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휴 - 여자 곱하기 남자 2

3학년2반 | 2022.02.16 07:47:15 댓글: 0 조회: 538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9212



<11>

모경주--H대 회화과졸, 26세, 초창기엔 사실화에
주목했으나 최근 경향은 페미니즘를 초현실화에
접목해 보려는 독특한 시도를 하고 있다.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벌써 2번의 개인전을 모
갤러리에서 대담하게 해내 대체적으로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가족 관계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반면, 아뜨리에를 하거나 음악, 연극 등 예술에
종사하는 친구들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수진--S여상졸, 반신불수가 된 아버지에 남동생이
하나, 간호사 출신, 그외 다른 사생활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금화란--이미 알려진 바와 같음...

"성격으로 봐선 모경주가 가장 의심스러워."
혜빈은 조사한 내용을 훑어본 다음 말했다.
"거친 여자야?"
동표가 말했다.
그들은 동표의 용인 별장에 와 있었다. 기온은
오랜만에 봄날씨처럼 따뜻했다.
그들은 누런 잔디가 깔린 정원 원탁에 앉아 있었다.
토요일 오후의 햇살이 하늘을 노을로 물들이며 스러져
가고 있었다.
다혜가 자전거를 타고 꽃밭 사이를 누비며 다니고
있었다.
"다혜야, 거긴 안돼!
혜빈이 소리쳤다.
다혜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노는 데 열중해 있다.
"내버려 둬. 모처럼 엄마가 곁에 있으니까 좋아
어쩔 줄을 모르는 것 같은데."
"잰 꼭 머슴애 같다니까. 꽃밭이 망가지면
어쩌려구?"
"걱정 마. 퇴비를 줄 때 손보면 돼."
혜빈은 그런 동표를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동표는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지 아빠가 이만큼만 너그러웠으면...'
방기열은 아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앞으로는 자식에
기대어 살 부모가 하나도 없는데 귀찮게 자식은 낳아
무엇 할 거냐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그 시간에
공부나 하면서 취미나 살리겠다는 거였다.
그런 생각이 너무 이기적이지 않느냐고 말하면 그는
그게 개인적이지 어디 이기적이냐고 따져들곤 했다.
궤변이 따로 없었다. 자식을 낳아 기르는 것은
자연스런 행위이자 인간의 도리라고 여겨 오던
혜빈이라 자신의 주장대로 아이를 낳았지만, 남편은
놀러온 남의 집 아이를 대하듯 시큰둥하기만 했다.
이혼을 앞두고 당연히 다혜는 자신이 기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던 혜빈은 남편의 양육권 요구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식은 남자의
소유물이라는 전근대의식이 남아서일까, 하여간
남편은 돌보지도 않을 아이를 기르겠다고 나선
거였다.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해?"
동표의 말에 혜빈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뭐라고 했지?"
"무슨 걱정 있어?"
"아냐, 깜박 했어. 다시 얘기해봐."
"모경주란 여자 거칠게 구느냐고 물었어."
"왜 예술하는 사람들의 전형 있잖아. 자유롭고
분방한, 그러면서 자기 주장이 강한... 뭐 그런
여자야."
"특별히 의심을 두는 이유는?"
"수진이나 화란이는 강한 성격이 아냐. 사람을 죽일
타입이 못된다는 거지."
"그건 편견이야. 사람을 죽일 타입이 따로 있는 게
아니거든."
"그럼 아무나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거야?"
"물론이지. 교수와 목사가 사람을 죽이는 세상인데
뭘."
"그건 다르지. 직업이 존경 받던 시대는 지났어.
이젠 무슨 직업을 갖고 있느냐가 아니라 어떤
인간인가가 중요하게 되었어. 경찰이라도 나쁜 짓을
하지 말란 법은 없어. 요는 인물의 됨됨이지. 난 그런
의미에서 말한 거야."
"모경주의 됨됨이가 어때서?"
"비밀스런 여자 같아. 표정은 늘 뭔가를 감추고
있는 듯하구."
"예술하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느껴지는 인상일
뿐이야."
"어떻게 직접 보지도 못했으면서 그렇게 잘 알아?"
"모경주와 금화란이 너를 욕보일려고 했다면서?"
"그래서?"
"모경주가 주동하고 금화란이 모경주의 말이나
지시에 따르는 관계이고."
"뭐 대충 그런 거 같아."
"그렇다면 윤병두 감독의 살인도 같은 맥락에서
봐야 해. 무슨 말인가 하면 둘은 일종의 혈맹 관계인
거지. 둘은 동성애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져.
그만큼 친밀하다는 거지. 그렇다면 둘 중의 하나가
무슨 이유로 살의를 가졌다면 너에게 한 것처럼 같이
저지르려고 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모경주는
커피숍에서 전화를 건 다음 먼저 친구 아뜨리에로
갔다며? 그게 바로 둘 중의 하나가 저지르지 않았다는
간접적인 증거야."
"그럼 박수진이?"
"그래, 난 그 여자 같아. 물론 이건 짐작에
불과하지만."
"그 여잔 윤 감독하고 아무 관계도 없어."
"그건 우리 생각이고... 알 수 없는 거잖아."
"방금 생각난 건데 모경주가 윤 감독을 질투해서
일을 저지른 건 아닐까?"
"질투?"
"삼각관계 말이야."
"그것도 삼각관계라고 할 수 있나?"
"모경주와 금화란이 동성애를 하고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하지. 금화란에게 관심을 보이는 윤감독에게 화가
치민 나머지..."
"글쎄..."
동표는 납득하지 않았다.
"여종선은 어때?"
"아파트에서 나와서 핸드폰으로 바로 과천에 전화를
걸었대."
"전화를 받고 올 수도 있잖아."
"시간적으로 불가능해. 과천에서 공릉동까지
1시간에 올 수는 없어. 설령 올 수 있다 해도 그렇게
촌각을 다투며 여유없이 살인을 할 사람이 어디
있어?"
"누가 죽였든 동기가 대체 뭘까?"
하지만 그것은 끝내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러자 누군가를 의심하는 건 부질없는 짓이라고
여겨졌고, 어쩌면 그들 셋은 범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봤다.
이 생각 저 생각 옮겨가다 보니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된 것 같았다.
결국 세 명 다 의심할 수 없거나 다 의심을 해야
한다는 막연한 결론밖에 도출하지 못하고 둘은
잠자리에 들었다.
혜빈은 다혜와 함께 2층을 사용했다.
법원의 오숙자가 이 모습을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피식 쓴웃음이 나왔다.
혜빈은 다혜가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곤한 잠에 빠져 있다. 가벼운 콧소리가 난다.
언제부턴가 아이의 행복이 자기 행복의 바로미터가
되어버렸다. 처녀 때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상상을 했다면 오히려 혐오감을 가질 일이었다. 새삼
핏줄의 끈끈한 정에 압도되어 아이의 이마를
쓰다듬는다.
혜빈은 유복자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녀의
어머니가 임신 3개월이었을 때 소방관으로 일하다
순직했다. 어린 시절, 화재 예방 포스터를 그릴 때면
아버지는 죽을 때 얼마나 뜨거웠을까 괴로워했던 적이
있다.
젊은 모습을 담은 아버지의 사진을 가슴에 품고
다니며 아버지가 늘 수호신 역할을 해줄 거라고 믿은
적도 있다. 아버지는 그녀를 낳아준 친부(親父)
이상의 무엇이었다.
아버지가 없음으로 해서 그녀가 겪은 고통과 연민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다. 다혜에게 같은 고통을
물려 주게 된 것이 혜빈은 무엇보다 가슴 아팠다.
그때 노크 소리가 났다.
혜빈은 얼핏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고개를 돌렸다.
노크 소리가 다시 나며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조 기자, 자?"
"으응, 아니."
"그럼 좀 내려와."
"왜?"
"술이나 한 잔 마시자구."
"별로 생각이 없는데."
"커핀 어때?"
"알았어."
혜빈은 옷을 갈아입고 아래로 내려갔다. 1층
응접실은 넓고 호화로웠다. 벽엔 곰가죽과 장총이
장식으로 걸려 있고, 그 옆엔 여러 종류의 양주가
선반위에 놓여져 있다.
혜빈은 벌건 장작개비가 페치카 안에서 타오르는
맞은 편의 소파에 가 앉으며 말했다.
"아까부터 미뤄오던 질문인데... 물어봐도 돼?"
동표는 저만치에서 커피를 스푼으로 푸고 있었다.
"뭔데? 이거 겁나는걸."
"난 손 기자가 부자는 아니라고 생각했거든."
"아, 이 별장-- 친구 아버지 거야. LA로 이민을
가셨지. 2년 동안만 내가 사용하게 됐어. 내가 이런
걸 가지려면 앞으로 20년 동안 한 푼 안쓴 월급을
꼬박 저금해도 못살걸."
잠시 뒤, 동표는 두 잔의 커피를 날라왔다.
"난 술 한 잔 하고 싶은데."
"마셔."
혜빈은 커피잔을 그러쥐며 말했다.
"혼자서야 술맛이 안 나잖아."
"옆에서 봐줄게."
동표는 고무된 듯 꼬냑과 얼음을 가져왔다.
혜빈은 한잔 따라주었다.
"건배!"
혜빈은 커피잔을 마주쳤다. 동표는 단숨에
들이켰다.
"속버려. 안주 안먹어?"
"저녁 때 먹은 게 소화가 되지 않아서."
그러며 동표는 뚫어지게 바라본다. 눈빛이 유난히
반짝인다. 예사롭지가 않다.
혜빈은 갑자기 이런 둘만의 시간이 어색해졌다.
뭔가 얘기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겨났다.
"역시 넌 박수진이 의심스럽다는 거지?"
"그거밖에 할 얘기가 없어?"
"그럼?"
"우리 둘 얘기."
동표는 침을 삼켰다.
"날 어떻게 생각해?"
"뭘?"
"남자로 말이야."
"어머, 너, 지금 날 유혹하는 거야?"
"크게 다르지 않아."
"농담마!"
"농담 아냐."
동표는 조심스럽게 다가오고 있다.
"이러지 마!"
혜빈은 발딱 일어났다.
"이러면 나 지금 갈 거야!"
"이거 너무 예민하잖아."
"날 값싼 여자로 보지마."
"결코 그런 뜻은 아냐."
혜빈은 커피잔을 내려놓고 2층으로 올라가려고
했다. 동표가 그녀의 팔목을 잡아챘다.
"난 널 말이야..."
동시에 그는 혜빈의 입술을 덮쳤는데, 그보다 먼저
볼에서 번쩍 불꽃이 튀었다.
혜빈이 손찌검을 한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벌겋게 흥분되어 있었다. 페치카 불빛이 홍조를 더욱
붉게 물들였다.
"나쁜 자식!"
그녀가 부리나케 나무계단을 밟아 올라간다.
그런데도 동표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소리쳤다.
"다혜 때문에 그러는 거 알아. 하지만 언제까지
다혜 핑계를 댈 거야? 우리 같이 힘을 합쳐 키우면
되잖아."
혜빈은 방으로 돌아왔다. 도무지 가슴이 진정되지
않는다. 그녀는 소지품을 서둘러 챙겼다. 그리고
다혜를 깨우려다가 문득 동작을 멈추고는 그 자리에
쓰러지듯 주저앉아버렸다.
까닭 모를 설움이 복받쳐온다. 그녀는 소리 죽여
울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이 이혼녀가 당하는 수모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발끈한 것은, 자신의 내부에 동표를 향한 욕구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했다.
"미안해."
어느 새 동표가 들어와 있었다.
혜빈은 울음을 그쳤다. 동표는 그녀의 뒤로 가서
등을 두드렸다.
"용서해. 난 너도 날 좋아하는 줄 알았어."
"......"
"지금 어떻게 가려고? 너무 늦었어. 차편도
없는데."
동표는 혜빈을 돌려앉혔다. 혜빈은 시선을
외면했다.
동표는 그녀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혜빈은
저항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마. 잠시 그냥 이렇게 있고 싶어."
혜빈은 남자의 체취를 느꼈다.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혜빈은 그 체취가 싫지 않았다...
다음 날, 혜빈은 동표가 모는 갤로퍼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녀는 동표를 남겨두고 다혜와 함께 강남의 한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방기열은 미리 나와 있었다. 기열은 지난 밤에도
술을 마신 듯 부석부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눈에
띄게 살이 말라 있다. 눈은 퀭한 채 핏발이 서 있다.
다혜는 아빠를 보자 주춤댄다.
"뭐하고 있어?"
혜빈의 다그침에 다혜는 쭈뼛쭈뼛 인사를 한다.
다혜가 가지 않으려고 하자 기열은 다혜를 번쩍
안아들어 볼을 비벼댄다.
"또 법원에서 나온 그 여자가 보고 있나요?"
혜빈이 말했다.
"무슨 소리야?"
기열은 다혜를 놔주었다. 다혜는 엄마 곁으로 온다.
"유난떨지 말라는 얘기예요."
"흥, 시비조는 여전하군. 그래 그 기자 친구와는
요즘 어때?"
"상관 말아요."
"보통 사이가 아닌 것 같던데."
기열은 노골적으로 빈정거렸다.
"이쯤 해서 양육권 청구건을 포기하지 그래. 법원의
여자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던데. 어차피 각자
재혼할 거라면 아버지 밑에서 크는 게 낫잖아. 게다가
시간을 끌어 봤자 내게 유리할 건 뻔하구."
"나야말로 당신이 왜 이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요.
여자들이랑 노닥거리려면 다혜가 방해되지 않아요?"
"젠장, 레파토리도 없나? 내 주변 여자 신경쓰지
말고 당신 처신이나 잘해. 가자!"
기열이 일어났다.
다혜는 엄마 눈치를 살폈다. 헤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3주 후가 다혜 생일이라는 거 알지?"
기열이 말했다.
"알아요."
"수요일이야. 어떡할 거야?"
"어떡하긴요. 만나야지요."
"어지간하면 양보하지 그래."
"말같지 않은 소리 말아요. 당신은 늘 보잖아요.
당신이 양보하세요."
그러나 서로가 양보를 할 리 없다. 법원에서
지켜보고 있는 한 생일날에 자상한 부모의 모습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방기열은 또 연기를 할 것이다. 기막힌 노릇이었다.
"좋아."
방기열이 말했다.
"같이 만나. 내가 연락할까?"
"아니에요. 제가 연락할게요."
다혜는 기열의 손에 끌려가면서 힐끗힐끗 뒤를
돌아본다.
혜빈은 뭉클 가슴이 아렸다. 그녀는 커피숍을 나와
갤로퍼에 올랐다.
"어떻게 됐어?"
"데려갔어. 지금 몇시야?"
그녀는 자신의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싶지 않아
말했다.
"1시 50분. 과천으로 들어가기에는 아직 이른 것
같은데. 중국에 갔다는 회장은 언제 돌아온다고
했지?"
"모레."
"그럼, 내일 가지 그래."
"마찬가지야. 집에 혼자 있고 싶지 않아."
동표와 헤어진 혜빈은 전철을 탔다.

혼자가 되면 그녀는 멍한 눈길이 되어, 다혜의 장래
생각으로 착잡한 기분이 되곤 했다.
아무래도 불길했다. 어쩐지 다혜를 영영 방기열에게
빼앗길 것만 같았다. 오숙자에게, 남자가 있다는
인상을 심어준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다.
어쩐다? 또 동표씨는...
손 기자한테는 조만간 태도를 확실히 해야 할 것
같았다. 이렇게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다간 누군가는
상처를 받기가 십상이다.
혜빈은 동표의 청혼--그가 '우리 같이 힘을 합쳐
키우면 되잖아'라고 한 것을 그녀는 청혼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이 더없이 곤혹스러웠다.
동표는 일단 말문이 트인 이상 적극 공세를 펴올
것이다. 더이상 눈치를 보거나 할 필요가 없을
테니까, 시원하고 통이 큰 성격답게 가타부타 결정을
하라고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혜빈은 거기에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주변의 이목도 이목이지만 그녀 스스로 자신이 서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동표에게 기대고
싶은 복잡한 심리가 생겨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복잡할 것은 없는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확고부동한 결심이다. 그런데 그게 쉽게
생겨나지가 않고 있었다.
S에 도착했을 때는 논밭 위로 바람이 드세어지며
조금씩 눈발이 듣고 있었다.
화란은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호들갑에 가까운
반김으로 혜빈을응 접실에 앉혀두고 녹차를 내왔다.
"왜 벌써 왔어요?"
"응, 그냥. 혼자 심심했지?"
"밖에 나가 만화 빌려 왔어요."
"왜 바람 좀 쐬지 그랬어?"
"친구들이 다 바쁜가 봐요. 전활 했는데 다들
선약이 있다길래 여기 죽치고 있기로 했어요."
"아깝게도 모처럼의 외박이 무산됐잖아."
"상관없어요. 언니는 누구랑 지냈어요?"
"여기저기 기웃거렸어."
"재미 있었어요?"
"재미가 있었으면 빨리 왔겠어?"
"하긴... 차 식어요."
차를 마시고 나서 샤워를 하고 났을 때 수진이가
나타났다.
"아니, 너 벌써 온 거야?"
혜빈이 말했다.
"혼자 나와 있다는 게 미안해서요."
"흥, 우릴 생각했단 말야?"
화란이 눈을 흘겼다.
"신경 쓰지마. 너 보고 싶어 온 건 아니니까."
"애들두, 또 티격태격이야. 싸우지 말고 밥이나
먹자."
혜빈은 저녁 내내 무료하게 TV 앞에 앉아 있었다.
시덥잖은 코메디 프로에 시선을 맡긴 채 화란과
수진의 소란스런 웃음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적당히 어울려 주다 혜빈은 슬그머니 방으로
돌아왔다. 피곤을 느끼며 침대에 누웠다.
잠시 뒤, 수진이 따라 들어왔다.
"왜 영화 보지 않구?"
"별로예요."
"화란이는?"
"팝콘 입에 물고 흠뻑 빠져 있어요."
"난 눈 좀 붙일 게."
"10시도 안됐는데 벌써 자려구요?"
"식곤증인가, 자꾸 졸음이 와."
혜빈은 수진을 의식하지 않고 벌렁 침대에 누웠다.
오늘은 정말 피곤하다. 어제 동표와 그런 일이 있고
나서 한숨도 눈을 붙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샤워를 하려는지 수진이 타월을 들고 나갔다.
'누가 왜 윤 감독을 죽였을까?'
혜빈은 몽롱한 의식 속에서 살인범의 윤곽을
그리다가 이내 스르르 잠이 들고 말았다.


<12>

김포공항 국제선 입국 로비 앞.
이른 아침인데도 귀국하는 여행객들로 부산하다.
혜빈 일행은 몰려든 환영객 틈에 섞여 TV 모니터를
주시하고 있었다. 벌써 30분 전에 베이징발 서울행
대한항공이 도착했다는 표시등이 켜졌지만, 눈이
빠지도록 지켜봐도 여종선과 보육원 아이들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혹시 오늘 안 오는 거 아녜요?"
화란이 투덜거렸다.
"KAL 702AE라고 했다며? 전환 니가 받았잖아?"
혜빈이 말했다.
"그건 확실해요."
"그럼 안달복달하지 말고 좀더 기다려봐."
"알았어요. 저 잠시 화장실에 다녀올게요."
"아까 다녀왔지 않았어?"
"아침에 물 종류를 많이 마셔셔요."
"수진이는 어디 갔지?"
아까부터 보이지 않는다.
"커피 마시러 간다고 했어요."
"또?"
"걔 커피 좋아하는 거 아시잖아요."
"그래도 곧 들어올 참인데."
"내버려 둬요. 지딴에는 어제 못잤다고 불만인가
봐요."
화란이 사라지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눈에 익은 고만고만한 여자 아이들이 무리를 지어
하나 둘씩 모습을 나타내는가 싶더니 이윽고 여종선과
모경주가 카트를 앞세우며 세관대를 빠져나온다.
혜빈은 손을 흔들었다. 이쪽을 못본 거 같아 손을
더 높이 치켜들었을 때였다.
우르르 억센 인상의 사내들이 몰려들었다. 개중에는
경찰복장을 한 장정들도 섞여 있었다.
그들은 민첩하게 산개해서 여종선과 모경주의
겨드랑이를 양쪽에서 잡아챘다.
혜빈은 입을 쩍 벌렸다.
"회장님..."
부름은 그녀의 입안에서 힘없이 사그라들었다.
경찰은 아이들까지 인도해서 어디론가 데려갔다.
따라가 보자 그들은 공항 세관 사무실로 들어갔다.
무슨 일인가 싶어 어리둥절해진 그녀는
쫓아들어가고 싶은 욕구를 잠재우며 화장실 쪽으로
움직였다.
화란이 나오고 있었다.
"아직 안 왔어요?"
"아니 왔어. 근데 그게..."
"왜 그래요?"
화란은 굳어진 혜빈의 얼굴을 살폈다.
혜빈은 본 것을 얘기했다.
"경찰이요?"
"그래, 분명히 경찰이었어. 정복경찰이 섞여
있었거든. 대체 무슨 일일까?"
"세관을 통과하는 데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닐까요?"
"그건 아닐 거야. 세관대를 이미 빠져나온
상태였어."
"언니!"
화란은 겁을 집어먹은 표정으로 혜빈의 팔을
잡아당겼다.
"우리 그냥 가요."
"무슨 소리야? 그냥 가면 어떡해? 무슨 일인지 알아
봐야지."
"아니에요. 빨리 가요."
화란은 완강했다. 혜빈은 주춤대며 화란에게
끌려갔다.
"대체 어쩌자는 거야?"
"뭔지 몰라도 그곳 일은 회장님이랑 경주 언니가
알아서 잘 처리할 거예요. 우리까지 나설 필욘
없어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모른 척 발뺌하면
어떡해?"
화란의 태도는 비겁했다. 혜빈은 팔을 뿌리치며
멈춰 섰다.
그때, 수진이 다가왔다.
"여기서 뭐하고 있어요?"
혜빈은 수진에게도 상황을 설명했다.
"아깐 당황해서 그랬는데 무슨 일인지
알아봐야겠어."
하지만 한편으로 혜빈은 몹시 조심스러웠다. 경찰을
함부로 상대하다간 이쪽의 신분이 고스란히 노출될
수가 있다. 만에 하나 잡지사 여기자라는 것이
밝혀진다면 재미가 없다.
그렇지만 무슨 이유로 경찰에 끌려갔는지
알아보지도 않고 물러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가 보자."
"어딘데요?"
수진은 비교적 협조적이었다.
"이쪽이야. 넌 어떡할래?"
화란은 머뭇거린다. 그녀는 뭔가를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그럼, 넌 차에 가 있어."
그러자 화란은 대꾸 없이 로비를 빠져나간다.
"쟤 왜 저래요?"
수진이 말했다.
"겁을 집어먹은 거 같아."
"뭣 때문에요?"
"모르겠어."
혜빈은 수진과 함께 세관 사무실로 갔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란 빨간 딱지가 문에 붙여져 있다.
그것이 막아서듯 혜빈을 주저하게 했다. 그러나
이내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사무실 안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여긴 들어오시면 안됩니다."
하고 제복을 입은 경비가 불쑥 가로막아섰다.
"제가 아는 분이 아이들과 함께 여기
들어오셨거든요."
혜빈은 전후 사정을 차근히 설명했다.
"그러시면 밖에서 기다려주세요. 지금 조사중일
테니까 끝나면 곧바로 돌려보내드리겠습니다."
"얼마나 걸릴까요?"
"그건 모르겠습니다."
"대체 무슨 이유로 저희 회장님과 아이들을
조사한다는 거죠?"
"자, 나가주세요."
험상궂은 경비원은 귀찮다는 듯이 그들을 떠밀며
몰아세웠다.
혜빈과 수진은 밖으로 쫓겨나왔다.
"어쩌죠?"
"글세... 대체 무슨 일일까?"
그들은 넓은 곳으로 나왔다. 사람들이 차츰
불어나고 있었다.
"금반지나 고급시계, 전자제품 같은 규제 품목을
들여오다가 잡힌 게 아닐까요?"
"아닐 거야. 경찰과 형사들이 꽤 많았거든. 그 만한
일 때문에 여자 둘에 여남은 명의 아이들을 잡느라고
그 많은 경찰들이 떼거지로 몰려들어 부산을 떨었을
리가 없어."
"그럼 뭘까요? 답답하네..."
그들은 거기에 서서 세관 사무실을 기웃거리고
있었지만 30분이 지나도록 여종선 일행은 나오지
않았다.
그들은 일단 봉고로 돌아왔다. 화란이 차에서
쫓아나왔다.
"어떻게 됐어요?"
"조사를 받고 있나 봐."
혜빈이 말했다.
"대절한 미니버스가 저쪽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어떡하죠?"
"좀더 기다리라고 해둬."
화란이 버스로 갔다. 좀 있자 그녀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언니, 왔어요!"
"누가 와?"
수진이 물었다.
"회장님이랑 경주 언니, 그리고 애들두요. 지금
버스에 올라타는 중이에요. 우릴 찾고 있었나봐요."
혜빈은 화란을 따라 전세낸 버스가 주차된 곳으로
가보았다.
아이들은 차에 올라타 재잘대고 있었고, 여종선과
모경주가 운전기사와 합세해 짐꾸러미를 짐칸에 옮겨
싣고 있었다.
"수고 많으셨어요."
혜빈이 인사를 했다. 여종선과 모경주가 반겨왔다.
그들은 새까맣게 탄데다 조금 야위어 보였다.
"세관 사무실로 끌려간 건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별일 아니에요. 가면서 얘기해요."
여종선은 태연스럽게 대답했다. 그 일이 자신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았음을 과시하려는 태도였다.
모경주는 짐을 다 싣자 차에 올라탔다.
"혜빈씨도 같이 타시죠?"
여종선이 권해 왔다.
"봉고를 따로 가져 왔는데."
"얘들에게 맡기세요."
"난 여기 탈래. 봉고는 니가 몰고 와."
화란이 말했다.
"나 혼자서?"
수진이 반발했다.
"그래, 혼자 심심할 테니까 같이 와. 바짝 버스
뒤따라오면 되잖아."
여종선이 말하자 그들은 잠자코 그 말에 따랐다.
화란과 수진이를 봉고로 보낸 후 혜빈은 여종선과
함께 버스에 올랐다. 그들은 운전사 뒷좌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모경주는 앞줄 옆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굳어 보였다.
"다 탄 겁니까? 그럼 떠납니다."
하는 운전사의 말에 여종선이 그러라고 말했다.
여종선의 얼굴빛도 심상치가 않다. 헤빈은 아무래도
아까 그 일이 신경에 거슬린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들은 여전히 소란스럽다.
"과천 집엔 별일 없었죠?"
여종선이 말했다.
"네... 다들 잘 있었어요. 여행은 어땠어요?"
"좋았어요. 화장실이 불편한 것만 제외하고는요."
혜빈은 중국에 다녀온 사람들로부터 그곳 화장실이
우리의 성적 수치심을 자극시킬 만큼 불편하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다.
"만리장성은 정말 웅장하면서도 아름답더군요."
"네..."
그리고는 대화가 싱겁게 끊어졌다.
여종선은 등받이에 깊게 몸을 묻으며 눈을 감았다.
피곤한 기색이다.
혜빈은 왜 세관사무실로 불려갔는지 궁금했지만
애써 알고 싶어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말을
아끼고 있었다.
모경주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와의
사이에 아직 풀리지 않은 앙금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그녀의 심각한 표정은 그 이상의 무엇을 드러내고
있었다. 담배를 피워 문다. 연기를 내뱉으며 한숨을
토해낸다.
혜빈은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리는 느낌이었다.
과천으로 돌아오는 동안 겨우 몇 마디만 나누었을
뿐이었다. 여종선은 내내 경찰에 불려간 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버스에서 짐을 내리며,
"아까 일은 저것 때문이에요."
라고 했다.
그녀가 가리킨 곳에 골프채가 보였다.
"절 상습 밀수꾼으로 오해한 모양이에요. 가짜
티타늄 클럽을 수입해와 내다파는 경우가 많아졌다나
봐요. 경찰이 정중하게 사과하더군요."
그것으로 끝이었다. 여러 모로 보아 더이상 캐묻는
것은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과연 골프채 때문이었을까.
혜빈은 끝내 의혹을 지울 수가 없었다.
식구들이 다 모인 앞에서 선물꾸러미가 풀어지고
왁자지껄하게 식사를 했다. 반찬은 닭갈비에 도미
매운탕이었다. 오랜만에 입맛이 맞아서인지 다들
식욕이 대단했다.
헤빈은 식탁을 슬그머니 빠져나와 동표와 통화를
했다. 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과를 보고했다.
"글쎄... 경찰이 풀어줬으면 뭐 특별한 일일라구?"
"그렇긴 한데... 단순히 골프채 때문인 것은 아닌
것 같아."
"알았어. 내 한번 공항 경비대에 알아볼게."
"그리고 앞으로 매사에 서둘러야겠어."
혜빈은 까닭 없이 조바심이 났다.
"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그런 건 아니구. 시간 끈다고 결정적인 단서를
잡을 것 같진 않아. "
"그래두 참아야지. 고생하는 친구 오은영씨를
생각해서라도."
"하지만... 알았어. 노력할게."
"조심해.. 그리고 이 말 자제하려고 했는데 막상
전화를 받으니까 안 하고는 오늘 밤잠 설칠 것 같아."
"무슨 얘긴데?"
"사랑해."
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핸드폰을 그러쥔 손이 엷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무슨 대꾸를 해야할지 몰랐다. 상대의
호흡을 전화 너머로 느끼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울렁거렸다.
"아무 말 안해도 좋아. 내 지금 이 기분이 진심이란
것만 알아줘."
"......"
"그럼 잘 자."
혜빈은 동표가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핸드폰을 들고
있었다. 그녀는 힘이 빠진 하체에 의지해서 간신히 서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침대에 걸터앉아 침착해지기를
기다렸다. 한참만에야 겨우 흥분된 가슴이 진정됐다.
문이 열리며 수진이 들어왔다.
"언니, 뭐하고 있어요?"
"응, 그냥... 머리가 좀 아파서..."
"다들 기다리고 있어요."
혜빈은 수진을 따라 1층으로 내려왔다. 응접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식탁은 음식부스러기 하나 남기지
않고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다들 어디 갔지? 이상하네..."
"기다리고 있다며?"
"그랬어요. 잠시 전까지는..."
그때, 보육원에서 여자아이들을 돌보는 교사 하나가
화장실에서 나오며 말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뭐가요?"
수진이 말했다.
"조 선생님 데려오신다더니 한참 동안 소식이 없어
방금 커피타임 가지고 각자 방으로 흩어졌어요.
그럼..."
그녀는 그들을 비켜나서 2층으로 올라갔다.
혜빈은 수진을 바라봤다. 어떻게 된 거냐고 묻고
있었다.
"화장실에 들렀어요. 설사라 시간이 좀
지체됐어요."
그녀는 변명하듯 말했다.
"얼마나?"
"글쎄요. 한 20분 아니 30분..."
하긴 2, 30분 정도는 잠시 전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혜빈은 이 일로 굳이 수진에게 의혹의
가산점을 덧보태고 싶진 않았다.
혜빈은 수진과 함께 방으로 돌아왔다.
"언니, 저 또 아랫배가 아파요."
수진은 그러며 방을 다시 나갔다.
혜빈은 양말부터 벗고 피로해진 발을 주물렀다.
무좀으로 인해 발바닥 피부가 허옇게 벗겨진다.
혜빈은 그것을 발톱깍기로 뜯어내다가 냉큼
일어나서는 갈아입을 옷을 챙겼다.
욕실로 갔다. 머리를 수건으로 말아올리다가 문득
수진이 화장실에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녀는 욕실을 나와 화장실로 가보았다. 수진은
보이지 않았다.
혜빈은 욕실로 다시 돌아와 샤워실에 들어가려다가
당겨진 의혹의 불길에 이끌려 1층으로 내려가 보았다.
불이 켜진 응접실엔 아무도 없었다.
도로 돌아오려던 그녀의 걸음은 들려오는 소리에
멈춰졌다. 소리는 여종선의 서재 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곳으로 통하는 복도는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혜빈은 그리로 다가섰다. 소리가 선명해진다.
누군가를 야단치는 여종선의 목소리다.
"대체 경찰이 어떻게 안 거야? 어디서 정보를
얻었길래 김포공항에서 우릴 덮쳐?"
그러나 더이상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혜빈은 방 가까이 다가가 문에 귀를 기울일까 하다가
아무래도 위험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혜빈은 서둘러 욕실로 돌아왔다.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나서 방으로 돌아오자 수진이 논노잡지를 들고
침대에 누워 음악을 듣고 있었다.
"회장님한테 혼났어?"
혜빈이 말했다.
"아뇨, 왜요?"
수진이 잡지에서 눈을 뗐다.
"무슨 소리가 난 것 같아서."
"전 화장실에 있었는걸요."
"그래?"
"네."
"아님 말구."
수진은 다시 잡지에 눈길을 준다. 하지만 어딘지
그녀의 행동에는 작위의 냄새가 났다.
혜빈은 침대에 누웠다.
"아까 그 일 어떻게 생각해?"
"무슨 일요?"
"공항 경비대에 회장님이 붙들렸다 풀려난 일."
"골프채 때문에 그랬다면서요?"
"믿어져?"
"믿고 안 믿고가 어디 있겠어요."
"그때 수진이는 어디 있다 나타난 거야?"
"화란이가 말 안하던가요?"
수진은 잡지를 내려놓으며 혜빈 쪽으로 돌아누웠다.
"말했어. 커피 마시러 갔다구."
"근데 그걸 왜 물어요?"
"오늘 왠지 분위기가 이상해서."
"뭐가 어때서요?"
"딱히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뭐랄까... 다들
들떠 있다고나 할까. 하여간 그래."
"전 도무지 언니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혹시 절 의심하시는 거 아닌가요?"
"내가 왜?"
"자꾸 이상한 소릴 하니까 그렇죠."
노크 소리가 나자 둘은 대화를 중단했다.
화란이 들어왔다.
"경주 언니가 보재."
"나?"
수진이 말했다.
"그래. 방으로 와."
화란이 먼저 나가자 수진은 혜빈을 바라봤다.
"거봐, 오늘 좀 이상하지?"
혜빈이 말했다.
"글쎄요, 가봐야 알겠죠."
수진이 방을 나갔다. 혜빈은 조바심이 났다.
15분쯤 후, 수진이 돌아왔다. 그녀의 얼굴은 벌겋게
상기돼 있었다.
"언니도 오래요."
"누가?"
"경주 언니가요."
"무슨 용건인데?"
"모르겠어요."
"할 말 있으면 자기가 이리로 오라고 해. 나
피곤해."
혜빈은 모경주 따위에게 불려다녀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수진이 나가더니 금방 모경주와 금화란을
데려왔다.
혜빈은 태연스럽게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거기들 앉아."
셋은 하나같이 심각해 보였다. 자리를 찾아 앉지
않고 엉거주춤 서 있다.
"앉지 않구 뭐해?"
그제서야 천천히 움직인다. 경주와 화란은 수진의
침대에 걸터앉고 수진은 책상의자에 앉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어요."
경주가 말했다.
비장한 각오라도 한 듯이 그녀의 눈은 빛나고 있다.
혜빈은 내심 긴장하며 화란에게 꼬치꼬치 캐물은 일
때문일 거라고 짐작했다.
"우리들 중 하나가 윤병두 감독을 죽였을 거라고
의심한다면서요?"
"내가? 누가 그래?"
혜빈은 화란을 쳐다봤다. 시선을 외면한다.
"아, 얼마 전에 김포공항에서 돌아오다 화란이와
나눈 얘기 때문에 그런가 본데... 그건 오해야. 난
단지 호기심에서 물었을 뿐이야. 우연히 오은영이라는
여자가 윤감독이 죽기 전 벌거벗고 있었다는 진술을
한 기사를 보았다가, 전남편이 당한 것과 같다는 것을
알고는 물어본 것 뿐이야."
"오은영이라는 여자와는 어떤 관계죠?"
"어떤 관계긴? 신문에 난 기사를 우연찮게 보았을
뿐이라니까. 윤 감독은 영화를 자주 보다 보니 얼추
알게 됐고."
그 말을 하며 혜빈은 자신의 입술 언저리 근육이
떨린다는 것을 느꼈다.
"그뿐인가요?"
"그럼 달리 또 뭐가 있겠어? 나도 여기 들어올 땐
단단히 작정을 하고 온 사람이야. 내가 뭐가 아쉬워서
사람들 의심이나 하고 다니겠어?"
혜빈은 부당하게 모함을 받았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제스처까지 크게 써가며 말했다.
"분명히 해둘 게 있어요."
"말해."
"우린 윤 감독 안죽였어요."
"그걸 굳이 내게 강조하는 이유가 뭐야?"
"화란이 얘기로는..."
모경주는 갑자기 말을 멈추고는 화란을 쳐다본 후
다시 말했다.
"아니, 좋아요. 화란이와 언니 사이에 무슨 말을
나눴든 이제 개의치 않겠어요. 그리고 지난 번에 제가
무례하게 굴었던 것에 대해 아직 앙금이 남아 있다면
이번 기회에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려요."
혜빈은 모경주가 대체 무슨 꿍꿍이로 이렇게
저자세로 나오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모경주는
어떤 의미로든 강한 여자다.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는데는 그만한 노림수가 있을 것이다.
혜빈은 잔뜩 경계하는 표정이 되었다.
"우린 눈 떠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함께 생활하는
처지야. 싸우고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는 서로 간에
원만하게 지내는 게 낫지. 하지만 솔직히 말해 난
그날 새벽 심한 모욕감을 느꼈고 심지어는 이곳에서
나가려고 결심까지 했었어. 김포공항에 환송을 나갔던
날은 화란이와 둘만이 있었고 자연스럽게 화해를
시도하다보니 그런 얘기까지 한 거야."
"제 사과를 받아들인다는 의민가요?"
"그래, 이제 와서 그깐 일로 시비를 걸어 뭐
하겠어. 회장님 말대로 서로 간에 의견과 영역을
존중해 주면 그만이야. 그게 무시되고 침범될 때
증오가 싹트겠지."
"전 그 일로 언니가 우릴 이간질 하려는 줄
알았어요."
"이간질?"
"사실 우린 겁을 집어먹고 있어요."
"겁을 먹다니?"
혜빈은 화란과 수진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다.
"우린 금방이라도 분열되어 서로에게 적대적이 될
수 있을 만큼 불안한 관계예요."
"그건 왜 그렇지?"
"어느 누구도 그날 확실한 알리바이를 가지고 있지
못하니까요. 따라서 서로가 의심하게 되면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로 발을 들여놓게 돼요."
"그럼 앞뒤가 안 맞잖아? 그러면서 어떻게 아무도
안 죽였다는 걸 자신하지?"
"어리석게 들릴지 몰라도 우린 농약으로 실험을
했어요. 치사량의 농약을 각자 앞에 두고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마시자고 했어요."
"기묘한 짓을 했군. 그래서?"
"우린 셋 다 마셨죠. 나 빼고는 수진이와 화란이는
그것이 농약이 아니라 식초에 콜라를 탄 음료하는 걸
모르는 상태였죠."
"그럼 죽기를 각오하고 그걸 마셨단 말야?"
"그래요. 그렇기 때문에 우린 안 죽였다는 거죠."
"사실이야?"
혜빈은 수진과 화란을 보고 물었다. 그들은
사실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경주의 결백성은 어떻게 입증되는
거지?"
"바로 그 점이에요. 그 때문에 전 언니가 절
의심하는게 아닌가 생각했어요."
"그건 아냐. 난 다만..."
"이젠 상관없어요. 사실 제가 결백하다는 걸
수진이와 화란이도 믿지 않았을지 몰라요. 전 아무
것도 입증할 수가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렇데 된 건
알리바이가 없어 입증할 수 없었던 게 아니라
알리바이가 있어도 내세울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이에요."
"언니, 정말이야?"
화란이 말했다.
수진도 심각하게 경주를 응시한다.
"그래."
"근데 왜 여태 얘기 안했어?"
"방금 말했잖아. 아무한테도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고."
"그게 뭐지?"
혜빈이 말했다.
모두들 긴장하며 모경주의 입에서 다음 말이 나오길
기다렸다.
그녀는 담배를 피워물더니 한숨을 길게 내뱉는다.
그런 다음에야 입을 열었다.
"그게 말이예요... 어쩌면 별 게 아닐지 몰라요.
하지만 생각에 따라서는 무척 곤혹스러운 일일 수도
있어요."
"대체 뭔데?"
화란은 조바심을 감추지 못한다.
"마약! 나 뽕하고 있어. 윤병두 감독이 죽던 날 난
친구 아뜨리에에서 같이 마약했어."
시간이 정지한 듯이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먼저 입을 연 것은 그녀 자신이었다.
"왜, 내 말이 이해가 안가?"
"그 말 입증할 수 있어요?"
그렇게 물은 것은 수진이었다.
"물론이야. 친구 이름을 댈 수 있어. 하지만 그
친구에게 피해를 주고 싶진 않아."
그녀의 말은 진심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이왕 얘기한 거 아뜨리에와 그 친구 이름을
공개하는 게 낫지 않을까?"
혜빈이 말했다.
"그래야 의혹의 씨앗이 완전히 제거될 테니까.
그렇지 않을 경우엔 상황에 따라 또 문제의 여지를
남길 수 있어."
"그래, 혜빈이 언니 말이 맞아."
수진이 동조했다.
화란은 잠자코 지켜보고만 있었다.
"좋아요."
한참을 망설이던 모경주가 이윽고 말했다.
"내 친구가 있는 곳은 강남의 <샤갈>이라는
아뜨리에예요. 이름은 이지은이구요."
"그럼 서로 간의 오해는 풀린 셈이군.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아. 대체 윤감독을 누가 죽인 거지?"
혜빈이 말했다.
"그야 오은영이라는 여자겠죠. 우리가 죽이지 않은
이상 우린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요."

"그래요, 그건. 경찰이 다 알아서 할 테니 우린
보고 있으면 그만이에요."
화란이 맞장구를 쳤다.
"닭대가리야!"
수진이 말했다.
"넌 대체 머리가 있는 애니 없는 애니?"
"뭐 닭대가리? 이게 정말?"
화란이 펄쩍 뛴다. 한바탕 붙을 기세다.
"수진이 너 말 조심해!"
혜빈이 나무랐다.
"함부로 말하니까 자꾸 감정의 골이 깊어지잖아.
어서 사과해!"
수진은 멋쩍은 태도로 머뭇거린다.
"어서!"
불호령이 떨어진다. 경주도 수진을 몰아세운다.
수진은 마지못해 사과한다. 화란은 사과를 받고서도
시큰둥하다.
"하지만 말이에요..."
수진은 그래도 할말이 있는 모양이다.
"경주 언니의 알리바이가 완벽하다면 결국 우리
둘에게 의혹의 시선이 쏠리는 거 아닌가요?"
"우린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죽기를 각오하고
농약을 마셨잖아. 비록 가짜이긴 하지만."
화란이 말했다.
"그걸 여기 있는 사람 말고 누가 믿어주겠어?"
"바보야! 너야말로 쓸데없는 걱정하지마. 여기 있는
사람 말고 아무도 모르는데 뭣하러 걱정을 해?"
"그래, 그건 화란이 말아 맞아. 우리가 입 다물면
아무도 모를 일이야."
혜빈이 말했다.
"오늘 말한 건 또 한사람, 회장님에게도 비밀에
붙여야 해요."
경주가 말했다. 다들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건 왜?"
혜빈이 말했다.
"난 그 길로 쫓겨나고 말 거예요. 마약은 절대
못하게 돼 있어요."
"가입서약서에 그런 조항이 있었나? 난 못봤는데."
"마약은 쾌락의 도구예요. 건전한 사회구성원의
정신과 육체를 좀 먹는 공적(公敵)인 셈이죠. 제가
마약을 하고 있다는 게 외부에 알려지면 <사포의
딸들>의 이미지에 먹칠을 하게 되고 말 거예요."
"다들 들었지?"
혜빈이 경고했다.
"입조심 하도록 해."
얘기가 끝나자 경주와 화란은 자기들 방으로
돌아갔다.
혜빈은 무언가 기분이 개운치 않았다. 모경주가
화란을 통해서 자신이 윤 감독의 죽음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들었을 때, 의구심을 갖고
경계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이건 비루먹은 똥개처럼 꼬리를 사리고 들어와
자신의 약점을 한점 남김없이 까발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얻는 게 있다면 윤병두 감독의
살인범일지도 모른다는, 주변의 의혹이 담긴 시선에서
깨끗이 벗어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중요한 일이기는 하다. 누구도
저지르지 않은 살인의 범인으로 몰리는 게 유쾌한
일은 아닐 테니까.
하지만 막다른 골목에 몰린 것이 아닌 이상
그녀로서는 나중에 가서라도 그 점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변호를 할 시간과 여유가 있다. 게다가 여태
옆에서 지켜 보아온 그녀의 성격으로 볼 때 어딘지
석연치 않은 데가 있다.
그녀는 스스로 마약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함으로써, 그리고 어찌 된 셈인지 여종선에게
알려져서는 안 되는 약점임을 지적함으로써, 그녀가
이제 더이상 그 누구 위에도 군림하게 될 수 없음을
예상하지 못한 것일까.
그렇다면 그야말로 어리석고 아둔한 여자다. 이제껏
내가 보아온 독재자적인 그녀의 모습은 허상이었던
것일까?
사실 그녀는 지독한 겁쟁이여서, 겉보기로는
위협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사소한 위험에도 당당하지
못하고 움츠러들고 마는 걸까?
이런 것들을 능가하는 의혹은 그녀와 여종선의
관계이다. 이번 중국여행에 유일하게 동행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그녀는 여종선의 돈독한 신임을
얻고 있다. 마약을 한다고는 하지만 둘의 관계로 볼
때 얼마든지 상의할 수 있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 정반대의 길을 택한 것이었다.
수진도 그 점에서는 공감하는 듯했다. 그녀는 입이
근질한지 아까부터 잠을 못자고 있었다.
"왜, 잠이 안와?"
혜빈이 말했다.
"경주 언니 얘기 곧이곧대로 들려요?"
"글쎄..."
"전 이상해요."
"어떤 점이?"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뭐랄까, 경주 언니답지
않아요."
"그래, 나도 같은 생각이야. 그럼 그녀의 행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거지?"
수진은 대꾸하지 않는다.
그 순간, 혜빈은 수진을 찾기 위해 1층으로
내려갔다가 듣게 된 여종선의 서재에서 새어나온
소리를 떠올렸다.
'대체 경찰이 어떻게 안 거야? 어떻게 알았길래
김포공항에서 우릴 덮쳐?'
혜빈은 새삼 그 말에 함축된 의미를 곰곰
되짚어보았다.
대체 뭘 알았다는 것일까...


<13>

동표로부터 2가지 소식이 전해졌다. 아뜨리에
<샤갈>과 친구 이지은은 실존하며, 김포공항에서
여종선 일행을 수사했던 경찰은 사람을 오해했다고
말할 뿐 더이상의 정보를 알려주지 않는다고 했다.
혜빈으로서는 답답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서
한 발도 전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S에 머물러야 하는 날이 길어질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러던 며칠 후였다. 혜빈은 오전 교육을 받고 식사
후에 잠깐 눈을 붙였다가 수진이 깨우는 소리에
일어났다.
"왜?"
"강의 들으러 오래요."
"무슨 강의? 오늘 3시에 이혼녀 고백담 듣는 거밖에
없잖아."
"그 여자가 벌써 왔나봐요. 그리고 그 여자 이혼녀
아닌가봐요."
"그래?"
혜빈은 부시시해진 머리카락을 대강 추스르고
필기도구를 지참한 채 1층 강의실로 내려갔다.
회원들은 대부분 벌써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혜빈은 습관적으로 뒷좌석에 가 앉았다.
모경주와 금화란은 제일 앞줄에 앉아 있었다.
보육원 교사들도 다 모여 있었다. 수진이 옆에 와
앉으며 말했다.
"여자가 어리던데요."
"어려?"
"기껏해야 저랑 동갑이거나 두세 살 어려 보여요."
"그럼 겨우 스물 둘셋?"
"이거 심하지 않아요. 그런 애송이에게 뭐 들을 게
있다구?"
"그렇긴 한데... 혹시 모르지. 그 많지 않은
나이에도 남다른 파란만장한 인생을 겪었을지."
여종선이 앞문으로 들어와 단상에 올라서고 예의
여자가 뒤를 따라 들어왔을 때 혜빈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하마터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설 뻔했다.
믿을 수 없게도 여자는 전남편 방기열과 어울리던
바로 그 젊은 아가씨였던 것이다.
혜빈은 안절부절 못했다. 여자의 눈에 띄는 날엔
만사가 끝장이다. 그런 위기감이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혜빈은 '정희'라는 이름을 기억해내고는
현기증으로 아찔했다.
이윽고 여종선의 소개를 받은 여자가 박수 세례를
받으며 단상으로 올라선다.
"박정희라고 합니다."
그녀는 마이크에 대고 얌전하게 인사를 한다. 지난
번에 본 것과는 영 딴판이다. 옷차림뿐만 아니라
태도도 단정하다. 화장을 옅게 하고 있지만 분명히 그
여자다.
어쩐다?
그러나 다음 순간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알았다.
어떡하든 그녀가 자신을 알아보는 일만은 없어야
한다.
여종선이 단상 옆 의자에 앉아 감시라도 하듯
강의실을 둘러본다.
혜빈은 시선을 피해 슬그머니 일어났다.
"왜, 언니?"
수진이 속삭인다.
"화장실에..."
그리고는 가능한 한 그녀가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고개를 숙인 채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일단 한숨을 돌린 혜빈은 별관의 취사실로 갔다.
아줌마가 국솥에 물을 퍼담고 있었다.
"뭐 도와드릴 일 없어요?"
"방금 설겆이 다 끝냈어. 신경 쓰지 말고 쉬어."
"저녁 때 무슨 반찬 할 건데요?"
"고등어 조리고 두부부침이랑 이것저것 하려구."
"아무 거나 맡겨줘요. 도와드릴게요."
"시장 간 병수가 돌아와야 하는데."
그때였다. 혜빈은 부르는 소리에 돌아봤다.
여종선이 서 있었다.
'귀신이 따로 없어.'
"뭐해요? 여기서..."
"잠깐 바람 쐬러 나왔어요. 어지러워서..."
"그래도 강의를 빼먹으면 안돼죠. 어서 따라와요."
그녀가 돌아섰다. 주저하던 혜빈은 무거운 걸음을
떼었다.
강의실까지의 짧은 거리에 이르는 동안 혜빈은 온갖
상상을 다했다. 그만 콱 주저앉을까, 아프다고 소릴
고래고래 지를까, 급하게 외출할 일이 있다고
사정할까...
그러나 끝내 혜빈은 어느 것도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강의실 앞까지 왔다. 복도는 마이크 소리로
시끄럽다. 정말이지, 더이상은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안색이 안좋아 보이는데... 두통약이라도
드릴까요?"
아연 긴장하고 있는데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보였다.
"네, 아무래도 그 편이 낫겠어요."
혜빈은 여종선을 따라 그녀의 서재로 들어갔다.
그녀는 우정 약을 갖고 와 물까지 한잔 따라 준다.
"고마워요."
"혹시 신열 있어요?"
"열은 없는데 빈혈 증세가 있는지 머리가 띵해요."
혜빈으로서는 그것을 구실로 강의를 듣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하지만 오늘 체험 고백은 혜빈씨가 반드시
들어야만 해요. 그래야 다음 프로그램에 참가할 수
있어요."
눈앞이 캄캄해졌다.
여종선은 앞서 나간다. 혜빈은 물컵을 내려놓고
뒤따른다. 영락없이 코 꿴 소가 끌려가는 꼴이다.
어쩌지?
여종선은 앞문으로 들어가며 뭐하고 있냐는 투로
힐끗 바라본다.
하는 수 없다. 부딪치는 수밖에 없다.
혜빈은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뒷문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는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수진이 궁금해한다.
"쉿, 나중에."
혜빈은 열변을 토하고 있는 박정희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러니까 저로서는 당연히 그 남자를
혼내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혼한
남자에게, 그것도 저와는 상당한 나이 차이가
납니다만, 접근한 것은 저 자신의 경험부족에서 오는
소치라고 자탄하고 있습니다. 그 남자는 사귄 지
3개월도 되지 않아 새 애인을 핑계대어 저를
차버렸습니다. 전 이것이 여자의 숙명인 양
생각했으나, 하도 분하고 억울한 나머지 친구에게
털어놓았다가 이곳이 울분을 달래줄 수 있다기에
이렇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찾아온 것입니다. 전문대
강사이기도 한 방기열이라는 남자는..."

방기열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기 시작했을 때 혜빈은
귀가 멍멍해져 아무 것도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다.
가슴이 휑하게 비워져 가는 느낌이었다.
전 남편의 엉성한 처신이 대체 어느 정도였기에
이렇게 새파란 계집의 독기어린 험담까지 듣고 살아야
하는가 하는, 한심하다는 생각과 그래도 다혜의
아빠라는 까닭 모를 연민이 생겨나 그녀의 심정은
더할나위없이 착잡해졌던 것이었다.
이윽고 박정희의 고백이 끝났을 때 강의실이
떠나가라 박수 소리가 터져나왔다.
한 사람씩 연단 쪽으로 나가 그녀와 정식으로
인사를 나눈다.
혜빈은 어떡할까 하다가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언니, 뭐해?"
수진이 재촉한다.
"난 여기 좀 있다가 갈게."
"왜?"
"아냐, 그냥... 먼저 가."
혜빈은 수진의 엉덩이를 밀었다. 수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박정희 쪽으로 걸어간다.
이제 강의실 뒤쪽에 남은 것은 그녀 혼자였다.
여종선은 박정희의 옆에서 뭔가를 얘기하고 있다.
혜빈은 눈 딱 감고 뒷문으로 걸어갔다.
"조혜빈씨!"
하고 부르는 소리에 혜빈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멈춰 섰다.
"어딜 가세요? 인사 나누셔야죠."
여종선이 말한다.
혜빈은 돌아서지 못하고 두근대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아, 어쩌면 좋지...
"혜빈씨!"
"네--"
혜빈은 어금니를 깨물며 돌아섰다.
"인사 나누시라구요."
여종선은 이쪽을 노려보듯 바라보고 있다. 혜빈은
체념하고 걸어갔다.
"수고 많으셨어요. 조혜빈이라고 해요."
혜빈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박정희는 눈가에 웃음을 띤다.
혜빈은 이제 곧 그녀의 머리 위로 비명이 터져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을 대비해 단단히
마음을 다졌다.
"조혜빈씨, 어때요?"
여종선이 말했다.
"네?"
혜빈은 그것이 누구의 말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띵하던 머리 좀 어떠냐구요?"
"아, 네... 약 덕분에 이제 많이 나아졌어요."
"다행이네요. 불편한 건 알지만 긴히 할 말이
있으니까 좀 쉬다가 1시간 후에 내 서재로 와
주세요."
"네..."
박정희는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눈치다. 여종선과
조혜빈의 대화를 흥미있게 듣고 있다. 혜빈을
눈앞에서 빤히 쳐다보고 있으면서도 얼굴에 아무런
감정도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럼..."
혜빈을 남겨두고 그들은 총총히 강의실을 나갔다.
혜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야말로 천운이다. 상대는 혜빈을 전혀 알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전남편 빌라 입구에서 그리고
응접실에서 스치듯 아주 잠깐 마주쳤기 때문에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분명했다.
'지레 겁을 먹었어.'
혜빈은 자기방으로 돌아와 마음을 진정시킨 다음
시간에 맞춰 여종선의 서재로 갔다. 거기엔 이미
경주, 화란, 수진이 와 있었다.
"자, 앉으세요. 커피 하실래요?"
여종선이 말한다.
"좋아요."
혜빈의 대답이 떨어지자 수진이 기다렸다는 듯이
커피 다섯 잔을 내온다.
혜빈은 요즘 아랫배살이 대책없이 찌고 있는
형편이다. 프림을 넣을까 하다가 블랙으로 그냥
마신다.
"아까 박정희씨 얘기 어떻게 들었어?"
여종선이 감상을 묻는다.
"젊은 애가 당돌하던데요."
모경주가 말했다.
"내가 보기엔 큰 재목감이야."
"그럼 가입시키지 그러세요?"
"아직 그럴 생각이 없는 모양이야. 복잡한
집안사정이 있는 것 같았어. 잘 사귀어 두었다가
상황이 호전되면 권유할까 해. 다른 사람은?"
"박정희 양만 피해자라고 볼 수 있을까요?"
수진이 말했다.
"무슨 뜻이지?"
"글쎄요... 그 아가씨를 헐뜯자는 게 아니라 애가
딸린 이혼남에게 쉽게 접근한 것은 여자로서의 소양이
불성실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접근한 건 방기... 그 남자 이름이 뭐랬지?"
"방기열요."
"그래 그 남자가 먼저 접근했다고 했어. 물론 누가
먼저 유혹을 했느냐가 중요하다는 게 아니라 굳이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지."
"하지만 그건 그 아가씨의 말뿐이지 아무도 실상은
모르잖아요."
"누가 유혹했든 아가씨가 어리면 나이 든 사람이
이성적으로 처신했어야지. 충분히 우리의 힘을 보여줄
대상이야. 그게 주저해야 할 이유라고 보여지진
않는데."
"적어도 방기열이란 작자가 바람둥이인 건 분명한
것 같아요."
화란이 말했다.
"따라서 그 자를 우리의 율법으로 처리하지 못할
장애는 없다는 데 동감해요. 하지만 제 생각에는
어쩐지 핀트가 맞지 않는 점이 있어 보여요. 모르긴
몰라도 박정희 양이 피해자라 하더라도 이혼을 했다는
방기열의 전처만큼 고통스럽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렇다면 전처를 한번 만나 죄상(?)을 들어보는 게
낫지 않을까요?"
혜빈은 숨을 흑 하고 들이켰다. 그 소리는 거기
있는 모든 사람에게 들렸다.
"왜 그래? 조혜빈씨?"
여종선이 물어왔다. 다른 여자들도 그녀를
주시한다.
"아, 아니에요."
"아직 아파?"
혜빈은 급하게 커피를 한모금 마셨다. 아직 뜨거운
커피를 마시는 바람에 커피는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고 입밖으로 터져나왔다.
수진이 휴지를 가져와 혜빈에게 건네주었다. 다들
혜빈의 불안한 행동을 눈여겨보고 있다.
"죄송해요."
"컨디션이 정 안좋으면 올라가구."
"아니에요."
혜빈은 진정을 되찾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지금 오고 가는 말들이 방기열에 대한 테러를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회의인 것을 짐작하자 그녀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제 생각은 달라요. "
혜빈이 불쑥 말했다.
그러다가 그녀는 그 전에 미리 확인해두지 않으면
안될 사실 하나를 떠올렸다. 설마 그럴 리는 없지만
결단코 확인해두지 않으면 안되었다.
"대체 방기열의 전처는 어떤 여자죠?"
"그건 아는 바 없어요."
여종선이 대답했다.
"이름이나 직업 같은 거라도?"
"오늘 화제는 그 여자와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제가 말하고 싶은 것도 바로 그 점이에요. 이건
어디까지나 박정희 양과 방기열이란 남자 둘의
문제이지 전처에게까지 확대시켜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요. 그녀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혼녀라면 누구든 심한 정신적 상처를 입었을
거예요. 스스로 부탁을 해온 것도 아닌데 굳이
들춰내서 새삼 고통을 준다는 건 우리 협회의 취지나
목적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보여지는데요."
"동감이야. 화란이 생각이 나쁘진 않지만 좀더
신중할 필요가 있어."
여종선이 결론을 내리듯 말했다.
"알겠어요."
화란은 더이상의 반론 없이 수긍했다.
"또 다른 의견은?"
"박정희 양이 자신이 당한 만큼의 응분의 대가를
돌려주기를 바라는 건가요?"
모경주가 말했다.
"그건 강의실에서 들은 바와 같아. 정희 양은 이번
일이 조속히 처리되기를 바라고 있어."
"특별히 그래야 할 이유는요?"
"자기와 같은 제2, 제3의 피해자가 나오는 걸
막아야 한다는 공분(公憤)에 사로잡힌 거 같아."
"하지만 우린 방기열이라는 남자에 대해 거의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하잖아요."
"그 점은 염려하지 않아도 돼. 박정희 양이
최대한의 도움을 주기로 했으니까. 요는 방기열이란
작자가 얼마나 약점을 가진 인간인가 하는 것이지.
약점이 클수록 우리의 대응도 쉬워질 테구."
여종선은 식은 커피를 서너번 휘저은 다음 후루루
단숨에 마셨다. 다른 사람들도 머그잔에 손을
가져간다.
"혜빈씨!"
여종선의 말에 힘이 들어간다.
"네."
"여기 생활도 꽤 됐으니까 대충 우리가 지금 뭘
논의하고 있는지 아시겠죠?"
"네."
"어때요?"
"글쎄요... 아직은 실감이 나지 않아요."
"화란이한테 듣기로는 이런 일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싶다고 했다던데요?"
혜빈은 화란의 얼굴을 슬쩍 훔쳐본 다음 마지못해
대답했다.
"네."
"어때요? 할 수 있겠어요?"
"......"
혜빈은 자신의 얼굴에 집중된 따가운 시선을 느끼며
대답이 불러올 파급 효과를 서둘러 저울질해 보았다.
연유가 어떻든 전 남편을 테러하는 것은
비신사적이다. 다혜 아빠라는 심정적 프레미엄도
있다. 아니 그 이전에 누구에게든 폭력으로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키는 해법을 혜빈은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발뺌하면 태도가 일관적이지
못하다는 의혹을 살 염려가 있다.
그녀는 직간접으로 테러에 가담하고 싶다는 의사를
누차 표명해왔는데, 이제 방기열이라는 전남편의
존재가 방해가 되어 일을 그르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테러에 가담한다 해도 문제는 간단치
않다는데 그녀의 고민이 있다. 방기열이 자신을
알아보는 위험은 차치하고서라도, 만에 하나 그가
손동표처럼 입원이라도 하게 될 경우 당장 다혜를
누가 돌보느냐 하는 걱정, 그리고 테러에 가담하는
목적은 이들에 대한 폭력 성향의 증거를 포착하는
것인데 과연 소기의 성과를 뜻대로 달성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아직 생각이 많으신가 보죠?"
여종선의 물음에 혜빈은 결정의 벼랑으로 내몰렸다.
'그래, 운에 맡기는 거야.'
"아니에요. 가담하겠어요. 여태 기다려왔던 일인
걸요."
"좋아요. 일간 구체적인 계획이 나올 거예요. 그때
세부적으로 논의해요."


<14>

"전남편 방기열을 테러하는데 가담한다... 글쎄,
이거 일이 꼬이는 건지 제대로 돼 가는 건지..."
보고를 받은 잡지사 유동천 사장은 사뭇 심각해져
있었다.
사장실에는 권옥희 국장과 손동표 기자가 자리를
같이 하고 있었다.
"이거 천방지축으로 너무 앞서 가는 거 아냐? 손
기자는 어떻게 생각해?"
"주사위는 이미 손을 떠났습니다. 판을 다시 바꿀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동표는 나름대로 결심을 굳힌 듯했다. 그는 30분 전
혜빈과 통화를 했다.
"단호해서 좋군. 하지만 방기열씨가 조 기자를
알아본다거나 하면 어쩌지?"
"감기를 핑계대어 마스크라도 쓸 모양이던데요."
"투지는 좋은데 얄팍한 수 쓰다가 일만 망치는 거
아닌지 몰라."
"내기라면 전 조 기자 능력 쪽에 걸겠습니다."
"...좋아, 밀어붙여 보도록 하지."
마침내 유 사장의 의지가 확고해지자 일사천리로
대책이 의논되어졌다.
"중요한 것은 저들이 방기열씨를 테러할 때 어떻게
적절히 사진을 찍어두느냐 하는 점입니다."
손 기자가 말했다.
"현장에 있을 수는 없잖아. 그렇다고 조 기자더러
해달랠 수도 없을 테고."
권 국장이 받았다.
"그렇습니다. 현장 사진을 가까이서 찍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대신 현장 주변과 가능하다면 조
기자와 상의해서 망원 렌즈로 창문을 통해 테러
장면을 잡아보겠습니다."
"지원 인원은?"
유 사장이 말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만 기동력을 생각해서 두
명 정도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디데이가 언제라고 했지?"
"다음주 금요일입니다."
"아직은 여유가 있군. 하지만 유비무환이야. 미리
준비할 게 있을지 모르니까 빠짐없이 점검해봐."
"이번에야말로 실수 없도록 하겠습니다."


<15>

"뭐라구?"
방기열에 대한 테러가 이틀 앞당겨졌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혜빈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오늘이란 말야?"
"그래요. 사정상 계획이 변경됐어요."
혜빈은 아침부터 다혜에게 무슨 선물을 할까에만
신경이 가 있었다.
"어서 서둘러요."
모경주가 재촉했다. 그녀는 이미 나갈 채비를 갖춘
상태였다. 청바지에 잠바를 입고 있어 몸이 가뿐해
보인다.
"지금?"
"네, 화란이랑 경주는 차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하지만..."
혜빈은 주저했다.
오늘은 다혜 생일이다. 오후 4시에 남편과 셋이서
만나기로 되어 있다.
혜빈은 시계를 보았다. 오전 1시를 막 지나고
있었다.
그녀는 점심식사를 마치자마자 외출할 생각이었다.
마침 오후에 들어야 할 강의가 없어 나갈 때 여종선의
허락을 받아낼 참이었다.
"왜요?"
"약속이 있는데..."
혜빈은 약속 정도의 핑계가 통하지 않을 뿐더러
모경주에게 말해봤자 소용이 없다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당황한 나머지 그렇게 말했다.
"당장 취소하세요."
"......"
"이건 회장님 명령이에요."
"명령?"
"이런 일엔 개인용무나 감정 따위는 용납안돼요.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어요. 10분안에 준비 갖춰 갖고 내려오세요."
준비란 가장 간편한 복장을 하라는 뜻이다. 혹시
방심하는 사이 떨어뜨릴 수 있는 액세서리는 절대
안된다.
혜빈은 서둘러 복장을 갖추면서 동표에게 전화를
했다. 동표는 화들짝 놀랐다.
"뭐야, 지금?"
"그래."
"장소는?"
"십중팔구 다혜 아빠 빌라일 거야. 일단 거기서
대기하는 게 좋겠어."
혜빈은 집의 위치를 알려줬다.
"그리고 오늘 다혜를 만나는 날인데 거기 못 나갈지
몰라."
"남편이 다혜 데리고 나올 거 아냐?"
"맞아."
"그럼 어떻게 된 거지? 방기열씨의 스케줄을 훤히
꿰뚫고 있을 텐데 하필 오늘 같은 날로 예정을 당겨
잡았을까?"
"모르겠어. 뭔가 사정이 있겠지."
"남편과의 약속 장소는 어디야?"
"강남호텔 커피숍. 오후 4시에."
"내가 방기열씨와 통화해 볼까?"
"아냐, 내가 할게."
"알았어."
혜빈은 방기열이 전임강사로 근무하는 학교로
전화를 걸었으나 오후 강의는 모두 휴강으로
처리되었다고 담당조교가 전갈했다.
외출을 했는지 집에서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그녀는 다시 동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무래도 손 기자가 수고 좀 해줘야겠어."
"알았어. 달리 내가 해야 될 일은?"
"없어. 수고해."
전화를 끊으려는데,
"잠깐만. 물어볼 게 있어."
하고 동표가 다급하게 말했다.
"뭐?"
"뒤늦은 물음이지만... 이번 일 후회하지 않아?"
"개인 감정이 섞여 있지 않느냐고 묻는 거야.?"
"상대는 다혜 아빠야."
"후회 안해. 난 <사포의 딸들>의 폭력성과 친구의
누명을 벗겨줄 수 있었으면 해. 솔직히 말해 다혜
아빠를 혼내주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냐. 그 덕에
잡지사 사정도 나아졌으면 하구."
"그렇다면 다행이고."
수화기를 내려놓는데, 수진이 들어왔다.
"언니, 뭐하고 있어요? 다들 기다리고 있어요."
"잠깐만... 다 됐어."
혜빈은 핸드폰을 챙겨들고 서둘러 방을 나왔다.
수진과 함께 계단을 내려오면서 말했다.
"왜 갑자기 계획이 앞당겨진 거지?"
"저도 영문을 잘 모르겠어요."
정원으로 나오자 정문앞에 봉고가 서 있었다.
여종선과 모경주 그리고 금화란이 그 앞에서 머리를
맞대고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혜빈은 지체없이 그리로 다가갔다.
"서둘러야겠어요."
여종선이 말했다.
"갑작스런 일이라 당황스럽겠지만 어차피 언제든
닥칠 일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임해 줘요."
여종선은 혜빈의 복장을 점검했다. 단추
하나하나에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쓴다.
"좋아요. 한가지 명심할 것은 여길 나서면 경주의
명령에 철저히 따라야 한다는 점이에요. 평소엔 언니
대접을 받았겠지만 이 시간 이후론 날 대하듯 경주를
대해야만 해요. 물론 일이 끝나면 원래대로 돌아오는
거구요."
"알겠어요. 한가지 질문이 있어요. 지금 어디로
가는 거죠?"
"그건 가면서 경주가 자세히 설명할 거예요. 자,
출발!"
여종선의 지시가 떨어지자 여자들은 전쟁터에
나가는 여군처럼 민첩하게 움직였다.
아닌 게 아니라 화란은 복장도 개구리복이었다.
무거워 보이는 워커도 신고 있다. 총만 없었지
영락없이 군인으로 보인다.
운전대는 수진이 잡았다.
혜빈은 뒷좌석에 모경주와 마주보고 앉았다. 그녀
옆자리에 화란이 앉았다.
"다들 조심해."
여종선이 멀어져가는 차에 대고 손을 흔든다.
회원들도 손을 들어 호응한다. 혜빈은 고개를
까딱해 인사를 대신했다.
혜빈은 대체 이 차가 어디로 가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봉고가 과천을 벗어나면서
모경주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그녀를 크게
안심시켰다.
"우린 지금 방기열의 집으로 가는 겁니다. 오늘
오후 3시에 그곳에서 방기열과 박정희 양이 만나기로
되어 있어요. 명목은 관계를 청산하기 위한 거지만
사실은 우리에게 기습할 시간을 주기 위한
구실이에요."
'우리 다혜는? 아빠와 함께 있을 텐데...'
"다른 문제는 없어?"
혜빈이 말했다.
"가령 그 집에 방기열이라는 남자 혼자 있는 게
아닐 수 있잖아."
"그건 걱정말아요. 딸애가 하나 있는 모양인데 오후
6시까지는 놀이방에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제서야 혜빈은 안심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치밀하군. 만만치가 않은데...'

* * *

그 보다 30분 전, 동표는 대기하고 있던 기자 둘을
불렀다.
하나는 같은 또래의 사진기자 추영구이고, 또
하나는 조혜빈을 대신해 문화부 파트를 새로 맡은
애송이 여기자 문병숙이었다.
"곧 출동이야. 국장님께 보고하고 나올게."
동표는 금방 돌아왔다.
"가지."
동표는 갤로퍼를 직접 몰았다.
방기열의 집은 강남의 주택가에 있었다. 그 인근의
동정을 살핀 동표가 말했다.
"저 빌라 2층이야. 저기 응접실창이 보이지. 거길
통해 안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낱낱이 찍어야 해. 물론
지금 이 시각부터 이 빌라를 드나드는 의심스러운
인물도 사진에 담고."
"그럼 각도로 봐서 저 반대편 집 옥상에
올라가야겠는데."
망원렌즈가 달린 카메라를 어깨에 맨 추영구가
말했다.
빌라 반대편에는 단독주택이 있었다. 담도 높은데다
화강암과 대리석으로 지은 집이라 으리으리해 보인다.
문은 굳게 닫혀져 있다.
"협조해 주지 않을 거 같은데요."
문병숙이 웃으며 말했다.
긴머리에 검은 안경을 쓰고 있는 그녀는 아직
학생티를 벗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장부답게
젊은 혈기를 앞세워 일에서는 남자들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다.
"담치기를 할 수밖에 없겠는데."
동표가 말했다.
"신나겠는데요."
"뭐 신나?"
추영구는 벌써 닥칠 일에 신경이 곤두 서 있었다.
"문 기자가 직접 섭외를 해보지 그래? 겨울 주택가
풍경 스케치하러 잡지사에서 나왔다구."
"얼마든지요."
문 기자는 자신있게 다가가 초인종을 누른다.
"배짱 하난 좋군. 하지만 서두를 거 없어. 아직은
시간이 충분해."
동표가 만류했다.
"아니에요."
기어코 그녀는 초인종을 눌렀다.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 눌러댄다.
동표와 추영구는 불안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누구세요?"
송송 뚫린 구멍을 통해 소리가 들려온다.
"청일이 있어요?"
"지금 없는데."
"저, 청일이 친구 병숙인데 언제 들어와요?"
"늦을 거 같은데. 어쩌지..."
"아줌마 저, 모르시겠어요?"
"왜 모르겠어?"
"잠깐 들어가서 얘기해도 돼요?"
문이 철ㅋ 열리는 금속성 소리가 난다.
문 기자는 눈을 찡긋했다.
"쓸 만한데."
동표는 추영구를 보며 말했다.
그들은 문 기자를 따라 들어갔다. 돌계단을 따라
정원을 가로 질러가자 황소한만 세퍼드가 컹컹
짖어댄다.
현관 밖으로 가정부로 보이는 아줌마가 쫓아
나온다.
문 기자가 뭐라고 얘기하더니 동표와 추영구를
남겨두고 같이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 그녀가 나와서,
"됐어요. 허락을 얻었어요."
하고 말했다.
정성스럽게 내온 차까지 대접받은 그들은 2층
베란다로 나가보았다. 방기열의 빌라가 정면으로
시야에 들어온다.
"조심해! 안에 누가 있을지 몰라."
동표가 경고했다.
"위치는 좋은데 창문이 선텐이 돼 있는 게 문제야."
추영구가 말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 삼발이 세워놓고 앵글을 잡아
봐."
삼발이가 세워지자 추영구는 능숙한 솜씨로 렌즈의
거리를 조절했다.
"자, 다음에 할 일은?"
"기다리는 거야. 방기열과 그 여자들이 나타날
때까지."
충혈된 눈으로 밖을 내다보는 동표의 시선은 전에
없이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 * *

'대체 이 남자는 어딜 쏘다니고 있는 거야?'
혜빈은 방기열의 소재지를 파악할 수 없자 좀이
쑤셔 견딜 수가 없었다.
봉고는 양재를 지나 강남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제
곧 목적지에 닿을 시간이다.
얼마 뒤, 닥칠 일에 대한 긴장감 때문인지 다들
말을 아끼고 있었다.
차의 요동에 따라 흔들리는 몸을 내맡길 뿐 좀처럼
입들을 열지 않고 있다.
모경주는 화가 난 듯한 얼굴로 표정이 굳어 있다.
화란도 큰 눈망울을 껌벅일 뿐 무표정하다.
어떡하든 방기열과 통화를 해야 오늘 만나기로 한
약속을 취소할 수가 있다.
혜빈은 내내 이런 생각에 빠져 있었으나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 나중에서야 알아차렸다.
오후 4시에 약속장소에 나가려는 방기열의 예정엔
변함이 없을 터였다. 박정희가 내민 미끼에 걸려들어
3시에 집에서 그녀를 만나기로 했을지언정 그는
자신에게 닥칠 일까지 예상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테러가 실패하면 그는 약속장소에 나올 것이고
반대로 테러가 성공하면, 생일 축하를 위해 다혜와
같이 만나 즐겁게 놀기로 한 약속은 당연히 무산이
된다.
이것 자체는 하등 문제 될 것이 없다.
요는 법원의 오숙자가 걸림돌인 것이다.
오숙자가 오늘이 다혜 생일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면, 그래서 우정 약속장소까지 나와 자신을
훔쳐보는 일이 없다면 상관없겠지만, 그와 반대라면
불이익은 자신에게 떨어질 소지가 다분했다.
약속장소에 둘 모두 나가지 않아 부부가 하나같이
딸아이에게 관심이 없는 것으로 판명이 날 경우,
다혜를 돌려받는데 결정적인 장애가 생길 수도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남편도 점수가 깎이겠지만 더
손해보는 것은 여자인 자신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혜빈은 작전(?)을 마치자마자
다혜를 데리고 약속장소로 나가 애정어린 엄마의
모습을 오숙자에게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 * *

"그거 굉장한데!"
신청일은 친구이자 기자인 문병숙에게서 설명을
듣고난 후 큰 소리로 말했다.
"여자가 남자를 테러한다, 이거 기자라면 앞다투어
다루고 싶은 특종이겠는 걸!"
"너도 그렇게 생각해?"
"물론이야. 얼마 전 해외 토픽에서 읽었는데,
아내에게 맞았다는 영국 사람이 있어 화제가 된 적이
있지."
"그까짓 거 갖고 뭘. 아내에게 얻어터지는
남편들이 의외로 많아. 특히 여자들의 체구가 큰
동유럽이나 다혈질인 이탈리아 같은 데서는
심심치않게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야."
"그렇긴 해도 그 경운 달랐지."
"뭐가?"
"그 영국남자가 유명한 권투선수였거든."
병숙은 허리를 젖혀 웃음을 터뜨렸다.
청일은 병숙과 국민학교 동기동창이었다. 이
근처에서 줄곧 살아오던 그녀가 이사를 간 것은
대학교 때로, 성격이 시원하고 막힌 데가 없어 여자
친구보다는 오히려 남자 친구처럼 대해 오고 있다.
어머니들도 육성회를 통해 잘 아는 사이라 서로
집안을 드나드는 데도 스스럼이 없다. 대학원에
재학중인 그는 삐삐로 연락을 받고 학교에서 곧바로
달려온 것이었다.
"바야흐로 우리 집앞에서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진다..."
청일은 수염이 거뭇거뭇 돋아난 턱을 쓰다듬으며
눈을 반짝인다.
"넌 뭐가 궁금한 거야? 역시 폭력?"
"아니, 안면이 있는 사람에게 닥친 불행을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이 날 흥분시켜."
"잔인한 취미야!"
"잔인한 게 누군데? 너희 기자들이야말로 대중의 알
권리라는 미명하에 그런 걸 흥미본위로 취재하고
다니잖아."
"하여간 네 독설은 알아줘야 해. 그나저나 앞집
이혼남은 어떤 사람이야?"
"취재하는 사람이 그것도 몰라?"
"대충은 알고 있지만 어디 실감이 나야지."
"니가 끔찍하게 반할 타입이야. 아주 핸섬하지.
요절한 임성민 뺨친다고나 할까."
"정말, 그 정도야?"
"모르긴 몰라도 가슴 설렌 여자들 많았을 거야.
이혼한 거 같은데 다혜라는 딸아이가 하나 있지. 아주
귀엽고 똑똑한 아이야. 이혼한 부모 때문에 응석이
잦고 이따금 울적해 보이기는 하지만."
"외동딸을 키우는 핸섬한 이혼남, 여자들의
가차없는 테러에 무릎을 꿇다! 이거 액조틱한데..."
"여자들?"
"그래, 이건 개인 복수가 아냐. 페미니스트들의
자기 항변인 셈이지."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병숙은 <사포의 딸들>에 대해 아는 것을 얘기했다.
"오호, 그거 대단하군!"
청일은 감탄사를 연발했다.
"마치 라스베가스에 나타난 여자 갱단같군! 한국판
델마와 루이스라..."
"여자로서 내 입장은 미묘해. 그 남자
후안무치(厚顔無恥)였을 거 같은데 혹시 보거나 들은
거 없어?"
"없어. 오가다 가볍게 인사하는 정도니까. 참,
다혜가 다니는 놀이방은 알아. 꼭 남자같은
녀석이지."
"놀이방이라면... 방기열씨가 출근할 때 맡겨
두는가 보지?"
"그래, 대학에 전임강사로 나간다니까 어떻게든
애를 맡겨두어야겠지."
병숙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조혜빈의 후배 기자지만 아직 그녀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다. 게다가 방기열에게
테러를 가하는 정확한 사정에 대해서는 유 사장,
권옥희 국장, 손동표 그리고 조혜빈 네 사람만 알고
있었다. 나중에 드러나도 크게 상관은 없지만, 굳이
입 밖에 내어 소문을 만들 필요는 없다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다혜라는 아이가 딸려 있다는 것은 문
기자로서는 처음 듣는 얘기였다.
'다혜라는 아이의 사진을 찍어둔다면...'
하는 데 생각이 미치자 병숙은 가벼운 흥분을
느꼈다.
이건 기사를 입체화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아직 손동표 선배도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 같았다.
문 기자는 자신의 능력을 잡지사 내에 두루 알리고
싶었다. 그건 신출내기가 처음으로 직장에서 인정을
받게 되는 획기적 사건이 될 수도 있다.
그녀는 이 일을 아무도 몰래 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나 거기로 안내해 줄 수 있어?"
"어디로?"
청일은 얼른 알아듣지 못했다.
"다혜란 아이가 있는 놀이방으로."
"거긴 왜?"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할게. 정말 가능한 거야?"
"하기로 친다면야 쉬운 일이지."
"그럼 어서 안내해."
문 기자는 일어났다. 청일은 느닷없는 여자의
변덕에 얼떨떨했다.
"빨리!"
"대체 갑자기 왜 그래?"
"너, 사진기 있지?"
병숙은 사진기를 가지러 2층에 올라가고 싶지
않았다. 잠깐 청일을 만나러 내려온 처지라 그녀의
손엔 아무 것도 들려있지 않았다.
청일은 어이없다는 듯 지켜보다가 그녀의 재촉에
하는 수없이 방으로 들어가 니콘제품의 자동카메라를
가져나온다.
"자--"
병숙은 사진기를 받아들자 그를 앞세워 현관으로
나간다.
"상사한테 보고 안해도 돼?"
"상사 눈을 피하고 싶어 이러는 거야."
"그럼 이리로 나가다간 발각될 텐데."
그러고 보니 2층에서 물샐틈없이 방기열의 빌라
앞을 지켜보고 있을 터였다. 정문으로 나가면
개미새끼 한 마리라도 그 시선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다른 문 있어?"
"글쎄..."
청일은 장난기가 발동한다.
"미적거릴 시간 없어."
병숙은 청일의 어깨를 꼬집는다.
"넌 완전히 깡패야!"
"어느 쪽이야?"
"좋아, 신발 들어."
병숙은 청일을 따라 뒷문으로 나간다.
잠시 뒤, 그들은 놀이방 앞에 도착했다.
갖가지 색상의 색종이로 창문이 도배질해져 있었다.
입구에 <나리> 놀이방이라는 간판이 내걸려 있었다.
그들은 노크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남녀 아이들이 넓은 마루바닥에 옹기종기 모여
여교사 앞에서 교육을 받고 있었다. 여교사의 손동작
몸동작에 따라 민감하게 반응한다. 대답도 크고
우렁차다.
여교사가 아이들에게서 시선을 떼며 말해 왔다.
"누굴 찾으세요?"
"여기 방다혜라고 있죠?"
청일이 나선다.
"아, 다혜요."
그때, 또래들 틈에 섞여 있던 다혜가 청일을 먼저
알아보고는 일어섰다.
"아저씨!"
가슴에 생일축하 백합꽃을 꽂은 다혜는 볼 것도
없이 청일에게 달려든다. 얼른 보기에도 여자애답지
않게 씩씩하고 외향적인 아이 같다.
청일은 다혜를 안아들었다가 놓았다.
병숙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연방 플래시를
터뜨린다. 아이들이 집중력을 잃고 소란스러워졌다.
방해를 받았다고 생각한 여교사의 눈살이 찌푸려진다.
"지금 수업중이거든요. 여기서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정중한 경고였다.
"죄송합니다. 다혜랑 잠깐 얘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다혜와는 어떻게 되시죠?"
"앞집에 삽니다."
"다혜 아빠가 4시 전에 데리러 오기로 돼
있거든요."
"잠깐이면 됩니다."
"그럼 나가시지 말고 저기로 들어가서 얘기하세요."
그들은 다혜를 데리고 그녀가 가리킨 칸막이 뒤로
갔다. 공룡, 곰, 고릴라 등의 완구가 벽을 끼고
한켠에 쌓여 있다.
"너, 오늘 생일이야?"
청일이 물었다.
다혜는 고개를 끄덕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생일선물 사올 걸 그랬네."
"아저씨, 나 로보트 사줘."
"로보트?"
"변신 로보트말야."
"여자애가 웬 로보트? 너 혹시 자신을 남자로
착각하고 있는 거 아냐?"
"애한테 무슨 소리야? 게다가 여자라고 로보트
가지고 놀지 말라는 법 있어?"
병숙이 말했다.
"아저씨, 로보트."
"그래, 나중에 사줄게."
청일이 말했다.
그 사이에도 병숙은 다혜를 여러 각도에서 찍는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얼마나 찍으려구?"
청일이 말한다.
"다 됐어."
"이 아줌마는 누구야?"
"으응, 아저씨 친구."
병숙은 아줌마라는 말에 눈을 흘긴다.
"아저씨, 빨리 로보트 사줘!"
"지금은 안돼. 같이 나갈 수가 없거든. 아저씨가
나중에 사줄게. 자, 약속."
청일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지만 다혜는 막무가내로
앙탈을 부린다.
"아니, 지금 사줘! 빨리 아저씨이--"
이제 청일의 바지자락을 잡고 늘어진다.
청일은 아이를 달래 보지만 여간내기가 아니다.
달랠수록 다혜의 투정은 심해진다.
"어떻게 좀 해봐."
청일이 지친 듯이 말했다.
그녀는 사진 찍는 것을 중단하고 다혜를 어른다.
그러나 병숙도 달리 재간이 없었다. 점점 다혜의
요구가 드세진다.
"나가야겠어."
병숙이 말했다.
"애 울리려구?"
"하는 수없어. 난 가봐야 해. 정 뭐하면 여교사한테
허락받아 하나 사주지 그래."
"나 돈없어."
"애들 선물 하나에 얼마나 한다구?"
"정말 한 푼도 없다니까."
청일은 지갑을 꺼내 펼쳐보였다. 천 원짜리 두세
장이 전부였다.
"자--"
병숙은 2만 원을 건네준다.
그들은 칸막이를 나왔다. 청일은 여교사를 불러
말했다.
"잠깐 데리고 나가면 안될까요? 애가 로보트
사달라고 보채는데."
"안돼요."
여교사는 단호했다.
"참는 것도 교육이에요. 볼일 다 보셨으면 나가
주시겠어요?"
다혜는 눈치를 채고 청일의 다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청일은 다혜가 금방 울음을 터뜨릴 거 같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 서 있었다.
"다혜야, 떼쓰면 못써!"
보다 못한 여교사가 강제로 다혜를 떼냈다. 다혜는
발버둥을 치다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어서 가세요. 다혜는 제가 잘 타이를게요."
청일은 병숙에게 이끌려 소란스런 놀이방을 뒤로
하고 밖으로 나왔다.
"너 때문에 애만 울렸잖아."
청일이 불평했다.
"미안, 그 돈으로 나중에라도 선물 사줘."
그들은 거리로 나왔다. 오늘 따라 날씨는 봄기운이
완연했다. 얼었던 흙이 녹으면서 보도 틈새로 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그래, 도움은 된 거야?"
"아주 흡족할 만큼. 몇 장 더 찍었으면 24방 다
찍는 건데..."
그녀는 카메라에 남은 필름 수를 확인하며 말했다.
그들은 집 근처까지 왔다.
"3방 남았는데 사진 찍어줄까?"
병숙이 말했다.
"동네에서 뭘."
"아깝잖아."
병숙은 청일을 적당한 곳에 서게 한 다음 오가는
행인들을 피해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너도 찍어."
청일은 사진기를 건네받아 위치를 잡았다.
"저 차 어때?"
"빨리 찍어. 그만 들어가봐야 해. 지금쯤 나
찾느라고 난리 났을 거야."
"저 새로 나온 지프에 기대봐."
"성가시게 굴지 말고 어서."
"배경이 별로 안 좋은데?"
"예술사진 찍는 것두 아닌데... 어서 찍어!"
청일은 무심결에 셔터를 눌렀다. 그리고 동시에
엉거주춤 일어나며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네..."
그가 인사를 한 사람은 30대 여자였다.
여자는 가볍게 목례를 한 후 스치듯 지나친다.
"누구야?"
"다혜와 같은 빌라에 이사온 사람이야. 다혜와 놀다
서너 번 마주쳤어."
"그래? 그런데 일일이 인사하는 거야? 하여간
여자라면..."
그들은 후문을 통해 집안으로 들어갔다.
청일은 병숙이 2층으로 올라간 다음 크게 호통이
들려 오는 소리를 들었다.
"여전하군.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건..."

* * *

혜빈은 차를 세워 달라고 요구했다.
"왜요?"
모경주가 물었다.
"거의 다 온 거지?"
"네."
"자꾸 기침이 나서 그래. 약 좀 사먹었으면 해."
"또 아픈 거예요?"
"아냐, 잠깐이면 돼."
"좋아요. 지체하면 안돼요."
차에서 내린 혜빈은 약국으로 들어가 우황청심환과
드링크제를 요구했다.
그녀는 대머리에 기분 좋은 웃음을 머금는 약사가
건넨 바카스F를 물로 삼아 씹던 청심환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씁스레한 맛이 불쾌하게 입안에 감돈다.
하지만 어쩐지 그것으로도 안심이 안되었다.
"하나만 더 줘요. 그리고 흰 마스크도 주세요."
그녀는 청심환을 주머니에 넣고 그곳을 나와 봉고에
올라탔다.
차가 출발한다.
"드셨어요?"
모경주가 말했다.
"그래, 가벼운 몸살 기운이 있는 것 같다니까
마스크까지 추천하더라구."
그녀는 자리에 앉아 거침없이 마스크를 써보인다.
"옮길 수 있다니까 내 가까이 사람들 접근시키지
말래."
무심히 보고 있던 화란이 움찔 창가로 물러난다.
혜빈은 쓴웃음을 삼키며 차창밖으로 눈길을 주었다.
곧 방기열의 빌라에 도착한다. 혜빈의 가슴은
방망이질치기 시작했다.
기열이 알아보면 곤란하지만 이것으로 어느 정도
대비책을 세운 셈이 된다. 게다가 그 전에 따로
조치를 취한다고 했으니까 크게 우려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아보지만 좀처럼 긴장은 가시지
않는다.
"아무리 우리가 넷이라고 하지만 방기열이란 남자가
완강하게 저항하면 어떡하지?"
"그건 걱정말아요. 박정희 씨가 우릴 맞을 준비를
해둘 거예요."
혜빈의 물음에 모경주는 사무적으로 대꾸했다.

* * *

"방기열이 나타났어!"
동표가 소리쳤다.
"바로 저 자야!"
추영구는 렌즈를 통해 빌라입구를 주시했다.
방기열은 특별히 경계하는 기색 없이 빌라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빌라 입구에서 한 순간도 눈을 떼면 안돼!"
잠시 후, 방기열의 응접실 커튼이 걷혀지더니
창문이 열린다.
하지만 선텐이 돼 있는데다 열린 틈이 비좁아서
안은 잘 들여다보이지가 않는다. 그가 응접실을
오가다가 소파에 앉은 것이 확인되었다.
"저도 좀 봐요."
병숙이 망원경을 들고 있는 동표에게 말했다.
"잘 생긴 바람둥이라면서요?"
"관심 있어?"
뒤에서 추영구가 말했다. 동표는 집안을 살피는데
흠뻑 빠져 있었다.
"저 임성민 팬이었어요. 임성민 씨 닮았다던데요."
"그거 듣기 거북한데. 난 미스 문이 날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행여 혼사 망칠 농담일랑은 마세요. 유부남이 눈이
높아도 유분수지."
"헛소리들 말고 정신 집중이나 해."
동표는 병숙에게 망원경을 건네주었다.
병숙은 눈을 갖다댄다. 방기열의 빌라가 눈앞으로
성큼 다가섰지만 사정은 그다지 좋아지지 않았다.
역시 선텐이 방해가 되고 있다.
그때, 3층 베란다로 여자 하나가 분재를 들고
나온다. 새로 이사 왔다는 아까 그 여자다.
병숙은 망원경의 초점을 그곳에 맞추었다.
여자는 분재를 내려놓고 그곳을 정리하더니 이쪽을
힐끗 내려본다. 병숙은 얼른 망원경을 눈에서 떼었다.
"왜?"
"아니에요."
"이리줘 봐."
동표가 망원경을 빼앗아간다. 하지만 이미 여자는
들어가고 난 뒤였다.
동표는 병숙에게 눈길을 준다.
"뭘 봤는데 그래?"
"이쪽을 보는 사람과 눈을 마주칠 뻔해서요."
"방기열씨가?"
"아니에요. 빌라 주민이었어요."
"이봐, 손 기자!"
추영구가 셔터에 손을 가져가며 말했다.
동표는 얼른 망원경으로 시선을 가져갔다. 젊은
여자가 빌라 입구로 들어선다.
"첨병인가?"
"모르겠어. 좀더 지켜봐야겠어.

* * *

그로부터 5분 후, 푸른색 봉고가 빌라 근처에
미끄러져 들어와 멎어선다.
혜빈은 자신도 모르게 일어섰다.
"서두르지 말아요."
모경주가 말했다.
"기다려야 해요."
"얼마나?"
"전화가 올 거예요."
다시 10여 분이 지나자 예고한 전화벨이 울렸다.
모경주가 핸드폰을 귀에 갖다댄다.
"...알았어."
통화는 간단하게 끝났다.
"뭐래?"
혜빈이 말했다.
"곧 들어오래요."
혜빈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자요."
"아니..."
모경주는 칼을 내밀고 있었다. 손잡이 가까운 곳이
톱니처럼 생겨먹은 등산용이었다.
"이건 왜?"
"위협용이에요. 칼은 휘둘러도 좋지만 상대에게
상처를 입혀서는 안돼요."
"꼭 이래야 해?"
혜빈은 칼을 거부했다.
"자신 있어요?"
"자신? 글쎄..."
"언니가 앞장서서 처리하세요."
"뭘 어떻게?"
"상대를 제압해 무릎을 꿇리는 거죠."
"하지만 상대는 남자잖아."
"우리가 하는 일 모두가 남자들이 있기 때문에 하는
거예요. 본때를 보여줘야 해요. 우리가 뒤에서 거들
테니까 겁먹을 필요 없어요. 게다가 박정희씨가 이미
조치를 취해 놓고 있을 테니까 기습을 하면 상대는
꼼짝하지 못할 거예요."
"무슨 조치?"
"들어가보면 알아요. 자, 수진이는 여기 남고
화란이는 따라와."
혜빈은 모경주를 따라 엉거주춤 봉고에서 내려섰다.
마스크 위로 두눈이 유난히 커보인다.
"202호예요. 앞장 서세요."
들을 것도 없다. 이곳이라면 혜빈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꿈속에서도 혜빈은 다혜를 떠올리며 이곳을
생각하곤 했었다.
'마스크를 썼으니 몰라 볼 거야.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적극적으로 대들어 보는 거야.'
혜빈은 마음을 다잡아먹었다.
빌라 입구에 도착한 그녀는 주위를 슬며시
둘러보았다. 혹시 손동표가 눈에 띌까 하는
생각에서였는데, 보이지는 않았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2층으로 올라갔다. 모두들
발소리를 죽인 채 그녀를 따라 온다.
문앞에 멈춰섰다.
"노크는 하지 말아요."
모경주가 말했다.
혜빈은 손잡이를 돌렸다. 스르르 돌아간다. 당기는
힘에 문이 밖으로 열린다. 짓눌려 있던 공기가
빠져나오면서 집안 특유의 냄새가 코를 찔러온다.
현관으로 들어섰다. 응접실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혜빈은 응접실 위로 올라섰다.
그때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혜빈은 멈칫 섰다. 다음 순간 그것이 남녀가 열에
들떠 서로의 몸을 애무하는 교성임을 알고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러나 역겨움 외에는 더이상의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혜빈은 뒤로 돌아 모경주를 봤다. 그녀의 눈이
'어떻게 된 거죠?'하고 묻고 있었다.
모경주가 소리가 나는 방으로 가라고 눈짓했다.
혜빈이 조심조심 다가설 때마다 신음소리가 점점
커진다. 알몸으로 뒤엉긴 두남녀의 몸부림이 눈앞에
선명히 보이는 듯했다.
이제 대충 이들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방기열이 방심한 사이 기습을 해서 그를
저항하지 못하도록 만들려는 것이다.
혜빈은 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섰다. 눈부신
알몸이 보이는가 싶더니 여자 밑에 깔린 방기열이,
"누, 누구야?"
하고 소리쳤다.
짧은 순간, 방기열의 시선과 혜빈의 눈길이
마주쳤다. 방기열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여자가 그에게서 떨어지며 한쪽 팔을 잡고
늘어졌다.
"어, 뭐야?"
기열은 여자의 돌변에 당황했다. 그는 무슨
일인지를 몰라 민첩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있었다.
혜빈은 침대 위로 몸을 던져 다른 팔을 잡았다.
망설임 없는 동작이었다. 동시에 모경주가 기열을
눌러타고 앉았다.
뒤늦게 기열이 발버둥을 쳤지만, 그의 목에는 칼이
들어와 있었다.
"허튼짓하면 죽어!"
"당신들 누구야?"
"알 거 없어."
화란이 기열의 입을 테이프로 틀어막았다.
기열의 안색이 굳어졌다. 상대가 모두 여자였지만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았다.
어느새 그는 뒤로 돌려져 노끈으로 단단히
묶여졌다. 침대에서 끌어내려진 그는 응접실 바닥으로
질질 끌려나왔다.
넓은 공간으로 나오자 정희와 화란이 달려들어
사정없이 발길질을 해댄다. 혜빈은 적당히 시늉만
내다가 기침을 하며 한발 물러났다.
그녀는 무심코 베란다로 난 창을 보았다.
'아무래도 저길 열어 두어야 하는데...'
하지만 좀처럼 기회가 날 것 같지가 않았다.
분풀이를 한 정희와 화란은 흩어져서 여기저기를
뒤지기 시작했다.
"대체 뭘 하는 거지?"
"별거 아니에요."
그러나 경주의 말과는 달리 화란과 정희는 뭔가를
찾는 기색이다.
혜빈은 답답함을 느낀 듯이 마스크 위에 손을 대고
기침을 연거푸 해대다가 베란다 쪽으로 걸어가 창문을
열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무슨 짓이에요?"
경주가 쫓아왔다.
"숨이 막혀서 그래."
"밖에서 들여다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구요? 그리고
아무 것에도 손대지 말아요."
창문을 닫은 경주는 혜빈의 손이 닿은 창문틀을
수건으로 정성껏 닦아냈다. 그러고 보니 정희와
화란은 어느 사이엔가 목장갑을 끼고 있었다.
"잠깐만 가만 있어요. 곧 나갈 테니까요."
그러며 경주도 찾는데 합세한다.
혜빈은 쓰러져 축 늘어져 있는 기열을 바라보았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바닥에 처박은 채 저항을
포기한 듯 눈을 질끈 내려감고 있다.
'어리석은 남자...'
연민의 시선을 던지던 혜빈의 눈에 얼핏 들어온
것이 있었다. 그것은 작은 봉지에 쌓여 소파 다리밑에
떨어져 있었다.
혜빈은 그것을 주워 안을 들여다보았다. 밀가루
같은 게 네모난 비닐봉지에 담겨 있었다. 그런 게
5개쯤 돼 보였다.
"혹시 찾는 게 이거 아냐?"
혜빈이 들어 보였다.
"어디 봐요."
경주가 다가왔다.
그녀는 안을 들여다보더니,
"찾았어!"
하고 말했다.
화란과 정희가 달려왔다.
"나가기 전에 지문이나 유류품이 떨어져 있나
확인해봐."
잠시 뒤, 안전을 확인한 그들은 밖으로 나왔다.
아무도 그들을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임무는
완벽하게 수행된 것이다.
"아까 그게 뭐야?"
봉고에 오르며 혜빈이 말했다.
"별 거 아니에요. 어서 출발해."
경주가 말했다.
수진이 시동을 걸었다.
"뭔데 그래?"
"훔치는 물건 아니니까 걱정말아요."
"내 말은..."
"별거 아니라니까요!"
경주는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회장님이 내 말에 철저히 따르라고 하신 거
기억하시죠? 더이상 캐묻지 말아주세요."
혜빈은 머쓱해지며 움츠러들었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금방 이면 도로를
빠져나가 대로에 합류했다.
경주는,
"회장님에게 전화 좀 걸어주시겠어요?"
하고 말했다.
혜빈은 과천으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세번째
떨어진 후에 여종선이 나온다.
"저예요."
"어떻게 됐어요?"
"큰 무리없이 끝났어요. 경주씨 바꿀게요."
혜빈은 즉시 핸드폰을 건네준다.
"...네... 네... 알겠어요... 그렇게 할게요."
통화를 끝낸 모경주가 말했다.
"오늘 외박해도 좋대."
차안이 소란스러워졌다. 가장 좋아한 사람은
수진이었다.
혜빈은 수진과 함께 뱅뱅사거리에서 내렸다. 경주와
화란은 적당히 돌아다니다 과천으로 돌아갈 의향인
듯했다.
그들은 택시정류장으로 나왔다.
"어디로 가실 거예요?"
수진이 말했다.
"난 약속이 있어. 늦게라도 다시 만나기로 했거든.
수진이는?"
"뭐 집으로 가거나 친구 만나려구요. 헌데 아까
무슨 소리예요?"
"뭐가?"
"경주 언니에게 뭐라고 물었었잖아요."
"아, 그거! 밀가루 같은 게 작은 비닐봉지에 쌓여
있었거든."
"정말이에요?"
수진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왜, 짐작가는 거라도 있어?"
"그거 혹시... 아, 아니에요."
수진은 뭔가를 말할 듯하다가 그쳤다.
"뭔데 그래?"
"아니에요. "
꽁무니를 뺀다. 모범택시 한 대가 굴러왔다.
혜빈은 시계를 보았다. 거의 4시가 다 돼 간다.
서둘러야만 했다.
"내가 먼저 탈게. 나중에 얘기해."
혜빈은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방기열의 빌라 근처에서 내려 택시를 기다리게 한
다음 놀이방을 찾기 시작했다. 20여 분을 허비한 뒤,
세번째 가서야 다혜가 다니는 놀이방을 찾아냈다.
그런데 여교사는 한사코 다혜를 데려갈 수 없다는
거였다.
"제가 다혜 엄마예요. 이렇게 따르는 걸 보시구서도
그러세요?"
다혜는 생기가 도는 얼굴로 그녀의 허리에 바싹
붙어 있었다.
"우리로서는 다혜 아빠에게 아이를 돌려줘야만
해요. 선생님의 신분을 확인할 도리가 없잖아요."
"그럼, 다혜 아빠에게 전화를 해보세요."
하지만 전화를 받을 리가 없다. 지금 꼼짝도 할 수
없는 처지인 것이다. 여교사가 돌아왔다.
"안 계신가봐요. 전활 받지 않아요."
"엄마, 빨리 가!"
다혜가 보채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해 전 이혼한 처지인데, 오늘이 다혜
생일이라 다혜아빠가 제게 돌보라고 하셨어요."
"어쩐지 한번도 뵙지 못한 분이라... 잠깐만
기다리세요."
여교사는 원장실로 들어갔다. 금방 나와서는
신분증을 요구했다.
"죄송합니다만, 원장님이 지금 상담중이시라 나올
수가 없습니다. 신분증을 확인하라시는군요."
혜빈은 불쾌했지만 하는 수 없었다. 여교사가
요구하는 것을 모두 다 들어주고 나서야 겨우 다혜를
데리고 나올 수가 있었다.
그녀는 그 길로 방기열과 약속한 장소로 나갔다.
55분이나 늦어 있었다. 호텔 커피숍은 비교적
한산한 편이었다.
입구가 잘 내다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은 그녀는
다혜에게 코코아를 시켜주었다.
'벌써 왔다가 돌아갔으면 어떡하지?'
시간 상으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왕 온 거니까 좀더 기다려보는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다소 맹랑한 짓이지만 다혜를 데려와 기르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일이었다.
혜빈은 한참을 기다렸다. 무작정 기다린다 해도 안
나타날 수도 있지만, 만에 하나 오숙자가 보고 있을
것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5시가 훨씬 지나 일어서려는데
오숙자가 나타났다.
"죄송합니다. 많이 늦었죠?"
"아니, 어쩐 일이세요?"
혜빈은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표정은
놀라는 척 연기를 했다.
"다혜 아빠에게 연락받았어요. 오늘 다혜
생일이라고 나와 보지 않겠느냐구요?"
"아, 네..."
이것은 예상 밖이다. 혜빈으로서는 이 여자가
게임에 공정하지 못하다고 느꼈다.
둘 사이에는 교감이 오가고 있는 듯하다. 과천이
멀지는 않다 해도 자유롭게 활동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불리하다고 판단되었다.
"애가 볼에 살이 통통히 올랐네. 다혜야 이거."
그녀는 들고온 종이백에서 커다란 물건을 꺼냈다.
"이게 뭐야?"
다혜가 말했다.
"선물! 변신 로보트야. 니가 좋아한다며?"
"로보트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아셨죠?"
"다혜 아빠가 얘기해 줬어요."
다혜가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른다.
방기열이 구워삶은 게 분명하다. 혜빈은 그렇게
짐작했다.
"다혜 아빠는요?"
"바쁜 일이 있어서 방금 갔어요."
"어머, 다혜 생일인데 바쁜 일 때문에 갔단
말인가요?"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비난하고 싶진 않지만 원래 그런 사람이에요."
"알 수가 없군요. 제겐 꼭 여기 오라고 했는데."
"변덕이 심한 사람이라 그래요."
혜빈은 방기열을 폄하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있었다.
"두 분은 자주 통화하시는가 보죠?"
"자주 통화할 일이 뭐 있겠어요? 제가 움직이기
쉽도록 다혜의 일정같은 것을 알려주는 정도예요."
"오늘은 따로 연락이 없었나 보죠?"
"없었어요."
오숙자의 얼굴에서 밝은 표정이 사라졌다. 혜빈이
이상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눈치챈 듯했다.
"전 다혜를 위해서 백화점에 가볼까 하는데요."
혜빈이 일어났다.
"네, 그러세요."
그녀도 일어났다.
"어쩌죠? 다혜 아빠에게 초대 받으신 거라면 아주
죄송하게 됐군요."
혜빈은 이 여자에게 잘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말은 은근히 비아냥거리는 투였다.
"아니에요. 오해 마세요. 따로 초댈 받은 건
아니에요. 다혜가 특별히 낯을 가리지 않아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었을 뿐이에요."
혜빈은 인사를 하고 커피숍을 나왔다. 금방
그녀에게 무례하게 군 것이 후회가 되었지만, 하는 수
없다고 생각하며 건물을 나와 행인들에게 섞여
걸었다.
"엄마, 나 배고파. 햄버거 사줘."
다혜가 칭얼댔다.
"햄버거는 몸에 나빠. 방부제가 많이 섞여 있거든."
"그래도 사줘."
"안된다니까."
"햄버거 먹고 싶어."
다혜는 잡았던 손을 놓고 길 한가운데 우뚝 선다.
한바탕 울어젖힐 기세다. 볼이 빨개지며 눈물이
글썽글썽한다.
"또 고집피운다."
"햄버거 먹고 싶단 말야."
울먹이기 시작한다.
혜빈은 생일날까지 아이를 울리고 싶진 않았다.
"알았어. 사줄게."
그녀는 다혜를 데리고 햄버거 가게를 찾아나섰다.
마침 KFC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그리로 들어가 치킨과 햄버거를 함께
주문했다. 그리고 다혜가 먹는 것에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 전화 부스로 갔다.
"나야."
동표를 확인하자 말했다.
"지금 어디야?"
"강남. 손 기자는?"
"막 들어온 참이야."
"사진은 찍었어?"
"그래, 하지만 사진이 나와봐야 알 것 같아."
"무슨 소리야?"
"선텐의 어두운 부분에 가려 만족스러울지 몰라서
그래."
"이번엔 반드시 결과가 있어야 해. 그래야 내가
<사포의 딸들>을 나오지."
"알았어. 최선을 다할게. 다혜와 같이 있어?"
"그래."
"나갈까."
"아냐, 오늘은 혼자 있고 싶어. 그리고 내일부터
다혜를 며칠만 맡아줘. 방기열씨가 여러 모로 맡을
상황이 아닐 테니까."
"알았어."
혜빈은 전화를 끊고 자리로 돌아왔다. 다혜는
닭다리를 뜯고 있었다.
혜빈은 살을 발라주었다. 긴장해 있던 그녀의
눈빛은 더없이 평화스러워 보였다.


<16>

"네? 방기열씨가 죽어요?"
혜빈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왜요? 왜 죽은 거죠? 우린 발길로 몇대 걷어찼을
뿐이잖아요."
"흥분하지 말아요."
여종선이 말했다.
"흥분해선 안돼요. 아직 정확한 건 몰라요. 하지만
여기 이렇게 석간신문에 기사가 나 있고 경찰에도
확인해 봤어요."
"어떻게 그런 일이..."

--오늘 오전 11시, K전문대 강사 방기열 씨가
알몸인 채로 등을 칼에 찔린 시체로 자택 응접실에서
발견되었다. 시체를 발견한 오숙자 씨에 따르면...

기사를 확인한 혜빈은 쓰러지듯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귀가 멍멍해지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대체 누가 이런 몹쓸 짓을 한 거죠?"
역시 기사를 훑어보고 나서 사색이 된 모경주가
말했다.
"그건 몰라. 벌써 두번째야. 이번엔 누가 그랬는지
반드시 밝혀내야겠어."
그들은 여종선의 서재에 있었다.
수진과 화란도 파랗게 질려갔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나아가 그들은 일종의 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져
있었다. 멍한 기분에 사로잡혀 서로를 망연히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혜빈은 절망적인 느낌에 빠져들었다.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녀는 눈물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속으로 울었다.
"괜찮아요?"
한참 뒤, 여종선이 어깨를 쳤다.
혜빈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 앞에 쟁반에 담긴
양주잔이 놓여 있었다.
혜빈은 그중에 하나를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모두들 돌아가며 양주를 한잔씩 마셨다.
"다들 흥분이 좀 가라앉았겠지."
여종선이 말했다.
"이건 용서할 수 없는 범죄행위야. 누군가가 우리
일을 훼방놓고 있어. 혜빈씨는 잘 모르겠지만 전에도
이와 꼭같은 일이 생겼어요. 그땐, 설마하는 생각에
흐지부지 넘어갔는데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가지
않겠어.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꼭 밝혀내고야
말겠어."
"회장님!"
수진이 말했다.
"그럼, 지난 번 살인사건과 이번 살인사건의 범인이
동일범이라고 생각하시는가요?"
"물론이야."
"이유는요?"
"방기열씨는 너희들이 테러하고 난 뒤 2시간 안에
죽었어. 게다가 등을 칼에 찔렸어. 윤병두 감독도
그랬구. 범행수법도 같은 건 동일범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지."
모두들 웅성거렸다. 하나같이 경악하는 표정이
나타났다.
혜빈은 침착하려고 했지만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양해를 구한 뒤 3층 화장실로 갔다. 거기서
터져나오는 울음을 해소했다.
밖으로 나온 그녀는 핸드폰을 들고 다시 화장실로
들어가 잡지사로 전화를 걸었다.
동표는 없고 권국장이 받았다.
"조 기자! 큰일 났는데 어쩌지?"
"들었어요.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혜빈은 애써 침착하게 물었다.
"그보다 괜찮아?"
"네, 괜찮아요."
"당장 거길 나와야지."
"저도 아까부터 그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어떻게 해야할지 잘 모르겠어요."
"다혜 문제도 있고 장례를 치러야 할 거 아냐.
게다가 곧 경찰이 조 기자를 지목하게 될 거야."
"다행히 기사엔 제 이름이 없더군요."
"하지만 언제 불똥이 튀게 될지 몰라."
"그보다도 찍은 사진은 나왔나요?"
"아마 나왔을 거야. 난 아직 보지 못했어. 손
기자가 가지고 있어."
"손 기자는 어디 갔어요?"
"살인현장에 갔어."
"언제 들어오죠?"
"곧 들어올 시간 됐어."
"거기에 제가 찍혔을 텐데 공개하기가
곤란해졌잖아요."
"저런, 정말 그렇네! 난 거기까지 생각이
못미쳤는데."
"경찰 쪽은 어때요? 범인은 잡혔나요?"
"아니, 아직. 손 기자가 돌아오면 윤곽이
드러나겠지."
"그럼 1시간쯤 후에 다시 전화걸게요. 자리 뜨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세요."
혜빈은 1층 서재로 돌아왔다. 침울한 분위기는
여전했다.
"마침 잘 왔어요. 안 그래도 심각한
얘기중이었는데."
혜빈이 앉자 여종선이 다시 말했다.
"자, 다시 한번 정리해 보자. 일단 이번 일이
우연히 생겨난 사건이 아니라는 점, 수법이 같은
것으로 보아 동일범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
그리고 뭔지는 몰라도 우리 단체의 이미지에 먹칠을
하려는 의도를 가진 거 같다는 점! 그 외에 달리
생각나는 게 있어?"
"과연 우리 단체에 특별히 적의를 가진 사람이나
집단이 있을까요?"
모경주가 말했다.
"그야 우리에게 테러당한 남자들중에 앙심을 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나름대로 보안을 취한다고는
했지만 조금도 우리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았다고 볼
수도 없을 테니까요."
화란이 말했다.
혜빈은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렇진 않아."
여종선이 말했다.
"방금 보안이라고 했는데... 어제 우리가 방기열을
테러한다는 게 언제 통고됐지?"
"당일 오전에요."
화란이 대답했다.
"그걸 아는 사람은?"
"회장님과 테러에 가담한 네 명 그리고
박정희씨까지 여섯요."
"정보가 새나갔다면 여섯 명 중 하나일 거야. 난
아냐. 왜냐하면 난 바로 그 시각 여기에 있었으니까.
그건 내게 전화를 한 사람이 입증해 줄 거야."
그 점에서는 아무런 이의가 있을 수 없었다. 말은
하지 않았으나 모두 긍정하는 태도였다. 그녀가 다시
말했다.
"그럼 다섯으로 줄어드는데 동일범을 가정할 경우
지난 번 일은 전혀 모르거나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조혜빈씨와 박정희씨는 제외시켜야 할 것 같고.
따라서 세 명이 남게 돼."
"저희들 셋 말인가요?"
모경주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너 화란이 그리고 수진이."
"하지만 불공평해요. 전 어제 다른 데 가지 않고
경주 언니와 바로 들어왔잖아요."
"전화 연락이야 얼마든지 취할 수가 있어."
여종선이 반박했다.
"제가 누군가를 시켜 청부살인을 했단 말인가요?
그렇게 해서 뭘 얻게 되는데요?"
"잠깐, 잠깐만요!"
경주가 손을 크게 휘저었다.
"지난 번에 우리 셋은 알리바이가 모호했어요.
이번에 모호한 사람은 누구죠?"
"수진이와 혜빈 언니요."
화란이 말했다.
"조혜빈씨는 윤감독 사건과 관련이 없으니까 남은
사람은 박수진인데..."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려들었다. 그녀는
당황한 나머지 어쩔줄을 몰라 했다.
"설마 절 의심하는 건 아니겠죠?"
"어제 어디 갔었지?"
여종선이 추궁했다.
"친구들 만났어요."
"어떤 친구들?"
"고등학교 동창들요."
"증명할 수 있어?"
"얼마든지요."
"그 친구들 전화번호 알고 있겠지?"
여종선은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그러자 눈에 띄게
수진의 안색이 흐려졌다.
"물론이에요. 당장 전화 걸 수는 있지만 이렇게
부당하게 의심을 받는다면 전 견딜 수가 없어요."
"우린 수진이가 절대 그릴 리가 없다고 생각해.
그리고 결백하다면 아무 것도 거리낄 게 없잖아."
"전 두 사건의 범인이 같다는 전제부터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그럼 다르다는 거야?"
"그럴 수도 있어요."
"물론 다른 사람이 비슷한 수법으로 우리가 테러를
한 바로 다음에 살인을 하지 말라는 법은 없어.
하지만 확률적으로 따지면 천만분의 일 혹은 1억분의
일쯤이나 될까?"
"전 정말 친구를 만났을 뿐이에요."
수진의 궁색한 변명은 납득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녀는 방어를 하기에 급급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
점이 그녀를 더욱 몰아붙이게 만들었다.
"우리 모두를 실망시키지마."
여종선의 그 말은 무슨 엄중한 경고처럼 들렸다.
수진도 더 이상 궁지에 몰려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어리광을 부리듯 말했다.
"알겠어요. 3층에서 수첩을 가지고 올 게요. 만일
제 결백이 밝혀지면 어떻게들 하실래요?"
"꼭 그렇게 조건을 갖다 붙여야겠어? 아무튼 좋아.
여기 있는 사람 모두 앞에서 내가 무릎 꿇을게.
됐어?"
"좋아요."
수진은 자신만만하게 서재를 나갔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무도 섣불리 그 고요한
침묵을 깨뜨리려고 하지 않았다.
"왜 이렇게 늦죠?"
화란이 말했다.
"글쎄... 이상한데. 한번 올라가 봐."
화란이 일어나자 혜빈이 말했다.
"저도 가볼게요."
여종선이 고개를 끄덕이자 혜빈은 화란과 함께
3층으로 올라갔다. 방으로 들어서며,
"수진아!"
하고 불렀다.
그러나 방안에선 보이지 않았다. 열려진
창문으로부터 찬바람이 밀려왔다.
"저기가 왜 열려 있지?"
화란이 창문쪽으로 쫓아갔다. 혜빈도 따라갔다.
그때,
"쿵!"
하는 소리가 났다.
이어 누군가가 정원의 잔디밭 위를 가로질러
달려가는 게 보였다. 그것이 허둥대는 수진의
뒷모습임을 확인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화란이 비명을 내지르다시피 하면서 1층으로
내려갔다.
혜빈이 1층으로 내려갔을 때는 여종선과 모경주가
현관으로 몰려나가고 있었다.
정원으로 나온 혜빈이 본 것은 막 정문을
빠져나가는 푸른색 봉고의 테일라이트였다.
어떻게 손을 써볼 도리가 없었다. 모두들
망연자실한 채 봉고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네 저년일 줄 알았어."
화란이 비아냥거렸다.
"회장님 어서 경찰에 신고해요."
그러나 여종선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서재로 돌아온 그녀는 각자 방으로 돌아갈 것을
지시했다. 혜빈은 그녀의 냉정한 태도가 이상했으나
드러내놓고 따져들지는 않았다. 그녀를 대신해서
화란이 말했기 때문이다.
"회장님, 당장 경찰에 신고해야 하지 않겠어요?"
"무슨 근거루?"
반문하는 여종선은 무표정했다. 속은 게 굉장히
속이 상할 텐데도 감정을 이렇게까지 제어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수진이 범인이라는 것이 드러났잖아요."
"심증일 뿐이야."
"심증이래도 경찰이 조사하다 보면 새로운 단서가
잡힐 거예요."
"넌 하나만 아니? 그러다간 우리도 다쳐."
"그래, 회장님 말씀이 옳아. 수진이에게 내내 속고
산 게 분하지만 그 계집애를 경찰에 신고하게 되면
우리까지 조사를 받게 될 거야. 그럴 경우 우리가
폭력을 행사하게 된 것두 문제시될 거구."
경주가 말했다.
"그렇다고..."
"그쯤 해 둬."
여종선이 말을 잘랐다.
"혜빈 씨는 달리 의견이 있나요?"
그녀는 혜빈의 존재를 무시할 수가 없어서 마지못해
묻는 것 같았다.
"요는 우리의 확신이라고 봐요. 우리가 수진 씨를
두 사람을 죽인 범인으로 확신한다면 얼마든지 우리의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고도 경찰에 신고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아니요. 그렇지가 않아요. 결과는 마찬가지예요.
수진이가 경찰에 잡히면 <사포의 딸들>에 대해 다
불고 말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살인범이 활개치며 살 게 놔둘 수는
없는 일이잖아요."
"혜빈 씨가 잡혀들어가게 된다 해도 자신있어요?
방기열 씨를 테러한 게 낱낱이 발혀질 텐데두요?"
그 점은 혜빈으로서도 곤혹스러웠다. 당장은
잡지사의 공작 차원이라고는 하지만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될 것은 틀림없다.
아무래도 손동표와 상의를 해봐야겠다.
"알겠어요."
혜빈은 한 발 물러났다.
방으로 돌아온 혜빈이 잡지사로 전화를 걸려고
하는데 화란이 따라 들어왔다.
혜빈은 얼른 핸드폰을 침대 시트 밑으로
집어넣었다.
"왜?"
"수진이 계집애 소지품 좀 뒤져보려구요."
화란은 닥치는 대로 헤집고 다녔으나 별 소득이
없는 듯 시무룩해져 방을 나갔다.
혜빈은 잡지사로 전화를 걸었다. 동표가 나온다.
"다혜 아빠는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괜찮아?"
"......"
한동안 침착했던 혜빈은 그 말에 다시 말문이
막혔다. 여종선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행동했지만 그녀는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처럼
정신이 멍멍했다.
"내 말 들려?"
"나 괜찮아. 어서 말해."
애써 이성을 되찾는다. 아무리 이혼한 미운
남편이라고는 하지만 누가 뭐래도 커다란 충격이다.
"사건 현장과 수사본부에 막 다녀오는 길이야."
"...권국장님한테 들었어."
"곧 경찰이 너를 찾을 것 같아."
"예상하고 있어. 아깐 정신이 없어 미처
권국장님에게 못 물어봤는데 시체를 발견한 사람이
오숙자라는 건 어떻게 된 거야?"
"보도 그대로야. 아침에 그 집을 방문했다가 발견한
모양이야."
"그 여자가 아침부터 왜 거길 가?"
"그야..."
동표는 얼버무리는 눈치다. 민감한 부분이라
말하기가 난처한 모양이다.
"하여간 알았어. 난 이제 어쩌지?"
"당분간 거기 있는 게 좋겠어. 오숙자씨가 엉뚱한
진술을 경찰에게 한 모양이야."
"엉뚱한 진술을 하다니?"
"어제 널 커피숍에서 봤다고 그랬나봐. 거기서
방교수와 셋이서 만나기로 했었다며?"
"그래."
"오숙자씨가 도착하기 바로 전에 방교수가 나갔다고
했다며?"
혜빈은 어제 일을 떠올렸다.
'다혜 아빠는요?'
라는 오숙자의 물음에
'바쁜 일이 있어서 방금 갔어요.'
라고 거짓말을 했었다.
그 얘기를 경찰에 진술했다면 사망 추정 시간을
두고 경찰은 혼란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자신을 찾으려고 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혜빈은 어제의 실언을 얘기했다.
"왜 하필 그런 말을 했어?"
"법원 여자의 점수를 따고 싶었어. 일이 이렇게
꼬일 줄은 몰랐으니까. 이제 어쩌지? 여기 남아
있는다 해도 신문지상에 내 이름이 오르내리기
시작하면 곧 정체가 밝혀질 텐데. 손 기자 별장에 가
있으면 안될까?"
"안돼! 경찰이 나한테도 곧 들이닥칠 거야. 너와
내가 친했다는 걸 경찰이 알게 되는 건 시간 문제야.
당분간은 거기 있는 게 최선이야. 조 기자 정체가
드러날 위기가 닥치지 않는 한 그곳이 가장 안전해."
"참, 내 정신 좀 봐! 우리 다혜는?"
S로 들어오기 전 다혜를 동표에게 맡겨두었었다.
"만일 방교수가 입원을 한 정도였으면 오후에
병원으로 데려갈 참이었는데, 아까부터 문병숙 기자가
돌보고 있어."
"지금 통화할 수 있어?"
"밖에 데리고 나간 거 같아. 걱정마."
"그리고 박수진씨가 여기서 도망쳤어. 여종선의
추궁을 받다가..."
혜빈은 아까 있었던 일을 차근히 설명했다.
"알았어. 내 그 여자에 대해 따로 조사해 볼게."
전화를 끊고 난 혜빈은 멍하니 앉아 눈길을 허공에
두고 있었다.
이제서야 전남편 방기열의 죽음이 밀착되어 왔다.
원망과 회한의 감정이 가슴을 후려쳤다.
눈물이 주르르 볼을 타고 흘러내려 입가로
스며든다.
혜빈은 식사를 거른 채 하루 내내 방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17>

혜빈은 다혜를 보고 싶어 한시라도 견딜 수가
없었다. 다혜는 이제 아무 보호자가 없는 상태였다.
문 기자가 돌보고 있다고는 하지만 도무지 안심이
되지 않았다.
느닷없는 충동에 사로잡혀 잡지사로 전화를
걸었으나 동표는 외근을 나갔다는 것이었다. 문
기자와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
혜빈은 S를 빠져나왔다. 여종선이 보이지 않아
허락을 받지 않았다. 오후에 존 스튜어트 밀의
<여성의 예속>을 강독하기로 돼 있었으나, 그런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부랴부랴 전철을 이용했다. 잡지사에 도착한 것은
1시간이 좀 지나서였다.
그때까지 권국장과 동표는 없고 문기자가 막
외근에서 돌아와 있었다.
"우리 다혜는?"
혜빈이 물었다.
"다혜란 아이는 지금 집 근처 놀이방에 있는데...
헌데 우리 다혜라뇨?"
병숙은 의아했다.
"가만 있자..."
혜빈은 수첩을 뒤지다가 말했다.
"그 놀이방 전화번호 알아?"
병숙은 마침 적어둔 게 있어 보여 줬다.
혜빈은 곧 다혜와 통화할 수 있었다. 다혜는 재밌게
놀고 있었는지 몇마디 대꾸를 신통찮게 하다가 친구
이름을 내지르며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혜빈이 수화기를 내려놓자 그녀를 지켜보고 있던
병숙이 말했다.
"다혜와는 잘 아는 사이인가 보죠?"
"내 딸이야."
"네? 아니 그럼..."
"놀랄 거 없어. 문 기자한테까지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었어."
"그럼 방기열씨가 다혜 아빤가요?"
병숙의 안색은 침울하게 변해갔다.
"그래, 그 문제로 위로 안해도 돼."
"하지만..."
"그보다도 다혜가 어떻게 놀이방이 가게 되었지? 손
기자가 맡긴 거야?"
"아니에요. 제 친구가 맡겼어요."
병숙은 신청일과의 관계 그리고 그 친구가 다혜
앞집에 산다는 것 등을 얘기했다.
"오늘 아침 제가 다혜를 그 친구에게 맡겼는데 아까
급하게 나갈 일이 있다며 놀이방에 데려다놓겠다고
하더군요. 놀이방 전화번호도 그때 알려준 거구요."
"손 기자 어디 갔는지 알아?"
"박수진이라는 여자를 조사한다고 나가는 것
같던데요."
"그래? 그럼, 난 아무래도 놀이방에 가봐야겠어."
"네, 그러세요."
혜빈은 걸음을 떼려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 돌아서며
말했다.
"사진은 나왔어?"
"나왔을 거예요. 암실로 가보세요."
혜빈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12시가 다 돼 가고
있었다.
"아니에요. 암실엔 제가 안내할 게요."
망설이고 있는 혜빈에게 문 기자가 말했다.
"전 그런 줄도 모르고..."
그녀는 뒤늦게야 자신이 다혜의 사진을 의욕적으로
찍어댄 일을 떠올렸던 것이다.
"뭘?"
"제가 어리석은 짓을 했어요. 암실에 가보면
알아요."
암실로 들어선 그들은 붉은등을 켰다. 실내 상황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세척된 사진들이 쳐놓은 줄에
빨래집게로 걸려 있다. 그것은 대부분 다혜의 모습을
찍은 것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죄송해요. 전 다혜가 조 선배님의 딸인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혜빈의 물음에 문 기자가 당시 상황을 차근히
설명했다.
"아냐, 우리가 미리 귀띔하지 않은 책임도 있어.
헌데 추영구 기자가 찍었다는 사진은?"
"글쎄요, 여기 어디 있을 텐데..."
문 기자가 찾아봤으나 사진은 보이지 않았다.
"잠깐만요."
문 기자는 나갔다가 돌아왔다.
"추기자님 얘기로는 손 기자가 챙겨갔다는데요."
"형광등을 켜도 되겠지?"
"잠깐만요."
문 기자는 작업대를 살핀 후 말했다.
"네, 됐어요."
형광등이 켜지자 암실은 보다 확연해졌다. 여기저기
잡다한 게 널려 있어 지저분했다.
혜빈은 다혜의 사진을 살폈다.
"이 사진 내가 가져도 되겠지?"
"네, 물론이에요. 제 불찰 용서해 주시는 거죠?"
"불찰은 무슨 불찰? 나도 초년 시절엔 의욕이
왕성했어. 바람직한 현상이야."
혜빈은 문 기자의 도움을 받아 다혜를 찍은 사진을
챙겨들다가 문득 말했다.
"이건 문 기자 사진인데."
그것은 신청일이 지프를 배경으로 찍어준 것이었다.
혜빈은 그 사진을 문 기자에게 넘겨주려다가 사뭇
놀랐다.
"아니, 이 여잔..."
문 기자의 뒤로 스치듯 찍힌 여자가 시선을 확
잡아당겼다. 놀랍게도 그 여자는 여종선이었다.
"이 사진 어떻게 된 거야?"
"뭐가요?"
"이 사진 찍은 게 언제지?"
"어제 다혜 찍을 때 같이 찍었어요."
"정확한 시간은?"
"조 기자님 일행이 방기열씨 빌라에 나타나기 얼마
전요."
"설마..."
혜빈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시간에 여종선은
과천의 S에 있어야만 했다.
"그 여자가 뭘 어쨌게요?"
"<사포의 딸들>의 회장이야."
"청일이란 친구 말로는 얼마 전 자기 집앞 빌라로
이사를 왔다던데요."
"그거 정말이야? 청일이란 친구 당장 만날 수
있을까?"
"모르겠어요. 일단 삐삐를 쳐볼 게요."
잠시 뒤, 암실을 나온 혜빈은 문 기자의 소개를
통해 신청일과 통화할 수 있었다.
"우리 다혜를 늘 돌봐주신다면서요?"
"아닙니다. 별말씀을요. 전 원래 애를 좋아하고
있습니다. 다혜는 특히 하는 짓이 귀엽더군요."
"고마워요. 혹시 다혜 아빠 윗집에 사는 분을
아세요?"
"잘 알진 못합니다.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어 그저
인사하는 정돕니다."
"그럼 이름이나 직업도 모르시겠군요."
"전혀요."
"언제 처음 그 분을 보았죠?"
"글쎄요, 한 한달 전부터 뵙지 않았나 싶습니다만."
"네, 잘 알겠어요. 친절하게 얘기해 줘서 고마워요.
큰 도움이 됐어요. 다혜를 돌봐준 것두 감사하구요."
통화를 끝낸 혜빈은 다급하게 말했다.
"빨리 손 기자에게 삐삐 쳐봐."
"안그래도 아까 쳤는데 받지를 않아요. 손 기자님은
삐삐 보통 끄고 다니세요."
"저런! 그럼 이걸 어쩐다?"
혜빈은 혀를 차다가 말했다.
"지금 바빠?"
"약간요. 오전에 취재한 기사 오후까지 써내야
하거든요.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아냐. 됐어. 손 기자와 연락이 닿거든 급한 일이
있으니까 내게 연락하라고 해."
혜빈은 바삐 잡지사를 나왔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여종선이 왜 다혜 아빠
빌라 윗층에 살았던 것일까. <사포의 딸들>에서는
전혀 그런 내색이 없지 않았던가.
혜빈은 택시를 타고 다혜가 있는 놀이방으로
향했다. 빌라 근처에 오자 혜빈은 살인현장을
확인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녀는 차에서 내려 빌라까지 걸었다. 빌라 앞은
경찰들과 구경꾼들로 법석일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여느 때처럼 무심한 행인만이 주차된 승용차로
비좁은 거리를 지나친다. 날씨가 쌀쌀해서일까,
행인들의 걸음마저 빨라 보인다.
혜빈은 빌라까지 올라가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빌라 안은 아직 경찰들이
득실거리고 있을지 모른다.
빌라 2층과 여종선이 세를 들었던 것으로 보이는
3층을 힐끗 올려다보고는 얼른 그곳을 지나쳤다.
놀이방에서 다혜를 데리고 나오던 혜빈은 손동표와
마주쳤다.
"삐삐 좀 열어놓지 않구?"
혜빈이 말했다.
"안그래도 조 기자한테서 연락 있을까봐 잡지사로
전화를 했더니 이리로 갔다고 문 기자가 알려주더군.
여긴 위험천만 한 곳이야. 경찰이 널 찾느라고 발칵
뒤집혔어! 어서 어디 조용한 곳으로 가!"
혜빈은 다혜와 함께 동표의 갤로퍼를 타고 꽤
먼곳까지 벗어나 적당한 레스토랑을 찾아들어갔다.
레스토랑 구석자리에 앉은 혜빈이 차(茶)를 시키고
나서 말했다.
"경찰쪽부터 차근히 얘기해봐."
"예상대로 널 찾고 있어. 오숙자 씨의 증언이
결정적이야."
"날 살인자로 의심하고 있는 거야?"
"모르겠어. 용의자가 수사선상에 떠오르지 않자
아무래도 행방이 묘연한 널 찾으려는 거겠지. 오전에
형사 두 명이 널 찾으러 잡지사에 왔었어."
"문 기자는 그런 말 없던데?"
"회사에 출근하지 않고 바로 취재할 탤런트를
만나러 갔었으니까. 헌데 회사에 갔을 때 아무도
너한테 그런 경고를 안했단 말이야."
"유감스럽게도."
"하마터면 큰일날 뻔 했어. 이만한 게 다행이야."
"박수진은?"
"행방불명이야. 그녀의 집주소를 조사했는데 그런
사람 없다는 거야."
"노량진동 달동네에 중풍에 걸린 아버지와 고학하는
남동생이 산다고 들었는데."
"말도 마. 그런 사람은 애초에 없었대."
"그건 이상한데. <사포의 딸들>에서도 박수진의
신분을 철저히 조사했을 텐데 왜 그 점을 몰랐을까?"
"그야 박수진을 믿었는지도 모르지. 아무튼 그 집을
찾아갔을 때 100킬로그램쯤 나갈 듯한 뚱보 아줌마가
나와서는 배와 가슴을 불쑥 내민 채 대체 박수진이
누구냐고 되려 묻던데."
"그래?"
혜빈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박수진의 도망, 여종선의 의심스런 행동! 게다가
자신은 앞으로 어떻게 처신해야할지 몰라
곤혹스러웠다.
차가 날라져왔다. 다혜가 뜨거운 레몬차를 빨리
마실 수 없자 보챘기 때문에 얼음을 추가로 주문했다.
여종업원이 돌아간 후 혜빈이 말했다.
"이 사진 좀 봐."
"문 기자 아냐?"
"아니, 그 뒤 여자."
"이 여잔 <사포의 딸들>의 회장이잖아. 기억나!
어떻게 된 사진이야?"
"문 기자가 어제 찍은 거래. 우리가 다혜 아빠를
덮치기 직전에."
"그래서?"
"우린 다혜 아빠를 테러하고 바로 나와서는 과천에
있는 여종선에게 전화를 걸었지."
"당연히 없었겠군."
"아니, 그 반대야. 놀랍게도 전화를 받았어."
"상대가 받은 척 연기한 게 아니구?"
"아니 내가 직접 걸어 모경주에게 건네줬는 걸."
"그럼 어떻게 된 거지?"
"모르겠어."
"사진을 찍혔을 때 과천으로 가고 있던 중이
아니었을까?"
"현장에 나타났다면 테러를 하던 우리 앞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을 이유가 없고, 그때 갔다 하더라도
과천에 20분 안에 도착할 수는 없어. 우린 10분도 채
못돼 다혜 아빠를 묶어두고 나왔으니까."
"그럼 앞뒤가 안 맞잖아."
"더 이상한 건 여종선이 다혜 아빠 윗집에 살고
있다는 점이야. 그 집에 드나드는 걸 본 사람이
있어."
"누구?"
"문 기자 친구. 왜, 신청일이라는 청년 집에서
사진을 찍었다며?"
"아, 알겠어. 활달하고 의욕이 넘치던 대학원생
말이지."
"그래. 그 친구가 빌라로 드나드는 걸 봤다고
했어."
"잘못 본 게 아니구?"
"아냐, 틀림없어. 한 번 본 게 아니라 한달 전부터
봤다고 했으니까."
"그럼 어떻게 된 거지?"
"나도 몹시 혼란스러워. 도무지 어디서부터 가닥을
잡아야 할지 단서도 보이지도 않구."
"그래, 나까지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 같아. 좀
정리해 보자.
우선 오은영의 약혼자 윤병두 감독이 죽었을 때
시체는 알몸인 채 등에 칼이 꽂혀 있었다고 했지?
게다가 윤감독이 죽기 전 세명의 여자가 그를
테러했던 게 드러났고. 그 세 여자가 모경주, 금화란
그리고 박수진이란 말이지. 셋 모두 <사포의 딸들>의
회원이고. 그리고 그저께 똑같은 일이 생겨났어. 다혜
아빠도 알몸인 채 칼에 찔렸으니까, 맞아! 바로 그
점이야! 두 사건은 어디까지나 동일범의 소행이야."
"그건 여종선도 지적했어."
혜빈은 그래서 결국 박수진이 3층에서 물홈통을
타고 뛰어내려 도망간 얘기를 다시 한번 세세하게
했다.
"그럼 모경주, 금화란, 박수진 중에서는 내
짐작대로 박수진이 가장 의심스럽잖아."
"그런데 느닷없이 여종선이 돌출돼 있어. 어쩐지
모든 게 맞아돌아가는데 여종선의 경우만 전체의
그림을 흐트려놓는 인상이야."
"조 기자는 여종선을 의심하는 거야?"
"모르겠어. 하지만 다혜 아빠 빌라에 살고 있었다는
게 아무래도 이상해. 다혜 아빠가 죽었을 때 여종선은
어디 있었을까?"
"빌라 3층에 있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렇지 않다면 여종선이 거기 가 있을 이유가
없어. 세까지 들어가면서 말야. 물론 이건 확인절차를
거쳐야 하지만."
"하지만 조 기자가 전화할 때 받았다며?"
"그래, 그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야. 한 사람이
동시에 두 장소에 있어야 하거든. 그건 불가능한
모순이야. 기초적인 물리법칙을 어기고 있어."
"그나저나 누가 죽였든 동기는 대체 뭘까?"
그것은 더 오리무중이었다.
"윤감독과 방교수 사이에 공통점은?"
동표가 말했다.
"없다고 봐도 무방해."
"오은영씨 예비부부와 넷이서 만난 적이 없어?"
"없어. 은영이가 윤감독을 만났을 땐 이미 다혜
아빠와 난 사이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벌어져
있었으니까."
"제기랄, 골치덩어리군. 과연 둘 사이를 묶어 주는
끈이 뭘까?"
그때, 손 기자의 삐삐가 소리를 냈다. 허리춤을
확인하더니 말했다.
"가봐야겠는데."
"급한 일이야?"
"미안해."
"평소에도 삐삐 좀 켜놓지 않구? 어딘데 그래?"
"나중에 얘기해. 참, 다혜는 문 기자한테 맡겨놔.
내가 나중에 데려갈게."
"아냐. 우리 다혜 축구공처럼 이리저리 내돌리고
싶지 않아."
혜빈은 정색을 했다.
"아, 미안."
손 기자는 일어나려다가 도로 엉덩이를 붙여
앉았다.
"내 말뜻은..."
"됐어. 나더러 <사포의 딸들>로 들어가라는
모양인데 나 더이상 거기 머물고 싶지 않아. 이렇게
된 이상 경찰에 가서 모든 걸 털어놓는 수밖에 없어."
"그건 안돼! 잘못하면 니가 의심받게 돼! 니가
처음부터 취재하러 왔다는 걸 알면 저들은 네게 모든
걸 덮어씌울 거야."
"그렇다고 마냥 거기 있을 수는 없잖아."
"조금만 참으면 돼. 사건의 진상이 곧 밝혀질
거야."
"어떻게?"
"어떻게든 내가 뛰어다녀볼게. 지금은 상황이 네게
몹시 불리해."
"그럴수록 하루라도 빨리 내가 자진해서 경찰에
모습을 나타내는 게 낫잖아. 그래야 또다른 오해를
살일도 없을 테고."
"너무 조급하게 굴지마. 그래 봐야 며칠이야. 내게
3~4일만 말미를 줘."
동표는 혜빈의 손을 꼬옥 잡았다. 따뜻한 정감이
전해온다.
혜빈은 동표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가 신뢰
섞인 웃음을 보인다.
"좋아. 며칠 더 기다려볼게."
손 기자와 헤어진 혜빈은 다혜 아빠가 살던 빌라
3층의 주소를 가지고 동사무소에서 주민등록등본을
떼보았다.
문 기자의 말대로 거주인은 여종선의 이름으로 돼
있었다.
다혜의 손을 잡고 동사무소를 나오는 순간부터
혜빈은 내내 여종선을 생각했다. 그녀가 다혜 아빠를
죽인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알리바이는 어떻게
조작했을까?
잡지사에 들러 문 기자에게 다혜를 맡겼다.
떨어지지 않으려는 다혜를 달래 놓고 잡지사를
나오다가 혜빈은 반짝 스쳐가는 생각에 머리를 쳤다.
'그래, 바로 그거야!'
과천으로 돌아오는 동안 혜빈은 자신이 생각해 낸
해법에 스스로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18>

과천 S에 도착했을 때 화란은 목장갑을 끼고 정원과
실내를 드나들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집기와 포장한 물건들을 봉고에 옮겨 싣고 있었다.
그것은 주로 여종선의 서재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이사라도 하는 거야?"
혜빈은 화란을 잡고 물었다.
"언니, 하루종일 어디 있었어요?"
화란이 되물었다.
"급한 볼일이 있었어. 어떻게 된 거야?"
"모르겠어요. 회장님이 실으라고 해서요."
"회장님은?"
"안에 계세요."
"이 봉고는?"
"우면동 쪽에 버려져 있었어요. 경찰에서 연락이
왔어요."
활짝 열린 문을 통해 실내로 들어서자 여기저기
오가다 떨어뜨린 신문지들이 발에 짓밟혀 지저분하게
더럽혀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분위기가 어수선한데다 문을 열어두어서인지
찬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여종선과 모경주는 서재에서 막 나오고 있었다.
혜빈은 꾸벅 인사를 했는데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그들의 눈빛에선 냉랭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들은 가볍게 목례를 한 후 혜빈을 지나쳤다.
"어디 외출하세요?"
혜빈은 그들을 뒤따라 나왔다. 그러나 무겁게
짓눌린 듯한 그들의 입에서는 아무 대꾸도 나오지
않았다.
그들은 봉고 앞으로 다가섰다.
"다 됐어?"
여종선이 말했다.
"네, 다 됐어요."
화란이 대답했다.
그제서야 여종선은 혜빈을 바라보았다.
"경주랑 잠깐 나갔다 올게요."
"네... 언제 들어오시죠?"
"좀 늦을 거 같아요."
여종선이 자신의 무단외출에 아무런 핀잔도 주지
않는 것이 혜빈은 이상했다.
차가 출발하자 혜빈은 안으로 들어왔다. 곧 밖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화란은 TV를 켰다. 만화영화에 채널을 고정시킨 채
화면에 빠져든 화란을 남겨두고 혜빈은 자신의 방으로
올라왔다.
아무래도 뭔가 심상치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혜빈은 동표에게 전화를 했지만 받지를 않았다.
'어떻게 된 거야?'
핸드폰과 삐삐 모두 꺼져 있었다.
낙담한 혜빈은 1층으로 내려왔다. 화란은 아직 TV에
몰두해 있었다.
"식사 차릴까요?"
파출부 아주머니가 들어와서 말했다.
"좀 이른데요. 한 30분 후에 차리세요. 회장님과
경주씨는 나갔으니까 인원 맞추시구요."

* * *

혜빈은 혼자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왔다. 폭풍
전야의 고요처럼 별장은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듯했다.
그녀는 한 가지 실험을 해볼 생각에 좀이 쑤셔 견딜
수가 없었다. 그것은 여종선의 방에 침입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어서 시간이 흘러가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그래서 늦은 밤이 되어 화란이 잠들게 되면, 더해서
여종선과 모경주가 돌아와 잠자리에 들게 되면
바야흐로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일인 것이다.
한데 그녀는 조바심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몇
시간이나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도무지 참을 수가
없어 안절부절 못했다.
그녀는 우리에 갇혀 자유를 잃은 들짐승처럼 방안을
왔다갔다 했다. 그러다가 결심을 한 듯 1층으로
내려왔다.
여느 때와는 달리 발걸음이 몹시 조심스럽다.
소파 너머로 방만한 자세의 화란이 베게에 기대어
개그 프로에 눈길을 주고 있는 것이 보였다. 간간히
웃음소리가 섞여 든다.
혜빈은 발소리를 죽여 여종선의 서재로 갔다.
안에서 문이 잠겨 있는 것을 확인한 혜빈은 거실을
가로질러 현관으로 갔다.
"언니, 어디 가?"
어깨 너머로 화란이 물어왔다.
덜컥 뒷덜미가 잡힌듯이 혜빈은 놀랐다.
"바, 바람 좀 쐬러."
"춥지 않아?"
"답답해서."
혜빈은 밖으로 나왔다. 밤공기가 찼다. 숨을 내쉴
때마다 허옇게 입김이 새어난다.
혜빈은 건물을 돌아가 여종선의 서재 창가로 발길을
옮겼다.
창문은 바깥에 쇠창살을 댄데다 굳게 잠겨 있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혜빈은 방으로 돌아왔다.
긴장감이 누그러졌다.
그러나 그럴 틈도 없이 그녀는 30센티 자와
가느다란 철사를 찾아 1층으로 다시 내려갔다.
화란은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1층에 자신뿐이라는 안도감에 젖어들면서 혜빈은
침착하게 여종선의 서재에 붙어 선 다음 문틈에 자를
밀어넣고 문을 따려고 했다.
자만으로는 되지 않았지만, 철사를 사용하자 똑
소리가 나며 문이 쉽게 열렸다.
안으로 들어선 혜빈은 형광등을 켤 수 없는 처지라
어둠이 눈에 익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어지간히
사물들을 식별할 수 있게 되자 그녀는 자와 철사를
적당한 곳에 내려두고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여종선의 서재로 전화를 걸었다.
서재 안에서 서재로 전화를 건다는 게 이상야릇한
기분을 불러일으켰다.
뛰루루, 하고 신호가 떨어진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귀에 댄 핸드폰에서는 계속해서 신호가 가는
소리가 났다.
그러자 그때였다.
와락 휘어감는 힘에 혜빈의 입이 틀어막혔다.
"누, 누구야?"
하는 말은 자신에게조차 들리지 않았다.
"소리내지 말아요!"
그녀 뒤에 있는 그림자가 경고했다.
혜빈의 팔이 뒤로 꺾여졌다. 상대는 그녀가 날뛰지
못하도록 일거에 제압하고 있었다.
"저예요. 수진이에요."
그림자가 말했다.
혜빈은 귀를 의심했다. 공포가 덜 가신 그녀는
간신히 숨을 쉴 수가 있었다.
"소리치지 않는다면 입을 풀어줄게요."
혜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손을 떼자 혜빈이 돌아서며 말했다.
"여긴 웬일이지?"
"그건 제가 오히려 묻고 싶은데요? 아까 그 전화
무슨 의미죠?"
혜빈은 당장 말할 수가 없었다. 수진의 정체를 알지
않는 한 그것을 입밖에 낼 수는 없었다.
수진은 아무런 흉기도 들고 있지 않았다. 그것이
혜빈을 안심시켰다.
"좋아요, 절 두려워하는 모양인데 제 정체를
밝히죠. 전 사실 경찰이에요."
"경찰?"
"여형사예요. 믿기 어렵겠지만 사실이에요."
혜빈은 수진의 표정을 읽으려 했지만, 어두워서
불가능했다.
"전 오래 전부터 <사포의 딸들>과 여종선 회장을
관찰해 왔어요."
"내게 왜 그런 말을 하지?"
"전 언니의 정체를 처음부터 쭉 알고 있었으니까요.
<까뜨리느> 여기자라는 것뿐만 아니라 다혜 엄마라는
것두요."
"뭐야? 그럼..."
"놀랄 거 없어요. 언니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알고
있어요."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던 거지?"
"마약을 찾고 있었어요."
"마약?"
혜빈은 그 순간 방기열의 빌라에서 뭔가를 찾던
모경주의 행동을 떠올렸다.
"마약이라면..."
"여종선은 중국 대련에서 제조된 마약을 국내에
들여오는 운반책이에요. 마약중에서도 히로뽕이에요."
"여종선씨가?"
"언론엔 철저한 페미니스트로 알려져 있지만 그
이면엔 엄청난 치부가 있는 거죠. 더 놀라운 사실은
아이들을 통해 마약을 운반한다는 점이에요."
"아이들을 이용하다니?"
"지난 번에 중국 여행에 보육원 아이들을 대동한
것도 마약을 운반하기 위해서였어요. 미성년자들은
세관을 통과하기가 수월하거든요."
"마약을 아이들 몸에 감춘단 말야?"
"아이들의 발목에 마약을 감추고 테이프로 묶는
거죠. 어설퍼 보이지만 의외로 많이 써먹는
수법이에요. 여자아이들에게 하나같이 바지를 입힌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에요. 우린 그 정보를 알고
공항을 덮쳤지만 어찌된 셈인지 마약을 들여오지
않았어요. 역으로 우리의 정보가 새나간 게
틀림없어요."
혜빈은 귀에서 윙윙 벌떼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다혜 아빠도 마약과 관계 있어?"
"학생들뿐만 아니라 그들을 지도해야 할
대학교수까지 마약에 노출돼 있는 거 아세요?"
"설마..."
"뿐만 아니라 윤병두 감독도 마찬가지예요. 둘 모두
학계와 연예계를 담당하고 있는 판매책으로 활동하고
있었죠. 스스로 마약 상용자이기도 하면서요."
혜빈은 점점 수진의 말을 믿기 어려워졌다. 하지만
윤감독과 방교수를 맺어주는 끈으로서 마약은 확실한
매개체였다.
"그래, 마약은 찾았어?"
"못 찾았어요."
"위험을 무릅쓰고 여길 들어올 각오를 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 아냐?"
"언니, 제가 밤에 이따금 침대를 빠져나간 거
아시죠?"
"그래, 난 수진을 의심했었지."
"내내 마약을 찾고 있었던 거예요. 증거가
필요했으니까요. 하지만 결국 오늘까지 해내지
못했어요."
"아까 여 회장과 경주 나가는 거 봤어?"
"봤어요. 그리고 바로 들어온 거예요."
"마약이 있었다면 봉고에 옮겨 싣지 않았을까?"
"우리 요원이 미행하고 있으니까 그랬다면
나중에라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다혜 아빠 사건도 같이 조사하고 있는 거야?"
"그건 별개예요."
"누가 죽였는지 짐작해?"
"모르겠어요."
"날 체포할 거야?"
"전 언니가 죽였다고 생각 안해요. 나중에
수사본부에서 밝혀질 일이에요. 헌데 여기 들어와서
뭘 하신 거예요?"
"전화... 어쩌면, 아니 다혜 아빠는 여종선이 죽인
게 틀림없어."
"여 회장이요?"
"우리가 다혜 아빠를 테러하고 난 뒤 봉고에서
이곳으로 전화를 했을 때 여종선은 여기 있었던 게
아냐."
"그럼?"
"다혜 아빠 빌라 바로 윗층에 있었지. 우릴 모두
속인 거야."
"어떻게 그게 가능하죠?"
"그건..."
혜빈이 말하려는데 밖에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야?"
"화란일 거예요. 내가 들어올 때 수도로 숨골을
내리쳐 기절을 시켜놨거든요."
"화란이는 여종선의 하수인인가?"
"어느 정도로 관련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십중팔구
그럴 거예요."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났다.
혜빈은 수진을 앞세워 서재를 나왔다. 열려 있는
현관문 사이로 찬바람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화란이 허둥대며 도망친 것 같았다.
"빨리 잡아야지!"
혜빈이 말했다.
"알았어요."
"조심해."
수진이 뛰어나갔다.
혜빈이 뒤쫓아나갔으나 어둠속으로 사라진 수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혜빈은 수진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여종선과 모경주가 먼저 돌아올까봐 몹시
초조했다.
1시간이 지나도록 수진은 돌아오지 않았다.
다들 빠져나간 별장은 귀신이라도 나올 것처럼
적막했다.
2시간이 가까워서야 수진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너무 멀리까지 나왔어요. 뛰느라 지쳤구요."
"화란이는 잡았어?"
"잡았어요. 화란이 걱정은 말아요. 여 회장은
돌아왔나요?"
"아니, 돌아오지 않았어."
"아무래도 거기 있는 건 위험할 거 같아요."
"봉고를 쫓아간 요원들은 뭐래?"
"바보같이 봉고를 놓쳤대요. 미행을 눈치챈 거
같아요."
"저런, 어쩌지?"
"별장은 우리 요원에게 감시를 시킬 테니까 일단은
어서 그곳을 피하세요."
혜빈은 3층으로 올라가 중요한 물건들을 챙겨들고
S를 빠져나왔다. 전철역에서 동표에게 전화를 하자
그가 받았다.
서둘러 오늘 일어난 상황을 설명했다.
"어쩔 수 없었어."
"알아. 사정이 그렇다면 이리로 와."
"다혜는?"
"자고 있어."
"어떻게 가지?"
"수원역까지 전철을 타고 와서 그곳에서 택시를
타."
혜빈이 동표의 별장에 도착한 것은 12시가
가까워서였다.
동표가 현관 앞까지 쫓아나왔다. 혜빈은 동표와
뜨겁게 포옹했다.
"고생 많았어."
혜빈은 가만히 품에 안겨 달콤한 안도에
젖어들었다.
안으로 들어간 혜빈은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이봐, 손 기자..."
혜빈이 말했다.
"아직도 손 기자야?"
"그럼 뭐라고 불러?"
"동표씨라고 해봐."
"뭐, 동표씨?"
혜빈이 피식 웃었다.
"왜, 어색해?"
"어색하잖구."
"곧 자연스럽게 될 거야. 자, 이거."
동표는 소파에 앉아 있는 혜빈에게로 다가 앉았다.
그는 다이어 반지를 혜빈의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혜빈은 감동했다.
"어디서 났어?"
"오래 전부터 준비했던 거야. 이런 순간을
기다려왔어."
둘은 진하게 키스했다.
혜빈은 다혜 아빠와 헤어진 후 처음으로 남자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남자에 대한 욕구를
느낄 때마다 자신을 괴롭히던 죄의식은 더이상
생겨나지 않았다.
"청혼하는 거야?"
"그래."
그들은 부둥켜 안은 채 서로를 애무했다. 애무는
잔잔하면서도 몹시 자극적이었다.
동표의 손길이 능숙하게 파고들었다.
"아, 안돼!"
혜빈은 신음하면서도 마지막 선을 지켜야 한다는
자제력이 남아 있었다.
"내가 못미더워?"
"그게 아냐..."
"아니면 뭐야?"
"아직은..."
그러나 혜빈은 이내 그런 감정이 처녀가 아닌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고쳐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말은 입밖으로 나와버렸고, 굳이 그것을 주워
담을 마땅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아직은 이른 거 같아."
이건 꽤나 진부하고 시대에 뒤처진 관념임을
느끼면서도 혜빈은 내친 김에 그렇게 말했다.
동표는 머쓱해져서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그보다도 동표씨!..."
혜빈은 어색함을 떨쳐버리려는 듯 말했다.
"우리 내일 같이 경찰서에 가."
"경찰서에? 거기 가서 뭘 어쩌려구?"
"모든 걸 밝히고 내게 누명이 씌워 있다면 벗기는
거야."
"잡지사 특종은?"
'어머, 이 남자, 내 신변을 걱정하는 게 아니잖아.'
혜빈은 문득 그렇게 생각했으나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여종선이 살인범이라는 것만으로도 특종감이야."
"여 회장이?"
"내 말 좀 들어봐."
"잠깐만."
동표는 양주 두 잔을 내왔다.
"피로가 풀릴 거야."
"마시고 싶지 않아."
"내 기분 상하게 해놓고 양주 한잔 마시는 것두
거절할 테야?"
"알았어."
혜빈은 무려 152년을 살았다는 토마스 파(Thomas
Parr)의 장수를 상품화시킨 양주를 한모금 마신 다음
말했다.
"착신변환장치(着信變換裝置)라고 알아?"
"그야, 장소 A에 걸려온 전화를 장소 B로 돌릴 수
있는 전화 장치 아냐? 토요일엔 회사에 안 나가고
집에서 전화를 받을 수 있는 장점이 있어
오피스맨들에게 인기가 있다고 들었는데."
"여종선도 바로 그걸 사용한 게 분명해. 내가 다혜
아빠를 테러하는데 가담하고 나와 곧바로 과천으로
전화를 했는데 여종선이 받았거든."
"정말?"
"사실이야. 나도 무척 놀랐어. 알리바이 조작은
그렇게 된 거야. 아까 여종선의 서재에서 실험까지
해봤어."
"하지만 과천은 서울지역이 아니잖아. 서울과 지방
사이에는 그 장치가 통하지 않는 걸로 알고 있는데."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어. 헌데 과천은
지역번호가 서울과 같은 02번이야."
"그럼 윤병두 감독을 죽인 사람도 여종선이야?"
"그럴 가능성이 높아. 박수진에게 들었는데--아까
얘기했듯이 그 아가씬 여형사야--마약이 원인인 거
같아."
"마약?"
"둘 다 판매책이래."
혜빈은 남은 양주를 입속으로 흘려넣었다. 열기가
식도로부터 솟구쳐오른다.
"확실해? 난 믿기지 않는데."
"확실해."
"그거 여종선한테 직접 물어봐야 하지 않겠어?"
"뭐야? 어떻게?"
동표가 손뼉을 쳤다. 그러자 여종선이 그의 뒤에서
나타났다. 냉소어린 얼굴로 혜빈을 내려다본다.
"어, 어떻게 된 거지?"
혜빈은 눈이 감겨왔다.
'내가 왜 이러지?'
"윤감독과 방교수가 판매책이라면 여종선과 난
운반책이야."
그 말은 혜빈의 귓전에서 자장가처럼 아득히 멀어져
갔다.


<19>

혜빈은 눈을 떴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의식이 돌아오면서 혜빈은 자신에게 닥친 불행이
실감되어 왔다.
"잘 잤어?"
사지가 묶여 있는 혜빈의 앞에는 동표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방안이었다. 바로 며칠 전 딸 다혜와 자던
방이었다.
다혜는 침대에 잠들어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아직 모르겠어?"
"어떻게 니가..."
"날 욕하지마. 쥐꼬리만한 월급에 만족할 수
없었으니까.야망이 있는 사내라면 누구라도 그랬을
거야."
"언제부터 마약에 손을 댔지?"
"벌써 오래 됐어. 4년 전 여종선을 취재하고
나서부터였지. 난 그녀가 마약을 취급하고 있다는 것
알아냈지. 그리고 협박을 해 돈을 뜯어낼
생각이었는데--이건 변명같지만 당시 난 돈이 몹시
궁한 처지였어.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시기
직전이었으니까--여종선이 내게 도박을 해왔지.
자신들의 조직에 가담하지 않겠느냐구 말이야."
"그래서 돈에 환장해 마약을 취급하게 되었나?"
"월급보다는 몇십배 보수가 좋았으니까."
"이 별장도 빌린 게 아니지?"
"그래, 내 거야."
"왜 날 끌어들인 거야?"
"난 널 원했어."
"웃기지 마."
"그래, 그건 웃기는 일이지."
동표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혜빈은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이런 남자에게 내가 몸을 허락할 뻔하다니!'
혜빈은 자신의 경솔한 처신을 원망했다.
"우리 조직안에, 그것도 <사포의 딸들>안에 제5열이
있었지. 적과 내통해서 우리에 관한 정보를 조금씩
흘리는 골치거리였어. 일전에 경찰이 공항을
빠져나오던 여종선 일행을 덮친 것도 제5열이 경찰과
선이 닿아 있기 때문이었지. 물론 우리가 보기좋게
선수를 쳐서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말이야. 어쨌든 난
그 계집이 누구인지 찾아내고 싶었던 거야. 니가
조직에 들어오면 뭔가 변화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물론 위험 부담이 있는 게임이었지. 신분이 확실한
내부인을 통해 적을 밝혀낼 수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너에게 경계심을 덜 가질 거라는 생각에서 널 택한
거야."
"겨우 그거였어? 그래, 소득은?"
"아직이야. 엉뚱하게도 넌 윤병두 감독 사건에
관심이 많았지. 그로 인해 일이 이렇게 뒤틀리게 된
거구."
"윤 감독을 죽인 이유는?"
"경찰에 꼬리를 잡혔기 때문이지. 미안하지만 그건
다혜 아빠도 마찬가지야. 둘 모두 조심성이 없었기
때문에 조직에서 제거하기로 결정을 내린 거야.
그리고 말이야... 문 기자 친구가 여종선의 사진을
찍지 않았더라면 넌 우리 조직의 일원이 되었을 거야.
그랬다면 우리 관계도 전과 다름이 없었을 텐데
말야."
"웃기지 마!"
그러자 동표는 다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사장이 특종을 위해 <사포의 딸들>을 밀착
취재한다는 건 어떻게 된 거야? 손 기자 선에서
일처리가 쉽지 않았을 텐데."
"권 국장은 오래 전부터 우리 조직에서 준 뇌물을
받아왔지."
혜빈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권 국장도 꼭두각시였단 말야?"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손 기자가 잡지사 지하주차장에서 <사포의 딸들>
회원들에게 당한 건?"
"각본에 따른 연기였어. 그래야 날 믿을 테니까."
"모르겠어. 왜 날 끌어들였는지 좀더 분명한 동기를
확실하게 말해 줄 수 없어?"
"역시 넌 똑똑한 데가 있어. 오은영에게 그랬던
것처럼 널 방교수를 죽인 함정에 빠뜨릴 생각이었지.
그래야 우리가 경찰의 시선에서 벗어나 계속 사업을
할 수 있을 테니 말이야."
"그럼 처음부터 오은영과 나를 지목했던 거야?"
"두말 하면 잔소리지."
"교활해!"
"그건 어릴 때부터 듣던 소리군."
"내게 관심을 보인 것도 다 그 때문이었나?"
"덤으로 잘 빠진 네 알몸을 소유하고 싶었지."
혜빈은 욕지기가 나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자, 이걸 보라구!"
동표는 혜빈이 방기열을 테러할 때 찍은 사진들을
내놓았다. 그것은 모두 혜빈의 사진뿐이었다.
흐릿하긴 하지만 거실에 서 있는 모습이 찍힌 것도
있었다.
"다른 사진은?"
"미안하지만 이미 모두 폐기했어."
"나쁜 자식!"
혜빈은 사진들을 빡빡 찢어댔다.
"애꿎은 사진이 무슨 죄가 있겠어? 하지만 화가
난다면 얼마든지 분풀이를 하라구. 원판은 항상
대기중이니까."
혜빈은 꼼짝없이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알았다.
"날 어쩔 셈이지?"
"넌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됐어."
"아무한테도 발설하지 않을게."
"나도 그러길 바래. 하지만 자고로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고 했으니까 믿을 수가 없어."
혜빈은 동표에게 동정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수진을 떠올렸다. 미처 이곳으로 온다는
말은 못했지만 수진이 가진 정보력으로 볼 때 한가닥
희망은 있다고 생각했다.
"뭘 생각하지?"
"아냐."
"내가 짐작해 볼까?"
"......"
"우리 내부 누군가가 네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할 테지."
동표는 일어나 담배에 불을 붙인 다음 혜빈의
주위를 맴돌았다.
"살고 싶지 않아?"
"......"
"살려주는 대신 누가 우리 내부의 제5열인지
고백하실까?"
"난 몰라."
돌연 자세를 낮춘 동표는 혜빈의 따귀를
올려붙였다.
"반말하지 마!"
고개가 홱가닥 젖혀졌다 돌아오며 혜빈은 입가를
훔쳤다. 피가 묻어났다.
"내가 널 죽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나?"
동표의 눈은 광기로 빛나고 있었다. 혜빈은 침을
카악 뱉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겨났는지 모를 일이었다.
"난 네 성격을 알아. 부드럽지만 대나무처럼 꺾이지
않는 독종 기질을 갖고 있는 것 말야. 하지만 아무리
너라 해도 내 제안을 거절하진 못할 걸."
동표는 다혜가 잠든 침대로 갔다. 다혜를
교수목으로 들어올려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았다.
잠 자다 날벼락을 맞은 다혜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사지를 바둥거렸다.
"제발! 다혜를 놔줘!"
혜빈은 울부짖었다.
동표가 목을 움켜쥐었던 양손에 힘을 풀자 침대에
떨어진 다혜는 간질병 환자가 발작을 하는 것처럼
온몸에 경련을 일으켰다.
혜빈은 달려들려고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어서 말해! 이번엔 시범으로 끝나지 않아!"
"제발, 우리 다혜만은..."
공포에 사로잡힌 혜빈은 절망적으로 애원했다.
"다혜 목숨은 네게 달렸어. 다혜를 사랑한다면
엄마가 보호해 줘야지."
"아, 알았어요."
혜빈은 더듬거렸다.
"수진이에요, 박수진!"
"뭐야? 박수진이라구?"
동표는 코웃음을 쳤다.
"날 놀리지 말고 똑바로 대란 말야!"
"정말이에요. 박수진은 여형사예요. 동표씨도 그
여자를 가장 의심했잖아요."
"모경주는 어때?"
"모르겠어요. 아니, 그 여잔 아닐 거에요."
"여종선은?"
"여종선은 살인자가 아니던가요?"
"하긴. 난 모든 사람을 의심하는 버릇이 있지. 어떤
때는 나 자신마저도 말이야. 화란이는 그럴 재목도
못돼 보이던데, 어때?"
"아니에요."
"혹시 보육원 교사들중에 있는 게 아냐?"
"난 그 여자들은 잘 알지도 못하는 걸요."
"그러니까 니 말은 박수진이란 말이지."
침대 위에서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다혜가
끙끙대며 헤매고 있었다. 혜빈은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더할 수 없는 고통을 느꼈다.
"이봐, 여종선! 수진이 좀 데려와!"
동표가 문밖에 대고 소리쳤다. 그리고 나서 동표는
주전자에서 물을 따라 다혜에게 먹여주었다. 다혜는
헛기침을 콜록대더니 한참만에야 정상을 되찾았다.
공포에 질린 눈으로 엄마를 발견하고는 으앙 울음을
터뜨리며 달려든다.
"꼴사납군!"
동표는 이죽거렸다.
여종선이 수진을 데리고 들어왔다.
혜빈은 생글생글 웃고 있는 수진의 얼굴을 보고는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듯했다.
"이 여자 얘길 들어봐! 니가 여형사라던데?"
동표의 말에 수진을 깔깔댔다. 여종선은 웃지
않았다.
수진은 혜빈에게 다가가 가래침을 사정없이 뱉었다.
"미친년!"
"우린 니가 수진을 의심하길 바랬지."
동표가 말했다.
"아니, 모든 사람을 의심해서 내게 정보를 주길
원했지. 하지만 넌 내 예상보다 유능하지 못했어.
니가 보내온 정보는 이미 다 알고 있는 것들
뿐이었으니까."
"도무지 모르겠어요. 날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수진씨가 그렇게 엉뚱한 행동을 했단 말이에요?"
"내가 수진이를 의심하는 척 했던 건 역으로 가장
믿을 수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지."
"하지만 3층에서 물홈통을 타고 내려가는 법석을 떨
필요가 있었을까요?"
"아니지. 그건 너 보라고 한 행동이 아냐. 내부
소통자가 수진을 살인자로 의심하도록 한 거지."
"그래서 효과를 보았나요?"
"반복하지만 여종선이 사진에 찍혀 니가
착신변환장치를 알아내지만 않았다면 충분히 안전판
역할을 할 수 있었어. 수진이 잡혀간다 해도 그녀의
알리바이는 확고할 테니까."
혜빈은 눈앞에 깜깜해져 옴을 느꼈다.
"하지만 내부소통자가 제가 여기에 와 있는 걸 알고
있지 않을까요?"
"아, 미안! 여긴 아무도 몰라. 넌 여기 와서 하루
잤을 때 소문이 두려워 아무한테도 발설하지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
동표는 게걸스럽게 웃어댔다. 그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이제 우리의 관계도 종착역에 온 것 같군.
데려가!"
수진은 기다렸다는 듯이 혜빈의 머리채를 잡아챘다.
"잠깐만요. 우리 다혜요!"
그러나 혜빈은 애원은 먹혀들지 않았다. 누구 하나
그녀에게 동정의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혜빈은 밖으로 끌려나왔다.
1층으로 내려와 페치카 옆으로 갔다. 문을 열자
어두운 지하실 바닥까지 낡은 나무계단이 아래로 뻗어
있었다.
이곳이 주위로부터 고립돼 있어 고함을 쳐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혜빈은 수진의
요구에 고분고분 따랐다. 그렇게 하는 것이 다혜의
목숨을 살리는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들어가 있어! 조금이라도 허튼짓하면 다혜에게
해가 된다는 걸 명심해!"
수진은 혜빈의 엉덩이를 향해 발을 뻗었다. 바로 그
순간 막대기 같은 것이 디딤발을 걸어왔고, 수진은
중심을 잃은 채 휘청대다가 계단 아래로 우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굴러떨어졌다.
"쉿!"
하고 말해 온 사람은 S의 파출부 아줌마였다.
"아니, 아줌마!"
"괜찮아요?"
"2층에 우리 다혜가 있어요."
"알아요. 제 동료들이 올라갔어요. 안전하게 처리할
테니까 염려말아요."
"동료들이라뇨?"
"걱정말아요. 나쁜 사람들 아니니까!"
수진은 지하실 바닥에 널부러져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좀 있자 총성 두방이 천지를 뒤흔들 듯이
울렸다.
"다혜가 위험해요!"
혜빈은 만류하는 아줌마를 뿌리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2층으로 향하는 계단에는 사복형사 두 명이 권총을
빼들고 있었다.
그들은 혜빈을 제지했다.
"제 딸이 2층에 있어요!"
"안됩니다!"

* * *

동표는 다혜를 인질로 삼아 경찰과 대치하고
있었다.
방안엔 여종선, 박수진, 금화란 그리고 모경주 모두
모여 있었다.
다들 긴장과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대체 여길 어떻게 알아낸 거야?"
동표는 차례로 여자들의 목에 칼을 들이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투항하라! 너희들은 포위됐다!"
메가폰 소리가 들려왔다.
"빌어먹을 ! 대체 누구 짓이야?"
여종선을 제외하고 다들 동표의 광란에 벌벌 떨고
있었다.
"말해 보란 말이야! 경찰이 여길 어떻게 알아낸
거야? 누가 배신자야? 너야, 아니면 너! 대체 어느
년이야?"
"흥분을 가라앉혀요!"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여종선이 말했다.
"이제 다 끝난 일이에요."
"뭐야?"
동표는 눈을 부라렸다.
"너야?"
"이런다고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아요."
"네년이군! 그래, 네년이 가장 의심스러워! 네년이
배신한 거지?"
"제가요?"
여종선은 쓴웃음을 지었다. 두 명이나 사람을 죽인
자신을 의심하다니! 이런 한심한 남자에게 질질
끌려다닌 자신이 저주스럽기만 했다.
"사람은 때를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해요"
"이거 웃기는군. 이번엔 또 인생에 달관한
선지자이신가?"
"그럼 어떡하려구요?"
동표는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훌쩍대는 다혜를
잡아일으켰다.
"그앨 건드리지 말아요!"
"왜? 이 계집앤 내 생명줄이야!"
동표는 놀라 울음을 터트린 다혜를 문앞까지
끌고가서는 밖에다 대고 소리쳤다.
"모두 물러들 가! 안그러면 여자아이를 죽이겠다!
다시 한번 경고한다! 5분 안에 별장에서 철수해!"
"투항하라! 너희들은 나갈 수 없다! 투항하라!"
"개새끼들!"
그때였다.
와장창하는 소리에 이어 산산조각이 난 창유리조각
사이로 검은 물체가 뛰어들었다. 기동타격대 요원인
것 같았다.
동표는,
"어?"
하며서 다혜의 목에 칼을 들이댔다.
"그 앨 놔둬요! 여자를 함부로 취급하는 건 난 정말
용서 못해요!"
여종선이 뛰어든 것과 경찰 요원의 총구에서 불이
뿜어져 나간 것은 거의 동시였다.
"탕!"


<20>

"여기야!"
혜빈은 손을 흔들었다.
"혜빈아!"
은영이 언덕을 올라왔다.
푸른색 블라우스에 트레퍼즈한 라인의 배이지색
바지를 입은 은영에게서는 봄내음이 물씬 풍겨났다.
그러고보니 내일이면 3월이다.
그들은 구치소로 들어갔다. 수속을 밟고 나서 30분
후 여종선과 면회할 수 있었다. 초췌해 보이기는
했어도 여종선은 당당하고 흐트러짐이 없었다.
"죄송해요."
"아니에요. 다혜를 살려주신데 대해 감사드려요."
혜빈은 마음으로부터 그녀를 용서하고 있었다.
"오늘 주제 넘게 오시라고 부탁을 한 것은..."
여종선이 말했다.
"<사포의 딸들>을 맡아주십사 하구요."
"저희들이요?"
"<사포의 딸들> 별장과 보육원은 제 소유로 돼
있어요. 제가 마약에 손을 댔던 건 시설을 유지하고
소외된 여자아이들을 돌보기 위해서였어요. 하지만
수단이 좋지 않았음을 인정해요. 그 규모를 줄이는
한이 있더라도 <사포의 딸들>과 보육원은 계속 이어져
나가야 한다는 게 제 생각이에요."
"하지만..."
"당장 결정을 하지 않으셔도 돼요."
혜빈은 은영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
또한 약혼자를 죽인 악녀 여종선에 대한 감정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알았어요. 고려해 볼게요."
"고마워요."
그들은 구치소를 나왔다. 한줄기 돌풍이 먼지를
몰며 지나갔다.
가슴속이 휑댕그렁 비워져 가는 것 같았다.
"단단히 각오를 한 것 같아."
혜빈이 말했다.
"어떻게 저런 여자가 두 남자나 죽였을까?"
"글쎄, 마약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어쩌면 남자에
대한 증오심 때문이었는지 몰라."
"헌데 하필이면 왜 남자들을 발가벗겨 꽁꽁 묶어
놓고 죽인 거야?"
"발가벗긴 건 <여자를 억압하는 남자의 진면목을
속속들이 까발리겠다>는 의지의 표시이고, 저항하지
못하도록 사지를 묶은 건 여자가 궁극적으로 싸워
획득해야 할 <권력>을 상징하는 거래."
"난 모르겠어. 통 무슨 말인지... 그거 뭐랬지?"
"뭐?"
"알리바이를 조작한 전화장치 말야."
"착신변환장치."
"여종선씨가 부인하면 증거가 없지 않아?"
"스스로 자백했어. 그리고 파출부 아줌마 아들
병수! 아니, 그 아줌마가 경정인가 경윈가 그렇대. 꽤
높은 직위에 있는 모양이야. 병수가 여종선의 서재에
들어가 컴퓨터를 사용한 시간이 우연히 여종선이
윤감독을 죽인 시간과 일치하고 있어. 그건 병수가
증언하기로 했대."
"그럼 병수란 중학생도 경찰이라는 그 여자가 위장
잠입시킨 거야?"
"그런가 봐."
"대단한 여자야! 그 분 나이가 어떻게 돼?"
"마흔 대여섯 된 모양이야."
"그 나이에 우린 어떤 모습일까?"
은영의 물음에 혜빈은 대답하지 않았다.
신호등이 바뀌어 걸음을 옮겼기 때문이다.
"어떡할 거야?"
"직장에 들어가봐야 해. 넌?"
"오숙자씨가 점심 사기로 했어."
"법원 그 여자? 밥맛이라며?"
"미안하다고 다혜랑 같이 나오라고 했는데, 다혜는
친구 생일잔치에 초대받아 갔기 때문에 나 혼자
가기로 했어."
택시가 굴러오자 은영이 손을 들었다.
"나 먼저 갈게."
은영을 보내고 나서 혜빈은 우두커니 서서 거리를
바라보았다.
나이, 외모, 직업 등 천차만별의 여자들이 남자들
틈에 섞여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여자와 남자, 남자와 여자!
글쎄...
문득 시간을 확인한 혜빈은 어깨를 펴고 보무도
당당하게 인파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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