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거서 크리스티 - ABC살인사건

3학년2반 | 2022.01.29 07:20:42 댓글: 0 조회: 372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5805
ABC 살인사건


- 애거서 크리스티


나오는 사람들

앨리스 애셔 부인 첫 번째 피해자
프린츠 애셔 앨리스의 남편
메리 드로워 엘리스의 조카딸
베티 버너드 두 번째 피해자
미건 버너드 베티의 언니
도널드 프레이저 베티의 약혼자
카마이클 클라크 경 세 번째 피해자
프랭클린 클라크 카마이클 경의 동생
소러 그레이 카마이클 경의 비서
조지 얼스필드 네 번째 피해자
앨릭잰더 보너퍼트 캐스트 부인용 양말 행상인
머벌리 부인 캐스트의 하숙집 주인
릴리 머벌리 부인의 딸
톰 허티건 릴리의 연인
재프 런던 경찰국 경감
에르큘 포아로 사립탐정, 벨기에인
헤이스팅즈 포아로의 친구




영제국 육군 대위 아서 헤이스팅즈 머리글

이 이야기에서는 내가 직접 입회한 사건이나 장면만을 이야기하는 전의 내 방법을 바꿔 보았다. 그래서 몇몇 장은 3인칭으로 씌어 있다.
이제부터의 각 장에서 이야기되는 사건들은 모두 내가 확증 할 수 있었던 것임을 밝혀둔다. 여러 인물들의 생각이나 감정을 서술하는 데 있어 얼마쯤 내가 시인의 특권을 행사했다 해도 그것은 아주 정확을 기해서 한 일이다. 또한 그것들은 모두 내 친구 에르큘 포아로의 검토를 받았음을 덧붙여 둔다.
끝으로, 나는 이 이상한 연쇄 범죄의 결과로서 일어나는 부차적인 인간관계에 대해 너무 많은 이야기를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적, 개인적 요소란 빠뜨려선 안 되는 것이다.
에르큘 포아로가 언젠가 과장된 몸짓으로 나에게 가르쳐 준 일이 있다. 로맨스란 범죄의 부산물일 경우가 있다고.
ABC 수수께끼의 해결에 대해 말한다면, 에르큘 포아로는 이제까지 그가 다뤄 온 어느 사건과도 다른 방법으로 문제에 뛰어들어 그 진정한 천재성을 발휘했다고 말해도 좋으리라.


< 편지 >

1935년 6월, 나는 남아메리카의 내 농장에서 떠나 여섯 달쯤 머무를 예정으로 귀국했다.
그때는 어려웠던 시대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세계적인 불황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영국에서 나 자신이 손대지 않으면 도저히 잘되어 나가지 않을 것 같은 볼일이 여러 가지 있었다. 농장 관리를 위해 아내가 뒤에 남았다.
영국에 와 닿아 내가 맨 먼저 한 일의 하나는 말할 나위도 없이 오랜 친구인 에르큘 포아로를 찾아간 것이었다.
그는 런던의 어떤 최신형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내가 그것을 지적하며, 그가 이 특별한 건물을 고른 것은 완전히 그 기하학적이 겉모습과 넓이 때문일 거라고 말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아주 기분 좋게 균형이 잡혀 있지. 그렇게 생각되지 않나?”
나는 좀 너무 모난 것같이 생각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오래된 농담이 생각나 이 아파트에서는 암탉에게 네모난 달걀을 낳게 할 수 있을 듯하다고 말했다.
포아로는 크게 웃었다.
“아니, 자네는 아직도 그걸 기억하고 있나?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과학은 아직 암탉을 현대 취미에 알맞도록 하는 일에 성공하지 못하고 있네. 닭들이 지금도 여전히 크기와 빛깔이 서로 다른 달걀을 낳고 있지.”
나는 애정어린 눈길로 오랜 친구를 관찰했다. 그는 굉장히 활기가 넘쳐 전에 만났을 때보다 조금도 더 나이먹은 것같이 보이지 않았다.
“자네는 정말 건강해 보이는군, 포아로. 거의 나이를 안 먹었잖나. 전에 만났을 때보다 흰머리가 더 적어졌다고 해도 좋을 정도일세,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면.”
포아로는 나에게 빙그레 웃어 보였다.
“어째서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나? 진짜 그 말대로인데.”
“자네 머리는 검은빛에서 잿빛이 되는 대신 잿빛에서 검은빛으로 된단 말인가?”
“그렇다네.”
“그렇지만 그런 일은 과학적으로 불가능해!”
“천만에.”
“하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이잖나. 자연 법칙에 어긋나.”
“헤이스팅즈, 자네는 여전히 남을 의심하지 않는 아름다운 마음을 지니고 있군. 세월도 자네의 그 마음은 바꿔 놓지 못하는구먼! 자네는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하면 곧바로 그 해결을 입에 담지. 자기 자신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지만!”
나는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어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잠자코 침실로 들어가더니 병을 하나 들고 돌아와 나에게 건네 주었다.
나는 까닭을 모르는 채 그 병을 보았다.
병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르비비 - 머리칼의 자연스러운 빛깔을 회색, 밤색, 빨강, 노랑, 갈색, 검은 색의 여섯 가지 색조로 되살린다. 르비비는 염료가 아니다.

나는 소리쳤다.
“포아로, 머리를 염색하고 있구먼!”
“아, 겨우 알아차린 모양이군!”
“그래서 자네 머리가 전에 돌아왔을 때보다 훨씬 검어 보였단 말인가?”
“그렇지.”
놀라움이 가라앉자 나는 말했다.
“그럼, 다음에 돌아왔을 때에는 가짜 수염이라도 달고 있을게 아닌가? 아니면 지금도 가짜 수염인가?”
포아로는 움찔했다. 수염은 늘 그가 세심하게 신경쓰는 부분이다. 그는 수염을 터무니없이 자랑했다. 그런데 내 말이 그의 아픈 데를 찌른 것이다.
“아닐세, 당치도 않아. 그런 날은 되도록 오지 않기를 비네. 가짜 수염이라니? 끔찍한 소리를!”
그의 수염이 진짜인 것을 증명하기 위해 힘주어 잡아당겨 보였다.
“과연 아직 숱이 꽤 많군.”
“그렇지? 온 런던을 다 찾아봐도 나에게 맞는 가짜 수염은 있을 리 없네.”
꽤 우쭐대는군 하고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소리를 해서 포아로의 기분을 상하게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 대신 그가 아직도 때로 일을 하는지 물어 보았다.
“자네가 몇 해 전 은퇴한 것은 알고 있지만……”
“그렇네. 대대적으로 호박을 가꾸기 위해서! 그런데 곧 살인 사건이 일어나 호박들에게 멸망으로의 행진을 시키고 만 셈일세. 그 뒤부터는, 자네가 뭐라고 할지 잘 알지만 나는 자진해서 고별 공연을 여는 프리마돈나가 됐네. 물론 그 고별 공연이 끝없이 되풀이되고 있지만 말일세.”
나는 웃었다,
“실로 그대로라네. 그때마다 나는 이것을 마지막이라고 하지. 그런데 안돼. 다른 사건이 일어나거든. 그래서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네. 나는 은퇴를 바라지 않는다고. 이 조그만 회색 뇌세포는 쓰지 않으면 녹슬어 버리니까.”
“알았네. 적당히 운동을 시키고 있다는 거로군.”
“맞아, 요즘의 에르큘 포아로는 범죄의 진수밖에 다루지 않네.”
“그 진수는 충분히 있던가?”
“꽤 있지. 바로 저번 사건 같은 경우는 위태로울 뻔했었어.”
“실패했나?”
포아로는 놀라운 듯했다.
“당치도 않네. 그렇지만 이 내가, 이 에르큘 포아로가 하마터면 살해될 뻔했었지.”
나는 휘파람을 불었다.
“대담한 범인이로군.”
“대담하다기보다 무모하지. 그래, 진짜 무모한 녀석이었어. 하지만 그 이야기는 그만두세. 그런데 헤이스팅즈, 알겠나? 나는 여러 가지 뜻에서 자네를 내 마스코트로 생각하고 있네.”
“정말인가? 어떤 뜻에서?”
포아로는 내 물음에는 직접 대답하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자네가 온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나는 곧 무언가 일어나겠군 하고 생각된다네. 예전처럼 둘이서 수사하지 않겠나. 하지만 만일 그렇게 한다면 평범한 사건은 안돼. 뭔가 이렇게…….”
그는 흥분해서 손을 파도치듯 움직였다.
“머리를 잔뜩 쓰게 하는, 미묘하고 피이누(섬세)한 것이 아니면 안 되지.”
피아누라는 번역하기 어려운 말에 가득한 풍미를 곁들이는 듯한 말투였다.
“포아로, 남이 들으면 마치 리츠에서 저녁 식사라도 주문하고 있는 줄로 생각하겠네.”
그는 한숨을 쉬었다.
“범죄란 주문할 수 있는 게 아닌데 말일세. 정말이야. 그렇지만 나는 운을 믿겠네. 운명이라 해도 좋아. 내 곁에 붙어 있으면서 내가 용서받을 수 없는 실책을 저지르는 걸 막아주는 게 자네 운명이야.”
“용서받을 수 없는 실책이란 뭔가?”
“명백한 것을 놓치는 것이지.”
나는 이 말을 가슴속에서 되풀이해 보았으나 핵심을 잡을 수 없었다.
나는 밝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그 진수라고 할 만한 범죄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나?”
“적어도 아직은. 왜냐하면…….”
그는 말을 끊었다. 이마에 난처한 듯한 주름이 잡혔다. 그 손은 내가 생각없이 접어버린 물건을 무의식중에 펴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말했다.
“뚜렷이 알 수는 없지만…….”
그 말투에 어떤 이상한 게 느껴져 나는 놀라며 그의 얼굴을 보았다.
가로진 주름은 아직 남아 있었다.
그는 갑자기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창 가까이의 책상 쪽으로 방을 가로질러 갔다. 책상 속의 것은 말할 나위도 없이 잘 분류되고 정리되어 손을 넣기만 하면 kq로 필요한 서류를 꺼낼 수 있었다.
그는 한 통의 뜯어진 편지를 손에 들고 내 쪽으로 천천히 되돌아왔다. 그리고 그것에 눈길을 한 번 주더니 나에게 내밀며 말했다.
“자네는 이걸 어떻게 생각하나?”
나는 어떤 흥미를 가지고 그것을 바았다.
그것은 좀 두꺼운 흰 편지지에 활자체로 씌어 있었다.

에르큘 포아로여, 너는 자만에 빠져 있는 게 아닐까. 갸엾은 우리 멍청이 영국 경찰이 감당하지 못하는 어려운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건 자신이라고?
명민한 포아로여, 너의 명민함을 어디 한 번 보여 다오. 하지만 너에게는 이 호두가 너무 딱딱할걸. 이 달 21일, 앤도버(Andover)를 경계하라. 이만.
ABC

나는 잠시 봉투에 눈길을 주었다. 역시 활자체로 씌어 있었다.
내가 소인에 주의를 돌리고 있는 것을 보자 그가 말했다.
“소인은 서중앙 제1국일세. 그래, 어떻게 생각하나?”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편지를 돌려주었다.
“아마도 미치광이 짓이겠지.”
“그뿐인가?”
“자네한테는 미치광이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건가?”
“아니, 그렇게 여겨지네.”
그의 말투는 진지했다. 나는 호기심을 느끼며 그를 보았다.
“자네는 이 편지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모양이군, 포아로.”
“미치광이란 진지하게 다루어야 하지. 미치광이는 아주 위험한 존재니까.”
“그렇지, 물론 그렇네. 나는 그 점을 생각지 못했어. 그러나 내 말은, 어쩐지 우스꽝스러운 장난같은 생각이 든다는 걸세. 누군가, 8이라는 숫자에 하나가 더 많은 것 같은 우쭐해진 주정꾼 바보 말이네.”
“뭐라고? 아홉이란 말인가? 그건 대체 무슨 뜻이지?”
“아니, 그냥 말장난일세. 취한 녀석이라는 뜻이지. 아니, 그보다도 지나치게 마셔서 고주망태가 된 녀석이라는 뜻일세.”
“고맙네, 헤이스팅즈. 그 <취한다>는 말이라면 나도 알고 있네. 자네 말대로 그 이상의 뜻은 없는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의 불만스러운 말투에 자극되어 물어 보았다.
“그럼, 자네는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나?”
포아로는 의심스러운 듯 머리를 흔들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물었다.
“그래서 자네는 어떻게 했나?”
“어떻게 할 수 있었겠나? 재프 경감에게 보였을 뿐이지. 그는 자네와 같은 의견이었어. 할 짓 없는 녀석의 장난이라고 말일세. 그것이 그의 표현이었는데, 런던 경찰국에서는 거의 날마다 이런 것을 받는다는군. 나도 그 바람에 휘말려 들었다는 거였어.”
“하지만 자네는 이 편지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잖은가?”
포아로는 천천히 대답했다.
“아무래도 이 편지에는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어, 헤이스팅즈.”
그 말투가 묘하게 인상적이었다.
“그래, 자네 의견은?”
그는 고개를 젓고 그 편지를 들어올려 다시 책상 속에 넣어 버렸다.
“자네가 그토록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는 건가?”
“여전히 활동가로군, 자네는! 하지만 대체 어떻게 할 수 있겠나? 지방 경찰에도 편지를 보였지만 역시 진지하게 여겨 주지 않았어. 지문도 없고, 편지를 낸 사람에 대한 단서도 없으니.”
“그렇다면 자네 육감 말고는 아무것도 없단 말인가?”
“육감이 아닐세, 헤이스팅즈. 육감이란 나쁜 말이야. 내 지식이며 경험일세. 그 편지에 뭔가 이상한 게 있다고 가르쳐 주는 것은.”
말이 막히자 그는 손짓을 해보였다. 그리고 또 머리를 흔들었다.
“개미집에서 산을 만들어 내려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말일세. 어쨌든 기다려 보는 수밖에 없어.”
“옳지, 21일은 금요일이군. 앤도버에서 굉장한 강도 사건이라도 일어난다면 그야말로…….”
“아, 그렇다면 얼마나 기분전환이 되겠나.”
“기분전환이라고?”
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 자리에서 그 말은 너무나 이상스럽게 들렸다.
나는 항의했다.
“강도는 스릴이 있을지 모르지만 기분전환이라고 할 수는 없어!”
포아로는 힘주어 고개를 저었다.
“자네는 잘못 알고 있네. 자네는 내 말뜻을 모르고 있어. 내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더 큰 다른 염려에 비하면, 강도는 오히려 마음 놓을 수 있다는 걸세.”
“무슨 염려인가?”
“살인이지.‘


< 삽 화 >

앨릭잰더 보너퍼트 캐스트 씨는 의자에서 일어나 초라한 침실을 근시인 듯한 눈으로 둘러보았다. 답답스러운 자세로 앉아있었기 때문에 등이 완전히 뻣뻣해져 버렸다. 등을 쭉 펴고 기지개 켜는 그를 본 사람은, 그가 실제로는 키가 큰 사람임을 알았으리라. 그의 굽은 등과 근시처럼 기웃거리는 동작이 아주 다른 인상을 주고 있었다.
문 안쪽에 걸린 낡아빠진 외투로 다가가 주머니에서 싸구려 담뱃갑과 성냥을 꺼냈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지금까지 앉아있던 의자로 돌아왔다. 철도 안내서를 집어 들고 세밀히 보더니 이윽고 타이프된 이름 리스트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는 펜으로 그 리스트의 첫 번째 이름에 표시했다. 그것은 6월 20일 목요일의 일이었다.


< 앤도버 살인 >

나는 그때 포아로가 받은 편지에 대한 그의 예감에 깊은 인상을 받은 건 사실이지만, 그 일은 내 머리에서 아주 사라져 버렸다고 해도 좋다.
실제로 21일이 되어 런던 경찰국의 재프 경감이 포아로를 찾아왔을 때 나는 겨우 그 일을 생각해 냈다. 이 사법 경찰관과는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나를 보자 진심으로 환영해 주었다.
그는 큰소리로 말했다.
“여, 내가 헤이스팅즈 대위를 몰라볼 리 있겠습니까. 드디어 당신의 야만 지대에서 돌아오셨군요! 포아로 씨와 함께 계신 당신을 뵈니 정말 예전 그대로입니다 그려. 게다가 건강하신 듯 하군요. 머리가 좀 벗겨졌는가요? 그렇습니다, 누구나 그렇게 되지요. 나도 그렇습니다.”
나는 좀 놀랐다. 머리 꼭대기에 머리칼이 덮이도록 빗어 두었기 때문에 벗겨진 곳이 눈에 띄지 않으리라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재프 경감은 그런 점에 그리 머리가 잘 도는 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좋은 얼굴로 아무도 젊어지는 사람은 없다는 데 동의했다.
재프 경감은 말했다.
“그러나 이 포아로 씨만은 다릅니다. 헤어토닉의 좋은 광고가 되지요. 얼굴 구석구석이 한층 더 싱싱해졌습니다. 늘그막에 이르러 점점 더 각광받게 되셨으니 말입니다. 요즘의 유명한 사건에는 모조리 관계되어 계시지요. 열차 사건, 공중에서의 사건, 사교계 살인 사건……. 정말이지 여기서기에 이분은 등장합니다. 은퇴하고 나서 훨씬 더 유명해지셨답니다.”
포아로가 웃으며 말했다,
“요전에도 헤이스팅즈에게 말했었지요. 나는 언제나 또다시 등장하는 프리마돈나 같다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죽음을 탐정한다 해도 우스운 일이 아닐겁니다. 이건 기발한 생각인데, 정말. 책에 써둬야겠어.”
재프 경감은 커다랗게 웃었다.
포아로는 내게 눈짓을 해보였다.
“그것을 해야 할 사람은 우선 헤이스팅즈지요.”
재프 경감은 웃었다.
“하하하! 농담입니다, 농담입니다.”
나는 그 생각이 어째서 악취미로 여겨졌다. 가엾게도 포아로는 점점 나이를 먹어 가고 있다. 죽음이 가까이 오는 것과 관계된 그 농담이 그에게 유쾌할 리 없을 것이다.
내 태도에 속마음이 나타나 있었던 모양이다. 재프 경감은 화재를 바꾸었다.
“포아로 씨의 익명 편지에 대해 들으셨습니까?”
포아로가 말했다.
“저번에 보여 줬지요.”
나는 소리쳤다.
“아, 그렇지. 완전히 잊고 있었어. 문제의 날짜가 언제였지?”
재프 경감이 말했다.
“21일입니다. 그래서 내가 조사해 보았지요. 어제가 21일이었기 때문에, 어젯밤 혹시나 싶어 앤도버를 불러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역시 장난이었지요.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요. 어린아이가 돌을 던져 쇼윈도가 하나 깨진 일과 술주정꾼의 규칙 위반이 두 건. 그래서 우리 벨기에인 친구분(포아로)이 처음으로 헛짚으신 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포아로는 인정했다.
“확실히 한시름 놓았습니다.”
재프 경감이 동정하듯 말했다.
“많이 염려하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만? 가엾게도, 우리는 그런 것을 날마다 몇십 통씩 받는답니다. 달리 아무 하릴없는 머리가 좀 이상한 사람들이 그런 것을 쓰지요. 그리 악의가 있는 건 아닙니다. 뭐, 일종의 흥분에서지요.”
포아로가 말했다.
“그걸 그토록 진지하게 생각했던 건 정말 어리석은 짓이었습니다. 내가 코를 들이민 것은 새의 보금자리였던 셈이군요.”
재프 경감이 말했다.
“말과 벌을 혼동했던 겁니다.”
“뭐라고요?”
“아니, 속담입니다. 자, 이제 가봐야겠군요. 이 가까이에 볼일이 있어서요. 도난품인 보석을 인수하러 왔지요. 그곳에 가는 길에 마음 놓으시도록 잠시 들렀던 겁니다. 회색 뇌세포를 뜻없이 써버리는 건 낭비니가요.”
재프 경감은 기분좋게 웃으며 돌아갔다.

포아로가 말했다.
“사람좋은 재프 경감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지?”
나는 보복하듯 말했다.
“아주 늙었군. 오소리같이 잿빛이 되었어.”
포아로는 헛기침을 하고 나서 말했다.
“헤이스팅즈, 아주 하찮은 장치가 있는데, 내 단골 이발사는 재간있는 사나이지. 머리에 그 장치를 붙이고 그 위에 자신의 머리칼을 벗어 놓는다네. 그건 가발이 아닐세, 잘 알겠지만.”
나는 으르렁댔다.
“포아로, 분통 치미는 자네 이발사의 더러운 발견 따윈 아무래도 좋네. 대체 내 머리가 어떻다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건가?”
“아니, 아무렇지도 않아, 아무렇지도.”
“내가 대머리가 되어가고 있다는 건 아니겠지?”
“물론 그런 건 아닐세! 그런 건…….”
“그 나라의 뜨거운 여름은 절로 얼마쯤 머리를 벗겨지게 하지만 말이야. 그냥 질좋은 헤어토닉이나 가져가지.”
“그게 좋겠군.”
“그렇다 해도 재프 경감 따위가 관여할 일은 아니야. 녀석은 언제나 기분좋지 않았지. 게다가 유머 센스도 없어. 사람이 앉으려고 할 때 의자를 잡아당겨지면 웃는 그런 사나이거든.”
“그러면 사람들은 대개 웃지.”
“모름지기 센스가 없단 말일세.”
“앉으려던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확실히 그렇지.”
“그렇네.”
나는 얼마쯤 기분을 돌리며 다시 말했다―머리칼이 적어졌다는 말에 내가 아주 민감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익명 편지가 아무 일 없었다니 유감이군.‘
“그것은 완전히 내 잘못 생각이었네. 그 편지에 어쩐지 피비린내나는 것 같은 느낌이 있었는데, 그러나 단순한 장난이었어. 아, 나도 나이 먹어 아무것도 아닌 일에 짖어대는 눈먼 개처럼 의심이 많아져 버렸나 보네.”
나는 웃으며 말했다.
“내가 도우려면, 우리는 다른 데서 온갖 진수가 모아진 멋진 범죄를 찾아내야만 되겠군.”
“자네는 요전에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나? 만일 요리를 주문하듯 범죄를 주문할 수 있다면 어떤 것을 고르겠나?”
나는 좋아진 그의 기분에 휩쓸려 말했다.
“그렇지, 메뉴를 잘 봐야 하지 않겠나. 강도? 위조지폐? 아니, 이런 건 안 돼? 이건 식물성 요리 같지? 역시 살인이 좋겠군. 피비린내나는 살인사건, 물론 여러 가지가 딸린 것으로.”
“옳지, 오르되브르(식사 전 또는 술안주로 먹는 가벼운 요리)로군.”
“피해자는 남자로 할까, 여자로 할까? 역시 남자가 좋겠어. 누군가 유명한 사람, 미국의 백만장자나 국무장관이나 신문사 사장쯤 되는 인물. 범행 현장은……그렇지, 훌륭한 낡은 도서관 같은 데가 어떨까? 분위기로서 이 이상의 것은 없네. 흉기는 기묘한 형태로 구부러진 단도 아니면, 뭔가 둔기 같은 것, 예를 들면 조각된 돌상이라든지…….”
포아로는 한숨을 쉬었다.
“그렇잖으면 물론 독약. 하지만 이것은 아무래도 너무 전문적인 것 같네. 그렇다면 깊은 밤에 메아리치는 권총 소리……이런 것으로 할까. 그리고 아름다운 여자 하나, 둘.”
친구는 중얼거렸다.
“그녀는 빨강머리겠지.”
“신통치 못한 농담이군. 물론 아름다운 여자 한 사람에게 잘못된 혐의가 씌워져야만 되겠지. 그리고 그녀와 젊은이 사이에 오해가 생기고. 물론 그 밖에도 몇 사람에게 혐의가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네. 이를테면 피해자의 친구거나 경쟁 상대인 피부빛이 검고 위험한 타입의 중년 여자, 얌전한 비서. 이들이 유력한 혐의자인데, 거기에 행동거지가 무뚝뚝하고 성실한 사나이인 해고된 하인이라든지 사냥터 관리인 등이 두어 사람쯤 그리고 재프 경감 같은 얼치기 형사. 그래, 이쯤이면 되겠지.”
“그것이 자네가 말한 온갖 진수가 모아진 범죄인가?”
“찬성하지 않는구먼?”
포아로는 한심스러운 듯 나를 보았다.
“자네는 지금까지 씌어진 거의 모든 미스터리 소설의 아주 멋있는 줄거리를 만들어 주었네.”
“그럼, 자네라면 어떤 주문을 할 건가?”
포아로는 눈을 감고 의자에 기댔다. 그의 목소리는 입술 사이로 조용히 흘러나왔다.
“아주 단순한 범죄, 복잡한 데가 조금도 없는 범죄. 조용한 가정 생활의 범죄……열광적이 아니고 아주 내밀스러운.”
“범죄에 내밀스러운 게 있을 수 있는가?”
포아로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네 사람이 앉아서 브리지를 하고 있네. 그리고 한 사람이 그 게임에 끼지 않고 벽난로 옆 의자에 앉아 있지. 밤이 깊어졌을 즈음 난롯불 옆에 앉아 있던 사나이가 죽은 것을 알게 되네. 네 사람 가운데 누군가가 손이 비게 되었을 때 죽인 것인데, 모두들 게임에 정신이 팔려 모르고 있었지. 자, 이것이 사건이네. 범인은 네 사람 가운데 누구일까?”
(나, 아시겠죠? 다들....<테이블위의카드>네요...)
“도무지 자극적인 데가 조금도 없는걸.”
포아로는 비난하듯 눈길로 나를 보았다.
“없지. 이상한 모양으로 구부러진 단도도, 협박도, 신상의 눈에서 훔쳐 낸 에메랄드도, 흔적을 알 수 없는 동양의 독약 같은 것도 없네. 헤이스팅즈, 자네는 아무래도 멜러 드라마 애호가로군. 자네는 하나의 살인이 아니라 연쇄적인 살인 쪽이 좋은 거지?”
“그렇네, 책 속의 두 번째 살인은 경기가 좋아 보이던걸. 제1장에서 살인이 일어나 마지막 페이지 바로 앞까지 모두들의 알리바이가 성립되어 있다는 건……그래, 좀 따분하지.‘
전화가 울려 포아로가 일어나 받으러 갔다.
“여보세요, 에르큘 포아로입니다.‘
잠시 말없이 듣고 있던 그의 얼굴빛이 달라졌다. 그의 대답은 짧게 토막토막 끊어졌다,
“그랬군요……물론, 그렇지요……아, 가겠습니다……당연합니다……그야 당신 말대로겠지요. 그렇지요, 갖고 가겠습니다. 그럼, 곧.”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방을 가로질러 내 곁으로 돌아왔다.
“재프 경감에게서 온 걸세, 헤이스팅즈.”
“그래서?”
“경찰국으로 돌아가자마자 마침 앤도버에서 연락이 있었다는 거야.”
나는 흥분하여 소리쳤다.
“앤도버?”
포아로가 천천히 말했다.
“노파가 하나 살해되었다는군. 애셔(Ascher)라는 이름으로, 담배와 신문을 파는 조그만 가게의 노파일세.”
나는 얼마쯤 맥이 풀렸다. 앤도버라는 이름으로 부채질되었던 내 흥미는 어리둥절해졌다. 나는 뭔가 환상적인, 아주 색다른 것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조그만 담배 가게 노파가 살해된 일 따위는 아무래도 그리 신통찮다.
포아로는 여전히 느릿느릿한 무게있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앤도버 경찰에서는 범인을 체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나는 다시 한 번 맥이 풀렸다.
“노파는 그 남편과 사이가 나빴던 것 같네. 남편은 술꾼이며 질나쁜 녀석으로 종종 노파를 죽이겠다고 협박했었다는군. 그러나 그곳 경찰에서는 다른 점도 고려하여 내가 받은 익명의 편지를 보고 싶다는 거야. 나는 곧 자네와 함께 앤도버로 가겟다고 말해 두었네.”
나는 얼마쯤 기운을 되찾았다. 시시하게 보일지라도 아무튼 범죄임에 틀림없다.
내가 범죄니 범인이니 하는 것에 관계하고부터 벌써 많은 세월이 흘렀다.
나는 포아로의 다음 말을 거의 듣지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나중에 중요한 뜻을 지니고 내 기억 속에 되살아났다.
에르큘 포아로가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시작이다.”


< 철도 안내서 >

우리는 앤도버에서 글렌 형사의 마중을 받았다. 그는 키가 크고 머리칼이 아름다운 남자로 기분 좋은 미소를 떠올리고 있었다.
이야기를 간결이 하기 위해 사건의 사실만 간단히 밝혀 두는 게 좋으리라.
범죄는 22일 오전 1시에 그곳 순경에 의해 발견되었다. 순찰을 돌면서 가게 문을 밀어 보니 잠겨 있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자 처음에는 아무도 없는 듯했으나, 계산대 쪽으로 회중전등을 돌리니 노파의 웅크린 시체가 눈에 들어왔다.
경찰의가 현장에 와 닿아 노파가 뒷머리를 강하게 얻어맞았음을 알아냈는데, 아마도 계산대 뒤의 선반에서 담배 봉지를 꺼내는 도중에 얻어맞은 듯했다. 범행은 일곱 시간 내지 아홉 시간 전에 행해진 것 같았다.
형사는 설명했다.
“그러나 더 정확한 시간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5시 30분에 담배를 사러 들어갔던 사나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6시 5분 좀 지나서 가게에 들어갔다가 아무도 없는 줄 알고 그냥 나온 다른 남자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범행 시간을 5시 30분에서 6시 5분 사이로 추정할 수 있지요. 이웃에서 애셔를 보았다고 말해 온 사람은 아직 없습니다. 그러나 물론 이제부터입니다. 그는 9시쯤 <스리크라운즈>에서 꽤 취해 있었습니다. 체포하는 대로 곧 용의자로 잡아 둘 겁니다.”
포아로가 물었다.
“그리 호감주는 타입의 사나이가 아닌 모양이군요?”
“싫은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아내와 함께 살고 있지 않았던가요?”
“그렇습니다. 몇 해 전에 헤어졌지요. 애셔는 독일 사람으로 한때 급사일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만, 술을 너무 마셔서 차츰 그를 고용하는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부인이 일을 나가게 되었지요. 마지막으로 한 일은 미스 로즈라는 노부인의 요리사 겸 가정부였습니다. 급료를 받아 남편에게 꽤 많은 돈을 주었던 듯한데, 그는 몽땅 마셔 버리고는 자기 마누라가 일하는 곳으로 가서 소동을 벌이곤 했답니다. 그래서 애셔 부인은 미스 로즈네 농장으로 가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거기는 앤도버에서 3마일 떨어진 완전한 시골이어서 그도 그리 자주 찾아가지 못했지요. 미스 로즈가 세상을 떠나자 애셔 부인은 유산을 조금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돈으로 담배와 신문을 파는 이 조그만 가게를 시작했습니다. 싸구려 담배와 얼마 안 되는 신문뿐이어서 겨우 먹고 사는 정도였지요. 애셔가 자주 찾아와 그녀에게 욕을 하곤 했는데, 그녀 쪽에서는 귀찮고 하니까 잔돈푼이나 줘서 쫓아 버리곤 했지요. 1주일에 15실링은 줬던 것 같습니다.”
포아로가 물었다.
“아이들은 있었소?”
“없습니다. 조카딸이 하나 오버튼 가까이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아주 고집이 센 똑똑한 아가씨지요.”
“그 애셔라는 사나이가 아내를 자주 협박했었다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그는 술에 취하면 무섭게 변해서 아내의 머리를 박살내겠다는 둥 소리를 질러대곤 했답니다. 애셔 부인은 정말 끔찍한 일을 당한 거지요.”
“그녀는 몇 살이었소?”
“60살이 다 되었지요. 아마. 훌륭하고 부지런한 사람이었습니다.”
포아로는 신중하게 말했다.
“그러면 그 애셔라는 사나이가 범인이라는 게 당신 의견이오?”
형사는 조심스럽게 헛기침을 했다.
“그렇게 말하는 건 좀 성급한 판단입니다만, 프란츠 애셔가 지난밤에 어떻게 지냈는지 그 자신의 설명을 듣고 싶은 겁니다, 포아로 씨. 만일 만족할 만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는 꽤 의미심장하게 말을 끊었다.
“가게에서는 아무것도 없어지지 않았소?”
“네, 아무것도. 돈도 그대로 다 있고, 훔쳐 간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그 애셔라는 사나이가 술에 취해 가게로 들어와 아내를 욕하다가 끝내 때려 죽였다는 거로군요?”
“네, 그것이 가장 타당한 해석이겠지요. 그러나 당신이 받으셨다는 그 이상한 편지도 고려해 보고 싶습니다, 포아로 씨. 그것이 이 애셔라는 사나이로부터 보내진 것인지 어떤지 알 수 없으니까요.”
포아로가 편지를 건네주자 형사는 이마를 찌푸리고 그것을 읽었다.
형사는 마침내 말했다.
“아무래도 애셔가 쓴 것 같지는 않군요. 도대체 이 <우리> 영국 경찰이라는 말을 애셔가 쓸 턱이 없지요. 그야말로 각별히 교묘하게 행동하려는 게 아니었다면 말입니다. 게다가 그에겐 그만한 머리가 없습니다. 그는 이제 산송장입니다. 다 망가져 버렸지요. 이런 글을 쓰기에는 그의 손이 너무 떨릴걸요. 편지지도 잉크도 고급품이고. 그러나 편지에는 21일이라고 한 것은 이상하군요. 물론 우연의 일치겠지만요.”
“그렇겠지요.”
“하지만 이런 일치는 좋지 않습니다, 포아로 씨. 너무 딱 들어맞으니 말입니다.”
그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ABC. 대체 ABC란 어떤 녀석일까요? 메리 드로워―조카딸입니다만―가 좀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군요. 뭐 수고하시는 김에 말입니다. 이 편지만 없다면 나느 프란츠 애셔에게 내기를 걸어도 좋은데요.”
“애셔 부인의 경력은 알고 있소?”
“그녀는 햄프셔 태생으로 처녀 때 런던에 나가 직장 생활을 했지요. 거기서 애셔를 만나 결혼했습니다. 헤어진 것은 1922년으로, 그즈음 두 사람은 아직 런던에 있었지요. 그녀는 남자에게서 달아나 여기로 왔으나, 남자가 곧 알아차리고 따라와 귀찮게 굴었던 겁니다.”
마침 거기에 순경이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브릭스?”
“애셔를 연행해 왔습니다.”
“좋아. 이리로 데려오게. 어디 있던가?”
“인입선의 화차 안에 숨어 있었습니다.”
“숨어 있었다고? 데려오게.”
프란츠 애셔는 정말 보기 싫은, 초라한 인간의 표본이었다. 그는 엉엉 울고, 꾸벅꾸벅 절하고, 서슬이 시퍼래지기도 했다. 그 짓무른 눈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모두들의 얼굴을 살폈다
“나를 어쩌자는 거야. 나는 아무 짓도 안 했어. 날 이런 데 데려오다니 너무하잖아. 네 놈들은 돼지야. 어쩌자는 거야?”
그의 태도가 갑자기 바뀌었다.
“아니, 아니, 그게 아냐. 선생님들은 이 가엾은 늙은이에게 몹쓸 짓을 하고 있소. 심하게 대하고 있소. 누구나 이 가엾은 프란츠에게 심하게 군단 말야, 이 가엾은 프란츠에게.”
애셔는 울기 시작했다.
형사가 말했다.
“그만해 두오, 애셔. 정신차려요. 당신에게 무슨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건 아니오. 지금으로서는. 당신이 싫으면 아무 말 않아도 좋소. 만일 당신이 당신 아내 살해에 관계가 없다면 말이오.”
애셔는 그 말을 가로막았다. 그 목소리는 비명 같았다.
“나는 죽이지 않았어! 죽이지 않았어! 모두 엉터리야! 네 놈들은 거지같은 영국 돼지야. 모두들 내게 죄를 덮어씌우고 있어. 나는 죽이지 않았어, 죽이지 않았어.”
“당신은 늘 아내를 협박하고 있었잖소, 애셔?”
“아니, 아니, 네 놈들은 알 리 없어. 그건 농담이었어. 나와 앨리스만이 알고 있는 농담이야. 앨리스는 그걸 알고 있었어.”
“우스운 농담이로군! 어젯밤 어디 있었는지 말할 수 있소, 애셔?”
“말할 수 있고말고, 있고말고. 모두 이야기하지. 난 앨리스한테 가지 않았어. 친구들하고 있었어. 멋있는 친구들하고. <세븐 스타즈>에 있다가……그리고 나서 <레드 독>에 갔어.”
그는 기침이 나와 말이 막혔다.
“딕 윌러즈, 그도 함께 있었지. 커디 녀석도 그리고 조지도……플랫도, 그 밖의 놈들도 많이 있었어. 나는 앨리스에게 가지 않았어. 하느님께 맹세코 나는 사실을 말하고 있어.”
그 소리는 비명이었다. 형사는 부하에게 눈짓을 했다.
“데려가. 용의자를 구금시켜.”
떨며 욕지거리를 퍼부어대는 그 불쾌한 노인이 나가 버리자 형사는 말했다.
“아무래도 알 수 없군요. 그 편지만 없다면 저 늙은이의 짓이 분명한데요.”
“저 사람이 말하는 다른 남자들은 어떻소?”
“나쁜 놈들입니다. 모두 위증쯤은 손쉽게 할 녀석들이지요. 나도 저 늙은이가 그날 밤 어느 시간까지는 그들과 함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6시 사이에 가게 언저리에서 저 늙은이를 본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에 달렸다고 봐야겠지요.“
포아로는 신중하게 머리를 저었다.
“가게에서 아무것도 없어지지 않은 건 분명하지요?”
형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야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요. 담배 한두 갑이 없어졌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런 일 때문에 사람을 죽이지는 않지요.”
“게다가 아무것도, 뭐라면 좋을까. 가지고 온 것이 없었다는, 그러니까 이상한, 그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그런 아무것도 거기에는 없었다는 거지요?”
“철도 안내서가 있었습니다.”
“철도 안내서?”
“그렇습니다. 계산대 위에 펼쳐진 채 뒤집혀 있었습니다. 꼭 누군가가 앤도버에서 떠나는 기차 편을 알아보고 있었던 것처럼. 그 할머니나 아니면 손님이 보고 있었다는 것이겠지요.”
“그런 것도 팔고 있었소?”
형사는 머리를 저었다.
“1페니짜리 시간표를 팔고 있었습니다만, 그것은 큰 것이었으니까 스미스네 가게나 커다란 문방구점 같은 데서 다룰 겁니다.”
포아로는 눈을 빛내며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철도 안내서라고 말했지요? <브레드쇼>던가요, <ABC>던가요?”
그러자 형사의 눈도 빛나기 시작했다.
“정말, 그러고 보니 ABC였습니다.”


< 조카딸의 이야기 >

이 사건에 대한 내 관심은 ABC 철도 안내서가 나왔을 때 비로서 일기 시작했다고 생각된다. 그때까지 나는 이 사건에 그리 열중하고 있지 않았다. 뒷골목의 노파 살해 같은 시시한 사건은 날마다 신문에 보도되는 흔해빠진 범죄여서 거의 주의를 끌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마음속으로 익명 편지가 21일이라는 날짜를 지정한 일 따위는 우연의 일치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당연히 애셔 부인은 그 남편이 술에 취한 나머지 폭력을 휘둘러 희생된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지금 철도 안내서(철도역을 알파벳 순서로 나열했기 때문에 ABC라는 준말로 알려져 있음)가 등장하자 내 온몸에는 흥분의 전율이 일었다. 확실히 이것은 우연의 일치 같은 것 일 리 없다. 시시한 범죄가 새로운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애셔 부인을 살해하고 ABC 철도 안내서를 남기고 사라진 신비의 인간은 대체 누구인가?
경찰서를 나와 우리는 먼저 살해된 여자의 시체를 보러 시체 안치소로 갔다. 얼마 안 되는 머리칼을 이마 위로 가지런히 빗어 넘긴 노파의 주름잡힌 얼굴을 보고 있는 동안, 나는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너무나 평화로워 폭력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느낌이었다.
경관이 말했다.
“누가 무엇으로 자기를 때렸는지 조금도 모르는 얼굴입니다. 카 의사가 그렇게 말하더군요. 오히려 그게 잘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엾게도, 깔끔한 사람이었는데.”
포아로가 말했다.
“옛날엔 아름다웠을 것 같군.”
나는 믿을 수 없는 마음이 들어 중얼거렸다.
“그럴까.‘
“그렇네. 자, 턱의 선이며 뼈 모양이며 머리 생김새를 잘 보게.”
그는 덮개를 본래대로 해두면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시체 안치소를 나왔다.
다음에는 경찰의와 간단히 면담했다.
카 의사는 유능해 보이는 중년 사나이였다. 그는 활발하게 단정적인 말투로 이야기했다.
“흉기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요. 무거운 지팡이, 몽둥이, 모래주머니 같은 것……그런 거라면 어느 것이나 들어맞습니다.”
“그런 타격을 가하려면 억센 힘이 필요합니까?”
의사는 날카로운 눈으로 포아로를 보았다.
“그 말뜻은 몸을 떨어대는 70살의 노인으로서도 할 수 있느냐는 거지요? 네, 물론 할 수 있습니다. 흉기의 머리 부분에 충분한 무게를 주면 체력이 약한 사람도 바라는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범인은 남자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자일 수도 있군요?”
이 말은 얼마쯤 의사를 놀라게 한 모양이었다.
“여자도? 네, 그렇습니다. 이런 종류의 범죄를 여자와 관련시켜 생각해 볼 마음은 없었습니다만, 물론 할 수 있습니다. 완전히 가능합니다. 다만 심리적으로 말해서, 이건 여성의 범죄라고 할 수 없지요.”
포아로도 그 말에 동의하여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확실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모든 가능성을 염두해 두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시체는 쓰러져 있었겠지요.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의사는 피해자의 위치를 세밀하게 우리에게 설명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타격이 주어졌을 때 그녀는 계산대 쪽으로 등을 돌리고―따라서 가해자에 대해서도―서 있었다고 한다.
머리를 얻어맞고 그녀는 계산대 뒤로 쭈그려 앉아 버려 가게에 들어온 사람 눈에 얼른 띄지 않았던 셈이다.
카 의사에게 인사하고 밖으로 나오자 포아로가 말했다.
“이로써 애셔의 무죄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선 게 확실하네. 헤이스팅즈. 만일 그가 아내한테 덤벼들면서 협박한 거라면 그녀는 계산대를 사이에 두고 그와 마주서 있었을 걸세. 그런데 그녀는 가해자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지. 틀림없이 그녀는 손님에게 줄 파이프 담배나 궐련을 꺼내려 했던 걸 거야.”
나는 조금 몸을 떨었다.
“기분이 언짢군.”
포아로는 무겁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는 중얼거렸다.
“가엾은 여자일세.”
그리고 나서 그는 시계를 흘끗 보았다.
“여기서 오버튼까지는 그리 멀지 않네. 거기 가서 노파의 조카딸을 만나 보는게 어떻겠나?”
“범행 현장인 가게 쪽을 먼저 보는 게 좋지 않을까?”
“그건 뒤로 미루고 싶네. 이유가 있어서.”
그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잠시 뒤 우리는 자동차를 타고 오버튼 쪽으로 런던 행 도로를 달려갔다.

형사가 가르쳐 준 집은 마을에서 런던 쪽으로 1마일쯤 간 곳에 있었다. 훌륭한 집이었다.
벨을 누르자 아름다운 검은 머리의 아가씨가 나왔다. 지금까지 울고 있었던 듯 눈이 빨갰다.
포아로가 상냥하게 말했다.
“아, 당신이 이 집 하녀인 메리 드로워 양이군요?”
“그렇습니다. 제가 메리예요.”
“주인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잠시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은데요. 이야기란 다름아닌 아가씨 아주머니인 애셔 부인에 대한 것입니다.”
“주인은 외출중이세요. 들어오셔도 그리 꾸중이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녀는 조그만 거실의 문을 열었다. 우리는 안으로 들어갔다. 포아로는 창가 의자에 앉아 날카롭게 아가씨의 얼굴을 보았다.
“아주머니가 돌아가신 이야기는 물론 들었겠지요?”
아가씨는 고개를 끄덕였는데 눈물이 다시 새삼스럽게 솟아났다.
“오늘 아침 경찰에서 오셨었어요. 아, 무서운 일이에요! 가엾은 아주머니! 그토록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서 또 이런 일을 당하시다니……너무해요.”
“경찰이 앤도버로 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월요일에 심문을 받기로 되어 있어요. 하지만 저는 그리로 가면 있을 데가 없어요. 이젠 그 가게로 갈 수도 없고. 게다가 저 말고는 하녀가 없는데 주인에게 폐 끼치고 싶지도 않아요.”
포아로는 부드럽게 물었다.
“당신은 아주머니를 아주 좋아했었군요, 메리 양?”
“정말 좋아했어요. 아주머니는 언제나 제게 잘해 주셨지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저는 11살 때 런던의 아주머니 집으로 갔어요. 16살 때부터 돈벌이를 하러 나와 있었지만, 쉬는 날이면 꼭 아주머니에게 가곤 했어요. 아주머니는 그 독일사람 때문에 아주 애를 먹고 계셨어요. 그 남자를 아주머니는 늘 <나의 악마>라고 부르곤 하셨지요. 그는 아주머니가 있는 데는 어디든 와서 가만히 두지 않았어요. 돈만 빼앗아 가는 거지같은 짐승이에요.”
아가씨의 말투는 아주 격렬했다.
“아주머니는 법적 수단으로 그 남자의 압박에서 벗어나려고는 하지 않았습니까?”
아가씨는 단순하게, 그러나 딱 잘라 말했다.
“아무래도 남편이었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지요.”
“메리 양, 그 남자는 아주머니를 협박했었지요?”
“네, 아주 무서운 소리를 곧잘 했어요. 목을 부러뜨린다든가 하는 말들을. 저주스럽게 욕지거리를 해대면서. 독일 말과 영어 두 가지로요. 그렇지만 아주머니는 결혼했던 즈음에는 아주 멋있는 남자였다고 말씀하셨어요. 사람이 그렇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이에요.”
“정말 그렇군요. 그런데 메리 양, 늘 그런 협박을 받고 있었다면 사건이 일어난 것을 알았을 때 그리 놀라지 않았겠군요?”
“그래도 역시 놀랐어요. 아무튼 진짜로 하는 소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으니까요. 그저 말로만 해대는 것뿐 그 이상으로는 여기지 않았어요. 아주머니도 무서워하고 계셨던 것 같지 않아요. 아주머니가 대들면 개가 다리 사이로 꼬리를 감추듯 움츠러드는 것을 본 적도 있어요. 오히려 그쪽에서 아주머니를 무서워하고 있을 정도였지요.”
“그런데도 아주머니는 돈을 주고 있었습니까?”
“남편인걸요.”
“그렇군요, 아까도 그렇게 말했었지요.”
포아로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계속했다.
“그렇다면 결국 그 남자는 아주머니를 죽이지 않았다는 거로군요?”
“죽이지 않았다고요?”
그녀는 눈을 크게 떠보였다.
“그렇습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아가씨 아주머니를 죽였다는 말입니다. ……달리 짐작되는 사람 없습니까?”
그녀는 한층 더 놀란 듯 그의 얼굴을 보았다.
“알 수 없어요. 하지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당신 아주머니가 무서워한 다른 사람은 없었습니까?”
메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주머니는 남을 무서워하지 않으셨어요. 말솜씨가 좋아 누구에게나 맞설 수 있으셨어요.”
“아주머니에게 악의를 품고 있는 어떤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 일은 없습니까?”
“네, 없어요.”
“익명의 편지를 받은 일도”
“무슨 편지라고요?”
“개인적인 서명이 없는 편지로, 예를 들어 그저 ABC라는 서명만 있는.”
그는 아가씨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그녀는 분명 난처해하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가씨 말고 또 다른 친척이 있습니까?”
“지금은 없어요. 열 남매였는데 자란 사람은 셋뿐이었지요. 톰 아저씨는 전쟁터에서 돌아가시고, 해리 아저씨는 남아메리카로 가버리셔서 소식을 몰라요. 그리고 또 제 어머니는 돌아가셨기 때문에 저밖에 없어요.”
“아주머니는 저축을 했었습니까? 돈을 모으고 있었습니까?”
“은행에 조금 있어요. 매장 비용만 된다면 하고 곧잘 말씀하곤 하셨지요. 그리고는 겨우 그럭저럭 살아 나가셨어요. 그 늙어빠진 악마가 있으니 안 그렇겠어요.”
포아로는 생각 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가씨에게 말한다기 보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지금으로선 어둠 속에 있는 것 같군. 방향도 잡을 수 없어. 만일 좀더 뚜렷해진다면…….”
그는 일어섰다.
“만일 아가씨한테 볼일이 생기면 여기로 편지하지요. 메리 양.”
“사실을 말씀드리면, 저는 여기를 나갈 생각으로 있어요. 시골을 그리 좋아하지 않거든요. 아주머니 곁에 있는 게 마음 든든히 여겨져 여기 있었던 거예요. 그러나 이젠…….”
그 눈에 다시 눈물이 솟았다.
“이제는 여기 있을 이유가 없어져 런던으로 되돌아가려고 해요. 그곳이 제게는 더 재미있는 걸요.”
“그럼, 그리고 가게 될 때에는 주소를 가르쳐 주십시오. 이것이 제 명함입니다.”
그는 아가씨에게 명함을 건네주었다. 그녀는 곤혹스러운 듯 이마에 주름을 지으며 그것을 보았다.
“그럼, 선생님은……경찰과는 관계가 없으신가요?”
“나는 사립탐정입니다.”
그녀는 선 채로 잠시 말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이윽고 그녀가 말했다.
“뭔가 의심스러운 점이라고 있으신지요?”
“그렇습니다, 아가씨. 좀 이상한 점이 있지요. 아마 앞으로 아가씨에게 도움 받을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저는 무엇이든 하겠어요. 아주머니가 살해되시다니, 옳은 일이 아니니까요.”
그것은 기묘한 표현이었다. 그러나 꽤 감동적이었다.
우리는 곧 자동차를 타고 앤도버로 돌아갔다.


< 범행 현장 >

참극이 일어난 곳은 큰길에서 좁은 골목이었다. 애셔 부인의 가게는 그 중간쯤의 오른쪽에 있었다.
그 골목에 들어섰을 때, 포아로는 흘끗 시계를 보았다. 그래서 나는 그가 범행 현장으로 가는 시간을 지금까지 미룬 까닭을 알았다. 꼭 5시 30분이 되어 있었다. 그는 되도록 어젯밤의 상황을 재현하려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목적이었다면 실패했다. 이 때 골목은 어젯밤의 그림자를 거의 전해주고 있지 않았다.
그곳에는 가난한 사람들 집에 섞여 조그만 가게가 몇 채 줄지어 있었다. 다른 때 같으면 이 언저리의 가난한 몇몇 사람들이 그곳을 오가고 또 찻길이나 보도 위에서는 몇 명의 아이들이 놀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때는 많은 사람들이 쭉 둘러서서 집인지 가게를 보고 있었다. 그것이 어느 집인지는 곧 알 수 있었다. 우리가 본 것은 한 사람이 살해된 곳을 아주 흥미롭게 보고 있는 여느 사람들의 무리였다.
가까이 다가감에 따라 확실히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블라인드를 내린 그을음 낀 듯한 구멍가게 앞에 젊은 순경이 애를 먹고 있는 듯한 얼굴로 서서 사람들에게 저리 가라고 딱딱하게 명령하고 있었다.
그는 동료의 도움을 받아 모여 있는 사라들을 해산시키기 시작했다. 꽤 많은 사람들이 불평스럽게 한숨을 쉬며 저마다 자기네 일로 돌아갔다. 그러나 곧 또 다른 사람들이 몰려와 살인 현장을 똑똑히 봐두려는 듯 그 자리를 다시 차지했다.
포아로는 사람들로부터 조금 떨어져 섰다. 그가 서 있는 곳에서는 문 위에 씌어진 글자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포아로는 그것을 입속에서 되풀이했다.
“A 애셔. 그렇지, 어쩌면…….”
그는 말을 끊었다.
“가세, 헤이스팅즈. 안으로 들어가 보세.”
나는 기다리고 있던 바였다.
우리는 사람들을 헤치고 젊은 순경에게로 갔다. 포아로는 형사에게서 받아 둔 소개장을 내보였다. 순경은 머리를 끄덕이며 우리를 안으로 들여보내기 위해 문의 자물쇠를 열었다. 우리는 구경꾼들의 호기심에 찬 눈길을 받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어 안은 어두웠다. 순경이 전등 스위치를 찾아내어 당겼다. 그러나 전구의 촉수가 낮아 안은 여전히 어두웠다.
나는 가게 안을 빙 둘러보았다.
지저분하고 좁은 곳으로 몇 권의 싸구려 잡지가 흩어져 있고 어제 신문에는 하루치 먼지가 쌓여 있었다. 계산대 뒤에는 천장까지 선반이 매어져 파이프 담배며 궐련 봉지가 놓여 있었다. 박하가 든 과자와 사탕병도 있었다. 흔해빠진 구멍가게로 다른 데에도 몇천 군데나 있는 그런 곳이었다.
순경은 느릿한 햄프셔 사투리로 상황을 설명했다.
“거기 계산대 뒤에 웅크린 채 쓰러져 있었지요. 할머니는 자신이 습격당하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고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아마 선반으로 막 손을 내민 순간이었는지도 모르지요.”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소?”
“없었습니다. 다만 곁에 <플레이어즈>꾸러미가 하나 떨어져 있었지요.”
포아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은 그 좁은 가게를 탐색하듯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철도 안내서는 어디에?”
“여기입니다.”
순경은 계산대 위를 가리켰다.
“바로 앤도버 있는 데가 펼쳐진 채 뒤집혀져 있었습니다. 런던 행 기차를 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앤도버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물론 철도 안내서는 살인과 관계없는 다른 사람이 잃어버리고 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물어 보았다.
“지문은?”
순경은 머리를 저었다.
“곧바로 모두 조사해 보았지만 없었지요.”
포아로가 물었다.
“계산대에도?”
“굉장히 많았습니다. 모두 함께 뒤섞여 뒤죽박죽되어 있었지요.”
“그 속에 애셔의 지문은?”
“아직 알 수 없습니다.”
포아로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죽은 사람이 가게 안에서 살고 있었느냐고 물었다.
“그렇습니다. 안쪽 문을 지나면 그곳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함께 가드렸으면 좋겠습니다만, 저는 여기 있지 않으면 안 돼서…….”
포아로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도 그 뒤를 따라갔다.
가게 안은 부엌 딸린 조그만 거실로 되어 있었다. 그곳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지만 음침한 느낌이 들었으며 가구도 거의 없었다.
벽난로 위에 사진이 몇 장 있었다. 내가 다가가서 들여다보자 포아로도 옆으로 왔다.
사진은 모두 세 장이었다. 한 장은 오늘 오후에 만난 아가씨 메리 드로워의 싸구려 사진이었다. 그녀는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얼굴에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떠올리고 있었다. 포즈를 취한 이런 사진은 표정을 엉망으로 만들기 때문에 스냅 사진 쪽이 훨씬 좋다.
두 번째 것은 더 고급스러운 것으로, 꽤 나이든 머리가 희끗희끗한 부인을 기교적으로 흐릿하게 찍은 사진이었다. 털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다. 나는 아마도 미스 로즈일 거라고 생각했다. 즉 애셔 부인에게 장사를 시작할 수 있도록 돈을 물려준 사람이다.
세 번째 사진은 아주 오래된 것으로 누렇게 빛이 바래 있었다. 얼마쯤 구식으로 보이는 것으로 팔짱낀 젊은 남녀가 찍혀있었다. 남자는 단춧구멍에 꽃을 꽂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고풍스러움이 느껴지는 딱딱한 사진이었다.
포아로가 말했다.
“아마도 결혼 기념사진인 모양이군. 보게, 헤이스팅즈. 그녀는 아름다웠을 거라고 내가 말했잖나.”
그 말대로였다. 시대에 뒤떨어진 머리 모양과 기묘한 옷 때문에 좀 이상해 보이긴 했지만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반듯한 아가씨의 아름다움은 의심할 바가 없었다. 나는 옆에 있는 다른 한 인물을 자세히 보았는데, 이 군인 같은 모습의 말쑥한 젊은이가 그 초라한 애셔였다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았다. 나는 그 곁눈질을 하는 주정꾼 노인과 피로에 지친 얼굴의 죽은 노파를 생각해 내고 세월의 무자비함에 몸을 떨었다.
그 거실로부터 2층의 두 방으로 층계가 이어져 있었다. 하나는 빈방으로 가구도 없고, 다른 하나는 죽은 노파의 침실이었다. 경찰이 조사한 뒤여서 그 흔적이 그대로 있었다.
침대에는 털이 빠진 낡은 담요가 두 장 있었다. 한 서랍에는 알뜰히 기워진 속옷 몇 벌, 또 한 서랍에는 요리책 종류, ≪녹색의 오아시스≫라는 제목의 표지가 달린 책, 번쩍거리는 싸구려 새 양말 한 컬레?그것은 번쩍거리는 싸구려였다?사기 그릇 장식 한 쌍?드레스덴 도자기로 된 깨어진 양치기며 파랑과 노랑점이 있는 개?나무못에 걸린 검은 레인코트와 털 자켓. 이러한 것들이 죽은 애셔 부인이 이 세상에 남긴 재산이었다.
무언가 개인적인 메모 같은 게 있었다 해도 경찰이 가져가 버렸을 것이다.
포아로가 중얼거렸다.
“가엾게도. 자, 헤이스팅즈, 여기에는 이제 아무것도 없네.”
다른 길로 나서자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길을 건넜다. 바로 애셔 부인의 가게 맞은편에 야채 가게가 있었다. 안에 있는 물건보다 밖에 내놓은 물건이 더 많은 그런 종류의 가게였다. 포아로는 낮은 소리로 내게 몇 마디 일러두고 혼자 가게에 들어갔다. 나는 잠시 뒤 따라 들어갔다. 그는 막 상추를 사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딸기를 1파운드 샀다.
포아로는 물건을 싸주는 뚱뚱한 아주머니와 큰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살인 사건이 일어난 곳이 바로 댁 맞은편이었군요. 이런 끔찍한 일이 있나.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 뚱뚱한 여자는 살인 사건 이야기에는 이제 질린 것 같았다. 그날은 그녀에게 있어 너무 길었던 모양이다.
“이 법석거리는 구경꾼들을 어떻게 좀 할 수 없을까요? 대체 무엇을 그렇게 보는 것일까요?”
포아로가 말했다.
“어젯밤에는 꽤 달랐을 테지요? 아주머니는 범인이 가게로 들어가는 걸 보시지 못했습니까? 키가 큰 훌륭한 남자로 수염이 있었다지요? 러시아인이라든가 뭐 그렇다는 이야기던데요?”
여자가 날카롭게 돌아보았다.
“뭐라고요? 러시아인이 했다고요?”
“경찰이 체포했다던데요.”
“정말이에요?”
여자는 흥분해서 입이 가벼워졌다.
“외국 사람인가요?”
“그렇습니다. 나는 틀림없이 아주머니가 어젯밤 그 남자를 본 줄 알았지요.”
“아니, 그럴 기회가 없었어요. 그래요, 저녁 무렵의 한창 바쁜 때여서 일을 끝내고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비나가니까요. 키가 크고 수염이 난 훌륭한 남자라니……아니에요. 그런 사람이 이 언저리에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데요.”
그래서 내가 대사를 받았다. 나는 포아로에게 말했다.
“실례지만, 당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닙니까? 키가 작고 얼굴빛이 검은 남자라고 나는 들었습니다만.”
그리하여 이 뚱뚱한 여자에다 여윈 남편과 쇳소리 내는 심부름꾼 아이까지 합쳐 재미있는 토론이 시작되었다. 키 작은 검은 얼굴의 남자가 네 사람이나 목격된 이야기가 나오고, 쇳소리 내는 심부름꾼 아이는 키가 큰 훌륭한 남자를 보았지만 그에게는 수염이 없었다고 유감스러운 듯 덧붙였다.
겨우 쇼핑이 끝나 우리는 거짓말을 한 채 그대로 가게를 나왔다.
나는 얼마쯤 비난을 섞어 물었다.
“대체 그건 무슨 연극이었나, 포아로?”
“나는 다만 낯선 사람이 저쪽 가게로 들어갔는지 어떤지 듣고 싶었던 것뿐일세.”
“그럼, 그렇게 물어보면 되잖나, 그런 엉터리 같은 소리 하지 말고.”
“아니, 자네가 말하는 것처럼 그냥 물어 보아서는 아무 대답도 얻을 수 없다네. 자네는 자신도 영국 사람이면서, 그냥 물어보는 질문에 반발하는 게 영국 사람의 기질이라는 걸 모르고 있는 모양이군. 그것은 반드시 의심하는 마음을 불러일으켜 결과는 완강한 침묵으로 끝난다네. 이 사람들에게 뭘 물어보게나, 그들은 조가비처럼 입을 다물어 버리지. 그렇지만 이상하고 터무니없는 어떤 말을 한 가지 꺼내 거기서 자네가 반대되는 말이라도 해보이면, 금방 이야기가 풀려나온다네. 그런 방법으로 우리는 문제의 시각이 바쁜 때였다는 것, 그래서 누구나 자기 일 말고는 신경 쓸 수 없으며 많은 사람이 길을 지나가고 있었던 때임을 알게 된 거야. 우리의 살인범은 좋은 시간을 택했다는 말이 되네, 헤이스팅즈.”
그는 말을 끊었다. 그리고는 엄격하게 나무라는 듯한 말투로 덧붙였다.
“자네는 상식이라는 걸 갖고 있지 않는 것 같군, 헤이스팅즈. 무엇이든 사라고 했더니 하필이면 딸기를 고르다니! 보게, 벌써 포장지에서 물이 배어 나와 그 좋은 옷을 버리게 하고 있잖나.”
정말 그의 말대로였으므로 나는 좀 당황했다.
나는 급히 한 아이에게 딸기를 줘버렸다. 그 아이는 깜짝 놀라 좀 경계하는 빛이 되었다.
포아로도 상추를 주자 아이는 완전히 당황한 모양이었다. 포아로는 설교를 계속했다.
“허름한 야채 가게에서는 딸기 같은걸 사면 안돼. 딸기란 막 따온 게 아니면 물이 배어 나오지. 바나나, 사과, 양배추, 이런 것들이라면 그래도 좀 낫지만, 딸기는 안 되네.”
나는 변명하듯 말했다.
“막 들어서자 생각이 났으니 어쩌나.”
포아로는 엄숙하게 대답했다.
“그건 자네 상상력이 모자라기 때문일세,”
그는 보도에서 걸음을 멈췄다.
애셔 부인 가게 오른쪽에 있는 집 딸린 가게는 비어 있었다. 창에 <세놓음>이라고 씌어 있었다. 반대쪽 옆집에는 때낀 모슬린 커튼이 내려져 있었다.
포아로는 그 집 쪽으로 걸어갔는데 벨이 없어서 노커를 힘차게 몇 번이나 두드렸다.
한참 있다가 코를 훌쩍거리는 지저분한 아이가 문을 열었다.
포아로가 말했다.
“안녕, 어머니 계시니?”
“네?”
아이는 불쾌하고 의심스럽게 우리를 보았다.
포아로가 말했다.
“네 어머니 말이야.”
아이는 이 말을 알아듣는 데 5분의 1분쯤 걸렸다. 이윽고 아이는 층계 쪽을 향해 소리쳤다.
“엄마, 손님.”
그리고는 어두컴컴한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딱딱한 얼굴을 한 여자가 난간 너머로 내려다보고 나서 층계를 내려왔다.
“시간 낭비예요.”
여자가 말을 시작했으나, 포아로가 가로막았다. 그는 모자를 벗고 정중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아주머니. 저는 <이브닝 프리커>의 기자인데 살해된 이웃집의 애셔 부인에 대해 기사가 될 만한 것을 얻으러 왔습니다. 사례금으로 5파운드 드리지요.”
화난 목소리를 억누르고 여자는 머리를 쓰다듬고 치마를 잡아당기며 층계를 내려왔다.
“자, 안으로 들어오세요. 이쪽으로. 어서 앉으세요.”
그 조그만 방은 커다란 모조 자코비언 식 가구로 어수선하여 우리는 가까스로 안으로 들어가 딱딱한 긴 의자에 앉았다.
여자는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조금 전에 그런 실례되는 말을 드려서요. 그렇지만 우리가 얼마나 성가신 꼴을 당하고 있는지 도저히 모르실 거예요. 아무튼 여러 사람들이 진공청소기니 양말이니 향로 주머니니 뭐니 온갖 잡동사니들을 팔러 온답니다. 그들은 정말 말솜씨가 좋고 점잖게 보이지요. 이름도 한 번 들으면 금방 외워서 이쪽은 파울러 부인이고, 저쪽은 누구라느니 하며 말예요.”
재치있게 그 이름을 잡아서 포아로가 말했다.
“갑작스러운 이야기입니다만, 파울러 부인, 우리가 부탁드린 일을 들어주시겠습니까?”
“글쎄요.”
그러나 이미 5파운드가 파울러 부인의 눈앞에 유혹하듯 어른거리고 있다.
“애셔 부인은 알고 있지만, 글로 쓰는 일이고 보면.”
포아로는 얼른 안심시키듯 그녀 쪽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며, 그녀로부터 사실 이야기를 들은 다음 기사는 자기 쪽에서 쓴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이에 용기를 얻어 파울러 부인은 자진해서 기억이며 억측이며 소문 따위를 이것저것 이야기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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