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 - 동사 황약사 5

3학년2반 | 2022.02.20 07:08:30 댓글: 0 조회: 354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9977

제25장 은혜를 원수로 갚다
매초풍이 몸져 눕자 황약사는 육승풍의 처를 시켜 병구완을 하게 하고 자기도 아형과 함께 병문안을 했다. 스승이 와도 매초풍은 말 한마디 없이 창 밖만 보고 있었다.
아형은 매초풍의 그런 모습을 보고 웃으면서 황약사에게 눈을 찡긋해 보였다. 매초풍을 살살 달래 주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황약사는 불쾌한 표정으로 방에서 휙 나가 버렸다.
아형은 혼자 매초풍의 침대맡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호심장에서 '아형'이라는 공예품을 만들어 하녀에게 내다 팔게 하던 일과 치음, 미화, 병묘 세 공자들이 자기를 따르던 일, 그리고 태호방 방주인 필소해와 총타주 학 영감이 자기에게 폭행을 가하던 일 등등 지금까지 겪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아형은 매초풍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처녀 하나에 사내 백이 따른다는 말이 있지. 너처럼 예쁜 처녀한테는 나보다 더 많은 사내들이 따를 텐데, 도화도엔 사내가 너무 적구나. 명년쯤 내가 사부님께 여쭈어서 중원에 보내 주마. 바람 쐬면서 중원 구경도 하고, 그러면서 사람을 찾아보는 거야. 어때, 너도 좋지?"
그래도 매초풍은 대답이 없었다.
아형은 한숨을 쉬며 일어섰다.
"마음 굳게 먹고 몸조리 잘해라. 내일 또 오마."
아형이 집으로 돌아오자 먼저 와 있던 황약사가 일어서며 말했다.
"당신이 수고가 많군. 그런 일에까지 나서지 않아도 되는데……."
"사부님 때문에 제자가 병이 났는데 부인이란 사람이 모른 척할 수 있어요? 마음을 달래 줘야지."
그리고는 한숨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자존심이 강한 아이라서 잘못하면 당신한테 평생 원한을 품을지도 몰라요."
"원망하려면 자기 자신을 원망해야지, 왜 나를 원망하겠소?"
황약사는 힘들어 보이는 아형을 부축해 자리에 앉혔다.
"자꾸 나다니지 마오. 그러다가 우리 아기가 다치겠소."
그가 아형의 아랫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자 아형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딸을 낳아도 당신같이 꾀 많은 장난꾸러기를 낳을 것 같아요."
황약사는 허허 웃으며 아내를 포근하게 안아 주었다.
밤이 되었다.
매초풍의 방으로 살금살금 다가간 진현풍은 손가락에 침을 발라 창호지에 구멍을 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육승풍의 처가 매초풍과 앉아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잠시 후에 육승풍의 처가 일어섰다.
"아이가 걱정돼서 난 이만 가야겠어."
육승풍과 곡영풍은 황약사의 허락을 얻어 가솔을 이끌고 도화도에 옮겨 와 살고 있었는데, 육승풍에게는 관영(冠英)이라는 어린애가 있었다.
"그럼 그만 가 보세요. 아이가 울면 어떡해요."
육승풍의 처는 급한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진현풍은 살그머니 방문을 열고 매초풍의 방으로 들어섰다. 매초풍은 벽을 보고 누워 있었다. 진현풍이 다가오는 발소리를 못 들었는지 그녀는 깊은 잠이 든 사람처럼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진현풍은 그녀를 부르려다 말고 한동안 그녀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얇은 속옷 차림으로 머리를 흐트러뜨린 채 이불을 덮고 누워 있는 매초풍은 몹시 육감적이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진현풍의 가슴이 쿵쿵 뛰면서 숨이 가빠졌다.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지만 목 안이 타는 듯 말라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던 그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사매, 몸은 괜찮아?"
매초풍은 대답이 없었다. 진현풍은 한참을 기다리다가 할 수 없이 몸을 돌려 나가려 했다.
"사형, 잠깐만!"
갑작스런 소리에 깜짝 놀라서 그는 그 자리에 우뚝 섰다. 뒤를 돌아보니 매초풍이 침대에 앉아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진현풍은 멀쩡히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 너무나 반가워서 입가에 활짝 웃음을 띄우며 다가갔다.
"사매, 깨어났군. 난 자는 줄 알고 그냥 가려고 했지."
매초풍은 갑자기 눈물을 뚝뚝 떨구며 말했다.
"사형, 전에 사형이 한 말은 모두 거짓말이었나요?"
진현풍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가 금세 얼굴색이 어두워졌다. 그것은 예전에 진현풍이 매초풍에게 그녀를 업신여기는 놈은 죽여 버리겠다고 호언한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바로 사부님이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다신 날 찾아오지 말아요. 사부님한테 잘 보여서 도화도에서 제일 큰 제자가 되세요."
진현풍은 이러지도저러지도 못하고 묵묵히 눈물만 흘렸다. 매초풍은 사부님을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고 있지만, 그가 그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사부님을 죽일 순 없었다. 그들 두 사람의 목숨을 구해 주고 제자로 거두어 준, 평생의 은인인 사부님을 죽인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물론 무공으로 보아도 사부님을 죽일 수 없지만, 설령 자신의 무공이 사부님보다 강하다 할지라도 그럴 순 없었다.
진현풍은 눈물을 그치고 말했다.
"사매, 밤이 깊었으니 난 이만 돌아가겠어.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 무술을 익혀야 하거든."
그 말에 매초풍은 코웃음을 쳤다.
"흥! 한평생 해 봐요. 사부님 발뒤꿈치나 따라가나."
진현풍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매초풍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사부인 황약사는 무학백가(武學百家)를 모조리 섭렵했으며 장법검식(掌法劍式)까지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수시로 독창적인 절기들을 창안해 내고 있으니 평생을 바쳐 그를 따라가도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맞아, 누구도 사부님의 무공을 따를 순 없을 거야. 사매도 말했잖아, 남제, 북개, 서독도 우리 사부님보다는 못하다고."
진현풍이 힘없이 대답하자 매초풍은 침대에서 뛰어내리며 소리쳤다.
"못 따라가긴 왜 못 따라가요? 사부님도 결국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인데 우리라고 왜 못하겠어요?"
그러더니 매초풍은 진현풍에게 다가와 그 희고 매끄러운 손으로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눈썹이 좀 처져서 그렇지, 이만하면 당신도 꽤 잘생긴 얼굴이에요."
진현풍은 매초풍에게서 풍기는 여인의 향기에 취해 꼼짝도 못하고 멍청하게 서 있었다.
매초풍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자, 진현풍은 그녀를 밀어 버린다는 것이 그만 그녀의 젖가슴을 만지고 말았다.
그는 당황해서 얼굴이 붉어진 채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아니, 난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그러나 매초풍은 그에게 좀더 몸을 밀착시키며 요염한 미소를 지었다.
"일부러 그러면 어때요?"
그러더니 희고 긴 팔로 진현풍의 목을 끌어안았다. 매초풍은 진현풍을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녀의 입김에 혼이 나간 진현풍은 화들짝 놀라 겁먹은 소리로 외쳤다.
"사매, 이 손 놔!"
도화도 무공에 적지 않은 부분이 동자공(童子功)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황약사는 매초풍과 진현풍, 풍묵풍 세 제자들의 이성 교접을 엄금했다. 황약사는 진현풍과 매초풍에게 둘이 만약 남녀간의 정을 통한다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고 엄하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매초풍은 사부님의 엄명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진현풍의 만류에도 아랑곳없이 매초풍은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사형, 정말 날 좋아해요?"
매초풍이 방긋 웃으며 물었다. 그리고는 진현풍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그의 볼이며 머리칼에 입을 맞추더니 진현풍의 품에 머리를 기대었다.
난생 처음 여자에게 이런 입맞춤을 받아 본 진현풍은 가슴이 활랑거리고 다리가 떨려서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사매, 이러지 마……."
그러나 매초풍은 요염하게 웃으며 옷을 벗기 시작했다.
"사형, 내 말을 안 들으면 소리칠 거예요."
"안 돼, 이러면 안 돼."
"왜, 사부님이 무서워요?"
그 말을 하며 매초풍은 깔깔 웃었다.
진현풍은 머리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사부님이 두려웠다.
매초풍은 침대에 걸터앉더니 속옷까지 모두 벗었다. 그녀는 희디흰 알몸을 보이며 모로 누워 진현풍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나직하게 속삭였다.
"이리 와요."
그녀의 알몸을 쳐다볼 수 없어 눈을 질끈 감고 있던 진현풍은 그녀의 목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눈을 떴다. 매초풍의 긴 머리칼이 침대에 드리워졌고, 그녀의 봉긋한 젖가슴이 탐스러운 꽃송이처럼 그를 유혹하고 있었다. 진현풍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그녀에게 다가가 그 젖가슴을 살며시 만져 보았다.
그러자 매초풍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그의 손을 잡았다.
"왜 그러고 있어요? 좀 대담해지란 말예요."
결국 두 사람은 운우지정을 나누었다. 대개 남녀간의 정사란 잠깐의 쾌락을 맛보는 것으로 끝나게 마련인데, 더구나 두 사람이 각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때는 후회와 원망이 남는 법이다. 진현풍과 매초풍의 경우도 그랬다.
진현풍은 매초풍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매초풍이 진지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형, 내 부탁 하나 들어 줄래요?"
매초풍의 말에 진현풍은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는 매초풍의 얼굴을 두 손으로 어루만지며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사형, 우리 여기서 달아나요. 달아나서 같이 살아요."
매초풍의 말에 진현풍은 여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매초풍은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가 아무리 멀리 달아나도 언젠가는 사부님 손에 죽을 거예요……. 하지만 난 이제 당신의 여자가 되었으니 죽을 때까지 함께 있을 거예요."
죽을 때까지 매초풍과 함께 있는다는 생각을 하니, 진현풍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다 해 봐."
매초풍은 뚫어질 듯이 진현풍의 눈을 바라보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형, 나와 함께 큰일을 해 보지 않겠어요?"
"큰일이라니?"
매초풍은 방안에 둘밖에 없는데도 진현풍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우리 둘이 《구음진경》을 훔치는 거예요."
진현풍은 어림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농담 하지 마. 설령 《구음진경》을 훔쳐낸다 해도, 며칠 안 가서 사부님께 잡혀 끔찍한 벌을 받을 거야. 죽음보다 더한……."
"무섭단 말이죠? 그러면 나 혼자 달아나겠어요. 《구음진경》을 훔쳐 갖고."
진현풍이 애가 타서 얼른 그녀를 구슬렸다.
"사매, 그러지 말고 이 섬에서 몇 년만 참고 견디자구. 그러면 천하 무적의 무공을 익힐 수 있잖아. 그리고 나서……."
그 말에 매초풍은 쓰디쓴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당신이 도화도의 대사형이란 사실을 잊고 있었군요."
매초풍은 눈물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난 달라요. 난 그 책을 훔쳐서 달아날 거라구요. 나랑 함께 가기 싫으면 당신은 그저 모르는 척하고 있어요. 우리 둘 사이는 이걸로 끝장이에요."
'끝장'이라는 말이 진현풍의 가슴에 아프게 와 박혔다.
매초풍은 천천히 옷을 주워 입기 시작했다.
매초풍이 옷을 다 입을 때까지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던 진현풍이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좋아, 같이 가자구!"
멀리서 기슭을 때리는 파도 소리가 들려 올 뿐 사위는 쥐죽은듯 고요했다. 두 사람은 황약사와 아형의 거처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황약사와 아형은 그 시간까지 앉아서 고금의 문장을 논하고 있었다.
진현풍과 매초풍은 황약사가 《구음진경》을 서재에 보관해 두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도화도는 외부 사람이 들어오기 힘들고 적의 침략에 대비해 설비도 잘해 두었으므로 사실 그것을 빼앗길 염려는 거의 없었다. 더구나 섬에는 황약사 부부와 제자들, 그리고 벙어리 노복들뿐이었기 때문에 황약사는 《구음진경》을 허술하게 보관하고 있었다. 그로서는 제자나 노복들 중 그것을 탐내는 자가 있으리라곤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매초풍과 진현풍은 창문 밑에 숨어 황약사 부부가 잠들기만을 기다렸다. 황약사의 무공을 잘 아는 그들은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숨어서 그들을 엿보았다.
황약사는 아형을 조심스럽게 눕히더니, 그녀의 이마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진현풍은 황약사 부부가 그토록 서로를 알뜰히 사랑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기도 매초풍에게 그렇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매초풍은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태도를 의아해 하며 진현풍이 물었다.
"사매, 왜 그래?"
매초풍이 그의 품에 안기며 속삭였다.
"난 안 볼래요."
드디어 방안의 불이 꺼지고, 잠시 후에 고요한 숨소리가 들렸다. 아형의 숨소리였다. 이제 두 달만 있으면 해산을 할 사람이어서인지 숨소리가 좀 틀렸다. 그러나 내공이 정예한 황약사는 잘 때도 기(氣)를 다루고 있으므로 숨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두 사람은 사부님 부부가 깊은 잠이 들 때까지 기다리다가 화랑을 지나 서재로 다가갔다. 진현풍이 서재 창문을 천천히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책상 위에 《구음진경》이 놓여 있었다. 그것을 손에 쥔 그는 잽싸게 서재를 빠져 나와 매초풍을 잡아 끌고 그녀의 집으로 나는 듯이 달려갔다.
매초풍의 집으로 돌아와 부랴부랴 펼쳐 보니, 그것은 사부님이 자랑하시던 《구음진경》이 분명했다. 두 사람은 그것을 행낭 깊숙이 간직하고는 바닷가로 나갔다. 그들은 거룻배 하나를 몰래 타고 도화도를 떠났다.
이튿날 날이 밝자 황약사가 먼저 일어나 아형을 깨웠다.
"여보, 어서 일어나요. 엄마가 늦잠을 자면 우리 용아도 늦잠꾸러기가 된다구."
황약사는 아형이 그녀처럼 총명하고 예쁜 딸을 낳기를 바랐고, 아형은 남편처럼 다정하고도 늠름한 아들을 바랐다.
아형과 함께 서재 앞을 지나던 황약사는, 서재 창문이 열려 있는 걸 보고 의아하게 여겼다. 무심코 안을 들여다보다가 그는 깜짝 놀랐다. 분명히 어젯밤에 《구음진경》을 책상 위에 두었는데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황약사는 잠시 얼빠진 표정으로 서재를 둘러보다가 말했다.
"아형, 그 책이 없어졌소."
아형이 방긋 웃으며 대꾸했다.
"또 농담하시는군요."
"아니야. 당신도 찾아봐. 《구음진경》이 없잖소."
그제야 아형도 여기저기 살펴보다가 물었다.
"다른 데 둔 거 아니에요?"
"아니, 난 여기 올려 놓고 손대지 않았소."
황약사는 서재를 뒤집다시피 하며 책을 찾았으나 그것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구음진경》을 도둑맞은 것이다. 황약사는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지었다. 상권의 내용을 익히지 않으면 하권의 것을 연결시킬 수가 없어서 자세히 읽지도 않았는데, 이제 와서 생각하니 후회 막급이었다.
황약사는 아형을 집으로 들여보내고 나서 육승풍 둥을 시켜 섬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불러들였다.
서재에 늘어선 벙어리 노복들은 황약사가 또 혹독한 벌을 내릴까봐 얼굴이 흙빛이 된 채 벌벌 떨고 있었고, 제자들도 잔뜩 주눅이 들어 사부님의 눈치만 살폈다.
"말해 봐! 누가 내 서재에서 그 책을 가져갔느냐!"
황약사가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소리쳤지만 대답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누가 여기서 《구음진경》을 훔쳐 갔느냐? 이실직고하면 목숨은 살려 주겠다!"
《구음진경》이 없어졌다는 말에 다들 놀라서 서로의 얼굴만 쳐다 보았다.
"육승풍, 왜 말들이 없느냐? 갑자기 벙어리가 되기라도 했느냐?"
황약사는 벙어리 노복들에게 다가가 손짓으로 자기 서재에서 책을 가져갔느냐고 물었으나, 그들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잠시 후 나이 지긋한 자가 앞으로 나서더니, 손짓으로 자기들은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았으며 서재는 중요한 곳이므로 가까이 가지도 않는다고 했다.
"네가 《구음진경》을 가져갔지?"
황약사는 대력 허패의 멱살을 잡아 비틀며 목을 조였다. 황약사 생각에는 아무래도 벙어리 노복들 중 한 놈이 가져간 듯했다. 이들은 벙어리에 노복 신세였지만 한결같이 담이 큰 자들이었다. 황약사는 손바닥을 대력 허패의 정수리에 올려 놓으며 소리쳤다.
"어느 놈이 《구음진경》을 가져갔는지, 어서 이실직고하지 못할까?"
대력 허패와 나머지 노복들은 비록 말을 하지도 듣지도 못하지만, 황약사의 기색으로 보아 그가 몹시 화가 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이 황급히 손을 내저었으나 화가 솟구친 황약사의 눈에는 그것이 모두 거짓으로 보였다.
"너희들 모두 죄악이 하늘에 사무쳤던 놈들이다! 이 섬에 너희들 빼놓곤 외인이 없는데 그 책이 어디로 갔단 말이냐!"
그러면서 황약사는 손바닥을 내리쳤다. 대력 허패의 머리에서 팍! 하는 소리가 나면서 그가 두 눈을 부릅떴다. 이윽고 칠규(七窺)에서 새빨간 피가 주르르 흐르더니 금방 숨이 멎었다.
그때 들어간 줄 알았던 아형이 놀라 소리쳤다.
"여보!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말아요! 내 생각엔 이들이 훔친 것 같지 않아요!"
아형은 무천풍에게 일렀다.
"자넨 어서 가서 진현풍과 매초풍을 불러 오게. 그들이 빠졌어."
그제야 황약사는 그들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잠시 후 돌아온 무천풍이 숨가쁘게 말했다.
"사부님, 두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데도 없어요!"
황약사는 몸을 솟구치더니 단숨에 바닷가로 날아가 고함을 질렀다.
"아……! 아……!"
그는 섬 주변을 날아다니며 계속 고함쳤지만, 섬 주위에 그의 고함소리만 무섭게 메아리칠 뿐 두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황약사는 무거운 걸음으로 서재로 돌아왔다. 사람들은 서재에 묵묵히 서서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희들을 제자로 삼아 가르친 내가 미쳤지!"
황약사는 남은 사람들에게 공연히 화풀이를 해댔다. 그는 원래 성미가 괴팍한 사람이었다. 그 앞에서 무서워하면 더욱 노기충천하여 펄펄 뛰지만, 오히려 대들면 그 기세가 수그러지면서 상대방을 좋아했다. 그러나 제자들이 그 사실을 알 리 없었다. 그들은 잘못도 없이 그저 스승 앞에서 머리를 조아릴 뿐이었다.
"너희들이 오늘은 《구음진경》을 훔쳐 갔으니 내일은 도화도를 차지하려 들겠지. 그리고는 나까지 죽이려 들게야!"
육승풍이 무슨 말인가 하려고 그를 불렀다.
"사부님……."
그러나 황약사는 발을 구르며 더욱 화를 냈다.
"사부님이라니! 너희들은 귀운장의 삼 협객이 아니냐? 이제부터는 너희들이 내 사부다!"
그 말에 육승풍 둥 셋은 무릎을 털썩 꿇으며 부르짖었다.
"사부님……!"
"듣기 싫다! 난 이제 너희들의 사부가 아니다! 진작부터 내가 너희들에게 도화도의 율을 일렀다. 도화도의 사문을 반역하면 반드시 징벌할 것이라고 말이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황약사는 육승풍, 곡영풍, 무천풍, 풍묵풍 네 사람의 혈도를 눌러 놓았다. 그리고는 아형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형, 당신은 여기서 나가요."
아형은 가슴을 태우며 간절히 말했다.
"제 말 좀 들으세요. 내가 다시 그것을 묵사하면 되잖아요."
그러나 황약사로서는 아형이 그 책을 다시 묵사한다 해서 수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키운 제자에게 무공의 비급을 도둑맞다니, 이런 절통하고 한심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목숨을 구해 주고 제자로 받아들여 먹여 주고 가르친 은혜에 보답을 하기는커녕 원수로 그 빚을 감다니……. 그는 인간이란 존재를 믿을 수가 없었다.
나머지 제자들이 다칠까 봐 걱정스러운 아형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제가 다시 묵사할 테니 이제 들어가세요, 네?"
그러나 황약사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입 좀 다물고 있지 못하겠소?"
벙어리 노복 둘이 아형을 데리고 안채로 들어갔다. 아형은 마지못해 들어가기는 했으나 근심스러운 얼굴로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제자 네 명은 스승에게 혈도를 눌려 말을 하지 못했으므로 표정으로 심중을 표현하고 있었다. 화내는 자, 애걸하는 자, 억울하다는 자……. 그러나 황약사는 그 모든 것을 묵살하고 소리쳤다.
"네 놈들 발에 있는 힘줄을 끊어 버릴 테다. 도화도를 떠나 다시는 날 볼 생각을 말아라!"
황약사는 육승풍의 두 발뒤꿈치의 힘줄을 단번에 끊어 버리더니, 곡영풍과 무천풍에게도 그렇게 했다. 눈물을 뚝뚝 떨구는 어린 풍묵풍은 한쪽 다리의 힘줄만을 끊어 놓았다.
"어서 떠나거라! 내 마음이 변해서 모두 죽여 버리기 전에 서둘러라!"
스승의 손에 다리를 다친 그들은 식구들을 데리고 황급히 도화도를 떠났다.
황약사는 그들이 탄 배가 멀리 사라지자 무거운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와 보니, 아형이 책상 앞에 앉아 《구음진경》을 묵사하고 있었다.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한참 만에야 몇 글자씩 쓰는 것으로 보아 기억을 더듬기가 무척 어려운 모양이었다.
황약사는 슬그머니 밖으로 나와 생각했다.
'지금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중원에 가서 두 연놈을 처치하고 싶지만, 벙어리 노복들만 있는 이곳에 만삭의 아내를 남겨 놓고 갈 수가 없다. 그렇다고 데려갈 수도 없고……. 할수없지. 아내가 해산하고 몸조리가 끝나면 그때 같이 가기로 하자.'
매초풍과 진현풍은 이틀 후에 밀주(密州)에 도착했다. 그들은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 본 후에야 여기서 제남부(濟南府)가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왼쪽으로 가면 제남으로 갈 수 있고, 오른쪽으로 가면 익주(益州)에 갈 수 있었다.
진현풍이 매초풍에게 말했다.
"내 생각엔 적어도 서너 달은 아무 일이 없을 것 같아. 사부님은 분명히 사모님이 해산하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우리를 잡으러 올 거야. 그러니 지금 최대한 멀리 달아나야 해. 서하(西夏)까지 말이야. 거기 가면 사부님이 우릴 찾기도 어렵게 되지."
두 사람은 서하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서하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고생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드디어 천신만고 끝에 두 사람은 서하의 하주(夏州)에 도착했다.
지칠 대로 지친 매초풍이 말했다.
"어디 들어가서 배를 좀 채우고 가요.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 마음을 좀 놓아도 되겠죠."
두 사람은 주점에 들어가 깨끗한 자리 하나를 차지하고 술과 음식을 청했다. 한창 맛있게 먹고 있는데 누군가 주루로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무거운 발걸음 소리와 함께 층계를 짚는 지팡이 소리가 들려 오더니, 한참 만에야 그 소리의 임자가 나타났다. 진현풍과 매초풍은 그를 보자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1차 화산 무예 시합에 모인 무림의 고수들은 북개 구지신공 홍칠공, 남제 단지흥, 동사 황약사, 서독 구양봉, 중신통 왕중양, 이렇게 다섯 명이었다. 그런데 화산의 무예 시합 후 왕중양은 죽었고 구양봉의 합마공도 흩어지고 말았다 하니, 무림엔 세 명의 고수가 남은 셈이었다. 황약사는 화산의 무예 시합에 갈 때 제자들을 데리고 가지 않았지만, 돌아와서 서독, 남제, 북개, 중신통에 대해서 자세히 얘기해 주었으므로 도화도 사람들은 이 넷을 직접 보기나 한 것처
럼 환히 알고 있었다.
지금 나타난 자는 풀어헤친 머리에 호복을 입었고 발에는 끝이 뾰족한 가죽 장화를 신었으며 손에는 큰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지팡이 위쪽에 악마의 머리 두 개가 새겨져 있는데, 귀에는 금 귀걸이를 달았고, 뻥 뚫린 콧구멍 밑에 피 묻은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었으며, 퉁방울 같은 커다란 눈은 흉악하게 부릅뜨고 있었다. 그런데 이보다 더욱 소름 끼치는 것은 지팡이에 새겨진 악마의 눈과 입, 그리고 귀에서 작은 뱀 두 마리가 정신없이 왔다갔다하는 광경이었다. 그
뱀들은 지팡이에 새겨진 악마의 눈에서 기어 나와 귀로 쏙 들어갔다가 다시 입으로 나와 새빨간 혀를 날름거렸다.
그는 다름아닌 노독물 구양봉이었다.
구양봉이 주루에 올라와 보니 주루 안에는 네 사람뿐이었다. 한 탁자에는 시골의 부호처럼 보이는 사람 둘이 마주앉아 권커니자커니 하며 재미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고, 다른 탁자에는 부부인 듯싶은 젊은 남녀가 앉아 조용히 음식을 먹고 있었다.
구양봉은 커다란 소리로 심부름꾼을 불렀다.
"게 누구 없느냐?"
문가에 서 있던 심부름꾼 셋은 서로 네가 가 보라고 실랑이를 벌였다. 구양봉의 차림으로 보아 괜한 봉변을 당할까 봐 겁이 난 것이다.
그러자 구양봉이 다시 소리쳤다.
"이 놈들! 내가 셋을 세기 전에 오지 않으면 네 놈들 목숨은 없는 줄 알아라!"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세 명 모두 구양봉 앞에 와서 머리를 조아렸다.
"나으리, 무슨 분부십니까? 말씀만 하십시오."
구양봉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안주 네 개를 가져오너라. 남제, 북개, 동사, 중신통, 그리고 좋은 술로 두 항아리만 가져오너라."
그 말에 심부름꾼 셋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만 쳐다 보았다. 이곳은 하주에서 가장 큰 주루였으므로 남방 요리든 북방 요리든 못하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남제니 북개니 하는 요리는 금시초문이었다.
"나으리께서 분부하시는 요리가 도대체 어떤 것인지 좀 자세히 알려 주십쇼. 그래야 주방에다 시키는데요."
심부름꾼 하나가 조심스럽게 말하자 구양봉이 다시 소리쳤다.
"네 이 놈!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당달봉사냐?"
"아닙니다. 글자는 꽤 압니다."
"그러면 이걸 봐라!"
구양봉은 젓가락으로 탁자 위에 글씨를 쓰며 말했다.
"이 글자 알지? 남제! 북개! 그리고 이건 동사, 이건 중신통!"
그것을 본 심부름꾼은 낄낄거리며 대답했다.
"예, 예. 알았습니다. 소인이 즉시 대령하겠습니다."
매초풍과 진현풍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그런 요리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들은 목을 빼고 구양봉의 탁자를 보았다. 탁자 위에는 구양봉이 강한 내력을 가지고 새긴 글자들이 보였다. '중신통'이란 글자 다음엔 돼지 염통이 그려져 있었고 나머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럼 우리 사부님은 뭘까?'
매초풍은 궁금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해서 창문을 열러 가는 척하고 살금살금 구양봉 뒤로 갔다. 창문을 열면서 슬쩍 고개를 돌려 구양봉의 탁자를 보니, '북개'라는 글자 다음엔 닭이 그려져 있고 '남제'라는 글자 뒤엔 뱀 한 마리가 그려져 있으며, '동사'라는 글자 다음엔 물고기 한 마리가 그려져 있었다.
매초풍은 자기도 모르게 깨드득 웃고 말았다. 스승 황약사가 물고기로 비유된 것이 너무나 우스웠던 것이다. 매초풍이 구양봉 뒤에 서서 웃는 걸 보고 진현풍은 얼른 그녀를 불렀다.
"사매, 얼른 이리 와!"
매초풍이 돌아와 자리에 앉자 진현풍이 목소리를 잔뜩 낮춰 꾸짖었다.
"사매, 저 사람이 누군지나 알고 그러는 거야? 서독 구양봉이란 말이야. 재수 없으면 저자의 손에 비명 횡사한다구."
매초풍은 그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구양봉이 식탁에다 그린 것을 들려주었다. 그러자 진현풍도 빙긋 웃었다. 그러나 그들은 구양봉이 자기들 말을 다 듣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심부름꾼이 구양봉이 시킨 음식들을 가져와 탁자에 놓고 술 한사발을 따라 주었다.
구양봉은 젓가락을 들고 혼자 중얼거렸다.
"이 거렁뱅이 홍칠아! 이제부터 너를 먹겠다."
그는 젓가락으로 닭다리를 집어 쭉 찢어서는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그는 고기를 뜯으면서 혼자 떠들었다.
"다리 하나를 뜯긴 주제에 무슨 위풍이냐?"
구양봉은 계속 혼자 중얼거리면서 뱀탕 한 사발과 닭 한 마리, 물고기와 돼지 염통을 눈 깜짝할 새에 다 먹어 버렸다.
진현풍과 매초풍은 구양봉이 음식을 다 먹었으니 일어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는 닭뼈를 손가락으로 잘게 부수더니 뱀에게 먹이기 시작했다. 뱀 두 마리는 팔딱팔딱 뛰어오르며 순식간에 닭뼈를 먹어 치웠다.
구양봉은 사장을 손에 짚고는 진현풍과 매초풍을 쏘아보며 호통쳤다.
"둥신 같은 것들, 이리 오지 못하겠느냐!"
도화도에서 도망친 후 잠시도 걸음을 늦추지 못한데다, 강호의 고수들을 피하느라 마음 편할 날이 없던 두 사람은 기절 초풍하도록 놀랐다. 그러나 이 자리를 피할 순 없었다. 그들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구양봉에게 다가갔다.
그 탁자 앞에 가 선 진현풍이 입을 열었다.
"선배님은 누구신지요? 무슨 분부가 계십니까?"
"분부? 그런 소리 말고 내 사장이나 받아라!"
구양봉은 갑자기 사장으로 두 사람의 머리를 내리쳤다. 대단히 절묘한 술수였다. 얼핏 보기엔 앞가슴이나 왼쪽 어깨를 치는 것 같지만, 실은 어디를 내리치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진현풍은 얼른 매초풍을 자기 등뒤로 밀고 한 손으로 사장을 막으면서 다른 손으로 뱀 대가리를 쳐냈다.
"하! 요것 봐라."
구양봉은 놀랍다는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사장을 내려놓았다.
"너희들 도화도에서 왔구나! 황약사의 제자들이냐?"
진현풍과 매초풍은 얼른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주저하다가 더듬더듬 대답했다.
"우린 도화도 사람이 아닌데요……."
그러자 구양봉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이상하군. 네 장법은 분명히 황약사의 낙영장법이었는데?"
"소생의 사부님은 동해 현의괴객(玄衣怪客)입니다. 사부님과 도화도 도주 간에 교분이 두터워 저도 낙영장법을 좀 배우긴 했지만, 제대로 배우지 못하여 어르신의 웃음을 자아냈을 겁니다."
진현풍이 그럴듯하게 둘러댔다.
'이들은 내가 왕중양에게 합마공을 파(破)당한 후 아직까지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걸 모르는 모양이구나. 이들을 더 건드렸다간 나중에 황약사에게 곤욕을 당할 테니 오늘은 이만 하고 떠나자.'
구양봉은 이렇게 생각하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좋다! 황약사의 제자가 아니라니 나도 볼일이 없다."
구양봉은 사장을 짚으며 주루를 내려갔다.



제26장 흑풍쌍살
매초풍과 진현풍은 산속에 오막살이를 짓고 거기서 《구음진경》의 무공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무공이 빨리 진전되었지만 6개월 정도 지나자 더 이상은 나아지지 않았다.
"사매, 이 《구음진경》은 정말 굉장하지만, 상권을 읽지 않고는 더 이상 알 수가 없어. 이거 큰일인데."
도화도에 있을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진현풍에게 살뜰하게 대하는 매초풍이 근심스런 어조로 대꾸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어떻게 해서든 사부님의 무공보다 세야 하는데."
진현풍이 생각에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래도 도화도에 한 번 다녀와야겠어."
매초풍은 깜짝 놀랐다.
"당신 미쳤어요? 사부님 손에 잡히면 당신이 살아 돌아올 수 있을 줄 알아요?"
"《구음진경》상권을 사부님이 깊이 감추어 놓은 게 분명해. 상권을 보지 않고 계속 수련하다간 주화입마가 되어 자칫하면 병신이 된단 말이오. 하지만 상권을 손에 넣으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구. 그것만 얻으면 난 천하에서 가장 막강한 고수가 되는 거요. 사부님도 날 건드릴 수 없을걸."
그러자 매초풍이 쏘아붙였다.
"도화도에 가려면 당신 혼자 가요."
그 말에 진현풍은 벌컥 화를 냈다.
"마음대로 해. 나 혼자 갔다 올 테니 당신은 여기서 기다려. 죽지 않고 책을 가져오면 우리 부부는 천하 무적이 되는 거고, 실패하면 당신은 과부로 살라구."
매초풍은 눈물을 흘리면서 진현풍을 부둥켜안았다.
"그건 안 돼요. 나 혼자서는 못 산단 말이에요. 나도 같이 가요. 사부가 죽이면 내가 먼저 죽겠어요."
두 사람은 강남을 향해 길을 떠났다.
드디어 임안에 도착한 그들은 전당강의 파도를 구경하러 갔다. 많은 사람들이 집채만한 파도가 몰려왔다 몰려가는 광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매초풍과 진현풍도 사람들 틈에 끼여 있다가, 그들은 무관 복장을 하고 단도를 찬 사내 셋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들을 심상치 않게 여긴 진현풍 부부는 몰래 세 사람 뒤를 따라갔다.
세 사람이 주점에 들어가자 진현풍 부부도 그들을 따라 들어가 밥을 먹었다. 주점 주인은 그 무관들에만 관심이 쏠려 매초풍과 진현풍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나이 어린 심부름꾼 하나가 부지런히 술과 음식을 나를 뿐이었다. 진현풍과 매초풍은 주인 곁에 놓여 있는 쌍지팡이를 보고서야 그가 불구자임을 알았다.
술이 취하자 세 무관 중 하나가 떠들기 시작했다.
"아우, 여기가 어디지?"
"아니, 형님 취했수? 여기가 임안부 교외인 우가촌이란 것도 모르겠수?"
그러자 형님이라 불린 자가 웃으며 말했다.
"여기가 우가촌이란 걸 몰라 그러나? 나도 안다구. 이 우가촌에 다리 병신이 하나 있는데 무공이 대단하다는 말을 들었거든. 그자가 황궁에 들어가 황제의 금은 보석을 훔쳐 낸다지 않아. 그러니 죽지 못해 환장한 게 아니냐구!"
"근데 형님, 그자 솜씨가 호락호락하지 않은 모양입디다. 자칫하다간 형님이 당한다구요."
"흥! 뭐라구?"
무관은 코웃음을 치면서 단도를 뽑아 탁자에 탁 꽂았다. 칼끝이 탁자에 박히면서 칼자루가 부르르 떨렸다.
그러자 주점에서 술을 먹던 촌민들 몇이 그만 질겁하여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기 시작했다. 주점 주인은 자기를 빗대 하는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내색하지 않는 눈치였다.
진현풍은 얼른 매초풍을 끌고 주점을 나와 가까이에 있는 숲으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그 주점 주인이 대단한 무공을 지닌 사람 같아요."
매초풍의 말에 진현풍은 뜻밖이란 듯이 말했다.
"아니, 당신 그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어?"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렇게 까마득하게 모른단 말이야?"
그제야 매초풍은 무릎을 탁 쳤다.
"아니, 그럼 그 사람이 곡 사제란 말이에요?"
다리 불구인 주점 주인은 곡영풍이 분명했다.
"곡 사제가 왜 여기 있을까요?"
그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진현풍이 말했다.
"오늘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으니까 여기서 기다려 보자구."
어느새 캄캄한 밤이 되었다.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 와서 둘은 급히 몸을 숨겼다. 발소리의 주인은 주점 주인인 곡영풍이었다.
숲으로 들어온 곡영풍은 달을 올려다보고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중얼거렸다.
"사부님, 전 아직도 사부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곡영풍은 중얼거리면서 무릎을 꿇더니 품에서 자그마한 보따리를 꺼내 풀었다. 안에는 보석들이 들어 있었다.
"사모님께서 이걸 좋아하실 지 모르겠군요."
그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이렇게 말하고는, 또 족자 하나를 펼쳤다.
"사부님, 이것은 도종 황제의 <학명구천(鶴嗚九天)>입니다. 사부님께서 그의 그림을 좋아하시기에 제가 가져왔습니다."
그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한참 울다가 일어났다.
"사부님, 진현풍과 매초풍이 《구음진경》을 훔쳐 갔다고 제 발의 힘줄을 끊어 병신을 만드신 건 너무합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고함소리가 들렸다.
"네 이 놈! 꼼짝 마라!"
뒤이어 발자국 소리가 어지럽게 들리더니 세 사람이 그를 에워쌌다. 낮에 주점에 왔던 무관들이었다.
"이 절름발이야! 끝까지 항복하지 않을 작정이냐?"
양손에 지팡이를 쥔 곡영풍은 그들에게 둘러싸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네 놈이 황궁에 들어와 감히 황제의 보물을 홈쳐냈으니 그 죄가 하늘까지 뻗치는구나! 순순히 우리를 따라와 벌을 받아라!"
그들의 호통은 들은 척도 않고 곡영풍은 풀어헤쳤던 보따리를 다시 싸서 허리에 찼다.
무관 하나가 곡영풍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
"그 보따리부터 이리 던져라. 네 놈의 목숨은 어찌 되든 상관없으나 황궁의 보물이 손상되면 우리가 봉변을 당한단 말이다."
"이봐, 지난번에 내가 사정을 좀 봐 줘서 그렇지, 안 그랬으면 지금쯤 황제의 목이 붙어 있지 않을걸."
곡영풍은 빙긋빙긋 웃으며 무관들을 약올렸다.
"네 놈이 곱게 죽기 싫은 모양이구나!"
한 무관의 고함에 나머지 두 사람이 칼을 빼들고 곡영풍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곡영풍이 한 박자 빨랐다. 곡영풍이 오른손에 쥔 지팡이를 들어 한 사람의 가슴을 찌르자, 그는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에 쓰러졌다. 다른 무관들이 기합 소리를 내지르며 곡영풍을 난도질할 기세로 달려들었다. 곡영풍은 쌍지팡이를 휘둘러 두 무관의 칼을 막아냈다.
이런 와중에 한 무관의 칼끝이 곡영풍의 보따리를 찢었는지 보물이 와르르 쏟아졌다. 그것을 본 무관이 기뻐 소리를 지르는 찰나 곡영풍이 지팡이로 그의 머리를 내리쳤다. 동료가 그의 지팡이에 맞아 머리가 깨지는 것을 본 마지막 무관 한 명은 얼이 빠져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곡영풍은 철팔괘를 품에서 꺼내 힘껏 뿌렸다. 철팔괘가 뒤통수에 박혔는지 놈은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칼을 떨구더니 두 손을 허우적거리다가 앞으로 푹 고꾸라지고 말았다.
매초풍과 진현풍은 놀란 눈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때 곡영풍이 돌아서며 말했다.
"곽 형, 양 형, 이리 나오게!"
매초풍이 자신들을 부르는 것으로 착각하고 뛰어나가려 하자 진현풍이 다급히 붙잡았다. 기다리고 있자니 과연 수풀 속에서 작살을 든 두 사람이 나타났다.
곡영풍은 그들 둘에게 귓속말로 소곤거린 다음, 잠시 후에 숲을 빠져 나갔다.
그들이 사라지자 진현풍은 매초풍을 이끌고 큰길로 향했다.
두 사람은 말없이 걷기만 했다. 자기들 때문에 곡영풍이 불구가 되었다면 다른 사형들도 사부님에게 그만한 벌을 받았을 게 뻔했다. 그 생각을 하니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건강에 이르렀다.
"사매, 기억나? 사부님이 우리를 구해 주고 염방 사람들을 더러 죽이긴 했지만 아예 없애지는 못했지. 사부님을 따라 도화도로 가기 전에 나는 이 염방을 모조리 없애 버리겠다고 맹세했었어. 어때, 오늘 우리 부모님의 원수를 갚아 버릴까?"
매초풍 역시 부모님의 원수를 갚고 싶었지만 사부가 두려웠다.
"우리가 염방 사람들을 죽였다는 소문이 사부님 귀에 들어가면 어떡해요?"
"사부님은 지금 도화도에 계실 텐데 어떻게 소문을 듣겠어?"
두 사람은 부모의 원수를 갚기로 합의하고 건강부 염방총타로 향했다.
건강부 염방총타는 전보다 더욱 융성해져 있었다. 대문 앞의 돌사자는 여전히 무시무시한 눈초리로 사람들을 쏘아보고 있었고, 문 앞에 세운 깃대 위에는 '염( )' 자를 쓴 붉은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진현풍과 매초풍은 그것을 보자 옛날의 끔찍한 기억들이 머리에 떠올랐다. 이 염방 사람 손에 부모님들이 무참하게 살해되었던 것을 생각하자 가슴에서 분노가 치밀었다.
그들이 문 앞에 이르자 몽둥이를 든 거구의 사나이들이 우르르 모여들었다.
"당신들은 누군데 염방을 기웃거리는 거야?"
진현풍은 얼음같이 싸늘한 표정으로 그들을 쏘아보았다.
"너희들은 흑풍쌍살(黑風雙煞)도 모르느냐?"
진현풍의 말을 듣고 그중 가장 체구가 큰 젊은이가 물었다.
"그렇다면 두 분의 호가 흑풍쌍살이란 말인데, 이름은 무엇이오? 이름을 알아야 소생이 방주님께 여쭈어 올릴 것 아니오."
"동시(銅尸) 진현풍과 철시(鐵尸) 매초풍이 귀방의 혈채(血債)를 청산하러 왔다고 여쭈게."
"뭐? 염방을 해쳐 보겠다구?"
그가 코웃음을 치자 나머지 사나이들이 진현풍과 매초풍에게 일제히 달려들었다.
진현풍과 매초풍은 그동안 《구음진경》에 있는 기공 괴식(奇功怪式)을 연마했는데, 그중에도 '구음백골조(九陰白骨爪)'와 최심장( 心掌)'을 가장 열심히 연마했다. 《구음진경》에는 이 두 가지 무공을 익히면 손이 번개처럼 빠르고 쇠갈고리같이 억세져서 상대방의 머리를 송곳처럼 푹푹 찌를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 매초풍이 구음백골조를 수련하고 진현풍은 최심장을 수련하여 둘은 얼마간의 성과를 올리고 있었다.
다만 상권에 있는 내공 심법을 터득하지 못한 탓에 일정한 성과를 얻고 나서는 더 깊이 알 수가 없었다. 《구음진경》을 쓴 황상은 도가의 내공 심법에 정통한 사람으로서 그것을 토대로 해서 책을 써 나갔으나, 두 사람이 배운 도화도의 무공은 그것과는 전혀 달랐으므로 상권을 얻지 못하면 더 이상의 진전은 있을 수가 없었다.
열 명이 넘는 염방의 문지기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자 두 사람은 구음백골조와 최심장을 썼다.
한 녀석이 몽둥이를 휘둘러 매초풍의 정수리를 내리치려 하자, 그녀는 번개같이 그것을 피하고 다섯 손가락을 확 펼쳐 녀석의 머리를 움켜잡았다. 순식간에 그녀의 손가락이 녀석의 두개골을 송곳처럼 뚫고 들어갔고, 녀석은 무시무시한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두 눈으로 시뻘건 피가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진현풍은 다섯 손가락을 곧추세워 들고 상대방의 인후를 갈겼다. 그 손을 슬쩍 앞으로 당기니 그대로 목이 부러지고 말았다. 그러자 나머지 놈들이 놀라 소리치며 뒷걸음질쳤다. 그들은 얼핏 보기에 나약하고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이들이 싸움이 시작되자 마귀같이 변하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렸다.
매초풍은 몸을 날려 한 놈의 몽둥이를 빼앗아 들고는 가슴팍을 힘껏 내질렀다. 몽둥이에 가슴을 맞은 놈은 비명도 못 지르고 쿵 나가떨어졌다. 그의 가슴에 꽂힌 몽둥이가 향처럼 꼿꼿하게 서 있었다.
"너희들이 우리 집안을 망쳐 놓았으니, 나는 염방을 통째로 없애 버리겠다! 이 원수를 갚지 못하면 나는 진백만의 아들이 아니다!"
진현풍은 고함을 지르면서 염방의 무리에게 달려들어 손가락으로 목을 부러뜨리고 뒤통수를 후려갈기면서 닥치는 대로 죽였다. 염방의 문을 지키던 자들이 순식간에 다 죽어 넘어지고 한 사람만이 남았다. 놈은 얼이 빠진 멍한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 이 놈! 어서 방주한테 고하지 않고 뭣 하고 있느냐?"
매초풍이 호통치자 그자는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화들짝 놀라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그자는 노루처럼 껑충껑충 뛰면서 뭐라고 외쳐 댔지만, 너무 놀라서인지 도통 앞뒤가 맞지 않는 괴상한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들렸다.
그 소리에 놀란 염방 사람들이 문을 열고 나와 보니, 문지기가 눈을 부릅뜬 채 고함을 지르며 정신없이 뛰어오고 그 뒤를 따라 젊은 남녀가 들어서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
누군가 큰소리로 물었다.
문지기는 꺽꺽거리며 무슨 말을 하려 했으나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그때 뒤에 서 있던 젊은이가 몽둥이를 던지자, 그것이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 문지기의 뒤통수에 박혔다.
염방 사람들은 모두 놀라서 그자를 바라보았다.
황약사의 손에 서 나으리가 죽은 후 그만큼 총명하고 무공이 출중한 방주를 세우지 못한 염방은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근래 들어 장사는 잘되고 있었지만 강호에서 위풍을 떨치던 염방의 기세는 형편없이 위축되어 있었다.
염방 사람들이 갑자기 들이닥친 젊은 남녀를 에워쌌다. 다들 질긴 가죽으로 얼굴과 허리, 무릎을 감싸고 있었는데, 당장이라도 독염을 뿌릴 기세였다.
진현풍이 매초풍에게 속삭였다.
"사매, 저 독염을 조심해."
매초풍은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며 손을 뻗어 한 놈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팍, 하는 소리가 나며 놈의 머리가 박살났다.
"놈들이 손쓸 틈을 주지 말아요!"
매초풍이 소리쳤다.
그 말뜻을 알아차린 진현풍은 순식간에 몸을 날려 염방의 무리들을 찌르고 차면서 전광석화같이 빠른 동작으로 공격을 퍼부었다. 두 사람이 움직일 때마다 피가 튀고 뼈가 으스러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넓은 마당에 시체가 즐비했다.
매초풍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끔찍한 몰골로 죽어 나자빠진 염방의 무리들을 내려다보았다.
"우린 이제 원수를 다 갚았어요. 지하에 계신 부모님들도 속이 시원하실 거예요."
진현풍은 피로 범벅이 된 자신과 매초풍의 옷을 번갈아 보았다. 매초풍이 피곤한 듯이 다시 말했다.
"복수를 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난 걱정이에요. 사부님이 중원에 오시면 분명히 이곳부터 들르실 텐데, 우리가 이자들을 몰살시킨 걸 알아차리실 거예요. 그렇게 되면 우리가 잡히는 건 시간 문제라구요."
매초풍의 근심 어린 말에 진현풍이 대꾸했다.
"이왕지사 이렇게 된 일, 걱정만 하면 뭣하오? 시체들의 형체를 모호하게 만들어서 우리 소행인지 모르게 하는 수밖에 없지."
두 사람은 즉시 대문을 잠그고는 시체들을 하나하나 난도질하여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도 없게 해 놓았다. 그리고 나서야 염방을 떠나 도화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날그날 한가하게 지내던 노완동 주백통은 종남산의 전진교를 찾아가 마옥과 구처기나 만나 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나 같은 놈은 전진교도가 못 될 거야. 조과니 참선이니 따위는 죽어도 못하니까. 하지만 종남산은 다시 한 번 가 보고 싶어. 사형의 묘도 거기 있고 경치는 또 얼마나 좋냐 말야! 내가 보기엔 종남산이 바로 극락이야. 좋긴 한데, 거길 가면 절을 받느라고 고생스럽단 말이야. 마옥과 구처기의 절을 받아야지, 그 절을 받고 나면 다른 제자들의 절을 받아야지. 그게 끝나면 그 제자들의 제자들이 줄줄이 들어와 절을 하겠지? 아이고, 절 받다가 허리가 부러지고 말걸. 꼿
꼿이 앉아 있기도 얼마나 힘든데. 하여간 이번에 가면 절하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야지.'
그러면서 그는 또 왕중양을 원망했다.
'내가 제자가 되겠다고 그렇게 애걸해도 사제로 삼더니, 그것 봐요, 일이 얼마나 귀찮게 되었나. 제자들만 해도 감당을 못하겠는데, 제자의 제자들까지 우글우글하니…….'
이윽고 종남산에 당도한 노완동은 우선 왕중양의 묘를 찾아갔다. 묘 앞에서 그는 한참 동안 울었다. 처음에는 울음 소리를 내면 구처기와 마옥이 그 소리를 듣고 찾아올 게 뻔했으므로 울음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런데 정작 왕중양의 묘 앞에 무릎을 꿇으니 설움이 복받쳐서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천하에 보기 드문 왕중양의 인품이며 그가 당부하던 말들이 떠올라 가슴이 미어지는 것이었다. 또한 그가 서독 구양봉에게 우롱당한 일을 생각하면 분이 치밀어 견
딜 수가 없었다.
"형님, 주백통이 왔습니다. 형님은 저만 덩그러니 남겨 놓고……, 제가 불쌍하지도 않으세요? 제가 황약사에게 얼마나 조롱당했는지 아세요? 그자는 형님까지 비웃었어요……."
말할수록 더욱 비통해진 그는 엉엉 통곡을 했다. 노완동은 실없는 장난을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사형 왕중양을 각별히 좋아하고 존경하였다. 자기가 그토록 따르다 사형이 구양봉에게 우롱당했다는 생각을 하자 너무나 서럽고 분했던 것이다.
"사형, 영혼이 있으시면 어서 나와서 제게 무공을 가르쳐 주세요. 밤잠을 안 자고 배우겠습니다. 열심히 배워서 형님의 원수를 갚겠습니다."
그가 한참 통곡을 하고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왕중양의 묘에 나타난 일곱 사람은 노완동 뒤에 와 서더니 하나하나 꿇어 엎드려 왕중양의 묘에 절하며 곡을 했다.
'우리 사형의 인품이야 더 말할 게 없지. 세상을 하직한 지 그렇게 오래 되었는데도 날마다 사람들이 찾아와 절을 하니, 사나이 일생이 이만하면 헛되지 않은 게야.'
노완동은 이런 생각을 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잘 보니 그들은 바로 전진교의 일곱 제자들이었다.
'음, 잘한다, 망할 놈들. 억지 눈물을 간신히 짜내는구나. 내가 화를 낼까 봐 수작을 피우는 게야.'
노완동은 못마땅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됐네, 됐어. 그런 억지 울음은 그만 하라구. 마옥이, 자네 오늘 저녁 밥은 먹었나?"
사숙이 괴이한 소리를 하자 마옥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사숙님, 그새 별고 없으십니까? 저녁밥이야 물론 먹었지요."
노완동은 또 손불이에게 불쑥 물었다.
"손불이, 자네는 오늘 머리를 빗었나?"
손불이는 마옥의 처였다. 마옥이 도문에 들어 왕중양의 제자가 되자, 손불이도 왕중양을 찾아와 자기도 제자로 받아 달라고 야단을 피웠었다. 그녀는 일단 종남산에 들어와 마옥을 구슬려 함께 나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정작 도문에 들어 무공을 연마하고 좌선에 참여하다 보니 그만 세속에의 미련이 가신 듯 없어져서, 도리어 어느 누구보다 열심히 도를 닦게 되었다. 손불이는 이런 여인이었다.
손불이는 사숙의 갑작스런 물음에 얼굴을 붉히며 허리를 굽혔다.
"사숙님, 물론 머리를 빗었지요."
노완동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너희들은 밥도 먹지 말고 머리도 빗어선 안 돼! 걷지도 못하고 말도 안 나올 정도로 기운이 다 빠져야 될 놈들이다!"
일곱 사람은 실없는 소리를 잘 지껄이는 사숙에게 함부로 말대꾸 했다가는 큰 놀림을 받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사숙의 말에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하나하나 나서서 인사를 올렸다. 처음엔 수제자이며 전진교 장문인 마옥, 다음은 장진자(長眞子) 담처단(譚處端), 장생자(長生子) 유처현(劉處玄), 장춘자(長春子) 구처기(丘處機), 옥양자(玉暘子) 왕처일(王處一), 광녕자(廣寧子) 학대통( 大通), 청정산인(淸淨散人) 손불이(孫不二), 이런 차례로 노완동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러나 노완동은 우거지상이 되어 있었다.
"이봐라! 나와 사형은 구양봉에게 속았다!"
그 말에 전진교의 일곱 제자들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우리 사부님이 구양봉에게 속다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노완동은 황약사와 돌멩이로 내기를 하던 일과 황약사의 부인에게 그 경서를 보였던 일들을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다시 부아가 치밀어 투덜거렸다.
"사형께선 임종 직전에 노독물 구양봉의 합마공을 파했다고 생각하셨지만 그게 아니라네. 노독물 구양봉이 쥐도 새도 모르게 진짜 《구음진경》을 손에 넣고 그 대신 가짜를 넣어 놨다는 걸 모르고 계셨단 말일세. 난 울화통이 터져 죽을 지경이야."
모두들 놀라서 입을 쩍 벌리고 있는데 구처기가 입을 열었다.
"사숙님께서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며칠 전에 강남에 갔다가 염방 사람을 하나 만났지요. 그 사람 말이, 두 사람이 염방총타에 와서 염방 사람들을 몰살시켰답니다. 그 두 사람은 호를 동시, 철시라고 하며, 자칭 흑풍쌍살이라고 하는데, 구음백골조와 최심장을 써서 사람을 죽였답니다. 그들 손에 죽은 사람들은 모두 머리에 구멍이 다섯 개씩 뚫리거나 목의 인후가 끊어져 있었다는 겁니다. 본 사람들이 말하길, 앞가슴에 장풍만 한 번 후려
쳐도 오장육부가 터져 죽는다더군요. 그 말을 듣고 제가 몰래 흑풍쌍살을 찾아내어 둘이 하는 말을 엿들었지요. 헌데 그들이 바로 도화도에서 온 진현풍과 매초풍이란 자들이었습니다."
구처기의 말을 듣고 노완동은 크게 놀랐다.
"아니, 그 놈들이 어떻게 구음백골조와 최심장을 알지? 사형 말씀으로는, 《구음진경》을 없애려는 까닭이 바로 그 무공 술수가 잔혹해서 무림 세계를 어지럽힐까 봐 그런다고 하셨어. 그래서 천하에 둘도 없는 그 기서를 태워 없애려 하셨지. 그들이 정말 도화도 사람이라면 어떻게 그런 무공을 익혔을까? 이상한 일이야……."
노완동은 믿을 수가 없다는 듯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사숙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구처기가 노완동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할말이 있으면 우물쭈물하지 말고 빨랑빨랑 하게. 이 노완동은 성질이 급하니까."
"제가 보기엔 아무래도 사숙님이 황약사에게 속은 것 같습니다."
"뭐? 내가 황약사한테 속았다구?"
노완동은 펄쩍 뛰었다.
구처기는 《구음진경》을 몽땅 외워 버린 아형이 노완동을 속여 그 책을 태워 버리게 했고, 그래서 책이 도화도로 흘러간 것이라는 자기의 추측을 얘기했다. 그제야 노완동은 생각났다는 듯이 무릎을 탁 쳤다.
"어쩐지 황약사가 그 책을 가지러 서역에 가겠다면서 나한테 같이 가자는 말을 안 하길래 은근히 괘씸하다는 생각을 했었지. 그런데 그 녀석이 엉큼하게 날 속일 줄이야! 아무래도 내가 황약사를 찾아가야겠어."
그는 한동안 잠잠하게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마옥, 구처기, 너희들은 대체 어디에 갔었느냐? 너희들이 없으니 내가 그렇게 어이없이 당하지 않았느냐. 남들이 네 사숙을 이렇게 우롱하는데도 너희들은 희희낙락 잘 살았느냐?"
왕중양의 일곱 제자들은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쓴웃음을 지었다. 자기가 두 눈을 훤히 뜨고 속아 놓고서 이제 와서 누구를 원망한단 말인가?
다들 입을 다물자 노완동은 더욱 노발대발했다.
"정말이지 알 수 없는 일이야! 우리 사형 같은 영웅이 어떻게 너희 같은 바보들을 제자로 두었는지 말이다! 나 혼자라도 그 흑풍쌍살인지 뭔지 하는 것들을 찾아서 《구음진경》을 찾아와야겠어!"
"사숙님, 그럴 것 없이 우리 몇이 흑풍쌍살을 찾아가서 책을 찾아오지요."
마옥의 말이었다.
"흥, 나 같은 놈은 안 된다 이거냐? 어디 두고 봐라. 황약사의 제자들이 더 센지, 내가 더 센지 두고 보면 알 것 아니야."
노완동이 펄펄 뛰자 마옥이 그를 만류했다.
"사숙님, 고정하시고 제발 그렇게 고집 부리지 마세요. 그래 가지곤 해결이 안 됩니다."
그러나 노완동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마옥이 네가 전진교 장문이라고 나더러 지금 명령하는 거냐?"
"사숙님, 제 말 좀 들어 보세요. 사숙님은 흑풍쌍살과 싸우면 안됩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과 싸우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황약사가 와서 캐물으면 뭐라고 하실 겁니까?"
"물론 윗사람이 아랫사람과 싸우면 안 된다는 것은 잘 알지만, 너희들 힘으로 흑풍쌍살을 당해 낼 것 같으냐?"
그들은 둘러앉아서 대책을 의논했다. 그 결과, 구처기와 왕처일이 먼저 흑풍쌍살과 맞붙고, 나머지 마옥 둥 몇 사람은 숨어서 지켜 보다가 구처기 등이 흑풍쌍살을 못 당하면 일제히 뛰쳐나가기로 결정했다.
하남에 이른 구처기와 왕처일은 흑풍쌍살에 대한 소문만 무성할 뿐 아무리 해도 그들을 찾을 수가 없었다. 산자락이나 벼랑 아래 시체들이 나뒹굴고 있는데 모두 목이 잘려 나간 머리 없는 시체들이라는 둥, 산 위에 사는 귀신이 땅에 구멍을 파고 사람의 두개골을 묻어 놓는다는 둥 끔찍한 얘기들이었다. 한 구멍에 아홉 개의 두개골을 묻어 놓는데, 맨 밑에는 다섯 개, 중간에 세 개, 맨 꼭대기엔 하나를 묻는다고 했다. 그런 구멍을 세 개씩 품(品)자형으로 만들어 두개
골 스물일곱 개를 묻고, 다시 이와 같은 무덤을 세 군데 만든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듣고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전진교의 제자들은 그 수법이 강호에서 실전된 지 오래 된 구음백골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악독한 무공은 벌써 몇 대 전에 사라져서 지금은 그것은 행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이런 잔인한 무공을 연마하느라 멀쩡한 사람을 한 번에 여든한 명이나 죽인다 하니, 정말 기가 찰 일이었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이런 악마 같은 짓을 하는 사람이 바로 동해 도화도에서 온 동시와 철시라고 했다. 구처기와 왕처일은 이 두 사람을 찾아 여러 곳을 돌아다녔으나 그들의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다.
이즈음 진현풍과 매초풍은 최심장과 구음백골조를 4단쯤 연마하고 있었다. 둘은 강호에서 고수들을 만나 겨룰 때마다 매번 이기고 있었다. 둘은 황약사가 조만간 자기들을 붙잡으러 오리란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하루빨리 《구음진경》무공들을 완전히 익혀 그를 이길 정도로 실력을 쌓으려고 애썼다.
그날도 진현풍과 매초풍은 세 명을 잡아다가 무공을 수련하고 있었다.
매초풍은 구음백골조를 수련할 때면 황약사를 만나 자기 손으로 그의 두개골을 움켜쥐는 상상을 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슬픔과 쾌감이 교차되는 이상한 감정에 휩싸이는 것이었다.
잡혀 온 사람 중 하나는 노인이었다. 그는 매초풍을 보고 부들부들 떨었다. 노인은 매초풍의 예쁜 얼굴을 보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소저, 제발 날 살려 주시오. 난 나쁜 짓이라곤 안 해 본 사람이오. 이 불쌍한 늙은일 제발……."
그러나 매초풍은 싸늘하게 코웃음쳤다.
"이봐 영감, 나도 한때는 나쁜 짓하고는 담을 쌓고 살았어. 그런데 지금은 나쁜 짓을 안 하고는 못 견디는 버릇이 생겼거든. 당신이 보기에 내가 나쁜 사람이야, 좋은 사람이야?"
노인은 이러지도저러지도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매초풍이 다시 말했다.
"난 노인장의 몸을 좀 빌려 쓰자는 것뿐이야. 다른 건 필요없고 머리만 있으면 된다구."
노인은 그 말을 듣고 벌벌 떨며 대답했다.
"쓰……쓰십 ……시오."
매초풍은 진현풍을 불렀다.
"이리 와서 날 좀 도와줘요. 내 일이 끝나면 당신도 해야잖아요."
매초풍의 말이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진현풍이 머리를 끄덕이며 다가왔다.
"난 노인장의 머리만 쓸 테니까 다른 데는 저 사람한테 빌려 주라구. 저 사람은 오장육부가 필요하거든."
공포에 질린 노인은 아무 말도 못하고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했다.
매초풍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싸늘하고 매서운 눈초리로 노인을 노려보더니 승냥이 울음 소리 같은 무서운 소리를 냈다. 노인은 비명을 질렀다.
매초풍은 노인이 다시 소리를 지를 틈을 주지 않고 갈고리 같은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천천히 움켜쥐었다. 머리에서 뿌지직 소리가 나자 노인은 소름 끼치는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나 매초풍은 태면하게 손가락 끝을 노인의 두개골에 천천히 찔러 넣었다.
매초풍이 노인의 머리에 박았던 손을 뽑자, 노인은 짤막한 비명을 지르더니 눈을 부릅뜨고 죽어 버렸다.
"어서 가서 저 젊은 남자를 끌어 와요. 다시 해 봐야겠어요. 노인이라 두개골이 맥없이 부서져서 틀렸어요."
매초풍은 계속 투덜거렸다.
"그러게 내가 뭐했어요? 건장한 사람을 잡아 오랬잖아요! 저렇게 힘도 못 쓰는 영감을 잡아 오니까 손써볼 새도 없이 죽어 버리지……."
그러자 진현풍은 젊은 남자 한 명을 끌어다 매초풍에게 주었다. 앳된 얼굴의 젊은이였다.
"어쭈, 잘생겼는데. 내가 처녀라면 한번 유혹해 볼 텐데 말이야."
젊은이는 매초풍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 듯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다리를 후들후들 떨고 있었다.
"어때, 젊은이, 내가 맘에 들어?"
매초풍이 젊은이에게 묻자 진현풍이 벌컥 화를 냈다.
"사매!"
그러자 매초풍이 쏘아붙였다.
"왜 그래요? 죽음을 앞에 둔 사람을 시샘이라도 하는 거예요? 한심하게 그러지 말고 구경이나 해요."
그리고는 다시 젊은이를 향해 물었다.
"말해 봐, 내가 맘에 들어?"
그러나 겁에 질려 바지에 오줌을 싸고 있는 젊은이의 귀에는 그런 말이 들어오지 않았다.
"넌 여자가 다정하게 구는 것도 모르는 바보 천치로구나. 우리 남편을 봐. 생긴 건 별로지만 나한테는 아주 살뜰하지. 전에도 늘 다정하게 대해 줬어. 도화도에 있을 땐 제일 크고 좋은 복숭아를 따서 내게 주었지. 왜 그랬는지 알아?"
그러나 정신이 나간 젊은이는 이 악마 같은 여자를 쳐다보며 눈도 깜박이지 못했다.
"그거야 나한테 잘 보이느라고 그랬지. 나한테 잘못 보였다가 나 말고 다른 여자와 살아야 할까 봐 겁나서 그랬던 거라구. 알아?"
여전히 젊은이가 대꾸도 못하고 멍청히 서 있자, 매초풍은 진현풍에게 말했다.
"이 남자 이거 남자 구실도 못하는 물건 아냐? 나를 보고 찍소리도 못하는 걸 보니……."
매초풍은 다시 젊은이 쪽을 쳐다보았다.
"이봐, 난 미인이야. 남자가 미인의 손에 죽는 것보다 더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 있어? 그런데 넌 내 얼굴에 관심이 없나 보구나. 날 잘 보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대단한 미인이라는 걸 알텐데. 난 나를 깔보는 사람은 누구든 죽이는 여자야!"
매초풍이 손가락을 매처럼 치켜 들고 그에게 다가가자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기절해 버렸다.
"이런 한심한 인간 봤나. 손도 안 댔는데 제풀에 덜컥 기절하다니!"
매초풍은 손을 거두며 투덜거렸다. 매초풍은 언제나 산 사람을 상대로 무공을 수련했다. 그래야 자기의 구음백골조가 사람의 두개골에 얼마나 깊이 들어가는지, 또 시간은 얼마나 걸리는지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수련한 결과 손가락 끝이 즉시 상대방의 머리를 파고들기는 했으나, 아직도 움켜쥐자마자 상대방을 죽이지는 못했다. 손으로 움켜쥐자마자 상대를 죽이려면 산 사람으로 실험해야 했다.
"이 남자는 아무래도 바보야. 내 얼굴을 보고도 마음이 동할 줄 모르니 말이에요. 말해 봐요. 내가 예쁘지 않아요?"
"물론 당신은 예뻐. 그러나 그 모양을 하고 서 있는데 정신이 남아 있겠어?"
진현풍의 말에 매초풍이 얼른 대꾸했다.
"좋아요. 깨어나면 좀 다정하게 굴어야지."
그들 둘은 앉아서 그 남자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정신이 든 젊은이는 자기가 아직도 이 악마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자 또 벌벌 떨기 시작했다.
"겁내지 말아요. 내가 아주 부드럽게 해 줄게. 내가 당신 이마에 입을 맞춰 준다니까."
하지만 그 따위 말이 귀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이제 젊은이는 혼비백산해서 새된 소리를 질러댔다.
"아이, 그러지 말아요. 사람들 놀라겠네."
매초풍은 이런 수작을 하면서 손을 뻗어 남자의 머리를 움켜잡았다. 그녀는 다섯 손가락을 깊이 넣지 않고 한마디 정도만 박아 넣었다. 때문에 죽지도 못한 남자는 악악 비명을 질렀다.
"이거 왜 이래? 손가락을 콱 박아 넣어 찍소리도 못하고 죽게 하면 좋겠어?"
매초풍은 성난 얼굴로 투덜거리며 진현풍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 가슴에 두어 장 먹여 봐요. 최심장이 얼마나 수련되었는지 봅시다."
매초풍의 말에 진현풍은 어깨를 으쓱하며 남자에게 다가섰다.
"아무래도 내가 더 세지."
그리고는 남자의 가슴을 겨냥하여 한 장 갈겼다. 남자의 가슴에서 퍽! 소리가 나더니 다시는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진현풍과 매초풍이 쪼그리고 앉아 남자의 가슴을 살펴보니 앞가슴이 우묵하게 패어 들어가서 속이 텅 빈 것처럼 보였다.
"안이 어떻게 되었는지 보아야지."
매초풍의 말에 진현풍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남자의 배에다 손을 찔러 넣더니 뱃가죽을 찢어 갈랐다. 그리고는 염통, 쓸개, 간, 허파 따위의 내장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얼핏 보기엔 모두 정상으로 보였다. 그러나 달빛을 빌려 유심히 보니 오장육부에 가느다란 금이 가 있었다. 파열된 것이다.
매초풍과 진현풍은 자기들의 무공이 아직도 멀었다는 것을 느끼고는 개탄했다. 단번에 상대방의 오장육부를 박살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의 무공으로 사부님을 만났다간 우린 영락없이 죽을 거야. 도화도에 가서 《구음진경》상권을 손에 넣어야 하는데……. 그러면 우리는 그야말로 천하 무적일 텐데…….'
매초풍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호통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 악귀들아! 하늘이 도와 결국 네 놈들을 찾았구나!"



제27장 다시 도화도로
매초풍과 진현풍이 고개를 돌리니, 첫눈에 형제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꼭 닮은 두 사람이 서 있었다. 한 사람은 키가 작고 뚱뚱했으며, 한 사람은 훤칠하고 야윈 편이었다. 뚱뚱한 사람은 손에 구리 몽둥이를 쥐고 있었고 야윈 사람은 무쇠로 된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진현풍이 물었다.
"당신들은 누구요?"
뚱뚱한 사람이 대답했다
"우린 비천신용(飛天神龍) 가벽사(柯酸邪)와 비천편복(飛天 福) 가진악 (柯鎭惡)이란 형제다!"
야윈 편인 가진악이 입을 열었다.
"너희들이 흑풍쌍살이냐?"
진현풍이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그렇다."
그러자 비천신용 가벽사가 껄껄 웃었다.
"잘됐어! 우리 형제는 진작부터 네 놈들을 찾고 있었다. 천하의 무림을 위해 화근을 없애 버리겠단 말이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두 형제는 몽둥이와 지팡이를 들고 흑풍쌍살에게 달려들었다.
흑풍쌍살이 악독하고 잔인한 짓을 일삼는다는 소문이 자자하여 사람마다 이를 갈고 있던 터였다. 가벽사 형제는 흑풍쌍살을 없애서 무림이 편안해지도록 하겠다는 생각으로 이들을 찾아 다녔던 것이다.
비천신용 가벽사가 소리쳤다.
"오늘 내 몽둥이 맛을 좀 보아라!"
매초풍이 날카롭게 외쳤다.
"네 놈이 날 치겠다구? 네까짓 게 날 치겠다는 거냐?"
두 형제는 매초풍, 진현풍과 일전을 벌였다. 그런데 싸울수록 점점 더 힘에 겨웠다. 그들의 무예는 흑풍쌍살보다 한 수 아래였던 것이다. 더구나 구음백골조와 최심장은 당해 내기가 어려웠다.
'흑풍쌍살의 무예가 참으로 대단하구나. 잘못하다가는 이 연놈들에게 당하겠어.'
이렇게 생각한 비천편복 가진악은 쇠지팡이를 빗발치듯 휘둘러 대면서 매초풍을 공격했다.
진현풍이 그것을 보고 큰소리로 말했다.
"이 망할 마누라야! 그렇게 진짜로 덤비지 말고 대충 대처하라구. 내가 이 놈을 죽여 버린 다음 임잘 도울 테니까!"
매초풍은 갈고리 손가락으로 가진악을 공격하면서 질세라 욕설을 퍼부었다.
"빌어먹을! 자기나 잘할 일이지 왜 나까지 참견하는 거예요?"
그들 부부는 이렇게 입씨름을 하면서도 그 법수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가벽사 형제는 점점 형세가 불리해지는 것을 확실히 느꼈다. 가진악이 형에게 외쳤다.
"형님, 어서 몸을 피해요!"
오늘은 이만 하고 후일 다시 사람을 모아 흑풍쌍살을 혼내 주자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매초풍이 코웃음을 쳤다.
"흥! 가긴 어딜 간단 말이냐?"
그녀는 큰소리를 지르며 손으로 가진악의 얼굴을 공격했다. 가진악은 매초풍의 구음백골조가 끔찍한 수법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므로 얼른 뒤로 몸을 피했으나 그녀의 오른쪽 손이 갑자기 법수를 바꾸어 자기의 쇠지팡이를 잡으리라곤 생각조차 못했다. 오른손으로 가진악의 지팡이를 빼앗은 그녀는 왼손으로 그의 머리를 움켜잡으려 했다. 가진악이 그 기미를 알아채고 재빨리 몸을 피했으나 그만 그 악마 같은 손가락에 눈을 긁히고 말았다. 가진악은 모진 비명을 지르면
서 멀리 피했다.
가벽사는 동생의 비명 소리를 듣고 큰소리로 물었다.
"동생, 어떻게 된 일이야?"
가진악의 눈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 년이 내 눈을 할퀴었어요, 형님! 아무것도 안 보여요."
비천신용 가벽사는 동생을 구하려고 얼른 몸을 솟구쳤다. 그러나 그 순간 무서운 장이 그의 둥에 떨어졌다. 그 장이 어찌나 빠르고 강한지 비천신용 가벽사는 입으로 피를 토하며 그대로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는 쓰러지면서 소리를 질렀다.
"동생, 빨리 피해라!"
쓰러졌던 가벽사는 얼른 몸을 일으켜 다시 구리 몽둥이를 휘두르며 외쳤다.
"동생, 빨리 몸을 피해!"
매초풍이 쓴웃음을 지으며 비아냥거렸다.
"그 따위 실력으로 우리 흑풍쌍살을 죽이겠다구?"
그녀는 가진악에게 연거푸 공격을 퍼부었다.
진현풍과 매초풍은 번개같이 움직이는 가벽사의 몽둥이를 피하면서 함께 몸을 훌쩍 날렸다.
가벽사는 손으로 동생을 밀어냈다.
"빨리 가거라. 그렇지 않으면 둘 다 죽는다!"
매초풍이 차갑게 내뱉었다.
"안 될 말씀! 너희 둘 다 여기서 죽어야 해!"
그녀는 마귀 같은 손가락을 뻗었다. 짝!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다섯 손가락이 가벽사의 머리에 박혔으나 가벽사는 워낙 용력이 대단하여 중상을 입고도 죽지 않았다. 그는 매초풍의 어깨를 움켜잡고 소리를 질렀다.
"네 년이 날 죽이면 나도 널 죽일 테다!"
그는 품속에서 비수를 꺼내 들더니 매초풍에게 마구 휘둘렀다.
매초풍은 손을 내밀어 가벽사의 손목을 꽉 잡았다. 그녀는 선뜩한 칼날을 보고 감히 그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매초풍은 다른 한 손을 가벽사의 머리 속에 집어 넣으려 했지만, 한 손으로 가벽사의 손목을 틀어쥐고 있으려니까 아주 힘들었다. 그녀는 진현풍에게 또 욕설을 퍼부었다.
"망할 인간 같으니, 어서 날 도와주지 않고 뭐 해요?"
그녀는 가벽사가 구음백골조 법수에 걸려들었는데도 죽지 않고 이처럼 기세가 사나운 것을 보고 속으로 은근히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진현풍은 동생인 비천편복 가진악을 공격하다가 아내의 욕설을 듣고 몸을 돌려 가벽사의 등을 향해 장을 날렸다. 그러자 가벽사는 머리가 뒤로 꺾인 채 입으로 피를 분수처럼 내뿜으며 소리쳤다.
"동생, 빨리 도망가라!"
가진악은 형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쪽으로 뛰어갔으나 형님은 이미 숨진 뒤였다. 형님이 죽었다는 걸 확인한 그는 얼른 몸을 날려 도망가 버렸다.
진현풍은 그가 도망가는 것은 보지도 않고 매초풍을 보살폈다. 죽은 가벽사가 두 손으로 여전히 매초풍의 어깨를 꽉 틀어쥔 채 놓지 않고 있었다. 진현풍이 가벽사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부러뜨리고 나서야 매초풍은 풀려났다. 그녀는 독살스럽게 말했다.
"놈이 내 구음백골조에 눈을 다쳤으니 소경이 될 거예요."
진현풍과 매초풍은 가벽사의 시체를 숲 속에 버려 둔 채 가진악을 찾아 한참 동안 헤맸으나 찾아낼 수가 없었다.
매초풍과 진현풍은 자신들이 《구음진경》하권을 훔쳐 도화도에서 달아난 것으로 시작된 일이 강호에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들이 바란 건 오로지 황약사에게 붙잡히기 전에 하루빨리 《구음진경》상권을 손에 넣어 스승의 무공을 뛰어넘자는 것뿐이었다.
두 사람은 평강이란 도시에 도착하여 도화도까지 갈 배를 구하는 일을 의논했다. 그들이 얘기하고 있는데 한 노인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바다에 나가 노실 손님이십니까?"
"네, 우리 부부는 난생 처음 바다를 본답니다. 바다에 나가 뱃놀이를 하는 게 소원이었지요."
진현풍의 대답에 노인이 말했다.
"배를 타시려면 돈을 내셔야지요. 그러면 내 배로 두 분을 모시고 경치를 구경시켜 드리리다."
진현풍이 잠시 망설이자 매초풍이 답답하다는 듯이 물었다.
"저 사람이 뭐라는 거예요?"
"제기랄, 돈을 내야 바다로 데리고 나가겠대."
"그럼 어서 돈을 줘요."
진현풍은 품에서 가벽사의 몸에서 뒤져 낸 은전을 꺼내 노인에게 내밀었다.
"이거면 되겠소? 은전은 후하게 드릴 테니 우릴 도화도까지 데려다 주시오."
도화도란 말에 노인은 기겁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도화도? 지금 도화도라고 했소? 거기라면 은전 아니라 금덩이를 줘도 못 가겠소. 제발 농담 마시오."
기분이 상한 진현풍은 노인에게 을러댔다.
"뭐? 그럼 안 가겠다는 거요?"
진현풍의 험악한 기세에도 노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안 가겠소."
진현풍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노인을 위협했다.
"내가 시키는 대로 안 하면 후회할걸."
그가 가까이 대 놓은 노인의 배에 가볍게 장을 날리자 갑판이 산산조각 났다. 그러자 노인은 두 사람을 설득하려는 듯이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아무래도 젊은 양반들이 잘 모르는 모양인데, 도화도란 데는 갈곳이 못 되오. 그 섬엔 성미가 사악한 자가 살고 있어서 거기 갔다가 살아서 나온 자가 없소. 거길 가는 건 죽으러 가는 셈이란 말이오."
진현풍은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윽박질렀다.
"잔소린 그만 하고, 가겠소, 안 가겠소?"
노인은 할 수 없다는 듯이 쯧쯧쯧 혀를 찼다.
"정 그렇다면 가겠소. 하지만 섬에 닿으면 당신들끼리 섬에 오르시오. 알았소?"
진현풍이 고개를 끄덕이자, 노인은 집에 대고 소리쳤다.
"둘째야, 셋째야! 이리 나오너라!"
그러자 초가집에서 두 사람이 걸어 나왔다. 그들은 진현풍과 매초풍을 찬찬히 뜯어보더니 노인에게 물었다.
"아버님, 무슨 일이십니까?"
"이분들이 도화도에 가시겠단다."
노인의 대답에 그들의 얼굴이 대번에 굳어졌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알아듣도록 말했지만 저분들은 기어이 가시겠다는구나."
그러자 젊은이가 두 사람 앞으로 나섰다.
"어느 곳이든 갈 수 있지만 도화도만은 안 됩니다."
매초풍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우린 꼭 도화도에 가야 해요. 가겠어요, 안 가겠어요?"
"못 갑니다."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매초풍은 그의 머리를 움켜쥐어 구음백골조를 사용하려 했다. 그러나 젊은이도 무예를 아는지 번개같이 뒤로 물러섰다. 그는 가소롭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당신들이 감히 도화도엘 가겠다는 거요? 그곳에 가면 황 도주가 당신들을 가만 놔두지 않을텐데."
매초풍과 진현풍은 놀라 흠칫 뒤로 물러나며 물었다.
"당신들은 누구요?"
그 젊은이는 쓴웃음을 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진현풍이 매초풍에게 속삭였다.
"여보, 내막을 환히 아는 걸 보니 사부님께서 우릴 붙잡으라고 보낸 사람들이 아닐까?"
그러나 매초풍은 고개를 저었다.
"사부님처럼 자존심이 대단한 분이 자기 문하의 일에 남이 참견하도록 하진 않으셨을 거예요. 어쨌거나 이 놈들은 없애 버리면 그만이라구요."
그들 두 사람이 노인과 젊은이를 공격하려는 순간, 초가집 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나오는 사람이 있었다.
"진현풍, 매초풍, 내가 누구인지 보아라!"
비분에 가득 찬 표정을 한 사람이 수레에 앉아 있었다. 바로 육승풍이었다.
진현풍 부부는 깜짝 놀랐다. 육승풍이 이곳에 있는 걸 보니 사부님도 가까운 곳에 계신 것이 틀림없었다. 두 사람은 사위를 둘러보며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었다.
매초풍이 먼저 입을 열었다.
"육 사제, 사부님은 어디 계세요?"
육승풍은 다짜고짜 욕을 퍼부었다.
"네 년이 감히 사부님을 만나 보려구? 사부님께서 보시면 네 년은 더 처참한 죽음을 당할 것이다. 그래서 내가 사부님을 대신하여 네 년을 잡으러 왔다. 우선 네 년의 다리 힘줄을 끊어 맛을 좀 보여 줘야겠다!"
육승풍도 곡영풍과 마찬가지로 사부님한테 다리 힘줄을 끊겼다는 것을 이들 부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매초풍은 황약사와 육승풍을 이간시키려 했다.
"육 사제, 그분은 제자에게도 그처럼 가혹한 분이에요. 자기 제자에게도 잔인하기 짝이 없는 그분이 밉지 않으세요? 육 사제, 우리와 함께 도화도로 가서 복수하지 않을래요?"
육승풍은 그녀의 말에 더욱 화를 냈다.
"매초풍, 네 년은 일말의 양심도 없구나. 사부님께서 널 구해 주지 않았더라면 네 년이 오늘까지 목숨이 붙어 있었겠느냐? 사부님의 은혜는 생각지도 않고 《구음진경》을 훔쳐 도망가다니……. 네년 때문에 우리 형제 네 사람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아느냐? 내 오늘 네 년의 다리 힘줄을 잘라 내어 도화도로 끌고 가지 못하면 사람이 아니다!"
진현풍은 그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육승풍, 그까짓 재주로 우리 부부를 죽이겠다는 거냐?"
진현풍과 매초풍은 육승풍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달려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초가집의 문짝과 창문들이 활짝활짝 열리더니 안에서 수십 명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 모두 손에 칼을 들고 있었다.
"흑풍쌍살, 꼼짝 마라!"
달려 나온 사람들이 진현풍과 매초풍을 물샐틈없이 둘러쌌다.
육승풍이 대노하여 부르짖었다.
"진현풍, 매초풍, 순순히 포박을 받아라! 내가 너희들의 다리 힘줄을 끊은 다음 사부님께 끌고 가겠다. 사부님께서 자비심을 베풀어 너희들을 용서하실지도 모르지!"
그 말에 화가 난 진현풍은 다짜고짜 몸을 날려 육승풍한테 달려들었다. 그러자 육승풍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10여 명의 사내들이 진현풍에게 덤볐다. 초가집 앞은 삽시에 아수라장이 되어 칼과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진현풍이 어찌나 귀신같이 몸을 놀리는지 그 많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눈 깜짝할 사이에 육승풍에게 접근했다. 그러나 몸집이 커다란 사나이가 진현풍 앞을 막아 서며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물러나라!"
진현풍은 그 엄청난 몸집의 사나이를 보고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덤벼들었다. 그러자 커다란 사나이가 몇백 근의 장을 휘둘렀다. 그는 자신의 장을 맞은 진현풍이 나가떨어질 줄 알고 더 이상 손을 쓰지도 않았다. 그러나 진현풍은 끄떡도 하지 않고 오른손으로 그에게 장을 날렸다. 커다란 사나이는 눈이 휘둥그래져서 두 손으로 진현풍의 어깨를 움켜쥐려 했으나 목에서 꾸르륵꾸르륵 소리를 내더니 입과 귀로 피를 흘리며 풀썩 고꾸라져 버리고 말았다.
육승풍이 놀라서 소리쳤다.
"조심해라! 이게 바로 최심장이란 법수다. 놈의 몸에 부딪쳐서는 안 돼!"
사람들은 몸집이 커다란 사나이가 진현풍의 장에 맞아 너무나 쉽게 죽어버리는 것을 보고 몸을 사렸다.
그 덕분에 흑풍쌍살의 형세가 한결 유리해졌다. 상대방이 목숨을 걸고 덤벼들면 두 사람이 그에 대적하느라 손을 쓸 틈이 없을 테고, 그 와중에 누군가의 칼에 찔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모두들 겁이 나서 저마다 몸을 사렸으므로 두 사람은 운신의 폭이 훨씬 넓어졌다.
그들 부부가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며 법수를 쓰자 순식간에 두 사람이 쓰러지고 말았다. 한 사람은 매초풍의 손에 걸려 머리에 다섯 개의 구멍이 났고, 다른 한 사람은 진현풍의 장에 맞아 어깨뼈가 부서진 것이다.
매초풍은 긴 머리칼을 흩날리며 이리저리 날아다니면서 모진 욕설을 퍼부었다.
"육승풍, 사부님이 네 발의 힘줄을 끊었다면 나는 네 놈의 심장을 뽑아 줄테다!"
육승풍은 수레에 앉은 채 몸을 전혀 움직이지 않았는데 그의 주위에는 네 사람이 호위하고 있었다.
육승풍이 입을 열었다.
"《구음진경》을 훔쳐 도화도에서 도망간 것만 해도 큰 죄를 진 것이니 강호에서 착하게 살아갈 일이지, 어찌 그토록 잔인하게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단 말이냐! 한꺼번에 여든한 사람이나 죽이다니! 사부님과 저 하늘이 너희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매초풍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나는 네 놈을 용서할 것 같으냐?"
그녀는 큰소리를 지르며 육승풍을 덮쳤다. 매초풍은 법수를 세번씩이나 바꾸어 가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첫번째 법수는 '루루백골(累累白骨)'로 두 손을 아홉 번이나 움직이는 것이었다. 그런데 움직일 때마다 그 동작이 절묘했고, 아홉 번 모두 동작이 달랐다. 육승풍 주위에 서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검을 내밀었는데, 검을 쓰는 그 법수 또한 절묘하여 매초풍의 공격을 모두 막아냈다. 그녀의 두 번째 법수는 '식골소혼(蝕骨銷魂)'으로 이번에는 육승풍의 정수리를 움켜
쥐려 했다. 일단 걸려들기만 하면 목숨을 건질 수 없는 무서운 법수였다. 그때 육승풍이 손을 쳐들더니 무엇인가를 뿌렸다. 그것은 윙윙 소리를 내면서 매초풍의 머리를 향해 날아갔다. 겁이 난 매초풍은 그것을 손으로 잡을 생각은 하지 못하고 '야귀유혼(野鬼游魂)' 법수를 썼다. 그러자 그것이 육승풍 쪽으로 되돌아 갔다. 깜짝 놀란 육승풍은 얼른 몸을 피했다.
'듣던 대로 대단한 무공이구나!'
진현풍과 매초풍은 '영오보(靈鰲步)'란 걸음 법수를 써서 사람들 속을 누비고 다니며 장을 날리거나 갈고리 같은 손으로 끌어 잡아 그들을 처치했다. 사람들은 장이 날아드는 바람 소리를 듣고 급히 몸을 피했지만, 어느새 칼에 벤 듯 얼굴이 아파 오곤 했다. 바로 매초풍의 갈고리손이 할퀸 자리였다. 이처럼 한 번 긁힌 사람은 얼른 몸을 피해야지, 그러지 않으면 목숨을 잃기 십상이었다.
육승풍이 갑자기 소리를 버럭 질렀다.
"흑풍쌍살, 너희 연놈이 죽을 때가 되었다!"
육승풍은 몸을 일으키더니 양손에 두 개의 쇠지팡이를 쥐고 두 사람을 찌르기 시작했다. 육 장주가 손을 쓰기 시작하자 모두들 사기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달려들어서 흑풍쌍살을 잡지 못한다면, 창피해서 강호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것이다. 육 장주께서 친히 나서시니 목숨을 걸고 싸우는 수밖에 없다.'
모두들 병장기를 잡고 소리를 지르면서 흑풍쌍살을 향해 일제히 달려들었다.
진현풍 부부는 깜짝 놀랐다. 두 사람이 손을 쓰기도 전에 매초풍이 어깨에 칼을 맞았는데, 칼날이 깊이 박혔는지 피가 샘솟듯 했다.
매초풍이 얼굴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난 틀렸으니 당신이나 도망치세요. 이 놈들을 기억해 두었다가 훗날 꼭 복수해 주세요!"
그러나 진현풍은 욕설을 퍼부었다.
"망할 여편네야, 네가 죽으면 나 혼자 무슨 재미로 살겠어."
매초풍이 다친 것을 보고 힘을 얻은 육승풍의 제자들은 더욱 잽싸게 손을 놀렸다.
벌써 세 시간이나 지나갔다. 죽은 사람이 열 명이 넘었고, 그들이 흘린 피로 땅은 온통 피범벅이가 되었다.
진현풍과 매초풍 역시 점점 기운이 빠져 그들이 휘두르는 장도 처음보다 훨씬 약해져 있었다. 그들은 《구음진경》상권을 얻어 천하 제일의 실력자가 되기는커녕 여기서 죽을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망할 여편네야, 얼른 도망가라구! 더 어물거리다간 둘 다 죽고 말아!"
진현풍이 소리치자 매초풍도 지지 않았다.
"나 혼자 무슨 재미로 살란 말이에요? 살다가 또 날 업신여기는 놈이 있으면 어떡하구요?"
그러자 진현풍이 대꾸했다.
"그야 다른 사내를 찾으면 되지!"
매초풍은 쓴웃음을 지었다.
"당신처럼 날 좋아할 멍청이가 또 있을 것 같아요?"
그들 부부는 그렇게 주고받으면서도 여전히 손을 놀려 육승풍과 그의 제자들을 대적하고 있었다. 이제는 기진맥진해서 구음백골조나 최심장도 먹혀 들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하나라도 더 죽이려고 이리저리 날뛰었다. 조금이라도 더 살려면 그 길밖에 없었다.
육승풍이 점잖게 말했다.
"너희들이 손을 멈추면 나도 멈추겠다. 이쯤 해 두고 사부님께 가자."
그러나 매초풍으로서는 사부님을 만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았다. 사부님에게 끌려가면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고 죽음보다 더 끔찍한 형벌을 받을 게 뻔했다.
매초풍은 남편을 보고 말했다.
"여보, 도화도에 끌려가지 않으려면 죽을 각오로 싸우는 수밖에 없어요!"
진현풍 역시 그럴 생각이었다. 그들 부부는 죽을 각오를 하니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다시 힘이 솟는 것을 느꼈다.
네 시간이 지났다. 매초풍과 진현풍 모두 숨이 턱에 닿아서 법수가 형편없이 약해지고 있었다.
육승풍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만 마음을 바꿔 도화도로 가는 게 어떠냐?"
그러나 매초풍은 악에 받쳐 고래고래 소리쳤다.
"난 죽어도 네 놈과 함께 도화도엔 안 간다!"
육승풍은 할 수 없다는 듯이 혀를 끌끌 차더니 소리질렀다.
"그럼 좋아! 정 그렇다면 죽는 수밖에 없다!"
그의 말에 모두들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두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어느새 날이 저물었고, 이미 스물이 넘는 사람들이 땅에 나뒹굴고 있었다. 매초풍 부부는 여전히 악전고투하고 있었는데 지칠 대로 지쳤음에도 두 사람의 살기는 하늘을 찌를 것만 같았다.
매초풍이 견디다 못해 괴롭게 소리쳤다.
"여보, 아무래도 우린 여기서 끝장나나 봐요!"
그녀의 말에 진현풍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두려울 게 뭐 있어? 당신이 조금만 힘을 내면 놈들은 절대 우릴 해치지 못해!"
모두들 그 말에 눈이 휘둥그래졌다. 참으로 악착같은 자들이었다. 상처입은 몸으로 그토록 오랜 시간을 싸웠는데도 여전히 침착을 유지하는 걸 보니 놀랍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육승풍이 큰소리로 외쳤다.
"이제는 생포하려 들지 말고 죽여 버려라!"
모두들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또다시 두 사람한테 달려들었다.
매초풍은 숨을 몰아쉬며 남편을 바라보았다.
"망할 사람 같으니! 후회하지 않아요?"
"내가 왜 후회하겠어? 사부님의 경서도 훔쳤겠다, 또 임자와 이렇게 같이 있는데!"
"사부님의 경서를 훔친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래요? 당신, 나와 함께 도망친 걸 후회하지 않아요?"
"후회하지 않아. 후회스러운 것이 있다면 육승풍을 죽여 버리지 못하는 것뿐이야!"
육승풍은 그 말에 화가 나서 자기 수하 사람들한테 소리질렀다.
"저 놈을 죽여라! 매초풍만 끌고 가도 사부님께선 우릴 용서하실 거다!"
이때 갑자기 시커먼 먹구름이 몰려들더니 비가 억수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찌나 엄청나게 퍼붓는지 눈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앞이 안 보이니 어디서 적이 공격할지 알 수 없어 모두들 병장기로 자신을 보호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번개와 천둥이 땅을 울리며 폭우가 쏟아지는 동안 흑풍쌍살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 소낙비가 아니었다면 진현풍과 매초풍은 육승풍의 손에 죽었을 것이다. 하늘이 악인을 도와준 셈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의지하면서 간신히 심산에 당도했다. 사부님에게서 훔쳐 온 구화옥노환을 몇 알 먹으면서 달포 남짓 정양을 하자 상처가 씻은 듯이 나았다.
두 사람은 다시 바닷가로 찾아가 배를 찾아보았다. 그들은 담대하게도 지난번에 갔던 곳으로 다시 갔다.
육승풍이 숨어 있던 초가집은 볼썽사납게 부서져 있었다. 창문들이 바람에 쾅쾅 여닫기고 있었으며 문짝도 다 떨어져 나갔다. 싸움의 흔적은 말끔히 없어졌으나 먼 곳에 20여 기의 새 무덤이 생긴 것이 눈에 띄었다.
낡은 배를 얻은 두 사람은 노를 저어 도화도로 향했다.
어둠이 깃든 후에야 도화도 기슭에 배를 댈 수 있었다. 배를 은밀한 곳에 감추어 놓고 두 사람은 섬에 올랐다.
매초풍이 남편의 귀에 대고 말했다.
"이번에 우리가 상권을 얻지 못하고 천하 제일이 못 되면 같이 죽어 버려요."
그 말에 진현풍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살금살금 사부님의 서재로 다가갔다.
그때 누군가가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황 괴물! 어서 나와라!"
그러자 황약사가 안에서 나왔다. 황약사를 본 매초풍은 가슴이 세차게 뛰는 것을 느꼈다. 황약사는 수척한 얼굴에 푸른색 옷을 입고 있었다. 매초풍은 의아했다.
'내가 알기로 사부님은 푸른 옷을 입은 적이 없는데 오늘은 웬일일까?'
황약사는 그 사람을 바라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흠, 노완동 당신이었군."
그러나 고함친 사람은 담담한 것 같지 않았다.
"황 괴물, 당신이 날 속이고 가져간 《구음진경》을 돌려주시오!"
"주백통, 난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이 아니오. 내가 언제 그것을 엿봅디까?"
노완동 주백통은 그 말에 또 소리를 질렀다.
"또 날 속이겠다는 거요? 내 사형 말씀이 《구음진경》에 있는 몇 가지 악독한 무예가 잘못 알려지면 사람들에게 해가 크다고 했소. 특히 구음백골조나 최심장이 그렇다고 했소. 당신이 그 경서를 훔치지 않았다면 당신의 제자 진현풍과 매초풍이 어떻게 그 사악한 무예로 사람들을 해칠 수 있었겠소?"
황약사는 맥빠진 소리로 대꾸했다.
"그 둘은 이제 내 제자가 아니오."
"황약사, 허튼소리 그만 하시오!"
황약사는 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구음진경》을 읽어 본 것은 사실이오. 하지만 내가 본 것은 집사람이 기록한 것이지 당신의 경서가 아니오."
그러자 노완동은 더욱 화를 냈다.
"거짓말이오! 당신 같은 고수가 그런 치사한 거짓말을 하다니……. 당신의 명성은 모두 거짓이었군! 게다가 그게 사실이라면 당신 아내도 이상한 여자요!"
그 말에 황약사는 두 눈을 부릅떴다.
"나한테는 무슨 욕을 해도 다 듣겠소. 하지만 집사람을 모욕한다면 가만있지 않겠소!"
그러자 노완동은 한결 수그러든 기세로 말했다.
"좋소, 그럼 아형을 만나게 해 주시오. 그녀가 뭐라고 말하는지 들어 봐야겠소."
그러자 황약사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한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말했다.
"정히 아형을 만나고 싶다면 이리 오시오."
두 사람은 아형의 처소가 있는 내당으로 갔다.
매초풍은 숨어서 그들을 지켜 보며 생각했다.
'사모님께서 뭐라고 얘기하실까? 하여튼 저 사람은 사부님께 《구음진경》을 내놓으라고 할 것이고, 그러면 어차피 서재로 나와야 되니까 여기서 기다리자.'
그녀는 진현풍에게 귓속말로 자기 생각을 얘기했다.
황약사는 노완동을 내당으로 데리고 갔다. 그런데 그곳은 아형의 위패가 놓인 영당이 되어 있었다.
노완동이 앞으로 나아가 절을 하려 하자 황약사가 말렸다.
"노완동, 억지로 그럴 거 없소. 당신이 《구음진경》을 가지고 그토록 소란을 피우지 않았더라면 집사람이 이처럼 내 곁을 떠나진 않았을 거요."
그러자 노완동은 벌컥 화를 냈다.
"그게 무슨 말이오?"
황약사는 아무 대답 없이 화난 얼굴로 노완동을 바라보았다.
노완동은 속으로 생각했다.
'일이 재수 없게 되었구나. 황약사가 아형이 죽은 분풀이를 나한테 하면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잖아.'
노완동은 황약사에게 이길 자신은 없었지만 그와 싸움을 해서라도 《구음진경》을 찾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아내인 아형이 죽어서 황약사의 심기가 대단히 불편하니 일은 틀린 셈이었다.
황약사는 아형의 위패 앞에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는 머리를 숙이고 천천히 탄식하더니 아형이 죽게 된 연유를 들려주었다.
매초풍과 진현풍이 《구음진경》을 훔쳐 가고 황약사가 제자들을 모두 쫓아버린 뒤 아형은 기억력을 되살려 경서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서를 왼 것이 꽤 오래 전의 일이라 똑똑히 기억할 수가 없었다. 임신 8개월의 몸으로 밤을 새워 가며 8천 자 가량을 써 놓았으나 앞뒤 내용이 잘 연결되지 않았다. 그 일로 무리를 한 아형은 그만 조산을 하고 말았다.
조산으로 딸을 낳은 아형은 곧장 병을 얻어 영영 드러눕고 말았다. 황약사의 뛰어난 의술로도 그녀의 목숨을 건지지 못한 것이다.
황약사의 주위엔 벙어리 노복 몇 사람밖에 없었으므로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고통을 어디다 하소연할 데도 없었다 그러던 참에 노완동이 오자 황약사는 너무나 반가워 많은 이야기를 하려 했다. 하지만 이야기가 아형의 죽음에 이르자 그는 그만 모든 것이 귀찮고 허무해졌다.
"노완동, 어서 물러가시오. 난 지금 《구음진경》이고 뭐고 다 귀찮을 뿐이오."
그러나 노완동은 그의 말을 가볍게 받아들였다.
"당신처럼 이름 높은 고수가 여자에 빠져 그러는 걸 알면 사람들이 비웃을 거요."
황약사는 고개를 저었다.
"노완동, 당신은 모르오. 아형은 보통 여자와는 달라요."
그러나 눈치가 무딘 노완동은 계속 그의 심사를 긁었다.
"부인이 죽었으니 무예를 닦기가 더 좋지 않소? 나라면 오히려 시원해 하겠소. 본래 여편네란 일찍 죽을수록 좋은 법이오……."
황약사는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노완동, 그래도 당신을 사람으로 생각하고 내 속마음을 털어놓았는데……,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군. 정말이지 난 헛살았어. 네 놈을 용서하지 않겠다!"
황약사는 노완동에게 장을 날리려고 손을 뻗었다. 그것을 본 노완동이 황급히 소리쳤다.
"황약사, 당신도 《구음진경》상권을 얻어야 하잖소? 날 없애면 그걸 손에 넣을 수 없을 거요. 하지만 난 그걸 없애 버릴 거요!"
"모르는 소리 마시오. 난 아형에게 《구음진경》이 세상에 해를 끼치지 못하게 하겠다고 맹세했소. 당신이 그걸 갖고 왔다면 내놓으시오. 아형의 위패 앞에서 태워 버립시다."
그러나 노완동도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부인이 기억력으로 책을 훔치더니, 이젠 남편이 억지로 빼앗으려 드는군!"
화가 난 황약사는 민첩한 장법으로 노완동을 가격했다. 노완동도 처음에는 꽤 힘차게 반격했다. 그는 스무 가지가 넘는 전진파의 법수로 황약사를 대적할 수 있었지만, 결국은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황약사의 장을 맞은 노완동은 뒤로 쿵 나가떨어졌다.
노완동은 얼른 몸을 일으켜 도망가면서 소리쳤다.
"황약사, 여기서 싸움을 벌이면 아형이 속상할 거요! 그러니 밖으로 나갑시다!"
황약사는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영당에서 나와 노완동을 따라갔다. 도화도의 지리를 모르는 노완동은 도망을 치다 보니 한 동굴 입구에 이르렀다.
노완동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황 괴물, 여기서 기다리시오! 내가 동굴 안에 《구음진경》을 감춘 뒤에 다시 해 봅시다!"
황약사는 천천히 대답했다.
"좋아! 네 놈을 죽인 다음 그 경서를 찾아 아형의 묘 앞에 갖고 가서 태워 버릴 테다."
노완동은 그런 황약사를 비웃었다.
"웃기지 마시오! 당신이 경서를 탐내는 바람에 아형이 죽은 것 같은데 어찌 그런 뻔뻔스런 말을 할 수 있소?"
그 말에 화가 난 황약사가 노완동에게 달려들어 다시 싸우기 시작했다. 싸우면서도 노완동은 황약사의 복장을 지르는 소리만을 골라 욕을 퍼부었다. 노완동의 지독한 욕설에 분이 머리끝까지 치민 황약사가 요란한 소리를 지르며 단매에 노완동을 쓰러뜨렸다. 그래도 분이 사그러들지 않아 장을 날려 노완동의 두 다리를 분질러 버렸다.
"《구음진경》을 내놓으시오!"
노완동은 두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도 속임수로 훔쳐낼 수 있으면 그렇게 해 보시지."
황약사는 노완동의 품을 뒤져서 《구음진경》을 차지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럼 책을 굴 안에 감추시오."
그 말에 노완동은 호쾌하게 대답했다.
"과연 황 약사답군. 당신이 날 죽이려 들면 《구음진경》부터 없애 버리겠소."
노완동은 동굴 속으로 기어 들어가 《구음진경》을 숨겨 놓고 다시 나왔다.
"황약사, 책을 다시 빼앗으려 들면 내가 태워 버리고 말겠소!"
황약사는 껄껄 웃으며 대꾸했다.
"이봐, 그렇게 멍청하니 아형에게 속을 수밖에. 당신이 동굴에서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 것 같소? 십 년을 버티겠소, 이십 년을 버티겠소? 당신이 떠나면 경서는 내 손에 들어오게 돼 있다구."
"맞아. 당신은 내 음식에다 독약을 넣거나 내가 잠깐 나간 틈에 동굴로 들어와 그걸 가져가려는 거겠지. 그렇게 하면 경서를 가져갈 수 있구말구."
"흥, 날 어떻게 보고 하는 말이오?"
"좋소. 어디 두고 봅시다!"
서재 밖에서 조용히 기다리던 매초풍과 진현풍은 한참 후에 노완동과 황약사가 영당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 두 사람은 동굴 입구까지 가더니 서로 욕설을 퍼부으며 싸우기 시작했다.
진현풍과 매초풍은 자신들이 《구음진경》을 보고 익힌 무예가 이미 천하에 보기 드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황약사가 노완동과 싸우는 것을 보니 장을 날리는 하나하나의 법수가 절묘하기 그지 없었다. 그것은 《구음진경》을 아무리 연구해도 따라가기 어려운 것이었다. 드디어 노완동이 기어서 동굴 안으로 도망가자 매초풍이 소곤소곤 말했다.
"우린 아직 멀었어요. 얼른 도망갑시다."
하지만 진현풍은 머리를 가로 저었다. 그는 《구음진경》상권을 손에 넣지 않고는 도화도를 떠나지 않을 작정이었다. 두 사람은 다시 황약사와 노완동을 보았다.
노완동이 황약사 앞에서 맹세를 하고 있었다.
"하늘이 굽어보고 조상님이 살펴보나이다. 노완동이 오늘 황약사에게 패하였나이다. 황약사가 선심을 쓰거나 내가 황약사를 이기기 전에는 절대로 이 동굴을 떠나지 않겠나이다!"
노완동은 황약사를 쏘아보면서 말했다.
"황 괴물, 당신이 매일 나한테 먹고 마실 걸 갖다 주시오. 내가 천하 무적의 무술을 익혀서 꼭 당신을 이기고 말겠소!"
황약사는 선선히 대답했다.
"그렇게 합시다. 당신 손에 《구음진경》상권이 있으니 부지런히 익히면 되겠지."
"이 노완동을 업신여기지 마시오! 사형께서 이 경서를 보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셨으니 난 그 책을 보지 않을 거요."
그러더니 노완동은 갑자기 만면에 희색을 띠면서 지껄였다.
"그렇지! 나도 사람을 시켜서 내게 경서를 읽어 주게 하면 되겠군. 내가 그것을 암기해 버리면 그 책을 안 보고도 익힐 수 있을 테니까. 당신에게 배운 대로 하면 되겠군."
노완동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미친 듯 웃어댔다.
먼 곳에서 이들을 지켜 보던 흑풍쌍살은 두 사람이 다투는 것은 알았지만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들에게 다가간다는 것은 죽으러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매초풍은 속으로 사모님을 생각하고 있었다. 사모님의 태산 같은 온정을 생각하니 창문으로 살짝이라도 보고 싶었다. 그녀는 내당으로 들어가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곳이 영당이 되어 있는 것을 보고 매초풍은 깜짝 놀랐다. 자신의 몹쓸 행동이 아형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니 그녀는 몹시 괴로웠다. 사부님에게 미안해서 죽고만 싶었다.
'사부님 혼자 남아 얼마나 외로우실까.'
매초풍의 뺨으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순간 매초풍은 한 살쯤 되어 보이는 계집애가 걸상에 앉아 자기를 보고 웃는 것을 보았다. 아형을 빼쏜 듯한 모습이었다.
'저 아이가 사부님의 딸이란 말인가? 아, 사모님은 난산으로 돌아가신 모양이구나.'
그때 누군가 소리쳤다.
"누구냐?"
때마침 진현풍이 번개같이 달려와 그녀의 손을 잡아당겼다. 아형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매초풍은 손발에 힘이 빠져서 한 발자국도 뗄 수가 없었다. 진현풍은 황급히 그녀를 안고는 몸을 솟구쳤다. 황약사가 방금 내당에 들어갔다가 고함을 치기에 쏜살같이 달려온 것이었다.
걸상에 앉아 있던 아이가 웃으면서 소리쳤다.
"아빠!"
아이는 귀엽게 웃으면서 두 팔을 벌리고 뒤뚱뒤뚱 황약사에게 달려갔다. 누가 받지 않으면 땅바닥에 굴러 떨어질 판이었다. 이상한 기척을 느끼고 소리를 지른 황약사는 얼른 딸을 안아 들고 창밖을 살펴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매초풍 부부는 섬 기슭에 감추어 놓은 배를 타고 부지런히 노를 저어 도망쳤다. 배 안에 물이 고여 있었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형의 죽음으로 인해 두 사람 모두 한없이 마음이 무거웠다.




제28장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원수
매초풍과 진현풍은 황급히 북쪽으로 향했다. 그들은 도화도에서 멀리 떠날수록 좋다고 생각했다. 최선의 방법은 산속에 들어가 《구음진경》의 무예를 열심히 닦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무예가 빨리 늘 것이었다.
그들은 마차 한 대를 불러 타고 이틀이나 달려 커다란 도시에 도착했다. 날은 이미 어두워졌는데 달빛 한 점 없이 사방이 캄캄했다. 매초풍은 진현풍의 품에 안겼다. 두 사람의 마음은 한없이 쓸쓸하고 허전했다. 황약사와 노완동의 대결을 보니 한평생을 연마해도 황약사의 무예를 따르지 못할 것 같았다.
이들이 악인들이라는 것을 알아챈 마부는 감히 말도 붙이지 못했다. 날이 어두워지기에 돌아가겠다고 말했다간 매초풍한테 따귀를 얻어맞아 이빨이 세 개나 부러진 터였다. 마부는 부어 오른 볼을 감싸 쥐고 말을 몰 수밖에 없었다. 길이 고르지 못한데다 사위가 어찌나 캄캄한지 한치 앞도 볼 수가 없었다.
매초풍이 남편에게 말했다.
"이 마차의 꼴이 꼭 우리 신세 같군요."
온 강호에서 보호하거나 두둔해 주는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는 자신들이 캄캄한 길을 무작정 달리는 말에 매인 마차처럼 처량하다는 뜻이었다.
드디어 마차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되었다. 커다란 구덩이에 물이 가득 차 있어서 마차가 도저히 건널 수 없었던 것이다.
매초풍이 그것을 보고 소리쳤다.
"마차를 세워!"
마차가 멈추자 매초풍이 진현풍과 함께 마차에서 내렸다.
매초풍이 마부를 보고 말했다.
"내가 은전 열 냥을 줄 테니 땅에 떨어뜨리지 말고 잘 받아라."
이 악랄한 사람들에게 마차삯을 받을 기대는 아예 하지 않았던 마부는 은전을 열 냥이나 주겠다니 뜻밖이었다. 그는 손을 내밀어 은전을 받으려 했다. 그러나 사위가 너무 캄캄해서 그만 매초풍의 얼굴을 건드리고 말았다. 여인의 부드러운 살결이 만져지자 깜짝 놀란 마부는 얼른 손을 움츠렸다. 그러자 매초풍이 새된 소리를 질렀다.
"네 놈이 감히 내 얼굴을 만져!"
그녀는 구음백골조를 써서 마부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무예라곤 전혀 모르는데다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던 마부는 매초풍의 다섯 손가락에 머리를 잡혀 뇌에 구멍이 나 버렸다. 마부는 한마디 비명도 질러 보지 못하고 축축한 땅에 널브러졌다. 진현풍이 놀라서 아내를 쳐다보았다.
"아니, 이게 무슨 짓이야?"
매초풍이 웃으며 대꾸했다.
"저 녀석은 우릴 여기까지 데려다 준 걸 사방에 떠벌리고 다닐 거예요. 후환을 없애야 된다구요."
매초풍은 마부의 시체를 들어 마차에 집어 던지더니 말을 향해 장을 날렸다. 그녀의 장을 맞아 머리가 부서진 말은 애처로운 비명을 지르다가 땅바닥에 털썩 쓰러지더니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매초풍은 마차에 불을 질렀다. 마차가 커다란 화톳불처럼 훨훨 타오르기 시작했다. 불빛을 빌려 주위를 살펴보니 먼 곳에 숲이 보였고, 그 숲 속에서 불빛 하나가 반짝이는 게 눈에 띄었다. 두 사람은 반가워하며 불빛이 비치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한참 동안이나 숲을 걸었으나 이상하게도 불빛이 가까워지지 않았다. 불빛이 눈앞에 있는 것 같아 좀더 걸어가면 어느새 등뒤에 가 있는 것이었다. 마치 미로에 빠진 느낌이었다.
진현풍이 입을 열었다.
"참으로 괴상한 일이군. 보아하니 여기에도 대단한 고수가 살고 있는 모양이야."
그 말에 매초풍은 정신이 퍼뜩 들었다. 그녀는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것 같아요. 이곳에 괴상한 사람이 있다는 걸 눈치챘어야 했는데…….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순 없어요. 황약사의 제자가 그렇게 호락호락할 수 있어요?"
말을 뱉어 놓고 나서야 그녀는 자신이 실언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두 사람이 도화도를 떠난 후 강호에서는 아무도 그들을 황약사의 제자로 치지 않았던 것이다.
황약사는 음양 술수며 갖가지 진법, 오행 기문 둥에 통달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의 여섯 제자들 가운데 매초풍이 그 법수들을 가장 많이 터득하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총명한 매초풍은 황약사의 이런 법수에 각별히 흥미를 느꼈고, 그래서 이런 법수들을 가장 많이 배웠던 것이다.
매초풍이 진현풍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이제부터 날 따라와요."
매초풍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숲 속의 길 찾는 법을 알아냈다. 그녀는 진현풍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어 드디어 불빛이 새어 나오는 집 앞에 이르렀다.
매초풍이 안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주인 계십니까? 길을 잘못 든 사람인데 하룻밤 묵어갈 수 있을까요?"
그러나 집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매초풍이 살펴보니 어지러운 소택지 한복판에 세워진 두 칸짜리 집이었다. 어쨌거나 안에서 대답이 없으니 집 안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매초풍은 진현풍의 손을 잡고 불빛을 보며 앞으로 세 발자국을 걷고 왼쪽으로 네 발자국을 걸은 다음, 다시 앞으로 세 발자국을 걷고 또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네 발자국을 걸었다. 이렇게 해서 징검다리로 쓰이도록 박아놓은 나무 그루 앞에 당도했다. 나무 그루들은 단단히 박아놓은 것이 아니어서 걸을 때마다 흔들렸고, 어떤 것들은 비뚤어져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경공이 대단했으므로 어렵지 않게 건널 수 있었다.
그 자리에서 곧장 백아홉 발자국을 걸으니 집 앞에 이르렀다. 가까이 와 보니 이상하게도 문이 없이 담장만 둘러쳐져 있었다.
매초풍이 말했다.
"날 따라 뛰어들어와요. 왼쪽으로 내려서야 해요."
그들이 뛰어내린 곳은 뜨락으로, 왼쪽은 땅이었고 오른쪽은 연못이었다. 두 사람은 뜨락을 지나 내당으로 들어갔다. 내당도 문은 없고 창문만 있었다. 두 사람은 창을 통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긴 탁자가 놓여 있고 그 위에 기름 등잔 일곱 개가 마치 북두칠성 모양으로 배열되어 있었다. 그 불빛을 받으며 한 여인이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궁궐의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이 아름다운 여인은 두 사람을 차례로 쏘아보더니 대뜸 소리쳤다.
"아무리 그래 봐야 소용없어! 난 절대 대지로 돌아가지 않는다!"
매초풍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대리로 돌아가지 않는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여인은 냉소하며 계속 지껄였다.
"돌아가서 단황 나으리께 알려라. 내가 미안하게 생각하고는 있지만, 인연이란 따로 있는 것이니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시라고 말이다. 나한테 끈질기게 달라붙어 남에게 비웃음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라는 말씀도 전하여라."
매초풍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전에 사부님한테서 대리라는 소국의 황제가 대단한 무예를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들었어. 아마 일양지공이라고 했었지. 그 대리의 단씨가 필시 이 여인과 인연이 있었던 모양이로군. 그렇지 않다면 이 여인이 이런 말을 할 리가 없지. 우리를 운남 대리국의 단황 나으리네 사람으로 보고 있는 것이 분명해.'
"당신은 운남에서 오셨군요?"
매초풍의 물음에 여인은 말없이 웃었다. 미소 짓는 그녀의 얼굴에는 부귀를 누려온 여인들에게서 볼 수 있는 우아한 자태가 비쳤다.
진현풍은 이 쌀쌀한 여인에게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못한 채 읍하면서 물었다.
"저희가 하룻밤 묵어갈 수 있겠습니까? 내일 떠날 테니 오늘 밤 재워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 여인은 탄식을 하는 듯하더니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인이 묵어 가라는 말도 하지 않고 안 된다는 말도 하지 않으므로, 매초풍 부부는 더 이상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고 긴 탁자 한쪽에 앉아 여인을 바라보기만 했다. 여인은 탁자 위에 놓인 일곱 개의 등잔을 주시하면서 수시로 그것들을 움직여 놓고 있었다. 그녀는 천구(天樞)를 벌려 놓았다가 다시 천권(天權)을 천구 가까이 놓아 북두칠성이 더욱 가까워지도록 했다.
매초풍이 그것을 보고 말했다.
"아니, 틀렸어요."
그녀는 북두칠성으로 다가가 천권과 천구를 바로잡아 놓은 다음 다시 천권을 벌려 놓아 옥형(玉衡), 개양(開陽), 요광(搖光) 세 별이 이어지도록 했다. 매초풍이 이렇게 배열해 놓으니 그제야 북두칠성처럼 보였다.
"이 칠성 중에선 천권이 중심이지만, 그것은 어두운 별이라서 그다지 밝지 못하지요. 당신이 배열한 건 틀려요."
여인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네가 누구기에 성진(星陣)을 배열할 줄 아느냐?"
그러더니 매초풍의 멱살을 쥐고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지? 단황 나으리가 보낸 고수임이 분명하구나."
매초풍은 웃으면서 대꾸했다.
"그건 오히려 제가 묻고 싶어요. 당신은 입만 벌리면 단황 나으리가 어쩌구 하는데, 바로 대리 황제 단지흥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여인은 매초풍이 단황 나으리를 단지흥이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 속으로 깜짝 놀랐다. 여인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넌 대체 누구냐?"
매초풍은 가볍게 대답했다.
"전 흑풍쌍살 중의 철시 매초풍이에요."
여인은 놀란 눈으로 두 사람을 살펴보면서 말했다.
"철시, 동시? 너희들 이름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뭘하려는 거지?"
매초풍은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어서 한참 망설였다.
그러자 여인이 비웃는 투로 말했다.
"네 얼굴을 보니 사실대로 말할 수 없는 모양이로구나."
그녀는 몸을 돌리더니 상자에서 죽편 한줌을 꺼냈다. 그 죽편은 그녀가 숫자를 계산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의자에 앉아 두 손을 잽싸게 놀리면서 죽편으로 무언가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매초풍 부부는 구석에 놓인 나무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자는 척하고 있었다.
그때 한 사내가 들어왔다. 그가 여인에게 말했다.
"주인님께서 분부하신 일을 하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우선 구 방주 일인데요, 그자의 행방을 알아냈습니다. 그 사람은 원계의 철장봉 아래서 철장방의 방주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무예가 대단하므로 주인님께서 친히 나서신다 해도 그를 이긴다고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다른 한 사람에 대해서도 알아보았습니다. 그 사람의 수중에 《구음진경》이 있는데, 지금은 도화도에 갇혀 있습니다. 제가 도화도에 찾아갔는데, 도화 도주 황약사가 그를 내보내지 않아서 만나 볼
수가 없었습니다."
여인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자기가 찾는 사람이 도화도에 갇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물었다.
"말해 봐. 황약사가 그 사람을 못살게 군다던가?"
"그 사람은 황약사 때문에 두 다리가 부러져서 동굴 속에 갇혀 있답니다."
"저런, 다리가 부러진 사람을 동굴에 팽개치다니!"
여인이 소리를 지르자 그 사나이는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했다.
여인이 머리를 돌려 한쪽에서 자는 척하고 있는 매초풍과 진현풍을 흘끗 보더니 웃으면서 말했다.
"동시와 철시 저 두 사람이 황약사의 제자들이란 걸 알고 있지. 저들이 황약사에게서 도망쳐 나왔다는 것도 말이다. 귀한 손님이 내게 왔구나."
사나이는 기쁜 기색으로 말했다.
"주인님, 저 사람을 길잡이로 쓸 수 있다면 도화도로 가실 수 있습니다."
그러자 여인이 대답했다.
"왜 안 되겠느냐? 저자들을 길잡이로 삼겠다!"
여인이 다가오더니 진현풍을 잡아 일으켰다.
"빨리 일어나!"
"왜 이러십니까?"
"너희들이 날 도화도까지 데려다 줘야겠다. 황약사와 싸울 생각이야."
그 말에 매초풍이 그녀를 보며 깔깔깔 웃기 시작했다.
"아유, 우스워라! 당신이 우리 사부님과 싸운다구요?"
진현풍도 기가 막힌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가소롭다는 듯한 두 사람의 웃음이 그치자 여인이 냉랭하게 말했다.
"그래, 실컷 웃었느냐?"
그녀는 갑자기 두 장을 날려 진현풍 부부의 안면을 강타했다.
진현풍은 처음에는 그럭저럭 대적할 수 있었으나 10합이 지나자 자신이 그녀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데 그녀의 법수가 언젠가 한 번 본 것처럼 눈에 익었다.
매초풍이 남편에게 말했다.
"저 여자의 법수는 섬에 있던 그 사람이 하던 것과 같아요!"
진현풍은 그제야 이 여인이 도화도에 있는 노완동을 찾아가려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인이 소리를 질렀다.
"너희들은 나와 함께 도화도로 가야 해!"
여인의 무예도 대단했지만 매초풍, 진현풍도 만만치 않았다. 두 사람이 최심장과 구음백골조의 법수를 사용하기 시작하자 여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혹풍쌍살, 너희들이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여인은 뒤로 훌쩍 물러서서 새된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밖에서 자그마한 여우 두 마리가 뛰어들어왔다.
여우들은 공중으로 훌쩍 뛰어오르더니 길다란 꼬리로 균형을 잡으면서 매초풍과 진현풍의 어깨에 매달려 마구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 동작이 너무나 민첩해 미처 피하거나 장을 날릴 틈도 없었다. 한편으로는 여인과 계속 대적해야 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그만 곤경에 빠지고 말았다.
여인은 코웃음치며 외쳤다.
"여우한테 물리면 아무도 살아날 수 없다!"
구석에 서서 이들을 지켜 보던 사나이가 입을 열었다.
"주인님, 이들은 잔인하고 악독한 짓을 수없이 저지른 악인들입니다. 살려 두면 반드시 천하의 영웅들을 해칠 것입니다."
그 말에 여인이 대꾸했다.
"나도 알아. 하지만 천하의 영웅들이 나와 무슨 상관이라더냐? 내가 도화도에 가는 걸 도와주기만 하면 이들을 살려 줄 것이다."
그러자 그 사나이도 소리를 지르면서 흑풍쌍살에게 덤벼들었다. 매초풍과 진현풍은 그들 두 사람과 맞붙어 격렬하게 싸웠다. 상황이 점점 불리해지자 매초풍이 다급하게 외쳤다.
"병신 같으니! 빨리 최심장으로 저들을 없애 버리지 않고 뭐해요?"
진현풍 역시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여인의 무예가 워낙 출중해서 막아내기만도 급급할 지경이었다. 매초풍이 한창 싸우고 있는데 여우가 눈앞을 휙 지나가더니 갑자기 머리가 몹시 아파서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매초풍이 쓰러지는 것을 본 여인이 손을 멈추고 진현풍을 바라보았다.
진현풍은 그제야 아내가 쓰러진 것을 보고 대경실색하여 부르짖었다.
"망할 년 같으니, 이까짓 걸로 쓰러지다니 말이 돼? 일어나, 빨리 일어나라구!"
진현풍은 매초풍을 거칠게 흔들었다.
"여보, 정신차려!"
하지만 매초풍은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진현풍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녀는 진현풍을 뚫어지게 보다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부님, 잘못했어요……."
마음속으로 늘 황약사를 그리고 있었지만 평소에는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했던 매초풍이었다. 그런데 여우 독이 퍼져서 정신이 혼미해지자 저도 모르는 사이에 가슴에 묻은 말을 한 것이다.
"아직도 절 나무라시는군요. 제 다리의 힘줄을 끊어 놓든 죽이든 마음대로 하세요. 사부님 곁에 있게만 해 주신다면……."
그녀를 바라보는 진현풍의 마음은 너무나 쓰라렸다. 그 역시 아내가 여전히 사부님을 잊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안타깝게 매초풍을 불렀으나 그녀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도화도엔 절대로 가지 않겠어요. 차라리 죽여 주세요."
여인은 진현풍에게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너희들에겐 나와 함께 도화도로 가는 길밖에 없다. 난 황약사와 승부를 내야 해."
매초풍이 여전히 황약사를 그리며 뭐라고 중얼거리자 여인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진현풍을 바라보았다.
"동시, 보아하니 너 혼자 저 계집을 좋아한 모양이다. 철시의 마음속엔 너란 사람이 아예 없는 거야."
진현풍은 한참이나 여인을 쏘아보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말해 주시오. 저 여우한테 물리면 사람이 죽는 거요?"
여인은 음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말해 주지. 난 운남의 대리국 왕비다. 이름은 신산자(神算子) 영고(瑛姑)라고 하지. 네가 저 계집을 살리고 싶으면 나와 함께 도화도로 가야만 한다."
"아까 당신이 사부님과 싸우던 사람을 구하러 도화도에 갈 것이란 말을 들었소. 하지만 그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오. 도화도에서 내 사부님과 싸워 이기고 나온 사람은 이제까지 하나도 없었소."
"네가 무슨 소릴 하든 난 도화도에 가야 해."
"나와 집사람은 당신이 찾는 노완동과 사부님이 싸우는 것을 보고 오는 길이오. 그분 역시 무예가 뛰어나긴 하지만 우리 사부님의 적수가 되진 못했소."
진현풍은 도화도에서 본 것을 영고에게 모두 말해 주었다.
그러자 영고가 말했다.
"그럼 황약사와 싸우지 않고 그 사람을 구해 내면 되지 않겠느냐?"
"그것도 불가능한 일이오. 싸움이 끝난 후 그 사람이 사부님께, 둘이 싸워서 자기가 이기지 않으면 절대로 동굴에서 나가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걸 들었소. 자기가 한 맹세를 스스로 저버릴 수 있겠소?"
영고는 진현풍의 말에 장탄식을 했다.
"자기 맹세를 쉽게 저버리는 사람이라면 지금 같은 일도 없었을거야."
이렇게 말하는 영고의 얼굴에 발그레한 홍조가 어렸다.
그녀는 진현풍에게 단약 반쪽을 주어 매초풍에게 먹이게 했다. 잠시 후에 매초풍이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여인과 진현풍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천천히 물었다.
"내가 어떻게 됐던 거죠?"
진현풍은 대답이 없었고, 영고는 차디찬 눈길로 매초풍을 보며 말해 주었다.
"너에게 단약 반쪽을 먹였으니 보름 동안은 더 살 수 있다. 내말대로 도화도까지 같이 가주면 해독약을 주겠다."
진현풍은 자기 무릎을 베고 누워 있는 매초풍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결정을 따르겠다는 뜻이었다. 매초풍은 안타까운 얼굴로 남편을 바라보았다.
매초풍은 기운 없이 말했다.
"사모님께서 세상을 뜨시고 이제 사부님 혼자 남았어요……. 얼마나 외롭고 허전하시겠어요……."
매초풍이 다시 황약사 이야기를 꺼내자 진현풍의 마음속엔 오만가지 생각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그는 매초풍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우린 다신 그곳에 가면 안 돼요……."
진현풍은 다급하게 말했다.
"여보, 하지만 당신은……."
그는 차마 말끝을 맺지 못했다.
매초풍은 힘없이 웃었다.
"도화도에 가지 않으면 내가 죽을 테고, 그러면 당신 혼자 남게 된다는 말을 하려는 거죠? 그래도 거기엔 갈 수 없어요."
매초풍이 입으로는 욕설을 퍼붓지만 사실은 더없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아는 진현풍은 그만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물론 그녀가 황약사를 잊지 못하고 있긴 하지만, 두 사람은 이 세상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친구이자 동반자였던 것이다.
진현풍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결연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이 죽는다면 나혼자 살아 뭣하겠소?"
두 사람을 바라보던 영고는 고개를 떨구었다. 자신과 노완동 역시 이들처럼 서로를 끔찍이 사랑하는 사이였다. 비록 오랫동안 함께 지내진 못했지만, 그들의 사랑도 흑풍쌍살 못지않았다. 그런데 자신의 사랑 때문에 어찌 이들의 사랑을 짓밟는단 말인가. 영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들 부부에게 말했다.
"어서 떠나게. 도화도로 데려다 달라고 하지 않을테니."
두 사람은 뜨락으로 나왔다. 매초풍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영고를 바라보았다.
"선배님께 한 가지 말씀드릴 게 있어요."
영고는 말없이 서서 매초풍의 말을 기다렸다.
"도화도에 가시거든 우선 그곳에 있는 기문환진(奇門幻陣)을 공략하셔야 해요. 그 일에 성공한다면 노완동 선배님을 구하는 건 어렵지 않을 거예요. 대신 기문환진을 공략하지 못하면 노완동 선배님께 커다란 재난을 안겨 줄 거예요."
영고는 두 사람을 바라보면서 태연히 말했다.
"그런들 어떻겠어? 두 사람이 함께 죽으면 그만이지."
매초풍은 잠깐 망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쉽게 죽을 수도 없게 될까 봐 그러는 거예요. 두 분 선배님께서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는 어려운 지경에 빠질까 봐요."
영고는 매서운 눈초리로 허공을 쏘아보며 말했다.
"그 사람이 고통을 당하도록 내가 내버려둘 것 같아?"
매초풍은 생각에 잠긴 영고를 남겨 두고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잠시 후에 영고가 그들을 불러 세우더니 품에서 환약 한 개를 꺼내 주었다.
"이 약을 먹으면 병이 재발하지 않을 거야."
진현풍과 매초풍은 그녀에게 수없이 머리를 조아렸다.
영고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세상 사람들은 자네들이 천하에 악인이라고들 하지만, 자네들처럼 서로를 사랑하는 게 가장 귀중한 거야. 난 자네들의 사랑을 따라가지 못해……."
그녀는 말끝을 흐리더니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매초풍과 진현풍이 소택지를 벗어날 무렵엔 날이 훤히 밝아 오고 있었다.
며칠 후, 아침부터 30리를 걸은 두 사람은 길 옆에 있는 작은 식당에서 요기를 했다. 여우한테 물린 뒤 매초풍은 후유증 때문인지 식욕이 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밥도 몇 술 뜨지 않고 죽도 절반쯤 마시다가 그만두었다.
두 사람이 막 떠나려고 하는데 다섯 사람이 떠들썩하게 식당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식당에 들어와서도 계속 떠들어댔다.
그중 한 사람이 큰소리로 말했다.
"주인, 어서 밥을 가져오라구!"
주인이 반찬 몇 접시와 비빔밥을 내오자 그들은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한 사람이 밥을 먹으며 말했다.
"흑풍쌍살이 멀리 가진 못했을 테니 우리 형제가 찾아낼 수 있을 거예요. 그 연놈을 찾아내서 우리가 힘을 합쳐 죽여 버리자구요."
다른 사람이 말을 하려고 입을 벌렸는데 말하기가 무척이나 힘들어 보였다. 얼굴이 새빨개지면서 한참이나 애를 썼지만 "아……아니……."라고 말한 게 고작이었다.
다른 사람이 가슴을 치며 재촉했다.
"셋째, 좀 빨리 말하려무나!"
다른 사람이 껄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런다고 쟤 말이 빨리 나오겠수?"
그러자 다른 한 사람이 셋째에게 말했다.
"셋째야, 그러지 말고 노래를 부르렴!"
그러자 셋째는 정말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흑풍쌍살을 쉽게 생각하면 안 된다네
최심장을 소홀히 여기다간 큰일나고
구음백골조는 머리를 긁히면 뇌수가 흘러 나오지
그들을 발견하면 숨돌릴 틈도 없이 해치워야 한다네…….
나머지 네 사람은 그의 노래를 듣고 한결같이 머리를 끄덕였다.
매초풍 부부가 보기엔 한없이 멍청한 놈들 같기도 하고 미친놈들 같기도 했다. 성질 같아선 당장 달려들어 깨끗이 처치해 버리고 싶었으나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여우한테 물린 매초풍이 아직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 다섯 사람은 건강 오의란 자들이었다. 최근에 동시, 철시라는 흑풍쌍살이 사람들을 파리 잡아죽이듯 한다는 소문을 들은 그들은, 이 기회에 이름을 날리고 싶어 급히 흑풍쌍살을 찾아 나선 것이었다. 흑풍쌍살에 대해 아는 거라곤 그들이 젊은 남녀라는 것밖에 없으면서도 이렇게 무작정 찾아 헤매고 있었다.
다섯 사람 중 가장 나이 들어 보이는 자가 입을 열었다.
"흑풍쌍살은 황 괴물이 가장 아끼는 제자들이었다는군. 자기 제자의 허물이 어느 정도든, 황 괴물은 다른 사람이 자기 제자에게 손대지 못하게 한다는 거야. 자기가 직접 처벌하겠다는 거지. 그러니까 흑풍쌍살을 만나면 쥐도 새도 모르게 빨리 해치워야 해. 황 약사가 알면 우릴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그러자 둘째가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형님. 황약사란 자가 귀머거리나 소경이 아닌 다음에야 왜 그 소식을 듣지 못하겠소? 형님이 흑풍쌍살을 죽여 강호에서 이름을 날리면 자연히 황약사의 귀에도 들어갈 거란 말이에요. 강호의 협의 영웅들이 흑풍쌍살을 죽여 버리겠다고 말하는 것도 들었을 거구요. 어쨌거나 우리가 흑풍쌍살을 처치했다는 소문이 그자의 귀에 들어가면 황약사는 우리들을 찾아 복수할 거예요."
그러자 넷째가 두려운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황약사가 이 일을 알면 재미 없을텐데."
말더듬이 셋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아……아니……."
나머지 사람들은 셋째가 꺽꺽거리며 하는 말을 듣더니 모두 기뻐서 펄쩍 뛰었다.
"옳아! 우리가 했다는 소문만 안 내면 돼! 흑풍쌍살이 죽었다는 소문만 내고 말이야. 흑풍쌍살을 없애는 건 천하가 다 바라는 일이니 사람들이 다 알게 해야 된다구!"
다섯 사람은 이런 얘기를 주고받으며 가슴을 두드리고 발을 굴러대며 기뻐했다.
매초풍은 머리를 숙인 채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대단히 언짢았다. 그들이 처음에 황약사의 제자가 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사부님을 비웃기는 했지만 감히 도화도 사람들과 맞서는 자는 없었다. 누구나 황약사의 무예를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사부님의 보호라는 그늘이 없어지니 사람들마다 그들 둘을 죽이려고 안달을 하는 것이다.
매초풍은 갑자기 몸을 일으켜 그들에게 다가가 읍하면서 말했다.
"제가 들으니 흑풍쌍살을 찾으신다구요?"
맏이가 휘둥그래진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래, 낭자는 그 흑풍쌍살을 아오?"
매초풍은 가볍게 웃었다.
"알다뿐인가요? 제가 여러분을 안내해서 흑풍쌍살을 찾아 드리지요."
진현풍도 다섯 사람들한테 다가가 예를 올렸다.
"흑풍쌍살을 찾자면 힘들 것도 없지요."
넷째가 놀란 어조로 진현풍에게 물었다.
"당신이 흑풍쌍살을 알고 있소?"
진현풍은 사나운 눈길로 그를 노려보았다.
"내가 동시 진현풍이고, 이 여자가 철시 매초풍이오."
그 말을 들은 다섯 사람은 배를 움켜쥐고 웃기 시작했다. 사람을 그토록 잔인하게 죽이고도 눈 한 번 깜짝하지 않는 악마 같은 흑풍쌍살은 당연히 추악하게 생겼을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토록 젊고 아름다운 남녀가 흑풍쌍살이라고 자처하니, 농담을 해도 좀 과하지 않은가 말이다.
넷째가 여전히 웃음을 흘리면서 말했다.
"당신들이 흑풍쌍살을 찾아 주면 되지, 무슨 농담을 그리 하는 거요?"
진현풍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도 믿지 않으니 어찌란 말인가?
건강 오의는 진현풍과 매초풍을 따라 식당을 나왔다. 다섯 사람은 길을 가면서도 여전히 왁자지껄 떠들어댔다.
한참을 걷다가 그들은 멀리서 흰 용처럼 쏟아져 내리는 폭포를 보았다. 폭포는 마주선 두 봉우리 사이로 떨어지고 있었는데, 크기도 엄청나고 소리 또한 굉장했다. 일곱사람은 폭포를 향해 걸어갔다.
폭포 아래 소에서 한 남자가 알몸으로 목욕을 하고 있었다. 잠시 후 그 사람은 폭포수가 내리꽂히는 큰 바위 위로 올라갔다. 떨어져 내리는 물살이 워낙 세서 바위에 올라서기조차 쉬워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세찬 물줄기를 맞아 연신 비틀거리면서도 고집스럽게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물 위에 떠있는 암초에 서서 책을 읽고 있었다.
맏이가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여보, 한 가지 좀 물어 봅시다. 혹시 흑풍쌍살이 어디 있는지 아시오?"
그 사람은 머리를 들어 일행을 살펴보더니 대답했다.
"당신도 알고 있으면서 뭘 그러시오?"
맏이는 그 말을 듣고 속으로 아주 탄복했다.
'이 사람이 읽고 있는 책에 그 일이 씌어 있는 모양이구나. 우리 일을 대뜸 알아 맞추다니 참으로 대단하다.'
맏이는 그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다시 물었다.
"우리 중에 흑풍쌍살을 아는 이가 있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소."
이들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에 알몸으로 폭포 밑에 서 있던 사람이 옷을 입으면서 걸어왔다. 그는 가까이 다가와 이들 일행을 천천히 둘러 보았으나 아무 말이 없었다. 매초풍과 진현풍은 이 두사람을 자세히 살펴보고는 그들의 무예가 상당한 수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세찬 물살을 맞고 서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책을 읽던 사나이는 한 손에 책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책의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는데, 그 손가락의 변화가 아주 빠르고 다양하여 매초풍과
진현풍마저 그것을 똑똑히 볼 수 없었다.
매초풍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두 분께서는 뭘 하시는 분인가요?"
그러자 책을 읽던 사람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난 선비고, 저 사람은 농부지요."
매초풍은 더욱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선비와 농부라면 신분으로 보아 서로 어울릴 처지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선비와 농부는 더 이상 이들을 상관하지 않았다. 농부는 돌 위에 앉아 폭포를 바라보았고, 선비는 머리를 저으면서 시구를 읊기 시작했다.
일곱 사람은 다시 발길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작은 다리에 이르렀는데, 다리 한가운데에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 다리는 아주 좁아서 사람이 거기에 앉아 있으면 지나갈 수가 없었다. 허리에 도끼를 차고 있는 그는, 왼손에 한줌의 나뭇가지를 쥐고 오른손으로 그것을 한 개씩 집어 멀리 던지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건강 오의들은 별다른 느낌을 갖지 못했지만 매초풍과 진현풍은 깜짝 놀랐다. 나뭇가지를 던지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주 묘한 방법으로 나뭇가지들을 던졌는데,
그것들이 모조리 땅에 꽂혀 마치 아주 작은 나무들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매초풍과 진현풍은 서로 마주보다가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선생은 대체 누구십니까?"
그러자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틀렸어, 모두 틀렸단 말이야."
"무엇이 틀렸단 말씀입니까?"
"난 선생이 아니라 나무꾼이오."
그제야 두 사람은 언젠가 황약사가 들려주었던 말이 생각났다. 강호에 아주 신기한 재주를 가진 어부, 농부, 나무꾼, 선비 네 사람이 있는데, 대리 황제 단지흥의 호위병이라는 것이었다.
나무꾼이 두 사람에게 물었다.
"당신들은 이곳에 뭣 하러 왔소?"
말참견을 못해 입이 근질거리던 건강 오의의 맏이가 얼른 나섰다.
"우린 흑풍쌍살을 찾고 있는데, 혹시 그 놈들을 보지 못하셨소?"
그러자 나무꾼은 껄껄 웃기 시작했다.
"물론 보았소. 당신도 머리만 돌리면 볼 수 있을 거요."
그러자 넷째가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아니, 도대체 어디 흑풍쌍살이 있다는 거요?"
나무꾼은 웃으며 매초풍과 진현풍을 바라보았다
"매초풍, 진현풍, 잘 있었나?"
매초풍과 진현풍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들은 어부와 농부, 나무꾼, 선비가 모두 자신들이 누군지 알고 있으므로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제야 건강 오의의 맏이가 눈이 휘둥그래져서 물었다.
"당신들이 정말 흑풍쌍살이오?"
진현풍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내가 아까 그렇게 말하지 않았소?"
넷째가 싸늘한 어조로 꾸짖었다.
"네 놈이 진심으로 알려 주지 않는데 우리가 어떻게 믿는단 말이냐?"
매초풍이 비웃으며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알려 주어야 진심인 거요?"
그 순간 건강 오의의 다섯 형제들이 흑풍쌍살에게 덤벼들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진현풍은 그들을 쏘아보기만 할 뿐 손을 뻗지 않았다. 다섯 사람이 진현풍에게 달려드는 것을 보고 나무꾼이 소리쳤다.
"조심하게!"
그러나 이미 늦었다. 맏이가 주먹으로 진현풍의 가슴을 내질렀고 둘째가 철각으로 등을 갈겼으며 셋째, 넷째, 다섯째가 그의 머리에 장을 날리고 있었다.



제29장 남제의 자비심
건강 오의의 주먹다짐은 배합이 아주 밀접하고 상하 전후가 잘 조응되는 것이었다. 진현풍이 미처 손쓸 틈도 없이 다섯 형제들한테 둘러싸이니 형세가 금방 험악해졌다.
그것을 본 매초풍이 새된 소리를 지르면서 손을 내밀어 말더듬이 셋째를 움켜쥐었다.
놀란 셋째가 소리를 질렀다.
"계……계……계집……이……."
셋째는 무슨 말을 하려고 꺽꺽거리면서 팔을 휘둘러 매초풍을 막았으나, 매초풍은 다섯 손가락으로 그의 팔을 꽉 움켜쥐었다. 셋째는 비명을 지르면서 몸을 뒤로 훌쩍 날려 한 장 남짓 물러났다. 팔을 보니 옷이 찢어지고 살을 뚫고 다섯 개의 구멍이 나 있었다. 그것을 보자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면서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셋째가 비명을 지르자 건강 오의 네 사람은 진현풍을 버려 두고 매초풍에게 덤벼들었다. 매초풍은 그것을 보고 피식 웃었다. 그자들이 자기에게 덤벼드는 틈에 진현풍이 손을 쓸 거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진현풍은 둘째의 머리에 황급히 장을 날렸다.
그때 어디선가 염불 소리가 들려 왔다. 낮고도 우렁찬 염불 소리가 사람들의 가슴속을 파고들어 전율을 느끼게 했다. 그 순간 누군가가 진현풍의 눈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진현풍의 장이 둘째의 머리에 떨어지려는 찰나 '팍' 하는 소리와 함께 그 손이 진현풍의 장을 물리쳤다. 손을 내민 사람은 우렁찬 목소리로 또 염불을 외웠다.
"나무아미타불!"
모두들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는 키가 크고 몸이 야위었으며 얼굴이 아주 부귀한 상이었다. 노란 승복을 입었고, 머리를 정수리에 틀어올리고 승모를 쓰고 있는 품이 출가한 중처럼 보였다.
진현풍이 비틀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당신은 누군데 우리 일에 끼여드는 거요?"
진현풍은 어지간히 당황해 있었다. 자기의 장 한 번이면 사람의 몸뚱이는 물론 바위도 박살이 나는데, 이 노승이 손을 내밀어 그것을 막는 바람에 건강 오의의 둘째는 무사하고 오히려 자신이 비틀거린 것이다. 실로 이상한 일이었다.
노승이 두 손을 모아 쥐고 예를 올리며 말했다.
"흑풍쌍살, 죄과가 이미 너무 많으니 더 이상 죄를 짓지 말게. 자꾸 죄를 짓다가는 그 업보로 악과를 자초하게 될 것이야."
매초풍은 그 사람이 대리 황제 단지흥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진현풍이 다시 소리질렀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가 껄껄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또 사람을 죽이려고 나쁜 마음이 꼬리를 쳐드는군. 보아하니 그대들의 손에 핏자국이 가득한데 오늘 날 만난 건 하늘의 뜻인 게야. 불조께선 자비를 말씀하셨네. 내가 자네들의 무예를 폐할 테니 다음엔 가고 싶은 곳으로 가게."
남제는 자비로운 눈빛으로 매초풍과 진현풍을 응시했다.
그들 두 사람은 남제의 자비롭고도 위엄 있는 기세에 눌려 새삼 자신들의 죄를 뒤돌아보았다. 그동안 최심장과 구음백골조로 죄없는 무수한 목숨을 해친 생각을 하면 누구 손에 죽든 죽어 마땅한 죄였다. 무예를 폐하는 것쯤은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다.
남제가 두 사람을 데리고 길가의 자그마한 집으로 들어가자 네 명의 호위병이 그들을 따라 들어갔다.
집 안으로 들어선 남제가 손가락을 내밀어 매초풍의 몸을 가볍게 짚자 그녀의 공력이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매초풍은 눈을 꼭 감은 채 순순히 따랐다.
"이상한 일이군."
남제가 중얼거렸다. 매초풍의 미목(眉目) 사이를 들여다보던 그는 붉은 줄 몇 갈래가 화염처럼 환하게 비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진현풍을 보니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남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기색을 본 매초풍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희 부부를 용서해 주시는 겁니까?"
남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자네들은 이미 중독되었어. 그러니 무공을 폐하는 게 문제가 아니란 말일세. 자네들은 일시삼각(一時三刻)을 넘기지 못할 걸세. 영호단(靈狐丹)의 독에 중독되었군."
매초풍 부부는 깜짝 놀랐다. 여우에 물린 매초풍에게 해독약을 준 영고는 그들 부부에게 약을 먹은 후 보름 동안은 부부가 동침하지 말라는 말을 잊고 해주지 않았었다. 동침을 하면 그 독이 남편에게까지 전해져 결국 둘 다 죽고 마는 것이다. 영고의 처소에서 빠져 나온 두 사람은 동침을 자제하기는커녕 하루도 빠짐없이 일을 치렀다.
남제의 말을 들은 두 사람은 삽시에 마음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매초풍은 남편에게 소리쳤다.
"날 따라 사부님을 배신하고 도화도에서 뛰쳐나오더니 이제는 죽게 되었군요! 옳지 못한 일을 거들어 준 벌을 받은 거예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울긴 왜 울어! 같이 죽으면 그만이지. 우리가 죽으면 세상 사람이 모두 좋아할 거야."
두 사람은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여보, 도화도에서 어느 날 당신이 나한테 복숭아 한 개를 따주었었죠. 그 복숭아는 참으로 크고 붉었어요. 그날 밤 바로 그 복숭아 나무 아래에서 내가 당신에게 꼭 안아 달라고 했었죠. 지금 도화도엔 복숭아가 한창 열리고 있을 테죠?"
진현풍은 매초풍이 또 헛소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마음이 다급해졌다.
염불을 외우며 두 사람을 내려다보던 남제가 그들 곁에 앉아 해독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 옆에 서 있던 어부, 나무꾼, 농부, 선비 네 사람이 정색을 하며 남제를 말렸다.
"폐하, 안 됩니다!"
선비가 나섰다.
"폐하, 노독물 구양봉이 올 시간이 됐습니다. 만일 폐하께서 손수 흑풍쌍살을 구하시다가 노독물이 찾아온다면 상황이 좋지 않을 것입니다. 조금 더 생각해 보십시오."
남제가 그들 네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노독물 때문에 사람이 죽어 가는 걸 뻔히 보고도 구해 주지 말아야 한단 말이냐?"
그 선비가 한걸음 나서서 읍을 하며 말했다.
"정 그러시다면 소인이 황비님께 가서 해독제를 구해다가 이들을 구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남제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럴 시간이 없다. 네가 아무리 빨리 갔다와도 이들에겐 늦어."
남제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손가락으로 매초풍과 진현풍의 둥에 있는 대혈을 가리켰다. 그의 일양지는 독을 없애는 데 커다란 효험이 있었다.
매초풍은 벌써 의식이 혼미해지고 있었으나 진현풍은 정신이 말짱했다. 남제가 일양지로 그들의 척추에 있는 대혈을 가리키자 즉시 척추의 혈도에서 난류가 미려혈을 뚫고 중누혈을 지나 두 팔에 이르더니 몸이 아주 시원하면서도 훈훈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남제의 네 호위병은 이럴 때 구양봉이 나타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남제와 진현풍, 매초풍이 치료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을 때 먼 곳으로부터 바람 소리가 들려 오더니 그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누군가 번개같이 달려오며 길게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휘파람의 주인공은 눈 깜짝할 사이에 다가오더니 요란한 소리로 웃어대기 시작했다. 그 웃음 소리는 듣는 사람의 피를 거꾸로 치솟게 하는 것 같아 견디기 어려웠다.
서독 구양봉이 쉰 목소리로 커다랗게 외쳤다.
"남제, 서독이 왔으니 어서 문을 여시오!"
네 호위병은 깜짝 놀라 남제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그가 치료하는 손길을 거두고 구양봉과 맞서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남제는 태연한 기색으로 매초풍과 진현풍에게 손가락을 내밀고 있을 뿐, 구양봉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구양봉이 다시 소리를 질렀다.
"남제, 도대체 언제 나올 셈이오?"
그래도 아무 대답이 없자 구양봉은 또 소리를 질렀다.
"감히 이 노독물 구양봉을 멸시하다니! 분해서 견딜 수가 없구나! 당신이 정 안 나오면 내가 들어갈 수밖에!"
그 순간 두 눈을 감고 있는 남제의 머리 위로 열기가 뿜어 나오고 있었다. 매초풍과 진현풍 역시 얼굴이며 목덜미, 심지어 손가락 끝에서까지 땀이 솟아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마치 물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처럼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구양봉은 여전히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남제, 이 노독물이 이렇게 한없이 기다리고 있는데 당신은 집안에서 처첩들을 끌어안고 재미를 보는 거요?"
우당탕 하는 소리가 나더니 문짝이 떨어져 나가고 뒤이어 밀려드는 먼지와 함께 노독물 구양봉이 집 안으로 들어섰다.
구양봉이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네 호위병이 그를 둘러쌌다. 구양봉은 남제가 있는 쪽을 바라보더니 웃으면서 말했다.
"자기 앞도 못 가리면서 남을 구하겠다는 거요?"
구양봉은 남제에게 치료받고 있는 두 사람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는 마주 기뻐하며 또 입을 열었다.
"그날 술집에선 너희들을 살려 보냈다만 오늘은 절대 그러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그는 미친 듯이 웃어댔다.
매초풍 부부는 일이 틀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만일 남제가 손을 떼면 두 사람의 몸에 독이 퍼져 그 자리에서 죽거나 불구자가 될 것이었다.
남제의 네 호위병이 구양봉을 둘러싸고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구양봉의 무예가 대단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들은 저마다 병장기들을 꺼내 들었다. 어부는 갈고리가 달린 작대기를 들고 있었다.
긴 작대기 끝에 줄이 매어 있었고, 그 줄에는 금갈고리 몇 개가 달려 있었다. 그는 그 금갈고리로 구양봉을 걸어 당기려 했다. 나무꾼이 손에 든 도끼를 휘두를 때마다 휙휙 하는 바람 소리가 났다. 농부는 호미를 들고 있었는데 그 호미 날이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어서 긁고 당기고 깎고 막는 둥 오구장검(吳鈞長劍)이나 구련창(鉤連槍)처럼 마음대로 법수를 부릴 수 있었다. 선비는 긴 피리를 들고 있었는데 갑자기 피리에서 한 마디가 더 빠져 나오더니 길이가 넉
자는 족히 되게 늘어났다. 긴 곤봉 같은 이 피리로 치고 때리고 부수고 누르기를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네 호위병은 구양봉이 두 사람을 치료하고 있는 남제에게 달려들까 봐 일제히 그를 공격했다.
그들을 보고 구양봉은 커다란 소리로 외쳤다.
"좋아, 네 놈들 넷의 무술을 합치면 남제의 절반 정도나 되는지 보자!"
구양봉은 여유를 부리며 장을 밀어 네 사람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선비에게 한 장을 먹이고 머리를 돌려 농부를 후려 갈기면서 한 발로는 나무꾼을 걷어차고 다른 한 발로 어부를 공격했다. 단번에 이 네 가지 동작을 조금도 빈틈없이 해내는 것을 보고 네 사람은 감탄했다.
"훌륭한 솜씨다!"
"그렇고말고! 이것도 안 되면 어떻게 노독물이라고 불리겠나?"
그는 천천히 왼손을 굽혔다. 아마 통벽장법(通臂掌法) 같았는데 이렇게 하면 팔이 몇 푼 정도 늘어나게 된다. 그는 이 늘어난 손을 뻗어 어부가 들고 있는 작대기의 줄을 잡았다. 구양봉이 손을 한 번 잡아채자 갈고리가 달린 줄이 날아가더니 농부가 들고 있는 호미에 가서 칭칭 감겼다.
이 순간 농부는 호미로 풀을 매듯이 구양봉을 긁으려고 하던 참이었는데 어부의 갈고리 줄이 호미에 감기는 바람에 그것을 풀 수가 없어 한동안 쩔쩔맸다. 선비는 피리 곤봉으로 구양봉을 치려 했으나 구양봉이 동작을 취하는 바람에 피리 곤봉이 나무꾼의 도끼와 맞부딪쳤다. 땅!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서고 말았다.
구양봉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남제 곁까지 날아와 손바닥을 남제의 둥에 대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남제, 당신은 이제 죽은 목숨이오. 화산에서 다음 무예 시합을 할 땐 경쟁자가 한 사람 줄어들겠군!"
단지흥의 목숨은 구양봉의 손에 달린 셈이었다. 노독물 구양봉은 변덕이 심하고 심보가 사나워 남의 목숨 따위는 전혀 아까워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네 명의 호위병이 시간을 끌어 준 덕분에 매초풍과 진현풍의 몸에 있는 여우독을 제거한 남제는 한결 홀가분한 기분이 되어 있었다. 그는 태연히 입을 열었다.
"노독물, 자네가 날 죽이는 데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진 않을 걸세."
구양봉이 징그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한 가지 묻겠는데, 왕중양이 당신에게 《구음진경》을 전수해 주었소?"
남제는 머리를 숙이고 잠시 생각하고 나서 대답했다.
"그렇다네."
단지흥은 속으로 생각했다.
'왕중양은 애인 임조영을 따라 죽으려고 마음먹었었지. 그 사람은 《구음진경》을 나한테 전수해 주려 했었지만 만일 내가 그때 전수받았다면 그 사람은 죽었을 게야. 난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에게서 선천공(先天功)만을 배웠었지. 하지만 선천공은 그가 《구음진경》을 습득한 이후에 알게 된 것이므로 《구음진경》을 전수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야.'
구양봉은 희희낙락해서 말했다.
"단황 나으리, 난 당신을 죽이진 않고 그 무공만 폐하겠소. 당신을 불구자로 만들겠단 말이오. 단 당신이 내게 《구음진경》의 공력을 알려 주면 살려 주겠소."
남제는 가볍게 탄식하며 대답했다.
"노독물, 그래 봤자 자넨 실망할 걸세. 난 《구음진경》에 있는 무예를 알지 못하니까."
"일국의 임금이라는 사람이 금방 그토록 다른 말을 할 순 있는 거요? 당신은 방금 《구음진경》에 있는 무공을 배웠다고 했잖소?"
"중양진인은 살아 있을 때 《구음진경》에 있는 무예를 내게 가르쳐 주려 했었지. 그런데 난 그 후 그 사람이 죽어 버릴까 봐 대답하지 않고 선천공만 배웠다네."
구양봉은 실망하고 말았다. 그는 남제를 죽일 것인가, 살릴 것인가 하고 속으로 망설였다.
그때 누군가 문 밖에서 소리를 질렀는데 여인의 목소리였다.
"단황 나으리, 문을 열어 주세요!"
네 호위병은 구양봉이 남제에게 손을 쓸까 봐 그의 등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을 들여놓으면 자기들한테 유리할 듯 싶어 농부가 문을 열어 주었다. 들어온 사람은 황비 영고였다.
"황비 마마시군요!"
농부가 그녀에게 읍하면서 말했다.
'내가 주백통을 구해 내지 못하면 그는 도화도에서 죽을 거다. 어쩌면 좋단 말인가?'
암만 생각해 보아도 자기가 도화도에 가면 죽으러 가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남편인 남제와 함께 가면 황약사도 할말이 없을 것이었다. 그녀가 주백통을 사랑하게 된 것은 운남 대리사에서 황비로 있을 때였다. 이제 와서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남편에게 그런 도움을 청하자니, 말을 꺼내기가 부끄러운 일이지만 일이 워낙 화급하므로 이렇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집 안에 들어서고 보니 눈앞에 엉뚱한 상황이 벌어져 있었다.
구양봉이 계속 남제를 다그쳤다.
"남제, 끝까지 응하지 않을 셈이오?"
남제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대답이 없었다.
영고는 매초풍과 진현풍, 그리고 남제와 구양봉을 보고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구양봉에게 다가가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그 유명한 노독물이신가요?"
구양봉이 그녀를 흘깃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렇소만."
영고가 살짝 웃음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아니, 당신이 노독물 구양봉일 리가 없어요. 구양봉이라면 이처럼 비신사적인 행동을 하지 않을 테니까요."
"내가 비신사적이란 말이오?"
"제 남편인 단황이 말하길 왕중양의 선천공과 노독물의 합마공이 천하에서 가장 유명하다더군요. 대리 단씨의 무예인 일양지공, 도화도 황약사의 탄지신공, 개방 방주 흥칠공의 강룡십팔장도 합마공을 따라가지는 못한다고 말이에요. 그런데 그런 고명한 인물이 어떻게 상대방이 손을 쓸 수 없는 틈을 타서 공격하겠어요? 이 소식이 알려지면 모든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게 뻔하지요."
구양봉이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이 바로 남제를 싫어한 황비였군. 정말 대단한 여인이오. 여인의 몸으로 감히 단황을 거절하다니……. 하하하! 그런데 이처럼 알뜰하게 남제를 생각하면서도 싫어한다니 이해가 안 되는군 그래. 아마 그게 헛소문인가 보오. 하하하!"
이때 단지흥 덕분에 여우독을 말끔히 씻어 낸 매초풍과 진현풍이 벌떡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진현풍이 구양봉을 보고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서독, 우선 나와 겨뤄 봅시다!"
구양봉은 비웃는 투로 말을 뱉었다.
"네 놈이 감히 나의 상대가 될 것 같으냐?"
매초풍과 진현풍이 구양봉과 한판 붙으려 할 때 밖에서 누군가 큰소리로 외쳤다.
"여보게 어부! 이 폭포에 금으로 만든 어린애가 있다던데, 그게 정말인가?"
그 목소리를 들은 구양봉의 정신이 산란해졌다. 그는 구양봉이 아주 잘 아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제일 큰 골칫거리인 사람이었다. 집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남루한 옷차림을 하고 둥에 조롱박을 잔뜩 짊어진 개방의 방주 홍칠공이었다. 그는 손에 옥죽봉을 들고 성큼성큼 들어섰다.
집 안에 들어선 홍칠공은 구양봉이 남제의 어깨에 장을 대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소리쳤다.
"구양통, 너는 도대체 언제까지 사람 해치는 짓을 계속할 작정이냐?"
흥칠이 덤벼들자 구양봉이 무서운 소리를 지르며 그를 멈춰 세웠다.
"거기서 한 발자국만 더 나오면 남제의 목숨은 없을 것이다!"
흥칠공은 흠칫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구양봉이 의기양양하여 소리질렀다.
"이 거지야, 남제를 없앤 다음 너와 자웅을 겨루겠다!"
흥칠공은 한동안 망설이다가 남제의 호위병들에게 물었다.
"이보게, 자네들 혹시 가지고 있는 암기가 없나?"
어부와 나무꾼은 즉시 어디론가 날아갔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돌아왔는데, 두 사람의 소매 속에 아주 가는 죽통을 몇 개 감추어 가지고 왔다. 그들은 그것으로 구양봉을 겨누었다.
홍칠공이 물었다.
"그게 뭔가?"
어부가 대답했다.
"운남의 독벌렙니다. 만일 서독이 우리 단황 나으리한테 손을 대면 우린 이 벌레를 쏠 것입니다. 맛이나 보라지요."
흥칠공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좋아. 내가 소리를 지르면 그걸 쏘게. 구양봉이 장력을 휘두르는 순간 자네들도 그걸 쏘는 거야."
홍칠공은 여전히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건 별로 필요하지 않을 거야. 노독물이 심보가 사납긴 하지만 이 거지가 여기 있는 한 함부로 손을 쓰진 못할 테니까."
구양봉이 꽥꽥 소리를 질렀다.
"이 거지야!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홍칠공이 웃으며 대꾸했다.
"네 놈은 내가 잘 안다. 여긴 영고도 있고 나도 있고 대리의 사대 고수도 있다. 네가 남제에게 손을 대면 그 순간 넌 죽은 목숨이야. 그러니 마음대로 해 봐라."
구양봉은 잠시 머리 속을 굴렸다.
'남제처럼 죽는 걸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에게는 법수가 잘 안 통하니 단번에 죽지 않을지도 몰라. 게다가 흥칠의 말대로 남제를 죽여 버리면 이자들이 필시 내게 덤벼들텐데……. 내 목숨까지 걸고 남제를 없앨 수야 없지. 하긴, 서두를 필요 있나?'
홍칠은 구양봉이 잠시 주저하는 듯싶자 겁을 먹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다시 입을 열었다.
"네 놈이 황약사의 두 제자를 죽이면 내가 황약사에게 찾아가 다 일러바칠 거야. 나와 황약사가 힘을 합치면 너도 문제가 심각해질걸!"
그 말을 들은 구양봉은 놀랍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여 가슴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홍칠 하나 때문에 전세가 완전히 역전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남제를 살려 줘야 자기 체면이 서는 것 같았다. 그는 남제의 둥에서 손을 떼며 능청맞게 웃었다.
"저 거지의 청을 받아들이기로 하지."
구양봉은 즉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
사람들 모두 그가 문 밖으로 나가는 것을 지켜 보았다. 옷깃이 날리는 소리가 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그 소리마저 사라져 버렸다.
홍칠공은 천하의 다섯 고수 가운데 남제를 가장 존경하고 좋아했다. 그는 남제에게 공손히 읍을 했다. 그러나 매초풍과 진현풍을 보자 그의 얼굴에 노기가 치밀어 올랐다.
"너희들은 정말 한심한 것들이구나! 이 《구음진경》은 사마왜도(邪魔歪道)가 아니라 양생(養生)을 위한 거야. 어찌하여 그런 잔인한 무예로 죄없는 사람들을 해치고 다녔느냐?"
홍칠의 불 같은 기세에 눌려 두 사람이 감히 입을 열지 못하자 남제가 온화하게 물었다.
"매초풍, 이리 와서 말해 보아라. 무엇 때문에 그토록 지독한 법수를 익혔느냐? 열 손가락으로 사람의 머리를 깨뜨리다니……."
매초풍과 진현풍은 《구음잔경》하권에 있는 내용을 설명하면서 그들에게 자신들이 쫓기듯 그 무공을 익힌 까닭을 말했다.
《구음진경》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다섯 손가락에 힘을 주면 아무리 단단한 것이라도 부서진다. 적의 우두머리[首腦]를 깨뜨리면 썩은 흙처럼 구멍이 뚫리리라.>
적의 우두머리를 깨뜨리라는 말은 적의 요해처를 공격하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그것을 다섯 손가락으로 적의 머리를 부수뜨리라는 뜻으로 해석하고 무예를 연마할 때 꼭 그렇게 했던 것이다.
남제가 탄식하며 말했다.
"중양진인이 그 《구음진경》을 없애 버리려고 했을 때 난 이렇게 말했었네. '그 책이 훌륭한 사람의 손에 들어가면 사람들한테 약이 될 테지만 그것이 악인의 손에 들어가면 천하에 화근이 될 것이오.' 인생이란 복잡한 것이고 사람마다 자기 길을 가는 것일세. 자네들은 앞으로 선업을 쌓아 죄과를 뉘우치게."
홍칠공은 매초풍 부부에게 소리를 질렀다.
"어서 물러가거라!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말아라! 내 손에 걸리기만 하면 가차없이 죽여 버리겠다!"
매초풍과 진현풍은 홍칠과 남제에게 예를 올리고는 돌아서서 길을 떠났다.
남제는 홍칠공의 마음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만일 자기가 이 자리에 없었더라면 홍칠공은 흑풍쌍살을 죽여 천하의 화근을 제거해 버렸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홍칠공에게 읍하며 말했다.
"그대의 뜻은 충분히 알고 있소이다."
남제는 아내인 영 고에게도 예를 올리고 나서 말했다.
"오랜만이구료. 할말이 있어서 여기까지 온 모양인데……."
남편에게 노완동을 구하러 도화도에 함께 가자는 말을 하러 온 영고는 그가 흑풍쌍살을 구해 주는 것을 보고 마음을 바꿨다. 그래서 그녀는 말없이 두 사람에게 읍을 하고 물러 나왔다.
남제 역시 떠나는 영고를 붙잡지 않았다. 두 사람은 비록 점잖게 말을 주고받았지만 심기는 퍽 불편했으므로 남제는 영고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매초풍과 진현풍은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오늘 강호를 주름잡기엔 자신들의 무예가 턱없이 무르고 약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홍칠공이나 구양봉같은 고수를 만나면 법수도 써 보지 못하고 잡힐 것이 뻔했다. 그들은 심산 속에 은거하며 8년이고 10년이고 무예를 잘 익힌 다음에 그들과 다시금 겨루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었다.
그들이 한참 걸어 울창한 숲에 이르렀다. 멀리 숲 속에 여인들이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여인들은 하얀 소복을 입고 커다란 나무 밑에 앉아 두 사람을 보며 은은하게 웃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여인들이 앉아 있는 나무 밑을 지나야 길을 갈 수 있었다. 문득 불길한 예감을 느낀 매초풍이 입을 열었다.
"저들을 상관하지 말고 얼른 지나갑시다. 아무래도 수상쩍은 여인들이에요."
그러나 진현풍은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저 여인들이 고수도 아닐 텐데 뭘 그리 걱정하는 거요?"
진현풍은 그 여인들에게로 다가가서 물었다.
"당신들은 누구요?"
여인들이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진현풍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어서 길을 비켜라! 그러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을테다!"
그 순간 갑자기 휘파람 소리가 들리더니 여인들 뒤에서 몇몇 사내들이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그들이 계속 휘파람을 불자 수많은 뱀들이 기어 나와 두 사람을 향해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두 사람을 에워싼 뱀들이 그들에게 기어들기 시작했다. 매초풍은 황급히 긴 채찍을 꺼내 마구 휘둘렀다. 채찍에 맞은 뱀들은 몸뚱이가 동강난 채 피비린내를 풍기며 픽픽 널브러졌다. 그러나 다른 뱀들은 더욱 극성스럽게 두 사람의 몸으로 기어올랐다. 진현풍은 품에서 단검을 꺼내 들
었다. 최심장과 구음백골조를 익힌 후 그들은 병장기를 사용한 적이 거의 없었으나 이때는 워낙 많은 독사들이 극성스럽게 달려드는 통에 병장기를 휘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매초풍이 자신에게 달려드는 10여 마리의 독사들을 물리치지 못하자 급하게 소리쳤다.
"빨리 오지 않고 뭘 해요!"
진현풍이 번개같이 달려와 10여 마리의 살모사들을 단번에 베어 버렸다. 독사들의 몸뚱이에서 뿜어 나온 피가 두 사람의 옷에 마구 튀었다. 매초풍이 화가 나서 소리쳤다.
"너희들은 웬 놈들이냐! 어서 물러나지 못할까? 떳떳하게 나서지 않고 이따위 뱀들을 앞세우다니, 수치스럽지도 않느냐!"
그러자 누군가 소름 끼치는 소리로 요란하게 웃어댔다. 그 웃음 소리를 들은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그것은 노독물 구양봉의 웃음 소리였기 때문이었다. 과연 숲 속에서 구양봉이 천천히 걸어 나오더니 뱀몰이꾼들에게 손을 내저었다. 뱀몰이꾼들이 피리를 불자 독사들이 슬금슬금 사라져 버렸다.
구양봉이 매초풍을 쏘아보며 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느냐?"
화가 난 매초풍은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당신 같은 고수가 비겁하게 뱀무리를 앞세우다니, 창피하지도 않아요? 빌어먹을 서독 같으니!"
구양봉이 쓴웃음을 지었다.
"너희 연놈을 죽이려고 마음먹었다면 진작 죽였을 것이다."
진현풍도 부아가 치밀었지만 매초풍의 손을 잡아 끌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구양봉 같은 고수에게 말려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구양봉이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내게 아쟁이 있는데 한 곡 연주할 테니 들어 보아라."
그리고는 또 징그럽게 웃었다.
음률에 밝은 매초풍은 구양봉이 아쟁을 연주하겠다는 말에, 이처럼 거친 남자에게도 그런 재주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구양봉이 나무 밑에 앉자 두 여인이 옥으로 된 자그마한 탁자를 그의 앞에 갖다 놓았다. 또 한 여인은 그에게 옥그릇을 갖다 주었는데 그 옥그릇에 깨끗한 물이 담겨 있었다. 구양봉은 옥그릇의 물에 손을 씻은 다음 여인의 앞섶에 손을 닦았다. 횐옷을 입은 다른 여인이 아쟁을 가져다 탁자 위에 놓았다.
진현풍은 그것을 지켜 보면서 참으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사부님의 <벽해조생곡>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탄복하는 곡이지만 그분은 너처럼 이렇게 요란을 떨지는 않는다. 저렇게 허세를 부리는 걸 보면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말처럼 신통할 리가 없어.'
그러나 매초풍은 진현풍과 생각이 달랐다. 그녀는 구양봉의 일거수 일투족을 자세히 지켜 보다가 그가 이처럼 진지하게 연주 준비를 하자 은근히 겁이 났다. 그녀는 구양봉을 처음 만났지만 언행이 거칠고 싸움을 할 때도 인정사정 없는 사람임이 분명했다. 그런 사람이 아쟁 연주에 저토록 정성을 들이는 것은 필시 그럴 만한 까닭이 있기 때문일 것이었다.
구양봉은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오른손으로 둥기당당 아쟁을 타기 시작했다.
구양봉의 손끝에서 아쟁은 구슬프면서도 박력 있게 울려 퍼져 듣는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겼다. 아쟁의 음이 높아지면 마음도 그와 더불어 부풀어올랐고, 리듬이 빨라지리면 빨라진 만큼 가슴이 뛰는 것이었다. 구양봉이 계속 빠른 리듬으로 아쟁을 연주하자 매초풍과 진현풍의 맥박이 점점 빨라지더니 급기야는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매초풍은 비명을 질렀다. 이대로 있다가는 제풀에 지쳐 죽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채찍을 떨어뜨리고 진현풍의 손을 꼭 그러쥐었다. 두 사람은 손바닥을 마주대고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들은 서로의 몸에 기를 보내 그 아쟁 소리를 막아내려고 애썼다.
한편 구양봉의 아쟁 소리는 더욱 격렬해져서 마치 천군만마가 내달리고 징과 북이 일제히 울리는 듯했다. 두 사람은 머리에 거대한 압력을 받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귀 밑의 태양혈로부터 가슴과 오장육부에 이르기까지 온몸이 압력을 받아 견디기 어려웠다.
아쟁 소리가 극에 달했을 때 가슴이 터지는 듯한 느낌을 받은 진현풍은 매초풍을 밀어젖히며 소리질렀다.
"안 돼! 안 된단 말이야!"
그는 비틀거리며 구양봉한테 달려가 휘둥그래진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외쳤다.
"난 당신이 싫어요! 우리 집은 건강부에서 으뜸가는 부호이고, 부친은 진백만이란 어른입니다. 전 어릴 때부터 글을 배워 예절을 압니다. 세상에 당신 같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제자로 하여금 그렇게 당신을 부러워하게 만들고, 사매에겐 또 당신을 사랑하게 만들어 놓지 않았습니까? 만일 당신이 음심을 품지 않았다면 그녀가 어떻게 당신을 좋아할 수 있었겠어요? 사부님과 제자 사이에 이런 추문이 생겨나다니,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진현풍은 혼미한 정신으로 마음 깊이 묻어 두었던 말을 모조리 털어놓았다. 그가 이제까지 사부 황약사와 매초풍 때문에 얼마나 속을 끓였는지 알 수 있었다.
진현풍은 구양봉에게 한 장을 먹이려고 손을 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 구양봉이 갑자기 느린 곡을 타기 시작했다. 그 곡은 남녀가 이불 속에서 듣기 안성맞춤인 음탕하고 질퍽한 것이었다.
진현풍은 갑자기 얼이 빠진 사람처럼 얼굴을 푸들푸들 떨더니 혼자 중얼거렸다.
"물론 사부님에 비하면 난 별볼일없는 놈이야. 하지만 세상에 사부님만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그분은 외모도 빼어나고 재능도 출중해. 못하는 게 없으시지……. 사매가 그분을 사모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야. 하지만 그분은 절대로 사매를 좋아하지 않아. 사매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나뿐이라구……."
이렇게 중얼거리더니 진현풍은 구양봉의 탁자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쥔 채 통곡을 하였다.
매초풍도 아득한 표정으로 일어나 구양봉에게로 걸어갔다. 그녀는 광기가 번득이는 눈으로 구양봉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사부님, 바둑을 배우는 제자가 하늘에 나는 기러기를 활로 쏴서 잡을 궁리만 하면 바둑을 배울 수 없다고 하셨죠? 저도 바둑을 배우는 그 제자처럼 마음속엔 온통 사부님 생각뿐인데 가르침이 어떻게 귀에 들어오겠어요?"
매초풍은 구양봉에게 걸어 가면서 옷을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
"사부님, 전 《구음진경》에 적혀 있는 무예를 닦은 후에 당신을 찾아가겠어요. 처음엔 사부님께 져 드리겠어요. 두 번째는……. 어떻게 할까요? 하지만……, 제가 정말로 사부님을 이기지 못하면 절…… 용서해 주시겠어요?"
매초풍의 눈은 아주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땅이 꺼지도록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부님께선 아마 절 받아 주지 않으시겠죠? 그럼 전……, 사부님 손에 죽겠어요."
아쟁 소리에 정신을 잃은 진현풍과 매초풍은 마음 깊이 담아 두었던 말을 끝도 없이 쏟아내고 있었다.
구양봉의 아쟁 소리는 갈수록 음탕해졌다. 횐옷을 입은 여인 몇이 나타나 진현풍의 음심을 자극하는 요사스러운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들은 진현풍을 유혹하기 위해 옷을 벗어 던지고 자신들의 젖가슴을 드러내며 교태를 부리기 시작했다.
난생 처음 이런 광경을 보는 진현풍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당장이라도 집어삼킬 듯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 꼴을 본 매초풍이 꽥 소리쳤다.
"어서 눈을 감아요! 눈을 감으란 말이에요!"
그러나 진현풍은 그녀의 말엔 아랑곳하지 않고 신음 소리까지 내면서 여인들을 응시했다.
아쟁 소리는 더욱 기세가 더해졌다. 삼월의 누각에 봄비가 내리는 아름다운 정경이 음악으로 연주되었다. 노곤한 미녀들이 향기로운 육체를 드러내고 백옥 같은 팔을 뻗어 사내들을 끌어안는, 그런 장면을 연상케 하는 음률이었다.
매초풍은 사부님이 섬 기슭에 서서 자기를 받아들이는 장면을 생각하고 있었다. 사부님이 매초풍에게 다가왔는데, 그의 눈빛에는 다정한 표정이 담겨 있었다. 바로 그의 부인 아형을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매초풍은 가벼운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머리를 들어 사부님을 바라보자 그가 웃는 얼굴로 그녀의 두 손을 잡았다.
매초풍은 가슴이 몹시 뛰는 것을 느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부님, 두렵지 않으세요? 사부님이 자기 제자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소문이 나면……."
사부님이 큰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내가 누구인가? 천하의 황약사가 아닌가? 누가 감히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하겠느냐?"
사부님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도화도로 걸어갔다. 때는 바로 봄철이어서 온 섬에 복승아꽃이 만발해 있었다.
갑자기 아쟁 소리가 멎었다. 매초풍과 진현풍은 땅바닥에 누워 있었다. 진현풍은 온 얼굴이 땀투성이가 되어 있었고, 매초풍도 여전히 구양봉을 쳐다보면서 입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구양봉이 코웃음을 쳤다.
"도화도 사람들의 마음속엔 온통 복숭아꽃뿐이로군. 이 제자들의 꼴을 황 괴물에게 보여 주면 아마 기절할걸."
구양봉은 매초풍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대 정도의 미인이라면 나한테 제일 큰 사랑을 받을 수 있지. 무예를 배우고 싶다면 내 밑으로 오라구. 날 사부님이라고 불러도 좋고, 삼촌이라고 불러도 좋아. 낮에는 내게 무예를 배우고 밤에는 사랑을 배우는 거야."
구양봉은 이렇게 말하며 요란하게 웃어댔다.
정신을 차린 진현풍과 매초풍은 그를 보았으나 일어날 수가 없어서 그저 쏘아보기만 할 따름이었다. 구양봉에게 아혈을 눌려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매초풍이 사납게 쏘아붙였다.
"노독물, 우릴 죽여라! 우리 사부님께서 이 사실을 아시면 네 놈을 용서하지 않으실 거다!"
구양봉은 매초풍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진현풍에게 말했다.
"진현풍, 날 따라가서 백타산장 사람이 되어라. 천하 절색의 계집도 다 가질 수가 있다. 이 사나운 계집을 따라다니며 수모를 받을 필요가 없다. 아까 보니까 내 계집들을 바라보느라 정신이 없더군."
진현풍은 그 말에 기가 죽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구양봉은 부하들에게 명하여 그들 두 사람을 수레에 싣고 뱀을 부리는 부하들도 뱀을 거두어 수레에 실었다.
이윽고 일곱 개의 마차가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제30장 인간중의 강자
어느덧 16년의 세월이 흘렀다.
여느 때처럼 도화도에는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적막하고 고요하기만 했다. 죽은 아내를 잊지 못하는 황약사는 가끔 노완동을 찾아가 입씨름하는 것으로 마음의 위안을 삼고 있었다. 도화도 안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라곤 이제는 제법 처녀티가 나는 딸 황용과 노완동뿐이었던 것이다. 잔꾀라고는 부릴 줄 모르고 오로지 보고 들은 대로 생각하고 말하는 고지식한 노완동이 황약사에겐 하나밖에 없는 말동무인 셈이었다. 그러나 잠을 이루지 못하는 깊은 밤이면
황약사는 남자로서의 고독을 피할 수 없어 괴로워했다.
그는 집 뒤에 아형의 영당을 세워 그 안에 새로 관을 짜서 넣고 제물상을 차린 다음 초상화를 걸어 두었다. 마음이 쓸쓸하고 울적할 때면 그는 홀로 아내의 영당을 찾아가 황용이 자라면 당신을 따라가겠다고 중얼거리곤 했다. 그는 크고 멋진 배 한 척을 건조하여 마음먹으면 언제든지 그 배를 타고 나갈 수 있도록 준비해 두었다. 황용이 다 자라면 중원으로 내보낸 다음 자기는 이 배에 아형의 초상화를 싣고 바다 한가운데에 나가 그녀의 그림과 함께 바다로 뛰어들 작
정이었다.
그러나 매일매일 비통에 빠져 지낸 것은 아니었다. 날이 갈수록 제 엄마를 닮아 가는 사랑스러운 황용이 있기 때문이다. 제 엄마를 닮아 예쁘고도 영리한 황용은 벙어리 노복들을 부리고 아버지의 수발을 드는 도화도의 안주인 노릇을 제법 잘해 내고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노복들이 만든 음식을 잘 잡수시지 않자 자기가 직접 음식을 만들어 아버지를 기쁘게 하곤 했다.
그날도 황약사는 황용에게 낙영신검장법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녀는 몸을 이리저리 날리며 아버지가 가르쳐 준 대로 검법을 익혀 나갔다. 다 자란 황용이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자 황약사는 아형이 더욱 그리워서 자기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혔다.
아버지가 침울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본 황용은 연습을 멈추고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또 엄마 생각을 하시는군요. 나만 있으면 된다고 하시고선 맨날 엄마 생각뿐이시라니까……."
황약사는 딸의 말에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너 이제 그만하고 싶은 모양이구나. 그럼 방에 들어가 공부나 해라. 난 네 엄마 영당에나 가 봐야겠다."
황약사는 뒷짐을 지고 아내의 영당을 향해 천천히 발길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온 황용은 아버지 말씀대로 공부하는 대신 부엌에 들어가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맛있는 안주와 술로 아버지의 시름을 덜어 드리고 싶었다.
점심때가 지났는데도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자 황용은 어머니의 영당으로 가 보았다. 그곳에도 아버지가 계시지 않자 황용은 도화도 안을 여기저기 찾아 다녔다.
이윽고 바닷가로 나온 황용은 먼 바다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서 있었다. 도화도에서 태어나 한 번도 바깥 세상에 나가 본 적이 없는 그녀는 육지가 있는 바다 너머를 언제나 동경의 눈길로 바라보곤 했다. 그날도 황용은 아버지에게서 들은 중원의 이야기를 저 혼자 상상으로 그리며 설레는 가슴으로 바다 저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멀리에서 배 한 척이 도화도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황용이 어릴 때부터 보아 온 배들은 모두 합쳐도 열 척이 되지 않았으므로 그녀는 그 배에 누가 타고 있을지 벌써부터 궁금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경계심이 앞섰으므로 그녀는 커다란 바위 뒤에 숨어 배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도화도에 도착한 배는 밧줄을 떨어뜨리더니 한 사람이 내려와 밧줄을 큰 바위에 묶었다. 배와 섬 사이에 널빤지가 놓이자 여인들이 줄을 지어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공자 한 명이 내렸다.
황용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했다.
'처음 본 사람인걸. 아마 섬에 놀러 온 사람들일지도 몰라.'
배에서 내린 여인들이 복숭아 나무가 있는 곳까지 걸어오자 공자가 소리쳤다.
"거기 서라!"
그러자 여인들은 일제히 걸음을 멈추었다. 황용은 그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횐 소복 차림의 여인들은 저마다 손에 악기 한 가지씩을 지니고 있었다. 나팔, 피리, 퉁소, 거문고, 공후 등등이었다. 황용이 그들을 세어 보니 모두 열여섯 명이었는데, 서너 명의 젊고 예쁜 여자가 있긴 하지만 나머지는 모두 나이가 든데다 표정에 생기가 없어서 마치 죽은 사람의 얼굴같이 보였다.
공자는 복숭아 나무 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기에 자리를 잡아라."
그러자 악기를 든 열여섯 명의 여인들이 자리를 잡고 앉기 시작했다. 비스듬히 기대어 앉은 사람, 가부좌를 틀고 앉은 사람, 둘이 등을 맞대고 앉은 사람……. 앉은 모양이 다 제각각이었는데 한눈에 그것이 북두대진(北斗大陣)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천권성 자리에 앉은 공자가 커다란 소리로 황약사를 불렀다.
"황 도주, 손님이 왔는데 영접도 안 할 생각이오?"
그러자 복숭아 나무 밑에서 황약사가 웃는 얼굴로 나왔다.
"미화 공자께서 꽃에 취해 여기까지 오셨군 그래. 오랜만이오."
미화 공자도 활짝 웃으며 황약사를 바라보았다.
"당신 말대로 꽃에 취해 여기까지 왔소. 우리끼리는 구구한 인사치레는 생략해 버립시다."
황약사는 껄껄 웃었다.
"좋소. 아무튼 잘 오셨소. 혹시 무슨 일이 있어서 날 찾아오신게 아닌지 모르겠소만."
"한때는 강호가 좁다 하고 이름을 날렸지만 이제는 다 지난 일이 되고 말았소. 사실은 당신과 내기를 하고 싶어서 이렇게 불원천리 먼길을 찾아왔소."
황약사는 영문을 몰라 하며 물었다.
"내기라니오?"
미화 공자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세상 사람들이 왜 당신을 마귀 우두머리라고 하는지 알 수가 없군 그래. 이럴 때 보면 영낙없이 순진한 어린애인데 말이오."
황약사는 이자가 무슨 일로 이러는 걸까 생각하면서 대꾸했다.
"멀리서 왔을 땐 보통 일 같지 않은데 무슨 내긴지 들어 봅시다."
그러자 미화 공자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지난번 화산의 무예 시합에서 왕중양이 이겼다고 들었소. 몇 년 지나면 다시 그 시합을 할 텐데 사실은 그 일 때문에 왔소."
"공자가 그 시합에 참가하는 게 나와 상관이 있다는 말씀이오?"
"그렇소. 왕중양이 죽었으니 이제는 당신이 최고의 고수 아니오?"
"그럼 나와 무예 시합을 하고 싶다는 말씀이오?"
미화 공자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어떻게 당신에게 감히 도전을 하겠소? 내가 준비해 온 게 세 가지 있소. 당신이 그걸 이겨내지 못하면 화산의 무예 시합에서 날 도와주시오."
그 말을 들은 황약사는 커다랗게 웃기 시작했다. 그의 웃음 소리는 섬을 한바퀴 돌아 먼 바다에까지 퍼져 나갔다. 그의 내력에 미화 공자는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웃음을 그친 황약사가 흔쾌하게 대답했다.
"좋소. 먼길을 찾아온 손님의 청을 거절한다면 대접이 아니지요."
둘은 곧바로 내기에 들어갔다.
첫번째는 '치음절기(痴吟絶技)'였다.
미화 공자가 설명했다.
"이걸 하려면 대진을 쳐야 하니 나의 진중으로 들어오시오."
황약사는 웃는 얼굴로 그들이 만든 진중에 들어가 앉았다.
"황 도주, 당신이라면 천지를 놀라게 하고 귀신을 울리는 곡이 있다는 걸 알 거요."
황약사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귀곡(鬼哭) 말이오?"
미화 공자가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맞았소. 당신이라면 알 거라고 생각했소."
귀곡은 창힐이 글자를 만들 때 나온 울음 소리라 한다. 창힐이 한밤중에 글자를 만들고 있는데 귀신들이 일제히 통곡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귀신에게 왜 우느냐고 묻자 귀신들이 말하길, 세상 사람들이 글을 배우면 자기들이 사람들을 우롱하기 어렵게 되어 그런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그 울음 소리가 너무나 끔찍하고 무시무시했다.
황약사는 귀곡에 대한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전해 온 지가 너무 오래 되어서 아무도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깜짝 놀랐던 것이다.
미화 공자는 입가에 쓴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
"귀곡을 찾다 보니 어느덧 저승과도 인연을 맺어 밤이면 귀신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가 됐소. 그 귀신들과 사귀다가 난 절반은 산 사람이고 절반은 귀신이 되어 버렸다오."
황약사가 주위에 둘러앉은 여인들을 바라보니 정말 피부가 창백하고 손발을 놀리는 모양도 음침하기 짝이 없었다.
미화 공자가 긴 비단 세 필을 복숭아 나무 위로 던지자 복숭아 나뭇가지에 걸린 비단은 그대로 병풍이 되었다. 제일 위에 걸린 비단은 하늘을 의미했고, 가운데 비단은 사람, 맨 아래 비단은 땅을 의미했다. 그 비단 병풍에는 많은 누각들과 사람들, 그리고 무시무시한 귀신들이 가득 그려져 있어서 삽시간에 도화도 전체에 음산한 기운이 퍼졌다.
"황 도주, 당신도 이 귀곡을 견뎌 내지 못할 거요."
황약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서 시작하라는 손짓을 했다.
미화 공자가 눈짓을 보내자 여인들이 악기를 만졌다. 먼저 미화 공자가 입으로 귀신이 우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억울한 원귀가 애절하게 흐느끼는 것 같기도 하고, 함정에 빠진 야수가 있는 힘을 다해 울부짖는 것 같기도 한 소리가 나오자 여인들이 일제히 악기를 타기 시작했다. 음산하고 무시무시한 곡조가 여인들의 손끝에서 흘러 나오고 미화 공자는 쉴 새 없이 소름 끼치는 귀신의 울음 소리를 냈다.
잠시 후 황약사의 눈앞에 글자를 만드는 창힐의 모습이 나타났다. 용의 머리에 사람의 몸뚱이를 갖고 있는 창힐의 모습은 보기만 해도 머리칼이 쭈뼛 서는 듯했다. 창힐이 붓을 들고 글자를 만들고 있는데 귀신이 옆에서 계속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귀신들은 괴롭히면서도 그를 두려워했다.
창힐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썩 물러가지 못할까!"
그가 글자를 하나하나 만들어 내고 있는 동안에도 귀신들은 휘파람을 불며 그의 팔과 머리를 잡아당겼다. 또 예쁘장하게 생긴 귀신 몇 명은 요염한 몸짓으로 접근해 창힐이 들고 있는 붓을 빼앗으려 들었다. 그러나 창힐은 이 모든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글자를 만드는 데만 열중했다.
자기도 모르게 황약사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귀신이 자기 소매를 잡아당기고 등뒤에서 차가운 숨을 내뿜는 착각에 빠진 그는 어느새 심장이 거칠게 뛰고 안색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황약사를 둘러싸고 앉은 여인들은 악기를 타면서 그에게 있는 힘을 다해 내력을 내뿜고 있었다. 열여섯 사람의 내력이 그의 몸으로 물밀듯 밀려오고, 그들이 연주하는 귀곡은 귀신들의 세계로 들어가도록 그를 떠밀고 있었다.
그 순간 황약사는 불현듯 아형을 떠올렸다.
'아형과 함께 이 어둡고 추운 저승으로 갔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 지겨운 이승에서 사람 죽이는 일을 그만두고 아형과 함께 있을 수 있다면…….'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그의 정신이 귀곡의 세계로 빨려들어가면서 몸에서 스르르 힘이 빠져 나갔다. 그는 아형을 만날 생각에 빠져 있었다. 드디어 그가 발광을 일으키려 할 즈음 어디선가 겁에 질린 황용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아버지!"
바위 뒤에 숨어서 이 모든 일을 엿보고 있던 그녀는, 여인들에게 둘러싸인 채 끔찍한 음악 소리를 듣던 아버지가 이상하게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다가 눈을 감은 채 얼굴을 일그러뜨리자 달려 내려온 것이다. 물론 황용도 음악 소리를 듣고 있었으나 귀신이라곤 구경한 적도 없고 창힐에 대해선 전혀 몰랐으므로 연상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의 마음에는 아버지가 위험에 빠졌으므로 자기가 아버지를 구해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황용은 그들의 진중으로 들어가 아버지 옆으로 다가가 섰다. 북두대진 안에 황용이 들어가자 황약사에게 쏠려 있던 여인들의 내력이 분산되는 바람에 황약사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귀여운 딸의 손을 잡으며 생각했다.
'큰일날 뻔했군. 미화 공자의 귀곡은 정말 대단하구나.'
그는 딸의 손을 통해 자신의 내력을 보내 주었다. 여인들의 내력과 무시무시한 음악 소리 때문에 정신이 어찔어찔하던 그녀는 아버지의 내력이 몸에 스며들자 안심하고, 자신의 내력으로 그들의 내력을 물리치는 데 정신을 집중했다.
귀곡은 향을 두 대 태울 정도의 시간이 지날 때까지 계속되다가 갑자기 멈추었다. 두 사람이 눈을 뜨니 눈앞에는 여전히 푸른 바다가 넘실거렸고, 복숭아 나무 숲도 여전했다.
황약사는 미화 공자를 바라보았다.
"참으로 훌륭한 귀곡이었소."
미화가 손짓을 하자 여인들이 악기를 들고 조용히 일어나 그의 뒤에 가서 섰다.
"이제 두 번째요. '도광병묘(賭狂病猫)'의 절기를 겨뤄 봅시다."
미화 공자가 말을 마치고 손을 흔들자 여인 한 명이 주사위 하나를 가져왔다. 미화 공자는 그 주사위를 들어 보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본래 도박꾼이란 승부와 상관없이 도박을 하게 마련이오. 하지만 이번만큼은 내가 자신있소."
황약사는 진지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이기고 지는 거야 해 봐야 아는 일이오."
미화 공자는 주사위를 황약사에게 던져 주었다. 황약사가 그것을 살펴보니 주사위의 여섯 개 면에 아무것도 새겨진 것이 없었다.
미화 공자가 설명을 했다.
"이 주사위는 주해(珠海)의 녹옥(綠玉).으로 만든 것인데, 알겠지만 녹옥은 대단히 굳은 물질이오. 한 사람이 여섯 개의 점을 찍는데 많은 점을 먼저 찍는 사람이 이기는 거요."
그는 말을 마치더니 주사위를 두 사람 사이의 땅바닥에 굴렸다. 주사위는 두 사람에게서 3장 정도 떨어진 곳에 멈추었다.
황약사는 내심 깜짝 놀라고 있었다. 그가 알기로 미화 공자는 결코 대단한 고수가 아니었다. 비록 오랜만에 만나긴 했지만 그 사이에 사람의 내력이 이렇게 고강해질 순 없는 일이었다. 3장이나 떨어진 곳에서 작은 구슬만한 주사위에 점을 찍는다는 건 아마 대협 왕중양이 살아 돌아온다 해도 해내지 못할 것이었다.
황약사가 입을 열었다.
"어디, 그럼 당신이 먼저 시범을 보여 주시오."
미화 공자는 자신만만하게 웃더니 금침(金針) 몇 개를 품에서 꺼냈다. 특별히 주문해서 만든 이 가는 금침 끝에는 아주 작고 둥근 구(球)가 달려 있었다. 이것이 주사위에 가서 박히면 이 금구(金球)가 주사위에 작은 홈을 파놓아 점이 되는 것이었다. 황약사는 미화 공자의 철저한 준비에 내심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처음엔 당신한테 열여덟 개의 금침을 줄 생각이었는데 다 만들 수가 없었소. 이 금침을 만들기가 워낙 까다로워서 말이오. 금침을 똑같은 무게와 굵기로 만들어야 되는 건 물론이고 금구의 속이 비어 있어야 하오. 금구의 속이 꽉차 있으면 무거워서 정확도가 떨어지기 때문이오. 이것을 만드느라 천하에서 가장 유능한 장인에게 청을 했다오. 자, 자신 없으면 졌다고 인정하시오."
그 말에 황약사는 웃음을 터뜨렸다.
"질 때 지더라도 당신 솜씨나 좀 봅시다. 해 보지도 않고 손을 들 수야 있겠소?"
미화 공자는 가는 금침을 들고 주사위를 향해 가볍게 던졌다.
날아간 금침은 바로 그 작은 주사위에 박혔다. 그는 연거푸 여섯 개의 금침을 날렸는데 모두가 주사위에 정확히 꽂혔다.
황약사는 놀랍고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것은 금침으로 사람의 혈을 맞히는 것만큼이나 정확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것도 단단하고 굳기가 천하 일품인 녹옥을 파고들어 갈 정도면 금침 하나에 엄청난 내력을 실어야 하는데 인간의 힘으로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당신의 금침이 내 시야를 넓혀 주는구려. 천하 제일의 암기를 다루는 고수라도 이렇게는 할 수 없을 거요. 어디, 주사위를 한 번 봅시다."
그의 말에 여인 한 명이 주사위를 집어서 황약사에게 건네주었다. 황약사는 그것을 받아 꼼꼼히 살펴보았으나 분명히 녹옥 주사위에 금침이 정확히 꽂혀 있었다.
'이자가 어느새 이런 실력을 길렀을까? 미화 공자의 내력이 나보다 강하단 말인가?'
그는 눈을 휘둥그래 뜨고 주사위를 살펴보며 자기가 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옆에서 그것을 같이 보고 있던 황용이 아버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아버지, 저 사람이 속임수를 쓰는 것 같아요."
그녀의 말을 들은 미화 공자는 신통하게도 아형을 꼭 닮은 황용에게 말했다.
"네가 흠집을 찾아낸다면 내가 지는 걸로 하겠다."
그 말에 황용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사위를 살펴보았으나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었다.
황약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탄지신공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을 어떻게 미화 공자가 했는지 정말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주사위를 뚫어지게 살펴보던 황약사는 그 순간 또 아형을 생각하며 탄식했다.
'아형이 살아 있다면 분명히 알아낼 수 있을텐데…….'
아형이 죽은 뒤, 크고 작은 문제에 부딪칠 때마다 그는 아형이라면 분명히 해냈을 거라고 믿는 버릇이 생겼다. 아형을 생각하던 그는 어쩌다 지나간 일 하나를 떠올렸다.
이전에 황약사는 왕중양에게 그의 애인 임조영과 내기를 하던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왕중양과 임조영은 바위에 글씨를 새기는 내기를 했다고 한다. 그녀가 해내면 왕중양은 그녀에게 자신의 활사인 묘를 주기로 했다. 그들은 커다란 바위 앞에 서서 시합을 했는데 임조영은 바위에 손가락으로 시 한 수를 썼고, 왕중양은 하지 못했다. 당연히 왕중양은 자신의 내력이 그녀에게 뒤진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활사인 묘를 내주었다.
왕중양에게 이 이야기를 들은 황약사는 두 사람이 시합을 한 바위에 가서 한참 동안이나 그것을 만져 보다가 문득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그는 왕중양에게 며칠 후엔 자기도 그 바위에 글씨를 쓸 수 있다고 장담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켜 임조영이 쓴 시 뒤를 이어 또 한 수를 썼다.
그는 임조영이 그 바위에 화석분(花石粉)을 발라 놓았다는 것을 깨닫고 자기도 그 바위에 미리 화석분을 발랐다가 왕중양과 함께 가서 글씨를 새긴 것이다. 화석분을 바르면 돌이 연석(軟石)으로 변하므로 글씨가 얼마든지 새겨졌다. 그제야 임조영이 자기를 속였다는 것을 안 왕중양은 허리가 휘어지도록 웃어댔다.
황약사는 미화 공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과연 대단하오!"
그는 그때까지 들고 있던 주사위를 여인에게 건네주고 새 주사위를 가져오라고 했다. 새 주사위를 제 위치에 놓은 그는 황용을 보고 말했다.
"얘야, 네 금침 몇 개만 빌려 다오."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던 아버지가 여유 있는 미소를 짓는 것을 보고 안심한 황용은 주머니에서 금침을 꺼내 주었다.
황약사는 큰소리로 미화 공자를 꾸짖었다.
"당신의 속임수가 눈에 훤하군. 내가 만약 왕중양이었다면 속았겠지. 하지만 내기에 속임수를 쓰는 건 비겁한 짓이오!"
말을 마친 황약사는 금침 여섯 개를 주사위에 던졌는데 모두 명중했다.
"미화 공자, 당신이 졌소!"
미화 공자는 당황한 기색으로 주사위를 살펴보며 말했다.
"당신과 내가 모두 여섯 개씩 점을 찍었는데 왜 내가 졌다는 거요?"
황용이 깔깔 웃으며 말했다.
"아저씨, 주사위를 자세히 보세요."
미화는 황약사가 금침을 던진 주사위를 집어서 불안한 눈길로 살펴보았다. 과연 황약사의 주사위는 금침이 맞은편까지 뚫고 나갔기 때문에 모두 열두 개의 점이 찍힌 셈이었다. 분하지만 자신의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좋소, 내가 졌소. 하지만 마지막으로 남은 게 하나 있소. 그것은 나 미화가 아니면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오."
그가 머리를 돌려 손짓을 하자 배에 있던 사람이 상자 하나를 가져왔다. 그 상자를 앞에 놓고 미화 공자가 말했다.
"내가 재배한 꽃이 한 그루 있었는데 아형은 그 꽃이 천하 제일이라고 했었소. 본래 신(信), 아(雅), 색(色)을 꽃의 삼신이라 하는데 이 꽃은 삼신을 다 구비하고 있다오. 아형에게 보여 주려고 화분째 들고 왔소."
미화가 상자 뚜껑을 열어 화분 하나를 보여 주었다.
"이 일은 아형과 관계되는 일이니 그녀를 만나게 해주시오, 황 도주."
황약사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만나게 해드리지."
황약사는 미화 공자를 데리고 아형의 영당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그곳에 도착하자 황약사가 영당 문을 열어젖히며 말했다.
"아형은 여기 있소."
미화 공자가 눈을 들어 바라보니 작은 집 안에 제물이 놓인 상이 있고, 그 위에 구보련대(九寶蓮臺)가 있었으며 향정(香鼎) 한 대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벽 한가운데 그림 한 폭이 걸려 있었는데 바로 아형의 초상화였다.
미화 공자는 창백한 얼굴로 황약사의 옷깃을 거머쥐었다.
"황약사, 지금 날 놀리는 거요?"
황약사는 가슴이 무너지는 듯한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소?"
미화 공자는 한참 동안 아형의 그림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더니 처량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아형, 저승 가는 길이 그렇게도 바빴소? 내 오늘 이 꽃으로 황약사를 이겨 당신과 함께 가려고 했는데……."
그 말을 들은 황약사의 얼굴이 대뜸 굳어졌으나 황용이 아버지의 옷자락을 가만히 잡았다. 황약사는 눈을 감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아형의 영당을 더럽혀선 안 되지.'
미화 공자는 눈물을 흘리며 자기가 가져온 화분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아형, 이 꽃을 보시오. 천하에 이런 꽃은 다시없을 만큼 우아하고 아름다운 것이라오."
미화 공자가 손끝으로 꽃을 가리키자 서른여섯 송이의 꽃잎이 서서히 열리면서 봉오리가 피어 오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활짝 핀 꽃에서 짙은 향기가 뿜어져 나와 아형의 영당을 가득 채웠다.
"아형, 당신의 나이에 맞춰 서른여섯 송이를 채워 왔소. 왜 벌써 혼자 가 버렸단 말이오! 박복한 사람 같으니……."
미화 공자 뒤에 서서 그 광경을 지켜 보던 열여섯 명의 여인들도 아형에게 절을 했다.
잠시 후 미화 공자는 여인들과 함께 황황히 도화도를 떠나 버렸다.
황용은 점점 멀어지는 배를 바라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만에 중원의 사람들을 만나 보았는데 오자마자 가 버리는구나.'
배가 점점 작아지다가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수평선이 원래대로 돌아갈 때까지 바닷가에 서서 하염없이 그쪽을 바라보던 황용은 힘없이 발길을 돌렸다. 아무 생각 없이 되는 대로 걷던 황용은 어느새 노완동이 살고 있는 동굴까지 다가왔다.
가까이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자 황약사라고 짐작한 노완동이 소리를 질렀다.
"어이, 황 괴물! 오랜만이군 그래! 한동안 뜸하더니 오늘은 웬일이오?"
사람의 목소리를 들은 황용은 반가워서 얼른 동굴 쪽으로 다가서며 물었다.
"당신은 누구세요?"
여자 목소리를 들은 노완동은 놀라서 잠시 주춤하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넌 누구냐?"
황용은 깨드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노완동도 따라서 웃는 것이었다.
"내가 먼저 물었잖아요?"
"그랬던가? 난 남자야."
"어쩌다 동굴에서 살게 됐나요? 그리고 왜 나오지 않는 거예요?"
그녀의 말을 들은 노완동은 분해 죽겠다는 듯 동굴 벽을 쾅쾅 두드렸다.
"야, 내가 여기 있고 싶어서 있는 줄 아냐? 황 괴물이 날 여기다 가두었단 말야!"
이렇게 말하더니 그는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동굴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웅웅 울리는 바람에 상대방의 나이를 짐작할 수 없었던 황용은 그가 어린애처럼 엉엉 울자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사내아이라고 생각했다.
황용은 우는 아이를 달래려고 입을 열었다.
"얘, 그러지 말고 우리 같이 놀자. 내가 한 발을 동굴 안에 넣고 넌 한 발을 동굴 밖으로 내밀면 둘이 다 동굴 밖에 있는 거니까 놀 수 있을 거야."
"그래, 그래, 좋은 생각이야."
노완동은 발을 내밀려다 갑자기 물었다.
"그런데 넌 누군데 그렇게 똘똘하니?"
"난 황용이라고 해."
"황약사랑 어떤 사이냐?"
"그분은 우리 아버지야."
그 말을 들은 노완동은 질겁을 해서 소리쳤다.
"그럼 싫어. 난 안 나가. 네가 황약사의 딸이라면 분명히 날 속일 거야."
황용은 빙그레 웃으며 대꾸했다.
"마음대로 하렴. 밖으로 못 나오는 네가 갑갑하지, 내가 갑갑하겠니? 그럼 난 간다."
그러자 잠시 후에 동굴 안에서 머리 하나가 불쑥 나왔다. 그의 얼굴을 본 황용은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어린애이기는커녕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수염이 성성한 노인이었던 것이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세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노완동이 대답했다.
"난 노완동이란 사람이야. 흔히 어리광쟁이 주백통이라고들 하지. 너 내 이름 들어 본 적 있니?"
"아니오."
"물론 그럴테지. 네 아버지란 사람이 날 여기 가둬 두고선 맛있는 것도 안 주고 같이 놀아 주지도 않는구나. 하루하루가 지겨워 죽겠어."
그는 자꾸 캐묻는 황용에게 자기가 동굴에 갇히게 된 사연을 들려주었다. 그의 이야기를 전부 들은 황용이 말했다.
"당신은 정말 바보군요. 우리 아버지가 안 계실 때 배를 훔쳐 타고 도망가면 되잖아요."
그러나 노완동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건 안 돼. 난 황 괴물을 이기지 못하면 여기서 나가지 않겠다고 맹세했거든. 내가 동굴 안에서 무예를 닦아 네 아버지를 이기면, 날 큰 배에 태워 보내 주겠다고 약속했어. 그 모습을 상상해 봐. 이 노완동이 황 괴물을 꺾고 중원에 금의환향하는 거야. 얼마나 멋지냐? 얘, 황용아. 내가 불쌍해 보이냐?"
황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서 술과 고기 좀 갖다 주련?"
"우리 아버진 아주 엄한 분이세요. 들통나면 큰일난다구요,"
그러자 노완동은 입을 삐죽거렸다.
"그럼, 어련하려구. 천하에 고약한 황 괴물의 딸이니 오죽하겠어. 제 아버지보다 더 못돼먹었을 거야."
그러면서 그는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아, 이 놈의 도화도엔 사람다운 사람이 하나도 없구나! 얘, 황용아. 넌 책도 안 읽었니? 책에도 '노인을 존경하는 것은 그가 늙었기 때문이고 어린이를 사랑하는 것은 그가 어리기 때문이다.'라고 씌어 있단다."
그의 말을 들으며 황용은 계속 헤실헤실 웃었다. 섬에 살면서 남자 어른이라곤 아버지 황약사만을 보고 자랐는데, 아버지는 그녀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나 실없는 농담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어른들은 우스갯소리를 안 하는 것인 줄 알았던 그녀는 머리가 허연 할아버지가 서슴없이 울기도 하고 우스갯소리도 툭툭 던지는 것을 보며 아주 재미있어 했다.
황용은 장난삼아 말했다.
"당신이 제게 절을 하면 술과 고기를 갖다 드릴게요. 이래봬도 제 요리 솜씨는 아버지도 알아주시거든요."
"너, 그……그게 정말이냐?"
노완동은 체신머리 없이 당장 머리를 조아려 절을 하기 시작했다.
황용은 살금살금 어머니의 영당으로 가 보았다. 아니나다를까. 아버지가 그곳에서 어머니의 초상화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아형, 미화 공자가 당신에게 주려고 저 꽃을 가져왔구려. 당신은 유난히 꽃을 좋아했었지……. 하지만 당신은 저 꽃을 좋아하진 않을 거요."
그는 화분으로 다가가 서른여섯 송이의 꽃들을 한꺼번에 움켜쥐었다. 그러자 꽃에서 하얀 김이 한 줄기 나오더니 모두 누렇게 시들어 버렸다. 황약사가 화분을 멀리 집어 던지자 화분은 곧장 날아가 바다에 떨어졌다.
황용은 부엌으로 달려가 급히 요리를 만들고 술을 한 병 챙긴 다음 음식과 술을 보자기에 쌌다.
동굴 안에 있던 노완동은 황용이 달려오는 것을 보자 너무 좋아서 손뼉을 치며 마구 소리쳤다.
"황용아, 빨리 오너라! 이 늙은이 배고파 죽을 뻔했다!"
황용이 얼른 달려와 큼직한 식함 뚜껑을 열자 구수한 고기 냄새가 풍겨 나왔다.
"야, 그 냄새 참 좋다!"
노완동은 젓가락을 들고 허겁지겁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먹으면서도 그는 연신 지껄여댔다.
"얘, 사실 말이지, 도리대로 하자면 너한테도 먹으라고 권해야 옳은 일이지만, 듣자 하니 요리를 만든 사람은 냄새에 질려 먹고싶은 생각이 싹 없어진다더구나. 그러니까 구태여 권하진 않겠다. 너야 뭐 먹고 싶겠니? 매일 먹는 음식인데……."
황용은 아무 말 없이 웃기만 했다.
노완동은 상대방은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 계속 떠들었다.
"내 참,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널 사귀어 두는 건데 말이야……. 하긴 내가 여기 왔을 때 넌 애기였지. 사귈 틈도 없었다구. 이런 걸 보면 나도 참 멍청하단 말이야. 황용아, 넌 몇 살부터 요리를 만들었냐?"
"열한 살 때부터요. 노복들이 만드는 요리가 영 형편없길래 제가 아버지한테 배웠어요. 전 요리 만드는 게 참 좋아요."
노완동은 갑자기 심각한 표정으로 황용을 바라보더니 혼자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젓기도 하면서 중얼거렸다.
"그건 안 돼. 그럼, 안 되고말고!"
황용은 그에게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그러나 노완동은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그 여자를 데려다 살아 봤자 이런 딸을 얻을 순 없을 거야. 난 황약사처럼 총명하지 못하니까 딸을 낳아도 이렇게 똑똑하지도 못하고, 맛있는 음식도 못 만들 거라구. 그러니까 안 돼!"
황용이 자꾸 무슨 일이냐고 묻자 노완동이 대답했다.
"아, 넌 몰라도 돼. 그건 그렇고, 아까는 왜 그렇게 시끄러웠니? 황 괴물이 무슨 요괴들이라도 끌어들인 거냐?"
황용은 그에게 아버지와 미화 공자가 겨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노완동은 동굴 벽을 두드리며 엉엉 울기 시작했다.
"난 왜 이렇게 한심할까? 16년 전에 황 괴물에게 맹세할 때 동굴을 떠나지 않겠다고 할 게 아니라 도화도를 떠나지 않겠다고 할 걸. 그랬으면 지금까지 이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고, 그런 구경거리도 놓치지 않았을텐데……."
황용은 어린애처럼 울기도 잘하고 그러다가 또 금방 헤헤 웃는 노완동을 재미나게 구경했다.
잠시 후 맑은 피리 소리가 들려 오자 황용은 서둘러 그릇을 챙기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절 부르시는 거예요. 오늘은 이만 가 봐야겠어요. 다음에 또 놀러 올게요."
보따리를 든 황용은 나는 듯이 집으로 달려갔다.




제31장 병묘와 사불의 결혼식
황용이 피리 소리를 듣고 달려가 보니 아버지가 바닷가에 서서 큰 배 한 척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계셨다. 황용으로서는 생전 처음 보는 크고 화려한 배였다. 배 위에는 갑옷을 입은 용감하게 생긴 장정들이 큰 칼을 들고 일렬로 서 있었다.
이윽고 배가 섬 기슭에 닿자 한 사람이 뛰어내려 닻줄을 바위에 비끄러맸다. 잠시 후에 두 손에 선물 상자를 든 남자 네 명이 배에서 내려 황약사에게 다가왔다. 그들 뒤에 어린아이가 제법 거들먹거리는 걸음으로 따라오더니 황약사에게 다가와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태호의 고우(故友)이신 도광 공자와 사불 악귀께서 도주님을 만나 뵈러 왔습니다. 여기 약소한 선물을 가져왔으니 사양 마시고 받아 주시면 이보다 고마운 일이 없을 것입니다."
도광 공자와 사불 악귀란 말에 황약사는 반가운 얼굴로 대답했다.
"그럼 어서 모시게 해야지."
어린아이는 방긋 웃고는 배를 돌아보며 큰소리로 외쳤다.
"도주님께서 듭시랍니다!"
그러자 간드러진 웃음 소리가 들리더니 서른 살이 넘어 보이는 여인이 한들거리며 배에서 내려왔다. 그녀는 반짝이는 진주로 치장한 머리를 만지작거리고 고개를 숙여 황약사에게 인사를 했다.
"호호호……, 이렇게 오랜만에 뵙는데도 공자님은 여전히 미남이시네요. 호호호……."
그녀는 바로 태호에서 가장 유명한 흑도(黑道) 인물 사불이었다. 두 사람은 세월이 유수 같다느니 하면서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었다. 헤픈 웃음이나 매끈한 몸매가 여전한 사불을 보니 황약사는 또 아형이 생각나서 마음이 울적해졌다.
'아형이 살아 있다면 이보다 더 예쁠텐데…….'
계속 주위를 살피던 황약사가 불쑥 물었다.
"병묘 형은 왜 보이지 않습니까?"
"내가 왔는데 그이가 안 올 리가 있나요?"
사불은 수줍은 처녀처럼 얼굴을 붉히더니 배를 향해 외쳤다.
"도광 공자님을 모셔 오너라!"
잠시 후 장정 두 명이 커다란 상자를 메고 배에서 나왔다. 그들은 그것을 힘겹게 들어다 황약사와 사불 앞에 내려놓았다.
"이게 뭐요?"
황약사는 눈을 크게 뜨고 사불을 바라보았다.
"도광 공자를 찾으셨잖아요?"
그녀가 손짓을 하자 장정들이 뚜껑을 열었다. 상자에 무슨 장치를 해놓았는지 건드릴 때마다 덜커덩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사람의 머리 하나가 불쑥 올라와서 눈을 껌벅거렸다. 얼굴에 윤기가 돌고 머리도 단정하게 빗어 넘긴 그는 병묘임에 틀림없었으나 어딘가 이상했다. 머리와 목만 보일 뿐, 어깨부터 발 아래까지 두꺼운 곰가죽을 덮어씌워 팔다리와 몸통은 볼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그는 의자에 앉은 채 머리만 내놓고 있는 모습이었다.
깜짝 놀란 황약사는 말문이 막혀 그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정이 넘치는 눈길로 병묘를 바라보던 사불은 그의 귀밑머리를 귀뒤로 넘겨 주며 사근사근하게 말했다.
"아이 참, 내가 뭐했어요? 움직이지 말했잖아요. 남들이 보면 날 흉본단 말이에요."
그녀는 품에서 깨끗한 수건을 꺼내 말끔한 병묘의 얼굴을 다시 닦아 주었다.
황약사는 그제야 병묘에게 인사를 했다.
"병묘, 그동안 잘 지내셨소?"
그러나 병묘는 두 눈만 끔벅일 뿐 얼굴엔 아무런 표정이 없었고 말도 없었다.
사불이 대신 입을 열었다.
"도주님, 이이는 지금 병을 앓고 있어서 말을 못한답니다. 뭐든 제가 대신 대답할게요. 이 사람 마음은 제가 잘 아니까요."
그러더니 사불은 병묘를 한 번 보고는 황약사에게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병묘가 황 도주님께 인사드립니다."
황약사는 병묘를 바라보고 물었다.
"병묘께선 무슨 일로 이 먼 도화도까지 찾아오셨소?"
병묘를 한 번 보고 사불이 대답했다.
"친구였던 아형 아씨를 만나려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황약사는 병묘의 표정을 살피며 대답했다.
"아형은 벌써 오래 전에 저 세상 사람이 되었소. 지금은 외로운 무덤만 남아 있을 뿐이오."
그 말에 병묘의 두 눈이 한참 동안 깜박거리더니 잠시 후에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는 소리도 없이 눈물만 계속 흘렸다.
사불도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입을 열었다.
"이이와 아형 아씨는 대단히 가까운 사이였죠. 그분이 세상을 뜨시다니……. 우리도 가서 절을 올리겠어요."
"그러시다면 절 따라오십시오."
황약사는 미화 공자 일행을 아형의 영당으로 안내했던 것처럼 다시 그들을 데리고 아형의 영당으로 갔다.
그곳에 이르자 그는 병묘의 상자를 들고 온 장정들을 가리키며 사불에게 말했다.
"이들은 안에 들여놓지 마십시오."
황약사는 사불과 함께 병묘가 앉은 상자를 들어 영당 안으로 옮겼다. 영당 안에는 황약사와 황용, 사불과 병묘, 그리고 배에서 내려 선물을 올린 사내아이가 들어왔다.
아형의 초상화를 보고 병묘는 다시 눈물을 흘렸지만 표정에는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사불은 아형의 초상화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형 아씨, 생전에 그렇게 친하게 지냈던 병묘가 왔어요. 아씨가 병묘의 일생을 지켜 보고 보살펴 주세요."
말을 마친 사불은 일어나서 향불을 피웠다.
황약사는 점잖게 답례를 했다.
"제 망실(亡室)을 대신해 감사드립니다. 이제 안으로 들어가 좀 쉬시죠."
그런데 사불은 할말이 있는 표정으로 황약사를 바라보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황 도주님……. 저와 이 사람이 이 먼 곳까지 온 것은 아형 아씨께 부탁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어요. 그런데 아형 아씨가 안 계시니 도주님께 대신 말씀을 드려야겠군요."
"주저 마시고 말씀하십시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황 도주님께선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우리 두 사람이…… 결혼을 하려는데요……."
황약사는 뜨악한 얼굴로 사불을 바라보았다.
'둘이 결혼을 하려면 할 것이지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가 뭘까?'
"저이가 말하길, 자기가 나와 결혼한다는 사실을 아형 아씨께 알리고 아형 아씨 앞에서 결혼식을 해야 한다는 거예요."
황약사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웃다가 선선히 대답했다.
"그럼 조용히 식을 치르도록 하시오. 아형이 놀라지 않게 말이오."
황약사가 이 일을 허락하지 않을 거라고 짐작했던 사불은 그가 의외로 선선히 승낙하자 기뻐 어쩔 줄 몰랐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황 도주님의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그녀는 병묘에게 다가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황 도주님께서 우리 결혼을 허락하셨어요."
그러나 병묘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눈만 껌벅거릴 뿐이었다. 사불은 그의 두 뺨을 어루만지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리 둘이 죽을 때까지 재미나게 사는 거예요. 나도 이제 강호에서 물러나 당신 곁에만 있겠어요."
사람을 부른 사불은 혼례복을 입고 화장을 하고 머리를 치장하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치장이 끝나자 사불은 더욱 아름다운 미인이 되었다.
그녀는 아형의 초상화 앞에서 다시 한 번 절을 올렸다.
"언니, 고마워요."
이윽고 아형의 영당에서 그들의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어린 사내아이가 영당 가운데로 나와 말했다.
"병묘 공자님과 목주(沐珠) 아가씨의 혼례! 우선 신랑 신부는 아형 아씨의 영전에 절하시오."
그때 황약사는 사불의 이름이 목주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사불은 병묘에게 걸어가더니 말했다.
"거기 앉은 채 절을 할 수 없으니 이리 나와야겠어요."
말을 마친 그녀는 상자를 탁탁 쳐서 뜯어냈다. 상자가 뜯어지자 사불은 병묘의 목까지 둘러져 있던 곰가죽을 벗겨 냈다.
"이 곰가죽 위에서 함께 절하는 거예요. 아형 아씨의 영령이 우릴 보살펴 주실 거예요."
사불이 병묘의 몸에 덮여 있던 곰가죽을 걷는 순간 황약사는 너무 놀라 앗! 소리를 질렀다.
어깨부터 발끝까지 너무나 앙상해서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었다. 황약사는 성큼 다가가서 그의 옷을 들추어보았다. 팔뚝과 다리엔 살점이 하나도 없이 뼈에 가죽만 붙어 있는 형상이었고, 손과 발도 처참하게 말라붙어서 오그라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놀란 황용이 새된 비명을 질렀고, 황약사도 엉겁결에 뒤로 주춤 물러섰다. 그러나 사불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그의 겨드랑이에 팔을 넣어 조심스럽게 안아 일으켰다. 그녀는 곰가죽 위에 그를 앉히며 입을 열었다.
"여기서 나와 함께 절합시다. 우린 천지신명이 아니라 아형 아씨께 절을 하면 된다구요."
그러나 병묘는 여전히 미동을 하지 않았다. 그런 병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은 사불이 손을 모으며 말했다.
"목주와 병묘는 이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헤어지지 않겠습니다."
그녀는 아형에게 절을 하려 했다.
그 순간 황약사가 소리쳤다.
"잠깐!"
사불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세요?"
"도대체 병묘 형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소?"
사불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병이 든 거죠, 뭐. 꽃도 물을 안 주면 말라 죽듯이 이 사람도 그렇게 수족이 말라 비틀어지는 병에 걸렸답니다."
그녀는 연민과 애정이 담긴 손길로 병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황약사가 아주 날카로운 어조로 내뱉었다.
"당신 말을 믿을 수가 없소."
"그럼 이 사람한테 물어 보세요."
황약사는 무릎을 꿇고 앉아 병묘의 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병묘,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오?"
병묘는 다소 부드러운 표정으로 황약사를 바라보았지만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황약사는 그의 얼굴과 어깨를 만져 보았다. 팔은 말라 비틀어져 있었지만 어깨는 여전히 실팍했고 얼굴도 정상이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중독된 흔적은 보이지 않았으나 뭔가가 이상한 것만은 분명했다.
사불이 병묘를 살펴보는 황약사에게 다가왔다.
"아무리 보셔도 모르겠죠?
그녀는 얼굴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와 황약사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사실은 응구(鷹嘔)를 먹이고 팔과 다리를 매일 물에 담그게 했어요. 처음엔 한 시간씩 담그기 시작해서 보름 후엔 여섯 시간씩 담그게 했더니 저렇게 됐답니다."
황약사도 응구를 알고 있었다.
독에 가장 강한 동물인 독수리는 독사를 많이 잡아먹는다. 독수리가 많은 독사를 잡아먹으면 위 안에 뼈처럼 단단한 것이 생기는 데 그것이 바로 응구이다. 독수리는 갖은 애를 써서 그것을 토해 낸 다음 흙 속에 잘 묻어 두었다가 새끼가 좀 자라면 그곳에 데리고 와서 응구를 먹인다. 그것을 먹은 새끼 독수리는 처음엔 중독이 되어 거의 죽음 직전에까지 이른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물만 마시며 며칠을 지내면 차츰 회복이 되는데, 그 후에는 독에 대한 면역이 생겨
어떤 독이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먹을 수 있는 것이다.
황약사 역시 의술이 높은 사람이므로 약이나 독극물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나 응구로 사람을 이렇게까지 해친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사불의 설명을 들은 그는 버럭 화를 냈다.
"병묘를 왜 이렇게 만든 거요?"
사불은 싸늘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다른 방법이 없었어요. 나는 이 사람을 너무나 사랑하는데 이 사람은 자나깨나 아형 아씨 생각뿐이었어요. 그냥 내버려두었다면 이 사람은 제 발로 아형 아씨를 찾아왔을 거예요. 나라고 이 짓이 좋아서 한 줄 아세요? 저 사람은 손으로 날 때리고 발로 날 걷어 찼어요. 입으로는 욕을 퍼부었구요. 언제나 그랬죠. 머리 속엔 아형 아씨 생각이 가득 차서 다른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구요. 그래서 말을 못하게 하고 팔다리를 못쓰게 만들 방법을 궁리했죠……. 이제 멀쩡한
건 두 눈뿐이에요. 그러니 이 사람은 나만 바라보면서 살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사불의 눈에서는 눈물이 끝없이 흘러내렸다.
황약사가 말없이 쏘아보자 사불은 눈물이 흐르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절 어떻게 하실 건가요?"
"당신을 죽여서 병묘의 원수를 갚겠소."
말을 마친 황약사가 손을 내밀자 사내아이가 울부짖으며 앞을 가로막았다.
사불이 사내아이에게 침착하게 말했다.
"넌 이 일에 나서지 마라. 황 도주님이 낱 죽이면 넌 내 시체를 수습해서 집으로 가거라. 나중에 병묘 공자님이 돌아가시면 합장이나 해다오."
사불은 눈을 감고 앉아 황약사가 자기를 죽이길 기다렸다.
사내아이는 엉엉 울면서 소리쳤다.
"우리 아가씰 죽이기만 하면 내가 가만 안 있을 거야!"
황약사는 빙긋 웃으며 사불의 정수리에 주먹을 올려 놓았다. 그런데 그 순간 흥, 하는 가벼운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그 소리는 병묘에게서 나는 소리였다.
황약사는 그를 바라보았다
"병묘, 당신 대신 내가 이 여잘 죽여 버리겠소. 어떻소?"
그러자 병묘는 눈을 두 번 깜박거렸다.
사불이 그걸 보고 말했다.
"날 죽이지 말라는 뜻이에요. 긍정은 한 번, 부정은 두 번이거든요."
황약사는 그에게 물었다.
"도화도엔 아형을 만나러 왔소?"
병묘는 눈을 한 번 깜박였다.
"왜?"
그 질문에 병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황약사는 한숨을 쉬며 다시 물었다.
"내가 사불을 죽이길 바라오?"
황약사를 바라보는 병묘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젖은 눈으로 그는 눈을 분명하게 두 번 깜박거렸다.
"당신을 이 지경으로 만든 저 악랄한 여자를 살려두란 말이오?"
황약사가 화가 나서 소리쳤지만 병묘는 여전히 두 번 깜박거리고는 눈을 아예 감아 버렸다.
옆에 있던 사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길, 황약사 님은 사파의 인물이라 예의 범절도 없고 정도 없다고 하던데 지금 보니 그렇지도 않군요."
황약사는 혐오스럽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 날 두고 하는 말이오?"
"그래요."
"당신이 감히 내 험담을 하는 거요, 지금?"
"네, 그랬어요. 어쩌시겠어요?"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친 황약사는 대뜸 두 손가락을 뻗어 사불의 두 눈을 찌르려 했다. 그런데 어찌 된 셈인지 그는 얼른 손가락을 거두었다.
"당신을 장님으로 만들어도 날 헐뜯는 소릴 지껄이고 다니겠소?"
"그럴 거 없이 절 죽여 버리면 되잖아요."
황약사는 갑자기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그 엄청난 웃음 소리에 놀라 눈을 휘둥그래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황약사는 아형의 초상화 앞으로 다가가 호탕하게 말했다.
"여보, 세상에 나만큼 잔인하고 삭막한 놈이 없는 줄 알았더니 여기 나보다 더 악랄하고 불쌍한 여자가 있구려!"
그는 뒤로 돌아서더니 번쩍이는 눈으로 사불을 바라보았다.
"목주 아가씨, 내가 주례를 서겠소."
사불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병묘를 부축해 황약사 앞에 앉았다. 그녀는 황약사가 시키는 대로 아형의 영전에 세 번 절을 하고 나서 병묘를 부축해 절하는 걸 도왔다. 그리고 나서 두 사람이 맞절을 했다.
절을 하면서 그녀는 눈물을 비 오듯 흘렸는데 보는 사람의 마음까지 슬픔에 젖도록 하는 애달픈 눈물이었다.
혼례가 끝나자 사불과 사내아이는 병묘의 의자를 끌고 영당 밖으로 나가 배에 올랐다. 서둘러 출항 준비를 마친 배는 닻을 올리고 도화도를 떠나기 시작했다.
떠나는 배를 보면서 황용은 남녀간의 일이란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독약을 먹여 병신을 만든 것도 이해할 수 없었고, 홧김에 그랬다면 해독제를 먹여 낫게 해주면 될 일이지 병신이 된 사람한테 자청해서 시집을 가다니, 그건 더욱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그것을 물어 보려 했으나 어머니의 영당에 들어간 아버지는 어머니의 초상화 앞에서 울고 있었다.
그녀는 부엌에 가서 먹을 것을 챙겨 들고 동굴로 갔다. 그녀는 동굴 입구에서 소리쳤다.
"노완동 할아버지, 뭐하세요?"
안에서 노완동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얘, 여기 들어오면 안 된다! 난 지금 절기(絶技) 한 가지를 수련하고 있는데 이건 비밀이거든."
"할아버지가 아무리 그러셔도 우리 아버질 이기진 못해요."
황용의 말에 화가 난 노완동이 벌개진 얼굴로 달려 나왔다.
"뭐, 네 아버질 못 이긴다고? 그 황 괴물이 빌어먹을 도깨비 같은 술수를 써서 그렇지, 진짜로 한 번 겨뤄 봐라. 우리 사형 왕중양이 살았을 때 황 괴물은 그에게 꼼짝도 못했다구. 왕중양만 보면 설설 기었지. 정말이야."
그러나 황용은 혀를 날름 내밀었다.
"할아버지 입으로 우리 아버지한테 다리를 분질렸대면서요? 할아버지 무예가 그 정도면 사형 무예는 오죽하겠어요? 뻔한 거짓말을 왜 하세요?"
황용의 말을 들은 노완동은 엉엉 울기 시작했다. 황용은 인상을 쓰면서 물었다.
"왜 또 우세요?"
"나 같은 거야 무슨 말을 들어도 상관없지만 우리 사형까지 비웃음을 당하다니……, 세상에……."
황용은 손가락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아유, 시끄러워 죽겠네!"
"난 다른 건 다 참아도 눈물은 못 참는단 말이야. 네가 우리 사형 왕중양이 천하의 최고 고수라는 걸 인정하면 모를까, 그전에는 못 그친다, 아이고!"
그러면서 노완동은 더욱 시끄럽게 울어댔다. 사실 황용도 아버지에게 들어서 왕중양이 화산의 무예 시합에서 승리한 천하의 최고 고수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헤헤 웃으며 대답했다.
"그 사람이 천하의 고수라는 건 저도 알아요. 이제 됐어요?"
노완동은 눈물을 뚝 그치고 물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내가 왜 몰라요? 황약사 딸인데."
"맞아, 그럼 됐다. 하여간 네 아버진 고작해야 세 번째가 될까말까 한다구."
"왕중양이란 사람이 죽었는데도 우리 아버지가 최고가 아니란 말이에요? 그럼 도대체 누가 최고예요?"
"그건 나도 몰라. 하지만 네 아버진 아니야."
노완동은 왕중양의 자리가 황약사나 구양봉에게 내려질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구양봉을 옛날부터 깔보고 있는 형편이었고, 황약사는 자기를 16년 동안이나 섬에 가둬 두고 있는 자이니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네 아버진 영웅의 재목이 아니야. 세상 사람들 모두가 자기한테 큰 빚이나 진 것처럼 항상 얼굴을 상추잎처럼 시퍼렇게 하고 다니는데, 난 빚진 게 없다구. 흥, 허구헌 날 도깨비 수작이나 부리는 사람이 무슨 능력이 있겠니? 넌 네 아버질 닮으면 안 된다. 알았지?"
그는 황용이 가지고 온 음식을 맛있게 먹으면서 혼자 계속 떠들었다.
"지금 천하에는 남제, 북개, 동사, 서독 이렇게 네 명의 고수가 있는데 내가 보기엔 북개 홍칠공이 그중 나은 것 같아. 생각해 봐라. 남제처럼 황제 자리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무림의 최고 고수가 되겠니? 잔머리만 굴리는 네 아버지도 안 되고, 구양봉처럼 사악한 자는 더 말할 것도 없어……."
한창 신나게 지껄이다가 문득 이상한 기척이 느껴져서 고개를 든 노완동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황약사가 황용의 등뒤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는 얼른 황용에게 말했다.
"황용야, 이제 집에 가거라."
그러나 황용은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아버지도 맨날 저한테 집에만 있으라고 하신단 말이에요. 전 답답해 죽을 것 같아요."
노완동은 그런 황용을 바라보며 낄낄낄 웃기만 했다.
황용은 등뒤에서 들려 오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영감, 내가 지금 잔머리만 굴려서 영웅의 재목이 못 된다고 말했소?"
노완동은 엉뚱한 곳을 바라보며 딴전을 피웠다.
"흥, 귀도 밝네그려."
"그래, 당신이 보기엔 흥칠공이 영웅이란 말씀이오?"
황약사가 재미있다는 듯이 묻자 그가 얼른 대답했다.
"그렇소. 그 사람의 강룡십팔장과 타구봉법은 천하에 드문 무예인데다 그를 따르는 수하의 무리가 수십만에 이른단 말이오. 홍칠공은 당신처럼 손바닥만한 섬에서 벙어리 노복 몇이나 거느리는 그런 째째한 사나이가 아니오."
말을 마친 노완동은 황약사에게 한 방 얻어맞을까 봐 얼른 동굴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는 동굴 안에서 머리만 쏙 내밀고 황약사를 약올렸다.
"당신이 16년 동안이나 중원 출입을 하지 않는 것도 홍칠공이 무서워 그러는 줄 내가 모르는지 알아? 그의 타구봉에 맞으면 박살이 나니까."
황약사는 머리가 허연 영감이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놀리고 도망가는 것이 우스워 허허 웃고 말았다. 그러나 노완동은 분풀이를 하려는 것인지 그를 계속 놀려 댔다.
"하긴 무서운 게 어디 홍칠공뿐인가? 구양봉도 무섭고 남제도 겁날 거야. 당신이 날 이 섬에 가둔 건 나한테 《구음진경》을 빼앗아서 좀더 실력을 기른 다음에 그들과 대적하려는 계산 때문이었어. 내가 그 속을 모를 줄 알아?"
"어린애 앞에서 그만하시오, 영감."
황약사가 점잖게 나무랐으나 노완동은 손뼉을 치면서 혼자 웃고 떠들어댔다.
"황용아, 네 아버진 말이다, 자나깨나 《구음진경》을 훔칠 궁리만 하고 있단다. 하하하!"
결국 약이 오른 황약사는 딸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황용아, 어서 집에 가지 않고 뭘 하는 게냐? 다시 한 번 이 노인에게 음식을 날라 줬다간 네 다리가 성치 못할 줄 알아라! 음식이 남으면 개나 줘!"
난생 처음 아버지에게 호된 꾸지람을 들은 황용은 설움이 복받쳐 울음을 터뜨리며 뛰어갔다. 황용이 달려 내려가는 모습을 보며 노완동은 혀를 끌끌 찼다.
"화풀이할 데가 없어 저렇게 예쁘고 착한 딸한테 화풀이를 하나 그래?"
"영감, 그러지 말고 그동안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한 번 봅시다."
"흥, 어림없는 소리. 실력을 보자면서 날 한 방 먹일려고? 그렇게 겨루고 싶으면 맹세를 어기고 이 동굴로 들어오시지!"
황약사는 슬그머니 웃으며 노완동에게 욕을 퍼부었다. 아마 이 장난꾸러기 노인이 없었다면 아형을 잃은 황약사는 이보다 훨씬 삭막하게 살았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황용은 침대에 엎드려 엉엉 울었다.
'어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이럴 때 어머니 가슴에 안겨 실컷 울 수 있을텐데.'
이런 생각을 하자 그녀의 설움은 더 커지기 시작했다. 따뜻하고 포근한 한마디의 위안이, 어머니의 손길이 너무나 그리워 황용은 울고 또 울었다.
'어머니, 그렇게 일찍 돌아가실 거면 왜 날 낳으셨어요? 아버지는 매일 엄마 초상화만 보시고 내게는 관심도 없으세요.'
울다 지친 황용은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밤이 이슥해서 황약사는 딸의 방으로 가 보았다. 눈가에 눈물자국을 남긴 채 곤히 자고 있는 딸을 보니 그의 마음도 쓰라렸다. 그는 안쓰러운 마음으로 딸의 얼굴에 묻은 눈물자국을 닦아 주고 한참 동안 딸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황용은 커 갈수록 제 어머니를 닮아 가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그는 딸의 방에서 살그머니 나왔다.
문득 잠에서 깬 황용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 밖을 내다보았다. 검은 하늘에 별이 총총히 박혀 있었고, 별빛을 받은 바다가 희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불쑥 도화도를 떠나겠다는 결심을 했다.
'중원으로 가서 어머니가 계시던 호심장으로 가자. 거긴 아주 멋질 거야.'
어린 황용은 자기가 떠나 버리면 아버지가 얼마나 걱정하실 것인가 따위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일단 떠나겠다고 결심하자 마음이 급해져 다른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대충 짐을 꾸린 황용은 그것을 들고 아버지의 서재로 살금살금 가 보았다. 그곳의 불이 꺼져 있는 것으로 보아 아버지가 잠든 게 분명했다.
캄캄한 바닷가로 달려 나간 황용은 기슭에 있는 작은 배 하나를 풀어 힘겹게 밀어낸 다음 바다로 나아갔다. 그녀는 노를 쥔 손에 힘을 주며 육지를 향해 서서히 다가갔다.
날이 밝아 오자 불그레한 햇빛을 받은 바닷물의 수많은 물살이 비늘처럼 찬란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그러자 멀리에 검붉은 육지의 그림자가 보였다. 황용은 더욱 힘을 내어 노를 저었다.
한 시간쯤 지나 육지에 닿은 황용은 배에서 내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을로 걸어갔다.
이른 새벽에 바닷가에 앉아 있던 사내 네 명이 바다 쪽에서 걸어오는 황용을 발견했다. 한 사내가 눈을 번쩍 뜨며 외쳤다.
"어이, 초대각. 저기 좀 봐. 바다에서 선녀가 올라오네그려."
그 말에 초대각이란 자가 고개를 돌려 멀리서 다가오는 황용을 바라보았다.
"정말 예쁘게 생긴 계집인데……."
한 사내가 공연히 그를 부추기기 시작했다.
"이봐, 자네에게 시집을 마음이 있는지 한 번 떠봐. 그렇게만 되면 자넨 복이 넝쿨째 들어오는 거라구."
밤새 배를 저어 오느라 지치고 배고픈 황용은 그들에게 다가와 말했다.
"여보세요, 먹을 것 좀 주세요."
그녀가 인사 한마디 없이 다짜고짜 먹을 것을 달라고 하자 사내들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먹을 것 좀 달라는데 왜 웃는 거예요?"
황용이 깜찍하게 말하자 사내 한 명이 음탕한 눈초리로 그녀를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아가씨같이 예쁜 사람이 먹을 게 없어 걱정이라니, 말이 되나? 우리 초대각 형님에게 시집만 오면 그까짓 먹을 게 문제겠어? 매일 횐 쌀밥을 배가 터지도록 먹여 줄텐데."
젊은 아가씨가 동행도 없이 혼자 바닷길을 걸어 오자 황용을 얕잡아 본 사내들은 그녀에게 거침없이 음탕한 눈길을 던졌다.
그들의 응큼한 속내를 눈치챈 황용은 우선 배를 채울 요량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짐짓 새침하게 굴었다.
"아이 참, 누구한테 시집을 가라는 거예요?"
그녀는 얼굴까지 붉히면서 사내들을 살짝 흘겨보았다. 한창 피어나는 꽃송이처럼 환하고 어여쁜 황용이 교태를 부리자 촌놈들은 그만 혼이 다 달아나는 것처럼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이었다.
"그……그러니까 말이야……, 저 대각 형님이……."
그들이 바보처럼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자 황용이 얼른 말머리를 낚아챘다.
"그건 그렇고, 난 배고파 죽겠단 말이에요. 일단은 허기를 풀어야 다른 생각을 하죠."
초대각이란 사내는 황용이 벌써 제 계집이 된 것처럼 좋아서 입이 헤 벌어졌고, 공연히 그에게 선심을 썼다고 생각한 나머지 사내들은 후회막급한 표정을 지었다. 제 뺨이라도 찰싹찰싹 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황용은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내들에게 재촉했다.
"아, 얼른 먹을 것 가져오지 않고 뭐해요? 이러다 굶어 죽겠네."
사내들은 부리나케 자기의 오두막으로 들어가 먹을 것을 챙겨 왔다. 그들이 가져온 것을 보니 튀긴 생선 한 접시에다 불고기 한 접시, 그리고 고기국과 술이었다. 그들은 자리를 잡고 앉아 황용과 함께 음식을 먹으려 했다. 그러나 황용은 손을 내저었다.
"이러지 말아요. 난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어떻게 당신들과 한상에서 밥을 먹어요?"
그러자 그들은 아무 소리도 못하고 뒤로 물러나 그녀가 먹는 것을 지켜 보았다. 음식은 별로 맛이 없었으나 가릴 처지가 아니었으므로 황용은 그것들을 게눈 감추듯 재빨리 먹어 치웠다.
배불리 먹고 난 황용은 그들에게 인사를 했다.
"고마워요. 덕분에 잘 먹었어요. 참, 그러고 보니 은자가 없네. 혹시 은자 가진 거 있어요?"
초대각이 눈이 휘둥그래져서 물었다.
"은자? 은자는 뭐하게?"
"아이 참, 옷을 해 입어야 할 거 아니에요? 당신과 내가 한 벌씩 해 입고 이 사람들도 한 벌씩 입어야죠."
"쟤들은 왜 옷을 해 입히지?"
초대각이 이상한 표정으로 묻자 황용이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 저렇게 꾀죄죄한 옷을 입고 우리 결혼식에 참석하란 말이에요? 창피해서 어떻게 결혼식을 해요?"
초대각은 난처한 표정으로 다른 사내들을 쳐다보다가 어쩔 수 없이 은자를 가지러 집으로 갔다.
황용은 그의 뒤에 대고 소리쳤다.
"많이 필요하니까 있는 대로 다 가져와요!"
그러나 초대각이 가져온 은자는 겨우 2, 30냥밖에 안 되었다.
황용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아유, 겨우 이것밖에 안 돼요? 당신은 이걸로 나한테 장가들 생각이었어요?"
급한 김에 초대각은 다른 사람에게 은자를 빌리려고 했지만 다들 없다고 잡아떼었다. 그들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 생각했다.
'초대각을 싫다 한다면 저 계집은 내 차지다!'
"이것들 보세요. 나는 은자를 제일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한테 시집갈 거예요. 그러니까 어서들 가서 은자를 가져와 보세요."
그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사내들은 엉덩이를 들고 자기 집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황용 앞에 은자가 네 무더기나 놓여졌다. 네 명은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황용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정작 황용은 은자를 보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당신들 걸 전부 다 합쳐도 이것밖에 안 되는군요."
네 사람은 그녀의 눈치를 보면서 물었다.
"얼마나 더 있어야 되는데?"
"없으면 관둬요."
그녀는 초대각을 돌아보며 말했다.
"어서 그 걸레조각 같은 옷을 벗어요. 정나미 떨어진다구요."
속옷을 입지 않은 초대각이 옷을 벗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사정을 짐작한 황용이 웃으며 말했다.
"모두 한집안 식구 같은 사람들인데 어때요?"
황용의 달콤한 목소리와 꽃 같은 미소에 얼이 빠진 초대각은 그녀가 자기를 좋아한다고 생각하고는 용기를 내어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의 가슴은 활랑활랑 뛰고 있었다. 그는 얼른 옷을 벗어 황용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황용은 초대각의 옷에 은자를 척척 싸서 들고 일어나 걸어갔다.
그녀가 열 발자국쯤 멀어지자 사내들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아이고, 저 년이 내 돈을 훔쳐 간다!"
그들은 황용을 잡으려고 앞을 다투어 달리기 시작했다.
"저 년 잡아라!"
사실 황용이 아무 짓을 하지 않았어도 그녀를 곱게 보낼 위인들이 아니었지만, 깜찍하게 속여서 돈까지 뜯어 가자 기가 막히고 창피해서 말도 안 나올 지경이었다.
뒤를 돌아본 황용은 사나운 눈길로 그들을 노려보았다.
"쫓아오면 가만두지 않겠다!"
그녀를 쫓아오던 사내들은 가소롭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뭐? 우릴 가만두지 않겠다구? 그래, 이불 속에서라면 가만두지 않아도 되고말고!"
그들은 킬킬거리며 황용에게로 다가들었다. 순간 그녀가 손을 내밀자 제일 앞에 있던 초대각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더니 그대로 쿵 쓰러졌다. 나머지 사내들이 놀라 쓰러진 그를 흔들어 깨웠다.
"이봐, 초대각! 정신차리게!"
입으로 피를 토한 초대각은 다시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세 명의 사내는 깜짝 놀라서 황용을 쳐다보았다.
"저, 저 년이 사람을 죽였다!"
황용은 여유만만하게 말했다.
"이 놈들, 너희들도 초대각의 저승길을 따라가겠느냐?"
그들은 황용의 눈치를 보며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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