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 - 서독 구양봉 5

3학년2반 | 2022.02.18 07:43:38 댓글: 0 조회: 369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9562


제25장 5년 후의 약속
왕중양과 소씨 거렁뱅이의 싸움을 갈수록 치열해졌다. 그들은 서로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대항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온몸은 땀으로 흥건히 젖었고 얼굴마저 시뻘개졌다. 두 사람은 모두 기진맥진했지만 떼어놓을래야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무예의 대가인 단지흥은 이 두 사람의 속사정을 환히 꿰뚫어 보고 개탄을 금치 못했다.
'소씨 거렁뱅이는 당대의 호걸이다. 그런데 이다지 사리에 어두울 수 있는가? 일시의 만용으로 목숨을 내걸고 싸움을 벌이고 있으니 한심하기 짝이 없구나. 왕중양은 명성을 중히 여기는 사람이다. 그러기에 전진교의 뒷일에 저토록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천하의 대사에 대해서도 소홀히 하지 않고 자가의 뜨거운 피를 전장에다 뿌리려고 하지 않는가. 이러한 사람이 어찌 소
씨 거렁뱅이한테 순순히 굴복하려 하겠는가? 만일 이 두 사람을 뜯어말리지 않으면 둘 다 크게 상할 텐데, 이런 무익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단지흥이 다급한 생각이 들어 싸움을 말리려고 불쑥 달려나가는 데 역시 이 모든 것을 환히 꿰뚫어 보고 있던 황약사가 큰소리로 말했다.
"중양진인께서 소씨 선배님을 이겼소이다. 냉큼 손을 떼시오!"
황약사가 보기에 만일 왕중양이 손을 늦추지 않으면 소씨 거렁뱅이가 위험했던 것이다. 그는 벌써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가쁜 숨을 몇 번 몰아쉬더니 급기야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왕중양도 얼굴빛이 샛노래졌다. 그는 몸을 일으키면서 황약사를 바라보았다.
"황 도주님, 소인이 다행히도 소 선배님한테 지지는 않았습니다. 만일 황도주님께서 소인과 겨루어 보실 뜻이 있으시면 달갑게 응수하겠습니다."
황약사가 대답했다.
"중양 진인, 그대가 이미 지쳤는데 내가 어찌 손을 댈 수 있겠소? 만일 내가 그대와 겨루면 천하의 영웅들이 이 황약사를 비경하다고 비웃을 것이니 설사 이긴다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소. 며칠
푹 쉬시오. 그때 내기 그대와 한번 겨루어 보겠소."
"그럼 그렇게 합시다."
홍칠은 사부를 부축하여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왕중양, 오늘 우리 사부님이 그대와 겨루기는 하셨지만 결판이 난 건 아니오. 이후에 사부님께서 꼭 그대와 결판을 내실 것이니 그때 봅시다!"
그는 사부를 부축하여 자리에 앉도록 한 뒤 사부의 상처를 치료할 뿐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황약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중양 진인, 그대는 급해 할 필요가 없소. 우리 함께 날짜와 장소를 정해 가치고 길고 짧음을 가려 보도록 합시다. 그래서 이긴 쪽에서 그대의 그 《구음진경》을 가지도록 하잔 말이오."
"좋은 생각입니다."
"중양 진인, 우리 모두 5년 후에 화산(華山)에서 모이기로 하는 게 어떻겠소? 그땐 우리들만 모일 것이 아니라 천하의 영웅들이 다 모일 수 있도록 합시다."
왕중양은 황약사의 말을 들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5년 후면 나의 전진교도 흥성할 것이고 항금(抗金)의 큰일도 마무리를 지을 수 있을 테니, 만반의 준비를 했다가 싸운다면 더욱 손해날 게 없다.'
왕중양은 흔쾌히 대답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합시다."
단지흥도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그때 꼭 다시 중원에 찾아오리라고 마음먹었다. 한쪽에 서 있던 홍칠도 스승을 대신하여 때가 되면 꼭 화산에서 만나자고 왕중양과 단단히 약속했다.
왕중양이 여러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그럼 모두들 약속을 지킵시다. 제게 친구가 한 명 있는데, 여인이긴 하지만 무림의 기인이지요. 제가 그 친구도 데려오겠습니다. 그때 우리 제대로 겨뤄 봅시다."
이렇게 굳은 언약을 하는 동안 황약사는 속으로 생각에 잠겼다.
'《구음진경》의 위력을 누가 모르겠는가? 만일 왕중양이 5년 동안에 이 경서에 통달하고 자기 제자들한테도 일일이 전수한다면 우리들이 다시 화산에 모여서 무예를 겨룬들 어찌 그를 제압할 수 있겠는가.'
여기까지 생각한 황약사는 빙그레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나한텐 작은 청이 하나 있는데, 중양 진인께서 들어주시길 바라오."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서슴지 말고 하십시오."
황약사는 여러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입을 열었다.
"화산에서 무예를 겨룬다면 설사 《구음진경》이 아니더라도 천하의 영웅들이 구름처럼 몰려들 것이고 고금에 다시없는 치열한 겨룸이 될 것이 자명하오. 그런데 이런 큰 겨룸에 아무런 상품도 내걸지 않는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그래서 난 이 《구음진경》을 상품으로 내걸자고 제의하오. 중양의 생각은 어떠한지 ? 누구든지 이기기만 하면 천하 무림의 일인자로 추대하고 이 경서도 줍시다.
여러분들의 의향은 어떠한지요?"
황약사의 말이 떨어지자 모두들 좋다고 떠들어댔다.
원래부터 무림의 무사와 협객들은 글을 읽는 선비들과는 형편이 달랐다. 선비들한테는 해마다 과거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향시 (鄕試)를 보고 나서는 경시 (京試)를 준비하느라고 바쁘고, 경시를 보고 나면 전시(嚴試) 때문에 바쁘다 보니 1년 내내 한가한 나날이 별로 없다. 하지만 무림의 인물들은 무슨 큰 사건이나 생겨야 재주를 과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10년 혹은 20년씩
골방에 틀어박혀 매일 책과 씨름한다는 것이 비록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개중에는 학운이 트여 벼슬자리에 앉거나, 석학대유(碩學大儒)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면서 어디를 가나 대접을 받는 선비들이 적지 않듯이, 무인들이 천하에 이름을 떨치려면 무슨 명목으로든지 무예를 겨루어 이겨야 했다.
관가에서는 군사를 일으켜 외적을 막는 일 외에는 좀처럼 무인들을 머리 속에 떠올리는 일이 없었다. 사태가 긴박해져 서야 무인들한테 달라붙는 것이 바로 관가의 벼슬아치들이다. 하지만 관가의 벼슬아치들만 탓할 일은 못 된다. 예로부터 황제들은 모두 이러했으니, 그들은 평소에는 소위 문사(文事)에만 정신을 팔다가 난세가 돼야 비로소 무사(武事)를 생각하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무인들을 양성하려면 선비들을 키워 내는 것보다 돈이 훨씬 많이 들어가는데, 관가의 재정 형편상 무사에게 돈을 푹푹 쓸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예부터 '세상을 다스리려면 학문을 배워야 하고 난세에는 무예를 익혀야 한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지 않는가?
치세에는 무예를 배워도 소용없다. 관가에서 매일 칼부림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마음대로 사람을 잡아죽일 수도 없는 일이니 무예를 익힌들 별 쓸모가 없다. 기껏해야 제 몸을 지킬 수 있는 방신술만 익혀 두면 족하다. 하지만 난세가 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무예를 익히면 변방에 나가 외적을 무찔러 군공을 세울 수도 있고 그로 인하여 빨리 진급할 수도 있다. 몇 년 사이에 큰 관리로 책
봉되고 5품이나 6품 벼슬을 하는 것은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다. 하지만 문인 학사(文人學士)들은 조정에서 허리가 휘도록 굽신거리고 서로 작당을 하여 물고 뜯으면서 수없이 암투를 벌여야 관작이 겨우 하나나 두어 급 올라가는 것이다.
사람들이 황약사의 제의에 이구동성으로 찬성하자 황약사가 말을 이었다.
"아마도 여기에 계시는 여러분들은 5년 후 틀림없이 화산에 전부 오실 것이 틀림없는데, 그때는 오늘보다 더 성황을 이를 것입니다. 제 소견엔 이렇게 했으면 좋을 듯합니다. 그전 천하의 무림 영웅들이 다 모일 테니 최후의 승자는 당연히 이 무림의 기저를 자기 것으로 하는 대신 두 번째 승자에게 한 달 동안 책을 읽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그 다음 사람에겐 며칠 동안만, 또 그 다음
사람에겐 남들이 책을 보는 것을 구경이나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게 어떨까 싶소. 이렇게 되면 얼마나 재미 있겠소?"
모두들 황약사의 생각이 아주 괴상하다고 여겼으나 당장 더 좋은 묘안이 떠오르지 않는지라 머리를 끄덕였다.
단지흥이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좋소. 때가 되면 나도 꼭 찾아가겠소. 여러분들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이에 황약사도 맞장구를 쳤다.
"저도 도화도에 돌아간 뒤 이 5년 후의 약속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때가 되면 저도 화산 꼭대기에서 여러분들을 기다리겠습니다."
그리고는 한쪽에 있는 홍칠과 소씨 거렁뱅이를 건너다보면서 물었다.
"화산 모임에 개방도 올 수 있겠는지요?"
"물론이지요. 우리 사부님께서 안 가신다 해도 난 꼭 가겠소. 그 《구음진경》인지 뭔지가 대관절 어떤 책이기에 천하의 무림 영웅들이 이토록 눈독을 들이는지 내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소……."
이때 소씨 거렁뱅이가 '악!'하고 비명을 지르더니 입으로 핏덩이를 토해냈다.
모두들 불안한 눈초리로 소씨 거렁뱅이의 고통스러워하는 몰골을 지켜. 왕중양은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소씨 거렁뱅이와 같은 이러한 풍진 세상의 이인(異人)은 강호의 은원(思怨)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지만 자신의 명성에 대해서는 아주 중히 여기지. 때문에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나와 내력을 겨루려고 했으며, 이렇듯 중상을 입게 된 것이지. 만일 내가 양보를 했다면 그는 나에게 무슨 짓을 했을지 몰라. 내가 그한테 해를 입히지 않았다면 그가 나한테 해를 입혔을 거야. 하지만 상황이야 어
쨌든간에 소씨 거렁뱅이가 상처를 입었으니 앞으로 개방과의 관계가 좋을 순 없겠군. 우리 전진교를 원수로 여길 것이 분명해.'
소씨 거렁뱅이는 연신 쿨럭거리며 계속해서 피를 토해냈다. 마옥과 구처기는 외상을 낫게 하는 전진교의 단약(丹蘂)을 꺼내 소씨 거렁뱅이에게 권했다.
소씨 거렁뱅이는 두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질렀다.
"이 전진교의 개종자들아, 이 어르신이 그렇게 쉽게 죽을 성싶으냐? 그 따위 약 냉큼 치우지 못할까!"
그는 말끝을 맺지 못하고 또다시 피를 내뿜었다. 홍칠은 대수롭지 않게 마옥과 구처기를 보면서 뇌까렸다.
"우리들은 천한 거지라 몇 대쯤 얻어맞는 건 다반사야. 우리 몸뚱어리가 그렇게 귀한 줄 알았어 ?"
이 말에 마옥과 구처기는 얼굴이 붉어졌다. 그들은 손에 약을 든 채 건네지도 못하고 도로 집어 넣지도 못한 채 우물거렸다. 두 사람은 은근히 화가 났다.
'네 놈이 기껏해야 개방 방주의 제자지 뭐냐? 네 놈이 아무리 무예가 빼어나다 해도 우리만은 못할걸? 아무래도 사제간이 더 망신을 당해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두 사람은 서로 눈짓을 하고 동시에 홍칠을 향해 내력을 방출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무도 이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손과 발은 전혀 움직이지 않은 채 내력으로만 공격을 했기 때문이다.
마옥과 구처기가 전신의 내력을 한데 모아 홍칠과 소씨 거렁뱅이를 공격하는 것을 왕중양은 한눈에 알아보았다. 왕중양이 큰소리로 소리쳤다.
"마옥아, 너희 두 놈이 이렇게 무례할 수가 있느냐!"
그가 고함을 지르면서 마옥과 구처기를 막으려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두 사람이 발한 내력은 마치 구리로 부어 만든 성벽에라도 부딪친 듯 갑자기 방향을 바꾸더니, 오히려 이들 두 사람을 10여 보나 허우적거리며 뒷걸음질치게 만들었다. 두사람은 하마터면 뒤로 자빠질 뻔했다. 왕중양이 고개를 돌려보니 홍칠이 소씨 거렁뱅이 앞을 턱 막아 서서 버티고 있었다.
마옥과 구처기는 비록 왕중양의 제자였으나 나이는 둘 다 왕중양과 비슷했다. 그들은 언제나 전면서 스승인 왕중양을 천하에 둘도 없는 영웅으로 숭앙해 오던 터에 소씨 거렁뱅이와 홍칠이가 왕중양에게 불손하게 구는 것을 보고 한번 본때를 보여 주려던 것이 도리어 망신을 당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모닥불을 뒤집어쓴 듯 얼굴이 뜨거워졌다.
왕중양은 속으로 개탄했다.
'우리 전진교 내에 비록 인걸이 적지 않다고는 하나 홍칠이처럼 젊은 나이에 저만한 조예를 가진 명수는 없는 것 같구나. 마옥과 구처기는 이 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이 홍칠이란 친구는 지금 수준이 이미 황약사나 단지흥과 엇비슷하다. 기실 내 무예와 견주어도 별반 차이가 없다. 그런데 너희 둘이 홍칠이와 겨루어 보려 했으니 망신을 자초한 셈이지 뭐냐?'
사람들은 모두 무학의 대가로서 저마다 단약을 지니고 있었고 또 저마다 소써 거렁뱅이를 고쳐주려 했지만, 소씨 거렁뱅이는 단지흥의 단약만 받아서 꿀꺽 삼켰다. 소씨 거렁뱅이는 단지흥의 인후한 성품을 잘 아는 터라 가볍게 기침하는 것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대신했다. 단약을 삼킨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는 어느새 기력을 되찾기 시작했다.
구양봉은 중양궁을 떠나그 근처 마을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어느덧 날이 밝아오자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오늘 난 왕중양의 내막을 알게 됐어. 그한테 《구음진경》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고……. 한데 5년 후에야 그 경서를 빼앗을 수 있구나. 이젠 대사막으로 돌아가 형부터 찾아야겠다. 그러면 모용쟁도 찾을 수 있겠지.'
모용쟁을 생각하니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모용쟁은 형과 눈이 맞아 지내겠지. 노상 붙어 있으니 안 그럴 리가 있겠는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구양봉의 마음은 왠지 모르게 불쾌해졌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뿐이었다. 그는 형을 만나면 지난밤에 본 일을 얘기해 주자고 생각했다. 형이 깜짝 놀랄 광경을 머리 속에 그려 보며 빙그레 웃었다.
구양봉은 곧장 서역 대사막을 향해 떠났다. 10여 일 동안 길을 재촉하여 이윽고 서역에 닿았다. 한 작은 마을에 들어섰는데 그 마을은 아주 깨끗하고 조용했다. 그는 어쩐지 이곳이 마음에 들어 여기저기 구경을 다니다가 날이 저물어서야 한주막에 들어섰다.
주막 안에서는 거지 차림의 중년 사내들 두 사람이 한창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들은 각각 자그마한 주머니를 여덟 개씩이나 메고 있었는데 그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외에는 별로 이상한 점이 없었으나, 머리에 천으로 된 횐 끈을 질끈 동여맨 것으로 보아 아마도 상을 당한 듯했다.
한 사내가 입을 열었다.
"날이 좀더 어두워지면 출발하자구. 아마 그쪽에서도 도착한 것 같아. 만일 그쪽에서 모두 왔다면 우리의 대사는 무난할 것이야."
마주앉은 좀 젊어 보이는 거지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머리카락 한 오라기 없는 대머리였는데 중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주먹과 팔뚝에 근육이 불끈불끈 튀어나온 것으로 보아 무예가 만만치 않은 사람 같았다.
두 사람은 구양봉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구양봉의 차림새는 서역인을 꼭 닮았다. 중원에서 이곳저곳을 다니는 동안 사람들은 모두 그를 시답지 않은 눈길로 보곤 했다. 머리가 텁수룩하고 옷차림이 남루해서 거지 같은데다 그 지방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이르는 곳마다 푸대접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구양봉은 그런 것에 차차 습관이 되다 보니 별로 개의치 않게 되었다. 그는 돌아다니는 중에도 합마공만은 부지런히 연마하여 무공이
상당히 늘어 있는 상태였다.
두 사람은 구양봉을 얼핏 보더니 본지의 거지인 줄 알았는지 말을 걸었다.
"여보게 노형, 오관묘(五官廟)를 어떻게 찾아가야 하오?"
마침 구양봉은 며칠 동안 이 고장에서 머물면서 구경할 만한 곳은 거의 다 다녀 봤으므로 오관묘가 어디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두 분께선 서쪽으로 곧장 가십시오. 한참 가노라면 강이 하나 나타날 것인데 그 강만 건너면 바로 오관묘입니다."
그는 말을 마치자 혼자서 연거푸 술잔을 기울이면서 두 거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두 거지 중 하나가 곱지 않은 눈길로 구양봉을 쏘아보았다.
"이 서역 대사막의 자식들은 너무 무례합니다. 보십시오. 담로칠(譚老七)의 제자 놈들이 얼마나 오만한가를. 웃어른들을 보고도 인사할 줄도 모릅니다. 여기 잠깐 계십시오. 제가 버릇을 좀 가르쳐 주고 올 테니까요."
그가 일어나려 하자 다른 거지가 팔소매를 잡으면서 말렸다.
"가만두라구. 이곳은 우리 고장이 아니야. 담로칠도 제 일에 남들이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걸 좋아하는 성미가 아닌 것 같아. 그러니 제자 놈들도 저처럼 목덜미가 뻣뻣한 게지. 그건 그렇다치고, 버릇을 가르치려면 그 장본인을 찾아서 가르쳐야지, 부하들한테 성풀이할 건 뭔가?"
구양봉은 속으로 냉소를 금치 못했다.
'담로칠은 무슨 뚱딴지같은 담로칠? 이 어르신이 화가 나면 네 놈들이야말로 다 죽는 줄 알아라! 개방이 뭐 그리 대단해? 거지 발싸개만도 못한 놈들이!'
그는 어려서 형을 의지해 살아오면서 천덕꾸러기로 남의 수모를 많이 받았었는데 거지들로부터도 적잖게 업신여김을 당했다. 그랬던 터라 그들에 대한 감정이 좋을 수가 없었다.
'더러운 거지 놈들까지 거들먹거리다니. 한 번만 더 건드려 봐라. 따끔한 맛을 보여 줄 테니.'
그는 속으로 벼르면서 두 사람 쪽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조용히 술잔만 기울였다.
두 사람도 더는 구양봉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술을 마시면서 잡담을 나누다가 밤이 무척 깊어서야 은전을 탁자에 놓고 주막을 나섰다.
두 사람은 경공이 만만치 않은 것 같았다. 그들은 함께 축지법을 써서 나는 듯이 서쪽을 향해 달려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두사람은 오관묘 앞에 닿았다. 오관묘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문 앞에서는 숱한 거지들이 땅바닥에 모여 앉아 투전놀이를 하고 있었다. 몇 사람은 그 뒤에 서서 초롱불을 들고 놀음판을 비춰 주고 있었다. 몇 걸음 더 가 안을 들여다보니 마치 온 시가지의 거지들이 몽땅 모여든 듯 오관묘 안은 거지들로 꽉 차 있었다.
두 사람은 함께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문 앞의 거지들은 투전에 눈이 뻘개져서 그들을 알은체도 안 했다. 두 사람을 미행해 여기까지 쫓아온 구양봉은 문 앞에서 잠깐 망설였다. 그러나 안에서 무슨 일들을 꾸미고 있는지 궁금한 생각이 들어 마음을 다져 먹고 성큼 성큼 안으로 향했다. 구양봉이 태연하게 걸어 들어가자 파수꾼들은 자기들패거리겠거니 여기면서 그를 순순히 들여보냈다.
곧장 대청 안으로 들어가려던 구양봉은 수많은 거지들이 죄다 대청 밖에 주저앉아 마치 무슨 큰일의 결말을 기다리기나 하듯이 조용히 있는 모습을 보고 멈춰 섰다.
이때 거지 하나가 구양봉을 가로막았다.
"이보쇼, 노형은 장로시오?"
구양봉은 감히 장로라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아닙니다. 장로가 아닙니다."
그러자 그 거지는 시답지 않다는 눈길로 구양봉을 바라보았다.
"장로가 아니면서 무슨 자격으로 들어가려 하오? 나처럼 밖에 앉아 기다리기나 할 일이지."
그는 '흥!'하고 코방귀를 뀌더니 한마디 덧붙였다.
"안에서 한창 대사를 상의하고 있는데 어딜 함부로 들어가려는거야?"
구양봉은 대뜸 그가 입이 가벼운 놈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넌지시 물었다.
"노형, 난 요새 볼일이 좀 있어서 타향엘 다녀왔네. 그래서 오늘 여기서 뭣들 하는지를 모르고 있었지. 대관절 뭣들 하고 있나?"
그 거지는 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말해 주지. 우리 개방의 방주이신 소씨 거렁뱅이께서 세상을 떴네. 그래서 지금 저 안에서는 새 방주님을 뽑느라고 장로들만 모여서 대사를 상론하고 있는 중이야."
"새 방주님을 뽑는다면야 하나를 뽑겠구만. 아마 십중팔구는 홍칠이 그 어른이 뽑힐 거야."
구양봉이 대충 알은체를 하자 거지는 자기 허벅다리를 탁 쳤다.
"당연히 그래야지! 자네도 내막을 어지간히 알고는 있구만. 그런데 애석하게도 그 어른이 방주 노릇을 안 하겠다고 사양한다는구만 글쎄."
이 말에 구양봉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소씨 거렁뱅이가 죽었는데 홍칠이 방주 자리를 거절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 구양봉은 다시금 슬며시 물어 봤다.
"아무리 따져 봐두 우리 개방엔 홍칠공 외엔 방주 재목이 없네. 그런데 그 어른이 뭣 땜에 방주 자릴 마다하지?"
거지는 갑자기 말하기 곤란한 듯 어물거렸다.
"그 어른이 하시는 말씀이 방주 노릇을 하면 맘이 편치 못하다나 뭐라나……."
"방주 노릇을 하는데 왜 마음이 편칠 못하지?"
계속해서 묻자 거지는 구양봉을 바라보며 말을 할 듯 말 듯 주저했다. 구양봉은 이 거지가 내막을 알면서도 뭔가 두려워 입을 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죄를 썼다. 그는 갑자기 무릎을 탁 치면서 소리쳤다.
"그래 그래, 알 만하네. 그 어른이 방주 노릇을 마다하는 것도 일리가 있어."
거지는 눈이 둥그래져서 반문했다.
"자네가 그 내막을 알고 있다는 건가?"
구양봉은 계속 능청을 떨었다.
"그 어른이 이걸 좋아하니 마음이 편하지 못할 수도 있지."
구양봉이 먹는 시늉을 하자 거지가 빙그레 웃으면서 맞장구를 쳤다.
"옳네, 옳아. 보아하니 자낸 홍칠공과 아주 잘 아는 사이인 것 같네, 안 그래?"
구양봉은 그저 빙그레 웃기만 했다. 어찌 잘 아는 사이다 뿐이겠는가. 홍칠과 함께 황궁 안 깊숙이 들어가 원앙오진회라는 걸 훔쳐 먹은 적이 있을 정도인데 말이다.
구양봉이 은근히 말했다.
"내가 한번 가까이 가서 들어 보겠네. 그래도 되겠지?"
거지는 구양봉이 홍칠과 잘 아는 사이인 줄 알고 선선히 대답했다.
"자네 마음대로 하게, 대청문 앞에 앉아 있는 친구들은 모두 우리 거지방의 수제자들로 다들 무예가 뛰어난 사람들이네. 내가 우리 형제들한테 자릴 하나 내주라고 할 테니까 자넨 조용히 앉아서 듣기만 해야 하네. 절대 소리를 내선 안 돼. 들키기라도 하는 날이면 집법장로께서 자넬 용서 안 할 테니까."
구양봉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거지가 나지막이 누군가를 부르자 그 사람은 구양봉이 맨 앞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마련해 주었다. 구양봉은 자리에 앉아서 대청 안을 기웃기웃 들여다보았다.
대청 안에는 열두 명의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가장 복판에 앉은 이가 바로 홍칠이었다. 그는 머리를 숙인 채 마치 늙은 중이 좌선을 하듯이 입을 꾹 봉하고 목석처럼 앉아 있었다.
그중에는 몸집이 유달리 우람하고 나이가 젊은 사람도 있었다. 그가 홍칠을 재촉했다.
"칠공께서는 생각을 다 하셨소? 다 하셨다면 빨리 예를 올려야 하잖겠소?"
그러자 홍칠이 길게 한숨을 내쉬곤 입을 열었다.
"이미 여러분한테 말을 했지 않나? 그 노릇을 하는 게 맘이 편치 않다고. 난 언제나 하늘에서 마음대로 떠도는 구름처럼, 들판에서 제멋대로 노니는 학처럼 살아왔네. 그런 내가 어찌 방주 노릇을 할 수 있겠는가? 여러분들이 이러는 거 난 정말 달갑지 않네."
그러자 다른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노유각, 자넨 개방에서 제일 젊은 장로네. 자네는 어딘지 생각이 모자라는 것 같아. 칠공께서 마다하시는 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그러시는 게 아니겠나?"
그는 잠시 말을 끊더니 이번에는 홍칠을 향해 말했다.
"그건 그렇고, 칠공에게 묻고 싶소. 칠공이 보기엔 누가 개방의 방주 노릇을 해야 합당하겠소?"
이 질문에 홍칠은 대답을 못 했다. 그는 좌우를 두루 살펴보았다. 한참 말없이 하나하나 살펴보던 그는 이 자리에 앉은 사람들 중에는 적임자가 하나도 없노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나이가 지긋한 장로가 입을 열었다.
"이 팽충(彭沖)의 생각으로는 칠공이 중임을 짊어져야 하오. 소 방주님께서 떠나가셨고 우리 개방엔 할 일이 너무나도 많소. 칠공이 마다하면 우린 어떻게 하겠소? 소 방주님께서 임종시에 칠공한테 누가 우리 개방의 발주 노릇을 해야 할지 물었지요? 그때 칠공은 대답을 못하지 않았소?"
소씨 거렁뱅이의 말이 나오자 홍칠은 당장 침울해지며 비애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랬소. 사부님이 물으시는데 속에 없는 빈말을 할 수는 없었소."
팽충이 즉시 덧붙였다.
"소 방주님께서는 칠공더러 꼭 방주 자리를 이어받으라고 강요하지는 않았지요. 그분은 그저 미소를 지으시면서 그 개 쫓는 타구봉을 넘겨주셨을 따름이오. 내 말이 틀리오?"
"틀림이 없소."
"그럼 됐지 않소! 칠공이 타구봉을 받아 쥐자 소 방주님께선 비로소 숨을 거두셨소. 내 말이 틀리오?"
"틀림이 없소."
팽 장로와 다른 장로들이 일제히 떠들어댔다.
"칠공은 타구봉을 넘겨받고도 왜 방주 자리는 넘겨받으시려 하지 않는 거요?"
"칠공은 소 방주님 앞에서는 대답을 해 놓고 왜 싫다는 거요? 화산에서 벌어질 무예 시합이 겁나서입니까? 왕중양이 무서워 그렇소? 황약사와 단지흥이 무서워 그렇소?"
여러 사람들이 중구난방으로 한꺼번에 떠들어댔다. 홍칠은 어이없는 듯 잠자코 듣고만 있다가 소리가 어느 정도 가라앉자 냉소하며 말했다.
"내가 그들을 무서워한다고? 5년 후 화산에서 그들과 싸우는 걸 보시오. 사부님께서 내게 말씀하신 적이 있소. 강룡십팔장에는 일부 허점이 있다고 말이오. 나더러 그 허점을 보완하라고 신신당부하셨소. 난 5년 동안 조용히 몸을 숨기고 무예를 연마할 작정이오. 타구봉법과 강룡십팔장법을 몸에 잘 익히기만 하면 그 어떤 적수라도 거꾸러뜨릴 수 있소. 난 천하 무림의 일인자가 되어 화산
꼭대기에서 우리 개방의 위풍을 떨칠 작정이오."
장로들은 일제히 환성을 질렸다. 홍칠에게 이처럼 높은 뜻이 있는데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팽 장로가 입을 열었다.
"칠공이 천하 무림의 일인자가 된다면 우리 개방의 더 없는 행운입니다. 하지만 방주 자리를 맡아도 화산의 무예 시합에는 지장이 없을 줄 아오. 방의 사무는 우리 형제들이 어련히 다 맡아 할 테니까 칠공은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하십시오. 절대 방의 시시껄렁한 일로 시끄럽게 굴지 않을 테니까요. 이래도 안 되겠소?"
홍칠도 더는 마다할 수가 없었다.
"좋소, 그럼 내가 방주 노릇을 하겠소. 하지만 여러분들이 문하의 제자들한테 알리시오. 나를 시끄럽게 쫓아다니지들 말라고 말이오."
장로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리구 난 여러분들의 금의파니 오의파니 하는 시비 장단엔 절대 춤을 추지 않겠소. 비단옷을 입든 넝마를 주워 입든 내 마음 내키는 대로 ,할 거요. 그래도 괜찮겠소?"
홍칠이 어떤 조건을 내놓든 장로들은 이구동성으로 찬성했다. 다들 홍칠이 방주 노릇을 하겠다고 승낙한 것만도 고마운데 이런 것쯤이야 양보를 못 하겠느냐는 식의 태도였다.
한쪽에 앉아 장로들을 하나하나 훑어보던 구양봉은 뜻밖에 낯익은 얼굴을 둘이나 발견했다. 이 둘은 형제 간으로 모두 구양봉의 사형들이었다. 그들은 제갈정, 속문성, 석초수와 함께 구양봉을 변경에서 북국으로 끌고 갔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들과 얘기해본 적이 없어 그들의 성과 이름은 모르고 지냈다. 그런데 이 시각 이 두 형제가 홍칠과 마찬가지로 개방 장로의 신분으로 대청에 앉
아 있는 것을 발견한 구양봉은 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구양봉은 이 형제가 언제 개방에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개방에 가입한 지 오래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개방에 가입한 지 오래지 않다면 어찌 개방의 열두 장로 속에 끼일 수 있겠는가.
'좋다, 네 놈들이 몽땅 여기에 있구나. 오늘은 네 놈들 제삿날인 줄 알아라. 네 놈들을 잡아죽여 사부님의 원수를 갚겠다!'
구양봉의 가슴속에는 분노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그의 핏속에는 사부의 피가 흐르고 있고 그의 뛰어난 무예는 사부가 가르쳐 준 것이다. 때문에 그는 언제나 사부를 은인으로 생각해 오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이 두 사형이란 자가 점잖게 앉아 있는 것을 보니 사부가 임종시에 이 두 놈을 저주하던 모습이 자꾸만 뇌리에 떠올랐다.
'네 놈들을 꼭 죽여 버리고 말 테다!'
개방의 장로회의는 더는 길게 끌 것 같지 않았다. 한 장로가 일어나더니 거지 무리를 향해 홍칠이 새 방주가 되었다고 선포하였다. 열두 장로가 다 모였는지라 곧장 방주 취임식에 대한 논의로 들어갔다.
거지들은 일제히 환호했다. 홍칠은 다른 장로들에 비해 무예가 월등했을 뿐 아니라 사람 됨됨이도 솔직했기 때문에 평소에 거지무리의 환심을 사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악인들을 죽일 때는 가차없이 죽였고 개방을 위해 많은 일을 했으며 여러 차례 큰 공을 세웠다. 거지들은 자기들이 바라던 대로 홍칠이 새 방주가 되자 모두들 흡족해 했다.
그 자리에서 개방 방주의 등위대전(登位大典)이 거행되었다.
홍칠이 한복판에 나가 앉았다. 그는 엄숙한 낯으로 똑바로 앉아서 거지들을 내려다보았다. 홍칠을 중심으로 열한 명의 장로가 차례로 앉았다. 모두 정돈하여 앉자 집법장로인 팽 장로가 사회를 보았다.
"개방의 새 방주이신 홍칠공께서 취임하셨습니다. 방내의 제자들이 나와서 축하를 드리겠습니다!"
팽 장로의 말이 떨어지자 방내의 제자들이 줄줄이 앞으로 나가더니 홍칠의 몸에다 침을 뱉기 시작했다. 한 사람이 한 번씩 뱉었지만 삽시에 홍칠의 온몸은 침투성이가 되어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이 광경을 바라보던 구양봉은 기가 막혔다.
'보아하니 거지방 방주 노릇 하기도 쉽지가 않구나. 남들이 참아 내지 못하는 것을 참아 내야 하고, 남들이 견뎌 내지 못하는 고초를 견뎌 내야 하는구나. 저렇듯 침을 뱉는 것은 수천 수만의 침벼락을 무릅쓰고 나서야 비로소 방주 노릇을 할 수 있다는 뜻인 모양이다.'
이때 방금 자기를 알선하여 앞자리에 앉혀 주었던 거지가 말을 건넸다.
"여보게, 자네도 방주님과 아주 잘 아는 사이인 것 같은데 나가서 침을 뱉으라구."
거지는 다짜고짜 구양봉을 잡아 끌고 앞으로 나가려고 했다. 구양봉은 속으로 당황했으나 자기도 개방의 제자인 것처럼 가장한다면 홍칠이 알아볼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백주에 자세히 뜯어보아도 누군지 잘 모를 텐데 황차 밤인데야.
구양봉은 마음을 다잡고 앞에 나서서 문안을 올렸다.
"방주님, 개방의 제자 구양평이 방주님께서 만사 여의하시길 바라옵나이다!"
홍칠은 다른 제자들의 문안을 받을 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구양봉이 머리를 숙이고 돌아서서 물러 나오려는 순간이었다.
"게 섰거라!"
홍칠의 목소리가 등뒤에서 들려 왔다.
구양봉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가슴은 마치 쌍방망이질을 하는 것처럼 두근거렸다.
'홍칠이 날 알아본 게로구나. 내 모습이 많이 변했을 텐데 어떻게 알아낼 수 있었을까? 만일 내가 개방의 제자가 아니라는 게 발각되면 홍칠의 한마디 영에 거지들이 벌떼처럼 달려들 텐데 큰일이구나!'
그는 여러모로 생각을 굴렸으나 묘안이 떠오르지 않아 가만히 선 채 홍칠의 다음 말만 기다렸다.
"넌 누구냐?"
"소인은 본방의 제자올시다. 이 고장에 살고 있습니다."
구양봉이 대답하니 홍칠은 다시 묻지 않았지만 한편에 서 있던 집법장로가 구양봉이 당황해 하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넌 누가 데려온 자냐 ? 누굴 따라왔느냐?"
구양봉은 누구를 따라온 것이 아니었으므로 이름을 댈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두 사형을 가리키며 큰소리로 대답했다.
"소인은 이 두 분을 따라왔습니다."
홍칠은 구양봉을 바라볼 뿐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다. 구양봉은 두 사람을 노려보면서 천천히 다가서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난 구양봉이오."
목소리는 아주 낮았으나 두 사람의 귀에는 마치 천둥 소리처럼 크게 울렸다. 두 사람은 너무나 뜻밖의 상황에 혀가 굳어 버렸다. 한참 후에야 두 사람 중의 하나가 홍칠을 향해 말했다.
"방주님, 이 사람은 우리 개방의 제자가 맞습니다. 저희들 두 형제가 데려왔습니다. 방내의 예법을 잘 모르고 있으니 이후에 저희들이 잘 가르치겠습니다."
이 두 형제는 구양봉이 왜 이곳에 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구양봉이 석초수를 죽여 버렸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터라 구양봉이 자기들도 죽일까 봐 겁이 나서 그를 비호해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홍칠은 거지떼를 둘러보면서 빙그레 웃었다.
"본방에서 모임을 가졌으나 별다른 문제는 생기지 않았소. 기실 이 고장은 무슨 요충지도 아니니까 문제가 일어날 것도 없겠지만. 다들 푹 쉬었다가 각자 일을 보도록 하시오."
그가 말을 마치자 거지들은 일제히 소리쳐 대답하고는 허리 굽혀 인사를 한 뒤 흩어지기 시작했다.
두 형제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들은 구양봉을 흘낏거리며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는 용맹하기 이를 데 없는 석초수마저 죽여 버린 무서운 인물이 아니던가. 한편 그들은 자기들이 유운장의 노독물 문하에 있었다는 사실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질 까 봐 여간 걱정이 아니었다. 이 일이 폭로되면 그들의 명성이 땅에 떨어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던 것이다.
구양봉이 재촉했다.
"머뭇거리지 말고 날 따라오게."
두 사람은 말없이 구양봉을 따라 오관묘를 빠져 나와 널따란 공지에 이르렀다.
구양봉은 걸음을 멈추더니 그들을 쏘아보았다.
"여기서 네 놈들을 만나게 되다니 여간 반갑지 않구나. 사부님께서 임종하실 때 난 굳게 맹세했지. 네 놈들을 몽땅 잡아죽이겠다고. 오늘에야 비로소 그 약속을 지키게 되었구나."
두 형제는 말없이 서로 눈짓을 하더니 갑자기 벼락 같은 소리를 지르면서 동시에 구양봉을 덮쳤다.
그들의 무예는 석초수보다 강하면 강했지 약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선수를 쓰기는 했지만 아주 조심스러웠다. 둘 중 하나는 공격 하고 하나는 방어하면서 진퇴를 묘하게 조절했다. 구양봉은 오랫동안 허점을 노렸으나 그들의 일공일수(一功一守), 일진일퇴(一進一退)는 극히 규칙적이고 주도면밀했다. 구양봉은 두 사람과 20합이나 싸웠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
구양봉은 몹시 화가 났다.
'사부님의 60년 공력을 몸에 익힌데다 세상에 둘도 없는 합마공을 가진 난데 네 놈들 따위한테 질 성싶으냐?'
그는 갑자기 몸을 낮추어 두꺼비처럼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더니 꾸르륵꾸르륵 괴상야릇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모두 노독물 문하의 제자인지라 이 소리를 듣고는 대경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싸움을 시작할 때만 해도 그들은 요행을 바랐었다. 이 싸움에서 자기들이 이기면 구양봉을 죽여 심복지환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이요, 진다 해도 이곳 개방의 세력이 크고 사람들이 많으니 구양봉에게 맞아죽기야 하겠느냐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구양봉이 합마공을 쓸 기미가 보이자 그들은 깜짝 놀랐다
. 그들은 당황하여 도망치려고 했다. 그러나 구양봉은 틈을 주지 않고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면서 두 사람을 향해 양손바닥을 동시에 내밀었다.
두 사람은 저항 한번 못해 보고 그대로 땅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구양봉이 내려다보니 두 형제는 이미 숨이 끊어져 늘어져 있었다. 그는 다가가서 중구법(重手法)으로 두 녀석의 머리를 한 번씩 내리쳤다. 삽시에 두 녀석의 두개골이 으깨지고 칠규(七窺)에선 시뻘건 피가 콸콸 흘러 나왔다. 구양봉은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사실 결전에 임하자 구양봉 자신도 긴장했었다. 그는 자기의 무공이 이처럼 놀라울 정도로 발전했음을 처음으로 확인한 것이다. 자기의 타격 한 번에 두 녀석이 당장 쓰러져 숨을 거두자 그는 너무나도 놀랍고 기뻤다. 그는 예전과는 달리 사람을 죽인 데 대한 자책감 같은 것은 전혀 느끼지 않고 처참한 모습으로 쓰러진 두 시체를 태연하게 내려다보았다.
잠시 후 그가 막 자리를 뜨려는데 두런대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 왔다.
"아까 그 낮선 자식이 괴상한 술법이라도 가지고 있는 모양이야. 그 자식이 부르니까 두 형제가 즉시 따라 나섰어. 도대체 뭐하는 놈일까? 두 형제의 하인이라고 했지만 그런 것 같지 않아. 방주님께선 아마 이상한 기미를 느끼신 것 같아. 안 그러면 왜 우리더러 나가서 찾아보라고 하셨겠어 ?"
말소리가 점점 가까워 오자 구양봉은 급히 몸을 감추었다.
두 사람은 공지에서 시체 둘을 발견하자 놀라서 소리를 질러 댔다. 한참 소리를 질러 대던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뭔가를 의논하더니 허겁지겁 그들의 방주에게로 달려갔다. 개방의 두 장로가 비명횡사했으니 보통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제26장 돌아온 구양봉
구양봉은 도망치듯 그곳을 떠나 대 사막으로 향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집은 몰라볼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마치 새 주인이 신접살림을 꾸리느라고 깨끗하게 가꿔 놓은 것 같았다. 제일 눈을 끄는 것은 대청이었다. 꽃병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꽂혀 있고 한쪽 구석엔 자그마한 책장을 새로 놓았는데 책장 안에는 책들이 적지 않게 꽂혀 있었다. 다가서서 살펴보니 당대의 사람들이 남긴 글과 시들을 묶은 책들 여러 권과 불경들이었다. 책들이 가지
런히 꽂혀 있지 않고 들쭉날쭉한 것으로 보아 누군가가 늘 뽑아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청 안을 둘러보니 특별히 더 달라지진 않았으나 전에 없이 정갈하고 아늑한 분위기가 흘러 넘치고 있었다.
구양봉이 대청 안을 기웃거리고 있는데 안방에서 계집애 하나가 걸어 나왔다. 구양봉은 첫눈에 가시를 알아보았다. 가시가 빙그레 웃으면서 물었다.
"손님은 누구세요? 우리 집 도련님을 찾아오셨나요?"
구양봉이 큰소리로 말했다.
"가시야, 날 못 알아보겠니 ? 난 이 집의 둘째 도련님이다. 둘째 도련님이란 말이야."
가시는 소스라쳐 놀랐다. 그녀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구양봉의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비록 머리는 봉두난발이고 수염이 텁수룩했지만 정기 도는 두 눈에서 그의 옛모습을 어렴풋이나마 찾을 수 있었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안방을 향해 소리쳤다.
"빨리 나오세요, 빨리요. 둘째 도련님…… 둘째 도련님이 오셨어요!"
잠시 후 몇 사람이 우르르 달려 나왔다. 다름아닌 형 구양적과 모용쟁, 그리고 구씨 할멈이었다.
형은 구양봉을 보자 텁석 두 손을 잡았다.
"네가 살아 있다니! 이게 꿈이냐 생시냐? 난 줄곧 네가 죽은 줄로만 ……."
구양적은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죽다니요, 내가 왜 죽어요?"
구양적은 여전히 기쁨과 놀라움이 섞인 눈길로 구양봉을 보고 또 보았다.
"살아 있으니 됐다. 살아 있으니 됐어!"
구양적은 이윽고 고개를 돌리면서 말했다.
"당신도 인사를 해야지!"
형의 등뒤에 서 있는 여인은 바로 모용 낭자였다. 모용쟁과 눈길이 마주치자 구양봉은 그제야 자기가 부랴부랴 대사막에 돌아온 까닭을 상기했다. 모용쟁의 모습은 변해 있었다. 전보다 더욱 아름답고 얌전해진 것 같았다. 하지만 무슨 영문인지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해 보였다. 그녀는 구양봉을 보고 가볍게 미소만 지어 보일 뿐 말이 없었다. 구양적은 너무나 기쁜 나머지 두서없이 떠들어댔
다.
"돌아왔으니 잘됐다. 난 네가 죽은 줄로만 알았어. 난 사부님과 함께 북국에 가서 너를 애타게 찾았지. 유운장은 폐허가 됐더라구. 그래서 수소문을 해 보니, 모두들 유운장에는 살아 남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들 하지 않겠니? 아무리 찾아도 종적이 묘연해서 난 얼마나 괴로웠는지 모른다. 그래서 네가 죽은 줄로만 알았지. 그런데 이렇게 살아 돌아왔으니, 실로 하늘이 보살폈구나. 우리 구
양 가문의 행운이랄밖에……."
그는 상봉의 기쁨에 들떠 어쩔 줄을 몰라했다.
이날 밤, 구양봉은 홀로 방안에 누워 이 몇 년 동안의 변화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상전벽해라더니, 얼마 안 되는 사이에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그와 모용쟁이 대사막에서 서로 아이들처럼 다투던 때가 어제 일처럼 생생한데, 지금은 모용쟁이 형수가 되어 있지 않은가? 그리고 아무런 무예도 익히지 못해 일개 아녀자한테까지 업신여김을 당하던 그가 절세의 신공인 합마공을 배워 무
림의 둘도 없는 고수가 되었으니, 생각하면 할수록 묘한 기분이었다. 그는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밤 깊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문밖에서 조심스러운 기척 소리가 들려 왔다.
"도련님, 주무세요?"
모용쟁의 목소리였다. 그는 당황했다. 이 깊은 밤에 왜 왔을까?
"형수님이시군요. 아직 자지 않고 있습니다."
모용쟁은 살그머니 문을 열고 방에 들어서더니 탁자에 마주앉았다. 그녀는 마치 심심해서 놀러 오기나 한 것처럼 책을 뒤적이다가는 손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한참 후 모용쟁이 입을 열었다.
"도련님, 유운장에서 대관절 무얼 했어요?"
구양봉이 점쟁이에게 이끌려 유운장에 간 후 보고, 듣고, 겪은 갖가지 일들은 그야말로 보통 사람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구양봉은 그러한 이야기들을 가슴속에 쌓아 둔 채 누구한테도 들려준 적이 없었다. 모용쟁의 질문에 구양봉은 그간의 일들을 낱낱이 털어놓기 시작했다. 모용쟁은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에 정신이 팔렸다.
이때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봉아, 잠이 들었느냐?"
순간 두 사람은 말을 뚝 끊고 낯빛이 굳어졌다. 너무나 갑작스런 일이라 구양봉은 몹시 당황했고, 모용쟁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시동생과 형수가 야밤 삼경까지 호젓한 방안에 마주앉아 한담을 나누고 있는 것을 보면 누군들 의심하지 않으랴.
구양봉은 급히 대답했다.
"형님, 전 아직 자지 않고 있습니다. 형수님과 한창 한담을 하고 있는 중인데 마침 잘 오셨습니다."
구양적이 방으로 들어섰다.
그는 모용쟁을 보고 흠칫 놀라는 눈치였다.
"낮에 네가 겪은 일들을 자세히 들을 짬이 없어서 밤에 이렇게 찾아왔다."
구양적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건네며 의자에 앉았다.
모용쟁은 슬그머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럼 형제분끼리 얘기 나누세요. 전 졸려서 가 봐야겠어요."
그녀는 두 형제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모용쟁이 자리를 뜨자 마주앉은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구양봉은 그 동안 자기가 겪은 일들을 이야기하고 싶었으나 방금 모용쟁을 앞에 두고 한바탕 장광설을 늘어놓은 터라 다시 되풀이할 흥이 나지 않았다. 그는 떠듬떠듬 몇 마디를 하다가 결국 입을 다물어 버렸다. 구양적은 자기와 모용쟁의 혼사를 대강 이야기했다. 하지만 스승과 자기 사이의 일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역시 자기의 속은 드러내지 않고 담담하게 몇 마
디만 하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두 형제는 서로 생사를 모르다가 기쁘게 상봉을 했지만 정작 무릎을 대고 마주 앉으니 할말이 없었다. 형제간의 사이가 전과는 달리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밤은 깊어 칠흑같이 캄캄했다. 구양적은 모용쟁이 깊이 잠든 틈을 타서 슬그머니 집에서 빠져 나왔다. 그는 나는 듯이 산꼭대기의 거인석을 향해 달려갔다. 바위 앞에 이르자 그는 두 손으로 바위틈을 더듬어 몸을 날려 얼음 동굴 속으로 뛰어내렸다. 그는 횃불도 켜지 않고 눈어림으로 동굴 안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갔다. 그런데 전과는 달리 얼음 동굴에 들어서자마자 그의 가슴이 후둑후
둑 뛰었다. 그는 큰소리로 외쳤다.
"사부님, 사부님!"
그러나 그의 외침은 빈 메아리가 되어 돌아올 뿐 대답이 없었다. 그는 마음이 산란하여 천년 묵은 현빙을 더듬었다. 그는 몸을 훌쩍 날려 현빙 꼭대기로 올라갔다.
그는 두 손으로 얼음을 어루만지면서 다시금 백면라살을 불러 보았으나 역시 대답이 없었다. 그는 가슴이 섬뜩했다. 백면라살이 자기를 버리고 얼음 동굴을 떠나 타향으로 가 버린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는 쓰라린 마음으로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중얼거렸다.
"사부님, 어딜 가셨습니까? 왜 떠나시면서 알리지도 않으셨습니까?"
그가 절망한 나머지 두 손을 맥없이 늘어뜨리는 순간 부드러운 것이 손끝에 닿았다. 그것은 사부의 옷자락이었다. 그 옷자락으로부터 더듬어 나가니 이번엔 사람의 몸이 만져졌다. 구양적은 다급히 백면라살을 불렀으나 역시 대답이 없었다. 자세히 더듬어 보니 그녀는 이미 죽은 지 오래인 것 같았다. 그는 백면라살의 머리를 품에 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한참 통곡을 하노라니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이 차디찬 얼음덩이 위에 10여 년이나 앉아 있었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 갑자기 숨을 거둔 까닭은 무엇인가?
'사부님께선 절대 이렇게 돌아가실 리가 없어…….'
구양적은 얼른 맥을 짚어 보았다. 역시 뛰지 않았다. 급히 가슴을 만져 보니 다행히 가슴은 그다지 차지 않았다. 그는 부랴부랴 그녀의 옷을 벗겨 던지고는 알몸을 끌어안고 현빙에서 뛰어내렸다.
구양적은 백면라살을 으스러지게 부둥켜안았다. 실 한 오라기 걸치지 않은 두 사람의 알몸이 꼭 밀착되었다. 구양적은 그녀를 자기의 무릎 위에 앉힌 후 두 손을 마주잡고 수소음심경맥(手少陰心經脈)으로부터 천천히 그녀의 몸에 내력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향을 세 대쯤 태울 시간이 지나자 가느다란 신음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몸이 가볍게 떨렸다. 구양적이 다시 내력을 주입하자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는 소스라쳐 놀라면서 몸을 떨었다. 구양적이 와락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자신의 알몸을 내려다보며 기운 없이 물었다.
"적아, 이게 꿈이냐 생시냐?"
"사부님, 어찌 된 영문입니까?"
구양적이 흐느끼면서 반문했다.
그녀는 구양적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이만한 삶을 누린다면 더 바랄 게 무엇이겠는가?
구양적은 백면라살을 품에 안고 더는 물으려 하지 않았다. 구양적은 새삼 백면라살의 몸매에 강렬한 매혹을 느꼈다.
그는 애써 감정을 숨기며 물었다.
"사부님, 지금은 좀 어떠십니까?"
백면라살은 대답 대신 자신의 머리칼을 한줌 쥐어 구양적의 얼굴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적아, 네 얼굴이 몹시 야위었구나, 장가 든 지 얼마 안 되니 벌써 부부싸움을 한 건 아닐 테고……."
구양적은 고소를 금치 못했다. 스승을 품에 안고 있는 이상 그의 마음속에는 모용쟁의 존재가 파고들 여지가 없었다.
"적아, 너희들이 첫날밤에 누울 자리를 펼 때 내 가슴속에서는 피가 흘렀다. 내가 노래를 할 테니 들어 보아라. 내 목청이 얼마나 고운지 들어 보아라."
첫날밤의 이야기를 꺼내자 구양적은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 밤의 한스러운 심정을 누구한테 하소연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백면라살은 그의 심정은 아랑곳없이 그의 품에 안겨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양춘가절 춘삼월에 보름달 교교한데
화촉동방 신랑신부 원앙금침 베었구나
새색시의 고운 얼굴 도화같이 탐스럽고
새신랑의 장한 얼굴 대추같이 붉었구나
개미허리 잔뜩 안고 두 얼굴을 서로 대고
엎치락뒤치락 한창 장난하노라니
삼단 같은 색시 머리 침대가에 드리웠네
…….
구양적은 슬며시 손을 뻗쳐 스승의 입을 막았다.
백면라살은 그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쥐며 조용히 말하기 시작했다.
"적아, 난 어렸을 때 남의 신방을 엿보러 다니길 상당히 좋아했다. 때로는 신랑 신부의 침대 밑에 기어 들어가 엿들을 정도였지. 첫날밤의 신랑 신부들이란 성급한 법이라 침대 밑을 자세히 살펴볼 경황들이 없거든. 그런데 난 나이가 너무 어려서 신랑 신부가 신방에 들어 서기도 전에 잠들어 버리곤 했지. 신랑신부가 정사를 하느라고 엎치락뒤치락, 침대가 삐걱삐걱 요란스레 소리를 내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나서는 무서워 울음보를 터뜨리곤 했어. 한 번은 신랑 신부가 어찌나 마음이 고운지 나를 침대 밑에서 끄집어내서는 자기들 사이에 눕히는 게 아니겠니? 난 그날 밤 신방에서 신랑 신부 사이에 누워 달콤하게 잠을 잤지. 지금 생각해 보니 내 팔자가 그런 것 같다. 남의 신혼이나 방해하고 일생 동안 고독하게……."
그녀의 목소리에는 외로움이 잔뜩 묻어 있었다.
"사부님께서 이 세상에 미련이 없으시다면 저도 함께 죽겠습니다!"
구양적이 괴로운 나머지 큰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건 안 돼. 적아 너한텐 집과 아내가 있지 않느냐? 네 아내를 버린다는 게 말이 되니? 그리고 넌 구양씨 가문의 대를 이을 몸이 아니냐? "
구양적은 갑자기 스승을 품에서 내려놓으며 말했다.
"사부님, 왜 나를 멀리하려 하십니까?"
백면라살은 담담히 웃으면서 대꾸했다.
"적아, 난 남을 속여도 보았고 남을 죽여도 보았지만 너를 멀리 한 적은 없다……."
"아닙니다. 사부님께선 절 멀리하셨습니다! 모용쟁에게 장가 들면 구양씨 가문에 후대가 생기게 될 거라고 하시면서 장가를 들라고 권한 사람이 사부님이 아니고 누굽니까? 내가 아내를 거느릴 수 있는 처집니까? 사부님께선 분명히 저를 기만했습니다. 왜 나를 속였습니까?"
구양적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는 모용쟁과 결혼은 했으나 말 못할 고충이 있었다. 그 일을 어떻게 입 밖에 낼 수 있겠는가? 백면라살과 .함께 이 천년 묵은 차디찬 얼음바위에 앉아 무예를 배우게 되면서부터 그는 점차 음(陰)이 성하여 여인과의 교합이 불가능한 몸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완전히 불구가 된 줄은 생각지 못했다. 백면라살도 그가 모용 낭자와 결혼만 하면 구양
씨 가문에는 후대가 생길 수 있고 모용 낭자도 구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결혼한 후 그와 모용쟁은 둘 다 끝없는 고통의 심연 속으로 떨어졌을 뿐이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그는 애초에 결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일을 생각하니 구양적은 화가 났다. 그가 갑자기 백면라살의 어깨를 잡아 쥐고 힘껏 흔들어 댔다.
"사부님은 절 속였습니다! 모용쟁과 결혼시켜 사부님을 잊게 하려고 절 속인 거예요! 전 죽어 버리겠습니다. 사부님께선 한공(寒功)을 지니고 계셔서 얼음 위에서도 절대 탈이 없다는 걸 전 압니다. 그런데 사부님께서는 스스로 경혈을 막아 목숨을 끊으려 하셨지요? 전 사부님께서 그렇게 돌아가시는 걸 그냥 지켜 보고 있지만은 않을 겁니다!"
백면라살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난 죽어야만 해. 명전과 함께 죽지도 못하고 너와 함께 살지도 못할 바엔 내가 무슨 낙으로 살겠니? 적아, 난 너를 속이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모용 낭자와 성혼하여 너희들이 재미나게 산다면 아이가 없다고 한들 그게 무슨 큰일이냐? 난 그저 너와 모용낭자를 일단 성혼시킨 다음 기회를 보다가 투량환주지계(愉梁換柱之計)를 써서 구양씨 가문에 아들이 생기게 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
던 것뿐이다. 적아, 구양씨 가문에 후대가 없게 만든 건 내 죄다, 내 죄야!"
구양적은 정이 많은 사람이라 백면라살에게 정을 준 후로는 완전히 그녀에게 빠지고 말았다. 게다가 어려서 일찍이 부모를 잃고 그녀의 보살핌과 사랑을 받아 온 그에게 백면라살은 생명과도 같았다.
"사부님, 사부님께서 자살을 하시면 저도 함께 죽겠습니다! 이제 우리 구양씨 가문에 후대 걱정은 안 해도 됩니다. 저의 아우 구양봉이 북국에서 돌아왔으니까요."
이 말에 백면라살의 얼굴에 희색이 떠올랐다.
"그게 정말이냐? 날 속이는 건 아니겠지?"
구양적은 구양봉이 북국에 다녀온 이야기를 대충 백면라살에게 들려주었다.
"적아, 그렇다면 일이 쉽게 풀릴 듯하구나. 그럼 넌 먼저 돌아가거라. 내일 내가 찾아가서 네 아우를 만나 보겠다."
백면라살의 말에 구양적은 생각했다.
'사부님께서 자살하려고 한 것은 다름아니라 내가 결혼한 후 혼자서 얼음 동굴 속에서 고독에 시달렸기 때문이야. 오늘 밤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사부님과 함께 지낼 테다.'
구양적이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자 백면라살은 더없이 기뻐했다. 두 사람은 모처럼 서로를 부둥켜안고 끝없이 정담을 나누었다.
구양봉이 깊은 잠에 곯아떨어져 있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시오?"
그가 잠에 취한 목소리로 물었다.
"도련님, 저예요."
모용쟁이었다. 구양봉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 앉았다. 왜 또 왔을까? 그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조심스레 대답했다.
"형수님, 볼일이 있으시면 내일 뵙지요."
그러자 처량한 한숨 소리가 들려 왔다. 한참 후에 침묵을 깨며 모용쟁이 다시 입을 열었다.
"도련님, 혹시 형님께서 이 방에 안 계신지요?"
구양봉은 의아했다.
"형님께서 왜 여기 계시겠습니까? 벌써 안방으로 건너갔는데요."
"안방에 건너오시긴 했어요. 하지만 내가 잠든 사이에 어디론가 빠져 나갔어요. ……아마도 그 얼음 동굴에 있는 사부님을 찾아간 모양이군요."
모용쟁의 말에 구양봉은 할말이 없었다. 워낙 눈치가 빠른 그는 형과 형의 사부 사이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모용쟁의 음성이 다시 들려 왔다.
"도련님, 수고스러우시겠지만 저와 함께 그 얼음 동굴에 가 봐 주실 수 없으세요?"
구양봉은 실로 난처했다.
"형수님, 무서우시면 제가 옷을 입는 동안 가시를 깨우세요. 곧 나갈 테니 그때 얘기해 보죠."
구양봉은 부랴부랴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주워 입고는 방을 나섰다. 가시까지 세 사람이 대청에 마주앉았다.
가시는 잠이 덜 깬 듯 두 눈을 부비고 있었다. 야밤에 사람을 깨워 촛불을 밝히고 대청에 나와 앉으라고 하니 이상한 눈치였다.
구양봉은 근심스런 눈으로 모용쟁을 바라보았다. 그녀도 형과 백면라살 사이를 알고 있을지 염려되었다. 그는 의도적으로 말머리를 다른 데로 돌리면서 모용쟁이 두 사람 얘기를 끄집어내지 못하게 하려고 애썼다. 만일 모용쟁이 두 사람에 관하여 물어 온다면 대답하기가 무척 난처하기 때문이었다.
이때 갑자기 소름이 끼치는 괴상야릇한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이제 엄연히 무학의 대가인 구양봉은 벌써부터 문밖에서 나는 버스럭거리는 소리에 잔뜩 귀를 세우고 있던 참이었다. 그는 괴상한 웃음소리가 들리자 대뜸 백타산장의 난쟁이 임일천이 찾아왔음을 알았다.
아니나다를까, 난쟁이가 창문에 달린 동그란 창문 고리를 쥐고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그는 창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면서 히죽거렸다.
"모용 낭자, 그새 안녕하셨소? 듣자니 낭자께선 대사막 무림의 제일인자인 구양적과 결혼했다더군. 재미가 어떠시오? 시집가기 전엔 그야말로 티끌 하나 묻지 않은 백옥과도 같았지. 하지만 시집을 갔으니 한물갔어. 깨끗한 백옥이 더럽혀졌지 뭐야. 너무나도 아쉬워, 아쉽다구."
난쟁이는 정말 아쉬워했다. 그는 모용쟁이 결혼한 데 대해 몹시 가슴 아파 하면서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모용 낭자는 총명하고, 얼굴은 왕색(王嗇)이나 서시(西施)와 비길 수 있고, 재주는 설도(薛濤)와 어깨를 겨를 수 있어. 그런데 왜 사내 놈팽이한테 시집은 가? 사내 놈들이란 심보가 제대로 박힌 놈은 약에 쓰려야 쓸 놈이 없어. 죄다 망나니들이지. 사내 놈한테 시집을 가 보니 뭐가 좋은가? 깨끗한 백옥에 티끌이 묻었어. 정말 아까운 일이라니까."
순간 모용쟁은 백타산장에 억류당해 있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구양봉은 불끈 화가 솟구쳤다. 그는 이제 시구나 읊조리고 책장이나 뒤적이던 과거의 구양봉이 아니었다.
'마침 잘 왔다. 안 그래도 손이 근질근질하던 참인데 말이야. 네 스스로 자초한 일이니 날 탓하지는 말아라.'
그는 짐짓 생각을 숨기고 차가운 눈길로 난쟁이가 노는 꼬락서니를 지켜 했다.
모용쟁이 참다못해 쏘아붙였다.
"임일천, 이 놈아, 난 이미 결혼한 몸이다. 계속해서 함부로 떠들면 가만 놔두지 않을 테다!"
난쟁이가 넉살좋게 말을 받았다.
"모용 낭자님, 난 요새 새 궤짝을 얻었어. 전에 가지고 있던 것보다 월등한 걸로 말이야. 이전 궤짝도 크게 나무랄 데는 없지만 저절로 움직이지 못하는 게 흠이었지. 밤중에 일어나 계집 구경을 하려면 나귀가 연자방아 돌리듯 내가 빙빙 돌아야만 했으니 마음이 심란해서 자세히 구경할 수 없었지. 이 새 궤짝을 구해 놓고 난 부랴부랴 낭자를 찾아왔어. 날 따라가서 궤짝 안에 들어가 봐.
낭자 맘에 쏙 들 거야."
모용 낭자를 건너다보는 난쟁이의 눈에는 음욕이 흘러 넘쳐 마치 모용 낭자를 통째로 삼킬 듯했다. 모용쟁은 더럭 겁이 났다. 그의 태도로 보아 무서운 흉계를 숨기고 있는 게 분명했던 것이다. 그녀는 북국에 다녀온 구양봉의 무예가 대체 어느 정도인지 알 수가 없었다. 구양적이 없는 지금 자기와 구양봉의 힘과 무예만으로는 난쟁이를 물리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이때 수많은 벌레들이 기어드는 듯한 버스럭대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 오자 난쟁이가 기다렸다는 듯 품속에서 피리를 꺼내 들었다. 피리는 새까맣고 아주 작았는데 돌로 만든 것 같았다. 난쟁이가 피리를 입에 대자 삘리리삘리리 괴상한 가락이 울리기 시작했다.
피리 소리가 울리자 방문과 창문들이 와락와락 열렸다. 놀랍게도 네 개의 창문에 모두 사람이 지켜 서 있는데 사막의 독수리 어거풍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그는 두 손으로 창문들을 거칠게 잡아채서 사정없이 부수어 버렸다. 문짝들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박살이 나서 땅바닥에 너저분하게 널렸다. 다른 한 창문에는 쌍환 기노가 버티고 서 있었다. 백면라살한테 크게 다친 그는 구양 형제한
테 복수하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그가 쌍환을 휘둘러 창을 부수자 그 서슬에 벽까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세 번째 창에는 만도 마혁이 서 있었는데 그는 만월도를 휘둘러 창문을 짓부숴 놓았다. 마지막 창에는 쌍검 옥문이 서서 왼손에는 장검을 잡고 오른손에는 단검을 잡은 채 차가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네 사람은 살기등등하여 난쟁이가 명령만 내리면 구양봉과 모용쟁에게 덮칠
기세였다.
난쟁이는 피리만 불 뿐 두 사람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소름 끼치는 피리 소리가 점점 드높아졌다. 피리 소리에 맞추어 부서진 창문으로 수많은 독사들이 혀를 날름거리면서 기어들기 시작했다. 대가리를 빳빳이 쳐든 독사들은 스르륵스르륵 소리를 내면서 ,두 사람에게 접근해 왔다.
구양봉은 두려워하는 기색이라곤 없이 잠자코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모용쟁을 바라보았다. 손에 단검을 잡고 대기하고 있는 그녀는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고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했다. 구양봉은 냉큼 모용쟁에게 뛰어가 그녀를 옆구리에 끼고는 자기 침대로 날아왔다. 그는 침대 복판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이런 자세로 앉으면 앞뒤의 독사들을 막을 수 있
기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대청 안은 독사들로 우글거렸다. 피리의 가락이 빨라지자 수백 마리의 독사들이 춤을 추면서 구양봉의 침대로 바싹 몰려들었다. 독사들은 혀를 날름거리며 두 사람을 물어 죽이려고 기회를 노렸다. 다급해진 구양봉은 다른 것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모용쟁을 바짝 끌어당겼다. 두 손을 마음대로 쓸 수 있게 되자 그는 독사들을 향해 두 손을 천천히 펼쳐 들었다.
구양봉은 난쟁이를 쏘아보며 꾸짖었다.
"임일천! 이 따위 독사들을 풀면 내가 무서워할 줄 알았느냐?"
구양봉은 여전히 태연자약했다. 품속에 안긴 모용쟁은 백타산장의 난쟁이와 독사 떼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구양봉의 거동을 얼떨떨한 표정으로 지켜.
난쟁이 쪽에서 반응이 없자 구양봉은 위협조로 말했다.
"임일천, 네 놈이 조금이라도 눈치가 있다면 순순히 타이를 때 이 독사 떼를 거두어 당장 떠나거라."
임일천은 웃음을 터뜨렸다.
"구양봉, 내가 알기로는 그 계집은 네 형수인데, 예끼 이 놈아, 시동생이 형수를 품에 꼭 끌어안고 있다니, 그게 할 짓이냐? 그리고 모용 낭자도 너무하시는구만. 사내를 몇 놈이나 호려 내야 성이 차겠소? 구양적한테 시집간 것은 옥에도 티가 있겠거니 하면서 눈감아 주려고 했지. 그런데 알고 보니 네 년한텐 서방이 한둘이 아니구나. 예끼 더러운 년!"
그는 말을 마치더니 피리를 더욱 급하게 불어 댔다. 잦은가락에 맞추어 구양봉 주위에 모여든 독사들은 일제히 대가리들을 치켜 들고 혀를 날름거렸다.
모용쟁은 난쟁이의 말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녀는 급히 몸을 일으켜 구양봉의 품에서 빠져 나가려고 했다. 모용쟁이 품에서 빠져 나가면 큰일이 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구양봉은 다급히 모용쟁의 견정(肩井), 환도(環跳) 두 혈을 찔렀다. 모용쟁은 꼼짝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구양봉은 악에 받쳐 소리쳤다.
"임일천, 네가 사람을 죽이려 드는구나. 하지만 네 대가리를 조심해라! 옛 성인들의 말이 있다. 예절이 아무리 엄해도 사정에 따 라야 한다고. 형수가 물에 빠졌을 때 손을 내밀어 건져 주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냐? "
이때 사막의 독수리 어거풍이 빈정거렸다.
"구양봉, 네 놈이 어디 손만 잡았느냐? 형수를 품에 꼭 끌어안고 있지 않느냐? 백주에 남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그 지랄인데 남의 눈이 없는 데서는 무슨 짓거린들 안 했겠냐? 이 사람 가죽만 쓴 짐승 같은 놈아!"
쌍검 옥문은 모용쟁을 향해 입을 열었다.
"구양씨 가문의 가풍이 원래 저렇게 더러운데 어찌 도덕 군자가 있을 수 있겠어? 더구나 모용쟁 같은 화냥년이 꼬리를 치고 있으니 더 말할 필요가 있겠나?"
모용쟁은 마음이 몹시 괴로웠다. 이날 이때까지 그녀는 깨끗하게 몸을 지키려 했지만 이르는 곳마다 수모를 당하고 유린을 당해야 했다. 구양씨네 두 형제조차 그녀에게 심리적으로 적지 않은 고통을 주었다. 게다가 이러쿵저러쿵 남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보니 여린 여자의 마음으로 차마 감당하기 마려웠다.
독사들은 대가리를 빳빳이 쳐들고 혀를 날름거렸다. 구양봉의 주위는 이미 독사들로 가득했다. 구양봉은 재빨리 손을 뻗쳐 독사 대가리를 잡더니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딱'!' 하는 소리와 함께 독사 대가리가 부러졌다. 독사는 대가리를 들지 못하고 몸뚱이만 움직여 몸부림쳤다. 하지만 이 수많은 뱀을 어떻게 손가락만 가지고 막아낼 수 있겠는가. 곰곰이 궁리하던 구양봉은 종남산에서 왕
중양이 신을 벗어 들고 신바닥으로 단황의 불호(佛號)와 황약사의 옥소를 막아내던 광경을 떠올렸다.
'옳지, 지금 이 장면이 그날 종남산에서 벌어졌던 광경과 뭣이 다른가?'
구양봉은 모용쟁의 손에서 단검을 빼앗아 휘익 던졌다. 단검이 둥그런 원을 그으면서 한바퀴 날자 독사 대가리들이 이리저리 잘려 나가고 몸뚱이들이 맥없이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러나 대가리가 잘린 독사는 2, 30마리밖에 안 되었다.
갑자기 구양봉은 입술을 오므려 휘파람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마치 매가 울고 학이 끼룩거리는 것 같은 소리가 밤하늘에 멀리 울려 퍼졌다.
세상 만물은 모두 상생상극(相生相克)하는 법이다. 난쟁이의 피리 소리를 듣고는 구양봉과 모용쟁을 물어 죽일 듯 설쳐 대던 독사들이 구양봉의 휘파람 소리에 저마다 대가리를 땅에 처박고는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 광경을 본 난쟁이는 소스라쳐 놀랐다. 원래 그는 구양적과 싸우려 했었다. 구양적을 생포하여 그를 인질로 삼아 백면라살을 협박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구양적은 없고 구양봉과 모용쟁만 집을 지키고 있자 더욱 쾌재를 올렸다. 구양적이 없는 데서 구양봉과 모용쟁을 생포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구양봉에게 이런 대단한 술법이 있을 줄이야! 난쟁이는 내심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백타산장의 주인이며 서역 대사막의 간웅으로 불리는 임일천이 만만하게 물러설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그는 방안에 대고 고함을 질렀다.
"저 연놈을 죽여라!"
영이 떨어지자 창 밖에 있던 네 사람이 뛰어들었다. 다름아닌 대사막의 4걸이었다. 사막의 독수리 어거풍이 고함을 질렀다.
"네 놈이 우리 산군을 노엽게 했으니 죽어 마땅하다!"
어거풍은 매 발톱처럼 두 손가락을 세워 마구 할퀴려 들었다. 쌍검 옥문도 앙칼진 소리를 지르며 구양봉의 눈언저리를 향해 장검을 내찔렀다. 만도 마혁은 구양봉의 등뒤에서 휙휙 바람을 일으키며 만월도를 사납게 휘둘렀다. 쌍환 기노는 구양봉을 박살내려는 듯 금환으로는 머리를 겨냥하고 은환으로는 앞가슴을 겨냥하며 쌍환을 휘둘렀다.
싸움이 진행되는 동안 모용쟁은 구양봉의 품에 안겨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든든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구양봉과의 지난 일들을 머리에 떠올렸다. 지금 돌이켜보니 구양봉한테는 남다른 점들이 많은 것 같았다. 비록 무예는 닦지 못했지만 사람됨이 소탈했다. 사막에서 자기가 여러모로 놀려대고 괴롭혔지만 시종일관 기품을 잃지 않은 구양봉이었다.
모용정은 얼음누에의 독에 중독되어 하는 수 없이 구양적과 결혼한 뒤 차츰 자기들이 결혼하게 된 내막을 알게 되면서 구양적을 미워하기 시작했다. 한번은 밤중에 구양적이 잠꼬대를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누가 들어도 얼굴이 달아오르는 사랑 타령이었는데 분명히 여자에게 하는 말이었다. 귀를 기울여 들어보니 꿈속에서도 자기의 스승인 백면라살 수라아와 사랑을 속삭이고 있는 게
아닌가? 모용쟁은 처음엔 치욕감을 느꼈지만 나중에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사제가 짜고 사람을 이처럼 우롱할 수가 있는가?'
그녀가 이런 서글픈 생각에 잠겨 있는데 대사막 4걸이 일제히 병장기들을 휘두르면서 와락 달려들었다. 순간 모용쟁은 속으로 생각했다.
'구양봉이 죽으면 나도 죽겠다! 구양봉과 생사를 같이할 테야!'
그러나 구양봉은 재빠르게 4걸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의 주먹에 맞아 기노의 쌍환이 허공에 튕겨 올랐다. 구양봉은 여전히 모용쟁을 안고 앉은 채로 몇 발자국 앞으로 날아갔다. 만도 마혁이 따라오면서 만월도를 내리쳤으나 치는 족족 허공만 가를 뿐이었다. 구양봉이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그는 대사막 4걸을 향해 으름장을 놓았다.
"이 놈들! 순순히 말할 때 물러가거라. 내가 손을 쓰는 날이면 너희들 중 한 놈도 살아 남지 못할 것이다!"
어거풍이 코방귀를 뀌었다.
"뭐라구? 구양적이 여기 있다 해도 오늘 밤엔 황천객이 안 되고는 못 배길 텐데, 하물며 네깟 놈이 뭘 어쩐다구? 냉큼 그 낭자를 내려놓아라. 어차피 죽을 바엔 빨리 죽는 게 편할 거다."
구양봉은 독기 어린 눈으로 난쟁이를 쏘아보면 서 꾸짖었다.
"임일천,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뽑지 마라. 전에 네가 모용 낭자를 붙잡아 두고 무슨 짓거리를 했든 그건 상관하지 않겠다. 나의 형이 모용 낭자를 구한 것은 사나이로서 당연히 할 일을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늘 네 놈들이 나를 계속 성가시게 한다면 나도 더는 참을 수 없다. 네 놈들이 계속 설치면 한 놈도 살려 두지 않을 테다!"
난쟁이는 여전히 가소롭다는 태도였다. 구양봉이 그새 다소 무예를 익혔다고 해도 얼마나 대단하랴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무예를 배워서 한 가지라도 뛰어난 술법을 가지려면 보통 10년 이상의 세월이 필요했던 것이다.
'제깟 놈이 무예를 익혔다면 얼마나 익혔겠어? 고작해야 제 형한테서 사파의 무예나 약간 배웠겠지. 궁지에 타지게 되니 그걸 써 먹으려는 모양인데 무서울 게 없지.'
난쟁이가 다시 명령했다.
"저 놈을 죽여라!"
쌍검 옥문은 워낙 미인이었다. 난쟁이는 옥문을 노리갯감으로 삼으려고 머나먼 고장에서 빼앗아 왔다. 한데 옥문은 사내를 호리는 솜씨도 솜씨려니와 매사에 어찌나 눈치가 빠르고 수완이 좋은지 난쟁이는 그녀를 제자로 삼은 것이다.
이때야말로 스승의 환심을 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여긴 그녀는 세 사형들이 뛰어나갈 새도 없이 소리를 지르면서 구양봉에게 덮쳐 들었다.
구양봉은 대청 벽에 등을 붙인 채 침착하게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는 모용쟁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두 손을 마음대로 쓰기 위해서였다. 그는 두 손을 어깻죽지까지 올리고 무릎을 좀 굽혀 마보(馬步) 자세를 취했다. 이 자세는 마치 무술을 처음 배우는 초보자가 연습을 할 때 취하는 자세와 흡사했다. 쌍검을 휘두르면서 달려들던 옥문은 이런 자세를 보고는 속으로 고소를 금치 못했다.
'그 우스꽝스러운 마보로 내 쌍검을 당해 내겠다고?'
옥문은 더욱 자신감이 생겨 급히 내력을 모아 시위를 벗어난 화살처럼 돌진했다. 그녀는 구양봉이 합마공을 쓰려는 것과, 그 합마공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쌍검을 어찌나 빨리 휘두르는지 그저 휙휙 소리만 날 뿐 검날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오로지 어떻게 하면 구양봉의 몸뚱이를 멋들어지게 토막 내어 사형들의 박수갈채를 받고 스승의 환심을 살 수 있을까에만 온 정신이 쏠려 있었다. 구양봉의 술법이 얼마나 무서운지 옥문의 쌍검이 구양봉의 가슴을 찌르는 순간까지도 누구도 알지 못했다.
모용쟁이 다급히 소리를 질렀다
"빨리 피해요!"
하지만 구양봉은 무릎을 더 낮게 굽히고 두 눈을 크게 뜨며 옥문을 쏘아보았다. 그는 입으로 '쿠르륵'하는 소리를 내면서 두 손바닥을 확 펴고 앞을 향해 천천히 내밀었다.
"위험해!"
난쟁이 임일천이 고함을 질렀다. 독수리 어거풍도 놀란 소리를 질렀고 만도 마혁과 쌍환 기노 역시 눈이 휘둥그래져서 구양봉을 바라보았다.
'콰앙―!'
요란한 굉음과 함께 쌍검 옥문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광풍에 날리는 낙엽처럼 허공에 떠서 벽을 뚫고 밖으로 날아갔다.
난쟁이 일행도 급히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러나 그들이 밖에 나왔을 때 그녀는 땅바닥에 쓰러진 채 이미 죽어 있었다.
쌍검 옥문은 악한 계집이기는 하지만 얼굴이 반반하여 세 사형들은 저마다 마음속으로 그녀를 사모해 왔다. 그러나 옥문을 사모하는 세 사람의 태도는 각각 달랐다. 독수리 어거풍은 옥문에게 엄하게 대하고 눈을 부라리면서 무예를 닦도록 닦달했다. 이와는 달리 쌍환 기노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으나 눈길만은 언제나 옥문에게 쏠려 있었다. 그래서 옥문의 등뒤에는 언제나 그의 불타는 눈길
이 끊임없이 따라다녔다. 만도 마혁은 옥문을 보기만 하면 제 쪽에서 먼저 얼굴을 붉히고 꺽꺽거리면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세 사람이 일찍부터 임일천에 대해 딴마음을 품어 왔지만 다들 떠나지 않고 지금까지 눌러 있었던 것도 순전히 옥문에 대한 마음 때문이었다. 그러한 그녀가 지금 구양봉의 합마공에 의해 저 세상으로 가버린 것이다.
독수리 어거풍이 옥문의 시체를 흔들면서 소리쳤다.
"옥문아, 일어나. 빨리 일어나! "
한쪽에서 바라보고 있던 쌍환 기노가 쌍환을 땅바닥에 내던졌다. 어찌나 힘을 주었던지 쌍환은 땅속에 푹 박혔다. 그는 옥문의 시체 앞에 꿇어앉아 옥문의 이름만 한없이 불러 댔다.
워낙 우직하기로 소문난 만도 마혁이 못 봐 주겠다는 듯 소리쳤다.
"야야, 시끄럽게 굴지 마! 이미 죽었는데 울어 봤자 무슨 소용이 있어?"
그러면서 그는 만월도를 틀어잡았다.
"구양봉, 이 놈아. 내 누이를 살려 놓아라!"
그는 곧바로 구양봉에게 달려들었다.
난쟁이 임일천이 무모하게 달려가는 마력을 잽싸게 가로막았다.
그가 구양봉을 향해 물었다.
"구양봉, 네가 방금 보여 준 게 무슨 술법이냐?"
구양봉은 대답 대신 대청이 떠나가라 웃어대기 시작했다. 실컷 웃고 나자 가슴이 여간 후련하지 않았다.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해. 마음먹기에 따라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니 이제야 사는 맛이 나는구나.'
사형인 석초수를 죽여 버린 후로 그의 마음속에는 점차 악의가 자라나기 시작했으며, 또 벙어리처럼 과묵한 두 형제를 손쉽게 죽인 뒤로는 사람을 죽여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방금 옥문을 죽이고 나서는 더 없는 쾌감까지 느낄 정도였다. 사람을 죽여 목숨을 빼앗는다는 게 이렇게 쉬운 일일 줄 예전에는 상상조차 못했었다.
구양봉이 물었다.
"임일천, 네가 보기에 어떤 것 같으냐? 너와 나 둘 중에 누가 더 악인이라고 생각되지?"
임일천은 구양봉의 독기 어린 눈초리에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얼어붙는 듯하여 대꾸할 수가 없었다.
그는 구양봉의 무예가 놀랄게 발전한 것은 물론 온몸에서 살기가 넘쳐흐르는 것을 보고 이쯤에서 몸을 피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셋째 제자인 마혁은 눈치 없이 만월도를 꼬나 들고 여전히 구양봉과 사생결단을 하려 했다. 쌍환 기노도 일어나더니 두 손으로 눈물을 닦고 땅속에 박힌 쌍환을 뽑아 들고는 천천히 걸어가 구양봉의 왼쪽에 버터 섰다. 독수리 어거풍도 손으로 옥
문의 두 눈을 감겨 준 뒤 그 곁을 떠나 구양봉의 오른쪽에 버티고 섰다.
분위기가 다시 살벌해지자 구양봉은 태연히 세 사람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어디 덤벼 봐라. 모조리 죽여 줄 테니."
수많은 싸움판을 겪어 온 독수리 어거풍은 이번 싸움이 더없이 치열하고 처참하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그는 쌍환 기노를 보고 눈짓했다. 두 사람은 눈짓을 통해 서로의 심중을 읽었다. 구양봉이 합마공을 쓰기 전에 먼저 손을 쓰자는 것이었다. 세 사람은 칼, 환, 장을 동시에 휘두르면서 벽력같이 함성을 질렀다.
이번 싸움은 아까와는 달랐다.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달려드는 세 사람의 술법은 저마다 악착스러웠고 일격에 목숨을 빼앗을 수 있을 정도로 요해를 겨냥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의 싸움은 오로지 난쟁이 임일천을 위해 계집을 빼앗기 위한 싸움이었다면, 지금은 한 스승 밑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해 온 사매(師妹)에 대한 복수전인 것이다.
구양봉은 합마공을 쓸 겨를이 없었다. 그는 좌우 양쪽을 방어하며 피하기에 바빴다. 다행히도 봉황력 경공을 몸에 익혀 두어 몸이 가볍고 자세의 변화가 수월하여 상대방의 악착스러운 진공을 거듭 피할 수 있었다. 세 사람은 목숨을 내건 단합된 힘으로 무섭게 공격해 왔다. 구양봉은 얼굴을 할퀴고 옷이 찢겨 너덜거렸다. 그는 몹시 화가 났다. 그는 '꾸꾸꾸'괴상한 소리를 지르면서 무릎을
굽히고 두 손을 위로 뻗치고 두 발을 힘껏 굴렀다. 그는 '쉬익'하는 소리와 함께 하늘로 날아올랐다. 공중에서 몇 번 곤두박질하여 물구나무 선 자세가 되자 '쿵!' 하는 굉음과 함께 마혁이 땅바닥에 쓰러져 그대로 숨이 끊겼다.
쌍환 기노와 독수리 어거풍은 마혁마저 잃자 더욱 격노하여 필사적으로 달려들었다. 급환은 톱니가 돋혀서 '윙윙' 소리를 냈고 은환에는 독아가 돋쳐 서슬이 퍼렇다. 독수리 어거풍은 날카로운 손가락을 확 펴고 몸뚱이를 흔들거리며 달려드는데 마치 회오리바람이 이는 듯했다.
핏발이 선 구양봉의 두 눈에는 살기가 번뜩였다. 그의 뇌리에는 상대방을 죽이겠다는 일념밖에 없었다. 그가 양팔에 힘을 주어 휘두르자 기노의 쌍환이 '쨍강!' 소리를 내며 공중에 솟구쳤다. 그는 칼을 놓친 기노의 팔을 잽싸게 거머쥐고 힘껏 잡아당겼다. 기노의 팔이 우지끈 소리를 내며 어깨에서 뽑혀 나왔다. 그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팔을 땅바닥에 던지고는 다시 남은 한쪽 팔마저 거머
쥐었다. 그는 왼손으로 기노의 어깻죽지를 틀어쥐고 힘껏 당겼다. 역시 뼈마디가 떨어져 나가는 소리와 함께 팔 하나가 뽑혀 나왔다.
기노는 비명을 지르다가 곧 숨을 거두었다.
구양봉은 이제 살기가 번뜩이는 눈으로 어거풍을 노려보았다.
"난 사람을 죽여야겠다. 내가 널 죽이고 싶으면 죽이는 거야. 네가 날 건드리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테지만, 네가 덤벼들었으니 난 널 죽여야겠어!"
위기감을 느낀 어거풍은 즉시 달아나려 했다. 그러나 구양봉은 잽싸게 손을 뻗쳐 순식간에 대혈 세 군데를 쿡쿡 찌르더니 손바닥으로 어거풍의 정수리를 무섭게 내리쳤다. 두개골이 으깨지는 소리와 함께 어거풍은 끽 소리도 못하고 즉사해 버렸다.
가련한 독수리 어거풍, 만도 마혁, 쌍환 기노, 그리고 쌍검 옥문, 이 대사막의 4걸은 대사막에서 10년 동안이나 횡행했지만, 오늘 구 양봉과의 한 번 싸움에서 이렇듯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것이다.



제27장 모용쟁을 구출하라
대사막의 사걸을 단번에 해치우고 나자 구양봉은 형언할 수 없는 심정에 사로잡혔다. 그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두 손을 늘어뜨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느새 난쟁이 임일천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아무리 훑어보아도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줄행랑을 친 게 틀림없었다. 구양봉은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모용쟁이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구양봉, 다가서지 마라! 다가서기만 하면 네 형수를 때려죽일테다!"
구양봉은 깜짝 놀랐다. 난쟁이가 모용쟁의 뒤에서 당장이라도 그녀를 쳐죽일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구양봉은 곧 정신을 가다듬었다.
"형수님의 털끝 하나만 건드렸단 봐라! 네 놈을 당장에 죽여 없앨 테니!"
난쟁이는 잔뜩 겁먹은 얼굴로 거듭 경고했다.
"다가서지 마! 한 발자국만 다가서면 나도 어쩔 수 없다!"
"넌 우리 형수님을 데려다 네 노리갯감으로 만들려는 모양인데, 내가 보고만 있을 것 같으냐?"
"아니, 아니야. 네가 다가서기만 하면 네 형수는 죽는다!"
구양봉은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부드러운 어조로 구슬리기 시작했다.
"임일천, 네가 우리 형수님을 놓아주기만 하면 살려 주겠다."
그러나 난쟁이는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모용쟁을 끌고 문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이때 숨어 있던 가시와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깬 구씨 할멈이 달려 나왔다.
"모두 꼼짝 말고 섰거라. 누구든 움직이기만 하면 이 계집을 죽여 버릴 테다!"
난쟁이는 모용쟁의 단검을 쥐고 모용쟁의 등을 쿡쿡 찌르면서 문 밖으로 끌고 나갔다.
구양봉은 섣불리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쥐 한 마리 잡겠다고 독을 깰 수야 없지 않은가. 그는 물끄러미 서서 난쟁이가 모용쟁을 끌고 나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문밖에 나선 난쟁이는 고개를 돌리더니 소리쳤다.
"구양봉, 원한다면 언제든 백타산장으로 찾아오너라. 기다리고 있겠다. 네 재주를 다시 한 번 보고 싶구나."
말을 마친 그는 한바탕 큰소리로 웃어대더니 모용쟁을 끌고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어느덧 날이 밝아 왔다. 구양적은 품에 안긴 채 잠들어 있는 사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깊이 잠들었을 때는 마치 어린애와 같은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숨소리마저 무척 가냘펐다. 그녀는 빙그레 웃고 있었는데, 구양적의 품에 안기면 언제나 웃는 낯이었다. 구양적은 그녀를 내려다보면서 속으로 다시 한 번 다짐했다.
'사부님, 전 사부님과 함께 있겠습니다. 이제 동생이 돌아왔으니 우리 구양씨 가문의 대를 잇는 문제는 동생에게 맡기고 전 사부님과 함께 살렵니다. 죽어도 함께 죽고 살아도 함께 살겠습니다. 행복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그 길뿐입니다.'
그는 스승의 얼굴이며 다리며 가슴이며 어느 한 구석도 사랑스럽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런 여인과 일생을 함께 산다면 여한이 없을 것만 같았다.
날이 완전히 밝으니 얼음 동굴 안도 환해졌다. 얼음 동굴 입구로 새어 들어온 빛이 빙판에 반사되어 생긴 현상이었다.
백면라살이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구양적을 향해 나지막하게 물었다.
"적아, 밤을 꼬박 새운 모양이구나?"
"사부님, 전 그저 사부님의 머리맡을 지키고 앉아 있기만 해도 행복합니다."
구양적의 말에 백면라살 수라아는 가볍게 웃었다.
"내가 처음으로 너한테 안겼을 때 넌 무척 당황해 했지. 넌 말끝마다 나를 사부님, 사부님하고 부르는데 이젠 넌더리가 나는구나……."
백면라살은 계속해서 소리 내어 웃었다. 그녀의 웃음 소리는 마치 천진난만한 소녀의 웃음처럼 맑고 투명했다.
하지만 구양적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그때가 그립습니다. 그때만 해도 사부님께선 지금처럼 절 멀리 하려 하진 않으셨으니까요…….:
"허튼소리!"
백면라살은 손으로 가볍게 구양적의 입을 막았다.
"사부님, 저의 아우가 돌아왔다는 말씀을 드렸지요? 전 아우에게 우리의 일을 말하고 그에게 집안 일을 일임할 생각입니다. 그러면 다시는 이 얼음 동굴을 떠나지 않고 사부님과 함께 살 수 있을테니까요."
백면라살은 내심 흐뭇한 감정을 숨기며 말했다.
"적아, 그러지 말아라. 그러면 네가 너무 고생하게 돼. 너무 고생하게 된다구……."
구양적은 백면라살을 으스러지게 끌어안았다.
"사부님, 전 사부님과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다른 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구양적은 구양봉보다 말주변이 없고 말수도 적었지만 마음은 구양봉보다 뜨겁고 진지했다.
"사부님, 모용쟁한테도 솔직히 말하여 제 갈 길을 가게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내가 너한테 말한 적이 있다만, 모용쟁은 원래 네 아우한테 마음을 두지 않았느냐?"
"그런 줄로 알고 있습니다."
구양적은 서슴없이 대답했다. 사실 그는 모용쟁이 자기 아우와 결혼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랐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자기가 모용쟁과 결혼하여 괴로운 나날을 보내게 될 줄이야.
잠자코 생각에 잠겨 있던 백면라살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적아, 네 뜻이 정 그렇다면 모용 낭자와 헤어지도록 해라. 그리고 우리 둘이 여기서 함께 살자꾸나. 네가 없으면 나도 사실 너무나 고독해……."
구양적은 당장 머리를 끄덕였다. 얼마나 기다려 왔던 말인가.
백면라살은 결심한 듯 말을 이었다.
"적아, 좋은 생각이 있다. 네 아우를 모용쟁과 짝을 지어 주면 어떨까?"
구양적은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 앤 말을 듣지 않을 겁니다……."
구양적은 말끝을 흐렸다. 자기가 이미 모용쟁을 아내로 삼았는데 구양봉이 다시 모용쟁과 가까이 하려 할 것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적아, 넌 사내가 아니다. 솔직히 모용쟁과 혼인은 했어도 사내로서 그 애를 소유한 적은 없지 않니? 그리고 중요한 것은 각자의 마음이다. 네 마음은 내게로 향해 있었고 모용쟁의 마음은 네 동생에게로 향해 있었으니, 형식적으로 성혼을 했을 뿐 두 사람이 정말 맺어진 것은 아니지 않니?"
구양적은 머리를 떨구었다.
"저로선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간단한 일은 아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넌 잠자코 지켜보기나 해라."
백면라살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구양적도 찜찜한 기분으로 따라 일어났다. 두 사람은 곧장 얼음 동굴을 빠져 나와 구양적의 집으로 향했다.
잠시 후 집 마당에 들어선 둑 사람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구씨 할멈과 가시 계집애가 마당에서 무엇인가를 수습하고 있는데, 마당은 수라장이 되었고 집마저 형편없이 부서져 있었다. 구양적이 다급히 물으니 구씨 할멈과 가시가 자초지종을 상세히 알려주었다.
구양적은 방안으로 뛰어들어가면서 소리쳤다.
"봉아, 어디 다친 데는 없느냐?"
구양봉은 형의 목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왔다.
"난 괜찮아요. 그런데 형님은 어디 갔었던 거요?"
구양적이 대답하기도 전에 뒤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나한테 왔었지."
구양봉이 보니 형의 스승인 백면라살이었다. 구양봉은 더 할 말이 없어졌다. 모용쟁의 짐작대로였던 것이다.
"봉아, 네가 돌아왔으니 정말 잘됐구나!"
백면라살이 구양봉에게 말했다. 구양봉도 백면라살에게 예를 올리면서 깍듯이 인사의 말을 했다.
"선배님, 감사합니다. 저 때문에 머나먼 북국까지 어려운 걸음을 하셨다니 이 구양봉은 너무나 감격했습니다."
백면라살은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미소는 사람의 혼백을 휘어잡는 듯한 묘한 마력이 있었다.
"감사는 그만두고, 나를 미워하지만 않아도 족하겠다."
그녀는 말을 마치자 더는 구양봉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녀는 방안을 두루 살펴보고는 구양적에게 말했다.
"적아, 우리가 가서 네 색시를 찾아와야 하지 않겠느냐?"
갑자기 당한 일이라 어쩔 바를 몰라 하던 구양적은 스승의 말에 고개만 끄덕여 보이고는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 나갔다.
자기와는 아무런 상의도 없이 방에서 나가 버리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면서 구양봉은 몹시 불쾌한 기분이 되었다.
'두 사람은 아예 날 무시하는군. 내가 지금은 무림의 고수라는 걸 모르고 있어도 그렇지, 형수를 찾으러 가면서 나한테 상의 한 마디쯤은 해줄 수 있잖아? 나 같은 사람의 도움은 있으나마나하다는 건가?'
구양봉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형님, 함께 갑시다!"
구양적은 무표정하게 돌아보며 대꾸했다.
"그럼 같이 가자."
세 사람은 나는 듯이 백타산장을 향해 달렸다.
백타산장은 서역 대사막에서는 아주 큰 마을이었다. 멀리 산기슭에 쌓아 올린 성곽이 보였다. 성곽은 아주 견고했다. 성루와 성곽 귀퉁이에는 활을 든 파수꾼들이 빈틈없이 배치되어 있었다. 세 사람은 대수롭지 않은 듯 성을 향해 걸어갔다
구양봉은 미안한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난쟁이가 형수님을 납치해서 끌고 가는데 전 손을 쓰려야 쓸 수가 없었어요. 단검으로 형수님의 목을 겨누고 있는데 방법이 있어야지요."
구양적은 묵묵히 머리만 끄덕였다.
세 사람이 문 앞에 이르자 구양적이 큰소리로 외쳤다.
"어서 성문을 열어라. 너희들 산장 주인과 할말이 있다!"
성문 위의 파수꾼이 세 사람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오호, 네가 구양적이로구나. 우리 성주님께선 이미 영을 내리셨다. 네 놈의 염통에 대고 화살을 날리라구 말이다. 눈치가 있으면 빨리 돌아가도록 해라. 우리도 손을 쓰기 싫으니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성루에서 몇 놈이 활시위를 당겼다. 휘익 휘익 화살들이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세 사람이 서 있는 데까지는 거리가 멀어서 화살이 미치지 못했다.
구양적이 대로하여 백면라살을 보았다.
"사부님, 뛰어 올라갈까요?"
백면라살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두 사람은 몸을 솟구치더니 단숨에 성벽 밑에 다다랐다. .두 사람은 다시 몸을 솟구쳐 성벽에 찰싹 달라붙어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순식간에 절반쯤 올라갔다. 그들을 발견한 파수꾼들은 당황하여 고함을 지르면서 연신 화살을 날렸다. 하지만 화살들은 번번이 빗나가 땅바닥에 꽂히곤 했다. 그러던 중 화살 두 대가 백면라살의 옷자락을 꿰뚫고 지
나갔다.
이때 갑자기 구양적이 "아이쿠!" 소리를 지르면서 미끄러져 내리기 시작했다. 성벽 아래에 있던 구양봉이 깜짝 놀라서 받아 낼 준비를 하고 있는데, 구양적은 몇 장 정도 미끄러져 내리다가 갑자기 멈춰 섰다. 구양봉은 조급한 나머지 바닥에 꽂힌 화살 한 대를 뽑아 쥐고 성루를 향해 내던졌다. 그의 손에서 빠져 나간 화살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면서 성벽 위를 향해 날아갔다. 구양적에게 활
시위를 당기고 있던 궁노수 한 놈이 비명을 지르며 굴러 떨어졌다. 구양봉이 던진 화살이 정확히 그의 숨통에 가 박힌 것이다.
구양봉은 계속해서 땅바닥에 꽂혀 있는 화살들을 뽑아 성벽 위를 향해 날리기 시작했다. 화살은 날리는 족족 명중하여 이미 서넛이 비명을 지르면서 굴러 떨어졌다. 놈들이 놀라 주춤하는 틈을 타서 구양적과 백면라살은 잽싸게 성 위로 기어 올라갔다.
구양적에 앞서 성 위에 오른 백면라살은 다짜고짜 한 파수꾼에게 달려들어 정수리를 쳐갈겼다. 일 장에 파수꾼의 두개골은 박살이 났다. 파수꾼들은 이 무서운 광경을 목격하고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윽고 구양적도 성주에 올라왔다. 백면라살은 그의 몸에 박힌 화살을 보면서 물었다.
"적아, 많이 다치지 않았느냐?"
"어깻죽지를 조금 다쳤을 뿐 괜찮습니다."
구양적은 어깻죽지에서 화살을 쑥 뽑아 냈다.
두 사람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파수꾼들은 이제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구양봉이 성벽 위를 쳐다보니 잠잠했다. 그는 형과 백면라살이 이미 성루에 올랐다는 것을 짐작하고는 몸을 훌쩍 날려 성벽을 타고 슬슬 올라가기 시작했다. 봉황력 경공을 몸에 익힌 터라 10여길의 성벽을 기어오르는 것 정도는 식은 죽 먹기였다. 그는 순식간에 성루에 올랐다.
구양봉을 내려다보고 있던 구양적과 백면라살은 구양봉의 경공이 자기들보다 월등하다는 것을 대뜸 알았다.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그들은 구양봉이 그 사이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웠으리라고는 짐작하고 있었으나 그의 무예가 이 정도이리라고는 예상 못했던 것이다.
구양봉은 두 사람의 의아해 하는 시선을 느끼면서 짐짓 모르는 척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갈 겁니까?"
세 사람은 산장을 향해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산장 안에 들어가려면 작은 다리 하나를 지나야 했다. 다리 양쪽에 난간이 붙어 있고 난간 사이에 자그마한 길이 나 있는데 길이 너무나도 깨끗하여 이상스러운 느낌마저 주었다. 백면라살이 주춤 멈춰 섰다.
"조심해!"
그녀는 구양적을 향해 소리쳤다. 뭔가 함정이 있을 것만 같이 느껴졌던 것이다. 구양적은 걱정 말라며 성큼성큼 앞장서서 달려갔다. 멀쩡하던 다리가 구양적이 딛는 순간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무너져 내렸다.
"형, 조심해!"
구양봉이 소리침과 동시에 백면라살이 훌쩍 몸을 날렸다. 그녀는 잽싸게 구양적을 안아 다리 건너로 날아갔다. 두 사람이 무사히 건너간 것을 본 구양봉도 가볍게 몸을 날려 건너편에 살짝 내려섰다.
산장에 들어서니 어마어마하게 큰 대청리 나왔다. 세 사람은 죽은 듯이 숨을 죽이고 대청 안의 동정에 귀를 기울였다. 대청 안에서는 누군가가 혼자서 중얼거리는 듯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세 사람은 다짜고짜 대문을 박차고 대청 안으로 들어섰다.
대청 안에서는 난쟁이 임일천이 의자에 앉아 뭔가 재미있는 일이 있는 듯 혼자서 손뼉을 치면서 신나게 웃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궤짝 하나가 놓여 있었다. 칠보 장식을 한 이 상자는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는데, 그리로 아롱진 빛이 뿜어져 나왔다. 난쟁이는 대청에 들이닥친 세 사람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어? 당신들이 어떻게 왔지?"
그는 곧 아까처럼 궤짝에 대고 지껄이기 시작했다.
"임자가 말 좀 해 보시오. 난 임자하고 단둘이만 있고 싶은데, 저자들이 노상 훼방을 놓는군. 임자가 말해 보오. 내가 저 연놈들을 살려 두는 게 좋겠소, 죽여 버리는 게 좋겠소?"
궤짝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래도 난쟁이는 개의치 않고 계속 주절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임잔 빙옥 같은 여자였소. 그때 임잔 그야말로 화씨지벽 (和氏之壁)처럼 티끌 한 점 묻지 않았었어. 사람의 손길이 전혀 스치지 않은 천진미조였지. 그때 임잔 정말 흠 잡을 데 없이 완전무결했소. 내 말이 틀렸소? 그런데 임잔 왜 구양적한테 시집을 갔소? 그 자식은 사내 구실도 못하는 반편이라는데 그게 정말이오? 글쎄, 그 자식이 사내 구실을 했다면 임잔 왜 지금도
……."
구양적은 난쟁이가 지껄이는 말을 더는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궤짝 안에는 다름아닌 모용쟁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임일천, 이 개망나니 같으니! 닥치지 못할까!"
구양적이 소리치자 난쟁이는 멀뚱하니 그를 보면서 말했다.
"입을 다물라구? 내가 뭐 틀린 말이라도 했나? 그렇다면 나도 입을 다물겠다. 엉터리 사내인 줄은 알았지만 쓸데없이 성깔만 있는 바보인 줄은 미처 몰랐군! 그렇게 눈을 부라려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구양적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그가 막 튕겨 나가려는 것을 백면라살이 붙잡았다.
그녀는 난쟁이가 이처럼 약을 올리는 데는 뭔가 계략이 숨어 있으리라고 짐작했다. 흥분해서 멋모르고 덤볐다가는 크게 당하는 수가 있는 것이다.
구양봉을 발견한 난쟁이는 다시 악이 받치는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구양봉, 네 놈도 왔구나. 네 놈과 결판을 내려고 벼르고 있는 중인데 마침 잘 왔다. 네 놈은 내 제자를 넷이나 참혹하게 죽였다. 어거풍, 기노, 마력을 죽인 것은 그래도 괜찮다. 하지만 넌 그 애교가 찰찰 넘치는 옥문만은 죽이지 말아야 했어. 그 앤 내가 머나먼 중원에서 데려왔다구. 그 애가 얼마나 이 어르신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 주었는지 알기나 해? 그런데 백면라살, 네 년이 그 애
의 고운 얼굴을 망태기로 만들어 놨었지. 그때 난 네 년을 죽이지 못한 게 더없이 한스러웠다. 구양봉, 네가 옥문을 죽였으니 그 대신 네 목을 내놓아라!"
구양봉은 냉소했다.
"네 놈 몸 간수나 잘해라."
"구양봉, 그까짓 재주를 가지고는 이 어르신을 죽이기 쉽지 않을 걸. 두고 보자, 네가 죽는가, 내가 죽는가. 네 놈뿐 아니라 셋 모두 살아 돌아갈 생각일랑 집어치우는 게 좋을 거다. 그리고 한 가지 알려 줄 게 있는데, 난 아주 기막힌 생각을 해냈다. 모용 낭자를 납인(蠟人 ; 미이라)으로 만들어 10년이고 100년이고 젊음과 아름다움을 유지하게 만들 생각이야. 너희들 생각은 어떠냐?"
난쟁이는 킬킬거리면서 웃어대더니 궤짝을 보며 다시 지껄였다.
"이 궤짝 속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모용 낭자가 계시단 말이다. 어리석은 생각들이랑 하지 말고 어서들 돌아가는 게 좋을 거야. 난 낭자를 납인으로 만들 테야. 보고 싶을 때면 수시로 꺼내서 볼 수 있도록 말이다."
난쟁이는 갑자기 한숨을 내쉬더니 천천히 말을 이었다.
"사실 나도 처음부터 낭자를 납인으로 만들 생각은 없었어. 부채가 아무리 몸을 시원하게 해 준다 한들 자연히 부는 바람만 못하고, 집에서 기른 꽃이 아무리 향기롭다 한들 들꽃의 향기에 비길 수는 없거든. 내 말이 틀린가?"
구양적과 구양봉은 약이 오를 대로 올랐다. 둘은 무심결에 앞으로 걸어 나갔다.
난쟁이가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움직이지 말어! 움직이면 낭자는 죽는다. 낭자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보여 주마."
난쟁이가 손뼉을 탁 치자 궤짝이 활짝 열렸다. 아니나다를까, 궤짝 안에는 모용 낭자가 앉아 있었다. 두 눈을 살포시 감고 그린 듯이 앉아 있는 품이 잠이 든 것 같기도 하고 이미 죽은 것 같기도 했다. 구양적과 구양봉이 흠칫 몸을 떨면서 앞으로 나가자 난쟁이가 또 위협했다.
"잘들 보라구. 너희들이 움직이기만 하면 낭자는 영락없이 죽는다!"
구양봉이 형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모용쟁은 자그마한 천조각으로 사타구니만 가렸을 뿐 알몸이었는데, 살갗이 유난히 반질거리는 것으로 보아 난쟁이가 납인을 만들려고 밀람을 골고루 바른 것이 분명했다. 구양봉은 소름이 끼치며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
난쟁이는 구양봉의 표정을 살피며 이죽거렸다.
"구양봉, 네가 형수님을 품에 안고 있는 장면을 네 형이 봤더라면 어땠을까? 구양적, 네 아우가 네 색시를 탐내고 있다는 걸 넌 아냐? 두 형제가 계집 하나를 끼고 그럴 수 있는 거냐? 그러니까 숫제 나한테 양보하는 편이 서로를 위해 좋은 처사가 아닐까? 그러면 계집 하나 때문에 형제간에 의가 벌어지는 일은 없을 테니 말이야."
구양적 형제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다들 여길 똑바루 보라구. 낭자의 몸뚱어리가 어때? 계집의 곱고 미움은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모든 것을 다 보구 나서야 판단을 할 수 있는 거야. 어떤 계집은 얼굴은 괜찮은데 몸뚱이를 보면 정이 떨어지고, 또 어떤 계집은 몸뚱어리는 다 탐스러운데 등을 보면 낯이 찌푸려지고, 또 어떤 계집은 다 괜찮은데 주둥아리만 열면 구역질이 난단 말이야. 한데 모용 낭자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어디 한 군데도 흠잡을 데가 없거든. 이런 계집을 어디 가서 구하겠는가? 네가 이토록 곱기에 세상에서 제일 미련한 바보 형제 구양적과 구양봉까지도 너를 탐낸단 말이다. 고운 계집을 보는 눈은 다 한가지인 모양이야."
구양봉은 함부로 날뛰었다간 난쟁이가 모용쟁을 죽일 게 뻔했으므로 어찌해야 좋을지 막막했다. 그는 모용쟁을 똑바로 볼 용기가 나지 않아 시선을 떨군 채 속수무책으로 이를 갈았다.
난쟁이는 세 사람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을 보고 더욱 기고만장해서 떠들어댔다.
"구양봉, 이제 알겠느냐? 난 낭자의 몸뚱어리 구석구석에 밀랍을 발랐다. 내가 일 장만 내갈기면 몸뚱어리에 묻은 밀랍들이 녹아서 낭자의 땀구멍들을 죄 막아 버리게 되고 그러면 낭자는 순식간에 죽고 말지. 낭자가 죽고 사는 건 지금부터 다 네 놈들의 일거수일투족에 달려 있는 거야."
구양봉과 구양적은 침통한 얼굴로 서로의 얼굴만 바라볼 뿐이었다.
이때 백면라살이 차갑게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임일천, 넌 잘못 생각한 거야. 잘못 생각해도 크게 잘못 생각했어……."
난쟁이가 떨떠름한'표정으로 물었다.
"잘못 생각하다니, 뭘 말이냐?"
"네가 괴물이라는 걸 난 일찍부터 알고 있었고 너한테 감복하는 바도 적지 않다. 넌 정말로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괴짜요, 괴인이다. 네가 소유한 수많은 진주 보석과 숱한 계집들은 누구라도 탐내고 부러워할 정도니 말이다. 하지만 넌 한 가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게 있어. 죽은 물건과 산 사람이 어떻게 같을 수가 있겠느냐? 모용쟁 같은 미인을 죽이겠다는데, 미인의 아름다움이란 어디까
지나 생명에서 비롯되는 거야, 모용 낭자가 웃고 울고 기뻐하고 슬퍼하는 것이 다 미인의 아름다움이지. 죽은 시체가 무슨 재미가 있겠느냐? 울 줄도 모르고, 웃을 줄도 모르고, 성낼 줄도 모르는 시체가 너한테 무슨 기쁨을 줄 수 있겠냔 말이다."
난쟁이는 백면라살을 멀거니 보면서 대꾸했다.
"그걸 내가 모르는 줄 아느냐? 낭자가 죽으면 나로서도 좋을 건 전혀 없지. 하지만 너희들한테 뺏겨서 없는 것보다야 낫단 말이다!"
난쟁이가 이렇게 나오자 백면라살도 더는 할말이 없었다.
말로 설득할 수 없다고 생각한 구양봉이 소리쳤다.
"임일천, 네가 모용 낭자를 내놓기만 하면 우리도 손대지 않겠다. 네가 이곳을 떠나 어디를 가든 상관하지 않겠어."
"구양봉, 네 놈이 나를 용서해 준다면 난 누굴 용서해 줘야 하지? 그리고 내가 왜 여기를 떠나? 이 많은 금은 보화며 백타산장이 누구 손에 들어가라구? 이 산장을 버리라구? 어림도 없는 소리!"
구양봉은 천천히 난쟁이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멈춰 서!"
난쟁이가 소리쳤다.
구양봉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다가갔다.
"임일천, 너한테 72식 교장침법이 있다고 하는데, 나와 승부를 가려 보는 게 어떻겠냐?"
구양봉의 제의를 난쟁이는 한마디로 거절했다.
"네 놈과는 싫다. 싸운다면 백면라살과 싸우겠다. 저 년이 저번에 내 제자인 쌍검 옥문의 얼굴을 못쓰게 만들어 놨거든. 오늘은 반드시 그 빛을 갚아 줄 테다!"
구양봉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옥문이란 년을 죽였는데도 나하고는 싸우려 하지 않고 백면라살과 싸우겠다고 하니 정말 알 수 없는 놈이군.'
그러나 그는 곧 이해가 됐다. 난쟁이에게 있어서 옥문의 얼굴은 생명과도 같은 것이고, 따라서 그녀의 얼굴이 못쓰게 된 것은 옥문이라는 계집이 이미 죽은 것과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구양봉은 갑자기 묘안이 떠올랐다.
"임일천, 내가 보기에 넌 모용쟁을 암만 봐도 어디가 곱고 미운지 알지를 못하는 것 같다……."
그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말을 이었다.
"넌 연약한 여자를 죽일 수 있다는 게 그렇게 자랑스러우냐? 그게 사내 대장부로서 할 짓이냐? 이렇게 하면 어떨까? 너와 내가 정정당당하게 겨뤄서 이기는 사람이 모용쟁을 데려가는 거야. 괜찮은 생각 아니냐?"
구양봉의 제의에 난쟁이는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내가 뭐하러 손해볼 짓을 하지? 네 놈은 술법이 대단해서 내가 질 게 뻔하다."
"너의 술법 중에도 대단한 게 있지 않느냐? 그 사진(蛇陣) 말이야. 내가 너의 사진을 물리치면 모용쟁을 우리한테 들려주고, 만일 네가 이기면 우리는 순순히 물러가겠다. 다시 찾아오는 일도 절대 없을 거야."
이 말에 난쟁이는 속으로 생각했다.
'구양봉, 너는 저번에 사진을 물리쳤었다. 하지만 독사굴에 떨어지면 사정은 달라질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난쟁이는 자신감이 솟구쳤다.
'구양봉 네 생각이 정 그렇다면 좋다. 어디 뱀굴 속에 떨어져만 봐라. 뼈다귀 하나도 추리지 못할 테니. 네가 자초한 일이니 나중에 후횔랑 말아라. 그래, 일단 네 놈만 없애 버리면 나머지 놈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난쟁이는 히죽히죽 웃으면서 구양봉을 건너다보았다.
"구양봉, 사람이란 너무 큰소리를 치다가는 손해를 입는 법이다. 어쨌든 네 생각이 그렇다니 굳이 마다하진 않겠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
난쟁이는 한바탕 큰소리로 웃어대더니 갑자기 손을 번쩍 치켜 들었다. 그가 손을 치켜들기가 무섭게 대청이 터질 듯한 무서운 소리와 함께 시커먼 동굴이 세 사람 앞에 나타났다.
알고 보니 이 동굴은 하나의 큰 함정이었다. 만일 방금 구양봉과 구양적이 한 걸음만 더 앞으로 걸어 나갔더라면 둘은 그대로 뱀굴에 굴러 떨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구양적은 온몸에 소름이 확 끼쳤다.
'다행히 사부님께서 일찍 낌새를 알아차렸으니 망정이지 자칫했다간 우리 두 형제가 뱀들의 밥이 될 뻔했구나!'
구양봉은 고개를 숙여 뱀굴을 내려다보았다. 순간 뱀굴에서 올라오는 악취가 코끝을 찌르며 머리 속을 혼미하게 했다.
'이 자식은 정말로 악독한 놈이구나. 우리 셋을 깡그리 이 동굴속에 빠뜨려 독사 밥이 되게 할 참이었어. 독사보다 더 잔인한 놈 같으니. 오늘 네 놈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죽여 버리고 말겠다!'
구양봉은 마음을 다잡아먹고 소리쳤다.
"임일천, 네가 먼저 손을 써 보아라!"
"그 밑바닥을 자세히 보아라.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구양봉은 뱀굴 밑바닥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수십 길이나 될 것 같은 동굴 속으로부터 독사들이 기어다니는 소리가 스륵스륵 들려왔다.
구양봉이 머리를 들자 난쟁이가 입을 열었다.
"어떤 사람들은 어두컴컴한 것을 좋아한다고 하지만 난 질색이야. 어두컴컴한 데서는 미색을 즐길 수가 없으니까. 어두컴컴한 데서는 서시 (西施)를 무염(無艶)으로 여길 수가 있지. 만일 무염을 서시로 여기면 그래도 괜찮지만, 서시를 무염으로 여긴다면 그런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겠나? 내 말이 틀렸나?"
구양봉은 난쟁이의 말들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난쟁이는 마치 타향에서 고향 친구를 만나기라도 한 듯이 구양봉을 향해 쉴 새 없이 지껄였다.
"여보게, 내 말을 듣고 있나? 난 말이야, 사람을 이 뱀굴 속에 처넣고는 아우성 치며 살아 보겠다고 발버둥치는 꼴을 끝까지 구경하곤 하네. 참 볼 만하지. 얼마나 통쾌한지 몰라. 자네들은 아마 그런 재미있는 구경은 생전 못해 봤을걸? 당장 그 구경을 시켜 주겠네."
난쟁이가 손을 쓰자 '우릉우릉' 소리가 나면서 동굴 밑바닥에서부터 무엇인가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커다란 쇠그물로 엮은 뱀 상자였다. 그 뱀 상자 속에는 수천 마리의 독사들이 갇혀 있었는데 너무 비좁아 마구 한데 엉켜 있었다.
난쟁이가 구양봉을 향해 말했다.
"네가 이 뱀상자 안에 들어가 반시간만 견뎌 내면 모용쟁을 풀어 주겠다!"
"봉아, 안 된다!"
구양적이 동생을 말렸다. 자기나 스승이라도 이 뱀 상자 속에서 반시간을 견뎌 내기란 어려울 것 같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얼음 동굴에서 단련된 한으로 몸뚱어리가 언제나 얼음처럼 차갑다. 그러니 만일 뱀 상자 안에 들어간다 해도 뱀들이 쉽게 덤벼들지는 못하리라는 생각이 들자 그는 얼른 앞으로 나섰다.
"봉아, 내가 들어가겠다!"
그러나 구양봉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난쟁이를 향해 물었다.
"뱀 상자 속에서 내가 저 독사들을 죽여도 되나?"
난쟁이가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재주가 얼마나 있는지 한번 마음대로 해 보시지."
"좋다."
구양봉의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난쟁이는 품속에서 피리를 꺼내 들었다. 난쟁이가 피리를 불기 시작하자 상자 안의 독사들은 일제히 대가리들을 꼿꼿이 치켜 들었다. 피리의 가락이 빨라지자 독사들은 이리저리 부딪치고 엉키며 상자 밖의 사람들을 노리는 듯 정신없이 혀를 날름거렸다.
백면라살과 구양적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봉아……."
구양적은 동생을 불러 놓고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동생을 말리자니 자기가 들어설 용기가 없고, 동생이 들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자니 형으로서 차마 못할 짓이었다.
구양봉은 태연하게 웃었다.
난쟁이가 손을 움직이자 뱀 상자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구양봉은 서슴없이 몸을 훌쩍 날려 상자 안으로 가볍게 뛰어들어갔다. 상자 바닥에는 독사들이 빽빽이 엉켜 있어 구양봉의 경공이 아무리 뛰어나도 독사들을 밟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독사 한 마리가 구양봉한테 밟히자 대가리를 쳐들어 물려고 했다.
구양봉이 손으로 뱀 대가리를 가볍게 툭 치자 대가리가 저쪽으로 쏠렸다. 이때 난쟁이의 피리 소리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상자 안의 독사들은 먹이를 주는 줄 알고 구양봉에게 달려들며 아가리들을 쩍쩍 벌렸다. 이 광경을 바라보는 모용쟁의 눈에는 눈물이 괴었다. 그녀는 비록 말을 할 수는 없어도 정신은 멀쩡했다. 구양봉네 세 사람이 난쟁이와 교섭할 때 그녀는 너무나도 억울
하고 수치스러웠다. 여자로서 자기의 알몸을 남들에게 구경시키고 있으니 이보다 더한 수치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뱀상자 안에 들어간 구양봉을 보면서 그녀는 수치심을 잊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구양봉은 제 형보다 백 배나 훌륭한 사내야. 내가 그렇게까지 놀려 주고 골탕을 먹였는데도 나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려 하다니……."
모용쟁의 눈에는 초조와 불안의 빛이 가득했다. 그녀는 자기가 구양봉을 대신하여 뱀의 먹이가 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구양봉은 독사들이 엉켜 있는 데를 마구 헤치더니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삽시에 그의 온몸에는 수많은 독사들이 기어올랐고 그를 친친 휘어 감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그의 몸은 온통 뱀으로 휘감겨 옷자락조차 보이지 않을 지경이 되었다.
뱀 상자 밖의 사람들은 이 놀라운 장면을 보면서 치를 떨었다. 구양적은 목이 터지게 동생을 불렀다.
"봉아, 봉아……!"
하지만 구양봉은 대답이 없었다. 그는 두 눈을 감고 왕중양과 황약사, 단지흥 사이에 벌어졌던 그 치열한 결투를 머리에 떠올렸다. 만일 한쪽이 무심하고 이쪽에서 가만 있으면 저쪽에서 응하고, 한쪽이 유심하고 이쪽에서 응하면 저쪽에서 가만 있는 법이다. 이것은 무학 대도로서 보통 사람들은 몇십 년이 지나도 터득하지 못한다. 하지만 구양봉은 왕중양이 황약사, 단지흥과 무예를 겨루던
한 차례의 싸움을 통해 터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 구양봉이 이 독사 무리들과 싸우는 것도 마찬가지 이치였다. 이 술법은 정말 묘했다. 뱀들은 구양봉을 맛좋은 먹이로 여기고 몇 번 물어 보았으나 이가 들어가지 않자 물러나서 한쪽으로 가 버렸다. 그러나 피리 소리는 계속해서 울리면서 이 상자 속에 먹이가 있다고 알려 주었다. 이 먹이란 다름아닌 구양봉이었다. 이 상자 속의 독사
들은 평소에도 늘 사람을 잡아먹어 왔던 터라 다시 마구 덤벼들어 구양봉을 물었다. 그러나 구양봉은 꼼짝하지 않고 앉아서 기운을 모아 합마공을 발했다. 온몸에 기운이 차서 오장육부와 사지로 흘러 다녔다.
구양적과 백면라살은 손에 땀을 쥐고 구양봉을 응시했다. 그들은 여차하면 달려들어 구양봉을 구출해 낼 참이었다. 그러나 한식경이 지나도록 구양봉은 여전히 바위처럼 버티고 앉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백면라살의 얼굴에는 희색이 떠오르고 두 눈에는 대견스러워하는 빛이 가득 찼다.
"적아, 정말 생각 밖이다. 네 아우가 이런 재주가 있을 줄은 정말 몰랐어……."
그와는 반대로 난쟁이 쪽에선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더욱 빠른 가락으로 피리를 불어 댔다. 그러나 구양봉은 여전히 끄덕도 하지 않았다. 눈을 감고 앉아 있는 모양은 마치 입선(入禪)
한 중을 방불케 했다.
또 반식경이 지나자 구양봉은 난쟁이를 올려다보면서 천천히 말했다.
"임 장주, 이제는 나가도 되겠소?"
난쟁이는 대경실색했다. 그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을 열지 못 하자 구양봉은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몸을 날려 상자에서 뛰어나와 난쟁이의 앞에 버티고 섰다.
임일천은 할말이 없었다.
"네가 이겼다. 약속대로 모용쟁을 너에게 넘겨주겠다. 단, 네가 이토록 목숨을 걸고 구해 낸 계집이니 절대 네 형에게 주진 말아라."
말을 마친 난쟁이가 손을 번쩍 쳐들자 '탁'하는 소리와 함께 궤짝이 갈라졌다. 난쟁이는 모용쟁을 끌어내어 구양봉에게로 던졌다.
난쟁이가 이런 수작을 부리리라고는 미처 짐작하지 못했던 구양봉은 공중에서 날아오는 모용쟁을 받아 안지 않을 수 없었다. 두 팔을 벌려 모용쟁을 받아 안는 순간 뭉클한 촉감이 온몸에 전해짐과 동시에 향긋한 여인의 살냄새가 코끝에 와 닿았다. 그의 가슴은 후두둑 뛰었다. 그는 차마 실 한 오라기 걸치지 않은 모용쟁의 알몸을 볼 수가 없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형님을
부르며 모용쟁을 구양적에게로 던졌다.
구양적이 멍청히 서 있자 백면라살이 눈치 빠르게 날아오는 모용쟁을 받아 안았다.
"빨리! 옷, 옷을……."
백면라살이 이렇게 소리를 쳐서야 구양적은 허둥지둥 옷을 찾으러 달려갔다. 난쟁이는 본디 계집이라면 오금을 못 쓰는 위인인지라 여인의 옷들이 수두룩했다. 뿐만 아니라 옷가지들마다 깔끔하고 화려했다. 백면라살은 옷들 중에 알맞은 것을 골라 모용쟁의 몸에 씌운 다음 혈도를 풀어 놓았다.
셋이 모용쟁을 둘러싸고 서두르는 틈을 타서 임일천은 잽싸게 줄행랑을 쳤다. 뒤늦게야 이 사실을 깨달은 세 사람이 대청 안을 샅샅이 뒤졌으나 그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었다. 셋은 의논 끝에 대청에 불을 질렀다. 불길이 세차게 타오르자 여기저기서 수많은 독사들이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윽고 대청 안은 불에 타 죽어 가는 뱀들의 소름 끼치는 소리와 노린내로 가득 찼다.
세 사람은 얼른 밖으로 나왔다. 불길은 삽시간에 산장 안의 집들로 옮겨 붙었다. 불길은 점점 기승을 부리며 타올랐고, 뛰쳐나온 마을 사람들과 가축들로 산장 안은 온통 아수라장이 되었다.




제28장 시동생과 형수 간의 치정
백면라살과 구양적, 구양봉은 모용쟁을 데리고 함께 집에 도착했다. 그들은 이 고장에서 오래 머물 수 없다고 생각하고 구씨 할멈과 가시한테 귀띔한 후 모두 산으로 올라갔다. 얼음 동굴 아래에는 돌로 지은 작은 집이 있었다. 기근을 만난 난민들이 임시로 거처하던 집이 아니면 산에서 양을 치던 사람들이 남겨 놓은 거처였다. 그들은 이 돌집에 거처하면서 백타산 쪽의 동정을 살폈다.
모용쟁은 이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 어쩐지 싫었다. 그녀는 날마다 밖에 나가 멍하니 먼 산만 바라보았다. 산너머에는 백타산장이 있고 날씨가 좋은 날이면 멀리 있는 대 사막까지 바라보였다. 하지만 아스라이 넓은 사막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모용쟁은 저 사막 너머에 있는 강남의 고향 땅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정암의 멋들어진 지붕과 붉은색 나는 담벽과 푸른 기와들이 눈앞에 떠오르고,
법당에서 울려 나오는 종소리와 목탁 소리들이 귓전에 들리는 듯했다.
돌집에는 자그마한 방이 여섯 개나 되었다. 그녀는 자진하여 제일 작고 누추한 방을 차지했다. 밤이 되면 그녀는 누가 문을 두드려도 열어 주지 않았다.
구양적도 그녀를 찾아가지 않았다.
구양적은 밤마다 산꼭대기에 올라가 상념에 잠기곤 했다. 그럴때면 은은한 달빛이 수심에 잠긴 그의 몸을 어루만져 주는 듯했다.
바위 아래에서 그는 한숨을 내쉬며 돌집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는 언제나 여섯 개의 방이 모두 어두워져서야 자기 방으로 돌아가곤 했다. 방에 돌아가 누워도 그는 오래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구양적은 바위 위에 앉아 산 아래 있는 백타산장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인간이란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동물이다. 난쟁이만 보아도 그렇다. 어떻게 사람을 수집하여 궤짝 속에 가둬 두고 장난감이나 인형처럼 가지고 놀려고 할 수 있을까? 이런 어처구니없는 짓거리를 하면서도 불안한 생각이 들지 않을까? 난쟁이뿐만 아니라 나 자신 역시 알 수가 없다. 나는 분명히 내가 사랑하는 여인이 있는데도 함께 지낼 수도 없고 가서 볼 수도 없다. 내가 사랑하는 여
인이 얼음동굴 속에서 날마다 추위와 고독 속에 세월을 보내고 있는데, 나는 왜 그녀를 안아 주고, 애무해 주고, 달콤한 사랑의 말을 속삭여 주지 못하고 이곳에서 쓸쓸한 밤을 지새는 것인가.'
그는 모용쟁에 대해서도 미련을 완전히 끊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는 모용쟁에 대해 어떠한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그는 모용쟁이 무서웠다. 그녀의 쌀쌀한 눈길이 무서웠다. 그는 모용쟁의 눈에서 일종의 절망을 보았던 것이다.
모용쟁은 그에 대해 절망했다. 명색이 남편이라는 사람이 한밤에 빠져 나가 밤새도록 돌아오지 않더니 결국은 이런 봉변을 당하게 만들지 않았는가. 그녀는 구양적을 원망하며 결코 그를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바보가 아닌 이상 구양적도 모용쟁의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
구양적이 한참 시름에 잠겨 있는데 익숙한 내음과 함께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 왔다.
"적아, 여기서 뭘 하고 앉았느냐? 색시 방에는 가지 않을 작정이냐?"
구양적은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백면라살이었다.
"날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내가 자기한테 죄를 지었다고 여기고 있으니까요.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적아, 네 마음을 알 만하다. 네가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니 내 가슴이 쓰리구나……."
구양적은 가슴이 뭉클했다. 굳센 성미를 가진 그였으나 백면라살의 따뜻한 한마디에 눈물이 왈칵 솟았다.
백면라살은 그를 품에 안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서로에 대한 연민과 사랑의 감정으로 눈물을 흘렸다.
누구보다 구양적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하는 백면라살은 가볍게 구양적의 어깨를 토닥거려 주며 말했다.
"적아, 죄는 너한테 있는 게 아니라 나한테 있다. 그날 밤 내가 어떻게든 널 네 아내한테 돌아가게 했어야 했는데……."
백면라살은 모용쟁이 난쟁이한테 납치되어 간 것은 그날 밤 자기가 구양적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적아, 네가 너무 괴로워 보이는구나. 내가 어떻게 해 주었으면 좋겠니……?"
구양적의 가슴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아프고 쓰렸다. 그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모용쟁은 자기를 소 닭 보듯 하며 함께 있는 것조차 꺼려 하지 않는가. 구양적은 부끄럽고 자존심이 상해 견딜 수가 없었다.
백면라살은 구양적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말했다.
"적아, 내가 보기에 넌 네 아내와 헤어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쩐지 아쉬워하는 눈치로구나."
구양적은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백면라살은 구양적에게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넌 모용쟁을 네 아우와 짝지어 주어야 한다. 내가 가서 설득해 볼까?"
구양적은 백면라살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사부님은 이런 일을 가지고 아우를 찾아서 어떻게 말하겠다는 것인가?
백면라살은 결심한 듯 말했다.
"적아, 이 길밖에는 없는 것 같다. 내가 구양봉을 만나 말해 보겠다. 지금 당장 말이다."
구양봉은 돌집 안에서 한창 무예를 연마하고 있었다. 그의 공력은 상당한 수준에 달해 있었다. 그는 이제 그 어떤 무림의 명수들과 겨룬다 해도 두려울 게 없었으며 합마공만은 이미 스승을 능가했다고 여겼다.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는 대뜸 형이 아니면 형의 스승일거라고 짐작했다. 아니나다를까, 문 여는 소리와 함께 안으로 들어선 사람은 바로 형의 스승이었다.
백면라살은 가벼운 걸음걸이로 구양봉 앞에 다가오더니 말했다.
"자네와 할말이 좀 있네."
"무슨 말씀이신지요?"
"내가 자네한테 하려는 말은 자네들 구양씨 가문의 앞날과 큰 관계가 있는 거네. 내 말을 들어 볼 생각이 있나?"
"선배님께서는 형님의 사부이신데 저 같은 까마득한 후배가 어찌 귀담아듣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구양봉은 이렇게 대답하며 백면라살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얼굴만 봐서는 무슨 말을 하려는지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었다.
"난 적이한테 네가 장래에 꼭 대성할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언젠가 자네가 무예를 익히겠다고 했을 때 난 너를 제자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지. 내가 그렇게 한 걸 너는 내가 널 잘못 봤거나 혹은 너에 대해 경계심을 두었기 때문이라고 오해했을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그게 아니야. 그때 나나 네 형은 네게 사실을 말할 수 없는 처지였지. 이제 솔직히 말할 때가 온 것 같아. 나와 적이
는 그 얼음 동굴에서 한사공(寒邪功)을 연마했지. 한사공을 익히다 보면 인체에 아주 좋지 않은 일이 생기지. 사내는 온전한 사내구실을 못하고 여인들은 아이를 낳을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교합조차 불가능해지지. 이건 우리들이 언제까지든 덮어 두고 싶었던 한사공의 치명적인 결함이다. 하지만 다른 어떤 이유보다도 내가 이 사실을 오랫동안 자네한테 숨겨 왔던 것은 내가 여자이기 때문
이었어. 너도 이 점은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백면라살의 말은 충격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여자가 아이를 낳을 수 없고 남자가 남자 구실을 할 수 없다면 그 이상 고통스러운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런 고통을 겪으면서도 형은 왜 동생인 나에게조차 전혀 내색하지 않았을까? 나에게 알리기가 싫어서였을까?'
구양봉의 머리 속에는 이어 모용쟁의 모습이 떠올랐다. 모용쟁은 그의 형수이다. 형이 사내 구실을 못한다면 형수는 어찌하는가? 구양봉은 이제야 모용쟁이 그토록 수심에 잠겨 있었던 까닭을 다소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가 늘 혼자서 먼 하늘가를 바라보며 자기의 고향인 강남 땅을 그리워하는 것도 아마 이것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백면라살은 다시 입을 열었다.
"기왕 얘기가 나온 거, 네게 솔직히 말하마. 짐작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마는, 나와 적이는 이미 갈라지려야 갈라질 수 없을 만큼 각별한 사이다."
구양봉은 갑자기 멍청해졌다. 그는 백면라살의 말뜻을 도무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갈라지려야 갈라질 수 없는 각별한 사이라니, 그게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구양봉은 문득 깨달아지는 바가 있어서 백면라살의 얼굴을 멍청히 바라보았다. 백면라살은 구양봉의 멍청한 표정을 보며 말없이 웃었다. 그 웃음은 아주 처량한 느낌을 주었다.
"너는 선비라서 무인들의 어려운 점들을 모를 수가 있어. 내가 서역에 온 것은 마음의 고통을 어쩌지 못해서야. 한때 난 누군가를 사랑했었어, 그가 준 마음의 상처가 너무 깊어 난 그 길로 얼음 동굴에 들어가 천년 묵은 현빙 위에서 얼음 찜질로 상처를 치료하게 되었지. 하루는 네 형이 얼음 동굴 속에 떨어진 걸 내가 구해 됐지. 그때부터 우린 서로 의지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렇게
10여 년을 함께 지내다 보니 나 역시 여자이고 네 형 역시 남자인지라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정이 싹트기 시작했지. 우리 둘의 마음은 날로 가까워졌어. 우린 이제 서로 헤어져서는 살 수 없을 정도지. 더구나 우리 둘은 아까 말한 것과 같이 다 같은 불구의 몸이야. 그래서 둘의 마음이 더욱 가까워졌는지도 모르지. 말하자면 동병상련인 게야. 우리들의 고충을 너도 얼마쯤 알 수 있으리
라 생각한다."
구양봉은 여전히 충격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조실부모한 그에게 형은 부모와 같은 존재였다. 형은 과묵한 성격이었지만 매우 융통성이 있었다. 그래서 구양봉은 어려서부터 형을 따르고 존경했다. 그에게 있어서 형은 사내 중의 사내였고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러한 형에게 이처럼 큰 불행이 오래 전부터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고 있었을 줄이야. 형의 불행은 어느 한때의 불행이 아니라 일생
의 불행인 것이다. 구양봉은 할말을 잃은 채 고통스러운 생각에 잠겼다.
백면라살이 말을 이었다.
"언젠가 적이가 나서서 모용 낭자를 구한 것은 전적으로 너를 위해서였지……."
"저를 위해서라니요?"
백면라살은 처량한 음성으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언젠가 적이가 내게 말한 적이 있지. 모용 낭자가 네게 아주 호감 있어 하고 좋아하는 눈치라고 말이야. 내가 적이에게 모용쟁을 구해 주라고 한 것도 그 때문이었지. 그런데 너는 중원에 갔다가 늙은 독물 신독행한테 납치당해 생사불명이 됐지. 나와 적이는 북국에 달려가 찾았으나 도무지 찾을 길이 없었어. 우린 유운장이 불타서 폐허가 된 것을 보고는 자네가 죽은 줄로만 여겼지. 그후
로 적이는 구양씨 가문의 대를 잇는 문제로 고민하기 시작했지. 그를 보다못한 내가 그에게 모용 낭자와 성혼하라고 권했어. 그 까닭은, 첫째로는 모용 낭자가 천하기한(天下奇寒)인 빙잠지독( 蠶之毒)에 걸려서 그 독을 빼지 않으면 머지않아 죽게 될 형편이었고, 둘째로는 네 소식을 알 수 없으니 적이라도 구양씨 가문의 대를 이을 방도를 찾아야 했기 때문이지. 대를 이으려면 적이가 장가
드는 방법밖에 달리 뭐가 있었겠어?"
구양봉은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실로 자기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백면라살의 말을 들으며 한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있었다. 백면라살과 형은 모두 불구의 몸으로 정상적인 남녀 관계를 가질 수 없다고 했다. 그러한 형이 모용쟁과 결혼한들 무슨 수로 대를 이을 수 있다는 말인가.
백면라살은 구양봉의 마음을 읽은 듯 말을 이었다.
"두 사람을 혼인시키기로 한 데는 나대로 계획이 있었지. 기회가 있으면 투량환주지계를 써서 사내를 데려다가 씨를 받게 할 생각이었지."
구양봉은 더는 참을 수가 없어서 불쑥 물었다.
"선배님께서 방금 말씀하신 것들을 형님께서도 다 알고 계신가요?"
백면라살은 쓴웃음을 지었다.
"적이 성격에 이런 사실까지 다 알면 큰일나게?"
구양봉은 다시 잠자코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그의 머리를 퍼뜩 스치는 게 있었다. 백면라살이 빙빙 둘러대면서 많은 말을 했지만 내용은 매우 간단한 것이었다.
그는 백면라살을 똑바로 보면서 쌀쌀한 어조로 물었다.
"선배님께서 씨내리로 찾는 사내가 설마 저는 아니겠지요?"
그의 목소리에는 야유와 함께 분노가 섞여 있었다. 백면라살은 갑자기 허탈하게 웃어대더니 역시 쌀쌀하게 대꾸했다.
"네가 아니라는 법도 없지. 구양봉과 구양적은 본디 친형제가 아닌가? 네 일은 곧 네 형의 일이고 형의 일은 곧 네 일이 아니냐? 형제간에 무슨 분별이 있다는 거지?"
구양봉은 할말을 끊었다. 백면라살은 정말 놀라운 여자였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어찌 이런 일을 생각이나 해낼 수 있겠는가?
구양봉은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모용쟁을 좋아했으며 모용쟁 역시 자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형수는 어디까지나 형수가 아닌가? 시동생과 형수가 동침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한 일만 같았다.
백면라살은 갑자기 큰소리로 웃어대기 시작했다. 우묵한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는데, 눈물을 흘리면서 웃는 모습이 어쩐지 섬뜩했다.
"왜 그렇게 웃으십니까?"
"네가 유운장에 가서 북강의 일절(一絶)이라고 불리는 늙은 독물 신독행의 제자로 있었다는데, 그게 정말이냐?"
구양봉이 그렇다고 대답하니 백면라살은 냉소했다.
"노독물 신독행은 한평생 나쁜 짓거리만 하고 돌아다닌 대악인이야. 그자는 스스로가 기꺼이 악인이 되려 했지. 네가 그런 자를 스승으로 모셨으니 악인 중에서 최고는 아니어도 둘째는 가야 하지 않겠나? 그런데 방금 네 태도를 보니 여간 실망스럽지 않군. 이런 손톱만한 일에도 그렇게 융통성이 없으니 어떻게 대악인이 될 수 있겠느냐?"
백면라살은 백방으로 설득하려 했지만 구양봉은 여전히 망설여졌다. 형님은 어디까지나 형님이시다. 형님의 아내와 어떻게 잠자리를 같이할 수 있단 말인가? 강호에 떠다니며 뭇계집들과 놀아날 수는 있지만 형님의 아내와 어찌 그런 짓을 할 수 있겠는가?
백면라살은 구양봉의 기색을 살피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대송조(大宋朝)는 지금 엉망이 됐어. 백성들은 헐벗고 굶주리는데, 그 어느 왕조 때보다 쓸데없는 규범만 잔뜩 늘어왔지. 정이(程 )와 정호(程顥), 그리고 주희(朱熹) 이 세 망나니들은 자기들은 금준미주로 질탕거리고 밤마다 삼처사첩(三妻四妾)들을 끼고 자면서 백성들한테는 하지 말라는 것뿐이지. 도대체 무슨 이학의 더러운 법도를 지키라는 게야? 자넨 총명한 사람 같은데 어째서 이
따위 사기에 말려들려 하나? 자낸 모용쟁을 차지하고 싶지 않은가? 모용쟁에게 행복을 주고 싶지 않아? 구양씨 가문이 대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려면 모용쟁과 살아야 해. 남녀간에 둘이 좋아하면 그만이지 다른 게 무슨 상관인가? 모용쟁한테서 아직 얼음누에의 독이 채 빠지지 않았으니 자네의 그 신공으로 말끔하게 해독을 시켜 줘야 해. 자네가 정말로 모용쟁을 좋아한다면 이 길 말고 다른
길이 없어."
子양봉은 머리를 숙이고 생각을 거듭했으나 여전히 결정할 수가 없었다. 그는 누구나 다 인정할 만한 악인이었다. 합마공으로 그의 사형인 석초수와 벙어리 형제들을 죽였고, 또 백타산장의 대사막의 4걸을 죽였다. 특히 쌍환 기노의 두 팔을 생으로 뽑아서 잔인하게 죽여 버린 그때부터 그는 완전한 악인이 되었다. 그는 남들이 자기에 대해 무슨 말을 지껄여도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이 일
은 형님인 구양적과 관계되는 것이므로 결정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모용쟁을 유혹하러 찾아갈 수 있겠는지, 모용쟁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 수 있겠는지, 그럴 경우 형은 어떻게 생각할는지, 꼭 이렇게 해야만 하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온통 의문투성이였다.
구양봉은 임안에도 다녀오고 중원 땅도 두루 밟으면서 많은 미인들을 보아 왔다. 그러나 고요한 밤중에 잠 못 이루며 여인을 생각할 때마다 그의 눈앞에 나타나는 것은 아리따운 모용쟁의 모습뿐이었다. 그는 사막에서 모용쟁과 함께 보낸 그 낮과 밤들을 영원히 잊을 수가 없었으며, 삼단 같은 머리를 드리우고 빙옥같이 새하얀 알몸으로 난쟁이 임일천의 궤짝 안에 앉아 있던 모용쟁의 모습
은 더더욱 잊을 수가 없었다.
모용쟁은 돌집 안에 앉아 있었다. 한적한 집 안에 등잔불이 가물거렸다. 그녀는 조용히 앉아서 착잡한 생각에 휩싸여 있었다.
구양적이 문을 밀고 들어섰다. 하지만 모용쟁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말을 건네지도 않았다. 구양적은 한참 서성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날 밤, 난 사부님한테 갔더랬소……."
모용쟁은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구용적과 말하기도 싫을 뿐더러 마주보기조차 싫었다.
구양적은 그러한 모용쟁의 태도를 보며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마음속에 담고 있던 말들을 모두 털어 놓고야 말리라고 결심했다.
"난 사부님을 보러 갔댔소. 임자와 성혼한 뒤에 한 번도 가 보지 못했으니 사부님께서 외로워하실까봐……."
모용쟁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으나 양미간이 경련을 일으키듯 파들파들 떨렸다. 그녀는 뭔가 말하려다가는 이내 그만두었다.
"……그날 밤 웬 영문인지 가슴이 뛰고 살이 떨려서 나는 사부님께 무슨 변고가 있지 않나 생각했더랬소. 내 예감은 틀림없었소. 내가 얼음 동굴에 들어가 보니 사부님께선 이미 혼절해 쓰러져 있었소. 사부님께선 스스로 경혈을 막아 얼음 바위 위에 누운 채 거의 죽어 가고 계셨지. 조금만 늦게 갔더라면 사부님께서는 돌아가셨을 거요……."
모용쟁의 두 눈이 번쩍 뜨이더니 입에서 욕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사부님, 사부님……. 말끝마다 사부님 타령이고 꿈속에서까지도 잠꼬대를 하며 사부님을 찾으시더군요. 사부님이 그렇게 맘에 들면 사부님하고 결혼할 것이지 왜 나하고 결혼했어요? 자기 사부님을 맘에 두고 왜 다른 여자는 건드려요? 그렇게 사부님을 떠나기 아쉬워하면서 나를 아내로 맞아들인 건 무슨 심보예요? 사내구실도 못하는 주제에 아내는 왜 맞아들였어요?"
욕설을 다 퍼붓자 그녀는 돌침대에 쓰러지며 울음을 터뜨렸다.
얘기가 이쯤 이르자 구양적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성례를 올린 첫날밤 수줍음을 타던 모용쟁은 벽을 마주하고 앉아 구양적이 거듭 불렀지만 상대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녀의 마음속에는 사랑의 감정이 싹터 말은 안 해도 구양적이 달려 들어 자기를 끌어안아 주기를 은근히 바랐다. 얼마 후 구양적은 모용쟁이 바라던 대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는 한쪽 팔로는 그
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건장한 두 다리로 그녀의 하반신을 휘감은 뒤 서툴게 옷고름을 풀기 시작했다. 저고리와 치마가 벗겨져 나가고 속곳마저 벗겨내자 그녀는 완전히 알몸이 되었다. 구양적도 일어서서 자기의 옷을 활활 벗어 던지고 알몸으로 다시 덮쳐 들었다. 모용쟁은 부끄러움과 흥분으로 몸이 달아올랐다. 그녀의 정신은 황홀해졌고 마음은 허공에 둥둥 떠오르는 듯했다. 구양적의 손
은 모용쟁의 젖가슴을 주무르다가 성급하게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모용쟁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며 뜨거운 욕정과 두려움이 한데 뒤엉킨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에게 몸을 맡겼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구양적은 다음 행동을 취하지 못한 채 당황하는 눈치를 보였다. 그는 허둥대는 손길로 모용쟁을 애무하며 그녀의 사타구니 사이로 자신의 하반신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마음만 앞설 뿐 도무지 몸이 따라 주질 않았다. 기세 좋던 사내다운 격정은 어디론가 사
라지고 온몸의 맥이 풀렸다. 어느덧 구양적의 몸에서는 땀이 비 오듯 했다. 그는 점점 절망적인 기분이 되어갔고 끝내는 온몸이 축 늘어지고 말았다.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모용쟁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모용쟁은 두 눈을 꼭 감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마치 시뻘겋게 달아오른 숯불에 냉수를 끼얹은 듯 참담한 기분이었다.
첫날밤은 그렇게 지나갔다. 모용쟁은 밤새도록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고 구양적은 마음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두 사람은 이러한 사정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벙어리 냉가슴 앓듯 가슴만 앓았다. 송대에는 이학이 크게 성해 남녀간의 정사는 남들의 눈을 피해 몰래 했지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하였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구양적은 어떻게 하면 모용쟁과 원활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지 궁리해 보았으나 그러면 그럴수록 자신의 무능함만 확인하게 될 뿐이었다. 그는 자기한테도 아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백면라살이 모용쟁을 아내로 맞으라고 권했을 때 한사코 거절하지 못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자기와 모용쟁의 사이가 원만한 부부 사이가 되기를 한없이 갈망했다. 그는 더욱
열심히 모용쟁을 안아 주고 애무해 준다면 모용쟁이 마음을 붙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자신을 기만하는 것이기는 했지만 구양적은 제 생각만 했지 모용쟁의 심정은 헤아리지 못했다. 구양적이 넌지시 손을 뻗치면 모용쟁은 질겁을 해서 소리치곤 했다.
"건드리지 말아요! 만지지 말라니까요!"
그런 일이 몇 번 있고 나니 구양적은 더 이상 모용쟁과 한 이부자리에 누울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모용쟁은 마음이 처량하고 고통스러울수록 자기가 사막에서 상습적으로 구양봉을 놀려 주고 골탕을 먹인 것은 그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유운장의 패거리들이 구양적과 무예를 겨루어 이기고는 구양봉을 인질로 데려가겠다고 할 때에 모용쟁은 자기도 모르게 구양봉을 자기 남편이라고 했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것은 평소에 자기가 품고 있던 생각을 무의식중에
드러낸 것으로 결코 우연한 행동이 아니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녀는 백타산장에서 구양봉이 죽음을 각오하고 자기를 구출하고자 뱀 상자에 뛰어들었을 때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녀가 강남땅 사랑스러운 정암을 저버리고 강호에서 떠돌아다니게 된 것도 사실은 마음에 꼭 드는 사내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구양봉은 지금은 이미 무림 영웅들 중에서도 일류 고수가 되었다. 그런 구
양봉과 함께 살게 되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뜻도 같고 취미도 비슷하고 사람이 그토록 풍류스러우니 얼마나 좋은가!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구양적은 모용쟁이 마음을 진정하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난 일찍부터 임자한테 말하려고 했었소. 난 어려서 부모를 여의었는데 하루는 얼음 동굴에 빠졌소. 바로 사부님께서 날 구해 주셨지. 이때부터 나와 사부님은 서로 사랑하게 되었소. 그렇게 10년이란 세월이 흘렀지. 사부님은 나의 부모이자 나의 아내요, 난 사부님의 제자이자 사부님의 남편이오. 이 속에 얽힌 사정을 한마디로 설명하긴 어렵소……."
모용쟁은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아찔했다. 구양적과 백면라살의 눈치로 봐서 이들의 사이가 심상치 않음을 모르진 않았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측과 짐작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구양적에게 직접 그 얘기를 듣고 나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구양적은 모용쟁의 기색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나도 알고 있소, 임자가 아우를 좋아한다는걸. 임자가 정말로 그를 좋아한다면 그와 함께 살아도 되오……."
이 말에 모용쟁은 버럭 화를 냈다.
"닥쳐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요? 나를 도대체 뭘로 보는 거예요? 방금 당신 입으로 당신의 사부님을 사랑한다고 했지요? 그러면서 어떻게 나하고 결혼할 수 있었어요? 날 구하려고 그랬다구? 말도 안 돼. 모두들 미쳤어요. 이런 미친 짓거리가 세상 천지에 또 어딨어요?"
구양적은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는 모용쟁을 잠자코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가 아무리 화를 내고 성깔을 부려도 타고난 아름다움은 여전히 사내의 마음을 현혹시키고도 남음이 있었다. 구양적은 노기 띤 모용쟁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가슴이 쓰려 왔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부끄럽게 생각하오. 하지만 난 임자를 진심으로 좋아하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임자와 결혼까지 했겠소. 날 이해해주길 바라오……."
모용쟁은 눈물을 흘릴 뿐 더는 대꾸하지 않았다.
구양적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눌러앉아 있기가 멋쩍었던 것이다.
그는 자기의 방으로 돌아왔다. 방에는 언제 와 있었는지 백면라살이 침대에 자리를 펴고 있었는데 아주 정성스러운 모습이었다. 깔끔하게 펴 놓은 이부자리를 흡족하게 내려다보면서 그녀는 중얼거렸다.
"됐어. 이쯤이면 방이 아무리 추워도 견뎌 낼 만할 거야."
백면라살의 거동을 뒤에서 지켜 보고 있던 구양적의 눈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천하에 여인들이 많고 많아도 날 사랑하고 보살펴 주는 이는 사부님밖에 없구나. 사람이란 양심이 있어야지. 내게는 이런 사부님이 계시는데 왜 자꾸 딴 생각을 하려는 걸까?'
백면라살은 자기의 머리를 이불에 대면서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적아, 내가 사서 고생을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난 벌써 10여 년 동안이나 이불 속에서 자는 게 어떤 맛인지를 모르고 살아왔지 뭐냐."
그녀는 이불 위에 살며시 누웠다.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리고 있었다. 삼단 같은 백발이 어깨로부터 흘러내려 침대 가에 폭포처럼 드리워졌다. 그녀는 황홀한 듯 이불을 자기 품에 꼭 끌어안고는 얼굴에 문지르기 시작했다.
이 광경을 잠자코 지켜 구양적의 마음은 쓰리고 아팠다.
'사부님께선 얼음 동굴 속에서 10여 년이나 남자와 함께 이부자리에 드는 맛을 모르고 살아오셨어. 그 쓰라리고 아픈 마음을 내가 위로해 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구양적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뛰었다.
백면라살은 그제야 구양적이 온 것을 알고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다정스럽게 말했다.
"적이가 왔느냐?"
"사부님……."
"적아, 내가 명전을 만난 것은 일시의 정이었지만 너를 만나서는 한평생 정을 쏟았다. 적아, 네가 나한테 다시 한 번 여자 노릇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겠니? 난 오랫동안 사내와 이부자리를 같이하는 맛을 모르고 살아왔다."
구양적은 성큼성큼 다가가서 가볍게 백면라살 수라아의 머리를 안았다.
"수라아, 내가 그대를 사부님이라고 부르고 그대는 나를 적이라고 부르는 건 너무나 어색하오……."
백면라살이 머리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그래? 그럼 어떻게 하면 될까?"
구양적은 말머리를 돌렸다.
"참, 아우한텐 말을 했습니까?"
"그래, 다 말했다."
구양적은 어쩐지 마음이 초조해졌다.
"그러니 뭐랍디까?"
백면라살은 초조해 하는 구양적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적아, 넌 왜 스스로 마음고생을 사서 하느냐? 너한텐 모용쟁같은 고운 아내가 어울리지, 나같이 늙고 추한 여자를 뭐에 쓰겠니? 네가 나와 함께 살다보면 금방 후회하게 될지도 몰라."
"사부님, 전 이미 모용쟁한테 말했습니다……."
구양적이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라 하자 백면라살이 가볍게 그의 입을 막았다.
"적아, 모용쟁 이야긴 그만두어라. 제발, 빈다……."
겨울의 밤은 길고 추웠다. 창 밖의 으스스한 달빛은 수심 많은 사람들을 더욱 울적하게 했다. 한참을 울고 난 모용쟁은 허탈한 기분이 되어 멍청히 천장만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마음속의 말들을 누구한테든지 털어놓지 않고는 못 견딜 것만 같았다. 강남 땅 정암에 다시 가서 들려 오는 독경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보풀이 인 누런 경서들을 앞에 놓고 불경 공부나 했으면 싶었다. 하지만 정
작 정암에서의 고독하고 삭막한 나날들을 되새겨 보니 그것도 못할 짓 같았다. 불문(佛門)은 조용하고 깨끗한 세계이기는 하지만 사람이 사는 재미는 도무지 없는 것이다. 그 때문에 정암에서 뛰쳐나왔는데 어찌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으랴?
그녀는 천천히 방에서 걸어 나왔다. 밤하늘을 쳐다보니 상현 달이 걸려 있는데 구름들 사이로 숨바꼭질을 하는 듯했다. 반달이 뜬 이 밤의 정취는 구양봉과 함께 지냈던 사막에서의 그날 밤과 너무도 흡사했다. 그녀는 멍하니 달을 올려다보면서 그날 밤 자기와 구양봉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다가 무심코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모용쟁은 문득 웃음을 멈추며 생각했다.
'구양적은 지금 백면라살과 함께 있는 게 분명해. 그렇다면 나라고 구양봉을 찾아가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어?'
이렇게 생각한 그녀는 더 망설이지 않고 곧장 구양봉의 방으로 달려갔다.
모용쟁이 방에 들어섰을 때 구양봉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러나 무예 수준이 구양봉쯤 되면 기(氣)가 온몸에 흐르고 신(神)이 몸 밖에 돌아다닐 수 있으므로 비록 자더라도 경각(警覺)은 늦추어지지 않는다. 그는 갑자기 인기척이 느껴지자 벌떡 일어나 앉았다.
"누구냐!"
모용쟁은 가볍게 웃더니 침대 맞은편에 앉아 구양봉을 바라보았다.
"잠드신 걸 깨웠나 봐요?"
모용쟁의 음성에 구양봉은 흠칫 놀랐다. 자기를 응시하고 있는 모용쟁의 예쁜 두 눈이 달빛에 빛나 보였다. 그는 이 눈길에 무슨 뜻이 담겨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더듬거렸다.
"잠든 지 얼마 안 됩니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구양봉은 여러 가지로 생각이 복잡해져 옴을 느꼈다. 그는 형의 스승이 찾아와서 하는 말을 듣고 이 세 사람 사이가 아주 미묘함을 알게 되었다. 형은 스승을 좋아하지만 모용쟁도 싫어하지는 않는다. 형의 스승은 형을 좋아하므로 모용쟁과 형이 헤어지길 바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하지만 모용쟁의 마음은 어떠한지 구양봉은 알 수가 없었다. 구양봉은 모용쟁의 생각이 몹시 궁금했으나 명
색이 시동생과 형수 사이인지라 차마 물어 볼 수가 없었다.
모용쟁은 구양봉보다 더 총명하고 눈치가 빨랐다. 그녀가 정암에서 대담하게 탈출해 나온 것만 보아도 범상한 아녀자들과는 달랐다.
'내가 왜 스스로 내 손발을 묶어야 하지? 구양적과 백면라살 수라아는 나를 속였어. 내 주관이 있는 이상 난 그 두 사람의 농간에 의해 아까운 청춘을 허송하지는 않을 테야.'
모용쟁은 생각을 가다듬고 말문을 열었다.
"나를 구하려고 백타산장에 달려왔고 뱀 상자에까지 뛰어들었으니 무엇이라고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모용쟁은 진실을 담아 마음 깊숙이 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뜻을 비쳤다. 구양봉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피식 웃었다.
모용쟁은 침대에 다가가 열띤 목소리로 속삭이기 시작했다.
"변경에서 그자들이 아우님을 붙잡아 가려 하자 난 아우님을 내 남편이라고 했지요. 그 일이 기억나세요?"
구양봉은 머리를 끄덕였다. 모용쟁이 변경 땅에서 용감히 나서서 자기를 구출하려 한 행동에 대해 구양봉은 마음속으로 늘 고맙게 여겨 오던 터였다. 시집도 안 간 처녀가 대담히 나서서 구양봉을 제 남편이라고 했으니 어지간한 용기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형수님이 저를 구해 주려 애쓰시던 그 은혜를 전 영원히 잊지 않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이 말에 모용쟁은 눈물을 흘렸다. 이 순간 모용쟁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도 부드럽고 아름다워 보였다.
"방……방금 절 뭐라고 불렀어요? 형수님이라 했나요? 누가 형수예요?"
모용쟁은 기가 막히다는 듯 허탈하게 웃었다. 한참을 웃고 난 그녀는 거칠게 퍼부어 대기 시작했다.
"누가 형수란 말이에요? 당신 형이 어떤 사람인 줄 아세요? 사내가 사내 구실을 못해도 사내라고 할 수 있어요? 말해 봐요! 형이 사내라야 내가 형수 자격이 있는 게 아녜요? 내가 어쩌다 당신 형 같은 사람과 결혼해서 당신한테 형수 대접을 받아야 하는지 알 수가 없군요."
구양봉은 얼결에 모용쟁의 뺨을 후려갈겼다. 모용쟁은 그대로 방바닥에 나뒹굴었다. 여려서 부모를 잃고 형님의 살뜰한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 온 그에게 형은 부모나 다름없었다. 그래선지 누구라도 형을 흉보거나 무시하는 사람이 있으면 어릴 때부터 주먹을 쥐고 달려들어 휘둘러 대던 그였다. 아무리 사랑하는 여자라 해도 형을 무시하는 태도만큼은 용납할 수가 없었다.
방바닥에 쓰러진 모용쟁은 구양봉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그녀의 입에서는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모용쟁은 차가운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이젠 날 치기까지 하는군요?"
모용쟁은 몸을 일으키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말해 봐요! 처음부터 날 미워했지요? 겉으로는 날 이해하는 척, 선비 같은 얼굴을 하고 처음부터 날 미워했어! 게다가 내가 형과 결혼했으니 이젠 쳐다보기도 싫은 거야! 망나니 같으니라구. 차라리 날 죽여요! 차라리 날 죽이라구!"
그녀는 분에 못 이겨 와락 달려들어 구양봉의 상투를 거머쥐었다.
순간 두 사람의 머리가 맞닿아 상대방의 숨결이 서로의 얼굴에 혹 끼쳤다. 모용쟁은 두 눈을 부릅뜨고 구양봉을 쏘아보았으나 목소리는 흥분으로 묘하게 떨려 나왔다.
"차라리 날 죽여……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아……."
모용쟁은 상투를 거머쥔 손을 여전히 풀지 않고 구양봉의 행동을 기다리는 듯 눈을 감았다.
"잘 들어둬! 난 저승에 가서도 너를 저주할 테야!"
구양봉은 이날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울고, 웃고, 떠들고, 저주하고, 애교를 부리는 식의 온갖 자태가 모두 한 여자의 몸에서 동시에 표출될 수 있다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그는 갑자기 온몸의 피가 거꾸로 역류하는 듯 뜨거운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모용쟁, 내 머리를 놓아……."
그러나 모용쟁은 계속 약을 올렸다.
"재주가 있으면 날 죽여! 늙다리 독물의 제자라면서? 천하에서 소문난 악종인 네가 왜 날 못 죽여? 뭣 땜에 난쟁이 임일천한테서 날 구해 냈어? 가만 놔 두었으면 난 벌써 죽었을 게 아냐? 그럼 이런 일로 고통을 당하지도 않았을 거 아니냐구!"
말을 마친 그녀는 어깨를 들먹이며 울기 시작했다. 설움에 겨운 그녀는 더는 말을 못하고 눈물이 흥건한 눈으로 구양봉을 쏘아보았 다.
구양봉은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르는 듯했다.
'모용쟁, 빨리 나가 줘! 나를 더는 괴롭히지 마. 네가 계속 이러고 있으면 난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제발…….'
그는 마치 얼빠진 사람처럼 몸이 말을 듣지 않았고 두 손도 부들부들 떨려 왔다. 그러나 모용쟁은 그의 상투를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구양봉은 참다못해 버럭 고함을 쳤다. 그 고함소리에는 가슴속의 초조와 불안이 섞여 있었다. 구양봉은 더는 견딜 수 없는 듯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모용쟁을 번쩍 안아 올렸다.
"빨리 떠나, 빨리 이곳을 떠나……."
그녀는 구양봉의 팔에 안긴 채 그의 열띤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구양봉은 모용쟁을 품에 안고 마치 우리에 갇힌 짐승처럼 좁은 방안에서 이리 부딪치고 저리 부딪치며 우왕좌왕했다. 그는 허둥지둥 방문을 열고 주위를 둘러본 뒤 부랴부랴 빗장을 질렀다.
그를 지켜 모용쟁의 가슴이 후두둑 방망이질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팽팽하게 얽혔다. 가쁜 숨을 몰아 쉬던 구양봉은 모용쟁을 다시 가뿐히 안아 돌침대 위에 눕혔다. 모용쟁은 잠자코 그가 하는 대로 몸을 내맡겼다. 구양봉이 손가락을 펴서 모용쟁의 혈도를 찌르려 했다. 모용쟁은 비로소 그를 제지했다.
"난쟁이도 이 짓거리를 하고 그 녀석도 이 짓거리를 하더니 당신까지 이러는군요."
모용쟁은 차분히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녀의 말에 구양봉은 주춤 손을 멈추었다.
"이봐요, 날 좋아하세요? 어서 말씀하세요."
구양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하신다면 마음대로 하세요. 내 혈도를 찌르지 않아도 돼요. 이 몸은 당신 거니까 마음대로 하세요."
구양봉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미 끓어오르는 욕망으로 반쯤 미칠 지경이 돼 있었다.
"절 다시 안아서 편히 눕혀 주세요. 그리고 천천히, 가볍게 다루어 주세요, 난 당신이……."
구양봉의 입술이 모용쟁의 입술을 덮쳐 눌렀다. 모용쟁은 경련을 일으키듯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그녀는 격렬한 흥분을 느끼며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구양봉은 모용쟁의 부탁대로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다루었다. 모용쟁의 몸매는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답고 황홀했다. 난쟁이의 대청에서 궤짝 안에 앉아 있는 그녀의 알몸을 보았었지만, 지금 침대 위에 조용히 누워 있는 모용쟁을 바라보는 기분은 그에 비길 바가 아니었다. 구양봉은 모용쟁의 입술을 더듬으면서 두 손으로는 앞가슴을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그는 한 손으로 모용쟁의 등을 받쳐
웃옷을 벗겨 낸 뒤 서둘러 아랫도리마저 벗겨 냈다. 구양봉은 너무나 황홀하여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그저 멍청하니 모용쟁의 알몸을 뚫어지게 응시할 뿐이었다.
갑자기 멍청해진 구양봉을 올려다보던 모용쟁은 그만 발끈 화를 냈다.
"바보처럼 왜 보기만 해요? 당신도 빛 좋은 개살구, 남자 구실을 못하는 남자인가요?"
"그녀의 말에 구양봉의 피는 다시 들끓기 시작했다. 그는 거친 숨을 내뿜으며 탐욕스럽게 모용쟁의 몸을 탐하기 시작했다.
달빛 아래서 구양적은 백면라살을 정감 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의 손은 그녀의 어깨와 등허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피부의 감촉이 손을 통해 온몸에 전해졌다.
"두 사람이 오늘 밤에 어떻게……."
백면라살은 말문을 열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모르겠다,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해. 내가 네 아우에게 그런 말을 했더니 내심으로는 매우 기뻐하는 것 같았어. 겉으로는 시치미를 떼더라만 마음은 그렇지가 않은 눈치야……."
구양적은 이 말을 듣고도 묵묵부답이었다.
백면라살은 구양적의 불쾌한 눈치를 알아차리고 말머리를 돌렸다.
"적아, 어서 말해 봐. 넌 날 좋아하느냐?"
백면라살은 자기의 머리칼로 구양적을 애무해 주며 유심히 표정을 살폈다.
구양적이 고개를 끄덕이자 백면라살이 또 물었다.
"적아, 난 너한테 시집갈란다. 나를 아내로 맞아들이지 않겠니? 만일 네가 나를 아내로 맞아들이면 난 계속 이 세상에서 살겠어. 우리 함께 강남 땅에 가서 깨끗하고 조용한 고장에 자리잡고 살자꾸나. 밥짓고 길쌈하면서 오붓한 살림을 꾸리자꾸나. 만일 네가 거절한다면 난 너를 죽여서 얼음 동굴 속에 넣어 두겠다. 그리고 나도 따라죽겠어. 그럼 우리 둘이 얼음 동굴 안에서 영원히 살수
있지 않겠니?"
"좋습니다. 사부님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구양적은 웃으며 대답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달은 여전히 밝고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구양봉과 모용쟁은 이윽고 뜨거운 격정에서 벗어났다. 모용쟁이 손을 구양봉의 어깨에 걸쳤다. 그녀는 몹시 피곤하고 졸렸다. 그녀는 난생 처음으로 남자를 경험했다. 사내의 거칠음과 사내의 부드러운 정을 처음으로 동시에 맛보았다.
그녀의 온몸은 땀에 흠씬 젖었고 삼단 같은 머리는 침대맡에 드리워졌다. 그녀의 두 눈은 전에 없이 반짝였고 얼굴은 온통 흥분과 만족감으로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구양봉은 더없이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에 가벼운 입맞춤을 하고 몸을 일으켰다.
모용쟁이 부드럽게 그의 팔을 잡으며 조용히 말했다.
"그 사람이 나에게 당신을 찾아가라고 했어요. ……우리가 왜 그들을 신경 써야 해요? ……그들도 우리처럼 함께 있을 거예요. 정 가려면 날이 밝아서 가도 돼요. 날 더 안아줘요……."
모용쟁은 두 눈을 살포시 내리감고 구양봉의 애무를 기다렸다.
구양봉은 물끄러미 모용쟁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아무래도 안 되겠는지 모용쟁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부랴부랴 옷을 주워 입고 밖으로 나갔다.
모용쟁은 그의 뒷모습에 섭섭한 눈길을 주다가 자기도 옷을 입기 시작했다.
구양봉은 형의 방 앞에 이르렀다. 형과 솔직히 터놓고 이야기해 보고 싶었다. 그러나 방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구양봉은 당황해서 급히 모용쟁을 불렀다.
둘은 부랴부랴 얼음 동굴로 향했다.
동굴 속에 들어온 두 사람은 형과 백면라살을 소리쳐 부르기 시작했다.
"형님―! 선배님―!"
구양봉의 목소리가 동굴 속에서 메아리쳤다. 거듭 불렀으나 역시 대답이 없었다.
구양봉은 모든 것을 알 것 같았다. 형도 떠났고 백면라살 수라아도 떠나 버렸다. 그들 둘은 다시는 이곳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었다. 아마 그들은 살 만한 고장을 찾아가 함께 살림을 꾸리면서 잘 살아갈 것이다.
모용쟁은 몸이 오싹해지며 추워졌다. 무슨 영문일까? 방금 전에 구양봉과 땀을 흘리면서 살을 섞고 난 뒤로는 어쩐지 조금만 추워도 몸이 오싹해졌다. 그녀는 어지간한 추위에는 추운 줄을 모르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얼음 동굴 속에서 그녀는 잠시도 지체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몸을 오돌오돌 떨면서 말했다.
"이봐요, 그만 나갔으면 좋겠어요. 더는 못 견디겠어요. 난…… 난 추워서 죽겠다구요……."
구양봉은 그녀를 품에 안고 몸을 날려 동굴에서 빠져 나왔다.



제29장 대사막의 주인
구양봉과 모용쟁은 구양 가문의 옛집으로 돌아왔다. 백타산장의 난쟁이 임일천이 찾아와 시끄럽게 굴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산 위의 돌집에서 기거할 수는 없었다. 구양적이 없어선지 집은 전보다 훨씬 썰렁했다.
백타산장은 아주 평온한 것 같았다. 저번의 큰불로 피해가 적지 않았을 텐데, 멀리서 보면 백타산장은 여전히 그 면모를 잃지 않고 있었다. 산장 주변의 촌락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침이면 밭에 나가 일하고 저녁이면 쟁기를 메고 돌아와 밥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것을 멀리서도 바라볼 수 있었다. 이처럼 평화로운 것으로 보아 난쟁이 임일천이 구양봉에게 복수하려고 찾아다닐 것
같지는 않았다.
그날 밤, 얼음 동굴에서 돌아온 구양봉과 모용쟁은 구씨 할멈과 가시를 불러서 구양적과 백면라살의 행방을 물었으나 둘 다 우물거리며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사부님과 먼 곳으로 떠나신다며 다시 만나기 어려울 거라고……."
가시가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두 분이 행복하게 사시길 바란다고만 전해 달라셨어요."
"어디로 가신다는 말씀은 전혀 없으셨고?"
구양봉이 묻자 계집애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눈물을 훔쳐냈다.
구양봉도 더 따져 묻지는 않았다. 자기가 형수와 살을 섞었으니 형을 대할 면목도 없었다. 이 점을 생각하면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몰랐다.
그와 모용쟁은 밤마다 한 몸으로 뒤엉켜 정신없이 서로의 몸을 탐했다. 두 사람의 욕정은 채워도 채워도 수그러들 것 같지가 않았다.
"당신이 살아 돌아와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정사가 끝나자 모용쟁이 아직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목소리로 나른하게 말했다. 그녀는 구양봉의 품에 안긴 채 그의 가슴을 어루만지다가 옆구리를 꾹 찔러 보기도 하고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간지럼을 태우기도 하며 교태를 부렸다. 남녀간의 정사란 그 재미와 낙이 이처럼 끝이 없었다.
그녀는 밤이 되면 언제나 열망에 가득 찬 눈길로 구양봉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마치 구양봉의 온몸을 통째로 집어삼켜 완전히 제것으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릴 듯한 눈길이었다. 어떤 날은 일이 끌난 후에 눈물을 주루룩 흘리기도 했는데 아마도 그 눈물은 기쁨의 눈물일 것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가슴속에는 그에 대한 정이 점점 깊어 갔다.
하지만 구양봉은 모용쟁과는 달랐다. 일단 정사가 끝나 조용히 침대에 눕기만 하면 그의 머리 속은 온통 형 생각으로 가득 찼다.
'형은 백면라살과 행복할까? 이곳을 떠나서 자그마한 초가 농가라도 마련했을까?'
정말 형은 밭에 나가고 백면라살은 길쌈하면서 깨끗하고 조용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그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구양봉과 모용쟁이 함께 살게 된 지도 어느새 여러 날이 지났다.
어느 날 정오 무렵, 구씨 할멈이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 오고 가시는 부엌에서 식탁에 올릴 생선을 손질하는 등 허드렛일을 하고 있었다. 둘은 일을 하면서 웃고 떠들어댔다.
구양봉과 모용쟁도 밖안에서 한가로이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서로 말을 주고받다 보니 둘이 사막에서 지내던 옛이야기가 나왔다. 두 사람은 모용쟁이 구양봉을 냉대하다 못해 오랏줄로 묶어 놓기도 하고 모래를 뿌려 눈을 못 뜨게 만들던 이야기들을 하며 박장대소를 했다.
"우리 사이가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눈에다 모래를 던지진 않았을 거예요."
"그렇게 괄시를 했으니까 이런 사이가 됐지. 그게 다 연분이라는거야."
둘이 한창 재미있게 말을 주고 받는데 갑자기 부엌에서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려 왔다. 목소리의 임자는 가시가 분명했고 무슨 큰 일이라도 난 듯했다. 구양봉의 얼굴에 긴장의 빛이 스쳤다. 재빨리 주방으로 달려간 그는 구씨 할멈과 가시를 보고 깜짝 놀랐다.
할멈의 두 손은 마치 먹물에 담갔다가 꺼내기라도 한 듯 손끝부터 팔꿈치까지 시커맸는데 두 팔은 시커멓다 못해 윤이 반지르르 돌았다. 그 검은 색 나는 칠은 괴상하게도 아무리 해도 지워지지를 않았다. 할멈은 몹시 아픈 모양이었다. 그는 뻘겋게 핏발선 눈을 하고 연신 비명을 지르며 이빨로 혓바닥을 마구 깨물어 댔다. 얼마나 지독하게 깨물어 댔는지 혓바닥이 절반이나 끊어져 입가에서
덜렁거렸다. 그는 가시를 보더니 와락 덮쳐 들었다. 가시는 찢어질 듯 비명을 지르며 피해 도망쳤다.
구씨 할멈은 구양봉이 들어서자 가시를 내버려두고 미친 듯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무방비 상태이던 구양봉은 얼결에 구씨 할멈한테 두 팔을 잡혔다. 힘이 어찌나 대단한지 할멈의 손에 잡힌 두 팔에 통증이 엄습해 왔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할멈의 손이 닿은 팔소매 부분이 어느새 썩어 너덜너덜 조각이 나고 있었다. 소맷자락은 물론 할멈의 손이 조금만 스치기만 하면 천들은 여지없이 썩어
문드러지는 것이었다.
구양봉이 놀라 소리쳤다.
"할멈, 나야! 나, 둘째 도련님이야!"
구씨 할멈은 도무지 누가 누군지조차 분간이 안 되는 눈치였다. 물에 빠진 놈처럼 구양봉의 두 팔을 거머쥐고는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구양봉은 기를 모아 할멈을 떼어 버리려고 했다. 그러자 할멈의 두 손에서 시커먼 살점들이 뭉팅뭉팅 일어나더니 주르륵 땅바닥에 떨어지는 게 아닌가? 순식간에 할멈의 팔과 손은 앙상한 뼈만 남았다. 이 소름이 끼치는 광경을 보며 비명을 질러 대던 가시
는 곧 기절해 쓰러지고 말았다.
구양봉이 달려가 할멈을 부축하려 하자 할멈은 소리도 내지 않고 썩은 나무토막처럼 쿵 하고 넘어져 버렸다. 뒤늦게 달려나온 모용쟁도 이 무서운 광경을 보고는 공포에 질려 소리쳤다.
"이봐요, 그…… 그 팔이……."
구양봉이 자기 팔을 내려다보니 할멈이 쥐었던 팔뚝에 검은 줄이 가득했다. 그제야 구양봉은 아픔을 느끼기 시작했다. 구양봉은 이렇게 강한 독을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다. 이 독성은 난쟁이 임일천의 뱀 상자 속에 갇힌 독사의 그것보다 더 독했다. 살에 닿기만 하면 살이 다 문드러져서 뼈밖에 남지 않는 것이다.
"조심해요, 중독된 것 같아요!"
모용쟁이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구양봉은 가슴이 섬뜩했다. 자기의 합마공으로 이 극독을 이겨 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가 모용쟁에게 말했다.
"당신은 거기 꼼짝 말고 있어요. 이 주방에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구양봉은 말하다 말고 가시에게로 눈길을 주었다. 계집애가 히죽히죽 웃으며 몸을 일으키더니 주방에서 빙빙 맴을 도는 게 아닌가? 계집애는 걸으면서 히죽거리며 중얼거렸다.
"둘째 도련님, 큰마님! 날 보세요, 날보라구요."
그녀는 음탕한 눈길로 구양봉을 바라보았다.
"둘째 도련님과 큰도련님께서는 소녀를 좋아하시지요? 그런데 진지 드실 때만 소녀를 곁눈질해 보시더군요. 그러니까 배고플 때만 소녀를 생각하고 배부를 때는 소녀를 까마득하게 잊어버리시나부죠? 둘째 도련님, 좀 봐 주세요. 이 소녀의 몸매도 날씬하지 않나요?"
그녀는 계속해서 구양봉에게 추파를 던지더니 누가 보거나 말거나 옷을 활활 벗어 던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느 틈에 속곳마저 홀딱 벗어 버린 알몸이 되었다.
문어귀에 서서 이 광경을 지켜 모용쟁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이봐요, 그 계집애를 그냥 두면 어떡해요!"
구양봉은 멀리서 기합을 주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는 두 손가락에 힘을 넣어 가시 계집애의 전중(壇中), 기해(氣海) 두 대혈을 찔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계집애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여전히 알몸동이를 배배 꼬면서 구양봉에게 다가들었다.
크게 놀란 구양봉은 한 손에 합마공을 넣어 가시를 밀어내려고 했다. 그러자 계집애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는데 눈물이 아니라 붉은 피눈물이었다. 이어서 계집애의 칠규에서도 피가 흐르더니 온몸이 삽시에 한 무더기의 핏덩이가 되어 무너져 내렸다. 주방은 어느새 질펀한 피바다가 되었다.
모용쟁은 너무나 놀란 나머지 비명을 지르며 구양봉에게로 달려갔다. 구양봉은 얼른 한 손바닥을 펼쳐 들어 모용쟁을 멈춰 세웠다.
"움직이지 마!"
구양봉의 외침 소리와 함께 모용쟁은 주술에 걸린 듯 자리에 멈춰 섰다.
"사자우, 냉큼 나오너라!"
구양봉이 큰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곧 코흘리개 어린애의 목소리가 대꾸해 왔다.
"하하, 네가 어떻게 이 어르신이 오신 줄 알았느냐? 구양봉, 노독물이 죽은 후 우리 유운장의 주인이 누군 줄 아느냐?"
구양봉은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쳤다.
"사자우, 이 놈아, 냉큼 나서라! 쥐새끼처럼 숨어 다니면서 독을 뿌리다니, 이 무슨 졸렬한 짓이냐?"
아이의 목소리가 다시 대꾸했다.
"구양봉, 네 놈은 이제 끝장이다. 내가 뿌린 독약이 무슨 독약인지 알기나 해?"
"네가 할멈한테 쓴 극약은 '흑사우(黑絲雨)'라는 거다. 이 독에 닿기만 하면 피부가 먼저 시커멓게 되고 두 눈이 시뻘개져서 보이는 것마다 닥치는 대로 삼키고 물어 뜯으려 하지. 중독이 되어 조금만 지나면 살점이 몽땅 썩어문드러지고. 이 독약에 중독된 제일 뚜렷한 증세는 중독자가 자기의 혓바닥을 물어 끊는 것이다. 네 놈이 가시 계집애한테 쓴 것은 '여인미(女人媚)'란 것으로, 이 독
약은 미약(媚藥)이자 극독이기도 하다. 여자들이 이 독약에 중독되면 음탕한 생각이 일게 되고, 사내와 교합을 하면 그 독성을 얼마간 없앨 수 있지만 이런 계집과 살을 섞은 사내는 영락없이 죽어 버리지. 내 말이 틀린가?"
"구양봉, 과연 노독물의 수제자답구나. 하지만 넌 이미 흑사우에 중독되었으니 너한테 합마공이 있다 해도 그걸 써서 독을 몰아 낼 순 없을 거다. 그러니 네 놈이 어찌 나한테 손을 댈 수 있겠느냐?"
양봉은 흠칫 놀랐다. 이때 코맹맹이 웃음소리가 들려 오더니 창살이 와지끈 부서졌다. 이윽고 창에 검은 그림자가 어른대더니 사람 하나가 뛰어들었다. 역시 짐작대로 유운장의 사숙이었다.
구양봉이 차갑게 웃으며 물었다.
"사숙, 당신 패거리들은 어쩌고 혼자 왔소? 여러 사형들은 모두 어딜 간 거요?"
사자우가 대꾸했다.
"모두 어딜 갔냐구? 글쎄? 유운장의 무리 중에서 누가 제일 악인이냐? 네가 잘 모르면 알려 주지. 제갈정도 악인이야. 그자는 사람을 죽일 때 먼저 스스로 관을 갖추고 무덤도 파놓으라고 협박할 정도지. 하지만 이 정도는 약과야. 속문성은 한술 더 뜨지. 이 자는 앞에서는 해죽거리면서 뒤로 음흉을 떨지. 이런 악질 두 놈과 자네의 사숙이신 이 어르신이 어찌 손을 잡을 수 있겠나? 이 두
놈과 일을 도모한다는 건 그야말로 늑대와 고기 흥정을 하고 호랑이와 한 방에서 자는 것과 다름이 없지."
구양봉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제갈정과 속문성을 이렇게 욕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그들과 사이가 벌어져 있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 내막을 어찌 알겠는가?
"예쁜데? 정말 예쁜데? 낭자, 그 정도 얼굴이면 유운장의 색시노릇을 얼마든지 할 수 있겠어. 정말이야. 한데 낭자는 왜 하필이면 구양봉 같은 놈팽이한테 들러붙었나? 저 자식은 좋은 놈이 아냐. 내 흑사우에 중독됐으니 죽을 시각도 머지 않았어. 설사 뒈지지 않는다 해도 양쪽 팔엔 살점 하나 붙어 있지 않을 텐데, 생각만해도 몸서리쳐지지 않나? 이 세상의 사내와 계집들이 그 짓거리를
할 때 제일 많이 쓰는 것이 뭐야?"
모용쟁은 열두어 살 정도밖에 돼 보이지 않는 사숙이라는 자가 어른 흉내를 내고 몹쓸 소리를 지껄여 대는 것이 놀랍고도 의아했다. 모용쟁이 말없이 쳐다보기만 하자 그는 계속해서 지껄여댔 다.
"이 낭잔 얼굴은 쓸 만한데 머리는 아둔한 모양일세? 그럼 하는 수 없이 이 어르신이 가르쳐 드려야겠구만. 제일 많이 쓰는 건 다른 게 아니라 바로 이 손이란 말이야. 생각해 보라구. 사람들이 사내와 계집 사이의 정사를 입에 올릴 때 어떤 말을 제일 많이 쓰던가? 애무한다, 그러지 않던가? 애무라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어루만지고 쓰다듬는 행위지. 그런데, 애무하는 데 손이 없어서야
되겠나? 손이 없는 자는 귀신과 같지. 낭자가 깊은 밤중에 피가 끓어 사내하고 그 짓거리를 몹시 하고 싶어 한다구 치자. 촛불을 밝혀 놓고 휘장을 드리우고 두 연놈이 엉키는 순간 불쑥 손이 건너왔다고 하자. 뼈만 남은 앙상한 손을 보고 기분이 어떻겠나? 아마 낭자는 놀라 까무러칠 것이야. 재미를 보기는커녕 자칫하다간 놀라서 황천객이 될걸? 그 예쁜 얼굴을 가지고 저 놈과 붙어 있을
게 아니라 숫제 날 따라가는 게 낫지 않을까?"
모용쟁은 그의 말에 무서운 생각이 드는 한편 어이가 없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쬐끄만 녀석이 벌써 이렇게 계집을 밝히다니 웃기는 일이었다.
아이는 이제 구양봉을 향해 말했다.
"구양봉, 해독제가 몹시 필요할 텐데, 내가 너의 대혈 세 곳을 찌를 때까지 가만 있으면 주겠다. 그게 싫다면 오늘 난 너를 죽여 버리는 수밖에 없고!"
구양봉은 자기 팔에 찍힌 검은 자국을 보며 치를 떨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나한테 시간이 조금만 있어도 이만한 독상 정도는 거뜬히 치료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저자가 절대 틈을 줄 리가 없지. 만일 내가 저자와 맞붙는다 해도 저자는 슬슬 몸을 피하면서 시간을 끌다가 내 홈에서 독성이 크게 발작할 때에야 본때를 보이려 할 것이야. 비열한 놈 같으니…….'
사숙은 구양봉의 속마음을 알아채고 깔깔 웃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난 다 알아. 이 어르신을 대처할 궁리를 했지? 안 그런가? 내 계획을 속시원히 알려 주지. 네가 달려들면 난 도망치고 네가 잠자코 있으면 다시 내가 덤벼들 생각이야. 이렇게 시간을 끌면서 난 두 가지를 기다리지. 첫째는 네가 죽기를 기다렸다가 화공대법(化功大法)을 써서 네 몸에 지닌 노독물의 60년 공력을 내 몸에 옮겨 오는 것이고, 둘째는 네가 죽기를
기다렸다가 너의 이 예쁘장한 색시를 내 집으로 데려가는 것이다. 야밤 삼경에 이 어르신의 차가워진 두 발을 네 색시의 따끈한 품속에 찔러 넣겠단 말이다."
구양봉은 화가 났다. 자기를 모욕하는 것은 참을 수 있었으나 모용쟁을 모욕하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악에 받쳐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
'내가 악해지지 않으면 남들은 내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아 똥을 싸려 하는구나. 난 바보다. 남의 수모를 받고만 있으니. 난 네 놈을 꼭 죽여 버리고야 말 테다…….'
구양봉은 이를 갈며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사숙은 뒤로 멀찍이 물러섰다.
"구양봉, 다가서지 말아라. 네가 다가오면 난 도망치겠어. 내가 멀리 도망치면 누가 너한테 해독제를 주겠나?"
구양봉은 멈춰 섰다.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모용쟁은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사숙과 결판을 낼 생각으로 장검을 뽑아 들었다.
구양봉이 소리쳤다.
"움직이지 마! 저 놈한텐 온통 독이 묻어 있소. 임자가 싸운다면 죽는 길밖엔 없소!"
모용쟁은 주춤 멈춰 섰다. 구양봉의 말을 듣고 나니 어찌해야 좋을지 막막해졌다.
사숙이 이죽거렸다.
"과연 의좋은 부부로구만. 하지만 네가 네 색시한테 다정하게 굴면 굴수록 이 어르신은 화가 난단 말이야. 난 네 놈을 죽여 버리고 네 색시를 빼앗고야 말겠어."
그와 실랑이하는 동안 구씨 할멈한테 잡혔던 구양봉의 팔뚝은 점점 더 새까매지면서 살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이렇게 방치해 뒀다가는 머지않아 온몸으로 퍼질 것이다. 구양봉은 생각할수록 악이 받쳤다.
몸이 그 지경인 형편에 상대를 죽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구양봉은 천천히 앉아서 사숙을 건너다보며 말했다.
"사숙, 내가 합마공으로 상처를 치료하겠으니 나를 건드리지 마오!"
말을 마친 구양봉은 한 손을 하늘로 뻗쳐 해와 달의 정기를 끌어온 다음 두 손을 합장하여 음과 양이 교합되게 한 후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사숙은 눈알을 굴리면서 생각했다.
'합마공이 기이한 술법이라고는 하나 눈을 감고 내시(內視)하면서 상대방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말은 못 들어 봤어. 상대방이 옆에서 빙빙 돌면서 호시탐탐 노리는데 저렇게 눈을 감고 내시만 하면서 상처를 치료하고 있으니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게 아니고 뭐야?'
하지만 구양봉한테 호되게 당한 적이 있는 그는 감히 손을 쓰지는 못하고 살금살금 다가가면서 으름장을 놓았다.
"나는 널 죽여야겠다. 계속 그러구 있을 테냐? 이제는 손을 써야겠다!"
그러나 구양봉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여전한 자세로 묵묵히 앉아 있었다.
사숙은 마치 한 마리의 여우가 함정에 빠진 토끼를 잡아먹자니 함정이 무섭고 내버리고 가자니 아쉬워하는 것처럼 구양봉 주위를 세 바퀴나 돌았다.
"구양봉, 내가 날쌘 고양이가 쥐를 덮치듯이 네 천령혈(天靈穴)을 치면 네 놈은 끝장이야. 그리고 참, 내가 소군출색(昭君出塞) 수법으로 네 놈의 앞가슴에 있는 귀음(歸陰), 유혼(游魂), 흑호(黑虎), 혈저(血阻), 참명(斬命), 촉명(捉命) 이 여섯 개 대혈을 찔러 버리면 네 놈의 목숨이 그냥 붙어 있을까? 그리고 네 놈의 뒤통수에……."
그는 이렇게 떠벌리면서 구양봉의 등뒤에 가 섰다. 그는 식지와 중지를 한데 모아 구양봉의 등허리를 겨냥했다. 그가 손가락을 내찌르기만 하면 구양봉은 그대로 송장이 될 판이었다. 그러나 그는 워낙 천성적으로 의심이 많은데다가 구양봉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낼 수가 없어 감히 앞으로 내찌르지 못했다. 그는 구양봉이 노독물의 수제자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노독물은 한평생 매사
에 조심스러웠고 섣불리 모험을 하지 않았다. 이런 스승 밑에서 무예를 익힌 구양봉이 어찌 손쉽게 제 목숨을 빼앗아 가도록 아무런 수도 쓰지 않고 가만히 있기만 하겠는가?
'이 놈이 무슨 놀라운 술수를 쓰려고 이렇게 능청을 부릴 수도 있어. 멋모르고 함부로 대했다가 송장이 되는 건 구양봉이 아니라 나일지도 몰라.'
가부좌를 틀고 땅바닥에 앉은 구양봉은 두 다리에 힘을 주며 지기(地氣)가 미려혈(尾閻穴)로 들어와 중추를 거치고 두 어깨를 지나 수소음심맥(手少陰心脈)에까지 뻗치게 함으로써 합마공을 두 팔에 집중시켰다. 어느새 두 팔은 수천 수백 근의 물건을 들기나 한 듯 무거워져서 위로 쳐들기도 힘들 지경이 되었다. 구양봉은 갑자기 머리를 번쩍 쳐들더니 두 눈을 부릅뜨고 하늘을 쏘아보았다.
그의 입에서는 꾸르륵 괴상한 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구양봉이 두꺼비 울음 소리를 내자 사숙은 깜짝 놀랐다. 그는 봉황력 신법을 써서 훌쩍 몸을 날려 한쪽으로 비켜섰다.
과연 구양봉은 몸에 상처를 입기는 했으나 여전히 대단한 공력을 지니고 있었다. 만일 손을 썼더라면 사숙은 이미 황천객이 되었을 것이다.
구양봉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더니 사숙을 바라보며 미친 듯이 웃어대기 시작했다. 득의양양해진 그의 몸이 웃음 소리와 함께 마구 앞뒤로 흔들거렸다.
"웃긴 왜 웃어?"
사숙이 묻자 구양봉이 대답했다.
"네 놈이 너무나 둔해서 웃었다. 그렇게 야들하니까 키도 자라지 못하고 철도 들지 못하는 게야. 또, 그렇게 야들하니까 우리 사부님도 이기지 못했던 거구. 네 놈은 정말 바보 중의 바보다. 이걸 보아라."
구양봉이 한 손을 쭉 뻗치자 시커먼 피가 통리(通里)를 지나 음극(陰隙), 신문(神門), 소부(少府), 소충(少沛)을 거쳐서 손가락끝에서부터 마구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구양봉은 바로 이렇게 왼손으로부터 시작하여 나중에는 오른손까지 검은 독혈(毒血)을 몽땅 빼 버렸다. 일이 다 끝나자 구양봉은 빙그레 웃으면서 사숙을 건너다봤다.
사자우는 확실히 철부지 어린애였다. 그는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입에 물고 자근자근 씹으면서 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 구양봉을 멍청히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는 왼손으로 제 머리를 쥐어박으면서 탄식조로 중얼거렸다.
"바보, 넌 정말 바보다! 넌 왜 저 놈이 저런 수작을 피우는 걸 미처 생각을 못했어? 네가 저 놈의 대가리만……."
그는 구양봉의 머리를 후려갈기는 시늉을 했다.
"이렇게 후려치기만 했으면 대가리가 묵사발이 됐을 거고, 대혈만 찔러 놓아도 저 놈은 죽으려 해도 죽지 못하고 살려 해도 살지 못하는 꼴이 되었을 텐데……."
사자우는 이번에는 두 손으로 자기 머리를 마구 때리면서 발까지 동동 굴렀다. 그는 응석을 부리는 아이처럼 울어대기 시작했다.
"사자우, 넌 정말 바보, 백치, 얼간이야! 구양봉을 없애 치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쳤어……."
그는 생각할수록 울화가 터져 미칠 지경인 것 같았다.
"이 놈아, 운다고 일이 해결되냐?"
구양봉이 큰소리로 나무랐다. 사자우는 울음을 뚝 그치더니 눈을 둥그렇게 뜨며 물었다.
"울지 말라구?"
"널 죽여서 사부님을 위해 원수를 갚겠다. 그때 울어도 늦지는 않을 거다."
구양봉은 이렇게 대꾸하고 사자우에게로 다가섰다. 그러자 사자우가 다급히 외쳐 댔다.
"이 개새끼 같은 놈, 이 난쟁이 놈아! 왜 아직도 나서지 않느냐?"
사자우는 이렇게 욕을 하면서 꽁무니를 빼기 시작했다. 구양봉은 얼른 몸을 날려 문어귀를 막아서다가 그림자 하나를 발견했다.
사자우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문 앞에는 정말 난쟁이가 있었다. 틀림없는 백타산의 주인인 임일천이었다. 임일천은 사자우가 왜 토끼 새끼마냥 허겁지겁 달려오는지 미처 깨닫지 못하다가 구양봉의 모습이 시야를 막자 눈을 크게 떴다.
임일천은 자그마한 수레에 앉아 있었다. 그는 구양봉을 보면서 호통을 쳤다.
"구양봉, 네가 사람을 업신여겨도 분수가 있지, 행동이 너무 지나쳤더구나! 내 보물을 빼앗아 간 것까진 좋다. 그런데 남의 산장에 불을 지르는 심보는 뭐냐? 네 놈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지 못하는 게 한스럽다!"
구양봉도 난쟁이를 보니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언제나 이 난쟁이가 화근이었다. 형을 못살게 굴어 이 고장을 떠나게 했고, 다시 돌아오니 이번엔 모용쟁을 붙잡아 갔었다.
'오늘 내가 네 놈을 요절내지 못한다면 손가락에 장을 지지겠다!'
그는 꼭 이 난쟁이 임일천을 죽여 버리고야 말겠다는 생각으로 꼬마 사숙이 달아나는 데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임일천이 말을 건네 왔다.
"구양봉, 오늘 내가 널 찾아온 건 다름이 아니라 너하고 내기를 하고 싶어서다. 응할 맘이 있느냐?"
"무슨 수작을 피우려는지 어서 말해라!"
난쟁이가 거드름을 피우면서 대꾸했다.
"나한테 독사대진(毒蛇大陣)이 있는데……."
구양봉이 가로챘다.
"그 따위로는 어림도 없다. 왜 또 그 따위를 가지고 성가시게 굴어?"
"이걸 봐라."
난쟁이는 웃으면서 손을 들어 보였다. 뜻밖에도 자그마한 실뱀 두 마리가 난쟁이의 손가락들을 친친 감고 있는데 까맣고 반지르르 한 게 냉큼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본 구양봉은 깜짝 놀랐다. 그것은 서역 대사막의 괴상한 뱀으로 몸뚱이에 비해 대가리가 좀 크고 몸은 철사처럼 굳세어 칼로 베고 검으로 찍어도 끄떡없는 무서운 뱀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뱀은 극독을 가지고 있어 아름드리 거목이라도 이 뱀한테 물리기만 하면 하루도 못 가 시들어 죽고 만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 뱀한테 물려 혈관의 피가 한바퀴만 돌면 그 즉시 죽
어 버린다.
구양봉은 난쟁이의 손에 이처럼 무서운 뱀이 두 마리나 있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난쟁이는 구양봉의 기색을 훔쳐보고는 더욱 우쭐거렸다.
"네가 이 뱀한테 물려서 당장 죽지 않으면 내가 네 앞에서 목을 따겠다. 물론 백 타산장도 너한테 물려주고 서역 대사막의 주인 자리도 너한테 넘겨주겠다. 만약 네가 지면 이 서역 땅을 떠나 중원으로 가라. 다시는 대사막에 돌아오지 말도록 해라. 이런 내기를 하겠느냐?"
구양봉은 속으로 코방귀를 뀌었다.
'내가 왜 이곳을 떠난단 말이냐? 이곳을 떠나야 할 사람은 네놈이지 내가 아니다.'
구양봉은 큰소리로 대답했다.
"좋다, 내기를 하겠다!"
구양봉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임일천은 들고 있던 뱀을 홱 뿌렸다. 그러자 괴상하게 생긴 실뱀 한 마리가 구양봉의 얼굴을 향해 몸뚱이를 곧게 편 채 화살처럼 날아왔다. 구양봉은 날쌔게 두 손가락으로 뱀 대가리를 잡았다. 하지만 뱀은 대가리를 잡히고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꼬리로 마구 구양봉의 뺨을 후려갈겼다. 구양봉은 마치 무쇠로 만든 채찍에 얻어맞기라도 한 듯 몹시 아팠
다. 화가 난 구양봉이 손가락에 힘을 주자 뱀은 더는 몸부림치지 못하고 얌전해졌다.
"임일천, 이제 어떻게 하란 말이냐?"
구양봉이 묻자 난쟁이가 대답했다.
"그 뱀을 네 팔에 놓아라. 뱀에게 네 팔을 한 번 물게 한 뒤 그 자리에 앉아라. 누가 더 중독되는가 겨뤄 보자. 만일 네가 독을 덜 타면 난 네가 하라는 대로 하겠다."
"좋다!"
구양봉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난쟁이도 더는 말이 없었다. 난쟁이의 손에도 뱀 한 마리가 있었다. 그는 잠시 후 구양봉을 건너다보며 말했다.
"그만두고 싶으면 말해라. 지금이라도 늦지는 않아. 이 뱀들은 전번에 네가 뱀 상자 안에서 본 그 따위 독사들과는 다르다. 이 뱀들은 하늘의 신선을 보아도 무서워하지 않아. 아마 네가 나한테 용서를 비는 쪽이 나을 게다. 뱀한테 물려 다 죽게 되었을 때 후회해 봤자 아무 소용 없으니까."
구양봉은 빙그레 웃을 뿐 대꾸를 안 했다.
구양봉은 뱀을 머리 위로 치켜 올려 난쟁이가 똑똑히 볼 수 있도록 한 후에 뱀을 팔뚝 위에 올려 놓았다. 뱀은 다른 뱀들과는 달리 팔뚝 위에 올려 놓자 반응이 없더니 한참 후에야 가볍게 물었다.
뱀을 내려다보던 구양봉은 자기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가볍게 한 번 물었을 뿐인데 삽시에 온몸이 떨려 오기 시작했다.
'대단히 지독한 뱀이로구나! 과연 견뎌 낼 수 있을까?'
그는 난쟁이에게 재촉했다.
"뭐하고 있느냐? 난 이미 말대로 했으니 너도 빨리 실행해라!"
"좋다, 내가 너한테 질 것 같으냐?"
난쟁이도 뱀을 자기의 팔뚝에 올려 놓았다. 뱀한테 물리자 난쟁이 역시 한참 동안 몸을 오돌오돌 떨었다.
"구양봉, 어디 견뎌 보아라!"
난쟁이가 이렇게 말했으나 구양봉은 대꾸를 안 했다. 둘은 모두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땅바닥에 앉기가 무섭게 난쟁이는 해독약을 꺼내 슬쩍 입 안에 집어 넣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모용쟁에게 놀리듯 말했다.
"모용 낭자, 아마 이번에도 날 따라가야 할걸? 한데 낭잔 구양적한테 시집을 가고서도 왜 구양봉과 붙어 살아? 낭잔 하루라도 사내가 없으면 못 견디나 보지?"
모용쟁이 검으로 찌르려 하자 난쟁이가 엄하게 소리쳤다.
"모용 낭자, 낭자가 함부로 날뛰면 난 구양봉일 죽여 버리겠어. 그래도 후회 안 하겠어?"
모용쟁은 구양봉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구양봉의 머리에서 열기같은 것이 몽실몽실 피어 오르고 있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자세로 보아 합마공으로 뱀 독을 몰아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구양봉이 독을 쉽사리 몰아낼 수 있을까? 만일 독을 몰아내는 게 그리 쉽지 않다면 내가 손을 써야 할 텐데……? 내가 난쟁이를 당해 내지 못하면 구양봉은 이 난쟁이의 손에 영락없이 죽고 말거야.'
모용쟁은 이 궁리 저 궁리로 속이 타는 듯했다.
이때 난쟁이가 깔깔대며 일어나더니 구양봉의 기색을 살펴보고 또 뱀한테 물린 팔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는 나름대로 뭔가를 확인한 듯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끝장을 봤구만. 이번엔 참말로 끝장을 봤어. 모용 낭자, 임자는 서방님께서 죽어 가는데도 손을 쓰지 않는가?"
모용쟁은 검을 으스러지게 거머쥐었다. 이처럼 방자하게 자기를 모욕하는 난쟁이를 당장이라도 찔러 죽일 수만 있다면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임일천이 모용쟁의 거동을 지켜 뇌까렸다.
"구양봉이 죽게 됐고 구양적은 떠나 버렸는데 너 같은 일개 아녀자가 무슨 용 빼는 재주가 있겠느냐? 네가 감히 이 어른한테 덤벼들기만 하면 당장 죽여 버릴 테다!"
모용쟁이 격노하여 검을 치켜 들고 달려들려는 순간 구양봉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잠깐!"
모용쟁은 흠칫 놀라며 손을 멈추었다. 그녀는 입술을 악물고 난쟁이를 쏘아보았다.
임일천은 시간을 지체하다간 좋지 않을 것 같아 즉시 구양봉을 죽여 버리기로 결심했다. 그는 별안간 몸을 날렸다.
"네 놈을 당장 죽여 버릴 테다! 나중에 후회 없게!"
날아가는 난쟁이의 두 손에는 자그마한 골침(骨針)이 쥐어져 있었다. 이 골침은 머리카락처럼 가늘고 손가락만큼 길었다. 난쟁이가 두 손을 정신없이 휘저으며 술법을 피우자 두 개의 골침 끝에서 새어 나온 빛이 구양봉의 눈을 어지럽게 했다.
이 72식 교장침법은 정말 무서운 것이었다. 구양봉이 미처 피할 겨를도 주지 않고 난쟁이는 벌써 열 가지가 넘는 침법을 썼다. 그의 손놀림이 어찌나 빠른지 춤추는 듯한 두 개의 골침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구양봉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 꼼짝 못하고 서 있었다. 난쟁이가 달려들자 겨우 몸을 뒤로 젖혀 피했을 뿐이었다.
난쟁이는 득의양양해서 말했다.
"구양봉, 넌 죽었어. 만일 네가 섣불리 진기(眞氣)를 운행하다가는 끝장이란 걸 알아라!"
난쟁이는 더욱 동작을 빨리 하면서 달려들었다. 두 가닥의 골침이 구양봉의 앞뒤에서 찔러 대는 바람에 더는 피할 도리가 없었다.
한쪽에서 지켜 모용쟁은 사태가 급박해지자 앙칼지게 소리를 지르면서 달려들어 구양봉을 위해 싸우기 시작했다.
난쟁이의 교장침법은 실로 괴상한 술법이었다. 그의 골침은 바람처럼 구양봉과 모용쟁의 머리 위를 날아다니며 그들의 눈, 머리, 코, 귀, 뒤통수만 겨누었다. 난쟁이 몸이 워낙 작고 날렵하여 술법을 피워 대기 시작하자 떨쳐 내려야 떨쳐 낼 방도가 없었다.
구양봉은 난쟁이의 거듭되는 공세에 겨우 몸을 피할 뿐이었다. 그가 머리를 숙여 날아오는 난쟁이의 골침을 피하자 이번에는 모용쟁의 두 눈을 겨냥하고 골침을 던졌다.
"조심해!"
구양봉은 모용쟁을 향해 다급히 소리쳤다.
모용쟁이 황급하게 피하려 했으나 골침 한 가닥이 그녀의 얼굴에 박히면서 피가 확 솟구쳐 나왔다. 모용쟁은 비명을 지르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구양봉은 얼른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많이 다쳤소?"
모용쟁은 신음 소리를 내며 대답을 못했다. 구양봉은 모용쟁의 상처가 심각함을 알 수 있었다. 삽시에 그의 가슴속에는 악이 받쳐 올랐다.
구양봉은 들고 있던 뱀을 힘껏 던졌다. 얼마나 힘껏 던졌던지 뱀은 나무에 박혀 들어가 더는 움직이지 못했다.
난쟁이는 구양봉의 두 눈에서 흉악한 살기가 번뜩이는 것을 발견하고 겁을 집어먹었다. 그가 달아나려 하자 구양봉이 달려들어 얼른 그의 머리채를 움켜잡았다. 그는 구양봉의 손에 의해 번쩍 들어 올려졌다.
난쟁이는 소리를 꽥 지르면서 들고 있던 뱀을 구양봉에게로 던졌다. 구양봉은 잽싸게 피하며 소리쳤다.
"짐승 같은 놈! 감히 모용쟁을 다치게 하다니!"
난쟁이는 구양봉의 손이 이처럼 잽싼 줄 몰랐다. 그는 혀가 굳어 말이 안 나왔다. 그는 최후의 발악을 하면서 구양봉의 태음(太陰), 태양(太陽), 백회(百會) 삼 혈을 찌르려고 시도했다. 골침을 던지는 동작은 빠르고도 정확했다. 그것에 한 번만 찔려도 죽게끔 되어 있었다.
구양봉은 난쟁이의 숨통을 쥐고 높이 쳐들었다.
구양봉은 모용쟁에게로 다가갔다. 그려는 여전히 손으로 두 눈을 감싸쥐고 있었는데 눈에서는 여전히 피가 흐르고 있었다.
"내 눈이 안 보여요. 보이질 않아요……."
비애에 젖은 목소리로 모용쟁이 말했다.
"손을 치워 봐요. 내가 좀 봅시다……."
구양봉은 난쟁이의 대혈을 몇 군데 찔러 땅바닥에 내던지고 모용쟁에게 바짝 다가섰다. 하지만 모용쟁은 손을 떼려 하지 않았다.
"눈이 어떻게 됐는가 좀 봅시다. 어서 손을 떼 봐요."
"아마도 잘못된 것 같아요……."
그녀는 절망적인 심정으로 말했다. 눈이 멀면 장님이 되는 게 아닌가? 그렇게 되면 구양봉이 자기를 싫어하리라는 생각에 그녀의 마음은 한없이 쓰라렸다.
"난 눈이 멀었어요. 당신은 날 볼 수 있지만 난 당신을 볼 수가 없어요……."
구양봉은 천천히 모용쟁의 손을 잡아 때었다. 그는 피가 흘러내리는 모용쟁의 눈을 들여다보며 큰소리로 말했다.
"눈을 뜨고 날 봐요!"
구양봉은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파 왔다.
모용쟁과 행복을 느끼며 지낸 날이 겨우 며칠이나 된다고 벌써 이런 일을 겪어야 한단 말인가. 그는 난쟁이를 일찌감치 죽여 버리지 못한 것이 너무나 한스러웠다. 구양봉은 모용쟁을 안고 나직이 말했다.
"모용쟁, 가만히 앉아 있어요. 내 당장 난쟁이 놈을 죽여 버리고 오겠소."
구양봉은 곧장 난쟁이에게로 달려갔다. 그는 난쟁이를 닭 모가지 거머쥐듯 비틀어 쥐고 번쩍 들어올렸다.
"이 놈아, 네가 모용쟁을 다치게 했으니 난 너를 죽여야겠다. 네 놈이 죽으려 해도 죽을 수 없고 살려 해도 살 수 없도록 고통을 주다가 죽이겠다……."
난쟁이는 피에 주린 늑대처럼 무서운 얼굴을 한 구양봉을 바라보면서 애걸했다.
"구양봉, 날 살려만 주게. 그럼 내가 네 상처를 치료해 주겠어."
"내 상처쯤이야 아무래도 상관없다. 네가 모용쟁의 눈을 망쳐 놓았으니 난 너를 죽이겠다!"
쟁이가 또 뭐라고 변명하려 했지만 구양봉은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구양봉은 난쟁이의 대가리를 꽉 움켜잡고는 손가락 두 개로 난쟁이의 두 눈을 겨냥했다.
"네가 모용쟁의 두 눈을 멀게 했으니 네 두 눈깔로 배상해라!"
"구양봉은 두 손가락으로 난쟁이의 눈알을 꾹 찔렀다. 단말마의 비명 소리와 함께 난쟁이의 두 눈에서는 피가 마구 쏟아져 나왔다.
"됐다, 네 놈도 두눈을 잃었으니 이만하면 모용쟁의 두 눈을 멀게 한 대가는 치른 셈이다. 하지만 널 살려 두겠다는 말은 아니니 오해하진 말아라."
모용쟁은 난쟁이의 소름 끼치는 비명 소리를 듣고 다급히 물었다.
"이봐요, 난쟁이를 어떻게 했나요?"
"이자의 두 눈알을 후벼냈소."
모용쟁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난쟁이의 잔인한 성미를 증오했다. 그러나 구양봉도 난쟁이의 잔인성을 본따서 눈알을 파냈다고 하자 어쩐지 몸서리가 쳐졌다.
모용쟁의 마음을 읽은 구양봉이 말했다.
"나의 사부님께선 나한테 여러 번 당부하셨소. 세상 사람이 다 선량한 것은 아니라고 말이오. 난 줄곧 사부님의 말씀을 잊고 지냈는데 이번에 실로 후회했소. 내가 진작에 난쟁이 놈을 없애 버렸다면 오늘 같은 화는 당하지 않았을 거요."
이때 난쟁이를 태운 수레를 밀고 왔던 졸개들과 가마를 메고 왔던 졸개들이 모두 줄행랑을 놓으려 했다. 구양봉은 벼락같이 호통쳤다.
"어딜 가느냐! 여기서 한 발짝이라도 움직이면 죽는 줄 알아라!"
그러나 한 놈은 이미 백 보 이상 달아난 상태로 멈추려 하지 않았다. 그는 수림을 향해 계속 뛰었다. 그러나 그는 얼마 안 가서 구양봉이 던진 돌멩이에 뒤통수를 맞고 앞으로 푹 꼬꾸라지더니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한 놈도 움직여선 안 된다. 움직이는 날엔 저 놈처럼 되는 줄 알아라!"
구양봉의 위협에 졸개들은 부들부들 떨면서 누구 하나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구양봉은 모용쟁을 향해 말했다.
"모용쟁, 저 악종을 없애 치우고 갑시다."
모용쟁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구양봉은 땅바닥에 쓰러져 있던 난쟁이를 다시 거머쥐었다.
난쟁이는 죽음이 임박해 왔음을 느끼고 악을 썼다.
"구양봉, 네 놈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구나. 네가 나를 이겼느냐?"
구양봉은 버럭 화를 냈다.
"이 망나니야, 네 놈은 언제 약속을 지켰더냐? 네 놈들은 죄다 나쁜 놈들이다! 네 놈을 살려 주는 건 천리(天理)에 어긋나는 일이야!"
구양봉은 난쟁이의 멱살을 잡아 흔들며 계속해서 소리쳤다.
"난 네 놈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겠다. 죽어도 온전치 못한 귀신이 되게 말이다."
구양봉은 '얏!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난쟁이의 왼팔을 잡아 비틀었다. 난쟁이의 애처로운 비명 소리와 함께 어깻죽지에서는 피가 샘솟듯 쏟아졌다.
"맛이 어떠냐? 네가 남을 죽이면 남도 너를 죽이려 한다. 죽는 맛이 어떤지 실컷 경험해 봐라!"
구양봉은 난쟁이의 오른쪽 팔마저 와락 뜯어냈다.
"넌 끝장이다. 네 백타산장도 이젠 내 것이야. 으하하하……."
구양봉은 미친 듯이 웃어대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마치 성난 사자가 울부짖는 것 같았고, 그 위풍은 천신(天神)을 방불케 했으며, 그 잔인함은 누구라도 두려워할 만한 것이었다.
부들부들 떨면서 이 광경을 지켜 난쟁이의 졸개들은 평소에 우쭐대면서 나쁜 짓만 일삼던 자들이었으나 지금은 모두들 겁에 질려 똥오줌도 못 가릴 지경이었다. 심지어 어떤 자들은 놀란 나머지 까무러치기까지 했다.
구양봉의 두 손에는 피가 흥건했다. 난쟁이의 사지를 모조리 뜯어낸 그는 급기야 대가리마저 비틀어서 끊어 버렸다. 그는 난쟁이의 수급을 손에 받쳐 들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졸개들을 향해 소리쳤다.
"이 놈들아! 아직도 덤벼 볼 용기가 있는 놈이 있으면 나서라!"
실뱀의 독이 발작하여 시커멓게 변한 구양봉의 몰골은 더욱 무섭게 보였다.
"이 놈들아, 빨리 내 형수님을 저 수레에 모셔 올려라!"
난쟁이의 졸개들은 부들부들 떨면서 모용쟁을 부축하여 수레에 앉혔다. 그들은 어디로 갈 것인지조차 감히 묻지 못한 채 멍청히 서 있었다. 구양봉이 호통쳤다.
"장승처럼 서서 뭣들 하나? 빨리 수레를 끌어라. 네 놈들의 백타산장으로 가자!"
모두들 찍소리도 못하고 구양봉의 명령을 좇아 백타산장으로 향했다. 산장 앞에 닿자 한 놈이 달려가서 문을 열라고 연통했다. 산장 안에 있던 사람들은 임일천의 수레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맞이할 준비를 하느라 부산을 피웠다. 대문이 활짝 열렸다. 구양봉은 냉큼 산장 안에 들어섰다. 구양봉은 모용쟁을 부축하여 수레에서 내리게 한 다음 산장의 사람들을 모두 불러오라고 분부했다.
이윽고 마당에는 숱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구양봉은 사람들을 향해 선혈이 낭자한 두 손을 휘두르며 입을 열었다.
"원래 난 너희들을 괴롭힐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너희들의 주인이란 녀석이 날 내버려두지 않았어. 난 그 놈을 잡아죽이고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산장 안의 사람들은 깜짝 놀라 구양봉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천신같이 위풍당당한 구양봉의 모습에 찍소리도 내지 못했다.
구양봉은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너희들의 주인은 이미 황천객이 되었다. 오늘부터는 이 어른이 너희들의 주인이다. 만에 하나라도 내 영을 거역하는 놈이 있으면 산 채로 찢어 버릴 테다!"
산장의 사람들은 그저 허리만 굽신거릴 뿐 누구 하나 반박하려 들지 않았다.
위세당당하던 백타산장의 주인 임일천도 찍소리 못하고 맞아 죽었는데 누가 감히 거역할 수 있으랴!




제30장 악은 악으로
구양봉이 백타산장의 주인이 된 후 백타산장의 하인들은 하나같이 그를 무서워했다. 구양봉은 아주 짧은 기간에 배타산장을 몰라 보게 정비했다. 그는 사람들을 시켜 산장 입구의 대문을 새롭게 수선했다. 수선이 끝나자 그는 대문에 서로 대칭이 되도록 좌우 양쪽에 주련을 써서 붙이도록 했다. 왼쪽에는 '총명한 낙타는 서쪽에서 나오고(明驗西來)', 오른쪽에는 '뛰어난 무예는 동쪽으로 간
다(神功東去)'는 글귀가 씌어져 있었다. 이 주련은 구양봉의 웅심을 나타낸 것으로, 그는 자기의 합마신공이 중원에서 위력을 과시하게 될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구양봉은 난쟁이가 긁어 모은 재물도 모두 차지했다. 그는 재산도 많고 무예도 뛰어난지라 서역 대사막의 무림 호걸들이 모두 소문을 듣고 달려와 귀순하였다. 구양봉은 자기의 뜻을 이루어 대사막을 좌지우지하는 주인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중원을 바라보면서 왕중양과 황약사, 대리의 단지흥, 소씨 거렁뱅이, 홍칠 등이 화산에서의 무예 시합을 약속하던 일을 떠올리곤 했다. 5년이
지나면 그의 합마신공은 높은 수준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꼭 화산에 찾아가서 중원 무림의 쟁쟁한 무림 영웅들과 겨루어 세상에 둘도 없는 기경인 《구음진경》을 빼앗아 오리라고 그는 작심했다.
구양봉은 지금은 생계를 위해 분주히 뛰어다니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난쟁이의 지하실에서 무예를 닦는 데만 전념했다.
하루는 그가 열심히 무예를 연마하고 있는데 밖에서 누군가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구양봉―! 구양봉―!"
워낙 이 지하실은 아주 견고하게 지어져서 밖의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를 부르는 소리가 비록 모깃소리처럼 가냘픈 것이긴 해도 지하실까지 전해 올 수 있다는 게 실로 이상했다. 구양봉은 한껏 귀를 기울였다. 이 소리는 아주 높은 공력으로 목소리를 한 가닥으로 만든 것임에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깊은 지하실까지 뚫고 들어올 수가 없는 것이다.
구양봉은 목소리의 임자가 자기의 적수일 것이라고 단정했다. 그러면 대관절 누구일까? 난쟁이 임일천의 패거리일까? 아니면 어린애 같은 사숙일까? 구양봉은 문득 모용쟁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걱정이 앞섰다. 모용쟁은 현재 임신 중이었다. 그는 모용쟁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정신없이 지하실을 나와 방으로 돌아갔다.
그는 살며시 침대 휘장을 젖혔다. 모용쟁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잠든 그녀의 얼굴은 몹시 편안해 보였다. 장님이 된 그녀의 눈동자는 눈이 감겨 있어 보이지 않았다. 구양봉은 다정한 눈길로 모용쟁의 잠자는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그녀의 이마를 가볍게 어루만졌다.
이때 또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 소리는 마치 망향대에서 귀신이 소리를 지르고 염라전에서 사람의 혼을 부르는 것처럼 길게 여운을 끌며 들려 왔다. 구양봉은 한참 귀를 기울이다가 자기도 음성을 한 가닥으로 모아 아주 강한 내력으로 소리를 냈다.
"누구요―!"
이렇게 소리를 내면 산장 밖에 숨어 있는 목소리의 임자가 들을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목소리의 임자는 구양봉의 음성을 듣고도 못 들은 체하는 것인지 여전히 구양봉만을 소리쳐 불러댔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목소리의 임자는 누굴까? 나를 불러서 무얼 하려는가?
구양봉은 또 대답했다.
"넌 난쟁이 임일천의 패거리냐? 만일 난쟁이를 위해 복수하러 왔으면 직접 나를 찾아오너라. 이 구양봉은 언제든지 응할 각오가 돼 있으니까!"
그러자 껄껄대는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웃음 소리로 미루어 난쟁이 임일천의 일당은 아닌 것 같았다. 구양봉은 한참 침묵을 지키다가 다시 물었다.
"넌 백타산장 사람이냐?"
이윽고 대답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왜 내가 백타산장 사람이라고 생각했지?"
구양봉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 수 없어 대꾸하지 않았다.
그 목소리는 때론 강하게 들려 오다가도 때론 약하게 들려 오곤 했다. 보아하니 목소리의 임자는 경공을 써서 날아다니며 위치를 자꾸 바꾸는 것 같았다. 구양봉은 은근히 놀랐다. 그렇다면 목소리 임자의 공력이 여간 대단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구양봉은 오늘밤에는 예감이 좋질 않아 가급적 모용쟁 곁을 떠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자기를 부르는 소리가 점점 더 급박해지자 천리전음지법 (千理傳韻之法)을 써서 물었다.
"당신은 누군가? 무엇 때문에 날 찾는 건가?"
"구양봉, 우리는 구면이다. 내가 여기 찾아온 것은 절대 딴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다. 산장 남쪽의 수림에서 기다릴 테니 거기로 나와라."
"용무가 있으면 직접 찾아올 것이지 산장 밖으로 날 불러내려는 까닭이 뭐지?"
목소리의 임자는 구양봉의 속마음을 알아챈 듯 천천히 말했다.
"구양봉, 네 집사람을 절대 다치지 않을 테니 안심해라. 만일 내가 너의 집사람한테 딴마음을 품었다면 네가 아무리 조심하고 방비를 해도 전혀 소용이 없다. 산장 밖에 나을 생각은 있나?"
구양봉은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그의 말을 믿기로 했다. 만일 목소리의 임자가 작정만 하면 몸을 숨기고 모용쟁을 얼마든지 기습할 수 있을 것이었다.
"좋아, 당장 산장 남쪽에 있는 수림으로 가겠다."
구양봉은 이렇게 대답하고는 다시 모용쟁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잠자는 모습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차마 깨울 수가 없었다. 목소리의 임자가 누구인지 구양봉은 모른다. 적인지 친구인지 아직은 짐작할 수 없는데 모용쟁을 깨워 봤자 걱정밖에 더 시키겠는가? 갔다가 즉시 돌아오면 아마 큰일은 없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안심시키며 구양봉은 가볍게 문을 밀
쳤다.
밖으로 나온 그는 몇몇 하인들을 불러 마나님이 놀라는 일이 없도록 방을 잘 지키라고 분부했다. 구양봉은 이것저것 점검하고 정비시킨 뒤 봉황력 경공을 써서 바람처럼 빠르게 산장 남쪽의 수림을 향해 달려갔다.
수림에 다다르자 교교한 달빛 아래 나무 그림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보아도 기다리겠다던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구양봉은 가슴이 섬뜩했다. 함정에 빠진 거나 아닌가 싶어 그는 급히 몸을 돌려 백타산장으로 돌아가려 했다.
이때 다시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수림 속엔 역시 사람의 그림자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나무들 사이사이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문득 한 그루의 교목 옆에 장대처럼 곧게 서 있는 사람 하나를 발견했다. 그는 잿빛 장삼을 입고 있었는데 몹시 야윈 모습이 얼핏 봐서는 마치 앙상한 나뭇가지 같았다.
구양봉은 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밝은 달빛을 빌어 상대방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가 있었다. 뜻밖에도 그는 구양봉의 사형 속문성이었다. 구양봉은 다가서다 말고 쌀쌀하게 물었다.
"요즘 재미가 어떠시오?"
속문성이 코방귀를 뀌며 대답했다.
"어찌 자네하고 비기겠나? 자낸 합마공을 몸에 지녔고 또 백타산의 주인까지 되었으니 위풍과 권세를 모두 혼자 차지하지 않았는가? 얼마나 버젓하게 사는가 말이야. 하지만 난 비참하지, 비참해 ……."
원래 제갈정과 속문성은 꼬마 사숙 사자우를 따르기로 했었다. 두 사람이 사숙과 함께 세상을 한번 흔들어 보겠다는 속셈에서였다. 사실 유운장의 무리들치고 심보가 바로 박힌 놈은 하나도 없었다. 속문성은 겉으로는 공손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어린 사숙을 깔보았다. 그는 언제든 때만 되면 꼬마 사숙을 죽여 버릴 작정을 하고 있었다.
어쨌든 두 사람은 사자우를 따라 중원으로 갔다. 중원에는 소림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천하 무학의 정종(正宗)이었다. 이들 셋은 소림사에서 무예를 배우면 천하를 주름잡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소림사 방장(方丈)을 배알하려 했다. 그러나 방장인 현의(玄衣)대사는, 이 세 사람이 북강의 유운장 사람들이라 하자 만나 주지 않았다. 이들의 더러운 명성이 중원에까지 전해졌던 것이다. 셋은
대로하여 허락도 없이 소림사에 뛰어들어갔다. 소림사 나한당(羅漢堂)의 몇몇 고승들이 손을 써서 이들 셋을 절 밖으로 몰아냈다. 이들 셋은 중원의 첫 대결에서 이런 망신을 당하고는 기분이 잡쳤다. 그래서 소림사 밖의 수림 속에서 노숙하면서 다시 기회를 엿보아 소림사를 피로 물들여 놓으리라 작심했다.
어느 날, 세 사람은 모닥불을 피우고 농가에서 훔쳐 온 닭 세 마리를 굽게 되었다.
사숙은 제갈정이 구운 닭을 뒤집으며 들여다보다가 말했다.
"이 닭에 독을 뿌린 것이 분명하구나. 이렇게 고기 색깔도 변하지 않고 냄새도 변하지 않게 독을 뿌리는 방법은 우리 유운장에서 고안해 낸 방법만 해도 열일곱 가지나 된다. 이를테면 흑사우(黑 雨), 여인미(女人媚), 소교환혼(小橋還魂), 귀망향(鬼望鄕), 일어불토이자(-語不吐二字), 삼성단장(三聲斷湯), 몽리사타척일도(蔘里思他隻一度), 귀주(鬼酒), 삼생연(三垈緣) 같은 것들이지. 제갈
정 이 놈, 솔직히 말해 봐라. 여기에다 대관절 어떤 독을 뿌렸느냐?"
제갈정은 아주 공손하게 굽실거렸다.
"이 제자가 아무리 담이 크다 한들 언감생심 거기다가 독약을 넣을 수 있겠습니까? 참말로 제가 그런 짓을 했다면 사숙님 앞에서 주제넘게 훈장 노릇을 하려는 거나 다름이 없지요."
이어서 제갈정은 속문성을 향해 말했다.
"비가 구질구질 내리던 그 가을날 내가 자네를 사부님께 천거하던 때로부터 오늘까지 어언 20년이란 세월이 흘렀네. 여보게 아우, 20여 년 동안이나 사귀어 온 정을 봐서라도 자넨 나한테 독을 넣지 않았겠지? 만일 자네가 나를 해칠 마음이 있다면 제발 일어불토이자나 삼성단장에는 중독되지 말게 해 주게……."
"형님, 내가 어찌 그날을 잊을 수 있겠소. 그날 내가 문에 들어서자 형님은 나를 힘껏 네 번이나 걷어차지 않았소? 이게 다 내가 잘되라고 한 것이지요. 만일 형님이 그때 날 네 번씩이나 걷어차지 않았다면 내가 오늘 이렇게 행세를 하면서 다닐 수 있겠소? 이런 과거지사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형님께 감사해서 절이라도 올리고 싶소. 이러한 내가 어찌 형님을 해치려 하겠소?"
속문성은 이번에는 사숙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사숙님의 이 닭을 제가 먹겠습니다. 먹고 내가 주어도 사숙님의 은덕이지요. 하지만 지금 사숙님께서 한창 사람이 필요할 때이니 우리가 다 죽는 걸 바라시지는 않겠지요?"
사숙은 대범하게 대꾸했다.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구말구. 우리 세 사제간은 일심협력하여 소림사의 중놈들과 싸워야 하네. 이런 판에 제집 사람끼리 물고 뜯어서야 되겠나? 내가 그 정도로 어리석진 않지. 기분 잡치는 소리들은 그만 하구, 다들 닭고기나 뜯자구."
셋은 각각 닭다리 하나씩을 뜯어서 입을 벌리고 먹으려다가 또 입을 다물고는 자기 손의 닭고기들을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사숙이 개탄했다.
"모두 안심을 하지 않으니 내가 하나둘셋을 불러야만 하겠구나. 내가 하나, 둘, 셋을 세면 입으로 물어뜯어라. 누구든지 안 먹으면 딴 심보를 품은 게 분명하니 다짜고짜 손을 써서 죽여 버리기로 하자."
사숙이 하나, 둘, 셋을 세자 세 사람은 일제히 닭다리 하나씩을 들고 물어뜯기 시작했다.
셋은 배가 고프던 터라 일단 입에 대자 미친 듯이 뜯어먹기 시작했다. 세 사람 앞에는 순식간에 뼈다귀만 남았다.
속문성은 아직도 속이 차질 않는지 닭뼈를 쥐고 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새하얀 뼈다귀를 살펴보며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보아하니 이번엔 내가 이겼어. 사숙 네 놈이 아무리 잔인하고 꾀가 많아도 이번엔 내 올가미에 걸렸다, 걸렸어!'
그런데 한창 웃음 주머니가 흔들흔들하던 속문성의 낯빛이 갑자기 새파랗게 질렸다. 그의 손에 들린 닭뼈가 점점 붉은색으로 변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사숙을 쏘아보며 외쳤다.
"네 놈이 독을 뿌렸구나. 독을 뿌렸지? 삼생연, 삼생연이다……."
그는 천방지축 수림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사숙은 냉소하면서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삼생연'이라는 극약에 중독되면 이승에서 인간과 인연이 없어질 뿐만 아니라 내세에 재생해도 그
독이 몸에서 채 빠지지 않는다고 한다. 이 극약의 이름이 삼생연인 것도 바로 이런 까닭이었다.
사숙을 바라보는 제갈정의 두 눈에도 공포와 불안의 빛이 가득했다. 바로 이때 둘은 모두 크게 놀랐다. 사숙의 손에 들린 닭뼈도 시커멓게 색깔이 변했던 것이다.
"제갈정, 여기에다 무슨 독약을 뿌렸지? 흑사우냐, 아니면 일어불토이자냐? 어서 말해라!"
사숙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데 제갈정의 손에 쥐어져 있는 닭뼈에도 잿빛 반점들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제갈정은 사숙의 말은 아랑곳없이 속문성한테 고래고래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속문성, 이 개 같은 놈! 널 발로 찬 걸 여태 앙심을 품고 있었구나. 너 같은 놈은 그때 독살을 시켰어야 했어! 사부님을 만나보지도 못하고 뒈지게. 사숙님, 그놈한테 극약을 잘 안겼소이다!"
그러나 사숙은 와락 덮쳐 들어 제갈정의 숨통을 조였다.
"제갈정, 이 놈아! 내가 극약을 잘 안겼으면 네 놈은 그래 나보다 못하단 말이냐? 빨리 실토해! 흑사우냐, 일어불토이자냐?"
제갈정은 한바탕 너털웃음을 쳤다.
"하하하……. 여보 마누라, 아들아, 그리구 며늘아기와 두아야, 내가 오늘에야 너희들을 위해 복수를 하는구나."
두 사람의 마음은 모두 얼어붙었다. 생이 이렇게 끝난다고 생각하니 허탈하기 그지없었다. 틈만 나면 서로를 죽이려 하다가 결국은 셋 다 동시에 황천객이 되게 된 것이다. 제갈정은 이젠 죽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사숙의 독공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쓴 이 일어불토이자는 다른 사람들은 먹자마자 거품을 토하며 죽는데 사숙은 중독되고도 나를 목 졸라 죽일 수 있으니 대단해. 난 여기서 죽지만 여한은 없다. 사숙이 죽는 것을 보지는 못하지만 망향대에서 기다리리라. 아마 거기서는 꼭 만나겠지.'
이렇게 생각한 제갈정의 마음은 아주 편해졌다. 그는 아예 두 눈을 감고 사숙이 마음대로 목을 조이도록 몸을 내맡겼다. 거의 숨이 끊어지려는데 갑자기 천둥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 왔다. 그렇게 맑던 하늘에 갑자기 먹장구름이 덮이고 비가 억수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오기 시작하자 둘은 모두 독성이 발작하여 땅바닥에 쓰러졌다.
속문성은 생각에서 깨어나 구양봉을 바라보았다.
"구양봉, 내가 널 찾아온 것은 큰 부탁이 있어서이다……."
그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등뒤에서 검을 휙 뽑아 들었다. 구양봉은 속문성이 손을 쓰려는 줄 알고 몸을 날려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런데 뜻밖에도 속문성은 그 검을 자기의 목에 갖다 대며 비장하게 말했다.
"너도 잘 알지만 난 유운장의 악인이다. 내가 죽으면 세상 사람들은 모두 쾌재를 부를 것이다. 하지만 넌 아마 다를 거야. 내가 지금 네 앞에서 죽으면 넌 불안할 게야."
구양봉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폭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유운장의 무리들은 죄다 악종이고 망종들이다. 난 사부님의 제자이고 독물이다. 네가 죽으면 내가 사부님을 대신하여 크게 세 번 웃으면 그만이지 불안할 게 뭐냐?"
"구양봉, 악인들 사이에는 도의와 정이 없다고 하지만 제 집 사람들끼리는 너처럼 매정하지 않은 법이다. 네가 유운장에서 두 가지 절기를 배우고 사부님의 60년 공력을 넘겨받은 것은 기실 내가 없었다면 어림도 없었을 일이다. 내가 점복 난전을 벌여 놓고 있다가 네 점괘를 뽑아 보고 사부님한테 천거하지 않았다면 너한테 오늘이 있을 수 있었겠느냐? 네가 사부님 앞에서 두꺼비 주련을 맞
춘 것도 내 천거가 없었으면 가능했을까?"
속문성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만일 속문성이 없었다면 그는 북국에 가지도 않았을 것이고, 천하의 무림 영웅들 속에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신독행 같은 인물을 사부로 모시고 무예를 배울 수도 없었을 것이며, 봉황력과 합마공이란 두 가지 절기를 배울 수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모용쟁도 구할 수 없었고 백타산장의 주인이 되는 것은 더더욱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듣고 보니 그렇구만. 사형이 나한테 그런 은혜를 베푼 적이 있으니 무슨 부탁이든지 서슴지 말고 이야기해 보시오."
뜻밖에도 구양봉이 이렇게 말하자 속문성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크게 비통해 했다.
"여보게 구양 동생, 나를 도와 복수를 해 주게. 사부님께서 운명하실 때 자네에게 나를 죽여 버리라고 했다는 걸 나도 알고 있네. 하지만 사부님께서 나에게는 사숙과 제갈정을 죽이라고 했네. 내가 자네를 천거해 준 것을 생각해서라도 나를 한번 도와주게. 사숙을 죽여 나를 대신하여 복수를 해 주게. 일단 사숙이 죽고 나면 난 자네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겠네. 절대 식언이 아니야."
구양봉이 속문성에게 물었다.
"사형, 무슨 좋은 수가 있소?"
"구양봉, 나하고 함께 가세. 우리 함께 힘을 합쳐 사숙을 없애 버리자구. 그는 지금 무방비 상태이니 그자를 죽이기는 지금이 절호의 기회네. 그는 제갈 형이 뿌린 독에 중독된 상태라 누구하고든 싸울 경황이 없지."
구양봉은 이 계책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선뜻 대답했다.
"그럽시다. 내가 당장 달려가서 그자를 죽여 버리겠소."
구양봉은 속문성을 따라 자그마한 연못가에 이르렀다. 가만히 살펴보니 연못 속에 사람 하나가 서 있는 것이 달빛에 비쳐 보였다. 키가 어린아이처럼 자그마해 보이는 게 틀림없는 사숙이었다. 구양봉은 그가 봉황력으로 수면 위에 서 있는 줄 알고 깜짝 놀랐으나, 다시 자세히 보니 그는 연못의 자그마한 섬에 서 있었다. 사숙은 구양봉을 발견하고 속문성을 향해 분통을 터뜨렸다.
"속문성, 구양봉을 데려오면 네가 내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느냐?"
속문성이 마주보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사자우 이 놈아! 네 놈이 나를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았다. 봐라!"
속문성은 자기의 손을 내보였다. 그 손은 마치 자그마한 고깃덩어리처럼 오그라들어 있었다.
"우린 모두 같은 유운장 사람들인데 이렇게 기어코 나를 죽여서 무슨 득을 보겠다는 거냐?"
속문성의 말에 사자우가 대꾸했다.
"무슨 득을 보겠냐구? 유운장 사람들이 남을 해칠 때 언제 좋은 점, 나쁜 점을 따지더냐? 너희들이 내 곁에 있는 한 내가 너희들을 죽이지 않으면 너희들이 나를 죽일 게다. 그러니 먼저 손을 쓰는 수밖에. 이게 뭐가 그리 이상하냐?"
속문성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사자우 이 놈아! 네 놈은 나를 살 수도 죽을 수도 없게 만들었다. 난 매일 나무에 기대어 나무의 음기로 목숨을 연명해야 해. 나무 곁만 떠나면 난 죽는다……."
사숙은 빙그레 웃으면서 속문성의 말을 듣다가 이죽거리기 시작했다.
"속문성, 간사한 여우놈 같으니. 그 동안 매일 웃는 얼굴로 나를 대하느라고 고생이 오죽하였을까. 그 지극정성을 봐서 내 좋은 방법을 하나 가르쳐 주마. 밖에 나갈 때는 언제나 손목에다 나무칼을 차고 다녀라. 그리고 네가 사는 곳에 나무가 있을 테니 밤에도 침대에서 잘 생각을 말고 나무를 끌어안고 자는 게 좋을 거다. 서서 나무를 부둥켜안고 자면 편안할 거야……."
속문성은 약이 올랐지만 어쩌는 수가 없었다. 무릇 '삼생연'에 중독된 사람은 살아 남는 사람이 없는데, 속문성은 다행히도 노독물 신독행의 제자인지라 그런대로 죽음은 면했다. 하지만 이렇게 살아 봤자 죽는 것보다 나을 게 뭐 있겠는가.
속문성은 이를 갈았다.
"사자우, 네 놈도 제갈정이 뿌린 독약에 중독됐다. 오늘 구양봉을 만났으니 죽을 각오나 단단히 해라!"
사자우는 입을 쩝쩝 다시고는 대꾸했다.
"내 입이 다 쓰다. 구양봉이라? 구양봉이 무슨 물건이더라? 그렇지, 내가 깜빡 잊었네, 속문성, 방금 너한테 한 가지 빠뜨린 말이 있다. 넌 계집과 재미를 봐서는 안 돼. 계집과 그 짓거리를 한 번만이라도 하면 네 몸뚱이는 당장 썩어문드러지고 말지. 그러니 난 너에게 절에 가서 중이나 되라고 권하고 싶구나. 네 생각은 어떠냐? 으하하하……."
사자우는 생각할수록 통쾌하다는 듯 자지러지게 웃어댔다.
구양봉은 속문성의 몰골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이 독에 중독되면 해독할 수가 없으니 속문성의 신세가 여간 딱한 게 아니었다.
그러한 속문성이 갑자기 박장대소를 했다.
"으하하하……. 사자우, 네 놈은 제갈정의 독에 중독됐어. 네 놈이 물 밖으로 감히 나오지 못하는 걸로 보아 흑사우나 일어불토이자에 중독된 게 분명해. 그러니 네 놈의 처지도 나보다 별로 나을 게 없지. 무엇보다 큰 문제는 네 놈이 둘 중에 어느 독에 중독됐는지 알 수가 없다는 점이야. 일어불토이자의 해독약을 흑사우에 중독된 자가 쓸 경우 온몸이 마비되어 죽고 말지. 또한 네가 일어
불토이자에 중독되었다면 아무 해독약이나 쓰는 게 아니야. 잘못 썼다가는 먼저 뼈가 녹아서 한 덩어리의 고깃덩이로 변하고 말테니까. 네 놈은 날마다 눈만 뜨면 '난 대관절 흑사우에 중독된 건가, 아니면 일어불토이자에 중독된 건가'하고 골머리를 썩여야 할 게야, 지금처럼 언제나 음수(陰水)에 서서 죽을 때까지 떠나서는 안되지."
그의 말에 사자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큰소리로 웃어댔다. 속문성이 소리쳤다.
"웃긴 왜 웃어?"
"저길 보아라! 저게 무엇이냐?"
사자우가 연못가에 서 있는 나무 한 그루를 가리켰다. 그 나무에는 사람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그것은 마치 사람의 시체 같았다. 속문성은 그쪽으로 다가가 보았다. 나무에 매달려 있는 사람은 눈알을 무섭게 위로 부릅I뜨고 있다가 속문성이 다가서자 사납게 쏘아볼 뿐 말이 없었다. 그의 입에서는 횐 거품이 구질구질 새어 나왔다.
그는 다름아닌 구양봉과 속문성의 큰 사형 제갈정이었다.
속문성은 깜짝 놀랐다.
"사자우 이 놈아! 네가 우리 큰 사형을 어떻게 한 거냐?"
"보면 모르냐? 이미 매달린 지 오래다. 거의 죽게 됐을 거다."
속문성과 제갈정은 몇십 년 간이나 한 사부 밑에서 무예를 닦아 온 동문이었다. 그런데 정신이 나가 자기를 알아보지도 못하자 속문성은 가슴이 아팠다.
"사형, 날 알아보겠소? 내가 둘째 사제요……."
그러나 제갈정은 속문성은 쳐다보지도 않고 구양봉을 향해 입을 열었다.
"두아야, 네가 두아지? 왜 그렇게 쳐다보고만 있는 거냐? 네가 두아가 맞지?"
사자우가 외쳤다.
"문성아, 제갈정은 네 놈이 넣은 독약에 중독됐어. 네 놈의 극약에 저 모양이 됐단 말이야……."
"내 독약에 중독되면 당장 죽지 이 모양으로 되진 않어!"
"하긴 그래. 독약을 쓰는 데는 네 놈이 날 못 따르지. 네 놈의 독약에 중독된 데다가 내가 좀 독기를 보탰더니……"
"독기라니?"
"난 원래 숨통을 조여 죽이려고 했는데 마침 소나기가 내리는 바람에 그러지는 못했지 ."
얼마 전, 사자우가 제갈정의 숨통을 조이고 있는데 큰 비가 내렸다. 억수로 퍼붓는 이 비에 두 사람은 흠뻑 젖었다. 그 빗물 덕분에 몸에 스며든 독소가 얼마쯤 씻겨 나갔던 것이다. 그 후 사자우는 어느 정도 정신이 좀 들었는데 제갈정은 아예 얼이 빠진 듯했다. 그는 사자우한테 목이 졸리다 보니 미처 해독할 겨를이 없었고, 자연 중독이 깊어져 결국 미쳐 버리고 만 것이다.
속문성은 다시 사자우를 위협했다.
"아무튼 좋다. 사자우, 구양봉이 너를 찾아온 건 술이나 먹자고 찾아온 건 아닐 거다."
그의 말에 사자우가 소리쳤다.
"구양봉, 넌 왜 왔냐? 날 죽이려구?"
"사부님의 유언에 따라 네 놈들을 하나하나 깡그리 죽일 생각이다!"
구양봉의 대꾸에 사자우가 냉소했다.
"네 사분지 뭔지 하는 놈이 큰소리는 잘도 쳤다. 우리들이 다 죽어야 한다구? 네 놈더러 날 죽이라구 했다고? 네 놈이 날 죽일 재주나 있냐? 그런 재간이 있으면 왜 손을 써 보려 하지 않지?"
"오냐. 그럼 기다려라."
구양봉의 경공은 사자우보다 훨씬 뛰어났다. 그는 당장에 손을 쓸 태세로 몸을 움직였다. 이때 속문성이 다급히 외쳤다.
"사제, 기다리게!"
구양봉은 멈칫 돌아보았다.
"아우, 나도 함께 가서 저 놈을 죽이겠네, 저 놈이 우리 사부님을 얼마나 괴롭혔나? 우리들도 저 놈의 꼬임에 넘어가 사부님을 죽이려 했지. 우리들에게 베풀어 주신 사부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얼마나 후회스러운지, 이 몸이 죽지 못하는 게 한스럽네. 아우가 저 놈을 없애는데 나도 조금이라도 돕겠네."
속문성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구양봉은 굳이 마다 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으로 대답했다.
"그럼 그럽시다. 우리 함께 힘을 합쳐 저 놈을 죽여 사부님의 복수를 합시다!"
구양봉은 속문성이 비록 악인이기는 하지만 아직 양심이 조금이나마 살아 있다고 생각했다.
"형님, 중독된 몸으로 나와 함께 저 놈과 싸워도 괜찮겠소?"
"동생, 난 괜찮아. 저 놈만 죽이면 나도 자살하겠어. 내 죽음으로 사부님께 사죄하겠네."
속문성의 비장한 결의를 듣노라니 구양봉은 가슴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보아하니 악인에게도 의로운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닌 성싶었다.
구양봉은 속문성의 손을 당겨 잡았다. 속문성 혼자 힘으로는 연못을 날아 건너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구양봉이 고함을 지르면서 속문성을 이끌고 몸을 솟구쳤다.
두 사람이 나란히 자기에게로 날아오자 사자우는 당황하여 소리를 질렀다.
"구양봉 이 놈, 네 놈은 꼭 후회할 거다!"
구양봉은 공중을 날면서 대꾸했다.
"다 죽은 놈이 무슨 잔말이 그렇게 많으냐?"
구양봉은 더욱 속도를 빨리하며 삽시에 연못 복판의 자그마한 섬에 닿았다. 두 사람이 아직 중심을 잡지 못한 틈을 타서 꼬마 사숙이 벽력 같은 함성을 지르며 두 손바닥을 힘껏 앞으로 밀었다. 마치 산이라도 무너뜨릴 기세였다. 하지만 구양봉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역시 두 손바닥을 펴서 맞받아 밀었다. 구양봉의 합마공은 이제 최고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그는 사숙의 무예가 아무
리 뛰어나도 자기를 당해 내긴 어려울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었다.
이때였다. 한쪽에 서 있던 속문성이 큰소리로 외쳤다.
"구양봉! 뒈져 버려라!"
속문성은 구양봉의 배후에서 수법을 썼다. 이 수는 더없이 악독했다. 그는 독침 세 개를 구양봉의 우견정(右霜井), 좌이문(左耳門), 정대문(正大門)을 겨냥하여 힘껏 던졌다. 구양봉은 방금 사자우한테 합마공을 썼던 터라 두 손이 천근마냥 무거워져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속문성의 독침 세 개가 고스란히 그의 뒷잔등에 꽂혔다. 다행히도 몸을 약간 뒤트는 바람에 독침들은 견정, 이문, 정
대문에 명중하지는 못했다.
구양봉은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는 잘못 생각했던 전이다. 그는 꼼짝없이 두 악인의 올가미에 걸려들고 말았다.
구양봉의 몸은 어느새 연못으로 곤두박질쳤다.
구양봉이 떨어져 내리자 두 놈은 환성을 올렸다. 그들은 연못에다 독약을 뿌려 넣었던 것이다.
구양봉의 두 발이 수면에 닿는 순간 거품 끓는 소리와 함께 독침들이 꽂힌 뒷등이 마비될 지경으로 아파 왔다. 그는 악이 받쳤다.
'내가 왜 저 망나니를 믿었던가? 속문성이 무슨 좋은 놈이라고 믿었단 말인가? 원통하구나, 여기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하게 됐으니…….'
그런데 이 순간 난데없는 호통 소리와 함께 두 가닥의 연기 같은 것이 속문성과 사자우 쪽으로 날아왔다.
"조심해!"
눈치 빠른 사숙이 먼저 몸을 솟구쳤다. 속문성도 엉겁결에 따라서 뛰어올랐지만 둘은 공중에서 서로 맞부딪쳐 몸을 가누지 못한 채 연못에 풍덩풍덩 빠지고 말았다.
속문성은 당황했다. 물 속에서 유운장에서 늘 맡아오던 또 다른 독약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었다. 이 독약은 냄새를 한 번만 맡아도 온몸이 나른해지고, 만일 여러 번 거듭 맡으면 사람의 뼈가 노근노근해지면서 천천히 죽게 된다. 그렇다면 여기에 있던 유운장 사람들 말고 또 누가 왔단 말인가? 그 가짜 벙어리 형제가 왔나? 속문성은 가짜 벙어리 형제가 구양봉의 손에 죽은 줄도 모르고 이
렇게 추측했다. 두 사람은 기가 막혔다. 구양봉을 독살하려다가 자기들이 먼저 중독되게 생겼으니 이런 억울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허우적대던 두 사람은 무심코 연못가로 눈길을 주다가 더더욱 깜짝 놀랐다. 나무에 매달려 있던 제갈정이 어느새 구양봉과 함께 서있는 게 아닌가.
구양봉은 놀란 눈길로 제갈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중독되어 움직이지도 못하더니……?"
제갈정이 코웃음을 쳤다.
"흥! 내가 왜 움직이지를 못하겠어? 저 놈은 내 온 집안 식구들을 다 죽였어. 그때부터 난 미친 척했던 거지. 저 놈들이 경계할까 봐 날마다 미치광이처럼 허튼 짓거리를 했단 말야. 네 놈들은 모두 내 올가미에 걸렸어……."
말을 마친 제갈정은 몸을 마구 흔들어 대면서 미친 듯이 웃어댔다.
"사자우, 속문성, 네 놈들이 다 뭐냐? 네 놈들도 알고 있겠지? 이 어른은 노독물의 제일 큰 제자야. 이 제일 큰 제자가 허구한 날 공밥이나 먹은 줄 알았느냐?"
구양봉은 이자들이 이처럼 서로를 물고 뜯고 개싸움을 벌이는데 무슨 곡절이 숨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제갈정은 계속 말을 이었다.
"너희들은 내가 중독되어 죽을 줄로만 알았지? 꿈은 잘 꾸었다마는, 어림도 없지. 이걸 봐라!"
제갈정은 입을 쫙 벌렸다. 달빛에 비친 제갈정의 입 안은 다른 사람의 입과 확실히 달라 보였는데, 그의 입 안에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흰 물건이 있었다.
"나한텐 누구도 모르는 비법이 있다. 사부님께서 처음 나한테 독약을 안길 때부터 난 이 비법을 터득하기 시작했어. 그것은 다름 아닌 백독대(白毒袋)라는, 백 가지 독약을 담을 수 있는 주머니 다. 나는 언제나 이 주머니를 입 안에 달고 다닌다. 누구든지 나에게 음식을 먹으라 하면 난 거리낌없이 먹는다. 물론 너무 많이 먹어서는 안 되지만……. 내가 독이 있는 음식들을 먹게 되면 그 독
은 이 백독대에 걸러지게끔 되어 있거든. 그러니 네 놈들이 암만 독을 써도 아무 소용이 없을 수밖에."
구양봉은 아연실색했다. 유운장의 인간들은 그야말로 악종들이었다. 구양봉이 아무리 총명하다 해도 제갈정 같은 묘책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구양봉, 내가 사자우와 속문성을 죽여 버릴 테니 너는 한쪽에서 구경이나 해라."
제갈정은 괴상한 웃음을 웃더니 사자우에게 달려들면서 외쳤다.
"사자우, 네 목숨을 내놔라! 내 식구들의 피 값을 받을 테다!"
사자우와 속문성은 모두 부들부들 떨었다. 평소엔 서로 누가 센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예가 엇비슷했으나 지금은 둘 다 심하게 중독되어 제갈정과 맞서 싸울 수가 없었다. 이미 기가 꺾인 두 사람은 뒷걸음질치기 바빴다.
제갈정은 숨돌릴 틈도 주지 않고 거듭 공격했다. 그는 공격을 하면서 연신 소리를 질렀다.
"두아야, 할아버지가 너를 위해 복수를 하겠다! 이 사자우란 망나니를 잡아죽이겠다! 속문성 놈도 죽여 버리겠다!"
그는 몇 장을 내갈겨 사자우를 물 속에 처박아놓고는 다시 속문성에게 달려들어 그를 땅바닥에 꺼꾸러뜨렸다. 그는 맹수처럼 속문성의 목덜미를 마구 물어뜯으면서 뇌까렸다.
"두아야, 난 네 둘째 삼촌이라는 놈을 물어 죽이겠다. 다시는 악독한 짓을 못하게……."
제갈정은 끝내 속문성의 숨통을 물어서 끊어 버렸다. 그는 피를 입가에 뚝뚝 떨어뜨리며 몸을 일으켰다.
"속문성, 이 망나니야! 네 재주를 다 어쨌느냐? 넌 네 재주를 뽐냈었지? 눈깔은 왜 치뜨고 있냐? 말은 왜 못하지? 그 주둥아리가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감언이설을 늘어놓더니만 왜 말이 없어?"
제갈정은 이제 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사자우를 향해 엄포를 놓았다.
"네 놈도 죽어야 한다. 하지만 난 네 놈이 너무 빨리 뒈지게는 안 하겠다. 난 수림 속에서 모닥불을 피워 놓고, 네 놈의 살점 맛이 좋지야 않겠지만 내 식구들의 복수를 위해 억지로라도 먹어야겠다! 난 네 놈의 몸뚱이에서 살점을 열석 점만 베어 내겠다. 네가 내 집 식구들을 열셋이나 죽였으니 말이다. 네 생각엔 어떠냐?"
제갈정은 달려들어 사자우를 붙잡았다. 그는 사자우를 거머쥐고 훌쩍 연못을 건너 수림 속으로 들어갔다.
구양봉은 천천히 제갈정의 뒤를 쫓아갔다. 그는 제갈정이 사자우를 죽이면 자기 손에 피를 묻힐 필요가 없으므로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제갈정은 모닥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사람고기 맛이 어떨까? 난 한 번도 맛을 못 봤어. 오늘 맛이나 봐야겠다. 꼭 맛을 봐야겠어."
그는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날카로운 칼로 사자우의 살을 한 점 베어내 불에 굽기 시작했다. 그 살점은 찌르륵찌르륵 한참이나 소리를 내면서 익어 갔다. 제갈정은 다 구운 사자우의 살점을 입에 넣고 씹기 시작했다.
"아, 참말로 별미구나! 구양봉, 자네도 먹지 않겠나?"
"난 사람 고기는 안 먹소."
제갈정은 또 사자우의 살점을 베어내기 시작했다. 사자우는 더욱 애처롭게 비명을 질렀다.
"이 자식아, 듣기 싫다. 소리 좀 작작 질러라! 아마 너도 들었을 거다, 하늘에서는 용 고기가 최고이고 땅에서는 사람 고기가 최고라는 말을. 그렇게 맛있다는 걸 난 오늘에야 처음 먹어 본다. 난 더도 안 먹고 딱 열석 점만 먹겠다. 그러니 더는 시끄럽게 굴지 마!"
제갈정은 이렇게 꾸짖더니 손바닥으로 사자우의 아혈(嗤穴)을 탁 때렸다. 그러자 사자우는 더는 소리 내지 못하고 잠잠해졌다.
제갈정은 끝내 아직 살아 있는 사자우의 생살 열석 점을 저며 내어 전부 모닥불에 구워 먹었다.
"됐어, 오늘은 그만 먹자. 너무 배가 불러. 내일 다시……."
제갈정은 말하다 말고 갑자기 웩웩 토하기 시작했다.
사자우는 자기의 목숨이 질기게 붙어 있는 것이 원망스러웠다. 제갈정이 정말로 날마다 자기의 살을 열석 점씩 도려낸다면 몇 날 며칠을 이런 고통 속에 보내게 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사자우는 고래고래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제갈정 이 놈아! 씨를 받을 수도 없는 이 악종아! 네 놈을 갈기갈기 찢어도 내 원이 안 풀리겠다."
제갈정은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다.
"네 놈이 또 약은 수를 쓰는구나. 네 놈이 욕을 하면 내가 쉽사리 죽일 줄 알아? 그런 꿈은 꾸지도 말아라! 난 아무리 약을 올려도 화를 안 낼 테야. 앞으로 며칠은 더 이 짓을 해야겠으니까. 이제 보니 네 놈은 진짜 악인은 못 되는구나."
사자우는 기가 막혀 입을 다물었다. 제갈정이 약이 올라 자기의 허벅지에서 또 살점을 도려낼까봐 내심 겁도 났다.
제갈정은 피에 굶주린 두 눈을 번뜩이며 구양봉을 바라보았다.
"여보게, 자낸 지금 몸이 어떤가?"
구양봉은 묵묵히 제갈정을 마주보았다.
제갈정은 천천히 칼에 묻은 피를 닦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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