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크밤

화산논검 - 동사 황약사 3

3학년2반 | 2022.02.19 07:46:59 댓글: 0 조회: 373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9811

제13장 황약사와 구천인의 만남
낭떠러지를 타고 올라온 사람은 바로 항주부 세 공자 가운데 한 사람인 도박 미치광이 병묘였다. 암석 모서리에 걸린 듯 옷이 온통 찢긴 그는 두 손에 비수 한 자루씩을 갈라 쥐고 있었다. 세 사람은 너무나 놀라 눈이 휘둥그래졌다. 천길이나 되는 이런 가파른 절벽으로 사람이 기어 올라오리라곤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학영감이 사나운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오라, 이 놈 병묘야, 이런 벼랑까지 기어 올라오는 걸 보니 대단하구나. 오늘 네 놈이 또 어디로 도망가나 보자."
학 영감은 이렇게 말하고는 우묵한 돌 위에 앉아 사불과 악귀를 바라보았다.
사불이 병묘를 향해 물었다.
"당신은 소인한테서 도망쳐 오는 길인가요?"
"그렇소."
사불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은 그곳에서 꼬박 열흘을 채웠어야 해요. 그래야 몸에 퍼진 독이 말끔히 가셔요."
"알고 있소. 소인 선생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소. 하지만 사정상 열흘을 채우지 못하고 떠날수밖에 없었소."
"당신 몸에 독이 남아 있으면 조만간 해를 당하고 말 거예요."
"소인께서도 내 몸에 독이 남아 있는 한 생명에 지장이 있으며 절대 술을 마시면 안 된다고 했소. 조금만 마셔도 독이 퍼진다고 말이오."
사불은 그 말을 듣더니 더는 대꾸를 하지 않고 물끄러미 학 영감을 건너다보았다.
그러자 학영감이 나무라듯 말했다.
"사불 악귀, 당신들은 나의 태호방을 위해 원수를 갚아 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소? 그런데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요?"
한쪽에 앉아 묵묵히 침묵만 지키던 악귀가 갑자기 학 영감을 노려보며 거칠게 말했다.
"닥쳐, 입을 더 놀리면 죽여 버리겠다!"
병묘를 바라보던 사불이 다시 입을 열었다.
"병묘, 당신은 그 비수를 버리고 나와 함께 갑시다."
병묘는 사불의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아형을 향해 물었다.
"아형, 그간 잘 지냈소?"
"병묘 오라버니……."
아형은 병묘를 보고 눈물을 뚝뚝 떨구며 말을 잇지 못했다.
사불이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다시 말했다.
"병묘, 어떡하시겠어요? 나와 함께 갈 텐가요, 말 텐가요?"
병묘는 코방귀를 뀌면서 중얼거렸다.
"사불 악귀들 같으니!"
사불은 평소에 남이 자기를 사불 악귀라고 부르는 것을 대수로워 하지 않았다. 하지만 병묘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자 어쩐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화를 누르며 살뜰한 아내가 남편을 염려하는 듯한 태도로 부드럽게 말했다..
"난 당신을 돌려보내야겠어요. 소인한테로 돌아가서 몸에 밴 독을 말끔히 없애야만 해요."
"필요 없소."
병묘가 쌀쌀하게 대꾸했다. 그는 학 영감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네 놈이 아형을 억지로 소유하려 하는데 내 오늘 결판을 내려고 왔다."
학 영감은 입가에 냉소를 머금고 여유롭게 뒷짐을 지고 서서 사불과 악귀를 바라보았다. 마치 병묘와 자기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이 옆에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겠다는 태도였다.
사불은 유심히 병묘를 바라보았다. 그의 어깨에 꽂힌 네 개의 나뭇가지가 눈에 띄었다. 사불은 그것이 독이 심장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소인이 꽃아 놓은 것임을 알았다. 목숨을 내걸고서까지 아형을 구하려는 병묘의 헌신적인 자세에 사불은 더더욱 질투심이 불타올랐다.
"병묘, 당신은 상처도 낫지 않은데다가 절벽까지 기어 올라왔으니 지쳐서도 나와는 상대가 안 될 거예요. 그러니 어리석은 생각일랑 버리는 게 좋아요."
병묘는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어깨에서 나뭇가지를 뽑아 내었다. 어깨에서는 피가 흘렀다. 사실 그는 솔직히 사불과 싸우고 싶은 마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형을 구하기 위해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는 비수를 꼭 틀어쥐면서 말했다.
"어서 덤비시오. 어디 한번 겨뤄 봅시다."
사불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천천히 병묘 앞에 다가서더니 조용히 말했다.
"당신 생각이 정 그러시다면 마음대로 하세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더니 양손을 늘어뜨린 채 눈을 감았다.
"자, 날 죽이세요."
병묘는 뜻밖의 상황에 난처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사불 쪽에서 먼저 공격해 온다면 또 몰라도 어찌 이런 상황에서 손을 쓸 수 있겠는가?
병묘는 비수를 든 손을 맥없이 바라보았다. 칼날의 날카로운 빛이 눈을 찔렀다.
사불이 독촉했다.
"뭘 망설이세요? 어서 날 죽이라구요. 지금 내 심정은 당신 손에 죽고 싶은 생각뿐이에요."
사불의 처연한 몇 마디 말에 병묘는 새삼 감정의 동요를 느꼈다.
'이 여인을 어찌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이 여인은 나의 생명의 은인이다. 만일 내가 이 여인을 죽인다면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게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가 이처럼 갈등하고 있는 틈을 놓치지 않고 갑자기 사불이 손을 썼다. 그녀는 번개같이 두 손을 놀려 병묘의 대혈 몇 곳을 눌러 놓았다. 병묘는 즉시 그 자리에 굳어진 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훌륭하오. 과연 사불이로군. 하긴 누가 사불의 재주를 당해 내겠소?"
학영감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사불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워요.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학 영감은 머쓱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사불이 병묘를 바라보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와 함께 돌아가요. 가서 소인 선생한테 완전히 치료를 받도록 해요. 난 당신의 생명이 위험해지는 것을 그냥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요. 내 말대로 해요, 네?"
병묘가 대답했다.
"난 아형을 구해야 하오."
사불이 비웃었다.
"그 꼴을 해 가지고 남을 구하겠다구요? 정말 웃기는군요."
병묘는 더 이상 할말이 없어 입을 다물고는 물끄러미 사불을 바라보았다.
'내가 잠시 딴 생각을 하고 있는 새에 손을 써서 나를 옴쭉달싹 못하게 만들다니…….'
그는 생각할수록 사불이 괘씸했다.
이런 그의 기분은 아랑곳없이 사불이 학 영감에게 말했다.
"당신의 독수리가 필요해요. 난 저 사람을 데리고 여기를 떠나 소인 선생에게 가야겠어요. 이번에 데려가면 다시는 당신을 찾아 오지 못하게 하겠어."
학 영감은 병묘를 힐끔 쳐다보고는 하는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남이 독수리를 부리려면 반드시 팔의 피를 짜내어 놈한테 먹여야 하오. 그렇지 않으면 말을 듣지 않거든."
사불은 망설이지 않고 병묘의 손에 들려 있는 비수를 빼앗아 자기 팔을 찔렀다. 피가 솟아나오자 그녀는 독수리에게 다가가서 서슴없이 팔뚝을 내밀었다. 피를 본 독수리는 흥분하여 괴상한 소리를 지르더니 곁으로 뛰어와 날카로운 부리로 그 피를 들이마셨다.
한참 후 사불이 병묘 곁으로 다가갔다.
"병묘, 당신의 팔도 좀 베어야겠어요. 아프면 소리를 질러도 돼요."
사불은 부드러운 어조로 이렇게 말하고는 병묘의 팔을 끌어당겨 칼로 찔렀다. 피가 나오자 이번에는 다른 독수리에게 그 피를 먹였다.
피독수리는 병묘와 사불의 선혈을 마시고 나자 신기할 정도로 온순해졌다. 놈들은 두 사람 앞에 와서 괴상한 소리를 지르더니 날아갈 준비를 했다. 사불은 한 놈의 목덜미를 두드려 몸체를 낮추게 한 후 병묘를 앉히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병묘, 날 따라가요. 함께 가서 다시 소인을 만나도록 해요."
그리고는 그녀도 다른 한 놈의 등에 올라앉았다.
학 영감은 그들 두 사람이 기어이 떠나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았다. 독수리들은 사불의 영에 따라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더니 날개를 펼치고 날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응취봉 봉우리로부터 아득히 멀어졌다.
산봉우리에는 아형과 학 영감, 악귀만이 남게 되었다. 학 영감은 생각할수록 부아가 치밀었다. 그는 아형에게 눈길을 주고는 악귀를 향해 말했다.
"거기 그러구 앉아 있을 게 아니라 동굴 속에 들어가 한잠 주무시지요."
악귀가 웃으며 대꾸했다.
"거 좋은 생각이군."
그는 냉큼 일어나 동굴로 들어갔다.
잠시 후 학 영감은 아형에게 말했다.
"낭자도 알겠지만 이젠 병묘도 다시는 낭자를 구하러 올 수 없어. 그러니 딴 생각 말고 내가 하자는 대로 하는 게 좋을 거야. 나한테 시집오기만 하면 한평생 부귀와 영화를 누릴 텐데 뭣 땜에 마다하는 건가?"
아형은 상대도 하기 싫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학 영감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결심한 듯 아형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는 잽싸게 아형의 적삼을 찢었다. 순간 아형의 자그마한 젖가슴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학 영감은 아형의 아름다운 자태를 보자 더는 욕정을 참지 못하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아형은 얼른 한옆으로 비켜섰다. 한 발자국만 물러서면 그 아래는 천길도 넘는 낭떠러지였다.
아형이 소리쳤다.
"당신이 한 걸음만 더 다가서면 난 이대로 절벽에서 뛰어내리겠어요!"
학 영감은 우뚝 멈춰 섰다. 그는 잠시 어찌할 바를 몰라 씩씩대며 서 있었다.
이때였다. 아형의 뒤쪽으로 사람 하나가 기어 올라왔다.
그를 발견한 학 영감은 당황한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는 바로 자기의 철천지 원수이자 일심으로 태호 무리를 소탕하려 하는 황약사가 아닌가. 아형 역시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황약사가 아직도 살아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으며 그가 어떻게 이 산봉우리까지 올라오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놀랍고도 반가운 마음에 황약사를 뚫어져라 쳐다볼 뿐 할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황약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온통 옷이 찢기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아형을 바라보며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끼며 학 영감을 노려보다가 다시 아형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아형 낭자, 아직 살아 있었구려."
아형은 가슴이 뭉클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황약사가 살아 돌아오다니 도무지 꿈만 같았다.
황약사는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홰 돌려 학 영감을 쏘아보았다.
"개만도 못한 놈 같으니. 오늘 내 손에 죽는 줄 알아라!"
그는 신력(神力)을 모아 늙다리에게 일격을 가하기 위해 성큼성큼 다가들었다.
학 영감은 몹시 당황했다. 그는 비록 온몸의 내력을 집중시키고 있었으나 황약사에 대한 두려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자기가 황약사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악귀! 이봐, 악귀!"
학영감이 갑자기 소리쳤다.
"악귀가 아니라 염라대왕을 불러 온다고 해도 네 놈은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학 영감은 황약사의 말은 들은 척도 않고 계속 미친 듯이 소리만 질러 댔다. 황약사는 개의치 않고 공격할 태도를 취했다.
이때였다. 불쑥 앳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대체 웬 소란이야? 이거 원 잠을 잘래야 잘 수가 있나?"
학 영감은 악귀가 나온 것을 보고 다급히 말했다.
"악귀, 날 구해 주게. 날 구해 달라구."
악귀가 눈을 비비며 황약사를 쳐다보았다.
"이 놈 말이냐?"
그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황약사의 허리에 일격을 가했다. 급작스러운 일격에 황약사는 내심 충격을 받았다. 악귀는 황약사가 잠시 비틀대는 틈을 타 방장을 빗발치듯 날리며 연달아 공격해왔다.
아형은 사태가 불리한 것을 느끼고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황 공자, 조심하세요!"
황약사는 피할 길이 없자 몸을 가로 뻗으면서 두 손의 대력으로 학 영감의 옆구리를 내질렀다. 학 영감은 움찔 뒤로 물러섰다. 황약사는 얼른 몸을 세워 도로 제자리에 앉았다. 그는 품속에서 옥소를 꺼내 들고 소리내어 불기 시작했다. 그가 옥소를 불자 그것은 검이 되어 학 영감 쪽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악귀는 속으로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렇듯 절묘한 검법은 일찍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 놈은 정말 무서운 놈이구나. 섣불리 덤벼들었다간 큰코다치겠어. 학영감이 알아서 하도록 난 구경이나 해야지.'
이렇게 생각한 악귀는 뒷짐을 지고 멀찍이 물러섰다.
악귀의 심사를 눈치챈 학 영감은 속으로 부아가 치밀었다. 둘이 힘을 합치면 황약사 정도는 물리칠 수도 있을 텐데 지레 겁먹고 몸을 사리는 악귀의 태도가 여간 얄밉지 않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는 혼자서라도 황약사와 싸울 결심을 하고 결연히 앞으로 나섰다.
"황약사, 네 놈이 나의 태호 무리를 해쳤으니 내 오늘 네 놈을 요절내 버리고 말 테다!"
그는 잽싸게 '독수리가 아홉 가지를 끌어잡는' 수법으로 갈고리손을 내밀었다. 황약사의 두 귀를 가격하여 태양혈에 손톱을 걸어 대번에 죽여 버리려는 수작이었다.
황약사는 그 갈고리 손이 얼씬거리는 것을 보고 내심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호방 무리가 명성을 떨치게 된 것도 이 학 영감의 '독수리가 아홉 가지를 끌어잡는'무예 때문이 아니던가.
학 영감은 첫 공격에서 실패하자 몸을 회전시키더니 되돌아오며 측면공격을 해왔다. 황약사는 잽싸게 몸을 피하며 옥소로 학 영감의 두 손을 가리켰다. 순간 소스라치게 놀란 학 영감은 얼른 두 손을 움츠러뜨렸다. 이 옥소가 학 영감의 손에 있는 소부혈(少府穴)을 적중하기만 하면 더는 손을 움직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학영감이 손을 거두어 들이는 순간 그 손이 큰 돌멩이에 부딪치며 '팍'하는 소리와 함께 돌멩이가 두 쪽으로 갈라져 발치에 떨어졌다. 학 영감은 얼
른 떨어지는 돌멩이를 발로 걷어찼다. 그 돌멩이는 황약사 쪽으로 씽 하고 날아왔다. 황약사는 몸을 피하면서 손을 내밀어 그 두 조각의 돌멩이를 받아 쥐었다. 그는 손에 쥔 돌멩이에 힘을 주어 부숴 뜨리더니 학 영감에게로 다시 날려 보냈다. 아홉 조각으로 부숴진 돌멩이들은 빠른 속도로 날아가 학 영감 몸에 있는 혈도들을 명중하였다. 학 영감은 더는 꼼짝하지 못하고 못박인 듯 굳어졌다. 움직일 수 없게 된 그는 미친 듯이 두 손을 허우적대며 악만 바락바락 썼다
악귀가 손뼉을 치며 소리쳤다.
"멋지군! 과연 무서운데?"
그는 황약사 쪽으로 다가서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전력을 다한 것도 아닌데 학 영감은 상대도 되지 않는군요
황약사는 웃음을 머금으며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황약사는 아형에게 다가가 자기가 입었던 두루마기를 벗어 아형에게 걸쳐 주었다. 아형은 기쁨과 슬픔이 뒤엉킨 감정으로 황약사를 바라보며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학 영감은 분노에 찬 시선으로 황약사를 바라보았다. 그런 학 영감을 향해 황약사가 경멸 조로 말했다.
"네 놈의 독수리가 아홉 가지를 끌어잡는 법수가 다른 자들한테는 먹혀 들지 모르지만 나한테는 아무 것도 아니야."
학 영감은 심한 모욕감을 느끼며 화가 나서 소리쳤다.
"네 놈의 재간이라야 암기로 남을 해치는 것밖에 더 있느냐? 내가 독수리가 아홉 가지를 끌어잡는 법수를 제대로 다 쓰기만 하면 네 놈 따윈 일거에 해치울 수 있다."
황약사가 비웃었다.
"그래? 그렇다면 어디 한번 시험해 볼까?"
황약사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땅에서 돌 하나를 번개같이 집어 던졌다. 그 돌멩이는 곧바로 학 영감의 혈도에 명중하였다.
혈도가 풀린 학 영감은 몸을 가눌 수 있게 되자 고함을 내지르며 황약사에게 덮쳐 들었다. 황약사는 번개같이 몸을 놀리며 학 영감과 싸우기 시작했다. 학 영감은 자기의 무예가 황약사보다 못하다는 것을 빤히 알고 있었다. 학 영감은 한 가지 죄를 썼다. 그는 허장성세로 덤벼들다가 황약사가 옥소를 휘두르자 바삐 뒷걸음질을 쳐서 아형의 곁에 바싹 다가갔다. 황약사가 아차하는 순간 그는 잽싸게 몸을 돌려 아형을 끌어안고는 벼랑 아래로 획 몸을 날렸다.
황약사는 몹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학영감이 이런 행동을 취하리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급히 낭떠러지께로 달려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물결치는 태호 한복판으로 떨어져 내리는 아형과 학 영감의 모습이 잠시 시야에 잡히는가 싶더니 금세 출렁이는 흰 파도만 보일 뿐 두 사람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황약사는 너무나 기가 막혀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자기도 당장 뛰어내려 아형을 구하고 싶었으나 천길 낭떠러지 아래로 뛰어내린 두 사람이 살아 있을 리 만무이고 자기 또한 살아 남으리라는 확신이 서질 않아 멍청히 태호의 물결만 하염없이 내려다볼 뿐이었다.
이때였다. 누군가 뒤에서 소리쳤다.
"황약사, 꼼짝 마라!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간 벼랑 아래로 밀어 버리겠어!"
황약사는 움찔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악귀란 놈이 뒤에 붙어 서서 손으로 척추의 대혈을 겨냥하고 있었다. 깜짝 놀라 움직이지 못하는 황약사를 바라보며 악귀가 소리내어 웃었다.
"사내놈과 계집년들이란 어찌 그렇게 하나같은지……. 그 따위 사랑인지 뭔지 때문에 아까운 목숨들을 덧없이 저버리다니. 그래 네 놈들은 목숨이 몇 개씩이라도 된단 말이냐?"
악귀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손뼉까지 쳐대면서 깔깔거렸다.
"모두 다 어리석은 연놈들이지. 어쨌든 일이 이 지경이 됐으니 여기서 살아 남을 사람은 자연히 나 한사람뿐이겠군."
황약사는 놈이 왜 당장 손을 쓰지 않고 딴청을 부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악귀가 또다시 입을 열었다.
"가만, 우린 구면인 것 같은데 어디서 봤더라?"
황약사는 악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 역시 이 소년의 얼굴이 무척 낯익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어디서 봤는지 뚜렷한 기억은 없었다. 악귀가 고개를 저었다.
"에이, 세상엔 비슷한 사람도 많은 법이니까. 그건 그렇구, 내가 강호에서 무슨 이름으로 불리는지 아느냐?"
황약사는 악귀를 차갑게 쏘아볼 뿐 대꾸하지 않았다.
"모두들 날 악귀라고 부르지. 그런 내가 자네를 순순히 놓아줄 성싶은가?"
황약사는 대꾸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이 산꼭대기에서 내려갈 수 있을까만 궁리했다.
"아니, 저게 뭐지?"
악귀가 갑자기 큰소리로 말했다. 멀리, 까만 점 두 개가 어른거리더니 점점 커지면서 산봉우리를 향해 날아왔다. 그것은 다름아닌 학 영감의 피독수리였다. 독수리들은 응취봉 상공을 몇 바퀴 선회하더니 곧 산꼭대기에 내려앉았다. 독수리들은 황약사와 악귀를 보며 괴상한 소리로 울어댔는데 마치 학영감이 어디에 있는가고 묻는 것만 같았다. 황약사와 악귀는 서로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갑자기 악귀가 입을 열었다.
"이 놈을 타면 산꼭대기에서 내려갈 수 있겠구나."
악귀는 당장 자기 손톱으로 팔에 상처를 냈다. 삽시에 피가 샘솟듯 흘러 나왔다. 악귀는 그 팔을 독수리에게 들이밀어 피를 마시게 다. 독수리는 악귀의 뜻을 알아차리고 부리로 팔뚝을 쪼아 대며 흐르는 피를 말끔히 먹어 치웠다. 악귀는 냉큼 독수리의 등에 올라 타고는 학영감이 그랬던 것처럼 휘파람 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그 피독수리는 껑충 뛰더니 산봉우리 아래로 질풍같이 날아 내려갔다.
황약사도 다른 한 마리의 독수리를 보고는 악귀가 한 것처럼 자기의 피를 먹게 했다. 잠시 후 악귀와 황약사를 태운 두 마리의 독수리는 태호의 상공을 질풍같이 날아가기 시작했다. 독수리들은 줄곧 북쪽을 향해 날았다.
멀지 않아 태호의 물결 대신에 전야며 인가들이 총총히 들어앉은 시가지가 눈앞에 나타났다. 한참 날던 독수리가 갑자기 아래를 향해 곤두박질치듯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황약사는 독수리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독수리는 커다란 암석 위에 황약사를 떨구어 놓더니 재빨리 무엇인가를 향해 덮쳐 들었다. 황약사는 이내 구렁이 두 마리가 치열하게 뒤엉켜 싸우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황약사는 침착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암괴석들이 우뚝우뚝 일어서 있고 수목들이 울창한 이곳이 도대체 어딘지를 암만 봐도 알 수가 없었다. 피 독수리는 어느새 두 마리의 구렁이한테 덮쳐 들어 싸우고 있었다. 두 마리의 구렁이는 저희들끼리 싸우다가 독수리가 덮쳐 들자 한편이 되어 독수리에게 덤벼들었다. 구렁이와 독수리의 싸움은 볼 만하였다.
황약사가 한창 싸움 구경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였다.
느닷없이 씽 하는 소리가 나더니 두 개의 날카로운 화살이 날아와 하나는 독수리의 몸뚱이에 매달린 구렁이의 요해처를 명중하고 계속해서 독수리의 앞가슴까지 뚫고 들어갔고, 다른 하나는 왼쪽 날개를 감은 구렁이의 몸뚱이를 관통하여 독수리의 날개까지 뚫고 들어갔다.
순간 한 무리의 사람들이 환성을 지르며 수림 속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모두 소매와 바짓가랑이가 좁은 옷을 입고 머리를 영웅건(英雄約)으로 싸매고 있었다. 그들은 독수리와 구렁이가 엉켜 있는 곳으로 다가와 구경하면서 한 젊은 사나이를 향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방주님의 활재주는 실로 대단하십니다. 방금 쏘신 두 개의 화살은 실로 비(飛) 장군(將軍)의 신전(神箭)에 비길 만하옵니다."
그러자 무리들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오? 우리의 방주님이야말로 절세의 영웅으로 문재(文才)와 무략(武略)이 모두 뛰어난데 비 장군 정도에 비기겠소? 그래 비 장군한테 우리 방주님처럼 철장(鐵掌)으로 물 위에서 떠다니는 뛰어난 법수가 있다면 또 모르겠소."
황약사는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앉아 쓴웃음을 지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 녀석들이 어느 무리에 속하는 놈들인지 는 모르겠으나 세상에 저밖에 없다고 설치는 놈들이 태호방말고 여기 또 있었군.'
이때였다. 갑자기 젊은 사나이가 큰소리로 외쳤다.
"비켜라!"
칭찬을 쏟아 붓던 사나이들이 일제히 한쪽으로 물러났다. 젊은 사나이는 곧장 독수리와 구렁이들이 한데 엉켜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거리가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그는 놈들을 노려보며 한 손을 치켜 들었다.
순간 '팍!'하는 소리와 함께 뱀 한 마리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연달아 다른 한 마리마저 같은 방법으로 죽이자 모여 섰던 사나이들이 일제히 환성을 질러 댔다. 독수리는 자기 몸에 감겼던 두 마리의 구렁이가 죽자 막혔던 숨을 내쉬면서 고맙다는 시선으로 젊은 사나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젊은 사나이는 한걸음 쓱 나서며 말했다.
"자, 이젠 네 차례다."
그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아까처럼 손바닥 하나를 펼쳐 들었다. 피 독수리는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대가리가 몇 장 밖으로 날아가 떨어지고 피를 뿜어 대며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어서 가마를 걸어라!"
사나이들은 즉시 몸을 움직여 바위 곁에 가마를 걸고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가마 속의 물이 끓기 시작하자 그들은 죽은 구렁이의 아가리를 벌려 긴 이빨을 뽑아 내고는 혓바닥을 잘라 낸 뒤 입에 고인 독을 씻어 냈다. 이어서 그들은 칼로 배때기를 째고 심장과 담낭을 꺼내더니 구렁이 두 마리를 토막내어 가마에 앉힌 다음 독수리도 배를 째고 털을 뽑는 등 바삐 손질하여 가마에 앉혔다. 잠시 후 누군가가 시꺼먼 약초를 캐다가 가마에 넣었는데 그 약초 냄새가 황약사
가 숨어 있는 곳까지 풍겨 왔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끓고 있는 국물을 휘젓던 사나이 한 명이 갑자기 냄새에 취한 듯 땅바닥에 쓰러졌다. 일행들이 쓰러진 자를 부축해 가고 다른 사람이 국을 젓기 시작했는데 그도 얼마 안 있어 힘이 드는 듯 비틀거리더니 맥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멀찍이서 이를 지켜 보던 황약사는 속으로 몹시 놀랐다. 보아하니 가마 속의 약물은 기가 막히게 독한 것인 모양으로 도대체 저걸 어디에다 쓰려는 것인지 여간 궁금하지 않았다. 이때였다.
젊은 사나이가 웃옷을 훌훌 벗어 던지며 앞으로 나섰다.
"됐다. 그만들 해라!"
그는 털이 가득 난 앞가슴을 드러내고 몇 발짝 옮겨 가마 앞에 멈춰 섰다. 그는 두 손을 치켜 들다니 기합을 넣어 천천히 가마 속에 들이밀기 시작했다.
황약사는 놀라운 마음으로 시선 한 번 테지 않고 그를 지켜 보았다. 한참 후 그는 드디어 가마에서 손을 꺼냈다. 두 팔을 곧게 쳐들자 거무스름한 액체가 가득 발린 손이 눈에 들어왔는데 전과는 달리 다소 부은 듯한 감을 주었다.
그는 이제 몸을 옮겨 큰 돌바위 사이를 질주하면서 손에 발린 액체를 온몸에 뿌려 대기 시작했다. 그 모양을 바라보던 황약사는 다시 한 번 놀랐다. 그 사람의 경공 또한 자기에게 지지 않을 만큼 훌륭해 보였던 것이다. 그는 한참을 오락가락 뛰어다니더니 갑자기 큰 바위 위에 올라앉아 두 손을 한데 모으고 움직이질 않았다.
황약사는 그가 왜 그러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는 기를 모아 몸에 발린 독을 내력으로 변화시키려는 것이었다. 이것은 사파(邪派)의 법수로서 이런 수법으로 내력을 강화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하면 다른 사람이 사용하는 독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게 된다. 그러나 이 법수는 아주 지독한 것으로 내공이 아주 강한 자가 아니면 자칫 생명을 잃을 위험이 있다.
그는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팔뚝의 검은 색깔이 점점 엷어졌다. 잠시 후 그는 두 손을 곧게 펴면서 눈앞에 있는 큰 바위를 향해 천천히 뻗쳤다. 그가 몇 차례를 빨리, 혹은 천천히 바위를 밀어붙이는 듯한 행동을 반복하자 두 손의 검은 빛이 모두 퇴색하여 손바닥에 동전만한 검은 반점밖에 남지 않았다.
그가 바위를 밀어붙이기를 그만두자 사나이들 중 한 사람이 다가가서 그 바위를 살펴보았다. 그는 슬그머니 바위를 건드려 보았다. 순간 바위는 즉시 가루가 되어 주저앉았다.
사나이들이 모두 환성을 올렸다.
"철장방의 방주인 철 장수상표 구천인은 당세의 으뜸가는 영웅이며 천하의 무적이다!"
그들은 이렇게 연거푸 세 번이나 외쳤는데 소리가 어찌나 요란한지 천지가 뒤흔들리는 듯했다.
그러나 젊은 사나이는 별로 기쁘지 않은 듯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이 철장신공으로 강호에 있는 일류의 호수(好手)들을 대적하는 건 쉬운 일이다. 하지만 몇몇 인물들과는 아직 자신이 없어."
철장방의 한 졸개가 물었다.
"구 방주님, 방주님의 철장은 그동안 상당히 진보했습니다. 방주님께선 충분히 화산의 무예시합에 나가 왕중양 등과 겨뤄 이길 수 있습니다. 소인은 그렇게 믿습니다."
젊은 사나이는 잠자코 말이 없었다. 그는 바로 철장방 방주 구천인으로 일심으로 무예를 닦으며 화산의 싸움에서 《구음진경》을 손에 넣을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터였다. 구천인이 철장방의 방주가 된 후 철장방은 강남에서 크게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자신의 무예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무예를 연마할 때마다 구양봉에 대한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는데, 아무리 무예를 닦아도 구양봉의 무예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아 괴롭기 짝이 없었다. 그
낡은 절에서 사부인 상관위의 유체를 화장할 때 구양봉이 철장방의 많은 사람들을 대수롭지 않게 죽여 버리던 일을 생각하면 자기의 무예는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구양봉 한 사람도 대적해 내지 못하는 처지에 천하에 이름을 날리는 무림의 고수들을 무슨 수로 당해 낸단 말인가.
구천인은 탄식조로 입을 열었다.
"나의 이 재주를 가지고 어찌 화산엘 갈 수 있겠는가? 한낱 서역의 백타산 장주에 불과한 구양봉 하나도 자신 있게 대적해 낼 수 없는 마당에 말이야."
구천인은 서글픈 심정이 되어 고개를 떨구었다. 철장방의 무리들은 종래로 천하에 뛰어난 무예를 접촉한 일이 없는지라 자기들의 방주 구천인의 무예가 천하에 으뜸인 줄로만 알고 있다가 구천인으로부터 이 같은 말을 듣게 되자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잠시 침묵을 지키고 앉아 있던 구천인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누구냐? 냉큼 나오지 못할까!"
철장방 졸개들은 모두 깜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때였다. 한 사나이가 전혀 당황하는 기색 없이 그들에게로 걸어 나왔다.
"나오라니 나오겠다만, 어쩔 셈인가?"
황약사는 철장방 패거리들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누군가가 외쳤다.
"넌 누구냐? 우리 방주님이 무예를 닦는 걸 훔쳐보는 게 무슨 죈지 아느냐?"
그의 말에 황약사는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장방 사람들은 황약사가 미친 듯이 웃어대자 몹시 화가 났다. 그들 중 하나가 황약사를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감히 뉘 앞이라고 방자하게 웃어대느냐? 넌 우리 철장방의 명성도 듣지 못했단 말이냐?"
황약사가 웃으며 대답했다.
"너희들은 내가 그 하찮은 무예를 훔쳐 봤다고 이 야단들이냐? 정말 웃지 않을 수가 없구나."
그의 말에 구천인은 낯색이 파래지며 물었다.
"네 놈은 누구길래 나의 무예를 하찮게 보는 거냐?"
"누구라는 건 알아서 어쩌려구?"
구천인은 부아가 치밀었다.
"좋다. 네 놈에게 하찮은 내 무예를 보여 주마!"
구천인이 당장이라도 덤벼들 태세를 취하자 황약사가 얼른 물었다.
"자넨 화산의 무예시합에 참석할 생각이라면서?"
구천인은 잔뜩 화가 나서 사납게 소리쳤다.
"내가 참석하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이냐? 장이나 받아라!"
그는 곧장 장을 날려 황약사의 안면을 강타했다.
황약사도 얼른 장을 날려 구천인의 장을 맞받아 쳤다. 탁, 하고 두 사람의 장이 맞부딪치자 구천인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황약사가 무예를 모르는 일개 서생에 지나지 않으리라 여겼다가 자신이 잘못 판단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구천인은 놀란 표정으로 황약사를 바라보며 급히 물었다.
"당신은 누구신데 이처럼 무예가 훌륭하시오?"
황약사는 빙그레 웃으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구천인이 부하들을 둘러보았다. 그들은 멍청하니 황약사와 자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구천인은 속으로 생각을 굴렸다.
'우리 철장방 사람들은 종래로 남한테 쉽사리 굴복해 본 적이 없는데, 오늘 내가 저 놈한테 굴복한다면 내 부하들이 날 우습게 여길 것이다. 방금 난 장을 가볍게 날리고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내가 전력을 다했더라면 저자를 꺼꾸러뜨릴 수 있었을 거야.'
이렇게 생각한 그는 두어 걸음 물러섰다가 무서운 소리를 지르며 다시 황약사에게 달려들었다.
황약사는 이번에도 가볍게 손을 뻗어 구천인의 손을 막아냈다. '팍'소리가 나면서 그의 두 손이 구천인의 두 손과 맞부딪쳤다.
두 사람은 장을 맞붙이고 한식경이나 서로 버티고 있었다. 구천인은 낯색이 새파래지며 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그는 속으로 생각을 더듬었다.
'내 이 두 손에는 독이 있는데 그래 네 놈이 두렵지 않단 말이냐? 오늘은 참 이상한걸? 이 사람의 공력이 이다지도 세단 말인가……."
구천인은 입에 신 침이 괴면서 구역질이 치밀어 오름을 느꼈다. 하지만 토해서는 안 되었다. 만일 피를 토하게 된다면 결과는 불 보듯 빤한 일이다. 그는 황약사를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절망적으로 생각했다.
'아무래도 명대로 살긴 틀린 것 같구나. 한데 이자는 누굴까? 내가 누구 손에 죽는지도 모르고 저 세상으로 가겠구나.'
이때였다. 황약사가 천천히 손을 거두어 들이더니 구천인을 바라보며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보아하니 자네도 재주가 그리 만만한 것 같지 않은데 오늘은 이쯤 해두겠네. 다음에 만날 기회가 있으면 그때 제대로 한번 겨뤄보세."
황약사는 이 말을 툭 내뱉고는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구천인이 다급히 물었다.
"선생께선 함자를 어떻게 쓰시는지요?"
황약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난 동해 도화도 도주 황약사라 하네!"
그는 이 말을 남기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제14장 선악일념
철장방 사람들은 모두 아연실색했다. 황약사란 사람이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자기들의 방주 구천인을 대번에 물리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들은 모두 얼떨떨해져서 서로의 얼굴만 쳐다볼 뿐 누구 하나 입을 열려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갑자기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 왔다.
"거 참 맛있구나, 맛있어!"
모두들 소리나는 쪽을 돌아다보니 언제부턴가 쇠가마 곁에 낯선 사람 하나가 누워 있는 게 아닌가. 그 사람은 누더기를 걸친 남루한 행색으로 몹시 지저분해 보였다. 하지만 눈은 아주 정기가 있어 보였는데 서글서글한 두 눈으로 철장방 사람들을 둘러보며 무엇인가를 아귀아귀 씹어 먹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가마솥에서 건져 낸 뱀과 독수리 고기였다.
철장방 사람들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이 거지야, 목숨이 아깝지도 않느냐? 네가 먹는 그 고기엔 독이 있어!"
그 거지는 그들의 말엔 아랑곳없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을 계속해서 먹어댔다.
철장방 사람들은 그가 무슨 산해진미나 맛보는 듯이 고기를 게걸스레 뜯어먹는 것을 보고 모두들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을 지켜 보던 한사람이 물었다.
"이 솥의 고기엔 독이 있는데 당신은 겁나지도 않소?"
거지가 웃으며 대꾸했다.
"거지 주제에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되나? 남이 먹을 걸 주기만 해도 감지덕지지. 찌꺼기든 나쁜 음식이든 닥치는 대로 먹어 둬야 하는 거야, "
그는 다시 펄펄 끓는 물에 손을 집어 넣어 뱀 한 토막을 건져 냈다. 그가 어찌나 맛있게 먹어대는지 철장방 사람들까지도 그 고기가 정말 먹을 만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구천인이 차가운 어조로 물었다.
"정말 대단한 양반이로군.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거지는 그저 웃는 낯으로 가마솥에서 고기를 건져 먹을 뿐이었다. 구천인은 그가 자기를 무시하는 것 같아 은근히 화가 났다.
"이보시오, 그 고기를 먹으면 당신은 중독되오. 그 고기의 독성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고나 있소?"
거지가 여전히 웃으며 대답했다.
"여기엔 독초인 식심초(蝕心草)가 들어 있지. 거기에다 독사와 독수리를 넣고 끓이니 아주 맛있구만 그래, 자네도 좀 맛보지 않겠나?"
그의 말에 구천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놈이 날 떠보려는 수작이렷다?'
구천인은 아무래도 가만히 있어선 안 될 것 같아 선뜻 그의 곁에 다가앉았다.
"당신이 그렇게 맛있다고 하니 이거 침이 넘어가서 견딜 수가 없군요. 어디 나도 좀 먹어 봅시다."
구천인도 가마솥에서 고기를 건져 내어 맛을 보았다. 아닌게 아니라 정말 기막힌 맛이었다.
구천인은 가마솥에서 고기를 건져 내어 정신없이 뜯어먹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고기의 독이 몸에 퍼지면 어쩌나 하는 우려도 없지 않았다. 그는 유심히 거지를 눈여겨보았다. 가만 보니 거지가 국에서 고기를 건져 내는 방법은 아주 독특했다. 그는 먼저 손을 국 속에 밀어 넣은 다음 팔뚝까지 국 속에 담그더니 고기를 건져 낼 때면 희한하게도 손이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야 팔뚝이 나오는 게 아닌가? 거지의 팔뚝을 보니 온통 새까맣게 물이 들었는데 딱딱하게
굳어 보이는 게 이미 중독된 듯했다.
거지가 웃으며 말했다.
"구천인, 자넨 철장방의 방주 노릇을 헛했구만 그래. 여태껏 이렇게 맛좋은 음식도 모르고 있었다니. 그래, 직접 먹어 보니 어떤가? 천하일미가 아닌가?"
구천인은 아무 대꾸도 않고 거지와 함께 가마 속의 고기를 번갈아 건져 내어 먹기만 했다. 그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거지가 또 입을 열었다.
"가마 밑의 불이 약하군 그래. 좀더 끓이면 안 되겠나?"
구천인이 눈짓을 하자 부하들이 몰려와 가마 밑에 장작을 더 넣었다. 그러자 국이 더 세차게 설설 끓어 대기 시작했다. 거지가 손을 넣어 가마솥을 저으며 말했다.
"좀 기다렸다가 먹으면 더 맛있을 거야."
한식경 가량을 더 끓이고 나서 거지가 말했다.
"됐어. 이젠 먹자구."
두 사람은 다시 가마솥에서 고기를 건져 먹기 시작했다. 실컷 먹고 난 거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배가 부르니 졸음이 오는군. 보게나 여기에 무슨 독이 있다는 건가? 아, 난 좀 자야겠네."
그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구천인이 무어라 말할 사이도 없이 벌렁 드러누웠다. 그는 자리에 눕자마자 금세 곯아떨어졌는데 코를 고는 소리가 놀라울 정도로 요란했다. 철장방 사람들은 모두 구천인의 행동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방주가 아주 지독한 사람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방주가 안하무인격으로 날치는 이 거렁뱅이를 죽여 버리기를 바랐다. 하지만 구천인은 망설이기만 할 뿐 감히 손을 쓰지 못했다.
한식경이나 흘렀을까. 한참 달게 잔 거지가 기지개를 켜며 몸을 일으켰다.
"아, 한숨 잘 잤다!"
그는 일어나 앉기가 무섭게 구천인에게 물었다.
"내가 한숨 자는 동안 자네들은 뭘 했나?"
"당신이 잠자는 걸 구경하고 있었소."
구천인의 대답에 거지가 큰소리로 웃으며 말을 받았다.
"이 홍칠이 어디 볼 게 있다구 잠자는 걸 구경해?"
구천인은 그가 홍칠이라는 말에 속으로 깜짝 놀랐다. 천하에서 제일 큰 무리가 바로 개방이고 개방에서 지금 방주 노릇을 하고 있는 자가 바로 홍칠이 아니던가.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는 그의 사부인 소씨 거렁뱅이로부터 강룡십팔장과 타구봉법이라는 두 가지 신기를 전수받았는데 재주는 소씨 거렁뱅이보다 더 무섭다고 했다. 그러나 구천인은 은근히 호기가 치밀어 속으로 생각했다.
'난 사부님한테서 무예를 배워 철장방의 방주가 된 이래 천하의 영웅과 겨루어 보지 못했다. 오늘 천행으로 이 홍칠공을 만났으니 이런 기회를 놓쳐서야 되겠는가?'
홍칠은 구천인을 바라보며 거만하게 물었다.
"자네가 철장방 방주 구천인인가?"
구천인은 침착한 기색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자 홍칠이 또 큰소리를 쳤다.
"그렇지 않아도 네 놈을 찾아 한번 버릇을 단단히 가르쳐 놓으려 했었다. 그런데 네 놈이 나한테 고기를 대접했으니 손을 대기가 멋쩍게 됐군 그래."
구천인이 홍칠을 노려보며 한마디 받아 주었다.
"고기를 먹은 건 네 놈이 스스로 먹은 것이지 내가 대접한 건 아니지."
그러자 홍칠이 손뼉을 치며 대꾸했다.
"그렇군! 내가 먼저 먹지 않았더라면 네 놈은 이 고길 먹을 수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테구. 그러니 따지고 보면 이 거지가 네 놈한테 모르는 걸 가르쳐 주기까지 한 셈이다. 독이 한 가지면 문제가 있지만 독을 섞으면 약간 좀 아프다가 곧 아무렇지도 않게 되지. 이제 제대로 알겠나?"
홍칠을 바라보는 철장방 사람들의 마음속엔 놀라움과 부끄러움이 교차했다.
홍칠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어쨌든 내가 너의 신세를 진 것은 없는 셈이지?"
그 말에 구천인도 호기롭게 껄껄 웃었다.
"신세질 게 뭐가 있단 말이냐? 나하고 싸우고 싶으면 어서 손이나 쓸 일이지, 계집년처럼 무슨 잔말이 그리도 많아?"
홍칠도 큰소리로 웃으며 대꾸했다.
"그래그래, 싸우려면 손을 써야지."
그는 냉큼 몸을 일으켰다.
"너희들의 철장방은 과거엔 괜찮았어. 네 놈의 사부가 방주 노릇을 할 땐 실로 좋은 일도 적잖게 했었지. 한데 네 놈 차례가 되니까 철장방이 쓰레기더미가 됐단 말야. 네 놈 수하엔 온통 아첨이나 하기 좋아하는 놈들뿐이고 어디 쓸 만한 놈이 있나 말야……."
홍칠의 말에 누군가가 말허리를 잘랐다.
"네 놈이 뭐길래 감히 우리 철장방 일에 참견하는 거야? 죽고 싶어서 환장했느냐?"
두 사람이 앞다투어 나서더니 곧장 홍칠에게 덮쳐 들었다. 철장방 사람들은 모두 자기들의 장력을 믿는 터라 남과 싸울 때면 병장기 같은 것은 여간해서 사용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밀어 다짜고짜 손을 쓰기 시작했다.
구천인은 그들을 말리려다가 생각을 고쳐 먹었다. 그는 입을 다물고 그들이 싸우는 것을 지켜 보았다.
홍칠이 번개같이 몸을 움직여 나는 듯이 피하더니 두 사람을 향해 동시에 장을 날렸다. 그의 장에 한 사람은 붕 떠올랐다 떨어지고 다른 한 사람은 딱 하는 소리와 함께 다리뼈가 부러졌다.
이를 지켜 보던 철장방 사람들은 모두 겁을 집어먹고 자기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구천인이 천천히 일어서더니 홍칠에게 물었다.
"이게 그 강룡십팔장이란 거냐?"
그는 홍칠이 개방의 방주로서 두 가지 신기인 타구봉법과 강룡십팔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홍칠이 웃으며 대답했다.
"천만에! 이건 내가 만들어 낸 권법으로 '소요유(逍遙游)'라고 부른다. 장자(莊子)의 책에는 사람이 소요하고 새가 소요하고 물고기가 소요한다는 구절이 있지. 바로 거기서 따온 이름이다……."
그의 말에 구천인은 가슴이 섬뜩해졌다. 홍칠이 갖고 있는 절기는 그만두고라도 이 '소요유'만 하더라도 권법이 기막히게 오묘하지 않은가.
그러나 구천인은 생각을 감추며 말했다.
"네 놈이 우리 철장방엔 사람이 없는 줄로 아는 모양인데 내가 오늘 본때를 보여 주마."
홍칠이 웃으며 대꾸했다.
"좋다, 네 놈이 그걸 바란다면야 이 어른이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지."
홍칠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잽싸게 나서면서 구천인의 면상을 향해 장을 날렸다.
구천인도 얼른 장을 날려 맞받아 치면서 다른 한 장으로는 얼굴을 막았다. 첫 공격이 좌절되자 홍칠은 몸을 날려 구천인을 에워싸고 돌며 주먹과 장을 빗발치듯 내질렀다.
구천인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앞뒤로 장을 내밀며 대적했다. 두 사람은 10여 합을 싸웠으나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홍칠이 바깥 쪽으로 물러나더니 껄껄 웃었다.
"이 어른이 이 몇 해 동안 적수다운 적수를 만나 보지 못했는데 오늘에야 제대로 만난 것 같구나. 네 놈의 무예도 그리 만만한 것 같진 않은데 이제부터 제대로 한번 싸워 봐야겠구나."
홍칠은 품속에서 녹옥죽봉(緣玉竹棒)을 꺼내 들고는 그것으로 구천인을 가리켰다.
"이건 타구봉이라는 것인데 어디 맛을 좀 보아라."
그는 손가락 세 개로 녹옥죽봉의 허리께를 잡고 돌리기 시작했다. 구천인은 그 녹옥죽봉을 보며 속으로 은근히 놀랐다. 개방의 타구봉법은 종래로 방주에게만 전수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알려 주지 않는 것으로, 이 봉법에는 걸고, 가르고, 감고, 찌르고, 쑤시고, 당기고, 막고, 돌리는 여덟 가지 비법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홍칠은 현재 죽봉으로 빨리 감는 동작을 쓰고 있었는데 구천인이 아무리 훌륭한 장력을 써도 홍칠의 죽봉에 의해 여지없이 무산되곤 했다. 구천
인은 아까처럼 진퇴의 폭을 크게 하지 않고 장력도 약간 조절했다. 그러나 그가 어떤 방식으로 손을 쓰든 그 장력은 홍칠의 몸에 닿지 못하였다. 홍칠은 다만 녹옥죽봉으로 가벼이 감는 동작을 취할 따름이었지만 죽봉 끝이 움직이기만 하면 구천인의 그 무서운 장력은 어디로 갔는지 가뭇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구천인이 손을 멈추며 침울한 기색으로 말했다.
"개방의 타봉법은 과연 헛소문이 아니었구려. 이제 비로소 그걸 알게 되었소."
홍칠은 껄껄 웃으며 대꾸했다.
"기색을 보니 불복인 모양이로구만. 끝까지 싸워 보고 싶다면 나도 마다하진 않겠다."
홍칠은 타구봉을 허리춤에 찔러 넣고는 다시 말했다.
"좋아, 난 자네와 장법으로 겨루겠네!"
구천인도 바로 그걸 바라고 있었다. 그가 내심 자신이 있는 것도 바로 자기의 철장법이었다. 그는 자신의 경공과 철장공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훌륭하다고 자부하고 있는 터였다. 당년에 상관위가 방주의 자리를 구천인에게 넘겨줄 때 철장방의 호수들은 모두 불복했었다. 그래서 상관위는 절의 대정향로(大鼎香爐)에 손자국을 남기는 시합을 시켰었는데, 사숙과 사조들은 결국 자신들의 철장공이 구천인보다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구천인은
자기의 이 두 가지 재주에 대해 긍지를 느끼며 말했다.
"당신이 정말 재주가 있다면 나와 장력을 겨루든가 아니면 누구의 경공이 더 나은가 비교해 봅시다."
홍칠이 넓적다리를 철썩 치며 대꾸했다.
"좋아 좋아. 자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해보자구."
홍칠은 흥이 나서 어깨에 메고 있던 조롱박을 끌어내렸다.
"이 조롱박 속엔 죽엽청(竹葉靑)이 담겨 있네. 아까 이 어른이 고기를 먹을 땐 이걸 꺼내지 않았었지. 그건 자네가 가마 속의 고기를 먹은데다가 이 술까지 마시게 되면 중독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어. 그러나 시간이 좀 흘렀으니 어디 한번 마셔 볼 텐가? 그럴 용기가 있나?"
"당신이 마신다면 나도 마시겠소."
구천인이 눈을 부릅뜨며 대꾸하자 홍칠은 당장 조롱박 주둥이를 입에 대고 두어 모금 마셨다. 잠시 후 그는 조롱박을 구천인에게 넘겨주었다. 구천인도 서슴없이 조롱박의 술을 두어 모금 마셨다. 그런데 술독이 어찌나 센지 목구멍이 찢어지는 것 같고 위가 타는 듯이 아파 왔다. 사실 그는 은근히 두려웠다. 이 조롱박의 술이 뱃속의 고기와 한데 섞이면 무슨 변이 날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를 지켜 보고 있는 홍칠의 시선을 의식하며 속으로 생각
했다.
'저 놈도 개방의 방주지만 나 구천인도 일방(一需)의 방주이니 절대로 약하게 보여서는 안 돼.'
구천인은 홍칠과 함께 번갈아서 조롱박에 담긴 술을 잠깐 사이에 몽땅 마셔 버리고 말았다.
몸에 술기운이 퍼지자 구천인은 약간의 피로를 느꼈다. 그는 홍칠을 건너다보았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기색으로 구천인만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몸을 일으키자 구천이도 튕긴 듯이 뛰어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됐소. 이제 장력을 겨뤄 봅시다!"
홍칠이 껄껄 웃으며 조롱박을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좋아 좋아. 내가 자네에게 개방의 신기 강룡십팔장의 맛을 보여주지!"
두 사람이 맞서자 이번의 싸움은 아까보다 훨씬 무시무시했다.
홍칠이 싸우다 말고 말했다.
"자네의 그 철장은 별게 아니야. 어차피 질 텐데 굳이 싸워서 뭘 어쩌겠다는 건가?"
구천인은 대답하지 않고 홍칠만 바라보며 틈을 노렸다. 홍칠은 두 손을 앞으로 가져가더니 들숨을 크게 쉬고는 '팍!'하는 소리와 함께 장을 내밀었다. 이 장은 항룡유회라고 하는 법수로, 홍칠이이 법수를 쓰자 구천인의 뒤에 있던 나무의 줄기가 댓바람에 뚝 부러져 나갔다. 구천인도 얼른 손을 내밀어 대응했다. 그는 먼저 오른손을 내밀어 일부러 허세를 보인 다음 다시 왼손으로 마미장(摩眉掌)을 내밀었는데 이를 본 홍칠은 속으로 찬탄을 금치 못했다.
'재주가 괜찮군! '
홍칠은 다시 힘을 모아 장을 날렸다. 이번에 쓴 법수는 쌍장을 이용한 견룡재전(見龍在田)이라는 것인데 그 위력이 어찌나 대단한지 '쿵!'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구천인은 몇 발짝이나 뒤로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구천인은 급히 두 손을 거둬 들여 장으로 가슴을 막았다.
홍칠은 그가 뒤로 밀려 나간 것을 보고 더는 장을 쓰지 않았다. 그는 자리에 앉아 조롱박을 집어 들더니 입에 갖다 대었다. 그러나 술이 한 방울도 남지 않았음을 깨닫고는 속이 상한 듯 투덜댔다.
"젠장, 술이 한 모금도 없잖아!"
구천인이 숨을 돌리고 나서 우울한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개방의 절기 강룡십팔장이 과연 헛소문이 아니었군요. 탄복하는 바입니다."
홍칠이 웃으며 대꾸했다.
"자넨 말은 그렇게 해도 속으론 이 어른을 욕하고 있을걸? 안 그런가?"
구천인은 마음을 들킨 것 같아 움찔했으나 곧 아무렇지 않게 대 답했다.
"홍칠공, 저는 다만 당신의 경공이 어느 정돈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한번 잘 배워 보고 싶습니다."
홍칠이 큰소리로 웃었다.
"좋네, 좋아. 그토록 원한다면 내 얼마든지 가르쳐 주지. 그까짓 것 뭐 어렵겠나?
"좋습니다. 그럼 경공을 겨뤄 봅시다."
두 사람은 바위 위에 서 있다가 갑자기 몸을 날려 쏜살같이 앞으로 날아갔다. 홍칠은 몸체를 좀 작게 만들어 가지고 한 번 솟구치면 몇 장 밖으로 나갔는데 내력이 구천인보다 낫다는 것을 한눈에도 알 수 있었다. 구천인도 지지 않으려고 몸을 솟구쳤다. 마치 날아 가는 낙엽처럼 둥둥 떠가는 것이 실로 수상표 공력다웠다. 두 사람은 재빨리 먼 산의 꼭대기까지 갔다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홍칠이 구천인보다 더 빨라서 훨씬 먼저 제자리에 돌아왔다. 홍칠이 자리
에 털썩 주저앉은 후에야 구천인이 뒤미처 홍칠의 곁에 와 뛰어내렸다.
홍칠이 구천인을 바라보며 껄껄 웃었다.
"구천인, 자네네 철장방 사람들이 갖은 악한 짓은 다 하고 있는데 근래에는 더욱 말이 아니더군. 내가 미리 경고해 두겠는데 앞으로도 그런 일이 계속된다면 내가 자넬 가만 놔두지 않을 거야."
구천인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한 채 물끄러미 홍칠을 바라보았다. 홍칠의 얼굴은 전에 없이 무섭고 위엄 있어 보였다.
홍칠은 더는 말하지 않고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양손에 각각 조롱박과 녹옥죽봉을 나눠 들고는 나는 듯이 그곳을 떠났다.
철장방 사람들과 헤어져 산을 내려온 황약사는 인파가 붐비는 남송 건강부에 들어섰다. 이 건강부는 빗 도시 남경 (南京)이었는데 아주 번화한 고장이었다. 황약사는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라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을 싫어했다. 그는 떠들썩한 사람들로부터 벗어나 강변에 있는 한 술집에 들어섰다. 그곳에서 호호탕탕 흘러가는 장강의 물줄기를 바라보노라니 태호가 생각났다.
그가 한창 생각에 잠겨 있는데 험상궂게 생긴 장정 두 사람이 밧줄에 묶인 열네댓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를 끌고 들어섰다. 두 사내의 몸에서는 소금 냄새가 물씬 풍겼다. 가만 보니 의복에도 소금기가 하얗게 배어 나와 있었는데 이 장강 지역에서 염장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임에 틀림없었다. 그들은 술집에 들어서더니 밧줄을 잡아당겨 어린애를 땅바닥에 앉게 했다. 그중 한 자가 소리 높여 외쳤다.
"주인, 주인 있소?"
그 소리가 어찌나 요란한지 주인이 당황한 기색으로 달려 나왔다.
"객관(客官) 나으리, 오셨습니까? 뭐든 분부만 내리십시오."
"맛있는 음식과 술을 내오게, 돈 걱정은 말고."
그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주인은 냉큼 주방으로 달려갔다. 얼마 안 있어 술과 안주가 갖춰져 나왔다.
두 사나이는 술과 요리를 보자 더는 말하지 않고 부지런히 먹어 대기 시작했다. 아이는 침을 삼키다가 상에 놓인 음식을 바라보며 애걸했다.
"절 좀 풀어놔 줘요. 저도 좀 먹고 싶어요.'"
두 사나이가 기가 막히다는 듯 서로 마주보며 징그럽게 웃어댔다. 그중 한 사람이 말했다.
"뭘 좀 먹고 싶다구? 그래 먹어 봐라."
그는 젓가락으로 안주를 집어 어린애의 입에 마구 밀어 넣었다. 그러자 다른 한 자도 덩달아 안주를 집어서 그 애의 입 안에 밀어 넣었다. 두 놈이 번갈아 안주를 입에 밀어 넣자 아이는 음식을 입안 가득 담은 채 씹지도 삼키지도 못하고 매우 고통스러워했다. 아이는 급기야 입귀에 피까지 흘렸는데 두 사나이는 그것을 보고 껄껄 웃으며 무척 재미있어 했다.
이를 지켜 보고 있던 황약사는 화가 치밀어 올라 당장이라도 놈들에게 버릇을 가르쳐 주고 싶었으나 가까스로 눌러 참았다. 이 '태백(太百)'이라는 술집이 하도 유명한 곳이라 이곳에서 싸움을 벌이면 시끄럽게 될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치미는 분노를 꾹 참고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술만 마셨다.
아이가 눈물을 줄줄 흘리는 것을 보고 한 놈이 지껄여 댔다.
"진현풍(陳玄風) 이 놈아, 네 놈 목숨도 이젠 끝장난 셈이니 오늘은 먹고 싶은 것이나 실컷 먹어라."
이어서 그는 소년의 손을 묶은 포승을 풀어 주고 그 애의 견정대혈(肩井大穴)과 다리의 환조(環跳)를 눌러 놓고는 아이에게 젓가락을 쥐여 주었다.
"여기에 있는 안주를 마음대로 먹으라구."
두 사나이는 더는 그 애를 상관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번에 큰형 님께서 이 건강의 십대 부호를 찾으신 건 그들과 짜고서 소금간을 올리려는 것일 거야. 만일 그자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그자들한테 구경거리 하나를 만들어 주세. 그자들한테 이 진현풍의 끝장을 보여 주잔 말일세."
"내 성질 같아서는 그 건강의 부호 놈들을 몽땅 잡아다가 한칼에 한 놈씩 죽여 버리고 그 살점을 이 놈한테 먹였으면 시원하겠네. 그러고 나서 칼도마를 장강에 던져 버리면 얼마나 멋지겠나?"
"그래 큰형님께선 안 그러실 것 같은가? 두고 보게. 만일 큰형님께서 그 십대 부호 놈들의 대답을 얻어 내게 되면 자연히 아무 말씀도 안 하실 것이지만 그 놈들이 대답하지 않는다면 필시 죽음밖엔 없을걸세."
황약사는 은밀히 주고받는 두 사람의 얘기를 엿들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보아하니 이 두 놈은 좋은 놈들이 아닌 것 같군. 이 놈들이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뒤를 밟아 알아봐야겠다.
갑자기 한 놈이 성난 소리를 내었다.
"빨리 빨리 먹지 않고 뭐해? 시간 없어!"
소년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음식을 정신없이 퍼먹었다. 음식 그릇은 잠깐 사이에 바닥이 났다.
두 사나이는 곧 진현풍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수레 한 대가 두 사람 안에 와 섰다. 황약사는 적당히 거리를 두고 그들의 뒤를 밟았다. 그 수레는 건강부의 성을 빠져 나와서는 곧장 강변 쪽으로 갔다.
강변에 이르니 낡은 절이 있었는데 '니마묘(泥馬描)'란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그 유래는 다음과 같다.
남송 개국 황제인 고종(高宗) 조구(趙枸)가 휘종(徽宗)과 흠종(欽宗) 두 황제와 함께 금나라 사람들한테 붙잡혔었는데 하루는 도망하여 이 강변에 이르렀다. 강을 건널 배가 없어 망설이고 있는 참에 아주 영특하게 생긴 말 한 필이 강변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도망쳐 온 강왕(康王) 조구 뒤를 금나라 군대들이 추격해 오는 것을 본 그 말은 발굽으로 땅을 구르며 조구더러 어서 올라타라고 울부짖었다. 조구는 급한 나머지 말등에 올라앉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말은
강에 들어서더니 나는 듯이 질주하여 곧장 대안으로 달려갔다. 언덕에 올라서서 말에서 내린 조구가 머리를 돌려 말을 바라보니 말은 투레질을 하며 몸에 묻은 진흙을 털고 있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한 무지의 흙더미가 쌓이는 것이었다. 강왕이 강변의 절에 들어가 보니 절 안 낭하에 있던 그 니마가 그림자도 없이 사라졌다. 강왕은 임안에 와서 도움을 정하고 국호를 고쳤는데 이때로부터 남송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강왕은 즉위한 후 고종으로 칭하였는데, 고종은 이
니마가 공이 있다고 생각하여 건강성 밖에다 니마묘를 세우기에 이른 것이다. 이 니마묘는 아주 휘황한 건물인데 말 대가리에 사람의 몸뚱이를 가진 신(神)이 모셔져 있으며 사면의 벽에는 강왕이 니마를 타고 강을 건너는 이야기의 내용이 그려져 있다. 고종이 재위하던 시절에는 이 니마묘의 향불이 꺼질 줄을 몰랐으나 효종(孝宗) 때에 이르러서는 그처럼 흥성하지 못했다.
그 두 사람은 진현풍을 데리고 절 앞까지 갔다. 절 문앞에는 많은 장정들이 파수를 보고 있었다. 그들은 이 두 사람을 보더니 들어가라는 눈짓을 했다.
황약사는 그들의 시선을 끽해 잽싸게 몸을 날려 절 앞에 서 있는 큰 나무 위에 뛰어올랐다. 이어서 그는 몇 개의 담을 날아 넘어 어느새 대전(大殿)의 용마루 위에까지 올라갔다. 뜰 안에는 불이 환히 켜져 있었는데 사람들이 한 줄로 늘어서서 뜰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은 일제히 횃불 한 자루와 칼 한 자루씩을 들고 있었는데 불빛이 칼날에 반사되어 매우 섬뜩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누군가 소리쳤다.
"아홉째 형님께서 진가라는 꼬마를 끌어 오셨다!"
이 말에 절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몰려 나왔다. 머리칼을 함부로 풀어헤친 모습의 두목이라는 자는 가만 보니 눈뜬 장님이었다. 손에는 부채가 들려 있었는데 그것은 쇠로 만든 커다란 부채였다. 여덟 명 되는 인물들이 그를 따라 천천히 전(殿) 앞으로 나왔다. 그들은 두목을 중심으로 방금 하인들이 갖다 놓은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황약사는 그들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가 없어 가벼이 몸을 날려 뜰 한쪽에 있는 커다란 나뭇가지에 옮겨 앉았다.
누군가가 고함을 질렀다.
"그들을 모두 끌고 올라오너라!"
그러자 손에 오랏줄을 쥔 사람 하나가 편전에서 걸어 나왔다. 뒤이어 그 오랏줄에 매인 사람들이 줄레줄레 끌려 나왔는데 남녀노소가 무려 4, 50명이나 되었다. 사람들이 대정 앞까지 끌려 나오자 우두머리인 청맹과니가 한바탕 징그럽게 웃어댔다. 실컷 웃고 난 그는 마치 앞을 볼 수라도 있는 듯이 끌려온 사람들을 쭉 둘러보았다. 그는 전혀 몸을 움직이지 않고서 어느 틈엔지 끌려온 사람들 앞까지 미끄러져 왔다.
"너희들은 건강의 십대 부호들이지? 내가 너희들한테 쪽지를 보내어 소금을 사들이라고 하지 않았더냐. 건강부의 소금을 몽땅 사들이라고 했는데 왜 말을 듣지 않는 거지?"
사람들은 모두 묵묵히 말이 없었다. 그중 제일 앞줄에 묶여 있는 사내가 입을 열었다.
"나으리, 나으리께서는 소금을 파시는데 장강의 수리 조건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우리 열 집에서 시장에 있는 소금을 모조리 사들인다 해도 나으리께서는 바다에서 많은 양의 소금을 쉽사리 또 날라 오실 겁니다. 얼마나 많은 돈이 있어야 그 소금을 다 사들일 수 있겠습니까? 또 해염으로 말하면 명주나 비단처럼 오래 보관할 수 있는 것도 못 됩니다. 관가에서 매매하는 물건은 사사로이 저장해 두지 못한다는 걸 나으리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서 나으리라는 자는 다시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매성비(梅星飛), 또 네 놈이로구나?"
서 나으리의 목소리에는 노기가 서려 있었다.
"보아하니 건강부의 열 집 사람들 중 네 놈이 말재주가 제일 나은 모양이지? 그런가?"
젊은 사나이는 두려워하지 않고 천천히 대답했다.
"제가 한 말은 사실입니다. 서 나으리께서 건강의 우리 열 집을 기어이 못살게 구시려 한다면야 제 입을 틀어막으면 그만이지요."
서 나으리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가? 그럼 네 놈이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 보아라. 유(劉)씨, 곡(曲)씨, 송(宋)씨들한테 물어 보아. 이 서 나으리가 자네들에게 소금을 사게 하는 것이 자네들을 해치는 것인가고 말이야!"
그는 부채로 묶여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가리키다가 그 부채로 한 노인의 어깨를 눌렀다. 그러자 노인은 비틀거리며 넘어지려 했다. 그는 또 부채로 한 어린애의 머리를 눌렀다. 그러자 어린애는 부채에 눌려 울음을 터뜨렸다.
"울지 마라. 울면 죽여 버릴 테야!"
서 나으리가 소리쳤다. 어린애는 잔뜩 겁을 집어먹고 뚝 울음을 그쳤다. 서 나으리가 매성비 앞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네 놈이 아무 재주도 없는 주제에 꽤나 오기를 부리는구나. 네 놈이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한 번 보고 싶을 정도다."
그는 다가가서 손으로 매성비의 얼굴을 만져 보려 했다. 매성비는 뒤로 물러서며 그를 피했다. 서 나으리는 재빨리 부채로 매성비의 혈도를 가리켜 그가 꼼짝달싹 못하게 했다. 서 나으리는 매성비의 얼굴을 만져 보며 중얼거렸다.
"음, 괜찮게 생긴 놈이구나."
그는 다른 사람들 쪽으로 머리를 돌리며 물었다.
"듣자니 매성비의 여편네가 잘났다고들 그러던데 정말 그렇게 고운가?"
그 말에 의자에 앉아 있던 염방( )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어댔다. 그 중의 누군가가 매성비의 아내에 대해 음담패설을 늘어놓았다. 진현풍을 끌고 온 아홉째였다.
"큰형님, 이 매가라는 놈한테는 훌륭한 여편네가 있을 뿐만 아니라 훌륭한 딸도 있답니다. 그 년은 아주 예쁘게 생겼는데 얼굴만 깨끗하게 생긴 게 아니라 엉덩이도 아주 깜찍하게 생겼지요. 건강부에서 제일 가는 미인이랍니다."
그 말에 염방의 여덟 우두머리들은 모두 허리가 부러질 지경으로 웃어댔다.
서 나으리란 자는 매성비의 아내를 향해 더듬더듬 손을 뻗쳤다. 그 여인은 딸을 부둥켜안은 채로 뒷걸음질쳐 숨으려 했다.
서 나으리가 제법 부드러운 목소리로 딸을 향해 물었다.
"네 이름이 뭐냐?"
매성비의 딸은 그가 두려워서 감히 대답도 하지 못하고 어머니 품속에 머리를 틀어박았다. 잠시 후 그녀는 간신히 대답했다.
"전 매약화(梅若花)예요."
"좋은 이름이군! 좋은 이름이야!"
서 나으리는 슬슬 다가서며 매성비의 아내를 매만지려 했다. 참다못한 매성비가 욕설을 퍼부었다.
"서 나으리, 당신네 염방 사람들은 정말 형편 없구려, 할말이 있으면 나하고 할 것이지 무엇 땜에 우리 집사람은 괴롭히는 거요?"
"그런가? 내가 네 놈더러 소금을 사라고 말했는데도 네 놈이 말을 듣지 않으니 낸들 무슨 방법이 있겠느냐? 너희들 열 집은 돈이 얼마든지 있잖아? 소금값도 싼데 네 놈들이 좀 많이 사서 소금값을 올려 주면 좀 좋아? 그럼 소급을 팔아먹고 사는 우리도 좀 살만해지지 않겠냔 말야!"
워낙 한(漢)조 때부터 염철(遮鐵)에 대해서는 관세를 실시하여 사인(私人)은 해염을 매매하지 못하게 했었다. 그런데도 서 나으리라는 자는 염방의 두령 노릇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소금을 관가에 팔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건강부의 열 집들에 사염(私濫)을 사라고 못살게 구는 것이었다. 그들이 이처럼 법을 어기면서 하는 짓을 이 열 집에서 어찌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서 나으리는 매성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기어이 손을 내밀어 매성비의 아내를 움켜잡았다. 그는 커다란 손으로 여인의 젖가슴을 더듬으면서 말했다.
"남들이 모두 건강부의 미인들 중에 네 년이 으뜸이라고들 하는데 나는 보지 못하니까 만져 보기라도 해야겠다."
그의 손길을 견디다 못한 여인은 품속에서 가위를 꺼내 들었다. 그녀는 자기 목을 겨누고 소리를 질렀다.
"여보, 미안해요. 난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어요."
여인은 누가 말릴 새도 없이 가위로 자기 목을 푹 찔렀다. 순식간에 그녀의 목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딸 매약화가 울음을 터뜨리며 엄마를 불러댔다. 매성비는 울음을 삼키며 아내의 주 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여보, 이게 무슨 짓이오……. 여보……!"
서 나으리는 분위기가 소란스러워졌음을 느끼고 부하들을 향해 물었다.
"무슨 일이냐? 여자가 죽었느냐?"
염방 사람들 중 누군가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서 나으리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딸아이는 몇 살이나 되었나?"
염방 사람들 중에서 또 누군가가 대답했다.
"아마 열두어 살 되는가 봅니다."
그러자 서 나으리가 분부했다.
"저 계집앨 데려다 우리 염방의 여인으로 만들어라. 계집애가 아직 어리니까 데려다가 우선 아무 일이나 시키거라. 웬만큼 성숙해지면 우리 형제들을 시중들게 해야겠다."
그가 손을 젓자 염방 사람 둘이 나와 매약화를 포승에서 풀어 내어 한옆으로 끌고 갔다.
매성비가 몸을 일으키며 비장하게 소리쳤다.
"약화야, 똑똑히 봐 두거라. 이 놈들은 모두 악한 놈들이다. 천하에 네 부모를 제외하곤 믿을 자가 없다는 걸 명심해라. 사내들이 너에게 가까이 굴고 달콤한 말을 하면 그건 다 널 속이려는 거야. 그러니 절대로 그걸 믿어선 안 된다!"
서 나으리란 자가 쌀쌀한 어조로 말했다.
"이제야 자식을 가르치려 하다니 때가 늦었지, 말해 봐라. 소금을 살 텐가, 안 살 텐가?"
매성비가 너털웃음을 웃었다.
"소금을 사겠느냐구? 안 사겠다. 그래 안 사면 어쩔 셈이냐?"
서 나으리란 자는 대답 대신에 당장 쇠부채를 휘둘렀다. 머리를 얻어맞은 매성비는 온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는 천천히 자기 아내의 몸 위로 쓰러졌다. 손을 뻗어 아내의 얼굴을 어루만지던 그는 곧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서 나으리란 자는 갑자기 부채를 확 폈다. 부채가 펼쳐지자 큼직하게 써진 '염( )'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나머지 아홉 집 사람들을 향해 물었다.
"그래 소금을 사겠느냐, 안 사겠느냐? 너희들도 이 매성비처럼 되고 싶다면 마음대로 해라."
아홉 집 사람들은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하고 흘끔흘끔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드디어 서 나으리가 손에 들린 쇠부채를 내저으며 소리쳤다.
"불을 지펴라!"
황약사는 그제야 전 앞에 세워 놓은 세 개의 가마솥에 눈길을 주었다. 그 안에는 물이 가득 채워져 있고 그 밑에는 장작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염방 사람들은 두령의 명령이 떨어지자 횃불로 장작에 불을 붙였다. 삽시에 세찬 불길이 타올랐다. 오래지 않아 가마솥 안의 물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서 나으리가 입을 열었다.
"우리 염방 사람들은 날이면 날마다 소금물을 밟고 다니면서 뜨거운 햇빛 아래서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지. 오늘 내가 너희들에게 그 맛을 보여 주겠다!"
그는 부채로 아홉 집 사람들을 쿡쿡 찌르면서 다시 다짐을 받았다.
"자, 저 솥에 들어가고 싶지 않거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소금을 사겠다고만 대답하면 그 고생을 면할 수 있어."
염방 사람들은 사람들을 묶었던 포승줄을 풀고 그들을 가마솥 옆까지 끌고 갔다. 이제 명령만 떨어지면 전부 가마솥 속에 집어 넣을 참이었다.
서 나으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느 놈부터 소금맛을 보여 줄까?"
그의 말에 염방 사람들은 아주 익숙한 동작으로 사람들의 옷을 벗긴 다음 긴 채찍으로 등을 후려갈기며 뜨거운 소금물을 등판에 끼얹었다. 사람들은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무서운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했다.
서 나으리가 다시 말했다.
"이 정도로 웬 엄살들이냐? 우리 염방 사람들은 매일 등허리가 익을 지경이고 온몸에 소금기가 가실 날이 없다. 심지어 갓난애까지도 소금에 절어 있어. 그런데 네 놈들은 겨우 요 정도로 죽겠다고 야단들이냐? 어디 말해 봐, 소금을 사겠나 안 사겠나?"
이때였다. 갑자기 뒤에서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왜 이렇게 남을 괴롭히는 건가? 당신이 소금을 팔면 사는 사람이 있게 마련인데 그 사람들을 괴롭힐 게 뭐 있나?"
니마묘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소리나는 쪽을 돌아보았다. 담장 옆에 한 공자가 서 있었는데 얼굴에는 면구를 끼고 있었다. 자주색 두루마기를 입은 그는 어느 틈에 사람들 앞에 다가와 섰다.
"넌 웬놈이냐?"
서 나으리가 물었다.
"난 천하의 거부이다. 한 해 사이에 소금을 몇 섬이나 만들어 내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그 소금을 전부 사겠다."
황약사가 이렇게 대답하자 서 나으리란 자는 어리둥절해졌다.
"당신은 대체 누구요? 여긴 어떻게 들어왔소?"
"소금만 팔면 되지 그런 건 알아 뭐하려나? 그래, 한 해에 소금을 몇 섬이나 거두는가?"
황약사의 말에 서 나으리가 냉소하며 말했다.
"일년 동안 걷어들인 소금을 전부 사시겠다구? 내가 황제라도 만난 건가?"
그는 뚫어져라 황약사를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네 놈이 날 놀리려는 모양인데 된맛을 좀 보여 줘야겠구나!"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의자에 앉아 있던 여덟 사람이 일제히 몸을 일으켜 황약사에게로 덮쳐 들었다.



제15장 황약사를 처단하라
큰형인 서 나으리의 호령하에 여덟 명은 일제히 황약사에게 달려들었다. 그중 세 사랑은 손에 병장기를 들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작은 검을 들었고 다른 두 사람은 유성추(流星鐘)와 동불수(銅佛手)를 각각 들고 있었다. 이 세 사람이 일제히 공격하니 그 기세는 자못 흥흥하였다. 황약사의 뒤에 있는 다섯 놈은 맨손으로 덤벼들었는데 그들 중 한 놈은 황약사를 향해 독염 (毒 )을 뿌렸다.
황약사는 그들을 노려보며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대적했다.
매약화라는 계집애의 놀란 울부짖음 소리와 더불어 진현풍이란 소년의 고함소리가 들려 왔다.
"왜 도망가지 않나요?"
황약사는 멈춰 서서 놈들이 휘두르는 검과 유성추를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튕겨 버렸다. 쨍그렁 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검은 어디로 날아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또다시 딱 하는 소리가 나더니 유성추도 땅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뜻밖의 상황에 놈들은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동불수를 양손에 갈라 쥐고 휘두르던 놈도 동불수 한 개는 중간이 부러져 나가고 다른 한 개는 공중에 날아올랐다가 자기 머리에 떨어지는 바람에 피가 흐르는 머리를 움켜쥐고 멍하니 황
약사를 바라보다가 소리쳤다.
"귀신……."
그는 미처 말을 맺지 못하고 땅바닥에 쓰러지더니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독염을 뿌리던 자도 앞의 세 놈이 당하는 꼴을 보고 주춤하였다.
황약사의 손이 번뜩하더니 가는 침이 그자에게로 날아갔다. 막 달아나려던 그는 황약사의 부골독침에 맞아 꼼짝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는 고통을 참지 못해 처참한 소리를 내며 대굴대굴 뒹굴었다.
이를 지켜 보던 염방 놈들은 하나같이 겁에 질려 제각각 달아날 궁리만 했다. 니마묘 안은 일시에 혼란이 일어났다. 한쪽에 서 있던 서 나으리가 소리를 질렀다.
"모두들 멈춰 서지 못할까!"
놈들은 달아나려 다 말고 못박인 듯 멈춰 섰다. 그들은 무슨 귀신을 대하기라도 하듯 겁에 질려 황약사를 지켜 보았다. 면구로 얼굴을 가린 황약사는 한마디의 말도 없이 그들을 쏘아보았다.
서 나으리가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이름을 대란 말이오. 우리 염방이 과거에 당신과 무슨 원수진 일이라도 있소?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여기에 와서 행패를 부리는 거요!"
그의 말투는 평소와는 달리 사나운 기세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황약사가 대답했다.
"물론 나하곤 원수진 일이 없지. 하지만 네 놈이 하는 짓이 천리(天理)가 용납 못할 일인지라 관계하게 된 거다."
갑자기 서 나으리가 고함을 질렀다.
"불을 치켜 들엇!"
그러자 염방 사람들은 저마다 손에 들린 횃불을 치켜 들었다.
서 나으리가 징그러운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네 놈이 까딱 움직이기만 하면 난 불을 질러 몽땅 태워 죽이고 말겠다!"
"벌써 몇 사람이나 죽이고서도 아직 성이 안 차는 모양이지?"
황약사가 차갑게 대꾸했다.
서 나으리가 소리를 질렀다.
"진현풍이를 끌어내왓!"
누군가가 진현풍을 대령시켰다.
서 나으리가 다시 협박조로 말했다.
"네 놈이 조금만 허튼 수작을 하면 난 한칼에 이 진현풍이를 죽여 버릴 테니 그리 알아!"
이 진현풍이란 소년은 건강부에서 첫손 꼽히는 부자 진백만(陳百萬)의 아들인데 아버지는 벌써 염방 놈들한테 죽고 혼자 남은 상태였다. 그는 황약사에게 애걸하며 말했다.
"어르신께선 이 놈들을 어서 죽이세요. 제가 어찌 되든 상관 말고 이 놈들을 깡그리 죽여 버리세요!"
그러자 서 나으리가 징글맞게 웃으며 대꾸했다.
"과연 뼈대있는 집안 자식답구나. 이 서 나으리도 탄복한다."
그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독염을 진현풍의 등허리에 뿌리고는 힘껏 문질러 놓았다. 진현풍이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서 나으리는 다시 황약사를 쳐다보았다.
"너도 이 꼴이 되고 싶지 않거든 남의 일에 상관 말고 순순히 돌아가라.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말야."
황약사는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큰소리로 대꾸했다.
"그 독염이 그처럼 무서운 것이라면 한번 시험해 보려무나?"
진현풍이 다시 소리를 질렀다.
"영웅께선 어서 이 죄 많은 염방 놈들을 처단하여 우리 부모님원수를 갚아 주세요. 매성비 아저씨의 원수를 갚아 주세요!"
소년의 말에 황약사는 염방 놈들에 대한 적개심이 새삼 들끓어오름을 느꼈다.
'이 노약자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염방 놈들한테 잡혀 억울한 죽음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이 놈들이 악행을 저지르는 걸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황약사가 입을 열었다.
"이보게, 서가. 네가 이 사람들을 놓아주면 나도 더는 손을 쓰지 않겠다. 어쩔 텐가?"
서 나으리가 어이없다는 듯 소리내어 웃었다.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시나? 우리 염방 사람들이 너 하나쯤을 못 당해 낼 것 같으냐?"
그는 자기 사람들의 수가 많으니 황 약사쯤은 넉넉히 대적해 낼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황약사는 쓴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서 나으리에게로 다가갔다.
"멈춰 서! 멈춰 서란 말이야!"
서 나으리가 급히 소리쳤다. 그러자 진현풍이 외쳤다.
"어서 이 나쁜 놈들을 모조리 죽여 주세요. 그래서 이 놈들이 더는 사람들을 해치지 못하게 해주세요!"
서 나으리가 쇠부채를 진현풍의 목에 갖다 대었다. 순간 진현풍의 목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 나왔다. 서 나으리가 사납게 말했다.
"다시 주둥이를 놀렸다간 네 놈부터 죽여 버릴 테다."
황약사는 그 틈을 타 잡혀 온 사람들에게로 걸어갔다. 그는 포승에 묶인 사람들을 하나하나 풀어 주면서 말했다.
"걱정들 마시오. 곧 집으로 돌아가게 될 거요."
서 나으리가 고함을 질렀다.
"네 놈은 나의 이 횃불에 타죽지 않으면 이 독염에 죽고 말 거다. 쓸데없는 짓 말고 당장 무릎을 꿇어라."
황약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내가 저 놈을 죽여 버리고 당신들을 데리고 나가겠소."
그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경공을 써서 염방 놈들을 향해 날아갔다. 그는 공중에 뜬 채로 손을 내밀어 기묘한 동작을 취했는데 마치 선인이 춤을 추는 것만 같았다. 염방 놈들은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족족 혈도가 찔려 그 자리에 못박인 듯 굳어 버렸다. 그중 두 놈은 손에 쥔 횃불이 팔에 붙기 시작하는데도 비명을 지를 뿐 움직이지 못했다.
이를 본 서 나으리는 더럭 겁이 났다. 그는 악에 받쳐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횃불을 던져 저 놈을 태워 죽여라!"
그러자 삽시에 염방 놈들이 던진 횃불들이 황약사에게로 날아들기 시작했다. 5, 60개의 횃불이 일제히 날아들자 황약사는 옷소매를 펼쳐 들고 힘껏 휘저어 횃불을 도로 놈들 쪽으로 날려 보냈다.
몇몇 놈들이 미처 피하지 못하고 횃불에 맞아 돼지 멱따는 소리들을 내었다.
황약사가 잽싸게 몸을 날려 진현풍을 붙잡아 온 염방의 아홉째를 틀어쥐었다.
순간 서 나으리의 날카로운 음성이 들려 왔다.
"네 놈이 나의 아홉째 동생을 다치기만 하면 이 놈을 독염으로 죽여 버리겠다!"
그는 위협적으로 진현풍의 머리채를 잡아 흔들었다. 황약사가 대노하여 아홉째의 면상을 후려갈겼다. 놈은 찍소리도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황약사는 독이 오를 대로 올라 또 한 놈의 염방 사람을 향해 장을 날렸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놈의 목이 떨어져 나가며 시뻘건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 나왔다.
화가 치민 서 나으리는 쇠부채를 들고 곧장 황약사에게 달려들었다. 황약사는 잽싸게 '난화불혈수(蘭花拂穴手)'를 썼다. 서 나으리는 열 여섯 개의 부챗살로 황약사를 겨누었다. 손에 쥔 자루에 단추가 달려 있는데 그것만 누르면 열 여섯 개의 부챗살이 일제히 황약사에게로 날아갈 판이었다. 그는 서둘러 단추를 눌렀다. 순간 황약사는 옷소매를 펄럭여 부챗살을 물리치며 공중으로 훌쩍 날아올랐다. 그러자 부챗살은 대부분 빗나가 버리고 한 개만이 황약사의 왼쪽 어깨
를 스쳤다. 황약사는 오른손으로 허리춤을 더듬어 옥소를 꺼냈다. 황약사의 왼쪽 어깨가 부챗살에 긁혀 피가 흘러 나오는 것을 본 염방 놈들은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저 놈이 큰형님의 부챗살에 맞아 상했다!"
누군가가 졸아서 미친 듯이 소리쳤다. 서 나으리의 이 부챗살에는 독염이 발라져 있는데 이 독염은 피를 응고시키는 것으로 황약사가 그 부챗살에 맞아 피를 흘렸으니 죽게 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 아닌가.
두 놈이 소리를 지르면서 겁없이 황약사에게로 달려들었다. 황약사는 놈들이 달려들자 손에 든 옥소를 획 휘저었다. 이 법수는 황약사의 낙영신검의 한 동작인 '수황입죽(修篁立竹)'이란 것이었다. 그는 이 법수로 염방 놈들의 귓부리를 가격했다. 윙 하는 소리와 함께 놈들은 땅바닥에 거꾸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황약사가 연달아 손을 뻗쳐 서 나으리의 손에 들린 쇠부채를 날려 보낸 뒤 냉큼 멱살을 움켜쥐었다. 너무 순식간의 일이라 꼼짝없이 황약사의 손아귀에 붙들린 서 나으리는 눈이 휘둥그래져서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황약사가 소리쳤다.
"염방 놈들은 듣거라. 모두 칼을 놓고 절 밖으로 물러나라. 말을 듣지 않으면 너희들의 큰형은 죽은 목숨이다!"
염방 놈들은 모두 벌벌 떨며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서 나으리는 황약사에게 멱살을 잡히고도 기가 살아 소리를 질러 댔다.
"어서 독염을 뿌려라!"
놈은 기를 쓰고 황약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발악하였다. 황약사는 얼른 놈의 혈도를 눌러 꼼짝못하게 했다.
염방 놈들은 저마다 허리춤에 자그마한 주머니들을 간직하고 있었는데 그 주머니 속에는 독염이 들어 있었다. 그들은 위급할 시에만 이 독염을 사용하였는데 그들에게 있어선 구명염(救命 )이자 절명염(絶命 )이기도 했다. 즉, 상대방과 싸우다가 당해 내지 못하게 되면 그것을 던져 물리치는데 그럴 경우엔 구명염이고, 반대로 상대방에게 붙들려 괴로움을 당하게 되어 먹고 자살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경우엔 절명염이 되는 것이다. 큰형이 큰소리로 독염을 뿌리라고
고함을 지르자 놈들은 모두 허리춤에서 주머니들을 꺼내 내던졌다.
5, 60명이 독염을 던지자 실로 대단했다. 삽시에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몸에 독염이 묻자 너나없이 피부가 타들어 갔고, 사람들은 모두 아우성을 쳐댔다.
독염이 새하얗게 날아오는 바람에 황약사는 한 손으로는 서 나으리의 목덜미를 틀어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날아오는 독염들을 막아 내기에 바빴다. 그러나 먼지처럼 날리는 독염 가루가 어찌 황약사라고 피해 가겠는가. 독염 가루가 몸에 닿자 황약사는 대노하여 옥소로서 나으리의 머리를 내리쳤다. 일격에 서 나으리의 머리가 부서져 뇌장이 흘러 나왔지만 놈은 황약사의 두 다리를 끌어안은 채 한사코 놓아주려 들지 않았다.
독염을 다 뿌리고 나서 놈들은 그 독염이 자기 몸에도 묻을까 봐 뒤로 물러섰다. 여기저기서 신음 소리가 들리더니 절 마당은 곧 죽은 사람들의 시체로 장사를 이루었다. 그러나 황약사만은 끄떡도 않고 두 눈을 부릅뜬 채 죽어 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의 발치에는 서 나으리가 죽어 널브러져 있었는데 피투성이가 된 그의 몰골은 차마 볼 수 없을 만큼 끔찍했다. 그래도 놈은 황약사의 다리를 끌어안은 손만은 풀지 않고 있었다. 황약사가 천천히 옥소를 쳐
들어 번갈아 그의 양쪽 팔을 내리쳤다. 그의 두 팔이 다 떨어져 나간 후에야 황약사는 비로소 몸을 움직일 수가 있었다. 황약사는 독염에 의해 부식되어 누더기가 된 차림을 한번 훑어보고는 품속에서 구화옥노환(丸花玉露丸)을 한 알 꺼내어 입에 넣었다. 그는 다시 마당을 둘러보았다. 아홉 집의 식솔들이 죽어 널려 있는 풍경은 실로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처참했다. 황약사는 타는 듯한 분노의 눈길로 염방 놈들을 노려보았다.
황약사는 하늘을 우러러 입김을 불 듯 숨을 내쉬었다. 그 바람에 독염가루가 염방 놈들을 향해 날려갔다.
염방 놈들은 너무나 놀란 나머지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손에 들고 있던 횃불이며 칼들을 팽개쳐 버리고 절 밖으로 달아났다. 황약사는 얼른 뒤를 따르며 연거푸 장을 내밀어 10여 명을 쓰러 눕혔다. 그러나 남은 놈들은 전부 어디로 달아났는지 금세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황약사는 건강에 오면서 더는 아형을 찾지 않을 뿐더러 남의 일에도 절대 끼여들지 않으리라고 작심했었다. 그런데 못된 염방 놈들을 만나고 보니 손을 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인데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기는커녕 오히려 자기마저 염독을 타게 되어 기분이 몹시 상했다.
그는 언짢은 기분으로 태백주점에 돌아가 위층에 앉아 호호탕탕한 장강을 굽어보면서 고금의 영웅들을 떠올렸다. 어리석은 대송 임금이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아름다운 강산을 두 쪽으로 갈라놓은 사실에 새삼 분노가 느껴졌다. 강 저쪽은 오랑캐의 점령을 당해 이젠 남의 땅이 된 것이다. 그는 울분을 달래기 위해 술만 진탕으로 퍼마셨다. 어느 정도 취기가 올라오자 그는 술값을 치르고 술집을 나섰다. 그는 수레 한 대를 불러 동태사(同泰寺)로 향했다.
이 절은 건강성 현무호반(玄武湖畔)의 계명산(鷄鳴山) 동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보아하니 오래 된 절인 것 같았다. 절의 대문은 열려 있었고 안으로 들어서니 오래 된 우물 하나가 눈에 띄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 우물은 진후주(陳後主)와 그의 귀비인 장여화(張麗華), 공귀비(孔貴妃)가 수(隋)나라 군대를 피하여 숨어 있던 곳이라 하는데, 그들은 모두 절세의 미인들로 이 우물 속에 뛰어들 때 손으로 우물의 난간을 잡는 통에 우물 난간의 석맥(石脈)에 연지
흔적을 남겼다 하여 이 우물을 연지정( 脂井)이라고도 불렀다.
절 안은 사람이라곤 눈에 띄지 않는 쓸쓸한 분위기였다. 황약사가 법당 안으로 들어 가려는데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 왔다.
황약사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법당 안에는 7, 8명 되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는데 상좌에 도가(道家)의 전진(全眞)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둘 다 서른 살쯤 되어 보이는 얼굴로, 한 사람은 좀 뚱뚱한 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좀 여윈 편이었다. 하석에 앉은 다섯 사람은 전부 같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말하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이 다섯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계속해서 말했다.
"염방 사람들이 한 말이 사실이라면 제 생각엔 푸른 면구를 썼다는 그 자는 필시 사학에 속하는 인물일 것입니다. 우리가 찾아내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다른 한 사람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난 넷째하고 생각이 달라. 얼굴에 푸른 면구를 쓰고 있던 사람을 어디 가서 무슨 수로 찾겠단 말인가? 그가 누군지를 알고?"
넷째란 사람이 계속 고집을 부렸다.
"왜 못 찾는단 말입니까? 우선 자주색 옷을 입은 사람만 찾아내도 가능성이 있어요."
다른 사람이 또 입을 열었다.
"자주색 옷을 입었다고 해서 꼭 그 사람일 수야 없지 않나?
넷째란 사람이 언성을 높였다.
"형님은 정말 둔하오. 자주색 옷을 입은데다가 손에 옥소까지 들고 있다면 바로 그 놈이지 누구겠소?"
상좌에 앉은 전진도인(全眞道人)이 말했다.
"염방 사람들의 말대로 그 사람이 옥소를 쓰고 그 법수가 실로 대단하다면 아마도 그 사람은 도화도 도주 황약사일 걸세."
다섯 사람은 그 말을 듣자 모두 낯색이 변했다.
"도화도 도주 황 약사라면 무슨 연고에서인지 태호방을 깡그리 쓰러 눕혀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했다는 그 사람 아닙니까?"
다섯 사람 중 하나가 물었다.
"그래. 아주 무서운 사람이지."
전진도인이 대답했다. 이 이야기는 강호 사람들이라면 이제 누구나 다 알고 있는 터였다.
상좌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은 종남산 전진교의 마옥과 구처기였다. 그들 두 사람은 건강에 유람을 왔다가 이 다섯 사람의 청을 받아 푸른 면구를 쓰고 자주색 두루마기를 입었다는 사람에게 손을 쓰려고 이 동태사에 달려온 것이었다. 이 건강의 오의 (五義)는 바로 쌍둥이 오형제였다.
황약사는 종남산 중양궁에서 마옥과 구처기를 만나 본 이후로 오랫동안 그들을 보지 못하였는데 이번에 보니 그들의 모습은 조금씩 달라져 있었다. 마옥은 좀 살이 올랐고 구처기는 몹시 여위었는데 그런대로 알아볼 만은 했다.
갑자기 넷째라는 사람이 입을 열었다.
"그 열 집의 건강부 부호들은 사람마다 본분을 지키고 남의 미움을 살 짓은 한 일이 없다는데 동해 도화도의 황약사가 와 그 사람들을 그처럼 잔인하게 죽였는지 모르겠군요."
마옥이 물었다.
"그 사람이 그 열 집의 부호들을 어떻게 죽였다고 그러던가?"
"그 놈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열 집 사람들을 모두 니마묘로 끌고 가서 재물을 내놓으라고 협박했답니다. 사람들이 말을 듣지 않자 놈은 매성비 가족을 전부 때려죽이고 이를 말리려던 염방 사람들은 물론 염방의 철선(鐵扁) 서 나으리까지 때려죽였다는군요. 게다가 놈은 염방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독염까지 빼앗아 열 집 사람들에게 마구 뿌려 비명에 죽게 하였답니다."
이렇게 말하는 넷째는 격분하여 이를 갈며 몸까지 부르르 떨었다.
마옥이 물었다.
"당신들 다섯 형제는 염방 사람들이 하는 말만 듣고 그 열 집 사람들을 모두 황약사가 죽였다고 생각하는 건가?"
다섯 형제는 모두 그렇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성미가 급한 구처기가 큰소리로 말했다.
"전번에도 바로 그 황약사가 종남산에 와서 우리 사부님에게 《구음진경》을 내놓으라고 괴롭히지 않았었소? 내 보기엔 이 황약사란 사람은 음험하고도 간사한 인간임이 틀림이 없어. 그자가 단지 흥 나으리, 홍칠공 등과 함께 종남산에 왔을 때 다른 사람들은 점잖게 구는데 그자가 화산에서 무술시합을 하자는 주장을 내놓지 않았었소? 그것만 보아도 그자가 얼마나 탐욕적이고 사악한 인간인가를 알 수 있다구."
이때였다. 구처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낯선 사나이의 음성이 법당 안에 울렸다.
"그래, 자네가 말하는 황약사는 워낙 지독한 괴물이거든!"
황약사는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마옥과 구처기는 그를 알아보고 깜짝 놀랐다.
건강 오의는 황약사의 얼굴을 모르는지라 마옥과 구처기의 안색이 달라지는 것을 보고 몹시 의아해졌다.
갑자기 그 오의 중의 맏이가 소리를 질렀다.
"저걸 보게. 저 사람이 자주색 옷을 입지 않았나?"
둘째가 말을 받았다.
"자주색 옷을 입긴 했지만 꼭 옥소까지 갖고 있는 사람이라 할 순 없지 않수?"
황약사는 그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마옥과 구처기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 웃는 모습이 어찌나 무서워 보이는지 마옥과 구처기는 자기도 모르게 전율을 느꼈다. 황약사는 계속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그래, 자네들 말대로 나는 음험하고도 간사한 인간이야. 그렇다 한들 자네들이 날 어쩌겠다는 건가?"
마옥과 구처기는 방금 큰소리를 치고 난 터라 은근히 걱정이었다. 만일 황약사와 싸우게 된다면 자기들 두 사람은 당초에 그의 상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황약사에게 덤벼들어야 할지 어쩔지 입장이 여간 난처하지 않았다.
하지만 건강부의 오의는 달랐다. 그들은 황약사가 건강부의 열 집 부호들을 죽인 인물임이 확인되자 자기들까지 죽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황약사와 한판 싸워 볼 결심을 하고 있는 터였다.
둘째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당신이 바로 니마묘에서 사람을 죽였다는 황약사란 사람이오?"
황약사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다. 내가 바로 황약사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오의들은 펄쩍 뛰더니 일제히 황약사에게로 달려들었다.
마옥과 구처기는 다섯 형제가 일제히 달려드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다섯 사람이 함께 달려든다고 해도 황약사의 적수가 못 된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섯 형제를 말리기엔 이미 때가 늦었다.
다섯 사람은 이미 황 약사한테 달라붙어 싸움을 시작하고 있었다. 넷째와 다섯째가 소리쳤다.
"당장 저 놈을 죽여 버리자!"
그들 두 사람은 동시에 양쪽에서 황약사의 팔 하나씩을 잡고 힘껏 잡아당겼다. 그들 두 형제가 함께 힘을 쓰면 황소라도 찢어 죽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황약사가 양쪽 팔굽을 굽혀 두 사람의 손에 있는 소음심경의 신문혈(神門穴)을 누를 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대력이 혈로 들어가자 넷째와 다섯째는 둘 다 땅에 주저앉더니 꼿꼿이 굳어 버렸다. 황약사도 그 자리에 앉았는데 세 사람이 정좌하고 있는 모습은 마치 세 사랑의 중이 참선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다만
붙잡고 있는 손이 떨어지지 않은 채로 있을 뿐이었다.
맏이가 소리를 질렀다.
"내가 저 놈을 죽여 버리겠다. 내가 저 놈을 죽여 버리겠단 말이다!"
그는 당장 황약사의 백회대혈에 장을 먹였다. 그러나 황약사는 끄떡도 하지 않고 빙그레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저 놈이 왜 죽지 않지? 저 놈의 백회대혈에 장을 먹였으면 당연히 뻐드러져야 할 텐데 어떻게 된 일이지? 내가 장을 제대로 먹이지 못한 건가?"
둘째와 셋째도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그들은 넷째와 다섯째가 황약사의 팔을 붙잡은 채로 세 사람이 모두 땅 위에 그대론 앉아만 있는 것을 보고 고함을 질렀다.
"찢어 놓아라. 그 놈을 찢어 놓아!"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넷째와 다섯째의 안색이 파리해지며 머리에서는 열기가 몽실몽실 피어 오르는 게 아닌가. 두 사람은 급기야 몸을 부들부들 떨기까지 했는데 아무래도 상태가 심상치 않았 다. 이를 본 둘째와 셋째는 급급히 넷째와 다섯째의 뒤에 달려가 동생들의 등허리에 손을 가져다 대고 그들과 합심하여 황약사와 내력 싸움을 하려 했다.
맏이도 황급히 달려가 동생들에게로 다가앉았다.
이를 지켜 보던 구처기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안 되겠소. 이대로 구경만 하다간 저 오형제의 목숨이 붙어나질 않겠어."
그는 냉큼 칼을 뽑아 들었다.
"그건 안 되네!"
마옥이 다급히 소리쳤다.
구처기가 말했다.
"이 황약사는 사악한 인간이어서 정도(正道) 지사가 저 놈을 죽이는 건 대의와 명분에 맞는 일이오. 저 놈은 종남산에 와서 우리의 《구음진경》을 빼앗아 가려 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사부님을 괴롭혔소. 그리하여 임조영 선배님께서 돌아가실 때 사부님이 그분을 마지막으로 만나 보지도 못하게 만든 장본인이 아닌가 말이오. 그러니 사부님을 생각해서라도 우리는 저 놈을 죽여 마땅하오!"
듣고 있던 황약사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명문의 정파(正派)로 자칭하는 놈들이 겨우 이 정도냐? 전진교의 왕중양 밑에는 모두 이런 개자식들뿐이란 말이냐?"
황약사는 조소하는 표정으로 마옥과 구처기를 물끄러미 건너다보았다.
구처기는 성미가 굳세고 불 같은 사람으로 마옥과 함께 왕중양의 첫 제자가 된 사람이다. 왕중양은 최근에 또 새로 제자 두 사람을 받았는데 한 사람은 철각선 (鐵脚仙)이라고 칭하는 왕처일 (王處一)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학대통이었다. 하지만 왕중양의 문하에서는 이 구처기가 무예도 가장 훌륭하고 성미도 가장 급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었다. 그는 황약사가 자기를 모욕하자 대노하여 마옥이 미처 말릴 새도 없이 황약사의 목을 향해 장검을 내질렀다. 마옥은 자기도
모르게 "앗!"하고 소리를 내었다. 황약사는 현재 다섯 형제와 내력을 겨루고 있었기 때문에 몸을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으므로 마옥은 황약사가 꼼짝없이 죽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구처기의 검술은 전진교의 진짜 법수를 배운 것이라 그가 찌른 검날은 조금도 빗나가지 않고 황약사의 목을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마옥은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칼끝이 막 목에 박히는가 싶더니 황약사가 번개같은 동작으로 머리를 낮추면서 입을 벌려 그 칼끝을 이빨로 물어 버리는 게 아닌가.
구처기는 금세 안색이 변했다. 아무리 명성이 대단한 황약사라지만 칼끝을 물리다니 이런 수치가 어디 있겠는가. 다급해진 구처기는 자기도 모르게 칼을 빼내려다가 곧 생각을 바꾸어 힘껏 들이 밀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힘을 써도 검은 마치 바위나 철벽에 박히기라도 한 듯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구처기는 전진도인으로서 그다지 승부를 따지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일이 이 지경이 되고 보니 자신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안간힘을 써서 검자루를 쥔 손을 힘껏 비틀었다. 그러자 칼날이 뚝 부러져 나갔다. 그는 끝이 부러진 검으로 다시 한 번 황약사를 찌르려 했다. 하지만 검은 황약사의 아랫배 쪽을 스쳐 옷자락만 찢어 놓았을 뿐 그대로 빗나가고 말았다.
이를 지켜 보던 마옥이 말리느라고 소리를 질렀다.
"사제!"
하지만 화가 상투 밑까지 치민 구처기의 귀에 마옥의 소리가 들릴 리가 없었다. 그는 다시 부러진 겁으로 황약사를 향해 내질렀다.
이때였다. 갑자기 황약사가 입에 물었던 칼끝을 뱉어 버렸다. 그것은 곧장 구처기에게로 날아갔다. 황약사는 동시에 몸을 일으키며 달라붙어 있던 건강부의 오형제들을 확 떠밀었다.
구처기는 간신히 칼날을 피하며 탄복하는 눈길로 황약사를 바라보았다. 한쪽에 나뒹굴어진 오형제들 역시 더는 덤빌 생각을 못하고 멍청히 앉아 있을 따름이었다. 황약사는 차가운 눈길로 그들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제16장 황약사와 두 제자
법당 안은 조용해졌다. 마옥과 구처기는 멍청히 황약사를 바라볼 뿐 둘 다 말이 없었다. 그들은 황약사의 공력이 이처럼 대단하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자기들의 사부인 왕중양과 겨루어도 승부를 가리기 어려울 것 같았다.
황약사가 입을 열었다.
"구처기, 보아하니 네 놈은 성미가 거친 게 도무지 전진교 사람다운 면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구나. 왕중양이 너한테 가르친 그 전진교의 수양을 네 놈은 몽땅 그르쳤단 말이다!"
마옥이 얼른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황 도주님, 저도 전진교의 마옥이온데 니마묘 사건에 대해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달리 생각지는 마십시오. 보아하니 뭔가 우리가 모르는 내막이 있는 것 같사온데 우리는 그 일에 더는 관여치 않고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구처기를 끌고 그곳을 떠나려 했다.
황약사가 냉소하며 말했다.
"전진교의 왕중양 같은 사람 밑에서 어찌하여 네 놈들 같은 제자가 나왔는지 알 수가 없구나. 전진교도 이젠 맛이 간 모양이지?"
황약사는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구처기가 더는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언사가 너무 지나치구나! 네 놈이 뭔데 우리 전진교를 그렇게 함부로 모욕하는 거냐?"
그는 당장 마옥을 뿌리치고 앞으로 달려나가 황약사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구처기의 주먹이 얼굴로 날아오자 황약사는 얼른 손을 내밀어 그의 주먹을 움켜잡았다.
황약사가 조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내가 조금만 힘을 더 주면 네 놈은 다시는 손을 쓸 수 없게 될거다. 그렇게 되고 싶지 않다면 당장 용서를 빌어라, "
"황약사, 이 사악한 괴물아! 천하의 그 어떤 사악한 괴물도 너 동사(東邪)보다는 나을 거다!"
구처기는 악이 받쳐 앞뒤 생각 없이 욕을 퍼부었다. 황약사는 화가 치밀어 구처기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방금 뭐라고 했지?"
구처기는 움찔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저 놈을 모질게 욕했으니 저 놈은 반드시 나를 죽이고 말거다. 좋다. 죽일 테면 죽이라지. 어쨌든 사부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 수는 없다. '
이렇게 생각한 구처기는 내친 김에 다시 한 번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자 황약사는 갑자기 만면에 웃음을 띄우며 구처기를 냅다 떠밀었다. 종잇장처럼 문앞에 나동그라진 구처기는 얼른 몸을 일으키며 황약사를 쳐다보았다. 황약사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태연히 하늘을 올려다보며 휘파람을 불더니 갑자기 큰소리로 말했다.
"그래, 내가 황 괴물이지 황 괴물이야. 연작이 어찌 붕새의 뜻을 알랴. 네 놈 같은 속물이 어찌 나를 알 수 있겠느냐?"
황약사는 몸을 날리며 법당 안에서 한바탕 장법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이 장법은 황약사 자신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 '낙영신장(落英神掌)'이라는 장법이었다. 황약사가 처음 도화도에서 이 장법을 익힐 때는 장을 내밀기만 하면 복숭아꽃들이 분분히 땅에 떨어졌었다. 그러나 후에 이 장법을 다 익히게 되어서는 복숭아 꽃들이 사람의 몸을 따라 돌다가 장을 일단 거두게 되면 일제히 땅에 떨어졌고, 좀더 무르익어서는 장을 내밀어도 꽃이 떨어지지 않다가 장을
완전히 거두어 들인 연후에야 미풍이 불며 꽃잎들이 우수수 떨어지는 것이었다. 한옆에서 줄곧 지켜 보던 마옥과 구처기는 그 장법이 고금에 드문 오요한 것임을 알고 황약사의 재주에 새삼 탄복했다.
황약사는 장법을 다 과시한 뒤 한참이나 말없이 법당 안을 거닐다가 두 사람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너희들과 더는 싸우고 싶지 않으니 그만 돌아가도록 해라."
그의 말이 떨어지자 마옥은 얼른 구처기를 이끌고 황약사에게 예를 올린 뒤 총망히 절을 떠났다.
그들이 떠나고 나자 황약사는 건강 오의들에게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자네들은 나를 찾아서 건강부의 열 집 사람들을 위해 복수하려고 했지만 원체 상대가 안 되니 어떡할 셈인가?"
오의 중의 둘째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널 이기지 못했으니 네 놈이 우릴 죽이면 되는 거야, 우리가 이겼더라면 우리도 네 놈을 죽였을 건데 뭘 더 할말이 있단 말이냐?"
"그렇다. 네 놈이 이겼다는 걸 우리도 인정하니 우릴 죽인다 해도 할말이 없다."
맏이도 결연히 말했다.
잠자코 듣고 있던 황약사가 문득 물었다.
"내가 건강에서 사람을 죽였다고 누가 너희들한테 알려 주더냐?"
다섯 형제의 시선이 말더듬이인 셋째한테 집중되었다
황약사는 눈치를 채고 셋째에게 물었다.
"그래 솔직히 말해 보아라."
셋째가 입을 열었다.
"마, 말…… 말하……."
맏이가 말했다.
"셋째야, 서두르지 말고 차분하게 말해 봐라."
셋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염…… 염염……."
황약사는 속이 답답해졌다. 셋째가 얼굴이 시뻘개지며 한참이나 꺽꺽거렸지만 한마디도 신통히 말하지 못하자 맏이가 나무랐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말하라니까!"
그러자 다섯째가 끼여들었다.
"셋째 형, 그러지 말고 노래를 불러. 노래를 부르라구."
워낙 셋째는 노래를 잘 부르는데 일단 노래를 부르게 되면 말을 더듬지 않았다. 그러자 셋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어저께 점심 때 염방 사람들을 만났다네
그들은 저마다 몹시 놀란 모습이었네
포승 하나에 두 사내애와 계집애를 묶었네
그들의 말이 니마묘에서 염방 사람들 큰 재앙 만났다네
푸른 면구를 쓴 괴한은 무예가 하도 강해
독염을 빼앗아 공중에 뿌렸다네
그 바람에 열 집 부호들 깡그리 목숨 잃고
서 나으리도 황천길을 갔다네
그 사람 자주색 두루마기 입고 옥소를 지녔다네
황약사는 그 노래를 듣고 대번에 짐작이 갔다. 워낙 이 건강 오의들은 한길에서 그런 말을 얻어들은 것이었다. 푸른 면구를 쓴 괴한이 사람을 죽였다는 말을 대충 얻어듣고 쪽지를 띄워 마옥과 구처기를 청해다가 황약사와 싸워 보려 했던 것이다. 일이 이처럼 왜곡되었을 줄 어찌 알았으랴?
황약사가 입을 열었다.
"염방 사람들의 포승에 두 사내애와 계집애가 묶여 있었다고 했는데, 계집애는 바로 건강의 열 집 부호들 중 매씨 성을 가진 사람의 딸이지. 그런데 어떻게 그 애들은 나한테 죽지 않고 염방 놈한테 묶인 채 끌려가고 있었을까?"
맏이가 나섰다.
"염방 사람들이 그 애들을 끌고 다니는 건 바로 당신을 찾기 위해서였소. 그것도 모른단 말이오?"
황약사는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었다. 그는 이 다섯 형제들에게 사실대로 이야기한다는 게 쉽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황약사는 그들에게 말했다.
"시끄럽겠지만 자네들이 날 그 염방 놈들한테 데리고 가서 대질시키면 모든 걸 알 수 있을 게 아닌가? 이렇게 하는 것이 어때?"
"그렇지. 좋은 생각이오."
맏이가 얼른 대꾸했다. 그러자 둘째가 눈을 부라리며 반대했다.
"당신은 남은 염방 사람들마저 죽여 버릴 생각으로 그러는 게 아니오?"
넷째도 맞장구를 쳤다.
"그래요. 그런 생각으로 염방 사람들을 만나려는 것이라면 우린 응할 수 없소."
황약사는 변명하려 들지 않고 묵묵히 웃어 보였다.
이리하여 건강 오의는 황약사를 데리고 염방 사람들을 찾으러 떠났다.
멀지 않아 그들은 커다란 뜰 앞에 당도하였다.
그 뜰은 매우 컸는데 둘러친 담장만 해도 1리는 실히 될 것 같았다. 뜰 밖에는 버드나무들이 심어져 있고 커다란 대문 앞에는 돌사자 두 마리가 세워져 있었다.
층계 위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오형제를 보고 물었다.
"자네들은 그 푸른 면구를 쓴 괴한을 잡았나?"
"여기 오지 않았나."
오형제들은 데들 황약사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문어귀에 섰던 사람들은 곧 황약사를 알아보았다. 그들은 놀라 소리를 지르며 일제히 안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황약사는 웃음 띤 얼굴로 천천히 뜰 안으로 들어갔다.
뜰에 들어서자 큰 마당이 나타났다. 마당 복판에는 깃대가 경사지게 서 있었는데 깃대에는 '염 ( )'자가 큼지막하게 써진 누런 깃발이 걸려 있었다. 황약사 등 여섯 사람이 객청 (客廳)으로 다가가자 활짝 열려 있던 객청 문으로 칼과 몽둥이를 든 사람들이 한 무리 몰려 나왔다. 염방의 그 몇몇 형제가 사람들을 끌고 나오는 판이었다. 사위를 둘러보던 황약사는 염방 사람들 속에 그 사내애와 계집애가 묶인 채로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건강 오의 중 맏이가 염방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당신들이 이 사람을 찾기에 우리가 찾아왔소이다."
염방 사람들은 우르르 몰려 나와 긴장한 낮으로 황약사를 주시할 뿐 감히 덤벼들지는 않았다.
맏이가 또 소리를 질렀다.
"셋째 나으리, 사람이 왔으니 따질 게 있으면 어서 따지시오!"
그의 말에 염방의 셋째라는 사람은 입이 붙어 버린 듯 잠자코 있었다. 황약사의 면전에서 니마묘 사건의 시비를 캔다는 것은 근본상 되지도 않을 일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그는 건강 오의의 눈치를 보고 그들 역시 황약사와 싸워 패하였음을 짐작했다. 그는 마음을 도사려 먹고 입을 열었다.
"네 놈은 우리 염방과 무슨 원수진 일도 없는데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찾아와 말썽을 부리려는 거냐? 오늘 우리 염방은 네 놈과 사생결단을 할 테다!"
황약사는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복수해 볼 생각이 있거든 덤벼들어라."
그는 경공을 써서 그들에게 바싹 다가갔다. 염방 놈들은 그가 다가오는 것을 보자 일제히 소리를 지르면서 칼과 몽둥이를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그러나 황약사가 자주색 두루마기를 입은 채로 놈들사이를 왔다갔다하자 놈들은 낫에 삼대가 잘리듯 픽픽 나가떨어졌다.
염방의 셋째라는 놈이 황약사에게 덮쳐들며 고함을 쳤다.
"오늘 무슨 수로든 네 놈을 죽여 버리고 말 테다!"
놈은 왼손으로 기만 동작을 써 가면서 오른손에 든 칼로 황약사를 내리찍으려 했다. 황약사는 가볍게 한 손을 치켜 들더니 놈에게 일장을 갈기면서 다른 손으로는 놈의 칼날을 튕겨 냈다.
'쟁!'하는 소리와 함께 공중으로 날아오른 칼은 금세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놈은 수중에 칼이 없어지게 되자 주먹으로 황약사의 면상을 겨냥하여 후려갈기려 들었다. 황약사는 대뜸 놈의 주먹을 틀어잡고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놈이 비명을 질러대자 황약사는 사정을 두지 않고 오른손을 내밀어 그의 머리에 가볍게 일장을 먹였다. 놈은 눈이 화등잔만해져서는 미끌어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건강 오의는 수많은 싸움판을 경험해 보았지만 황약사와 같은 인물은 생전 처음 보았다. 그는 가벼운 동작으로도 사람을 파리 죽이듯 간단히 해치우지 않는가. 그들은 할말을 잃은 채 멍청히 황약사를 바라보았다.
황약사는 마치 한가롭게 산보라도 하듯이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가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염방 놈들은 놀란 소리를 지르며 몇 걸음씩 물러났다. 드디어 황약사는 놈들을 문앞까지 밀어 붙였다.
황약사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너희들이 진현풍과 그 매씨네 계집애를 내놓으면 목숨을 살려 주겠다!"
염방 놈들은 잔뜩 겁에 질려 일제히 그렇게 하겠노라고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그들은 당장 진현풍과 매약화를 묶은 포승줄을 끊어 버리고 두 사람을 황약사 쪽으로 떠밀어 보냈다. 황약사는 온통 상처투성이인 아이들을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너희들 둘은 나를 따라 이 건강부를 떠나는 것이 어떻겠느냐?"
황약사가 물었다.
진현풍은 황약사의 무예에 심히 탄복하고 있던 터에 그가 자기를 데리고 가겠다는 말을 듣고 더없이 기뻐했다. 그는 한 손으로 황약사의 손을 잡은 채 머리를 돌려 염방 놈들을 바라보며 을러댔다.
"내가 훗날 무예를 익혀 가지고 돌아오게 되면 너희들 염방 놈들을 씨도 남기지 않고 몽땅 죽여 버릴 거야!"
염방 놈들은 속으로 움찔했으나 황약사의 손을 잡고 있는 그를 없앨 도리가 없었다.
황약사는 기특하다는 듯 진현풍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다가 한편에 조용히 서 있는 매약화를 내려다보았다. 매약화는 미목이 수려한 게 무척 성숙해 보였다. 황약사는 문득 그녀를 어디선가 본 듯한 생각이 들었다. 자세히 뜯어보니 매약화는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유난히 붉은 입술이며 새하얀 이빨, 총기 도는 눈동자 등이 어딘가 아형을 닮은 데가 있었다.
그녀를 향해 황약사가 물었다.
"날 따라가면 다시는 염방 놈들의 학대를 받지 않을 수 있다. 어떠냐?"
매약화가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그러겠어요. 따라가겠어요."
"그럼 가자."
황약사는 두말하지 않고 계집애와 진현풍의 손을 양손에 각각 나누어 잡았다. 세 사람은 나란히 법당 문을 나섰다.
얼마나 걸었을까. 황약사는 땅바닥에 앉으면서 진현풍과 매약화도 자기 옆에 앉게 했다. 황약사가 진현풍에게 물었다.
"네 부친의 함자가 어떻게 되느냐? 가족들은 없느냐?
진현풍이 땅바닥에 엎드려 절을 하며 대답했다.
"저의 부친은 진백만이라 부르는데, 건강부에선 첫손에 꼽히는 부자였지요. 염방 놈들한테 살해당하고 집도 불타 버렸어요. 전 영웅이신 당신을 따라가서 사부님으로 모시겠습니다."
황약사가 입을 열었다.
"네가 나를 스승으로 섬기자면 여간 어렵지 않을 게다. 먼저 일어나서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해 보아라."
그러나 진현풍은 감히 일어나지 못하고 그냥 엎드린 자세로 황약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넌 무예를 배워 뭣 하려느냐?"
"사람을 죽이렵니다."
진현풍이 서슴없이 대답했다.
황약사는 머리를 끄덕이고 나서 다시 물었다.
"사람을 죽인다면 어떤 자들을 죽이려느냐?"
"제가 보기에 나쁜 놈 같으면 몽땅 죽여 버리겠습니다."
황약사는 내심 놀란 듯 진현풍을 바라보았다. 말 맵시며 행동거지 하나하난가 데려다 제자로 삼아도 무방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이번에는 고개를 돌려 매약화에게 말했다.
"너도 고아가 되었구나. 우리 도화도엔 여인이 없어서 널 섬에 데리고 가긴 무척 곤란할 것 같은데……."
그는 말끝을 흘리며 매약화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매약화는 아주 총명한 아이인지라 황약사의 말에 전혀 개의치 않고 서슴없이 말했다.
"어르신께서 절 도화도에 데리고 가시면 그곳에도 여인이 있게 되는 거죠."
그녀의 말에 황약사는 무어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넌 도화도에 가 뭐 하려느냐?"
"전 부엌일을 할 줄 알아요. 남자들이 무예를 닦을 때 전 남자들을 위해 밥짓고 반찬을 만들면 안 되나요?"
황약사가 말을 받았다.
"도화도엔 불을 때고 밥짓는 사람이 있단다."
매약화는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도화도엔 여인이 없다면서요?"
"도화도엔 여인이 없단다. 나한테 불 때주고 밥을 지어 주는 사람도 사내란다."
매약화가 큰소리로 말했다.
"남자도 불 때고 밥을 지을 줄 아나요? 남자가 하는 밥이 오죽 하겠어요?"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니 황약사는 자꾸만 아형 생각이 났다.
'이 앤 솔직하고 총명하지만 아형에게 비하면 아직도 한참 어린애지…….'
그는 어쩐지 마음이 쓸쓸해졌다.
황약사는 두 애를 데리고 객점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옷을 갈아 입고 밥을 먹은 뒤 황약사의 방에 모여 앉았다. 황약사는 앉은 자세로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진현풍과 매약화는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불안한 듯 바라보았다.
이경(二更)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자 황약사는 갑자기 훌쩍 몸을 일으켰다.
"자, 나를 따라오너라!"
세 사람은 객점을 나와 거리에 나섰다. 거리와 골목은 불빛 한 점 없이 온통 깜깜했고 집집마다 문을 닫아걸고 불을 끈 채 잠이 든 지 오래였다. 황약사는 진현풍과 매약화의 손을 양손에 나눠 잡고 경공을 써서 지붕 용마루로 날아올랐다. 그는 두 아이를 데리고 한 번에 몇 장씩 용마루와 용마루 사이를 날아 넘어 눈 깜짝할 사이에 성벽 위에 당도했다.
이 건강부는 여섯 조대의 도읍지로서 천하에 이름난 돌성이었다. 5대 16국 때 계속하여 돌을 쌓아 올린 탓에 성벽은 매우 두텁고 높아 높이가 5,60장, 두께가 7, 8장에 달했다.
황약사는 아무 말 없이 진현풍과 매약화를 성벽 위에 내려놓고는 성벽 가장자리에 조용히 앉아서 성 밑을 내려다보았다.
성안에서 삼경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 왔다. 꼼짝 않고 한곳에 앉아 있는 황약사는 마치 참선을 하고 있는 노승과도 같았다.
이때였다. 성 밑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 왔다. 발자국 소리의 임자가 머리를 들어 성 위를 올려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당신이 도화도 도주인 황약사요?"
"그렇소."
황약사의 대답에 그는 갑자기 미친 듯이 웃어대기 시작했다. 진현풍과 매약화는 그의 징그러운 웃음 소리에 잔뜩 긴장하여 성 밑을 내려다보았다. 달빛 아래에 장승 같은 사나이가 서 있었는데 풀어헤친 머리칼이 허리까지 드리워져 있었으며 손에는 구리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얼굴은 자세히 볼 수 없었으나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견주어 볼 때 힘깨나 쓰는 사람 같아 보였다.
황약사가 입을 열었다.
"여기로 올라오구려."
"당신이 내려오구려!"
"올라올 자신이 없는 모양이지?"
황약사의 말에 그가 버럭 성을 내었다.
"좋아, 거기서 기다려. 내가 올라갈 테니까!"
사나이는 성 밑까지 와서 투덜댔다.
"제기랄! 이 놈의 성은 왜 이리 높아?"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구리몽둥이로 성벽을 뚫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몽둥이가 성벽에 석 자나 되게 깊이 박혔다. 그는 그 몽둥이를 잡고 성벽에 기어올랐다.
잠시 후 그는 황약사의 앞에 와서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이 도화도 도주 황약사란 말이지?"
황약사는 대답 대신 머리를 끄덕여 보였다.
그는 머리를 기웃거리며 황약사를 자세히 살펴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그런 것 같지 않아."
황약사가 되물었다.
"뭐가 그런 것 같지 않다는 거요?"
그 사람이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모두들 당신을 황 괴물이라 부르면서 사악한 인간이라고 하더군. 그런데 당신을 보니 사악해 보이기보다는 백면서생에 지나지 않는데 어찌 황 괴물이라 할 수 있겠소?"
황약사는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황 괴물이오. 대호(大號)는 동사요. 오늘을 넘기기만 하면 당신은 이 황 괴물이 얼마나사악한 인물인가를 알게 될 거요."
"내가 듣기에 당신은 태호방을 없애 버렸고 염방 사람들도 숱하게 죽였더군. 그래 소문을 듣고 당신과 싸워 보려고 이렇게 찾아 왔는데, 나 참……"
그는 아무래도 신통찮아 뵌다는 듯 입맛을 쩍 다셨다.
그의 눈엔 황약사가 암만해도 서른 남짓한 섬약한 선비로밖엔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황약사가 천천히 일어나며 물었다.
"당신이 구리몽둥이로 강남을 정정 울리고 있다는 대력 (大力) 허패 (許覇)가 아니오?"
"그래, 이 어른이 허패이시다. 그런데 어쨌단 말이냐?"
허패가 오만하게 대답했다.
"당신이 금년 봄에 강남에서 세 사람을 죽였는데 그 세 사람은 동해 상어방 사람들이 아니오?"
"그래, 이 어른이 그 세 놈을 죽였다. 하지만 그 놈들이 어느 방놈들인지는 몰라. 하긴 그 놈들 몸에 큰 물고기 두 마리가 매달려 있던 기억은 나는군."
"당신이 그 세 사람을 죽이게 된 건 무슨 까닭에서요?"
"내가 죽이고 싶으면 죽이는 거지 거기에 무슨 이유가 있어야 하지?"
"그래도 당신이 사람을 죽인 데는 무슨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사나이가 음침해진 기색으로 대답했다.
"그 상놈의 자식이 술집에서 술을 마시는데 이 어른보다 더 빨리 마시지 않겠나? 내가 두 사발 마시는 사이에 세 사발이나 마시더란 말야. 그래 그 놈을 죽여 버리게 된 거지."
황약사가 입을 열었다.
"워낙 그 사람들은 당신과 술시합을 했었구먼. 술시 합에서 지게 되니까 사람을 죽였다구?"
사나이가 절레절레 머리를 저었다.
"천만에, 술시합에서 지게 되면 이후에 기회를 보아 죽여 버리면 되는 거지 그 자리에서 사람을 죽이겠나? 그때 술집에서 그 자는 저쪽에 있었고 나는 이쪽에 있었는데 이 어른이 볼라니까 내가 한 사발을 마시면 그 놈이 두 사발 마시더라구. 이 어른이 눈알을 부라리는데도 놈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더란 말이야. 그 놈이 나를 보기에 이 어른이 또 한 사발을 마셨지. 술사발을 내려놓고 바라보니 나 참, 그 놈이 또 한 사발 들이마시는 게 아니겠나? 그래 화가 나서 그
놈한테 달려가 그 자리서 모가지를 비틀어 끊어 버린 거지. 그런데 그 옆에 함께 앉아 있던 두 놈이 달아나지 않고 겁없이 덤벼들잖아? 그래 두 놈 다 마저 해치워 버렸지."
그는 술집에서 세 사람을 죽여 버리던 장면을 떠올리자 통쾌한 모양인지 다시금 껄껄 웃어대기 시작했다.
황약사가 말했다.
"내가 자네보다 술을 더 잘 마신다면 자네가 이 황약사의 모가지도 비틀어 꺾어 버릴 텐가?"
"이 어른이 비틀고 싶으면 당연히 비트는 거지!"
대력 허패는 아무렇지도 않게 툭 내뱉었다.
이때였다. 황약사가 몸 뒤에서 무슨 물건인가를 잡는 것 같더니 대력 허패를 향해 힘껏 던졌다.
그 물건이 대력 허패의 면상을 향해 씽 하고 날아갔다. 하지만 그 역시 워낙 손놀림이 빠른 자라 얼른 두 손을 내밀어 물건을 받아 쥐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술단지였다.
대력 허패가 헤헤 웃으며 말했다.
"황 괴물, 나와 함께 술을 마실 셈인가?"
황약사는 대답하지 않고 술단지 한 개를 더 꺼내었다. 그는 술단지의 뚜껑을 뜯으며 말했다.
"마시자구."
대력 허패는 황약사가 술을 내놓자 몹시 기뻤다.
'황약사, 네 놈도 괴짜로구나. 이 허패가 술을 좋아하는 줄 알고 함께 술을 마시자구 하는구나. 좀 있다가 이 놈을 이겨 모가지를 꺾어 놔야지.'
그는 황약사의 뒤에 앉아 있는 진현풍과 매약화에게 흘낏 눈길을 주고는 입을 열었다.
"훌륭하군. 황약사 자네는 정말 세심한 사람이군. 시체를 수습할 사람까지 데리고 왔으니."
그는 기고만장하여 껄껄 웃어댔다.
황약사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술단지를 든 채 그가 술을 마시기만을 기다렸다.
대력 허패는 술단지의 뚜껑을 연 다음 한 단지나 되는 술을 꿀꺽 꿀꺽 단숨에 들이켰다. 황약사도 천천히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대력 허패와는 달리 조금도 소리내지 않고 단지를 비우고는 조용히 내려놓았다.
이윽고 대력 허패가 단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황약사, 난 다 마셨네."
그는 아주 득의 양양한 표정이었다. 황약사는 묵묵히 앉아 그를 바라보더니 술단지를 거꾸로 치켜 들어 흔들어 보임으로써 다 마셨음을 알렸다. 순간 황약사의 손에 들려 있던 단지가 갑자기 '팡!'하고 부서져 버렸다.
대력 허패는 기가 죽은 기색으로 황약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자넨 나보다 빨리 마시기는 했지만 난 자네보다 더 많이 마실 수 있어."
황약사가 쌀쌀한 어조로 대꾸했다.
"내가 너보다 더 빨리 마셨으니 어디 내 목을 비틀어 끊어 보지 그래?"
대력 허패가 두 눈을 부릅뜨고 황약사를 쏘아보며 말했다.
"황 괴물, 날 건드리지 말어. 날 우습게 아는 모양인데 강남 16부에서 아직 이 대력 허패를 감히 건드리는 놈은 없어!"
"네 놈이 손을 쓰지 않겠다면 내가 손끌 쓰마. 네 모가지 하나 비틀어 놓는 정도는 내게 아 아니거든."
대력 허패가 천둥같이 화를 내며 황약사를 향해 구리몽둥이를 휘둘렀다. 구리몽둥이가 '팍!' 하고 황약사의 어깨에 맞았다. 그러자 진현풍과 매약화가 놀란 소리를 지르며 황약사에게로 달려왔다.
황약사가 외쳤다.
"움직이지 마라!"
두 아이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대력 허패는 끄떡도 하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는 황약사를 보고 깜짝 놀랐다.
살과 피로 된 황약사의 몸뚱이가 돌벽도 뚫는 구리몽둥이에 맞고서도 이처럼 성할 수가 있단 말인가? 허패는 귀신이라도 본 듯 겁에 질린 얼굴이 되었다.
황약사가 입을 열었다.
"난 사람을 죽일 때 먼저 상대방이 나에게 죄를 짓게 만든다. 네 놈이 내 한마디에 날 몽둥이로 쳤으니 오늘 살아 돌아갈 생각일랑 말아라!"
황약사는 훌쩍 봄을 날려 대력 허패에게로 달려들었다. 황약사가 몸을 날려 재주를 부리기 시작하자 놈은 당황하여 구리몽둥이를 미친 듯이 휘둘러 댔다. 그러나 황약사는 그가 몽둥이를 휘두르는 대로 몽둥이를 따라 그만큼 빨리 몸을 움직였다. 한바탕 몽둥이를 휘두르던 허패는 기진맥진하여 몽둥이를 휘두르는 속도가 점점 느려 갔다.
어느 결에 황약사의 손이 퍼뜩하더니 허패의 구리몽둥이를 거머쥐었다. 허괘는 몽둥이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두 손으로 힘껏 잡아 챘다. 그러나 황약사의 다섯 손가락 끝에 잡힌 몽둥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허패는 더욱 힘을 내어 몽둥이를 빼내려고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황약사의 손에 잡힌 몽둥이는 자기가 틀어쥐고 있는 부분만 빼놓고 엿가락처럼 휘어들고 있는 게 아닌가.
황약사는 어느 틈에 대력 허패의 곁에까지 다가왔다.
"짐승 같은 놈, 끝까지 물러서지 않을 테냐?"
대력 허패는 손을 놓으며 겁에 질린 눈길로 황약사를 바라보았다. 그가 체념한 듯 말했다.
"좋다. 내가 너한테 진 셈이니 죽이든 살리든 네 마음대로 해라!"
황약사는 뒷짐을 진 채 한가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좋아. 네 놈이 졌다는 걸 인정했으니 스스로 목숨을 끊어라."
대력 허패는 황약사를 쳐다보더니 그렇게 하겠노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황약사는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이때였다. 허패란 놈은 갑자기 허리춤에서 비수를 꺼내 들더니 황약사의 가슴팍을 냅다 찔렀다.
황약사는 번개같이 손을 놀려 두 손가락으로 비수를 잡았다. 막 가슴팍을 파고들던 비수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허패는 황약사 앞에서 비수를 틀어된 채 멍하니 서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황약사는 태연자약한 기색으로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어디 계속 덤벼 보시지 그래?"
허패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창백해진 낯빛으로 황약사를 멍청히 바라보았다.
황약사는 가슴에 박힌 비수를 빼내며 말했다.
"네 놈이 요까짓 칼로 날 죽이겠다구?"
황약사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손가락 끝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비수는 몇 토막으로 끊어져 땅바닥에 떨어졌다.
허패는 더는 방법이 없는지라 제자리에 굳은 듯이 서 있을 따름이었다. 황약사는 손가락을 가볍게 놀려 두 개의 돌조각을 날려 보냈다. 그것은 허패의 혈도에 명중하여 그는 아예 꼼짝도 못하게 되었다.
어느덧 날이 밝아 오면서 성벽이 희미한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황약사는 다시 성벽 위에 앉아 진현풍과 매약화를 불렀다. 그들이 앞에 와 서자 황약사는 다정하게 물었다.
"현풍아, 넌 이 놈을 어떻게 처치했으면 좋겠느냐?"
진현풍은 황약사를 쳐다보다가 다시 대력 허패를 쳐다보았다. 그는 염방 놈들이 인명을 빼앗는 일을 장난처럼 여기던 일을 생각하고는 이를 갈았다.
"죽여야지요! 사부님이 허락하신다면 이 제자가 손을 쓰겠습니다."
"황약사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이번에는 매약화에게 물었다.
"네가 말해 보아라. 이 놈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죽여야 하겠느냐 죽이지 말아야 하겠느냐?"
매약화는 계집애인지라 그 말에 두 눈이 휘둥그래져 가지고 황약사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분의 제자가 되려면 저분의 환심을 사야 해. 그러자면 매사에 저분의 뜻에 따르는 길밖에 없어.'
매약화는 조심스레 대답했다.
"죽이든 살리든 어르신 뜻대로 하세요."
황약사가 다시 물었다.
"만약 죽이지 않는다면 저 놈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매약화는 다시금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난 지금까지 부모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자랐다. 부모님들은 내가 요구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들어주셨어. 그러한 부모님들께서 염방 놈들에 의해 하루아침에 돌아가셨다. 게다가 염방 놈들은 나에게 갖은 수모를 주었어. 졸지에 고아가 되어 놈들의 학대까지 받게 되었지.'
예까지 생각한 매약화는 다시 대답했다.
"저 놈은 죄가 크고 나쁜 짓을 많이 한 놈이니 쉽게 죽여선 안돼요.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을 만큼만 고통을 줘요."
황약사는 매약화의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황 괴물은 오늘 정말로 작은 두 괴물을 만난 셈이로구나. 계집애의 소견으로 어찌 저런 지독한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
황약사는 갑자기 요란하게 웃어댔다. 그는 허패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한 가지 묻겠는데, 네 놈은 사람을 죽이는 일 말고 또 무엇을 할 줄 아느냐?"
허패는 황약사의 느닷없는 말에 어리둥절해졌다.
그는 한참 동안 생각을 더듬다가 비로소 대답했다.
"술 마실 줄 아오."
황약사는 코웃음을 쳤다.
"나의 도화도에서는 쓸모없는 사람은 두지 않아. 네 놈이 술 마실 줄밖에 모른다면 죽는 길밖에 없어!"
허패는 또 머리를 숙이고 한참 생각을 더듬다가 입을 열었다.
"난 화초를 가꿀 줄 아오."
황약사는 하늘을 쳐다보며 잠시 생각을 굴리다가 말했다.
"좋아. 네 놈은 목숨은 건진 셈이다. 넌 오늘부터 양주로 갔다가 평강을 거쳐 배를 타고 내가 있는 도화도로 오도록 하여라. 명심할 것은 바다로 나갈 때 도화도로 가려 한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황약사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품속에서 금 몇 냥을 꺼내 허패에게 주었다.
허패는 내심으로 기뻐하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어리석은 놈! 금까지 주면서 날더러 도화도로 가라구? 이 허패가 무슨 보살쯤 되는 줄 아는 모양이지? 시키는 대로 순순히 말을 듣게? '
하지만 허패는 마음을 감추고 시키는 대로 하겠노라고 대답했다.
황약사는 진현풍에게 말했다.
"현풍아, 넌 나를 스승으로 모시고 나의 도화도 문하로 들어가게 되면 오늘부터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그래야만 나의 도화도의 큰 제자가 될 수 있다!"
진현풍은 예절 바른 자세로 고개를 숙이고 황약사의 말에 묵묵히 귀를 기울였다.
황약사가 말을 이었다.
"나한테 긴 침이 두 개 있는데 네가 이걸 저 놈의 귀에 꽂아라."
진현풍은 그 침을 보자 깜짝 놀랐다. 이런. 침을 두 개나 귓속에 꽂는다면 놈은 죽을 게 아닌가?
그는 고개를 들고 황약사를 쳐다보았다. 황약사는 엄한 기색으로 그를 마주보았다.
진현풍은 마음을 다져 먹고 말없이 침을 받아 들었다. 그가 막 허패에게로 다가가려는데 황약사가 소리쳤다.
"잠깐!"
황약사는 진현풍을 불러 세우고 나서 허패의 등허리를 손으로 툭 쳤다. 허패는 겁이 나서 벌벌 떨었다. 그는 황약사가 자기의 척추에다가 독침을 꽂는 줄로만 알았다.
황약사가 말했다.
"네 놈은 반드시 밤낮으로 길을 재촉해야 한다. 만일 한 달 이내로 섬에 당도하지 못하면 독이 퍼져 죽어 버리게 돼, 네가 섬에 당도하게 되면 너한테 해독약을 주는 사람이 있을 거다."
황약사는 말을 마치고 진현풍에게 눈짓을 했다. 진현풍은 다시 한 번 마음을 도사려 먹고 허패에게로 바짝 다가섰다. 그가 침을 허패의 귓속에 찔러 넣자 허패는 돼지 멱따는 소리를 질렀다. 그는 악이 받쳐 황약사의 조상 팔대에 이르기까지 깡그리 욕을 퍼부었다. 황약사는 못 들은 척 딴청을 부렸다.
매약화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남색이 창백해지면서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황약사가 또 입을 열었다.
"네 놈한테 혓바닥이 있어선 뭘 하겠느냐?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소리를 듣느니 차라리 베어 없애는 게 낫지."
그는 손가락으로 허패의 혈도를 짚었다. 그러자 허패는 입을 벌리더니 자기도 모르게 혀를 쑥 내밀었다. 그 모양은 오기에도 끔찍했다. 진현풍과 매약화는 사람의 혀가 이처럼 길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황약사가 손가락을 내밀어 한 번 내리긋자 허패의 혀가 땅에 덜렁 떨어졌다. 놈은 더는 욕설을 퍼붓지 못하고 핏물과 눈물 범벅이 되어 목구멍으로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끊임없이 냈다.
진현풍과 매약화는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황약사와 허패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황약사가 두 사람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우리도 이젠 가야지? 객점에 가서 좀 쉬자꾸나."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객점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매약화와 진현풍은 손에 땀을 쥔 채 묵묵히 황약사를 따랐다. 그들의 등뒤에선 허패의 처절한 울음 소리가 끝없이 메아리쳤다.



제17장 천하의 악인
황약사는 진현풍과 매약화를 데리고 동해 도화도를 향해 떠났다. 그들은 건강부에서 숙소를 정할 수가 없어 건강성 밖 풍림(楓林)에서 노숙하게 되었다.
달을 바라보노라니 황약사는 마음이 한없이 쓸쓸해졌다. 그는 또다시 아형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는 진현풍과 매약화를 불러 앉혀 놓고 말했다.
"난 동해 도화도의 도주이다. 도화도는 아주 아름답고 온통 녹음이 우거져 있으나 다른 사람들이 살지 않는단다. 나 혼자밖에 살지 않지. 몇몇 종복이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나와 가까운 사람들이 아니란다. 이런 자들은 모두 악한들인 데 내가 중원에서 잡아 온 놈들이다. 방금 너희들도 보았겠지만 이런 놈들은 귀머거리로 만들고 혀를 잘라 벙어리로 만들어 무예를 써먹지 못하게 해 놓았지. 나는 종래로 제자를 받아들인 적이 없는데 너희들 둘이 첫 제자가 된 셈이다.
그는 한참 생각에 잠겼다가 매약화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진현풍이 큰 제자이니 너의 이름도 풍자 돌림으로 매초풍(梅超風)이라 부르는 게 좋겠구나."
매약화는 머리를 들어 황약사를 쳐다보았다. 달에 비친 황약사의 모습은 더욱 늠름하고 사내다워 보였다.
진현풍은 어느새 황약사 앞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인사를 올렸다.
"사부님께서 이 제자를 동해 도화도 문하에 받아들여 주심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황약사는 흐뭇한 표정으로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는 매약화를 건너다보았다.
"넌 나의 문하에 들어오고 싶지 않은가 보구나?"
매약화가 황급히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아닙니다. 얼마나 원하던 일인데요."
"그렇다면 됐다. 그만 일어나 앉거라."
황약사가 다시금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한평생 무예를 닦다가 도화도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두 가지 법수를 터득하였는데 그중 한 가지가 낙영신장이고 다른 한 가지가 〈벽해조생곡〉이니라. 이 두 가지 기공으로 나는 능히 천하의 무림 사람들과 선두를 다투고 있지."
이때였다. 누군가의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그 날카로운 웃음소리는 동서남북으로 방향을 바꿔 가며 커졌다가는 작아지고 작아졌다가는 다시 커지며 끊임없이 들려 왔다.
깜짝 놀란 세 사람은 웃음 소리를 따라 정신없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황약사가 얼른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누구냐! 냉큼 앞으로 나서지 못할까?"
갑자기 웃음 소리가 멎으며 사위가 잠잠해졌다. 어둠 속에선 화톳불만이 정적을 깨뜨리며 타올랐다.
잠시 후 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당신의 동해 도화도가 무어 그리 대단하단 말이오? 기는 놈 위에 뛰는 놈 있고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는 말도 못 들어 보았소?"
황약사가 대답했다.
"당신은 누구요? 누구길래 감히 남의 말을 엿듣다가 함부로 지껄이는 거요?"
그 사람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황약사, 당신은 동해 도화도의 무예가 천하의 으뜸이라고 여기고 있소. 그래서 당신은 종남산에서 왕중양의 《구음진경》을 놓고 화산에서 무술시합을 하자는 의견을 내세웠는데, 미안한 말이지만 그때 종남산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는 그 《구음진경》을 손에 넣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거요. 그 《구음진경》은 반드시 내가 차지하게 될 테니까."
황약사는 은근히 놀랐다. 이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 그때 종남산 싸움을 지켜 보았던 사람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누굴까? 황약사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으나 누구인지 선뜻 짐작이 안 갔다.
"당신은 혹시 단지흥 나으리가 아니오?"
그가 자신 없게 물었다. 그러자 목소리의 주인공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단지흥 나으리? 대리란 작은 나라의 황제 노릇을 하는 별볼일 없는 인물 말이오?"
황약사는 다시 속으로 생각해 보았다. 이 사람의 어조가 이처럼 오만한 것으로 보아 단지흥이 아닌 것은 분명했고 그렇다고 왕중양일 리도 없었다. 그렇다면 그 장소에 함께 있었던 사람 중에 남은 사람은 소씨 거렁뱅이와 홍칠뿐이었다. 황약사는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은 소씨 거렁뱅이요, 아니면 홍칠공이오?"
그러자 목소리는 더욱 큰소리로 웃더니 수림 속으로부터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발소리도 내지 않고 눈 깜짝할 사이에 황약사 앞에 와 섰다. 세 사람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한쪽 어깨만 가려지는 윗도리를 입고 발에는 검은 칠피구두를 신고 있었는데 구두코가 유난히도 뾰족하게 들려 있었다. 장승같이 훤칠한 키에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그의 두 눈에는 흉악한 살기가 넘쳐 흘렀고, 칼과 조가비 따위로 만든 장신구가 허리에 매달려 있는 게 유독 눈에 띄었다. 황약사가 점잖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길래 감히 날 비웃는 거요?"
그는 또다시 앙천대소하였다. 황약사는 그의 웃는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며 그의 내공이 대단함을 짐작했다.
그 사람이 입을 열었다.
"당신은 서역이란 곳을 아시오? 백타산장이란 곳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소? 나는 백 타산장의 산군인 노독물 구양봉이오."
워낙 구양봉은 서역의 대사막에 돌아가서 백 타산장의 산군인 난쟁이 임일천을 죽여 버리고 자기가 백 타산장의 장주가 되었으며 그곳에서 형수인 모용쟁과 함께 살았었다. 후에 모용쟁은 낡은 절에서 구양봉의 아들 구양극을 낳고 죽었다. 그 후 그는 서역에서 지금까지 줄곧 합마공만을 닦았는데 현재 중원에 온 것은 대리에 가서 단지흥과 자웅을 가리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개방의 방주인 홍칠이 이곳에 있다는 말을 듣고 급히 건강으로 찾아왔는데 뜻밖에도 황약사
를 만나게 되자 여간 기쁘지 않았다. 그는 황 약사와도 자웅을 가리고 싶었다.
구양봉이 입을 열었다.
"황약사, 당신은 왕중양, 단지흥, 홍칠공, 소씨 거렁뱅이 등과 함께 화산에 모여 무예시합을 열어 이긴 자가 천하의 기서인 《구음진경》을 갖도록 하지 않았소?"
황약사는 깜짝 놀랐다. 이 사람은 그때 종남산에 있지 않았는데도 그 일을 마치 눈으로 보기라도 한 듯이 알고 있으니 왕중양, 단지흥 보다 재주가 더 고명하지 않은가? 그는 머리를 숙이고 생각 에 잠겼다. 그는 그때 구양봉이 종남산에서 어두운 곳에 몸을 숨기고 그들이 주고받는 말을 엿들었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구양봉의 재주가 매우 비상하여 화산의 무예시합에 얽힌 내막을 저토록 잘 알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구양봉이 말했다.
"황약사, 당신의 재주에 대해 이 노독물은 마음속으로 깊이 탄복하고 있소."
"그래 어쩔 셈이오?"
구양봉이 자신만만한 기색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집에서 한가로이 있자니 문득 당신이 화산에서 무예시합을 하자고 하던 말이 생각나더군. 그런데 그때까지 기다리자니 어디 갑갑해서 견디겠소? 내가 중원에 와서 당신 황약사며 홍칠, 단지흥을 모조리 죽여 버리는 게 차라리 낫지. 그러면 화산의 무예시합에는 나와 전진교 교주 왕중양만 남을 테고, 내가 《구음진경》을 빼앗아 내기가 한결 수월해질 것 아니오?"
그의 말에 황약사는 노기가 충천했다.
"너 따위 하잘것없는 구양봉이 이 황약사를 죽이겠다고? 살다보니 별 재미있는 놈을 다 보겠구나. 좋다, 오늘 밤에 어디 네 놈 손에 한 번 죽어 보자."
"내가 이기지 않고서야 네 놈은 수그러들지 않을 거다. 그러니 지금부터 우리 두 사람이 무예를 겨루어 이긴 자만 화산의 무예시합에 참석하고 진 자는 다시는 무림의 일에 참견하지 않는 게 어떻겠나?"
황약사는 선선히 응낙하면서 손을 내밀며 말했다.
"좋다. 나중에 딴소리나 하지 마라."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하고 땅바닥에 앉았다
구양봉이 물었다.
"천하의 문인들 중에서 당신은 누굴 제일 좋아하오?"
그의 물음에 황약사는 속으로 생각했다.
"네 놈이 나와 내력을 겨룬다면 혹시 다행으로 이길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황약사와 문재(文才)를 겨루려 들다니 가소롭구나. '
구양봉이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 두 사람이 각기 자기가 즐기는 사람의 가장 훌륭한 글귀 한 구절씩만 말하기로 합시다."
구양봉이 먼저 한 구절을 읊기 시작했다.
"굴원이 억울하게 죽자 '이소(街騷)'풍의 부(賦)가 문학이 되었더라."
이 대송(大宋) 연간에 시인들은 점차 사부(詞賦)에 깊이 흥미를 느끼면서 당조 이전의 시부(詩賦)는 후세에 가서 더는 이어갈 사람이 없으리라고 생각하여 시를 버리고 사를 쓰기 시작했고 사부를 짓는 데 큰 공력을 들였다. 구양봉의 이 글귀는 춘추전국시대 초나라 굴원 (履原)의 이야기였다.
화약사가 잇달아 한 구절을 읊었다.
"이백 태백이 '장진주(將進酒)'를 천 잔이나 마셨어라."
구양봉이 웃으며 말했다.
"황약사, 나와 당신은 모두 문인을 좋아하지 않는데 그 따위 것에 머리를 썩일 필요가 있소? 차라리 우리 둘이서 한바탕 싸우는 것만 못하오."
황약사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구양봉을 마주보았다. 갑자기 구양봉이 소리를 질렀다.
"황약사, 각오 단단히 하시오!"
구양봉은 품속에서 피리를 꺼내어 불기 시작했다.
그러자 무엇인가가 스르륵스르륵 기어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어둠 속에서 갑자기 무수한 눈알들이 반짝이면서 가까워오고 있었다. 눈길을 주고 있던 황약사는 내심 소스라쳐 놀랐다. 그것은 다름아닌 수백 수천 마리의 독사떼였던 것이다. 놈들은 혀를 날름거리며 점점 가까워 왔다.
진현풍과 매초풍은 너무나 놀란 나머지 달아날 엄두도 못 내고 두 눈을 꼭 감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구양봉이 비양거리는 투로 말했다.
"황약사, 당신은 방금 기분 좋게 두 제자를 받아들였지만 난 저 애들을 죽여 버릴 테요. 독사들이 저 애들을 뜯어먹고 나면 한 무더기 뼈밖엔 남지 않을 텐데 어서 손을 쓰지 않고 윌 하고 있소?"
황약사는 태연한 표정을 지었으나 내심 여간 걱정이 아니었다. 자기라면 이따위 뱀들은 조금도 두려워할 까닭이 없지만 두 제자는 아무래도 위험했던 것이다. 황약사는 온몸으로 기를 내어 보내 제자들을 감쌌다. 그러자 독사들은 마치 철벽에 부딪치기라도 한 듯 더는 다가들지 못했다.
그러나 이 상태로 계속 간다면 체력이 많이 소모되기 때문에 내력이 따라가지 못하여 황약사 자신까지 죽게 될 우려가 있었다. 황약사는 땅에서 돌멩이를 주워 아홉 조각으로 부스러뜨렸다. 그는 돌을 날려 제자들의 신변에 다가든 독사들을 하나씩 때려눕혔다.
그러나 수많은 뱀들을 어찌 몇 개의 돌 조각으로 물리칠 수 있겠는가. 이제 세 사람은 완벽하게 독사로 이루어진 담벽에 둘러싸였다고 할 정도였다. 달빛 아래 세 사람의 주위를 물샐틈없이 둘러싼 뱀 장벽이 피리 소리에 따라 파도처럼 굼실거리는 광경은 실로 몸서리쳐지는 광경이었다.
황약사는 또다시 돌멩이를 주워 들고 공중으로 튕겼다. 돌멩이는 공중에 솟구쳤다가 떨어지는 순간 여러 조각으로 변하더니 한꺼번에 수십 마리의 뱀을 명중하였다. 황약사는 다시 소매를 펄럭여 돌멩이들을 날려 보냈다. 불과 몇 분 만에 황약사는 백여 마리의 독사들을 죽여 버렸다.
"황약사, 나한테 투항하는 게 상책이야. 그러면 먼지를 들쓰면서 화산에 가 남들과 싸우며 무예를 겨를 필요도 없는 거 아니겠어? 내가 당신 대신 가는 게 어때?"
구양봉은 이렇게 큰소리로 말하고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황약사는 속으로 생각을 굴렸다.
'나 하나 몸을 빼긴 간단한데 이 두 제자를 구하기가 어렵구나.'
그는 몹시 괴로워졌다. 그래 요까짓 이름없는 애숭이 같은 놈의 손에 패하고 만단 말인가?
구양봉의 피리 소리는 더욱 빨라졌다. 독사들은 그들 세 사람 주위를 더욱 빽빽하게 조여들었다. 놈들은 마치 세 사람을 백골만 남을 때까지 몽땅 뜯어먹으려고 날치는 듯싶었다.
황약사는 소맷자락을 휘저어 강풍을 일으켰다. 순간 뱀들은 맥을 못 추고 한 장 남짓 뒤로 밀려갔다. 그러나 피리 소리는 계속 빠르게 이어졌고 뱀들은 다시금 몰려들기 시작했다.
황약사는 두 제자를 바라보았다. 진현풍은 당황한 기색으로 도망갈 궁리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으나 매초풍은 이빨을 사려물고 굳건하게 독사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황약사가 진현풍에게 말했다.
"현풍아, 넌 겁이 나는 모양이로구나?"
진현풍이 우물쭈물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황약사는 이번에는 매초풍에게 물었다.
"넌 더욱 겁이 나지?"
매초풍이 웃으며 대답했다.
"제 곁에 사부님이 계신데 겁날 게 뭐가 있어요?"
황약사는 피식 웃음을 머금었다.
"너희들 둘은 시름을 놓거라. 정 안 되겠으면 내가 먼저 너희들을 죽여 저 놈들에게 당하지 않게 해주마,"
그는 이번에는 구양봉을 향해 말했다.
"구양봉, 너무 기고만장해 하지 마라. 이 황 동사도 그리 만만한 인물은 아니야. 네 놈이 끝까지 독사를 이용하여 나의 두 제자를 괴롭힌다면 내 손으로 저 애들을 죽여 버릴 거다. 결코 저 애들이 독사의 먹이가 되게 하지는 않을 거란 말이다!"
황약사의 과단성 있는 말에 구양봉도 멍해지고 말았다. 그는 속으로 탄복했다.
'이 구양봉은 지독하기로 서역에서 이름난 사람이다. 이 노독물을 모르는 사람이라고는 없다. 그런데 황약사가 이런 생각까지 하는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구나. 정말 만만하게 볼 인물이 아니야. 큰일을 해내려면 사소한 걸 따지지 말라는 말도 있지만 바로 이 구양봉과 저 황약사가 그런 인물이고 이런 사람만이 《구음진경》을 놓고 싸울 수가 있는 거지.'
예까지 생각이 미친 구양봉은 황약사에게 두려움을 느끼면서 그를 죽여야겠다는 생각을 더욱 확고히 했다.
구양봉이 입을 열었다.
"황약사, 당신이 자기 손으로 제자까지 죽일 수 있다니 이쯤에서 그만두겠소. 화산에서 무예시합을 할 때 당신과 다시 자웅을 겨루기로 합시다."
황약사는 말없이 진현풍과 매초풍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진현풍이 두려운 기색으로 말했다.
"사부님, 절 죽이지 마십시오……"
하지만 매초풍은 황약사를 쳐다보며 눈을 똑바로 뜨고 말했다.
"사부님, 저를 죽이는 건 대수롭지 않으나 절 대신하여 한 가지 일을 해주세요. 그런 다음 절 죽여 주세요."
황약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매초풍을 놀라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넌 날 미워하지 않겠느냐?"
"저의 이 목숨은 워낙 사부님께서 구해 주신 거니까 사부님 거나 다름없어요. 그러니 절 죽이든 살리든 사부님 뜻대로 하세요. 하지만 저한텐 시름이 놓이지 않는 게 한 가지 있어요. 사부님께서 대답해 주신다면 전 스스로 목숨을 끊겠어요."
황약사가 다그쳐 물었다.
"말해 봐라. 내가 널 도와줘야 할 일이 뭐냐?"
"염방 놈들이 저의 부모님을 죽였어요. 부모님의 원수와는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거죠. 사부님께서 절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사부님께서 절 도와 염방 놈들을 몽땅 죽여 버린다면 이 제자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매초풍은 무릎을 꿇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머리를 조아렸다.
황약사는 잠자코 앉아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진현풍이 황약사와 매초풍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매초풍은 몸을 일으켜 진현풍에게도 읍하며 말했다.
"사형께서도 이 현실을 받아들이세요. 달리 무슨 방법이 있겠어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칼을 뽑아 자기 목을 찌르려 했다.
진현풍이 낚아채듯 칼을 빼앗으며 소리쳤다.
"너 미치지 않았니? 사부님께서 아직 너한테 아무 말씀도 없었는데 왜 이러니?"
황약사가 차가운 눈길로 진현풍을 바라보았다. 진현풍은 칼을 들고 황약사에게 달려들며 외쳤다.
"네까짓 게 무슨 사부란 말이냐? 남들은 모두 자기 제자들을 백방으로 아끼고 제자한테 재주를 전수하는데 너는 강적을 만나니 제자들을 먼저 죽이려 드는구나. 네까짓 게 무슨 영웅이란 말이냐?"
황약사가 냉소를 지었다.
그는 시선을 돌려 매초풍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너도 속으로는 진현풍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겠지?"
매초풍이 대답했다.
"전 사부님을 위해 죽기를 원해요."
매초풍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녀는 이 며칠 동안 황약사와 함께 지내면서 그를 존경하고 깊이 흠모하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 자기가 사부의 부담이 된다고 생각하자 자결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황약사가 쌀쌀한 어조로 말했다.
"현풍아, 넌 정말 아들하구나. 나의 도화도 문하에 있기로는 부족한 놈이야. 넌 도화도 사람인 내가 그렇게 겁이 많은 사람인 줄 아느냐?"
그는 또다시 매초풍을 향해 엄한 어조로 꾸짖었다.
"넌 우리 도화도 문중의 사람으로서 쉽게 죽을 생각부터 하니 쓸모가 없구나. 우리 문중 사람이 되려면 강적을 만났을 경우 죽더라도 적을 물고늘어져야 하는 법, 너처럼 적수를 만났을 때 자살할 궁리부터 한다면 상대방 좋은 일밖에 더 되겠느냐? 어쨌거나 둘 다 당장 일어나거라!"
진현풍과 매초풍은 모두 일어섰다. 그들 두 사람은 모두 깜짝 놀랐다. 그들은 남한테 쉽사리 굴복해서는 안 된다는 도리를 황약사가 이런 방식으로 깨우쳐 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황약사가 진현풍에게 호령했다.
"이제부터 내가 하는 것을 잘 지켜 보도록 해라!"
진현풍은 공손히 허리를 숙여 보였다. 황약사는 이번엔 구양봉을 향해 차갑게 말했다.
"노독물, 이제부터 도화도의 솜씨를 보여 주마!"
황약사는 당장 몸을 솟구쳐서는 경공으로 진현풍, 매초풍의 주위를 돌며 옥소로 그들 주위를 철갑처럼 두르고 있는 뱀들을 가차없이 죽여 나가기 시작했다. 이를 지켜 보던 구양봉은 자기가 황약사와 싸우러 왔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크게 탄복하며 물었다.
"훌륭하군. 아주 훌륭해! 한데 이건 무슨 검법인가?"
황약사가 대답했다.
"이건 도화도의 낙영신검이라는 것이다!"
구양봉은 호기심이 동하여 큰소리로 말했다.
"훌륭하군, 훌륭해! 나도 당신의 이 낙영신검을 배우게 해주게"
황약사가 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구양봉, 네 놈이 이따위 벌레들을 가지고 이 도화도 사람을 해칠 수 있다고 생각했느냐? 그 독사는 나의 제자들을 죽이는 데나 쓸 수 있을 따름이야. 네가 저 애들을 죽인 다음 나와 승부를 겨를테냐?"
구양봉이 너털웃음을 치면서 대꾸했다.
"황약사, 네 놈이 종남산에서 그 세 치도 안 되는 혀를 놀려 화산에서 무예시합을 하자고 왕중양을 부추기더니 이번엔 이 구양봉으로 하여금 너의 제자에게 손을 쓰게 함으로써 나의 이름을 더럽히려는 작정이냐?"
구양봉은 또다시 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피리 소리는 아까에 비해 무척 느렸는데 그 때문인지 잔뜩 기승을 부리던 독사들이 꾸불거리며 흩어져서는 천천히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화톳불 주위에는 이끼 한 마리의 독사도 남지 않았다.
구양봉은 옆구리에서 사장(蛇 )을 뽑아 들었다. 이 사장은 사람의 키만큼 긴 것으로 위에 사람의 머리 같기도 하고 뱀대가리 같기도 한 모양이 부각되어 있어 매우 징그러워 보였다. 그것은 일반적인 병장기와는 확연히 달라 보였다.
"황약사, 난 이 사장의 마흔아홉 가지 법수로 너와 자웅을 겨를테다!"
황약사는 머리를 돌려 진현풍과 매초풍을 바라보았다. 긴장한 탓으로 눈이 휘둥그래져 있는 진현풍과는 달리 어글어글한 눈매로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매초풍의 기색은 꼭 아형과 흡사했다. 황약사는 속으로 생각했다.
'만일 아형이 이 곳에 있다면 얼마나 힘이 날까. 그러면 나는 구양봉과 싸워 반드시 이길 수 있을 텐데…….'
그는 구양봉이 확실히 대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싸우게 되면 쉽사리 승부를 가리기 힘들 것이며 까딱 잘못했다간 패배할 가능성도 많았다. 황약사는 마음을 가다듬고 품속에 찔러 넣었던 옥소를 다시 꺼내 들었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서서 한참이나 노려보았다.
"황약사, 네 놈의 낙영검법을 나의 이 독사장에다 시험해 보면 서역의 대사막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게 될거다!"
구양봉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독사장을 앞세우고 몸을 날려 일직선을 이주며 곧장 황약사에게 날아갔다. 이 진공은 그야말로 엄청난 위력을 지닌 것이었지만 황약사는 가볍게 옥소를 들어 독사장을 겨누었다. 순간 무서운 굉음과 함께 두 사람은 모두 땅 위에 떨어지며 서너 걸음 물러났다.
두 사람은 몇 차례 더 같은 방법으로 공격하고 막아내기를 반복했으나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웠다.
구양봉의 무예 실력에 황약사는 속으로 은근히 놀랐다. 구양봉의 무예는 홍칠이나 단지홍보다 전혀 못하지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생각을 감추며 큰소리로 말했다.
"구양봉, 독사장을 쓰는 법수가 훌륭하군. 나도 독사장 쓰는 법을 배워야겠는걸?"
두 사람은 다시 한데 엉켜 싸우기 시작했다.
진현풍과 매초풍은 두 사람이 싸우는 장면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지를 못했다. 두 사람이 어찌나 번개처럼 몰아치는지 그들의 그림자마저 똑똑히 보이지를 않았다. 황약사가 구양봉을 에워싸고 질주하는데 손에 들려 있는 옥소가 천 개가 넘는 소검(簫劍)으로 변하여 개개마다 구양봉의 대혈을 노리는 광경은 실로 장관이었다
구양봉 역시 독사 장으로 건드리고, 쑤시고, 낚아채고, 찌르는 등 다양한 장법을 써서 한치의 틈도 주지 않았다.
두 사람은 줄창 2백 합 가까이 싸웠으나 도무지 승부가 나질 않았다. 갑자기 구양봉의 독사장과 황약사의 옥소가 부딪치며 요란한 정음을 냈다. 그것은 구양봉의 공격을 황약사가 옥소로 막는 소리였다. 구양봉은 주춤하며 뒤로 물러섰다.
"황 괴물, 과연 네 놈은 보통 놈이 아니구나!"
황약사가 큰소리로 웃으면서 대답했다.
"통쾌하군, 통쾌해. 나 역시 일속 대사와 겨루어 본 이래 당신같은 고수는 처음이야, 상대방이 이 정도는 돼야 싸울 맛이 나는 거지."
구양봉도 일찍이 일속을 만나 본 적이 있고 일속과 황약사가 싸운 일을 알고 있었으나 당시만 해도 그는 무예를 모르는 백면서생에 불과했었다. 그런데 지금 황 약사로부터 이 같은 칭찬을 받게 되자 내심 기분이 좋아졌다.
"황약사, 당신의 재주에 정말 탄복하오. 이 노독물이 당신을 놓아 보낼 테니 저 두 애들을 데리고 가도 좋소."
날이 밝아 오기 시작하자 단풍나무숲이며 강들이 점점 형체를 드러냈다. 황약사는 여전히 살기등등한 표정으로 구양봉을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
"구양봉, 네 놈이 뱀을 가지고 날 괴롭혀 놓고도 그냥 가려구?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 물러서리라 생각하느냐?"
그러자 구양봉도 냉소하며 대꾸했다.
"황약사, 네 놈은 정말 안하무인이로구나. 그래 끝까지 이 노독물과 싸워 보겠단 말이지? 좋다. 내 오늘 네 놈과 결판을 내고야 말 테다!"
황약사는 대뜸 옥소를 허리춤에 꽂으며 꺼져 가는 화톳불 앞에 가 앉았다. 이를 바라보던 구양봉도 화톳불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앉았다. 황약사가 입을 열었다.
"나와 그대가 다시 싸우게 되면 누가 이길 것 같은가?"
황약사는 이렇게 말하면서 식지로 엄지를 감싼 다음 엄지를 힘껏 튕겼다. 그러자 돌연 세찬 바람이 일며 스러져 가던 화톳불이 세차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멋지군, 멋져! 실로 귀신 같은 재주야!"
구양봉은 사뭇 감탄하듯 말하고서 두 손을 쳐들었다가 앉은 자세로 두 장을 수평으로 내밀었다. 그는 다시 두 손바닥을 맞붙였는데 기를 내보내려는 눈치였다. 황약사는 뛰어난 견식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구양봉이 지금 취하고 있는 행동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몰라 갑자기 멍해졌다.
'뭐하려는 수작이지? 꼭 개구리 한 마리가 쭈그리고 앉은 것 같구나.'
이때였다. 구양봉은 두 손을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황약사는 소스라쳐 놀랐다. 갑자기 땅속으로부터 꽈르릉 하는 요란한 소리가 나더니 화톳불이 더욱 세차게 타올랐던 것이다.
황약사가 급히 물었다.
"노독물, 정말 놀랍군! 그건 도대체 무슨 재준가!"
구양봉은 득의 양양한 기색으로 대꾸했다.
"당신은 견식이 뛰어난 사람인데 아직도 나의 이 합마신공은 모르고 있는 모양이로군."
황약사가 입을 열었다.
"중원 사람들한테서 들은 적이 있는데, 북강의 구사독옹(丸邪毒翁) 문하에서 나온 법수 아니오? 20년 전 무림계에 한 기인이 있었는데 모두들 그를 노독물 신독행이라고 불렀소. 이 사람이 합마신공에 능하다고 하던데 난 말만 들었을 뿐이지 그 사람을 보지는 못했소. 당신이 그 사람의 계승자이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구려."
구양봉은 황약사가 처음의 오만하던 태도를 버리고 정중하게 나오자 기분이 우쭐해졌다. 그는 자기도 황약사와 같은 강호의 으뜸가는 고수가 되었음이 입증되자 몇 년 동안 고생해 온 보람을 새삼 느꼈다. 그는 의기양양해서 큰소리로 외쳤다.
"황 괴물, 쓸데없는 소릴랑 걷어치우고 두 사람 중 누구의 무예가 높은가 겨루어 보자구!"
구양봉은 두 손을 아래로 향하게 하고 두꺼비 울음 소리를 세 차례 내더니 두 손을 앞으로 내밀며 황약사를 향해 덮쳐 들었다.
황약사도 양손을 벌려 들고 구양봉을 향해 거센 장풍을 날려 보냈다. 황약사의 한쪽 손가락은 구양봉의 왼손에 있는 노궁혈(勞宮穴)을 겨냥하고 있었고 다른 한쪽 손가락은 구양봉의 오른손에 있는 신문(神門)을 겨냥하고 있었다. 그러자 구양봉은 합마공을 끌어낼래야 끌어낼 수 없게 되었다.
구양봉이 큰소리를 지르며 겨냥해 오는 두 손가락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황약사의 손동작은 더욱 빨라 손목을 약간 돌리기만 하면 그 두 손가락은 여전히 두 개의 혈을 겨냥하게 되었다. 두 사람의 동작에 따라 화톳불의 불꽃이 이리저리 휩쓸리며 춤을 추었다. 구양봉은 하는 수 없어 두 손을 앞으로 확 내밀었다. 그러자 불꽃은 두 방향에서 오는 힘을 동시에 받아 어느 쪽으로도 움직이지 못하더니 '팍!'하는 소리와 함께 대번에 꺼지고 말았다.
황약사와 구양봉은 서로 마주보며 껄껄 웃었다.
구양봉이 말했다.
"황 괴물, 과연 훌륭한 재주로군. 화산에서 다시 만나기로 합시다."
구양봉은 말을 마침과 동시에 훌쩍 몸을 솟구쳐 순식간에 가뭇없이 사라져 버렸다.
황약사는 진현풍과 매초풍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꺼진 화톳불에 눈길을 던졌다. 잠시 후 그는 가볍게 탄식하며 입을 열었다.
"세상에 이런 인물이 있을 줄은 생각지 못했구나."
그는 무림의 인물로는 중원의 왕중양과 단지흥, 소씨 거렁뱅이, 홍칠이 있을 뿐 다른 사람은 더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보니 서역 백타산의 산군인 구양봉이라는 자도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황약사는 진현풍과 매초풍을 보며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들은 자기 죄를 아느냐?"
진현풍과 매초풍은 구양봉이 가 버리자 시름을 놓다가 뜻하지 않은 사부의 질문에 몹시 당황하여 겁에 질린 낯빛으로 넙죽 엎드렸다.
황약사가 물었다.
"진현풍, 난 줄곧 남을 엄하게 대하는 데 습관된 사람이다. 넌 기왕 나의 문하에 들어온 만큼 나의 뜻에 따라야 할 것이다. 네 생각엔 이 일을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느냐?"
진현풍은 며칠 동안 황약사를 따라다니며 어느 정도 그의 성미를 알게 된 터라 황약사가 자기를 죽이려 든다면 아무리 사정해도 소용없음을 깨닫고 머리를 들며 말했다.
"사부님, 이 제자를 죽일 생각이면 죽이십시오. 저는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널 죽이겠느냐? 난 오늘 이 일을 장부에 적어 두고 널 가르치겠다. 네가 다시는 버릇없이 굴지 못하도록 말이다. 일후 강호에 나가서 남의 업신여김을 당한다면 그땐 반드시 널 죽여 버릴 테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땅에 박혀 있던 검을 뽑아 내더니 앞으로 내던졌다. 장검은 '씽' 하고 날아가 세 그루의 나뭇가지를 한 줄에 째어 놓았다.
진현풍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사부님께서 벌을 주신다면 제자가 무예를 잘 닦고 재주를 잘 키워 절대로 도화도의 수치가 되는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인 줄로 알겠사옵니다."
황약사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는 매초풍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너의 애비가 이 세상에 좋은 사람이 없다고 가르친 말은 아주 옳은 말이니 잘 기억해 두거라."
"아버님의 말씀은 옳지 않아요."
매초풍의 대답에 황약사가 놀라서 물었다.
"옳지 않다고? 그건 왜지?"
매초풍은 황약사를 똑바로 마주보며 말했다.
"저의 아버지 말씀대로라면 세상엔 좋은 사람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지만 사부님은 좋은 사람인걸요?"
황약사가 엄하게 꾸짖었다.
"매초풍, 내 미리 알려 준다만 네가 아무리 듣기 좋은 말로 나한테 잘 보이려 해도 내가 널 죽일 맘이면 언제든지 죽일 수 있다는 걸 명심하거라."
매초풍은 황약사의 성미가 변덕스럽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대답했다.
"사부님, 언제든 절 죽이고 싶거든 죽이세요. 하지만 사부님이 좋은 사람이라는 점만은 틀림이 없어요."
황약사는 한참이나 매초풍을 쳐다보다가 속으로 탄식했다.
'저 계집앤 어쩌면 이다지도 아형을 닮았을까? 저 고집스러운 성미도 꼭 같구나. 하지만 저 앤 아형이 아니야. 아형은 사실 저 애처럼 굳세지는 못했었어. '
황약사가 알고 있는 아형은 영리하고 깜찍한 여인이었지 이 매초풍처럼 어린 나이에 생사를 대수로워하지 않고 결단성 있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매초풍은 황약사가 오래도록 자기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바람에 얼굴이 붉어져서 고개를 숙인 채 다시는 황약사를 바라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날이 이미 밝았는지 라 그들 세 사람은 길을 떠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저만큼 앞에 사람 하나가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 사람은 왼손에는 큰 독을 들고 오른손에는 총채를 들고 있었는데 가벼운 걸음걸이로 나는 듯이 걷고 있었다.
그것을 본 황약사가 깜짝 놀라면서 제자들에게 말했다.
"저걸 좀 보아라. 저 사람이 손에 저렇게 큰 독을 들고서도 조금도 비틀거리지 않고 나는 듯이 길을 걸으니 정말 대단하구나."
그 사람은 점점 더 빨리 걷는데 멀리서 보니 큰 독으로부터 물이 줄줄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을 본 황약사는 더욱 놀라서 생각을 더듬었다.
'저 사람처럼 손에 큰 독을 들고 나는 듯이 걷는 정도는 나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독에 물을 가득 채워 들고서 저렇게 빨리 걷는다는 것은 나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황약사는 그 사람을 따라잡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자 상대방의 걸음은 더욱더 빨라졌고 그럴수록 손에 든 구리독이 번들번들 빛을 뿌렸다. 황약사는 그 사람이 이처럼 신력(神力)을 갖고 있는 것을 보고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신선이 아닌가 두 눈이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천천히 뒤따라 오너라, 난 저 사람을 따라잡아야겠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나는 듯이 그 사람을 뒤쫓아갔다.
그 사람은 강가에 당도하자 망설이지 않고 그대로 물에 들어서서 계속 걸음을 옮겼다. 그의 걸음걸이는 평지에서 걷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이 경쾌하고 자유스러웠다.
황약사가 강변에 당도하니 그 사람은 벌써 강을 건너 대안의 수림을 향해 걷고 있었다. 강변에 다다른 황약사는 난처한 기색을 지었다. 그는 방금 구양봉과 한바탕 싸우고 난 뒤지만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았었는데 이 사람을 보자 삽시에 영웅심이 절반이나 줄어드는 듯했다.
'저 사람의 신력은 나뿐만이 아니라 왕중양, 홍칠, 소씨 거렁뱅이, 단지흥이 와도 모두 상대가 되지 못하겠구나. 한데 저 사람은 누구길래 이처럼 대단한 공력을 갖고 있단 말인가? 정말 믿기지 않는 일이구나. '




제18장 곡절 많은 사랑
구양봉은 황약사와 작별한 뒤 이 단풍나무가 울창한 나루터로 와서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그는 강을 건넌 즉시 시가지에 당도했다. 건강부는 워낙 풍요한 고장으로서 시가지는 아주 번화했다. 구양봉은 시가지에 당도하여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한 주점에 들어섰다. 그는 창가에 자리를 잡은 뒤 술과 안주를 청하여 먹고 마시기 시작했다.
이 술집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한창 술을 마지면서 한담을 하고 있었다. 구양봉은 그들이 모두 이 시가지의 사람들이고 대체로 부잣집 사람들임을 알아보았다. 그들은 하릴없이 술집에 와서 술을 마시고 한담하는 것으로서 소일하고 있었던 것이다.
구양봉은 그들을 관계치 않고 술을 마시는 데만 골몰하였다. 그는 대리로 가는 길에 길도 알아볼 겸 이곳에서 잠시 쉬는 참이었다. 그는 임만을 거쳐 흠주(欽州)까지는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널 것인가, 아니면 건강으로부터 악주(鄂州)까지 가서 또 형주(街州)를 거쳐 육로로 갈 것인가를 생각하다가 그만두었다.
옆의 술자리에서 한 사람이 떠드는 말소리가 들렸다.
"자넨 못 들었나? 그 구부( 府)에서 사건이 일어났는데 아주 큰 추문이라던데."
그러자 다른 사람이 다그쳐 물었다.
"구부라면 철 장수상표 구 선배님이……."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이 낮은 목소리로 낚아채듯 말했다.
"언성을 좀 낮추게! 그렇게 소리를 높이다간 큰일을 치르는 수 있어."
그는 남들이 들을 수 없게 귓속말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구양봉은 그들이 하는 말을 처음에는 귀담아듣지 않았는데 구 선배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면서부터 은근히 신경이 쏠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눈짓을 하며 귓속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 그 구 선배라는 사람을 몹시 두려워하는 눈치가 확연했다.
구양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구 선배라구? 만일 그 철장방의 새 방주를 두고 한 말이라면 필시 그 철 장수상표 구천인임이 틀림없을 거다. 그런데 그렇게 새파랗게 젊은 놈을 보고 선배라니?'
그러면서 구양봉은 구천인 역시 인물은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낡은 절에서 구천인이 향로에 손자국을 내어 철장방 방주의 자리를 차지하던 일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그때로부터 좨 오랜 시일이 흘렀는데 그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
이때였다. 그가 한창 생각에 잠겨 있는데 누군가가 소리쳤다.
"왔다, 왔어!"
길 복판에서 한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는데 그 사람은 손에 커다란 구리독을 들고 있었다. 구양봉이 창문을 열어젖히고 머리를 내밀어 살펴보니 그는 다름아닌 철장방 방주 구천인이었다. 그가 손에 들고 있는 구리 독에는 물이 가득 차 있었는데 걸음을 옮길 때마다 구리독에 담긴 물이 찰랑거리는 게 확연히 눈에 띄었다.
구천인은 태연한 기색으로 천천히 술집에 들어와 곧장 구양봉이 앉아 있는 이층으로 올라왔다. 구양봉은 그가 열여덟 개의 나무층계를 올라오는데도 그 걸음이 온건하고 조금도 힘들어 하지 않는 것을 보고 내심 놀랐다. 구천인은 층계를 다 올라온 후 깨끗이 치워 놓은 탁자를 골라 구리독을 그 위에 올려 놓았다. 그러자 탁자는 구리독의 무게를 견뎌 내지 못하여 뿌지직 부서지는 소리를 냈다. 구천인은 자리에 앉자 사나운 눈초리로 주위를 살폈는데 아마도 누군가를
찾고 있는 듯했다.
구양봉은 사두장을 술상 옆에 세워 놓은 채로 무심한 척 술을 따라 마셨다. 그는 구천인이 지난날에 비해 내공이 놀라울 정도로 늘었음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일반적인 강호의 고수는 물론이고 구양봉조차도 미치지 못할 듯싶었다.
한편 구천인은 구천인대로 호복(胡服)을 입고 위풍당당하게 앉아 있는 구양봉을 발견하고 그가 중원 사람이 아니라는 것과 이 술집 안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는 첫손가락에 꼽힐 인물이리라는 것은 짐작했다. 하지만 대충 스쳐 보았을 뿐으로 그가 구양봉인 것은 알아보지 못했다.
술집에 있던 손님들은 구천인의 일을 이러니저러니 이야기하고 있던 터에 그가 불쑥 나타나자 겁이 나서 숨조차 바로 쉬지 못했다. 그들은 술을 마시는 척하면서 가끔 구천인의 거동을 가만히 훔쳐보았다.
구천인이 자리에 앉은 채 소리쳤다.
"둘째야! 둘째!"
둘째라는 호칭은 술집 심부름꾼들을 하대하여 부를 때 사용하는 것으로서 점잖게 부른다면 주인이라고 부르는 게 상례다. 그런데 이 술집에는 심부름꾼이 따로 없는 터라 주인이 직접 술을 날랐는데 그는 둘째라는 호칭으로 불리고도 하는 수 없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나으리님, 뭘 드시겠습니까?"
구천인이 노한 기색으로 말했다.
"내가 들어오는 걸 보지 못했나? 맛있는 게 있으면 날라 오란 말이야. 술은 열 단지를 가져와!"
구양봉은 그 말을 듣고 속으로 흠칫 놀랐다.
'나도 두 단지밖에는 마시지 못하는데 저 놈은 열 단지나 마신단 말인가?'
주인은 곧 술을 날라 왔다. 그는 술 열 단지를 구천인의 발치에 놓고 술상에 안주를 가득 차려 놓았다. 만일 탁자 위에 놓인 구리독만 아니었다면 안주를 더 많이 차려 놓았을 것이었다.
구천인이 불쑥 젓가락을 집어 들더니 다시 화를 냈다.
"이 놈의 젓가락은 왜 이렇게 굵어?"
주인은 허리를 굽실거리면서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했다.
구천인은 손에 들었던 젓가락에 손톱을 박아 넣더니 힘을 주어 쭉 내리그었다. 그는 이렇게 젓가락을 가늘게 몇 가닥으로 갈라 놓고 나서야 머리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젓가락이란 이렇게 가늘어야 음식을 집기가 좋지."
그제야 비로소 구천인은 술을 마시고 안주를 먹기 시작했다.
한쪽에서 이를 지켜 보던 구양봉은 구천인의 술 마시는 모양이
남다른 데 대해 무척 놀랐다. 그는 안주를 집어먹고 나서는 젓가락을 술상 위에 박아 세워 놓는 것이었는데, 그 한 쌍의 참대 젓가락은 술상에 꼿꼿이 선 채 넘어지지 않았다. 그는 술단지의 뚜껑을 떼고 단지째 집어 들고는 술을 단번에 들이켰다. 꿀꺽꿀꺽 술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고래가 물을 들이켜듯 한 단지의 술을 단번에 비워 냈다.
구양봉은 그가 이처럼 술을 호걸답게 마시는 것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구양봉도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지만 이렇게 독한 술을 단지째 들고 단번에 마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때 층계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올라왔다. 열 명이 넘는 그들은 모두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한 나이 어린 공자가 유독 눈길을 끌었다. 그 공자를 바라보던 구양봉은 자기도 모르게 키드득 웃었다. 그 공자는 옷차림이 아주 멋졌는데 머리에는 공자소요건(公子消遙巾)을 쓰고 몸에는 소수(蘇辯) 두루마기를 입었으며 좌우 양쪽에는 각기 깨어진 반쪽짜리 옥반(玉盤)을 매어 드리우고 있었다. 소매에는 한쪽에 각기 열여덟 개씩 진주를 박았는데 하나 하나에 불상
이 새겨져 있었다. 발에는 꽃무늬를 수놓은 신발을 신고 있었는데, 구양봉이 웃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렇게 멋진 차림을 한 자가 생긴 것은 아주 형편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눈썹이 짝짝이였는데 한쪽 눈썹이 시커멓게 숱이 많은 데 비해 다른 한쪽은 거의 없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게다가 코는 돼지코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한심한 들창코였다. 그자는 단추구멍처럼 살짝 째진 볼품없는 눈을 깜박거리면서 구천인을 바라보았다.
그 사나이들은 구천인의 맞은편의 탁자에 둘러앉았다. 모두 자리에 앉자 그들 중의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우리 공손곡주(孔孫谷主)께서 왕림하여 방주님을 배알하여 의논할 일이 있다고 하옵니다."
구천인이 거드름을 피우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손곡주라는 자가 소리를 질러 주인을 불렀다.
"이봐, 여기에도 한 상 차리게. 철장방의 방주님 것과 똑같이 말이야."
주인은 이 사람도 소홀히 대해서는 안 될 사람인 것을 아는지라 나는 듯이 아래층으로 달려 내려갔다. 이윽고 술상이 마련되었다.
공손곡주가 술잔을 들자 옆에 있던 사람이 바삐 술을 따랐다. 공손곡주가 술잔을 치켜 들고 말했다.
"구 방주님, 저한테 한 가지 청이 있사온데 방주께서 허락하여 주십시오."
구천인은 그자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짓고는 발치에 있던 다른 술단지를 들고 뚜껑을 데서는 입에 대고 꿀꺽꿀꺽 마시기 시작했다. 그는 한 단지나 되는 술을 단숨에 비우고는 쓱 입술을 훔쳤다.
그는 공손곡주를 쏘아보며 쌀쌀한 어조로 말했다.
"이봐, 자네가 그 무슨 절정곡(絶情券)의 곡주라고 해서 나의 철장방을 업신여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 행여라도 그런 생각일랑 말어!"
구천인의 어조는 더 아상 의논할 여지가 없이 맺고 끊는 것이었다. 그는 두 눈을 부릅뜨고 사나운 기색으로 공손지 (公孫止)를 나무랐다. 그 눈길이 어찌나 무서워 보이는지 공손지는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다.
공손지는 얼굴에 웃음을 바르며 아양을 떨었다.
"구 방주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다만……."
구천인이 더는 참지 못하고 큰소리를 쳤다.
"개수작 말어! 나의 여동생은 보통 인물이 아니야. 용모가 선녀같은데다 현숙하고 총명해. 이 천하에서 얼마든지 훌륭한 배필을 고를 수 있어. 네 놈이 무슨 덕과 재간이 있다고 감히 그 앨 넘보는 게야?"
공손지가 또 만면에 웃음을 바르면서 술잔을 치켜 들었다.
"방주님, 그런 얘길랑 천천히 하고 술이나 듭시다!"
"술 마시는 일이라면 좋지. 큰 잔을 가져오너라. 내가 한 단지를 마실 때 자네가 한 잔을 마시면 주량이 괜찮은 것으로 치겠어!"
공손지는 주량이 변변치 못한지라 손에 든 술잔을 보며 망설였다. 그러자 구천인이 또 입을 열었다.
"공손곡주가 나의 체면을 봐서라도 그 정도는 응해 주겠지?"
그는 차디찬 눈길로 공손지를 쏘아보았다.
공손지가 한숨 섞인 어조로 말했다.
"제가 마시기 싫어 그러는 게 아니라, 사실 평생 술이라고는 입에 대지 않는 성미가 돼서……."
구천인이 별안간 미친 듯이 웃어대더니 손으로 술상을 내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공손지, 자네가 안 마시겠다면 나도 강요하지는 않겠어. 단, 내 여동생 얘기만은 삼가해 주게."
공손지가 구천인을 쳐다보며 한참 생각을 더듬다가 소리쳤다.
"좋소이다. 술잔을 가져오너라!"
술집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찍소리도 못하고 그들 두 사람이 술 다시는 것을 구경했다. 공손지는 술에 약한지라 냄새만 맡고도 벌써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는 술 한 모금을 입에 넣기는 했으나 한참이 지나도록 그것을 목구멍으로 넘기지는 못하였다.
구천인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발치에 놓인 술단지를 집어 들고 꿀꺽꿀꺽 마셨다. 역시 술단지는 단숨에 비워졌다. 잠깐 사이에 세 단지의 술이 그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구천인의 배는 한껏 불러 올라왔다. 그는 묵묵히 공손지의 거동을 지켜 보았다.
공손지는 코를 손으로 잡고 사발에 담긴 술을 겨우 마셨다.
구천인이 입을 열었다.
"공손지, 안주나 집어."
공손지가 억지로 웃음을 흘리며 대꾸했다.
"이 안주는 먹을 수 없소이다."
"왜 못 먹겠다는 건가? 이 안주에 독이 들어 있나?"
구천인이 공손지네 사람들을 둘러보니 그들은 공손지의 곁에 앉아 있으면서도 안주를 집어먹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워낙 이 공손지의 가문은 현종(玄宗) 때부터 절정곡 안에 은거하며 줄곧 소식만 하다 보니 비린내가 나는 음식은 입에 대지도 않아 왔던 것이다.
구천인이 '탕! '소리나게 술상을 쳤다.
"자네가 내 여동생한테 장가를 들겠다구? 천만에! 자네 같은 사람은 절간에 가서 중질이나 하면서 살아야 꼭 맞어. 그런 사람한테 시집보낼 수야 없는 일 아닌가?"
공손지는 눈이 휘둥그래져 가지고 구천인을 쳐다보았다. 만일 구천인이 구천척의 오라버니가 아니었더라면 그는 당장 덮쳐 들어 결사적으로 싸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구 방주님께서 술을 마신다면야 전 목숨을 내걸고라도 모시겠소이다."
구천인은 벌써 세 단지를 마시고도 더 마시려는 눈치였다. 아마 취할 모양이었다. 공손지는 내심으로 그를 취하게 만들면 오히려 일이 수월해질 듯싶어 일부러 술을 더 마시도록 부추겼다.
구천인이 비웃는 투로 말했다.
"술이야 얼마든지 마실 수 있지. 내가 자네 같은 줄 아나?"
한쪽에서 줄곧 지켜 보고 있던 구양봉은 구천인이 이젠 술을 더 마시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술이 세 단지나 뱃속에 들어갔으니 더 마신다면 무슨 수로 견뎌 내겠는가?
이때였다. 구천인은 갑자기 뭇사람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서 두 손을 합장하였다. 그는 마치 중이 참선이라도 하듯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는 숨결을 조절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는 한데 모았던 손을 떼어 앞으로 내밀고는 손가락을 곧게 펴 힘을 주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의 열 손가락 끝으로부터 술이 콸콸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게 아닌가. 얼마 안 되어 술집 바닥은 온통 뿜어져 나온 술로 질펀해졌다. 순간 구천인의 불룩하던 배는 홀쭉해졌고 얼굴에 떠돌
던 취기는 말끔히 사라졌다. 처음 상태로 되돌아온 구천인이 공손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공손지, 자넨 내 여동생을 어디로 데려갔나? 좋게 말할 때 순순히 내놓는 게 좋을 거야!"
공손지가 웃으며 대답했다.
"구 방주님, 여동생을 만나는 건 쉬운 일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자기 뒤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그의 뒤에 있던 장대한 체구의 사나이가 창가에 다가가서 밖에 대고 손을 저었다. 술집 앞에는 지붕을 씌운 마차 한 대가 대기하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마차에서 한 처녀를 부축하여 내리고 있었다. 처녀는 날렵한 걸음걸이로 술집에 들어섰다. 층계를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처녀는 곧 모습을 드러냈다. 기막히게 아름다운 처녀의 용모에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그러나 처녀는 무슨 까
닭에선지 근심 어린 표정으로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처녀는 두 탁자 사이에 섰다.
구천인이 반갑게 소리쳤다.
"천척아, 이리로 오너라!"
처녀도 구천인을 보더니 매우 반가운 기색이 되었다.
"오라버니……."
그녀는 설움이 왈칵 치미는 듯 눈물을 흘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여동생을 바라보는 구천인 역시 가슴이 쓰린 듯 간신히 말했다.
"천척아, 내가 이 곡준 녀석과 결판을 내겠다!"
그는 공손지를 매섭게 쏘아보면서 동생을 끌어당겼다.
공손지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사람에겐 정이란 게 제일 무서운 거지요. 제 생각엔 구 방주님이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정을 떼어 버리지는 못할 겁니다."
구천인은 얼른 여동생의 기색을 살폈다. 부끄러움 때문인지 그녀의 얼굴이 빨개졌다. 구천인은 뭔가 짚이는 게 있었다.
'듣자니 절정곡에는 정화(情花)라고 부르는 기이한 꽃이 있다고 하던데 아무래도 그 꽃에 원인이 있는 것 같군. 거 놈의 말을 들으면 천척이 정화의 독을 받은 게 틀림없어.'
그는 발끈해서 입을 열었다.
"공손지, 내 다시 한 번 경고하겠는데 자네 주제를 알라구. 그런 상판때기를 하고 내 여동생의 남편이 되겠다니 웃기지도 않는군 그래!"
공손지가 웃으며 대꾸했다.
"그러니까 나의 이 용모 때문에 저 여자와 배필이 되지 못한다는 말씀인가요? 좋소이다. 나의 외모 때문이라면 당장 보기 좋은 얼굴로 바꾸겠소이다."
그는 대뜸 탁자 위의 술잔을 집어 자기 얼굴에 끼얹었다. 그는 술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구천인을 쏘아보다가 몸을 돌려 두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그러자 피부가 한 껍질 벗겨져 나갔다. 뒤에 섰던 사람이 수건을 넘겨주자 그는 수건으로 얼굴을 말끔히 닦은 다음 몸을 돌렸다. 순간 구천인과 뭇사람들은 일제히 탄성을 질렀다. 눈 깜짝할 사이에 공손지는 완전히 딴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구양봉도 속으로 감탄했다. 그러나 한편 우스운 감도 없지 않았다. 그것은 공손지가 미남으로 변하긴 했지만 열네댓 살밖에 안 되는 너무나 어린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어린 모습의 사내가 구천척과 혼사를 치른다는 것도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사람들 가운데서 누구보다 놀란 사람은 구천척이었다. 그녀가 공손지를 처음 만났을 때도 공손지의 얼굴은 추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몸에 정화의 독을 입은 탓에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느 틈엔가 그를 연모하게 되었으며 이제는 헤어질래야 헤어질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그녀가 마음을 다잡으려 하면 할수록 정화의 독은 더욱 기승을 부리는 것이었다. 그러한 터에 공손지가 비록 용모는 말끔하고 고와졌으나 열네댓밖에는
안 돼 보이는 어린 소년이 되자 여간 당혹스러운 게 아니었다. 저렇게 어린 사람을 어찌 남편으로 섬길 수 있겠는가?
구천척은 공손지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물었다.
"공손 공자님, 금년에 연세가 어떻게 되시나요?"
공손지도 서먹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금년 국월(菊月) 열이렛날이면 열다섯 살이 되오."
구천인은 여동생과 공손지를 번갈아 바라보다가는 자기도 모르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사람들도 따라 웃었다. 공손지만이 냉담한 표정으로 사람들이 웃음을 그치기를 기다렸다. 그는 눈길 한 번 떼지 않고 뚫어져라 구천척을 쳐다보았다.
구천척이 기가 막힌 듯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이제야 겨우 열다섯 살이군요, 이제야 겨우 열다섯 살……."
술집에 있던 사람들은 웃고 또 웃었다. 열다섯 살밖에 안 된 놈이 어른 행세를 하며 장가들겠다고 청혼하는 꼴이 너무도 우스웠던 것이다.
공손지가 구천척의 표정을 지켜 보다가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낭자, 나를 등지고 돌아서서 그날 옥에 오던 정경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오."
구천척은 그의 말대로 몸을 돌려 공손지를 등지고 그날의 일을 떠올려 보았다.
그날 구천척은 한 놈의 원수를 죽이려고 절정곡까지 추격하여 갔다가 공손지를 만나게 됐었다. 공손지는 구천척을 보자 마을이 흔들리며 마치 천인이라도 만난 듯한 기분이 되었다.
'이 처녀는 어떤 사람이기에 이곳으로 왔으며 또 이곳에 와서 뭣 하려는 걸까? '
이때 구천척이 말을 걸어 왔다. 그녀는 공손지에게 낯선 사람 하나를 보지 못했는가고 물었고, 두 사람은 서로 말을 주고받다가 정이 통하게 되었다. 공손지는 용모가 기막히게 아름다운데다가 무예까지 뛰어난 그녀를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강호에서 10년 가까이 돌아다녔으나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은 여태 보지 못했어. 평생에 한 번 만나 볼까말까한 저 여인을 그냥 놓아 보낸다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짓이지. 그렇다면 저 여인을 어떻게 붙잡지?'
공손지는 외모는 볼품이 없어도 아주 죄가 많은 사람이라 구천척을 데리고 곡구(谷口)에 있는 꽃밭으로 구경을 갔다.
구천척은 정화를 발견하고는 몹시 기뻐하며 몇 송이를 꺾어 들고 냄새를 맡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꽃은 처음이에요."
그 꽃은 꽃송이가 탐스럽고 큰데다가 향기 또한 강렬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쉽게 매혹시켰다.
공손지는 속으로 슬그머니 웃음을 베어 물었다. 그리고 한껏 정중한 자세로 말했다.
"이 꽃은 천하에 드문 꽃이오. 그대의 외모 또한 그처럼 아름다운데 이 꽃잎을 몇 개 맛보는 게 어떻겠소?"
구천척은 그가 자기의 미모를 칭찬해 주자 수줄은 듯 빙그레 웃었다.
"이 꽃잎을 먹을 수 있나요?"
공손지가 웃으며 대답했다.
"이 꽃잎은 다른 사람이 먹어 봤자 쓸모가 없지요. 말하자면 나같이 못난 사람은 그것을 아무리 먹어도 무익하지요. 하지만 그대처럼 아름다운 사람이 꽃잎을 몇 개 먹으면 좋은 점이 아주 많아요."
"꽃잎을 먹으면 무슨 좋은 점이 있나요?"
"좋은 점이 아주 많지요. 향초(香草)는 미인이 반드시 갖춰야 할 조건이라고 굴원이 말한 바 있소. 미인의 아름다움은 형(形), 신(神), 색(色) 세 가지에 달려 있는 거요. 그대의 아름다운 모습과 뛰어난 자태는 형(形)이 아름답다는 것을 말해 주오. 또 그대가 그토록 얌전하고 부드러우며 밝게 웃을 줄 아는 것은 신색(神色)이 아름답다는 것을 말해 주오. 그러나 사람들은 대체로 외모가 아름다운 것에 대해서는 말하나 여인이 갖고 있는 향기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
소. 천하의 미색이란 모두 이 향기 속에 있는 것이오. 그대가 이 꽃잎을 먹게 되면 양귀비처럼 될거요."
그러자 구천척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양귀비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게 뭐예요?"
공손지가 말을 이었다.
"그대한테 솔직히 하는 말이지만 우리 가문의 선조는 바로 안사(安史)의 난을 피하여 이 절정곡에 정착하였다오. 우리 가문의 선조는 일찍 천보(天 ) 연간에 벼슬을 했었기 때문에 양귀비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소."
그는 말끝에 시 한 구절을 읊기 시작했다.
봄 추위에 맑은 물에서 목욕하니
온천물에 씻겨 살결 부드러워지네.
시구를 읊고 나서 공손지는 계속 말을 이었다.
"양귀비의 가장 아름다운 점은 자태와 정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살결에 있다오. 양귀비는 살결이 각별히 부드럽고 온통 향기로 그윽했다고 하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양귀비의 몸에서 나온 때는 연지로 사용될 정도였다고 하오. 그것이 무엇에서 연유했는지 아시오?"
"저도 그런 기이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지만 사실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아요. 무엇 때문이었는지 말씀해 주세요."
"그건 양귀비가 바로 이 정화를 먹었기 때문이오."
구천척은 공손지의 이 말을 곧이들었다. 그녀는 수중에 있는 정화가 아름답고 향기가 훌륭한 탓에 그 꽃에 독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게다가 자기의 미모를 양귀비에 비교하며 부추기는 데야 어찌 그 꽃을 먹지 않고 배길 수 있겠는가.
구천척은 꽃잎 한 개를 떼어 내어 입에 넣고 천천히 씹어 보았다. 별로 특이한 맛은 없이 처음에는 좀 달짝지근하던 것이 후에는 약간 쓴맛이 났다. 하지만 그 쓴맛도 심하지는 않아 그런대로 참아 낼 만했다.
공손지는 그녀가 꽃잎 몇 개를 다 삼킨 것을 보고 또 입을 열었다
"됐소. 한 가지 잊은 게 있는데 그대가 이 꽃을 먹은 이상 절대로 사내 생각을 해선 안 되오. 그러면 병이 나게 되오."
그 말을 들은 구천척은 당장 안색이 변했다. 멀쩡한 처녀가 어찌 남녀간의 정이며 사랑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자 문득 무림의 젊은 협객들이 떠올랐다. 그들이 그녀 주위를 싸고 돌며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법석을 떨던 일들이 하나하나 생각났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를 떠올렸다. 그 순간 그녀는 갑자기 펄쩍 뛰었다. 천만 개의 바늘이 심장을 찌르는 듯 아팠던 것이다. 그녀는 통증을 견디다 못해 공손지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이 나쁜 놈아! 도대체 이게 무슨 꿍꿍이속이냐?"
공손지가 웃으면서 대꾸했다.
"구 낭자, 난 그대를 보자마자 우리 절정곡에 좋은 일이 생기게 될 줄 알았다오. 그대는 아름다운데다가 무예까지 뛰어난 처년데 나한테 시집오지 않겠소?"
구천척은 어이가 없어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공손지, 웃기지 좀 마세요. 당신 같은 사람은 돈 몇 푼 들여서 아무 집의 계집종이건 데려다가 자식이나 보게 되면 다행인 줄 아세요. 나한테 장가들려는 건 망상이에요."
공손지는 속으로 화가 치밀었으나 드러내지 않고 서글픈 어조로 말했다.
"구 낭자, 낭자 말이 맞소. 나의 이 추한 외모 때문에 누구도 내게 시집오려고 들질 않지. 그러니 당신이 나를 불쌍히 여겨 시집와주오."
구천척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끝없이 욕설을 퍼부어 댔다.
공손지는 젊은 여인이 이처럼 심한 욕설을 퍼부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공손지는 노기를 간신히 눌러 참으며 말했다.
"당신이 나한테 시집오지 않으면 그만이지 그처럼 사납게 굴 것까지야 있소? 구 낭자, 평소에 당신과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을 생각하고 그들이 당신을 좋아하던 일을 생각하노라면 화가 누그러질 거요. 방금 내가 한 말은 없었던 일로 합시다."
그가 이렇게 나오자 구천척도 더는 화를 낼 수가 없게 되었다.
'이 사람과 혼인한다는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하지만 이 사람은 생긴 건 저래도 확실히 이 절정곡의 주인이 아닌가. 추한 사람도 아내는 얻어야 하는 거다. 저 사람이 나의 미모에 반하여 잠시 나한테 장가들 마음을 품었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야.'
그녀는 마음을 약간 진정하고 평소에 강호에서 만나던 젊은 영웅들을 떠올리며 그들이 자기한테 친근하게 굴던 일을 생각했다. 그러자 마음이 절로 흥분되면서 느닷없이 온몸이 가시로 찌르는 듯 아파 왔다. 그녀의 입에선 자기도 모르게 절로 신음이 흘러 나왔다. 그녀는 땅바닥에 드러누워 가슴을 쥐어뜯으며 몸부림을 쳤다.
이를 지켜 보던 공손지가 큰소리로 말했다.
"구 낭자, 낭잔 정말 바보요. 내가 주의를 주었는데도 왜 말을 듣지 않소? 이제 정화의 독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면 날로 더 심해지고 해독약도 없어 죽게 되오."
구천척은 견디다 못해 다시금 욕설을 퍼부어 대기 시작했다
공손지는 구천척의 몸에 있는 대혈을 눌러 놓은 다음 그녀를 품에 안고 정화가 무더기로 피어 있는 순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구천척을 땅에 내려놓고 그녀의 몸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여인이란 참으로 신기한 물건이로구나. 보면 볼수록 사람을 심취하게 만들거든."
그는 구천척의 자태를 자세히 살펴보며 계속 중얼거렸다
"옛사람들은 꽃을 여인에 비겼다만 오늘에야 여인이 꽃보다 더 아름답다는 걸 알게 되었구나."
그는 구천척의 볼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요 귀염둥이야, 하필 정화를 먹을 게 뭐냐? 절정곡에서는 절정이란 두 글자를 명심해야 하는 거야. 일단 정을 가지기만 하면 이 곡에선 편안히 보낼 수 없거든. 한번 생긴 정은 끊어 내기가 어려우니깐 말야."
그는 천천히 몸을 기울여 구천척의 입술에 자기 입술을 포개었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구천척은 눈물만 흘렸다. 그녀는 수치심을 느꼈으나 눈을 꼭 감고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공손지는 두 손으로 구천척의 젖가슴을 집요하게 주물러 댔다. 그가 손가락 끝으로 젖꼭지를 가볍게 건드릴 때마다 젖꼭지는 구천척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빳빳하게 일어섰다.
여동생에게 이런 일이 있은 줄을 구천인이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으랴? 그는 여동생이 눈에 눈물을 가득 머금고 풀이 죽은 채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화가 나서 소리쳤다.
"천척아, 너 정말 저 놈한테 시집을 가려느냐? 네가 한마디만 해라. 시집을 가겠다고 한다면 저 놈을 놔둘 게고 시집을 안 가겠다고 한다면 저 놈을 죽여 버릴 거야!"
구천척은 눈물이 그렁그렁하여 외쳤다.
"싫어요, 싫단 말이에요!"
구천인은 동생이 싫다고 말하자 벌떡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좋다, 좋아! 내 여동생이 네 놈과 같이 살지 않겠다고 했어!"
그는 부릅뜬 눈으로 공손지를 쏘아보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저 애가 널 싫어하니 넌 죽는 길밖에 없다!"
구천인이 한 발자국 내디디며 공손지의 머리에 일장을 먹이려는 찰나였다.
"오라버니, 잠깐만요!"
구천척이 놀라 소리쳤다. 그러나 구천인의 장은 이미 공손지의 머리를 후려친 뒤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느닷없이 구천척이 땅바닥에 주저앉으며 신음을 삼켰다.
구천인은 뜻밖의 상황에 놀라 동생에게로 달려갔다.
"무슨 일이냐? 뭐가 잘못되기라도 한 거냐?"
구천척이 뭔가 말하고 싶은 듯 우물거렸다.
"할말이 있으면 어서 해!"
구천인이 답답한 듯 발을 굴렀다.
구천척이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구천인의 팔을 잡았다. 그녀의 눈에는 무엇인가 애걸하는 빛이 역력했다.
"오라버니……."
"그래, 어서 말을 해라. 도대체 어쩌자는 거냐?"
"오라버니, 저 사람을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그녀는 공손지에 대한 분노와 연민이 뒤엉킨 심정으로 안타깝게 말했다.
공손지가 쓴웃음을 지으며 구천인에게 말했다.
"내가 당신을 두려워하는 것은 당신이 내가 사랑하는 구 낭자의 오라버니이기 때문이지 당신의 철장공력을 겁내서가 아니오,"
그는 말하다 말고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내 검을 가져오너라!"
그의 뒤에 서 있던 사람이 두 가지의 병장기를 넘겨주었다. 하나는 검이었는데 색깔이 까맣고 매우 가벼워 보였으며 다른 하나는 톱날로 된 금칼이었는데 그것은 아주 무거워 보였다. 공손지는 두 자루의 병장기를 손에 쥐더니 늠름한 기색으로 소리쳤다.
"구 방주, 오늘 난 당신과 승부를 내겠소!"
구천인이 가소롭다는 듯 소리내어 웃었다.
"네 놈이 나와 겨뤄 보겠다구? 오래 살다보니 별 재미있는 일이 다 생기는구나."
"구 방주, 당신의 철장공력이 아무리 뛰어나기로서니 이렇게 날 깔봐도 되는 거요?"
"네 놈이 병장기를 내드는 걸 보니 무예를 약간 알긴 아는 모양인데, 난 네 놈과 싸우는 것으로 내 이름을 더럽히고 싶지 않다. 그러니 네가 나한테 재주를 좀 보여 줘 봐라."
구천인의 말에 공손지의 뒤에 섰던 몇몇 사나이들이 욱하고 달려들어 구천인과 싸우려 했다. 공손지가 얼른 그들을 만류했다.
"구 방주가 날 존중한다니 내가 몇 가지 법수를 보이겠소. 방주께서 가르쳐 주시오."
공손지는 말을 마치더니 양손에 각각 병장기를 나눠 들고는 칼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는 연거푸 스물한 가지 동작을 해 보였는데 두 개의 칼날이 엇갈리며 나는 듯이 움직였다. 이를 지켜 보던 구천인은 잠시 멍청해졌다. 공손지가 이렇듯 훌륭한 무예를 갖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공손지가 구천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구 방주님, 당신 보기에 어떻습니까? 나의 이 '음양도란인법(陰陽倒亂刃法)'에 무슨 허점이라도 있다면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구양봉은 그것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것은 일심이용(-心二用), 쌍심격물(雙心格物)의 방법으로서 음(陰)을 양(陽)으로 변화시키고 양을 음으로 변화시켜 음양을 교차적으로 사용하는 법수였다. 사람들이란 무릇 무예동작을 쓸 때 모두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법수를 취하게 된다. 빠르게 되면 그것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이루어진다. 칼과 검을 쓸 때면 반드사 상대방에게 착각을 일으켜야 하는데, 금칼이 날아올 땐 그것이 무거우니 속도가 느릴 것이고 흑검이 날아올 땐
그것이 가벼우니 속도가 빠를 것이라는 착각을 일으켜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구양봉은 이 공손지가 내력이 부족한데다가 병장기를 쓰는 법수가 숙련되지 못하였다는 것을 읽어 냈다.
그러나 구천인은 구양봉의 생각과는 달리 공손지에 대해 찬탄을 금치 못했다.
"훌륭하군, 훌륭해. 자네가 칼과 검을 동시에 다를 줄 아니 실력이 대단한 편이야!"
공손지가 입을 열었다.
"제가 구 낭자한테 청혼하는 건 마음 깊숙이서 우러나오는 진심이오니 방주께서 소망을 이루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공손히 예를 올렸다.
구천인이 대꾸했다.
"자네의 검과 칼 쓰는 법수는 좀 자리가 잡힌 듯하나 자네의 내력은 아직 약해."
"그렇지요. 그렇고말고요."
공손지는 얼굴에 웃음을 바르며 얼른 대꾸했다. 그러나 그는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다.
'나보고 내력이 약하다구? 그럼 이 세상에 네 놈처럼 한 손으로 물이 가득 담긴 구리독을 들고 달릴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어야 한단 말이냐? 나한테 그만한 천생의 신력이 있었다면 '음양도란인법' 정도는 벌써 익히고도 남았을 거다.'
구천인이 또 입을 열었다.
"이걸 좀 보게나."
그는 품속에서 네모 반듯한 옥석 하나를 꺼내 들었다. 구천인은 그것을 탁자 위에 올려 놓고 말을 이었다.
"사람이 내력이 없다면 아무런 쓸모가 없는 거네. 마치 비단옷을 입고 밤에 나선다거나 대낮에 도적질을 하는 것처럼 아무 효과도 못 보고 일만 망쳐 먹게 되는 거야. 내공을 잘 닦는 것이 무예 연마의 기본이라는 걸 자넨 알아야 해."
구천인이 탁자 위에 놓은 옥석을 오른손으로 힘껏 내리치자 '팍! '하는 소리와 함께 세 조각이 났다.
"보게. 바로 이래야 한단 말일세."
술집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 탄성을 질렀다.
공손지도 그가 일장에 옥석을 바스러뜨리는 것을 보자 두려운 마음이 되었다.
'저 놈이 저 장법으로 나를 죽일 생각이었다면 벌써 죽였을 거야. 그런데 날 내버려두는 것을 보면 자기의 여동생과 같이 살게 할 생각이 있는 거다.'
이렇게 생각한 그는 구천척에게 읍하면서 말했다.
"구 낭자, 그대가 실수로 정화의 독을 입었으나 불행히도 내겐 해독제가 다 떨어지고 없소. 그러니 구 낭자는 나를 따라 절정곡에 갈 수밖에 없겠구려. 시간을 끌다가는 멀지 않아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거요."
구천인이 잠시 생각하는 눈치더니 동생에게 말했다.
"천척아, 넌 다시 저 사람을 따라가거라. 며칠 후에 내가 절정곡에 널 보러 가겠다. 이 친구가 우리 구씨 가문의 사람을 함부로 하진 못할 거다."
말을 마친 그는 한바탕 요란하게 웃어대더니 왼손에 구리독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부서진 옥석들을 끌어 모아 쥐고는 층계를 내려갔다.
구양봉은 속으로 생각을 굴렸다.
'내가 화산에 가 무예시합을 하게 된다면 가장 강한 적수는 아마도 이 철 장수상표 구천인일 것이다. 이 놈을 뒤따라가서 틈을 봐 싸워야겠다. '
구양봉은 얼른 몸을 일으켜 구천인의 뒤를 쫓았다.
그런데 구천인의 걸음걸이가 어찌나 빠른지 눈 깜짝할 사이에 시가지를 벗어나 강변에 당도하였다. 구천인은 나룻배를 불러 타고 대안으로 저어갔다. 구양봉은 구천인을 놓치지 않으려고 서둘러 다른 배 한 척을 찾아냈으나 그가 배를 타고 대안에 당도했을 때는 이미 구천인은 그림자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그가 화가 나 어쩔 줄 몰라 하는데 길가에 옥석 한 개가 떨어져 있는 게 눈에 띄었다.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고 난 구양봉은 아주 기뻤다. 그것은 바로 구천인이 술집에서 박살낸 그 옥석의 부스러기였던 것이다.
구양봉은 옥석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방금 땅 위에 놓여 있을 때는 온전하던 것이 손으로 잡는 순간 그대로 부서졌다. 멍하니 옥석을 바라보던 구양봉은 자기도 모르게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 옥석은 겉보기엔 밀정해도 이미 부서져 있는 것이었다. 구천인은 근본적으로 뛰어난 공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사기꾼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때였다. 구천인의 모습이 다시 눈에 띄었다. 그는 강물 위를 나는 듯이 걸어가고 있었는데 강폭이 수십 미터는 될 것 같았다. 구천인이 사기꾼이라면 어떻게 저렇게 뛰어난 경공을 갖고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구양봉은 즉시 몸을 일으켜 강변으로 달려갔다.
강물을 자세히 살펴보고 난 그는 또다시 너털웃음을 웃었다. 먼 곳에서는 똑똑히 볼 수 없었지만 가까이서 보니 두 미터씩 사이를 두고 나무등걸 한 개씩이 박혀 있는 게 눈에 피었던 것이다. 수면에 약간 잠겨 있을까말까 한 이 암교(暗橋)는 먼 곳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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