게 하면 어떨까. 내가 남편 모르게 한 이천만 원 모아 놓은 게 있거
든. 그걸 주고 도망쳐 나오지 뭐."
"개 성격에 그걸 받아들일 것 같아? 차라리 없애는 게 낫지."
칼날 같은 선언이었다. 그들은 최악의 경우 용일이를 없앨 생각까지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산간은 벌써 저녁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내는 동호의
팔똑을 끌어당겼다. 동호는 미묘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따라 일어섰다.
"남편 올 시간이 되어가요. 바빠도 저녁 10시 안팎이면 돌아오거든요."
"어쩌지?"
"어쩌긴...그냥 갈 수 없잖아요."
동호를 적극적으로 유혹하는 것은 오히려 아내 쪽이었다. 둘은 허리를 감
싸안은 채 근처 작은 여관으로 들어섰다. 용일이도 뒤따라 옆방으로 들어
섰다. 애내와 관계를 가져본 것이 6개월이 넘었다. 언제나 피곤하다는 핑계
였다.
'맞아, 이 두 연놈의 배가 맞기 시작한 것이 벌써 6개월이 넘었어.'
아내와의 마지막 밤을 애써 떠올려 보려고 했지만 도무지 기억이 나지를
않았다. 아내와의 기억은 옆방에서 들려온 교성과 이따금 들려오는 사내의
신음소리로 자꾸만 지워지고 있었다.
'이 두 연놈들을 내 손으로 해지우고 말겠어.'
이빨을 갈며 용일이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날 밤부터 정신병 환자
놀이를 시작한 것이다.
2년 반 만에 집으로 돌아온 용일이가 오히려 침묵으로 일관하자 아내가 먼
저 대들기 시작한 것이다.
"눈치 채고 있었어!"
"병원에서 영원히 못 나오기를 기다렸겠군?"
"흠, 사람을 죽인 주제에..."
동호의 몸이 뒤틀리며 숨이 넘어가던 모습이 용일이의 눈에 또 열바쳐 왔
다.
그날 밤, 용일이는 칼을 들고 아내가 아끼며 기르는 꿩의 목을 낚아챘다.
그리고 단칼에 목을 잘라 피가 뚝뚝 떨어지는 대가리를 들고 아내를 깨웠
다. 하얗게 자지러진 아내는 비명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용일이
는 꿩의 대가리를 아내에게 던지고 피 묻은 손으로 아내의 목을 누르다 말
고 동호의 집으로 ㄳ아온 것이다.
철두철미한 정신병 환자로 인식시키는 데 무진 고생과 정성이 들어 있었
다. 만일 정신병 환자로 둔갑하지 못했으면 동호의 살해로 적어도 사형이
나 종신형은 살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아내에 대한 복수를 할 길이
없는 것이다. 다시 나와야 한다는 절박감은 병원에서의 그 길고 긴 고통
을 감히 참아내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용일이는 이미
아내가 눈치 채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처음에는 아내도 남편이 정말 정신분열증에 걸린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꿩의 목을 잘라 던지고 동호의 집으로 달려가고 있을 때 비로소 동호
와의 관계가 들통난 것을 알 수 있었다.
남의 이목도 있고 하여 남편이 돌아온 후 방법을 모색하기로 결심했으나 그
시기가 너무 빨리 온 것이다. 아내는 장농 속에서 한자루의 칼을 꺼냈다.
남편이 동호의 가슴을 후볐던 바로 그 식칼이었다. 매일매일 갈아놓아 섬
광이 시퍼렇게 들 만큼 날이 서 있었다. 남편이 동호의 가슴을 찌르듯 이번
에는 아내가 남편의 가슴을 후벼댈 차례라고 이를 악물었다. 남편은 아랫목
에 누워 천정을 바라보며 아내의 피를 말려 죽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봇."
갑자기 아내의 목소리는 금속성으로 변했다. 손에는 시퍼란 칼이 들리어져
있었다.
"나는 당신만 속였어. 그런데 당신은 세상을 전부 속였어! 감쪽같이. 다
좋아. 그러나 동호씨를 죽인 건 용서할 수 없어. 난 너 하나만으로 만족할
수는 없었어. 무기력한 셀러리맨, 시계추처럼 한없이 반복되는 생활, 난
지겨웠어. 애 없는 것이 어째서 나만의 책임이야. 난 자유롭고 싶었어.
그런데 네가 동호씰 살해해? 이 개새끼야."
식칼을 든 아내의 손이 용일의 가슴으로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이놈아, 너만 병원에서 이를 갈며 참아왔는 줄 아니? 나도 집에서 네놈이
나오기만 절치부심 기다리고 있었다."
버둥대던 용일이의 몸뚱이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아내는 칼을 빼고 가슴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고함을 지르며 밖으로 뛰쳐
나왔다.
"남...남편이...끝내 자살을 했어요."
아내는 아파트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다시 경찰서로 전화를 걸었다.
"정신병에 걸려 입원했던 남편이 돌아와 자살을 했어요, 흑흑...어쩌죠?"
경찰들은 즉시 출동했고 아내는 땅을 치며 울어 대고 있었다.
그러나 아내는 남편 용일이의 가슴에 올려져 있는 칼 손잡이에 남편의 지
문은 하나 없고 자신의 지문만 잔뜩 묻어 있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 끝 -



수출 살인 1
by 한대희


1
나는 완전범죄를 했다.
(1) 범행의 단서가 될만한 물건이나 사실을 남기지 않고 교묘하
게 수사망을 피한 범죄.
(2) 언뜻 보기에는 불가능한 것 같이 보이지만 논리적으로 완전
히 가능한 범죄.
국어 대사전은 완전 범죄를 이렇게 풀이한다. 그렇다면 나의 범
죄는 완전범죄 정도에 머무를게 아니라 완벽범죄에 속할지도 모른
다.
국어 사전의 1항,2항을 완벽하게 충족 시켰을뿐 아니라 나의 기
발한 착상은 그 이상을 뛰어넘고 있다.
범행의 흔적이나 단서가 될만한 물건을 남기지 않는다든가, 교
묘하게 수사망을 피한다는 따위는 애초부터 마음에 두지 않았다.
혹시 하는 불안감으로 꿈자리마저 사나울 그런 정도의 조심은 내
마음에 차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2중3중의 안전장치를 준비해 두
었다. 범행 그 자체를 수출해 버린것이다.
수출살인.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그런 정도가 되겠지만 그 이름이 내포하
고 있는 뜻 그대로 나는 살인을 하였고, 그 흔적을 수출해 버렸
다.
수출 드라이브 정책에 편승한 우리 경제는 고도 성장을 계속하
고 있지 않는가. 자못 경이로운 눈으로 우리를 지켜보는 세계의
여러나라들을 의식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살길은 수출 뿐이다.
그렇다고 내가 그러한 사명감을 지니고 있다거나 소명의식을 가
지고 수출살인을 했던것은 아니다. 연간 186개국에 4850종의 품목
이 수출되고 있는터에 나의 '수출살인'이 하나 더 추가되어 품목
이 4851종으로 늘어난들 무어 크게 대수랴 싶은 마음 뿐이었다.
어차피 시멘트 대신 돌을 수출하고 쓰레기까지 수출 한다는 세상
이 아닌가.
마리아 그랜드호.
이름이 아름다운 중국선적의 화물선을 보기위해 나는 회사에 출
장 신청을 냈다.
수출품의 선적 기일을 맞추기 위해서라는 그럴듯한 이유를 대었
지만 솔직히 말해서 '마리아 그랜드호'를 직접 보아 두어야 겠다
는 절박한 심경 때문이기도 했다.
본 모델(bone model)이라는 상품으로 수출되는 내 작품의 선적
장면을 내 눈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범행 후 반드시 현장을 확인한다는 범죄심리학의 주장이
나에게도 적용이 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대책없이 일을 저지른 후
조바심이 나서 현장을 기웃거리다가 체포되는 일반 잡범들과 나는
엄연히 구분되고 싶다.
내가 현장 확인을 강행한것은 에제 곧 이역만리로 떠나 구천을
헤멜 영혼에게 애도의 뜻을 표하겠다는 일종의 의식이었을뿐 그
이상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솔직히 고백하건대 부산행 야간열차에 탑승하여 부산역
에 도착 할 때까지 가슴이 두근거렸던것은 사실이다.
사람의 일이란게 혹시 또 모르는 법. 어딘가에 구멍이 생겨 차
질이 빚어질지 신이아닌 이상 누가 알겠는가. 나는 밤을 꼬박 새
우며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하여 확인 점검을 했다.
차창으로 어슴프레한 미명이 밀려올 즈음에야 나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나의 시나리오는 완벽하다는 것을.


부두는 언제나처럼 활기가 넘쳐 흘렀다. 하역회사 털보 반장의
안내로 하역장에 막 당도했을 때 일만이천톤 급의 대형 화물선<마
리아 그랜드>호는 선적 작업을 거의 마무리 짓고 있었다.
" 쓸데없는 걸음을 하셨습니다. 보십시오. 이제 마무리 작업만
남았잖습니까. "
털보 반장은 오늘밤 함께 나눌 술자리를 염두에 둔듯 걱정을 아
끼지 않았고 나는 의미있게 웃어 주었다. 과연 털보 반장의 말마
따나 하역 작업은 한치의 오차도 없었다.
대형 윈치가 엄청난 힘을 자랑하며 부지런히 360도 회전을 하였
고, 육중한 컨테이너를 가볍게 들어 올려선 화물 탱크에 집어넣는
반복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털보 반장이 손짓을 했다. 드디어 우리 회사 차례였다. 나는 재
빨리 컨테이너의 봉인을 살폈다. 봉인은 조금도 훼손되지 않은 채
통관 때 붙인 그대로 얌전하게 붙어 있었다.
이상이 없다.
나는 저으기 안도하며 윈치에 매달려 올라가는 컨테이너와 작별
을 나누었다.
" 잘 가거라. "
나의 입가로 회심의 미소가 번졌다.
한나절이나 지났을까.
하역장에 그득 쌓였던 컨테이너를 몽땅 삼킨 <마리아 그랜드>호
는 이제 출항 준비로 부산해지기 시작했다.
햇빛에 반사되어 은빛을 토해내는 <마리아 그랜드>호의 장관은
자못 감동스럽기까지 했다.
파일럿의 안내를 받으며 항구를 빠져나간 <마리아 그랜드>호가
까만점이 되어 수평선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나는 감회어린 시선
으로 지켜 보았다.
이제 모든건 끝났다. 나의 범죄는 완벽하게 성공한 것이다. 나
는 터질것 같은 웃음을 참느라 한참동안 어깨를 추스려야 했다.

2

내가 완전범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혜수의 약혼 소식을 들
은 후 부터였다.
혜수의 약혼은 나에게 엄청난 충격을 던져 주었고, 기나긴 겨울
밤 몇 날 며칠을 나는 하얗게 지새워야 했다.
그 며칠동안 혜수는 나의 상념속에서 수없이 난도질 당했다. 죽
였다간 살리고 살려내어선 또 죽였다. 그렇다고 나의 울분이 풀릴
리 만무한데도 그 무모한 반복 작업을 포기할 뜻이 내겐 조금도
없었고 결국 지쳐버린 건 나 자신이었다.
유난히 추웠던 그해 겨울을 나는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며 오도
카니 혼자서 떨어야 했다.
나의 메모철에는 혜수의 이름 석자가 무수히 나뒹굴었고, 낙서
가 쌓이면 쌓이는 만큼 반비례하여 나의 갈증은 도를 더해갔다.
제풀에 지친 나는 혜수를 수없이 포기해 보았고, 또 견딜수 없
는 외로움으로 열병을 앓아야만 했다.
" 날 보내줘. "
혜수는 내게 애원을 했었다.
" 내가 널 좋아했던 건 사실이야. 하지만 좋아한다고 꼭 결혼해
야 되는건 아니잖아? 네가 날 좋아하는 만큼 내가 잘 되라고 빌어
줄 수 없니? 제발 부탁이야. 날 보내줘. "
혜수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혜수는 일방적으로 혼자 떠들었다. 자기에겐 큰 꿈이 있
었다고, 어린시절의 불우했던 갖가지 기억들이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고, 이제 자기도 남보란 듯이 한번 살아 보겠다고, 혜수는
마치 신데렐라나 된듯이 들떠 있었다. 그런 혜수가 잡은 상대는
시쳇말로 꽤 있는 집 아들이었다.
혜수는 그렇게 내 곁을 떠나갔다.
혜수를 설득하여 마음을 돌려 보겠다던 나의 결심은 그렇게 깨
어졌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 내가 해야할 일은 혜수를 잊
는 방법뿐이었다. 그리고 노력을 했다. 혜수를 잊기위해 주위에서
놀랄만큼 많은 맞선을 보았고, 주지육림 속을 뒹굴어도 보았다.
그런데 사람의 심사가 왜 그리 묘한 건지, 잊으려고 애를쓰면
쓸수록 더 혜수가 그리워져 견딜 수 없었다.
혜수가 상큼 웃을때의 그 보조개, 그 화사한 웃음, 그 풋풋한
살내음. 타는 듯한 갈증과 미칠 것 같은 번민 속에서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은 혜수를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어느 영화 배우가 발설하여 한때 시중의 화제가 되었던 '사랑하
기 때문에 헤어진다'라는 유행어는 나에겐 터무니 없는 궤변이었
고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와 진배 없었다.
나는 다시 용기를 내어 이번엔 혜수의 약혼자라는 사내를 만나
보기로 했다.
사나이 대 사나이로 이야기하면 뭔가 뜻이 통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예감마저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 혼자만의
일방적인 느낌일 뿐이었다.
대학병원 연구실에서 만난 그 사내에게 나는 한마디로 압도당하
고 말았다.
멋진 사내였다. 남자인 내가 반할 것 같은.
잘생긴 얼굴이며, 몸에 배인 체취며, 동작 하나하나가 모두 나
와는 다른 부류의 사람 같았다.
그리고 참을성도 꽤 있는 사내였다. 그는 내가 늘어 놓는 푸념
같은 이야기를 끝까지 다 들어 주었다.
혜수와 나와의 관계, 우리가 고등학교 3년, 대학교 4년, 군대 3
년, 그리고 사회에 나와서 2년. 도합 12년간이나 사귀어 온 떨어
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사이였고, 사고무친인 혜수를 위해 내가
얼마나, 어떻게 도움을 주며 오늘에 이르렀는지, 나는 구구절절이
설명을 했다. 그리고 나는 혜수가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다는 점
을 특별히 강조했다.
그런데 그의 반응은 엉뚱했다.
" 그래서요? "
사내는 도리어 반문을 해 왔다.
나는 그만 말문이 막혔다. 답답한 노릇이었다. 그 정도 설명했
으면 말귀를 알아 들을만 할텐데.
" 그런 건 당사자들이 해결해야 될 문제들 아닙니까? "
사내는 마치 국외자처럼 말했다.
" 그 문제라면 제가 아무런 도움도 드릴 수 없겠군요. 혜수씨와
직접 말씀해 보십시오. 저는 다음 주에 미국으로 떠납니다. 뉴욕
주립대학 병원에 교환교수로요. 그래서 그 결정권은 혜수씨에게
드리겠습니다. 혜수씨가 미국으로 찾아 온다면, 미국에서 혜수씨
와 결혼 할 생각입니다만 혜수씨가 당신을 선택한다면 저는 두 분
에게 축복을 보내드릴 뿐이죠. 그럼, 전 바빠서 이만... "
사내는 담담하게 말을 하고 자리를 떴다.
나는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날 줄을 몰랐다. 마치 커다란 벽에
부닥친 느낌이었다. 사내가 그렇게 크게 보일 수 없었고, 반대로
나 자신은 그렇게 왜소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혜수를 사이에
놓고 그처럼 담담한 사내와는 달리, 생사를 걸고 덤비는 내 자신
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결국 사내를 만나지 않느니보다 못한 결과가 되었다.
사내를 만난 후로 나는 더욱 심한 갈증을 느꼈고, 그 사내로 인
해 내 마음 속에 웅크리고 있던 살의가 고개를 쳐들었다.
나는 마음 속으로 칼을 갈기 시작했고 완전범죄를 결심했다.
혜수가 없이는, 그것도 다른 사내의 품에 안겨 주고는 살 수 없
다는 결론이 내려진 이상 망설일 것은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싫다고 부득부득 떠나는 여자와 정사를 할 생각
또한 없었다.
나는 살아 남아야 했다. 시골에는 내가 책임져야 할 부모형제가
있을 뿐 아니라 내가 받았던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대한 보상만
받아내면 족하니까, 그러므로 나는 반드시 완전범죄를 해야만 했
다.
내가 완전범죄를 구상하고 있을때 혜수는 사내와의 결혼을 예정
대로 진행시키고 있었다.
그 즈음에도 나는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며 늘상 목이 말라 있
었고, 번민과 갈등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러나 혜수의 미국행이 확정된 순간 나의 살의도 굳어졌다.
사내는 벌써 미국으로 날아갔고 혜수는 넉달 후에 뒤따라 가도
록 예정되어 있었다.
기회를 포착하고 있던 나는 드디어 혜수를 깜쪽같이 납치하는데
성공했다.
혜수를 감금한 나는 마지막으로 한번 더 설득을 했다.
혜수는 코웃음을 쳤다. 처음엔 내가 장난을 치는 정도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심상찮은 내 기색을 눈치챈듯 이내 애원을 하
기 시작했다.
통사정을 하다 지친 나는 미국의 사내에게 보낼 편지를 강요했
다.
미국행을 포기한다. 미안하다. 잊어달라. 마음이 괴롭다. 당분
간 여행이나 하면서 마음을 정리하고 다시 연락드리겠다. 이런 요
지의 내용인데 혜수는 이것마저 거부했다.
무려 사흘동안 우리는 씨름을 했다. 그 사흘간 나는 미쳐서 날
뛰었다. 그리고 모든 걸 체념한 혜수는 마침내 편지를 썼다. 그러
나 나와의 결합은 끝내 반대를 했다.
결국 나는 나의 계획을 행동으로 옮기고 말았다.
우리의 인연은 이렇게 끝이 났다. 끝없이 상류사회를 동경한 혜
수와 사랑에 눈이 멀었던 나와의 인연은.


수출 살인 2

by 한대희


ㄳ ㄳ ㄳ ㄳ 3.
부산 출장에서 돌아 온 나는 촉각을 곤두세운 채 하루하루를 보
냈다. 그러나 혜수의 실종을 눈치채거나 혜수의 근황을 궁금해 하
는 사람은 없는듯 했다. 물론 당분간 혼자서 조용히 마음을 정리
하고 싶다는 뜻의 편지가 미국을 비롯한 여러 지인들에게 배달되
기도 했지만, 혜수가 피붙이 하나없는 사고무친이란 점이 나에겐
다행 스러웠다.
그러는 사이에 두어 달이 지나갔다.
부산의 메인포트를 출발한 화물선이 미국 L.A 까지 도착하는데
15일에서 20일 가량 소요된다. 거기서 뉴욕까지 트로킹(TRUCKING)
하거나 철도를 이용하더라도 일주일. 모두 한달을 넘지 않는다.
또 제품에 하다가 있다면 바이어로 부터 크레임이 걸려도 벌써 걸
렸을 시일이다.
그러나 미국쪽의 반응은 조용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오히려 내 쪽에서 미국에 전화를 넣어
보았다. 그리고 넌지시 떠 보았다. 수출품의 품질을.
" 엑설런트! "
그쪽의 대답은 한마디로 오케이였다.
그렇다면 내가 수출한 본 모델(BONE MODEL)은 벌써 실수요자의
손에 들어가 있다는 얘기다.
짐작컨대 혜수는 지금쯤 어느 병원의 연구실에 서 있거나 의과
대학강단에서 모델 노릇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혜수의 몸 구석
구석을 살피면서 진지하게 인체 해부학 강의를 듣고 있을 미국 학
생들의 모습이 떠올라 나는 얼핏 웃고 말았다.
미국을 가지못해 안달하던 혜수였는데 기껏해야 구경거리밖에
안되는 처지 아닌가. 한편으론 그런 혜수가 딱한 느낌도 들었다.
그러나 어쩔텐가. 버스는 이미 정거장을 떠난 것을.
어쨋든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그렇게 또 8개월이 훌쩍 지나갔다.
혜수를 떠나 보낸 지 근 일년여가 되는 셈이다.
이제 나는 혜수를 까맣게 잊어가고 있었다.
가끔씩 나의 꿈자리를 어지럽히던 혜수도 최근엔 통 나타나지
않았다. 바쁜 업무가 날 더이상 한가하게 내버려 두지 않은 탓도
있었다.
나에게는 큼직한 행운들도 잇따랐다.
내가 몸담고 있는 의료기구 수출회사가 3저호황의 특수한 붐을
타고 사세가 껑충 뛴 것이다. 회사 기구를 확대 개편하면서 나는
영업부 계장에서 무역부 과장으로 한 계단 승진을 했다.
게다가 되는 년은 앉아도 요강 뚜껑에 앉는다고, 나에게 그럴싸
한 규수감이 생겨서 요즘 데이트에 열을 올리는 중이었다.
나를 이쁘게 본 회사 중역의 소개로 맞선을 보았는데 나는 그녀
에게 흠뻑 빠져버렸다. 꿩대신 닭이라는 기분으로 만나기 시작했
는데 찬찬히 뜯어보니 그 아가씨야 말로 꿩이었다. 더욱이 그녀의
집안 배경 역시 빠뜨릴 수 없었다.
세칭 있는 집이었다.
있는 집 아들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혜수처럼 나도 있는
집 딸과 사귀게 되었다.
꿈같은 하루하루가 흘러갔다.
눈코 뜰사이없이 분주하면서도 보람있고 즐거운 나날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 김석기라고 합니다. "
사내가 내 놓은 명함에서 경찰대학 지도실장 경정 김석기라는
고딕체 글자가 한눈에 들어왔다.
경찰? 불길한 예감이 선뜩 뇌리를 스쳤다. 그리고 까맣게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하나 둘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 무슨 일이신지? "
응접실로 안내하여 녹차를 대접하면서 나는 다짜고짜 용건을 물
었다.
" 바쁘신 모양인데 죄송합니다. "
분주하게 돌아가는 회사 분위기가 마음에 걸리는듯 김석기는 한
참만에 입을 열었다.
" 경찰대학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학생들이
가끔씩 엉뚱한 질문들을 해댑니다. 아주 난처할때가 많아요. 고도
의 전문지식을 요하는 물음 말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전문가도 아
니고, 허허... "
" 무슨... 내용이신지? "
나는 저으기 안도했다. 상대가 경찰이라 켕기긴 했지만 수사경
찰관이 아니라 학생들을 지도하는 경찰이라니 일단 마음은 놓였
다.
" 거 뭡니까? 사람 해골 있잖습니까? "
" 해골요? "
나는 속이 뜨끔해졌다.
" 거 왜, 인체 해부학 시간에 가르치는 인조뼈라 그러던가? 인
체구조말입니다. "
" 아! 본 모델 말씀이군요. "
나는 재빨리 바로 잡아 주었다.
" 본 모델? "
" 우리 말로하면 인체골격이나 인체골격개라고 하죠. 저희들이
상품용어로 본 모델이라고 합니다. "
" 아하! "
김석기는 수긍이 가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 본 모델이 필요하십니까? "
" 아니, 몇 가지 알기만 하면 됩니다. 그 본 모델이라는게 성분
이 뭔가요? "
" 특수 플라스틱과 석회질로 구성되어 있죠. "
" 그럼 진짜 사람 뼈와 비교하면 어떨까요? "
" 똑 같습니다. "
" 빛깔두요? "
" 네. 전문가가 보더라도 하눈에 식별하긴 쉽지 않을겁니다. 실
물과 아주 흡사해요. 예를 들자면 뼈에도 신경이 있어요. 그 미세
한 신경구멍까지 똑같이 만들어 내니까요. "
" 허...정말 놀랍습니다. 우리 기술 수준이 거기까지 가 있다
니... "
김석기는 감탄을 연발했다.
" 정말 좋은 세상이죠. 과학의 발전은 놀라울 정도예요. 지금은
인조뼈를 일부분 이식수술하는 정도지만 좀 더 두고 보십시오. 몸
속의 뼈를 아예 갈아치울 수 있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는 겁니
다. "
" 허어... "
" 오늘날 이 지구상에서 천연두가 멸종되었듯이 미래 사회에서
는 다리불구나 척추 불구 같은 장애자들이 구제 받을 수 도 있다
이런 얘깁니다. "
" 그러니까 인조뼈를 사람 몸 속에 이식할 수 있다는 얘깁니
까? "
" 물론이죠. 교통사고가 나면 뼈가 으스러지는 경우가 태반인데
요, 그때는 인조뼈로 대체 해야죠. "
김석기는 벌린 입을 다물 줄 몰랐다. 현대 과학의 신기에 감탄
을 금치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한참만에 다시 입을 열었다.
"저희들이 어릴땐 모조뼈는 엄두도 내지 못했고 실물을 놓고서
공부를 했던것 같은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실물은 귀하겠죠?"
" 그럼요. 우리나라처럼 유교 사상이 뿌리 박힌데서 누가 죽은
송장인들 선뜻 내놓겠습니까? 경찰에 계시니까 잘 아시겠지만 사
망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면서 부검도 잘 못하게 한다잖습니까."
" 의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이나 의사들은 실물을 더 좋아한다는
것 같던데요?"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실물을 어디서 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군요."
머리를 끄덕이던 김석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러가지로 고마웠습니다."
"별 말씀을..."
나는 김석기를 사무실 문앞까지 배웅했다.
자리에 돌아 온 나는 머리 속을 정리해 보았다.
둘의 대화에서 이상한 부분은 없었다. 그리고 김석기를 통해서
도 특별한 느낌이나 낌새를 알아차리진 못했다. 그는 수사경찰도
아니었고 젊은 나이에 꽤 높은 자리에 올라가 있는 친구로구나 하
는 느낌외에 별다른 것은 없었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그런데 내
마음은 편치 못했고 불길한 예감마저 들었다.
웬지 입맛이 썼다.


4

이상한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나의 집을 뒤진 흔적이 보인 것이다. 그것도 하루 이
틀이 아니고 한달 내내 계속되었다.
그렇다고 집안이 뒤죽박죽이 되어 있는건 아니었다. 그 자리에
있어야 할 물건들이 조금씩 자리를 이동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틀림없이 누군가가 나 모르게 나의 집을 수색하고 있다는 얘기다.
나는 원래 결벽증이 있어서 남이 내 물건에 손 대는 건 딱 질색
이었다. 내가 한번 옮긴 물건은 내가 손대기 전에는 영원히 그 자
리에 있어야만 했다. 혜수도 나의 그 불문율만은 곧잘 지켰었다.
그런데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다. 혹시 경찰이 냄새를 맡은걸
까? 생각하니 머리털이 곤두섰다.
나는 내 짐작이 틀리길 간절히 바라며 실험을 해 보았다.
출근을 하기 전에 벽장이며, 세면실이며, 부엌문이며, 책상서랍
이며, 문이란 문은 모두 그 틈새에 머리털을 붙여 놓았다.
첫날은 무사히 넘어갔다.
나는 안도했다. 그런데 둘째날, 머리털은 하나도 붙어 있지 않
았다. 셋째날도 마찬가지였다. 틀림없이 가택 침입의 흔적이다.
나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어떤 놈일까? 혹시 경찰일까?
흥신소에 부탁해서 어떤 놈인지 캐어볼까 하고 생각하다가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분실한 물건도 없는 터에 괜히 꼬투리를 잡힐 필요가 없다는 느
낌 때문이었다.
어쨌든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내 범행이 발각 되었다면 방어를 위한 대책을 세워야 하는 것이
다. 나는 나의 시나리오를 전면 재 검토하기 시작했다.
내가 혜수를 우리집으로 유인한 것은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만
나자는 구실을 붙여서였다. 혜수가 제발로 걸어 왔으니 남의 눈에
뜨인다거사 이상하게 보일 이유가 하등 없었다.
또 범행 장소로 우리 집을 택한것은 우리집이 서울 변두리에서
도 좀 떨어진 야산 밑의 외딴 독립 가옥이기 때문이었다.
비록 허름하긴 하나 나에겐 궁전이나 진배없었고 이곳에선 내가
제일 어른이었다.
안채는 나 혼자서 사용하고 있고, 건너채 방 두칸에는 두 쌍의
맞벌이 신혼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범행 당시에는 두쌍의 신혼부부
가 모두 여름 휴가를 떠나고 집에는 오직 나혼자 뿐이였었다.
범행장소로 서울시내에서 여기보다 더 나은 곳이 어디 있겠는
가?
혜수의 목을 졸라 질식사 시킨 다음 욕조에 집어넣고 화학약품
을 부어 혜수의 시체를 급속도로 부패시켰다.
이 화학약품은 나만이 알고 있는 비법인데 자세히 공개할 수 없
는것이 유감이다.
농유산과 중크롬산 칼륨, 그리고 몇가지 화학약품을 더 첨가하
면 농크롬 유산이라는 화학약품이 되는데 피혁 회사에서 동물의
가죽과 살을 분리할때 쓰는 가죽 용해용과 비슷한 약품이 된다.
어쨌든 나는 지난 해 무더운 여름의 휴가를 밀폐된 목욕탕 안에
서 온통 보내야 했다.
뼈를 알콜로 닦고, 씻어내고, 가공하느라고 전문가인 나도 꽤
많은 땀을 흘려야 했다. 그 당시에 나는 부산에서 일어났던 토막
살인 사건의 범인을 비웃으며 작업을 했었다.
그 못난 친구는 지문을 칼로 마구 그어 놓으면 신원 확인이 안
될 줄 알았지만 겉지문 속에 속지문이 또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체포되었던 것이다.
허나 나의 경우는 다르다. 나야말로 완벽하다. 뼈만 가지고 어
떻게 지문을 채취햐며 신원을 확인할 것인가.
나는 분해한 뼈를 가방속에 넣어 회사로 들고가서 내가 숙직하
는 날 밤에 간단하게 조립하여 통관 직전의 수출품들 속에 끼워
넣었다. 그렇게 모든일이 끝난 것이다.
게다가 나는 더욱 완벽을 기하기 위해 혜수의 소지품이나 옷은
모두 불태웠다. 그리고 또 한가지. 이번 사건에서 음미할 부분은
혜수의 여권이었다.
혜수가 비자까지 받아놓은 여권을 나는 나만이 아는 루트를 통
해 여권 위조단의 어느 브로커에게 넘긴 것이다. 물론 나라는 인
물은 드러내지 않은 채.
이 땅에는 미국에 가지못해 안달하는 여자들이 혜수말고도 수두
룩한 모양이었다.
내가 여권을 넘긴지 정확히 사흘 후에 혜수로 위장한 여자가 김
포공항을 빠져 나갔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러니까 엄밀히 얘기하자면 혜수는 아직 살아있는 셈이다. 그
리고 미국의 어느 거리를 활보하고 있을 것이다. 비록 대리인이지
만. 그것은 출입국 관리소의 컴퓨터에도 기록되어있다.
자, 이정도면 나의 콘티는 완벽하지 않은가. 그런데 현재 내 주
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은 또 무엇인가. 누군가가 냄새를 맡았
다면 나의 콘티중에서 어느 부분이 노출되었단 말인가.
며칠을 두고 점검해 보아도 나의 콘티는 완벽했다. 어디에도 허
점은 없었다. 그런데 우리집의 비밀 가택 수색은 그 후로도 계속
되었다.




수출 살인 3

by 한대희


나는 불면증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신경쇠약으로 금방이라도 쓰러
질것 같았다. 나의 이런 신경쇠약을 제일 먼저 알아차린건 그 아
가씨였다. 그리고 걱정을 해 주었다. 그 사실을 전해들은 아가씨
의 부모님들은 노총각이 혼자서 해 먹는 밥이 얼마나 부실하겠느
냐며 약혼을 서두르고 날짜를 고르느라고 법썩인 모양이었다.
나로선 고마운 일이었다.

이런 와중에 나에겐 골치거리가 또 하나 있었다. 그것은 경찰대
학의 김석기 경정이었다.
그 친구는 나를 만나고 간 후로 사흘이 멀다하고 전화질을 해대
었다. 주제는 한결같이 해골이었다.
그 친구, 경찰대학의 학생지도실장이라면 학생들 지도 하기도
바쁠텐데 해골에 웬 관심이 그리 많은지 해골 박사가 되어 버린듯
했다.
그것도 처음 통화때는 듣기 편하게 내가 가르쳐 준 용어 그대로
본 모델이 어떻고 안체 골격이 어떻고 해쌓더니 어느새 용어는 다
까먹고 해골,해골하며 노골적으로 해골을 뇌까리는 통에 이제 내
골이 아플 지경이 되었다.
그렇다고 나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전화를 거절할 명분도
없고 피하는 것도 한도가 있어서 이젠 전화 노이로제에 걸릴 정도
였다.
그런 김석기로 부터 또 전화가 걸려 왔다.
" 아, 장과장님! 공장 견학을 좀 할수 없을까요? "
나는 마지못해 그러라고 했다.
그랬더니 이게 웬일인가. 김석기는 한 떼의 경찰대학생을 몰고
견학을 온것이다.
"허허...이번에 졸업하는 학생들입니다. 이제 곧 임관을 하면
일선 경찰서로 나갈 동량들인데 앞으로 범죄수사 실무를 맡을 때
도움이 될까 해서요. 허허.... "
이렇게 말하고 김석기는 넉살 좋게 웃었다.
한패거리의 불청객들을 견학시키느라 공장은 때 아닌 법썩을 떨
어야 했다. 회사 간부들은 속도 모르고 뜻밖의 진객이라며 수선들
을 떨었지만 나는 마음이 편치 못했다.

견학이 끝날때쯤 김석기가 나를 공간 한쪽의 으슥한 곳으로 이
끌었다. 그리고 대단한 발견이나 한것처럼 말을 꺼냈다.
"그 해골 말입니다. 의과 대학생들은 해골들을 하나씩 가지고
있는 모양이에요. 모두 진짜로 말입니다. 마침 대학병원에 근무하
는 친구가 있어서 물어 봤죠. 그 출처를 말이에요. "
김석기는 그 지긋지긋한 해골 이야기를 또 화제로 끄집어 내었
다. 나는 담담하게 얘기를 했다.
" 그래서요? 출처를 알아 내ㄳ어요? "
" 네. 모두 선배들 한테서 물려 받았다는 겁니다. "
" 예? "
순간 나는 뻥해서 바라 보았다. 김석기는 아랑곳없이 재빠르게
이야기 했다.
" 그럼 그 선배들은 어디서 해골을 얻었느냐? 모두들 그 위의
선배들로 부터 물려 받았다고 해요. 그래서 그 출처를 거슬러 올
라 갔더니 옛날에 해골이 흔한 시절이 있었던 겁니다. 바로 6.25
동란 직후죠. "
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무엇보다 해골에 대해 끈질긴 집념을
보이는 김석기가 무서워졌다.
" 그때 가장 해골이 많이 나온데가 어딘지 아십니까? 바로 동두
천 근방이었어요. 참, 장과장님 고향이 어디죠? "
나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 동두천입니다....."
" 그래요, 동두천. 제가 또 다른 기록에서 알아 내었는데 동두
천에서는 그 후에도 임자없는 해골들이 많이 있었다고 해요. 그
당시 동두천에 근무했던 미국 군의관들이 귀국할 때 본 모델 하나
씩은 들고 갔다고 하더군요. 참 장 과장님은 군대 생활을 어디서
하셨죠? "
나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러자 김석기가 대신 대답을 했다.
" 동두천 미군 부대에서 카츄사로 근무 하셨더군요. 전 사실 장
과장님의 해골에 대한 해박한 지식에 놀랐거든요. 장 과장님도 아
마 그때 선배들로 부터 전해 내려오는 얘기를 들은 거겠죠? "
그렇게 말하고 김석기는 히죽 웃었다. 그리곤 휘적휘적 일행들
속으로 사라져 갔다.
강한 충격을 받은 나는 땅에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순간
모든게 확연해 졌다. 바로 저 놈이다. 나의 집을 비밀리에 뒤진
놈이. 저놈은 모든걸 알고 있다. 다만 증거가 없기 때문에 드러내
고 덤비지 못한 것이다. 몰래 가택수색을 한 것도 증거를 찾기 위
해서였고, 흥. 그렇다고 없는 증거가 어떻게 나올것인가. 나는 아
직까지 완전범죄를 하고 있는것이다.
스스로 자위를 하는데도 온몸의 맥이 풀리고 두 다리가 후들후
들 떨려왔다.
나는 화단 모서리에 엉덩이를 걸쳤다. 더는 서 있을 수가 없었
다. 그리고 떨리는 마음을 진정 시키기위해 담배를 붙여 물었다.
멀리서 김석기가 손을 흔들었다. 학생들을 인솔하여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나는 간신히 손을 반쯤 들어서 흔들어 주었다.

그 후로 나의 생활은 엉망이 되어 버렸다.
신경쇠약은 날로 증세를 더해 갔고 불면증으로 잠을 못이루는
날이 많아졌다.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고 실수를 연발하여 상사로
부터 꾸중도 들었다.
그런데 더욱 이상한 것은 김석기였다.
그는 공장견학을 한 날 이후로는 한달 이상을 전화도 없었고 찾
아오지도 않았다. 그리고 비밀 가택 수사도 중단 되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일까? 그점이 또 나를 불안 속으로 몰아 넣었다.
그래. 증거가 없기 때문이야. 요즘은 증거 지상 제일주의 아닌
가. 윤노파 사건도 그렇고 미모의 여대생 살인사건도 증거 때문에
미제 사건이 된 셈이 아닌가. 김석기 그놈이 심리전을 쓰고 있는
거다. 내 피를 말려서 스스로 항복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김석기의 의도를 어렴풋이 알게되자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
다. 그렇다면 일단은 안심이다.
그런데 도무지 알수 없는것은 김석기가 어떻게 냄새를 맡았을까
하는 문제였다. 나로서는 그 점이 수수께끼였다. 이번엔 내 쪽에
서 김석기에게 궁금증을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던 차에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김석기를 만나게 되었
다.


수출 살인 (최종회)

by 한대희


아니 우연히 만났다기 보다 김석기가 나를 찾아왔다고 표현함이
옳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약혼식을 올리는 서라벌 호텔 로비에서였다.
그는 허름한 점퍼 차림으로 호텔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어슬렁 거리고 있었고, 나는 얼마나 놀랐는지 오줌을 찔
끔 재릴뻔 했다.
약혼식을 하는둥 마는둥 치르고 나는 김석기를 이끌고 황황히
호텔을 빠져 나왔다. 김석기가 단 둘이 조용히 얘기하고 싶다고
해서 우리는 가까운 여관 방을 찾아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나는 따지듯 대들었다.
" 도대체 뭡니까? 왜 남의 약혼식장까지 쫓아와서 분위기를 깨
는겁니까? "
내가 흥분을 하자 김석기는 지그시 나를 보며 말을했다.
" 정말 완벽하게 일을 하셨더군요. "
" 무슨 소리요? "
" 지혜수씨 살인사건 말입니다. "
나는 숨을 훅 삼켰다.
김석기는 노골적으로 본론을 끄집어 내었다.
" 솔직히 말씀 드리죠. 몇달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 있는 후매
로 부터 커다란 소포뭉치가 하나 배덜되어 왔습니다. 그 소포를
뜯어본 순간 나는 기겁을 했어요. 그 소포에 들어 있는건 바로 사
람의 해골이었어요. 나는 후배가 장난을 친줄 알고 불같이 화를
냈죠. 그런데 미국의 후배로 부터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시애틀
의 주립대학에서 공부를 하고있는 그 후배의 말에 의하면, 어느날
자기네 교수의 연구실에서 본 모델을 보았는데 그것이 우리나라
제품이었다는 겁니다. 타향에서 고향 까마귀를 봐도 반갑다는데
메이드 인 코리아라는 상표를 보자 반갑기도하고, 신기하기도 해
서 자세히 살펴 보았대요. 그러다가 그것이 진짜 해골이라는 사실
을 알게 되었죠. "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 그 후배는 처음에는 무심코 넘겼는데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니
더란겁니다. 범죄의 냄새가 풍기기도 하고,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
지만 억울해서 구천을 떠돌고 있을 영혼을 생각하니 견딜 수 없었
다는거죠. 생각다 못해 그는 자기 돈으로 그 값을 치르고 마침 경
찰에 몸담고 있는 내가 생각나서 보냈으니 수사를 해 봐 달라는겁
니다. "
' 미친 놈! '
나는 마음 속으로 그 후배를 저주했다.
" 그런데 해골을 가지고 수사를 하자니 난감도 하고 분야도 달
라서 할 수 없다고 그랬더니 그 후배가 막 야단을 치더군요. 선배
님이 그러고도 민중의 지팡이가 되겠느냐구요. 혹시 억울하게 죽
었을지도 모를 불쌍한 원혼을 생각하면 멀리 이국에 나와 있는 자
신도 의분이 터질 판인데, 경찰에 몸 담고 있는 선배님이 그래서
되겠느냐는 겁니다. 그 말을 듣고보니 느껴지는 부분도 있고해서
할 수 없이 수사를 시작 했습니다. "
김석기는 거기서 잠시 말을 끊었다. 나는 입 안이 바싹바싹 타
들어갔다.
" 마지못해... 일단 경찰병원에 해골을 가지고 신원파악을 할
수 있는지 검사를 의뢰했는데 거기서 뜻밖에도 놀라운 결과가 나
왔습니다. 바로 장 과장 당신이 역설했던 과학의 힘이죠. 피해자
의 뼈에서 2년전에 당했던 교통사고의 흔적을 발견한겁니다. "
그 순간 나는 아차하고 땅을 치고 싶었다. 그 점만은 미처 계산
에 넣지 못하였던것이다.
" 피해자의 해골에는 좌대퇴골 골절, 안면부 좌상으로 앞니 상
하가 부러졌고, 두개골에 금이 갔던 흔적이 남아 있었어요. 피해
자는 개방성정복 수술을 하여 대퇴골에 심을 박았던 경력, 상하문
치가 의치로 보충되었으며 두개골에 어렴풋한 흔적이 있음이 판명
되었죠. 그래서 교통사고 전문 병원에 회람을 돌린 결과, 피해자
를 치료한 병원을 찾아 내었고, 그때의 기록카드와 엑스레이 필름
을 통해 피해자의 신원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피해자의 이름은
지혜수였습니다. "
모든것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나는 나의 긍금증, 나의 실수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자 이상하게 나의 마음은 편해졌고 나는
평정을 되찾았다.
" 그리고 범인은 쉽게 지목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장 과장, 당
신이었어요. "
나는 코웃음을 쳤다.
" 그런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
나는 오히려 유들유들하게 대들었다.
" 그래요. 그 증거 때문에 당신을 체포하지 못하고 몇달씩이나
심리전을 펴면서 허송세월을 했던거요. "
" 흥. 몰래 우리 집에 침입했던 것도 당신이었군? "
" 그렇습니다. "
" 잘하는 짓이군. 경찰관이 그런 불법을 저지르다니! 당신을 불
법 가택 침입죄로 고발하겠어! "
" 당신은? "
" 흐흥, 증거가 있으면 얼마든지 체포하라구! "
" 당신이 저지른 그 범죄를 인정은 하는군? "
" 그래 내가 했다! 하지만 어쩔테야? 증거를 대봐 증거를! 하하
하하..이거 재미있군. 감방에는 당신이 가게 생겼으니. "
그때 김석기가 빙글 웃었다. 그리고 품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순간 나는 눈이 뒤집혔다.
" 천만에! 감방에는 당신이 가게 될거요. 나는 가택수색영장을
소지하고 있어. 다만 당신이 보는데서 집행하지 않았을 뿐이오. "
" 뭐야? "
" 그리고 방금 당신 입으로 말한 그게 증거요. 이 소형 녹음기
에 우리가 한 대화가 모두 녹음 되어 있으니까. 또 일러 두지만
그동안 당신과 나눈 해골에 대한 이야기도 모두 녹음되어 있고,
지금쯤 경찰청 특별 수사대가 당신 집을 덮치고 있을거요. 당신이
화학 지식을 자랑스럽게 얼핏 얘기 했었지? 전화로 말이오. 농크
롬산이라는 화학약품을.... 아마 당신집 어딘가에서 그 흔적을 찾
아내게 될거요. "
나는 무너지고 말았다. 완전범죄를 그렇게 자신 했었는데, 이것
은 꿈에도 생각못했던 상황이었다. 나는 발악하듯 외쳤다.
" 당신! 도대체 당신이 형사야 뭐야? 수사관도 아니면서..."
내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방문이 열리면서 정복 경찰관이 들
어왔다.
김석기가 끌려 나가는 내 뒤통수에다 대고 말을 했다.
" 내가 만약 경찰 제복을 입지 않았더라도 국민의 한 사람으로
서 당신을 기어코 찾아 내었을거요! "

5
나는 독방에 감금 되었다.
쇠창살 너머로 유난히 푸르고 높은 가을 하늘이 보인다. 하얀
구름이 평화롭게 보인다.
나의 변호사는 내 목숨을 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정신분열 초기증세, 신경쇠약, 노이로제, 결벽증, 소심증, 편집
증, 등 정신과 의사의 소견서를 첨부하여 나를 정신병자로 규정할
것을 청원 했으나 재판정에서 받아 들여지지않았다.
사상초유의 끔찍한 범죄를 저질러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한 피
고인에게 극형을 내린다는것이 판결문의 요지였다.
나는 사형이 확정되어 그 집행을 기다리는 사형수다.
지금에 와서 한가지 불만스러운 것은 변호사가 나를 정신병 환
자 취급을 했다는 점이다.
내가 정신분열 증세를 보인다니 그건 말도 안되는 소리다. 나는
지금 감기 증세를 보이고 있을 뿐이다. 아직 초가을인데 감방안은
무척 쌀쌀하다.
시멘트 바닥이라서 그런건지.

<수출살인. 끝>






< 악 몽 >

by 한대희
그것은 생각만 해도 흉칙한 꿈이었다.
잠 자리에서 일어 난 보희는 몸 둘바를 몰라했다. 어쩌면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어제 밤 꿈에 서산에 올라가 방뇨를 했는데
온 서울이 오줌으로 그득히 차 오르지 않는가.
세상에 망측도 하지. 아녀자가 어찌 그런 꿈을 다 꾸었을까? 남
부끄러워 혼자 속을 꿍꿍 썩이는데, 보희로 부터 꿈 얘기를 들은
동생 문희는 금방 반색을 한다.
" 언니, 그 꿈을 나한테 팔아요. "
" 그럼 꿈 값으로 뭘 줄래? "
" 비단 치마면 되겠지? "
그리고 문희는 언니를 향해 옷깃을 벌리며 꿈을 받아들일 자세
를 취했다.
" 지난 밤의 꿈을 너에게 넘겨준다. "
보희는 그렇게 외쳤다.
보희가 동생 문희로 부터 꿈 값으로 비단 한필을 넘겨 받은지
열흘 후.
김춘추와 함께 집 앞에서 공놀이를 하던 김유신은 짐짓 김춘추
의 옷을 밟아 김춘추의 옷고름을 떨어뜨려 놓고는 옷고름을 꿰메
어 가라고 그를 집안으로 불러 들였다.
유신은 누이를 불러 춘추의 옷고름을 달게 했는데 마침 언니 보
희는 병으로 누워 있어 문희가 대신 춘추가 기다리는 방으로 들어
갔다.
춘추는 유신의 의중을 눈치채고 빙긋 미소를 흘렸다.
혈기방장한 청춘남녀가 옷고름을 단다는 핑계로 서로의 숨결이
들릴만큼 얼굴을 마주 했으니 어이 탈이 없을손가. 춘추는 하루에
쌀 3되로 지은 밥과 꿩 아홉마리를 먹어야 하는 혈기 넘치는 거한
이었다. 오죽하면 당나라 왕이 그의 풍채를 보고 신(神)이 내린
사람이라고 감탄을 했겠는가.
그날 춘추와 문희는 넘을 수 없는 선을 넘고 말았다. 혈기방장
한 춘추 공(公)이 문희를 겁탈했다고 표현함이 옳을지도 모르겠
다.
모든것은 유신의 의도대로 착착 진행되었다.
그런데 그 이후 춘추로 부터 달다쓰다 말이 없었다. 그들 남녀
는 그후로도 공공연히 왕래를 하며 교제를 계속했고, 문희가 임신
을 했는데도 춘추가 청혼을 해오지 앉자 유신은 누이를 크게 꾸짖
었다.
" 네 이년! 너는 부모에게도 알리지 않고 임신을 하였으니 이
어인 까닭이냐! "
그리고 유신은 누이를 불태워 죽인다고 온 나라에 말을 퍼뜨렸
다.
어느 날, 선덕왕이 남산에 거동한다는 소식을 듣고 유신은 마당
에 나무를 그득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저게 무슨 연기냐고 선덕왕이 물으니 주위에서 아뢰기를.
" 유신이 누이 동생을 불태워 죽이는 것인가 보옵니다. "
하고 고했다.
놀란 왕이 그 까닭을 알고는 마침 왕을 수행하여 앞에 있던 춘
추 공을 크게 나무랐다.
" 그것은 네가 한 짓이니 빨리 가서 네 아낙의 목숨을 구하도록
하라."
춘추는 그길로 말을 달려 유신에게 왕명(王命)을 전하여 문희를
죽이지 못하게 하고 그후에 버젓이 혼례를 올렸다.
훗날 춘추는 신라 제 28대 태종대왕이 되었고, 언니로 부터 꿈
을 샀던 김유신 공의 손아래 누이인 문희는 문명황후(文明皇后)가
되었다.


이송자여사는 꼭 그런 설화 때문이 아니더라도 유난스레 꿈을
믿는 사람중의 하나였다.
설혹 이송자여사가 요상망칙한 꿈이라도 하나 꾸는 날이면 그녀
의 집 전화는 아침부터 불통이 되기 일쑤였다. 그녀는 전화통을
붙들고 이 사람 저 사람 불러내어 꿈 해몽을 하느라 법썩을 떨기
마련이었고, 결국 개 꿈이라는 결론이 내려질 때 까지 그녀는 단
념이란걸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사소한 꿈 따위로 자신의 길흉화복을 점치기를 즐겨했
고, 년전에 남편이 교통사고로 숨지고 혼자가 되었을 때도 자신이
미리 꿈을 꾸고 예언을 했는데도 남편이 그 말을 믿지 않고 대책
을 소홀히해 변을 당했다고 철썩같이 믿을 정도였다.
그런 이 송자 여사가 또 꿈을 꾸었다.
" 자야.....고만 일어 나레이...."
비록 꿈결 속이지만 그 목소리는 너무도 귀에 익어 있었다.
" 자야아~~~"
이름의 뒷꼬리를 '자야아~~~'하고 길게 끄는 억양은 오갈데 없
는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 아버지..."
그녀는 기절초풍할듯 놀랐다. 오래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돌아
가실 때의 옷 차림 그대로 머리 맡에서 그녀를 굽어보고 계시지
않는가.
" 자야아...어서 도망 가레이! 여기 있으면 죽는다! 얼른 도망
가레이! "
아버지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향해 호소했다. 홀몸이 된
후, 꿈 속에서도 그리워하며 몽매에도 잊지 못하던 아버지였다.
그녀는 와락 부친의 품 속으로 뛰어 들었다.
" 아버지이...."
그러나 그녀의 손에 잡히는건 허공 뿐이었다.
"자야아이...어서 도망가라카이...그냥 있으면 죽는데이...자야
아..."
" 아버지! "
버럭 소리를 지르며 허공을 향해 두팔을 허우적대던 이송자 여
사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꿈이었다. 그런데 꿈치고는 생시와
너무나 흡사했다. 주위를 두리번 거리는 그녀의 눈에 황당그레하
게 넓은 방이 그득히 들어 왔다. 전기 불도 끄지 않고 잠이 들었
던듯 형광등의 불빛이 방안을 온통 밝히고 있었다.
그녀는 문득 공포를 느꼈다. 대낮처럼 훤하게 밝은 방이 오히려
무섬증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그 꿈. 그건 예삿 꿈이 아니었
다. 빨리 달아 나라는 부친의 애절한 호소가 뇌리를 스치자 그녀
의 등줄기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베겟닛에 감추어 두었던 수
표뭉치들을 꺼집어 내어 허리춤에 꿰어 차고는 쪽문을 열고 뒷채
로 빠져 나왔다. 오금이 떨려서 앞문으로 나갈 엄두는 도저히 나
지 않았다. 그녀는 정신 없이 뒷 담을 뛰어 넘었다. 평소의 그녀
로선 꿈도 꾸지 못할 담장을 그녀는 쉽게 뛰어 넘었다.
바로 그때였다.
대문옆의 화장실에서 문을 열어놓고 볼일을 보고있던 뒷집의 학
생이 담을 넘어 오는 사람을 발견하고 냅다 고함을 질러댔다.
" 도둑이야! "
벼락같은 소리가 그녀를 더욱 혼비백산하게 만들었다. 시골 집
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뒷 집도 집 한채에 여러가구가 세 들어 살
고있는 다세대 주택이었고, 고함 소리에 이방 저방에서 뛰쳐 나온
사람들에 의해 이 여사는 미처 몇걸음도 떼지 못한채 덜미가 잡히
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 아니? 이분은 ...앞집 아주머니 아니세요? "
" 아주머니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
다행히 달빛이 휘황한 밤이라 뒷집의 주인이 그녀를 쉽게 알아
보았다. 마침 순찰 중이던 방범과 안면있는 순경이 소동을 보고는
급히 달려 왔다.
" 무슨 일입니까? "
" 어머나 김순경님. "
경찰 제복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다는듯 이 송자여사는 김순경
의 제복 소매를 잡고 늘어 졌다. 그리고는 조금전의 꿈이야기를
줄줄이 늘어 놓았다. 이야기를 듣고 난 김순경은 기가 막힌다는듯
그녀를 빤히 바라 보았다.
" 에이, 아주머니도... 난 또 난리라도 크게 난줄 알았네. 그만
한 일로 뭘 그러세요? 자. 다들 들어 가셔서 주무세요."
그리고 김순경은 몸을 돌렸다.
" 어머나! 그냥 가시면 어떡해요? "
그녀는 김순경의 팔소매를 와락 움켜 쥐었다.
" 아니 아주머니, 그만 주무시라니까요? "
" 무서워서 집에 못 들어 가겠어요."
" 아주머니, 꿈은 꿈일 뿐입니다. 아시겠어요? 원래 걱정이 많
으면 꿈자리가 사나워지고 말이 많으면 어리석은 소리가 나온다고
성경 말씀에도 있잖습니까? "
김순경은 차분하게 설득했으나 이미 새파랗게 질려있는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
" 그게 예삿 꿈인줄 아세요? 우리 아버님이 나타 나셔서 일러
주셨다구요."
김순경은 그 말만을 반복해서 들었을 뿐이었다.
" 좋심다! 그럼 집으로 가 보입시다! 우리가 수색을 해 드릴팅
께. 그라므 안심이 되겠지요? "
보다못한 방범 대원이 불쑥 앞장을 섰고 모두 그 뒤를 따랐다.
뒷집을 나와 돌아가니 대문이 굳게 걸려 있었다. 방범대원이 담을
넘어 대문을 따 주었고 모두들 대문간에 서 있었다. 이송자 여사
가 한사코 집안에 발을 들여놓는걸 거부했던 것이다.
" 아주무이요. 도대체 무신 말라빠진 귀신이 있단 말인교? 샅샅
이 두 바쿠나 이잡듯이 뒤져도 아무꺼도 안 나오잖는교."
그녀의 요청에 의해 집안을 두번씩이나 뒤졌던 방범대원은 은근
히 눈을 흘기며 그녀를 나무랐다.
" 에이구..멀쩡한 밤에 이기 무신 난리고...김순경요...마 소변
이나 보고 우리는 가입시더."
그리고 방범대원은 대문간에 달린 변소로 가서 문을 왈칵 열었
다.
" 윽! "
별안간 그의 입에서 짐승의 소리와 흡사한 신음소리가 들려 오
더니 그의 온몸이 굳어버렸다.
" 무슨 일이요? "
가까이 다가간 김 순경이 플래시를 비추었다. 순간 김순경 역시
두걸음이나 뒷걸음을 치고 말았다.
화장실 안에는 머리를 산발한 여인이 하얀 소복을 입은채 우두
커니 서 있는게 아닌가. 얼굴은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써커스
의 광대를 방불케하는 울긋불긋 요란한 화장과, 가슴까지 치켜
든, 두손에 움켜 쥔 칼날이 시퍼런 식칼을 보는 순간 아무리 담
이 큰 사내라도 가슴이 서늘해 질 정도였다.
" 누.누구냐? 귀신이면 사라지고 사람이면 나와라...."
얼마나 놀랐는지 김순경은 자신이 지금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지
도 모를 지경이었다.
다행하게도 귀신같은 여자는 순순히 변소에서 빠져나와 칼을
버렸다. 잠시 후, 파출소로 연행 된 귀신 같은 여자의 화장을 지
우는 순간, 이송자여사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소리가 튀어 나왔다.
" 아니? 아주머니! "
귀신으로 분장하고 그녀의 집에 숨어 들었던 여자는 다름아니라
어제 낮에 그녀에게 계를 태워 준 계주 아주머니 였던것이다.

- 끝 -


원제:검찰측의 증인 (Witness for the Prosecution) #1
원작:아가사 크리스티
메이헌 씨는 코안경을 바로잡고, 특유의 짤막한 마른 기침을
하며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런 다음, 모살죄(謀殺罪)로 기소되어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잇는 남자를 다시 쳐다보았다.
메이헌 씨는 태도가 분명하고, 모양을 냈다기보다는 단정하게
차려입은 키가 작은 사람으로, 아주 비늠없고 날카로운 회색 눈
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한구석도 어리숙해 보이지 않았다. 사
실, 사무 변호사로서 메이헌 씨의 명성은 대단히 높았다. 자기의
의뢰인과 말할 때의 그의 목소리는 무미건조하긴 했지만 매정하
지는 않았다.
"나는 당신이 아주 중대한 위허메 처해 있으니, 극히 솔직할
필요가 잇다는 것을 다시 주지시켜야겠소."
레너드 볼은 자기 앞에 있는 빈 벽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다가,
그 변호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알고 있습니다." 그가 힘없이 말했다. "계속 그런 말씀을 하
시는 군요. 그러나, 아직도 제가 살인 - 살인혐의로 기소되었다
는 것이 믿기질 않아서요. 그것도 그렇게 비열한 범죄로 말입니
다."
메이헌 씨는 경험이 풍부하여 감정에 치우치지 않았다. 그는
다시 기침을 하며, 코안경을 벗어 세심하게 닦은 다음 다시 걸쳐
썼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예, 예, 예. 자, 볼 씨,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을 빼내도록 노력할 겁니다 - 그리고, 우
리는 꼭 성공하게 될 겁니다 - 성공하고 말고요. 그러기 위해서
는 내가 모든 사실을 알아야 하요. 그 사건이 당신에게 정말 어
느 정도로 불리한지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최선의 변호
방향을 설정할 수 있쟎겠소."
그 젊은 남자는 멍하고 무기력한 태도로 여전히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메이헌 씨가 보기에 이 사건은 아주 절망적인 것 같았
고, 피고로 유죄가 확실한 것 같았다. 그러나, 처음으로 그는 그
렇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은 제가 유죄라고 생각하고 계시는군요." 레너드 볼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맹세코 저는 그러지 않았습
니다 ! 상활이 제게 아주 불리해 보인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
ㄳ. 저는 올가미에 걸린 것 같습니다 - 그물이 온통 저를 사로잡
고 있어서 어느 쪽으로 돌아서도 걸리고 말아요. 그러나, 저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메이헌 씨, 저는 그러지 않았다고요 !"
그러한 입장에 처한 사람은 으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게 마련
이다. 메이헌 씨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
하고 그는 감명을 받았다. 어쩌면 레너드 볼이 결백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당신 말이 옳아요, 볼 씨." 그는 엄숙하게 말했다. "이 사건
은 당신에게 아주 불리해 보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당신의 말을
받아들이겠소. 자, 그럼, 그 사건에 대해 다시 한번 들어 봅시
다. 당신이 에밀리 프렌치 양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솔직하게 말해 주시오."
"언젠가 런던의 옥스퍼드가(街)에서였습니다. 저는 어떤 나이
든 부인이 길을 건너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ㄳ. 그녀는 물건을 잔
뜩 들고 잇엇죠. 길 한가운데에서 그것들을 떨어뜨려 주우려고
하다가, 버스 한 대가 거의 그녀를 덮칠 뻔하는 것을 보고는, 사
람들이 소리치는 통에 얼떨떨하고 당활해서 저는 가까스로 그녀
를 길 가장자리로 피하게 해주었죠. 그리고는 그녀의 물건들을
주워 흙을 잘 털어낸 다음, 끈으로 다시 ㄳㄲ어서 그녀에게 돌려
주었습니다."
"당신이 그녀의 생명을 구해 주었다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겠군요 ?"
"오, 아니에요 ! 제가 한 행동은 순전히 호의에서 비록된 평번
한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굉장히 고마와하며 제 행동거지가 요즘
젊은이들과 다르다는 뜻의 어떤 말을 했습니다 - 그 말을 정확하
게 기억할 수가 없군요. 그런 다음 저는 모자를 약간 들어올려
인사를 하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ㄳ.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리라
고는 생각지도 못하고서요. 하지만, 인생이란 우연의 일치로 가
득차 있죠. 바로 그날 저녁 저는 한 친구의 집에서 있었던 파티
에서 그녀와 마주쳤습니다. 그녀는 저를 대번에 알아보고 제 소
개를 하라고 하더군요. 저는 그 때서야 비로소 그녀가 에밀리 프
린치 양이고, 크리클우드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잠시 동안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녀는 사람들한테 잡
작스럽고 맹렬하게 정을 쏟는 노부인이었던 것 같습니ㄳ. 그녀는
누구라고 할 수 있었던 아주 단순한 행동을 보고 저를 좋아하게
된 거죠. 떠날 때, 그녀는 제 손을 다정하게 잡으며 꼭 자기 집
에 놀러와 달라고 하더군요. 물론 저도 그렇게 하고 싶다고 햇
죠. 그랬더니 그녀는 대번에 날짜를 정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저
는 특별히 가고 싶다는 생각은 없엇지만, 거절하는 게 좀 뭣한
것 같아서 그 다음 토요일로 정했죠. 그녀가 가 버리고 난 다음,
저는 친구들한테서 그녀에 대한 것을 좀 알게 되었습니ㄳ. 그녀
가 부자라는 것과, 하녀 한 명만 데리고 살고 있으며, 고양이를
여덟 마리나 기르고 잇는 괴짜라고 말입니다."
"알겠소 - " 메이헌 씨가 말했다. "그녀가 잘산다는 말이 꽤
일찍 나왔군요 ?"
"제가 물어 봤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 "하고 레너드 볼이 몹
시 화를 내며 말하기 시작했으나, 메이헌 씨가 손짓으로 그를 잠
자코 있게 했다.
"나는 이 사건을 일단은 저쪽 검찰측 입장에서 살펴봐야만 하
오. 보통 사람들은 프렌치 양이 재산이 많다고는 생각지 않을 거
요. 그녀는 가난하게, 아주 초라하게 살고 있었으니까. 당신이
그 정반대라는 말을 듣지 못했다면, 당신도 아마 십중팔구는 그
녀가 가난하다고 생각했을 거요 - 적어도 처음에는 말이오. 당신
에게 그녀가 잘산다는 말을 한 사람이 정확히 누구였소 ?"
"조지 하비라는 친구인데, 그의 집에서 그 파티가 열렸었죠."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을 기억하고 있을까요 ?"
"잘 모르겠군요. 꽤 시간이 흘러서."
"좋습니다, 볼 씨. 검찰측에서는 당신의 경제 사정이 궁핍했다
는 것을 첫번째로 겨냥할 텐데 - 그건 사실이죠 ?"
레너드 볼은 얼굴을 붉혔다.
"예 - " 하고 그는 나지막하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그 땐 정
말 지독한 불운의 연속이었습니다."
"좋습니다." 하고 메이헌 씨가 다시 말했다. "내 말대로 당신
은 경제적으로 궁핍한 상태에서 그 부유한 노분인을 만나 그녀와
의 관계를 이끌어왔습니다. 만일 우리가, 당신은 그녀가 잘산다
는 것으 ㄹ모랐으며, 당신이 그녀를 방문한 것은 순수한 인정에
서였다고 말할 수 있는 입장이라면 - "
"정말로 그랬습니다."
"아마 그렇겠죠. 나는 그 점을 의심하는 게 아니오. 그 이면의
관점에서 그것을 보고 있소. 당신 친구 하비 씨가 기억을 하느냐
못 하느냐에 많은 것이 달려 있습니다. 그 사람이 그 대화를 기
억하고 있을까요, 못 할까요 ? 그것이 더 나중의 일이 아니냐고
물으면, 그는 그럴지도 모른다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
레너드 볼은 몇 분간 생각을 해보았다. 그런 다음 아주 침착하
게, 그러나 얼굴이 좀 창백해진 채 이렇게 말했다.
"그쪽은 성공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메이헌 씨. 그 당시 거기
에 있어던 여러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들었는데, 그들 중 한두 명
이 제가 부유한 노부인을 낚았다고 놀렸거든요."
변호사느 ㄴ손을 내저으며 실망한 기색을 감추려고 애썼다.
"유감스럽군." 하고 그가 말했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해 주니
기쁘오, 볼 씨. 내가 나아갈 방향을 가리켜 줄 사람은 당신뿐이
오. 당신은 아주 정확하게 판단한 겁니다. 좀 전에 말한 방향으
로 계속 밀고 나갔다간 비참해졌을 거요. 그 문제는 일단 제쳐두
기로 합시다. 아뭏든 당신은 프렌치 양을 알게 되었고, 그녀를
방문함에 따라 그녀와의 관계가 진전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모든
것에 대한 뚜렷한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당신처럼 잘생기고, 운
동을 좋아하고,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은 서른 세 살의 젊은 남자
가 무엇 때문에 공통점이라곤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나이 많은 부
인에게 그렇게 많은 시간을 쏟았습니까 ?"
레너드 볼은 손을 신경질적으로 홱 벌렸다.
"모르겠습니다 - 정말 모르겠어요. 첫번째로 찾아간 날 그녀는
자기는 외롭고 불행하다는 이야기를 하며 저에게 꼭 다시 와달라
고 하더군요. 그녀는 제가 거절하기 어렵게 만들었습니ㄳ. 그녀
가 저에 대한 확고한 애정을 너무 솔직하게 드러냈기 때문에 저
는 입장이 정말 난처했었습니다. 보시다시피, 메이헌 씨, 저는
마음이 약해요 - 남에게 이끌려 다니죠 - 저는 싫다는 말을 못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저를 믿든 안 믿든 그건 선생님 마음이
지만, 세 번짼가 네 번째로 방문하고 난 뒤로느 저도 진실로 그
할머니를 좋아하게 되엇습니다. 전 어렸을 때 어머니를 여의고
아주머니가 길러 주셨는데, 아주머니 역시 제가 채 열 다섯 살도
되기 전에 돌아가셨죠. 제가 정말 어머니한테 하듯이 응석부리는
것을즐겼다고 말씀드리면, 아마 선생님은 웃으시겠죠 ?"
그러나 메이헌 씨는 웃지 않았다. 웃기는 커녕 오히려 코안경
을 다시 벗어 닦았는데, 그에게는 그것이 깊은 생각에 점겨 있다
는 표시였다.
"나는 당신의 말을 믿소, 볼 씨." 그는 마침내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것이 심리학적으로 가능한 일이라고 봅니다. 배심원이
그러한 견해를 받아들일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오. 이야기
를 계속해 주시오. 프렌치 양이 자기의 사업 문제를 처음으로 이
야기했던 때가 언제였소 ?"
"제가 그녀를 세 번짼가 네 번째 방문한 뒤였습니다. 그녀는
자기는 사업에 대해서 거의 아는 게 없다고 하며, 몇 군데 투자
를 해놓았는데, 꽤 걱정이 된다고 했습니다."
메이헌 씨는 날카롭게 쳐다보았다.
"잘 생각해서 말해야 합니다, 볼 씨. 재닛 매킨지라는 그녀의
하녀는 자기의 여주인의 사업 수완은 놀라운 것이라고 햇으며,
모든 문제를 직접 처리했다고 주장하고 있고, 또 이 사실은 그녀
와 거래하던 은행들의 증언에서도 확인된 말이오."
"전 그 말 밖에 할 수 없습니다."하고 볼이 진지하게 말햇다.
"그녀가 저에게 그렇게 말했습니까요."
메이헌 씨는 잠시 동안 말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그렇게
마할 생각은 없엇지만, 레너드 볼이 무죄라는 생각이 그 순간에
더욱 강해졌다. 그는 노부인들의 심리에 대한 것을 잘 알고 잇었
다. 메이헌 변호사는 이 잘생긴 젊은이한테 열중하여, 그를 자기
집으로 끌어들일 구실을 찾는데 혈안이 된 프렌치 양을 생각해
보았다. 자기는 사업에 대해서는 문회한인 체하며, 그에게 자기
의 사업을 도와 달라고 하는 것보다 더 그럴 듯한 게 무엇이 있
겠는가 ? 그녀는 어떤 남자라도 그의 명석함을 인정해 주면 우쭐
해 한다는 것을 알 만큼 세상 물정에 밝은 여자였다. 레너드 볼
은 우쭐해 했겠지. 아마 그녀 역시 자신이 부자라는 것을 이 남
자에게 알리는 게 싫지는 않았을 테고. 에밀리 프렌치는 의지가
강한 성격이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위해서는 기꺼이 그 댓가를
지불할 여자였다. 이 모든 것이 메이헌 변호사의 마음속을 재빨
리 스쳐 지나갔으나, 그는 아무런 내색 없이 그 다음 질문을 했
다.

....

검찰측의 증인 (2)



"그래서 당신은 그녀의 요청에 따라 그녀 대신 업무를 처리했
습니까 ?"
"예."
"볼 씨 - " 변호사가 말했다. "당신에게 아주 중요한 질문 하
나를 할 테니,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정직하게 대답해 줘야만 하
오. 당신은 경제적으로 궁핍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노
부인의 업무를 대신 처리해 주고 있었소 - 그 노부인은 자기는
사업에 대해서는 거의 , 아니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소. 당신은
언제, 어떤 방법으로든, 당신이 처리한 증권을 당신의 이익을 위
해 돌려 쓴 적이 있었습니까 ? 그리고 또 자신의 금전상의 이익
을 위해 비밀리에 어떤 거래를 한 적은 없었습니까 ?" 그는 상대
편의 대답을 가로막었다. "대답하기 전에 잠깐만 기다리시오. 우
리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한 가지는 그녀의 일을 대행해
주면서 당신이 보여 준 성실함과 정직함을 내세우면서, 그렇게
아주 쉬운 방법으로도 차지할 수 있었을 돈 때문에 살힌을 저지
른다는 것이 얼마나 비현실적인가를 지적하는 것이오. 한편, 당
신이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검찰측이 눈치챌 만한 어떤 것이
있다면 - 즉, 노골적으로 말해서, 당신이 그 노분인을 어떤 식으
로든 속엿다는 사실이 증명될 수 있다면, 그녀는 이미 당신에게
유익한 수입원이었다는 말이 되므로, 우리는 당신에게 살인을 저
지를만한 동기가 없었다는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소. 그런 차
이점이 있다는 걸 알아두기 바랍니다. 자, 부탁하겠는데, 천천히
대답해 주시오."
그러나 레너드 볼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았다.
"저는 프렌치 양의 일을 조사해 보면 누구라도 알 수 있겠지
만, 전 제 능력이 닿는 한 그녀에게 이익이 되도록 했습니다."
"고맙소 - " 하고 메이헌 씨가 말했다. "그 말을 들으니 굉장
히 안심이 되는군요. 당신은 현명한 사람이라, 이렇게 중요한 문
제가 걸려 있는 일에 대해서는 내게 거짓말하지는 않으리라고 굳
게 믿소."
"그럼요 - " 하고 볼이 호소하듯이 말했다. "제게 가장 유리한
점은 동기가 없다는 겁니다. 제가 돈을 빼앗으려고 부유한 노부
인과의 관계를 맺으려 했다 하더라도 - 그것이 선생님이 하고 계
신 말의 요점인 것 같은데 - 그녀의 죽음으로 제 모든 기대가 무
산되지 않았습니까 ?"
변호사는 그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런 다음 아주 신중하게,
코안경을 닦는 그의 무의식적인 버릇을 되풀이했다. 그는 그것을
자신의 코에 단단히 올려 놓은 다음에야 입을 열었다.
"프렌치 양이 당신을 주요 상속자로 하는 유언장을 남겼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까, 볼 씨 ?"
"뭐라고요 ?" 피고는 벌떡 일어났다. 그가 당황해 하는 빛은
명백하고도 자연스러웠다. "그럴 리가 !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 겁니까 ? 그녀가 제게 재산을 남겼다고요 ?"
메인헌 씨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볼은 손으로 머리를 잡
고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그 유언장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체하기요 ?"
"체하다뇨 ? 체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저는 그것을 전혀 몰랐
어요."
"그 재닛 매킨지라는 하녀가 당신이 알고 있다고 증언했다면,
당신은 뭐라고 할 테요 ? 그녀의 여주인이 그 문제로 당신과 의
논했으며, 그녀의 뜻을 당신에게 전달했다고 분명히 자기에게 말
했다고 하던데 ?"
"그래요 ? 그녀가 거짓말하고 있는 겁니다 ! 아뇨, 제가 극단
으로 치닫고 있군요. 재닛은 나이 많은 여자입니다. 그녀는 자기
여주인에 대한 충실한 감시인인 동시에 저를 좋아하지 않았죠.
그녀는 질투심도 많았고 의심도 많았습니다. 프렌치 양이 자기의
뜻을 내닛에게 털어놓았다고 했는데, 재닛이 뭔가 그녀의 말을
잘못 알아들었거나, 아니면 제가 노부인에게 그렇게 하도록 재촉
했다고 마음속으로 확신한 걸 겁니다. 아마 그녀는 이제는 거의
프렌치 양이 정말로 자기에게 그런 말을 했다고 ㄳ고 있을 거예
요."
"혹시 그녀가 당신을 너무 싫어한 나머지, 고의로 그 문제에
대해 거짓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
레너드 볼은 깜짝 놀라는 것 같았다.
"아니, 그럴 리야 ! 그녀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겠습니까 ?"
"나도 모르겠소." 하고 메이헌 씨가 생각에 잠긴 채 말했다.
"혹시, 그녀가 당신에게 너무 반감을 가지고 있어서......"
그 가엽은 젊은이는 다시 괴로와했다.
"이제야 알겠어요." 하고 그가 중얼거렸다. "소름끼치는군요.
제가 그녀의 환심을 산 다음 - 검찰에선 이런 식으로 말할 테죠
- 그녀에게 저한테 돈을 남긴다는 유언장을 만들게 해놓고는, 그
날 밤 그 집에 가서......그 집에는 아무도 없었으니......그리
고 그 다음날 아침에 그녀의 시체가 발견되었단 말이죠. 오, 이
럴 수가, 끔찍하군요 !"
"집에 아무도 없었다는 말은 틀렸소." 하고 메이헌 씨가 말했
다."단신도 기억하겠지만, 재닛은 그날 저녁 외출하기로 되어 있
었죠. 그녀는 밖에 나갔다가, 밤 9시 반경에 한 친구에게 갖다
주기로 약속한 블라우스 소매 원형을 가지러 돌아왔었소. 그녀는
뒷문으로 들어가서, 2층으로 올라가 그것을 찾아 가지고 다시 나
갔습니다. 그 때 그녀는 응접실에서 나는 목소리를 들었는데, 무
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엇지만, 그 중 하나는 프렌치 양
의 못소리였고, 하나는 남자의 목소리였다고 증언했소."
"밤 9시 반이라고요 ?" 하고 레너드 볼이 말했다. "9시 반이라
면 - " 그는 벌떡 일어섰다. "그러면 저는 구제됩니다 - 그제된
다고요 - "
"구제되다니, 무슨 말이오 ?" 메이헌 변호사가 깜짝 놀라면 소
리쳤다.
"0시 반경에 저는 집에 있었거든요 ! 아내가 그것을 증명해 줄
겁니다. 저는 8시 55분쯤 프렌치 양과 헤어졌어요. 집에는 9시
20분쯤에 도착했죠. 아내가 집에서 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
고마운 일이군요 - 고마운 일이에요 ! 재닛 매킨지의 소매 원형
에 축복이 깃들길."
그는 잔뜩 흥분해 있는 바람에 변호사의 엄숙한 얼굴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거의 깨닫지 못했다. 그러다가 변호사의
말에 그는 그만 기가 꺾여 버리고 말았다.
"그렇다면, 당신 생각엔 누가 프렌치 양을 살해했을 것 같소
?"
"그야 물론, 강도를 제일 먼저 생각할 수 잇겠죠. 그 창문이
억지로 열려 있엇다는 것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녀는 쇠막대로
세게 얻어맞아 죽었으며, 그 쇠막대가 시체 옆바닥에 놓인 채 발
견되었습니다. 그리고 물건들이 여러 가지 없어졌어요. 저에 대
한 재닛의 터무니없는 의심과 반감만 없었다면, 경찰에서도 그러
한 정확한 증거에서 벗어나지는 않았을 겁니다."
"아니, 그렇지 않을 겁니다. 볼씨."하고 변호사가 말했다. "없
어진 물건들은 위장을 하기 위해 가져간, 아무런 가치가 없는 한
찮은 것들뿐이오. 그리고 그 창문에 난 흔적도 결코 결정적인 단
서는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이걸 잘 생각해 보시오 - 당신은 9
시 반에 그 집에 있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재닛이 들었다
는, 응접실에서 프렌치 양에게 말하던 남자는 누구였겠습니까 ?
그녀가 강도와 유쾌한 대화를 나누었을 리가 없쟎소 ?"
"그렇군요 - " 볼이 말했다. "물론 - " 그는 당황하고 실망한
것 같았다. "그렇지만 어쨋든 - " 하고 그는 다시 용기를 내어
말했다. "저는 아닙니다. 저는 알리바이가 있어요. 로메인을 -
우리 집사람입니다 - 만나 보십시오 - 당장에."
"물론 그렇게 하겠소." 변호사는 잠자코 받아들였다. "당신이
구속되었을 때 당신 부인이 집을 비우지만 않았더라면, 벌써 만
나 보았을 겁니다. 내가 바로 스코틀랜드로 전보를 쳤으니까, 당
신 부인이 오늘밤에 돌아올 겁니다. 나는 당신 부인이 도착하면
즉시 만나 볼 생각이오."
볼은 굉장히 마족스러운 표정을 띤 채 고개를 끄덕엿다.
"예, 로메인이 선생님에게 말해 줄 겁니다. 아, 정말 다행입니
다 !"
"실례지만, 볼 씨. 당신은 아내를 사랑합니까 ?"
"물론입니다."
"그리고 부인께서도 ?"
"로메인은 저한테 아주 헌식적입니다. 그녀는 저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겁니다."
그는 열광적으로 말했지만, 변호사의 심정은 조금 침제되었다.
헌신적인 아내의 증언 - 그것이 신용을 얻을 수 있을까 ?
"당신이 9시 20분에 돌아오는 것을 본 그 밖의 다른 사람이라
도 있습니까 ? 예를 들어, 하녀라도 ?"
"우리는 하녀가 없습니다."
"그럼, 돌아오느 ㄴ길에 거리에서 만난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도중에 버스를 탔으니까, 혹
시 차장이 기억할지는 모르겠습니다."
메이헌 변호사는 의심스러운 듯이 머리를 저었다.
"그럼, 당신 부인의 증언을 증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단 말입니까 ?"
"예. 그런데 그것이 꼭 필요한 건 아니쟎습니까 ?"
"아마 그럴 거요, 아마도." 하고 메이헌 변호사가 주저하며 말
했다. "자, 딱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프렌치 양은 당신이 결혼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소 ?"
"오, 물론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부인을 그녀에게 한 번도 데려가지 않았습니
다. 왜 그랬소 ?"
순간적으로 레너드 볼은 망설이며 불확실하게 대답했다.
"글쎄요 - 모르겠습니다."
"제닛 매킨지가 자기의 여주인은 당신을 독신이라고 믿고 있었
으며, 장차 당신과 결혼할 생각이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소 ?"
볼은 웃었다. "말도 안 돼요 ! 우리는 나이 차이가 40년이나
나요."
"하지만, 그래도 결혼할 사람들이 있어요."하고 변호사가 사무
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은 사실이오. 당신의 아내는 프렌치
양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습니까 ?"
"예 - " 다시 어색한 침묵이 흘렸다.
"이런 말을 해도 된다면 - " 변호사가 말했다. "나는 그 문제
에 대한 당신의 태도를 조금도 이해할 수가 없군요."
볼은 얼굴을 붉히며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다 털어놓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돈데 쪼들렸
습니다. 저는 프렌치 양이 돈을 좀 빌려 주었으면 했죠. 그녀는
저를 좋아했지만, 젊은 부부가 살려고 버둥거리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우리 부부가 사이가 좋지 않아 - 별
거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전 일찌감치 눈치채고
있었습니다. 메이헌 씨 - 전 돈이 필요했습니다 - 아내 로메인을
위해서죠.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노부인이 마음대로 생
각하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녀는 저를 양자로 삼겠다는 이야
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결혼 이야기는 결코 한 적이 없었어요 -
그건 다만 재닛이 상상해 낸 것일 겁니다."
"그게 전부요 ?"
"예 - 전부입니다."
그 말에 망설이는 기색이 있었던가 ? 변호사는 그렇다고 생각
했다. 그는 일어나서 손을 내밀었다.
"잘 있으시오, 볼 씨." 그는 그 수척한 젊은이의 얼굴을 들여
다보며 전에 없이 충동적으로 말했다. "나는 당신 앞에 놓여 있
는 그 수많은 불리한 사실들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무죄라고 믿
소. 그것을 증명하여 당신의 혐의를 완전히 벗겨 주고 싶소."
볼은 그를 보고 미소지었다.
"제 알리바이가 확실하다는 것을 아시게 될 겁니다." 그는 쾌
활하게 말했다.
그는 상대자의 반응이 없다는 것을 또 알아차리지 못했다.
"모든 일이 재닛 매킨지 하녀의 증언에 크게 좌우됩니다." 메
이헌 씨가 말했다. "그녀는 당신을 미워하고 있소. 그것만큼은
확실하오."
"절 미워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하고 그 젊은이는 주장
했다.
변호사는 머리를 흔들며 나갔다. '이제 볼 부인을 향하여.'라
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는 돌아가는 일의 양상에 심각한 불
안을 느꼈다.

....

검찰측의 증인 (3)




볼 부부는 런던 서쪽의 패딩턴 그린 근처의 한 작고 초라한 집
에 살고 있었다. 메이헌 씨는 그 집으로 갔다.
그가 초인종을 누르자, 파출부임이 분명한 몸집이 크고 단정치
못한 한 여인이 문을 열었다.
"볼 씨 댁이죠 ? 부인께서 돌아오셨는지요 ?"
"한 시간 전에 오셨어요. 하지만, 만나실 수 있을는지 모르겠
군요."
"내 명함을 갖다 주면 틀림없이 만나자고 할 거요." 메이헌 변
호사가 조용하게 말했다.
그 여이은 그를 의심스럽다는 듯이 쳐다보더니, 앞치마에 손으
ㄹ닦고 그 명함을 받아들었다. 그런 뒤 그의 면전에서 문을 쾅
닫고 그를 바깥 계단에 세워둔 채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몇 분 뒤 그녀는 약간 달라진 태도로 돌아왔다.
"들어오세요."
그녀는 그를 조그만 응접실로 안내했다. 메이헌 변호사는 벽에
걸린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거의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아
주 조용하게 들어온 키가 크고 가날픈 여자를 마주 보고 깜짝 놀
랐다.
"메이헌 씨 ? 선생님이 제 남편의 변호사시죠 ? 그이가 당신을
보냈나요 ? 좀 앉으시겠어요 ?"
그는 그녀가 말을 하기 전까지는 그녀가 영국인이 아니라는 것
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녀를 좀더 자세히 관팔해 보니, 툭 튀어
나온 광대뼈며, 짙은 감색이 감도는 검은 머리카락하며, 이따금
씩 나오는 그 가벼운 손동작이 명백히 이국적이었다. 야릇한 분
위기의 아주 조용한 여자였다. 너무 조용해서 불안할 정도였다.
바로 첫 순간부터 메이헌 씨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에
직면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 볼 부인 - " 하고 그가 입을 열었다. "절대 포기해서는 -
"
그는 멈췄다. 로메인 볼은 조금도 포기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
너무나 명백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더할 나위 없이 침착하고 냉
정했다.
"그 사건에 관해 모두 말슴해 주시겠어요 ?" 그녀가 말했다.
"저는 모든 것을 알아야만 해요. 제게 신경쓰지 말고 말씀해 보
세요. 저는 최악의 상태를 알고 싶어요." 그녀는 망설이다가 나
지막한 어조로 되풀이했는데, 거기에는 그 변호사가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어감이 기들어 있었다. "저는 최악의 상태를 알고
싶어요."
메이헌 씨는 레너드 볼과 나눈 이야기를 모두 들려주었다. 그
녀는 가끔 머리를 끄덕이며 주의깊게 들었다.
"알겠어요." 그가 말을 마치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그이
는 제가 그날 밤 자기가 9시 20분에 들어왔다고 말해 주기를 원
한단 말이죠 ?"
"남편은 정말 그 시간에 들어왔습니까 ?" 메이헌 씨가 날카롭
게 물었다.
"그것은 문제가 안 돼요." 그녀는 냉정하게 말했다. "제가 그
렇게 말하면 그이가 석방될까요 ? 그들이 제 말을 믿어 줄까요
?"
메이헌 씨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문제의 핵심을 너무도 빨리
알아차렸던 것이다.
"저는 바로 그거 알고 싶어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렇게
만 하면 충분한가요 ? 제 증언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다른 사람
이 있나요 ?"
그녀의 태도에 감춰진 간절함에 변호사는 어렴춧하게나마 불안
을 느꼈다.
"아직까지는 아무도 없습니다." 벼호사는 마지못해 이렇게 말
했다.
"알겠어요 - " 하고 로메인 볼이 말했다.
그녀는 잠시 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그녀의 입가
에 희미한 미소가 감돌았다.
변호사는 점점 더 의아스러워졌다.
"볼 부인 - " 하고 그가 말했다. " 당신의 심정이 어떤지 잘
알고 있습니다 - "
"그러세요 ?" 그녀가 말했다. "흥미 있군요."
"상황이 그러하니만큼 - "
"상황이 그러하니만큼 - 저는 혼자 힘으로 해보겠어요."
그는 당황하여 그녀를 쳐다 보았다.
"그렇지만, 볼 부인 - 부인은 너무 긴장하고 있어요. 부인이
남편에게 너무 헌신적인 나머지 - "
"예 ? 뭐라고 하셨어요 ?"
그녀의 목소리가 얼마나 날카로왔던지 그는 깜짝 놀랐다. 그는
주저주저하며 되풀이했다. "부인이 남편에게 너무 헌신적인 나머
지 - "
로메인 볼은 여전히 입가에 그 이상한 미소를 띤 채 천천히 고
개를 끄덕였다.
"제가 헌신적이라고 그이가 말하던가요 ?" 그녀가 상냥하게 물
었다. "아 ! 예, 그랬을 거예요. 남자들은 얼마나 어리석은지 !
어리석고 - 어리석고 - 정말 어리석군요 - "
그녀는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변호사가 그 분위기에서 줄곧
느끼고 있었던 긴장감이 이제 온통 그녀의 어조에 집중되어 있었
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저는 그이를 증오해요 ! 증오해요, 증
오한다고요 ! 전 그이가 교수형 당하는 꼴을 보고 싶어요."
변호사는 그녀의 눈에 끓어오르는 격정을 보고 뒷걸음질 쳤다.
"아마 저는 그것을 보게 될 거에요. 제가 선생님에게 그날 밤
그이는 9시 20분이 아니라, 10시 20분에 들어왔다고 말슴드린다
면요 ? 그이는 자기에게 들어올 돈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는 말을 했다고 하셨는데, 제가 선생님에게 그이는 그것을 모두
다 알고 있었고, 그것을 기대했으며,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 살
인을 저질렀다고 말씀드린다면요 ? 그날 밤 그이가 들어와서 자
신이 한 일을 제게 모두 털어놨다면 ? 그이의 외투에 피가 묻어
있었다고 말씀드린다면 ? 그런 다음 어떻게 할까요 ? 제가 법정
에 서서 이 모든 것들을 다 말한다면 ?"
그녀의 눈은 그에게 도전하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점점 더
당황하고 있다는 것을 감추려고 애쓰며, 차분한 어조로 말하려고
노력했다.
"아내는 법정에서 자기 남편에게 불리한 증언을 할 수 없습니
다 - "
"그 사람은 제 남편이 아니에요 !"
그 말이 너무 빨리 나왔기 때문에, 그는 그녀의 말을 잘 못 들
었다고 생각했다.
"뭐라고 했습니까 ? 나는 - "
"그 사람은 제 남편이 아니라고요."
침묵이 너무 깊어 핀 하나가 떨어지는 소리라도 들을 수 있을
지경이었다.
"전 과거에 빈에서 여배우로 지내고 있었어요. 제 남편은 아직
도 살아 있어요. 하지만 정신병원에 있죠. 그래서 우리는 결혼할
수가 없었어요. 그게 오히려 잘 된 일이죠." 그녀는 도전적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한 가지만 말해 주시오." 하고 메이헌 씨가 말했다. 그는 여
저니 냉정하고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은 것처럼 보이려고 노력했
다. "레너드 볼에 대해서 왜 그렇게 원한을 품고 있습니까 ?"
그녀는 약간 미소를 띤 채 머리를 흔들었다.
"예, 선생님은 그걸 알고 싶으시겠죠. 하지만, 얘기하지 않겠
어요. 전 제 비밀을 지키겠어요."
메이헌 씨는 짤막하게 마른 기침을 하며 일어섰다.
"얘기를 더 나눈다고 해도 별 의미가 없겠군요." 하고 그가 말
했다. "내 변호 의뢰인과 이야기해 본 다음 다시 연락드리겠소."
그녀는 그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와, 그 이상한 검은 눈으로 그
의 누을 들여다보았다.
"말씀해 주세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선생님은 오늘 여기에
오실 때 그이가 무죄라고 - 정말로 - 믿으셨나요 ?"
"그랬소 - " 하고 메이헌 씨가 말했다.
"정말 한심하시군요." 그녀는 웃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믿고 있소." 라고 변호사는 끝
을 맺었다. "안녕히 계십시오, 부인." 그녀의 놀란 얼굴을 뒤로
하고 방을 나왔다. '이거 야단났는데 !' 하고 생각하며 메이헌
씨는 거리를 따라 성큼성큼 걸어 내려갔다.
모든 것이 이상했다. 이상한 여자, 아주 위험한 여자, 여자들
은 원한을 품으면 악마로 변하는군.
어떻게 해야 하지 ? 그 불행한 젊은이한테는 이제 지탱하고 일
어설 다리 다리 하나가 없는 셈이다. 물론, 어쩌면 그가 그 범죄
를 저질렀을지도 모른다.
'잰장 !' 메이헌 씨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젠장 - 그에게는
불리한 증거가 너무 많아. 하지만, 나는 그 여자의 말을 믿지 않
아. 그녀는 모든 이야기를 꾸며대고 있어. 그래도 법정에서까지
야 그런 말을 하지는 않겠지.'
그는 그 점에 대해서는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

....
검찰측의 증인 (4)



경찰의 법정 진술은 간단하고 극적이었다. 검찰측의 주요 증인
은 죽은 여인의 하녀였던 재닛 매킨지와 피고의 정부(情婦)인 오
스트리아 국적의 로메인 하일저였다.
메이헌 변호사는 법정에 앉아서 로메인 하일저가 마하는 그 끔
찍한 이야기를 죄다 들었다. 그 얘기는 지난번 그 부인과 만났을
때 한 그대로였다.
피고는 자신의 변호를 보류한 채 재판의 진행을 지켜보았다.
메이헌 변호사는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레너드 볼에 대해 그
사건은 불리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피고측에 선 그
유명한 왕실 고문 변호사도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만일 그 오스트리아 여인의 증언을 흔들리게 할 수만 있다면,
뭔가 될 것도 같은데." 하고 그는 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
게 좀 어려워야 말이지."
메이헌 변호사는 한 가지 문제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레
너드 볼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가정하고, 9시에 그 살해된 여
인의 집에서 나왔다면, 재닛이 9시 반에 프렌치 양에게 말하고
있는 거을 들었다는 그 남자는 누구일까 ?
오직 한 줄기 빛을 찾아볼 수 있다면, 과거에 돈이 없어 자기
아주머니(죽은 프렌치 양)를 여러 번 속이고 협박한 망나니 조카
한테서였다. 재닛 메킨지도 변호사가 알기로는, 그 젊은이를 꽤
종하해서 자기 여주인에게 돈을 좀 주라고 부추겼다고 한다. 게
다가, 그가 늘 다니던 곳의 어디에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은 것을
보아 레너드 볼이 프렌치 양의 집을 떠난 뒤 프렌치 양과 함께
있었던 사람은 확실히 그 조카일 가능성이 높았다.
변호사는 그 밖의 모든 다른 방향으로도 조사해 보았으나, 결
과는 매우 부정적이었다. 레너드 볼이 자기 집으로 들어가는 것
이나 프렌치 양의 집에서 나오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또한, 크리클우드에 있는 프렌치 양의 집으로 들어가거나 나오는
다른 어떤 남자르 ㄹ본 사람도 없엇다. 조사해 본 것은 모두 실
패로 돌아갔다.
메이헌 변호사가 자신의 생각을 환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돌리
게끔 된 편지를 받은 것은 재판이 다시 시작되기 전날 저녁이었
다.
그것은 6시경 우편으로 왔다. 싸구려 편지지에 무식하게 휘갈
려써서는, 우표도 비뚤게 붙인 더러운 봉투에 넣은 것이어싸.
메이헌 변호사는 그것을 한두 번 읽고 나서야 그 의미를 파악
할 수 있었다.

친애하는 선생님
당신은 그 젊은 친구를 위해 일하고 있는 변호사 양반이오. 만
일 그 바람둥이 외국 여자가 말하는 것이 거짓말투성이라는 것을
폭로하고 싶으면 오늘밤 스티프니에 있는 쇼네 셋집 16번지로 오
시오. 200파운가 들 거요. 목슨 부인을 찾으시오.


변호사는 이 이상한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그것은 물론 못된
장난일지도 모르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점점 더 그것이 진짜라
는 확신이 들었으며, 그것만이 피고를 위한 유일한 희망 같았다.
로메인 하일저의 증언은 피고를 완저히 구것으로 몰아넣어서, 변
호인측이 구상하고 있는 방향, 즉 부도덕한 생활을 한 여인의 증
언은 믿을 게 못 된다는 주장은 아무래도 설득력이 없을 것만 같
았다.
메이헌 변호사는 결심했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자신의 의
뢰인을 구하는 것이 그의 의무였다. 그는 쇼네 셋침으로 가기로
했다.
그는 지독한 악취를 풍기는 빈민가에서 그 쓰러질 듯한 건물을
겨우 찾아네어 목슨 부인을 찾자, 4층의 한 방으로 올라가라고
했다. 그 문을 두드렸으나, 아무 대답이 없어 다시 두드렸다.
두 번째로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발을 질질 끄는 소리가 들리
더니, 이득고 문이 반 인치 가량 조심스페 열리고, 허리가 구부
러진 사람이 빼꼼히 내다보는 것이었다.
그 여자는 - 그건 여자였다 - 갑자기 낄낄 웃으며 문을 활짝
열었다.
"당신이었군 그래." 그녀는 씩씩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함
쎄 온 사람은 아무도 없소 ? 속임수를 쓰는 것은 아니겠지 ? 그
럼 좋아요. 들어와요 - 들어오라니까."
변호사는 좀 머무적거리며 문지방을 넘어 가스등의 불꽃이 어
른거리는 그 조그맣고 더러운 방으로 들어갔다. 이부자리도 개지
않는 채 너저분한 침대가 한쪽 구석에 있었으며, 평범한 전나무
탁자 하나와 다 쓰러져 가는 의자 두 개가 잇었다. 메이헌 씨는
그 불쾌한 세방의 거주자를 처음으로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녀는
허리가 굽은 중년 여인으로, 회색 머리는 더부룩하게 흐트러져
있었고, 얼굴에는 스카프를 단단히 두르고 있었다. 그녀는 변호
사가 자기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자, 다시 그 이상하고 억양
없는 목소리로 낄낄거리며 웃었다.
"내가 예쁜 얼굴을 왜 감추고 있는지 궁금하죠, 그렇죠 ? 히히
히. 그게 당신을 유혹할까 봐 ? 하지만 보여 드리지 - 보여 드리
고 말고."
그녀가 스카프를 옆으로 젖히자, 그는 심하게 문드러져 있는
새빨간 흉터 자국을 보고 숨이 탁 막혔다. 그녀는 스카프를 다시
가렸다.
"이젠 입맞추고 싶지 않으시겠지 ? 히히, 그럴 줄 알았다니까.
그러나 나도 예전에는 예쁜 여자였다오 -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
그리 오래 전 일도 아니지, 황산이오, 황산 - 그게 이렇게 만들
었소. 아 ! 하지만 나도 갚아 줄 거야 - "
그녀가 갑자기 불결한 말을 소름끼칠 정도로 마구 내뱉기에 메
이헌 변호사가 진정시키려고 해보앗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한참 뒤에야 잠잠해지더니 손을 신경질적으로 뒤었다 풀었다 했
다.
"이젠 그만하시오." 하고 변호사가 위압적으로 말했다. "내가
여기에 온 것은 당신이 레너드 볼이라는 내 의뢰인의 협의를 풀
어 줄 정보를 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오. 그럴 수 있겠소 ?"
그녀는 교활하게 그를 곁눈질했다.
"돈은 어떻게 됐죠 ?" 그녀는 씩씩거리며 말했다. "정확하게
200파운드요."
"증언을 하는 것은 당신의 의무이기 때문에, 우리는 당신에게
그렇게 하도록 요구할 수 있소."
"그렇게는 안 될걸. 나는 나이가 들어 아무것도 몰라요. 그러
나, 당신이 나한테 200파운드를 주면 한두 가지 힌트는 줄 수 있
지. 알겠소 ?"
"어떤 힌트를 ?"
"편지라면 뭐라고 할 테요 ? 그녀가 쓴 펴지라면. 내가 그것을
어떻게 손에 넣게 되었는지는 신경쓰지 말아요. 그건 내 일이니
까. 그것만 있으면 될 거요. 하지만 나는 200파운를 받아야겠
어."
메이헌 씨는 그녀를 날카롭게 쳐다보고는 마음을 굳혔다.
"10파운를 주겠소. 더는 못 줍니다. 그것도 그 편지가 당신이
말하는 대로일 경우에만 주겠소."
"10파운드 ?" 그녀는 사납게 소리쳤다.
"20 - "하고 메이헌 변호사가 말했다. "이제 더 이상 말하지
않겠소."
그는 갈 것처럼 일어섰다. 그러더ㅣ 그녀를 자세히 지켜보며,
지갑을 꺼내어 지폐로 21파운드를 세었다.
"보다시피 - " 하고 그가 말했다. "이게 내가 가진 전부요. 받
든 말든 알아서 하시오."
그러나 그는 이미 그 돈만 해도 그녀에게는 굉장히 큰 액수라
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무력하게 욕설을 퍼붓고 날뛰더니,
결국엔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녀는 침대로 가서 그 누덕누덕한
시트 밑에서 뭔가를 끄집어냈다.
"여기 있소, 빌어먹을 !" 그녀는 버럭버럭 소리지르며 말했다.
"당신에게는 더없이 중요한 것일 게요."
그녀가 그에게 던져 준 것은 편지 뭉치였는데, 메이헌 변호사
는 그것들을 풀어 평소의 그 차분하고 정연한 태도로 자세히 살
펴보았다. 그 여인은 그를 열심히 지켜보고 있었으면서도, 그의
태연한 얼굴에서 아무런 낌새도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그는 편지를 하나씩 자세히 읽어 본 다음, 맨 위의 편지를 한
번 더 읽었다. 그런 다음 그 뭉치를 다시 조심스럽게 묶었다.
그것은 로메인 하일저가 쓴 연애편지였는데, 수신인은 레너드
볼이 아니었다. 맨 위의 편지는 그가 구속되던 날에 쓰여진 것이
었다.
"내 말이 맞을 거요, 안 그래요 ?" 하고 그 여인이 투덜거렸
다. "그 편지만 있으면 그년이 꼼짝 못하겠지 ?"
메이헌 변호사는 그 편지들을 호주머니 속에 넣고 한 가지를
물었다.
"이 편지들을 어떻게 손에 넣게 되었소 ?"
"그런 말을 하면 비밀이 탄로나요." 그녀는 곁눈질하며 말했
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는 게 더 잇지. 나는 법정에서 그 창
녀가 말하는 것을 들었소. 그년이 집에 있었다고 말한 10시 20분
에 그년이 어디에 있었느지 찾아내 봐요. 라이언 로드 극장에 가
서 불어 봐요. 그들이 기억할 게요 - 그와 같은 늘씬하고 잘빠진
여우라면 - 빌어먹을 !"
"그 남자는 누구요 ?" 하고 메이헌 변호사가 물었다. "여기에
는 세례명밖에는 없는데."
그녀의 목소리는 더 세고 거칠어졌으며, 손을 계속 쥐었다 풀
었다 했다. 마침내 그녀는 한 손을 들어 얼굴로 가져 갓다.
"나를 이렇게 만든 남자. 이제는 몇 년 전 일이 되었지만. 그
년이 내게서 그를 가로챘소 - 그 때 그년은 깜찍한 계집애였지.
그래서 내가 그를 뒤쫓아가서 - 그에게 덤벼들자 - 그가 그 빌어
먹을 물건을 내게 집어 던졌어요 ! 그랬더니 그 망할 놈의 계집
애가 웃는 거예요 - 앙큼한 것 같으니라고 ! 나는 몇 년 동안 그
년에게 원한을 품어 왔어요. 그 계집을 따라다니며 감시했지. 그
래서 이제야 겨우 붙잡은 거라고요 ! 그 계집은 이것 때문에 틀
림없이 벌답을 거요, 안 그렇소, 변호사 양반 ?"
"아마 위증죄로 금고형을 받게 될 거요." 하고 메이헌 변호사
가 조용하게 말했다.
"감옥에 간단 말이지 - 그랬으면 정말 좋겠소. 가시려고 ? 돈
은 어디 있어요 ? 그 멋진 돈이 어디 있냔 말이오 ?"
그는 군말없이 그 지폐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런 다음,
숨을 깊게 쉬고는 돌아서서 그 더러운 방을 나왔다. 뒤돌아보니
그 늙은 여인은 그 돈을 보고 뭐라고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라이언로(路)에 있는 그 극장을
쉽게 찾아네어 로메인 하일저의 사진을 보여 주자, 제복을 입은
수위가 그녀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녀는 문제의 그날 저녁 10
시가 조금 넘어서 한 남자와 그 극장에 도착했다고 한다. 그는
그녀와 하께 온 남자는 특별히 눈여겨 보지는 않앗지만, 자기에
게 상영중인 영화에 대해 물어 보았던 그 부인은 잘 기억하고 있
었다. 그들은 약 한 시간 뒤인, 영화가 끝나는 시각까지 거기에
있었다고 한다.
메이헌 변호사는 만족해 했다. 로메인 하일저의 증언은 처음부
터 끝까지 모두 거짓말투성이였다. 메이헌 변호사는 그녀의 증오
뒤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아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레너드
볼이 그녀에게 무슨 짓을 했을까 ? 메이헌 변호사가 그에 대한
그녀의 태도를 말해 주었을 때, 그는 어이가 없어서 말도 못 하
는 것 같았다. 그는 그런 말은 믿을 수 없다고 했다 - 그러나,
메이헌 변호사가 보기엔 처음에 그녀가 놀라움을 표시하고 나서
한 변명에는 진실성이 결여된 것처럼 느꼈었다.
볼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메이헌 변호사는 그것을 확신했다.
그는 알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밝힐 생각이 없었던 것이리라.
그 두 사람 사이의 비밀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메이헌 변호사는
조만간 그게 무엇인지 밝혀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변호사는 시계를 힐끔 쳐다보았다. 시간이 늦긴 했지만, 잠시
도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그는 택시를 불러세워 운전사에게
주소를 말했다.
"왕실 변호사 찰스 경이 이 사실을 당장 알아야 해." 그는 올
라타며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
검찰측의 증인 (5) 마지막




에밀리 프렌치 노파 살해에 대한 레너드 볼의 재판은 사람들의
관심을 널리 불러일으켰다. 우선 피고가 젊고 잘생긴 데다 아주
비열한 죄로 기소되었으며, 검찰측의 주요 증인인 로메인 하일저
에 대한 흥미까지 겹친 것이었다. 수 많은 신문에 그녀의 사진과
함께 신문에 그녀의 사진과 함께 그녀의 출생과 과거에 대한 여
러 가지 억측 기사가 실렸다.
재판 절차는 아주 조용한 가운데 속개되었다. 가지가지의 전문
적인 증거들이 제일 먼저 나왔다. 그런 다음 재닛 매킨지가 소환
되엇다. 그녀는 대체로 전과 똑같은 진술을 했다. 반대 심문에서
피고측 변호사는 볼과 프렌치 양의 관계에 대한 그녀의 설명에
관해 한두 번인가 진술이 모순 되게끔 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또한 그ㄳ 밤 그녀가 응접실에서 나는 어떤 남자의 목소리를 들
었다고 하더라도,ㅡ 거기에 있었던 사람이 볼이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강조했으며, 그녀의 증언 저변
에는 피고에 대한 질투심과 반감이 많이 깔려 있다는 그낌을 그
럭저럭 납득시켰다.
그리고 나서 다음 증인이 소환되었다.
"당신의 이름은 로메인 하일저입니까 ?"
"예."
"당신은 오스트리아 국적을 가졌습니까 ?"
"예."
"지난 3년 동안 단신은 피고와 함께 살며 그의 아내로 알려져
왔지요 ?"
로메인 하일저의 눈이 잡시 피고석에 잇는 남자의 눈과 마주혔
다. 그녀의 표정엔 이상하고도 불가해한 어떤 것이 담겨져 있었
다.
"예."
심문이 계속되엇다. 그리고는 한 마디 한 마디 그 저주스런 사
실들을 뱉어냈다. 문제의 그날 밤 피고는 쇠막대를 가지고 나갔
다. 그는 10시 20분에 돌아와서, 그 노부인을 죽였다고 털어놓았
다. 그의 소맷부리는 피로 물들어 있었는데, 그는 부엌에 있는
난로에다 그것을 태워 버렸다. 그리고 그녀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겁을 주며 위협했다.
진수이 진행됨에 따라, 처음에는 기고에게 약간 호의적이엇던
법정의 분위기가 이젠 그에게 아주 불리하게 굳어져 버렸다. 그
는 이제 운명이 다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이 고개를 축 숙이고
우울한 태도로 앉아 잇었다.
그러나 검찰측 역시 로메인의 악의(惡意)에 가득찬 진술을 억
제토록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수도 있었으
리라. 검찰측에서는 그녀가 좀더 공평하기를 원했다.
만만찮게 무게를 잡으며 피고측 변호사가 일어섰다.
그는 그녀에게 그녀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악의에 찬 거
짓말이며, 그녀는 문제의 그 시각에 집에 있지조차 않았고,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져 있었으며, 볼을 일부러 사형시키려고 그가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지었다고 고의로 말하고 있는 게 아니냐고
추궁했다.
로메인은 아주 거만하게 이 주장을 부인했다.
그 때 그 편지를 제풀하여 깜짝 놀랄 만한 결말에 접어 들었
다. 숨막힐 정도로 조용한 가운데 그것이 법정에서 소리내어 읽
혔졌다.


"사랑하는 맥스, 운명의 여신들이 드디어 그를 우리 손에 넘겨
주었어요 ! 그는 살인죄로 구속되엇답니다 - 예, 물론 그 노부인
을 살해한 혐의로요 ! 파리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하는 레너드가
말예요 ! 드디어 나는 복수를 하게 되었어요. 불쌍한 겁장이 !
나는 그날 밤 그가 옷에 피를 묻힌 채 들어왔다고 말하겠어요 -
또, 그가 내게 털어놨다고도 말하겠어요. 그를 교수형당하게 하
겠어요. 맥스 - 그가 교수형에 처해질 때, 그는 자기를 죽게 한
사람이 바로나 로메인이라는 것을 알게 될 거예요. 그리고 나면
- 행복해지는 거예요, 내 사랑 ! 드디어 행복이 찾아온 거라고요
!"


그 필적이 로메인 하일저의 필적이라는 것을 증언하기 위해 전
문가들이 출석해 있었으나, 그들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 편지
를 보더니, 로메인은 기세가 완전히 꺾여 모든 것을 자백하고 말
았던 것이다. 레너드 볼은 그가 말한 9시 20분에 집에 돌아왔다
고 했다. 그녀는 그를 파멸시키려고 그 이야기를 모두 꾸며냈다
는 것이다.
로메인 하일저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자, 검찰측의 주장도 무너
지고 말았다. 왕실 변호사 찰스 경이 몇몇 증인들을 소환했고,
피고 자신도 증인석으로 가서 반대 심무네도 동요되지 않고 남자
답게 담담하게 진술했다.
검찰측에서 다시 기세를 회복하려고 노력했지만, 별 성공을 거
두지 못했다. 판사의 요약도 피고에게 전적으로 유리하지는 않앗
으나, 이미 반작용이 일어나고 있었으므로 배심원들이 평결을 내
리는 데에는 거의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리는 피고가 무죄라고 봅니다."
레너드 볼이 풀려난 것이다 !
메이헌 변호사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기의 변호 의뢰인에게 축하해 주어야 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코안경을 열심히 닦고 잇다는 것을 문득 알아차리
고는 갑자기 행동을 멈췄다. 그의 아내가 바로 그 전날 밤 자기
에게 그런 습관이 있다는 것을 말해 주었기 때문이다. 습관이란
이상한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그런 습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
을 결코 알지 못한다.
흥미로운 - 아주 흥미로운 사건이다. 우선, 그 로메인 하일저
라는 여자만 해도.
그는 그 로메인 하일저라는 외국인 때문에 여전히 그 사건에
사로잡혀 있었다. 패딩턴에 있는 집에서 보았을 때는 가냘프고
조용한 여자 같았는데, 법정에서는 그 엄숙한 분위기와는 달리
열대 지방의 꽃처럼 활활 타올랐었다.
그는 이제 눈을 감아도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잇엇다. 키가 크
고 격렬하며, 우아한 몸을 앞으로 약간 기울인 채, 오른손을 무
의식적으로 계속 쥐었다 폈다 하는 모습을 말이다.
습관이란 이상한 것이다. 그는 그녀에게는 그 손놀림이 습관인
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누군가 다른 사람이 아주
최근에 그렇게 하는 것을 보앗는데, 그게 누구였더라 ? 아주 최
근이었는데 -
그게 머릿속에 떠오르자, 그는 숨을 헐떡였다. 쇼네 셋집에 있
던 그 여자였어 -
그는 ㅓ리를 취두르며 꼼짝도 않고 서 잇엇다. 불가능한 일이
야 - 불가능해 - 하지만, 로메인 하일저는 여배우였다고 햇지.
왕실 고문 변호사가 그의 뒤에 다가와서 어깨를 툭툭 쳤다.
"그 사람한테 축하 인사 했소 ? 정말이지 아슬아슬했어요. 가
서 그를 만나 보지 않겠소 ?"
그러나, 그 작달막한 변호사는 손을 늘어뜨렸다.
그는 딱 한 가지 하고 싶은 일이 있었을 뿐이다 - 로메인 하일
저를 만나 보는 일이다.
그는 시간이 얼마간 지난 뒤에야 그녀를 만나는데, 그들이 만
난 곳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럼 알아내셨군요." 변호사가 마음속에 품고 있던 얘기를 모
두 하자, 그녀가 이렇게 말했다. "그 얼굴 ? 오 ! 그건 아주 위
웠죠. 가스등의 불빛이 너무 약해서 선생님이 그 분장을 알아보
실 수 없었던 거예요."
"그렇지만 왜 - 왜 - "
"왜 혼자서 그런 수를 썼느냐고요 ?" 그녀는 자신이 지난번에
도 그런 말을 했던 것을 기억하며, 약간 미소지었다.
"정말 감쪽 같은 희극이었소 !"
"이보세요 - 저는 그이를 구해 내야만 했거든요. 그이에게 헌
신적인 여자의 증언만으로는 충분치가 않았을 거예요 - 그건 선
생님도 충분히 주의를 주셨쟎아요. 그리고, 저는 청중들의 심리
에 대해 좀 알고 있죠. 제가 증언한 것을 제가 잘못되었다고 자
백하여 법률상으로 저를 꼼짝 못하게 하면, 피고에게 유리한 반
응이 금방 나타나는 거 아녜요 ?"
"그럼, 그 편지 뭉치는 ?"
"한 통만으로는 - 결정적인 증거가 되는 한 통만으로는, 그걸
뭐라고 하죠 ? - 조작한 일처럼 보일지도 모르니까요."
"그리고 그 맥스라는 남자는 ?"
"가공의 인물이죠."
"그렇지만, 나는 우리가 정상적인 절차에 의해서도 그의 혐의
를 풀 수 있었으리라 생각하는데 - ?" 메이헌 변호사는 불만스러
운 태도로 말했다.
"저는 감히 그런 모험은 하지 않겠어요. 선생님이야 당연히 그
이가 무죄라고 생각하고 계셨겠지만 -"
"그럼, 당신은 그걸 알고 있었군요 ? 알겠소." 하고 키가 작달
막한 메이헌 변호사가 말했다.
"메이헌 씨 - " 로메인이 말했다. "선생님은 전혀 이해를 못
하시는군요. 저는 - 그이가 유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요 !"

....




<추리꽁트>
- 벽속의 남자 -
글, 한 대희.

그날도 어김없이 고스톱 판은 벌어졌다.
누군가가 고스톱은 망국병이라고 한다지만 고스톱이야말로 범국민적 스포
츠라고 주장하는 우리들이 모였으니 어찌 그냥 넘어갈손가. 그것은 고양이
가 생선가게 앞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어쨋든 초저녁부터 시작된 백일잔치는 고스톱 판으로 변질되면서 밤 열두
시가 지나도록 끝날줄을 몰랐다. 우리의 흥겨움이 지나쳤던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결혼 3년만에, 그것도 떡두꺼비 같은 3대독자를 떡하니 생산해 놓고
입이 딱 벌어진 우리의 죽마고우인 우춘구 부부의 경사를 어찌 나몰라라 하
겠는가. 그중에서도 나는 더욱 각별한 심정으로 좌중을 리드했고 흥겨운 분
위기를 한껏 즐겼다.
술 기운이 싹 가시는 사태가 발생된 것은 고스톱판이 거의 파장이 되어갈
무렵이었다. 오늘의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잔치 분위기에 밀려 저녁내내
건너방에 갇혀있던 아기에게 젖을 물리러 들어갔던 아이 엄마가 온몸이 불
덩어리처럼 열에 들뜬 아기를 안고 안방으로 달려온 것이다. 백일잔치 집은
대번에 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나는 어쩔줄 모른채 발을 동동 구르는 애엄마한테서 아기를 나꿔채고 냅
다 밖으로 달렸다. 우춘구와 친구들 모두가 허둥지둥 내 뒤를 따랐다.
불행히도 우춘구가 어렵게 마련한 연립주택은 서울의 변두리에서도 뚝 떨
어진 외딴 지역이라 택시가 잘 들어오지 않는 지역이었다. 자정이 훨씬 지
난 지금 시간에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 날 구멍은 있는 법. 내가 연립주택의 2층에
서 현관으로 뛰어내려 왔을 때 승용차 한대가 막 도착하고 있었다. 낡은 소
형승용차에서 내린 사내는 바로 맞은편 연립 2층에 사는 신충식이란 사람이
었다. 우춘구와 나는 염치불구하고 그에게 매달렸다.
"죄송합니다. 어린애가 갑자기 열이 나서 그럽니다. 제발 시내 병원까지
만 좀 태워 주십시오."
빤히 바라보던 사내가 차갑게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오. 오늘 새벽에 지방 출장을 가야하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사내의 매몰찬 소리에 우춘구가 다시 통사정을 했다.
"부탁입니다. 이웃간에 한번만 도와 주십시오.예?"
"여보시오, 아무리 이웃도 좋지만 지금은 내 코가 석자요. 다른 집에도
차가 있는데 왜 나한테만 떼를 씁니까?"
"이미 잠든 사람들을 깨울수가 없어서요..제발...."
"그건 댁의 사정이니까 알아서 하쇼."
사내는 냉정하게 돌아서고 말았다. 차 빌리는걸 포기한 나는 밤공기가 차
가운 거리를 뛰기 시작했다. 차라리 통사정하는 시간에 뛰었더라면 하는
후회가 막급하게 가슴을 때렸다. 무려 30분을 달리고서야 우리는 조그만 개
인병원의 간판을 발견하고 문을 두드렸다.
"다른 큰 병원으로 가 보십시오."
잠시 아기를 진찰하던 의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부랴부랴 가까운
개인 병원으로 달려 갔으나 파자마 차림으로 잠자리에서 불려나온 원장은
역시 고개를 저었다. 천신만고 끝에 택시를 잡아서 종합병원 응급실에 당도
했으나 때는 이미 늦고 말았다. 아기를 진찰하던 당직의사는 다시 데려가라
며 고개를 저었다. 아기의 몸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던 것이다.
진찰실은 대번에 초상집이 되고 말았다. 금쪽같은 3대독자를 허무하게 잃
어버리고, 절망과 실신을 거듭하는 우춘구 부부를 보며 우리 모두는 함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 원성은 모두 비정한 이웃집 남자에게로 쏟아졌
다.
의분에 넘친 동네 사람들의 온갖 욕설과 함께 이웃집 남자의 집에 돌팔매
가 날아들기 시작했고, 다음날 밤. 이웃집 남자와 그 가족은 야반도주를 하
고 말았다. 그러나 비극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고, 사흘 후. 이웃집 남자가
변사체로 발견되는 사태로 확대되고 말았다.
백일잔치에 참석했던 우리는 당연히 경찰로 부터 용의자로 지목 되었고
그 중에서도 이웃집 사내에게 가장 큰 원한을 품었던 아기아빠 우춘구가 유
력한 용의자로 취급되었다. 우리는 경찰수사에 성실히 협조하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들을 비교적 소상히 진술하였고, 혈액형 확인을 위한 채혈이
나 지문조사도 함께 받았다. 수사과정에서 첫번째 용의자로 지목된 우춘구
는 혹독하게 추궁을 당하는 눈치였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돌연 경찰의 방문을 받았다.
"당신을 신충식씨 살해범으로 체포합니다."
그들의 뚱단지 같은 소리에 나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것 보세요. 원한이 있다 하더라도 아기 아빠한테 있지 내가 무슨 상관
입니까?"
"바로 그겁니다. 당신이 바로 죽은 아기의 친아빠였으니까요."
나는 하늘이 무너지는듯한 아뜩한 충격을 느꼈다. 그리고 경찰이 내미는
ABO형, MNS형, RH-HR형식의 친자확인 도표를 허전한 눈길로 내려다 보았다.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경찰이 그 사실을 어떻게 캐어냈을까?
"그날 밤. 아기 아빠를 제치고 당신이 설치면서 병원을 찾아 헤멨다는 사
실에 우리는 의문을 느꼈죠. 그리고 아기 아빠 우춘구씨는 정충 생산 부족
으로 아기를 낳을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아기
는 누구의 아기일까요? 그들 부부와 가장 가깝고 각별했던 당신이 일으킨
불륜의 씨앗임을 확인할 수 있었던거죠. 비정한 이웃에 가장 격분하고 울분
을 느꼈던 사람! 그건 바로 당신입니다."
형사반장의 냉정한 논리 앞에서 나는 그만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 끝 -



아스떼리온의 집
La Casa de Asterion


그리고 여왕은 아스떼리온이라는 아들을 낳았던 것이다.

아폴로도로 : '서재' III,1.


나는 그네들이 나를 오만하고 아마도 염세적이며 미친 사람이라고 비난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한 비난은 (내가 적절한 시기에 벌하겠지만) 가소
로운 것이다. 내가 집 밖으로 나다니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또한 밤
낮으로 (그 수가 무한히 많은) 내 집의 문들이 사람들은 물론 동물들에게까지
개방되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원하는 사람이나 동물은 들어오기 바란다.
이곳에는 여성적인 조화로움이나 궁전같이 웅장한 외양은 찾아볼 수 없을 테
지만 조용함과 고독함은 발견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집은 이 지
구의 표면에는 없다고 하는 사실도 알게 될 것이다.(이집트에 이와 유사한 집
이 하나 있다고들 이야기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나를 비난하는 자들까지도 집
안에 단 하나의 가구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또 한가지 우스운 일
은 나 아스떼리온 자신은 일종의 포로와도 같은 존재라는 사실이다. 내가 이
집에 닫힌 문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말할까? 자물쇠가 없다는 사
실을 부언할까? 그 밖에 어느 저녁에 나는 거리로 산책을 했다. 내가 밤이 되
기 전에 돌아왔다면 그것은 빈 손처럼 창백하고 평평한 평민들의 얼굴들이 내
마음속에 스며들까봐서 그렇게 한 것이다. 이미 해가 저물었다. 그러나 어느
보호자가 없는 사내 어린이의 울음소리와 목축 떼가 애원하듯 거칠게 우는 소
리는 이미 나를 인지했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사람들은 기도를 하고, 도망을
치며, 엎드리고 있었다. 어떤 자들은 아차스의 사원에 있는 연주반(連柱盤)으
로 올라가는 것이었고 다른 자들은 돌들을 모으고 있었다. 내 생각에는 어떤
사람이 바다 아래로 숨어버린 것이다. 나의 어머니는 헛되이 여왕이 된 것은
아니었다. 나는 비록나의 겸허함이 그것을 원하더라도 나 자신을 서민과 혼동
시킬 수는 없다.
나는 사실 유일한 존재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수될 수 있다는 것
은 나에게 흥미가 없는 일이다. 나는 철학자로서 문자라는 기예(技藝)를 통해
서는 아무 것도 전달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위대한 것을 위한 능력이
구비된 나의 정신에는 귀챦고도 하찮은 자질구레한 것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
다. 나는 하나의 문자와 또 하나의 문자 사이의 차이를 지각하지 못했다. 어
떤 고결한 조급함이 나로 하여금 독서하는 법을 배우는 데 동의하지 않았다.
밤과 낮들이 길기 때문에 가끔 나는 그것을 한탄한다.
나에게 오락이 부족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나느 지루하는 양처
럼 어지러워서 땅바닥에 구르도록 돌로 된 복도를 달린다. 나는 어떤 저수조
의 그림자를 잡는다거나 어떤 주자가 도는 것을 붙잡으며 또 숨바꼭질을 하며
논다. 내가 피가 날때까지 뛰어내리며 노는 옥상들이 있다. 언제든지 두 눈을
감고 힘차게 호흡하며 잠을 잘 때까지 나는 놀 수 있다.(나는 가끔 정말로 잠
을 자며 때로는 내가 두 눈을 떴을 때 낮의 색깔이 변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많은 놀이 가운데 내가 더 좋아하는 놀이는 바로 다른 아스떼리온이 되어
보는 놀이이다. 그래서 나는 그 다른 아스떼리온이 나를 방문하러 온 것을 상
상하고 그에게 내 집을 보여주는 것을 가상한다. 나는 대단한 존경의 표시로
그에게 말한다. "자아, 이제 우리는 지나온 그 교차로로 돌아갑시다. 또는 이
제 우리는 다른 안뜰로 들어가 봅시다. 또는 그 작은 수표가 마음에 드시는지
제가 물어 보았는데 어떠하신지. 또는 이제 모래로 가득 찬 어떤 저수지를 보
시지요. 혹은 자아, 이제 지하실이 어떻게 분기화(分岐化)되는지 관람하시게
될 것겁니다."하는 식의 표현들이 그것이다. 이따금 내가 말을 실수하여 우리
는 둘이서 건강하게 웃는 것이다.
나는 그러한 놀이를 상상했을 뿐만 아니라 역시 집에 대해서도 명상해 보았
다. 이 집의 모든 부분들은 흔히 있는 것들이다. 또 어떤 것이나 그 장소는
상이한 다른 장소이다. 하나의 저수조, 하나의 후원, 하나의 가축들의 물 마
시는 곳, 한 개의 구유는 없다. 구유들과 가축들이 물 마시는 곳과 후원들과
저수조들은 16개(무한히 많다)이다. 이 집의 크기는 세계의 크기만 하다. 달
리 표현해서 이 집은 세계이다. 그렇지만 저수조가 있는 후원들과 회색 돌로
된 먼지나는 복도들을 지치도록 뛰논 덕분으로 나는 거리에 다다를 수 있었고
아차스의사원과 바다를 보았다. 나는 하나의 밤의 환상이 바다와 사원들의 수
도 역시 열 넷(무한히 많다)이라는 사실을 나에게 보여 준 때까지 나는 그것
을 이해하지 못했다. 모든 것은 무수히 즉 열네 번 존재한다. 그러나 두 가지
가운데 하나는 위에 있는 복잡한 태양이며 또 하나는 아래에 있는 아스떼리온
이다. 아마 내가 별들과 태양과 거대한 집을 창조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매 9년마다 그 집에는 아홉 사람이 들어오게 되며 나는 그 아홉 사람에게
모든 죄로부터 해방시켜 주게 된다. 나는 돌로 된 복도의 안쪽에서 그들의 발
자국 소리와 음성을 듣고유쾌하게 그들을 찾으러 달린다. 그 의식은 불과 몇
분간 걸린다. 나의 두 손에 피가 흐르지 않도록 하여 그들은 차례로 한 사람
씩 떨어진다. 그들은 떨어진 곳에 있게 되며 그 시체들이 다른 복도들 중에
하나를 구분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나는 그들이 누구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
들 중에 한 사람이 죽는 순간에 언젠가는 나의 구원자가 올 것이라는 것을 예
언하였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나는 나의 구세주가 살아 있다는 것과 결국에
는 그 구세주가 진애 위에서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때
부터 나는 고독의 고통을 겪지 않고 있다. 만약 나의 청각기능이 세상의 모든
소음들을 들을 수 있다면 그의 발자국소리를 내가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제발 복도들이 적고 문들이 적게 있는어떤 곳으로 나를 데려다 주었으면 하고
나는 원하고 있다. 그의 구세주는 어떻게 생겼을까? 나는 자문해 본다. 아마
도 사람의 얼굴을 가지고 황소같이 생겼을까? 아니면 나와 같이 생겼을까?
아침의 햇빛이 청동빛의 칼에 반사되었다. 이제 피의 흔적은 하나도 남지 않
았다.
"그것을 아리아드네가 믿을까? 인신우두(人身牛頭)의 괴물 미노타우르스는
간신히 자기 방위를 했다." 하고 테세우스가 말했다.




미련한 탐정 하경감의 재치 - 노원 -

- 사브르에 꽂혀 죽은 사나이

희귀한 고미술품 수집가로 유명한 강영훈씨가 심장에 펜싱경기용
장검인 사브르에 꽂힌 채 죽었다.
사브르의 날은 아주 정확하게 심장을 찔렀기 때문에 주사한 것
같았다.
칼을 쓴 솜씨가 아마추어는 아닌 것 같았다.
강영훈이 죽은 방은 그가 늘 음악감상을 하는 거실로 그날도 흔들
의자에 앉은 채 음악 감상을 하다가 펜싱 칼에 찔려 죽었다. 오디오
의 텐테이블은 숨을 죽이고 있었으나 앰프에 불이 켜져 있다는 것은
이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다.
누군가와 둘이서 음악 감상을 하고 있다가 한사람이 벽에 걸려 있는
사브르를 뽑아 갑자기, 정확하게 강영훈의 심장을 찔렀다고 볼 수 밖
에 없다.
그 방에는 사브르뿐 아니라 에빼플리렛 등 여러가지 펜싱이 벽에 걸
려 있었다. 양궁과 석궁,라케트 등 다른 운동 기구도 벽에 걸려 있었
다. 그것으로 봐서 강영훈은 만능 스포츠맨이었는지 모른다.
"강영훈씨는 펜싱과 승마 등을 즐겼대요. 특히 요즘은 양궁을 좋아
해서 아침마다 조카와 함께 활터에 나가 운동을 했다고 합니다. 오늘
도 조카인 오지민이 활터에 가자고 들렀다가 숙부의 시체를 발견했다
고 합니다."
맹달수 형사가 하영구 경감에게 보고 했다.
"그럼 시체를 제일 먼저 발견한 사람은 오지민이란 조카란 말이지?"
하경감이 되물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어제 오후부터 오늘아침
까지 강영훈의 방에는 아무도 드나든 사람이 없습니다. 강영훈의 펜
싱칼에 찔린 것은 어젯밤 11시께라고 검시의가 보고 했습니다. 그렇
다면 이게 귀신 곡할 노릇아닙니까?"
"자살 할 수도 있지 않은가?"
하경가이 물었다.
"사브르의 칼날은 가늘고 휘청거리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를 찌르기
는 어렵습니다."
"그럼 어젯밤 그 방에 아무도 출입하지 않았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
어?"
"강영훈씨는 이 집안에 어마어마한 고미술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도난 방지를 위해 온갖 장치를 다 해두었습니다. 경비원이
넷이나 집을 지키고 있고, 사방을 철책으로 싸놓았기 때문에 현관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집에 들어올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폐쇄회로
를 이용한 감시 텔레비젼이 집안팎을 감시하고 있습니다. 경비원
넷은 둘씩 짝을 지어 집을 지키고 있었다고 합니다."
"감시 텔레비젼에는 뭔가 녹화 되어 있을 것 아닌가?"
하경감이 다시 물었다.
"그것은 이미 제가 틀어봤습니다. 아무도 드나들지 않았습니다."
"그럼 경비원이 수상하잖아?"
"그것도 조사해 봤습니다만 전혀 의심할 점이 없습니다."
"그것 참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 더운 여름에 창문이 닫혀 있다?

하경감은 낭패한 모습니다.
"처음 시체를 발견한 사람이 조카인 오 지민이라고 했지? 강영훈은
친척이 오지민 외에는 아무도 없으니까 그가 죽으면 모든 재산은 조
카인 오지민 한테 가는 것 아닌가? 그놈이 수상해."
한참 생각하던 하경감의 눈이 빛났다.
"하지만 밤 11시께 오지민은 그 집앞에 얼씬 거리지도 않았습니다."
"그 녀석 집은 어디야?"
"바로 옆집입니다. 그 녀셕 집에서 창문을 열면 강영훈의 거실이 마
주 보입니다."
"거리가 얼마나 되나?"
"50~60미터 될겁니다."
"그러면 사브르를 창문으로 던질 수도 없겠구먼...."
"그러나 시체가 발견되었을때 창문은 모두 꼭꼭 잠겨 있었습니다."
하경감이 이마에서 벗어진 땀방울을 씻어냈다. 한 겨울에도 땀을 잘
흘리는 하경감이라 오늘같은 무더운 삼복엔 물에 빠진 사람 같았다.
"진짜 귀신 곡할 노릇이군...."
다시 낭패한 얼굴로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아 한참 뭔가 생각하던 하
경감이 다시 벌떡 일어섰다.
"이러다가 추경감이나 강형사한테 당하겠어. 최근 추경감과 강형사
가 "여섯번째 사고(史庫)'라는 소설에서 밀실 살인을 해결한 솜씨
좀 봐... 이 무더운 여름에 뭣 때문에 창문을 걸어 잠그나...에어컨
도 없는 방에..."
하경감은 계속 중얼거리며 거실을 왔다 갔다 했따.
"조카란 녀석을 불러와. 그녀석이 범인이야."
하경감이 갑자기 자신있게 소리쳤다. 조금있다 오지민이 빙그레 웃
으며 들어왔다. 내가 범인이라고요, 웃기지 마슈하는 표정이다.
"당신 양궁 선수였지?"
하경감이 벗어진 이마에서 연신 땀을 닦으며 물었다.
"그럼요, 왕년엔 국가대표 선수까지 지냈지요. 하지만 도중하차한
몸입니다. 요즘은 숙부님의 사부 노릇을 하죠. 그게 뭐 잘못 된 겁
니까?"
"잘못됐지, 당신집 2층에서 숙부의 거실까지는 60미터, 양궁의 명
중거리로는 안성마춤이지. 자네는 국가 대표선수 시절 70m가 전공
이었지. 70m거리에서 쏜 화살 9개 중 8개가 반경 123Cm인 노란색 타
케트에 명중하는 실력이었으니까 60m 거리에서 숙부의 가슴 쏘는 것
쯤 문제가 아니었을 꺼야."
하경감이 빙긋이 웃으며 말을 계속했다.
"강영훈이 창밖을 내다보며야경을 즐기고 있을 때 자네가 쏜 거
야!"
"말도 안되는 소리 마십시오. 펜싱의 사브르를 활에 매어서 쏘아
보십시오. 5m도 안갑니다. 그런데 60m 밖에 있는 사람을 쏘아요?
후후후."
오지민이 코웃음을 쳤다.
"더구나 숙부의 방 창문은 잠겨 있었단 말입니다. "
"그게 자네 실수야. 자네는 화살로 숙부를 쏘아 죽인 뒤, 이튿날
아침 그방에 제일 먼저 들어갔자. 우선 창문을 닫아 잠근 뒤, 숙부
를 흔들 의자에 앉히고 가슴에 꽂힌 화살을 뽑아 냈지. 그리고 그
자리에 벽에 결려있던 펜싱칼을 그대로 꽂은 거야. 양궁의 화살과
사브르의 칼날 굵기는 거의 비슷하거든, 이걸봐, 자네가 뒤뜰로
던져버린 자네 화살."
오지민은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하경감의 놀라운 추리에 항복한 것이다.





군복의 포로

by 나집 마흐조프


자가찌 역에 기차가 당도할 무렵이면 담배팔이 가샤는 언제나 제일
먼저 역내로 뛰어 들어 가곤 했다. 그는 역이야 말로 가장 수입이 좋
은 장소라고 믿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플랫폼을 따라 뛰며 자그만한
눈을 익숙하게 굴려 손님을 찾았다.
누군가 그에게 그의 직업에 대해 묻는다면, 그는 욕을 퍼부어주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도 역시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사는 일에 신물이
나있었고 스스로를 불행한 운명의 소유자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
다. 만일 기회가 있었다면 그는 부자들의 차를 끄는 운전수가 되고 싶
었다. 운전수가 되면 양복도 입을 수 있고 나릿님이 드시는 음식도 먹
을 수 있으며 또 사시사철 나릿님과 호화스런 곳들만을 다닐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먹고 살기 위해 악착감이 노력해야하는 이 생활이 완전
히 살아지고 계속해서 즐거울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그런 종류의 직업을 특별히 좋아하고, 나아가 간절하게
소망하게 된 데는 그 나름의 각별한 이유--혹은 핑게거리--가 있었다.
언젠가 그는 어느 지방 유지의 운전수인 알거가 마머댁 하녀 나바비야
의 앞을 가로막고는 자신있는 태도를 아주 노골적으로 추근대는 것을
보았다.
한번은, 알거가 기쁨에 겨워 양 손을 비비면서 다음에는 반지를 가지
고 오겠노라고 그녀에게 말하는 것을 듣기도 했다. 그때 가샤는 그녀
가 알거에게 미소를 흘리는 것을 보았으며, 밀라야(이집트 여자들이
입는 장옷) 끝을 살짝 들어 올리는 것을 보았다. 마치 그것을 매만지
고 있었다는 듯이, 그녀는 기름을 바른 자신의 흑발을 보여주고 싶었
던 것이다. 이것을 본 가샤의 마음은 불붙기 시작했다. 질투가 그의
내부에서 고통스럽게 꿈틀거렸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는 그에게 모든
고통과 괴로움을 안겨 주었다.
그는 그녀의 뒤를 몇 발자국 따라가 보기도 했고 몇 번인가는 그녀가
혼자 걷고 있을 때 그녀 앞에 나서보려고 했었다. 드디어 골목길에서
그녀와 단둘이 마주칠 기회가 생기자, 그는 알거가 말했던 대로 자신
도 반지를 가져오겠노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상을 찌푸리며 홱
돌아섰다.
"나막신이나 가져온다면 모를까." 그녀는 지극히 경멸스럽다는 투로
이 말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그는 마치 낙타 등처럼 생긴 자신의 큼지막한 발과 더러운 갈리비야
(이집트 남자들이 입는 헐렁한 겉옷), 먼지 투성이의 머리수건 등을
훑어보았다. "이것이 바로 내가 비참한 이유로구나" "이것이 바로 나
의 별이 다른데로 마음이 기운 이유로구나" 그는 자신이 그토록 원하
는 직업을 가진 알거가 부러웠다. 그러나 이런 욕망에도 불구하고 그
는 결코 자신의 일을 중단하지 않았다. 그의 꿈을 그저 꿈속에서나 이
루어볼 뿐, 그는 자신의 일에 더욱 악착같이 매달렸다.
그날 오후, 그는 담배갑을 들고 역으로 나가 기차를 기다렸다. 지평
선을 바라보고 있으려니까 기차가 저 멀리서 자신이 내뿜는 연기 탓에
구름의 모양을 하고서 달려오는게 보였다. 점점 가까워질수록 기차의
모습은 더욱 또렷이 보였다. 기차 소리가 점점 요란해지더니 드디어
기차는 정차하였다. 가샤는 사람들로 가득찬 객차 쪽으로 서둘러 달려
갔다. 그러나 놀랍게도 입구에는 무장한 경비병이 있었으며 창가에는
멍하고 실의에 찬 낯선 얼굴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곧 이 기차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 기차에는 이번 전쟁에서 생포된 수 많은 이탈리아 병
사들이 타고 있으며 그들은 지금 수용 막사로 이송중이라고 했다.
가샤는 먼지를 뒤집어 쓴 이들의 얼굴을 훑어보자 당황한 나머지 우
뚝 서 버렸다. 그는 마치 기절을 당한 느낌이었다. 왜냐하면 절망과
빈곤을 드러내는 저 창백한 얼굴의 사람들에겐 담배에 대한 욕구를 충
족시킬 만한 능력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들이 눈으로 자신
의 담배갑을 탐욕스럽게 먹어치우고 있는 것을 눈치 채고는 조소하는
태도로 노려보았다.
그가 뒤돌아 오던 길로 되돌아 가려는 순간 누군가가 유럽 액센트가
섞인 아랍어로 "어이 담배"하고 불렀다. 그는 소리의 주인공을 의심스
럽다는 듯이 쳐다보더니 엄지와 검지 손가락을 비벼서 돈을 달라는 시
늉을 했다. 병사는 이 의미를 알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샤는 조
심스럽게 다가와 병사가 다가 올 수 없을 만한 지점에 멈춰 섰다. 병
사는 잠자코 윗 저고리를 벗더니 손으로 가르켰다. "나의 돈은 이거
다"라고 병사는 말했다.
깜짝놀란 가샤는 노란 단추가 달린 회색 윗 저고리를 놀라움과 갈망
이 뒤섞인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숙맥이나 바보가 아니었
으므로 자신이 이탈리아인의 욕망의 먹이로 던져질 손해를 볼 만한 어
떠한 감정 표현도 감족같이 숨길 수 있었다. 그는 무표정하게 담배 한
갑을 내밀고는 윗 저고리를 가져가려고 팔을 뻗쳤다. 병사는 상을 찌
푸렸다. "윗 저고리 하나에 담배 한 갑이라니" 병사는 소리를 질렀다.
"열 갑을 내" 그러자 가샤는 놀라 뒤로 물러 섰다. 그의 욕망도 다소
사그러졌다. 그는 다시 떠나려고 했다. "그럼 좀 깍도록 하지" 병사는
다시 외쳤다. "아홉이나 여덟로 말이야" 가샤는 완강하게 머리를 저었
다. "그렇다면 일곱"
그는 다시 머리를 젖고는 떠나기로 작정한 체 해보였다. 병사는 여섯
이라도 좋겠다더니 다시 다섯으로 내렸다. 가샤는 손으로 절망적이라
는 시눙을 하더니 자기의 자리로 돌아가 쭈그리고 않았다. "이리 와
봐" 실망한 병사는 외쳤다. "네 개까지 하자" 가샤는 쳐다보지도 않으
면서 자신이 얼마나 무관심한가 만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여 맛있게 피우기 시작했다. 머리 끝까지 화가 난 병사는 거의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그의 유일한 존재 목적은 담배를 얻는 것 같
았다. 그는 세개를 요구하더니 다시 두 개를 불렀다.
가샤는 죽치고 앉아 있었다. 그 윗저고리를 가지고 싶은 열망을 삭이
느라 그의 가슴 속은 끓어 올랐다. 그러나 여태까지 버텨온 것이다.
병사가 두개를 불렀을 때, 가샤는 내키지 않는다는 투였지만 마음이
동했다는 뜻을 비쳤고 병사는 그것을 알아 챘다. "이리 와 봐" 병사는
윗 저고리를 들고서 말했다. 이제 가샤는 더이상 별 수 없다고 생각하
고 자리에서 일어나 기차에 다가가서는 담배 두 갑에 윗 저고리를 넘
겨 받았다. 그는 기뻐서 탐욕스러운 눈으로 윗 저고리를 바라보았다.
승리의 미소가 그의 입가에 나타났다. 그는 자기 자리에 돌아와 답배
값을 내려 놓고는 윗저고리를 입고 단추까지 채워 보았다. 그에게는
약간 큰 듯 싶었지만 그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너무나 자랑스러웠
고 행복했다.
그는 담배갑을 다시 집어 들고, 자신감과 즐거움에 가득 차 플랫폼을
걸어 다녔다. 밀라야에 싸인 나바비야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가 지
금 나의 모습을 보기만 한다면" 그는 중얼거렸다. "오늘부터 더이상
나를 경멸하거나 비웃지 않을 테지. 알거도 이제 더이상 뽐낼 것이 없
고" 그러나 그 때 그는 알거가 윗저고리만이 아니라 한 벌의 옷을 갖
춰 입었던 것을 기억했다. 오, 바지를 어떻게 구할 수 있담? 그는 잠
시 생각에 잠기더니 창가에 기대서 밖을 내다 보고 있는 포로의 얼굴
들을 쳐다보았다.
그의 가슴 속에 다시 한 번 욕망이 솟아 올랐다. 그의 마음은 평온해
지는 듯 했으나 다시 열망에 휩싸였다.
그는 열차에 다가가 "담배요 담배" "바지 한 벌에 한 갑이요"라고 뻔
뻔스럽게 외쳤다. 두 번인가 세번 이렇게 외치고 나자 그는 병사들이
자신의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 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입고 있던 윗저고리를 가리키며 그것이 담배 한
갑의 값이라는 시늉을 해보였다. 이 동작은 곧 효과를 보았다. 한 병
사가 한 순간도 지체함이 없이 윗저고리를 벗으려고 했다. 가샤는 그
에게 쏜살같이 달려가 행동을 멈추게 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바가
바지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 그들의 바지를 가리켰다. 병사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듯 어깨를 으쓱 거렸다. 병사는 바지를 벗어 주었고 거래는
끝났다. 가샤는 정신을 잃을 정도로 기쁨을 느끼며 바지를 움켜 쥐었
다.
그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바지를 입었다. 1분도 못되어서 그는 완
벽하게 이탈리아 병사가 되었다..... 더이상 빠진 것은 없을까? 포로
들이 타르부쉬(검은 술이 달린 붉은 색의 터키모자)로 머리를 감싸지
않은 것이 매우 불만스러웠으나 그대신 신을 신고 있었다. 그는 신발
도 가짐으로써 자신의 삶을 망가뜨리고 있는 바로 그 알거와 동등해지
고 싶었다.
다시 한 번 그는 담배 갑을 들고 열차로 다가 갔다. "담배요" 그는
외쳤다. "신발 몇 켤레에 담배 한 갑이요" 그는 지난 번 처럼 시늉을
해 보였고 곧 병사들은 그의 뜻을 이해했다. 그러나 그가 손님을 찾기
도 전에 열차의 출발을 알리는 호각 소리가 났다. 그러자 경비병을 포
함하여 모두가 술렁거렸다.
역에는 어둠이 조금씩 깔리기 시작했고 밤 새들이 날기 시작했다. 가
샤의 눈에는 슬픔으로 인한 분노의 빛이 떠올랐고 깊이 상심한 그는
그 곳에 우두커니 서 버렸다. 열차가 움직이는 순간 앞 차량의 경비병
하나가 그를 가리켰다. 그는 지독히 화가 나서 영어로, 다음에는 이탈
리아어로 소리쳤다.
"즉각 열차에 올라 타" "죄수 너 말야" 가샤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
했고 다만 자신의 우울한 감정을 발산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경비
병의 행동을 흉내내며 비웃어 주었다. 그는 경비병이 저렇게 멀리 있
으므로 자기를 잡으러 오지는 못할 것이라고 믿었다. 기차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자 경비병은 다시 외쳤다.
"열차에 타라" "경고한다.. 어서 올라 타!" 가샤는 조소하는 표시로
입을 꽉 다물고는 들을 돌렸다. 그는 그 자리를 뜨려고 했다. 경비병
은 상대방을 위협하는 듯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그러더니 그 바보
같은 젊은이를 향해 총을 겨누고...쏘았다.
귀가 멍해지듯 총성이 울리고 날카로운 비명이 허공을 갈랐다. 가샤
의 몸의 그가 서있던 곳에서 무너져 내렸다. 담배 갑이 그의 손에서
떨어지면서 담배값과 성냥이 플랫폼에 산산히 흩어졌다. 고꾸라진 채
누워있는 주검과 함께....

- The End -



아주 특별한 재주



"하지만 그 사람은 걸핏하면 나를 때렸어요."
안젤라는 그때 멍들었던 곳이 생각난 듯 어깨를 문지르며 말했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해요?"
"이혼을 할수도 있었을 텐데."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 사람이 이혼은 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이 주에서 이혼하려면 얼마나
힘든지 당신도 아시잖아요. 당신은 내가 얻어맞은 것이 아무렇지도 않으세
요?"
비록 아내를 만나기 전의 일이긴 하지만, 그 짐승 같은 놈이 사랑스럽고
연약해 보이는 아내를 두들겨 팼다는 사실에 나는 물론 화가 났다.
"하지만 일에는 원칙이 있어. 그래서는 안되는거야."
안젤라는 항벼하듯이 말했다.
"그건 그 사람 잘못이었어요. 그 사람에게 술에 취한 상태로 욕저에 들어
가서 라디오를 너무 가까이 두는것은 위험하다고 말했지만, 황소 앞에서 붉
은 천을 흔드는 격이었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을것 처럼 고집을 부리
더라구요."
아내는 실제로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갑자기 키득거리고 웃기 시
작했다.
오싹 소름이 끼쳤다. 7년동안 같이 행복하게 살면서 귀여운 아이를 둘이나
낳은, 너무나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내, 그 아내가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은
모두 죽여 버리는 냉혹한 살인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때, 남편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난 살인마가 아니에요. 그리고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 아니
면 절대 죽이지 않아요."
안젤라는 벌컥 화를 내며 말했다.
그때 뒷문이 요란산 소리를 내며 열리더니 붉은 머리칼과 주근깨까지 나를
꼭 빼어닮은 다섯 살 난 샌디가 방안으로 뛰어들어오며 대들듯이 말했다.
"왜 이러고 있어요? 매트가 우는 소리가 안들려요? 조지가 매트를 때려서
피투성이가 되었어요!"
안젤라는 급히 샌디를 뒤따라 갔고, 나도 그 뒤를 따라갔다.
네살 난 매트는 뒷문 밖 층계에 앉아서 울고 있었다. 아이의 찢어진 아랫
입술에서 피가 흘러 흰 셔츠에 떨어지고 있었고, 샌디와 제일 친한 크리스
코피가 어색하게 매트의 등을 토닥여 주고있었다.
아이 중의 누가 다쳤을 때마다 안젤라는 아주 침착했는데 나는 그점이 무
척 좋았다. 나는 아이들이 피를 흘리는 것을 보면 극도로 당황하지만, 안젤
라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아이를 달래곤 했다.
아내는 매트를 안아들고 상처를 자세히 들여다본 뒤에 꿰맬 필요는 없겠다
며 아이를 안심시켰다. 부엌으로 가서 아이의 부은 입술에 찬 물스건을 대
주었다. 그러자 아이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다시 뒷문이 벌컥 열리며 옆집에 사는, 안젤라와 아주 친한 질 코피가 뛰
어들어왔다.
"조지 이놈의 자식! 내가 다 봤어! 매트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덴 조지
가 다짜고짜 때린거야!"
"그래요, 아빠."
샌디가 맞장구를 쳤다.
"조지가 그네를 못타게 했어요. 크리스와 내가 만들었으니까 우리 타잔놀
이인데도 말이예요."
매트는 다시 울기시작했고, 질은 고래고래 소리치고, 안젤라까지 화를 내
기 시작했다. 그러자 샌디까지 고함을 지르기 시작해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
다.
"잠깐만! 한사람씩 얘기합시다."
나는 소리쳤다.
여러사람의 말을 종합해 보면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우리 동네를 개발하던 당시에 우리 집의 뒷마당으로 흐르던 시냇물을 막아
버렸는데, 그 바람에 지름이 8피트나 되는 도랑이 생기게 되었다. 그 위로
개발업자들이 자르지 않고 내버려 둔 크고 오래된 버드나무 가지가 늘어지
게 되었다. 도랑 주위의 넓은 땅이 모두 개발되어 집이 세워지자 동네 아이
들이 그 도랑에 와서 놀게 되었다.
아이들은 나이에 따라 서로 다른곳에서 놀았다. 우리집에서 한 블록 쯤 떨
어진 곳에서는 청소년들이 모여서 놀았는데, 그쪽의 도랑이 다른곳보다 더
가파를 데다가 크고 뾰족한 돌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반면, 우리집과 코휘
의 집 사이의 도랑은 경사도 완만하고 풀도 많이 나 있어서 어린아이들이
주로 그곳에서 놀았다.
샌디와 친구 녀석들은 도랑 위로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에 로프를 매달아
놓고는 정글 속에서 덩굴을 타고 이 나무 저나무로 날아다니는 타잔처럼 도
랑 위를 건너며 위험한 놀이를 즐겼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언제나처럼 조지
왓슨이 나타나서 로프를 빼앗고 매트를 때린것이다.
뒤룩뒤룩 살이 찐 아홉살난 조지는 전형적인 동네 깡패였는데, 자기 또래
의 아이들에게는 꼼짝못하면서도 여섯살 아래인 아이들에게는 공포의 대상
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만나기만 하면 조지의 욕을 했다. 최근에는 또 어떤
짓을 했다는 얘기와 그 아이의 심리적인 동기가 무었일까 하는 얘기는 결국
<그 부모에 그자식이지 뭐>라는 말로 끝나곤 했다.
도시계획법으로 정해 놓기라도 한 것처럼 어느 동네든지 골칫거리인 집이
꼭 하나씩 있다. 왓슨네 집이 바로 그런 집이었다. 시끄럽고 천박하고, 잘
난체 하는데다가 다른 사람들의 권리나 요구는 깡그리 무시하는 그런 사람
들이었다.
그들은 주중에 파티를 열어 새벽 1시쯤 소란스럽게 떠들며 헤어지거나, 토
요일에 시내에서 밤늦게까지 놀다가 새벽 2시에 요란산 차 소리를 내며 와
서는 아기보는 여자더라 나오라고 클랙슨을 울리기도 했다.
밤중에 그렇게 시끄럽게 떠들었으면 다음날인 일요일에는 숙취때문에라도
늦잠을 잘 것 같은데 그렇지도 않았다. 왓슨은 아침 7시에 마당에 나와 세
상에서 가장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잔디 깎는 기계를 켜놓고는 2층에 있는
마누라와 큰 소리로 얘기를 하는것이다.
왓슨 부인도 똑같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아이를 포기한 뒤에 낳게 된 조지
를 애지중지했다. 그래서 조지와 나이가 같거나 나이 많은 아이가 조지를
건드리면 야단법석을 치면서도 조지의 잘못은 모른척 했다. 왓슨 부인은 조
지가 때려서 피를 흘리는 아이를 데리고 와서 화를 내는 아이 엄마를 똑바
로 쳐다보면서 점잖게 말하곤 했다.
"조지는 저애를 때리지 않았대요. 난 그애를 믿어요. 그리고 조지는 절대
로 싸움을 걸지 않아요."


"그 녀석은 우리 동네 골칫거리예요."
안젤라는 세 아이에게 레몬주스를 주어 텔레비전 앞에 앉혀놓고 나서 화를
내며 말했다.
우리는 뒤뜰에 앉아있었는데 안젤라는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저녁
준비를 하다가 콩 다듬는 칼로 도마를 내리찍었다.
"그래도 의사들은 그애를 좋아할 거예요. 여름 방학한지 이제 겨우 5일밖
에 안 됐는데 내가 아는것만 해도 그녀석이 네명이나 ㄳ려서 피를 봤거든
요."
질은 안젤라를 도와서 콩을 까며 심술궂게 말했다.
"도트네 아이는 조지가 던진 돌에 맞아서 세 바늘이나 꿰맸죠, 낸시 스미
스를 떠밀어 깨진 병 위로 쓰러뜨렸죠. 그리고 어제는 우리 크리스의 다리
를 걸어 넘어뜨려서 아이 얼굴이 찢어졌고, 오늘은 매트도 두들겨 팼어요.
이러다간 여름이 가기 전에 우리 아이들을 전부 병원에 입원시키겠어."
"누군가 그 아이에게 어떻게 손을 써야겠어요."
안젤라가 의미 심장한 눈길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나는 빼줘요. 지난번에 조지 때문에 따지러 갔더니 그애 아빠가 내 얼굴
앞에 렌치를 들이대면서 애들일은 애들끼리 해결하게 놔두라고 합디다."
질은 좋은 생각이라도 났다는 듯이 소리쳤다.
"이러면 어떻까요! 12살짜리 애들을 시켜서 그 녀석을 두들겨 패주는 거
예요."
"왓슨 부부가 당장 고소할 걸요."
안젤라는 그런건 생각도 말라는 듯이 말했다.
"왓슨 부부가 이번 여름에 아이를 캠프 같은곳에 보낼지도 모르지."
나는 좋은 생각이 아니냐는 듯이 말했다.
"어림도 없어요. 왓슨 부인이 아이하고 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있으려고
하지 않을거예요."
안젤라는 콩을 다 다듬고 나서 청바지에 칼을 문질러 닦고는 무심코 칼 손
잡이를 돌리면서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는 도랑쪽을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갑자기 안젤라가 말했다.
"좋은 생각이 났어요. 이번에는 조지가 우리에게 좋은 일을 한 건지도 몰
라요."
질과 나느 어이가 없어 마주보았다.
"저 로프는 안전하지 않을수도 있어요."
안젤라가 말했다.
"하지만, 로프는 안전하고 튼튼해요, 바레트 아줌마."
크리스가 문 앞에서 말했다. 어린이 프로가 끝나자 세 아이는 뒤뜰로 나와
있었다.
"맞아요, 엄마. 아빠가 가르쳐 주신 대로 로프를 나무에 맸어요."
샌디가 덧붙였다.
"맞아요."
로프를 어떻게 묶는지도 모르는 매트도 한마디 거들었다.
안젤라는 씨익 웃으며 매트가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매트의 머리를 헝클었
다.
"그랬더라도 아빠하고 내가 직접 눈으로 확인 해 봐야 안심이 되겠구나."
그래서 우리는 벌써 이슬에 젖은 잔디를 밟으며 밖으로 나가 도랑을 건넜
다. 내가 로프가 닳아지지 않았나 확인하는 사이에 안젤라는 고양이 처럼
버드나무 위로 올라갔다. 두 아이의 엄마로써 체면도 생각하지 않고 나무에
걸린 연을 내려주려고 선뜻 나무 위로 기어올라가거나 공을 내려주려고 지
붕위로 올라가는 엄마때문에 샌디와 매트는 아이들의 부러움을 샀다.
"로프는 튼튼해 보이는데, 매듭은 어떻소?"
나는 어두워진데다가 나뭇입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 안젤라에게 큰소리로
물었다.
"별로 튼튼한것 같지도 않아요. 알렉스. 좀더 튼튼한 로프로 달아주시겠
어요?"
아내는 별로 힘들이지 않고,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매듭은 잘 묶여져 있구나. 하지만 너무 낡았어. 아빠가 내일 새 로프를
사다주실테니까 그때 까지는 이 로프에 매달리지 말고 네 친구들도 매달리
지 못하게 해야한다."
아내가 샌디에게 말했다.
"너도 마찬가지야, 크리스."
질이 말했다.
"흥! 난 마찬가지가 아니예요!"
비꼬는 듯한 아이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서보니 우리가 때리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악동, 조지가 비웃
고 있었다. 아내가 차갑게 말했다.
"아냐, 너도 마찬가지야. 작은 애들이 매달리기에도 튼튼하지 않으니까
넌 당연히 매달려서는 안 되지."
조지는 자신의 뚱뚱한 몸을 비꼬는 말에 얼굴이 빨개졌다. 그건 녀석의 유
일한 약점이었다.
"아줌마는 우리 엄마가 아니예요, 아줌마 말은 듣지 않겠어요!"
조지가 소리쳤다. 참다 못해서 한대 때려주려고 내가 한발짝 앞으로 나서
자 아내가 나를 잡았다.
"이건 위험해, 조지. 그러니 너도 매달리지 말아라."
아내는 그렇게 타이르고 로프 끝을 잡아 나무위로 던져 올렸다.
"그래도 난 다시 꺼낼수 있어요."
조지가 대들듯이 말했다. 그러나 내가 버티고 서있는 것을 보고는 나무 족
으로 가지는 않았다.
그 때, 왓슨부인이 저녁을 먹으라고 조지를 불렀고, 질도 냉동실에서 고기
를 꺼내는 것을 깜빡 했다며 크리스와 집으로 갔다. 안젤라와 샌디와 나는
매트에게 먼저 출발하라고 하고 누가 집까지 빨리 뛰어가는지 시합을 했다.
침대에 들고 나자 조지 왓슨녀석과 씨름을 하며 긴 여름을 보내야 한다는
생각과 두 아이를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하는 일상의 부산함으로 잊고있
던 안젤라와의 대화가 생각이 났다. 갑자기 묻고 싶은말이 떠올랐다.
"경찰은 아무 의심도 하지 않았소?"
나는 침실의 어둠속에서 물었다. 안젤라가 졸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경찰은 제게 아주 동정적으로 잘 대해 줬어요. 그들이 보기에도 그가 욕
실 문을 안으로 잠근게 확실했거든요. 사실, 제가 한 일이라고는 선반 끝에
아슬아슬하게 라디오를 걸쳐놓은 것 뿐이예요. 그리고는 그저 일이 잘 되기
만을 바랐죠."
그걸로 이야기가 다 끝났다는 듯이 안젤라는 돌아누우며 머리를 베개 속으
로 파묻었다.
"아니, 잠깐!"
나는 갑자기 또 다른 생각이 나서 베개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그 완벽한 표본은 어떻게 된거야?"
"쉿! 애들 깨겠어요."
아내가 속삭였다.
"그럼, 그것도 당신이 한거야?"
나는 목이 잠겨 중얼거렸다.

우리는 결혼 후 2년 동안 시내의 한 연립주택 2층에 세들어 살았다. 오래
되고 아주 낡아서 더러운 곳이었지만, 값도 싸고 방도 크고, 벽이 두꺼워서
방음도 잘 되었기 때문에 젊은 부부 몇이 더 세들어 살고 있었다.
우리는 인생에서 결혼은 처음이었고 그쪽에서 모드 성공하고자 하는 패기
에 차 있었기 때문에 늘 못마땅한 눈초리를 하고 돌아다니는 주인 여자만
없었다면 그 낡은 집도 우리에게는 행복한 곳이었을 것이다.
주인여자는 3층에 살고 있었는데, 현관 문이 열릴때 마다 계단으로 나와
낡아서 흔들거리는 난간에 기댄체 밑을 내려다 보곤 했다. 그건 혹시라도
누가 금지한 애완동물을 데리고 들어오지 않는지, 누가 쓰레기로 현관을 더
럽히지나 않는지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그 여자는 남편을 쥐고 흔들었고 세딸을 들들 볶았고, 입주자들을 서로 이
간질 시키면서, 굉장한 기쁨을 느꼈다.
"난 D호에 사는 여자가 하는말을 이해할 수 없어요. 나는 당신옷이 아주
단정하다고 생각하는데.."
주인 여자는 아무것도 모르는 새로 이사온 입주자들에게 그런식으로 충동
질 하곤 했다.
나는 두어달이 지난 뒤에야 주인여자가 하지도 않은 말을 했다며 거짓말을
하고 다닌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마치 서클에 처음 가입한 학생듣ㄹ의
연수기간 같았다. 그 기간이 지난 후에야 우리는 서로 모여서 주인 여자가
또 어떤 거짓말을 하고 다녔는지, 언제 그런 거짓말을 했는지 사람들의 화
난 표정을 보고 알았다는 등의 얘기를 하며 웃을수 있게 되었다.
주인여자는 그래서는 안되는 아내상의 완벽한 표본이었으므로 우리는 등
뒤에서 주인 여자를 <완벽한 표본>이라고 불렀다.
이웃간을 서로 이간질하는 것도 나쁘지만, 부부 사이를 이간질하기 시작하
자 더 이상 웃어넘길 수가 없었다. 우리가 거기 사는 동안 두 부부가 주인
여자의 뱀같은 혀에 놀아나 가정 파탄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첫번째 부부
는 서로 헤어질 것이 분명했다고 하더라도 두번째로 당한 부부는 서로 아주
사랑하는 어린 부부였는데, 부모의 반대와 인생에 대한 경험 부족으로 어려
움을 겪고 있었다. 주인여자가 무슨짓을 하는지를 깨달은 안젤라가 불문률
로 되어있는 것까지 깨어가며 <확실한 표본>의 수법을 그 젊은 부부에게 이
해시키려고 노력했지만, 이미 늦었다. 소녀는 부모집으로 가버렸고 소년도
화가나서 캘리포니아로 돌아가 버렸다. 나는 안젤라가 그토록 화를 내는 것
을 본적이 없었다.
"주인여자는 계단 난간에 기대어 거미줄을 치고는 들락날락 거리는 우리
파리새끼들 중 누가 걸리는 가를 지켜보는 크고 살찐 거미 같은 여자예요.
그런 사람을 처벌할 법이 왜 하나도 없죠?"
아내는 울먹이며 말했다.
이틀후, 난간에 기대는 순간 난간이 부서져 <완벽한 표본>이 3층 아래로
떨어져 죽었을 때, 우리는 하늘이 내린 벌이라고 까지 생각했다. 경찰이 사
고사로 처리하자마자 주인집 남자는 집을 팔고 딸들을 데리고 고향인 캔사
스 주의 옥수수 밭으로 가버렸다.
"당신이 꾸민 일이오?"
나는 안젤라를 흔들며 다시 물었다.
"오, 알렉스. 지금은 한밤중이예요."
아내는 애원하듯이 말했다.
"알고싶소."
"주인여자도 집이 낡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수리하는데 돈 한푼 쓰
려고 하지 않았어요. 경찰도 그 난간이 언젠가는 부서졌을거라고 했던 얘기
들으셨죠? 난 그저 난간이 좀 더 빨리 부서지게 했을 뿐이에요. 그리고 내
가 주인여자에게 난간에 기대는 것은 위험하다고 몇번이나 얘기했었다는 것
을 잊지 마세요."
"참 좋은 일을 했구려. 그 여자에게 얘기했다는 것으로, 그렇지? 모든 것
이 괜찮다는 거군! 안젤라, 말 좀 해봐. 안젤라! 당신 부모님은 당신 이름
을 꽤나 재미있게 지었군 그래. 천사라고 지었으니 말이오. 당신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 거요? 힘없는 인간에게 기쁨의 빛을 선사하는 복수의 화신
쯤으로 생각하는 거요?"
안젤라가 한 쪽 팔을 짚고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말하죠. 알렉스 바레트 씨. 나는 이제 5,6시간 후면 일어나서 아침밥을
달라고 조를 두 사내 아이의 엄마예요. 당신은 피곤해 죽겠는데도 오래전에
일어난 사소한 사건 하나를 가지고 귀찮게 구는 한남자의 아내를 보고있단
말이예요!"
아내는 다시 침대에 누워서 베개로 얼굴을 덮어 버렸다. 두번씩이나 베개
를 벗겨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내는 자꾸 귀찮게 굴면 좋지 않을거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아주 사소한 사건. 기가 막히군!"
나는 밤새도록 악몽에 시달렸는데, 아내를 교수형 시키기로 결정한 판사와
경찰들 앞에서 나는 아내를 변호하고있었다. 나는 아내가 현모양처임을 강
조했지만 그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아내는 전혀 살인자처럼 생기지
않았다고 덧붙이자 그들은 화를 내기까지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두건을 쓴
간수가 낡은 로프에 어깨를 걸고 샹들리에에 매달려 흔들거리며 외쳤다.
"우린 그녀를 로프에 매달거야! 로프에 말야! 울인 그녀를 로프에 목매달
거야! 로프에!"
그 꿈의 편린들이 하루 종일 나를 괴롭혔다. 나는 두려움을 떨쳐 버릴수가
없었는데, 가게에 들러 샌디에게 줄 새 로프를 살 때는 나도 안젤라의 공범
같은 생각이 들었다. 오후 늦게 차를 차고에 넣는데, 샌디가 공구상자를 뒤
지고 있었다.
"네 타잔 로프 사왔다."
나는 샌디에게 소리쳤다.
샌디가 낡은 군용 텐트를 끄집어 내며 말했다.
"고마워요, 아빠. 하지만 우린 군대 놀이를 할거예요. 크리스와 매트와
내가 도랑옆에 텐트를 칠 건데 이걸 써도 되겠어요?"
"그래라. 하지만 조지가 와서 부숴버리면 어떻게 할거냐?"
"우린 이제 조지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요."
샌디는 쾌활하게 말하고는 내가 말문이 막혀서 머뭇거리는 사이에 집 모퉁
이를 돌아 사라져 버렸다.
아, 안 돼.
"안젤라!"
나는 고함을 지르며 집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문을 부서져라 열어젖혔다.
마우 대답도 없었다.
"경찰이 그녀를 데려갔으면 샌디가 말을 했을 텐데."
나는 냉정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며 중얼거렸다.
"안젤라!"
그때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 나 질네 집에 있어요. 이리오세요!"
아내가 소리쳤다. 내가 급히 문을 열고 들어가자 질이 명랑한 목소리로 말
했다.
"우린 자축하고 있었어요. 한 잔 드릴까요?"
여자들이란! 아무리 애가 미운짓을 많이 했어도 애를 죽이고도 이렇게 태
연할수 있단말인가? 나는 잠시 멍하니 의자에 앉아 있었다.
"여보, 오늘 힘드셨어요? 얼굴이 창백해요."
"조지는 어떻게 됐지?"
나는 안젤라를 쏘아보며 다그쳐 물었다.
질은 진정하라며 나에게 찬 음료수를 큰 컵에 담아 건네주었다.
"샌디가 얘기 안 하던가요? 타잔 로프를 타다가 줄이 끊어졌어요. 두 다
리가 다 부러졌죠. 한쪽 다리는 두 군데나 부러졌구요."
질은 만족스러운 듯이 말했다.
"죽지는 않구요?"
나는 맥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물론이죠, 여보. 어떻게 죽겠어요? 밑에는 돌도 없고 대부분 잔디가 깔
린 곳이잖아요. 잔인한 말 같지만, 이제 이번 여름은 마음 편히 지낼수 있
겠어요. 그 녀석이 석고한 걸 풀고 지팡이 없이 걸어다닐 때 쯤에는 개학일
테니까요."
질은 안젤라를 보고 씨익 웃으며 말했다.
"믿을수가 없어요! 여름 방학 내내 조지 왓슨이 어린 애들을 때리는 꼴을
안보게 되었으니 말예요!"
"경사 났군!"
나는 비꼬듯이 중얼거렸다. 지난 밤에 안젤라가 살펴보았던 매듭이 풀려서
조지가 떨어진 것은 물어보나 마나일 것이다.
"그럼요. 왓슨 부인에게도 말했지만, 그건 순전히 조지 잘못이예요. 새
로프를 달때까지는 절대 매달리지 말라고 안젤라고 경고까지 했었잖아요."
질은 떳떳하다는 듯이 말했다.
"안젤라는 아주 생각이 깊죠."
내가 그렇게 말하자 안젤라에게도 양심은 있는지 얼굴이 붉어졌다.
토요일인 다음 날, 나 자신조차도 이번 여름은 참 평화로운 방학을 보내겠
구나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아이들은 한번도 조지가 때렸다면서 울며
뛰어들어오는 일 없이 하루종일 평화롭게 적군을 물리치며 도랑에서 놀았
다.
오후에 그 누구의 훼방을 받지 않고 야구를 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여름
내내 할수 없이 갇혀 지내는 것도 조지 자신에게는 득이 될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일요일 아침 일찍 잠이 깬 나는 이미 무의식중에 상황을 합리화 시켜 놓고
있었다. 아내들 중에는 특별한 재주를 가진 여자들이 있지 않은가? 아내가
기계 만지는 것을 좋아하면 가족들이 쓰는 차의 카뷰레터를 청소하게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아내가 페인트 칠을 하고 싶어 한다면,
취미로 옷을 만들어 보겠다고 한다면, 또는 막힌 하수구를 고치겠다고 한다
면, 간단히 말해서 아내의 재주가 가족의 안락과 평화에 도움이 된다면, 그
것이 해가 되지 않는다면 남편이 그것을 막을 필요가 있겠는가?
일단 그렇게 마음을 고쳐먹고 난 후에 나는 다시 돌아누워 잠 속에 빠져들
었다. 그때 였다. 잔디깍는 기계의 발동이 걸리는 큰 소리가 아침의 정적을
깼다.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시계를 보고는 신음했다. 7시 20분인데!
머리를 베개속에 파묻었지만 소음은 더 커졌다. 소리를 피할 방법이 없었
다.
나는 한숨을 쉬며 아내의 어깨에 입을 맞추었다.
"왜요?"
아내가 잠에 취해 중얼거렸다.
나는 아내에게 속삭였다.
"안젤라. 왓슨에게 아침 9시 이전에 잔디를 깎는 것은 위험하다고 말해
줄수 있겠소?"

---히치콕 서스펜스 걸작선 중에서....



피를 나눈 형제 (원제:Blood Brother)

by Charles Beaument



"그럼 시작하실까요."
정신과 의사는 노트에서 고개를 들며 말했다.
"자신이 죽었다는 걸 께닫게 된 건 언제지요?"
"죽었다는 게 아닙니다. 죽지를 못한다는 거죠."
검은 옷을 입은 창백한 사내는 말했다.
"차라리 죽은 몸이면 고맙게요. 그게 문젭니다. 죽을래야 죽을 수가 없는
거예요."
"왜 못 죽지요?"
"살아있는 목숨이 아니니까요."
"하긴 그렇군요."
의사는 민첩한 솜씨로 노트를 했다.
"그럼 스미스 씨, 자초 지종을 말씀해 주실까요."
창백한 사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농담 마십시오. 상담료가 한 시간에 25달러나 되는데, 언제 얘기를 다 할
시간이 있습니까. 돈이 없어서 지금 입고 있는 망토도 한 달에 한 번 세탁
할까말까 한데요."
"그렇지 않도 물어 보려던 참입니다. 그건 왜 입습니까?"
"망토 없이 다니는 흡혈귀 얘기 들어봤습니까? 다 각본대로지요. 내가 그
걸 어떻게 압니까?"
"진정하십시오."
"진정하라니! 진정하게 됐습니까.... 선생님, 정말 미칠 것 같습니다. 이
걸 좀 보세요!"
스미스라고 자칭한 사나이는 두 손을 내밀었다. 핏기 하나 없이 희멀건 두
손이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또 이 눈 좀 보십시오!"
빨간 실핏줄이 거미줄처럼 얽힌 충혈된 눈이었다.
"제발 도와 주세요!"
그는 쓰러지듯 쇼파에 몸을 던지며 부르짖었다.
"이 상태로 며칠만 더 있다간 정신병원에 갈 겁니다."
의사는 책상 위에 있던 마호가니 페이퍼 나이프(종이를 자르는 칼)을 집어
들어, 짜증이 난다는 듯 손바닥을 탁탁 두드렸다.
"스미스 시, 처음부터 말씀해 주셔야 겠는데요."
"....여자를 만났지요. 도르카스라고...그 여자가 날 물었습니다."
"도르카스라...흔치 않은 이름인데..."
"그렇지요. 그 여자가 선생님께 가보라더군요. 아는 여잔가요?"
"그럴지도 모르지요. 아무튼 하던얘기나 계속하세요. 여자가 당신을 물었
다....그리고는요?"
"그뿐이에요.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합니까. 다 아시는 얘기잖아요."
정신과 의사는 안경을 벗고는 눈을 비볐다.
"그러니까 선생은 ...자신이 흡혈귀라고 생각하신다 이거죠?"
"생각이 아닙니다. 나야 내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요. 한데 사실은 흡혈귀
란 말입니다. 그게 고민이에요. 도대체가 적응을 할 수 없으니..."
"적응이라뇨?"
"예를 들어 시간이에요. 저는 원래 규칙적인 생활을 했었습니다. 아홉 시
부터 다섯 시까지 일하고, 집에 와서 TV 좀 보다가, 열 시 반쯤 자리에 들
어 여섯 시 반에 일어나곤 했지요. 그런데 지금은..."
그는 맹렬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흡혈귀가 어떻게 사는지 아시잖아요."
"모른다고 칩시다."
의사는 달래듯 말했다.
"말씀하세요. 어떻게 살지요?"
"아까 얘기한 대로, 시간이 문젠데...밤낮이 싹 바뀌는 거예요."
"왜죠?"
"말씀 잘 하셨습니다. 나도 영문을 몰라 도르카스한테 물어 봤지요. 알아
봐 준다고 했는데, 이유를 확실히 아는 사람이 통 없나 봐요 그야 도르카스
는 원래 밤귀신이니까 별 문제가 안 되겠지만, 난 미칠 것 같아요. 여덟 번
이나 직장을 바꿨는데도 그때마다 쫓겨났다니까요."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설명할 것도 없어요. 그냥 눈을 뜰 수가 없는 거에요. 매일 밤, 아니 매
일 낮이면 한나절을 졸음하고 씨름하다가, 마침내는 지쳐서 잠이 들 때쯤
해서는 싹!하고 밤이 오는 게예요. 그럼 그땐 또 관에서 나와야지요."
"관?"
"예. 그게 또 웃기는 얘긴데...일단 흡혈귀가 됐다 하면, 침대를 못쓰고
관에서 자게 돼 있어요. 아 그런데, 기분은 둘째치고라도 돈이 너무 깨져
서...."
스미스는 생각할수록 화가 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 우선 그놈의 관부터 사야 할게 아닙니까. 요새 관값이 얼만지나 아세
요?"
"글쎄요..."
"천문학적 숫자라고요! 터무니없어도 유분수지, 이건 그냥 사람을 생으로
말아 먹는 거에요! 조금이라도 품위를 갖추려면 큰 거 다섯 장은 그냥 날아
가는 게에요. 그것도 시작에 불과하죠. 이번엔 또 흙을 깔아야 해요. 그냥
관 속에 들어가 자면 되는 게 아니라, 뭐 가족 묘지에서 퍼 온 흙을 살짝
깔아야 한다나요. 가족 묘지라니! 요즘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선
생님은 있으세요?"
"없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거에요. 어쩝니까? 어디 가서 사 와야죠. 그래 흙을 두어 되 사다
가는 관 속에 골고루 뿌리는 거에요. 밤중에 일어나서 온통 흙투성이가 된
꼴을 보면..."
스미스는 약이 오르는지 혀를 끌끌 찼다.
"아, 그나마 잠옷 바람으로 잘 수 있다면 또 괜찮게요. 이건 뭐 규칙이랍
시고 완전 정장을 하고 자야 하니, 세상에 이런 말도 안되는 소리가 어딨습
니까. 구두도 벗으면 안 된대요. 내가 미쳐!"
그는 오락가락 방안을 서성대기 시작했다.
"게다가 핏자국이 고민이에요. 한 달에 스무 번은 와이셔츠를 갈아입어야
하거든요. 세탁비야 한 벌에 2달러 50센트라지만, 그것도 쌓이니까 무시 못
할 액수더라구요. 혹시 이렇게 생각하실지 모르겠네...아 왜, 식사할때 좀
조심하면 되지 않느냐고..그야 나도 하노라고 조심은 하죠. 하지만 이건 토
마토 주스를 마시는 거 하곤 달라요. 아시잖아요."
창백한 사내는 보일 듯 말 듯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리고 또 있어요. 그 식사라는게...그야 물론 나도 좀 덜익은 고기를 좋
아하긴 했지만, 이건 말도 안 되는 거에요. 아침에도 피, 점심에도 피, 저
녁애도 피니, 이거야 원 속이 메스꺼워서 살 수가 있어야죠!"
스미스는 다시 소파에 몸을 던지며 눈을 감았다.
"게다가 또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짓이라는 게! 생각 좀 해보세요. 햄버거
가 먹고 싶을 때마다 길 가는 사람을 덮쳐야 한다면 그게 대채 무슨 꼴입니
까! 한데 그게 내 팔자라니까요. 그래 냉장고에 쌓아 놓고 먹어 보기도 했
지만 영 제 맛이 나질 않아서, 이삼일 지나면 결국은 또 진짜를 찾아 나서
게 되는 게예요. 아무리 골백번 다짐했어도 소용없어요."
"진짜라..."
"그 얘기는 하고 싶지 않군요."
스미스는 고개를 돌려 벽을 향했다.
"난 사실 아주 민감한 사람입니다. 부드럽고 다정한 성격이에요. 폭력이라
면 딱 질색이었지요. 어렸을 때부터 그랬는 걸요. 그런데 이젠..."
그는 서럽게 흐느껴 울더니, 발딱 일어나서는 다시 서성대기 시작했다.
"내가 사람들을 물어뜯는 걸 좋아하는 줄 아세요? 그게 얼마나 끔찍한 일
인지 모르는 줄 아세요? 한데 그만둘 수가 없는 거에요! 사흘에 한번은 이
끔찍한 충동이 일어나서...그래 그 때문에 누구나 날 미워한단 말입니다!"
"그럼 학대받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무렴요."
스미스는 말했다.
"왜 그런지 아세요? 이유는 간단해요. 실제로 학대받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게 이유에요. 흡혈귀를 좋게 말하는 거 들어 본 적 있으세요? 평생에 한
번이라도 있냐 말입니다. 없죠. 왜냐? 사람들이 우릴 미워하기 때문이지요.
한데 또 웃기는 일은, 그러면서도 또 우릴 무서워한단 말이거든요!"
창백한 사내는 으하하하 웃어젖혔다. 거칠지만 서글픔이 깃들인 웃음이었
다.
"세상에 우릴 무서워하다니! 이 지구상에 가장 힘없고 나약한 존재가 바로
우린데! 아 뭐, 무기까지도 필요없어요. 우린 그냥 건드리면 쓰러진답니다.
거울을 안 보니 면도를 하다가 자칫하면 제 손으로 목을 베기 십상이죠...
보면 뭘 합니까. 얼굴이 비쳐야 말이죠. 아랫집에서 마늘이라도 삶으면 멀
쩡히 서있다가도 그냥 졸도하죠. 흐르는 물만 보면 가슴이 두근거리죠. 은
으로 만든 총알은 또 어떻구요. 햇빛이야 말할 것도 없죠. 그냥 끝내 주니
까요! 행여 날이 밝기 전에 그놈의 빌어먹을 관속에 들어가지 않으면....
휙! 그냥 파리 목숨인 거에요. 그리고 이걸 좀 보세요..."
그는 처음으로 싱긋 웃으며, 큼직한 송곳니 두 개를 드러냈다.
"우리라고 충치가 안 생기는 줄 아세요? 이 왼쪽 이는 아마 스무 번도 더
때웠을 겁니다. 의사 말이, 차라리 몽땅 뽑고 새로 박아 넣는 편이 싸게 먹
힐 거라더군요. 누군 몰라서 안하나요. 아 흡혈귀가 의치로 사람 목을 물어
뜯는 꼬락서니, 상상이나 갑니까? 그냥 가관이지요. 그리고 그 왜, 나무 말
뚝 얘기 아시죠? 원래는 그게 비밀이었는데, 그놈의 거지 같은 삼류 공포
영화 때문에, 아 이젠 세 살 먹은 애도 다 아는 얘기가 됐잖아요. 한번 우
리 입장이 돼 보세요. 아 동네 사람 모두가 눈에 불을 켜고 '어디 흡혈귀
한 놈 없나? 가서 나무 말뚝 좀 박아주게!' 하면서 좀이 쑤셔 근질거리는
판에, 어디 잠이 오겠습니까? 정상이 아니라니! 누가 정상이 아니란 말입니
까, 그 사람들이야 말로 비정상이예요!"
그는 또다시 부르르 몸을 떨었다.


"참 그렇지, 십자가 얘길 또 빼놓을 수 없죠. 솔직히 말해 생각만 해도 가
슴이 덜컹 하지만요. 왠지 아세요? 아 글쎄 외출 한번 하려면 그놈의 교회
때문에 세 정거장이나 돌아가야 한다니까요! 그것도 전엔 내가 일요일마다
나가던 교회예요. 한데 십자가가 교회에만 있는 게 아니라고요. 그냥 사방
에 널려 있는 거예요. 덧셈표만 봐도 식은땀이 나지요, 누가 밥을 먹고 나
이프에 포크를 포게 놓은 것만 봐도 난 혼비 백산해서 창밖으로 뛰어내릴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냐구요?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져 박살이 나겠죠.
그렇죠? 한데 그런다고 내가 죽습니까? 아니거든요....선생님, 제발 좀 도
와 주십시오! 선생님이 안도와 주시면 난 그냥 돌아 버릴 거예요. 뻔하다니
까요!"
의사는 노트를 덮고는 빙그레 웃었다.
"스미스씨...이런 말을 들으면 놀라시겠지만, 선생의 고민은 비교적 단순
한 겁니다. 치료법도 비교적 간단하구요."
"정말입니까?"
"정말입니다."
의사는 무심한 태도로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위에 있던 마호가니 종이칼
을 잡어들더니, 느닷없이 푹 찔렀다. 칼은 자루만 남기고 스미스의 심장 깊
숙히 박혔다.
몇 초 후 그는 전화기를 끌어당겨 다이얼을 돌렸다.
"도르카스 양 계십니까?"
말하면서 그는 목에 난 아련한 잇자국을 무심코 긁적였다.
"약혼자라고 전해 주십시오."

- The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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