绝代双骄 16 끝

3학년2반 | 2022.02.15 07:26:27 댓글: 0 조회: 319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8950
십대악인의 최후 1
유자아는 가의신공(嫁衣神功)을 익히는 방법에 대해서 여러 사
람들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무예는 너무도 맹렬한 것이어서 공력이 육칠할 정도 이루어
졌을 때 그때까지 익혔던 공력을 모두 없애야 하오. 그리고 나서
다시 처음부터 익히기 시작하여야 하는 것이오."
소 노파가 웃으며 보충해 주듯 이야기했다.
"사람들이 가의신공을 겁내는 것은 마치 복숭아씨를 껍질까지
그냥 삼키다가 목에 걸려 죽은 사람을 보고, 복숭아 씨는 먹으면
죽는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과 같소. 하지만 복숭아 씨는 먹을 수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아주 맛이 좋소. 그것을 먹으려면 먼저 단
단한 겉껍질을 깨버리면 되는 것이오."
미심팔이 그 말을 듣고는 다소 이해가 간다는 듯 말했다.
"그렇다면 먼저 예봉(銳鋒)을 꺾어 놓는다는 말이로군."
유자아가 계속 이어 이야기했다.
"일단 예기(銳氣)를 꺾어 놓은 다음 다시 시작을 해도 그 가의
신공의 위력은 추호도 감해지지가 않소. 그렇게 하기를 두 번쯤
하면 그 진력의 성능이 더욱 맹렬하게 되어 최대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운용할 수도 있게 되는 것이
오."
소 노파가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계속 말을 이었다.
"아주 사납고 악독한 개를 길들이려고 할때 그 개는 처음에는
주인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물고 덤벼들 것이오. 하지만 먼저
개를 때려 기를 꺾어 놓은 다음 훈련을 시키면 완전히 주인에게
복종하게 되지."
유자아의 말은 계속 되었다.
"그러나 그 가의신공은 육칠할 정도만 익히려 해도 많은 세월의
고된 수련이 필요한 것이오. 누가 그때까지 익힌 공력을 모두 수
포로 돌리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려고 하겠소? 그렇기 때문에 그
무공을 익히려면 초인간적인 의지가 필요한 것이고, 그렇지 못 한
사람은 절대로 익힐 수가 었는 것이오."
귀동자는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연남천은 확실히 불세출의 기재(奇才)임에 틀림없군. 그와 겨
루어 보지 못 한 것이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야."
사실 그들은 한 가지만 알고 있을 뿐 두 가지는 모르고 있었다.
연남천은 그 무예를 익힐 때, 익히고 있던 무예를 모두 수포로
돌리고 다시 시작할 마음은 없었다. 다만 강인한 성격과 인내력으
로 다른 사람이 할 수없는 일을 이루어볼 생각이었다. 자신의 힘
으로 가의신공을 익히기도 전에 악인곡에서 불행을 만나게 되어
전신의 공력이 모두 없어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것을 두고 길인천생(吉人天象 : 좋은 사람은 하늘도 돕
는다는 뜻)이라고 한다. 도교교, 이대취 등은 원래 그를 죽여버리
려고 했으나 오히려 그를 크게 돕게 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연남천은 폐인과 같이 모든 공력이 없어져 버렸지만 다시 연마
를 하기 시작하자 완전히 회복되었음은 물론 전보다 더욱 강해졌
다.
이때 모용산산은 한동안 서있다가 돌연 궁금한 듯 물었다.
"그런데 여러분들께서는 어떻게 연 대협이 가의신공을 익혔다는
것을 아셨습니까?"
유자아가 그말에 유유히 입을 열었다.
"만약 당신이 누군가와 겨루려고 서서 공력을 집중하고 있었다
면 필시 땅바닥에 발자국을 남겼을 것이오."
모용산산은 잠시 생각한 다음 말했다.
"그렇군요. 그러나 내 공력으로는 그리 깊숙이 파이지는 않을
것같군요."
유자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연남천이 서있던 곳에는 발자국이 나 있기는 커녕 아
무런 흔적도 없지 않소?"
"연 대협의 공력이 만약 나보다도 못 하다면 그는 벌써 이화궁
주의 손에 죽어 없어졌을 것입니다."
유자아가 말했다.
"바로 그렇소. 연남천의 공력은 이미 자기 마음대로 운용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해 있어 쓰지 않을 때는 절대로 밖으로 노출되지
않소. 그래서 그가 서있던 곳에는 아무런 흔적이 남지 않게 된 것
이오."
소 노파가 곁에서 또다시 보충했다.
"그것은 그의 공력과 그 자신이 혼연일체가 되어 어떠한 외부의
힘에도 동요되지 않기 때문이오. 이화궁주의 절학(絶學)인 명옥공
도 그에게는 써볼 수조차 없게 된 것이지."
모용산산은 한숨을 내쉬었다.
"선배님들의 말씀을 듣고 나니 후배들의 막혔던 귀가 뚫린 것
같군요."
이때 돌연 소만이 큰소리로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 소야님! 빨리 오세요. 모두들 기다리시기에 지쳐 있어요!"
사람들은 그 소리에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과연 고인옥이 오고
있었다.
소선녀는 고인옥을 보게 되자 입가에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있었
겠지만 그녀는 주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가며 소리쳤다.
"도대체 어디 갔다 오는 거예요? 어째서 한마디도 없이 갔지
요?"
고인옥은 얼굴을 붉히며 더듬거렸다.
"나는...... 나는 소어아를 대신해서 한 가지 일을 하러 갔었던
것이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당신을 시켰지요? 당신은 또 그에게 당
했군요."
고인옥은 탄식을 했다.
"나는 오늘에야 비로소 우리들이 그를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소! 그는 사실 나쁜 사람이 아니었소!"
"당신이 또 그의 꾐에 빠졌군요? 그 소귀, 정말 보통이 아닌
걸!"
"강별학 부자는 연 대협을 속이려고 하다가 도리어 당했지. 그
들은 서로 모르는 사람인 양 하고 있다가 기회를 보아 연 대협에
게 독수(毒手)를 쓰려고 했던 것이오."
소선녀는 저주스럽다는 어조로 말했다.
"나는 벌써부터 그들 부자 모두가 좋지 않은 놈들이라고 생각했
어요."
"그렇지만 연 대협은 악인곡에서 당한 일도 있고 해서 그 전과
는 달랐지. 그는 그들 부자의 음모를 알아차리고 먼저 그들의 무
예를 폐( )하여 버린 다음, 그들을 산굴 속에 가두어 놓고 소어아
로 하여금 직접 부모의 원수를 갚을 수 있도록 해 놓았더군."
소선녀는 손을 마주 비렸다.
"그들 부자가 그렇게 됐다는 것은 정말 뜻밖인데요?"
"만약 소어아가 아니었다면 그들 부자가 그렇게 간악한 소인이
라는 것을 아무도 알아채지 못 했을 것이오."
"그랬군요. 그것은 그가 일생 중에서 단 한 번 행한 선행(善行)
이에요. 그런데 그는 당신에게 무슨 일을 시키던가요?"
"그는 나에게 그들을 놓아주라고 했지!"
소선녀는 놀라며 물었다.
"그들을 놓아주라고 했어요?"
"그렇소. 그는 비단 나에게 그들을 놓아 주라고 했을 뿐만 아니
라 그들이 이미 살아갈 수 없는 폐인이 되었으니 잘 살 수 있는
곳을 찾아 주라고 했지."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나서 계속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그동안 저지른 악행이 드러난 이상 그 원수들
이 그들을 가만히 내버려 두겠소? 소어아는 나에게 그들을 고가장
(顧家莊)의 정원지기로 써달라고 하더군. 그렇게 되면 그들은 얼
어죽거나 굶어 죽을 염려도 없고 다른 사람의 복수를 두려워할 필
요도 없게 된다는 것이지."
소선녀는 더욱 놀랍고 의아스럽다는 듯 물었다.
"강별학이 자기의 부모를 악독하게 죽였는데도 복수를 하지 않
고 도리어 살려 주려고 하다니. 그 소귀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
고 그러는 것일까?"
"비록 부모의 원수이기는 하지만 그 정도로 징벌했으면 족하다
고 생각했겠지. 그는 원수를 꼭 피로써 갚는다면 서로 죽이고 죽
는 비극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소."
"부모의 원수는 같은 하늘 아래 있을 수가 없다는데, 부모의 원
수를 갚지 않는 것이 군자다운 일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는 반드시 죽이는 것만이 복수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무예
마저 상실하여 쓸모 없게 된 폐인을 죽여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느
냐고 반문하더군. 설령 다른 사람이 자기의 생각이 옳지 않다고
말하더라도 그는 자기 마음에 물어보아서 부끄러움이 없으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말하든 관계가 없다는 것이오."
소선녀는 못 마땅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은 아마도......."
고인옥이 정색을 하며 급히 그녀의 말을 막았다.
"나도 그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오. 원한이라는 두 글자가 얼
마나 많은 사람을 해치는지 아시오? 강호에는 그것에 얽매어 서로
를 죽이고 죽고 하는 일이 하루에도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시오? 만약 모든 사람들이 소어아와 같은 생각을 한다면 얼마간
의 세월이 흐른 후에는 아주 조용하고 즐거운 세상이 될 것이라고
나는 믿소."
그는 정이 듬뿍 담긴 눈동자로 소선녀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계
속했다.
"하느님이 사람을 만드셨을 때 서로 죽이고 죽고하라고 만드신
것일까?"
"그렇다면 어째서 그는 자기 자신이 그들을 놓아주지 않았어
요?"
"그는 연 대협도 자기의 생각에 찬성하지 않을까봐 그런 것 같
았소. 얼마 동안은 연 대협이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 하도록 하기
위해서요."
"역시 그가 쓰는 수단은 사람을 속이는 것이에요."
"그렇소. 그는 확실히 가끔 사람을 속이기도 하오. 그렇지만 그
의 본심은 아주 선량하지. 나는 그가 쓰는 수단이 옳지 않다고 생
각하지는 않소."
소선녀는 그 말에 한동안 어리둥절해 있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정말 아주 괴상야릇한 사람이로군요. 그가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도대체 분간을 할 수가 없어요."
이때 유자아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를 잘 알지 못 하고 더우기 그가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도 알지 못 하오. 그렇지만 나는 강호의 사람들이 모두
그 사람처럼 생각한다면 우리들이 구태여 해외의 황막한 섬으로
피해갈 필요가 없다는 것만은 확신하오."
헌원삼광이 손뼉을 치며 동의했다.
"그렇지, 그래. 당신의 말이 옳소. 그와 같은 사람이 몇 명만
더 있다면 나는 이후 절대로 내기 같은 것은 하지 않겠소!"
모용산산이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되면 우린 어떻게 하지요? 후에 우리 자매는 당신과 한
번 멋진 내기를 해보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단지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고 한 말이지 하지 않겠다는 말은
아니오."
사람들은 모두 그말을 듣고는 웃음을 참지 못 했다.
그렇게 되자 사람들은 이틀 주야를 긴장 속에 보내 쌓인 피로가
다소 풀리는 것 같은 개운함을 느꼈다.
오직 화무결만이 개운치 않던 마음이 더욱 착잡해진 듯했다.
그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기가 소어아의 손에 죽을지언정
자신은 도저히 소어아에게 상해를 입힐 수 없다고 느꼈다. 그는
어찌할 수 없는 고민에 빠져 차라리 자신이 죽었으면 하는 마음까
지도 들었다.
사람들은 아무도 이대취, 합합아, 두살, 도교교, 음구유, 백개
심 등이 일찌기 그 자리에서 빠져나간 것을 눈치채지 못 했다.
연남천이 나타났다는 것은 실로 자신들의 목덜미에 비수를 갖다
댄 것이라고 느낀 그들은, 도저히 여러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있
을 수가 없었다.
그 백 부인은 촌보도 백개심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바싹 그를
따라갔다.
백개심은 아까 두살에게 따귀를 세차게 얻어맞아 지금은 한쪽
뺨이 완전히 퉁퉁 부어 올라 있었다. 찢어진 입술에서는 선혈이
쉬지않고 흘러내렸다.
이대취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사실 우리들도 연남천과 이화궁주의 그 일장(一場)의 대전(大
戰)을 구경했어야 되는 것인데! 공전절후(空前絶後)의 대전을 보
지 못했으니 정말 억울하기 짝이 었는 걸!"
백개심은 손으로 입가에 흘러내리는 피를 닦아내며 말했다.
"그렇지. 정말 아깝기 그지없지. 빨리 가서 구경하도록 하세.
지금이라도 늦지는 않았으니까 말이야."
그는 말을 하면서도 아픔에 겨워 식은 땀을 흘렸다. 그러나 그
는 죽더라도 할 말은 해야겠다는 양 지껄여댔고 말을 하지 못 하
면 살아갈 재미가 없는 듯했다.
이대취는 그의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고 또다시 중얼거리듯 말
했다.
"내가 보기에 연남천은 절대로 이화궁주의 적수가 되지 못 할
것 같은데...... 그는 무예를 그만둔 지 이십여 년이나 됐으니 아
마 그전처럼 그렇게 매섭지는 못 할 거야. 더우기 혼자서 두 사람
을 모두 상대하려면 그리 쉽지 않을 텐데!"
백개심은 차가운 어조로 그의 말을 받았다.
"두 사람이 한 사람을 상대로 하여 싸운다구? 흥! 그들이 너희
들 같이 그렇게 체면도 차릴줄 모르는 사람들인 줄 아나? 강호의
호한(好漢)이라면 일대 일로 싸울 줄 알아야지!"
이대취는 그 말을 듣자 펄쩍 뛰며 큰소리로 외쳤다.
"한마디만 더 해봐라. 나머지 한쪽 뺨마저 부어터지게 해 놓을
테니. 어디 믿지 못 하겠다면 다시 한 번 지껄여 보라니까!"
두살도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아까 한쪽 뺨을 마저 부어 터지게 해놓는 것인데......."
백개심은 그 말을 듣자 다시는 아무말도 하지 못 했다.
백 부인이 백개심을 향해 말했다.
"당신이 무엇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멸시와 수모를 받는지 아
세요?"
"당신 같이 못난 여자를 만났기 때문이야."
백 부인은 그의 말에 성을 내지 않고 웃음을 지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은 다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있는데 당신
은 혈혈단신 외톨이이기 때문이에요. 두 손으로 네 손을 상대하기
는 어려운 것이죠. 당신도 이러한 것을 알고 있을 텐데 무엇 때문
에 도울 수 있는 협조자를 찾지 않고 있지요?"
백개심은 그 말을 듣자 눈빛을 반짝이더니 곧 백 부인을 한쪽으
로 끌고 갔다.
이때 그들은 이미 산봉우리가 울퉁불퉁 나와 있는 험한 산속으
로 들어서고 있었다.
백개심은 그녀를 골고 산기슭에 숨으며 빠른 어조로 말했다.
"꿈꾸던 사람이 한마디에 놀라 깨어났다고나 할까? 당신의 그
말을 듣고나니 좋은 협조자가 있다는 것이 생각났어!"
"당신은 지금도 나를 못난 여자라고 말하겠어요?"
"아니야. 아니고말고. 난 이미 당신의 코를 보고 정말 남편을
아주 잘 내조해줄 수 있는 여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
백 부인은 웃더니 욕설을 섞어가며 말했다.
"이리 저리 둘러다 붙이기는 잘 하는 영감탱이 같으니. 좋은 협
조자가 생각났다고 했는데 그가 도대체 누구인지나 빨리 말해 보
아요!"
"이 사람들 가운데 이대취와 나는 옛날부터 사사건건 맞서는 원
수 같은 사이야. 지금은 두살도 그쪽 편에 기울어져 가고 있고,
그 두 사람은 모두 무예가 보통이 아닌데다가 더우기 두살은 더욱
세단 말이거든."
"그런 것은 나도 알고 있어요."
"나는 원래 합합아와 함께 그들을 상대하려고 했었지만, 그 뚱
뚱이는 어찌나 미꾸라지 같은지 그런 말을 했다가는 그놈이 오히
려 그들에게 내가 한 말까지 고해바치고 달라 붙을 것 같단 말이
야."
"도교교는 어떨 것 같아요?"
"그 중성 같은 여자는 안 되지. 겉으로는 나와 사이가 좋은 것
같아 보이지만 두살을 두려워하고 있어. 그녀는 두살을 적대하는
행동은 죽어도 하지 않을 거야."
백 부인은 웃었다.
"그녀와 두살이 깊은 사이인지도 모르지요?"
"이런 염병할! 그런 사이인 것이 분명한 것 같아? 그건 그렇고
이리저리 생각해본 결과 음구유가 제일 적당하다고 생각했지. 그
와 당신, 그리고 나, 우리 세 사람이 힘을 합한다면 상대하기에
넉넉하거든."
"당신은 그를 설득시킬 자신이 있나요?"
"원래는 방법이 없었지만 지금은 생각이 났어!"
"그렇다면 당신은 어째서 지금 그를 찾아보지 않지요?"
"내가 그를 찾을 필요까지는 없지. 그는 반드시 제발로 나를 찾
아올 테니까 말이야."
"아, 그래요."
"그 사람은 원래 음흉스러워서 몰래 숨어서 남의 은밀한 일을
들여다 보기를 좋아하지. 더우기 부부간의 일을 몰래 들여다 보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야."
백 부인이 눈망울을 크게 뜨고 그를 한 번 흘겨 보더니 양쪽 눈
가에 눈웃음을 지었다.
"당신은 설마 여기서 나와 그 일을 하자는 것은 아니겠지요?"
백개심이 그녀를 잡아 끌었다. 그리고 나서 웃으며 입을 열었
다.
"어쩌면 그렇게 사람의 속을 들여다 보듯이 알고 있지? 우리가
일단 그 일을 시작하기만 하면 불원간 그가 꼭 올 거야."
백 부인은 깔깔 웃었다.
"다른 사람이 옆에서 구경한다면 나는 하지 않겠어요."
"이런 병신 같은 할망구야! 다른 사람이 옆에서 몰래 훔쳐 보고
있으면 더욱 기분이 난다는 것을 몰라!"
그는 그녀를 힘껏 끌어안았다.
"시작해 보지!"
백 부인은 그의 귓볼을 지그시 깨물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얼마가 지난 후 백개심이 소리쳤다.
"음노구, 보고 싶으면 나와서 시원스럽게 구경하지 그래!"
음구유가 과연 바위 뒤에서 나오더니 껄껄 웃었다.
백 부인이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웃음을 보였다.
"당신도 한 번 해 보고 싶지 않아요?"
음구유는 대소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구경만 하면 되는 것이니까. 그럴 것까
지는 없다구!"
백개심은 웃고 있는 음구유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이 기회에 마음을 좀 털어놓는 것이 어떤가? 연
남천이 너를 찾게 되면 그때는 늦을 테니까 말이야."
'연남천'이라는 말이 나오자 음구유는 곧 안색이 변하더니 냉랭
한 어조로 말했다.
"일부로 이런 짓을 해서 나를 꾀어 마음을 털어 놓도록 하려 했
구나."
"우리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지. 나는 연남천에게 해를 끼친
적이 없으니 그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 그렇지만 너는......."
그는 히히 웃으며 고의로 말을 끝맺지 않았다.
음구유는 시퍼렇게 질려 한동안 얼떨떨해져 있더니 홀연히 입을
열었다.
"너는 내가 두려워하는 줄로 알고 있는 것 같군? 연남천은 아마
도 지금쯤 이화궁주의 손에 죽었을 것인데 내가 두려워할 필요가
있겠어?"
"그렇지, 그래. 너는 그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지. 연남천의 무
예는 원래 별 것이 아니었으니까. 지금쯤은 아마 이화궁주의 손에
골통이 부서져 버렸을 거야!"
"연남천의 무예는 보통이 아니지만, 그러나 이화궁주는......."
백개심은 그의 말을 가로챘다.
"너는 아마도 연남천이 수십 년간을 강호에 나타나지 않았으니
까 무예가 보잘 것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잊지 마라.
그는 원래 강호 최고 고수였고 악인곡에서 나온 후 필시 어디엔가
숨어서 아주 무서운 절기를 익혔을 거야. 그렇지 않다면 그가 어
떻게 감히 이화궁주를 찾아가겠나? 살기가 싫어져 죽으려고 간 것
같은가?"
음구유는 그 말을 듣자 더욱 안색이 창백하게 변해 보기에 민망
할 정도였다.
"더구나, 이화궁주는 그 산동(山洞)에서 며칠 간이나 굶었어.
아무리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며칠씩 굶고 나서 무
예의 실력을 모두 발휘하기는 힘들지. 그런 때에 그녀들이 연남천
과......."
그는 고개를 저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보기에는 흉한 것은 많고 길한 것은 적은 것 같아."
음구유는 한동안 얼떨떨해 했다.
"그가 죽지 않았다면 또 어떻단 말인가? 내가 그를 건드릴 수는
없다고 하지만 그를 피해 숨지도 못 한단 말인가?"
"연남천이 꼭 찾아야 할 사람을 찾지 못 했다는 말은 여지껏 들
어보지 못 했어. 더구나 오륙십까지 살아온 늙은이가 가슴을 조이
며 이리 숨고 저리 숨고 하며 목숨을 부지해 간다면 너무도 불쌍
한 일이 아닌가?"
음구유가 이를 악물며 원망스럽다는 어조로 그의 말에 대답했
다.
"별다른 뜻은 없어. 단지 연남천이 너를 찾을 수 없도록 너를
도와주고 싶을 뿐이야."
음구유는 그 말을 듣자 안색이 풀렸다.
"무슨 좋은 방법이 있어?"
"방법이 없었다면 너를 찾지도 않았을 것이야!"
음구유는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어떤 방법인지 빨리 말 좀 해봐!"
백개심은 한동안 눈을 감고 있다가 이윽고 느릿느릿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내가 알기에는 연남천에게 치명적인 손을 쓴 사람은 네가 아니
라는 것이야."
음구유가 곧 대답했다.
"그렇지. 이대취가 그렇게 하자고 한 것이고 도교교가 거짓으로
죽은 체......."
백개심은 손뼉을 쳤다.
"그렇다면 됐어. 단지 그 두 사람이면 족하지. 그들이 바로 주
모자이니까. 연남천이 그들 두 사람의 시체를 발견하게 된다면 어
느 정도 마음이 풀릴 거야. 전전긍긍해가며 다른 사람들까지 찾아
내려고는 하지 않을 걸."
음구유는 눈빛을 반짝였다. 귀가 솔깃한 이야기였다.
"너의 말은 나보고 그들을 죽여 없애라는 것인가?"
"너 한 사람으로는 도저히 안 되지. 우리 부부가 힘을 합하고
계략을 쓰지 않으면 안 돼. 그들이 그렇게 모가지를 순순히 내줄
것 같은가?"
음구유는 그의 말을 듣고 한동안 신음하듯 괴로운 표정을 짓다
가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내가 보기에는 네가 네 자신을 위해 그런 일을 하려고 하는 것
같군."
"그렇지. 내가 만약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너를
도우려고 나서겠어? 내가 너의 아들도 아닌데 말이야!"
음구유는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그 두 사람도 살 만큼 산 것 같으니 이젠 그들을 없애 버린다
고 해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듯 싶어."
백개심은 그 말을 듣자 자기 마음에 꼭 든다는 듯 껄껄 웃었다.
"머리가 잘 도는군. 내가 사람을 잘못 고르지는 않았어."
"흥, 너도 눈이 아직 멀지는 않았다. 사람을 제대로 볼 줄 아는
걸 보니."
백개심은 갑자기 침중한 안색을 짓더니 탄식을 하듯이 말했다.
"그렇지만, 우리들이 만약 지금 손을 쓴다면 합합아는 한쪽에서
수사방관한다고 하더라도 두살은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또
다시 그가 끼어들어 참견한다면 골치 아프게 돼."
음구유는 그의 말을 듣자 눈빛을 번쩍이며 말했다.
"너 이놈! 두 노대까지도 없애 버리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군
그래!"
백개심은 웃었다.
"어설프게 일을 했다가는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서 숫제 하지
않은 것보다도 못 하게 되고 말아."
음구유는 냉소를 터뜨렸다.
"그렇지만 우리 세 사람이 그들을 없애버리겠다고 덤벼드는 건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아. 우리들이 도리어 당하게
될 것이 뻔한 일이거든. 그렇다면 구태여 위험스러운 일을 할 필
요가 어디 있겠어?"
"너 이 멍청한 놈아! 그래 너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단순
한 놈이란 말이냐? 병법은 하나도 모르는구나."
음구유는 한동안 침중한 표정을 짓고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더
니 돌연 눈빛을 반짝이며 물었다.
"네 생각은 아마도......."
백개심은 그의 말을 재빠르게 가로챘다.
"허(虛)를 틈타 약점을 공격하여 격파해 버리겠다는 뜻이야."
"그렇지만...... 두 노대에게 무슨 약점이 있지?"
"그의 약점은 바로 자기 자신을 너무 과시하여 영웅인 체 행동
하는 거야. 그렇기 때문에 여인을 내세워 그를 상대하는 것이 제
일 좋은 방법이지. 그의 약점은 바로 여자에게 약하다는 거야."
백 부인이 웃으면서 끼어들었다.
"여인을 이용해 남자의 약점을 꿰뚫려고 하다니 정말 악독하
군!"
합합아, 도교교, 두살과 이대취 등도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들은 이곳의 지세(地勢)가 아주 외떨어지고 편벽하다고 느꼈
다. 우선 이곳에서 휴식을 하며 의논을 하기로 하고 발걸음을 멈
추었다.
그들은 이제부터 쉴사이 없는 도망만이 자기들에게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먼저 의논을 하기로 작정하고 휴식을
취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그들에게는 이렇다할 뚜렷
한 의견이 없었다.
도교교가 침묵을 깨뜨리며 말머리를 꺼냈다.
"너희들이 보기에는 연남천이 결국 이화궁주의 손에 죽게 될 것
같으냐?"
이대취가 대답했다.
"내가 보기에는 아무래도 연남천이 불리할 것 같은데!"
두살이 냉랭한 어조로 반박했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 연남천의 무예에 대해서는 내가
아주 잘 알고 있어."
그는 자기의 잘려진 손을 바라보며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도교교가 말했다.
"만약 연남천이 죽지 않는다면 그는 절대로 우리들을 놓아주지
는 않을 거야.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디로 도망가 숨어야 하
지? 또다시 악인곡으로 도망해 들어가 숨을 수는 없지 않아?"
그들은 모두 다시 악인곡에 들어가 숨더라도 다른 사람은 속이
고 숨어 있을 수 있어도 절대로 연남천을 속이고 숨어 있을 수는
없다는 것과, 악인곡을 제외하고는 어느 곳도 자기들이 숨어 있을
만한 곳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한동안 말이 많은 수다스
러운 합합아까지도 아무말을 하지 못 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이대취가 양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 백가 놈은 도대체 어디로 갔기에 보이질 않지? 또 사람을
해칠 생각으로 어딜 간 것이 아닐까?"
두살이 차가운 어조로 말을 받았다.
"그놈은 이 마당에 와서까지도 그렇게 담이 큰 짓을 하지는 못
할 걸!"
도교교가 뭐라 이야기를 하려고 할 때 백 부인이 눈물에 젖어
퉁퉁 부은 얼굴을 하고 비틀거리며 나타나더니 황망히 사방을 둘
러보았다. 그녀는 두살 앞으로 다가와 꿇어 엎드리더니 흐느끼며
더듬더듬 이야기를 했다.
"두대가(杜大哥), 제발...... 제발...... 저 좀 구해...... 주
세요!"
두살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구해 달라니? 도대체 무슨 일이오?"
"저는 그와 백 년 가약을 맺은 지 아직 하루도 채 되지 않았는
데 저를 필요없다고 생각함은 물론, 저를 죽이려고 하더군요. 저
는 혈혈단신으로 의지할 데도 없는 외로운 몸이니 두대가께서 저
를 대신해서 원한을 풀어주세요. 두대가께서는 공도(公道)를 지키
시는 분이니 그렇게 해주시기를 간청하는 것입니다."
두살은 그녀의 말을 듣자 크게 노하여 소리쳤다.
"그놈은 당신과 백 년 해로를 맹세했거늘 어찌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이대취가 곧 그의 말을 받아 끼어들었다.
"그렇지, 당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대로 헤어지면 그만이지
무엇 때문에 죽이려고까지 하느냐 말이야. 나는 벌써부터 그놈이
양심이라곤 손톱만큼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두살은 분연히 일어서더니 날카롭게 외쳤다.
"그놈은 도대체 어디에 있소? 나와 함께 갑시다. 어디 그놈이
감히 당신의 머리털 한 오라기라도 건드리나 좀 보아야겠소!"
백 부인은 울음을 그치고 곧 웃었다.
"저는 일찍부터 두대가만한 영웅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절대로 연약한 여자가 괴로움을 받는 것을 보고 있기만 하시리라
고는 생각지 않았어요."
그녀는 비실비실 일어서려고 했으나 제대로 서지도 못 하겠는지
심하게 비틀거렸다.
두살이 양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당신은 벌써 상처를 입었소?"
백 부인이 또다시 한숨을 내쉬며 침통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놈에게 맞아서 온 몸이 모두 상처로 뒤덮였어요. 두대가, 보
세요."
그녀는 불쑥 앞가슴을 풀어 헤치더니, 부끄러움도 모르는 듯 젖
가슴을 드러내 보였다. 두살이 재빨리 눈을 감으며 말했다.
"더 볼 필요 없으니 빨리 옷을 입으시오. 나와 함께 가
서......."
그가 미처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돌연 가슴이 써늘해짐을 느꼈
다. 반사적으로 번쩍 눈을 뜨고보니 한 자루의 예리한 비수가 앞
가슴에 깊숙이 꽂혀 있지 않은가!
두살은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며 잘려진 팔의 쇠갈퀴를 휘둘렀
다.
그러나 백 부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자 이미 삼사장(丈) 밖
으로 굴러가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실로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이대취, 도
교교, 합합아 등은 이 여인이 감히 두살에게 독수(毒手)를 가하리
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 했다. 그들이 놀라서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바라보니 두살이 가슴에 박혀 있는 비수를 잡아 빼고 있었
다. 그가 비수를 잡아 생자 선혈이 마치 분수처럼 뻗쳐나왔다. 그
가 분을 못 참고 백 부인을 쫓아가려고 발걸음을 옮기자 더욱 쏟
아져나와 전신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살인을 마치 식은 죽 먹듯이 하던 그의 손에는 여느 때처럼 선
혈이 낭자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자신의 피였던 것이다!
이대취, 도교교 등이 달려가 그를 부축하려고 하자 두살은 그들
의 손을 뿌리치며 길게 탄식을 했다.
"두모의 영웅다왔던 일생이 뜻밖에도 저런 천박한 음부(淫婦)의
손에 끝나게 될 줄이야......."
도교교가 이를 갈며 말했다.
"두 노대, 안심하시오. 저년도 절대 살지는 못 할 테니까!"
"좋지...... 아주 좋아......."
그는 서글프게 한 번 웃더니 말했다.
"이럴줄 알았다면 차라리 연남천의 손에 죽는 것이 좋았을 텐
데...... 그는 영웅호걸이거든......."
영웅호걸이라는 말과 함께 스스로 영웅이라 자처하던 그가 쓰러
졌다.
백 부인은 그제서야 도망가야겠다는 것을 자각한 듯 땅 위를 한
바퀴 뒹굴더니 일어섰다.
그것을 본 이대취가 날가롭고 매서운 목소리로 외쳤다.
"네가 도망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느냐?"
이때 돌연 한 음침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년을 도망하도록 그대로 내버려 둘 수야 없지!"
말소리와 함께 음구유가 바위 뒤에서 나타나 백 부인의 앞을 가
로 막았다. 백 부인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그를 향해 삼장(三掌)
을 연달아 뿜어냈다.
그렇지만 음구유는 어림도 없다는 듯 재빨리 몸을 피하더니 번
개 같이 빠른 동작으로 그녀의 팔을 움켜 잡았다.
"만약 우리들이 너를 도망가도록 내버려 둔다면 십대악인이라는
이름이 너무도 보잘 것 없이 돼 버리고 말지 않겠느냐!"
"나는 이미 너희들 악당놈들에게 시달림을 받을 만큼 받았다.
분풀이를 했으니 죽일 테면 어서 죽여라!"
음구유가 냉소를 터뜨렸다.
"너를 죽여? 히힛! 그렇게 쉽게 죽여줄 것 같으냐?"
그는 고개를 돌려 이대취를 바라보았다.
"인육(人肉)은 살아있는 것을 한 점 한 점 도려내어서 먹는 것
이 좋다고 하더군."
이대취가 음흉한 웃음을 보였다.
"내가 만약 네년을 천팔백 조각으로 각을 떠 죽이지 않는다면
내 성은 이(李)씨가 아니다."
백 부인이 발작적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난 또 네가 두 노대를 위해 복수를 하려고 하는 줄 알았더니,
내 고기가 먹고 싶어서였구나. 와라 이 젖비린내 나는 놈아. 이리
와 서 애미 젖이나 실컷 처먹어라. 내가 눈썹하나 까닥한다면 네
놈의 새끼다."
도교교가 차갑게 소리쳤다.
"이 여인은 자기 스스로는 이렇게 대담한 행동을 하지 못 해.
보아하니 분명 백개심이 몰래 조종하는 것 같군."
"내가 다른 사람의 충동질을 받고 행동한다고? 정말 웃기는 소
리로군! 사실대로 이야기해 줄까. 백개심 그 천치 같은 놈은 벌써
내 손에 죽었어. 믿어지지 않으면 시체나 치우고 확인해 보시지
그래!"
도교교는 눈빛을 반짝였다.
"잠시 저년을 죽이지 말고 있어라. 내가 먼저 확인해 볼 테니
까!"
이대취가 음산하게 웃으며 큰소리로 답했다.
"안심해라. 저년을 그리 쉽사리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그는 두살의 가슴에 꽂혀있던 피묻은 비수를 집어들더니 한 걸
음 한 걸음 백 부인을 향해 다가갔다.
합합아는 그를 쳐다보고 나서 또다시 십여장 밖에 있는 도교교
를 바라보더니 빙긋이 웃었다.
"백개심, 그 녀석이 죽고 나서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 좀 보
아야겠는데!"
이대취는 백 부인에게도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그러나 백
부인은 조금도 겁을 먹지 않고 소리쳤다.
"음구유, 네가 만약 사람이라면 빨리 나를 죽여다오. 사람 같지
도 않은 놈에게 시달림을 받기는 싫다."
"내가 사람이라고? 누가 나를 사람이라고 하더냐? 나는 원래부
터 사람이 아니란 말이다!"
이대취는 음구유의 말을 듣고 껄껄 웃었다.
"네년도 두려움을 아는 년이었구나. 백개심을 죽여 버린 공로를
생각해 백 번은 감해주지. 그렇지만 천칠백 번을 저민다는 것에서
는 조금도 더 감해줄 수가 없어."
백 부인은 거의 울부짖었다.
"네놈은 짐승보다도 더하구나! 네놈은......."
"먼저 네년의 혓바닥을 오려내서 혓바닥이 얼마나 길기에 그렇
게 말이 많은지 좀 봐야겠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비수를 쳐들고는 그녀를 향해 내리치려 했
다.
바로 이때, 갑자기 음구유가 움켜 잡고 있던 백 부인을 놓아 버
렸다.
이대취가 얼떨떨해 하는 순간, 왼쪽 옆구리에는 백 부인의 일장
을 맞았고, 오른쪽 옆구리에는 음구유의 일격을 받아 비명 한 번
지르지 못 하고 선혈을 토하며 쓰러졌다.
백 부인은 깔깔대며 웃었다.
"내 말대로 잖아요? 보세요. 식은 죽 먹기보다도 더 쉽게 일이
되지 않았어요?"
음구유는 음침스럽게 웃었다.
"내가 천하에서 제일 악독한 놈인줄 알았는데 이제보니 부인에
비교될 사람은 없는 것 같소."
백 부인은 입술을 깨물면서 이대취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대취
는 아직도 숨이 붙어 있었다.
"너...... 너희들이...... 간악한 것들, 어서 나를 죽여라."
백 부인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당신이 천칠백 번 찌르겠다고 한 것을 그만 두었는데 내가 어
찌 당신을 죽일 수가 있겠어요."
그녀는 몸을 구부리더니 이대취에게 낮은 목소리로 뭐라고 몇
마디를 지껄였다.
음구유는 뒷짐을 지고 서서 백 부인이 이대취의 숨을 완전히 끊
어버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돌연 백 부인이 이대취를 들어 음구유에게 집어던졌다. 이
대취는 삼장 정도 허공을 날아 음구유의 머리채를 휘어잡으며 그
를 덮쳐갔다.
음구유는 크게 놀라며 이대취를 받아 들었다. 순간 백 부인의
호미은침(虎尾銀針)이 그의 옆구리의 혈해혈(血海穴)을 찔러들어
갔다.
그는 전신이 마비되는 듯한 통증을 느꼈고, 조금도 움직이지 못
하게 되었다.
이대취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사납게 웃었다.
"하하하...... 너는 천하에서 제일 악독한 것이 여자의 마음이
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무엇 때문에 여자의 말을 믿었단 말
이냐. 그래, 네가 나를 죽이려고 해서 너에게 득이된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음구유는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르며 무엇이라 대꾸를 하려고 했
으나 결국 한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 한 채 이대취에 의해 목 없는
귀신이 되고 말았다.
이대취는 피투성이가 된 자기의 두 손을 바라보며 미친 듯이 웃
기 시작했다.
백 부인은 그에게 빙긋이 미소를 보였다.
"이대취야, 내가 당신의 원수를 갚을 수 있도록 해주었으니 응
당 나에 대해 감사의 표시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이대취는 웃음을 거두어 들이더니 가쁜 숨을 내쉬며 물었다.
"넌 내가 어떻게 해주었으면 좋겠어?"
백 부인은 부드러운 어조로 그 말을 받았다.
"당신이 나에게 감사해 하든 하지 않든 나는 아직 당신을 도와
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제발, 이제 그만 도와주어도 돼. 지금껏 받은 도움만 해도 감
당할 수가 없어."
"사양할 필요는 없어요. 당신들 십대악인이 나에게 그렇게 좋게
대해 주었는데 내가 어떻게 보답해 드리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그녀가 빙그레 웃음을 지은 채 돌연 발을 쳐들더니 이대취의 급
소를 걷어 찼다. 그는 한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 한 채 그대로 나
가떨어졌다.
백개심은 과연 죽어 있었다.
살아있을 때의 모습도 비루했지만 죽어있는 모습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흉칙했다. 마치 절여 말려 놓은 족제비 같이
나무 위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죽어 있었다.
도교교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벌써부터 네가 고히 죽지 못 할 것은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비참하게 죽을 줄은 미처 몰랐군."
그녀가 중얼거리며 나무 아래로 왔을 때 홀연 뒤에서 합합아의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정신 차려라. 그놈이 죽은 척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니까!"
그가 그런 말을 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그녀를 위해서는 좋을
뻔했다.
합합아의 말에 도교교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백개심의 두손이
그녀의 목을 나꿔챘다.
합합아는 그것을 보고는 몸서리를 치더니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 한 채 멍하니 그 자리에 꼼짝 하지 못 하고 서버렸다.
백개심은 차갑게 냉소를 터뜨렸다.
"도교교, 너와 나는 아무 원한도 없으니 너를 죽이고 싶은 마음
은 없었어. 모두 음구유에 의해서 마지못해 하게 된 것이니 죽어
귀신이 되더라도 절대로 나를 찾아올 필요는 없어. 그놈을 찾아
가봐."
도교교의 눈동자가 희게 뒤집혔다. 백개심은 그제서야 도교교를
팽개치고 나무에서 내려 오더니 합합아를 바라보며 웃었다.
"내가 죽은 척하고 있는 수법이 도교교보다 못 하지 않다는 것
을 알겠지? 저년은 평생토록 죽은 척 해가며 사람을 해쳐왔지만
자기자신이 죽은 척하고 있는 사람에 의해 죽게 되리라고는 생각
지도 못 했을 걸."
합합아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천도(天道)는 돌고 도는 것이라더니 과연 절대로 틀리지가 않
는군. 저지른 죄의 값은 꼭 받게 되어 있는 법이야. 이후에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는 남을 해치는 일은 하지 않아야지."
"합합아, 이제 십대악인은 서너 명 밖에 남지 않았어. 그리고
네가 겨우 십대악인의 체면을 유지하고 있는 셈이지. 그것은 너
한사람이 나머지 두셋의 힘을 당하고도 남기 때문이 아니겠나?"
"너...... 너는 나까지 해칠 마음은 없겠지?"
백개심은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뒷짐을 지고 거드름을 피웠다.
"글쎄, 생각을 해보고 결정할 문제야."
합합아는 비굴한 웃음을 띠웠다.
"제발...... 생각하고 말고 할 게 무엇이 있겠나. 나를 용서해
준다면 나는 자네를 다시 태어나게 해 준 부모로 알고, 하라는 대
로 물불을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지 하겠네!"
백개심은 그 말을 듣자 씩 웃었다.
"지금 땅 위를 엉금엉금 기어다니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겠지?"
합합아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그의 말대로 땅 위에 엎드려 엉금
엉금 기기 시작했다.
백개심은 손뼉을 쳤다.
"모두들 와서 구경하시오! 여기에 뚱뚱한 거북이가 한 마리 가
오."
합합아는 엉금엉금 기어다니며 히죽히죽 웃음을 지었다.
"뚱뚱한 거북이 한 마리가 땅 위를 기어다니고 있고, 백 대야께
서는 손뼉을 치시며 껄껄 웃고 계십니다. 아주머니께서 오시어 구
경하시면 꽃 같은 웃음이 피어오를 것입니다......."
백 부인이 과연 그의 말을 듣고 나타났다. 그녀는 합합아를 바
라보며 웃음을 지었는데 정말 웃는 모습이 한 떨기의 꽃 같았다.
백개심은 그녀를 주시하며 물었다.
"일이 모두 순조롭게 되었나?"
"간사한 놈들에게 톡톡히 맛을 보여 주었지요."
"음구유는 어찌 되었지?"
십대악인의 최후 2
"그를 그냥 남겨 둘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어요. 만약 후에 우
리들이...... 우리들이 좋아하고 있을 때 그가 곁에서 구경하러
든다면 어떻게 그것을 견디어 낼 수 있겠어요?"
"그말이 옳아. 그런데 무엇 때문에 저 강아지 같은 것을 남겨두
었지?"
백 부인이 이대취를 쳐들어 올렸다.
"이 주둥이가 큰 놈은 당신이 그렇게 빨리 죽어 없어지기를 원
치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백개심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서서 그녀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당신은 정말 나의 보물이야. 모든 일을 다 알아서 척척 처리하
니 말이야!"
백 부인은 백개심의 애무에 교태를 부리며 말했다.
"이 뚱뚱이 거북이는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저 거북이 놈은 어느 때고 없애버리려면 없앨 수 있는 것이 아
니겠어? 구태여 빨리 죽여 버릴 필요가 어디있겠나. 남겨두고 심
심할 때마다 보고 즐기면 좋지 않겠어?"
백 부인은 눈을 깜빡거렸다.
"이 주둥이가 큰 이리는 어떻게 하지요? 당신은 어떻게 하려고
생각하고 있나요?"
"당신에게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있단 말인가?"
"저놈은 사람 고기라면 마누라까지 먹어 치운 놈이에요. 아직
먹어보지 못 한 한 가지 고기를 먹지 못 하고 그대로 죽는다면 큰
유감으로 생각할 것이에요. 나는 저놈이 죽어도 유감이 없도록 도
와줄 생각이에요."
백개심은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어떤 사람의 고기를 저놈이 여지껏 먹어보지 못 했단 말이야?"
"식인종의 고기이지요."
백개심은 눈빛을 번쩍였다.
"그렇다면 당신은 저놈에게 제 자신의 살을 뜯어 먹이려는 것인
가?"
백 부인은 깔깔대며 웃었다.
"내 생각이 좋은지 나쁜지 말해보세요?"
백개심이 또다시 그녀를 어루만지며 기쁨을 감추지 못 했다.
"당신은 정말 살아있는 보물이야. 이제는 정말 당신과 떨어져
있기가 어렵겠는걸!"
백개심의 웃음소리와 함께 '퍽'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백
부인이 비참한 비명을 지르더니 목아지가 옆으로 축 늘어지며 힘
없이 옆으로 쓰러졌다. 뚫어져라 하고 백개심을 쏘아보고 있는 그
녀의 눈초리에는 놀라움과 공포와 원망과 저주로 가득차 있었다.
그녀는 힘없는 목소리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당신......."
그러나 목이 부러진 사람이 어떻게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
녀는 온갖 저주와 욕을 퍼부으려고 했지만 독사가 죽기 전에 내는
소리 같은, 씩씩거리는 소리만을 낼 뿐 말을 하지는 못 했다.
그녀는 백개심이 자기를 죽이리라고는 생각치 못 했던 것과 같
이 바로 두살과 음구유가 그녀에 의해 그렇게 당했던 것이다.
백개심은 히히거리며 웃음을 보였다.
"그렇게 나를 볼 것까지는 없어. 너도 일찍부터 알고 있었을 텐
데. 모두가 다 죽어 없어졌는데 내가 너 같은 암캐를 살려두어서
무엇하지?"
백 부인은 눈동자가 튀어나올 정도로 그를 쏘아 보았다.
백개심은 그 원한이 가득찬 눈동자가 소름이 끼치지도 않는지
유유히 말을 이었다.
"더군다나 난 만약 너를 죽이지 않는다면 조만간에 네가 나를
죽이리라는 것을 알고 있어. 네가 나를 곱게 보고 있는 것도 아닌
데 언젠가는 손을 쓰지 않겠어? 화근은 일찌감치 없애버리려는 것
이 당연한 일이니까 너무 억울하게 생각할 것은 없어. 내가 조금
늦었다면 도리어 네게 당했을 테니까."
백 부인의 목덜미에서 굵고 푸른 힘줄이 꿈틀거리더니 잠시 후
에는 거친 숨소리마저도 사그라져 버렸다. 돌연 이대취가 길게 탄
식을 했다.
"백개심아 백개심, 나는 여태껏 너를 어리석은 놈으로 여겨 왔
었는데 뜻밖에 너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아주 총명한 놈이었구
나!"
백개심은 웃음을 터뜨렸다.
"네놈이 아직 죽지 않은 것은 네놈의 살점을 스스로 먹어보기
위해서냐?"
이대취는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그렇구 말구. 나는 벌써부터 내 살점의 맛이 어떤지
먹어보고 싶었다. 오늘에야 이런 좋은 기회를 얻게 되었는데 어찌
이 좋은 기회를 그대로 놓쳐버릴 수 있겠나?"
백개심이 도리어 얼떨떨했다.
"정말이냐?"
"사람이 죽을 때는 속에 있는 말을 한다고 했다. 내가 무엇 때
문에 네놈을 속이겠느냐?"
백개심은 눈을 껌뻑거리더니 돌연 껄껄 하고 웃었다.
"내가 정말 너의 말을 믿을 것 같으냐?"
"빨리 칼이나 가져오너라. 하지만 팔을 짜르지는 말라. 그곳은
살은 아주 질기고 맛이 없으니까!"
백개심은 그를 한동안 주시하다가 돌연 합합아를 바라보았다.
"너는 저놈의 말을 믿겠느냐? 믿지 못 하겠느냐?"
합합아는 엉금엉금 땅 위를 기어다니다가 고개를 쳐들어 그를
바라보더니 히죽 웃었다.
"개가 똥먹는 버릇을 고치지 못 하는 것처럼 저 주둥이가 큰 이
리 같은 놈도 자기의 고기를 먹을 법도 하지요. 형님, 무엇 때문
에 원대로 한 번 먹여주시지 그런 것까지 물어 보십니까?"
백개심은 손바닥을 비비면서 기뻐했다.
"그렇지, 그래. 이왕 죽일 바에야 비록 제자신의 몸둥이에 붙어
있는 살점일망정 원대로 먹고 죽도록 해줘야지."
이대취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음구유가 우리들을 죽이려고 한 것은 연남천이 우리의 시체를
보고 더 이상 우리를 찾지 않게 하려는 것임은 알겠다. 그렇지만
네놈이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이냐?"
"나의 이름을 어떻게 부르는지 설마 네놈이 잊어 버린 것은 아
니겠지?"
이대취는 그 말 뜻을 알 수 없어 한동안 어리둥절해 있었다. 한
참 후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남에게 해를 끼치면 자기 자신에게도 해가 돌아오는 법이
지...... 남에게 해로운 일을 하면 반드시 그만한 대가를 받게 되
는 법이야......."
그는 숨을 쉬기조차 힘들다는 듯 눈을 감고 다시는 아무말도 하
지 않았다.
이때 합합아가 계면쩍게 웃었다.
"형님, 뚱뚱한 거북이가 땅 위를 기어다니는 재주를 더 보시렵
니까?"
백개심은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일어나거라. 오늘은 그만하면 됐어."
"당신은...... 당신은 정말로 저를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까?"
"안심해라.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다면 절대로 해치지는 않을
것이니까. 많던 형제 가운데 지금 남아있는 것은 너와 나 두사람
뿐이다. 내가 만약 너를 죽여버린다면 천하에 오직 나 하나만 남
으니 외로워서 어떻게 지낼 수 있겠니?"
합합아는 연신 허리를 굽혀 그에게 절을 했다.
"형님, 정말 감사합니다. 형님, 정말 감사한 은혜에 보답할 길
이 없군요."
백개심은 그것을 보며 마치 자기가 황제라도 된 듯이 기분이 좋
아 연신 허허허 너털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합합아가 새번째 고개를 숙였을 때 돌연 세 개의 검고
짧은 화살이 날아와 백개심의 앞가슴을 꿰뚫어 버렸다.
백개심은 크게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합
합아를 쏘아보았다. 그 모습은 조금 전 백 부인이 그를 쏘아볼 때
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합합아는 앙천대소 했다.
"백개심아 백개심. 너는 똑똑하기도 하지만 어리석기도 하구나.
내가 정말 너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니 말이다."
백개심은 두 손으로 앞가슴에 박힌 화살을 움켜 잡으며 더듬거
렸다.
"내가 만약 그것을 알아차렸다면 너 같이 병신 같은 놈에게 당
했을 것 같으냐?"
"하하하, 그런데 너는 도대체 무엇을 믿고 내가 너를 그렇게 겁
내는 것으로 알았단 말이냐?"
"나는 뚱보놈들은 모두 죽음을 두려워 한다고 믿고 있었다. 감
히 나에게 손을 쓰리라고는 생각지 못 했지. 네가 비록 손을 쓴다
해도 조금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만 나는 한
가지를 잊고 있었어...... 잊고 있었어......."
그의 안색은 더욱 창백해졌다. 그는 입술이 검게 변했으며 눈도
아주 검붉게 충혈되었다.
"하하. 너는 내가 웃음 가운데 칼을 품고, 세 가지 비밀무기를
잘 쓴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는 말이로구나? 너는 지난 날 얼마
나 많은 사람들이 나의 절학에 목숨을 잃었는지 기억하겠지?"
백개심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렇지만 무엇 때문에 나를 죽이는 것이냐? 두 사람이 힘을 합
하여 살아 간다면 혼자서 살아가는 것보다 훨씬 수월할 텐데."
합합아는 더 이상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도교교의 앞으로 다가
가더니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교교, 너도 보았겠지? 나는 이미 당신을 위해 복수를 했소."
백개심은 그 말을 듣자 의아스럽다는 듯 물었다.
"무엇이라고? 그녀를 위해 복수를 했다니 그렇다면 네가 그녀
의......."
합합아의 얼굴이 고통스러운 듯 굳어지는 것을 본 백개심은 더
묻지 않아도 도교교와 그가 어떤 사이였는가를 알 수 있었다.
합합아는 구슬픈 어조로 말을 이었다.
"너는 나에게 너무도 잘 해 주었어. 네가 죽었으니 정말 나는
괴로운 마음을 이길 수 없어......."
백개심은 쓴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
(도교교가 악인곡에 이십여 년을 살아 오는 동안 정절을 지키며
수절하고 지내지는 않았을 것으로 나도 알고 있었다. 나는 여태껏
그 상대가 두살인줄로 알고 있었는데.......)
백개심은 고개를 쳐들고 합합아를 향해 비웃으며 말했다.
"나도 그녀의 상대가 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런 남자도 아
니고 여자도 아닌 늙어빠진 노파를 네놈 거북이 같은 뚱보놈 말고
는 누가 거들떠 보기나 했겠느냐?"
합합아는 그 말을 듣자 크게 노하여 백개심을 걷어차 버렸다.
합합아가 분을 못 이겨 이를 악물고 한동안 씩씩거리며 가쁜 숨
을 내쉬고 있을 때, 홀연 도교교가 눈을 가냘프게 떴다. 합합아는
한편으로는 놀랍고 한편으로는 기뻐서 곧 쭈그리고 앉았다.
"말을 할 수 있겠어?"
도교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움직였으나 너무 목소리가 미약해서 한마디도 알아 들을 수가 없
었다. 합합아는 귀를 그녀의 입술 가까이에 갖다 대고 부드럽게
말했다.
"무슨 말이든 하고 싶은 말은 다 해! 내가 꼭 너를 대신해서 네
뜻을 이뤄줄 테니까."
도교교는 신음을 하듯 가냘프게 말했다.
"우리는 목숨을 같이 한 원앙이지?"
합합아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그렇구 말구. 우리는 목숨을 같이하는 원앙이고 다
정스런 부부이지."
도교교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죽으면 너도 살 수 없을 거야."
합합아가 그말을 듣자 놀라며 뛰어 일어나려고 했으나 이미 일
어날 수가 없었다.
도교교는 마치 뱀처럼 두팔로 그를 꽉 끼어 안더니 그의 목을
물고 늘어졌다. 합합아는 있는 힘껏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쳤으나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그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졌다. 그의 몸의 피는 마치 조수처럼
도교교의 뱃속으로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돌연 전신의 기력
을 다하여 도교교의 몸을 엎어눌렀다.
뿌득뿌드득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도교교는 전신의 뼈마디가 부
러지고 말았다. 합합아는 비실거리며 일어나 크게 웃으며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잠시 후 그는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땅 위
로 쓰러졌다. 그리고 다시는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대취는 눈을 크게 뜬 채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얼마
후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잘 됐어. 아주 잘 됐어. 십대악인이 마침내 모조리 죽고 말았
군. 오래 전부터 나는 우리가 반드시 서로를 죽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느님이 우리들 열 사람을 만든 것은 독공독
(毒功毒)이라고 서로를 잔인하게 죽이라고 한 일이지. 만약 그렇
지 않다면 하나만 만들면 됐지 무엇 때문에 열 명씩이나 만들 필
요가 있었겠는가!"
그는 있는 힘을 다하여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몇 걸음을 내
딛다가는 쓰러지고 또 다시 일어서 걷다가는 또 쓰러지고 하며 깊
은 산 속으로 들어섰다. 죽음 만큼은 조용한 곳에서 혼자 맞이하
고 싶었다.
소슬한 산바람이 불어왔으며 들짐승의 울부짖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이대취는 쓴웃음을 입가에 머금은 채 걸음을 옮겼다.
"토지신(土地神)은 저들의 시체마저 싫어서 맹수에게 먹이려 하
는 모양이군!"
그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저들은 마음만 검은 것이 아니라 고기에서도 악취가 날
거야. 굶주린 들개마저도 거들떠 보지 않을 것이야."
산기슭의 관목(灌木)으로 뒤덮인 숲 사이에 거대한 괴석이 돌출
해 있는 것이 보였다. 그 괴석에는 동굴이 하나 있었으며 동굴의
입구는 마치 괴석의 입인 듯 짝 벌어져 있었다.
이대취는 동굴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저 큰 입은 나의 입쯤은 상대도 되지 않는군. 이대취가 저 입
속에서 죽는다면 죽을 장소는 제대로 찾은 셈이지!"
동굴 안은 음침스러웠고 컴컴했다. 습기가 가득차 있었으며 비
위를 뒤집는 악취가 풍겨 나왔다. 그러나 이대취는 마치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자리에 눕듯 길게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드러누웠
다.
바닥은 질펀한 진흙에 깨진 돌들이 그득했다. 그렇지만 이대취
는 침상 위에라도 누워있는 것처럼 편안하게 누워 중얼거렸다.
"이대취야, 이대취. 하느님께서 너에게 이러한 곳을 주시어 편
안히 죽을 수 있도록 해주신 것만 해도 보통 은혜가 아닌데 너는
무슨 원망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하느님은 그에게 편안하게 죽을 수 있도록 해 준 것이
아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돌연 동굴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이대취는 일어나려고 생각했으나 이미 너무 지치고 힘이 빠져
있는 몸이라 잘 움직여 지지가 않았다.
그는 쓴웃음을 띠우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평생토록 사람의 고기를 먹었으니 하느님께서 개에 물려 죽게
한다 하더라도 당연한 것이지.)
다행스럽게도 하느님은 그를 개에게 물려 죽도록 하는 의도는
아니었다. 발자국 소리와 함께 두런두런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오
기 시작했다.
"바로 이곳이야. 절대로 들릴 리가 없지! 동굴 입구의 저 바위
를 보면 알 수가 있어."
짧은 몇 마디 말이었지만 그 말소리에 위엄과 침중함이 서려 있
었다. 이대취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확실히 알지 못
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심장이 마치 방망이질 하는 것 같이 뛰기
시작했다.
잠시 후 또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부님, 제가 한 가지 백부님을 속인 것이 있는데 저를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그 목소리를 듣자 이대취는 크게 놀랐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소어아였다. 그렇다면 다른 한 사람
은 분명히 연남천임에 틀림이 없었다.
이대취는 놀라움에 감히 숨소리조차 내지 못 하고 있었다.
사실 그는 이미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어 이제 더 이상 두려워
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으면
결코 편할 수가 없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다시 연남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에게 무엇을 속였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구나!"
"저는...... 저는 이미 백부님을 속이고 강별학 부자를 놓아주
었습니다."
연남천은 그 말을 듣자 전혀 뜻밖이라는 듯 어리둥절해하더니
잠시 후 매서운 어조로 물었다.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했느냐? 설마 바다보다 더 깊은 뼈에
사무치는 원한을 잊은 것은 아니겠지?"
"제가 그것을 잊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저는 꼭 그들을
죽이는 것만이 복수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저는 정말 살인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거든요. 그가 저의 부모를 죽인 것은 그가 비겁
하고 악독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그들을 죽여 버
린다면 그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겠어요? 저는 그들을
살려주고 자신의 죄악을 참회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그들을 죽여
없애는 것보다 더욱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연남천은 그말을 듣자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더니 길게 탄식
을 했다.
"너는 정말 착하구나. 정말 착해! 강풍은 너 같은 아들을 두었
으니 구천에서나마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몇십
년간을 살아왔지만 너 같이 명리(明理)에 밝지는 못 하구나!"
"그렇다면 저와 화무결과의 일전(一戰)은 하지 않아도 되겠지
요?"
그러나 연남천은 엄격하고 매서운 어조로 말했다.
"그것은 절대로 안 될 말이다."
"무엇 때문에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저와 화무결과는
아무런 원한관계도 없는데 무엇 때문에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단
말입니까?"
"그 싸움도 복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명예를 위한 것이야. 사나
이라면 목이 금방 날아간다 해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하는 법이야.
네가 만약 빠져나가려고 한다면 너는 어떻게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면목을 세울 수 있으며, 나에 대한 면목을 세울 수 있겠느
냐?"
소어아는 한숨만을 내쉴 뿐 입을 다물고 아무말도 하지 못 했
다.
"너만 화무결과 결전을 벌이게 되는 것이 아니라 나도 이화궁주
와 일전을 벌여야 해. 어떠한 결과가 되더라도 대장부는 하려고
하는 것을 두려움 없이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기지
못하고 죽게 된다고 할지라도 절대로 피해서는 안 되는 것이야."
소어아는 갑자기 서글퍼졌다.
"잘 알겠습니다."
연남천이 길게 한숨을 내쉬고 나서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나도 너와 화무결 사이에 이미 우정이 생겼다는 것을 알고 있
다. 그와 목숨을 걸고 싸우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
다. 그렇지만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종종 어쩔 수 없이 자
기가 원치 않는 일을 하게 되는 때가 있는 법이란다. 그것은 운명
의 장난이라고 하기도 하고 어찌할 수 었는 팔자의 소관이라고도
하지. 어떠한 영웅호걸이라고 해도 그러한 정해진 운명을 피할 수
는 도저히 없는 것이란다."
소어아는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갑자기 물었다.
"백부님, 저는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말해 보아라."
"저는 백부님께서 두살, 이대취 등을 만나게 되도 그들을 죽이
시지 않았으면 합니다."
연남천은 그 말을 듣자 다시 노했다.
"그놈들은 백 번 죽어 마땅한 놈들인데 너는 무엇 때문에 그들
을 위해 그런 말을 하느냐?"
"잘못을 저질렀으면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이미 충분하다고 할 수 있을 만
큼 벌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악인곡에서 백부님께 죄를 저지른 후
마치 한 무리의 가련한 벌레처럼 매일 매일 가슴을 조이며 이리
피하고 저리 숨었지요. 상가집 강아지 같이 어찌할 바를 몰라 하
며 전전긍긍 하고 있는데 어찌 또다시 사람을 해치는 일을 할 수
가 있겠습니까?"
이대취는 탄식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잘 욕했다. 정말 욕 잘했어. 오히려 너의 욕이 너무 가볍구나.
우리들은 정말 모두 강아지만도 못 한 놈들이었으니까 말이야.)
연남천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강산은 쉽게 변하지만, 못 된 마음은 뜯어 고칠 수가 없다고
했다. 너는 어떻게 그들이 다시는 나쁜 짓을 하지 않으리라고 믿
고 있느냐?"
"그들은 악인곡으로 들어갈 때 수많은 보물을 가지고 들어가 감
추어 두었습니다. 그 보물을 위해서라면 그들은 아마도 목숨을 버
리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백부님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아직도 사람을 해칠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 무엇 때문에
다시 들어가 그 많은 보물을 가지고 나오지 않겠습니까? 보물을
다시 가지고 나오지 못 하는 것만 보더라도 그들이 지금 어떠한
형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나서 말을 계속했다.
"그런 것만 보아도 그들의 간담이 얼마나 작아졌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보잘 것 없는 늙은이들이 되어 버렸지요. 십대악인이라
고 불리우던 위풍은 없어져버린 지가 오래 되었고, 그들은 이미
죽는 것이나 살아 있는 것이나 별로 차이가 없게 되었어요. 백부
님, 그런 보잘 것 없이 되어버린 사람들을 굳이 쫓아가 죽여버릴
것까지는 없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들을 일이 년 더 살려둔다고
해서 무슨 큰 상관이 있겠습니까?"
이대취는 온통 뜨거운 눈물로 얼굴이 뒤덮혔다. 그는 참을 수가
없어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하며 중얼거렸다.
"소어아, 우리들은 과연 너를 잘못 보아 왔었구나. 우리들이,
만약 네가 우리들을 위하여 그렇게 거짓말까지 하며 사정 사정할
줄을 알았더라면 아마도 우리들은 지금 이러한 처지에 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의 중얼거리는 소리에 연남천과 소어아는 놀라며 고개를 돌렸
다.
소어아는 그를 발견하자 크게 놀라며 물었다.
"이 숙부님, 당신이 이렇게 되다니 도대체 어찌된 일입니까?"
이대취는 서글프게 웃었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야. 자기가 뿌린 씨는 자기가 거두게 된
다고나 할까, 불의를 저지른 것에 대한 대가를 받은 것이지!"
소어아가 물었다.
"다른 분들은 어찌 되었습니까?"
"죽었지. 모조리 죽었지."
소어아가 의아스럽다는 듯 다그쳐 물었다.
"누가 도대체 그들을 모두 죽였다는 말씀입니까?"
이대취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들 자신 외에 누가 그들을 죽일 수 있겠어?"
그는 길게 탄식하고 나서 이어 말했다.
"연 대협, 나는 실로 당신에 대해 무척 송구스럽게 생각하고 있
소. 빨리 나를 죽이시오."
연남천은 처음 그를 보았을 때는 만면에 노여움의 기색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가엾게 여기는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고
그의 말을 듣고나서는 고개를 저으며 길게 탄식을 했다. 그리고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이대취는 쓴웃음을 보였다.
"내 자신이 보더라도 나 같은 놈은 연 대협께서 구태여 손을 써
서 죽일 가치조차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소. 죽여 보았자 아무
런 가치도 없다고 느낄 정도의 사람이 되었으니 내가 이 세상을
더 산다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소?"
그가 돌연 껄껄 웃더니 말을 이어갔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이제 얼마 더 살지 못 할 것이오. 운이 좋
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연남천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소어아에게 짧게 말했다.
"가보도록 하자!"
"저는 도저히 갈 수가 없습니다."
연남천은 양미간을 찌푸렸다.
"너는 또 무슨 볼 일이 있단 말이냐?"
소어아는 고개를 숙였다.
이대취의 사연(事緣)
이대취는 길게 탄식을 하며 중얼거렸다.
"은정(恩情), 은정이라니...... 십대악인이 키워낸 아이의 입에
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십대악인은 일찌기 모든 것을 걷어치우고
부모노릇이나 했었으면 더욱 좋았을 걸 그랬군!"
이때 한 여인이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그렇구말구요. 우리는 아이를 낳으면 당신에게 양부가 되어달
라고 부탁하려 하고 있어요."
소앵도 그들과 함께 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까지 아무말
도 하지 않고 한쪽에서 서있다가 그제서야 말을 한 것이다.
이대취는 그녀를 주시했다.
"너와 누구의 아이란 말이냐?"
소앵이 소어아를 한 번 의미심장하게 쳐다보고 나서 고개를 숙
였다.
그녀는 입가에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지금은 비록 없지만 장래에는 있을 것이니까요."
이대취는 껄껄 대소했다.
"정말 보통이 아니로군. 소어아가 그렇게 여자를 낚는 기술이
탁월한 줄은 정말 몰랐는걸."
"저 여자가 혼자 도취되어 떠벌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소앵은 살짝 읏었다.
"내가 혼자 도취되어 떠벌리는 것이라고 해두어요. 당신이 무슨
말을 해도 나는 당신의 말을 고분고분 듣겠어요. 내가 만약 아이
를 갖게 된다면 당신은 바로 그 아이의 아버지이어야 하니까요."
소어아가 한숨을 내쉬고 나서 얼굴을 찡그렸다.
"내가 저런 사람을 만나게 된 것도 결국 나의 기구한 팔자 탓이
지."
이대취는 손으로 무릎을 치며 껄껄 웃었다.
"소어아가 저런 여인을 만나게 되다니 정말 뜻밖인데. 아가씨,
나는 아가씨의 그 대담성에 탄복했어. 너는 정말 우리들 십대악인
을 모조리 합한 것보다도 더욱 뛰어나!"
웃으면 웃을수록 그의 얼굴에는 더욱 고통스러운 빛이 나타났
다. 웃음으로 인해 상처의 아픔이 더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연남천이 홀연 입을 열었다.
"은혜를 입었다면 반드시 갚아야 하는 것이 사나이의 도리이다.
네말대로 너는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이 좋겠다!"
"백부님은 어찌 하시렵니까?"
연남천은 신음하는 듯한 어조로 대답했다.
"나는 산꼭대기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그녀들이 지금쯤은 화무
결을 찾았을 것 같으니 너도 빨리 오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소어아는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
"저는 이미 백부님과 굳게 약속을 했으니 반드시 가겠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아시고 가시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하도록 해라!"
그는 간단히 몇 마디 하고 나서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성큼
성큼 걸어나갔다.
이대취는 그의 듬직한 뒷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바
라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탄복한다.
"저 사람은 일단 하겠다고 하면 어김없이 하는 것이 정말로 당
당한 사나이 대장부답군!"
소앵은 빙그레 웃었다.
"저는 당신도 사나이 대장부로서 부끄러움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대취는 그 말을 듣고 얼떨떨해 했다.
"나를 말하는 것인가?"
"십대악인 중에서 오직 당신만이 사나이다운 사나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아깝게도 구미가 다른 사람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 흠
이라고나 할까요. 그렇지만 않았다면 아마도 연 대협과 좋은 친구
지간이 되었을 거예요."
이대취는 그 말을 듣자 길게 웃었다.
"좋아 좋아. 너 같이 아름다운 여인이 나를 사나이다운 사나이
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으니 이젠 죽어도 원통할 것은 없어. 네가
소어아의 어이를 낳는 것을 보지 못 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야."
소어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 숙부님이 그렇게 남을 칭찬하시다니 정말 뜻밖인데요. 하지
만 이 여자는 다른 사람이 칭찬하는 말을 듣게 되면 곧 기고만장
해져서 으쓱거리며 저를 얽어매려 든답니다."
이대취는 눈을 부릅떴다.
"너를 얽어매려고 덤벼든다고? 내가 이야기해 주지. 네가 저런
여인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은 정말 타고난 복이야. 내가 만약 이
렇게 죽어가게 되지만 않았다면 너와 저 아가씨를 두고 한번 겨뤄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을 거야."
소어아는 입을 쩍 벌리고 웃었다.
"후에 저의 구미가 이 숙부 같이 변한다면 단숨에 저 여자를 먹
어 치울 거예요."
이대취의 눈에 고통스러운 빛이 다시 나타났다. 아마도 다른 사
람에 의해서 그런 것을 상기하게 되는 것이 몹시 괴로운 모양이
다.
소어아는 총명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라 그의 눈빛을 보고는
당장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그는 곧 말투를 고쳤다.
"소앵, 네가 정말로 이 숙부님을 나중에 아이의 양부로 삼고 싶
다면 빨리 상처를 치료하여 드려야 마땅하지 않겠어?"
"너는 그녀에게 나의 상처를 치료하도록 하려는 것인가?"
"저 여인은 스스로 도취되어 마음껏 지껄이는 것 외에도 병을
고치는 데 좀 뛰어난 데가 있습니다."
이대취는 씁쓸하게 웃었다.
"나는 네가 총명한 사람인 줄 알았더니 뜻밖에도 큰 멍텅구리였
구만!"
"숙부님은 설마 상처를 치료케 하는 것을 원치 않는......."
이대취는 그의 말을 가로 막았다.
"묻겠어. 너는 내가 영웅이나 사나이로 보이나?"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계속 이었다.
"나는 영웅도 사나이도 아니야. 나는 여지껏 죽음을 제일 두려
워하던 사람이야. 만약 나의 상처가 고칠 수 있는 것이었다면 나
는 벌써 그녀에게 무릎을 꿇고 고쳐주기를 사정했을 거야."
소앵이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노인장, 저에게 상처를 좀 보여 주실 수 없겠어요?"
"무엇을 보겠다는 거야? 자신의 상처가 가벼운지 중한지를 자기
자신이 모른단 말이야? 내가 내 상처의 경중도 모르는 바보인 줄
알아?"
소어아와 소앵은 서로 마주 쳐다보며 그가 이제는 더 이상 살아
가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가 다른 궁리를 하
도록 하자는 눈짓을 주고 받았다.
이때 이대취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정말로 나의 은혜를 입어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한다면 보
답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기는 해."
"무슨 방법입니까?"
"나는 지금 배가 고파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야. 그러니 배불
리 잘 먹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봐. 듣자하니 황천길에는 음식
점도 없다더군. 허기진 채 이대로 길을 떠나 염라대왕을 만나게
된다면 나의 처지가 너무도 가련하지 않을까?"
소어아는 그 말을 듣자 잠시 어리둥절해 하다가 머리를 긁으며
웃었다.
"이곳에는 사람 고기를 찾기가 힘드니 별다른 방법이 없겠군요.
이 숙부께서 그렇게 시장하시다면 제 넓적다리 살이라도 한 점 오
려드릴 테니 우선 요기를 하시지요."
이대취는 또다시 눈을 부릅떴다.
"사람 고기라고? 누가 인육을 먹고 싶다고 했나?"
"그렇다면...... 인육을 잡수시고 싶다는 것이 아니었다는 말입
니까?"
"인육은 정말 천하에서 가장 맛이 있는 것이긴 하지만 몇십 년
동안 먹었더니 이제는 물렸어."
그는 침을 탁 뱉고 나더니 이야기를 계속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는 인육에 대한 것을 생각만 해도 토할
것같아."
소어아는 그 말을 듣자 정말 멍해져 버렸다.
이대취는 웃으면서 실토했다.
"너는 정말로 내가 인육 먹기를 즐기는 줄로 알고 있겠지! 사실
대로 이야기해주마. 내가 인육을 먹는 것은 오직 사람을 두렵게
하기 위한 것이었어."
"사람을 두렵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요?"
"도교교, 합합아 등 그들이 무엇 때문에 나에게 두려움을 느끼
고 대해왔는지 알아? 별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야. 바로 내가
인육을 먹기 때문이지. 인육을 먹는 사람에 대해서는 모두들 두려
움을 느끼고 무서워하거든."
소어아는 그 말을 듣자 머리를 벅벅 긁으며 웃지도 울지도 못
하는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이대취는 한숨을 쉬었다.
"사람이 태어나서 한세상 살아가는 것이 악을 위해서인지 선을
위해서인지 정말 미묘하기 이를 데 없더군. 그래서 이렇게 저렇게
생각을 하다가 결국 십대악인의 하나가 되어 버렸지."
그는 웃음을 짓더니 이번에는 소어아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너는 내가 어떻게 십대악인의 하나가 되었는지 알 수 있겠나?"
"도무지 알 수가 없는데요."
이대취는 먼 곳의 어두움을 응시하며 느릿느릿한 어조로 말했
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먹는 것을 아주 즐겼지. 심지어는 광동인
(廣東人)도 감히 먹지 못 하는 것을 나는 모두 먹어치울 수 있었
어. 오직 사람의 고기만을 먹어보지 못 해 항상 인육은 맛이 어떨
까 하고 생각했었지."
그는 겸연쩍은 듯 연신 웃더니 말을 이었다.
"어느 날 나는 한 사람과 싸우다 죽인 후 인육을 먹어보고 싶은
충동을 이기지 못 해 마침내 그의 살점을 도려서 끓여먹게 되었
지. 먹어보니 말고기보다 좀 찝찔하고 신맛이 나는 것이 마늘과,
파 생강 등 양념을 듬뿍 넣지 않고는 먹을 수가 없겠더군."
소어아가 그곳까지 듣고나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물었
다.
"그럼 인육의 맛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아셨을 텐데 무엇 때문에
계속해서 인육을 먹어야 했단 말입니까?"
"내가 막 인육을 먹고 있을 때 그것을 목격한 사람이 있었지.
그 사람은 나의 숙적이었는데 무예가 나보다 한결 뛰어난 사람이
었어. 그렇지만 그는 내가 인육을 먹는 것을 보더니 곧 안색이 흙
빛으로 변하며 꽁무니가 빠져라하고 도망가더군. 그후 나를 보면
슬슬 피하기만 하고 감히 덤벼볼 엄두도 못 하는 거야. 그 일이
있고부터 나는 인육을 먹는 사람을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 한다는
것을 알게 됐지. 그래서 내가 인육을 즐겨 먹게 된 것이야."
소어아가 물었다.
"그렇다면...... 숙부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두려워하
는 것을 즐기시는군요."
그가 또 한번 웃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자 좀 야만스러운 행동이긴 하지만 맛이 이상한 것을 무릅쓰고
라도 먹지 않을 수가 없더군."
소어아는 그 말을 듣자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그럼 숙부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자기 아내의 고기마저 먹
어야 했단 말입니까?'라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이대취가 상심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대취는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요즈음은 다른 사람이 보지 못 하는 곳에서 몰래 돼지고기를
구워 먹으며 허기를 메꾸었지."
그는 소어아를 한번 쳐다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더 이상 숨어서 몰래 먹을 필요가 없게 되었으니 잘 구
워진 돼지의 넓적다리를 빨리 먹을 수 있도록 해 주었으면 좋겠
어. 될 수 있는 대로 가죽이 두껍고 비계가 많은 것으로 한 입 베
어 물면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것을 먹을 수 있도록 해달란 말이
야."
조그만 마을이라 산해진미는 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잘 구워진
돼지의 넓적다리는 있었다.
세 근이나 되는 돼지의 넓적다리를 이대취는 단숨에 두 개나 먹
어치웠다.
그들은 객잔에서 문을 닫고 먹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그렇지 않
았다면 그것을 본 사람은 아마 그를 석달 열흘이나 아무 것도 먹
지 못 하고 굶어 죽은 아귀쯤으로 여겼을 것이다.
이대취가 한참 돼지다리를 뜯는 동안 소어아는 슬그머니 소앵을
잡아끌어 밖으로 나오더니 빠른 어조로 물었다.
"숙부님을 부축하고 들어올 때 상체가 어떤지를 살펴 보았겠
지?"
소앵은 탄식하는 듯한 어조로 대답했다.
"상처가 정말 가볍지 않아요. 갈비뼈가 적어도 열 개는 부러진
것 같고 다른 곳에도 한 다섯 군데쯤 심한 상처를 입고 있는 것
같아요. 만약 남다른 신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벌써 죽었을
거예요."
"내가 묻는 것은 네가 고칠 수 있는지 없는지 하는 거야."
"내 말을 고분고분하게 잘 듣고 몸조리를 한다면 고칠 수 있을
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는 아마도......."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그는 아마도 더 이상 살기를 원치 않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그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었는 셈이지요."
소어아는 그 말을 듣자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알 수 없는데. 이 숙부님은 아주 맹랑한 사람이었는데 무
엇 때문에 갑자기 죽으려고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소앵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서글프게 말했다.
"사람은 죽음에 임박해서는 일생 동안 자신이 했던 모든 일을
회상하게 되지요."
소어아도 한숨을 내쉬었다.
"옳은 말이야. 그는 틀림없이 자기가 일생 동안 저질렀던 일에
대해 무척 후회를 하고 있음에 틀림없어. 죽음으로써 그에 대한
속죄를 하려는 것 같군."
소앵은 동정어린 어조로 말했다.
"그렇지만 죽음을 앞에다 두고도 담담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
에요. 그렇기 때문에 제가 그를 사나이 중에서도 사나이라고 말했
던 것이에요."
"그는 원래부터 사나이다운 사나이였어. 네가 무얼 안다고 쓸데
없는 소리를 새삼스럽게 지껄이는 것이지?"
소앵은 그 말을 듣고 빙그레 웃었다.
"그래요. 저는 쓸모없는 말만 지껄이는 사람이에요."
소어아는 그녀에게 화를 내려고 쏘아부쳤으나 어찌된 일인지 도
저히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바로 이때 한 사람이 뜰 한모퉁이에 숨어 몰래 그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러나 소어아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소어아는 느릿
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이 숙부의 은혜에 보답도 하지 못 했는데, 그가 저렇게 되었으
니 정말 마음이 편치 못 하군. 화풀이할 상대를 찾고 있었는데 마
침 잘 됐어."
그는 돌연 몸을 날려, 숨어서 훔쳐보던 사람이 있는 담모퉁이로
날아갔다. 담모퉁이에 있던 사람은 크게 놀라기는 했지만 도망할
의사는 없는 듯 오히려 굽신 허리를 굽히고 예를 갖추었다.
"저는 벌써부터 어형(魚兄)이 어떠한 난관에 봉착하게 되더라도
흉한 것을 길한 것으로 바꿀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소.
오늘 안전하게 위험에서 벗어나신 것을 보니 실로 기쁘기 이를 데
없군요."
소어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너 이 생쥐 같은 놈아, 언제부터 그렇게 아첨을 잘 하게 되었
느냐?"
그 사람은 바로 도약사였다. 소어아는 분풀이 할 상대를 찾았다
고 좋아했었지만 그의 추켜올리는 말을 듣고는 화도 낼 수 없었
다.
도약사가 말했다.
"저는 그날 형님께서 저의 살 길을 열어 주셔서 언제고 한 번
형님을 찾아 뵙고 감사를 드릴려고 생각하고 있었소. 그런데 오늘
에야 비로소 소원을 이루게 되었군요."
소어아는 날카로운 어조로 물었다.
"그렇다면 왜 너는 애당초 우리를 보았을 때 정정당당하게 나타
나지 못 하고 음흉스럽게 몰래 숨어서 살피고 있었지?"
"사실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태산 같았소. 그렇지만 어찌 정
랑(情郞)과 조용히 말씀하고 계신 것을 방해할 수 있겠소?"
소어아도 그 말에는 피식 웃고 말았다.
"네놈이 지껄이는 말을 듣고 소앵이 정말 흐뭇해 하겠구나. 반
드시 그녀가 다가와서 너를 거들어 주려고 할 것이다."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과연 소앵이 다가와 웃으며 말했
다.
"우리들을 잊지 않고 있는 것만도 고마운 일인데, 당신은 어째
서 방으로 청해 뜨거운 술 한잔 대접하지도 않아요?"
소어아는 껄껄 대소했다.
"들었지? 내 말이 어떤가. 자네가 만약 몇 마디만 더 추켜올려
주면 저 여인은 반드시 옷이라도 벗어 팔아가지고 자네에게 듬뿍
술을 사줄 것일세!"
소어아는 한참을 웃다가 돌연 정색을 하고 도약사를 향해 물었
다.
"참 철평고 그 아가씨는 어찌 되었나?"
도약사는 그가 그녀에 대한 것을 물을 줄은 몰랐다는 듯 얼떨떨
해 하며 대답했다.
"저는...... 저는 잘 알지 못 합니다."
"두 사람은 함께 도망을 했었는데 어찌 자네가 그것을 모르고
있단 말인가?"
도약사가 고개를 숙이더니 어색하게 어설픈 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그녀도...... 아마 이 근처에 있을 것입니다. 그
렇지만..... 그렇지만......."
소어아는 그의 멱살을 움켜잡고 호통을 쳤다.
"네 이놈, 도대체 무슨 수작을 하려는 것인지 빨리 사실대로 말
하지 못 하겠느냐? 감히 네놈이 나를 속이려 들다니."
도약사는 안색이 변하더니 아무말도 하지 못 했다.
소앵이 옆에 서있다가 보기가 민망한 듯 끼어들며 부드러운 어
조로 말을 건냈다.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차근차근하게 조용히 하실 것이지 무엇
때문에 사람을 그렇게 윽박지르세요?"
소어아는 그녀의 말을 듣자 분통이 터진다는 듯 부르짖었다.
"뭐라구, 내가 공연히 사람을 윽박지른다고? 저놈이 속에 가책
되는 일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저런 꼬락서니를 하고 있지? 내가
보기엔 저놈이 그 아가씨를 팔아먹었거나 나쁜 짓을 저지른 것 같
아."
그러나 소앵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저 사람은 절대 그럴 리가 없어요."
"그럴 리가 없다고, 너는 저놈이 좋은 사람인 줄 알아? 저놈은
원래부터 색만 밝히는 호색한(好色漢)이란 말이야."
소앵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 선생, 내가 보기에는 당신이 사실대로 숨김없이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만약 저분의 성미가 정말 폭발한다면 그때
가서는 나도 당신을 거들 수 없게 될 테니까 말이에요."
그들 두 사람은 정말로 하늘 아래 둘도 없는 천생배필이었다.
한 사람은 화를 내어 얼굴을 붉히며 떠들고, 한 사람은 조용히 옆
에서 두둔해 주는 척하며 부드럽게 타이르지 않는가.
도약사는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그녀가 저에게 단지 잠시 동안만 두 분을 여기에
붙잡아 두라고 하더군요. 어째서 그렇게 하라고 한 지는 저도 모
릅니다."
소어아는 눈을 부릅떴다.
"그녀가 자네에게 우리들을 붙잡아 두랬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소어아가 노하여 외쳤다.
"터무니없는 소리 하지 말아라. 나는 네놈이 그녀의 말을 고분
고분하게 들으리라고는 도저히 믿지 못 하겠다!"
도약사가 온통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말했다.
"그것은 정말입니다. 저는...... 저는......."
소앵이 다시 끼어들었다.
"나는 당신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믿어요. 대부분의 남
자들은 모두들 여인의 말을 잘 들으니까요. 조금도 희귀한 일이
아니지요. 오직 저분만은 영원히 그러한 것을 알지 못 할 거예
요."
소어아는 입을 삐죽거렸다.
"내가 만약 그런 도리를 알고 있다면 당신의 말을 고분고분하게
들을 것이란 말이로군?"
소앵은 웃었다.
"오직 그래 주었으면 하고 바란다는 것 뿐이에요. 그렇지만 그
렇게 할 수 있는 방법도 없고 그렇게 해달라고 억지를 부릴 수도
없는 일이잖아요?"
"흥! 그래, 네가 똑똑하다고 해두자. 내가 한 가지 묻겠어. 네
말대로 이 사람과 철평고가 함께 있다고 해도 그렇다고 해서 무엇
때문에 꼭 그녀의 말을 들어야 하지?"
소앵이 눈을 깜빡거렸다.
"단정해서 말할 수는 없지만 저들은......."
소어아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너는 철평고가 저 사람과 좋아지내고 있다는 거야?"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거예요? 저분이 어디가 못
마땅하단 말씀이에요? 적어도 저분은 당신보다 남의 말을 잘 들어
요. 자기의 말을 잘 듣는 남자를 여인들은 가장 좋아한답니다."
소어아는 그녀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더니 중얼거렸다.
"그 말도 일 리가 있어. 그녀는 남자들에게 수없이 분통 터지는
일을 당했으니까 말을 잘 듣는 남자를 찾아 마음껏 화풀이를 하려
고 생각했음에 틀림없을 것 같군."
그는 다시 고개를 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그녀가 무엇 때문에 저 사람으로 하여금 우리를
붙잡고 시간을 끌게 한단 말이야? 무엇 때문에 우리를 속이려 들
겠어?"
소앵은 지근지근 입술을 깨물며 느린 어조로 대답했다.
"생각해 보세요. 그녀가 이 숙부와 무슨 관계가 없나 말이에
요."
"그들이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이야?"
"이 숙부는 작고하신 철노선배님의 사위가 아니었어요?"
소어아는 그말을 듣자 돌연 철평고가 악인곡과 이대취라는 말을
듣고는 곧 표정이 변하여 굳어졌던 일이 생각났다. 그는 가슴이
두근거림을 느꼈다.
소어아는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고 급히 몸을 날려 뜰을 지
나 집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서는 흐느껴 우는 울음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소어아는 그 소리를 듣자 그 울음소리의 주인공이 놀랍게도 바
로 철평고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문을 열어 젖히고 방 안
으로 들어섰다.
이대취는 마치 목상처럼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었는데 얼굴에는
차마 바라볼 수 없을 정도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철평고는 그의 곁에서 흐느끼며 서있었는데 그녀의 손에는 날카
로운 비수가 들려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손은 맥이 풀려 축 늘어져 있었다.
소어아는 그것을 보고 어리둥절해 하며 자기도 모르게 외쳤다.
"이것이 도대체 어찌된 일이지? 아가씨, 당신은 이 숙부를 알고
있었소?"
철평고는 그의 말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다만 소리를 죽
여 흐느낄 뿐이었다. 이대취는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저 애가 나를 알고 있었던 것은 아마도 자네가 태어나기 전부
터였을 것일세."
소어아가 의아스럽다는 듯 물었다.
"그렇다면 저 여자가 숙부와...... 무슨......."
이대취는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서글픈 어조로 대답했다.
"저 애는 바로 나의 딸이야."
소어아는 그 말을 듣고나자 얼떨떨해져 버렸다. 아내까지 먹어
치운 그에게 딸이 있었단 말인가!
이대취는 소어아의 생각을 알아차린 듯 탄식을 하며 말했다.
"세상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이대취가 자기의 아내를 잡아먹어
버렸다고 알고 있지. 나는 한번도 그것을 부인해 본 적이 없어.
그렇지만 오늘은...... 아, 오늘은 그것에 대한 진상을 사실대로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지.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죽어도
눈을 제대로 감지 못 할 것이니까 말이야!"
그의 말 속에는 슬픔과 분노의 빛이 서려 있었다.
"철노영웅(鐵老英雄)은 재능을 목숨보다도 중하게 여기는 분이
었어. 그분은 나에게 과거를 뉘우치고 좋은 사람이 되라고 자기의
딸을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시집보냈지. 나는 그분의 호의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이 감격했어. 그렇지만...... 그렇지
만......."
그는 이를 악물더니 이어 이야기했다.
"그렇지만 그분의 딸은 나를 무시하고 괴롭혔어. 그녀는 나를
욕보이려는 의도에서 내가 없는 틈을 이용하여 그녀의 사제(師弟)
와 불륜의 관계를 맺고 있었더군."
소어아는 철무쌍(鐵無雙)의 사인(死因)에 생각이 미치자 탄식을
하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철무쌍은 비록 재능을 알아보는 안목은 지니고 있
었지만, 사람을 알아볼 줄 아는 안목은 없었습니다. 그의 제자들
중에는 확실히 나쁜 놈이 적지 않았으니까요."
이대취는 탄식하듯이 계속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녀에 대해 무척 원망스러운 마음을 품지 않을 수가 없
었고 또한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 그렇지만 철노영웅의 깊은
은정(恩情)을 생각하니 나는 그녀가 잘못을 뉘우치고 바르게 행동
해주기만을 바랬어.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남들이 그런 추문을
알게되면 얼굴을 들 수 없는 창피스러운 일이니 깨끗하게 관계를
끊도록 하라고 타일렀네."
그의 얼굴이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그는 이를 악물며 계속
말을 이었다.
"그렇게 좋은 말로 타일렀으나 그녀는 나의 말을 들은 체도 하
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도리어 병신 같은 놈이 쓸데없는 참견을 한
다고 욕을 퍼부으며 자기의 일에 간섭하지 말라고 호통을 치더군.
나는 도저히 더 이상 화를 누를 길이 없어 단숨에 그녀를 쳐죽여
서 삶아 뜯어 먹음으로써 나의 분을 풀어버린 것이었어!"
소앵은 그 말을 듣자 의아스럽다는 듯 물었다.
"그러한 곡절이 있었군요. 그렇다면 숙부께서는 무엇 때문에 그
러한 내막을 여지껏 말씀하시지 않으셨지요?"
"첫째 철노영웅의 명예를 손상시키고 싶지 않아서였어. 그분이
마음 아파하는 것을 볼 수는 없었지. 그리고 둘째로는 나의 체면
도 생각해서였고."
그는 서글프게 한번 웃었다.
"생각을 해보게. 강호의 사람들이 만약 이대취의 아내가 서방질
을 하던 파렴치한 여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내가 어떻게 얼
굴을 쳐들고 살아갈 수 있겠어. 그녀로 인해 가뜩이나 뼈에 사무
치는 한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 어찌 뭇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수
있겠나?"
소앵은 그의 처지를 동정하는 듯 고개를 숙이고 얘기에 귀를 기
울이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죽이고 나서, 강호에는 이제 내가 발붙일 곳이 없
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어. 철무쌍은 그런 사실을 결코 알지 못
하기 때문에 원한에 사무쳐 나를 만나게 되면 천만갈래로 찢어 죽
이려고 들 것이 분명하니까. 나는 하는 수 없이 밤을 이용해 악인
곡으로 들어가면 되었지만 그렇다고......."
그는 철평고를 한 번 쳐다보고 나서 서글픈 어조로 계속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내 딸들이 그러한 곳에서 성장하는 걸 원치 않
았어. 다른 사람에게 아이들을 키워달라고 부탁하기로 했지. 나는
오직 딸애가 아무 일 없이 편안하게 자라나 일생을 아무런 근심도
없이 지내게 하고 싶다는 소망 뿐이었으니까......."
소어아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누구에게 딸을 길러달라고 부탁했습니까?"
이대취는 저주스럽다는 어조로 대답했다.
"나는 원래 그 사람만은 나의 친구이리라고 생각했는데......
누가 알았겠나...... 나 같은 사람에게 애당초 친구 같은 게 있을
리가 만무했지."
철평고는 홀연 통곡을 하며 그의 말을 이었다.
"그 두 부부는 밤낮으로 저의 자매를 보기만 하면 너는 못 된
이대취의 딸년이니 너 역시 쓸모없는 못 된 종자라고 온갖 욕설을
다 퍼부으며 괴롭혔지요. 저는 하는 수 없이 아주 어렸었지만 동
생과 함께 그 집에서 뛰쳐나오고 말았지요."
이대취는 서글픈 어조로 말했다.
"네가 이화궁에 투신한 일은 정말 불행 중 다행이었어!"
철평고의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 내렸다.
"그 후 저는 사람들에게서 이...... 이...... 말을 듣게 되
었......."
소앵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당신은 사람들이 이 숙부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자 당신의
아버지가 당신의 어머니를 죽였을 뿐 아니라 자기의 일생까지도
망쳐 놓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철평고는 얼굴이 온통 눈물투성이가 되어 흐느꼈으며 아무말도
하지 못 했다.
이대취가 서글프게 대답했다.
"그래서 저애는 오늘 나를 죽이려고 왔던 것이지. 그것을 탓하
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어. 당연한 일이니까 말이야. 그것은 저
애가 너무도...... 저 애가......."
한 마디 한 마디를 할 때마다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걷잡
을 수 없이 쏟아졌다. 그는 더 이상 말을 계속하지 못 했다.
소어아가 홀연 큰소리로 외쳤다.
"오늘 부녀가 서로 만나게 되어 쌓였던 오해가 모두 풀렸으니
마땅히 기뻐해야지 무엇 때문에 보기 싫게 훌쩍거리고 계십니까?"
이대취는 손바닥으로 탁자를 내리치며 큰소리로 외쳤다.
"소어아의 말이 옳아. 오늘은 모두가 즐거워해야 되는 날이니
지금부터는 눈물을 흘리지 말도록 하자!"
소어아가 그의 말을 받았다.
"다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사람을 아내로 삼
아 매일 나의 냄새나는 발을 씻도록 하겠소!"
철평고도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손바닥으로 연신 눈물을 훔쳐냈
다. 그러나 이때 소앵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엉엉 울기 시
작했다.
소어아는 어리둥절해 했다.
"너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슬프게 울지? 너도 이 숙부님의 따님
이란 말이냐?"
"나는 당신에게 시집을 가고 싶어서 우는 거예요. 당신은 당신
이 한 말을 벌써 잊었어요?"
그녀는 말을 채 끝맺지도 않고 낄낄 소리를 내며 웃기 시작했
다.
철평고도 그것을 보자 마침내 울음을 그치고 웃지 않을 수가 없
었다.
그때 도약사가 방으로 들어왔다. 철평고의 눈물을 닦아 주려는
지 그는 그녀에게로 다가섰다. 그러나 뜻밖에도 철평고는 외면을
했다.
"누가 당신에게 가까이 오라고 했어요? 당장 비켜요!"
도약사는 그녀의 말을 듣자 얼굴을 붉히며 한쪽 옆으로 물러섰
다.
소앵은 그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오늘은 기쁜 일에 기쁨을 더하는 즐거운 날인가 보군요."
이대취는 도약사와 딸을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이분은......?"
도약사가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숙였다.
"후배는 성이 도이고 이름은 약사라고 합니다."
"도약사, 도약사라. 그렇다면 그대가 바로 십이성상 중의 도약
사란 말인가?"
"바로 후배입니다."
이대취는 껄껄거리며 앙천대소했다.
"십이성상이 나의 후배가 되다니 정말 뜻밖인 걸. 역시 예쁜 딸
을 두는 것도 괜찮군!"
철평고는 화를 내는 기색이 없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도약사는 감히 그녀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는 듯 멀찌감치 서서
힐끔힐끔 그녀의 표정을 훔쳐보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소앵이 말했다.
"마음을 좀 크게 가지세요. 만약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제가
곁에서 도와드릴 테니까요."
소아아는 손뼉을 치며 웃어 제꼈다.
"자네는 무엇 때문에 엎드려 인사드리고 장인이라고 떳떳하게
부르지 못 하고 멍청하게 서있는가?"
도약사는 그 말을 듣자 얼굴을 붉히며 엎드려 절을 하려고 했
다. 그러나 철평고가 그를 한 번 흘겨보자 그는 곧 놀라 일어섰
다. 그는 안색마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소어아는 강옥랑 때문에 철평고가 고통스러워하며 가슴 아파 했
던 것을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의 모습을 보자 그녀의 상처가 이
제는 치유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도약사는 나이가 비록 많았지만, 철평고는 활짝 피었다가 시드
는 꽃 같이 그에 의해 온갖 감정의 변화를 맛본 것이었다.
나이가 든 만큼 여자의 섬세한 감정을 이해하고 상처를 포용할
수 있는 그런 여유가 도약사에게는 없었다.
소어아는 탄식을 하며 중얼거렸다.
"보아하니 하느님께서는 일찌기 한 사람 한 사람의 짝을 정해
놓으신 것 같군. 지극히 어울려서 조금도 불안해하거나 걱정할 필
요가 없는 상대를 말이야."
소앵은 그 말을 듣고 웃음을 보였다.
"그렇구 말구요. 하느님께서는 벌써부터 당신과 나를 짝지울 상
대라고 정해 놓으신 것이랍니다. 그러니 당신이 아무리 그렇지 않
다고 발버둥을 쳐도 헛수고일 뿐 아무 소용도 없을 거예요."
소어아가 눈을 부릅뜨며 그녀에게 뭐라 쏘아 주려고 할 때 이대
취가 말했다.
"오늘은 정말 즐거운 날이로군. 나는 여지껏 살아오면서 오늘
같이 마음 편한 날이 없었고 오늘 같이 즐거운 날도 없었어. 내가
이렇게 죽을 수 있게 되는 것을 보니 나의 한평생도 그렇게 억울
한 것은 아니었......."
그는 말소리가 점점 미약해지더니 조용히 웃음을 머금고 마치
즐겁게 깊은 잠에 빠져든 것 같이 숨을 거두었다.
철평고와 도약사는 이미 이대취의 유해를 모시고 떠났다.
막 떠나갈 때에 철평고는 소어아에게 무슨 할 말이 있는 듯 잠
시 멈칫거리다가 결국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떠나갔다.
소어아는 그녀가 자기에게 물어보려했던 것이 강옥랑에 관한 것
임을 짐작했다. 그러나 그녀가 결국은 묻지 않는 것을 보니 강옥
랑에 대한 것을 모두 잊기로 결심한 것 같아서 소어아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듯한 홀가분한 기분이 되었다.
도약사도 소어아에게 무슨 말을 물어보고 싶은 듯 머뭇거렸으나
그 역시 철평고와 마찬가지로 아무말도 묻지 않고 떠났다.
소어아는 그가 물어 보려고 했던 것이 백 부인에 대한 것임을
역시 짐작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도 역시 모든 과거지사를 궁
금한 마음과 함께 묻어버리기로 한 모양이었다.
소어아는 미소를 띠고 중얼거렸다.
"이상하단 말야. 그들 두 사람이 어떻게 해서 좋아하게 되었는
지 전혀 알 수가 없는 걸. 정말 괴상한 일이로군!"
소앵은 그 말을 듣고 부드러운 어조로 대꾸했다.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실 것 없어요. 그들은 환난(患難) 중에
서로 알게 된 것이니까요. 사람들은 대개 환난을 당했을 때 알게
된 사람에게 마음이 끌리는 법이거든요. 더구나 그들은 모두 마음
의 상처가 있었던 사람들이 동병상련이라고 마음이 끌리게 된 것
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어요?"
그녀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당신과 저도 환난 중에 서로 가까와지게 된 것이 아니에요?"
소어아는 그녀를 향해 코를 찡긋거리며 대답했다.
"당신은 나와 사이가 좋아지려고 하고 있지만 내가 당신과 사이
가 좋아지려고 생각하는지는 모르는 것이 아니오?"
"벌써 잊고 계신 모양이군요. 그것이 하느님의 깊으신 배려라는
것을 말이에요!"
"너무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걸. 당신은 당신의 정적
(情敵)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 좋을 거
야. 단정지어 말할 수는 없지만......."
그는 원래 소앵을 아무말도 하지 못 하게 만들어 놓으려고 했었
다. 그러나 철심난과 화무결을 생각하자 목구멍에 마치 커다란 응
어리라도 박힌 것 같이 목이 메어 이야기를 계속할 수가 없었다.
소앵은 이 말을 듣자 침중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말도 하지 않
고 한동안 잠자코 있더니 홀연 한숨을 내쉬며 탄식하듯이 말했다.
"보아하니 당신과 화무결과의 일전은 이제 도저히 피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 같군요?"
소어아도 한숨을 내쉬었다.
"음! 그렇게 된 것 같아?"
"당신은 어떻게 하면 일전을 연기할 수 있겠나 궁리하고 계신가
요?"
"음!"
그는 고개를 쳐들어 소앵을 주시하며 물었다.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네가 어떻게 알았지?"
소앵은 빙그레 웃었다.
"그런 것을 이심전심이라고 부른답니다."
그녀의 달콤하게 미소짓던 얼굴에 돌연 수심이 떠오르더니 양미
간이 좁혀졌다.
"당신은 방법을 생각해 내셨나요?"
소어아는 걱정할 필요가 조금도 없다는 듯 털썩 자리에 앉았다.
"안심해. 다 궁리가 되어 있으니까!"
소앵은 부드럽게 물었다.
"저도 당신에게 반드시 방법이 있으리라고 믿고 있어요. 그렇지
만 또 얼마를 연기한다해도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소어아는 눈을 부릅떴다.
"그게 왜 아무 쓸모도 없단 말이야?"
소앵은 탄식을 하며 말했다.
"또다시 지연시킨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해결해야 할 일이기도
해요. 이화궁주가 절대로 당신을 그대로 놓아주지는 않을 테니까
요. 생각해 보세요. 그녀들은 산동(山洞) 속에 갇혀 있을 때는 당
신과 친해진 것 같더니 일단 그곳을 벗어나오자 곧 태도를 바꾸지
않았어요?"
소어아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는 그녀들이 그러리라는 것을 벌써부터 짐작하고 있었어."
"그렇기 때문에 화무결과의 일전은 피하기 어렵다는 것이에요.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원치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된다는 말이지!"
소앵은 정이 듬뿍 어린 눈으로 그를 주시하며 천천히 말문을 열
었다.
"우리 둘이 함께 먼 곳으로 가요. 산좋고 물좋은 살기좋은 곳을
찾아가서 어느 누구도 만나지 않고 어느 누구의 일에도 간섭하지
않으며 은거해 살자는 것이에요."
소어아는 그 말을 듣자 한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 후
그는 돌연 큰 목소리로 말했다.
"안 돼, 나는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어. 만약 평생토록 아무도
만나지 않고 숨어 산다면 죽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이야? 더구
나 나에겐 연 백부님이 계셔. 벌써 그분에게 굳게 약속을 했잖
아?"
"저도 당신이 절대로 그렇게 하시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
어요. 그렇지만 당신과 화무결이 일전을 벌이게 된다면 꼭 생사의
판가름이 나야만 끝나게 될 거예요."
소어아가 멍하니 먼 곳을 응시하며 중얼거리듯이 대답했다.
"그래, 우리들이 일전을 벌이게 되면 누가 죽든지 한 사람이 죽
어야만 판가름이 나게 될 거야......."
그는 소앵을 바라보며 한 번 싱긋 웃더니 계속해서 말했다.
"그렇지. 우리 두 사람 중 한 사람만 죽게 된다면 일이 깨끗하
게 해결되겠군. 그렇지?"
"당신은...... 당신은 그를 암살하려는 것이에요?"
소어아는 눈을 꼭 감고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소앵의 목소리가 다시 서글퍼졌다.
"저도 당신들의 승부가 무예의 고저(高低)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문제는 누가 더 악독한 마음을 품을 수
있느냐는 것에 달려 있어요. 악독한 마음을 품을 수 있는 사람만
이 승리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녀는 소어아의 손을 꼭 쥐더니 더듬거리는 듯한 어조로 말했
다.
"저는 당신에게 꼭 한 가지 듣고 싶은 말이 있어요."
비련(悲戀)
소어아는 웃으며 물었다.
"너를 아내로 맞이하겠다는 말을 듣고 싶다는 것이겠지?"
소앵이 입술을 지긋이 깨물고 고개를 숙일 뿐 더 이상 말을 하
지 않았다.
소어아는 얼굴에 여전히 웃음을 띠운 채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내가 죽어버린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
"그렇게 된다면...... 그렇게 된다면 저도 당신과 함께 죽는 것
이지요......."
그녀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마치 넋을 잃은 사람 같이 소어
아를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저는 죽고 싶지 않아요. 저는 당신과 함께 백 년이고
천 년이고 살고 싶어요. 우리들이 함께 살게 된다면 하루 하루가
무척 즐거운 나날들이 될 거예요."
소어아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눈빛을 띠우고 그녀를 주시했다.
"만약에 제가 죽음으로써 당신을 구할 수만 있다면 저는 서슴지
않고 죽겠어요......."
그녀가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이렇게 대답하자 미처 그녀의 말
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소어아는 그녀를 끌어 안았다.
"안심해. 우리들은 모두 절대로 죽지 않을 테니까. 반드시 잘
살아야 하지 않겠어?"
그는 창 밖의 하늘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최소한 하루는 즐겁게 살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죽음을 생각
해야 한단 말이지?"
하루라는 시간은 원래 아주 짧은 것이었지만, 서로 깊이 사랑하
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루의 달콤한 시간은 그들의 무수한 고통
을 잊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깊은밤.
산속은 깊은 정적이 깃들어 있었다. 산악으로 둘러싸여 있는 현
무궁(玄武宮)에는 삼삼오오 사람들이 둘러 앉아 조용히 깊은 산중
의 정적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화무결에게는 이 조용한 깊은 산중의 정적이 정말로 견
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사당에는 철전과 그의 친구들, 모용자매와 그녀들의 남편들, 이
화궁주 등 사람들이 아주 많았으나 그들의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가 않았다.
아마도 화무결이 조용히 휴식을 취해 다음 날 아침에 있을 악전
에 대비하도록 하려는 배려에서인 것 같았다.
그러나 화무결은 이 깊은 정적을 도저히 감당해낼 수가 없었으
며 차라리 누구라도 곁에서 말을 좀 걸어 주었으면 하고 생각했
다. 그러나 누구에게 그렇게 하소연 할 수가 있겠는가! 그는 고독
했다.
바람이 불어 창문을 흔들었다. 그는 마치 바람도 그의 처지를
동정해서 울어 주는 듯 생각되었다.
화무결은 마치 부처라도 된 것처럼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는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철심난을 생각하고 있는 것
일까? 아니면 소어아를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그가 누구를 생각
하고 있든지간에 그것은 모두 고통스러운 것들이었다.
방 안에는 불도 켜지 않은 채였고, 탁자 위에는 그가 미처 마시
지 않은 술이 놓여 있었다.
그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막 술잔을 집어 들려고 할 때, 홀연
가볍게 문이 열리더니 한 가냘픈 사람의 그림자가 방 안으로 들어
섰다. 그 사람은 철심난이었다.
어둠 속이었으나 그녀의 안색은 백지장 같이 창백했고, 한쌍의
눈은 두려움을 느끼게 할 정도로 반짝였다.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것을 보니 무척이나 긴장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화무결은 놀란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볼 뿐 아무말도 하지를 못
했다.
철심난도 조용히 문을 닫고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그를 응시할
뿐이었다.
한동안 조용한 침묵이 흐른 뒤 화무결이 비로소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향해 물었다.
"당신...... 무슨 일이 있었소?"
철심난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화무결은 그녀의 활활 타오르는 듯한 눈빛을 바라보며 또다시
한동안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마침내 술잔을 집어들고 마시려고 하다가는 술잔에 술이 비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내려 놓았다.
철심난이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저는 당신을 저의 오빠 같이 생각하며 행동해 왔고 또 그렇기
를 희망했었어요. 그렇지만 지금에 와서야 저는 저의 생각이 전혀
틀린 것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저의 당신에 대한 감정이 형제
지간의 우애 같은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이지요. 우
리들은 무엇 때문에 자기 스스로를 속여야 한단 말입니까?"
화무결은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술잔조차 다시 집어들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철심난에 대한 감정이나 철심난의 자신에 대한 감
정을 이미 확연하게 느끼고 있기는 했었다. 그러나 철심난이 자기
에게 그 말을 서슴지 않고 할 줄은 전혀 뜻밖이었다.
그는 자기들 마음 속의 비밀은 영원히 말할 수가 없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자기들이 죽게 되면 그러한 비밀은 자기들 가슴 깊
숙히 묻힌 채 없어지게 되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달빛이 교교하게 비치는 가운데 철심난이 그를 응시하며 듬뿍
정이 어린 어조로 얘기를 계속했다.
"당신은 저에 대한 감정이 절대로 형제간의 우정 같은 것은 아
니라고 일찍부터 느끼고 있었어요. 그렇죠?"
그녀의, 마치 가슴 속을 꿰뚫듯이 반짝이는 눈빛을 화무결은 도
저히 피할 수가 없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며 더듬거렸다.
"그렇지만...... 나는...... 나는......."
철심난은 재촉하듯이 물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계시지 않았다는 말씀이에요? 아니면 차마 이
야기를 하실 수 없었다는 것인가요?"
화무결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서글픈 어조로 대답했다.
"아마도 나는 이야기 할 수 없을 것 같소."
"무엇 때문에 이야기 하실 수 없다는 것입니까?"
그녀는 감정에 북바치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영원히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 나을 것이
오."
철심난은 서글프게 웃었다.
"그렇지요. 저도 원래는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생각했었어요. 그
러나 지금은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될 때인 것 같았기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어요. 만약 지금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이야기할 기회가 없을 테니까요."
화무결은 서글픈 표정으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소. 만약 지금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영원히 이야기
할 기회가 없을 것이오."
철심난의 눈에서 눈물 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는 거예요. 창피스
럽고 부끄럽다고 생각하세요?"
화무결은 찢어지는 듯한 마음의 아픔을 느끼며 자기 자신이 어
찌해서 철심난보다도 용기가 없는지 자기 자신을 원망하고 힐책했
다.
"소어아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저도 우리들이 이렇
게 된 것에 대해 그에게 미안스러움을 느끼고 있으니까요. 그렇지
만 지금은 명백하게 알게 되었어요. 그러한 감정은 억지로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요."
화무결이 고개를 들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바다보다 깊
은 정이 담겨 있는 눈빛을 보며 그는 자기 자신이 억제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이게 되어감을 느꼈다.
"내일은 바로 당신과 그가 생사를 판가름 할 결전을 벌이는 날
이에요. 저는 생각을 거듭한 끝에 저의 마음을 모두 당신에게 이
야기 하기로 결심했어요. 당신이 저의 마음을 알게 된다면 다른
것은 아무 것도 꺼리낄 것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에요."
화무결은 더 이상 참고 있을 수가 없어 그녀의 손목을 움켜 잡
았다. 그는 떨리는 어조로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나는...... 나는...... 나는 당신에 대해 무척 감격하고 있소.
당신은 나에게 이렇게 잘 해줄 것까지는 없는 것이오."
철심난은 돌연 활짝 웃음을 보였다.
"응당 당신에게 잘 해드려야 하지요. 잊고 계신 것 같군요. 우
리는 이미 결혼을 한 것과 같아요. 저는 당신의 아내이거든요."
화무결은 마치 정신나간 듯 멍하니 그녀를 응시했고, 그녀의 손
은 이미 그의 얼굴로 옮겨와 따뜻하고 부드럽게 수척해진 그의 두
볼을 하염없이 쓰다듬었다.
한 방울의 눈물이 그녀의 손위에 떨어지면서 마치 한 알의 진주
알처럼 반짝이다가 부서져 버렸다.
화무결과 철심난은 조용히 서로 기대고 앉아 끝없이 펼쳐진 어
둠과 깊은 정적을 즐기고 있었다.
애정이라는 기이한 꽃은 따사로운 태양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빗방울이나 이슬을 필요로 하지 않으면서도 어두움 속에서 더욱
아름답게 피어나는 꽃송이인 것이다.
그러나 창문의 창호지가 점점 밝게 비쳐오더니 긴밤이 어느 사
이에 지나갔다.
아침의 여명이 대지에 스미기 시작했다.
철심난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날이 밝았군요. 정말 빠르게도 날이 밝는군요?"
화무결은 창 밖의 아침 햇살을 바라보며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여지껏 살아오는 동안 느껴보지 못 했었던 짧은 행복의 순
간이 동터오는 아침 햇살과 함께 끝나버렸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
이었다. 광명(光明)은 비록 모든 사람들에게 무궁한 희망을 안겨
주는 것이지만 지금 그에게는 오직 고통만을 느끼게 해줄 뿐이었
다.
철심난은 물었다.
"당신은 그가 오늘 꼭 오리라고 생각하고 계시나요?"
"그도 오지 않을 수는 도저히 없을 것 같소."
"그렇겠군요. 언제든 조만간에 해결해야 할 일이고, 피하려고
발버둥쳐 보아도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저는 비록 생
각하고 싶지 않지만 도저히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내일 아
침이 되면 이 세상이 어떠한 모습으로 변할까 하고 말이에요."
화무결은 서글프게 웃었다.
"내일 아침이 된다해도 태양은 여전히 그대로 떠오를 것이고,
모든 사물도 변한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오."
"그렇지만 우리들은요?......."
그녀는 화무결을 힘껏 껴안더니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어떻게 된다 해도, 지금 우리들은 함께 있을 수 있으니 그에
비하면 우리들이 더 행복한 셈이지요."
화무결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끼며 길게 탄식했다.
"그렇소. 우리들은 정말 그에 비한다면 무척이나 행복한 셈이
오. 그렇지만 그는......."
"그 사람은 정말 가련한 사람이에요. 그는 여지껏 살아오는 동
안 털끝 만큼의 쾌락도 느껴보지 못 했으며, 부모도, 친척도, 친
구도 없이 살았어요. 어디를 가거나 사람들은 그를 냉담하게 대했
지요. 그가 죽는다고 해도 그를 위해 눈물을 흘려 줄 사람은 아마
몇 명안될 거예요.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그를 나쁜 사람으로 알
고 있기때문........"
그녀는 결국 흐느낌 속에 더 이상 말을 계속하지 못 했다.
화무결은 어둡고 침울한 어조로 말했다.
"그는 여지껏 살아오는 동안 많은 재난과 불행스러운 일들만을
겪었소......."
그는 철심난을 바라보며 고통스러운 듯 말을 잇지 못 했다.
소어아가 그런 일생을 살아오는 동안 전심전력(全專全力)을 기
울여 오직 그를 사랑한 사람이 있었다면 바로 그 사람은 철심난이
었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화무결은 고개를 숙이고 젖어있는 눈시울을 옷소매로 닦아냈다.
철심난도 고개를 숙였다.
"저는...... 한 가지 당신의 대답을 듣고 싶은 것이 있어요. 응
락을 해 주실지 알 수가 없군요."
"내가 어떻게 당신의 말에 응락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이오?"
철심난은 멍하니 먼 곳을 응시하며 말했다.
"저는 그가 죽게 된다면 실로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 할 것이라
고 느끼고 있어요. 아마도......."
그녀는 고개를 돌려 깊은 정이 담겨 있는 시선으로 화무결을 응
시하며 한 자 한 자를 똑똑히 이야기 했다.
"저는 당신에게 그를 죽이지 말라고 간청하고 싶어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그를 죽이지 말라고 말이에요!"
그순간 화무결은 전신의 피가 모두 놀라움에 엉겨 붙어버린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그는 그녀에게 외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내가 그를 죽이지 않는다면 그가 나를 죽일 것이라는 것은 알
기나 하고 하는 소리오? 그가 살기만 한다면 나 같은 것은 죽어도
아깝지 않다는 말이오? 당신이 어젯밤에 온 것이 나에게 단지 그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단 말이오?)
그러나 화무결은 그런 말을 입 밖에 내지 못 할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는 어떤 상처를 입는다 해도 다른 사람에게는 상처를
입히기를 원치 않는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사랑하는 사람
의 마음에 상처를 입힐 말을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단지 씁쓸한 웃음을 한 번 지을 뿐이었다.
"당신이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해도 나 자신 역시 그를 죽이지
는 못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소."
철심난은 그를 뚫어질 듯이 응시했다.
그녀의 눈빛 속에는 부드러움과 동정, 비통, 심지어는 가슴 속
깊이 우러나온 존경심이 충만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다른 말은 하지 않고 단지 가볍게 한마디만을 말
했다.
"고마와요."
태양은 아직 둥글게 떠오르지 않았다. 젖빛의 뿌연 아침 안개가
대지와 산악에 가득차 있었다. 서늘한 아침 바람이 초목의 향기를
머금고 불어왔다.
소어아는 상쾌한 듯 길게 심호흡을 하고 나서 중얼거리듯 말했
다.
"오늘은 보아하니 아주 좋은 날씨일 것 같군. 이렇게 좋은 날에
구인들 죽음을 생각할 수 있으랴?"
소얏은 미소를 머금고 그의 몸에 기대앉아 생각했다.
(날씨가 좋든 나쁘든 간에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어
요.)
그러나 그녀는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녀는 지금
소어아와 말다툼을 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소어아가 태
양은 네모진 것이고, 달은 길쭉한 것이라고 한다해도 반대할 생각
이 전혀 없었다. 소어아는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어떤 사람이 죽음을 생각하건 하지 않건간에 날씨와는 그
다지 관계가 없는 것이지. 만약 그가 막 결혼을 하고 과거에 장원
으로 급제 했다고 한다면, 삼 년 아니라 십 년 동안 비가 계속해
서 쏟아진다고 해도 죽고 싶은 생각은 없을 테니까."
소앵은 빙그레 웃었다.
"당신의 말씀이 정말 옳아요."
"만약 어떤 사람이 아내를 샛서방에게 도둑 맞은 데다가 자식이
강도질까지 했다면, 날씨가 좋든 나쁘든간에 죽음을 생각하고 또
죽으려고 하겠지."
"조금도 틀리지 않아요."
소어아는 눈을 부릅뜨며 언성을 높였다.
"아내가 서방질을 했건 아들이 강도질을 했건 그것은 그의 아내
나 아들이 한 것인데 무엇 때문에 그가 죽어야 한다는 말이냐?"
"저는 그가 죽어야 한다고는 말하지 않았어요."
"네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도대체 누가 말한 것이란 말이
야?"
"좋아요. 제가 말한 것으로 해 두세요. 제가 잘못 했어요."
소어아가 펄쩍 뛰었다.
"네가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한데, 넌 무엇 때문에 그
것을 네가 이야기 했다고 하며 또한 잘못을 비는 거야?"
소앵은 어처구니 없다는 듯 눈망울을 굴렸다.
"당신은 정말 말다툼 하기를 무척 좋아하는 것 같군요?"
"그래 나는 말다툼을 하려고 생각하고 있어. 그게 어쨌단 말이
야?"
소앵이 돌연 큰소리로 외쳤다.
"그렇다면 제가 당신에게 말씀드리지요. 당신은 정말 아무 줏대
도 없는 큰 멍텅구리로군요. 사나이 대장부라면 응당 한 번 이야
기한 것은 좋건 나쁘건간에 일단 산에서 싸우기로 결정했으면 시
원스럽고 통쾌하게 산에서 한 번 싸워보는 것이지, 그렇게 사람도
만나기 전에 자기의 마음을 흐트러뜨리고 애꿎은 사람에게 분풀이
나 하려고 하다니 이번의 일전은 하지 않는 것이 더 좋아요. 당신
은 싸워보기도 전에 마음이 어지러워졌으니, 결과야 어떻든간에
자기 자신에게 먼저 패한 것이거든요."
그녀가 조리있고 준엄하게 꾸짖자 소어아는 펄쩍 뛰기는 커녕
도리어 조용해져 얼떨떨한 듯 멍하니 서있었다. 그는 탄식하며 말
했다.
"너의 말은 조금도 틀리지 않아. 나는 확실히 큰 멍텅구리야.
싸워 보기도 전에 마음이 어지러워졌으니 정말 싸운다면 반드시
패할 것이 틀림없어."
소앵은 그가 고개를 숙이고 상심하는 것을 보자 안타깝고 가련
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가볍게 그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몇
마디 위로의 말을 하려고 했다. 이때 한 사나이의 침중한 목소리
가 들려왔다.
"싸움에서 마음이 어지러우면 필히 패한다고 했다. 너는 그런
도리를 명백하게 알고 있으니 이젠 마음을 안정시키도록 해라. 너
도 알다시피 이번의 싸움은 실로 어렵고도 큰 싸움이다. 그리고
절대로 패해서는 안 된다."
소어아는 보지 않아도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연남천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며 오직 한마디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연남천의 우람한 몸집은 미처 밝지도 않은 아침 안개 속에 산신
이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이 보였다. 그는 타는 듯이 번쩍이는 눈
초리로 소어아를 주시했다.
"너의 은원관계는 모두 끝맺음을 했느냐?"
"그렇습니다."
그는 돌연 고개를 들었다.
"그렇지만 한 분의 큰 은혜는 아직까지 갚지를 못 했습니다."
"누구인데?"
"바로 만춘류(萬春流), 만 백부님입니다."
연남천의 준엄하고 매서운 눈초리에 따뜻한 빛이 보였다.
"너의 그러한 마음만으로도 그분의 너에 대한 은정은 저버리지
않은 것이 되는 것이다. 비와 이슬이 만물을 적셔주는 것은 만물
의 보답을 바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오직 만물이 잘 자라나는 것
으로 그는 아주 만족하게 생각하는 것이야. 반드시 보답을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겠느냐?"
"저는 지금 오직 그분이 어디에 계신지, 몸은 편안하신지, 하는
것만을 알고 싶을 뿐입니다."
"너는 그를 만나보고 싶으냐?"
"그렇습니다."
연남천이 담담하게 웃음을 지었다.
"잘됐군. 그도 너를 만나보고 싶어 기다리고 있다."
소어아는 크게 기뻐했다.
"그분께서 지금 바로 이 부근에 계시단 말입니까?"
"그는 어제 저녁에야 이곳에 도착했단다."
소앵도 일찍부터 인술(仁術)을 베푼다는 이 일대9一代)의 신의
(神醫)를 만나보고 싶어했다.
바라보니 긴 도포를 입고 황관을 쓰고 있는 도인이 뒷짐을 지고
한 그루의 늙은 소나무 아래 서있는 것이 보였다. 속세를 벗어난
듯한 깨끗하고 인자스러운 모습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말로 표
현할 수 없는 평화스러움과 편안함을 느끼게 했다.
소어아는 한편으로는 놀랍고, 또 한편으로는 기뻐하며 달려 갔
다. 그는 원래 생각하고 있었던 말을 다하고 말겠다고 다짐을 했
었지만 창졸지간에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를 몰랐다. 마치 무엇인
가가 목구멍을 꽉 메우고 있기라도 한 듯 그는 한마디의 말도 하
지 못 했다.
만춘류의 조용했던 표정에도 격동된 빛이 떠올랐다. 두 사람은
서로 두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글썽거리며 웃음을 띠고 있었다.
연남천도 감격스러움을 금치 못 하겠다는 웃음을 띠고 그들의 모
습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돌연 말문을 열었다.
"이미 해가 떠올랐으니 나는 가보도록 하겠다."
소어아가 말했다.
"저도......."
"너는 잠시 이곳에 머물러 있어도 무방하다."
그는 침중한 표정을 짓더니 이어 말했다.
"너의 마음이 아직 안정되어 있지 못 하니 지금은 싸움을 하기
에 부적당하기 때문이야."
만춘류가 그의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오랫동안 머물러 있는 것도 좋지 않지. 마
음이 더욱 어지러워지게 되니까."
연남천이 말했다.
"그렇다면 그들과 오시(午時) 삼각(三刻)에 약속을 하겠소."
마지막 한마디와 함께 그의 몸은 이미 구름 같이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만춘류는 소어아와 소앵을 번갈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사실 나도 그냥 가려고 생각했다만 너희들은 후에라도 이야기
할 기회가 많을 것 같고 나는......."
소어아는 양미간을 찌뿌렸다.
"백부님께서는 어찌 하시려는 것입니까?"
만춘류는 한숨을 내쉬었다.
"너를 만나보는 것 외에는 속세에 나의 마음을 머무르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구나."
소어아는 그 말을 듣자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돌연 고개를 돌
려 소앵을 바라보았다.
"남자들이 이야기 하는 것을 너는 무엇하려고 곁에서 듣고 있
지?"
소앵은 웃었다.
"당신과 노인장 사이에 제가 들어서는 안 되는 비밀 이야기라도
있다는 말인가요?"
"비밀 이야기가 있든 없든 간에 남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여인
이 곁에서 듣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야."
소앵은 눈초리를 치켜 세웠다.
"그렇다면 밖으로 나가 한바탕 시원한 바람이나 쏘이며 산보나
하고 오는 것이 좋겠군요."
만춘류는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굴레를 벗어난 야생마 같은 여인이 마침내 사랑의 올가미에 얽
혀 들은 것 같군."
소어아는 입술을 삐쭉 거렸다.
"그녀는 평생토록 나를 사로잡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직 저
만이 그녀를 사로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아! 그랬었나?"
"그녀가 만약 저의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았다면 저는 벌써 그
녀를 발길로 차버렸을 것입니다."
"소어아는 역시 소어아로군. 마음 속은 한없이 연약하면서 입으
로만은 연약한 체 하지 않는군."
"누가 저의 마음이 연약하다고 말하던가요?"
"그녀가 만약 너에 대한 확실한 파악이 없었다면 무엇 때문에
네가 하라는 대로 아무말 없이 따르겠느냐? 만약 후에 네가 자기
의 말에 순종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다면 지금 너의 말을
그렇게 아무 반발도 하지 않고 들었을 것 같으냐?"
그는 미소지으며 계속해서 말했다.
"그런 방면은 영원토록 여인이 남자보다 총명하다고 할 수 있
지. 여인들은 절대로 손해보는 일은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 두
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소어아가 한동안 눈을 껌벅거리다가 말했다.
"병을 치료하시고 약초를 수집하시는 일만은 저보다 능하시지만
여인에 대한 것은......."
그는 히히 웃으며 말을 끝맺지 않았다.
"젊은 사람들은 모두들 자기만이 여인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자부심을 갖고 있지. 그렇지만 나이를 먹게 되면 그제서야 비로소
자기가 여인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
닫게 되는 법이야."
"저는 백부님에게 여인에 대한 것을 가르쳐 달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도 벌써부터 네가 나에게 아주 비밀리에 이야기하고 싶은 것
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이야기
해봐라. 나는 어떠한 일이든간에 너에 대해서는 도저히 거절할 수
가 없으니까 말이다."
그의 눈초리에 웃음빛이 가득 떠오르더니, 소어아를 주시하며
또 말했다.
"너는 옛날에 나에게 물었던 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겠지? 냄
새가 아주 지독해 한번 냄새를 맡게 되면 기절해 쓰러질 수 있는
고약한 냄새가 나는 약이 없느냐고 하던 일 말이다. 이번에는 또
누구에게 장난을 하려는 것인지 아주 궁금하구나."
소어아는 그때의 일을 생각해 내고 자기 자신도 웃음을 금치 못
했다.
그러나 그는 한참을 웃다가 돌연 정색을 하더니 목소리를 가다
듬고 말했다.
"이번에 제가 도움을 받고 싶어하는 것은 장난을 하려고 도와달
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생명이 걸려있는 지극히 중요한 문제입니
다."
"도대체 어떤 일이기에 그러느냐?"
소어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오직......."
이 두 달 사이에 소앵은 소어아에 대해서 아주 깊이 알게 되었
다.
여인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 잘 알게 되는 것은 그다
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남자는 다른 것이다.
남자가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되면 더욱 더 그 여인에 대해서 알
지 못 하게 되어 버리고, 그 여인에 대해서 잘 알게 되었을 때는
아마도 그때는 그 자신이 그 여인을 사랑하지 않게 되었을 때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평소 소어아가 마음 속으로 무엇을 생각하고 있으며 또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지 소앵은 십중팔구는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그러
나 이번에는 정말 그가 만춘류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지 도
저히 추측할 수 없었다.
그녀는 원래 멀리 가려고는 생각지 않았었다. 그렇지만 무슨 중
대한 결심이라도 한 듯 돌연 그녀의 눈빛이 밝게 빛났다.
그녀는 곧 길을 바꾸어 총총히 산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발걸음을 재촉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화궁주와 화무결, 이미 산에서 이틀 간을 기다린 것 같은
데...... 사람이 머물만한 곳이라면 필시.......)
산등성이의 숲 사이로 붉은 담장의 한 모서리가 보였다. 그녀는
바로 그곳이 지난 날에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던 곳이지
만 지금은 향화(香火) 마저 끊어질 정도로 쇠락해버린 현무궁(玄
武宮) 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몇 사람이 걸
어나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사람들은 모두들 고령의 노인들이었으나 민첩한 동작과 광채
를 발하는 번쩍이는 눈빛이 모두들 무예계에 알려진 일류 고수들
같았다. 그중 한 사람은 등에 특이한 형상을 하고 정교하게 만들
어진 큰 북을 둘러 메고 있었다.
또 그중에는 늙어서 이가 다 빠져버린 듯한 한 노파가 있었다.
그녀는 추파를 이리저리 보내며 미처 이야기도 하기 전부터 웃음
부터 짓는 말하자면 아직도 애교가 있다고 할 수 있는 노파였다.
보아하니 젊었던 시절에는 바람께나 피웠을 풍류인물 같았다.
소앵은 그 사람들을 알지 못 했다. 강호 무예계의 고수들 가운
데 등에 북을 메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었
다. 그러나 그녀는 그 중의 한 사람만은 알 수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철심난이었다.
그녀는 철심난을 보자 그녀의 모습이 며칠 전에 보았던 것 같이
그렇게 초췌해 보이지 않고 얼굴에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
로 기이한 광채가 떠도는 것을 발견했다. 의아스러움을 느꼈으나
그 연유는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곁에 있던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어쩐지 철심난에게
자신을 보이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산 위를 향하여 걷고 있었다.
님을 위하여
철심난 일행의 이야기 소리를 소앵은 모두 들을 수는 없었다.
그 중에 구레나룻이 짙고 용맹스러워 보이는 한 노인의 말소리가
특별히 커서 알아들을 수 있었다.
"소란(小蘭), 너는 무엇을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고 있느냐? 나
는 너에게 죽더라도 화무결과 함께 죽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그에
게 달라붙으라고 권하고 싶다. 그녀석은 좀 계집애 같은 기질이
있는 것같아 보이지만, 아무리 보아도 너와는 알맞는 배필인 것
같으니까 말이다."
철심난은 고개를 숙이고 있어 그녀가 무엇이라고 대답을 했는지
또는 잠자코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 노인이 또다시 그녀의 어깨를 토닥거리고 나서 웃으며 말했
다.
"앙큼한 것 같으니! 너는 이 늙은이 앞에서 무슨 흉물을 떨려는
것이냐? 어젯밤 너는 도대체 어디에 갔었지? 너는 이 아빠가 정말
늙어 망녕이 나서 아무 것도 알지 못 하고 있는 줄 아느냐?"
철심난은 그래도 아무말을 하지않고 오직 얼굴만 붉혔다.
이가 빠져버린 노파가 웃으며 다시 말했다.
"나는 여지껏 자기의 딸에게 그런 장난을 하려고 드는 사람은
보지 못 했어. 보아하니 넌 정말로 망녕이 난 늙은이 같구나."
그 구레나룻이 난 노인은 기분이 좋은 듯 앙천대소 하기 시작했
다.
소앵은 그들이 주고받는 말로 철심난과 화무결이 친밀한 사이가
된 것과 철심난의 아버지마저 그녀가 화무결에게 시집가기를 권하
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소앵은 놀랍고도 기뻐서 가슴이 방망이질
을 치는 것 같이 두근거림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실로 소앵에게는 즐겁고 마음 놓이는 일이었기 때문이었
다.
그 노인이 껄껄 웃으며 말하는 소리가 또 들려왔다.
"이미 화무결에게로 마음을 정하고도 무엇 때문에 걱정이 있어
보이느냐? 싸움이 끝나고 난 다음 내가 너희들을 성혼 시켜줄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그 노파도 따라 웃었다.
"미래의 남편이 싸움을 하는데 어찌 걱정스럽지 않겠나? 만약
저 애가 나라고 한다면 나는 일찌기 궁리를 해서 그...... 그 조
그만 물고기를 죽여 없애고 말겠어."
그 노인은 대소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어보니 누가 당신을 마누라로 얻
게 된다면 정말로 내조를 잘 하는 현모양처를 얻게 되는 것이로구
만 그래."
노파가 그의 말에 대답했다.
"그렇구 말구. 그렇지만 아깝게도 넌 그럴 복이 없지."
다른 한 사람 키가 크고 삐쩍마른 노인이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
었다.
"보아하니 화무결 그 녀석은 정기(精氣)가 흘러넘치는 것이 보
기만해도 내외공(內外功) 모두가 이미 깊은 경지에 도달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 선천적으로 타고난 좋은 재질에다가 후천적으로
는 유명한 스승의 전수를 받았으니 무예가 절정의 경지에 도달해
있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지. 그 강소어라는 녀석은 나이는 그와
비슷하지만 무예는 결코 그와 같은 경지에 도달해 있지 못 할 거
야. 그러니 이번 싸움은 절대로 패할 리가 없지. 그를 걱정할 필
요는 조금도 없어요."
그가 그렇게 이야기를 하자, 다른 사람들은 모두들 홀가분한 표
정을 지었지만 소앵은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원래 이번 싸움의 승부가 절대로 무예의 강약에 좌우되
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자신의 생각
이 잘못이었음을 돌연 깨달았다. 소어아의 무예가 만약 화무결의
무예와 도저히 적수가 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난다면 그가 아
무리 독하고 사나운 마음을 먹는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었
다.
그녀는 이 싸움의 관건이 화무결이 사납고 독한 마음을 갖고 소
어아에게 손을 쓰느냐 쓰지 않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라고 느껴졌
다. 그리고 그녀 자신도 소어아의 무예가 결코 화무결의 적수는
되지 못 한다고 생각했다.
만약 지혜를 가지고 겨룬다면 소어아가 필시 이길 것이다. 그러
나 두 사람이 무예로 겨룬다면 추호도 소어아가 이길 수 있다는
승산은 없었다.
그녀는 소어아를 이번 싸움에서 이길 수 있도록 하려면 소어아
로 하여금 독한 마음을 갖게하는 것은 물론, 화무결로 하여금 독
한 마음을 품지 못 하도록 하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다
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한 생각은 마치, 원님은 불을 질러 방화를 일삼으면서도 백
성들에게는 불도 켜지 못 하게 한다는 속담과 같아 자기 자신이
생각해도 황당무계한 생각이라고 느껴졌다.
(나는 소어아는 화무결을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무엇 때문
에 화무결은 소어아를 죽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가? 화무결은
살아서는 안 된단 말인가? 그가 자신을 희생해 가며 죽음을 택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소앵은 한숨을 내쉬며 화무결의 처지에 서서 생각해 본 적은 없
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의 안중에는 소어아의 생명이 화무결의 생명보다 더욱 중요
한 것이라고 비쳐 왔었지만 다른 사람의 눈에는 어떻게 비춰졌을
까?)
온갖 상념이 그녀의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소앵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더욱 마음이 어지러워졌다.
사실 그녀는 이리저리 궁리를 해가며 깊은 생각을 했지만 결국
에는 단 한 가지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소어아가 살아 있도록 하려면 화무결을 죽일 수밖에 없다. 죽은
사람은 살인을 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소앵이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모용가의 자매들과 그녀들의 남
편들이 현무궁에서 나왔다.
그들은 모두 눈에 붉은 핏발이 서 있었고 시들한 표정을 하고
있어서 그들이 이틀 동안 한숨도 자지 못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
다. 사해(四海)를 벗삼으며 어디에서도 편히 쉴 수 있다는 말이
이 호의호식을 하며 자라난 사람들에게는 통용되지 않는 것 같았
다.
그들은 잠자리만 바뀌어도 잠을 못 이루는 종류의 사람들인데,
어찌 쌀쌀한 한기가 떠도는 다 헐어 빠진 묘에서 잠을 이룰 수 있
었으랴!
그러나 그들의 차림새는 모두들 아주 단정하고 깨끗했으며 머리
도 곱게 빗어넘겨 비녀를 꽂고 있었다. 손을 벨것 같이 날이 서
있는 의복은 주름살 하나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들은 강한 어조로 의논이 분분했고 소앵은 들어보지 않아도
그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소어아와 화무결의 일전에 대한 것
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이 산으로 올라가고 난 후 또다시 한동안 기다렸으나 현무
궁에서는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다. 전혀 사람의 동정이라고는
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화무결은 아직도 현무궁에 머물러 있을까? 이화궁주도 그와 함
께 있는 것이 아닐까?
소앵은 이를 악물고 한 번 모험을 해보기로 결정했다.
그녀는 대전에 임박해서 그 사람들이 먼저 나온 것은 아마도 화
무결로 하여금 조용히 쉴 수 있도록 해 주려는 뜻일 것이라고 생
각했다. 아마도 산 정상으로 먼저 가 기다릴 모양이었다.
그녀는 지금쯤은 연남천도 산에 도착해 있을 것이니 이화궁주도
역시 이곳에 머물러 있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들은
최소한 화무결이 조용히 앉아 어떻게 싸움에 임할 것인가를 생각
할 수 있도록 피해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현무궁은 근년에 비록 향화가 끊어질 정도로 쇠락하고 솥 밑을
벅벅 긁을 정도로 궁했지만 몇몇의 도인(道人)들이 머물러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묘문 안에 있는 뜰에는 몇 그루의 하늘을 뒤덮을 듯이 크고 무
성한 잣나무가 있어 태양이 비록 높이 떠올라 있었지만 뜰 안은
햇살 하나 비치지 않을 정도로 어둠침침 했다.
소앵은 빠른 발걸음으로 조용히 뜰을 지나 높다란 층계를 올라
갔다. 바라보니 대전(大殿) 안 향불이 타는 연기 속에 현무상이
보였다. 몸에 칠해져 있는 금박은 벌써 벗겨져 나간 듯 찾아볼 수
없었고, 그가 앉아 있는 구사 이장(二將)은 오랫동안 인간의 혈식
(血食)을 받지 못 해서인 듯 언뜻 보기에도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
는 조각들이 회색인지 황색인지 분간 조차 할 수 없게 변해 있었
다.
십여 명쯤 되어보이는 도사들이 그곳에 단정히 앉아 고개를 숙
이고 입 속으로 무엇인가를 웅얼웅얼 거리고 있었다.
소앵은 혹시 그들에게서 무슨 소식이라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그들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그들은 마치 아무 것도 보이
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여전히 무엇인지 알 수 었는 말을 웅얼거
리고 있었다.
소앵은 그들이 자신을 본 체 만 체 하고 염불만 외우고 있자 속
으로 화가 치밀었지만 국 눌러 참았다.
젊은 여인의 몸으로 어찌 늙은 도사들과 시비를 할 수 있으랴!
후원에는 양 옆으로 방들이 쭉 늘어서 있었지만 사람의 그림자
라고는 찾을 수 없었다.
화무결도 이미 떠났단 말인가?
소앵이 머뭇거리며 생각하다가 홀연 둥글게 만들어진 문 뒤에
있는 죽림(竹林) 속에 몇 개의 방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곧 그곳이 현무궁 방장(方丈)의 방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이번에 벌어질 구경거리의 주인공은 화무결이니 그는 필
시 방장실(方丈室)에 묵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앵이 다가가 바라보니 방장실의 덧문은 횡하니 열려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처마 밑에는 거미줄이 가득했으며 귀뚜라미의
소슬한 울음소리가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며 들려왔다. 나무잎이
바람에 날려 떨어지며 창문을 때리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하게 입
을 열었다.
"화 공자(花公子)!"
그러나 방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화무결이 이미 갔다는 말인가?
그러나 소앵은 일단 여기까지 온 바에야 어떻게 되었든 간에 들
어가 보기나 하자고 문을 열고 방 안을 바라보았다. 방 안에는 흰
탁자 위에 술병들과 몇 가지의 안주가 놓여 있었다.
화무결은 아직 가지 않고 그 방 안에 남아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정신이 몇만 리 밖으로라도 날아가 버린 듯 멍하
니 창가에 서 있었다.
그와같이 이목(耳目)이 영민한 사람이 소앵이 다가가도록 모르
고 서있는 것이 아닌가!
창문으로 비쳐드는 햇빛을 받은 그의 안색은 창호지보다도 더욱
창백해 보였다. 그의 눈에는 붉게 핏발이 서 있었으며 그의 표정
은 더 할 수 없이 위축되어 보였다.
(대전(大戰)을 바로 눈앞에 두고 있는데도 이화궁주는 무엇 때
문에 그의 정신을 북돋아 줄 방법을 강구하지도 않는 것일까? 어
떠한 상황에 처하게 되더라도 그가 소어아를 손쉽게 격파시킬 것
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안심을 한 탓일까? 아니면 승부 따위에는
추호도 관심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그녀들은 단지 소어아와 화무
결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 외에는 어떠한 일도 관심이 없기 때
문이 아닐까)
소앵은 이리저리 생각을 해보았지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화무결이 길게 탄식을 했다.
그의 탄식 속에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상심과 비통함이 깊
이 스며 있는 듯 했다.
그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비통해 하는 것일까?
소어아 때문에 상심을 하고 있단 말인가?
소앵은 천천히 그의 곁으로 다가 갔다.
"화 공자......."
화무결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소앵을 바라 보았다.
소앵은 그의 눈빛도 소어아와 마찬가지로 밝게 빛나서 사람의
마음을 설레이게 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두 눈은 마치 죽은 송장의 눈 같이 아무런 광채도 없었으며, 심지
어는 움직이지 않아 그러한 눈을 바라보기는 진정 괴로운 일이었
다.
소앵은 그를 바라보자 식은땀이 흘러내림을 느꼈으나 억지로 웃
음을 지었다.
"저를 못 알아 보시지는 않으실 텐데요?"
화무결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나에게 온 것은 소어아를 죽이지 말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오?"
소앵이 얼떨떨해 하며 미처 대답도 하지 못 하고 있을 때 화무
결이 낄낄거리며 대소하기 시작했다.
그의 웃음 소리는 마치 미친 사람의 웃음 소리 같이 기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소앵은 놀라고 당황했다.
"모두들 나에게 소어아를 죽이지 말라고 요구하고 있소. 그런데
무엇 때문에 소어아에게 가서 나를 죽이지 말라고 전하는 사람은
없단 말이오? 나는 죽어도 당연한 사람이란 말이오?"
"그것은...... 그것은 아마도 소어아는 절대로 당신을 죽일 수
없다고 모두들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 거예요."
화무결이 웃음을 멈추었다.
"그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소? 그도 자기가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소."
"그가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그런 것을 절대로 말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렇소. 그는 아주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고, 아무도 그 자신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소. 그렇지만......."
그는 소앵을 쏘아보며 큰소리로 말했다.
"그는 무엇 때문에 당신으로 하여금 그러한 청을 하도록 한 것
이오?"
"그는 제가 이곳에 온 것도 모르고 있어요."
"모르고 있다고?"
소앵은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알았더라면 절대로 저를 보내지 않았을 거예요. 그리고
제가 지금 이곳에 온 것은 당신에게 그런 청을 하기 위한 것이 아
닙니다."
화무결은 의아스럽다는 듯 물었다.
"그런 청을 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고요?"
"아닙니다."
그녀는 화무결을 쏘아보며 한마디 한마디 똑똑하게 말했다.
"나는 당신을 죽이려고 온 것이에요!"
그녀의 말을 듣자 화무결은 어리둥절한 듯 한동안 소앵을 주시
하다가 돌연 또다시 껄껄 웃기 시작했다.
소맹은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믿지 못 하겠다는 것 같군요?"
화무결은 대소했다.
"당신이 나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오?"
"당신은 내가 당신을 죽일 수 없다고 생각하세요?"
화무결이 돌연 웃음을 멈추었다가 또다시 웃기 시작했다.
"만약 정말로 나를 죽이려고 온 것이라면 그런 말을 하지는 못
했을 것이오."
"무엇 때문이죠?"
"당신이 만약 그 말을 입 밖에 내어 말하지 않았다면 기회가 있
었을 것이니까 하는 말이오."
"이야기 했기 때문에 기회가 없게 되었다는 말씀인가요?"
"아주 없다고는 말할 수 없어도 기회가 아주 적을 것이오."
소앵은 웃었다.
"나의 기회는 최소한 소어아 보다는 많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
다면 나는 절대로 이곳에 오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녀는 돌아서서 탁자 위에 놓여 있는 두 개의 술잔에 술을 가
득 따라 놓은 다음 계속해서 말했다.
"만약 당신과 무예를 겨눈다면 승산이 추호도 없음을 나 자신도
잘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우리들은 사람이지 야수가 아닙니다.
야수는 오직 무력만으로 모든 일을 해결하려고 하지만, 사람은 꼭
그렇게 하지 않고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거든요."
"도대체 무슨 방법을 써서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이오?"
"사람이 쓸 수 있는 방법은 야수들 같이 야만스러운 것이 아니
고 좀더 아름다운 흥취를 느낄 수 있는 것이지요."
그녀는 돌아서서 탁자에 놓여 있는 두 개의 술잔을 가리켰다.
"저 두 잔의 술은 내가 방금 따라 놓은 것입니다."
"그것은 나도 보았소."
"저 두 잔의 술잔 가운데서 당신이 한 잔을 선택해 마시면 우리
들의 문제는 깨끗하게 해결이 나지요."
"어떻게 해서 그렇게 하기만 한다면 해결이 난다고 하는 것이
오?"
"내가 그 두 개의 술잔 중 하나에 독을 넣었기 때문이지요. 만
약 그 독이 들어 있는 술잔을 선택해서 마시게 된다면 바로 당신
이 죽게 될 것이고 당신이 만약 독이 들어 있지 않은 술잔을 선택
하여 마시게 된다면 바로 내가 죽게 되는 것이에요."
그녀가 담담하게 웃더니 이어 말했다.
"어떻습니까? 이 방법은 얼마나 깨끗하고 흥취가 있으며, 또한
얼마나 공평한 방법입니까?"
화무결은 탁자 위에 놓여 있는 두 개의 술잔을 바라보더니 눈
가장자리의 근육이 경련을 일으켰다.
소앵이 말했다.
"그런 방법을 선택할 용기가 없다는 것인가요?"
화무결은 목멘 소리로 말했다.
"내가 무엇 때문에 반드시 한 개의 술잔을 선택해야 된다는 말
이오?"
"그것은 내가 당신과 생사의 판가름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지요.
이 이유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말인가요?"
"내가 무엇 때문에 당신과 생사의 판가름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
소."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 때문에 소어아와 생사의 판가름을 하려
고 한단 말이오? 당신은 그와 생사의 판가름을 할 수 있는데,
나는 당신과 생사의 판가름을 해서는 왜 안 된단 말인가요? 그것
은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요? 어서 이유를 명백하게 말씀해 보시지
요!"
화무결은 그녀의 말에 또다시 얼떨떨해져 아무말도 하지 못 했
다.
소앵은 차가운 어조로 다시 물었다.
"승산이 불분명하기 때문인가요? 그렇다면 당신은 상대방을 이
길 수 있다는 승산이 선 후에야 비로소 상대방과 판가름을 해보자
고 덤벼드는 종류의 사람에 불과하군요?"
그녀는 냉소를 터뜨렸다.
"이긴다는 승산이 선 다음 다른 사람과 결투를 하자고 덤벼든다
면 그것은 결투가 아니라 바로 모살(謀殺)이라는 것이오!"
화무결의 안색은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비참하게 변했다. 식
은 땀이 한방울 한방울 콧잔등에서 샘솟듯 솟아 나왔다.
소앵은 계속 냉소를 터뜨렸다.
"당신이 하지 못 하겠다고 한다면 나도 억지로 그렇게 하자고
권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그렇게 한다면......."
화무결은 이를 악물더니 마침내 한 개의 술잔을 집어 들었다.
소앵이 그를 쏘아보며 한마디 한마디 힘주어 말했다.
"술잔에 독이 있건 없건 각에 그것은 당신이 선택한 것이에요.
그리고 난 당신에게 그것을 집어 들라고 강요하지 않았어요. 우리
들의 결투는 지금껏 세상에 알려져 있는 어떤 결투보다 지극히 공
평한 것이지요."
화무결은 웃음을 보였다.
"그렇소. 이것은 확실히 아주 공평한 것이요, 나는......."
이때 돌연 한 사람이 큰소리로 외치며 그의 말을 끊었다.
"그것은 조금도 공평한 것이 아니오. 당신은 절대로 그 술잔의
술을 마셔서는 안 되오."
거칠게 열어 젖히는 문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달려 들어왔다.
그 사람은 바로 소어아였다.
그가 나타난 것을 본 소앵은 놀라며 물었다.
"당신이 어떻게 이곳에 왔지요?"
"흥, 나는 이곳에 오지 못 한다는 법이라도 있다는 말이냐?"
그는 화무결에게 다가가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술잔을 뺏어 들며
큰소리로 외쳤다.
"이 술은 내가 마셔야겠다."
소앵은 그의 말에 크게 안색이 변하더니 황급히 말했다.
"절대로 마셔서는 안 되오."
"무엇 때문에?"
"그것은 그것은...... 독이 들어 있기 때문이에요."
소어아가 차갑게 웃었다.
"당신은 이 술에 독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로
군."
"제가 따른 다음 독을 넣은 것인데 어찌 제가 모를 리가 있겠어
요."
소어아가 노하여 외쳤다.
"왜 독을 탄 술잔을 저 사람에게 마시도록 한 것이지?"
"이것은 바로 일장(一場)의 생사의 판가름을 하는 중요한 결투
예요. 독이 들어 있는 술잔을 집게 되면 자기의 불운을 탓해야 하
는 것이에요. 무엇 때문에 나를 탓하려고 한단 말입니까?"
그녀는 화무결을 쏘아보며 말했다.
"나는 당신에게 저 술잔을 집어 마시라고 권하지는 않았어요.
그렇지 않아요?"
화무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비록 죽음을 두려워 하지는 않았지만 방금 자기가 지옥의
문턱에까지 다달았었다는 생각이 들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손바
닥에 식은 땀이 베어들었다.
소어아는 술잔을 바라보고 나서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네가 이 술잔을 집어 들라고 권하지 않았다는 것은 잘 알
고 있지. 그렇지만 어떤 술잔을 집어들었든 간에 결과는 마찬가지
였을 것이야."
소앵은 말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소어아는 큰소리로 외쳤다.
"두 개의 술잔에 모두 독이 들었기 때문이지! 그런 방법으로 다
른 사람을 속일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절대로 나를 속일 수는 없
어. 저 사람은 어떤 잔을 선택하든 간에 마시기만 하면 죽을 것이
야."
소앵은 그를 주시하며 원망스럽다는 듯 굵은 눈물 방울을 뚝뚝
흘렸다.
소어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계속했다.
"화무결아 화무결, 당신의 큰 결점은 바로 너무 여인을 믿는 점
이야...."
소앵은 한스러운 듯 길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소어아야, 소어아, 당신의 큰 결점은 바로 여인을 너무 믿지
않는다는 점이에요."
그녀가 갑자기 탁자 위에 남아 있던 술잔을 집어 들더니 단숨에
마셔버렸다.
화무결은 그것을 보자 안색이 변하며 더듬거리듯 말했다.
"그녀...... 그녀를 탓한 것은 잘못이오. 그 술잔의 독주는 응
당 내가 마셔야겠소."
"무엇 때문에?"
화무결은 큰소리로 말했다.
"이것은 정말 아주 공평한 결투였고, 나는 이미 패한 것이니 죽
어도 아무 원통할 것이 없소!"
소앵은 탄식하듯이 말했다.
"당신은 정말 군자로군요."
소어아는 껄껄 웃었다.
"그렇지, 저 사람은 군자야. 나는 군자가 아니기 때문에 네가
하려고 하는 짓을 똑똑히 알 수 있는 것이지."
화무결은 노했다.
"당신은 어째서 저 여인에게 그런 말을 한단 말이오? 저 여인은
이미 그 술을 마시지 않았소!"
소어아는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저 여인은 이미 해독약을 복용했을 것이오. 이렇게 간단한 것
을 모르겠단 말이오?"
화무결은 그를 바라보며 다시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소앵도 그를 한동안 주시하다가 비로소 중얼거리듯 말했다.
"당신은 정말 총명한 사람이에요. 정말 너무도 총명한 사람이에
요!"
그녀는 서글프게 한 번 웃고나서 다시 말했다.
"어떻게 했었든 간에 내가 그렇게 한 것은 모두 당신을 위해서
였어요."
"네가 화무결을 죽였다고 해서 내가 너에게 고마워하며 감격할
줄 알았어?"
"저도 당신이 고맙게 생각하거나 감격해 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요. 당신들은 모두 영웅이기 때문이지요. 영웅은 영웅
인 상대를 다른 사람이 꾀를 써서 죽이기를 원치 않아요. 바로 자
기 자신의 손으로 죽이려고 하겠죠."
그녀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방울 방울 아롱져 떨어졌다. 그
러나 그녀는 곧 손등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았다.
"한 가지 당신에게 묻겠어요. 제가 계략을 써서 사람을 해치려
고 한 것과 당신들과 무엇이 다른가를 말씀해 보시라는 거예요."
소어아가 외쳤다.
"당연히 다르고 말고, 우리들은 최소한 당신보다는 광명정대 하
거든!"
소앵은 냉소를 터뜨렸다.
"광명정대 하다고요? 당신들은 서로 적수가 되지 못 한다는 것
을 모르고 계셨던가요? 그런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결투를 하는
것이 공평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흥! 정말 아주 공평하고 아주
광명정대하군요. 칼이나 창으로 살인을 해야만 공평하고 광명정대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나요? 개 같이 물어 뜯으며 싸우는 것을 배
워 신나게 서로 물어 뜯으며 싸우지 그래요? 광명정대한 것으로
말하자면 그렇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광명정대한 것일 텐데요!"
그녀는 손가락으로 소어아를 가리키며 말했다.
"더구나 내가 살인을 하려고 하는 것에는 최소한 뚜렷한 목적이
있어요. 그것은 바로 당신을 위해서라는 것이에요. 한 여인이 자
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하는 일이지요. 그런데 당신들은 도대
체 무엇을 위해 싸우는 것이지요?"
입술이 몹시 메말랐던지 침을 몇 모금 삼킨 그녀는 소어아를 향
해 또다시 날카로운 언사를 퍼부었다.
"당신들은 곧 목숨을 걸고 상대방을 죽이지 못 하면 상대방에게
죽어야 하는 처절한 싸움을 해야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당신
들은 누구를 위해 그러한 싸움을 하는 것이에요? 당신들은 정말
아무 목적도 없이 물어 뜯으며 싸우는 미친 개보다도 더 못 한 사
람들이에요."
소어아는 그녀의 말에 얼떨떨해져서 한마디의 말도 하지 못 했
다.
욕을 얻어 먹고도 마치 벙어리라도 된 것 같이 아무말도 하지
못한 것은 정말 그의 평생에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화무결은 그 자리에서 서서 움직이지도 못 한 채 식은 땀을 줄
줄 비오듯 흘리고 있었다.
소앵은 목메인 소리로 말했다.
"저는 음험스럽고 악독한 여인이고 당신은 광명정대한 대영웅이
시니 이후로는 저도 당신을 떠받들 생각은 추호도 갖지 않겠어요.
당신들이 싸워서 누가 죽고 누가 살건 이제는 나와 아무 상관도
없는......."
그녀는 점점 더 목이 메이는 듯 말을 계속하지 못 하다가 마침
내 참을 수 없는 듯 통곡하며 얼굴을 가리고 달려 나갔다.
그녀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은 것이다.
한 여인의 가슴이 찢어져나가는 듯한 마음의 상처는 영원히 돌
이킬 수가 없는 것이다.
오동나무 잎이 하나, 둘 창문을 때리며 떨어졌다. 담장 모서리
의 귀뚜라미는 쉬지 않고 울고 있었다. 처마밑의 거미줄은 바람에
날려 끊어져 가고 있다.
그러나 거미줄은 다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애정의
줄은 일단 끊어지게 되면 다시 이을 수가 없는 것이다.
사람은 거미와 같이 어떠한 방해와 괴롭힘을 받아도 다시 시작
하는 불요불굴(不撓不屈)의 정신을 갖기가 지극히 어렵다.
소어아와 화무결은 서로 마주 바라보며 오래도록 아무말도 하지
못 했다.
한참 후 화무결이 비로소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무엇 때문에 그 여인을 그렇게 대했소."
소어아 역시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당신과 나는 확실히 다른 점이 많소."
"사람과 사람이 완전히 같을 수는 없소."
"그녀는 나를 위해 목숨을 내걸고 당신과 판가름을 내려고 했지
만 나는 마치 개나 돼지를 나무라듯 욕을 퍼부었소. 그녀는 당신
을 죽이려고 했지만 도리어 당신은 그녀를 옹호하는 것 그것이 바
로 우리들의 가장 다른 점이지."
그는 쓴 웃음을 지었다.
"당신은 군자(君子)이고 나는......."
화무결은 그의 말을 가로 막았다.
"당신은 정말 당신 자신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군. 사실 당신
이야말로 정말 진정한 군자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나를
위해 그녀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겠소?"
소어아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해서였소."
"당신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고?"
"그렇소. 바로 내 자신을 위해서였던 것이지......."
그는 천천히 똑 같은 말을 다시 한 번 되풀이 했다. 그의 눈에
서는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빛이 번쩍였다.
화무결은 종종 그의 눈빛에서 번쩍이는 그러한 광채를 보았다.
그는 소어아의 눈빛을 보고 그가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소어아가 느릿느릿한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만약 당신을 다른 사람의 손에 죽도록 내버려 둔다면 일생 동
안 마음의 고생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오.
그러니 나를 위한 일이 되는 것이 아니겠소?"
화무결은 도저히 알 수 없다는 듯 의아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일생토록 마음의 고통을 면하기 어렵다니 그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이오?"
"그것은......."
그가 무어라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한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
다.
"그것은 바로 그가 너를 직접 죽이고 싶어서이지!"
요월궁주의 목소리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더욱 냉혹하
게 변해 있었다.
그녀는 얼굴도 변해 있었다. 비록 옛날과 마찬가지로 창백하고
냉혹했으나, 부드럽게 빛나는 광채가 떠돌아 이전에는 얼음 같았
다면 지금은 바로 한덩이의 옥을 깎아놓은 듯했다.
소어아는 그녀를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삼 일 못 본 사이에 당신은 더욱 젊어진 것 같군요. 천하의
여인들은 모두 당신의 그 명옥공(明玉功)을 익혀야 될 것이오. 정
말 당신은 복이 많은 사람인 것 같소."
요월궁주는 오직 차가운 눈초리로 그를 주시할 뿐 아무런 대꾸
도 하지 않았다.
소어아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당신들을 그곳에서 구해내게 되면 나의 일에는 더 이상
참견 하지 않을 줄로 알았소. 만약 이럴줄 알았다면 그 빠져나올
길 없는 쥐구멍 같은 굴 속에 그대로 있는 편이 더욱 좋았을 것인
데 그랬소. 그러면 당신은 나의 말을 순순히 들었을 것이고, 나에
대해 좀더 겸손했을 것인데."
요월궁주는 안색이 변했다.
"이제 할 말은 다 했느냐?"
"다했소. 그렇지만 한 가지 당신을 깨우쳐 주고 싶은 것이 있
소. 내가 구해 주지 않았더라면 당신은 좀더 젊어지기는 커녕 도
저히 나올 길이 없는 동굴 속에서 며칠 못가 굶어 죽었을 것이
오."
산정(山頂)에서 내려다 보이는 험준한 산에는 흰구름이 감돌고
있었고, 장강(長江)물은 마치 구렁이처럼 굽이쳐 흘러 가고 있었
다.
연남천은 홀로 가장 높은 곳에 외롭게 서있었다. 그 모습은 더
없이 적막해 보였다.
그러나 그는 일찍부터 적막감을 참을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
다. 자고 이래로 누구를 막론하고 깊은 산중에서 가장 높은 봉우
리에 올라 설 수 있는 사람은 먼저 어떻게 하면 적막감을 참고 이
겨나갈 수 있는가를 배우는 법이다.
산 위에는 비록 그 한 사람 뿐만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이 있는
곳과 그가 있는 곳은 아주 요원한 것 같이 느껴졌다.
바람이 불어 그의 웃자락은 펄럭였고, 흰구름은 그의 눈앞을 스
치고 지나갔다.
모용산산은 한숨을 내쉬더니 서글픈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앞을 보면 뛰어난 사람이 하나도 없고, 뒤돌아 보면 쫓아 오는
자가 하나도 없다더니...... 연 대협은 비록 절대(絶代)의 영웅이
긴 하지만 평생토록 살아오는 동안 단 한번이라도 즐거움을 느꼈
을까?"
곁에 있던 모용쌍이 그 말을 받았다.
"가장 높이 솟아있는 봉우리가 더욱 비바람을 세차게 받는다고
했는데 오직 홀로 솟아있는 단층누각이야 말해 무엇하겠
어......."
모용산산은 탄식을 했다.
"모름지기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이 특출하게 뛰어난 것보다 좋
을 것 같군."
이때 돌연 한 사람이 외쳤다.
"왔다. 왔어!"
모용쌍이 물었다.
"도대체 누가왔다는 말이오?"
모두를 돌아서서 바라보니 흰구름 사이로 소어아와 화무결의 모
습이 보였다.
소행은 마치 넋을 잃은 사람처럼 얼마나 멀리 왔는지, 어디로
가는 것인지 조차도 알지 못 하고 걷고 있었다.
그녀는 차라리 벼락이 떨어져 자신의 몸을 산산조각내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또한 소어아가 홀연 자기에게로 달려와 발 밑에 무릎을 꿇고 관
대한 용서를 빌면서 영원히 자기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해
주지 않는 것이 한스러웠다. 그러나, 소어아도 오지 않았고 벼락
도 떨어지지 않았다.
철심난이 서있는 곳에서는 소어아와 화무결 모두를 볼 수 있었
다. 그녀는 화무결의 눈에 서려 있는 고통스러운 빛을 보자 마음
이 산산조각으로 깨어지는 아픔을 느꼈다.
소어아는 조금도 걱정스러울 것이 없다는 듯 빙글거리며 서있었
다. 그는 화무결이 절대로 자기를 죽이지는 못 할 것이라고 생각
하고 있는 듯했다. 화무결을 상대해 이길 수 있다는 충분한 계산
이 서있는 것 같기도 했다.
철심난은 입술을 너무 세차게 깨물었기 때문에 피가 흐르기 시
작했다. 피는 찜질했고 마음은 쓰라렸다. 그러나 그 누가 그녀의
고심을 알아준단 말인가?
광사철전은 치미는 화를 참을 수 없다는 듯 연신 수염을 쓰다듬
으면서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화무결, 저 놈은 도무지 사리판단을 할줄 모르는 놈이로군. 내
이 늙은 장인은 그렇다 해도 최소한 난아(蘭兒)와는 몇 마디 이야
기라도 해야 도리가 아닌가?
소 노파가 곁에서 웃었다.
"너무 그렇게 억지를 부리지 마라. 네 사위는 이번 일전을 치루
고 나면 천하에 널리 이름이 알려질 텐데, 그렇게 좋은 사위에게
무슨 불만이 그렇게 많은가?"
"지금도 장인을 아는 체도 하지 않는데 명성을 얻고 난 후라면
더더욱 아는 체를 할 것 같소?"
"젊은 사람은 부끄럼이 많은 법인데 어찌 수많은 사람들이 주시
하고 있는 가운데 장인에게 다가와 인사를 한단 말인가? 더구나
그의 정적(情敵)이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고 있는데 말이야."
철심난은 그들이 주고받는 말을 듣고는 전신이 얼어붙는 것 같
은 오한을 느끼며 몸서리를 쳤다. 지금 바로 밀리 떠나지 못 함을
한스러워 했다.
그녀가 떠나지 못 하고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은 한마디 꼭 하
고 싶은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전(決戰)
세찬 바람이 휘몰아치듯 불어오자 천지간은 마치 살기(殺氣)가
가득찬 듯 느껴졌다.
소어아는 목을 움추렸다.
"정말 세찬 바람이로군. 어휴, 추워. 옷을 더 껴입고 올 걸 그
랬는데요."
연남천이 양미간을 찌푸리며 침중한 어조로 물었다.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추위를 느끼느냐?"
소어아는 웃음을 보였다.
"백부님 안심하세요. 저는 그렇게 허약하지는 않으니까요."
연남천이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느린 어조로 말했다.
"내공(內功)이, 불 같은 경지에 도달해 있는 사람은 비록 완전
히 추위나 더위를 느끼지 못 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최소한 보통
사람들 같이 그렇게 더위나 추위를 타지는 않는 법이다."
"그렇습니다."
"네가 익힌 무예는 무수한 무예계 선배님들이 심혈을 기울인 결
정(結晶)으로서 한 가지 한 가지 모두가 무예의 정화(精華)라고
할 수 있는 것이야. 만 대숙이 네 체력의 기초를 튼튼하게 해 주
었고, 너의 공력이 사로(邪路)에 들어서지 않았으니 화무결과 일
전을 벌이는 것에 대해 조금도 근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난 아직 너의 공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지 못 해. 넌
아주 총명하고 운도 좋기는 하지만 성격이 너무 들뜨기가 쉬워.
성격이 조급해서 그 무예를 완전히 단련했을른지 모르겠구나."
소어아는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듯 낄낄 소리죽
여 웃었다.
"다른 일에는 엄벙덤벙 했는지 모르지만, 무예를 익힐 때만은
성심성의껏 온 힘을 다 기울였습니다."
연남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만 하다면 오죽 좋겠느냐?"
그는 소어아의 얼굴을 쳐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화무결의 무예가 어떠한 것인지는 알고 있겠지?"
소어아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이화궁이 명성을 오랫동안 떨치고 있는 것은 실로 독특한 비장
의 무예가 있기 때문이지요. 더우기 그 '이화접옥(梨花接玉)'이라
는 무예는 실로 뛰어나기 그지없는 골치아픈 것 같더군요."
그러나 그는 곧 웃음을 보였다.
"다행스럽게도 저는 얼마간의 비결을 알아차리고 있지요."
연남천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이화접옥은 이화궁의 많은 무예 가운데 오직 한 가지에 불과한
것이야, 이화궁의 무예는 실로 변화가 아주 오묘하고 복잡하다.
냉정하게 참을성을 가지고 침착하게 수없이 되풀이 하여야만 익힐
수 있는 것이야. 더구나 내가 보기에 화무결은 겉보기로는 너보다
총명하지 못 한 것 같아도 사실은 절대로 너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는 것 같아. 너의 무예가 박이잡(博而雜)하다면 그의 무예는 정
이심(精而深)하니, 너는 절대로 그의 수법을 강경하게 막아 내려
고 하지 말아라. 먼저 그의 공력을 최대한 소모시켜 가며 다각적
인 공격을 가하는 것이 승리를 거둘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그에 비해서 우위
에 서게 되는 것이지요."
연남천은 매서운 어조로 날카롭게 말했다.
"무예의 도(道)에 있어서 우위에 설 수 있다는 것은 절대로 없
는 일이다. 네가 그보다 우위에 선다고 생각했다면 네가 먼저 패
한 것이 되는 셈이지."
소어아는 숙연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무예의 성질은 제가 모두 알
고 있지만 저의 무예에 대해서는 그가 전혀 알고 있는 바가 없습
니다. 제가 그렇게 말씀드릴 수 있었던 것은 제가 여지껏 사람들
앞에서 저의 진실한 무예를 썼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연남천의 눈언저리에 기쁨과 안도의 빛이 역력하게 나타났다.
그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주 잘 됐구나. 손자(孫子)의 병법에도 있듯이 적을 알고 나
를 알면 백전백승한다고 했으니까 말이다."
"연 백부님, 제가 한 가지 백부님께 여쭈어보고 싶은 것이 있습
니다."
"말해 보아라!"
"백부님께서는 요월궁주와 싸워 승산이 있습니까? 또한 그녀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계신지요?"
연남천은 멀리 떠도는 흰구름을 응시하며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서 있었다. 잠시 후 굳센 의지가 서려 있는 그의 입가에 일말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소어아의 물음에 대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
만 소어아 역시 그의 회답을 들을 필요조차 없다고 느낀 듯 미소
를 떠올렸다.
그때까지 한 옆에 서서 아무말도 하지 않던 만춘류가 말문을 열
었다.
"시간이 다 된 것 같은데 준비는 되었느냐?"
소어아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말했다.
"만 대숙께 여쭈어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만춘류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네가 묻는 말에 대해 내가 모두 대답을 해줄 수는 없지.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너보다 많지를 못 하거든."
소아아도 따라 웃는다.
"그렇지만 제가 만 대숙에게 여쭈어보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알고 계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품속에서 한 개의 술잔을 꺼내 들었다.
"이 술잔에는 아직 술이 조금 묻어 있습니다. 저는 이 술 속에
무색무미(無色無味)의 독이 들어 있지 않는가 하는 의심을 품고
있습니다. 만 대숙님 보십시오. 도대체 어떤 독이 들어 있는 것인
지?......."
만춘류는 술잔을 받아들자 새끼손가락으로 남아있는 술을 찍어
냄새를 맡아본 다음 다시 혀에 대고 맛을 보았다.
"이 술 속에는......."
소어아는 돌연 그의 말을 가로막고 웃음을 보였다.
"지금 저에게 알려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또 무엇 때문이냐?"
소어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술 속에 정말로 독이 들었다면 저는 아주 화를 내게 될
것이고, 술 속에 독이 없다해도 아주 견디기 어려울 것입니다. 제
가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싸움이 끝난 다음에 알려 주십시
오."
"좋다. 네녀석이 하는 짓은 정말 사람의 마음을 혼란시키는 엉
뚱한 일 뿐이로구나!"
그렇지만 소어아는 한 가지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가 만약 싸움에 패하여 죽게 된다면 영원히 그 회답을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모용가의 아가씨들과 그녀의 남편들은 모두들 소어아와 화무결,
두 사람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정황
을 살펴보고는 이상스러움을 느꼈다.
모용쌍이 말문을 열었다.
"너희들도 보았지? 소어아와 연 대협은 깊이 쌓인 회포라도 푸
는 것 같이 쉴사이 없이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는데 화무결과 이
화궁주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눈만 껌뻑거리고 있는 것을 말이
다."
모용산산이 대답했다.
"그래요. 보아하니 이화궁주는 화무결의 일전에 대한 승부에는
전혀 관심도 없는 것 같군. 그들 사도(師徒)간에는 조금도 정감
(情感)을 느끼지 못 하고 있는 것 같아."
남궁유가 탄식하며 그녀의 말을 이었다.
"아마도 화무결이 이번 싸움에 이길 것이 틀림없다고 확신하기
때문이겠지."
모용산산은 입을 삐쭉 내밀며 그의 말을 반박했다.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아요. 화무결은 비록 기지와 무예가
모두 뛰어나기는 해도 소어아도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거든
요. 무예만 가지고 싸운다 하더라도 그는 결코 뒤떨어지지 않아
요. 더구나......."
모용쌍이 그녀의 말을 이어 받았다.
"그렇지. 내가 보기로는 화무결의 무예가 좀 강한 것 같아. 그
러나 고수들의 싸움은 공력의 높고 낮음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
이 아니야. 상대방의 공격이나 수비를 막아내고 뚫을 수 있는 임
기응변과 더욱 기선(機先)을 제압하는 것이 중요하지."
진검이 끼어들며 말문을 열었다.
"내가 알고 있는 바로는 소어아의 무학(武學)은 해박하기 이를
데 없으며 여러 문파의 독특한 무예를 모두 겸비하고 있어 최소한
육할 정도의 승산은 있는 것 같소."
모용산산이 그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내가 보기로는 육할 정도의 승산에 그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요."
그들은 화무결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호감을 느끼지 못 하고 있
었다. 오직 소어아가 이기기만을 일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그렇지
만 광사 철전이 있는 그쪽 편 사람들은 완전히 그들과 달랐다.
노파는 철전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네가 보기로는 네 사위가 이번 싸움에 얼마 정도의 승산이 있
어보이나?"
철전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녀의 물음에 대답했다.
"십할 모두의 승산이 있지!"
노파는 실소했다.
"너무 큰소리를 치시는 것 같군. 내가 보기로는 저 소어아도 만
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야. 더구나 연남천이 뒤에서 보살펴주고 있
느니만치 그렇게 허술하지 않을거야."
"그게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이오? 연남천이 저놈을 대
신해서 싸울 수도 없는 것이고, 저녀석이 아무리 총명하다고 해도
이대취, 도교교 등이 길러낸 제자이니 강하다고 해보았자 별로 보
잘것 없는 상대이니까 말이오."
그녀는 깜짝 놀라며 정색을 했다.
"아 그랬었나? 나는 또 그가 연남천의 제자인줄 알았지. 그의
무공이 그 보잘 것 없는 악당들에게서 배운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면 구경조차 오지 않았을 것이야."
이때 연남천이 일어서며 말했다.
"이제 시간이 다 되었으니 가보도록 해라."
그의 말은 소어아에게 한 것이었지만 소리가 우피 같이 커서 온
산을 찌렁찌렁 울렸다.
화무결도 일어서더니 이화궁주를 향하여 허리를 굽혀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사부님, 저에게 무슨 분부하실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요월궁주가 대답했다.
"없다. 가 보도록 해라. 나는 네가 절대로 나를 실망시키지 않
을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녀의 말소리는 평정을 유지하고 조용하였으나, 그녀는 마음
속에서 치미는 격동을 금할 수 없었다.
최후의 시각은 마침내 오고야 말았다! 이번에 그녀는 어떠한 일
이 있더라도 절대로 이 일전을 도중에 그만 두도록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화무결과 소어아,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반
드시 꺼꾸러지고 말 것이라는 생각에 그녀의 지금 심정은 다른 사
람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긴장과 흥분으로 휩싸여 있었다.
그녀의 가슴은 소용돌이치듯 격동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사람은 단지 한 사람 바로 연성궁주
밖에는 없었다.
그녀의 안색은 평소보다 더욱 창백했다. 화무결이 고개를 돌려
자기를 바라볼 때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 하고 그들의 비밀을 이
야기하게 될까봐 황급히 그의 눈길을 피했다.
그녀는 원래 감정 같은 것은 느끼지도 않는 차갑기가 얼음보다
도 더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틀 사이에 자기의 마음이
변한 것을 느꼈다. 그것은 자기가 꿈에도 생각치 못 했던 일을 그
동굴 속에서 당하게 된 후부터 느끼게 된 감정이었다.
그녀는 일생을 살아오는 동안 죽음에 대해 심각히 생각해 본 일
이 없었다. 두려움을 느껴보지도 못 했으며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
려는 마음 같은 것은 가져본 적도 었었다.
어떤 사람에 대해 감격을 해 본 적이나 감사한 마음을 느껴 본
적도 없었다. 배고픔에 시달리며 허기져 못 견디게 되었던 적도
없었다. 배고픔이 어떠한 것이라는 것조차 느껴보지 못 했고, 취
하도록 술을 마셔본 적도 없었는데다가 더우기 자기가 한 남자의
품속에 안기게 되리라고 생각해 본 적은 꿈에도 없었다.
그랬었지만 그녀가 몇십 년 살아오는 동안 느끼거나 경험에 보
지 못 했던 뜻밖의 일들이 짧은 이삼 일 동안에 그녀의 신상에 발
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모든 사건의 인상은 모두 선명하고 심각하여 죽는다해도 잊지
못할 깊은 영향을 그녀에게 끼쳐 주었다. 그 이틀 동안의 소어아
를 생각하면 마음에 쓰라린 아픔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소어아는 자기에게 모든 것을 헌신적으로 잘 해주었는데 자기는
그에게 도대체 무엇을 해주었단 말인가?
이 악독하고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계획도 모두 자신이 생각해
냈던 것이 아닌가!
소어아와 화무결의 비참한 운명은 오직 그녀의 한마디 말로 뒤
바뀔 수 있는 것이었지만 그녀는 감히 그러한 말을 할 수가 없었
다.
소어아는 연남천과 만춘류에게 공손하게 예를 드린 다음 발걸음
을 옮겨 장중(場中)으로 걸어 나왔다.
화무결은 조금도 초조해 하거나 재촉하지 않고 묵묵히 그를 기
다리고 있었다.
소어아는 먼저 헌원삼광(軒轅三光)의 앞으로 다가가서 웃음띤
얼굴을 했다.
"이틀 사이에 재미가 어떠십니까?"
헌원삼광은 그때까지 쭉 그를 주시하고 있었지만 막상 그가 자
기 앞으로 다가오자 마음이 쓰라린 듯 눈시울을 붉히며 아무말도
하지 못 했다. 그는 한동안 서있다가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그의
말에 대답했다.
"요즈음은 아주 재수에 옴이라도 붙은 것 같네. 심지어는 내기
조차 걸어보고 싶은 마음도 없어져 버렸다네."
"도박의 귀신이라는 체면이 말씀 아니로군요. 물극필반(物極必
反)이라는 말도 알지 못 하시는가 보군요. 재수가 아주 나쁘다고
생각될 때에 큰 내기를 하면 오히려 다시 좋아진다는 것이지요."
헌원삼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일 리가 있는 걸...."
"지금 한번 내기를 걸어보고 싶으신 마음은 없으십니까?"
"지금?"
소어아는 눈을 껌벅거리며 웃고 있었다.
"지금 저의 몸에 아주 고약한 냄새가 나는 벌레가 있다고 하면
믿으실 수 있겠습니까?"
헌원삼광도 따라 웃었다.
"어찌 자네의 몸에 냄새가 고약한 취충이 있을 수 있겠나?"
"만약 믿지 못 하시겠다면 어째서 내기를 걸려고 하시지 않습니
까?"
헌원삼광이 참을 수 없다는 듯 황급히 물었다.
"무슨 내기를 하자는 말인가?"
"바로 한 마리의 취충입니다."
"내가 만약 진다면 한 마리의 취충을 잡아서 자네에게 달라는
말인가? 그래 자네는 취충을 가지고 도대체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
가?"
"그렇게 내기를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도대체 어떻게 내기를 하자는 말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걸?"
"저의 몸에 만약 취충이 없다면 저에게 한 마리를 잡아 주시어
제가 기르도록 한다는 것이고 만약 아저씨께서 지신다면 저의 몸
에 있는 취충을 한 마리 드릴테니 몸에 품어 기르도록......."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헌원삼광이 껄껄거리며 대소했
다.
"개나 고양이를 기르는 것은 보았지만 취충을 몸에 기른다는 말
은 도무지 금시초문인 걸. 그게 도대체 무엇하자는 것인가? 매일
물려 전신에 부스럼이나 만들자는 것인가?"
"그래서 못 하시겠다는 말씀이신가요?"
"내가 오십팔 년간 살아오도록 내기를 무서워해서 그만 둔 적은
한 번도 없었네."
"그렇다면 내기를 하시겠다는 말씀이신가요?"
"좋아. 내기를 하지."
소어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놀랐는데요. 그런 것까지 내기를 하자고 물러서지 않으시
니. 제가 졌습니다."
헌원삼광은 대소했다.
"나는 벌써부터 자네가 나를 놀려주려고 그런 말을 하는줄 알고
있었지. 내가 자네에게 당할 것 같았나?"
"이제 이기셨으니 빨리 한마리를 잡아서 저에게 주십시오. 그렇
지만 꼭 살아있는 것이라야 합니다. 만약 지금은 시간이 없어서
잡지 못 하시겠다면 다음에 잡아서 살이나 뚱뚱하게 찌도록 해주
십시오. 저는 취충을 좋아하기는 합니다만 삐쩍 마른 놈은 좋아하
지 않으니까요."
헌원삼광은 그의 말에 한동안 얼떨떨해져 있다가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보아하니 정말 내가 자네에게 당한 것 같군. 세상에 그런 내기
는 정말 자네 아니면 생각해내지 못 할......."
그러나 그는 웃던 웃음을 홀연 멈추고 소어아의 뒷모습을 바라
보았다. 그러나 그는 곧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눈시울을 붉게
물들이며 중얼거렸다.
"저 애가 반드시 죽게 될 것이라 생각하고 나를 마지막으로 즐
겁게 해주려고 그러한 말을 한 것 같군."
소아아는 히죽히죽거리며 모용가의 사람들 앞으로 다가왔다.
"여러분들 안녕하십니까?"
진봉초(秦鳳超)가 두 손을 모아 읍을 했다.
"이렇게 인사까지 해주시니 정말 고맙기 한이 없군요."
"사실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여러분들께서는 이러한 현명한 내
조들을 얻으셨으니 정말 얼마나 행복하십니까?"
모용쌍이 빙그레 웃음을 보이며 대꾸했다.
"너무 과찬해주시니 정말......."
"사실 저도 잘하면 당신들의 친척이 될 수도 있었는데, 아깝게
도 저에게는 그러한 복이 없군요."
모용쌍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안타깝다는 어조로 말했다.
"오직 구매(九妹)만이 아직......."
소어아는 고인옥의 어깨를 두드리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시오?"
고인옥이 얼굴을 붉혔다.
"덕분에......."
"당신은 정말 복이 많은 사람이오. 나도 당신을 아주 흠모합니
다. 엄격히 말하자면 당신은 나의 이모부라고도 할 수 있고 고모
부라고도 할 수 있으니까."
고인옥은 어리둥절해 했다.
"고모부라니오?"
"암, 고모부가 되는 셈이지."
그는 소선녀를 향하여 미소를 띠웠다.
"당신이 아직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당신에게 고모라고도 부르고 이모라고도 불렀소."
소선녀도 그의 말에 얼굴을 붉혔다.
"나는...... 나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렇지만 나는 아주 자세하게 생각이 나는 걸요. 당신에게 세
차례나 따귀를 얻어 맞았으니까."
"아, 그런...... 그런 일이 있었나?"
사실 그녀가 어찌 그날의 일들을 잊을 수 있었으랴! 잊지 못 하
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하나하나 모두를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날의 일들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나는 당신이 영원히 저를 잊지 못 하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어
요. 여인이 일평생 첫사랑의 연인을 잊지 못 하는 것과 같이 당신
도 처음 입맞춤을 했던 여인을 어찌 잊을 수 있겠어요.......)
더우기 잊지 못 할 것은 그날 그녀가 그의 따귀를 때리자 그도
가만히 있지 않고 자기의 턱을 잡으며 하던 말이었다.
'너는 손으로 나를 때렸지만 나는 입으로 당신을 때릴테다. 너
의 손보다는 가벼울 거야.......'
그녀가 영원히 잊지 못 할 것은 소어아가 자기의 턱을 들어 올
리며 입에다 하던 강렬한 입맞춤과, 소어아의 탄식이 섞인 웃음
소리였다. 더욱 잊지 못 하겠는 것은 그날 소어아가 부르던 노래
였다.
"소선녀 소선녀, 눈물을 흘리며 콧물을 닦으니 정말 귀엽고 불
쌍하기도 하군. 하지만 소어아는 그것을 보고 박수를 친다. 하
하......."
그가 부르던 노래와 웃는 모습, 강렬한 입맞춤은 실로 그녀로
하여금 몸서리 쳐지게 했다. 그것이 원망인지 사랑인지는 자기 자
신도 자세히 분간할 수가 없었다.
지금, 그녀는 이미 다시는 소선녀가 될 수 었는 고 부인(高夫
人)이 되어 있었다. 소어아는 소어아 그대로인 채 조금도 변한 것
이 없었다.
그의 얼굴에는 그때의 표정과 같은 장난기가 서려 있었다. 소선
녀는 그가 그날 있었던 일들을 모두 이야기할까봐 두려웠지만 소
어아는 단지 한숨을 내쉬고는 중얼거렸을 뿐이다.
"여인의 기억력은 남자보다 뛰어나다고 하던데, 나의 기억이 틀
렸던 것 같군. 그날 나를 때렸던 것은 아마 당신이 아니라 바보같
은 돼지새끼가 아니면 한 마리의 암호랑이였던 것 같소......."
소선녀는 그의 말에 물어 뜯고 싶은 원망스러움을 느꼈다. 그러
나 그녀는 지금의 신분으로 보아 오직 조용히 고개만을 숙이고 있
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있었던 일은 영원히 마음 속 깊이 간직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철심난은 소어아가 자기에게로 다가올까봐 두려웠다.
소어아가 자기의 면전에서 지난 날의 달콤함과 쓰라림에 가득찼
던 한스럽고 사랑스러운 추억을 이야기할까봐 더욱 두려웠다.
사실 소어아가 이야기 하지 않더라도 그녀 자신이 한 가지 한
가지를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소어아가 자기의 몸을 더듬
던 일을 생각해내자 얼굴이 붉어졌고 심장이 터질듯이 고동침을
느꼈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신분은 그때와 달랐다. 지난 날의 쓰라린
가운데 달콤했던 사랑의 추억은 모두 과거로 돌려 버리고 생각치
말자고 굳은 맹세를 하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소어아는 그녀에게로 다가오지 않았다. 심지어는
한번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철심난은 안심을 한 것인지 실망을 한 것인지 알 수 없이 오직
깊숙이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광사 철전은 분통이 터진다는 듯 헛발길질을 연신하며 소리쳤
다.
"저놈은 도대체 무슨 도깨비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가 없군. 이화궁주는 무엇 때문에 빨리 싸움을 하도록 재촉하지
않는 것이지?"
노파는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어째서 그러는지 넌 알지 못 하고 있다는 말인가?"
"어째서 가만히 있는 것이지?"
"그것은 이화궁주가 저 녀석이 한 사람 한 사람 아는 사람들에
게 마지막 작별을 고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재촉하지
않는 것이야."
소어아는 마침내 화무결을 향하여 걸어 갔다.
화무결은 그가 한 사람 한 사람 모두에게 작별의 인사를 하는
것을 보고 자기의 기분이 어떤지 자신 조차 알지 못 했다.
그는 이미 철심난에게 응락했고,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죽음, 죽음이라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람은 죽음에 임박해졌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생명의 귀중함을
절실히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철심난의 정감(情感)은 그의
마음에 깊이 새겨져 영원히 버릴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두 가지
중에 한 가지 즉 생명을 버리고 애정을 택하기로 결정했다.
화무결은 헌원삼광, 소선녀 일행 등이 소어아에 대해서 아낌없
는 동정과 애석함을 표시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자기 자신은 지금 죽기를 굳게 결심하고 있건만 마지막
작별을 고할 한 사람의 상대자도 없는 것이 아닌가!
그는 자기 자신에게 물었다.
(내가 죽고 난 후에 누가 나를 위해서 슬퍼해 줄 것이며, 또 그
누가 나를 위해서 눈물을 흘려줄 것인가?)
그는 철심난의 면전에 달려가 그녀에게 엎드려 한없이 통곡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렇지만 물론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또한
그의 성격으로 보아 도저히 그렇게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는 오직 조용히 그곳에 서서 소어아가 다가오기 만을, 다가와
서 자기를 죽이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강호에는 매일 매시(每時) 매시각(每時刻)마다 무수한 사람들이
생사의 결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몇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
보아도 이렇게 보는 사람의 마음을 감상에 휩싸이게 하는 결전은
없었을 것이다.
두 사람 모두가 상대방에게 상해를 입히기 원치 않고 두 사람
모두가 자기 자신을 희생하려고 생각하고 있으니, 그러한 마음으
로 결전을 하는 사람들이 강호에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드디어 결전이 시작되었다.
화무결과 소어아는 싸움을 시작하기 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
다. 아마도 그들은 할 만한 말은 먼저 다해 버려 지금은 아무말도
할 것이 없는 듯했다.
"시작!"
연남천의 목소리가 마치 우뢰소리 같이 사방에 울려 퍼졌다. 그
들 두 사람은 손을 쓰기 시작했다.
화무결은 손을 쓰기 직전 자기를 바라보는 철심난의 눈길과 마
주쳤다.
단지 한 번 두 사람의 눈길이 마주친 것 뿐이었다.
비록 한 번 마주친 것이지만 그들이 주고 받은 눈길은 천만 가
지의 말보다 더욱 깊은 뜻을 지니고 있었다.
철심난은 그의 작별을 고하는 눈빛에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
은 애정이 담겨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그의 눈길이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
임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절대로 당신의 부탁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오. 소어아는
절대 죽지 않을 것이니 안심하시오.)
철심난은 마음이 모조리 부서져 버린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
그렇게 해달라던 것이 진정 자신의 마음 속 깊숙한 곳에서 우러
나온 진정한 요구였다는 말인가?
진정으로 화무결이 죽기를 희망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지 않는
가!
그녀는 화무결을 바라보며 쉴사이 없이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저도 결코 당신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니 안심하세요!)
그녀는 몸의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 자신이 화무결에게 죽도록 하라는 부탁을 한 것이긴 했지
만 어떻든간에 화무결이 자기를 위해 죽으려는 순간에 어떻게 그
것을 자신의 눈으로 볼 수 있단 말인가!
화무결은 그녀의 사랑하는 연인일 뿐만 아니라 남편이기도 했
고, 친구 형제 그녀 자신의 영혼, 그녀의 생명이기도 했던 것이
아닌가!
지금 장중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들 두 사람의 천변만화(千變萬
化)한 무예에 이끌려 있었다.
소어아와 화무결 두 사람은 모두가 자기를 희생할 수 있는 용기
를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겁하게 비춰지는
것은 원치 않는 자부심이 강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 둘은 모두 결심을 하고 목숨을 건 싸움에 임하기로
한 만큼 일신에 지니고 있는 모든 무예를 다 써서 결전을 펼쳤다.
여지껏 볼 수 없었던 기이하고 특출한 무예가 그 둘에게서 발휘되
었고, 관전하는 사람들은 마치 모두 넋을 잃은 듯이 그들의 동작
을 행여 한 가지라도 보지 못 할까 봐 정신을 집중하여 보고 있었
다.
그들 같이 젊은 사람들이 그렇게 고명한 무예를 지니고 있을 줄
은 아무도 예측치 못 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둘의 싸움을 눈을 있는데로 크게 뜨고 숨을
죽이며 구경하고 있었다.
어느 사람은 입을 멍하니 벌리고 넋을 잃은 것 같은 표정을 짓
고 구경했다.
어느 사람은 보는 것만으로는 치밀어 오르는 혈기를 누를 수 없
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침이 마르도록 찬사를 보내고 있었
다.
오직 철심난의 마음만이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다.
흰구름이 조용히 흘러가고 있었다.
소앵은 나무 밑에 누워 멍하니 떠도는 흰구름을 바라보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자신의 생명과 영혼, 연인이기도 하고 남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지금 뜻없이 떠도는 흰구름 아래에서 목숨을 걸고 생
사의 결투를 벌이고 있었지만, 그녀는 결투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
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소어아는 어떻게 됐을까? 아직 살아 있을까? 아니면 죽었을까?
소앵은 눈언저리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으며 자신에
게 중얼거렸다.
(내가 무엇 때문에 그에게 아직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
그와 내가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이지?)
그녀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일어서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마음만 산산조각이 난 듯 깊은 상처를 입은 것이 아니라 몸마저
깨어져 나간 듯 도저히 일어설 수가 없었다.
이때 돌연 나무 사이에서 구슬픈 흐느낌 소리가 들려왔다. 소앵
은 그 사람이 바로 철심난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철심난이 어째서 이곳까지 왔을까?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저렇게
상심해 하는지 알 수가 없는 걸?)
(일장(一場)의 결투가 벌써 끝났단 말인가? 소어아와 화무결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죽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도대체 죽은 사
람은 누구란 말인가?)
소앵은 있는 힘을 다하여 일어서더니 급히 그녀에게로 가까이
갔다.
철심난은 그녀를 보자 크게 놀랐다.
"당신도 이곳에 있었나요?"
소앵은 있는 힘껏 그녀의 팔을 잡았다.
"그가...... 그가 죽었나요?"
철심난은 구슬프게 고개를 끄덕이며 또다시 통곡을 하기 시작했
다.
소앵은 머리가 핑 도는 듯한 현기증을 느끼며 주저 앉더니 울음
을 터뜨렸다.
두 사람은 나무에 기대고 마주 앉아 통곡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돌연 철심난이 말문을 열어 그녀에게
물었다.
"소어아는 죽지 않았는데 당신은 무엇 때문에 우는 것이지요?"
소앵은 그녀의 말에 깜짝 놀라 그녀를 끌어당기며 되물었다.
"소어아가 죽지 않았다고요? 그렇다면 화무결이 죽었다는 말입
니까?"
철심난은 신음하듯이 대답했다.
"그래요!"
소앵은 한편으로 놀랍고 한편으로는 의외이라는 듯 기쁜 표정을
짓다가 돌연 큰소리로 외쳤다.
"나는 믿지 않아요. 소어아는 절대로 화무결을 죽일 수는 없어
요!"
"그가 화무결을 죽인 것이 아니라 화무결 자신이 자기를 죽인
것이란 말이에요."
"그가 자기 자신을 죽였다고요? 그건 도대체 무엇 때문이지요?"
철심난은 자신의 입술을 피가 흐르도록 깨물며 흐느끼는 어조로
더듬거렸다.
"그것은...... 그것은 내가 소어아를 죽이지 말라고 요구했고,
그가 그 요구에 응락했기 때문에 그 자신은 오직 죽음밖에
는......."
소앵은 그녀의 말에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마치 생전 처음보는
사람을 보는 것 같이 한동안 주시하다가 한 자 한 자 똑똑하게 말
했다.
"그렇게 되면 화무결이 죽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소어
아를 죽이지 말라는 요구를 한 것인가요?"
철심난은 마치 경련을 일으킨 사람 같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고
통스러움을 참지 못 하겠다는 듯 이를 악물었다.
"화무결은 자신이 죽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당신의 요
구에 응락했단 말인가요?"
철심난의 고통스러움이 서려 있는 눈에 부드러운 빛이 감돌았
다.
"그는 바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니까요."
"그렇다면 당신은 소어아를 위하여 가장 위대한 사람이 죽는 것
이 아깝지 않았단 말인가요?"
"나는...... 나는......."
소앵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이 소어아에 대한 감정이 그렇게 깊고 두터운 줄은 정말
몰랐어요."
철심난은 큰소리로 외쳤다.
"그렇지만 내가 진정 마음 속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소어아가 아
니에요!"
"소어아가 아니라면 화무결이란 말씀인가요?"
철심난은 눈물을 흘렸다.
"그렇습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바로 그 사람이
에요. 나는 나의 전부를 바쳐 그를 사랑했어요. 당신은 영원히 내
가 그를 얼마나 깊이 사랑하고 있는 것인지 알지 못 할 거예요.
세상 그 누구도 내가 그를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를 알지 못 해
요."
"그러면서도 당신은 그를 죽게 했군요!"
철심난은 얼굴을 감싸쥐고 통곡했다.
"그랬어요. 그것은 내가 이미 그와 함께 죽으려고 결심했기 때
문이에요."
드러나는 비밀(秘密)
소앵은 철심난을 바라보며 한동안 어리둥절해 하다가 길게 한숨
을 내쉬며 물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기로 했지요?"
철심난은 통곡하며 말했다.
"그것은 내가 화무결을 사랑하고 있고, 화무결도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소어아에게 미안스럽게 느끼게 되었고, 그런 생각을
하게 되자 우리들은 오직 죽음만이...... 오직 죽음만이 그에게
보답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게 된 때문이지요!"
"나는 아직도 모르겠는데요. 비록 나도 여자이지만 당신의 마음
을 이해할 수 없군요. 그렇기에 여인의 마음을 알기란 바다 속 깊
숙이 가라앉은 바늘 찾기보다도 더 어렵다고들 말하는 것이군
요......."
돌연 철심난이 몸서리를 치더니 마치 공 같이 둥글게 몸을 움추
렸다.
소앵이 놀라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철심난은 눈을 꼭 감고 만면에 고통스러운 빛을 띠우고 있었다.
그러나 입가에는 한가닥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 미소는 기쁨과 행복에 가득찬 미소였다.
그녀는 한 자 한 자 똑똑하게 소앵의 물음에 대답했다.
"지금쯤은 그도 죽었을 테니 나도 죽으려는 것이에요. 우리들은
곧 다시 만나 세상의 추악스럽고 잔혹하며 고통스러운 일이 다시
는 우리들을 괴롭힐 수 없는 곳으로 함께 가려는 거예요."
소앵이 그녀의 손을 급히 잡아 끌었다.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죠? 절대로 죽어서는 안 돼요!"
철심난은 서글프게 웃었다.
"나는 이미 세상에서 가장 독하다는 독약을 먹었으니 죽지 않으
려고 한다해도 죽지 않을 수......."
소어아와 화무결은 이미 칠백초(招)나 되는 싸움을 했다.
두 사람의 무공은 마치 장강(長江)의 큰 물줄기 같이 영원히 끝
나지 않을 것처럼 용솟음 쳤다. 기이한 변화와 예측할 수 없는 교
묘한 연결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눈길을 돌리지 못 하게 했고,
불가사의함마저 느끼게 했다.
그렇지만 이제 이 일전은 끝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사람의 내력(內力)이 거의 메말라 더 이상 싸울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 모두가 더 이상 시간을 끌며 싸우기를 원치 않았
다.
그들은 마치 한 마리의 공작이 활짝 날개를 펼쳐 사람들로 하여
금 경탄을 자아내게 하는 것과도 같이 자신들의 재주를 다하여 있
는 힘껏 싸웠으며 이제는 죽는다 하더라도 유감스러울 것이 없다
고 생각하고 있었다.
노파는 쉬지않고 고개를 저으며 탄식하듯이 말했다.
"아깝구나. 아까워!"
철전은 그녀의 말을 듣고 의아스럽다는 듯 물었다.
"아깝기는 무엇이 아깝다는 말이지?"
"저 두 아이는 모두 백 년에 하나 날까 말까한 무예계의 기재
(奇才)들임에 틀림 없어. 누구를 막론하고 둘 중에 하나가 죽는다
면 아까운 일이 아니겠어?"
미심팔도 참을 수 없다는 듯 길게 탄식을 하고 고개를 끄떡였
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조화...... 바로 하느님의 조화라는 것
이고, 어쩔 수 없는 운명의 장난이라는......."
다른 사람들도 모두들 그들과 같은 마음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
었다. 연남천마저도 화무결에 대해서 아깝고 불쌍하다는 마음을
느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들 두 사람이 모두 살 수 없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는 못 했다.
이때 연성궁주의 창백하고 아름다운 얼굴에는 격동된 빛이 역력
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손으로 누르
며 생각했다.
(내가 어찌 저들 두 사람을 그대로 죽게 내버려 둘 수 있으랴!
화무결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길러온 아이이고, 소어아는 비단 나
의 목숨을 구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나의 체면까지 더 세워 주었
는데 어떻게 내가 저들 두 사람이 나의 면전에서 죽는 것을 가만
히 보고 있을 수 있겠나!)
그녀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을 하게 되자 조금도 망서리지 않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바로 그 순간 그녀는 이십 년 전의 모든 원한을 깨끗하게 잊고
있었다. 오직 마음 속에서 뜨겁게 솟아 오르는 뜨거운 피의 소용
돌이를 느끼며 자기 자신을 걷잡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더 이상 참고 있을 수가 없다는 듯 큰소리로 외쳤다.
"손을 멈추어라. 할 말이 있다."
그러나 아깝게도 그녀의 목소리는 벅찬 감정에 의해 마치 목이
쉰 것 같이 크지 못 했다. 사람들은 모두들 눈앞에 멀어지고 있는
경심동혼(驚心動魂)의 대전에 이끌려 아무도 그녀가 무슨 말을 하
는지 주의해 듣지를 못 했다. 오직 요월궁주만이 그녀가 하는 말
을 들었을 뿐이다.
요월궁주는 어느새 그녀의 결으로 다가와 번개 같이 빠르게 그
녀의 팔을 움켜잡은 다음 재빠르게 혈도(穴道)를 누르며 날카롭고
매서운 어조로 물었다.
"도대체 무슨 할 말이 있다고 한 것이지?"
연성궁주는 떠듬거렸다.
"나는...... 저는......."
그녀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을 이었다.
"언니, 이십 년 전의 일은 이미 머나 먼 과거의 일이 아닙니까?
강풍, 그들이 비록 언니에게 잘못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그러
나...... 그러나, 지금 그들은 이미 시골(屍骨)마저 모두 썩어 재
로 변했을 것이에요. 언니, 언니는...... 저 애들에게까지 원한을
품을 필요는 없는 것이 아니겠어요?"
요월궁주는 눈초리를 옮겨 소어아와 화무결을 한번 바라보고 나
서 느릿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저애들을 용서해주자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
"언니께서 저애들을 용서해 주신다면 저애들은 평생토록 언니에
게 감격스러워할 것이에요."
요월궁주의 안색이 더욱 투명하도록 희게 변했다.
"너는 저애들의 비밀을 말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었구나?"
"저는 오직......."
그녀는 요월궁주의 안색을 발견하고는 몸서리를 치기 시작했다.
요월궁주는 한 자 한 자 힘을 주어 말했다.
"너는 일곱 살 때부터 내 일을 망쳐 놓는 것을 즐겼어. 내가 어
떠한 것을 즐겨 하노라면 너는 어떠한 수를 써서라도 나와 다투었
고, 내가 무엇을 하려고 생각하고 있으면 너는 무슨 수를 써서라
도 내가 하려는 것을 모두 망쳐놓고 말았었지!"
그녀의 안색은 더욱 더 투명하게 변해 마치 추운 겨울 얼어 붙
은 호수의 흰 얼음 같이 되었다.
연성궁주는 안색이 더욱 공포에 질리더니 말소리조차 제대로 나
오지 않는 듯 떠듬거리며 떨리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언니...... 언니는 잊고 계신가 보군요."
"저는 언니의 친동생이에요."
그녀는 급히 몸을 돌리며 요월궁주가 움켜쥐고 있는 손을 뿌리
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일진의 두려운 한기가 요월궁
주의 장심에서 뻗어나와 그녀의 심장을 향하여 파고 들어가고 있
었다.
연성궁주는 깜짝 놀랐다.
"언니 미쳤나요? 도대체 무엇을 하려는 것이지요?"
"나는 미치지 않았다. 오직 이십 년간을 기다려 겨우 오늘 같은
날이 있게 되었느니만치 어느 누구에게서라도 나의 일을 방해 받
지 않기 위해서일 뿐이지. 그것을 방해하려 하는 사람은 너라 할
지라도 도저히........"
그녀가 한 자 한 자 힘주어 이야기 할 때마다 연성궁주는 한기
를 더욱 느끼게 되었다. 그녀의 말이 끝났을 무렵, 연성궁주는 마
치 자기가 알 몸으로 꽁꽁 얼어붙은 호수에 빠진 것 같은 거센 한
기를 느꼈다. 벗어 나려고 몸부림쳐 보았으나 이미 아무런 힘도
남아 있지 않음을 알게 되었을 뿐이었다.
요월궁주는 그녀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오직 소어아와 화무결을
주시하며 입가에 기이한 미소를 띠웠다.
"보아라, 이제는 막바지에 접어 들었다. 강풍과 월노가 자기들
의 쌍둥이 형제가 서로 죽이고 죽는 것을 알게 된다면 반드시 지
난 날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을 저질렀을까 하고 깊이 후회하겠지."
연성궁주는 입술을 부르르 떨고 몸서리를 치다가 돌연 전신의
공력을 집중하여 크게 외쳤다.
"너희들은 싸울 필요가 없다. 들었겠지? 너희들은 원래 같이 태
어난 형제이기 때문이다."
요월궁주는 냉소를 짓고 있을 뿐 그녀를 저지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비록 그녀가 있는 힘을 다하여 외친 것이긴 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녀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만을 볼 수 있었을 뿐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는 듣지 못 했기 때문이다.
연성궁주의 두 눈에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주루룩 눈물이
흘러 떨어졌다.
수십 년 살아오는 동안 그것은 그녀가 처음으로 흘린 눈물이었
다. 그녀의 눈물은 흘러내리자 곧 얼음으로 변했다.
그녀는 소어아와 화무결의 운명을 이제는 아무도 바꿀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그 결과는 너무나도 비참한 것이어서 연성궁주는 더 이상 계속
해서 볼 수가 없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녀는 이미 볼 수 있는 능력도 없어져 버린
뒤였다.
철심난은 소앵의 품에 안겨 가쁜 숨을 몰아쉬며 몸부림을 쳤다.
"나는...... 우리들은 사실 자매지간이라고 할 수 있는 친밀한
사이이니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어요. 들어주실론지 알
수가 없군요?"
소앵은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온화한 어조로
대답했다.
"어떤 부탁을 한다해도 거절하지 않고 모두 들어줄 테니 서슴지
말고 이야기해 보세요."
"나의 시체를 화무결과 함께 묻어 달라는 부탁이에요. 그리고
또한 가지, 소어아에게 내가 비록 그에게 시집을 가지는 못 했지
만 시종 남매와 같이 생각했고 뜻깊은 친구였다고 대신 좀 전해주
세요."
소앵은 부드러운 눈초리로 그녀를 주시하며 대답했다.
"나는...... 당신의 부탁을 모두 들어드리겠다고 맹세 하겠어
요."
철심난은 그녀를 응시하며 느릿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또 한 가지, 소어아를 잘 보살펴 달라고 부탁하고 싶어요. 그
는 비록 고삐 풀린 야생마 같은 사람이지만, 당신이 그를 곁에서
보살펴준다면 반드시 좋아지리라고 생각해요."
소앵은 서글프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그렇구 말구요. 난 그를 잘 알고 있어요. 나는 그가 진심으로
당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요. 오직 당신 한 사람 만
을...... 나는...... 그는 나를 좋아했던 적이 전혀 없었어요. 오
직 그는 뽑내기를 좋아하는 성격이어서......."
소앵은 울음섞인 어조로 그녀의 말을 막았다.
"나는 알고 있어요. 이제 그만, 그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마세
요."
철심난이 빙그레 웃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녀의 웃음은 평화스럽고 조용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녀가 웃
음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은 더 이상 번뇌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고,
다시는 심각하게 마음 속으로 생각할 일도 없게 되었다는 안도감
에서인 듯 했다.
소앵은 그녀를 바라보며 눈물이 비오듯 흘러 내림을 금할 수 없
었다.
화무결의 손놀림이 점점 느려졌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끌고 나갈 필요가 없는 시기가 되었다는 것
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든간에 일찌감치 결정지어야 되겠다는 각오가 서있다
면 마음은 도리어 평화롭고 조용하게 가라앉는 것이다. 질투, 시
기, 애증, 원한 같은 속세의 모든 감정은 삽시간에 승화되는 것이
고, 이러한 감정의 승화는 인류의 지고무상(至高無上)한 정신작용
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오직 소어아, 철심난, 그리고 모든 그의 차구나 원수가 모
두 안락하고 유쾌하게 살아가 주기만을 희망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마음을 굳게 정하고 소어아의 공격에 죽을 수 있는 기회만
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소어아로 하여금 광명정대(光明正大)하게 이길 수 있는 기
회를 주려 하였고, 그 어떤 사람에게도 자기가 죽으려고 그에게
기회를 주는 것 같은 느낌을 들게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고의로 틈을 내 줄 수는 없었다. 더욱 소어
아의 공격에 자신을 내던질 수도 없었다. 오직 소어아가 아주 기
묘한 수법을 전개할 때에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수 있도록 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이때 소어아의 몸이 빙글빙글 돌더니 왼손이 비스듬히 내리쳐
왔다. 그는 오른 손을 몸 뒤로 숨기고 있었다.
화무결은 그의 왼손의 공격이 단지 속임수일 뿐 바로 몸 뒤로
숨기고 있는 오른손이 진정한 살수(殺手)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상대방이 왼손을 내리칠 때에 빙그르 돌며 바로 오른 손으로 창졸
지간에 옆구리를 내리치는 수법이었다.
그의 허허실실(虛虛實實)의 일초(一招)는 부위가 신비스럽고 기
이한 것이어서 강호에서는 보기드문 절초(絶招)인 살수(殺手)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소어아는 마치 머리가 혼란스러운 듯 지금 자기가 공격
하려는 수법이 방금 전에 사용했었던 수법이라는 것도 잊고 있는
것같았다.
화무결은 먼저 번에 그 공격을 간신히 피해냈고 지금은 그 일초
를 손바닥 위에 놓고 보는 것 같이 훤히 알 수가 있었다.
바로 화무결이 기다리던 기회가 온 것이었다.
그는 손바닥을 반쯤 펴 쳐들어 올리며 소어아의 옆구리를 향하
여 마주 공격을 가했다.
그가 그렇게 반격을 시도한 것은 그가 옆구리를 노리며 공격을
가하게 되면 소어아가 몸을 돌리며 오른손으로 자신에게 살수를
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반격의 수법은 절묘한 것 같아 보이면서도
기실은 죽을 수 있는 수법이었던 것이다.
그랬으나 뜻밖에도 소어아의 이번 동작은 화무결이 그의 옆구리
를 향하여 반격을 가했을 때도 그의 몸이 그대로 있었다.
옆구리 바로 밑의 연골은 사람의 몸 가운데 있는 중요한 급소
중에 하나인 것이다.
화무결의 공격은 소어아가 피할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교
묘하고 날카로운 살수였고 공격이었다. 그가 뭔가 이상한 것을 느
꼈을 때는 가했던 반격을 거둬들이기에 너무도 때가 늦어 있었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소어아가 나가 떨어졌다.
사방에서 터져나오는 놀라움의 외침 속에 연남천은 일곱장(丈)
이나 되는 거리를 마치 대붕(大鵬)과 같이 단번에 날아왔다. 헌원
삼광 등도 모두 비명을 지르며, 소어아의 면전으로 몰려왔다.
소어아의 안색은 마치 금종이 같이 샛노랗게 변해 있었다. 그는
간신히 숨을 내쉬고 있었고 맥박이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며 힘없
이 뛰고 있는 것이 살아날 수 있는 가망이 전혀 없어 보였다.
연남천은 자기 자신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분함을 이
길 수 없다는 듯 가슴을 쳤다.
"너는...... 너는 충분히 그의 일격을 피할 수 있었는데.....
너는...... 너는..... 너는......."
소어아가 서글픈 웃음을 지으며 있는 힘을 다하여 말문을 열었
다.
"저는 원래부터 수법으로 그를 유인하여 당하려고 했었습니다.
...... 그는...... 누구도 그를.......
그는 고통을 참을 수 없는 듯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극열한 기
침을 연거퍼 터뜨렸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입가에서는 가느다란
핏줄기가 흘러 나왔다.
"저는...... 역시...... 총명하지요..... 이것이 바로 교묘한
가운데 더욱 교묘한 것이라고...... 하는..... 바로 교묘하게 뜻
을 이루었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의 목소리는 더욱 더 미약해졌다. 그의 눈이 점점 감기더니
가쁘게 몰아쉬던 숨소리도 점점 조용해졌다.
그는 경련을 일으키며 눈을 다시 뜨려 애썼다. 여지껏 보아왔던
세상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보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의 눈은 다시는 떠지지 않았다.
화무결은 마치 나무로 깎아 세운 목각처럼 꼼짝하지 않고 그 자
리에 서있었다. 그는 심신이 완전히 혼란스러웠고, 눈앞은 커다란
공백이 되어버린 것 같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소어아가 마침내 죽었다.
소어아가 결국 자신의 손에 의해 죽었구나!
그는 이 사실이 진실이 아니기를 바랐고, 사악한 꿈을 꾼 것이
기를 바랐다.
그는 넋을 잃은 듯 멍하니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
다.
연남천이 홀연 고함을 지르며 화무결을 향하여 일장을 가했으나
화무결은 그것도 보이지 않는 듯 그 자리에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서있었다.
요월궁주는 소어아의 맥박을 검사하고 나서 한 옆에 서있다가
홀연 몸을 날려 연남천의 장풍 속에서 화무결을 끌어냈다.
연남천이 날카롭고 매서운 어조로 그녀를 향해 외쳤다.
"좋소. 하일대(下一代)의 결투는 이제 끝났으니 지금은 바로 우
리들 차례요!"
요월궁주는 그의 말을 듣고 웃음을 지어 보였다.
"당신과 나는 조만간 일전을 벌여야 하겠지만 먼저 이 사건에
대한 비밀을 나에게 듣고 난 후에 시작해도 늦지는 않을 것 같
소."
"비밀이라니? 도대체 무슨 비밀이란 말이오?"
요월궁주는 천연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당신은 방금 내가 화무결을 구해낸 것에 대해 나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오. 세상 사람들 모두가 화무결을 죽일 수 있다해도 오직
당신만은 절대로 그래서는 안 돼지!"
"그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이지?"
요월궁주의 눈에 잔인하고 혹독한 웃음이 떠올랐다.
"당신은 저 애가 누구인지 알고 있을 것 같은데요?"
연남천이 참을 수 없다는 듯 화급한 어조로 되물었다.
"누구란 말이야?"
요월궁주는 미친 듯이 깔깔 대소하며 손가락으로 화무결을 가리
켰다. 그녀는 느릿느릿 한 자 한 자 똑똑하게 힘주며 말했다.
"알려 주겠소. 저 애는 바로 강풍의 아들이기도 하고, 소어아의
쌍둥이 형제이기도 하니까. 그러니 세상에서 오직 당신만은 죽일
수 없는 것이 아니겠오?"
연남천은 어리둥절해져 한동안 멍하니 서있다가 돌연 노하여 외
쳤다.
"개소리 하지마라!"
"당신은 아마도 내가 당신을 속이는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 같
군요? 내가 무엇 때문에 당신을 속이겠소?"
그녀는 깔깔 대소하며 말을 이었다.
"나는 이십 년간을 기다려 왔소. 그 기나긴 세월을 지루하게 생
각하지 않고 기다린 것은 바로 오늘을 위해서였소. 형제지간에 서
로 죽이고 죽는 기막힌 연극을 보기 위해서 말이오. 이십 년간을
기다려 오다가 비로소 오늘에야 그러한 비밀을 이야기하게 되었으
니, 나는 정말 기쁘고 통쾌하기 이를 데 없소!"
연남천은 미친 듯이 외쳤다.
"당신이 뭐라고 말한다 하더라도 나는 당신의 말을 한마디로 믿
지 못 하겠소."
요월궁주는 계속 깔깔 웃어젖히며 말했다.
"당신은 꼭 믿게 될 것이오. 자세히 생각해 보면 곧 알게 될 것
이니까 말이오. 저들의 생김새가 얼마나 닮았는지 잘 보시오. 더
구나 눈과 코를 보면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오......."
연남천은 두 손을 꽉 쥐고 비오듯이 땀을 흘리고 있었다.
요월궁주가 또 말을 이어갔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무엇 때문에 저들 두 사람을 반드시 싸우
도록 만들었겠소? 내가 왜 그렇게 했는지 그 이유는 당신이 알 수
없겠지만 그들이 형제라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오. 하하
하! 그러나 이젠 알았다 해도 너무 늦었소. 암! 너무 늦었구 말고
요......."
실로 상상할 수 조차 없었던 너무도 놀라운 말이었다. 마치 맑
게 개인 푸른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진 것 같이 놀라운 뜻밖의 일
이다. 관전을 하던 모든 사람들은 일제히 멍해져 있었다. 사람들
의 마음속에서는 비록 강렬한 격동이 일어났지만, 오히려 추호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천지간에 요월궁주만 남은 것 같이, 미친 듯이 웃어 제치
는 그녀의 웃음소리만이 사방에 울려퍼지고 있었다.
소어아와 화무결 형제, 두 사람의 비참한 운명은 모용자매들로
하여금 울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헌원삼광도 원통
함을 금치 못 하겠다는 듯 발길질을 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화무결은 안색이 더욱 창백하게 변해 소어아의 시체를 바라보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는 그대로 서있지 못 하고 몸을 웅크리
며 쓰러졌다.
연남천은 서로의 싸움 끝에 하나는 죽고 하나는 살아 남은 형
제,
두 사람을 보며 망연히 서있었다. 그는 마치 잠깐 동안에 노인
으로 변해버린 것 같았다.
그의 마음 속은 비애와 고통, 후회스러움으로 충만되어 있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저애들의 싸움을 저지시키지 않고 싸우지 않
을 수 없게끔 만들었던가!)
그는 그 모든 것이 복수를 위해서였다는 것을 알고 있기는 했지
만 결국은 복수를 하는 것이 영광을 안겨다 주는 것이 아니라, 오
히려 고통스러움과 파멸을 가져다 주는 것임을 통절히 느끼고 있
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깨달았다 하더라도 이젠 너무 때가 늦어버린
것이다.
그는 비통함에 분노를 터뜨릴 힘조차 잃어버린 듯 요월궁주를
향해 도전도 하지 못 했다.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그녀를 다시는
바라보지도 못 했다.
요월궁주는 조용히 서서 모든 사람들의 표정을 한 사람 한 사람
살펴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초리에는 잔혹하고 악독함이 서려 있는 웃음이 떠올랐
다. 그녀는 화무결을 쏘아보며 차갑게 말했다.
"네 형제를 네 손으로 죽이고서도 무슨 할 말이라도 남아 있다
는 것이냐?"
화무결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땅위에 엎드려 침통하게
흐느끼고 있었다.
요월궁주는 사납고 잔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너는 너의 품속에 한 자루의 칼을 지니고 있는 것을 잊고 있는
것 같구나. 바로 '벽혈조단심(碧血照丹心)'을 말이다. 너는 지금
에 와서야 그것이 마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누구이든 간에 그 칼을 지니게 되면 그 사람에게는 오직
죽음만이 있는 것이지!"
화무결은 돌연 머리를 쳐들었다. 그의 손에는 이미 '벽혈조단심
'이 들려져 있었다.
짙은 녹색의 단검이 석양빛을 받아 괴이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비록 한 사람 한 사람 모두는 그가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를 저지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것은 누구를 막론하고 그와 같은 처지에 빠지게 되면 오직 죽
음밖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
문이다.
요월궁주는 매몰차고 잔인스러운 어조로 한마디 한마디 힘주어
말했다.
"지금이 바로 네가 죽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간이다. 너는 빨
리 자결하지를 못 하고 도대체 무엇을 하려고 머뭇거리고 있는 것
이냐?"
화무결은 담담하게 칼자루를 움켜쥐더니 자기의 가슴 한복판을
향해 찔러갔다.
사랑하는 사람들
이때였다. 홀연 하나의 손이 재빠르게 다가오더니 화무결의 손
에 쥐어져 있던 단검을 빼앗았다.
그는 고개를 쳐들고 한동안 그 사람을 노려보다가 떨리는 어조
로 말문을 열었다.
"당신은 누구시지요? 무엇 때문에 죽지도 못 하게 하는 것입니
까?"
단검을 빼앗은 사람은 바로 만춘류였다.
그가 가볍게 탄식을 하며 느린 어조로 그의 말에 대답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꼭 죽어야만 된다고 결심을 하고 있다면 아
무도 말릴 수가 없는 일이지."
요월궁주가 끼어들며 매섭게 쏘아부쳤다.
"잘 알고 있으면서 무엇 때문에 참견을 하는 것이오?"
만춘류는 그녀의 말에는 대꾸조차 하지 않고 화무결을 응시하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나는 자네를 저지하려는 것이 아니고 오직 잠시 동안만 기다려
달라고 청하는 것일세. 아마 한 반 시진(半時辰) 정도면 충분할
것같네. 반 시진이 지난 후에는 자네가 죽으려고 한다해도 말리지
않을 것일세. 절대 어느 누구도 자네를 저지하지 못 하도록 하겠
다고 내가 보증 하겠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단검을 바라보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그때 가서는 어느 누구라도 죽고 싶다면 저지하지 않을 것임은
물론 이 단검을 주겠네."
요월궁주는 그 말에 웃음을 보였다.
"반 시진 동안이라구? 그래, 그 반 시진 동안에 귀신이라도 나
타난다는 말인가? 너는 망서릴 것이 없다. 조금이라도 더 시간이
흐른다면 너는 그만큼의 고통을 더 받게 될 테니까!"
이때 광사 철전이 요월궁주를 향해 크게 외쳤다.
"조금 더 고통을 받게 된다고 해두자. 그래, 그것이 도대체 어
떻단 말이냐? 너는 반 시진을 더 기다리게 할 만큼의 속도 못 되
는 심술궂은 할망구인 모양이다."
요월궁주는 노했다.
"너는 도대체 어떤 놈이기에 감히 내 앞에서 말참견을 하고 나
서는 것이냐?"
철전도 크게 노해 있었다.
"내가 참견 못 할 일이라도 있다는 말이냐? 그래 내가 참견을
했으니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냐?"
그의 외침소리는 그녀의 외침보다 더욱 컸다.
요월궁주는 더욱 안색이 투명하게 변하더니 한 걸음 한 걸음 그
의 앞으로 다가섰다.
"누구이든 간에 말참견을 하는 놈은 내가 죽여 버리겠다."
이때 소 노파가 갑작스레 차가운 냉소를 터뜨리며 철전의 곁으
로 와서 말문을 열었다.
"나는 여지껏 한평생을 살아오는 동안 별로 즐기는 것이 없었
다. 그러나 오직 말참견 하는 것만은 아주 즐기며 살아왔지."
미심팔도 한숨을 내쉬었다.
"내 성질도 이 여자의 성질과 이상하리 만큼 꼭 같단 말이야!"
유자아도 일어섰다.
"나도 그렇지!"
찰라의 순간에 강호를 떠나 무인도에 은거하며 지내던 무예계의
고수들이 모두들 일어섰다. 그들은 조용히 요월궁주를 응시했다.
그들의 두 눈은 마치 푸르고 잔잔한 호수 같이 맑았고, 밤 하늘의
별과 같이 빛을 발하며 반짝이고 있었다.
요월궁주는 그제서야 발걸음을 멈추고 여러 사람들의 눈동자를
하나 하나 살피듯이 바라보고 나서 담담하게 웃음을 보였다.
"이심 년 동안이나 말없이 기다려 왔는데 반 시각 정도야 못 기
다릴 것도 없지."
만춘류 외에는 아무도 짧고도 짧은 반 시진 정도의 시간에 어떤
사정의 변화가 일어날 것인가는 알지 못 했다. 만춘류는 화무결의
곁에 조용히 앉아 눈을 감고 정신을 맑게 하고 있었다.
시간은 아주 느리게 흘러갔다. 반 시진 밖에 되지 않는 시간이
마치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이 길게 느껴져 모두들 초조스러움
을 이기지 못 하고 있었다.
한동안 넋빠진 듯 멍하니 서있던 연남천이 돌연 천천히 몸을 구
부리더니 소어아의 시체를 껴안고 일어섰다.
그것을 보고 만춘류가 깜짝 놀라며 큰소리로 외쳤다.
"내려 놓으시오!"
연남천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내려 놓으라니? 무엇 때문에 내려 놓으라는 것이오?"
"지금은 알 필요가 없소. 조금만 있으면 곧 알게 될 것이오."
연남천은 멍하니 얼마 동안을 서있다가 막 소어아의 시체를 바
닥에 내려놓으려고 하는 순간 돌연 크게 놀라며 소어아의 손을 잡
았다.
그는 푸르스름하게 변했던 소어아의 얼굴에 차츰 홍조가 떠오르
는 것을 발견하고 큰소리로 외쳤다.
"소어아는 죽지 않았다. 죽지 않았어......."
요월궁주는 그의 말에 일순간 놀라더니 곧 냉소를 터뜨렸다.
"나는 그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소. 내가 친히 맥을 잡
아보았으니까! 당신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나를 속이려고 하는 것
이오?"
연남천은 껄껄 대소했다.
"내가 당신 같은 사람을 속여서 무엇하겠소? 나도 조금 전까지
는 죽은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지금 보니 다시 살아났단 말이오!"
그의 말은 큰 동요를 불러 일으켰다.
사람들은 모두들 마음 속으로는 비록 소어아가 다시 살아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연남천의 말을 믿는 사람은 그다지 없었
다.
요월궁주는 더 이상 참지 못 하겠다는 듯 대소하며 손짓으로 연
남천을 가리켰다.
"저 사람은 미쳐버린 것이 틀림없소! 한 번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단 말이오?"
연남천은 그녀의 말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고개를 젖히
더니 계속 크게 웃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은 그의 표정을 보고 마
음속으로 비통함과 가엾고 안타까운 마음을 금치 못 했다.
그것은 일대(一代)의 명협이 정말로 미친 것 같아 보였기 때문
이었다.
죽은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바로 이때 돌연 한 사람이 외쳤다.
"누가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가 없다고 했소? 그럼 나는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오?"
사람들은 아무도 그말을 정말 소어아가 한 것인지 믿을 수가 없
었다. 그러나 땅 위에 눕혀져 있던 소어아의 시체가 어느새 일어
나 앉아 있지 않은가!
죽었던 사람이 정말로 다시 살아난 것이었다.
사람들은 자기의 눈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연신 두 눈을 비비며
한동안 망연히 있다가 돌연 환호성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요월궁주는 그가 정말로 죽었다는 것을 의심치 않았다.
그것은 그녀 자신이 그의 맥박을 검사하여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
녀는 분명히 그의 호흡이 멈추고 맥박이 끊어진 것과 심장조차 뛰
지 않고 멈춘 것을 확인했었다.
도대체 어떻게 그가 다시 살아날 수가 있었단 말인가? 귀신이란
말인가?
요월궁주는 소어아를 바라보며 한 걸음 한 걸음 뒷걸음질 쳤다.
얼굴에는 공포와 두려운 기색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그녀가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고 해도 결국은 일개 여인에 불
과했다. 세상에 아무리 대담한 여인이라 할지라도 귀신을 두려워
하지 않는 여인은 한 사람도 없는 것이 아닌가!
소어아는 그녀를 바라보며 히히 웃었다.
"당신은 무엇을 그렇게 두려워하고 있소? 내가 살아있을 때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더니 오히려 죽고난 다음에는 무섭게 여겨지
게 되었단 말이오?"
요월궁주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너는...... 너는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냐?"
"하하, 소어아가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당신 같은 사람이 추
측해낼 수 있다면 천하에 제일가는 총명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오."
그는 고개를 돌려 만춘류를 주시하며 물었다.
"저 여자가 모든 것을 다 이야기 했습니까?"
만춘류는 화무결을 잡아 끌며 미소 지었다.
"모든 것을 다 이야기 했지. 이 비밀은 단지 한마디 말이면 설
명이 되지. 너희들은 원래 친형제였어. 바로 쌍둥이 형제였단 말
이야!"
소어아는 환성을 지르며 달려가 화무결을 껴안았다.
"나는 일찍부터 우리들이 절대 천생 적대시할 상대가 아니고 날
때부터의 친구이거나 형제였으리라고 생각했었지!"
그는 비록 웃고 있기는 했으나 쉴 사이 없이 뚝뚝 굵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화무결은 눈물에 젖어 흐느끼기만 할 뿐 아무말도 하지 못 했
다.
연남천은 거대한 팔을 벌려 형제 두 사람을 함께 품속에 껴안으
며 하늘을 우러러 소리쳤다.
"아우님, 아우님, 자네는...... 자네는......."
그의 말소리는 목이 메어 잘 들리지를 않았다. 뜨거운 눈물만이
소리없이 흘러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슬픔의 눈물이 아닌 기쁨의 눈물이었다.
모든 사람들도 그들 세 사람을 바라보며 뜨거운 눈물을 말없이
흘리고 있었다.
모용쌍은 감동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남궁유의 품속으로 쓰러지
듯이 안겼다.
그녀의 마음 속에서는 슬픔이 기쁨으로 뒤바뀌고 있었다. 그녀
는 눈을 들어 자매들을 바라보았다. 그녀들도 모두 남편들의 품에
기대어 있었다.
소 노파가 옷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말문을 열었다.
"당신들이 무어라 얘기하든 간에 나는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소.
이 세상도 필경 사랑스러운 것이니까 말이오."
요월궁주는 마치 목각처럼 그 자리에 혼자만이 서있었다. 아무
도 그녀를 거들떠 보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는 완전히 자신이 세
상에서 버려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오직 만춘류 한 사람만이 느릿느릿한 걸음걸이로 그녀의 곁에
다가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독약은 사람을 해치기도 하지만 사람을 구할 수도 있는 것이
오. 그 교묘한 변화는 쓰는 사람의 마음 하나에 달려있지요."
그는 미소를 띠우며 다시 말을 이었다.
"몇 가지 독초를 한꺼번에 배합하면 아주 무서운 효력을 갖는
마취약을 만들 수 있소. 그 약은 순간적으로 전신을 마비시키고
호흡을 정지시켜 죽은 사람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효과를 발생시
킬 수 있는 것이오. 만약 그 약으로 사람을 해치려고 마음을 먹는
다면 마비된 틈을 이용하여 얼마든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이오. 그렇지만 나는 그 약을 사람을 구할 수 있을 때, 즉 고통
을 덜어주어야만 살려낼 수 있을 때, 혹은 다른 사람에게 당하지
않도록 해야 할 때에만 만들어 왔소."
그가 거기까지 이야기 했을 때 요월궁주는 안면에 강한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만춘류는 말을 멈추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소어아는 싸움을 하기 전, 나에게 그 마취약에 대한 것을 물었
소. 그는 어렸을 때부터 나와 함께 지냈기 때문에 그 약의 용법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소. 그는 그것을 생각하고 그 약을 써서 죽
은 척하고 있으면 당신이 반드시 숨겨져 있는 비밀을 모두 이야기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었소."
그는 또다시 미소를 지었다.
"저녀석은 정말 총명하기 이를 데 없소. 생각해내는 계획 하나
하나가 도저히 다른 사람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니 만큼 궁
주께서 그에게 당한 것도 이상스러워 할 수 만은 없는 것이지."
그는 두 손으로 단검인 '벽혈조단심'을 요월궁주의 면전에 공손
하게 내밀며 태연한 어조로 말했다.
"화무결은 이제 이것이 필요없게 됐으니 당신에게 돌려드리겠
소. 일이 이 정도에 이르렀으니 궁주께서 혹시 필요할지 모르기
때문이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는 뒤를 돌아 보지도 않고 천천히 발길
을 옮겼다.
요월궁주가 만약 한 번만 손을 휘두른다면 그는 곧 그 자리에서
그녀의 단검에 목숨이 끊어지고 마는 것이었다.
그러나 만춘류는 지금 요월궁주의 마음이 도저히 살인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꼭 살인을 하고야 말겠다
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바로 그녀 자신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추호
도 망설임이 없이 태연하게 발걸음을 천천히 옮기고 있는 것이었
다.
벽혈조단심(碧血照丹心), 그 단검은 확실히 불길한 마검이었다.
소앵도 일찌기 와 있었다.
그녀가 왔을 때는 바로 소어아가 다시 생기를 찾던 때였다.
그러나 그녀는 여지껏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다가 비로소 눈물을
닦으며 다가갔다.
소어아는 그녀를 발견하자 한편으로는 놀라고 한편으로는 크게
기뻤다.
"너도 왔군. 나는 네가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고 믿고 있었어."
소앵은 얼음 같이 차가운 얼굴에 추호의 표정도 나타내지 않고
말했다.
"내가 지금 이곳에 온 것은 다른 사람의 부탁을 받아 해결해야
할 한 가지 일이 있기 때문이에요."
"누구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으며, 무슨 일을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지?"
"나는 철심난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약속한 것이고, 이곳에 온
것은......."
그녀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광사 철전과 화무결이 거의 동시에
말문을 열었다.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소?"
소앵은 화무결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는 당신이 자기를 위하여 죽는 것이니 만큼 자기도 당신을
뒤따라 함께 죽으려고 준비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죽거든 함께 묻
어 달라고 부탁했지요."
화무결은 눈물을 흘렸다.
"나는...... 나는 그녀가 절대로 나를 저버리지 않을 것을 일찍
부터 알고 있었소."
소앵은 구슬프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도 그녀를 저버리지 않았으니, 당신네 두 사람은 확실히
천생배필임에 틀림이 없어요.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들에게 이
렇게 시달림만을 안겨주시니......."
이 말에 화무결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녀는......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소?"
"그녀는 벌써 독약을 복용하고......."
철전은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더니 화무결의 멱살을 쥐며 크게
외쳤다.
"모두 네놈으로 인해 내 딸이 해를 입게 된 것이니 나는 네놈의
목숨을 빼앗아야 되겠다!"
화무결은 철전에게 멱살을 잡힌 채 반항할 생각도 하지 않고 멍
하니 중얼거렸다.
"그렇습니다. 제가 그녀를 해친 것이지요....... 제가 그녀를
해친 것이에요......."
사람들은 그들 형제들로 인해 기쁨을 느끼고 있었으나 지금 화
무결의 모습을 보자 또다시 마음이 서글퍼짐을 느꼈다. 그들은 하
느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그와 같이 다정한 사람에게 잔인한 짓을
하며 불공평하게 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소어아가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껄껄 대소
하기 시작했다.
철전은 그 소리를 듣자 크게 노하여 소리를 질렀다.
"너 이 짐승 같은 놈아! 무엇이 그렇게도 우습단 말이냐?"
소어아는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철심난은 단지 독약을 조금 먹은 것에 불과하다고는 말할 수
없소. 그렇지만 그녀가 세상에 있는 독약을 모두 먹었다고 하더라
도 소 아가씨는 그녀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이오. 소 아
가씨, 어서 내말이 틀린지 말해 보시오."
소앵이 사납게 그를 흘겨보고 나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화무결을
향하여 미소를 보였다.
"저는 원래 당신을 좀 골려주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당신의 그
모습을 보니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빨리 가보세요. 그녀는
바로 저쪽에 있는 나무 밑에 있어요. 아마 지금쯤은 깨어났을 거
예요."
화무결은 뛸듯이 기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는 감사하다는 말조차 미처 끝내지 않고 마치 나는 듯이 빠르
게 달려갔다.
철전도 그와 함께 가고 싶었지만 소 노파가 슬며시 그의 옷 소
매를 잡아끌고 있었다.
"저쪽은 너무 좁아. 너까지 간다면 너무 비좁을 것이야."
철전은 그녀의 말을 듣자 어리둥절해 있다가 겨우 소 노파의 말
뜻을 알아 차렸다는 듯 만면에 희색을 보였다.
"그렇지 그렇고 말고. 좁지, 확실히 너무 비좁아......."
소어아는 히히 웃으며 소앵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
는 뾰르퉁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손을 뿌리치고는 발걸음을 옮겼
다.
이때 요월궁주가 돌연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리며 자기 동생의
시체를 쳐들고는 눈 깜짝 할 사이에 어슴프레한 어둠 속으로 사라
져 버렸다.
소어아는 아무 것도 꺼릴 것이 없다는 듯 성큼성큼 소앵의 뒤를
따라가며 입을 놀렸다.
"아직도 나에 대한 화가 풀리지 않았나?"
소앵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모두 내 잘못이었으니 이젠 그만 화를 풀지 그래."
소앵은 그래도 그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이미 너에게 잘못을 빌었는데 너는 아무말도 하지 않는구
나."
소어아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청혼을 하려고 했던 것인데 저렇게 화를 내고 있는 것을 보니
말하지 않는 편이 좋겠군. 공연히 핀잔만 맞을 것이니까."
소앵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
"당신...... 당신이 무엇이라고 말했지요?"
소어아는 눈을 껌뻑거리고 두 손을 벌리며 웃었다.
"내가 무슨 말을 했단 말이야?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어."
소앵은 달려 들어 그의 목을 끌어 안았다. 그녀는 그의 귓밥을
깨물고 그의 어깨를 때리며 교태를 머금은 웃음을 띠웠다.
"당신이 말하는 것을 분명히 들었어요. 당신이 저에게 청혼하려
고 했다는 말이에요. 아직도 시치미를 떼려고 하세요?"
소어아는 아프게 귓밥을 물렸지만 행복감이 충만되어 있어, 아
픔 같은 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졌다. 그는 소앵을 껴안아 올
려 성큼 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소앵은 교태로운 어조로 물었다.
"당신은...... 당신은 무엇을 하려는 것이지요?"
소어아는 빠른 어조로 말했다.
"이곳은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곳을
찾아가 너와 계산을 하려는 거야."
소앵은 얼굴을 붉혔다.
"당신...... 당신이 한말 믿어도 될까요?"
소어아는 웃음을 계속 보였다.
"사내 대장부가 믿지 못 할 부질없는 말을 할 것 같아?"
소앵이 으음하는 신음을 발하며 그의 목을 꼭 껴안았다. 그녀는
그의 귓전에 대고 빠른 어조로 말했다.
"그래요. 이곳은 정말 너무 사람이 많아요. 빨리 저를 데리고
가요. 이제부터는 당신이 어디를 데리고 간다고 해도 말없이 따르
겠어요."
모용쌍은 남궁유의 품속에 얼굴을 기대고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당신은 너무 사람들이 많다고 느끼지 않으세요?"
남궁유도 부드러운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며 빠른 어조로 되물
었다.
"당신도 집으로 돌아가고 싶소?"
모용쌍은 고개를 숙였다.
"집으로 돌아갈 것까지야 없지요. 오직 사람들이 없는 곳으
로......."
이때 돌연 모용산산이 빙그레 웃음을 보였다.
"정말 보기 좋군요. 늙어빠진 부부들이 빠져나가 딴짓을 하려고
만 하다니. 껍데기만 남게 될 것이 두렵지 않나요?"
모용쌍은 다시 얼굴을 붉혔다.
"몹쓸 계집애 같으니, 누가 너에게 우리들의 은밀한 이야기를
엿들으라고 하더냐?"
"당신들은 아무리 초조하고 급하게 굴어도 소용이 없어요. 오늘
은 절대로 당신들을 놓아주지 않을 테니까요. 모두들 이곳에 남아
연 대협과 함께 한 잔하기로 했어요."
모용쌍은 의아스럽다는 듯 물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곳에 무슨 술이 있겠니?"
모용산산이 웃으며 말했다.
"보아하니 정말 딴 생각에 머리가 돌아버린 것 같군. 헌원삼광
이 철 대협을 끌고 술을 사러 간 것도 보지 못 했나요?"
연 대협이 그들의 대화 속으로 기쁜 듯이 끼어들었다.
"그렇소.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이곳에 머물러 한 잔하자고
청하고 싶소. 바로 강소어(江小魚)와 강무결(江無缺)의 기쁨의 술
을 나누자는 것이오!"
그는 '강무결'이라는 세 글자에 특별히 힘을 주어 발음했다.
그것은 여러 사람들에게 이제는 화무결이 아니고 강무결이라는
것을 알리려는 의도에서였다.
소 노파는 넋빠진 것처럼 멍하니 있다가 돌연 한숨을 내쉬며 서
글픈 어조로 말했다.
"저렇게 젊은 사람들을 보니 정말 나는 후회스럽기가 한이 없
군."
미심팔이 물었다.
"무엇이 후회된다는 말이지?"
"예전에 무엇 때문에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며 아무데라도 시집
가지 않았었나 하고 후회하는 것이지.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같이 이렇게 혈혈단신 혼자도 아니고 외롭지도 않았을 텐데."
"그렇지만 지금 마땅한 사람을 찾는다고 해도 늦지 않아."
소 노파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지금 어느 누가 나 같은 늙은이를 데려
가려고 하겠어?"
미심팔이 자기의 콧잔등을 가리키며 웃었다.
"잊고 있는 것 같군. 나도 지금까지 아무 의지할 사람이 없는
외톨박이라는 것을 말이야."
소 노파는 마치 갑작스럽게 몇십 년 젊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얼
굴을 붉히더니 가볍게 미심팔의 따귀를 때리고 나서 말했다.
"이가 곧 다 빠져버릴 늙은이인 주제에 감히 나를 넘보고 있다
니 뻔뻔스럽지도 않아?"
미심팔이 히죽히죽 웃었다.
"그런 것이 바로 늙은이는 늙은 사람을 택하고 젊은 사람은 젊
은이를 택한다는 도리란 것도 모르고 있나......!"
소 노파가 또다시 그의 뺨을 한 대 후려치려고 할 때 다행스럽
게도 헌원삼광과 철전이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미심팔이 재빨리
달려 나가면서 소리쳤다.
"당신들이 사 가지고 온 술은 어디에 있소?"
헌원삼광은 웃음을 지었다.
"나는 돈 같은 것은 가지고 다니는 법이 없어 그런데 이 주책바
가지 늙은이도 나와 같이 동전 한푼도 주머니에 없더군. 이제 또
도둑질이나 강도질을 할 수도 없고, 그래서 돈을 가지러 다시 왔
지."
즐거운 때에 술이 없는 것은 마치 좋은 요리에 소금을 넣지 않
은 것 같이 싱거운 것이었다. 모두들 실망하고 있을 때 홀연 한때
의 검은 무리가 '찍찍' 거리며 산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한무리의 원숭이들이었다.
원숭이들은 큰 놈 작은 놈 종잡을 수 없이 많았다. 원숭이들은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손에는 깨진 찻단지, 주둥이가
깨진 병 등을 들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상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도대체 어디서 나타
난 원숭이들인가 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 콧전에 짙은 술 향기가
풍겨왔다.
미심팔이 급히 달려가 보니 주둥이가 깨어진 병과 찻단지 속에
들어 있는 것은 모두 향기가 그윽한 술이었다.
그는 참을 수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사람은 술을 사지도 못 하고 그대로 돌아왔는데 원숭이가 뜻밖
에도 많은 술을 가지고 왔군. 보아하니 원숭이가 우리들보다 더
나은데 그래!"
헌원삼광은 한숨을 내쉬고 나서 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원숭이들은 때때로 사람보다 총명할 때도 있지. 하지만 최소한
우리들 같이 내기를 하지는 못 해."
이때 소어아는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동굴 속에서 낄낄거리고
있었다.
"나는 내기를 걸자고 한다해도 서슴지 않겠다. 그들이 아무리
이궁리 저 궁리 해본다 해도 영원히 그들은 그 술이 어떻게 자기
들에게 생기게 되었고, 또 어떤 술인지를 절대 알아내지 못 할 것
이야!"
소앵이 마치 고양이처럼 소어아의 품속에 나즉히 안기어, 실 같
은 눈을 뜨고 그런 따위의 일에는 관심도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가만히 있기가 미안한지 미소를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그것이 도대체 무슨 술인데요?"
"그것은 바로 후아주라고 하는 것으로 바로 원숭이들이 만든 술
이지."
"원숭이도 술을 만들줄 아나요?"
소어아는 웃었다.
"원숭이들이 만든 술이 때로는 사람들이 만든 것보다도 월등하
게 뛰어날 수가 있어. 아무리 술을 잘 마시는 술꾼이라 할지라도
'후아주'를 많이 마시게 되면 최소한 삼일간은 취해서 일어나지도
못 하게 되는 수가 있으니 말이야."
"그건 그렇다고 해두고, 당신은 도대체 무슨 방법을 써서 원숭
이들로 하여금 자진해서 술을 가지고 가도록 했어요? 저는 도저히
알 수가 없는데요?"
"강소어의 묘계(妙計)를 당신 같은 사람들은 영원히 알 수 없는
것이 당연하지. 만약 당신이 나와 같이 총명하다면 나는 절대로
당신을 아내로 맞이하지는 않았을 것이야."
소앵은 참을 수 없다는 듯 그를 한번 깨물고 나서 빙그레 애교
있는 웃음을 띠웠다.
"소어아야, 소어아, 당신은 정말 고약한 물건이에요."
소어아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쳐들며 말했다.
"나는 이제 당신의 남편이고, 곧 당신 자식의 아버지가 될 텐
데, 당신은 그래도 소어아라고 계속 부르겠소?"
소앵은 빙그레 웃음을 보였다.
"소어아는 소어아이지 또 무엇이란 말이에요? 당신이 여든 살이
되건 아버지가 되든간에, 사람들은 당신을 소어아라고 부를 거예
요. 그것은 '소어아'라는 세 글자가 너무도 유명하기 때문이지요!"
- 완 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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