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 - 서독 구양봉 2

3학년2반 | 2022.02.18 07:39:15 댓글: 0 조회: 431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9559



제7장 사막의 밤
냉기가 뼛속까지 스미는 사막의 밤이었다. 하늘에 떠 있는 이지러진 달이 희미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구불구불 기복을 이룬 사막은 어찌 보면 뱀 같기도 하고 코끼리같기도 했다. 반 조각밖에 안 남은 달이 뿜는 냉기 때문인지 사막의 밤은 한없이 고요하고 차가웠다.
두 사람은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 각각 자리를 잡고 모래 위에 앉아 있었다. 여인은 안절부절못했다. 얼굴을 구양봉 쪽으로 돌리고 누우면 그가 자는 모습을 볼까봐 두려웠고, 등을 돌리고 누우면 잠에 곯아떨어진 틈을 타 달아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이렇게 망망한 사막에서 그가 도망간다면 날고 뛰는 재주가 있어도 붙잡지 못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런 생각으로 얼굴에 침울한
기색을 띤 채 앉아 있었다.
구양봉은 그 사정을 알아채고 여인에게 말했다.
"이 큰 사막에 우리 둘뿐인데 그렇게 체면 차릴 것 없소, 아가씨. 이렇게 된 바에야 그냥 하룻밤 편히 누워 지내는 게 좋을 거요."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여인은 벌떡 일어나더니 칼을 구양봉에게 겨누며 소리쳤다.
"그만 지껄여요. 나한테 알랑거릴 필요 없다구요. 날 건드리기만 하면 당장에라도 죽여 버릴 거예요."
구양봉은 구겨진 기분으로 생각했다.
'내가 점잖게 대해 주니까 더욱 기세등등해서 악담을 퍼붓는군. 애써 생각해 줘도 고마움을 모르는 여자라니까! 원수지간도 아닌 나를 죽일 궁리만 하니, 미친 개가 아무나 물어뜯는 격이 아니고 뭔가?'
여인은 옆에 꼬부리고 누워 소르르 잠이 들었다. 기척도 내지 않고 가만히 누워 있는 품이 정말로 잠이 들었는지, 아니면 잠든 척 꾸미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으스스 추운데다가 배까지 고파 잠들 수가 없었으므로 모래 위에 쓸쓸히 앉아 있었다.
'이렇게 춥고 배고픈데 저 여자는 잠이 올까?'
하지만 여인이 잠든 척하는데 말을 걸 수도 없어서 앉아서 멍하니 달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이나 반달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그의 눈앞에 어느덧 고향 백타산 마을의 초가집들이며 뭉게뭉게 피어 오르는 연기가 떠올랐다. 그리고 임안에 있는 잔월화각정루(殘月畵閣亭樓)의 풍경이 떠오르면서 감회가 더욱 깊어졌다. 그는 시흥에 젖어 자신도 모르게 낭랑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외로운 몸에 긴 옷 걸치고 터벅터벅 걸어도
손에 든 책 아무런 쓸모가 없네
달 향해 읊조려도 꽃은 화답이 없고
오로지 달만이 내 마음 알아주네
글벌레 책만 읽어 세상 물정 모르나니
도처에서 칼 번뜩여 이 세상은 피못이 되는구나
이제라도 칠척 장검 이 손에 비껴 들고
온갖 요사한 무리들을 단칼에 요절 내리.
한창 시흥에 젖어 코허리가 시큰해지고 있는데 냉소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여인이 눈을 동그랗게 치켜 뜨고 구양봉을 비웃고 있었다.
"말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글깨나 읽은 모양이군요. 먹물 좀 먹었다고 아는 척하는데, 난 당신 같은 사람이 질색이에요. 당신 같은 사내들은 칼부림질이나 하는 사내들보다 더 나빠요. 칼부림하는 사내들은 일시적인 혈기를 참지 못해 사람을 죽이는 일이 많지만, 당신 같은 사내들은 군자인 척하고 살생은 하지 않지만 천하의 살인 백정들은 다 당신 같은 사람의 개라구요."
구양봉은 말문이 막혀 뭐라고 대꾸하면 좋을지 몰랐다. 그는 삽시에 흥이 사그라져서 속으로 이 여인을 원망했다.
'정말 막돼먹은 계집이로군! 내가 달을 흠상하고 시를 읊조리는게 자기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풍아(鳳雅)한 멋은 눈곱만큼도 없이 밤낮 칼이나 꼬나들고 살기등등해서 사람 죽일 생각만 하다니……. 이런 여인과 어떻게 말이 통하겠어?'
구양봉은 입을 다물고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여인은 그가 잠자코 있자 캐물었다.
"왜 말이 없죠?"
구양봉은 덤덤히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인은 냉랭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책 몇 권 읽고 풍월 좀 할 줄 안다고 해서 스스로 대단하다고 여기는 모양인데, 묶인 몸으로 사막에서 혼자 감흥에 젖어 달을 보고 지절거리니 그 꼴 참 우습군요."
구양봉은 한탄했다.
"아가씨도 책을 읽고 예절을 좀 배웠더라면 교양을 갖추었을 텐데 참으로 애석한 일이오. 아가씨가 시를 모르니 한적한 사막에서 월하천리(月下千里)를 내다보는 멋을 알 리가 있소?"
그러자 여인은 구양봉 앞으로 타박타박 걸어와 글 읽는 선비처럼 가부좌를 틀고 앉더니 깍듯하게 말했다.
"도련님이 읊으신 운율에 맞추어 저도 한 수 읊지요."
구양봉은 놀랍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해서 여인이 맑은 음성으로 줄줄이 읊어 대는 시구에 귀를 기울였다.
구름에 가려진 이지러진 달 찬 향기를 뿜어
사막의 다정한 연인들을 비추어 주네
손에 비껴 쥔 작은 검 휘둘러
천하에 으시대는 무리들을 깡그리 요절 내리
인생의 길은 캄캄하고 험난하여
앞에서 기다리는 건 검과 포승줄뿐이라네
어스름한 달빛 아래 외로운 혼은 보이지 않고
어이하여 이 세상엔 악독한 무리들만 득실거리는고.
시를 읊으면서 처량한 기색을 띠고 한탄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구양봉은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이 여인이 세상의 모든 것, 심지어는 달빛이나 사막마저 얼음처럼 차게 대하는 걸 보면 필시 큰 충격을 받은 게야. 그러지 않고서야 이처럼 상심할 수가 없지! 저렇게 예쁜 여인이 모든 사람을 미워하게 됐으니 이 얼마나 딱한 일인가!'
여인은 얼굴에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앙칼지게 말했다.
"이봐요. 당신이 잘난 척하며 읊조린 그 정도는 나도 얼마든지 읊을 수 있어요!"
여인은 칼끝으로 모래를 툭 쳐서 구양봉의 얼굴에 뿌렸다. 온 얼굴에 모래를 뒤집어쓴 구양봉은 눈을 뜰 수 없었다. 그는 두 손을 휘저으며 큰소리로 외쳤다.
"이봐요, 내 눈에 모래가 들어갔단 말이오!"
하지만 손이 묶여 있어서 아무리 버둥거려도 소용이 없었다. 그는 목이 터지게 고함을 질렀지만 여인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자기 말만 했다.
"아까처럼 또 시를 읊어 봐요. 이번엔 '모래바람에 눈뜰 수가 없고 포승줄에 이내 몸 묶였네'하고 읊고 싶죠? 저런, 눈물까지 흘리는군요! 이봐요, 지금이야말로 시 읊기에 제일 좋은 때 아닌가요? 어서 읊어 봐요!"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려 기세등등하게 우쭐거리는 여인도 볼 수가 없었다. 그는 어처구니가 없어 입을 꾹 다물고 더럽게 재수 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여인은 큰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이젠 당신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됐군요. 이 큰 사막에 우리 두 사람뿐이니 만약 당신이……."
말은 맺지 않았으나 뜻은 명백했다. 그녀는 구양봉이 자기에게 더럽고 무례한 짓을 할까봐 두려워하고 있었지만, 여자의 몸으로 차마 그런 말을 입 밖에 내기가 부끄러웠던 것이다.
구양봉은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당장 여인을 죽여 버리고 싶었지만, 그녀의 말을 듣고 나니 마음이 누그러져서 더 이상 고함을 지르지 않았다. 마음에 큰 상처를 입지 않았다면 이같이 심약한 여인이 어찌 이처럼 괴팍스러울 수 있겠는가? 구양봉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씬 화를 낼 필요가 없소. 내가 아가씨를 보지 않는 게 소원이라면 보지 않으면 될 것 아니오?"
이제 구양봉도 더 할 말이 없었다. 모래 때문에 눈물이 끝없이 흘러내렸지만 모래는 여전히 씻기지 않았다. 어깨에 대고 눈을 비벼 보려 했지만 공연한 헛수고였다. 구양봉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이 포승줄 좀 끌러 주지 않겠소? 아무래도 눈에 들어간 모래를 손으로 꺼내야겠소."
여인은 들은 척도 않은 채 조금 떨어진 곳에 가서 앉았다. 구양봉은 그녀가 아무 기척이 없자 포승줄을 풀 생각을 버리고 잠자코 앉아 있었다. 눈알이 몹시 아파서 눈을 뜰 수도 깜박거릴 수도 없었다. 어찌나 아픈지 그는 이대로 죽어 버렸으면 싶었다.
어느새 한밤중이 되었다.
구양봉이 막 선잠이 들려는데 사람들이 터벅터벅 모래를 밟으며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로 봐서는 여러 사람인 듯했다. 조금 쉰 듯한 목소리의 사내가 말했다.
"산군께서 그 년을 꼭 잡아 오라고 명령을 내렸으니 잡아다 대령할 수밖에."
한 여인이 깔깔깔 웃으며 말했다.
"산군이 그 년을 붙잡으라고 시켰는지, 아니면 오빠가 그 년을 백타산 마을로 끌고 가려고 하는지 그 속을 누가 알겠어요."
사내는 이 말에 얼른 대꾸했다.
"넌 왜 자꾸 날 놀려먹으려 드니 ? 난 그런 심보는 품은 적이 없어. 자꾸 그따위 허튼소리를 지껄이다가 산군이 듣는 날엔 큰코 다쳐!"
여인은 픽 웃고 나서 비꼬는 투로 말했다.
"산군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벌벌 떨어요? 보기만 하고 먹을 줄은 모르는걸요. 도대체 예쁜 여자들을 그렇게 많이 수집해서 뭘 하는지 알 수가 없어요. 매일 붙잡아 온 여자들을 만져 보고 가지고 놀기만 하니……. 그 여자들이 너무 불쌍해요."
이번에는 다른 사내가 말했다.
"형제들, 보기만 하고 먹을 줄 모른다는 게 무슨 뜻인지 어디 한 번 말해 보게나."
그 말에 사람들이 와 하고 웃자 그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됐네, 됐어! 더 묻지 말라구. 이 사매(師妹)는 바로 자넬 놓고 말한 거야! 자네야말로 보기만 하고 먹을 줄 모르는 사람이잖아!"
"내가 왜 보기만 하고 먹을 줄 모른다는 거야."
그의 말투에는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
사매라고 불리운 여자는 그가 화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놀려먹던 태도를 고쳐 어린애 달래듯 부드럽게 말했다.
"셋째 오빠, 제 말은 오빠가 잘생겼단 뜻이에요!"
"동생 눈에 내가 잘생겨 보여?"
다른 사내가 대꾸했다.
"맞아! 사매의 말은 자네가 제일 번듯하다는 뜻이야. 용모는 번안(潘安) 같고 재주는 자건(子建) 같은 영준한 도련님이란 뜻이지!"
그는 말을 마치고 나서 크게 웃음보를 터뜨렸다.
일동의 웃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모두들 번안과 자건을 들먹이는데, 번안이란 녀석이 어디 사는지 좀 알려 주게. 도대체 얼마나 잘생겼는지 이 눈으로 보게 말이야. 암만 잘생겨 봤자 눈 두 개에 입 하나, 귀 둘이 달렸겠지. 큰 형! 형님은 자건의 재주가 뛰어나다고 하는데 그에게 대체 무슨 재주가 있수? 자건이 그래 화염공(火焰功)을 아우, 오독신장(五毒神掌)이나 대력응조공(大力鷹爪功)을 아우? 그가 이것들을 안다 해
도 실력이 형님보다야 낫겠수?"
사람들은 그가 원래 말이 많고 끈질기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모두들 못 들은 척하고 있었다.
구양봉은 한참 귀를 기울여 그들의 말을 듣고 있었는데 갑자기 몸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여인이 그의 품에 안겨 왔던 것이다. 구양봉이 입을 열려고 하자 여인은 부드러운 손으로 그의 입을 막으며 모기 소리같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쉿, 소리 내지 말아요!"
공포에 질린 탓인지 목소리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구양봉은 소리를 내지 않았다. 여인은 놀랍고 무서운 한편 부끄럽고 분이 치밀기도 하여 숨결이 가빠지고 있었다. 몸은 구양봉에게 기대고 있었지만 속으론 그가 여간 밉살스럽지 않았다.
'멍청한 놈, 죽여 버리지 않았더니 결국 이용해 먹게 되는군. 미인이 절로 품에 와 안기니 입이 떡 벌어지게 되었지 뭘! 흥, 조만간에 칼로 네 놈의 얼굴을 오리고 혓바닥을 잘라 줄 테다! 그때 가서 어디 또 여자한테 꿀 발린 소리나 하며 혀를 놀리는지 두고 보자.'
그러나 여인은 소리를 내면 사람들에게 발각될까봐 감히 입을 열지는 못했다.
다행히 두 사람이 모래바람을 피하려고 좀 우묵한 곳에 자리를 잡은 것이 은신처가 된 셈이었다. 그런데 그들 일행 네 사람이 구양봉과 여인이 숨어 있는 곳 가까이 이르렀을 때 한 남자가 외쳤다.
"큰형, 우리 여기서 잠시 쉽시다. 컴컴해서 걷기도 힘드니 여기서 쉬다가 내일 해가 뜨거들랑 떠납시다."
이어 여자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간청하는 소리도 들렸다.
"오빠, 어둔 밤중에 사람 찾기도 쉽지 않으니 좀 쉬고 가지요. 우리가 벌써 그 년을 따라잡았는지도 모를 일 아니에요?"
큰형이라고 불린 자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 모두들 지쳤으니까 좀 쉬도록 하자."
구양봉이 겨우 눈을 뜨고 보니 달빛 아래 네 사람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들은 구양봉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팔베개를 한 채 벌렁 드러누워 있었다. 네 사람은 네모꼴 모양으로 누워 각각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었으며, 머리를 안쪽에 두어 서로를 바라볼 수 있도록 했다.
이제 여인은 숨도 크게 쉬지 못한 채 온몸을 구양봉의 품에 맡기고 기대 왔다. 그녀는 그들이 뭐라고 말하는지 들을 생각도 못하고 바들바들 떨며 구양봉의 손에 묶인 끈을 풀어 주었다. 구양봉은 방금 전까지도 사나운 기세로 펄펄 뛰던 여인이 자기 품에 안겨 머리도 들지 못하는 것을 보자 슬그머니 우스웠다.
'이제야 여자다운 맛이 조금 나는군 그래!'
구양봉은 머리가 한결 맑아졌으므로 묶인 자국이 선명한 팔뚝을 만지며 네 사람이 주고받는 말을 듣고 있었다. 지척에 누워 있는 탓에 말소리가 매우 똑똑히 들렸다.
여인이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 소리가 매우 길었다. 그러자 여러 사형(師兄)들이 묻는 것이었다.
"사매, 한밤중에 웬 한숨이야?"
여인은 잠자코 있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그 여잘 붙잡지 못했으면 좋겠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그 여잘 붙잡지 못하면 우리가 호된 꾸중을 들을 텐데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여러 사람은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큰형이라 불리는 목소리의 임자가 부드럽게 말했다.
"옥문 사매, 네 마음은 나도 알아. 하지만 우리 제자들이 사부님의 일을 막을 수 있나? 게다가 사부님은 가련하단 말이야……."
이 말을 하면서 그는 감정이 격해지는지 목이 메었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구양봉은 이 네 사람이 백타산군 임일천(任一天)의 제자들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큰형이라는 사람은 '사막의 독수리'로서 어거풍(於去風)이라 불렸고, 쉰 듯한 목소리의 사내는 회인만도(回人彎刀) 마혁(馬赫)이었으며, 여인은 서역에서 이름난 미인 쌍검(雙劒) 옥문(玉雯)이라 불렸고, 줄곧 침묵을 지키는 나머지 한 사람은 쌍환(雙環) 기노(祁怒)였다. 그들 네 사람은 10여 년 동안이나
서역을 종횡해 온 사걸(四傑)이고, 그들의 사부는 뱀을 지휘하여 황약사와 대적하던 난쟁이 임일천이었다. 그는 보통 사내들처럼 여인을 가까이 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성질이 점점 비정상적으로 변해 갔다. 그는 밖을 나돌아다니며 예쁜 여인들을 납치해다가 온갖 모욕을 주고 참기 어려운 형벌을 가했다. 그는 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정암(靜庵) 사원의 제자 모용쟁(慕容箏)을 납치했던 것
이다. 난쟁이 임일천은 모용쟁을 보자 그녀의 아름다움에 이끌려 그녀와 맞붙어 싸웠다. 어린 모용쟁은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으므 로 두 합도 못 싸우고 붙잡혔던 것이다. 난쟁이 임일천은 모용쟁을 볼수록 그녀에게 끌리고 가슴에 기쁨이 일어 어쩔 줄을 몰라했다. 검은 머리는 폭포같이 드리웠고 머리에 가려진 얼굴은 보름달처럼 환했으며, 두 눈은 기쁨에 넘친 것 같기도 하고 애수가 흐
르는 것 같기도 하여 형용할 수 없이 사랑스러웠으니 말이다.
난쟁이 임일천은 크게 기뻐했다. 그는 백타산군이 된 이래 두 가지 일에 특별히 정성을 기울이고 있었다. 하나는 미녀 수집이고 다른 하나는 골동품 수집이었다. 그는 여자를 보는 눈도 남과 달랐다. 다른 사람들은 보통 용모와 자태, 피부색을 보았으나 그가 여자를 보는 눈은 정말 특별했다. 머리는 반드시 검은데다가 어깨까지 드리우지 않으면 구름발처럼 높이 틀어 얹어야 좋아했으며, 머
리결이 부드러워야 좋아했다. 얼굴 모양도 보름달처럼 둥실하되
너무 긴 얼굴도, 너무 동그란 얼굴도 좋아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팔뚝, 손가락, 심지어는 발까지 보는 것이었다. 발을 보는 안목도 매우 높아서, 발가락이 가늘고 균형이 잡혀 있어야 하며 종아리는 미끈하면서도 윤기가 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이렇게 여자를 까다롭게 가리는 것은 그 미인들과 운우지정을 나누려는 것이 아니라 여자를 골동품처럼 밀실에 저장해 두기 위해서였다. 그
는 여자들을 남에게 보이지도 않았다.
모용쟁을 납치해 온 그는 그녀의 옷을 벗겨 탁자 위에 누이고 칠도대혈(七道大穴)을 눌러 입을 벌려도 말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런 다음 하인들을 물러가게 하고는 탁자 옆에 높은 의자를 갖다 놓고 그 위에 올라섰다. 그렇게 해야 그의 눈높이가 모용쟁의 눈높이와 비슷했던 것이다. 그는 흡족한 기분으로 모용쟁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머리칼은 칠흑같이 새까맣고 흑
백이 선명한 두 눈은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살짝 휘어진 눈썹은 멀리서 바라본 산봉우리 같았고, 상큼한 콧마루는 화를 내고 있는 듯 했다. 그는 모용쟁의 팔을 꺼내 그 작은 손으로 관상용 옥을 매만지듯 어루만졌는데, 쯧쯧 하고 혀를 차는 품이 사내의 욕정 따위는 손톱만큼도 없는 것 같았다.
모용쟁은 꼼짝없이 누워 분이 치밀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여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추악한 난쟁이 같으니라구!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날 지경인데 그 음탕한 손으로 날 만져? 두고 봐라. 내 손에 칼이 잡히는 날엔…….'
난쟁이 임일천은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 앞뒤 좌우로 모용쟁을 꼼꼼히 감상하고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감탄했다.
꿈에 산을 유람하니
기이한 봉우리 어찌 한눈에 알랴
찾지 말라, 그 기상
여기 어두운 구석에서도 찾을 수 있으니.
그가 몸을 구부려 발을 만지자, 그녀는 몹시 화가 나 있었는데도 간지러워서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난쟁이는 머리를 흔들며 또 감탄했다.
"미인이 길을 걸을 땐 사뿐사뿐, 미풍만 불어도 날려 갈 듯한 자태로 걷는데 그게 왜인지 아느냐?"
그는 모용쟁의 발가락을 매만지며 계속 말했다.
"미인의 발이 너무 가냘퍼서 바람도 못 이겨내기 때문이야."
모용쟁은 그가 미워 죽을 지경이었다. 한창 꽃다운 나이인 그녀가 마음에 그리는 왕자는 귀밑머리를 멋지게 드리우고 영준하기 이를 데 없는 미남자였다. 키가 개 만큼밖에 안 되는 난쟁이가 그녀의 앞뒤를 부산히 돌아다니며 마음대로 주무르고 만질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모용쟁은 임일천이 체구는 비록 작지만 여느 사내들처럼 여인을 능욕할 수 있으리라고 짐작했다. 그녀는 절망스럽고 암담한 맘으로 이 난쟁이 손에 죽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임일천은 그녀를 요리조리 매만지며 감상하더니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며 말하는 것이었다.
"오늘은 이만하면 됐어. 이젠 널 놔줄 때가 됐단 말이야."
그는 조그만 손을 내밀어 모용쟁을 가볍게 끌어안았다. 모용쟁이 비록 그의 팔에 안기기는 했지만 난쟁이보다 몸집도 크고 훨씬 무거웠다. 하지만 난쟁이는 별로 힘들어하는 기색도 없이 그녀를 안은 채 몸을 휙 날려 땅에 사뿐 뛰어내렸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고, 모용쟁 역시 아무런 흔들림을 느끼지 않았다.
난쟁이는 한 손으로 모용쟁을 받쳐 들고 다른 한 손으로 상자 뚜껑을 열었다. 상자 뚜껑이 열리자 모용쟁은 깔짝 놀랐다. 이 상자는 겉으로 볼 땐 보통 상자와 똑같았는데 뚜껑을 열어젖히니 그 안은 보통 상자와 아주 달랐다. 상자의 사면에 숨쉴 공기 구멍이 나있었고 상자 안에는 크고 작은 구리 거울들이 튼튼하게 박혀 있어 그 안이 매우 밝았다. 상자 안의 여섯 면에는 큼직한 야광주가
꽂혀 있었고 양끝에 푹신한 베개가 놓여 있었다.
난쟁이가 우쭐한 어조로 말했다.
"이 상자 괜찮지?"
말을 마치고 나서 그는 모용쟁을 상자 속에 집어 넣었다. 그 상자를 의자 위에 올린 뒤 의자째 치켜 들고는 우쭐우쭐 걸어갔다.
침대 옆에 이르자 그는 의자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난 잘 테니까 임자도 자라구. 내일 다시 보자! 좋지?"
난쟁이는 조심스럽게 상자 뚜껑을 닫고는 침대에 뛰어올랐다.
한참 동안 뒤척거리다가 그는 다시 물었다.
"상자 안이 침침할 거야! 그지?"
모용쟁은 이제 증오심이 사그라들고 이상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상자 안은 촛불을 켠 방보다 훨씬 밝고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그녀는 피곤하여 곧 잠이 들었다.
한창 달콤한 잠에 빠져 일던 그녀는 상자가 천천히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한참이 지나자 상자 밖이 점점 훤해 오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밖으로 나온 것 같았다. 그녀는 황급히 막힌 혈(穴)을 풀려고 노력했지만 임일천의 혈법이 너무나 괴이한 탓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젠 운명을 하늘에 맡길 수밖에 없다고 맥을 놓고 있는데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상자가 땅에 떨어졌다. 그녀는 깜짝 놀랐지
만 밖에서 상자를 들고 있던 사람이 힘이 약해서 떨어뜨렸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이윽고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 자가 널 보는데 나라고 왜 널 못 보겠느냐? 하지만 성인들은 도둑질도 양심적으로 하라고 했으니까, 널 구해 주기로 했다. 내가 뚜껑을 열어 줄 테니 이제 옷을 입는 게 어때?"
모용쟁은 그 말을 듣고 밖에 있는 사람이 상자와 함께 자기를 훔쳐 온 도둑이란 사실을 알았다. 처음엔 기뻐 어쩔 줄 몰랐지만 승냥이를 피하고 나니 범을 만난 꼴이 될까봐 두려웠다. 이 사람이 중얼대는 말만 들어 봐도 나쁜 사람 같아 더욱 의심이 갔다. 그런데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고 상자 뚜껑이 덜컹 열리는가 싶더니 금방 뚜껑이 닫혔다.
'아이쿠! 벼락 같은 솜씨로구나!'
그 사람이 또 말했다.
"옷은 방금 상자 안에 넣었어. 입고 안 입는 건 네 마음이지만, 내가 너라면 얼른 입을 거야. 다 큰 계집애가 옷을 그렇게 홀랑 벗고 나오면 감기 들기 십상이지."
모용쟁은 속으로 아우성을 쳤다.
'이 멍청한 놈은 내가 지금 팔다리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알고 있으니 어쩌지?'
그 사람이 또 말했다.
"네가 움직이지 못할까봐 걱정이냐? 나올 수 있을 텐데……."
그 말에 모용쟁이 깜짝 놀라 몸을 움직여 보니 과연 몸이 움직여졌다. 그녀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모용쟁이 황급히 옷을 주워 입은 다음 뚜껑을 힘껏 밀어 보니 쉽게 열렸다. 모용쟁은 곧 상자 밖으로 빠져 나왔다. 그런데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사람의 그림자라곤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녀는 놀라서 모골이 송연해졌다. 귀신이라도 만났단 말인가? 다시 몸을 돌려 상자 안을 들여다본 모용쟁은 더욱 놀랐다. 상자안에 튼튼히 박혀 있던 10여 개의 야광주와 크고 작은 청동 거울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거기 누구 없어요?"
아무 대답도 없었다. 눈앞에는 뚜껑이 활짝 열린 상자뿐이었다.
모용쟁이 한참 생각에 잠겨 있는데 큰형이라고 불린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제자가 스승의 뜻을 거역하면 죄가 되는 거야. 게다가 사부님의 일은 우리와 큰 관계도 없으니 사부님이 사람을 찾아 오라고 하면 찾아다 드리면 될 게 아닌가? 공연히 맞서다간 된통 욕이나 보게 된다구!"
나머지 세 사람 모두 그 말에 수긍했다.
옥문이 탄식을 했다.
"사람 찾기도 쉬운 일이 아니에요. 우리 넷이 나온 지도 벌써 여러 날이 지났잖아요. 모용쟁을 본 사람의 말에 의하면 이 부근에 있어야 하는데 아직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으니……. 이렇게 자꾸 시간을 끌다간 백 타산으로 돌아가기도 어렵게 될 텐데 이를 어쩌면 좋아요?"
만도 마혁이 큰소리로 말했다.
"사부님이 찾아 오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아내야지! 찾지 못하면 사부님은 화를 낼 거요!"
여러 사람은 다시 아무 말도 없었다.
구양봉은 그제야 줄곧 자기 가슴에 칼을 대고 위협을 하던 여인이 바로 도망쳐 나온 모용쟁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생각에 잠겼다.
'날 그토록 잔인하게 대한 것은 임일천에게 능욕을 당한 보복으로 그런 것이었구나! 사람들 말에 의하면 그 자가 여인과 골동품들을 수집해서 밀실에 저장해 둔다던데……. 이 아가씨는 산군에게 납치당했다가 도망치는 중이었군 그래!'
구양봉이 머리를 숙여 내려다보니 모용쟁의 아리따운 눈이 그를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 구양봉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활랑거렸다.
그때 만도 마혁이 입을 열었다.
"사형, 나 소피 좀 보고 오겠소!"
말을 마치자 그는 곧 몸을 일으켜 구양봉과 모용쟁이 숨은 곳으로 걸어왔다. 구양봉과 모용쟁은 눈을 뻔히 뜨고도 감히 움직일 생각을 못했다. 만도 마혁이 모래언덕에 올라서는 걸 보고 구양봉은 일이 더럽게 꼬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달빛이 어렴풋하기는 했지만 두 사람이 마혁과 몇 발자국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으니 그가 눈이 멀지 않은 이상 보지 못할 리가 없는 것이다.
과연 만도 마혁이 급히 외쳤다.
"큰형, 여기 사람이 있소!"
세 사람은 몸을 일으켜 화살같이 달려왔다. 구양봉과 모용쟁도 더 이상 숨을 수가 없음을 깨닫고 버둥거리며 일어나려 애썼다. 구양봉이 모용쟁을 도와 일으키려 했으나 모용쟁이 그의 뺨을 갈기며 부르짖었다.
"사내들이란 좋은 물건짝이 하나도 없어! 당신을 죽여 버릴 테야!"
모용쟁의 얼굴을 알아본 네 사람은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큰형이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입을 열었다.
"아가씬 걸음이 몹시 빠르군. 우리가 아가씰 찾느라고 얼마나 애먹었는지 몰라!"
모용쟁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보아하니 난쟁이의 개들인 모양인데 날 찾아 무슨 좋은 일이 있어요?"
한켠에 서 있던 만도 마혁이 말했다.
"요 놈의 계집애, 그렇게 함부로 입을 놀려도 되는 줄 아니?"
모용쟁은 마음을 독하게 먹고 욕설을 퍼부었다.
"욕뿐인 줄 아느냐? 네 놈들을 다 죽여 버리지 못하면 내 분이 안 풀릴 거다!"
말을 마치자 모용쟁은 단도 잡은 손을 획획 내두르면서 만도 마혁에게 달려들었다.
만도 마혁은 깜짝 놀라서 뒤로 엉거주춤 물러섰는데, 그가 피하자 칼이 더욱 빨리 육박해 왔다. 그는 번개같이 날아드는 칼을 피하려고 이리저리 물러서다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고래고래 소리쳤다.
"큰형, 아무래도 이 년을 죽여야겠소!"
모용쟁을 빙 둘러싸고 서 있던 세 사람은 모두 말이 없는데 큰형이란 사람이 소리쳤다.
"사부님와 보배를 상하게 해서야 되겠느냐? 털끝 한 올이라도 건드렸다는 걸 사부님이 아시는 날엔 경을 쳐!"
만도 마혁은 펄펄 뛰며 소리쳤다.
"이 년이 날 죽이려 든단 말이오! 이 년을 못 죽인다니 분통이 터져 죽겠소! 분해 죽겠단 말이오!"
그는 모용쟁을 칼로 찌르지는 못하고 이리저리 막고 피하기만 했다. 모용쟁은 그가 감히 손을 쓰지 못하는 것을 알아차리자 칼을 더욱 빨리 휘두르며 일심으로 그를 죽이려 들었다. 몇 합 싸운 후 쉭 하는 소리와 함께 만도 마혁의 팔뚝이 모용쟁의 칼에 찔렸다. 단도가 매우 예리한지라 검이 팔뚝을 슬쩍 스쳤을 뿐인데도 가죽과 살이 뭉청 떨어져 나갔다. 그는 너무 아파 꽥꽥 소리를 지르며
날뛰었다.
그러자 구경만 하던 세 사람 모두 모용쟁에게 달려들 기세였다. 큰 사형이란 자는 조용히 서서 모용쟁이 칼 쓰는 모양을 지켜 볼 뿐 진짜로 손을 쓰지는 않았다. 둘째도 침착한 눈길로 지켜 보다가 모용쟁이 앞으로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면 번개같이 몸을 돌려 그녀의 길을 막곤 했다. 보아하니 그들 두 사람은 여자와 싸우는 것을 시시하게 생각하고 손을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만
도 마혁은 모용쟁이 하도 악착스럽게 달려드는 통에 온몸에 식은땀이 밸 정도로 바빴다. 실상 그의 무예 실력으로 모용쟁쯤은 얼마든지 누를 수 있지만 그녀를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니 피하기만 하다가 당한 것이다. 그래도 몇 번은 화가 솟구쳐 주먹을 심하게 다루려 했지만 그때마다 큰 사형이 제지하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다. 자기 칼로는 상대방을 찌를 수 없는데 상대방의 칼은 수시
로 자기를 죽이려 드니 온몸에 땀이 밸 수밖에.
한켠에 있던 옥문이 웃으며 말했다.
"모용쟁, 아가씬 사부님의 보배니까 우리를 따라 순순히 돌아가기만 하면 사부님이 아가씰 박대하지는 않을 거예요. 이렇게 사서 고생할 필요 있어요?"
모용쟁은 이 말을 듣자 분이 치밀어 욕설을 퍼부었다.
"너의 사부님이라고? 그자는 한 마리 개에 불과해. 서지도 못하는 난쟁이 개란 말이다. 오라, 이제 보니 너야말로 그 개의 보배인 모양이구나."
이 말은 옥문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의 사부를 욕할 때 자기까지 함께 욕하는 것을 제일 싫어했으므로 이를 부득부득 갈며 말했다.
"건방진 년, 네까짓 게 뭔데 그렇게 콧대를 세우는 거냐? 넌 우리 사부님이 상자 속에 집어 넣었다가 심심할 때 꺼내 보는 노리개야! 내 말이 틀리냐?"
모용쟁은 이 말을 듣자 너무 분해서 온몸이 부들부들 떨릴 지경이었다.
'놈들을 한둘쯤 죽이지 않고서는 이곳을 떠나지 못하겠구나. 한데 이 네 놈이 다 실력이 만만치 않아. 이 여자와 만도라는 놈과 격투를 벌여도 힘에 부치는데, 저쪽 두 사람까지 함께 덤벼들면 내 목숨은 끝장난 셈이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녀는 죽기를 각오하고 손에 쥔 칼을 더욱 날카롭게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구양봉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보아하니 우리 백타산 마을 체면이 저들 사제간에 의해 여지없이 똥칠을 한 셈이 되었구나! 저들은 사람을 파리 죽이듯 하는데다 임일천이란 자는 여인들을 납치해서 보석처럼 상자 속에 감추어 둔다니, 여인을 어찌 이처럼 노리개로 대할 수 있단 말인가? 천하에 이보다 더 황당한 일은 없을 것이다.'
구양봉은 곧 외쳤다.
"당장 멈추시오! 내 말 좀 들어 보란 말이오!"
사람들은 그 소리에 손을 멈추고 그가 말하기를 기다렸다. 그들이 싸움을 멈추자 구양봉이 침착하게 말했다.
"난 사두장(蛇頭枕) 구양적의 동생이오."
네 사람 모두 흠칫 놀랐다. 이 사막에서 활개를 치고 사는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이 사두장 구양적이었던 것이다. 사두장 구양적은 괴이한 사람이라 평소에는 문 밖을 나서는 일이 매우 드물었다. 게다가 성미가 포악하여 그를 건드린 자는 백타산 마을에 발붙일 엄두도 내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사막의 독수리 어거풍이 냉랭하게 말했다.
"그럼 당신이 바로 책벌레 구양봉이구먼?"
구양봉은 그가 자기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이 너무 기뻐서 얼른 대답했다.
"맞소, 내가 바로 구양봉이오!"
사막의 독수리 어거풍이 쌀쌀하게 물었다.
"당신 형님 이름만 대면 우리 네 형제가 벌벌 떨 줄 알았나?"
구양봉은 그런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으므로 즉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아니오! 난 다만 여러분과 함께 이 불쌍한 낭자가 살길을 찾아 도망치도록 놓아주자고 의논해 보려는 것뿐이오."
네 사람은 서로 바라보며 생각했다.
'보아하니 이 사람은 정말 구양적의 동생인 모양이구나. 만약 우리가 이 사람을 죽였다는 것이 그 마귀에게 들통나는 날이면 후환이 이만저만이 아니겠지? 우린 지금 모용쟁을 잡아가야 하는데, 그렇다고 이 구양봉을 건드릴 수도 없고……. 참으로 난처하군.'
그들 중 쌍검 옥문이 머리가 빨리 도는 편이었다. 그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구양봉에게 말했다.
"구양 도련님, 당신이 우리 사부님의 여인을 꼬드겨서 도망쳤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그랬다면 더 이상 추궁하지 않겠어요. 돌아가서 사부님께 잘 말씀드리면 그분도 용서하실 거예요. 그렇지만 지금은 우리가 이 여자를 데려가도록 길을 비켜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요."
구양봉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 뜻은 변할 수 없소. 당신들도 피와 살을 가졌다면 잘 생각해 보시오. 당신들도 잘 알겠지만, 당신들 사부님이 하는 일들이 모두 인간의 도에 어긋난 짓들인데, 그를 위해 목숨을 내걸게 뭐요?"
사막의 독수리 어거풍이 큰소리로 반박했다.
"허튼소리 하지 마시오! 당신이 뭔데 우리 사부님을 모욕하는 거요? 당신 형님의 면목을 봐서 그냥 놔 두지만 계속 우리 사부님을 욕되게 하는 말을 지껄이면 그땐 가만 두지 않을 것이오!"
구양봉도 사막의 독수리 어거풍의 이름을 여러 번 들어 잘 알고 있었다. 그의 형 구양적은 원래 혼자 움직이길 좋아하여 그들 네 사람과 별다른 왕래가 없었다. 설사 그들이 형과 교분이 있다 하더라도 사부의 명령을 어기고 이 여인을 놓아줄 리는 없는 것이다. 이제 사정해도 소용이 없음을 알아차린 구양봉은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내심 자기의 무술이 약한 것을 한탄했다. 만약
이 자리에 형님이 있었다면 그들 네 형제는 찍소리도 못했을 것이다.
얌전히 서 있던 쌍검 옥문이 갑자기 말했다.
"큰오빠, 내 생각엔 우리가 구양적이란 자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그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우리가 이 녀석을 죽여 버린 다음 여자를 사부님께 끌고 가서 다시는 달아나지 못하게 하면 되죠. 그때 가면 이 여자도 입을 열지 못할 거고, 우리가 구양봉을 죽인 것도 알 사람이 없을 것 아니에요?"
쌍검 옥문의 말에 세 사람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구양봉은 혼자 한숨을 길게 쉬었다.
네 사람이 천천히 걸어와 두 사람을 빙 둘러쌌다.
'나는 가는 곳마다 남의 손에 옴짝달싹 못하게 될 팔자를 타고난 모양이구나! 이제 백타산 마을의 사걸까지 내 머리에 올라앉는 지경이 됐으니. 내가 만약 형님처럼 무예가 뛰어났더라면 이 놈들은 틀림없이 내 손에서 주검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날 보자마자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을 갔을 것이고! 앞으로 무예를 잘 배워 가지고 놈들이 다시는 나한테 큰소리 치지 못하게 해
야지!'
하지만 다시 생각하니 오늘 밤을 무사히 넘기게 될지도 알 수 없는 판에 언제 무예를 연마하고 어쩌고 한단 말인가?
사막의 독수리 어거풍이 입을 열었다.
"구양봉, 평소에 네 형님이 거들먹거리는 꼴이 보기 싫었는데 잘 됐다! 오늘 네 버릇을 단단히 가르쳐 줄 테다!"
만도 마혁도 살기등등해서 외쳤다.
"옳소, 큰형. 우리 같이 손을 맞추어 이 골방 샌님을 없애 버립시다! 그때 가서 이 년이 한바탕 눈물 콧물을 쥐어짜게 말이오!"
사막의 독수리 어거풍은 백타산 마을에서 명성이 높았다. 그의 독수리 권법이 큰 위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서역에서는 사두장 구양적을 제외하고는 어거풍을 따를 자가 없었다.
어거풍은 이를 갈며 생각했다.
'구양적이란 자식은 오만무례하기 짝이 없고 아주 재수 없는 놈이야. 그의 동생 구양봉을 죽여 앙갚음이라도 해야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사막의 독수리는 명령을 내렸다.
"좋아! 시작하자!"
그가 명령을 내리자 세 사람이 움직였다. 쌍환 기노는 줄곧 말이 없었지만 이들 중 가장 악독한 자였다. 그는 독수리의 명령을 받자 곧 품에서 한 쌍의 환(環)을 끄집어냈다. 이 환이 그의 명성을 떨치게 한 전용 무기였다. 하나는 금환인데 크기가 보름달만하며 환 안쪽에 예리한 톱날이 가득 나 있었다. 다른 하나는 은환으로 크기가 팔찌 정도인데 사람의 몸에 박이면 치명적인 상처를 내는
암기(暗器)였다. 그는 한 쌍의 환을 마주 쳐서 쨍쨍 소리를 냈다. 만도 마혁은 날이 호형으로 휜 칼을 두 손에 틀어잡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쌍검 옥문은 두 손에 쌍검을 들었는데, 장검은 앞에 비껴 쥐고 단검으로는 가슴을 방비했다.
구양봉은 일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지만 도망갈 수도 없었으므로 마음을 굳게 먹고 그들의 일거일동을 뚫어지게 지켜 보고 있었다.
이때 뜻밖에도 모용쟁이 외쳤다.
"왜 멍청히 서서 도망가지 않는 거예요? 저 사람들이 당신을 죽이려 한단 말이에요!"
그때 사막의 독수리가 앞으로 나서서 두 발을 구르는가 싶더니 단숨에 구양봉을 움켜쥐었다. 손아귀 힘이 어찌나 억센지 구양봉은 뼈가 부서지는 것 같았다.
몇 발자국 떨어져 있던 모용쟁이 이 광경을 보고 꽥 소리쳤다.
"조심해요!"
그녀가 보기에도 어거풍의 권법이 매우 지독하여 구양봉이 그의 손아귀에 잡히는 날엔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녀는 몸을 날려 구양봉의 앞을 막아 섰다. 모용쟁은 어거풍을 비롯한 네 사람이 자기를 해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별걱정 없이 그렇게 한 것이다. 그녀는 어거풍을 향해 손에 쥔 단검을 휘둘렀다.
사막의 독수리 어거풍은 만도 마혁보다 훨씬 강한 적수였다. 그는 손을 거두어들이더니 주먹을 움켜쥐고 팔목을 비스듬히 굽혀 모용쟁의 팔을 내리쳤다. 모용쟁은 꼼짝 못하고 모래 위에 쓰러졌다.
쌍검 옥문이 냉랭한 소리로 비웃었다.
"흥,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사내 놈을 보호하여 싸우는 판이로군!"
모래 위에 넘어진 모용쟁은 쌍검 옥문이 자기와 구양봉을 비꼬는 말을 듣자 너무 분해 눈물을 글썽였다.
사막의 독수리가 입을 열었다.
"구양봉, 오늘이 네 제삿날인 줄 알아라! 백타산의 사걸이 인정이 없다고 원망하지 마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만도, 독수리, 금환, 쌍검이 일시에 구양봉에게 달려들었다.
구양봉은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으므로 슬며시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사막의 독수리 어거풍, 쌍환 기노, 쌍검 옥문, 만도 마혁 네 사람의 손이 공중에서 얼어붙었다. 그들은 얼굴에 당혹스러운 기색을 띠었다. 어디선가 매우 침착한 목소리가 울려 왔기 때문이었다.
"손끝 하나라도 움직이면 네 놈들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제8장 사두장 구양적
춥고 한적한 한밤의 사막에서 울려 오는 사람의 소리였다. 네 사람은 황급히 머리를 돌려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바닥에 쓰러진 모용쟁과 구양봉 외엔 사람이라곤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만도 마력이 큰소리로 외쳤다.
"누구냐? 어서 나와서 말해라!"
사막의 독수리는 급히 구양봉을 살펴보았지만 구양봉은 방금 전의 소리를 듣지도 못한 기색이었다. 이로 보아 방금 전의 사람이 전음입밀(傳音入密)의 공력을 써서 공중에 뜬 소리를 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네 사람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이 사람의 무예가 상당한 것임을 짐작하고 황황히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역시 아무도 찾아볼 수 없었다.
구양봉은 도마 위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고기 신세였으나, 그도 무엇이 그들의 손길을 멈추게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다만 모용쟁이 그들을 놀래킬 어떤 일을 한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사막의 독수리 어거풍이 벽력같이 소리질렀다.
"누구냐? 썩 나서지 못할까?"
모용쟁은 일어나며 방금 구양봉을 구하려 했던 자신의 행동을 떠올리고 자신을 질책했다.
'모용쟁, 산을 내려온 뒤 넌 좋은 사람이라곤 하나도 보지 못했다. 과연 사부님이 말씀하신 대로 사내들이란 하나같이 변심하는 자 아니면 지독한 자들뿐이다. 두셋쯤 좋은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허다한 나쁜 사람들을 대체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방금 나는 이 더러운 사내를 위해 상처까지 입었으니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그러나 모용쟁은 지금이라도 네 사람이 구앙봉을 죽이려 들면 자기가 가만 있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다시금 사람의 말소리가 산울림처럼 울려 왔다.
"당장 물러서지 않으면 오늘 이 사막에서 뼈다귀도 찾지 못할 줄 알아라!"
네 사람 중 가장 성질이 급한 만도 마혁은 미처 궁리도 해 보지 않고 칼부터 뽑아 들기가 일쑤였다. 그때도 그는 공중에서 울려 오는 사람의 말이 자기들 사걸 따위는 눈에 차지도 않는다는 뜻이 명백한지라 분이 치밀어 소리쳤다.
"넌 누구냐? 썩 기어 나오지 못할까?"
말을 마친 그는 손에 쥔 만도를 두 번이나 거칠게 흔들어 댔다.
그래도 세상 물정을 많이 겪어 본 사막의 독수리 어거풍이 쉰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느 선배님인지 가르침을 주시면 고맙겠소이다!"
쌍환 기노는 누군가 전음입밀의 공력으로 말을 걸어 오자 몹시 놀란 나머지 급히 환을 거두어 하나로는 머리를 가리고 다른 하나로는 가슴을 가리고 있었다. 그는 매우 신중한 사람이어서 강적을 만나는 경우 자신을 빈틈없이 보호하고 난 다음에야 상대방에게 덤벼드는 것이었다. 이와 반대로 도무지 겁이라고는 없는 쌍검 옥문이 큰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누군데 야밤에 사막의 밤귀신으로 분장하고 나타나 이 야단이요."
낯선 목소리가 시끄럽다는 듯 거칠게 울려 왔다.
"어거풍, 좋게 말할 때 세 사람을 데리고 얼른 꺼져라! 그러지 않으면 네 사람 모두 비명에 죽게 될걸!"
사막의 독수리 어거풍을 비롯한 네 사람이 누군데 낯선 사람의 말에 겁을 먹고 도망가겠는가? 네 사람은 모두 숨을 죽이고 잔뜩 긴장해서 적이 나오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구양봉과 모용쟁도 일어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모습은 보이지 않고 소리만 들리는 그 사람을 찾으려고 애썼다.
사막의 독수리 어거풍이 더 참을 수 없다는 듯 괴성을 질렀다.
"나와라!"
그러자 호탕한 웃음 소리가 들리더니 그들의 뒤에서 검은 그림자가 번개같이 돌진해 왔는데, 누구도 그를 똑똑히 볼 수 없었다. 네 사람은 그 사람의 무예가 실로 대단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어쩔 줄을 몰라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네 사람 앞에 딱 멈춰 서더니 냉랭하게 말했다.
"네 놈들이 구양봉을 죽이려 했지?"
네 사람은 그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 괴한은 손에 특이한 지팡이를 짚고 있는데, 손잡이 부분에 커다란 주먹 같은 매듭이 있고 그 속에 구멍이 나 있는 듯했다. 몸에는 두터운 옷을 걸치고 목이 긴 장화를 신고 싸늘한 눈길로 네 사람을 쏘아보고 있었다.
구양봉은 밖에서 놀림받던 아이가 부모를 만난 것처럼 눈물을 떨구면서 목이 메었다.
"형님……."
이 사람이 바로 지팡이 하나로 서역을 휩쓸면 대적할 자가 없다는 백타산의 제일 실력자 사두장(蛇頭杖) 구양적이었다.
모용쟁이 자세히 살펴보니 구양적의 얼굴 생김이 구양봉과 비슷했다. 다만 구양봉보다 키가 좀 작고 다부져 보일 뿐이었다. 달빛 아래서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구양적의 눈에 살기가 번뜩였다. 구양적 역시 모래 위에 서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가 섰던 자리에는 발자국이 남지 않았다. 오른손에 사두장을 가볍게 눌러 짚고 있는 품이 매우 침착해 보였다. 백타산 마을의 사걸은 구양
적이 모래 위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서 있는 것은 경공을 써서 그렇다는 것과, 자기들의 무술이 그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구양적이 이렇게까지 자기들을 업신여기는데 자라목 움츠리듯 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더욱이 그들은 오래 전부터 구양적을 질투하고 미워해 오던 터였다.
사막의 독수리 어거풍이 두 주먹을 으스러지게 틀어쥐자 뼈마디에서 으드득하는 소리가 났다.
"구양적, 네 놈 꼴이 눈꼴시어서 진작부터 별러 오던 터다. 이마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밤낮 손에 지팡이를 쥐고 거들먹거리니 구역질이 나서 못 봐 주겠구나."
말없이 네 사람을 쏘아보는 구양적의 냉랭한 눈길이 그들의 폐부를 뚫어 보는 듯했다. 그는 네 사람을 일일이 쏘아보고 나서 입을 열었다.
"네 놈들이 내 동생을 죽이려 했지?"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다 알면서 뭘 묻느냐는 태도였다.
사막의 독수리 어거풍이 큰소리로 대답했다.
"구양적, 입방아는 그만 찧고 빨리 대결해 보자!"
구양적이 대답했다.
"좋아, 우리 구양씨 가문을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는 걸 네 놈들에게 보여 주마!"
말을 마치자 그는 사막의 독수리 어거풍한테 다가가더니 손에 쥐었던 사두장을 치켜 들었다. 그는 지팡이 끝으로 네 사람을 하나씩 가리키면서 말했다.
"산군이란 자는 본래부터 괴상한 물건인데 이제 너희들까지 그 사람 같지 않은 것을 돕고 있으니 무슨 만행인들 저지르지 않았겠니? 내 오늘 네 놈들에게 똑똑히 버릇을 가르쳐 주마!"
사막의 독수리가 울부짖었다.
"좋아! 백타산의 최고 실력자라고 자부하는 너에게 사막의 사걸 맛을 보여 주마!"
구양적이 길게 웃어제끼자 네 사람은 동시에 구양적을 덮쳤다. 구양적은 오른손에 지팡이를 쥐고 왼손으로 네 사람과 번갈아 싸우고 있었지만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네 사람은 일진일퇴하면서 손발이 딱딱 맞았다. 독수리 어거풍의 열 가닥 발톱은 구양적의 옆구리, 어깻죽지로 수시로 육박해 오면서 그의 살가죽을 찢으려 들었고, 만도 마혁은 손에 틀어쥔 만도를 바람 소리가 나도록 휘둘
러 댔다. 아까 모용쟁과 싸울 때처럼 방어만 하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매동작이 날쌨고, 한 번 칼을 휘두를 때마다 단칼에 구양적을 도륙할 기세였다. 쌍검 옥문은 큰 칼을 머리 위에 치켜세우고 작은 칼로 몸을 막으며 일진일퇴하는 동작이 여간 재빠르지 않았다. 쌍환 기노는 더욱 살기등등해서 금환으로는 지팡이를 걸어 당기려 했고 은환으로는 구양적의 얼굴을 겨누었다. 네 사람은 원래
한 스승한테서 오랜 시일 같은 권법을 배워 왔는지라 서로 손발이 교묘하게 척척 맞아떨어져 일류 실력자와도 맞설 만했다. 구양적은 사두장을 돌풍 일으키듯 휘두르면서 지팡이 끝으로 독수리의 태양혈을 치는 척하다가 갑자기 쌍검 옥문의 얼굴을 휙 스쳐 지나고, 다시 지팡이 끝을 뱀처럼 금실거리는 기노의 쌍환에 걸어서 쌍환을 멀리 내팽개쳐 버렸다.
구양적이 괴성을 지르며 지광이를 휘두르자 사걸들은 계속 뒤로 물러섰다.
모용쟁은 멍하니 서서 구양적의 일거일동을 지켜 보며 이런 생각이 스쳤다.
'우리 정암파는 비구니파에 속하므로 거의가 경공으로 몸을 가볍게 놀려 큰 위력을 발휘하지. 그런데 구양적의 무예는 정암파와 비슷하게 부드러운 데가 있으면서도 그 술법이 대단히 음험하군. 사내가 이러한 권법을 갖고 있다는 건 아무래도 수상쩍은 일이야!'
구양봉은 비록 무예는 잘하지 못하지만 무학(武學)에 대한 견식은 갖고 있었으므로 형인 구양적의 지팡이 놀림이 그토록 악랄한 것을 보자 내심 놀라고 있었다. 형의 무예가 어느 파에 속하는지는 몰라도 그가 지팡이를 음험하게 사용하여 치명적인 곳만 골라 치는 데에 구양봉도 놀랐던 것이다. 이게 어디 정종(正宗) 무예 대가의 작품이란 말인가? 그러나 자신의 친형님이므로 구양봉은 생각
을 달리 하게 되었다.
'형님이 화가 나서 정신이 나가셨거나 일부러 그러는 걸 거야!'
잠깐 생각에 잠겨 있는데 그들의 싸움에 변화가 생겼다. 구양적이 슬쩍 휘두른 지팡이에 쌍검 옥문의 큰 칼이 딱 부딪치더니 멀리 날아가 버린 것이다. 당황한 옥문은 앗 소리와 함께 급히 한켠으로 물러섰다.
네 사람으로 묶인 진영의 한쪽이 허물어진 것을 본 구양적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독수리 어거풍의 아랫배로부터 앞가슴으로 지팡이를 날려 잡아당겼다. 이 술법은 매우 악랄하여 만약 독수리가 지팡이에 걸렸다면 그의 배가 갈라져 내장이 다 쏟아져 나올 뻔했다. 어거풍이 급히 뒤로 물러서니 지팡이 끝이 그의 얼굴을 획 스쳤다. 독수리가 이렇게 몸을 빼는 바람에 쌍환 기노와 만도 마혁이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원래 음험하기로 이름난 쌍환 기노는 쌍환을 치켜 들어 앞으로 내던질 것처럼 가동작을 피워 댔다. 그러자 그가 구양적에게 환을 던졌다고 생각한 만도 마혁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달려들어 칼을 휘둘렀다. 그가 쓴 술법은 만도제발(萬刀齋發)이었다.
그런데 쌍환 기노의 동작이 가동작일 줄이야 누가 짐작했겠는가? 기노는 금환을 위로 치켜 들어 머리를 가리고 은환은 뿌리지도 않은 채 몸을 굽혀 멀리 뛰어올라 도망가 버린 것이다. 혼자 남은 마혁은 구양적의 지팡이에 가슴을 얻어맞고 앗 소리와 함께 땅에 쓰러졌다.
사막의 독수리 어거풍, 쌍검 옥문, 쌍환 기노는 서로 바라보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만도 마혁이 중상을 입었으니 그들 세 사람이 구양적의 적수가 되지 못할 것은 뻔한 일이었다.
사막의 독수리가 냉랭하게 뱉었다.
"구양적, 네 실력은 확실히 막강하구나, 우리 사걸은 너의 적수가 못 된다. 그렇지만 네가 우릴 죽여 버리려 든다면 그건 쉽지 않을걸……."
그의 말에는 겁을 먹은 티가 완연했다.
구양적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물러가라, 내 앞에서 썩 꺼지란 말이다!"
사막의 독수리 어거풍은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만도 마혁에게 다가갔다.
"동생, 많이 다쳤나?"
쌍환 기노는 만도 마혁을 부축하며 구양적에게 한마디 던졌다.
"우린 가겠다."
그리곤 몸을 돌려 냉큼 사라져 버렸다.
사막의 독수리 어거풍은 무릎을 꿇고 조용히 말했다.
"구양적, 우리가 가도 되겠소?"
구양적은 날카로운 소리로 웃어댈 뿐 대답이 없었다.
쌍검 옥문이 쌀쌀맞게 말했다.
"죽이려면 빨리 죽이시오. 죽음을 두려워하면 대장부가 아니지요!"
구양적이 냉랭하게 말을 맞았다.
"여자가 무슨 대장부 행세냐?"
쌍검 옥문은 그의 어조가 차갑기는 하지만 기세가 많이 수그러든 것을 느끼고 구양적이 자신들을 죽이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구양봉과 모용쟁은 매우 긴장하여 싸움을 구경하고 있었다. 구양봉은 저도 모르게 모용쟁의 팔을 잡은 채 오랫동안 놓지 않았다. 모용쟁도 단검을 떨어뜨린 채 구양봉과 함께 휘둥그래진 눈으로 이 무서운 싸움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가 구양봉과 함께 서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구양적이 입을 열었다.
"네 놈들은 떠나거라!"
이렇게 말하고 나서 그는 몸을 돌려 구양봉에게 다가가며 지팡이를 모래 위에 꽂았다. 구양적은 온 얼굴에 활짝 웃음을 띠고 구양봉에게 말했다.
"얘야, 여행은 어땠니? 재미 좋았어?"
구양봉은 아주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또 얼마 안 되어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신 까닭에 형과 둘이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왔다. 그런 까닭에 형님 구양적은 아버지이자 어머니이기도 했다. 오랫동안 헤어졌다가 만나는데다가 형님이 이처럼 친절하게 물으니 그동안 쌓였던 설움이 일시에 터지면서 눈물이 나왔다.
구양봉이 대답했다.
"형님, 재미있게 지냈어요!"
사막의 독수리 어거풍과 쌍검 옥문은 구양적이 자기들을 본 체도 하지 않자 슬슬 뒷걸음치다가 몸을 홱 돌려 쌍환 기노가 도망간 쪽으로 뒤쫓아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구양적은 동생을 만나자 너무도 기쁜 나머지 사막의 독수리고 뭐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는 동생의 두 손을 꼭 잡고 온 얼굴에 자애로운 기색을 듬뿍 띄운 채 흐뭇해서 잠시 할말을 찾지 못했다. 한참 후에야 그는 동생 옆에 서 있는 모용쟁을 보고 놀랐다.
'대단한 미인이로군.'
모용쟁은 입술을 약간 벌린 채 윤지가 흐르는 눈으로 구양적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날이 차츰 밝아 오자 사막의 한 끝이 뿌옇게 밝아 오기 시작했다. 어렴풋하게 점점 밝아지는 빛이 짙어지는 듯 옅어지는 듯 변화를 부려 사막의 모든 것이 낯설게만 보였다.
세 사람은 다리를 쭉 펴고 앉아 날이 완전히 밝기를 기다렸다. 구양적이 물었다.
"둘째야, 임안은 백타산 마을보다 번화하니 구경할 만했지?"
구양봉은 형님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았지만 막상 입을 열자니 어디부터 시작하면 좋을지 몰랐다. 그는 황약사와 일속 스님과의 만남으로부터 시작하여 홍칠이를 따라 황궁에 들어가 음식을 훔쳐먹던 일이며, 작은 마을에서 백타산군 임일천을 만난 일, 그리고 황약사가 피리를 불어 뱀 무리를 물리치던 일 등을 자세히 이야기했다. 그의 입심은 임안 거리의 이야기꾼 못지않아서 듣는
사람이 눈앞에 일어나는 일을 보는 듯이 생생하고 구수하게 이야기했다. 구양적과 모용쟁은 귀를 기울여 구양봉의 이야기를 재미나게 듣고 있었다.
구양적이 말했다.
"백타산군 임일천이란 자는 소문난 폭군이어서 이 백타산 마을에서도 나쁜 짓을 얼마나 많이 하는지 모른단다. 그 놈이 중원까지 가서 안하무인 격으로 거들먹거리다니 참으로 가소롭구나. 그가 진짜 실력 있는 사람을 만나 콧대를 꺾였으니 그것도 좋은 일이야!"
하지만 구양봉이 빼놓고 말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말하기 싫어선지 아니면 자기와 모용쟁이 사막에서 보낸 하루가 수치스러워선지, 아무튼 수많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옆에 앉아 있는 모용쟁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구양적은 궁금해서 동생을 바라보다가는 모용쟁을 흘끔 보기도 하면서 생각했다.
'아까 사막의 사걸들과 싸우면서 보니까 이 낭자가 동생 옆에 꼭 붙어 있는 품이 동생과 자못 친근한 것 같았어. 그렇다면 동생의 벗일 수도 있는데 이 아이는 어째서 반나절이 되도록 이 낭자를 소개하지 않는 거지?'
하지만 구양봉이 말이 없는데 구태여 캐묻기도 미안했다. 구양적은 흐린 여명 속에 드러난 그녀의 얼굴이 참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이때 구양봉의 뇌리에는 임안에서의 일만 꽉 들어차 있었으므로 형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예전에 전 학문만 잘 닦으면 천하를 다스리는 훌륭한 인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임안 여행에서 그 생각이 그르다는 걸 똑똑히 깨우쳤습니다. 이번에 고난을 겪으면서 무예가 중요하다는 걸 알았으니 이제부턴 형님한테 무예를 배울 생각입니다. 형님께서 잘 가르쳐 주십시오."
구양적은 동생이 자기를 만나자마자 무예를 배우겠다고 청하자 너무도 뜻밖인지라 응하지도 거절하지도 못하고 망설이기만 했다.
구양봉에겐 이런 형님의 태도가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형님은 어릴 적부터 무슨 일이든 그의 말은 꼭 들어주었던 것이다.
'내가 무술을 배우면 형님과 같은 길을 걷게 되니 형님이 기뻐하시리라 여겼는데, 형님은 우물쭈물 망설이며 썩 내켜 하지 않으니 어찌 된 영문일까?'
구양적은 고개를 돌려 모용쟁에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했다.
"낭자, 임안에서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았을 텐데 조금 쉬었다가 떠납시다. 반나절도 안 걸려 백타산 마을에 도착할 수 있으니 집에 당도해서 편히 쉬시고요."
구양봉은 형님에게 무술을 연마할 자기의 계획을 말할 생각으로 흥이 도도했었는데 말꼭지를 떼자마자 형님이 시큰둥한 태도로 나오니 갑갑증이 나서 죽을 지경이었다.
'형님은 어물어물 넘기는 일이 없는데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일까?'
그러나 그는 늘 형님을 존경하고 있었으므로 더 이상 그 말을 꺼내지 않기로 했다. 그러다가 형님이 모용쟁에게 임안에서 오느라 수고가 많았다고 말하는 걸 듣고는 모용쟁을 자기가 임안에서 데려온 여자로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구양봉은 속으로 우스우면서도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우악스러운 여인이 날 끌고 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스런 일인데, 날 따라 임안에서 이렇게 먼 사막까지 따라왔다니……, 그게 무슨 말이나 되는 소린가?'
그러나 뜻밖에도 모용쟁이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전 둘째 도련님을 따라 임안에서 오는 길이 아니라 백타산 마을에서 도망쳐 나오는 길이에요."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란 구양적은 모용쟁의 신색을 다시 살펴보고 나서야 갑자기 크게 깨달았다.
'백타산군 임일천이 변태적인 인간이라더니 그게 참말이었군! 그는 여인과 보물을 밀실에 저장해 두는 걸 업으로 삼는다던데……. 이처럼 예쁜 여인이 어떻게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단 말인가?'
그는 그제야 사막의 사걸이 바로 이 모용쟁 때문에 동생을 죽이려 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자 그는 속으로 구양봉을 나무랐다.
'둘째야, 임안에 갔으면 변화한 거리나 보고 오면 그만이지 하필이면 강호지사(江湖之士)의 행색으로 남의 일에 참견할 건 뭐란 말이냐? 우린 백타산 마을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사람인데 어찌 백타산군과 원수를 맺으려 했느냐? 네가 이 아가씨를 백타산 마을로 데려가면 더 시끄러운 일이 생긴다는 걸 왜 생각지 못하느냐?'
여기까지 생각이 들자 그는 모용쟁을 보고 말했다.
"낭자께서 범의 아가리에서 도망쳐 나온 것만도 예삿일이 아니었소. 내 생각엔 날이 밝기 전에 어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이 뜻밖의 말에 구양봉과 모용쟁은 깜짝 놀랐다.
모용쟁은 구양적이 사막의 사걸들과 맞서 싸우는 것을 보면서 강호를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용감한 행동에 감동하여 저도 모르게 경모의 감정이 솟구쳤었다. 그런데 구양적의 말을 듣고 보니 그도 임일천과 시비가 벌어질까 봐 못내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모용쟁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갑갑해져서 서러운 듯이 말했다.
"좋아요! 당신이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제가 무슨 할말이 있겠어요. 그럼 구양 대협(大俠)께서 목숨을 구해 주신 은혜에 감격하면서, 소녀는 그만 떠나겠습니다."
구양봉은 그녀가 말 한마디 불쑥 던지고는 몸을 돌려 떠나가는 것을 보자 소리쳐 불렀다.
"안 돼! 돌아오시오!"
모용쟁은 몸을 홱 돌려 구양봉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흥! 아무려면 도련님께서 나와 함께 임안까지 갈 작정은 아니겠지요?"
구양봉은 쓴웃음을 지으며 저렇게 지독한 여자에게는 '강 동쪽의 사자가 울부짖네'라는 옛시인들의 시구가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어느 멍청인지 너한테 장가드는 날이면 그야말로 사자 한 마리를 데리고 사는 셈이지. 날마다 귀가 아프게 울부짖을 텐데 누가 그런 고생을 사서 한담? 뭐? 나더러 같이 임안에 가겠느냐구?'
그러나 형님을 만나 기분이 좋은 그는 우스갯소리를 꺼냈다.
"아가씬 떠나기 전에 할 일이 한 가지 있소."
모용쟁이 의아스럽게 물었다.
"저더러 뭘 하라는 거예요?"
구양봉이 대답했다.
"가기 전에 내 눈에 들어간 모래들을 꺼내 주어야겠소!"
모용쟁은 그가 이런 말을 하리라곤 전혀 생각지 못했으므로 어쩔 줄을 몰라했다.
구양적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면서 동생과 이 아가씨가 생소한 사이 같기도 하고 익숙한 사이 같기도 하여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그가 보아하니 모용쟁은 구양봉의 말을 듣고 아주 난처해 하는 게 분명하므로 큰소리로 말했다.
"봉아, 그거라면 내가 씻어 줄 테니 이 아가씨를 난처하게 하지 말아라!"
모용쟁은 속으로 구양봉을 욕했다.
'뭐, 모래를 꺼내 달라구? 널 죽이지 않은 것만도 다행인 줄 알아라, 이 바보야! 그때 내가 검으로 한 번만 찔렀다면 네가 지금 그렇게 살아 있을 줄 알아?'
그러나 모용쟁도 이제는 변고를 겪을 만큼 겪어 보았으므로 얼마간 조심성이 생겼다.
'구양적이 옆에 있으니 계속 뻗대다간 이대로 빠져 나가기도 힘들 게 아닌가? 차라리 구양봉의 말에 응하는 척하다가 몸을 빼도 늦지 않을 거야.'
여기까지 생각한 모용쟁은 활짝 웃으며 대꾸했다.
"좋아요! 제가 눈을 씻어 드리지요!"
모용쟁은 구양봉을 살며시 끌어당겨 먼 곳으로 데려갔다. 그 다음 얼굴에 웃음을 담으며 손을 내밀어 섬섬옥수로 꽃송이를 꺾듯이 식지와 엄지로 구양봉의 눈꺼풀을 뒤집는데 그 모양이 실로 정겹고 부드러웠다. 그녀는 손으로 눈꺼풀을 뒤집으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기고만장하지 마세요! 당신 형님만 없으면 내가 칼을 한 번 휘두르기만 해도 당신은 찍소리도 못하고 죽어 버릴 거라구요."
한창 아름다운 상념에 빠져 흐뭇해 하던 구양봉은 모용쟁의 가시박힌 말에 기분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그러나 그 역시 지지 않고 낮은 소리로 대꾸했다.
"아가씨가 밧줄로 날 묶어 놓은 것만 해도 큰 죄인데 모래를 뿌려 내 눈을 못 뜨게 만들었으니 죄가 더욱 커졌소. 아가씬 조만간 대가를 치러야 할걸!"
모용쟁이 속삭이듯이 대꾸했다.
"당신은 구양 가문의 둘째 도련님이니 당당한 사내 대장부 아니에요? 그런데도 형님을 만나자마자 눈물을 훌쩍거리니 그래, 아녀자들과 다를 게 뭐가 있어요?"
그녀는 온 얼굴에 웃음을 띄우고 구양봉과 입씨름하고 있었으므로 먼 곳에 있는 구양적은 엉뚱한 생각을 했다.
'아마 저 여자가 의협심이 강한 둘째에게 반해 버린 모양이야! 그렇다면 저 여자를 쫓아 버리려 한 나의 언행이 너무 모질지 않은가?'
이 순간 모용쟁이 얼굴에 웃음을 담은 채 입으로는 악랄한 말만 골라 퍼붓고 있음을 구양적이 어떻게 상상이나 하겠는가?
구양봉은 비록 무예는 몰랐으나 담은 보통이 넘게 큰 사람이니 모용쟁의 한두 마디 위협에 겁을 집어먹을 리가 없었다. 그 역시 얼굴에 웃음을 바르고 속삭이듯 말했다.
"모용쟁이라……. 그 이름 참 듣기 좋구먼. 전부터 강남 모용 가문 규수들의 자색이 천하에 으뜸이라고 하더니, 확실히 모용 가문 아가씨들은 무예에도 능하고 얼굴도 예뻐서 사람마다 부러워할 만하오!"
모용쟁도 젊은 아가씨인지라 칭찬해 주는 말을 듣자 속으로 흐뭇하고 뽐내고도 싶었다.
'이 사람이 재주는 신통찮지만 꿀 발린 소리는 참 잘하거든! 상대방이 이렇게 추어주는데 계속 눈살을 찌푸리고 냉대할 수야 없지!'
그녀는 짐짓 구양봉의 말에 취한 듯한 태를 냈다. 그러자 구양봉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난 아가씨에게 배울 게 있소!"
모용쟁도 웃으며 대답했다.
"할말이 있으면 어서 하세요!"
"모용 가문의 두 가지 재주는 실로 절묘하기 그지없소. 한 가지는 바로 밧줄로 동여매는 것인데 이것은 '정견몽요(情牽夢繞 ; 정으로 끌고 꿈으로 묶는다는 뜻)'라 할 수 있지! 다른 한 가지는 모래알로 사람의 눈을 흐리게 하는 건데, 이것은 '연인의 눈에서 모래가 나오게 한다(情人眼里出沙子)'고 할 수 있지! 내 말이 맞지 않소?"
그 말에는 모용쟁도 참을 수 없어서 훗 하고 소리 내어 웃어 버렸다.
멀리서 바라보는 구양적은 적이 놀랐다. 동생과 모용쟁이란 아가씨가 눈이 맞은 게 확실해 보였던 것이다. 그들 두 사람이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니 한 쌍의 금슬 좋은 원앙새 같았다.
모용쟁은 입으로는 혹독한 말들을 내뱉었지만 손으로는 구양봉의 눈꺼풀을 뒤집어 입김을 훅 불어서 모래알을 불어 날렸다.
"이젠 됐지요?"
모용쟁이 물었다.
난생 처음으로 한 여인과 이토록 가까이 있어 본 구양봉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뛰고 얼굴이 붉어져서 더는 경박한 언사를 던질 수가 없었다.
바로 이때 가까이 다가온 구양적은 이 두 사람이 정이 철철 넘치는 눈길을 주고받는 모양을 보고는 자기의 추측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과연 내 짐작이 맞구나.'
모용쟁이 말했다.
"구양 도련님, 이젠 가도 되겠지요?"
구양봉은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황망히 대답했다.
"그, 그럼……. 가도 되고말고요!"
모용쟁은 가볍게 웃고 단도를 줍더니 두 사람에게 읍을 하고는 몸을 돌려 떠나갔다.
구양적이 소리쳐 불었다.
"아가씨, 잠깐만!"
모용쟁은 멈춰 섰지만 몸은 돌리지 않은 채 차디찬 어조로 물었다.
"이번엔 무슨 말씀이지요?"
구양적이 말했다.
"방금 아가씨가 백타산 마을에서 도망쳐 나왔다는 말을 듣고 난 아가씨의 용기에 무척 탄복했소. 내가 아가씨에게 혼자 길을 떠나라고 했는데 너무 무심했던 것 같소. 아가씨가 혼자 사막을 걷자면 불편한 점도 많을 텐데, 괜찮다면 우리 집에 며칠 묵다가 중원으로 올라가는 사람이 나타나길 기다려 함께 떠나는 게 어떻겠소?"
그의 말에 구양봉은 깜짝 놀랐다. 형님은 일처리에 몹시 신중하여 일단 입 밖에 낸 말은 절대 걷어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보니 형님은 틀림없이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다고 단정해서 모용쟁에게 이처럼 살갑게 대해 주는 것이다. 사실 두 사람은 사막에서 하루내 원수처럼 아웅다웅 싸움만 했지 다른 감정은 조금도 없는데……. 구양봉이 입을 열려는 순간 모용쟁이 꾀꼬리 같은 목소
리로 앞질러 대답했다.
"그래 주신다면 구양 도련님의 은혜에 감사드리겠어요!"
모용쟁으로서는 내심 계산이 있었던 것이다.
'구양적이 옆에 있으면 임일천도 날 붙잡기 어렵겠지. 이 사막에서 나 혼자 천리를 도망간들 백타산군의 천하라 몸을 빼기 어려울게 아닌가? 옛사람들이 '천난만험, 막약적담(千難萬險, 莫若敵膽)'이라고 했듯이, 아무리 먼 곳으로 도망가도 적의 심장 속에 움츠리고 있는 것보다 못한 것이니, 백타산 마을에 숨어 있는 것이 제일 안전할 거야.'
모용쟁은 살며시 웃으며 말했다.
"전 오래 전부터 구양 대협님께 경모의 정을 품어 왔답니다. 그렇지만 제가 댁에 묵게 되면 구양 대협께 시끄러운 일이 생길 텐데 그 일을 어찌합니까?"
구양적이 그 걱정을 안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모용쟁의 말을 듣자 오히려 호기가 치밀었다.
'서역의 제일 실력자인 내가 어찌 임일천이 무서워 우물쭈물하는 꼴을 보일 수 있단 말인가?'
생각이 거기에 이른 구양적은 점잖게 말했다.
"아가씬 걱정 마시오. 이 서역에선 나 구양적이 첫째가는 인물이니 임일천이 내 목숨을 빼앗자 해도 쉬운 일이 아니오!"
모용쟁은 바로 이 대답을 기다렸던 것이다. 구양적이 내 뒤를 봐준다면야 무서울 것이 뭐람? 그녀는 몹시 기뻤지만 입으로는 딴전을 부렸다.
"구양 대협님, 그래도 조심스럽게 처사하셔야 해요! 백타산 마을이 산군의 지반이라서 당신이 비록 그의 관할 범위에 들어 있지 않다 해도 토주(土主)와의 관계를 섣불리 처리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와 완전히 사이가 벌어진 다음에는 후회해도 소용없지요."
모용쟁의 말 속에 자기에 대한 관심과 염려가 가득 담긴 것 같아 구양적은 내심 아주 감동했다.
'아녀자도 이렇듯 날 걱정하는데 사내 대장부가 여인 하나를 보호하지 못한다는 건 말이 안 되지. 그러고서야 어찌 서역의 제일인자라고 할 수 있으리? 나와 산군은 가까운 사이가 아니지만 이번에 그가 기어이 이 연약한 여인을 욕보이려 든다면 난 반드시 보호해 주어야 할 거야.'
구양적은 표정이 어두워지면서 냉랭하게 물었다.
"모용 아가씨, 그렇다면 아가씨가 날 믿지 못한다는 말씀이오?"
모용쟁은 속으로 구양적의 심사를 더 이상 돋우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자기가 구양씨 댁에 몸을 의탁한다면 그건 전적으로 구양적의 힘에 의지하여 백타산군 수하의 사람들에 대처하자는 것인데 구양적의 미움을 사서야 될 말인가?
모용쟁은 방실 웃으면서 대답했다.
"구양 대협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소녀로선 더 여쭐 말씀이 없습니다."
구양봉은 일이 잘못 꼬여 간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뭐라고 딱 집어 말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다시 생각해 보면 사내가 둘이나 있으면서 이 넓은 사막에 여자를 혼자 내보낸다는 것도 도리에 어긋나는 것 같아서 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는 모용쟁이 자기 집에 묵게 되면 시끄러운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그걸 말할 수는 없었다.
구양적은 구양봉과 의논하지도 않고 자기 혼자 이 일을 매듭지어 버렸다. 구양적은 동생을 키우다시피 한 사람이었으므로 동생이 형의 생각을 순순히 따르는 것이 상례였던 것이다. 구양봉이 다 큰 어른이 되어서도 그것은 여전했다. 형이 우선 그걸 당연하게 여겼고 동생 역시 모든 것을 형님한테 의지하면 머리 아플 일이 없어서 좋았다.
세 사람은 함께 백타산 마을로 돌아왔다.
백타산 마을 동쪽에 두 채의 자그만 초가집이 있었다. 눈에 잘 뜨이지 않는 곳에 세워져 있는 이 두 채의 작은 집에 백타산 마을의 유명한 인물들인 구양 형제가 살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각기 문무가 뛰어났으므로 백타산 마을에서는 물론이고 전 서역에서도 소문나 있었다. 이 자그마한 초가집에서 그들 형제가 늙은 몸종 구씨 할멈과 나이 어린 계집종 가시와 함께 살고 있었다.
구양적은 집에 들어서자 구씨 할멈과 가시를 불러 모용쟁과 대면시켰다. 두 여인은 인사하러 나왔다가 모용쟁을 보고 놀라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했다.
'큰 도련님과 작은 도련님은 복도 많으시지! 어디서 저렇게 예쁜 색시를 데려왔을까?'
그들은 온 얼굴에 웃음꽃을 활짝 피우고 모용쟁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시간이 왜 흘렀다. 하루는 두 사람이 구양적을 만나러 찾아왔다. 두 사람 모두 서역에서 뛰어난 무술을 자랑하는 사람들이었다. 한 사람은 대장밀종(大藏密宗 ; 티베트의 라마교를 뜻함)의 실력자로서 서역에서 이름을 날리는 영지상인(靈智上人)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하북, 산서 일대에서 꽤나 이름난 사나운 비적으로 천수인도(千手人屠)라 불리는 팽연호(彭連虎)였다. 두 사람 모두 구양
적 형제와 나이가 비슷했는데, 일찍부터 구양적의 높은 명성을 흠모하던 나머지 그를 만나려고 먼길을 찾아온 것이다. 구양적은 손님을 극진히 대접하는 사람이었으므로 두 사람의 소개를 듣고나서 곧 자리를 권하고는 함께 강호의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그들은 서로를 너무나 늦게 알게 된 것을 통탄하면서 마음껏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지상인이 말했다.
"구양 대협께 한 가지 여쭤 볼 일이 있습니다."
구양적이 대답했다.
"무슨 말씀이든 사양하지 마십시오."
"중원 무림에 큰일이 일어났다는데 구양 시주께선 아십니까?"
"우리 형제는 이 백타산 마을에 은거하여 살아가는 형편이라 바깥 세계의 일에 대해서 거의 아는 일이 없습니다. 중원의 무림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요?"
영지상인이 대답했다.
"오래 전에 황상(黃裳)이라는 한 기인이 살고 있었지요. 휘종 황제 시절에 태어난 사람인데 휘종 황제의 정화년간(政和年間)에 황제로부터 천하의 기서(奇書)들을 찾아내어 다시 찍어내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 책들이 아주 많아 그 수가 5천 4백 82권에 달했고 만수도장(萬壽道藏)이라 불리었지요. 황상은 책을 찍는 일만 관리했는데, 혹여 책을 잘못 찍기라도 하면 황제가 죄를 물을
까봐 한 권씩 자세히 읽어 내려가는 중에 뜻밖에도 도학에 정통하게 되어 무공상승(武功上乘)의 도리를 깨우치게 되었다 합니다. 그는 집에서 내공과 외공을 수련하여 무림의 실력자가 되었는데, 후에 책 두 권을 써냈다 합니다. 이 책이 《구음진경(九陰眞經)》인데 지금 전진교의 교주 왕중양의 손에 있답니다. 우리들 소견으로는 만일 구양 시주가 우리와 함께 왕중양을 찾아가 그 책을 내
놓으라고 하면 그가 우리 말을 따르지 않을 리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천하 무학(武學)의 비적(秘籍)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구음진경》을 얻게 된다면 말 그대로 천하를 누벼도 대적할 자가 없을 것이니, 두려울 게 없을 것 아닙니까?"
구양적은 구미가 동하는 듯했으나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말했다.
"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젊고 재능 있는 전진교의 교주 왕중양은 본디 무예가 뛰어났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러한 그가 《구음진경》까지 얻었으니 그야말로 범에게 날개가 돋친 격이군요. 우리가 수중의 무학기서를 내놓으라 한들 그가 순순히 내놓겠소? 만일 그가 내놓지 않을 때에는 어찌 하시겠습니까?"
한켠에 있던 천수인도 팽연호가 말했다.
"그가 순순히 내놓지 않으면 우리가 힘을 모아 죽여 버리면 될 것 아닙니까?"
구양적도 비록 사악한 일을 저지르기는 하지만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짓은 하지 않으므로, 팽연호가 입을 열자마자 사람을 죽인 다는 말을 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은 용맹한 점을 빼놓고는 아무 장점도 없으니 이런 사람과 함께 《구음진경》을 구하러 간다는 건 너무 위험한 짓이야. 만일 왕중양이 책을 순순히 내놓지 않는다면 다짜고짜 죽이려 들 테니, 지혜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인간이 아닌가? 이런 사람과 함께 일을 하다간 뒤가 좋지 않아!'
여기까지 생각하자 그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내가 보기엔 두 분의 뜻이 성공할 수 없을 것 같소이다!"
영지상인이 급히 물었다.
"타당치 않은 점이 있으면 구양 대협께서 일깨워 주십시오."
구양적이 대답했다.
"제가 전진교의 왕중양을 잘 알고 있는데 중원 무림에 그보다 실력이 나은 자가 없다고 합니다. 그가 《구음진경》을 얻지 못했을 때에도 실력이 우리들이 비길 바가 못 되었는데 이제 《구음진경》까지 얻었으니 그의 무예가 엄청나게 늘었을 것 아닙니까? 그의 손에 이미 책이 들어 있다면 우리에게 무슨 방도가 있겠습니까? 두 분께서 불원천리 중원까지 찾아갔다가 남의 손에 죽는다면 이
보다 더 억울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영지상인은 비록 출가한 사람이지만 성미가 여전히 폭약같이 급한 사람이었으므로 큰소리로 외쳤다.
"좋소이다! 우린 그를 죽이지 않고서도 책을 손에 넣을 수 있소이다!"
구양적은 한탄했다.
"그게 어디 말같이 쉬운 일입니까? 만약 그의 《구음진경》이 순순히 대사의 손에 넘어간다면 그것은 소문처럼 훌륭한 책이 아닐 것이 분명합니다. 또 만약 그것이 참말로 천하의 기서라면 대사가 그를 찾아간다 해도 꼭 패하게 될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일입니다."
영지상인은 말이 없었다. 그도 구양적의 말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중원에 이러한 기서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의 가슴 속에서 탐욕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으니 그 기서를 수중에 넣지 않고는 속이 편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구양적의 말을 들어 보니 그는 자기들처럼 이 경서를 탐내는 것 같지 않았으므로 더 이상 말하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즉시 구양적에게 읍하며 말했다.
"구양 대협께서 힘을 쓰지 않겠다고 하시니 저희들은 이만 물러 가겠소이다!"
구양적이 말했다.
"이렇게 급히 가실 필요야 있습니까? 우리 집에서 며칠 머물다가 가셔도 늦지 않을 겁니다."
영지상인이 말했다.
"구양 대협께서 중원에 가시지 않는데 저희들이 댁에 묵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저희들은 일이 급하니 이만 떠나겠습니다."
두 사람은 읍을 하고 나서 떠나 버렸다.



제9장 얼음 동굴 속의 여인
구양적이 영지상인과 팽연호의 청을 거절한 뒤로 구양씨 집안엔 별다른 일이 없었다. 구양봉은 여전히 무예가 출중한 사람이 되겠다는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벽 한쪽을 채운 책들을 마주하고 책 읽는 시늉을 했지만 생각은 딴 데로 굴러가서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스스로도 자신이 이상하게 여겨졌다. 얼마 전에 그는 형에게 무예를 가르쳐 달라고 거듭 애원했지만, 형은 허락
하지 않았을 뿐더러 그 이유도 말하지 않았다.
구양봉은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임안에서 겪었던 일과 사막에서 모용쟁과 겪었던 일들을 돌이켜볼 때마다 그는 언제나 안절부절 못했다. 사람이 세상에 한번 태어나서 손에 비껴 든 장검으로 은인께 보답하고 원수에게 복수하지 못한다면 어찌 사내 대장부라 할 수 있겠는가?
모용쟁은 그들 형제들과는 별로 말도 하지 않고 하녀들의 허드렛일을 도우면서 지냈다. 그녀는 서둘러 길을 떠나려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고, 구양 형제도 이에 대해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 가시와 구씨 할멈은 모용쟁을 좋아했고 내심 그녀를 구양 가문의 사람으로 생각하여 그녀한테 아주 곰살맞게 굴었다.
구양적이 밖에 나가 돌아오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집에는 구양봉과 모용쟁, 그리고 구씨 할멈과 가시 네 사람이 남아 있었다. 구양봉은 심심한 터에 책 한 권을 들고 모용쟁을 찾아가 한담을 나누었다. 그들 집에 얹혀 사는 처지였으므로 모용쟁은 사막에서의 그날 밤처럼 구양봉에게 차갑게 대하지는 않았다. 강남의 모용 세가(世家)에서 태어난 그녀는 정암(靜庵) 일파로부터 무예를 익혔을
뿐만 아니라 문학과 사부(辭賦)에도 조예가 있었다. 사막에서 함께 지내던 날 밤에도 그녀가 구양봉을 놀려 주려고 시구로 응수를 했는데, 조금도 막힘 없이 술술 흘러 나왔던 것이다.
조금만 일찍 모용쟁 같은 사람을 만났더라면 구양봉은 물을 만난 고기마냥 기뻐했을 것이고, 함께 시문(詩文)을 논하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구양봉은 무예를 닦기 위해 공부를 초개처럼 버리려는 참이라 모용쟁의 입에서 흘러 나오는 음풍영월의 아름다운 시들도 그다지 탐탁하지 않았다.
구양봉은 문을 두드리고 방에 들어선 후 모용쟁과 한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모용쟁은 황막한 사막에서 헤매던 때와는 달리 그 자태가 한없이 곱고 얌전했다. 그때의 싸늘하고 모진 태도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모습이었다. 애교가 찰찰 흐르는 강남 말씨에다 목소리는 은쟁반에 옥을 굴리듯 맑고 고왔다.
"이 누추한 집에서 지내실 만합니까?"
구양봉이 방안을 둘러보며 물었다.
"아무렴요, 춥고 배고프고 오랏줄이 사지를 결박하고 모래바람까지 얼굴을 마구 때리는 사막보다야 훨씬 낫지요."
모용쟁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구양봉은 더 말을 건네려다 뒷말을 잇지 못하고 말았다.
모용쟁은 구양봉의 서투른 인사말을 듣고 속으로 웃었다. 비범한 구양씨네 두 형제가 모용쟁의 눈에는 아주 우습게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구양적은 언제나 음울한 표정으로 한나절이 다 가도 말 한마디 없는 모습이 마음속에 끝없는 걱정을 안고 있는 사람 같았고, 구양봉은 융통성이라곤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지내 볼수록 이 두 형제는 괴상하면서도 재미있는 인간들이었다.
모용쟁은 방그레 웃으면서 끊어진 말꼬리를 이었다.
"큰도련님께선 밖에서 무슨 일을 하시기에 아직도 안 돌아오세요?"
그제야 말거리를 되찾은 구양봉이 대답했다.
"형님은 늘 혼자 다니길 좋아한답니다. 밖에 나가도 나한테 연유를 알리는 적이 없구요. 아마 친구라도 만나시는 게지요. 난 형님일엔 참견하지 않습니다."
모용쟁도 호기심이 동한 듯 말했다.
"제가 보기에도 그분의 행동엔 신비스러운 데가 많아요. 그분은 어느 파의 어느 분한테 무예를 배우셨나요?"
구양봉은 모른다는 뜻으로 머리를 저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서역의 사막 지대는 황량하기 그지없는 불모의 땅이었다. 가도가도 자갈밭 아니면 모래바람이 날리는 사막이었고, 어쩌다 자그마한 산들이 눈에 띄었으나 거의가 벌거숭이였다. 이런 벌거숭이 산들에는 듬성듬성 풀들이 보이기도 하고 간혹 나지막한 난쟁이 나무들이 몇 그루 보이기도 했지만 그 풀과 나무들의 이름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홀가분한 차림의 구
양적이 나는 듯이 빠른 걸음으로 바위가 많은 산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잠깐 사이에 그는 산기슭에 닿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산마루를 올려다보았다. 산은 그다지 크지 않았으나 산마루까지 뻗은 길은 꽤나 가파르고 길었다. 그는 산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그 외침 소리는 바윗돌들이 솟아 있는 산허리에 되맞아 길게 메아리를 쳤다.
이윽고 그는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몸에 날개라도 돋친 듯 가볍고 날렵한 걸음이었다. 산마루에 오르니 두 개의 커다란 바위가 마치 거인처럼 등을 맞대고 서서 산 아래의 세계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두 바위 사이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점 크게 벌어져서 저 아래 시커먼 동굴로 뺑 뚫려 있었다. 구양적이 그 바윗돌 사이로 다가서더니 큰소리로 말했다.
"사부님, 제자 구양적이 왔습니다!"
이어 구양적은 몸을 날려 동굴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윽고 탁 하는 소리와 함께 깊은 동굴 속의 넓적한 빙판에 발이 닿았다. 그는 일어나 왼손을 더듬어 동굴 벽에서 부싯돌을 찾아내서 불을 일으켰다. 그리고 땅바닥에서 주운 홰에 불을 붙여 들고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 안에 신기한 세계가 나타났다. 동굴 양쪽은 반들반들한 얼음벽이었고 천정은 천태만상의 종유석들이 진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바닥에는 두꺼운 얼음이 깔려 있어서 차가운 기운에 등골이 시려 왔다. 들리는 거라곤 그의 발소리와 횃불이 바지직거리는 소리 뿐이었다. 이윽고 커다란 얼음 덩이 앞에 다다른 구양적은 그 얼음 덩이를 향해 읍했다.
"사부님, 제자 구양적이 스승님의 안부를 여쭙니다!"
구양적의 앞에 있는 거대한 얼음 덩이는 다른 것들보다 훨씬 커서 두 길도 더 되었다. 얼음 덩이는 매우 두터웠지만 아주 투명해서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 얼음 덩이 꼭대기에 사람 같기도 하고 귀신 같기도 한 무언가가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두개골은 뾰족한 호두씨 모양이었는데, 위쪽은 얼마간 사람의 얼굴을 닮아 있었고, 눈꼬리는 아래로 쳐져 있었다. 얼굴 모양이 사람 모양
을 하지 않은 것은 둘째로 치더라도, 움푹 꺼져 버린 눈두덩이와 살점이라고는 없는 두 볼이 해골과 흡사했다. 그녀는 흰 소복 차림으로 단정하게 앉아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삼단 같은 머리칼이 얼음 위에 드리워져 있는데, 시간이 많이 흘러서인지 몽땅 얼어붙어 마치 얼음 위에 꽂혀 있는 무수한 화살 같았다. 이 여인 또한 얼어 죽은 시체와도 같았다.
구양적은 여인이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으나 개의치 않고 다시 큰소리로 인사를 올렸다.
"사부님, 제자 구양적이 문안을 올립니다!"
이때였다. 얼어 죽은 시체처럼 보이던 여인의 몸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꺼풀을 움직이자 눈에 앉았던 서리들이 아래로 우수수 흩날려 내렸다. 내리깔았던 눈을 뜨니 눈동자는 얼마 안 되고 흰자위만 번뜩이는 두 눈이 나타났다. 여인은 눈을 뜬 후 한참 동안 잠자코 있었다. 이윽고 삼단 같은 여인의 머리칼에서 흰 김이 뭉게뭉게 피어 오르기 시작했다. 빳빳하게 얼어붙었던 머리칼
들이 순식간에 한데 모이더니 어깨 위에 치렁치렁 드리워지는 것이었다. 희디흰 그녀의 은발은 범상한 인간들의 머리칼보다 훨씬 길었으며 검은 머리칼이라곤 한 올도 섞이지 않았다.
여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왔느냐?"
그 목소리에는 노여움도 기쁨도, 도무지 감정이라곤 없는 듯했다.
"사부님, 제자가 사부님을 뵈러 왔습니다."
천 년 묵은 얼음 바위 위에 태연히 앉아 있는 모습으로 보아 여인은 차가움을 전혀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여인은 구양적을 내려다보면서 천천히 말했다.
"그 너절한 세상에 새로운 일이라도 생겼느냐?"
구양적은 다시 두 손을 모아 읍을 하고 나서 대답했다.
"백타산군 임일천은 여전히 악습을 버리지 못하여 날마다 계집질을 하고 있으며 무고한 생명들을 해치고 있습니다."
여인은 이 대답에 냉소했는데 그 짧은 웃음 소리가 마치 날아가는 화살 소리처럼 귀를 자극했다.
"네가 백타산군도 아닌데 남의 일에 간섭할 필요가 있느냐?"
구양적은 이 말에 대뜸 고개를 숙이면서 지당한 말씀이라고 대답했다.
여인은 구양적이 입을 열지 않는 것을 보고는 대뜸 그의 마음속에 할말이 있음을 간파했다.
"날 속이고 있는 일은 없느냐?"
"사부님, 며칠 전 제가 사막으로 아우를 마중 나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한 여인을 만났습니다. 그 여인은 임일천의 부하들에게 추격당하고 있었는데 제가 구해 주었습니다. 그 여인이 지금 제집에 있습니다. 하도 가련하여 잠시 머물도록 했는데, 사부님께 미처 여쭙지 못했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이 말에 여인은 갑자기 눈을 부릅뜨고 구양적을 무섭게 노려보면서 새된 소리로 질책했다.
"너 이 놈, 미쳤느냐? 설마 너 자신이 누군지 모르고 한 짓은 아니겠지?"
구양적은 고개를 수그린 채 잘못을 빌었다.
여인은 말투를 다소 누그려뜨렸다.
"네가 지난 일을 잊은 것은 아니겠지?"
말을 마치자 여인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동굴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 바람에 긴 머리칼들이 수만 개의 활시위를 벗어나는 화살처럼 휙휙 소리를 내더니 다시 가볍게 드리워졌다. 그 머리칼들은 해골 같은 여인의 얼굴을 가려 놓았다. 구양적은 대뜸 꿇어 엎드렸다.
"사부님의 바다 같은 은혜를 제가 어찌 잠시라도 잊겠습니까?"
여인은 눈물을 흘리면서 오랫동안 침묵했다. 이윽고 여인은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네가 그 계집애한테 마음이 끌린 모양이구나? 그 계집애 이름이 뭐라더냐? 무슨 무예를 알고 있고, 얼굴은 얼마나 예쁘더냐?"
여인의 목소리는 어딘지 처량하게 들렸다. 구양적은 여인의 물음에 더욱 당황하여 다급히 입을 열었다.
"저는 그 여인과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다만 제 아우와 정이 오가는 눈치가 보여 그녀를 집으로 데려온 것입니다. 그 여인은 강남 모용씨네 딸인데 강남의 정암이란 절에서 무예를 배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임일천이 납치해서 노리갯감으로 삼으려 한 것입니다. 그 여인이 어떻게 그의 마수에서 벗어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 아우를 만나게 되었고, 저는 그 여인이 아우를 좋아하는 것을
보고 우리 구양 가문에 들어설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여인은 오랫동안 침묵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적아, 이리 올라오너라."
구양적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몸을 날려 얼음 덩이 위의 여인 앞에 앉았다. 여인을 바라보는 그의 두 눈에 깊은 정이 담겨 있었다. 여인은 한 손을 구양적에게 가만히 내밀었다. 구양적은 해골처럼 뼈만 앙상한 그 손을 잡아 자기 얼굴을 쓰다듬게 했다.
"사부님, 저는 한평생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두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말에 여인은 숨소리를 높였다.
"적아, 너 정말 후회하지 않겠느냐? 나처럼 죽은 해골과 함께 있는 걸 말이다. 나하고 같이 있는 게 어찌 너한테 기쁨을 줄 수 있겠느냐?"
"사부님, 사부님이 아니었다면 전 이미 귀신이 되었을 겁니다. 사부님이 아니었다면 제가 어찌 사막의 일인자가 되었겠습니까?"
구양적은 어린애처럼 여인의 품에 머리를 파묻었다. 여인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피골이 상접한 장작개비 같은 손가락으로 은빛의 긴 머리칼을 쥐어 마치 봄누에가 실을 토하듯 구양적의 머리를 휘감아 놓았다. 삽시간에 그의 얼굴은 번데기가 누에고치속에 감기듯 여인의 은발에 친친 감기고 말았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천 년 묵은 얼음 덩이는 냉기를 뿜었지만 두 사람의 심장은 뜨겁게 뛰고 있었다.
구양봉은 모용쟁과 재미나게 얘기를 하다 보니 공부를 그만두고 무예를 닦겠다던 결연한 결심마저 잠시 잊고 있었다. 모용쟁이 도도하게 흐르는 장강의 돛배들, 강남의 누각과 녹음이 어우러진 경치, 그리고 강남 처녀들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이야기하자 구양봉도 흥이 올랐다.
"모용 낭자, 낭자가 강남에 돌아갈 때 나도 함께 가야겠어요. 가흥(嘉興)의 호수에서 일엽편주에 몸을 싣고 수양버들 휘늘어진 녹음을 누비며 노고지리 소리에 취해 보고, 악양(岳陽)의 누각에 올라 빗소리를 들으면서 시부(詩賦)를 짓는다, 정말 훌륭합니다."
이 말에 모용쟁도 살짝 웃으며 대꾸했다.
"누가 당신과 함께 강남에 돌아간대요? 난 두 다리가 멀쩡하다구요."
바로 이때 간사스러운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옳아, 옳아. 멍청이가 따라다니는 게 뭐가 좋겠어? 차라리 내가 옆에서 보살피는 쪽이 낫지, 안 그래?"
두 사람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언제 들어왔는지 탁자 위에 난쟁이가 앉아 자그마한 두 손을 이마 위에 대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바로 백타산군 임일천이었다.
대문이 열리지 않았고 창문도 닫힌 채인데 이자가 어디로 들어왔단 말인가?
구양봉이 버럭 소리쳤다.
"당신은 허락도 없이 왜 남의 집에 들어왔소? 냉큼 나가 주시오!"
그러나 난쟁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이죽거렸다.
"젊은 남녀가 야밤에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음란한 말 한마디 없으니 그야말로 정인군자(正人君子)들이로군. 그런데 구양 도련님, 서역 최고의 선비인 자네가 왜 이제 와서 엉뚱한 길로 빠지려 하나? 젊은 낭자의 뒤 꽁무니를 따라 강남 땅을 구경하겠다니 말일세. 그건 자네 같은 사람이 할 짓거리가 못 되네."
모용쟁과 구양봉은 모욕을 당하는 것 같아 욕을 퍼부어 주고 싶었다.
난쟁이는 더욱 흥이 나서 이죽거렸다.
"옛사람들이 이르기를 요조숙녀는 군자의 훌륭한 배필이라고 했네. 그런 배필을 구하지 못하면 잠도 잘 수 없다네. 모용 낭자를 본 뒤로 내 눈엔 천하의 미녀들이 다 무색해졌거든. 낭자도 내 상자 안에서 누구 못지않게 행복했을 텐데 부랴부랴 도망칠 것은 뭐냔 말야? 낭자같이 나약한 사람이 사막으로 도망가니 모래바람과 땡볕에 그을리고 독수리마저 채 가려고 하지 않았나? 그 예쁜 모습
이 해골이 될 뻔했으니 정말 끔찍한 일이지 뭐야?"
모용쟁은 싸늘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또 날 어째 보겠다는 거냐?"
난쟁이 임일천은 큰소리로 웃어대면서 탁자 위에 앉은 채 팽이처럼 뱅글뱅글 몸을 돌리기 시작했다. 난쟁이는 한참 동안 그렇게 돌다가 문득 멈추고 말했다.
"구양봉, 난 글쟁이들을 잘 알고 있어. 글쟁이들 중 여색을 멀리하는 놈은 하나도 없지. 내 집엔 숱한 미녀들이 있다. 네가 좋아하는 여자를 골라 가도 좋아. 여러 여자들이 좋다면 다 데리고 가도 좋다구. 모용 낭자만 나한테 넘겨주면 난 만족할 거야."
구양봉이 차갑게 대꾸했다.
"모용 낭자가 뭘 원하든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오. 그러나 모용 낭자는 백타산장에 가길 싫어하고, 상자 안에 갇히는 건 더욱 싫어할 거요."
난쟁이는 간드러지게 웃으면서 물었다.
"낭자, 날 따라가는 게 정말 싫소?"
모용쟁은 가슴이 타는 듯 조급해졌다. 그녀는 이 방자한 난쟁이를 꾸짖으려고 그를 쏘아보았다. 그런데 난쟁이의 눈길과 마주친 순간 그녀는 울창한 수림을 보는 듯했다. 그 수림 속에서 맑은 종소리가 들려 오고 암자에서 경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들려 오는 듯 했다. 그녀는 난쟁이의 눈길에서 10여 리의 돌계단을 내려와 친히 강가의 나루터까지 나와 떠나는 배를 향해 손을 흔들던 스님의
자애로운 눈빛을 보았으며,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과 강가에 서 있던 모용부의 모습도 보았다.
그녀는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나에게 뭘 하자고 하시든 따르겠어요."
구양봉은 무예가 높지 못했으므로 이것이 섭혼대법(攝魂大法)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는 모용쟁이 너무나 이상했다.
'모용 낭자가 무슨 영문일까? 난쟁이를 따라가겠다고 자진해 나서다니? 낭자가 제일 미워하는 자가 바로 이 백타산군 아닌가? 백타산에서 도망쳐 나온 지도 얼마 되지 않은 낭자가 왜 갑자기 이 난쟁이를 따라가겠다는 것일까?'
난쟁이는 탁자에서 몸을 솟구치더니 천천히 뜰에 내려섰다. 괴상한 것은, 모용쟁도 난쟁이를 따라 몸을 한바퀴 돌리더니 두 눈으로 난쟁이를 응시하면서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당신을 따라갈래요……."
모용쟁은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난쟁이만 바라보면서 문 밖으로 따라 나섰다.
구양봉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속으로 조바심 칠 뿐 어찌 할 줄을 몰랐다. 그는 얼른 모용쟁의 소맷자락을 잡았다.
"모용 낭자, 가면 안 돼요, 가면 안 돼요!"
모용쟁은 눈빛이 흐릿해진 채 구양봉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소리를 질렀다.
"이거 놔요! 놓으라고요! 내가 가고 싶으면 가는 거지, 당신이 뭔데 참견이에요?"
구양봉은 모용쟁이 난쟁이의 섭혼대법에 걸려 얼이 빠진 건 모르고, 그저 갑자기 생각이 바뀐 줄로 여겼다. 그래서 갈대처럼 쉽게 변하는 게 여인의 마음이라더니, 하고 탄식했다. 그러나 잠시 후 난쟁이를 따라 휘청휘청 발을 옮겨 놓는 모양을 보고서야 눈치가 무딘 그도 그녀가 술법에 걸려 들었음을 깨달았다. 그도 책을 통하여 사람의 넋을 잃게 하는 실혼대법(失魂大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구양봉은 모용쟁의 뒷전에 대고 큰소리로 외쳐 댔다.
"모용 낭자, 그대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강남 땅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았소? 그대의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그 난쟁이를 따라가서 뭘 한단 말이오? 놈은 그대를 상자 안에 넣어 노리개로 삼으려 하고 있소. 갑갑해서 그 노릇을 어찌한단 말이오?"
모용쟁은 구양봉을 힐끗 돌아보더니 미친 듯이 소리쳤다.
"난 당신을 좋아하지 않아요! 난 당신의 형님을 좋아해요! 그분이 무예가 출중해서 난 그이를 좋아해요……."
구양봉은 깜짝 놀랐다. 모용쟁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므로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모용 낭자의 모습이 너무 깨끗하고 아름다워서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지. 낭자의 상큼한 자태에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엄도 있었어. 그런데 낭자가 형에게 마음을 두었을 줄이야! 낭자가 형님을 좋아한다면 형님과 생사를 같이하고 뜻도 같이 해야 할 것 아닌가? 헌데 형님은 낭자를 좋아할까? 내가 왜 그 생각을 미처 못했을까? 형님은 본래 여인을 멀리했는데 이번만은 전
례를 깨지 않았는가? 저 백타산군과 원수지간이 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낭자를 집으로 데려왔으니까 이것만 봐도 형님의 마음을 알 수 있지.'
여기까지 생각한 구양봉은 다시 모용쟁을 불렀다.
"모용 낭자, 잠깐 기다려요. 형님은 금방 돌아오실 테니 형님이 오시는 걸 기다렸다 가도 늦지 않아요."
그러나 모용쟁은 빙그레 웃는 얼굴로 구양봉을 돌아보며 대꾸했다.
"구양 도련님, 전 가야겠어요. 도련님께서는 정암사를 보신 적이 있어요? 울창한 수림에 자리잡은 정암사의 그 분홍빛 담장을 보았나요? 저기서 들려 오는 사원의 종소리가 귀에 안 들려요? 그리고 자매들의 낭랑한 독경 소리도……."
모용쟁은 고집스러운 얼굴에 꿈 같은 미소를 담고 말을 계속했다.
"인간이 부처님께 몸을 의탁하면 큰길이 들어선 거예요. 짙은 구름을 보니 시간이 많이 흐른 것 같아요. 거센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드는군요. 전 가요. 전 정암사로 돌아가겠어요. 전 정암사로 돌아가겠어요……."
말을 마치더니 모용쟁은 멍청한 눈을 돌려 난쟁이를 따라갔다.
구양봉은 모용쟁을 따라 헐레벌떡 달렸다. 달리면서 그는 그녀의 뒤에 대고 계속 소리를 질렀다. 그는 모용쟁이 백타산장에 들어가면 다시는 빠져 나오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런 묘책도 없었으므로 그저 뒤를 쫓아가면서 목이 터지게 모용쟁을 부르기만 했다.
이 정경을 본 구씨 할멈과 가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대뜸 알아차렸다.
구씨가 큰소리로 질책했다.
"난쟁아, 왜 우리 집 아가씨를 데려가는 거냐? 이 칼을 맞아도 시원치 않을 놈아! 냉큼 모용 아가씨를 놔 두고 가라!"
가시도 큰소리로 아우성을 쳤다.
"모용 아씨, 그 놈을 따라가지 말아요. 따라가면 안 돼요!"
한창 법석을 떠는데 옆에서 두 사람이 튀어나왔다. 두 사람 모두 병장기를 손에 들었는데, 옥문은 양손에 검을 들고 있었고, 기노는 환을 들고 있었다. 기노가 양손에 든 환을 흔들며 큰소리로 꾸짖었다.
"이 망할 놈의 할망구! 계속 떠들어대면 죽여 버릴 테다!"
옥문도 검으로 구양봉을 가리키면서 호통쳤다.
"이 놈! 섣불리 움직이면 죽여 버리겠다!"
구양봉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옥문의 칼에 목숨을 잃을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구양적은 얼음 동굴 속에서 백발 여인과 애틋한 정을 나누고 있었다. 여인은 구양적의 머리를 품에 안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갓난아기를 품에 안고 어르는 것 같았다.
"적아, 춥지 않으냐?"
구양적의 목소리가 얼음 동굴 안에 메아리쳤다.
"춥지 않습니다. 사부님과 있을 땐 춥다는 느낌이 없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적이 떨리고 있었다. 아마도 가슴이 몹시 설레는 모양이었다.
여인은 구양적을 더 힘차게 부둥켜안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적아, 내가 너를 구해 준 그 순간부터 너와는 헤어져 살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구양적과 백발 여인은 그날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10여 년 전의 일이었다. 그때 구양적은 어린아이였다. 그는 등을 맞대고 선 바위를 기어오르면서 소리를 질렀다.
"이 사람처럼 생긴 바위야, 너희들은 정말 바보 같구나. 서로 등을 돌리고 말이 없잖아? 너희들, 맥이 빠진 거냐?"
이렇게 주절대면서 바위 꼭대기에 오른 구양적은 아주 즐거웠다. 산 아래를 굽어보니 멀리 백타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밥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그곳은 사람 사는 생기로 가득 차 보였다. 바위에 올라서 내려다보는 백타산이 늘 보아 오던 모습과는 판이했으므로 그는 기뻐서 함성을 질렀다.
"와! 정말 아름다워!"
그는 너무 기쁜 나머지 자기가 바위 위에 서 있다는 것을 잊었다. 그 바람에 그만 발을 헛디디면서 깜깜한 동굴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동굴 바닥에 떨어진 그는 혼비백산하여 엉엉 울었다. 울면서도 그는, 나는 이제 끝장이지만 두고 온 동생은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이 들자 더욱 서러워져서 그는 계속 쿨적거리면서 울어댔다. 반나절이나 울고 나니 몸이 점점 얼어붙기 시작했다. 사위의 벽들을 만져 보니 몽땅 얼음 덩이였다. 그는 기어오르려고 안간힘을 써 보았으나 동굴 벽이 반질반질해서 도저히 기
어오를 수가 없었다.
그는 그만 체념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머리 속에 동생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가슴이 아팠다. 아우는 열 살밖에 안 되는데 내가 이 동굴에서 나가지 못하면 그 앤 영낙없이 굶어 죽고 말 거야! 어떻게 하면 좋아? 궁지에 빠진 그는 절망적으로 울다가 기진맥진해져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혼곤히 잠이 들었다.
이 동굴 속의 얼음 위에서 깊은 잠에 빠지면 다시는 깨어날 수 없다는 걸 그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알았다 해도 자지 않고는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아무리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써도 마음대로 안 되기 때문이었다.
그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으나 누군가 자기를 부르고 있는 것을 느꼈다.
"얘야, 깨어나거라! 어서 깨어나거라."
그는 흐리멍텅한 의식 속에서 뼛속까지 스며드는 냉기를 느끼고,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면서 깨어났다.
그는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사람의 그림자를 보았다. 어렴풋하게 그는 그 그림자의 주인이 여인이고, 삼단 같은 머리칼을 드리우고 자기 귀에 입을 대고 부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구양적은 총명한 아이였다. 그는 이 여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했으나, 여인의 품에 안기면 뼛속까지 스며드는 냉기가 사라진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계속 자는
척했다.
여인은 몇 번 불러서 깨우다가 혼자 중얼거렸다.
"정말 가련하구나. 이렇게 귀여운 애가 동굴에 빠져 죽다니!"
어린 구양적은 여인이 자기가 자는 척하는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여인은 잔꾀를 부리는 아이가 귀엽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여인은 다시 말했다.
"만일 네가 죽으면 널 만 길도 넘는 얼음 동굴 속으로 떨어뜨릴거야. 그렇게 되면 너의 시체가 영원히 썩지 않을 테니, 나도 너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겠지."
그러나 구양적은 무섭지 않았다. 여인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여전히 자기를 안고 있었으니 말이다. 구양적은 여인이 자기를 동굴 밑바닥으로 떨어뜨리기 전까지는 그냥 자는 척하기로 작심했다.
구양적은 자기가 있는 곳이 커다란 얼음 덩이 위이고, 여인이 바로 이 얼음 덩이 위에 앉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엄청나게 큰 이 얼음 덩이는 반짝반짝하고 투명한 빛을 뿌렸다. 반짝거리는 얼음 덩이의 빛을 빌어 구양적은 여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여인은 아주 아름다웠다. 삼단 같은 머리에 흰 머리카락이 섞여 있었으나 얼굴은 아주 부드러웠다. 구양적은 얼음 덩이가 뿌리는 빛 속에
서 여인의 머리칼과 얼굴에 괴이한 기품이 서려 있음을 보고, 아마도 귀신이나 정령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때 여인은 구양적을 동굴 바닥에 떨구어 버리는 시늉을 했다.
그제야 구양적은 소리를 질렀다.
"떨어뜨리지 말아요! 제발, 떨어뜨리지 말아요! 난 죽지 않았어요……."
여인은 키득키득 웃으면서 물었다.
"난 네가 죽지 않았다는 걸 벌써 알고 있었다. 넌 누구지? 어쩌다 내 동굴 속에 떨어졌느냐?"
"오고 싶어 온 것이 아니에요. 산에서 삭정이를 줍고 까불다가 떨어졌어요."
"네 이름이 뭐냐?"
"구양적이라고 해요. 동생 이름은 구양봉이구요."
"네 아버지 이름은 뭐냐? 그리고 엄마는?"
이 물음에 구양적은 처량한 기색으로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아빠 엄만 일찍 돌아가셨어요……."
여인은 가슴이 철렁했다. 부모 없는 불쌍한 아이로군……. 여인의 가슴속에 동병상린의 정이 샘 솟듯 피어 올랐다.
"나도 팔자가 사나운 여자란다. 너도 나처럼 박복한 아이로구나. 조실부모하고 어린 나이에 산에 올라 나무를 하다가 얼음 구덩이에 빠졌으니 참으로 불쌍하구나. 날 만나지 않았더라면 넌 꼼짝없이 죽었을 거다. 네가 오늘 얼음 동굴에 빠진 것은 나와 인연이 있는 게야. 내가 너를 구해 줬으니 날 사부로 섬기는 게 어떠냐?"
구양적은 총명한 아이였으므로 대뜸 이렇게 물었다.
"좋아요, 당신을 사부로 모시겠어요. 그럼 이제부터는 허드렛일을 하지 않아도 되나요?"
"물론이지, 네가 나한테 무예를 배우기만 한다면 말이다.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악한 짓을 하는 놈들을 잡아죽이는 거야. 어떠냐, 마음에 들지?"
구양적은 가만히 궁리했다.
'이 여인을 사부로 섬기는 게 나쁘지는 않을 거야. 이제 허드렛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잖아, 그리고 강호의 협객이 되어 나쁜 놈들을 잡아죽인다니,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사부님께서 무예를 가르쳐 주시면 난 열심히 배울 거야!'
이렇게 생각한 구양적은 입을 열었다.
"사부님, 제게 무예를 가르쳐 주십시오. 무예를 닦은 후에 강호를 돌아다니면서 나쁜 놈들을 모조리 잡아죽이겠습니다. 제가 사부님의 복수도 해 드릴 거예요."
아이의 천진한 말에 여인은 코끝이 시큰했다.
'네가 아직 철이 안 들었으니 하늘이 얼마나 높고 땅이 얼마나 두터운지 알 수가 없지. 네가 나 대신 복수를 하겠다고 큰소리치지만 나의 적수가 그렇게 만만한 줄 아느냐? 네 말만 같다면 나도 이 차가운 얼음 동굴 속에서 홀로 갇혀 있지는 않았을 게다. 그자는 천하에 보기 드문 기재란다. 그자의 무예를 누가 꺾을 수 있겠는가? 나도 그자의 적수가 못 되는데…….'
얼음 동굴에서 오랜 세월 동안 고독하고 적막한 나날을 지내던 여인은 오랜만에 소년과 이야기를 나누니 기쁘기 한량없었다.
여인은 구양적을 얼음 위에 내려놓았다.
"아이구, 차가워라!"
구양적은 새된 소리를 지르면서 얼음 위에서 콩콩 뛰었다. 얼음 덩이가 발을 디딜 수 없을 정도로 차가웠던 것이다.
"사부님, 이 얼음 덩이가 왜 이렇게 차가운가요?"
여인은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했다.
"이것은 천 년 묵은 얼음 덩이란다. 그러니 다른 얼음 덩이보다 찰 수밖에……."
"사부님, 사부님께선 이 얼음 덩이 위에 앉아 있어도 춥지 않아요?"
이 물음에 여인은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 오랜 세월 차디찬 얼음 덩이 위에 앉아 있었지만 누가 한 번 이렇게 물어 보아 주었던가? 구양적의 이 물음은 여인의 가슴속에 오만 가지 생각을 떠오르게 했다.
서역에서 유명한 백면라살 수라아(修羅兒)라는 이 여인은, 자기 원수와의 대결에서 중상을 입고 도처로 피해다니다가 결국 이 얼음 동굴 속에 은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적아, 보아하니 넌 자질이 있는 것 같구나. 나를 따라 무예를 익힐 생각이 있느냐?"
"좋아요, 정말 좋아요."
"네가 원한다면 무예를 전수해 주겠다. 지금 네가 찬 얼음판 위에 앉아 있으니 오늘은 얼음판 위에서 앉는 법부터 가르쳐 주마."
그러나 구양적은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사부님께 배울 수가 없어요. 우선 집에 돌아가 동생한테 먹을 걸 마련해 준 다음 다시 올게요."
이 말에 여인이 발칵 역정을 냈다.
"네 동생이고 뭐고 다 귀찮으니 잔말 말고 여기 있거라. 내가 구해 주지 않았다면 네가 지금 살아 있을 줄 아느냐?"
구양적이 곰곰이 생각해 보니 여인의 말이 옳았다. 여기 있으라고 하니 있어 보자. 무예를 얼마간 배운 다음에 나가서 동생한테 먹을 걸 얻어다 주어도 되지 않는가.
여기까지 생각한 구양적이 대답했다.
"좋아요, 사부님 말씀을 받들겠습니다."
이리하여 구양적과 여인은 빙판 위에 마주앉게 되었다. 여인은 그에게 기이한 무예를 전수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기(氣)를 단련하는 법이었다. 한 손은 곧게 앞으로 뻗어 손바닥이 하늘을 향하게 하고, 다른 한 손은 뒤로 뻗어 손바닥이 땅을 향한 자세를 취했다. 이것은 '천지팔황유아독존(天地八荒唯我獨尊)'이라는 것이었다. 워낙 총명한 구양적인지라 한 번 보고는 단번에 그 표리를 터득
하고 말았다.
여인은 몹시 기뻐했다.
"훌륭하다, 참 훌륭해. 너 같은 자질을 가지고 무슨 무예인들 못 익히겠느냐? 3, 4년만 있으면 이 '천지팔황유아독존'을 몸에 익힐 수 있을 거야."
이 말에 구양적은 깜짝 놀랐다.
"3, 4년이나 걸린다구요? 그럼 전 그만두겠어요!"
여인은 놀라서 물었다.
"왜 그만두겠다는 거냐?"
"동생한테 먹을 걸 구해다 줘야 해요……. 내 동생을 먹여 살려야 한단 말이에요."
여인이 빙그레 웃으면서 물었다.
"적아, 네가 내 제자냐, 아니냐?"
구양적이 머리를 끄덕이니 여인이 냉소를 했다.
"그럼 됐지 않느냐? 내 제자라면 내 말을 들어야 한다. 네 동생이 너에게 부담거리가 된다면 차라리 죽게 내버려두어라."
여인의 냉정한 말을 들은 구양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여인은 좋은 사람이 아니야. 내가 동생을 돌보는 것도 허락하지 않으니 말이야. 내가 돌봐 주지 않으면 그 앤 굶어 죽고 말거야. 반드시 집에 돌아가 먹을 걸 얻어다 주어야 해. 내가 없으면 그 앤 울며불며 날 찾을 거야.'
구양적은 한참 궁리하고 나서 입을 열었다.
"사부님, 오줌이 마렵습니다."
"이 동굴 안에서 오줌을 누어라."
"사부님, 여쭐 말씀이 있습니다……."
여인은 차갑게 말했다.
"할말이 있으면 해라!"
"사부님의 동굴에서 오줌을 싸는 게 좀……그렇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일이 많이 생길 텐데, 그러면 사부님의 동굴 안에서 지린내가 진동할 겁니다. 이렇게 깨끗한 데다 오줌을 눌 순 없습니다……."
그녀는 이 꼬마가 꾀를 부리리라고는 짐작도 못했으므로 수월하게 응낙했다.
"네 말에도 일리가 있구나. 그럼 동굴 밖으로 나가서 오줌을 누도록 해라."
"사부님께서 절 동굴 밖까지 데려다 줄 수 없는지요?"
"난 동굴 밖에 나가기 싫다. 너 혼자 가려무나."
구양적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다물어 버리자 여인이 물었다.
"한숨은 왜 쉬는 거냐?"
"전 사부님이 강호에서 제일 이름 높은 분인 줄 알았습니다. 이런 사부님을 모셨으니 앞으로 밖에 나가 자랑스럽게 다닐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내 생각이 틀렸어요……."
여인은 여전히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왜 그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했지?"
"그건…… 말씀 드리기가 거북합니다."
여인은 아이의 꾀에 넘어가 계속 따져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고 스승이 물으면 반드시 대답을 해야 하는 거다. 대답을 안 하면 널 죽여 버릴 테니까."
"전 사부님께선 무예가 비범하시니 날개가 돋친 듯 동굴 속을 자유자재로 오르내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재주가 없으면 사부님께서 어떻게 이 동굴 속에 계실 수 있겠어요? 그래 내가 한 마음으로 사부님께 배운다면 무예를 다 익힌 뒤 이 동굴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그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았습니다. 사부님께서도 이 동굴을 벗어나시지 못하는데 제가 무
예를 다 배운들 어떻게 동굴 밖으로 나가겠습니까?"
이 말에 여인은 화가 나서 대꾸했다.
"어떻게 내가 이 동굴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고 단정하느냐?"
구양적은 빙글빙글 웃으면서 응수했다.
"사부님께서는 이 동굴에서 나갈 수 없는 게 분명해요. 동굴 밖에 마음대로 나갈 수 있다면 왜 이 추운 얼음 동굴 속에서 고생을 하시겠어요? 보아하니 사부님의 재주로도 이 동굴을 빠져 나갈 수 없는 것 같으니 전 무예를 안 배우겠습니다. 동굴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데 무예는 배워서 뭐하겠습니까?"
여인은 더욱 화가 났다.
"내가 동굴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걸 어떻게 알아?"
여인은 구양적을 들어 올렸다가 공깃돌 팽개치듯이 저쪽으로 휙 던져 버렸다. 구양적은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순간 뼈가 다 부스러질 줄 알았다. 그런데 아무데도 상하지 않고 몸뚱이가 가볍게 바닥에 닿는 것이 아닌가?
"어때? 아직도 내 재주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생각해?"
구양적은 더 이상 까불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만일 사부님의 무예가 쓸모 없다고 대꾸한다면 필시 그녀의 화를 돋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만일 스승이 정말로 성깔이 나서 동굴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한다면 그는 끝장이지 않은가.
구양적은 손뼉을 치면서 말했다.
"사부님, 무예가 정말로 대단하십니다!"
길고 긴 세월 동굴 속에 갇혀 있는 동안 여인은 자기의 무예를 칭찬해 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구양적의 갈채와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그녀는 구양적의 청을 순순히 들어주기로 했다.
"좋아, 내가 당장 널 데리고 동굴 밖으로 나가 주마."
말을 마치자마자 여인은 구양적의 뒷덜미를 턱 잡더니 얼음 바닥에서 몸을 몇 번 굴렀다. 이윽고 그녀의 몸이 솟구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동굴 입구에 닿았다.
동굴 입구의 얼음벽은 아주 두터웠다. 구양적은 여인이 밧줄 같은 것을 가지고 기어오르려니 짐작했는데 여인은 몸만 솟구치면서 간단히 오르는 것이 아닌가? 얼음벽에 붙었다가 다시 몸을 솟구치면 한층 더 높은 벽에 올라 붙고……. 이렇게 서너 번 몸을 솟구치더니 두 바위가 등을 맞대고 서 있는 곳에 이른 것이다.
'난 이 동굴을 벗어나는 법부터 배워야 해. 그런 재주가 없으면 맨날 동굴 속에 처박혀 있다가 얼어 죽을 거야.'
구양적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여인은 몸을 훌쩍 날려 산꼭대기 위에 올라섰다.
구양적이 산 아래를 굽어보니 백타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밤이라 집집의 등불들이 하늘의 잔별들처럼 촘촘히 깔려 있었다. 동생을 생각하니 구양적은 또 조바심이 났다. 동생이 날 찾으며 울고 있지나 않을까?
구양적은 여인을 향해 말했다.
"사부님, 전 집에 돌아가겠습니다……."
그는 얼른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몇 발자국 뛰지도 못했는데 뒤에서 자꾸만 몸뚱이를 잡아당기는 것만 같았다.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소용이 없었다.
"도망치려고? 어림도 없어!"
구양적은 애원했다.
"도망치려구 그러는 게 아니구요……, 동생이 보고 싶어 그래요!"
여인은 살기등등한 어조로 위협했다.
"내 말을 거역하면 네 동생을 죽여 버릴 테다!"
구양적은 새파랗게 질려서 애걸했다.
"사부님, 제발 동생을 죽이지 마세요. 제발 제 동생을……."
"좋아, 내 말을 고분고분 따른다면 네 동생은 죽음을 면할 수 있다. 하지만 내 말을 조금이라도 거스른다면 네 동생을 죽이고 뼈까지 가루를 내어 얼음 동굴 바닥에 처넣고 말 테다!"
"전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매일 밤 네 동생이 잠들면 이 동굴로 찾아와 무예를 익혀야 한다. 만일 하루라도 오지 않으면 네 동생이 죽는 줄 알아라."
"사부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여인은 아직도 구양적을 품에 안고 있었다.
그녀의 음성이 차분하게 들려 왔다.
"적아, 우리 둘이 지내 온 지도 어언 10여 년이 지났구나."
"11년입니다. 11년하고도 23일이 지났습니다."
여인은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적아, 이제는 내 곁을 떠나도 괜찮다. 네 동생을 해치지 않을테니 걱정 말아라. 네가 이미 무예를 몸에 익혔으니 말이다……."
구양적은 따스한 눈길로 여인을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사부님 곁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한동안은 아무래도 사부님 곁을 떠나야 할 것입니다."
여인이 깜짝 놀랐다.
"적아,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냐?"
"얼마 전에 영지상인과 팽연호한테서 중원에 무림비적(武林 籍)이 유전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책을 《구음진경》이라 부른답니다. 무예의 보고라고 하는데 그 학문과 술법이 넓고도 깊다는군요. 제가 중원에 가서 그 책을 구할 생각입니다. 그 책 속에 사부님의 병을 고칠 수 있는 비방이 들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여인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구음진경》이라? 난 왜 지금까지 그 책 이름을 한 번도 못 들어 봤을까?"
"저도 얼마 전에야 들었습니다. 중원에 한 번 다녀와야겠습니다. 책을 구하기만 하면 그 길로 돌아오겠습니다."
여인은 구양적의 몸에 기대어 속삭였다.
"적아, 내 병은 낫기 어려울 거야. 네가 가든 말든 난 개의치 않겠다. 하지만 여기 남아 내 동무를 해 주는 편이 나을 것 같구나. 네 생각은 어떠냐?"
"사부님 병은 꼭 고칠 수 있습니다. 사부님의 병을 고친 다음 함께 그 원수를 찾아가 복수를 합시다."
이 말에 여인의 두 눈에 빛이 번뜩였다.
"네……네가 정말 복수를 할 수 있을까? 정말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구말구요!"
두 사람은 더욱 힘차게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백면라살의 몸이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적아, 난 무섭구나. 이 흉한 몰골을 드러내고 동굴 밖으로 나가 세상 사람들을 대하기가 두렵단 말이야."
"두려울 것 없어요. 누구든 사부님을 흉보면 제가 한칼에 요절을 내겠습니다!"
구양적은 여인을 위로했다.



제10장 난쟁이의 노리개
구양봉은 자신이 모용쟁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형 구양적이 돌아와야 가능했다. 그러나 그는 백타산군의 뒤 꽁무니를 따라 백타산장까지 부득부득 쫓아가려 했다. 그런데 쌍검 옥문과 쌍환 기노가 뛰쳐나와 앞을 가로막고 구양봉을 노려보면서 호통쳤다.
"계속 따라오면 죽여 버릴 테다!"
옥문이 쌍검으로 자신의 정수리를 겨냥하고 있으므로 구양봉은 너스레 웃음을 치면서 대꾸했다.
"알았어요, 알았어. 더 쫓아가지 않겠소."
쌍환 기노가 입을 열었다.
"구양적이 돌아오면 쫓아오라고 해라."
그 말은 구양적이 백타산장까지 쫓아와도 무섭지 않다는 뜻이었다.
구양봉은 멀쩡하게 서서 난쟁이가 모용쟁을 끌고 백타산장을 향해 달려가는 것을 지켜 볼 수밖에 없었다.
구양봉은 기분이 몹시 상했다. 놈들이 차근차근 이치를 따지기 전에 사람을 베고 죽일 줄만 아니, 무기력한 그로선 방법이 없었다. 그는 구씨 할멈과 가시에게 말했다.
"너희 둘은 형을 찾으러 가거라. 찾으면 모용 낭자가 또 백타산장 놈들한테 끌려갔다고 알려라."
구씨 할멈과 가시는 분부대로 부랴부랴 구양적을 찾으러 떠났다.
구양봉은 먼발치에서 슬금슬금 옥문과 기노의 뒤 꽁무니를 밟아 백타산장에 이르렀다. 뒤에 숨어서 살펴보니 기노와 옥문이 입구에서 파수를 보는 졸개들한테 뭐라고 명령을 했다. 이윽고 졸개들이 허궁다리를 내려놓자 두 사람은 유유히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멀리서 바라보아도 백타산장은 방비가 엄밀한 것 같았다. 그래도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까짓 백타산장이 뭐 대단한 게 있겠어! 난 임안의 황궁에도 들어가 보았어! 백타산장의 방비가 아무리 엄밀하다 해도 황궁보다야 더하겠어? 땅거미가 지면 산장 안으로 들어가야겠다. 오늘은 난쟁이 놈이 대관절 어떻게 노는지 내 눈으로 똑똑히 보고야 말테야.'
이렇게 작심한 구양봉은 구석에 앉아 땅거미가 지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머리 속은 여전히 어지러웠다.
'오늘 형님이 계셨더라면 일이 어떻게 됐을까? 두말할 것 없이 형은 큰 싸움을 벌였을 거야. 형은 서역의 일인자니까 손을 쓰기만 하면 놈들은 지탱해 내지 못했을 거야. 그런데 형은 난쟁이와 무예를 겨루어 본 적이 없잖아? 형이 과연 난쟁이를 이길 수 있을까?'
이런 저런 생각 끝에 구양봉의 생각은 자연히 모용쟁한테로 옮아갔다.
'모용쟁은 자존심이 강하고 무예도 출중한 낭자가 아닌가? 총명하긴 하지만 쉽게 성을 내는 성깔 사나운 여자이기도 하지. 만일 낭자가 정신이 들어 난쟁이를 마구 욕한다면 죽음을 자초할 수도 있어…….'
구양봉은 형 생각, 모용쟁 생각으로 골몰하다가 날이 저물었음을 깨달았다. 형이 달려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구씨 할멈과 가시가 그를 찾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구양봉은 혼자 백타산장으로 숨어 들어가 모용쟁의 행방을 알아보기로 했다.
날은 벌써 새까맣게 저물었고, 산장 안에는 오가는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다. 산장 입구에서는 몇몇 파수꾼들이 모여 앉아 투전놀이를 하느라 왁자지껄했다. 이는 절호의 기회였다. 만일 구양봉의 무예가 뛰어났다면 고양이처럼 몸을 날려 쥐도 새도 모르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겠지만 그는 입구로는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파수꾼들이 발견하고 소리를 지르면 끝장이기 때문이었다. 그
래서 그는 벽을 엉금엉금 기어올랐다. 담벽 꼭대기에 기어오른 그는 산장 안쪽을 살펴보았으나 칠흑같이 어두워 어디가 어딘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는 몸을 날려 담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발이 닿으면서 쿵 하고 육중한 소리가 났으나 다행히 그곳은 구석진 곳이라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땅바닥에 나동그라진 그는 스스로를 욕했다.
'구양봉, 넌 정말 밥통이야. 남들은 무예를 익혀 몸이 그토록 날랜데 넌 이렇게 우둔하니……. 어떻게 이런 재주로 남을 구할 수 있겠느냐?'
그는 어두컴컴하고 후미진 구석에 몸을 숨기고 백타산장 안에서 사람들이 오가는 것을 주시했다.
구양봉은 커다란 방 근처까지 다가갔다. 방안에 등불빛이 환했으므로 그는 창호지에 침을 발라 구멍을 빠끔히 뚫어 놓고 방안을 훔쳐보았다.
바로 이 방에 난쟁이 백타산군이 있었다. 난쟁이는 커다란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의자에 앉아서도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콩콩 뜀질도 하고 팽이처럼 뱅그르르 돌기도 했다. 뜀질을 할 때면 천장까지 솟아올랐다가 다시 의자 위에 떨어져 내리기도 했으며,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앞을 바라보기도 했다. 팽이처럼 몸뚱이를 돌릴 때는 어찌나 빨리 도는지 몸뚱이는커녕 그림자마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는 문득 멈추어 두 눈을 부릅뜨고 앞에 있는 사람을 쏘아보는 것이었다. 난쟁이 앞에 네 사람이 서 있었다. 바로 사막에서 구양봉과 모용쟁을 잡아죽이려 했던 사막의 사걸이었다. 사막의 독수리 어거풍은 난쟁이 앞에서 두 손을 공손히 드리우고 서 있는 모습이 마치 어린애가 가르침을 받고 있는 듯했다. 쌍검 옥문은 난쟁이 옆에 서서 얼굴에 웃음을 띠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난쟁이한테 아첨을 떨고 있는 듯했다. 또 그 옆에는 만월도를 잡은 만도 마혁, 쌍환 기노가 서 있었는데 두 사람 모두 침울한 표정을 지은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난쟁이가 싱글거리면서 말했다.
"너희들 모두 밥통들이지? 그지?"
넷은 그저 난쟁이를 힐끔힐끔 볼 뿐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한참 만에 쌍검 옥문이 입을 열었다.
"사부님, 저희들 재주로는 사두장 구양적을 당해 내지 못합니다. 그자는 사막의 일인자라구요. 저희들의 무예는 그자와 비길 바가 못 됩니다."
난쟁이는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웃어대더니 머리를 번쩍 쳐들며 물었다.
"그자가 사막의 일인자라면 난 뭐냐?"
넷은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난쟁이는 그들이 대답을 못하자 기뻐했다.
"이 바보들아, 내가 바로 서역의 일인자야. 너희들이 믿지 못하겠다면 내 솜씨를 한번 보여 주지!"
난쟁이는 말을 마치자마자 몸을 솟구치더니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의 몸뚱이는 허공에서 멈추더니 순식간에 세 가지 동작을 해 보인 뒤 다시 날아 의자 위에 내려 앉았다. 방금 전에 앉았던 그 모양 그대로였는데 몸뚱이는 못이 박힌 듯 까딱도 안 했고, 거친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사부님, 정말 대단합니다!"
먼저 쌍검 옥문이 큰소리로 칭찬하자 뒤따라 사막의 독수리 어거풍, 만도 마혁도 이구동성으로 잘한다고 칭찬했다.
난쟁이 임일천은 본디 성질이 괴팍해서 걸핏하면 제자들의 잘못을 트집 잡아 호되게 질책하곤 했다. 그래서 이 네 사람이 그의 제자 노릇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네 제자 중에서 그래도 총애를 받는 것은 쌍검 옥문이었다. 이 계집애는 얼굴이 예쁘장한데다가 말도 달콤하게 할 줄 알아서, 성깔을 부리는 난쟁이의 비위를 제법 잘 맞춰 주었다. 그래서 난쟁이가 웃을 때가 많
아졌다. 남의 비위를 잘 맞출 줄 아는 옥문도 난쟁이가 납치해 온 여인이었다. 네 제자 중에서 사막의 독수리 어거풍은 이미 사막에서 명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스승 앞에선 머리를 숙이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만도 마혁은 본래 어리숙한 자이므로 스승의 질책에도 기분이 상하는 적이 없었다. 그래서 욕을 먹을 때뿐이지 욕을 먹은 후에는 다 잊어버리곤
했다. 그러나 쌍환 기노는 언제나 말이 없었다. 다른 제자들은 난쟁이에게 꾸중을 들을 때마다 비위를 맞추느라 애를 썼지만 이 쌍환 기노만은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난쟁이는 어릴 때부터 기노를 마구 치고 박고 윽박질렀고, 때로는 거의 죽을 정도까지 매를 안기기도 했는데 그래도 기노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 후로 난쟁이는 기노에게서 아첨하는 말을 받아 내기를 포기했다
난쟁이는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내 재주로 구양적이란 녀석을 쓰러뜨릴 수 있겠나?"
쌍검 옥문이 큰소리로 대답했다.
"사부님의 무예는 세상에 비길 자가 없는데 구양적이란 놈이 어떻게 사부님의 적수가 될 수 있겠어요? 그러나 저희가 넷이 힘을 합쳐 싸운다 해도 그자의 적수가 못 되거든요. 아마도 사부님께서 친히 출전해야 그 놈을 잡아죽일 수 있을 거예요."
난쟁이는 잠깐 침묵하다가 말했다.
"거풍아, 네가 보기에 구양적이란 자의 무예가 대관절 어디서 배워 온 것 같더냐?"
사막의 독수리 어거풍은 무예가 출중했을 뿐더러 견식도 넓었다. 그는 한참 궁리하다가 대답했다.
"제가 보기에 그자의 무공에는 비정상적인 데가 굉장히 많습니다. 아마도 사악한 파의 음독한 무예인 것 같습니다. 우리 서역에는 이런 무예가 없었습니다. 일전에 제가 사람을 시켜서 알아보게 했는데 곤륜파에도 그런 사람이 없었다 하고, 설산파에도 그런 사람이 없었다 합니다. 중원에서 이름 높은 협객 여문생( 文生)한테 물어 봤더니, 그런 무예를 익힌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이미 죽었
으므로 이제는 세상에 전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난쟁이의 얼굴이 굳어졌다.
"여문생이 더 말한 건 없느냐?"
"그분 말씀이, 그 사람 이름은 백면라살 수라아랍니다. 그분은 사부님께서도 그 여인을 기억하고 계실 거라더군요."
이 말에 난쟁이의 얼굴이 공포로 질렸으나 목소리는 또렷했다.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 여인은 죽은 지 10여 년이 넘었어."
사막의 독수리 어거풍이 말했다.
"그 여인에 대해선 전 잘 모릅니다. 여문생이란 분은 사부님께 매사에 조심하시라고 당부했습니다."
"매사에 조심하라고?"
난쟁이는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렸으나 내심 어지간히 겁을 먹고 있었다.
네 명의 제자들은 스승의 얼굴을 응시하면서 조용히 분부를 기다렸다.
"좋아, 밤이 깊었으니 너희들 모두 돌아가 쉬거라."
난쟁이가 분부하자 그들은 공손히 물러났다.
구양봉을 아주 기뻤다. 이 네 놈들이 자리를 뜨면 기회를 엿보아 모용 낭자를 찾을 수 있고, 모용 낭자를 찾으면 끌고 도망치면 되는 것 아닌가? 만일 형이 돌아오면 형한테 무슨 방법이 있는지 묻고, 형이 돌아오지 않으면 모용 낭자를 깊숙이 숨겨 두면 되리라.
구양봉은 방안을 조심스레 훔쳐보았다. 난쟁이는 방 안의 문들을 다 닫은 뒤 조심스럽게 상자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큰 상자에서 자그마한 상자를 꺼내더니 계속 수많은 작은 상자를 꺼내 놓는데 크기와 모양이 각양각색이었다. 구양봉은 모양이 제각각인 그 상자들을 바라보면서 속으로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다. 난쟁이가 모용 낭자를 저런 상자에 집어 넣었을까?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모용 낭자를 저렇게 작은 상자 속에다 어떻게 집어 넣는단 말인가? 그가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난쟁이는 상자들 뚜껑을 죄다 열고는 하나하나 잘 배열해 놓는 것이었다. 다 배열한 뒤 난쟁이가 혼자 중얼거렸다.
"이걸 보시오, 이 상자에 담긴 건 천왕탑(天王塔)인데 당나라의 유종원(柳宗元)이 손수 비문을 쓴 그 탑이오……. 이건 천하에 보기 드문 보물이오. 그리고 이건 두 마리 용이 진주 구슬을 희롱하는 형상을 그대로 만든 것이라오. 이 구슬은 야명주요. 광채가 대단하잖소? 용들은 가느다란 금실을 엮어 만들었소. 정말 훌륭한 보물이야."
구양봉은 난쟁이가 다른 사람과 말하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보아도 방에는 난쟁이뿐으로 자기 혼자서 중얼거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구양봉은 속으로 웃으면서 생각했다.
'난쟁이가 이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걸 보니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는 연습을 하고 있는 게로군.'
난쟁이는 다시 그 작은 상자들이 다 잘 보이도록 정성스럽게 배열해 놓고는 천천히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 놓으면 그 여인도 만족할 거야."
난쟁이는 큰 시름이라도 던 듯이 잠시 앉았다가 이윽고 침대 밑에서 커다란 상자를 끌어냈다. 난쟁이는 이 상자를 자그마한 의자에 올려 놓은 후 상자 뚜껑을 열면서 중얼거렸다.
"낭자, 어서 나오시오."
그리곤 상자에서 한 여인을 꺼냈는데, 바로 방금 구양봉의 집에서 빼앗아 온 모용쟁이었다. 모용쟁의 얼굴에는 노기가 서려 있었다. 그녀는 싸늘한 눈길로 난쟁이를 쏘아보고 있었는데, 당장 달려들어 그를 씹어 삼키지 못하는 것을 한스럽게 여기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적의에 차서 난쟁이를 쏘아본들 도리가 없었다. 난장이가 몇 군데 대혈을 찔러 놓아 옴쭉달싹할 수가 없었
던 것이다.
난쟁이 임일천은 히죽거리면서 모용쟁을 바라보았다.
"모용 낭자, 그대를 잃어버린 뒤 난 오매불망 그대를 사모했소. 난 여인들을 많이 간수해 봤지만 어느 여인도 그대처럼 내 마음을 사로잡진 못했소."
난쟁이가 제 흥에 취해 떠벌렸지만 모용쟁은 고개를 비틀고 외면해 버렸다.
그러나 난쟁이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계속 떠들었다.
"모용 낭자, 그대는 천하에서 제일 아리따운 여인이오. 사내들이란 누구나 미인 앞에서는 오금을 쓰지 못하는 법이지."
모용쟁은 숫제 두 눈을 감고 못 들은 척했으나 난쟁이는 여전히 개의치 않고 지껄였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여인의 어여쁨은 허벅지에 있다고 했소. 물론 이런 말들은 죄다 허튼소리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대에게 이것만은 말해야겠소. 미인의 아리따움을 알려면 앞가슴과 등허리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고 말이오."
말을 마친 난쟁이는 모용쟁의 옷을 벗기고 탁자 위에 앉혔다. 모용쟁은 탁자에 앉아 꼼짝달싹 못하고 난쟁이가 마음대로 자기를 다루는 것을 바라볼 뿐이었다.
난쟁이는 한참 동안 모용쟁을 마음대로 만져 보다가 중얼거렸다.
"등불 아래서 미인을 보는 것은 달빛 아래서 보는 것만 못하고, 달빛 아래서 보는 것은 진주 보석 아래서 보는 것만 못하다고 했소."
말을 마치자 난쟁이는 손을 흔들어 촛불을 꺼버렸다. 촛불이 꺼지면서 동시에 방 전체가 진주와 보석이 흩뿌리는 빛살로 현란하게 반짝였다. 그 황홀한 빛 속에서 모용쟁은 온몸이 금, 은, 진주의 빛으로 번쩍이는 미인으로 변했다. 게다가 그녀가 앉아 있는 탁자가 빙글빙글 돌자 구양봉은 눈이 아찔할 지경이었다.
현란한 빛 속에서 난쟁이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모용 낭자, 사람들이 말하기를 미인의 어여쁨은 보석의 빛을 빌어서 더욱 돋보인다는데, 그대는 이 말을 믿소?"
난쟁이는 모용쟁의 어여쁜 몸매를 구경하면서 손뼉을 치다가 고개를 흔들기도 했으며, 때로는 흥분을 못 이겨 괴상한 소리를 질러대기도 했다.
"모용 낭자여, 모용 낭자여! 그대는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미인이오! 그 아름다움을 내가 독차지했으니 이 임일천의 일생도 헛되지는 않구려……."
이렇게 소리를 지르다가도 너무 흥분했는지 한참씩 죽은 듯 입을 다물기도 했다.
밖에서 이 광경을 훔쳐보는 구양봉은 난쟁이의 소행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임일천이 여인을 좋아하는 방식엔 별난 데가 있구나. 흔히 사내들은 아름다운 여인과 살을 섞고 몸뚱이를 차지하려고 날뛰지. 그런데 이자는 여인들을 마치 노리개처럼 이리 뒤집고 저리 뒤집고 이리 만지고 저리 만지면서 가지고 놀려고만 하지, 살을 섞으려는 생각은 없는 것 같아.'
난쟁이 임일천은 대단히 만족스러운 눈길로 모용쟁의 팔을 바라보더니 그것을 슬슬 만지기 시작했다.
"미인의 피부는 세옥(細玉)처럼 매끄럽고 양의 기름처럼 희다는 옛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았는데, 오늘 낭자의 피부를 보고 난 그 말을 믿게 됐소이다."
난쟁이는 거듭 모용쟁의 팔을 훑어보면서 감탄했다.
"아름다워라, 미인의 팔뚝이여!"
구양봉이 듣자니 난쟁이는 옛날 영웅의 탄식을 흉내내는 듯했다. 춘추 전국시대에 연의 태자 단(丹)은 자객 형가(荊軻)를 청해다가 진의 왕 영정(羸政)을 죽여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형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태자 단은 형가의 환심을 사려고 그를 극진히 환대했다. 태자가 베푼 주연에서 한 미인이 술을 따르게 되었는데, 형가는 그녀의 손을 보고 찬탄했다.
"아름다워라, 미인의 손이여!"
이는 형가가 취중에 한 말이었다. 그런데 잠시 후 태자 단이 형가에게 옥반을 가져오게 했는데, 그 옥반에는 끔찍하게도 그 미인의 손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태자 단의 잔인함은 더 말할 나위도 없지만, 그가 이런 잔인함을 보인 것은, 형가가 자기를 대신하여 진 왕을 죽이기만 하면 무슨 요구든 다 들어주겠다는 뜻을 전달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지사가 주인을 위하여 힘을 다 바친
다는 일례이기도 했다. 구양봉은 난쟁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그가 '형가가 진 왕을 찌르다'는 전고(典故)를 인용했음을 대뜸 알았다. 구양봉은 밖에서 들으면서 냉소했다.
'등신 같은 난쟁이 놈이 어찌 태자 단과 형가 사이에 맺어진 약속이 교역에 불과했음을 알겠는가? 형가는 천교의 명성을 탐냈고 태자 단은 진 왕의 수급을 탐냈을 뿐이다. 그래서 하나는 여인의 손을 아까워하지 않았고 다른 하나는 여인의 생명을 아까워하지 않았지. 지금 난쟁이는 적어도 모용쟁의 팔이나 목으로 무슨 물건을 바꾸려는 것이 아니므로 이 비유는 적절하지 못하다.'
그러나 모용쟁의 팔뚝에 반한 난쟁이는 마치 마음에 드는 놀잇감이나 보석을 구경하듯이 정신이 다 팔려 자기마저 잊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난쟁이는 감탄을 했다.
"미인의 아리따움이여, 내 정신을 다 빼앗아 가는구나!"
난쟁이는 너무 도취된 나머지 연신 머리를 흔들어 댔다.
"모용 낭자, 내게는 진주 보석들이 무진장하오. 낭자에게 그것을 선물할 마음이 있으니 탐나는 게 있으면 말씀하시오."
난쟁이는 말을 마치더니 모용쟁을 한 번 쿡 찔렀다. 그러자 모용쟁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난쟁이는 깜짝 놀라서 투덜거렸다.
"낭자! 그렇게 마구 소리질러선 안 되오. 미인이라면 미인답게 앵도 같은 입술을 살짝 열고 나지막하게 소리를 내야 하오. 노고지리나 제비들이 지저귀듯 말이오. 낭자께서 지금처럼 큰소리로 비명을 질러 대는 건 정도(正道)가 아니오."
모용쟁은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모응 낭자, 낭자께서 탐나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드리겠소. 낭자만 내 손에 있으면 이런 진주, 보석 따위들은 분토밖에 안 되니 사양 말고 말씀하시오. 이 천왕탑이 탐나시오? 아니면 두 마리의 용이 진주를 가지고 노는 이것이? 둘 중 어느 것이든 가져도 좋소."
모용쟁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난 싫다! 네 놈의 물건은 싫어!"
난쟁이의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낭자는 왜 내 물건이 싫다고 하시오? 내 물건들이 마음에 안 든다는 말씀이오?"
모용쟁은 난쟁이를 보기도 역겹다는 듯이 고개를 외면해 버렸다.
"낭자가 화를 내는 것도 보았고 우는 것도 보았지만 웃는 모습은 보지 못했소. 낭자가 웃는 모습은 어떨까? 나로서는 알 수가 없구려. 옛날에 유왕(幽王)이 보사( )를 그토록 사랑했다오. 유왕은 보사가 웃는 모습을 보려고 8백 리에 봉화를 올리게 하고 제후들 오금에서 비파 소리가 날 정도로 동분서주하게 영을 내렸답니다. 그래서 나중에 보사가 웃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지 않소? 한데 내
가 무얼로 낭자를 기쁘게 해 드릴 수 있겠소? 난 미인이 웃는 모습을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소. 정말로 천 가지 교태에 백 가지 아름다움이 곁들여지는지 보고 싶소."
모용쟁이 쌀쌀맞게 대꾸했다.
"개가 웃는 모습을 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아, 네 놈이 뒈지기만 하면 내가 당장 웃을걸."
난쟁이가 기뻐하면서 말했다.
"좋소이다. 좋소이다. 낭자가 웃기만 한다면 난 무엇이든……. 한데……."
난쟁이는 바보처럼 모용쟁을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그건 안 돼, 안 되고말고. 내가 죽으면 낭자가 아무리 웃어도 볼 수 없게 되지 않소? 두 눈을 감은 다음에야 미인의 웃음에 천 가지 교태에 백 가지 아름다움이 있는지 어떻게 안단 말이오? 그건 안 되지, 안 되고말고."
모용쟁은 이 미치광이 같은 난쟁이와 입씨름해 봤자 아무 쓸모가 없는 줄 잘 알므로 입을 꾹 다물고 난쟁이 혼자 떠들도록 내버려두었다.
"모용 낭자, 옛날 고시(古詩)에는 '치장할 물건이 없어서가 아니요, 보여 줄 사람이 없음이로다'라고 읊었소이다."
모용쟁이 대답을 하지 않자 난쟁이는 맥이 빠진 듯 탄식했다.
"이런! 모용 낭자께선 가타부타 통 대답을 안 하시니 답답하구려!"
그는 모용쟁을 보면서 또 입을 열었다.
"옛날 사람들은 장상(張敞)이란 녀석이 제 마누라의 눈썹을 그려 주어서 천하에 이름이 알려지게 됐다고 말했소이다. 장상이란 녀석은 제 마누라의 눈썹을 그려 주었을 뿐이지만, 난 미인을 화장시켜 주는 데 대단한 솜씨가 있소.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나를 알아준답니까?"
말을 마친 난쟁이는 왼손에 검은 상자를 올려 놓고 오른손으로 빗을 들더니 모용쟁에게 물었다.
"모용 낭자, 내가 잘 치장해 드리고 싶은데, 어떻소?"
모용쟁은 큰소리로 외쳤다.
"싫다, 싫어……!"
모용쟁이 악을 쓰는 것이 듣기 싫은지 난쟁이는 다시 모용쟁의 아혈을 쿡 찔렀다. 그러고 나서는 또 나지막한 소리로 이죽거렸다.
"모용 낭자님, 미녀가 치장을 할 때는 조용한 법이오. 아름다운 눈에는 은근한 정이 담뿍 담겨 있어 마치 가을의 호수마냥 그윽하오. 그 눈길은 정든 님을 고대하는 눈길임에 틀림없소. 아미는 먼 언덕 같은데 언덕 너머 정든 님을 기다리고 있는 듯하오. 낭자께서 말씀이 없으니 치장하기에는 안성맞춤이구려."
모용쟁은 정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구양봉이 밖에서 보니 난쟁이의 몸뚱이가 갑자기 붕 뜨더니 모용쟁의 전후좌우로 오락가락했다. 삼단 같은 모용쟁의 머리칼은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처럼 시원스럽게 드리워졌다가 날아오르는 화살처럼 정수리 위로 치솟기도 했으며, 또 잠깐 후에는 하늘에 떠있는 구름 송이처럼 부풀어 있기도 했다. 난쟁이가 앞에 달라붙어 빗질을 하면 아름다운 얼굴이 머리칼 뒤에 숨겨졌고, 뒤에
달라붙어 빗질을 하면 아리따운 얼굴이 드러났다. 난쟁이의 작은 빗은 실북처럼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모용쟁의 머리를 윤이 반질반질 나도록 빗어 놓았다.
난쟁이의 손바닥에서 탁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빗이 눈 깜짝할 새에 자그마한 함 속으로 날아 들어갔다. 난쟁이가 한 손을 흔들자 다른 함 뚜껑이 달카닥 열렸는데 함 속에서 머리 장식품들이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난쟁이는 모용쟁의 앞뒤를 맴돌면서 손에 쥔 비녀며 보석 귀걸이를 순식간에 머리와 귀에 꽂아 놓았다.
치장을 다한 모용쟁은 금은 보석들에 둘러싸여 눈부신 빛을 뿌리고 있었다. 난생 처음 이처럼 아름다운 미녀를 본 구양봉의 두 눈이 황홀해졌다.
'저 여인이 살기등등하여 나를 쏘아보던 모용쟁이란 말인가? 사막에서 언제나 적의에 찬 눈길로 나를 대하던 모용쟁이 저 여인이란 말인가?'
난쟁이는 득의양양해서 모용쟁에게 말했다.
"모용 낭자, 내 솜씨가 어떻소?"
난쟁이는 크게 웃어대면서 모용쟁의 눈앞에 거울을 가져다 보였다.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을 보고 모용쟁은 깜짝 놀랐다. 거울 속의 이 여인이 나란 말인가? 거울 속에 비친 여인은 소박하고 단정한 자기의 모습이 아니라 요염하고 화려한 귀부인이었다. 거울 속의 여인은 그녀의 어머니와 너무도 흡사했다. 모용쟁은 거울을 보고 일찌감치 세상을 뜬 어머니를 떠올리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난쟁이도 구양봉도 모용쟁이 왜 눈물을 흘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구양봉은 자기 나름대로 추측했다.
'모용 낭자는 이처럼 모욕을 당한 것이 분해서 울고 있을 거야. 난쟁이의 이 끝없는 모욕에 누군들 분통이 치밀지 않겠어?'
구양봉의 추측도 과히 어긋난 것은 아니었다. 처녀들의 치장은 워낙 규방의 밀사(密事)이므로 사내들이 엿보지 못하는 것이 상례다. 그런데 사내가 마음대로 머리와 얼굴을 가지고 놀았으니 이보다 더 큰 치욕이 어디 있겠는가? 구양봉은 모용쟁이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은 전혀 알지 못했다.
모용쟁이 서럽게 우는 것을 보자 난쟁이도 당황하고 말았다.
"모용 낭자, 걱정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 주시오. 내가 시름을 덜어 드릴 테니."
모용쟁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눈물만 흘렸다.
난쟁이는 스스로 사내 대장부라 자칭하는 자인데, 원래 사내 대장부는 여인의 눈물 앞에서는 무력한 법이다. 하물며 미인의 눈물이니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모용 낭자, 오늘은 낭자께서 내 침대에서 주무실 수밖에 없소."
모용쟁이 보니 난쟁이의 눈길에는 애모의 정이 담뿍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장난감만한 난쟁이의 침대에서 자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난쟁이는 모용쟁의 마음은 개의치 않고 말했다.
"낭자께선 여기서 주무시오. 상자 안에서 자는 것보다 훨씬 나을거요."
모용쟁은 싫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말을 할 수 없었으므로 더욱 눈물이 솟았다. 난쟁이는 울고 있는 모용쟁을 보면서 말했다.
"제발 그만 우시오. 그렇게 눈물을 흘리면 내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진다오……."
난쟁이도 제풀에 흐느끼기 시작했다.
구양봉은 난쟁이가 여인들과 골동품을 그러모으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 미친 놈이라는 것을 자기 눈으로 확인했다. 난쟁이가 모용쟁을 침대 위에 뉘어 몸마저 빼앗으려 한다고 생각하자 구양봉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만일 형이 계셨더라면 분연히 뛰쳐나가 그 독장(毒杖)으로 난쟁이를 단매에 요절냈을 거야!'
생각이 이에 미치자 구양봉은 고함을 지르면서 문을 박차고 방안으로 뛰어들었다.
이때 난쟁이는 이불을 펴고 얼굴에 미소를 지으면서 말하고 있었다.
"모용 낭자, 밤에 잘 때 무서워하는 것이라도 있소? 무서우면 날 깨우시오."
그때 구양봉이 불쑥 뛰어들었다. 그는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침대로 달려갔다. 구양봉을 본 모용쟁은 놀랍기도 하고 감격하기도 하여 어쩔 줄 몰랐다. 자신을 걱정한 나머지 이곳까지 달려와 준 구양봉이 너무나 고마웠지만 한편으로는 무섭기도 했다. 구양봉이 난쟁이의 손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곳까지 찾아오긴 했으나 모용쟁을 구하기는커녕
십중팔구 제 목숨까지 덤으로 내주게 될 것이었다.
난쟁이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으나 누가 뛰어들었는지 다 알고 있었다. 그는 손에서 이불을 놓더니 중얼거렸다.
"모용 낭자, 보시오. 꾀죄죄한 사내 놈이 낭자를 구하러 왔소이다. 영웅이 미인을 구한다, 그런 말이지요. 한데 뛰어든 자가 영웅이 아니고 제 주제도 모르는 얼간이라면 어쩌겠소?"
난쟁이는 제 물음을 제가 받으면서 탄식을 했다.
"딱하지만 내가 이 얼간이 새끼를 잡아죽여야 할 것 같소이다."
난쟁이는 후닥닥 뛰어 일어나면서 구양봉을 쏘아보았다.
"이 놈, 감히 여기까지 기어들었구나!"
구양봉이 호기 있게 외쳤다.
"모용 낭자를 보내 드려라!"
난쟁이는 키들키들 웃으며 구양봉이 한 말을 그대로 흉내냈다.
"모용 낭자를 보내 드려라……."
난쟁이가 자기의 말투를 너무나 똑같이 흉내내는 바람에 구양봉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할말을 잊을 지경이었다.
구양봉을 바라보는 모용쟁의 표정에는 근심스러운 빛이 가득했다. 그녀는 구양봉의 무모한 소행이 한심스러웠다.
'정말 멍청한 선비야! 공부 끝에 바보가 된다더니, 그 말이 꼭 맞지 뭐야! 나를 구하기는커녕 제 목숨도 부지하지 못할걸!'
난쟁이는 구양봉과 모용쟁을 번갈아 훑어보더니 갑자기 물었다.
"모용 낭자, 그래 이 얼간이가 임자의 사내란 말이오?"
모용쟁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난쟁이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내 말이 옳지? 난 임자 같은 미인들이 왜 나한테 와서 하나같이 안심을 하지 않는지 알 수가 없었어. 난 그 년들이 내 상자 안에서 편안히 살고 있으려니 생각했는데 년들은 저마다 탈출할 궁리만 하고 있더라구. 그 년들이 그러는 것은 모두 네 놈처럼 흰 낯짝을 가진 사내들을 마음속에 두고 있는 까닭인 게야. 내 짐작이 틀림없어. 네 놈을 죽여 버리겠다!"
구양봉도 주눅들지 않고 욕설을 퍼부었다.
"임일천, 듣거라! 네 놈은 백타산군이라는 명색을 갖고 남의 부녀자들을 억지로 빼앗아 오고 갖은 행패를 부리고 있으니 네 죄악이 얼마나 큰 줄 알고 있느냐?"
난쟁이가 반문했다.
"네 놈이 어떻게 내가 모용 낭자를 억지로 빼앗아 온 줄 아느냐? 네 놈이 직접 물어 보아라. 내가 정말 억지로 빼앗아 왔는지."
구양봉은 모용쟁의 혈도를 풀려고 몇 군데 찔러 보았으나 그 요령을 알지 못하므로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난쟁이는 요란스럽게 웃어댔다.
"구양씨네 젊은이가 이렇게 둔할 줄은 몰랐군. 그 꼬락서니가 보기 싫어서라도 네 놈을 빨리 없애야겠구나!"
난쟁이는 고개를 돌려 모용쟁에게 말했다.
"낭자, 아무래도 내가 저 얼간이를 없애 버려야 낭자가 잡생각을 털어 버리겠구려. 안 그렇소?"
난쟁이는 방바닥에서 몇 번 폴짝폴짝 뛰더니 구양봉 앞에 섰다.
난쟁이는 갈고리 같은 손을 뻗었다. 눈앞에 난쟁이의 손이 다가오자 구양봉은 몸을 비키려 했지만 어느새 그의 억센 손아귀에 목을 잡혔다.
난쟁이 임일천은 모용쟁을 보며 물었다.
"이 자식을 죽일까, 살릴까? 빨리 대답하시오."
말을 하려 해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모용쟁은 마음만 조급했다. 난쟁이는 모용쟁의 표정을 눈여겨 살폈다. 그리고 모용쟁의 속마음을 알아내자 울화가 치밀었다.
'네 년이 이 놈을 좋아하는 게 틀림없구나! 내 오늘 네 눈앞에서 놈을 목 졸라 죽일 테니 네 년이 이후에 어떻게 놈을 그리워하는지 두고 보자.'
난쟁이가 손에 힘을 넣어 목을 조이자 구양봉은 사지를 뻗으며 기절해 버렸다.
그 순간 어디선가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 손을 풀어라!"
난쟁이는 깜짝 놀라서 고개도 돌리지 못했다. 그는 등뒤에 다가선 사람이 무예가 아주 높은 사람이며, 그 사람이 자기 등을 겨누고 있다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난쟁이는 침착하게 물었다.
"네가 구양적이냐?"
난쟁이 뒤에 서 있는 사람은 서역의 일인자 구양적이었다.
구씨 할멈과 가시는 구양봉과 헤어진 후 부랴부랴 구양적을 찾아 나섰지만 땅거미가 질 무렵까지도 그의 종적이 묘연했다. 구씨와 가시가 맥이 풀려 있는데 갑자기 검은 그림자가 산꼭대기에서 성큼성큼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가시가 시험삼아 불러 보았다.
"큰 도련님! 큰 도련님!"
그런데 그 그림자가 잠깐 발걸음을 멈추더니 두 사람을 향해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눈앞까지 다가온 걸 보니 바로 큰 도련님 구양적이었다. 구씨 할멈은 급히 그에게 자초지종을 알렸고, 그는 몹시 놀라서 그 길로 나는 듯이 달려왔던 것이다.
구양적은 첫눈에 상황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조급해지는 마음을 애써 누르며 싸늘한 음성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는 자기가 난쟁이의 등뒤에 서 있으므로 자기만 손을 쓰지 않으면 난쟁이도 구양봉의 목을 계속 조이지는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난쟁이는 구양적이 등뒤에 있으니 움직이지는 못했으나, 손아귀로 구양봉의 목을 움켜잡은 채 풀어주려 하지 않았다.
난쟁이가 꼼짝도 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구양적, 마침 잘 왔다! 동생의 송장을 치울 때를 맞춰서 왔군……."
구양적이 을러댔다.
"어디 내 아우를 죽여 봐라. 네 놈의 백타산장에 불을 질러 잿더미로 만들어 놓을 테니!"
난쟁이가 냉소했다.
"그래?"
난쟁이는 구양봉의 목을 쥔 채 천천히 몸을 돌려 독사장 구양적을 쏘아보며 위협했다.
"내가 오늘 너희 두 형제를 함께 황천길로 보내 주마!"
난쟁이는 날쌔게 구양봉의 견정(肩井)과 상양(商陽) 대혈을 찔러 바닥에 쓰러뜨린 다음 구양적을 쏘아보았다.
"좋아, 오늘 우리 둘이 생사 결판을 내 보자!"
구양적은 쓴웃음을 지으며 외쳤다.
"임일천, 네 놈이 감히 나와 내 아우를 죽이려고 설치는구나! 좋다! 네 놈과 사생 결단을 해 보자!"



제11장 백타산장의 혈투
난쟁이 임일천은 구양적을 쏘아보았다.
"구양적, 네 놈은 내 눈의 가시였다. 내가 백타산장에서 유유자적하게 사는데, 네 놈이 내 옆에 살면서 시끄럽게 굴고 서역의 일인자라고 뻐긴다면서? 네 놈이 으뜸이라면 이 백타산군 임일천은 어느 자리에 앉으란 말이야? 말도 안 되지. 네 놈을 없애 버리고 말 테다. 네 놈이 없어져야 내가 서역의 으뜸이 되지 않겠느냐?"
구양적은 난쟁이를 역겨운 듯 바라보며 천천히 대꾸했다.
"임일천, 이제까지 서로 간섭하지 않고 잘 지내 왔는데, 왜 자는 범에게 코침을 놓는 거냐?"
난쟁이는 요란하게 웃어댔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옛말 틀린 데 없구나. 구양적, 이 놈! 네 놈이 날 건드리지 않았어도 진작부터 네 놈을 죽여 버리려 했다. 내가 이제 겨우 천하 절색을 구해 왔는데 네 놈이 언감생심 손을 대려고 하니, 네가 미친놈이 아니고 뭐냐?"
구양적도 지지 않고 욕설을 퍼부었다.
"미녀들을 붙잡아 상자 안에 가두어 놓고 네 놈의 재산같이 부둥켜안고 있으니, 네 놈이야말로 미치광이로구나!"
"네 놈이 감히 내게 훈계를 해? 네 놈이 제 발로 백타산장에 들어왔으니 죽은 목숨인 줄 알아라!"
난쟁이가 휘파람을 길게 뽑았다. 휘파람 소리가 그치자 밖에서 우당탕 퉁탕 요란한 소리가 들리면서 대문들이 벌컥벌컥 열렸다.
삽시간에 문 밖에는 백타산장의 인마들이 근엄하게 늘어섰다. 맨 앞에 사막의 사걸이 버티고 있었고, 마당 한복판에는 백타산장의 무리들이 병장기를 손에 쥐고 살벌한 눈빛으로 구양적을 노려보고 있었다.
사막의 독수리 어거풍이 소리쳤다.
"다들 들어라! 구양적을 놓치는 자는 목을 베겠다!"
말이 떨어지자 무리들이 이리떼마냥 소란스럽게 고함치면서 호응했다.
뒤이어 쌍검 옥문이 앙칼지게 소리질렀다.
"구양적 네 이 놈! 개뿔 같은 독사장을 휘둘러 보았자 결국은 이 백타산장에서 혀를 빼물고 쓰러질 것이다!"
만도 마혁은 더욱 위세를 부리면서 으르렁댔다.
"구양적, 오늘이 네 놈의 제삿날인 줄 알아라! 우리 사부님 손을 빌릴 것도 없이 너는 우리 손에 죽을 것이다!"
난쟁이는 득의 양양한 얼굴로 모용쟁을 올려다보며 이죽거렸다.
"모용 낭자, 난 낭자뿐만 아니라 저 구양 형제도 갖고 싶소이다. 놈들의 시체를 말이오. 낭자는 내 진보팔극(珍寶八極) 상자에 넣고 두 놈의 송장은 관에 넣어서 무덤에 보내겠소. 어떻소, 맘에 드시오?"
난쟁이는 말을 마치자 미친 듯이 웃어댔다.
구양적은 눈길이 동생에게 이르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자기 한 몸이라면 이 백타산장에서 싸움을 하든 도망을 치든 아무 부담도 없을 테지만 아우와 모용 낭자가 옆에 있으니 상당히 난처했다. 싸움이 시작되어 미처 보호하지 못하면 구양봉과 모용쟁이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칼에는 눈이 없다. 만일 이들이 잘못되면 어떻게 하는가?
궁리하던 구양적이 난쟁이를 보고 말했다.
"이보시오 산군, 내 아우와 모용 낭자를 놓아주면 내가 당신과 판가름을 하겠소. 어떻소?"
난쟁이는 머리를 흔들고 탁상 위로 뛰어오르며 대답했다.
"내가 왜 저 둘을 놓아주겠나? 옛말에 이르기를 범을 잡기는 어려워도 놓아주기는 쉽다고 했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지?"
"잡소리는 그만둬라, 임일천. 놓아주겠어? 안 놓아주겠어?"
"안 놓아준다! 얘들아, 저 놈을 쳐죽여라!"
난쟁이가 명령을 내리자 즉시 세 놈이 돌진해 왔다. 한 놈은 칼을 휘두르고, 한 놈은 쇠채찍을 휘두르고, 한 놈은 도끼를 휘둘렀다. 세 놈은 고함을 지르면서 구양적을 에워싸고 덤볐다.
도끼를 휘두르는 자는 산서(山西)의 나가부법(羅家斧法)을 익힌 자로, 그가 도끼 쓰는 법은 피풍도법(拔鳳刀法)에다 밀기[推], 막기[ ], 빼앗기[奪], 누르기[壓] 네 가지를 보탠 것이었다. 도끼를 휘두르니 바람이 휙휙 일어 얻어맞았다간 풍비박산이 날 판이었다. 칼을 휘두르는 자는 산서의 염가도법(閻家刀法)도 아니고 난쟁이의 지당도법(地 刀法)도 아닌 괴상한 법을 몸에 익히고 있었는
데, 칼을 휘두르는 동작이 느렸으며 앞동작보다 뒷동작이 더 느렸다. 구양적은 이 칼잡이의 재주가 만만치 않음을 알아채고 몸을 뒤로 비켰다. 채찍을 쓰는 자도 만만치 않았다. 편장막급(鞭長莫及)이라는 옛말이 있다. 채찍이 길어도 닿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자의 채찍은 아주 길어 단번에 구양적의 얼굴을 후려갈기려 했다. 구양적이 살짝 몸을 비키자 채찍이 탁자 위에 떨어졌는데
난쟁이가 모용쟁을 앉혀 놓았던 탁자가 칼로 내리친 듯이 두 쪽으로 갈라졌다. 이를 본 구양적은 속으로 은근히 놀라며 생각했다.
'난쟁이와 사걸만 염두에 두었었는데 이자들이 뛰쳐나올 줄이야! 보아하니 이 세 놈의 무예도 사걸에 못지않구나! 백타산장에 이같이 출중한 자들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군. 내가 오늘 이곳을 뚫고 나갈 수 있을까?'
이런 궁리를 하다 보니 손발이 굼떠졌다. 이 틈을 타서 세 놈이 더욱 악착스럽게 달려들었다. 길다란 뱀 같은 채찍이 구양적의 얼굴 앞에서 짱짱 울렸고 칼잡이의 칼이 빨라지더니 단번에 구양적을 베어 낼 듯이 이리저리 번뜩였다. 도끼장이도 뒤질세라 달려들어 내리찍고 옆으로 후려치며 다가들었다.
구양적은 냉소하며 외쳤다.
"내 눈엔 너희들이 세 마리 생쥐로 보이는구나. 감히 어르신을 건드려 보려구?"
구양적은 몽둥이를 휘둘렀다. 몽둥이는 마치 눈이라도 달린 듯 도끼잡이의 손에 있는 소음심경맥(少陰心經脈)의 소해(少海), 청영(靑靈), 통리(通里)의 세 대혈을 때리려고 날아갔다. 도끼잡이는 몽둥이가 날아오는 것을 보고 질겁하여 도망쳤다. 도끼잡이가 도망치자 구양적의 몽둥이는 픽 돌며 칼잡이의 가슴을 향했다. 가슴에 있는 여섯 곳의 대혈이 모두 구양적의 몽둥이 아래 놓인 칼잡이
는 당황하고 말았다. 구양적의 번개 같은 몽둥이에 여섯 곳의 대혈이 찔리면 목숨이 남아날 리 없었다. 칼잡이가 황급히 몸을 피한 후 다시 칼을 치켜 들었을 때에야 비로소 구양적이 방금 휘두른 몽둥이가 헛몽둥이질이었음을 알아차렸다. 구양적이 헛몽둥이질로 칼잡이를 위협한 것은 그를 채찍잡이로부터 떼어놓기 위해서였다.
구양적은 제일 밉살스럽게 굴던 채찍잡이를 겨냥하고 몽둥이를 휘두르면서 덮쳤다. 갑자기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채찍이 땅바닥을 후려갈기면서 뽀얀 흙먼지를 일으켰다. 채찍잡이의 손목이 독사장 끝에 찔린 것이다.
채찍잡이는 삽시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뒤로 물러섰다.
그는 구양적의 몽둥이 끝에 독이 발라져 있으며, 그 독이 치명적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몽둥이 끝에 손목을 찔렸으니 팔병신이 될 게 뻔했다. 몽둥이에 찔린 오른손은 벌써 퉁퉁 부어 오르고 있었다. 그는 자기 팔을 잘라 버리려 했으나 어느새 독이 어깻죽지까지 올라와 있었다.
칼잡이는 절망적으로 외쳤다.
"산군님, 저자의 배 ……뱀몽둥이에 도……독이 있습니다!"
그는 최후의 힘을 모아 채찍으로 구양적을 후려갈기려 했으나 몸만 몇 번 푸들푸들 떨더니 쿵 소리와 함께 땅바닥에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것을 본 나머지 둘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둘은 서로 눈길을 주고받았지만 공포에 질려 맥이 풀어지고 있었다. 구양적은 둘이 주저하는 틈을 노려 벽력 같은 함성을 지르면서 두 놈의 정수리를 몽둥이로 연거푸 내리쳤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걸 본 사막의 사걸들이 일제히 고함을 지르면서 철장, 만도, 검, 쌍환을 휘두르면서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그 틈에 몽둥이의 공격에서 벗어나 뒤로 몸을 뺐다.
구양적은 욕설을 퍼부었다.
"임일천, 나 하나와 겨루는데 한 무리의 졸개들을 풀어 놓아 시끄럽게 구니 네 재주를 알 만하구나! 담이 있으면 네 놈 혼자 나서라! 우리 마당에 나가서 승부를 가려 보자!"
난쟁이가 냉소하면서 응수했다.
"좋아, 어디 우리 둘이 겨루어 보자. 서역의 일인자라는 네 놈의 재주를 구경하자!"
임일천이 명령을 내리자 그의 부하들이 뒤로 물러섰다.
이윽고 임일천은 쌍검 옥문과 다른 제자를 시켜 탁자 위에 앉힌 모용쟁을 들어 내오고 구양봉도 끌어내도록 했다.
임일천은 독살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이기면 넌 죽음을 면치 못할 거고, 내가 져도 그건 마찬가지다!"
마당에는 난쟁이의 부하들이 빙 둘러서 있는데 무려 1백여 명이나 되었다. 마당 복판은 텅 비어 있고, 그 둘레에 활활 타오르는 횃불을 밝혀 마당 전체가 백주처럼 밝았다.
임일천은 새된 소리로 웃어대더니 마당 한복판에 나서서 자그마한 두 손으로 가슴을 가리고 구양적이 먼저 공격하기를 기다렸다. 임일천을 마주한 구양적도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이 싸움에 자기의 명성뿐 아니라 아우와 모용쟁의 목숨이 달려 있기 때문이었다. 조금도 소홀히 할 수 없는 대결이었다.
난쟁이가 비아냥거렸다.
"다들 네 놈의 뱀몽둥이에는 귀신도 막아내기 어려운 신통력이 있다고 한다만, 내가 보기엔 네 재주가 별것 아니구나. 방금 네가 설산삼로(雪山三老)와 맞붙어 장편(長鞭)잡이 진독(泰獨)을 좀 상하게 했더구나. 네 놈이 자신 있다면 나한테도 상처를 좀 내 보아라!"
구양적이 몽둥이를 휘두르려는데 괴상한 소리가 들리더니 와지끈 툭탁 하는 소리와 함께 대문이 박살나면서 웬 사람이 뛰쳐나왔다. 머리를 풀어헤친 그는 왼손에 채찍을 쥐고 있었다. 그는 몇 번 공중제비를 해서 구양적 앞에 오더니 소리를 질렀다.
"구양적, 해독제를 가져와라!"
구양적은 냉소하면서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왼손으로 채찍을 휘둘러 젖 먹던 힘까지 다 내어 후려쳤다.
구양적이 슬쩍 비키자 허공을 때린 채찍은 휘익 되돌아가 채찍 임자의 목을 친친 휘감았다. 채찍 임자는 졸지에 얼굴이 돼지 간처럼 벌개지더니 숨이 막혀 입을 쩍 벌리고 두 눈을 부릅떴다. 이윽고 그의 눈알이 시뻘개지고 양미간이 새까매지더니 꺼억꺼억 하는 소리와 함께 땅바닥에 쓰러져 죽어 버렸다.
이 광경을 지켜 보던 난쟁이의 부하들은 너무나 무섭고 끔찍스러워 누구 하나 입을 벌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중에는 이런 생각을 하는 자도 있었다.
'서역의 일인자 구양적의 재주는 저 뱀몽둥이에 있구나! 실력자인 장편잡이 진독이 저 몽둥이에 살짝 찔렸는데도 졸지에 황천객이 되고 말았으니, 저 몽둥이를 멀리하는 게 상책이야!'
갑자기 난쟁이 임일천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구양적, 네 놈이 그 뱀몽둥이 하나로 내 백타산장을 요절낼 것 같으냐? 이 어르신네도 한때는 뱀 무리들을 몰면서 중원을 두루 섭렵했었다. 그 동해 도화도의 주인 황약사만 만나지 않았더라면 네 놈도 내 사진(蛇陣)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았을 텐데. 네 놈이 그따위 뱀몽둥이를 믿고 우쭐한다마는 내게는 대수롭지 않다!"
말을 마친 임일천이 휘파람을 길게 불자 그의 졸개들이 벌떼처럼 구양적에게 달려들었다. 구양적은 앞장선 임일천과 맞붙어 치고 박고 찌르고 막으면서 한바탕 열이 나게 싸웠다. 구양적은 요해만 겨냥하여 몽둥이를 휘둘러 댔지만 임일천은 원숭이처럼 몸을 가볍게 움직여 요리조리 잘도 피했다. 두 사람이 진퇴를 거듭하면서 한데 어울려 수십 합을 싸웠으나 요란한 소리 한 번 나지 않았으
며 그 싸우는 자세도 절묘하기 그지없었다.
이 무렵, 정신을 차린 구양봉은 두 눈은 똑바로 뜨고 두 사람이 싸우는 모습을 지켜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싸움이 어우러져 떼려야 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무렵, 구양봉은 문득 느끼는 점이 있었다. 형과 난쟁이가 몸에 익힌 것은 다 유연한 음유공부(陰柔功夫)여서, 마치 둘이 어울려 춤이라도 추듯이 동작이 교묘하고 진퇴와 공수가 잘 맞아떨어졌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강하고 맹
렬한 힘과 기세가 부족했다. 둘 중 하나만이라도 강한 내력과 용맹한 기세가 있다면 눈을 어지럽히는 저 많은 기묘한 동작과 재주가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었다.
옆에서 구경하고 있는 구양봉은 문제점을 똑똑히 보고 있었지만 마당 복판에서 싸우고 있는 두 사람은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서로 물러서고 공격하는 두 사람이 손발을 어찌나 빨리 놀리는지, 무슨 재주를 부리는지 볼 수도 없을 정도였다. 두 사람의 무예는 그야말로 막상막하였다. 5, 60합을 싸운 뒤 두 사람은 갑자기 양쪽으로 비켜 섰는데, 싸움을 시작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구양적은 뱀
몽둥이를 손에 잡은 자세였고, 난쟁이 임일천도 두 손으로 가슴을 엇막은 원래의 그 자세였다.
구경하던 사람들도 두 사람이 한바탕 싸움을 벌였지만 승부를 가릴 수 없음을 느끼고 있었다.
구양적은 오른손에 몽둥이를 잡고 말했다.
"임일천, 내일 다시 승부를 가르기로 하고 내 아우와 모용 낭자를 풀어 주어라!"
난쟁이가 히죽거리면서 응수했다.
"구양적, 네가 서역의 일인자라는 건 알고 보니 헛소문이었구나. 내 오늘 기어이 네 놈을 없애 버리고 말겠다!"
임일천이 손짓을 하자 쌍검 옥문과 만도 마혁이 달려 나오면서 물었다.
"사부님, 무슨 분부십니까?"
임일천은 구양봉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자식을 끌어내라. 형제간에 서로 정이나 나누게 말이다."
쌍검 옥문은 긴 검으로는 구양봉의 머리를 단검으로는 구양봉의 허리를 겨냥하고, 만도 마혁은 칼로 구양봉의 배를 겨냥하여 마당 한복판으로 끌어냈다.
난쟁이는 미친 듯이 웃어대면서 말했다.
"구양적, 냉큼 그 뱀몽둥이를 집어 던지고 네 스스로 목을 베어라! 그러면 네 아우와 모용 낭자를 살려 주겠다. 이 총각과 처녀가 배필이 되어 너희 구양 가문이 대를 잇도록 해 주마."
구양적은 약이 올라 몸을 부르르 떨면서 어쩔 줄을 몰랐다.
난쟁이는 더욱 약을 올리기 시작했다.
"내가 네 이름을 세 번 외칠 때까지 목숨을 끊어야 한다. 뱀몽둥이로 목숨을 끊든지 주먹으로 정수리를 쳐서 죽든지 그건 네 좋을대로 해라. 내가 세 번 외칠 때까지 목숨을 끊지 않으면 동생은 이 자리에서 송장이 되는 줄 알아라."
구양적의 몸은 돌처럼 굳어졌다.
난쟁이는 자그마한 손으로 구양적을 가리키면서 계속 약을 올렸다.
"서역의 일인자 구양적 어른, 당신은 죽는 게 좋겠소, 사는 게 좋겠소?"
구양적은 두 눈을 부릅뜨고 이를 앙물었다. 그는 당장 이 난쟁이를 박살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난쟁이는 구양적의 일그러진 얼굴은 본 체도 하지 않고 턱을 잔뜩 치킨 채 더욱 큰소리로 약을 올렸다.
"서역의 일인자이신 구양적 어른, 당신은 살아야 마땅하오? 죽어야 마땅하오?"
구양적은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두 손은 경련을 일으킨 듯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난쟁이는 그가 더 이상 궁리할 틈도 주지 않고 큰소리로 재촉했다.
"서역의 일인자 구양적 어른, 당신은 마땅히 죽어……!"
난쟁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공중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울려 왔다.
"구양적이 살아야 하는가, 죽어야 하는가는 네가 알 바가 아니다! 네 놈이 뭔데 그의 생사를 결정하려 드느냐?"
목소리는 아주 낮았으나 마당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정말 깊은 무예를 가진 사람이로구나! 사람들 모두 커다란 전율을 느꼈다. 모두들 천천히 사위를 둘러 보았으나 소리가 어디서 들려 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오직 한 사람 구양적만 낯빛이 변했다. 그는 놀라움과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입속말로 뭐라고 중얼거렸는데 누구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난쟁이는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침묵을 깨고 큰소리로 물었다.
"누구냐? 냉큼 나서지 못할까!"
한동안 정적이 지속되다가 좀 전의 그 목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네가 나서라고 호령하지만 난 나설 수 없구나! 난 너무 늙어서 걸음걸이가 불편하거든. 게다가 내 몸은 불구이니 아마 너희들이 크게 실망할 거다!"
난쟁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쌍검 옥문이 소리를 질렀다.
"잔소리 말고 냉큼 나오너라!"
그 사람은 탄식했다.
"쌍검을 쥐었구나. 예쁘장한 계집애가 애석하게도 가슴속에 살기를 가득 담고 있구나. 네 년은 오늘 두 볼에 칼을 받을 것이다!"
난쟁이가 손짓을 하자 다들 쥐죽은듯 조용해졌다. 임일천도 어느덧 표정이 굳어져 숙연한 자세로 말했다.
"선배님,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나와서 말씀하십시오."
임일천의 무예로도 이 사람이 어디에 몸을 감추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무서워진 임일천은 저도 모르게 공손해졌던 것이다.
그 사람이 탄식했다.
"일천아, 네가 내 제자를 대단찮게 여긴다는 걸 알고 있다. 네가 대단한 독공을 몸에 익혔으므로 독 있는 몽둥이도 널 해치지는 못한다는 걸 알고 있다. 또 72가지 교장침법(巧長針法)을 연마했다고 천하의 무림을 우습게 여긴다만, 사람이 너무 우쭐대면 안 되느니라."
난쟁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날더러 어쩌라는 겁니까?"
허공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저 애들을 놓아주어라!"
난쟁이는 한참 망설이다가 대꾸했다.
"좋다. 구양적, 너만 가라."
구양적이 말했다.
"내 아우와 모용 낭자를 데리고 가겠다."
난쟁이가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네 아우 구양봉은 데려가도 좋아. 하지만 모용 낭자는 내 보배야. 네가 뭔데 내 것을 가져가겠다는 거냐?"
이때 그 사람이 탄식하며 말했다.
"적아, 넌 네 앞만 챙기면 되느니라. 남까지 신경 쓸 필요가 있느냐?"
구양적은 흠칫 놀라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부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구양적은 몸을 돌려 구양봉에게 다가가 해혈(解穴)시킨 다음 나지막하게 말했다.
"봉아, 어서 돌아가자."
구양적은 차마 모용쟁을 쳐다보지 못했다.
그러자 구양봉이 모용쟁에게 말했다.
"모용 낭자, 우리와 함께 갑시다."
모용쟁은 눈물이 고인 두 눈으로 말없이 구양봉을 바라보기만 했다.
구양적은 구양봉을 끌며 다급히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러나 구양봉은 버티고 서서 모용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모용 낭자, 함께 갑시다. 낭자가 가지 못하는데 어떻게 나만 떠날 수 있겠소?"
구양적은 동생이 막무가내로 버티는 바람에 그와 함께 멈춰 서서 마당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때 다시 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적아, 네 말대로 네 동생은 정말 정을 소중히 여기는 아이로구나. 소원이라면 그 앨 여기에 남겨 두어라. 저 난쟁이가 저 앨 상전으로 환대할 리야 없겠지만……. 적아, 우린 가자!"
구양적이 머리를 숙이고 말했다.
"사부님, 모용 낭자를 동생과 함께 데리고 가야 합니다. 왜 허락을 안 하십니까?"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난쟁이 임일천은 불현듯 불길한 기분을 느끼고 큰소리로 떠들어댔다.
"구양적, 날 괴롭히지 말아라!"
구양적은 임일천의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사람의 말이 떨어지기만 기다렸다.
그 사람은 결심을 내렸는지 천천히 말했다.
"난 20여 년 동안이나 세상 사람들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일천아, 날 괴롭히지 말아라!"
임일천이 악에 받쳐 도전했다.
"당신이 모용 낭자를 데려가면 내 목숨을 걸고 싸우겠소!"
마당에서 1백 명이 넘는 임일천의 졸개들이 병장기를 손에 쥐고 구양 형제 등 네 사람을 철통같이 에워싸고, 난쟁이가 명령을 내리기만 기다렸다. 그야말로 처절한 혈투가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이때 그 사람이 개탄했다.
"난 손을 대기가 싫구나. 일천아, 내가 누군지 아느냐?"
난쟁이가 냉소했다.
"당신이 중원의 협객 여문생이오? 아니면 전진교 교주 왕중양이오? 그도 아니면 천하에 소문난 거지 무리의 소씨 거렁뱅이요? 만일 이 세 분 중 한 분이라면 당신을 두려워하겠지만, 아니라면 당신이 오히려 나를 두려워해야 할 것이오."
그 사람이 개탄했다.
"오랜 세월 세상을 멀리했더니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졌구나. 시시껄렁한 놈들이 우쭐거리고 있으니 말이다. 세상 인심이 옛날과 다르구나, 정말 달라."
그리고 말을 잠깐 멈추었다가 다시 이었다.
"일천아, 내가 알려 주마. 내 이름은 백면라살이다. 그 계집애를 놓아주어라. 그럼 네 목숨을 살려 주마."
임일천은 미친놈처럼 모용쟁의 앞뒤를 뱅뱅 돌면서 자기 귀를 비틀고 볼을 꼬집기도 하면서 중얼거렸다.
"이건 안 돼. 천왕탑도, 이용주(二龍珠)도, 당신이 탐내는 건 다 가져갈 수 있으나 이것만은 안 된단 말이야. 안 되고말고……."
임일천은 나귀가 연자방아를 돌리듯 그 자리에서 계속 맴돌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멈춰 서더니 자그마한 주먹을 움켜쥐고 허공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네가 백면라살이든 왕중양이든 소씨든 무슨 상관이냐? 난 천하를 다 돌아다녀서 겨우 저 계집앨 찾아냈다. 사람들은 천하의 계집들이 다 미녀라고 하지만 미인이 어디 그리 흔하더냐? 잔말 말고 냉큼 나서라. 오늘 너와 사생결단을 내겠다!"
나지막하게 웃는 목소리가 또 들려 왔다.
"제상에 계집에 미친 사내들이 많다고 하더라만, 네가 미쳐도 아주 단단히 미쳤구나. 아무래도 널 찬찬히 살펴봐야겠다."
순간 담장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나더니 무너진 담장쪽에서 유령의 모습이 표연히 다가왔다. 유령은 여자의 형상이었다. 그녀 뒤에는 그림자가 없었고 발 밑에는 소리가 없었으며 다가오는 쪽에서는 바람도, 냄새도 일지 않았다. 그녀는 곧장 구양 형제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얼굴 윤곽을 볼 수 없도록 길다란 은발이 풀어헤쳐져 있었다. 흰 비단 같은 은발이 발처럼 드리워져 도
저히 그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녀가 횐 손을 뻗자 피골이 상접한 앙상한 손과 뾰족한 손가락 끝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그 손가락으로 구양봉을 가리키며 칭찬했다.
"훌륭하다, 참 기특해! 적의 아우답다."
그녀는 깔깔 소리 내어 웃더니 고개를 돌려 모용쟁을 훑어보았다.
"네 이름은 뭐냐?"
모용쟁은 난쟁이에게 아혈을 찔렸으므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백면라살은 성을 발칵 냈다.
"날 업신여기는 거냐? 왜 대답을 안 하느냐?"
모용쟁은 조바심이 났다. 이 여인이 구양적을 적이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던 그녀는 구양적이 이 여인에게 사부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는 더욱 놀랐다. 이 여인이 구양적의 스승이라면 무예가 대단하리라 생각하고 그녀는 더욱 안절부절못했다.
여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네 몸은 이제 아무런 탈이 없느니라. 왜 입을 열지 않고 일어서지 않느냐?"
모용쟁은 반신반의하면서 몸을 일으키고 입을 열어 보았다. 그러고 보니 몸이 전대로 회복되어 있지 않은가?
마당에 서 있던 사람들은 귀신 같은 재주와 유령 같은 몰골을 지닌 이 여인이 손 한 번 움직이지 않고 모용쟁의 혈을 풀어 주는 것을 보고, 한결같이 경탄과 함께 공포를 감추지 못했다.
난쟁이 임일천도 난처했다. 명색이 백타산장의 주인인데 도전을 했다가 물러선다면 부하들의 웃음을 사게 될 것이 뻔했다. 그래서 그는 가까스로 용기를 내어 큰소리로 말했다.
"백면라살, 대관절 어쩔 셈이냐?"
그런데 은발의 여인은 긴 머리를 드리우고 마당 안을 천천히 거닐면서 시구를 읊조리는 것이었다.
그 옛날 그대와 작별할 때
미혼의 총각이었는데
오늘 만나 보니
아들딸이 수두룩하구려
아들딸들이 제 아비 손 흔들며
내가 어디서 오는가 묻는구려.
창칼을 휘두르는 것밖에 모르는 자들이 어찌 이 여인의 가슴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옛정을 알 수 있으며, 지난날의 아름다운 추억을 짐작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구양봉은 이 여인이 읊조린 당시(唐詩)가 바로 자기의 심중을 고백하고 옛정을 토로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칼과 창이 번뜩이는 전란 속에서 천군만마를 개미떼로 여기고 채찍을 휘두르는 무사와 협객들도 때때로 장쾌한 시상
이 떠오르고 만단정회가 솟구치는 법이다. 구양봉은 불현듯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선비가 될지라도 규염객(?髥客)이나 이정(李靖) 같은 호협한 사람이 되어야지, 일개 문약한 글방 도련님이 되어 남들로부터 수모나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다. 바로 형의 스승님처럼 세상을 멀리하여 세속의 티끌에 젖지 않아야 비로소 문무기재(文武奇才)를 갖출 수 있지 않겠는가?
이 순간 구양봉의 마음속은 형의 스승에 대한 선망으로 가득 찼다.
여인은 사람들을 헤치고 유유히 걸어 나갔다. 그녀의 앞뒤와 좌우에는 칼과 그 외의 무기가 숲을 이루었지만 누구도 경거망동을 하지 못했다. 여인은 길게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20여 년 동안 한가로이 앉아 있다가 오늘에야 비로소 손을 펴보게 되었구나."
여인은 돌연 임일천의 무리들을 향해 번개 같은 권법으로 맹공격을 가했다. 여인의 손이 닿는 곳마다 칼과 창이 땅바닥에 나뒹굴었고 사람들은 썩은 나무등걸처럼 거꾸러졌다. 그야말로 무인지경을 걸어 나가는 풍경이었다. 난쟁이 임일천은 여인이 종횡무진하는 것을 보고 큰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저 여자를 죽여랏!"
사막의 사걸이 일제히 여인을 에워쌌다.
백타산장 놈들이 일제히 사부를 공격하는 것을 본 구양적은 독사 몽둥이를 들고 덮치려 했다.
이때 여인의 음성이 들렸다.
"적아, 내가 손을 쓰고 있는 걸 보지 못하느냐? 네 스승이 이 생쥐 같은 놈들한테 질 것 같느냐?"
말을 마치자 삽시에 두 주먹이 우박이 내리치듯 했고 몽둥이가 귀신의 그림자처럼 어른거렸는데, 여인이 이르는 곳마다 피가 튀었다.
난쟁이 임일천이 외쳤다.
"백면라살, 손을 멈춰라!"
여인은 서서히 손발의 움직임을 멈추었다.
"난쟁이, 무슨 할말이 있느냐?"
난쟁이 임일천은 이를 갈며 외쳤다.
"백면라살, 할말이 있다. 내겐 일흔두 가지 교장침법이 있다. 당신과 오늘 생사결판을 내고야 말 테다!"
백면라살은 태연히 서 있었으나 난쟁이는 조바심이 났다. 그의 자그마한 두 손이 갑자기 모양을 바꾸었다. 왼손을 높이 들어 귓전에 대고 손가락을 꽃처럼 펼쳐 식지와 엄지손가락으로는 무슨 물건을 집으려는 것 같았다. 이때 오른손은 허리춤으로부터 앞으로 곧게 뻗어 식지와 엄지손가락을 뒤로 구부렸는데, 천하의 절기인 '탄지신통법(彈指神通法)'을 쓰려는 것 같았다. 그는 숨을 죽이고
정신을 차려 백면라살이 선수를 쓰기만 기다렸다.
백면라살은 느릿느릿 발을 옮겼다. 두 손을 늘어뜨리고 머리카락은 흔들리지도 않는데 옷자락은 바람이 없이도 저절로 펄럭펄럭 나부꼈다. 여인은 난쟁이 임일천의 주위를 세 바퀴 돌더니 갑자기 멈춰 서서 뼈만 앙상한 손가락을 쫙 뻗어 난쟁이의 두개골을 움켜 쥐려 했다. 난쟁이는 하하 하고 웃더니 몸을 날려 허공에 떴다가는 백면라살의 뒤로 날아 내려 여인 주위를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
다.
난쟁이의 작은 손은 찌르기도 하고 닭이 모이를 쪼듯 아래로 쪼기도 하면서 열 손가락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의 열 손가락은 백면라살의 앞가슴과 뒤통수의 대혈들을 노리고 있었다. 그의 자그마한 손가락에 찔리기만 하면 끝장이었다. 백면라살의 발걸음이 빨라졌지만 삼단 같은 머리칼이 드리워져서 여전히 얼굴은 드러나지 않았다. 그녀는 손을 치켜 들더니 뾰족한 손가락으로 난쟁이의
대맥을 할퀴려고 덮쳤다. 여인이 할퀴어 대면 그 서슬에 휘익휘익 바람이 일었다. 그 손톱에 한 번 할퀴면 쇠로 만든 병장기마저 파손되니 사람의 피와 살은 말할 것도 없었다. 난쟁이 임일천의 수중에도 병기가 있었다. 왼손에 쥔 빗과 오른손에 쥔 금비녀가 그것들이었다. 그는 왼손으로는 빗질하듯이 박박 긁어 내리고 오른손으로는 송곳질 하듯이 앞으로 쿡쿡 찌르면서 사납게 덤벼들었다.
둘은 10합을 싸웠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 난쟁이 임일천은 은근히 기뻤다.
'천하에 유명한 백면라살의 무예도 별것 아니구나!'
합에도 승부가 나지 않자 백면라살은 은근히 조바심이 났다.
'이 백면라살이 정말로 늙었단 말인가? 늙어서 저 쥐새끼 같은 놈도 골탕먹일 수 없단 말인가?'
그녀는 괴상한 소리를 지르더니 갑자기 수를 바꾸었다. 그녀는 자기가 얼음 동굴 안에서 10년 동안이나 고심해서 연마한 신기한 법술 '천라지(天羅指)'를 펼쳤다.
난쟁이 임일천은 갑자기 눈앞의 백면라살이 차가운 얼음 덩이로 변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한테서 찬바람이 휙휙 불어오는 바람에 한기로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녀가 손가락을 쫙 펴면서 앞으로 내밀자 손가락 끝에서 피익피익 소리가 나면서 순식간에 냉기가 난쟁이 임일천을 휘감았다. 난쟁이는 삽시에 온몸이 얼어드는 것을 느꼈다. 난쟁이의 72가지 교장침법은 세밀한 무예였으므로 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뛰고 솟아야 재주를 부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온몸이 꽝꽝 얼어붙으니 마음껏 재주를 부릴 수 없었다. 난쟁이는 백면라살한테 참패 직전에 놓였다. 옆에 서서 싸움을 구경하고 있던 사막의 독수리 어거풍과 쌍환 기노는 사부의 처지가 위태로운 것을 보고 일제히 달려들었다. 그러자 구양적도 독사장을 비껴 들고 싸움에 뛰어들려 했다.
이때 백면라살이 나지막한 소리로 말렸다.
"적아, 내가 셋을 감당하지 못할까 봐 그러느냐?"
구양적은 손을 멈추고 독사장을 쥔 채 싸움판을 지켜 보기로 했다.
백면라살의 머리칼은 바람에 흩날렸고, 두 손은 춤추는 것 같았다. 그녀는 눈 깜짝할 새에 두 사람을 넘어서 한 손으로는 사막의 독수리 어거풍의 어깨를 가볍게 때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쌍환 기노의 은환을 틀어쥐었다. 쌍환 기노는 그녀가 환을 잡는 것을 보고 속으로 기뻐했다.
'네 년이 스스로 죽을 차비를 하는구나. 이 쌍환을 살과 피로 된 맨손으로 잡을 수 있는 것인 줄 알았어?'
쌍환 기노가 은환 속에 숨겨져 있는,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기관(機關)을 사용하려는 순간 갑자기 차가운 기운이 은환으로부터 손에 전해져 은환을 떨구고 말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팔까지 꽁꽁 얼어붙었다. 은환을 떨어뜨린 그는 당황한 나머지 몸을 돌려 싸움판에서 물러서려 하는데 떨어뜨린 은환이 자기 가슴을 향해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은환은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가슴에 박혔다. 쌍환 기노는 졸지에 숨이 막혀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는 평소에 가장 지독한 자였는데 오늘은 사막의 사걸 중에서 제일 큰 타격을 받았다. 뒤따라 달려들던 쌍검 옥문과 만도 마혁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들은 허투로 검과 칼을 몇 번 휘두르다가 제자리에 멈춰 서서 감히 나서지 못했다.
난쟁이 임일천은 가슴이 후들후들 뛰었다. 만일 사막의 독수리 어거풍과 쌍환 기노가 달려들지 않았다면 땅바닥에 쓰러진 사람은 자신이었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악에 받쳐 소리를 질렀다.
"백면라살, 어쩌자고 이러느냐?"
백면라살이 대답했다.
"이 계집애를 풀어주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네가 내 말을 안 들었지. 네 놈이 스스로 죽음을 자초한 것이다!"
난쟁이의 기세가 금방 수그러들었다.
"당신이 다른 걸 달라면 다 허락하겠소. 왜 하필이면 이 계집을 달라는 거요? 이 계집을 데려다 어디에 쓰려는 거요?"
백면라살이 대답했다.
"어디다 쓰려는 거냐고? 이 계집애는 내 제자 아우의 계집이기 때문이다. 네가 풀어 주기만 하면 만사가 다 잘 풀릴 것이다."
난쟁이는 이를 악물고 대답을 하지 않았다.
백타산장은 서역의 큰 패거리이고 백타산장의 주인인 임일천은 서역에서 종횡무진하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백면라살한테 골탕을 먹고 대패했으니 난쟁이는 분하고 수치스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백면라살, 기껏해야 죽기밖에 더 하겠느냐?"
그러나 백면라살은 난쟁이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모용쟁에게 걸어가 횃불 빛에 그녀를 살펴 보면서 탄식했다.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경국지색이로구나. 적아, 네 아우가 목숨을 걸고 이 애를 구하려는 그 마음을 알 만하다."
백면라살은 모용쟁을 응시하면서 못박인 듯 서 있었다. 모용쟁은 생각에 잠긴 듯한 백면라살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배님, 선배님의 머리는 왜 그렇게 세었나요……."
백면라살은 흠칫했다. 그녀는 머리가 다 세었으나 지금껏 자기의 백발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얼음 동굴 안에서 오랫동안 살면서도 구양적은 그녀의 은발을 화제에 올린 적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모용쟁이 묻자 그녀는 처량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네 가슴속에도 근심이 있으면 머리가 셀 것이다. 구양씨 가문의 둘째 도련님이 너를 아껴 주길 바란다. 마음속에 번뇌가 없으면 머리도 세지 않는 법이지."
백면라살이 모용쟁의 손을 잡고 백타산장을 나서자 구양적과 구양봉도 뒤따랐다. 난쟁이는 두 눈을 멍하니 뜨고 그들 일행이 떠나는 것을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백면라살이 구양적 형제를 데리고 무너진 벽을 넘어서 나간 뒤 한참 후, 그들의 그림자조차 사라졌을 때였다. 갑자기 쌍검 옥문이 울부짖었다.
"내 얼굴, 내 얼굴이……."
네 사람은 걸음을 재촉해 백타산 아래까지 내려왔다. 백면라살이 다른 사람들의 의향은 묻지도 않고 말했다.
"여기서 쉬었다 가자꾸나."
그녀는 먼저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구양적과 구양봉은 한쪽에 잠자코 서 있고 모용쟁만 살며시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달이 구름 속에 얼굴을 감추었다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네 사람은 다 아무 말이 없었다.
한참 후에 백면라살이 물었다.
"모용 낭자는 강남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어디서 무예를 배웠나?"
모용쟁이 읍을 하고 대답했다.
"강남 정암에서 배웠습니다."
"강남 정암이라? 난 들어 보지 못했는데……."
시답지 않은 그녀의 말투에 모용쟁은 불쾌했다.
'내가 강남 정암의 제자라고 하니 시답지 않게 여기는군. 언젠가는 강남 정암 제자의 재주가 어떤지 본때를 보여 주겠어.'
모용쟁은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강호에서는 강남 정암의 무예를 대단하게 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들어 보지 못하신 것 같은데,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요."
백면라살은 겸손한 모용쟁의 말을 듣고 속으로 생각했다.
'적아네 형제가 그토록 애를 써 가면서 이 계집애를 구하려고 한것은 아마도 이 계집애가 이렇게 겸손하기 때문이리라. 계집애가 워낙 예쁜데다가 남의 마음을 잘 헤아릴 줄 아니 누군들 마음이 쏠리지 않겠는가?'
백면라살은 흡족한 기색으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정말 괜찮은 애야."
구양봉과 모용쟁은 밑도 끝도 없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짐작할 수 없었으나 구양적만은 아주 기뻐했다. 그는 스승이 사람들을 칭찬할 때가 매우 드물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모용쟁을 괜찮은 여자라고 말했을 때는 정말로 모용쟁에게 호감을 가졌음을 뜻했다. 구양적이 입을 열었다.
"사부님께선 다른 사람을 칭찬하실 때가 아주 드물지요……."
모용쟁은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살짝 웃으면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백면라살을 향해 공손히 읍을 했다.
"선배님,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구양봉은 세 사람 중에서 모용쟁의 성격을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처럼 공손해진 모용쟁을 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보아하니 사람의 성격은 자꾸 변하는 모양이구나. 사막에서는 사납기만 하더니 오늘 형과 형의 사부님 앞에서는 이처럼 얌전하고 공손하니 말이야. 아마도 형한테 마음을 두고 있어서 그러는 걸 거야. 그러기에 나한테는 사나운 몰골을 하고 아무 말이나 가리지 않지만, 형 앞에서는 얌전을 부리고 이처럼 부드럽게 굴지.'
여기까지 생각한 그는 싱긋 웃었으나 입 밖에 내진 않았다.
백면라살이 구양적을 보며 말했다.
"적아, 내 생각엔 너희들이 백타산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을 것 같구나. 이 길로 집에 돌아가 집사람들을 한동안 피난시키는 게 어떠냐? 다 안돈시킨 후에 다시 나를 찾아오는 편이 좋지 않겠느냐?"
구양적이 대답했다.
"예, 할멈과 가시를 피난시키겠습니다. 그런데 저의 아우와 모용 낭자는 어떻게……."
"이 애들은 내가 동굴로 데려갈 테니 넌 빨리 갔다가 돌아오도록 해라."
백면라살은 이렇게 분부하고는 구양봉과 모용쟁에게 묻지도 않고 몸을 일으켜 길 떠날 차비를 했다.
"봉아, 넌 모용 낭자와 함께 사부님을 모시고 가거라. 난 집에 갔다가 즉시 그리로 가마."
구양적은 아우에게 말하고는 나는 듯이 달려갔다.
구양봉과 모용쟁은 서로 마주 보았다. 그들은 구양적의 당부도 있고 다른 방법이 없기도 해서 백면라살을 따라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세 사람은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우뚝우뚝 솟아 있는 바위숲을 지나 산정의 동굴 입구에 닿았다. 구양봉과 모용쟁은 백면라살이 동굴 안으로 어떻게 뛰어들어가는지 보지 못했다. 그녀의 그림자가 번뜩하더니 시커먼 동굴 밑으로 날아 내려가는 것이 아닌가? 두 사람은 깊이가 얼마인지 짐작할 수 없는 시커먼 동굴을 내려다 보면서 겁이 덜컥 났다. 이 깊고 시커먼 동굴에 잘못 뛰어들다간
자칫 다리가 부러지거나 발목이 삘 것이 아닌가?
모용쟁은 잔뜩 겁먹은 기색으로 구양봉을 바라보았다.
"둘째 도련님, 전……."
구양봉도 속으로는 무서웠지만 사내가 여자 앞에서 뒷걸음질을 칠 수도 없는지라 모용쟁을 보고 말했다.
"내가 먼저 뛰어들겠소. 낭자가 뛰어들면 내가 밑에서 받지요."
그러자 모용쟁이 앵돌아지며 대꾸했다.
"도련님이 나를 받는다구요? 그 재주에 어떻게요?"
그녀는 구양봉이 자기를 받으려다 둘이 부둥켜안고 나동그라질 광경을 떠올리고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달빛 아래서 모용쟁의 얼굴을 훔쳐본 구양봉은 속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 모용 낭자는 참으로 이상한 여자야. 동굴 속에 뛰어내리기가 무섭다면서 수줍음은 왜 타지? 여자들은 원래 다 이런가?'
그래서 그는 모용쟁을 보고 말했다.
"그러면 낭자가 먼저 뛰어내려요."
모용쟁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구양봉은 형의 스승이 기다리다 짜증을 낼까봐 속으로 은근히 근심스러웠다.
"이것도 저것도 다 싫다니, 그럼 내가 먼저 뛰어내리겠습니다."
말을 마친 구양봉은 동굴로 훌쩍 뛰어내렸다. 앗 하는 소리와 함께 구양봉은 시커먼 동굴 속으로 사라졌다. 이 광경을 지켜 보던 모용쟁은 더욱 겁이 나서 소리를 질렀다.
"안 돼요, 내가 먼저 뛰어내려야 해요. 도련님이 없으면 나 혼자 너무 무서워요."
그러나 구양봉은 이미 뛰어내린 뒤였으므로 대꾸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녀는 사위를 둘러보았다. 우중충한 산은 아무런 기척도 없고, 발 아래에는 입을 벌리고 있는 시커먼 동굴만 보였다. 그녀는 울며 겨자 먹기로 두 눈을 질끈 감고 아래로 뛰어내렸다. 귓전에 바람이 쌩쌩 일었다. 그녀의 몸뚱이는 돌멩이처럼 아래로 떨어졌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그녀는 누가 자기 몸을 밀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미끄러운 밑바닥은 희미한 빛을 뿌리고 있는 성싶었다. 그녀의 몸뚱이는 계속 미끄러지다가 얼음벽에 부딪쳐서야 멈추었다. 꼭 감았던 눈을 뜨고 앞을 보았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구양봉의 목소리만 들려 왔다.
"모용 낭자, 내려왔어요? 어디 다친 데는 없습니까?"
구양봉의 말에는 언제나 자기에 대한 관심과 걱정이 어려 있음을 새삼스레 느낀 모용쟁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녀가 대답을 하려는데 웬 손이 그녀의 몸뚱이를 더듬더니 앞가슴까지 만지려 했다. 그녀는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구양봉은 질겁하여 손을 움츠렸다.
"모용 낭자, 왜 그래요?"
모용쟁이 생각해 보니 멋쩍은 일이라 킥킥거리며 웃었다.
"호호호, 아무 일도 아니에요."
동굴 속은 어두워서 주위가 잘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좀 지나자 희미한 빛을 빌어 앞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길다란 얼음길이 뚫려 있는 것을 보았다. 이 길로는 한 사람이 겨우 빠져 나갈 수 있었다. 그들은 옆과 앞을 천천히 더듬으면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
한참 걸어서야 그들은 커다란 얼음 덩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얼음 덩이는 아주 투명하고 굉장히 컸다. 그 높다란 얼음 덩이 위에 백면라살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제12장 중원에 가다
구양봉과 모용쟁은 이 얼음 동굴 안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에 사시나무 떨듯이 온몸을 떨었다.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진 그들은 몸을 녹일 만한 곳을 찾아다녔다. 그들은 손바닥만한 땅이라도 있으면 그 위에 발을 딛고 서서 몸을 녹일 수 있겠지 생각했으나, 아무리 찾아다녀도 반짝반짝 빛을 뿌리는 얼음 벽과 얼음 바닥뿐 맨땅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추운데다가 허기까지 져서 뱃속에서 연신 꾸르륵꾸르륵 소리가 났다. 두 사람은 서로 멍청하게 건너다볼 뿐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들은 결국 백면라살을 찾아가 사정해 보기로 했다.
구양봉은 아무런 무예도 몸에 익히지 못했고 살집도 적은 사내였으므로 모용쟁보다도 더 부들부들 떨면서 사정했다.
"선배님, 저희들이 몸을 녹일 만한 곳이 있을까요?"
그는 이빨을 딱딱거리면서 겨우 말을 했다. 모용쟁도 옆에서 거들었다. 그녀 역시 뼛속까지 한기가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 가다간 얼어 죽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녀는 백면라살을 향해 읍을 하고는 애걸했다.
"선배님께서는 무예가 뛰어나시니 이 추운 동굴 안에서도 괜찮으시지만 저와 구양 도련님은 얼어 죽을 것 같습니다. 저희들을 살려 주십시오."
백면라살은 개탄하듯 시 한 수를 읊었다.
얼음같이 찬 세상
세상 인심이 이러하도다
세상이 이런 줄 모르고서야
어떻게 세상일을 올바르게 처리하랴.
그녀의 대답에 구양봉은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보아하니 이분은 인간들은 누구나 춥고 더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걸 알려 주려는 것 같아. 부득이한 사정이 없다면 이 백발 여인이 어찌 이 어두운 얼음 동굴 속에서 시달림을 겪고 있겠는가? 인생을 살면서 천하의 좋은 일을 다 차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 고초를 겪는 것도 낙으로 생각하면서 견뎌 낼 수 있을 것이고 이러한 추위도 견뎌 낼 수 있을 텐데.'
이렇게 생각하니 구양봉은 어쩐지 속이 탁 트이는 것 같았다. 차가운 얼음 동굴에서도 뜨거운 여름철이라고 생각한다면 추위가 꿀처럼 달콤하게 느껴지리라. 이리하여 그는 무예 연마의 심오한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견디지 못하는 것을 견뎌 내기만 하면 다른 사람들이 얻을 수 없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용쟁은 구양봉만큼 생각이 깊지 못했으므로
속으로 투덜거렸다.
'이 할망구가 미쳤나 봐. 그렇지 않고서야 이 얼음 동굴에서 살 수가 있어? 여기서 조금 더 있으면 얼어 죽겠다!'
모용쟁은 크게 소리질렀다.
"얼어 죽겠어요! 얼어 죽는단 말이에요!"
그러나 백면라살은 모용쟁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얼음 덩이에서 뛰어내려 구양봉을 움켜잡고는 훌쩍 몸을 날려 다시 얼음 덩이 위에 올라앉았다. 구양봉은 이 얼음 덩이에 몸이 닿자 몸이 더욱 부들부들 떨렸다.
그는 깜짝 놀라면서 물었다.
"선배님, 이 얼음 덩이는 왜 다른 얼음보다 훨씬 차가운가요?"
백면라살이 냉랭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것은 천 년 묵은 현빙(玄 )이다. 그러니 다른 것들보다 훨씬 차갑지."
구양봉은 몸이 더욱 떨려 왔다.
구양봉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모용쟁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우리 둘은 함께 이 얼음 동굴 안에 있는데 왜 저 사람만 저토록 견디기 어려워하는 걸까? 저 투명한 얼음 덩이에 이상한 점이 있는 걸까?'
그녀는 손으로 그 얼음 덩이를 만져 보았다. 대뜸 찬기운이 뼛속까지 스며들어 숨이 탁 막히는 것 같았다.
구양봉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해 뛰어내리려 하는데 백면라살이 갑자기 물었다.
"적의 말에 의하면 자넨 책 읽기를 그만두고 강호를 떠돌아다니면서 협객 노릇을 하고 싶어 한다면서? 하지만 무예를 몸에 익히기란 엄청나게 고통스럽다는 걸 알아야 한다. 말하자면 이 현빙은 뼈가 저리도록 차갑지만 무예를 익히는 사람에게는 보배인 거야. 이 현빙 위에서 두 시간만 버터 내면 넌 무예를 익히는 고통을 이겨낼 수 있을 거야."
이 말에 구양봉은 할 수 없이 한기를 견디면서 백면라살 곁에 앉았다. 엉덩이를 붙이고 앉자 한기가 미려혈(尾閭穴)을 뚫고 들어와 척추와 등뼈를 거쳐 뇌리에까지 뻗쳤고, 이어 오장에까지 흩어지면서 졸지에 얼음 사람이 되는 듯했다. 그는 자기의 무능함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럴 때 무예가 깊은 사람이라면 따뜻한 기운을 내정(內庭)에 흘러들게 하고 내력으로 자기의 심맥을 보호할 것이었
다. 이런 방법을 모르면 자칫 얼어 죽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그는 고집이 센 사람이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 얼음 덩이 위에서 두 시간을 버텨 보기로 했다.
모용쟁은 구양봉이 현빙 위에 앉아 꼼짝하지 않는 것을 보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미쳤어요? 이건 현빙이에요. 아무 재주도 없는 주제에! 두 시간이 아니라 반 시간도 되기 전에 송장이 될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동굴 안에 쩌렁쩌렁 메아리쳤다.
그러나 구양봉은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으면서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구양봉의 얼굴색은 푸르다 못해 하얘졌고 다시 시퍼래졌다. 입술에 핏기라곤 하나도 없었다. 한기가 온몸에 스며들어 아무 감각이 없어졌으나 그의 마음속에는 자그마한 쾌감이 남아 있었다.
'누가 나한테 무예를 못 배운다고 하는가? 보통 사람이 이 현빙위에서 두 시간 동안이나 버텨 낼 수 있겠어? 이 구양봉은 버텨냈다! 남들이 못 버텨도 나는 버텨 냈어!'
그는 갑자기 머리가 혼미해지는 것을 느끼고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가 깨어났을 때는 동굴 안이 전과 달랐다. 횃불이 얼음벽 위에서 툭탁거리며 타오르고 있었고, 눈앞에선 형 구양적과 모용 낭자가 그를 보고 있었다.
구양봉은 가슴속에서 열기가 맴도는 것 같았다. 사지의 뼈마디들도 느긋하고 편안하기 그지 없었다. 그는 등허리로부터 따끔따끔한 뜨거움을 느꼈다. 그가 온몸이 나른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구양적이 말했다.
"봉아, 사부님 덕분에 네가 살아났다."
구양봉은 두 눈이 휘둥그래져서 한마디 말도 못했다. 이때 백면라살이 느릿느릿하게 말했다.
"적아, 내가 보니 네 동생은 뜻이 높고 생긴 것도 굳세구나. 네 동생이 무예를 배우면 장래에 무술이 너에 못지않을 것이다."
이 말에 구양봉은 기쁨을 금할 수 없었다. 그는 부랴부랴 몸을 일으켜 백면라살을 향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간청했다.
"저는 무예를 배우고 싶습니다. 제 소원을 풀어 주십시오!"
구양봉은 자기가 원하기만 하면 그녀가 형님의 스승이자 자기의 스승이 되어 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는 백면라살이 왜 20여년이나 얼음 동굴에서 나오지 않았는지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형이 배운 독장(毒杖) 무예가 모두 악랄하고 음험하며 사악한 사파(邪派)의 무예라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백면라살은 빙그레 웃으면서 구양적을 바라보았다.
"적아, 내가 네 아우를 제자로 받아야 하겠느냐?"
구양봉은 형을 보면서 속으로 기뻐했다. 형의 스승이 자기를 거절하지 않은 것은 자기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구양봉은 진작부터 형이 자기의 마음을 알고 있으므로 흔쾌히 허락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스승의 이 물음에 구양적은 깜짝 놀라면서 바닥에 꿇어 엎드려 큰소리로 말했다.
"사부님, 우리 구양씨 가문의 대를 이을 사람은 아우뿐입니다. 저는 사부님과 함께 사부님의 원수를 갚을 것입니다. 동생을 집에 돌려보내고 우리 파에 가담시키지 말아 주십시오. 사부님께서 허락해 주시길 간절히 빕니다."
구양봉은 도대체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스승한테 원수가 있다면 찾아서 복수를 하면 되는 것이지 우리 가문의 일은 왜 곁들이며, 삽시에 얼굴 색이 변할 것은 또 무언가? 그리고 내가 형의 스승한테서 무예를 배우는 게 어째서 구양씨 가문이 대를 잇는 데 지장이 된다는 말인가? 그래, 이 백발 여인의 제자로 들어가면 절이나 암자에 들어가는 것처럼 한평생 장가를 들지 못하고 자식을 낳지
못한단 말인가?
구양봉은 형이 자기에게 무슨 말이든 하겠지 생각했으나, 형은 자기 스승만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구양봉 쪽에는 눈길도 돌리지 않았다.
구양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형님은 출중한 무예로 서역의 일인자가 되어 독사장을 손에 쥐고 천하를 종횡무진하지만, 난 어떤 꼴인가? 사막에서 계집애에게 수모를 당하고 백타산장에서는 남들의 노리갯감이 되었다. 가는 곳마다 남들로부터 수모를 당하니 어찌 사람 구실을 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분이 날 가르치지 않으면 내가 다른 스승을 찾아가서 배우지도 못할 등신인 줄 아는 모양이지?'
그러나 구양봉은 마음이 괴로웠다. 형의 스승에게서 무예를 배울 수 없는데 다른 스승을 찾아서 배운다는 게 어디 그리 쉽겠는가?
구양봉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풀이 죽은 채 현빙에서 내려와 모용쟁과 나란히 섰다. 백면라살한테 무예를 배울 수 없게 되었으니 현빙 위에서 더 버틸 필요도 없어진 것이다. 그는 자기가 현빙위에 주저앉았을 때 모용쟁이 자기를 향해 큰소리를 지르면서 말리던 광경을 머리에 떠올렸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때 모용쟁의 말에는 자기에 대한 근심이 담뿍 어려있었던 것이다. 그는 흐뭇
해져서 모용쟁을 바라보았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백면라살은 현빙 위에 앉아 낮은 소리로 구양적을 가까이 오라고 불렀다. 구양적은 몸을 훌쩍 날려 얼음 위에 올라가 스승 앞에 꿇어 엎드렸다.
"적아, 네가 말하던 중원의 무공 비적인 《구음진경》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는데, 그 책을 꼭 얻어야겠다. 우리의 원수는 무예가 아주 높으니 우리 사제 둘의 힘으로는 당해 내기 어려울 것 같구나. 더구나 그자도 10여 년 동안 강호에는 발길을 끊었으니 무예가 더욱 높아졌을 거다. 내 몸에 병만 없어도 그자와 한번 겨루어 보겠는데 숙환이라 당장 나아질 수도 없으니 승부를 예측하기 어렵
구나. 네가 중원에 가서 전진교의 교주인 왕중양을 찾아 그 경서를 빼앗아 오도록 하거라. 그러면 우리의 원수를 갚을 가망이 있을 것 같다. 하늘이 우리를 도울지도 모르지."
구양적은 머리를 조아려 명령을 받았다. 백면라살 수라아는 모용쟁을 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낭자는 강남 사람이니 사막의 바람과 추위를 겪어 보지 못했겠지? 그러니 적을 따라 강남으로 돌아가도록 하게. 가는 길에 낭자를 보호할 수 있으니 잘됐군."
모용쟁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녀는 백면라살이 자기를 강남으로 돌려보내 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강남은 그녀가 오매불망 그리던 고향이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자기 혼자 대사막을 가로지르는 것이 아니라 구양적과 동행하게 되었으니 백타산장 놈들이 달려들어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녀는 앞으로 나서서 예를 올렸다.
"선배님께서 저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구양봉은 영리한 사람이었으므로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형님은 강남에 가는 길에 모용 낭자까지 동행하게 되었으니, 산천 구경도 실컷 하고 둘이 웃고 떠들면 얼마나 재미날까? 나만 이 얼음 동굴 속에 남아 매일 저 어른을 모시고 있으라니, 이건 말도 안돼!'
그는 억울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다. 백타산장의 무리들이 찾아와서 괴롭힐까봐 걱정되었고, 또 이 쌀쌀맞은 백면라살을 매일 상대할 일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큰소리로 청을 했다.
"형님은 중원에 가는 길도 잘 모르시니 내가 길잡이로 나서는 게 좋을 것입니다."
그의 속마음을 모르는 구양적이 거절했다.
"넌 여기서 기다려라. 길어야 한 일년이고 짧으면 반년이면 돌아올 게다."
구양봉은 생각할수록 한심했다. 이 얼음 동굴 속에서 반나절 지내는 것이 그에게는 마치 한평생을 사는 것처럼 견디기 어려운데 일년이고 반년이라니…….
그래서 그는 얼른 둘러댔다.
"중원에 가시더라도 몇 사람들은 알고 계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초행길에다 아무도 알지 못하면 사람들이 형님을 이상하게 여길 거고 또 적으로 생각할 것이니 시끄러울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 말을 듣고 백면라살은 연신 머리를 끄덕이면서 생각했다.
'이 녀석이 제 형보다 백 배나 영리하구나. 이 두 녀석은 친형제간이니 서로 힘을 합하기 좋을 거야. 중원 무림의 인물들과 교제를 할 때 구양봉의 꾀에다 적의 무예를 합치면 그 《구음진경》을 쉽게 얻을 수 있지 않겠는가?'
이렇게 궁리한 그녀는 나지막한 소리로 구양봉에게 물었다.
"자넨 중원의 인물들을 알고 있나?"
중원에 가고 싶은 구양봉은 마냥 겸손할 수가 없었다.
"제가 지난번에 임안에 갔을 때 몇몇 인물들을 사귀었습니다. 고담을 하는 가게에서 동해 도화도의 주인인 황약사란 분을 만난 적이 있는데, 이분은 무예가 특이하여 중원의 인물 같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일속이라는 중도 만났는데 무예가 황약사보다 한 수 위였습니다. 그분의 재주는 손가락에 있었습니다. 손가락 하나로 적과 싸우는데 대단히 비범했지요. 제가 볼 때 그분은 풍채가 선풍도
골(仙風道骨)로 빼어날 뿐만 아니라 수양도 일류였습니다. 그분은 운남 대리 사람이라고 합니다……."
구양봉이 일속이라는 중의 이야기를 꺼내자 백면라살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그녀의 은발이 갑자기 위로 약간 솟구치면서 이상한 소리를 내더니 다시 천천히 내려오는 것이었다. 그녀는 사뭇 떨리는 소리로 물었다.
"네가 말하는 그 일속이라는 중이 운남 대리 사람이 틀림없나?"
"틀림없습니다."
"그 사람이 손가락을 잘 쓴다고."
구양봉이 그렇다고 대답하니 백면라살이 계속 물었다.
"그 사람 나이는 얼마나 돼 보이고 생김새는 어떻던가?"
구양봉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대답을 했다.
"수척한 얼굴에 골격이 반듯했어요. 나이는 3, 40정도 돼 보였습니다. 여러 가지로 보아 그 동해 도화도 주인인 황 약사보다 횔씬 흠모할 만한 분이었습니다."
그 순간 백면라살의 백발이 팽팽해지더니 마치 화살처럼 뒤로 흩날리는 것이었다. 그러자 해골 같은 그녀의 얼굴이 완전히 드러났다. 그녀는 깔깔거리면서 괴상한 웃음을 웃더니 새처럼 날아와 두 손으로 구양봉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급박한 그녀의 목소리에는 어쩐지 처참한 느낌이 있었다.
"날 보게, 날 보란 말이야. 자네 눈엔 내 나이가 얼마나 돼 보이나?"
구양봉은 어리둥절했다. 그는 백면라살이 왜 자기 나이를 알아 맞추라고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백면라살과 일속이라는 중이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러나 하나는 운남에 있고 하나는 사막의 북변에 있는데 무슨 인연으로 안단 말인가? 그러나 백면라살의 반응으로 보아 필시 무슨 연고가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백면라살이 또 물었다.
"그 사람이 이렇게 손가락을 쓰지 않던가?"
말을 마친 그녀는 자세를 고치더니 두 손을 쭉 내미는 것이었다. 그 모양은 부처님이 손가락으로 꽃송이를 집는 것 같기도 했고, 소녀가 손가락으로 턱을 고이고 상념에 잠긴 것 같기도 했는데, 얼굴 표정은 어딘지 짓궂고 우스꽝스러웠다. 그러나 여인의 기색은 금방 장중하고 엄숙하게 변했다. 그녀가 손가락을 쓰는 거동은 산처럼 무게가 있었고, 대가의 솜씨를 역력히 드러냈다. 닭이 모이
를 쪼듯 쪼기도 하고 송곳으로 물건을 찌르듯 찌르기도 하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변화무쌍했다. 그녀는 실북 나르듯 손가락을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구양봉에게 물었다.
"그 중이 이렇게 손가락을 쓰지 않던가?"
정신이 팔려 바라보던 구양봉은 깜짝 놀랐다. 백면라살의 지법(指法)이 일속이라는 중이 쓰던 지법과 똑같았던 것이다. 구양봉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백면라살 수라아는 머리를 숙이고 상념에 잠겨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한참 후에야 그녀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이 중이 됐다고! 그 사람이 중이 됐어……."
옆에서 듣는 사람으로서는 미워서 그러는지 유감스러워서 그러는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구양적은 깨닫는 바가 있어서 마음이 밝아졌으나 한편으로는 머리칼이 쭈뼛해지는 것을 느꼈다. 백면라살의 원수는 다름아닌 그 일속이라는 중인 것 같았다.
그러나 백면라살이 10여 년 간 한시도 잊지 않은 사람은 중이 아니라 대리 황실 단씨 가문의 도련님이었다. 지금 그 도련님은 없어지고 일속이라는 법명을 가진 중이 남았다. 그 원수가 출가하여 중이 되었다니 섭섭하기 그지 없었다. 상대방은 이미 고해(苦海)에서 벗어나 불산(佛山)에 들어갔는데 기어코 찾아서 복수를 한다는 것은 멋쩍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백면라살 수라아는 머리를 젖히고 소리쳤다.
"단 도령, 내 말을 듣느냐? 네 놈이 어찌하여 절에 들어가 밝은 등잔불 밑에서 불공이나 드리는 중이 되었단 말이냐?"
그녀의 움푹 꺼진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구양봉은 백면라살과 일속이라는 중 사이에 무슨 증오와 사랑이 얽혀 있는지 알 수 없었으나, 그녀가 눈물을 줄줄 흘리는 것을 보자 저도 모르게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한참 후에 백면라살이 입을 열었다.
"적아, 넌 동생과 함께 중원에 다녀오너라. 함께 다니면 서로 의지가 되겠지."
구양적은 기뻐하면서 사부의 분부를 따르기로 했다.
얼음 동굴에서 나온 세 사람은 대사막을 지나 석림을 뚫고 막북(莫北)을 거쳐 중원에 들어섰다. 이날 그들은 변량( 梁)에 닿았다.
구양적 일행이 걸음을 재촉하다 쉬다 하며 이윽고 도착한 북쪽 지방의 변량은 북지의 큰 도회지로 가는 곳마다 온통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이리저리 뚫린 크고 작은 거리들에 사람들이 득시글거리고 길 양옆에는 가게와 점포들이 즐비하여 그 번화함이 강남에 못지않았다.
번화한 거리에 들어서자 구양봉은 딴사람이 된 듯했다. 그는 좌우를 두리번거리면서 제 흥에 겨워 중얼거리기도 하고 손가락으로 이것저것 가리키며 장광설을 늘어놓기도 했다. 형님과 모용쟁이 지나가면서 물으면 그는 더욱 흥이 나서 저 비둘기장 같은 작은 집들엔 황제가 시험을 거쳐 뽑은 선비들이 머문다느니, 저 편액에 씌어 있는 글자들은 당대 문호들의 친필이라느니 하면서 구구한 설
명을 붙이곤 했다. 구양적과 모용쟁은 처음엔 흥미있는 듯했지만 구양봉이 갈수록 흥이 나서 장광설을 퍼부어 대고 구경에만 눈이 팔려 있자 이젠 아예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세 사람은 한 술집에 들어갔다.
변량의 이 술집은 천하가 다 아는 집이었다. 왜냐하면 이 집에 얽힌 유명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
태조가 출세하기 전에 이 청우루(聽雨樓)에서 심부름꾼으로 있으면서 허드렛일을 한 적이 있다고 했다. 당시 이 술집 이름은 청우루가 아니라 경화루(京華樓)였다. 어느 날 땅거미 질 무렵, 태조가 일을 마치고 땔나무를 쌓아 둔 광에 누워 있는데 밖에서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태조는 일어나 동료들을 깨웠다.
"다들 일어나게. 밖에 비가 오네. 비가 온단 말이야."
그때는 이른 봄이라 아직 비가 내린 적이 없는데 첫비가 내린다니 다들 희한하게 여겼다. 그래서 광에서 자던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앉아 비 내리는 소리를 들으려 했다. 그러다가 창문을 열어 보고는 모두들 깜짝 놀랐다. 하늘에는 달이 휘영청 밝고 별빛이 반짝일 뿐 비라고는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던 것이다.
단잠이 들었는데 비가 온다고 소리를 쳐서 깨워 놓았으니 누군들 화가 나지 않겠는가? 다들 태조를 죽일 놈이라고 욕하는 중에 누군가가 소리쳤다.
"저 자식을 패 줘라!"
태조 역시 망연자실했다. 자기가 정말 빗소리를 들었는지 아니면 꿈에서 비가 내리는 것을 보았는지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주먹을 휘두르면서 달려드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소리를 질렀다.
"들어들 보게. 정말 비가 오네!"
사람들이 주먹질을 멈추고 다시 창 밖의 하늘을 보니 하늘에는 달이 여전하고 별들이 반짝이는데 과연 빗소리가 주룩주룩 들려 오는 게 아닌가! 사람들은 하도 이상해서 밖으로 달려나가 맑은 하늘을 쳐다보며 비 오는 소리를 들었다.
그날 밤 그 광에서 잔 사람들은 다들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도 똑같은 빗소리를 들었다.
그 이튿날 아침, 이 집 심부름꾼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지난밤에 빗소리를 듣던 이야기를 하니 아무도 믿지 않아, 서로 낯을 붉혀가며 말다툼을 벌이기까지 했다. 달이 대낮처럼 밝고 하늘에 별들이 반짝였는데 무슨 난데없는 빗소리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태조와 더불어 미치광이, 천치들이라고 조롱당했다.
진교병란(陳橋兵亂)이 일어나고 태조가 황포를 입고 용상에 오르게 되어서야 문득 깨달았다. 조광윤(趙匡胤)은 진룡천자(眞龍天子)였으니 그가 빗소리를 들었다면 꼭 비가 내리는 법인데 우둔한 범인들이 어찌 그것을 알았겠는가?
그래서 사람들은 이 술집을 경화루라 부르지 않고 청우루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구양봉은 전고(典故)들을 익숙히 아는지라 청우루라는 간판을 보자 크게 기뻐하며 구양적과 모용쟁을 보고 말했다.
"이 집에 들어갑시다!"
그가 앞장서서 들어서고 그 뒤로 구양적과 모용쟁이 따라 들어갔다.
이 술집의 2층에 큰 편액이 걸려 있고 거기 청우루라는 세 글자가 씌어 있었다. 획마다 힘이 있고 기세가 비범한 글씨였다.
구양봉은 이 편액을 놓치지 않았다.
"이 글씨는 동피거사(東坡居士)가 쓴 것입니다."
회칠을 한 벽에 먹으로 쓴 현판들이 걸려 있었는데 술 먹으러 온 문인 묵객들이 남겨 놓은 것들이었다. 용(龍)이 날고 봉(鳳)이 춤추는 듯한 활달한 글씨들이었지만, 적지 않은 제자(題字), 제사(題詞)들이 빛이 바랜 것으로 미루어 시일이 상당히 흐른 것들임을 알 수 있었다. 구양봉은 그것들을 하나하나 유심히 훑어보면서 개탄을 하기도 하고 어떤 것은 조소하기도 했다.
그가 중얼거리면서 시구들을 읽었다.
비가 온다 안 온다 떠드는데
비가 온다고 말하니
다들 말이 없구나
하늘을 보고 구름을 보고 있다가
구름으로 천하를 얻었으니
얻을 만한 사람이 얻은 거로다.
구양봉은 다 읊고 나서 품평을 했다.
"이 시구도 그저 그렇네, 뭘. 태조가 빗소리 들은 이야기를 곱씹었을 뿐이잖아. 아부의 뜻이 담겨 있으니 문품(文品)이 참으로 보잘것없군."
그는 이어 그 아래의 제사를 읽었다.
빗소리, 바람소리 들으면 천시(天時)를 알리라
바람이 분다고 예측할 수도 있다지만
그 누가 바람을 차고 다니리요.
구양봉은 감탄했다.
"이 시는 방금 전의 시와는 기품이 다르구나. 청신한 기풍과 오기가 있는 사람이 쓴 것 같아. 그러니 시구가 이처럼 고매하지."
모용쟁은 구양봉이 머리를 흔들면서 시를 읊고, 듣는 사람도 없는데 저 혼자 시구들을 품평하는 것을 보면서 고소를 금할 수 없었다. 사막에서 밤중에 달을 보면서 시를 읊조리던 광경을 돌이켜보니 더더욱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녀 역시 구양봉 못지않은 재녀(才女)였다. 현판에 씌어 있는 시구들을 묵묵히 읽으면서 그녀 역시 속으로 품평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무예에 뛰어난 구양적은 어려서 양친을 잃고 혼자 살림을 떠맡아 온 바람에 참답게 공부를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시구들이 잘됐는지 잘못됐는지 잘 알지 못했다. 그는 하릴없이 먼저 자리에 앉아 사위를 둘러보았다. 이 술집은 상당히 큰 편에 속하고 분위기가 정갈했다. 식사 시간이 이른 터라 손님이 별로 없었다. 그들 셋 외에 동남쪽 창문 옆에 놓인 식탁에 비좁게 둘러앉아 있는 사람들
뿐이었다. 그들은 세 사람이 들어왔을 때도 저마다 자기 술잔을 내려다보며 누구 하나 시선을 주지 않았다.
구양적은 그들을 자세히 훑어보았다. 모두 여덟 명인데 저마다 무예가 있는 사람들인 것 같았다. 이들 남자 일곱과 여자 한 명이 둘로 갈라져 마주 앉았는데 자리가 비좁았다. 식탁에서는 흔히 손님이 윗자리, 주인은 왼쪽 자리에 앉고 곁다리들은 오른쪽에, 부하들은 맞은편에 앉게 마련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 여덟 사람들은 모두 좌우 양편에 몰려 앉아 윗자리와 아랫자리는 빈 채였다.
여덟 중에서 왼쪽의 넷은 모두 넝마 같은 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
중에서 좌상인 듯 보이는 사람의 등에는 아홉 개나 되는 작은 주머니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그 다음 사람의 등에는 여덟 개의 작은 주머니들이 달려 있고 차례차례 하나씩 적어져서 마지막 사람의 등에는 여섯 개가 달려 있었다. 이 네 사람들의 옷은 더럽다 못해 썩은 냄새까지 풀풀 풍겼다. 그러나 맞은편의 네 사람은 화려한 능라주단들을 감고 있었다. 양쪽 사람들 모두 덤덤히 앉아
있는 데, 식탁에는 술단지 세 개와 산해진미가 그득하게 놓여 있었다.
구양적이 다시 눈여겨보니 이 사람들은 술잔을 향해 머리를 숙이고 있었지만 술을 마시지도 말을 하지도 않았다.
식당 안을 한바퀴 빙 돌아본 구양봉이 자리에 와서 앉았다. 그는 앉자마자 모용쟁을 상대로 시(詩), 사(辭), 부(賦)를 청산유수처럼 주워섬겼다. 모용쟁도 정신을 차리고 응수했다.
이때 나무계단에서 떨꺽떨꺽 소리가 들리더니 두 사람이 올라왔다. 소리나는 쪽을 무심히 보던 구양봉은 두 사람을 보자 몹시 기뻤다. 그도 그럴 것이, 둘 다 그가 알고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하나는 임안 흥안루의 요리사인 소씨 거렁뱅이였고, 다른 한 사람은 자기를 꼬드겨 황궁 어선방에 기어 들어가 함께 음식을 훔쳐먹었던 홍칠이었다.
구양봉은 이 두 사람을 보고 하도 반가워 당장 알은체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구양적이 그를 잡아당기면서 소리를 치지 못하게 했다. 소씨 거렁뱅이와 홍칠은 구양봉 쪽은 보지도 않고 곧장 동남쪽 구석에 앉은 여덟 사람을 향하여 걸어갔다.
구양봉은 소씨 거렁뱅이와 홍칠을 보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소씨 거렁뱅이가 혼이 나간 사람처럼 안색이 흐리멍덩했고, 옷차림이 너무나 괴상야릇했기 때문이다. 누더기도 그런 누더기가 없었다. 어깨에 누덕누덕 기운 자리가 적어도 한치 두께는 될 성싶었고 너무 더러워서 원래 무슨 색깔이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옷은 세상에서 제일 화려한 옷이기도 했다. 다른 것들
은 그만두고라도 오른쪽 가슴에 달린 단추와 금줄, 그리고 대롱거리는 추옥(墜玉)이 보기 드문 진품이었다. 이 옷은 복판에서 바느질을 했는데 왼쪽 절반은 누덕누덕한 넝마였고 오른쪽 절반은 화려하고 눈부셨다. 이런 차림을 하고 나타났으니 다들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런데 이런 괴상한 차림을 한 소씨 거렁뱅이는 양미간에 시름이 가득해 보였다. 그는 상석에 털썩 주저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홍칠은 졸개들이 앉는 자리에 가서 앉더니 좌우의 여덟 사람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었다.
소씨 거렁뱅이가 갑자기 코를 벌름거리면서 이쪽저쪽 냄새를 맡다가 소리쳤다.
"좋은 술이로구나! 50년 묵은 여아홍(女兒紅)이란 명주야. 내 오늘 화끈하게 먹어 보자!"
말을 마치자 그는 술잔을 잡더니 마치 고래가 물을 삼키듯 연거푸 아홉 잔을 마셔 댔다.
양편에 앉은 사람들은 그가 술 마시는 것을 구경할 뿐,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소씨 거렁뱅이가 실컷 먹었을 때 비단옷을 입은 한사람이 입을 열었다.
"방주님, 방주님께서 보시건대……."
그의 말을 뚝 끊으며 소씨 거렁뱅이가 큰소리로 떠들어 댔다.
"날 방주님이라고 부르지 마. 너희들의 방주 노릇을 하는 게 뭐가 좋아? 너희들은 허구헌 날 싸움질만 하잖아. 금의파(錦衣派)다 오의파(汚衣派)다 서로 작당을 해 가지고서는 싸움판을 벌여대는 통에 난 골치가 아프다. 너희들이 좀 말해 봐라. 내 이 옷 좀 보라구 너희들이 날 얼마나 괴롭히고 있는지 알겠지? 세상을 살아가는 데 난 옷가지는 하나면 족하다. 그런데 너희들은 이때는 이 옷
을, 저때는 저 옷을 입어야 한다고 아우성이니 그 비위를 어떻게 맞춰? 너희들 보기에 내가 궁리해 낸 이 방법이 어떠냐? 난 어느 때는 더러운 옷을 입고 어느 때는 비단옷을 입어야 하는지 일일이 기억하지 않아도 괜찮게 되었지. 이 옷만 입으면 만사 형통이야. 한쪽은 오의파고 다른 한쪽은 금의파니 말이다. 이제 누구도 불만이 없겠지? 다들 어떻게 생각해?"
그는 여덟 사람을 둘러보면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옥에도 티가 있다고, 내 이 옷에도 나쁜 점이 있지. 이 차림으로 거리에 나서면 사람들이 전부 나를 구경하거든. 마치 무슨 괴물을 보듯이. 정말이지 기분 나빠, 나쁘고 말고……."
소씨 거렁뱅이는 몹시 속상한 듯 연신 한숨을 쉬었다.
금의파 중 나이 든 자가 불만을 털어놓았다.
"방주님께서 이런 옷차림을 하시는 것은 부당합니다."
이 노인이 이유를 늘어놓기도 전에 소씨 거렁뱅이가 발끈 성을 냈다.
"자네 방금 뭐겠어? 이래도 안 된다, 저래도 안 된다, 그럼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야?"
소씨 거렁뱅이가 펄펄 뛰자 노인은 다급하게 변명을 했다.
"제가 그렇게 말씀드리는 건, 방주님의 옷차림이 법도에 맞지 않아서입니다, 방주님……."
소씨 거렁뱅이는 자기의 옷차림이 법도에 맞지 않는다고 하자 더욱 화가 났다.
"내가 어째서 자네들의 법도에 맞지 않는다는 거지? 조 영감, 이 절반이 비단옷이 아니란 말이야? 이건 비단 중에서도 아주 화사한 거라구. 이 금줄과 추옥 두 개, 그리고 단추들은 모두 진품이야. 내가 은전을 50냥이나 주고 구한 거라구. 자네 대답해 보게. 그래, 내 옷이 금의가 아니란 말인가?"
소씨 거렁뱅이가 다그치자 조 영감은 부득이 그렇다고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방주님, 그 옷은 금의가 분명합니다. 정말 우리 금의파의 방주답습니다. 한데 ……."
소씨 거렁뱅이가 큰소리로 말을 잡아챘다.
"됐네, 됐어. 금의가 옳으면 옳은 거고, 방주다우면 다운 거고……. 잔말 말고 술이나 마시지. 자네 금의파에 별다른 일이 없으면 됐네. 그리고 우(于) 양반, 자네 오의파에서도 별다른 의견은 없겠지?"
그 말에 수염을 세 가닥 길게 기른 사내가 일어섰다.
"방주님, 소인도 조 형의 소견이 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방주님의 옷차림은 오의로 보자니 오의 같지 않고 금의로 보자니 금의 같지 않습니다. 우리 개방의 제자들은 방주님께서 왜 이런 옷을 입으시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방주님께선 달리 온전한 대책을 세워 주십시오."
소씨 거렁뱅이는 울상이 되어 입을 열었다.
"네가 좀 알려 주렴. 대관절 뭣이 온전한 대책이냐? 너희들은 한쪽에서는 헌옷을 입으라 하고, 다른 쪽에서는 비단옷을 입으라고 하니 난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모르겠어. 그래서 이런 옷차림을 하는 것이 제일 속 편하다구."
말을 마친 소씨 거렁뱅이는 양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한동안 여덟 사람은 중구난방으로 소씨 거렁뱅이에게 오의를 입으라, 금의(錦衣)를 입으라 서로 권하느라 소란을 피웠다.
구양봉과 구양적, 그리고 모용쟁은 소씨 거렁뱅이가 그들의 말을 귀찮게 여기고 있으며 옷차림을 바꿀 생각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도 한 가지만은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여덟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소씨 거렁뱅이를 기다린 것이 단지 그가 무슨 옷을 입어야 하는가를 토의하기 위해서였는가 하는 점이었다.
이 무렵 천하의 큰 무리 중에서 가장 큰 무리가 거지 무리였다. 이 거지 무리를 개방이라고 하는데 두 파로 갈라져 있었다. 한 파는 오의파(汚衣派)고 다른 한 파는 금의파(錦衣派)였다.
오의파는 이렇게 주장했다.
"내가 거지인 이상 먹는 것은 동냥해 온 밥이요, 입는 옷은 남들이 입다가 던진 헌옷이며, 사는 집은 오두막이다. 이렇지 않고서야 어찌 거지라고 하겠는가?"
그러나 금의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거지란 원래 서러운지라 잘 먹지도 못하고 좋은 집에서 자지도 못하므로 옷이라도 좋은 걸 입고 다녀야 한다. 속담에 사람은 옷이 날개라고 했는데, 옷을 잘 입으면 남들도 우러러보지 않는가?"
하지만 오의파들은 이런 주장을 비웃었다.
"거지가 옷만 잘 입어서 무슨 소용이 있는가? 게다가 거지는 어디를 가나 동냥해야 배를 채울 수 있고 아무 데나 누우면 집인데 좋은 옷을 입으면 어떻게 하는가? 아무 데나 앉을 수도, 누울 수도 없으니 체면만 차리다가는 굶어 죽고 얼어 죽는 수밖에 없다."
두 파는 논쟁을 벌인 지가 오래 되었지만 어느 쪽도 상대방을 설복시키진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새로 법도를 정하기로 했다. 즉 방주는 자기가 아무 쪽에도 기울지 않고 금의파와 오의파를 똑같이 대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한동안은 금의를 입고 한동안은 오의를 입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이런 시끄러움을 견뎌 낼 사람이 아닌데다가 방주가 된 것도 그다지 달갑지 않은 터라 이런 얼토당토않은 법도를 지킬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앉은 사람들에게 역정을 냈다.
"난 너희들의 방주가 되고 싶지 않다. 난 가겠어, 가겠단 말야. 너희들이 하고픈 대로 해 보라구……."
소씨 거렁뱅이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다시 말을 이었다.
"내 생각엔 너희들이 아예 새 방주를 추대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난 이런 잔소리를 기억하지 못해. 더러운 옷이니 깨끗한 옷이니, 이따위 것들은 기억하지 못한다구."
그가 자리를 뜨려고 하자 여덟 사람들이 부랴부랴 자리에서 일어나 나란히 서서 소씨 거렁뱅이를 막았다.
소씨 거렁뱅이가 벌컥 화를 냈다.
"아이쿠! 얘들이 날 죽이려 드는구나!"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잽싸게 땅바닥으로 몸을 굴려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여덟 명이 일제히 막아 서며 조여드는 통에 그만 뒷걸음질을 쳤다. 소씨 거렁뱅이는 몸을 훌쩍 솟구치더니 다시 자기 자리에 날아와 앉았다. 그러고는 여러 사람들을 보고 말했다.
"왜들 서서 설치는 거냐? 점잖게 앉아서 술이나 먹지 않고?"
그는 홍칠을 건너다보았다. 홍칠이 혼자 히죽거리고 있는 걸 보고 그가 입을 열었다.
"이 자식, 넌 뭐가 좋아서 히죽거리는 거야? 네가 한번 방주 노릇을 해 봐라. 머리가 아파서 죽지 않으면 다행일걸!"
소씨 거렁뱅이는 말을 마치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구양적은 이 개방의 두목인 소씨 거렁뱅이의 무예가 자기 스승보다 월등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땅바닥에서 몸을 굴리는 솜씨는 그야말로 귀신 같았다. 그는 부하들의 자존심을 다치지 않으려고 자기 자리에 돌아왔을 뿐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그는 이미 이 청우루를 빠져 나갔을 것인데, 그때는 어디 가서 그의 종적을 찾는단 말인가? 구양적은 속으로 크게 탄복했다.
한창 술상에서 권커니 자커니 술잔이 오고 가는데 아래에서 손님이 왔음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철장방(鐵掌幇) 상관위 방주님께서 오셨습니다!"
이윽고 계단에서 저벅저벅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리더니 아홉 사람이 올라왔다. 웃고 떠드는 것으로 보아 기분이 아주 좋은 모양이었다. 그들은 이층에 손님이 두 무리나 있는 것을 보았다. 구양적 네 사람에 대해서는 별로 꺼리지 않는 눈치였으나, 자기들과 맞은편에 앉아있는 동남쪽 창문가의 식탁을 건너다보고는 유쾌한 기색이 흐려졌다. 그 중 한 사람이 말했다.
"방주님, 자리를 바꾸시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복판에 선 사람이 대답했다.
"괜찮아, 우리들이 여기 앉으면 돼."
먼저 말을 꺼냈던 사람이 공손히 대답한 뒤 구양적네가 앉은 곳에서 의자를 하나 집어 들었다. 그걸 소맷자락으로 먼지 하나 없이 깨끗이 닦은 후 자기네 방주에게 앉도록 권하고, 주인을 불러 술과 안주를 청했다. 주인이 물러가자 아홉 사람은 조용히 앉아서 술과 안주가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구양적은 이 아홉 사람들 중 적어도 일곱 사람은 무예가 뛰어나다고 짐작했다. 그들 중 가장 억센 기상을 지닌 사내가 상관위 방주로 마흔 고개를 넘은 것 같았다. 무쇠로 부어 만든 것 같은 시커먼 손만 보아서도 출중한 장법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대뜸 알 수 있었다. 이들은 위층에 올라올 때만 해도 웃고 떠들어댔지만, 식탁에 모여 앉은 거지 무리를 발견한 뒤로는 하나같이 입을 꾹 다물
고 있었다.
가운데 앉은 방주가 한마디했다.
"빨리 먹고 떠나자."
그는 다시 입을 꾹 다물고 안주만 오기를 기다렸다. 안주가 오자 다들 게걸스럽게 먹어댔다. 그들 방주만 먹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먹는 모습을 지켜 보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가 먹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참 후에 술집 주인이 술단지를 하나 가져다 그의 앞에 놓았다. 이 상관위 방주란 사내는 술단지 뚜껑을 열고 코로 냄새를 맡더니 냉수를 퍼마시듯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이때 문어귀에서 작은 아이가 달려 들어왔다. 한눈에 거지 아이임을 알 수 있었다. 아이는 넝마 같은 옷을 입고 시커먼 두 손을 허우적거리면서 상관위 방주 앞을 지나쳤다. 그곳을 지나 거지 무리가 모여 앉은 식탁으로 달려가 먹을 것을 구걸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너무 서두르다가 그만 술단지를 잡은 방주의 팔을 툭 쳤다. 술단지가 바닥에 떨어지는 걸 보고 거지애는 겁이 나서 비명을
질렀다.
술단지가 바닥에 부딪쳐 박살이 나려는 순간, 방주가 히죽 웃으면서 발끝으로 술단지를 차 올렸다. 그러자 술단지가 솟구쳐 올라 다시 머리 위쪽으로 날아 내려오는 게 아닌가? 그는 대뜸 두 손을 뻗어 술단지를 받았다.
상관 방주 옆에 있던 사내가 거지 아이를 냉큼 붙잡았다.
"네 애비 상이라도 당했느냐?"
거지 아이는 말은 못하고 질질 울기만 하더니 땅바닥에 꿇어 엎드려 살려 달라고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사내는 방주가 말은 안 하지만 자기가 거지 아이를 한바탕 때려 줄 것을 바란다고 여겼는지, 일어서서 큰소리로 꾸짖었다.
"네 놈을 때려죽이지 않으면 나중에도 말썽을 부릴 거야!"
그 사내는 주먹을 들어 거지 아이를 때리려 했다.
그때 갑자기 상관위 방주가 거지 아이의 옷자락을 와락 낚아챘다. 거지 아이의 너덜너덜한 넝마가 뭉청 뜯어져 나갔다. 거지 아이는 엉엉 울면서 대들었다.
"내 옷을 내놔요, 옷을 내놔요!"
그 사내가 소리를 꽥 질렀다.
"듣기 싫어! 네가 우리 방주님의 술을 쏟았지만 널더러 술을 내놓으라고 하지 않았다. 그까짓 넝마조각이야 찢어지면 어떠냐? 어디 한번 된매를 맞아 볼래?"
사내가 매를 들려는데 상관위 방주가 말리더니, 몸을 낮추면서 물었다.
"네 이름이 뭐냐?"
친절한 목소리였다. 거지 아이는 방주가 몸을 낮추고 자기에게 상냥하게 말을 걸자 울음을 그쳤다.
거지 아이는 입속말로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구천인( 千 )이라고 해요."
이때 옆에 있던 사내가 웃으며 말했다.
"훌륭한 이름이로구나! 천인이라, 그럼 네 키가 아주 크겠구나, 허허허!"
거지 아이는 정색하여 대꾸했다.
"내 키는 별로 안 커요. 난 두 번째로 크지요. 내 형은 구천장( 千丈)인데 나보다 더 커요. 내 여동생은 구천척( 千尺)인데 나보다 키가 작구요."
구양적은 한쪽에서 이 모든 것을 지켜 보고 있었다. 만일 그 사내가 정말로 거지 아이를 때렸다면 구양적은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구양적은 물론이고 또 다른 쪽에 앉아서 이 장면을 노려보고 있던 소씨 거렁뱅이 역시 잠자코 보고만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쥐고 있는 젓가락이 날기만 하면 그 사내의 팔뚝에 정확히 꽂혔을 것이었다. 그런데 다행히 상관위 방주가 갑자기 상냥한 기
색으로 거지 아이에게 말을 건네는 바람에 소씨 거렁뱅이와 구양적 모두 안도의 숨을 쉬었던 것이다.
상관위 방주가 거지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 이름은 상관위(上官威)다. 내 이름이 네 이름보다 못하구나."
그리고 방주는 고개를 돌려 다른 사람에게 분부했다.
"가삼(賈三) 동생, 자네 맞은편 가게에 가서 옷을 좀 사 오게. 최고급으로 말이네."
가삼은 영문을 몰라 물었다.
"방주님, 누구의 옷입니까? 방주님의 옷이 더러워져서 갈아입으시려구요?"
"바보 같은 소리! 내가 무슨 옷을 갈아입어? 이 아이, 아니 이 구 공자님의 옷을 보란 말이다. 네가 찢어서 볼썽사납게 되었잖아. 어서 가서 새 옷을 사다가 갈아입혀 줘라."
가삼은 내막을 알 수 없었으나 방주의 명령이므로 더 묻지 못하고 나는 듯이 달려갔다.
"그래, 형과 누이동생은 어디 있니?"
상관위가 아이에게 물었다.
그 말에 아이는 눈물을 흘리며 우는 소리로 대답했다.
"모두…… 남의 집에서 삯일을……."
"남의 집이라니? 누구네 집에서?"
상관위의 기색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장대선(張大善)네 집에서 일해요. 형은 심부름을 하고 누이동생은 종으로 있어요."
"그 장대선이란 사람이 너희들을 잘 대해 주더냐?"
상관위의 물음에 구천인이라는 아이는 대답도 못하고 엉엉 울었다. 가슴이 미어지는 모양이었다.
"내가 네 형과 누이동생을 데려오면 어떨까?"
"안 돼요. 장대선이란 사람이 가만 놔두지 않을 거예요. 우릴 때려죽일 거예요."
아이는 놀라서 부르짖다시피 했다.
"그 사람이 네 형에게 은자를 얼마나 주지?"
상관위가 물었다.
"은자는 안 주고 그냥 밥만 줘요."
어린아이의 대답에 상관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네 형을 불러다가 내 일을 돕게 하고 네 누이동생도 불러다가 내 일을 돕게 해서 매달 백은 30냥씩을 주면 어떨까?"
상관위의 말에 구천인의 눈이 둥그래졌다. 그는 의아한 듯이 말했다.
"지금 날 놀리는 거죠?"
"내가 왜 널 놀리겠니?"
상관위는 그러면서 몸을 돌려 옆에 있는 키 큰 사나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키 큰 사나이가 은자 한 정(錠)을 꺼냈다. 상관위는 그 은자를 손에 들고 아이에게 말했다.
"이건 50냥짜리 은괴란다. 가져가서 형과 누이동생에 보여 줘라. 그래도 그들이 안오겠다고 하겠느냐?"
이렇게 큰 은자를 난생 처음 본 구천인은 너무나 놀랍고 기뻐서 더듬더듬 대답했다.
"제……제가 마……말하면 꼭 올 거예요."
그러자 상관위는 옆사람에게 분부했다.
"자네가 장대선 씨에게 말해서 이 아이의 형과 누이동생을 우리 방(幇)으로 데려오게."
지시를 받은 자는 즉시 일어서서 장대선을 찾아갔다.
구양적 일행은 아무리 생각해도 오리무중이었다. 이 사림이 가는 곳마다 척척 시사(施舍)를 일삼는 보살(菩薩)이란 말인가? 아니라면 왜 저러는 걸까? 소씨 거렁뱅이 역시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도대체 저 사람이 왜 저러는 걸까?
― 제2권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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