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 - 서독 구양봉 1

3학년2반 | 2022.02.18 07:37:54 댓글: 0 조회: 750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9558

제1부 서독 구양봉편

<제1장 황약사와 일속>

바쁜 걸음으로 거리를 왕래하는 행인들, 주옥같은 글들이 빛을 뿌리는 청루(靑樓)의 등불들, 그리고 그 불빛 속에서 펄럭이는 치맛자락, 여기저기서 터지는 웃음 소리…….
송나라 효종(孝宗) 말년과 광종(光宗) 초년에는 대륙 일부에 몇 해 동안이나마 평화가 깃들었다.
강북에서는 금의 군대가 이 나라 금수강산을 침략하여 백성들을 처참하게 유린하고 있었으나 이쪽 강남의 풍경은 여전히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청루에서는 여색과 술판으로 밤이 새는 줄 몰랐고 저자에는 보부상(褓負商)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울긋불긋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새긴 들보와 기둥이 늘어선 고대광실에서 흘러나오는 죽현생관(竹弦笙管)의 풍악 소리도 흥겨웠다. 수도 임안(
臨安)은 그야말로 날마다 불야성이었다. 이처럼 주홍빛 대문 안에서는 술과 고기가 썩어 나갔건만 거리에서는 처량한 노랫소리가 애닮게 들려 왔다.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고종(高宗) 조구(趙構)가 흙투성이 말을 타고 장강을 넘을 때는 그래도 금의 군대를 물리치겠다는 맹세를 했다고 한다. 어쩌면 그 당시 임금과 백성이 일치단결하여 금의 군대를 물리쳤으면 수복이 성사되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조정에는 현명한 재상 이강(李綱)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고 변경에는 무장 악비(岳飛)가 있었으니 이 둘 모두 천하에 보기 드문 인재들
이었다. 문(文)에 명재상이 있고 무(武)에는 영장이 있으니, 한결같이 힘을 합해 금을 쳤더라면 잃어버린 금수강산을 되찾았을지도 모르고, 단단했던 이 나라의 강토가 기왓장처럼 깨져 반쪽만 남을 리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간악한 무리들의 농간으로 송은 패하고 깨져서 다시는 원기를 회복할 수 없게 되었다. 그때부터 임금들은 대를 이어 가며 풍악을 즐기고 노는 데 취하여 수도 임안
을 아예 향락의 세계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밤마다 불야성이었고, 항상 금성옥진(金聲玉振)의 풍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런 향락의 세계 임안에서 사람들은 천가(天街)에 모여들고 상인들은 석교(石橋)에서 싸구려를 외치며 고객을 부르고 이따금 술취한 귀족의 공자님들 몇이 꽃 같은 미녀들을 옆구리에 끼고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지나가며 풍류 남아의 모양새를 뽐내고 있었다.
여기는 길 옆의 모퉁이에 자리잡은 자그마한 단층집이다.
길을 향해 열린 문 앞의 넓은 마당에는 값이 나갈 만한 물건은 아무것도 없었다. 딱딱한 나무 걸상 몇 개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고, 사람들의 소매 끝에 닳고 세월과 햇빛에 바래어 반질반질한 탁자 몇 개가 있었다. 탁자들 복판에 작고 네모난 탁자가 하나 또 있었다. 그 위에는 이야기꾼이 흥이 나서 탁자를 탕 칠 때 쓰는 네모난 나무토막이 하나 있었고 탁자 모서리엔 이야기꾼이 목을 축이
는 도자기 주전자와 잔이 놓여 있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이 뜨락에 앉아 이야기꾼의 이야기를 정신없이 듣고 있었다. 이야기꾼은 긴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는데 닳고닳은 소매는 해어져서 색이 바래고 실밥까지 드러나 보였다.
이야기에 열이 오른 이야기꾼은 입에 거품을 물고 팔을 휘두르며 격앙된 어조로 떠들어댔고, 앉아서 듣는 청중들 역시 하나같이 눈을 부릅뜨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야기꾼은 대나무 꼬챙이로 탁자 밑에 있는 갈고(?鼓 ; 양가죽으로 만든 북)를 둥둥둥, 잦은 가락으로 두드리더니 목소리를 가다듬어 한 곡조 뽑았다.
자고로 충신의 죽음은 슬프도다
짐주( 酒)에 죽지 않으면
싸움터의 피못에 쓰러졌거늘
그 까닭이 임금의 혼용 탓임을
사서(史書)에 남겨
후세 사람이 알게 할지어다.
그리고는 나무 방망이를 탕 치며 이야기를 다시 시작했다.
"양재흥(場再興) 장군은 소상하(小商河)에서 적병 2천을 찔러 죽이고 만호장(萬戶長) 살팔발근(撒八發菫)을 요절내고, 천호장 백호장 1백여 명을 무찌르며 좌충우돌 무인지경처럼 내달으니 금군(金軍) 4만이, 글쎄 3백밖에 안 되는 송군한테 풍비박살나는 판이라! 그런데 이때 그 망할 놈의 화살이 우박처럼 쏟아졌어! 양장군은 몸에 맞은 화살을 쭉쭉 뽑아 뚝뚝 끊어 가며 계속 악전고투 혈전
을 벌였지. 그러다가 그만 말이 수렁에 빠지는 바람에 순국을 하셨으니 이 얼마나 애통한 일인가? 하지만 소상하에 우뚝 서 있는 화살투성이 양재흥 장군을 보고는 활을 쏘던 금군도 간담이 서늘해져 부들부들 떨었고, 싸움이 끝난 후 금의 통수 김올출(金兀朮)도 군사(軍師)에게 묻기를 '송에 양재흥 같은 사람이 또 얼마나 있소?' 하였으니 그 놈들이 우리 송을 얼마나 두려워하고 우리 악가
군(岳家軍 ; 악비의 군대)을 두려워했는지 알 만했지. 심지어 '산이 요동할지언정 악가군은 어쩔 순가 없다'고 한탄했으니……."
이야기꾼은 갈고를 둥둥둥 울려 댔다. 잦은가락으로 격앙하게 울리는 북소리에 청중들의 가슴에서도 피가 끓었다.
"기막히군! 그 얘기 한번 시원하네."
청중들 속에선 수시로 환호가 터지고 어떤 사람은 걷어부친 팔뚝을 흔들기도 했다.
그즈음엔 이렇듯 사립문 안의 패설야담(稗說野談)이 흥했다. 송의 황제도 무능한 조정에 대한 백성들의 격분을 알고 있었으므로, 백성들이 모여들어 국사를 의논하면 조정을 비방한다는 누명을 씌워 당장 투옥시켰지만 사립문 안의 야담은 그런대로 방임했다. 황제로서도 민원(民怨)을 없애기는 매우 어려워서 백성들의 분노가 폭발하지 않게만 하면 상책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자면
사립문 안의 야담쯤은 내버려두는 것도 무관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까짓 야담으로 조정이 무너지기야 하겠는가?
그런가 하면 송나라 백성들은 울적한 마음을 야담으로나 달래 보려고 이런 장소에 모여들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이야기꾼의 탁자 주위에는 삼교구류(三敎九流) 별의별 사람이 다 모여들었고, 이야기를 듣다가 부지중에 탁자를 탕! 치며 벌떡 일어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끓어오르는 우국지정을 가누지 못해 눈물을 주르르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아니, 그보다 더 희한한 일도 자주 있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막역한 두 친구가 있었는데 하나는 성이 진(秦)씨이고 다른 한 사람은 악(岳)씨였다. 하루는 그들이 같이 와서 야담을 들었다. 그 날 이야기 제목은 <풍파정(風波亭)>이었다. 이야기 대목이 간신 진회와 근의 여편네 왕씨가 창가에서 귤을 먹으며 악독한 계책을 꾸며 악비를 옥사시키는 데에 이르자, 이야기꾼도 격분한 나머지 목이 다 쉬고 청중들도 주먹을 움켜쥐
며 개탄을 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아이고!" 하는 비명 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돌아보니 세상에, 악씨 성을 가진 친구가 진씨 성 가진 친구의 귀를 물어뜯어 놓은 것이다. 그러고도 분이 가라앉지 않은 악씨는 노기등등해서 진씨를 손가락질하며 욕을 퍼부었다.
"이 진가 놈아! 내가 눈이 멀었지, 너 같은 놈을 친구로 삼다니. 네 선조가 어떤 놈인지 알았느냐? 오랑캐에게 나라를 팔아먹은 간신 진회야, 진회! 내가 여태 그걸 모르다니. 이제부터 네 놈과는 끝이다. 친구고 뭐고 싹 끊는다, 끊어."
그 바람에 진씨는 자기가 세인들의 질타를 받고 있는 진회라도 되어 버린 듯 말문이 막혀 꺽꺽거리기만 했다. 그러자 청중들도 덩달아 진회를 죽일 놈이라고 욕을 해대는 것이었다.
오늘도 이야기가 고조에 오르니 사람들은 모두 얼굴에 노한 빛을 띠고 주먹들을 움켜쥐더니 양재흥처럼 창칼을 휘두르며 금의 군대와 싸우겠다고 야단들이었다. 죽어도 그렇게 싸우다 죽으면 한이 없다는 것이다.
"흥! 노는 꼴들이 가관이로군!"
바로 그때 청중 중에 있던 한 사람이 그렇게 비웃는 것이 아닌가?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차가운 비웃음 소리였다. 사람마다 눈물을 흘리며 금의 군대와 이판사판으로 싸우지 못해 이를 갈고 있는 판에 한구석에 앉아 그들을 비웃고 있다니, 청중을 싸잡아서 조소하고 있는 게 아닌가?
"비웃는 놈이 도대체 누구야? 어서 나와!"
누군가가 소리쳤다.
두서넛씩 탁자에 둘러앉아 차를 마시며 이야기에 정신을 팔고 있던 터라 누가 그런 소릴 했는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아무리 담이 큰 놈이라도 어찌 감히 이럴 수가 있느냐고 머리를 흔들었다. 도대체 누구를 비웃는단 말인가? 청중들인가, 아니면 영웅 양재흥인가? 양재흥이야말로 소상하 싸움에서 송나라의 위엄을 떨친 당대에 둘도 없는 영웅인데 무엇이 어떻다고 비웃어!
정신이 돈 놈이지, 암.
이윽고 한 사나이가 일어섰다. 빙긋 웃음을 띠고 여러 사람을 돌아보는 그의 눈엔 경멸이 가득했다.
"저 이야기꾼의 이야기가 너무 고약해서 한번 웃어 보았소. 뭐가 잘못되기라도 했소?"
그 사나이는 태연하게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당신은 대체 누구요?"
누군가 물었다.
"내가 누구냐고? 내가 누구인지 알려 줄 이유라도 있소?"
사나이는 자기에게 말을 걸어 오는 사람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 오만한 기세에 주눅이 들었는지 묻던 사람은 말문이 막혀 입을 열지 못했다.
혈색 좋은 얼굴에 큰 눈과 단정한 입매를 한 스물 안팎의 이 사나이는 이목구비가 청수하고 몸매가 호리호리하여 언뜻 보면 문약한 일개 서생으로 보였다. 손에는 소요선(逍遙扇)이라는 부채를 들고 담자색 두루마기를 입었는데 옷자락에 놓인 수는 정교한 솜씨로 보아 그 유명한 소주(蘇州)의 수인 듯싶었다.
'미남인데!'
청중들은 그의 깔끔하고 수려한 외모에 내심 경탄하면서도 시기심과 혐오감을 느꼈다.
"우리 송나라의 양재흥이 금나라 오랑캐를 족친 영웅적인 업적이 어떻다고 비웃는 거요?"
누군가 따져 물었다.
그러자 그 사나이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글쎄 일이야 훌륭한 일이고 말고 좋아 듣기는 좋지만, 당신들이 양재흥을 한번 보기나 하고들 이러시오? 송나라 일은 고종 황제께서 흙투성이 발로 장강을 넘어온 뒤로 송나라엔 칭송할 일이 없어졌소이다. 그런데 야담패설로 밥을 먹고 사는 분들은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듣고 와서 대송(大宋)이 어쩌구저쩌구 하는지 통 알 수가 없단 말이오."
그 말에 덩치가 커다란 사나이가 일어서더니 큰소리로 떠들었다.
"이거 화가 나서 어디 살 수가 있나!"
"화가 나다니?"
"우리 송나라엔 우러러 모실 영웅이 천지이고 어진 인재, 용맹한 장수 또한 많고 많다. 나라 위해 싸움터에서 목숨 바친 사람, 과거 시험에서 연이어 장원 급제한 사람, 주옥 같은 글을 써낸 일류 문장가들이 너무 많아 헤아릴 수도 없을 지경인데, 뭐? 칭송할 일이 없다구?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커다란 사나이는 화난 듯 대들었다. 그가 뻗은 네 손가락의 길이와 굵기가 서로 비슷하여 무공(武功)을 아는 사람들은 첫눈에 그가 철사장(鐵砂掌) 같은 무공을 익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청중들은 그 커다란 사나이의 말이 옳다고 떠들며 수려한 젊은이를 잡아먹을 듯이 둘러쌌다.
처음에 이야기꾼은 그 젊은 서생의 말이 괘씸하고 분하여 청중 모두가 달려들어 동네북 치듯 주먹으로 그를 패주었으면 했으나, 막상 사람들이 노기등등하자 뜻하지 않은 일이 생길까봐 겁부터 더럭 났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을 말렸다.
"이 공자님의 말씀도 과히 그른 데는 없지요. 우리 송나라가 사실 한심하기도 하잖소. 그러니 공자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실밖에요."
이야기꾼은 사람들의 노기를 가라앉히고 이야기를 다시 시작할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데, 그게 철사장을 익힌 사나이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너 이 놈, 황제께서 계시는 궁전을 옆에 두고 어디 감히 무엄한 소리를 지껄이는 게냐?"
사나이의 말이 떨어지자 사람들은 혀가 굳고 말았다. 아무래도 이 인간이 궁을 지키는 신용위(神勇衛)쯤 되는가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어찌 이런 위엄을 부릴 수가 있는가?
그래서 모두들 말은 못하고 숨만 내쉬는데, 소란을 일으킨 서생은 두려움 하나 없는 얼굴에 냉소를 흘리면서 한마디 던졌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커다란 사나이는 묻기를 기다리기나 한 듯이 득의양양해서 말했다.
"내가 누군고 하니, 바로 궁내 대도시위(待刀侍衛)로 있는 철장(鐵掌) 수평(隋平)이시다. 이제 알겠느냐?"
그는 자기 신분을 떠벌리며 문약한 일개 서생쯤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듯 거들먹거렸다.
"그런데 네 놈은 도대체 누구냐?"
수평의 물음에 서생은 호탕하게 한번 웃고는 대답했다.
"나는 이름 없는 백성이니 이름을 대도 알지 못할 텐데?"
"물론 그렇겠지. 그렇지 않고야 내가 모를 수가 있나. 이 경성 바닥에서 위로는 왕공 귀족으로부터 아래로는 무림호걸(武林毫桀)에 이르기까지 내가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네 놈 얼굴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거 용케도 아는군. 그렇소, 난 경성 사람이 아니오. 외지에서 왔소."
젊은 서생은 커다란 사나이의 말을 반박하지 않고 그저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수평은 외지에서 왔다는 그의 말에 한결 위세를 뽐냈다. 경성 사람이라면 혹시 그의 친척이나 외척들 중에 권세 있는 자가 있을까 걱정되기도 하겠지만 촌놈이라면 조금도 두려울 게 없었다. 커다란 사나이 수평은 또 한 번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으허허……. 좋다, 어서 네 이름이나 여쭈어라. 한번 들어 보자."
"내 이름은 알아서 무엇하오? 그저 동해(東海)에 있는 도화도(桃花島) 사람인 줄이나 아시오."
젊은 서생의 대답에 수평은 이 녀석이 동해 사람이라는 것까지 이실직고하는 걸 보니 분명 겁을 좀 먹은 모양이라고 여겼다.
'이 녀석이야말로 객사를 당해도 묻어 줄 사람 하나 없는 놈이로군. 녀석을 감옥에 처넣어 피마대효형(披麻戴孝形)으로 죽여 버린들 녀석이 억울하게 죽었다고 상소장 올릴 놈조차 경성엔 없을 터……. 이번에 이 나으리가 상 한번 톡톡히 타게 되겠구나. 재수가 좋으면 엎어져도 떡판에 엎어진다더니.'
"이봐, 네 이름을 어서 대라. 이름이 도대체 뭐냐?"
젊은 서생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천천히 대답했다.
"황약사(黃藥師)라 하오."
궁전의 금의위(錦衣衛)인 수평은 그 이름이 꽤나 신기하게 들리는 모양이었다.
"뭐라구? 약사? 네까짓 게 약사야? 보기엔 선비 티나 내는 놈이 그래, 약사라고? 네가 정말 고약이나 팔고 병을 고쳐 주는 돌팔이 의생이란 말이냐."
이름만 듣고 사람을 가늠하는 이 궁내 대도시위 수평은 사람을 잘못 보아도 대단히 잘못 보았다. 동해 도화도의 무공은 강호(江湖)에서 독자적인 파가 되어 전진교(全眞敎)의 새로운 교주인 왕중양(王重陽)과, 운남 지역을 쥐고 흔드는 대리(大理 ; 지금의 운남성 곤명)의 단씨(段氏)와 더불어 그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수평은 천하에 황약사 같은 고수가 있는 줄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오히려 황약사를 침통이나 흔들고 다니는 의생으로 알고 조소하고 있으니 아마도 제 명에 죽기가 싫은 모양이었다.
수평의 조롱을 들은 황약사의 얼굴이 대번에 험악해졌다. 그는 얼굴에 싸늘한 냉소를 띠며 대꾸했다.
"그래, 내 이름이 돌팔이 의생 같다고 합시다. 돌팔이 의생이면 어쨌다는 거요? 의생이 여기서 야담 좀 듣는 것이 관아의 법에 걸리기라도 한단 말이오?"
황약사의 말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그러나 눈치가 더딘 수평은 황약사가 대단히 하가 난 것도 모르고 더욱더 위풍을 떨었다.
"이 약사 놈아, 그렇다면 잠자코 앉아 야담이나 들을 일이지 건방지게 뭘 비웃어?"
이때 황약사가 몇 마디 구실을 대어 얼렁뚱땅 넘겨 버렸다면 수평도 더 이상 트집 잡지 않고 그만두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황약사가 어떤 사람인가? 그가 한낱 궁내 대도시위에게 겁을 집어먹을 사람인가? 황약사는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도대체 눈꼴이 사나워서 그렇소이다. 우리 송나라 사람들이 어째 모두 거세한 환관이나 계집들처럼 변했는지 모르겠단 말이오. 우리의 금수강산을 금나라에 바치고도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속편히 앉아 야담이나 듣고 있으니 이런 한심한 일이 어디 있소? 선조들이 금군과 싸우던 이야기는 흥이 나서 잘하면서 왜 장방창(張邦昌)이 금을 도와 우리 나라를 망하게 한 이야기는 못하오? 송의
두 황제가 금에 잡혀간 이야기는 왜 못하오? 진회, 나여(羅汝), 집만이(輯萬俟) 같은 작자들 일은 왜 말 못하오? 수백만 인구를 가진 송이 해마다 금의 오랑캐에게 금은 보석을 공납하면서 신하를 자칭하고 남의 아황제(兒皇帝)질이나 하는 수치스려운 일은 왜 말 못하오? 이런 일들은 입 밖에도 내지 못하면서 케케묵은 옛일이나 이야기하고 있으니 어디 들을 맛이 있소?"
그 말에 내심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황약사의 말이 끝나자 수평은 어이없다는 듯이 껄껄 웃어제치더니 천둥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네 이 놈! 잘난 체하지 마라! 네 놈이 궁궐 뇌옥의 원귀가 되고 싶은 게로구나!"
그러면서 수평은 손바닥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모두들 화들짝 놀라서 바라보니, 수평이 내리친 곳이 움푹 꺼졌는데 그 색깔이 불에 탄 듯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 그 바람에 사람들이 질겁한 것은 물론이고 무공을 좀 아는 사람들은 손에 땀을 쥐었다.
'저 탁자가 꺼져 들어간 것 좀 봐. 수평의 무술이 여간내기가 아닌걸. 저 손바닥이 젊은 서생의 몸에 떨어지면 아까운 목숨이 이슬처럼 사라지고 말지!'
하지만 황약사는 두려워하는 기색이라고는 없이, 마치 그의 무예가 범상치 않다는 걸 전혀 모르는 것처럼 수평을 덤덤히 바라보다가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까맣게 타들어간 탁자를 슬슬 만지면서 수평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이 나으리께선 죽고 싶어 환장한 모양이군. 왜 죄 없는 탁자에다 공연한 행패를 부리나?"
그런데 황약사가 슬슬 문지르는 사이에 탁자는 어느새 꺼져 들어갔던 자리가 다시 평평하게 돋아 올라오고 있지 않는가.
"어이쿠! 저 봐, 저 탁자 좀 보라구!"
누군가 소리쳤다.
도대체 무슨 마법을 썼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쨌든 탁자는 수평의 손바닥에 맞아 꺼져 들어갔던 자리가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그 대신 원래 모양대로 평평해져 있었다. 황약사가 솜씨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수평이 어느 정도 식견이 있는 자였다면 황약사가 보인 이 솜씨가 상승(上乘)의 내공(內功)이며 현묘한 장법(掌法)이라는 걸 알아차리고 냉큼 뺑소니쳤을 것이다. 그랬으면 그 많은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수평은 그런 인간이 못 되었다. 궁궐 안에서 위세 부리며 호의호식만 하던 이 자는 걷는 놈 위에 뛰는 놈 있고,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는 이치를 몰랐던 것이다. 그는 황
약사가 그런 솜씨를 보이자 금방 대노하여 부르짖었다.
"이 놈, 네 놈이 감히 나에게 도전하는 거냐?"
교만과 횡포가 몸에 밴 수평은 노기 충천하여 다짜고짜 손바닥으로 황약사를 내리쳤다. 그래도 황약사는 그가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꿈쩍도 않고 서 있었다.
수평은 단매에 황약사를 쳐죽이고 싶었지만 야담 장소에서 살인이 나면 어지간히 시끄러우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놈을 혼찌검이나 좀 내주고 명줄기는 놔두기로 하고 6, 7분의 역도(力道)만 손바닥에 넣었는데, 그 힘만도 워낙 엄청나서 주위 사람들 얼굴이 다 따끔따끔할 정도였다. 옆 사람들은 부지중에 어이쿠 소리를 지르며 옆으로 피해 버리고 싸움
을 말릴 엄두도 못 내었다.
수평의 무공도 보통은 아니었다. 철사장법의 정수를 터득하여 그 동작이 대단히 영민하고 변화 역시 교묘했다. 누군가 이 무공을 알고 있는지 자기도 모르게 "사람 죽는다!"고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수평은 더욱 콧대가 높아졌다. 오늘 사람들이 철장 수평의 솜씨를 보았으니 내일이면 온 경성 바닥에 소문이 뜨르르할 것이다. 이 황약사란 녀석을 혼내는 것은 녀석이 감히 황제에게 불손한 말을 던지고 조정을 비방한 탓이니, 싸움에 명분이 서고 자신도 위풍이 서는 일 아닌가. 수평은 더욱 득의양양해서 다시 한 번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황약사를 단번에 쳐죽일 듯 내리치는 그 일
장은 흉맹하기 짝이 없었다.
황약사는 수평과 맞서지 않고 좌우로 피하기만 했다. 구경꾼들 사이에서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동해에서 온 저 도화도 사람이 필시 횡액을 당하고 말지. 수평의 손에 목숨을 빼앗기지 않더라도 적어도 중상은 입을 텐데 이걸 어떡하지. 아무래도 수평이란 자가 황약사를 그냥 놔주지는 않을텐데…….'
수평은 이 사람 많은 곳에서 위풍을 떨쳐 볼 생각으로 연달아 큰 소리를 지르며 황약사에게 맹공을 가했다. 황약사는 마당 구석까지 물러나서 이제는 더 물러설 자리조차 없게 되었다. 원체 넓지 않은 집안에 둘러서 있는 구경꾼까지 많아서 막다른 골목에 이른 것이다. 그러자 황약사는 수평을 보고 갑자기 히죽 웃었다.
"이젠 화를 좀 삭일 때가 되었지 않느냐? 네가 여태까지 지랄발광을 했지만 난 손 한 번 쓰지 않고 피하기만 했으니 그만하면 화풀이는 했을 것 아니냐? 더 이상 재롱 떨지 마라. 난 이만 가 볼테니."
황약사의 입에서 이죽거리는 말이 나오자 듣고 있던 사람들이 와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사람들은 이 황약사의 무공이 수평을 앞선다는 것을 그제야 분명히 알게 되었다. 수평이 철사장으로 그토록 야단했어도 여지껏 황약사의 옷깃 한 번 스치지 못한 것이다. 김 안 나는 숭늉이 더 뜨겁다더니 정말 이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폭소를 터뜨렸던 것이다. 수평에게도 그것은 분
명 자기를 비웃는 웃음이었다. 여태껏 우쭐거리며 덤벼들었어도 황약사의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못했으니, 솜씨를 뽐내기는커녕 황약사의 발꿈치에도 못 미친다고 남들이 웃고 있는 것 아닌가? 평소 백성들을 업신여기고 멋대로 세력을 휘두르는 수평에게 임안성 백성들은 내심 응어리가 맺혀 있었다. 그런 그가 조롱당하는 꼴을 보자 모두들 삼복염천에 얼음을 삼킨 듯 속이 시원해졌고, 그래
서 쾌재의 웃음을 터뜨린 것이었다. 그들은 황약사가 수평을 혼찌검 내주길 바라고 있었다.
그때 퍽! 하고 주먹으로 바가지를 부수는 소리가 났다. 막다른 골목에 이른 황약사가 수평에게 일격을 가했던 것이다.
그 순간 수평의 얼굴이 새까맣게 질렸다.
"윽!"
수평은 가슴이 콱 막히면서 목구멍에서 비릿한 것이 올라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입을 열면 시뻘건 핏덩이가 왈칵 쏟아질 판이었다. 두 눈을 부릅뜨고 황약사를 바라보는 수평의 눈빛이 공포에 질려 있었다.
'이 녀석의 무공이 이렇듯 고강하다니! 도대체 어느 문파의 전인(傳人)이란 말인가? 동해 도화도가 도대체 어디에…….'
입안에 찬 피를 가까스로 삼킨 수평은 맥빠진 목소리로 몇 마디 뱉었다.
"귀하의 무공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절륜하여 나는……."
그러다가 수평은 울컥 피를 토하고 말았다. 시뻘건 피를 연이어 토하는 수평을 보자 사람들은 그가 아주 중한 내상을 입었다고 놀라워했다.
'동해 도화도에서 온 이 젊은 서생은 틀림없이 세상 밖에서 온 사람인 게야. 손 한 번 쓰지 않고 수평의 철사장을 요리조리 피하는 재간도 그렇고, 손길 한 번 번뜩 날리니 저 유명한 대도시위가 피를 토하잖아. 두 눈으로 보지 않았으면 누가 이 일을 곧이들을까?'
사람들은 내심 경탄했다.
이제 여기 더 있어 봐야 이로울 게 없다고 생각한 수평은 아무 소리도 못하고 비틀거리며 빠져 나갔다. 사람들도 중상을 입은 그에게 길을 비켜 주었다. 그런데 수평이 문 어귀까지 갔을 때 황약사가 벽력같이 소리를 질렀다.
"게 섰거라!"
수평이 흠칫하여 멈춰 서니 노여움이 삭지 않은 황약사가 언성을 높여 물었다.
"어서 말 못하겠느냐? 대송(大宋) 사람이 바보나, 아니냐?"
수평은 황약사를 노려보며 이를 악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황약사는 그를 향하여 한 발자국 성큼 내디디며 호통쳤다.
"어리석은 황제에게 빌붙어 약한 백성을 괴롭히는 나쁜 놈! 네 놈을 일 장에 쳐죽이고 말 테다."
그가 손을 번쩍 치켜 드는 순간이었다. 누군가 두 사람 사이에 뛰어들었다.
"나무아미타불! 수평 대도시위께서 돌아가시겠다니 황 시주(施主)께서는 관용을 베풀어 주십시오. 한 번 실수는 석가모니도 하신다는데 속세의 범인이야 더 말할 게 있습니까?"
이런 싸움판에 나서서 참견한다는 것부터가 놀라운 일이었다. 뛰어난 무공이 없으면 누가 감히 이 싸움판에 끼여들겠는가? 사람들이 바라보니 그 말을 한 사람은 뜻밖에도 젊은 중이었다. 불그레한 얼굴이 번듯하고 준수하게 생겼는데, 얼핏 보면 용맹이 있어 보이지만 그래도 극히 평온한 표정이 속세를 초탈한 고승의 자태가 분명했다.
황약사도 첫눈에 이 중이 범속하지 않다는 걸 알아보고 싸늘하게 웃었다.
"고승께서 제게 가르침을 주시겠습니까?"
그 당시만 해도 동해 도화도의 무공에 대하여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황약사같이 젊은 무림대종사(武林大宗師)가 무림 중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더구나 없었다. 세상 사람들은 전진교의 젊은 진인(眞人) 왕중양과 대리의 단씨 집안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왕중양은 무공 못지않게 명성도 대단했다. 그는 사람들을 이끌고 금의 공격에 반격했으나 애석하게도 하늘이 그 뜻을 돕지
않아 성사를 못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강호에 나서지 않고 종남산(終南山)에서 전진교만을 꾸려 가고 있었다.
대리의 단씨 세가는 몇 대를 내려오면서 부유한 대리국(大理國)을 건설한 황족들인데, 그들의 무공이 강호에서 하나의 파를 이루고 있었다. 특히 그들의 일양지공(一陽指功)은 천하에 둘도 없는 일파절학(一派絶學)이었다.
이외에 서역(西城)의 백타산(白陀山)에도 독특한 무공이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들의 무공은 비정비사(非正非邪), 역정역사(亦正亦邪)로 신묘하고 강력하기가 대리의 단씨나 전진교의 왕중양에 뒤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소승은 동해에 도화도라는 섬이 있는 줄 일찍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머지않아 강호의 사람들이 이 동해 도화도를 모두 알게 되리라고 짐작하고 있었지요. 그것은 물론 도화도에 황약사라는 시주님이 계시는 까닭이구요."
스님이 웃으며 하는 말에 여러 사람들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지금 황약사가 수평을 불러 세워 단매에 쳐죽이려는 판인데 이 중은 도대체 어쩌자고 이러는 걸까? 수평을 도와 황약사를 잡으려면 잔말 말고 자웅을 겨루어 볼 일이지, 무슨 말이 저리 많은가? 황약사의 무공에 겁을 먹은 건가, 아니면 남의 비위나 맞춰 주고 밥벌이 하는 자인가?
그런데 뜻밖에도 중의 말을 들은 황약사는 얼굴에 희색을 띄우더니 공손한 태도로 중에게 읍까지 하는 게 아닌가?
"말씀 고맙습니다. 황약사 인사 올립니다."
그러자 중도 공손한 자세로 얼른 답례하고는 웃었다.
"소승의 말은 허례허식이 아니라 진정이오니, 도주(島主)께서는 부디 자중하시고 보통 사람과 견식을 달리하십시오."
그 말에 황약사가 대뜸 불쾌한 빛을 띠었다.
"대사께서는 소생이 세상에서 두 가지 일을 제일 싫어한다는 걸 모르시는 모양입니다. 한번 들어 보시겠습니까?"
황약사가 코웃음을 치며 하는 말에 중은 다시 한 번 공손하게 읍을 했다.
"귀담아들어 보겠습니다."
황약사는 싸늘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소생은 평생 도화도라는 섬에서만 살아 견식이 없지만 두 가지 인종을 제일 미워하지요. 하나는 가식 많은 글쟁이들입니다. 이자들은 말은 번지르르하나 공명과 녹봉을 탐내 앞을 다투어 관아에 빌붙고 아첨하며 양심을 팔아먹지요. 소생은 이런 인종을 평생 미워하기에, 만나는 족족 죽여 버려 다시는 그런 자들이 사모관대를 뽐내면서 성현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해치지 못하게 하리라 결심
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인종은 가짜 도학을 떠벌리는 위군자들인데 그들 모두 오입쟁이들 아니면 도적 놈들이면서도 겉으로는 점잔을 빼고, 모두가 악한들이면서도 겉으로는 양순한 체하고 다니니, 공자왈 맹자왈이나 외우면서 사람들을 홀려먹는 그런 개종자들을 보면 속에서 방망이가 치밀어 견디지를 못합니다. 몇백 년만 일찍 태어났더라면 그따위 이학(理學)쟁이들을 눈으로 보지
않았을 텐데 하필이면 이런 때 태어나 원수 같아도 보아야 하니 속이 뒤집혀 살 수가 있어야지요. 그저 보는 족족 단매에 쳐죽여 몽땅 꺼져 버리게 했으면 속이 개운하겠습니다."
그 말에 중은 껄껄 웃었다.
"도주의 성미가 시원시원하여 좋습니다. 하지만 도주의 말씀대로라면 함부로 살인을 하시겠다는 겁니까."
"그따위 인간들은 죽여 없애야지요. 그런 인간들을 다 죽이지 못하는 것이 소생의 큰 한입니다."
"나무아미타불. 황 시주께선 도대체 어찌하여 여기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요."
"그거야 명백하지요. 안팎이 다르고 공로에 눈이 먼 궁내 대도시위 같은 자는 살려 둘 수가 없다 이 말이지요."
그 말에 구경꾼들은 일제히 술렁거렸다. 황약사가 수평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야 백 번 고소한 일이지만,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를 죽인다면 큰일이었다. 황약사가 타관 사람인데다가 눈꼴사나운 관리 나부랭이에게 억울하게 당하는 것이 불쌍해서 그를 동정하던 사람들은, 그가 수평을 기어코 죽여 버리려 하자 생각들이 달라졌다.
'괘씸하군. 대도시위를 죽여 버리려면 얼른 죽여 버릴 것이지 공연히 다른 사람까지 걸고 들어갈 게 뭔가? 이학이 어떻다는 거야? 이학이란 당대의 대학문이니 사람마다 정성들여 배워야 할 바이고, 이학을 배워야 부부자자(父父予子) 군군신신(君君臣臣)을 아는데, 동해의 몽매한 일개 백성이 이 천하 제일의 학문을 도대체 뭘로 알고 헐뜯는가 말이다.'
그러나 중은 이 모든 것에 개의치 않고 또 한 번 허허 웃고 말했다.
"내 얼굴을 봐서라도 저 사람을 한 번 용서해 주십시오."
황약사는 별로 시답지 않게 대꾸했다.
"화상(和尙)께서 소생의 성풀이를 좀 해주시겠다면 그럴 수도 있지요."
화상과 무공을 겨루어 보자는 말이었다.
황약사는 이 중의 무예가 보통이 넘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긴장을 조금도 늦추지 않고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자, 받으시오."
그러면서 황약사는 낮은 소리로 시를 읊었다.
도화꽃이 떨어지니
신검(神劍)이 날고
백해의 조수가 밀려드니
옥소 소리 구성지네.
무슨 시 구절을 읊는 것 같았지만 황약사는 도화도에 있는 자기 집 문 앞에 써붙인 주련(柱聯)을 읊은 것이었다. 순간, 황약사는 오른손을 들어 엄지손가락과 식지를 오무려 원을 만들고 나머지 세 손가락은 약간 펴 보였다. 그러자 황약사의 손은 한 떨기 난초처럼 보였는데 그 자태가 대단히 미묘했다.
황약사의 '난화불혈수(蘭淹佛穴手)'였다. 이는 황약사가 독창적으로 만들어 낸 절기(絶技)였으나 다른 사람들은 알 수 없었다. 그저 꽃을 접는 천수관음의 형상 같아 피식 웃기만 했을 뿐이지 황약사의 불혈공(佛穴功)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중은 황약사가 손을 쓰자 깜짝 놀라 번개처럼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그는 어이쿠 소리를 지르고는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시주께선 천하의 절학 72식(七十二式) 불지점화(佛指拈花)를 쓰고 계신 게 아니오?"
신명이 난 황약사는 대답도 없이 한바탕 솜씨부터 보였다.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한 그 동작들은 신묘하기 그지없었다.
"대사께서는 우리 도화도에 '난화불혈수'라는 절학의 무공이 있는 줄은 모르시는가 보군요."
그러면서 그는 잠시도 손을 멈추지 않고 중에게 덤벼들었다.
그제야 사람들은 황약사와 중의 무술이 서로 비슷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황약사의 재촉에 하는 수 없이 솜씨를 보이기 시작한 중은 손가락 하나를 슬며시 뻗쳐 들었다. 그런데 중의 흰 손가락이 척 가리키기만 하면 황약사의 '난화불혈수'는 단단한 금속에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흠칫흠칫 멎곤 하여 도무지 제대로 재주를 부릴 수가 없었다. 황약사는 잠깐 중을 바라보다가 너털웃음을 터뜨
렸다.
"대사님의 고강한 무예가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대사님은 단씨네 일가시군요. 이거 몰라뵈어 죄송합니다."
입으로는 죄송하다고 하지만 그의 안색에는 그런 빛이 조금도 없었다.
"오늘 소생은 단씨네 일양지(一陽指)를 보고 견문을 넓혔습니다."
황약사의 말에 화상은 빙그레 웃기만 했다.
"소승은 일찍부터 동해 도화도에 뛰어난 무예가 있다는 말을 들어 알고 있었지만 배를 부릴 줄 몰라 가지 못하여 도주와 사귈 인연을 못 가져 매우 유감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임안에서 존안을 뵈니 이것 역시 소승의 복인가 합니다."
황약사는 웃으며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소승과 다시 한 번 겨루어 보시겠소?"
"대사께서 원하신다면 그러지요."
황약사는 선뜻 대답했다.
사람들이 보니 중은 용맹하게 생겼으나 실은 점잖은 편이었고, 황약사는 문약한 선비 같았으나 오히려 예의가 부족한 편이었다. 이번엔 화상이 기어코 결판을 보자고 하는 양이 아무래도 재미있는 일이 생길 것 같다고 구경꾼들은 생각했다.
둘은 탁자를 가운데에 놓고 서로 마주앉았다. 그리고는 친구들끼리 다정한 이야기나 나누듯이 두 손을 탁자 위에 올려 놓았다.
이번에도 황약사가 먼저 손을 쓰는데 역시 그 72식 난화불혈수였다. 그 솜씨가 얼마나 기묘한지 구경꾼들은 절로 찬탄을 했다. 도대체 어떻게 생긴 손이기에 저렇듯 뱅뱅 돌며 미인의 팔처럼 온갖 자태를 다 부리는 걸까? 그러자 상대편 역시 손가락을 슬그머니 움직였다. 그는 그 손가락 하나로 황약사를 겨냥하여 찔러 왔다. 둘의 손은 서로 찌르고 막으며 수많은 모양을 만들어 내는데, 살
기는 하나도 없고 아름다운 자태가 번뜩여 사람들을 반하게 만들었다. 구경꾼들은 넋을 잃고 멍하니 그 모양을 바라보았다. 둘이서 결사적으로 무술을 겨루는 것이 아니라 서로 손가락 장단을 하고 있다는 편이 더 적절할 성싶었다. 한 사람은 미인의 손가락처럼 희고 뾰족하여 보기 좋았고 한 사람은 동작이 다소 굼뜬 듯했으나 그 변화가 무궁무진했다. 한 동작이 끝나면 순식간에 다른 동작
으로 변하는데 손가락의 오고 감과 변화함이 마치 두 마리 용이 엇갈려 날고 두 개의 화살이 서로 마주 나는 듯하여 눈 깜짝할 사이에 이미 여러 가지 동작이 지나갔다.
황약사의 안색이 점점 더 침중해지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대리 단씨의 일양지공은 과연……."
그러자 중은 몸을 일으키며 호방하게 웃었다.
"황 도주님, 천하의 무림이 이젠 동해에 도화도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거요. 그리고 악을 원수같이 미워하는 도화도 도주 황약사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을 겁니다. 그러니 이만 합시다."
둘은 또 한 번 크게 웃으며 서로 허리를 굽혀 읍했다.
"외람된 물음인지 모르겠으나 대사의 존함이 어떻게 되시오?"
황약사가 물었다.
"존함이랄 게 있습니까? 소승은 대리에서 온 중이 확실하며, 일속(-俗)이 바로 소승의 이름이올시다."
중이 읍하며 대답하는 말에 황약사는 미소를 짓더니 좀 느린 어조로 읊었다.
"불가의 일은 몇천 가지이고 그 변화도 몇만 가지이지만 나는 오직 일속(一俗)이로다."
그 사이에 수평은 언제 뺑소니쳤는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둘은 서로의 손을 잡고 호방한 웃음을 터뜨리며 구경꾼들 사이를 빠져 나와 거리로 나섰다.



제2장 어둠 속에서 바둑두기
두 사람이 거리로 나서자 행인들이 놀란 듯 그들을 바라보았다. 중과 서생이 손을 잡고 넓은 임안 거리를 희희낙락 걸어가고 있으니 괴상한 일이 아닌가?
그러거나 말거나 둘은 한참 걷다가 한 주루(酒樓)로 들어갔다. 황약사는 큰소리로 심부름꾼을 불러 좋은 술과 맛있는 안주를 가져 오게 하여 일속 대사와 마시기 시작했다. 일속 대사도 소탈하고 시원시원한 사람인지라 황약사와 호흡이 잘 맞았다. 정오 무렵 주루에 앉은 두 사람은 야밤이 될 때까지 취하도록 마셔 댔다.
도화도 얘기가 나오자 황약사는 신명이 나서 떠들었다. 청음동(淸音洞)이 어떻고 녹죽림(綠竹林)이 어떻고 시검지(試劍池)는 여차여차하고 탄지봉(彈指峰)은 또 여차여차하고…….도화도 자랑에 입에 침이 마르는 줄도 몰랐다.
"황 도주님, 이젠 도화도 자랑은 그만하는 게 어떻소? 더 말씀하시면 이 일속이 이름을 바꿔야 하니 말이오."
"이름을 바꾸다니요?"
황약사가 놀라는 기색으로 물으니 일속 대사가 웃으며 말했다.
"도화도가 그렇게 좋다니 소승의 마음에 가보고 싶은 생각이 불일듯 하는구려. 그러니 속념이 더 많아질 게 아니오? 속념이 그렇듯 많으면 다속(多俗)이라고 해야지 어찌 일속(一俗)이라고 하겠습니까?"
둘은 함께 박장대소하고는 은자를 놓고 주루에서 나왔다.
주홍이 도도한 채 달빛이 흐르는 길을 걸어 산고개에 이른 그들은 마주앉아 한담을 나누었다. 인적이라곤 없는 울창한 숲에 푸르스름한 달빛과 이따금 스치는 맑은 바람뿐, 참으로 호젓한 밤이었다.
"일속 대사님, 대리 단씨네 일양지를 보았으니 저로선 평생의 행운입니다."
황약사의 말이었다.
"과찬입니다. 우리 대리의 일양지공이 어찌 도주님의 난화불혈수를 당해 내겠습니까?"
둘이 이렇듯 서로 겸손을 차리며 이야기를 하는데 느닷없이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 왔다.
"개방귀 뀌는 소리 하고 있네! 천하에 개방귀 소리 잘하는 사람이 몇 있다는 건 알았지만, 오늘 밤 여기에도 있을 줄은 몰랐는데."
황약사와 일속 대사의 무술 실력으로 보아 가까이 에서 토끼 한 마리가 달아나는 건 물론이고 낙엽만 져도 당장 알련만, 살아 움직이는 사람이 있는데 그걸 모르고 있었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달빛 아래 큰 나무 한 그루가 서 있고 그 굵게 뻗친 곁가지에 사람 하나가 비스듬히 걸치고 누워 그들 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남루한 옷에다 헝클어진 머리에는 지푸라기들이 붙어 있고 몸에서는 역한 냄새까지 풍겼다. 그는 원숭이처럼 나뭇가지 위에 앉아 둘을 향해 소리쳤다.
"천하와 바보 둘이 웬일로 여기까지 왔소? 황약사가 제 자랑밖에 모른다는 걸 누가 모르는 줄 아우? 제딴에 고고한 척하지만 염불이나 아는 중과 마주앉아 서로 칭찬하느라고 입에 침이 마르는군……. 한편에서는 대리 단씨네 '일양지'가 천하 무적이라 추켜올리고, 다른 한편에선 황 도주의 무술이야말로 천하 제일이라고 엄지 손가락을 내밀고. 허 참! 나 기가 막혀. 다행히 나 같은 거렁뱅
이 귀에 들렸으니 망정이지, 영웅들 귀에 들어갔다면 그 꼴이 어쨌겠소?"
"아니, 대관절 당신은 누군데 그런 험담을 하는 거요?"
자존심이 강한 황약사는 누추한 거렁뱅이가 자기와 일속 대사를 조소하는 소리를 듣고 화가 났다. 하지만 거렁뱅이는 황약사의 말에는 아랑곳없이 느릿느릿 말했다.
"내가 잠을 자는데 말이오, 코 한 번 안 골고 잠이 푹 들었는데 갑자기 무슨 냄새가 나서……."
"냄새라니? 여태껏 앉아 있어도 우리는 아무 냄새도 못 맡았는데."
일속 대사가 이상하여 묻자 거렁뱅이는 좋아라고 크게 웃어댔다.
"핫하하, 냄새를 못 맡았다고? 핫하하! 그럴 수도 있겠지. 원래 제 방귀 구린 줄은 모르는 법이니까. 하지만 난 둘이 마주앉아서 너 한 번 나 한 번 개방귀를 뀌는 통에 구려서 숨이 막혀 죽을 뻔했거든……. 핫하하!"
황약사는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
"거렁뱅이 녀석, 그따위 소리 말고 냉큼 내려와!"
거렁뱅이는 서슴지 않고 황약사와 일속 대사 앞에 뛰어내렸다.
"화상 한 사람과 속인 하나, 이렇게 둘만 앉아서야 재미가 덜하지 않소? 이런 데는 나 같은 거렁뱅이까지 끼어야 재미가 무진한 법이오."
이 거렁뱅이가 범상한 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내심 경탄하고 있던 황약사와 일속 대사는 한동안 말없이 거렁뱅이의 모습만 훑어 보았다.
서른 안팎의 젊은 거지였다. 겉모양은 더럽기 짝이 없지만 거짓 없고 소탈한 인간인 듯싶었다.
"할 일이 없으면 집에서 술 먹고 잠이나 잘 것이지, 이런 후미진 곳에 앉아 나발들을 불고 있으니 미친 사람들 취급을 당하잖소?"
황약사는 잠자코 있었고 일속 대사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한 마디 건넸다.
"당신은 우리에게 미치광이라지만 우리가 보기엔 당신이 미친 것 같으니, 안개같이 몽롱한 세상사 시비곡절을 어떻게 밝히겠소?"
그러자 거렁뱅이는 그따위 선문답(禪問答)은 하기 싫다는 듯이 언성을 높였다.
"설교는 그만두시오! 난 그런 절간의 넋두리는 딱 질색이오. 백마는 말이 아니라느니, 세상 모든 것이 공허하다느니, 그런 허튼 소리는 딱 질색이란 말이오."
황약사와 일속 대사는 서로 눈길을 나누었다. 두 사람 다 이 거렁뱅이가 범상한 인간이 아니고 무예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라고 짐작하면서도 개방( 幇 ; 거지 무리) 중에 어느 정도 위치인지는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이 거지가 튀어나오는 바람에 한창 흥이 올랐던 황약사와 일속 대사는 흥이 깨지고 말았다. 그러나 거렁뱅이는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며 입을 쩍 벌려 하품을 하고는 말했다.
"아이고, 그 잘난 자화자찬을 누가 듣고 싶다고 이 밤중에 떠들어? 난 날이 저물자 입궁하여 황제 폐하께서 잡수시던 진수성찬을 잔뜩 먹고 왔소. 주육으로 배가 부르면 단잠에 빠지는 게 당연하지요. 그런데 당신들이 와서 떠드는 통에 깨어나서 이렇게 뛰어내린 거요. 뭐, 당신들과 한담이나 하자고 나섰는 줄 아오? 그따위 잡소리만 없었어도 지금 이 나으리는 한창 달게 잘 텐데……."
황약사는 비위가 거슬렸다. 새파랗게 젊은 거지 녀석이 누구 앞에서 나으리가 어쩌구저쩌구 떠들어? 황약사가 녀석의 버릇을 좀 고쳐 주겠다고 눈을 부릅뜨자 일속 대사가 눈짓으로 그를 막았다. 그리고는 점잖게 한마디 했다.
"시주님, 그렇게 포식을 하셨다면 제자리에 올라가서 다시 주무시는 게 좋겠소이다. 나와 황 시주는 상관 마시고."
거지는 또 한 번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그야 좋지요. 떠들 사람은 떠들고 잠잘 분은 잠자고. 이젠 무슨 허튼소리를 해도 이 나으리는 상관 않고 잠만 잘 테니까."
그는 땅 위에 네 활개를 뻗고 드러누웠다. 그러더니 금방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기 시작했다.
달빛은 아름답고 바람은 맑고 신선했다.
일속 대사와 황약사는 한동안 말없이 하늘에 떠있는 달을 보고 있었다. 한참 후에 일속 대사가 엄숙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황 도주께선 아직 우리 불가에 입적하지 않았으나 내가 보기엔 조만간 불가의 사람이 될 거외다. 오늘 이 달 밝고 바람 잔 고요한 밤에 선법이나 담론해 보면 어떨까요?"
황약사는 내심 이렇게 생각했다.
'낮에 무술로 이길 수 없었으니, 이 화상이 이제 와서 불가의 학식으로 날 이겨 보려는 속셈이군 그래, 내가 선법을 담론하면 질 줄 아는가?'
이처럼 그는 일속 대사의 뜻을 오해하고 있었다. 일속 대사는, 황약사가 오기가 대단하고 승부 근성이 강하여 임안에서 사람을 상하게 할까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부처의 마음으로 그의 인애지심(仁愛之心)을 불러일으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도화도에서 처음 나온 황약사는 일속 대사의 고심(苦心)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그와 겨루어 볼 생각만 잔뜩 하고 있었다.
"좋습니다. 대사께 그런 흥이 계시다면 저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황약사는 껄껄 웃으며 말하긴 했으나 내심 근심이 없지 않았다. 그 역시 불가의 학문을 연구하기는 했지만 불가에 입적한 중은 아니요, 도를 닦은 고승은 더욱 아니었다. 그러니 일속 대사 같은 고승을 정말 이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황약사는 마음을 다잡았다.
'내가 도화도에서 온 황약사가 아니냐. 어떻게 해서라도 이겨야 한다. 임기응변을 해서라도 이겨야지. 암, 이겨야 하고말고.'
둘은 한동안 말없이 있었다. 일속 대사가 말을 꺼냈으니 먼저 제목을 내야 했다. 일속 대사는 황약사의 눈에 열기가 번득이는 것을 보고 그의 가슴에 승부욕이 불붙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개의치 않고 낭랑한 목소리로 읊었다.
도화도, 온 섬은 도화 천지
봄이면 유화무인 (有花無人)인지 무화유인(無花有人)인지
일속 대사가 불경에 대하여 말할 줄 알았던 황약사는 그가 도화도에 관한 시를 읊자 은근히 기뻤다.
'일속 대사가 불경을 논하자고 하면 혹시 내가 질 수도 있겠지만, 매일 절간에서 삼재칠계(三齋七戒)나 하는 화상이 도화도를 논의하려는 데야 내가 질 수 없지.'
황약사는 기쁜 내색을 하지 않고 점잖게 화답했다.
도화도는 해마다 의구하고
사람도 해마다 춘풍이로세.
일속 대사가 황약사에게 말하려는 뜻은, 인생이 꿈 같으니 무슨 일이나 너그럽게 처사하면 마음도 편해지고 재앙도 없어진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황약사가 화답하는 뜻은 온통 자신에 관련되는 일이었다.
벙어리 노복 몇을 거느리고 꽃에 파묻힌 채 도화도에서만 살아온 황약사는 사람들의 그윽한 정취나 인정을 느껴 보지 못했다. 그러다 지금 일속 대사의 시를 듣자 불쑥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번 여행길에 나에게도 예쁜 홍안의 지기가 생기는 행운이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일속 대사에게 드러낼 수는 없어서 퍼뜩 떠오른 생각을 스쳐 보내었다.
일속 대사는 그런 황약사의 심중을 헤아리고 있었다.
'황약사, 그대에게도 행운이 올 것이다. 이 여행에서 어여쁜 홍안의 지기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이번 중원길이 순조롭지 못할지라도 기쁜 일이 생길 것이다.'
일속 대사는 이렇게 축원에 가까운 생각을 하며 서서히 또 시를 읊었다.
하늘이 내려 준 명(命)
어이 이리 짧은가
검은 머리로 이 세상 하직하고
한 가지 고통 끝나기도 전에
새 재앙이 덮치누나
아침 이슬 햇빛에 사라지듯
그 밝던 햇빛 저녁이면 사라지듯
쫓아가도 쫓아가도 붙잡지 못하고
애절한 마음 이를 데 없어
하늘 바라보니 높고 끝없는데
이 한을 도대체 어디에 하소연하랴.
일속 대사와 초면이었는데도 황약사는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내심 탄복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가 낭랑하게 읊는 시를 들으니 자연 마음이 처량하고 구슬퍼졌다. 그 애절한 시구는 한동안 황약사의 귓전에서 떠나지 않았다.
'비록 나이는 많지 않지만 이 일속 대사도 인생에 역경이 많았던 모양이구나. 그러니 저렇듯 감개가 많지. 나마저 공연히 마음이 구슬퍼지니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황약사는 솟구치는 애수를 누르지 못하여 끝내 눈물을 흘렸다.
"황 도주께서도 동감이신 모양입니다 그려."
일속 대사가 탄식을 했다.
"대사께서 읊으신 시에 동감을 했습니다. 심중에 북받쳐 오르는 애수를 누를 길이 없어 눈물까지 흘리게 되었군요."
황약사의 구슬픈 목소리에 일속 대사는 빙그레 웃고는 다시 그런 말은 꺼내지 않았다. 감회에 젖은 황약사는 옥으로 만든 퉁소를 만지작거리며 깊은 상념에 젖었다.
티없이 맑은 백옥으로 만든 그 옥소는 참으로 보기 드문 보물이었다.
"황 도주님, 이왕 꺼내셨으니 옥소 소리나 좀 들려 주시오."
일속 대사가 요청했다.
황약사는 대답 없이 옥소를 입에 가져갔다. 옥소 소리가 밝고 조용하게 흘러 나오다가 점차 구성지게 울리기 시작했다. 때로는 폭풍우가 쏟아지고 격랑이 솟구치듯 세차졌고, 때로는 인생의 무한한 고뇌를 하소연하듯 애처롭고 침울하게 울렸다. 일속 대사는 그 소리에 완전히 빠져들어가 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 앉아 있었다.
옥소를 부는 황약사의 눈앞에는 자기의 태를 묻은 땅 도화도가 떠올랐다. 자신이 태어나서 자란 땅, 아버님의 시신이 묻혀 있는 땅, 그곳에서 그와 어머니는 벙어리 노복들과 더불어 무술을 익히며 살았다. 어머니가 세상을 뜬 다음에도 그는 10년을 도화도에서 살아왔다. 이 10년 동안 그는 바다의 조수를 바라보며 옥소를 불고 무술을 익혔다. 그는 이미 천하에 드문 고수가 되었건만 그래도
무술을 닦고 또 닦았다. 마치 자신이 사는 보람은 이것밖에 없다는 듯이.
황약사의 눈앞에 매일 올라가 경공(經功)과 검술을 닦던 탄지봉이 떠오르더니 이어 부모님의 산소를 모신 청음동도 떠올랐다. 그곳에 올라 온종일 돌처럼 앉아서 밀려오고 밀려가는 조수 소리만 듣고 있을 때가 많았다. 그런가 하면 녹죽림과 시검지도 보였다. 72식 난화불혈수를 그는 녹죽림에서 익혔다. 황약사는 날아 떨어지는 무수한 대잎으로 그만의 절세신기(絶世神技)를 닦으며, 시검지
에 서서 바다를 향해 긴 고함을 내지르곤 했다. 고함소리는 바다의 파도 소리와 서로 호응하면서 멀리멀리 비껴 가곤 했다. 이럴때면 그의 벙어리 노복들은 감히 그 앞에 얼씬거리지 못했다. 그가 고함을 내지르면 가까이 있는 벙어리 노복들의 귀에서 피가 나오곤 했는데, 고함소리에 더 힘을 넣었다면 그들은 살아 남지 못했을 것이다. 벙어리 노복들은 중원에서 큰 죄를 지어서 그의 부친이
데리고 온 자들로, 지금은 도화도의 식구들이었다.
지금 옥소를 부는 황약사의 눈앞에는 이런 도화도의 사람들, 도화도의 일들이 삼삼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이윽고 퉁소를 그치니 일속 대사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황 도주님은 향수에 젖어 버리셨군요. 황 도주님은 일속(一俗)이 아니라 다념(多念)이라고 해야 알맞겠습니다."
"글쎄요, 내가 이 중원에 무얼 하러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황약사의 대답에 일속대사는 다시 한 번 준수하게 생긴 그를 바라보고는 '제법 큰 인물이다!' 하고 감탄했다.
"소승이 보건대 장차 황 도주께 기쁜 일이 있을 겁니다."
그 말에 황약사는 귀가 솔깃해졌다.
'일속 대사가 말하는 기쁜 일이란 도대체 무슨 일일까?'
그러나 황약사는 궁금증을 입 밖에 내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글쎄,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나와 바둑이나 한 판 둡시다."
그즈음 달빛이 빛을 잃어 지척도 분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황약사는 일속 대사가 이 어둠 속에서 어떻게 바둑을 두자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에라, 일속 대사가 두면 나도 두지. 내가 못 둘 이유가 있나? 반드시 일속 대사를 이겨야지.'
황약사가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일속 대사는 손가락으로 땅에다 바둑판을 그렸다. 비뚤어지는 줄이 하나도 없이 가로 세로 척척 그어 나가는 품이 대단히 익숙한 솜씨였다.
"두어 볼까요?"
바둑판을 그린 일속 대사는 황약사와 함께 각기 팔을 앞으로 뻗어 손바닥을 위를 향해 펼치고는, 마치 물 속에서 무엇을 건져내는 모양을 했다. 그러자 일속 대사와 황약사의 손에 각각 잡히는 것이 있었다. 두 사람은 그것들을 바둑판 앞에 내려놓았다.
일속 대사가 쥔 것은 나뭇가지였는데 잔 토막들로 잘려져서 임시 바둑알로 쓸 만했다. 그리고 황약사가 내놓은 것은 나뭇잎이었는데 그것 역시 바둑알만큼씩 조각나 있었다. 둘은 물론 내력을 쓴 것이었다. 달빛이 어두워 바둑판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그들은 바둑알을 놓았다. 속으로 헤아리고 가늠하면서 두는 이른바 맹기(盲棋)였다.
얼마를 이렇게 바둑을 두었는지 알 수 없었다. 동쪽 하늘에 새벽빛이 어리기 시작했으나 그들 둘은 여전히 바둑에만 골몰하고 있었다.
그때 옆에서 자던 거렁뱅이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정말 미쳤군! 올빼미같이 한 잠도 안 자고 이따위 짓만 하기요? 이까짓 바둑이 점잖은 놀음인 줄 아시오? 구린내도 아주 몹쓸 구린내가 나는 짓인데."
거렁뱅이가 무슨 소리를 해도 바둑에 정신이 팔린 두 사람은 제 바둑 수를 생각하느라 일언반구 대꾸가 없었다.
거렁뱅이는 봉두난발이 된 머리를 긁적거리더니 또 한마디 뱉었다.
"황제의 밥을 차리는 어선방(御膳房)에 가면 맛좋은 성찬들이 그득하다오. 우리 함께 가 보겠소?"
그래도 황약사와 일속 대사는 여전히 바둑판만 내려다보며 거렁뱅이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자 거렁뱅이는 발을 탕탕 구르며 외쳤다.
"망측도 하지! 세상에 이따위 기괴망측한 인간들이 다 있담? 천하에 둘도 없는 진수성찬인데 먹을 생각을 안 하다니?"
거렁뱅이가 별의별 소리를 해도 황약사와 일속 대사는 귀머거리가 된 듯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여전히 바둑판에만 골몰하고 있었다.
"제기랄! 속에서 불이 나 죽겠네."
거렁뱅이는 발을 마구 구르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더니 갑자기 번개같이 손을 뻗어 바둑판을 마구 휘저어 놓았다.
"어디 또 바둑을 둬 봐. 이거 벨이 꼬여 살겠나. 잘들 놀아 보란 말이야!"
그리고는 몸을 돌려 나는 듯이 사라져 버렸다.
바둑판이 흩어지자 황약사와 일속 대사는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다. 이윽고 황약사가 물었다.
"대사께서 어제 밤에 읊은 자건의 시는 무슨 뜻입니까?"
황약사는 아주 총명한 사람이었다. 범속하지 않은 일속 대사가 딸의 죽음을 애달파 하는 조자건(曹子建)의 시를 읊은 데는 심상찮은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일속 대사는 웃기만 할 뿐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황약사를 바라보는 그의 눈길에는 진지함이 가득했다. 그러자 눈치 빠른 황약사도 더 묻지 않았다.
"황 도주님, 이젠 소승도 길을 떠나야겠습니다. 앞으로 만날 날이 꼭 있을 겁니다."
일속 대사는 말을 마치고 몸을 솟구쳐 날아올랐다. 넓은 소맷자락이 공중에 날리더니 눈 깜짝할 새에 보이지 않았다.
홀로 남은 황약사는 임안 시내를 며칠 돌아다녔다.
하루는 경성의 취원(翠苑)을 찾아갔다. 그곳은 지난날 송나라의 명기 이사사(李師師)가 거처하던 곳이었다. 밤이면 휘종(徵宗)이 이리 통하는 지하 통로로 나와 이사사를 만나곤 했다고 전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찾아오는 구경꾼들의 탄식만 자아낼 뿐이었다. 휘종은 비록 혼용한 임금이었지만 그림과 서예만은 천하에 보기 드문 솜씨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특히 새를 그리는 솜씨와
수금체(瘦金體) 법서(法書)는 실로 천하의 명화, 명필이었다. 명기 이사사의 거처에 휘종의 그림과 글이 몇 폭 있었는데, 그 중에도 <학명구천도(鶴鳴丸天圖)>는 보는 사람의 절찬을 자아내게 했다. 금빛이 휘황한 황궁과 그 위를 구성지게 울며 날아오르는 백학들. 그로 하여 황궁이 더욱 깊이 있고 위엄 있게 보여 그 그림을 보는 이들을 숙연하게 했다. 그림의 변두리에는 도종(道宗) 황제
가 친필로 쓴 제사(題詞)가 있었다. 글은 그림을 돋보이게 하고 그림은 글을 돋보이게 했다. 황약사는 자기도 모르게 아, 하고 장탄식을 터뜨렸다.
"손님께선 무슨 탄식을 그렇게 하시오?"
누군가 옆에서 말하는데, 목소리가 우렁찬 게 범상한 사람이 아닌 듯했다. 돌아보니 그 사람의 모습이 참으로 이상했다. 가죽으로 만든 쭈글쭈글한 옷을 입었는데 더운 날씨에 입고 다니느라 한 쪽 어깨를 드러내 놓고 있어 이역 사람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안에 입은 긴 속옷도 횐색에 아무 무늬도 없는 것이 역시 오랑캐 복색이었고, 발에 신고 있는 가죽장화도 무겁고 둔하게 생긴 것으로
보아 오랑캐 장화가 틀림없었다. 그는 고집스럽고 형형하게 빛나는 눈길로 황약사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황약사는 이 사람이 분명 경성 사람이 아니라고 짐작했다. 경성 사람이라면 적대감부터 앞서는 그였으므로 이역 사람을 만나니 자연 호감이 느껴졌다. 황약사는 얼굴에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이 황제께서 글도 명필이고 그림도 훌륭하니 아예 글이나 쓰고 그림이나 그리며 지내는 것이 황제로 계시는 것보다 더 좋았을 걸, 공연히 황제 노릇을 하신 게 안타까워 탄식한 거요."
"정사를 잘못 보는 황제가 퇴위하여 서예를 하면 얼마나 잘하겠소? 제위에 있으면서 정사는 되는대로 보고, 시간이 남으니 글씨도 늘고 그림도 늘어 명필이 되었을 뿐이지요. 세인들은 저 황제께서 붓글씨와 그림에 능함을 알아야 하지만, 그보다도 제위에 앉았기에 글씨와 그림에 시간을 쏟아부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지요."
그 말에 황약사는 이 사람에 대한 인상이 대번 좋아졌다. 중원이라는 이 장룡와호지지(藏龍臥虎之地)에서 어제는 천외기인(天外奇人) 같은 일속 대사를 만나더니 오늘은 언변이 범상치 않은 이역 사람을 또 만났지 않는가? 황약사는 동해에서 나오자마자 이런 사람들을 만나 보니 지금까지 가졌던 자기의 견식이 실로 우물 안의 개구리였다는 느낌이 더해졌다. 일속 대사와 눈앞의 이 이역 사
람만 해도 자기보다 무술이 약한 사람 같지 않았다.
이 사람은 용맹할 뿐만 아니라 오기도 제법 있어 보였다. 황약사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원래 예의 같은 것을 가볍게 보는 사람이었다. 선현 성인의 글을 수없이 본 그였다. 도화도에서 심심풀이로 책을 읽다가 '성인의 말도 엉터리구나' 라고 적은 쪽지를 책에 끼워 두곤 했었다. 그런데 오늘 만난 이 사람이 자기와 생각이 같은지라 불현듯 친구로 사귀고 싶어 가까이 다가서며 읍을
했다.
"선생께서도 여기서 휘종 황제의 그림을 관람하고 계셨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왜 여기 서 있겠소. 황제질은 잘 못했지만 글씨와 그림이 그만하면 제법인데다가 미녀와 풍류를 즐겼으니, 사람이 세상에 한번 나서 그렇게 살아 보면 무슨 여한이 있겠습니까?"
말을 마치고 그는 껄껄 웃어댔다. 호방하고 거리낌없는 웃음이었다. 황약사는 그 말과 태도에 이 인간이 심성이 바르지 않은 사파(邪派)의 인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황약사는 무엇보다 겉과 속이 다른 군자들을 더럽게 보는 소탈한 사람이었으므로 그에게 그다지 큰 반감은 가지지 않았다.
황약사는 빙긋 웃으며 그에게 물었다.
"선생의 주옥 같은 말씀을 들으니 깨우치는 바가 많은데, 선생께서는 어디서 오셨습니까? 경성엔 무슨 용건이 계십니까?"
"나는 이역 사람입니다. 서역(西城) 백타산(白陀山) 아래 사는 평민으로 이름은 구양봉(歐陽鋒)이라고 합니다."
백타산 사람이라는 말에 황약사는 적이 놀랐다. 서역에 한 파의 무공이 있는데 그 술수가 신비하고 교묘하기 그지없어 중원 무림이 모두 혀를 내두른다는 소문이 나돌았던 것이다. 그 사파(邪派)의 무술이 극히 음험하고 악독하여 세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고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 구양봉이라는 사람이 무림의 인사들이 모두 두려워하는 사파의 고수란 말인가?
황약사는 이 사람과 자웅을 겨루어 보고 싶은 생각이 불쑥 들었다. 고향을 떠나 임안에 당도하자마자 일속 대사를 만난 그는 중원 무림을 얕잡아 보지 않게 되었는데, 오늘 구양봉을 대하니 더욱 그를 경시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구양봉의 능력을 시험해 보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황약사는 겉으로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웃는 얼굴로 구양봉에게 말했다.
"구양 선생의 주옥 같은 말씀에 제 가슴이 다 후련합니다. 소생과 함께 이 취원을 한번 돌아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구양봉은 통쾌하게 껄껄 웃으면서 대꾸했다.
"소인의 말을 탓하지 않으니 고맙습니다. 함께 이 취원을 돌아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겠지요. 그럼 가 봅시다."
구양봉은 황약사를 알고 있었으므로 그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 황약사가 수평을 혼내 주고 일속 대사와 겨루던 그 자리에 그도 있었던 것이다.
취원 이사사의 거처에 들어가니 단청을 새긴 들보와 기둥, 수놓은 비단으로 드리운 휘장, 그리고 주보옥기(珠寶玉器)들이 그 사치와 호화로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침상 위에는 옥으로 정교하게 만든 아름다운 머리 장식품들이 있었다. 정성들여 가지런히 진열한 품이 마치 금방 일어난 미인은 봄빛 무르익은 들로 나가고 없고, 미인의 향기로운 체취만 남아 떠도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아름다운 머리 장식품들을 보던 구양봉은 부지중에 큰소리로 탄식했다.
"사람이 세상에 나서 휘종 황제처럼 살면 무슨 여한이 있으랴."
그 소리에 곁에 있던 사람들은 사뭇 놀란 얼굴로 구양봉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심경은 구양봉과 달랐다. 휘종 황제는 이사사와 치정을 벌인 방탕한 황제였다. 몇 대를 훑어봐도 휘종같이 음탕한 황제는 없었다. 일국의 황제로서 미인 후궁들도 몇백은 있었을 텐데 그것도 성에 차지 않아 기생 이사사에게 내왕하는 비밀 통로까지 만들었다니 그야말로 천하에 보기 드문 음탕한 황제가 아닌가.
이런 황당한 황제가 있으니 송의 두 황제가 금에 잡혀 가는 수치스러운 일이 생겼으며, 금에게 송의 금수강산을 빼앗긴 것이다. 비록 입으로 말은 안 하고 있었지만 백성들 모두가 이렇게 휘종 황제를 욕하고 있었다.
그런데 구양봉이 휘종 황제를 부러워하는 소리를 했으니 사람들이 못마땅한 눈초리로 그를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이런 심경을 눈치채지 못한 구양봉은 마음대로 떠벌렸다.
"황 형, 황 형도 황제가 되면 휘종처럼 마음껏 재미를 볼 게 아니오? 다른 바보 황제들처럼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종일 상소장들을 보고 공문을 결재하느라 고생할 게 뭐요? 한평생 그렇게 고생만 하다가 늙어 빠지는 황제라면 난 시켜 줘도 안 하겠소."
황약사 역시 구양봉의 말에 동감이었다. 그는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구양봉을 비범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무공 실력을 겨루어 보고 싶은 생각이 불일 듯하는 것을 느끼며 황약사는 껄껄 웃었다.
"하하하……. 과연 고견이오. 소생은 정말 탄복했습니다."
황약사는 슬그머니 구양봉 앞으로 다가가 몸을 교묘하게 접근시키면서 돌연 내력을 썼다. 이 느닷없는 공격을 받은 구양봉은 단번에 저만큼 밀려갔다.
"황 형, 왜 이러는 거요?"
구양봉은 소리쳤다.
황약사는 내심 우스웠다. 구양봉은 무공이 전혀 없는 사람이 분명했다. 고수라면 즉각 반응해 자기도 모르는 새에 그의 내력을 막아 버릴 것이 아닌가?
구양봉은 황약사를 바라보며 미심쩍은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황 형이 비틀거리는 바람에 내가 밀린 것 같지는 않은데?"
"정말 미안하오. 취원 구경에 정신을 팔다 그만 실수를 했소.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오."
구양봉은 눈을 껌벅거리며 황약사를 바라볼 뿐 더 말이 없었다.
취원을 돌아보고 나서 그들은 혜인루(慧人樓)라는 주루를 찾아 갔다. 혜인루라고 이름하였으니 이 주루에 올라 술을 먹는 사람은 모두 총명한 사람이어야 할 터인데, 주루의 손님들을 보니 그게 아니었다. 고주망태가 된 취객 몇이 여기저기 쓰러져 혀 꼬부라진 소리로 뭐라고 지껄여 대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한 곳에선 험상궂게 생긴 사나이 하나가 술친구 서넛을 데리고 개구리 세기 장난
을 하고 있었다. 술에 흠뻑 취한 탓에 혀가 꼬부라져서 내뱉는 소리가 웅왈웅왈 개구리 소리처럼 똑똑히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두 눈을 개구리처럼 부릅뜨고 '개구리 세기'를 한다고 야단이었다.
"개구리 하나 입 하나, 눈 두 개에 다리 넷, 풍덩 소리 한 번에 물 속으로 뛰어든다. 개구리 둘 입 둘, 눈 네 개에 다리 여덟 개, 풍덩풍덩 물에 뛰어든다. 개구리 셋 입 셋……, 개구리 셋이면 눈이 몇 개지?"
그러자 고주망태가 된 취객들이 멋대로 지껄였다.
"개구리 세 마리면 눈이 다섯 개."
"다섯 개? 왜 다섯 개냐?"
"개구리 한 마리는 외눈이니 다섯 개지. 하하하!"
그러자 다른 자가 말했다.
"틀려, 틀리다니까. 개구리 세 마리면 눈이 일곱 개야. 믿지 못하겠으면 이걸 봐. 이 놈 개구리도 눈이 하나, 둘……."
그는 손가락까지 꼽아 가며 제 술 동무들의 눈을 하나하나 세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취태만상이었다.
황약사와 구양봉은 껄껄 웃었다.
"틀림없는 술 미치광이들인데 혜인(慧人)이 뭔가, 혜인이……."
그런데 그 말을 취객들이 들었다. 그들은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뭘 하는 것들인데 그따위 소리야! 그래, 우리가 혜인이 아니면 네가 혜인이란 말이냐?"
그들은 우르르 달려들어 두 사람에게 주먹질과 발길질을 해댔다.
황약사가 손만 한번 들면 그들은 무리로 쓰러지고 말 것이지만 그는 가만 있었다. 구양봉의 솜씨를 좀 구경하려는 속셈이었다. 어쩌면 구양봉이 자기 무술을 감추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황약사는 이번 기회에 구양봉의 실력을 보고 싶었다.
취객들이 치고 박는 대상은 황약사와 구양봉 둘이었으나 황약사는 잘 피했으므로 얻어맞는 사람은 구양봉뿐이었다.
"이것들이 왜 이러나, 이 미친 놈들아!"
구양봉은 팔뚝을 마구 내저으며 소리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취객들은 구양봉과 황약사를 두드려 패느라 정신이 없었다.
황약사는 내공을 쓸 줄 아는 사람이므로 취객들의 주먹이나 발길이 그의 몸에 부딪치면 얼음에 부딪쳐 미끄러져 내려오는 것 같아, 그들이 아무리 힘을 주어도 제대로 때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구양봉에게 가해지는 주먹질과 발길질은 그렇지 않았다. 살갗이 툭툭 터지는 듯한 아픔을 참지 못해 구양봉은 아우성을 쳤다.
"개자식들! 왜 죄 없는 사람한테 이 지랄들이야!"
구양봉은 소리를 지르며 자기가 가지고 있는 무술 밑천을 다 긁어 내어 마구 치고 박았다. 하지만 구양봉의 무술이라야 별로 신통한 것이 못 되었으므로 상대방의 급소는 건드리지도 못했다. 그러자 험상궂게 생긴 작자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이 자식, 내가 본때 좀 보여 줘야겠다."
그가 후닥닥 달려들더니 구양봉을 향해 주먹을 내리쳤다. 그 주먹이 얼마나 셌던지 구양봉은 그만 "으악!" 하고 쓰러져 버렸다.
"날 죽여라, 이 놈아! 차라리 날 죽여!"
"죽이라면 못 죽일 줄 알고! 이 놈아, 개구리 세 마리 눈이 몇이냐?"
놈들은 정말 구양봉을 죽일 듯이 덤벼들어 주먹들을 휘둘렀다.
"개자식들, 네 에미 눈깔이 일곱 개다."
구양봉은 얻어맞으면서도 욕을 퍼부었다.
"이 놈, 네 에미 눈깔이 일곱 개라고 해라. 눈깔이 일곱 개면 칠목(七目) 승냥이다. 네 에미가 칠목 승냥이지."
험상궂게 생긴 자가 눈알을 번득이며 구양봉에게 을러댔다.
그 말에 취객들은 껄껄 웃으며 재차 달려들었다.
술집 주인은 마음이 다급했으나 자기 재주로는 싸움을 말릴 수가 없으므로 그저 한켠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르며 제발 이러지들 말라고 애원을 했다.
이윽고 취객들도 어지간히 맥이 빠졌고 황약사와 구양봉도 옷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얼굴에는 멍이 들어 엉망이었다. 취객들은 기고만장하여 마지막으로 따져 물었다.
"항복할래? 안 할래?"
"항복? 항복은 무슨 개떡 같은 항복이냐? 네 놈을 박살내고 말테다."
구양봉은 벌떡 일어나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험상궂게 생긴 사나이가 주먹을 한 번 날리니 구양봉은 그만 허깨비같이 나뒹굴며 "아이고, 아이고." 하는 신음만 연발했다.
황약사는 구양봉이 당하는 꼴이 은근히 재미있었다. 그는 갑자기 공손하게 취객들에게 읍을 했다.
"소생 황약사는 동해 도화도 사람이올시다. 섬은 비록 황량하나 금이 많이 나지요. 여러분께서 소생의 안면을 봐서 저 구양 동생을 용서해 준다면 가지고 온 금을 모두 여러분께 드리겠습니다."
황약사가 금을 갖고 있다는 말에 취객들은 술이 번쩍 깼다.
"거 참 듣던 중 반가운 말이다. 정말 그렇다면 너희들 목숨은 살려 주지. 그러나 이 나으리를 속였다간 이 주먹에 네 놈들 목숨이 남아 있지 못할 줄 알렷다!"
누군가 이렇게 으름장을 놓았다.
그 말에 황약사는 무서워 부들부들 떠는 척하며 굽신거렸다.
"어찌 감히 그럴 수 있겠습니까? 제 명에 죽지 못해 환장해서 그런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그 말에 취객들은 기뻐 어쩔 줄 몰랐다. 술판에 뒹굴다가 병신같은 놈들을 실컷 패주고 횡재까지 했으니 이런 복이 어디 있는가? 속에서는 웃음이 끓어올랐으나 험상궂게 생긴 자는 짐짓 사나운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잔말 말고 금을 이리 내놔. 금만 주면 살려 주겠다."
'더러운 놈들, 어디 죽어 봐라. 저승에 가서도 이 황약사 소리만 들으면 벌벌 떨게 만들어 놓을 테니.'
속으로는 이렇게 벼르면서도 황약사는 무서워 오금을 못 쓰는 것처럼 허둥지둥 손을 내저었다.
"제발 때리지 마세요. 더 맞으면 목숨이 끊어진다구요. 그저 우리 두 사람 입에 풀칠이나 하게 한 조각만 남겨 주시면 됩니다."
금을 내놓기도 전에 조금만 남겨 달라고 애걸하는 꼴만 보아도 거짓은 아니겠다 싶어 취객들은 그만한 사정을 보아 주기로 했다.
"그럼 요만큼 남겨 주겠다."
그들은 황약사의 품에 지닌 금덩어리가 이미 자기 것이 된 것처럼 벌써 선심을 썼다.
황약사는 손을 후들후들 떨며 보따리를 펼쳤다. 목을 늘이고 들여다보던 취객들은 놀라서 환호성을 질렀다. 보따리에는 정말 금엽자(金葉子)가 가득 들어 있었는데 이 혜인루를 통째로 사고도 남을 것 같았다.
금을 본 취객들은 가슴이 뛰고 눈에는 핏발이 섰다. 험상궂은 자가 다급히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가만있거라!"
취객들은 흠칫 놀라 모든 동작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험상궂은 사나이는 갑자기 껄껄 웃었다.
"우리가 심하게 다루었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 말게. 우리가 자네들 금을 빼앗을 수야 없지. 우린 강도가 아니니까, 싸움 끝에 정이 든다는데, 어디 조용한 데로 가서 얘기나 하며 우정을 쌓는 게 어떻겠나."
황약사는 이 험상궂은 사나이의 말에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러면서도 그는 여전히 두려운 기색을 보이며 말문을 열었다.
"노형과 교분을 갖는 영광을 주신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자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일견여고(一見如故)라는 말도 있잖나. 만나고 보니 친구인데 뭘 그리 고마워 하는가? 자, 어서 가세."
그런 다음 험상궂은 사내는 그의 일행에게 눈짓을 보냈다. 취객들은 그 뜻을 알아채고 둘을 끌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구양봉은 황약사가 그렇게 선선히 금을 내줄 위인이 아니라는 것과 놈들에게 당할 위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순순히 끌려갔다.
그들은 두 사람을 끌고 마차에 올랐다.
"빨리 성문을 벗어나라."
험상궂게 생긴 사나이가 눈을 부라리며 마부에게 소리쳤다.
말이 뛰기 시작하자 마차는 금방 성문을 벗어나더니 이윽고 한적한 교외로 나갔다.
"됐어, 됐어. 여기가 조용하구나. 내려라."
모두들 마차에서 내렸다. 주위를 둘러본 황약사는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조용하기 그지없는 곳이었다. 집도 한 채 없고 사람이라곤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곤 멀리 호수 위에 떠 있는 돛단배 몇 척뿐이었다.
험상궂게 생긴 사나이는 마차가 멀리 사라지자 한바탕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그의 떨거지들도 좋다고 히히덕거렸다.
"그 금을 이리 내라."
험상궂게 생긴 자가 본색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제기랄, 다 가져가요."
황약사가 보따리를 땅에 내려놓자 취객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앞을 다투어 금을 손에 쥔 놈들 중에는 그것을 급히 품에 넣는 자도 있었고 입에 넣고 깨물어 보는 자도 있었다.
"이 자식들, 못 내려놔?"
험상궂게 생긴 사나이가 꽥 소리를 내질렀다.
그 바람에 움찔 놀란 떨거지들은 내키지는 않았지만 할 수 없이 그 금을 도로 내려놓았다.
"그래도 당신 마음이 좋군요. 남들은 금을 보자 욕심이 동해서 야단인데 노형은 진짜 군자군요. 소생은 진짜로 탄복했습니다."
황약사가 기뻐하는 꼴을 보고 험상궂게 생긴 사나이가 그를 비웃었다.
'이 바보야, 남들은 물욕이 동해서 그러지만 난 살기가 동해서 그런다. 소문이 나기 전에 네 놈들 둘을 죽이고 볼 일이다. 금이야 이젠 떼어 논 당상이니 날아가지야 않겠지.'
득의양양해진 놈은 또 너털웃음을 웃었다.
"난 물욕이 아니라 살기가 동해서 그런다. 이 놈들, 어디 내 손에 죽어 봐라."
"이……이러지 마십쇼. 제발 이러지 마세요. 금을 몽땅 드릴 테니 목숨만 살려 주세요. 절대 고발은 안 할게요. 경조윤(京兆尹)한테도 지휘사(指揮使)한테도 고발을 안 할게요. 난 당신들을 몰라요……. 당신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난 기억도 못해요."
황약사가 벌벌 떨며 이런 소리를 하자 험상궂게 생긴 사나이와 그의 떨거지들은 더욱 가만 있을 수가 없었다.
'이 놈 말하는 꼴 좀 보게. 어디다가 고발해야 한다는 것도 빤히 아는 걸 보니 놔 두면 제꺼덕 고발할 놈이군 그래. 당장 죽여 버려야지.'
"미안하지만 아무래도 난 자넬 죽여야겠네. 고발은 놔 두었다가 염라부에 가서 하게."
험상궂게 생긴 놈은 대뜸 시퍼런 칼을 들더니 두 사람의 가슴팍을 겨누었다. 황약사는 언뜻 구양봉을 돌아보았다. 뜻밖에도 구양봉은 태연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저 사람이 정말 무술이 있어 저러는 건가? 무공이 높지 않으면 저렇듯 침착할 수가 없지. 나야 물론 두려울 것이 없지만 구양봉도 그렇단 말인가? 그럼 내가 구양봉을 잘못 보았단 말인가? 어쨌든 구양봉도 이번엔 본색을 드러내게 되었군.'
그런 생각을 하다가 황약사가 소리쳤다.
"잠깐!"
"왜 소리쳐? 소리친다고 살려 줄 줄 아느냐?"
"한 가지 요청이 있습니다. 저 사람을 먼저 죽이시오. 그 다음에 내가 죽겠소."
"그럼 그러지. 금을 내놓은 공을 봐서 네 놈은 조금 있다가 죽이고 우선 저 놈부터 요절을 내자."
험상궂게 생긴 사나이는 구양봉의 머리에 칼을 내리치려 들었다. 만약 구양봉에게 무공이 없으면 영락없이 머리가 쪼개질 판이었다. 황약사는 손에 자그마한 돌멩이 하나를 들고 있었다. 구양봉이 움직이든가 놈의 칼이 구양봉의 머리 위에 내리쳐지는 찰나에 손을 써서 그를 구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구양봉이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제발 살려 주세요! 제 말 좀 들어 보세요!"
"마지막으로 남길 유언이라도 있느냐?"
구양봉이 험상궂은 자를 보고 눈을 빛내며 물었다.
"우리 둘 중에 누가 금을 가졌지요?"
"금이야 저 녀석이 내놨지."
"그러니 저 사람 보따리에 금이 없었다면 이런 변이 생겼겠어요? 금이 없었다면 당신이 우리를 죽일 생각은 안 했을걸요."
구양봉의 말에 누군가 말했다.
"금만 지니지 않았다면야 너희 같은 놈들은 비린내가 나서도 칼을 안 대지. 밥 먹고 할 짓이 없어 그런 헛일을 하겠느냐!"
"저 사람의 금이 이런 판국을 만들었으니 저 사람부터 죽이는 것이 이치에 맞잖아요. 저 금만 없었다면 난 고작해야 매나 몇 대 맞고 끝났을 텐데, 재수 없게 곁달아 죽게 되었으니 이렇게 억울할 데가 어디 있습니까? 지옥에 가도 난 애매하게 죽은 원귀가 될 거라구요. 그렇잖아요? 먼저 죽을 사람이 누군지 생각해 보라구요."
취객들은 그 말을 듣고 황약사를 바라보았다.
황약사가 돌연 늠름하게 외쳤다.
"그래, 정말 나를 죽일 셈이냐?"
"그렇다. 네 놈도 죽일 테다!"
험상궂은 자는 그렇게 부르짖으며 황약사에게 덤벼들었다.
그 순간 황약사의 손길이 한 번 번뜩하더니 험상궂은 자는 소리도 미처 못 지르고 종이조각처럼 날아가 호숫물에 풍덩 머리를 처박았다. 그 뒤로는 호수의 파문만 보일 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취객들은 걸려도 대단히 잘못 걸렸다는 것을 깨닫고 뿔뿔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황약사가 손길 한 번 번뜩일 때마다 놈들은 차례로 호숫물에 머리를 박았다. 순식간에 일이 끝나고 넓은 들판엔 황약사와 구양봉만 남았다.
"서역에 있을 때 어떤 사람의 무술은 주먹질 한 번이나 발길질 한 번이면 사람 목숨을 끊는다는 말을 들었지만, 오늘 황 형의 무공을 눈으로 보고서야 그것을 믿게 되었소."
구양봉의 말이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왜 나 먼저 죽이라고 했소?"
황약사의 기색이 험악했다. 구양봉의 대답이 조금만 시원치 않아도 대번에 그를 죽여 버릴 기세였다. 구양봉 하나 죽이는 것쯤은 문제도 아니었다. 손 한 번 움직여 혈도를 막아 버리고 호수에 처넣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구양봉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놈들 손에 죽을 황 형이 아니어서 그랬소."
"만일 놈들이 나를 죽였다면 어쩔 뻔했소?"
"나도 따라서 죽었겠지요."
황약사는 마음이 꿈틀했다.
'보통 인물이 아니군. 비록 지금은 이렇다 할 무술을 지니고 있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두각을 나타낼 인물임에 틀림이 없어. 어쩔까? 아예 여기서 죽여 버려?'
그런데 구양봉이 황약사를 보고 갑자기 웃었다.
"무슨 생각을 하시오? 날 죽일 생각을 하고 있소?"
"그렇소. 당신을 죽여야 내가 살인범으로 쫓기지 않지."
느릿느릿한 황약사의 말에 구양봉은 가슴이 섬뜩했다. 하지만 그는 예사스럽게 대꾸했다.
"누군가 황 형이 천하의 영웅이라고 한다면 나는 즉시 반대할 것이오."
"그건 왜 그렇소."
"그렇게 여러 번 내 무술을 시험해 보려고 한 걸 내가 모르는 줄 아시오? 나에게 무공이 있으면 놈들이 내 털끝 하나 못 다치게 했지, 수치스럽게 얻어맞았겠소? 장차 나도 무술을 배우면 꼭 황 형과 겨루어 보고야 말겠소."
구양봉을 바라보던 황약사가 화를 내기는커녕 갑자기 껄껄 웃어댔다.
"구 형, 그 꼴 참 좋군."
그러자 구양봉도 황약사를 보고 박장대소했다.
"황 형 몰골은 다른 줄 아우?"
구양봉은 두 눈이 감길 정도로 유쾌하게 웃어제꼈다.
그러다가 눈을 떠보니 황약사가 보이지 않았다. 호수와 들판은 보였으나 사람은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호수는 잠잠했다. 물 위에 떠오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황약사가 손길 한 번 움직이는 바람에 모두 수중고혼이 된 것이다.
"그렇다. 사람이면 황약사처럼 살아야지. 그래야 사내 대장부지."
구양봉은 주먹을 움켜쥐며 결연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나도 천하 무쌍의 무술을 익히고 말 테다. 두고 보자, 황약사. 언젠가 너와 자웅을 겨루어 볼 테니!"
[화산논검] - 김용




제3장 황궁의 어선방
황약사와 헤어진 구양봉은 혼자 임안성 안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무술이 신통치 않아 다른 사람과 옥신각신하는 일을 조심하게 된 그는 임안성이나 실컷 구경하고 나서 백타산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돌아가서 형님에게 무술을 배울 작정이었다.
거리에서 구양봉은 젊은 거지 하나를 보았다. 젊은 거지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운이 딱딱 맞아 꽤 재미있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맛있는 술 즐겁게 먹고 돈 생기면 고기를 먹고, 돈을 벌어 논밭을 사고, 예쁜 계집종 무리로 거느리세. 아둥바둥 살아 봤자 팔다리 뻗고 덜커덕 숨넘어 가면 남는 것은 한뿐이네……."
이 거지가 범속한 인간이 아닌 성싶어 구양봉은 다가가 웃는 얼굴로 말을 걸었다.
"뭐가 그리 흥겹소? 말끝마다 먹고 마시는 소리뿐이니, 그래, 사람이 먹고 마시기만 하면 된다 이 말이오?"
거렁뱅이는 구양봉을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그럼 천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좋단 말인가?"
"내가 득세하면 우선 태깔 고운 계집부터 얻어다가 시중들게 할 참이오. 먹고 마시는 일보다 이게 더 급하고 재미 좋은 일이지."
그리고 구양봉은 껄껄 웃었다.
거지는 그의 대답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
"자네 이름이 뭐지?"
"구양봉이라 하오."
그러자 거지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 이름은 틀렸어. 구양봉이 뭔가? 지금 구양수(歐暘修)란 사람이 아주 유명한데, 그 이름이 얼마나 좋은가? 아예 이름을 구양수로 고치게."
"구양수? 그 이름이 뭐 좋소? 구양수란 사람이 나보다 나은 구석이라도 있단 말씀이오?"
거지는 그 말에 한동안 의아한 눈길로 구양봉을 바라보았다.
"그럼 자네가 구양수보다 낫단 말인가?"
"내가 구양수만 못한 것이 뭐요? 구양수가 고작해야 책 몇 권에 시 몇 수 쓴데다가 벼슬 며칠 더한 것뿐이지 않소."
구양봉은 얼굴을 쳐들고 껄껄 웃었다.
"그래. 자네는 무술을 좀 아는가?"
거렁뱅이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구양봉은 대답이 궁해졌다. 구양봉은 사람들이 무술을 아느냐고 묻는 것이 딱 질색이었다. 무술을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상등 수준까지는 아직 멀었으니 고작해야 보통 강호(江湖) 인물 정도나 될까? 그런 정도를 갖고 어떻게 남에게 무술을 안다고 말하겠는가? 그렇다고 아예 무술을 모른다고 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저러나 구양봉은 백타산 사람이었다.
백타산엔 무술에 능한 기인들이 부지기수이며 무술을 닦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걸 세상이 다 아는데 자기만 무술을 모른다면 믿기나 하겠는가 말이다.
"무술이라……. 좀 알긴 하지만 당신만은 못할 거요."
구양봉은 이렇게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야 물론 두말하면 잔소리지. 자네 무술이 나보다 세다면 이 거지 애비가 속이 상해 못 살지."
거지는 재미있다는 듯 껄껄 웃었다.
스무 살이 좀 넘은 것이 거지 애비라니……. 이자가 개방 중에 세력이 대단히 큰 자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구양봉의 뇌리를 스쳤다. 그래서 거지를 다시 한 번 훑어보았으나 겉으로 보아 별로 특별한 구석이 없었다. 거지는 구양봉을 바라보며 득의양양하게 웃고 있었다.
그것을 본 구양봉은 이 거지의 무술을 보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서 물었다.
"노형은 존함을 어떻게 쓰시오?"
"존함? 존함이라……. 내 이름을 꼭 알고 싶다면 알려 주지. 거지는 값이 없어서 이름도 값이 없으니 감출 것도 없지. 내 이름은 기억하기도 좋네. 성은 홍(洪)가고 항렬로는 일곱째이니 모두들 홍칠공(洪七公)이라 부르네. 어떤가, 홍칠공, 이 이름이?"
거지는 자랑스럽게 웃었다. 그러나 구양봉은 고개를 흔들었다.
"틀렸어, 그 이름은 틀렸다니까."
"틀렸다니."
"젊디젊은 나이에 홍칠공이 뭐요? 그렇다면 나도 내일부터 구양공이라고 해야 옳겠군."
구양공이란 말이 나오자 둘은 서로 마주보며 박장대소했다. 당시 가장 유명했던 구양수를 모두들 구양공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러니 구양봉을 구양공으로 부른다면 구양수와 동명이 되는 것이다.
한바탕 웃고 난 홍칠은 통쾌하게 팔을 휘둘렀다.
"에라, 홍칠공이면 어떻고 홍칠이면 어떠냐? 그런 걸 따질 필요가 있나? 그런 건 상관 말고 내 물음에 대답이나 해. 황궁 어선방의 음식을 맛보고 싶지 않나? 거기엔 맛깔스러운 음식들이 아주 많거든."
황궁 어선방이란 말이 나오자 홍칠은 신명이 나서 떠들었다.
"어선방이 어떤 덴지 알기나 하나? 굉장한 곳이라구.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종일 사람이 들락날락하는 곳이야. 황제가 하루에 밥을 몇 끼 먹는지 아나? 반찬이 얼마나 많은지 알기나 해? 황제가 식사하는데 어떤 예의범절이 있는지 알기나 하냐구? 자넨 모르지? 알 수가 있나. 황제의 어선방엔 유명한 주자(廚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 이 사람이 가면 저 사람이 오고……. 모두들 천하에서
자기가 제일 유명한 인물인 것처럼 위풍을 부리지. 어떤 사람은 반찬을 잘 만들고 어떤 사람은 국을 잘 끓이고 어떤 사람은 양념만 만드는데, 누구든지 자기만의 독특한 솜씨들을 가지고 있거든. 거기에도 별의별 학문이 다 있으니까. 자네 여태까지 주방에도 장부가 있다는 말은 못 들었지? 황제의 어선방에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일하는 사람 곁에서 장부책을 들여다보며 황제가 먹은 음식이
무엇무엇이라는 걸 매일 적어 두는 사람도 있어. 그걸 알기나 해?"
구양봉은 홍칠의 말을 듣고 어선방을 구경하고 싶은 욕심이 솟구쳤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 보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짓이었다. 황제가 있는 내궁(內宮)이 어디 함부로 드나드는 곳인가? 까딱 잘못하면 모가지가 날아날 텐데……. 구양봉은 잠시 주저했다.
"이봐, 겁낼 거 없어. 전번에 난 거기서 열흘이나 묵고 무사히 빠져 나왔어. 거긴 시끌벅적하고 복잡해서 숨어 있기 딱 좋거든."
홍칠은 구양봉을 손가락질하며 말을 이었다.
"보아하니 자넨 재주가 별로 없는 위인 같은데 내 자네한테 인심쓰는 셈치고 어선방 구경 한번 시켜 주지. 들어가고 나오는 건 걱정 말라니까. 어때? 가겠나?"
구양봉은 잠깐 생각해 보다가 마음을 사려 먹었다.
"그럼 한번 따라가 보지요."
그는 홍칠에게 허리를 굽혀 절을 했다.
"아니, 왜 이러나? 절은 왜 해?"
홍칠이 놀라는 기색으로 물었다.
"나도 무술을 좀 알긴 하지만 서투르기 짝이 없습니다. 이번 일은 칠공께서 많이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그저 칠공만 믿습니다."
구양봉이 칠공이라 부르며 공손히 절까지 하자 홍칠은 희색이 만연했다.
'제법 공손한 태도로 봐선 성품이 괜찮아 보이는걸. 구양봉이 나를 칠공이라고 공대하며 절까지 하는 걸 우리 개방 사람들이 봤으면 신날텐데, 애석하게도 우리 떨거지들이 여기 없군.'
"그럼 날 따라오게. 황궁 어선방으로 가서 이 홍칠공이 푸짐하게 한턱 내지."
그들이 한담을 하는 사이에 밤하늘엔 벌써 달이 뜨고 한길에는 인적이 끊어졌다. 집집의 창문마다 등불 빛이 흘러 나왔다.
"어서 날 따라와!"
홍칠보다 경공(經功)이 떨어지는 구양봉은 홍칠을 따라가느라 땀을 뻘뻘 흘렸다. 그것이 갑갑한 흥칠은 구양봉의 뒷덜미를 달랑 들어 몸을 솟구치더니 지붕 위로 가볍게 날아올랐다. 가볍기가 마치 수리개가 날아오르는 듯했다. 그들 둘은 고요한 밤거리를 나는 듯이 갔다.
구양봉은 홍칠의 경공이 형 구양적보다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껏 구양봉은 문재무략(文才武略)만 있으면 되지 무술은 없어도 괜찮다고 여겼는데 임안에 와 보니 그것이 아주 틀린 생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홍칠이만 해도 황제의 어선방을 제집 드나들듯 하지 않는가? 이런 재주에 이만한 담력이 있으면 천하에 무슨 일을 못하겠어. 이번에 서역으로 돌아가면 형님에게 사정하여 꼭 무술을 배워야겠어. 그래서 문무를 겸비한 대협(大俠)이 되어야지.'
흥칠이 열심히 날아 어느덧 그들은 황궁의 외원(外院)에 이르렀다.
멀리 눈앞에 황궁의 내원이 있었다. 송대에 임안은 자그마한 도성에 지나지 않아서 개봉과 낙양의 기백도 없었고 남경의 위엄도 없었다. 멀리서 황궁을 바라보면 큰 부잣집 정도로 보였다. 홍칠을 따라온 구양봉은 잔뜩 긴장되었다.
'이런 황당한 짓이 어디 있나? 생면부지인 사람을 따라 황궁 안에 들어오다니. 자칫하면 목이 달아난다는 걸 알면서 말이야. 홍칠은 무술이 있으니 급하면 혼자 달아날 텐데, 그러면 나 혼자 남아 당하게 될 것 아닌가? 그때 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
아무리 생각해 봐도 구양봉은 황궁의 귀신이 되고 말 것 같았다.
지붕 위에서 걸음을 멈춘 홍칠은 숨소리를 죽여 가며 말했다.
"저 집이 황궁의 외사방(外事房)이야. 무서우면 지금이라도 돌아가. 내가 땅 위에 내려놔 줄 테니까 객사에 가서 잠이나 자라구."
그 말을 들은 구양봉은 속으로 찔끔했다. 그러면서 슬그머니 부아도 치밀었다.
'흥칠인지 홍팔인지 하는 이 거지가 무술 좀 한다고 꽤나 잘난 체하는군. 나도 배우지 않아서 그렇지 배우기만 하면 너보다 못할 줄 알아? 사람을 깔봐도 분수가 있지.'
구양봉은 그런 내색은 하지 않고 홍칠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칠공께서 날 데리고 들어가기가 싫은 모양인군요. 방금 전까지도 황궁을 자기 집 드나들듯 한다고 자랑이더니 결국은 농담이었단 말이오? 정말 그렇다면 칠공도 들어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황궁이 어떤 뎁니까? 자칫하면 큰 변을 당한다구요. 칠공은 자기 혼자 들어간 적은 있어도 나처럼 무술을 모르는 사람까지 데리고 들어간 적은 없는 모양인데, 자칫하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
게 된다구요."
구양봉의 말은 짐짓 홍칠을 약 올려 주는 말이었다.
과연 그 말에 약이 오른 홍칠은 얼른 구양봉의 옷깃을 거머쥐었다.
"뭐? 내가 무서워 그런다구?"
"칠공이 호걸이라는 건 나도 알아요. 무술이 대단하다는 것도 알구요. 하지만 여긴 황궁이라구요. 나 같은 것을 데리고 들어갔다가 무사히 나올 수 있을지 어떻게 장담한단 말입니까? 내가 황궁에서 원귀가 되는 건 서럽지 않지만 이 일로 칠공의 명성이 떨어지는 게 가슴 아프단 말입니다……."
그 말에 홍칠은 구양봉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히죽 웃었다.
"거 말 한번 비단이군. 하지만 충동질은 그만두게. 그래, 자넨 이 칠공이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걸 모르나? 이 칠공이 자네의 격장법(激將法)에 이용되었다고 하자. 자네를 데리고 들어갔다가 내일 무사히 나올 테니까, 이 칠공의 재주가 어떤가를 찬찬히 보아 두란 말이야."
홍칠은 구양봉의 뒷덜미를 잡더니 수리개처럼 몸을 솟구쳐 황궁 안으로 사뿐 내려앉았다.
황궁 안에는 넓은 공터가 있고 그 공터에 불빛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홍칠은 잽싸게 어두운 곳으로 숨어 들어가 구양봉을 내려놓고 주위를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멀리 황궁의 등롱 몇 개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것이 보이자, 홍칠은 땅바닥에서 조약돌을 움켜 쥐고 손바닥으로 쓱쓱 비벼 돌가루를 만들어 휙휙 뿌렸다. 순식간에 등롱 불빛이 몽땅 꺼져 버렸다.
"누구냐?"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구양봉이 뛰쳐나가려 하자 홍칠이 그를 잡으며 꾹 눌렀다.
눈앞의 모퉁이에서 우람한 체구의 사나이들이 허리에 찼던 칼을 빼들고 이쪽으로 걸어왔다. 그들은 홍칠과 구양봉 앞에 이르러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하자 마음을 놓고 도로 돌아갔다. 불씨를 얻으러 들어간 것이다.
이 틈에 홍칠은 구양봉을 끌고 나무숲 사이를 누비면서 어선방으로 향했다.
어선방은 황궁의 외딴 구석에 있었다. 근처에 다른 건물은 하나도 없고 어선방만 덩그라니 있었다. 목적지에 이른 홍칠은 기분이 대단히 좋아서 구양봉에게 슬쩍 눈짓을 해 보였다. 이게 어선방이야. 봐, 얼마나 들어오기 쉬운가! 이런 뜻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간이 콩알만해졌던 구양봉은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어선방까지 왔으니 큰일은 없겠지. 여기엔 대도시위도 없을 테고 당직 근무자 따위는 더구나 없을 거야. 지금은 어선방 사람들도 모두 잠에 곯아떨어졌을 테니까 우리 둘이 무사히 들어갈 수 있을거야.'
그러나 홍칠은 여전히 경각심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그는 구양봉을 옆구리에 끼고 몸을 솟구쳐 지붕 위로 날아 올라갔다. 그는 지붕 위에 엎드려 기왓장을 몇 개 벗겨 낸 다음 그 밑의 흙을 살살 긁어 종이에다 따로 싸놓고 나서 비수를 꺼냈다. 비수로 지붕 판자에 네모꼴을 쭉쭉 그은 다음 그가 비수 끝을 네모꼴 가운데 턱 꽂아 잡아당기니 네모난 판자 조각이 꿰어져 올라왔다. 홍칠은 이
모든 것을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쥐도 새도 모르게 해치웠다.
지붕에 빠끔한 구멍이 뚫리고 그 밑으로 집안의 모든 것이 똑똑히 보였다.
그곳은 어선방의 바깥채였다. 스무 칸이 넘는 큰 집이었는데 바람벽 한켠에는 커다란 목판이 걸려 있었다. 목판에는 글들을 정연하게 써 놓았는데, 눈여겨보니 그것은 채보(禁譜), 즉 요리 목록표였다. 멋진 필체로 아주 똑똑히 적혀 있는 그 요리 이름들이 얼핏 보기에도 몇백 가지가 넘어 보였다. 그런데 구양봉은 이 모든 것을 잘 볼 수가 없었다. 그는 홍칠처럼 어둠을 꿰뚫어 보는 재간이
아직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저 큰 목판에 빽빽하게 글이 씌어 있다는 것만 알았지 뭐라고 씌었는지는 읽을 수가 없었다. 그곳에는 또 굉장히 큰 탁자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탁자 위에는 갖가지 요리들을 담은 접시와 과자를 담은 쟁반들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식함(食含)들이 가득 놓여 있었다. 별의별 식함들이 다 있었다. 네모난 것, 둥근 것, 울긋불긋한 것, 흰색에 아무 무늬도 없
는 것……. 그야말로 오색이 영롱했다. 이런 식함들은 부호의 집에서 태어난 구양봉도 여지껏 보지 못한 것들이었다. 구양봉은 놀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황제는 끼니 때마다 이 식함들에 담아 먹는 모양이지? 그러니 식함들이 이렇게 많지.'
그런데 탁자 옆에 괴상하게 생긴 사람이 앉아 눈을 내리깔고 중이 염불하듯 뭐라고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정말 이렇던가? 아닌데, 아니야. 이런 맛이 아닌데……. 틀렸어. 틀리다니깐. 에잇, 이번에도 제대로 못 만들었구나."
이맛살을 찌푸리고 앉아 있는 모양이 아주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여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게 분명했다. 온 밤을 이렇게 노심초사하며 생각을 짜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갑자기 일어나더니 접시에 담긴 반찬들을 손으로 집어 냄새를 맡아 보고는 아주 상심한 얼굴로 도리질을 했다. 그리고는 그 요리들을 전부 내버렸다.
'세상에, 저런 진수성찬을 버리다니!'
구양봉은 아깝기 그지 없었다.
홍칠 역시 그 요리사를 주시하고 있었다. 구양봉은 밤이 깊었으니 얼른 내려가 자리를 찾아 숨자고 했다. 이러고 있다가 날이 밝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래도 홍칠은 대답 없이 그 사람만 내려다보았다.
구양봉도 하는 수 없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선방의 그 요리사는 일어나더니 손을 앞으로 길게 뻗었다. 그러자 멀찍이 있던 그릇들이 날개가 돋친 것처럼 줄줄이 요리사의 손으로 날아왔다. 그는 그 요리들을 만져 보기도 하고 맛보기도 하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손을 뒤로 번뜩하여 뒤에 있는 항아리에다 요리 접시를 던져 넣곤 했다. 마치 뒤통수에 눈이 붙어 있는 것처럼 모두 백발백중이었고 그 손은 갈수록 빨라졌다. 잠시 후엔
그가 집어 던진 요리들이 항아리에 가득 찼다.
그리고 나서 요리사는 사색에 잠긴 얼굴로 책을 뒤적이더니 한 대목을 또박또박 읽어 내려갔다.
"종자지방(種子之方)이란 본디 규정된 틀이 없다. 사람에 따라 약을 쓰고 사람에 따라 알맞게 써야 한다. 그렇지, 딱 맞는 말이다. 사람에 따라 알맞게 써야 한다는 이 말이 딱 맞는 말이야. 그런데 황제께 무엇이 딱 맞지……? 고로 냉한 자에게는 온기를 주는 약이 알맞고, 열이 많은 자에겐 서늘하게 하는 약을 주는 것이 알맞고, 얹혀서 내려가지 않는 자에게는 설하는 약을 줌이 알맞고,
허한 자에게는 보신하는 약을 주는 것이 알맞다. 부족한 것을 보태 주고 넘치는 것은 덜어 주면 음과 양이 조화되어 생기가 살아난다……. 맞았어, 맞았어! 넘치는 것은 덜고 모자라는 건 보태 주어야지……."
그리고는 또 무어라고 중얼거렸다.
야밤까지 자지 않고 책을 보며 중얼거리는 양이 마치 글공부에 미친 사람 같아서 구양봉은 홍칠의 귀에다 대고 수군거렸다.
"글공부에 미친 사람이군요. 저렇게 열심히 공부하는 품을 보니 앞으로 과거 시험에 급제를 할 수도 있겠어요."
그러나 홍칠은 코웃음을 쳤다.
"자네가 뭘 안다구 그래? 글공부는 무슨 글공부. 저자는 요리하는 주자야. 지금 들여다보는 것이 이학(理學)이나 현학, 대학이나 중용인 줄 아나? 옛날 사람들이 쓴 요리책이야. 그런 책들을 보고 황제에게 맛있는 음식을 바쳐 환심을 얻으면 큰 벼슬을 하게 되는데 다른 책은 읽어 뭐하겠어?"
구양봉은 그제야 그 요리사에 대해 생각을 달리 하게 되었다.
홍칠은 묵묵히 그 요리사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요리사는 요리사대로 새로운 비방을 고안해 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향불을 세 대는 태울 시간이 지나고서야 그 요리사는 궁리에 지쳐 버렸는지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고는 책을 놓고 나가 버렸다.
희색이 만면해진 홍칠과 구양봉은 지붕에서 내려와 살금살금 어선방 문 앞에 당도했다.
구수한 음식 냄새와 향기로운 과일 냄새가 풍겨 왔다.
구양봉은 이토록 맛있는 음식 냄새를 처음 맡아 보았다. 배에서 꾸르륵 소리가 나고 군침을 꿀꺽꿀꺽 삼키니 홍칠이 킥킥 웃었다.
"이 홍칠이도 이 냄새를 맡고는 가만 있지 못하지. 한 번은 이 냄새를 맡으려고 열며칠이나 어선방을 떠나지 않았거든. 군침이 돌게 하는 이 구수한 냄새……."
그러다가 홍칠은 말을 뚝 그쳤다. 뒤에서 갑자기 인기척을 느낀 것이다. 이쪽으로 걸어오면서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꼬맹아, 황제께선 지금 뭘 하고 계시니?"
그러자 나이 어린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소인은 그런 것은 입 밖에 못 냅니다."
"야, 내가 그걸 몰라서 묻는 줄 아냐? 네가 그 난쟁이한테 한 말도 다 알고 있어. 흥, 말하기 싫으면 그만둬라. 그렇다고 네가 다른 사람한테 한 말을 내가 모르는지 알아, 응?"
분명 이것은 꼬맹이라는 아이에 대한 위협이었다. 꼬맹이는 그 말을 듣자 금방 겁을 먹고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제가 말하기 싫은 게 아니라…… 그러다가 잘못하면……."
꼬맹이가 우는 소리를 하자 상대방은 더욱 자만에 가득 찬 어조로 말했다.
"꼬맹아, 넌 정말 겁쟁이구나. 황제께서 지금 네가 무얼 하는지 어떻게 아시겠냐? 그저 당신을 조심스레 시중하는 줄 아실 거 아냐? 네가 지금 하는 말은 너하고 나 빼면 천하에 누구도 모를 게 아니냐? 그리고 황제의 일이란 게 그저 그런 일밖에 더 있느냐? 네가 말하지 않는다구 내가 모르는지 아니? 황궁에 있자니 너무 심심해서 좀 알아보자는 거야. 그래야 웃을 일이 생기지. 안 그러냐?
꼬맹이라는 아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겨우 떠듬떠듬 말했다.
"황제께선 오늘 그 조개춤을 추는 처녀와 같이 계셨어요. 황제께서도 조개춤을 추겠다고 하셔서 그 처녀가 폐하와 같이 조개춤을 추었어요. 후궁의 황후께서 이 일을 아시면 어떻게 해서라도 그 처녀에게 누명을 씌워 감옥에 처넣을 텐데."
"꼬맹아, 그건 모르고 하는 말이야. 황중의 여인들이란 황제의 환심만 사면 높은 자리에 올라가 부귀를 누리게 되는 거야. 황제에게 총애를 얻으면 걱정할 게 없지."
그러나 꼬맹이란 녀석도 아는 것이 많아 그 말에 지지 않았다.
"그건 모르는 말씀이에요. 황제께선 하룻밤 자고 난 여인을 다시 찾는 일이 아주 드물어요. 석 달 동안 계속 황제께 총애받은 여인이 어디 있어요? 그리고 그런 궁녀들 중 황후에게 죽지 않은 여인이 또 어디 있구요?"
"쉬잇, 가만."
둘은 갑자기 말소리를 뚝 끊었다. 그들의 발자국 소리가 어선방 가까이 다가왔다. 구양봉 바로 앞까지 와서 집안에 인기척이 없는 것을 알자 나이든 녀석이 한마디 했다.
"우삼(虞三)이 당직인 모양이다. 그 자식은 술에 미친 놈이야. 여기 없는 걸 보니 또 술 먹으러 갔군."
그리고는 탁자 위를 살펴보았다.
"그럼 우리가 찾아볼까, 황제께서 가져오라는 요리가 어디 있는지."
그의 말에 꼬맹이란 녀석이 대꾸했다.
"이 많은 식함 중에 어느 게 그 요리인지 어떻게 찾는다고 그래요? 그 국을 못 찾으면 공연히 고생만 하잖아요."
"그 말도 맞다. 우삼! 우삼!"
나이 든 녀석이 소리쳐 우삼이란 자를 불렀다. 그 소리가 텅 빈 어선방 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누구요? 왜 그래?"
그제야 안에서 한 사람이 뛰어나왔다. 입이 뾰족한 원숭이처럼 생긴 그 사람은 야밤에 찾아온 환관들에게 물었다.
"무엇이든 다 준비되어 있어요. 황제께서 어떤 국을 원하세요?"
"우삼, 어제 그 국을 가져오게. 서둘러. 황제의 대사를 지체했다간 머리가 남아 있지 않는다는 걸 알겠지."
나이 든 환관이 눈을 부릅뜨고 말하자 우삼이 제 가슴을 턱 치면서 받았다.
"황제께서 대사는 무슨 대사요. 기껏해야 그렇고 그런 일이나 하고 계시겠지."
"아니, 이 사람 정신이 돌았어? 감히 황제를 흉보다니!"
꼬맹이가 놀라 소리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술이 취한 우삼은 제멋대로 떠들었다.
"밖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황제께서 매일 국사로 노심초사하시는 줄 알지만 나는 알아. 나는 안단 말이야. 연일 여색에만 빠져 있는 걸 누가 모를 줄 알고? 제기랄, 나도 그 미인들을 봤어. 옆으로 지나가는 걸 슬쩍 봤지. 그 미인들의……."
"뭐? 감히 황제의 시첩들을 엿보았다고?"
꼬맹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엿보긴 감히 어떻게 엿봐. 길에서 마주치는 바람에 급히 한쪽에 꿇어앉아 머리를 숙였는데……. 얼굴도 못 보고 젖가슴도 못 봤지만 그렇다고 다리도 못 봤겠니?"
우삼은 아쉬운 듯 한숨을 쉬었다.
"오라, 겨우 다리를 본 걸 가지고……."
나이 든 환관과 꼬맹이는 우삼을 비웃었다. 우삼은 한숨을 쉬며 마음대로 떠들었다.
"그 미녀들의 다리가 얼마나 고운지 알아? 다리만 봐도 정신이 아찔해지거든. 그 다리는 정말……, 사람 미치게 하더군."
그리고는 침을 꿀꺽 삼켰다.
두 환관도 말이 없었다. 그들도 미인들의 다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고 있었다.
"황제야 물론이지만 나라도 그런 미인들을 보고는 못 견디겠더라. 그저 와락 껴안고 마음대로 해 보고……."
우삼의 말이었다. 두 환관이 그를 막 놀려 주려고 하는데 갑자기 차디찬 목소리가 들려 왔다.
"너 이 놈 ! 죽지 못해 환장을 했구나. 어디라고 감히 황제께 무엄한 소리를 하고 있느냐."
그리고는 퍽 하는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조용해졌다. 우삼이 꼼짝도 못하고 쓰러져 애걸했다.
"나으리, 나으리, 농담 좀 한 거 갖고 왜 이러세요? 술 마시고 허튼소리 한 걸 갖고 이러지 마세요. 사실 그 날 나는 머리도 못 들었고 미인들의 다리를 볼 엄두는 더더욱 못 냈어요. 곁눈질 했다가 황제께 들키면 죽는다는 걸 낸들 모르겠어요? 금방 내가 지껄인 건 모두 허튼소리예요."
"우삼, 허튼소리든 아니든 넌 오늘 죽어야 한다. 너를 죽이지 않으면 황제께 내가 무어라고 말하겠느냐?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데, 네 말이 황제께 들어가면 너도 죽지만 그런 무엄한 말을 듣고도 널 죽이지 않은 벌로 나도 죽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살려면 너를 죽여야 해. 알겠냐?"
그 말을 듣자 우삼은 벌떡 일어나 상대방을 덮쳤다. 그러나 상대방은 무겁게 몸을 돌리며 한마디 내뱉었다.
"쓸데없는 짓 마라!"
그가 손바닥을 들고 앞으로 턱 밀자 우상은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한 번 하고는 탁자 위에 던져졌다. 그 바람에 탁자 위에 놓였던 식함들이 박살이 났다. 상대방은 또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펴서 번개같이 우삼을 들어올려 땅에다 내동댕이쳤다. 우삼은 납작하게 누워 꼼짝도 못했다.
"천하의 괴수 요주자(妖廚子), 당신한테……."
우삼은 겨우 이렇게 말하다가 목을 꺾고 죽어 버렸다.
눈앞에서 우삼이 죽는 것을 본 구양봉의 등골에 식은땀이 주루룩 흘렀다. 요주자란 놈이 우리 둘을 발견하기만 하면 우리의 목숨도 끝장이다! 그런데 다행히도 그 요주자라는 놈은 두 환관만 쏘아보며 으름장을 놓았다.
"내 말을 잘 들어. 황제는 어디까지나 황제시다. 황제가 하시는 일은 적게 아는 것이 좋아."
그러더니 우삼의 시체를 끌고 휘적휘적 나가 버렸다.
어선방에는 두 환관만 남았다 그들은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서 있다가 자기네가 찾던 식함을 찾아 들고 부랴부랴 밖으로 나가 버렸다.
문이 닫히고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자 구양봉이 나직이 물었다.
"칠공님, 이제 나가 볼까요?"
칠공님이란 말에 기분이 좋아진 홍칠은 싱글벙글하며 대답했다.
"이젠 올 사람이 없을 거야. 이 큰 집 안에 우리 둘만 남았네. 저건 황제의 음식함들인데 이제 마음놓고 실컷 먹세."
그는 탁자 위에 냉큼 뛰어올라 편안하게 앉았다. 그리고는 식함들을 하나하나 열어 보다가 그 중 작은 식함 하나를 들고 그 안의 음식을 꺼내 한 움큼 입에 넣었다. 그는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으면서 한편으로는 푸념을 해댔다.
"에구, 맛없어, 맛없어."
이제 긴장이 풀어진 구양봉도 탁자 위에 올라가 손에 잡히는 대로 음식함을 집어다가는 보지도 않고 볼이 메어지도록 입 안에 처넣었다.
"가만가만. 뭘 그렇게 급히 먹나? 천천히 먹으라구."
홍칠이 구양봉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왜 그래요? 먹으라고 데려왔잖아요."
"이건 함부로 먹는 음식들이 아니야. 이 함을 봐. 이건 오독진주(五毒珍珠)라는 건데 해독약을 미리 먹고 나서 먹는 음식이야. 그리고 이것은 피를 덥게 하는 보신 음식인데, 황제가 여인을 데리고 놀 때 먹는 거지. 이 바보야, 이건 먼저 여자부터 데려다 놓고 먹어야 하는 거라구."
그 다음부터 그는 홍칠이 먹는 것을 따라 먹었다. 그런데 홍칠은 이것도 안 된다고 말렸다.
"허, 이 사람 봐. 사람이 왜 이리 둔한가? 자기가 먹고 싶은 걸 먹을 일이지, 나 먹는 대로 따라 먹을 게 뭐야?"
그 바람에 구양봉은 은근히 부아가 났다. 홍칠이 자기를 우습게 아는 것 같았던 것이다.
'황궁에 들어와 황제의 음식 훔쳐먹는 것이 무어 그리 대단해서 내 앞에서 거드름이야? 이 구양봉이 너를 따라 여기까지 들어온 것만 봐도 너보다 담력이 세단 말이야. 너는 무술이 있는 놈이지만 난 그런 것도 없이 황궁에 들어왔으니 그렇지 않은가 말이야.'
그런데 홍칠이 또 입을 열었다.
"구양봉, 이런 무늬가 있는 음식함에 든 건 못 먹는 거야. 독이 들어 있지 않으면 정력제거든. 그 나머지는 마음대로 먹어."
구양봉은 이제 마음 푹 놓고 음식을 조금씩 골고루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홍칠이 또 말렸다.
"그렇게 흔적을 남기면 안 된단 말이야. 넌 도둑질도 못해 봤구나. 도둑질에도 '하나를 먹고 둘은 가져가고 셋은 남겨 놓는다'는 법칙이 있어. 도둑질에도 법칙이 있단 말이야. 알겠어?"
구양봉은 홍칠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홍칠은 거지인데 거지는 열에 아홉은 도둑놈이다. 그러니 도둑질의 법칙을 알겠지만 나는 그 법칙을 모른다. 그러니 홍칠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홍칠은 이제 더 이상 잔소리를 안 하고 아구아구 먹어대기만 했다.
"황제가 먹는 음식이 어때? 맛있지?"
홍칠이 으쓱해서 물었다.
"좋아요, 아주 맛있어요."
구양봉은 물론 맛있게 먹었다.
"물론 맛 좋을 테지. 주막집에서 먹는 쇠고기 편육에 대겠어?"
홍칠이 껄껄 웃자 구양봉도 덩달아 웃었다. 그런데 갑자기 홍칠이가 구양봉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이크, 사람이 온다."
홍칠은 순식간에 구양봉을 옆구리에 끼더니 몸을 솟구쳤다. 둘은 들보 위에 올라앉아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과연 문이 열리더니 몇 사람이 들어왔다.



제4장 원앙오진회
안으로 들여선 것은 다섯 사람이었다. 그들은 어선방 부엌으로 걸어와서 아궁이를 빙 둘러섰다.
한 사람이 높은 소리로 말했다.
"됐네, 이제 폐하의 아침 식사를 장만해야겠어!"
나머지 네 사람은 구석에 조용히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거드름을 피우며 의자에 주저앉는 사람이 그들의 우두머리로 보였다. 홍칠과 구양봉은 들보 위에서 이 모든 것을 똑똑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시중을 받으면서 느릿느릿 손을 씻은 다음 손톱을 깎기 시작했다. 손톱을 다 깎은 뒤에는 요모조모로 살펴보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여인처럼 부엌
아궁이께로 다가섰다. 그런데 웬 영문일까? 방금까지도 아낙네같이 느릿느릿하던 사람이 아궁이 앞에 다가서니 손놀림이 번개같이 빨라지는 것이었다. 한 손에 국자를 쥐고 다른 손에 요릿감을 쥐더니 곧 번개같이 손을 놀리는데, 순식간에 향기로운 음식 냄새가 확 풍기면서 기름 끓는 소리가 났다. 홍칠과 구양봉은 배불리 먹고 난
뒤였지만 다시 식욕이 동했다.
'냄새만도 이렇게 향기로우니 먹어 보면 너무 맛있어서 둘 중에 하나가 죽어도 모를 거야!'
요리를 마치자 그 사람은 국자를 놓고 물러 나왔는데, 그 오만하던 기상은 간 곳이 없고 방금 전에 자기 시중을 들어 주던 사람처럼 구석에 공손히 서 있었다. 그는 시종처럼 묵묵히 서서, 다른 사람이 아침 요리를 만들기를 기다렸다.
방금 물을 들고 그를 시중하던 사람이 부엌 아궁이로 나섰는데, 그는 더욱 의기양양하여 남이 시중 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뒤에 서 있던 사람이 조심조심 나서더니 역시 아까처럼 물을 길어 오고 수건을 받쳐 주며 조심조심 시중을 들었다. 이 사람은 손에 국자를 쥐자마자 부리나케 휘젓기 시작했는데, 국자에서 불길이 날름거리며 올라오더니 어느덧 눈썹까지 솟는 것이었다. 그는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이 없이 뚫어지게 불을 들여다보고 서 있다가 요리가 끓자 손으로 여러 가지 양념들을 집어 요리에 뿌렸다. 그 사람은 요리를 이리저리 휘젓더니 국자를 맞은편에 던져 버렸다.
구양봉은 크게 놀라서 생각했다.
'저렇게 마구 던지면 애써 만든 요리가 상 위에 흩어져 버릴 텐데.'
맞은편을 향하여 날아가던 국자는 떨어질 때가 되자 갑자기 속도가 늦어지면서 조용히 상 위에 떨어졌는데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 자태가 얼마나 기묘하고 멋있는지, 또 요리사가 얼마나 힘을 알맞게 사용했던지, 어두운 구석에 숨어 그것을 지켜 보던 홍칠과 구양붕은 혀를 차며 감탄했다.
홍칠은 그 사람의 재주가 참으로 대단하다는 뜻으로 구양봉에게 눈을 찡긋해 보였다. 구양봉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이만한 재주를 갖자면 내공이 매우 깊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보아하니 이 사람은 무예가 범상치 않은 것 같았다.
이때 세 번째 사람이 나섰는데 그는 더욱 득의양양하여 다른 네 사람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손만 앞으로 내밀어 남이 손을 씻어 주고 손톱을 깎아 주도록 한 다음 다시 손을 내밀어 수건으로 깨끗이 닦게 했다. 또 한 사람이 다가와 그에게 곰방대를 건네주고 불을 붙여 주자 그는 몇 모금 들이마시고 나서 국자를 손에 쥐었다. 이 사람은 앞의 두 사람과는 달리 국자에 기름 대신 물을 조금
담은 후 거기에다 여러 가지 양념을 넣었다. 그가 무얼 넣는지 아무도 알아볼 수 없었다. 그의 손이 번개같이 움직이면서 이것저것 집어넣는데, 눈앞에서 갖가지 양념이 이리저리 날아가고 날아오더니 곧 가마에서 향기로운 냄새가 풍겼다.
이 사람은 요리를 끝마치자 접시를 홱 던졌는데 공교롭게도 접시가 홍칠과 구양봉의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두 사람은 깜짝 놀라서 이번엔 영낙없이 발각되겠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그 접시는 홱 돌아서 날아가더니 물 한 방울 떨어뜨리지 않고 탁자 위에 내려앉았다.
그러자 다른 네 사람이 그에게 박수갈채를 보냈다.
네 번째 사람이 걸어 나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옆사람에게 말했다.
"내 생각엔 우리 다섯 사람이 여전히 승부를 내지 못한 것 같소. 봄날 난초와 가을 국화가 승부를 가르지 못하는 것과 같이 말이오. 우린 아무래도 비긴 것 같소."
그러자 남은 네 사람이 동시에 외쳤다.
"안 되오. 안 돼!"
모두들 안 된다고 하는 바람에 그도 솜씨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 사람은 더욱 오만하고 냉랭한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모두가 원하고 있으니 그럼 물을 길어다가 내 발을 잘 씻도록 하게."
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그들은 종종 누가 가장 뛰어난 음식을 만드는지 내기를 했다. 매번 시합할 때마다 골머리를 짜면서 새 요리들을 강구하느라 애썼지만 한결같이 솜씨가 뛰어나 누구도 적수를 누를 수 없었던 것이다. 오늘 아침 요리를 두고 벌어진 내기를 놓고 보아도 벌써 세 사람이나 나와 솜씨를 보였지만 역시 승부를 가릴 수가 없었다.
그들의 규칙에 의하면 요리하는 사람은 나머지 사람들을 마음껏 부릴 권력을 가지게 되지만, 반드시 뛰어난 재주를 보여 주어야 했다. 만일 재주가 신통치 않으면 스스로 조심하여 너무 우쭐거리지 말아야 했다. 이리하여 그들 모두 국자를 잡은 사람에게 공경스런 태도를 취하다가도 자기 차례가 돌아오면 눈이 이마빡에 올라가 붙은 듯이 행동했다. 하지만 처사에 있어서 정도가 있어야지 너
무 과분하게 처사하면 경을 치게 되었다. 시합에서 지는 사람은 경성에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그가 내기에서 졌다는 것을 알게 되면 황궁에 발붙일 자리가 없게 되며 강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자기 발을 씻을 물을 떠오라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가 다른 사람들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비방을 갖고 있다는 일종의 시위였다.
네 사람 모두 숨을 죽이고. 조심조심 물을 길어 와 그가 앉아서 발 씻는 것을 시중 들었다.
이 사람은 아주 득의 양양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하느님은 뜻있는 자를 버리지 않아! 내가 매일 고서 뭉치들을 이리저리 뒤적인 게 헛수고였겠나? 어제 나는 비방을 찾아냈다네. 내가 보기에 그 비방은 진나라 시황제의 비방 같아. 그것을 먹으면 백발이 검게 되고 노인이 젊어지며 심지어는 신선이 되어 영원히 늙지 않을 수도 있네."
이 사람의 말을 듣고 네 사람 모두 속으로 깜짝 놀랐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더 이상 내기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반신반의하는 사람이 이렇게 물었다.
"당신이 무엇을 찾아냈는지 모르지만 그것이 참말로 시황제의 비방이란 말이오?"
네 번째 사람은 동료들이 믿지 않자 냉소하며 대꾸했다.
"당신들은 내가 큰소리만 탕탕 친다고 생각할 테지? 그럼 어디 한번 구경하라구."
그는 양말을 신고 아궁이로 다가가더니 가마를 들어다 부뚜막에 놓고는 입을 열었다.
"그럼 모두들 보게나. 이 묘수인주가 뚱딴지 같은 걸 만든다고는 생각 말게."
그리하여 모두들 그의 동작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요리법이라는 것은 아주 신비하여 눈 깜짝할 새의 동작도 빠뜨려서는 안 되는 데다가 시황제의 비방을 모르면 장수의 비결을 알 수 없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물건을 한 가지씩 끄집어내면서 말했다.
"예로부터 특이한 것일수록 평범하다고 했는데, 아주 평범한 재료를 가지고도 맛좋은 요리를 한 상 차릴 수 있네. 누가 이런 오묘한 요리를 알 수 있겠나! 자네들은 눈을 똑바로 뜨고 나의 비방을 구경하게."
나머지 사람들도 그와 마찬가지로 요리의 대가들이었지만 공손히 서서 가르침을 받는 수밖에 없었다.
묘수인주는 손에 쥔 물건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기 시작했는데 어둠 속에서 그것을 들은 홍칠이와 구양봉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한결같이 독이 든 것들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수탉의 맹독성을 띤 화산 골짜기의 흡혈충, 백두산 꼭대기의 새우, 그리고 천산의 녹초(鹿草)……, 이 모든 것을 육류에 붙여 놓으면 작은 구더기가 생겨나지. 보게나, 이 하얗고 투명한 구더기가 얼마나 훌륭한 요리감인가?"
여러 사람들이 조심스레 살펴보니 그 작은 구더기란 것은 너무나 평범하여 흡혈충, 새우, 녹초에서 자랐다는 벌레 같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이상한 점이 있다면 몸이 아주 투명하다는 것뿐이었다. 말을 끝내자마자 그는 구더기를 끓는 물 속에 집어넣었다가 잠시 후에 꺼냈다.
이것을 다시 식초물에 집어 넣으며 묘수인주가 입을 열었다.
"모두들 맛을 좀 보게나!"
그러나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의 규칙에 의하면 만든 사람이 먼저 맛을 보아야 했다. 만일 변이라도 당하면 후회할 여지도 없게 되니까.
묘수인주는 아무 말 없이 은수저로 구더기가 든 국물을 떠 마셨다. 그는 그 국물을 마시자마자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머리를 떨기 시작하더니 이어 손을 떠는 것이 마치 학질에 걸린 사람 같았다. 사람들은 그가 곧 죽을 것 같아 급히 소리쳤다.
"묘수 형, 해독제를 갖다 줄까요?"
그런데 그가 부들부들 떨면서 눈을 지그시 감고 더없이 기분 좋은 표정을 지을 줄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그의 몸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지만 심신이 더없이 가뿐한 모양이었다. 그는 노래까지 부르기 시작했다.
인생살이 실로 어렵거늘
술잔 기울이며 생각해 되네
잔걱정 많으면 머리 희어지고
처첩이 많으면 시앗 싸움 끝없네
가산이 많으면 후회만 생기고
자식이 많으면 손 털고 나앉는다네
인생살이 실로 쉽지 않아
술 취하여 한 생을 즐겨 보세
빼앗고 빼앗기는 것은 헛되니
세상사 장기판처럼 환히 보인다네.
홍칠과 구양봉은 물론 나머지 네 사람도 어안이 벙벙해져서 묘수인주를 멍청히 바라보았다.
갑자기 한 사람이 소리를 질렀다.
"이거,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정신이 둥둥 떠가는 모양이구먼……."
이윽고 네 사람이 숟가락을 쥐고 그 국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들도 똑같이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두 눈을 감는 것이었다. 끝없이 부들부들 떠는 꼴을 보니 모두 미쳐 버린 것만 같았다.
다섯 사람 모두 얼굴에 만족한 웃음을 담고 매우 기분이 좋은 듯이 앉거나 기대거나 엎드려 즐기고 있었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르자 국을 만든 묘수인주가 제일 먼저 깨어났다. 그는 묵묵히 나머지 사람들을 둘러보았는데 얼굴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잠시 후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깨어나더니 네 사람이 다 묘수인주에게 찬탄을 보냈다.
"형의 비방은 과연 대단하오! 이 요리의 이름이 대체 무엇이오?"
묘수인주는 도량이 너그러운 사람처럼 허허 웃으며 대꾸했다.
"형제 여러분, 모두 애를 많이 했구려. 사실은 나도 우연히 비방을 찾아낸 것뿐이지 대단할 건 없소."
한 사람이 또 물었다.
"묘 형, 이 요리 이름이 뭐요?"
묘수인주가 한탄조로 말했다.
"참 불행한 일이야! 이토록 훌륭한 요리 이름이 흑발탕이라지 뭔가. 자네들 보기에도 이 훌륭한 요리에 그 이름이 당키나 한가?"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그렇다고 하자 묘수인주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난 자네들과 의논하여 요리 이름을 다시 지어 주기로 작심했네. 어초오금탕(魚草五禽湯)이라 하면 어떨까?"
사람들 모두 이름이 좋지 않다고 입을 모았다. 그 이름은 부르기도 안 좋고 귀에 거슬린다는 것이었다.
묘수인주가 말했다.
"그렇다면 자네들이 이름을 지어 보게!"
한 사람이 삼금탕(三禽辯)이라고 짓고 나서 진주삼금탕이라고 불러도 되고, 그렇지 않으면 어희오주(魚 五珠)라 부르면 더욱 좋다고 했다.
"그건 안 되오. 폐하께서는 언제나 재료를 물으시니 무슨 재료로 만들었다는 것을 알려 드려야 하는데, 이 요리를 다섯 가지 독약으로 만든 것이라고는 차마 말씀드릴 수 없잖소?"
다섯 사람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 말했다.
"우리가 좋은 이름을 만들기만 하면 폐하께 말씀드리기도 쉬울 것이오. 사전에 이름을 잘 생각해 둬야지 그렇지 않고 어전에서 어물거리다가 폐하께서 알아차리시는 날이면 큰일난단 말이오. 우리 모두 이 요리의 이름을 잘 생각해 봅시다."
사람들은 저마다 뒤질세라 이름을 짓다가 결국은 그 요리의 이름을 원앙오진회(鴛鴦五珍謄)라고 지었다.
홍칠과 구양봉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원앙오진회라, 참 훌륭한 이름이군!'
송나라 때 황궁의 요리사들은 역대의 요리사들과 마찬가지로 아주 어려운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다. 옛말에도 임금을 모시는 것이 호랑이를 모시는 것과 같다고 했지만, 폐하가 성을 내시지는 않는가, 어떤 때에 즐거워하시는가, 또 어떤 음식을 즐기시는가 하는 것들을 일일이 파악하고 비위를 맞추어야 했으며, 폐하의 기분이 갑자기 나빠지면 목이 떨어질 위험도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 때문
에 요리사들은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고 살아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평소에 서로를 감싸 주고 역성을 들어주었다. 요리 문제에선 서로 경쟁이 심하지만 일단 곤란이 닥치면 서로 돌봐 주었다.
한 사람이 나서서 말했다.
"폐하께서 이 원앙오진회를 마시면 우리처럼 한바탕 떨어야 하니 아무래도 그게 좋지 못할 것 같소."
이 말에 다섯 사람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혹시 폐하께서 그것을 마시고 우리처럼 몸을 떠시고 추상같이 화를 내지 않으실까? 우리가 폐하를 독살하려 했다고 오해하시진 않을까? 물론 폐하의 음식을 맛보는 태감이 있긴 하지만, 그 태감이 몸을 떠는 것을 보고 우리를 죽이기라도 한다면 이 얼마나 억울한 노릇인가?
모두들 침묵을 지키고 있는데 한 사람이 말했다.
"우리가 폐하께 이 요리의 좋은 점을 말씀드리면 폐하께서도 좋아하실 것이오. 폐하의 음식을 먼저 맛보는 태감이 그것을 맛보지 못하도록 어선방의 총관에게 이 일을 잘 설명해야겠소. 어떻소?"
네 사람 모두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고 찬성했다.
어선방의 총관에게 원앙오진회의 맛을 보여 주면 그도 기꺼이 폐하께 이 일을 말씀드릴 테니 두려울 것이 무엇인가?
다섯 사람 모두 희색이 만면하여 총관에게 이 일을 알리러 갔다.
홍칠과 구양봉은 군침이 저절로 넘어갔다.
'나도 저 원앙오진회를 마셔 봤으면 죽어도 원이 없겠는데!'
하지만 그 사람들은 이미 밖으로 나갔고 그 훌륭한 요리는 눈에 보이지 않았다. 홍칠과 구양봉은 그들의 손에서 국물을 빼앗아 마셔 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구양봉은 그럭저럭 참을 수 있었으나 식탐이 유난스러운 홍칠은 그 욕구를 참아낼 수가 없었다. 생전 먹어 보지 못한 기막힌 요리를 눈앞에서 놓치는 찰나였다. 그는 기둥에서 뛰어내려 눈 깜짝할 사이에 몸을 감추었다. 구양봉마저 그가 어디에 숨었는지 알 수 없었다.
다섯 사람이 뜰을 걸어가고 있는데 별안간 묘수인주가 비명을 지르더니 손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원앙오진회가 담긴 식함을 든 그는 일행에서 몇 발자국 뒤떨어져 걸으면서 한창 황제에게 상을 받는 상상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손이 아파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그 바람에 그가 들고 있던 식함이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앞서가던 네 사람 중 두 사람이 그 식함을 받으려고 덮치다가 서
로 머리를 부딪치고 말았다. 그리하여 식함은 당장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
바로 이때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 떨어지는 식함을 잽싸게 받아 쥐었다.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원앙오진회를 담은 식함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다섯 사람은 어안이 벙벙하여 서로 얼굴을 마주볼 뿐, 누가 식함을 채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상한 것은 땅바닥에 국물 한 방울 흘린 흔적조차 없다는 사실이었다. 더구나 다섯 사람 누구의 손에도 식함이 들려 있지 않았다.
묘수인주는 차디찬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흐흐흐……. 나 묘수인주는 자네들과 막역지간이네. 황제께서 좋아하시면 자네들에게도 이득이 많아. 미안하지만 어서 내놓게. 내가 화내기 전에. 그렇지 않으면 우리 모두 편치 못할걸세."
묘수인주의 말엔 위협이 다분히 섞여 있었다. 그는 화가 잔뜩 났으나 고함치지 않고 그저 차디차게 말할 뿐이었다. 네 사람이 자기와 동료이기에 망정이지, 다른 사람이라면 벌써 큰일이 났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동료들도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원앙오진회가 없어져서 황제께서 그 국을 먹을 수 없게 되었으니 묘수인주가 헛고생을 한 셈이 아닌가? 동료들은 은근히 쾌재를 불렀다.
"묘 형, 그까짓 일로 너무 속 썩이지 마시오. 기껏해야 국 한 그릇 아니오? 내일 또 맛있게 만들어 황제께 올리면 그만 아니오."
한 사람이 그렇게 말하자 나머지 셋도 그 말이 옳다고 떠들었다.
그러나 묘수인주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내가 갖은 애를 다 써서 만든 것이오. 그 재료를 장만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시오? 도린어(倒鱗魚 ; 물고기의 일종)도 그렇지만 천산에서 나는 녹초를 얻기가 얼마나 어려웠는 줄 아시오? 고생고생하여 겨우 그것밖에 못 얻었는데 또 어디 가서 얻는단 말이오."
그 말에 나머지 네 사람의 얼굴에 놀란 빛이 흘렀다. 묘수인주가 그 희귀한 재료를 장만하느라 무진 애를 쓴 것은 황제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고 상을 타려는 욕심에서 그리 한 것인데 하늘이 돕지 않아 헛고생만 하지 않았는가!
한편 묘수인주의 뇌리에는 의심이 떠나지 않았다. 갑자기 손이 뜨끔하더니 누군가 그 국그릇을 채 갔던 것이다.
'필시 이들 중에 고수가 있어. 소리도 없이 감쪽같이 그 국그릇을 가져갔거든. 내가 오늘 크게 당했어. 내가 이 녀석들을 잘못 보았군.'
그러나 묘수인주는 그 말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제기랄, 다 내 탓이오. 내 운수가 사나워 이렇게 되었지. 난 여러분들이 가져 갔다고는 생각하지 않소. 자, 여기서 웅성거릴 것 없이 모두들 나갑시다."
네 사람은 묘수인주의 말이 거짓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묘수인주는 여전히 그들을 의심하고 있었지만 여기서 나가지 않으면 누가 원앙오진회를 가지고 나갔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네 사람 다 켕기는 것이 없었다.
"그럽시다. 묘수 형 말대로 모두 나갑시다."
그들은 쾌활하게 말하고는 우르르 몰려 나갔다.
주방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구양봉은 돌아온 홍칠과 함께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들보 위에 너무 오래 쪼그리고 앉아 있어서 허리가 아팠다. 그래서 그들은 아래로 내려와 허리를 폈다. 그러다가 구양봉은 홍칠의 손에 커다란 식함이 들려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게 뭐요?"
구양봉의 물음에 홍칠이 득의양양하게 웃었다.
"소리치지 마. 이게 바로 저 녀석들이 찾던 원앙오진회라는 거야."
그 식함이 홍칠의 손에 있는 것을 보고 구양봉은 깜짝 놀랐다.
"아니, 그건 왜?"
구양봉의 물음에 홍칠은 히죽 웃었다.
"내가 먹어 봐서 알지만 묘수인주가 만든 요리는 정말 별미라네. 자네는 먹어 보지 못했으니 그 맛을 모를 거야. 계집을 얻으려면 오월 계집을 얻고, 사나이를 얻으려면 비단옷 입은 사나이를 얻고, 요리를 먹으려면 묘수인주가 만든 요리를 먹고, 남과 싸우려면 홍칠이를 불러 와라! 자넨 이런 말을 못 들었지?"
구양봉은 그 말에 웃었다. 그 말은 홍칠이가 만들어 낸 우스갯소리지만 어쨌든 묘수인주의 솜씨가 대단하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자, 말은 그만하고 어서 맛이나 보자구."
"나도 함께 먹자구요?"
"왜, 이 좋은 걸 안 먹으려나? 먹기 싫으면 그만둬. 음식도 먹을 줄 모르는 딱한 사람 같으니. 자넨 무슨 재미로 사나?"
"그럼 나도 먹겠소."
구양봉도 달려들어 맛을 보았다.
원앙오진회는 참으로 별미였다. 매끌매끌하면서도 시원하고, 고기 같으면서도 야채 같고, 입에 들어가면 박하처럼 싸하니 녹아 버리는 것이었다. 목으로 넘기면 마치 부드러운 미인의 손이 내장을 골고루 쓰다듬어 주는 것 같아 얼마나 시원하고 야릇한지 몰랐다. 그러면서 몸이 약간 떨렸는데 그 떨림이 또한 아주 상쾌했다. 도대체 어째서 상쾌한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온몸이 상쾌하고
기분이 좋았다. 홍칠과 구양봉은 기분이 좋아서 서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말은 하지 않았다. 아니, 몸과 마음이 너무 황홀해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한참 만에야 진정이 되자 홍칠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 이렇게 기막힌 음식은 처음이지?"
"언제 이런 걸 먹어 봤겠습니까? 이렇게 맛있는 건 생전 처음이죠. 그런데 이 음식 이름이 뭐죠?"
"아까 못 들었나? 원앙오진회라고 하잖아. 이건 다섯 가지 독이 든 물건으로 끓인 국이야."
"그런데 어떻게 끓인 걸까? 나도 이런 국을 끓일 줄 알면 좋겠는데. 매일 이런 국만 먹고 살면 한이 없겠어요."
"그러려면 저 묘수인주를 시켜야 하는데 자네에게 그런 재주가 있나? 저 묘수인주는 임안에서 가장 유명한 요리사인데 오기가 대단하거든. 황제를 시중 들라면 몰라도 자네 같은 걸 시중 들라고 하면 그는 화가 나서 죽어 버릴 거야."
그때 구양봉은 갑자기 졸음이 오는 것을 느꼈다.
"홍칠공님, 홍칠공님은 졸리지 않습니까?"
홍칠은 눈이 게슴츠레해지는 구양봉을 보고 깔깔 웃었다.
"잠이 온다구? 자기만 해 봐, 자네를 버리고 갈 테니까. 황제한테 붙잡혀도 나를 원망하지 말라구."
홍칠이 농담을 한다는 걸 알면서도 무술이 짧은 구양봉은 어쩐지 으스스했다.
"아무리 담이 크다 한들 이런 데서 잠잘 수야 있겠소? 그러다가 어선방의 주자들에게 들키면 나를 잡아 국을 끓일지도 모르는데."
"그러면 참 좋겠다. 자네 고기로 국을 끓이면 맛이 좋을 거야. 난 아직 인육탕은 못 먹어 봤거든. 분명히 별미일 거야."
구양봉은 농담인 줄 알면서도 정말 자기 고기로 인육탕을 만들어 묘수인주 같은 사람들이 맛을 보면서 할 말들을 생각하니 소름이 끼쳐 머리칼이 쭈뼛쭈뼛 일어서는 것 같았다. 하지만 몰려오는 잠을 참을 수가 없었다. 드디어 구양봉은 옆으로 덜컥 쓰러지더니 코를 골기 시작했다.
"구양봉, 구양봉! 일어나! 자다가는 죽는다."
그러나 구양봉은 곯아떨어져 깨어날 줄을 몰랐다.
그런데 구양봉을 흔들어 대던 홍칠이도 정신이 아찔하면서 머리가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거 야단났네.'
홍칠이는 가슴이 섬ㅉ했다. 그런데 그 순간 어디선가 차디찬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그 바람에 홍칠이는 가슴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홍칠이 앞에 다섯 명이 다가섰다. 황제의 어선방에서 일하는 다섯 고수들 즉, 묘수인주 묘 나으리, 천도만과(千刀萬過) 과 나으리, 유소화작(油燒火炸) 허 나으리, 백수십권(百手十拳) 우 나으리, 일지칭(一枝秤) 평 나으리 등이었다.
이들은 황제가 가장 총애하는 심복들이었다. 이들이 없으면 황제는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을 테니 황제 노릇도 못할 것이었다. 그래서 이 다섯 나으리들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황중의 대신들보다도 세도가 당당했다.
"감히 황궁 안으로 기어들다니? 네 놈들은 대체 뭐하는 것들이냐?"
구양봉파 홍칠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홍칠은 가슴이 철렁했지만 겉으로는 태연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가 누구냐구요? 저희는 홍안루(鴻雁樓)의 요리사들입니다. 어르신들의 요리 솜씨를 몰래 배워 가려고 이렇게 황궁까지 들어왔습니다. 사실 출중한 요리 솜씨가 없으면 강호에서 살아가기가 어렵거든요. 어르신들 솜씨만 배워 가면 평생 걱정이 없겠는데 말입니다."
홍칠이의 말은 지극히 간곡했다. 다섯 사람은 그 말을 믿는지 잠시 말이 없었다. 만약 이들이 진짜 홍안루에서 온 요리사들이라면 요리 솜씨를 배우려고 황궁에 잠입했다는 것도 일리가 있었다. 강호에서는 누구든 자기만의 뛰어난 재주가 있어야 살아갈 수 있으며, 요리사들도 특기가 있어야 했다. 홍안루 요리사라면 나름대로 빼어난 솜씨가 있겠지만, 더 배우려면 이 황궁의 어선방을 빼놓
고는 달리 없을 것이다. 그러니 황궁에 잠입할 용기를 낼 수도 있었겠지. 다섯 명의 나으리들은 홍칠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잠시 말이 없었다.
불안했던 구양봉도 태연자약한 홍칠을 보고 용기를 좀 찾았다.
'이 거지를 따라 황궁으로 들어온 것부터 황당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홍칠이한테 얕잡아 보여선 안 되지.'
"그런데 자네 이름이 뭐지?"
"홍안루에 있는 소(蘇)씨 성 가진 거렁뱅이, 소씨 거렁뱅이입니다."
소씨 거렁뱅이는 강호에서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는 거렁뱅이로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다가 홍안루 주인의 마음에 들어 굉장한 대우를 받으면서 그곳 주자로 일하게 되었다. 이 소문이 한때 강호에 자자했으므로 황궁의 다섯 주자들도 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홍칠은 자기가 소씨 거렁뱅이라고 말을 해놓고 보니 이 다섯 주자들이 소씨 거렁뱅이를 알고 있지나 않은지 슬그머니 근심이 되
었다. 그런 눈치만 보이면 재빨리 내빼야 했다. 구양봉이 짐이 되겠지만 짐이 되더라도 데리고 달아나야 했다. 여기서 혼자 죽게 할 순 없었다.
"그래, 네가 정말 소씨 거렁뱅이냐?"
묘수인주가 따져 물었다.
홍칠은 이를 사려 물었다.
'이왕지사 이렇게 된 일, 끝까지 버티는 게 상수다.'
"참, 내가 소씨 거렁뱅이가 아니면 대체 누가 소씨 거렁뱅이겠소?"
그 말을 곧이들었는지 다섯 주자는 서로 바라보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왕 황궁에 들어왔으니 우리한테 솜씨를 좀 보여 주시지. 요리 솜씨가 제법이라면 살려 보낼 수도 있다."
묘수인주의 말에 홍칠은 가슴이 철렁했다. 거리에서라면 이깟 다섯 주자쯤 손쉽게 해치우련만, 장소가 장소인 만큼 그들이 맞붙으면 그 소리를 듣고 궁내 대도시위들이 무리로 달려올 게 뻔한 일이었고, 그러면 그와 구양봉은 해를 입기 십상이었다.
"잠깐 내 말 좀 들어 보십시오. 저희에게 무슨 솜씨가 있다고 이러십니까? 따지고 보면 우린 동업자들이니 앞으로 친하게들 지냅시다. 오늘 이렇게 몰래 들어온 것은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그러면서 홍칠은 구양봉에게 어서 내빼자고 눈짓을 하고 자기부터 달아나려 했다.
그러나 다섯 주자들이 얼른 앞을 막아섰다.
"이봐, 이왕 왔으니 우리에게 솜씨 한번 보여 줘야지."
묘수인주의 말이었다.
"왜 이러시오? 이 어선방 안에서 붙어 보자는 겁니까? 정말 해 보고 싶으면 밖에 나가 해 봅시다. 내가 겁이 나서 이러는 줄 아시오?"
묘수인주는 홍칠의 말에는 끄떡도 하지 않고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여기 들어올 재간이 있으면 나갈 재간도 있을 테니 어디 그 솜씨를 한번 부려 봐라. 그래야 여기까지 기어든 보람이 있지."
그는 말을 마치자 손을 번뜩하더니 무엇인가를 집어 던졌다.
특수한 시력이 없는 구양봉은 번개같이 날아오는 그것이 몰래 던지는 흉기인 줄 알았으나 그것은 요리를 볶는 데 쓰는 국자였다. 구양봉은 자기 머리를 향해 날아오는 국자를 피할 재간이 없었다. 그런데 다행히 홍칠이가 그 국자를 손에 척 받아 쥐었다.
"그래, 기어코 해 보자는 거요?"
"듣자니 소씨 거렁뱅이가 '강산이개(江山易改)'를 잘 만든다더군. 수고스럽지만 그 요리 맛 좀 보자."
다섯 주자 중 누군가 말했다.
홍칠과 구양봉은 그제야 그들이 싸우자는 것이 아니라 요리 솜씨를 보려는 의도임을 알았다. 하지만 구양봉은 그게 더 걱정이었다. 싸움을 하면 홍칠이 얼마간 막아내겠지만 황제의 요리사 앞에서 요리 솜씨를 보이다니, 이건 싸움보다 더 어려운 일이 아닌가?
다섯 주자들은 홍칠을 지켜 보며 이 소씨 거렁뱅이라는 자가 요리 솜씨를 발휘하기를 기다렸다. 홍칠은 하는 수 없이 국자를 들고 느릿느릿 부뚜막으로 다가갔다. 그는 부뚜막 위의 물건들은 보지도 않고 국자를 탕 내려놓으며 소리쳤다.
"수건."
홍칠이 수건을 찾자 다섯 주자 중 하나가 수건을 척 펼쳐 들더니 그것을 물에 헹구어 물방울이 떨어지기도 전에 작 펴서 돌렸다. 한 순간 젖은 수건이 공중에서 날면서 수많은 물방울이 천장에 뿌려졌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한 방울도 튀지 않는 것이었다. 너무 젖지도 마르지도 않은 적당한 수건이 되자 그 사람은 그것을 거두어 홍칠에게 던져 주었다.
"자, 수건 갑니다."
홍칠은 손을 뻗어 그 수건을 턱 잡더니 다시 던졌다. 수건은 공중에서 뱅그르르 돌며 이쪽에 있는 여러 사람에게 날아오더니 도로 그에게 날아갔다.
이것이 아주 어려운 재주라는 것을 알고 다섯 주자들은 그에게 갈채를 보냈다. 과연 듣던 대로 소씨 거렁뱅이 솜씨였다. 수건 던지는 솜씨만 봐도 사람들의 부러움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언제나 연기와 불에 그을려야 하는 주방에서 일하는 요리사들은 손이 기름 범벅이라 수건을 잘 받아 쥐지도 못했고 비틀어 짜기는 더욱 어려웠다.
그런데 소씨 거렁뱅이의 솜씨는 얼마나 멋들어지는가! 수건을 쥐거나 짤 필요도 없이 공중에 던져 돌리면서 얼굴과 손을 갖다 대면 된다. 정말 편리한 방법이었다.
그제야 다섯 주자들이 비로소 이 소씨 거렁뱅이를 믿는 성싶었다. 국자를 던지는 그들의 솜씨와 마찬가지로 소씨 거렁뱅이의 수건 던지는 솜씨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섯 주자의 욕심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천하에 이름이 높은 소씨 거렁뱅이의 요리 솜씨를 보지 않고는 속이 근질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홍칠의 수건 던지는 솜씨에 다섯 주자들이 박수갈채를 보내자 구양봉은 또 새로운 근심이 생겼다. 글쎄, 수건 던지는 솜씨는 멋들어졌지만 이제 국자를 쥐고는 어떻게 할 셈인지 난감한 일이었다.
"이것 참, 아무래도 한번 해 봐야겠군. 그렇지 않으면 용서해 주시지 않을 것 같으니……."
홍칠은 다섯 주자한테 억지로 몰려 하는 수 없이 솜씨를 보인다는 뜻으로 말했다. 그러나 그 말에는 이렇게 된 것이 은근히 기쁘다는 기색도 담겨 있었다.
홍칠이는 요리감을 한줌 척 쥐고 말했다.
"그럼 주제넘지만 이름 높은 다섯 나으리들 앞에서 잔재주를 피워 보겠습니다."
그는 요릿감들을 솥에 넣어 날쌔게 요리를 볶아 대기 시작했다. 불이 이글이글 타는 부뚜막에서 국자 부딪치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리더니 홍칠은 삽시간에 요리 한 가지를 볶아 냈다.
홍칠은 아까 다섯 주자가 하던 것처럼 국자를 다섯 주자들에게 던져 빙그르르 들게 했다. 기름이 지글지글 끓는 소리와 함께 고소한 냄새가 풍겨 왔으나, 다섯 사람은 그 요리의 과정을 일일이 볼 수가 없었다.
홍칠은 다시 탁자 위로 국자를 던져 국자 안의 요리가 접시에 딱 알맞게 부어지게끔 재주를 부렸다. 그런데 그 솜씨가 묘수인주의 솜씨보다 더 정확하고 아름다운 것이 아닌가. 다섯 명은 부지중에 환성을 질렀다.
묘수인주는 홍칠이 만든 요리를 맛보더니 그를 뚫어지게 보았다. 구양봉은 가슴이 철렁해서 생각했다.
'저 묘수인주의 눈빛으로 보아 아무래도 요리 맛이 틀린 것 같은데……. 홍칠이가 홍안루의 소씨 거렁뱅이가 아니라고 저렇게 쏘아보는 거야.'
그런데 묘수인주가 갑자기 소리쳤다.
"그 맛 참 좋다!"
세상에! 저 묘수인주가 봉사란 말인가? 홍칠이 솜씨와 소씨 거렁뱅이의 솜씨를 가려 내지 못하다니. 구양봉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나머지 네 사람도 그 요리를 입에 넣고 약 먹듯 씹어 삼켰다. 한 사람은 씹다가 손바닥에 뱉어 내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보기까지 했다.
"자네가 만든 요리는 강산이개가 틀림없어. 확실히 소씨 거렁뱅이 솜씨군. 그런데 자네가 진짜 소씨 거렁뱅이인가?"
묘수인주가 느닷없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그럼 좋아. 이제 그만 가 보게."
그 말을 들은 구양봉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어쩌면 홍칠이가 진짜 소씨 거렁뱅이인지도 모르지. 홍칠이라는 이름이 가명이고. 에라, 이름이 무슨 상관이냐. 가짜고 진짜고 간에 황궁을 벗어나게 되었으면 그만이지.
둘은 바삐 걸어 나갔다. 그런데 그들이 문가에 다다랐을 때 뒤에서 벼락치는 소리가 났다.
"게 섰거라!"
할 수 없이 둘은 우뚝 섰다. 구양봉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제발 무슨 변이 없어야 하는데……. 묘수인주의 생각이 변했다면 야단이다.
"소씨 거렁뱅이가 홍안루 사람인 것도 사실이고 네가 만든 강산이개 요리도 틀림이 없다만, 너는 소씨 거렁뱅이가 아니다."
구양봉은 무엇으로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멍했다.
그런데 홍칠은 태연하게 몸을 돌리며 물었다.
"내가 소씨 거렁뱅이가 아닌 줄 어떻게 아셨습니까?"



제5장 칼과 국자
홍칠은 이번엔 정말 제대로 걸렸구나 생각하면서도 짐짓 얼굴에 웃음을 띠고 다섯 사람을 향해 말했다.
"소씨는 거렁뱅이 출신이고 보다시피 나도 거렁뱅이입니다. 소씨의 '강산이개' 요리가 뛰어나다고들 하지만 내가 만든 요리도 그에 못지않구요. 소씨도 나도 같은 거렁뱅이인데 뭐가 달라 내가 소씨 거렁뱅이가 아닌지 말해 보십시오."
묘수인주가 침묵을 지키고 있자 옆에 서 있던 둘째 나으리가 입을 열었다.
"형님, 이 놈 영 마음에 안 드는데 혼쭐을 내줄시다."
홍칠은 둘째 나으리가 이가 갈리도록 미웠다.
'이 녀석, 이 홍칠 할배가 어떤 사람인지 네까짓 놈이 어찌 안단 말이냐? 먹고 놀기 좋아하는 것과 제멋대로 하길 즐기는 것을 제외하곤 이 칠공은 천하에서도 제일 훌륭한 호인이란 말이다.'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홍칠은 온 얼굴에 웃음을 바르고 둘째 나으리한테 말했다.
"이분은 틀림없이 둘째 나으리군요. 황궁의 다섯 나으리가 모두 대단한 분들이란 소문을 듣고 난 꼭 이곳에 와서 다섯 나으리들을 뵈려 했었지요."
사람이란 누구나 자기를 칭찬하는 말을 듣기 좋아하게 마련이다. 둘째 나으리도 예외가 아니었다. 자기를 추켜 주는 말을 듣자 내심 흐뭇하여 얼굴 근육이 절로 풀어지면서 한 가닥 웃음이 피어났다. 그는 홍칠에게 말했다.
"우리들이 비록 황궁의 요리사이긴 하지만 강호의 동업자들은 모두 우리 체면을 봐 준다. 네가 누구인지 어서 말해라."
홍칠은 썩 내키지 않았으나 자기 이름을 알려 주고 말았다.
"난 거지 무리에 속하는 사람인데 이름은 홍칠이고, 모두들 홍칠공이라 부릅니다."
홍칠의 이름을 듣자 다섯 사람은 깜짝 놀랐다. 홍칠공이라면 거지 무리의 장로(長老)로서 나이는 젊지만 강호에서 꽤나 명망 있는 사람이 아닌가? 그는 거지 무리에서 유일하게 젊고 재능 있는 자였다. 강호의 인물들은 모두 마대를 여덟 개나 달고 다니는 그를 알고 있었다. 그가 진짜 홍칠공이라면 명성이 소씨 거렁뱅이보다 높으면 높았지 결코 낮지는 않을 텐데 하필이면 소씨로 가장할 건
뭐란 말인가?
셋째 나으리가 한마디 물었다. 훨씬 온화해진 말투였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소씨로 가장했소? 그리고 강산이개 요리 솜씨는 어디서 배운 거요."
홍칠은 솔직히 말했다.
"소씨 거렁뱅이는 나의 사부요. 난 사부님한테서 배웠소."
다섯 사람은 내심 몹시 감탄했다. 소씨만한 스승이라면 홍칠과 같이 뛰어난 제자가 나오게 마련이지! 그 스승에 그 제자라더니, 과연!
홍칠은 구양봉을 힐끔 보고는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무예실력은 보잘것없지만 그는 시종 당황한 기색 하나 없이 태연자약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비록 무예는 시답잖지만 상황에 대응하는 능력이 대단하군. 게다가 이 사람은 무엇이든 빨리 깨치는 총기가 있어! 이후 적당한 기회를 만난다면 필시 무림의 기재(奇才)가 될 수 있겠어?'
이때 줄곧 말이 없던 다섯째 나으리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홍칠이라 했지요?"
홍칠은 그를 눈여겨보고 나서 그가 다섯 사람 중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짐작하고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렇소, 내가 바로 홍칠이오."
"나도 당신이 홍칠이란 걸 믿소. 홍칠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같이 훌륭한 실력을 갖고 있겠소?"
네 사람 모두 머리를 끄덕이면서 다섯째 동생의 말에 동감을 표했다. 홍칠이가 아니고서는 누구도 그렇게 완벽한 솜씨를 갖지 못할 것이다. 강산이개 요리를 만들 때 몇 가지 동작은 상당히 높은 기교가 필요했던 것이다.
다섯째 나으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은 소씨 거렁뱅이처럼 요리 만들기에만 마음이 끌린 사람 같지 않구려. 당신은 한 가지 일에만 전념할 사람이 아니라서 한 자리에 오래 붙박여 있지 못할 거요, 안 그렇소?"
"다섯째 나으리, 난 정말 요리 기술을 배우러 왔소. 이건 거짓이 아니오."
이 말을 하면서 홍칠은 내심 부끄러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만약 이들에게 들통이 나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찌 차마 음식을 훔쳐 먹었다고 사실대로 말한단 말인가?
총명한 다섯째 나으리는 그의 의중을 꿰어 보았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이 정말로 우리의 요리 솜씨를 보러 왔다면 몰래 숨어 들어 올 필요가 없었지요. 한마디 말만 했어도 우리들이 모셔 들였을 테니까요. 하지만 우리들이 발견했을 때 당신은 천장에 매달려 있었으니 이해가 안 가는군요."
다섯째 나으리의 말은 분명 홍칠을 공격하는 말이고 홍칠도 그것을 빤히 알고 있었으나 짐짓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물었다.
"다섯째 나으리, 그 말이 무슨 뜻이오?"
다섯째 나으리는 되받아 말했다.
"제 말은 당신이 이곳에 음식을 훔쳐 먹으러 왔단 말씀입니다. 홍칠공의 식탐이 대단하다는 걸 모르는 이가 어디 있소?"
이 말을 듣고도 홍칠은 성을 내기는커녕 허허 웃으며 말했다.
"다섯째 나으리, 당신 말대로라면 천하가 이 홍칠이 먹보라는 걸 안단 말이오?"
"그럼요. 당신은 먹는 욕심이 대단한 사람이니 황궁의 요리를 탐내는 게 당연하다 이 말이오."
"하하하! 그렇게 다 알면서 뭘 자꾸 캐묻는 거요?"
홍칠은 크게 웃으며 대꾸했다.
묘수인주는 혼자 생각했다.
'이 놈은 먹을 것이 탐나서 이곳까지 왔구나. 어선방에서 음식을 좀 훔쳐먹었을 뿐이라면 대단한 일이 아니지. 하지만 이 놈이 다른 심보를 품고 왔다면 그건 간단한 일이 아니지.'
어쨌든 자기들 다섯 명을 안중에 투지도 않고 쥐새끼처럼 어선방까지 기어들었다는 생각을 하자 그는 이가 갈릴 정도로 분했다. 게다가 그 정도의 무공을 가진 자라면 이번이 처음이 아닌 것이 뻔했다.
둘째가 묘수인주의 속마음을 알아채고 홍칠에게 물었다.
"당신은 이곳을 제집 드나들듯 들락날락한 모양인데, 우리 다섯 사람을 죽은 자로 생각한 모양이구려."
홍칠은 걸려든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얼굴을 붉혀 가며 그들과 싸울 생각이 없었다. 그러다가 그들의 노여움을 사면 더 이상 좋은 말로 구슬리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홍칠은 얼굴이 굳어진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큰 나으리, 둘째 나으리, 당신들 하고픈 대로 말해 보시오. 내가 다 받아들일 테니까."
홍칠은 다섯 사람을 하나하나 바라보고 생사를 건 싸움을 벌여야겠다고 각오했다.
'에이, 구양봉을 안 데려왔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어. 나 혼자라면 다섯 놈뿐만 아니라 황궁 놈들이 모두 달려든대도 두려울 게 없어! 내가 손을 쓰기만 하면 네깟 놈들이 바람을 타고 줄행랑을 놓는다 해도 도망가지 못할걸!'
그러나 그는 처음에 약속한 대로 구양봉을 돌봐 주어야 했다.
이때 다섯 사람의 주의가 구양봉에게 돌려졌다. 다른 것은 제쳐놓고 황제의 요리를 훔쳐먹으러 황궁에 들어온 것만 봐도 보통이 넘는 담력의 소유자였다. 홍칠은 말할 것도 없고 줄곧 침묵만 지키고 있는 이 사람도 천하 제일의 실력자임에 틀림없었다.
둘째 나으리가 말문을 열었다.
"홍칠, 잔말 할 필요 없소. 당신이 우리 형제의 관문을 넘으면 보내 드리지. 어떻소?"
홍칠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네깟 놈들 손에서 벗어나는 게 무슨 대수냐? 네 놈들과 맞붙기만 하면 될 일인걸! 못 당해 내면 내빼면 되고. 하지만 이 멍청이는 혼자 몸을 뺄 수 없을 게 분명하니 내가 무슨 방도로 구해 준단 말인가?'
홍칠은 잠시 주저하며 궁리를 해 보았다. 그는 자기가 손을 쓰면 구양봉에게 해가 돌아가리란 걸 알고 있었다.
둘째 나으리가 또 질문을 던졌다.
"이 사람은 누구요?"
홍칠은 구양봉이 서역에서 왔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들에게 내막을 알려 주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들이 구양봉과 붙으면 그의 실력이 드러나고 말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구양봉과 맞붙지 못하게 하려면 자신이 모든 걸 알아서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분은 내 친구인데, 내가 이분을 청해 궁중의 음식을 맛보게 한 것이오. 당신들이 죄를 따져 사람을 죽이려거든 날 죽이시오. 이 사람과는 상관이 없소."
그러나 구양봉은 홍칠의 의도를 짐작하지 못하고 얼른 말했다.
"난 구양봉이라고 하고 서역 백타산 출신이오."
묘수인주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당신은 서역에서 맛좋은 음식을 입에 대 보지도 못한 모양이군?"
그는 매우 득의양양하게 말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둘 모두 별볼일 없는 놈들이야. 한 놈은 거지에 불과하고 다른 한 놈은 황야에서 온 야만인이잖아.'
셋째 나으리가 음흉한 웃음을 띠고 말했다.
"홍칠, 난 당신이 강호에서 유명한 사나이라는 걸 잘 알고 있소. 하지만 황궁에 들어오면 아무리 날고 뛰는 재주가 있어도 소용없지. 당신이 이곳에서 영웅 행세를 하려는 생각이라면 부질없는 짓이야."
그들과의 입씨름에 싫증이 난 홍칠은 가벼운 기합 소리를 내며 다섯 사람을 향해 덮쳤다. 대번에 다섯 사람 앞에 이른 그는 큰 나으리를 치는 척하다가 둘째 나으리를 향하여 주먹을 날렸고 곧이어 셋째 나으리에게 손을 뻗치는 동시에 넷째 나으리를 향해 발길을 날렸다. 마지막으로 손을 뻗어 다섯째를 한 방 먹였는데 이번에는 손을 좀 심하게 쓴 편이었다. 한마디로 그들 다섯 사람을 한주
먹에 때려부술 기세였으니 네까짓 놈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뜻이었다.
평소에 거들먹거리고 우쭐대는 데 익숙한 다섯 사람은 화가 나서 얼굴이 창호지처럼 새하얗게 질렸다. 그들은 홍칠을 대번에 죽여 버릴 기세로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묘수인주는 칼과 국자를 능숙하게 다루었는데 그것은 그가 수년간 요리를 만들면서 익힌 재주였다. 그는 왼손에 칼을 들고 오른손에는 국자를 잡고 있다가, 칼을 휘둘러 홍칠의 살점을 도려내고 국자로는 그것을 건져 담으려 했다. 그가 칼을 빨리 휘두를 때면 국자가 느리게 움직였고 국자를 빨리 휘두를 때면 칼이 느리게 움직였다. 칼을 빨리 쓸 땐 힘이 무진장했고 국자를 빨리 휘두를 땐
그 힘의 쓰임이 정화했다. 과연 황궁 제일의 요리사다운 솜씨였다.
둘째 나으리는 입가에 냉소를 머금고 무기를 휘둘렀는데, 그가 쓰는 것은 이상하게 크고 긴 솔이었다. 이 솔에는 서른 여섯 갈래의 가는 철사가 꽂혀 있었다. 이 철사는 남쪽 변강에서 나는 적철로 만든 것으로서 굳고 질기기가 말할 수 없었다. 이 솔로 사람의 몸을 후벼 놓으면 죽진 않는다 해도 크게 상했다. 둘째 나으리가 휘두르는 솔이 쉭쉭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연신 홍칠의 몸에 와
닿으려 했다.
셋째 나으리는 아무런 무기도 사용하지 않고 주먹으로 홍칠을 때려눕히려 했다. 그의 괴력은 대단한 것이어서 가마솥에 대고 한 방 먹이면 가마솥이 오그라질 정도였다. 그는 이를 악물고 아무말 없이 주먹만 휘둘렀다. 주먹이 공기를 스치는 소리가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넷째 나으리도 그에 못지않은 괴짜였다. 손을 뻗고 다리를 차는 하나하나의 동작이 매우 굼떴는데, 동작을 하면서 그는 커다랗게 소리를 질렀다.
"어디 한번 맞아 볼래?"
이 소리는 홍칠에게 묻는 것이 아니라, 이 소리에 맞춰 자기의 동작을 조화시키는 수단이었다. 그는 자기 동작이 마음에 들었는지, 주먹을 뻗을 때마다 꼭 자기 주먹을 들여다보곤 했다. 그 모양이 자신의 실력에 대해 매우 자신만만한 듯 보였다.
다섯째 나으리도 남다른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먼 옷에 서서 갈고리로 마른 낙엽을 건지는 모양을 지어 보였는데, 그 낙엽이란 다름아니라 홍칠이었다.
이 다섯 사람은 저마다 무예가 비범했고, 평소에 함께 싸운 적이 많아 손발이 척척 맞았으며, 동작이 세련되어 있었다. 다섯 사람이 동시에 손을 쓰는 데다 병기까지 사용하니 홍칠은 마치 철벽에 둘러싸인 듯했다.
홍칠은 자기가 선수를 치면 크게 이득을 볼 것으로 계산했었는데 실은 정반대가 되고 말았다. 다섯 사람과의 첫번째 싸움에서 그는 우세를 점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차례나 위험에 봉착했다. 쇠솔이 쉭쉭 뱀 소리를 내며 어찌나 악착스럽게 달라붙는지 하마터면 쇠솔에 머리를 긁힐 뻔했다.
다섯 사람은 그때까지도 구양봉을 내버려두고 있었다. 가끔 옆 눈으로 흘끔 건너다볼 뿐이었다. 만약 구양봉이 달려들면 그때는 두 패로 갈라져 구양봉과 싸울 작정이었다. 아직까지 구양봉이 대들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그들도 별로 신경 쓰지 않은 것이다.
이때 구양봉이 급하게 소리질렀다.
"여러분, 그만들 하시오! 내가 할말이 있소이다!"
그는 그때까지도 자신과 홍칠이 이 다섯 사람을 잘 구스르기만 하면 자기들을 놓아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구양봉은 홍칠보다 머리가 훨씬 명석했으므로 사태를 손금 보듯 알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이들 다섯 사람이 큰소리를 내지 않아서 사람들이 모여들지 않고 있지만, 시간을 끌면 사람들이 모여들 게 뻔했다. 일단 사람들이 몰려들면 홍칠은 몸을 뺄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구
양봉이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누구도 들은 척하지 않았다. 다섯 사
람은 홍칠을 기어이 때려눕혀 고분고분하게 만들 작정이었다. 지금 그들은 전력을 다해 홍칠을 대적할 일념뿐, 다른 것은 고려하지도 않았다. 만약 구양봉의 무예가 높았다면 대처하기가 퍽 쉬웠을 것이다. 그가 손을 써서 다섯 사람의 힘을 분산시킨 다음 일부를 자기 쪽으로 끌어 오면 될 것 아닌가? 구양봉은 몇 차례나 달려들었지만 다섯 사람의 강력한 반격을 받아 쫓겨 나왔다. 그는 휘
둥그래진 눈으로 여섯 사람이 한데 어울려 치고 받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홍칠은 이미 자기와 구양봉이 몸을 빼기 어렵게 되었다는 것을 간파했다. 그는 온몸에 경상을 입어 붉은 피가 도포자락을 적시고 있었고 발길질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는 힘껏 주먹을 휘둘렀으나 다섯 사람 누구도 그와 죽기살기로 싸우려 들지 않고 거리를 두어 애만 먹일 뿐이었다. 만약 한 사람이라도 홍칠에게 빈틈을 보여 얻어맞게 되면 나머지 네 사람이 달려들어 그를 구해 내곤
했다. 홍칠이 아무리 애를 써도 그들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상황이 이랬으므로 구양봉도 목숨을 걸고 다섯째 나으리한테 달려들었다. 주먹이 다섯째의 갈고리에 걸러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섯째와 넷째에게 죽기살기로 달려들었다. 그의 뚝심은 대단했으나 무예가 여물지 못한 탓으로 주먹이 사람 몸에 떨어지면 살가죽이 아픈 정도에 머물 뿐 사람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구양봉 자신이 다섯째 나으리의 갈고리에 걸려 옷
이 죄다 찢어지고 피와 살이 범벅이 되어 버렸다. 크게 상한 데는 없지만 보기에 끔찍스러웠다. 구양봉은 야수처럼 울부짖으며 앞뒤 가리지 않고 다섯째를 향해 덤벼들었다. 다섯째는 구양봉의 야수같은 모양을 보고 놀라 뒤로 몇 걸음 물러섰는데, 그 바람에 그만 구양봉에게 길을 내주게 되었다. 구양봉은 홍칠이 옆으로 달려가 두 사람이 서로 도우면서 다섯 사람과 싸웠다.
홍칠은 숨이 차서 헐떡거리며 생각했다.
'이번에 내가 정말 망신했구나! 큰 강과 바다도 어렵지 않게 건너던 배가 황궁에 와서 시궁창에 뒤집힌 꼴이 되었으니, 이 소문이 새어 나가는 날에는 사람들이 뭐라고 할 것인가? 이 홍칠이 식탐을 부리다 결국 음식 가마 옆에서 개죽음했다고 욕할 텐데, 이 창피를 어이할꼬?'
어쨌거나 다섯 요리사의 솜씨도 워낙 대단한 것이었으므로 용빼는 재주가 없었다. 큰 나으리와 둘째 나으리는 내공에 정통하여 국자를 뒤흔들면 말 그대로 바람 샐 틈 없이 잽쌌고 동작 또한 현묘했다. 음흉한 셋째와 넷째는 연신 냉소를 머금으며 홍칠을 도륙하려 들었고, 다섯째는 언제나 틈을 노리다가 진공해 왔는데 그가 멀찌감치 서서 뿌린 갈고리에 걸려 드는 것은 낙엽이 아니라 사람
의 살과 피였다. 이들이 어디 밥 짓고 요리하는 요리사란 말인가? 사람을 잡아 지옥에 보내는 악귀 들이지.
홍칠과 구양봉은 자기들에게 불리한 상황을 간파하고 나니 그만 맥이 탁 풀렸다. 홍칠이 풀쩍 뛰어 탁자 가장자리로 올라서서 외쳤다.
"잠깐만 기다리시오. 난 더 이상 싸우지 않고 싶소!"
다섯 사람은 홍칠이 잔꾀를 부리려 한다는 걸 알아챘지만 별로 개의치 않고 그의 말을 기다렸다.
홍칠은 말을 이었다.
"당신들은 그래도 강호에서 이름값을 한다는 인물들인데, 너절한 거지와 타지에서 온 미욱한 사람을 때려죽여 봐야 좋을 게 뭐요? 그러니 나를 내보내 주시오. 난 나대로 계속 거렁뱅이짓을 하고, 당신들도 여전히 요리사 노릇을 하면서 살 수 있도록 좋게 끝내는 게 어떻소?"
묘수인주가 빙그레 웃으며 말을 받았다.
"홍칠, 자네가 거지 무리의 장로라니까 하는 말인데, 황궁의 어선방이 그다지 대단한 곳은 못 되지만 당신이 제멋대로 행패를 부릴 곳은 아니오."
둘째 나으리가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
"홍칠, 우리 형제들의 술안주로 한쪽 귀를 남겨 놓고 가구려."
그러자 한켠에 섰던 다섯째가 홍칠과 구양봉을 동정하는 척하며 참견했다.
"귀를 베다니요? 거렁뱅이가 오관마저 온전치 못하면 얼마나 꼴불견이겠소? 차라리 손가락을 한 개 끊어 놓는 것이 낫지요."
그러자 홍칠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구양 형을 보내 준다면 당신들과 결판을 내겠소."
구양봉은 속으로 몹시 놀라며 한탄을 했다.
'재주도 시답잖은 내가 무슨 정신에 홍칠을 따라 황궁에 뛰어들었을까?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도망갈 수도 없고 남아 있을 수도 없고……. 어찌한단 말인가?'
하지만 서역의 사막에서 잔뼈가 굵은 구양봉 역시 세상의 어려움을 겪을 만큼 겪었고 세속의 비바람도 맞을 만큼 맞은 사람이었으므로 마음을 굳게 먹었다.
구양봉은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쥐고 홍칠에게 읍하며 말했다.
"홍칠공, 나와 당신은 서로 생판 모르는 사이였으나 오늘 이 일을 겪고 나서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이곳에서 죽는다면 나 구양봉은 꼭 이 다섯 사람을 죽여 버릴 것을 맹세합니다!"
홍칠은 구양봉이 이렇게까지 의리 있는 사람이리라곤 짐작하지 못했으므로 얼마간 감동되었으나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그만둬요! 당신은 여기서 나가기나 하시오. 미욱스럽긴 하지만 마음씨 하나만은 바르게 가졌군. 하지만 그까짓 재주를 갖고는 죽을 때까지 배워도 이 다섯 사람을 이기지 못할 거요!"
묘수인주가 입을 열었다.
"홍칠, 결단을 내리시오. 귀를 내놓겠소, 아니면 손가락을 내놓겠소? 그리고 당신은……."
그는 구양봉을 가리키더니 큰소리로 말했다.
"당신도 홍칠과 똑같이 해야 하오!"
다섯 사람은 구양봉과 홍칠을 에워싸고 끝없이 지껄여 대고 있었다.
바로 이때 삐걱하는 소리가 들려 와서 모두들 그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누가 열지도 않았는데 어선방 문이 저절로 열리면서 소리를 내는 것이 마치 귀신이 와서 미는 듯했다. 이미 자정이 지난 시간이었으므로 사람들 모두 놀랍고 무서워서 문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둘째 나으리가 용기를 내어 소리쳤다.
"누구냐? 나와라!"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머리를 돌려 보니 탁자 위에 한 사람이 우뚝 서 있었다. 그 사람은 머리에 기름때가 번질번질한 모자를 쓰고 머리카락은 몹시 길었으며, 수염을 세 가닥 길렀는데 입고 있는 두루마기는 너무나 때가 끼어서 흰색인지 검은색인지 도무지 분간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바지는 두 가닥 푸대자루 같았으며 발목은 아예 신 속에 묻혀 있었다. 그 사람은 가부
좌를 틀고 앉더니 손에 곰방대를 들었다.
"사부님!"
홍칠이 그에게 넙죽 절을 했다.
다섯 요리사는 곧 그를 알아보았다. 바로 그 유명한 홍안루의 요리사 소씨 거렁뱅이였던 것이다.
소씨 거렁뱅이는 껄껄 웃어대면서 손뼉까지 쳤다.
"역시 황궁이 다르긴 다르군! 황제한테 요리를 해주면 사람마저 인정머리 없이 변하는 모양이지? 이봐, 그 동안 잘 지냈나?"
소씨 거렁뱅이는 다섯 나으리들을 한 사람씩 짚어 가면서 꾸짖었다.
"첫째 네 놈은 아직도 날마다 사람의 생고기를 달달 볶는 수작을 하고 있겠지? 둘째 네 놈은 날마다 칼놀이를 하면서 뼉다구를 찍는 버릇을 기르고 있겠고? 셋째 너 이 놈, 삼 년 전에 네 놈이 흑풍의 어깻죽지로 불고기를 만들었는데 너무한 거 아니냐? 그리고 다섯째, 너는 남의 물건을 잘 탐내지? 사람 고기를 삼키고 뼈도 안 뱉어 낼 녀석 같으니라구! 너희들 자신 있으면 나와 결판을 내
보자!"
다섯 사람은 소씨 거렁뱅이를 보자 덜컥 겁을 집어먹었다. 구양봉은 별로 특이하게 생기지도 않은 늙은 거렁뱅이를 다섯 사람이 무서워하는 꼴을 보고 속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소씨는 홍칠을 보고 외쳤다.
"홍칠아, 너는 뱃속이 허전하면 홍안루에 와서 한 끼 먹을 일이지 왜 이곳까지 들어왔느냐? 너도 알겠지만 이 다섯 사람은 개에 불과하다. 그것도 어디 평민 집의 개들이더냐? 황제의 문지기 개지! 개란 워낙 흉악스러운 법이거늘, 황제의 개야 더 말할 여지가 있느냐? 어쩌자고 개들을 건드린 게야?"
소씨 거렁뱅이는 입을 열자 다섯 사람을 마구 욕해 댔다. 다섯 사람은 부아가 치밀었으나 감히 입을 열지는 못했다.
소씨는 다섯 사람이 침묵을 지키자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
"다섯 마리의 개가 동시에 달려들어도 나는 너희들을 당장에 없애 버릴 수 있어. 몽둥이로 말이야!"
다섯 나으리는 눈길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마음을 읽었다. 오늘 일은 이대로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이 소씨 거렁뱅이와 결판을 내지 않는다면 이후 어떻게 강호에 발을 붙일 수 있겠는가? 다섯 사람은 곧 마음을 합치고 말했다.
"좋다, 소씨! 우리 오늘 결판을 내 보자!"
소씨는 키들키들 웃었다.
"네까짓 놈들이 감히 나와 한판 붙겠다구?"
자정이 넘은 어두운 밤에 황궁의 어선방에서 생사를 건 혈투가 벌어질 찰나였다. 묘수인주는 침착한 표정으로 아궁이로 걸어가더니 이글이글 타고 있는 난로 안에서 빨갛게 타는 숯덩이를 꺼내 두 손에 하나씩 올리고는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숯덩이가 손바닥의 살을 태우는가 싶더니 삽시간에 온 방에 고기 타는 냄새가 풍겼다. 묘수인주가 두 손을 지켜 보는 중에도 연기는 끊임없이 피
어 올랐고 숯덩이도 점차 꺼멓게 변해 갔다. 여러 사람이 다시 묘씨의 손을 보니 그의 손바닥은 온통 울퉁불퉁한 물집이 잡혀 보기에도 끔찍했다. 묘수인주가 두 손을 가볍게 틀어쥐자 숯은 금방 가루가 되어 손가락 틈새로 푸시시 흘러내렸다.
구양봉과 홍칠의 표정에는 마치 못 볼 것을 본 듯한 기색이 떠올랐다. 남과 실력을 견주려면 진짜 실력을 겨뤄야지, 이거야 자신을 학대하고 못 견디게 구는 격이니, 이럴 필요야 있는가?
묘수인주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씨, 당신도 해 보시오!"
소씨 거렁뱅이는 여전히 히죽거리며 소리쳤다.
"아이구, 야단났네! 거렁뱅이가 이 세상을 살아가자면 제일 불쌍한 것이 바로 이 두 손이 아니겠나! 귀한 물건이라곤 쥐어 보지도 못한 이 손으로 오늘은 불타는 숯덩이까지 쥐라고 하니, 이야말로 날 태워 죽일 셈이 아닌가."
입으로는 이렇게 지껄이면서도 그의 몸은 어느새 난로 옆에 가 있었다. 그도 묘수인주처럼 불타는 숯덩이를 집어 들고 두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그러나 두 눈엔 여전히 장난기가 번뜩이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놀라는 한편 의아스러웠다. 소씨의 손아귀에서도 숯이 타고 있는데 우선 살이 타는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고, 연기도 나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자세히 살펴보니 깍지낀 두 손의 손가락 살이 숯과 닿지 않았던 것이다.
셋째 나으리가 그걸 알아채고 큰소리로 질책했다.
"소씨 어른, 당신처럼 명성이 높은 인물이 속임수를 쓰면 되겠소?"
소씨 거렁뱅이는 휘둥그래진 눈으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어쨌기에 그 야단이냐? 이 숯이 이상해서 내가 아무리 쥐어도 손에 닿지 않는단 말이야. 자, 보라구!"
화가 치민 다섯째 나으리가 소씨의 두 손을 꽉 움켜쥐어 살을 숯불에 지지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소씨의 손을 힘껏 쥐어도 숯은 여전히 소씨의 손바닥을 태울 수 없었다.
묘수인주가 큰소리로 외쳤다.
"다섯째, 그만 물러나게!"
다섯째는 기가 꺾여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묘수인주가 말을 이었다.
"이보시오, 소씨. 우리 다섯 사람은 이제까지 당신을 강호의 선배로 존경해 왔으니 더 이상 난처하게 굴고 싶진 않소. 비록 황궁에 기탁한 몸들이지만 우리 역시 강호에서 세력이 있는 패거리란 말이오. 당신들 거지 무리와 내왕할 때 우린 이제까지 조심스럽게 일처리를 해 왔소. 하지만 사람마다 일처리가 공정해야지, 어찌 당신만 이득을 볼 수 있겠소? 우리가 화를 내는 것은 바로 그 때문
이오!"
소씨 거렁뱅이는 엄숙하게 말했다.
"좋소! 그럼 어떻게 처리하면 공정한지 당신이 말해 보시오!"
묘수인주를 비롯한 다섯 사람 모두 자기들의 실력이 소씨보다 한수 아래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분한 마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한동안 쑥덕공론을 하더니 둘째 나으리가 말했다.
"우리 일동은 금년 추시(秋時) 8월에 소 선배, 홍칠 형과 숭산에서 만나기로 결정했소. 그때 가서 이 일을 결판 내려 하니 두 분께선 기일을 어기지 말기 바라오!"
소씨 거렁뱅이는 그 자리에서 그렇게 하마고 대답했다.
소씨가 앞장서자 홍칠은 구양봉을 옆구리에 끼고는 천천히 몸을 날려 황궁의 지붕으로 뛰어올라 단숨에 서까래를 넘었다. 다섯 사람은 눈을 똑바로 뜨고 지켜 보았으나 달빛 아래 검은 그림자가 스치는가 싶더니 곧 사라지고, 사람의 그림자라곤 찾아볼 길이 없었다.
황궁을 벗어난 세 사람은 큰 거리를 나는 듯이 지나가 버렸다. 그들은 성벽을 미끄러져 내린 다음 다시 경공을 써서 성 밖으로 벗어났다. 거의 반 시간 동안 달린 뒤에야 숲에 당도하여 쉴 수 있었다.
홍칠은 소씨 거렁뱅이 앞에 공손히 서서 그의 꾸중을 들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소씨 거렁뱅이는 눈을 감고 가부좌를 튼 채 함구무언이었다.
홍칠은 겁이 나서 조심조심 물었다.
"사부님, 무슨 가르침이 있으시든지 제자 꼭 명심하겠습니다."
소씨는 냉랭하게 말을 받았다.
"홍칠, 자네도 이젠 거지 무리의 장로가 아닌가? 어찌하여 아직도 음식을 탐하는 습성을 고치지 못하나? 황궁을 들락거리면서 우리 거지 무리와 내 얼굴에 먹칠을 하다니……."
구양봉은 말없이 그들 사제간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소씨 거렁뱅이가 입을 열자마자 홍칠을 훈계하고, 홍칠은 또 고개를 숙이고 아무런 변명도 못하고 있는 모양이 하도 딱해서 그가 나섰다.
"소 선배님, 선배님께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할말이 있소?"
구양봉은 중원에 와서 이상한 사람들을 만나 보았다. 제일 처음 만난 사람은 동해 도화도 주인 황약사와 일속이라는 중이었고 두 번째로 만난 사람이 홍칠과 소씨 거렁뱅이인데, 이 사람들이야말로 중원 무림의 최고 실력자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무림의 호걸들을 통틀어 보아도 그들 네 사람과 실력을 견줄 만한 이가 몇 안 된다는 것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는 강호
의 인물이 모두 홍칠이나 소씨 거렁뱅이처럼 뛰어난 무예 실력을 갖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그만 낙심하고 말았다. 기백 있는 사나이로 자처하던 자기가 다른 사람의 호주머니 속에 들어간 인형처럼 끌려 갔다가 끌려 나왔으니 그야말로 창피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사정이었다. 그는 소씨 거렁뱅이에게 말했다.
"소인은 비록 황량한 곳에서 왔지만, 어릴 적부터 교육을 받았고 예절도 다소 알고 있습니다. 소 선배께서 칠공에 대해 불만스럽게 여기고 계시지만 이번 일은 칠공만 탓할 게 아닙니다. 소인이 칠공에게 황궁의 정경에 대하여 물으면서 따라갔기 때문에 그만 부담거리가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제가 따라가지 않았다면 칠공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을 겁니다. 그랬으면 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구양봉이 태연하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별안간 커다란 괴성이 들렸다. 점잖게 앉아 있던 소씨가 벌떡 일어나 고함을 질렀던 것이다.
"이 녀석, 너 방금 홍칠을 뭐라고 불렀느냐?"
소씨 거렁뱅이는 화가 나서 발을 탕탕 구르고 홍칠에게 삿대질을 하면서 큰소리로 욕했다.
"빌어먹을 녀석! 이마에 피도 안 마른 놈이 벌써부터 할애비 행세를 해! 네가 칠공이면 난 뭐냐?"
소씨는 손가락으로 홍칠의 코를 찔러 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홍칠은 이거 야단 났다고 생각하면서도 얼굴엔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어이구, 저 미련퉁이가. 정말 귀찮게 구는군! 하필이면 우리 늙다리 앞에서 칠공이라고 부를 게 뭐야?'
속으로는 이렇게 씨부렁거리면서도 그는 온 얼굴에 웃음을 듬뿍 띠고 머리를 조아렸다.
"사부님, 사람들이 저더러 칠공이라 부르는 건 제 얼굴이 늙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사부님이야 암만 해도 늙지 않으시니……."
소씨 거렁뱅이는 더욱 화가 나서 소리질렀다.
"이제 보니 네 놈은 내가 빨리 늙어 죽길 고대하고 있었구나!"
소씨는 다짜고짜 홍칠을 때리기 시작했다. 그는 우선 거지 무리 장로들의 전통적 무예인 강룡십팔장의 제1초 항룡유회 수법으로 냅다 갈겼다. 손바닥을 곧게 세운 다음 앞으로 내밀자 팍 하는 소리와 함께 주위의 초목들이 우수수 흔들리는 것이 마치 천지가 진동하는 듯했다.
놀라서 얼굴색이 밀랍처럼 질린 홍칠이 훌쩍 몸을 솟구쳐 두 장도 넘게 뒤로 물러섰지만, 강룡십팔장 힘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신음 소리와 함께 기절하고 말았다.
구양봉은 깝짝 놀라 소씨 거렁뱅이에게 달려가며 외쳤다.
"야, 이 영감탱이야! 범도 제 새끼는 잡아먹지 않는다고 했거늘 넌 어쩌자고 자기 제자를 때려눕히는 거냐?"
소씨 거렁뱅이가 고함을 쳤다.
"네 놈이 감히 날 훈계해? 내가 한 번만 손을 쓰면 네 놈은 뼈도 못 추릴 거다!"
말을 마치자 소씨는 곧 손을 앞으로 모으고 길게 호흡하더니 공격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구양봉은 조금도 두려운 기색 없이 두 눈을 똑바로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한밤의 교교한 달빛 속에 살기가 번뜩이는 구양봉의 눈빛은 사람의 간담을 서늘케 하기에 충분했다.
소씨 거렁뱅이는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이 자식, 괜찮은 놈이군. 기골이 장대한데다 담력 또한 이만저만이 아니니 잘 가르치면 필시 큰 인물이 되겠는데!'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방금 전까지 치밀던 울화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는 구양봉에게 히죽히죽 웃으며 말을 건넸다.
"이보게, 구양봉, 나한테 무예를 배울 생각 없나? 자네가 원한다면 내가 자네의 스승이 되어 주지!"
그때까지도 분이 사그라지지 않은 구양봉은 씩씩거리며 되물었다.
"당신에게 무슨 무예가 있소?"
그 말을 들은 소씨 거렁뱅이는 다시 화가 났다.
"무슨 무예가 있냐구? 좋아, 그렇다면 이 어른이 네 눈을 번쩍 뜨게 해주지!"
때는 남송 효종 연간으로 조정은 밤낮 가무에 파묻히고 권세가들은 흥청망청 술만 들이키면서 사치스러운 생활을 일삼았다. 온 나라 구석구석에선 백성들의 원성이 그칠 새 없었고, 가난한 사람들은 갖은 고통을 당하면서도 하소연할 곳이 없었다. 평민들은 자신을 지킬 방도가 없었으므로 억울한 일이 생기면 강호의 무리들에게 도움을 청하곤 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거지 무리도 한때 온
세상을 쩡쩡 울리는 강호의 큰 실력파로 명성을 떨쳤다. 그런데 이 소씨 거렁뱅이가 바로 거지 무리 중에서 가장 실력 있는 장로였던 것이다. 거지 무리의 장로 겸 장문인 역할을 하던 사도의(司徒義)가 병으로 죽은 지 얼마 안 되었으므로 무리의 백사(百事)는 모두 소씨에 의해 처리되었고, 이에 따라 그는 자연히 무리에서 가장 위엄 있는 사람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시간이 흐르자 그도
교만해져서 남이 자기 허물을 잡으려 하면 펄펄 뛰었다. 그는 자존심이 이만저만한 사람이 아니어서 남을 쉽게 용납하는 성미가 아니었지만 그때는 스스로 구양봉에게 문예를 가르치겠다고 했으니, 이것은 그야말로 큰 은혜를 베푼 셈이었다. 그런데 구양봉이 그의 호의를 거절하고 감히 무예가 있냐고 물으니 누그러졌던 화가 다시 치밀었다.
'네까진 놈이 내 제자가 되든 안 되든 그게 무슨 대수냐? 너 같은 바보를 제자로 받아들였다간 내 속을 무던히도 썩여야 할 텐데 얼마나 골치 아픈 일이냐 말이야. 그건 그렇다치고, 이 소씨 어른을 무시해도 분수가 있어야지! 네 놈의 눈에 똥이 피어 태산을 못 알아보니 내 오늘 너의 눈을 번쩍 뜨게 해주겠다!'
여기까지 생각한 소씨 거렁뱅이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 놈, 내가 솜씨를 보일 테니 눈깔을 똑똑히 뜨고 봐라!"
소씨 거렁뱅이는 바른 자세를 취한 다음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하에 무림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많지만 각 패거리마다 자기의 장기를 갖고 있다. 우리네 거지 무리도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두 가지 재주를 갖고 있는데, 하나는 강룡십팔장이고 다른 하나는 타구봉법이다. 이 두 가지 모두 천하에서 가장 훌륭한 무예이니 잘 보아 두어라!"
말을 마치자 소씨 거렁뱅이는 천천히 자세를 바꾸면서 강룡십팔장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 동작들은 보기에도 강한 힘을 갖고 있어, 손을 쓰자마자 회오리바람이 일기 시작하더니 소씨를 에워싸고 바람이 불어닥쳤다. 그가 갑자기 손바닥을 곧게 세워 앞으로 내밀자 정면에 서 있던 작은 나무 한 그루가 뚝 부러지고 나뭇잎들은 죄다 떨어져 나가 방금까지 멀쩡히 서 있던 나무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소씨 거렁뱅이가 말했다.
"봐라! 방금 한 동작은 아까 한 동작과 다르지 않느냐? 이건 '견룡재전(見龍在田)'이라는 동작이지! 멋지다고 생각되지 않느냐?"
구양봉은 그가 손바닥만 한 번 펼쳤는데 굵은 나무들이 뚝뚝 부러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나무도 막 부러뜨리는 실력이니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아마 뼈가 부서지고 피가 쏟아져 죽고 말았을 거야!'
구양봉은 모골이 송연해져서 말을 하기도 무서웠다. 소씨 거렁뱅이는 장난삼아 부려 본 솜씨에 구양봉이 기가 질린 것을 보자 득의양양하여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내 실력을 모르니 내가 얼마나 무섭다는 걸 알 턱이 있나. 그래, 이젠 알 만하냐?"
구양봉이 대답했다.
"당신이 방금 한 동작은 정말 위력이 대단하군요. 그렇지만 헛기운을 쓰는 것 같아 그저 그런데요, 뭐."
소씨 거렁뱅이는 이 말을 듣고 탄식하며 생각에 잠겼다.
'바보 같은 녀석! 이처럼 대단한 위력을 가진 동작을 보고도 헛기운을 쓰는 것 같다니 참으로 가소롭구나. 보아하니 이 놈은 이처럼 날카롭고 맹렬한 동작에는 흥미가 없고 유연하고 날랜 동작을 즐기는 모양이로군! 내가 이제 타구봉법의 몇 가지 동작을 보여 주면 이 녀석도 입을 딱 벌리고 말걸!'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는 타구봉법은 남에게 함부로 보여서는 안 될 보배라는 것도 고려하지 않았다. 그 두 가지 무술은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비밀이므로 다음 세대의 장로에게만 전수하게끔 되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역시 이 점을 잊은 것은 아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그만두고 싶지가 않았다. 그는 서역에서 온 이 사람에게 중원의 높은 무예 실력을 보여 줌으로써 그가 다시는 중원
의 인물들을 얕보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좋아, 그럼 자네에게 놀랄 만큼 날랜 재주를 보여 주지!"
그때 정신을 차리고 구석에 서 있던 홍칠은 사부가 지금 선인들이 지켜 오던 계율을 깨뜨리려는 것을 보고 한마디 했다.
"사부님, 저 사람은 우리 거지 무리 사람도 아니고 방회(幇會)의 장로 계승자도 아닌데 왜 그것을 보여 주려고 하십니까?"
소씨 거렁뱅이는 눈을 부라리며 고함을 질렀다.
"네 놈이 감히 내 일에 참견하려고 들어? 난 오늘 저 놈에게 절묘한 타구봉법을 보여 줄 테다. 넌 저리 비켜라!"
구양봉은 소씨 거렁뱅이가 자기에게 타구봉법을 보여 주겠다고 부득부득 우기자 그것을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번 보는 것도 괜찮지! 타구봉법이라! 이름만 들어도 별로 신통한 무예 같지 않은데, 뭘! 그까짓 재주 하나 갖고 우쭐거리긴.'
소씨 거렁뱅이는 구양봉의 얼굴을 흘끔 보고 나서 그가 타구봉법을 대단찮게 여긴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꽥 소리쳤다.
"이 놈, 똑똑히 보아라!"
소씨 거렁뱅이는 나뭇가지 한 대를 뚝 꺾어 손에 쥐었다. 활등같이 휜 나뭇가지는 대단한 물건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손에 들고 나서니 병기가 된 셈이었다.
소씨가 엄숙하게 말했다.
"이 타구봉법은 거지 무리의 먼 선조 할아버지로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다. 옛날부터 거지들은 고난을 많이 겪어 왔느니라. 사람들은 눈을 흘기며 그들을 멸시했고, 어떤 놈들은 흉악한 개까지 몰아서 물게 했단 말이다. 우리 거지한테 개새끼를 때려죽이는 무예가 없다면 어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겠느냐? 그런 연유로 이 타구봉법이란 절묘하기 이를 데 없는 무예가 생겨난 것이다. 네 놈은
오늘 천하에서 가장 훌륭한 무예를 보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복이 넝쿨째 굴러온 셈이다!"
말을 마치자 소씨 거렁뱅이는 타구봉법의 시범 동작들을 천천히 펼쳐 보였다.
소씨가 손을 흔들자 나뭇가지에 눈이라도 박힌 것처럼 한 가지 동작마다 절묘하기 이를 데 없는 무예가 펼쳐졌다. 소씨가 사용하는 술법은 일명 전(纏)이라고도 하는데 마치 무수한 물건들이 나뭇가지에 들러붙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손이 점차 느려지고 동작이 굼떠지더니 한참이 걸려서야 일련의 동작들을 끝냈다. 구양봉은 멍청하게 바라보고 있다가 이 동작들이 매우 훌륭하다는 것을 깨
달았다. 갑자기 그의 뇌리에 홍칠이 황궁에서 다섯 요리사들과 싸울 때 사용하던 변화무쌍한 동작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타구봉법의 동작에 비교하면 그건 조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만일 그때 소씨 거렁뱅이가 나타나 '풀을 뽑고 뱀을 찾는' 그 동작을 했더라면 그 다섯 요리사들은 감히 덤벼들지도 못했을 것이다. 구양봉은 타구봉법의 묘리를 보고 너무나 기쁜 나머지 손발을 움직여 소씨
거렁뱅이의 동작들을 따라 해 보았다.
소씨 거렁뱅이는 구양봉이 이 어려운 동작들을 흉내도 내지 못할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가 막 깨우치고 있는 걸 보자 그만 더럭 의심이 나서 동작을 멈추었다. 그러고 나서 큰소리로 물었다.
"구양봉, 이 늙다리 거렁뱅이의 재주가 어떠냐?"
구양봉은 몽둥이를 다루는 이 무예들이 확실히 비범한 위력을 지녔다는 걸 알고 있었으나 여전히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당신의 실력은 정말 놀랍습니다. 하지만 난 아직도 당신에게 무예를 배우고 싶은 생각이 없군요."
소씨 거렁뱅이가 물었다.
"그건 무엇 때문이냐?"
"제 형님은 서역에서 가장 실력 있는 사람인데, 형님의 무예도 대단하답니다. 하지만 전 무예 배우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거든요. 만일 제가 배우려고 들었더라면 형님이 진작 가르쳐 줬을 겁니다."
소씨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
"뭐라구? 그럼 나한테 안 배우겠단 말이냐?"
"예, 싫습니다."
소씨는 별안간 고함을 질렀다.
"아이구 분해라! 내 오늘 기어이 네 놈을 죽이고 말 테다!"
소씨의 번개 같은 주먹이 날아오자 구양봉은 대번에 나가떨어졌다. 그는 주먹을 구양봉의 머리에 갖다 붙이고 꽥꽥 소리를 질렀다.
"나한테 배울 테냐, 안 배울 테냐?"
구양봉은 끝까지 고개를 저었다.
"안 배울 거예요!"
"좋아, 그렇다면 네 놈을 죽여 주지!"
소씨는 구양봉을 번쩍 들어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팔다리를 확 뻗은 구양봉은 혼이 구천으로 날아갈 지경이었다.
"홍, 잘도 뻗는구나! 내 몽둥이에 맞아 널부러진 개새끼처럼 말이야!"
구양봉은 벌떡 일어나 죽기살기로 그에게 덤비려 했다. 그러나 간신히 일어나 보니 방금 전까지 있던 홍칠과 소씨 거렁뱅이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거무칙칙한 수림이 거기 서 있을 뿐이었다.
하늘로 치솟았는지 땅으로 꺼져 들었는지 소씨 거렁뱅이와 홍칠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제6장 난쟁이 백타산군
구양봉은 남방의 아름다운 풍경을 구경하려고 임안에 왔지만, 임안에 당도한 뒤에 그가 당한 일들은 하나같이 기괴한 것들이어서 도대체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소씨 거렁뱅이한테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당했다고 생각하니 분통이 터져 죽을 지경이었다.
'빌어먹을 거지 같으니. 나중에 내가 무예를 배우면 기어이 복수를 해줄 테다! 그때 가서 또 거드름 피우며 개수작을 해 보라지!'
하지만 지금의 실력으로는 소씨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는 할 수 없이 잡념을 털어 버리고 객점까지 왔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한 자그마한 마을을 지나게 되었다. 찌그러진 오막살이 집들이 늘어선 초라한 마을이었다. 날은 이미 밝아서 마을에는 닭과 개들의 울음 소리가 요란했다. 마을 어귀에 몇몇 사람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멀리서 보니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었다. 사내들은 모두 올이 굵은 천으로 지은 옷을 입고 있었고 살갗이 거칠었다. 행동은 또 어찌나 느린지 한참이 지나서
야 꾸물거리는 품이 몹시도 기운이 없어 보였다. 아낙네들은 긴 치마를 입고 부수수한 머리를 아무렇게나 올려 몹시 초라해 보였다. 장정들이나 아낙네들이나 모두 열심히 일하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이따금 웃고 지껄이며 야단법석을 떨기도 했다.
구양봉은 허기를 느꼈던 터라 그들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먼 곳에서 온 길손인데 먹을 걸 좀 주실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모두 잡고 있던 일감들을 놓고 구양봉을 바라보았다. 빈들거리며 게으름을 부리던 차에 볼 만한 구경거리가 생겨 잘 되었다는 듯했다. 그 중에 처녀 몇 명은 구양봉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품이 아마 그처럼 풍채 좋고 영준한 사내를 처음 보는 듯싶었다.
한 노인이 대답했다.
"이 시골에 무슨 맛있는 음식이 있겠소만 손님께서 가리지 않는다면 성의껏 대접해 드리지요."
구양봉은 배가 몹시 고팠으므로 이것저것 타박할 처지가 못 되었다. 그는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를 표하고 나서, 그 노인을 따라 방에 들어가 그 집 안주인이 음식을 내오기를 기다렸다. 준비가 되어 있었던지 음식상은 금방 장만되었다. 야채와 산나물로 얼른 차린 음식들이었지만 금방 볶아 내었는지라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오르고 향기가 코를 찔렀다. 구양봉은 노인과 마주앉아 서로의
잔에 술을 따르면서 권커니 자커니 마시기 시작했다.
주기가 오르자 노인이 물었다.
"당신은 점잖은 서생 같은데 말씨로 봐선 서역의 사막 사람 같군요. 이 임안의 교외에선 도련님 같은 인물을 보기 힘들지요."
구양봉이 대답했다.
"노인장께서 보신 것처럼 저는 서역의 백타산 사람입니다. 제 고향이 워낙 황막한 곳이라 그런지 그곳 사람들은 싸움을 좋아하고 성미가 사납지요. 그런데 전 어릴 적부터 남과 싸우기를 좋아하지 않아서 책과 동무하여 자랐답니다. 이번에 임안에 와서 견식을 좀 넓히고자 했는데 가는 곳마다 노략질을 일삼고 약육강식을 하는 정경을 보고 크게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정말 가슴 아픈 일이에
요."
노인과 구양봉은 뜻이 맞아 술을 마실수록 말수도 점점 많아졌다.
어둠이 깃들자 집집마다 굴뚝에서 밥짓는 연기가 피어 올라 초라한 마을의 적막을 깨뜨리는 듯했다. 사람들이 들에서 소를 부르는 소리와 닭과 양의 울음 소리가 어울려 작은 마을이 제법 시끌시끌했다.
노인은 호미를 둘러메고 밭에서 돌아온 아들을 불러들이더니 이어 하루 종일 가축들에게 풀을 먹이고 돌아온 어린 손자도 불러들였다. 이내 집안은 아들과 손자, 손녀들로 꽉 찼다. 노인은 기쁜 마음으로 구양봉에게 자기 식구들을 일일이 소개해 주었다. 손님과 주인은 곧 친해져서 한데 어울려 웃고 떠들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노인은 영준하고 교양 있는 구양봉을 우러러보았다. 촌에 사는
농부인 자기가 이렇게 늠름한 귀족 도련님을 자기의 초가집에 모실 수 있는 행운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는 집 기둥이라도 뽑아 손님과 함께 즐길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가족들은 노인과 구양봉을 에워싸고 담소하면서 기쁨을 나누었다.
그런데 갑자기 먼 곳에서 삑삑하고 귀청을 찢는 듯한 피리 소리가 들려 왔다. 사람들의 혼을 빼앗는 마력을 갖고 있는 이 소리는 듣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듣지 않으려고 손가락으로 귀를 틀어막으면 오장육부에 불이 붙는 것 같아 더욱 참아낼 수가 없었다.
피리 소리는 점점 빨라졌다. 이제 그건 듣는 사람의 마음을 확 움켜잡아 당장이라도 미쳐 버릴 것 같았다. 피리 소리와 함께 쉭쉭하는 이상한 소리도 끊임없이 들려 왔다.
어떤 사람이 큰소리로 외쳤다.
"모두들 명심해 듣거라! 오늘 사막의 백타산군(白陀山君)께서 이곳을 지나시니 잡인들은 썩 물러나거라."
잠시 후 횃불들이 보이더니 뒤이어 나타난 사람들이 마을을 휘젓고 다녀 주위가 자못 소란스러웠다. 그러더니 갑자기 소음이 뚝 멎어 버렸다.
구양봉은 이 광경을 보고 놀라서 생각에 잠겼다.
'참 괴이한 일이로군! 나도 서역 사람이라 백타산군이 서역에서 으뜸가는 실력자이고 성미가 포악하여 사람을 파리 죽이듯 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가 무엇하러 임안에 온단 말인가?'
그때 다시 외침 소리가 들려 왔다.
"모두들 나와라! 산군께서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
워낙 작은 마을이라 인가가 몇십 호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1백여 명 가량의 마을 사람들이 금방 노인의 집 앞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사막에서 온 백타산군이 무슨 말을 하려는가 하고 조용히 기다렸다. 나무로 만든 받침대와 받침대 위의 작은 안락의자에 어린아이가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의 얼굴과 턱에 검은 수염이 빽빽이 나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 어린애는 아
니었다. 그 사람은 손과 발, 몸체가 다 짧은데 머리만 커다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머리를 이쪽 저쪽으로 돌리고 눈을 뒤룩뒤룩 굴려 마을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몰려들자 주인집 노인은 손자의 팔을 꼭 잡아 멀리 가지 못하게 했다. 백타산군과 함께 나타난 사람들이 저마다 칼을 비껴 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들 뒤에는 시뻘건 혀를 날름대는 독사들이 쫙 깔
려 있었기 때문이다.
받침대 위의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난쟁이가 바로 백타산군이었다.
한 사람이 큰소리로 외쳤다.
"너희들도 임안 주위에서 살고 있으니 중원의 무림 호걸들의 정황은 잘 알고 있겠지? 천하의 무림인들 중에 내공, 칼 쓰기, 장력에서 최고로 꼽히는 자가 누구냐?"
마을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생각했다.
'우리같이 해를 머리에 이고 밭에 나갔다가 별을 머리에 이고 돌아오는 사람들이 언제 무림이니 영웅이니 하는 것을 논할 기회가 있는가? 우리 마을 사람들 중엔 떠돌아다니며 무예를 연마하는 사람도 없고 밖에 나가 일을 저지르고 다니는 사람도 없으니 그런 일을 알 수가 있나?'
갑자기 귀청을 찢는 듯한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사람의 피를 빨아 내는 듯한 그 웃음 소리에 마을 사람들은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고 온몸에서 힘이 빠져 나가는 듯했다. 사람들이 눈을 들어 바라보니 의자에 앉아 있던 난쟁이가 입을 벌리고 웃어대고 있었다.
이윽고 난쟁이가 입을 열어 말했다.
"너희들은 전진교의 왕중양을 본 적이 있느냐?"
가련하고 무지한 마을 사람들이 봄이 되면 씨앗을 뿌리고 가을이면 곡식을 걷어들이는 농삿일이나 알았지, 무림의 전진교니 왕중양이니 하는 것을 알 턱이 없었으므로 다들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난쟁이는 계속 너털웃음을 웃어대다가 갑자기 뚝 그치더니 굳어진 얼굴로 마을 사람들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널려 있던 뱀들이 구불거리며 마을 사람들을 덮치기 시작했다. 큰 뱀, 작은 뱀, 검은 뱀, 횐 뱀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몸에 기어오르자 질겁한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야단법석을 떨었다.
난쟁이는 손뼉을 치며 깔깔 웃어댔다.
"네 놈들 숫자가 이처럼 많으니 이제 나의 귀염둥이들이 배를 곯을 염려가 없게 됐구나!"
그는 의자에 앉은 채 손발을 건들거리며 춤까지 추었다.
뱀에게 물린 사람, 혼비백산하여 땅바닥에 쓰러진 사람, 머리를 움켜쥐고 아우성치는 사람들로 난리법석이었다. 구양봉은 백타산군을 만날 생각이 없었지만 무고한 마을 사람들의 생명이 위급한 지경에 빠진 것을 보았고, 자기 몸에도 미끌미끌한 독사들이 기어오르자 급히 소리쳤다.
"그만하시오! 내가 말하겠소!"
이상하게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아우성 속에서 백타산군은 구양봉의 소리를 금방 알아듣고는 갑자기 괴상한 소리를 질렀다. 흡사 승냥이의 울음을 닮은 이 괴상한 소리에 놀라서 아우성치던 마을 사람들조차 일시에 잠잠해졌다.
이 소리를 들은 뱀들은 땅으로 기어 내려와 혀를 날름거리며 사람들을 위협했다.
백타산군이 물었다.
"넌 누구냐?"
구양봉이 큰소리로 대답했다.
"난 누가 중원의 영웅인지 알고 있소! 당신이 내게 묻지 않고 마을 사람 전체에게 물으니 알아낼 수 있겠소?"
산군은 횃불을 비춰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제법 기백 있어 보이는 구양봉을 보고 내심 놀랐다.
'이 조그마한 마을에 이렇게 뚝심 있는 인물이 있단 말인가?'
하지만 산군은 이런 것에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물었다.
"그렇다면 중원의 무림들 중 누가 가장 센지 어서 말해라!"
구양봉은 빙그레 웃고 나서 대답했다.
"난 무림에 속하는 인물이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한테 얻어들었소. 지금 중원 무림의 첫째가는 인물은 종남산에서 전진교를 새로 창제한 교주 왕중양이라 하오. 모두들 말하기를 왕 교주는 젊고 소탈한데다 문무를 겸비하여 막히는 일이 없다고 하오. 유감스럽게도 인연이 없어서 난 아직껏 왕중양을 만나 보지 못했소. 그러나 임안에서 거지 무리의 장로 소씨 거렁뱅이와 그 무리의 명망 있는
제자 홍칠을 만났는데, 그들 역시 대단한 무예를 갖추고 있었소. 뿐만 아니라 난 운남 대리 단씨의 일가로 출가한 중인 일속과 동해 도화도의 주인인 황약사가 무예를 겨루는 걸 엿보는 행운도 만났소. 이렇듯 넓디넓은 천하에서 첫손 꼽히는 실력가들을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소. 중원의 무림에는 인재가 구름처럼 많이 모여 있으서, 우리 백타산의 실력으로는 상대도 안 되오."
난쟁이가 우쭐거리며 말했다.
"중원의 무림에 아무리 인재가 많다 해도 우리 백타산의 인재들보다야 못하겠지."
구양봉은 백타산군이 잘난 척하는 꼴을 보니 참으로 가소로웠다. 범 없는 골에 삵이 왕 노릇 한다더니, 산군이야말로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 역시 서역 백타산 출신이지만 백 타산에선 내 형님 구양적을 당할 자가 없지 않는가. 그러나 내 보기에 형님의 무예로는 일속 스님의 적수가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만하기 짝이 없는 황약사의 상대도 될 것 같지 않아. 까딱 잘못하면 인생을 놀음처럼 여기며 살아가는 소씨 거렁뱅이마저 당해 낼 수 없을 것 같아! 이렇게 얼핏 꼽아 봐도 백타산의 실력이 짧은 거야 불 보듯 뻔한 일
아닌가. 그것도 모르고 제가 제일 잘났다고 뻐기니 참 가련한 인간도 다 있지!'
구양봉은 이런 생각을 품고 입을 열었다.
"내가 보기에 당신은 일속 스님이나 황약사나 소씨 거렁뱅이의 적수가 못 될 것 같소. 그들의 무예 실력은 실로 대단한……."
이때 난쟁이가 꽥하고 소리를 지르더니 목이 터지게 울부짖었다.
"믿을 수 없어! 도무지 믿을 수 없단 말이야! 왕중양이 도대체 어디에 있나? 빨리 불러 와! 소씨 거렁뱅이는 또 어디에 있어? 당장 그 놈과 겨루어 봐야겠어!"
구양봉은 자기 말이 백타산군의 귀에 한마디도 들어가지 않는 것을 보자 그만 입을 다물어 버렸다. 하지만 백타산군은 구양봉을 그대로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그는 냉소를 머금더니 구양봉에게 손가락 하나를 겨누었다. 그는 뱀이 기어가는 모양으로 손가락을 요리조리 움직이며 끊임없이 휘파람을 불어 댔다.
이 휘파람 소리에 맞추어 뱀들이 기어오더니 구양봉을 덮쳤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목, 팔뚝과 허리를 독사들이 친친 감았다. 독사들은 혀를 날름거리며 그의 몸에서 구불거렸는데 선뜩하고 미끌미끌한 감촉이 견딜 수 없이 싫었다. 구양봉은 심장이 거칠게 뛰었으나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산군, 내게 왜 이러는 거요?"
백타산군은 미친 듯이 웃어댔다.
"귀신도 부릴 만한 내 재주로 무림의 첫째가는 영웅이 될 수 있을지 없을지 어디 말해 봐!"
구양봉은 잠자코 있었지만 속으로 중얼거렸다.
'너 같은 바보가 백타산의 산군이 된 것도 희한한 일인데, 영웅들이 구름처럼 모인 중원 무림에서 영웅 행세를 하다니 한심한 일이지!'
그러나 그는 이런 생각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백타산군의 성품이 잔인하여 분통을 터뜨리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또다시 명령을 내리면 뱀들이 달려들어 그를 피범벅이 되게 물어뜯을 것이 아닌가?
백타산군은 구양봉이 입을 열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두려워하는 그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고 입을 열었다.
"내 너에게 백타산군의 위력을 보여 주겠다!"
그가 천천히 앉아 그 자그마한 손을 휙 내젓자 주위가 삽시에 물 뿌린 듯 조용해졌다. 그의 지시에 따라 독사들이 땅에 내려와서 한곳에 엉켰다. 검고 번들번들한 뱀의 무리가 횃불 아래서 꿈틀거리는 걸 보니 구역질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바로 이때 먼 곳에서 은은한 음악 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했다. 이 소리는 무지갯빛 깃털 옷이 하늘에서 나부끼는 듯 사뭇 부드럽고 감미로웠다. 음악 소리 속에서 소복 단장을 한 여인들이 두 줄로 늘어서서 긴 옷자락을 날리며 가벼운 걸음으로 사뿐사뿐 다가오고 있었다. 백타산군이 작은 손을 획 내젓자 흰 옷을 입은 미녀들은 잠깐 멈춰 섰다가 대열을 변형시켜 한 줄이 다른 한 줄을 꿰뚫
고 지나가면서 몸을 빙그르르 돌렸다. 미녀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사막을 지날 때면 사람을 볼 수 없고
하늘은 맑건만 이곳은 한적하네
눈 들어 바라보니 님 언제나 내 곁에 있고
인걸이 곁에 있으니 광풍인들 두려우랴
노래 가사는 멍청한 사람이 꿈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두서가 없고 몽롱했지만 노랫소리는 그야말로 아름답고 황홀했다. 선녀들은 그 노래를 반복하면서 너울너울 춤을 추었는데, 그 자태가 너무나 매혹적이었다. 이토록 많은 미인들이 아름다운 춤을 추는 정경을 난생 처음 본 촌사람들은 모두들 멍청해져서, 자기들이 위험한 처지에 빠져 있다는 것조차 깡그리 잊고 있었다. 구양봉은 오래 전
에 형님이 백타산군이 기이한 재주를 갖고 있다고 말해 주던 게 생각났다. 백타산군에게는 이상야릇한 힘이 있어서 여자들이 그의 마법에 걸려 들기만 하면 이성을 잃고 음탕한 춤을 추게 되는데, 죽을 때까지 그 춤을 춘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보니 과연 놀라웠다.
마을 사람들 중에 건장한 사나이가 있었다. 그는 여인들이 아름다운 눈매로 자기를 바라보는 모양이 마치 선녀가 양왕(襄王)을 바라보는 듯하자 가슴에서 더운 피가 끓어올랐다. 그는 범처럼 부르짖으며 미인들한테 달려갔다. 그는 미인들에게 안기기 전에 미인들 옆의 뱀무리 속에 고꾸라졌다. 그러자 뱀들이 삽시에 몰려들어 그의 몸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이 건장한 사나
이는 피와 살을 다 뜯기고 백골이 되어 나뒹굴었다. 독사들은 그래도 직성이 풀리지 않는 듯 백골 위를 구불구불 기어다니며 뼈다귀를 핥았다.
마을 사람들은 이 끔찍한 정경을 보고 몹시 놀랐지만, 사람의 혼백을 앗아 가는 음악 소리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때 한 젊은 부인이 온 얼굴에 웃음을 담고 은근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달, 전 당신을 좋아해요. 당신도 절 좋아한다고 해 놓고 왜 말이 없어요? 그새 절 잊었단 말인가요? 지난번 명절에 우리 집 암탉으로 닭국을 끓여 당신에게 대접하려 했어요. 그런데 당신은 두려워서 가지러 오지 못하고 나더러 밖에 놔 두라고 했지요. 당신은 야밤에 가만히 달려와서 닭국을 마시고는, 이 닭국이야말로 당신이 먹어 본 것 중에서 가장 맛있는 닭국이라고 했잖아요. 당신은
이 모든 걸 잊었단 말인가요?"
여인은 넋이 빠진 멍한 표정으로 뱀 무리를 향해 휘적휘적 걸어갔다. 여인은 몽롱한 눈으로 그녀가 꿈에 그리던 아달을 보고 있는 듯했다. 여인이 마음속에 간직했던 말을 내뱉자 마을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현숙하고 착한 그 여인을 존경해 오는 터였다. 만약 그녀가 속말을 털어놓지 않았다면 그녀가 옆마을 사내를 몰래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음악 소리에 심신이 노곤해 있었으므로 그녀가 독사의 무리로 걸어 들어가 비명에 죽을 걸 빤히 알면서도 아무도 말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비단을 찢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나더니 이윽고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듯한 피리 소리가 들려 왔다. 옥을 굴리는 듯한 그 소리가 사람들의 머리 속으로 파고들자 모두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정신이 맑아졌다. 여인은 뱀의 무리 가까이 걸어갔다가 피리 소리를 듣고 정신을 찾았는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백타산군은 급히 내공을 걷어들이면서 외쳤다.
"어떤 놈이냐?"
호탕한 웃음 소리가 들리더니 초가집 지붕 위에서 한 사람이 불쑥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젊고 단아한데다가 자주색 두루마기를 입고 손에 옥피리를 들고 있는 자태가 참으로 우아했다. 그는 피리 불기를 멈추고 나서 말했다.
"이까짓 재주를 갖고 중원에서 뽐내고 다니다니……, 가소롭군."
백타산군은 분노에 차서 생각했다.
'감히 날 건드리는 걸 봐서 여간내기가 아니다. 어쩌면 이 자가 중원에서 제일가는 실력자인지도 몰라.'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백타산군은 큰소리로 말했다.
"대체 누군지 어서 이름을 대라. 나의 뱀들이 널 백골로 만들어 줄 테니!"
지붕 꼭대기에 서 있던 사람이 대꾸했다.
"난 동해 도화도의 주인 황약사다. 너는 누구냐?"
백타산군은 이 자가 자기같이 큰 인물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생각하자 분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이 어른의 명함도 모르다니 정말 한심하구나! 좋아, 그럼 내 실력을 보여 주마!"
그가 조그마한 손을 흔들자 곧 네 사람의 건장한 사내가 다가와 받침대를 높이 들어 그를 황약사를 향해 돌려 세웠다. 백타산군은 얼굴에 악착스런 빛을 띠고 째지는 듯한 휘파람 소리를 냈다. 그러자 땅바닥에 있던 독사들이 목을 빼들고 초가집을 향해 스르륵스르륵 기어가기 시작했다. 얼마 안 되어 독사들은 지붕 꼭대기까지 기어 올라가 쉭쉭 소리를 내며 황약사를 위협했다. 조금만 지체
한다면 황약사는 비명에 죽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황약사는 조금도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 손에 들고 있던 옥피리를 입가에 대더니 여유 있게 불어 대기 시작했다. 태연자약하게 피리를 부는 모양이 흡사 홀로 앉아 우울한 심사를 달래고 있는 것 같았다.
피리 소리가 울리기 시작하자 독사들은 점점 안절부절못하고 혀를 날름거리며 온몸을 비틀었다. 달빛과 횃불빛이 비치는 한밤에 기이한 정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지붕 꼭대기엔 한 사람이 조용히 앉아 마치 자기가 위험에 빠진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듯이 머리를 숙이고 피리를 불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서는 수많은 독사들이 바람에 흐느적거리는 수양버들처럼 흔들흔들
춤추고 있었다. 뱀들은 수시로 머리를 불쑥불쑥 내밀고 사람을 물어뜯으려 들었다. 그러나 황약사는 피리 불기에만 몰두하여 이 모든 것을 본 척도 하지 않았다.
이상한 것은 백타산군이 아무리 기를 쓰고 휘파람을 불어도 독사들이 황약사의 신변에 접근하지 못하고 춤만 추는 것이었다. 황약사의 피리 소리가 점점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듯 쓸쓸한 곡조로 변하자, 곡조에 따라 미친 듯이 춤을 추던 독사들은 금방이라도 지쳐 쓰러질 듯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피리 소리의 리듬이 점점 빨라지자 독사들은 더욱 심하게 꿈틀대다가 지붕 아래로 툭툭
떨어져 땅바닥에서 죽어 나자빠졌다.
백타산군은 부끄러운 한편 분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돌멩이가 튕기듯이 씽하고 지붕 위로 날아가 황약사의 맞은편에 앉아 싸울 태세를 취했다.
구양봉은 두 사람이 주먹과 손바닥을 내밀었다 들이밀었다 하면서 불이 번쩍번쩍 나게 싸우는 것을 지켜 보았다.
한참 시간이 흐르자 한 사람이 지붕에서 굴러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굴러 떨어진 사람은 백타산군이었다. 그가 일어나서 휘파람을 불자 아까 받침대를 들어 주던 네 사나이가 달려와 그를 둘러메고는 바람같이 사라졌다. 흰 옷을 입은 미녀들도 그를 따라 사라져 버렸다.
황약사는 지붕에서 훌쩍 뛰어내리더니 구양봉에게 물었다.
"난쟁이가 당신에게 뭘 묻고 있었소?"
구양봉은 씩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주위를 둘러보니 뱀에게 물려 상한 사람, 백타산군의 부하들에게 얻어맞아 다친 사람들로 아수라장이었다. 구양봉은 간밤에 자기와 함께 술을 마시던 노인이 독사한테 물려 온몸이 뻣뻣하게 굳은 것을 보고 몹시 가슴이 아팠다. 마을 사람들 모두 노인과 아까 백골이 된 사나이의 시체 곁에 몰려들어 흐느껴 울고 있었다. 한 젊은 남자는 아내의 시
체를 끌어안고 통곡하고 있었다. 구양봉은 이 처참한 광경을 보자 너무 괴로워서 그곳을 따나려 했다.
갑자기 황약사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당신은 앞으로 어쩔 셈이오?"
구양봉은 언짢은 기색으로 냉랭하게 되물었다.
"당신들의 무예가 아무리 비범하고 재주가 뛰어나다 해도 숱한 사람의 생명을 빼앗아 가니 그게 대체 무슨 소용이 있소?"
그러자 황약사가 큰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뭔데 감히 날 훈계하려 드는 거요?"
그는 적의에 찬 눈으로 구양봉을 쏘아보았다. 황약사는 본래 남을 하찮게 여기는 오만한 영재(英才)였다. 그는 구양봉이 감히 자기를 훈계하려 들자 화가 치밀었다.
"내가 뭘 잘못했길래 날 훈계하려 드냔 말이오?"
구양봉이 곰곰이 생각해 보니 확실히 황약사에게는 잘못이 없었다. 오히려 그에게 고마워해야 할 일이었다. 만약 그가 와서 백타산군을 쫓아내지 않았다면 이 마을 사람들이 얼마나 더 죽고 상해야 할지 모를 판이 아니었던가? 생각이 이에 미치자 구양봉은 미안한 마음에 황약사에게 읍하며 말했다.
"방금 나와 같은 백타산 출신인 산군이 저지른 악행을 보니 부끄러운 마음 금할 수 없군요. 도주에게 사과드리니 받아 주십시오."
황약사는 가벼운 미소를 띠었지만 더 이상 구양봉을 보지 않았다. 구양봉의 사람됨이 떳떳하고 정직하긴 하지만 무예가 신통치 않고 처사하는 것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좀 전에 구양봉이 자기한테 화낸 것을 생각하면 불쾌했지만, 이 마을 사람들이 죽고 사는 문제가 자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데 생각이 이르자 심드렁해졌다.
그가 번개같이 손을 뻗어 구양봉에게 한 방 안기자 아무런 방비없이 서 있던 구양봉은 뒤로 벌렁 나자빠지고 말았다.
구양봉이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보니 황약사는 이미 종적을 감춘 뒤였다.
구양봉은 그날 밤 마을을 떠나지 않고 사람들과 함께 동이 틀 때까지 노인과 여인, 그리고 젊은 사나이를 땅에 묻었다. 그리고 무덤 앞에 서서 눈물을 훔치고는 마을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구양봉은 중원에 와서 느낀 것도 많고 배운 것도 많았지만, 이 마을에서 보낸 하룻밤을 잊을 수 없었다. 우선 촌사람들에게 따뜻한 대접을 받으니 타향에서 지기를 만난 듯이 마음이 푸근했다. 그러나 백타산군이 뱀을 부려 사람을 물어 죽이는 걸 보고는 큰 충격을 받았다. 사람이 한세상을 살아가자면 갖은 생활고와 생명의 위험을 당하게 되는데, 이럴 때 일시적인 혈기만 가지고는 아무런
문제도 해결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백타산에 돌아가 다시는 밖으로 나오지 않고 형님에게 일심으로 무예를 배우겠다고 결심했다.
이윽고 그는 사막 지대에 이르렀다. 멀리서 볼 때도 인가가 매우 드물더니, 3리나 5리를 걸어야 한두 개의 토굴집들이 나타나곤 했다. 토굴집들은 모두 볼품없이 찌그러져 있었는데, 지금 그가 들어선 토굴집에는 그나마 사람조차 살고 있지 않았다. 토굴 안은 누렇고 뿌연 먼지가 두껍게 쌓인데다 거미줄까지 얼기설기 얽혀 있어서 차마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었다. 구양봉은 인가를 찾아 허
기진 배를 달래고 싶었지만 사람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가 없어 낙심천만이었다.
목마르고 배고픈데다 추위에 지친 그는 별수없이 먼지가 덮인 토굴 방바닥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 한밤중이었다. 한창 달게 자는 그의 귓가에 사람의 숨소리가 들려 왔다. 구양봉이 머리를 들어 살펴보니 희미한 달빛 아래서 두 눈동자가 샛별처럼 반짝반짝 빛을 뿌리고 있었다. 어렴풋이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는가 싶던 그는, 문득 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휜 옷을 입은 사람이 옆에 앉아 있는
걸 깨닫고 갑자기 긴장해서 꽥 소리를 질렀다.
"누구ㄴ?"
상대방 역시 몹시 긴장했던지 샛별 눈이 반짝하고 빛을 뿌리더니 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토굴집 천장이 몹시 낮은데다가 급히 몸을 일으키는 바람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천장에 머리를 부딪치고 말았다. 그는 외마디 소리를 내지르며 땅바닥에 쓰러졌다.
구양봉은 그제야 쓰러진 것이 밤귀신이 아니라 여인임을 알았다. 여인의 머리에서 풍기는 향기와 옷에서 풍기는 향초(香草) 냄새로 짐작할 수 있었다. 구양봉은 이 모든 일이 꿈속에서 벌어진 환영이 아닌가 싶었다. 여인의 긴 머리가 그의 다리에 흘러내렸으므로 그는 몹시 당황하여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여인은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머리를 천장에 부딪치고는 까무
라쳤는데, 아마 쉽사리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구양봉은 사막의 토굴집에 뜻밖에도 한 여인이 들어와 있는 것을 보고 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날이 새고, 이윽고 찌그러진 창으로 햇빛이 비쳐 들었다. 주위가 점점 밝아지자 구양봉은 엎드린 여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여인의 얼굴과 몸매가 점점 똑똑히 보이자 구양봉은 깜짝 놀랐다.
'이런 황막한 사막에 어쩌면 이토록 아름다운 여자가 있단 말인가?'
여인은 정신이 들자 눈을 반쯤 뜨고 머리를 돌리다가 눈앞에 앉아 있는 구양봉을 보고는 얼굴색이 변하면서 놀라 물었다.
"다…… 당신은……?"
딱한 사정이 있는 게 분명했다. 잠시 후 여인은 갑자기 눈물을 떨구었다. 구양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런 황막한 사막에서 왜 여자 혼자 다니는 걸까? 이렇게 무서워하는 걸 봐선 아마 날 사막에 출몰하는 강도나 야밤에 도둑질하는 놈쯤으로 여기는 것 같군.'
구양봉이 다급한 목소리로 불렀다.
"아가씨, 정신 좀 차리세요!"
여인은 울음을 그치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곧 구양봉에게 달려들어 때리기 시작했다. 구양봉은 무예에 어두웠으나 형님 구양적이 무예의 대가인 탓에 그 방면에 꽤 높은 견식을 갖고 있었다. 여인의 권법을 본 그는 나약한 여인이 그처럼 지독한 권법을 알고 있는 것이 무척 놀라웠다. 구양봉은 피하려 했지만 얻어맞고 말았다.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여인의 주먹이 구양봉의 기해대혈(氣
海大穴)을 명중시킨 것이다. 다행히 여인이 몹시 기진맥진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 타격에 의해 구양봉은 큰 내상을 입었을 것이다.
구양봉이 외쳤다.
"처음 보는 사람을 왜 때리는 거요?"
여인이 대답했다.
"난 죽으면 죽었지 당신을 따라 돌아가진 않겠어요!"
구양봉은 영문을 알 수 없어 다시 캐어 물었다.
"아가씬 대체 어디로 간다는 거요?"
"어디로 가든 당신을 따라 백타산 마을로 돌아가진 않겠어요!"
구양봉은 놀랍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하여 잠시 생각했다.
'내가 백타산 마을로 돌아가는 걸 이 여자가 어떻게 아는 걸까? 그리고 백타산 마을로 돌아간다 해도 이 여자와 같이 갈 수야 없지. 우린 서로 초면인데다 남녀가 유별하거늘 어찌 같이 간단 말인가? 그런데 이 여자가 입을 열자마자 백타산이라는 말을 끄집어내니 이상하기도 하지. 백타산 마을 사람들을 잘 알고 있단 말인가?'
구양봉은 이 여인을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아가씬 백타산 마을 사람이오?"
여인은 잠자코 있다가 표독스럽게 말했다.
"천만에! 백타산 마을 사람들을 죄다 죽여 버리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워요. 마을에 불이라도 질렀으면 속이 시원하겠어요. 내가 만약 그 마을 사람이라면 그야말로 개 돼지만도 못한 셈이지요!"
구양봉은 그녀가 이렇듯 원한에 차서 저주를 퍼부어 대는 걸 보고 그녀가 백타산 마을 사람들에게 원한을 품고 있음을 알았다. 고향을 떠올리자 그는 밤낮으로 그리던 형님이 생각나면서 어쩐지 몹시 긴장되었다. 마을을 떠난 지 오래 되었으므로 그는 그 사이에 마을이 많이 변했을까봐 퍽 걱정되었다. 게다가 여인이 저주를 퍼붓는 바람에 그 속에 혹시 형님도 끼여 있을까봐 더욱 두려웠다.
"아가씬 백타산 마을에서 떠나 오는 길이오?"
여인은 대답을 하려다 갑자기 언성을 높이며 물었다.
"어떻게 백타산 마을을 알지요?"
구양봉은 천성대로 정직하게 대답했다.
"난 그 마을 사람인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여인은 얼굴을 붉히더니 몸을 발딱 일으켜 구양봉의 뺨을 후려갈겼다. 그러고도 성에 차지 않아 냅다 발로 차서 그를 쓰러뜨렸다. 구양봉은 영문도 모른 채 뺨을 맞고 발길에 차이자 다급히 외쳤다.
"왜 아무 말도 없이 다짜고짜 사람을 때리는 거요?"
여인은 눈물을 뚝뚝 떨구더니 목이 메어 말했다.
"당신…… 당신…… 정말 백타산 마을 사람이에요?"
구양봉은 사람 좋게 웃고 나서 대답했다.
"그렇소."
여인은 사납게 그를 노려보며 부르짖었다.
"좋아요, 그렇다면 당신을 죽여 버리겠어요! 꼭 죽여 버리고 말겠어요!"
구양봉은 이 여인이 화풀이로 독한 말을 내뱉는 줄 알고 내심 우스웠다. 이토록 예쁜 여인이 말끝마다 사람을 죽이겠다고 하니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그런데 여인은 토굴 안을 뒤져 끈을 한 오라기 찾아내더니 구양봉을 꽁꽁 묶는 것이었다. 더 이상 두려워하는 기색도 없이 방글방글 웃는 품이 교태를 부리는 것 같기도 하고, 표독스러운 웃음을 흘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손뼉까지 치면서 깔깔 웃어댔다.
"좋아요. 당신부터 시작해서 난 백타산 마을 사람을 하나 죽인 셈 치겠어요!"
구양봉은 그제야 비로소 그녀가 백타산 마을 사람을 죽이겠다고 한 말이 거짓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는 그만 웃지도 울지도 못할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 당황한 그는 생각에 잠겼다.
'부끄러운 일이다. 임안에서 고향까지 갖은 고생을 겪으며 겨우 돌아왔는데 형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사막의 토굴집에서 생면부지의 여인 손에 죽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원통한 일인가?'
여인은 품에서 푸른 빛이 번뜩이는 단도를 꺼내더니 예리한 칼끝으로 구양봉의 얼굴을 살살 그어 댔다.
"당신네 백타산 마을엔 사람다운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난 당신을 죽여 버리고 말겠어요."
구양봉은 본시 담력이 대단한 사람이었으므로 그다지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여인을 보고 빙글빙글 웃으며 말을 걸었다.
"아가씨, 아가씬 정말 예쁘게 생겼구려."
여인은 구양봉을 죽일 생각에 골몰해 있다가 뜻밖의 말을 듣자 손에 단도를 쥔 채 멍한 얼굴이 되었다.
구양봉은 이 기회를 타서 또 지껄였다.
"아가씬 맘씨도 곱고 칼도 잘 쓰는데 이 밧줄이 좋지 않군! 나도 밧줄에 묶여 있으니 좋지 않고!"
구양봉의 말에 여인은 놀라서 입을 딱 벌렸다. 이제 곧 황천에 갈 사람이 우스갯소리만 연발하니 기가 막힌 일이었다. 여인은 정신을 차리고는 꽥 소리를 질렀다.
"잔말 말아요!"
구양봉은 빙글빙글 웃으며 계속 이죽거렸다.
"아가씨 옷차림이 좀 남루하긴 하지만 그건 문제가 안 되는군요. 워낙 예쁘니까 무슨 옷을 입어도 상관없소. '옷자락 날리고 정겨운 눈매 뜻깊네'란 옛사람의 시구도 못 들었소? 말 그대로 옷의 아름다움은 소매에 있고 사람의 마음은 눈길에서 읽을 수 있다는 뜻이오. 아가씨 같은 미인이 어떻게 사람을 죽일 수 있겠소? 아가씬 손에 칼을 쥐고 입으론 끔찍한 말을 하고 있지만, 눈에 살기가
없으니 사람은 못 죽일 거요."
여인은 한참이나 구양봉을 바라보다가 속삭이듯 말했다.
"내가 당신을 죽이지 못하리라는 걸 어떻게 알죠?"
구양봉은 웃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이미 해가 높이 떴으므로 여인은 구양봉을 잡아 일으켜 밖으로 끌고 나왔다. 두 사람은 끝이 보이지 않는 아스라한 사막을 총총히 걷기 시작했다. 10여 보나 걸었을까? 여인이 문득 걸음을 멈추더니 구양봉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부턴 당신이 앞서 걸어요. 만약 내 명령을 듣지 않으면 이 단도에 찔려 죽을 줄 알아요."
구양봉은 여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원체 망망한 사막이므로 큰길은 보이지도 않았고, 간혹 어지러운 발자국들과 짐승들의 자취, 그리고 이따금 풀포기가 눈에 띌 뿐, 인가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구양봉은 길을 알아보고 나서 속으로 연방 욕을 해댔다. 여인이 그를 끌고 가는 길은 임안으로 통하는 옛길이었던 것이다. 구양봉은 일이 참 더럽게 꼬여 간다고 생각했다.
'중원에서부터 갖은 고생을 겪으며 이제 겨우 사막에 도착했는데 다시 임안으로 되돌아가다니, 이게 미친 짓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는 여인에게 간절히 사정했다.
"예쁜 아가씨, 제발 선심을 베풀어 날 백타산 마을로 돌아가게 해 주시오. 그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소!"
여인은 가볍게 코웃음쳤다.
"당신이 가 버리면 이 망망한 사막을 어떻게 나 혼자 지나가겠어요? 여자 혼자 가다가 무슨 변이라도 당하면 당신이 나한테 미안하지 않겠어요?"
그 말을 듣고 구양봉은 여인에 대한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다.
'이 여인은 입으로는 독한 말을 퍼부어 대지만 마음은 상냥한 여인이었구나!'
구양봉은 제꺽 대답했다.
"정 그렇다면 내가 아가씨를 중원까지 모셔다 드리겠소. 혼자 가자면 적적할 뿐더러 어려움이 많을 테니 말이오."
여인은 깔깔 웃음을 터뜨리며 구양봉을 손가락질했다.
"당신은 꿀 발린 말을 잘하는 사내로군요. '사내가 말이 많으면 여자한테 업신여김을 당한다'는 말이 있는데, 당신 같은 사내를 두고 한 말 같아요. 나쁜 놈들과 맞닥뜨리면 난 그들에게 당신을 먼저 죽이라고 할 것이고, 배가 고프거나 갈증이 나면 당신에게 먹을 것이나 물을 구해 오라고 할 거예요. 만약 음식을 찾지 못해서 정 배가 고프면 이 비수로 당신의 허벅다리에서 살점을 베어 낼
것이고, 갈증을 풀 길이 없으면 당신의 혈관을 끊어 피를 마실 거예요."
구양봉은 눈이 등잔만해지고 입이 헤 벌어져서 더 이상 그녀에게 말을 건넬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망망한 사막에 보이는 거라곤 모래뿐이었다. 바람을 타고 모래가 휙휙 날리더니 순식간에 온몸을 덮쳤다. 모래바람 속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머리를 숙인 채 걷고 있는 그들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 여인은 칼을 구양봉의 등에 대고 그를 협박하면서 걸었지만, 나중에는 칼을 집어 넣고 잠자코 그의 뒤를 따르기만 했다. 바람이 더욱 세차게 불고 모래가 심하게 휘날렸다. 여
인은 연신 헐떡거리면서 걸었으나 아무리 애를 써도 구양봉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여인은 급히 외쳤다.
"거기 서요! 멈추란 말이에요!"
구양봉은 멈춰 서서 그녀가 따라오기를 기다렸다. 여인은 앞으로 다가오더니 그의 가슴에 칼을 대고 말했다.
"당신……, 도망가려고 했지요?"
구양봉은 히죽 웃고는 손을 들어 앞을 가리켰다.
"봐요! 이렇게 끝없는 사막에서 뛰면 어디로 뛰겠소?"
여인은 살기등등하게 외쳤다.
"흥, 도망쳐 보라지! 당신이 백 보를 앞섰다 해도 내가 뿌린 단도에 머리가 잘려 나갈걸!"
구양봉은 그녀가 횐소리를 치고 있다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그래도 날 죽이지 않는 편이 나을 거요. 내가 죽으면 누가 아가씨와 동무해서 걷겠소?"
여인은 구양봉이 여전히 히죽거리며 우스갯소리를 지껄이자 그만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약해져서 그를 겨누던 칼을 슬그머니 아래로 내려뜨렸다.
여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은 진짜 정인군자일까? 아니면 교활한 놈일까? 겉으로 봐선 무척 부드러운 사람 같아. 한 번도 날 욕한 적도 없고. 만약 정말 좋은 사람이라면 죽인다는 건 말이 안 되지. 나는 죄를 받아 내세에 태어나서도 고통을 당할 거야. 지금 우리 두 사람은 동행하면서 우스갯소리까지 주고받는 처지니 부부간이라 해도 사람들이 믿을 거야! 하지만 이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면 무슨 면목으로
이 세상을 살아간단 말인가!'
여러 가지 착잡한 생각을 하다가 여인은 사막을 벗어나는 즉시 사나이를 죽여 버리기로 작정했다.
구양봉은 총명한 사람이었으므로 그녀가 서슬이 퍼랬다가 다시 평화로워지는 등 금방금방 기색이 바뀌는 것을 보고 그녀의 심사를 알아차렸다. 이 여자는 악의를 품고 자기를 죽이려고 하지만 마음이 약한 탓에 손을 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내심으로 한탄했다.
'이 아가씬 어디서 큰 모욕을 당한 게 틀림없어! 그렇지 않다면 이같이 행동할 리가 없지! 이 여인은 날 죽이려는 생각을 품다가도 차마 손을 대기를 두려워하는 거야. 이 점만 봐도 이 여인은 아직 선량한 마음을 갖고 있는 게 분명해.'
구양봉이 물었다.
"아가씨는 이름이 뭐요?"
여인은 눈을 부릅뜨고 쏘아붙였다.
"그건 뭐하러 묻는 거예요?"
여인의 날카로운 소리에 구양봉이 대답했다.
"난 이제 아가씨 손에 죽게 된 몸이오. 그런데 지옥에 가서 귀신이 나더러 '누가 널 죽였느냐?'고 물으면 '어떤 아가씨가 죽였습니다' 하고 대답하란 말이오? 그러면 귀신은 날 멍청이라고 비웃을텐데, 이런 난감한 일이 또 어디 있겠소?"
여인은 냉소를 머금고 말했다.
"당신 생각엔 자신이 무엇인 것 같아요? 당신은 바로 멍청이고 바보예요. 내가 당신을 죽이면 이 세상에 바보가 한 사람 줄어들 것이고, 그러면 세상에서 사내에게 기만당하는 불쌍한 여인도 한 명쯤 줄어들 것 아니에요?"
구양봉은 이 여인이 이토록 사내들을 증오하는 데 대해 내심 놀라면서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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