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크밤

백휴 - 여자 곱하기 남자 1

3학년2반 | 2022.02.16 07:45:51 댓글: 0 조회: 885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9211

여자 곱하기 남자 - 백휴



----- 차 례 -----

작가 소개
작가의 말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작가소개>

백휴

서강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학원 철학과를
수료했다.
1991년 장편추리소설 <샤프의 비밀>로 데뷔했으며,
1994년 <낙원의 저쪽>으로 한국추리작가협회 신예상을
수상했다.
1996년 현재 한국추리작가 협회 사무국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작품으로는 <샤프의 비밀> <장미 벼랑에 서다>
<낙원의 저쪽> 등이 있다.


<작가의 말>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나는 이 문제가 궁극적으로
'권력'과 '이성'을 어떻게 인간의 본성에
결부시키느냐 하는 것이 귀착됨을 알게 되었다.
권력에 대한 집착이 영속되는 것이라면, 억압은
필연적이며, 이성이 감성의 힘에 충분히 대항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것이 아닐 때 남녀 평등의 앞날은
그리 밝지만은 않을 것이다.
물개와 주걱뿔 사슴, 그리고 스프링복!
이 동물들은 암수의 관계가 사뭇 다르다. 물개
수컷은 심지어 서른 가량의 암컷을 거느리며, 이
과정에서 목숨을 건 피의 투쟁을 벌인다. 주걱뿔 사슴
수컷은 하나의 암컷을 배우자로 선택하지만, 경쟁을
벌일 때 격렬한 몸싸움으로 인하여 때때로 생명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그에 반해
스프링복은 - 어쩌면 '톰슨 가젤'을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상호간의 신체 접촉이 없이
냄새를 맡는 것 정도로 경쟁에 종지부를 찍고
짝짓기를 이루어 낸다.
나는 몇몇 사람들에게 과연 인간은 위의 세 동물 중
어느 것과 유사한지 물어왔다. 대답은
각양각색이었다. 이것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그랬듯이 인간의 본성에 대한 다양한 시각차를
반영한다.
나는 극단적 페미니스트의 시각에서 스토리를
서술해 갔을 뿐이지만, 남녀 문제가 단지 '남성의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 '사회구조적인 여성차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을 이 소설이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추리소설은 그 형식의 독특성으로 인해
인물(캐릭터)의 깊이나 스타일의 풍성함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극단적 페미니스트의 시각에서
스토리를 전개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추리소설이라는
장르를 벗어나지 못한 탓이었다. 그러나 이 포기는
추리소설적인 재미라는 가치로 보상받을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이 추리소설을 읽는 적극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아내의 조언에 감사한다.

1996년 2월 백휴


<1>

"대체 그런 터무니없는 충고를 하시는 저의가
뭐죠?"
은영은 전화에 대고 말했다.
"아아, 그건... 이쪽의 선의를 모독하는 말이
됩니다."
"모독은 당신이 하고 있어요. 다짜고짜 전화를
걸어와 결혼을 하지 말라니요? 누가 그런 말을 선뜻
받아들일 수가 있죠?"
은영은 결혼을 겨우 이틀 앞두고 있다. 상대는
34세의 젊은 영화감독 윤병두(尹炳斗). 영화계의
보편적인 지지는 얻고 있지 못하지만, 흥행감독이라는
명성에 더해서 에로물의 귀재라는 평판을 얻고 있다.
전화를 걸어온 상대는 여자였다. 2주 전 처음
전화가 왔었다. 대뜸,
'윤병두 감독과 결혼해선 안돼요!'
라는 것이었다.
'왜 그런 이상한 소리를.... 당신은 누구시죠?'
그러나 신분을 밝히지 않은 채 시종일관 결혼을
하지 말라는 말만 되풀이했었다.
"윤 감독을 사랑하나요?"
"결혼을 하려는 사람이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나요?"
은영은 상대의 말에 응대할수록 되려 말려든다는
것을 알면서도 발끈 해서 내뱉고 말았다.
"저런, 아아... 가여워라."
"자꾸 그렇게 말씀하시면 곤란해요. 혹시 윤
감독님의 열성 팬인가 본데 정정당당히 신분을
밝히세요."
"제 신분을 밝히는 건 중요하지 않아요. 정작
중요한 건..."
이쪽의 사정을 잘 알고 있듯이 말한다. 그것이
은영은 몹시 불쾌했기 때문에 서둘러 말을 잘랐다.
"그렇지가 않아요. 그건 내게 무엇보다 중요해요.
당신이 장난을 치는 게 아니란 걸 전 알 수가
없잖아요."
"제 말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하시는가요?"
"그야 당연하죠. 당장 신분을 밝힐 수 없다면 빨리
끊으세요."
"자, 잠깐만요! 과연 당신은 사람을 깊이
신뢰하는군요. 하지만 이번엔 틀렸어요."
"그건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잖아요."
"윤 감독이 지독한 바람둥이인데두요?"
"어쩜... 입이 있다고 함부로 말하시네."
"윤 감독의 과거에 대해 몰랐나요?"
그렇지는 않았다. 영화감독이라는 자리가 워낙
미인들로부터 집중 포화의 표적인데다가, 에로물
위주로 입지를 굳히다 보니 윤병두 주변엔 구설수가
잦았다. 그러나 은영은 애초부터 그런 약점은
접어두고 있었다.
"비겁해요! 남의 사생활을 왈가왈부하시면..."
"자상도 하셔라... 바다처럼 넓은 마음씨네요."
"빈정대지 말아요."
"저도 그 점은 인정해요. 34살의 노총각에게 과거가
있을 수 있다는 것쯤은요. 동거를 했다 해도 흔쾌히
묻어둘 수가 있어요. 하지만... 결혼을 이틀 앞둔
남자가 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 하고 있다면요?"
"지금 뭐라고 했어요?"
"이제 감이 오나 보죠?"
"그 말 장담할 수 있어요?"
"장담해요."
"하지만 그저 말뿐이지 아무 것도 입증할 수가
없잖아요."
"아니에요. 이번엔 달라요."
단언하듯 말한다. 은영은 수화기를 바꿔들었다.
"누가 허튼 소리를 늘어놓으려고 며칠씩 떼를
쓰다시피 하겠어요?"
"약올리지 말고 어서 본론을 말해요!"
"당신, 화났나 봐?"
"이 여자가 정말!"
은영은 욕설이 나올 뻔하는 걸 눌러 참았다.
"참아요. 사과할게요. 하도 당신이 내 말을 믿어
주지 않길래 나도 화가 났던 것뿐이에요. 당신 공릉동
알아요?"
"공릉동이라면...."
"육사가 있는 곳이요."
"아, 알겠어요."
"그곳에 윤 감독이 비밀리에 얻어둔 아파트가
있어요. 아무도 모르는 곳이죠."
"그래서요?"
"지금쯤 거기서 새파란 계집애와 놀아나고 있을
거예요."
"어쩜, 뻔뻔하시긴. 뭘 모르시는 모양인데 윤
감독은 지금 부산에 있어요."
"영화 촬영 때문에 해운대에 내려간 건 저도
알아요. 이 달 말까지 일정이 잡혀 있다는 것두요."
은영은 새삼 놀랐다. 생각 이상으로 이쪽에 대해
훤히 꿰뚫고 있는 것이다.
"지금 그곳에도 눈이 오나요?"
"그래요, 눈이 무슨 시비거린가요?"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창밖으로 눈길을 주며
은영은 말했다.
"아니오. 부산 해운대엔 눈 대신 비가 온대요.
그래서 촬영이 하루 연기되었어요. 그 공백을 윤
감독이 어떻게 메꾸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당신은 꽤나 뜸을 들이는군요. 나쁜 습성이에요."
"좋아요. 그럼 부산 스탭진에게 직접 전화를
해보세요. 윤 감독의 행방이 묘연할 땐 공릉 2동 행복
아파트 3단지 74동 211호로 가 보구요. 하지만
서두르셔야 할 거예요. 적어도 현장을 잡고 싶다면
말이에요."
윤 감독은 핸드폰을 쓰지 않는다. 현대 문명의
이기는 때로 거추장스러울 때가 있다며 한사코 마다해
왔다. 특히 촬영을 할 때는 불필요한 연락을 하지
말라며 전화마저 사양한다.
그걸 알면서도 은영은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그녀가 짐작한 호텔에 스탭진들은 투숙하고
있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상대는 제작부장이었다.
"급하게 얘기할 게 있어서요. 윤 감독은요?"
"이거 어쩌죠? 윤 감독 아까 나갔는데요."
"언제 들어오시죠?"
"글쎄요... 여긴 비바람이 드세게 몰아쳐 내일
오전까지는 촬영을 못할 형편입니다만."
"혹시 서울에 올라가신다고 안 하던가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니, 누가 그렇게
말하던가요?"
"아니에요. 알았어요."
"윤 감독 들어오면 집에서 연락 왔다고 전해드리죠.
그리고 다시 한번 결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멍하니 창밖을 응시하던 은영은
돌연 서두르기 시작했다. 전철을 탔다.
행복 아파트 3단지는 서민아파트였다. 대략
13~15평쯤 될 것 같았다. 지은 지가 오래 돼 녹슬고
낡았지만 태릉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눈 속에서
생겨난 전원 주택의 평온한 인상을 풍겼다.
74동 앞에 서자 긴장감이 밀려왔다. 오후 1시의
아파트는 조용했다.
'설마, 아닐 거야...'
바바리 어깨 위에 쌓인 눈을 털며 2층으로 올라간
은영은 두근대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노크를 했다.
반응이 없다. 재차 노크를 했다.
"실례합니다."
소리쳐 불렀는데도 나올 기색이 없다.
허탈감에 돌아서려다가 무심코 손잡이를 돌렸는데
스스르 문이 열렸다. 비좁은 현관으로 들어서자 바로
응접실로 이어졌다.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냉장고였다. 그 옆에 서랍장도
보인다.
"아무도 안 계세요?"
그때, 어디선가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쥐어짜는 듯한 소리를 들으며 은영은 거실로
올라섰다.
거실은 M자형으로 왼쪽에 방이 두개 겹쳐져 있다.
신음은 안쪽 방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초조하게 걸어가서 문을 확 열어 젖히자, 눈부신
엉덩이가 보였다. 침대 밑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의 윤병두는 허우적대고 있었다. 두 다리와
양손은 교묘하게 허리 뒤로 묶여져서 뒤집어진
거북이처럼 바둥거렸다.
입은 테이프로 봉해져 있어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그의 얼굴을 벌겋게 달궈놓고 있었다. 시퍼런
멍자국이 온몸 군데군데 보였다. 누군가가 심하게
발길질을 한 것 같았다.
"어쩐 일이에요?"
은영은 달려들어 테이프를 뜯어냈다.
병두는 가슴이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어서 풀어줘."
노끈 매듭으로 손을 가져가던 은영은 문득
주저했다.
강도의 소행이라면 남자를 발가벗겨놓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전화를 걸었던 여자의
말이 맞는 것 또한 이상했다.
"어떡하다가 이 지경이 된 거예요?"
"빨리 풀기나 해. 숨막혀 죽겠어."
"대체 무슨 일이에요? 왜 서울엔 올라온 거죠?"
"이 여자가... 풀기나 하라니까!"
병두의 기세가 되려 반발심을 불러 일으켰다.
"왜 서울에 올라온 거냐구요? 또 이 아파트는
뭐구요?"
"풀기나 해. 대답은 그 다음이야."
그러나 은영은 병두의 기질을 잘 알고 있었다.
좀처럼 남에게 지길 싫어하는 데다 난폭한 면이
있었다. 포박을 풀어주면 순순히 대꾸할 리가 없는
것이다.
"당신, 나 몰래 딴살림을 차려놓고 있는 거
아녜요?"
"빌어먹을, 환장하겠군! 너까지 왜 이래?"
"대답부터 해 보세요. 부산에 있어야 할 사람이 왜
여기 올라와 있는 거예요?"
"정말, 이게... 너 죽을래?"
본심을 호도하려는지 병두의 어투는 난폭해졌다.
"말 안 하시면 저 이대로 두고 가버릴 거예요!"
"야, 빨리 풀지 못해?"
그러다가 병두는 콜록콜록 기침을 해댔다.
등판은 땀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일말의 동정심이
생겼는지 은영은 냉수를 떠와 먹여주었다.
"빨리 안 풀면 정말 국물도 없어."
"몰아붙이지 말아요. 전 다만 진실을 알고 싶을
뿐이에요."
"진실? 얼어죽을..."
"이 아파트는 어떻게 된 거예요?"
"월세야. 새 영화를 구상할 때 혼자 머무르며
생각하던 곳이야."
갖은 위협에도 굴복하지 않자 병두는 태도를
바꾸었다.
"바쁜 스케줄을 제쳐두고 서울에 온 용건은요?"
"부산에 비가 와서 내일 오전까지 촬영이 연기됐어.
여기엔 잠시 볼일이 있어서야."
"무슨 볼일요?"
"그것까지 알 건 없잖아."
"무슨 말을 그렇게 섭섭하게 해요. 우린 내일 모레
결혼할 사이에요. 서울에 올라오면 저부터 찾는 게
당연하지 않아요?"
"바빠서 그럴 경황이 없었어. 미안해. 어서 이거나
풀어."
"대체 누가 이런 황당한 짓을 한 거죠?"
"보면 모르겠어?"
"강도의 소행이란 말인가요?"
"그럼 누가 했겠어?"
그러나 은영의 눈엔 그렇게 안보였다. 방안엔 뒤진
흔적이 없었다. 은영은 거실로 나가 확인하고
돌아왔다.
"강도라면 몹시 세심한 강도겠군요. 아무 것에도
손을 대지 않고 털어갈 수 있었으니 말이에요."
그녀는 새삼 하이그로시 옷장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다섯 칸 중 제일 왼쪽의 문을 열어 젖혔다.
"정말 안 풀어 줄 거야?"
병두가 발버둥질을 쳤지만 은영은 개의치 않을
정도로 냉정해져 있었다.
안에는 와이셔츠와 양복저고리 서너 벌이 걸려
있었다. 넥타이도 있었다. 세번째 칸에서 은영은 흔히
똥꼬치마로 알려진 쪽빛 원피스를 발견했다.
그녀는 그것을 병두의 눈앞에 들이대고 말했다.
"이건 누구 거죠?"
"그건... 말이야."
병두는 드러나게 더듬거렸다.
"어떤 계집애와 동거를 한 거죠?"
"아, 아니야..."
"당신, 저질이군요! 뻔뻔하기 짝이 없어요."
은영은 치미는 분노에 저항하여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돌연 그녀는 병두의 등에 올라타서 때리기
시작했다.
"왜 그랬어요? 왜 이런 짓을 했어요!"
병두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어지간히 화풀이를 하고 나서 은영은 떨어져
나갔다.
"우린 끝장이에요!"
"한번만 기회를 줘!"
"바람둥이! 구렁이! 바퀴벌레!"
은영은 뛰쳐나갔다.
"이봐, 날 풀어줘! 그냥 가면 어떡해? 이봐,
은영이--"
은영은 아파트를 빠져 나오다가 맞은 편 아파트
주민과 시선이 부딪쳤다. 곱슬머리를 한 30대
주부였다. 은영은 흘러내리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
얼굴을 외면했다.
밖은 눈발이 드세어지고 있었다. 세차게 몰아치는
바람에 전선줄이 우이잉 소리를 냈다.
은영은 아리해 오는 볼의 고통을 참으며 뛰듯이
걸었다.
그녀의 바바리 자락이 아파트 광장에서 사라진
뒤에도 몰아치는 눈발의 기세는 누그러지지 않았다.


<2>

그로부터 2개월 후--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 면회실.
혜빈(趙惠嬪)은 쇠창살 안을 들여다보며 초조하게
기다렸다. 이윽고 문이 열리며 간수의 안내를 받아
미결수 복장을 한 은영이 나타났다.
"면회는 10분간입니다."
간수가 사라지자 은영은 쇠창살에 기대어 왔다.
"어떻게 됐어?"
은영이 말했다.
"여의치가 않아. 병두 씨 주변엔 의심이 갈 만한
인물이 떠오르지 않아."
은영의 표정엔 낙담하는 빛이 역력했다.
그러니까, 2개월여 전, 바로 공릉동 3단지
아파트에서 윤병두와 결별을 선언하고 눈발을 헤치며
집으로 돌아온 다음날, 윤병두는 처참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등의 피부를 뚫고 들어온 칼이 그대로
심장을 관통했다. 그것이 직접적인 사인이었다. 칼은
집안에서 사용하는 식도였다. 손잡이에서 지문은
발견되지 않았다.
사망 추정 시간은 당일 오후 1시 전후, 앞집 210호
주인이 마침 그 시간에 아파트를 빠져나가는 여자에
대해 얘기했다. 설상가상으로 하이그로시 옷장
손잡이에서 은영의 지문이 확인되었다. 두 가지
증거만으로도 은영은 범인으로 지목 받기에 충분했다.
은영은 울먹이며 자신이 본 사실을 낱낱히
고백했다.
'병두씬 알몸으로 다리와 양손이 허리 뒤로 묶여
있었고, 얼마간 다투다가 화가 나서 아파트를
뛰쳐나왔을 뿐이에요. 정말 그뿐이에요. 전
결백합니다.'
그러나 형사들에겐 먹혀들지 않았다.
'그러니까 당신이 분명히 거기에 간 것이로군요.
게다가 윤병두씨는 저항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구요.'
'그래요, 전... 헌데 대체 무슨 뜻으루?'
경찰은 미리부터 그녀를 범인으로 몰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신빙성 있는 수사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몇 구비 곡절을 겪었지만, 다른 용의자가
수사선상에 떠오르지 않자 경찰의 심증은 더욱
굳어졌다. 윤병두 주변에 여자가 많았다는 사실에
비추어 살해 동기는 질투심의 폭발로 결론지어졌다.
경찰의 수사를 거쳐 검찰에 송치된 것은 채 한 달도
걸리지 않았다. 재판은 계류중에 있다.
"변호사는 믿을 수가 없어. 도무지 신뢰가 가지
않아."
"그래도 지금 상황에서는 별 수가 없잖아."
"아냐, 그게 아냐. 변호사조차 내 말을 신뢰하지
않고 있어. 경찰이 시체가 된 병두씨를 발견했을 때
병두씨는 묶여 있지 않았대. 하지만 난 그걸 본 걸.
이 두눈으로 직접 말이야. 거기서부터 엇나가고 있어.
어이없게도 엉뚱한 얘기를 늘어놓으면 검찰을 더
자극할 뿐이라는 게 변호사의 충고야."
"뭐야? 그럼 변호사를 갈아 보지 그래."
"안 그래도 그렇게 조치하고 있어."
"난 별로 도움이 안돼서 어쩌지..."
은영이 혜빈의 도움을 원한 건 그녀가 잡지사
기자였기 때문이다. 비록 <까뜨리느>라는 이름의
주부층을 대상으로 한 여성잡지이긴 하지만 언론과
기자 방면에 두루 안면이 넓은데다가 정보 수집
능력도 뛰어나 윤병두의 주변 인물에 대한 조사를
부탁한 것이었다.
"1차 선고 공판이 언제지?"
혜빈이 물었다.
"다음 주야. 그 전에 무죄를 입증할 새로운 증거가
생겼으면 좋겠는데."
"그 여자쪽은 어때? 너한테 전화를 걸었다는 여자
말야."
"비관적이야."
"사건의 키는 그 여자가 쥐고 있어. 그 여자를
찾아내지 않으면..."
그러나 혜빈은 다음 말은 차마 내뱉을 수가 없었다.
보기에도 딱한 은영을 뒤로 하고 혜빈은 작가
하나를 취재한 후 잡지사로 돌아왔다.
엘리베이터에서 동료 사진기자를 만났는데 국장이
찾더라는 전갈을 해줬다. 혜빈은 생수를 한잔 마신
다음 국장의 방을 찾아갔다. 그 자리에는 손동표
기자가 자리를 같이 하고 있었다.
"여어, 수고가 많은데."
그가 말해 왔다. 혜빈은 손짓을 한 후 소파에 가
앉았다.
"어떻게 됐어?"
권옥희 국장이 말했다.
"다음달부터 써주시겠답니다."
"고료는?"
"신문사 수준으로 해달라고 해서 10%만 깎자고
했습니다. 처음엔 역정을 내시더니 미인이 부탁을
하러 와서 봐주시겠다던데요."
"저런, 그럼 내가 직접 갈 걸 그랬지."
"그 추리작가 글은 너무 야하던데요."
껄껄 웃던 동표가 한마디 했다.
"그래도 너저분한 느낌은 없어. 야하다고 해서 다
같은 건 아냐."
"어허, 이것 참! 두 분은 페미니스트는 절대 되지
못하겠습니다. 말려야 할 사람들이 야한 걸 더
부추기니까요."
"여성지의 기본 테마는 남의 사생활 엿보기야.
관음증(觀淫症)에 시달리는 여자들을 만족시켜주는 게
우리의 지상 임무야. 그건 그렇고... 조 기자! 이번에
만사 제쳐두고 밀착 취재를 하나 근사하게 하려고
하는데... 자, 손 기자..."
"왜, 있지? <사포의 딸들> 말야..."
동표가 말했다.
"페미니즘을 기치로 내 건 여성 단체?"
"그래, 몇 년 전에도 특집으로 내가 한번 다룬 적이
있지. <사포>는 그리스 여류시인으로, 그녀의 이름을
따서 단체이름을 지었다고 했어."
"여성 해방론이라면 이제 식상할 때도 되지
않았어?"
" 모르는 소리야."
권 국장이 말했다.
"아직 열기는 식지 않았다고 봐. 양귀자의 소설이
유행할 때만은 못하지만... 게다가 이번 밀착 취재는
관점이 달라. <사포의 딸들>을 경찰이 주시하고
있다는 첩보가 있어."
"주시라면?"
혜빈이 말했다.
"그건 비밀이래."
"단체가 주시를 받는 거예요? 아니면 <사포의
딸들>에 소속된 개인의 문젠가요?"
"몰라."
"우리 잡지가 그것에 특별히 관심을 가질 만한
이유라도 있나요?"
"여성지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어. 지난 달만
해도 3개나 늘어났어. 뭔가 특종을 내지 않으면
이미지가 흐려져 독자들은 있는지도 모를 거라는
거야. 특종을 잡은 다음 대대적으로 광고를 치겠다는
게 사장님의 전략이야. 그래서 <사포의 딸들>을
기사로 다루기로 한 거야."
"과연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소재일까요?"
"이거 조 기자답지 않게 왜 꽁무니를 빼고 그래?
저돌성은 다 어디 간 거야?"
"요즘 골치 아픈 일이 있어서 일 겁니다."
동표가 말했다.
"무슨 일인데?"
"왜 그 윤병두 감독 건 있지 않습니까?"
"참, 오늘 서울구치소에 갔다 왔지? 좀 어때?"
"친구는 계속 결백을 주장하고 있어요."
"조 기자가 보기엔?"
"솔직히 말해 잘 모르겠어요... 품성 하나는 괜찮은
아이였는데."
"윤병두 감독 사건을 심층취재로 한번 더 다루면
어떨까요?"
동표가 말했다.
"제발 참아줘. 안 그래도 당사자들은 고통스러울
텐데 대중 잡지에 자꾸 실어 뭐가 좋겠어?"
혜빈이 반발했다.
"그래, 검찰의 증거를 일시에 허물어뜨릴 만한
역증거가 없는 한 독자들의 시선을 끌기도 어려울
거야."
권 국장이 말했다.
"하여간 조 기자! 이번 일에 적임자는 당신이야."
"꼭 제가 해야 되는 일인가요?"
"그래, 반드시 여자가 해야 되는 일이야."
"여자라면 양 기자와 박 기자도 있잖아요."
"하지만 그들은 결혼을 안했잖아. 이번 밀착취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냐. 아주 특별한 조건이
따라붙거든."
"조건요?"
"오해하지 말고 들어. 정말이지 오해하지 말아야
해. 조 기자의 개인 사생활을 빗대어서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으니까."
권 국장은 전에 없이 다짐을 두고는 말했다.
"<사포의 딸들>에 들어가려면 남편과 불화가 있거나
매맞는 아내의 인상을 보일 수 있어야 해. 게다가
남편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으면 더욱 고무적이구."
"...하지만 아시다시피 전 이제 남편이 없는걸요."
혜빈은 6개월 전에 이혼을 했다. 대학강사인 남편
방기열과의 사이엔 4살 난 딸 다혜를 두고 있다.
아직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 남긴 흔적이 가슴에
남아 있지만, 이젠 딸을 잘 돌보지 않는 것 때문에
생겨난 양육권 다툼을 제외하고는 차츰 잊혀져 가고
있다.
"남편이야 새로 만들면 돼."
"네?"
"난 가봐야 해. 약속 시간에 늦었어. 자세한 내용은
손 기자에게 들어."

* * *

"<사포의 딸들>에 들어가는 건 뭐고 남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건 뭐지? 게다가 남편을 새로
만들다니?"
자판기에서 뽑아온 커피를 들고 회의실 탁자에 마주
앉자마자 혜빈이 말했다.
"성급하긴."
동표는 느긋하게 커피를 음미한 후에 말했다.
"그건 말이야... 우선 이번 밀착 취재는 <사포의
딸들>의 심장부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점이야. 그리고
이건 공개적으로 하는 일이 아니야."
"무슨 뜻이지?"
"일종의 잠입(潛入)인 셈이지. 그들의 회원
자격으로 몰래 활동하는 거야."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아냐. 그러지 않고서는 특종감을 얻기 어려울
거야. 단순히 <사포의 딸들>을 세부적으로 보여 주는
거라면 하등의 의미가 없어."
"좋아, 그건 그렇다고 치고 남편에 대한 폭력 운운
한 것은?"
"그건 <사포의 딸들>이 지향하고 있는 3대
프로그램의 하나야. 이데올로기적으로는
<레즈비어니즘>을 표방하지."
"레즈비어니즘이라면 여자 동성애?"
"그건 우리들 생각이고... 잘은 모르지만 그들은
그게 <정치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한대. 어쨌거나 그게
하나고 둘째는 고아나 버려진 여자 아이들을 무료로
교육하는 프로그램, 셋째가 매맞는 아내들의 복수를
대신 해준다는 거야. 경찰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이
부분인 것 같아."
"매맞는 아내들을 위해 청부 폭력을 행사한다는
거야?"
"확실한 건 아직 몰라. 하지만 그런 의심을 받고
있는 건 분명해."
"그렇다면 특종이 되겠는데. 그건 개인이 아니라
집단적인 움직임이잖아."
"동감이야. 드디어 의욕에 불이 당겨졌나보군.
조사한 결과 그곳 회원이 되는 것은 의외로 어렵지
않아. 단, 아무나 회원으로 가입시킬 수는 없는
입장이니까 나름대로 안전장치가 있는 모양이야."
"안전장치?"
"적어도 남편에게 혹은 남자에게 적의(敵意)가 있는
여자라는 게 객관적으로 입증되어야 한대. 예를 들어
남편의 부당한 폭력을 호소하기 위해 여성단체에
진정을 하러 왔다든가 평소 문화적으로 혹은 저서를
통해서 남자 중심의 이데올로기를 통렬히 비난을
해왔다든가... 중요한 건 어디까지나 남성들에 대한
적개심이야."
"그렇다면 저쪽에서 내 신분을 철저히 조사할
텐데."
"그러니까 조작을 하자는 거야. 네겐 이혼한
전남편도 딸도 없는 거야. 단지 망나니같은 남편
하나만 있는 거야."
"저들이 쉽게 속아줄까?"
"너와 내가 동거인으로 위장하면 돼."
"뭐?"
"눈 치켜뜰 거 없어. 이번 일이 끝날 때까지
만이야."
"안돼! 그건 불가능해!"
"왜?"
"우리 다혜--"
다혜는 혜빈의 딸이다.
"다혜가 뭘 어때서?"
"말하고 싶지 않아. 사생활이야."
"생각할 시간을 줄까?"
"아냐, 변하지 않을 거 같아."
"대체 무슨 일인데?"
"......"
혜빈은 울적해졌다. 동표와는 동갑이라 친하게 지내
왔다고는 하지만 집안일까지 미주알고주알 밝히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 사이가 겨우 이 정도였어?"
동표가 불만을 토로했다.
"미안해."
"아픈 기억을 건드리고 싶진 않지만 이번 일은
신중하면서도 빨리 착수하지 않으면 안돼. 정 사정이
있다면 굳이 강권하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권
국장에게 안 되는 이유라도 들려줘야 할 거 아냐?"
혜빈은 가만히 앉아 있었다. 동표는 혜빈의 마음이
정리되길 기다렸다. 이윽고 입을 연다.
"남편이 다혜를 잘 돌보지 않는 것 같아서 법원에
양육권을 청구해 놓고 있어. 지금 심사중인데 내게
동거인이 있다는 게 알려지면 물거품이 돼. 그러면
우리 다혜는 계속 무관심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야
하는 거구..."
"저런... 난 그런 줄 몰랐어. 하지만 그건 아무
문제가 안돼. 동사무소에 동거인으로 올려놓는
것뿐이지 혼인신고를 하는 건 아니니까. 게다가 그런
정도라면 얼마든지 손을 써둘 수도 있어."
"어떻게?"
"변호사의 공증을 받으라면 받아둘 수도 있어. 아는
친구들 많으니까."
그 말에 혜빈의 마음은 크게 흔들렸다.
"정말 딸 일에 아무 피해가 없을까?"
"날 믿어. 그 점은 권 국장과도 상의할게."
"아냐, 확대할 필욘없어. 사생활 때문에 일이 방해
받는다는 인상을 주고 싶진 않아."
프로의식만큼은 결코 뒤지지 않는 혜빈이었다.
"그럼 이제 아무 문제가 없는 거지?"
"좋아, 헌데 어떻게 그곳에 잠입하지?"
"날 봐."
멀뚱히 쳐다보자 동표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간다.
"미안해."
동표가 말했다.
"뭐가?"
"곧 알게 돼."
이어 느닷없이 얼굴로 날아든 주먹에 혜빈은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 * *

"이건 해도 너무하잖아."
혜빈은 날계란으로 시퍼렇게 멍든 눈언저리를
비비며 푸념했다.
"정말 미안해. 도리가 없었어. 알고 나서 맞으면
상처가 애매할 수가 있어."
머쓱해진 동표가 말했다.
그들은 압구정동 <시몬느 드 보봐르>라는 까페에
앉아 있었다.
어제 동표가 혜빈의 얼굴을 때린 건 <사포의
딸들>에 잡입하기 위한 1단계 작전이었다.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그럼 2단계 작전은 뭐야?"
"<사포의 딸들>의 회원들 눈에 띄는 일."
"여기가 아지트야?"
"아니, 그렇진 않고 자주 들른다는 정보야."
"그들 중에 아는 사람 있어?"
"없어."
"그럼 어떻게 눈에 띄게 하려고?"
"이 가게 주인이 소문을 내게 해야지. 회원은
아니지만 가끔 그들과 어울린다는 정보가 있어. 쉿!
음료가 날라져와!"
동표가 경고하자 혜빈은 얼른 날계란을 감추고
안대를 썼다.
여종업원이 파르페와 커피가 담긴 쟁반을 테이블에
내려놓는 순간, 동표는 발작적으로 일어나며
소리쳤다.
"뭐? 어쩌고 어째? 이년이 진짜 매운 맛을 봐야
알겠어?"
그 바람에 깜짝 놀란 여종원의 손에서 쟁반이
미끄러지며 와르르 쏟아졌다. 조용하던 홀은 금방
소란스러워졌다.
"제발 이러지 말아요! 여기서 이러지 말고 우리
나가요!"
혜빈도 능청스럽게 연기했다.
"니가 이럴 줄은 몰랐어! 나쁜 년!"
"제발요..."
동표의 손이 휙 날았다. 혜빈은 얼굴을 감싸쥐며
휘청거렸다.
틈도 주지 않고 달려든 동표는 머리끄덩이를
잡아챘다.
종업원들이 달려왔다.
"이게 무슨 행패예요?"
행주를 든 여주인이 만류했다.
"저리 비켜! 이 년은 내 마누라야!"
"아무리 그래도 여자를 때리는 법이 어딨어요?"
"상관하지 마! 꼴도 보기 싫은 년! 어디 니
마음대로 해봐!"
동표는 혜빈을 냅다 밀어젖혔다. 혜빈은 테이블
위로 무너지듯 쓰러졌다.
여주인이 '경찰을 불러!' 라고 소리치는 것을
들으며 동표는 침을 카악 내뱉었다. 그리고는 총총히
사라졌다.
혜빈은 얼얼해진 볼의 통증을 참으며 가만히 쓰러져
있었다.
"빨리 여자를 내실로 데려가!"
내실에서 혜빈은 극진한 간호를 받았다. 여주인은
뜨거운 물수건을 이마에 대주며 체온을 덥혀주었다.
마침내 혜빈이 충격에서 헤어난 기미를 보이자
그녀는 우유까지 데워다 주었다.
"위스키를 좀 탔어요."
"죄송해요. 기물이 부서지지 않았나 모르겠네요."
"걱정말아요. 하마터면 큰 부상을 당할 뻔했어요.
아까 그 남자 진짜 남편이에요?"
"네..."
"헌데 어쩜..."
"원래 난폭해요."
"그래도 도가 지나치네요. 병원에 가시겠다면
모셔드릴게요."
"아니에요. 크게 다친 데는 없어요."
혜빈은 가려는 듯 요에서 반쯤 상체를 일으켰다.
"서두르실 거 없어요. 더 쉬다 가세요."
"폐가 될 텐데..."
"전혀 그렇지가 않아요. 눈은 왜 또 그래요?"
"......"
"어머, 그럼 거기도?"
"네."
"아주 몹쓸 사내군요."
혜빈은 참고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듯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여주인은 그 모습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한심해 보이죠?"
이윽고 혜빈이 말했다.
"아니요."
"이 세상은 여자에게 너무 가혹해요."
"쯧쯧, 젊은 사람이 벌써 세상을 탓해서야... 대체
무엇 때문에 남편에게 손찌검을 당한 거죠?"
"고등학교 때 알고 지내던 남자친구를 한번 만났을
뿐인데... 정말이지 우리 둘 사이엔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런데도 남편은 절 의심하는 거예요."
"조심하시지 않구요."
"제가 분한 건 그런 주제에 자신은 두 번이나 여자
문제를 일으켰다는 점이에요."
"어머나, 뻔뻔할 수가... 앞뒤가 맞지 않는
사람이잖아요."
"남자들은 위신을 내세워 멋대로 행동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하는가 봐요."
"그래요. 남자란 구제불능의 족속이에요."
남자를 욕하기 시작하자 여주인은 거침없이 험담을
늘어놓았다.
기회를 엿보던 혜빈은 적당히 맞장구를 쳤다.
급기야는 여주인은 무척 흥분한 것 같았다.
"아아, 이렇게까지 공감할 수 있는 동지를
만나다니."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걸 보면 선생님은 남편이 안
계신가 보죠?"
"이혼한 지 오래 돼요."
"쉽지 않은 결심을 했군요. 하지만 아이들을
키우는데 지장이 있을 텐데?"
"요즘 아이들은 달라요. 원진살이 끼어 지지고
볶으며 사느니 차라리 헤어지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말은 그렇게 해도 마음 한 구석에 상처를 받지
않을까요?"
"물론 사람에 따라 각양각색이겠죠. 우리 아이들은
날 이해해 주는 편이에요. 그런 점에선 운이 좋다고
할 수 있죠. 그쪽은? 참 이름이 어떻게 돼요?"
"조혜빈이라고 해요."
"전 민윤자예요. 애들은?"
"아직 없어요."
"남편을 사랑하나요?"
"웬걸요. 이젠 정나미가 떨어졌어요. 맞는 것도
더이상 못참겠구요."
"그럼 과감히 떨쳐버려요."
"...이혼을요?"
"왜 겁나요?"
"솔직히 말하자면..."
"먹고 살 방도가 막막한가 보군요."
"번역일을 하지만 수입은 대단치 않아요. 그렇다고
전업을 위해 내세울 만한 특기도 없고."
"여기서 일하는 건 어때요? 마침 여종업원을 한
사람 더 구할 참이었는데."
"고맙긴 하지만 남편이 이곳에 제가 있는 것을 알면
가만 있지 않을 거예요."
"일부러 알려서 화를 자초하는 바보짓을 하면
안돼요."
"남편 직장이 이 근처라 결국 들통이 나고 말
거예요. 혹시 멀리 떨어진 곳이라면 또 모를까..."
혜빈은 슬쩍 운을 띄웠다.
"글쎄요..."
민윤자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눈치였지만 별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혜빈이 <시몬느 드 보봐르>를 나온 것은 소동이
있고 나서 2시간쯤 지나서였다. 그녀는 기다리고 있던
동표의 갤로퍼에 올라탔다.
"어떻게 됐어?"
담배를 비벼끄며 동표가 말했다.
"시종 부당하고 난폭한 남편에게 매맞고 사는
신혼주부처럼 연기했어."
"반응은?"
"크게 동정하는 눈치였어. 그리고 자신이 이혼한
사실까지 얘기할 만큼 내 입장에 공감하는 거 같았어.
나더러 까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해보지 않겠느냐고
했을 정도였으니까."
"뭐랬는데?"
"싫다고 했지 뭐."
"왜, 해본다고 하지 않구? 그래야 <사포의 딸들>의
회원들을 만날 기회가 있을 거 아냐."
"나중에 내 신분을 조사할 때 작위의 느낌을
가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어쩐지 의도적으로
접근한 냄새가 나잖아?"
"이런 좋은 기회도 다시 없는 건데."
동표는 아쉬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걱정하지 마. 전화번호를 주고 왔으니까 곧 연락이
올 거야."
그러나 혜빈의 장담이 무색하게도 민윤자로부터는
1주일이 지나도록 연락이 오지 않았다. 이쪽의 숨은
의도와는 달리 까페 <시몬느 드 보봐르> 측에서는
부부 간의 몸싸움이 가벼운 해프닝에 불과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 문제로 회의가 열렸을 때 권 국장은 적극적인
방안을 모색했다.
"무작정 저쪽의 연락을 기다리는 것보다 적극성을
띠는 게 낫지 않을까?"
"역효과가 날 텐데요."
혜빈은 조심스러운 입장이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기다릴 순 없어. 결국에는
민윤자라는 여자가 다리를 놔야 하는 건데... 난 역시
그 여자가 아르바이트직을 제안했을 때 받아들였어야
한다고 생각해."
동표가 말했다.
"그렇지가 않아. 그때 난 직감적으로 너무 쉽게
제안을 받아들이는 건 나중에 의심을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 앞뒤 따져볼 겨를 없이 순간적으로
결정한 판단이었지만, 지금 돌이켜봐도 옳은
결정이었다고 생각해."
"결과가 좋질 않은데두?"
"아르바이트직을 맡았다고 해서 <사포의 딸들>에
들어가리라는 보장은 없어."
"왜들 이래? 지나간 일을 따져 뭐할 거야?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나 얘기해 봐."
권 국장이 말리고 나섰다.
동표는 혜빈을 힐끗 바라보았다. 잔뜩 부은
표정이다.
"회원 하나를 선택해 직접 부딪쳐 봐야겠는데요."
동표가 말했다.
"점찍어둔 회원이라도 있어?"
"그렇진 않습니다만."
"그렇다면 위험해."
"어느 정도 위험은 각오해야 합니다."
"여자들만 모인 집단이라고 얕봐선 큰코 다쳐!"
"그럼 별수가 없을 텐데요."
"우리 이렇게 해요."
혜빈이 말했다.
"일단 시작한 거니까 민윤자쪽을 한번 더 공략하는
게 나을 거예요."
"방법은?"
"신병(身病)을 가장해 병원에 입원한 다음 전화로
그 여자를 불러 놓고 울고불고 해보는 거에요.
얻어맞는 것도 선을 넘어 부부 관계가 막바지에까지
이르렀다는 걸 보여주는 거죠."
"어떻게 생각해?"
권 국장은 동표를 바라보며 물었다.
"글쎄요..."
동표는 혜빈에게 눈길을 주었다가 말했다.
"나쁘진 않은데요."
"그래, 괜찮아 보이기는 한데... 지난 번에
눈언저리가 멍든 모습을 보여줬으니까 이번엔
다리라도 부러져야 충격적인 효과가 있지 않을까?
"안돼요! 그건..."
혜빈은 지레 겁을 집어먹고 손사래를 쳤다.
"진짜 제 다리를 부러뜨리려는 건 아니겠죠?"
"의견을 낸 건 조 기자잖아."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아이디어를 냈으니까 구체적인 실행 방법도
제시해야지."
동표도 권 국장을 거들었다.
"손 기자까지..."
"월요일까지 더 좋은 방법이 생각나지 않거든
그렇게 하도록 해."

* * *

"특별한 약속없으면 나랑 데이트나 하지?"
동표는 혜빈과 나란히 잡지사 1층 로비를
걸어나오면서 말했다.
"동표씬 이 추운 겨울에 허리 덥혀줄 난로 하나
없어?"
"곧 봄이 올 텐데 뭐."
그들은 회전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바람이
매섭다.
눈이 오려는지 하늘은 잔뜩 구름을 머금고 있다.
거리의 사람들은 움츠러든 모습이었다.
혜빈은 숄더백을 추스른 다음 양손을 반코트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선약 있어."
"남자?"
"그래."
"어, 정말?"
"왜, 궁금해?"
"궁금하잖구. 언제부터야?"
"4년 전부터."
"4년 전이라면 한창 신혼일 땐데. 이상한데... 혹시
내가 아는 사람?"
"역시 넌 눈치 하난 기민해."
"이런, 대체 누구야?"
그들은 버스 정류장까지 나왔다. 버스를 기다리는
승객들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저기 버스가 와. 참, 차는 어떡하구 여기까지
왔어?"
"같이 종로쪽으로 나가 영화라도 볼까 해서 두고 온
거야."
"바보같이... 헛걸음했어. 난 저 차 타야 해.
안녕!"
"이봐!"
동표는 달려가는 뒷통수에 대고 소리쳤지만 혜빈은
얼른 좌석버스에 올라탔다. 그녀가 자리를 잡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동표는 입가에 손을 모아,
"그 천하에 재수좋은 놈 대체 누구야?"
하고 크게 말했다.
혜빈은 차창에 입김을 불어넣고 그 위에 손가락으로
'방다혜'라고 크게 썼다.
동표가 어어없어하는 표정을 지었을 때 버스가
미끄러지며 굴러가기 시작했다.
혜빈은 짓궂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버스가 움직이자 동표의 모습이 뒤로 멀어져갔다.
혜빈은 문득 시계를 보았다. 3시 반이었다.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 1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등받이에 기대고 눈을 감았다.
신촌 Y대학 앞 다방에 들어섰을 때는 막 4시가
지나고 있었다.
그녀는 화장실부터 찾아 볼일을 본 다음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시끄러운 음악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하다. 에너지가
남아도는 젊은이들은 신이 나서 몸을 들썩인다.
29살이라는 나이, 결코 늙었다고 볼 수 없는
나이인데도 대학가에 오면 역시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진다.
혜빈은 날라져온 뜨거운 커피잔을 보듬어잡고
홀짝홀짝 마셔댄다. 그러며 그녀는 채 5분이 지나기도
전에 시계를 확인한다.
토요일은 딸 다혜를 만나는 날이다. 이혼과 함께
법원이 그렇게 결정을 내린 것이다. 아무리
친자식이라 해도 토요일에서 일요일에 걸친
하룻밤외에는 딸을 만날 수가 없다.
눈안에 집어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을 한달에 기껏
4번 밖에 만날 수 없다는 가혹한 현실 앞에 그저
망연자실할 뿐이다.
그러기를 5개월 여, 혜빈은 그동안 다혜가
아버지한테 얼마나 소외되어 왔던가를 알게 되었다.
남편에게 새애인이 생겨난 후, 다혜는 언제나
뒷전이었다. 관심이 소홀해지자 아이는 우울증에 걸린
것처럼 말이 없어지고 소심해졌다. 그래서인지 다혜는
한번 만나면 헤빈의 품에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 아이를 일요일마다 돌려주려 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혜빈은 용기를 내어 법원에 재심을 요청했다.
남편의 무관심과 소홀의 증거를 확보해 두었다.
그러나 남편도 만만치가 않았다. 무슨 헛소리냐며
완강하게 나왔다. 그는 자신이 아빠로서 딸을 돌보는
것이 당연한 권리이며 또한 충분히 돌볼 능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딸을 사랑한다고 했다.
그것은 거짓말이다. 그러나 제3자적 입장에서
진실을 쉽게 판별할 수 없는 법원은 3개월의 유예
기간을 두고 그동안 부부 중에 과연 누가 진정
아이에게 필요한 존재인지를 결정하겠노라고 했다.
혜빈은 상념에서 깨어나며 다시 시계를 보았다.
4시반, 약속 시간이다.
남편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초조해 하고 있는데
음악이 그치면서 그녀를 찾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카운터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
"나요. 아무래도 집으로 와야겠소."
더없이 점잖은 말투다. 그러나 혜빈은 가면 뒤에
숨겨진 진면목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어떻게 된 거예요? 거기 집인가요?"
"그렇소. 급히 마무리지어야 할 일이 있어 집에
늦게 도착했소."
"다혜는요?"
"같이 있소."
혜빈은 이제 그의 말이라면 얼음으로 빙수를
만들었다고 해도 믿지 않을 만큼 냉랭해져 있었다.
"바꿔줘요."
"놀이터에 놀러 나갔소."
"불러서라도 바꿔줘요. 제 귀로 확인해야겠어요."
"이봐, 대체 무슨 돼먹지 못한 어거지야? 여기
찾아와서 데려가면 되질 않아?"
"지난 번에도 절 골탕먹였잖아요."
"이 여자가 속고만 살았나?"
"이러시면 법원에서 불리한 판정을 받을 텐데요?"
"내가 그런 놈들을 두려워할 줄 알어?"
"다혜를 귀찮아하면서 왜 제가 키우지 못하게
하시는 거죠?"
"다혜는 둘도 없는 내 딸이야."
"제 딸이기도 해요."
"웃기는 소리하지마! 걘 방씨야 조씨가 아니라구."
"당신에게 또 새 여자 생긴 거 알고 있어요. 그
여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도 성가신 다혜를
떼버리는 게 나을 텐데요."
"당신의 수작을 알아! 날 약올리려 들지마."
그리고는 수화기가 쾅 내려닫혔다.
헤빈은 허둥지둥 커피숍을 빠져나왔다. 하늘에서는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행인들의 걸음이 빨라지고
있었다.
전남편이 사는 빌라에 도착했을 때 헤빈을 맞이한
것은 <급한 일이 있어 외출한다. 다혜는 근처
놀이터에 있으니 찾아가!>란 전갈이었다. 메모지는
문에 스카치테이프로 붙여져 있었다.
혜빈은 놀이터를 찾아나섰다.
눈이 쏟아지는데다 어두워지고 있어 아이들이
하나둘 모습을 감춰가기 시작했다.
혜빈은 공터로 나왔다. 그네와 미끄럼틀이 눈을
맞으며 휑뎅그렁 서 있다. 아이들은 보이지 않는다.
"다혜야!"
혜빈은 조심스레 불러보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빈 공터를 향해 퍼져나가다가
맥없이 잦아든다. 날은 저물어 어둠이 밀려들고
있었다.
혜빈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사방을 휘젖고
다녔으나 다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혜빈은 빌라 앞으로 돌아와 들이치는 눈발을 피해
계단에 털퍼덕 주저앉았다.
온갖 상상이 밀려들어 왔다. 대부분 안 좋은
상상이다.
눈은 함박눈에서 폭설로 변해갔다. 거기 앉아 있은
지 2시간이 지났을 때 저쪽에서 서로 엉겨붙은 두
남녀가 우산 밑에서 히히덕거리며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어떻게 된 거예요?"
혜빈이 다가섰다.
"어, 당신?"
전 남편 방기열이 입구에 멈칫 섰다. 여자의 어깨에
손을 두른 채였다.
기껏해야 스물두셋 정도로 보이는 여자는 두꺼운
스웨터에 몸을 감싼 채 멀뚱히 바라본다. 긴 생머리에
초롱초롱한 눈빛이 싱그럽다. 남편은 <긴 머리 소녀>
타입을 좋아했다. 게다가 상대를 수시로 갈아치우는
것도 잊지 않는다.
"여기서 뭐하고 있어?"
기열이 말했다.
"다혜는 어딨어요?"
"놀이터에... 메모지는 본 거야?"
"놀이터엔 없어요. 아무리 찾아봤지만 다혜는
보이지 않아요."
기열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여자가 태평스럽게
우산을 접고 옷깃의 눈을 털어낸다.
"벌써 2시간이 지났는데... 장난치는 거 아니지?"
"제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으로 보여요?"
"가만 있자, 그럼 이 녀석이 어딜 간 거지?"
"어디 친구집에라도 갔겠죠 뭐."
여자가 껌을 입안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이내 질겅질겅 씹어댄다.
"그래, 정희 말이 맞아. 눈이 오니까 친구집으로
놀러 갔을 거야."
기열은 쉽게 동의했다. 혜빈은 뭉클 치솟는 분노를
느꼈다.
"그렇게 태평할 수가 있는 거예요?"
"걱정할 거 없어. 내가 엄마가 올 거라며
기다리라고 단단히 일러뒀는데 뭐."
"혹시 잘못되기라도 하면요?"
"재수없는 소리 하지 말고 좀더 기다려봐!"
그러며 여자의 손을 잡아끈 기열은 혜빈을 지나쳐
계단을 몇걸음 올라가다가 뒤돌아보며 말했다.
"어쩔 거야?"
집안에 들어오지 않겠느냐고 묻는 것이다.
"전 여기 있겠어요."
"젠장, 꼴사납게 지지리 궁상은..."
구둣발 소리가 멀어지자 혜빈은 밖으로 나가 동정을
살폈다. 눈이 쌓여 가는 거리는 인적마저 끊겨
있었다. 바람은 매서웠다.
'정말 얘가 어딜 간 거야...'
혜빈은 애간장이 다 녹았다.
추위도 잊은 채 서성대던 혜빈은 빌라로
올라가보았다. 자욱한 연기에다 시큼텁텁한 냄새가
진동한다.
반나체로 담배를 피워대던 여자가 무심하게 눈길을
한번 주었다가 다시 TV를 바라본다. 화면 가득 남녀의
알몸이 뒤엉기며 신음소리를 낸다.
"다혜 아빠는요?"
혜빈이 거실로 올라서며 말했다.
그녀는 악을 쓰듯 소리쳤다.
"자기야! 자기야!"
좀 있자 방기열이 알몸을 수건으로 두른 채
욕실에서 나왔다.
"왜, 그래?"
그는 곧 혜빈을 발견하고는 움찔했으나 이내
당황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듯 태연하게
냉장고로 걸어가서는 맥주를 꺼내든다.
"그 사이 연락 없었어요?"
혜빈은 눈살을 찌푸렸다.
"없었어?"
기열은 여자를 응시한다.
"없었어요."
여자가 대꾸한다.
"없었다는데."
"정말 가관이군요."
"간섭마!"
"법원 사람들이 이 꼴을 봐야하는건데."
"뭐야?"
기열은 마시던 동작을 멈추며 표독스럽게 쏘아본다.
혜빈은 더 쏘아줄까 하다가 체념하고 돌아선다.
빈정대는 소리를 뒤로 하고 혜빈은 아래로 내려왔다.
이제 눈은 발목 높이까지 쌓여 있었다.
한 순간, 어둠을 응시하던 혜빈의 눈이 크게
떠졌다. 저만치에 허둥대는 꼬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다혜야."
혜빈은 달려나간다.
"엄마아-."
딸도 엄마를 알아보았다.
모녀는 격렬하게 포옹한다.
혜빈은 참았던 눈물이 와락 쏟아진다.
"이 녀석아, 어딜 갔었어?"
"철호 집에. 철호 엄마가 가자고 했어."
"전화 좀 하라고 하지 않구?"
그러나 딸은 아직 철부지에 불과하다. 아무 조치도
취해 주지 않은 철호 엄마가 야속했다.
혜빈은 애정이 용솟음치며 으스러지듯 다시
껴안는다.
겨우 흥분이 가라앉아 막 돌아서려고 했을 때였다.
딸 팔을 잡고 걷는다는 것이 그만 눈길에 미끄러지며
휘청 중심을 잃고 말았다.
"아야..."
혜빈은 고통스런 소리를 냈다.
자신의 방심을 탓하며 일어서려는데, 오른 발목이
이상하다.
그곳을 만져 보자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진다.
그녀는 주위에 몸을 의지해 일어설 만한 것들이
있나 둘러보았으나 아무 것도 없었다. 다혜가
칭얼댄다.
"엄마, 추워!"
"잠깐만."
혜빈은 부상 부위를 살펴본다.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었다.
'어쩌지?'
공교롭게도 지나다니는 행인조차 보이지 않는다.
주저앉은 엉덩이가 젖어드는 것을 느끼며 혜빈은
다혜에게 말했다.
"아빠한테 가서 좀 나오시라고 해."
"엄마가 가면 되잖아."
"엄만 지금 다쳐서 갈 수가 없어. 니가 아빠 좀
불러주련?"
"싫어. 난 아빠한테 가기 싫어! 아빤 화나면 막
때린단 말야!"
"그래도 가야 해. 엄만 아파서 움직일 수가 없어."
혜빈은 다혜를 달래 보았지만 막무가내였다.
"여보세요! 누구 없어요? 도와주세요!"
혜빈은 소리치기 시작했다.
한참 만에야 그림자가 다가왔는데, 올려보자
방기열이었다.
"꼴 좋군! 내 이럴 줄 알았어."
그는 부축해 일으킬 생각도 하지 않고 혜빈의
고통을 즐기는 듯했다.
"가까운 병원이나 119에다 전화나 해주세요."
자존심이 상한 혜빈이 말했다.
"죽었으면 죽었지 내 도움을 받고 싶지는 않다는
건가?"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하긴 아무렴 어떨까... 그렇다고 애까지 추위에
떨게 할 순 없겠지."
기열은 혜빈에 붙어 서 있는 다혜를 덥석 안으려고
했다. 그러자 다혜는 아빠의 손길을 거부하며 앙탈을
부렸다.
"싫어! 안 갈래! 엄마랑 같이 있을 거야!"
"감기 걸려 이 녀석아!"
아빠의 완력에 다혜는 엄마에게서 떨어져나갔다.
아이의 몸이 붕 뜨며 기열의 가슴에 얹혀졌다. 그
순간 다혜는 발버둥질을 쳤고, 내뻗은 발이 기열의
얼굴에 가 닿았다.
"이 자식이-."
기열의 입에서는 거침없이 욕설이 튀어나왔다.
전문대학 강사라는 직업이 무색할 정도였다.
혜빈의 눈이 불안하게 다음 행동을 쫓았다.
기열의 손이 움직이자 다혜는 울음을 터뜨렸고 말릴
틈도 없이 빌라 안으로 사라졌다.
혜빈은 까닭없이 서글퍼졌다. 오싹한 한기가 뼈속
마디까지 스며들고 있었다. 눈은 아무리 털어내도
금방 다시 쌓여갔다.
눈 털기를 포기한 혜빈은, 사이렌 소리를 내며
구급차가 달려왔을 때 형체를 알 수 없을 만큼, 흡사
눈사람처럼 크게 부풀어 있었다.


<3>

까페 <시몬느 드 보봐르>의 주인 민윤자는 혜빈의
전화를 받았을 때, 다소 뜻밖이란 생각이 들었다.
부부 사이에 폭력이 행사된다고 해도 여간 해선
이혼을 못하는 것이 한국 여성들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혼은 아주 특별한 경우에 속했다. 남편이
바람을 피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땐 이미 심리적으로
결별을 하고 난 후여서 피차간에 불륜을 저질렀다는
죄의식 따위는 없었다.
그녀가 남자에 대해 혐오감을 갖게 된 것은
남편보다는 아버지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평생 가정을
돌보지 않고 밖으로 쏘다니다가 중풍을 맞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 다음 당당하게 조강지처의 병구완을
받았다.
그녀는 어머니의 가슴에 맺힌 한을 잘 알고 있었다.
무릇 남자란 무책임하며 이기적이라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혜빈이라는 여자가 남들이 보는 앞에서 모욕을
당했지만, 그것이 당장 이혼으로 이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 스스로가 고백했듯이 경제력은
인내의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화 속의 그녀는 펄펄 끓는 유황굴에라도
뛰어들 각오였다.
"이젠 미련이라곤 찌꺼기조차 남아 있지 않아요.
이혼녀라고 손가락질을 받거나 가난으로 고통을 받는
한이 있더라고 더이상 얻어맞고는 살지 않을
작정이에요."
"어떻게 된 일이에요?"
"남편이 또 손찌검을 했어요. 피하려다가 넘어지는
바람에 그만..."
"많이 다쳤나요?"
"저... 입원했어요. 민 선생님이 좀 도와줬으면
해요."
울먹이는 목소리다.
"거기가 어디죠?"
"사당동에 있는 H병원이에요."
"알았어요."
그러나 윤자는 다음날에야 문병을 갔다.
혹시 상대가 몹시 흥분한 탓에 이성을 잃어
충동적으로 진로를 결정하게끔 만들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혜빈은 깁스를 한 다리를 받침대에 옳려놓은 채
링거를 맞고 있었다. 작은 병에 담긴 노란 물약이
비닐선을 타고 방울방울 흘러내리고 있다.
그녀는 V8베지터블 주스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좀 어때요?"
혜빈은 윤자를 보자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윤자는 혜빈을 안고 달래주었다.
"정말 더 이상은... 못살겠어요. 저 이혼하겠어요!
절 도와주세요."
혜빈은 서럽게 울어댔다.
그녀의 울음이 잦아든 후에야 윤자가 냉정하게
말했다.
"결심이 굳지 못하면서 애써 수선피울 거 없어요."
"아니에요. 이번엔 달라요. 누가 뭐래도 제 뜻은
확고해요. 시골에 계신 아버님에게도 알렸구요."
"아버님은 뭐래요?"
"물론 처음엔 반대하셨어요. 하지만 여기에
다녀가시면서 제 뜻대로 하는 걸 허락하셨어요."
"남편 쪽은 어때요?"
"바라던 바일 거예요. 틀림없어요. 처음부터 저를
사랑하지 않았으니까요."
"이혼을 하게 되면 여러 모로 고통이 뒤따르게
돼요. 나중에 후회하는 여자들도 의외로 많아요.
남편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는 해방감은 아주
잠깐이에요. 그 다음에 그 하찮아 보이던 울타리가
실은 바람막이였던 것을 알고는 뒤늦게 아차
싶어하죠. 그럴 거라면 차라리 이혼하지 않는 게
나아요."
"아니에요. 제 결심은 흔들리지 않아요. 단지
각오만 가지고 뭘 해보겠다는 것과는 차원이 달라요.
제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한 거예요. 새로운 삶을 찾지
않는 한 전 살 의욕을 잃고 말 거예요."
"글쎄요, 정 그러시다면..."
"뭔가 제게 도움을 주실 수 있겠어요?"
"저희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건 싫다고
하셨으니까..."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이 제 이런 기분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과 같이 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에두른 표현이지만 <사포의 딸들>을 지칭하고 있다.
혜빈은 내심 너무 노골적으로 말한 것이 아닐까
은근히 조바심이 났다.
"그럼 그들에게 부탁해볼까?"
윤자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누구에게요?"
"아는 사람들이 있긴 한데 장담할 순 없어요."
"어떤 사람들인데요?"
"지금 단계에선 뭐라고 말할 수가 없어요."
윤자는 입이 무거운 듯했다.
"당장 어떻게 하실 거예요?"
"퇴원을 하면 일단 집을 나갈 거예요."
"퇴원이 언제쯤 가능하죠?"
"한 열흘요."
"묵을 곳은 있나요?"
"어떻게 마련해 봐야죠."
"그럼 저희 집에 묵도록 해요. 아르바이트는 안
해도 좋으니까 다른 곳으로 갈 때까지 만요."
"정말 그렇게 해주실 수 있으세요?"
혜빈은 감동하는 척했다.
"원한다면요."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이 은혜 잊지 않을
게요."
혜빈은 윤자의 손을 꼬옥 잡았다.


<4>

민윤자가 과연 <사포의 딸들>--이하 영문이니셜 S로
표기--에 입성(入城)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해낼까
하는 의구심은 기우임이 드러났다.
퇴원을 하고 나서 민윤자의 집에 거처를 마련한 지
보름도 되지 않아 혜빈은 S에 첫발을 들여놓는 개가를
올렸다.
그 동안 그녀는 여러가지로 조마조마했다. 특히나
병원에 자주 드나드는 손동표와 민윤자가 서로
부딪치기라도 하면 어쩔까 싶어 한시도 마음이
놓이지가 않았었다.
다혜를 만나는 것은 동표가 기꺼이 맡고 나서 큰
도움이 되었다. 동표는 스스럼 없이 다혜를
전남편에게서 인계받아 자신의 집에서--병원에서 재울
수는 없으니까--하루 재운 다음 다음날 되돌려 보내곤
했다.
S로 들어가기 전에 동표는 단단히 주의를 줬다.
"매사에 조심하는 게 좋아. 만에 하나 잠입 취재를
위해 들어왔다는 걸 들키는 날엔 저쪽에서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어."
"무슨 뜻이야?"
"신체에 위해가 가해질 수도 있어."
"청부 폭력을 행사하는 집단이라는 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건 남자들에 대한 거잖아. 설마 여자인
내게 무슨 짓을 하겠어?"
"저들은 같은 이데올로기로 똘똘 뭉친 집단이야.
그럴수록 적에 대한 적개심은 강할 수밖에 없어."
"알았어. 조심할게."
"널 걱정하는 사람이 많아. 그러면서도 널 보낼 수
밖에 없는 안타까운 마음을 이해해 줘. 그리고
이거..."
동표는 성공을 기원한다며 안개꽃 한아름과
핸드폰을 내밀었다.
"핸드폰으로 수시로 연락 취해. 그래야 그쪽 상황을
낱낱이 알 테니까."
S는 경기도 과천의 별장을 본부로 사용하고 있었다.
정부종합청사 맞은편으로 논밭을 가로질러 얼마간
들어간 곳이었다.
본부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이 사회에 대해
메시지를 전하며 집단적인 성격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환경을 위해 봉사하는 <그린피스>
대원들과 유사하다.
혜빈은 동표에게 경고를 받고 갔기 때문에 잔뜩
긴장을 하고 있었지만, 의외로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10여 명의 젊은 여자들이 정원까지 나와 그녀를
맞이했다. 회원들은 예상보다 훨씬 적었다. 그에 대해
<사포의 딸들>의 회장인 여종선은 자신의 방에서
마주앉았을 때 이렇게 설명했다.
"회원들은 100여 명 가량 되는데 두 부류로
나눠지지요. 그러나 그 구별은 여기서 사느냐 자기
집을 갖고 있느냐 하는 거주의 문제이지 권리나
의무에 차이가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녀 뒤에는 <에리카 종>의 확대한 사진이 액자에
담겨 걸려 있었다. 지적이면서도 유난히 큰눈이
여종선의 쪽 찢어진 눈과 대조적이다.
혜빈의 시선이 액자에 머무르자 여종선은 뒤를
돌아보았다가 말했다.
"저 여자 알아요?"
"아니요."
혜빈은 무역을 전공한 전문대생으로 알려져 있다.
가급적 똑똑하다는 인상은 주지 않기로 했다.
"에리카 종이라는 유태계 미국인 페미니스트예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는 여자죠. 우리에겐
코페르니쿠스적인 발상이 필요해요. 이를테면 저
여자는 '페니스 주위에는 태양과 처녀가 돈다'고
했는데 '바기나 주위에 태양과 총각이 도는 날'이
조속히 도래하도록 우리는 노력하고 있어요. 참,
이곳이 어떤 단체인지 들은 게 있나요?"
여종선은 갈색빛이 도는 단발머리를 뒤로
쓸어넘겼다.
가위로 대강대강 자른 머리 같았다. 화장기 없는
메마른 얼굴에 불거져나온 광대뼈가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억센 인상이었다. 나이는 30대 초반쯤 돼
보였다.
"민 선생님으로부터 대강 듣긴 했지만 자세한 건
몰라요."
"이혼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오늘로 꼭 일주일 됐어요."
"후회하지 않나요?"
"조금도요."
"우린 여자라면 누구나 대환영이에요. 다만, 회원이
되려면 몇 가지 절차를 밟아야 해요."
"가입 신청서를 써낸 것으로 회원이 된 게
아니던가요?"
"그건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해요. 굳이 말하자면
준회원이 된 셈이죠."
"달리 어떤 절차죠?"
"서두르실 거 없어요. 차차 알게 되실 거예요.
그리고 미리 말해두지만 여기서 생활하는 동안 외박은
절대 금지예요."
'아아, 그건 안되는데...'
혜빈은 다혜와 함께 보낼 수 없는 토요일밤을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외출을 하는 건 자유지만 귀가 시간은 9시예요.
다소 엄격한 규율이라 해도 우리 목표가 이뤄질
때까지는 어쩔 수가 없어요."
"또다른 규율은요?"
"공적인 만남 외에는 남자와의 접촉은 삼가해야
해요."
그것은 이미 가입 신청서에 서약한 사실이었다.
"바보같은 질문 같지만 왜 그런지 물어봐도 돼요?"
"정말 어리석은 질문이군요... 남편에게 호되게
당하고서도 모르시겠어요?"
"그럼..."
"그래요. 남자는 우리 모두의 적이에요. 물론 역사
상에는 우리 여자를 이해해 준 남성들이 많이 있어요.
예를 들어 노자(老子), 존 스튜어트 밀, 스탕달,
입센, 이능화, 오토 그로스 같은 사람들이죠. 특히
오토 그로스는 종족을 숭배하는 비스마르크의
부계지배에 저항하여, 모계지배라는 도덕을 역설한
사람이죠. 그러나 우리가 현실에서 만날 수 있는
남자들은 최종적인 검증을 거치기 전까지는 적일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이은상 시인의 <어머님
은혜>라는 노래 아시죠?"
"'나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이 노래요?"
"네, 그 노래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글쎄요."
"그것은 마치 여자의 한량없는 노고를 찬양한
찬가(讚歌) 같지만 기실은 여성을 육아(育兒)와
봉사(奉仕) 혹은 가사(家事)와 희생(犧牲)의 가치에
속박시키려는 남성의 음모이자 이데올로기의 표현에
다름 아니에요."
그것은 아주 색다른 해석이었다.
여종선은 철저히 과격한 여성해방론으로 무장한
여자였다. 거기다가 굉장한 지식과 기억의
소유자였다.
혜빈은 거기서 열거할 수 없을 만큼의 많은 얘기를
들었다. 그 주된 내용은 이러했다.

<사포의 딸들>의 사포(Sappo)는 B.C 6세기경의
그리스 여류시인으로 동성애자로도 유명하다.
레즈비언(Lesbian)이란 그녀가 살았던
레스보스(Lesbos)섬에서 따온 말이다.
<사포의 딸들>은 사상적으로
레즈비어니즘(Lesbianism)을 지향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레즈비어니즘이 성적 기호(동성애)
이상의 <정치적 선택>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정치적인
이유는 남성과 여성의 관계가 본질적으로 정치적이기
때문에, 즉 그 관계는 힘과 지배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남성은 지배자이고 여성은 피억압자이다.
피억압자들이 지배자의 억압을 종식시킬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은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다.
그러나 권력을 장악하는 것은 가까운 장래에 도달할
수 없는 요원한 길이다.
따라서 먼저 해야 할 일은 남성과의 성관계를
거부함으로써 남성의 지배권에 도전해야 한다.

<사포의 딸들>의 기본 사상에 대해 혜빈은 몇몇
부분에서는 공감했지만 전체적으로는 몹시 생경하고
낯설었다.
"자, 우리 그런 얘기는 그만하고... 그 소지품 좀
보여주실래요?"
여종선이 혜빈이 들고온 가방을 가리켰다.
"소지품은 왜요?"
"여기서 금지하는 품목이 있나 해서요."
"대부분 입을 옷 같은 것들이에요."
"옷은 상관없어요. 어서 줘봐요.'
혜빈이 가방을 건네주자 여종선은 옷을 제외한
소지품을 책상 위에 늘어놓았다.
자질구레한 화장품과 지갑, 핸드폰, 수첩 같은
것들이 보였다. 여종선은 그것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다시 분류했다.
"불쾌하게 생각하시지 말아요. 여기 들어오면
누구나 당하는 일이니까요."
아이섀도우, 아이라이너, 립라이너, 매니큐어,
볼터치, 파운데이션은 핸드폰과 함께 모아졌다. 남은
것은 콜드크림과 립크로즈 같은 없어서는 안되는 기초
화장품뿐이었다.
"여자가 남자에게 지는 이유는 화장에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하기 때문이에요. 자, 이것들은 도로
담으세요."
"핸드폰도 못쓰나요?"
"쓰지 못할 건 없어요. 하지만 여기 각 방에 전화가
있는데다가 혼자만 갖고 다니면 위화감을 불러일으킬
거예요. 여긴 어디까지나 공동체 생활이라는 점을
명심해요."
"하지만 그건..."
혜빈의 목소리는 들릴듯 말듯 잦아들었다. 여종선은
그것들을 자신의 서랍에 넣은 채 열쇠로 채워버렸다.
"자, 우리 나가요. 집 내부랑 사람들을 소개할게요.
묵을 방도 배정해야 하구요."

* * *

S는 금남(禁男)의 집이다.
인근 농가에서 출퇴근하는 파출부를 빼고 정확히
11명의 회원은 모두 여자다. 딱, 한사람, 파출부
아줌마의 아들인 중학교 2학년생 병수가 부식을
나르느라 들락거린다고 한다.
11명중 7명은 이곳에서 가까운 보육원(버려진
여자아이들을 데려다 키운다)교사로 봉사하고 있다.
보육원에는 스무 명 가량의 여자아이들이 있었다.
대부분이 9~12세 정도의 아동들로, 그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경비가 들
것 같았다.
시설도 든든하게 지어져 있다. 벽돌집이지만 실내는
부족한 것이 없게 가구들이 갖추어져 있다.
혜빈은 그곳을 둘러본 다음 S로 돌아왔다.
회장인 여종선의 방은 1층, 2층은 보육원
선생님들중 일부가 사용하고, 3층방이 그녀의
차지였다.
혜빈은 박수진이라는 여자와 한방을 쓰게 됐다.
24살로 아직 앳돼 보이는데다 굉장한 수다쟁이다.
3층에는 방 하나가 더 있었는데, 화가라고 자신을
소개한 모경주와 여배우 경력이 있는 금화란이 같이
쓰고 있다.
저녁 때 공식적인 환영 행사가 있고 나서 간단한
파티가 벌어졌다. 혜빈은 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마이크를 잡고 노래 방기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투투의 <1과 1/2>을 불렀다.
거푸 마셔댄 맥주에 가벼운 취기를 느끼며 방으로
돌아오자, 모경주와 금화란이 따라 들어왔다.
금화란의 손엔 양주병과 은박지 안주접시가 들려
있었다.
"축하해, 언니."
화란이 말했다.
"저도 다시 한번 축하드려요."
모경주가 말했다.
그 사이 박수진이 컵을 마련해 와 한잔씩 따뤄
마셨다.
혜빈은 경계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권해오는
술을 마다하지 않았다.
"모두들 고마워."
혜빈은 나이를 의식해 반말을 썼다. 자신보다 최소
서너 살은 어렸기 때문이다.
"여기 생활에 관한 한 선배들이니까 지도편달
부탁해."
"언닌 결혼도 하셨다면서요?"
박수진이 말했다.
"그래... 하지만 이혼했어."
"어머, 왜요?"
"사이가 나빴으니까."
"피, 시시하다."
"회장님이 그런 건 묻지 말라고 주의 주셨잖아."
화란이 핀잔을 주듯 말했다.
"그게 뭐가 어때서?"
수진과 화란은 동갑나기로 다툼이 잦은 것 같았다.
"넌 고지식해서 탈이야. 사람이 궁금한 걸 어떻게
견뎌?"
"뭐야? 내가 고지식하다구?"
"그럼 아냐?"
"그만들 둬! 모처럼 들어온 신입회원 앞에서 웬
추한 싸움질이야?"
모경주가 말했다.
그녀의 말에는 상대를 압도하는 힘이 있었다.
화란과 수진은 움찔하며 수그러들었다.
"그래, 우리 시시한 얘기는 접어두고 술이나 마셔."
혜빈의 제안에 금세 양주병이 비워졌다.
"그나저나 난 내일부터 어떻게 처신해야 하지?"
혜빈이 말했다.
"회장님이 말씀해주시지 않던가요?"
화란이 되물었다.
"말이야 해주셨지만 그게 어디 체험한 사람들 얘기
듣는 거 하고 같은가?"
"우선은 페미니즘 이론를 배우게 돼요."
"얼마 동안?"
"기초 과정은 2주간이지만 병행해서 주제발표와
토론을 1주일에 두번씩 가져요."
"난 책 읽기를 싫어하는 편이라... 이거
곤란하겠는데."
"처음엔 지긋지긋하지만 익숙해지면 책 읽는 게
재밌어요."
"아무리 그래도 재미있기까지야..."
"지적 호기심이 없으면 평생을 가도 재미있을 리가
없지."
모경주가 말했다. 왠지 비아냥거리는 투였다.
혜빈은 모경주를 바라보았다. 뻔뻔하게 노려본다.
술기운이 돈 얼굴로 시선을 외면하지 않고 있다.
"건배하지 않겠어요?"
그녀가 술잔을 치켜들며 말했다.
"경주씬 책벌레인가 보지?"
"제 말투에 비위가 상하셨나요?"
"아니."
"전 다만 솔직하게 얘기했을 뿐이에요."
잠시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듯했으나 수진이 화제를
돌렸다.
"참, 언니는 당분간은 식사 당번도 겸해야 할
거예요. 파출부가 있지만 일손이 딸려 돌아가면서
돕고 있거든요. 신참에게는 뭐든지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하죠. 자, 나 피곤해요. 시간도 9시가 넘었으니까
오늘은 이쯤 해 뒀으면 싶어요."
경주와 화란이 자기 방으로 돌아가고 나자 수진은
목욕을 하겠다며 샤워실로 갔다.
혜빈은 혼자 남자 얼른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동표의 집 번호를 돌리다가 문득 불길한 예감에
멈칫 했다.
'왜 핸드폰을 쓰지 못하게 했을까?'
그런 의구심이 떠올랐다.
위화감이라고 하지만 어딘지 궁색한 변명이다.
핸드폰은 더이상 사치품이 아닌데다 얼마든지 눈에
띄지 않고서도 사용할 수 있다.
혜빈은 주저하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전화는 밖에 나가 거는 게 낫겠어.'
방을 정리하고 있는데 수진이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비비며 돌아왔다.
"내버려두세요. 제가 치울게요."
"아냐, 다했는걸."
"언니도 샤워하세요."
"난 좀 있다. 샤워실이 어디지?"
"우측 복도 끝요."
수진은 침대에 털썩 주저앉아 콜드크림을 꺼내 씻은
얼굴에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여자들방에 거울이 없네."
"네?"
수진은 잘 못들은 듯 고개를 돌려 물었다. 볼에
콜드크림이 찍혀 있다.
"거울이 없다구. 내 손거울 줄까?"
"손거울은 저도 있어요. 꺼내기 귀찮아서요."
"다 큰 여자들 방에 왜 제대로 된 거울 하나 없어?"
"행여 그런 불평일랑은 입 밖에 내지 말아요.
회장님이 좋아하시지 않을 거예요."
"그런 것까지 참견하셔?"
"때론요. 화나면 무서워요."
"미스 박은 여기 들어온 지 얼마나 됐지?"
"저도 2개월밖에 안됐어요."
"회장이 화내는 거 본 적 있어?"
"그럼요."
"주로 언제 화내시지?"
"아침에 늦잠을 자거나 토론 준비가 부실할 때요.
그리고 여성스럽다느니, 여자다워야 한다느니, 여자를
미모로 평가하는 따위의 말을 제일 싫어해요."
"철저하군."
"뭐가요?"
"아, 아냐. 혼자 한 말이야. 매일 아침 6시에
기상한다던데 그렇게 부지런한 참새처럼 일어나 뭘
하지?"
"조깅을 한 30분 정도 한 후에 정원과 집주변
청소를 해요. 그런 다음 세면도 하구... 식사할
때까지 간단한 개인 용무를 봐요."
"완전히 군대로군."
"처음엔 좀 힘들 거예요. 하지만 곧 나아져요.
건강에도 좋구요."
"헌데 미스 박은 어떡하다가 여기 들어오게 됐어?"
"회장님이 도와주셨어요. 전 조그만 개인병원 신참
간호사였는데 생리 휴가 문제로 원장에게 모욕을 당한
적이 있어요. 하루는 아랫배가 심하게 아파 원장에게
조퇴를 하겠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랬더니 원장은 대뜸
꾀병이라면서 남자들 앞에서 확인해 보자는 거였어요.
전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나머지 화가 나서 조퇴계를
내고 일방적으로퇴근을 했는데 다음날 절
해고하겠다고 통보를 해온 거예요. 너무나 분해서
노동부를 통해 원장을 고소했는데 회장님이 신문에 난
토막기사를 보고 절 도와주신 거예요."
"구체적으로 어떻게?"
"병원의 전직원들앞에서 원장이 공식 사과를
했어요. 회장님이 여성 단체를 통해 적극적으로
문제삼겠다고 압력을 넣으셨죠."
"통쾌했겠는데?"
"아주 통쾌했어요. 태어나서 그렇게 기분좋은 적은
처음이었어요. 전 늘 억눌리고 주눅든 기분이었는데
그날 여자라는 신분이 그런 질곡으로 몰아넣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거예요. 그게 이곳에 들어오는 계기가
됐구요."
"왜, 남자들이 싫어?"
"물론이에요. 남자들은 탐욕스런 승냥이같은
존재예요. 여자를 먹이감으로밖에 생각하지 않아요.
언닌 어때요?"
"싫으니까 이혼했지."
"하지만 처음엔 사랑했으니까 결혼했을 거 아녜요?"
"물론 그래."
"변하게 된 이유가 뭔데요?"
"특별한 이윤 없어. 사소한 게 쌓이다보니 서로
간에 넘지 못할 벽이 생긴 거야."
"남편되시는 분이 바람 피웠죠?"
"어떻게 그렇게 잘 알지?"
"부부 간의 문제는 대부분 성(性) 문제래요. 저희
부모님도 자주 싸우셨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게
부부 생활에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돼요."
"글쎄...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갖게 됐지?"
"여기에 들어와서요."
"혹시 회장님이 그렇게 말한 거 아냐?"
"어머... 그걸 어떻게?"
"짐작해 본 거야. 그런데 경주씨는 내가 싫은가
봐."
"언니는 예술가라 그래요. 하고 싶은 말을 참지
않는 성미예요. 제게도 늘 핀잔을 주는걸요. 하지만
특별히 악의가 있어 그러지는 않을 거예요."
"수진씬 착한 마음씨를 가졌어."
"그렇지도 않아요. 저도 아무나 좋게 말하지는
않아요. 특히 화란이 고 계집앤 얄미워요."
"화란이와는 자주 다투나 보지?"
"항상 사람들 앞에서 나를 깎아내리려고 하니까요.
에로물 영화에 출연한 주제에."
"영화배우였다는 얘긴 나도 들었는데, 그게 에로물
영화였어?"
"젖가슴까지 다 드러내는 3류 영화예요. 출연한
영화를 봤는데 정말 못봐주겠더라구요. 시도 때도
없이 야한 장면이 나오는데 포르노와 하나도 틀리지
않았어요. 이건 다른 사람에겐 비밀이에요. 여자가
성적인 도구로 전락한 영화를 보면 회장님이 화내요."
"화란이는 어떻게 여기 들어왔는데?"
"그건 저도 모르겠어요."
"경주씨는?"
수진은 대답 대신 고개를 흔들었다.
"언닌 궁금한 게 많은가봐.
그제서야 혜빈은 질문의 도가 지났쳤다는 것을
알고는 말했다.
"앞으로 같이 살게 될 사람들이니까 당연하지. 그만
난 ㅆ을게."
혜빈은 욕탕으로 갔다. 옷을 벗고 샤워실로
들어갔다.
샤워실은 특이하게 설계돼 있었다. 따로 반투명
유리 칸막이가 돼 있어 문을 열고 들어가게 돼
있었다. 안은 두 사람이 들어가면 꽉 찰 만큼 비좁다.
혜빈은 비누칠을 하고 물 온도를 조절한 다음
쏟아지는 물줄기에 몸을 내맡겼다. 피로가 엄습해
왔다.
그녀는 태연한 척 행동하고 있었지만 꽤나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첫날 치고는 이만하면 성공적이라고 자평했다.
여종선과 모경주를 빼고는 사람들이 다 친절해
보였다.
특히 박수진은 잘만 부추기면 정보원으로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천성적으로 입이 가벼운
여자 같았다.
오늘만 해도 그녀는 많은 것을 말해주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한편 생각하면 의심스럽기는 하다. 어쩌면
생각과는 딴판으로 자신의 속을 드러내보이면서
이쪽의 속셈을 캐내보려는 의도인지 모른다.
'그나저나 전화 때문에 어떡한다? 동표씨가
기다리고 있을 텐데...'
동표와는 수시로 연락을 취하기로 돼 있었다.
그러나 혜빈은 전화를 하지 않은 건 일단 잘한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도청 장치가 돼 있는지 몰라.'
그때였다. 누군가가 어른거리는 것이 반투명유리를
통해 보였다.
"누구세요?"
혜빈이 말했다.
상대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 움직이지 않으면 못
알아볼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혜빈은 샤워를 끄는 동시에 문을 와락 열어젖혔다.
그러자 누군가가 후다닥 줄행랑을 쳤다.
혜빈은 쫓아나갔다. 열린 욕실 문을 통해 복도를
내다보았으나 아무도 없다.
혜빈은 알몸이라 더 나가볼 수가 없었다.
'누굴까? 왜 하필 샤워하는 모습을 엿본 것일까?'
헤빈은 얼른 젖은 몸을 닦고 방으로 돌아왔다.
"자지 않고 뭐해요?"
여종선이 방한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샤워를 했어요."
"지금이 몇신 줄 알아요?"
"......"
"취침시간은 10시예요."
혜빈은 벽시계를 보았다. 10분을 경과하고 있다.
"죄송해요. 시간이 이렇게 된 줄 몰랐어요."
"다음부터 규칙 어기는 일 없도록 해요. 어서
취침하세요."
여종선은 휭하니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던
수진이 침대 밖으로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갔어요?"
"그래, 갔어."
혜빈은 가방에서 헤어드라이어를 꺼내들며 말했다.
"헌데 거울이 없어서 어떻게 머리카락을 말리지?
미스 박이 좀 해줄래?"
"회장님이 또 들어오면 어쩌려구요?"
"회장님이 그렇게도 무서워?"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요."
"괜찮아. 머리 좀 말리고 잘 건데 뭐."
혜빈은 침대에 걸터앉은 다음 헤어드라이어기를
건네주었다. 수진은 마지못해 일어났다.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을 때 혜빈이 말했다.
"회장님 언제쯤 들어왔어?"
"언니가 들어오기 조금 전요."
'몰래 엿본 게 여종선일까?...'
"복도에서 뛰는 소리 못들었어?"
"글쎄요, 왜요?"
"아냐, 그냥."
"언닌 머리결이 고와요. 난 꼭 뻣뻣한 돼지털
같은데."
"아니야. 수진이 머리결도 고와."
"마음에 없는 소리 말아요. 듣기 간지러워요."
그러면서도 수진은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아냐, 진심이야. 참!"
혜빈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여기 귀가 시간이 9시라던데 토요일은 몇시야?"
"마찬가지예요."
"외박은 안된다며?"
"그건 절대 안돼요. 외박을 하면 여기서 쫓겨나요.
지난 달에도 한 명 쫓겨났는걸요."
"미스 박은 서울에 외출할 일 없어?"
"전 별루예요."
"부모님은 안 계셔?"
"서울에 계시지만 자준 못가요. 다 됐어요."
"수고했어. 고마워."
헤빈은 헤이드라이어기를 치워두고 형광등을 끈
다음 자신의 침대로 들어갔다.
커튼을 쳐놓고 있어 방은 그야말로 암흑이었다.
"자?"
혜빈이 이불을 턱 밑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막 잠이 들려고 해요. 10시에 자는 게 버릇이
됐거든요."
"그래, 잘 자."
"언니두요."
혜빈은 다혜를 생각했다.
다혜는 요즘 오줌소태가 있다. 화장실에 자주
드나들어 아빠에게 혼나지는 않는지.
혜빈은 잠이 올 것 같지가 않았다.
수진은 어느새 코를 골기 시작했다.

* * *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깜박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이불을 뒤채던 혜빈은 낯선 느낌에 눈을 떴다.
캄캄하다.
'여기가 어디지?... 아 그렇지 참. '
빠져나간 발을 이불안으로 끌어들이는데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난다.
혜빈은 본능적으로 귀를 기울였다.
수진이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말을
붙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수진은 살금살금 문쪽으로 걸어가서는 밖으로
나갔다.
'화장실에라도 가려나? 애두 조심스럽긴... 불을
켜지 않구?'
혜빈은 다시 잠을 청했으나 잠자리가 바뀌어서인지
여의치가 않았다.
이리저리 뒤채다가 일어나 찬 공기를 마시기 위해
창문을 조금 열어두고 왔다.
아직 수진은 돌아오지 않고 있다.
그녀는 불을 끄고 도로 누웠다.
'나간 지 얼마나 됐을까?'
그녀는 머리맡에 있는 시계를 확인했다. 야광판이
3시 20분을 가리키고 있다.
수진은 그로부터 20분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행동이
몹시 조심스럽다.
혜빈을 깨우지 않기 위해 고양이걸음을 쳐서는
침대로 들어간다.
그리고 들릴듯 말듯한 한숨을 포옥 내뱉는다.
잠시 뒤, 그녀는 다시 코를 골기 시작했다.


<5>

숨이 차올라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혜빈은 헉헉대며 대열의 맨 뒤쪽에 처져 있었다.
"혜빈씨, 아무리 여자라지만 이렇게 약골이어서
쓰겠어요. 모름지기 여자도 남자만큼 체력이 강해야
남자들을 이길 수 있는 거예요."
여종선은 그녀를 독려하며 옆에서 뛰고 있었다.
"다 왔으니까 좀더 힘내요."
산모퉁이를 돌자 저만치 길가의 바위 옆에 미리
뛰어올라가 있는 회원들이 모여 있다. 혜빈은
어금니를 깨물며 젖먹던 힘까지 짜내었다.
"힘내요!"
"파이팅!"
그들이 응원을 하듯 소리쳤다.
혜빈은 납덩이를 매단 것 같은 다리를 질질 끌며
겨우 바위에 도달할 수 있었다.
곧바로 맨손체조에 들어갔다. 혜빈은 어기적거리며
따라 했다.
내려오는 길은 그런 대로 수월했다.
S의 정원에 도착하자 회원들은 2열 횡대로 섰다.
여종선의 지시가 떨어졌다.
"다른 회원들은 각자의 일에 충실하면 돼요..
그리고 조혜빈씨!"
"네!"
"필기도구 갖고 식사 후에 강의실로 오세요. 자,
해산해도 좋아요."
혜빈은 허리를 짚으며 어디라도 좀 앉았으면
싶었다. 평소 운동을 안한 탓에 하체가 뻐근했다.
마땅한 곳이 없자 그녀는 아무 데나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다리를 펴서 주무르고 있는데, 여종선이 세
여자에 둘러싸여 뭔가 숙의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세 여자는 모경주, 금화란, 박수진이었다.
얘기가 끝나자 그들은 흩어졌다.
박수진이 다가왔다.
"우리 씻으러 가요."
"좀 쉬구. 만사가 귀찮아."
"힘들었죠?"
"힘들다마다. 산길이 왜 그리 멀고 꼬불꼬불해?
대체 얼마나 뛴 거야?"
"왕복 4킬로예요."
"차라리 죽으라지... 수진인 펄펄 날데."
"그간 훈련이 됐으니까요. 처음엔 누구나
뒤처져요."
"강의는 나 혼자 듣는 거야?"
"아마 그럴 거예요."
"그럼 수진인 뭐해?"
"따로 할일이 있어요."
"뭔데?"
"나중에 얘기해요."
"괜히 궁금하네... 어젠 잘 잤어?"
"푹 잤어요."
"난 잠을 설쳐서 말이야..."
수진은 긴장하는 것 같았다. 혜빈은 괜히 말했다
싶었다.
"안씻을 거예요?"
"난 좀 더 쉬구."
수진은 도망치듯 멀어져갔다.
'수상한 애야..."
혜빈은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생각 같아서는
여기 그대로 드러누워 한숨 붙이고 싶었다.
잠이 부족한데다 갑작스런 조깅 탓에 헤빈은
정신마저 몽롱해져 있었다.
"거기, 조혜빈씨! 첫날부터 게으름 피우면
어떡하나?"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자 회원들이 싸리빗자루를
하나씩 들고 모여 있었다.
'하여간 깐깐한 사람들이야.'
"알았어요. 갈게요."
헤빈은 지친 몸을 일으켜세웠다.

* * *

강의는 일대 일 방식이었다.
그러니 쏟아지는 졸음에도 불구하고 혜빈은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지 않을 수 없었다.
여종선은 안드레아 드워킨, 질 존스톤, 샬롯테 번취
같은 극단적 여성해방론자에 대해 얘기했다.
기본적으로는 어제 주제의 반복이었다. 다만
표현양식이 약간 다를 뿐이었다.

".....여성해방론은 이론이고 레즈비어니즘은 그
실천이다. 이것이 우리가 레즈비어니즘을 전면에
내세울 수밖에 없는 이유예요."
강의를 끝내며 여종선이 말했다.
"어감상 별로 유익해 보이지 않는데 오해를 사지
않을까요?"
"우리나라에서는 여권신장운동 자체가 오해를 사는
형편이에요. 일일이 신경 쓰다간 아무 것도 성취하지
못해요. 자, 이 책들을 읽으세요."
그녀는 책 몇 권을 건네주었다.
"질문이 있는데요."
"해보세요."
"레즈비어니즘이 <정치적 선택>이라고는 하지만
남자와의 접촉을 금지하는 것은 동성애를 포함하고
있는 게 아닌가요?"
"한국적 현실을 감안해서 권장하고 있진 않지만
굳이 말리진 않아요."
거리낌이 없는 대답이었다.
"달리 궁금한 것은요?"
"없어요."
"지금이 10시 40분이니까..."
여종선은 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취사실로 가서 파출부 아줌마를 도와주세요.
오후엔 자유 시간을 가지구요. 나중에 책을 읽었는지
확인할 테니까 게으름은 피우지 마시구요."
취사실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파를
다듬던 아주머니가 혜빈을 알아보고는 말했다.
"일하러 오셨나요?"
"네, 아무 거나 부담 갖지 말고 시켜주세요."
"그러고 보니 어제 들어오신 분이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아줌마는 수더분하고 정이 많게 생겼다. 짧은
퍼머머리에 펑퍼짐한 몸매가 몸빼 바지에 썩 어울려
보인다.
혜빈은 양파를 까는 일부터 시작했다. 아줌마는
배추를 다듬고 있었다.
"부양 인원이 많아 일이 힘드시겠어요."
"아니에요. 다들 잘 해주셔서 수월해요."
"보육원 밥도 여기서 하나요?"
"거긴 자기들이 해결해요."
"그럼 오늘 점심은 얼마나 하죠?"
"세 명이 외출한다고 했으니까 8인분 정도요."
그때, 라면박스를 어깨 위에 진 소년이 들어왔다.
"저, 왔어요."
새까만 피부의 소년은 얼굴에 여드름이 보송송했다.
건강하고 씩씩해 보였다.
"중학교에 다니는 우리 아들 녀석이에요. 인사해."
"안녕하세요? 김병수라고 합니다."
"안녕!"
"낙지가 있디?"
파출부가 물었다.
"두 마리. 물은 안 좋구."
학생이 대꾸했다.
"계란 삶아 놨는데 가져가."
"엄만, 내가 찐 계란에 걸신 들린 줄 알어?
컴퓨터나 사줘."
"그게 어디 한두 푼이야?."
"전자과에 가려면 컴퓨터가 있어야 한단 말이야."
파출부는 혜빈의 눈치를 보더니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한다.
"알았어. 내달에 사줄게."
"그 말 진짜지?"
"그래, 약속지킬 테니 어여 학교 갈 준비나 해."
학생이 총총히 사라지자 혜빈이 말했다.
"든든하시겠어요."
"든든하긴요? 말썽에 이골이 났는데."
"붙임성이 있어 어머님 말씀도 잘 들을 것
같은데요."
"비싼 컴퓨터 사달라고 조르는 걸 보셔 놓구도
그러세요?"
"요즘 애들 다 그래요."
"배추 다듬는 건 대충 끝난 것 같은데 그 쓰레기나
좀 내다 버려주시겠어요?"
그러고보니 썩은 음식찌꺼기와 뜯어낸 배추가
비닐주머니에 수북이 쌓여 있다.
"어디에 버려요?"
"저리로 나가서 우측으로 돌아가면 소각장이
있어요. 그 옆에 구덩이가 있으니까 거기 버려요."
혜빈은 비닐주머니를 위에서 매듭지은 다음 들어
나르려고 했다.
"무거워요. 손수레가 있으니까.... 잠깐만요."
파출부는 손수레를 가져와 두꺼비 배처럼 부푼
비닐주머니를 올려주었다.
혜빈은 손수레를 밀고 밖으로 나갔다. 소각장으로
다가가자 정원 쪽이 훤히 내다보였다.
혜빈은 손수레를 들어올려 음식찌꺼기를 구덩이에
밀어넣었다. 그리고 나서 돌아서는데 정문 앞에
푸른색 봉고가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박수진이 운전석에 타고 있었다.
여종선과 모경주가 다가온다. 그 뒤에 금화란도
보였다.
여종선이 그들을 모아놓고 뭔가를 얘기했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하기도 하고 질문도 하면서 5분쯤
대화했다.
여종선이 손짓을 하자 모경주가 조수석에 올라타고
금화란은 뒷죄석에 올라탔다.
봉고는 미끄러지듯 정문을 빠져나갔다.
혜빈은 우두커니 지켜보다가 취사실로 돌아왔다.
"죄송하지만 밥이 다 됐으면 보온밥통 코드를 빼고
그 옆에 있는 코드 좀 꼽아 주시겠어요?"
파출부는 마른 오징어를 무치느라 손이 고추장과
기름으로 범벅이 돼 있었다.
혜빈은 주문대로 한 다음 잠깐 나갔다가 오겠다며
취사실을 나왔다.
혜빈은 정문쪽으로 가보았다. 저만치 모퉁이를
돌아가는 봉고 뒷모습이 보였다.
정원엔 아무도 없었다. 고요한 정적이 감돈다.
혜빈은 별장을 빠져나와 걸었다. 코트를 입지 않아
쌀쌀했다.
15분을 걸어 차길로 나온 그녀는 공중전화를
찾았다.
잡지사로 전화를 걸자 동표가 받았다.
"어떻게 된 거야? 온종일 전화 앞을 떠나지 않고
있었잖아."
"지금 여기 밖이야. 길게 설명할 시간없어. 자주
전화를 못할 거 같아. 핸드폰을 압수당했거든."
"왜, 무슨 실수라도 있었어?"
"그게 여기 규칙이래."
"방에 전화 없어?"
"있긴 한데 혹시 도청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설마 그렇게까지야..."
"아냐, 당분간 조심하는 게 나을 거 같아."
"그래, 그건 조 기자가 그때그때 알아서 판단해.
그곳 분위기는 어때?"
"아직은 잘 모르겠어. 군인처럼 시간에 얽매인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과 여성해방론에 대해 진지하게
공부하고 있다는 게 인상적이야. 그리고 시설 좋은
보육원도 하나 운영하고 있는데, 의문스러운 것은
점은 어디서 그 뒷돈을 조달하는가 하는 거야."
"여종선이 부잣집딸이라고 들었어."
"그렇게 안 보이던데?"
"이마에 부자라는 딱지 붙이고 다니는 사람이
어딨어?"
"알았어. 특별히 연락할 소식이 있으면 다시
전화할게."
"토요일엔 나올 거지?"
"물론이야. 이번 주엔 법원에서 나온 감시관과 같이
시간을 보내기로 했어. 반드시 나가야 해."
"그럼 난 필요 없겠군."
"하여간 나중에 또 걸게."
"잠깐, 나 이사했어. 잡지사에 없으면 이리로
전화해줘. 0335-56-988X야."
"0335가 어디 지역번호야?"
"용인 쪽이야."
"그럼 토요일에 봐."
"조심해."
혜빈은 수첩을 꺼내 불러준 전화번호를 적은 다음
돌아서다가 기겁을 하며 비명을 내지를 뻔했다.
바로 눈앞에 여종선이 버티고 서 있었던 것이다.

* * *

"조심해."
화란이 봉고에서 내려서자 조수석에 앉은 모경주가
말했다.
"약속시간이 언제지?"
"10분 후."
"어디로 갈 거야?"
"일단 교외로 나가야지. 여기서 가까운 곳이
장흥이니까 그 방면이 좋겠어."
"알았어."
"시간이 이르지 않을까?"
운전석의 박수진이 말했다.
"그 사람이 원한 시간이야. 때를 안가리는
짐승이지."
"어떻게 생긴 쌍판인지 보고 싶은데... 우린 저쪽에
대기하고 있을게."
"수고해."
봉고가 움직이자 화란은 시계를 들여다본 후 시선을
차가 오는 방향으로 돌렸다. 이제 겨우 오전 11시다.
하루 중에 가장 차량의 흐름이 원활한 때다. 그건
달리 말하면 누구나 생업에 종사하느라 회사에
틀어박혀 일에 몰두해 있기 때문인 것이다.
바야흐로 이런 시간에 한가롭게 인생을 낭비하는
무리들이 있다.
돈이 남아도는데다 아내를 속이는데는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하는 족속들이다.
이윽고 화란의 시야에 하얀 색 뉴그랜저가
들어왔다. 차체가 눈부신 햇빛을 반사시킨다.
손을 흔드는 화란 앞으로 뉴그랜저가 천천히 굴러
왔다.

* * *

"저..."
혜빈은 곤혹스러웠다.
"여긴 무슨 볼일로 나온 거예요?"
여종선이 다그쳐 물었다.
"그건..."
주저하는 헤빈의 눈에 구멍가게가 들어왔다.
"시, 식용유를 사러 왔어요."
저도 모르게 불쑥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식용유요?"
"마침 떨어졌거든요. 볶을 밑반찬은 많은데."
"파출부 아줌마가 사오라고 시키던가요?"
"아니에요. 제가 사오겠다고 했어요."
"어디에 전화를 했죠?"
"아, 전화요... 한데 그것까지 말해야 하나요?
사생활인데."
혜빈은 강하게 나갔다. 쩔쩔매는 인상을 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좋아요. 사생활이니까 굳이 묻지 않겠어요.
하지만 앞으로 외출을 할 땐 저한테 반드시 보고를
하세요."
여종선의 표정은 치밀어오르는 감정을 참는 듯했다.
"여기까지 잠시 나오는 것두요?"
"거리가 멀든 가깝든 대문 밖을 벗어나면 반드시
제게 알리도록 해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알았어요."
혜빈은 식용유를 사들고 여종선과 함께 S로
돌아왔다. 파출부 아줌마에게 식용유를 사러
보냈는가를 물으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여종선의 생각은 거기까지 미치지 못한 것 같았다.
12시가 되자 남은 회원들은 식당에 모여 식사를
했다. 반찬은 소고기국에 조기구이였다. 나물도
풍성했다. 한마디로 식탁은 윤기가 흐르고 기름졌다.
식사가 끝나자 여종선은 혜빈을 자신의 서재로
불렀다.
"새로운 환경이라 여러 모로 낯설었을 텐데... 어젠
잘 잤어요?"
그녀는 책상 의자에 앉아 말했다. 혜빈은 그 앞에
서 있었다.
"네, 덕분에요."
"불편한 점은요?"
"아니, 없어요."
혜빈은 엄살을 피운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규율은 엄격하지만 딱이 못살게 굴기 위해 그러는
게 아니라는 점을 이해해 주길 바래요."
"잘 알고 있어요. 아깐 제가 몰라서 한 행동이에요.
한 가지..."
"뭐죠? 말씀해 보세요."
"이번 토요일날 외박을 할 수 없을까요?"
"그건 안돼요!"
여종선의 대답은 단호했다.
"어떤 이유라도 허용 못해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라면 지금 이곳을 나간도 해도 말리지 않을
거예요."
"......"
혜빈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여종선을
바라보았다.
"달리 할 말이 있나요?"
"아뇨."
"그럼 나가 봐요."
혜빈이 돌아서서 몇 발짝 떼었을 때 여종선이
불렀다.
"잠깐만요."
혜빈이 돌아봤다.
"이건 돌려드릴게요."
여종선은 압수했던 핸드폰을 책상 위에 내놓았다.
혜빈은 그녀가 왜 변덕을 부리는지 의아했다.
"하룻사이에 규칙이 변한 건가요?"
혜빈은 그 자리에 서서 말했다.
"규칙은 변하지 않았어요."
"그럼 왜 돌려주는 거죠?"
"그만 받으면 될 것을... 혜빈씬 매사에 따져드는
버릇이 있군요."
"전혀 뜻밖이라서 그래요."
"제게 그럴 권한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떤 뜻으로 받아들여야 하죠?"
"마음대로 생각해요. 어서 가져 가요."
"아무튼 고마워요."
혜빈은 핸드폰을 챙겨들고 방을 나왔다.

* * *

흰색 뉴그랜저가 장흥의 러브호텔 지하주차장으로
스르르 미끄러져 들어왔다.
잠시 뒤, 두 남녀가 내려섰다.
여자는 금화란이었다. 사내는 50대 중반의
중늙은이였다. 머리가 하얗게 새고 피부도 탄력을
잃었지만 눈빛만은 강렬했다.
그들은 구두소리를 내며 주차장을 가로질러 가 전용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두 남녀는 숨을 죽인 채 번호판이 3층에 멈춰서는
것을 바라보았다.
문이 열리자 바로 객실이었다. 객실은 넓고 전망이
좋았다. 그제서야 화란이 일성을 터뜨렸다.
"어머, 신기해라! 이런 모텔 처음 봐요."
"고객의 신분을 최대한 노출시키지 않는 주의지."
사내는 흡족한 듯한 웃음을 머금었다.
"놀라워요. 하지만 프론트에서는 체크인 됐다는
것을 어떻게 알죠?"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면 자동적으로 신호음이
울리게 돼 있어."
"철저하군요."
사내는 화란의 손을 잡아끌고 객실의 중앙으로
갔다.
품안에 끌어안긴 화란은 사내의 손길이 엉덩이에
닿는 것을 느끼며 움찔했다.
"서두르실 거 없어요. 얼마든지 시간이 있잖아요."
"내가 성급했나?"
사내가 화란을 놔주는 것과 동시에 노크소리가
났다.
"뭐예요?"
화란이 말했다.
"프론트일 거야."
사내가 입구로 나가 돈을 치렀다.
화란은 전망이 툭 트인 창문을 통해 잔설이 남아
있는 소나무숲을 바라보았다.
뒤로 다가온 사내가 귓볼을 애무하며 말했다.
"젖가슴이 탐스럽군. 이거 큰 기대가 되는데...
내가 먼저 씻을게."
사내가 욕실로 들어가자 화란은 잽싸게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땄다. 그리고 나서 맥주를 두 개의 컵에
각각 넘칠 만큼 따랐다.
약봉지 하나를 주머니에서 꺼내 펼쳐든 그녀는
그것을 컵 하나에 남김없이 쏟아부었다. 이어
손가락으로 잘 섞이게 휘저었다. 조금도 주저함이
없는 행동이었다.
거품에 젖은 손가락을 옷자락에 비벼 닦고 소파에
앉아 태연하게 앉아 있다가 사내가 욕실에서 나오자
자신의 컵을 들어 한 모금을 들이키며 말했다.
"갈증나시죠? 사장님도 한 잔 하세요?"
"아냐, 난 곤란해. 지난 주부터 급성대장염으로
고생하고 있어. 술은 당분간 입에 대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어."
팬티만 입은 사내는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며
말했다.
"한 잔쯤이야 뭐 어때요? 사장님답지 않게 맥주 한
잔 갖고 뭘 빼시고 그러세요?"
화란은 맥주잔을 코앞으로 들이밀었다.
"안된다니까! 피똥을 쌌단 말야."
사내는 머리를 흔들었다.
"피똥요? 그럼 장출혈..."
화란은 과장되게 웃어댔다.
"이제 밧데리가 다 되셨나봐."
"이거야 원..."
사내는 자존심이 상한 것 같았다. 손을 뻗어
맥주잔을 받아든다. 그러나 아직 결심이 서지 않은 듯
냉큼 들이키지는 못하고 있다.
"사약이라도 받는 기분인가 보죠?"
"놀리지 마. 안되겠어."
사내는 끝내 맥주잔을 탁자에 내려놓는다.
"자네도 씻지 그래?"
"딱 한 잔인데도 겁이 나세요?"
어떡하든지 화란은 사내가 수면제를 탄 맥주를
마시도록 유도하고 있다.
"주치의의 처방이야. 오래 살고 싶으면 보리밭
근처에도 가지 말라더군."
"여자 쪽은요?"
"여자야..."
"양기를 함부로 쏟아내는 게 더 몸에 해롭지
않아요?"
"이 여자가 왜 귀찮게 굴지, 오늘 따라..."
"빌빌대는 남자 배 위에 올려놓고 황홀한 척
연기하고 싶지 않아요. "
사내의 얼굴이 붉어졌다.
"지랄같군!"
"알았어요. 관두세요. 저, 씻을게요."
화란은 욕실로 들어간다.
그녀는 샤워기를 틀어놓고 한참을 기다렸다.
"아, 뭐해?"
밖에서 빨리 나오지 않는다고 성화다.
"곧 나가요. 잠시만요."
'수면제를 먹지 않았으니 이거 어쩐다?...'
화란은 작전이 먹혀들지 않아 당황스러웠다. 나가면
중늙은이 앞에서 홀랑 옷을 벗어야 할 판이다.
"뭐해? 빨리 나와!"
문이 쿵쿵 울려댄다.
"곧 나가요."
화란은 하는 수 없었다. 물로 얼굴과 목덜미를 대강
적신 다음 밖으로 나간다.
사내가 달려들어 키스 세례를 퍼부어댄다.
"난 달아올랐어."
사내는 여자를 침대 쪽으로 밀어붙인다.
"자, 잠깐만요. 옷도 벗지 않았는데 이러시면
어떡해요."
여자는 시간을 끌어보려 하지만 요령부득이다.
화란은 거센 힘에 떠밀려 침대 위로 쓰러졌다.
사내가 몸을 던져 덮쳐오른다.
화란은 등허리가 빠질 듯한 중량감을 느낀다.
사내의 손길은 바람개비처럼 마구 휘젓고 다니고
있다. 화란은 그 손길을 방어하느라 필사적이다.
"이거 왜 이래? 여기까지 와서 마음이 변한 거야?"
사내가 도끼눈을 부릅 뜬다.
"그럴 리가요. 너무 조급하게 구시니까 되려 흥분이
반감되서 그래요. 이렇게 낭만을 몰라서야."
"아, 미안, 미안!"
사내는 창가로 걸어가 커튼을 친다. 조명도
은은하게 조절한다.
"됐어?"
"보기없기예요."
화란은 블라우스의 윗단추에 손을 대며 말했다.
"이 여자 보기보다 숙맥인데..."
사내는 돌아선다.
화란은 뒤통수를 갈겨주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생각한다.
'어쩌지?'
하지만 이제 와서 벗지 않을 수도 없다.
화란은 단추를 위에서부터 하나하나 따내려간다.
사내가 몸이 근질근질한지 고개를 돌리려고 한다.
"아직 안돼요!"
"아, 알았어."
'에라 모르겠다!'
화란이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뛰쳐나가려고
작정했을 때였다. 노크소리가 났다.
"누구지?"
사내가 말했다.
"제가 나가 볼게요."
화란은 재빨리 블라우스를 추스리며 문으로
걸어갔다.
문 가까이 와서는 슬쩍 뒤를 돌아보고는 문을
빠꼼히 열었다.
"어떻게 됐어?"
문틈으로 들여다보며 모경주가 소리를 낮춰 말했다.
"약을 안먹었어."
"뭐야? 그럼 어떡하라구?"
"조용히 해."
화란은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 틈엔가
사내가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있다.
"뭐하구 있어?"
모경주가 다그친다.
"아무래도 오늘은 실패한 것 같아."
"놈은?"
"소파에 앉아 있어."
"그럼 빨리 나와."
화란은 곁눈으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자세가 이상하다.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있긴 한데
어쩐지 생명력이 없었다.
줄행랑을 놓으려던 화란은 발목이 잡힌 듯 동작을
멈추었다.
"나오지 않구 뭐해?"
모경주가 재촉했다.
"잠시만."
화란은 소파쪽으로 몇 발짝 떼보았다. 사내의
상태가 보다 확연해졌다.
게슴츠레 반쯤 감은 눈은 완전히 풀려 있었다.
그때, 사내는 드렁드렁 코고는 소리를 냈다.
'어떻게 된 거지?'
그제서야 화란의 눈에 빈 맥주잔이 들어왔다.
'그 사이에 마셨나 보군.'
"언니, 들어와"
화란은 큰소리로 말했다.
모경주가 쫓아왔다.
"어떻게 된 거야?"
"안 마신 줄 알았는데 욕실에 들어간 사이 마신 거
같아. 하마터면 큰일날 뻔 했어."
화란은 블라우스를 단정히 했다.
"더러운 자식!"
경주는 축 늘어진 사내를 보며 말했다.
"수진이는?"
"불러올게."
경주가 나간 사이 화란은 사내의 소지품을 꺼내
한곳에 모아두었다.
사내를 끌어내려 바닥에 반듯이 눕히고 있는데
경주와 수진이 들어왔다.
"서둘러!"
모경주가 말했다.
그들은 서로 도와가며 사내의 옷을 죄다 벗겨냈다.
사내의 알몸은 볼품이 없었다.
처진 뱃가죽이 튀어나온 배위에서 보기 흉한 겹살을
이루고 있었다.
"아버지 뻘이잖아."
수진이 놀랍다는듯이 말했다.
"사내놈들은 젊으나 늙으나 머리 속엔 그
생각뿐이야."
화란이 사내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경주가 가세하려 들자 수진이 말했다.
"힘없는 늙은이야. 잘못 건드렸다간 무슨 변을
당할지 몰라. 망신을 주는 것으로 충분해."
"아냐, 두번 다시 여자에게 못 추근대도록 이번
기회에 단단히 쓴맛을 보여줘야 해."
화란이 말했다.
"침착해. 그러고 보니 수진이 얘기가 맞아. 뭇매를
주기에는 나이가 너무 들었어. 노끈은?"
경주는 발길을 거두어 들였다.
"여ㄱ어."
수진이 내밀었다.
그들은 사내를 뒤로 돌려눕히고 나서 묶기
시작했다. 그 작업은 주로 경주가 주도했다.
양손과 양발을 허리뒤로 끌어와 같은 위치에서
단단히 졸라맸다. 능숙한 동작으로 재빨리 해치웠다.
"소지품은?"
마지막으로 입을 테이프로 봉한 모경주가 말했다.
"챙겼어."
화란이 대답했다.
"수진이 넌 옷을 맡아."
그들은 혹시 떨어뜨린 유류품이 없는가를 확인한 후
객실을 나왔다.
그들은 봉고를 타고 지하주차장을 빠져나왔다.
국도로 접어들자 경주가 핸드폰을 들고 S로 전화를
걸었다.
"저희예요."
"어떻게 됐어?"
상대는 여종선이었다.
"보기좋게 해치웠어요."
"실수는 없었겠지?"
"없었어요. 걱정마세요."
"수고했어. 귀가 시간 있지 말고 적당히 놀다
들어와."
핸드폰을 끄자 화란이 말했다.
"언니, 뭐래?"
"늘 하는 얘기 있잖아."
"귀가 시간 늦지 말라는 거?"
"그래."
"그 사내의 아내한테는 알렸나요?"
운전을 하는 박수진이 말했다.
"알렸어. 아까."
"소지품이랑 옷은 누가 부칠래?"
"제가 할게요... 헌데 효과가 있을까요? 아내가
부탁한 일이라는 걸 알면 불똥이 엉뚱한 곳으로 튀지
않을까요?"
"괜한 걱정할 거 없어. 여태 아무 실수도
없었잖아."
"하지만 지난 번 윤병두 감독 건은..."
"그 얘긴 입밖에 내지 마! 다 지난 일이야..."
차 안의 공기는 냉랭해졌다.
"... 언닌 어떡할 거예요?"
화란이 경주에게 물었다.
"가볼 데가 있어. 넌?"
"전 친구를 만날 생각이에요."
"수진이는?"
"전 집에 잠깐 들릴게요."
"알았어. 그럼 각자 행동하다가 오후 7시반에 강남
버스터미널 앞에서 만나 같이 들어가도록 해. 늦지
않도록 하구. 난 신촌에서 내려줘."
"나도. 거기서 전철을 탈 거니까."
봉고는 구파발을 지나 수색 방면으로 쏜살같이
달려가고 있었다.

* * *

"오늘 온종일 어디 갔었어?"
혜빈은 참았던 질문을 터뜨렸다.
"...네? 뭐라고 하셨어요? 졸린데..."
수진이 말했다.
그들은 불을 끄고 침대에 들어가 있었다. 창가에
나뭇가지의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외출했었잖아."
"별일 아니에요. 회장님 심부름 하러 나간 거예요."
"9시가 다 될 동안?"
"언닌 그게 또 궁금해요?"
"궁금하다기보다 하루 내내 얼굴을 못보니까
그렇지."
"제가 그렇게 보고 싶었어요?"
"딴전부리지 말구 얘기해봐."
"별로 할 얘기 없어요. 회장님 심부름을 했을
뿐이에요."
"무슨 심부름?"
"그건 말하기 곤란해요."
"비밀주의야?"
"아니에요. 언니도 곧 알게 될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좀 말하기 곤란하다는 뜻이에요."
"그 곧이라는 게 언젠지 물어봐도 될까?"
"언니가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걸 회장님이
확신하는 날요. 더이상은 묻지 말아요."


<6>

"늦어서 미안해."
혜빈은 커피숍에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말했다.
"고생했어."
동표가 말했다.
토요일 오후라 그런지 커피숍은 드나드는 손님들로
붐비고 있었다. 혜빈은 과천을 빠져나와 방금 막
잡지사 앞에 도착한 것이었다.
"우리 나가."
"차도 안마시구?"
"벌써 2시가 다 돼 가. 나 9시까지 도로 들어가야
해. 차 가져왔지?"
"물론이야."
"가면서 얘기해."
"눈총받을 텐데."
"그런 적이 어디 한두 번이야?"
혜빈이 몸을 일으키자 동표는 하는 수 없이
따라나섰다.
레지가 엽차를 날라오다가 말했다.
"차도 안 마시구 가셔요?"
"죄송합니다."
동표가 꾸벅 인사를 했다.
"어머, 별꼴이야! 재수없게스리..."
"왜 서두르는 거야?"
동표가 갤로퍼 시동을 걸며 물었다.
"우리 다혜---"
"참, 내 정신 좀 봐. 오늘이 토요일이지. 방교수와
약속했어?"
"롯데백화점으로 가."
"어느 쪽?"
"잠실."
잠실대교를 건너 백화점에 도착했을 때는 3시가
넘어 있었다.
동표가 주차장에 차를 대고 사이드브레이크를
잡아당기자 혜빈이 말했다.
"미안해서 어쩌지?"
"지금 가봐야 하는 거야?"
"10분 남았어. 여ㄱ어."
혜빈은 노트를 내밀었다.
"이게 뭐지?
"그곳에서 내가 듣고 본 것의 일지(日誌)야. 아직
주목할 만한 것은 없어."
"거기 들어간 지 며칠째지?"
"6일."
"결코 적은 시간은 아닌데."
"왜 국장님이 뭐라셔?"
"워낙 성질이 급한 분이시니까."
"뭐랬는데?"
"아니, 뭐 특별한 말이 있었던 건 아니고 큰 기대를
하는 눈치야. 하루 속히 눈에 보이는 결과가 있었으면
하는 거지."
"수요일인가 여자 세 명이 서울로 외출을 했었어.
청부 폭력을 행사하는 회원들이 있다면 그들일 거야.
하지만 아직은 가능성이 반반이야. 그 내용도 거기
적어뒀어. 나 가봐야 해. 전에 말했지만 3개월간
육아능력에 대해 법원의 평가를 받게 돼 있어.
엉망으로 굴었다간 다혜를 영영 빼앗기게 돼."
혜빈은 문을 열고 내려서려다가 말했다.
"오늘 밤에 시간 있어?"
"글쎄."
"과천까지 들어가야 하는데 차 타는데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아서 말야."
"전철 타면 금방인데 뭘."
"전철 내려서 꽤 걸어 들어가야 해."
"그럼, 몇시에?"
"여기서 늦어도 8시에는 출발해야 해."
"4시간이나 남았는데 그동안 난 뭘하지?"
동표는 푸념하듯 말했다.
"불편하면 관두구."
"아니, 불편해서가 아니라 혼자 영화를 보는 것도
그렇고... 이러면 어떨까? 눈에 띄지 않을 테니까 이
근처에 있을게."
"안돼!"
"다혜를 건네 주고 나서 방교수는 바로 돌아갈 거
아냐? 게다가 법원 직원이 날 알아볼 리도 없을
테고."
혜빈은 망설였다. 그러나 심심찮게 귀찮은 부탁을
해온 그녀로서는 그런 제안마저 거절하면 너무 뻔뻔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았어. 하지만 반경 20미터 이내엔 절대 나타나지
않기야."
"OK!"
동표는 눈을 찡긋했다.
방기열은 잠실역 지하 분수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딸은 수소 풍선을 들고 있었다.
"다혜야--"
혜빈이 손을 벌리고 다가가자 다혜가 뛰어와 품에
안긴다. 혜빈은 여느 엄마처럼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동안 얼굴에 이목구비가 제대로 붙어있는 것을
확인하기라도 하듯 찬찬히 들여다본다. 다혜의 이마에
대일밴드가 붙여져 있다.
기열은 그 모습을 탐탁치 않게 내려다본다.
"이 상처는 뭐예요?"
혜빈이 올려보며 말했다.
"뛰어놀다 넘어진 거야. 대수롭지 않으니까 걱정
마."
"애 자꾸 바깥으로 내돌리지 말아요."
"이 여자가..."
"안녕하세요?"
그때 불쑥 말쑥한 차림의 20대 여자가 아는 척을
해왔다.
"누구시더라..."
혜빈은 일어났다.
"법원에서 나왔어요. 오숙자라고 해요."
"어머나..."
"놀라실 거 없어요. 오늘 하루는 다혜가 엄마를
얼마나 따르는가 보려고 왔어요."
"암행을 해서 저 몰래 평가를 하는 게 아니었나요?"
"오늘은 아니에요. 한두 시간만 옆에서 지켜볼게요.
부담되시는 건 아니겠죠?"
그거라면 대환영이다. 남편과 다혜가 같이 있는
것을 봐야 오히려 내 쪽에 유리하다. 문득 혜빈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거 번번히 고생이 많으십니다."
방기열이 인사를 한다.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다.
전에 없던 표정이다.
"네, 지난 번엔 정말 고마웠어요."
법원 직원은 정답게 대꾸를 한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뭘 잘 부탁한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렇게 인사말을 남기며 방기열은 가버렸다.
"아는 사이신가요?"
다혜가 분수대 앞으로 뛰어가는 것을 보며 혜빈이
말했다.
"그저께 자리를 같이 했어요. 다혜가 아빠를
따르는가도 봐야 하니까요."
"아, 네..."
그것이 묘하게 경쟁심리를 유발시켰다. 남편은
어떻게 이 여자에게 잘 보였을까? 한아름 선물을
사주었을까? 아니면 드림랜드 같은 데라도 데려가
놀아 준 것일까?
하지만 그저께라면...
"그저께라면 다혜 아빠가 수업이 있지 않던가요?"
"하루 휴강을 했다고 하더군요."
여우같은 자식!
"다혜에게 잘 하던가요?"
어리석은 질문이라 것을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입밖으로 튀어나왔다.
"평가는 제 입으로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다혜가 뛰어온다.
"엄마아--"
"왜?"
"동표 아저씨 봤어."
"누, 누구?"
혜빈은 이크 싶었다.
"새우깡 사주시는 동표 아저씨 말야."
"아냐, 잘못 본 걸 거야."
"정말 봤어. 저기 있는데."
다혜는 분수대 쪽을 가리켰다.
"어디?"
그러나 동표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조심하지 않구.'
혜빈은 내심 불안해하며 어떻게 해야 법원 여자를
구워삶을까를 생각했다.
일단 다혜가 좋아하는 로보트 장난감가게에 들렀다.
다혜는 여자애답지 않게 로보트 장난감을 갖고 놀기를
좋아한다.
다혜가 정신없이 달려들어 고르는 것을 몇 가지
사준다. 순간순간 곁눈질로 반응을 살펴보지만 여자는
무표정하다.
산 물건들을 매장에 맡겨두고 환타지 월드로
들어갔다.
거기서 같이 즐길 수 있는 기구를 탔다. 토요일이라
2가지를 타고 났을 때는 거의 1시간 반이나 흘러
있었다.
"전 그만 가봐야겠어요."
오숙자가 말했다.
"네, 따라다니느라 고생많으셨어요."
"아니에요. 제 할 일인 걸요."
그들은 1층 로비까지 나왔다.
"전 전철을 타야 하니 저리 가야 해요."
"네, 그럼..."
"맡긴 물건 안찾아가세요?"
"어머, 내 정신 좀봐."
그때 다혜가,
"저기, 아저씨다!"
하고 소리지르며 뛰어갔다.
허둥대던 다혜는 지나가던 남자에 부딪쳐 그만 꽈당
하고 넘어졌다.
혜빈과 오숙자가 달려갔다.
그러나 그에 앞서 동표가 나타나 넘어진 다혜를
부둥켜안았다. 다혜가 울음을 터뜨렸다.
코에서 피가 번져간다.
동표는 다혜의 고개를 뒤로 젖히고 목덜미를 수도로
가볍게 두드렸다.
"병원에 가야 되지 않겠어요?"
혜빈은 불안을 감추지 못했다.
"코뼈가 부러진 정도는 아냐. 괜찮으니까 약국에
가서 솜이나 사와."
혜빈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동표는 아이를 잘 다룰 줄 아는 것 같았다. 다혜는
금방 울음을 그쳤다.
"다혜가 잘 따르는군요."
오숙자가 말했다.
"아, 네..."
동표는 그제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차렸다.
"그렇지만 이건 순전히 우연입니다."
"네? 뭐가 우연이라는 거죠?"
"아, 아닙니다."
동표가 당혹스러운 나머지 조리 있게 말을 못하고
있을 때 혜빈이 돌아왔다. 혜빈은 솜을 건네 주며
어색한 분위기를 한눈에 알아봤다.
오숙자의 눈길이 동표와 혜빈의 얼굴을 번갈아
더듬었다.
혜빈은 동표를 쳐다봤다. 동표는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전 그만 가보겠습니다."
오숙자가 인사를 하고 멀어져갔다.
"눈에 띄지 말랬잖아. 바보같이..."
혜빈이 나무랐다.
"미안. 방심했어."
"눈치가 우리 관계를 의심하는 거 같던데?"
"우리 관계가 어디가 어때서?"
"사귀고 있는 남자로 의심하면 곤란해."
"설마 그런 일이야..."
"사소한 거라도 놓치지 않을 사람이야."
"그렇다면 오히려 잘 됐지 뭐야. 내가 직장동료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될 테니까."
"과연 그럴까?"
"신경 꺼."
"엄마, 장난감!"
다혜가 소리쳤다.
"그래, 가자."
혜빈은 다혜를 안은 동표와 함께 에스컬레이터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거기서 30여 미터쯤 떨어진 곳에 오숙자가
초롱초롱한 눈을 반짝이며 그들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지켜보고 있었다.


<7>

혜빈이 S에서 배운 것은 실로 엄청난 이론들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거의 전부가 남자에 대한 적개심으로
넘친 것들이었다.
적개심은 <결혼>의 거부라는 현실적인 결의로
나타났다.
결혼의 경력이 있는--그들에게 알려져 있는
바--혜빈은 그곳에서 예외적인 존재였다.
결혼이 인류의 존속이라는 보편적인 가치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하다는 논리는 전적으로
남성의, 남성에 의한, 남성을 위한 이데올로기라는
거였다. 그 편협한 이데올로기의 논리적 수순은
이렇다.

1.모든 여성의 삶의 목적은 출산이다.(모성)
2.임신에는 성교가 필요하므로, 모든 성행위는 결국
질내 성교로 이루어져야 한다.(이성간의 성행위)
3.출산에는 남성의 사정이 필요하므로 여성은
자기를 임신시킨 남자에게 자신을 결속시켜야
한다.(결혼)
4.모든 여성은 아이를 낳을 뿐만 아니라 키우기도
해야 한다.(가족)
5.여성들은 아이를 돌보아야 하며, 결혼을 했으니
남편도 역시 돌보아야 한다. 직업을 가지려고 가정
밖으로 나가면 이를 수행하기가 힘들게
된다.(가정주부)
6.여성이 집밖에서 직업을 가진다면, 그것은 남자의
요구에 부응하는 능력(비서, 웨이트리스)이나
아이들의 요구에 맞는 능력(교사, 간호사)이어야
한다. 남성의 일보다 덜 중요하므로 보수도 적을
수밖에 없다.(직업차별)

각 단계는 논리적인 고리처럼 연결되어 있으므로
남자들의 핍박과 억압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남자와의 관계를 거부하고(성교시 질보다는 음핵의
쾌감이 중요시된다. 본래 여자의 성욕은 자연적으로
혹은 필연적으로 남성의 성기와 관계되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것은 동성애의 가능조건이다), 결혼을
거부하고(여성에 있어서 자유는 결혼의 철폐없이
달성될 수 없다. 결혼은 노예제의 한 형태에
불과하다), 내일 존재하려는 타자(자식)에게 자신의
존재 의미를 부여할 이유가 없으므로 어머니가 되어야
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는 것이다.
"그럼 인류는 단절되어야 하는 겁니까?"
라는 혜빈의 물음에
"바람직한 방법은 아니지만 시험관을 이용해 인류를
존속시킬 순 있지요."
라고 여종선은 대답했다.
혜빈이 보기에 여종선 외에는 누구도 그런 얘기에
진정으로 공감을 나타내지는 않는 듯했다. 머리로서는
받아들일 수 있으나 가슴으로 느낄 순 없는 괴리가
거기에 있었다.
그렇긴 해도 표면적으로는 누구든지 남성에 대해
공격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토론과 학습 외에 자신의 경험을 낱낱이 고백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것은 대부분 외부인을 불러들여
회원들과 토론을 하는 방식을 취하곤 했는데, 주로
남자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았으나, 결국에는
파멸에 이른 이혼녀의 쓰라린 고백담이 주류를
이루었다.
줄줄이 딸린 자식만 아니었다면, 혹은 독립할 수
있는 경제 능력만 갖췄다면, 하는 따위로 자신을
한탄하거나 눈물 젖은 후회로 결론지어지곤 했다.
때로는 매 맞아 멍든 부위를 내보여 회원들의
분노를 부추기기도 했다. <시몬느 드 보봐르>의
민윤자도 한번 다녀갔다.
하루는 인사동 갤러리에서 <96 페미니스트
화가전>에 출품한 모경주의 작품--몽롱하고 환상적인
작품으로 대단해 보이지는 않았다--을 감상하고
돌아왔는데, 여종선이 찾는다는 전갈이어서 혜빈은
그녀의 서재로 갔다.
여느 때와 달리 모경주, 금화란, 박수진도 자리를
함께 하고 있었다. 다들 신중해 보였다.
"우린 혜빈 씨를 조심스럽게 관찰해 왔어요."
여종선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제 때가 온 것 같아요."
혜빈은 내심 긴장했다.
"우리는 혜빈 씨를 정식회원으로 받아들이려고
해요."
"네..."
"정식회원이 되면 우리가 하는 사업들에 직접
관여할 수 있어요. 그만큼 책임도 따르게 되구요."
"정식회원은 월급도 받게 돼요. 한달에 100만 원쯤
돼요."
"네..."
"왜, 관심이 없는가요?"
"아뇨.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서요."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요 며칠 동안
이혼녀들이 고백을 하는 걸 보셨을 거예요. 혜빈씬
남자들을 증오하나요?"
"물론이에요. 다른 건 몰라도 그 점만은 확고해요."
"그 증거를 보일 수 있는가요?"
"증거라면?"
"이곳에 찾아온 이혼녀들은 결혼 실패담을 들려주러
온 것만은 아니에요. 또 다른 목적이 있죠. 그건...
남편을 응징하는 일이에요. 자신이 당한 만큼 복수를
하는 일이죠. 혜빈씨도 그럴 수가 있나요?"
"구체적으로 어떤 복수를 말씀하시는 거죠?"
"수모를 안겨주는 것이죠. 거기엔 육체적인 고통도
포함되구요. 남편이 혜빈씨의 몸에 손을 댄 적이
있다고 했죠?"
"그래요."
"그와 똑같이 해주는 거예요."
"하지만 이미 지난 일인데 그런 행위가 이제 와서
무슨 의미가 있죠?"
"의미란 무엇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느냐에 따라
무궁무진하게 변화될 수가 있어요. 정당한 응징은
하찮은 게 절대 아니에요."
"전남편은 거친 사람이에요. 저 혼자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요."
"염려 말아요. 우린 이미 손동표씨에 대해 충분히
조사했어요. <까뜨리느>라는 여성잡지사에선 가장
유능한 기자 중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더군요. 키가
크고 매력이 있어 여자들의 호응이 좋을 남자로
보였어요. 꽤나 바람을 피웠을 것 같던데요."
혜빈은 뜨끔했다.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적극성을
띠며 나올 줄이야.
"외도가 심해 하루도 마음이 편했던 적이
없었어요."
"지금 오피스텔에 살고 있는 것은 알고 있나요?"
"네."
"용인 쪽에 농가를 사들여 개조해 놓은 것은요?"
"얼핏 듣긴 한 것 같은데."
'과연, 철저하군. 내가 잘 모르는 것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으니 말야.'
"응징에 동의할 수 있나요?"
이거야말로 기다려 왔던 순간이었다. 그러나 혜빈은
잠시 주저하는 척했다. 선뜻 동의하는 것이 되려
의심을 살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결정하는데 고민이 되신다면 하루쯤 시간적 여유를
줄 수도 있어요."
"양주 한 잔만 마실 수 있을까요?"
마침 여종선의 뒤로 선반 위에 양주병이 보였다.
"긴장하고 있군요. 갖다 드려."
여종선은 수진에게 지시했다.
혜빈은 눈을 딱 감고 그것을 받아 마신 다음
말했다.
"좋아요. 기꺼이 하겠어요. 하지만 남편에게 제
손을 직접 대고 싶진 않아요. "
"그건 걱정 말아요. 어지간한 경우가 아닌 한
아내는 남편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기 마련이에요.
복수를 결심했다 해도 정작 앞에 나서게 되면
위축되는 게 여자의 심리죠. 그로 인해 일을 그르칠
우려도 있구요. 우린 당사자를 응징의 첨병에
내세우지 않는 주의예요. 우리가 바라는 건 응징에
대한 혜빈씨의 동의예요."
"상대가 크게 다칠 수도 있나요?"
"때에 따라서는요. 왜 겁나요?"
"아뇨. 과연 그 사람이 당할 때 어떤 표정을 지을까
보고 싶은 지경인걸요."
손을 대고 싶진 않지만 괴로워하는 표정을 보고
싶다는 이중심리는 혜빈의 내부에서 충돌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것은 당연히 조작된 남편 손동표가 아니라
전남편 방기열을 겨냥한 것이었다.
"우린 남자들에게 손을 대지만 기준 없이 덤벼드는
건 아니에요. 얼마나 혼을 내줄까 하는 결정은
혜빈씨가 부당하게 처우받은 정도에 비례해요."
"손동표씨가 제게 어떤 짓을 했나 듣고 싶은가
보군요?"
"부인하지 않겠어요. 바로 우리가 바라던
바이니까요."
시선이 혜빈의 한몸에 쏠려들었다.
"제 남편이었던 손동표씨는..."
혜빈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시나리오를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 * *

새벽 2시, 침대에서 살그머니 빠져나온 혜빈은
화장실로 들어가 칸막이문을 걸어 잠근 다음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열번 이상 가고 나서야 겨우 상대가 나온다.
"여보세요."
졸린 음성이다.
"동표씨?"
"네, 누구시더라... 아, 혜빈이? 이 늦은 시간에
웬일이야?"
"잘 들어. 나중에 잠결에 잊어먹었다고 엉뚱한
소리하지 말구. 드디어 때가 왔어. 청부 폭력의
현장을 잡을 수 있게 됐어."
"그거 정말이야? 잠이 확 달아나는데..."
"그런데 말이야..."
"어서 말해. 왜 뜸을 들이구 그래? 나 졸려."
하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테러의 대상이 결정됐어.
"누구야, 그게?"
"미안해..."
"그럼, 나?"
"전혀 예상 못한 건 아니겠지?"
"하지만... 아, 알았어. 헌데 그 정보는 어떻게
입수했지?"
"정식회원으로 인정받는 조건으로 그렇게 하기로 한
거야."
"날 헐값에 팔았군."
"니가 원한 일이야. 왜, 두려워?"
동표는 헬스와 조깅으로 단련된 체력의 소유자였다.
꼭 그래서가 아니라 그는 원래 대담하고 겁이 없는
성격이었다.
"이거 떨리는데."
"엄살 떨지마. 그나저나 그들이 동표씨한테 수작을
걸 때 확실한 물증을 잡아놔야 하는데 어쩌지?"
"현장 사진을 찍어두면 돼지 뭐."
"어떻게? 넌 당하느라 정신이 없을 텐데."
"니가 도와주면 안될까?"
"글쎄, 모르겠어. 당일날 내가 어떤 처지에
있을지."
"그럼 천천히 연구해 보도록 할게."
"어느 천년에? 그들이 언제 널 공격할지 몰라. 내일
당장일지도 모른다구. 그 전에 만반의 준비를 해둬야
할 거야. 중요한 건 그들이 무슨 짓을 하건 큰
저항없이 가만 있어야 한다는 거고 동표씨가
여자들에게 당하는 걸 객관적인 증거로 남겨야 한다는
거야. 그게 어떻게 양립될지 불안해."
"당하는 건 나야. 니 얼굴에 애꿎은 펀치 한방
먹이고 난 졸지에 몰매를 맞게 됐잖아."
"하여간 조심해."


<8>

기사의 마지막줄을 쓰고 나서 동표는 허리를 젖혀
기지개를 폈다. 벽시계가 눈에 들어온다. 벌써 11시가
넘고 있었다.
잡지사 사무실에서 퇴근을 못하고 남은 사람은 그
혼자뿐이었다. 창밖은 이미 어둠속에 잠겨 있었다.
불을 밝히고 있는 빌딩도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동표는 노트북을 덮고 일어섰다. 온몸이 나른하다.
그는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오며 체조를 하듯 목을
돌려보기도 하고 허리를 뒤틀어보기도 했다.
주차장은 겨우 사물을 식별할 수 있을 만큼의 빛만
밝혀놓고 있었다. 동표는 3A-1이라고 쓰인 기둥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는 피곤한 탓에 방심하고 있었다. 곧 공격이
가해질 거라는 혜빈의 경고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키를 꽂고 쓰리도어 갤로퍼 문을 여는 순간
갑작스런 충격이 그의 뒤통수를 지나갔다.
그는 그것이 무엇인가 고개를 돌려 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 의지는 깜깜해지는 시야 앞에서 맥없이
허물어졌다.
다음 날, 그는 딱따구리가 쪼는 듯한 소리에 눈을
떴다. 그는 그것이 알람시계라고 생각했지만 곧
밖에서 누군가가 차창을 두드려대는 소리이고 자신이
얼마나 불편한 자세로 차안에 처박혀 있는지를
깨달았다.
양손과 양발이 허리 뒤로 돌려져 묶여진 그는
젖혀진 조수석 등받이에 처박힌 채 고개를 들어 밖을
내다보았다.
권 국장과 여기자들이 호기심 반 안쓰러움 반인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빌어먹을! 이 무슨 망신이람!'

* * *

소각장에서 막 취사실로 돌아오던 혜빈은 파출부
아줌마가 부랴부랴 뛰어나가는 것을 보았다.
"아줌마!"
라고 불러보았지만 아줌마는 눈깜짝할 사이에
밖으로 사라져버렸다.
혜빈이 애호박 2개째를 썰고 있는데 아줌마가 아들
병수를 앞세워 돌아왔다.
아줌마는 병수를 세워놓고 야단치기 시작했다.
"왜 그런 짓을 한겨? 나 쫓겨나는 거 보고 싶어서
그러는겨?"
아줌마는 병수의 어깨를 사정없이 내려쳤다.
병수는 꼼짝도 하지 않고 울먹울먹했다.
"이 놈의 자식!"
손찌검은 매섭게 계속됐다.
이윽고 병수는 더 못 참겠다는 듯이 반발했다.
"그러니까 컴퓨터 사 달랬잖아."
"그렇다고 회장님 방엘 들어가? 이 나쁜 놈아!"
"에이 씨--"
"뭐야? 이놈이 그래도!"
병수는 달아난다.
뒤쫓아가던 아줌마는 몇걸음 떼지 않아 이내
포기하고 돌아선다.
"헛키웠어! 내가 자식농사 잘못 한겨."
그녀는 허물어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병수가 어디가 어때서요? 제가 보기엔 명랑하고
건강하기만 하던데."
"아니에요. 나도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지 아버지
잃고 내가 요 모양 요 꼴이다 보니까..."
아줌마는 신세 한탄을 하며 눈물을 찍어낸다.
"병수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요?"
"고 녀석이 글쎄 회징님 방에 몰래 숨어들어
컴퓨터를 만졌다나봐요."
"컴퓨터가 망가졌대요?"
"그런 건 아니고..."
"단순히 호기심 때문이었을 거예요."
"그건 알지만 회장님이 호되게 욕설을 하는
바람에..."
"그 또래는 다 그런 거예요. 사춘기 때 그 정도의
장난끼조차 없는 남자애들이 어딨어요? 손버릇이
나쁘다든가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닌데요 뭘."
그때, 박수진이 찾아왔다.
"언니, 뭐하고 계세요?"
"아, 참 내 정신 좀 봐."
혜빈은 취사실을 나서며,
"아줌마 너무 속상해하지 말아요."
하고 말했다.
혜빈은 오늘 보육원에 가서 아이들을 돌보기로 돼
있었다. 아이들은 곧 외국 나들이를 할 예정이었다.
그에 수반되는 잡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고아들에게 외국 여행까지 시켜주다니 실로
감동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건 온전한 부모를
두고도 어지간한 경제력이 없는 가정은 감히 꿈도 못
꿀 일이었다.
혜빈은 여종선이 존경스러웠지만 마음 한
귀퉁이에선 잘 납득이 가지 않았다.
'내 천성이 의심이 많은 건가?'
하면서도 부잣집딸인 것만으로 과연 엄청난 돈을
들여가며 선행을 베풀 수 있을까 하는 의혹이 갔다.
박수진이 모는 봉고가 S대문을 나설 때 혜빈이
말했다.
"회장님은 선하신 분인가 봐. 돈도 엄청나게 많은가
보지? 열 명이 넘는 아이들을 해외여행까지
시켜주시니 말야. 게다가 어제 내게 100만 원까지
주시더라."
"아버지가 부자이셨던가 봐요."
"뭘 하셨는데?"
"그건 나도 잘 몰라요."
"애들 여행은 어디로 간대?"
"여행사에 알아보는 중이래요. 화란이가 접촉하고
있어요."
"오늘 우리가 할 일은 뭐지?"
"애들 데리고 서울에 나가야 해요. 옷 한 벌씩 사야
하거든요. 근처 백화점에 알아봤는데 질감도 별로 안
좋고 비싸기만 해요."
그로부터 2시간 후 혜빈은 남대문 시장을 헤매고
있었다. 열 명에 가까운 여자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며
보호해야 했기 때문에 좀처럼 잠깐의 시간조차 낼
수가 없었다.
서울에 오는 틈을 타 동표를 만나고 싶었지만 결국
과천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의 옷은
하나같이 바지를 골랐다.
차가 남태령 고개를 지날 무렵 혜빈은 아쉬움에서
깨어나며 말했다.
"다 여자애들인데 왜 애들 옷을 바지만 고른 거야?"
"겨울이라 춥잖아요."
"스타킹을 신기면 되지."
"회장님은 치마를 남성을 즐겁게 해주는 도구로
생각하나 봐요."
그래도 애들은 좋은지 뒷좌석에서 재잘거리고
있었다. 아이들의 손에는 과자 부스러기가 들려
있었다.
"혹시 자기 각선미가 보기 싫으니까 심술부리는 건
아니고?"
"그 보다도 언니! 남편되시는 분 말이에요."
"시도한 거야?"
혜빈은 눈치가 빨랐다.
"네."
"언제?"
"어제 밤에요."
"너 나랑 같이 잠자리에 들었었잖아. 내가 잠든
사이에 나간 거야?"
"아니요. 난 이번엔 빠졌어요."
"왜?"
"특별한 이윤 없어요."
"예상보다 빠른데."
"더딜수록 언니가 긴장을 할 수도 있으니까요. 또
마음이 변할 수도 있구요."
"그 사람은 어떻게 됐대?"
"모르겠어요. 화란이와 경주 언니가 와 봐야 돼요."
"그래서 아침부터 안보였구나. 난 또 어디 외출을
했나 했지. 헌데 이런 소식이라면 회장님이 직접 내게
전해줘야 하는 거 아냐?"
"안그래도 그럴려고 했는데 내가 한방을 쓰니까
먼저 전해주라고 한 거예요. 왜 기분 나빠요?"
"정식회원으로 받아들였다면서도 따돌림을 하는
같아서."
"그건 그렇지가 않아요. 회장님은 언니를 배려하고
있어요."
"돈 준 것 말고는 실감이 나지 않던데."
"곧 실감할 수 있을 거예요."
"무슨 얘기라도 들었어?"
"꼭 그런 건 아니지만..."
"하여간 바지는 좀 심했어."
"입 조심해, 언니."
그러나 혜빈으로서는 이제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다. 동표가 당한 이상 청부 폭력을 일삼는
<사포의 딸들>의 범죄 행각은 낱낱이 세상에 공개될
것이었다.
늦어도 내일까지는 이 변태의 소굴 같은 곳을
벗어난다는 생각에 혜빈은 해방감마저 느꼈다.
밀착 취재라는 명분만 아니었다면, 두 번 다시
찾아오고 싶지도 않은 곳이었다.
육체적으로 크게 불편한 건 없지만 뭐든지 여종선의
시선을 의식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혜빈으로서는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혜빈은 S로 돌아오자마자 <까뜨리느>로 전화를
걸었다.
"어떻게 됐어요?"
그녀는 권국장을 확인하고는 성급하게 물었다.
"낭패야."
"낭패라뇨?"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어."
"네?"
혜빈은 귀를 의심했다.
"아니, 왜요? 제가 주의까지 줬는데. 손 기자가
당하는 현장 사진을 찍을 사람을 따라붙이지 않구요?"
"조 기자가 경고한 날 이후로 내내 따라붙이긴
했지. 어젠 손 기자가 밤샘할 거라고 해서 사무실에
남아 있을 줄 알았는데 일이 예상보다 빨리 끝나는
바람에 혼자 오피스텔로 돌아가려고 했나봐.
공교롭게도 그때 당한 거야."
"왜 사무실에 남아 있지 않았대요?"
"너무 피곤해서 그만 깜박 했다는 거야. 하긴 요즘
손 기자 좀 무리했어."
"그래도 그렇지. 결정적인 순간에 일을 그르치면 난
어떡해요?"
"안그래도 그 문제로 연락을 취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당분간 거기에 더 있어야 할 것 같아."
"얼마나요?"
"그건 손 기자와 상의해 봐야겠어."
"손 기자 상태는 어때요?"
"뒤통수를 세 바늘 꿰매고 병원에 입원해 있어.
CT촬영을 했는데 뇌에는 이상이 없대."
"다른 곳은요?"
"괜찮은가봐. 그만한 게 다행이야. 그런데
말이야... 왜 조 기자 친구 있었지?"
"누구요?"
"왜 윤병두 감독 살인범으로 기소돼 서울구치소에
수감돼 있는 친구 말야."
"오은영이라는 앤데... 걔가 왜요?"
"안그래도 지금 막 그때의 기사를 찾아보는 중이야.
오양의 진술이 경찰의 진술과 차이가 난 점
있었잖아."
"글쎄요..."
혜빈은 요즘 워낙 머리 속이 복잡해서 얼른
기억해내지 못했다.
"잘 생각해봐."
"그게 그러니까..."
기억을 더듬고 있는데 불쑥 박수진이 들어왔다.
"네, 죄송해요. 네, 네..."
혜빈은 얼른 말을 돌리며 딴전을 부렸다.
"조 기자, 왜 그래? 주위에 누가 있어?"
"네, 그래요. 내일까지 돈은 반드시 넣어드릴게요."
혜빈은 화가 난 듯이 핸드폰을 집어던졌다.
"누군데?"
박수진이 침대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카드회사야. 연체됐다고 저 난리잖아."
"얼마나?"
"회장님이 주신 돈으로 갚을 수 있어."
"회장님이 잠깐 보재."
"날? 왜?"

* * *

"수진씨에게 대충 들으셨죠?"
혜빈이 서재 소파에 앉자 여종선이 맞은 편에
자리를 잡으며 말했다.
"네."
"기분이 어때요?"
"직접 눈으로 본 게 아니라 실감은 나지 않아요."
"그럼 직접 보실 걸 그랬나요? 원하지
않으셨잖아요."
"전남편은 지금 어떤 상태예요?"
"병원에 입원한 걸로 알고 있어요."
"꼴사납겠군요!"
혜빈은 과장되게 말했다.
"그 모습 보고 싶지 않아요?"
"전 그 인간 곁에 가기조차 싫어요."
"하지만 이런 때 혜빈씨가 손동표씨 병문안을
간다고 생각해봐요."
"병문안이라뇨? 가당치 않은 일이에요. 제가 왜
갈아 마셔도 속시원하지 않을 인간의 병문안을 가요?"
"그렇게 생각할 것만은 아니죠. 손동표씨의
입장에서 생각해봐요. 그는 지금 수모를 당했고 그
사실이 잡지사 여기자들에게까지 알려져 있는
상황이에요."
"그랬나요?"
"우린 잡지사 지하 주차장에서 공격을 감행했어요.
그리고 그를 갤로퍼속에 방치해뒀죠. 그래서 다음날
잡지사 직원들이 알게 된 거예요."
"네..."
"그런 상황에서 혜빈씨가 병문안을 간다고
생각해봐요? 손동표씨가 얼마나 수치스럽겠는가?"
'지독한 여자야! 뭘 그렇게까지...'
"과연 그럴까요?"
"제 생각이 틀림없어요. 혜빈씬 병문안을 가
손동표씨를 마음껏 비웃어주는 거예요. 그보다 더
멋진 복수는 없을 거예요. 내일 아침 일찍 외출을
허락할게요. 하루 나갔다 와요."
"정말요?"
혜빈은 오전에 외출을 시켜준다는 사실에 더
흥분했다.
그녀는 늘 오후까지 교육을 받고 있어 충분한
시간이 나지 않았던 탓이었다.
"뭐든지 철저하게 마무리 짓는 게 우리
방침이에요."
혜빈은 저녁 내내 들떠 있었다.
에이키(EIKI)라는 16밀리 영사기를 통해 여성 버디
필름으로 유명한 <델마와 루이스>를 감상하는
동안에도 그녀는 내일 이곳을 빠져나갈 생각만을 하고
있었다.
"언닌, 감상문 안 써요?"
영화를 보고 나서 방으로 돌아와 원고지와 씨름하던
수진이 말했다.
"난 천천히 쓸래."
"언니가 제 것도 좀 써줄래요?"
"내가?"
"전 글이라면 젬병이에요. 언닌 저보다 학벌도
높잖아요."
"글은 학벌로 쓰는 게 아냐. 마음으로 쓰는 거지.
게다가 지금 그거 할 기분 아냐. 나 내일 아침 일찍
외출해."
"아침부터요?"
"회장님이 허락했어."
"별일이네요. 참, 그러고보니 병원에 입원한 전남편
때문인가요?"
"그래... 달리 뜻이 있는 게 아니고 병문안 가서
자존심을 뭉개 놓으라고 보내주시는 거야."
"그럼 그렇지."
"나 먼저 씻을게."
혜빈은 샤워실로 나와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 섰다.
샤워실에 드나들 때마다 지난 번처럼 또 누군가가
훔쳐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마저 오늘은 쉬
떨쳐버릴 수 있었다. 그만큼 그녀는 홀가분했다.
샤워를 끝내고 돌아오자 방안엔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또 너구리 잡네. 창문 좀 열어놓을게."
"미안, 언니... 도무지 진척되지가 않아서."
"내일 해. 안되는 거 붙잡고 씨름한다고 써질 리가
없잖아."
혜빈은 일찌감치 자리에 누웠다.
수진은 팝송을 틀어놓고 계속 담배를 피워대다가
스르르 일어나 형광등을 끈다.
"굿나잇, 언니."
"너도."
혜빈은 나른함이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 기분좋은
피곤함이다.
반나절 남대문 시장을 쏘다닌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
왔다.
금방 골아떨어진 수진의 쌔근대는 숨소리가 들릴 듯
말 듯 하다가 아련히 멀어져 갔다.
혜빈은 동표와 한방에 있었다. 동표는 상반신에
아무 것도 걸치지 않고 있었다.
동표의 육체에 매혹 당하고 있다는 의식이 더없이
기분 좋으면서도, 쉽게 보여서는 안된다는 저항감이,
더해서 이건 점잖치 못한 짓이라는 윤리적 거부감이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동표는 부드럽게 속삭이며 다가왔다. 이윽고 그의
손길이 혜빈의 가슴에 와 닿았다. 전류가 몸을
관통하듯, 격렬한 흥분이 솟구쳤다.
'아, 안돼요...'
그 저항의 목소리는, 그러나 상대의 귀에 닿을 만큼
크지 못했다.
그녀는 온몸을 채찍으로 휘감는 듯한 동표의 시선에
압도 당하고 있었다.
동표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그녀는 황홀감에 넋이
빠져나갈 것 만 같았다. 그녀의 내부에서도 남자를
소유하고 싶은 욕구가 참을 수 없게 치밀었다.
남자의 손길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자세에서
동표의 허리를 끌어안아 자신의 하체에 밀착시켰을
때, 느닷없이 그 뒤로 원망스러워 하는 다혜의 얼굴이
보였다.
다혜의 표정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엄마, 뭐하고 있어?'
그 순간 혜빈은 동표를 품 안에서 밀쳐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안돼요!'
동시에 그녀는 얕은 꿈에서 깨어났다. 그때 불쑥
어둠 속에서 속삭이는 말이 아직 반수면 상태에 있는
그녀의 정신을 일깨웠다.
"괜찮아. 가만히 누워 있어."
그리고 젖가슴을 쓰다듬는 손길을 느꼈는데, 그녀는
바퀴벌레가 스쳐지나간 것 같아 저절로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러나 그에 앞서 무언가가 입을 틀어막았다.
"입닥쳐! 소리치면 죽어!"
그것은 말만의 위협은 아닌 것 같았다.
머리맡에서 누군가가 혜빈의 목을 조여왔고, 또 한
사람은 혜빈의 하체를 타고 앉아 있었다.
혜빈은 그제서야 자신의 상체가 벗겨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둠 속에서 뻗어나온 손이 혜빈의 몸을
마구 더듬었다.
혜빈은 이게 능욕을 당하는 것이로구나 하는
두려움에 발버둥질을 쳐보았다. 이상하다. 발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양발은 저항을 하지 못하도록 묶여져 있었다.
철저한 놈들이었다.
아니다. 놈들이 아니다.
혜빈이 상대가 남자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뒤늦게
눈치 챈 순간 하체의 잠옷이 벗겨내려지고 있었다.
혜빈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그에 따라 상대도
움직임이 기민해졌다.
"참아. 처음엔 거부감이 있을지 모르지만 곧
좋아져."
손길이 혜빈의 은밀한 곳을 더듬자 혜빈은,
"이러지 마! 제발!"
하고 소리쳤다.
물론 그 소리는 혜빈의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혜빈의 저항이 만만치가 않자 억압은 더욱
거세어졌다.
'이런 곤욕을 치르고 있는데 대체 수진은 뭘 하고
있는 걸까?'
그러나 수진은 잠에 빠져 있는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렇게 5분여, 실랑이를 벌이고 있던 와중에 돌연
형광등이 밝아지며 하체를 타고 앉은 사람의 놀라는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모경주였다.
위에서 입을 틀어막고 손을 못쓰게 잡고 있던
여자의 손놀림도 멈추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여종선이 소리쳤다.
두 여자가 침대에서 물러났다. 그들은 여종선의
기세에 눌려 위축되어 서 있었다.
혜빈은 몸을 추스려 침대에 앉았다.
또 한 여자는 금화란이었다. 여종선이 뺨을 한대씩
후려쳤다.
"아무한테나 이러지 말라고 했지."
여종선은 강도 높게 나무랐다.
"죄송해요, 회장님..."
화란의 목소리는 떨려나왔다. 그에 반해 모경주는
고개를 떨구고는 있었지만, 잘못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그 사이 혜빈은 발목을 풀고 여종선의 옆으로 붙어
섰다.
그제서야 소란에 눈을 뜬 수진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침대에 일어나 앉았다.
"괜찮아요?"
여종선이 말했다.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죠?"
혜빈은 진저리를 쳤다.
"제가 대신 사과할게요."
"아니에요. 사과는 아직 반성의 기미가 없는
모경주씨에게 직접 듣고 싶군요."
혜빈의 말에 모경주가 고개를 쳐들어 노려봤다.
"지금 노려보는 거야?"
여종선이 말했다.
"아니에요."
"어서 사과해."
"......"
자존심이 그걸 허락하지 않는 것 같았다.
"어서!"
여종선의 톤이 높아졌다.
"미안해요."
"더 크게 해! 그리고 공손하게."
"죄송해요, 언니. 제가 잘못했어요."
"너도."
여종선은 화란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죄송해요.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어요."
여종선은 다시 한번 사과하며 둘을 데리고 나갔다.
혜빈은 어이가 없고 기가 차서 방 한가운데를
어슬렁거리며 왔다갔다 했다.
수진은 상황을 대충 짐작한 듯 말도 못 붙인 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수진이 너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던 거야?"
혜빈이 말했다.
"못들었어요. 미안해요. 곤한 잠이 들었었거든요."
"정말이야?"
혜빈은 다그치려다가 생각을 바꿔 말했다.
"아냐, 나 찬물 한 잔만 갖다 줄래?"
냉수를 마시는 동안에도 수진은 몸둘 바를 몰라
쩔쩔매고 있었다.
"너도 당한 적 있어?"
"네, 두번요."
"요즘에도 그래?"
"아뇨."
"계속 요구했을 거 같은데 어떻게 벗어났지?"
"회장님한테 일러바쳤어요. 욕지기가 나 참을 수가
없었거든요."
"경주와 화란이는 보통 관계가 아닌 것 같던데?"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둘만의 은밀한
일이라 확실히는 모르겠어요. 지난 번에 언니가
목욕하는 걸 누군가가 훔쳐보았다면 아마 둘 중의
하나일 거예요."
"그때 왜 얘기 안해줬지?"
"모함한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어요."
"회장님의 본심은 뭐야?"
"레즈비어니즘을 표방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것에 무게를 두는 입장인 거 같아요.
여성끼리 생리적 욕구를 느낀다 해도 무방하지만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주의구요."
"더러워! 이거야말로 강간이잖아. 여자들이 그렇게
비난해 마지 않는 강간말야!"
혜빈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도무지 다시 잠을 청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되어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피지 않던
담배까지 하나 얻어 피우면서 어서 동이 트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9>

"머린 좀 어때?"
혜빈은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동표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런 대로 견딜 만해. 헌데 이 시간에 어떻게
빠져나온 거야?"
"널 골려 주라던데."
"누가?"
"누구긴 누구겠어? <사포의 딸들> 회장이지. 내가
이렇게 불쑥 나타나면 동표씨가 자존심 상해할
거라던데."
"독종이군!"
"왜 테러에 대비를 못했지? 사진 한 장
못찍었다며?"
"미안해, 내가 방심했어. 야근을 하려다가 설마
하고 퇴근한 게 화근이었어."
"지하 주차장에서 당했다며?"
"그래, 잡지사 지하주차장에서... 갤로퍼로
걸어가는데 뒤통수에 강한 충격을 느꼈어."
"누군지 얼굴은 봤겠지?"
"전혀."
"뭐야?"
"난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으니까."
"최악이군."
그때, 권옥희 국장이 부랴부랴 들어왔다.
"아니, 국장님?"
동표가 웬일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뜨악한 얼굴 할 거 없어. 조 기자 연락받고 바로
달려온 거야."
"뭐 바쁜 일이라도 있어요?"
"조 기자가 <사포의 딸들>로 다시 들어가지
않겠다잖아."
동표는 혜빈을 쳐다보았다.
"아니, 왜?"
"나도 그걸 들으러 온 거야. 겸사겸사 셋이서 할
말도 있고."
권 국장이 말했다.
혜빈은 어제 새벽에 겪은 일에 대해 낱낱이
설명했다.
듣고 난 권 국장과 손동표는 한결같은 반응을
보였다.
"그렇다면 문제가 심각한데."
동표가 말했다.
"전 이 일에서 손떼겠어요. 그렇게 지저분한 경험은
처음이에요. 아직도 토할 것 같은 역겨움이 남아
있어요. 그리고 기사라면 제가 겪은 걸 메모한 게
있으니까 그것으로 부족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렇지가 않아. 조 기자의 경험은 부인 못하지만
함부로 써댔다간 오히려 역공을 당할 수도 있어."
"역공이라뇨?"
"기사를 두고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해올 수도
있다는 거지."
권 국장은 여전히 밀착 취재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했다.
"하지만 조 기자더러 그곳엘 다시 들어가라는
건..."
동표가 말했다.
"알아, 무리라는 건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이제
와서 <사포의 딸들>에 대해 뭐라고 쓸 거야?
동성연애자가 득실거리는 변태 소굴이라고? 손 기자가
지하주차장에서 무력하게 당하지만 않았어도 내 이런
말은 안할 거야. 청부 폭력에 대한 증거가 확고하지
않으면 기사는 고려할 일고의 가치도 없어. 그저 그런
정도의 하찮은 기사가 되고 마는 거야. 사장님의
전략에 형편없이 함량 미달이 될 거구."
"이거 저 때문에..."
동표는 머쓱해졌다.
"그렇다고 오해 마. 손 기자를 나무라자고 꺼낸
얘긴 아니니까."
"하지만 전 다시 들어가지 않을 거예요. 이렇게
주요 소지품은 아예 챙겨갖고 나온 걸요.,"
혜빈은 가방을 내보였다.
"한 두 주 정도 더 버텨볼 수 없겠어?"
"아뇨. 무슨 대안이 있으면 또 몰라도 이젠 증거를
잡을 길이 막연하잖아요."
"아냐, 대안은 있어. 대안이라기보다는 특종감이지.
그래, 이건 정말 특종감이야!"
권국장의 확신에 찬 어조에 혜빈과 동표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며칠 전 통화를 할 때 미처 그 얘기를 마무리짓지
못했는데... 왜 윤병두 감독 피살사건 있었지?"
"네, 그래서요?"
혜빈은 왜 자꾸 그 얘기를 꺼내는지 의아했다.
"친구 오은영 양이 진술한 내용중에 윤 감독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양손발이 허리 뒤로
묶여져 있었다고 했지?"
"네."
"정말요?"
놀란 것은 동표였다.
"정말 오은영씨가 그렇게 진술했습니까?"
"이 기사를 봐."
권 국장은 복사해 온 종이를 꺼내보였다.
기사를 읽은 동표는 이마를 쳤다.
"이거, 믿기 어려운데요."
"대체 그게 뭐가 문제죠?"
혜빈은 아직 정보를 갖고 있지 못했다.
"아직 얘기 안했어?"
권국장이 동표에게 말했다.
"그 얘길 어떻게 합니까? 창피하게."
"뭔데요?"
헤빈은 궁금해졌다.
"새삼스레 왜 빼고 그래? 결국 다 알게 될 텐데."
"내 입으로는 말 못하겠어요."
"그게 말이야..."
권 국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윤감독과 손 기자가 당한 모양새가 같아. 손
기자도 나체로 모욕을 견뎌내야 했거든."


<10>

지난 한 주 내내 혜빈은 소형녹음기를 가슴에 품고
다녀야 하는 곤욕을 치러야 했다.
소형녹음기로 S 회원들의 목소리를 녹음하자는
발상은 손동표의 아이디어였다.
윤병두의 살해 혐의로 기소된 오은영에게 결혼을
하면 안된다고 전화를 걸어왔던 미지의 여자가
<사포의 딸들>의 회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이 생각이 옳다면, 그래서 녹음된 목소리를
오은영에게 들려주어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왔던
여자를 확인하게 한다면, 궁지에 몰린 그녀의 처지도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까뜨리느>로서는 여러 모로 특종을 잡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혜빈은 동표의 뒤통수를 내려쳤던 여자가 모경주와
금화란이었듯--이건 박수진이 귀띔한 것으로 나중에
확인되었다--윤병두를 옴짝달싹 못하게 묶었던 사람도
바로 그들일 거란 짐작을 했다.
모경주와 금화란, 거기에 박수진 그리고 여종선도
포함될지 모른다. 적어도 청부 폭력이 이들을 통해
저질러져 온 것은 거의 확실했다.
혜빈은 우선 이들 4명의 목소리를 녹음한 테이프를
우편으로 잡지사에 보냈다. 결과는 예상 외로 빨리
나왔다.
비록 녹음된 목소리라 100% 확신은 못했지만,
오은영--1차 선공공판에서 그녀는 20년형을
언도받았다--은 금화란을 지목하더란 거였다.
이것은 번연히 눈앞에 두고서도 미처 깨닫지 못했던
점을 혜빈에게 일깨워주었다.
윤병두가 영화감독이고 금화란이 여배우라는
불가분의 연관성은 새로운 관점에서 모색되어졌다.
오랜 전부터 둘은 배우와 감독으로서, 혹은
영화계라는 큰 울타리안에서 모종의 교제를 해왔던 게
아닐까?
윤병두와 금화란 둘 모두 에로물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 그런 의혹에 신빙성을 가져다주었다.
그래서 둘이 아는 사이라면, 또한 금화란이
레즈비어니즘으로 사상을 무장하고 발가벗겨진 윤병두
감독을 꽁꽁 묶는 데 가담했더라면, 그의 끔찍한 죽음
또한 그 연장선상에서 해법을 찾아야하는 게 아닐까?
금화란이 윤병두 감독이 연출한 에로물에
출연했다는 것은 쉽게 확인되었다.
<앵두 부인>, <자정의 러브호텔>, <여자가 짙게
화장할 때> 같은 통속 에로물이 그것들이었다.
줄거리라고 내세울 만한 게 없고 그저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장면의 무분별한 나열에 불과한, 그렇기에
극도로 관객들의 성욕을 자극하는 3류 영화들이었다.
그것들은 처음부터 비디오 영화로 만들어졌고,
따라서 그런 부류의 영화들에 대한 애호가들이 아닌
한 영화배우를 알아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개중에 더러는 눈에 확 띄게 얼굴이 예쁜 배우도
있었지만, 대개가 농염한 육체의 관능미에 중점을 둔,
어딘지 둔한 인상의 백치미 여인들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자연 혜빈은 금화란을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의 여성성을 상품으로 격하시켜 시장에
내놓은 에로물 스타가, 자신의 행위와 인생관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S에 가입했다는 것부터가 흥미로운
일이었다.
금화란은 왜 그런 급격한 변화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된 것일까? 혹시 그것이 윤병두 감독의
죽음과 일말의 관련성이라도 있진 않을까?
조사한 바에 따르면 금화란은 1남 3녀의
막내딸이었다. 아버지는 기한 없이 공사장을 떠도는
미쟁이였고, 어머니는 날품팔이로 근근히 생계를
유지했다.
아버지가 공사판에서 실족 사고로 사망한 후 연이어
어머니가 과로로 쓰러지자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막내는 사내라 하여 작은 아버지 집에 맡겨졌으나
불량 청소년이 되어 가출했다는 소식만 들릴 뿐
지금은 어느 하늘 아래 살고 있는지조차 모른다.
사정은 두 언니도 마찬가지였다. 먹고 살려다 보니
여기저기를 떠돌다 안부 소식마저 끊어졌다.
학력은 고중퇴, 예능에 소질이 있고, 친화력이 강한
성격이라는 것 외에 별달리 알려진 것은 없었다.
그녀가 3류 에로물 여배우에서 어떻게 이곳에까지
흘러들어오게 되었는지는 베일에 싸여 있었다.
금화란에 대한 조사가 처음부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반면, 주목되는 초점은 분명했다. 윤병두 감독이
살해된 날, 대체 이곳에서 무슨 음모가 꾸며졌으며,
금화란이 맡은 역할이 무엇인가 하는 점을 밝혀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 점에 대해 동표는 적극적으로 달려들어 보라고
말했다.
"뭘 어떻게?"
라는 혜빈의 반문에 동표는 이렇게 충고했다.
"어떻게든 그날 벌어진 일을 밝혀내지 않는 한 우린
아무 것도 시도하지 않은 것과 같아."
"그러니까 그 <어떻게든>이 뭐냐니까?"
"금화란에게 은밀히 접근해봐. 단연코 위험하다고
생각되지만 하는 수 없어."
밀착취재를 통해 얻은 특종으로 벼랑에 몰린
잡지사를 살리자는 데 그치지 않고 친구 오은영의
누명까지 벗겨 준다면 금상첨화가 따로 없을 터였다.
기자의 천성을 가진 혜빈은 투지가 생겨났다.
이쯤 되면 해볼 만하다.
하지만 접근은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다. 우선은
모경주와 합세해서 그녀를 성폭행하려 했던 전과(?)가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 섣불리 접근했다가 오히려
이쪽의 속셈을 간파당하기 십상이다.
상당 기간 혜빈으로서는, 그 두 명에 대해서는 화가
난 인상을 심어 주는 것이 자연스런 반응이었다.
따라서 화가 풀어질 뚜렷한 명분도 없이 접근하는
것은 어설픈 연극이라는 것이 금방 들통난다.
혜빈은 지루함을 참으며 기회를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 그녀에 대한 여종선의 신뢰도 깊어
갔다. 하기야 그게 과연 어느 정도인지, 믿을 만한지,
안심을 해도 될 만한 수준인지 아직은 불투명했다.
그러나 사사로운 대화나 태도에서, 또는 이젠
충분히 우리의 일원의 자격을 갖추었으니까 매사에
참여하자는 분위기는 성숙되어 갔다.
화란은 보육원 아이들의 해외여행에 동참하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그녀는 처음부터 제외된
것 같았고, 그게 무척이나 속상한 것 같았다.
그녀는 어린애처럼 부어오른 볼을 내밀고
노골적으로 투정을 부리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해외여행에 가게 된 사람은 여종선을 제외하고는
모경주 혼자뿐이었다.
미니버스까지 대절해 김포공항으로 나가 중국으로
떠나는 아이들을 환송해주고 돌아올 때 혜빈은 마침내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회장이 없자 분위기는 사뭇 이완되어졌다.
그것을 알기 때문인지 여종선도 비행기에 오르기
전에 당부를 잊지 않았었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자라나는 아이들의
꿈과 미래를 위한 것이야. 못 간다고 해서 불만이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아. 그 대신 외박을
허용하겠어. 하지만 규칙에 어긋나는 일은 절대 삼가
줘!"
돌아오는 길에 수진은 서울에서 내리겠다고 말했다.
혜빈도 따라 내리고 싶었지만, 딱이 갈 데가 없어
보이는 화란의 의중을 탐색해 볼 다시 없는 기회라고
생각하며 과천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봉고를 몰고 있었고, 혜빈은 조수석에 타고
있었다.
"수진이는 어디 갈 데가 있나 보지?"
혜빈이 부드럽게 말했다.
화란은 대꾸하지 않았다. 아직은 서먹서먹한 기분을
누그러뜨리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수진이는 정말 좋겠어. 당장 외박을 할 곳이
있으니 말야."
"......"
계속되는 자극에도 무반응이다.
마침, 기름이 떨어진 거 같아 혜빈은 주유소에
들르라고 말했다.
혜빈이 용변을 보고 나서 나오자 화란은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차도 한 잔 안마시구?"
혜빈은 운전석 문을 열고 팔을 잡아끌었다.
그제서야 반응을 보여 왔다.
"알았어요. 내려갈게요."
그곳은 간이 휴게소가 마련돼 있어 그들은 커피를
뽑아와 파라솔 아래 앉았다. 아직은 쌀쌀했지만
혜빈은 오랜만에 짓눌린 기분에서 해방되는 듯한
시원함을 느끼며 말했다.
"이거 오해하지 말고 들어줘."
화란의 얼굴에서 시큰둥한 표정이 사라졌다.
"지난 번에 서울 나갔다가 들은 얘긴데 너 윤병두
감독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며?"
"네?"
펄쩍 뛸 듯 놀란다.
"누가 그래요?"
"비디오방에서 니가 출연한 영화를 우연히 보게
됐어. 윤 감독 작품 말야. 내가 <자정의 러브호텔>을
고르니까 비디오 가게 아저씨가 그러더라구. 윤감독과
너랑 염문이 있었다구."
"미친 자식! 그 비디오방이 어디예요?"
"흥분하지마. 악의가 있어 그런 말 한 건 아닐
거야. 그만큼 니가 유명해서겠지."
"더러운 자식! 말이라고 함부로 하고 있어."
"원래 대중들은 그렇잖니? 연예인 씹는 걸로
스트레스 해소하잖아."
"결코 아니에요. 그건 루머에 불과한 거예요."
"알아, 나두. 니가 설마 그랬겠어?"
"그래요. 절대 날 그런 여자로 보지 말아요."
화란은 의외로 약한 데가 있었다. 스스로 당당하지
못하고 남의 평판에 꽤나 신경을 쓰는 눈치다. 이런
여자는 얼마든지 요리할 수가 있다.
"사실 난 그 말을 듣고 나서도 꼭 그렇게 생각을
안했는데..."
혜빈은 말끝을 흐리며 뭔가 심중에 감추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했다. 그게 주효했는지 화란은 당장
관심을 보여 왔다.
"그럼 또 누가 그런 말을 하던가요?"
"얘기 못해. 그렇게 되면 난 남의 험담이나
늘어놓는 수다쟁이가 되잖아."
"우리 회원인가요?"
"그만 가지."
혜빈은 마신 종이컵을 휴지통에 던져넣었다.
"고약해요, 언닌. 감질나게 해놓고
그만두시려구요?"
"가면서 얘기해."
헤빈이 먼저 차 쪽으로 걸어갔다.
화란이 서둘러 뒤따른다. 바짝 속이 탄 모양이다.
"수진이죠?"
화란은 시동을 걸며 말했다.
"수진이? 왜 수진이라고 생각하지?"
"걘 날 싫어하니까요. 얼마든지 뒤에서 나를 헐뜯을
위인이에요."
"그렇지가 않아. 수진인 착해."
"그럼 누가 그런 거예요?"
"누가 말했냐는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화란이의 마음 자세야. 아니면 그만인 거지 뭐."
"하긴 그래요."
그녀는 자신이 주눅들 이유가 없다고 고쳐
생각했는지 말투에 힘이 들어갔다.
"그런데 난 화란이가 윤병두 감독 작품에
출연했다는 걸 알고는 섬뜩해졌지 뭐야."
"무슨 얘기예요?"
그녀는 담배를 뽑아물며 계기판 아래 부착된 라이터
버튼을 누른다.
"윤감독이 살해된 건 알고 있지?"
"네, 알아요."
"난 혹시나 해서 말야..."
"뭐가요?"
"경찰이 찾아온 적 없어?"
"아뇨... 절 왜요?"
"경찰들은 주변 인물들에 대해 샅샅이 조사하잖아.
의혹이 가건 안 가건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 관련
인물을 추궁하는 게 그들의 생리야."
"전 윤감독이 살해된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벌써 오랜 전부터 만난 적이 없는 걸요. 게다가
범인으로 이미 결혼을 앞두었던 오은영이라는 여자가
기소되었구요."
이쯤 해서 혜빈은 어느 정도의 수위(水位)에서
대화를 이끌어가야 할지 망설여졌다. 알몸이 되었던
손동표의 상태와 윤감독이 죽기 전의 상태가 같았다고
말함으로써 직접적으로 회원들을 빗대는 것이 좋을지,
오늘은 이 정도에서 그만두어야 할지 쉬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물러난다면 결국 아무 것도
알아내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작용한데다
그녀가 오은영이라는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크게 고무됐다.
"내가 알기론... 얼핏 신문기사에서 읽은 것
같은데... 하여간 그때 언론이 대단했었잖아. 각
신문마다 특종으로 다루었으니까. 그래서 분명히
기억이 나는데, 기소된 오은영이라는 여자가
진술하기로는 윤병두 감독은 죽기 전에 발가벗은 채
꽁꽁 묶여 있었다고 하던데."
그러자 봉고가 차선을 잃고 휘청거렸다.
"조심해! 왜 그리 놀래?"
"제가 언제요?"
화란의 안색이 하얘졌다.
"하여간 조심해. 이러다간 사고나겠어."
"왜 내게 그런 말을 하는 거죠?"
"특별한 이윤 없어. 하두 이상해서 그래. 너와
모경주가 내 전남편도 옷을 죄다 벗겨 갤로퍼에
처박았다며?"
"후회하시는군요."
"아니, 후회는 전혀 안해. 둘 사이에 공통점이 있는
게 이상하다는 거지. 화란이는 그 점을 어떻게
생각해?"
"우연의 일치겠죠."
"우연의 일치? 형사라면 다르게 해석할걸."
혜빈은 고개를 돌려 바라봤다.
화란은 태연한 척 보이려고 무척이나 애를 쓰고
있었지만 성격이 단순해 당황한 기색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형사라면 말이야... 그걸 범행 수법이 같다고
얘기하지."
"그럼, 윤 감독도 우리가 손을 봐줬단 말인가요?"
"왜 아닌가?"
"......"
화란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가 흔들리고 있음을
혜빈은 느낄 수 있었다.
"수진이 얘기로는..."
그 순간 혜빈은 하필 왜 수진이를 내세워
넘겨짚었는지 스스로도 납득이 안갔다. 하지만 그렇게
해야 화란이 실수를 저지를 것 같았고, 그녀의 예상은
생각보다 빨리 적중했다.
"나쁜 년! 역시 입이 싼 년이야!"
"욕할 거 없어. 난 이제 당당한 회원이잖아."
"그 얘긴 달라요. 우리가 윤 감독을 테러하고 그
다음 윤 감독이 바로 죽었기 때문에 아무한테도
발설하지 않기로 굳게 약속한 걸요. 행여 죄없는
우리가 살인범으로 몰릴 수도 있으니까요."
'그럼 안 죽였다는 말인가?'
헤빈의 가슴은 쿵쿵 뛰었다.
오은영이 결백하다고 전제할 때, 윤병두에 대한
테러가 필경 죽음과 무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화란은 테러를 인정하면서도 살인은
부인하고 있는 거였다.
"대체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데 그래?"
"수진이가 다 얘기 안하던가요?"
"수진이 말만으론 믿을 수가 없어서 그래."
"우린 윤 감독 안죽였어요. 그거야말로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는 거라든가... 뭐 그런 거예요."
"그럼 화란이는 윤감독을 누가 죽였다고 생각해?"
"그걸 왜 내게 물어요? 전 몰라요."
"그날 윤 감독을 테러하는 데 누가 가담했지?"
대충 짐작은 갔지만 확실히 해두고 싶었다.
"우리 셋요. 경주 언니, 나 그리고 그 알량한
계집요."
"그만해. 앞으로도 한솥밥 먹을 날이 하루이틀이
아닌데 언제까지 앙숙으로 지내려고?"
"하는 짓이..."
"그만 두라니까!"
혜빈으로서는 그렇게 다져두지 않으면 나중에라도
화근이 될 것 같아서였다. 화란이 수진에게 쫓아가
따져들면 그야말로 난처해진다.
"회장님은 가담하지 않았어?"
"아뇨, 회장님은 그런 일을 손수 하시지 않아요."
화란은 고분고분해졌다.
"그 일에 대해선 뭐라셔?"
"무슨 일요?"
"테러한 후에 바로 윤 감독이 죽은 거."
"처음엔 우리 셋 중에 하나가 한 짓이 아닌가
의심을 했었죠. 하지만 한 명씩 면담을 한 후엔
조용히 덮어두라고 하셨어요."
"왜 그랬을까?"
"뭐가요?"
"왜 셋 중에 하나가 한 짓이라고 의심을 했을까?"
"그야 우리가..."
그러다가 화란은 멈칫하며 차를 길가에 갖다대고는
비상등을 켰다.
"언니, 수상해요. 왜 그걸 꼬치꼬치 캐묻는 거죠?"
"꼬치꼬치는... 나도 하고 싶어서야."
"뭘요?"
"남자를 혼내주는 짓."
"전 남편을 혼내주는 짓은 거부하셨잖아요."
"그거야 다르지. 게다가 하려고 해도 직접 당사자는
하지 못하는 게 규율이라며?"
"그건 그렇지만... 마음이 변한 건가요?"
"매일 세뇌교육을 받다시피 레즈비어니즘을
공부하고 있어. 안 변한다면 사람이 아니겠지."
"회장님이 들으면 좋아하시겠는데요. 테러에 직접
가담하겠다고 해보시지 그래요?"
"안그래도 그럴 참이야. 그래서 그 일이 자꾸
궁금해지는 거야. 험담을 들어야 할 거 아냐?"
"하지만 윤 감독이 죽은 것에 대해서는 별로 말할
것도 없어요."
"회장님이 왜 셋 중에 하나가 한 짓이라고 의심을
한 거야?"
"그건... 그렇게 알고 싶어요?"
"굳이 말 못할 이유라도 있어?"
"이렇게 된 이상 그런 건 없어요."
화란은 담배를 피워물더니 말하기 시작했다.
화란이 말한 것을 종합하면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그러니까 작년 12월 10일경, 눈발이 세차게
몰아치던 날, 부산에서 새 영화를 촬영중이던 윤병두
감독이 스스로 서울로 올라온 것은 치밀한 계획이
이뤄낸 성과였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사포의 딸들>에서 이미
디데이(D-Day)를 잡아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기는 그가 부산 촬영을 마치고 난 뒤였다.
그가 최근 들어 부쩍 열을 올리며 촬영에 임하던
것을 생각하면 부산에 비가 와서 촬영이 연기됐다는
구실로 서울까지 올라온 것은 다소 뜻밖의 일이었다.
오은영에게 미리부터 윤병두 감독과 결혼을 해서는
안된다는 전화를 몇차례 걸었던 <사포의 딸들>은
마침내 계획을 수정해 며칠 앞당겼다.
화란은 처음부터 미끼로 사용되어졌다. 한 달쯤
공릉동의 행복 아파트를 드나들던--관리인이 없는
서민 아파트인데다 윤 감독도 남의 눈에 띄는 것을
꺼리고 있어 주민은 시선을 따돌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화란은 그날 기꺼이 몸을 제공할 수 있다는
태도를 보였고, 그가 허겁지겁 옷을 벗어던지고
그녀를 덮치려 했을 때 대기중이던 모경주와 박수진이
들이닥쳤다. 그리고는 단숨에 그를 저항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몇 차례 발길질을 했지만 그로 인해 죽을 상황은
아니었다. 그저 몸 군데군데 멍이 들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늘 하던 방식으로 그의 양손발을 허리 뒤로
묶어두고 아파트를 나왔다. 그때가 12시
45분경이었다.
그들은 봉고에 올라타서는 바로 전화로 과천의
여종선에게 보고를 했다. 통상, 청부 폭력이 있는
날이면 귀가 시간을 늦춰주거나 하루 외박을
허용하기도 했다. 이것은 폭력을 행사하기까지 사기를
진작시키고 몇날 며칠을 두고 느끼게 되는 긴장을
해소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이날은 모처럼 외박을 해도 된다는 지시가
떨어졌다.
박수진을 남겨두고 화란과 경주는 종로에서 봉고를
내렸다.
커피숍으로 들어가 커피를 마시던 중 모경주는
어디론가 전화를 연방 걸어대더니 곧 갈 데가 있다며
가버렸다.
화란도 중학교 때 단짝처럼 지내던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약속은 했으나 4시간쯤 뒤에나 만날 수 있다고
했다.
그녀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 가까운 상영관을
찾아들었다. 실베스터 스텔론 주연의 SF영화 <저지
드레드>였다.
영화를 보고 나서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떨다가
그녀의 자취집에서 하루를 보내고 다음 날 S로
돌아왔다. 그때가 오후 4시쯤 되었는데, 모경주와
박수진은 이미 돌아와 있었다.

"그럼 니가 영화를 보고 있던 중에 윤감독이
살해되었다는 거야?"
얘기를 다 듣고 난 혜빈이 말했다.
"대충 그래요."
오은영은 1시쯤 공릉동 윤 감독의 아파트로
찾아갔었다. 그곳에 머문 시간은 최대 30분 가량--
경찰은 1시 전후 사이를 살해 시간으로 추정했었다.
그 시간과 화란이 영화를 보고 있던 시간은 정확히
일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난 알리바이를 입증할 수 없었어요. 영화를
혼자 봤으니까요. 영화표를 버리지 않고 간직했었으면
좋았으련만..."
"그럼 다른 사람은?"
"경주 언닌 친구의 아뜨리에에 갔었다고 했지만
그게 불분명했어요. 수진이도 마찬가지고. 아무 데도
들르지 않고 바로 집에 갔다고 했다는데, 집 식구야
언제든지 거짓으로 알리바이를 만들 수가 있잖아요."
"그래서 회장님이 세 사람을 의심했던 거로군."
"공교롭게도 그렇게 되고 말았어요. 하지만 전 안
죽였어요."
화란은 강변하듯 말했다.
"그래, 나도 그렇게 믿어. 화란인 그럴 사람이
아냐."
혜빈은 적당히 기분을 맞추어 주었다.
그러나 적어도 그녀의 말은 객관적으로 입증할
방도가 없었다.
"가지, 그만..."
혜빈의 말에 화란이 기어를 1단에 넣었다.
차가 움직이자 혜빈은 생각했다.
모경주, 금화란, 박수진--이 세 사람, 이들 중에
누가 윤감독을 죽인 걸까?
추천 (0) 선물 (0명)
IP: ♡.221.♡.27
23,498 개의 글이 있습니다.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조회
나단비
2024-03-07
0
435
나단비
2024-03-07
0
406
나단비
2024-03-07
0
438
나단비
2024-03-06
1
493
뉘썬2뉘썬2
2024-03-05
1
473
뉘썬2뉘썬2
2024-03-04
1
512
나단비
2024-03-04
1
490
나단비
2024-03-03
1
443
나단비
2024-03-03
0
94
나단비
2024-03-02
0
70
나단비
2024-03-02
0
59
나단비
2024-03-02
0
86
나단비
2024-03-02
0
60
나단비
2024-03-01
0
88
나단비
2024-02-29
1
470
나단비
2024-02-29
0
90
나단비
2024-02-29
0
87
나단비
2024-02-29
0
126
나단비
2024-02-27
1
89
나단비
2024-02-27
0
60
나단비
2024-02-27
0
65
나단비
2024-02-27
0
65
나단비
2024-02-27
0
66
나단비
2024-02-26
0
73
나단비
2024-02-26
0
98
나단비
2024-02-25
0
88
나단비
2024-02-25
0
101
나단비
2024-02-24
1
144
나단비
2024-02-16
0
111
나단비
2024-02-16
0
123
모이자 모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