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거서 크리스티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3학년2반 | 2022.01.29 07:14:57 댓글: 0 조회: 398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5804

제 목 : [애-크]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1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초대받은 사람들


요즘 현직에서 물러난 워그레이브 판사는 일등 흡연차 구석에 앉아 담
배를 피우며 타임즈의 정치 기사를 열심히 읽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신문을 내려놓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기차는 서머셋을 달
리고 있었다. 그는 시계를 보았다――앞으로 두 시간이다.
판사는 인디언 섬에 대해 신문에 난 모든 기사를 마음속으로 되새겼다.
요트를 좋아하는 미국인 부호가 섬을 사들여 이곳 데븐셔 바닷가 가까
운 섬에 사치스러운 근대적인 저택을 세웠다는 게 첫번째 기사였다.
그런데 미국인 부호의 세번째 아내가 뱃멀미를 심하게 해서 섬과 저택
을 팔려고 내놓았다. 사람의 눈길을 끄는 광고가 몇차례 났다. 그리고 오
윈이라는 사람이 사들였다는 짤막한 기사가 실렸다. 그로부터 여러 가지
소문이 일기 시작했다.
인디언 섬을 산 사람은 헐리우드 영화배우 게이브리얼 털 양이다! 그녀
는 1년 가운데 몇 달 동안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이 섬에서 살려고 한다!
<소문난 참새>난 필자는 어떤 고귀한 사람의 별장으로 팔렸다고 했다.
<기상대>난은 신혼여행 때문이라고 썼다. 젊은 L경이 마침내 큐피트의
화살을 맞았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조너스>는 확실한 정보라고 하며 해
군 본부가 샀다고 전했다. 극비에 속하는 실험을 하기 위해서라고. 확실
히 인디언 섬은 큰 뉴스거리였다.
워그레이브 판사는 주머니에서 한 통의 편지를 꺼냈다. 거의 글자를 알
아보기 어려운 필적이었으나, 군데군데 뜻밖으로 여겨질 만큼 명확히 알
수 있는 글귀가 있었다.
그리운 로런스님……당신의 소식을 듣지 못한 때로부터 오랜 세월……
꼭 인디언 섬에……참으로 아름다운 곳에서……이야기 하고 싶은 게 잔
뜩……아쉬웠던 옛날 일을……자연과 벗하여……햇빛을 받으면서……패
딩턴 역을 12시 40분……오크브리지에서 기다렸다가……그리고 보낸 이
는 <당신의 콘스턴스 캘민턴>이라고 아름다운 필적으로 서명되어 있었
다.
워그레이브 판사는 콘스턴스 캘민턴 부인과 마지막으로 만난 게 언제
였던가 회상했다.
7년 아니, 8년도 더 된 옛날 일이었다. 그때 그녀는 일광욕을 하며 자
연과 농촌을 즐기기 위해 이탈리아로 여행하려던 참이었다. 그 뒤 그녀는
다시 흠뻑 일광욕하고 자연과 유목민과 친숙해지기 위해 시리아로 갔다
고 한다.
확실히 콘스턴스 캘민턴은 섬을 사들여 수수께끼 같은 생활을 할 만한
여자였다.
워그레이브 판사는 자기가 내린 결론에 스스로 만족하며 머리를 떨어
뜨렸다. 그는 잠자기 시작했다.

다른 다섯 승객과 함께 삼등차에 타고 있던 베러 크레이슨은 머리를
뒤로 기대로 눈을 감았다.
기차로 여행하기에는 무척 더운 날이다. 바다에 닿으면 얼마나 기분 좋
을까. 참으로 이번 일자리를 얻게 된 것은 굉장한 행운이다. 휴가 기간의
일이란 대부분 많은 어린이들을 돌보는 일이었다. 비서 일은 거의 없었
다. 직업소개소에 부탁해도 어려웠다.
그런 중에 편지가 왔던 것이다.
――당신 이름을 직업소개소에서 듣고, 또 추천장도 받았습니다. 직업
소개소에서는 당신을 잘 알고 소개하여 준 것으로 생각합니다.
당신이 바라는 급료로, 8월 8일부터 일해 주기 바랍니다. 패딩턴 역을
12시 40분에 떠나는 기차를 타고 오면, 오크브리지 역으로 마중나가겠습
니다. 여비와 그 밖의 비용으로 5파운드 함께 보냅니다.
유너 낸시 오윈
편지 윗머리에 데븐셔 주 스티클헤이븐 인디언 섬이라는 소인이 찍혀
있었다.
인디언 섬! 요즘 자주 신문에 나고 있는 섬이다. 여러 가지 소문이 나
돌았지만, 어느 것이나 모두 걷잡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저택은
틀림없이 어떤 부호에 의해 세워져 호사스럽기 이를 데 없다고들 떠들어
대고 있다.
고된 교사 근무로 지쳐 있던 베러 크레이슨은 늘 생각했다.
(삼류 학교 교사로 있어 봐야 볕들 날이 없다. 좀더 좋은 학교로 옮겨
갈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노라면 언제나 서글픔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 학교에 있게 된 것만도 다행이야. 검시관의 심문을 받았다
는 사실이 어딜 가나 걸리적거리거든. 비록 검시관이 무죄 판결을 내렸다
해도!)
그녀는 검시관으로부터 침착한 태도와 용기를 칭찬받았던 일을 생각해
냈다. 검시관으로부터 심문받은 자가 이토록 유리한 판정을 받은 일은 전
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해밀턴 부인도 그녀에게 친절했다. 단 유고만
이――.
(그러나 이제 유고는 더 생각하고 싶지 않아!)
기차 안이 찌는 듯 가운데도 베러는 갑자기 몸을 떨면서 바다에 가는
것을 그만두는 게 좋을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그때의 일이 뚜렷하게 그녀 마음속에 떠올라 왔다. 시릴의 머리가 떴다
가라앉았다 하면서 바위 쪽으로 헤엄쳐 가고 있다. 떴다 가라앉았다――
떴다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녀 자신은 정확한 수영법으로 그 뒤를 헤엄치
고 있다――물을 가르고 나아간다,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느끼며…….
바다, 그 깊고 따뜻함이 감도는 푸르름――모래 위에 함께 나란히 누워
지내던 아침. 유고――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한 유고……아니, 유고를 생
각해선 안 된다.
베러는 눈을 뜨고 마주앉아 있는 남자의 얼굴을 흘끗 바라보왔다. 푸르
스름한 얼굴, 엷은 빛깔의 눈. 키가 크고 입 언저리가 몹시 냉혹해 보일
만큼 뻔뻔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녀는 가만히 생각했다.
(늘 여행하며 여러 가지 재미나는 경험을 가진 남자임에 틀림없어.)

필립 롬버드는 마주앉은 아가씨를 흘끗 보고 생각했다.
(꽤 매력있군. 어쩐지 여선생 같은 데가 있는데. 아마도 쌀쌀한 마음을
지녔을 거야. 자신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는 여자다――사랑에 있어서도,
싸움에 있어서도. 친구가 될 수 있다면 재미있겠는데…….)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안 돼.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 돼. 일이다. 일에
정신을 집중시켜야 한다.
대체 어떤 일일까, 하고 그는 다시 생각했다. 모리스는 참으로 수수께
끼 같은 말을 했다.
「자네가 승낙하든 않든 나는 어느편이나 좋네, 롬버드 대위.」
롬버드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1백 기니라고?」
1백 기니의 돈쯤 그리 큰 건 아니라고 투로 그는 물었다. 식사도 충분
히 할 수 없을 만큼 어려웠던 때의 1백 기니! 그러나 그는 모리스를 속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돈 때문에 모리스에게 거짓말할 수는 도저히 없었
다. 그는 알고 있는 것이다.
롬버드는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로 물었다.
「그 이상 자세한 것은 말할 수 없나?」
아이적 모리스는 조그만 대머리를 옆으로 저었다.
「말할 수 없네. 롬버드 대위. 지금 이야기한 것만으로 결정해 주기 바
라네. 이 일을 나에게 의뢰한 사람은, 자네가 만일의 경우 힘이 될 수 있
는 사나이는 것을 잘 알고 있네.
자네가 데븐셔 주 스티클헤이븐으로 가기를 승낙하면, 나는 자네에게 1
백 기니를 주게 되어 있네. 가장 가까운 역은 오크브리지고, 마중나온 자
가 그곳에서 스티클헤이븐까지 데리고 가 다시 모터 보트로 인디언 섬에
실어다 줄 거야. 그곳에서 자네는 나에게 의뢰한 사람에게 몸을 맡기면
되네.」
롬버드는 불쑥 물었다.
「기간은?」
「무슨 일이 있어도 1주일을 넘지 않네.」
조그만 입수염을 비틀며 롬버드 대위는 말했다.
「올바르지 않은 일이라면 손대지 않겠네.」
그는 말하면서 상대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모리스는 두터운 입술에
희미한 미소를 떠올리며 신중하게 대답했다.
「만일 옳지 않은 일을 요구받으면, 언제든지 돌아와도 좋아.」
한마디 말로는 듣지 않는 녀석이라고 생각하며 모리스는 미소지었다.
롬버드의 지난날 행동이 언제나 정직하지마는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웃음이었다.
롬버드 자신도 입술을 조금 벌리고 엷게 웃었다. 확실히 자기는 한두
차례 위험한 다리를 건넌 일이 있다. 그러나 언제나 겉으로 드러나지 않
고 끝났다.
비록 옳지 못한 일이라도 그리 마음에 꺼려 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아니, 오히려 위험한 다리를 건너 보고 싶다. 그는 인디언 섬에 재미있는
일이 기다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미스 에밀리 브랜트는 언제나처럼 몸을 꼿꼿이 하고 금연차 안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65살, 기차 안에서 기분나는 대로 떠들어대는 일에는 단연코 반
대였다. 옛스러운 풍속을 중히 여기는 대령이었던 그녀의 아버지는 예의
범절에 엄격했다. 요즘 젊은이들은 버릇이 없어. 기차 안에서의 예절이나
그 밖의 여러 가지 의미에서도.
에밀리는 자기가 옳다고 믿는 주장을 굳게 갖고, 붐비는 삼등차에 꼿꼿
이 앉아 불쾌함과 더위를 꾹 참고 있었다.
요즘 사람들은 누구나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떠들어댄다! 이를 뺄 때는
주사를 요구한다, 잠이 오지 않을 때는 약을 먹는다, 언제나 부드러운 의
자며 쿠션을 바라고, 여자 아이들은 예의없이 행동하는 것을 아무렇지 않
게 여기며, 여름이 되면 벌거벗은 거나 다름없는 모습으로 바닷가에서 뒹
군다.
이러한 모든 일이 못마땅하여 에밀리의 입술은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
스스로 모범을 보이려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지난해 여름 휴가를 생각했다. 그러나 올해는 사정이 달라졌다.
인디언 섬. 그녀는 이미 몇 번이나 본 편지를 다시 한 번 읽었다.
미스 브랜트님.
나를 기억하실는지요. 우리들은 여러 해 전 8월, 벨헤이븐의 바닷가 호
텔에서 함께 서로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했었습니다.
나는 지금 데븐셔 주에 있는 인디언 섬에서 가족적인 그룹을 만들려고
합니다. 간단하고도 맛있는 식사와 예의바른 조용한 손님을 모토로 하고
싶습니다. 필요 이상 몸을 드러낸다든지, 밤늦게까지 축음기를 트는 사람
은 이곳에 오지 않습니다.
만일 당신이 올 여름 휴가를 인디언 섬에서 지내 주신다면 그보다 더
한 기쁨이 없겠습니다. 물론 나의 손님으로 와주시므로 비용은 필요없습
니다. 8월 첫무렵이면 어떻겠습니까? 8일에 오시면 좋겠습니다만.
당신의 성실한
UN
몇 번이나 읽었을까. 몹시 알아보기 힘든 글씨다. 에밀리 브랜트는 초
조해 하며 생각했다.
(요즘은 읽을 수 없는 서명을 하는 이가 많아 곤란해.)
그녀는 벨헤이븐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떠올려 보았다. 두 해 여름동안
계속 그곳에 있었다. 분명 중년 여성이 하나 있었다. 그녀의 이름이 무엇
이었더라. 아버지는 지위높은 승정이었다. 미스 올턴, 오먼이었던가? 아
니, 틀림없이 올리버였다. 그렇다. 올리버다.
인디언 섬! 요즘 인디언 섬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가 신문에 나고 있
다. 영화배우가 어떻게 했다던가――아니, 미국의 부호였는지도 몰라. 물
론 이런 곳에 매우 싸게 손에 들어오는 경우도 있다. 섬은 누구에게나 알
맞은 게 아니다. 처음에는 낭만적으로 여겨져 사들이지만 살다 보면 불편
한 점이 많아 다시 내놓는 수가 많다.
에밀리 브랜트는 생각했다.
(어쨌든 공짜로 휴가를 즐길 수 있는 거야.)
수입이 줄어들어 꼭 써야 할 데에도 쓰지 못하는 형편에 참으로 귀가
솔깃한 이야기였다. 다만 그녀――미스 올리버였다고 생각되지만, 그녀에
대해 좀더 생각해 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매커스 장군은 차창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기차가 갈아탈 엑서터 역에
닿을 무렵이었다. 아무래도 지선의 기차는 느려서 못마땅해. 거리로 오면,
인디언 섬과 코와 눈 사이다.
그는 오윈이라는 사나이가 어떤 인물인지 머리 속에 뚜렷이 떠오르지
않았다. 분명 스푸프 레이거드의 벗이고, 조니 다이어의 친구임에는 틀림
없지만.
――각하의 옛 친구도 보실 수 있습니다――옛이야기를 나눌 것을 하
나의 즐거움으로 아시고…….
아무튼 옛이야기는 나쁘지 않다. 요즘은 사람들이 애써 그를 피하려 하
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것은 모두 저 가시돋친 소문 때문이다! 벌써
30년 전 일인데도. 아마 아미테이지가 지껄인 것이겠지.
지독한 녀석이다! 뭘 알고 있다고. 그러나 마음아파 해도 아무 쓸데없
다. 사람은 마음에 두지 않아도 좋을 일을 마음에 둔다. 이상한 눈초리로
보게 되면 아무것도 아닌 일까지 마음꺼려 한다.
인디언 섬은 그도 가보고 싶다고 여겼던 곳이었다. 여러 가지 소문이
나돌고 있다. 해군, 공군, 육군이 손에 넣었다는 이야기가 뿌리도 잎도 없
는 터무니없는 소문이 아닐지도 모른다.
미국의 젊은 부호 엘머 롭슨이 저택을 세웠다는 것은 사실이다. 많은
건축비가 들었다 한다. 온갖 사치스러운 시설을 다했다는 것이다.
엑서터! 여기서 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그는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한시 빨리 목적지에 닿고 싶었다.

암스트롱 의사는 모리스를 타고 솔즈버리 평야를 달리고 있었다. 그는
지쳐 있었다. 오늘날의 명성을 얻기까지의 생애가 이 같은 피로를 가져다
준 것이다.
예전에 할리 거리의 진료실에서 흰 가운을 입고, 최신식 기구의 호화로
운 시설에 둘러싸여 성공이냐 실패냐의 두 갈래 길을 걷고 있었던 시대
가 있었다.
결국 그는 성공했다. 운이 좋았던 것이다. 물론 솜씨도 훌륭했다. 그러
나 의사로서 성공하려면 솜씨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운도 필요했다. 그는
그 운을 붙잡은 것이다.
올바른 진단, 부인 환자로부터 감사를 받았다. 재산과 지위가 있는 부
인 환자로부터. 그리고 소문이 퍼졌다.
「암스트롱에게 보이면 좋아. 아직 젊지만 참으로 착실한 의사지. 팸은
오랫동안 여러 의사에게 보여 왔었는데, 그 의사는 단 한 번에 병의 원인
을 밝혀 냈어요!」
마침내 공은 구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암스트롱 의사는 자신이 바라던 것을 이루었다. 병원은 사람으로 붐볐
다. 거의 쉴 틈도 없었다.
며칠 동안 런던을 떠나 세븐셔 바닷가의 섬에서 8월의 더위를 피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휴가라고 할 수 있을지 어떨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그
가 받은 편지로는 웬지 확실한 것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함께 들어 있는 수표는 의심할 나위 없는 현실이었다. 더욱이
생각지도 못한 액수였다. 오윈이라는 사람은 돈이 남아도는 인물임에 틀
림없다. 아내의 건강을 염려하는 남편이, 아내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진찰
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신경이――.
신경! 의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부인 환자에게는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의사로서는 이런 환자가 가장 힘들다. 진찰을 받는 부인은 몸의
이상은 조금도 없고, 다만 무료할 뿐이다. 그러나 명확하게 그대로 이야
기하면 그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가 병을 발견하는 것은 덧없
는 일이다.
「좀 이상은 있습니다만――.」
여기서 길고 어려운 이름을 들어 병명을 이야기하고는 다시 말을 잇는
다.
「그러나 대단치는 않습니다. 이대로 두면 안 됩니다만, 뭐, 처방은 간
단하지요.」
약은 신념을 되찾는 수단이다. 더욱이 그의 태도는 상대방에게 신뢰감
을 더해 주었다. 희망과 신념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10년――아니, 15년 전 사건 뒤에 그가 다시 일어설 수 있었
던 것은 운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한때는 다시 일어설 수 없다고 생각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분발했다. 술도 끊었다. 참으로 위험한 고비였
다.
갑자기 고막이 터질 듯한 경적이 들리고 스포츠 경기용 자동차 댈메인
이 시속 80마일쯤의 속력으로 그를 앞질렀다. 암스트롱 의사는 하마터면
길가 울타리에 자동차를 처박을 뻔했다.
예사롭게 난폭한 운전을 하는 젊은이임에 틀림없다. 의사는 그런 젊은
난폭자가 싫었다. 하마터면 자동차를 길가 울타리에 처박을 뻔했지 않은
가. 참으로 싫은 녀석이다!
앤터니 머스틴은 자동차를 달려 미어로 들어가며 생각했다.
(어째서 느릿느릿 달리는 자동차가 많은 것일까? 방해되어 참을 수 없
어. 더욱이 그런 차들일수록 도로 한가운데를 달리고 있단 말이야! 아무
튼 영국에서는 자동차 여행을 할 수가 없어. 프랑스 같지 않아.
여기서 자동차를 멈추고 목을 축일까, 이대로 앞으로 달려나갈까. 아직
시간은 넉넉하다. 앞으로 1백 마일 조금 더 남았다. 진과 진저 맥주를 마
시고 가자. 아주 더운 날이니까!
그 섬의 저택은 틀림없이 유쾌할 거야. 날씨만 좋다면. 그건 그렇고, 오
윈 부부는 어떤 사람일까? 아마도 돈은 있으나 그리 유쾌하지는 않은 인
간들이겠지.)
배저는 그런 사람들을 잘 냄새맡는 것이 특기다. 물론 그 자신은 돈이
없으므로 그런 사람을 잡지 않으면 안 되지만…….
어떻든 술만은 흠뻑 마시고 싶다. 돈은 벌었지만 쓰는 방법을 모르는
인간이다. 게이브리얼 털이 인디언 섬을 샀다던 이야기가 소문에 지나지
않는 게 유감스럽다. 영화배우와 벗하여 노는 것은 재미있는 일임에 틀림
없는데. 거기에 젊은 아가씨가 있다면 더욱 좋겠지만…….
그와는 호텔을 나와 몸을 쭉 펴고 기지개를 켠 뒤 푸른 하늘을 올려다
보고 댈메인에 올라탔다. 아가씨 몇 명이 그의 모습을 부러운 듯 쳐다보
고 있다. 균형잡힌 6피트의 몸집, 좀 짧은 고수머리, 햇볕에 그을린 얼굴,
깊이 있는 푸른 눈.
그는 자동차를 출발시켜 좁은 길을 맹렬한 속도로 달려갔다. 노인과 소
년이 놀라서 길을 비켰다. 소년은 달려가는 자동차를 부러운 듯 바라보았
다.
앤터니 머스턴은 승리에 찬 개선장군처럼 자동차로 달려가고 있었다.

블로어는 플리머스에서 오는 느린 열차에 타고 있었다. 그말고는 눈이
흐린 점원 같은 노인이 타고 있을 뿐이었다. 노인은 지금 잠들어 있었다.
블로어는 조그만 수첩에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그는 혼자말을 했다.
「이게 모두다. 에밀리 브랜드, 베러 크레이슨, 암스트롱 의사, 앤터니
머스턴, 워그레이브 판사, 필립 롬버드, 매커서 장군, 하인 로저스 부부.」
그는 수첩을 덮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한구석에서 자고 있는 노인
을 바라보았다.
블로어는 생각했다.
(취해 있군.)
그는 마음속으로 빠진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면밀히 생각했다. 그는 자
신에게 말했다.
「문제없는 일이야.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괴이하지만 않으면 되는
거지.」
그는 일어나 거울 앞에 섰다. 거울에 비친 얼굴에 입수염을 기른 어딘
지 군인 같은 모습이 남아 있다. 표정은 거의 없었다. 눈동자는 회색이고
눈과 눈 사이가 굉장히 좁았다.
블로어는 말했다.
「소령으로 보아 줄까? 아니, 잊었었군. 늙은 장군이 있었지. 금방 꿰뚫
어 볼 거야. 역시 남아프리카 좋아. 남아프리카에 관련된 이는 하나도 없
고, 나는 여행 안내서를 읽었으니 어떤 이야기든 할 수 있거든.」
다행히도 식민지 사람에는 여러 타입이 있다. 남아프리카에서 사업을
하던 사나이로 해두면 어떤 이들 속에 섞여 들어도 의심받을 리 없다.
인디언 섬. 그는 소년 시절에 인디언 섬을 알고 있었다. 바위투성이 섬
으로 갈매기가 가득 모여 있었다. 바닷가로부터 1마일쯤 되는 거리였다.
그 이름의 유래는 사람 머리를 닮아 있는 데서 나왔다. 미국 인디언의 옆
얼굴과 비슷했던 것이다.
그 섬에 저택을 짓다니 괴상한 취미를 가진 사람도 있군! 바다가 거칠
어지면 지독한 곳이다. 그러나 돈 많은 부자 가운데에는 괴상한 사람이
많은 법이다.
구석의 노인이 눈을 뜨고 말했다.
「바다는 알 수 없어――알 수 있는 게 아니지!」
블로어는 화난 사람을 달래듯 말했다.
「그렇소. 알 수 없지요.」
노인은 두 번이나 딸꾹질하고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태풍이 올 거야.」
「그럴 리 없소. 이토록 날씨가 좋은데!」
노인은 성난 듯 말했다.
「틀림없이 태풍이 올 거요. 나는 알고 있소.」
블로어는 거스르지 않고 말했다.
「어쩌면 당신 말대로일지도 모르지요.」
기차가 역에 닿자 노인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여기서 내려야지.」
그는 손을 떨며 창가를 더듬거렸다. 블로어가 그의 몸을 부축해 주었
다.
노인은 통로에 서서 위엄있게 한손을 들고 흐릿한 눈을 깜박거리고 있
다가 말했다.
「기도해야 돼. 기도해야지. 심판의 날이 가까이 왔도다.」
노인은 플랫폼에 떨어져 넘어졌다. 그리고 넘어진 채 블로어를 쳐다보
며 감격어린 투로 말했다.
「자네에게 말하는 걸세, 젊은 양반. 심판의 날이 바로 옆까지 와 있네.
블로어는 자리로 돌아왔다.
(자기 쪽이 심판의 날에 가까이 다가가 있지 않은가!)
그러나 블로어의 생각은 틀려 있었다.

제 목 : [애-크]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2
올린이 : 매직라인(한창욱 ) 96/11/24 20:44 읽음 : 97 관련자료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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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인디언 자장가

오크브리지 역 밖에는 여러 사람들이 무리지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
르는 듯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들 뒤에는 여행 가방을 든 짐꾼이 서 있었
다.
그들 가운데 하나가 외쳤다.
「짐!」
한 택시 운전수가 다가왔다. 그는 부드러운 데븐셔 사투리로 물었다.
「인디언 섬에 가십니까?」
네 사람의 목소리가 그 물음에 긍정의 대답을 하고, 그리고 곧 서로의
얼굴을 흘끗 훔쳐보았다.
운전수는 그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워그레이브 판사에게 말했다.
「택시는 두 대 있습니다. 그러나 한 대는 엑서터에서 보통열차가 와닿
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5분쯤 걸릴겁니다만, 그 기차로
오는 남자 손님이 한 분 있습니다. 어느 분이 그때까지 주시겠습니까? 그
편이 더 편할 텐데요.」
벌써 오윈 부인의 비서가 된 듯한 베러 크레이슨이 곧 입을 열었다.
「내가 기다리겠어요. 여러분, 먼저 가주세요.」
그녀는 세 사람을 보았다. 그녀의 눈초리와 목소리에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의 명령하는 듯한 투가 조금 나타났다. 여학생들에게 어느 테니스 코
트를 쓸 것인지 지시하는 것 같은 말투였다.
에밀리 브랜트가 점잔빼며 가볍게 머리를 숙여 보였다.
「그럼, 먼저.」
그녀는 운전수가 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는 택시에 올라탔다. 워그레이
브 판사가 그 뒤를 따랐다.
롬버드 대위가 말했다.
「나도 기다리지요. 저…….」
베러는 말했다.
「크레이슨이에요.」
「나는 롬버드라고 합니다. 필립 롬버드.」
짐꾼이 택시에 짐을 실었다.
자동차 안에서는 워그레이브 판사가 직업적인 주의깊은 말씨로 말했다.
「좋은 날씨입니다.」
에밀리 브랜트는 대답했다.
「네, 참으로.」
아주 훌륭한 노신사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바닷가 여관에서 보던 남자
들과 아주 다르다. 올리버 부인인지 미스 올리버인지는 잊었지만, 그녀와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워그레이브 판사가 물었다.
「이 부근을 잘 아십니까?」
「콘월과 토키에는 갔었지만, 이곳 데븐셔에 온 것은 처음이에요.」
「나도 이 부근은 잘 모릅니다.」
택시는 달려갔다.
두 대째 택시 운전수가 말했다.
「기다리는 동안 안에 들어가 앉으시겠습니까?」
베러는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예요, 밖에 있겠어요.」
롬버드 대위는 미소지었다.
「밖에 있는 편이 기분좋지요. 그보다도 역 안으로 들어가실까요?」
「여기에 있겠어요. 겨우 무더운 기차 안에서 풀려 났으니까요.」
「정말 그렇습니다. 이런 더위에 기차 여행은 정말 견딜 수 없지요.」
「그래도 날씨가 계속 맑아서 좋아요. 영국의 여름날은 변덕이 심하니
까요.」
롬버드는 스스로 평범한 말이라고 여기면서도 이야기를 계속하기 위해
물었다.
「이곳을 잘 아십니까?」
「아니오, 처음이예요.」
그녀는 자신의 위치를 확인해 두려는 듯 급히 덧붙였다.
「아직 나의 고용주와도 만나지 않았어요.」
「고용주라고요?」
「네, 나는 오윈 부인의 비서로 고용되었어요.」
「그렇습니까?」
그의 태도가 눈에 띄지 않게 좀 달라진 것 같았다. 상대가 어떤 사람인
지 알게 되어 말하기 쉬워진 듯했다.
그는 말했다.
「그러나 묘한 이야기로군요.」
베러는 웃었다.
「아니, 그렇지도 않아요. 부인의 비서가 갑자기 앓게 되었다며 직업소
개소로 전보가 와서 오게 되었으니까요.」
「그렇습니까. 그곳에 가서 만일 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떻게 하렵
니까?」
베러는 다시 웃었다.
「뭐, 임시적인 일인걸요. 여름방학 동안만의. 나는 여학교에 나가고 있
어요. 게다가 인디언 섬에 가는 건 즐거운 일이에요. 신문에 여러 가지
기사가 나고 있었거든요. 정말 아름다운 곳일까요?」
「나는 모릅니다. 가본 적이 없으니까요.」
「어머나, 그러세요? 오윈 부처는 매우 좋은 분들일 것 같아요. 어떤
분일까? 좀 가르쳐 주겠어요?」
롬버드는 생각했다. 난처하게 되었군. 아는 체하는 게 좋을까, 정직하게
모른다고 할까.
그는 갑자기 빠르게 말했다.
「팔에 벌이 앉았군요. 가만히 계십시오.」
그는 더없이 친절하게 그녀의 팔에 앉은 벌을 손으로 털어 주었다.
「고마워요. 올 여름은 벌이 많군요.」
「그렇습니다. 더위 때문이겠지요. ……우리들,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건지 아십니까?」
「모르겠어요.」
기차가 가까이 온 듯 길게 꼬리를 끌며 기적이 울려 왔다.
롬보드가 말했다.
「온 것 같군요.」
역 출구에 나타난 사람은 키큰 군인 같은 노인이었다. 흰머리를 짧게
깎고 잘 손질된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육중한 가죽 여행 가방을 무거운
듯 든 짐꾼이 베러와 롬버드 쪽을 가리켜 보였다.
베러는 사무적인 태도로 나아갔다.
「오윈 부인의 비서예요. 택시가 기다리고 있어요.」
그리고 그녀는 덧붙였다.
「이분은 롬버드 씨예요.」
나이는 들었지만 아직 날카로움을 잃지 않은 푸른 눈이 롬버드를 관찰
했다. 순간 그의 눈 속에서 하나의 판단이 내려졌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
을 눈치채지 못했다.
(호남자로군. 어딘지 의심스런 점이 있긴 하지만…….)
세 사람은 기다리고 있던 택시에 올라탔다. 그들은 조그만 오크브리지
의 잠든 듯 조용한 시가지를 지나 플리머스 가도를 1마일쯤 달렸다. 그리
고 나서 좁은 시골길로 접어들었다.
매커서 장군이 말했다.
「데븐셔의 이 지방은 전혀 모르오. 도시트셔와의 경계 가까운 동 데븐
셔에 조그만 집을 갖고 있소만.」
베러는 말했다.
「참 아름다운 곳이에요. 언덕이 있고, 땅은 붉고, 한쪽으로는 아름다운
푸르름이 펼쳐져 있군요.」
필립 롬버드는 그녀의 관찰을 비평하듯 말했다.
「좀 협소한 느낌이군요. 나는 넓은 곳이 좋습니다. 멀리까지 환히 내
다보이는…….」
매커서 장군이 말했다.
「여행을 많이 한 것 같구려.」
롬보드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냥 돌아다녔을 뿐입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요전번 전쟁에 참가했는지 안 했는지 묻겠지. 이런 늙은이들
은 꼭 그렇게 묻거든.)
그러나 매커서 장군은 전쟁에 대해서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들은 험준한 구릉의 비탈길을 올라가 스티클헤이븐 쪽으로 구불구불
한 길을 내려갔다. 작은 집이 몇 채 모여 있고 바닷가에 어선 두 척이 조
는 듯 끌어올려져 있었다. 남쪽 방향으로, 저물어 가는 저녁해를 받은 인
디언 섬이 비로소 그들의 눈에 비쳤다.
베러는 놀라운 듯 말했다.
「바닷가에서 꽤 떨어져 있군요.」
그녀는 바닷가 가까이 있는 아름다운 하얀 저택을 상상하고 있었다. 그
러나 저택은 보이지 않고, 거대한 인디언의 머리를 닮은 바위투성이 섬이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을 따름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기분나쁜 모습
이었다. 그녀는 희미하게 몸을 떨었다.
<일곱 개의 별>이라는 조그만 찻집 앞에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등굽
고 나이든 판사와, 자세가 꼿꼿한 에밀리 브랜트, 세번째 사나이는 사람
좋아 보이는 몸집큰 사람으로 그들 앞으로 걸어와 자기 이름을 댔다.
「기다리는 게 좋을 것같이 생각되었습니다. 한 번에 갈 수 있으니까
요. 나는 데이비스라고 합니다. 남아프리카의 나타르에 있었지요. 그곳에
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유쾌한 듯 소리내어 웃었다.
워그레이브 판사는 분명 불쾌한 태도로 그를 보았다. 사나이의 품위없
는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에밀리 브랜트는 식민지에서 태어난
사람에게 어떤 태도를 보일 것인지 뚜렷이 결정한 듯했다.
데이비스는 모두의 얼굴을 둘러보며 물었다.
「배가 떠나기 전에 한 잔 들고 싶은 분 없으십니까?」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자 데이비스는 엄지손가락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그럼, 곧 떠납시다. 오윈 씨와 부인이 기다리고 계실 테니까요.」
모두의 얼굴에 뜻하지 않은 긴장의 빛이 감돌았다. 데이비스도 그것을
눈치챈 듯했다. 그들을 초대한 사람은 그들에 모두에게 이상한 힘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데이비스가 손짓하자 가까운 벽 쪽에 서 있던 사나이가 다가왔다. 몸을
양옆으로 흔들며 걷는 모습으로 보아 뱃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얼굴이
바닷바람에 그을리고 눈은 검었으며 초점이 없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부드러운 데븐셔 사투리로 입을 열었다.
「떠나시겠습니까, 여러분? 보트는 준비되어 있습니다. 자동차로 오실
남자분이 둘 있지만, 오윈 씨는 기다리지 않아도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언제 올지 모르니까요.」
모두 일어섰다. 안내자는 그들을 돌을 쌓아 만든 선착장으로 안내했다.
한 척이 모터 보트가 옆에 대어져 있었다.
에밀리 브랜트가 말했다.
「꽤 작은 배로군요.」
배주인은 설득하듯 말했다.
「이래봬도 훌륭합니다. 플리머스까지도 문제없이 갈 수 있지요.」
워그레이브 판사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토록 많이 타는가?」
「이 곱절의 사람이 타도 끄덕없습니다.」
필립 롬버드가 밝은 목소리로 태평스럽게 말했다.
「괜찮겠지요. 날씨가 좋고 파도도 잔잔하니까요.」
에밀리 브랜트는 아직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태도로 다른 사람의 도움
을 받아 무서워하며 보트에 올랐다. 다른 사람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들
사이에는 아직도 음울한 기분이 가셔지지 않았다. 서로 상대가 이해되지
않는 듯했다.
보트가 떠나려 할 때 밧줄을 쥐고 있던 안내자가 별안간 고개를 갸웃
했다. 자동차 한 대가 급한 비탈길을 마을 쪽으로 달려 내려왔다. 크고
아름다운 자동차의 모습이 갑자기 나타난 환상처럼 보였다. 머리칼을 바
람에 흩날리며 핸들을 잡고 있는 젊은이는 지는 해의 강한 빛을 받아 스
칸디나비아의 전설 속에 나오는 젊은 무신(武神) 같아 보였다.
그는 경적을 울렸다. 그 커다란 소리가 만 안쪽의 바위에 부딪쳐 메아
리쳐 왔다. 현실로 여겨지지 않는 한순간이었다. 이때의 앤터니 머스턴은
인간 이상의 존재인 것처럼 보였다. 이 곳에 있던 몇 사람은 뒷날 이 순
간의 그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었다.
프레드 내러컷은 엔진 옆에 앉아 이상스러운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상상한 오윈 씨의 손님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아름답게 차려 입
은 여자들과 스포츠 옷을 입은 신사들을 상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엘머 롭슨 씨를 찾아오던 손님들과는 전혀 다르다. 프레드 내러컷은 롭
슨 씨의 손님들을 생각해 내고 엷은 미소를 떠올렸다. 그들은 무척 쾌활
했다. 그리고 술을 마셨다!
오윈 씨는 몹시 색다른 인물 같다. 이상스럽게도 프레드 내러컷은 아직
오윈 씨를 만난 적도 없고 부인을 본 일도 없었다. 오윈 부처가 마을에
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모든 일은 모리스 씨를 통하여 했고, 돈도 모리스 씨가 치렀다. 언제나
명확히 지시되고 지불도 틀림없었으나 이상한 일임에는 변함없었다. 신문
에 <수수께끼의 인물 오윈>이라고 난 것을 내러컷도 읽었지만, 확실히
그는 수수께끼의 인물이었다.
아니면 섬을 산 사람이 정말은 게이브리얼 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
금 배에 탄 손님들을 보자 그렇게 믿어지지 않았다. 영화배우나 영화에
관계있는 이는 한 사람도 없는 것 같았다.
프레드 내러컷은 손님들을 차가운 눈으로 둘러보았다.
늙은 노처녀 한 사람――잔소리 심한 여자임에 틀림없다.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그는 이런 여자가 싫었다.
군인 같은 노신사――얼굴 표정으로 보아 참다운 군인인 듯하다.
아름다운 아가씨――그러나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아름다움으로, 헐리우
드 스타일의 호화스러운 아름다움이 아니다.
몸집 단단한 쾌활한 신사――이 남자는 진짜 신사가 아니다. 아마 세일
즈맨 같은 일을 하던 남자이리라.
또 한 사나이는 눈이 날카롭고 방심할 수 없는 사람으로 전혀 정체를
모르겠다. 이 사나이는 혹시 영화와 관계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오윈 씨의 손님 같은 사람이 하나 있다. 마지막으로 자동차를 몰
고 온 젊은이다.
(얼마나 훌륭한 자동차인가! 스티클헤이븐에서는 본 적도 없는 자동차
다. 값이 굉장히 비싸겠지.)
이 사나이는 충분한 자격이 있다. 재산도 꽤 있음에 틀림없다. 다른 이
들도 모두 그와 같은 사람들이라면 말이 되겠지만…….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이야기다. 어디까지나 이상하다. 믿을 수 없을 만
큼 이상스럽다.
보트는 바위코를 돌았다. 마침내 저택이 눈에 들어왔다. 섬 남쪽은 경
치가 전혀 달랐다. 토지가 부드러운 굽이를 이루며 바다로 흘러내리고 있
었다.
저택은 그곳에 남쪽을 향하여 세워져 있었다. 낮고 네모진 건물로, 둥
근 창이 모든 빛을 받아들이는 근대적 건축물이었다. 멋들어진 저택이었
다. 모두들 기대하고 있었던 대로의 저택이었다.
프레드 내러컷은 엔진을 멈췄다. 보트는 바위와 바위 사이의 자연적인
수로를 따라 조용히 앞으로 나아갔다.
필립 롬버드가 말했다.
「바다가 거칠어지면 배를 댈 곳이 없겠는데.」
프레드 내러컷은 무심하게 말을 받았다.
「동남풍이 불면 인디언 섬에는 상륙할 수 없습니다. 1주일이 넘도록
교통이 끊어진 때도 있지요.」
베러 크레이슨은 생각했다.
(요리사의 고생이 심하겠군. 섬은 어디나 그래. 집안일을 맡는 것은 고
생이지.)
보트는 바위 사이에 닻을 내렸다. 프레드 내러컷은 보트에서 뛰어내려
롬버드와 함께 다른 사람들을 상륙시켰다. 내러컷은 바위에 박힌 쇠고리
에 보트를 단단히 묶었다. 그런 다음 모두를 안내하여 바위에 새겨진 층
계를 올라갔다.
매커서 장군이 말했다.
「꽤 좋은 곳이로군!」
그러나 마음속은 침착치 못한 기분이었다.
그들은 층계를 올라가 저택의 넓은 뜰로 나오자 마음이 놓인듯 숨을
몰아쉬었다. 저택 정면에 단정한 옷차림을 한 하인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
었다. 그의 침착한 몸가짐이 그들의 마음을 가라앉게 했다. 더욱이 저택
그 자체가 느낌 좋은 건물이었으며, 저택에 달린 테라스의 전망도 아름다
웠다.
하인은 고개를 조금 숙이고 앞으로 나왔다. 키크고 여윈 사나이로 머리
는 희었으며 기품이 있었다.
「자, 이쪽으로 오십시오.」
넓은 홀에 마실 게 준비되어 있었다. 술병이 가지런히 놓여져 있었다.
앤터니 머스턴은 그제야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여기에 모인 이들이 재
미없는 사람들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인. 함께 말을 나누고 싶은 사
람은 하나도 없었다. 자기를 이런 부류에 불러 넣다니, 배저는 무슨 생각
을 했던 것일까. 그러나 술은 상등품인 것 같다. 그리고 얼음도 충분하다.
뭐라고? 하인 녀석이 뭐라고 말하고 있군. 오윈 씨는 안됐습니다만 내
일이 되어야 오실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시가 계셨습니다. 무엇이든 말
씀하십시오. 먼저 방으로 안내하고…… 식사는 8시에…….

베러는 로저스 부인 뒤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그녀의 방은 복도 끝
에 있었으며 문이 열려 있었다. 베러는 바다 쪽으로 난 창문과 동쪽으로
또 하나의 창문이 있는 아늑한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기쁨의 환성을 질렀다.
로저스 부인이 말했다.
「뭐, 필요한 게 있나요?」
베러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트렁크가 날라져 와 그 안의 물건들이 깨끗
이 정돈되어 있었다. 방 한쪽에 문이 열려 있고, 담청색 타일을 깐 욕실
이 보였다.
그녀는 빠르게 말했다.
「없어요.」
「볼일이 있으면 방울을 흔들어 주세요.」
로저스 부인은 억양없는 단조로운 목소리의 주인이었다.
베러는 호기심을 품고 그녀를 보았다. 어쩌면 이토록 핏기없는 여자일
까. 마치 유령 같다! 머리칼을 뒤로 꽉 움켜 묶고 검은 옷을 입은, 조금도
빈틈없어 보이는 하녀지만, 불안한 듯 눈동자를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베러는 생각했다. 이 여자는 자신의 그림자에 겁먹고 있다. 그렇다. 두
려워하고 있다. 무서운 공포에 사로잡힌 것같이 보인다. 베러는 차가움이
등골을 스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여자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일까?
베러는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오윈 부인의 새로운 비서예요. 물론 알고 계시겠지요?」
「아니예요,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여러분의 이름과 방의 할당만 지시
받았을 뿐이지요.」
「오윈 부인이 내 이야기를 하지 않았나요?」
로저스 부인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나는 아직 마님을 뵙지 못했어요. 우리들도 이틀 전에 왔을 뿐이에
요.」
오윈 부처는 참으로 색다른 사람들인 것 같다고 베러는 생각했다.
「여기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나요?」
「나와 내 남편뿐이에요.」
베러는 눈썹을 찌푸렸다. 저택에는 여덟 명의 손님이 와 있다. 주인 부
처를 포함하면 열 명이 된다. 그런데 시중드는 사람은 한 쌍의 부부뿐인
것이다.
로저스 부인은 말했다.
「나는 요리를 잘하고, 남편은 저택 일이라면 무엇이나 해요. 이토록
많은 손님이 오시리라는 건 몰랐지만…….」
「손이 모자라지 않을까요?」
「네, 모자란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만일 더 많은 손님이 오시면 마님
이 돌봐 주실 거예요.」
「그래야 되겠지요.」
로저스 부인은 돌아서서 나갔다. 그녀는 발소리를 전혀 내지 않았다.
그림자처럼 방에서 나갔다.
베러는 창가로 가서 의자에 앉았다. 마음이 좀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모든 일이 이상했다. 오윈 부처의 부재, 얼굴빛 나쁜 유령 같은 로저스
부인, 그리고 손님들! 그렇다, 손님들도 이상스럽게 모여 있다. 한시 빨리
오윈 부처를 만나고 싶다……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은 것이다.
그녀는 일어나 방안을 거닐었다. 완전히 근대적 스타일로 꾸며진 나무
랄 데 없는 침실이었다. 반질반질하게 닦여진 윤나는 쪽마루 바닥에 깔린
새하얀 카펫, 엷은 색이 칠해진 벽, 전등으로 에워싸인 긴 거울.
하얀 대리석 곰 조각이 놓여 있을 뿐인 벽난로. 곰 조각 속에 시계가
들어 있고, 그 위에는 아름답게 빛나는 크롬 액자에 커다란 양피지가 끼
워져 걸려 있었다. 거기에 씌어져 있는 것은 노래 가사였다.
그녀는 난로 앞에 서서 그것을 읽었다. 어릴 적부터 알고 있는 오래된
자장가였다.

열 인디언 소년이 식사하러 갔다.
한 소년이 목이 메어 아홉 소년이 되었다.

아홉 인디언 소년이 늦게까지 일어나 있었다.
한 소년이 잠들어 여덟 소년이 되었다.

여덟 인디언 소년이 데븐셔를 여행하고 있었다.
한 소년이 그곳에 남아 일곱 소년이 되었다.

일곱 인디언 소년이 장작을 팼다.
한 소년이 제 몸을 두 조각내 여섯 소년이 되었다.

여섯 인디언 소년이 벌집을 건드리며 장난쳤다.
벌이 한 소년을 쏘아 다섯 소년이 되었다.

다섯 인디언 소년이 법률에 열중했다.
한 소년이 대법원에 들어가 네 소년이 되었다.

네 인디언 소년이 바다에 나갔다.
한 소년이 훈제 청어에 먹혀 세 소년이 되었다.

세 인디언 소년이 동물원을 걷고 있었다.
큰 곰이 한 소년을 안아가 두 소년이 되었다.

두 인디언 소년이 양지 쪽에 앉았다.
한 소년이 햇볕에 타서 한 소년이 되었다.

한 인디언 소년이 뒤에 남았다.
그 소년이 목을 매어 아무도 없었다.

베러는 미소지었다. 과연 여기는 인디언 섬이다! 그녀는 다시 창가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다는 어째서 저토록 넓을까! 육지 그림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석양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푸른 물이 끝없이
펼쳐져 있을 뿐이다.
바다――오늘은 이토록 조용하지――때로는 거칠게 날뛸 때도 있다.
인간을 그 깊은 곳으로 빨아들이는 바다. 빠진 것이다……빠져서 발견된
것이다……바다에 빠진 것이다……빠진 것이다――빠진 것이다――빠진
것이다……아니, 그녀는 기억하고 있지 않다……생각해선 안 된다! 모든
일은 지나간 것이다.

암스트롱 의사는 마침 해가 바다에 잠기려 할 때 인디언 섬으로 왔다.
바다를 건너올 때 그는 배주인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이 고장 사나이였
다.
의사는 인디언 섬을 갖고 있는 사람에 대해 알아보려 했으나, 프레드
내러컷이라는 그 사나이는 이상할 만큼 아무것도 몰랐다. 아니면 말하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암스트롱 의사는 날씨와 낚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긴 자동차 여행으로 지쳐 있었다. 눈이 아팠다. 서쪽으로 드라이
브하는 것은 해를 바라보며 달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는 몹시 지쳐 있
었다. 바다와 완전한 평화, 그것이 그에게는 필요했다. 그에게는 오랜 휴
가가 필요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물론 경제적으로는 가능했지만 런
던을 오래 떠나 있을 수 없었다. 요즘은 누구나 곧잘 잊어버리고 만다.
아니, 성공의 바닷가에 이르렀으니 만큼 어떤 일이 있어도 자리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 밤은 런던에 돌아가지 말기로 하자. 런던
이며 할리 거리며 일과 인연을 끊어 버리기로 하자.
섬에는 이상한 힘이 있다. 섬이라는 말만 들어도 환상적 분위기가 상상
된다. 세상과의 교섭이 없어지고 섬만의 세계가 생겨나는 것이다. 다시
그 섬에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는 생각했다. 좋다, 인생을 완전
히 잊어버릴 계획을 세워 나갔다. 바위에 새겨진 층계를 올라갈 때에도
그는 아직 미소짓고 있었다.
테라스의 의자에 노신사가 앉아 있었다. 암스트롱 의사는 그 모습을 어
디선가 본 적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개구리 같은 얼굴, 자라 같은
목, 굽은 등, 그리고 날카로운 조그만 눈. 어디서 보았을까.
그렇다. 워그레이브 판사다. 옛날 이 판사 앞에서 증언한 일이 있다. 언
제나 반쯤 잠든 것 같지만, 중요한 대목에 이르면 사람이 달라진 듯 날카
로운 말을 뱉아 내는 사람이었다.
배심원에 대해 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언제나 배심원의 판결을 자기
마음먹은 대로 이끌어 갈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있었다. 한두 번 배심원들
로부터 뜻밖의 판결을 끌어낸 일이 있었다. <목매다는 판사>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묘한 곳에서 만나게 되었구나. 이런 뜬세상을 벗어난 곳에서 만나게 되
다니…….

워그레이브 판사는 생각했다. 암스트롱일까. 증인석에서 본 적이 있었
다. 똑똑한 사나이로 증언도 주의깊고 빈틈없었다. 의사란 대개 우둔한
자들이다. 할리 거리의 의사는 더욱 그렇다. 그는 그곳 의사 중 한 사람
과 만난 최근의 회견을 떠올렸다.
그는 암스트롱 의사에게 말을 걸었다.
「홀에 마실 게 준비되어 있소.」
암스트롱 의사가 말했다.
「먼저 주인 부처에게 인사하고 와야지요.」
워그레이브 판사는 다시 눈을 감고 파충류 같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 일은 할 수 없소.」
암스트롱 의사는 놀랐다.
「왜 안 된다는 겁니까?」
「주인도, 부인도 없소. 이상한 일이오. 나는 여기가 어떤 곳인지 모르
겠소.」
암스트롱 의사는 잠시 판사를 바라보았다. 노신사는 정말로 잠들어 버
린 것 같았다. 그러나 그때 워그레이브 판사가 별안간 입을 열었다.
「콘스턴스 캘민턴이라는 여자를 아오?」
「네――아니, 모릅니다.」
「아무래도 좋은 일이오. 나도 확실히 기억하고 있지는 않소. 필적도
거의 읽을 수 없었소. 잘못 온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는 중이오.」
암스트롱 의사는 머리를 흔들며 저택 쪽으로 걸어갔다.
워그레이브 판사는 콘스턴스 캘민턴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여자는
모두 믿을 수 없다.
그리고 저택 안에 있는 두 여자에 대해 생각했다. 입술을 꼭 다물고 있
는 늙은 노처녀와 젊은 아가씨. 아가씨 일은 마음에 두지 않았다. 마음이
차가운 아가씨다.
아니, 로저스의 아내를 합하면 세 사람이 된다. 그 여자는 언제나 겁에
질린 듯한 표정을 하고 있다. 그들 부부는 착실해서 하는 일에 실수가 없
다.
로저스 테라스로 나왔다.
판사는 물었다.
「콘스턴스 캘민턴이라는 부인이 오는지 안 오는지 알고 있나?」
로저스는 판사를 바라보았다.
「아니오, 모릅니다만…….」
판사는 눈을 들었다. 그러나 뭔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그는 생각했다――인디언 섬인가. <장작더미>속에 검둥이가
하나 있다.

앤터니 머스턴은 욕조에 들어가 있었다. 그는 김이 무럭무럭 오르는 욕
조 속에서 팔다리를 뻗었다. 긴 드라이브를 한 뒤라 손발이 굳어 있었다.
아무것도 생각할 기분이 나지 않았다.
앤터니는 감각과 행동만으로 살고 있는 인간이었다. 한번 마음에 결정
한 일은 어떻게든 실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뒤에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따뜻한 김이 오르는 욕조, 지친 팔다리, 수염을 깎고, 칵테일, 식사, 그
리고 나서――.
블로어는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그는 이런 일에 익숙치 못했다. 옷차
림에 이상한 데가 없을까. 그로서는 없다고 보았다.
그를 알아본 이는 하나도 없다. 이상한 일이다. 서로가 상대의 태도를
떠보고 있다. 마치 사정을 알고 있는 것같이. 그렇다, 일을 잊어선 안 된
다.
그는 일을 실패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벽난로 위의 자장가 가사가 든
액자를 바라보았다. 이 액자를 여기에 걸어 놓은 것은 영리한 착상이다…
….
그는 생각했다. 이 섬은 어릴 때 살아서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섬
이 이 저택에서 이런 일을 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인간
이 미래를 예상할 수 없다는 건 어떤 뜻에서 좋은 일인지도 모른다.

매커서 장군은 자신이 한 행동을 생각하고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모든 게 이상하다! 상상하고 있었던 것과 너무나 다르다. 될 수만 있다
면 무슨 구실을 대고 돌아가고 싶지만……모터 보트는 이미 돌아가 버렸
다. 섬에서 묵을 수밖에 없다.
저 롬버드라는 사나이가 묘한 녀석이다.
정직한 사나이는 아니다. 정직한 생활을 해온 사나이가 아니다.

종소리가 울리자, 필립 롬버드는 방에서 나와 층계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표범같이 발소리를 내지 않고 걸었다. 몸 전체의 인상에도 어딘지
모르게 표범 같은 데가 있었다. 먹이――바라보고 있기만 해도 즐겁다.
그는 미소지었다. 1주일 동안 있게 된다.
1주일 동안 충분히 즐기기로 하자.

에밀리 브랜트는 식사하러 가기 위해 검은 비단옷을 입고 성경을 읽고
있었다. 입술이 글자 하나하나를 따라 움직였다.
「여러 백성은 자신이 만든 함정에 빠져 들고……여호와는 나를……심
판하도다. 악인은 자신의 덫에 걸려 지옥으로 가리라…….」
그녀의 입술이 굳게 다물어졌다. 그녀는 성서를 덮었다.
그녀는 일어나 연수정 브로치를 달고 저녁 식사를 하러 내려갔다.

제 목 : [애-크]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3
올린이 : 매직라인(한창욱 ) 96/11/24 20:51 읽음 : 80 관련자료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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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UNKNOWN

식사가 끝나 가고 있었다. 요리는 물론 술도 훌륭했다. 로저스의 시중
도 나무랄 데 없었다.
모두들 기분이 좋아졌다. 서로 마음 터놓고 이야기하게 되었다.
워그레이브 판사는 질좋은 포도주로 기분이 풀어져 그의 특성인 풍자
를 섞어 이야기하고 있었다. 듣고 있는 사람은 앤터니 머스턴과 암스트롱
의사였다.
에밀리 브랜트는 매커서 장군과 이야기꽃을 피우며 두 사람이 서로 알
고 있는 친구들 발견해 냈다. 베러 크레이슨은 데이비스에게 남아프리카
에 대해 묻고 있었다. 데이비스는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듯 크레이슨에게
상세하게 이야기했다.
그 대화를 롬버드 대위가 옆에서 듣고 있었다. 그는 때때로 눈을 들어
그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테이블을 둘러보며 모두의 태도를 관찰했
다.
앤터니 머스턴이 갑자기 말했다.
「이상한 게 있군.」
둥그런 테이블 한가운데에 둥근 유리 받침대가 있는 몇 개의 조그만
도자기 인형이 놓여 있었다.
앤터니는 말했다.
「인디언이군요. 인디언 섬이라고 해서 이런 게 놓여 있는 모양이군.」
베러가 얼굴을 내밀었다.
「그럴지도 몰라요. 몇 개 있나요? 열 개지요?」
「그렇소. 열 개요.」
베러는 소리쳤다.
「알았아요! 자장가에 있는 열 명의 인디언 소년이로군요. 내 방 벽난
로 위에 그 자장가 가사가 액자에 들어 있어요.」
롬버드가 말했다.
「내 방에도 걸려 있소.」
「내 방에도.」
「내 방에도.」
모두들 입을 모아 말했다.
베러가 말했다.
「기분좋지 않지요?」
워그레이브 판사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바보 같으니! 우리는 어린아이가 아니오.」
그리고 그는 포도주 잔으로 손을 뻗었다.
에밀리 브랜트는 베러 크레이슨의 얼굴을 보았다. 베러 크레이슨도 에
밀리 브랜트의 얼굴을 보았다. 두 사람은 일어섰다. 응접실의 프랑스식
창문이 테라스 쪽으로 열어제쳐져 바위에 부딪치는 파도 소리가 들려 오
고 있었다.
에밀리 브랜트가 말했다.
「기분좋은 소리군요.」
베러는 날카롭게 말했다.
「나는 싫어해요.」
에밀리 브랜트의 눈이 놀라며 베러를 보았다. 베러는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태풍이 불어오면 여기에 도저히 있을 수 없을 거예요.」
에밀리 브랜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겨울이 되면 저택을 비워 두겠지요. 무엇보다도 가정부가 없으니까
요.」
「겨울이 아니더라도 가정부는 여간해서 오지 않을 거예요.」
「네, 저 두 사람이 와주어서 올리버 부인은 정말 다행이에요. 로저스
부인은 요리 솜씨도 뛰어나니까요.」
베러는 생각했다. 나이가 들면 어째서 이름을 잘못 아는 것일까.
그녀는 말했다.
「그래요. 오윈 부인은 아주 행복한 분이에요.」
에밀리 브랜트는 주머니 속에서 조그만 자수를 꺼냈다. 그리고 바늘을
움직이려다가 갑자기 손을 멈추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윈이라고요, 오윈이라고 했나요?」
「네.」
「나는 오윈이라는 사람을 만난 적 없는데요.」
베러는 에밀리 브랜트의 얼굴을 보았다.
「하지만 분명히…….」
그들은 거기서 대화를 멈췄다. 문을 열고 남자들이 들어왔던 것이다.
로저스가 커피 쟁반을 들고 그 뒤를 따라 들어왔다.
판사는 에밀리 브랜트 옆으로 와서 앉았다. 암스트롱 의사는 베러 곁으
로 왔다. 앤터니 머스턴은 열려 있는 창가로 갔다. 블로어는 호기심에 찬
눈으로 조그만 놋쇠 조각품을 보고 있었다――이상스러운 모양을 하고
있다. 이것도 여자인가.
매커서 장군은 벽난로 쪽으로 등을 돌리고 서서 조금밖에 없는 흰 수
염을 비틀고 있었다. 꽤 훌륭한 식사였다. 장군은 매우 기분이 좋았다. 롬
버드는 벽 옆의 테이블 위에 신문과 함께 놓인 펀치 잡지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로저스가 커피 쟁반을 들고 그들 사이를 걸어 다녔다. 맞좋은 커피였
다. 진하고 뜨거웠다.
모두들 실컷 마셨다. 누구나 만족스럽고 몸이 노곤해졌다. 시계 바늘이
밤 8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방안은 아주 조용했다. 마음이 차분해지
는 정적이었다.
별안간 그 정적을 깨뜨리고 소리가 들려 왔다. 아무 예고도 없이 사람
의 목소리가 아닌 것 같은 날카로운 소리가…….
「여러분, 조용히 해주십시오!」
방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 그들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 벽을 보았다. 누가 말한 것일까.
소리는 말을 이었다. 높고 확실한 소리였다.
여러분은 저마다 다음 죄상으로 살인 혐의를 받고 있다――.
에드워드 조지 암스트롱, 너는 1925년 3월 14일, 루이저 메리 크리스를
죽게 했다.
에밀리 캐럴라인 브랜트, 너는 1931년 11월 5일에 일어난 비트리스 테
일러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
윌리엄 헨리 블로어, 너는 1928년 10월 10일, 제임스 스티븐 랜더를 죽
음으로 이끌었다.
베러 일리저버스 크레이슨, 너는 1935년 8월 11일, 시릴 오딜비 해밀턴
을 죽였다.
필립 롬버드, 너는 1932년 2월 어느 날, 동아프리카 어느 마을 사람 20
명을 살해했다.
존 고든 매커서, 너는 1917년 1월 4일, 네 아내의 애인 아서 리치먼드
를 고의로 죽음에 몰아넣었다.
앤터니 제임즈 머스턴, 너는 지난해 11월 14일, 존과 루시캠즈를 살해
했다.
토머스 로저스와 에설 로저스, 너희는 1929년 5월 6일, 제니퍼 블레이
디를 죽게 했다.
로런스 존 워그레이브, 너는 1930년 6월 10일, 에드워드 시튼을 살해했
다.
피고들에게 변명의 여지가 있는가.

소리는 끝났다. 화석 같은 침묵의 순간이 지나고 나서 무엇이 깨지는
큰소리가 났다. 로저스가 커피 쟁반을 떨어뜨린 것이다. 그와 함께 방 밖
에서 외침 소리가 들리고, 사람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롬버드가 맨 먼저 행동했다. 그는 문 쪽으로 달려가 힘차게 양옆으로
열어제쳤다. 그곳에 로저스 부인이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롬버드는 외쳤다.
「머스턴!」
앤터니가 달려가 롬버드를 도왔다. 두 사람은 쓰러진 여자를 안고 응접
실로 갔다. 암스트롱 의사가 달려와 로저스 부인을 소파에 눕히고 들여다
보았다.
그는 말했다.
「대단치 않소. 정신을 잃었을 뿐이오. 곧 의식을 되찾을 거요.」
롬버드가 로저스에게 말했다.
「브랜디를 가져오오.」
로저스는 핼쑥한 얼굴로 손을 떨며 대답했다.
「네.」
그는 어쩔 줄 모르며 방을 나갔다.
베러가 외쳤다.
「누가 말했을까요? 어디서 지껄여댔을까요? 마치――마치――.」
매커서 장군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쓸데없는 장난을 하는 녀석 같으니!」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어깨가 축 늘어졌다. 갑자기 10년
이나 더 늙어 보였다.
블로어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워그레이브 판사와 에밀리 브랜트
만이 겨우 냉정을 되찾고 있었다. 에밀리 브랜트는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두 볼이 불그스름했다. 판사는 언제나처럼 머리
를 목에 파묻고 있었다. 그리고 한 손으로 가만히 귀를 막았다. 다만 눈
만이 무엇을 찾는지 의미없이 방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다시 롬버드가 가장 먼저 행동했다. 정신잃은 여자를 암스트롱에게 맡
기고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 소리는 이 방안에서 들여 온 것 같았소.」
베러가 외쳤다.
「누구예요? 누구지요? 우리들은 아니었어요.」
롬버드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의 눈이 한순간 열려진 창문을 뚫어지
게 쏘아보다가 곧 부정하듯 머리를 저었다. 별안간 그의 눈이 빛났다. 그
리고 난로 곁에 있는 옆방으로 통하는 문쪽으로 재빨리 걸어갔다.
그는 민첩한 동자으로 문 손잡이를 잡고 힘차게 열어제쳤다. 그리고 옆
방으로 뛰어들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이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그 뒤를 따라 서둘러 옆방으로 들어갔다. 에밀리 브랜트
만이 몸을 꼿꼿이 하고 의자에 앉은 채 있었다.
옆방의 응접실과 맞닿은 벽에 테이블이 밀어붙여져 있었다. 테이블 위
에 축음기 한 대가 놓여 있었다. 커다란 스피커가 달린 구식 축음기였다.
스피커는 벽을 향해 있었다. 롬버드가 그것을 밀어젖히자 두 세 개의
작은 구멍이 사람 눈에 띄지 않게 벽에 뚫려 있었다. 그는 바늘을 레코드
에 대었다. 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여러분은 저마다 다음 죄상으로 살인 혐의를 받고 있다――.」
베러가 소리쳤다.
「멈춰 주세요! 멈춰 주세요! 무서워요!」
롬버드는 그 말에 따랐다.
암스트롱 의사가 놀라운 듯 깊이 숨을 내쉬며 말했다.
「몹시 나쁜 장난이로군!」
워그레이브 판사의 낮으나 뚜렷한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은 장난이라고 생각하오?」
의사는 판사를 지켜 보았다.
「장난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판사의 손이 조용히 윗입술을 눌렀다.
「아직 나로선 의견을 말할 수 없소.」
앤터니 머스턴이 옆에서 입을 열었다.
「그러나 잊어버린 일이 하나 있습니다. 대체 누가 축음기를 틀었지요?
워그레이브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렇소. 먼저 그것을 조사해야만 하오.」
그는 앞장서서 응접실로 돌아갔다. 다른 사람들도 그 뒤를 따랐다.
로저스가 브랜디 글라스를 가지고 돌아왔다. 에밀리 브랜트는 입에 거
품을 물고 누워 있는 로저스 부인을 내려다보았다. 로저스가 그 옆으로
걸어갔다.
「내가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에설――에설――아무 일도 아니오. 마음
을 굳게 가져야 하오.」
로저스 부인은 거칠게 숨쉬기 시작했다. 가늘게 떨리는 눈이 자기를 들
여다보는 몇몇 사람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로저스가 재빠르게 말했다.
「정신차려요, 에설!」
암스트롱 의사가 부드럽게 그녀에게 말했다.
「이제 괜찮소, 로저스 부인. 정신을 좀 잃었을 뿐이었으니까요.」
「정신을 잃었었나요?」
「그렇소.」
「그 소리, 그 무서운 소리. 하느님의 심판과도 같은――.」
그녀의 얼굴이 다시 핼쑥해지고 눈썹이 떨렸다.
암스트롱 의사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브랜디는…….」
로저스는 글라스를 조그만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있었다. 누군가 한 사
람이 그것을 의사에게 건네 주었고, 의사는 괴로운 둣 숨쉬고 있는 여자
위로 몸을 굽혔다.
「이것을 마시오, 로저스 부인.」
그녀는 좀 목이 메어 흐느꼈으나 이윽고 브랜디를 꿀꺽꿀꺽 마셨다. 곧
얼굴빛이 좋아졌다.
「이젠――괜찮소. 좀 놀란 것뿐이오.」
로저스가 곧 이어서 말했다.
「당신이 놀란 것은 당연한 일이오. 나도 놀랐고. 쟁반을 떨어뜨릴 정
도였으니까. 그런 거짓말을 하다니! 대체――.」
그의 말은 거기서 멈춰졌다. 그것은 하나의 헛기침 소리에 지나지 않았
다. 착 가라앉은 낮은 헛기침 소리였으나, 로저스의 흥분된 말을 가로막
을 만한 위력을 갖고 있었다.
로저스는 워그레이브 판사 쪽을 보았다. 판사는 또 한번 헛기침을 했
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누가 레코드를 걸었을까. 자네인가, 로저스?」
로저스는 외쳤다.
「나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맹세합니다!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알고 있
었다면 레코드를 틀지 않았을 겁니다.」
판사는 차갑게 말했다.
「아마 사실이겠지. 그러나 일단 설명을 듣고 싶은데, 로저스.」
로저스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다만 명령대로 했을 뿐입니다.」
「누구의 명령인가?」
「오윈 씨의…….」
「분명하게 들려주게. 오윈 씨의 명령이란 어떤 것이었나?」
「나는 한 장의 레코드를 축음기에 걸어 놓도록 지시받았습니다. 레코
드는 서랍 속에 있었고, 내가 커피 쟁반을 가지고 응접실에 들어갔을 때
아내가 레코드를 틀도록 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갈수록 이상한 이야기로군.」
로저스는 크게 소리쳤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하느님께 맹세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전혀 몰랐습니다. 레코드에는 라벨이 붙어 있었습니다. 음악이라고만 생
각했습니다.」
워그레이브는 롬버드의 얼굴을 보았다.
「라벨이 붙어 있었다고?」
롬버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며 쓴웃음지
었다.
「붙어 있었습니다. <백조의 노래>라고.」

매커스 장군이 별안간 큰소리를 질렀다.
「언어도단이야! 그런 거짓 제목을 붙여 놓다니! 그대로 둘 수 없어!
오윈이라는 자가 누구든――.」
에밀리 브랜트가 옆에서 입을 열었다. 그녀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
다.
「그래요, 대체 어떤 사람일까요?」
판사가 끼여들었다. 오랜 세월 법정 생활에서 몸에 밴 위엄있는 목소리
였다.
「그 일을 신중히 조사해야겠소. 그전에 로저스, 자네는 아내를 침대에
눕히고 오는 게 좋겠네. 그리고 나서 이리로 돌아오게.」
「네.」
암스트롱 의사가 말했다.
「내가 도와주지, 로저스.」
로저스 부인은 두 남자의 부축을 받으며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방을 나
갔다.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앤터니 머스턴이 말했다.
「어떻습니까, 나는 한잔 하고 싶은데요.」
롬버드가 대답했다.
「찬성이오.」
「내가 가져오지요.」
앤터니는 방을 나갔다가 곧 되돌아왔다.
「방 밖에 준비가 되어 있더군요.」
그는 무거운 듯 들고 온 쟁반을 가만히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다음
1,2분은 술을 따르는 데 소비되었다.
매커서 장군은 독한 위스키를 골랐다. 판사도 장군과 같은 것을 마셨
다. 모두들 기분을 바꿔 줄 알코올이 필요했다. 에밀리 브랜트만이 물을
달라고 하여 컵에 따랐다.
암스트롱 의사가 방으로 돌아왔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수면제를 먹여 두고 왔지요. 뭐요, 술이군요. 나
도 한잔 합시다.」
여러 남자들이 글라스에 두 잔째 술을 따랐다. 로저스가 방으로 돌아왔
다.
워그레이브 판사가 좌석의 우두머리가 되어 방안은 마치 법정처럼 되
었다. 판사는 말했다.
「그럼, 로저스, 처음부터 이야기해야만 되겠는데, 오윈 씨는 어떤 사람
인가?」
로저스는 판사를 쳐다보았다.
「이 집 주인입니다.」
「그건 알고 있네. 자네에게 묻고 싶은 것은, 자네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점일세.」
로저스는 머리를 저었다.
「그렇지만 나는 만난 적이 없습니다.」
방안에 희미한 동요가 일었다.
매커서 장군이 말했다.
「만난 적이 없다고? 그건 무슨 뜻인가?」
「우리들은 이곳에 온 지 아직 1주일도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직업
소개소를 통해 편지로 고용되었지요. 플리머스의 레지너라는 소개소입니
다.」
블로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된 곳이오. 신용도 있지요.」
워그레이브가 말했다.
「그 편지를 갖고 있나?」
「아니, 없애 버렸습니다.」
「이야기를 계속해 주게. 그래, 편지로 채용되어…….」
「네, 날짜가 편지에 지정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지정된 날 이곳에
왔습니다. 모든 게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지요. 식량도 충분히 저장되고,
가구며 부엌살림도 훌륭한 것으로 갖춰져 있었습니다. 그저 먼지만 털면
될 정도였지요.」
「그리고…….」
「그 밖에 특별히 말씀드릴 건 없습니다. 우리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것도 편지였습니다만, 손님을 맞을 테니 방을 준비 해 두라는 내용이었
습니다.
그런데 어제 오후에 다시 편지가 와서 주인어른과 마님은 좀 늦어진다
면서, 손님들에게 실례되지 않게 할 것과 식사와 커피를 대접하고 레코드
를 틀라는 지시가 씌어져 있었습니다.」
판사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편지는 가지고 있겠지?」
「네, 갖고 있습니다.」
로저스는 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냈다. 판사는 그것을 받아 들었다.
「흠, 과연. 리츠 호텔이라고 되어 있군. 타이프라이터로 찍혀 있어.」
블로어가 판사 옆으로 다가왔다.
「좀 보여 주십시오.」
그는 판사의 손에서 빼앗다시피 편지를 받아 들고 눈을 빛냈다.
「콜로네이션 타이프라이터군. 아직 신품입니다. 종이는 엔사인. 어디서
나 쓰고 있는 거지요. 이 편지에서는 어떤 단서도 잡히지 않을 겁니다.
지문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아마 없을 테지요.」
판사는 날카로운 눈길로 블로어를 보았다. 앤터니 머스턴이 블로어 옆
에 서서 어깨너머로 들여다보았다.
「보기드문 이름이군. 유릭 노먼 오윈. 부르는 느낌이 꽤 좋은데.」
판사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자네에게 경의를 표하네, 머스턴. 자네 덕분에 묘한 게 생각났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둘러보고 자라가 놀랐을 때처럼 고개를 움
츠렸다가 길게 빼며 말했다.
「우리는 이 인물에 대해 저마다 알고 있는 것을 하나하나 털어놓아야
만 되겠소. 한 사람씩 이 집 주인에 대해 바를 제공해 주기 바라오.」
그는 일단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우리는 모두 그로부터 초대받은 손님이오. 모두들 어떻게 초대되었는
지 알게 되면 반드시 얻을 것이 있으리라 보오.」
한순간 침묵이 흘렀다. 에밀리 브랜트가 마음을 정한 듯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이상한 점이 있었어요. 나는 보낸 이의 주소가 확실치 않은
편지를 한 통 받았어요. 2,3년 여름 어느 피서지에서 알게 된 어떤 여자
로부터 온 것 같았지요.」
나는 그 이름이 올턴 또는 올리버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올리버
부인이라는 사람도, 미스 올턴이라는 여자도 만난 적은 없어요. 물론 친
한 사이도 아니지요.」
「그 편지를 갖고 있소, 미스 브랜트?」
「갖고 있어요, 찾아오지요.」
그녀는 방을 나가 편지를 가지고 곧 돌아왔다.
그 편지를 읽고 난 다음 판사는 말했다.
「알 수 있을 것 같군. 크레이슨 양, 당신은?」
베러는 비서로 채용된 사정을 설명했다.
판사가 말했다.
「머스턴, 자네는?」
앤터니 머스턴이 말했다.
「전보를 받았습니다. 친구인 배저 버클리라는 남자로부터였지요. 노르
웨이에 가 있는 줄 알았기 때문에 좀 놀랐습니다. 이리로 오라는 전보였
지요.」
워그레이브 판사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암스트롱 의사, 당신은?」
「나는 의사로서 불려왔습니다.」
「흠. 지금까지 이 집 사람들과 친분이 있었소?」
「없었습니다. 편지 속에 동료의 이름이 있기에…….」
「믿었다는 거로군요. 그래, 그 동료란 오랫동안 소식이 없었던 사람이
었겠지요.」
「아니――네, 그렇습니다.」
블로어의 얼굴을 보고 있던 롬버드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판사님, 지금 깨달은 일입니다만…….」
판사는 한손을 들었다.
「기다리시오.」
「그러나…….」
「그 이야기는 한 번에 하나씩 처리해야 하오. 우리는 지금 오늘 밤 우
리가 이곳에 모이게 된 까닭을 조사하고 있는 거요. 매커서 장군, 당신
은?」
장군은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편지를 받았지요. 이 오윈이라는 사나이로부터. 나의 옛 친구와 와
있다면서 갑자기 초대장을 보내는 실례를 용서해 달라고 씌어 있었소. 지
금 그 편지는 갖고 있지 않소.」
「롬버드, 자네는?」
롬버드는 판사가 이야기를 시작할 때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솔직하게
이야기할 것인가, 숨길 것인가. 그는 마음을 정하고 말했다.
「나는 당신들과 같습니다. 초대 편지가 왔는데, 잘 아는 친구 이름이
씌어 있고――요컨대 잔뜩 유혹한 내용이었지요. 편지는 찢어 버렸습니
다.」
워그레이브 판사는 블로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목소리는 기분
나쁠 만큼 조용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모두 여러 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들었
소. 우리들은 한 사람씩 이름이 불려져 죄를 문초받았소. 그리하여 지금
그 일에 관한 조사를 하고 있는 거요.
지금 거기에 대한 조그만 일 하나가 나에게 의문을 갖게 하오. 불려진
이름 속에 윌리엄 헨리 블러오라는 이름이 있었소. 그런데 우리가 아는
범위 안에서는, 이 가운데 헨리 블로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없소. 또
한 데이비스라는 이름은 불려지지 않았는데, 여기에 대해 무언가 할말이
없소, 데이비스 씨?」
블로어는 기분나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드러나 버렸군요. 솔직하게 인정하지요. 내 이름은 데이비스가 아닙
니다.」
「윌리엄 헨리 블로어요?」
「그렇습니다.」
롬버드가 말했다.
「좀더 물어 봅시다. 블로어 씨, 당신은 본디 이름을 숨기고 이곳에 왔
을 뿐 아니라 큰 거짓말쟁이오. 당신은 남아프리카의 나타르에서 왔다고
했소. 나는 그곳을 잘 알고 있는데, 당신은 그곳에 한 발자국도 들여놓은
일이 없소.」
모든 눈이 블로어에게로 쏠렸다. 노여움에 찬 의혹짙은 눈빛들이었다.
앤터니 머스턴이 한걸음 그에게로 다가섰다.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요? 할말이 있소?」
블로어는 머리를 뒤로 젖히며 네모난 얼굴을 내밀었다.
「여러분은 나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나는 신분증명서를 갖고 있습니
다. 언제든지 보여 드리지요. 나는 런던 경찰국의 수사과에 근무했었고,
지금은 플리머스에서 탐정사무실을 열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일 때문에
고용되어 온 겁니다.」
워그레이브 판사가 물었다.
「누구에게?」
「이 오윈이라는 사나이에게지요. 비용으로 꽤 많은 액수의 송금 수표
가 함께 들어 있었고 용건이 편지에 씌어 있었습니다. 손님으로 꾸미고
오도록 지시되어 있었던 거지요. 여러분들 이름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의 행동을 지켜 보는 게 내 임무였습니다.」
「그 까닭이 씌어 있었소?」
블로어는 내뱉듯 말했다.
「오윈 부인의 보석입니다. 그런데 오윈 부인이라는 여자는 있지도 않
군요!」
판사는 손가락으로 입술을 눌렀다. 무언가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당신의 추리는 올바르다고 생각하오. Ulick Norman Owen! 미스 브
랜트의 편지를 보면, 휘갈겨 써서 잘 모르겠지만 세례명은 읽을 수 있도
록 되어 있소――Una Nancy요. 어느쪽이나 모두 같은 머리글자인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소.
Ulick Norman Owen――어느쪽이나 머리글자만 취하면 UN Owen이
오. 좀더 머리를 쓰면 곧 알 수 있소. UNKNOWN(어디의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사람)이오!」
베러가 외쳤다.
「하지만 그건 미친 짓이에요!」
판사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말했다.
「확실히 그 말이 맞소. 우리는 의심할 여지없이 머리가 돈 사람으로부
터 초대를 받은 거요. 틀림없이 위험을 즐기는 살인광이겠지!」

제 목 : [애-크]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4
올린이 : 매직라인(한창욱 ) 96/11/24 20:56 읽음 : 81 [7m관련자료 있음(TL)[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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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처벌받지 않은 범죄

한순간 침묵이 이어졌다. 불안과 곤혹의 침묵이었다. 판사의 낮고 잘
울리는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럼, 우리들의 조사는 다음 단계로 들어가오. 그러나 그전에 나 자
신의 일을 이야기해 두겠소.」
그는 주머니에서 한 통의 편지를 꺼내 테이블 위로 던졌다.
「이 편지는 나의 옛벗 콘스턴스 캘민턴이 보낸 것으로 되어 있소. 나
는 그녀와 오랫동안 만나지 않았소. 그녀는 근동에 가 있을 거요.
이 요령부득한 편지의 내용은 그녀의 글씨체와 흡사하오. 이곳에서 만
나자고 한 것도 갑작스럽고, 이곳 주인 부부일도 이 편지로는 잘 모르겠
소. 여러분에게 온 편지와 같은 구실이오.
내가 생각하기에 이런 편지들로부터 하나의 흥미로운 결론이 나오지요.
우리를 여기로 불러모은 게 누구든, 그는 우리들을 잘 알고 있거나 또는
자세하게 조사한 게 틀림없소.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나와 콘스턴스 캘민턴 사이의 교우 관계를
알고 있소. 그리고 그녀가 잘 알아볼 수 없는 편지를 쓴다는 것까지도 알
고 있소. 암스트롱 의사의 동료에 대한 일을 알고 있고, 그들이 지금 어
디 있는지도 알고 있소.
머스턴의 친구에 대해서도, 그가 어떤 전보를 치는지도 알고 있소. 미
스 브랜트가 2년 전 어디서 휴가를 보냈으며 거기서 어떤 사람과 만났는
지 정확히 알고 있소. 매커서 장군의 옛 벗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고 있
소.」
판사는 잠깐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이처럼 그는 우리들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소. 그리고 그 지식을 바
탕으로 우리의 죄를 물으려 하는 거요.」
매커서 장군이 큰소리로 외쳤다.
「근거가 없소! 거짓말도 정도가 있지!」
베러가 소리쳤다.
「터무니없는 일이에요!」
숨결이 가빠져 그녀는 겨우 그 말만 했다.
로저스가 메마른 큰 목소리로 말했다.
「거짓말입니다. 당치도 않은 거짓말입니다. 우리는 아무 짓도 하지 않
았습니다. 나도, 아내도…….」
앤터니 머스턴의 목소리는 부르짖는 듯이 들렸다.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어!」
판사는 한손을 들어 모두를 제지했다. 그는 한마디 한마디에 주의하며
말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렇소. 이 수수께끼의 고발자는 내가 에드워드
시튼이라는 사람을 죽였다고 말했소. 나는 시튼을 잘 기억하고 있소.
1930년 6월에 피고로 내 앞에 나타났던 사나이였소.
어떤 연상의 부인을 죽였다는 혐의였소. 꽤 유능한 변호사가 변호를 맡
았고, 증언대에서의 증언도 배심원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소. 그러나 증
거를 조사해 보니 확실한 유죄였소.
그래서 나는 그런 결론을 내렸고, 배심원들도 유죄 판결을 내놓았소.
나는 그 판결을 승인하고 사형을 선고했소. 공판이 피고에게 불리해지도
록 유도되었다는 이유로 공소가 제기되었으나 기각되고 예정대로 사형이
집행되었소.
나는 여러분 앞에 확실히 말해 두지만, 양심에 거리끼는 일은 하나도
없소. 나는 내 의무를 다했을 뿐이오. 정당한 판결을 받은 범인에게 사형
선고한 것에 지나지 않았소.
암스트롱은 그 사건을 생각해 냈다. 시튼 사건이다! 유죄 판결이 내려
진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뜻밖으로 여겨졌다.
공판이 열리고 있던 때인 어느 날, 그는 변호사인 매슈즈와 함께 식사
를 했었다. 매슈즈는 확신을 갖고 말했다.
「판결은 정해져 있소. 9할이 무죄요.」
그 뒤 그는 여러 가지 소문을 들었다.
「판사가 적의를 품고 있었으므로 배심원을 유도하여 유죄 판결을 내
리게 한 것이다. 그러나 법률적으로 올바른 일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워
그레이브에게 실수가 있을 리 없다.」
「그는 피고에게 개인적 원한을 품고 있었던 것 같다.」
그즈음의 기억이 주마등같이 암스트롱의 머리에 되살아났다. 그는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질문을 마음속으로 말해 보았다.
(당신은 시튼을 알고 있었던 거지요? 공판이 시작되기 전부터 그를 알
고 있었겠지요!)
파충류를 연상케 하는 눈이 암스트롱을 지그시 보았다.
판사는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물론 공판이 시작될 때까지 시튼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었소.」
암스트롱은 자신에게 들려주었다.
(거짓말하고 있다. 틀림없이 거짓말하고 있는 것이다.)

베러 크레이슨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여러분에게 이야기해 두고 싶어요. 그 아이 일인데요. 시릴 해
밀턴 말예요. 나는 그 아이의 가정교사였어요.
그 애는 멀리까지 헤엄쳐 나가면 안 된다고 일러두었는데도, 어느 날
내가 보고 있지 않을 때 앞바다로 헤엄쳐 나갔어요. 나는 곧 뒤따라 헤엄
쳐 갔어요……따라갈 수 없었어요. 무서운 일이었지요. 그러나 내 죄는
아니예요.
검시관은 나를 심문하고 나에게 죄가 없다고 말해 주었어요. 그리고 그
애 어머니도 나에게 친절하게 해주었어요. 그랬는데, 그랬는데 왜 그런
말을 들어야 하는 걸까요? 너무해요! 왜 그런 말을…….」
베러는 말끝을 흐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매커서 장군이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울 필요없소. 물론 사실이 아니오. 미치광이가 하는 말이오. 미쳐 있
는 거요! 정말 미쳐 있는 거요!」
장군은 노여움으로 어깨에 불끈 힘을 주며 일어섰다. 그는 부르짖듯 말
했다.
「그런 말을 귀에 오래 담아둘 수는 없소! 그러나 나는 한마디 해두고
싶소. 아서 리치먼드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런 근거도 없는 일이오.
리치먼드는 내 부하 장교였소. 나는 그를 정찰하러 내보냈소. 그리하여
그는 전사했소. 전쟁 때 흔히 있는 일이오. 그런데 내 아내에게까지 오명
을 뒤집어씌우다니! 아내는 훌륭한 여자였소! 군인의 아내로서 모범적인
여자였소!」
매커서 장군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수염을 비틀었다.
이야기가 끝난 후련한 표정이었다.
롬버드가 이야기를 꺼냈다.
「아까 그 토인들 말인데…….」
머스턴이 말했다.
「어떤 사정이었소?」
필립 롬버드는 엷은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 이야기는 사실이오. 나는 토인들을 놓아둔 채 달아났소. 자신을
지켜야만 했기 때문이오. 우리는 정글 속에서 길을 잃었소. 나는 두 친구
를 꾀어 남은 식량을 갖고 도망쳐 나왔소. 덕분에 목숨을 건진 거요.」
매커서 장군이 격렬하게 말했다.
「토인들을 모르는 체 내버려두었단 말이오? 식량을 모조리 훔쳐내어
굶어 죽게 했단 말이오!」
「신사적인 행동은 아니었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자신을 지키는 것은
인간의 첫째가는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토인들은 죽음을 아무렇지
도 않게 생각합니다. 우리와는 다르니까요.」
베러는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있던 얼굴을 들었다. 그녀는 롬버드를 쳐
다보며 말했다.
「죽을 줄 알면서도 버렸단 말인가요?」
롬버드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물론 알고 있었지요.」
앤터니 머스턴이 당혹한 듯 말했다.
「지금 생각하고 있던중이었는데, 존과 루시 캠즈는――내가 케임브리
지에서 자동차로 치어 죽인 어린아이들일 거요. 운이 나빴던 거지요.」
워그레이브 판사가 차갑게 말했다.
「자네 말인가, 아니면 어린아이들 말인가?」
「내 운이 나빴던 거지만 당신 말씀대로 그들도 운이 나빴습니다. 물론
진짜 사고였습니다. 갑자기 뛰어들어왔거든요. 운전면허증을 1년 동안 압
수당하고 괴로움을 겪었습니다.」
암스트롱 의사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속력을 너무 내는 것은 좋지. 당신 같은 젊은이들이 있어 교통 사고
가 끊이지 않는 거요.」
앤터니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스피드 세상이잖습니까. 영국의 도로가 돼먹지 않았습니다. 속력다운
속력을 낼 수 없으니까요.」
그는 주위를 둘러보고 자기가 마시던 글라스를 찾아내 테이블에서 집
어 들고 사이드 테이블로 걸어가 위스키와 소다수를 섞었다. 그리고는 어
깨너머로 말했다.
「아무튼 내 죄는 아니야. 사고에 지나지 않았어!」

하인 로저스는 혀로 입술을 축이고 두 손을 비비며 자못 겁에 질린 낮
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롬버드가 말했다.
「말하시오, 로저스.」
로저스는 헛기침을 하고 메마른 입술을 다시 한 번 혀로 축였다.
「아까 우리 부부 이름도 나왔습니다. 블레이디님 일은 전혀 기억에 없
습니다. 우리는 블레이디님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함께 지냈었습니다. 우
리가 고용되기 전부터 건강이 몹시 나빠 있었지요.
그날 밤――블레이디님의 용태가 갑자기 나빠졌던 날 밤 태풍이 불었
습니다. 전화가 통하지 않았으므로 내가 태풍 속을 걸어 의사를 부르러
갔었는데, 의사가 왔을 때는 이미 늦었던 겁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모든 일을 다했습니다. 진심으로 정성을 다해 모
셨습니다. 누구에게 물어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한마디로 우리를
나무랐던 사람은 없었습니다. 단 한마디도…….」
롬버드는 하인의 비틀린 표정과 바싹 마른 입술과 눈에 떠오르는 공포
를 지그시 지켜 보았다. 그리고 커피 쟁반을 떨어뜨렸을 때의 소리를 생
각했다. 그러나 그는 그런가 하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블로어가 입을 열었다. 용의자를 심문할 때와도 같은 말투였다.
「그렇지만 그 노파가 죽은 다음 적은 돈이나마 갖게 되었을테지. 그렇
잖소?」
로저스는 몸을 굳히며 말했다.
「블레이디님은 우리들이 충실하게 모신 것을 인정하시어 유산을 남겨
주셨습니다. 그게 나쁜 일입니까?」
롬버드가 말했다.
「당신 일은 어떤 것이었소, 블로어 씨?」
「내 일?」
「당신 이름도 리스트에 들어 있었지요.」
「랜더의 일 말이로군. 은행 강도였소. 런던 상업은행이었지요.」
워그레이브 판사가 몸을 움직이며 말했다.
「기억하고 있소. 내가 다룬 사건은 아니었지만 잘 기억하오. 랜더는
당신이 제출한 증거에 의해 유죄가 되었지요. 그 사건을 다룬 게 당신이
었소?」
「그렇습니다.」
「랜더는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중 1년 뒤 다트무어 감옥에서 죽
었소. 몸이 몹시 약한 사나이였소.」
「나쁜 녀석이었지요. 방범대원을 죽인 것도 그 사나이입니다. 확실한
사건이었지요.」
워그레이브 판사가 말을 받았다.
「당신은 그 사건으로 표창을 받았었지, 아마.」
블로어는 내뱉듯 말했다.
「승진했지요.」
그리고 넉살좋은 태도로 덧붙였다.
「어쨌든 나는 의무를 다했을 뿐입니다.」
별안간 롬버드가 웃었다. 방안에 울려 퍼지는 듯한 커다란 웃음소리였
다. 그는 말했다.
「모두들 의무에 충실하고 법률을 잘 지키는 이들뿐이잖은가! 나는 예
외지만. 의사 선생, 당신은 어떻소. 직업상의 조그만 과실이었겠지요. 그
렇잖으면 비밀스러운 수술이라도 했소?」
에밀리 브랜트가 혐오의 빛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롬버드를 한 번 쏘
아보고 그에게서 몸을 돌렸다.
암스트롱 의사는 침착하게 머리를 저었다.
「무슨 말인지 걷잡을 수 없군. 들어 본 적도 없는 이름이오. 뭐라고
했던가요? 크리스였던가요, 크로스였던가요――그런 이름을 가진 환자를
진찰한 적도, 죽는 걸 본 일도 없소. 나로선 전혀 알 수 없는 일이오.
물론 오래된 일로, 병원에서 수술한 환자인지도 모르지요. 병원에는 이
미 손쓸 수 없이 중태가 되어 오는 환자가 많으니까요. 그런 환자가 죽으
면 언제나 의사의 실수로 여기지요.」
그는 머리를 흔들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그 무렵의 일을 생각했다. 취해 있었다……취하여 수
술했던 것이다. 정신을 집중시킬 수 없어 손이 떨리고 있었다. 분명 자기
가 죽인 것이다. 나이든 여자였다. 맑은 정신일 때라면 간단한 수술이었
다.
다행히 자기네 직업인들은 서로 비밀을 폭로하지 않는다. 간호사는 알
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기가 받은 충격도 꽤 컸다.
마음을 굳게 가져야지. 그러나 아무도 알 리 없다. 먼 옛날 일이다…….

방안에 침묵이 흘렀다. 모든 사람들이 슬그머니 또는 똑바로 에밀리 브
랜트를 지켜 보았다. 모두의 눈길이 자기에게 쏠려 있음을 그녀가 느낀
것은 그로부터 1,2분 지나서였다. 양미간이 좁은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내가 무언가 말하기를 기다리고 있나요? 나는 아무것도 말할 게 없
어요.」
판사가 말했다.
「정말 아무것도 없소?」
「없어요!」
그녀의 입술이 굳게 다물어졌다.
판사는 얼굴을 어루만지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털어놓고 이야기할 게 없소?」
에밀리 브랜트는 냉정하게 말했다.
「없어요. 나는 언제나 양심이 명령하는 대로 행동하고 있어요. 숨길
일은 하나도 없어요.」
모두의 얼굴에 불만스러운 빛이 감돌았다. 그러나 에밀리 브랜트는 그
런 일로 마음이 움직여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입을 다물고 앉아
있었다.
판사는 두 번쯤 헛기침을 했다.
「그럼, 이것으로 일단 끝내기로 합시다. 그런데 로저스, 이 섬에 우리
들 말고는 누가 있는가?」
「아무도 없습니다.」
「틀림없나?」
「틀림없습니다.」
워그레이브는 말했다.
「이 저택의 수수께끼 같은 주인이 왜 우리를 이곳에 모이게 했는지
나는 아직 그 참뜻을 알 수 없소. 그러나 이 인물이 어떤 사람이든 내 의
견으로는 올바른 정신을 가진 자가 아니라고 보오.
위험한 인물일지도 모르오. 한시 빨리 이곳을 떠나는 게 가장 좋겠소.
오늘 밤에라도 이 섬을 떠나도록 합시다.」
로저스가 말했다.
「그러나 이 섬에는 배가 없으므로…….」
「한 척도 없는가?」
「없습니다.」
「육지와 어떤 방법으로 연락하나?」
「프레드 내러컷이 아침마다 빵과 우유와 우편물을 가져다 주고는 이
쪽 부탁을 듣고 갑니다.」
「그럼, 내일 아침 내러컷의 배가오면 돌아가기로 합시다.」
모두들 찬성했으나 한 사람만은 반대였다. 그것은 앤터니 머스턴이었
다.
「얼마나 용기없는 짓입니까. 가기 전에 수수께끼를 풀지 않겠습니까?
마치 미스터리 소설같이 스릴넘치고 재미있군요.」
판사는 차갑게 말했다.
「나만큼 나이먹으면 스릴 같은 것에는 전혀 흥미없어지네.」
앤터니는 쓴웃음을 지었다.
「법률에 얽매여 사는 생활은 답답합니다. 나는 범죄를 예찬합니다! 범
죄에 건배합시다!」
그는 글라스를 집어 들고 단숨에 마셨다. 술이 목구멍을 지나자 괴로운
듯 숨을 내쉬었다. 얼굴이 보라빛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뱉아 내듯 숨을
몰아쉬며 의자에서 미끄러 떨어져 글라스가 그의 손에서 바닥으로 나뒹
굴었다.

제 목 : [애-크]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5
올린이 : 매직라인(한창욱 ) 96/11/24 21:03 읽음 : 77 [7m관련자료 있음(TL)[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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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첫번째 죽음

그것은 너무도 뜻밖의 일이었다. 모두들 잠시 입도 열지 못했다. 다만
잠자코 쓰러진 머스턴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암스트롱 의사가 제정신으로 돌아와 머스턴 옆으로 달려가 무릎꿇고
들여다보았다. 의사가 머리를 들었을 때 그의 눈에는 이해할 수 없는 듯
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는 두려움에 떨리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죽었소!」
모두들 의사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죽었다! 스칸디나비아 신화에 나
오는 젊은 무신처럼 건강과 정력이 넘쳐흐르던 그가 죽어 있다! 건강한
젊은이가 위스키 소다에 목에 메인 것쯤으로 죽을 리 없다. 아무래도 믿
어지지 않았다.
암스트롱 의사는 죽은 사나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보랏빛이
되어 비틀린 입술의 냄새를 맡았다. 그런 다음 머스턴이 마신 잔을 집어
올렸다.
매커서 장군이 말했다.
「위스키에 체하여 숨이 막혀 죽었다는 거요?」
의사는 말했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만, 잠깐 사이에 질식한 겁니다.」
그는 글라스의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글라스 밑에 묻어 있
는 액체를 찍어 혀끝에 갖다댔다. 그의 표정이 달라졌다.
매커서 장군이 말했다.
「이런 죽음은 본 적이 없소. 잠깐 사레가 들었을 뿐이잖소.」
에밀리 브랜트가 말했다.
「죽음은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요.」
암스트롱 의사가 일어났다. 그리고 말했다.
「확실히 사레가 들린 것쯤으로 죽는 사람은 없습니다. 머스턴의 죽음
은 우리들이 말하는 이른바 자연사가 아닙니다.」
베러가 겁에 질려 조그맣게 말했다.
「위스키 속에 무엇이 들어 있었나요?」
암스트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확실한 것은 말할 수 없지만, 청산가리가 아닌가 여겨집
니다. 먹으면 곧바로 반응이 나타나는 무서운 독이지요.」
판사가 날카롭게 말했다.
「그의 글라스에 들어 있었소?」
「그렇습니다.」
의사는 위스키 병이 놓인 테이블로 가서 병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은
다음 혀끝으로 핥아 보았다. 그리고 소다수에 혀를 대보았다. 그는 머리
를 저었다.
「둘 다 이상없습니다.」
롬버드가 말했다.
「그렇다면 스스로 자기 잔에 독약을 넣었단 말입니까?」
암스트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보입니다.」
블로어가 말했다.
「자살이라고요? 이상한데.」
베러가 말했다.
「그 사람이 자살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어요. 그토록 기운찼는데, 인생
이 즐거워 못 견디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오늘 석양 무렵 언덕
에서 내려왔을 때에는, 마치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그녀가 말하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젊고 정력적으로 보인 앤터
니 머스턴은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는 듯 눈에 비쳤던 것이다. 그 머스
턴이 지금 무너지듯 바닥에 쓰러져 있다.
암스트롱 의사가 말했다.
「자살 말고 달리 죽은 원인을 생각할 수 있을까요?」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고개를 저었다. 달리 설명할 수 없었다. 머스턴
이 사이드 테이블로 가서 위스키와 소다수를 글라스에 따르는 것을 모두
들 보았다. 따라서 마실 것에 청산가리가 들어 있었다면, 머스턴 자신이
넣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다면 머스턴은 왜 자살한 것일
까.
블로어가 말했다.
「아무래도 이상하군. 머스턴은 자살할 것 같은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
았는데.」
암스트롱이 대답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그것이 모두의 결론이었다. 달리 할말이 없었다. 암스트롱과 롬버드는
머스턴의 시체를 그의 침실로 옮기고 시트로 덮어씌웠다.
두 사람이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모두들 한데 모여 있었다. 추운 밤이
아닌데도 모두 몸을 떨고 있었다.
에밀리 브랜트가 말했다.
「자러 가지요. 이제 늦었으니까요.」
12시 지나 있었다. 그녀의 제의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곧
바로 찬성하지 않았다. 서로 떨어져 있게 되는 일이 불안한 것이었다.
판사가 말했다.
「그렇소, 자는 게 좋겠소.」
로저스가 말했다.
「아직 식당을 치우지 않았는데요.」
롬버드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내일 아침에 해도 되오.」
암스트롱이 로저스에게 말했다.
「당신 부인은 정신을 차렸을까요?」
「보고 오겠습니다.」
로저스는 금방 돌아왔다.
「잘 자고 있습니다.」
의사는 말했다.
「다행이군. 그대로 두는 게 좋을 거요.」
「그러겠습니다. 나는 식당을 치우고 자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홀을 가로질러 식당으로 들어갔다.
다른 사람들은 2층으로 올라갔다. 마음내키지 않는 듯한 걸음이었다.
만일 이 저택이 검은 그림자가 어린 오래된 건물이었다면, 음침한 분위
기가 생겨난다 해도 이상할 게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저택은 근대 건축
의 정수를 모아 지어졌다. 어두운 구석은 없고, 벽에 어떤 장치도 있는
것도 아니며, 전등이 환하게 비치고, 무엇이나 모두 새롭고 밝았다. 감출
것도, 감춰질 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 밝음이 오히려 불쾌하게 느껴지
는 것이었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저마다 자기 방에 들어가자 일곱 사람 모두 저도
모르는 새 문을 잠갔다.

부드러운 색조로 둘러싸인 기분좋은 방에서 워그레이브 판사는 옷을
벗고 침대에 들려 하고 있었다.
그는 에드워드 시튼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시튼을 잘 알고 있
었다. 아름다운 머리, 푸른 눈, 친밀감을 주는 눈매로 상대를 바라보는 붙
임성있는 표정. 배심원들에게 좋은 인상을 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르엘린 검사의 논고는 너무도 조잡스러웠다. 정도가 지나쳐 필요 이상
의 죄상을 강조했다. 그에 비해 매슈즈 변호사의 변론은 훌륭했다. 정연
하고 조리있어 반대신문에서도 유리한 입장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시튼은 격렬한 반대신문에도 잘 견디었다. 그는 흥분하지도 당
황하지도 않았다. 배심원들은 강한 인상을 받았다. 매슈즈 변호사의 변론
만 남았을 뿐 이미 재판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고 여겨졌으리라.
판사는 시계의 태엽을 감아 조심스럽게 침대 머리맡에 놓았다.
그는 그즈음의 일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판사석에 앉아 한마디도
흘리지 않도록 귀를 곤두세워 메모하고, 피고의 죄상을 증명하기 위해 채
택된 증거를 하나하나 음미해 갔던 기분을 지금까지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는 그 사건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매슈즈 변호사의 마지막 변론은 아주 훌륭했다. 그 뒤에 있은 르엘린
검사의 논고는 변호사가 구축해 놓은 인상을 허물어 뜨릴 수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판사인 자신이 의견을 논술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워그레이브 판사는 주의깊게 틀니를 빼내어 물이 담긴 글라스 속에 떨
어뜨렸다. 주근깨투성이의 입술이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입가에 냉혹한
표정이 떠올랐다.
판사는 눈 가장자리에 잔주름을 잡으며 미소지었다. 나는 시튼을 보기
좋게 요리했었다! 그는 중얼거리며 침대에 들어 전등을 껐다.

층계 밑 식당에서는 로저스가 이상스러운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그는
테이블 한복판의 도자기 인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혼자말을 했다.
「이상하군, 분명히 열 개가 있었는데…….」

매커서 장군은 침대 속에서 몸을 뒤척였다. 잠들 수 없었던 것이다. 어
둠 속에 아서 리치먼드의 얼굴이 보이고 있었다. 그는 아서를 좋아했었
다.
레슬리가 그를 좋아하는것도 기쁘게 여겼다. 레슬리는 까다로운 여자였
다. 그들 주위에 훌륭한 사나이가 많이 있었지만, 레슬리는 어떤 남자를
만나도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말했다.
「지루한 사람이에요!」
언제나 그러했다. 그런데 아서와는 처음부터 마음이 맞았다. 언제나 연
극이며 음악이며 그림 이야기를 등을 했다. 그리고 레슬리는 때때로 아서
를 놀리며 즐거워했다. 매커서도 레슬리가 어머니 같은 애정으로 그를 사
랑하는 것을 기쁘게 여겼다.
어머니처럼! 리치먼드가 28살이고 레슬리가 29살인 것을 잊은 건 우둔
한 짓이었다. 매커서는 레슬리를 사랑하고 있었다. 지금도 그녀의 모습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하트 모양의 얼굴, 언제나 꿈꾸는 듯한 짙은 잿빛 눈, 아름답게 굽실거
리는 숱이 많은 다갈색 머리칼. 그는 레슬리를 사랑하고 믿었다.
프랑스 전선에 있을 때도 그는 언제나 레슬리의 사진을 주머니에서 꺼
내 보며 그녀를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의 발견을 한 것이다!
마치 소설에 나오는 것 같은 일이었다. 레슬리가 리치먼드에게 보내는
편지를 잘못하여 자기에게 보내는 봉투에 넣었던 것이다. 매커서는 지금
까지도 그때 받은 큰 충격을 잊어버릴 수가 없다.
더욱이 그것은 이미 오래된 관계였다. 편지가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
었다. 리치먼드의 마지막 휴가 때의 여러 날……레슬리――레슬리와 아
서!
얼마나 비열한 사나이인가! 그 웃음짓는 얼굴! 또렷한 말투로 「네, 각
하」라고 말하는 그 표정! 거짓과 위선으로 뭉쳐진 사나이가 아닌가. 남
의 아내를 훔치고도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다!
참을 수 없을 만큼 격렬하고 차가운 분노가 차츰 높아져 왔다. 그러나
되도록 평온한 태도를 가지려고 마음먹었다. 리치먼드에 대해서도 그때까
지와 다름없는 태도를 취하려 했다. 그것은 성공했던 것일까. 그는 성공
했다고 믿고 있었다.
인간의 신경이 끊임없이 긴장을 강요받는 곳에서는 기질의 변화가 간
단히 밝혀진다. 젊은 아미테이지가 때때로 이상한 눈치를 보이게 되었다.
아직 젊었으나 날카로운 신경을 가진 사나이였다. 아마도 아미테이지는
눈치채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매커서는 도저히 살아서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리치먼드를 정찰보냈
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살아서는 돌아올 수 없는 임무였다.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매커서는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마음에 걸리지도 않았다. 과
실이 끊임없이 일어나 장교들이 사실상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사지(死地)
로 쫓겨갔다. 모든 게 혼란과 공포였다.
사람들은 뒷날 말했다.
「냉정한 매커서도 초조했겠지. 그 작전은 큰 실패였어. 우수한 부하를
희생시키고 말았으니까.」
아무도 그 이상의 말은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미테이지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매커서를 이상한 눈길로 바
라보았다. 리치먼드를 일부러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 지껄여댄 것일까?
레슬리는 아무것도 몰랐다. 애인의 전사에 눈물흘렸겠지만, 매커서가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눈물이 말라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
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는 옛날과 다름없었다. 다만 레슬리의 모습에서
때로 공허함이 느껴졌을 뿐이었다. 3년쯤 뒤 그녀는 폐렴으로 죽었다. 이
미 먼 옛일이다. 15년――아니, 16년 되었을까?
그 뒤 그는 육군을 나와 데븐셔에 자리잡았다. 전부터 갖고 싶었던 땅
을 사들인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착했고 살기 좋은 고장이었다.
그는 사냥과 낚시를 하고 지내며 일요일에는 교회에 나갔다. 그러나 다
윗이 우리아를 싸움터에서 위험한 곳으로 내보냈다는 설교가 있던 날은
가지 않았다. 차분히 앉아서 들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친절했다.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으나, 차츰 자
기 험담을 하고 있지 않나 하는 불안이 일었다.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져
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디서 소문을 들은 것은 아닐까…….
(아미테이지겠지. 그 사나이가 지껄였을까?)
그는 사람들을 피하게 되었다. 소문이 나돌고 있다고 생각하면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것은 먼 옛일이었다. 레슬리는 이미 이 세상에 없다. 아서
리치먼드도 죽었다. 사건은 완전히 잊혀졌다. 다만 그의 인생이 쓸쓸해진
것만은 사실이었다. 예전의 군인 친구들도 만나지 않게 되었다.
(아미테이지가 떠벌렸다면, 그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밤――누군지 알 수 없는 목소리가 그 옛 사건을 지껼였
다. 자기는 그때 당황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던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아마 레코드의 말을 진실로 믿는 이는 없을 것이
다.
자기만이 아니다. 모두 살인죄를 문초받았다. 저 아름다운 아가씨가 아
이를 물에 빠뜨려 죽게 했다고 한다.
바보 같으니! 미치광이가 횡설수설한 것이다! 에밀리 브랜트만 해도 같
은 연대에 있던 톰 브랜트의 조카가 아닌가. 그녀가 살인했다고 한다! 누
가 보나 첫눈에 신앙심이 두터운 여자임을 알 수 있는 그녀가…….
이번 일은 처음부터 이상했다. 미친 짓이었다. 이 섬에 왔을 때부터…
…그게 언제였던가. 그렇다, 오늘 저녁 무렵이었다. 이곳에 온 지 벌써 오
래된 듯 여겨진다.
그는 생각했다. 언제 이 섬에서 나가게 될까? 물론 내일 아침 모터 보
트가 육지에서 올 것이다.
이상스럽게도 그는 섬을 꼭 떠나고 싶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육지로 돌
아가면 조그만 시골에서 다시금 어두운 생활을 보내게 된다.
열어제쳐진 창문으로 바위에 부딪치는 파도 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파도 소리는 날이 밝아짐에 따라 더욱 높아졌다. 바람도 더 세어진 것 같
다.
그는 생각했다. 얼마나 평화로운 소리인가. 그리고 평화스러운 곳인가.
섬이 좋은 것은 한번 이곳에 오면――이젠 더 앞으로 갈 수 없는 점이다.
모든 것의 종말에 와버린 것이다.
그는 그때 참으로 이 섬을 떠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베러 크레이슨은 침대에 누워 눈을 뜨고 천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한쪽
에는 스탠드가 켜져 있었다. 그녀는 어둠이 두려웠다.
그녀는 생각했다. 유고……유고……어째서 오늘 밤은 당신이 곁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까요. 어딘가 바로 가까이에 있는 것같이 느껴진다. 대체
그는 어디에 있을까.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영원히 알 수 없겠지. 그는
그냥 가버린 것이다. 내 생활 속에서.
지금 유고를 생각해 보았자 아무 소용없다. 그러나 유고는 그녀가 잊을
수 없는 남자였다. 아무래도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콘월……콘월……검은 바위, 평평하고 누르스름한 모래, 사람좋고 친절
한 해밀턴 부인. 언제나 반쯤 우는 목소리로 그녀의 손을 잡고 말하던 시
릴.
「바위있는 데까지 헤엄쳐 가고 싶어요, 크레이슨 선생님. 왜 바위까지
헤엄쳐 가면 안 되는 거지요?」
올려다보면 유고의 눈이 그녀를 지켜 보고 있었다.
밤이 되어 시릴이 잠들고 나면…….
「산책나가지 않겠습니까, 크레이슨 양?」
「네, 좋아요.」
바닷가의 산책. 달빛, 대서양의 부드러운 공기, 그리고 유고의 팔이 그
녀의 몸을 끌어안는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오.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소. 알고 있겠지, 베러?
분명 알고 있었다. 적어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당신에게 결혼을 청할 수 없소. 내게는 재산이 없소. 나 혼자
살아가기도 힘겹소.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이야기지. 나는 석 달 동안 재산
을 손에 넣을 기회를 쥐고 있었소. 시릴이 태어난 건 모리스가 죽은 지
석 달이 지나서였소. 만일 시릴이 여자 아이였다면…….」
만일 여자 아이였다면 모든 건 유고의 것이 될 터였다. 그는 분명 실망
한 것 같았다.
「물론 실망하는 게 틀린 생각이오. 그러나 확실히 내게는 운이 없었
소. 시릴은 사랑스러운 아이요. 나는 그 아이가 좋소.」
그렇다, 그는 시릴을 좋아했다. 언제나 스스로 놀이 동무가 되어 주곤
했다. 유고의 마음에는 시릴을 원망하는 빛이 조금도 없었다.
시릴은 건강이 나빴다. 몸이 허약하여 제대로 자랄 수 있을 지 어떨지
염려스러웠다.
그러던 어느 날 시릴은 울먹이며 몇 차례나 되물었다.
「크레이슨 선생님, 왜 바위까지 헤엄쳐 가면 안 되나요?」
「너무 멀기 때문이야, 시릴.」
「그렇지만 크레이슨 선생님…….」
베러는 일어나 화장대로 가서 아스피린을 세 알 먹었다. 그녀는 생각했
다. 진짜 수면제가 있으면 좋으련만…….
그녀는 생각했다. 만일 자살한다면 베로날을 정량 이상 먹는게 좋다.
청산가리 같은 건! 그녀는 앤터니 머스턴의 보라빛이 된 얼굴을 떠올리고
는 몸을 떨었다.
베러는 벽난로 앞에서 액자에 든 자장가를 올려다보았다.

열 인디언 소년이 식사하러 갔다.
한 소년이 목이 메어 아홉 소년이 되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아, 무서워! 꼭 오늘 밤의 우리들 같군!
앤터니 머스턴은 왜 죽은 것일까. 그녀는 죽고 싶지 않았다. 죽고 싶다
는 기분을 상상할 수도 없었다. 죽음은 자기 이외의 사람들을 찾아가는
것이다…….



제 목 : [애-크]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6
올린이 : 매직라인(한창욱 ) 96/11/24 21:29 읽음 : 75 [7m관련자료 있음(TL)[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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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작은 도자기 인형

암스트롱 의사는 꿈을 꾸었다. 무더운 수술실이었다. 땀이 그의 얼굴에
흘러내리고 있었다.
손이 굳어져 메스를 힘껏 쥘 수가 없었다. 얼마나 예리한 칼날인가……
이거라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는 말할 것도 없이 살인을 했
던 것이다…….
그 여자의 몸은 여느 때와 완전히 달라 보였다. 그녀는 본디 다루기 힘
든 큰 몸집이었다. 그런데 가냘프고 여윈 몸이 되어 있다. 그리고 얼굴이
덮여져 있다.
그가 죽여야 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그는 생각해 낼 수 없었다. 그러나
어떻게든 알지 않으면 안 된다.
간호사에게 물어 볼까. 그녀는 가만히 자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물어 볼 수 없다. 물어 보면 의심을 품을 게 틀림없다.
그러나 수술대 위에 누워 있는 것은 누구일까? 왜 얼굴을 덮어 놓았을
까……아무래도 얼굴을 보아야겠다. 아, 그 정도면 되었어. 젊은 실습생이
손수건을 벗겨 버렸던 것이다.
에밀리 브랜트였다. 그가 죽여야 할 사람은 에밀리 브랜트였다. 얼마나
악의에 찬 눈인가! 입술이 움직이고 있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
「죽음은 언제나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녀는 지금 웃고 있다. 아니, 간호사, 손수건을 덮지 말아 줘. 나는 보
고 있지 않으면 안 돼. 마취시키지 않으면 안돼.
에테르는 어디 있나. 에테르를 분명히 가져왔는데……에테르가 없나,
간호사? 포도주가 있다고? 좋아, 그것으로 됐어. 손수건을 걷어 버려, 간
호사.
그렇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앤터니 머스턴이었다! 얼굴이 보랏빛이
되어 비틀려 있다. 그러나 죽지 않았다. 웃고 있다. 웃으며 수술대를 흔들
고 있다! 정신차려! 위험해! 간호사, 잡아 눌러 줘! 잡아 눌러 줘!
암스트롱 의사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침이 되었다. 햇빛이 방안
에 비쳐 들었다.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며 흔들어 깨우는 사람이 있었다.
로저스였다. 얼굴이 파랗게 질려 부르고 있었다.
「선생님! 선생님!」
암스트롱 의사는 완전히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침대에 일어나 앉으
며 말했다.
「무슨 일인가?」
「아내가 눈을 뜨지 않습니다. 아무리 흔들어도 눈을 뜨지 않습니다.
모습이 이상합니다.」
암스트롱 의사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곧 가운을 몸에 걸치고 로
저스의 뒤를 따랐다.
누워서 편안히 잠들어 있는 여자 위로 의사는 몸을 굽혔다. 그리고 차
가운 손을 쥐고 눈꺼풀을 뒤집어 보았다. 그가 몸을 일으켜 침대 곁에서
물러난 것은 그로부터 몇 분 뒤였다.
로저스가 속삭이듯 말했다.
「아내는――아내는…….」
「그렇소. 죽어 있소.」
로저스의 눈이 무엇인가를 찾아내려는 듯 의사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서 두 사람은 침대 옆의 테이블로 갔다가 세면대에 가본 다음 누워 있
는 여자 곁으로 되돌아왔다.
로저스가 말했다.
「죽은 원인은――심장입니까?」
암스트롱 의사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평소에 건강했소?」
「류머티즘 증세가 좀 있었습니다만…….」
「최근 의사에게 진찰받은 적이 있소?」
로저스는 암스트롱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랫동안 의사의 진찰을 받은 적 없습니다. 아내도 나도.」
「심장이 나쁜 것 같은 증상이 있었소?」
「아니오, 그런 징조는 없었습니다.」
「잠은 언제나 잘 잤소?」
로저스의 눈이 의사의 눈을 피했다. 그리고 손을 모아 쥐고 우물쭈물하
며 말했다.
「잘 잤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의사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수면제를 써왔소?」
로저스는 놀라서 의사를 쳐다보았다.
「수면제라고요? 내가 알고 있는 한 먹은 적이 없습니다.」
암스트롱은 세면대 쪽으로 갔다. 병이 몇 개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로
션, 라벤더 향수, 설사약, 화장수, 치약, 칫솔. 로저스가 화장대 서랍을 열
었다. 그러나 수면제는 아무데도 없었다.
로저스가 말했다.
「어젯밤에는 선생님이 주신 것 말고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습니다.」

9시에 아침 식사 종이 울렸을 때에는, 모두들 일어나 종이 울리기를 기
다리고 있었다.
매커서 장군과 판사는 테라스를 거닐며 정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베러 크레이슨과 필립 롬버드는 저택 뒤 언덕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길
이었다. 거기서 그들은 육지 바라보고 서 있는 윌리엄 헨리 블로어를 보
았다.
블로어가 말했다.
「아직 모터 보트가 오는 것 같지 않소. 아까부터 지켜 보고 있었는데
…….」
베러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데븐셔는 한적한 곳이에요. 무엇이나 다 느리지요.」
필립 롬버드는 반대편 바다 쪽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그가 말했다.
「날씨는 어떨까요?」
블로어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괜찮을 거요.」
롬버드는 입술을 오므리고 휘파람을 불었다.
「오늘 안으로 바람이 불어올지도 모르오.」
「돌풍일까?」
아래쪽에서 종소리가 들려 왔다.
롬버드가 말했다.
「아침 식사로군. 나는 배가 고프오.」
블로어는 롬버드와 나란히 급하게 경사진 비탈질을 내려오면서 말했다.
「아무래도 이상해. 그 젊은 사나이는 왜 자살했을까. 나는 지난밤 내
내 그 일을 생각했소.」
베러는 앞서서 걸어가고 있었다. 롬버드가 걸음을 좀 늦추며 말했다.
「자살 말고는 달리 생각되는 점이 없소?」
「증거가 없으니 뭐라고 말할 수 없소. 그보다 먼저 동기요. 그는 틀림
없이 상당한 재산을 갖고 있다고 보오.」
에밀리 브랜트가 응접실에서 그들을 맞으러 나왔다. 그녀는 날카롭게
물었다.
「보트가 왔나요?」
베러가 대답했다.
「아직 안 왔어요.」
모두들 식당으로 들어갔다. 사이드 테이블에 달걀, 베이컨, 차, 커피 등
이 놓여 있었다. 로저스가 문을 열어 그들을 들여 보내고 밖에서 문을 닫
았다.
에밀리 브랜트가 말했다.
「저 사람 얼굴빛이 나빠 보이는군요.」
창문 옆에 서 있던 암스트롱이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차린 게 없더라도 참고 잡숴 주십시오. 로저스가 혼자서 준비했습니
다. 로저스 부인이 일할 수 없었으므로…….」
에밀리 브랜트가 말했다.
「그녀가 어떻게 되었나요?」
암스트롱 의사는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식사를 시작합시다. 달걀이 식습니다. 식사가 끝나면 여러 분들과 이
야기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모두들 의사의 말에 따랐다. 접시의 음식이 나눠지고, 커피와 차가 따
라졌다. 식사가 시작되었다.
아무도 섬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해외 뉴스, 스포츠, 네스호의 괴물이
다시 나타난 일 등이 순서없이 이야기되었다. 대화에 깊이 빠져 드는 사
람은 하나도 없었다.
이윽고 식사가 끝나자 암스트롱 의사는 의자를 조금 뒤로 물리면서 헛
기침을 한 뒤 이야기를 시작했다.
「식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실은 로저스의
아내가 어젯밤 잠든 채 숨졌습니다.」
여기저기서 놀라는 소리가 들렸다.
베러가 외쳤다.
「어머나, 어떻게 된 일일까요! 우리들이 섬에 오고 나서 벌서 두 사람
이나 죽다니!」
워그레이브 판사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나지막하고 뚜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흠――믿어지지 않는 일인데, 원인은 무엇이었소?」
암스트롱은 어깨를 으쓱했다.
「지금은 대답할 수 없습니다.」
「해부가 필요하다는 거요?」
「어쨌든 이대로는 사망진단서를 쓸 수 없습니다. 건강 상태도 몰랐으
니까요.」
베러가 말했다.
「그녀는 신경질적인 여자 같았어요. 어젯밤 그런 충격을 받았으니 틀
림없이 심장마비일 거예요.」
암스트롱 의사가 말했다.
「심장이 멈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어째서 멈췄는가 하는 게 문제
입니다.」
에밀리 브랜트가 또렷한 목소리로 차갑게 말했다.
「양심이에요!」
의사는 그녀 쪽으로 몸을 돌렸다.
「무슨 뜻입니까, 미스 브랜트?」
에밀리 브랜트는 얼굴빛도 달라지지 않고 말했다.
「여러분들도 들었잖아요? 그녀는 남편과 함께 전 주인을 죽인 죄를
문초받았어요.」
「그럼, 당신은…….」
「나는 그것이 정말이었다고 생각해요. 여러분들도 보았을 테니까요.
그녀는 놀라서 기절했지요. 죄가 밝혀졌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숨길 수
없었던 거예요. 공포로 말미암아 죽었다고 해도 될 거예요.」
암스트롱 의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일도 있을 수 있지만, 여느 때의 건강 상태를 확실히 알지 않고
는 잘라 말할 수 없습니다. 이를테면 심장이 약했다든지…….」
에밀리 브랜트는 의사의 말을 가로챘다.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모두들 놀라며 에밀리 브랜트의 얼굴을 보았다.
블로어가 난처한 듯 말했다.
「그것은 좀 지나친 말이군요, 미스 브랜트.」
그녀는 눈을 빛내며 모두들 둘러보았다. 그리고 턱을 내밀며 말했다.
「여러분들은 죄인이 하느님의 노여움을 받아 죽는 것을 의심하나요!
나는 의심하지 않아요.」
판사가 조용히 무릎을 두드렸다. 그는 비꼬임어린 말투로 천천히 말했
다.
「내가 오랫동안 죄를 재판해 온 경험에서 말한다면, 하느님은 단죄와
속죄에 대한 일을 우리들 인간에게 맡기고 있소. 그러나 그 일을 쉽게 해
나갈 수는 없소. 빠른 길은 없는 거요.」
에밀리 브랜트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잠자코 있었다.
블로어가 다시 입을 열었다.
「2층에 올라가 먹거나 마신 것은 없었소?」
암스트롱이 대답했다.
「아무것도 없소.」
「차를 마시지 않았을까요. 물을 마셨는지도 모르지요. 꼭 차를 마셔야
하는 그런 부류의 사람은 모든 잠자기 전에 차를 마시지요.」
「아무것도 마시지 않았다고 로저스가 말했소.」
「흠, 과연. 그러나 그로서는 그렇게 말하겠지요!」
무언지 확신하는 듯한 말투였으므로 의사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블로어
를 쏘아보았다.
필립 롬버드가 말했다.
「그럼, 당신은…….」
「그렇소! 우리는 어젯밤, 저마다 저지른 죄를 들었소. 미치광이의 잠꼬
대였는지도 모르오. 그러나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오. 그것이 사실이었다
고 합시다. 로저스 부부가 노파를 죽였다면 어떻겠소? 그들은 지금까지
마음놓고 있었는데…….」
베러가 입을 열었다. 낮은 목소리였다.
「아니예요, 마음놓고 있을 수는 없었을 거예요.」
블로어는 이야기 허리를 잘려 얼굴을 찌푸렸다. 그의 눈이 여자는 늘
이렇다고 말하는 듯 베러를 보았다. 블로어는 말을 이었다.
「어쩌면 마음놓고 있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어떻든 눈앞의 위험은
없었을 거요. 그런데 어젯밤 누군지 알 수 없는 미치광이가 나타나 사실
을 밝혔소. 그리하여 어떤 일이 일어났었지요? 그녀는 놀라 정신을 잃었
소.
겨우 정신이 들었을 때, 저 사나이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
하고 있소? 여자가 무언가 이야기하지 않을까 하여 뜨거운 지붕 위를 걸
어가는 고양이처럼 벌벌 떨고 있지 않았는가 말이오.
그리고 그의 입장은 또 어떻소. 그들은 살인을 저지르고도 시치미떼고
있었소. 그런데 모든 게 밝혀지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소? 열에 하나, 여
자는 진실을 실토하오. 여자들에게는 알면서 모르는 체하는 배짱이 없지
요. 언젠가는 모든 것을 고백하기 마련이오.
로저스로서는 여자가 살아 있는 게 위험하기 이를 데 없소. 자기는 자
신있지만, 여자는 어떨지 모르오. 그리고 만일 여자가 고백한다면 그의
목도 달아나오! 그래서 찻잔에 무엇인가를 넣어서 영원히 입을 열지 못하
도록 한 것이오.」
암스트롱이 침착하게 말했다.
「침대 옆에 빈 잔은 없었소. 그런 것은 아무데도 없었소. 나도 조사해
보았소.」
블로어는 외치듯 말했다.
「물론 있을 리 없지요! 여자가 마시고 난 뒤 잔과 받침접시를 깨끗이
치워 버린 거요.」
한순간 침묵이 흘렀다. 매커서 장군이 그 침묵을 깨뜨렸다.
「어쩌면 당신 말대로일지도 모르오. 그러나 나는 남편이 아내에게 그
런 일을 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소.」
블로어는 소리내어 웃었다.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울 때 감정적인 일은 생각할 수 없는 법입니다.
다시 침묵이 흘렀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 동안 문이 열리며 로저스
가 들어왔다. 그는 모두를 한 사람씩 둘러보며 말했다.
「뭘 좀더 드시겠습니까? 토스트가 적어서 죄송합니다만, 방을 아껴 둔
겁니다. 새 빵이 오지 않아서요.」
워그레이브 판사가 의자에서 몸을 움직이며 물었다.
「모터 보트는 늘 몇 시에 오나?」
「7시에서 8시 사이입니다. 때로는 8시 지나서 올 때도 있습니다만, 오
늘 아침은 어떻게 된 일일까요. 만일 프레드 내러컷이 병이라도 나면 그
의 동생이 오게 되어 있는데요…….」
필립 롬버드가 말했다.
「지금 몇 시요?」
「10시 10분 전입니다.」
롬버드가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로저스는 그대로 선 채 잠시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매커서 장군이 큰소리로 말했다.
「자네 아내가 참 안됐네, 로저스. 지금 의사 선생으로부터 들었네.」
로저스는 머리를 숙였다.
「네, 고맙습니다.」
그는 비어 있는 베이컨 접시를 들고 나갔다.
다시 침묵이 흘렀다.

테라스에서 필립 롬버드가 말했다.
「모터 보트 말인데…….」
블로어는 그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오, 롬버드. 나도 같은 생각을 하
고 있었소. 두 시간 전에 오도록 되어 있는 모터 보트가 아직도 오지 않
소. 어째서일까?」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오?」
「사고가 아니오. 나는 그렇게 생각하오. 이것도 계획의 하나요. 처음부
터 계획된 일이오.」
「그럼, 오지 않을 것으로 여기오?」
그의 등뒤에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성난 듯한 목소리였다.
「모터 보트는 올 리 없어!」
블로어는 떡벌어진 어깨를 돌려 말소리의 주인공을 보았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장군?」
매커서 장군이 뚜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올 리 없소. 우리는 모터 보트가 없으면 이 섬에서 나갈 수 없
소. 처음부터 그렇게 계획되었던 거요. 우리는 이 섬을 떠날 수 없소……
아무도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단 말이오. 여기가 종말이오. 모든 것의 종말
이오…….」
장군은 말을 멈추고 잠시 머뭇거리더니 낮은 목소리로 다시 이었다.
「그것이 평화요. 참된 평화인 거요. 마지막까지 와서――이제 더 앞으
로 갈 수 없소. 평화요…….」
장군은 홱 돌아서서 걸어갔다. 테라스를 가로질러 바다로 이르는 비탈
길을 내려가 바위가 바닷속에 솟아 있는 섬 끝으로 걸어갔다. 절반쯤 졸
고 있는 듯 힘없는 걸음이었다.
블로어가 말했다.
「저 사람은 머리가 돌아 버렸어! 곧 모두들 저렇게 미쳐 버리겠지.」
필립 롬버드가 말했다.
「당신은 그렇지 않을걸.」
전직 경감은 대답했다.
「내가 미치는 일은 좀처럼 없을 거요. 당신도 그렇게 되지 않을걸, 롬
버드.」
「고맙소, 지금은 완전히 제정신이오.」

암스트롱 의사는 테라스로 나갔다. 그곳에서 걸음을 멈추고 망설였다.
왼쪽에는 블로어와 롬버드가 있었다. 오른쪽에는 워그레이브가 머리를 숙
이고서 천천히 걷고 있었다.
암스트롱은 잠시 생각하다가 워그레이브 쪽으로 가기로 했다. 그때 로
저스가 저택 쪽에서 당황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잠깐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암스트롱은 로저스를 바라보았다. 로저스의 얼굴에는 핏기가 없었다.
두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몇분 전까지 그토록 건강한 모습이었는
데, 어떻게 된 일일까?
「부탁입니다. 저택 안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의사는 얼굴빛이 달라진 로저스와 함께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이오?」
「여기입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로저스는 식당문을 열었다. 의사는 안으로 들어갔다. 로저스는 그 뒤를
따라 들어와 문을 닫았다.
암스트롱이 말했다.
「무슨 일이오?」
로저스의 목 근육이 움직였다. 그는 침을 삼켰다. 그리고 가까스로 입
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상한 일?」
「틀림없이 내가 어떻게 되어 있는 게 아니냐고 하시겠지요. 쓸데없는
소리라고 말씀하실 겁니다. 그러나 이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잠자코 있
을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도 설명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대체 무슨 일이오? 수수께끼 같은 소리만 하고 있으니…….」
로저스는 다시 침을 삼켰다. 그리고 말했다.
「저 조그만 인형――테이블 한복판에 있는 인형 말입니다. 틀림없이
열 개가 있었는데…….」
「그렇소. 어제 저녁 식사 때 세어 보았지.」
로저스는 그 가까이로 다가섰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젯밤 내가 뒤처리를 할 때 인형이 아홉 개만
있었습니다.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때는 그리 큰일로 여기지 않
았지요.
오늘 아침 식사 때는 마음이 불안해서 인형에 관심이 없었습니다만, 지
금 돌아와 보니……내 말이 이상하다고 여겨지면 적접 보십시오. 인형이
여덟 개뿐입니다. 두 개가 줄어들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인형이
여덟 개밖에…….」


제 목 : [애-크]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7
올린이 : 매직라인(한창욱 ) 96/11/24 21:31 읽음 : 74 [7m관련자료 있음(TL)[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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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오윈은 누구인

아침 식사가 끝나자 에밀리 브랜트는 베러 크레이슨을 불러 내어 저택
뒷동산에 올라가 모터 보트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바람이 세어져 있었다. 바다에 하얀 물마루가 보였다. 고기잡이배는 한
척도 나와 있지 않았다. 모터 보트가 오는 기척도 없었다. 스티클헤이븐
마을은 붉은 바위 절벽에 가려져 보이지 않고 마을 뒤의 언덕만이 보였
다.
에밀리 브랜트는 말했다.
「어제 우리를 실어다 준 남자는 착실한 사람 같았어요. 아침이 되어도
아직 오지 않는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에요.」
베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마음속의 공포를 가라앉히려 애쓰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성이 나 있었다.
(침착해야 돼. 너답지 않군. 지금까지 그토록 마음을 굳게 먹고 있었는
데.)
조금 뒤 그녀는 큰소리로 말했다.
「빨리 와 주었으면――빨리 이 섬을 떠나고 싶어요.」
에밀리 브랜트는 차갑게 말했다.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너무 뜻밖의 일이어서……왜 이런 데 왔을까.」
옆의 노부인이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간단히 믿어 버린 것을 후회하고 있어요. 잘 생각해 보면 믿을
수 없는 편지였지요. 하지만 그때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아요.」
베러는 기계적으로 중얼거렸다.
「알아요.」
「무엇이든 혼자서 처리해 버리는 건 좋지 않아요.」
베러는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식사 때 하신 말씀대로 정말 그렇게 믿고 계세요?」
「무슨 일 말예요? 확실하게 말해 주겠어요?」
베러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로저스 부부가 정말로 노부인을 죽였다고 믿고 계시나요?」
에밀리 브랜트는 가만히 바다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그렇게 믿어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모르겠어요.」
「모든 일이 그렇게 믿도록 되어 있어요. 여자가 기절한 일, 남자가 쟁
반을 떨어뜨린 일, 게다가 그 사나이의 말을 듣고 있으면 정직하지 않게
여겨져요. 나는 누가 뭐라 해도 그들이 죽였다고 믿어요.」
「그 여자의 모습은 마치 자기 그림자마저 두려워하는 듯……나는 그
토록 무서워하는 여자를 본 적이 없어요. 틀림없이 언제나 그런 모습으로
…….」
조그만 목소리로 에밀리 브랜트는 말했다.
「어릴 때 내 방에 걸렸던 액자를 나는 기억하고 있어요. 너의 죄는 반
드시 밝혀지리라……그대로예요. 너의 죄는 반드시 밝혀지리라…….」
「하지만 미스 브랜트. 그렇다면…….」
「뭐지요?」
「다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요?」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다른 혐의는 모두 정말이 아니었어요. 로저스가 정말로 죄를 저질렀
다면…….」
그녀는 어떻게 이야기해야 좋을지 몰라 다음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얼굴을 찌푸리고 있던 에밀리 브랜트가 밝은 표정을 지었다.
「당신이 말하려는 뜻을 알겠어요. 롬버드 씨는 자기 죄를 인정했어요.
스무 사람을 죽게 내버려두었다고.」
「그것은 토인이었어요.」
에밀리 브랜트는 날카롭게 말했다.
「흑인이든 백인이든 우리는 모두 동포임에 변함이 없어요.」
베러는 생각했다.
(우리들의 흑인 동포――우리들의 흑인 동포! 나에게는 그렇게 생각되
지 않아. 마음이 이상해지는군.)
에밀리 브랜트는 침착하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물론 그 가운데에는 근거없는 이야기도 있었지요. 이를테면 판사는
직무를 충실히 수행했을 뿐이에요. 런던 경찰국에 있었다는 사나이도 그
렇지요. 그리고 내 경우도 마찬가지예요.」
그녀는 여기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나는 어젯밤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어요. 남자들 앞에서 할 이야기
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지요.」
「어떤 일인데요?」
베러는 흥미가 일었다. 에밀리 브랜트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냉정하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비트리스 테일러는 내가 데리고 있었던 처녀아이예요. 행실이 좋지
못했지요. 하지만 그것을 알았을 때에는 이미 늦었던 거예요.
나는 그녀에게 속았어요. 소문에는 행실좋고 착실하며 똑똑한 처녀라고
했지요. 나는 그녀가 마음에 들었어요.
그러나 그것은 모두 소문일 뿐, 정말은 몸가짐이 바르지 못한 게으른
처녀였어요. 그녀의 몸이 이상해진 것을 안 건 훨씬 지난 뒤였지요.」
노부인은 입에 담기조차 부끄러운 듯 얼굴을 찌푸렸다.
「나는 몹시 놀랐어요. 그녀의 부모님은 훌륭한 사람이며 그 애를 엄격
히 키웠으므로 물론 그 행실을 용서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나는 곧 그녀를 내쫓았어요. 그냥 두면 내가 불륜을 용서한게 되니까
요.」
베러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마음에 수치스러운 죄를 지은 위에 더 큰 죄를 짓고 말았지요. 그녀
는 자살하고 말았어요.」
베러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를 느끼며 속삭였다.
「자살했다고요?」
「그래요. 강에 몸을 던졌지요.」
베러는 몸을 떨었다. 그리고 에밀리 브랜트의 아주 침착한 얼굴을 쳐다
보았다.
「자살했다는 말을 듣고 어떤 생각이 들었지요? 잘못했다고 생각되지
않았나요?」
「내가? 어째서 잘못했다고 생각할 필요가 있지요?」
「하지만 만일 당신의 엄격한 꾸지람이 그런 결과를 불러일으켰다면…
….」
에밀리 브랜트는 딱 잘라 말했다.
「자신이 저지른 죄가 그녀를 자살시킨 거예요. 양심에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았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예요.」
그녀는 베러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자신을 나무라는 듯한 표정은 아니
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 같은 표정도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자신
이 옳다고 여기는 굳건한 표정이었다.
에밀리 브랜트는 그녀 자신의 도덕적 갑옷으로 몸을 감싸고 인디언 섬
의 언덕에 의연히 앉아 있었다. 몸집이 조그만 늙은 독신 여자는 이미 베
러에게 있어 어리석은 존재가 아니었다. 베러는 그 모습에서 공포를 느꼈
다.

암스트롱 의사는 식당에서 다시 테라스로 모습을 나타냈다. 판사는 의
자에 앉아 지그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롬버드와 블로어는 담배를 피
우고 있었다. 이야기는 하고 있지 않았다.
의사의 눈은 살피듯 판사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누구와 의논하고
싶었다. 그는 판사가 날카로운 논리적 두뇌를 지녔음을 알고 있었다. 그
러나 그는 판사를 피했다. 워그레이브 판사는 두뇌는 좋을지 모르지만 늙
었다. 지금 그가 필요로 하는 건 활동적인 사람인 것이다. 의사는 마음을
정했다.
「롬버드 씨, 잠깐 이야기할 게 있소.」
필립이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말씀하십시오.」
두 사람은 테라스를 떠나 바다 쪽으로 비탈길을 내려갔다. 다른 사람에
게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까지 오자 암스트롱은 말했다.
「당신 의견을 듣고 싶은데…….」
롬버드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농담 마시오. 나는 의학 지식이 없소.」
「아니, 이번 사건에 대해서요.」
「그거라면 말이 통하겠지요.」
「솔직히 말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오?」
롬버드는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
「여러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겠지요.」
「로저스 부인 일은 어떻소? 블로어 말을 인정하오?」
롬버드는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
「가능성은 충분히 있소.」
「내 생각도 그렇소.」
암스트롱은 마음이 놓였다. 필립 롬버드는 우둔하지 않았다.
롬버드가 말했다.
「그것은 그들 부부가 살인을 저질렀다는 가정 위에서의 이야기요. 그
러나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없지요. 그들이 어떤 방법으로
노파를 죽였는지 의견을 듣고 싶소. 독살이었을까요?」
「더 간단했는지도 모르오. 오늘 아침, 블레이디 노파의 병이 무엇이었
느냐고 로저스에게 물어 보았소. 꽤 흥미있는 대답을 하더군요.
심장병에 아초산(亞硝酸) 아밀이 쓰인다는 건 당신도 알고 있겠지요.
만일 발작이 일어났을 때 아초산 아밀이 없었다고 한다면――결과는 알
거요.」
「그렇습니까. 간단하군요. 누구든 유혹당하지요.」
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적극적으로 행동할 필요가 없었소. 독약을 손에 넣을 필요도, 먹게
할 필요도 없었지요. 그리고 로저스가 의사를 부르러 가면 아무도 이상히
여길 사람이 없소.」
롬버드가 덧붙였다.
「만일 그런 눈치를 챘다 해도 증거가 없지요.」
그리고 갑자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것으로 설명되는 셈이로군.」
암스트롱은 이해할 수 없는 듯 롬버드를 보았다.
「무슨 말이오?」
「즉 인디언 섬의 설명이오. 세상에는 범인을 처벌할 수 없는 범죄가
있소. 이를테면 로저스 부부의 사건이오. 워그레이브 판사의 사건도 그렇
지요. 법률의 울타리 안에서 살인한 거요.」
「당신은 그렇게 믿소?」
필립 롬버드는 미소지었다.
「물론이지요! 워그레이브는 단검으로 찌르는 것보다도 더 확실한 방법
으로 에드워드 시튼을 죽인 거요. 그러나 그는 그것을 법률 속에서 법의
를 입고 판사 자리에 앉아 행했지요. 그러므로 여느 방법으로 그의 죄를
문책할 수가 없소.」
암스트롱의 마음속을 번개같이 스쳐 지나가는 게 있었다.
(병원 안에서의 살인. 수술대 위에서의 살인. 이것만큼 완전한 살인은
없다!)
필립 롬버드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래서 오윈 씨가 나타나 인디언 섬의 제1막이 열린 것이오!」
「그렇다면 우리를 이곳으로 모아들인 목적은 무엇일까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오?」
암스트롱은 대답하지 않고 이야기를 원점으로 되돌렸다.
「로저스 부인이 죽은 원인 말인데, 로저스가 그녀의 입에서 비밀이 새
어 나갈 것을 두려워해 죽였는지, 아니면 양심의 가책을 이기지 못하여
자살한 것인지…….」
「자살이라고요?」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아니, 자살이라고도 생각되긴 하지만, 그전에 머스턴이 죽었소. 열두
시간 동안에 두 사람이 자살한다는 건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일이
오!
첫째, 그토록 호탕하고 당당한 사나이가 어린아이 둘을 자동차로 치어
죽인 일쯤으로 자살할 리 있겠소! 더욱이 독약을 언제 손에 넣을 수 있었
겠소. 청산가리는 조끼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다닐 물건이 아니오.」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가지고 다니지 않지요. 갖고 다니는 것은 벌집
을 채집하는 사람 정도요.」
「정원사나 지주겠군요. 엔터니 머스턴은 가지고 다니지 않소. 아무튼
청산가리의 출처는 충분히 조사할 필요가 있소. 머스턴은 이곳에 오기 전
부터 자살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든가, 그렇지 않으면――.」
암스트롱은 롬버드를 재촉했다.
「그렇지 않으면?」
롬버드는 쓴웃음을 지었다.
「왜 나에게만 말을 시키는 거요. 이미 입 밖으로 내어 말했잖소. 앤터
니 머스턴은 물론 살해된 거요!」

암스트롱 의사는 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리고 로저스의 아내는?」
롬버드는 느릿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만일 그녀가 죽지 않았다면, 앤터니 머스턴의 자살을 인정해도 좋소.
만일 앤터니 머스턴이 죽지 않았다면, 로저스의 아내는 자살한 것으로 믿
었을 거요.
또 로저스가 자기 아내를 죽였다는 이야기도, 머스턴이 죽지 않았다면
간단히 믿을 수 있소. 그러나 우리들의 먼저 설명해야 할 것은 짧은 시간
에 두 사람이 왜 죽었는가 하는 점이오.」
「그 수수께끼를 풀 열쇠가 발견되었소.」
그리고 로저스로부터 들은 인형이 두 개 없어진 사실을 이야기했다.
롬버드가 말했다.
「확실히 조그만 인디언 인형이 있었지요. 어젯밤 식사 때는 분명 열
개 있었소. 그것이 여덟 개가 되었단 말이오?」
암스트롱은 자장가의 처음 두 구절을 읊었다.
「열 인디언 소년이 식사하러 갔다. 한 소년이 목이 메어 아홉 소년이
되었다. 아홉 인디언 소년이 늦게까지 일어나 있었다. 한 소년이 잠들어
여덟 소년이 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필립 롬버드는 희미하게 웃음지으
며 담배를 내던졌다.
「우연으로 여기기에는 너무도 꼭 들어맞는군요! 앤터니 머스턴은 확실
히 식사 뒤 목이 메어 죽었소. 로저스 아내는 깊이 잠들어 깨어나지 못했
지요.」
「그래서?」
「미치광이의 장난이오! UN 오윈 씨는 미치광이임에 틀림없소!」
암스트롱은 마음이 놓인 듯 깊은 숨을 내쉬었다.
「나도 같은 생각인데, 로저스에게 물어 보니 이 섬에는 우리와 로저스
부부 말고는 아무도 없다고 하오.」
「그건 틀리오! 그가 거짓말하고 있는지도 모르오!」
암스트롱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가 거짓말한다고는 생각지 않소. 그는 두려움에 떨고 있소.
거짓말 같은 걸 할 리 없소.」
롬버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아침 모터 보트가 오지 않은 것도 오윈 씨가 꾸민 계획대로요.
인디언 섬은 오윈 씨가 일을 끝낼 때까지 교통이 끊어질 거요. 그러나 한
가지 오윈 씨가 잊은 게 있소.」
「무엇이오?」
「이 섬은 거의 벌거벗은 바위뿐이오. 수색하기가 쉽소. 곧 UN 오윈
씨를 잡아내야 하오.」
의사는 경고하듯 말했다.
「그러나 위험한 인물이오.」
필립 롬버드는 웃었다.
「위험하다고? 농담이 아니오! 놈을 잡았을 때에는 내가 위험한 인물이
지! 블로어를 한편으로 끌어들이는 게 좋겠소. 이럴 때 쓸모있는 사람이
오.
여자들에게는 이야기하지 맙시다. 장군은 머리가 돌았고, 워그레이브
판사는 경원해야 하오. 우리들 셋이면 충분할 거요.」


제 목 : [애-크]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8
올린이 : 매직라인(한창욱 ) 96/11/24 21:34 읽음 : 73 [7m관련자료 있음(TL)[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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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수색

블로어는 곧 한편이 되었다. 그는 말했다.
「다만 한 가지 찬성할 수 없는 일이 있소. 그 인형 말인데, 사람을 죽
이려는 이가 그런 바보 짓을 할 리 있겠소. 대체로 오윈이 써놓은 각본은
자기 손을 쓰지 않고 목적을 이루려는 게 아니겠소?」
「무슨 뜻이오?」
「이런 거요. 어젯밤 레코드를 듣고 머스턴이 머리가 이상해져 자살했
소. 로저스는 옛날 일이 마음에 걸려 자기 아내를 죽여 버렸소. 이 같은
각본이 아닐까 생각되오.」
암스트롱은 머리를 저으며 청산가리에 대한 것을 강조했다. 블로어도
찬성했다.
「그렇군, 그것을 잊고 있었소. 아무나 갖고 다니는 게 아니지요. 그런
데 어떻게 그의 글라스에 넣었을까.」
롬버드가 말했다.
「나도 그 일을 생각해 보았소. 머스턴은 어젯밤 위스키를 여러 잔 마
셨소. 마지막 한 잔과 그전에 마신 한 잔 사이에 상당한 시간이 있었소.
그동안 창문 옆의 작은 테이블에는 아무도 없었고, 창문이 열려 있었소.
청산가리를 글라스에 넣으려 했다면 못 할 것도 없었소.」
블로어는 믿을 수 없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들 눈에 띄지 않게 말이오?」
「우리는 다른 일에 주의를 빼앗기고 있었으니까요.」
암스트롱이 입을 열었다.
「그렇소. 우리는 흥분해서 방안을 걸어 다니고 있었소. 모두들 죄를
문초당하여 자기 일만 생각하고 있었지요. 글라스에 약을 넣으려 했다면
기회는 충분히 있었소.」
블로어가 어깨를 으쓱했다.
「어떻든 청산가리는 정말로 들어 있었소. 그럼, 출발합시다. 누가 권총
을 갖고 있소? 아마도 갖고 있지 않겠지만…….」
롬버드가 말했다.
「나는 갖고 있소.」
그는 주머니를 두드려 보았다.
블로어가 눈을 크게 떴다.
「언제나 갖고 다니오?」
「대개 갖고 다니지요. 꽤 위험한 상황에 맞닥뜨려 있으니까.」
「그렇군. 그러나 오늘이 가장 위험한 날이 되겠지. 미치광이가 숨어
있다면 틀림없이 엄청난 도구를 갖고 있을 테니까. 물론 날붙이 한두 개
쯤은 당연히 갖고 있으리라 여기는 게 좋을거요.」
암스트롱이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아니, 블로어, 살인광이란 맞닥뜨리고 보면 뜻밖에도 양순한 인간이
오.」
블로어가 말했다.
「그러나 이 녀석은 그런 인간이 아닌 것 같소.」

세 사람은 섬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간단한 일이었다.
육지로 향한 북쪽은 깎아지른 절벽이었다. 나무 한 그루 없어 사람이 숨
을 만한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세 사람은 면밀하게 계획을 세워 높은 곳에서부터 바닷가로 주의깊게
살펴 나갔다. 바위 그늘에 동굴이라도 있지 않을까 여겼으나 그 비슷한
것도 없었다.
그들은 매커서 장군이 바다를 바라보며 앉아 있는 바닷가로 나왔다. 아
름다운 파도가 바위에 부딪쳐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낭만적인 풍경이
었다.
노장군은 수평선을 바라보며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그들이 곁
으로 온 것도 보이지 않는 듯했다.
블로어는 생각했다.
(아무래도 장군은 제정신이 아니다. 최면술에라도 걸려 있는 게 아닐
까?)
그는 헛기침을 하고 큰소리로 말을 걸었다.
「장군, 멋진 곳을 찾아내셨군요.」
매커서는 어깨너머로 뒤를 흘끗 보았다.
「이제 시간이 없소. 조금밖에 없소. 방해하지 말아 주오.)
「방해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섬을 한바퀴 돌아보고 있습니다. 누군
가 숨어 있지 않나 생각되어서요.」
장군은 이마를 찌푸렸다.
「당신들에게 아직 모를 일이겠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소. 어서 돌아가
주오.」
블로어는 재빨리 물러나 앞서간 두 사람 뒤를 따라갔다.
「이상한데……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군.」
롬버드가 호기심에 끌려 물었다.
「뭐라고 말했소?」
블로어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제 시간이 없다느니, 방해하지 말아 달라느니…….」
암스트롱 의사는 까다로운 표정을 지으며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쩌면…….」

섬 수색이 끝났다. 세 사나이는 섬의 가장 높은 곳에 서서 육지를 바라
보았다. 배는 한 척도 나와 있지 않았다.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다.
롬버드가 말했다.
「고기잡이배가 나오지 않았소. 태풍이 부는군. 마을이 보이지 않는 게
섭섭하오. 신호도 할 수 없으니.」
블로어가 말했다.
「오늘 밤 신호불을 피웁시다.」
롬버드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헛일일 거요. 아무 효과도 없을 테니까.」
「어째서?」
「신호가 있어도 모른체 하도록 시켜 놓았을 게 틀림없소. 내기를 했느
니 뭐니 말했을 테지.」
「그런 말을 마을 사람들이 믿을까요?」
「진실을 말하는 것보다 오히려 더 믿을걸. 손님을 모두 죽일 때까지
교통을 끊는다고 하면 믿겠소?」
암스트롱 의사가 말했다.
「아직 믿어지지 않는 점도 있지만, 그러나…….」
롬버드가 그 말을 받았다.
「그렇소! 믿을 수 없다 하더라도 그건 사실이오!」
블로어는 절벽에서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여기는 내려갈 수 없겠군.」
암스트롱은 고개를 저었다.
「어렵소. 절벽이니까. 그리고 숨을 곳도 없고.」
「절벽에 굴이 있을지도 모르오. 배가 있으면 섬 둘레를 돌아 볼 텐데
…….」
롬버드가 말했다.
「배가 있다면 지금쯤 육지 쪽으로 절반쯤 가고 있을 거요!」
「과연, 그렇군.」
갑자기 롬버드가 말했다.
「어쨌든 이 절벽을 확인해 보는 게 좋겠소. 당신들이 밧줄을 잡고 있
으면 내가 내려가 보겠소.」
블로어가 곧 찬성하고 밧줄을 가지러 저택으로 달려갔다.
롬버드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바람은 더욱 세
차게 불어대고 있었다. 그는 옆으로 돌아서서 암스트롱을 보았다.
「말없이 뭘 그렇게 생각하고 있소?」
암스트롱은 조용히 말했다.
「매커서가 정말로 미쳤는지 어떤지 생각하고 있는중이오.」

베러는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그녀는 애써 에밀리 브랜트를 피했
다. 에밀리 브랜트는 저택 모퉁이의 바람이 불어오지 않는 곳에 의자를
내놓고 앉아 뜨개질하고 있었다.
베러는 그녀의 모습을 상상할 때마다 해초가 머리에 얽혀 있는 익사자
의 푸르퉁퉁한 얼굴이 눈에 떠올랐다. 예전에는 아름다웠으나 지금은 인
간의 정도 공포도 모르는 얼굴이……그러나 에밀리 브랜트는 침착한 태
도로 예의바르게 의자에 앉아 뜨개질하고 있었다.
테라스의 의자에는 워그레이브 판사가 앉아 있었다. 머리가 목 안으로
기어 들어가 버린 듯 보였다.
베러는 그 모습을 보고 피고석에 있는 아름다운 머리를 한 젊은이의
모습을 떠올렸다. 푸른 눈에 공포의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에드워드 시튼이었다. 판사는 지금도 검은 모자를 쓰고 판결을 내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베러는 바다를 향하여 섬 끝으로 걸어 나갔다. 매커서 장군이 수평선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장군은 베러가 가까이 오는 것을 알고 그녀 쪽으
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에 힐문과 허용이 뒤섞인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것이 그녀를 놀라게 했다. 장군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
다. 그녀는 생각했다. 이상한 눈초리를 하고 있구나. 마치 내 비밀을 알고
있는 듯이…….
장군은 말했다.
「당신이었군! 당신도 여기에…….」
베러는 매커서 곁에 앉았다.
「여기가 마음에 드세요? 여기서 바다를 바라보는 것이…….」
장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마음이 가라앉소. 기다리기 좋은 곳이지.」
「기다린다고요? 뭘 기다리는 거지요?」
「종말이오. 당신도 알고 있을 거요. 우리는 모두 종말을 기다리고 있
는 거요.」
베러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매커서는 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이 섬을 떠날 수 없소. 그렇게 되어 있소. 물론 당신도 그것
을 알고 있을 거요. 다만 당신이 모르고 있는 것은 구원이겠지.」
「구원?」
「그렇소. 당신은 아직 젊소. 모르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그러나 모든
것은 다가오고 있소! 이제 무거운 짐을 지지 않아도 좋다는 것을 알았을
때 구원의 손길이 찾아오는 거요.」
베러는 손가락을 가늘게 떨며 말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그녀는 갑자기 눈앞의 늙은 군인이 무서워졌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나는 레슬리를 사랑하고 있었소.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소.」
「레슬리――부인이신가요?」
「그렇소, 아내요.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소. 과장이 아니오. 아름
답고 쾌활한 여자였소.」
그는 잠시 묵묵히 있었다.
「그렇소, 나는 레슬리를 사랑하고 있었소. 그래서 한 짓이오.」
베러가 말했다.
「그럼…….」
매커서 장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와서 부정해야 쓸데없지. 우리들은 모두 죽는 거요. 나는 리치
먼드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소. 보기에 따라서는 살인이겠지. 이상한 일이
오. 내가 살인을 저지르다니! 그러나 그때는 살인이라고 생각지 않았소.
후회하지도 않았소.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했었지. 그러나 뒷날이 되어…….
베러는 굳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뒷날이 되어?」
그는 넋나간 표정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괴로운 표정이었다.
「나는 모르오, 레슬리가 알고 있었는지 어떤지 나는 모르오. 아마도
모르고 있었겠지. 그러나 그녀는 이미 내게서 멀리 떠나 버리고 말았소.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그리고 죽어 버렸소. 나는 혼자가 되었소…….
베러는 되풀이했다.
「혼자…….」
그 말은 바위에 부딪쳐 다시 그녀의 귀에 되돌아왔다.
매커서 장군이 말했다.
「종말이 오면 당신도 반드시 기뻐할 거요.」
베러는 일어섰다.
「무슨 말씀인지 나는 모르겠어요.」
「나는 알고 있소. 알고 있단 말이오…….」
「아니예요, 알 리 없어요.」
장군은 다시 바다를 바라보았다. 베러가 곁에 있는 것을 잊어버린 듯했
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레슬리…….」

블로어가 밧줄을 팔에 안고 돌아오니 암스트롱은 처음 자리에 그대로
서서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블로어가 물었다.
「롬버드는?」
암스트롱은 곧 대답했다.
「무언가 조사할 게 있다면서 갔소. 곧 돌아오겠지. 블로어, 나는 걱정
이 되오.」
「누구나 걱정하고 있소.」
의사는 초조한 모습으로 손을 내저었다.
「물론 그것은 알고 있소. 그 일이 아니오. 매커서에 대한 일이오.」
「그가 어떻단 말이오?」
「우리들이 찾는 것은 미치광이인데 매커서는…….」
「살인광이라는 거요?」
「그렇다고는 할 수 없소. 신경과는 내 전문이 아니니까. 그와 대화를
나눠 본 것도 아니고, 그런 관점에서 관찰한 바도 없고…….」
블로어는 아직 그 말이 가슴에 와닿지 않는 듯 말했다.
「확실히 머리는 돈 것 같지만…….」
암스트롱은 블로어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마 당신 말대로일 거요. 아무튼 누군가가 이 섬에 숨어 있소. 오,
롬버드가 왔군.」
그들은 밧줄을 단단히 매었다. 롬버드는 그리 힘들이지 않고 절벽을 내
려갔다. 그는 말했다.
「나는 되도록 밧줄에 의지하지 않고 내려가겠소. 밧줄이 갑자기 팽팽
해지는 것에 주의해 주오.」
롬버드가 내려가는 것을 보며 블로어가 말했다.
「마치 고양이 같군.」
그 목소리에는 묘한 울림이 있었다.
암스트롱이 말했다.
「등산 경험이 있나 보군요.」
「그럴지도 모르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이윽고 전직 경감이 말했다.
「참으로 묘한 사나이요.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아오?」
「어떻게?」
「저 사나이는 나쁜 녀석이오.」
암스트롱은 믿어지지 않는 듯 말했다.
「어떤 점에서?」
「어떻다고 확실히 말할 수는 없지만, 나는 그를 믿지 않소.」
「여러 가지 일을 경험한 것 같은데…….」
「그 속에는 밝은 데 내놓을 수 없는 일이 틀림없이 있을 거요. 당신은
권총을 갖고 다닌 적 있소?」
「내가? 농담 마오. 한 번도 없소.」
「롬버드는 왜 갖고 다닐까요?」
「아마 습관이겠지요.」
블로어는 코방귀를 뀌었다.
갑자기 밧줄이 팽팽해졌다. 그들은 힘을 합해 밧줄을 잡았다. 밧줄은
곧 늦춰졌다.
블로어가 말했다.
「습관에도 여러 가지가 있지요. 롬버드는 필요도 없는 곳에 권총을 가
지고 왔소. 그리고 요리용 석유 난로와 슬리핑 백과 구충용 파우더까지.
이런 곳에 오는 데 권총을 갖고 다닌다는 습관은 들어 본 적 없소. 그런
것은 소설 속에나 있는 일이지요.」
암스트롱 의사는 난처한 듯한 얼굴로 머리를 저었다.
그들은 절벽을 내려다보며, 롬버드가 수색하는 모습을 지켜 보았다. 수
색은 거의 끝난 것 같았고, 수확이 없음도 금방 알 수 있었다.
이윽고 롬버드가 올라왔다. 그는 땀을 닦으며 말했다.
「다음은 저택 안 수색만 남았소.」

저택 안 수색도 간단했다. 그들은 부속 건물부터 살펴 나갔다. 부엌 찬
장에 있던 로저스 부인의 양재용 자가 요긴하게 쓰였다.
비밀히 숨을 만한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근대 건축은 모든게 밝고 간
소하게 되어 있었다.
1층의 수색이 끝나 2층으로 올라가려고 할 때, 로저스가 칵테일을 담은
쟁반을 테라스로 가져가는 모습이 층계참 창문으로 내다보았다.
필립 롬버드가 말했다.
「저렇게 열심히 일하는 하인은 본 적이 없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하고 있군.」
암스트롱이 찬성했다.
「하인으로선 최고요. 내가 어디에든 추천해 줘야지.」
블로어가 말했다.
「부인도 훌륭한 요리사였지. 어젯밤 그 식사…….」
그들은 첫번째 침실로 들어갔다. 5분 뒤 그들은 층계참에서 얼굴을 마
주보았다. 아무도 숨어 있지 않았다. 숨을 만한 곳도 없었다.
블로어가 말했다.
「저곳에 조그마한 층계가 있소.」
암스트롱 의사가 말했다.
「하인들 방으로 올라가는 층계요.」
블로어가 말했다.
「지붕 밑에 물탱크가 있을 거요. 숨을 곳이 있다면 거기 말고는 없소!
그때 머리 위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 왔다. 확실히 누군가가 발소리를
죽이며 걷고 있는 소리였다. 암스트롱이 블로어의 팔을 잡았다.
롬버드가 손가락을 입에 갖다대며 말했다.
「쉿, 조용히――저 소리는…….」
다시 발소리가 들렸다. 틀림없이 누군가가 걷고 있는 것이었다.
암스트롱이 속삭였다.
「이 위 침실이오. 로저스 부인의 시체가 있는 방이오!」
블로어가 소곤거렸다.
「숨기에 가장 좋은 장소요, 아무도 들어갈 리 없으니. 가봅시다. 발소
리를 내면 안 되오.」
그들은 발소리를 죽이며 층계를 올라갔다. 침실문 밖의 좁은 복도에서
그들은 다시 걸음을 멈췄다. 틀림없이 누군가가 있었다. 부스럭거리는 소
리가 들려 온 것이다.
블로어가 속삭였다.
「됐소?」
그는 문을 힘차게 열어제치고 뛰어들었다. 다른 두 사람도 곧 뒤따랐
다. 그리고 세 사람 모두 놀라서 뻣뻣이 서버렸다. 로저스가 두 손으로
옷을 안고 서 있었다.

블로어가 맨 먼저 침착을 되찾았다.
「미안하오, 로저스. 발소리가 들려서…….」
로저스는 암스트롱 쪽을 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물건을 옮기려고 했습니다. 2층의 빈방을 쓸까해서지요.
가장 작은 방을…….」
의사가 대답했다.
「좋고말고. 옮기시오.」
그는 시트가 덮여져 침대에 누워 있는 시체를 보지않으려 애썼다.
로저스가 말했다.
「고맙습니다.」
그는 짐을 끌어안고 내려갔다. 암스트롱은 침대 곁으로 가서 시트를 젖
히고 편안히 잠든 듯 죽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미 공포의 흔적은 없었
다.
「해부해 보면 무슨 약을 먹었는지 알 수 있소.」
그리고 나서 암스트롱은 두 사람 쪽을 보며 말했다.
「이제 수색은 그만둡시다. 수확이 없는 듯하니까.」
블로어는 낮은 맨홀의 나사를 풀려 하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그런데 로저스 녀석은 조금도 발소리를 내지 않는군. 조금 전에는 정
원에 있었고, 아무도 올라오는 발소리를 듣지 못했는데…….」
롬버드가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방안에 수상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오.」
블로어는 캄캄한 구멍 속으로 사라졌다. 롬버드는 주머니에서 회중전등
을 꺼내 켜들고 그 뒤를 따랐다.
5분 뒤에 세 사람은 입구에 서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세 사람
모두 먼지를 뒤집어쓰고 머리에는 거미줄이 엉겨 붙어 있었다.
그들 여덟 사람 말고는 섬에는 아무도 없었다.


제 목 : [애-크]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9
올린이 : 매직라인(한창욱 ) 96/11/24 22:24 읽음 : 74 관련자료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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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우리들 가운데


롬버드가 말했다.
「우리들 생각이 잘못되어 있소. 우연히 두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터무
니없는 생각을 해버린 거요.」
암스트롱이 천천히 말했다.
「하지만 나는 의사요. 자살에 대해서도 전혀 지식이 없지 않소. 앤터
니 머스턴은 자살할 타입이 아니오.」

롬버드는 무언가 생각에 잠겨 말했다.
「과실이 아닐까요?」
블로어가 말했다.
「하지만 과실이라 해도 묘한 과실이오.」
세 사람 모두 잠시 묵묵히 있었다. 그리고 나서 블로어가 말했다.
「그 부인의 경우는 과실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로저스 부인?」
「그렇소. 있을 수 있는 일이오. 과실인지도 모르오.」
롬버드가 말했다.

「어떤 과실?」
블로어는 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붉은 벽돌 같은 얼굴빛이 더욱 짙
어졌다. 그리고 말하기 거북한 듯 빠른 말투로 지껄였다.
「암스트롱, 당신은 그녀에게 약을 주었겠지요?」
「약을?」
암스트롱 의사는 블로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젯밤에 말이오. 수면제를 주었지요?」
「주었소. 보통 수면제였소.」

「어떤 것이었지요?」
「트리오날이었소. 위험은 결코 없소.」
블로어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암스트롱, 화내면 안 되오. 어젯밤 잘못해서 양을 너무 많이 주지는
않았소?」
「그런 일은 없소.」
「그러나 의사도 잘못을 저지르는 수가 있소.」
암스트롱 의사는 딱 잘라 말했다.
「나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소!」
그리고 쌀쌀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아니면 내가 일부러 양을 많이 주었다는 거요?」
필립 롬버드가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두시오. 서로 죄를 덮어씌우려 해봐야 쓸데없는 일이오.」
블로어가 내뱉듯 말했다.
「나는 다만 의사도 실수할 수 있다고 말했을 뿐이오.」
암스트롱 의사는 억지로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의사는 그런 종류의 과실은 저지르지 않소.」
「하지만 당신은 전에도 한 번 그랬잖소. 그 레코드의 소리가 사실이라
면…….」
암스트롱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필립 롬버드가 곧 성내며 블로어에게
말했다.

「왜 그렇게 공격적인 태도로 나오오! 우리들은 모두 같은 운명에 빠져
있소. 서로 돕지 않으면 안 되오. 당신도 위증죄를 문초받고 있잖소.」
블로어는 주먹을 불끈 쥐고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위증이라고! 그것은 굉장한 거짓말이오. 당신이 그런 말을 한다면 나
도 묻고 싶은 게 있소. 당신에게 묻겠는데…….」
「나한테?」
「그렇소. 섬에 놀러 오면서 권총은 왜 가져왔소?」
「그게 알고 싶소?」
「알고 싶소, 롬버드.」

롬버드는 엷은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블로어, 당신도 꽤 영리하군. 나는 처음부터 사건이 일어날 것을 예
상하고 있었소.」
「어젯밤에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잖소?」
롬버드는 머리를 저었다.
「우리들에게 숨기는 게 있지요?」
「그렇소.」
「이야기해 줄 수 없소?」
롬버드는 천천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도 여러분과 같은 이유로 이곳에 온 것같이 보였겠지만, 정말은 그
렇지 않소. 조니라는――세례명은 모리스인데――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나
이가 나타나 이 섬으로 와서 방심하지 않고 지켜 주면 1백 기니를 주겠
다고 했소. 내가 적임자라는 것이었소.」
블로어가 초조한 듯 재촉했다.
「그래서?」
「그뿐이오.」
암스트롱 의사가 말했다.
「그러나 그 사나이는 좀더 자세히 이야기했을 텐데…….」

「아니, 그 이상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소. 미심쩍어 해도 어쩔 수 없
소. 그것밖에 말하지 않았으니까. 마침 나는 돈이 궁해 승낙한 거요.」
블로어는 아직 믿어지지 않는 듯했다.
「왜 어젯밤에 말하지 않았소.」
롬버드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당신――어젯밤 일이 우연히 아닌지 어떻게 아오? 나는 오직 있는
그대로만을 이야기했을 뿐이오.」
암스트롱 의사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이제 그렇게 생각할 수 없소.」
롬버드의 표정이 굳어졌다.
「물론 이제는 그렇게 생각지 않소. 나도 당신과 같은 입장이오. 1백
기니는 오윈 씨가 나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먹이였소. 모두들 함정에
걸린 거요.
틀림없소! 로저스 부인의 죽음! 앤터니 머스턴의 죽음! 없어진 인디언
인형! 오윈 씨의 손이 뚜렷이 보이고 있소! 모습만 보이지 않을 뿐이오!
아래층에서 점심 식사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2

로저스는 식당문 옆에 서 있었다. 세 사나이가 층계를 내려가자 그는
한두 걸음 앞으로 나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뭘 드시겠습니까? 차가운 햄과 소 혓바닥, 그리고 감자튀김과 치즈의
통조림과 과일을 내놓았습니다.」
롬버드가 말했다.
「좋소. 식량은 충분히 저장되어 있겠지요?」
「통조림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육지와 교통이 끊겼을 때를 대비한 준
비입니다.」

롬버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로저스가 세 사람의 뒤를 따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프레드 내러컷이 오지 않는 게 마음에 걸립니다.」
롬버드가 말했다.
「그렇군. 더욱이 오늘 오지 않은 게 수상하오.」
에밀리 브랜트가 식당으로 들어왔다. 털실 뭉치를 떨어뜨렸는지 정성들
여 고쳐 감고 있었다. 그녀는 테이블에 앉으며 말했다.

「날씨가 바뀌었어요. 바람이 세차게 불어 바다에 파도가 일고 있는 게
보여요.」
워그레이브 판사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그는 짙은 눈썹 밑으로 모두
를 재빨리 둘러보았다.
「여러분, 오늘 아침에 무척 운동을 많이 한 것 같군요.」
그의 목소리에는 비꼬는 투가 있었다.
베러 크레이슨이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다.
「미안합니다. 기다리셨지요?」
에밀리 브랜트가 말했다.

「당신이 가장 늦게 온 건 아니예요. 매커서 장군이 아직 오지 않았어
요.」
그들은 둥근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로저스가 에밀리 브랜트에게 말을
걸었다.
「먼저 드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장군님이 오실 때까지 기다리겠
습니까?」
베러가 말했다.
「바닷가에 계세요. 그곳까지는 종소리가 들리지 않을 거예요. 게다가
……어쩐지 태도가 좀 이상했어요.」
「가서 알리고 오겠습니다.」
로저스의 말에 암스트롱 의사가 일어섰다.
「내가 갔다 오겠소. 식사를 시작하십시오.」
그는 밖으로 나갔다. 등뒤에서 로저스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차가운 소 혓바닥 고기로 할까요, 차가운 햄을 드릴까요?」

둘러앉은 다섯 사람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창 밖에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불어닥치더니 잠잠해졌다.
베러가 몸을 떨며 말을 꺼냈다.
「태풍이 오고 있어요.」
블로어가 말했다.
「어제 플리머스에서 올 때 기차 안에 이상한 노인이 한 사람 있었습
니다. 태풍이 온다고 말했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 늙은 뱃사람이 잘 맞
추었군요.」
로저스는 테이블을 돌면서 고기 접시를 모으고 있었다. 별안간 그는 접
시를 든 채 멈춰 섰다. 그리고 겁에 질린 목소리로 외쳤다.
「누가 뛰어오고 있습니다!」
발소리는 다른 사람에게도 들렸다. 테라스를 달려오는 발소리였다. 모
두들 약속한 듯 일어나 문 쪽을 바라보았다. 암스트롱 의사가 숨을 헐떡
이며 나타났다.
「매커서 장군이…….」
「죽었군요!」
베러의 목소리였다.
「그렇소, 죽어 있소!」
긴 침묵이 이어졌다. 일곱 사람은 할말을 잃은 듯 서로 얼굴을 마주 보
았다.

노장군의 시체가 저택으로 날라져 왔을 때 태풍이 일기 시작했다. 모두
들 홀에 서 있었다. 비가억수로 퍼붓기 시작했다.
블로어와 암스트롱이 무거운 시체를 뗘메고 2층 층계를 올라갈 때, 갑
자기 베러 크레이슨이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은 그들이 아까 나왔을 때
그대로였다. 디저트가 손도 대지 않은 채 사이드 테이블 위에 그대로 놓
여 있었다.
베러는 식탁 옆으로 갔다. 그녀 바로 뒤에 로저스가 조용히 들어왔다.
그는 베러의 모습을 보고 말했다.
「실은 인형의 수를…….」
베러는 스스로도 놀랄 만큼 큰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상상한 대로예요! 자, 보세요, 일곱 개밖에 없어요!」

메커서 장군은 그의 침대에 눕혀졌다. 암스트롱은 검진을 끝내고 아래
층으로 내려갔다.
모두들 응접실에 모여 있었다. 에밀리 브랜트는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베러 크레이슨은 창가에 서서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블로어는 몸
을 굽히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롬버드는 침착하지 못한 모습으로 방안을
거닐고 있었다.
방 한구석에서는 워그레이브 판사가 안락의자에 몸을 깊숙이 파묻고
앉아 있었다. 그의 눈은 반쯤 감겨 있었으나, 의사의 모습을 보자 눈을
뜨며 또렷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되었소?」
암스트롱의 얼굴빛은 몹시 핼쑥했다.
「심장마비도 아무것도 아니오. 뒷머리를 얻어맞은 거요.」
여기저기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판사는 다시 뚜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흉기가 있었소?」
「아니,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틀림없겠지요?」
「결코! 틀림없습니다.」
워그레이브 판사는 조용히 말했다.
「이로써 우리들의 입장이 확실해졌소.」
그 자리의 주도권은 확실히 워그레이브 판사가 쥐고 있었다. 그는 오전
내내 테라스 의자에 앉아 있었을 뿐이었으나 오랜 경험으로 몸에 밴 위
엄이 어느새 그로 하여금 그들을 지휘하는 지위에 올려놓았다.
워그레이브 판사는 법정을 열 때처럼 헛기침을 하고 입을 열었다.
「오전 내내 나는 테라스 의자에 앉아 여러분의 행동을 보고만 있었소.
나는 그 목적을 알고 있었소. 여러분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살인범을 찾고
있었던 거요.」
필립 롬버드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아마 여러분은 나와 똑같은 결론에 이르렀을 거요. 즉 앤터니 머스턴
과 로저스 부인의 죽음은 사고도 자살도 아니라는 거요. 또 오윈 씨가 우
리들을 이 섬으로 초청한 목적에 대해서도 결론을 얻었으리라 보오.」
블로어가 내뱉듯 말했다.
「녀석은 미치광이오!」
「아마도 그렇겠지요. 그러나 그가 어떤 인간이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한 가지밖에 없소. 우리의 생명을 지키는 일이오.」
암스트롱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섬에는 우리들밖에 아무도 없습니다!」
판사는 얼굴을 문지르며 조용히 말했다.
「당신 말은 일단 들어맞소. 아침부터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소.
실은 수색해도 아무 소용없는 짓이라고 말하려 했었소. 그러나 내가 믿는
바에 의하면 오윈 씨는 틀림없이 이 섬에 있소.
그가 법률의 손이 미치지 않는 범죄를 들춰내어 우리를 벌주기 위해서
는 방법이 하나밖에 없소. 우리와 함께 이 섬으로 오는 길밖에 다른 방법
은 없는 거요. 오윈 씨는 우리들 가운데 한 사람이오!」
「그럴 수가…….」
베러의 목소리였다. 신음하는 듯한 소리였다.
판사는 그녀에게로 날카로운 눈길을 던졌다.
「놀랄 것 없소. 우리는 사실을 뚜렷이 보지 않으면 안 되오. 지금 우
리는 모두 무서운 위험에 맞닥뜨려 있소. 우리들 가운데 한 사람이 UN
오윈이오. 그것이 누군인지는 알 수 없소.
열 명 가운데 세 사람은 이미 그 혐의에서 풀려 났소. 머스턴, 로저스
부인, 매커서 장군 세 사람은 이제 의심할 여지가 없소. 남은 것은 일곱
사람이오. 이 일곱 사람 가운데 하나가 오윈 씨인 거요.」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모두를 둘러보았다.
「내 말이 인정하오?」
암스트롱이 말했다.
「믿어지지는 않지만 당신이 지금 이야기한 대로겠지요.」
블로어가 말했다.
「틀림없습니다. 더욱이 나는 그에 대해 짐작이 갑니다. 나는…….」
워그레이브는 당황하며 손을 들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 기다리시오. 먼저 모두가 내 말을 믿는지 어떤지 확인해야 하오.
에밀리 브랜트가 뜨개질하던 손을 멈추고 말했다.
「당신 말씀이 옳아요. 틀림없이 우리들 가운데 한 사람이 악마에게 홀
려 있는 거예요.」
배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믿어지지 않아요.」
워그레이브 판사는 웃었다.
「롬버드, 자네는?」
「나는 인정합니다.」
판사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증거를 조사해 봅시다. 먼저 우리들 가운데 의심할 만한 사람
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거요. 블로어 씨,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블로어가 말했다.
「롬버드는 권총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어젯밤 사실을 말하지 않았어
요. 그것은 자신도 시인하고 있습니다.」
롬버드는 차갑게 웃었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설명하지요.」
그는 섬으로 오게 된 사정을 간단히 이야기했다.
블로어가 날카롭게 말했다.
「증거가 어디 있소? 당신 이야기를 입증할 만한 건 아무것도 없잖소?
판사는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모두 그와 똑같은 상태에 놓여 있소. 저마다의
발언을 토대로 하여 이야기를 진행시킬 수밖에 없소. 그러려면 한 가지
방법밖에는 없다고 생각하오. 우리들이 갖고 있는 증거만으로 혐의가 풀
리는 사람을 하나씩 제외해 가는 거요.」
암스트롱 의사가 곧 입을 열었다.
「나는 의사로서 세상에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소. 그런 혐의를 받을
만한 기억은 없소.」
다시 판사의 손이 올라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나도 세상에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오. 그러나 그것은 아무 증거도 되
지 않소. 의사도 미칠 수 있소. 판사도 그렇고. 따라서…….」
그리고 블로어 쪽을 보며 말했다.
「경감도 역시 그렇소.」
롬버드가 말했다.
「그러나 여자는 제외해도 좋잖겠습니까?」
판사는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그리고 법정에서 닦여진 격결한 목소리
로 말했다.
「그렇다면 여자는 살인광이 되지 않는다는 거요?」
롬버드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물론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러나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판사는 여전히 격렬한 말투로 암스트롱에게 말했다.
「매커서 장군을 죽인 범인이 여자일 가능성이 있소, 암스트롱?」
의사는 냉정하게 대답했다.
「있습니다. 곤봉 같은 알맞은 흉기가 있다면 여자라도 죽일 수 있습니
다.」
「특히 심한 타격이 있었소?」
「없습니다.」
판사는 자라 같은 목을 움직이며 말했다.
「다른 두 사건은 약품에 의한 살인이오. 어떤 체력을 필요로 하지 않
는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소.」
베러가 성난 듯 외쳤다.
「지독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판사의 눈이 조용히 베러에게로 돌려지더니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인간의 품성을 속속들이 꿰뚫어 보는 듯한 감정없는 눈이었다.
베러는 생각했다. 저 눈은 나를 용의자로 보고 있다. 판사는 나를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고 그녀는 놀라움을 느꼈다.
판사는 조용히 말했다.
「놀랄 것 없소. 나는 당신에게 죄를 씌우려는 것은 아니오.」
그리고 나서 그는 에밀리 브랜트 쪽을 보았다.
「미스 브랜트, 우리들 모두가 용의자라고 하는 내 주장에 기분나빠 하
지 않겠지요?」
에밀리 브랜트는 계속 뜨개질만 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래를 내려다본
채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으려 한다는 혐의를 받는다는 건 내 성격
을 아는 사람들에게 더없이 바보스러운 일로 여겨질 거예요.
하지만 우리는 모두 남남이니까 완전한 증거가 없으면 혐의를 받지 않
을 수 없겠지요. 우리들 가운데 악마가 있는 것은 확실한 일이에요.」
판사가 말했다.
「그럼, 여기서 하나의 결론이 나왔소. 성격이나 지위만으로는 혐의를
받지 않을 수 없소.」
롬버드가 말했다.
「로저스는 어떻습니까? 그 사나이는 제외해도 좋다고 생각하는데요.」
판사는 그를 지켜 보며 말했다.
「어떤 까닭에서?」
「첫째로, 이런 일을 계획할 두뇌가 없습니다. 게다가 아내가 피해자의
한 사람입니다.」
판사는 다시 눈썹을 찌푸렸다.
「내가 현직에 있을 때 아내를 죽인 혐의로 법정에 나와 유죄 선고를
받은 사람이 여럿 있었소.」
「그건 알고 있습니다. 아내를 죽인 살인자는 흔히 있지요. 아내가 비
밀을 폭로할 우려가 있다든지, 함께 있는 게 싫어졌다든지, 따로 좋아하
는 여자가 생겼다든지 해서 로저스가 그의 아내를 죽였다면 나는 그것을
믿겠습니다. 그러나 그가 오윈 씨로, 묘한 정의감이 발동하여 자기 아내
로부터 없애 버렸다고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당신은 레코드의 내용을 지금 발언한 근거의 하나로 삼고 있소. 우리
는 로저스 부부가 과연 주인을 죽였는지 어떤지 아무 증거도 쥐고 있지
않소.
로저스가 자신의 입장을 우리와 똑같게 하기 위해서 꾸민 연극이었는
지도 모르오. 그 여자가 충격을 받은 건 자기 남편이 정신이 이상한 것을
알고 놀랐기 때문인지도 모르는 일이오.」
「어떻게든 생각하십시오. 어떻든 UN 오윈은 우리들 가운데 한 사람입
니다. 예외는 있을 수 없겠군요. 우리들은 모두 용의자입니다.」
워그레이브 판사가 말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성격, 지위, 가능성에 의해 예외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오. 여기서 이번에는 확실한 증거에 의해 예외를 인정할 것인
가 어떤가를 연구해 보아야 하오.
즉 우리들 가운데 머스턴에게 청산가리를 마시게 할 기회가 없었던 사
람, 로저스 부인에게 정량 이상의 수면제를 줄 기회가 없었던 사람이 있
는가 하는 거요.」
블로어가 눈을 빛내며 몸을 내밀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해야 합니다. 먼저 머스턴인데, 창문 밖에서 글라
스에 독약을 넣은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방안에 있던 사람이
더욱 간단할 수 있었지요.
로저스가 방안에 있었는지 어떤지는 잊어버렸습니다만,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가 했더라도 간단히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잠깐 사이를 두고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 다음은 로저스 부인입니다. 그때 그 여자 곁에 있었던 사람은 로
저스와 의사 선생입니다. 약을 더 많이 마시게 하려 했다면…….」
암스트롱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일어섰다.
「실례의 말이오! 내가 그녀에게 준 수면제의 양은 틀림이 없었소.」
판사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암스트롱, 당신이 화내는 것도 무리가 아니오. 그러나 사실을 인정하
지 않으면 안 되오. 당신이나 로저스가 그녀에게 정량 이상의 수면제를
주려고 했다면 손쉽게 할 수 있었던 거요. 여기서 다른 사람들이 어떠했
는가 볼 때, 내 생각으로는 다른 사람들도 혐의에서 풀려 날 수 없소.」
베러가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녀 곁에 가지도 않았어요! 여러분도 다 알고 계실거예요!」
판사는 잠시 묵묵히 있다가 말을 이었다.
「그때 일을 상기해 보면 이렇소. 틀린 곳이 있으면 바로잡아 주기 바
라오. 로저스 부인이 머스턴과 롬버드에 업혀 소파에 뉘어졌고, 암스트롱
이 진찰을 시작했소.
그는 로저스에게 브랜디를 가져오도록 했소. 여기서 소리가 어디서 들
려 왔었는가 하는 이야기가 나왔소. 우리는 옆방으로 가보았소. 미스 브
랜트만이 의식을 잃은 여자와 방에 남아 있었소.」
에밀리 브랜트의 볼이 붉어졌다. 그녀는 뜨개질하던 손을 멈추고 말했
다.
「실례의 말씀을…….」
감정없는 낮은 목소리로 판사는 말을 이었다.
「미스 브랜트, 우리들이 이 방으로 돌아오니 당신은 소파의 여자 옆에
앉아 있었소.」
에밀리 브랜트가 말했다.
「동정과 연민의 정이 죄악인가요?」
「나는 다만 사실대로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오. 그때 로저스가 브랜디
를 갖고 들어왔소. 물론 방으로 들어오기 전 브랜디에 손댈 수 있었을 것
이오.
로저스 부인이 브랜디를 마시고 나서 로저스와 암스트롱이 그녀를 방
으로 옮겼소. 그곳에서 암스트롱이 수면제를 주었소.」
블로어가 말했다.
「그대로입니다. 즉 판사, 롬버드, 나, 크레이슨 양, 이 네 사람은 관계
가 없습니다.」
판사는 뱀눈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
「그럴까요. 우리는 모든 가능성을 생각지 않으면 안 되오.」
블로어는 워그레이브 판사를 보며 말했다.
「모르겠군요.」
「로저스 부인은 2층의 그녀 방에 누워 있었소. 의사로부터 받은 수면
제가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했소. 의식이 몽롱해졌을 거요.
그때 누군가가 정제나 물약을 가져가 의사의 심부름이라고 하며 건네
주었다면 어떻겠소? 마시지 않았을까요?」
침묵이 흘렀다. 블로어는 발을 한데 모으고 얼굴을 찌푸렸다.
필립 롬버드가 말했다.
「그것은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로부터 오랫동안 우리는 이 방을 떠나
지 않았습니다. 머스턴이 갑자기 쓰러졌기 때문에…….」
「맨 나중에 침실을 떠난 사람인지도 모르오.」
「그러나 그때는 로저스가 방에 있었겠지요.」
암스트롱 의사가 몸을 움직였다.
「아니, 로저스는 식당과 부엌을 치우기 위해 아래층에 있었소. 그때라
면 누구든 그녀의 방에 갈 수 있었소.」
에밀리 브랜트가 말했다.
「그 무렵에는 약효가 나타나 그녀가 깊이 잠들어 있지 않았을까요?」
「아마 그랬겠지요. 그러나 확실한 것은 말할 수 없습니다. 처음 환자
의 경우는 약효의 정도가 언제나 불명확하지요. 수면제의 효과가 나타날
때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체질에 따라 약에 대한
반응이 틀립니다.」
롬버드가 말했다.
「그렇겠지요. 어떻든 의사 일은 우리들이 모르니까요.」
암스트롱은 불끈한 것 같았다. 그러나 다시 감정이 없는 낮은 목소리가
그를 제지했다.
「서로 감정을 자극해 봐야 좋은 결과는 나타나지 않소. 이 사실이야말
로 우리들이 문제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오. 내가 지금까지 말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건 인정되었다고 생각하오.
다만 누가 갔느냐에 따라 그녀의 반응이 틀렸겠지요. 미스 브랜트나 크
레이슨 양이라면 의심받지 않겠지만, 나나 블로어나 롬버드라면 이상하게
생각했을 거요.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의 혐의가 풀리는 것은 아니오.」
블로어가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워그레이브 판사는 조용히 입술을 문질렀다. 감정이 전혀 없는 표정이
었다.
「두번째 살인에 있어서도 우리는 누구나 모두 용의자의 한 사람인 것
을 알았소. 다음에는 매커서 장군의 경우를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이것
은 아침에 일어난 일이오. 알리바이가 있는 사람은 상세히 이야기해 주기
바라오.
나 자신부터 말한다면, 나에게는 확실한 알리바이가 없소. 나는 오전
내내 테라스 의자에 앉아 이번 사건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소.
점심 식사 종이 울릴 때까지 앉아 있었지만, 아무에게도 모습을 보이지
않은 때가 있었다고 생각하오. 그 사이에 장군을 죽이고 돌아올 수도 있
었다고 보오. 내가 테라스를 떠나지 않았음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내 말
뿐이오. 이것만으로는 증거로서 불충분하오.」
블로어가 말했다.
「나는 롬버드와 암스트롱 의사가 함께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증인이
되어 주겠지요.」
암스트롱 의사가 말했다.
「당신은 밧줄을 가지러 갔었잖소?」
「그렇지만 아무데도 들르지 않았소. 알고 있잖소?」
「시간이 꽤 걸렸는데…….」
블로어는 얼굴빛이 달라져 큰소리로 외쳤다.
「그래서 어떻다는 거요?」
「다만 시간이 걸렸다고 말했을 뿐이오.」
「찾으러 다녔소. 밧줄이 어디에 있는지 금방 알 수 없잖소.」
워그레이브 판사가 말했다.
「블로어 씨가 밧줄을 가지러 간 동안 당신들 두 사람은 줄곧 함께 있
었소?」
「함께 있었지요. 롬버드가 잠깐 모습을 감추었을 뿐 나는 꼼짝하지 않
았습니다.」
롬버드가 웃으며 말했다.
「햇빛의 반사로 육지에 신호할 수 없을까 조사하러 갔었습니다. 겨우
1,2분 동안이었지요.」
암스트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살인을 할 만한 시간은 없었습니다.」
판사가 말했다.
「두 사람 가운데 누가 시계를 보았소?」
「아니오.」
롬버드가 말했다.
「나는 시계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판사는 차갑게 말했다.
「1,2분이라는 것은 매우 막연한 이야기요.」
그리고 그는 뜨개질하고 있는 노부인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미스 브랜트, 당신은?」
「크레이슨 양과 언덕에 올라갔다 돌아와 줄곧 테라스에 있었어요.」
「나는 몰랐는데…….」
「동쪽 모퉁이에 있었지요. 바람이 불어와 닿지 않았으므로.」
「그곳에서 점심 시간까지 있었소?」
「그래요.」
「크레이슨 양은?」
베러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똑똑히 대답했다.
「미스 브랜트와 헤어져 바닷가까지 걸어갔어요. 거기서 매커서 장군을
만났어요.」
「그것이 언제쯤이었소?」
베러는 확실히 기억하지 못했다.
「점심 식사 한 시간쯤 전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보다 뒤였는지도 모르
겠어요.」
블로어가 물었다.
「우리들이 그와 이야기한 뒤였습니까?」
「모르겠어요. 모습이 매우 이상했어요.」
그녀는 몸을 떨었다.
판사가 물었다.
「어떻게?」
베러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들은 모두 죽는다고 말했어요. 종말을 기다리고 있다면서……나
는 무서워서…….」
판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어떻게 했소?」
「저택으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나서 점심 식사 조금 전에 밖으로 나가
뒷동산에 올라갔지요.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으므로…….」
판사가 턱을 어루만졌다.
「다음은 로저스뿐이오. 그러나 그의 이야기에도 새로운 수확은 없을
거요.」
로저스는 법정에 불려 나왔으나 특별히 말할 게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오전 동안 저택 안의 자질구레한 일과 점심 준비로 바빴다. 점심
전에 테라스로 칵테일을 내가고 나서 자기 짐을 다른 방으로 옮기기 위
해 지붕 밑 방에 올라갔었다.

제 목 : [애-크]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10
올린이 : 매직라인(한창욱 ) 96/11/24 22:26 읽음 : 73 관련자료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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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악령의 덫

베러가 물었다.
「당신은 믿어지세요?」
그녀는 필립 롬버드와 창가에 앉아 있었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고 세찬
바람에 흔들려 유리창이 덜컹거리고 있었다. 필립 롬버드는 고개숙이고
말없이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범인이 우리들 가운데 하나라고 판사가 이야기한 것 말입니까?」
「그래요.」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론적으로는 판사의 말이 맞지
만 그러나…….」
베러가 그의 말을 받았다.
「그러나 믿을 수 없겠지요.」
롬버드는 얼굴을 부드럽게 하며 말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믿을 수 없는 일뿐입니다. 다만 매커서 장군이 죽고
나서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과실이나 자살이 아
닙니다. 살인인 거지요. 이미 세 건의 살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베러는 몸을 떨었다.
「마치 악몽 같아요!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아요.
「알고 있습니다. 노크 소리가 들리고, 아침차를 날라다 주면 좋겠다는
평화로운 생각이겠지요.」
「그랬으면 좋으련만…….」
「그렇게는 안 됩니다! 지금부터는 1초도 방심해선 안 됩니다.」
베러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만일 범인이 우리들 속에 있다면 누구라고 여기세요?」
롬버드는 갑자기 엷은 미소를 떠올렸다.
「당신은 우리들 두 사람을 범인에서 제외하고 있군요. 나도 같은 의견
입니다. 내가 범인이 아닌 것은 스스로 알고 있고, 당신도 정신이 돌지는
않았다고 봅니다.
나는 여러 여자를 알고 있지만, 당신같이 머리가 영리한 여자는 없습니
다. 당신이 미쳐 있다는 것을 나는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베러는 가냘프게 미소지었다.
「고마워요.」
그는 말했다.
「그런데 당신 쪽에선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군요.」
베러는 좀 머뭇거리며 말했다.
「당신은 스스로 인간의 목숨을 그리 소중히 여기지 않는 듯 말했지만,
내게는 아무래도 그 레코드가 불어대는 것 같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아요.
「그렇습니다. 내가 만일 살인을 한다면, 나에게 큰 해로움이 없는 한
하지 않습니다. 대량 살인 같은 건 나에게 맞지 않지요.
그러나 우리 둘을 뺀 다섯 사람을 생각해 볼 때 누가 UN 오윈일까요.
아무 증거도 없지만, 내 생각으로는 워그레이브가 수상해 보입니다.」
「어머나!」
베러는 놀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잠시 생각한 뒤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요?」
「뚜렷이 말할 수는 없지만, 우선 그는 나이가 들었고 오랫동안 판사
일을 했습니다. 결국 그는 오랫동안 신의 대리 역할을 해왔던 겁니다.
그런 생각이 그의 머리 속에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생과 사
를 맡고 있다는 기분이 되어 머리가 이상해지고, 그것이 다시 한걸음 나
아가 신을 대신하여 인간을 응징하려는 건지도 모르지요.」
「그렇군요. 생각할 수 있는 일이에요.」
이번에는 롬버드가 물었다.
「당신은 누구라고 여깁니까?」
베러는 주저없이 대답했다.
「암스트롱이에요.」
롬버드는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암스트롱? 나는 맨 마지막으로 그에게 혐의를 두고 있는데.」
베러는 머리를 저었다.
「지금까지의 살인 가운데 둘은 독살이었어요. 아무래도 의사가 가장
수상해요. 또 지금까지 알고 있는 대로 말한다면 로저스 부인이 먹은 것
은 의사가 준 수면제뿐인걸요.」
「그건 그렇소.」
「의사가 정신이상이 된다 해도 겉으로는 여간해서 알 수 없어요. 더욱
이 의사는 과로하기 쉽고 신경도 피로하거든요.」
「그러나 매커서 장군을 죽일 기회는 없었을 겁니다. 내가 그와 떨어져
있었던 건 겨우 몇분 동안이었습니다. 잠깐 동안에 그런 일을 저지르고
본디 장소로 돌아올 만큼 몸이 날랜 사나이는 아닙니다.」
베러가 말했다.
「그때 죽인 게 아니예요. 뒤에 기회가 있었어요.」
「언제?」
「장군을 부르러 갔을 때예요.」
롬버드는 다시 나지막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렇군! 그때에.」
베러는 말을 이었다.
「조금도 위험이 없잖아요? 의학 지식을 지닌 사람이 따로 없으니 죽
은 지 한 시간 지났다고 해도 아무도 반박할 수 없으니까요…….」
롬버드는 꼼짝 않고 그녀를 지켜 보았다.
「과연 그럴듯하군요. 아니면…….」

「누구일까요, 블로어 씨. 가르쳐 줄 수 없습니까?」
로저스는 표정이 긴장되어 있었다. 그는 가죽 허리띠를 손으로 꽉 움켜
잡고 있었다.
블로어가 말했다.
「그게 문제요.」
「우리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누구일까요?」
「모두들 그것을 알고 싶어하오.」
「그러나 당신은 짐작하겠지요.」
블로어는 천천히 말했다.
「짐작이야 하고 있소. 그러나 잘못 짐작했는지도 모르오.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범인은 꽤 냉정한 인간임에 틀림없다는 사실이오.」
로저스는 얼굴의 땀을 닦았다.
로저스는 얼굴의 땀을 닦았다.
「마치 악몽을 꾸는 것같이…….」
블로어는 로저스를 찬찬히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도 짐작되는 게 있소?」
로저스는 머리를 저었다.
「모릅니다. 짐작도 할 수 없습니다. 무서워서 앉을 수도, 서 있을 수도
없습니다.」

암스트롱 의사는 격렬하게 말했다.
「이 섬에서 나가야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나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워그레이브 판사는 끽연실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는 안경
다리를 손으로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나는 기상에 대해 잘 모르지만, 예를 들어 우리의 위험한 입장을 알
았다 해도 24시간 안으로는 배가 오지 못할 거요. 더욱이 24시간이 지나
도 태풍이 잠잠해질지 어떨지 알 수 없소.」
암스트롱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신음하듯 말했다.
「그동안 우리들은 모두 같은 침대에서 죽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고 싶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온갖 수단을 다하여 경계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소.」
의사는 생각했다. 판사 같은 노인은 젊은이보다 오히려 생명에 집착을
갖고 있다. 직업상의 경험으로 보아도 그런 사실에 자주 놀랄 때가 있다.
그는 판사보다 20살은 젊다고 생각하지만, 자기 생명을 지키려는 열의는
판사에 비해 훨씬 뒤져 있었다.
워그레이브 판사는 생각했다. 같은 침대에서 죽지 않으면 안된다! 의사
들은 무엇이나 자기 직업에 결부시켜 생각한다. 평범한 두뇌밖에 갖고 있
지 않는 것 같다.
의사가 말했다.
「아무튼 이미 세 사람의 피해자가 나왔으니까요.」
「그러나 그들은 경계를 게을리했기 때문이오. 우리들은 그들과 경우가
다르오.」
암스트롱은 괴로운 듯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좋습니까? 누가 범인인지도 모르는데…….」
판사는 얼굴을 쓰다듬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소.」
암스트롱은 눈을 빛냈다.
「누군지 알고 있습니까?」
워그레이브 판사는 말에 주의를 기울이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법정에서 필요로 하는 것 같은 증거물은 아직 하나도 얻지 못하고
있소. 그러나 모든 사건을 자세히 검토하면 어느 한 사람을 확실히 지목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오. 나는 그렇게 믿고 있소.」
암스트롱 의사는 판사의 얼굴에 눈을 못박았다.
「어떤 뜻으로 말씀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에밀리 브랜트는 2층 자기 방에 있었다. 그녀는 성서를 들고 창가로 갔
다. 그녀는 성서를 폈으나, 잠시 생각하고 나서 다시 덮은 다음 화장대
서랍을 열고 조그만 검은 표지의 수첩을 꺼냈다. 그녀는 수첩을 펴고 쓰
기 시작했다.
무서운 일이 일어났다. 매커서 장군이 죽었다. 장군의 사촌 형세는 엘
시 맥퍼슨과 결혼했다. 살인임에 틀림없다.
점심 식사가 끝난 뒤 판사가 매우 흥미있는 말을 했다. 그는 범인이 우
리들 가운데 하나라고 확신하고 있다. 우리들 가운데 하나가 악령의 포로
가 되어 있는 셈이다.
나는 지금까지 줄곧 이번 일을 살펴 왔다. 누구일까? 모든 사람이 마음
속으로 같은 질문을 되풀이하고 있다. 나만은 알고 있다…….
그녀는 잠시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눈빛이 흐려져 왔다. 손가락 사이
에 끼워진 연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떨리고 있는 커다란 글자를 한 자
씩 쓰며 말했다.
――범인의 이름은 비트리스 테일러다……그녀의 눈이 감겨졌다. 갑자
기 그녀는 놀란 듯 눈을 떴다. 그리고 수첩을 내려다 보았다.
그녀는 놀라 소리지르며 어설픈 글씨로 씌어진 마지막 문장을 보았다.
내가 이것을 쓴 것일까. 내가……나는 머리가 돈 것일까…….

태풍이 맹렬해졌다. 바람이 저택을 뒤흔들며 울부짖었다.
모두들 거실에 모여 있었다. 그들은 어수선한 마음으로 한덩어리가 되
어 서로 경계의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로저스가 차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커튼을 내릴까요? 그편이 더 마음놓일 것 같습니다.」
커튼이 내려지고 램프에 불이 켜졌다. 방안에 조금 밝은 공기가 감돌았
다. 내일이 되면 태풍이 자고 배도 오겠지.」
베러가 크레이슨이 말했다.
「차를 따라 드릴까요., 미스 브랜트?」
「네, 당신이 따라 줘요. 그 주전자는 무거워요. 나는 회색 털뭉치를 두
개나 잃어버려서 기분이 몹시 나빠요.」
베러는 차가 놓여 있는 테이블로 걸어갔다. 사기그릇 부딪치는 소리가
맑게 울려 퍼졌다.
차! 오랜만에 맛보는 오후의 차!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밝은 기
분이 되었다.
롬버드가 우스운 이야기를 하자 블로어가 장단을 맞췄다.
암스트롱 의사는 유머스러운 이야기를 했다. 다른 때는 차를 들지 않던
워그레이브 판사도 맛있게 마셨다.
이 밝은 분위기 속에 로저스가 모습을 나타냈다. 불안한 태도였고, 얼
굴빛도 달라져 있었다.
「어느 분이든 욕실 커튼이 어디로 갔는지 아십니까?」
롬버드가 머리를 번쩍 들었다.
「욕실 커튼이라고? 그것이 어떻다는 거요?」
「없어졌습니다. 저택 안의 커튼을 모두 내리고 다녔는데, 욕실 커튼이
없어졌습니다.」
판사가 물었다.
「아침에는 있었나?」
「있었고말고요.」
블로어가 말했다.
「어떤 커튼이오?」
「진홍빛 울 실크입니다. 진홍빛 타일에 어울리도록 되어 있었는데…
….」
롬버드가 말했다.
「그것이 없어졌단 말이오?」
「네.」
모두들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블로어가 억지로 지어낸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염려할 것 없소. 어차피 모든 게 다 이상스러우니까. 울 실크 커튼으
로는 사람을 죽일 수 없소. 내버려둬도 괜찮을 거요.」
로저스는 방을 나가 문을 닫았다.
방안에 새로운 공포가 일었다. 모두들 다시 경계의 빛을 보이기 시작했
다.

식사가 날라져 와 먹고 치워졌다. 거의 통조림뿐인 간단한 식사였다.
식사가 끝나 아까 모여 있던 거실로 되돌아온 그들 사이에는 참을 수
없을 만큼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9시가 되자 에밀리 브랜트가 일어섰다.
「나는 자겠어요.」
베러가 말했다.
「나도 자겠어요.」
두 여자는 2층으로 올라갔다. 롬버드와 블로어가 함께 나가 층계를 다
올라간 곳에서 여자들이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 보았다. 두 방의 문
에 열쇠 채워지는 소리가 들려 왔다.
블로어가 쓴웃음지으며 말했다.
「안쪽에서 잠가 두면 주의할 필요가 없지.」
롬버드가 말했다.
「이것으로 두 사람 모두 오늘 밤에는 안전하겠지.」
그는 층계를 내려오기 시작했다. 블로어가 뒤따랐다.

네 남자는 한 시간 뒤 잠자리에 들었다. 그들은 함께 2층으로 올라갔
다. 로저스는 식당에서 다음날 아침 식사 때 쓸 식기를 정리하며 네 사람
이 올라가는 것을 지켜 보았다.
네 사람은 2층에 오르자 걸음을 멈췄다.
판사가 말했다.
「말할 것까지도 없지만, 열쇠를 채워 두는 게 좋소.」
블로어가 말했다.
「문 손잡이 밑에 의자를 놓아두십시오. 밖에서 잠긴 문을 여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롬버드가 말했다.
「블로어, 당신은 쓸데없는 것까지 알고 있군!」
판사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잘들 자시오. 여러분, 내일 아침에 무사히 만납시다.」
로저스는 식당에서 나와 층계를 중간까지 올라가 그곳에서 네 사나이
가 저마다 자기 침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열쇠가 채워지는 소리를 들
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제 됐다.」
그는 다시 식당으로 들어갔다. 아침 식사 준비는 완전히 되어 있었다.
그의 눈은 조그만 일곱 개의 도자기 인형에 멈췄다.
「오늘 밤에는 아무도 장난치지 못하게 해야지!」
그는 식당을 가로질러 부엌으로 통하는 문을 잠그고 다른 문으로 복도
에 나와 그 문도 잠근 다음 열쇠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전등을 끄고
빠른 걸음으로 층계를 올라가 새로 옮긴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는 숨을 곳이라곤 한 군데밖에 없었다. 커다란 옷장이었다. 로저스
는 급히 옷장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런 뒤 문을 잠그고 침대 옆으로 걸어
갔다.
「오늘 밤에는 인디언이 장난치지 못할 거야. 모든 문을 엄중히 잠가
두었으니까.」


제 목 : [애-크]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11
올린이 : 매직라인(한창욱 ) 96/11/24 22:27 읽음 : 70 [7m관련자료 있음(TL)[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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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의혹

필립 롬버드는 아침 일찍 깨어나는 습관이 있었다. 그날 아침에도 그는
일찍 눈을 떴다.
그는 몸을 일으키며 조용히 귀기울였다. 바람이 좀 약해진 듯했으나 아
직도 불고 있었다. 빗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8시가 되자 바람이 다시 세
어졌지만 롬버드는 듣지 못했다. 그는 다시 잠들어 있었다.
9시 30분, 롬버드는 침대 끝에 앉아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그는 시계를
귀 가까이 갖다댔다. 그리고 이리 같은 이빨을 드러내며 중얼거렸다.
「언제까지나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10시 25분 전, 그른 블로어의 방문을 두드렸다. 블로어는 조용히 문을
열었다. 머리가 헝클어지고, 눈은 잠에 취해 있었다.
필립 롬버드가 말했다.
「잘 자고 있군. 아무 근심도 없다는 증거지.」
블로어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대체 뭐요?」
「아무도 오지 않았소? 차를 가지고 오지 않았느냔 말이오. 몇 시인 줄
알고 있소?」
블로어는 침대 옆에 놓인 조그만 여행용 자명종 시계를 어깨 너머로
보았다.
「10시 25분 전, 이만큼 잔 것 같지 않은데. 로저스는 어디 있소?」
「그건 내가 묻고 싶은 일이오.」
「뭐라고?」
「로저스는 아무데도 없소. 방에도 없고, 부엌에 불도 피워져 있지 않
소.」
블로어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어디 갔을까? 섬 어딘가에 나가지 않았을까? 옷을 입을 때까지 기다
려 주오.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는지 어떤지 물어 봅시다.」
롬버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모두의 방을 돌아보았다. 암스트롱은
옷을 다 입고 난 참이었다. 워그레이브 판사는 블로어와 마찬가지로 아직
자고 있었다. 베러 크레이슨은 단정하게 옷을 입고 있었다. 에밀리 브랜
트의 방은 비어 있었다.
그들은 저택 안을 돌아다녀 보았다. 로저스의 방은 롬버드가 말한 대로
비어 있었다. 침대에는 자고 난 흔적이 있고, 면도와 비누를 쓴 것같이
보였다.
롬버드가 말했다.
「일어난 것은 확실하오.」
베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딘가에 숨어서 우리를 노리고 있는지도 몰라요.」
「마음놓을 수 없소. 보일 때까지 우리는 서로 떨어지지 않는 게 좋겠
소.」
암스트롱이 말했다.
「이 섬 어딘가에 있겠지.」
블로어가 옷을 입고 나와서 함께 되었다. 수염은 아직 깎지 않은 채였
다.
「미스 브랜트는 어디 갔을까, 이상하잖소?」
모두들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에밀리 브랜트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비옷을 입고 있었다.
「바다가 아직 거칠어요. 오늘도 배가 못 뜨겠어요.」
블로어가 말했다.
「혼자 걷고 있었습니까? 위험하지 않습니까?」
「염려하지 마세요, 블로어 씨. 나는 잠시도 마음놓고 있지 않으니까요.
블로어는 쓴웃음을 지었다.
「로저스를 못 보았습니까?」
에밀리 브랜트는 눈썹을 찌푸렸다.
「아니오, 한 번도 못 보았어요. 왜 그러지요?」
워그레이브 판사가 수염을 깎고, 옷을 단정히 입고, 틀니를 끼우고 층
계를 내려왔다. 그리고 열려 있는 식당 안을 들여다 보았다.
「아침 식사 준비가 되어 있군.」
롬버드가 말했다.
「어젯밤 차려 놓은 건지도 모릅니다.」
모두들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접시와 포크와 나이프가 정연하게 놓여
있었다. 사이드 테이블 위에는 커피잔이 놓여 있었다. 커피 주전자를 놓
는 펠트 깔개도 놓여 있었다.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은 베러였다. 그녀는 판사의 팔을 꽉 잡았다. 스
포츠로 단련된 듯한 센 힘으로 팔을 잡히자 판사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는 부르짖었다.
「인디언이! 보세요!」
테이블 한가운데의 도자기 인형이 여섯 개밖에 없었다.

로저스의 시체는 곧 발견되었다. 가운데 뜰을 지나서 있는 좁은 빨래터
에서였다. 거기서 그는 부엌에서 쓸 장작을 패고 있었다. 조그만 도끼가
아직도 손에 쥐어져 있었다.
무거워 보이는 커다란 도끼가 문에 기대어져 있었다. 도끼날에 갈색 피
가 묻어 있었다. 그것은 로저스의 목덜미에 난 깊은 상처와 관련있는 것
이었다.

암스트롱이 말했다.
「확실해. 범인은 뒤에서 몰래 다가가 그가 몸을 구부리고 있을 때 일
격에 찍어 넘긴 거요.」
블로어는 도끼 자루와 부엌에서 가져온 듯한 행주를 살펴보고 있었다.
워그레이브 판사가 물었다.
「암스트롱, 이런 짓을 하려면 남자 힘이 필요하오?」
암스트롱은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여자도 할 수 있겠지요.」
그는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베러 크레이슨과 에밀리 브랜트는 부엌으로 가 있었다.
「그 아가씨도 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 아가씨는 스포츠로 단련된 타
입입니다. 미스 브랜트는 약해 보이지만, 그런 여자가 생각지도 못할 힘
을 지니고 있는 법이지요. 게다가 정신이 이상해졌을 때에는 뜻밖의 힘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판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블로어가 몸을 일으키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지문은 없소. 자루를 닦아 놓았소.」
갑자기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그들은 놀라서 돌아보았다. 베러 크레이
슨이 가운데 뜰에 서 있었다. 그녀는 크게 웃으며 높고 날카로운 목소리
로 외쳤다.
「이 섬에서 꿀벌을 치나요? 어디 가면 꿀이 있지요?」
그들은 여우에게 홀린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베러는 정신이 돈 것인
가.
그녀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떠들어댔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내가 미친 것 같나요? 내가 묻는 건 중요
한 일이에요. 꿀벌, 벌집 말예요! 모르나요. 저 저주스러운 자장가를 읽지
않았나요? 어느 방에나 걸려 있어요. 처음부터 경고하고 있었어요.
우리들이 재빨리 알아차렸다면, 바로 여기에 와 보았어야 했어요. 일곱
인디언 소년이 장작을 팼다. 그 다음 구절을 아세요? 나는 외고 있어요!
여섯 인디언 소년이 벌집을 건드리며 장난쳤다――그래서 묻는 거예요.
이 섬에서는 꿀벌을 치나요? 이상하지 않으세요? 아무래도 이상하지 않
으세요…….」
베러는 다시 웃기 시작했다. 암스트롱 의사가 앞으로 나아가 손바닥으
로 그녀의 뺨을 때렸다. 그녀는 숨을 멈추고 침을 삼켰다. 그리고 잠시
움직이지 않고 서 있더니 이윽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이제 괜찮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본디 상태로 돌아가 있었다.
베러는 가운데 뜰을 가로질러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걸어가며 말
했다.
「미스 브랜트와 아침 식사 준비를 하겠어요. 누구든 장작을 갖다 주지
않겠어요?」
의사의 손자국이 그녀의 볼에 빨갛게 남아 있었다.
그녀가 부엌으로 들어가자 블로어가 말했다.
「참 잘한 처지였소, 의사 선생.」
「참을 수가 없었소. 이런 상황에 여자의 히스테리까지 당하고 있을 수
는 없잖소.」
필립 롬버드가 말했다.
「그녀는 히스테리가 될 타입이 아니오.」
암스트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 아가씨는 똑똑하오. 꽤 침착하지요. 다만 충격을 받았을
뿐이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오.」
로저스는 살해되기 전에 꽤 많은 장작을 패놓았다. 그들은 그것을 주워
모아 부엌으로 날랐다.
에밀리 브랜트가 난로의 재를 끌어내고 있었다. 베러는 베이컨 껍질을
잘라 내고 있었다.
에밀리 브랜트가 말했다.
「고마워요. 되도록 서두르지요. 그렇지. 3,40분만 기다려 주세요. 난로
에 불을 피워야 하니까요.」

블로어가 조그만 목소리로 필립 롬버드에게 말했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알겠소?」
필립 롬버드가 말했다.
「이야기하는 편이 빠를 거요. 생각해 보았자 헛일이니까.」
전직 경감 블로어는 농담을 모르는 사나이였다. 그는 진지한 태도로 말
했다.
「미국에 이런 사건이 있었소. 노인 부부가 둘 다 도끼로 살해되었소.
집에는 딸과 하녀밖에 없었소. 하녀가 한 짓이 아니라는 것은 곧 증명되
었소.
딸은 중년에 접어든 독신이었소. 종교적 믿음이 깊은 여자로 도저히 살
인을 저지를 것으로 보이지 않았소. 끝내 그 여자는 무죄가 되었지만, 그
러나 신앙심 깊은 여자라는 것 외에 무죄가 될 만한 이유는 아무것도 없
었소.
나는 도끼를 보는 순간 이 이야기를 생각해 냈소. 그리고 나서 부엌으
로 가보니, 에밀리 브랜트는 아주 냉정하고 얼굴빛 하나 달라져 있지 않
았소. 아가씨 쪽은 정신이 홱 돌아 버렸소. 아마 그게 정상일 거요. 당신
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필립 롬버드가 말했다.
「그럴 거요. 그게 정상이겠지요.」
「그런데 노처녀 쪽은 앞치마를 두르고 냉정한 얼굴로 일하고 있소. 저
것은 로저스 부인의 앞치마겠지. 저 노처녀는 확실히 머리가 돈 것 같소.
나이든 독신녀에게 흔히 있는 일이오.
살인도 할 수 있을 거요. 믿음이 두터우니 자기를 신의 사도나 무언가
로 여기고서 말이오. 방에서는 늘 성서를 읽고 있소.」
「그것만으로는 정신이 돌았다는 증명이 되지 않소.」
그러나 블로어는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게다가 밖에 나갔었잖소, 비옷까지 입고――바다를 보러 나갔다고는
했지만…….」
롬버드는 고개를 저었다.
「로저스는 장작을 패고 있을 때 살해되었소. 일어나서 곧 피살된 거
요. 미스 브랜트가 했다면 밖에서 언제까지나 우물쭈물거리고 있지 않았
겠지. 침대로 돌아와 코를 골고 있으면 되는거니까.」
「당신은 중대한 점을 빠뜨리고 있소. 만일 자기가 한 짓이 아니라면
혼자서 밖을 돌아다니지 못할 것이오. 두려운 게 없으니까 아무렇지 않게
밖을 돌아다닐 수 있는 거요. 자기가 범인이니까 아무것도 두려운 게 없
지요.」
「흠……거기까지는 미처 생각지 못했는걸.」
그는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덧붙였다.
「나는 당신 눈에서 벗어나 있어 다행이로군.」
블로어가 거북스러운 듯 말했다.
「실은 처음에 당신을 의심했었소. 권총 문제며, 우리들을 힐난한 일도
있고 해서. 그러나 내가 잘못 생각했던 거요.」
그는 잠깐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당신은 나를 의심하지 않겠지요?」
「실례될 지 모르지만 당신이 이 같은 계획을 세울 상상력을 가졌다고
는 생각지 않소.
만일 당신이 범인이라면 참으로 훌륭한 솜씨라고 할 만하오. 나는 말없
이 모자를 벗어 보이겠소.」
그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었다.
「우리끼리 이야기인데, 내일까지 생명이 남아 있을지 어떨지 모르는
우리들이오. 전에 이야기한 위증은 사실이겠지요?」
블로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숨겨 보았자 별수없지. 랜더는 확실히 무죄였소. 나에게 부탁하는 사
람들이 있어 모두들 유죄로 몰고 말았소. 그러나 잘라 말하지만, 달리 증
인이 있었다면 나는 그런 증언을 하지 않았을 거요.」
「듬뿍 맛잇는 국물을 먹었다는 거로군.」
「그런데 구두쇠들뿐이었소. 나는 다만 승진했을 뿐이오.」
「그리고 랜더는 종신형을 받고 감옥에서 죽었겠지.」
블로어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죽을 줄 몰랐소.」
「뭐, 당신 운이 나빴던 거요.」
「내가? 그의 운이 나빴지.」
「당신도 그렇소. 왜냐하면 그 때문에 당신도 죽게 되었으니까.」
「내가?」
블로어는 롬버드를 쳐다보았다.
「내가 로저스나 다른 사람들 같은 지경을 당하리라고 생각하오? 농담
마오? 나는 그런 길은 밟지 않소.」
「뭐, 좋소. 나는 내기 따위는 질색이거든. 또한 당신이 죽는다고 해서
내가 얻을 건 없으니까.」
「롬버드, 무슨 말을 하는 거요?」
롬버드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안됐지만 블로어. 당신도 빠져 달아날 수는 없소.」
「뭐라고?」
「당신은 상상력이 모자라오. 함정에 빠뜨리는 데는 이유가 없지. UN
오윈같이 상상력 풍부한 범인이라면, 당신 목에 새끼줄을 감는 일쯤 아주
쉬울 거요.」
블로어는 얼굴이 새빨개지며 화를 냈다.
「그럼, 당신은 어떻게 되오?」
필립 롬버드의 얼굴에 대담한 표정이 나타났다.
「나는 상상력을 충분히 갖고 있소. 지금까지도 꽤 위험한 일을 당했지
만 언제나 무사히 헤쳐 나왔소. 아니, 더 이상 말하는 것은 그만두겠소.
그러나 이번에는 꼭 헤쳐 나가 보일 테요!」

달걀이 프라이팬에 넣어졌다. 베러는 난로 앞에서 생각했다. 어째서 그
토록 정신이 혼란되었을까? 그것은 잘못된 일이었다. 침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일이 있어도 허둥대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는데…….
「크레이슨 양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곧 시릴의 뒤를 따라 헤
엄쳐 갔습니다.」
왜 이런 일이 지금 생각나는 것일까. 모든 것은 지나간 일이다. 시릴은
그녀가 바위에 닿기 훨씬 전에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었다.
조수가 그녀를 앞바다로 밀고 나갔다. 그녀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배
가 올 때까지 바다 위에 떠 있었다. 모두 그녀의 용기를 칭찬했다.
그러나 유고는 잠자코 그녀를 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지금도 유고를 생
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어디에 있을까,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약혼했을까,
결혼했을까.
에밀리 브랜트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베러, 베이컨이 타고 있어요.」
「어머나……미안해요. 정신차리지 않아서.」
에밀리 브랜트는 마지막 달걀을 굽고 있었다. 베러는 새 베이컨을 프라
이팬에 넣으며 말했다.
「당신은 몹시 침착하군요, 미스 브랜트.」
에밀리 브랜트는 또렷하게 말했다.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정신이 혼란되지 않도록 자라났어요.」
베러는 기계적으로 생각했다――어린 시절에 억압당하여 그것이 여러
가지 점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녀는 말했다.
「무섭지 않나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그렇잖으면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건가요?」
죽음! 에밀리 브랜트는 가늘고 날카로운 송곳으로 뇌를 찔린 듯 느꼈
다. 죽음? 아니, 나는 죽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은 죽을지 모르지만, 나는
죽지 않는다! 이 아가씨는 모른다.
나는 물론 무서워하고 있지 않다. 브랜트 집안 사람은 누구나 그렇다.
모두 깊은 신앙심을 갖고 있다. 죽음을 두려워한 사람은 없었다. 모두 자
기와 마찬가지로 올바른 생활을 해왔다. 나는 수치스러운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따라서 나는 죽을 까닭이 없다.
「우리들은 모두 이 섬을 빠져 나갈 수 없소.」
누가 그런 이야기를 했던가. 물론 매커서 장군이었다. 그의 사촌이 엘
시 맥퍼슨과 결혼했다. 그는 죽음을 조금도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어쩌
면 기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당치도 않다! 신을 두려워하지 않다니! 죽음을 가볍게 여겨 스스로 목
숨을 끊는 사람조차 있다.
비트리스 테일러……어젯밤 그녀는 비트리스 꿈을 꾸었다――그녀의
방 창문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울부짖는 듯한 목소리로 들여보내 달라고
했다.
그러나 에밀리 브랜트는 그녀를 안으로 들여놓고 싶지 않았다. 만일 안
으로 들여놓으면 무서운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에밀리 브랜트는 번쩍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저 아가씨가 자기를 바라
보며 이상히 여기고 있었다.
그녀는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준비가 되었군요. 가져가요.」

기묘한 아침 식사였다. 모두들 말씨가 정중했다.
「커피를 따라 드릴까요, 미스 브랜트.」
「크레이슨 양, 햄을 들겠어요?」
「베이컨을 하나 더 드십시오.」
여섯 사람 모두 아무 일도 없었던 듯한 태도였다.
그러나 마음속에서는 여러 가지 생각이 참나무 숲 속의 다람쥐처럼 이
리저리 뛰어 돌아다니고 있었다.
(다음은 누구일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잘될까. 자신이 없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지. 시간
이 흐르면 해결될 거야.)
(신앙으로 똘똘 뭉쳐져 있다. 그래서 미친 것이다. 그러나 저 모습을 보
고 있노라면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아. 잘못되었는지도 모른다.)
(무엇이나 모두 기묘한 일뿐이야. 이래서는 머리가 돌아 버릴 것야. 털
실이 없어졌어. 진홍빛 비단 커튼도.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 조금도 예상
할 수가 없어.)
(바보 같은 녀석. 내가 한 말을 그대로 믿어 버리다니. 이유는 없어. 그
러나 충분히 경계해야 한다.)
(여섯 개의 조그만 도자기 인형……이제 여섯 개뿐――오늘 밤은 몇 개
가 될 것인가.)
「달걀이 하나 남아 있군요.」
「마멀레이드는?」
「고마워요. 햄을 드릴까요?」
여섯 사람……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행동하는 여섯 사람…….


제 목 : [애-크]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12
올린이 : 매직라인(한창욱 ) 96/11/24 22:28 읽음 : 69 [7m관련자료 있음(TL)[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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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꿀벌 살인

식사가 끝났다.
워그레이브 판사가 헛기침을 했다. 그는 낮고 위엄있는 목소리로 말했
다.
「모두 모여 의견을 나누는 게 좋을 것 같소. 30분 뒤 응접실로 모여
주기 바라오.」
모두들 곧 찬성했다. 베러는 접시를 포개기 시작했다.
「내가 치우겠어요.」
필립 롬버드가 말했다.
「모두 함께 날라다 드리지요.」
「고마워요.」
에밀리 브랜트는 일어섰다가 다시 앉아 한숨을 쉬었다.
판사가 말했다.
「어디 편찮으시오, 미스 브랜트?」
에밀리는 미안한 듯 말했다.
「죄송해요. 크레이슨 양을 도와주고 싶지만 어쩐지 머리가 어지러워
요.」
「어지럽다고요?」
암스트롱 의사가 그녀의 곁으로 갔다.
「무리도 아니지요. 아까 받은 충격이 크니까요. 무슨 약이라도…….」
「싫어요!」
그 말은 포탄이라도 터지듯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리하여 모두
를 놀라게 했다.
암스트롱 의사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녀의 얼굴에는 확실히 공포와
의혹의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의사는 어색하게 말했다.
「무리하게 권하지는 않습니다, 미스 브랜트.」
「약은 보기도 싫어요. 기분이 나아질 때까지 이대로 여기 조용히 앉아
있겠어요.」
모두들 식사 뒤처리를 했다.
블로어가 말했다.
「나는 가정적인 남자입니다. 도와드릴까요, 크레이슨 양.」
베러가 말했다.
「고마워요.」
에밀리 브랜트만 식당에 남겨졌다. 잠시 동안 부엌에서 이야기 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기분은 좋아졌으나 이번에는 졸음이 왔다. 그대로 잠
들어 버릴 것 같았다.
귀에 날개 소리가 들려 왔다. 방안 어디에서 들려 오는 것일까? 그녀는
생각했다. 꿀벌이다, 꿀벌이 있는 것이다.
이윽고 그녀의 눈에 꿀벌이 보였다. 창문 유리 위를 기어 다니고 있었
다. 아침에 베러 크레이슨이 벌 이야기를 했었는데.
꿀벌과 벌꿀……에밀리 브랜트는 벌꿀을 좋아했다. 벌집의 꿀을 모슬린
주머니로 거르면 뚝, 뚝, 뚝…….
방안에 누군가 있는 것 같았다. 흠뻑 젖어서 옷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비트리스 테일러가 강에서 올라온 것이다. 고개를 돌리기만 하면 그 모습
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돌아볼 수 없었다.
소리질러 누군가를 불렀으면 좋으련만, 그러나 그녀는 소리를 지를 수
없었다. 저택에는 달리 아무도 없다. 그녀 한 사람뿐인 것이다.
발소리가 들려 왔다. 바닥에 끌리는 듯한 조용한 발소리가 등뒤로 다가
왔다. 익사한 여자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가까이 오고 있다. 퀴퀴하니
습기찬 냄새가 코를 찔렀다.
창문 유리에서는 꿀벌이 날개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목덜
미를 찔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벌이 목을 쏜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응접실에서 에밀리 브랜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베러 크레이슨이 말했다.
「불러올까요?」
블로어가 당황하며 말했다.
「기다리시오.」
베러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모두들 이상스러운 듯 블로어를 보았다.
그는 말했다.
「어떻습니까? 나는 이렇게 생각하오. 지금 식당에 가면, 범인의 정체
를 알 수 있을 것이오. 그 여자가 우리들이 찾는 범인이라고 믿소!」
암스트롱이 물었다.
「동기는?」
「신앙이 너무 깊은 거요. 당신 의견은 어떻소?」
「있을 수 있는 일이오. 반대는 하지 않소. 그러나 증거가 없소.」
베러가 말했다.
「식사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참으로 이상했었어요. 눈이…….」
그녀는 몸을 떨었다.
롬버드가 말했다.
「그런 일로 판단할 수는 없소. 우리는 모두 정신이 어떻게 되어 있소.
블로어가 말했다.
「게다가 그녀는 레코드의 말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소. 왜 그랬을까요.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일 거요.」
베러가 의자에서 몸을 움직였다.
「그건 틀려요. 나에게 이야기했어요. 나중에.」
워그레이브 판사가 말했다.
「어떤 이야기를 했소, 크레이슨 양?」
베러는 비트리스 테일러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워그레이브 판사가 말했다.
「조리있는 이야기요. 사실을 이야기한 게 틀림없소. 크레이슨 양, 책임
을 느끼고 괴로워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소? 지나치게 엄격했던 것을
후회하는 태도는 없었는지요?」
「조금도 없었어요.」
블로어가 말했다.
「심장이 부싯돌같이 단단한 여자요. 그런 여자는 모두 그렇소! 질투
같은 거지요.」
판사가 말했다.
「벌써 11시 5분 전이오. 미스 브랜트를 불러오는 게 좋겠소.」
블로어가 말했다.
「손을 쓰지 않겠습니까?」
「지금으로선 어떻게 할 수 없소. 단순한 혐의에 불과하오. 그러나 암
스트롱에게 부탁해 미스 브랜트가 정신이상이 되어 있는지 어떤지 살펴
보도록 합시다. 그럼, 모두 식당으로 갑시다.」
그들이 식당으로 가니 에밀리 브랜트는 아까의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등뒤에서 보았을 때는 그녀가 그들이 들어온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그리 다른 점이 없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핏기가 없고 입술이 새파랬
으며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블로어가 말했다.
「죽어 있잖소!」

워그레이브 판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또 한 사람, 혐의가 풀렸소. 풀리는 게 늦어졌지만…….」
암스트롱은 에밀리 브랜트 위로 몸을 굽혔다. 그는 입에서 나는 냄새를
맡고 머리를 갸우뚱하며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롬버드가 기다릴 수 없는 듯 말했다.
「어떻게 죽었소? 우리들이 그녀를 이곳에 두고 나갔을 때는 아무 일
도 없었는데요.」
암스트롱의 주의가 그녀의 목줄기 오른쪽에 있는 상처에 쏠렸다.
「피하 주사 자국이오.」
창문에서 날개 소리가 들려 왔다.
베러가 외쳤다.
「보세요. 벌이――벌이……내가 말한 대로예요.」
암스트롱이 말했다.
「그녀를 쏜 것은 벌이 아니오. 사람 손이 주사기로 찌른 것이오.」
판사가 물었다.
「독은 무엇이오?」
「내 상상으로는 청산가리라고 생각합니다. 앤터니 머스턴의 경우와 같
은 것이지요. 아마도 질식해서 금방 숨졌을 겁니다.」
베러가 외쳤다.
「하지만 저 벌은――우연으로 보기에는…….」
롬버드가 말했다.
「아니, 우연이 아니오! 우리들 살인범의 세밀한 작품이오! 꽤 장난이
심한 사람 같소. 할 수 있는 한 자장가대로 하려 드는군.」
그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떨렸다. 오랫동안 위태로운 세상을 살아오면서
단련된 롬버드의 신경도 결국은 항복하고 만 듯했다.
그는 세차게 부르짖었다.
「미치광이야! 모두 미쳤어! 모두 미치광이야!」
판사가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우리들은 아직 이성을 갖고 있소. 누가 이 섬에 피하 주사기
를 가져왔소?」
암스트롱이 몸을 굳히며 자신없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가져왔습니다.」
네 사람의 눈이 의사에게로 쏠렸다. 그는 적의를 품은 의혹의 눈길을
의연히 받아 냈다.
「언제나 갖고 다니지요. 의사라면 누구나 갖고 있을 겁니다.」
판사가 말했다.
「당연한 일이오. 그 주사기는 지금 어디 있소?」
「내 방의 가방 속에.」
「확인해 보겠소?」
다섯 사람은 말없이 2층으로 올라갔다. 가방 속의 물건들이 바닥에 펼
쳐졌다. 피하 주사기는 없었다.

암스트롱이 거친 목소리로 외쳤다.
「누가 훔쳐 갔어!」
방안에 침묵이 흘렀다. 암스트롱은 창문을 등지고 서 있었다.
네 사람의 눈이 의혹과 적의에 차서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호소하는
듯한 눈길로 베러와 워그레이브 판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기어드는 목
소리로 말했다.
「틀림없이 누군가가 훔쳐 간 거요.」
블로어는 롬버드와 마주보았다.
판사가 말했다.
「여기에 우리들 다섯 사람이 있소. 이 가운데 하나가 범인이오. 나머
지 네 사람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해야 하오.
암스트롱, 당신은 어떤 약품을 갖고 있소?」
「그곳에 약품 상자가 있습니다. 조사해 보십시오. 수면제로서 트리오
날과 즐포날, 프로마이드 한 포, 중탄산 소다, 아스피린. 그 밖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청산가리는 갖고 있지 않습니다.」
「나도 수면제를 갖고 있소. 아마 즐포날일 거요. 수면제도 너무 많이
먹으면 생명이 위험하오. 그리고 롬버드, 당신은 권총을 갖고 있지요?」
「그게 어떻다는 겁니까?」
「암스트롱 약품, 나의 즐포날, 당신의 권총, 그 밖에 약품이나 총기류
가 있으면 한데 모아 안전한 곳에 놓아두기로 합시다. 그리고 나서 한 사
람씩 몸과 소지품 검사를 하는 거요.」
롬버드가 말했다.
「권총은 건네 줄 수 없습니다.」
워그레이브 판사는 엄격하게 말했다.
「롬버드, 당신은 몸이 건강하고 힘도 셀 거요. 그리고 블로어도 훌륭
한 몸집을 하고 있소. 당신들 두 사람이 싸우면 어떤 결과가 될지 모르
나, 한마디 확실히 해둘 게 있소.
나와 암스트롱 의사와 크레이슨 양은 블로어 편이 될 거요. 그러니 당
신이 끝까지 반대하면 자신을 위해 이로울 게 없지. 불리한 것이 확실하
니…….」
롬버드는 흰 이를 드러내며 내뱉듯 말했다.
「알았습니다. 따르지요.」
판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소. 그런데 권총은 어디에 있소?」
「침대 옆 테이블 서랍 속에 두었습니다.」
「우리 모두 함께 갑시다.」
필립 롬버드는 비웃는 듯한 미소를 띠었다.
「어디까지나 믿지 않는군.」
그들은 복도를 지나 롬버드의 방으로 갔다. 롬버드는 침대 옆 테이블로
재빨리 가서 거칠게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소리질렀다.
서랍은 텅 비어 있었다.

롬버드가 물었다.
「이해되오?」
그는 벌거벗고 있었다. 다른 세 사람이 방안 수색을 막 끝낸 참이었다.
베러 크레이슨은 복도에 나가 있었다.
수색은 돌아가며 행해졌다. 암스트롱, 판사, 블로어의 순서로 한 사람씩
방과 몸을 수색했다.
네 사나이는 블로어의 방에서 나와 베러 곁으로 갔다.
판사가 입을 열었다.
「예외가 있을 수 없음은 알고 있겠지요. 권총을 어떻게 해서든 찾지
않으면 안 되오. 당신은 수영복을 갖고 왔겠지요?」
베러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영복을 입고 이곳으로 나오시오.」
베러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리고 몸에 꼭 달라붙는 비단 수
영복을 입고 다시 나타났다.
워그레이브는 말했다.
「고맙소, 크레이슨 양. 여기서 기다려 주시오.」
베러는 방 수색이 끝날 때까지 복도에서 기다렸다. 그리고 나서 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다시 나왔다.
판사가 말했다.
「이로써 이제 아무도 위험한 총기나 약품을 갖고 있지 않음을 알게
되었소. 이번에는 약품을 보관할 안전한 장소를 생각해 봅시다. 아마도
부엌에 은그릇을 넣어 두는 상자가 있을 텐데.」
블로어가 말했다.
「좋은 생각입니다만, 열쇠는 누가 갖습니까? 당신이 갖나요?」
판사는 대답하지 않고 걸어갔다. 모두들 그 뒤를 따랐다. 은그릇을 넣
는 조그만 금고같이 생긴 상자가 벽장 속에 있었다.
판사의 지시에 따라 그 상자 속에 약품을 넣고 열쇠를 채워 벽장 속에
넣었다.
판사는 상자 열쇠를 롬버드에게 주고 벽장 열쇠는 블로어에게 주었다.
「당신들은 둘 다 힘이 세오. 당신들 둘 가운데 하나가 열쇠를 차지하
기는 힘들 거요. 따라서 나머지 우리들이 열쇠를 손에 넣기는 더욱 어렵
소.
벽장문을 부수고 상자를 꺼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오. 그리고 소리가
날 것이오. 다른 사람들에게 눈치채지 않고 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하오.」
판사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그리고 아직 매우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소. 롬버드의 권총 행방이
오.」
블로어가 말했다.
「주인이 알고 있겠지요.」
필립 롬버드는 금방 얼굴빛이 달라졌다.
「무슨 소리요! 도둑맞았다는 것을 모르오!」
워그레이브가 물었다.
「맨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소?」
「어젯밤입니다. 잠자기 전 확인했을 때는 서랍 속에 분명히 있었습니
다. 만일의 경우 곧 쏠 수 있도록 해두었지요.」
판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아침 우리들이 로저스를 찾고 있을 때나, 또는 시체가 발견되었
을 때의 소란스러운 참에 도둑맞았겠지.」
베러가 말했다.
「집안에 숨겨 둔 게 틀림없어요. 찾아봐요.」
판사는 손가락으로 턱을 두드리며 말했다.
「아마 찾아봐야 헛일일 거요. 범인은 우리가 모르는 장소를 연구하는
데 충분한 시간이 있었을 테니까.」
블로어가 말했다.
「권총이 어디 있는지는 모르지만, 주사기가 어디 있는지는 압니다. 나
를 따라오십시오.」
그는 현관문을 열고 나가 저택을 따라 걸어갔다. 주사기는 식당 창문에
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떨어져 있었다. 그 곁에 도자기 인형이 산산이
부서져 뒹굴고 있었다. 다섯번째 인형이었다.
「여기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범인은 그녀를 죽인 뒤 창문을 열어
주사기를 던지고, 또 테이블 위의 인형을 꺼내 내던진 것이오.」
주사기에는 지문이 없었다.
베러가 말했다.
「권총을 찾아봐요.」
워그레이브 판사가 말했다.
「찾아봅시다. 그러나 우리들은 한데 뭉쳐 있어야 하오. 떨어지는 것은
범인에게 기회를 주는 결과가 되니까.」
그들은 집안을 샅샅이 뒤졌다. 지붕 위부터 지하실까지 빠짐없이 수색
했다.
그러나 결과는 헛일이었다. 권총의 행방은 아무래도 알 수 없었다.

제 목 : [애-크]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13
올린이 : 매직라인(한창욱 ) 96/11/24 22:30 읽음 : 72 [7m관련자료 있음(TL)[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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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어둠 속
「다섯 사람 중 한 사람이……다섯 사람 중 한 사람이……다섯 사람
중 한 사람이…….」
똑같은 말이 다섯 사람의 머리 속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공
포에 사로잡힌 다섯 사람, 서로 경계의 눈을 빛내고 있는 다섯 사람.
이제 마음의 동요를 감출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부러 마음
을 가라앉히려 애쓰는 이도 없었다. 그들은 서로 상대를 적대시했으며,
그들을 한데 묶어 놓고 있는 것은 자기 방어 본능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섯 사람 모두 인간이 아니었다. 동물로 변해 버린 것이었다.
워그레이브 판사는 나이든 거북이처럼 몸을 움츠리고 쉴새없이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전직 경감 블로어는 건장한 몸이 어딘지 모르게 굳어 보였다. 그의 걸
음걸이는 둔한 짐승과도 같았다. 눈은 언제나 핏발이 서 있었다. 흉폭함
과 우둔함이 뒤범벅되어 있는 듯한 인상이었다. 강한 자에게 쫓겨 죽을
힘을 다해 반격하려는 동물 같았다.
필립 롬버드도 쉴새없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의 귀는 아주 조
그마한 소리에도 날카롭게 움직였다. 가벼운 걸음으로 재빠르게 걸어 돌
아다니고, 때때로 흰 이를 드러내며 기분나쁘게 웃음지었다.
베러 크레이슨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의자에 몸을 파묻고 꿈꾸듯 똑
바로 앞만 지켜 보고 있었다.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치고 떨어져 사람 손
에 쥐어진 참새와도 같았다. 공포로 말미암아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다만
구원을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암스트롱은 안타까울 정도로 초조해 있었다. 쉴새없이 몸을 움직이고
두 손을 떨었다. 줄곧 담뱃불을 붙였다가는 이내 재떨이에 비벼 끄곤 했
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유난히 불안해 하는 것 같았다. 때때로 그는
이상한 말을 떠들어댔다.
「이대로 가만히 있어선 아무것도 안 돼! 무언가 방법이 있을 거야! 예
를 들면 신호불을 피우든가…….」
블로어가 말했다.
「이런 날씨에도 불이 붙소?」
비가 다시금 세차게 퍼붓고 있었다. 바람은 포효하며 불어 닥쳤다. 후
려치는 듯한 빗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머리가 돌아 버릴 것 같은 기분이
었다.
그들은 모두 응접실에 있었다. 방에서 나가는 것은 한 번에 한 사람으
로 제한했다. 그들 사이에그것은 어느 틈에 묵계가 되어 있었다. 다른 네
사람은 한 사람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롬버드가 말했다.
「시간문제요. 날씨가 좋아지면 방법은 얼마든지 있소. 신호도 할 수
있고, 불을 피울 수도 있고, 뗏목을 만들 수도 있소.」
암스트롱이 웃음을 터뜨렸다.
「시간문제라고? 그런 소리를 해선 안 되오! 그때까지 우리들은 모두
죽고 말 거요!」
워그레이브 판사가 말했다. 낮고 똑똑한 말투였다.
「아니, 경계를 태만히 하지 않으면 염려없소. 경계만 잘하면…….」
점심 식사를 했다. 그러나 서로 말은 나누지 않았다. 다섯 사람은 부엌
으로 들어가 식량 저장고를 열고 통조림이 많이 비축된 것을 보았다. 그
들은 쇠고기 통조림 하나와 과일 통조림 두 개를 꺼내 부엌 테이블 둘레
에 선 채로 먹었다.
식사를 끝낸 뒤 한데 모여 응접실로 돌아와 의자에 웅크리고 앉아 다
시 서로 경계의 눈을 번뜩였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모두 지식있는 사람들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
들이었다.
(암스트롱임에 틀림없다. 이상한 눈초리로 나를 보고 있다. 그것은 미치
광이의 눈이다. 의사가 아닌지도 모른다. 그렇다, 의사가 아닐 것이다! 병
원에서 달아난 미치광이인지도 모른다. 의사 시늉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 그게 틀림없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할까, 큰소리를 지를까.
아니, 그에게 경각심을 줄 뿐이다. 더욱이 그는 정상적인 것처럼 보이거
든.
……지금 몇 시일까? 아직 3시 15분밖에 안 되었다. 하느님, 나는 미쳐
버릴 것만 같습니다. 그렇다, 암스트롱이다. 지금 나를 보고 있구나…….)
(나는 당하지 않는다! 당할 리 없다. 몇 차례나 죽을 고비를 넘겨 왔다.
그건 그렇고, 권총은 어디로 갔을까. 누가 훔쳤을까. 아무도 갖고 있지 않
다――그건 알고 있다. 모두 몸을 뒤졌다. 그러나 누군가는 반드시 알고
있을 것이다.)
(모두 머리가 돌았다. 죽음의 공포. 우리는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
다. 나도 두려워하고 있다. 그러나 두려워하고 있는 것만으로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영구차가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디서 읽었던가. 수상한
것은 저 여자다. 그렇다, 저 여자를 조심해야 한다.)
(4시 20분 전. 아직 4시 20분 전이다. 시계가 섰는지도 모른다. 나로서
는 알 수 없다.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지금 일어나고 있는데 어째서
우리들은 눈을 뜨지 못하는가. 눈을 떠라――응징의 날이다!
아니, 그런 일은 없다. 내 머리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산산이 부서져
버릴 것만 같구나.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게 사실로 여겨지지 않는다! 몇
시일까……뭐야, 아직 4시 15분 전이 아닌가…….)
(단단히 마음먹지 않으면 안 된다. 냉정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계획은 충분히 세워져 있다. 그러나 의심받으면 안 된다. 누구일까. 그게
문제다……그렇다, 그다.)
시계가 5시를 알렸다. 다섯 사람은 모두 놀라며 몸을 움직였다.
베러가 말했다.
「누구――차를 드시겠어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블로어가 말했다.
「마시고 싶군!」
베러는 일어섰다.
「준비해 오겠어요. 여기서 기다려 주세요.」
판사가 조용히 말했다.
「모두 같이 갑시다. 당신이 준비하는 것을 보고 있겠소.」
베러는 판사를 보고 소리높여 웃었다.
「그래요. 그편이 더 좋아요.」
다섯 사람은 부엌으로 들어갔다. 차가 준비되어 베러와 블로어가 마셨
다. 그리고 나머지 세 사람은 위스키를 마셨다. 새 병을 꺼내 고정되어
있는 사이펀을 사용했다.
판사가 파충류를 연상시키는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충분히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오…….」
그들은 다시 응접실로 돌아왔다. 여름인데도 방안이 어두웠다. 롬버드
가 전등을 켜려고 했으나,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켜질 리 없지. 로저스가 죽은 뒤로 모터가 움직이지 않고 있소.」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모두 힘을 합쳐 움직이게 합시다.」
판사가 말했다.
「부엌에 양초가 있소. 촛불을 켭시다.」
롬버드가 방을 나갔다. 네 사람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롬버드는 양초 상자와 조그만 접시 몇 장을 포개 들고 돌아왔다. 다섯
자루의 초에 불이 붙여져 방안에 놓였다. 시각은 6시 15분 전이었다.

6시 20분이 지났을 때, 베러는 그곳에 앉아 있는 게 견딜 수 없어졌다.
자기 방에 돌아가 후텁지근한 머리를 찬물로 식히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다가 문득 깨닫고 초를 가지러
되돌어와 불을 붙여서 접시에 촛불을 떨어뜨려 양초를 세웠다. 그리고 방
을 나와 문을 닫았다. 방에는 네 사나이만 남았다.
그녀는 층계를 올라가 자기 방문을 열자 그대로 그 자리에 못박힌 듯
멈춰 섰다. 코가 벌름벌름 움직였다. 바다……세인트 트레데닉의 바다 냄
새였다.
그렇다, 그녀가 잘못 알 리 없다. 물론 섬에 있으면 바다 냄새가 나는
법이지만, 이 냄새는 달랐다. 그날의 바닷가 냄새였다. 조수가 빠지고 바
위에 엉겨 붙은 해초가 햇볕에 말라 있었다.
「섬까지 헤엄쳐 가도 괜찮아요, 크레이슨 선생님? 왜 섬까지 헤엄쳐
가면 안 되나요?」
말을 듣지 않는 장난꾸러기! 이 아이만 없었다면 유고는 재산을 얻어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할 수 있었다.
유고……유고는 그녀 곁에 있었던 것일까? 아니, 방에서 그녀를 기다리
고 있었다.
그녀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갔다. 창문으로 불어닥친 바람이 촛불을
꺼버렸다. 촛불은 흔들거리다가 꺼졌다. 어둠 속에서 그녀는 갑자기 공포
에 몸을 떨었다.
그녀는 스스로 꾸짖었다.
「정신차리지 않으면 안 돼. 걱정할 것 없어. 네 사람은 아래층에 있다.
방안에는 아무도 없어. 있을 리 없다. 쓸데없는 일을 상상하고 있는 거야.
그러나 저 냄새――세인트 트레데닉 바닷가 냄새――그것은 상상이 아
니었다. 분명히 냄새가 났다.
그리고 확실히 누가 있는 것 같았다.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확실히
들렸다. 그녀는 귀를 기울이고 서 있었다. 갑자기 차가운 손이 그녀의 목
줄기에 닿았다. 바다 냄새나는 젖은 손이…….

베러는 부르짖었다. 공포의 절규였다. 구원을 청해 부르짖은 것이다. 아
래층에서 의자가 넘어지고 문이 열리며 발소리가 층계를 달려 올라왔다.
그러나 그녀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의식에 남아 있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공포뿐이었다.
그녀가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복도에 촛불이 흔들리고 남자들이 소리
지르며 방으로 들어왔다.
베러는 몸을 떨면서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다가 바닥에 쓰러졌다. 위에
서 굽어보며 그녀의 머리를 억지로 그녀의 무릎 사이로 밀어 넣으려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누구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별안간 고함 소리가 들렸다.
「저걸 보오.」
베러는 그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는 눈을 뜨고 머리를 들었다.
그녀는 남자들이 촛불을 비추어 보고 있는 곳으로 눈을 옮겼다. 폭넓은
젖은 해초가 천장에서 밑으로 늘어져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녀이 목줄기
에 닿은 것은 해초였다. 그것을 익사한 사람의 손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그녀는 발작을 일으킨 듯 웃었다.
「해초였군요. 그 냄새도 해초에서 났군요!」
그리고 나서 그녀는 다시 정신이 몽롱해졌다. 또 누군가가 그녀의 머리
를 무릎 사이로 밀어 넣으려 했다.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모두 그녀에게 무엇을 마시게 하려고 했
다. 글라스를 그녀의 입술에 갖다대고 있었다. 브랜디 냄새가 났다. 베러
가 기쁘게 그것을 마시려 할 때, 돌연 위험을 알리는 벨소리 같은 것이
그녀의 머리 속에서 울렸다. 그녀는 글라스를 밀어젖히고 고쳐 앉았다.
「이거 어디서 가져왔지요?」
블로어가 대답했다. 그는 그녀를 한 번 쳐다보고 나서 말했다.
「아래층에서 가져왔소.」
「마시지 않겠어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롬버드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훌륭하오, 베러. 기분이 좋아졌군요. 머리도 괜찮나 보오. 내가 새 브
랜디 병을 가져오겠소.」
그는 급히 방을 나갔다.
베러가 말했다.
「이제 괜찮아요. 물을 마시겠어요.」
암스트롱은 그녀를 도와 일으켜 세웠다. 베러는 의사의 부축을 받으며
세면대 쪽으로 가서 유리첩에 물을 따랐다.
블로어가 기분나쁜 얼굴로 말했다.
「이 브랜디에는 독이 들어 있지 않소.」
암스트롱이 말했다.
「어떻게 아오?」
「나는 아무것도 넣지 않았소. 당신은 나를 의심하는 거요?」
「당신이 독을 넣었다고는 말하지 않았소. 누가 병을 만졌는지 모르잖
소.」
롬버드가 새 브랜디 병과 병마개를 갖고 돌아왔다. 그는 베러 앞으로
병을 내밀었다.
「보오, 새것이오!」
그는 납으로 봉한 뚜껑을 따고 크로크 마개를 잡아 뺐다.
「술이 많이 있는 것은 고마운 일이야. 그러고 보니 오윈에게도 괜찮은
데가 있군.」
베러는 심하게 몸을 떨었다. 롬버드는 암스트롱이 가지고 있는 글라스
에 브랜디를 따랐다.
암스트롱이 말했다.
「마시는 게 좋소, 크레이슨 양. 충격이 컸으니까…….」
베러는 글라스에 입을 댔다. 곧 얼굴이 불그레해졌다.
롬버드가 웃으며 말했다.
「능숙한 범인도 이번만은 계획대로 하지 못했군!」
베러가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계획적이었을까요?」
롬버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포로 심장마비를 일으키는 일도 있겠지요, 의사 선생?」
암스트롱은 그 의견에 찬성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도, 그렇지 않다고도 말할 수 없소. 크레이슨 양은 아직 젊
고 건강하오. 심장이 약하다고는 생각지 않소. 아마도 그런 계획은 아니
었을 거요. 그보다는…….」
그는 블로어가 가져온 브랜디를 집어 들어 손가락에 찍어서 맛을 보았
다. 그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음…이상없는 것 같군.」
블로어가 얼굴빛이 달라지며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내가 독을 넣었다고 생각한다면 가만히 있지 않겠소.」
브랜디로 기운을 되찾은 베러가 화제를 바꾸었다.
「판사님은 어디계세요?]
세 사나이는 얼굴을 마주보았다.
「이상한데. 함께 온 줄 알았는데.」
블로어가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소, 어떻소. 의사 선생? 당신은 내 뒤에서 층계를
올라왔는데…….」
암스트롱이 말했다.
「뒤따라오고 있다고 생각했었소. 물론 우리보다는 느리겠지만.」
세 사람은 다시 얼굴을 마주보았다.
「아무래도 이상한데.」
「찾아야 돼!」
그는 문 쪽으로 달려갔다. 모두 뒤따라갔다. 베러가 맨 끝으로 따라갔
다.
층계를 내려가며 암스트롱이 외쳤다.
「워그레이브 씨! 워그레이브 씨! 어디 있습니까?」
대답이 없었다. 좀 가늘어진 빗소리가 들릴 뿐 저택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응접실 문가에 왔을 때 암스트롱은 얼굴빛이 달라지며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다른 사람들은 그의 등뒤에 겹치듯 서서 어깨너머로 들여다보
았다. 누군가가 외침 소리를 질렀다.
워그레이브 판사는 방 한구석에 놓인 등받이 높은 의자에 몸을 파묻고
있었다. 양쪽에 두 자루의 촛불이 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놀라게 한
것은 판사가 진홍빛 의상을 두르고 머리에 판사들이 쓰는 가발을 쓰고
쓰러져 있는 모습이었다.
암스트롱 의사는 다른 사람들을 제지하고 판사 곁으로 걸어 갔다. 취한
사람처럼 다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는 몸을 굽혀 판사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재빠른 동작으로
머리를 젖혔다. 가발이 마루 위로 떨어지고, 벗겨진 앞이마가 드러났다.
그 한가운데에 피가 엉킨 둥그런 상처가 있고, 거기서 무엇인가가 스며
나오고 있었다.
암스트롱 의사는 떨리는 손으로 판사의 맥박을 짚어 보았다. 그리고 세
사람을 돌아보고 말했다. 표정이 없는 목소리였다.
「사살되었소.」
블로어가 말했다.
「뭐라고! 권총으로!」
의사가 말했다.
「머리를 꿰뚫었소, 즉사요.」
베러는 바닥으로 몸을 수그려 가발을 보았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스 브랜트가 잃어버렸던 회색 털실이에요.」
블로어가 말했다.
「게다가 이건 욕실에서 없어진 진홍빛 커튼이오.」
베러가 속삭였다.
「이런 데 쓰려고 그랬군요.」
갑자기 필립 롬버드가 웃음을 터뜨렸다. 억지로 자아내는 웃음소리였
다.
「다섯 인디언 소년이 법률에 열중했다. 한 소년이 대법원에 들어가 네
소년이 되었다. 이것이 워그레이브 판사의 마지막 무대였던 것이오!
그는 이제 판결을 내릴 수 없게 되었소. 법정에 설 수도 없소. 죄없는
사람을 사형에 처할 수도 없게 되었소. 에드워드 시튼이 여기에 있었다면
얼마나 비웃었을까? 틀림없이 크게 기뻐했겠지!」
그가 너무도 큰소리로 떠들어댔기 때문에 세 사람은 놀랐다.
베러가 말했다.
「그렇지만 범인은 판사라고 당신이 말한 게 어제 아침 일이었지요.」
필립 롬버드의 얼굴빛이 달라졌다. 흥분이 가라앉은 것이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틀림없이 그렇게 말했었소. 나는 잘못 알고 있었던 거요. 또 한
사람, 범인이 아닌 것이 입증되었소. 좀 늦긴 했지만…….」

제 목 : [애-크]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14
올린이 : 매직라인(한창욱 ) 96/11/24 22:31 읽음 : 70 [7m관련자료 있음(TL)[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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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사라진 의사

그들은 워그레이브 판사의 시체를 그의 방으로 옮겨 침대에 뉘었다. 그
런 다음 아래층으로 내려와 홀에 선 채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블로어가 말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하지?」
롬버드가 말했다.
「먼저 무엇이든 먹읍시다. 먹어 두지 않으면 안 되오.」
그들은 부엌으로 들어가 소 혓바닥 통조림을 따서 기계적으로 입에 넣
었다. 맛이 형편없었다.
베러가 말했다.
「난 한평생 소 혓바닥 고기는 안 먹겠어요.」
그들은 식사가 끝나자 부엌 테이블에 앉아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블로어가 말했다.
「드디어 네 사람이 되었소. 다음은 누구 차례일까?」
암스트롱이 지그시 블로어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거의 기계적으로
말했다.
「충분히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오.」
블로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판사도 늘 그렇게 말했지. 그리고 죽어 버렸소!」
암스트롱이 말했다.
「어떻게 죽였을까?」
롬버드가 말했다.
「훌륭한 계획이야! 크레이슨 양 방에 그런 것을 걸어 놓아 우리들에게
그녀가 살해된 것으로 생각케 했소. 그리고 그 소동을 이용해 노인이 방
심한 틈을 노렸소.」
블로어가 말했다.
「어째서 아무도 권총 소리를 듣지 못했을까?」
롬버드가 머리를 저었다.
「크레이슨 양이 큰소리로 부르짖은데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대고 있었
소. 더욱이 우리들은 외쳐대며 뛰어 올라갔으니 들릴리 없지.」
그는 말을 멈추었다.
「그러나 이런 계략은 이제 성공할 수 없소. 이 다음에는 더욱 기발한
술수를 생각하지 않는 한 성공할 수 없을 거요.」
블로어가 말했다.
「틀림없이 또 생각해 내겠지.」
그 말에는 적의가 담겨 있었다. 두 사람은 눈을 마주보았다.
암스롱이 말했다.
「이제 네 사람밖에 없소. 그러면서도 우리는 누가 범인인지 아직 모르
고 있소.」
블로어가 말했다.
「나는 알고 있소.」
베러가 말했다.
「나도 알아요.」
암스트롱이 천천히 말했다.
「나도 짐작은 가는데…….」
필립 롬버드가 말했다.
「나는 확실히 알고 있소.」
다시금 그들은 얼굴을 마주보았다.
베러가 힘없이 일어섰다.
「머리가 아파요. 좀 자고 싶어요.」
롬버드가 말했다.
「그러는 게 좋을 거요. 서로 흘겨보고 있어 봤자 이익될 게 없으니까.
블로어가 말했다.
「나도 찬성이오.」
의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좋은 생각이지만 아무도 잠들 수는 없을 거요.」
그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블로어가 말했다.
「권총은 어디에 있을까?」

그들은 2층으로 올라갔다.
다음 행동은 희극의 한 장면 같았다. 네 사람은 저마다 자기 방문 손잡
이를 한손으로 잡고 복도에 섰다. 그리고 신호에 맞추듯 동시에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빗장을 내리고 자물쇠를 채웠다. 의자를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공포
에 쫓긴 네 사람의 남녀는 이리하여 다음날 아침까지 성채에 틀어박혀
있었다.

필립 롬버드는 문 손잡이 밑에 의자를 밀어붙여 놓고 마음놓이는 듯
커다랗게 숨을 내쉬었다.
그는 화장대 앞으로 가서 거울에 비친 자기의 얼굴을 신기한 듯 바라
보았다.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굉장히 야위었군.」
그는 승냥이 같은 미소를 지었으나, 그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
다. 그리고 서둘러 옷을 벗고 침대로 들어가 팔목시계를 침대 옆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런 다음 서랍을 열었다. 그는 서랍 속에서 권총을 발견하고 멍하니
그곳에 서 있었다.

베러 크레이슨은 침대에 누웠다. 한쪽에서 촛불이 타고 있었다. 끄고
싶지 않았다. 어둠이 무서웠던 것이다.
그녀는 몇 번이나 자신에게 되풀이 들려주었다.
「내일 아침까지는 무사하다. 어젯밤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늘 밤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겠지. 아니, 일어날 리 없어. 빗장을
걸고 열쇠를 채웠다. 아무도 들어올 수 없어…….」
갑자기 그녀는 한 가지 생각을 해냈다. 그렇다! 이 방에 있으면 된다!
열쇠를 잠그고 가만히 들어앉아 있는 것이다! 먹는 것은 아무래도 좋다.
구원의 손이 미칠 때까지 이 방에 있으면 안전하다! 하루든――이틀이든
――.
이곳에 있으면 된다. 그러나 있을 수 있을까. 몇 시간이나 아무와도 이
야기하지 않고 하는 일없이 생각만 하면서…….
그녀는 콘월에서의 일, 시릴에게 한 말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귀찮도록
매달리는 소년이었다.
「크레이슨 선생님, 왜 바위까지 헤엄쳐 가면 안 되나요? 나는 헤엄쳐
갈 수 있는데.」
거기에 대답한 것은 그녀의 목소리였던 것일까?
「물론 헤엄쳐 갈 수 있어, 시릴. 알고 있어요.」
「그럼, 가도 되지요, 크레이슨 선생님?」
「하지만 시릴, 어머니가 안 된다고 말씀하셨잖아. 그러니 이렇게 해.
내일 바위까지 헤엄쳐 가. 내가 바닷가에서 어머니에게 말을 걸어 눈치채
지 못하게 하겠어. 그리고 어머니가 알아 차렸을 때, 네가 바위 위에 서
서 힘차게 손을 흔들어 보이는 거야. 어머니는 틀림없이 깜짝 놀라시겠
지.」
「고마워요, 크레이슨 선생님.」
그렇다! 내일이 되면 유고는 뉴기니아에 간다. 그가 돌아왔을 때는 모
든 게 끝난 뒤일 것이다.
그러나 만일 잘 안 된다면? 시릴은 구조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가 말
하겠지.
「크레이슨 선생님이 괜찮다고 했어요.」
그래서 어떻다는 것인가. 그때는 좀 위협하면 된다.
「왜 거짓말하는 거야, 시릴.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
누구나 그녀를 믿으리라. 시릴은 끝까지 거짓말한 것이 되겠지. 그는
그리 정직한 소년이 아니었으니까. 물론 시릴 자신은 알고 있겠지만. 그
런 것을 마음에 둘 필요는 없다.
게다가 잘되지 않을 리 없다. 뒤에서 헤엄쳐 가면 된다. 헤엄치면서 따
라가지는 않는다. 아무도 의심할 수 없다.
유고는 의심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래서 이상한 눈초리로 그녀를 보았
던 것일까? 그래서 신문이 끝나자 서둘러 모습을 감춰 버린 것일까?
그는 한 번도 편지에 답장해 주지 않았다.
유고…….
베러는 침대 속에서 몸을 움직였다.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다. 아니, 유
고를 생각해선 안 된다. 가슴이 아프다! 이제 끝난 일이다. 잊어버리지 않
으면 안 된다. 아까는 왜 유고가 이방에 있는 듯 여겨졌던 것일까?
그녀는 천장을 올려다보고 방 한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검은 갈고리를
보았다. 해초는 거기에서 밑으로 늘어뜨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목줄기에 닿았던 차가운 느낌을 생각해 내고 몸을 떨었다. 그녀
는 천장의 갈고리가 무서워졌다. 그러나 갈고리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
다. 커다랗고 검은 갈고리에서…….

전직 경감 블로어는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있었다. 핏기어린 조그마한
눈이 표정없는 얼굴에서 빛나고 있었다. 먹이에 달려들려 하는 멧돼지처
럼 보였다.
그는 자고 싶지 않았다. 무서운 일이 바로 옆에까지 닥쳐오고 있는 것
이다. 열 사람 가운데 여섯 사람! 그토록 두뇌가 날카롭고 그토록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던 노판사도 다른 사람과 같은 운명이 되고 말았다.
블로어는 잔혹한 만족 같은 것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그 노인은 뭐라고 했던가. 충분히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애써 한 말이지만 이젠 경계할 필요도 없게 되었다. 언제나 자기만이
옳은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더니…….
이제 네 사람밖에 없다. 크레이슨, 롬버드, 암스트롱, 그리고 나다. 곧
누군가가 또 없어지겠지. 그러나 윌리엄 헨리 블로어는 아니다! 자기는
남의 전철을 밟는 사나이가 아니다!
(그러나 권총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것이 마음에 걸린다. 그 권총은…
….)
블로어는 침대 위에 앉아 눈썹을 모으고 조그만 눈을 가늘게 뜨고는
권총 문제를 생각했다. 정적이 깃든 저택 안에서 아래층의 시계가 시간을
알렸다. 12시였다. 마음이 좀 가라앉았다. 그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러
나 옷은 벗지 않았다.
그는 누운 채 경감으로 근무할 때처럼 모든 일을 처음부터 순서있게
생각해 나갔다. 주도면밀한 생각만이 마지막 결정을 짓는 것이다.
초가 거의 다 타들어 가고 있었다. 성냥이 바로 손닿는 곳에 있는 것을
보고 촛불을 불어 껐다. 이상하게도 어둠 속이 되자 그의 눈앞에 여러 가
지 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마치 천년의 공포가 눈을 뜨고 그의 머리
속에서 우위를 다투고 있는 듯했다.
여러 개의 얼굴이 공중에 떠올랐다. 회색 털실을 머리에 뒤집어쓴 판사
의 얼굴, 로저스 부인의 차가운 죽은 얼굴, 앤터니 머스턴의 괴로움에 일
그러진 보랏빛 얼굴…….
또 하나의 얼굴, 안경을 쓰고 조그마한 밀짚빛 수염을 기른 젊은 얼굴.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어디서 보았을까. 이 섬에서 본 얼굴은
아니다. 아니, 더 옛날에 본 얼굴이다.
아무래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리 자주 본 얼굴은 아니다. 경찰에 끌려
온 사나이 같은…….
그렇다! 랜더다! 어째서 지금까지 랜더의 얼굴을 잊고 있었을까? 어제
도 생각하려 했으나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뚜렷이 떠오른
것이다.
랜더에게는 아내가 있었다. 슬픈 얼굴을 한 여윈 여자였다. 14살쯤 된
딸도 있었다. 그들은 지금 어떻게 지낼까? 블로어는 처음으로 그 일을 생
각했다.
(권총! 권총은 어디로 갔는가. 그게 훨씬 중대한 문제다.)
생각하면 할수록 알 수 없어진다. 이 저택 안 사람이 갖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데…….
아래층에서 시계가 1시를 쳤다.
블로어는 갑자기 침대 위에 벌떡 일어나 앉았다. 무슨 소리가 들려 온
것이다. 들릴 듯 말 듯한 소리였다. 문 밖 어디선가 들려 왔다.
칠흙같이 어두운 집안에서 움직이는 사람이 있다. 얼굴에 땀이 흘러내
렸다. 누구일까. 복도를 조용히 걷고 있다. 무슨 일을 꾸미고 있음에 틀림
없다.
블로어는 소리나지 않게 침대에서 내려와 문 안쪽에 서서 귀를 기울였
다. 이미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히 소리가 들려 왔었다.
바로 문 밖에서 발소리가 들려 왔던 것이다. 그는 찬물을 뒤집어쓴 듯 긴
장했다. 누군가가 발소리를 죽여 어둠 속을 걷고 있다. 그는 귀를 곤두세
웠다. 그러나 그 소린 두 번 다시 들리지 않았다.
블로어는 새로운 유혹에 사로잡혔다. 문 밖으로 나가서 조사해 보고 싶
어진 것이다. 어둠 속을 돌아다니는 사람은 누구일까. 그러나 문을 여는
것은 위험하다. 그때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블로어는 가만히 선 채 귀를 쫑긋했다. 이번에는 여러 곳에서 갖가지
소리가 들려 왔다. 물건 부딪치는 소리, 옷자락 스치는 소리, 나지막히 속
삭이는 소리. 그러나 그 소리들이 망상에 의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별안간 망상에서 우러난 것이 아닌 소리가 들려 왔다.
겨우 들릴락말락한 발소리였다. 블로어처럼 귀를 곤두세운 사람에게나 들
릴까말까한 희미한 발소리였다.
발소리는 조용히 복도를 걸어 다가왔다. 롬버드와 암스트롱의 방은 층
계 건너편 복도에 있었다. 발소리는 그의 방 앞을 멈추지 않고 지나갔다.
블로어는 마음을 정했다. 누구인지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발소리는 그
의 방 앞을 지나 아래층으로 내려간 것 같다. 어디에 가는 것일까? 블로
어는 한번 마음을 정하면 재빠르게 행동하는 사나이였다. 몸집이 탄탄하
여 둔한 것처럼 보이나 뜻밖에 몸놀림이 가벼웠다.
그는 침대로 돌아가 성냥을 주머니에 넣고 전기 스탠드의 플러그를 뽑
아 코드를 스탠드 다리에 감았다. 크롬제 스탠드로 무거운 에보나이트가
붙어 있었다. 무기로서 안성맞춤이었다.
그는 발소리를 죽이며 문 쪽으로 가서 손잡이 밑에 밀어붙여 놓았던
의자를 치우고 소리나지 않게 빗장을 풀어 문을 열었다.
그는 복도로 나왔다. 아래층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 왔다. 블로어는
양말신은 발로 소리나지 않게 층계 아래로 달려갔다. 그때 왜 소리가 들
렸는지를 알았다.
바람이 완전히 자고, 아마 하늘도 맑게 개인 것으로 여겨졌다. 창 틈으
로 엷은 달빛이 새어 들어와 아래층 홀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블로
어는 정면 문으로 나가는 사람 그림자를 보았다.
그는 층계를 뛰어 내려가려다가 멈춰 섰다. 위험한 찰나였다! 그를 집
밖으로 끌어내려는 술책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방 사나이도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2층의 세 침실 가운데
하나는 비어 있을 것이다. 어느 방이 비어 있는지 그것만 확인하면 된다!
블로어는 급히 복도로 돌아왔다. 처음에 암스트롱 의사의 방문을 노크
했다. 대답이 없었다. 그는 잠깐 기다렸다가 필립 롬버드의 방으로 갔다.
곧 대답이 있었다.
「누구요?」
「블로어요. 암스트롱이 방에 없는 것 같소.」
「……기다려 주오.」
그는 반대편 복도로 뛰어가 끝에 있는 방문을 노크했다.
「크레이슨 양, 크레이슨 양.」
베러가 놀라며 대답했다.
「누구세요? 왜 그러세요?」
「걱정할 것 없소, 크레이슨 양. 기다려 주오. 다시 돌아올 테니까.」
그는 롬버드의 방으로 돌아왔다. 문이 열리고 롬버드가 왼손에 촛불을
들고 나타났다. 잠옷 위에 바지를 입고 있었다.
롬버드는 날카롭게 말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요?」
블로어는 급히 설명했다. 롬버드의 눈이 빛났다.
「암스트롱이라고? 그럼, 그 녀석이었을까?」
그들은 의사의 방 앞으로 갔다.
「블로어, 미안하지만 확인해 보지 않고는 믿을 수가 없소.」
그는 문을 요란하게 두드렸다.
「암스트롱! 암스트롱!」
대답이 없었다. 롬버드는 무릎꿇고 열쇠 구멍으로 방안을 들여다보았
다. 그리고 새끼손가락으로 열쇠 구멍을 후비며 말했다.
「안에 열쇠가 없소.」
블로어가 말했다.
「문 밖에서 자물쇠를 채우고 열쇠를 가져간 거요.」
롬버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있을 수 있는 일이오. 이번에야말로 잡아야 하오! 잠깐 기다려 주오.
롬버드는 베러의 방으로 뛰어갔다.
「베러!」
「어떻게 되었어요?」
「우리는 암스트롱을 찾으러 가오. 그가 방에 없소. 어떤 일이 있어도
문을 열면 안 되오. 알았소?」
「알았어요.」
「혹시 암스트롱이 돌아와 내가 살해되었다고 해도 믿어서는 안 되오.
알겠소? 블로어나 내가 부르지 않는 한 문을 열어선 안 되오.」
「알았어요. 나도 그처럼 바보는 아니예요.」
「좋소.」
그는 블로어 곁으로 돌아갔다.
「자, 갑시다! 수색이오.」
블로어가 말했다.
「주의하는 게 좋소. 녀석은 권총을 갖고 있으니까.」
필립 롬버드는 층계를 뛰어 내려가며 웃었다.
「그렇지 않소.」
그는 현관문을 열며 말했다.
「문고리가 풀려 있군. 돌아왔을 때 손쉽게 열 수 있게 되어 있소.」
그는 말을 이었다.
「권총은 내가 갖고 있소.」
그러면서 주머니에서 권총 총구를 내보였다.
「어젯밤 서랍 속에 돌아와 있었소.」
블로어는 저택 현관 앞에 멈춰 섰다. 얼굴빛이 달라졌다. 그것을 보고
롬버드가 말했다.
「걱정 마시오, 블로어. 당신을 쏘지는 않겠소. 같이 가는 게 싫으면 집
에 남아서 방안에 처박혀 있어도 좋소. 나는 암스트롱을 잡겠소!」
그는 달빛 속으로 달려나갔다. 블로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 뒤를 따
라가며 생각했다.
(스스로 위험한 곳에 뛰어드는 셈이지만, 그러나…….)
그는 권총 가진 범인을 상대한 일이 몇 차례나 있었다. 비록 어딘가 모
자라는 점이 있다 하더라도 용감하기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위험해도 사나이답게 싸우자. 눈에 보이는 위험은 두렵지 않다. 그가
공포를 느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위험인 것이다.

베러는 일어나 옷을 입었다. 그녀는 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믿음직스
러운 문이었다. 열쇠도 채워져 있다. 손잡이 밑에는 의자가 놓여 있었다.
사람의 힘으로는 밀어서 깨뜨릴 수 없다.
범인은 힘센 사나이는 아니다. 살인을 저지르는 데에도 힘보다 책략에
의하는 사나이인 것이다.
그가 쓸지도 모르는 수단을 그녀는 생각해 보았다. 롬버드가 말한 대로
두 사람 가운데 하나가 죽었다고 하며 그녀에게 달려올지도 모른다. 또는
중상을 입은 것같이 꾸며 문 밖에서 신음소리를 낼지도 모른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경우가 생각되었다. 저택에 불이 났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정말로 불을 지를지도 모른다. 그렇다,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두
남자를 집 밖으로 꾀어낸 뒤 미리 뿌려 놓은 휘발유에 불을 지른다.
그런데 자기는 아무것도 모르고 엄중히 방비된 방안에 있다. 정신을 차
렸을 때는 이미 늦다.
베러는 창가로 갔다. 뛰어내리자――여차하면 여기로 달아나자. 뛰어내
리지 않으면 안 되는데, 마침 밑에는 꽃밭이 있다.
그녀는 의자에 앉아 일기장을 꺼내 아름다운 글씨체로 쓰기 시작했다.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이다.
갑자기 그녀는 몸을 굳혔다. 무슨 소리가 들려 온 것이다. 유리가 깨지
는 듯한 소리였다. 아래층 어디에선가 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귀기울였
다. 그러나 소리는 다시 들리지 않았다.
가만가만히 걷고 있는 발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층계를 밟는
소리, 옷스치는 소리. 그러나 정말로 들렸는지 어떤지 알 수 없었다. 그리
고 블로어가 그랬듯, 그녀는 자기가 망상에 사로잡힌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에 더욱 뚜렷이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래층에서 사람
이 걷고 있다. 소리도 들려 왔다. 그리고 층계를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리
더니 이어서 문이 열리는 소리, 닫히는 소리, 지붕으로 올라가는 발소리,
이윽고 발소리는 그녀의 방쪽으로 복도를 걸어왔다.
롬버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베러, 아무 일도 없었소?」
「네, 어떻게 되었어요?」
블로어의 목소리도 들렸다.
「안으로 들어가게 해주오.」
베러는 의자를 치우고 열쇠를 돌린 다음 다음 고리를 풀고 문을 열었
다.
두 사나이는 숨을 죽이고 있었다. 발과 바짓가랑이가 흠뻑 젖어 있었
다.
그녀는 다시 말했다.
「어떻게 되었지요?」
롬버드가 대답했다.
「암스트롱이 없어졌소.」

베러가 큰소리로 외쳤다.
「뭐라고요?」
롬버드가 말했다.
「섬에서 사라져 버렸소.」
이어서 블로어가 말했다.
「그렇다! 요술쟁이같이 사라져 버렸소!」
「하지만 그럴 리 없어요. 어딘가에 숨어 있을 거예요.」
블로어가 말했다.
「아니, 숨어 있지 않소. 이 섬에는 숨을 곳이 없소. 아무데도 없소. 달
이 밝은데 보이지 않을 리 없소.」
베러가 말했다.
「저택으로 돌아왔을지도 몰라요!」
블로어가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집안도 찾아보았소. 찾는 소리가 들렸을거요. 그는
여기에 없소.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소!」
베러가 말했다.
「믿어지지 않아요.」
그러자 롬버드가 말했다.
「그러나 틀림없소. 틀림없다는 사실이 있소. 식당 유리창이 한 장 깨
어져 있고, 테이블 위에 인디언 인형이 세 개가 되어 있소.」


제 목 : [애-크]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15
올린이 : 매직라인(한창욱 ) 96/11/24 22:33 읽음 : 73 [7m관련자료 있음(TL)[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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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마지막 세 사람

세 사람은 부엌 테이블에 앉아 아침 식사를 했다. 밖에는 태양이 빛나
고 있었다. 쾌청한 아침이었다. 태풍은 완전히 가라앉아 있었다.
날씨의 변화는 세 사람의 기분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악몽에서 깨
어난 듯 느껴졌다. 아직 위험은 남아 있지만, 대낮의 위험이었다. 밖에서
태풍이 미친 듯 불어닥치고 있던 때 그들을 감쌌던 공포의 분위기는 이
미 사라져 버렸다.
롬버드가 말했다.
「섬의 가장 높은 곳에서 거울로 신호를 보냅시다. 언덕에 올라 있는
사람의 눈에 띄면 SOS라는 것을 알아차리겠지. 그리고 밤이 되면 신호불
을 피웁시다. 다만 장작이 얼마 남지 않았고, 놀고 있는 거라고 생각할지
도 모르지만…….」
베러가 말했다.
「신호를 알아차리는 사람이 반드시 있을 거예요. 해지기 전에 꼭 구하
러 와줄 거예요.」
「날씨는 좋아졌지만 파도가 아직 높소. 내일이 아니면 배를 섬에 댈
수 없을 거요.」
베러가 부르짓듯 말했다.
「이곳에서 또 하룻밤을 보내야 하나요?」
롬버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24시간만 버티면 되오. 24시간만 무사하면 이제 우리들 세상이오!」
블로어가 기침을 하면서 말했다.
「그러나 사태를 잘 관찰해 두지 않으면 안 되오. 암스트롱은 어떻게
되었을까?」
롬버드가 말했다.
「증거가 하나 있소. 인디언 인형이 세 개밖에 남지 않았소. 암스트롱
은 죽은 거요.」
베러가 말했다.
「그렇다면 왜 시체가 없지요?」
블로어가 말했다.
「그렇소. 어디 있을까?」
롬버드는 머리를 저었다.
「그것이 이상하단 말이오. 짐작이 안 가오.」
블로어가 말했다.
「바다에 집어 던져 버렸는지도 모르오.」
롬버드가 날카롭게 물었다.
「누구일까? 당신인가! 나인가! 당신은 그가 집에서 나가는 것을 보았
소. 그리고 내 방으로 와서 함께 수색하러 나갔소. 내가 범인이라면, 나는
그를 죽인 뒤 시체를 치울 시간이 없었소.」
블로어가 말했다.
「그건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알고 있는 게 하나 있소.」
「뭐요.」
「권총이오. 당신은 권총을 갖고 있소. 줄곧 갖고 있었는지도 모르오.」
「무슨 말이오, 블로어. 모두 몸과 방을 수색당했잖소?」
「그전에 숨겨 두었다가 나중에 찾아왔다고 생각되오.」
「서랍 속에 되돌아와 있었다고 한 말을 못 믿는 거요? 나 자신이 이
토록 놀란 일은 태어나서 처음이오.」
「그런 일이 믿어질 거라고 생각하오! 암스트롱이든 그 밖의 누구든 한
번 훔친 권총을 돌려줄 리 없소.」
롬버드는 어깨를 으쓱하며 내뱉듯 말했다.
「나로선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소. 나 자신도 믿어지지 않으니
까.」
블로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도 믿지 못하오. 그래, 더 좋은 구실이 생각나지 않소?」
「그게 내가 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소?」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소.」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뿐이오.」
「롬버드, 당신이 정직하게 말하고 있다면…….」
「언제 내가 정직하지 않았소? 나는 한 번도 거짓말한 적 없소.」
블로어는 상관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당신이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다면 취할 행동은 하나밖에 없소. 당신
이 권총을 갖고 있는 한 나와 크레이슨 양은 당신 생각대로 될 거요. 권
총을 약품과 함께 두고 당신과 내가 열쇠를 갖는 게 가장 공평한 일이오.
롬버드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는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바보 같은 소리를 해선 안 되오.」
「찬성하지 않는 거요?」
「찬성할 수 없소. 권총은 내 것이오. 내 몸을 지키기 위해 필요하오.」
블로어가 말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밖에 없소.」
「내가 UN 오윈이라는 거요? 어떻게 생각하든 당신 마음대로요. 그러
나 내가 오윈이었다면 왜 어젯밤 당신을 쏘아 죽이지 않았겠소? 스무 번
쯤이나 기회가 있었는데.」
블로어는 머리를 저었다.
「그건 알 수 없소. 무슨 까닭이 있었겠지.」
베러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두 사람 모두 머리가 전혀 돌아가지 않는군요.」
롬버드가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뭐라고?」
「두 분 다 저 자장가를 잊고 있어요. 거기에 증거가 있잖아요.」
그녀는 자장가 한 구절을 외었다.
「네 인디언 소년이 바다로 나갔다. 한 소년이 훈제 청어에 먹혀 세 소
년이 되었다. 훈제 청어――그것이 실마리예요. 암스트롱은 죽지 않았을
거예요. 인디언 인형을 하나 줄여 죽은 것같이 보인 거예요.
당신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암스트롱은 아직 섬에 있어요. 훈
제 청어로 사람 눈을 멀게 한다는 이야기가 있잖아요(사냥개를 길들일 때
훈제 청어를 쓰는 데서 유래된 말로, <길에 훈제 청어를 놓는다>는 주의
를 다른 데로 돌린다는 뜻임).」
롬버드가 말했다.
「그렇군. 크레이슨 양이 이야기한 대로일지도 모르오.」
블로어가 말했다.
「그렇다며누 녀석은 어디에 있을까? 집 안팎을 모두 찾아보았잖소.」
베러는 비웃듯 말했다.
「권총을 찾을 때도 보이지는 않았지만, 집안 어딘가에 있었잖아요?」
롬버드가 말했다.
「사람과 권총은 크기가 다르오.」
「그렇다 해도 내 말은 틀림없다고 생각해요.」
블로어가 옆에서 말했다.
「하지만 스스로 실마리를 주기야 할까? 훈제 <청어>라고 하지 않고
다른 말을 써도 되었을 거요.」
베러는 열을 올리며 말했다.
「아직도 모르겠어요? 범인은 미치광이예요. 자장가대로 죽이고 있으
니, 미친 녀석이 하는 짓이지요. 판사에게 진홍빛 커튼을 씌우고, 로저스
는 장작을 패고 있을 때 죽였으며, 로저스 부인을 언제까지나 잠에서 깨
어나지 못하게 했고, 미스 브랜트가 죽었을 때 벌을 날아다니게 해둔 일
등 정상적인 정신을 지닌 사람의 짓이 아니예요! 모두 자장가대로 되어가
고 있어요.」
블로어가 말했다.
「과연 당신 말대로요.」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그러나 이 섬에 동물원은 없소. 이 다음은 자장가대로 되지 못할 거
요.」
베러가 큰소리로 말했다.
「있어요! 동물은 우리들이에요! 어젯밤의 우리들은 인간이라고 할 수
없었어요. 우리들이 동물이에요.」

그들은 오전 동안 절벽 위에서 육지 쪽으로 거울을 반사시키며 보냈다.
응답은 없었다. 하늘은 높푸르고 상쾌한 미풍이 불고 있었다. 그러나 아
직 파도가 높아 바다에 배는 한 척도 나와 있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섬을 수색했다. 의사의 모습은 아무데도 없었다.
베러는 서 있는 곳에서 저택을 바라보았다.
「밖에 있는 편이 무섭지 않아요. 이젠 저택 안으로 들어가지 말기로
해요.」
롬버드가 말했다.
「좋은 생각이오. 확실히 여기 있으면 안전하오. 가까이 오는 사람이
있으면 멀리서도 보이니까.」
「여기에 있어요.」
블로어가 말했다.
「밤에는 어쩌오.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오.」
베러는 몸을 떨었다.
「나는 참을 수 없어요. 이젠 집안에서 밤을 지낼 수 없어요!」
롬버드가 말했다.
「자물쇠를 채우고 있으면 무서울 것 없소.」
그녀는 중얼거렸다.
「그럴지도 모르지만……이렇게 햇볕을 쬐고 있으니 기분이 좋아요.」
그녀는 손을 길게 뻗으며 생각했다.
(이상한 일이다. 이렇게 있으니 행복에 감싸여 있는 것 같지만, 정말은
아직 큰 위험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기분이 조금도 들지 않는
다. 내가 죽는 일 따윈…….)
블로어는 팔목시계를 보았다.
「2시군. 점심 식사는 어떻게 하지?」
베러가 말했다.
「저택으로 돌아가기 싫어요. 나는 여기 있겠어요.」
「하지만 뭐든지 먹어 두지 않으면…….」
「난 소 혓바닥 통조림을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빠요.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요. 2, 3일쯤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괜찮아요.」
「나는 한끼도 식사를 거르고 싶지 않소. 당신은 어떻게 하겠소, 롬버
드?」
「나도 소 혓바닥 통조림은 먹고 싶지 않소. 크레이슨 양과 여기 있겠
소.」
블로어는 망설였다.
베러가 말했다.
「난 괜찮아요. 당신이 없더라도 롬버드 씨가 나를 쏠 것 같지 않아요.
블로어는 말했다.
「당신이 그렇다면 할 수 없지만 서로 떨어지지 않기로 약속했으니까.
「사자굴로 들어가자고 한 것은 당신이잖소. 뭣하면 내가 함께 가도 괜
찮소.」
「아니, 안 되오. 당신은 여기 있어 주오.」
롬버드는 웃었다.
「아직도 나를 경계하고 있소? 죽이려면 지금이라도 둘 다 죽일 수 있
소.」
「그런 그것은 계획과 틀리오. 한 번에 한 사람씩……죽이는 방법에 특
색이 있거든.」
롬버드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군. 당신은 잘 알고 있구먼.」
「알고 있다뿐이겠소. 그러나 혼자 저택으로 가는 것은 기분좋은 일이
아니군.」
롬버드는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내 권총을 빌려 달라는 거요? 대답은 <노>요. 거절하겠소.
모처럼의 부탁이지만, 그리 간단히 내줄 수는 없소.」
블로어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저택 쪽으로 뻗어 있는 가파른 언덕길
을 올라갔다.
롬버드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동물원에서 먹이 주는 시간이군. 동물은 습관에 충실하니까!」
베러가 근심스러운 듯 말했다.
「혼자 가는 게 위험하지 않을까요?」
「아니, 그럴 리 없소. 암스트롱은 무기를 갖고 있지 않고, 힘은 블로어
가 두 배나 세니까, 그뿐 아니라 아무리 생각해도 암스트롱 집안에 있을
리 없소. 나는 알고 있소.」
「그럼, 블로어가…….」
「그렇소.」
「정말 그렇게 믿나요?」
「알겠소? 당신은 블로어의 이야기를 들었겠지. 그가 말한 게 사실이라
면, 나는 암스트롱의 실종과 관계없소. 그의 이야기가 그것을 증명해 주
오.
그러나 그에 대해서는 알 수 없소. 발소리를 들었다는 것이며, 밖으로
나가는 사람 그림자를 보았다고 한 건 거짓말일지도 모르오. 그전에 암스
트롱을 죽였는지도 모르오.」
「어떤 방법으로?」
롬버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모르오. 그러나 우리는 블로어만 경계하고 있으면 되오. 저 사
나이에 대해선 아무것도 아는 바 없소. 경감이었다는 것도 터무니없는 이
야기인지 모르오.
머리가 돌아 버린 부자인지, 탈옥한 흉악범인지, 어떤 인간인지 알지
못하오. 단 하나 틀림없는 건 지금까지의 살인이 모두 그의 짓으로 여겨
진다는 것뿐이오.」
베러는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가 우리를 습격해 온다면…….」
롬버드는 주머니의 권총을 두드려 보였다.
「내게 맡겨 주시오. 당신은 나를 믿고 있을 거요. 나는 당신을 쏘지
않소.」
「누군가를 믿지 않고는 있을 수 없어요. 그래도 정말을 말한다면, 당
신 생각은 틀렸다고 여겨요. 나는 지금까지도 암스트롱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갑자기 그녀는 롬버드 쪽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늘 누군가가 보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나요?」
롬버드가 말했다.
「신경 탓이오.」
「그럼, 느끼고 있군요.」
그녀는 떨며 롬버드 옆으로 몸을 살짝 붙였다.
「난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판사 두 사람이 미국의 작은 도
시에 왔지요. 그들은 어디까지나 정의를 주장하며 아무리 작은 일도 용서
치 않았어요. 왜냐하면 그들은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었던 거예요.」
롬버드는 눈썹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
「하늘에서 왔단 말이오? 아니, 나는 그런 일은 믿을 수 없소. 이 사건
은 어디까지나 인간 냄새가 짙에 풍기고 있소!」
베러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나는……때때로…….」
롬버드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것은 양심 때문이오.」
그는 잠시 묵묵히 있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그 아이를 물에 빠뜨렸군.」
베러가 외쳤다.
「아니예요! 당신이 그런 이야기할 권리는 없어요!」
그는 웃으며 말했다.
「분명히 빠뜨린 것이오. 이유는 모르겠소. 아마 남자가 관련되어 있었
겠지. 그렇지요?」
심한 피로가 갑자기 베러를 덮쳐 왔다. 그녀는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남자가 있었어요.」
롬버드는 부드럽게 말했다.
「고맙소. 그것만 들으면 충분하오.」
베러가 별안간 고쳐 앉았다. 그녀는 큰소리로 외쳤다.
「무슨 일일까요. 지진이 아닌지 모르겠군요.」
「아니, 그렇지 않소. 그러나 이상한 소리가 난 것 같소. 땅이 울리는
소리가 들려 온 듯한데. 그리고, 외침 소리가 들린 것 같소…….」
그들은 저택을 지켜 보았다.
롬버드가 말했다.
「저쪽에서 들려 왔소. 가봅시다.」
「아니, 가기 싫어요.」
「마음대로 하오. 나는 가보겠소.」
베러는 체념한 듯 말했다.
「좋아요, 같이 가겠어요.」
그들은 비탈길을 올라 저택 쪽으로 갔다. 테라스에 밝은 햇빛이 비치고
있었다. 그들은 정면으로 들어가지 않고 저택을 끼고 돌기 시작했다.
동쪽 테라스에서 그들은 블로어를 발견했다. 블로어는 커다란 흰 대리
석으로 머리를 맞고 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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