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크밤

화산논검 - 동사 황약사 6

3학년2반 | 2022.02.20 07:09:53 댓글: 0 조회: 377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9980

제32장 우가촌의 혈투

임안성 부근에 황폐하고 고요한 우가촌(牛家村)이 있었다. 때는 한창 추수철인 팔월이라 사람들은 모두 곡식을 걷으러 들판으로 나가서 인지 마을은 마치 사람이 살지 않는 것처럼 한산했다. 그러나 가까운 전당강에선 힘찬 물소리가 잠시도 쉬지 않고 들려 왔고, 강 기슭의 단풍 든 나무들은 머리에 붉은 불을 이고 있는 듯했다. 몇몇 초가집 굴뚝에서 흰 연기가 가냘프게 피어 오르더니 맑고 푸른 하늘로 날아 올라갔다.
이 고요한 마을에 갑자기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말을 탄 세 사나이가 나타났다. 그들은 마을 안으로 들어오다가 작은 주점을 발견하고는 그 앞에 말고삐를 비끄러맸다. 그들 모두 똑같은 무관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버릇처럼 입가에 비웃음을 달고 있는 마른 체구의 사나이는 특별한 무기를 감추고 있는지 허리 부분이 유난히 불룩했다. 큰 키에 퉁방울눈을 한 사나이는 허리에 패도 하나를 차고 있었고, 별다른 특징이 없는 마지막 사나이는 손에 한 쌍의 판관필(判
官筆)을 쥐고 있었다.
한 사나이가 주점 문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아니, 주인이 어딜 갔나?"
"문을 두드려 봅시다. 이쯤에서 요기를 하고 가야 하니까."
그때 뒤에서 히히히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려 왔다. 세 사람이 뒤를 돌아보니 머리를 산발한 여자아이가 바보 같은 웃음을 흘리며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한 사나이가 여자아이에게 물었다.
"얘, 여기가 주점이냐?"
여자아이는 똑같이 되물었다.
"여기가 주점이냐?"
키 큰 사나이가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
"여기서 술과 음식을 파느냐 말이야!"
바보 같은 아이가 대답도 없이 주점 안으로 들어가자 사나이들은 그녀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여자애는 주방으로 들어가더니 연신 히히거리며 바가지에 삶은 고기를 담아 가져오고 술도 한 단지 내왔다. 그녀는 사나이들이 앉아 있는 탁자에 와서 입을 헤 벌린 채 그들을 보고 얼빠진 웃음을 흘렸다.
그들이 뭐라고 물어도 아이는 바보처럼 웃기만 할 뿐 아무것도 대답하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키 큰 사나이가 주방으로 들어가 젓가락과 그릇 몇 개를 가지고 나왔다. 사나이들은 술과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여자애는 여전히 그 옆에 서서 넋 나간 표정으로 그들의 하는 양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여자애의 존재를 무시하고 자기들끼리 음식을 먹으며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놈이 마음을 바꿔 먹은 게 분명하다니까. 그러니까 임안 근처에 얼씬도 안 하는 거 아니겠소?"
키 큰 사나이의 말에 마른 사람이 코웃음을 쳤다.
"흥, 어림없는 소리. 자네가 몰라서 하는 소리야. 어젯밤에도 황궁의 그림 한 폭이 없어졌다네. 놈이 멀리 가진 못했을 거야."
다른 사나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이 부근에 있다가 밤이 되면 황궁으로 기어들 거요. 한데 놈의 안목이 대단한 모양이오. 웬만한 건 손도 안 대고 금은으로 된 그릇이나 오래 된 그림만 훔쳐 가는 걸 보면 말이오. 상서방 이태감의 말을 들으니 놈이 폐하의 문진(文鎭)과 옥척(玉尺)까지 가져갔다 하오."
"어쨌든 이번엔 기필코 놈을 잡아야 해. 이번에도 놓치면 위에 계시는 나으리들이 우릴 가만두지 않을 거야."
세 사람 모두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이들은 황궁의 시위(侍衛)들이었는데, 대력응조(大力鷹爪) 국경(鞠敬)과 철장(鐵掌) 수평(隋平), 괴도(槐刀) 팽명(彭明)이었다.
그들이 울적한 심사로 술잔을 들이키고 있는데 주점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들어왔다. 그의 발소리가 얼마나 가벼운지 그가 들어설 때까지 주점에 있던 사람들은 인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는 쩔뚝쩔뚝 걸어 들어오다가 술을 먹는 세 사람을 보고 잠시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으나 금방 얼굴에 웃음을 띄우며 머리를 조아렸다.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얼른 안주 몇 가지를 올릴테니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괴도 팽명이 못마땅한 기색으로 큰소리를 쳤다.
"아니, 무슨 주점이 대낮에도 텅 비어 있는 게야?"
주인은 연신 허리를 굽실거리며 사과했다.
"볼일이 있어 잠깐 나갔다 왔습니다요. 정말 죄송합니다."
그는 양손에 지팡이를 짚고 가뿐하게 주방으로 들어가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김이 무럭무럭 오르는 음식을 내왔다.
세 사나이가 한창 음식을 박고 있는데 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인이 들어올 때 안에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문의 빗장을 질러 놓은 것이다.
"예, 예. 곧 나갑니다!"
주인은 이렇게 대답하며 지팡이를 짚고 달려나갔는데 그 걸음이 성한 사람보다도 빨랐다.
들어선 손님은 자리에 앉기도 전에 성급하게 외쳤다.
"어서 술과 안주를 가져오시오. 빨리 먹고 임안부로 들어가 일을 봐야 하니까."
그 손님을 본 시위들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가 매우 깔끔하고 호화롭게 차려 입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여기까지 오는 길에 사사로이 염낭을 채울 일이 많아서 그들은 톡톡히 재미를 보았으나, 이 작은 마을에 있는 주점에 들어서니 눈을 씻고 봐도 빼앗아 갈 만한 물건이 없어서 기분이 좋지 않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지금 들어선 손님을 보니 혈색도 좋고 옷차림도 훌륭한 것으로 보아 어느 문하의 종사(宗師) 같아 보였다. 머리에 쓴 소요건 앞에는 일월을 삼키는 용
의 모양을 새긴 옥패가 달려 있었고, 손에는 금반지를 세 개나 끼고 있었으며 허리에도 옥패를 차고 있었다.
주인이 술과 안주를 내오자 그는 음식을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괴도 팽명이 자기 동료들에게 슬쩍 눈짓을 하더니 그에게 다가가 수작을 걸기 시작했다.
"손님, 혼자 드시기도 적적하실 텐데 저희와 합석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뭐, 너희와 합석을 하자구? 그게 무슨 주제넘은 소리냐?"
그 말에 기분이 상한 괴도 팽명은 오른손을 들어 탁자 모퉁이를 내리쳤다. 그러자 모퉁이 부분이 칼에 베인 것처럼 뭉텅 떨어져 나갔다. 손님은 그것을 보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산서 오호(五虎)의 단문도(斷門刀) 팽씨네 독문도법(獨門刀法)이군. 역벽천균(力劈千釣) 술법인데 아직 여물지 못했어."
팽명은 속으로 깜짝 놀랐으나 이내 이렇게 생각했다.
'우리 단문도가 워낙 널리 알려져 있으니 이상할 것도 없지.'
그래서 그는 태연히 말했다.
"보아하니 아주 잘 차려 입으셨군요. 저는 옛날부터 진주 보석을 모아 온 사람인데 당신의 옥패를 보니 견딜 수가 있어야지요. 무척 비싼 물건인 것 같은데 한 번 보여 주시겠습니까?"
그러자 손님은 소요건을 풀더니 옥패를 뚝 떼서 시원시원하게 건네주었다.
"자, 가져 가서 보게."
옥패를 받아 든 괴도 팽명은 동료들을 보고 히죽 웃고는 우쭐거리며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것을 본 철장 수평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저렇듯 식은죽 먹기라면 나도 가만있을 수 없지.'
그는 손님에게 다가가 말했다.
"그 손가락에 낀 반지 좀 되여 줄 수 없소?"
주점 주인은 이 광경을 한쪽에서 가만히 지켜 보았다.
"흠, 자네도 보석을 좋아하는 모양이지?"
그는 손가락에 낀 반지 세 개를 하나하나 뽑아 철장 수평에게 건네주었다. 철장 수평은 그 반지들을 자기 손가락에 끼면서 헤헤 웃었다.
"야, 내 손에 딱 맞는데."
그리고는 태연히 자기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대력응조 국경도 그가 달라는 대로 내놓는 것을 보자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럴 때 한몫 챙기지 못하면 바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그도 동료들처럼 그에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그런데 막상 앞에 가 서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쨌든 그는 괴도 팽명이나 철장 수평보다는 명성을 떨치는 사람인데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무엇을 달라고 하기가 아무래도 쑥스럽고 창피스러웠던 것이다. 그가 인사만 하고 머뭇거리자 손님이 물었다.
"자네는 술은 안 마시고 왜 나한테 인사를 하는 건가?"
대력응조 국경은 어줍게 웃기만 할 뿐 차마 말은 꺼내지 못했다.
"옳거니, 자네도 뭔가 달라고 왔나 본데, 값비싼 게 있어야지. 어쨌든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말을 하게. 달라는 대로 줄테니."
대력응조는 말은 못하고 그의 허리에 찬 옥패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손님은 한숨을 지었다.
"이게 탐나나? 그렇다면 줘야지 어쩌겠나? 자네도 금은 보석을 퍽이나 좋아하는 모양일세."
대력응조 국경은 체신머리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손님은 자기 허리에서 옥패를 뚝 떼서 대력응조 국경에게 주었다. 참 별난 사람이었다.
"자, 가져 가게. 이 옥패는 적어도 금 천 냥은 나가는 보물이니 조심해서 다루게."
대력응조는 손이 다 떨릴 지경이었다. 이런 걸 두고 횡재라고 한단 말인가? 풍채가 늠름한 걸 보면 그 손님도 만만치 않은 인물처럼 보이는데 왜 저렇게 바보 천치 같은 짓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세 사람은 오늘 횡재를 했다 생각하고 모두들 마음이 흐뭇해져 있었다.
그동안 술과 안주를 배불리 먹은 손님이 주점 주인을 불렀다.
"여보게, 주인장. 술값을 받으시오."
손님은 그에게 은자를 주고 일어나 문 어귀까지 가더니 무슨 생각에서인지 도로 돌아왔다. 그는 세 사람이 있는 탁자에 와서 걸상을 당겨 앉더니 입을 열었다.
"난 지금 임안에 들어가야겠는데 은자가 모자라는군. 난 보석보다는 은자를 좋아하는 사람일세. 자네들 혹시 은자 가진 것 좀 없나? 금도 좋고 어음이라도 괜찮네. 있으면 모두 내놓게."
세 사람은 이자가 미친 것이 아닌가 하는 눈길로 그를 쳐다보았다. 말 그대로 죽지 못해 환장을 한 사람이 분명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손님은 자기 말만 했다.
"난 자네들이 누군지 훤하게 알고 있지. 자네가 회남(淮南) 응조문(鷹祖門)의 제자 맞지? 자네는 손에 응조공부(鷹祖功夫)를 한 5, 6성(成)은 익혔을 거야."
그러면서 손님은 왼손의 다섯 손가락을 꼿꼿이 펴서 손끝으로 탁자를 슬며서 눌렀다. 그의 손가락은 탁자를 깊이 파고들어갔다. 이제 조금만 더 힘을 주면 그 두꺼운 탁자에 구멍이 펑 뚫릴 판이었다.
대력응조 국경의 둥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의 사조(師祖)인 대력응조왕 양백수(楊白守)가 살아 있다 해도 이 정도까지 이르진 못할 것이다.
손님은 철장 수평을 보고 또 말을 이었다.
"자네가 내 반지를 손에 끼는 걸 보고 자네의 장력을 알 수 있었지. 그런데 반지 세 개가 서로 어긋나게 끼어야지, 만약 가지런히 끼었다간 싸울 때 손가락을 한데 모을 수가 없다네. 고수들은 다른 사람과 싸울 때 손가락에 무엇을 끼우고 싸우지 않는다네."
그러면서 그는 젓가락 네 개를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그가 탁자를 향해 손바닥을 내밀자 탁자가 조각나 버렸다.
손님은 또 괴도 팽명에게 말했다.
"자넨 그 잘난 칼 한 자루 차고 다니면서 큰 무공이나 닦은 것처럼 우쭐거리는데 부끄럽지도 않나?"
그리고는 손가락을 허공에 대고 몇 번 홱홱 내질렀다. 그러자 괴도 팽명의 안색이 대번 변하더니 벌떡 일어나 그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선배님의 검술은 분명 우리 문파의 검술 같은데 도대체 무슨 식인지 알 수가 없군요. 가르쳐 주십시오."
그는 빙긋 웃었다.
"이게 자네들의 산서 오호 단문도 제48식 '오호제출(五虎齋出)' 아닌가?"
괴도 팽명은 오호 단문도의 검술을 제47식까지 배운 사람이었다. 제48식 '오호제출'이 있다는 말은 들었으나 그것이 어떤 식인지는 그의 아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데 오늘 처음 이렇게 알게 되니 실로 감개무량한 일이었다.
세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다가 일제히 그에게 허리를 굽혔다.
"선배님은 누구십니까?"
손님은 허허 웃으며 품에서 뭔가를 꺼내 탁자에 내려놓았다.
세 사람이 보니 그것은 무쇠 손바닥인 철장이었다. 철장방 방주의 신표였던 것이다. 천하 대방의 하나로서, 강소, 절강 일대에서 가장 유명한 철장방이므로 흑도(黑道)든 백도(白道)든 그 앞에서 설설 기는 형편이었다. 세 사람은 철장방 방주 구천인이 고명한 무림 고수의 하나로서, 경공과 장법이 천하 제일이라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다.
셋은 무릎을 꿇고 구천인에게 큰절을 했다.
"방주님을 몰라본 저희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런 소리는 그만두고 내 물건이나 도로 내놓게."
구천인이 엄한 표정으로 말하자 세 사람은 빼앗은 물건들을 고스란히 내놓았다.
구천인은 소요건을 벗어 탁자에 내려놓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미안하지만 그 옥패를 제자리에 달아 주게."
괴도 팽명은 찍소리도 못하고 떨리는 손으로 옥패를 구천인의 소요건에 다시 달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어찌나 떨리는지 옥패를 단다는 것이 그만 소요건에 구멍만 내고 말았다.
다행히 구천인은 그런 것쯤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번에는 철장 수평을 보고 말했다.
"자네도 그 반지를 도로 끼워 줘야지."
그러면서 왼손을 내밀었다.
철장 수평은 눈을 홉떴다. 미끈한 미인의 손가락이라면 거기에 반지를 끼워 주는 것도 즐거운 일이겠지만, 이건 손가락 마디가 엄청나게 굵고 거친 것이 마치 곰 발가락 같아서 반지를 끼우기도 어려운 일이지만 곰발 같은 손바닥이 언제 자기 정수리를 내리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런 손에 한 번만 맞아도 머리가 박살날 것이다. 철장 수평은 식은땀을 흘리며 반지 세 개를 간신히 구천인의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구천인은 또 대력응조 국경에게 말했다.
"자네, 그 옥패를 내 허리에 안 채워 주려나?"
그러나 대력응조 국경은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회남(淮南) 응조 문파에서 대력웅조 국경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고, 천하의 무림에서도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인데 남의 허리에 옥패를 달아 주어야 하다니, 치런 수치가 어디 있는가.
그는 괴도 팽명과 철장 수평을 돌아보며 눈짓을 했다. 힘을 합쳐 구천인을 때려눕히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구천인에게 기가 죽은 그들 둘은 감히 그럴 생각을 못했다. 그들은 국경의 눈짓을 못 본 체할 뿐이었다. 대력응조 국경은 허리를 굽실거리며 다가가 구천인의 허리에 옥패를 달아 줄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구천인은 자기 허리를 돌아보고 아주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더니 머리를 들었다.
"자네들품에 있는 은자와 어음도 이리 내게."
세 사람은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이 돌아다니며 빼앗은 은자와 어음쪽들은 적지 않았다.
"대내시위들이라 과연 챙긴 것이 적지 않구만."
구천인은 은자를 전대에 넣고 어음은 품에 넣은 다음 껄껄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재수가 없으면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처음 보는 사람에게 수모를 당하고 돈까지 뜯겼으니 이런 망신이 어디 있는가. 구천인이 문밖을 나설 때까지는 찍소리도 못하고 속만 끙끙 앓고 있던 그들은 그가 사라지자 갖은 욕설과 저주를 퍼부었다.
그래도 성이 풀리지 않은 세 사람은 공연히 주점 주인한테 화풀이를 했다.
"절름발이, 어서 술을 가져와라!"
철장 수평이 고함치자 주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 말 없이 술을 가져왔다.
그들은 곤죽이 되도록 술을 퍼마셨다. 만취한 괴도 팽명이 벌떡 일어서더니 대뜸 주점 주인의 멱살을 거머쥐었다.
"이 놈, 너 지금 속으로 날 비웃고 있지?"
주인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왜 손님을 비웃습니까?"
"안 웃었다고? 그럼 내가 한 번 웃게 해주마."
괴도 팽명이 억지를 부리자 주인이 말을 받았다.
"아, 세상에 억지로 웃으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임마, 내가 웃으라면 웃는 거지. 웬 말이 그리 많아?"
그러면서 괴도 팽명은 다짜고짜 주인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앞가슴을 맞은 주인은 엉덩방아를 찧으며 저만큼 나가떨어졌다.
고주망태가 된 대내시위들은 주인을 사나운 눈초리로 노려보면서도 저희끼리는 낄낄거렸다. 절름발이 주인은 입가에 흐르는 피를 손등으로 쓱 문지르며 잠깐 사나운 기색을 띠었다가 금방 표정을 바꾸었다.
"나으리들, 취하였습니다그려."
"뭐 내가 취했다구? 이 놈아, 내가 취하려면 아직도 멀었다. 믿지 못하겠으면 술을 더 가져와!"
철장 수평은 주인을 기다리지 않고 비틀거리며 일어나 곧장 술청옆에 있는 벽장으로 달려갔다. 거기에 술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벽장을 홱 열어젖히고 보니 안에는 그릇 몇 개가 있을 뿐이었다. 그것도 어찌 된 영문인지 그릇이 딱 들러붙어 있어서 손으로 들어낼 수가 없었다.
"국경 형, 이것 봐. 이 벽장이 좀 괴상한데?"
철장 수평이 소리치자 대력응조 국경이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괴……괴상할 것도…… 많네. 그……그릇들이잖아?"
세 사람은 벽장 안을 들여다보았다.
이때 뒤통수에서 쌩 하는 바람 소리가 들려 왔다.
무예를 닦은 사람은 아무리 취했어도 주변의 상황에 민첩하게 대응하는 법이다. 뒤통수에서 휘파람 소리 같은 것이 나자 그들은 누군가 배후에서 병장기를 휘두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대력응조 국경과 철장 수평은 즉시 몸을 날려 한켠으로 비켜섰다. 그런데 두 사람 뒤에서 벽장 안을 들여다보려던 괴도 팽명은 갑자기 날아오는 지팡이를 미처 피하지 못했다. 지장이는 그의 어깨부터 허리까지 깊은 상처를 만들어서 하마터면 뼈까지 상할 뻔했다.
모진 아픔을 느낀 괴도 팽명은 무서운 소리를 지르며 지팡이의 임자인 절름발이 주인에게 달려들었다. 미처 칼을 뽑지 못한 괴도 팽명은 죽을 힘을 다 짜내 주먹으로 상대방의 급소를 내지르려 하였다. 그러나 절름발이 주인은 지팡이로 그의 공격을 쉽게 막아냈다. 그러자 괴도 팽명은 술수를 바꾸어 '금고제명(金鼓齋嗚)'으로, 즉 주먹 두 개로 상대방의 태양혈을 갈기려 했다. 그런데 팽명의 주먹이 주인에게 닿기도 전에 주인의 지팡이가 팽명의 왼쪽 어깨를 내리쳤다.
몇백 근의 힘으로 내리치는 지팡이에 괴도 팽명의 왼쪽 어깨가 단번에 부러져 축 늘어지고 말았다. 절름발이 주인은 즉시 오른쪽 지팡이를 들어 괴도 팽명의 목을 내리쳤다. 뒤로 벌렁 나자빠진 괴도 팽명의 목에서 뼈마디 끊어지는 소리가 몇 번 나더니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는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이 놈! 바로 네 놈이었구나!"
대력응조 국경과 철장 수평이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그들이 찾던 도적이 바로 이자라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황궁의 태감 두 명과 시위 하나가 모두 날카로운 무엇에 인후를 찔려 죽었는데 그 수법이 바로 이자의 수법과 똑같았다.
"네 이 놈! 오늘이 마지막인 줄 알아라!"
대력응조 국경은 매 발톱 같은 두 손으로 주인을 덮쳤다. 갈퀴같은 그의 두 손에서 찬바람이 쌩쌩 일었다. 대력응조 국경의 내력도 보통이 아니었다. 절름발이 주인, 즉 곡영풍은 지팡이를 휘두르며 둘과 싸웠다. 그의 지팡이 끝은 대력응조 국경을 내지르기도 하고 철장 수평을 치기도 했다.
곡영풍 역시 고수였지만 이 두 사람의 무술이 괴도 팽명보다는 고강한 편이었으므로 두 사람을 당해 내기가 어려웠다.
한참 동안 싸웠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고, 주점 안은 탁자와 걸상이 낭자하게 뒤집어져 아수라장이 되었다. 결국 곡영풍은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두 사람은 주점 밖의 나무에서 곡영풍을 따라잡았다. 밖으로 나간 곡영풍은 지팡이를 휘두르더니 그들이 타고 온 말부터 해치웠다. 지팡이 끝으로 대가리를 맞은 말 세 필은 처참한 울음 소리를 내면서 쓰러져 버렸다.
"이 놈 봐라. 고발이 두려워 말부터 죽이는구나."
철장 수평이 소리치자 곡영풍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말이 죽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네 놈들도 염라부로 보낼테니 거기 가서 말을 찾아라."
세 사람은 다시 싸우기 시작했다.
대력응조 국경은 곡영풍이 황궁의 물건을 도적질한 자라는 걸 알자 처음엔 굉장히 기뻤다. 자기와 철장 수평이 그에게 쉽사리 오라를 지울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30여 합을 싸운 뒤에도 곡영풍의 지팡이는 갈수록 힘이 더해져서 무서운 소리를 냈고, 몸을 날리며 쌍지팡이를 휘두르는 술수가 모두 정교하고 날래기 그지없어서 둘은 젖 먹던 힘을 다 내어 싸웠으나 곡영풍을 이길 수가 없었다.
갑자기 푹 소리가 나더니 곡영풍의 지팡이 끝이 철장 수평의 어깨를 찔렀다. 철장 수평이 아우성을 치며 한 쌍의 철장을 내리쳤으나 곡영풍이 훌쩍 뛰는 바람에 빗맞았다. 곡영풍은 땅에 떨어지면서 한 지팡이로 철장의 어깨를 찌르고 한 지팡이로는 몸의 균형을 잡았다. 그런데 이때 철장 수평의 손이 곡영풍의 지팡이를 꽉 움켜쥐었다. 곡영풍은 지팡이를 잡아당기려 했으나 수평이 어찌나 세게 잡고 있는지 지팡이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 틈에 대력응조 국경이 매 발톱 같은 손으로 곡영풍의 어깨를 후벼냈다. 곡영풍의 왼쪽 어깨에서 살점이 뚝 떨어져 나가며 시뻘건 피가 흘렀다. 타는 듯한 통증에 곡영풍은 비명을 질렀다. 하마터면 지팡이마저 놓칠 뻔했다.
대력웅조 국경은 다시 손을 뻗어 곡영풍의 가슴팍을 긁었다. 옷이 찢어지자 다급한 곡영풍은 지팡이를 힘껏 내질렀다. 그 바람에 지팡이 끝이 철장 수평의 어깨를 꿰뚫고 말았다. 철장 수평은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이렇듯 혈투를 하고 있는데도 멍하니 서서 구경만 하던 여자애는 곡영풍의 어깻죽지에서 시뻘건 피가 흘러 나오자 비명을 지르며 달려가 쓰러진 철장 수평을 마구 때렸다. 그 솜씨가 곡영풍과 비슷했다. 그러나 여러 번 갈기긴 했지만 철장 수평의 급소를 치진 못했다.
"사고(薩姑)야!"
곡영풍이 부르짖었다. 바보 아이가 달려들지 않았으면 곡영풍은 벌써 지광이로 철장 수평을 죽여 버렸을 것이다. 곡영풍은 딸이 수평한테 맞을까 봐 겁나서 지팡이로 그녀의 겨드랑이를 끼어 옆으로 던져 버렸다.
그런데 이 순간 대력응조 국경의 손이 곡영풍의 오른쪽 어깨를 치며 또 살점을 뜯어냈다. 결국 곡영풍은 양 어깨에 상처를 입은 셈이었다.
철장 수평이 대력응조 국경을 도우려고 안간힘을 쓰며 일어나자 대력응조 국경이 소리쳤다.
"수평, 저 벽장을 열어 봐. 안에 뭔가 있는 게 분명해!"
그리고는 다시 곡영풍에게 달려들었다. 철장 수평도 황궁에서 잃은 물건들이 정말 곡영풍의 손에 있는지 알고 싶었다. 수평은 급히 가서 벽장안에 있는 그릇들을 이것저것 만져 보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비밀 장치를 돌리게 되어 비밀문이 열렸다.
"이봐, 이 안에 정말 비밀방이 있군."
수평이 그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곡영풍이 지팡이 하나를 힘껏 던졌다. 어깨를 맞은 철장 수평은 단번에 푹 고꾸라졌다.
"네 놈들 같은 못된 관리들과 황제는 백 번 죽어 마땅하다!"
곡영풍은 소리치며 지팡이를 바람개비 돌리듯 세게 돌렸다.
도대체 얼마를 싸웠는지 알 수 없었다. 국경과 곡영풍 모두 지쳐서 땅에 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이 절름발이의 무공이 보통이 아니군. 좀 쉬었다가 기운을 차려 결판을 내야지.'
대력응조 국경의 생각이었다. 두 사람은 각기 말없이 앉아 정신을 집중하여 운공(運功)만을 했다. 각기 자기가 먼저 기운이 회복되기를 바라면서. 곡영풍의 기력이 회복되면 자기가 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대력응조 국경은 철장 수평에게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 철장 수평이 신음 소리를 내며 대력응조 국경의 도움을 청했으나 그는 대답도 않고 자기 운공에만 일념했다.
향불을 두 대 피울 시각이 지나갔다.
곡영풍의 회복이 빨랐다. 원래 도화도의 내공심법은 사파 중에서도 극히 높은 공부(功夫)였다. 먼저 일어선 사람은 곡영풍이었다.
"사고야, 밖에 나가 놀아라. 내가 부르기 전에 들어오지 말아라."
곡영풍이 바보 아이에게 말했다.
"그때 오면 엿 줄 거야?"
바보 아이가 철없이 웃으며 묻는 말에 곡영풍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줄게."
곡영풍은 코허리가 시큰하여 얼굴을 외면하고 말았다. 바보 아이는 신이 나서 밖으로 깡총깡총 뛰어나갔다.
곡영풍은 철장 수평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황제에게 빌붙어 개처럼 사는 놈들의 최후다!"
그는 철장 수평의 가슴을 겨냥하여 지팡이를 내질렀다. 그가 칠분(七分)의 힘밖에 쓰지 않았고 철장 수평의 손이 지팡이를 꽉 잡았는데도 지팡이는 철장 수평의 가슴에 푹 꽂혔다. 철장 수평은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벌렁 자빠지더니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곡영풍은 대력응조 국경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그들 셋 중에 그의 무술이 제일 고강한데다 꾀가 많아 대적하기가 만만치 않음을 곡영풍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지장이 끝으로 대력응조 국경을 겨냥했다.
"너도 염라부로 보내 주마!"
그리고는 번개같이 대력응조 국경의 이마를 내리쳤다. 그런데 대력응조 국경이 갑자기 눈을 뜨고 벼락 같은 소리를 내지르면서 곡영풍의 지팡이 끝을 손으로 잡았다. 둘은 밀고 당기며 한동안 악전고투를 했으나 좀체로 승부가 나지 않았다.
"오늘 너와 나 둘 중에 하나가 죽어야 결판이 날 것이다."
대력응조 국경이 그렇게 말하며 할퀴려 들자 곡영풍이 얼른 피했다. 그 바람에 서로의 위치가 바꾸어졌다. 대력응조 국경은 그 틈에 얼른 벽장으로 들어갔다. 자그마한 벽장 안에 철궤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 놈, 장물이 여기 있구나."
대력응조 국경이 철궤 뚜껑을 열어 보니 그 안에 보석이 가득 들어 있었다.
"모두 여기 있었구나."
그때 윙 하는 바람 소리가 나더니 곡영풍의 지팡이가 날아들었다. 좁은 벽장에서 둘은 또 어지럽게 싸웠다. 윙윙하는 바람 소리가 무섭게 나면서 벽장 안의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 상대방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곡영풍으로서는 좁은 벽장 안에서 손을 쓰기가 불편했다. 그러나 대력응조 국경의 응조장(鷹祖掌)은 할퀴고 후비고 잡아뜯는 등 근거리 박투가 위주여서 오히려 좁은 곳이 유리했다. 대력응조 국경은 무쇠 손바닥을 휘두르며 곡영풍의 지팡이를 막아냈다.
그러다가 둘은 또 기운이 빠져 잠깐 싸움을 멈추고 숨을 돌렸다.
철궤 옆에 앉은 대력응조 국경은 철궤를 열어 보며 중얼거렸다.
"흥, 장물이 여기 다 있으니 네 놈은 이제 죽은 목숨이다."
"그런 보물들은 황궁에 둘 필요가 없다. 내가 갖다가 사부님께 바치는 게 낫지."
'그래도 이 놈이 남을 생각할 줄 아는구나. 남을 주려고 이런 짓을 하다니…….'
대력응조 국경은 이렇게 생각하며 물었다.
"네 사부가 누구냐?"
"너 같은 놈이 무슨 자격으로 우리 사부님의 함자를 묻느냐? 우리 사부님은 세상에 둘도 없는 기남자(奇男子)이시다."
대력응조 국경은 코웃음을 쳤다.
"네 사부란 자도 너 같은 좀도둑이겠지."
그러자 곡영풍이 화를 발끈 내며 입을 열었다.
"결국은 여기서 죽을 테니 그럼 말해 주마. 죽어도 좀 알고나 죽으라고 말이다. 우리 사부님은 동해 도화도 도주이신 황약사이시다."
대력응조 국경은 그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황약사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천하의 최고 고수가 아닌가?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절름발이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흑풍쌍살도 동사 황약사의 제자라는 말을 들었지만 네 놈은 가짜일 거야."
대력응조 국경의 말에 곡영풍은 치를 떨었다.
"매초풍과 진현풍 얘기는 꺼내지 마라. 그 연놈들 때문에 우리가 이 고생을 하고 있다. 사부님 손에 다리 힘줄을 끊기고 쫓겨나서 이렇게 떠돌아다니고 있단 말이다. 그 연놈들 말만 나오면 난 이가 갈린다. 난 죽어 염라부에 가서도 그 연놈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자 대력응조 국경은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그러니 결국 네 놈도 동사의 제자이긴 한데 사부한테 쫓겨난 신세다 이 말이냐?"
"우리 형제가 비록 지금은 사부님한테서 쫓겨났지만 사부님은 조만간 우리를 부르실 것이다!"
곡영풍은 눈에 열기를 띠며 부르짖었다.
"밤낮 그런 꿈이나 꾸고 살아라!"
대력응조 국경은 무엇이 좋은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 말을 들은 곡영풍은 갑자기 회의가 생겼다.
'정말 사부님이 우리를 다시 도화도로 불러들일까? 내가 사부님을 위해 이 많은 보물을 모아 놓았다는 걸 아시면 사부님이 기뻐하실텐데. 하지만……, 하지만 사부님은 한번 뱉은 말을 고치는 법이 없다. 만약 저 놈의 말처럼 사부님이 끝까지 우리를 다시 부르지 않는다면 그동안 사지를 넘나들며 목숨을 걸고 훔쳐 온 이 많은 보물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나의 고생이 무슨 보람이 있는가? 나는 삿자리 하나에 죽 한 그릇이면 족하다. 나한테는 이 보물이 아무 소용이 없
다. 하지만 사부님이 부르시지 않는다면 무슨 낙으로 산단 말인가?'
곡영풍이 잠깐 정신을 팔고 있는 것을 대력응조 국경이 눈치챘다.
'이 놈이 황 약사한테 쫓겨난 생각을 하느라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있구나.'
그는 살그머니 곡영풍의 등뒤로 다가가 불시에 손바닥을 앞으로 쑥 내밀며 소리쳤다.
"이 놈! 황약사의 순장품이나 되어라!"
그리고는 번개같이 곡영풍의 등을 후려갈겼다. 그곳은 바로 심장이 있는 부분이었다. 곡영풍은 대번에 앞으로 고꾸라지더니 욱하고 피를 토해냈다. 그는 대력응조 국경을 돌아보며 말을 뱉었다.
"이, 짐승보다 못……."
그는 손가락을 떨다가 말도 다 못 잇고 고개를 푹 떨구며 쓰러지고 말았다.
자기가 곡영풍을 죽이리라곤 생각도 못했던 대력응조 국경은 혼자 남고 보니 모든 것이 꿈같았다. 그는 곡영풍의 시체 곁으로 다가가 한동안 그를 내려다보았다. 곡영풍은 그렇게 죽는 것이 못내 한스러운지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이 황량한 시골의 자그마한 주막집에서 맞아 죽은 귀신이 될 뻔했다고 생각하니 대력응조 국경은 무림 인물로서의 회한이 느끼지기도 했다.
그는 곡영풍의 품을 더듬었다. 종아리 곁에 기다란 칼이 하나 있을 뿐 다른 물건은 없었다. 아무리 뒤져도 쓸 만한 것이 보이지 않았다.
'에라, 그만두자. 이 절름발이가 훔쳐 온 보물 중에서 몇 개만 빼서 가져도 일생 동안 부족한 것 없이 살텐데.'
대력응조 국경은 손을 털며 속으로 웃었다.
그는 철궤 안을 들여다보았다. 옥환대(玉環帶), 서피함(犀皮含), 마노잔(瑪瑙盞), 비취 반지……. 하나하나가 모두 국보급의 보물들이었다.
대력응조 국경은 철궤의 밑바닥을 만져 보다가 그 밑에 뭔가가 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부랴부랴 보물들을 헤치고 보니 철궤 밑의 좌우에 고리들이 하나씩 있었다. 대력응조 국경은 손가락을 고리에 끼워 잡아당겼다. 그러자 보물이 든 위층이 들어올려지면서 그 밑에 있던 아래층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래층에는 형태가 괴이하고 퍼런 동녹이 슨 고물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이를테면 용문정(龍文鼎)이나 상이(商彛), 주반(周盤)이나 주돈(周敦) 따위의 골동품들이었
는데 대력응조 국경은 뭐가 뭔지 통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진주 보석보다 훨씬 더 값이 나가는 물건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또 그것을 들어올리자 맨 아래층이 나타났다. 거기에는 그림들이 있었다. 하나하나 펼쳐 보니 스무 개가 넘었는데 모두 대가들의 작품이었다. 대력응조 국경은 그림은 볼 줄 모르지만 족자에 찍힌 도장들은 알아볼 수 있었다. 그중에는 황제의 옥새가 찍혀 있는 것도 있었다. 황궁에서 훔쳐 온 진귀한 그림들임에 틀림없었다.
"복이 터졌구나, 횡재를 했어!"
대력응조 국경은 황홀경에 빠져 부르짖기도 하고 혼자 중얼거리기도 했다.
"내가 바보지. 이런 보물들을 왜 황궁에 갖다 바쳐? 내 집으로 가져 가면 모두 내 것이 되는데. 시골에다 장원을 하나 장만해서 미녀들을 몇십 명 데려다 놓고 일생 동안 호의호식하면 얼마나 좋은가?"
대력응조 국경은 그림들을 조심스럽게 철궤 안에다 집어 넣고 다른 두 층의 보물들도 차례로 집어 넣었다. 그는 뚜껑을 닫으려다 말고 다시 한 번 그 보물들을 들여다보았다. 한 번만 보고 뚜껑을 닫기엔 너무나 아쉬웠던 것이다. 하긴 일개 무인(武人)에 불과한 그가 평생 이토록 많은 보물을 본 적이 있었던가? 골동품과 그림이 값나가는 물건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보기에는 번쩍번쩍 빛나는 보석이 좋았다. 그는 손에 철궤 뚜껑을 든 채 고개를 늘어뜨리고
보석들을 들여다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곡영풍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대력응조 국경한테 심장을 얻어맞아 쓰러지기는 했지만 죽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가 겨우 정신이 들어 앞을 바라보니 대력응조 국경이 철궤 안을 들여다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곡영풍은 다리에서 길고 뾰족한 칼을 살며시 뽑아 들었다. 그리고는 살금살금 대력응조 국경의 뒤로 기어가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벽력 같은 소리를 지르며 그 길고 뾰족한 칼을 대력응조 국경의 둥에 박았다. 대력응조 국경은 비명을 지르며 안으로 고꾸
라졌다.
그리고 곡영풍 역시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대력응조 국경에게 최후의 칼날을 박을 때 곡영풍의 심장도 멎어 버린 것이다.
곡영풍이 박은 칼은 대력응조의 둥을 꿰뚫고 앞가슴까지 나가 철궤 뚜껑에 박혀 있었고, 철궤를 붙잡고 있는 대력응조 국경의 몸은 죽기 직전의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제 다시는 보물들을 볼 수 없게 된 그는 두 손으로 철궤 뚜껑을 안고 마지막 몸부림을 쳤지만 고통만 더해질 뿐이었다.
"이…… 보물들은 모……몽땅 내 거다!"
대력응조 국경은 이 말을 내뱉고는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때 바보 아이는 밖에서 들어와 탁자에 앉아 있었다.
"아이, 배고파. 배고파 죽겠네."
그 애는 탁자 위에 놓인 밥과 반찬을 보며 이런 소리를 하다가 아버지가 보이지 않자 히죽 웃었다.
"배고프니까 밥 먹을래……."
그 애는 밥그릇을 들고 아귀아귀 먹어대기 시작했다. 온 얼굴이 밥풀투성이였다. 실컷 먹고 배가 부른 아이는 혼자 놀기 시작했다.
"돌아라, 돌아라, 외할머니 네 집까지 돌아라. 외할머니 만나면……."
굴레 돌리기를 하다가 그것도 싫증이 나자 이번에는 벽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 사람이 둥에 칼이 꽂힌 채 철궤 위에 엎어져 있는 걸 보고 아이는 겁도 없이 다가가 물었다.
"왜 여기 있어?"
죽은 사람이 아무 말도 안 하자 아이는 혼자 지껄였다.
"정말 나쁜 사람이야. 나랑 말도 안 해……. 나도 말 안 해."
아이는 화가 났는지 입이 뾰로통해졌다.
그러다가 곡영풍의 앞으로 걸어갔다. 아버지를 본 아이의 눈길엔 기쁨이 흘렀다. 어머니를 일찌감치 여의고 아버지 손에서 자랐기에 아버지에 대한 정이 유난히 깊은 아이였다.
"아빠, 일어나. 아빠, 일어나라니깐."
아이가 아버지를 흔들었으나 꼼짝도 하지 않자 그의 몸을 뒤집어 놓으며 아버지를 불렀다.
"아빠, 왜 대답 안 해? 어서 말 좀 해."
그러나 이미 숨이 끊어진 곡영풍의 입에서는 대답 대신 붉은 피가 흘러내릴 뿐이었다. 아이는 손가락으로 그 피를 찍어서는 제 아버지의 얼굴에 발라 놓기 시작했다. 아이는 히히 웃으며 일어나더니 밖에 팽개쳐져 있는 지팡이를 가져와서 아버지의 겨드랑이에 갖다대며 불렀다.
"일어나, 어서……."
지팡이가 없어서 아버지가 일어나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팡이를 갖다 주어도 아버지는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아버지가 일어나지 않자 아이는 화가 나서 밖으로 나와 버렸다.
"안 나오려면 그만둬. 나도 못 나오게 할테야. 영영 못 나오게 할테야!"
아이는 눈까지 흘기며 주점 벽에 있는 벽장 안의 그릇들을 돌렸다. 아이가 한동안 끙끙거리자 벽장 문이 드르륵 닫혔다.
"야! 내가 했어!"
아이는 좋아라 웃으며 손뼉을 쳐댔다.
그때 갑자기 문밖에서 인기척 소리가 들렸다.
"주인 있소?"
그 소리를 들은 아이는 문으로 급히 뛰어갔다. 문밖에 웬 남자가 서 있었다. 아이는 문 틈으로 그를 내다보더니 다시 탁자에 와 앉았다. 그리고는 혼자 중얼거렸다.
"우리 집에 주인이 있던가? 주인이? 없지, 없어."
주점 안에서 대답이 없자 사나이는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 집에 또 누가 있느냐?"
그는 걸상에 앉으며 아이에게 물었다.
"이 집에 또 누가 있느냐?"
아이는 그의 말을 흉내내며 되풀이할 뿐이었다.
그제야 이 아이가 바보라는 걸 눈치챈 사나이는 더 말하지 않고 주방에 들어가 먹을 것을 찾았다. 마침 솥 안에 푹 삶은 고기가 있어서 그것을 꺼내고 술도 가져다 혼자 먹고 마시기 시작했다.
"거 술맛 좋다!"



제33장 신력이냐 마력이냐
아이는 그 사람을 보고 히히 웃으며 말했다.
"아까 왔다갔죠? 그랬잖아요?"
아이는 그의 머리에 있는 옥패괘(玉牌)와 손가락에 낀 세 개의 금반지, 그리고 허리에 달려 있는 옥패(玉佩)를 보고 히히 웃으며 또 말했다.
"여기 와서 떼어 냈다가는 다시 달고……."
이때 문밖에서 어지러운 발자국 소리들이 들려 왔다. 뒤이어 가까이에서 말소리도 들려 왔다.
"아버님, 여긴 아닐 거예요. 곡삼 아저씨가 설마 주점까지 하시겠어요?"
그러자 누구인가 점잖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쨌든 들어가 보자꾸나. 매사에 신중해야 실수가 없는 법이다."
잠시 후에 문이 열리더니 두 사람이 들어왔다. 앞서 들어온 사람은 얼굴이 옥같이 맑고 깨끗한 젊은이인데 스무 살쯤 되어 보였다. 그 뒤를 따라 들어온 사람은 쌍지팡이를 짚은 절름발이였다. 그 사람은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깜짝 놀라면서 말했다.
"관영아, 바로 이곳이다."
그러자 젊은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님, 정말 모든 게 눈에 익어요. 아버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똑같아요."
젊은이는 약간 들뜬 음성으로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곧장 벽장으로 달려가 비밀문을 열려고 했다.
쌍지팡이를 짚은 사람이 그를 말렸다.
"관영아, 그만둬라. 여기에 딴 사람이 있다!"
그의 말에 먼저 와 있던 사람이 쓴웃음을 지으며 끼여들었다.
"그만두라고? 왜 내가 있어서 방해가 되오?"
쌍지팡이를 짚은 사람이 그 사람을 살펴보더니 슬며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지금 누굴 보고 하는 말씀이오?"
"당신은 오호 폐인(五湖廢人)으로 자처하는 태호 귀운장의 장주 아니시오? 저 젊은이는 당신의 아들 관영이고 태호의 호걸들이 두령으로 섬기고 있는 자가 아니오, 당신은 황약사의 문하에 있다가 사매와 사제가 도화 도주의 경서를 훔쳐 가는 바람에 그 사건에 연루되어 황약사에게 쫓겨났지 않소."
그의 말에 육승풍은 내심 깜짝 놀랐다.
"그래서요?"
"당신이 도화도 사람이라면 나에게 인사쯤은 해야 할 것 아니오? 내가 누군지 모르겠소?"
그는 허리춤에서 시커먼 물건을 꺼내어 탁자 위에 놓았다.
육관영은 달려가서 한바탕 싸우려고 했으나 육승풍이 몸을 부르르 떨면서 말렸다.
"구천인 선배님이셨군요. 판영아, 이분이 바로 철장방의 구 방주님이시다. 어서 인사드려라."
관영은 아버지한테서 무림에 다섯 고수를 빼놓고도 구천인이란 괴걸(怪杰)이 있는데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무예를 갖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구천인에게 공손히 예를 올렸다.
육승풍이 구천인에게 물었다.
"구 방주님께선 이 임안에 뭣하러 오셨소?"
"지금 천하에 인물이 부족하여 무림을 통일시키지 못하고 있소. 난 당신의 사제 곡영풍을 찾아왔는데 대신 당신을 만났으니 잘됐구려. 당신은 사형, 사제들이 있는 곳을 알고 있소?"
육승풍은 그들과 함께 도화도에서 재미있게 지내던 일들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우리 형제 여섯 사람 가운데 매초풍과 진현풍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맙시다. 다섯째 사제는 몇 년 전에 죽었고, 풍 사제는 행방불명이 되었소. 그래서 지금 곡 사제를 찾아오는 길이오. 혹시 그를 보지 못했소?"
구천인은 고개를 저었다.
"나도 방금 들어오는 길인데 저 애말고는 아무도 만나지 못했소."
그런데 바보 아이가 불쑥 끼여들어 큰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아까 왔다갔잖아요! 떼어냈다 다시 달고 그랬잖아요!"
그 아이는 구천인이 아까 머리의 옥패와 반지, 허리에 찬옥패를 시위들한테 빼앗겼다가 다시 찾은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멍청한 아이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다만 그 아이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던 육관영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아버님, 저 아이가 곡 사숙님을 닮지 않았나요?"
그 말에 아이를 바라보던 육승풍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래 맞아! 꼭 닮았구나. 저 앤 곡삼의 딸이 분명하다. 아니, 관영아, 그런데 넌 곡 사숙을 어렸을 때 보았을 텐데 어떻게 지금도 얼굴을 기억하고 있느냐?"
관영은 빙긋 웃으면서 대꾸했다.
"아버님께서 그림을 보여 주셨잖아요."
그가 도화도를 떠나올 때 황약사가 그린 그림 한 폭을 갖고 왔었는데 그것은 도화도에 있던 여섯 제자를 그린 것이었다. 육관영은 아버지가 날마다 보던 그 그림 속의 곡 사숙이 아이와 닮았다는 것을 알아본 것이다.
구천인이 웃으면서 육승풍에게 말했다.
"어쨌든 육 형의 사제들이 그렇게 뿔뿔이 흩어져 서로 소식도 모르다니 참 안됐구려. 그러지 말고 내 밑으로 들어오시오."
육승풍은 앙천대소를 했는데 그 웃음 소리는 비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보시오, 구 방주. 난 죽을 때까지 도화도 사람이오. 내가 어찌 당신과 어울려 도화도의 명성을 더럽힐 수 있겠소?"
그 말에 구천인이 대노하여 소리쳤다.
"육승풍, 황 약사한테 쫓겨난 당신을 도화도 사람으로 인정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
그러자 육승풍은 탄식하는 어조로 대꾸했다.
"사부님이 내치셨다 해도 우린 도화도 사람이오. 나를 죽이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나로 하여금 사문을 배반하게 할 수는 없을 거요."
그러자 구천인은 이를 악물고 내뱉었다.
"좋아, 그렇다면 네 놈을 없애 버릴 테다!"
말을 마친 그는 의자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더니 두 눈을 감고 연공(練功)을 하기 시작했다. 그가 전신의 내력을 모으자 입과 코에서 흰 연기가 피어 오르더니 이윽고 귀와 눈에서도 연기가 피어 오르는 것이었다. 육승풍 부자는 그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무인들이라면 누구나 내공으로 신기(神氣)를 운행시키고 왕중양, 황약사 정도 되는 자들이라면 신공(神功)을 운행시킬 때 머리로 흰 김이 올라왔다. 그렇다고 코와 입에서 연기가 나는 일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 공력을 하찮게 보아서는 안 될 일이었다.
내공의 운행을 끝마친 구천인의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온몸의 관절들에서 마치 콩을 볶는 것처럼 요란한 소리가 났다.
"육승풍, 내 수하로 들어오지 않겠다면 먼저 장으로 나를 세 번 때려라. 내가 너의 장에 맞아 죽지 않는다면 널 죽여 버릴 테다."
육승풍은 여전히 오연한 기개로 대답했다.
"구천인 선배, 당신의 무예가 하늘에 닿는다 해도 내 마음을 바꿀 순 없소."
구천인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더니 말했다.
"좋아. 네가 먼저 세 장을 때려라. 그런 다음 선배의 무예를 보여 주마!"
그는 육승풍 앞에 와서 섰다. 그들간의 거리는 다섯 자밖에 안되었다.
육승풍은 황 약사한테 무예를 배울 때에도 인의도덕 같은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혼자 생각했다.
'나보고 먼저 세 번 때리라고 했으니 기회를 이용해 보자. 저자한테 사부님의 연위갑(軟 甲)이 없는 바에야 세 번을 맞고도 상하지 않을 리 있겠는가.'
육승풍이 신력을 모아 앞으로 달려가며 팍팍팍! 하고 세 번이나 강타를 보냈으나 구천인은 몸을 약간 휘청거렸을 뿐 그 자리에 태연히 서 있었다. 육승풍은 깜짝 놀랐다. 구천인이 이런 공력을 갖고 있으리라곤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스승인 황 약사보다 더 무서운 공력을 갖고 있는 듯싶었다.
구천인이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네가 날 세 번 때렸으나 난 너를 때리지 않겠다. 대신 너희 둘에게 환약을 줄 테니 동시에 먹어야 한다. 이제부터 내 말을 따르지 않으면 죽게 되는 거야."
육승풍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당신이 곡 사제를 처치했소?"
육승풍의 질문에 구천인이 껄껄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 놈이 내 말을 듣지 않길래 죽여 버렸지. 너도 내 말을 듣지 않으면 그 꼴이 될 것이다."
육승풍은 잠시 머리를 숙이고 있다가 아들을 보고 말했다.
"관영아, 우리는 이 사람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말을 듣는 수밖에 없어."
육관영이 아버지의 기색을 살피니 말은 그렇게 하지만 분명히 도망가라는 눈치였다. 자기가 구천인한테 손을 쓰면서 시간을 끌 테니 그 틈에 도망가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육관영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자 육승풍은 한숨을 내쉬더니 결심한 듯 말했다.
"좋아, 정 그렇다면 우리 풀이 여기서 죽는 게 좋겠다."
육승풍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
그때 밖에서 야멸찬 웃음 소리가 들리더니 문 어귀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걸 보니 그 사람은 긴 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린 여인이었다. 그녀가 머리를 들어 천장을 보는 바람에 얼굴이 드러나자 사람들은 그녀가 바로 철시 매초풍이란 사실을 알았다.
매초풍은 보이지 않는 눈으로 세 사람을 하나하나 뜯어보며 말했다.
"구천인, 우리 도화도 사람을 못살게 굴려는 생각은 이제 버리는게 좋아요. 내가 오늘 육 사제와 함께 당신을 없애 버릴 테니까."
매초풍을 본 육승풍은 내심 망설였다. 그는 죽이고 싶도록 매초풍이 미웠지만 그녀가 도화도의 명성을 지키기 위해 구천인과 목숨을 걸고 싸우겠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매초풍이 사문의 명성을 위해 결사적으로 싸우겠다고 하는 걸 보면 양심을 저버린 것 같지는 않구나. 잠자코 구경이나 하자.'
구천인이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매초풍, 육승풍, 이러지 마라. 너희들의 사부인 황약사도 모함을 당해 죽었는데 너희들끼리 무슨 사문의 명예를 지킨다는 거냐?"
육승풍이 놀라서 물었다.
"그 말이 사실이오?"
"왜 아니겠느냐? 황약사는 왕중양 문하의 전진교 일곱 제자들 손에 죽었어!"
그의 말에 매초풍과 육승풍은 대성통곡을 했고 육관영도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곡영풍의 딸 사고도 울먹이기 시작했다.
"나……나도 울어 버릴 거야!"
사고는 그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도 요란하고 서글프게 울어댔다.
육승풍과 매초풍은 절세의 무예를 갖춘 사부님이 그토록 쉽게 죽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지만, 전진칠자(全眞七子)들의 공격을 받았다면 그럴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마옥, 구처기 둥 일곱 사람들이 일시에 황약사를 덮쳤다면 황약사가 그들 손에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육승풍이 이를 갈며 외쳤다.
"관영아, 우리 가서 전진칠자들과 목숨을 걸고 싸우자! 매초풍, 너 먼저 죽이고 떠나야겠다. 이 모든 게 다 네 년 때문이야!"
육관영은 아버지를 부축하면서 그를 달랬다.
"아버님, 너무 상심 마시고 좀더 의논해 보세요."
그러나 육승풍은 울음을 그치지 않고 매초풍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매초풍, 너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비참하게 살았는지 아느냐? 네 년이 순진한 진현풍을 꾀어 사부님의 《구음진경》을 훔쳐 달아나는 바람에 화가 난 사부님은 우리 사형제들의 다리 힘줄을 끊고 도화도에서 쫓아 버리셨다. 난 그분이 마음을 돌리면 다시 도화도로 돌아가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오늘까지 살아왔다. 그런데 사부님이 별세하셨으니 난 이제 무슨 낙으로 살아간단 말이냐!"
"예전에도 그랬지만 사형은 여전히 기개가 없군요. 사형이 몇 번이나 사람을 모아 가지고 우리 부부를 못살게 구는 바람에, 결국 몽골의 대사막까지 쫓겨난 우린 그곳에서 별의별 어려움을 다 당했고 남편까지 죽고 말았어요. 지금도 사부님을 위해 어떻게 복수할 것이냐를 생각해야지 그렇게 울면서 지난 일이나 들추면 뭐하겠어요? 그런다고 내가 저지른 짓을 되돌릴 수가 있어요, 아니면 사부님이 살아나시겠어요? 우린 전진칠자를 찾아내야 해요. 사형 다리가 정 불편
하면 제가 업고 가겠어요."
매초풍의 조리 있는 말에 육승풍이 고개를 끄덕였다.
"옳아, 매초풍. 그건 사부님의 제자다운 말이다."
이러는 와중에 문 소리가 나더니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은 바로 곽정(郭靖)과 황용이었다.
도화도에서 나온 황용은 바닷가에서 어부들의 은자를 빼앗은 다음 그 길로 강남까지 갔다가 사막에서 온 곽정을 만났다. 황용이 그를 심하게 괴롭혔지만 인품이 너그러운 곽정은 그녀를 친근한 대해 주었다. 곽정은 황용에게 자기가 입고 있던 담비옷을 벗어 주고 금덩이도 주었으며, 후에는 대사막에서 얻어 온 적토마 한 필도 주었다. 곽정이 이처럼 진정으로 따뜻하게 대해 주자 황용도 그를 따르게 되었다. 그들 두 사람은 강남에서 임안까지 오는 동안 홍칠공을 만났
다. 두 사람은 홍칠공한테 한 달 남짓 무예를 배웠는데 그에게서 타구봉법과 강룡십팔장법을 전수받았다.
두 사람은 요기를 하려고 주점에 들른 것이다. 주점에 있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을 보고 황용이 의아해 하며 물었다.
"누가 상을 당했길래 이토록 슬프게 우시나요?"
이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담뿍 담겨 있었다. 곽정과 가까워진 후로 늘 자기를 보호하고 아껴 주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니 황용의 얼굴에는 언제나 웃음이 떠날 줄 몰랐다.
육승풍은 그녀에게 소리쳤다.
"너와 상관없는 일이니 입 닥쳐라!"
황용은 머리를 돌리다가 매초풍을 보고 깜짝 놀랐다.
곽정을 만난 후 연경(燕京)의 조왕부(趙王府)에서 매초풍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그때 곽정과 황용은 적의 손에 죽을 지경에 놓여 있었다. 구양봉의 아들 구양극과 조왕부의 공자 완안강(完顔康), 그리고 조왕부에서 청해 들인 영지상인(靈智上人) 삼선노괴(參仙老怪)가 그녀와 곽정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때 다급한 황용은 매초풍을 알아보고 얼른 소리쳤다.
"매약화!"
그 바람에 매초풍은 황용이 도화도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황용은 매초풍에게 자기가 황약사의 딸이라는 것을 알리고 그녀에게 곽정을 구해 달라고 간청했다. 매초풍은 곽정의 어깨에 뛰어올라 적들과 싸우기 시작했다. 매초풍 덕택에 그 속에서 빠져 나와 도망친 후 다시는 그녀를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황용은 매초풍을 보고 입을 열었다.
"매 사제, 당신이 이곳에 있었군요!"
황용은 곽정에게 함부로 덤비지 말라고 눈짓을 했다. 그것은 매초풍의 남편 진현풍이 곽정의 비수에 찔려 죽었기 때문이었다. 매초풍이 남편의 복수를 하려 할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러나 어리석은 곽정은 황용의 눈짓을 매초풍한테 인사하라는 것으로 잘못 알아듣고 큰소리로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매초풍은 자신한테 인사한 사람이 멍청이 곽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사부님 때문에 비통에 잠겨 있었으므로 그에게 눈돌릴 틈이 없었다. 매초풍은 눈물을 비 오듯 흘리면서 통곡했다.
"사부님, 사부님!"
이 세상 누구도 그녀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난 무예를 잘 닦은 뒤 도화도에 가서 당신과 겨루기로 결심했었어요. 내 실력을 보여 드리고 사부님을 웃게 할 수만 있다면 원이 없을 거예요. 그때 가서 사부님이 날 죽인다 해도 달갑게 죽었을 거예요.'
매초풍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사부님, 사부님을 위해 기필코 복수하겠어요!"
그 말을 들은 황용이 깜짝 놀라 매초풍을 붙잡고 물었다.
"뭐라구요? 아버지가 어떻게 되셨어요?"
그제야 황용을 알아본 육승풍이 그녀를 붙잡고 말했다.
"네가 바로 황용이로구나. 얘야, 나와 함께 전진칠자를 찾아가자. 그 놈들이 사부님을 살해했다는구나!"
그 말을 들은 황용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아버지……."
황용은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곽정이 급히 그녀를 안아 일으키며 불렀다.
"용이, 정신차려요!"
육승풍이 다가와 황용의 손바닥에 있는 노궁혈을 몇 번 누르자 깨어난 그녀는 정신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아버지, 아버지! 우리 아버지를 찾아 주세요……."
모두들 황용의 애끓는 호소에 또 눈물을 흘렸다.
매초풍이 울먹이는 소리로 말했다.
"용아, 사부님은 이제 안 계신단다. 내가 널 데리고 복수한 다음 사부님 묘 앞에서 자결을 하겠다."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구천인이 입을 열었다.
"자네들이 내 말을 듣는다면 내가 자네들을 데리고 복수하러 가겠네!"
그러자 매초풍은 화를 발칵 냈다.
"네 놈이 뭐 말라 비틀어진 놈이냐!"
그녀는 4, 5장이나 되는 긴 채찍을 꺼내더니 곧장 그의 얼굴을 후려쳤다. 채찍은 날카로운 소리를 내더니 곧바로 구천인의 얼굴에 떨어졌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구천인은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그는 피가 줄줄 흐르는 얼굴을 들어 소리쳤다.
"너희들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구나!"
매초풍이 발로 걷어차자 구천인은 그대로 얻어맞고 나뒹굴었다.
모두들 구천인이 매초풍에게 왜 그토록 꼼짝없이 얻어맞는지 알 수가 없었다. 육승풍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매초풍이 사부님의 《구음진경》을 훔쳐다가 무예를 닦아서 구천인도 매초풍을 당해 낼 수가 없단 말인가!'
휘둥그래진 눈으로 구천인을 멍하니 바라보던 황용이 갑자기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그녀가 미친 것이라고 생각한 곽정은 다급하게 소리쳤다.
"용이, 용이, 왜 이러오?"
황용은 웃음 띤 얼굴로 일어나더니 구천인 앞에 섰다.
"구 방주님, 다들 방주님의 무예가 괜찮다고들 하던데 우리한테 좀 보여 주실래요? 방주님께서 우릴 데리고 복수하러 가시려면 재주가 좀 있어야 할 것 아니겠어요?"
구천인은 잠깐 당황스러운 기색을 띠었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황 괴물의 딸이로구나. 날 믿지 못하겠다면 너한테 보여주지!"
구천인은 바닥에 있던 벽돌을 주워 들더니 두 손으로 그것을 비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벽돌이 가루가 되어 푸시시 떨어졌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구천인은 또 오른손에 술잔을 들고 가볍게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어느 틈에 술잔 바닥이 뚝 떨어져 나가는 것이었다. 곽정이 그것을 집어 보면서 속으로 깜짝 놀랐다. 이런 공력은 소문조차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나이 든 사람이 너희들을 속이겠느냐?"
구천인은 모두들 감탄하자 우쭐해져서 품에서 시커먼 물건을 꺼내었다. 그것은 철장이었다.
황용이 웃으면서 다가가 물었다.
"구 방주님, 아버님 말씀으로는 이 철장이 병장기이자 신물(信物)이라고 하던데 한 번 만져 볼 수 없을까요?"
그 말에 구천인은 고개를 저었다.
"안돼!"
그러나 황용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한 발 더 다가섰다.
"에이, 한 번 만져 보는 게 어때서요?"
황용은 재빠른 솜씨로 철장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구천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철장방주의 신물을 어찌 너 따위 계집애가 함부로 만지느냐? 빨리 내려놓지 않으면 큰 화를 당할 줄 알아라!"
황용은 철장을 코에 갖다 대고 냄새를 맡아 보더니 곽정풍에게 말했다.
"오빠, 나도 절기 하나를 새로 익혔는데 이 철장을 먹어 버릴 수 있어요. 믿을 수 있겠어요?"
곽정은 믿기지 않는 듯 의아스런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그녀가 미쳤다고 생각한 곽정은 황급히 그녀를 말렸다.
"용이, 그러지 마오!"
황용은 철장의 손가락 두 개를 바작바작 씹어 먹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것을 삼키면서 말했다.
"철장이 먹을 수 있는 것인 줄은 나도 몰랐어요. 오빠, 이 철장이 참 맛있어요. 오빠도 한입 먹어 봐요."
육승풍은 이처럼 익살스러운 황용을 바라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과연 사부님의 딸이로구나. 하는 짓이 사부님을 닮아 괴팍스러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도 몇 번 올다가 금방 잊어버리다니…….'
육승풍이 점잖게 타일렀다.
"용아, 그만해라. 아버님 복수를 하는 게 더 중요한 일 아니냐?"
그러자 황용이 웃으면서 말했다.
"보세요. 이 철장방주는 가짜예요. 아직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믿으세요?"
그러자 매초풍이 뛸 듯이 기뻐하며 황용의 팔을 텁석 붙들고 말했다.
"그럼 사부님께서 돌아가시지 않았다는 말이지? 응? 그게 사실이니?"
매초풍은 너무 기뻐서 다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육승풍은 그제야 구천인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육관영과 곽정도 알아챘다. 사람들은 일제히 구천인을 바라보았다. 구천인은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몸을 돌려 도망치려 했다. 그러자 황용이 그 앞을 막아 섰다.
"내가 아직 도화도의 무예를 보여 주자 못했는데 가긴 어디로 간단 말이냐?"
곽정이 그녀에게 말했다.
"용이, 저 놈이 거짓말은 했지만 무예를 모르는 것 같으니 용서해 주시오."
그러자 황용이 웃으며 말했다.
"오빠, 내가 철장방의 절기 두 가지를 보여 드리지요."
황용은 구천인의 손가락에 끼여 있는 금반지 세 개를 빼서 자기 손가락에 끼었다. 그녀는 아까 일은 까맣게 잊은 듯이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앉아서 손에 술잔을 들고 구천인의 목소리를 흉내내어 말했다.
"날 믿지 못하겠다면 너한테 보여 주지."
그녀는 손에 든 술잔을 한바퀴 돌리더니 금방 멈추었다. 구천인이 한 것처럼 술잔 바닥이 떨어져 나갔다. 모두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황용은 또 벽돌 한 장을 가져와서 구천인이 한 것과 똑같이 두 손으로 비틀었다. 그러자 벽돌이 가루가 되어 푸시시 떨어지는 것이었다.
육승풍이 그것을 보고 껄껄 웃자 매초풍의 얼굴에도 웃음이 피어 올랐다. 그녀는 속으로 황용이 아버지를 꼭 닮았다고 생각했다. 모두들 웃으니까 황용은 얼굴에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매초풍은 황용이 너무나 귀여워 그 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엄마도 없이 자란 불쌍한 것. 내가 만일 도화도에 가면 이 애와 의지하면서 살아가련만.'
이런 생각을 하는 그녀의 표정에는 살기가 저 멀리 날아가 버린 듯이 평화롭고 어질기만 했다.
황용이 왜 그러는지 모르는 사람은 곽정뿐이었다.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용이, 도대체 무슨 영문이오?"
황용이 손가락에 끼었던 반지를 빼면서 그한테 말해 주었다. 그 반지에는 말할 수 없이 굳은 금강석이 끼워져 있었다. 그 때문에 손으로 술잔을 돌리면 바닥이 끊어져 나가는 것이고 벽돌을 잡아 비틀면 가루가 되는 것이었다.
곽정이 호기심이 나서 그대로 해보니 과연 황용의 말대로 되는 것이었다. 그것을 보고 모두들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매초풍도 처음으로 모든 시름을 잊고 크게 웃었다.
곽정이 웃으면서 말했다.
"구천인, 어서 물러가거라!"
구천인은 금강석이 박힌 반지를 돌려받을 생각도 못하고 얼른 달아났다.
매초풍이 황용을 보고 말했다.
"용아, 넌 도화도에서 언제 나왔니?"
황용은 가슴이 쓰라렸다. 사막에서 만났을 때 싸움터에서 황급히 도망가느라 그녀에게 인사도 제대로 못했던 것이다.
"난 중원에 나온지 오래 됐어요. 듣자하니 아버지께서도 나오셨다고 하더군요. 어디 계시는지는 나도 몰라요."
그러자 매초풍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사부님께서 건강하시길 바래. 진정으로……."
모두들 매초풍의 진심 어린 말에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다.
'도화도에서 도망칠 땐 사부님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사부님에 대한 정이 깊구나.'
이렇게 생각이 든 육승풍은 매초풍에 대한 원한이 약간 옅어지는 것을 느꼈다.
매초풍이 육승풍을 돌아보았다.
"난 가겠어요. 혹시 내가 필요하면 임안 만기주보점(萬記珠寶店)에다 옥대를 갖다 놓으세요. 그럼 내가 찾아오겠어요. 사부님께서 무사하시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어요? 혹시 동생들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전력을 다해 돕겠어요."
말을 마친 매초풍이 나가려고 몸을 돌렸다.
그런데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그렇게 서두를 게 뭐 있나?"
들어오는 사람은 좀 전에 도망쳤던 구천인이었다.
구천인의 얼굴은 아까 창피를 당했던 때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그는 잔뜩 위엄을 부리면서 주점으로 들어오더니 탁자에 앉았다.
"황약사를 찾지 못한다면 너희들부터 찾는 것도 괜찮지."
그는 사람들을 둘러보다 매초풍의 얼굴에 눈길을 멈추었다.
"흑풍쌍살이로군. 네 년부터 죽여 버려야겠다!"
모두들 허풍쟁이 구천인이 다시 돌아와 잔뜩 위엄을 부리자 웃음을 터뜨렸다.
황용이 헤헤헤 웃으면서 말했다.
"구 선배님, 우리한테 그 손을 한 번 더 보여 주시죠?"
그러자 육관영도 재미있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구 선배님, 당신한테 철장방 방주의 신물이 있는지 모르겠는데요."
구천인이 흉폭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좋아, 네 놈이 보겠다면 보여 주마. 하지만 철장방의 신물을 빼앗으려 하는 놈에겐 죽음이 있을 뿐이다!"
그러자 육관영은 요란하게 웃어댔다.
"구 선배님, 당신이 그 철장을 다시 내놓으면 나도 황용 아씨처럼 한입에 먹어 버리겠습니다!"
구천인은 화가 났다. 하지만 그가 화를 낼수록 사람들이 모두 놀려대면서 요란하게 웃어대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좋아, 먹는지 못 먹는지 어디 보자!"
육관영은 황용이 자기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것을 보자 속으로 생각했다.
'보아하니 황용 아씨가 나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구나. 나도 아씨처럼 저 철장을 씹어 먹어서 사람들을 웃겨야지.'
그는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서 철장 한 개를 집어 깨물었다. 그런데 그는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철장을 깨물다가 그만 이빨 한 대가 부러진 것이다. 이것은 부용이 먹던 가짜 철장이 아니라 무쇠로 된 진짜 철장이었던 것이다.
모두들 깜짝 놀라 구천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황용이 구천인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저자가 또 어디 가서 이따위 물건을 가져왔을까. 안 되겠어. 내가 본때를 보여 줘야지.'
황용은 구천인에게 다가가면서 가볍게 말했다.
"구 선배님, 전 아까부터 선배님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버지께서는 당신이 천하에 드문 고수라고 말씀하시더군요. 화산의 무예 시합 때 당신에게 중요한 일만 없었더라면 당신도 그곳에서 다섯 고수들과 승부를 겨루었을 거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아버님께서는 왕중양이란 분이 돌아가셨으니 마땅히 한 사람을 더 넣어야 한다고 하셨어요."
황용의 말을 들은 구천인은 너무 좋아서 자기도 모르게 얼굴에 웃음이 피어 올랐다.
"넌 정말 총명한 아이로구나. 그래, 아버진 천하의 다섯 고수가 누구누구라고 하시더냐?"
황용은 손가락을 꼽으면서 말했다.
"아버지가 그중에 속하고, 다음엔 사부님……."
사부님이란 말에 구천인은 귀가 번쩍 띄었다.
"네 사부님이라니? 그게 누구냐?"
"제 사부님도 모르세요? 북개 홍칠공 말씀이에요."
구천인은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지."
그는 말은 못했지만 내심 놀라고 있었다.
'이 계집애가 무서운 아이로구나. 어느 사이에 북개 홍칠공을 사부님으로 모셨을까? 한 몸에 두 파의 신공을 지녔으니 그 공력을 얕보아서는 안 될 게야.'
황용은 계속 말을 이었다.
"이 밖에도 남제, 서독이 있고 마지막으로…… 아마 선배님이겠죠."
구천인은 그 말을 듣고 너무 기뻐서 몸을 덜덜 떨었다. 그는 황약사를 아주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황약사가 자기를 다섯 고수의 한 사람으로 보고 있다니, 이것은 자신에 대한 최대의 칭찬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구천인은 재차 물었다.
"너, 그 말이 참말이냐?"
부용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아버지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시고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믿어지지 않으면 우리 아버지한테 물어 보세요."
구천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황용이 다시 입을 열었다.
"구 선배님의 공력이 대단하다는 말은 오래 전부터 들었지만 오늘 보니 과연 범상치 않군요. 그런데 선배님께서 우리 후배들한테 장법을 좀 보여 주셨으면 해요!"
구천인은 그럴 생각이 없었으나 황용이 이렇게 잔뜩 치켜 주는 바람에 한 번 본때를 보여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홍칠공의 제자이자 황약사의 딸인 이 게집애 앞에서 자기 재주를 보여 주는 것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구천인은 "좋아!" 하고 말하더니 오른손으로 술잔을 비틀다가 손을 펼쳐 보였다. 그러자 그의 손에 조각난 술잔이 나타났다.
모두들 그것을 보고 또 폭소를 터뜨렸다.
"왜들 웃는 거냐?"
구천인이 노하여 소리를 질렀다.
술잔을 끊는 이 재주로 말하자면 그는 황약사나 홍칠공보다 자기가 더 낫다고 자부하고 있는 터였다. 그런데 모두들 자기의 재주를 보고 배꼽을 쥐고 웃는 것이었다.
황용이 또 웃는 얼굴로 말했다.
"선배님께 또 무슨 재주가 있으신지 우리들의 안계를 좀 넓혀 주세요."
구천인은 참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도화도 문하의 사람들은 모두 괴물들이로구나. 이 놈들이 웃는 것을 보니 탄복하지 않는 게 분명해.'
그가 다시 벽돌을 집어들고 가루로 내려 하자 황용이 말했다.
"선배님, 내력으로 그 벽돌을 부수려고 그러시죠?"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
"이 정체로운 공력은 정말 사람들을 탄복케 하지요. 그런데 선배님께서 절반만 부수고 나머진 절 주세요. 저도 해보고 싶어요."
구천인은 화가 났으나 꾹 참고 벽돌을 집었다.
그가 벽돌을 비틀자 벽돌은 아까처럼 가루가 되어 떨어졌다.
황용은 방실방실 웃으면서 말했다.
"저도 사부님한테 배웠고 아버지도 알고 계세요. 아주 쉬운 거죠. 제가 하는 걸 보세요."
그녀는 구천인이 남긴 절반짜리 벽돌을 받아 들었다.
황용은 벽돌을 쥔 오른손에 힘을 주면서 아까처럼 벽돌이 가루가 되어 푸시시 떨어지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가 아무리 힘을 주어도 벽돌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 구천인이 무슨 수작을 꾸몄단 말인가?
구천인이 멍청히 서 있는 황용에게 비웃음을 던졌다.
"홍칠공과 황 괴물의 제자도 별것 아니로군."
모두들 영문을 알 수 없어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황용은 재빨리 눈알을 굴리더니 구천인에게 말햇다.
"선배님, 손가락에 낀 반지를 좀 빌려 주시겠어요?"
황용이 반지를 한 번도 구경해 본 적이 없는 모양이라고 생각한 구천인은 내심 우쭐했다.
'황 괴물의 딸도 이런 반지를 본 적이 없다니 한 번 보여 주자.'
그는 식지에 끼었던 반지를 빼서 황용에게 주었다. 황용은 그것을 받아 살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이 반지가 아니에요."
그녀는 손을 내밀어 다른 반지를 달라고 했다. 그녀는 다른 반지를 들고 살펴보다가 또 말했다.
"이것도 아니에요."
영문을 모르는 구천인은 화가 났지만 꾹 참았다.
'이 계집애가 날 놀리는구나. 하지만 두고 봐라. 네 년을 깜짝 놀라게 해주겠다.'
구천인은 나머지 반지를 빼서 그녀에게 주었다.
세 번째 반지까지 살펴본 황용은 하도 이상하여 한숨을 내쉬었다. 세 개의 반지 모두 금강석이 끼여 있지 않았던 것이다.
곽정이 멍하니 서 있는 황용에게 물었다.
"용이, 왜 그러는 거요?"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군요. 이분의 반지엔 금강석이 끼여 있지 않아요."
구천인이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무슨 금강석이 있다고 그러느냐? 너 지금 날 놀릴 셈이냐?"
그러자 매초풍이 비웃는 어조로 내뱉었다.
"놀리면 어쩔 셈이냐? 내 채찍에 얻어맞기 전에 조심하란 말이야!"
그 말에 모두들 한바탕 웃어댔다. 그들은 아까 매초풍의 채찍에 맞아 구천인의 머리에 피가 나던 일이 생각났던 것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모두들 웃음을 뚝 그치고 말았다. 구천인의 이마는 아무 자국도 없이 말끔했던 것이다.
구천인이 벌떡 일어서더니 대노하여 부르짖었다.
"좋다, 너희들이 이 철장방 방주와 신물을 모욕했으니 모두 내 손에 죽을 줄 알아라! 네 놈이 우리 철장방의 신물을 깨물었으니 네 놈부터 죽여야겠다!"
그는 육관영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매초풍이 채찍을 뽑아 들며 날카롭게 외쳤다.
"죽으려면 네 놈부터 죽어라!"
그녀는 아까 한 것처럼 채찍을 휘둘렀다. 그 채찍은 조금도 빗나가지 않고 구천인의 머리에 명중했다. 하지만 구천인의 머리는 윤기가 반들반들한 것이 핏자국 하나 없었다. 그것을 본 사람들 모두 깜짝 놀랐다.
구천인이 한걸음 내디디며 매초풍의 채찍을 가볍게 거머쥐었다. 그와 매초풍은 채찍을 잡고 서로 잡아당겼다. 그 바람에 채찍 끝이 뚝 끊어지면서 길이가 한 장이나 짧아지고 말았다.
매초풍은 깜짝 놀랐다. 이것은 그의 사부 황약사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녀는 당황하여 소리질렀다.
"어서 비켜라!"
그녀는 구천인이 더 이상 벽돌이나 술잔을 가지고 장난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알아차렸다.
모두들 천천히 뒤로 물러났으나 구천인은 벌써 장을 내밀었다. 곽정은 황용이 그 장에 맞을까 봐 얼른 왼손을 휘둘러 몸을 돌리더니 오른손을 들어 강룡십팔장의 '견룡재전' 법수로 맞받아쳤다. 그러자 무섭게 날아간 곽정의 장과 구천인의 장이 맞부딪쳤다. 곽정은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뒤로 날려 가 벽에 부딪쳐 정신을 잃었다.
곽정이 손을 쓰는 것을 보고 황용이 소리를 질러 말리려 했으나 미처 그럴 틈이 없었다. 두 사람의 장이 맞부딪쳐 눈 깜짝할 사이에 곽정이 기절하는 것을 보고 그녀는 곽정에게 뛰어가 부둥켜안았다.
"오빠, 오빠!"
곽정을 애타게 부르짖는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비 오듯 떨어져 내렸다. 육승풍과 관영, 그리고 매초풍은 갑작스런 사태에 어쩔 줄 모르고 서 있었다. 구천인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눈 깜짝할 사이에 공력을 보여 줄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공력이었다.
구천인이 우쭐해진 기색으로 말했다.
"도화도 문하의 오합지졸들아, 오늘 내 손에 죽어 봐라!"
이 순간 요란한 웃음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문으로 들어왔다. 그 사람은 안으로 들어서며 외쳤다.
"집을 떠난 지 몇십 년인가."
그 사람은 바로 전진교의 장교진인(掌敎眞人) 마옥이었다. 마옥은 천천히 걸어와 공격 자세도 취하지 않고 조용히 구천인 앞에 섰다.
뒤이어 또 한 사람의 소리가 들어왔다.
"긴 낮을 더부룩한 머리로 뛰어왔구나."
그런데 목소리만 들리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요란한 소리가 나더니 천장에 구멍이 뚫리면서 한 사람이 뛰어내렸다. 그 사람은 구천인 옆에 앉았는데 우악스런 얼굴에 시커먼 눈썹, 그리고 부리부리한 눈을 갖고 있었으며 몸매 또한 우람했다. 이 사람은 전진철자 중의 둘째 사형 장진자 담처단이었다.
또다시 누군가가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해당정(海棠亭) 아래 중양의 제자들이 모이는구나!"
이윽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짝이 부서지더니 원숭이 같은 얼굴을 가진 왜소한 사나이가 들어섰는데, 이 사람이 바로 장생자 유처현이었다.
또다시 누군가가 높이 외치며 들어섰다.
"연엽주(蓮葉舟) 위에 선 태을선(太乙仙)이구나!"
그는 전진칠자 중에서 무예가 제일 높은 구처기였다. 그는 문을 부수거나 천장에서 뛰어내리지도 않고, 유처현을 따라 천천히 들어와 구천인의 오른쪽 자리에 섰다. 이 자리는 가장 요긴한 자리이므로 구천인이 손을 쓰게 되면 반드시 오른손부터 쓰게 되어 있었다.
또다시 누군가가 외쳤다.
"알맹이가 없는지라 껍질을 벗어 내쳤구나!"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창문이 밖으로 떨어져 나갔다. 그런 후 한 사람이 창턱에 걸터앉는 것 같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창턱에 앉은 것이 아니라 한쪽 무릎을 꿇고 온몸을 구부리고 있는 것이었다. 이 사람이 바로 전진칠자 중의 철각선 왕처일이었다.
누군가가 또 소리쳤다.
"죽기 전엔 깨달을 사람이구나!"
그 사람은 두 손으로 창틀을 뜯어내더니 그 창턱에 뛰어올라 앉았다. 광녕자 학대통이었다.
부엌 쪽에서 한 여인이 나오는데 손에는 먼지털이를 들고 해골들을 수놓은 괴상한 옷을 입고 있었다. 이 여인이 바로 전진칠자 중의 청정산인 손불이였다. 그녀도 들어오면서 한 구절을 읊조렸다.
"문을 나서니 구속 없이 웃을 수 있구나."
마옥이 마지막 구절을 읊조렸다.
"사람들이 서호(西湖)에 모였는데 하늘엔 달이 걸렸도다."
이 전진칠자들은 그들의 사부님인 중양진인으로부터 아주 무서운 진법을 전수받았는데 그 진법을 천강북두진(天 北斗陣)이라고 불렀다. 이 진을 칠 땐 사람마다 시구를 한 구절씩 읊고 마지막 시구를 마옥이 읊도록 되어 있었다. 모두 합하면 여덟 구절이 되는데 그것이 자기들의 마음을 이루는 동시에 진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여덟 구절이 다 끝나면 진중에 들어 있는 사람은 다시 살아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좋았다.
전진칠자를 보고 놀란 황용이 다급하게 물었다.
"마옥, 당신들이 우리 아버지를 죽였나요?"
정신을 차린 전진칠자들을 보자 생기가 넘쳤다.
"마 도장, 무사하십니까? 지난 번에 대사막에서 만나 뵙고는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습니다. 구 도장, 역시 무고하겠지요? 왕 도장, 당신은 그때 입은 상처가 다 나았나요?"
곽정은 본래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으나 전진 칠자들 중에서 세 사람이나 알고 있으므로 인사를 하느라 말수가 많아졌다. 그는 세 사람에게 일일이 문안 인사를 했다.
매초풍이 쌀쌀한 기색으로 물었다.
"당신들이 전진칠자들이신가요?"
그녀는 내심 그들을 의심하고 있었다. 대사막의 벼랑 끝에서 마옥이 강남의 여섯 괴물들을 전진칠자로 분장시켜 그녀를 물러가게 한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매초풍은 두 눈이 멀었지만 귀가 아주 밝아 마옥의 목소리만 귀에 익고 나머지 여섯 사람의 목소리가 모두 생소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전진칠자가 가짜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한 것이다.
육승풍은 이 전진칠자들을 보고 생각했다.
'전진교의 이 놈들이 이처럼 허장성세를 하는군. 싸움을 한다는 놈들이 시구나 읊고 거들먹거리는 꼴이라니. 이처럼 귀신 놀음을 하는 건 구천인이 질겁하여 도망가게 하자는 것일 게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 그는 물었다.
"당신들은 싸움을 할 때마다 이처럼 시구를 읊는 거요?"
육관영이 그 전진칠자들을 살펴보다가 끼여들었다.
"아버님, 전진칠자의 북두칠성 대진은 천하에서 유명한데, 이 일곱 사람들이 앉고 선 것을 보니 북두칠성 대진이 아니에요."
그들이 이것저것 물어 보았지만 대답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제34장 전진철자
전진칠자들은 말없이 있었지만 구천인은 이들이 아주 무시무시한 진을 치고 있어 자기에게 상황이 아주 불리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속으로 은근히 두려움을 느꼈다. 그는 일찍이 전진칠자들이 그들의 사부님인 왕중양한테 두 가지 절기를 이어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중 한 가지가 이 천강북두진, 즉 북두칠성대진인데 이것은 노독물인 서독 구양봉을 대적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른 한 가지는 '함께 죽는[同歸于盡]'검법인데 만일 홀몸으로 적과 싸우다가 무예가
상대방에게 뒤질 때 이 결사적인 방법을 쓰는 것이다. 구천인이 살펴보니 이들은 바로 천강북두진을 치고 있었다. 그 칠자 중에서 구처기가 자기와 가장 가까이에 있고 마옥도 비교적 가까운 천권성 자리에 서 있었으며, 다른 사람들은 그와 좀 멀리 떨어진 자리에 서 있었다.
구천인이 비장한 표정으로 외쳤다.
"이 놈들아, 나를 업신여기는 게냐?"
황용은 이들이 정말 아버지를 죽였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으므로 조급하게 물었다.
"마 도장, 혹시 우리 아버지를 보셨어요?"
마옥은 고개를 저을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황용은 간신히 마음을 놓았다. 그녀는 구천인을 노려보며 욕설을 퍼부었다.
"구천인 네 놈은 정말 못됐구나. 뭐 우리 아버지께서……."
그러나 구천인은 황용의 욕설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말만 내뱉었다.
"야, 이 놈들아, 너희들이 천강북두진으로 날 대적하려는 모양인데 오늘은 상대를 잘못 골랐다."
그러자 마옥이 읍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구 방주, 당신네 철장방은 오랫동안 나쁜 짓만 하고 있소. 듣자하니 홍칠 선배님이 당신에게 그 나쁜 버릇을 고치라고 훈시했다던 데 당신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군. 오늘 우리 전진철자들이 한 수 가르쳐 주겠소."
그러자 구천인이 대답했다.
"좋다!"
사람들이 바라보니 전진칠자들은 저마다 편안한 자세로 서 있거나 앉은 채 북두칠성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구천인은 철장 한 개를 손에 들고 앞으로 한 발자국 나섰다. 이렇게 되니 그는 담처단, 유처현과 좀 가까워졌다. 그는 마옥과 구처기가 전진철자 중에서 무예가 제일 높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일단 싸움이 붙으면 담처단과 유처현 쪽을 공격하리라 마음먹었다.
담처단, 유처현은 구천인이 자기들 쪽으로 접근하는 것을 보고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구천인이 움직이자 칠자들도 거의 동시에 움직여 여전히 천강북두진을 유지했다. 일곱 사람들은 검들을 뽑아 들었다. 구처기가 제일 먼저 검 끝으로 구천인을 겨누었다. 구천인은 몸을 돌려 철장으로 그것을 막았다.
구천인이 칼을 피하면서 말했다.
"싸움이 붙으면 집이 무너져 다른 사람들이 다칠 테니 밖으로 나갑시다."
마옥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좋아, 방주께서 먼저 나가시지."
황용은 구천인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 마음이 급했다. 교활한 구천인이 밖으로 나가는 척하다가 전진철자들이 진을 펼치지 못한 틈을 타서 도망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구천인은 철장수상표로 불릴 만큼 경공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황용이 다급하게 외쳤다.
"전진칠자님, 그자를 내보내면 당신들이 큰 손해를 보게 돼요!"
마옥이 그 이유를 묻자 구천인도 문가에 멈춰 서서 더 이상 발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황용이 설명했다.
"저자가 도망치면 당신들은 붙잡지 못할 거예요. 설령 달아나지 않더라도 비겁한 수법으로 장을 날리면 큰일이라구요."
손불이는 황용의 말이, 구천인이 손을 쓰기만 하면 자기들을 다 죽여 버릴 수 있다는 말로 재수없게 들렸다. 그래서 그녀는 쌀쌀맞게 대꾸했다.
"재수없는 소리나 지껄이는 그 입 좀 닥쳐라!"
그녀는 먼지털이로 황용을 후려쳤다. 황용은 홍칠공한테 배운 '소요유(逍遙遊)' 법수로 그것을 살짝 피했다. 그것을 본 손불이는 황 괴물의 딸도 제법 재주가 있다는 것에 내심 깜짝 놀랐다.
구천인이 문 앞에서 비웃는 얼굴로 말했다.
"내가 도망갈 거라구? 천만에! 오늘 전진철자와 결판을 내지 않으면 내 가슴의 분이 풀리지 않을 것이다."
구천인이 뜨락에 나와 섰다. 주점 앞에 있는 이 뜨락은 아주 넓었다. 마을 사람들이 가을에 탈곡을 하고 낟알을 말리느라 이 뜨락을 넓게 닦아 놓은 것이었다. 이곳이라면 싸움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구천인이 조롱하듯이 말했다.
"또 시구나 외워 보시지 그래!"
그러자 마옥이 장검을 흔들어 대면서 대꾸했다.
"구천인, 오늘 우리가 네 놈의 무공을 폐한 다음 속죄하게 만들겠다!"
"뭐라구?"
화가 난 구천인은 갑자기 오른손의 철장으로 마옥을 후려쳤다.
구천인의 장력은 대단했다. 곁에 있던 구처기가 급히 몸을 움직여 금사(金蛇)가 굴을 빠져 나가는 법수로 마옥과 함께 그 철장을 막아냈다. 쟁강 하는 소리와 함께 철장과 두 검이 부딪쳤다. 마옥과 구처기는 세 발자국이나 밀려나서야 구천인의 무공이 대단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때 전진칠자들은 이미 검진(劍陣)을 쳐놓았지만 구처기와 마옥이 천권, 천구(天樞)의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으므로 천권의 위치에는 왕처일이 서 있었다. 그런데 왕처일의 무예는 구처기보다 약했던 것이다.
왕처일이 검을 들어 구천인을 찌르자 구천인이 급히 장을 내밀어 그 검을 막았다. 마옥과 구처기는 그 틈에 천구, 천선(天璇)의 위치에 섰다.
구천인은 오늘의 싸움이 실로 어려운 싸움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말을 많이 하지 않고 좌우로 철장을 휘둘러댔다. 그러자 윙윙거리는 철장 소리만이 요란하게 들려 왔다. 그가 철장을 휘두르는 법수는 위력이 대단할 뿐만 아니라 굉장히 정확해서 맞기만 하면 살아나기가 힘들었다.
이들의 무예를 지켜 보던 도화도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라서 구천인을 쳐다보았다.
전진칠자들 역시 무예가 만만치 않은 사람들이었으나 구천인의 철장에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진을 조절하며 서로 호응할 따름이었다. 구천인은 앞과 뒤, 좌우에도 적이 있으므로 연거푸 2, 30장을 휘둘러야 했다. 그러나 매번 내미는 장마다 절묘하기 그지 없었고 그 법수가 무진장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자기를 방어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 되었다. 이렇게 싸우자니 그는 점점 견디기가 어려워졌고, 그럴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
구천인은 이 천강북두진이 전진교에서 으뜸가는 검진 공부이며 왕중양이 이 검진 법수를 고안해 내느라 엄청난 심혈을 기울였다는 것까지는 모르고 있었다. 이 검진은 작은 규모에서는 박투에 쓰일 수 있고 확대하면 전진(戰陣)에도 쓰일 수 있는 것이었다. 강적이 공격해 올 때는 선두에서 쳐오는 자의 공세를 좌절시키고 양옆의 동료들이 측면에서 반격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이처럼 한 사람이 여러 사람의 무공을 겸비하도록 할 수 있는 이 진세는 실로 막아내기가
어려웠다.
10여 합 싸우고 나니 구천인은 점점 기운이 빠져서 당황하기 시작했다.
'내가 산에서 20년이나 장법을 연마할 땐 일단 산을 나서기만 하면 천하 무적일 줄 알았다. 한데 이 전진교의 천강북두진에 걸려 목숨을 잃는단 말인가. 이대로 계속 싸우다간 내가 지고 말 것이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하느라 손 동작을 약간 늦춘 틈을 타서 담처단이 장력으로 그를 밀었다. 팍! 하는 소리와 함께 담처단의 장에 맞은 철장이 윙 소리를 내면서 진 밖으로 날아갔다.
왕처일이 그것을 보고 소리쳤다.
"구천인, 어서 항복해라!"
구천인이 노기충천하여 외쳤다.
"너희들 전진교에게 항복하라구? 그런 꿈같은 소리는 하지 마라!"
구천인이 발로 마옥과 구처기를 걷어차자 두 사람은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대단한 솜씨다!"
구처기와 담처단이 장을 내밀어 구천인의 공격을 막았다. 구천인은 몸을 돌려 다시 장으로 마옥을 공격했다. 하지만 천강북두진은 또 변화를 일으켜 이번에는 구처기가 천권성 위치에 있게 되었다. 그것은 전진칠자들이 평소에 연마해 온 진식(陣式)이었다.
그 순간 구천인이 하늘을 쳐다보며 요란하게 웃더니 갑자기 훌쩍 뛰어오르며 장으로 치고 발로 걷어찼는데 바람 소리만으로도 위력이 대단했다. 그것을 본 육승풍 일행은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아까 주점 안에서 그들이 조롱할 때 구천인이 즉시 손을 썼다면 육승풍 부자와 황용, 곽정, 그리고 매초풍까지 모두 함께 덤벼들었어도 그를 이기지 못했을 것이었다.
구천인은 좌충우돌하면서 천강북두진 안에서 이리저리 날아다녔지만 일곱 사람들의 물샐틈없는 포위를 뚫을 수가 없었다.
구천인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내 이름이 이 보잘것없는 전진칠자들에게 짓밟힌다면 너무도 억울한 일 아닌가? 남제, 북개, 동사, 서독의 손에 죽는다면 모를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구천인은 기분이 상해 얼굴마저 어두워졌다. 장을 놀리는 법수와 동작도 점점 느려졌다.
구천인이 위험에 빠져 있는데 갑자기 누가 큰소리를 질렀다.
"구천인, 빨리 이리 오게! 이리 오란 말이야!"
누군가 이쪽으로 질풍같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 사람은 달려오면서도 주먹으로 자기 몸을 계속 치고 있었다.
노완동을 알아본 황용이 깔깔 웃으며 물었다.
"할아버지, 우리 아버지를 이기고 도화도에서 뛰쳐나오셨어요?"
노완동은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물었다.
"마옥, 구처기, 자네들은 게서 뭘 하나?"
자세히 보니 사숙인 노완동이었으므로 일곱 사람은 일제히 고개를 숙여 예를 올렸다. 그러나 노완동은 귀찮다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아니, 됐네 됐어! 자네들 일곱 사람이 모두 나한테 예를 올리면 내가 일곱 번 응해야 하는데 얼마나 시끄럽겠나!"
노완동이 살펴보니 일곱 사람은 천강북두진을 이루고 있었다.
"자네들이 여기서 구천인을 괴롭히고 있는 건가? 그건 안 되네. 내가 저 놈을 놔주겠어. 저 놈이 철장수상표라고 하던데 내가 먼저 한바탕 붙어야 해. 저 놈의 철장이 얼마나 센지 보겠단 말이야. 저 놈의 철장이 센지, 아니면 나의 72수공명권(七十二手空明拳)이 센지 겨뤄 봐야 하네. 저자가 그 철장수상표라니, 이 영감이 분통 터질 일이지."
황용은 노완동을 보자 반가워서 다시 물었다.
"할아버지, 무슨 일로 그렇게 화가 나셨어요?"
"나도 철장무적수상표란 별호를 하나 붙여야겠다. 네 놈이 철장수상표라니 가소로워 웃음도 안 나오는구나. 구천인, 나와 경공을 겨뤄 보자!"
그러자 구천인이 그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노완동, 이건 당신이 참견할 일이 아니오. 흥, 네까짓 전진교 잡놈들이 이따위 작전으로 날 죽이려는 거냐?"
그러자 노완동이 마옥을 보고 말했다.
"마옥이, 우선 구천인을 내보내게. 나와 경공을 겨룬 다음에 자네들이 죽여도 늦지 않아."
마옥 등 일곱 사람은 속으로 불평이 대단했다. 이 주책바가지 영감이 다 죽게 된 구천인을 살려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노완동은 마옥이 선뜻 대답하지 않자 마구 화를 내기 시작했다.
"마옥, 구처기! 네 놈들이 나를 정말 사숙으로 생각하긴 하는거냐? 그까짓 천강북두진을 갖고 뭘 그리 으시대느냐? 구천인, 네 놈도 바보야, 날 좀 보란 말이야!"
노완동이 엿차 소리를 지르더니 진 안으로 들어가 구천인 곁에 서서 그에게 가르쳐 주었다.
"자네가 마옥이와 처현일 치고 빠져 나가게. 이렇게 치고 나가란 말이야. 허지만 손불이에게 손을 대면 안 돼. 호남아는 여인과 싸우지 않는 법이라구."
노완동이 진중에 들어가자 형세가 크게 달라졌다. 그가 황약사에게 붙잡혀 도화도에 16년 동안이나 갇혀 있으면서 《구음진경》의 심오한 도리를 깨우친데다가 '공명권(空明拳)'이란 장법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공명권은 생각을 두 갈래로 나누어 좌우로 다 공격과 방어를 할 수 있는 무술이므로 이렇게 되면 노완동이 두 사람이 되는 셈이었다. 그는 천구, 천선에 위치한 두 사람을 왼손으로 공격하고 동시에 천기, 천권에 위치한 두 사람을 오른손으로 공격함으로써
단번에 일곱 사람을 혼란에 빠뜨렸다. 게다가 전진칠자들로서는 자기네 문하의 사숙 노완동이 진 안에 있으니 적개심이 날 리 없었다. 하지만 노완동은 주먹질이나 발길질을 한 번도 허투로 하지 않았다. 그는 싸우면서도 여전히 버릇대로 중얼거렸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2, 30번이나 주먹을 휘둘러댔다. 그러지 않아도 싸울 생각이 없었던 담처단은 노완동이 사납게 주먹질을 하자 황급히 검을 거두어 들였다. 노완동이 그 틈을 타서 그의 손을 가격하는 바람에 손에 들
었던 검이 윙하는 소리와 함께 공중으로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이때 노완동이 손불이의 고함소리를 들었다. 머리를 돌려보니 구천인이 손불이를 공격하고 있는 것이었다. 노완동은 화가 치밀어 소리쳤다.
"구천인, 이 망할 놈아! 내가 여인은 때리지 말라고 했지 않느냐?"
구천인이 장으로 손불이의 검을 치자 그녀의 장검이 두 동강이 나면서 사람까지 공중으로 붕 날아갔던 것이다.
노완동은 소리를 지르며 달려가 구천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구천인, 나한테 덤벼라!"
전진칠자들은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사부님은 도대체 왜 저 사람을 사제로 받아들였을까? 보아하니 우리 전진교가 앞으로 저 사람의 도움을 받기는 어렵겠어. 저 사람은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사는 사람이니 대사를 망치기 십상이야. 오늘 저 못된 구천인을 살려 주었으니, 앞으로 얼마나 긴 세월이 지나야 이런 기회가 생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매초풍이 갑자기 웃으면서 말했다.
"천강북두진이 무적의 진이라고 하더니, 이렇게 쉽게 깨어질 줄은 몰랐군요."
손불이는 그 말에 자존심이 상했다.
"매초풍, 여기가 어디라고 네 년이 감히 주둥일 놀리느냐!"
그 말에 매초풍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지난 번엔 대사막에서 너희 전진칠자들이 날 궁지에 몰아넣었지만 오늘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이 일은 곽정과 마옥만이 알고 있었다.
대몽골의 사막에서 마옥과 곽정, 그리고 강남의 여섯 괴물이 절벽 위에서 전진칠자로 가장하는 바람에 매초풍이 물러선 적이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마옥만이 전진칠자에 속하는 사람이고 나머지 여섯 사람은 전진교과는 상관없는 사람들이었다. 매초풍은 그들이 구천인, 노완동과 싸우는 소리를 듣고 지금 이들은 진짜 전진칠자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도대체 마옥 둥이 왜 절벽 위에서 전진칠자로 가장하여 자기를 속였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겁이 나서 물러난
일을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매초풍은 차갑게 내뱉었다.
"마옥, 당신들처럼 명성이 높은 전진칠자가 사람을 속인단 말이오? 다른 사람들은 당신들을 두려워할지 몰라도 우리 도화도 사람들은 두려워하지 않소!"
그러자 구처기가 대꾸했다.
"매초풍, 도화도에서 쫓겨난 주제에 도화도 문하의 사람이라니, 그 따위 허튼소리 하지 말아!"
황용은 구처기의 말을 듣고 화가 치밀었다.
'허풍쟁이 같으니. 네 놈은 곽정 오빠가 나와 함께 있는 것을 싫어했었지. 네 놈은 우리 도화도가 늘 전진교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지만, 하나같이 머리를 쪽지고 도폴르 입은 그 꼬락서니가 참으로 가소롭구나.'
황룡은 매섭게 말을 내쏘았다.
"매초풍 언니가 도화도 사람이냐 아니냐 하는 건 당신이 관계할 일이 아니에요. 언니가 만약 천강북두진을 깨어 버린다면 우리 아버진 언니를 다시 제자로 받아 주실 거라구요."
매초풍은 자기를 두둔하는 말을 듣자 몹시 기뻤다.
'사부님께서는 한평생 사모님만을 사랑하셨으니 황용을 굉장히 예뻐하실 거야. 황용이 날 좋아하면 사부님께 잘 말씀드려 도화도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매초풍은 다시 생각을 바꿨다.
'이제 난 눈도 멀었고 아름답던 용모다 다 잃었다. 다시 도화도에 돌아가야 무슨 쓸모가 있단 말인가? 사부님의 모습마저 볼 수 없는 이 병신을 사부님께서 반기실 리 없지.'
이렇게 생각한 매초풍은 입을 열었다.
"마옥, 당신은 왕중양 문하의 사람이고 누가 뭐래도 난 도화도 문하의 사람이오. 내가 당신들의 이 천강북두진을 깨뜨리겠소."
그리고는 진중으로 걸어 들어갔다.
매초풍이 진중에 들어오자 전진철자들은 겉으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 다들 기뻐했다. 이제껏 전진칠자를 대하는 그녀의 태도가 아주 불경스러웠던 것이다. 그러나 매초풍은 살아 있는 사람을 상대로 무예를 닦은 사람이었으므로 그녀의 사악한 무예는 무서운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만약 전진철자들이 흩어진 상태에서 그녀와 싸우게 된다면 사태가 아주 불리하게 될 가능성이 많았다. 그러니 오늘 없애 버려 후환을 제거해 버리는 게 좋다고 그들은 생각하고 있었다.
황용이 매초풍을 보고 말했다.
"만일 언니가 전진칠자들을 이기면 도화도에 돌아갈 수 있도록 아버지한테 꼭 말씀드리겠어요."
매초풍이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용아, 그게 정말이냐?"
황용은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럼요. 만일 아버지께서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지 않으시면 전 도화도에 돌아가지 않겠어요."
잘하면 도화도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매초풍은 대단히 기뻤다. 황약사가 괴팍한 성미를 가진 사람이긴 하지만 자기 딸한테까지 무정하게 굴지는 않을 것이었다.
곽정은 여러 사람이 있는 데서 말은 못하고 혼자 생각했다.
'용이는 구천인 같은 사람도 이들을 당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왜 자기의 사제를 내보내는 것일까? 결국은 죽으로 가라고 등을 떠미는 짓이 아닌가?'
곽정은 매초풍을 말리고 싶었으나 감히 그러지는 못했다. 마옥과 구처기가 싫어할까 봐 망설여졌던 것이다. 마옥이 그에게 내공을 전수해 주었으므로 비록 사부님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은 사제지간의 정을 갖고 있었다. 그는 마옥을 공연히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는 황용에게 천강북두진으로 들여보내지 말라고 속삭였지만 황용은 속으로 그의 입을 막으며 더는 말하지 못하게 하였다.
곽정은 그제야 사정을 알아차렸다. 황용이 매초풍을 사지로 보내는 것은 곽정 때문이었다. 대사막에서 비바람이 몰아치던 날 밤 곽정이 비수로 진현풍을 찔러 죽였으므로 매초풍은 곽정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조왕부에서 곽정이 자기가 진현풍을 죽였다고 숨김없이 말했던 것이다. 매초풍이 남편의 원수를 갚으려 하지 않겠는가? 황용은 전진칠자의 손을 빌려 매초풍을 죽여 버림으로써 곽정의 원수를 제거해 버리려는 것이었다. 그녀는 곽정이 아직은 매초풍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매초풍이 큰소리로 외쳤다.
"마옥, 예전에 난 당신 얼굴을 보아 담가란 놈을 놓아주었다. 하지만 오늘은 당신들을 죽여 우리 도화도의 화근을 없애 버리겠다."
그러자 구처기가 물었다.
"우리 전진철자가 너희 도화도와 무슨 원수를 졌단 말이냐?"
그러자 매초풍이 소름 끼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방금 구천인이 말하길, 당신들이 우리 사부님을 해쳤다고 했다. 그 바람에 나와 사제, 사매들은 통곡을 했었다. 그러니 당신들 전진칠자도 통곡을 하게 만들지 않고선 내 한이 풀리지 않을 것이다."
"도화도와 전진파는 이제까지 아무런 원한도 없었다. 아마 존사께서 오시는 모양이지?"
마옥의 말에 매초풍은 깜짝 놀랐다.
"네 놈들이 우리 사부님을 왜 찾느냐?"
그러자 구처기가 거만하게 말했다.
"요망한 계집 같으니! 빨리 너희 사부님을 오라고 해라. 와서 전진칠자들의 솜씨나 보라고 해라."
매초풍이 대노하여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네 놈은 누구냐?"
"난 구처기다! 너 따위 계집이 이 어른의 이름을 아느냐?"
매초풍은 괴상한 소리를 지르면서 몸을 날렸다. 그녀는 구처기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날아가면서 왼손의 장으로 자기 몸을 막고 오른손으로는 상대방을 덮쳤다. 구처기 역시 무예가 대단했지만 당해 내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그는 가부좌를 틀고 앉은 채 그녀의 공격을 막지도 않고 피하지도 않는 것이었다.
그것을 본 곽정은 걱정이 태산 같았다.
'아유, 구처기가 어떻게 견뎌 낸단 말인가?'
매초풍은 손으로 구처기의 정수리를 잡으려 했다. 그런데 좌우 양쪽에서 동시에 장이 날아들었다. 그것은 유처현과 왕처일이 내미는 장이었다. 매초풍은 양손을 내밀어 두 사람의 장력을 막아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장력이 합치니 일음일양으로 힘이 서로 보완되어 그 힘이 대단했다.
매초풍은 결국 뒤로 밀려나고 말았다. 그녀는 장을 조(爪)로 바꾼 뒤 오른손을 힘껏 휘저으면서 땅에 뛰어내렸다.
'내가 담가 놈을 추격할 땐 재주가 발뒤꿈치에도 미치지 못했는데 저 놈의 사형들 중에 이런 고수들이 있단 말인가? 담가와 그의 사형제들의 무예가 이토록 차이가 난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한 매초풍은 새로운 제안을 했다.
"내가 검을 쓸 테니 네 놈들도 검을 들어라."
그러자 왕처일이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
"우린 일곱이고, 네 년은 혼자인데다 눈까지 멀었다. 우리 전진칠자가 어찌 네 년과 병장기를 갖고 싸울 수 있겠느냐? 우리 일곱 사람은 앉은 채 까딱하지 않을 테니 어디 마음대로 해봐라."
매초풍이 그 말에 쓴웃음을 지으며 내뱉었다.
"너희들이 앉아서 움직이지 않는다면 내 채찍을 견뎌 낼 것 같으냐?"
그녀는 독용편(毒龍鞭)을 뽑아 들고 손불이의 가슴을 향해 후려쳤다. 채찍이 움직이는 속도는 느렸지만 짱, 하고 요란한 소리가 났다. 그런데 채찍은 무서운 속도로 매초풍 쪽을 향해 다시 날아왔다. 매초풍은 손끝에 진동을 느끼고 급히 머리를 숙여 날아오는 채찍을 피했다. 매초풍은 이번에는 채찍을 가로 휘둘러 마옥과 구처기를 노렸다. 이번에도 두 사람은 가만히 앉아 있었는데 그 곁에 있는 담처단과 왕처일이 함께 장을 내밀어 채찍을 막아냈다.
옆에서 그것을 구경하던 육승풍이 찬탄을 금치 못했다.
"저것 좀 봐. 전진칠자들은 적의 공격을 막아낼 때 장 하나만을 쓰고 다른 장은 옆사람의 몸에 갖다 대는구나. 저렇게 일곱 사람의 힘을 한데 모아서 쓰니 저 매……, 어떻게 당해 낼 수 있겠어?"
육승풍은 끝까지 매초풍을 사제라고 부르기가 싫었던 것이다.
전진칠자들은 이제 채찍을 물리치거나 비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기들의 진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구천인이 끊어 놓은 바람에 3장밖에 안 되는 채찍은 절반이나 적진으로 끌려들어가 다시는 빼낼 수가 없었다. 이때 매초풍이 채찍을 버리고 몸을 피한다면 벗어날 수는 있었다. 하지만 매초풍으로선 이곳에서 죽을지언정 물러설 수는 없었다.
매초풍은 앞으로 한걸음 더 내디뎠다. 이제 한 발자국만 더 디디면 천구, 천권 위치에 있는 네 사람 사이에 서게 되므로 겹겹이 싸인 포위망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셈이었다. 그녀가 뒤로 물러서면 천강북두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한 발자국이 생명과 관계되었던 것이다. 자신을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흥분해 있던 매초풍은 긴 머리칼을 흩날리며 갈고리 손으로 포위를 헤쳐 나가려 했다. 하지만 칠자들의 장력에 의해 번번이 격퇴되고 말았다. 전진칠자들이 그녀의
목숨을 빼앗을 마음만 있다면 아주 쉬운 일이었으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매초풍이 힘들어 하고 전진칠자들 역시 장력이 점점 약해질 때 괴상한 웃음 소리가 들리면서 누군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천하의 으뜸은 그래도 황 형인가 보오. 난 지금까지 천하의 으뜸이 왕중양인 줄 알았더니 잘못 생각한 것이었소. 그 사람의 일곱 제자들이 당신의 제자 한 사람과 싸우다니, 수치도 모르는 자들이로군."
그러자 누군가 그 말에 대답했다.
"왕중양의 공력은 실로 가공할 만한 힘을 지녔소. 하지만 저 일곱 사람은 별것 아니군요."
모두들 깜짝 놀랐다. 말소리로 보아 먼저 말한 사람이 구양봉이고 뒤에 대답한 사람은 의심할 바 없는 황약사이기 때문이었다.
과연 사람들 뒤에 그들 두 사람이 서 있었다. 푸른 적삼을 입은 황약사와 횐옷을 입은 구양봉이 나란히 서 있는 것이었다.
전진칠자들은 이 두 사람을 보자 즉시 싸움을 멈추고 일제히 일어섰다.
황약사가 입을 열었다.
"왕중양의 제자 일곱이 합심해서 나의 제자를 대적하다니! 내가 저 놈들 버릇을 좀 가르쳐 놓는 게 잘못된 일이겠소?"
구양봉이 괴상한 웃음 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그게 뭐 그리 잘못된 일이오? 저 놈들이 먼저 황 형을 존중하지 않았으니 황 형이 본때를 좀 보여 주어야, 도화도의 무예가 어떤 것이라는 걸 알지 않겠소?"
전진철자 중 어떤 사람은 화산의 무예 시합 때 동사와 서독을 만나 본 적이 있고, 어떤 사람은 그보다 먼저 황약사를 알고 있으므로 모두들 이 두 사람한테 예를 올리려고 했다. 그런데 인사도 하기 전에 황약사의 손에서 장이 날아왔다. 이 장은 곧장 왕처일에게 떨어졌는데 왕처일은 그것을 막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팍! 하는 소리와 함께 얼굴을 얻어맞은 왕처일이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
구처기가 다급하게 소리질렀다.
"빨리 원위치에 서라!"
하지만 뒤이어 팍팍팍! 소리가 나더니 담, 유, 학, 손 이 네 사람이 모두 황약사에게 장을 얻어맞았다. 구처기 역시 눈앞에 푸른 빛이 언뜻 비치는 듯하여 그것을 맞받아치려 했으나 손을 뻗칠 사이도 없이 호되게 얻어맞았다. 장이 움직이는 그림자가 마치 번개같아서 막아낼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구처기는 그 와중에도 황약사의 가슴에 한 장을 안겼다.
구처기의 무예가 칠자 중에서 으뜸이므로 그의 공력은 소홀하게 볼 것이 아니었다. 상대를 얕잡아 본 황약사는 구처기의 반격을 받아 앞가슴이 뜨끔하자 급히 기를 운행시켜 왼손으로 구처기의 소매자락을 틀어쥐고, 오른손으로 그의 두 눈을 노렸다. 구처기가 힘껏 몸을 뒤틀자 소매자락이 찢어졌는데 그와 동시에 마옥과 왕처일의 장이 날아왔다. 황약사가 날래게 몸을 피하는 바람에 두 장은 목표를 잃고 말았다. 황약사가 뒤에서 학대통을 걷어차자 팍! 하는 소리가 나
면서 학대통이 앞으로 곤두박질을 했다.
구양봉이 요란하게 웃어대면서 손뼉을 쳤다.
"왕중양이 어디서 부실한 놈들만 골라 들였군 그래!"
전진칠자들이 길을 떠난 이후로 이처럼 대패해 본 적이 없었으므로 구처기가 고함을 쳤다.
"모두 원위치에 서라!"
하지만 황약사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면서 잠깐 사이에 열여덟 가지 동작으로 장을 날렸고 그것도 막아내지 못하는 그들로서는 천강북두진을 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쟁강쟁강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황약사가 마옥과 담처단의 허리에 달려 있던 장검을 빼앗아 재빨리 부러뜨려 땅바닥에 팽개쳤다.
구처기와 왕처일은 일제히 검을 들어 황약사를 찔렀다. 두 사람은 한뜻으로 전진교의 '함께 죽는' 검법을 썼다. 두 사람이 동시에 검으로 찌르는 위력이 대단했으므로 황약사도 즉시 정신을 가다듬어 몇 가지 방어 동작을 취했다. 마옥이 그 틈에 급히 천구의 위치에 섰고 뒤이어 담, 유, 두 사람을 비롯하여 다른 사람들도 자기 위치를 찾았다.
이 천강북두진이 이루어지자 형세는 크게 달라졌다. 천권, 옥형 두 위치에서는 상대방의 공격을 정면으로 막아냈고 천기, 개양, 두 위치에서는 장으로 측면 공격을 했으며 뒤에 있는 요광과 천선 위치에서는 기동 공격을 가할 수 있었다.
황약사가 번개같이 네 가지 동작을 취하여 네 사람의 장력을 벗어난 다음 웃으면서 말했다.
"왕중양이 이 법수를 남겨 놓았군 그래."
황약사는 말은 호기 있게 했지만 점점 힘들어지는 것을 느꼈다. 일곱 사람들이 흩어져 싸울 때와는 사정이 전혀 달랐다. 황약사는 즉시 낙영신검장법으로 공중에 떠서 우박같이 장을 날렸다.
이 대결은 칠자들이 구천인이나 매초풍과 싸울 때와는 틀렸으므로 구경하던 사람들 모두 내심으로 탄복하고 있었다.
육승풍은 경모의 정을 품은 채 생각했다.
'사부님은 만나 뵙지 못한 동안 무예가 더욱 신비로운 경지에 이르렀구나. 손길질 발길질 하는 하나하나의 법수와 동작이 절묘하기 그지없어. 도화도 문하의 사람으로서 사부님 뵙기가 부끄럽구나.'
황용도 아버지를 보며 생각했다.
'내가 아버지한테 낙영신검장법을 배울 때 오허일실(五虛一實)이며 칠허일실(七虛一實)이며 하는 법수들이 상대방을 유인하는 데 쓰이는 것인 줄만 알았어. 그런데 그것이 타격동작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몰랐구나. 이 변화는 위력이 대단하군.'
매초풍은 사부님이 전진칠자들과 싸우는 소리를 들으며 내심 기쁘기도 했지만 부끄럽고 두렵기도 했다. 16년이 지나 다시 사부님을 만나게 되어 기뻤고, 사부님이 그녀를 죽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속죄하도록 했기 때문에 두려웠다. 그리고 철자들과 싸우는 사부님의 무예가 자기와는 엄청나게 달랐으므로 부끄러웠다. 그녀는 사부님의 법수와 동작이 아주 무시무시한 것이어서 전진칠자들이 자기와 싸우던 때와는 달리 전력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귀로 감지할 수
있었다. 마음 한편으론 사부님께서 자기를 어떻게 대해 주실지 알 수 없어서 두렵기만 했다.
전진칠자들은 자기 위치를 튼튼히 지키면서 황약사에게 결사적으로 저항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소홀하면 전진칠자들 모두 목숨을 보전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전진교는 이 세상에서 없어지고 말 것이다.
황약사 역시 고뇌를 느끼고 있었다.
'내가 아까 손을 써서 두 사람만 없애 버렸다면 천강북두진이 이루어질 수 없었을 텐데. 사정을 보아 주었더니 내가 곤란해지고 말았구나.'
쌍방은 호미난방(虎尾難放)으로 각기 힘을 다해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황약사는 반시간 사이에 열세 가지 법수의 기문무공(奇門武功)을 펼쳐 보였으나 판가름이 나지 않았다.
황약사는 느린 걸음으로 팔괘의 방위를 밟아 가면서 천천히 장을 내밀었다. 그는 여간해서는 이런 법수를 쓰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승부와 생사를 결정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전진칠자들은 모든 힘을 합해 황약사의 공격을 막고 되받아쳤다. 그들의 머리 위로 열기가 피어 올랐고 온몸이 땀에 푹 젖었다. 그들은 구천인과 싸울 때처럼 신바람도 나지 않았고 매초풍과 싸울 때처럼 편안하지도 않았다.
구양봉은 곁에서 수수방관하고 있었다. 그는 전진철자들의 이 천강북두진의 위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황약사가 이 싸움에서 체력을 소모해서 중상을 입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두 번째의 화산 무예 시합에서 강적 한 사람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약사의 무예가 무궁무진하여 연거푸 10여 가지의 절묘한 법수를 바꾸어 대고 있으므로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내심 황약사의 무예에 다시 한 번 탄복하고 있었다.
'과연 대단한 솜씨다!'
쌍방의 법수와 동작은 갈수록 속도가 느려졌고 형편은 더욱 험악해졌다. 이제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면 이 악전이 끝날 판이었다.
황약사가 손불이, 담처단 두 사람한테 한 장씩 안기고 그 두 사람이 급히 장을 내밀어 그것을 막고 있을 때 유처현과 마옥이 두 사람을 구하려 했다.
그때 구양봉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황 형, 내가 도우리다!"
구양봉은 땅바닥에 앉더니 개굴개굴 하는 괴상한 소리를 지르고는 담처단에게 쌍장을 내밀었다. 담처단은 그때 장으로 황약사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는 중이었다. 갑자기 등뒤로 엄청난 장력이 밀려오는 것을 느끼는 순간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담처단은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황약사가 부르짖었다.
"누가 당신에게 참견하라고 했소?"
이 틈에 구처기, 왕처일이 검을 들어 일제히 황약사를 찌르려 했다. 황약사는 급히 소매를 벌려 그것을 막은 다음 오른손으로는 마옥, 학대통 두 사람의 장력을 막았다.
구양봉이 괴상한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황 형이 내 도움을 바라지 않는다면 난 저 사람들을 돕겠소!"
구양봉은 쌍장으로 황약사의 등뒤를 노렸다. 노독물 구양봉은 심보가 고약했다. 담처단을 공격할 때에는 3할의 힘만 썼으나 황약사를 공격할 땐 필생의 힘을 다 쏟았던 것이다. 그는 황약사가 네 사람과 대처하고 있는 틈에 그를 죽여 버리려 했던 것이다. 노독물은 칠자 중에서 한 사람을 죽여 버린 다음 황약사를 없애려 했다. 그러면 천강북두진이 파괴되어 칠자들이 복수를 하려 해도 두려울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또한 황약사를 죽여 버리면 강적 하나를 제거한 셈이
되는 것이다.
갑자기 구양봉까지 합세해 공격해 오자 황약사는 끝장이라고 생각했다.
황약사는 둥에 기를 집중하여 구양봉의 일격을 받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구양봉의 이 장력은 아주 대단한 것이었으나 속도가 아주 느렸다. 구양봉이 자기의 계략이 성공했다고 의기양양해 할 때 홀연 검은 그림자가 다가오더니 황약사의 등뒤로 한 사람이 날아들면서 큰소리를 내질렀다. 그 사람은 황약사 대신 구양봉의 일격을 막아냈다.
황약사와 마옥은 동시에 법수를 거두고 훌쩍 뛰어 물러났다. 몸을 바쳐 황약사를 보호한 사람은 다름아닌 매초풍이었다. 황약사가 머리를 돌려 구양봉을 바라보았다.
"노독물이란 이름이 과연 허명은 아니었군!"
구양봉은 아주 낙심하고 말았다. 그는 황약사와 전진칠자들이 힘을 합해 덤벼든다면 자기 목숨을 건지지 못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럴 땐 줄행랑이 제일이라고 생각한 구양봉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나는 듯이 도망쳐 버렸다.
마옥이 급히 담처단을 안아 일으키다 깜짝 놀랐다. 담처단이 머리를 외로 틀고 있었던 것이다. 담처단은 구양봉의 장력에 맞아 앞뒤의 갈비뼈와 척추가 몽땅 부러져 나갔다. 마옥은 사제의 목숨이 경각에 이른 것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구처기가 검을 들고 구양봉을 뒤쫓으려 하는데 먼 곳에서 구양봉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황 괴물, 내가 황 형을 도와 왕중양의 진법을 깨뜨렸고 또 황 형의 문호(門戶)를 청소해 주기까지 했으니 나머지는 내가 도와줄 필요도 없구려. 황 형 스스로 처리하시오! 후에 만날 때가 있겠지!"
황약사는 흥! 하고 코방귀를 뀌었다. 그는 구양봉이란 자가 사악한 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구양봉은 떠나면서도 그와 전진칠자 사이를 이간시키고 담처단을 죽인 죄를 몽땅 황악사한테 덮어씌워 전진칠자가 그에게 원한을 가지고 복수하도록 부추기는 인간이었다. 그는 이것이 구양봉의 이간책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나 전진칠자들에게 구구이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본래 오만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므로 전진칠자를 아예 깔보고 있었던 것이다.
황약사도 천천히 매초초풍을 부축해 안아 올렸다. 그녀는 많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마지막 행동을 만족하게 생각하는 듯했다. 밝은 세상을 보지 못하는 그녀의 눈에서 끝도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황약사가 보니 매초풍의 호흡이 점점 약해져 가고 있었다. 그는 지난 일을 떠올려 보니 만감이 겹쳐서 착잡하기만 했다.
매초풍은 얼굴에 떨어지는 물방울이 사부님의 눈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사부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는구나. 사부님이 나 때문에 눈물을 흘리시다니…….'
매초풍은 말을 하고 싶었지만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는 마지막 힘을 다하여 오른손으로 왼쪽 손목을 부러뜨리더니 오른손을 들어 옆에 놓인 돌에 힘껏 후려쳐 손목뼈를 부러뜨렸다. 황약사는 깜짝 놀라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매초풍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사부님께서…… 귀운장에서 분부하신 세 가지 일 중에…… 앞의 두 가지를 해내지 못했어요……."
일전에 귀운장에서 잠깐 매초풍을 만난 황약사는 그녀에게 《구음진경》과 사제들을 찾아오라고 분부하면서 《구음진경》에서 배운 무공을 스스로 폐하라고 명령했었다. 매초풍이 자기 손목을 부러뜨린 것은 죽기 전에 스스로 구음백골조와 최심장의 공력을 파기시킨 것이었다.
"사부님……."
매초풍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황약사는 눈물을 머금은 채 조용히 말했다.
"훌륭하구나, 매초풍. 육 사제가 여기 있으니 됐다. 《구음진경》이 다 무슨 소용이겠느냐? 내가 널 도화도의 제자로 받아들이마."
사문에 돌아오지 못한 것을 평생의 한으로 간직하고 살아온 매초풍은 결국 죽기 전에 사부님의 양해를 받게 되었다. 너무나 기쁜 매초풍은 초인적인 힘으로 몸을 일으켜 사부님한테 예를 올리느라고 머리를 세 번 조아렸는데 세 번째부터 몸이 점점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머리를 들고 움푹 꺼져 들어간 눈으로 황약사를 쳐다보며 말했다.
"사부님의 얼굴을…… 볼 수 없군요……."
그것이 매초풍의 마지막 말이 되고 말았다.
이때 구처기는 구양봉을 추격하느라 10여 장이나 쫓아가고 있었다. 마옥은 그가 혼자 구양봉을 쫓아가다가 구양봉의 간사한 마수에 걸릴까 봐 황급히 불러 세웠다. 다시 돌아온 구처기는 원한이 가득 담긴 눈으로 황약사를 노려보았다.
"우리가 당신에게 무슨 잘못을 했다고 담 사형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소?"
황약사는 불쾌한 기분으로 구처기를 쏘아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손불이가 담처단의 몸에 엎드려 대성통곡을 하자 모두들 황약사와 다시 싸우자고 떠들기 시작했다.
담처단이 천천히 눈을 뜨더니 꺼져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형들, 나 먼저 가오……."
전진칠자들은 급히 담처단을 둘러싸고 꿇어앉았다. 여섯 사람은 담처단이 운명하는 것을 지켜 보았다.
담처단이 마지막으로 시구를 읊었다.
손에 영주(靈珠) 틀어쥐고
항상 부지런히 붓 놀리면
마음 열리고 하늘도 도우리니
어찌 뜻을 이루지 못하겠는가.
그는 눈을 감고 세상을 하직했다.
전진의 여섯 사람들은 머리 숙여 그의 명복을 빌었다. 마옥이 담처단의 시체를 안아 올리자 구처기 둥이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은 서서히 대문을 나섰다. 그들은 담처단이 죽어 천강북두진이 깨어졌으니 황약사가 손을 쓰기만 하면 자신들이 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황약사 역시 떠나는 그들을 묵묵히 바라볼 뿐이었다.
이때 황용이 아버지한테 다가갔다.
"아버지!"
황약사는 딸을 보더니 화를 버럭 냈다.
"용아, 사방팔방 돌아다니니 이 애비가 널 찾을 수가 없구나!"
이때 육승풍이 황약사 앞에 다가가 예를 올렸다.
"사부님, 이 주점은 곡 사제가 운영하던 것입니다. 실내의 설비가 우리 도화도식인 것으로 보아 틀림없습니다."
황약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으로 들어가 보자."
낯선 사람들이 주점 안으로 들어서자 바보 아이가 달려 나왔다. 그 아이는 들어오는 사람들을 밀어내며 소리쳤다.
"여기 들어와서 뭐하려고 그래요? 나가요!"
황약사가 그 아이에게 물었다.
"넌 누구냐?"
육승풍이 대신 대답했다.
"곡 사제를 닮은 것으로 보아 그의 딸인 것 같습니다."
황약사가 아이를 찬찬히 살펴보며 물었다.
"네 성이 곡씨냐?"
"몰라요."
황용이 아이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어디 계시니?"
"아버지……, 아버지……."
아이는 무슨 말인가 하려 했으나 아버지라는 말만 하고 황약사를 멀뚱멀뚱 쳐다보는 것이었다.
황약사가 벽쪽에 다가가서 궤를 살펴보더니 그릇을 돌렸다. 그러자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면서 벽장이 나타났다.
사람들이 밀실로 들어가 보니 그 안에 몇 구의 시체가 있었는데 궤 곁에 쓰러진 사람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었고, 반대편에 쓰러진 사람이 바로 곡영풍이었다. 황약사가 얼른 냄새를 맡아 보니 죽은 지 몇 시간이 지난 듯했다. 황약사는 하루 사이에 제자가 둘씩이나 죽은 것이 너무나 괴로웠다.
황약사는 몸을 일으켜 서남쪽에 있는 구석으로 갔다. 담장 밑에는 굴이 하나 파여 있었다. 그는 그곳을 더듬다가 두루말이로 된 편지를 찾아냈다. 그는 주점으로 나와 그것을 펼쳐 보았다. 거기에는 비뚤비뚤한 글씨로 다음과 같이 씌어 있었다.
도화도 은사 황존 앞
제자는 황궁에서 얻은 자화기명(宇晝器皿)을 은사한테 바치려 합니다. 저의 죽음을 확인하시면 제가 궁중의 시위들 손에 죽은 줄 아십시오. 딸애 하나를 세상에 남기니 사부님께 맡깁니다.
그것은 황약사 앞으로 쓴 혈서였다. 자신의 최후가 불안한 곡영풍이 피로 쓴 유서를 남겨 놓은 것이었다.
곡영풍의 유서를 보고 황용은 아연실색했다. 보아하니 아버지의 제자들은 강호에서 너무나 불행하게 살았고, 이로 인해 아버지의 심정이 무척이나 괴로웠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황용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귀한 보물을 숨겨 놓은 모양인데 가 볼까요?"



제35장 구양봉의 계략
다시 밀실로 들어온 황용과 황약사가 상자를 열어 보니 3층으로 된 상자에 금은 보석과 고서화, 그리고 골동품이 가득했다. 오도자(吳道子)가 그린 <송자천왕도(送子天王圖)>와 한간(韓干)이 그린 <목마도(牧馬圖)>가 있었고, 남당(南唐)의 후주(后主)가 그린 <임천도수인물(林泉渡水人物)>도 있었다. 그리고 길고 짧은 족자가 20여 폭이나 되었는데 모두 명가들의 필적이었고 천하의 진품들이었다. 견식이 넓은 황약사도 이렇듯 많은 명화와 명인들의 서예를 보기는 처음
이었다.
"이 사람아, 자네 도대체……."
황약사는 한숨을 지으며 더 말을 잇지 못했다.
황용은 아버지의 가슴이 얼마나 아픈지 잘 알고 있었다. 곡영풍이 자기 사부님을 위하여 모은 보물들은 황약사가 평생 모은 것보다 열 배나 더 많았다. 이처럼 사부를 위하여 보물을 모으다 목숨까지 잃었으니 아버지의 심정이 어떻겠는가.
"아버지, 이 많은 보물을 얻었는데 저 좀 안 주실래요? 보물을 보더니 딸도 잊으셨나 봐. 왜 보물만 바라보고 계세요?"
황용이 어리광을 부리며 하는 말에 곽정이 놀란 기색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저런 철부지가 어디 있어? 비통에 잠긴 아버지를 위로하긴커녕 어리광을 부리다니. 저러다 아버지한테 꾸중 들으려고…….'
그런데 뜻밖에 황약사는 황용을 돌아보더니 얼굴에 보일락말락한 미소를 지으며 상자에서 진주 목걸이를 하나 꺼내 딸의 목에 걸어 주었다. 황약사도 딸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황용은 아버지의 슬픔을 달래 주느라 짐짓 어리광을 부린 것이다.
황용은 아름다운 진주 목걸이를 걸고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황용은 아름다운 진주 목걸이를 걸고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곽정 오빠, 앞으로 염낭이 비면 이 진주 목걸이를 저당잡히면 되겠어요."
그리고는 아버지를 보면서 방긋 웃었다.
황약사는 황용을 보며 물밀듯 밀려드는 후회와 가책을 느꼈다. 그는 바보 아이를 바라보다가 문득 자기가 내세운 계율이 생각났다.
"얘야, 아버지가 너한테 무공을 가르쳐 주더냐?"
황약사의 질문에 아이는 웃는 얼굴로 도리질을 하고는 벽장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문을 닫고 저 혼자서 무술 동작 몇 가지를 해보는 것이었다. 벽파장법(碧波掌法)을 흉내내는 것 같았는데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아버지, 저 애는 제 아버지가 연습하는 걸 훔쳐보고 좀 배운 것 같아요."
황용의 말이었다.
"음, 그런 것 같구나. 곡영풍이 내 문하를 벗어난 뒤 우리 도화도 무공을 남한테 전수하지 못했을 거다. 그런 짓은 안 할 사람이야."
황약사는 곡영풍을 생각하고 눈시울을 적시며 말을 이었다.
"내 제자들 중에 곡영풍의 무공이 제일 뛰어났었지. 두 다리만 그렇게 되지 않았어도 대내시위 따위는 1백 명도 거뜬히 상대했을 텐데……."
"아버지, 저 아이에게 무공을 가르치실 거예요?"
"그래, 곡영풍이 못 배운 무공들과 '작시탄금(作詩彈琴)', '감문오행(龕門五行)'을 모두 가르쳐야겠다."
그 말에 황용은 혀를 쏙 내밀었다.
'그러려면 아버지가 큰 고생을 하셔야겠네.'
"얘야, 난 구양봉과 영지화상, 그리고 구천인을 찾으러 가야겠다. 너도 따라가 구경하겠니?"
황약사가 딸에게 물었다.
황용은 곽정을 돌아보더니 대답했다.
"아버지, 전 곽정 오빠와 여기서 놀러 다닐래요."
"딸자식 길러야 아무 소용 없다더니 그 말이 꼭 맞는구나. 그럼 마음대로 하려무나."
황약사는 탄식을 한번 하고는 몸을 솟구치더니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황용과 곽정은 웃으며 길을 떠났다. 반나절 정도 걸으니 주점 하나가 보였다.
"곽정 오빠, 저 멀리 보이는 성이 임안성이에요. 여기서 요기를 하고 들어가도 늦지는 않을 거예요."
둘이 주점에 들어가 자리에 앉으려는데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마침 잘 왔구나."
황용과 곽정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목소리의 주인이 그 끔찍한 구천인이었던 것이다.
황용은 가슴이 철렁했으나 내색을 하지 않고 얼굴에 웃음을 띠며 말했다.
"구 방주님, 이렇게 함부로 다니셔도 되나요? 우리 아버지와 구양봉 선배님이 모두 방주님을 찾고 있던데."
구천인은 그 말에 냉랭하게 대답했다.
"네 아버지가 날 찾아? 네가 네 아버지를 빗대서 날 위협하는 거냐?"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우리 아버지가 방주님을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방주님의 일을 우리한테 들려주시는 걸 굉장히 좋아하세요. 우리 아버진 놀기를 좋아한답니다. 아버지께서 방주님을 만나시면 즐겁게 노실 거예요."
황용이 웃으며 하는 말을 들은 구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 참 듣기 좋은 소리다. 하지만 우선 너하고 좀 놀아야겠다."
구천인이 곽정 앞으로 다가오더니 그를 붙잡으려 했다. 곽정은 구천인에게 잘못 걸렸다간 운수 사납게 되므로 그 손을 슬쩍 피하며 황용을 끌고 달아나려 했다. 그런데 구천인이 문을 막아 서며 코웃음을 쳤다.
"황용아, 네가 아버지를 둥에 업고 나를 업신여기는구나. 어디 오늘 내 손맛 좀 보아라. 내가 놓아줄 줄 아느냐?"
"그럼 어쩔 셈이에요? 날 죽일 건가요?"
"죽일 필요도 없지. 너를 잡아 혈도를 눌러 놓고, 황약사를 협박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겠다. 어때, 내 방법이 괜찮지?"
그 말에 황용은 배를 잡고 깔깔깔 웃기 시작했다. 구천인은 물론 곽정도 그녀가 왜 이렇게 웃어대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웃기는 왜 웃어? 허파에 바람이 들었느냐?"
구천인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런 서투른 재주로 날 붙잡아요? 설령 나를 붙잡으면 또 뭘해요? 우리 아버지 별호가 괜히 동사인 줄 아세요? 당신 제자들의 목숨도 상관을 안 하는 분이 딸이라고 다르겠어요? 그런 분이시면 내가 이렇게 뛰쳐나와 강호를 떠돌아다니는데도 왜 오불관언이실까요? 나를 붙잡아 아버지를 협박하겠다고요? 그런 꿈은 아예 꾸지도 마세요."
그러나 구천인은 머리를 숙이고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어쨌든 우선 널 잡아 놓고 보겠다."
그러자 황용은 곽정에게 소곤거렸다.
"오빠 먼저 달아나. 가서 우리 아버지를 불러오든가 사부님을 불러와요. 그래서 나를 구해요."
그러나 곽정은 고개를 저었다.
"싫어, 난 안 가. 동생과 같이 싸울 거야."
곽정 먼저 보내는 걸 포기한 그녀는 한숨을 가볍게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 둘이 힘을 합해 구천인을 물리쳐야지, 뭐."
너그러운 곽정이 구천인을 죽이기 싫어할까 봐 황용은 이렇게 다짐을 했다.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갑자기 강적을 만났을 때 죽기살기로 싸우지 않으면 결국 두 사람 모두 구천인의 손에 죽기 십상이었다. 지금 황용은 홍칠공한테서 타구봉법을 전수받았고, 곽정은 강룡십팔장 중의 열다섯 가지 장법을 장악하고 있으므로, 사실 구천인에게 턱없이 당하지만은 않을 것이란 생각이 있었다.
구천인이 제의를 했다.
"나가자. 밖에서 자웅을 겨뤄 보자."
황용과 곽정이 그를 따라 나갔다.
숲 속에 이르자 구천인이 먼저 말했다.
"황용아, 네가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조롱했으니 오늘 너를 죽이지 않고는 내 속에 있는 한을 풀 수가 없다."
"구 방주님, 내가 보기엔 방주님의 무공은 태반이 다 가짜인데 그걸 갖고 나를 죽일 것 같아요?"
"뭐? 가짜라구?"
황용은 더욱 크게 웃어젖혔다.
"벽돌을 부수고 손가락으로 술잔을 끊는 그런 헛수작이 모두 남의 눈이나 속이는 가짜라는 걸 누가 모를 줄 알아요? 그런 가소로운 짓으로 누구를 위협하는 거예요?"
구천인은 그만 얼굴이 벌개져서 혼자 중얼거렸다.
"허튼소리, 그건 내가 아니다……. 그래도 당당한 철장방 방주인 내가 그런 속임수를 쓸까……."
구천인은 다 귀찮다는 듯 고개를 흔들더니 소리쳤다.
"이 황약사의 딸년아, 넌 입을 놀릴 줄만 아는구나. 잔말 말고 내 장이나 받아라!"
그러면서 한 장(掌)을 내밀자 그 힘에 황용은 그만 비틀거리며 한켠으로 밀려났다.
옆에서 구천인의 거동을 주시하고 있던 곽정은 그가 손을 쓰자 얼른 황용의 앞을 막아 나서면서 한 장 맞받아 내밀었다. '항룡유희' 장법이었다. 곽정이 손을 쓰자 구천인은 그를 향하여 한 장 후려쳤다. 펑! 하는 소리가 일며 곽정은 두어 장(丈)이나 멀리 밀려 나갔다.
"오빠, 조심해!"
황용이 고함치며 나무 막대기를 들고 달려들어 구천인의 혈도를 누르려 했다. 구천인이 곽정한테 손을 쓸 때 황용은 잽싸게 나무 막대기를 찾아 들었던 것이다. 황용은 '봉도쌍견(棒桃雙犬)'의 술법을 쓰며 구천인의 허리를 내지르려 하였다.
황용의 봉법(棒法)이 이렇듯 정묘한 줄을 몰랐던 구천인은 "이것 봐라!" 하며 급히 옆으로 피했다. 이 기회에 곽정도 함께 그에게 달려들었다. 구천인의 장법은 소박하지만 힘이 아주 강하여 한 장 한 장마다 쌩쌩 바람이 일었다. 구천인은 한편으로는 황용의 타구봉법을 막고 다른 한편으로는 곽정의 강력한 장력을 막느라 땀을 뻘뻘 흘렸다.
그때 문득 웃음 소리가 들렸다.
"그런 재주로는 화산논검에 갈 엄두도 못 내지. 그때 화산에 가지 않기를 잘했구만. 그만하면 자네도 스스로를 알고 있겠지만 말이야……."
그리고는 또 껄껄껄 웃어댔다.
귀에 익은 웃음이었다. 황용은 그만 가슴이 섬뜩했다. 노독물의 웃음 소리였던 것이다. 과연 위를 바라보니, 노독물 구양봉이 나무 위에 앉아 셋이 싸우는 것을 보고 웃고 있었다.
구천인이 그를 보고 말했다.
"재주가 있으면 거기서 내려와 이것과 겨루어 보시지."
구양봉은 또 한 번 크게 웃더니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좋다. 이 구양봉의 솜씨를 보여 주마!"
구양봉은 황용과 곽정 앞에 서서 차갑게 노려보았다.
"너희들이 내 앞에서 잔재주를 부리겠다구? 내가 따끔한 맛을 보여 주겠다."
구양봉의 말에 황용은 곽정을 보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듣자하니 자기를 천하에 없는 큰 영웅으로 자처하고 있는 인간이 있다는데 오빠는 그가 누군지 알아?"
"몰라, 그런 사람이 다 있나? 누군데?"
곽정은 황용이 일부러 그러는 것도 모른 채 이렇게 대답하자 그녀는 키드득 웃었다.
"그것도 몰라? 여기 있잖아. 여기 있는 서독 구양봉이란 분이 바로 그런 분이시래."
"구양봉이 왜 천하 제일이야? 우리 사부님이 천하 제일이지."
구양봉은 그 말에 화가 났다.
"네 사부가 누군데? 그 거렁뱅이 홍칠공 말인가? 그 거렁뱅이가 천하 제일이라……. 거기에 비하면 그 구양봉은…… 이 구양봉은 말이야……."
그는 거렁뱅이 홍칠공은 자기 적수도 안 된다는 말을 하려다가, 그것이 제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아서 말을 못하고 더듬거렸다. 사실 그와 홍칠공은 여태까지 자웅을 겨루어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탕탕 던지겠는가?
그런데 황용은 여전히 곽정을 보며 말했다.
"곽정 오빠는 몰라서 그래요. 노독물은 우리같이 어린 후배들한테도 손을 막 댄다구요. 그리고 아무 술법이나 가리지 않고 다 쓰고 다녀서 천하 무림의 낯이란 낯은 다 깎고 다니거든요. 그런데 우리 사부님은 여태까지 그런 일을 못하니까 천하 영웅은 그래도 노독물이라구요."
아무리 앞뒤가 꽉꽉 막힌 곽정이라도 이쯤 되면 황용이 노독물 구양봉의 약을 올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제야 곽정도 히죽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음, 그건 그래. 노독물을 확실히 낯가죽이 신바닥이야."
그 말에 노독물 구양봉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이 계집애야. 내가 너를 잡는 건 아랫사람들한테 손을 대는 게 아니라 네 애비와 겨뤄 보기 위해서야. 네 애비는 내가 목숨까지 구해 주었는데도 나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니 이런 망은부의(忘思負義)한 작자가 어디 있냐? 그리고 세상에 네 아버지 같은 등신도 없다. 여편네가 죽었으면 다른 계집을 또 얻으면 그만인데, 배를 타고 바다에 들어가서 죽은 여편네와 같이 어복지장(魚服之葬)을 하겠다니, 이런 등신이 어디 있냐 말이다. 세상에 계집이 없어 걱정이라더냐?
내가 우리 백타산장의 천(天), 지 (地), 인(人) 세 누각에 예쁜 계집들이 득실득실하니 마음대로 골라 가지라고 말했지, 계집이란 의복과 마찬가지니 새 것으로 자꾸 갈아입어야 한다고 말이야. 내 말은 어디까지나 호의에서 나온 거라구. 그런데 네 애비는 내 호의를 악의로 여기니 이게 바보 등신이 아니고 뭐냐? 이런 등신과 싸우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그런 맹랑한 일이 또 어디 있겠냐? 그러니 너부터 먼저 잡아 놓고 황약사한테 가서 항복을 받을 테다."
구양봉은 사설을 잔뜩 늘어놓으면서 곽정과 황용 앞으로 한 발 한 발 다가섰다. 그러자 황용이 또 곽정을 재촉했다.
"곽정 오빠, 어서 가서 아버지를 데려와요. 내가 노독물에게 붙잡혔으니 어서 구하라고 전해요."
그 말을 듣고 구양봉이 껄껄껄 웃었다.
"그 말이 옳다. 어서 가서 황약사를 불러와라. 나도 황약사에게 좀 물어 봐야겠다. 계집이 싫으니 딸도 싫은지 말이다."
그러나 곽정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난 황용과 같이 노독물과 이판사판으로 싸울테야. 저자가 우리를 어쩌겠다구……."
"이 바보 같은 녀석아, 이 기회에 달아나지 않으면 너도 죽는 거야."
구양봉이 말했으나 곽정은 그 말엔 대꾸가 없이 고함을 지르며 한 장(掌)을 내밀었다. 좀 전에 구천인에게 쓰던 장법과는 달리 이 장법엔 십분(十分)의 힘이 들어 있어 그 역도(力道)가 아주 강했다. 구양봉이 오분(五分)의 역도로 곽정의 장을 받아내자 둘은 그만 놀라서 그 자리에 못박인 듯 서 버리고 말았다.
"이 녀석, 무공이 만만치 않구나. 어디 한번 겨뤄 보자."
노독물은 개굴개굴 개구리 소리까지 하며 구분(九分)의 역도를 넣어 한 장을 내밀었다.
그러자 우뢰 같은 소리가 나면서 곽정의 눈앞에 일진 광풍이 일었는데, 곽정은 그만 숨이 턱 막히고 몸을 가눌 수가 없어 땅바닥에 쓰러졌다.
"곽정 오빠, 곽정 오빠!"
황용이 고함을 지르며 달려가 곽정을 안아 일으켰다. 곽정은 얼굴이 흙빛이 되어 가는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황용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 아팠다.
'내 말을 듣고 여기를 떠났으면 이런 봉변을 당하지 않았을텐데. 내가 노독물의 손아귀에 잡힐까 봐 떠나지 않아서 이런 중상을 입은 거야. 곽정 오빠가 죽으면 나도 살고 싶지 않아…….'
"황용아, 저 녀석의 목숨이 아깝지 않으냐? 내가 살려 줄까?"
황용은 곽정이 걱정되었지만 구양봉한테 굽히기는 싫었다.
"체면도 없이 후배한테 함부로 손을 대면서 뭐 영웅이라구요?"
"헤헤, 난 영웅이 아니야. 고금에 없는 큰 인물, 천하 무림의 제일가는 사람일 뿐이지."
구양봉은 밉살맞게 대꾸했다.
그때 곽정이 신음하며 일어났다. 황용은 곽정을 붙들고 눈물을 흘렸다.
"용아, 울지 마. 노독물이 웃는다."
곽정이 말했다.
그러나 황용은 구양봉이 웃든 울든 상관없었다.
"오빠가 완쾌되면 난 오빠와 결혼할 테야. 그러니 오빠도 화쟁 옹주를 생각하지 말아요."
곽정은 황용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런 허튼 생각은 하지 말라는데도 그러는구나. 내가 언제 화쟁을 생각했다고 그러니? 나한텐 너뿐이야."
"그럼 나랑 결혼하는 거죠?"
"그래, 그래. 너와 결혼할 거야……."
곽정은 고통이 심해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구양봉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황용에게 말했다.
"황용아, 네가 나와 함께 네 아버지한테 가서 아버지가 내 앞에서 죽도록 하면 이 녀석의 생명을 구해 주마."
"그 따위 허튼소리는 하지 말아요!"
황용은 울면서 소리쳤다.
"구천인, 이 애를 데려가서 대혈 두 곳만 찔러 놓게. 난 황약사를 찾아가야겠어. 네가 내 말을 듣지 않고 견뎌 내는지 어디 보자."
구양봉이 구천인에게 말했으나 엉뚱한 목소리가 대꾸를 했다.
"이봐, 자넨 갈수록 사람이 왜 그 모양인가? 옛날에 구양봉은 아무리 무능해도 자기 후배뻘 되는 어린것들을 해치지는 않았는데 왜 이렇게 점점 이상해지는 거지? 참, 풍속이 왜 이렇게 더러워지는지 모르겠어."
그러더니 한 사람이 나타나는데 다름아닌 개방 방주 홍칠공이었다. 푸른 옥죽으로 된 타눅봉을 들고 있는 홍칠공을 본 구양봉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별 거렁뱅이가 다 와서 귀찮게 구는군."
"이봐, 네가 내 제자를 붙들어 놓고 있는데 내가 눈뜨고 가만있을 줄 알아?"
홍칠공은 타구봉으로 구양봉을 가리키며 말을 계속했다.
"구양봉, 네가 감히 내 제자를 건드려? 내가 저 애를 개방 방주를 만들려고 생각하고 있는데 네가 감히 잡아가겠다구? 황약사는 둘째치고 이 거렁뱅이 홍칠이가 가만 놔둘 줄 알아?"
그 사이에 곽정이 깨어났다. 곽정이 보니, 황용은 구천인한테 잡혀 있고 홍칠공과 구양봉은 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그 기세가 금방이라도 큰 싸움이 붙을 것 같았다.
'사부님이 오셨으니 노독물 구양봉이 용이를 감히 해치지 못하겠지만, 구천인은 악한 인간이어서 잘못하면 용이를 해칠지도 몰라.'
곽정은 이런 생각을 하고 숨을 크게 들이쉬어 보았다. 몸에 별다른 장애가 없는 것을 확인한 곽정은 기운을 가다듬어 구천인에게 덤벼들려 했다.
곽정이 덤벼들자 황용이 급히 소리쳤다.
"곽정 오빠, 사부님이 계시니까 오빠는 빨리 가요! 가서 우리 아버지를 찾아와요."
그러나 구양봉은 곽정이 목숨을 걸고 덤벼들어도 구천인을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쪽엔 눈을 돌리지 않고 오로지 홍칠공만 쏘아보았다. 홍칠공이 느닷없이 장을 내밀면 큰 상처를 입을 것 같아 잠시라도 한눈을 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구천인과 구양봉이 천하에 악한 인간들이므로 자기가 황약사를 찾으러 떠나고 홍칠공이 구양봉과 싸우는 틈에 구천인이 황용을 납치할 것 같아서 곽정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두 손바닥에 기를 모아 한 장을 세차게 내쳤다. 강룡십팔장 중에서 장법은 가장 간단하지만 위력은 가장 큰 항룡유회였다.
비록 상처를 입었지만 목숨을 걸고 내는 장이라 위력이 대단하여 일진광풍이 구천인을 후려쳤다. 옆에서 곽정의 솜씨를 본 홍칠공은 좋아서 껄껄 웃었다.
"역시 훌륭하다! 이봐, 구천인, 내가 당신이라면 자식 같은 아이에게 지느니 차라리 접시물에 코를 박고 죽어 버리겠다."
구천인은 화가 치밀었다. 성질대로라면 동사니 서독이나 남제니 북개니 하는 것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으면 속이 시원하겠지만 재간이 모자라 첫번째 화산 무예 시합에 얼굴도 못 내민 주제이니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후에 물론 자기의 무공이 크게 자랐지만 동시에 그들의 무예도 더 고강해졌을 것이 뻔했다. 그리너 이번 무예 시합에도 얼굴을 내밀지 못할 것이었다. 하지만 구천인은 계책이 있었다. 서독은 화산 무예 시합에 가기 전에 암암리에 동사와 남제, 그
리고 북개를 하나하나 없애려 하고 있었다. 구천인은 서독을 도와줌으로써 자기의 원을 풀려고 하였다.
그러는데 곽정이 공격해 온 것이다. 구천인은 일진광풍에 밀려 황용을 끌고 급히 한켠으로 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곽정이 또 한 장(掌)의 기운을 모으자 구천인이 소리쳤다.
"네 놈이 계속 무례하게 굴 셈이냐? 그럼 이 계집애를 앞세워 네 장풍에 죽게 할테다."
그 바람에 겁이 난 곽정의 장력이 단번에 약해지고 말했다. 구천인한테 이리저리 끌려다니던 황용은 구천인의 말을 듣고 깔깔깔 웃었다. 그 웃음 소리가 귀에 거슬린 구천인이 버럭 화를 냈다.
"망할 년의 계집애, 웃긴 왜 웃어!"
"모두들 말하기를 첫번째 화산 무예 시합에 천하의 5대 고수말고 또 한 사람이 안 왔다고 그러던데요. 그가 왔다면 천하의 고수가 다섯이 아니고 여섯이 될 뻔했지 뭐예요? 누가 못 왔느냐면 철장 방주 구천인이……."
구천인은 황용이 서독과 북개 앞에서 자기를 천하의 6대 고수처럼 말하자 비록 얼굴에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흐뭇했다. 그런가 하면 홍칠공과 구양봉도 각기 제 나름의 생각을 갖고 고개를 끄덕이며 황용의 말에 찬성을 표시했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그런 체했을 뿐이었다. 홍칠공은 내심 구천인 따위는 발바닥으로 보고 있었으므로 절대로 그가 천하의 여섯 번째 고수라고는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황용에게 무슨 꾀가 있겠거니 하고 찬성을 표시했을 뿐이
었다. 서독 구양봉 역시 마찬가지였다.
'구천인이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천하 무림의 고수라고? 미친 소리군.'
하지만 구양봉도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황용의 말에 찬성을 표시했다. 그는 지금 어느 때보다 구천인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의 도움을 받아 북개, 남제와 동사를 죽여 버려야 했다. 그리고 나서 구천인까지 죽여 버리면 화산 무예 시합에서 그를 이길 사람이 없을 테니 자연히 천하 무림의 지존까지 받들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황용이 또 계속 말했다.
"그렇지만 이제 보니 사람들 모두 눈이 멀었어요. 이 철장방 방주가 후안무치한 위인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으니까요. 다른 건 그만두고 됨됨이만 봐도 5대 고수들의 발뒤꿈치도 못 따라가는데 무공인들 출중하겠어요? 한심하고도 불쌍하지요."
"너 이 계집애, 주둥아리 못 닥쳐! 죽여 버릴테다."
그 바람에 홍칠공과 곽정은 걱정이 되었으나 구양봉은 은근히 기뻐했다.
'그래, 죽여 버려라. 네가 그 계집애를 죽여 버리면 황약사가 너와 붙을 테고, 그러면 난 옆에서 구경하다가 기회를 봐서 달려들어 황약사를 해치우면 되지. 이것 참 묘한데.'
그런데 황용은 겁도 없이 웃는 얼굴로 구천인에게 대들었다.
"나를 죽이겠다구요? 당신이라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겠지요. 서독 구양봉 선배님을 보세요. 사람들이 그를 노독물이라고 하지만 그도 우리같이 어린 후배들을 죽이진 않아요. 그러나 당신은 우리 사부님이나 아버지, 남제 같은 분과는 맞서지도 못하면서 서독한테는 굽실굽실, 시키는 대로 뭐든지 다 하는데 천하 고수는 무슨 천하 고수예요? 천하 고수가 아니라 고주예요, 고주(高走)!"
"뭐 고주! 고주가 뭐냐?"
구천인이 물었다.
"그것도 몰라요? 그러면 우리 사부님한테 물어 보세요. 우리 사부님이 쓰시는 타구봉은 언제나 고주를 때리는 거니까."
그제야 황용이 자기를 서독 구양봉의 개라고 욕하는 것을 안 구천인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욕을 퍼부었다.
"이 망할 놈의 계집애! 네가 죽지 못해 환장을 했구나!"
구천인은 두 손을 펼쳐 들더니 황용을 치려고 했다. 구천인의 구문수법(狗門手法)에 의하여 혈도를 눌린 그녀는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구천인의 손바닥이 황용을 후려치려는 순간 곽정이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두 사람의 손바닥이 마주쳤다.
'이 녀석, 어디 내 철장을 견뎌 봐라.'
구천인은 이를 사려물며 온몸의 내력을 한데 모아 곽정의 손바닥을 눌렀다. 곽정은 달려들어 얼른 그녀를 한켠으로 비켜 세워 놓고 구천인과 맞받아 싸우려 했다. 그런데 눈치를 챈 구천인은 한 손으로는 곽정의 장(掌)을 막으며 다른 한 손으로 황용을 잡아 등뒤에 끌어다가 감추었다. 그리고는 또 한 번 힘을 모아 곽정의 손바닥을 눌렀다.
곽정은 온몸의 힘을 손바닥에다 응집시키며 거꾸러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사랑하는 용이를 위해 죽어도 좋다. 그러나 용이를 구하지 못하고 죽어서는 안 된다.'
구천인의 대머리에선 비지땀이 흘러내려 온몸을 적셨다. 곽정은 구천인의 적수가 못 되었다. 안타까운 황용이 또 소리쳤다.
"오빠, 어서 가서 우리 아버지를 불러와요!"
한편 홍칠공과 구양봉은 아주 태연한 자세로 마주보고 서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그들은 긴장을 조금도 늦추지 않고 있었다. 상대방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손을 움직일 참이었다. 고수들간의 싸움에선 손짓 한 번에 목숨이 달아나기가 일쑤였다.
이때 어디선가 구성진 퉁소 소리가 들려 왔다. 이승의 티끌 하나 묻지 않은 맑은 소리였다. 퉁소 소리는 여러 사람들이 놀라게 했으나 잠시 후엔 그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구양봉의 마음도 부드러워졌다.
'내가 홍칠공과 맞설게 뭔가? 설령 홍칠공이 천하 제일의 명호를 얻는다 해도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일시에 악념이 사라진 구양봉은 홍칠공을 보고 어줍게 웃기까지 했다. 그런가 하면 홍칠공의 마음도 비단결같이 고와졌다.
'이 홍씨 거렁뱅이는 반생을 떠돌아다니면서 악인들을 1백여 명도 넘게 죽였지. 하지만 이렇게 분주히 다니며 악인들을 없애서 무엇하겠다는 건가? 이 구양봉도 악인이긴 하지만 문무를 겸비한 천하의 인재인데 내가 죽이면 하늘의 뜻을 어기는 것이 아닐까?'
심지어 구천인마저 백감(百感)이 교차되면서 마음이 약해졌다. 어린 자신을 철장 방주 상관위가 제자로 받아들여 무공을 가르쳐주고 서역에서 사부님이 임종할 때 자기를 방주로 임명하던 일, 그리고 그것에 불복하는 사조나 사숙을 자기와 서독 구양봉이 합세하여 모조리 죽인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사조와 사숙을 죽이다니, 이건 반역이 아니던가? 그땐 내가 너무 잔인했어.'
구천인은 이렇게 뉘우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곽정과 황용은 서로를 보며 웃었다. 둘은 생사를 잊고 오직 자기들만의 애틋한 정을 되새기는 것이었다.
'용이가 죽으면 나도 죽을 거야. 구천인과 구양봉을 쳐죽이고 나도 용일 따라갈 테다.'
'곽정 오빠는 진정으로 날 사랑하는구나. 나를 구하려고 목숨을 걸고 싸우니 말이야. 몽고의 사막에 있는 화쟁 공주보다 나를 더 사랑하고 있는 게 확실해. 그러니 난 이제 죽어도 한이 없어. 살아 있을 땐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받고 죽은 다음엔 그의 기억에 영원히 남아 진정으로 눈물을 흘려 줄 사람이 있다면 그것만큼 행복한 일도 없을 거야.'
툰소 소리는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 흐느껴 우는 소리처럼 잔잔하고 처량하게 들리던 퉁소 소리는 가까이 다가오면서 어딘가 쓸쓸하고도 공허한 심정을 자아내게 했다.
'안 되겠다. 이러다간 황약사의 꾀임에 빠져 대사를 망치겠어!'
구양봉은 꿈에서 깨어나듯 정신을 가다듬으며 소리쳤다.
"황약사, 어서 나오시오! 그 따위 도깨비 수작은 그만두란 말이오!"
그러자 홍칠공도 휘파람을 길게 불더니 소리쳤다.
"황약사, 그 퉁소 소리에 이 거렁뱅이 눈물이 다 찔끔 나오는구려!"
잠시 후에 황약사가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사람들을 한번 둘러보고 나서 딸에게 눈길을 주었다.
"용아, 별일 없느냐?"
황용은 방긋 웃을 뿐 말은 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아버지 황약사와 비슷한 성격이어서 남에게 지기 싫어하고, 아무리 큰 고초를 당해도 우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구양봉이 그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황약사, 그동안 내가 여러 번 도와주었으니 오늘은 그 보답을 좀 해줘야겠소. 내가 당신 딸을 여기 붙잡아 놨으니 딸을 데려가려면 오른팔을 내놓고 가시오."
그러자 황약사는 홍칠공을 보며 웃었다.
"이보시오, 흥칠공. 당신이 보기엔 내가 오른팔을 뚝 떼어 서독에게 내줄 것 같소?"
홍칠공은 너털웃음을 웃었다.
"내 생각에도 오른팔을 잘라 버리는 게 한결 더 보기 좋을 것 같소. 그러면 지금처럼 걸음걸이가 기우뚱거리지 않을 테니 말이오. 키는 몇 척 안 되는데 소매는 한 장(丈)이나 되어 당신이 걸어갈 때 보면 괴물처럼 소매만 너풀거린단 말이오. 그러니 오른팔을 끊어 버리면 소매도 짧아질 것 아니오?"
"거렁뱅이 입에선 허튼소리밖에 안 나온다더니 그 말이 맞군. 내가 오른팔을 끊으면 외팔이가 되는데 그걸 감추기 위해서라도 소매를 한 장(丈) 반은 더 길게 해야 한다는 걸 모르겠소?"
둘은 그렇게 우스갯소리를 주고받으며 구양봉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구양봉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황약사, 홍칠공! 둘이 힘을 합쳐 나를 상대하겠다는 수작 같은데 그런 꿈은 꾸지도 마시오!"
구양봉은 고개를 홱 돌리더니 사장 끝으로 구천인을 건드렸다.
"이봐, 황약사가 팔을 끊지 않으면 그 계집애를 죽여 버리게."
구천인은 차디찬 웃음을 흘리더니 곽정에게 장을 밀었다. 그 바람에 곽정이 뒤로 날려 갔다.
"곽정 오빠!"
황용이 놀라 소리쳤다.
곽정이 날려 가는 것을 본 순간 황약사가 몸을 날려 떨어지는 곽정을 한 팔로 부철했다. 그로 인해 곽정은 조금도 다치지 않고 땅을 딛고 서게 되었다. 황약사는 곽정의 손을 잡고 노궁혈(勞宮穴)로 더운 기운을 주입시켜 주었다. 곽정은 가슴속이 시원하게 열리는 것을 느꼈다.
"황약사, 어서 오른팔을 끊으시오! 그렇지 않으면 내 장(掌)에 당신 딸 목숨이 끝장날 것이오!"
구천인이 고함쳤다.
"너하고 생사결단을 할테다!"
곽정이 소리치며 다시 구천인에게 덤벼드는 순간 황약사가 그를 잡아당기며 소리쳤다.
"구천인, 이리 나와라!"
구천인은 그만 어리둥절해졌다.
'아니, 내가 자기 딸을 잡고 있는데도 뭘 믿고 저렇게 큰소릴 치는 거지? 내가 앞에 있는데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구천인이 소리쳤다.
"이보시오, 당신 눈이 멀었소? 내가 여기 있는데 왜 고함은 치는 거요? 게다가……."
구천인은 이러다가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황약사의 등뒤에서 허리가 구부정한 사람이 머리를 숙이고 슬금슬금 걸어 나왔던 것이다. 그는 여전히 머리를 숙인 채 황약사와 마주섰다.
"구천인, 돌아서 저쪽으로 가라!"
황약사가 엄하게 명령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몸을 빙 돌리더니 황용 앞까지 걸어왔다. 그를 본 황용은 너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딱 벌렸다.
그녀는 한걸음 앞으로 나가 그 사람을 눈여겨보고는 고개를 돌려 뒤에 서 있는 구천인을 쳐다보았다. 앞에 서 있는 사람과 뒤에 서 있는 구천인의 얼굴이 똑같았다. 어떻게 된 일이길래 구천인이 갑자기 둘이나 나타났을까?
노독물 구양봉과 거렁뱅이 홍칠공까지도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이 황 약사라는 인간이 평생 괴상한 짓만 하고 다니더니 기괴한 술법을 써서 정말 살아 있는 구천인을 하나 더 만들어 낸 걸까?'
그들 둘의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황용의 머리에 손바닥을 대고 있던 구천인은 새로 나타난 구천인을 보자 그만 얼굴이 새까맣게 질리고 말았다.
"구천인, 너희 천장이니 천척이니 하는 형제들은 어쩔 셈이냐? 오불관언하겠느냐?"
구천인은 정신이 번쩍 들어 외쳤다.
"우리 누이동생은 어떻게 했소?"
"네 누이동생은 절정곡이라는 곳에 있다. 네가 내 딸을 놓아주지 않으면 너희 남매들을 모두 죽여 주마."
구천인은 눈앞에 나타난 사람을 보고 한숨을 지으며 말했다.
"형님, 다치지는 않았소?"
황용과 곽정은 그제야 새로 나타난 구천인이 가짜 구천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짜 구천인은 구천인의 형 구천장이었다. 황용과 곽정은 그 경황에도 웃음이 나와 서로를 보며 웃었다.
가짜 구천인인 구천장은 동생의 물음에 울상이 되어 대답했다.
"저거 황……황약사가…… 내 어깨에다 부골독침을 꽂아 놨어."
"아니, 이것 보시오. 황약사! 유감이 있으면 나한테 손을 쓸 일이지, 왜 우리 형님한테 이러는 거요? 우리 형님 같은 사람을 해치는 것도 무예인 줄 아시오?"
"잔말 말고 어서 우리 용이나 보내라. 그럼 나도 네 형에게 꽂은 부골독침을 뽑고 살려 주지."
황약사가 빙긋 웃었다.
구천인도 황약사가 한 번 뱉은 말을 거두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선뜻 말했다.
"좋소. 딸을 보내 줄 테니, 우리 형님 등에 꽂은 부골독침을 빼주시오. 그럼 우리는 모든 것이 끝나는 셈이오."
그가 황용을 놓아주려 하자 구양봉이 소리쳤다.
"이 사람아, 저 바보 같은 형이야 죽게 그냥 두면 어떤가? 오늘 살려 봐야 내일이면 황약사 손에 죽을 텐데 무슨 소용이냔 말이야?"
구양봉은 그렇게 소리치긴 했으나 몸은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자칫 잘못하다간 홍칠공에게 틈을 주어 공격을 받을까 봐 겁이 났던 것이다.
"구천인, 네 형은 죽이지 않겠다. 우리 용이를 놓아주면 말이다. 하지만 다음에 만나면 널 살려 두지 않을 것이다."
황약사의 말에 구천인은 얼굴이 파랗게 질린 채 이를 갈았다.
"제발 누이동생과 우리 형님을 놓아주시오, 당신 딸을 놓아줄 테니."
"내가 노리는 건 너다. 그들 둘은 다치지 않을 테니 염려 마라."
황약사가 여전히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구천인은 손바닥으로 황용의 혈도를 눌러 풀어 주었다. 곽정 옆으로 온 황용은 웃으면서 그의 손을 잡았다.
"구천장, 이리 와라."
황약사가 불렀다. 돌아온 구천장의 등에서 그가 독침 한 대를 뽑아냈다.
구천장이 울상이 되어 말했다.
"황약사, 당신은 날 속였소. 천하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지 않는지 두고 봅시다."
"천하사람이? 천하에 너 같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 밤낮 도깨비 수작으로 사람들 등이나 쳐먹고 다니는 놈!"
황약사가 껄껄 웃으니 다른 사람들도 따라 웃었다. 이제 구천장이 가짜 구천인 노릇을 하면서 사람들을 등쳐먹었다는 걸 다들 알게 된 것이다.
"형님, 이젠 가시오."
구천인이 볼멘소리를 했다. 비록 다정한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피를 나눈 형제였다.
"동생, 몸조심하게."
구천장은 시골 영감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천천히 걸어갔다. 그는 멀리 사라질 때까지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구천인, 네가 가는 곳마다 악행을 하고 다니니, 더 이상은 두고 볼 수가 없다. 내 오늘 노독물이 보는 데서 널 시원스럽게 죽여 주겠다."
황약사가 시원스럽게 말했다.
"황약사, 왕중양이 죽었으니 이제 당신이 무림의 지존이 되겠다구? 이거야 삶은 소 대가리가 앙천대소할 일이지!"
구양봉이 불쑥 끼여들어 한마디했다.
"그런 소리 마시오. 노독물 당신은 조만간 내 손에 죽고 말 테니 서두를 거 없소."
황약사가 구양봉을 돌아보며 빈정거렸다.
"글쎄, 한 20년 전이면 당신 손에 죽었을지도 모르지."
구양봉은 화가 나서 뇌까렸다. 사실 20년 전이 아니라 l0년 전이라도 구양봉은 황 약사한테 꼼짝못했을 것이다. 구잉봉은 진인(眞人)의 전수를 받아 합마공과 봉황력 이 두 가지의 절세기공을 배우고 나서야 일대 고수가 되었던 것이 아닌가? 그러니 구양봉의 말은 헛소리에 불과했다.
황약사는 구천인 앞으로 다가갔다.
"너 따위 무명지배(無名之輩)가 이 황약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겠다고? 뱁새가 황새를 쫓아가다간 가랑이가 찢어지는 법이다. 내 오늘 너와 상대해 줄 테니, 어디 네가 먼저 손을 써 봐라."
"잘난 체하지 마라, 황약사. 내가 산중에서 철장방을 수련한 지 이미 10여 년이나 된다. 비록 철장방을 미처 익지 못해 화산 무예시합엔 가지 못했다고 너 황약사가 우쭐거린다마는 어디 오늘 이 철장의 맛을 보아라!"
구천인은 기운을 모아 공격 자세를 취했다. '쌍귀고문(雙鬼叩門)'의 자세였다. 이 자세는 강호 각파 무공의 '개문읍도(開門揖盜)'나 '창송역객(蒼松逆客)' 같은 첫번째 무공 자세였다. 그러나 황약사는 별로 개의치 않고 딸을 돌아보며 말했다.
"용아, 내 저자를 죽여 네 분풀이를 해주마."
황용은 그저 방긋 웃었다.
황약사는 별다른 자세도 취하지 않고 그저 손을 척 내미니 낙영신검장법이 되었다. 그는 손을 가볍게 쓰며 구천인을 겨냥했다. 그러자 구천인은 두 손바닥으로 '역추구정(力推九鼎)' 술법을 쓰며 대들었다. 만약 상대방이 황약사가 아니라 곽정이었다면 이 장법에 벌써 숨이 막혔을 것이다. 그런데 황약사는 구천인의 장풍을 맞아 가볍게 떠오르며 두어 번 걸음을 떼는 듯하니 구천인의 장풍은 씻은 듯 사라져 버렸다. 황약사가 왼손을 등뒤로 가져가고 오른손을 부채질하
듯 좌우로 내치니 구천인은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구천인은 두 손바닥에 모든 힘을 다 넣어 쌍장(雙掌)으로 황약사와 맞섰으나 웬일인지 장을 내칠 적마다 황약사의 몸이 그 장풍 밖에 있는 것이었다. 구천인은 황약사가 팔괘기문(八卦奇門)을 쓰면서 일정일반(一正一反) 일생일사(一生一死)의 기묘한 보법을 쓰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구양봉이 보다못해 소리쳤다.
"황약사는 팔괘기문을 쓰고 정반양보(正反兩步)를 하는데 구천인 너는 여전히 정보(正步)만 겨냥하고 힘을 쓰니 어떻게 황약사를 맞히겠나?"
구천인은 그 말을 듣고 쌍장(雙掌)을 연거푸 내밀었다. 그 바람에 황약사가 맞을 뻔하기도 했으나 그를 넘어뜨리지는 못했다. 구천인은 짝짝 천 찢어지는 소리가 나길래 얼핏 보니 자기 소매들이 황약사의 장풍에 찢어져 나가고 맨살이 보이고 있었다.
"용아, 어떠냐? 구천인 꼴이 우습지?"
황약사가 웃는 얼굴로 딸을 돌아보았다.
"네, 재미있어요. 하지만 더 찢어 버리면 보기 흉할 테니 그만하세요."
황용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럼 이제 그만 찢을까? 그러지 말고 이 천을 조각 내서 더덕더덕 붙여 주면 보기 좋지 않을까?"
황약사의 말에 황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좀 낫겠네요. 그런데 그렇게 하실 수 있어요?"
"너도 날 깔보느냐?"
그는 구천인의 소매를 땅에서 주워 찢기 시작했다. 그는 이렇게 떨어진 천을 조각 내는 한편, 몸을 날리며 구천인에게 몇 장(掌) 갈기기도 했다. 약이 오른 구천인은 있는 힘껏 공격을 했으나 황약사의 머리칼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있었다.
'철장방 무공을 몇십 년 수련했다는 내가 황약사의 소매조차 건드리지 못하고 있으니 이런 수치가 어디 있는가?'
그러는데 이미 옷소매를 갈기갈기 다 찢은 황약사가 장(掌)을 내밀며 다가왔다. 다가와서는 장(掌)을 지(指)로 변화시켜, 구천인의 어깨를 겨냥하고는 연거푸 손가락을 튕겼다. 그 통에 구천인의 어깨에 구멍이 몇 개나 났다.
"용아, 내 이제 이 녀석 어깨에 천조각을 너덜너덜하게 붙여 줄테니 잘 보아라."
황약사는 손바닥을 내밀어 구천인을 공격했다. 구천인은 강한 장풍을 피하느라 몸을 이리저리 돌리다 보니 어느새 왼쪽 어깨에 천조각이 너덜너덜 달려 있었다.
구천인은 뒤로 물러서서 황약사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구천인, 왜 가만있나? 손을 써봐."
황약사가 이죽거렸다.
"아무리 손을 써 봤자 망신만 더 당하니 난 그만두겠소."
구천인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시무룩하니 말했다.
그러나 구천인의 기색이 아직도 항복하겠다는 표정은 아니었으므로 황약사가 말을 이었다.
"보아하니 마음속으론 아직도 항복한 것 같지 않은데 그러면 또 덤벼 봐."
그래도 구천인은 말없이 황약사를 바라보기만 하였다.
황약사는 고개를 돌려 구양봉에게 말했다.
"노독물, 당신은 내 제자를 죽이고, 그 죄를 전진칠자들에게 덮어씌우려 했소. 또 전진칠자 중 하나가 죽은 것을 내 탓으로 해놓았으니 내가 가만있을 수 없소. 당신이 죽든 내가 죽든 오늘 결판을 내야겠으니 오늘은 도망갈 생각 마시오. 둘 중에 누구라도 먼저 도망가면 화산 무예 시합엔 못 나갈 줄 아시오. 무슨 낯으로 거길 가겠소?"
그러자 구양봉도 정색을 하고 대꾸했다.
"좋소. 당신 생각이 그렇다면 나도 끝까지 상대하겠소. 차라리 잘됐군. 귀찮게 매일 만나 으르렁거릴 것 없이 한번에 끝내자구."
그러자 홍칠공이 타구봉으로 황약사와 구양봉을 가리키며 좋아했다.
"싸움 구경할 일 생겼다 이건가? 거 좋지. 좋은 일이야! 이 거렁뱅이는 싸움판이 벌어지면 신명이 난다니까. 황약사, 내가 먼저 노독물하고 한판 해볼 테니 당신은 좀 있다가 하시오."
"안 돼. 그건 안 되오. 내가 노독물을 직접 죽여야 한단 말이오. 잔말 말고 저리 비키시오. 나 혼자 상대하겠소."
구양봉은 코웃음을 치며 따져 보았다.
'내가 거렁뱅이 흥칠공과 먼저 붙으면 황약사가 득을 볼 거야. 황약사와 먼저 해보고 나서 홍칠공과 해보는 게 좋지. 홍칠이는 마음이 물러서 황약사처럼 악착같이 못하리까.'
이렇게 생각을 다진 구양봉은 대뜸 소리를 질렀다.
"황약사야, 네가 날 죽이겠다구? 그 따위 소리 말고 내 손에 네가 죽어 봐라!"
그는 황약사를 향해 두 손바닥을 힘껏 내밀었다. 대단히 세찬 장력이 황약사한테로 밀려 갔다.



제36장 노완동과 영고
"노독물이 감히 나를 기습하는군!"
황약사는 고개를 돌리며 구양봉의 두 눈을 겨냥하여 손가락을 탁 튕겼다. 구양봉이 끝까지 온 힘을 다해 장(掌)을 밀었으면 황약사가 적어도 부상을 입을 테지만 눈이 멀어 가면서까지 이런 공격을 들이댈 사람이 아니었다. 구양봉은 어이쿠 소리를 지르며 급히 뒤로 물러났다.
"노독물, 넌 언제나 고런 약은 수를 쓰려고 하니 문제야. 우리 셋이 모였는데도 그 따위 수작을 하면 되겠어? 실력을 겨루려면 좀 정정당당하게 하란 말이야. 남들이 보면 웃겠다!"
홍칠공이 구양봉을 나무랐다.
"웃으려면 웃으라지. 난 너도 무섭지 않아."
구양봉의 말에 홍칠공이 또 놀려댔다.
"그럼 나한테 덤벼 봐. 나하고 한 삼백 합만 싸워 볼래? 이 거렁뱅이 흥칠공의 타구봉이 센지 네 사장(蛇杖)인지 나발인지 그게 더 센지 한번 해 볼까?"
"해 볼테면 해 보라지. 내가 너 같은 걸 무서워할 줄 알아?"
구양봉은 사장을 아래위로 휘두르며 홍칠공을 공격했다. 눈 깜짝할 새에 그는 벌써 10여 개의 장법을 쓰고 있었다.
"이봐 노독물, 나하고 싸우다가 왜 홍칠공한테 그러는 거요?"
황약사가 구양봉을 나무랐다.
구양봉이 문득 생각해 보니, 이들 둘이 한편이 되어 자기를 놀리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들 두 사람 사이를 이간질하기로 했다.
"오라, 너희 둘이 지금 한편이 되어 번갈아 나를 공격하고 있구나. 이 구양봉과 한 사람씩 싸우면 질 것 같다 이거지? 황약사가 대들었다간 홍칠공이 맞받아치고……. 하긴 그래야 조금이라도 득을 보지."
구양봉의 말에 흥칠공과 황약사는 과연 서로 바라보며 다투기 시작했다.
"당신은 좀 가만있지 못하고 왜 이러는 거요? 저 노독물하고 난 원수란 말이오. 내 제자를 죽였지, 전진칠자 중 하나가 죽은 죄를 나한테 뒤집어씌웠지. 내 오늘 구양봉을 죽이지 않고는 이 원한을 풀 수가 없소. 그러니 잠자코 서서 이 황약사가 결판내는 걸 보기나 하시오."
"그게 무슨 말이오? 나도 노독물과 싸워 보려고 벌써 보름이나 찾아다니다가 오늘에야 겨우 만났는데 내가 왜 가만있어야 하오? 나도 노독물을 죽여야 속이 시원하겠소."
둘은 한동안 옥신각신했다.
황약사는 하는 수 없이 딸에게 눈짓을 했다.
'네가 홍칠공을 말려라. 네 말이면 들을 거야.'
그런데 황용은 그것을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황용으로선 아버지가 금방 구천인과 싸웠으니 홍칠공이 구양봉과 싸우도록 내버려 두는 게 훨신 나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황약사는 딸이 자기 눈짓을 못 본 척하니 발끈 화가 났다. 그래서 그 분풀이를 홍칠공한테 퍼붓기 시작했다.
"이 거렁뱅이야, 자네 잘못을 자네가 알아야지. 어쨌든 오늘 잘 만났다. 노독물과 싸우기 전에 우리 둘이 먼저 싸워 보자구."
'뭐? 내가 황 약사한테 잘못했다구? 별 엉뚱한 소리 다 듣네.'
홍칠공이 이상하게 생각하는데 황약사가 계속 떠들었다.
"용이는 내 딸이고 또 도화도 문하 사람인데 누가 당신더러 무공을 가르치래? 그리고 뭐? 우리 용이를 개방 방주를 시키겠다구? 도화도 도주의 딸이 거렁뱅이가 되어 누더기옷을 입고 앉아 있으란 말이야? 너희 거렁뱅이들이 하나하나 다가와 이 애의 몸에 침을 뱉고? 이게 어디 말이 되는 일이냔 말이야! 내 딸을 함부로 제자로 받아들인 죄만 가지고도 난 자넬 용서할 수 없어!"
홍칠공이 황용과 곽정을 제자로 받아들인 것은 영리한 황용이 말도 잘하고 일손도 빠른데다가 맛좋은 음식들을 만들어 홍칠공을 대접했기 때문이었다. 황용이 황약사의 딸이란 걸 알았지만 홍칠공은 개의치 않고 그녀가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으며 그녀에게는 소요유 권법을, 곽정에게는 십오장(十五掌)을 가르쳐 주었다. 황용은 홍칠공이 곽정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기를 바랄 뿐 자기는 무공에 별로 뜻이 없었다. 아버지의 무공도 배우기 싫어 여태까지 하나도 제대로 못
익혔으니 홍칠공의 무공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물론 홍칠공이 그녀에게 소요유 권법을 가르쳐 주고 타구봉법가지 물려주어 개방 방주를 시키려고 생각한 것은 어디까지나 호의였다. 그런데 오히려 황약사에게 힐문을 당하니 어처구니가 없어 입을 딱 벌렸다.
홍칠공은 성이 나서 황약사를 욕했다.
"이 황 요사(妖邪)야! 내가 네 딸을 제자로 받아들여 타구봉법을 물려주고 개방 방주를 시키려 한 게 어쨌단 말이냐? 너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고 사설이냐! 나하고 싸우고 싶으면 한번 붙어 보자. 어디 지난 16년 동안 누구의 무공이 더 늘었는지 직접 겨루어 보자."
그리고는 녹옥죽봉을 들고 황약사를 두어 번 내쳤다.
화가 나서 휘두르는 것이므로 그 술법은 매우 독한 술법이었다. 하나는 '봉타나견', 다른 하나는 '봉타낙수구(棒打落水狗)'였는데 이 두 가지 모두 극히 큰 위력을 갖고 있었다.
그것을 본 황용은 깜짝 놀랐다.
'사부님이 대단히 노하셨어. 그렇지 않으면 두 번 다 저렇게 막 내리치지는 않을텐데. 저 독한 술수를 아버지가 알면 아버지도 가만있지 않을걸.'
"야, 이 거렁뱅이야! 정말 미쳤냐? 정말 나하고 사생결단으로 싸울 셈이냐!"
황약사가 소리쳤다.
구양봉은 그 둘이 맞붙은 것이 좋아서 옆에 앉아 불난 집에 신나게 부채질을 했다.
"홍칠공 이 거렁뱅이야, 황 요사와 먼저 겨루어 봐. 그래서 이기면 나한테 덤비라구."
그러나 황약사는 홧김에 홍칠공한테 화풀이를 하느라 그런 억울한 말을 내뱉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홍칠공은 그 말에 정말 화가 나서 독한 술수를 쓰고 있었다. 그러니 황약사도 발끈해졌다.
황약사는 옥소를 꺼내더니 '단도도화(單桃桃花)' 술법으로 휘파람이 쌩쌩 일게 휘둘러댔다. 아주 큰 내력을 갖고 있는 술법이었다.
홍칠공은 이에 질세라 '구번봉하(狗飜棒下)' 술수를 써서 황약사의 옥소를 척척 막아냈다. 황약사의 옥소는 타구봉에 맞아 쨍쨍 하고 맑은 소리를 냈다. 황약사의 옥소도 홍칠공의 타구봉도 모두 옥으로 만든 병장기여서, 쇠로 만든 병장기들이 마주칠 때 나는 둔탁한 음향과는 달리 그 소리가 참 듣기 좋았다.
황약사는 마음이 급했다.
'어서 이 거렁뱅이 녀석을 제쳐놔야 노독물과 싸울텐데!'
"이 거렁뱅이 녀석아, 내 술법을 견뎌 봐라!"
황약사는 고함을 지르며 손가락에 낀 돌멩이를 튕겼다. 땅에 튕긴 것은 도로 튀어 홍칠공에게 날아갔다.
황약사가 튕긴 돌이 번개같이 날아왔다. 두 알은 흥칠공의 앞가슴으로, 두 알은 홍칠공의 등뒤로, 그리고 또 한 알은 홍칠공 머리 위의 백회대혈을 향하여 내려오고 있었다.
흥칠공은 한 손을 뒤로 가져가 등뒤로 날아오는 돌멩이 두 개를 턱 잡아 쥐었고, 다른 한 손으로는 앞으로 날아오는 돌멩이를 탁 쳤다. 그리고는 머리 위의 돌이 떨어지기 전에 황약사를 흘깃 보며 외쳤다.
"황약사, 또 무슨 재간이 더 있지?"
그가 녹옥죽봉을 머리 위로 들어 탁 내치니 떨어지던 돌멩이에 적중하여 돌멩이는 가루가 되고 말았다. 흥칠공은 이 세 번의 동작을 전광석화같이 눈 깜짝할 새에 해치웠다.
곁에서 구경하던 구양봉마저 부지중 탄성을 질렀다.
"잘한다!"
"이봐, 황약사. 네가 언제나 안하무인격으로 말을 하지만 본성은 그리 나쁘지 않다는 걸 나도 잘 안다. 그런데 세인들은 널 나쁜 놈이라고 욕을 하니, 알 수가 없단 말이야!"
홍칠공의 말에 황약사가 픽 웃었다.
"야, 이 거렁뱅이야. 남에 일에 간섭하지 마라. 자식도 하나 없는 녀석이 남의 시비엔 왜 그렇게 부지런히 달려들어 참견이냐?"
그러니 홍칠공도 크게 웃었다.
"황 요사야, 딸 하나 있다고 그 유세냐? 하지만 그 애는 내 제자다. 사위 하나 얻었다고 마음 든든한 모양인데 그 애 역시 내 제자다. 넌 그만한 자식이 있고 난 또 그만한 제자가 있으니 뭐가 다르냐? 네가 도화도에 이름깨나 있는 문하인들을 두고 있다면 나도 개방에 부하들 천지다. 우리 개방이 모두 달려들면 하늘에서 내려온 천병천장(天兵天將)이라도 대적할 수가 있으니 네가 나보다 센 것이 무엇이냐?"
홍칠공의 말에 황약사가 "핫하하"하고 크게 웃었다.
"너희들 개방이 몇십만이 된다 한들 그 오합지졸로 무슨 큰일을 해낸다더냐?"
그러자 홍칠이 정색을 하며 대꾸했다.
"우리 개방이 큰일을 못하는 건 내가 못난 탓이지만 너희 도화도는 왜 그 모양이냐? 너한테 벌을 받은 제자들은 강호에서 좋은 일을 하고, 너한테 벌을 받지 않은 제자들은 악독한 짓만 하니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네 제자 흑풍쌍살이 구음백골조와 최심장을 수련하느라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아느냐? 그런데다 무덤의 해골까지 꺼내 그 악독한 무공을 익혔으니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억울하게 두 번 죽음을 당했겠느냐? 네가 제자들을 도화도에서 쫓아내
는 바람에 이런 끔찍한 일이 생겼다."
황약사는 홍칠공의 말을 듣고 큰 가책을 느꼈다. 갑자기 지나간 일들이 떠올라 만감이 교차되는 것이었다. 그의 여섯 제자 중에 가장 일찍 죽은 무천풍이 생각났다. 도화도에 있었으면 자기의 천기황지술(擅岐黃之術)로 능히 살렸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가장 어린 제자인 풍묵풍도 떠올랐다. 그 애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곡영풍은 제자들 중에 가장 재능이 많은 제자였다. 그는 도화도에서 쫓겨난 후에도 황약사에게 주려고 황궁을 드나들며 보물과 명화들을 훔쳐내
다 결국은 대내시위들 손에 죽고 말았다. 도화도에 있을 때 그들 모두 황약사를 극진히 공경했고 무공도 부지런히 배웠다. 그들을 내쫓지 않았다면 이런 참혹한 봉변을 당했겠는가? 매초풍과 진현풍의 일도 그렇다. 자신이 매초풍에게 좀더 따뜻하게 대해 주었으면 그들이 《구음진경》을 훔쳐 달아나진 않았을 것이다. 이런 생각들을 하니 황약사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했다.
'결국은 다 내 잘못이 아닌가? 모두 내가 잘못하여 이렇게 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제까지 황약사는 자기 반성이란 걸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오일삼성오신(吾日三省吾身)"이란 성인의 말을 황약사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 왔었다. 사내 대장부가 무슨 일이든 호기 있게 해나가면 그만이지, 매일 세 번 네 번 앞뒤로 재고 따지다니, 그게 어디 말이나 되는 일인가? 아형이 살았을 때도 아형을 사랑하기는 했지만 그녀의 말을 귀담아들은 적도 없었고, 자기 잘못을 뉘우쳐 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의협심이 가장 많고 심성이 후덕한 북개 흥칠공의 말을 듣
고 자기 잘못을 뉘우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다시 곡영풍의 딸을 생각했다. 곡영풍의 처가 섬에서 쫓겨난 일로 놀라 우울증에 걸려 그런 바보를 낳은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 황약사의 죄업은 더 크지 않은가?
이런 생각을 하는 황약사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 남들이 괴팍하고 사악하다고 손가락질해도 이제는 할말이 없었다. 홍칠공의 꾸지람에 그의 오만한 기개가 완전히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그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며 홍칠공에게 말했다.
"홍칠이, 자네 말이 옳아. 이젠 나도 살기 싫네. 전에도 난 아형을 따라 죽으려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네. 자네가 내 딸을 사랑해 주니 난 마음놓고 가겠네."
그리고는 손바닥을 들어 자기 머리를 내리치려 했다.
곽정과 황용이 소리를 지르며 황약사를 말리려고 달려들었다.
"아버지!"
"선배님!"
그러나 그들보다 먼저 홍칠공이 녹옥죽봉으로 황약사의 팔을 내리쳤다. 황약사와 마주서 있던 흥칠공은 황약사의 얼굴색이 삽시에 이상해지면서 무어라고 중얼거리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또 무슨 기괴한 술법을 쓰려고 이러나 싶었는데, 뜻밖에도 왼손을 들어 스스로 자기 머리의 백회대혈을 내리치려 하는지라 급히 녹옥죽봉을 들어 황약사의 손을 내쳤던 것이다.
그러자 황약사는 이렇게 말했다.
"나 죽는 건 상관 말고 우리 용이나 맡아 주게."
그는 오른손으로 옥소를 내둘러 연거푸 홍칠이를 내질렀다. 홍칠이는 하는 수 없이 녹옥죽봉으로 그것을 막아야 했다.
구양봉은 그것을 보고 쾌재를 불렀다. 황약사가 죽으면 저절로 적수가 하나 적어지는 셈이었다.
세 사람이 말릴 틈도 없이 황약사가 손바닥으로 자기 머리를 내리치려는 순간, 어디선가 부웅 하는 소리가 가볍게 들리더니 황약사의 손이 허공에 멎은 채 꼼짝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황약사가 왜 저러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이 황 요사야! 또 무슨 도깨비 수작으로 날 홀리려는 거야? 왜 손을 꼼짝도 못해?"
홍칠공이 수상쩍어 소리쳤다.
"가만, 어디 좀 보자. 도대체 무슨 수작을 꾸미느라고 이러지?"
구양봉도 이렇게 떠들면서 황약사의 뒤로 돌아갔다. 그는 두 장(丈)쯤 떨어져 서서 황약사를 살펴보았다. 구양봉은 아무리 봐도 무슨 수작을 부리는 것 같다면서 쭈그리고 앉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개구리 울음 소리를 내며 합마공을 쓰기 시작했다. 그제야 홍칠공과 황용, 곽정은 구양봉의 계산을 간파하고 놀란 소리를 지르며 황약사를 구하려 뛰어들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노독물 구양봉은 번개 같은 솜씨로 쌍장(雙掌)을 내밀었다. 그의 장풍에 닿기만 하면 황약사는 죽지 않으면 중상을 입을 게 뻔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순간 구양봉 역시 두 손을 반자 가량 앞으로 내밀고 더 이상 내밀지 못했다. 얼굴에 띠었던 득의양양하던 기색도 사라지고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우거지상이 되어 있었다.
"구양봉은 또 왜 저렇게 가만있지?"
홍칠공이 수상쩍다는 듯이 말하는데도 구양봉은 얼굴이 흙빛이 된 채 아무 말도 못했다.
그때 문득 맑고 가벼운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나무아미타불! 구양 선생께서 일심으로 선을 행하신다면 부처님도 기뻐서 웃으실 겁니다."
사람들은 그의 말소리만 듣고도 공력이 아주 깊은 사람임을 알고 은근히 놀랐다.
홍칠공은 녹옥죽봉을 땅에 탁 꽂더니 기뻐서 소리쳤다.
"어, 이거 기쁜 일일세. 남제가 왔구만. 난 노독물이 왜 저 꼬라지를 하고 있나 했더니, 노독물한테 범이 왔으니 그럴 수밖에."
이때 구양봉도 어색한 웃음을 지으면서 합마공을 걷고 일어섰다.
구양봉의 합마공은 왕중양의 선천공을 제일 두려워했다. 왕중양은 임종 전에 이 선천공을 남제에게 가르쳐 주어 남제로 하여금 선천공으로 일양지법을 써서 구양봉의 합마공을 깨뜨리도록 당부했었다. 그리고 그해 왕중양은 죽은 척하고 관 안에 누워 있다가 《구음진경》을 훔치러 온 구양봉에게 덮쳐 들어 선천공에 상단식(上段式)인 일양지법으로 구양봉의 합마공을 깨뜨려 버렸다. 그로 인하여 구양봉은 5, 6년이나 무공을 회복하지 못하다가 이제 겨우 회복하여 중원
에 다시 나왔던 것이다. 그러니 남제를 보고 떨지 않을 수 없었다.
남제는 여러 사람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었다. 황용을 보고는 웃는 얼굴로 "나무아미타불"만 부르고 다른 말은 하지 않았고, 홍칠공과 구천인은 낯익은 사이라 읍을 서로 나누고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남제는 구양봉을 보고 말했다.
"구양 선생, 무공을 겨루고 싶으면 화산 무예 시합 때 겨루어 봐도 될 터인데 왜 벌써 일을 벌이는 거요?"
흥칠공이 웃으며 끼여들었다.
"글쎄 말이외다. 이 거렁뱅이는 하루 종일 술이나 먹으면서 세월을 보냈으면 좋겠는데, 이 두 사람이 저렇게 야단을 하니 조용히 살 수가 있어야지요."
남제는 홍칠공의 말에 빙그레 웃고 다시 구양봉에게 물었다.
"구양 선생, 내 말이 어떻소?"
"난 생각이 좀 다르오. 내가 황약사와 홍칠공을 없애 버리면 화산 무예 시합 땐 나와 당신만 남을 테니 제일인자의 자리가 내 차지라고 생각하오."
"흥 방주와 황 도주를 없애고 구양 선생이 천하 제일이 되었다 칩시다. 그래서 그게 어떻단 말이오?"
그 말에 구양봉은 말문이 막혔다. 남제의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과연 그렇기도 했다. 천하 제일이 되면 어떻단 말인가? 그러나 또 달리 생각해 보면 사람에게는 목적이 있어야 사는 재미가 있는 법이다. 구양봉이 천하 제일의 고수가 되는 일을 목표로 삼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슨 재미로 살겠는가?
구양봉이 잠시 자기 생각에 잠겨 있는데 남제가 입을 열었다.
"예전에 한 노인이 서천에 가는 도중 어느 절에 이르러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으려고 했소. 부처님의 말씀이, 금은이 있으면 내놓아야 가르쳐 주겠다고 하셨소. 얼마를 달라는가고 물으니 부처님께서 절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길을 금으로 쭉 깔면 된다고 하셨소. 노인은 평생 모은 금을 다 갖다 그 길에 깔았는데, 그래서 그 유명한 대찰인 돈금사를 이루었다 하오. 결국 그 노인은 일생 동안 그 한 가지 일을 한 셈이오. 그래, 구양 선생은 일생 동안 무슨 일을 하셨소?
'나도 그동안 세인을 놀라게 할 만한 큰일을 해놓은 것이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천하 무쌍의 노독물이란 호를 괜히 갖고 있는 건 아니지 않겠는가?'
구양봉은 자기가 한 일들을 하나하나 되새겨 보았다. 그러나 강호에 발을 들여놓고 구사독옹(九邪毒翁)의 문하가 된 뒤 지금까지 어느 하나 남에게 자랑할 만한 일이 없었다. 대 사막에서 황용과 싸우고 몽고 대군을 수없이 죽였을 뿐만 아니라 숱한 개방의 사람들도 죽였고 요나라 도왕 완안홍렬을 도와 송나라를 치며 강호의 수많은 유지인사(有志人士)들을 죽였는가 하면, 영지상인이나 팽연호와 야합하여 강호의 수많은 호걸들을 죽이다가 결국에는 자기가 도리어 해를
입어 쫓기게 되었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자랑할 만한 일이라곤 없었다. 구양봉은 남제와 북개를 번갈아 보았다.
'너희들은 뭐 자랑할 게 있느냐? 수하에 몇십만의 거렁뱅이들을 거느리고 그 잘난 일 몇 가지 해놓았다고 우쭐대는 거냐? 그리고 남제도 황제니까 한두 가지 좋은 일을 해놓은 것쯤이야 식은죽 먹기겠지. 황약사는 또 무슨 일을 해놓았나? 나와 마찬가지지.'
구양봉은 코웃음을 쳤다.
"글쎄 난 세상을 놀랄 만한 일을 해놓은 건 없소. 하지만 그건 황약사도 나와 마찬가지 아니오?"
황용은 속으로 안타까워 죽을 지경이었다. 아버지가 지금 구양봉의 말을 반박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도화도의 명성이 땅에 떨어져 강호에서 얼굴을 들고 다니기가 창피해질 게 뻔했던 것이다.
"노독물, 당신은 우리 아버지가 한 일은 평생 가도 못 해낼 거예요."
"뭐라고? 네 아버지가 무슨 큰일을 했다는 거냐? 네 아버지의 제자 매초풍이 시골의 나무꾼들을 잡아다가 그 대가리로 무공을 익힌 게 그렇게 큰일이냐?"
구양봉이 비웃었으나 황용이 입을 삐죽 내밀며 쏘아붙였다.
"흥, 그깟 걸 갖고 뭘 그래요? 사람을 파리 죽이듯 하는 당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아무리 많이 봐줘도 당신과 피장파장이라고나 할까?"
구양봉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이 조그마한 계집애가 감히 나를 매초풍에게 비교하다니.'
구양봉은 화가 나서 황용의 말을 소리쳐 잘랐다.
"너 따위 코흘리개들하고는 말하고 싶지 않다! 난 네 아버지와 말하는 거야."
"우리 아버지가 하신 일은 아마 남제, 북개 두 분도 못하실 거예요."
황용의 말에 남제와 북개는 얼굴에 놀란 빛을 띠었다. 도대체 황약사가 무슨 일을 했기에 우리 둘도 못하는 일을 했다는 걸까?
"근 20년 전에 강절 남로에 대력 허패라는 악마가 있었어요. 무림의 누구도 대적 못하던 그 사람을 기억하세요?"
"나도 알지. 그런데 언제부턴가 보이지 않던데. 그렇지 않아도 꼭 만나고 싶었는데……."
구양봉이 호기심 어린 투로 대답했다.
"그리고 또 그 무렵 강호에서 이름을 날리던 원앙도(鴛鴦刀) 호처(胡處), 향매(香梅) 허십경(許十 ), 대각팍(大脚婆) 염로(閻 ), 십육비기(十六飛綺) 등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아세요?"
사람들은 황용의 말에 놀람을 금치 못했다. 그 옛날 강호에서 제멋대로 살인과 강도를 자행하던 무림의 효웅들이 근년에 그림자도 없이 사라져 버렸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용아, 시원하게 말해라. 그래, 그것들이 지금 어디 있니? 네 아버지가 모두 죽여 버렸니?"
홍칠공의 말에 황용은 빙긋 웃었다.
"사부님, 이 일에 대해선 우리 아버지를 따를 자가 없어요. 사부님은 강호의 악한들을 깨끗하게 죽여 버리지만 우리 아버지는 그렇지 않아요. 우리 아버지 방법은 사부님보다 훨씬 고명하답니다."
그리고는 황약사에게 눈을 깜빡거렸다.
딸이 도화도의 비밀을 말하려 하는 것을 눈치챈 황약사가 소리쳤다.
"용아, 허튼소리 마라!"
그러나 황용은 주저없이 말했다.
"사람들은 우리 아버지가 사악하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더 사악해요. 내가 금방 말한 그 사람들은 지금 우리 도화도에 있어요."
그러자 구양봉이 꽥 소리쳤다.
"이 황 요사야, 이제 알았다! 네가 그 놈들을 도화도에 데리고 있다가 나중에 중원으로 쳐들어와 패왕이 되겠다는 거지?"
'정말 황약사가 그들을 주원, 아니 화산으로 데리고 온다면 화산 무예 시합 때 남제·북개, 나를 모두 죽일 수도 있다. 그러면 천하 무림의 지존은 동사 황약사가 차지하게 되지 않겠는가?'
이것이 구양봉의 짐작이었다.
구양봉의 속내를 꿰뚫어 본 황용이 쌀쌀맞게 말했다.
"우리 아버지가 당신처럼 무림의 제일인자가 되려고 남의 등뒤를 몰래 기습하는 졸장부인 줄 아세요?"
황용의 말에 급소를 찔린 노독물은 대꾸를 못했다.
"우리 아버지는 그 사람들을 섬에 데려다가 일을 시켜요. 나무와 풀을 심게 하고 고기를 잡고 사냥도 하게 하죠. 그래서 지금은 누구도 살인할 생각을 안 하고 있어요. 생각해 보세요. 그 사람들이 그냥 중원에 있었더라면 그동안 악한 일들을 얼마나 했겠어요? 그러니 우리 아버지가 착한 일을 얼마나 많이 한 셈이에요? 이 한가지 일만 가지고도 남제, 북개, 서독 세 분이 할 수 없는 좋은 일을 한 것 아니에요?"
황용의 말에 구양봉은 또 코웃음을 쳤다.
"황약사가 그런 놈들을 붙잡아 두었다는 건 믿을 수 있지만, 놈들을 길들여 나무 심고 사냥하고 고기를 잡게 했다는 건 믿을 수가 없는데……."
북개와 남제 역시 서로 쳐다보면서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황약사가 이런 놈들을 도화도로 잡아갔다면 데리고 가는 길에 필시 본 사람들이 있었을 텐데 어떻게 하여 그걸 아는 사람이 여태껏 한 사람도 없는 걸까?
"황 형은 도대체 그것들을 어떻게 섬으로 잡아갔소?"
북개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그 녀석들 등에 부골독침을 하나씩 박아 놓았지요. 아 독침은 내 독문술법(獨門術法)이 없이는 빼지 못하는데, 한 달 안에 도화도에 와서 그 침을 빼지 못하면 죽어 버리니 제 발로 도화도에 찾아올 수밖에요."
황약사는 사심없이 설명해 주었다.
"나무아미타불! 창생의 대복(大福)을 위해서 그랬으니 부처님도 나무라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황 도주께서는 어떻게 그것들을 개악종선(改惡從善)시켰습니까? 매일 불경을 읽혔습니까?"
남제가 한마디 물었다.
"그런 악인들한테는 목탁이 깨지도록 두드리며 염불을 시켜도 그야말로 소 귀에 경 읽기라 만무 소용이오. 그래서 나는 그들을 벙어리와 귀머거리로 만들어 버렸소."
그 말에 사람들은 그만 아연해지고 말았다.
흥칠공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황약사가 한 일은 겉으로 보면 인자한 일을 한 것 같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더 잔인한 일을 했군. 어떻게 그토록 심한 병신으로 만든단 말인가? 황약사는 매일 그런 병신들을 눈앞에 두고 살겠지만 다른 사람은 그렇게 할 수가 없지.'
하지만 남제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사람들을 병신으로 만들어 시달리게 하는 건 정도(正道)가 아냐. 어떻게든 권도하여 개악종선을 시켜야 하는 건데…….'
남제는 곧 머리를 흔들었다. 자신 역시 그런 놈들을 권도하여 착하게 만들 방법이 없을 것 같아서였다. 그런 놈들은 황약사의 말처럼 남들의 권도를 들을 인간들이 아니었다.
구양봉 역시 나름대로 경탄하고 있었다.
그는 구사독옹의 문하인이 된 이후부터 자기가 천하에 제일 큰 악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황약사의 말을 들어 보니 그가 자기보다 더 큰 악인이었다.
'그 많은 악인들을 잡아다가 굴복시키고 노복을 만들었다니, 그 위풍이 얼마나 당당한가?'
구양봉은 서역을 독차지하고 이쁜 계집들을 누각에 잔뜩 모아 두고 있지만, 그 계집들을 편안히 잘살게 만들어 놨지 황약사처럼 잔인하게 대하진 못했다.
'내가 왜 황약사 같은 궁리를 해내지 못했을까? 그러니 가장 악한 인간은 구양봉이 아니라 황약사다. 허, 이거 부끄러워 살 수가 없구나.'
구양봉은 생각할수록 후회스럽고 부끄럽기도 한 한편 화가 나서 자기도 모르게 왈칵 피를 토하고 말았다.
'구양봉이 웬일인가? 지금까지 멀쩡하더니 갑자기 핼쓱해지며 피까지 토하다니?'
홍칠공과 남제는 구양봉이 괴상하여 서로 쳐다보았다. 그러면서 홍칠공 혼자 생각했다.
'남제가 아무도 모르게 손을 썼나? 그 일양진지 뭔지로 구양봉의 합마공을 또 깨뜨려 버린 모양이야.'
남제 역시 생각했다.
'아까 난 삼분의 역도를 써서 구양봉을 제지시켰을 뿐인데 왜 저럴까? 내가 오기 전에 북개와 동사하고 싸우더니 그때 이미 어디 요진통에 어혈이 진 모양이지?'
오로지 황용만이 노독물이 화가 치밀어 피를 토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삼국시대 때 동오(東吳)의 주유(周瑜)도 홧김에 피를 토하고 죽었다 하지 않는가? 죽으면서"이 주유를 세상에 내놓을 바엔 왜 제갈량까지 내놓았소?" 하고 하늘을 원망했다고 하던데, 이번엔 노독물이 홧김에 피를 토하는구나. 구양봉도 지금 "이 구양봉을 세상에 내놓을 바엔 왜 황 약사까지 내놓았소?" 하고 하늘을 원망하고 있을지 모르지.'
황용은 살살 눈웃음을 치며 구양봉에게 다가갔다.
"선배님, 사실 우리 아버지 방법도 별로 대단한 건 아니에요. 물론 잔인하긴 하지만 말이에요. 그래서 모두들 이질 동독(東毒)이라고까지 하는데……."
구양봉은 황용을 바라보기만 할 뿐 말을 하지 못했다.
"선배님도 우리 아버지처럼 하실 수 있어요. 그런데 그러려면 좀 다른 방법으로……."
곁에 서 있던 곽정은, 황용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어리숙하게 물었다.
"다른 방법이라니?"
황용은 곽정에게 미소를 살짝 띄운 다음 구양봉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선배님, 우리 아버지는 부골독침을 꽂아 주었으니까 선배님은 단장환(斷腸丸) 같은 걸 먹이세요. 우리 아버지는 그것들의 귀를 다 멀게 만들었지만 아저씬 귀만 멀게 만들든가, 혀를 반쪽만 잘라 내든가, 그렇지 않으면 한쪽 눈만 멀게 하든가 코를 베어 버리든가……. 여하튼 우리 아버지와는 좀 다르게 하세요. 만약 누가 물으면 황약사에게 배운 것이란 말은 절대 하지 말고 선배님이 혼자 생각해 낸 거라고 우기세요. 알겠어요?"
그러자 구양봉은 눈을 부릅뜨며 발을 굴렀다.
"너 내 복장을 지르는 거냐, 지금?"
그리고는 온몸의 힘을 다하여 황용을 겨냥하여 쌍장을 내밀었다. 그런데 황용은 그가 그럴 줄 알고 구양봉이 어깨를 솟구치며 자세를 취하는 순간 벌써 멀리 달아났다.
"서독은 독(毒)이 동사보다 못하고 무공은 북개보다 못하며 남제의 일양지를 만나면 복통이 터져 울기만 하지!"
황용은 먼 데서 이렇게 구양봉을 놀려 주고는 깔깔깔 웃으며 어디론가 달아났다.
"황약사야! 내 기필코 네 딸을 죽이고야 말테다!"
구양봉은 발을 구르며 소리치더니 황용을 붙잡으러 쫓아갔다.
황약사는 세상 만사가 다 귀찮아져 살아갈 마음이 싹 없어졌었는데 황용의 말을 듣고 귀가 솔깃해졌다. 악인들을 도화도에 데려간 것이 일대장거(一大壯擧)라는 황용의 말에 스스로 자문해 보았다.
'정말 딸의 말대로 내가 좋은 일을 한 것이 아닌가? 물론 그들을 도화도로 잡아갈 때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잡아간 것은 아니다. 도화도에 일손이 부족해 일꾼으로 잡아간 것이며, 잡아갈 바엔 악인들을 잡아다 병신을 만들어도 거리낌이 없었다. 그런데 그것이 결과적으로는 중원에다 좋은 일을 한 것이 되다니……. 어쨌든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은 아니지만 하다 보니 한 가지 일을 한 것이 사실이 되었군.'
그때 북개가 황약사에게 읍하며 말했다.
"황 형, 이 거렁뱅이 홍칠이도 탄복을 했소. 황 형이 한 일로 천하 무림의 피비린내를 적지 않게 없애 놓았소. 화산 무예 시합에 가서 이 홍칠이가 당신에게 져도 달갑게 여길 것이오. 그런데 내 제자는 아무래도 개방 방주를 시켜야겠으니 내가 뒤쫓아 가봐야겠소. 노독물에게 다치면 큰일이오."
그러더니 홍칠공은 몸을 솟구치며 날아가듯 사라져 버렸다.
남제도 황약사에게 읍하며 말했다.
"나무아미타불! 소승도 이젠 알았소이다. 불심으로 말하면 황시주가 나보다 더 불조와 가까울 수도 있지요."
그리고는 어디론가 떠나가 버렸다.
황약사가 주위를 돌아다보니 구천인만 멍하니 서 있을 뿐 곽정도 어느새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마 황용을 뒤쫓아간 모양이었다. 황약사는 마음이 놓였다. 곽정이 비록 어리긴 하지만 무공이 일일천리(一日千里)로 진전되고, 거기에 홍칠공까지 쫓아갔으니 별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여겼다.
황약사가 문득 구천인을 바라보았다. 구천인은 눈 한 번 깜박거리지 않고 황약사를 쳐다보고 있었다. 황약사가 자기에게도 부골독침을 꽂아 도화도로 잡아가서 병신을 만들어 부려먹을까 봐 겁이 났던 것이다. 구천인은 얼굴이 점점 핼쓱해지면서 겁에 질린 표정으로 황약사를 노려보았다.
황약사는 구천인을 내버려둔 채 자리를 떴다. 황용이 간 방향으로 쫓아갔지만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아무리 찾아도 황용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는 딸을 찾느라 하루 종일 헤매다가 밤이 되어 어느 허름한 절간 앞에 이르렀다. 절간 층계에 작은 여인의 발자국 같은 것이 보이기에 혹시 딸아이가 와 있지 않나 해서 안에 대고 소리를 쳤다.
"안에 누가 있소?"
두어 번 불렀더니 안에서 대답하는 소리가 났다.
"웬 소리를 그렇게 지르는 거요? 산 사람은 없고 미망인이 하나 있어요."
대답하는 소리로 봐서 남편을 잃고 홀로 남은 과부가 분명했다. 이런 과부들은 자기를 미망인이라고 자칭했다. 하늘을 보니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아 황약사는 말했다.
"먼길을 걷는 과객인데 절간 낭하에서 하룻밤 자고 가도 되겠소?"
"자든 서 있든 나한테 물어 보지 말아요! 귀찮아 죽겠어요!"
여인이 쏘아붙였으나 황약사는 개의치 않고 절간 낭하로 들어와 섰다.
잠시 후에 과연 축축한 바람이 불어오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황약사는 낭하에서 비가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운공을 했다.
황약사가 낭하에 들어오자 절 안에 있던 여인은 촛불을 후욱 불어 꺼 버렸다. 그 뒤로 절간이 잠잠해지자 황약사가 운공을 시작하여 물아양망(物我兩忘)의 경지로 들어가는데 갑자기 여인이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려 왔다.
"이 벼락맞을 황약사야, 이 죽일 놈아! 너 때문에 내 머리가 다 하얗게 셌다. 아이고! 이러다 내가 제풀에 죽지……."
여인은 넋두리를 하며 서럽게 울었다.
황약사가 수련하는 도화도 독문내공은 다른 파와 달리 연공을 하면서도 분심(分心)을 할 수 있어 태산으로부터 개미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하나하나 가늠할 수가 있었다. 그러니 여인의 넋두리를 못 들을 리 없었다.
'나 때문에 머리가 다 셌다니……?'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어 황약사는 놀랍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했다.
'도대체 어느 여인이 나와 잊을 수 없는 만리장성을 쌓았길래 이다지도 나를 못 잊을까?'
황약사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만한 여인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는 절간 안의 여인에게 물었다.
"한마디 물어 봅시다. 방금 황약사란 사람을 욕한 것 같은데 그 사람이 어쨌다고 그러시오?"
그러자 절간 안의 여인은 발칵 화를 내며 말했다.
"황약사 말만 나오면 난 이가 갈려요. 그러니 그 사람 이름은 입에 올리지도 말아요. 또 입에 올리면 내가 당신 몸뚱이를 벌집처럼 쑤셔 놓을 줄 알아요!"
황약사는 어이가 없어서 픽 웃고 말았다.
'내가 여인들과 놀아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건 벌써 20여 년 전의 일인데, 도대체 누가 지금까지도 나를 기억하고 이렇듯 절치부심할까?'
황약사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소름 끼치는 여인의 웃음 소리가 들렸다.
"한걸음 더 내디디면 귀문관(鬼門關)인 줄 아시오. 응? 또 나와? 또 나오면 염왕전(閻王殿)인데, 또 거기서? 또 나오면……."
여인이 위협을 하는 사이에 벌써 그 여인 앞에 이른 황약사가 웃으며 말했다.
"더 나가면 당신과 부딪치겠는데……. 그래, 이젠 날 어떻게 할 셈이오?"
두 사람은 가까이 마주보고 있었지만 절간 안이 캄캄해서 황약사는 여인의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오로지 두 사람의 숨결 소리만 똑똑히 들려 왔다.
그런데 여인이 소곤거리듯 말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군데 날 무서워하지 않소? 내가 두렵지 않아도 귀신은 두렵겠지?"
"귀신이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 좀 합시다."
황약사의 말에 여인은 코웃음을 치더니 소리쳤다.
"자, 보시오!"
그 순간 여인의 그림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절간 안에 귀신들만 가득 보였다. 불빛이 번뜩이더니 염라부의 청면판관(靑面判官)이 나타나 무어라고 꽥꽥 소리질렀다. 또 불빛이 번뜩하자 손에 약 캐는 작살을 든 도깨비들이 나와 울부짖듯 고함을 쳤다. 그 다음 불빛이 번뜩하니 톱 쓰는 소리가 썩썩 나면서 도깨비 둘이 사람 하나를 쓱싹쓱싹 톱질을 해대는데, 그는 피투성이가 된 채 몸부림치면서 죽는다고 아우성이었다. 황약사 뒤에서도 무수한 귀신들이 소리지르
며 발광을 하는 듯했다. 몸서리쳐지는 광경이었다.
그러나 황약사는 태연히 앉아서 한동안 그 소리를 듣다가 문득 소리쳤다.
"이 절간에서 당신 혼자 도깨비 장난을 하는 이유가 뭐요?"
"귀신이 왜 나밖에 없어요? 당신 앞뒤에 모두 귀신인데 당신 머리도 만지고 다리도 잡아당기고……."
황약사가 다시 한 번 웃으면서 대꾸했다.
"허튼소리 마시오. 당신이 누군지 내가 모르는 줄 아시오? 신산자 영고 아니오? 지금 당신이 쓰고 있는 술법은 정반팔괘(正反八掛)이고 당신은 내 눈앞의 건위(乾位)에 서 있소."
그러자 귀신이 떠드는 소리가 삽시에 사라져 버리고 떨리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은 대체 누구시오?"
황약사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여태까지 날 그렇게 욕하고도 날 모르겠단 말이오?"
"어머나, 난 몰라!"
여인은 새된 소리를 질렀다.
불을 켜고 보니 여인은 두 손에 산주(算籌)를 쥐고 있었다. 산주란 좁게 쪼갠 참대 조각, 즉 죽침에다가 짧은 줄들을 불로 지져 놓은 것인데 여인은 이 산주로 술수를 쓰고 있었다. 도화도에 가서 노완동을 구하고 싶었으나 황약사가 도화도에 설치한 방비물들을 무사히 넘을 수가 없어, 매일 이 술수를 연구하느라 무진 애를 쓰다 보니 그만 머리까지 다 반백이 되어 버렸다.
"우린 서로 아는 사이도 아니고, 내가 당신을 해친 적도 없는데 나를 그렇게 욕하는 까닭이 무엇이오?"
황약사가 물었다.
그랬더니 여인은 나이와 어울리지 않게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이더니 떠듬떠듬 말했다.
"화……황 도주님……, 한 가지 물어 봅시다. 노……노완동…… 그 사람……."
주춤주춤 말을 하는 그 자태는 영낙없이 사랑에 빠진 어린 소녀였다. 그제야 황약사는 사태를 눈치챘다.
'신산자 영고가 노완동의 연인이었구나! 이 엉큼한 영감 같으니! 사내는 계집을 얻지 말아야 한다, 계집을 얻으면 연공을 못한다. 그래서 자기는 절대 계집을 안 얻는다고 잘도 떠벌리더니 여기 이렇게 여자를 숨겨 놓다니……. 어쨌든 악착 같은 정을 가지고 있는 여인이군. 이 여인의 절개가 반석보다 더 굳은 건 사실이니 장난 좀 쳐볼까?'
이렇게 작정한 황약사는 갑자기 슬픈 기색을 지으며 말하였다.
"노완동 주백통 말이오? 노완동은 글쎄……, 글쎄……."
총명한 영고는 황약사가 말을 못 잇자 그만 가슴이 철렁하여 황급히 물었다.
"황 도주님, 우리 그이가 어떻게 되었나요?"
그녀의 목소리와 몸이 다 부들부들 떨렸다.
"우리 도화도에서 편안히 잘 있었는데, 글쎄 중병에 걸려 턱 드러눕더니…… 그만……."
황약사는 비통한 기색으로 말끝을 맺지 못하고 한숨까지 지었다.
영고는 갑자기 황약사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좋다, 좋아!"
황약사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애인이 죽었다는데 좋다니?'
그 순간 영고의 두 손이 번쩍하더니 손에 쥐었던 산주 3, 40개가 황약사의 대혈을 향하여 살같이 날아왔다.
"황약사, 나도 그이가 이미 죽은 걸 알고 있었다. 너도 죽어라!"
황약사는 날아오는 산주들을 소매를 휘둘러 턱턱 막아내며 큰소리로 말했다.
"하늘엔 불측풍운(不測風雲)이 있고 사람에겐 제 명이 따로 있는 법인데 노완동이 죽은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너무 그러지 말고 젯상이나 차리시오."
"흥, 우리 그이를 도화도에 잡아 가두지 않았으면 그렇게 되었겠소? 제 밥 먹고 제 발로 돌아다니며 언제나 웃고 사는 사람인데, 그이는 황약사 당신이 죽인 거야!"
영고는 당장이라도 황약사와 사생결단을 낼 기세였다.
둘이 한창 싸우는데 갑자기 절간으로 웬 사람이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황약사는 썩 좋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노완동이 죽었다는 말이 세상에 잘못 전해지면 큰 화가 생길 수도 있었다. 황약사는 얼른 손가락으로 영고의 아혈을 눌러 찍소리도 못하게 만들고는 그녀를 안고 신상(神像) 위에 숨었다.
쿵쿵쿵 급히 뛰어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절간 안으로 들어왔다. 절간 안에 촛불 몇 개가 켜져 있는 걸 본 그는 기뻐서 하하 웃더니 혼자 떠들기 시작했다.
"사람 없는 절간에 불은 켜 있고 귀신 없는 절간엔 사람도 없네……. 하하하, 재미있군!"
그러더니 불공을 드리는 탁자에 앉아 품에서 술 한 병과 고기 보따리를 꺼내더니 맛있게 먹다가 문득 신상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사형이 나더러 불교를 믿지 말고 도교를 믿으라 했는데, 이 신상이 도교의 신상인가 불교의 신상인가?"
그러더니 신상을 보고 소리쳤다.
"이보시오, 당신은 도교 신상이오? 불교 신상이오? 불교 신상이면 절 받을 생각 마시고 도교 신상이면 내 절 한 번 드리리다."
그러다가 그는 자기 머리를 툭 쳤다.
"맞았어! 도교 신상이면 머리칼이 있을 거고 불교 신상이면 중머리겠지."
그리고는 오른손을 들어 신상의 머리 위에 있던 모자를 치워 버렸다. 신상의 머리를 보니 말총 같은 머리칼이 몇 개 있으므로 그는 투덜거렸다.
"까까머리였으면 허리 굽히는 고생을 안 할 텐데……."
그는 무릎을 끓고 넙죽넙죽 절을 하면서 또 중얼거렸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미워하는 사람은 황약삽니다. 이 사람이 날 도화도란 곳에다 16년이나 가두어 놓았으니 이 사람을 미워하지 않으면 대체 누구를 미워하겠습니까?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신상 뒤에 있는 황약사는 우스워 죽을 지경이었고, 영고는 기뻐서 죽을 지경이었다. 영고는 장난스런 눈으로 황약사를 흘끔 바라보았다.
'저이가 저렇게 살아 있는데 죽었다고 나한테 거짓말했군.'
그리고는 신상을 향해 절하는 노완동을 보면서 생각했다.
'백통 씨, 이젠 말하겠지요.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영고라고…….'
그런데 노완동의 말은 영고의 생각과 전혀 달랐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황약삽니다. 왜 그러냐 하면 황약사가 날 16년이나 가두어 놓은 덕택에 난 72수공명권이란 걸 수련하여 장악했답니다. 72수공명권은 황약사의 낙영신검이나 탄지신공 따위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답니다. 언젠가 한 번은 황약사와 자웅을 겨룰 때가 있을 겁니다만……."
황약사는 노완동을 또 한 번 놀려 줄 방법을 궁리해 보았다.
그런데 그가 또 중얼거렸다.
"나도 이제까지 양심에 꺼리는 일을 딱 한 번 한 적이 있습니다. 그건 한 여인한테 한 일인데, 천지신명께서 보우하셔서 그 여인이 날 못 찾게 해 주십시오. 나하고 멀리멀리 떨어져 있도록 해 주십시오. 어쩌다 마주쳐도 모르고 슬쩍 지나쳐 버리게 말입니다. 제발 그 여인이 날 싹 잊어버리게 해 주십시오. 다른 남자한테 반해서 그 남자한테 정을 쏟게 해 주십시오……."
노완동은 지금 자기 속마음을 황약사와 영고한테 다 들추어보여 주고 있다는 걸 전혀 모르고 계속 중얼거렸다.
이만하면 자기 마음을 솔직히 다 고백했다고 생각한 노완동은 이제 편안히 앉아 술을 먹을 셈이었다. 그런데 엉덩이를 바닥에 내려놓자마자 갑자기 훅훅 바람 소리가 일더니 방정맞게 촛불들이 꺼져 버렸다.
"신명도 무정하군. 촛불은 왜 끄는 거야?"
그러면서 술병을 더듬으니 술병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고기도 없어졌다. 정말이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그는 품에서 부시를 꺼내 탁탁 쳐서 촛불에 불을 붙였다. 고개를 돌리던 주백통은 하마터면 뒤로 벌렁 나자빠질 뻔했다. 한 여인이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나하고는 사돈에 팔촌도 안 걸린 사람같은데 왜 내 술과 고기를 훔쳐먹는단 말이오?"
노완동이 소리쳤다.
그런데 밖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보시오, 노완동. 눈 똑바로 뜨고 잘 보는 게 좋을 거요. 당신과 정분이 심상치 않은 여인인 듯싶으니까."
그리고는 껄껄껄 웃었다. 웃음 소리는 점점 멀어지는 듯하더니 폭풍우 속으로 사라졌는지 잠잠해졌다.
노완동은 눈앞의 여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누구지? 우리 사형의 제자 손불이 같지도 않은데. 손불이는 해골 바가지를 가득 그린 도포를 입고 다니거든……."
이윽고 여인이 몸을 돌리며 이쪽을 보자 그는 그만 기겁하여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백통 씨……."
영고는 그 말 한마디를 내뱉고는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그러자 그는 어쩔 줄 모르고 서서 중얼거렸다.
"이거…… 기……기절은 왜…… 왜 하나? 기절할 것까진 없잖아?"
노완동은 가까이 다가가 영고를 내려다보았다. 눈을 감고 이를 사려문 영고는 숨결까지 끊어진 듯했다. 노완동은 무릎을 꿇고 영고의 코에 귀를 대보며 중얼거렸다.
"정말 죽었나?"
그리고는 머리를 들려는데 갑자기 영고의 두 팔이 노완동의 목을 꽉 껴안았다.
"또 어디로 도망가려구요? 20년이나 날 기다리게 했으면 됐잖아요?"
― 제2부 끝 ―




추천 (0) 선물 (0명)
IP: ♡.221.♡.93
23,498 개의 글이 있습니다.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조회
나단비
2024-03-07
0
435
나단비
2024-03-07
0
406
나단비
2024-03-07
0
438
나단비
2024-03-06
1
493
뉘썬2뉘썬2
2024-03-05
1
472
뉘썬2뉘썬2
2024-03-04
1
511
나단비
2024-03-04
1
488
나단비
2024-03-03
1
442
나단비
2024-03-03
0
94
나단비
2024-03-02
0
70
나단비
2024-03-02
0
59
나단비
2024-03-02
0
86
나단비
2024-03-02
0
60
나단비
2024-03-01
0
88
나단비
2024-02-29
1
469
나단비
2024-02-29
0
90
나단비
2024-02-29
0
87
나단비
2024-02-29
0
126
나단비
2024-02-27
1
89
나단비
2024-02-27
0
60
나단비
2024-02-27
0
64
나단비
2024-02-27
0
65
나단비
2024-02-27
0
66
나단비
2024-02-26
0
72
나단비
2024-02-26
0
98
나단비
2024-02-25
0
88
나단비
2024-02-25
0
101
나단비
2024-02-24
1
143
나단비
2024-02-16
0
111
나단비
2024-02-16
0
123
모이자 모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