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 - 북개 홍칠공 1

3학년2반 | 2022.02.20 07:12:06 댓글: 0 조회: 363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9981
[화산논검3부] -
북개 홍칠공편
제1장 홍안루에서
예로부터 번화한 임안(臨案)은 남송(南宋)의 서울이 되자 더욱 부유하고 호화로운 향락의 도회지로 변했다. 서호(西湖)같이 구경하기 좋은 명소가 많은데다가 먹고 마시는 데도 많았다. 그중 서호가의 취선루(醉仙樓), 경가(京街)의 홍안루(鴻雁樓), 운가(雲街)의 악사거(樂士居)가 가장 유명했다.
어느 날 새벽이었다. 해가 뜨려면 아직 멀어 인적 하나 없는 조용한 시각에 홍안루의 문이 삐걱 열리더니 심부름꾼 하나가 잠이 덜 깬 눈을 비비며 걸어 나왔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덧문을 떼려던 그의 두 눈이 갑자기 휘둥그래졌다.
문앞 좌우 양편에 난데없는 거렁뱅이들이 서넛씩 일렬로 늘어앉아 있는 게 아닌가? 그들은 옆에 지팡이 하나씩을 놓고 머리를 숙인 채 말없이 앉아 있었는데 하나같이 등에는 일여덟 개씩의 자루들을 지고 있었다. 모두들 나이깨나 먹은 것을 보면 개방 중에도 항렬이 높은 축에 속하는 듯싶었다. 그들은 홍안루 심부름꾼이 문을 열고 나온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었다.
한편 거렁뱅이들로부터 좀 떨어진 곳에는 첫눈에도 부호들임을 알 수 있는 여섯 사람이 오만하게 걸상에 앉아 있었다. 뒤에는 그들이 타고 온 준마나 교자가 있고 옆에는 그들이 데리고 온 노복들이 공손히 서 있었다.
심부름꾼은 이게 웬 돈 덩어리들인가 싶어 얼른 다가서며 허리를 숙였다.
"아이고 반갑습니다. 이렇게 신새벽부터 우리 홍안루를 찾아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어서들 안으로 드시지요."
"오늘 우리 형제 여섯이 너희네 주루를 하루 사서 놀아야겠는데 가능하겠느냐?"
몸집이 실한 노인 하나가 빙글빙글 웃으며 물었다.
심부름꾼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잠시 대답을 못하였다. 예쁜 기생을 하루 사서 독차지한다든가, 술상을 한 상 몽땅 산다든가 하는 것은 봤지만 주루 전체를 사서 하루 놀겠다는 사람은 난생 처음이었던 것이다. 이 부호들이 돈이 너무 많아 정신이 돌았나?
심부름꾼이 대답이 없자 뚱뚱한 노인이 이죽거렸다.
"왜 대답이 없지? 이 좋은 돈벌이가 싫어서 그러느냐?"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런 것이 아니오라……, 어서 안으로 들기부터 하시지요. 쇤네가 주인님을 모셔 오겠습니다. 그 문제는 주인님과 의논하시지요."
심부름꾼은 헤헤 웃으며 허리를 굽신거렸다.
부호들이 가슴을 내밀고 누각에 올라 좌정을 하니 심부름꾼이 주루 주인을 불러 왔다. 주인은 부호들에게 읍을 하며 공손히 말했다.
"이렇게 오셔서 저희 누각을 빛내 주시니 고맙습니다. 누각이 협소하여 죄송합니다만……."
"우리 형제들이 자네와 의논할 일이 있어 찾아왔는데, 자네네 홍안루는 하루에 얼마나 버는가?"
뚱뚱한 노인이 물었다.
주루 주인은 내심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잘사는 부호들이란 남아 얼마나 버는가를 묻기 꺼려 하는 법인데 이 부호들은 좀 이상한데?'
하지만 돈벌이를 하려면 이런 부호들을 비위 상하게 해서는 안되었다. 주인은 얼굴에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홍안루가 명성은 좀 있지만 하루에 은자 백 냥도 못 벌지요. 다른 세 집에 비하면 턱도 없지요."
"하루에 은자 백 냥씩 번다면 벌이가 괜찮은 셈이 아닌가? 일년에 못 벌어도 몇만 냥은 벌겠구먼?"
뚱뚱한 노인이 빙그레 웃었다.
"아이고, 몇만 냥인 뭡니까? 투자한 돈과 그때그때 들어가는 비용이 있잖습니까? 그걸 제하면 남는 것도 없습지요. 제일 많이 버는 날이나 겨우 백 냥 벌까말까 하답니다."
주루 주인은 급히 덧붙여 설명했다.
"그러지 말고 솔직히 말해 보게. 정말 은자 백 냥밖에 못 번단 말인가?"
뚱뚱한 노인이 따지듯 물었다.
'이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꿍꿍이속으로 이러지?'
주점 주인은 아무래도 불길한 예감이 들어 되도록 수입을 적게 말하는 것이 낭패가 없겠다고 판단했다. 그래야 혹시라도 술 먹고 술값 안 내고 가는 일도 없을 것이고, 그럴 리는 없겠지만 설령 뭔가를 갈취하러 왔다면 빼앗겨도 적게 빼앗기게 될 것이다. 주인은 마음을 다져 먹고 자기의 하루 수입을 5분의 1이나 낮추어 말했다.
"정말인뎁쇼. 정말로 하루에 은자 백 냥도 벌까말까래두요."
"그래? 그럼 좋다. 동생, 그 돈 좀 이리 내게."
뚱뚱한 노인이 옆에 있는 다른 노인에게 웃으며 말했다. 옆에 있던 노인이 품에서 삼천 냥짜리 어음 하나를 꺼냈다.
"우리 형제들이 자네 홍안루를 30일 동안 몽땅 사겠네."
뚱뚱한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예? 아니, 삼천 냥으로 어떻게 30일 동안을 삽니까?"
"우리한테 밥상도 차릴 필요 없고 술상도 챙길 필요가 없이 그저 30일 동안 문만 닫고 있으면 되네. 그러니 이 삼천 냥은 공돈을 버는 셈이지, 밑천 하나 안 들이고 말야."
뚱뚱한 노인이 빈정대듯 웃었다.
주루 주인은 그만 속으로 자신을 꾸짖었다.
'바보 같은 자식, 하루에 백 냥밖에 못 번다고 할 게 뭔가? 한 천 냥은 번다고 해 뒀으면 좋았을걸……."
"나으리, 그건 좀 곤란합니다. 30일이나 문을 닫으면 홍안루는 망하고 맙니다요. 제발 사정 좀 봐 주십쇼. 죄송합니다만 그 삼천 냥 은자는 못 받겠습니다."
주루 주인은 애써 웃음을 지으며 사정하듯 말했다.
"이 사람아, 홍안루가 뭘 하는 곳인가? 손님을 받아 접대하는 곳이 아닌가? 내가 돈 내고 사겠다는데도 안 된단 말인가?"
"글쎄 술상을 챙겨 오라면 얼마든지 챙겨 올리겠습니다만…… 얼마든지 대접해 올린다니깐요. 하지만 우리 누각을 사시겠다는 말씀은……."
"그럼 좋네. 자네 생각이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
뚱뚱한 노인은 즉시 휘파람을 불어 형제들을 불렀다.
그러자 누각 아래에서 시끌벅적 떠드는 소리가 들리더니 숱한 사람들이 주루로 밀려 들어왔다.
주루 주인은 그만 눈앞이 캄캄해졌다. 어디서 몰려들었는지 누각 아래엔 몇 백이 넘는 거렁뱅이들이 득실거렸다. 외팔이가 있는가 하면 절름발이도 있고 하나같이 너덜너덜한 넝마 같은 차림의 사람들로 주루 안은 온통 혼잡을 이루었다.
뚱뚱한 노인이 다시 한 번 휘파람을 세게 불었다.
"형제 여러분, 떠들지 마시오. 이 홍안루는 보통 부귀한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 아니오. 누각에 올라왔으면 조용히 앉아 먹고 싶은 거나 청해다 먹으시오."
그제야 주루 주인은 마음이 좀 놓였다. 옷이 더러운 거렁뱅이들이지만 밥이나 먹으면 가 버릴 테니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얼른 심부름꾼에게 분부했다.
"어서 이 나으리들께 주안상을 차려 올리도록 하여라."
그 말에 심부름꾼은 냉큼 뛰어가서 요리 안내판을 들고 왔다.
"아니, 그런 건 뭐하러 가져오나?"
뚱뚱한 노인이 물었다.
"이걸 보시고 요리를 시키시지요."
주루 주인이 말했다. 그러자 심부름꾼이 뚱뚱한 노인에게 물었다.
"나으리들께선 무슨 요리를 잡수시렵니까?"
뚱뚱한 노인은 자기 동료들을 둘러보더니 엉뚱한 소리를 했다.
"난 차 한 잔만 주게."
주루 주인은 내심 흠칫하였으나 잠자코 있었다.
심부름꾼이 옆의 다른 노인에게 묻자 그 역시 대답이 같았다. 또 다른 여섯 노인에게 물어도 모두 한결같이 차 한 잔만을 청했다.
그러자 누각 아래 거렁뱅이들도 입을 모아 떠들었다.
"주인님, 뭐 그렇게 바삐 도실 건 없습니다. 우리들한테 그저 차 한 잔씩만 돌리면 되니깐요. 우리 형제들은 그저 차 한 잔이면 밤늦게까지도 앉아 있을 수 있거든요."
주루 주인은 애가 탔다. 이 거렁뱅이들과는 전에 상종도 없고 원수진 일도 없는데 무엇 때문에 와서 이런 야료를 부리는 것인지 통 알 수가 없었다.
주루 주인은 허리를 굽신거리며 애원하듯 말했다.
"나으리들, 저의 홍안루를 꾸중할 일은 꾸중하시고 분부할 일이 있으면 마음대로 분부하십시오. 그저 저희들이 잘못한 게 있다면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 주시기만 바랄 뿐이옵니다."
"우리 형제들 몇몇과 저 누각 아래 사람들은 모두 홍안루의 명성을 듣고 이렇게 찾아왔으니 대접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네."
뚱뚱한 노인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말했다.
홍안루는 임안에서도 워낙 이름난 곳이라 언제든지 손님이 그칠 새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야단이 났다. 손님들은 밖에서 홍안루 안을 들여다보고는 낯을 찌푸리고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다른 데로 가 버리곤 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누각 위아래를 차지하고 앉아 시끌벅적 떠들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남루한 옷에 얼굴엔 때가 얼룩진 거렁뱅이들이 아닌가. 머리는 봉두난발을 하고 발에는 닳아 해져 발가락들이 다 나오는 더러운 짚신들을 신고 있는 이 거렁뱅이들
을 옆에 두고 누군들 술 마실 생각이 나겠는가?
거렁뱅이들은 반나절이 지나도록 누구 하나 자리를 뜰 생각을 하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비단옷을 입은 노인들도 말없이 앉아만 있었다.
주인은 자기가 지금 도깨비한테 홀린 게 아닌가 싶었다.
그는 속이 뒤틀릴 대로 뒤틀려 당장 쫓아내 버리고도 싶었지만 가까스로 눌러 참았다. 만일 놈들이 앙심을 품고 달려들어 주루에 불이라도 지르는 날이면 그야말로 큰일이었던 것이다. 한편 그는 평소 같으면 갈가마귀 들끓듯 할 거렁뱅이들이 오늘따라 잠잠히 앉아만 있는 게 아무래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나으리들, 저희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르겠사오나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그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주루 주인은 또 비단옷을 입은 노인들에게 사정했다.
비단옷을 입은 노인들은 여태까지 찻잔을 들고 있었으나 차는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그저 잔을 들었다가는 놓고 들었다가는 놓고 할 뿐이었다. 차는 이미 식은 지 오래였고, 그들은 벙어리처럼 침묵만 지켰다.
주루 주인은 애가 닳았다.
"나으리, 무슨 분부가 계시면 말씀만 하십시오. 무슨 일이든 분부대로 받들어 모실 테니깐요. 그저 저희를 용서해 주시기만 바랄 뿐이옵니다."
"뭐 용서할 것도 없고 분부할 것도 없네. 우린 이렇게 앉아만 있으면 족하네. 어째 싫은가?"
뚱뚱한 노인이 덤덤한 기색으로 말했다.
"아……아닙니다. 싫을 것까지야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됐네. 우린 꼭 서른 날은 이렇게 앉아들 있어야겠으니 그때 가서 영업을 다시 시작하게. 그래도 되겠지?"
"아이고, 그러면 저더러 이대로 망해 먹으란 말씀입니까?"
주루 주인은 우는 소리를 하였다.
노인이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대꾸했다.
"아니, 자넨 무슨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하는가? 허, 허무한 소리로군. 그러다가 정말 망하면 어쩌려구?"
주루 주인은 어처구니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여러 형제들, 우리 좀 참고 기다려 보세. 좋은 수가 보이네. 이 주인님이 홍안루가 망할 것이라는데 그렇게 되면 우리가 이 홍안루에다 비단가게를 낼 수도 있잖아? 거기다가 기생집까지 꾸미면 비단도 팔고 웃음도 팔고 장사 한번 멋들어지겠는데?"
노인은 약이라도 올리듯 연신 빙글대며 말했다.
유가 성을 가진 노인이 좋다고 맞장구를 쳤다.
"이거 대운이 트이는가 부다. 홍안루에서 간판을 떼겠다면 내가 대신 수고해 줄까?"
그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당장 몸을 솟구치더니 창 밖으로 씽 날아 나가 누각 문앞에 이르렀다. 문 위에는 '흥안루'라고 쓴 편액이 있었는데 노인은 거기에 박은 대못 서너 개를 손으로 쭉쭉 뽑아 편액을 메어 들고는 다시 누각 위로 돌아왔다. 그는 편액을 탁자 위에 소리나게 내려놓았다.
"주인장, 어서 이 편액을 고쳐 달게. 기생집을 꾸리려면 '야야향(夜夜香)'이라 하면 좋겠고, 비단가게를 꾸리려면 '화서상(和瑞祥)'이 좋겠군. 어쨌든 이 편액은 없애 버리라구."
노인은 편액을 치켜 들어 당장이라도 박살낼 기세였다.
"아이고, 그러지 맙쇼. 그 편액을 제발 부수지 맙쇼. 주선(酒仙) 이백(李白)이 친필로 쓴 것인데, 우리 밥통이 그 흥안루라는 편액에 달렸습니다요. 그 편액으로 이름이 나서 저희가 밥을 벌어 먹고 사는데 그걸 없애면 우린 당장 밥줄이 끊깁니다. 그 편액은 저희 생명이나 다름없지요. 제발 이렇게 빌겠습니다."
주루 주인은 황급히 꿇어앉아 고개를 연신 조아리며 애원하다가 마침내는 눈물까지 펑펑 쏟았다.
그러나 노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빈정대듯 말했다.
"내 보기엔 홍안루 편액을 달고도 장사가 시원칠 않은데 그래? 이따위로 장사할 거면 홍안루라는 편액을 때려부수고 장사를 그만 두는 게 좋겠다는데 자넨 뭘 믿고 그렇게 고집을 피우는 건가?"
"어르신들 제발 이러시지 마십쇼. 무슨 마땅찮은 일이 있으시면 말씀하시면 될 게 아닙니까요? 왜 자꾸 이러십니까? 무슨 일로 이러시는지는 모르겠사오나 말씀만 하십시오. 잘못된 게 있으면 당장이라도 시정하겠습니다."
"뭐 잘못을 책망하자고 이러는 건 아니고 사실 청이 있어 왔네. 들어줄 수 있겠나?"
"무슨 일이든 말씀만 하십시오."
주인이 얼른 대답했다.
뚱뚱한 노인이 곁에 앉은 사람에게 말했다.
"내려가서 나 장로를 불러오게."
그 사람은 내려가더니 곧 네 사람을 데리고 올라왔다. 온몸이 흙투성이인 그들은 거만한 표정으로 목에 잔뜩 힘을 주고 올라와서는 부호 차림의 노인들 맞은편에 앉았다.
"범 장로님, 주루 주인이 대답을 하였습니까?"
얼굴에 검은 기미가 있는 노인이 물었다.
주루 주인은 바짝 긴장하여 그들의 눈치만 살폈다.
잠시 말이 없던 범 장로가 빙그레 웃으며 주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무슨 분부든 따르겠다고 했지? 그렇다면 우리가 은자 삼천 냥을 줄 터이니 홍안루에서 부리는 일꾼들을 몽땅 내보내게, 어떤가?"
그 말에 주루 주인은 다시금 울상이 되었다.
"아이고, 그건 소인의 목숨을 내놓으라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홍안루가 지금에 이른 것은 순전히 제가 부리는 일꾼들의 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요. 주방장이나 술청의 심부름꾼, 술 빚는 일꾼……, 이 모두가 특별한 재주꾼들이어서 내보내면 다시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재주 있는 자들을 다시 못 구해 들이면 이 홍안루는 망하고 맙니다요."
주루 주인은 다른 일은 몰라도 이 일만은 절대로 시키는 대로 할 수 없다고 마음을 다졌다. 주방장 소씨 거렁뱅이만 해도 그렇다. 소씨 거렁뱅이는 그가 아주 많은 돈을 주고 데려온 인물이다. 그의 요리 솜씨는 누구도 따를 자가 없었는데 무엇보다 '강산이개(江山易改)'라는 요리로 명성이 높았다. 이 요리를 한 접시 만들어 내놓으면 우선 그 색깔, 그 향기, 그 모양부터가 기가 막힌 데다가 한 번 입맛을 보면 어느 누구도 탁자를 치며 절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닭고기와 물고기를 한데 섞어 볶고 지지는데도 닭고기는 닭고기 맛이 그대로 살아 있고 물고기는 물고기대로 제 맛을 잃지 않으니 세상 누가 이렇듯 여러 가지를 한데 볶아도 서로의 맛이 혼합되지 않도록 할 수가 있겠는가?
홍안루가 처음부터 이렇듯 명성을 날리고 손님이 많았던 것은 아니었다. 뭐니뭐니 해도 소씨 거렁뱅이의 공이 컸다. 소씨 거렁뱅이만 없으면 이 홍안루는 썰렁한 여느 요릿집들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주루 주인은 안타깝게 말했다.
"나으리들, 저희 흥안루와 원수진 일도 없으신데 왜 이러십니까? 저희 홍안루에 무슨 불만이 있으시다면 그 연유라도 말씀해 주십시오.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으니 이런 답답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홍안루야 뭐 좋지. 난 그저 자네 집에서 일하는 일꾼들이 눈에 거슬려서 그러네. 그것들을 내보내는 게 아무래도 좋을 거야."
범 장로가 싱글거리며 말했다.
"정 그러시다면 일꾼들을 몽땅 내보낼 까닭이야 없지 않습니까? 그러지 마시고 누구를 내보낼지 찍어 말씀하십시오. 그러면 저도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그럼 좋네. 이봐, 자넨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지 알지?"
범 장로가 물었다.
"아다 뿐입니까? 여기 계신 분들은 개방 어른들이시고, 하나같이 고명하고 훌륭한 분들입지요."
"그만하면 눈이 바로 박혔군 그래. 그럼 어서 가서 임자네 주방장을 불러 오게. 어떤 사람이 와서 그를 내쫓아 버리라고 분부하더라고 하면서."
나 장로가 엄하게 말했다. 주루 주인은 그제야 어느 정도 감이 잡혔다.
'그렇구나. 이 사람들이 소씨 거렁뱅이와 무슨 척진 일이 있어 그를 찾아온 거로구나. 그런데 소씨 거렁뱅이가 무엇을 어쨌기에 이 사람들한테 이렇듯 미움을 사게 된 것일까? 날이면 날마다 음식 기름에 절어 나다닐 새도 없이 주방에만 처박혀 지내는 사람이 언제 무슨 일로 이 사람들과 원수를 졌을까?'
주인은 도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캐물을 경황도 아니었다. 주루 주인은 급히 심부름꾼을 불러 당장 소씨 거렁뱅이를 데려오도록 했다.
잠시 후 급히 층계를 오르는 소리가 나더니 소씨 거렁뱅이는 오지 않고 심부름꾼만 다시 돌아왔다.
"나으리, 주방장님께서는 자기는 그럴 겨를이 없으니 이 어른신들더러……."
심부름꾼은 어물어물 말을 잇지 못하고 눈치를 살폈다.
"그래 우리더러 어쩌라는 거냐?"
나 장로가 눈을 부릅떴다.
심부름꾼은 겁에 질린 눈으로 나 장로를 바라보았다.
"어물거리지 말고 제대로 말해 봐. 그 소씨가 도대체 뭐라고 했지?"
이번엔 범 장로가 웃는 낯으로 어르듯 말했다. 이에 기운을 얻은 심부름꾼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주방장님께선, 어르신들더러 어서 물러가기나 하라고……."
그 말에 주루 주인은 그만 털썩 주저앉아 버릴 뻔했다. 그는 간이 콩알만해져서 절망적인 심정으로 범 장로 일행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은 심부름꾼의 말을 듣고는 별로 노하는 기색도 없이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은근히 소씨 거렁뱅이를 두려워하는 눈치이기도 했다.
잠시 후 범 장로가 웃으며 주인을 향해 말했다.
"우리가 좀 너무한 것도 같은데 그리 언짢게 생각할 건 없네. 아무래도 주인인 자네가 직접 가서 소씨를 데려오는 게 좋을 것 같군. 소씨만 데려오면 그 다음은 관계치 말게. 우리도 홍안루의 다른 일은 관계치 않을 테니. 어떤가?"
주루 주인은 결과야 어찌 되든 간에 소비 거렁뱅이를 데려오고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많은 거렁뱅이들이 욱실욱실 몰려들어 홍안루를 벌써 반나절이나 점하고 있는 형편이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소씨 거렁뱅이를 데리고 와서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끄고 볼 일이었다.
급히 주방에 들어선 주루 주인은 그만 속이 뒤집혔다. 일이 없어진 주방 사람들이 하나같이 속 편하게 모여앉아 한담을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제 주루가 아니라고 해도 한솥밥 먹는 처지에 어떻게 저렇듯 남의 일처럼 희희낙락 노닥거리고 앉아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게다가 소씨 거렁뱅이의 태도는 더욱 비위를 긁었다. 그는 주방 복판에 있는 낡은 태사의(太師椅)에 몸을 기대고 앉아 주인이 들어오거나 말거나 조롱박을 들고 술만 마셔 대고 있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괴상한 인간이었다. 이 홍안루에 올 때 그는 다른 물건은 가져오지 않고 오직 그 낡디낡은 태사의 하나만 가지고 왔다. 이 황제가 앉는 용의(龍椅) 같은 태사의는 담향목(檀香木)으로 만든 것인데 어찌나 낡았는지 등받이 위에 새겨진 독수리의 눈은 없어졌고 날갯죽지는 떨어져 나간 꼴이었다. 또한 팔걸이도 오른쪽이 없어져 왼손만 걸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이따위 거저 줘도 가지지 않을 헌 의자를 가져다 놓고는 매일 거기에 궁둥이를 깔고 앉아 거
의 붙어 살다시피 했다. 주루 주인은 오늘따라 그러한 그의 모습이 여간 눈꼴사나워 보이지 않았다. 주인은 속이 뒤틀려 한마디 해 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계제가 아니라는 생각에 꾹 눌러 참았다.
"여보게, 여보게."
그는 애써 친절하게 소씨 거렁뱅이를 불렀다.
"왜 그러시우? 어느 놈이 배가 고프다고 조릅디까?"
소씨 거렁뱅이가 심드렁하게 물었다.
주인은 비굴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누각에 손님 열이 올라와 있고 아래층에는 거렁뱅이들이 한 무리 와 있는데 모두들 글쎄 차 한잔씩 시켜 놓고는 저렇게 떠날 생각을 않는군. 그러면서 자네를 꼭 한 번 만나 보자는데 나가 보는 게 좋지 않겠나?"
"그것들더러 어서 썩 물러가라고 내가 말했지 않소?"
소씨 거렁뱅이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주루 주인은 또 발끈 열이 올랐다.
'무슨 이따위가 다 있어? 제 놈 때문에 저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홍안루를 쑥밭으로 만들고 있는데도 뭐 잘났다고 큰소리야? 그렇게 잘났으면 여기 앉아 큰소리 치지 말고 냉큼 나가서 직접 쫓아 내든 말든 해 볼 것이지.'
그러나 주인은 다시 한 번 눌러 참았다. 그는 안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웃으며 소씨 거렁뱅이를 얼렀다.
"여보게, 아무튼 나가 보라니깐. 그 사람들이 자네를 꼭 만나 보자는데 무턱대고 버티는 것도 실례가 아닌가?"
"날 좀 내버려두시오. 시끄러워 죽겠소. 내가 뭣 땜에 그런 거렁뱅이들을 만나야 하오? 거 어디 사람같이 생긴 놈이 하나나 있소?"
주루 주인은 어이가 없었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더니 자기도 명색이 거렁뱅이이면서 거렁뱅이들을 무시하는 태도는 정말이지 눈뜨고 봐 줄 수가 없었다.
"제발 그런 소리 말고 한번 나가 보게. 그 사람들을 어떻게 해서라도 돌려보내야지, 그렇지 않고 그냥 이러고만 있으면 우리 홍안루는 끝장이야."
주루 주인의 우는 소리에 소씨 거렁뱅이는 하는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거 참, 사람 성가시게 구는군. 좋소. 정 그렇다면 내 한번 나가보지."
그는 냉큼 몸을 일으켜 성큼성큼 주방을 빠져 나갔다.
소씨 거렁뱅이가 누각에 올라오는 걸 보고도 범 장로 일행은 일어서지 않았다. 그저 기색이 약간 변해 있을 뿐이었다.
"소 장로, 그동안 별고 없었소?"
범 장로가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별고야 없지. 별고 없지 않구. 그런데 오늘 어쩐 일이오? 어디서 도적질을 해서 횡재 한번 톡톡히 한 모양이오? 이 뜨르르한 홍안루엘 다 찾아온 걸 보니."
나 장로가 노기등등 호통쳤다.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워. 네가 율을 위반하여 우리 개방의 일대(一袋) 제자로 떨어졌으면 응당 애써 입공속죄라도 해야 하거늘, 그러지 않고 그냥 제멋대로만 놀고 있으니 언제나 네가 사람 구실을 하겠느냐? 개방 10대 장로들을 보고도 무릎도 꿇지 않고 절도 하지 않고 문안 인사도 하지 않으니, 이 놈, 그래 무슨 반란이라도 일으켜 보겠다는 심산이냐?"
"허 참, 내 이미 개방에서 나온 몸인데 율은 무슨 율이오? 난 이제 율 따위는 모르외다."
소씨 거렁뱅이의 대답에 범 장로가 집법장로를 불렀다.
집법장로가 얼른 몸을 일으켰다. 마흔 안팎 나이의 얼굴에 엄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집법장로, 저 소씨 거렁뱅이가 우리 개방의 율을 위반했거늘 어떤 벌을 주어야 마땅할까?"
범 장로가 물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본 방의 율을 어기고도 웃어른들께 버릇없이 굴며 항거하였으니 이는 본 방의 세 번째 계율을 위반하였고, 개방의 제자로서 개방의 일을 복종하지 않고 사사로이 홍안루에 와서 주방일을 하니 이는 본 방 계율 제7조를 위반함이요, 돈을 받아 먹으며 남의 일을 해 주고 있으니 이 또한 우리 개방의 율에 벗어난다 하겠습니다. 그러하매 마땅히 저 소씨를 총부에 끌고 가서 엄벌에 처해야 할 줄로 아룁니다."
집법장로의 대답을 듣고 범 장로는 엄한 기색으로 호통쳤다.
"소씨는 네 죄를 알겠느냐?"
"뭐, 죄? 내가 무슨 죄가 있어? 거렁뱅이질 하기 싫어 요리사가 된 것도 죄요? 주방장 노릇도 거 해 볼 만한 노릇이더구만. 은자 받지, 술 공짜로 마시지, 그런데다가 손아래 스무 명 남짓을 머슴처럼 부릴 수 있지, 그만하면 위풍이 대단하지 않소?"
그 말에 범 장로가 피식 웃었다.
"이것 봐, 다른 사람을 호령하는 게 그리 좋으면 우리 개방에 돌아가도 얼마든지 네 마음대로 호령하게 해 주겠다. 우선 개방 총부에 돌아가 처분부터 받고 보자구."
"이거 참, 이젠 거렁뱅이질을 안 하겠다는데도 왜 자꾸 이러쇼들?"
소씨 거렁뱅이는 답답하다는 듯 투덜댔다.
한동안 말이 없이 동태를 지켜 보던 나 장로가 갑자기 소리쳤다.
"솔직히 말하지 그래? 네가 일대 제자로 떨어진 게 벨이 꼴려 그러는 거 아냐?"
"그런 억지 소리는 하지도 마시오. 그까짓 일대 제자면 어떻고 이대 제자면 어떻소? 난 정말 개방에 있기 싫어져서 그러는 거요. 내 자유로 홍안루에서 요리나 만들고 밥 벌어 먹으니 세상 편한데 뭣 땜에 또 거렁뱅이질을 하겠소?"
소씨 거렁뱅이는 코웃음을 쳤다.
나 장로가 다시 꾸짖었다.
"넌 본디 개방의 구대(袋) 장로로서 개방 11명 장로 중의 한 사람이었으나 노는 행실이 너무 지나쳐서 일대 제자로 떨어졌으니 아마 그것에 불만을 품고 개방을 나간 것이 분명하다. 이유야 어찌 됐든 이대로 놔둘 수는 없어. 그리고 홍안루 주인한테 물어 봐. 홍안루 주인도 감히 너를 계속 데리고 있겠다고는 못할테니."
"주인, 그래 날 내쫓을 셈인가?"
소씨 거렁뱅이가 주루 주인에게 물었다.
주루 주인은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낸들 어쩌겠나? 나야 자네가 계속 있어 주길 바라지만 저분들이 저렇게 성화니……. 내가 아무리 사정해도 저분들은 꼭 자네를 내보내야 한다는 거야."
그의 말에 소씨 거렁뱅이는 머리를 숙이고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럼 좋소. 당신이야 무슨 죄가 있겠소? 나 때문에 홍안루를 문닫게 할 수는 없지. 내 팔자에 요릿집 주방장은 무슨 주방장?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유리걸식하는 거렁뱅이가 제격이지."
소씨 거렁뱅이는 냉큼 몸을 돌려 누각을 걸어 내려가려 했다.
"잠깐!"
범 장로가 소리쳤다.
"또 뭐가 문제요? 여기서 술 한잔 먹자는 거요? 거 구미가 당기는데? 사실 여기 온 지 그렇게 오래 되지만 여태까지 여기 누각에 올라와 술 한잔 마셔 본 적이 없거든."
소씨 거렁뱅이는 태연히 자리를 잡고 앉으며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혼자서 열 사람이나 대적하고 있는 그였지만 얼굴에 일호의 위구도 읽을 수 없었다.
이때였다. 아래층에서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누각 위에 자리가 있소?"
그렇지 않아도 이럴 때 손님들이 왕창 밀려들어 이 개방 떨거지들을 몰아냈으면 하던 참이라 주루 주인은 반색을 하며 소리쳤다.
"어서 올라오시오. 자리야 많지요. 어서 올라오십시오."
느릿느릿 누각 위에 올라온 사람은 모두 다섯이었다. 그들은 저마다 모양새가 각각 달랐는데 첫머리에 올라온 사람은 둥글넓적한 얼굴에 배를 내밀고 어기적어기적 걷는 품이 십분 오만한데, 생긴대로 탁자의 상석에 자리잡고 앉았다. 두 번째 따라온 사람은 아주 대조적으로 퉁방울 같은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한 말라깽이였다. 세 번째는 보기 흉할 정도로 뒤뚱대는 오리걸음에 허리가 굽고 손가락이 유난히 앙상했다. 네 번째는 얼굴이 수수떡같이 벌겋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뒤를 돌아보는 게 인상적이었으며, 다섯째는 무슨 불쾌한 일이라도 있었는지 아니면 아직 잠이 덜 깼는지 얼굴이 찌뿌둥한 게 만사 성가신 표정이었다.
이들 다섯은 느릿느릿 탁자에 자리잡고 앉았다. 상석에 앉은 사람이 품에서 물건 두 개를 천천히 내놓았다. 채소나 고기를 써는 식칼 한 자루와 주먹밥 두 개는 담을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자루가 긴 국자였다. 두 번째 사람은 가마 닦는 큰 솔을 내놓았는데 일반적인 솔에 비해 엄청나게 크고 무거워 보였다. 세 번째 사람은 아무것도 내놓지 않고 그저 맨주먹만 두 개 식탁 위에 올려 놓았고, 네 번째 사람은 팔짱을 지른 채 눈을 내리감고 앉아 있었으며, 다섯 번째
사람은 저울 하나를 내놓았는데 그것도 저울이라기보다는 병장기에 가까웠다.
다섯 사람이 내놓은 병장기들을 본 개방 사람들은 모두 적이 놀랐다. 병장기만을 보고서도 이 다섯 사람이 임안성 안에서 명성이 높은 황궁 안의 대내오주(大內五廚)들인 묘수인주(妙手人廚) 묘대야(妙大爺), 천도만과(千刀萬 ) 과이야(過二爺), 유소화작(油 火炸) 허삼야(許三爺), 백수십권(百手十拳) 우사야(虞四爺), 일지칭(一支秤) 평오야(平五爺) 등임을 알 수 있었다.
"주인장, 우리가 여기 온 건 주인장과 볼일이 있어 온 것은 아니고 소씨 거렁뱅이를 한 번 만날까 해서 왔은즉 소씨를 만나게 해주게."
주루 주인은 또다시 간이 콩알만해졌다. 도대체 소씨 거렁뱅이가 어떤 인물이기에 이렇듯 별 사람들이 다 와서 그를 만나자는 것인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소씨 거렁뱅이를 힐끗힐끗 눈길질해 보며 사람들의 눈치를 살폈다. 소씨 거렁뱅이가 묘수인주 묘대야를 보고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내가 바로 소씨 거렁뱅이인데, 내가 그렇게 유명한 모양이지? 나를 보겠다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 걸 보니 말야."
묘수인주가 빈정거리듯 말했다.
"글쎄, 나는 그 명성을 익히 들어 왔지만 내 이 칼과 국자가 알아줄지 의문이지."
그러자 나머지 넷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은 곧 웃음을 거두고 꼿꼿한 눈길로 소씨 거렁뱅이를 쏘아보았다.
"홍안루에 천하 별미인 '강산이개'라는 요리가 있다는 말을 오래 전부터 들어 왔는데, 오늘 우리 형제 다섯이 맛 좀 볼까 해서 왔네."
일지칭 평오야가 차갑게 말했다.
주루 주인은 또 속이 탔다. 방금 소씨 거렁뱅이를 구슬려 겨우 내보내기로 했더니 이번엔 어디서 이런 도깨비 같은 사람들이 느닷없이 나타나서 강산이개를 만들어 내라고 성화인 것인가. 강산이개는 소씨 거렁뱅이가 아니고선 누구도 만들어 낼 수 없는 명요리가 아닌가.
소씨 거렁뱅이의 성미를 아는 주루 주인은 얼른 앞으로 나섰다.
"이거 죄송하게 됐습니다. 우린 방금 소씨를 내 보내기로 한 터이라 강산이개는 해 드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것말고 다른 요리들은 얼마든지 해 드릴 수가 있으니 다른 걸로 시키시지요."
"아니, 이 주인장이 우리를 어떻게 보고 이래? 우리 형제 다섯이 일손을 놓고 일부러 찾아왔는데 뭐가 어째? 우리 비위를 상하게 하면 재미가 없을걸? 주인장, 내 이름이 뭔지 알어? 내가 천도만과 과이야야. 알아? 그래 내 솜씨를 좀 봐야 정신이 들겠나?"
천도만과 과이야가 거들먹거렸다.
주루 주인은 잔뜩 겁을 집어먹고 이번엔 소씨 거렁뱅이를 향해 사정했다.
"번거로운 부탁이지만 마지막으로 이분들에게 강산이개를 해 드리고 갈 수 없겠나?"
"미안하지만 그러고 싶은 생각 없수다."
소씨는 일언지하에 거절하고는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주루 주인은 소씨 거렁뱅이가 한마디로 거절하자 아주 난처하게 되어 묘수인주 묘대야에게 또 사정하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나으리, 저 친구는 한번 하지 않는다면 죽어도 하지 않는 성미이니 이거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그러자 대내오주들은 소씨 거렁뱅이를 보며 또다시 앙천대소를 했다.
"이봐 소씨 거렁뱅이, 우리 대내오주에게 요리 솜씨를 보이는 게 두려워서 그러는 거 아냐?"
유소화작 허삼야가 비웃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코웃음만 칠 뿐 대꾸하지 않았다.
이번엔 백수십권 우사야가 말했다.
"그냥 돌아들 갑시다. 소씨 거렁뱅이의 강산이개라는 요리가 소문만 요란할 뿐 별게 아닐 거라지 않았소. 소문난 잔치 먹을 것 없다고 막상 먹어 보면 실망만 할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저 소씨가 요리를 안 하겠다고 뒤 꽁무니를 빼겠어요?"
"천만에! 이 소씨 거렁뱅이는 남의 말을 듣지 않을 뿐이야. 황제 폐하가 와도 내가 하기 싫으면 안 하는 성미니까."
소씨 거렁뱅미가 거만하게 말했다.
묘수인주네 다섯은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이 대내오주는 비록 요리사에 불과하지만 황궁 내의 일부 고관대작들보다 더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민이식위천(民以食爲天)'이란 말이 있듯이 기실 황제도 먹지 않고는 못 사는 법이요, 맛 좋은 음식을 즐기기는 백성이나 매한가지였다. 그러므로 대내오주들은 황궁의 외사방(外事房)에서 누구보다 대접을 받았으며 감히 그들을 건드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소씨 거렁뱅이로부터 이렇듯 무시를 당하고 보니 피
가 거꾸로 솟아 더는 참고 있을 수가 없어졌다.
"이봐, 재간이 있으면 어디 솜씨 좀 보여 주지 왜? 오늘 우리 대내오주하고 어디 한번 겨루어 볼까?"
천도만과 과이야가 비양거렸다.
"도대체 뭘 겨루어 보자는지 알 수 없구만. 손을 쓰자는 건가, 발을 쓰자는 건가?"
소씨 거렁뱅이는 가소롭다는 듯 대꾸했다.
묘수인주 묘대야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좋아, 우리 솜씨를 겨루어 보자구."
홍안루 주방은 아주 넓었다. 양편에 늘어선 부뚜막엔 아궁이가 스무 개가 넘었고 채소를 다듬는 사람, 고기를 써는 사람, 요리를 볶는 사람 등 쉰 명이 넘는 사람들을 전부 수용할 수 있을 정도였다.
누각에 있던 사람들은 주루 주인을 따라 주방에 들어섰다. 소씨 거렁뱅이를 선두로 대내오주, 개방 장로 열 명이 죽 들어서자 주방의 일꾼들은 사뭇 긴장한 태도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저리들 비켜서!"
소씨 거렁뱅이가 호통을 쳤다.
"소씨, 자네가 이아(易牙)가 환생한 사람만 아니라면 난 꼭 이길 수 있네. 우리 형제들의 솜씨를 보고 나면 자네도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고 하늘 위에 또 하늘이 있음을 알게 되겠지."
묘수인주 묘대야가 말하자 천도만과 과이야가 히죽 웃으며 나섰다.
"그럼 내가 먼저 본때를 보이지."
과이야는 느린 걸음으로 도마 곁으로 걸어갔다. 도마 위에는 돼지고기 한 덩어리가 놓여 있었다. 과이야는 칼을 번쩍 치켜 들더니 고기 한 점을 길게 베어 냈다. 그리고는 두 손바닥을 펴서 기를 모아 내밀었다. 얼마 안 가 그 돼지고기는 꽁꽁 얼어붙었다. 천하 최고의 한빙(寒氷) 장력(掌力)이었다. 사람들이 일제히 환성을 올렸다.
갈채 소리에 신명이 난 천도만과 과이야는 언 돼지고기를 왼손으로 집어 들더니 오른손으로 품에서 뭔가 자그마한 물건을 꺼내어 손가락에 끼우고는 왼손에 쥔 고기를 싹싹 내리훑었다. 도대체 무얼 하려는지 사람들이 미처 깨닫기도 전에 과이야의 손으로부터 가느다란 실오라기 같은 것이 뿜어져 나와 부글부글 끓고 있는 솥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이윽고 천도만과는 부뚜막에 사발 하나를 가져다 놓고 젓가락으로 솥 안을 휘휘 저어 건더기를 건져 냈는데, 그것은 마
치 국수가락 같은 고기 요리였다. 먹기 좋게 익은 고기가락은 색깔도 좋고 맛도 구수할 것 같았다.
사람들은 또 갈채를 보냈다. 장수면(長守面), 조단면(挑 面), 열탕면(熱湯面) 같은 것들은 많이 봐 왔지만 고기를 국수처럼 훑어 만든 육면(肉面)은 보다 처음이었다.
"이봐, 소씨! 어떤가?"
천도만과 과이야가 어깨를 으쓱하며 물었다.
소씨 거렁뱅이도 내심 탄복했다. 장풍으로 고기를 꽝꽝 얼리는 것도, 고기를 국수가락같이 가늘게 훑어서 육면을 만드는 것도 절세의 기공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번에는 일지칭 평오야가 앞으로 나섰다. 그가 저울대를 들고 한 번 척 휘두르니 물고기 한 마리가 낚시에 걸리듯 저울고리에 덜컥 걸려 나왔다. 푸른색과 붉은색이 뒤섞인 서호 잉어였는데 물에서 갓 잡아 올린 듯 무척 싱싱해 보였다.
평오야는 이번에는 저울대를 돌려 저울대 앞머리를 잉어 아가미에 쑥 쑤셔 넣더니 탁탁탁 아래로 몇 번 흔들었다. 그러자 저울에 달린 두 갈래 가느다란 사슬에 물고기 배가 갈라지며 내장이 쏟아져 나왔다. 이런 식으로 내장을 빼낸 그는 또 그 사슬로 쓱쓱 고기 비늘을 벗겼다. 그리고 저울대를 돌려 물고기를 기름이 부글부글 끓는 솥 안에 넣어 튀겼다.
고기가 제대로 튀겨지자 평오야는 또 저울대를 들어 휙 휘둘렀다. 그러자 튀겨진 물고기는 곧바로 큰 접시 위에 날아가 떨어졌는데 놀랍게도 고기는 아직도 죽지 않고 아가미를 벌름거리는가 하면 눈도 말똥말똥 뜨고 있는 게 아닌가?
"이게 뭔지 아는가? 산 물고기 튀김이라는 거야."
평오야가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괜찮구먼. 그 솜씨면 우쭐댈 만도 하겠어."
소씨 거렁뱅이가 대꾸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평오야의 솜씨에 머리를 끄덕였다.
"소씨, 우리 형제들이 솜씨를 보였으니 이젠 자네 쪽에서 뭔가 보여 줘야 하지 않겠나?"
천도만과 과이야가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급할 것 뭐 있소? 당신네들 대내오주가 모두 고수들인데 나머지 세 분의 절기를 마저 보고 난 뒤에 내 솜씨를 보이도록 하겠소."
소씨의 대답에 백수십권 우사야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럼 이번엔 내가 솜씨를 보여 주지."
그는 곧장 부뚜막 앞으로 가 서더니 아무런 동작도 취하지 않고 솥에서 닭 한 마리를 꺼냈다. 털을 뽑은 생닭이었다. 우사야는 닭을 도마 위에 올려 놓고는 소매를 걷더니 주먹으로 냅다 내리쳤다. 그는 또 발길을 날려 한 번 툭 걷어차더니 번갈아 같은 동작을 몇 번 되풀이했다.
사람들은 그의 동작을 유심히 눈여겨보았으나 닭은 여전히 제 모양 그대로였다. 우사야가 이번엔 장풍으로 그 닭을 자기 쪽으로 척 끄는 듯하자 닭은 도마 위에서 가볍게 몸을 뒤채였다. 우사야는 뒤집힌 닭에 대고 또 주먹질과 발길질을 번갈아 안겼다.
개방 장로 열은 일견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백수십권 우사야가 죽은 닭에 대고 열심히 주먹질과 발길질은 해대고 있지만 이렇다 할 변화가 통 보이지 않자 그가 헛수작을 하면서 사람들 눈속임을 하는 게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소씨 거렁뱅이의 표정은 사뭇 심각했다.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그는 이미 그 닭에서 괴이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우사야는 이번에는 그 닭에다가 조미료들을 뿌리고 나서 닭다리를 번쩍 집어 들었다.
"모두들 닭고기를 한두 번 잡숴 본 게 아닐 테지만 이런 닭고기는 아마 처음일 거외다."
우사야는 이렇게 말하며 닭을 끓는 기름솥에 던져 넣었다. 닭이 어느 정도 튀겨진 듯싶자 그는 큰 접시에다 닭을 건져 놓더니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러분 생각이 있으시면 맛 좀 보시지요. 이 요리는 유모계(油毛鷄)라고 하오."
'유모계?' 개방 열 장로들은 겨우 기름에 튀겨 낸 닭고기 정도가 무슨 대단한 요리라고 저러나 싶어 모두들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이때였다. 갑자기 팍 하는 소리가 나더니 닭고기가 툭툭 갈라 터지기 시작했다. 닭껍질에 있는 기름이 모두 말라 버려 그렇게 된 모양인데 그보다도 놀라운 것은 닭털이 한줌한줌 부스스 일어서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게 무슨 조화속인가 싶어 하나같이 제 눈을 의심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닭털이 아니라 닭고기 살들이 실낱같이 가느다랗게 터져 올라온 것이었다.
그제야 사람들은 크게 깨닫는 바가 있었다. 백수십권 우사야가 닭에게 주먹질 발길질을 하였을 때 닭의 살코기들은 이미 갈갈이 찢어진 채 껍질 안에 멀쩡한 듯 싸여 있었던 것이다.
"멋지네. 기가 막혀!"
소씨 거렁뱅이가 탄복했다. 그는 곧 닭고기살 몇 가닥을 뜯어 내어 입에 넣고 맛을 보았다.
"맛도 괜찮구먼. 백수십권 우사야 재주가 이만저만이 아닌데?"
개방 장로 열도 평소의 오만함은 간데없이 사라지고 속으로 저마다 혀를 내둘렀다.
이번에는 유소화작 허삼야가 나서며 소씨 거렁뱅이에게 읍하였다.
"소씨께서 정말 우리 형제들과 겨루어 볼 생각이라면 내 재주도 한번 구경해 보시오."
유소화작 허삼야는 펄펄 끓는 기름솥 앞에 다가서더니 대뜸 두 손을 기름솥 안에 쑥 넣었다. 자글자글 기름에 튀겨지는 소리가 나는데도 그는 꿈쩍도 하지 않고 물끄러미 소씨 거렁뱅이만 바라보고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손을 천천히 꺼내 들었다. 끓는 기름이 뚝뚝 떨어지는데도 손과 손목은 전혀 이상이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펄펄 끓는 기름솥에 넣고 그토록 오랫동안 튀겨 냈는데도 무사하다니 이야말로 천외기문이 아닌가!
허삼야는 득의양양한 태도로 이번에는 한 손을 주먹 쥐어 들고 솥 안에 있는 펄펄 끓는 기름을 주먹 쥔 손에다 끼얹었다. 주먹 쥔 손의 솜털이 타며 연기까지 피어 오르더니 뻘겋고 번들번들하게 부어 오르는 듯했다. 한동안 그렇게 끓는 기름을 끼얹은 뒤 허삼야는 두 주먹을 다시 불끈 쥐더니 큰 구리솥을 둥둥둥 북 두드리듯 두들겼다. 주먹에 아무 이상도 없음을 과시하려는 수작이었다.
개방 장로들은 도무지 믿기지 않는 듯 얼빠진 표정으로 잠자코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때 허삼야가 손바닥을 슬쩍 펴 보이는 것을 본 사람들은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허삼야의 손바닥은 붉은 색을 띠던 것이 하얗게 변하고 그것이 또 자색으로 변했는데 그제야 사람들은 그가 천하 최고의 무서운 내공심법(內功心法)을 갖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런 심법만 있으면 물도 불도 겁나지 않고 불에 데이거나 튀겨져도 끄떡없는 것이다.
묘수인주 묘대야가 소씨 거렁뱅이를 향해 빈정대듯 말했다.
"이봐 소씨, 이젠 자네 솜씨도 좀 보여 주지 그래? 도대체 무슨 재주가 있기에 자네가 이 경성에서 제일 뛰어난 요리사로 이름이 났는지 우리도 좀 보세."
소씨 거렁뱅이는 웃기만 할 뿐 대답이 없었다.
그러자 묘수인주 묘대야가 조리대 앞으로 다가가서 도마 위에 있는 채소들 중에 배추 한 포기를 집어 들었다.
"난 이걸 요리해 보지."
묘수인주는 배추를 손바닥 위에 올려 놓더니 다른 손바닥으로 배추를 내리누르기 시작했다. 한참 후 그는 배추 포기를 내려놓았다.
"기실 이건 자랑할 만도 못한 잔재주에 불과하지만 어디 보라구."
개방의 장로들은 모두 이 묘수인주 묘대야가 황궁의 대내오주 중에서 우두머리이며 그 재주도 으뜸임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잘난 배추 포기 하나를 움켜쥐고 눌렀다 놓았을 뿐 배추 포기에 이렇다 할 변화가 없자 모두들 이상한 생각이 들었으나 그렇다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참다못한 나 장로가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그 배추로 뭘 보여 주겠다는 것인지 우린 잘 모르겠소. 설명해 주기 바라오."
그러나 소씨 거렁뱅이만은 놀란 눈길로 묘수인주 묘대야를 바라 보았다. 이 재주가 그의 다른 네 형제들보다 훨씬 더 고강함을 알고 있는 사람은 기실 소씨 거렁뱅이 혼자뿐이었다.
"대단하구만, 대단해! 이 소씨 거렁뱅이가 당신들 대내오주의 재간에 깊이 감복했소."
그래도 개방 장로 열은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소씨 거렁뱅이는 묘수인주 묘대야가 무슨 재주를 보였다고 저토록 찬사를 하는 걸까?
"어디 내가 좀 보자. 도대체 이 배추 포기가 뭐 어쨌다고 그러는거지?"
나 장로가 다가와 그 배추 뿌리를 쥐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배추 포기를 들 때면 들기 좋게 배추 뿌리를 잡는 법이다.
나 장로는 배추 뿌리를 쥐고 위로 척 치켜 들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배추 뿌리에 배추 줄거리만 딸려 올라오고 푸른 배추잎은 도마 위에 전부 그대로 남아 있는 게 아닌가.
사람들은 그제야 묘수인주의 재주가 아주 비범함을 알고 일제히 환성을 올렸다.
각기 자기 재주를 다 뽐낸 대내오주들은 모두 소씨 거렁뱅이를 쳐다보았다. 소씨 거렁뱅이는 그들을 보고 손사래를 쳤다.
"안 되겠소, 안 되겠어. 당신들 대내오주에 비하면 이 거렁뱅이의 재주는 아무것도 아니니 내 두손들겠소."
소씨 거렁뱅이는 도리질을 하며 대내오주의 눈길을 피했다.
"그럼 좋아! 우리한테 항복한다 이거지? 그럼 자네 입으로 난 바보다, 하고 말해 봐. 대내오주에게 졌으니 난 바보다. 이렇게 한마디만 하면 이것으로 오늘 일은 끝내기로 하지."
묘수인주 묘대야가 우쭐거렸다.
"뭐? 내가 바보라고? 내가 왜 바보야? 이 소씨 거렁뱅이가 바보는 아니지. 바보야 거기 대내오주들이 바보지. 제 손을 펄펄 끓는 기름솥에 넣어 튀기는 게 바보짓이 아니고 뭔가? 그래 펄펄 끓는 기름에다 아까운 제 손을 튀길 때 아프지 않던가? 돌이나 나무로 만든 손이 아니고서야 아프지 않을 수야 없겠지. 배추를 줄거리만 하얗게 남겨 놓은 것도 그래. 그렇게 줄거리만 먹으면 뭐 뼈가 굵어진다던가, 힘줄이 굵어진다던가? 그리고 그보다 더 한심한 건 물고기를 산째
로 기름에 튀기는 짓이지. 그런 잔인한 짓을 하면서도 기뻐하고 있으니 참 딱해 못 보겠더구만. 공자님 말씀도 모르는가? 공자님 가라사대 '군자원포주야(君子遠疱廚也)'라 하셨지."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대내오주들을 한심하다는 듯 둘러보더니 말을 이었다.
"군자가 왜 푸줏간을 멀리 하는가? 군자도 고기를 아니 먹지는 않지만, 짐승도 생명인데 그것들을 산째로 묶어 놓고 죽이는 것만은 차마 눈으로 볼 수가 없어 멀리 피하는 거지. 그런데 펄펄 뛰는 물고기를 산째로 기름에 튀기면서도 일말의 연민지심도 없이 오히려 우쭐대니 그보다 잔인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또 하나는, 고기를 얼려 그것을 국수가락처럼 훑어 가지고 기름에 튀겨 고기가락을 만들던데, 생생한 고기를 얼릴 건 뭐고 얼린 걸 훑어서 고기가락
을 만들 건 또 뭔가? 이런 걸 보고 바지 벗고 방귀 뀌듯 쓸데없는 짓을 한다는 거야. 그리고 또 바보 하나가 더 있지. 그 좋은 닭에다 애써 주먹질 발길질을 해서 뭣 때문에 볼 모양, 입맛도 없게 만들지? 참 눈뜨고는 봐 줄 수가 없더구만. 그런 바보 같은 짓거리들이 세상 천지에 어디 있겠느냐구?"
대내오주들은 처음엔 소씨 거렁뱅이의 말이 무슨 고담준론인가 귀를 기울였으나 점차 한심하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소씨 거렁뱅이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대내오주들이 말이 없자 소씨 거렁뱅이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이봐, 소씨. 이젠 말 다했나?"
묘수인주 묘대야가 물었다.
"뭐 그만해 두지."
소씨 거렁뱅이의 대답에 묘수인주 묘대야가 언성을 높였다.
"그럼 좋다! 말을 다했다 이거지? 우리 다섯 형제의 재주가 자네 소씨 거렁뱅이보다 못하다면 어디 자네 재주를 보여 봐. 왜 못 보이는 거야?"
소씨 거렁뱅이는 한동안 대답이 없이 눈만 껌벅거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방금 뭐라고 했지? 내 솜씨를 구경해야겠다구? 그럼 그러지 뭐. 난 내가 익숙한 그 요리나 하나 해 보이지. 거기 다섯이 내 요리 솜씨를 배워 낼 수 있을까 모르겠는데, 나처럼만 할 수 있다면 내가 정말 항복을 하겠소."
소씨 거렁뱅이는 느릿느릿 조리대 앞으로 다가서더니 갑자기 소리쳐 누군가를 불렀다.
"홍칠이! 이봐, 홍칠이! 이게 어디 갔나? 어서 이리 나와! 어서 나와 이 나으리들께 내가 가르쳐 준 요리 솜씨를 한번 보여 주라구."
그러자 어디선가 낮게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솜씨는 무슨 솜씹니까? 난 왜 사부님한테 무슨 솜씨가 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을까요? 아니, 저 사람들한테 보여 주긴 뭘 보여 주겠다는 겁니까?"
소씨 거렁뱅이는 새로 나타날 이 사람과 아주 가까운 듯 낮은 소리로 말했다.
"저 사람들이 글쎄 이 소씨 거렁뱅이의 강산이개를 만드는 솜씨가 부러운 모양이야. 자기들도 좀 배워 봤으면 한단 말이네. 자기들도 배울 수 있으면 우리 솜씨도 별거 아니라 생각할 테고, 배워 내지 못하면 우리가 저 사람들보다 여러 면에서 대단한 셈이 되거든. 저 사람들이 과연 배워 낼 수 있을 것 같은가? 어때?"
"사부님은 언제나 황당한 일만 하시는군요. 저 사람들이 우리 솜씨를 정말 배워 내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럼 사부님은 다시는 자기 솜씨를 자랑하지 못하게 될 거 아닙니까?"
주방에 딸린 방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사람은 한창 나이의 젊은 청년이었다.
"이 사람은 내 제자인 홍칠(洪七)이오. 이제 이 사람이 당신들한테 강산이개를 만드는 솜씨를 보여 줄 거요."




제2장 강산이개
홍칠이 느릿느릿 조리대 앞으로 오자 소씨 거렁뱅이가 너털대며 말했다.
"홍칠이, 저 다섯 분은 대내오주들일세. 자네 솜씨를 보자구 왔으니 강산이개를 한 번 만들어 보이게나."
기실 홍칠과 소씨 거렁뱅이는 대내오주들과 처음 만나는 것은 아니었다. 전에 황궁 외사방의 어선재(御膳齋)에서 서로 만난 적이 있고, 홍칠과 구양봉이 황궁 안에 들어가 어선방 명요리들을 훔쳐 먹다가 대내오주들과 한바탕 겨루어 본 적도 있었다. 때문에 그들 둘은 이 대내오주들이 황궁에서 나와 소씨 거렁뱅이를 찾아온 데는 반드시 어떤 곡절과 연유가 있음을 짐작하고 있었다.
홍칠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조리대에 다가서서 먼저 조미료들이 담긴 그릇 몇 개를 앞에다 가지런히 갖다 놓고 또 고기들을 앞으로 당겨 놓았다. 고기는 돼지고기, 소고기, 사슴고기, 꿩고기, 토끼고기, 뱀고기, 양고기 그리고 개고기 여덟 가지였다.
홍칠은 식칼을 들더니 고기들을 각각 네모 반듯한 입방체로 썰어 도마 위에 모아 놓았다. 그리고는 끝이 뾰족한 칼로 한동안 마구 쑤셔 댔는데 사람들은 홍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홍칠은 뾰족한 칼로 고깃덩어리에 꽃 모양을 새겨 넣은 것인데 그 꽃 모양은 고기 안에 있고 겉은 여전히 입방체 모양으로 별다른 변화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홍칠은 그 칼을 도마 위에 꽂아 세워 놓고 다른 뾰족한 칼을 잡아 쥐고 나머지 고기들을 같은 방식으로 쑤셔 댔다. 이렇게 여덟 조각의 고기에 전부 칼집을 내어 도마 위에 차례대로 줄지어 놓으니 도마 위에는 뾰족한 칼이 여덟 자루나 나란히 꽂히게 되었다.
홍칠은 가는 젓가락으로 고기 조각들을 조심스레 집어서는 두 가지 조미료 그릇에다 각각 두 번씩 담갔다가 꺼내서는 다시 도마 위에 올려 놓았다. 그리고는 그 두 가지 조미료는 사람을 시켜 치우게 하고 다른 두 가지 조미료 그릇을 가져오게 하더니 이번에도 같은 식으로 고기를 조미료에 담갔다가 꺼내었다. 이런 식으로 홍칠은 연이어 여덟 차례나 조미료를 바꾸게 하였으니 기실 여기에 쓴 조미료 종류는 열여섯 가지가 된다. 홍칠은 조미료에 담갔던 고기들을 모두
도마 위에 차례대로 잘 놓았다.
대내오주들은 홍칠의 하는 양을 지켜 보면서 아직까지는 자기들 재주보다 그닥 나을 게 없다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홍칠은 이제 바닥이 평평한 쟁개비를 가져왔다. 그는 고깃덩이 여덟 개를 서로 붙지 않게 약간씩 사이를 띄워 쟁개비 바닥에 붙여 놓았다. 그 쟁개비를 숯불이 이글거리는 난로 위에 놓으니 이어 구수한 고기 냄새가 풍기기 시작하는데 이상하게도 여덟 가지 고기를 함께 굽는데도 다른 고기 냄새는 없고 맨 먼저 양고기 냄새만 풍겨 왔다. 그 다음은 소고기 냄새, 그리고는 개고기 냄새…… 이렇게 분별할 수 있게 순서적으로 풍겨 왔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홍칠은 이번에는 왼손으로 쟁개비를 자기 눈길과 수평이 되는 높이까지 들어올리고는 오른손 손바닥으로 쟁개비 밑바닥을 가볍게 툭 쳤다. 그러자 쟁개비 안의 고깃점들은 한 번씩 튀어올랐다가 뒤집혀서 떨어지곤 했는데, 놀랍게도 변함없는 위치에 한치의 어긋남 없이 그대로 떨어졌다. 만약 이 솥 안의 고깃덩이 여덟 개의 원면이 노르스름하게 구워진 것이 보이지 않았다면 이 고깃덩이들이 그 사이 한 번 뒤집어졌음을 절대 알 수 없을 것이
다.
홍칠이 이렇게 고깃덩이를 세 번 추스르자 고기는 완전히 구워졌다. 오직 두 면의 오목 들어간 곳, 즉 칼로 꽃잎 모양의 자국을 낸 곳만이 바닥에 닿지 않아 빛깔이 달랐는데, 사람들은 그제야 꽃모양으로 칼집을 내놓은 원인이 속까지 잘 익히기 위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홍칠은 쟁개비 안에 있는 고기에다 기름을 부었다. 뿌지직뿌지직 소리가 들리며 고기들이 더욱 구수하게 구워졌다.
홍칠은 쟁개비를 난로에서 내려놓고는 손바닥에다 기름을 부었다. 그리고는 그 손바닥을 쟁개비 위에 가까이 대고 장력을 써서 고깃덩이를 빨아당겨 그것을 접시 위에 떨궈 놓았다. 얼마 안 되어 접시 위엔 고깃덩이 여덟 개가 모두 이런 식으로 담겨졌다.
사람들은 비로소 홍칠의 솜씨에 탄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홍칠은 접시를 도마 위에 올려 놓고 옆에서 채소 한줌을 집어 왔다. 거기에는 사람들 눈에 익은 채소도 있었고 보기 드문 낯선 채소도 있었다. 그는 그 한줌 채소 중에서 향엽(香葉) 세 잎을 뚝 떼어 들고는 고깃덩이 하나하나에 그 향엽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향엽은 고깃덩이 복판에 낸 꽃잎 모양의 칼자국에 얇은 칼날같이 들어박히는 것이 아닌가? 홍칠은 이런 식으로 들고 있던 채소잎을 열몇 번이나 흩뿌렸다.
이를 지켜 보던 사람들은 일제히"와―" 하고 환성을 올렸다. 사슴고기 위에는 연꽃 모양으로 채소잎이 꽂히고 꿩고기 위에는 장미꽃 모양으로 채소잎이 꽂혔다. 다른 고기들 위에도 부추, 두릅, 상추 등 향료로 쓰이는 채소잎들이 꽂혔는데 고깃덩이는 꽃판 같고 채소의 줄거리와 잎은 꽃가지 같았다.
드디어 요리가 끝났다. 그러나 사람들은 넋이 나간 듯 누구 하나 말이 없었다. 대내오주들도 가슴속이 써늘해져서 잠자코 홍칠만 바라보았다. 그들 중 어느 한 사람도 홍칠의 요리 솜씨를 흉내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겉보기는 아주 쉬운 듯하나 절묘한 재주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뾰족한 칼로 고기 안에다가 꽃 모양을 새기는 것도 내공검법(內功劍法)이 필요하겠지만 장풍으로 고기를 움직이는 것도 심오하고 강한 장법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듣건대 이
개방 장로 중의 한 사람이었던 소씨 거렁뱅이가 전임 방주로부터 강룡십팔장을 직접 전수받아 그런 비범한 장법을 가지고 있다 하니 홍칠의 이 장법은 바로 소씨 거렁뱅이한테서 배운 것임이 틀림없었다. 더구나 채소잎을 던져 고기 속에 끼워 넣는 재주는 암기(暗器)를 쓰는 무공에 극히 정교한 내력까지 갖춰야 하는 것으로 무엇보다 어려운 재주였다.
개방 장로 역시 겁이 났다.
전에 소씨 거렁뱅이는 개방의 구대(九袋) 장로였고 홍칠은 개방의 팔대(八袋) 제자였다. 그런데 후에 두 사람은 개방의 계율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하여 방주 미운산(米雲山)의 눈 밖에 나게 되었다. 미운산은 개방의 율을 엄격히 하기 위해 집법장로를 불러다가 그들 둘에게 큰 책벌을 내리게 하였다. 소씨 거렁뱅이는 홍칠의 사부이기에 벌을 더 중하게 하여 일대(一袋) 제자로 떨어뜨려 입공속죄케 하였다. 홍칠은 이에 불복이었다. 그는 방주 미운산 앞에서 자기 옷
에 있는 주머니 여덟 개를 거침없이 뜯어 내동댕이 쳐 버리고 소씨 거렁뱅이를 따라 이 홍안루로 왔던 것이다.
묘수인주 묘대야는 속으로 생각했다.
'보아하니 이 둘은 앞으로 강호에서 큰 명성을 떨칠 인간들이다. 이 소씨 거렁뱅이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또한 제 나름대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을 즐기니 앞으로 무슨 큰일은 해내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저 홍칠이라는 사람은 보기에도 만만치 않은 것이 한가락해도 단단히 하겠어.'
묘대야가 느닷없이 물었다.
"이봐, 소씨. 이 요리는 왜 이름이 강산이개지?"
소씨 거렁뱅이는 흐뭇한 낯빛으로 대답했다.
"이 요리 이름은 강산이개지만 기실은 본성난개(本性難改)라고 함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오. 이 요리에 쓰는 고기가 모두 여덟 가지인데 여느 때는 글쎄 맛이 각각 다르겠지만 한 솥에 넣으면 맛이 혼합되어 가려 내기 힘들어지는 게 보통이 아니겠수? 하지만 이 요리는 그렇지 않거든. 여덟 가지 고기가 각기 제 고기맛을 조금도 잃지 않고 그냥 가지고 있어 분별하기가 아주 수월하단 말이오. 그러니 본성난개가 아니고 뭐요. 하지만 어쨌든 간에 그것들이 모여 새로운 요
리가 되었으니 강산이개가 제격이지. 어떻소? 이름이 묘하지 않소?"
"이봐, 소씨. 자네네 그 재주는 정말 대단하네. 저 홍칠이도 강호에서 보기 드문 일류 고수임이 틀림없고. 그런데 난 암만 생각해도 개방에서 일등 고수였던 자네가 어쩌다가 일락천장 일대 제자로 떨어졌는지 알 수가 없구먼. 저 홍칠이도 그렇지. 개방 팔대 제자가 지금은 주머니 하나 보이지 않으니 도대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가?"
묘수인주의 말에 소씨 거렁뱅이는 한동안 그를 쏘아보다가 언짢은 기색으로 말했다.
"그런 건 왜 묻소?"
"내가 듣기엔 자네가 뭔가 잘못을 저질러 쫓겨난 거라고 하던데 그게 사실인가? 개방에서 자넬 쫓아내려고 하자 자낸 울며불며 제발 내쫓지는 말라고 손이야 발이야 빌었다며? 그래서 일대 제자로라도 겨우 남게 되었다더군?"
묘수인주 묘대야는 실실 웃으며 약을 올렸다.
소씨 거렁뱅이는 격노하여 소리쳤다.
"개떡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내가 빌긴 누구한테 빌어? 내가 그 따위 것들한테 굽신굽신 머리를 조아리며 애걸할 놈같이 보이나? 누가 그런 말뼉다귀 같은 소릴 하던가? 내가 개방에 남아 있는 건 순전히 내 뜻이야. 내 이름이 소씨 거렁뱅이가 아닌가? 거렁뱅이이면 개방에 적을 둬야지 어디다 적을 두겠나? 이런 생각이 없었으면 난 벌써 개방을 떠나 버렸을 거야."
"이봐 소씨, 내 보기엔 자넨 자존심이라고는 없는 사람이야. 장로 자리도 빼앗고 자네를 내쫓으려고 하는 개방에 한사코 붙어 있으려는 까닭이 뭔가?"
천도만과 과이야의 말에 대내오주들은 큰소리로 웃어댔다.
소씨 거렁뱅이는 그들을 쏘아보다가 문득 홍칠에게 물었다.
"그래 그냥 여기 있으려나?"
"있어 뭘 해요?"
홍칠이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어서 떠나 버리자. 홍안루 주인도 우리를 내 보내기로 결정했어. 어차피 떠날 거 머뭇댈 필요가 없지."
소씨 거렁뱅이는 대내오주나 개방 10대 장로에겐 가타부타 말없이 홍칠을 끌고 홍안루를 걸어 나갔다.
개방 장로 열은 소씨 거렁뱅이와 홍칠이 나가고 나자 아차 싶었다. 범 장로와 나 장로는 서로를 쳐다보며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어서 쫓아가 소씨 거렁뱅이를 붙잡아 개방 총부로 끌고 가려는 생각에서였다.
이때 묘수인주 묘대야가 얼른 그들 앞을 막았다.
"개방 10대 장로들을 이렇게 만나 뵙게 되다니 우리 형제 다섯은 아주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황궁 안에서만 맴돌던 우리인지라 그 동안 상종할 기회가 없었는데 오늘 이 기회에 좀 가까이 사귀어 볼까 합니다."
그 바람에 개방 10대 장로들은 성이 나서 표정들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나 장로가 나서서 꾸짖었다.
"묘수인주, 이러지 말고 비켜서시오. 비켜서면 우린 서로 좋게 헤어질 것이지만 이렇게 한사코 우리 앞을 막아 선다면 일이 재미없게 될 줄로 아시오."
묘수인주 묘대야가 히죽 웃었다.
"그거 듣기 거북하구만. 개방 10대 장로들께선 어찌 나이가 들수록 사리를 모르오? 강호에 도리 있는 사람의 말을 들으라는 말이 있다는 것도 모르시오?"
범 장로가 크게 웃으며 대답했다.
"대체 강호에서 자네들 대내오주가 있다는 걸 몇이나 알고 있는가? 하지만 자네들 대내오주의 무공이 범상치 않다는 걸 우리 개방 10대 장로들이 오늘 봤으니 깊이 탄복하는 바일세. 그러나 오늘 우리는 따로 할 일이 있어 자네들과 더 깊이 사귀어 볼 수가 없으니 미안하지만 용서하게."
범 장로는 말을 마차고 앞서 출구로 향했다.
그러나 대내오주들이 얼른 문앞을 막아 섰다.
"이 문을 나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구만. 이 홍안루 주방 내에서 겨루어 봐도 되잖소?"
과이야가 말했다.
그러자 홍안루 주인이 다급히 소리쳤다.
"아이고 이러지들 마십쇼. 싸우려면 밖에 나가 넓은 데 가서 죽든지 살든지 마음대로 싸워요. 주방 안에서는 안 돼요!"
개방의 열 명의 장로들은 이 대내오주들이 무엇 때문에 자기네들과 싸우려 드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들은 어이가 없어 코웃음만 쳤다.
사실 대내오주들은 홍안루 주방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이곳이 자기네가 싸우기에는 아주 유리한 곳이라는 걸 대뜸 파악하고 속으로 흐뭇해 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거추장스럽게 보일 항아리들과 솥들, 그리고 사발, 병, 주걱 등은 그들 대내오주들한테는 극히 유용한 무기이자 방호물이었다. 항시 황궁 안 어선방에서 일하며 무예를 연마한 그들이라 이런 주방의 물건들을 싸움에 쓰는데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익숙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한편 천하 제일 큰 방( )으로 우쭐대는 개방의 장로들은 대내오주들이 앞을 가로막자 부아가 치밀대로 치밀었다.
10대 장로들 중 금의파인 부귀산인(富貴散人) 범장천(範長天)이 결국 앞으로 한 발 나서며 소리쳤다.
"대내오주들이 우리와 한번 해 보자는데 이런 기쁜 일이 있나? 잔말 말고 끝까지 상대를 해 줘야지."
범 장로의 말에 일점지 나장태도 코웃음을 치며 대내오주를 비웃었다.
"황제의 앞잡이질 하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지만 황제를 옷 입혀 주고 밥상 챙겨 주는 따위의 시중드는 짓은 더욱 수치스럽지. 황제에게 옷 입혀 주는 짓을 하는 태감도 개이지만 황제에게 밥해 주는 부엌데기들도 개란 말이야."
그는 말을 마치고는 한바탕 큰소리로 웃어젖혔다.
그 바람에 대내오주들도 몹시 화가 났다. 묘수인주가 동료들에게 말했다.
"여보게들, 우리 한번 이 개방 장로들과 무예를 겨루어 보세. 그러면 새로운 술수 몇 개를 배워 낼지 어찌 아나? 소씨 거렁뱅이네 동료들과 겨루어 본다는 것도 영광이라 해야겠지."
대내오주들도 개방 10대 장로들과 마찬가지로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미들이라 두 패거리가 어울려 싸움이 벌어지자 역시 보통 싸움이 아니었다.
주루 주인은 홍안루 주방이 수라장이 된다고 아우성을 쳤다. 하지만 그 두 패 가운데 어느 누구도 들은 척하는 사람이 없었다.
나 장로가 먼저 뛰쳐나가며 일지칭 평오야의 얼굴을 겨냥하여 한 주먹 갈겼다. 평오야도 급히 주먹을 피하며 나 장로의 요해처를 겨누고 주먹질을 했다.
한편 청한자자(淸閑慈者) 노명성(魯名聲)은 공연히 신명이 났다. 그는 남이 싸우는 것만 봐도 공연히 좋아서 싱글벙글하는 사람이었다.
"자, 가만들 있어요. 나 혼자 저 놈을 해치우겠소."
청한자자 노명성은 천도만과 과이야에게 덤벼들어 그의 가슴을 겨냥하여 일장을 갈겼다.
"이 놈이 죽고 싶어 환장했나?"
과이야가 소리치며 노명성의 태양혈을 갈겼다. 그러자 노명성이 또 과이야의 옆구리를 한 장 내질렀다.
홍안루 주방 안은 한동안 대혼잡을 이루었다.
묘대야는 노기가 잔뜩 긴 얼굴로 소리쳤다.
"개방 장로들은 눈을 똑바로 뜨고 보거라! 우리 대내오주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보이느냐? 어디 우리 대내오주의 주먹맛을 좀 봐라!"
그는 냅다 금의파 장로인 사개(蛇 ) 정원(程遠)과 옥면검객(玉面劍客) 호심(胡心)을 들이쳤다.
어지러운 혼전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쌍방은 좀처럼 승부가 날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한 가지 점점 분명해지는 것은, 싸움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대내오주네 편이 더 득세해 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홍안루 주방 안에 있는 솥과 항아리 등은 대내오주에게는 아주 유용한 기물이 되었다. 그들은 그것을 들어 병장기로 쓰기도 하고 그것을 방어물로 삼거나 상대방을 막는 장애물로 삼으면서 마치 자기네 주방 안에서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여 다니며 편안하게 싸울 수가 있었
다. 그러나 개방 장로들은 이런 주방 안에서 싸우는 것이 여간 불리하지 않았다.
부귀산인 범장천은 한참이나 싸우다가 비로소 자기네가 몰리는 원인을 깨닫게 되었다.
"개방 형제들! 우리 시원하게 넓은 데 나가 싸웁시다. 자, 나가자!"
범 장로가 소리쳤다.
"좋소. 나가 싸웁시다!"
범 장로의 뜻을 알아차린 개방 장로들이 소리쳤다. 그들은 대내오주의 의견은 묻지도 않고 당장 홍안루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봐, 대내오주들! 어서 나와! 왜 못 나오나? 여기 넓은 데 나와 싸우는 게 영웅이다. 몇백 번을 싸워도 우린 겁나지 않아!"
개방 장로들은 밖에서 입을 모아 소리쳐 댔다.
그러나 대내오주는 대답이 없었다.
대내오주는 일제히 누각에 올라 술상을 마주하고 앉아서 느긋하게 주인을 부르고 있었다.
"주인장! 어서 술과 안주를 푸짐히 챙겨 와! 아쉽게도 소씨 거렁뱅이의 강산이개를 못 먹게 되었구나. 거 참 아쉬운데?"
묘대야의 말에 대내오주들은 모두 한바탕 웃어젖혔다.
한참을 웃어대던 대내오주들은 이 재수 사나운 홍안루 누각에 괴상한 손님이 또 하나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손님은 대내오주들은 거들떠보지도 알고 혼자서 술만 마시고 있었는데 여자처럼 유난히 매끄럽고 깨끗한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길래 이렇듯 혼잡스런 홍안루에 앉아서 덤덤히 술만 마시고 있는지, 귀머거리나 소경이 아니고서야 어찌 그럴 수가 있는지 암만 봐도 이상했다.
묘수인주 묘대야는 그 섬섬옥수 같은 손이 술잔을 들어 소리도 없이 잔을 비워 내는 것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묘대야는 자기네 패거리 넷을 한번 돌아다보고는 그 객이 있는 탁자로 건너갔다. 객은 그런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직 술잔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째 혼자서 술을 마시오? 자작 술이 재미가 없을 텐데 우리 함께 한잔 하시겠소?"
묘대야가 말을 걸었다.
"왜요? 왜 함께 마시자는 거요?"
객은 쌀쌀히 되물었다.
묘대야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자기 딴에는 호의로 청한 것인데 이렇듯 무례한 태도를 보일 수가 있는가 싶었다. 하지만 묘대야는 금방 웃음을 지으며 또 말을 걸었다.
"아하, 공자는 이 홍안루에 술 마시러 온 것이 아니라 구경을 온 것 같구만."
객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겠다는 듯이 거들떠보지도 않고 묵묵히 술잔을 기울였다. 묘대야는 이 젊은이가 범상한 인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보면 볼수록 이 젊은 공자의 외모가 놀라웠다. 마치 여자와도 같은 갸름한 얼굴에 섬세한 이목구비가 절대가인 뺨치게 아름다웠다. 묘대야는 자기도 모르게 크게 웃으며 감탄했다.
"공자님은 정말 인물이네. 아쉽게도 사내이니 그렇지 여인으로 태어났으면 궁녀로 선발되어 나랏님 시중을 들었을 거야."
묘대야는 악의 없이 그저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그는 오랜 세월 궁중에서 살아온 탓으로 언제나 매사를 궁중의 생활과 연관시켜 생각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나 젊은이는 묘대야의 말에 발끈 성을 내며 손에 쥐었던 젓가락 한 쌍을 딱 분질러 버렸다. 그가 차디차게 웃으며 비꼬았다.
"그래 당신이 궁중에 있는 황제요?"
묘대야는 은근히 화가 났지만 어쩐지 이 젊은이가 귀엽게도 생각되어 은근한 눈길로 한동안 바라보았다.
'이 친구를 집에 데려가면 아주 재미있겠는데?'
그는 이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내 말을 기분 나쁘게 생각지 마시오. 우리 비록 오다가다 만난 사람들이지만 어쩐지 일면이 여구한 생각이 자꾸만 들어 공자와 벗으로 사귀었으면 해서 한 말이오."
그러나 그 공자는 여전히 묘대야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품에서 작은 부채 하나를 꺼내어 부채질만 하다가 문득 물었다.
"왜 나하고 벗을 하자는 거요?"
"공자를 보니 범상한 인물이 아닌 인중용봉(人中龍鳳)이어서 벗 삼으면 좋을 것 같아 그러지요."
묘대야가 그럴듯하게 대꾸하였다.
대내오주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이 묘대야는 남달리 남자들과 그 짓 하기를 즐기는 인간이었다. 그래서 걸핏하면 궁내에 있는 어린 태감들을 불러들여 그런 짓을 하곤 했는데 언제나 큰 만족은 못 느끼던 터였다. 그런데 오늘 그는 궁 밖에서 이렇듯 젊고 예쁘장하게 생긴 젊은이를 보게 된 것이다. 이에 혹한 묘대야는 자기가 누구인지도 잊고 젊은이를 궁중의 어린 태감 다루듯 하려 했다.
그러나 생각 밖으로 공자는 만만치 않았다. 그는 얼굴이 빨개서 묘대야를 노려보다가 툭 쏘아붙였다.
"우리가 언제 봤다고 이렇게 지분거리는 거요? 계속 이러면 나도 참고 있지마는 않을 거요!"
"공자가 뭐라고 해도 난 괜찮소. 하지만 그렇게 화를 내는 건 몸에 해로우니 조심하시오."
묘대야가 능글맞은 웃음을 입가에 매달았다. 묘대야는 이 젊은이에겐 말 그대로 홀딱 반하여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젊은이가 더 말이 없자 묘대야는 내심 기뻤다. 그는 젊은이가 당장이라도 칼을 때들고 달려들지 않는 것이 그도 자기를 좋아하는 것이라고 단정지었다.
묘대야는 젊은이에게 은근히 말했다.
"난 공자를 보자 첫눈에 마음이 들었소. 나하고 함께 가지 않겠소? 나와 저 사람들은 아주 넓은 집에서 사오. 가 보면 알겠지만 천하에 그렇게 좋은 집은 없을 거요."
"그럼 황궁에서 산단 말이겠군요?"
젊은이가 놀리듯 말했다.
"맞았네, 맞았어. 우린 정말 황궁에서 산다오. 공자는 과연 눈썰미가 있군."
한편 다른 넷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빙그레 웃기만 했다. 모두들 묘수인주 묘대야의 속내를 짐작하고는 개탄하고 있었다. 무공만을 보면 천하 부러울 게 없는 묘수인주이건만 잘생긴 남자만 보면 혹해서 꼼짝을 못하는 것이 한심하기도 하고 딱하기도 했다.
"이보오, 공자. 그 술잔을 비우면 내가 또 한잔 따를 테니 우리 두 잔씩 곱들이 술을 마시는 게 어떻겠소?"
묘수인주가 다시 추근대자 젊은이는 갑자기 크게 웃더니 물었다.
"대체 당신은 누군데 나하고 맞잔을 하자는 거요?"
젊은이가 얼굴에 웃음을 띄우자 묘대야의 얼굴에도 희색이 만면해졌다.
"나 말이오? 나는 묘대라고 하는데 황궁의 일을 보는 사람이오."
"그래 황궁에서 벼슬한단 말이시오?"
젊은이가 또 물었다.
다른 넷은 묘대야가 도대체 뭐라고 대답할지 궁금해 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나는 묘대야라고도 하는데, 본명은 묘무인(妙無仁)이오. 황궁 안에서 벼슬은 하오만 이 벼슬은 다른 벼슬과 다르오. 궁내에서 탐관들을 없애는 일을 하기에 여느 때는 황궁 밖을 나와 보지 못하다가 오늘 모처럼 나와 공자님을 만나게 되니 아주 기쁘오."
묘대야의 말에 젊은이는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
"여느 때 황궁 밖을 나오지 못했다니 그게 무슨 벼슬이오? 그렇다면 궁중에서 일하는 거…… 거 뭔가……."
이 젊은이가 자기를 태감으로 오인하고 있다는 생각에 묘수인주는 어이없어 크게 웃었다.
"이런, 그런 오해는 하지도 마시오. 내가 궁내에서 일하는 건 사실이지만 내궁(內宮)이 아니라 외사방에서 일하는 사람이오. 내궁에서 일하는 것들이 태감이고."
다른 넷은 그 말에 키득키득 웃었다.
어째서인지 사람들은 묘수인주를 태감으로 보는 일이 많았다. 묘수인주 묘대야의 목소리가 양기 부족한 남자들처럼 앵앵거려서 그런 모양이었다.
"그럼 노형의 관직은 몇 품이시오?"
젊은이가 물었다. 다른 넷은 또 묘대야가 뭐라고 대답하나 보자고 웃음을 머금으며 쳐다보았다.
"공자, 솔직히 말해서 내 벼슬은 크지도 작지도 않고 그저 일품(一品)밖에 못 되오. 일품 벼슬이 조정에서는 얼마나 큰 벼슬인지 알겠지?"
묘대야의 대책 없는 거짓말에 네 사람은 하나같이 놀랐다. 그러나 한편으론 묘대야의 말재주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묘대야가 일품이라고 말한 것은 사실 전혀 근거 없는 것도 아니었다. 품(品)자는 품감(品鑒)·품미(品味)·품평(品評) 등에서처럼 맛을 감별한다는 의미로도 쓰인다. 그런데 황제의 수라를 제일 먼저 맛을 보는 사람이 다름아닌 묘대야이니 그런 의미에서 일품이라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시 말하면 묘대야가 말하는 일품은 벼슬 등급을
말함이 아니라 황궁 내에서 황제의 어선(御膳)을 제일 먼저 맛본다는 것이었다.
젊은이는 물론 그것을 알 리가 없었다. 그는 묘대야에게 가볍게 읍을 하고는 말했다.
"그렇다면 노형은 고관대작이시구려. 이거 실례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투가 썩 공손한 것은 아니었다.
묘수인주 묘대야는 우쭐해져서 말했다.
"내 비록 일품 벼슬을 하고 있지만 공자의 인물이 하도 비범하고 용봉의 자태라, 공자와 결의를 맺고자 하는데 공자의 의향은 어떠시오?"
"형님 의사가 그렇다면 동생이야 마다할 까닭이 없지요. 하지만 저분들의 뜻이 어떨지 모르겠군요."
묘대야가 가슴을 툭 치며 말했다.
"아우, 그건 걱정 말라구. 저 사람들은 높은 관리도 아니야. 비록 나와 같이 다니기는 하지만 실은 모두 내 하속들이지. 나와 함께 궁 밖을 나다니자니 남의 이목을 생각해서 그냥 급이 비슷한 것처럼 행동할 뿐이야."
묘대야는 이 젊은이가 어느 고관의 자제로 집 안에만 갇혀 지내느라 강호엔 다녀 본 적이 없어 견식이 얕은 자라고 판단했다. 그러니 자기 같은 고관대작이 결의를 맺자니 자연 기쁘게 생각하는 거라고 여겼다. 이런 생각에 우쭐해진 묘대야는 다른 넷에게 눈까지 껌벅거려 보였다.
일지칭 평오야는 묘대야의 수작을 지켜 보면서 옆사람에게 수군거렸다.
"잘못하면 저 형님이 저 녀석한테 당하겠어. 저 녀석이 아무것도 모르는 체하지만 바보는 아니오. 지금 저 형님을 해칠 궁리를 하고 있을지 모르니까 아무래도 조심하는 게 상책인 것 같소."
"어느 놈이 감히 우리 대내오주를 건드려? 담이 도대체 얼마나 크기에?"
천도만과 과이야가 발끈하자, 백수십권 우사야가 손사래를 쳤다.
"다섯째 아우, 맏형 일을 너무 상관 말게. 반드레하게 생긴 남자만 보면 저러는 게 어디 어제 오늘 일인가? 자네가 걸려 들지 않은 걸 다행으로나 알고 있게."
그 말에 평오야는 입을 다물었다. 넷째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던 것이다. 묘대야가 남을 해치건 말건 무슨 상관이겠는가. 대내오주들 사이에서만 그런 일이 없으면 그만 아니겠는가?
묘대야는 또 앞의 젊은이를 향해 지껄여 댔다.
"아우는 이름이 뭔가? 이 형도 좀 알아야잖겠나?"
"미립(米粒)이라고 합니다."
젊은이는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미력? 좋아, 그 이름 참 좋네. 쌀 미(米)에 힘 력(力)이겠지?"
"아니, 미립이라니까요? 쌀 미(米)에 낱알 립(粒), 미립입니다. 어떻습니까, 이 이름이?"
젊은이가 싱글싱글 웃었다.
묘대야는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좋아, 그 이름도 멋져! 미립이라, 한 알의 쌀, 쌀 한 알이라도 소중하거든."
"우스운 이름이죠 뭐. 제가 어렸을 때 할머니께서 절 그렇게 부르곤 했는데 나중엔 그게 그대로 이름이 되어 버렸답니다. 내겐 또 다른 이름이 있는데, 뭔지 아십니까?"
묘대야는 고개를 저었다.
"몰라. 그건 몰라도 괜찮아. 아우의 이름 하나만 알면 됐지 둘까지 알 필요는 없거든. 미립이라는 이름만 알면 돼. 이제부터 내가 미립 아우라고 부르겠으니 자넨 날 묘대 형님으로 부르게. 어떤가?"
그러자 젊은이는 일어서서 묘대야에게 읍하였다.
"묘대 형님!"
묘대야도 기뻐하며 일어서서 마주 불렀다.
"미립 아우!"
둘은 서로 읍하고 다시 마주앉았다.
"미립 아우는 여긴 어쩐 일로 오게 됐나?"
"솔직히 말씀 올리면, 여기 홍안루에 고수 한 분이 강산이개인지 뭔지 하는 명요리를 한다기에 그 맛을 좀 볼까 해서 찾아왔지요. 그런데 누각에 오르니 주방에서 난장판이 벌어졌더군요. 심부름꾼에게 물어서야 일이 난 줄 알았지요. 그러나 주루에 온 이상, 강산이개를 못 먹으면 본성난개라도 먹고 가자 싶어 이렇게 앉아 있던 참입니다."
젊은이는 말을 마치며 크게 웃었다. 그러자 젊은이의 양볼에 예쁜 보조개가 곱게 패었다.
묘대야는 눈을 더욱 커다랗게 떴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남자가 또 있을까? 그는 미립의 웃는 얼굴을 바라만 보고 있어도 오금이 저리고 황홀해졌다. 이런 미남을 밀우(密友)로 삼아 같이 살 수 있으면 평생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하여튼 난 아우의 그 성격이 참 마음에 드네."
묘대야가 웃으며 말했다.
둘은 다른 넷은 상관치 않고 그저 웃고 떠들었다.
"다섯째야, 형님에게 가서 그만 돌아가지 않겠느냐고 물어 봐라. 하인인 것처럼 가장하고."
둘째 과이야가 언짢은 기색으로 다섯째에게 일렀다.
다섯째인 일지칭 평오야는 묘대야에게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는 아주 공손한 태도로 굽신 절을 하고는 물었다.
"나으리, 그만 입궐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지칭 평오야의 마음을 읽은 묘대야는 짐짓 거드름을 피우며 고관답게 헛기침을 섞어 대답했다.
"난 이 미립 아우와 재미나는 얘기를 좀더 해야겠으니, 너희들은 먼저 돌아가 기다리거라."
일지칭 평오야는 더는 말하지 않고 묘대야에게 또 한 번 굽신하고는 자리로 돌아왔다.
"나으리께선 우리들더러 먼저 객점에 돌아가 기다리랍니다. 나으리께선 좀 있다가 오시겠답니다."
그 말에 나머지 셋은 두말없이 일지칭 평오야와 함께 자리를 떴다.
묘대야는 보면 볼수록 미립이 마음에 들었다.
'이 애가 아무리 봐도 명문 거족의 자제는 아닌 것 같아. 명문 거족의 자제라면 이름을 미립이라 지을 수는 없지. 어쨌든 이렇게 만난 것도 행운인데 한번 단단히 재미를 봐야겠어.'
묘대야는 음심(淫心)이 크게 동하였다.
"미립 아무, 우리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함께 서사(書肆)에나 가 보지 않으려나?"
"그럽시다. 형님께서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지요."
미립은 선선히 동의해 나섰다.
둘은 어느 한 서사(書肆 ; 옛말하는 곳)에 이르렀다.
당시 남송 때는 이렇게 옛말을 하는 곳들이 도처에 많았다. 여러 가지 원인으로 그 당시의 일들은 이야기하지 못하고 오로지 송나라 개국 당시의 영웅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그 옛말은 또 당시 사람들의 민심을 말해 주기도 하여 적지 않은 공감을 일으키곤 했다. 청중들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기뻐서 웃기도 하고 안타까워 주먹을 쥐기도 하고 아쉬워서 탄식하기도 했다. 물론 이런 사람들은 국가의 흥망을 걱정하고 있는 열혈의 사람들이었다.
그런가 하면 다른 유형의 서사도 있었으니 여기서는 나라야 망하든 흥하든 상관하지 않고 오로지 남녀간의 곡절과 경난만을 이야기하며 치마가 술에 흠뻑 젖도록 온 밤을 술주정으로 새는 향락의 장소였다. '망국의 원한을 모르는 상녀(商女)는 강 건너 바라보며 꽃들만 노래하네'라는 당나라 때 시구가 말하듯이, 망우지락(忘擾之樂)을 즐기면서 남자들은 환락에, 여인들은 매춘에 밤 가는 줄 모르는 곳이었다.
이런 서사에 들어서면 그 안은 여느 서사들과 다름을 첫눈에 알 수가 있다. 집 안 정면에는 자그마한 서대(書臺 ; 이야기하는 사람이 앉는 단)가 만들어져 있고 그 위에는 탁자가 하나 있는데 탁자 위에는 이야기꾼의 필수품인 경목( 木), 접부채, 필척(筆尺)이 놓여 있다. 그리고 서대 아래에는 쌍방이 앉는 탁자들이 있는데 어떤 것은 원탁이다. 이야기꾼은 한 사람이 아니라 늘 둘이 나와서 흉내를 내어 말하는데 그 동작이 아주 구체적이다. 집 안은 사치하게 꾸며져서
일반인들은 들어오지 못하고 돈 많은 부잣집 공자들이 기관(妓館)의 명기들을 데리고 와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나 창극을 들으면서 재미를 보곤 한다.
묘대야는 미립을 데리고 이런 서사를 찾아갔다. 서사는 부잣집 공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묘대야는 궁내의 요리사로는 이름이 있었지만 궁 밖에 나서서는 그런 위풍이 없어졌다. 묘대야는 내심 부끄러운 생각도 없지 않아 한쪽 구석에 있는 탁자를 찾아 미립과 함께 앉았다. 경성 임안의 공자들이 명기들을 데리고 치근덕거리는 걸 보자 묘대야의 속은 더욱 근질거렸다.
'이렇게 여기까지 와서도 미립이 내 뜻을 모르지야 않겠지. 만일 내 마음을 모르고 있다면 내가 공연한 짓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미립은 이런 장소가 처음이었다. 서사에 모인 사람들을 둘러보던 미립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사내건 여자건 할 것 없이 방탕하고 천박하게 구는 것이 전부 눈에 거슬리고 귀에 거슬렸다.
"묘대 형님, 여긴 왜 온 겁니까? 정말 한심하군요. 여기 온 사람들은 모두 밥 먹고 하릴없는 사람들 같습니다. 사내나 계집이나 전부 싱거운 소리들만 하고 있으니, 도대체 여긴 뭐하는 뎁니까?"
'오라, 이 녀석이 아직 세상 물정을 통 모르는 햇병아리구나.'
이런 생각이 든 묘대야는 히죽 웃었다.
"서울 임안에서 제일 좋은 곳이지. '서호에서 달을 보고 완계(浣溪)에서 벼랑을 보고 서사에서 이야기를 듣고 작은 누각을 사서 별실을 앉힌다…….' 이런 말 못 들어 봤나? 이게 무슨 말인지 아나?"
"모릅니다. 형님은 아십니까?"
미립이 천진하게 물었다.
"나야 알지. 서호에서 달구경을 한다는 거야 알겠지? 달구경은 서호가 제일인데 달이 둥글면 웃고 달이 이지러지면 눈물을 흘리는 게 감정이 풍부한 문객들의 즐거움이지. 완계에서 벼랑을 본다는 것도 멋진 일인데, 완계라는 곳에 큰 산이 있고 그 산에는 높고 가파른 절벽이 있는데 개인 날 궂은 날 그 모습이 각각 다르단 말이야. 그래 '완계에 올라 보는 산 모습은 궂은 날과 개인 날이 판이하도다'라는 옛 시인의 시구도 있지. 그리고 '서사에서 이야기 듣는다'는 말
이 가리키는 서사는 여느 서사가 아니야. 여느 서사에는 창과 칼로 맞부닥치고 전쟁터 이야기나 일삼는데 재미가 그리 없지. 창과 칼을 써 사람을 죽여 본 사람이 들으면 이건 정말 아이들 장난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단 말일세. 그런데 오늘 우리가 온 이런 서사는 보통 서사와는 아주 달라. 이런 서사를 눈물의 서사라고 하는데,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사전에 수건을 네댓 개 마련해 들어와야 하고 돌아갈 때면 하도 울어서 눈들이 퉁퉁 부어 가지. '누각을 사고 별실을 앉
힌다'는 것은 남래북왕하는 강남의 상고(商賈)들이 여기 임안에다가 작은 누각을 사서 거기다 예쁜 계집을 첩으로 앉힌다는 말이야. 사람들은 이 네 가지를 임안 사경(四景)이라고도 하는데 아우는 들어 본 적이 없는 모양이지?"
"전 처음입니다. 하여튼 형님은 견식이 넓군요."
미립이 살짝 횐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었다.
이때였다. 서대로 남녀 두 사람이 좌우로부터 걸어 나왔다. 왼편에선 미끈하게 차린 사나이가 나왔고 오른편에서는 화려하게 단장한 미녀가 나왔다. 서대에 나선 사나이는 남색 옷에 눈같이 횐 사백(絲 )을 수놓아 입었고 여인은 옆이 찢어진 치마에 향건(香巾)을 달고 있었다. 둘은 탁자까지 걸어오더니 서로 경당목부터 쥐려고 했다.
"'사내가 경당목을 두드리면 여자는 놀란다'는 말을 모르나? 그래 내가 두드릴 줄 몰라 이녁이 두드리겠다는 건가?"
사내가 이렇게 말하자 여자는 호들갑스럽게 웃더니 대꾸했다.
"남정네들만 두드리란 법이 있나요? 여자들도 한번 두드려 봐야죠?"
"안 돼. 여자들이란 한 번 두드려 보면 두 번 두드려 보고 싶어하고 두 번 두드려 보면 세 번 두드려 보고 싶어한단 말이오. 그러면 계속 여자만 두드리는 게 되잖아?"
"아이고, 여자들만 두드리면 어때요? 나쁠 게 없잖아요?"
"좋을 게 뭐요? 천하 남자들은 다 뭘 하게 밤낮 여자들더러 두드리라고만 하겠어?"
"잘한다!"
"잘한다!"
청중들이 환성을 올렸다. 그러자 사나이는 좋다고 히히 웃으면서 여인의 머리를 툭툭 쳤다.
"들었지? 저분들이 괜히 갈채를 보내겠어?"
"묘대 형님, 왜들 저렇게 좋아들 하죠? 그 말이 뭐 그렇게 재미있다고 저러지? 묘대 형님은 아십니까?"
미립이 묘대야에게 물었다.
사실 묘대야도 청중들이 왜 환성을 올리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웃으니 자기도 덩달아 웃었을 뿐이었다.
"묘대 형님, 왜 말이 없으십니까? 저 사람들이 도대체 왜 저렇게 좋아하죠? 난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되는군요."
미립이 다시 물었다.
"남들이 웃으면 그냥 따라 웃으면 돼. 남들이 울면 아마도 이건 슬픈 대목인가 부다 하고 따라 울면 되는 거고, 남들이 '좋다!' 환성을 지르면 아우도 환성을 지르면 되는 거야. 이런 데 왔으면 이런 상식쯤은 가지고 있어야 하는 거야. 알겠나?"
묘대야의 말에 미립은 여전히 납득이 안 가는 얼굴로 머리만 끄덕였다.
이야기꾼들은 한창 달콤한 사랑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사나이가 떠나가니 여인은 집에서 남편이 그리워 눈물을 흘리는데 꿈속에 그 남편이 나타났다, 그래서 그 남편과 재미를 실컷 보고 나니 안정이 되었다, 대개 이런 이야기인데 서대 위의 남녀들은 동작들을 해 가며 노래도 하고 사설도 하였다. 청중들은 연달아 갈채를 보내며 환성을 올렸다. 그러자 묘대야도 덩달아 환성을 올리며 은자 두 냥을 꺼내어 서대에 던져 올렸다. 서대 위의 남녀는 우스갯 소리와 농짓
거리를 하며 점점 정이 무르익어 가더니 마침내는 음란한 동작까지 해 보이기 시작했다. 미립은 그만 얼굴이 달아오르고 가슴이 뛰어 눈을 꽉 감고 외면했다.
한편 묘대야는 음심이 동하여 미립을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아우, 저걸 봐. 얼마나 보기 좋은가? 저렇게 살아야 하는 거야. 우리처럼 이렇게 맹물처럼 아무 맛도 없이 살아서야 무슨 재미가 있겠나?"
묘대야에게 안긴 미립은 가슴이 쿵쿵 뛰어 꼼짝도 못한 채 묘대야에게 말했다.
"우린 남녀지간도 아닌데 왜 이러십니까? 이러다가 형수님이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구요?"
처녀처럼 수줍어하는 미립을 보자 묘대야는 더욱 안달이 났다.
'내가 그간 수많은 사내 놈들을 데리고 자 봤지만 이 애한테 비하면 모두 아무것도 아니야. 내 오늘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애를 집에 데리고 가서 흠뻑 취하게 만들어 놓고 단단히 재미를 봐야겠다.'
미립은 자기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묘대야의 눈길에 그만 고개를 푹 숙였다.
"이봐, 아우. 이만하면 구경도 할 만큼 했고 이야기도 실컷 들었으니 이젠 나하고 같이 우리 집에나 가 보지 않겠나?"
묘대야가 속삭이듯 말했다.
"묘대 형님, 그건 좀 어렵겠는데요. 댁에 가기 싫어서가 아니라 볼일이 있어 그럽니다. 볼일을 마치고 나면 형님을 찾아가겠습니다."
그 말에 묘수인주 묘대야가 빙그레 웃었다.
"아우, 이렇게 만나기가 어디 쉬운가?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이렇게 만난 날이 좋은 날인 줄 알게. 이렇게 반갑게 만나서 어떻게 말 몇 마디만 나누고 헤어지겠는가? 그러면 이 형 되는 사람이 얼마나 서운해 할지 자낸 모를 거야. 그러지 말고 내 말대로 하게. 우리 며칠 마음놓고 푹 쉬며 함께 놀자구, 응?"
미립은 한참 망설이다가 하는 수 없이 그러자고 대답했다. 미립이 자기를 따라가겠다고 하자 묘수인주 묘대야는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서사를 나갔다.
두 사람은 마차를 불러 타고 묘대야네 집으로 향했다.
경성의 한낱 요리사에 불과한 묘대야이지만 그는 다른 요리사와는 달랐다. 황제에게 어선을 대접하는 요리사일 뿐만 아니라 또 공로가 적지 않아 황제의 신임을 받고 있는 황궁 대내(大內) 어선방에서 첫손 꼽히는 요리사였다.
마차가 대저택 앞에 멎자 미립은 그 엄청난 규모에 내심 놀라지 앉을 수 없었다.
묘대야가 마차에서 내리자 대문 어귀에 서 있던 하인들이 얼굴에 웃음을 띄우며 굽실거렸다.
"이제 오십니까, 나으리?"
문지기 둘이 앞으로 나섰다. 하나는 뚱보이고 하나는 늙은이인데, 뚱보가 웃으며 아뢰었다.
"나으리, 얼마 전에 한 사람이 청첩장 하나를 들고 왔는뎁쇼, 꼭 나으리께 전해 드리라고 신신당부하더군요.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사오나 나으리가 보시면 자연 아신다고 하며 가 버렸습니다요."
"으흠, 그래?"
묘대야는 청첩장을 받아 펼쳐 보았다.
미립은 한편으로 비켜섰다. 강호문파(江湖門派)들은 자기들의 일을 남이 아는 것을 제일 꺼려 한다. 내막을 남이 알면 큰 화를 입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을 잘 알고 있는 미립은 한편으로 비켜서서 창문에 아로새긴 무늬를 훑어보는 척했다.
묘대야는 보내 온 청첩장을 훑어보더니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그것을 소매 속에 찔러 넣고는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누가 이 편지를 받았지?"
"여럿이 있는 데서 받았는뎁쇼. 그 사내는 그저 자기는 철장방 사람이란 말만 하더군요. 자기는 방주의 영을 받들고 왔으니 부디 묘대야 나으리께서 와 달라고, 오시면 자연히 알게 될 거라고만 했습니다요."
뚱보가 굽신거리며 대답했다.
"알았다. 내 한번 가 보지. 그만 물러들 가게."
묘대야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사람들이 모두 아래층으로 내려가 버리자 묘대야는 창문께에 서 있는 미립을 불렀다.
"미렵 아우, 우린 친구고 형제지. 비록 오늘에야 만났지만 일면이 여구하여 생사지교(生死之交)를 맺었으니까. 그런데 참 아쉽게 됐군. 오늘 밤 난 극히 위험한 데를 가 봐야 하네. 상대방은 강호에서 이름이 대단히 높은 자이지. 내가 그자를 이길 수는 없을 성 싶어. 그러니 자네는 이 물건을 가지고 어서 여기를 뜨게나."
묘대야는 궤짝 안에서 보따리 하나를 꺼냈다. 겉만 보아도 보통 물건이 아닌 금은수식 따위의 재물인 것 같았다. 은자로 하면 10만 냥이 될지 20만 냥이 될지 모를 일이었다.
"묘대 형님, 이러지 마십시오. 난 형님 대신 은자를 보관하긴 싫습니다. 형님네 은자는 형님이 갖고 계십시오."
미립은 탐탁치 않은 듯 묘대야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아우, 수고스럽지만 좀 보관해 갖고 있게. 앞으로 내가 무사하면 우리들이 다시 만날 일이 꼭 있을걸세. 내가 살아만 있으면야 천애지각을 가서라도 자네를 찾을 거고, 혹시라도 내가 잘못되면 이 재물은 내가 아우에게 주는 선물이라 생각하게."
"내 짐작이 틀리는지 모르겠지만, 형님이 아마 철장방과 무슨 척진 일이 있는 것 같은데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글쎄 시말을 다 말하려면 길어지네만, 옛날에 나와 몇이 강호를 떠돌아다닐 적에, 어느 하루 여럿이 싸우는 걸 보고 끼여들었다가 그만 철장방과 척을 지게 되었지. 그런데 철장방의 새로운 방주인 구천인( 千 )이 올라와서 과거에 철장방과 척진 사람을 하나하나 해치운다는구만. 그러니 나도 그 놈들의 손아귀를 벗어나긴 어려울 성싶네."
그 말에 미립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나 참, 형님은 강호에서 그렇게 굴러 먹었다면서 철장방이 어떤지 모르고, 구천인이 어떤지도 모르고 철장방 방주 구천인과 척을 졌단 말이시오? 구천인과 원수를 졌으니 이젠 구천인 손에 죽게 된 것 같소."
묘대야는 지금 미립과 긴말하고 있을 경황이 아니었다.
"아우, 아우와 재미나게 많은 얘기를 나누려고 했는데 오늘은 다 글렀네. 오늘 밤으로 아우는 속히 이곳을 떠나게. 공연히 있다가 봉변당하지 말고."
"형님은 벌써 구천인을 만나기도 전에 혼백이 다 달아난 사람 같습니다. 구천인이 그렇게 겁납니까? 손가락 한 번 튕기면 형님이 죽는답디까? 나 원."
미립이 껄껄 웃었다. 묘대야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구천인을 누가 당해 낼 수 있다던가? 듣기에 몇몇 무학대사들은 구천인을 누를 수 있다고 하더라만 난 이 무학대사들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있어. 그러니 내가 구천인을 당해 낼 재간이 있겠는가?"
"형님, 나도 여기 남겠습니다. 형님을 만나겠다는 자가 도대체 어떤 자인지 나도 한번 봐야겠습니다."
미립은 한사코 고집을 부렸다.



제3장 묘수인주의 위기
경성 임안에는 엄청나게 큰 연꽃 늪이 있었다. 해마다 여름이 되면 연꽃의 그윽한 향기가 사람들을 취하게 하고 연꽃밭 사이로 오고가는 원근의 고깃배들로 그 풍경이 기가 막혔다. 이따끔 어부들의 노랫소리도 은은히 들려 오는 평화롭고 고요한 고장이었다.
묘수인주 묘대야가 탄 쪽배가 연꽃 늪을 아무리 저어 가도 철장(鐵掌)을 크게 그린 큰 깃대를 이물에 꽂았다는 철장방의 배를 찾을 수가 없었다.
"철장방이 오지 않은 모양인데? 무슨 다른 일이 생긴 건가? 동생, 우리 돌아가는 게 어떤가?"
묘대야의 말에 미립도 그러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쪽배 하나가 난데없이 나타나더니 눈 깜짝하는 사이에 그들 코앞까지 달려왔다. 배엔 두 사람이 타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노를 젓고 한 사람은 이물에 서서 이쪽을 향해 읍을 하고는 말을 건넸다.
"댁이 대내오주 중의 묘씨 나으리십니까?"
"그렇소. 내가 묘대요."
묘대야가 큰소리로 대답했다.
"저희 방주께서 묘씨 나으리를 늪 서편으로 모셔 들이라는 분부가 계셨습니다. 어서 가시지요."
두 개의 쪽배는 꼬리를 물고 쏜살같이 달려 어느새 늪 가에 당도했다. 미립이 닻줄을 매려고 하자 묘대야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살아 돌아가지 못할 텐데 닻줄을 감아 둘 필요가 뭐 있겠냐는 태도였다.
미립도 그 뜻을 알고 한번. 히죽 웃고는 닻줄을 배 안에 집어 던지고 묘대야의 뒤를 따랐다.
둘은 길잡이의 안내를 받으며 아늑한 수림 속 돌길을 따라 여러 굽이를 돌고 돌아서야 어느 큰 장원에 이르렀다.
"누구냐!"
문지기가 소리쳤다.
"철장은 무적이다."
길잡이가 암호로 대답하니, 장원 대문이 쫙 열리며 사나이 열 몇이 뛰쳐나왔다.
묘대야는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미립을 돌아보며 웃어 보였다.
"아우, 보아하니 이곳이 철장방 소굴인 모양인데 나를 따라 들어갔다간 생사를 가량하기 어려우니 아우는 대문 안에 발을 들여놓지 않는 게 좋겠어. 여기서 기다리게. 한 시간쯤 기다리다 내가 나오지 않으면 아우는 더 기다리지 말고 혼자서 돌아가게나."
미립은 그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묘대야를 따라 장원 안으로 들어갔다.
대문을 들어서니 백여 명이 무예를 조련할 수 있을 만큼 넓은 마당이 있었는데 마당 정면에는 대청이 있었다. 대청에는 30명이 넘는 사나이들이 좌우로 늘어서 있고 중간에 있는 큰 의자 위엔 기껏해야 서른 살쯤 돼 보이는 사나이 하나가 위엄을 부리며 날카로운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낭하에는 활활 타는 불 위에 큰 가마를 걸어 놓았는데 그 가마 안에서는 기름이 펄펄 끓고 있었다.
대청에 앉아 있는 장한은 철장방 방주 구천인이었다.
"그래, 그대가 묘대야인가?"
구천인이 엄하게 물었다.
"그렇소."
묘대야가 대답했다.
구천인은 나이는 많지 않았으나 기색이 하도 엄격하여 일견 무척 겉늙어 보였다. 구천인이 냉랭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내가 철장방 방주 자리를 이어받은 후로 천하의 영웅들이 우리 철장방을 갈수록 공경하고 있다네. 그나저나 자네는 일찍이 우리 사숙한테 죄 지은 바가 있었지? 그걸 청산해 보자고 자네를 불렀네만, 어째 대내오주들이 모두 오지를 않았는가?"
"나 개인의 일인데 우리 형제들이 모두 올 필요가 뭐 있겠소? 나도 철장방과의 여태까지 일을 이번에 마무리 지으러 왔소."
묘대야의 말에 구천인이 큰소리로 웃었다.
"좋네, 좋아. 과연 대내오주의 맏이답군. 내 오늘 그럴 기회를 주지."
구천인은 어깨를 으쓱하며 일어서더니 뒷짐을 지고 가슴을 내밀며 묘대야를 내려다보았다. 확실히 무학 종사다운 기개가 엿보였다.
"묘대, 자네가 사나이라면 어디 우리 철장방과 무공을 겨루어 보세. 만일 내 장(掌) 세 번을 못 견딘다면 자네는 저 기름 가마에 던져져 기름에 튀겨질 걸세."
그는 여기까지 말하고는 목을 젖히고 크게 웃어댔다. 한참 웃어대던 구천인은 갑자기 미립을 향해 물었다.
"너는 또 누구지?"
미립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묘대야가 말했다.
"새로 사귄 내 아우요. 당신네와는 무관한 사람이니 신경 쓸 것 없소. 내가 싸우다가 죽으면 그 소식을 우리 대내오주 아우들에게 전하려고 날 따라온 것뿐이니까."
"아, 그거 좋은 생각이군."
구천인이 말했다.
여러 사람들의 날카로운 눈길이 묘대야에게 던져졌다. 구천인이 묘대야 앞으로 걸어왔다. 묘대야는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코웃음을 쳤다.
"죽음이 두렵지 않나?"
구천인이 물었다.
"구 방주, 듣자니 구 방주는 서역에서 사숙, 사조와 방주 자리를 다투어 이겨서 그 자리에 앉게 되었다더군. 물론 이것은 영광스러운 일일 수도 있겠지만, 사숙과 사조들을 서역에서 몽땅 죽여 버리기까지 했다던데 그게 사실이오?"
묘대야가 비양거렸다.
"모두들 제 입을 가졌은즉 무슨 소리인들 못하겠나? 이 구천인을 죽이지 못해 날뛰는 놈들이 하는 중상과 모략에 난 신경 끊은지 오래야. 난 우리 철장방을 흥하게 하고 철장방의 원수들을 보는 족족 죽여 버리는 것이 이미 고인이 된 그분들에 대한 추모라고 생각하여 내 도리를 다할 뿐이지."
그러더니 구천인은 두 눈을 부릅뜨며 꽥 소리쳤다.
"묘대야! 잔말 말고 내 철장이나 받아라!"
묘대야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당당히 앞으로 나서려 했다. 미립이 얼른 막아 섰다.
"형님, 저 구천인의 별명이 철장수상표라는 걸 아시는지요? 철장공이 대단히 센 사람이지요. 주먹질이나 병장기술을 겨루면 몰라도 절대 구천인의 철장은 건드리지 마십시오. 경공도 겨루지 말고."
묘대야도 이때는 성이 날대로 나 있어서 미립의 그런 권고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는 미립에게 눈을 흘기고는 구천인에게로 다가갔다.
둘은 마주서서 자세들을 낮추면서 기를 모았다. 그러다가 구천인이 먼저 한쪽 손바닥을 천천히 내밀었다.
"묘대, 내 장풍에 지옥 구경 갈라, 조심해!"
그는 손바닥 하나를 마저 내밀었다.
묘대야는 구천인의 검지도 그렇다고 희지도 않은 아주 괴이한 색깔의 손바닥을 보고 은근히 불안해졌다.
'저 철장엔 필시 극독이 있다. 장력을 겨루다가 자칫하여 중독이 되면 큰일나겠어. 무공도 겨루기 전에 구천인의 손바닥에 맞아 중독이 되어 쓰러진다면 그처럼 억울한 일이 또 어딨겠나?'
구천인은 묘대야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독수를 펼쳐 들고 천천히 내리쳤다.
묘대야는 머뭇거릴 경황이 아니었다. 그는 눈을 딱 감으며 하는 수 없이 구천인의 손바닥을 향해 장력을 내보냈다. 구천인의 장은 소리도 없고 힘도 얼마 들이지 않은 것 같았으나 묘대야의 장과 마주치자 엄청난 힘이 밀려왔다. 그 힘이 어찌나 센지 묘대야로서는 감당해 낼 수가 없었다. 묘대야는 자세를 낮추며 운기하여 새로운 행동을 취하려고 해 보았으나 오히려 비틀비틀 뒷걸음질을 치다가 미립에게 부딪쳐 안긴 채 몇 걸음 더 물러나다가 겨우 멈춰 섰다.
묘대야는 가슴속으로부터 뭔가 더운 것이 치밀어 오르는가 싶더니 그대로 토해 내고 말았다.
얼핏 보기에 구천인의 이 장법은 별스럽지 않은 듯하나 사실 대단히 독한 것이었다. 이 장법은 역도(力道)가 단계적으로 늘어나는 장법인데 출장이 절반에 이르면 역도가 배로 커지고 상대방의 손과 마주치는 순간에는 역도가 여섯 배로 늘어나는 것이다. 이 정묘로운 장법을 가리켜 '일파삼질(一波三迭)'이라고 하는데 더러 이 '일파삼질'을 쓰는 사람들이 있지만 구천인처럼 제대로 쓰는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형님, 아이고 형님, 이걸 어쩌나?"
미립이 소리쳤다.
이를 사려물고 있는 묘대야의 입귀에선 뻘건 피가 흘러내렸다.
"이봐 묘대, 자네는 오직 황제 밥이나 해 주면 제격이야. 나하고 겨뤄 보려다간 죽는 길밖에 없다는 걸 몰라? 차라리 네 무공을 없애 버리고 다리를 분질러 내 밥이나 하는 주방장으로 만들어 버리는 게 나한테나 자네한테 모두 좋을 성싶은데, 어떤가?"
구천인이 너털웃음을 웃었다.
묘대야가 다가서며 천천히 말했다.
"아직 두 번 남았소. 이제 두 번 다 내가 지면 그때 가선 나와 철장방 간의 은원을 어떤 식으로든 마무리 지으시오."
묘대야는 죽음을 각오하고 구천인과의 마지막 대결을 결심했다.
구천인은 크게 웃으며 묘대야에게 다가섰다.
"난 쉽게 끝낼 생각은 없어. 내가 세 번 출장해서도 네 목숨이 얼마간 남아 있어야 너를 저 기름 가마에 집어 넣어 튀기지. 그래야만 직성이 풀릴 테니까."
"묘대 형님! 저 철장방의 철장을 이기지 못하겠으면 맞서지 말고 피하래두요!"
미립이 안타깝게 소리쳤다. 묘대야가 구천인을 이기지 못할 바엔 그 장에 맞지 않도록 피하는 게 현명하다는 것이 미립의 생각이었다.
구천인은 빙긋 웃더니 또 한 장 내밀었다. 이번은 좀 전과 아주 다른 장법으로 손을 내미는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묘대야는 구천인이 공격하는 방향을 미처 가늠할 수가 없었다.
묘대야는 구천인 같은 고수들의 고명한 장법을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나름대로 손을 써서 구천인의 철장을 막아 보려 했으나 어느새 구천인의 철장이 어깨를 탁 내리쳤다. 묘대야는 종잇장처럼 떠밀려 맥없이 나동그라졌다.
"형님!"
미립이 소리치며 달려와 묘대야를 부축해 일으켰다. 묘대야는 어깨를 상했음은 물론이고 입으로 피까지 토했다. 그는 구천인을 보며 말했다.
"구 방주, 방주의 철장은 과연 절세무공이오. 탄복하오."
구천인이 빙글거렸다.
"이봐 묘대! 이제 마지막 철장만 받아 낸다면 내 자네를 살려 주겠네. 그렇지 못하면 죽어도 원망 말라구."
미립은 안타까워 싸움을 말리고 싶었으나 그저 두 사람이 마지막까지 싸우는 것을 지켜 보고 있을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구천인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묘대야에게 마지막 철장을 내밀었다. 곁에서 구경하던 철장방 무리들이 갈채를 보냈다.
구천인의 철장이 가슴팍에 다가오는 순간 묘대야는 한숨을 지으며 출장(出掌)하여 구천인의 철장을 막았다.
그들 둘은 모두 오른손을 썼는데 두 손바닥이 마주치자 이번엔 웬일인지 떨어지질 않았다.
"이번엔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아라!"
구천인이 소리쳤다.
묘대야는 젖 먹던 힘까지 모두 짜내며 필사적으로 버렸다. 자기의 힘으론 구천인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항복할 수도 없었다.
"네가 내 사숙을 죽였은즉 그 핏값을 받아 내야겠다."
구천인은 잔인하게 웃으며 팔에 한껏 힘을 주었다. 우지끈 소리가 나면서 묘대야의 견골이 부러지고 이마에선 식은땀이 쫙 흘렀다.
'끝내 구천인의 손에 죽고야 마는구나…….'
묘대야는 속으로 탄식했다.
구천인의 손바닥에서는 여전히 거센 힘이 용솟음쳐 나오며 묘대야를 내리눌렀다. 묘대야는 그 힘을 견디지 못하여 정신이 가물가물해졌다. 이제 구천인이 조금만 더 힘을 주면 그대로 피를 토하며 죽을 것만 같았다.
이때였다. 뜻밖에도 구천인이 손을 떼며 말했다.
"어떤가, 묘대! 이제는 졌지? 항복하는 거지?"
"죽이려거든 어서 죽이시오. 내가 죽으면 철장방과의 은원도 끝이 날테니."
묘대야가 창백한 낮으로 간신히 말했다.
구천인이 소리내어 웃었다.
"대내오주들한테도 이런 용기가 있을 줄은 몰랐는걸? 자네 뜻이 그렇다면 좋다. 여봐라!"
구천인의 부름에 장한들 몇이 달려오더니 묘대야를 붙잡았다.
"묘대의 소원이라니 소원 성취를 시켜 줘라. 어서 기름 가마에 처넣어라!"
"예!"
장한들은 얼른 묘대야를 이끌고 기름 가마로 향한다.
'황궁에서 매일 기름을 만지며 살더니 종내는 이렇게 기름에 튀겨져 죽게 되는구나. 물항아리는 우물 옆에서 깨지고 장수는 전쟁터에서 죽는다더니 내가 그 짝이로구나.'
묘대야는 자신의 신세가 너무도 처량한 생각이 들어 고개를 푹 떨구었다.
한쪽에서 이를 지켜 보고 있던 미립이 애가 타서 소리쳤다.
"구천인! 우리 형님을 죽이지 마시오!"
"묘대는 내 원수다. 죽이든 살리든 그건 내 맘이야. 너도 죽고 싶지 않거든 입 다물고 있어!"
구천인은 다시 한 번 불호령을 했다.
"뭘 꾸물대느냐! 어서 그 놈을 기름솥에 처넣지 않구!"
장한들은 서둘러 묘대야를 기름 가마에 던져 넣기 위해 번쩍 들어올렸다.
미립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여긴 도대체 어디지?'
문득 잠에서 깨어난 미립은 믿기지 않는 듯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는 어느 집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놀랍게도 묘대야가 웃는 낯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형님,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여기가 저승은 아니겠지요?"
미립이 간신히 물었다.
"저승은 무슨 저승? 여긴 임안일세. 이승의 삶도 아직 채 못 살았는데 저승 소리는 왜 하는가?"
"전 도무지 어떻게 된 영문인지……."
그는 묘대야가 기름솥에 처넣어지는 순간 그대로 의식을 잃어 다음 일은 도통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내 차근차근 얘기해 주지."
묘대야가 미소를 띄우며 입을 열었다.
"나를 기름 가마에 처넣으려고 번쩍 드는 순간 아우가 큰소리로 비명을 질렀지. 그런데 그 소리가 얼마나 날카롭던지 철장방 사람들이 모두 놀라 눈이 휘둥그래졌어. 그러자 철장방 방주 구천인이 동생 입을 막기 위해 급히 혈도를 눌러 그대로 혼수상태에 빠져 버린 거야. 그리고 나는 놈들이 놀라 가마 너머로 내던진 바람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거고……."
미립은 묘대야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좀처럼 믿기질 않았다. 그는 잠자코 있다가 다시 물었다.
"형님, 여기가 어디라고요?"
"여기는 객점이야. 내가 아우를 배에 태워 여기까지 데려왔지."
묘대야는 크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
"아우, 아우가 날 좋아하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난 아우가 정말 사랑스럽네. 철장방에 잡혀갔을 때도 아우는 목숨을 내걸고 나를 구해 주려고 하였은즉 이런 고분을 생사지고라고 하지 않겠나?"
"형님은 황궁 대내오주의 우두머리시고 무예도 비범하며 그 몇 형제들과 친형제처럼 지내시잖습니까. 형님과 그 사람들 간의 자별한 사이는 저도 알고 있지요. 그런데 저와 형님의 사이도 그같은 사이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미립을 처음 만났을 때 묘대야가 거짓말을 한 탓으로 미립은 묘대야가 황궁 안의 일품 관리인 줄만 알았었다. 철장방 소굴에 가서야 그는 묘대야가 사실은 황궁 안 대내오주의 우두머리임을 알았다. 그러나 미립은 그것을 별로 개의치 않고 오로지 묘대야와 형제처럼 지내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한편 미립의 입에서 대내오주라는 말이 나오자 묘대야는 내심 민망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우, 그건 모르는 소리네. 그 형제들도 평소엔 그만하면 친하게들 지내지만 생사관두에 이르러야 그 본심들을 알 수 있지 않겠나? 나와 아우는 비록 만난 지는 얼마 안 되지만 생사를 같이할 수 있는 진짜 형제일세. 아우는 나를 따라 생사를 가량키 어려운 철장방 소굴에까지 자청해서 갔으니 그 정을 내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미립은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그런 미립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묘대야가 불쑥 물었다.
"아우, 나하고 형제 결의를 맺지 않겠나?"
미립은 그 말에 얼굴 가득 웃음을 떠올렸다.
"형제 결의요? 좋습니다."
둘은 당장 간단히 예를 올렸다. 하나는 침대 위에서, 하나는 방바닥에서 각기 하늘과 땅을 향해 서약을 한 뒤 각각 세 번씩 맞절을 하였다.
"형님, 이 아우는 이제부터 일생을 형님만 믿고 따르겠습니다."
결의를 맺고 나자 둘은 한결 더 가까워진 것만 같아 서로를 마주보며 흐뭇한 미소를 나누었다.
밤은 조용히 깊어 갔다.
"아우, 오늘은 한 침대에서 같이 자 볼까? 서로 이야기도 하면서, 심심치 않게."
묘대야는 침대로 올라가 미립의 곁에 누우려고 했다.
"안 돼요, 이러지 마십시오. 난 불이 켜 있거나 곁에 사람이 있으면 잠을 자지 못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러니 잠잘 때만큼은 각 방을 썼으면 좋겠습니다."
미립이 급히 소리쳤다.
묘대야는 웃으며 말했다.
"아우, 난 동생이 귀여워 그래. 정말 사랑스럽다니깐. 난 종래로 여인은 멀리하는 사람이지만 남자들은 좋아하거든. 우린 이제 형제지간이 아닌가? 우리가 형제가 아니고 부부라면 내가 나이가 많으니 남편이고 아우는 아내라 할 수 있지."
묘대야의 엉뚱한 소리에 미립은 놀라서 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 한참이나 묘대야를 쳐다보았다.
"형님,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십니까?"
"농담이라니? 내가 할 일이 없어 그런 농담을 할까?"
묘대야의 말엔 어쩐지 날이 선 듯했다.
미립은 묘대야의 소행에 역겨움을 느꼈다.
'홍안루에 앉아 조용히 술 먹는 나에게 접근하여 술을 권하고 또 철장방의 소굴에서 여기까지 배에 태워 온 목적이 원래는 그런 짓을 하자는 것이었구나.'
미립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묘대 형님, 그게 무슨 말입니까? 형님도 남자고 나도 남자인데 어떻게 한 침대에 누워 그런 짓거리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묘대야는 여전히 뻔뻔스럽게 웃으며 사설을 늘어놓았다.
"동생은 뭘 몰라도 한참 몰라. 남자들끼리라고 그런 일이 없는 줄 아나? 전쟁터에 가면 자고로 여자 구경이라곤 하기 어려운 법인데, 어떻게 여자 생각을 참아내는가? 그래 그런 곳에선 인물 고운 남자를 골라 남자끼리라도 욕정을 달래곤 하지. 기실 생각해 보면 이상할 것도 없어. 이것도 사람이 사는 방식의 하나이니깐. 하물며 자네와 나는 형제 결의를 맺은 사이 아닌가? 말하자면 생사도 같이할 수 있거늘 함께 쾌락을 누리는 일이야 왜 같이 못해 보겠나?"
묘대야의 말에 미립은 소름이 끼쳐 당장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했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옴쭉달싹할 수가 없었다. 의식이 없는 사이에 묘대야가 무슨 약을 먹였든가 아니면 혈도를 눌러 놓은 게 틀림없었다.
"동생, 사람이 살면서 바라는 게 무엇이겠나? 즐겁게 사는 거지. 마음껏 쾌락을 누려보는 것이 제일이지. 함께 쾌락을 누려 보자는데 뭐가 나쁘다는 건가?"
묘대야는 미립의 곁에 바싹 다가앉으며 말했다.
그는 자기 얼굴을 미립의 뺨에 갖다 대었다.
"동생, 난 정말 30여 년을 헛살았단 생각이 드네. 정말 동생같이 아름다운 사내는 처음이야. 어쩌면 피부가 이렇게 곱고 태깔이 선녀 같은가?"
그는 손으로 미립의 볼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나는 동생에게 완전히 반했네. 남자인 내 마음이 이런데 여자들은 오죽할까?"
미립은 옴쭉달싹 못한 채 굴욕감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불을 끌까? 그게 좋겠군. 우리 둘이 어두운 데서 실컷 즐겨 보자구."
묘대야는 히히 웃으며 불을 끄고는 침대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미립의 옷을 하나하나 벗기기 시작했다.
미립은 울컥 욕지기가 올라왔다. 묘대야가 이런 인간인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철장방의 손에 죽도록 내버려두는 건데 그러지 못한 게 후회막급이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동생, 지금부터 내가 하는 짓을 불쾌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편안하게 생각하게. 그리 나쁘진 않을 거야."
묘대야가 뜨거운 입김을 토해내며 소곤거렸다.
묘대야는 미립의 머리를 풀어 여자처럼 길게 늘어뜨렸다.
"이러니 영락없는 여자로군. 정말 아름다워."
그는 웃으며 미립의 속옷을 마저 벗기기 시작했다.
"아니?"
갑자기 그가 불에 데기라도 한 듯 뒤로 물러앉았다.
미립의 가슴에는 원래 비단천 같은 것이 두텁게 감겨 있었는데 그것을 끊어 내니 뜻밖에도 뭉클한 젖가슴이 만져졌던 것이다. 놀란 묘대야는 급히 불을 켰다. 백설같이 희고 풍만한 젖무덤과 붉고 선명한 젖꼭지가 몹시 황홀하게 보였다.
"아니, 넌…… 넌…… 사내가 아닌 계집이었구나!"
묘대야가 격분하여 소리쳤다.
"묘대 형님이 남자만 구하는 줄을 내가 알았어야죠?"
미립이 비웃었다. 마치 자기가 남자가 아닌 것이 한스럽다는 듯한 태도였다.
묘대야는 한동안 말을 못하다가 중얼거렸다.
"천하에 어찌 이렇게 예쁘장한 남자가 있나 했더니, 과연…… 과연 넌……."
묘대야는 화가 나서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미립은 두 손으로 탄력 있는 젖가슴을 감싸 쥐고 똑바로 묘대야를 쏘아보았다.
보통 남자들 같으면 그와 같은 미녀의 나신을 눈앞에 두고 얼마나 기뻐하며 황홀해 하겠는가. 그러나 묘대야는 달랐다. 그는 여자에 대해선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않는 괴물이었다.
"나를 속이다니. 도대체 무슨 꿍꿍이속이냐?"
묘대야가 쌀쌀하게 물었다.
미립은 잠자코 대답이 없었다.
묘대야는 한 여인에게 자신의 치부를 들켰다는 사실에 극심한 수치심을 느꼈다.
"내가 남색을 좋아하는 걸 네가 알았으니 가만 놔둘 수 없다. 안됐지만 널 죽여 버리는 수밖에 없겠어."
묘대야는 잔인하게 칼끝으로 미립의 젖꼭지를 건드렸다. 정욕같은 것은 엿볼 수 없는 차가운 태도였다.
묘대야를 쳐다보던 미립이 갑자기 싱긋 웃었다.
"왜 이래요? 방금 전만 해도 나하고 결의 형제를 맺은 사이가 아니던가요? 벌써 그걸 잊으신 건 아닐텐데?"
그 말에 묘대야는 수치심에 큰소리를 지르며 미립을 덮쳤다.
이때였다. 느닷없이 낮선 음성이 들려 왔다.
"이봐, 묘대. 좀 잘 생각해 보고 손을 써도 늦지는 않을텐데."
묘대야는 흠칫 놀라 주위를 살폈으나 사람의 그림자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누구냐, 너는?"
묘대야가 외쳤다.
상대방이 비양거리듯 말했다.
"어쨌든 좀 잘 생각해 보라구. 사람들이 하는 일은 창천이 굽어보고 있다는 걸 모르는가? 금방 그 입으로 뭐라고 했는가? 저 여자와 한날 한시에 죽겠다고 창천에 맹세했었지? 그런데 자네가 저 여자를 죽이면 자네는 누가 죽여 주겠나? 내가 나서는 수밖에 없지 않겠나?"
"네가 날 죽인다구?"
묘대야가 코웃음을 쳤다.
휘장 뒤에서 목소리의 주인공이 천천히 걸어 나와 묘대야 앞에 턱 버텨 섰다.
"내가 자넬 못 죽일 것 같은가?"
묘대야는 놀라서 눈이 둥그래졌다. 상대방은 대내오주의 두통거리인 홍칠이었던 것이다.
홍칠이 미립을 향해 말했다.
"넌 어린 계집애가 어찌 겁도 없이 혼자서 그러구 다니느냐? 척 봐도 이 묘대야가 얼마나 안 좋은 사람인지 알 수 있을 텐데, 이런 사람을 따라다니며 제 손으로 제 무덤을 파고 있어?"
미립은 홍칠의 말에 와락 울음을 터뜨리더니 소리쳤다.
"저리 가요, 저리 가! 당신이 개방의 홍칠인 줄 누가 모르는 줄 알아요? 난 묘대 손에 죽을지언정 당신의 구원은 싫으니 저리 가요. 당신의 구원은 싫다구요!"
그녀의 말에 홍칠과 묘대야는 동시에 놀랐다.
'계집들이란 그 속을 알다가도 모르겠단 말이야? 내가 목숨을 구해 주겠다는데도 죽으면 죽었지 내 구원은 안 받겠다?'
홍칠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그러나 그는 곧 그녀가 알몸을 들켜 부끄러워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는 얼른 젓가락 두 개를 꺼내 미립을 향해 던졌다. 젓가락들은 곧바로 미립의 혈도를 맞춰 막혔던 혈도를 풀어 주었다.
"난 싫어, 싫단 말야! 차라리 죽는 게 낫지, 당신 손에 구해지는 건 싫다구!"
미립은 징징 울며 악을 썼다.
홍칠은 서둘러 그녀의 옷을 겨우 입혀 놓고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마주서게 된 홍칠과 묘대야는 한동안 서로를 노려보기만 했다.
"이봐 묘대, 어서 손을 써 보지, 왜? 그렇지 않으면 내 손에 죽을걸."
홍칠의 말에 묘대야가 실소를 머금었다.
"내가 먼저 손을 쓸 이유는 없지? 좀 전에 나는 철장방 방주 구천인과 싸웠는데 난 구천인의 상대도 못 되었지. 자네는 구천인보다 더 센 축인데 내가 먼저 손을 썼다간 도리어 웃음거리밖에 더 되겠나?"
홍칠은 묘대야의 기색을 살피다가 불쑥 말했다.
"그럼 좋다, 묘대! 사람이 그리 독한 축은 못 되는 것 같군. 그럼 날 따라와!"
홍칠은 묘대야를 데리고 어느 한 수림으로 갔다.
둘이 마주서자 홍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봐, 묘대. 점잖게 보이는 녀석이 어찌 그런 후안무치한 짓을 한단 말인가? 부끄럽지도 않은가?"
묘대야는 말없이 홍칠을 쏘아보며 쓴웃음만 지었다.
"이거 끼니를 걸렀더니 출출한데 우선 뭘 좀 요기를 하고 나서 뭘 하든 해야겠군."
홍칠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한 그루 나무기둥 속에서 뭔가 한참 후벼 대더니 거무스름한 것을 한 덩어리 파내었다. 그는 그것을 묘대야에게 내보이며 자랑스레 물었다.
"이것 봐. 이게 뭔지 아는가?"
"벌레구먼."
묘대야는 첫눈에 그게 뭔지 알았다.
원래 임안에는 이런 식법(食法)이 있었다. 좋은 살코기를 말려 그것을 나무구멍 안에 넣어 두면 고기 냄새를 맡은 지네들이 사처에서 몰려와 그 고깃덩이를 뜯어 먹다가는 그 고깃덩이에 있는 만성 독약에 중독되어 꼼짝도 못하고 고깃덩이에 붙은 채 죽어 버린다.
홍칠이 꺼낸 이 고깃덩이에도 커다란 지네들이 새까맣게 죽은 채로 붙어 있었다.
"이봐 묘대야, 네가 대내오주의 우두머리라면서? 이제부터 이 홍칠이의 재간을 좀 보겠나?"
홍칠은 고깃덩이는 옆에 놔두고 불부터 피웠다.
잠시 후 불길이 활활 타오르자 홍칠은 그 고깃덩이를 작은 칼로 얇게 썰었다. 그는 그 고기로 지네들을 한 마리 한 마리씩 감싸 스무 개 남짓 만들어 놓더니 그것을 들여다보다가 히죽 웃었다.
"이봐 묘대야, 이렇게 해먹는 것이 보기도 좋고 맛있을 것 같지 않나?"
그는 이제 그것을 하나하나 불에 집어 넣었다. 잠시 후 고기들이 까맣게 구워져 그을음이 앉았다. 구수한 고기 냄새가 풍겼다. 묘대야는 자기도 모르게 군침을 꿀꺽 삼켰다.
"묘대야는 명 요리사라면서도 이렇게 묘한 식법을 모르고 있으니 그러고도 명 요리사라 할 수 있겠나? 그러고도 뭐 대내오주니 뭐니 해?"
"흥, 뭘 안다고 그러나? 요리에 관한 한 자넨 아직 코흘리개야."
홍칠은 심기가 뒤틀려 묘대야를 쏘아보았다.
그는 고기 하나를 집어 묘대야에게 던져 주며 말했다.
"묘대, 그런 흰소리 말고 그거나 먹어 보라구. 맛이 어떤가? 그걸 맛보고 나면 이젠 죽어도 한이 없다는 생각이 들 거야."
고기를 받아 든 묘대야는 먹지는 않고 홍칠이가 그 고기를 하나 하나 먹어치우는 것만 지켜 보았다.
"왜 안 먹지? 먹어 봐. 한 마리 먹고 나면 또 먹고 싶어 못 견딜걸?"
홍칠이 연신 입 속에 고기를 집어 넣으며 말했다.
'맛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다구. 그저 구수한 냄새뿐이겠지.'
묘대야는 심드렁한 생각을 갖고 마지못해 한 입 먹어 보았다. 순간 묘대야는 깜짝 놀랐다. 맛이 얼마나 구수한지 이건 천하 별미였다.
"홍칠이, 이거 너무하는구만."
묘대야가 홍칠을 향해 말했다.
"너무하다구? 너무하긴 뭘 너무해?"
홍칠이 입을 우물거리며 물었다.
"사람을 죽일 땐 죽이더라도 배는 불려서 죽이는 게 인심 아닐까?"
그의 말에 홍칠이 폭소를 터뜨렸다.
"이름이 뜨르르한 대내오주가 이게 무슨 말이야? 이 홍칠이 잔재간으로 변변찮은 거 하나 만든 걸 가지고. 난 자네 같은 사람은 그런 건 거들떠보지도 않을 줄 알았더니만 그렇게 군침을 꿀떡꿀떡 삼키다니."
"이봐, 어차피 죽은 목숨 배불리 실컷 먹고나 죽게 하게. 날 주린 귀신을 만들 작정인가?"
"자네가 보기엔 이걸 장만하기가 그리 간단한 것 같은가? 이걸 장만하려면 먼저 큰 지네들이 많이 있는 곳을 찾아야 하네. 그런데 더욱 어려운 건 아주 상등의 고기를 구해 그걸 음랭한 곳에 놔두어 지네들이 먹고 취하여 죽게 만드는 거지. 여러 날 걸려야 취하여 죽는데 이렇게 하려면 자넨 상상도 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노력과 재간이 있어야 해. 이렇게 힘들여 만든 것을 배가 부르도록 실컷 먹게 해 달라구?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몇 조각 맛보게 해 준 것만도 고
마운 줄 알라구. 황궁 대내오주가 별미는 불가다용(不可多用)이란 말도 모르나?"
"이봐 홍칠이, 그건 모르는 말이야. 우리 황궁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런 말엔 개의치 않아. 맛있는 거면 실컷 먹어. 먹기 싫을 때까지 실컷 먹어야 직성이 풀리거든."
"거 참, 나 이 거렁뱅이는 그런 복이 없으니 아쉬운데."
지네를 다 먹고 나서 홍칠이 다시 입을 열었다.
"묘대야, 이제 죽을 차례다. 또 무슨 할말이 있느냐?"
"죽이려면 어서 죽이기나 하지, 시끄럽게 뭘 자꾸 묻나?"
"그럼 좋아. 죽이겠어, 네가 요리사질이나 확실히 하려 했으면 이런 일이 없지. 사실 난 널 죽이지 않을 수도 있어. 날 따라 도처로 다니면서 맛있는 음식만 대접하여 즐겁게만 해 주겠다면 죽이지 않을 수도 있다 이거야."
묘대야는 차가운 웃음을 흘리며 말이 없었다.
"이봐, 묘대야. 내 일생에 가장 중히 여기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 요리사들이지. 다른 일은 다 할 수 있어도 맛있는 음식 만드는 재주는 누구한테나 다 있는 건 아니거든. 어떤 명요리는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밖에 할 줄 모르는데 그 비결은 그 사람만이 알고 있지. 어쨌든 넌 네 잘못으로 죽는 것이니 이 홍칠일 원망할 건 없어."
홍칠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묘대야의 목을 겨냥하여 손을 치켜 들었다.
"잠깐!"
누군가가 느닷없이 소리쳤다.
홍칠은 주춤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앞뒤에서 웬 사내들이 두 사람씩 짝을 지어 튀어나왔는데 다름아닌 대내오주 네 사람이었다. 그들은 홍칠을 에워싸고 무섭게 노려보았다.
"홍칠이, 뭣 때문에 우리 맏형을 죽이려는 거지?"
우사야가 물었다.
홍칠은 신이 나서 대답했다.
"너희들 참 잘 왔다. 맏형이 저승길을 가는데 배웅하러 왔나 부지?"
"홍칠이, 자네의 인품을 우리 대내오주가 모르는 바 아닌데 우리 맏형은 왜 죽이려는 건가? 이래도 되는 건가?"
허삼야가 따져 물었다.
"그래 너희들은 묘대야가 어떤 더러운 짓을 했는지 아직 모른단 말이지? 웬 처녀애를 욕보이고 있었어. 이런 짓거리를 하는 건 죽여 마땅하지."
대내오주 넷은 하나같이 놀랐다.
"홍칠이, 그게 사실인가? 뭔가 잘못 보고 그러는 거 아냐? 다른 짓을 했다면 몰라도 계집을 건드렸다는 말은 정말 믿을 수가 없군. 혹시 거짓말로……."
허삼야가 느릿느릿 말하자 홍칠이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내가 이 두 눈으로 분명히 보았는데 무슨 소리야?"
"이봐 홍칠이, 솔직히 말하지. 우리 맏형은 사실 계집애는 싫어하고 사내…… 사내를 좋아하는 성미야."
홍칠은 그의 말에 급기야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는 잠시 말이 없다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
"어쨌든 간에 묘대가 계집애를 능욕하려는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본 이상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너희들은 잔말 말고 비켜서서 구경이나 해!"
대내오주 넷은 주춤거렸다. 맏형 묘대야가 홍칠의 손에 있는 지금 그들이 덤벼들려 하면 홍칠은 선손을 써서 묘대야부터 죽일 것이었다.
"묘대, 너의 형제들이 이렇게 모두 와서 네가 저승길 가는 것을 배웅해 주니 행복한 줄 알아라. 저승에도 어쩌면 너를 요리사로 청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저승 사람들도 밥이나 요리를 먹고 사는지 모르겠지만 말야."
대내오주 넷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잠자코 홍칠을 지켜 보았다.
"이봐 홍칠이, 우리 형제들이 황제한테 대단한 신임을 받고 있다는 걸 알고 있겠지? 자네가 우리 맏형만 살려 주면 황제에게 품하여 자네로 하여금 한평생 고관후록을 누리게 해 주겠네. 언제든 황제의 심기가 좋을 때 우리가 슬쩍 한마디만 진언하면 자네는 당장 큰 벼슬을 할 수 있단 말이네."
과이야가 홍칠을 구슬렸다.
홍칠은 묘대야의 정수리를 노려보았다. 그 바람에 기겁을 한 묘대야가 소리쳤다.
"홍칠이, 날 보지 말고 우리 동생들 말이나 들어!"
"난 그간 벼슬 같은 건 추오도 관심 없어!"
"벼슬이 싫다면 홍칠이, 우리 형제들이 돈을 주지. 자네가 평생동안 쓰고도 남을 많은 돈을 주겠어. 그래도 안 되겠는가?"
허삼야의 말에 홍칠이 껄껄 웃었다.
"거랭뱅이에게 무슨 돈이 필요해? 돈을 가지면 이미 거렁뱅이라고 할 수가 없지."
이번엔 백수십권 우사야가 말했다.
"그렇다면 먼저 우리 넷과 싸우는 게 어떤가? 우리 넷이 지면 우리는 맏형을 내놓고 물러가기로 하고, 자네가 지면 자네가 우리 맏형을 놓아주기로 하세."
"아니, 내가 더운 밥 먹고 무슨 할 짓이 없어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겠나? 너희들과 내가 왜 싸우지? 난 너희들 맏형만 죽이려는 거다. 너희들 맏형 묘대가 못된 짓을 하려다가 나한테 걸려들었기에 죽이려는 거야. 죽이지 않고 살려 두었다간 내가 염라대왕한테 혼날 것 같아서 말야."
대내오주 넷은 속이 탔다. 이런 상황에선 도대체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홍칠이, 자네는 도대체 뭘 바라는가? 바라는 게 있으면 솔직히 말해 보게."
일지칭 평오야가 답답한 듯 소리쳤다.
"난 오직 묘대를 죽이고 싶을 뿐 다른 건 바라지 않아.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다구!"
이때였다. 일지칭 평오야가 갑자기 소리쳤다.
"맞았어! 좋은 생각이 있다! 좋은 생각이 있어!"
"좋은 생각이라니, 무슨 소리냐?"
홍칠이 의아해서 묻자 평오야가 큰소리로 대답했다.
"우리 형제들이 자네 끼니를 챙겨 주면 어떻겠나? 우리가 자네를 따라다니면서 매끼 맛있는 음식을 30일 동안 골고루 해 바칠 테니, 그런 다음 우리 맏형을 놓아주는 것이 어떤가?"
"그거 진심으로 하는 소린가?"
홍칠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천천히 물었다.
네 사람은 일제히 머리를 끄덕였다. 홍칠에게 덜미를 잡힌 채 묘대야도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홍칠이, 우리 형제들 다섯은 서로 자기 재주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제각기 자부하고 있지. 그런데 우리 형제들이 자네를 따라다니게 되면 자네는 우리 형제들 중 누구의 솜씨가 더 출중한지 가려 낼 수 있을 거네."
홍칠은 그 말에 마음이 동했다.
"그럼 좋다, 좋아. 너희들의 소원이 정 그렇다면 내 한 번 소원 성취를 시켜 주지. 그러나 무슨 딴 수작을 부리려다간 큰 변이 날 줄 알아라. 조금이라도 그런 기미가 보이면 묘대야부터 단매에 때려죽일 테니까."
홍칠이 으름장을 놓자 다섯은 허리를 굽신거리며 다짐했다.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걸세."
다섯은 모여앉아 홍칠과 앞으로의 일을 의논했다.
"홍칠이, 천하의 별미들을 만들려면 천하를 편렵해야 되는 법일세. 그러니 우리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각 지방마다 제일 이름난 요리를 만들어 대접해 볼 생각인데, 어떤가?"
홍칠이 대꾸했다.
"좋아. 자네들 약속대로 꼬박 한 달 동안 내게 순종하며 나를 즐겁게만 해 주면 나도 반드시 너를 놓아주겠다. 그리고 그런 더러운 일을 다시 하지 않으면 다시는 너를 찾지 않겠다. 어떤가?"
그는 쥐고 있던 묘대야의 목덜미를 놓아주고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명심하도록 해. 묘대는 이제 나로 인해 중독된 상태니 만일 너희들이 허튼 수작을 했다간 묘대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는 걸 잊지 말아라."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래두 그러네."
허삼야와 과이야가 웃으며 대답했다.
대내오주 다섯은 한 사람이 한끼씩 번을 돌며 홍칠의 식사를 책임지기로 합의했다. 홍칠이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내 황궁의 명 요리사들은 모두들 세상에 없는 희귀한 재주들을 갖고 있다던데, 내 오늘부터 황제 노릇을 한번 해 보는 거야. 천하에 이름있는 대내오주의 요리를 먹게 되었으니 황제나 다름없지 뭔가?"
"황제도 먹고 싶은 걸 다 먹지는 못하는 법이네."
우사야가 대꾸했다.
홍칠은 적이 놀라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황제가 먹고 싶다는데 자네들이 거역하는 경우도 있나?"
"황제라고 별수 있나? 먹고 싶어도 우리가 해 주지 않으면 못 먹는 거지."
묘대야가 냉소적으로 말했다. 홍칠은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제가 먹고 싶어도 대내오주가 이런 구실 저런 구실을 가져다 붙여 만들어 주지 않으면 별수없는 일 아닌가.
"그렇다면 내가 먹고 싶다고 해도 자네들이 이 구실 저 구실 핑계를 대며 안 해 줄 수도 있겠구만?"
홍칠의 말에 묘대야가 엄숙하게 말했다.
"자네에게 우리 대내오주의 목숨이 달린 판국에 감히 우리 형제들이 그럴 수가 있겠나?"
첫 요리 담당은 천도만과 과이야였다. 그가 홍칠 앞에 다가서며 말했다.
"홍칠이, 난 자네에게 다섯 가지 요리를 선 보일까 하는데, 두부요리, 버들잎요리, 말밥요리, 쑥요리, 나뭇가지요리 등일세."
"좋아, 좋아. 자네 생각대로 어서 해 보게."
여섯은 임안 시내의 한 큰 주루에 이르렀다. '일호춘(一湖春)'이라고 하는 아주 호화로운 곳으로 누각으로 오르는 층계에까지 융단이 깔려 있었는데, 그 위를 걸으면 푹신푹신한 게 기분이 좋았다.
여섯이 누각에 오르니 심부름꾼이 달려 나오며 인사를 했다.
"나으리들께선 무엇을 드시려는지요?"
방금까지만 해도 홍칠에게 잔뜩 기가 죽어 있던 묘대야는 마치 황제라도 된 듯 잔뜩 폼을 잡으며 소리쳤다.
"당장 주인을 불러오거라."
주루 주인이 당장 달려 나왔다.
"소인을 부르셨습니까?"
"오냐, 이 주루에 무슨 좋은 요리들이 있는지 어디 아뢰어 봐라."
"무슨 요리든 나으리께서 분부만 하십시오. 우리 주루의 요리사는 임안 바닥에서 워낙 이름난 사람으로 그 솜씨를 흉내낼 자가 이 근처엔 아무도 없을 정도지요."
"그래?"
묘대야는 덤덤히 반문했다.
그러자 과이야가 입을 열었다.
"난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요리를 원하니 자네가 직접 가 요리사에게 전하게. 알겠지?"
주루 주인은 오늘 참 별스러운 사람들을 다 본다고 생각하면서 공손히 대답했다.
"예, 그러지요. 무엇이든 분부만 하십시오."
"내가 시키는 요리는 실은 아주 평범한 것이야. 두부요리 하나, 버들잎요리 하나, 말밥요리 하나, 쑥요리 하나, 그리고 나뭇가지 요리 하나."
과이야의 말에 주점 주인은 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들이 우리 주루에 무슨 트집을 걸어 싸우자고 온 건가? 나뭇가지로 요리하는 법이 세상 천지에 어디 있는가? 쑥요리 같은 건 몰라도 버들잎으로 어떻게 요리를 만드는가? 버들잎도 먹는 건가?'
주루 주인은 의아해 하면서 떠듬거렸다.
"그런…… 그런 것으로 어떻게 요……요리를 만듭니까? 만들어도 먹……먹을 수가……."
"왜 못 만들어? 그 따위 걱정 말고 어서 가 전하기나 해. 만약 그런 것도 못한다면 내가 이 누각에 불을 싸지를 줄 알아!"
과이야가 으름장을 놓았다. 주루 주인은 이 여섯을 잘못 건드렸다간 큰 변이 나겠다 싶어 냉큼 주방으로 달려갔다. 한참이 지나서야 요리사를 데리고 되돌아온 주루 주인은 여섯 사람을 보고 울상이 되어 말했다.
"이거 손님들께 죄송해서 어쩌지요? 저희 요리사 말이 그런 요……요리는 정말 못……못하겠다는데요?"
"그래? 정말 할 줄 모른단 말이지?"
과이야가 요리사를 향해 물었다.
가뜩이나 심기가 좋지 않은 상태로 나온 요리사는 자기를 업신여기는 것 같은 과이야의 태도에 그만 성이 나서 소리쳤다.
"할 줄 모르긴 왜 할 줄 모르겠소! 기름에 지지고 볶으면 되겠지. 그렇지만 버들잎으로 요리한다는 말은 듣다 처음이오. 그리고 세상 천지에 나뭇가지를 먹는 사람이 어디 있소? 이건 순전히 우리 주루에 와 생트집을 잡자는 게 아니고 뭡니까? 도대체 그런 걸 요리로 만드는 사람이 어디 있냔 말이오?"
"요리로 만들어 내면 어쩔 셈이냐?"
과이야가 요리사에게 얼굴을 들이대며 물었다.
"먹을 수 있는 요리로 만들어만 내시오. 그럼 난 나뭇가지를 그냥 씹어먹겠소. 그런데 만일 손님이 그런 요리를 못 만들어 낼 경우엔 어쩔 거요?"
요리사는 화가 나서 부들부들 떨기까지 했다.
"내가 그걸 요리로 못 만들면 자네가 어떻게든 해도 좋다."
과이야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좋소. 만일 만들어 내지 못하면 큰 곤욕을 치를 줄로 아시오."
요리사가 야멸차게 말했다.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는 동안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여기들 있으시오. 내 주방엘 갔다 오겠소."
과이야는 자신 있는 걸음걸이로 요리사를 따라 주방으로 향했다.





제4장 천하별미
과이야가 주방에 들어가자 주방 내의 사람들은 모두 놀라는 기색이 현연했다.
"다들 듣게. 내가 여기 요리사와 솜씨를 겨루어 보기로 했네. 내가 나물요리 몇 개를 만들 테니 암자들은 내가 시키는 대로 심부름을 좀 해 주게. 자, 임자는 가서 두부 네 모를 가져오고 임자는 어디 가서 속히 버들잎 백 잎을 따오게. 마른 것은 절대 안 되니 싱싱한 걸로 말이야. 그리고 임자는 마름을 가져와. 벗기지 말고 껍질째로 말일세. 그리고 또 임자는 밖에 나가 아무 나뭇가지나 몇 개 꺾어 오게. 껍질은 절대 벗기지 말고 굵기는 새끼손가락만 하면 되네. 그
리고 임자는 무우 몇 개를 썰어 와."
과이야가 일일이 분부하자 주방 사람들은 어디서 이런 미치광이가 다 굴러 왔나 하는 눈초리로 과이야를 말똥말똥 쳐다볼 뿐 누구 하나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이에 성이 난 과이야가 고함을 질렀다.
"냉큼 움직이지들 못할까!"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과이야는 요리사를 돌아다보았다. 역시 화가 나 있던 요리사는 수족들을 향해 버럭 고함을 쳤다.
"개 같은 놈들! 당장 시키는 대로 못해?"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과이야가 한참을 기다려서야 사람들은 다섯 가지 재료를 들고 들어왔다. 재료가 모두 갖추어지자 과이야는 비로소 요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연신 손을 놀리며 일호춘의 요리사에게 말했다.
"잠시 후에 어디 내가 만든 요리를 한번 먹어 보라구."
곁에서 과이야가 만드는 요리를 들여다보던 요리사는 잔뜩 낯을 찌푸렸다. 무릇 요리란 색깔, 냄새, 맛, 그리고 모양을 중시하는 법인데 과이야가 만든 다섯 가지 요리는 색깔과 모양부터가 틀려 먹었다.
"자, 먹어 보게."
과이야는 요리사에게 젓가락을 쥐여 주었다.
요리사는 젓가락을 잡아 쥐고 물끄러미 요리 접시만 내려다보았다.
언제 들어왔는지 홍칠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어디 내가 먼저 이 두부 맛을 볼까?"
홍칠이 젓가락으로 두부를 집으려 했다. 그러나 두부는 젓가락이 닿는 순간 흐물흐물 부서져 내려 도무지 먹을 수가 없었다.
'이 놈의 두부를 어떻게 지졌기에 젓가락도 대기 전에 부서져 버려? 이래 갖고야 먹을 수가 있겠나?'
홍칠은 다시금 조심스레 젓가락으로 두부 밑을 받쳐 들다시피 하여 얼른 입 안에 던져 넣었다. 홍칠이 몇 번 씹지도 않았는데 두부는 엿같이 스르르 녹으며 목구멍으로 꿀떡 넘어갔다.
"별미긴 별미구먼. 이 두부 맛이 별미야."
그는 딱히 두부 맛을 꼬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 연하고 부드러운 맛이 우유 같기도 하고 물고기살 같기도 한 한편 소고기 등심처럼 구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호춘의 요리사는 시답지 않게 생각했다.
'그깐 두부요리가 대단하면 얼마나 대단하다구. 이 거렁뱅이야 평소 맛있는 거라곤 먹어 보지를 못했을 테니까 그 잘난 두부구이 하나 먹으면서도 저 호들갑이지.'
"이봐 노형, 자네네 일호춘 이름을 빌려 이 다섯 가지 요리를 만들었으니 금후 노형은 이름을 크게 떨칠 걸세."
과이야가 떠들자 묘대야도 덩달아 말했다.
"어서 앉아 이 요리들을 먹어 보라니깐."
요리사는 속으로 시답잖게 생각하였지만 그래도 호기심은 있어 젓가락을 들어 두부를 집어 들었다. 그러나 집으면 부서지고 들면 미끄러져 아무리 해도 입에 넣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백수십권 우사야가 웃으며 말했다.
"안 되겠군. 내가 도와줘야지."
그는 홍칠이 했던 것처럼 젓가락 한 쌍으로 두부 밑을 살짝 들어 요리사의 작은 접시에 옮겨 놔 주었다.
"자, 들어 보게."
요리사는 행여라도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까 우려하며 접시를 입까지 가져가서는 입을 크게 벌려 쏟아 넣듯 하였다.
두부는 요리사의 입에 부어지기가 무섭게 스르르 목구멍을 넘어가 버렸다. 하지만 입 안에 남은 뒷맛은 정말 희한했다. 딱히 무슨 맛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별미였다.
요리사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30년 이상 요리사 노릇을 해 왔지만 이렇게 맛 좋은 두부요리는 생전 처음이었다. 그는 과이야를 바라볼 뿐 입을 열지 못했다.
버들잎요리, 쑥요리, 나뭇가지요리까지 전부 맛을 본 요리사는 정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재주를 가졌기에 음식이라고는 할 수도 없는 재료들을 가지고 이렇듯 기막힌 요리를 만들어 낼 수가 있단 말인가.
"거 참 맛있다. 마름 맛이 이럴 수가 있는가? 이건 어떤 물고기나 새우보다도 더 맛있는데?"
홍칠이 신이 나서 떠들었다.
여럿은 그 바람에 너도나도 다투어 마름요리를 먹어 보았다.
"과이야, 자네 요리 솜씨는 정말 놀랍군. 이 나뭇가지요리는 정말 세상에 다시없는 요리 중의 요릴세."
과이야는 일호춘의 요리사를 보고 히죽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과이야가 나뭇가지나 버들잎으로 맛있는 요리를 만들기만 하면 요리사는 나뭇가지나 버들잎을 그냥 씹어 먹겠노라 말했었다. 여섯은 모두 일호춘의 요리사를 지켜 보았다. 과이야가 품에서 나뭇가지 두 개와 버들잎 한줌을 꺼내더니 탁자 위에 올려 놓았다.
"자, 노형, 이젠 말한 대로 해야지? 약속은 약속이니까."
일호춘의 요리사는 여럿이 지켜 보는지라 하는 수 없이 버들잎을 한 움큼 쥐어 입에 밀어 넣었다. 버들잎을 씹어대는 그의 얼굴은 그야말로 죽을 상이 되었다. 입귀에서는 푸른 즙이 질질 새어 나왔고 고통스러운 기색이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과이야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홍칠이, 자, 이젠 갑시다."
여섯은 전부 흐뭇한 기색으로 주루를 나섰다.
그들이 누각을 내려가자, 일호춘의 요리사는 방으로 뛰어가 서둘러 짐을 챙겼다. 그는 보따리를 꾸려 들고 나와 주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동안 일한 품삯이나 챙겨 주시오."
주루 주인은 요리사의 뜻하지 않은 행동에 어안이 벙벙해서 물었다.
"뭐? 뭐라구?"
"어서 품삯이나 주시오. 난 여기 일 그만두겠소."
요리사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루 주인이 놀라 어벙벙해 있자 요리사는 느닷없이 고개를 젖히고 껄껄 웃더니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바보 같은 소리. 지금 품삯이나 챙기고 있을 때가 아니지."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주루를 달려나가 저만큼 멀어져 가고 있는 여섯 사람을 뒤쫓으며 소리쳤다.
"거기 좀 기다려요! 거기 좀 기다려요!"
그는 가쁜 숨을 내쉬며 달려가 과이야의 발 앞에 넙죽 엎드렸다.
"사부님, 이 제자를 받아 주십쇼. 게으름 없이 사부님의 가르침을 잘 받겠습니다."
과이야는 도리질을 했다.
"글쎄 내 제자질을 하기는 수월할지 몰라도 네가 평생 배워도 내 재주의 절반도 못 배워 낼 게야."
"아이고, 사부님 재주 절반만 배워 내도 전 천하에 부러울 게 없을 것 같습니다. 제발 자비를 베푸시어 아무쪼록 이 놈을 제자로 받아 주십시오."
대내오주들은 모두 껄껄 웃었다.
"좋다. 그럼 이제부터 우리를 따라라."
묘대야가 말했다.
임안으로 돌아온 일행은 이번에는 서호로 향했다. 호숫가에는 '취선루'라는 술집이 있었다. 사층으로 된 주루인데 누각 위에는 검은 편액이 걸려 있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당나라 때 신선거사(神仙居士) 진희이(陳希夷)가 쓴 것이라고 한다.
일곱이 취선루에 들어서자 유소화작 허삼야가 입을 열었다.
"이번엔 나 허삼야가 요리할 차례인데, 우리 대내오주의 재주가 어떤가를 자네 홍칠이 평생토록 기억하게 만들어 주지."
그리고는 소리쳤다.
"게 누구 없느냐!"
심부름꾼 하나가 얼른 달려왔다.
"나으리께서 무슨 분부가 계시는지요?"
"여기 산 물고기가 있겠지?"
허삼야가 물었다.
"물론입죠. 이 서호가 말라도 우리 취선루엔 펄펄 뛰는 물고기가 언제나 있습지요. 무엇이든 주문만 하십시오. 냉큼 대령해 올리겠습니다."
"그럼 가서 요리사에게 말해라. 우린 모두 다섯 가지 요리를 먹을 참인데 하나는 살아 있는 서호 물고기, 하나는 술이 담긴 물고기 부레, 하나는 살코기 있는 물고기 대가리, 또 하나는 살코기 있는 물고기 지느러미, 그리고 또 하나는 눈이 있는 물고기 꼬리, 이렇게 다섯 가지 요리를 가져오도록 해라."
허삼야의 말에 심부름꾼은 잠시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취선루에서 몇 해 동안 일해 오면서 그런 요리는 이름도 들어 보지 못한 터였다. 그는 허삼야를 말똥말똥 쳐다보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나으리께서 말씀하신 그런 요리는 우리 주방에서 못해 드릴 겁니다. 다른 요리들을 시키시는 게 어떠실는지요?"
허삼야가 언성을 높였다.
"우린 꼭 그 요리를 먹어야겠는데? 잔말 말고 만들어 와. 만약 못 만들어 오면 너희네 취선루 간판을 떼어 박살을 내 버릴 테다. 그러나 그걸 만들어 낸다면 너에게 은 열 냥을 상으로 주마. 요리사한테는 한 백 냥 주고."
심부름꾼은 돈은 안 받아도 좋으니 별탈이나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황급히 주방으로 달려갔다.
"영감님, 큰일났습니다요!"
요리사는 늙은 노인이었다. 그는 호들갑을 떨며 들어오는 심부름꾼을 태연히 바라보며 물었다.
"왜 이 야단이냐? 집에 불이라도 났느냐?"
"농담할 때가 아닙니다. 지금 밖에 어떤 사람들이 와서 영감님한테 괜한 시비를 걸려고 합니다요."
"그래?"
노인은 빙긋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반문했다.
"모두 일곱이 왔는데 그 일곱의 행색이 정말 괴상해요. 하나는 거렁뱅이 같고 하나는 요리사 같지만 나머지 다섯은 벼슬아치도 아니고 그렇다고 상인들 같지도 않고 도무지 뭐하는 사람인지 알 수가 없어요. 그 인간들이 평생 듣지도 못한 요리를 시키지 않겠어요?"
"네가 듣지 못한 요리야 세상에 많지. 하지만 우리 취선루에서 꼭 못한다고는 할 수 없지."
"글쎄, 그들이 뭘 시켰는가 들어 보기나 하고 그런 말씀을 하세요. 뭐 살아 있는 서호 물고기, 술이 담긴 물고기 부레, 그리고 뭐 살코기 있는 고기 대가리, 살코기 있는 고기 지느러미에다 또 눈깔있는 고기 꼬랑지, 모두 이런 것들이라니깐요?"
그의 말을 듣고 나자 요리사도 적이 놀라는 듯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잠시 생각하는 눈치더니 조용히 물었다.
"그래 그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모두 이층에 앉아 있어요. 그 다섯 가지 요리를 해 주면 저에겐 은 열 냥을, 영감님께는 백 냥을 상으로 주고, 그렇지 못하면 우리 취선루 간판을 박살내 버리겠대요."
요리사는 더 긴말을 하지 않고 일어서더니 주방을 나갔다.
이층에 올라와 그들 일곱을 본 요리사는 속으로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상석엔 서른 살 안팎의 젊은 거렁뱅이가 앉아 있고, 그 양 옆에는 뚱보 하나와 말라깽이 하나가 각각 배동해 앉아 있었다. 그들 모두는 상석에 앉은 거렁뱅이를 대단히 받들어 모시는 것 같았다. 하석에는 요리사 복장을 한 사람과 얼굴이 길쭉한 깡마른 사내가 앉아 있었는데 두 사람 다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요리사는 그들에게 읍을 하며 인사부터 올렸다.
"나으리들께서 이렇게 취선루를 찾아 주신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자네가 이 주루의 주인인가?"
허삼야가 물었다.
"아니올시다. 소인은 이 취선루의 주방장올시다."
요리사는 얼굴에 애써 웃음을 띄웠다.
"임안의 주루 네 곳 중 취선루가 제일 유명하다기에 우리가 일부러 왔으니 잘 좀 부탁하네."
묘대야가 빈정거리듯 말했다.
요리사는 공손히 허리를 숙여 보였다.
"그렇다면 내가 시킨 그 다섯 가지를 어서 만들어 와야지. 제대로만 만들어 오면 큰 상이 있다!"
허삼야가 품에서 은자 한 꾸러미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
"그 다섯 가지만 만들어 내면 이 삼십 냥 은자를 고스란히 내주겠다."
일곱 사람을 바라보는 요리사의 얼굴엔 난처한 기색이 돌았다.
그는 뭔가 말하려다가 그냥 잠자코 서 있기만 했다.
"왜 그러고 서 있는 건가?"
허삼야가 눈을 치뜨며 물었다.
그제야 요리사는 허삼야에게 허리를 굽신거리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나으리들, 제 말 좀 들어 보시지요. 우리 취선루에 이런 고담이 하나 있습죠. 대송(大宋) 개국 황제 태조(太祖)께서 하루는 승상 조보(趙普)를 데리고 우리 취선루에 오셨답니다. 그런데 그 조보란 승상은 성미가 심히 까다롭고 괴벽한 분으로, 그분이 그런 다섯가지 요리를 시켰는데 당시 취선루의 요리사로 계시던 허 노인께서 그 다섯 가지 요리를 만들어 대접해 올렸답니다. 태조 황제께서 심히 기뻐하시며 옛사람 말에 '신선은 부럽지 않고 원앙이 부럽도다'라는 말
이 있는데, 취선루에 와 보니 그런 게 아니라 오히려 '제왕은 부럽지 않고 신선이 부럽도다' 하셨더랍니다. 그러니 당시 취선루의 다섯 가지 물고기 요리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습지요. 후에 태종(太宗)께서도 즉위하여 우리 취선루 허 노인을 불러다가 그 다섯 가지 물고기 요리를 시켜 드시곤 했답니다. 이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오늘에 이르러 취선루에는 그 절묘한 기술이 전수되지 못하고 오래 전에 끊어져
버렸습니다. 소인도 그저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나 듣고 그런 일이 있었나 부다, 생각할 뿐이지요. 모르긴 해도 지금은 온 천하를 다 뒤져 봐도 그런 다섯 가지 요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못 찾을 겁니다."
그러자 허삼야가 벌떡 일어났다.
"그래? 그렇다면 내가 한번 시범을 보여 볼까? 내가 다섯 가지 요리를 만들어 보일 테니 주방으로 안내하게."
주방에 들어선 허삼야는 요리사를 시켜 서호의 산 물고기를 가져 오게 했다. 취선루는 주방의 층계 옆에 못을 하나 만들어 거기에 물고기를 잡아다 기르고 있었다.
허삼야는 산 물고기를 도마 위에 올려 놓고 비늘도 벗기지 않고 손바닥으로 물고기 배를 천천히 내리눌렀다. 그러자 고기는 입을 쩍쩍 벌리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허삼야는 조미료들을 고기 입에다 한 움큼씩 쓸어 넣고는 대가리를 번쩍 들었다. 그는 이번에는 물고기 입에다 술을 부어 넣었다. 술은 조미료와 한데 어우러져 물고기 뱃속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몇 번을 반복하자 물고기 뱃속이 찰 만큼 차서 입을 벌리면 술이 입귀로 줄줄 흘러 나올 정도가 되었다.
허삼야는 긴 꼬챙이로 물고기 아가리를 꿰어 물고기를 기름솥에 넣었다. 뿌지직 소리가 나며 기름이 튀었다. 얼마 안 가 물고기는 노랗게 튀겨졌다. 허삼야는 그것을 꺼내 접시 위에 놓고 조미료즙을 그 위에 뿌렸다.
얼마 후 그가 완성된 물고기 요리를 탁자 위에 올려 놓으니 이를 지켜 보던 사람들이 일제히 환성을 올렸다. 물고기는 양옆의 살코기만 튀겨졌을 뿐 눈과 입, 지느러미 등은 그대로 살아 퍼득이고 있었던 것이다.
"자, 먹어들 보시오. 요리 맛이 어떤가? 맛도 대단히 좋지만 다 먹을 때까지 물고기가 죽지 않는다는 게 이 요리의 특색이오."
묘대야가 자신 있게 설명을 했다.
모두들 먹어 보니 과연 기막힌 별미였다. 반시간쯤 지나자 나머지 네 가지 요리가 마저 만들어졌다. 하나같이 맛이 기막히고 희한한 요리였다.
사람들은 먹으면서 칭찬이 자자했다. 모두들 어느 정도 배를 채우고 나자 허삼야가 말했다.
"다 먹었으면 이제 다른 데로 갑시다."
포식한 일행은 이제 서호의 절경을 구경하자고 자리를 떴다.
그들이 누각을 내려오자 취선루의 늙은 요리사가 다가오더니 허삼야에게 덜컥 무릎을 꿇었다.
"나으리, 이 소인의 소원 하나 들어주십쇼. 저에게 무슨 일을 시켜도 좋으니 아무쪼록 그 물고기 요리 다섯 가지를 만드는 비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고 싶은 생각 없는데?"
허삼야가 쌀쌀하게 말했다.
그러자 요리사는 허삼야에게 물었다.
"사부님의 대명(大名)은 어떻게 쓰시는지요?"
"나? 허씨라고 하네만 그건 왜 묻지?"
요리사는 눈이 휘둥그래서 허삼야를 쳐다보았다.
"맞았어, 맞았다니깐! 그러면 그렇지."
요리사가 중얼거렸다.
"맞긴 뭐가 맞단 말인가?"
요리사가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나으리께선 분명 서호 허 노인의 후손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지 않고야 이런 절세의 재간을 갖고 있을 수 없죠."
허삼야가 심드렁하니 되물었다.
"그러면 어떻고 그렇지 않으면 또 어떤가?"
"나으리, 여기 좀 와 보세요."
요리사는 허삼야를 주방 뒤쪽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은 작지만 아주 알뜰하게 꾸며져 있었는데 한쪽 벽면에 초상화 한 폭이 걸린 게 눈에 띄었다. 몸이 여윈 한 노인을 그린 초상화였다. 그림의 노인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고 있었다. 초상화 아래에는 장생패위(長生牌位) 하나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선사조 허로지위(先師祖 許老之位)'라는 일곱 자가 씌어져 있었다.
"소인은 허 노인을 서호 취선루의 사조(師祖)님으로 받들어 공대하고 있습니다. 나으리께서도 허 노인의 후예이시라면 부디 취선루를 위해 빛을 내게 하여 주십쇼. 그 절묘한 재간이 취선루에서도 빛을 내게 해 주십시오."
허삼야도 서호 허 노인의 초상을 숙연히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는 향 세 대를 피워 들고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향불을 향로에다 꽂아 놓고 돌아선 허삼야는 묵묵히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요리사에게 건넸다.
"어보(魚譜 ; 물고기 요리 작식법)라네. 자네 마음이 고마워서 주는 거야."
요리사는 감격하여 두 눈 가득 눈물을 글썽였다.
허삼야는 조용히 웃어 보이고 일행들과 함께 그곳을 떠났다.
달빛이 없어 칠흑처럼 캄캄한 밤이었다. 그들 일곱은 객점에 들었다. 홍칠과 한 방에 든 묘대야는 잠이 오지 않아 촛불이 다 타도록까지 뜬눈으로 지새웠다. 문득 미립과 처음 만났을 때의 설레이던 감정이 되살아났다.
'그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밖에서는 이경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려 왔다. 묘대야는 살그머니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아주 익숙한 길이라, 깊은 밤에도 묘대야의 걸음은 아주 빨랐다. 잠깐 사이에 그는 한 골목길에 접어들었다. 이렇듯 깊은 밤에도 그 골목은 시끌벅적한 게 번화한 느낌이었다. 길가에는 탁자들과 걸상들이 놓여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모여 앉아 술을 마시며 밤을 새고 있었다.
묘대야는 주기를 내 건 어느 자그마한 술집에 들어가 말없이 서 있었다.
심부름꾼 하나가 나와 보더니 안에 대고 소리쳤다.
"손님이 왔어요!"
그러자 안방의 문발을 들추며 한 여인이 걸어 나왔다.
"술을 드시렵니까, 아니면 음식을 드시렵니까?"
여인이 묘대야를 보고 물었다.
"아니, 난 사람 한 분을 만나러 왔소."
묘대야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여인은 묘대야를 유심히 훑어보더니 또렷한 어조로 말했다.
"손님은 부자이신 것 같은데 이런 곳에 친구가 있단 말씀이신가요?"
묘대야는 집 안으로 느릿느릿 몇 걸음 걸어 들어가 복판쯤에 이르러 홱 몸을 돌리더니 나직이 중얼거렸다.
"소녀 하나 야밤에 자작술을 홀로 마시며 좀처럼 일어서질 않네."
그러자 여인의 얼굴에 갑자기 웃음이 번지며 반갑게 말했다.
"아이고, 그러고 보니 대내오주의 맏이신 묘대야 어른이시군요."
묘대야는 묵묵히 웃어 보였다.
그 여인이 고개를 숙여 정중히 말했다.
"어서 들어가시죠. 안에서 기다리십니다."
묘대야는 여인을 따라 어두운 낭하를 한동안 걸었다. 한참을 들어가자 눈앞이 환해지며 자그마한 방이 하나 나타났는데 거기에 웬 여인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두건 같은 것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암만 봐도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오셨군요."
묘대야는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무슨 분부라도 있으신지요?"
"당신들 대내오주들이 그 사람을 따라다닐 필요가 뭐요? 개방 방주 미운산은 벌써 밀소에 숨어 버려서 여느 사람은 접근하지도 못하고 있으니 당신들도 찾아내기 어려울 거요."
여인이 차분한 음성으로 질책했다.
"우리 형제 다섯은 기실 개방 중에서 자못 중요한 인물 몇을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그 방주를 찾아낼 수도 있을지 모르지요."
"폐하의 뜻은 그 개방을 당신들더러 없애 치우라는 것이오. 그런 인물들이 이 세상에 한 사람도 남지 않게 말예요."
묘대야는 잘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여인이 문득 나직이 소리내어 웃었다.
"묘대 씨, 듣자니 묘대 씨는 여인들과 가까이하는 것을 싫어한다던데 그게 사실인가요?"
묘대야는 놀라 가슴이 뛰었다.
'아니, 그런 일을 황제께서도 알고 계시단 말인가?'
묘대야는 입을 다물었다.
"묘대 씨, 여인을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니라 아직 맘에 드는 여인을 만나지 못한 거겠죠?"
'우리 대내오주의 일을 손금 보듯 하는 걸 봐서 이 여인은 궁내의 여인임이 분명하다. 황궁 내의 여인이라면 십중팔구 황제의 것인데 잘못 건드렸다간 목이 달아날지도 모르니 조심해야겠군.'
묘대야가 이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여인이 다가왔다.
"묘대 씨, 날 봐요. 날 보면 여인을 좋아하게 될 거예요."
여인의 몸에서는 향긋한 향내가 물씬 풍겨 왔다. 황궁 안에서 쓰는 분 냄새였다. 그 냄새에 묘대야는 정신이 아찔해지며 가슴이 뛰었다.
"당신은 대체 누구시오?"
당황한 묘대야의 물음에 여인이 깔깔 웃었다.
"묘대 씨, 당신은 남자로 태어나서 어찌 여자보다 남자를 더 좋아하는 거죠?"
그녀는 이렇게 말하면서 가느다란 손가락 끝으로 비단 옷깃을 풀어헤쳤다. 곧 여인의 탄력 있고 풍만한 젖가슴이 탐스럽게 드러났다.
"어때요? 탐나죠?"
"왜 이러시는지 알 수가 없구려. 당신이 궁중에 계시는 분이라면 이 묘대한테 그러시는 게 아니오."
여인은 또다시 소리내어 웃었다.
"제가 누군지 모르시죠? 제가 어떻게 생긴 여자인지 모르시죠? 그러니 저를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이제 내 얼굴을 보실래요? 보시면 홀딱 반할걸?"
여인은 얼굴에 늘어뜨린 두건을 살짝 들어 보였다. 묘대야는 눈부신 그녀의 미모에 적이 놀랐다. 그녀는 여전히 두건으로 얼굴을 반쯤 가린 채였는데 한쪽 얼굴만 보아도 그녀가 어느 정도의 미녀인지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러나 묘대야는 그녀를 외면하며 결연히 몸을 일으켰다.
서둘러 문을 나서는 묘대야를 바라보며 여인이 나직이 탄식했다.
"바보, 바보 같은 위인이야……."
홍칠은 문득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묘대야와 한 방에 들었던 생각이 나 곁을 살펴보았다.
"묘대, 묘대!"
묘대야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홍칠은 옆자리를 더듬어 보았다. 그러나 베개 하나만 덩그마니 놓여 있을 뿐 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는 이상한 생각에 과이야와 허삼야가 든 방에 가 보려고 몸을 일으켰다.
이때였다. 누군가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그것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홍칠은 얼른 문을 열어 보았다. 어둠 속에 젊고 아리따운 여인 하나가 서 있었다.
"저와 함께 가실 곳이 있는데요."
여인이 홍칠에게 말했다.
"내가 왜 아가씨를 따라가야 하지?"
홍칠이 반문했다.
"당신도 개방의 사람이죠?"
"글쎄, 그렇긴 하지만, 그게 아가씨와 무슨 상관이오?"
홍칠의 말에 여인이 방긋 웃었다.
"상관이 없다니요, 개방에는 여인이 없나요?"
"있기야 있지. 하지만 드물지. 그런데 아가씬 도대체 누구요?"
"난 미립이에요. 들어 본 적 있어요?"
여인은 홍칠을 향해 다시금 웃어 보였다.
그녀는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었다. 홍칠은 그녀를 좀더 자세히 보기 위해 가까이 다가섰다.
"댁을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데 절 따라가 보지 않으실래요?"
여인이 다시 물었다. 홍칠은 암만 생각해도 그녀를 어디서 봤는지 기억나질 않았다.
'분명 어디선가 보긴 봤는데……, 어두워서 잘못 본 걸까?'
그가 대답하지 않자 여인은 안타까운 듯 깊이 한숨을 몰아쉬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분명한 것은 당신과 같은 개방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밖엔 달리 전할 말이 없군요……."
"개방 사람이라구?"
홍칠은 자기 사부나 몇몇 장로들이 아니면 자기를 찾을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다.
"사부님이 날 부른다면 여자를 시켜 부르지는 않을텐데."
홍칠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하자 미립이 호소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부님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부른다면 안 가시겠어요? 여자가 모시러 왔다고 안 가시겠어요? 안 가시겠다면 그만두세요. 하지만 저쪽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당신이 오리라고 굳게 믿고 있어요."
홍칠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그녀를 따라가 보기로 마음 먹었다.
객점을 나오자 문앞엔 마차 한 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말 두 필이 끄는 이두마차인데 풍등까지 켜져 있어 이 야밤에 무척 괴이한 인상을 주었다. 홍칠은 서슴없이 마차에 올랐다.
얼마를 달렸을까. 그들은 큰 저택 앞에 이르렀다. 미립이 대문을 두드리자 한 노인이 대문을 열고 나왔다.
"오셨습니까요?"
미립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미립은 마차를 대문 안으로 몰고 들어가게 했다. 마차에서 내리자 미립은 홍칠을 이끌고 후원으로 들어갔다. 후원에는 큰 나무 상자 두 개를 놓은 밀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난 오른쪽 상자에 들어갈 테니 당신은 왼쪽 상자 안에 들어가세요."
미립이 웃으며 말했다.
홍칠은 암만해도 수상쩍은 생각이 들었다. 야밤 삼경에 사람을 불러내어 다짜고짜 끌고 와서는, 이제는 또 우스꽝스럽게 상자 안에 들어가라니 도대체 뭐하자는 수작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홍칠은 기왕 여기까지 온 거 끝까지 따라가보자고 마음먹었다.
홍칠이 상자 안에 들어가자 곁에 서 있던 장정 몇 명이 밀차를 끌기 시작했다. 얼마를 또 그렇게 갔을까? 느닷없이 대문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다.
"누구요?"
"나으리께 전해 드릴 옷감 상자입니다."
밀차는 뜰 안으로 들어갔다.
"상자를 여시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드디어 상자가 열렸다.
홍칠은 그 사이 뻣뻣하게 굳은 몸을 겨우 움직여 간신히 상자를 빠져 나왔다. 머리칼은 봉두난발이 되고 얼굴엔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미립이 홍칠을 향해 생긋 웃어 보였다.
"들어 가시지요."
홍칠은 그녀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에는 16, 7명 가량 되는 거렁뱅이들이 모여 앉아 골패 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정신이 팔려서인지 홍칠 일행은 본 척도 하지 않았다. 미립은 홍칠을 데리고 그 안을 통과하여 뒷문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또 한동안 걸어서야 어느 한 집 앞에 이르렀다.
집 안은 깜깜했다. 미립은 부시를 쳐서 촛불을 켰다.
"따라오세요."
그녀는 촛불을 들고 앞장섰다.
"조심하세요."
미립이 홍칠을 붙잡았다. 순간 홍칠은 미립의 몸에서 풍겨 오는 그윽한 향기에 취하여 자기도 모르게 스르르 눈을 감았다.
이때였다. 바닥에서 삐그덩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둘이 서 있는 자리가 서서히 밑으로 꺼져 내려가기 시작했다. 드디어 쾅 하는 소리가 나더니 바닥에 닿는 느낌이 들며 멈춰 섰다.
"이젠 다 왔어요!"
어둠 속에서 미립이 말했다.
철판이 아래로 떨어져 내릴 때 미립의 손에 있던 촛불이 꺼져 버려 사방은 온통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미립이냐? 홍칠이는 데려왔느냐?"
어둠 속에서 한 노쇠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예, 오셨습니다."
"불을 켜라!"
등잔 두 개가 갑자기 밝게 켜졌다. 석실 안은 꽤 넓었다. 석실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앞에는 오직 널찍널찍한 큰 층계들이 있고 층계 위에는 돌의자가 있었는데 그 위에 한 노인이 앉아 있을 뿐이었다. 노인은 홍칠을 유심히 내려다보았다.
홍칠은 이 노인이 개방 방주 미운산임을 깨닫고 흠칫 놀랐다.
개방의 한 사람으로서, 오늘 이렇게 미운산을 만나게 되자 가슴 속에서 말할 수 없는 감회가 소용돌이쳤다. 그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었다.
"방주님께 소인 인사 올립니다."
"됐네, 그만 일어나게."
미운산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시녀들을 불렀다.
"운낭(雲娘)과 여아(麗兒)야, 등잔 몇 개를 더 밝혀라. 내 홍칠이를 좀더 자세히 봐야겠다."
그제야 홍칠은 방주의 뒤에 여인 둘이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대단한 미인들이었다. 두 미인은 조용히 등잔 몇 개를 더 밝혔다. 석실 안은 곧 대낮처럼 밝아졌다.
"이봐 홍칠이, 자넨 개방의 제자로서 소씨 거렁뱅이와 함께 개방의 율을 무시하다가 집법장로에게 책벌을 당했는데, 지금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달갑게 복종하는가?"
미운산이 물었다.
물론 홍칠은 여전히 불복이었다. 하지만 자기의 생각을 그대로 말했다간 방주의 노여움을 사기밖에 더 하겠느냐는 생각에 마음에도 없는 대답을 했다.
"집법장로의 책벌을 소인은 달갑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자 미운산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 거짓말은 왜 하지? 너와 소씨 거렁뱅이는 사제간이 아니냐? 개방 계율을 지키지 않고 책벌에 불복인 건 너나 소씨 거렁뱅이나 다 마찬가지일 텐데 왜 나를 속이려고 하지?"
홍칠은 미운산의 말에 사내 대장부로서 솔직해지기로 생각을 고쳐 먹었다.
"방주님, 솔직히 말씀드리면 소인은 그 책벌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순간 미운산의 눈에 날카로운 빛이 번뜩였다.
"그럴 테지. 난 자네가 불복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고 있어."
"방주님, 저와 사부님은 확실히, 개방 제자들은 비렁뱅이질만 하고 제 손으로 일하여 벌어 먹어서는 안 된다는 개방의 계율을 위반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이 계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금의파가 개방에 등장한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 부자들이 개방에 가입해서는 금의파인지 뭔지 하는데 이게 뭡니까? 자기들의 옛 생활을 못 잊고 과거의 향락에 미련을 두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것은 탓하지 않고 엉뚱하게 소
인과 소인의 사부님이 술 좀 마시고 홍안루에서 요리사 노릇을 하며 제 손으로 벌어 먹는 것만 나쁘다고 하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홍칠의 열변에 미운산은 운낭을 돌아보더니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홍칠이, 자넨 과연 솔직하군. 개방의 계율은 이미 백여 년을 전해 내려오는 것이라 그중 어느 것이 이제 와서 옳고 그른지 분명히 말하기는 어렵네. 아무튼 오늘 내가 자네를 부른 것은 자네와 개방의 계율을 논의하자는 것이 아니라 자네와 아주 중요한 대사를 논의하자는 것이네."
미운산의 기색은 심각했다.
"방주님, 무슨 말씀이신지요? 무엇이든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하시지요."
"좋아, 자네도 개방의 제자거늘 개방에 어려움이 있으면 목숨을 내걸고 개방을 위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네."
미운산의 말에 홍칠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개방의 명성이 하늘을 찌를 듯하고 날로 흥성해 가는데 도대체 개방에 무슨 어려움이 있단 말인가?'
"홍칠이, 자네 이걸 좀 보라구."
미운산은 도포자락을 헤쳐 두 다리를 내보였다.
홍칠은 아무런 이상도 발견해 낼 수 없었다.
미운산이 웃으며 말했다.
"겉만 봐서는 아무런 이상도 없어 보일 걸세. 하지만 이 두 다리는 누구에겐가 독해를 입어서 쓸 수 없게 되었네. 그래서 일어서지도 못하지."
홍칠은 너무나 놀라 잠시 할말을 잃었다. 그는 멍하니 미운산을 쳐다보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어느 놈이 감히 방주님을 독해했단 말입니까?"
"자네는 어쩌면 믿지 않을 테지만 개방의 장로 열하나 중에 누군가가 한 짓이지."
"설마……, 저의 사부님이 한 짓은 절대 아닐 겁니다."
홍칠의 말에 미운산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 그건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개방의 장로 열한 놈 중 어느 놈이든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
홍칠이 잠자코 있다가 물었다.
"방주께선 해를 입을 때까지 무슨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하셨습니까?"
"독약은 극독이지만 방법이 묘해서 처음엔 아무런 감각도 없었지. 그러다가 이상하다 싶더니만 하루도 못 되어 이 모양이 돼 버리더군."
미운산이 탄식했다.
"우리 개방은 사람이 많다 보니 일도 복잡한 편이지. 지금 개방내에선 아직 내가 이 모양이 된 줄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렇게 감추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 조만간에 소문이 나게 마련이지, 그래 자네를 불러 온 걸세. 난 자네한테 큰 일을 좀 부탁하려 하네."
"제게 무슨 일을 맡기시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제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목숨을 내걸고 거행하겠습니다."
미운산은 잠자코 홍칠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 개방엔 타구봉법과 강룡십팔장이라는 두 가지 절기가 있는데 자네가 내 이 두 가지 절기를 배워 익히지 않겠는가?"
원래 개방의 이 두 가지 절기는 대대로 방주에게만 전수되는 것으로 외인에게는 절대 전해 주지 않는 법이었다. 미운산이 개방의 이 두 가지 절기를 가르쳐 주겠다고 하자 홍칠은 문득 깨달은 바가 있어 가슴이 울렁거렸다.
"방주님,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그것만은……."
"자네더러 방주가 돼 달란 말은 아니네."
미운산이 홍칠의 마음을 읽은 듯 결연히 말했다.
"난 그저 내 이 두 가지 절기를 자네한테 전수해 주려는 생각뿐이야. 자네는 이 절기를 익힌 후 장차 개방에서 새로운 방주가 서게 되면 그 절기를 그 새로운 방주에게 전수해 주어야 하네. 그래서 우리 개방에 그 두 가지 절기가 실전되지 않게 하는 게 자네 임무야."
홍칠은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방주님께선 어찌하여 저희 사부님을 불러 이 두 가지 절기를 전수해 주려고 하지 않으십니까?"
"소씨 거렁뱅이가 날 해치지 않았다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제 사부님은 그럴 분이 아니십니다."
홍칠은 단호히 말했다.
그 말에 미운산은 모호한 웃음을 웃었다.
"그럴 수도 있겠지. 난 자네에게 이 두 가지 절기를 전수함과 동시에 내 방주 자리는 자네 사부인 소씨 거렁뱅이한테 넘겨줄 작정이네."
홍칠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미운산을 바라보았다.
'방주께서 방주 자리를 사부님께 넘겨줄 생각이라면 어째서 그 두 가지 절기도 함께 전수하려 하지 않는 걸까? 무엇 때문에 타구봉법과 강룡십팔장을 굳이 나로 하여금 다음 방주에게 가르쳐 주도록 하려는 걸까? 도대체 방주님은 무슨 생각으로 이러시는 거지?'
홍칠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미운산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난 소씨 거렁뱅이도 믿지 않고 다른 장로 열도 믿지 않네. 난 오직 자네만 믿을 뿐이야. 자네는 개방의 두 가지 절기를 배우더라도 그냥 보통 제자로 있어야 하네. 만약 자네 사부가 날 독해한 사람이 아님이 확인되면 자네가 할 일은 없네. 그러나 일단 자네 사부가 날 독해한 사람임이 판명되는 날엔, 자네가 어떻게 해야 할지는 자네 스스로 알고 있을 걸세."
미운산의 말에 홍칠은 심각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마지막 말은 분명 방주를 해치려던 사람이 소씨 거렁뱅이일 경우 가차없이 처치하라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홍칠이, 그렇게 할 수 있겠나?"
미운산의 눈이 홍칠의 기색을 훑었다.
그러자 미운산 곁에 있던 두 여인이 각각 옥소와 검을 꼬나들고 나는 듯이 내려와 홍칠을 겨누었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자네는 여기서 죽는 길밖에 없어!"
미운산이 탄식하듯 말했다.
"왜 할 수 없다고 그러세요? 저분은 당당한 사내 대장부로 나름대로 생각이 있을 거예요. 그 일은 저분에게 맡겨 주세요, 아버지."
미립이 갑자기 나섰다.
'아버지라구? 아니, 저 미립이라는 여자가 미운산의 딸이었단 말인가?'
홍칠은 납득이 안 갔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한사코 개방의 구원은 받지 않겠다고 악을 쓰던 모습이 문득 떠올랐던 것이다.
미운산이 엄숙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홍칠이, 내 좀 자세한 내막을 말해 주지. 어떤 자가 우리 개방과 강남 철장방으로 하여금 송나라를 반역하고 금나라에 투항하라고 나를 협박한 일이 있지. 내가 그 말을 듣지 않으니 이렇게 해코지를 한 거야. 자네도 자칫하면 생명이 위험하다는 걸 각오해야 해. 내가 개방의 두 가지 절기를 가르쳐 주겠지만 각별히 조심해야 하네."
그리고는 곁에 있는 세 여인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홍칠이 자네가 여기 온 줄을 다른 사람은 누구도 모르고 있지만 이 세 사람 중에 누군가 간첩일 수도 있지. 운낭이 아니면 여아일 수도 있고 혹은 미립일 수도 있으니 언제나 사람을 조심해야 한단 말일세."
홍칠은 미운산이 남에게 독해를 입더니 머리마저 잘못된 게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사람을 무턱대고 의심부터 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홍칠은 미운산에게 깍듯이 읍을 했다.
"방주님의 말씀을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좋네. 미립아, 홍칠이를 데리고 가 숙소를 마련해 드려라. 홍칠은 오늘부터 이곳에 머물며 두 가지 절기를 배울 것이다."
홍칠은 미운산에게 절을 하고는 문을 나와 철판을 타고 땅 위로 올라왔다.
홍칠은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개방의 장로 열은 모두 개방의 대사를 주관하는 사람들인데, 가령 그 사람들 속에 반역자가 있다면 개방은 앞으로 어떻게 되려는 것일까?'
홍칠은 한없이 암담한 기분이 들었다.
"방주님께서는 방주 자리를 왜 저희 사부님에게 넘기겠다고 하는지 알 수 없군요."
골똘히 생각을 굴리던 홍칠은 옆에 있는 미립에게 불쑥 물었다.
미립은 홍칠을 한번 쳐다보고는 차분하게 대꾸했다.
"가령, 개방을 독차지하려고 애쓰는 놈이 당신의 사부님이라면 그 다음부터, 즉 당신의 사부님이 방주가 된 후부터는 방주를 해치는 일이 없어질 테죠. 하지만 만일 그 반역자가 당신의 사부님이 아니고 다른 놈이라면 그놈은 또 당신의 사부님을 해치려 들 겁니다."
그제야 홍칠은 미운산의 계책이 아주 절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주님께선 당신으로 하여금 그런 불상사를 막게 하려는 거예요."
홍칠은 자신의 임무가 얼마나 막중한가를 절감하며 묵묵히 서 있었다.





제5장 두 가지 절기
방안 의자에 앉은 홍칠은 말없이 미립을 지켜 보고만 있었다. 미립도 한동안 말이 없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당신은 개방의 방주가 되고 싶지 않으세요?"
"그런 자리는 난 싫소."
홍칠이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남들은 그런 자리에 오르지 못해 야단들인데 당신은 왜 싫죠?"
홍칠은, 이 계집이 방주 미운산의 딸이라니 말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피곤해서 좀 자야겠소. 공연히 쓸데없는 소리로 남의 잠을 방해하지 말고 이젠 나가요."
홍칠의 말에 미립이 피식 웃었다.
"자려면 자요, 누가 못 자게 했나? 나도 자야겠다. 나도 여기서 같이 잘래요. 안 돼요?"
미립이 말하는 기색을 봐서 농담은 아닌 성싶어 홍칠은 짐짓 심드렁한 태도를 보였다.
"여기서 같이 자든가 말든가 마음대로 하시오."
그러자 미립은 정말 하품을 하며 침대 위에 올라가 앉았다.
"홍칠 씨, 당신은 내가 데려온 분이고 또 내가 방주에게 추천하였으니 섣부르게 행동하는 일은 없길 바랍니다."
그녀는 이 말을 남기고 침대에 눕더니 금방 잠이 들었다. 그녀의 숨소리를 들으며 홍칠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계집이 왜 안 가고 한 방에서 자려는 걸까? 방주님의 분부를 받아서 내가 여색에 범연한가 어떤가를 떠보려는 수작일까? 그렇다면 방주님도 부질없는 짓을 하는 거지. 아무려면 이 홍칠이 방주의 딸을 건드릴까?'
홍칠은 탁자의 먼지를 툭툭 털고는 그 위에 벌렁 누웠다. 그도 곧 코를 골며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홍칠은 문득 미립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아유, 목말라. 물…… 물 좀……."
'목이 마르면 제 손으로 떠다 먹지, 손이 없나 발이 없나? 나를 시켜 먹자는 건가 지금?'
홍칠은 이런 생각을 하며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미립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으며 짜증을 부렸다.
"내 말 안 들려요? 목말라 죽겠다는데, 귀 먹었어요?"
"아니 아가씬 개방 사람이 아니오?"
홍칠이 그녀의 말이 괘씸하여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 말에 미립은 흠칫 놀라며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개방 사람이 아니면 내가 왜 여기 있겠어요?"
"개방 사람이라면, 먹을 것은 자기 손으로 빌어 먹고 입을 것도 자기 손으로 얻어 입어야 한다는 법을 왜 모르지? 목이 마르면 제 손으로 떠다 마시는 것은 물론이고!"
홍칠이 나무라듯 말했다.
"난 여자잖아요. 남자가 돼서 이 야밤 삼경에 여자한테 물 한 그릇 떠다 주는 게 그렇게도 어려워요?"
미립이 오히려 큰소리를 쳤다.
홍칠은 내키지 않지만 하는 수 없이 물 한 사발을 떠다가 그녀에게 주었다.
무더운 밤이라 미립은 얇은 속옷만 입고 있었다. 홍칠은 머리는 풀어 늘어뜨리고 눈은 잠이 채 깨지 않아 게슴츠레한 미립의 모습을 애써 외면했다. 그녀에게선 사내들을 취하게 하는 젊은 여인의 채취가 물씬 풍겨 왔다.
그녀는 홍칠의 기색을 힐끗 살피며 애교를 부렸다.
"여자를 어떻게 보살펴 주어야 하는지 도통 모르나 봐? 내가 가르쳐 줄까요?"
홍칠은 그녀가 물을 다 마시기를 기다렸다가 무뚝뚝하게 한마디 했다.
"또 마시겠소?"
그러자 미립이 캐드득 웃었다.
"제가 단순히 목만 말라서 일어난 줄 아세요?"
"그럼 배도 고프단 말인가? 이거 또 어디 가서 먹을 걸 얻어 와야겠군."
홍칠이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미립이 소리내어 웃었다.
"정말 바보인가 봐? 마시고 먹는 것 말고 남녀간에 더 좋은 일이 있다는 걸 정말 모르시나?"
미립은 실실 웃으며 홍칠에게 한들한들 다가왔다. 탄력 있는 허벅다리와 탄탄하게 솟은 횐 젖가슴이 여름 밤 얇게 걸친 여인의 옷 밖으로 선명하게 내비쳤다.
홍칠은 내심 당황했다. 그녀의 빠알간 젖꼭지가 달빛에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홍칠은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끼며 황급히 손을 뻗어 그녀의 유돌대혈(乳突大穴)을 찔렀다.
순간 미립은 하나와 석상처럼 그대로 굳어졌다. 홍칠은 미립을 안아다가 침대에 눕혔다.
"난 아가씨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겠어. 나 홍칠이는 배고프면 먹고 갈증나면 마시고 피곤하면 자야 한다는 것 외엔 아무것도 몰라. 그런데 아가씨는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않다면 피곤해서 그런 모양인데, 피곤할 땐 푹 자 두는 게 제일이지."
침대 위에 반듯이 누운 미립은 마치 괴물이라도 대하듯 홍칠을 보며 중얼거렸다.
"사람이 아니야……. 사람이 아니라구……."
홍칠은 탁자에 누워 입을 꾹 다물고 자는 척했다.
"사내 구실도 못하는 바보 같으니……. 여자를 곁에 두고도 감히 건드리지도 못하는 위인이 무슨 사내야?"
그러나 홍칠은 끝까지 못 들은 척했다.
홍칠은 드디어 미운산에게 두 가지 절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미운산이 홍칠에게 말했다.
"이 강룡십팔장은 지강지양(至剛至陽)한 무공이니라. 다만 대대로 전해 내려오다 보니 그 무공 본래의 강력한 부분이 다소나마 실전된 채 전해져 왔으나 어쨌든 강룡십팔장만큼 강력한 무공은 없으니 최선을 다해 열심히 배워야 한다."
홍칠은 미운산의 장법 하나하나를 눈여겨보며 강룡십팔장을 연마하기 시작했다. 미운산은 열며칠을 연이어 홍칠에게 강룡십팔장을 가르쳐 주었다.
홍칠은 그 이후 사람들로부터 홍칠공이란 칭호를 듣기에 이르러선 '항룡유회'로부터 '용비재천'에 이르는 십팔식(十八式) 장법을 완벽한 장법으로 집대성하였다.
홍칠은 보름이 걸려서야 이 강룡십팔장을 대강 배워냈다. 그러나 방주 미운산에 비하면 아무래도 무공이 떨어지기에 이 강룡십팔장을 하루아침에 능숙히 펼쳐 보이기는 어려웠다.
개방의 모임을 앞둔 어느 날이었다.
미운산은 미리 홍칠에게 일러두었다.
"홍칠이, 난 네가 여기 있는 걸 남들이 알게 하고 싶지 않다. 개방의 모임이 있는 며칠 동안 너는 딴 데 가 있거라.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놀다가 개방의 모임이 끝나면 다시 돌아와. 그때 내가 타구봉법을 가르쳐 주겠다."
홍칠은 그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딱히 갈 데가 없는 홍칠은 뭇 거렁뱅이들이 있는 동악산의 낡은 절로 갔다. 그는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비렁뱅이질로 간신히 허기를 채우는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절의 거렁뱅이 두목이 말했다.
"며칠 있으면 우리 개방에서 큰 모임을 갖게 되는데 우리 다 같이 가 보세. 적어도 밥 한끼는 배부르게 먹을 수 있거든."
거렁뱅이들은 얼씨구 좋다, 하며 두목을 따라 나섰다. 홍칠도 따라갔다. 그들은 얼마를 걸어 한 수림에 이르렀다. 수림 속에는 한 무리의 거렁뱅이들이 조용히 모여 앉아 있었다. 홍칠네 무리들도 슬금슬금 다가가 곁에 앉았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자 누군가가 나직이 소리쳤다.
"온다!"
홍칠은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멀리 교자 몇 개가 이리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교자가 수림에 닿자 여섯 사람이 각각 타고 온 교자에서 내려섰는데 모두 홍칠이 알 만한 사람들이었다. 앞에 선 사람은 부귀산인 범장천이요, 그 뒤를 따르는 사람들로는 청한자자 노명성, 출수표(出手 ) 노경(盧敬), 운중연(雲中燕) 서불성(徐不成), 사개 정원, 옥면검객 호심이었다. 그들 여섯은 뭇 거렁뱅이들 앞으로 걸어왔다.
"오랫동안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네."
부귀산인 범장천이 먼저 인사를 하자 다른 다섯도 같이 읍하며 인사를 했다. 그 깍듯한 인사에 사람들은 감격한 듯 급히 답례들을 했다.
청한자자 노명성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우선 형제들이 먹을 것과 입을 것들을 마차에 가득 싣고 왔으니 그것부터 나누세. 며칠 모임에 참가하려면 염낭들이 궁색해질 테니 그것부터 해결해야지."
거렁뱅이들은 환성을 올리며 우르르 달려가서 마차에서 고기며 술을 내어 맨땅에 주저앉아 먹고 마시기 시작했다.
원래 개방은 그 출범과 더불어 금의옥식을 피하고 은냥을 축적해서는 아니 되며 순 비렁뱅이질로 먹고 살아야 한다는 율을 내세웠다. 그것이 한 대 한 대 전해 내려오는 동안 변질되어 금의옥식하는 자는 물론 은자를 축적하거나 교자 타고 마차 타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금의파라는 파벌까지 나오게 되었다.
개방의 거렁뱅이들이 퍼지르고 앉아 먹고 마시며 한 절반쯤 취했을 때 누군가가 소리쳤다.
"여러분, 술만 마시지 말고 우리 장로님들 말 좀 들읍시다. 상론할 대사가 있으시답니다."
그러자 비렁뱅이들은 개방의 여섯 장로를 향해서 빙 둘러앉아 장로들의 말을 기다렸다.
부귀산인 범장천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개방의 형제들은 그동안 모두 한집안 식솔로서, 입을 것 먹을 것 서로 나누어 가지며 의좋게 지내는 것을 큰 자랑으로 여겨 왔소. 그런데 뜻밖에도 반년 전에 우리 개방에 반역자가 나타나서 우리 방주님을 독해하였소."
청중들은 놀라 술렁거렸다.
"아니, 방주를 해친 놈이 누구요? 우리 방주가 어떻게 해를 입었단 말입니까?"
누군가 소리쳤다. 그러자 옥면검객 호심이 냉랭히 말했다.
"우리가 직접 눈으로 봤는데 방주님은 다리를 못쓰게 되었소. 걷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이제는 남과 싸우지도 못하게 되었소."
"도대체 어느 놈이 한 짓이오? 장로님들은 모르시오?"
누군가 물었다. 그러자 청한자자 노명성이 입을 열었다. 노명성은 어느 장로보다도 거렁뱅이 무리들한테 신임을 받고 있었다.
"형제들! 우리 여섯 장로들이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그 놈은 우리 개방에 있는 놈입니다. 우리 개방엔 장로가 모두 열한 명이 있는데 그 열한 명의 장로 가운데 바로 방주님을 해치려는 범인이 있단 말이오. 방주님을 가까이서 모시는 사람이 아니고선 그런 방법으로 독해할 수가 없는 법이거든."
거렁뱅이들은 일순 입을 다물었다. 개방 안에, 그것도 장로들 가운데 방주님을 해치려는 자가 있다니 이보다 놀라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개방은 금의파(錦衣派)와 오의파(汚衣派)로 갈라지면서부터 분쟁이 끊일 날이 없었다. 금의파는 빈한한 수련과 청고한 계율을 반대했고 오의파는 금의파의 사치 향락을 거렁뱅이의 계율에 어긋난다고 비방했다. 이 두 파의 분쟁은 개방의 방주도 어쩌지 못하였는데, 더구나 지금의 방주 미운산은 금의파의 신분으로 방주 자리를 이어받았기에 오의파에게 미움을 사고 있었다. 그러니 방주를 독해한 것은 다름아닌 오의파일 가능성이 많다는 게 대부분 거렁뱅이들의 추측이
었다.
"오의파 놈들이 한 짓이 틀림없어. 오의파 장로 넷이 자기네가 방주 자리를 차지하려고 그런 독한 짓을 한 게 틀림없다구!"
거렁뱅이들 속에 끼여 앉은 홍칠은 다른 거렁뱅이들과 같이 어울려 먹고 마시면서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다.
'이 금의파의 말도 일리가 있어. 오의파 장로들이 방주 자리를 차지할 희망이 없으니까 방주님을 독해하고 개방을 크게 혼란시키려고 그랬는지도 모르지.'
저마다 한마디씩 떠들어 대어 소란스러운 가운데 부귀산인 범장천이 큰소리로 외쳤다.
"형제들! 오늘은 여기서 조용히 기다렸다가 내일 새벽 우리 함께 개방대회에 참가하러 갑시다. 가서 아무 일도 없으면 좋은 거고, 만일 무슨 일이 생긴다면 우리는 모두 일어나서 방주님을 옹위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개방이 무너지지 않도록 협력해야 합니다!"
"옳소!"
사람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하루 일을 마친 소씨 거렁뱅이는 주방의 밀가루 반죽용 등상 위에 길게 누워 잠을 청했다. 이때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처녀 한 명이 들어왔다. 두 눈이 초롱초롱하고 날렵하게 생긴 미모의 여인이 그를 보고 물었다.
"소씨 거렁뱅이시죠?"
소씨 거렁뱅이는 적이 놀라 몸을 일으켰다.
"그렇다만……. 넌 누구지? 누구길래 이 야밤 삼경에 날 찾아왔지?"
"그렇게 놀라실 것 없어요."
그녀가 소리내어 웃었다.
"누군가 당신을 찾는 사람이 있는데 함께 가 보시지 않으시겠어요?"
"날 찾는다고? 누가 나 같은 놈을 다 찾지? 거 참 고마운 일인데?"
"개방의 대사에 관련된 일인데 가시겠어요, 안 가시겠어요?"
처녀가 생글생글 웃으며 다시 한 번 물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몸을 돌려 뒤에 있는 술병을 끌어다가 한 모금 꿀꺽 마시고는 퉁명스레 대꾸했다.
"안 가!"
"역시 짐작대로군요. 싫다면 하는 수 없죠.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어요."
처녀는 더는 권하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문으로 향했다.
소씨는 술을 마시며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득 물었다.
"날 찾는 사람이 누구지?"
막 문을 나서려던 처녀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개방 방주 미운산 어른이세요."
소씨 거렁뱅이는 술 마시던 것을 멈추고 그녀를 멀뚱하게 쳐다보다가 다시금 천천히 물었다.
"뭣 땜에 날 찾지? 방주님은 날 제일 싫어하는데, 네가 날 속이는 게 아니냐?"
"그야 가 보시면 알 일이죠."
소씨 거렁뱅이는 연신 웃고 있는 처녀를 눈여겨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넌 누구냐? 개방 사람 같지 않은데……."
"전 미립이라고 해요. 미운산 어른의 딸이죠."
"딸이라고? 젠장, 미운산 방주님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은 모두 방주님의 아들이 아니면 딸이라고 하니 누가 진짜고 누가 가짜인지 알 게 뭐야."
소씨 거렁뱅이의 말에 미립은 또 호호 웃었다.
"그래요? 그렇다면 절 자세히 보세요. 제가 방주님의 친딸 같지 않아요?"
"글쎄, 방주님의 친딸 같지 않고 오히려 내 딸 같은데?"
"아버님 말씀이, 소씨는 실없는 말을 잘한다고 하시더니 과연 그렇군요. 어떻게 아내도 없는 사람이 딸이 있어요?"
미립이 깔깔거렸다. 그러자 소씨 거렁뱅이도 기분이 좋아져서 빙긋이 웃었다.
"그러고 보니 닮은 것 같기도 하구만. 방주님을 닮은 것 같기도 해."
소씨의 말에 미립은 더욱 자지러질 듯 웃어댔다.
"정말이지 안목이 의심스럽군요. 미안하지만 전 방주님의 딸이 아니에요. 그저 개방의 한 사람으로서 방주님을 도와드리고 있을 뿐이에요."
소씨 거렁뱅이는 머쓱해졌다. 미립은 소씨 거렁뱅이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어떤 놈이 미운산 방주님을 죽이려고 하고 있어요. 방주님께서 독해를 입으신 걸 알고나 있으세요?"
"방주님께서?"
"방주님은 지금 누구도 믿지 않아요. 어쨌든 방주님께서 소 장로를 급히 만났으면 하세요."
"이봐, 네가 방주님의 딸이라면 방주님은 바보가 아니지만 딸이 아니라면 방주님은 정말 바보야. 그러니 당하고서도 누구한테 당했는지도 모르고 있지."
"방주님을 도와주시겠어요?"
미립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물었다.
"난 싫어!"
소씨 거렁뱅이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미립은 더는 말하지 않고 두 눈 가득 눈물을 담더니 그대로 돌아섰다. 그녀가 막 문을 나서려는데 소씨가 소리쳤다.
"싫어도 가긴 가야겠다. 내가 방주를 해코지하지 않았다는 것도 증명해야겠고, 방주님을 해치려는 놈이 도대체 누군지도 궁금하고 말야."
소씨 거렁뱅이가 나타나자 미운산은 그를 바라볼 뿐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미운산의 눈길에서 영웅 말로의 절망같은 것을 읽었다. 미운산은 눈을 부릅뜨더니 소씨 거렁뱅이를 향해 말했다.
"자네가 나를 만나기 싫어하는 줄은 알고 있지만 이렇게 와 주리라 믿었네."
"미립에게 들었습니다만, 방주님께서 독해를 입었다니 잘 믿어지질 않습니다."
소씨 거렁뱅이가 딱하다는 듯 말했다. 미운산은 처연한 웃음을 웃어 보였다.
"자네는 일종의 반독(半毒)이란 독약에 대해 아는 바가 있는가?"
소씨 거렁뱅이는 물끄러미 미운산을 쳐다보았다.
"가령 그 어떤 산해진미를 먹으면서 동시에 다른 어떤 음식을 먹으면 그것이 독약이 되어 사람을 꺼꾸러뜨리는 경우가 있지. 이렇게 생기는 독을 반독이라고 하네."
미운산의 말에 소씨 거렁뱅이가 물었다.
"절 부르신 이유가 뭔지 그것부터 말씀해 주시지요. 방주님을 독해한 그 죽일 놈을 잡으라고 절 부르신 겁니까?"
소씨 거렁뱅이의 물음에 미운산은 갑자기 크게 웃었다.
"이봐, 자넨 왜 그렇게 눈치가 무디나? 나를 해친 놈을 잡으라고 자네를 야밤 삼경에 여기로 불러 올까?"
"그러시다면 저를 술동무하자고 부르셨습니까?"
소씨 거렁뱅이는 헤헤 웃으며 곁에 있는 술항아리를 끌어다가 술을 마시려고 했다. 워낙 성격이 제멋대로인 소씨 거렁뱅이는 방주 앞이라고 해서 그 행동이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 불손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소씨의 성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미운산은 웃기만 할 뿐 탓하지 않았다.
소씨 거렁뱅이는 술단지의 마개를 떼고, 단숨에 반 단지 가량 들이키더니 천연스레 미운산을 쳐다보았다.
"제게 할말이 있으시면 망설이지 말고 말씀하십시오."
미운산은 연신 한숨을 짓더니 자기 다리 위에 덮었던 가죽 담요를 들어 보였다.
"무릎과 다리가 성하지 못하니 걸을 수가 없고 걸을 수가 없으니 개방의 방주 일을 어떻게 보겠는가? 거렁뱅이 일생은 사처로 돌아다니는 게 업인데 이젠 한 발짝도 내딛기가 어렵게 되었네. 이 몰골을 하고서 내가 어떻게 계속 개방 방주 자리를 지킬 수 있겠는가?"
소씨 거렁뱅이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미운산은 날카로운 눈길로 소씨 거렁뱅이를 한동안 응시하다가 큰소리로 말했다.
"이봐, 자네가 개방의 율을 어겨 일대 제자로 떨어지긴 하였으나 난 내 대신 자네를 개방 방주로 앉힐 작정이네. 자네 생각은 어떤가?"
대경실색한 소씨 거렁뱅이는 미운산과 곁에 있는 두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기색에서 미운산의 말이 거짓말이 아님을 안 소씨 거렁뱅이는 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 됩니다, 아니 됩니다. 개방의 일대 제자에 불과한 제가 방주일을 보다니요? 천만 부당한 일이옵니다."
미운산은 고갯짓으로 운낭을 시켜 녹옥죽봉을 가져오게 했다. 운낭은 곧 그 유명한 녹옥죽봉을 가져왔다.
"소씨, 개방 총부의 십만이 넘는 인종과 대강 남북에 있는 모든 분타(分舵)를 이젠 자네한테 모두 맡기네."
미운산은 녹옥죽봉을 소씨 거렁뱅이에게 넘겨주려고 했다.
"이러지 마십시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런 일을 어떻게 이렇게 결정할 수가 있습니까? 잘 생각해 보시고 결정하십시오. 제 생각엔 이 녹옥죽봉을 범장천 장로에게 넘겨주고 그분에게 개방 방주
일을 맡아보게 하심이 마땅한 줄 아옵니다."
"이 사람아, 자네도 우리 개방 안의 일을 잘 알고 있지 않나? 금의파 장로가 여섯이고 오의파 장로가 넷인데 이들 두 파가 서로 조금도 양보 없이 티격태격 분쟁이 끊일 날이 없는데 나더러 방주 자리를 금의파에게 넘겨주라고?"
소씨 거렁뱅이는 술을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금의파에게 넘겨주는 게 마땅찮으면 오의파 나장태 장로한테 넘겨도 될 일 아닙니까?"
그 말에 미운산은 쓴웃음을 지었다.
"개방 방주 자리를 넘겨주는 일이 어디 그렇듯 간단한 줄 아는가? 내가 금의파 범장천에게 넘겨주면 오의파들은 내가 금의파 출신이니 금의파 편에 선다고 불복일 것이고 반대로 오의파에게 넘겨주면 금의파 사람들이 나를 죽일 놈이라고 욕할 걸세. 심성이 비뚤어져 다른 파 사람들에게 방주 자리를 넘겨준 나쁜 놈이라고. 그러니 이처럼 난처한 일이 어디 있겠나?"
그제야 소씨 거렁뱅이도 방주 자리를 넘겨주는 일이 생각처럼 수월한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하지만 성격적으로 심각한 것을 질색으로 여기는 그는 더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말했다.
"그렇다면 괜히 일을 시끄럽게 만들 필요 없이 방주님이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계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이거야 어디……."
미운산은 길게 한숨을 토해내며 안타까운 시선으로 소씨 거렁뱅이를 바라보았다. 열한 장로들 중에는 그래도 금의파도 아니고 오의파도 아닌 소씨 거렁뱅이에게 방주 자리를 넘겨주는 것이 가장 낫다고 생각했는데 소씨 거렁뱅이가 이렇듯 펄쩍 뛰니 앞일이 여간 걱정되지 않았다.
"전 방주 일을 못 봐요. 다른 사람을 시키시오."
소씨 거렁뱅이는 한사코 거절했다.
미운산은 소씨 거렁뱅이를 한동안 응시하다가 정색하며 말했다.
"그러면 자네 대신 금의파나 오의파가 아닌 사람 중에 누구를 시키면 좋겠나?"
미운산의 물음에 소씨는 퍼뜩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 기뻐 소리쳤다.
"홍칠이, 홍칠이가 있잖습니까! 홍칠이를 시키시오. 제일 적임자죠. 비록 내 제자이긴 하지만 무공은 저와 별반 다를 게 없고 또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우직한 성미라 가장 적합한 인물입니다."
그러자 미운산이 고개를 젖히고 크게 웃어댔다.
"역시 소씨답군. 난 이미 홍칠에게 방주 자리를 넘겨주기로 하고 답변을 받았네."
그의 말에 소씨 거렁뱅이는 은근히 심기가 뒤틀렸다. 그는 술단지를 들어 벌컥벌컥 술을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방주님께선 지금까지 나를 떠보고 있었군요? 이 소씨 거렁뱅이가 자기 제자와 방주 자리를 다투나 어쩌나 보자고 말입니다."
"이봐, 자네도 개방에서 어른인데 개방에서 이때까지 헛살았구만. 이 미운산이 이런 일엔 얼마나 꾀가 많고 빈틈없는 사람인지는 자네도 모르지 않을텐데?"
소씨 거렁뱅이는 미운산을 보며 생각했다.
'그래. 미운산은 나와 같이 장로를 지낼 때도 꾀가 많아 난 언제나 그를 따르지 못했지. 매사에 그는 앞뒤를 재어 빈틈없이 처리하면서 자기는 조금도 손해보지 않는 대단히 영악한 인간이었어. 그렇다면 이번 일은 도대체 무슨 꿍꿍이로 이러는 걸까?'
소씨 거렁뱅이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그 눈치를 챈 미운산이 사람 좋은 웃음을 띄웠다.
"이봐, 내가 내 생각을 솔직하게 말하겠네. 그럼 자네는 꼭 방주 자릴 맡아 줄 게야."
사실 개방의 열한 명 장로들 중에 누군가 방주를 해치려 했다면 일단 방주를 해치려 한 이상 홍칠이 방주가 되면 더 위험하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므로 홍칠을 그냥 방주로 올려 놓는 데는 큰 위험이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생각을 해 보게. 홍칠이가 죽으면 누가 개방의 방주 자릴 이어 가겠나? 개방을 지키려면 홍칠이만한 인물이 필요하고, 때문에 홍칠이가 방주 자리에 앉기 전에 자네나 나 둘 중 하나가 먼저 죽어야 하네. 그런데 나 같은 건 이미 무용지물이 되었으니 놈이 더 이상 나를 표적으로 삼지 않을 테구……."
미운산은 잠시 말을 멈추고 넌지시 소씨 거렁뱅이를 건너다보았다.
"이거 듣고 보니 난 순전히 낚싯밥인 셈이구만? 그러니까 날더러 홍칠일 대신해서 죽으라는 거 아뇨?"
소씨 거렁뱅이가 펄쩍 뛰었다.
"그렇네. 놈을 잡기 위한 수단인 셈이지. 그러면 개방을 구할 방법이 나서는 건데 자네가 죽기를 두려워 하니 이 일을 추진할 수가 없군 그래."
미운산의 말에 소씨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한동안 묵묵히 앉아 있던 그가 드디어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좋습니다. 방주님 말씀대로 죽으라면 죽어 보겠습니다. 그러나 난 방주님처럼 가만히 앉아서 독해를 당하고 있지마는 않을 겁니다."
소씨 거렁뱅이가 나가고 나자 미운산은 그의 의자에 앉아서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곁에 있던 운낭과 여아도 말이 없었다. 미운산이 드디어 침통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여아와 운낭은 내 말을 잘 듣거라. 난 이제 늙고 병들어 너희들을 더는 만족시켜 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니 둘 다 내 곁에 있을 것 없이 가고 싶은 데로 떠나들 가거라."
"방주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운낭이 미운산 앞에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방주님이 아니시면 제가 지금까지 무슨 수로 살 수 있었겠습니까? 방주님은 저의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그런 방주님을 저버리고 떠나라니요? 전 못 떠납니다. 전 죽을 때까지 방주님 곁을 지킬 겁니다!"
이에 감동한 미운산이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말은 고맙다만 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람이고 죽지 않아도 같이 있어 봐야 고생밖에 더 하겠느냐? 괜한 고집 부리지 말고 어서 떠나거라."
"방주님을 떠날 바엔 차라리 이 자리에서 죽겠어요."
운낭은 결연히 칼자루를 뽑아 들었다.
"운낭아!"
미운산이 버럭 소리질렀다.
운낭은 손을 멈추고 미운산을 애절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저보고 죽으라는 게 아니라면 절 내치지 말아 주세요. 끝까지 떠나가라 하신다면 전 방주님 앞에서 자결하고 말겠어요."
"정말 어리석구나. 난 이제 하반신을 못쓰게 된 불구의 몸이라 남녀간의 정도 나눌 수 없어. 젊은 나이에 그 무슨 못할 짓이냐?"
"전 상관없어요. 방주님과 함께라면 아무래도 좋아요."
"어리석은 것……, 어리석은 것……."
운낭의 말에 미운산은 가슴이 미어져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윽고 미운산은 고개를 돌려 여아에게 말했다.
"운낭은 그렇다 치고 여아 넌 어서 떠나거라."
세 사람이 한데 어울려 뒹굴 적이면 여아의 정욕이 가장 강하였음을 미운산과 운낭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도 미운산을 가만 놔두지 않았다. 그러한 그녀가 앞으로 끓어오르는 욕정을 억제하면서 언제까지 견딜 수 있겠는가.
"방주님, 그동안 이 여아에게 베풀어 주신 방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여아는 미운산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녀는 무어라 할말이 없었다. 그녀는 자기가 끝까지 미운산을 섬길 수 없음을 스스로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었다.
"여아는 이곳을 나가면 개방에 있지 않는 것이 좋다. 내 여기 운낭에게 주어 보내려던 은자가 있으니 그것도 함께 가지고 가거라."
여아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 은자를 받아 들고 미운산에게 절을 하였다. 그녀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듯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그곳을 떠났다.
여아가 석실을 나가고 나자 미운산은 운낭을 보며 길게 한숨을 토해냈다.
"여아가 막상 떠나고 나니 섭섭하시죠?"
운낭이 물었다.
미운산은 머리를 가로 저었다.
"그런 게 아니라 이제야 난 나를 독해한 놈이 누군지 알았어."
"누군데요?"
운낭이 급히 물었다.
"여아…… 여아였어."
"여아라니요? 지금 진정으로 하시는 말씀이세요?"
운낭은 펄쩍 뛰었다.
"여아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어요. 그런 독한 짓을 한 놈은 분명 장로들 중에 있을 거예요. 여아를 의심한다는 건 뭔가 잘못 알고 그러시는 걸 거예요."
"내 말이 틀릴 리가 없어."
미운산이 단호하게 말했다.
미운산은 자기가 앉아 있는 의자에 장착된 단추 하나를 눌렀다. 그러자 그와 운낭은 서서히 위로 올라갔다.
"게 누구 없느냐?"
위층으로 올라온 미운산이 소리쳤다.
곧 아랫사람 넷이 달려 들어왔다.
"너희들은 어서 가서 사개 정원과 소미타(笑彌陀) 추우(鄒雨)를 불러오너라."
넷은 미운산의 명을 받고 나갔다. 소미타 추우와 사개 정원은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미운산 앞에 나타났다.
"방주님, 무슨 분부가 계십니까?"
"드디어 나를 이렇게 만든 범인을 찾았다. 너희 둘은 어서 가서 그 년을 붙잡아 누가 시켜 한 짓인지 조사해 오너라. 서둘러라!"
미운산이 명하였다.
"그 년이 누굽니까?"
사개 정원이 사나운 기세로 물었다.
그는 금의파 장로로서 잔인하기로 이름난 사람이었다. 몸에는 비단옷을 둘렀으나 뱀을 가지고 놀기를 즐겼는데 그 뱀은 몸 전체에 독이 있는 뱀이었다.
미운산은 한숨을 짓고 두 눈을 내리감더니 머리를 숙였다. 그는 차마 말하기가 싫은 듯 한동안 그러고 있다가 나직이 내뱉었다.
"여아다. 어서 가서 찾아보아라."
사개와 소미타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방주를 독해한 사람이 방주가 그렇게도 사랑했던 여아라니……. 그들은 방주의 심정이 어떨지 짐작하고도 남았다.
"방주님께서는 여아를 다시 보시겠습니까?"
사개가 조심스레 물었다. 이것은 여아를 죽여도 좋은지 아니면 생포해 와야 하는지를 묻는 말이었다.
그런데 미운산은 차마 죽일 수는 없다는 듯 이마에 손을 짚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나 마음을 다잡은 듯 천천히 대답했다.
"그럴 필요 없다."
품에 은자 몇십 냥과 은표 몇십 장을 지니고 석실을 나온 여아는 어디로 갈지 막막했다. 그녀가 대문 앞에서 갈팡질팡하는데 저만치서 사람 하나가 다가왔다. 남의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양삼우(楊三牛)였다. 양삼우는 여아를 보자 소리쳤다.
"아씨, 여기서 뭐하십니까?"
여아는 애써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한동안 머물 만한 곳을 찾고 있는 중인데 좀 주선해 주시겠어요?"
양삼우는 의심이 버럭 났다. 여아는 방주의 여인인데 왜 갑작스레 밖에 나와 머물 곳을 찾는다는 건가? 방주와 다투고 성이 나서 뛰쳐나온 것이 아닐까?
"아씨, 숙소는 소인이 주선해 올릴 수가 있지만 도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그렇게 됐어요. 날 데리고 여기를 떠나 좀 먼 데로 잡아 줘요. 조용하고 깨끗한 집으로요."
여아가 여전히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양삼우는 이 일은 급히 서두를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적당한 집 하나를 찾아서 그녀를 데려다 놓고 윗사람들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방주와 싸우고 뛰쳐나왔으면 지금쯤 방주가 찾고 있을지도 모를 일 아닌가?
"여아 아씨,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내 어디 가서 수레 하나를 구해 오겠습니다."
잠시 후 양삼우는 수레 한 대를 얻어 왔다.
두 사람은 꼬박 반나절이 걸려 저녁 무렵에야 20리 밖에 있는 자그마한 마을에 당도했다. 인가가 몇 안 되는 마을 어귀에 객점 하나가 눈에 띄었다. 이 객점에는 모자 둘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여아네 일행을 반겨 맞으며 말을 들여 매 주고 밥을 지어 주었다.
여아네 일행이 밥을 다 먹자 노파가 말했다.
"아씨, 아씨가 이런 데서 지내자면 불편한 점이 많을 거외다. 이 늙은 걸 꺼리지 않으면 아씨는 나와 한 방에서 자고 저 남정네들은 내 아들과 같이 자게 함이 어떻겠소?"
여아는 노파의 말대로 하기로 했다.
잠자리에 들자 노파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씨를 보면 처녀는 아니신 것 같은데 어떻게 이렇듯 홀로 길을 떠나셨수? 남편 되시는 분이 걱정도 안 하든가 봐?"
그 바람에 여아는 자신의 신세가 새삼 처량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그간의 일들을 노파에게 자초지종 얘기해 주었다. 노파가 혀를 끌끌 차며 놀랍다는 듯 대꾸했다.
"아씨 남편도 대단한 사나이요. 이렇게 사랑스런 아낙을 어떻게 무 자르듯 정을 뚝 끊고 내보낼 수 있었을까? 하긴, 그것도 아씨에 대한 정일지도 모르지."
그 말에 여아는 더욱 슬피 눈물을 흘렸다. 끝까지 미운산 곁에 남는 건데, 괜히 떠나 왔다는 후회가 밀려 왔다.
여아가 슬퍼하자 노파가 그녀를 달래기 위해 말을 이었다.
"그분이 아씨를 떠나 보낸 것도 어쩌면 아씨를 위함이 아니겠소? 너무 슬퍼 말아요. 그런 분의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나 같으면 평생 원이 없겠네."
이때였다. 갑자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얘야, 어서 가 문을 열어라. 손님이 오셨나 부다."
노파가 아들 방에 대고 소리쳤다.
아들은 급히 일어나 옷을 주워 입으며 투덜댔다.
"야밤 삼경에 웬 손님이야?"
문을 여니 바깥엔 사나이 둘이 서 있었다.
"밤늦게 죄송합니다."
비단옷을 입은 선비 타입의 사나이가 정중히 말했다.
객점의 아들은 그의 손에 작은 뱀이 한 마리 들려 있는 것을 보고 기겁하여 소리를 내질렀다.
선비 타입의 사나이가 실실 웃으며 물었다.
"이 집에 아가씨 하나가 투숙하고 있지 않나?"
객점 아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내하게."
아들은 바짝 긴장하여 두 사나이를 안방으로 안내해 갔다. 문을 여니 여아와 노파가 침대 위에 일어나 앉으며 그들을 쳐다보았다.
'여기 있었구만."
사개가 차갑게 말했다.
뒤이어 들어온 소미타도 여아를 보고는 실실 웃었다.
"아씨 걸음이 얼마나 빠른지 따라오느라고 땀깨나 흘렸소이다."
여아는 이상한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 두 장로가 여기까지 왜 왔을까? 내일모레 개방의 큰 모임이 있는데 무슨 여가가 있어서 여기까지 왔을까?'
여아는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 두 놈이 바로 미운산을 독해한 사람이 아닌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여아는 더욱 긴장하여 어쩔 바를 몰랐다.
이때였다. 바깥 쪽에서 양삼우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추 장로님과 정 장로님이 오셨군요. 잘 오셨습니다. 그렇잖아도 걱정이 태산 같았는데. 글쎄 저 여아 아씨가 저더러 집을 하나 잡아 달라는데 방주님 생각을 알 수가 있어야죠. 그래 안 그래도 내일 아침에 달려가서 의논을 드리려던 참입니다."
"양삼우, 자넨 정말 꾀가 많은 친구야. 평소에도 일 처리를 이렇게만 하게. 그럼 방주님께서 자네한테 분타의 타주 자리 하나 내줄지 어찌 알겠는가?"
소미타가 치하를 했다.
"추 장로님, 장로님의 길언(吉言)대로 내가 분타 타주가 되면 장로님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이때였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귀청을 찢는 듯한 양삼우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소미타, 양삼우는 왜 죽이지?"
사개 정원이 놀라 물었다.
"자네, 철부지 애들도 아닌데 그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나? 저런 놈을 살려 둔다면 개방 총부의 비밀이 유지되겠나?"
소미타가 냉정하게 대꾸했다.
노파는 혼비백산하여 덜덜덜 떨며 여아를 쳐다보았다. 여아는 더는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죽이려면 나를 죽여요! 개방도 율이 있는데 이렇게 함부로 아무 짓이나 하는 법이 어디 있어요? 방주님이 아시면 가만 놔둘 줄 아세요?"
소미타가 쓴웃음을 웃었다.
"아씨는 아씨 일이나 걱정하시오. 아씨는 방주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방주님께선 아씨를 우리 손에 맡겼소!"
"당신들 손에 맡겼다고? 그렇다면 날……."
여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문득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다.
'운낭처럼 끝까지 미운산 곁에 있을 생각을 안 하고 혼자 떠나왔다고 이러는 건가? 이것이 미운산의 심보로구나. 그가 이토록 무정하고 잔인한 인간일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이럴 줄 알았으면 떠나 오지 말고 미운산이 보는 앞에서 죽어 버리는 건데…….'
여아는 눈물을 훔치며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바보야. 날 죽이려는 줄도 모르고 난 여태까지 그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었으니."
여아는 결심한 듯 칼을 꺼내 제 가슴을 겨냥했다.
"좋아요. 방주님께서 날 죽이려 한다면 차라리 내 손으로 죽겠어요."
여아의 칼 쥔 손이 허공에서 부들부들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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