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종 - 어느 창녀의 죽음

3학년2반 | 2022.01.29 07:51:05 댓글: 1 조회: 1265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5808
어 느 娼 女 의 죽 음
김 성 종 저
- 이 이야기는 종로 사창가가 폐지되기 전에 일어났던 한 비극
적인 사건을 다룬 것이다.
1969년 1월은 유난히 추웠다.
그 겨울 어느 월요일 새벽이었다. 신문 배달 소년 하나가 돈화
문 앞을 지나다가 가로수 밑에서 눈에 덮인 희끄무레한 무더기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사람의 형상을 닮은 그것은 소년을 섬
뜩하게 했다. 그러나 그 또래의 호기심에 끌려 놈은 그것을 한 번
툭 겉어차 보았다. 쌓인 눈이 그의 발등에 부 치며 흩어졌다.
나타난 것은 양말도 없이 흰 고무신만을 신은 여자의 발이었다.
그것은 새벽의 눈빛 속에서 선명하게 굳어 있었다.
소년은 두세 걸음 귀로 물러서다가 와아 하고 소리치면서 온
길을 되돌아 재빨리 뛰기 시작했다.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거리에는 한참 간격으로 질주하는 차
량만 있을 뿐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소년의 신고를 접수한 경찰은 이 신원을 알 수 없는 여인의 시
체를 일단 흔히 볼 수 있는 대수롭지 않은 변사체로 보고, 간단하
게 일건 서류를 작성했다. 그 가운데 신체상으로 나타난 것 중 중
요한 것은 대강 다음과 같았다.
① 연령 25세 정도.
② 사망 시간 7시간 전(6시 50분 현재).
③ 음부(陰部)가 심히 헐어 있음.
④ 약물 중독으로 인한 사망으로 사료됨.
과장 옆에 다가서서 사건 서류를 넘겨다 본 오 형사는 남은 담
배 꽁초에 불을 붙여 물고 밖으로 나왔다. 시계를 보니 7시 40분
이었다.
밤새 야근을 한 탓인지 그의 몸은 축 늘어진 모습이었다. 요즈
음 들어서 그는 갑자기 자신의 육체에 대해서 부담을 느끼기 시작
하고 있었다. 앉아 있을 때나 서 있을 때나 피로는 항상 그의 어
깨를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었다.
그는 경찰서 뒤뜰로 천천히 걸어갔다. 뒤뜰에는 적어도 매일 한
구(具) 정도의 변사체가 운반되어 오곤 했는데, 언제부터인지
는 몰라도 그는 거기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버릇이
있었다. 시체가 들어와 간간한 조사와 검시가 끝나면 이윽고 그
것은 시(市) 관리의 시체실로 옮겨져 며칠동안 주인을 기다리다가
연고자가 나타나지 않을 경우 곧장 화장터로 가든지 아니면 대학
병원에 염가로 팔려 실험대 위에 오르게 된다는 것을 그는 잘 알
고 있었다. 시체를 다루는 사람들의 솜씨는 언제나 익숙해 보였다.
그리고 그 표정들은 메마를 대로 메말라 감정이라곤 털끝만큼도
없는 것 같았다. 대개 이러한 일들은 아침 일찍 일어났고, 일이
끝나면 그들은 흡사 먼지를 털듯이 요란스럽게 해장국 집으로 달
려가곤 했다.
시체는 가마니에 덮인 채 뒤뜰의 담 밑에 버려져 있었다. 가마
니 끝으로 빠져나온 여자의 두 발을 보자 그는 그것들을 쓰다듬어
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두 발은 누가 양말이며 신발을 벗겨 가
버렸는지 모두 맨발이었다. 여기 들어오는 시체들은 언제 보아도
이렇게 하나같이 맨발이었다. 아마 시체를 나르는 인부들의 장난
일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눈이 아직 그치지 않고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가마니 위에는 벌
써 많은 눈이 쌓여 있었다. 신문팔이 소년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
온 것은 두 시간쯤 전이었다. 그동안 검시의(檢屍醫)가 다녀갔고,
몇몇 동료가 화장실에 들렀다가 한번씩 뜰을 거쳐 나오면서 시체
주위에 침을 뱉고, 아침부터 기분을 잡쳤다는 투로 이야기를 나누
곤 했었다. 기름 바른 머리에 금빛 로이드 안경을 끼고 바쁜 듯이
나타나는 검시의라는 작자는 종로 사창가에 산부인과와 성병 전문
의 병원을 차리고 있는데 어떤 연유로 그 자가 시체 한 구당 5천
원의 검시료를 받는 전문 검시의로 추천되었는지는 몰라도 벌써
오래 전부터 이 K 경찰서에 출입하고 있었다. 창녀를 상대로 해서
막대한 돈을 벌고 경찰서 간부들과 두터운 친분을 맺고 있는 그
검시의를 오 형사는 매우 싫어했다.
결국 그런 의식을 가진 자들이 잘 먹고 잘 산다는 사실에 이르
러서는 증오감마저 일곤 했다.
그는 가마니 끝을 들어올리고 죽은 여자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
다보았다. 얼굴을 반쯤 덮은 숱이 많은 그녀의 머리칼은 죽은 사
람 같지 않게 그 결이 곱고 부드러워 보였다. 핏기 하나 없이 하
얗게 가라앉은 얼굴은 머리칼에 덮인 탓인지 인형처럼 단순하고
작은 모습이었다. 콧등과 뺨 위에 뿌려져 있는 몇 개의 주근깨가
불현듯 그에게 서글픈 친근감을 안겨주었다. 온 얼굴에 흡사 해진
피부처럼 늘어붙은 값싼 화장기만 없었더라도 이러한 감정은 좀
덜했을 것이다. 화장은 눈 주위, 특히 눈두덩 위에 가장 많이 몰
려 있어서 얼른 보기엔 진보라빛의 부스럼 딱지 같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그것은 잘못된 눈수술을 가리기 위하여 거기에 유난
히 정성을 들인 것이었다. 그 두터운 화장기 밑에는 양쪽 모두 정
형수술의 부작용이 가져온 상처가 그대로 굳어 있었다. 아마 소녀
는 쌍거풀 수술을 했던 것 같았다. 그는 가마니를 더 젖혀 보았
다. 소녀는 빨간 털 셔츠에 검정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소녀의
몸은 얼굴에 비해서 전체적으로 큰 편이었으나 몹시 말라 있었다.
은이처럼 앙상한 손이 각을 이루면서 눈 속에 반쯤 파묻혀 있었
다. 다른 한 쪽 손은 배 위에 놓여 있었는데 흰 눈 때문인지 다섯
개의 긴 손톱에 칠해진 매니큐어 빛이 유난히 빨갛게 돋아 보였
다.그것은 죽은 후에 칠해진 것처럼 매우 생경해 보였고, 한편으
로는 죽은 자에게서 느낄 수 있는 최후의 감정, 끝없이 굴러 떨어
져 버린 고독한 주검의 찌꺼기 같기도 했다.
그가 가마니를 막 덮었을 때 검의 가죽 점퍼의 청년 하나가 그
의 곁으로 다가왔다.
"뭘 그렇게 열심히 들여다보세요."
청년은 기분 좋게 웃으면서 구두 끝으로 가마니를 휙 젖혔다.
청년은 서(署)에서 필요할 때마다 부르고 있는 카메라맨이었다.
변사체를 찍어 두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하, 요건 제법 이쁜데...... 자살입니까?"
"아직 몰라."
오 형사가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청년은 더 묻지 않고 카메라를
시체의 얼굴 위로 가까이 가져갔다. 그는 시체를 여러 각도에서
찍었다.
"오늘 오전중으로 뽑아 줄 수 있겠어?"
"그렇게는 안 됩니다. 일이 밀려서요......"
청년은 머리를 흔들면서 말했다.
"엄살 떨지 말고 빨리 좀 뽑도록 해, 급한 것이니까...... 열
한시에 내가 그쪽으로 가지."
뒤뜰을 돌아나오면서 오 형사는 죽은 소녀와 친해져 보고 싶은
막연한 기분을 느꼈다. 오늘이 비번이었기 때문에 그로서는 그녀
의 신원을 조사해 볼 수 있는 시간도 좀 있었다. 수사과의 말단
형사로서 언제나 일선 수사에 임하고 있는 그에게는 종종 가슴을
치게 하는 살인 사건들이 걸려들 때가 있는데, 그런 경우 그는 사
건 속에 깊이 파고 들어가서 들개처럼 그것을 갈가리 물어뜯어 놓
는 버릇이 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죽은 사람을 어느 누구
보다도 충실히 이해하려 들었고, 그러는 동안 어느새 그와 피살자
는 하나의 두터운 묵계 속에서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한덩어리가
되어 움직이곤 했다.
오 형사는 경찰서를 나오는 길로 곧장 해장국집으로 갔다.
작년 봄에 아내를 잃은 그는 현재 잠자리와 먹는 것이 퍽 불안
정했다. 때문에 그를 딱하게 여긴 주위 사람들이 재혼을 권하기도
했지만, 그는 아직 그럴 마음이 나지 않았다. 그런 생각만으로도
그는 죽은 아내에게 미안했던 것이다. 첫아이를 낳다가 핏덩이와
함께 죽은 아내인 만큼 가엾고 불쌍한 생각은 좀체로 가셔지지가
않았다. 그래서인지 방안에는 아직도 아내의 향기와 목소리가 진
하게 남아 있었다.
그러나 저러나 35세의 사나이가 홀로 자취를 한다는 사실은, 그
리고 그러한 상태가 언제까지 꼐속되어야 할지도 모든다는 사실은
정말 고적하고 불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해장국집에서 대강 식사를 마친 그는 경찰서로 돌아와 죽은 여
자에 대한 서류를 다시 한 번 자세히 검토했다.
음부가 심히 헐어 있고 손톱에 짙은 매니큐어를 했다는 점, 그
리고 약물 중독에 의한 사망이라는 사실 등이 그에게 수사 범위를
어느 정도 좁혀 주는 것 같았다. 전혀 엉뚱한 경우도 더러 있긴
하지만 대부분 그 차림만으로도 변사체의 신분은 밝혀지게 마련이
다. 그는 그 여자를 술집 작부 쪽보다는 창녀 쪽으로 더 생각해
보고 싶었다. 사창가에서 창녀의 시체가 발견되는 일이 종종 있었
다. 그런데 그들의 사인이라는 것이 거의가 타살이 아니면 자살이
었다. 창녀들이 자신의 신세와 성병에 견디다 못해 젊은 목숨을
끊어 버린다든가 사창가의 기생충들, 이를테면 포주나 펨프, 또는
깡패들에게 얻어맞아 죽는 것 따위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
었다.
그가 첫번째로 찾아간 곳은 사창가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그
산부인과와 성병 전문의 병원이었다.
금테 로이드 안경의 그 검시의는 오 형사를 보자,
"어이구 웬일이십니까? 여길 다 오시구......"
하고 호들갑을 떨면서 코피와 담배를 권했다.
그러나 그 안경 뒤에는 조그맣고 날카로운 눈초리가 이 불청객
의 속셈이 무엇인가를 알아내련ㄴ 듯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거기에는 바로 잘못 틈을 보였다가 의외로 많은 돈을 뜯길 지 모
른다는, 그 구역질나는 경계 의식이 잔뜩 깔려 있었다. 그것을 보
자 오 형사는 검시의를 만나러 온 것을 후회했다.
"다름이 아니라......"
입을 열면서 보니 검시의는 몸을 꼿꼿이 하고 있었다.
"수고스럽겠지만 검시를 다시 한 번 해주셨으면 하고요."
"아니, 왜, 어떻게 됐습니까?"
검시의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이 친구가 진정으로 그러는
건지 아니면 다른 속셈이 있어서 일부러 뚱딴지 같은 수작을 거는
건지 얼른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는 투였다.
"어떻게 된 게 아니고...... 검시를 좀 자세히 해주셨으면 하고
요."
오 형사의 조용하고 분명한 말씨에 상대는 갑자기 정신이 든 듯
이 자리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 신경질저그로 안경을 벗어 가운
자락에 닦으며,
"어떻게 더 자세히 하라는 건가요? 뱃속에 들은 것까지 다 조사
할 수야 없지 않습니까?"
하고 말했다.
"할 수 있다면 그런 것까지도 부탁드리고 싶은데요."
"하 참, 그 정도의 검시가 필요하다면 연구소(과학수사연구소
)에 의뢰해 보시지 그래요."
"네, 그게 가장 무난하겠지요. 허지만 여기서 해볼 수 있는 데
까지는 해봐야지요."
"저로서는 검시를 부탁받을 때마다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
이상 더 어떻게 하라는 건지 이해가 잘 안되는데요. 잘 아시겠지
만 시체를 한 번씩 만지고 나면 하루 종일 밥맛이 떨어집니다. 보
기는 쉬운 것 같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한 것만은 아닙니다. 돈이
나 많이 받고 한다면 또 몰라도......"
더 이상 부탁해 본들 소용없는 일이었다. 거듭 오 형사는 난처
함을 느꼈다. 그는 조금 생각해 보다가 별로 기대하지도 않으면서
물었다.
"무리한 부탁이라면 그만두겠습니다. 그런데 새벽에 오셨을 때
검시 결과에 대해서 혹시 기록에서 빼먹거나 묵살해 버린 점이 없
었는지 한 번 생각해 주십시오."
"그런 건 없었습니다."
검시의는 살찐 턱을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면서 잘라 말했다.
"음독 같다고 했는데...... 무슨 약을 먹었나요?"
"세코날입니다. 그건데 그 시체로부터 뭐 이상한 거라도 발견했
나요? 다른 땐 그렇지 않았는데 이번엔 유난히 관심을 보이시니
......"
사나이는 비꼬는 투로 말끝을 흐렸다.
"......직업이 그런 거니까요. 타살된 흔적은 조금도 없었나
요?"
"없었어요. 음독 자살이라니까요. 신중히 생각해 보는 건 좋지
만, 그 때문에 쓸데없이 헛수고를 한다면 우스운 일이죠."
오 형사는 뜨거워 오는 숨결을 삼키면서 또 물었다.
"그 여자에게 성병 같은 건 없었나요?"
이 질문에 검시의 는 똑바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건 정밀한 검사가 필요하니까요.
하지만 거기가 다 헐어 있을 정도였으니까 남자 관계가 많았었던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까 성병이 있을 가능성도 있군요."
"혹시 과거에...... 죽은 여자를 본 적이 없나요?"
"제가요?"
검시의는 놀라서 큰소리로 물었다.
"네, 바로......"
"원,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제가 어떻게 그런 여
자를 알 수가 있겠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제 말은 이 병원에서 성병을 전문으로
치료하니까 혹시 환자로서 그 죽은 여자가 이곳을 찾아온 적이 없
나 해서 그렇게 물어 본것이지 다른 뜻은 없어요. 여기서 치료를
받은 적이 있는 여자라면 신분을 알아내기가 쉬우니까요. 그리고
이 근방에서 이 병원에 손님들이 많이 찾아오니까,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아서요."
"보기와는 달라 단골 손님들 외에는 별로 손님이 없습니다. 그
래서 손님들의 얼굴을 모두 기억하고 있는데 도대체 그런 여자는
본 적이 없어요."
"그렇다면...... 잘 알겠는데...... 무슨 정형수술을 한 자리
같은 것은 없었읍니까?"
"있었습니다. 눈에 수술을 했더군요."
"왜 그런 것은 검시 기록에서 뺐죠?"
"별로 쓸데없는 것들이라 그랬습니다."
"아니죠. 그건 잘못 생각하신 건데요. 기록이란 건 자세할수록
도움이 되는 것이거든요. 앞으론 검시하실 때 이 점을 유의해 주
셔야 겠어요."
오 형사가 말을 끊고 일어서려고 하자 검시의는 재빨리 봉투 하
나를 그의 호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이러지 마세요. 정말 싫습니다."
그는 검시의의 손을 완전히 뿌리치면서 봉투를 도로 내 놓았다.
어디를 가나 이렇게 돈이 든 봉투를 슬그머니 찔러 주는 것이
유행으로 되어 있었다. 그때마다 그는 경찰직을 그만두고 싶은 생
각이 일곤 했다.
눈이 그쳤다가 오후에 들어서면서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함박
눈 때문인지 사람들이 갑자기 거리로 쏟아져 나온 듯이 보였다.
그들은 유쾌하게 웃으면서 거리를 휩쓸고 있었다.
점심으로 국수 한 그릇을 들고 난 오 형사는 종로 3가 일대에서
성형과 정형을 전문으로 하는 병원들을 찾아 하나하나 점검해 나
갔다.
사진관에서 찾은 변시체의 사진은 모두 다섯 장이었는데, 제대
로 선명하게 나온 것이 하나도 없었다. 더우기 얼굴을 정면으로
찍은 것이라 해도 시체가 눈을 감고 있기 때문에 사진만 가지고
신원을 찾는다는 것은 쉬울 것 같지가 않았다. 아닌 게 아니라 시
체의 사진을 본 의사들은 터무니없는 짓 하지도 말라는 듯이 고개
를 설설 내둘렀다. 장난기가 있는 어느 성형 전문의 의사는 이런
말까지 했다.
"우린 말입니다...... 환자들의 얼굴 보다는 하복부에 더 관심
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밑을 보면 누군지 알 수가 있어도
위에 붙은 얼굴을 보고는 좀체로 기억을 못 해요. 미안합니다."
망할 자식들 같으니라구. 오 형사는 홧김에 그만둘까도 생각했
지만 내친 걸음을 되돌리기가 거북스러웠다.
종로 3가 일대에서 정형과 성병을 전문으로 하고 있는 병원들은
상당수 되었다. 그러나 모두 훑어보았지만 조그만 단서 하나 잡을
수가 없었다. 결국 기분만 잡치고 보니 그는 여간 허탈감이 드는
게 아니었다.
그는 양장점 앞을 지나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진열장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몰골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진열장 안에 걸려 있는
몹시 비싸 보이는 여자용 밤색 털 오버 속에는 부쩍 마른 사내 하
나가 눈송이를 허옇게 뒤집어 쓴 채 잔뜩 움츠리고 서 있었다. 턱
주위를 거무스레하게 감싸고 있는 수염과 앙상하게 튀어나온 광대
뼈, 그리고 불안하게 치떠 있는 두 개의 큰 눈동자가 영락없이 사
흘 굶은 실업자의 모습이었다. 그러자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눈이 아프고 팔다리가 저려 왔다. 밤새 야근을 하고 난 이튿날에
는 언제나 하루 낮을 꼬박 잠으로 보내야만 겨우 피로가 풀리곤
하는데 그는 아직 낮잠을 한숨도 자지 못하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세 시가 지나 있었다. 저녁 출근까지는 이제
겨우 두 시간 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므로 변두리에 위치한 집에까
지 가서 낮잠을 잘 시간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바로 본서로 향했
다. 연말 연시로 접어들면서 각종 범죄사건이 우글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경찰서 안은 흡사 장터처럼 붐비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눈에 핏발을 세운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오 형사는
그 검은 제복, 검은 지퍼, 검은 구두의 혼잡을 뚫고 재빨리 숙직
실로 들어갔다.
텅 빈 방안에는 낡은 담요 몇 장과 때묻은 베개들이 여기저기
뒹굴고 있었다. 누가 갖다 놓은 것인지 맞은편 벽에는 새해 달력
이 하나 걸려 있었다. 달력에 눈요기로 박아 놓은 수영복 차림의
아름다운 여배우 사진이 침침한 실내에 빛을 뿌리고 있었다. 오
형사는 여자의 육체를 생각하면서 달력을 바라보고 있다가 곧 잠
이 들었다.
그는 얼굴을 찡그리고, 갑자기 담요를 걷어차고, 휙 돌아눕고,
한숨을 깊이 내쉬고, 허리를 꺾어 깊이 웅크리고, 마침내 소리를
지르기까지 하면서 잠을 자고 있었다.
"이봐, 이봐 무슨 잠을 그렇게 자는 거야?"
엉덩이를 걷어차이는 바람에 오 형사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방
안에는 불이 켜져 있었고, 창문은 어두었다. 시계를 보니 여섯 시
가 거의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자면서 헛소리를 하는 거 보니까 너도 죽을 때가 다 된 모양이
구나."
살이 쪄서 헛배까지 나오기 시작한 동료 김 형사가 그를 내려다
보며 웃고 있었다.
"내가 헛소리를?"
오 형사는 괜히 놀란 체하며 물었다.
"그래, 화장실에 가는데 여기서 괴상한 소리가 들려 오지 않아.
여자가 애기 낳는 소리 같은 거 말이야. 그래서 들어와 보니까 네
가 혼자서 고생하고 있지 않겠나."
"뭐라고 헛소리를 해?"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 뭐라더라...... 아, 살기싫다, 그러
던가...... 하하."
경찰이 되는 것이 소원이었고, 그래서 결국 그 뜻을 이루어 만
족스러운 상태를 누리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김 형사는 이상할 정
도로 몸을 흔들면서 웃었다.
"그만 웃고 담배나 하나 줘."
오 형사는 마른 침을 삼키면서 말했다. 숙면을 못한 탓인지 머
리는 더욱 무겁기만 했다.
"이봐, 내가 살께 저녁이나 먹으러 가."
김 형사가 담배를 내주면서 말했다.
오 형사는 수사과에 들어가 출근부에 도장을 찍은 다음 김 형사
를 따라 나섰다.
경찰서 정문을 나오기 전에 그는 뒤뜰로 잠깐 돌아가 보았다.
눈은 그쳐 있었지만 발목이 푹 빠질 정도로 쌓여 있었다.
여자의 시체는 아직 땅바닥에 버려져 있었다. 그것은 눈과 어둠
속에 깊이 파묻힌 채 단단히 뭉쳐 있었기 때문에 아침에 보았을
때와는 달리 이젠 손 닿을 수 없는 먼 곳으로 가버린 느낌이었다.
그는 눈을 헤치고 여자의 발끝이라고 한 번 확인해 보고 싶었다.
"하, 이 친구, 재수없게 그건 왜 쳐다보고 있는 거야?"
김 형사가 뒤에서 어깨를 잡아 제쳤기 때문에 그는 몸을 돌이켰
다.
그들은 경찰서 뒤쪽에 있는 한식집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경찰 동기생이었는데, 오 형사는 김 형사를 가까운 친구
로 생각한 적이 없으면서도 곧잘 어울려 다녔다. 그것은 이를테면
일상 생활의 잔부스러기와도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김 형사는 만족하게 웃으면서 돈 걱정은 하지 말고 충분히 먹으
라고 했지만 오 형사는 식사를 반쯤 하다가 그만두었다. 자신의
식욕이 언제나 이렇게 좋지 않기 때문에 그는 언젠가는 자신이 큰
병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왜 안 먹나? 술이나 마실까?"
김 형사의 얼굴에는 일부러 우정을 과시하려는 노력이 엿보였
다. 오 형사는 고개를 흔들었다.
"술 마실 돈 있으면 네 마누라한테나 갖다 줘."
"누가 몰라서 안 갖다 주나."
"그럼, 뭐야?"
"돈이 생길 때마다 제때 제때 상납하면 버릇만 나빠진단 말이
야."
"하하, 그럴지도 모르겠군."
오 형사는 자신의 웃음이 허황하게 터지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김 형사가 무안했던지 조금 얼굴을 붉히
면서 말했다.
"사실은 오늘 돈이 좀 생겼거든. 또 얻어터질까 봐 너한텐 말하
지 않으려고 했는데...... 사실 못 받을 돈도 아니었어."
오 형사는 웃음을 거두고 식어빠진 국그릇을 젓가락으로 휘저었
다. 그는 자기를 가까운 친구로 알고 부정에 대해서 그렇지 않다
는 뜻으로 해명하려고 드는 동료 경찰관의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
았다.
"백만 원 날치기를 해결해 주었어. 그것 때문에 사흘이나 뛰었
는데 수고료 쯤......"
"그만둬."
"듣기 싫을 거야. 돈 좀 빌려 줄까?"
"괜찮아."
"넌 묘한 데가 있어. 이해를 못 하겠거든, 알 것 같으면서도
......"
김 형사가 초조하게 그를 바라보았지만 오 형사는 대꾸하지 않
았다. 언젠가는 김 형사가 그를 건방진 놈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신통치 않다고 판단할 것이고, 결국 그에게서 멀어질 거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가급적이면 김 형사에게 그런 판단이 빨리
찾아들기를 그는 바라고 있었다. 비슷하게 생긴 얼굴들과 거듭 친
교를 맺어 가며 산다는 것이 그에게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그
래서인지 전혀 낯선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가 오히려 안정감이 더
했다.
"여자 생각 안 나?"
김 형사가 고깃덩어리를 입 속에 넣으며 물었다.
"뭐, 별루......"
"저 보라구. 혼자 살면서 여자 생각이 안 난다니 이상해. 난
...... 마누라가 있는데도 오입 안 하곤 못 배기는데......"
"넌 정력이 왕성하니까."
"흐흐, 젊을 때 많이 해야지. 그런데...... 너 아까 왜 거기 가
서 그걸 봤지?"
"뭐 말이야?"
오 형사는 기분이 언짢아지면서 물었다.
"죽은 여자 말이야."
"아, 그건......궁금해서 가 본 거지."
"궁금하다니?"
김 형사의 눈이 번쩍했다. 그것을 보자 오 형사는 자신이 아침
부터 한 사건에 빠져 있었음을 깨달았다.
"사람이 죽었으니까...... 궁금한 거지."
"죽었으면 그것으로 끝난 거지, 궁금하긴 젠장."
김 형사는 다시 고깃덩어리를 하나 입 속에 집어넣었다.
"참, 이 사진인데...... 본 적 있나?"
오 형사는 호주머니에서 죽은 여자의 사진을 꺼내어 김 형사에
게 보였다.
김 형사는 사진을 한 장 한 장 훑어보고 나서 고개를 흔들었다.
"모르겠는 걸. 왜, 무슨 냄새라도 맡았나? 지시 사항인가? 타살
이야?"
김 형사는 턱을 내밀면서 한꺼번에 물어 왔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지시받은 것도 아니고...... 검시의의
보고로는 타살도 아닌 것 같아. 그렇지만 아직 모르지. 단정은 금
물이니까."
"거 어쩌자고 시키지도 않은 일을 억지로 만들어 가지고 그러는
거야?"
"이유는 없어. 물론 그대로 내버려 두면 시체야 규정대로 처리
되겠지. 하지만 그렇게 되면 너무 억울해."
"뭐가 억울해?"
"그렇게 연고자도 없이 죽어 간 사람들 말이야."
"이런 제길...... 죽는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그렇게 따지다간
한정이 없어. 살인 사건도 처리 못해서 밀리는 판에 그런 데까지
일일이 신경을 쓰다간 모두 미치고들 말 거야."
"하긴 그래. 모른체 해 버리면 사실 모든 게 별것 아니지. 그렇
지만 가끔 가다 무시하기 힘든 것들이 있어. 오늘 들어온 여자 시
체가 그래. 할말이 많은 여자였던 것 같아."
오 형사는 자신의 말이 허황하게 들리는 것을 느꼈다. 아닌게
아니라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김 형사는 숨가쁘게 웃어제쳤다. 그
는 한참 후에 헐떡거리면서 말했다.
"역시 넌 다른 데가 있어. 너 같은 친구가 경찰관이 되었다는
게 이상한 일이야. 내 생각엔 넌 학교 선생이나 하면 좋을 거야."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입을 다물고 식당 밖으로 나왔다.
불자동차가 사이렌을 울리면서 미아리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들은 함께 그것을 바라보다가 동시에 서로 마주보았다. 오 형사
가 사진을 다시 내밀면서 먼저 입을 열었다.
"부탁이 있어. 담당 구역이니까 창녀들 중에 이런 여자가 있었
는지 알아봐 줘. 일부러 시간을 낼 필요는 없고......"
"그 여자가 창녀 출신이라는 건 어떻게 알아?"
김 형사가 의아한 시선을 던져 왔다. 쇼윈도의 불빛을 받은 탓
인지 그의 얼굴은 좀 상기되어 있었다.
"창녀 출신이라고 단정하는 게 아니고, 검시 보고서를 보니까
그럴 가능성이 많아서 그러는 거야. 거기가 헐 정도로 남자 관계
가 많았던 여자니까 하는 말이야."
"부탁하는 거니까 알아보긴 하겠지만 기대하지는 마. 신경쓸 일
도 아닌데 자꾸 그러면 몸에 해롭다구."
돌아서 가는 김 형사의 뒷모습을 그는 씁쓸한 시선으로 바라보
았다. 길게 이어진 담뱃재가 입술 끝에서 꺾어지면서 그의 턱 밑
으로 부서져 내렸다. 어둠과 빛 사이로 문득문득 출몰하는 행인들
의 얼굴이 하나같이 모두 걸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오 형사는 그
들과 부 힐 것이 두려워서 한쪽 벽에 붙어서서 경찰서 쪽으로 조
심스럽게 걸어갔다.
이튿날은 김 형사로부터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오 형사 자신도
그것을 크게 기대한 바는 아니였기 때문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
다. 그는 무거운 기분으로나마 어제 있었던 일로부터 관심을 돌릴
수가 있었다. 사실 그는 일이 엄청나게 많았기 때문에 김 형사의
말대로 상관의 지시도 받은 바 없이 변시체의 신원 따위나 조사하
고 다닐 만큼 그렇게 한가한 입장이 못 되었다.
오후 늦게 그가 창문으로 넘겨다 보니 뒤뜰의 그 여자 시체는
이미 치워지고 없었고, 대신 그 자리에는 남자로 보이는 형체가
큰 시체 하나가 새로 놓여 있었다.
3일째 되는 날, 그러니까 수요일 아침, 오 형사는 코피를 한 잔
마시기 위하여 본서 서원들이 단골로 출입하고 있는 부근 다방에
나갔다. 갑자기 밀어닥친 한파로 눈이 얼어붙는 바람에 길이 아주
미끄러웠더. 다방 안으로 막 들어서자 마침 레지 하나를 붙잡고
노닥거리고 있던 김 형사가 이쪽으로 손을 번쩍 쳐들어 보였다.
그가 다가가서 앉자 김 형사는,
"왜 면도도 하지 않고 그 꼴이야."
하고 말했다.
"만사가 귀찮다. 아가씨, 코피나 한 잔 가져와."
오 형사는 스커트 밑으로 드러난 레지의 허벅지를 황홀한 듯이
바라보았다.
"네 눈초리를 보니까 꼭 굶주린 늑대 같다, 야."
"정말 요즘은 괴롭다."
오 형사는 엉덩이를 흔들면서 주방 쪽으로 가고 있는 레지를 다
시 멀거니 바라보았다.
"새 장가를 가면 되지 않아?"
"싫어."
"왜?"
김 형사가 허리를 앞으로 굽혀 왔다.
"그것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자신이 있어야 돼. 난 말이야,
자신도 없고......"
그의 말에 김 형사는 실내가 떠나가도록 웃었다.
오 형사는 코피를 마시면서 자기의 말이 사실 엉터리는 아닐 거
라고 생각했다.
"거, 부탁한 거 말이야......"
김 형사는 웃다가 흘러내린 콧물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말했다.
"알아 봤어?"
오 형사는 번쩍 정신이 들었다.
"알아봤는데 신통치가 않아. 단성사 골목으로 쑥 들어가다 보면
군고구마 장사를 하는 늙은이가 하나 있는데......"
"늙은이라니 무슨 말투가 그래."
"아, 그런가. 그 노인한테 사진을 보였더니 아는 체를 하는데
정확한 말은 피하더군. 바빠서 더 이상 못 알아 봤는데 거기 가서
다시 한 번 물어 봐."
"수고 많았어. 찻값은 내가 내지."
오 형사는 김 형사가 내주는 사진을 받아들고 벌떡 일어섰다.
"아니, 이 양반이 돌았나? 벌써 가는 거야?"
김 형사가 앉은 채로 눈이 휘둥그래져서 그를 바라보았다.
다방을 나온 오 형사는 곧장 단성사 쪽으로 걸어갔다.
종로 일대를 몇 년 동안 돌아다닌 그였지만 종 3의 사창가만은
언제나 그에게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었다. 그는 그곳 출입을
꺼려 했고, 그래서 그 지역이 그의 담당 구역으로 배정될 때면 가
능한 한 변경 신청을 내곤 했었다.
아직 미혼이었던 몇 년 전, 그러니까 그가 경찰관이 된 직후 그
는 종 3의 사창가를 지나다가 남자로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자 관
계를 맺은 적이 있었다. 창녀가 우왁스럽게 움켜쥐고 끌어당기는
바람에 방안에까지 멍청하게 끌려 들어간 그는 당당하게 체위를
갖춘 그녀가 손수 그를 끌어내려 배 위에 태울 때까지도 부끄럽고
죄스럽고 무서울 뿐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을 치르고 밖으로
헐레벌떡 뛰어나온 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소름끼치는 구토와 허
탈 뿐이었다. 그는 창녀의 얼굴을 기억할 수가 없었다. 그 대신
그의 머리에는 머리 가죽이 드러나 보일 만큼 숱이 적은 머리칼과
나병 환자처럼 거칠고 반점이 있는 피부, 그리고 검게 썩은 늪 속
으로 돌연 그의 남근을 집어삼캐던 보랏빛의 혓바닥만이 생생한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는 즉시 임질에 걸려
몇 달 동안이나 병원 출입을 해야 했고, 그로 인한 고통은 치료
후에도 오랫동안 그를 괴롭혀 주었다. 무엇보다도 치료 기간 지출
된 그 많은 비용이 모두 빚을 얻어 쓴 것이었으므로 그것을 갚느
라고 그는 그의 박봉을 꼬박꼬박 털어 넣어야 했던 것이다. 이유
라고 친다면 좀 어설프겠지만 이런 과오로 해서 사창가에 대한 그
의 감상은 지긋지긋하다는 것 외에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러
니 그가 그 일대를 꺼려 할 것은 당연했다.
오 형사는 어깨에 힘을 주고 골목으로 들어섰다.
폭 4미터 정도의 골목에는 입구부터 각종 장사꾼들이 판을 벌여
놓고 있어서 몹시 비좁아 보였고 생존의 구차함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골목은 직선으로 뻗으면서 도중에 왼쪽으로 여러 갈래씩
뻗어 나가고 있었다. 전주 주변마다 누우런 오줌이 얼어붙어 있는
것을 보고 오 형사는 그 자유스러움에 참가항 한번쯤 실컷 소면을
보고 싶어졌다.
아침인데도 여자 하나가 그의 팔을 끌었다.
"놀다 가세요."
하고 창녀는 말했다. 껍질처럼 붙어 있는 흰 화장기와 피곤에
절은 두 눈빛이 핏빛 입술과 함께 그의 앞길을 완강하게 가로막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으스스 추위를 느끼면서 얼떨결에 여자를 밀
어 버렸다. 여자는 힘없이 벽에 부딪히면서 쓰러질 듯하다가 가까
스로 몸을 가누면서 그를 노려보았다.
"야, 이 개새끼야."
여자는 숨을 가다듬은 다음 다시 소리를 질렀다.
"똥이나 퍼 먹어라."
오 형사는 뒤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걸어갔다. 웬지 창녀의 욕지
거리가 허망하게 들릴 뿐 불쾌하지가 않았다. 그로서는 자신이 경
찰관 냄새를 피우지 않는다는 것이 기분 좋게 여겨졌다. 사실 감
추려고 하는데도 냄새가 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다.
김 형사의 말대로 골목 중간쯤에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 고구
마를 굽고 있었다. 노인은 몹시 추운지 어깨를 잔뜩 웅크린 채 두
팔로 불이 들어 있는 드럼통을 껴안고 있었다. 좀체로 움직이기
싫은 듯이 그렇게 고정되어 있는 노인의 모습을 보자 어쩐지 그는
선뜻 다가서기가 민망스러웠다.
기척을 느끼고 노인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엇갈린 시선이 표
정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노인은 둥근 눈의 사팔뜨기였다. 그 위
에 유난히 깊이 파인 두 개의 주름이 이마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고구마 하나 먹을까요?"
오 형사의 말에 노인은 묵묵히 드럼통 뚜껑을 열었다. 오 형사
는 그 속에서 주먹만한 것을 집어 내어 껍질을 벗겼다.
아직 아침 식사를 하지 않은 그는 오랜만에 그것을 맛있게 먹을
수가 있었다. 마침 나이 어린 창녀 하나가 맞은 편에서 그의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 줄까 하고 생각하다가 그
는 그대로 묵살해 버리고 두번째 고구마를 입 속에 처넣었다. 그
리고 다섯 개를 더 골라 낸 그는 노인에게 그것을 모두 봉투에 넣
어 달라고 부탁했다. 노인은 잠깐 주춤하다가 역시 묵묵히 손을
움직였다. 크고 억세 보이는 노인의 턱은 좀체로 움직일 것 같지
가 않았다.
봉투를 받아 든 오 형사는 노인에게 사진을 내밀었다.
"이런 여자 모르십니까?"
다섯 장을 모두 유심히 보고 난 노인은 초조하게 그를 바라보았
다. 그러나 시선은 엉뚱한 방항으로 빗나가고 있었다.
"이런 여자 보신 적 있습니까?"
그의 다그쳐 묻는 말에 노인은 여전히 대답이 없이 눈만 굴리고
있었다. 크고 두터운 입술이 움찔거리는 것을 오 형사는 안타깝게
지켜보았다.
노인은 생각해 보는 듯하다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때
킥킥하고 웃는 소리가 들려 왔다. 오 형사는 담벽에 기대어 서 있
는 어린 창녀를 쏘아보았다.
"벙어리예요."
창녀는 킥킥거리며 말했다. 그 말을 듣자 오 형사는 얼굴이 화
끈 달아오름을 느꼈다. 동시에 그에게 한 마디의 언질도 주지 않
았던 김 형사의 처사가 고약스럽게 생각되었다.
그가 맥이 빠져 돌아서려고 하자 노인이 갑자기 그의 팔을 나꿔
채면서 어린 창녀를 손으로 가리켰다. 오 형사는 노인이 무슨 말
을 하려고 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곧 창녀에게,
"너 몇 살이니?"
소녀는 대답 대신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사람들이 그들 남녀를
힐끗힐끗 바라보며 지나가는 바람에 오 형사는 창피한 생각마저
들었다.
"제 방 따뜻해요. 놀다 가세요."
어린 창녀가 그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몹시 추운지 솜털이 귀
뿌리와 뺨에서 가늘게 떨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뿌리쳤다.
"까불지 마. 나 경찰이야. 너 이 여자 알지?"
그는 어린 창녀에게 사진을 내밀었다. 그녀는 금방 겁먹은 시선
으로 그를 찬찬히 바라보다가 머뭇거리는 사진을 받아들었다. 그
리고 깜짝 놀랐다.
"아, 이 여자, 죽었네요?"
창녀의 두 눈이 크게 확대되는 것을 오 형사는 가만히 지켜보았
다.
"이 여자 정말 죽었어요?"
어린 창녀가 질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죽었어. 잘 아는 사이야?"
"잘 몰라요."
"그러지 말고 아는 대로 말해 봐. 자, 이거 먹으면서 잘 생각해
봐."
그는 소녀에게 고구마 봉지를 안겨 주며 부탁했다.
"싫어요."
어린 소녀는 그것을 뿌리치면서 그를 흘겼다. 어느새 소녀의 큰
눈에는 눈물이 번지고 있었다.
오 형사는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소녀가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
스스로 말해 줄 때까지 그로서는 별다른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눈치를 채고 모여든다면 정말 난처해질지도 모르는 일이
었다. 다행히 그녀가 입을 열어 주었다. 그녀는 몹시 어려운 것을
말하는 것처럼 감정을 누르면서 띄엄띄엄 소리를 내었다.
"그 여자 잘 몰라요. 잘 모르지만..... 몇 번 본 적이 있어요."
"어디서?"
"이 골목에서요. 부산에 있다가 이쪽으로 온 지 얼마 안되나 봐
요. 전 잘 몰라요. 말한 적도 없어요. 그렇지만...... 저 할아버
지하고는 친했어요. 그 여자는...... 저기서 고구마를 잘 사먹었
어요. 그리고...... 이 골목에서 제일 예뻤어요."
오 형사는 다시 고구마 봉지를 소녀에게 안겨 보았다. 그녀는
이번만은 그것을 뿌리치지 않고 받았다.
"그 여자도 손님을 받았니?"
"네, 단골 손님이 금방 많아졌어요."
"이름 아니?"
"몰라요."
"그 여자를 마지막으로 본 건 언제니?"
"며칠 전에 본 적이 있어요."
"그 뒤로는 못 보고?"
"네, 못 봤어요. 도망쳤다는 말만 들었는데...... 죽은 줄은 몰
랐어요."
"도망쳤다고?"
"네, 도망쳤대요. 어떤 남자하고......"
오 형사는 노인이 일어서서 이쪽을 응시하는 것을 곁눈으로 의
식할 수가 있었다.
"그 남자는 누구야?"
의외의 인물이 여자의 죽음에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 그를 바짝 긴장시켰다.
"제가 어떻게 알아요?"
"그 여자가 살던 집은 어디야?"
"그건......"
소녀는 거북스러운 듯이 고구마 봉지를 내려다보았다.
"제가 말했다고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세요, 네?"
"그럼, 말할 리가 있나."
소녀는 안심한 듯이 턱으로 방향을 잡아 보이면서 가만가만 말
했다. 그녀가 가리킨 곳은 전봇대 옆의 쓰레기통, 그 맞은편 집이
었다.
"아저씨, 저 잘 봐 주세요."
그녀는 기대에 찬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럼, 물론이지. 자, 수고해."
그는 소녀의 어깨를 두드려 준 다음 여전히 그를 향하고 있는
노인에게 목례를 했다. 그러나 노인의 시선은 역시 엉뚱한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오 형사는 쓰레기통 쪽으로 걸어가면서 자신이 사건의 핵심 속
으로 들어서고 있는 것을 느꼈다. 죽은 여자의 신원과 생전의 소
재를 알아냈다는 것은 사건을 거의 해결했다는 것이나 다름없었
다. 쓰레기통 맞은편 집 앞에도 창녀가 하나 서 있었다.
"싸게 해드릴께 놀다 가세요."
입이 큰 여자는 애원조로 말했다. 어서 한푼이라도 벌지 않으면
굶어 죽을 것 같은 매우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좀체로 팔리지 않을 만큼 나이가 들어 보였다.
오 형사는 창녀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보기에는
육중한 한식 가옥이었지만 내부는 전혀 딴판으로 꾸며져 있었다.
마당을 중심으로 조그만 방들이 밀착되어 있었는데 모두가 블록으
로 급조된 것들이어서 그런지 그에게는 동물의 우리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인기척이 나자 방문이 일제히 열리면서 여자들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녀들은 새로 들어온 먹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별
로 흥미도 없다는 듯이 도로 문을 닫았다.
늙은 창녀의 우리 안에서는 폐부를 찌르는 것 같은 고약한 냄새
가 났다. 때문에 그는 호흡에 곤한을 느끼면서 갑자기 밀려든 어
둠 속을 두리번거렸다.
여자는 붉은 전등을 켠 다음, 아직 주춤거리고 서 있는 그를 방
가운데로 끌어당겼다.
"왜 그렇게 서 있으세요? 딴 애를 불러 줄까요?"
여자는 서글픔을 감추면서 낮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어왔다.
"아니, 천만에, 그럴 필요는 없어요. 좀 쉬었다 갈 거니까."
그는 여자가 이끄는 대로 방 아랫목에 천천히 몸을 꺾고 앉았
다. 맞은편 벽 위에는 거대한 유방을 가진 서양 여자의 나체 사진
이 하나 붙어 있었는데 그것을 본 그는 처량하게도 그만 성욕을
느끼고 말았다.
"저어기...... 화대 좀 주시겠어요?"
여자는 미안한 듯이 두 손을 비비며 말했다.
"얼마요?"
"생각해서 주세요."
"생각해서라니...... 난 돈을 가진 게 얼마 없어요. 이거면 돼
요?"
그는 들은 바가 있어서 5백 원권 한 장을 내보였다.
여자는 매우 감사해 하며 그것을 받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아
마 포주에게 즉시 신고하러 가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돌아오자 그는 물었다.
"당신은 그 돈에서 얼마 먹는 거요?"
"2백 원 먹어요."
"그러면 주인이 3백 원이나 떼먹나?"
"네...... 할 수 없어요."
"죽일 놈들이군."
그는 화가 나는 것을 어금니로 짓눌렀다. 손을 대야 할 악들은
실로 많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것들은 흡사 전염병처럼 무서운
기세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정말 여자의 말처럼 할 수 없는 일인
지도 모른다.
"옷 벗으세요."
여자는 어느새 슈미즈 차림이었다. 붉은 조명 때문인지 앙상하
게 튀어나온 목뼈와 팔다리가 음울한 빛을 던져 주고 있었다. 메
마른 허벅지와 그것을 감싸고 있는 낡고 해진 옷자락을 보자 그는
비참한 생각마저 들었다.
"난 이대로가 좋으니까 옷 입어요."
그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네?"
여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옷 벗지 않아도 좋다구요."
"제가 싫으면 딴 여자를......"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가 난처한 얼굴을 하자 여자는 아무래도 모르겠다는 듯이 그
대로 엉거주춤 앉아 있었다.
"옛날에 손님 같은 분이 한 사람 있긴 했어요. 화대만 내고...
놀지도 않고 가곤 했지요. 가끔씩 오곤 했는데 손님처럼 젊지는
않았어요. 지금은 늙어서 죽었을 거예요."
"여기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됐지요?"
"한......5,6년 되나 봐요?"
"지금 나이가 몇이에요?"
"그런 건 왜 묻지요?"
여자의 반문에 그는 잠시 말이 막혔다.
"남자들은 그런 거 묻기를 좋아하데요. 저 몇 살로 보여요?"
"잘 모르겠는데."
"마흔 하나예요. 늙었지요?"
오 형사는 대답 대신 맞은편 벽 위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마흔
한 살의 창부라면 아마 아무런 희망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그가 입을 다물고 있자 여자는 그의 눈치를 살피면서 아주 느린
솜씨로 옷을 입기 시작했다.
"전 죽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편하게 죽을 수 있을까요?"
"치마를 뒤집어 쓰고 한강에 뛰어드시오."
"그건 너무 추워요. 따뜻하게, 잠자는 것처럼 죽는 방법 말이에
요."
여자는 빠르게 말했다. 그가 얼른 보니 그녀의 얼굴이 온통 주
름으로 덮이는 것 같았다.
"글쎄, 그건...... 차차 생각해 봅시다. 하나 물어 볼 게 있는
데 여기...... 얼굴이 예쁘고 좀 마른 아가씨가 하나 있죠?"
"얼굴 이쁜 애가 한둘인가요. 이름이 뭐예요?"
여자의 시선이 팽팽해지는 것을 그는 의식했다.
"글쎄, 이름은 잊어먹었는데...... 얼굴이 길고 갸름한 편이죠.
머리숱이 많고, 그렇지, 부산에서 온 지 얼마 안 된다고 하던데."
"춘이 말이군요."
여자는 갑자기 떨어지는 목소리로 힘없이 말했다.
"네, 바로...... 그애 말입니다. 지금 있을까요?"
그는 되도록 긴장감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춘이 단골 손님이군요."
여자는 입술 한쪽을 일그러뜨리면서 기묘하게 소리도 없이 웃었
다.
"단골은 아니고...... 며칠 전에 한 번 만난 적이 있죠."
"담배 가지신 거 있어요?"
창부의 요구에 그는 얼른 담배를 꺼내 주었다. 그녀는 벽에 기
대어 앉으면서 집어삼킬 듯이 담배를 빨았다. 담배 연기가 붉은
조명을 가리면서 천장 쪽으로 뿌옇게 퍼져 올랐갔다. 여자는 그렇
게 몇 번 연기를 뿜고 나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춘이 생각이 나서 왔나요?"
"그렇다고 볼 수 있지요."
"그애 찾는 손님들이 많아요. 하지만...... 손님은 너무 늦게
왔어요. 그앤 지금 여기 없어요."
"저런, 아주 가 버렸나요?"
그는 좀 큰소리로 물었다.
"네, 아마 다시는 오지 않을 거예요. 그애한테 반했군요."
"없다니까 더 보고 싶은데요. 이런 데 있기에는 참 아까운 아가
씨던데......"
"그래요. 참 좋은 아이였어요. 이쁘기도 했지요. 여기 온 지 두
달이 채 못 됐지만 그애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만 보아도 알
수가 있어요."
"혹시 어디로 갔는지 모르나요?"
여자가 흥미를 잃고 입을 다물어 버릴까 봐 그는 주의해서 물었
다.
"그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라요. 저하곤 누구보다도 친했었
는데도 한 마디 말도 없이 가 버렸으니까요. 생각하면 야속하기도
해요."
"그렇겠군요. 혹시...... 다시 올지도 모르잖아요?"
"짐까지 그대로 둔 채 맨몸으로 나갔으니까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제 생각엔 다시 올 것 같지 않아요. 그까짓 거 몇 푼이나
나간다고 그것 때문에 다시 돌아오겠어요?"
"주인이 펄펄 뛰겠군요."
"흥, 그럴 것도 없지요. 그렇게 착취해 먹으니 누군들 도망가지
않겠어요."
"춘이도 도망친 건가요?"
"그럼은요. 여기 있으면 하루하루 빚이 쌓여 가니까 도망치지
않고는 절대로 빠져나갈 수가 없어요."
"함부로 도망치다간 혼나겠군요."
"너무 목소리가 커요."
여자는 문틈으로 밖을 내다보고 나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닌데...... 제가 쓸데없는 말을 하는 것
같네요. 아마 손님이 좋아졌나 보지요."
여자는 쑥스럽게 웃었다. 그것을 보자 그도 따라 웃었다.
"여긴 깡패들이 꽉 쥐고 있어서 섣불리 도망치다가 붙들리면 맞
아 죽어요. 불로 지지고 그래요. 춘이라고 맞아 죽지 말라는 법은
없지요. 이 골목 여자들이 어떻게 죽어 가는 줄 아세요? 맞아 죽
거나 병들어 죽어요."
"경찰에선 가만 있나요?"
"경찰 말이에요? 참 손님 순진하시네요. 깡패들이 경찰과 짜고
노는데 어떻게 경찰을 믿을 수가 있어요. 제발 돈이나 뜯어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여자는 담배를 다시 하나 피워 물었다.
"춘이가 죽었다면 큰일이군요."
"아직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는 걸 보니까 그렇지는 않은 모양
이에요. 어떤 남자하고 도망쳤다니까...... 어쩌면 별일 없을지도
몰라요."
"남자라니, 누구말입니까?"
"저도 잘 몰라요. 주인한테 그렇게 듣기만 했으니까요. 어쩌면
거짓말인지도 모르지요."
"술 한잔 하겠어요? 제가 살 테니......"
"싫어요. 몇 년 전만 해도 곧잘 술을 마셨는데...... 이젠 몸도
좋지 않고 해서 못 마셔요."
"안됐군요. 이런 데 있을수록 몸이 건강해야 할 텐데......"
오 형사는 부끄러운 마음으로 말했다.
"춘이 년이 저를 많이 걱정해 줬어요. 사실은 자기가 더 불쌍한
몸인데도 말이에요. 그앤 고아예요. 다섯 살 때부터 혼자 자랐다
니까 오죽 했겠어요."
"아, 그랬군요. 어쩌다가 그렇게 불행하게 태어났지요?"
그는 가슴이 젖어 드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 여자는 촛점 없이
허공을 응시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애는 저한테 와서 잘 울곤 했어요. 그러다 보면 어느새 저도
함께 울곤 했지요. 그애 말들 들으면...... 고향이 평안북도 의주
인데 두 살 때 엄마가 돌아가셨대요. 그리고 다섯 살 때 아버지와
오빠, 자기 이렇게 셋이서 남하 했대요. 오빠와는 아홉 살 차이라
고 하던가...... 그런데 글쎄 도중에 가족을 잃어버렸다지 뭐예
요."
"춘이 혼자서요?"
"그렇지요. 그 뒤로 영영 가족을 만나지 못하고 혼자서 고생고
생하면서 살아온 것이지요. 열두 살 때까지는 이곳 저곳 고아원을
찾아다니다가 그 뒤로는 식모살이, 껌팔이 같은 은 일로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면서 살아온 모양이에요. 하지만 이런 애들이 막
판에 빠지는 길이란 뻔하지 않아요. 자기 몸이나 파는 게 고작이
죠."
"그럼, 어딘가에 가족들이 살고 있겠군요."
"그럴 거예요. 아버지와 오빠가...... 죽지 않았으면 어디엔가
살아 있겠지요."
"혹시 그 가족들 이름을 알고 있습니까?"
"왜요? 찾아 주려고요?"
그녀는 비웃듯이 물었다.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그런 건 혼자 속에 품고 있는 것보다는
여러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좋을 겁니다."
"춘이한테 듣긴 들었는데 잊어먹었어요."
"춘이란 이름은 진짠가요?"
"이런 데 있는 여자 치고 진짜 이름 쓰는 사람 봤어요?"
"하긴 그렇겠군요."
"손님은 남의 이야기 듣기를 퍽 좋아하는군요."
"아직 철이 덜 들어서 그러나 봅니다. 앞으로 종종 놀러 와도
되겠지요?"
그의 말에 여자는 놀란 듯이 몸을 움찔하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
렸다. 그녀로서는 오랜만에 털어 내는 것처럼 웃음은 한동안 계속
되었다.
"나 같은 사람한테 와서 무슨 재미를 보려고...... 오늘처럼 또
춘이 이야기만 하려고요? 손님 이상한 사람이야."
여자는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좋습니다.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렇다고 공짜는 아니예요."
여자는 그것을 확인하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물론, 물론이지요.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나요. 여기 전화 있
지요?"
"아무한테나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지는 않는데......"
그녀는 오 형사의 눈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큰일을 결심한 듯이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었다.
"전화로 저를 찾을 때는...... 진이 엄마 바꿔 달라고 그러세
요."
하고 일러 주기까지 했다.
그 말에 오 형사는 그녀가 자식까지 데리고 있는 몸일지도 모른
다고 생각했지만 남의 신상에 대해서 더 이상 묻고 싶지가 않았
다. 도처에 병균처럼 침투해 있는 불쌍한 사람들의 숨가쁜 이야기
들을 들을 때마다 그는 이 세상의 뿌리처럼 되어 버린 가난과 고
통에 대해서 일종의 불가사의한 힘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검시의의 진단에 따른다면 춘이가 타살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웠
다. 그러나 자살이라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어떤 자에 의한 압력
내지는 피치 못할 직접적인 원인이 개재해 있을 가능성이 많아졌
다고 볼 수 있었다. 적어도 이러한 생각은 그가 어제 사창가의 진
이 엄마를 만나 보고 났을 때 더욱 구체화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는 춘이와 함께 도망쳤다는 사내에 대해서 의문을 품었다. 그
자가 춘이의 죽음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일선 수사
관으로서의 그의 입장에서 볼 때는 거의 당연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늦기 전에 그자에 대해서 확실히 알아볼 필요를 느꼈다.
시간에 틈이 좀 난 것은 오후 늦게였다. 그는 바로 어제의 그
창가(娼家)로 전화를 걸어 포주를 찾았다. 포주는 세 사람의 손을
거쳐서야 겨우 전화를 받았는데,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상대는 남
자였다. 오 형사는 다시 사창가로 들어가기가 싫었으므로 포주에
게 경찰서로 와 주도록 부탁했다. 그러자 포주는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느냐고 하면서 몸이 불편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래서 화가
난 오 형사는 그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반 시간쯤 뒤에 포주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나타났다. 그는 땅
딸막한 키에 살이 몹시 찐 사내였는데 머리까지 훌렁 벗겨져 첫인
상부터가 흉물스러워 보였다.
그는 들어서자마자 여러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는데 더러 악수
까지 하는 것으로 보아 경찰과는 꽤 관계가 깊은 모양이었다.
오 형사는, 여자들에게 매음을 시켜 그것으로 치부까지 하고 있
는 자가 이렇게 버젓이 건재할 수 있다는 사실에 더욱 기분이 상
했다. 그는 사내를 데리고 이층의 취조실로 올라갔다.
실내는 몹시 추웠다. 피의자에게 위축감을 주기 위해서인지 아
니면 경찰 자체의 권위의식 내지는 속성 때문인지 한겨울에도 취
조실에만은 불을 피우지 않았다.
포주는 중앙에 놓여 있는 나무의자 위에 앉자 가볍에 주위를 둘
러보았다. 오 형사는 그가 이런 곳에는 이미 익숙해져 있다는 듯
이 행동하려 들고 있음을 알 수가 있었다.
"다른 것은 묻지 않겠어. 그 대신 내가 지금부터 묻는 말만은
......"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그럽니까?"
포주가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가만 앉아 있어!"
그는 신경질적으로 큰소리를 질렀다. 포주는 그보다 훨씬 나이
가 많은 것 같았다. 그러나 오 형사는 매음업을 하는 자에게는 조
금도 존대어를 쓰고 싶지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오히려 몇 대
갈겨주고 싶었다.
"당신 집에 춘이라는 여자가 있었지?"
오 형사는 선 채로 포주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포주는 책상 위
에 모아 잡고 있던 두 손을 재빨리 끌어내렸다.
"그렇지 않아도 그애를 찾고 있는 중입니다."
"찾고 있다니, 어떻게 된 건데?"
"그년이 도망쳤습니다. 빚이 십만 원이나 있는데 갚지도 않고
......"
"그년이라니...... 당신이 그 여자를 그렇게 부를 권리라도 있
어?"
오 형사는 포주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그렇지만 빚도 안 갚고 도망쳤으니까 도둑년 아닙니까."
"이 치가 정신이 있나. 그럼, 여자를 가둬 놓고 등쳐먹는 놈은
뭐야? 그런 놈은 도둑놈이 아니고 신산가?"
오 형사가 이렇게 윽박지르자 포주는 책상 위로 시선을 떨어뜨
렸다. 그러나 두고 보자는 듯이 이를 악물고 있었다.
"도둑놈이 따로 있는 게 아니야. 연약한 여자들 피나 빨아먹는
기생충 같은 놈들이야말로 진자 도둑이야."
그는 냉수를 퍼마시는 듯한 기분으로 말을 쏟아 낸 다음 창가로
걸어갔다. 낡은 마룻장이 그의 발밑에서 삐걱거렸다.
가로수의 앙상한 가지들이 비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길 건너
벽 위에 붙은 지 얼마 안 되는 벽보가 길게 찢어져 펄럭거리고 있
었는데, 마침 안경 낀 청년 하나가 그 곁을 지나치면서 그것을 홱
나꿔채 가는 것이 보였다. 오 형사는 그 벽보 내용을 며칠 전에
읽은 적이 있었다. 그것은 서울시장 명의로 발표된 것으로서 종로
3가 일대의 모든 사창가는 일체의 불법적인 매음 행위를 중지하고
1개월 이내에 완전 철수하라는, 매우 강력한 내용의 공고문이었
다.
오 형사가 돌아서서 사내를 바라보았다. 포주는 턱을 괸 채 담
배를 피우고 있었다.
"춘이가 도망쳤다고 어떻게 단정할 수가 있어?"
사내는 그를 흘끗 보고 나서 말했다.
"그건 분명해요."
"그렇다면 춘이가 죽으려고 도망친 건가?"
오 형사는 사내 쪽으로 다가가 책상 위에 사진을 내던졌다. 사
진을 들여다 본 포주는 움찔하고 놀라는 기색이었다.
"이게 춘이 사진입니까?"
"그래, 잘 보라구. 춘이 시체니까."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사내는 숨을 크게 들이쉬면서 말했다.
"몰라서 묻는 거야?"
"제가 어떻게 압니까?"
"시치미떼지 마!"
오 형사는 소리를 질렀다.
"전 아무것도 모릅니다."
사내는 갑자기 위축되면서 완강히 말했다.
"당신은 춘이를 데리고 있었으니까 누구보다도 그애를 잘 알고
있어. 쉽게 이야기하는 게 서로를 위해서 좋으니까 바른 대로 말
해. 춘이는 어떻게 해서 죽였지?"
"그럼...... 제가 춘이를 죽였다는 말입니까?"
"그랬을지도 모르지. 사람이란 알 수 없는 거니까."
"생사람 잡지 마십시오!"
포주는 벌떡 일어서면서 외쳤다. 두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
고 눈은 크게 치떠 있었다. 이마에 나타난 핏줄이 금방이라도 터
질 것 같았다. 오 형사는 사내의 가슴을 밀어제쳤다.
"이 새끼가 어디서 큰소리야? 앉지 못해?"
"억울합니다. 어떻게 알고 그러시는 줄은 모르지만......"
"그러니까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하라고 그러지 않아. 어떻게 해
서 춘이가 죽었는지 말이야."
"전 정말 모릅니다. 춘이는 갑자기 없어졌으니까요."
"그때가 언제야?"
"지난 일요일 밤이었습니다."
"도망쳤다면서?"
"네, 그러니까 그날 밤 춘이가 손님을 한 사람 받았었는데 바로
그 남자하고 도망쳤습니다."
"도망치는 걸 봤나?"
"보지는 않았지만, 그 손님이 나간 뒤에 바로 없어졌으니까 함
께 도망친 게 분명합니다."
"그런 엉터리 같은 말이 어디 있어. 도대체 함께 도망쳤다는 걸
뭘로 증명해?"
오 형사는 책상 주위를 빙빙 돌았다. 그는 빨리 핵심으로 들어
가고 싶었다.
"증명할 수가 있습니다. 춘이는 그놈한테서 화대를 받지 않았거
든요."
"왜 받지 않았어?"
"아마 그놈한테 단단히 반했던 모양입니다. 그날 밤 그놈이 나
간 뒤에 제 방에서 춘이를 기다렸는데 오지 않더란 말입니다."
"왜 춘이를 기다렸지?"
"그건...... 손님한테서 화대를 받으면 누구든지 제 방으로 와
서 방세를 내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알겠어. 자세히 말해 봐."
"그래서...... 춘이 방으로 가 봤지요. 그랬더니 막 울고 있더
군요. 방세를 내라고 했더니 뭐, 그놈한테 외상으로 줬기 때문에
돈이 없다나요. 화가 나서 몇 대 때릴려다가 그만 뒀지요. 세상에
외상으로 몸을 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아뭏든 외상으로 몸을
줄 정도였으니까 그놈한테 반해도 여간 반했던 게 아닌 것 같습니
다."
"춘이는 왜 울고 있었나?"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그놈을 사랑하게 되
었지만 결국 이룰 수 없는 사랑이니까, 그렇게 울지 않았나 생각
합니다만......"
포주의 이마는 진땀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불기 하나 없는 실
내에서 땀을 흘리고 있는 것을 보면 그자는 꽤나 놀라고 있는 것
같았다. 오 형사는 두 손을 비비다가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당신 정말 춘이를 때리지 않았나?"
"때리지는 않았습니다. 울고 있는 그애한테 손을 댈 수가 있어
야죠."
"춘이는 큰 소리로 울었나?"
"그애는 원래가 조용한 애가 돼 놔서 별로 소리를 내는 일이 없
어요. 아주 서럽게 울긴 했지만,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기를 쓰더
군요."
"춘이가 외상으로 몸을 주었다고 해서 그 남자한테 반했다고 할
수 있을까? 더구나 함께 도망쳤다는 건 말도 안 돼."
"잘 모르시니까 그러시는데...... 창녀들은 웬만한 사이가 아니
곤 절대로 외상 거래를 하지 않습니다."
"춘이가 없어진 건 바로 그 뒤였나?"
"네, 제가 그애 방에서 나온 뒤 얼마 안 있다가 없어졌어요. 틀
림없이 그놈을 만나러 나갔을 겁니다. 아마 둘이서 만날 약속을
미이 해 놓고, 그놈이 먼저 나가 춘이를 기다리고 있었을 겁니다.
틀림없이 ......"
"그 남자를 봤나?"
"처음 춘이가 데리고 들어올 때 얼핏 보긴 했습니다."
"어떻게 생겼던가?"
"키가 크구...... 미남으로 보였습니다."
"나이는?"
"한..... 서른 두셋 되었을까요. 확실히 보지는 못했지만."
"그 전에도 그 남자를 본 적이 있나?"
"처음 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단골인지 어쩐지 모르겠군."
"네, 거기까지는......"
포주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전에도 춘이가 외상 거래를 한 적이 있나?"
"없었습니다."
오 형사는 혼란을 느꼈다. 사실 알고 보면 간단한 사건이라 할
지라도 수사 단계에서는 이처럼 혼란을 느끼는 일이 많았다. 포주
의 말을 그대로 전부 믿는다는 것도 우스웠다.
"그러니까 당신 생각은 그 남자가 춘이를 데리고 나가서 죽였
다, 이건가?"
"아니, 그렇게 말한 건 아닙니다. 춘이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잘
모릅니다. 그렇지만...... 누구보다도 그놈이 제일 의심스럽습니
다."
"직접 보지 않은 이상 누구를 의심한다는 건 금물이야. 당신 혹
시 전과 없나?"
오 형사의 질문에 포주는 어깨를 웅크리며 대답하지 않았다.
"전과가 없을 리가 있나. 조사해 보면 다 알 수 있겠지. 그건
그렇고...... 춘이는 자기 짐을 가지고 나갔나?"
"짐이래야 뭐가 있어야죠."
"가지고 나갔느냐 말이야?"
"그건...... 그대로 있습니다."
"당신도 낫살이나 먹은 사람이 다른 직업을 생각해 봐야지 그런
더러운 일에만 빠져 있으면 되겠어."
"그렇잖아도 종 3도 폐지되고 하니까 그만둘까 합니다."
사내는 얼굴을 찌푸리며 참회하는 빛을 보였다. 오 형사는 그
얼굴에 붙어 있는 가면을 벗겨 버리고 싶었다.
"지금 당신 집에 가서 춘이 소지품을 조사해 봐야겠어. 아직 처
분하지 않고 그대로 있겠지?"
"네, 그대로 있습니다."
오 형사는 앞장서서 취조실을 나갔다. 추운 데 오래 있었기 때
문에 그는 뱃살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춘이의 소지품은 낡은 비닐백 하나뿐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그
속에는 입을 만한 옷가지도 없었고, 그녀를 말해 줄만한 물건도
하나 없었다.
오 형사는 흔적도 없이, 마치 이슬처럼 스러져 버린 한 창녀의
영혼을 가슴에 품은 채 불안한 밤을 보냈다. 밤새 여러가지 꿈을
꾸었는데 그 중에 가로등도 없는 어둡고 추운 거리에서 거지가 되
어 오들오들 떨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몹시
추워 한밤중에 눈을 뜬 그는 연탄불이 꺼진 것을 알고는 갑자기
외로움을 느꼈었는데, 아침이 되어도 그 기분은 사라지지가 않았
다.
열 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지만 그는 출근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전에도 그는 아무 이유 없이 결근하는 일이 종종 있곤
했다.
그는 드러누운 채 한참 조간 신문을 읽다가 배가 고파서 일어났
다. 밥통에는 어제 해 놓은 밥이 한 그릇쯤 있었는데, 그는 그것
을 그대로 먹을 것인가, 아니면 버릴 것인가 하는 문제로 망설이
다가 아까운 생각이 들어 먹기로 했다. 주인집 연탄불을 얻어 뜨
거운 물을 끓이고 겨우 식사를 끝마친 것은 열두시가 지나서였다.
밖은 어제처럼 흐려 있었는데, 추위가 조금 가신 것이 곧 눈이
올 것 같았다.
오 형사는 검정색 코트를 걸치고 시내로 나갔다. 그는 출근하는
것을 아예 단념하고 우선 다방부터 들러 코피를 마셨다.
춘이의 소지품 중에서 그가 가져온 것은 다섯 장의 명함이었다.
그것은 춘이를 찾은 손님들 중 솔직하거나 아니면 바보같은 자식
이 남기고 간 것들이라고 볼 수 있었다. 이들 중에 춘이의 죽음과
관계가 있는 자가 있다면 매우 다행한 일이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
우 그는 춘이에 대해서 더 이상 추적해 보는 것을 단념해 버릴 수
밖에 별도리가 없을 것 같았다.
다섯 장의 명함을 검토하던 오 형사는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다.
그만큼 명함에 박혀 있는 그들의 직업이 가지각색이었다.
그는 우선 접촉하기 쉬운 사람부터 만나보기로 했다.
그가 명함을 가지고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어느 수도 사업소였
다. 그 과장이란 자는 사십대의 사내였는데 오 형사가 신분을 밝
히면서 용건을 말하자 무조건 그를 다방으로 데리고 가서는 돈부
터 집어주었다.
"여편네가 임신을 하는 바람에...... 앞으론 조심하겠습니다."
사내는 얼굴을 붉히면서 말했다.
"종 3에 마지막으로 갔을 때가 언젭니까?"
"한......한달쯤 됐습니다."
오 형사는 뇌물이라고 집어준 돈을 돌려주었다. 수도 사업소 직
원은 사창가 출입 단속에 걸린 줄 알고 거의 울상이 되어 그에게
매달렸다.
"잘 봐 주십시오."
"그런 데 있는 여자들한테 명함을 주면 안 돼요."
오 형사는 탁자 위에 그자의 명함을 던져 놓고 일어섰다.
그가 두 번째로 찾아간 사람은 이마가 벗겨진 오십대의 식당 주
인이었는데, 명함에는 사장 아무개라고 되어 있었다. 사장 역시
수도 사업소 직원처럼 돈을 내밀고 잘 봐 달라고 부탁했다.
포주의 말대로 키가 크고 미남인 청년은 세 번째, 네 번째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세 번째는 구청 직원으로 작은 키에 안경을 낀,
역시 중년의 사내였다. 네 번째 사내는 은행원이었는데, 동료 직
원의 말에 의하면 죽은 지가 열흘이 넘었다고 했다.
"친구 되시는가요?"
하고 그 직원은 이쪽 신분을 알아 볼 생각도 하지 않고 물었다.
"네, 그저......"
"그런데 아직까지 모르고 계셨던가요?"
"네, 어디 좀 다녀오느라고......"
"바로 요 앞에서, 점심을 먹고 오다가 자동차 사고로 그렇게 되
었죠. 똑똑한 친구였는데......"
오 형사는 은행 직원과 헤어질 때 일부러 슬픈 표정을 지어 보
였다.
이젠 집으로 돌아가서 잠이나 자고 싶었다. 정말 극도로 피로했
기 때문에 그는 다섯 번째 사나이까지 찾아볼 마음이 조금도 나지
않았다. 더구나 명함을 보니 그 사나이의 소재는 인천이었다. 길
목에 서서 잠시 머뭇거리던 오 형사는 머리를 설설 흔들고 곧장
집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 한밤중에
배가 고파 눈을 뜨긴 했지만 몇 번 몸을 뒤챈 다음 그는 다시 잠
들어 버렸다.
토요일은 아침부터 바람이 불었다. 찌푸린 하늘에서는 조금씩
눈발까지 날리고 있었다.
아홉 시쯤 출근한 오 형사는 직속 계장의 핏발선 눈초리와 부
혔다. 알고 보니 어제 오후 대규모 마약 사건이 터진 모양이었다.
결국 하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는 마약 냄새를 아
몇몇 호텔을 돌아다녔다. 그런데 그 바쁜 중에서도 어제 내팽개쳐
버린 그 일이 줄곧 마음에 걸려 왔다. 저녁 무렵이 되자 그는 자
신이 그 일을 포기할 수 없음을 명확히 깨달았다. 겨우 틈을 낸
그는 서둘러 역으로 나가 막 출발하는 열차에 뛰어올랐다.
인천에 내렸을 때는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바닷가라 그런지 눈
보라가 거세어지고 있었다. 그는 택시를 타고 바로 하역장으로 찾
아갔다. 명함에 따르면 다섯 번째의 사나이는 어느 운수창고 주식
회사 인천지점 관리부장이라는 자였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는 하
역 인부들을 감독하는 십장이었다.
"백인탄(白仁灘) 씨요? 아, 십장님 말이군요. 저어기 불빛 보이
죠? 그 집에 가서 물어 보세요. 거기서 술을 마시고 있을 겁니
다."
창고 옆에서 모닥불을 쬐고 있던 인부들 중의 하나가 십장이 있
는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부두에는 선박들이 험한 날씨에 대비해서인지 일제히 닻을 내리
고 있었다. 파도 소리는 높아지고 있었고, 소금기를 실은 바닷바
람은 차고 날카로왔다. 조금 벗어나자 거기로부터는 배도 없었고
건물도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어슴푸레한 시야 속으로 개펄을 막
은 긴 둑이 나타났는데 바로 그 곁에 판자로 지은 술집이 하나 서
있었다.
오 형사는 술집 안으로 들어섰다. 아직 전기를 끌어들이지 못했
는지 여기저기 남포등을 켜 놓은 실내는 어둠침침했다. 확 끼쳐오
는 술 냄새에 그는 약간 현기증을 느끼면서 주위를 휘둘러 보았
다. 서너 평쯤 되는 흙바닥 위에는 판자와 각목으로 어설프게 짜
놓은 탁자와 의자가 몇개 놓여 있었고, 모두 부두 노동자로 보이
는 사람들이 거기에 띄엄띄엄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들의
말소리는 분명하지 않으면서도 크고 우렁우렁했다.
오 형사는 주모에게 십장이 누구냐고 물었다. 주모는 그를 쳐다
보지도 않은 채 턱으로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오 형사는 세 명의
청년이 앉아 있는 구석 자리로 다가갔다. 그리고 첫눈에 십장이란
자를 알아볼 수가 있었다. 포주가 말한 대로 십장은 몸집이 큰 미
남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청년은 오 형사가 제시한 신분증을 흘끗 바라보면서 물었다. 술
기운 탓인지 가슴을 벌리는 것이 매우 자신만만한 투였다.
"물어볼 게 있어서 그러는데, 잠깐 이야기 좀 합시다."
오 형사는 사내들의 시선이 차가움을 느꼈다.
"여기서 물어 보면 안 됩니까?"
하고 청년은 물었다.
"네, 좋습니다."
오 형사는 자리에 앉자마자 십장의 명함을 꺼내 놓으면서,
"지난 일요일 밤에 종 3에 갔었지요?"
하고 큰소리로 물었다. 의외의 공격에 상대는 얼굴을 확 붉혔
다. 그는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던지 동석하고 있던 친구들을
모두 밖으로 내쫓았다. 그리고는 하나 감출 것도 없다는 듯이,
"네, 종 3에 갔었습니다. 그런데요?"
하고 반문했다.
"어떻게 서울까지 원정을 가게 됐지요?"
"네, 사실은 친구한테 돈을 좀 빌리러 갔다가......"
"돈을 빌렸습니까?"
"못 빌렸습니다."
"그 길로 종 3에 간 건가요?"
"네, 전 아직 총각입니다."
"거기 가서 누굴 만나 무얼 했는지 자세히 이야기해 보시오."
"왜...... 무슨 일 때문에 그럽니까?"
부둣가에서 굴러먹는 사나이답게 백인탄은 좀 버티어 볼 모양이
었다.
"차차 이야기할 테니까 우선 그것부터 말해 봐!"
오 형사는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청년은 풀이 꺾이며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오 형사는 술과 안주를 더 시킨 다음,
"자, 술도 마시면서 천천히, 마음 놓고 말해 봐요."
- < 백인탄의 진술 >
술에 얼큰히 취한 심장은 남근이 불끈 솟구치는 것을 느끼면서
종로를 걷고 있었다. 그는 여자가 그리워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
었다. 최근의 그의 가장 심각한 고민은 성욕을 어떻게 처리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정 견딜 수 없을 때 그는 사창가로 달려가는 수밖
에 없었지만 그것도 적잖은 돈이 들기 때문에 마음대로 갈 수가
없었다. 사실 정력이 왕성한 노총각으로서 끓어오르는 열기를 그
대로 눌러 버린다는 것은 너무도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한
편으로 생각하면 자기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수 없다는 데 대해서
화가 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결국 그는 종 3으로 기어들었다.
아뭏든 오늘 밤엔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여자를 하나 사야 한다.
여자는 살찐 것보다는 약간 마른 듯한 게 품기에 좋다. 약간 마른
듯한 여자다. 그러나 현재 그의 수중에는 여자를 살 만한 돈이 없
었다.
그는 달려드는 여자들을 밀어제치며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창
녀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살벌하고 처참해 보였다.창녀들이 모두
남성의 육체를 그리워하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는 넥타이를
움켜잡는 창녀의 따귀를 철썩 하고 갈겼다.
"야, 이 개새끼야, 점잔빼지 마!"
여자는 울화통이 터지는지 욕설을 퍼부었다. 그는 술기운이 머
리끝으로 몰리는 것을 느꼈다.
그의 발걸음이 멈춘 것은 그가 백발의 어느 군고구마 장수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노인 옆에는 검정 바지에 빨간 털 셔츠를 받쳐
입은 창녀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처녀가 하나 서 있었는
데, 멍한 표정으로 느릿느릿 고구마를 먹고 있는 모습이 행인들에
게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불빛에 드러난 그녀
의 선명한 윤곽은 유난히 돋보이는 여자라면 일단 창녀라고 단정
해도 좋을 것이다. 그는 노인 앞으로 다가가서 고구마를 하나 집
어 들고 껍질을 벗겼다. 도중에 그는 그것을 땅바닥 위로 떨어뜨
렸는데 그러자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처녀가 킥킥 하고 웃었다.
"야, 왜 웃어?"
그는 여자를 노려보았다. 그래도 그녀는 여전히 킥킥거렸다.
"하하, 이 짜아식 봐라."
그가 처녀의 팔을 나꿔채면서 보니 노인은 두 눈을 디룩디룩 굴
리고 있었다.
"야, 너 손님 안 받아?"
"놀다 가실려구요?"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부끄러웠다.
"그래, 임마."
"주무시고 갈 거예요?"
"아니야, 놀다가 갈 거야."
그는 처녀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그녀의 허리는 가늘고 유연했
다. 팔에 힘을 주자 여자의 전신이 허물어지듯 안겨왔다. 입 속에
서 부드럽게 흘러넘치는 팥죽 같은 여자구나. 그는 기쁨이 치솟는
것을 느꼈다.
"야, 빨리빨리 안내해."
"어머, 눈이 와요."
그녀는 머리를 뒤로 젖히면서 팔을 휘저었다. 어느새 밤하늘로
부터 눈송이가 반짝거리면서 떨어지고 있었다.
그녀가 안내한 방은 훈훈했다. 난로 위에서는 물주전자가 김을
내뿜으면서 한창 끓고 있었다.
"야, 나 돈이 없는데 어떡하지?"
인탄은 아랫목에 풀썩 주저앉으면서 말했다.
"안 돼요. 돈이 없으면 안 돼요."
창녀는 완강하게 말했다.
"안 되긴, 임마. 내일 돈 갖다 줄 테니까 외상으로 하면 되지
않아."
"그래도 안 돼요. 돈 안 받고 하면 주인 아저씨한테 혼나요."
"이런 병신 새끼, 난 그런 돈 떼먹을 사람이 아니란 말이야."
"그래도 안 돼요. 외상은 안 돼요. 종 3이 곧 철거되기 때문
에......"
붉은 전등빛을 받고 서 있는 그녀의 모습에는 꿈 같은 데가 있
었다. 이런 애를 만져보지 못하고 겨날 것을 생각하니 그는 초
조했다.
"이런 빌어먹을 년, 이거 맡아 둬."
그는 최후 수단으로 손목시계를 풀었다. 그것은 초침이 따로 붙
어 있고 누렇게 변색까지 된 아주 낡은 것이지만 그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 시계였다.
"이거 얼마짜리에요?"
그녀는 시계를 자세히 살펴보다가 물었다. 그는 벌컥 화를 냈
다.
"이 병신아, 그건 돈으로 따질 시계가 아니야. 그거 없으면 난
죽는 거야."
"이게 뭐가 그렇게 중요해요? 이런 건 누가 사 가지도 않을 텐
데......"
"이 병신아, 무식한 소리 작작해! 그건 내 생명하고도 안 바꾸
는 시계야!"
그의 말에 여자는 씨익 하고 웃었다.
"그렇게도 하고 싶으세요?"
"그래, 죽을 지경이다."
"제가 좋으세요?"
인탄은 와락 그녀를 껴안았다.
"좋고 말고. 널 그대로 두고는 절대 갈 수 없어. 네가 좋아서
미치겠다."
"시계 찾으러 꼭 오셔야 해요?"
"그럼, 그럼, 네 돈 내가 떼어먹을 줄 아니."
그의 취기는 한층 고조되어 갔다. 그는 옷을 벗자 그녀에게 달
려들었다.
"아이, 이 술 냄새...... 꼭 짐승 같네."
그녀는 몇 번 몸을 빼다가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녀
의 육체는 조금씩 열려 나갔다. 그녀는 긴 팔과 다리를 허우적거
리다가 아기를 품듯이 그를 껴안았다. 겉보기와는 달리 그녀에게
는 힘과 열정이 있었고, 육체는 마른 듯하면서도 완숙된 풍만감을
느끼게 했다. 그는 완전히 기막힌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는 다시 달려들곤 했다. 숨이 가빠지고 그것이 더 참을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녀는 높고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고는 길게
신음 소리를 끌면서 몸을 늘어뜨렸다.
"야아, 너 굉장하구나, 굉장해."
그가 헐떡거리면서 땀을 닦자 창녀는 얼굴을 붉혔다. 그들은 나
란히 누워서 한참 동안 천장을 응시했다.
"그렇게 힘드세요?"
하고 그녀는 나직이 물었다.
"그래. 힘들어 죽갔다. 이 간나야."
그는 창녀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숱이 많은 머리칼
은 그 결이 곱고 부드러웠다.
"이북이 고향이세요?"
"그래. 너 눈치 빠르구나."
"사투리를 스기에 알았어요. 결혼하셨지요?"
그녀는 궁금한 듯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아아니, 아직 못 했어. 결혼한 것처럼 보여?"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어요. 왜 아직까지 결혼
도 안 하셨어요?"
"애인이 없어서."
"아이, 거짓말 말아요. 이렇게 미남이면서 애인이 왜 없어요."
창녀는 그의 매끄럽게 생긴 코를 어루만졌다.
"넌 있니?"
"저두 없어요."
"그것 봐라. 잘생겼다고 해서 애인이 있는 것이 아니야, 이 바
보야. 남을 사랑한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줄 아니."
"그게 그렇게 어려운가요. 전 돈 버는 것이 이 세상에서 제일
어렵던데요."
"그럴지도 모르지. 넌 노동자니까."
"뭐라고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돈 벌어서 너 뭐할래?"
창녀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결심한 투로 말했다.
"시집갈래요."
그는 천장 바로 밑에 달려 있는 조그만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
리고 어둠이 더욱 층층이 쌓여가고 있음을 느꼈다. 그는 웃었다.
"하하, 이년......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 난다고, 그래도 시
집은 가고 싶은 모양이구나."
"저라고 시집 못 가란 법 있나요?"
"하긴 그래. 너도 언젠가는 시집가야겠지. 지금 몇 살이니?"
"스물셋이에요."
"더 돼 보이는데......"
"고생을 많이 해서 그래요. 선생님은 몇이세요?"
"서른 하고도 둘이다."
"참, 이북 어디가 고향이에요?"
"이북 어디냐고?"
그는 다시 창문을 바라보았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문제가 가
슴을 파고 들어왔다.
"의주다. 압록강 끝에 있는 평안북도 의주가......"
"의주 어디에요?"
하고 창녀가 그의 손을 움켜쥐었다.
"이거 왜 이래? 또 하고 싶어서 그러니?"
그의 말에 그녀는 손을 풀면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의주군 의주면 의주리가 내 고향이야. 거긴 강 건너가 바로 만
주 벌판이야. 겨울이면 강이 두껍게 얼기 때문에 썰매를 타고 넘
나들지. 어떻게나 추운지 오줌을 누면 거기에 고드름이 다 언다
구, 하하."
그러나 그녀는 웃지 않았다. 그녀는 이불을 턱 밑으로 끌어당기
며 돌아누웠다.
"내 말 재미없는 모양이구나."
그는 창녀의 유방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아니에요. 재미있어요. 월남은 언제 하셨어요?"
"나한테 묻지만 말구 너두 좀 말해봐. 난 네 이름도 모른다구."
"그냥 춘이라고 불러요."
"춘이, 춘이...... 거 이름 참 좋은데...... 허지만 이런 데 있
는 여자가 진짜 이름을 댈 리가 있나. 고향은 어디야?"
"저, 전라도예요."
"전라도. 그런데 사투리를 토옹 안 쓰네."
"네, 어릴 때 나왔기 때문에......"
"꺼억, 나는 말이야......꺼억......"
그가 꺼억 하고 트림을 하자 술 냄새가 확 풍겼다.
"야, 소주 한 병만 사 올래?"
"아이, 그렇게 취하셨는데......"
"아니야, 난 취하려면 아직 멀었어. 이런 자리에서 벌거벗구 술
마시는 것도 괜찮지. 야, 소주 한 병 사 오라구. 돈없다구 너 날
괄시하니? 술 살 돈은 있어."
그는 벌거벗은 몸으로 벌떡 일어섰다.
그러자 그녀가 그를 가로막았다.
"아이, 저한테 돈 있으니까 앉아 계세요."
그녀는 옷을 입고 급히 밖으로 나갔다.
한참 후 그녀는 술과 함께 과자며 과일 같은 것들을 잔뜩 사들
고 들어왔다.
"야, 이거 미안한데."
"드세요."
그는 비스듬히 누운 채로 그녀가 깎아 주는 사과를 받아먹었다.
그리고 술을 마실 때는 대단히 기분이 좋고 만족한 표정이었다.
"제가 묻는 말에는 대답을 잘 안 하시네요."
그녀는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무슨 말을 물었는데? 아무 거나 다 물어 봐, 척척 대답
해 줄 테니까."
그는 벌건 얼굴로 씨근덕거리며 말했다.
"제가 아까 언제 남하했느냐고 묻지 않았어요?"
"아, 그렇지. 그러니까 1951년인가...... 1.4 후퇴 때 남하했
지. 사실 그 때 이야기를 하자면...... 이야기가 길어진다. 파란
곡절이 많았지. 우리 집안은 그때 없어진 거나 다름 없었어."
청년은 잠시 어두운 얼굴로 천장을 응시했다. 그녀는 사내 옆에
바싹 다가앉으며 치마폭으로 그의 손을 가만히 감싸주었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농사를 지어 왔는데, 아버지 대에 와서 좀
차질이 생겼어. 우리 아버지라는 사람이 가만히 앉아서 농사만 짓
는 데 만족하지를 않은 거지. 아버지는 자주 여기저기 돌아다니면
서 장사에도 손을 뻗쳤는데, 그 중에는 국경을 넘나들면서 아편
장사를 한 것도 끼어 있지. 그렇다고 우리 아버지를 나쁜 사람이
라고 생각하지는 마. 그 당시 국경 가까이 사는 사람들은 거의가
아편에 손을 대고 있었다니까 그렇게 대수로운 건 못 돼. 좌우간
아버지는 그런 식으로 돌아다니면서 낯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어. 아버지가 1.4 후퇴 때 우리들을 데리고 남하한 것도 순
전히 이러한 방랑벽 때문이었지. 남쪽에 대한 강한 호기심, 남쪽
에서의 새로운 희망...... 그러니까 아버지는 이민 가는 기분으로
남하했던 거야."
"누구누구 월남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그는 술 한 잔을
단숨에 집어삼켰다.
"햐아, 이거 이야기가 길어지는데, 누가누가 월남했느냐 하면
아버지하고 나하고 내 누이동생, 이렇게 셋이었지."
"엄마는요?"
"엄마? 그 여자는 버얼써 죽은 뒤었어. 내 누이동생을 낳고 그
이듬해엔가 승천했으니까. 오래된 이야기지. 살아 있을 때는 별로
몰랐는데...... 몇 년 지나서 어머니 사진을 보니까 상당히 미인
이었어. 아버지가 재혼하지 않고 동짓달 긴긴 밤을 홀로 지낸 이
유를 알 만하지. 자, 너도 한잔해."
그가 웃으면서 술잔을 내밀자 춘이는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흩어진 머리채 속에 얼굴을 묻은 채 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그녀의 몸은 조금씩 떨리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러나 온몸이 늘어지고 눈꺼풀이 잔뜩 무거워진 그로서는 이제 한
숨 푹 자고 싶을 뿐 그녀에게는 관심이 가지 않았다.
"흐응, 이제 내 이야기가 재미없는 모양이구나. 빨리 나가달라
이거지...... 그래에, 이년아, 나간다, 나가."
그는 몸을 일으키려다가 푹 고꾸라졌다. 그래도 그녀는 앉은 자
세를 흐트리지 않았다.
"야, 이 간나 새끼야, 내 이야기는 이제부터가 재미있다구, 넌
아무것도 몰라. 너 같은 똥치가 알게 뭐야."
청년은 주먹으로 그녀의 뒤통수를 한 대 쥐어박은 다음 술병을
입 속에 거꾸로 박아 넣었다.
"남하하다가 말이야...... 우리 세 식구는 뿔뿔이 헤어진 거야.
헤어졌다는 여기에 재미가 있는 거야, 흐흐. 어떻게 헤어졌는지
알아? 삼팔선을 넘어 서울에 들어왔을 땐데...... 그만 아버지가
검문에 걸린 거야. 헌병 나리가 하시는 말씀이 잠깐 가자는 거야.
아버지는 완전히 당황했지. 하지만 아버지는 별일 없을 거라고 하
면서 우리한테 기다리고 있으라고 말했어. 그러면서 필요할 거라
고 하면서......자기가 차고 있던 그 고물 시계를 나한테 주고
는...... 간 거야. 자꾸 우리 쪽을 돌아보면서 가더군. 그때 우리
가 기다리고 있던 곳은 길가에 있는 어느 빈 벽돌집 앞이었는데,
그 집은 반쯤 허물어져서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어. 이때 내가 잘
못을 저지른 거지. 아주 큰 실수였어. 난 아무래도 마음이 안 놓
여서 누이동생을 마루에 앉혀놓고...... 아버지를 찾아 나섰어.
얼마 후에 아버지가 어느 국민학교에 수용되어 있는 것을 알았어.
거기엔 아버지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수용되어 있었는데, 입초 헌
병이 하시는 말씀이 모두 징용에 나가야 한다는 거야. 나는......
사정을 했지. 이북에서 오는 길이니 한번만 봐 달라, 그게 어려우
면 잠깐 면회라도 허락해 달라. 허지만...... 나 같은 꼬마는 통
하지가 않았어. 한참 후퇴할 때라 모두가 살기등등해 있었지. 반
시간쯤 후에 하는 수 없이 되돌아왔는데...... 이번엔 거기 꼼짝
말고 앉아 있으라고 한 여동생이 온데간데가 없이 사라진 거야.
난 반 미치광이가 되어 날뛰었지만 홍수같이 밀려가는 인파속에서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어. 그앤 아마 날 찾느라고 나섰겠지만 다
섯 살짜리 애가 어디가 어딘 줄 분간이나 했겠어. 벌써 20년이 가
까와 오지만 아직까지 아버지도 누이동생도 만나지를 못했어. 여
기저기 수소문을 해 봤지만 감감소식이야. 내 생각엔 영영......
못 만날 것 같아. 아버지는 징용에 나가서 행방불명이 되어 버렸
는데, 아마...... 돌아가셨을 거야. 지금 살아 있다면...... 쉰
아홉...... 한창 나이지. 아버지는 몰라도 누이동생은 살아 있을
거야. 좋은 양부모 만나서 제대로 학교에 다닌다면 지금 대학 4학
년쯤 되었겠지. 막상 만난다 해도 서로 얼굴을 못 알아볼 거야.
처음 몇 년간은 누이 생각에 미칠 것 같더니...... 세월이 흐르니
까 그것도 만성이 되더군.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힘들게 말을 마친 그는 한참 동안 꼼짝도 없이 엎드려 있었다.
넓은 어깨 위로 흐르는 땀이 불빛을 받아 번들거리고 있었다. 주
전자의 물 끓는 소리만이 유난스레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는 결국 혼자 남아 부두 노동자로밖에 전락할 수 없었던 자신의
신세가 새삼 가슴을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선생님 성함은 어떻게 되는가요?"
하고 그녀는 기어들 듯이 아주 가느다란 목소리로 물었다.
"아하, 내가 아직 말 안 했던가. 내 이름은 백인탄이야. 이름이
아주 좋대."
그는 일부러 아주 큰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일어서서 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절대 허물어지지 않
을 듯이 버티고 서 있는 모습이 지금까지와는 달리 완강하고 고집
스러워 보였다.
"어서 가 보세요."
갑자기 그녀는 냉정하게 쏘아붙였다. 인탄은 한 대 얻어맞은 기
분이었다.
그녀를 다시 가까이할 수 없다는 것을 느낀 그는 벌떡 일어서서
옷을 입기 시작했다. 다리가 몇 번 휘청거렸다.
"빌어먹을, 쓸 데 없는 이야기만 지껄였군. 오늘 실례 많았다.
다시 말하자면...... 그 시계는 중요한 거니까 잘 간직해 둬. 내
일 아니면 모레 돈을 가지고 올 테니까."
그러자 그녀가 시계를 내밀었다.
"괜찮아요. 가져가세요."
인탄은 눈이 휘둥그래져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춘이
는 피했다.
"정말 가져가도 되겠어?"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음, 감사하군. 내, 돈은 떼먹지 않을 테니까 염려 마. 이자까
지 쳐서 갖다 주지. 앞으로 우리 잘 사귀어 보자구."
그는 신뢰를 보이기 위하여 그녀에게 그 잘난 명함까지 한 장
내주었다. 그로서는 정말 재수 좋은 날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을
외상으로 했을 뿐만 아니라 담보까지 잡히지 않아도 되었으니 얼
마나 다행한 일인가. 더구나 이 계집애는 나한테 단단히 반한 모
양이다. 아마 내 남근의 위력에 녹아버린 모양이지. 그는 가슴이
잔뜩 부풀어 오른 채 귀중한 시계를 팔목에 단단히 비끌어 매었
다. 그런 다음 대단히 취한 체하면서 비틀비틀 밖으로 나갔다.
대문을 벗어나서 몇 발자국 걷다가 뒤돌아보니 춘이가 문설주에
기대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시선이 마주치자 춘이는 얼굴을 돌
려 버렸는데, 순간적인 일이었지만 그는 그녀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저년이 나한테...... 반해도 단단히 반한 모양이구나."
그는 씁쓰레한 기분을 털어 버리기라도 할 듯이 침을 탁 뱉은
다음 걸음을 빨리했다. 눈은 아까보다 더 거세게 덩이가 되어 떨
어지고 있었다.
"춘이한테 돈은 갚았소?"
"아직 못 갚았습니다. 내일 서울 올라가는 길에 같다 줄 참입니
다."
청년은 춘이에게 아직 외상값을 갚지 못한 것을 변명할 기색인
것 같았다.
오 형사는 술 한 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 잔에 그는 다시 자작
술을 따랐다.
"춘이는 죽었소."
"네?"
"멀리 갔단 말이오."
"정말입니까?"
"정말이오."
오 형사가 시체를 찍은 사진을 내보이자 청년의 얼굴이 뻣뻣이
굳어졌다.
"이런!"
거센 바닷바람에 판자집은 통째로 들썩거리고 있었다. 실내에는
손님으로 그들 두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주모는 구석 자리에 앉
아 꾸벅꾸벅 졸고 있다가는 바람 소리에 놀라 눈을 뜨곤 했다.
"타살입니까?"
하고 백인탄은 물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상당히 겁먹은 얼굴이었다.
"그렇다고 볼 수 있지요."
"범인은 잡혔습니까? 도대체 누가 죽였습니까?"
그는 확실히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그 자신이 범인으로
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공포인 것 같았다.
"모두가 범인이오. 당신도 춘이를 죽였고 나도 춘이를 죽였소."
"네? 뭐라구요? 제가 춘이를 죽였다고요? 하하하, 생사람 잡지
마십시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허허허허."
청년은 기묘하게 웃음을 흘리면서 안주도 없이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 쌍놈의 계집애, 어쩐지 그날도 질질 우는 게 이상하더라니,
난 나한테 반해서 그러는 줄 알았지. 처녀 귀신은......"
"개 같은 자식!"
오 형사는 벌떡 일어서면서 청년의 얼굴을 후려쳤다. 탁자와 함
께 뒤로 쿵 떨어진 청년은 코피를 쏟으면서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
다.
오 형사는 놀라 어쩔 줄 모르는 주모에게 술값을 치르고 밖으로
나왔다. 밖은 한 걸음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다. 어
둠은 대지와 하늘을 온통 집어 삼킨 채 끝없이 퍼져 있었다. 소용
돌이치는 눈보라 속을 그는 바다 쪽으로 주춤거리며 걸어갔다. 그
리고 개펄을 막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둑 위에 웅크리고 앉았다.
지난 일요일 밤, 백인탄이 일을 치르고 떠나가 버린 뒤 춘이는
울면서 밖으로 뛰쳐나갔으리라. 양말도 신지 않은 맨발로 고무신
을 끌면서...... 그렇지 약방으로 갔겠지. 그녀는 이 약방, 저 약
방으로 돌아다니면서 수면제를 사 모은 다음 아마 그것을 하나하
나 삼키면서 눈 오는 밤거리를 헤매었으리라. 밤이 깊어 감에 따
라 정신이 흐려지고 몸이 얼어 버린 그녀는 마침내 길 위에 쓰러
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그 비빌을 자기의 몸과 함께 눈 속
에 묻어 버렸으리라. 그것이 그녀가 취할 수 있었던 마지막 예의
였겠지. 오 형사는 춘이의 주검이 하얗게, 아주 하얗게 변해가고
있는 것을 보는 듯 했다. 이제 남은 것은 종 3의 진이 엄마나 포
주로부터 춘이의 성이 백가(白哥)라는 것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모든 것이 밝혀진 지금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할 필요가
있을까.
그는 방파제를 두드리는 성난 바다의 물결이 썩어 가는 대지를
깨끗이 쓸어가 버리기를 실로 간절히 기원하면서, 그녀를 죽인 조
국을 증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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