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천도룡기 6-1

3학년2반 | 2022.03.06 07:02:29 댓글: 0 조회: 399 추천: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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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6 권

제 1 장 새로운 바람(風)과 구름(雲) #1/6

주아는 파사 사람의 약을 발랐는데도 전혀 차도가 없었다. 여전
히 열이 내리지 않고 헛소리를 했다. 며칠 동안 거친 바닷바람에
시달린 그녀는 오한까지 겹쳤다. 장무기는 자연히 초조해졌다.
사흘째 되는 날,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듯한 작은 섬이 보이자
장무기는 즉시 그곳으로 배를 몰도록 분부했다.

육지에 오르자 일행은 다소 마음이 놓였다. 섬의 둘레는 몇 리
에 불과했다. 장무기는 주지약에게 주아와 조민을 보살펴달라고
부탁한 후 약초를 찾아나섰다.

그러나 섬에 자생하고 있는 화초는 중원과 판이하게 틀려 이름
조차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장무기는 그 중에서 약초가 될 만
한 것을 캐느라 무척이나 애를 먹었다.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에서야 몇 가지 약초를 구해 돌로 찧어 주아에게 복용시켰다.

여섯 사람은 모닥불에 둘러앉아 요기를 채웠다. 교교한 달빛이
뿌려지는 가운데 바람결에 은은한 꽃향기가 실려오니, 갑갑하기
만 한 선창과는 달리 별천지에 온 기분이었다. 주아도 한결 정신
이 맑아졌다.

"아우 오빠, 오늘 밤은 배로 돌아가지 않고 여기서 지내요."

그것은 모든 사람의 바램이었다. 섬에는 사나운 짐승도 없으므
로 각자 마음놓고 잠을 청할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장무기는 잠에서 깨어나 첫걸음을 옮기자마자 비
틀거리며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 다리가 솜처럼 풀려 후들후들
떨렸다. 여지껏 없었던 증상이었다. 그는 내심 놀라며 눈을 비벼
시야를 넓혀보니, 파사선이 있어야 할 곳에 없었다. 이렇게 되
자, 그는 더욱 놀라며 해변으로 달려갔다. 역시 배는 보이지 않
았다.

장무기는직감적으로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그는 소리 높여 외
쳤다.

"의부님! 별고 없습니까?"

사손의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장무기는 황급히 사손이 있던 곳
으로 뛰어가 보니 의부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것을 확인하
자 일단은 안심이 되었다.

조민, 주지약, 주아 세 사람은 어젯밤 멀리 떨어진 바윗돌 위에
다 잠자리를 정했다. 장무기가 그곳에 달려가 보니 주지약과 주
아만 서로 얼굴을 마주한 채 잠들어 있고, 조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장무기가 더욱 놀란 것은 주아의 얼굴을 자세히 확인한
순간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예리한 칼날로 그은 십여 줄기의
상흔이 역력히 나 있었다. 장무기가 황급히 맥을 짚어보니 다행
하게도 미약하게나마 뛰고 있었다.

다시 주지약을 살피니, 그녀는 귀에 상처가 나 있고 고운 머리
카락이 절반 가량이나 잘려져 있는 게 아닌가! 그런데도 주지약
은 얼굴에 미소를 띄운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아침 햇살을
받은 그녀의 얼굴은 해당화처럼 아름다왔다. 장무기는 내심 아뿔
싸를 토하며 황급히 그녀를 깨웠다.

"주 낭자! 주 낭자! 어서 일어나시오!"

그러나 주지약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장무기는 그녀의 어깨
를 흔들었다. 주지약은 비로소 길게 하품을 하며 깨어나는 듯했
으나, 다시 고개가 꺾이며 새근새근 잠을 잤다.

장무기는 그녀들이 미약에 중독된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어
젯밤 이런 해괴한 일이 일어났는데도 불구하고 자기는 전혀 느끼
지 못했을 뿐 아니라, 지금 온몸이 나른하여 전혀 힘을 쓸 수 없
으니 역시 중독된 게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장무기는 주지약을 깨워도 일어나지 않자, 다시 사손에게 달려
가 소리쳤다.

"의부님! 의부님!"

사손은 그제서야 깨어나며 어리둥절해 했다.

"아침 일찍부터 웬 수선이냐?"

"큰일났습니다. 우린 함정에 빠졌습니다."

장무기는 파사선이 떠나 버리고, 주아와 주지약이 부상을 입은
일을 대충 얘기해 주었다. 사손은 대뜸 조민에 대해 물었다.

"조 낭자는 어떻게 되었느냐?"

장무기는 울적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길게 숨을 들이키며 운공을 시도해 보았지만, 사지가 구름
위에 두둥실 떠 있는 듯 힘을 전혀 쓸 수 없었다. 순간 그의 입
에서 절로 놀란 외침이 뱉어졌다.

"의부님!우린 십향연근산의 독을 당한 겁니다!"

육대문파의 고수들이 십향연근산에 의해 만안사에 갇힌 일을,
장무기로부터 전해 들어 알고 있는 사손이었다. 그도 마찬가지로
몸을 일으키는 순간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도저히 힘을 쓸 수
없었다. 그는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물었다.

"그 도룡도와 의천검은 있느냐?"

장무기가 비로소 살펴보니 보검과 보도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는데, 조민마저 자기를 배신할 줄이야. 꿈에도 생각지 못
한 일이었다.

장무기는 치를 떨었으나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는 주아의 상세
가 염려되어 다시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주지약은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장무기는 그녀의 공력이 자기나 의부에 비해
약하기 때문에 늦게 깨어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곧 옷자락
을 찢어 주아의 얼굴에 묻어 있는 핏자국을 닦아 주었다. 그녀
얼굴에 거미줄처럼 그려진 상흔은 모두 실처럼 가늘어, 의천검에
의한 것임이 분명했다.

주아는 자삼용왕 금화파파에게 상처를 입은 후 피를 너무나 많
이 흘렸다. 그로 인해 체내의 천주독액(千蛛毒液)도 피에 섞여
많이 씻겨진 탓으로, 얼굴이 팅팅 붓는 부종기가 거의 가라앉았
다. 요 며칠 동안 그녀는 어릴 적의 예쁘장하던 용모를 되찾았는
데, 지금 수십 줄기의 검상이 그어지자 다시 추하고 징그러운 모
습으로 변했다.

장무기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그리고 끝없는 분노에 사
로잡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조민! 다시는 내 손에 걸려들지 말아라. 다시 너를 용서한다면
난 맹세코 사람이 아닐 것이다!'

장무기는 길게 숨을 들이켜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지혈에 도움
이 되는 약초를 구해 와 입으로 질퍽하게 씹어 주아의 얼굴에 붙
여 주었다. 그리고 다시 주지약의 찢어진 귓부리부위와 머리카락
이 잘라져 두피가 보이는 부분에 발라 주었다.

장무기는 그제서야 하품을 하며 눈을 떴다. 그녀는 장무기가 자
신의 머리를 만지고 있는 것을 문득 깨닫자, 얼굴이 붉어지며 얼
른 그의 손을 밀어냈다.

"왜..... 왜 이러세요!"

한 마디를 내뱉자마자 귀에 통증을 느껴 손으로 만저보더니, 그
만 짤막한 비명을 질렀다.

"앗! 어떻게 된 거죠?"

그녀는 갑자기 무릎이 꺾이며 힘없이 장무기의 품에 쓰러졌다.

장무기는 그녀를 부축하며 위로해 주었다.

"주 낭자, 두려워할 것 없소."

주지약은 주아의 가공스러운 얼굴을 보자 반사적으로 자신의 얼
굴을 만져 보았다.

"이게..... 나도 저 모양이 되었나요?"

"아니오! 낭자는 가벼운 상처를 입었을 뿐이오."

"그..... 파사국의 악도들이 한 짓인가요? 난 어째 전혀 모르고
있었죠?"

장무기는 한숨을 내쉬며 울적하게 말했다.

"아마..... 조 낭자가 한 짓인 것 같소. 어젯밤 우리가 먹은 음
식에다 독을 풀어넣은 모양이오."

주지약은 잠시 멍해져 있다가 상처난 귀를 만지며 울음을 터뜨
렸다. 장무기는 그녀를 달랬다.

"낭자, 불행 중 다행이라 생각하면 마음이 편할 것이오. 귓부리
의 상처는 머리카락으로 가리면 감쪽같을 것이오."

주지약은 입을 삐쭉거리며 쏘아부쳤다.

"머리카락이라뇨? 머리카락도 없잖아요!"

장무기는 당황해졌으나 얼른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머리카락은 다시 자랄 것이오. 그러니 너무 심려 마시오."

주지약이 갑자기 토라졌다.

"내가 왜 머리카락으로 귀의 상처를 가려야 하죠? 일이 이 지경
이 됐는데도 당신은 그 계집을 감싸고 돌 생각인가요?"

장무기는 엉뚱하게 무안을 당하자 얼른 변명을 했다.

"난 절대 그녀를 감싸주는 게 아니오. 이렇게 악랄한 수법으로
주아의 얼굴을 난도질했으니, 잔 절대..... 그녀를 용서하지 않
을 것이오!"

주아의 추하게 변한 얼굴을 보자, 그는 다시 걷잡을 수 없는 분
노가 끓어올랐다. 그러나 지금으로선 속수무책이었다. 그는 일단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공을 시도해 보았다. 생각했던 대로 중독
현상이 깊었다.

십향연근산에 중독되면 주민의 독특한 해약을 복용하지 않는 한
독을 제거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으로선 구양신공을 운용해
독을 몰아내는 도리밖에 없었다. 그는 곧 내력을 운용하여 사지
백해에 산재돼 있는 독소를 천천히 단전으로 유인했다. 그리고
나서 조금씩 체외로 배출시켰다. 운공을 한 지 반 시진이 지나자
약간의 효과가 있었다. 장무기는 비로소 다소나마 마음이 놓였
다.

그것은 구양신공이 체내에 운집해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 구
양신공을 사손, 주지약에게 나눠 줄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일단
자신의 독을 완전히 제거한 연후에 그들을 도와야만 했다.

체내의 독을 밀어내는 일은 결코 쉬운 게 아니었다. 이레가 지
났는데 장무기는 체내의 독소를 삼 분의 일 가량 배출했을 뿐이
었다. 다행하게도 이 독소는 힘을 쓸 수 없게 할 뿐 몸에 해를
끼치지는 않았다.

처음 며칠 동안 주지약은 매일 짜증을 냈지만, 차츰 체념을 하
고 낮에는 사손과 함께 물고기도 잡고 잡일을 도맡아했다. 밤에
는 멀리 떨어진 동굴 속에서 혼자 잠을 잤다. 그녀는 의식적으로
장무기를 피하려는 것 같았다.

장무기는 내심 죄책감을 느꼈다. 조민이 꾸민 흉계지만 모두자
기로 인해 비롯된 것이라 생각됐다. 조민은 분명 몽고의 군주로
서 명교와는 같은 하늘을 우러러볼 수 없는 앙숙이 아닌가! 그런
데 자기는 그녀에 대해 전혀 경계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으니, 지금 와서 생각하니 부끄럽
기만 했다.

사손과 주지약은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장무기는 마
음이 괴로왔다. 우연히 주지약과 눈이 마주치게 되면 죄인이 된
느낌이었다. 주지약의 눈빛은 무언중에 자기를 비웃고 있는 게
분명했다.

----- 당신은 조민의 미색에 현혹되더니, 결국 이런 큰 화를 당
하게 된 거예요! -----

그럴수록 조민에 대해 분노와 배신감이 눈덩어리처럼 불어 났
다.

한편, 주아의 상세는 차츰 더 심해졌다. 이 섬은 남해 한복판에
위치해 있어 모든 화초가 호청우가 의경에 수록한 것들과 달랐
다. 그러니 장무기의 의술이 뛰어나다 한들 약초를 구할 수 없으
니 소용없는 헛것이었다.

게다가 섬에 자생하는 나무는 한결같이 앉은뱅이처럼 왜소해 그
쓸모가 고작 불을 때는데 국한됐다. 그렇지 않으면 벌써 뗏목을
만들어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중원행을 시도해 보았을 것이다.

장무기가 차라리 의술을 몰랐다면, 이렇게 안타까와하지는 않았
을 것이다. 그는 칼로 도리는 듯 마음이 아팠다. 이날 밤도 그는
오열을 퇴치하는 약초를 씹어 주아의 입에 넣어 주었다. 그러나
주아는 이제 그것마저 삼킬 수 없는 만큼 상세가 악화되었다. 장
무기는 콧등이 시큰해지며 눈물이 쏟아졌다. 그의 눈물이 양볼을
타고 주아의 얼굴에 떨어지자 주아가 갑자기 눈을 떴다. 그녀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얼룩져 있었다.

"아우 오빠, 슬퍼할 것 없어요. 난 저승으로 가서 그 야무지고
명이 짧았던 장무기를 찾겠어요. 그를 만나 아우 오빠의 예기를
들려 주겠어요.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잘 위해준 고마운 사람이
라고요."

장무기는 목이 메었다. 과연 그녀에게 자신이 바로 장무기라고
밝혀야 할지 망설여졌다. 주아는 그의 손을 쥐었다.

"아우 오빠, 난 오빠의 청혼을 여지껏 승락하지 않았는데, 그
때문에 나를 미워하진 않겠죠? 사실 오빠가 날 즐겁게 해주기 위
해서 그런 거짓말을 했다는 건 잘 알고 있어요. 나처럼 못 생기
고 성질도 고약한 계집을 정말 아내로 맞아들이려 하겠어요?"

장무기는 눈물을 삼키며 힘주어 말했다.

"아니야! 내 진심이었다. 너같이 진실하고 정이 많은 낭자를 아
내로 맞아들이는 게 내 소원이었어. 상처가 완쾌되는대로 혼례를
올리고 싶은데 괜찮겠지?"

주아는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내둘렀다.

"아우 오빠, 내가 일부러 혼례를 피하는 게 아녜요. 난 이미 그
쌀쌀맞은 장무기에게 마음을 송두리채 주었기 때문에..... 오빠,
웬지 무서워요. 저승으로 가서 정말 그를 만날 수 있을까요? 나
를 보면 예전과 마찬가지로 사납게 대할까요?"

장무기는 그녀의 정신이 어느 때보다도 맑고, 양볼에 불그스름
하니 홍조가 띄어지는 것을 보자 가슴이 철렁했다.

회광반조(廻光返照). 촛불도 꺼지기 직전에 마지막 광채를 발한
다는데, 주아가 바로 그런 상황이 아닌가?

장무기는 머리가 띵해지며 어떻게 해야 좋을 지 몰랐다. 주아가
그의 손을 잡고 다시 물어오자 비로소 복받치는 감정을 억제하고
부드럽게 말했다.

"그는 영원히 너를 잘 대해 줄 거야. 너를 금지옥엽처럼 소중히
생각할 거야."

"오빠가 나에게 해준 절반 만큼 잘 대해 줄까요?"

"장무기는 하늘에 맹세코 성심성의껏 너를 보살펴 줄 거야. 내
가 여지껏 네게 해준 것과 조금도 다름없이....."

주아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더니, 입가에 다시 미소가 피어 올랐
다.

"그..... 그러면 안심이예요."

장무기의 손을 잡았던 손을 천천히 풀며 주아는 눈을 감았다.
끝내 호흡이 멎은 것이다.

장무기는 그녀의 시신을 왈칵 끌어안았다. 억제했던 눈물이 주
르르 흘러내렸다. 주아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가 장무기라는 사
실을 모른 채 눈을 감은 것이다. 근래 며칠 동안 그녀는 줄곧 혼
수상태에 있었으므로 진실을 밝힐 기회가 없었다. 임종을 앞두고
맑은 정신이 돌아왔으나 역시 얘기할 새가 없었다. 하기야 지금
에 와서 그 사실을 밝힌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마는 그로 인해 장
무기는 더욱 가슴이 아팠다.

'조민이 그녀의 얼굴에 새로운 상처를 만들지 않았다면, 목숨까
지 잃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조민이 우리를 이 외딴 섬에 버리
고 달아나지 않았다면 벌써 중원에 닿았을 것이고, 내가 무슨 수
를 써서라도 그녀를 살렸을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장무기의 눈에서 원독의 불길이 뿜어졌
다.

"조민! 이 사갈보다 악랄한 계집, 언젠가 내 손에 걸리면 절대
살려두지 않겠다!"

그의 한맺힌 절규가 끝나는 순간, 등 뒤에서 냉랭한 음성이 들
려왔다.

"막상 그녀의 꽃같은 얼굴을 보면 마음이 달라질걸요?"

몸을 돌려보니 주지약이 경멸에 찬 표정으로 서 있었다. 장무기
는 가슴이 아프고 부끄러웠다. 그는 다시 한번 다짐을 했다.

"난 사촌누이의 시신 앞에서 다시 맹세컨데, 그 요녀를 죽이지
않으면 하늘을 우러러 보지 않으리다."

주지약은 냉소를 날렸다.

"과연 그 말을 실천에 옮길 배짱이 있는지 두고 보면 알겠군
요."

그녀는 앞으로 성큼 걸어와 주아의 시신을 끌어안고 통곡을 했
다.

사손은 울음소리를 듣고 달려와, 주아가 죽었다는 말을 듣자 역
시 상심해 했다.

장무기는 언덕배기 양지바른 곳에 얕은 구덩이를 파서 그녀의
시신을 가만히 내려놓았다. 혈흔이 낭자한 그녀의 얼굴을 보자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관도 없으니 흙과 돌이 얼굴에 닿으면 얼마나 아파할까?'

장무기는 나뭇 가지를 꺾어 구덩이에 즐비하게 가로걸치고 나서
그 위에다 돌을 조심스럽게 올렸다. 주아는 비록숨이 끊어졌지
만, 장무기는 자꾸만 그녀가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돌무덤을 쌓고 나서 장무기는 나무줄기를 잘라 껍질을 벗긴 후,
주아의 비수로 몇 글자 새겼다.

----- 망처주아은리지묘(忘妻蛛兒殷離之墓) -----

그는 스스로 주아(은리)의 남편으로 자처했다. 그것만이 주아를
위한 마지막 애정이라 생각했다. 묘비까지 세우고 나서 장무기는
엎드려 곡을 했다. 주지약이 옆에서 그를 위로했다.

"당신은 은 낭자에게 인의(仁義)를 다했어요. 그녀는 저승에서
나마 편히 눈을 감을 거예요. 앞으로 조민을 죽여 그녀를 위해
복수해 주는 일밖에 남지 않았어요."

이렇게 말하는 주지약의 눈동자에 웬지 모르게 불안한 빛이 깔
려 있었다.

장무기는 체내의 독을 제거하는 일에 열중했다. 다시 십여 일이
지났다.

섬의 기후가 무더워 야생하는 과일이 많았다. 그 덕분에 식생활
은 무난히 해결되었다. 주아가 죽은 후로부터 주지약은 장무기를
비교적 부드럽게 대해 주었다.

장무기는 구양신공으로 사손 체내의 독을 제거해 준 후에 마땅
히 주지약을 도와야만 했다. 그러나 독을 제거하자면, 한 손은
상대방 허리 뒤쪽에 붙여야 하며, 한 손은 배꼽 아랫 부위에 붙
여야만 했다. 장무기로선 난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문제로 인해 장무기는 며칠을 두고 고심했지만 결정을 내리
지 못했다.

이날 밤, 사손이 갑자기 이상한 질문을 해 왔다.

"무기야, 우리가 이곳에 얼마 동안 머물러야 될 것 같느냐?"

장무기는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글쎄요. 하루 속히 이 근방을 지나는 배를 만나 중원으로 돌아
가길 바랄 뿐입니다."

"그간 한 달 남짓이 지났지만, 배를 본 적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래, 물론 운이 좋으면 내일이라도 배를 만날 수 있겠지만,
수십 년간 배를 구경 못할지도 모른다."

계속 ---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6 권

제 1 장 새로운 바람(風)과 구름(雲) #2/6

장무기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섬은 바다 한 가운데 떠 있어 해선(海船)의 항로에서 크게
벗어났으니, 우리가 살아 생전 과연 중원으로 돌아갈 수 있을는
지 그저 막막하기만 합니다."

사손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받았다.

"그렇게 되면 해약을 구하는 일도 자연히 포기해야 마땅하겠구
나. 십향연근산의 독소가 체내에 남아 있으면, 사지가 나른해지
는 증세 외에 다른 후유증이 없는지 모르겠구나?"

장무기는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시일을 오래 끌지 않으면 별다른 해가 없겠지만, 모든 독소는
뼈를 삭이는 작용을 하므로 오랜시간이 경과되면 오장육부에 손
상을 입게 될 것입니다."

사손은 여지껏 늘어놓았던 서론을 정리하듯 본론을 꺼냈다.

"그러니, 하루속히 주 낭자의 독을 제거해 줘야 할 게 아니냐?
주 낭자는 너와 어릴 적부터 아는 사이었으며, 네가 현명패천장
의 한독으로 고생할 때 은혜를 베푼 바도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녀와 같이 온순하고 덕을 지닌 요조숙녀도 흔치 않을 것이다.
혹시 그녀의 용모에 대해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게 아니냐?"

장무기는 당치도 않다는 듯이 얼른 고개를 내둘렀다.

'아닙니다. 주 낭자는 정말 아름답습니다. 그녀만치 빼어난 용
모를 지닌 낭자도 드물 겁니다."

사손은 결론을 내렸다.

"이번 일만큼은 내가 독선을 부리겠다. 그러니 여러 생각말고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도록 해라. 그러면 독을 제거하는 일도 자
연히 해결될 거 아니겠느냐?"

주지약은 줄곧 옆에 있었다. 그녀는 사손의 단도직입적인 말을
듣자, 이내 얼굴이 붉어지며 횡하니 돌아서 달아나려 했다.

사손이 적시에 그녀의 앞을 가로 막았다. 그는 너털웃음을 흘리
며 말했다.

"당사자가 자리를 피하면 어떻게 하나? 오늘 이 중매장이가 기
필코 일을 성사시켜야겠네."

주지약은 입을 삐쭉거리며 곱게 눈을 흘겼다.

"사 어르신네, 정말 주착이시군요. 우린 지금 무슨 수를 써서라
도 중원으로 돌아가는 게 급선무인데, 그런 얼토당토 않는 얘기
를 꺼내면 어떻게 해요?!"

사손은 다시 껄껄 웃었다.

"남녀가 화합하는 것은 신성한 인륜대사이거늘, 어째서 얼토당
토 않는 얘기라는 거지? 무기야, 너의 부모님도 무인도에서 혼례
를 올렸다. 그들이 세속적인 예법을 간과하지 않았다면, 네 녀석
이 세상에 태어났을 리가 있겠느냐? 더군다나 오늘의 혼사는 이
의부가 직접 주선한 것이 아니냐? 혹시 주 낭자가 눈에 차지 않
아서 그러는 게 아니냐? 아니면 주 낭자 체내의 독을 제거해 주
기 싫어서 그러느냐?"

주지약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다시 달아나려 했으나 사손이
소매를 불잡았다.

"당장 이 자리를 피한다 해도, 우린 내일이면 다시 만나야 할
사람들이 아닌가? 음..... 이제보니 이봉사 늙은이를 시아버님
으로 모시기 싫은 모양이군?"

주지약은 당황해졌다.

"아니에요. 절대 그런 뜻이 아니에요. 사 어른신네는 당세의 호
걸로서....."

사손은 다짐을 받듯 물었다.

"그렇다면 승락하는 거지?"

주지약은 도리질을 하며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몰랐다.

"아니에요."

사손은 일부러 성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내 양아들이 낭자의 신랑감으로 부족하다는 뜻인가?"

주지약은 아랫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장공자는 무공이 탁월하고 사람됨이 인의로와 전혀 나무랄데
없는 인물이에요. 단지... 단지....."

사손이 다그쳤다.

'단지 뭐란 말인가?"

주지약은 힐끗 장무기를 쳐다보고 나서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
했다.

"그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은 조민이에요. 저는 그것을
알고 있어요."

사손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조민 그 교활한 계집으로 인해 우리가 이런 고생을 겪고 있는
데, 설마 무기가 아직도 그녀에게 마음을 두고 있을 리가 있겠
나? 무기야, 네가 직접 가슴 속에 품고 있는 생각을 솔직히 털어
놔 봐라."

장무기는 갈등이 일었다. 조민의 달콤한 미소와 매혹적인 눈망
울, 그리고 자신이 손에 쥐었던 그녀의 예쁜 맨발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다음 순간 선혈로 낭자한 주아
의 얼굴이 그녀의 얼굴 위에 크게 확대되어 자신을 짓눌러오자,
얼른 단호하게 말을 내뱉었다.

"조민은 나의 불공대천의 원수입니다. 기필코 그녀를 죽여 누이
의 원한을 갚겠습니다."

"주 낭자, 똑똑히 들었는가? 이래도 그 몹쓸 계집이 마음에 걸
리나?"

주지약은 다시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요. 그가 하늘에 대고 맹세를 한다
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는 한 설령 목숨을 잃게 되더라도 그
의 도움을 받아 독을 제거하지 않겠어요."

사손은 즉시 명령투로 말했다.

"무기야, 어서 맹세를 해라!"

장무기는 이미 마음의 결절을 내렸기 때문에 주저할 필요가 없
었다. 그는 낭랑한 음성으로 힘주어 말했다.

"요녀 조민은 몽고 오랑캐 황실의 앞잡이로서, 우리 한인을 괴
롭혀 왔으며 많은 무림 협사를 상하게 했을 뿐 아니라 의부님의
보도를 훔쳐갔고 사촌누이의 목숨마저 앗아갔으니, 나 장무기는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그 원한을 잊지 않을 것이며, 만약 이에 위
배되는 행동을 할 시엔 천벌을 받아 횡사하게 될 것입니다."

주지약은 그제서야 생긋이 웃었다.

"설마 그녀를 보는 순간 지금의 맹세가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것
은 아니겠죠?"

사손은 그녀의 확답을 받은 거나 다를 바 없다고 간주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이 있지 않는가? 특히 우리 강호인들
은 자질구레한 세속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으니, 오늘 당장 혼례
를 올리도록 하게. 그래야지만 하루 속히 십향연근산의 독을 제
거할 수 있을 걸세."

장무기는 정색을 하고 반대 의사를 표했다.

"아닙니다. 의부님, 주 낭자, 우선 저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주
아는 그 동안 저에게 깊은 정을 쏟아왔습니다. 우린 어릴 적부터
이미 상대방을 영원한 반려자로 생각해 왔습니다. 비록 혼례를
올리지 않았지만, 명분상 부부나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데, 그녀의 시신이 미처 식기도 전에 내 어찌 다른 낭자를 아
내로 맞아들여 혼례를 올릴 수가 있겠습니까?"

사손은 잠시 생각을 굴리더니 입을 열었다.

"그 말도 일리가 있군. 그럼 너의 생각으론 어떻게 하면 좋을
것 같냐?"

장무기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저의 생각 같아선, 우리가 요행히 중원으로 돌아가 조민을 죽
이고 도룡도를 되찾은 연후에 다시 주 낭자와 혼례를 올리면 보
다 뜻깊은 일이 될 것 같습니다."

사손은 빙긋이 웃었다.

"물론 그렇게만 된다면 오죽 좋겠느냐? 하지만 우리가 십 년이
넘도록 중원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냐?"

장무기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삼 년 후에도 우리가 이 섬을 떠나지 못하게 된다면, 의부님께
서 저희들의 혼례를 주선해 주십시오."

사손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주지약에게 물었다.

"주 낭자의 의견은 어떤가?"

주지약은 고개를 숙인 채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저는 의지할 곳이 없는 외톨인데, 스스로 무슨 주장을 내세우
겠어요? 모든 것을 어르신네의 분부에 따를 뿐이에요."

사손은 흐뭇해 하며 껄껄 웃었다.

"좋아, 좋아! 우리 세 사람이 이 자리에서 아예 약속을 하지.
자, 이제부터 나제들은 남남이 아니니 공연한 일로 쑥스러워할
것 없다. 무기야, 어서 내 며느리의 독을 제거해 주도록 해라."

이렇게 말하더니 일부러 자리를 비켜주려는 듯 성큼성큼 뒷산으
로 걸어갔다.

단둘이 남게 되자 장무기가 잠깐 침묵을 두었다가 입을 열었다.

"지약, 내 고충을 이해해 주겠소?"

주지약은 입가에 미소를 띄었다.

"내가 못 생겼기 때문에 이 핑계 저 핑계를 대서 미루는 게 아
닌가요? 만약 내가 조 낭자였더라면, 오늘 밤에 이미....."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스스로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장무기는 공연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난 한때나마 네 명의 미녀를 동시에 아내로 맞이할 망상을 갖
고 있었다. 사실 내가 진심으로 사랑한 것은 그 악마같은 요녀였
으니..... 미색에 눈이 어두워 선악을 구분 못한 것이 한없이 부
끄럽기만 하구나.'

주지약은 고개를 돌려 그가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을 보
자, 조용히 떠나가려 했다. 그 순간 그는 갑자기 그녀의 손을 나
꿔잡았다. 주지약은 공력이 회복되지 않아 그가 잡아 끄는 바람
에 비틀거리며 그만 그의 품안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녀는 몸부
림쳤으나 소용이 없자, 눈을 곱게 흘기며 쏘아부쳤다.

"이젠 노골적으로 나한테 경박한 행동을 하시는군요!"

그녀의 토라진 모습은 요염해 보이기까지 했다. 장무기는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뜨거운 감정이 용솟음쳐 올라, 그녀의 가냘픈 몸
을 끌어안고 나직이 말했다.

"지약, 우리가 어릴 적에 한수(漢水)에서 우연히 만난 것이 인
연이 되어, 오늘 같은 결과를 낳을지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소.
광명정에서 내 목숨을 구해 줄 당시만 해도 그저 감사를 느꼈을
뿐 감히 다른 망상을 갖지 못했었소."

주지약은 다소곳이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날 난 당신에게 일검을 찔렀는데, 그 일로 인해 나한테 원한
을 품지 않았나요?"

장무기는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당시 나의 급소를 피해 검이 날아왔을 때, 나에게 정을 품고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눈치챘소."

주지약은 흥! 하고 코웃음을 날렸지만, 얼굴이 홍당무처럼 달아
올랐다.

"그런 엉뚱한 생각을 갖고 있다는 걸 알았다면 그 때 아예 급소
를 노리는 건데, 앞으로 무궁한 세월을 당신에게 시달릴 생각을
하니, 당시 자비를 베푼 것이 후회스러워지는군요."

장무기는 두 팔에 힘을 주어 그녀를 바싹 끌어안았다.

"앞으로 난 모든 걸 바쳐 당신을 사랑할 것이오. 부부는 일심동
체라 했는데, 누가 누구의 시달림을 받겠소?"

주지약은 깨를 뒤로 젖혀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만약 내가 당신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당신은 나를 욕하거나
때리거나 죽이진 않겠죠?"

장무기는 지척에 있는 그녀의 얼굴에서 은은한 난초의 향기가
풍겨오는 것 같아, 그만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녀의
이마에 살짝 입맞춤을 했다.

"당신같이온순하고 현숙한 아내가 남편에게 잘못을 저지를 리가
있겠소?"

주지약은 섬섬옥수로 그의 등을 쓰다듬으며 다소 떨리는 음성으
로 말했다.

"신이 아닌 이상 사람은 누구에게나 잘못이 있기 마련이에요.
특히 나는 어릴 적에 부모님을 잃어 버릇없이 자랐기 때문에 언
제 잘못을 저지르게 될지 불안이 앞서요."

"설령 잘못을 저지른다 해도 난 좋게 타이르며 문제를 함께 해
결해 나갈 것이오."

"그러한 마음이 언제까지 변함없을 거라고 약속할 수 있나요?
나의 잘못으로 인해 당신이 꼭 나를 죽일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
요."

장무기는 그녀의 고운 이마에 다시 입맞춤을 했다.

"그것은 공연한 생각이오. 내 어찌 그런 야만스러운 일을 할 수
있겠소?"

주지약은 이상하리 만치 이 문제에 집착했다.

"그럼 사내 대장부로서 약속을 하시는 거죠?"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서편 하늘에 모습을 드러낸 반달을 가리
켰다.

"하늘의 달님이 우리 두 사람의 증인이 되어 줄 거예요."

장무기는 여전히 그녀를 품안에 안고 달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그 말이 맞소. 저 달이 나의 진심을 증명할 것이오. 지약, 난
여지껏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에게 기만을 당했으며 숱한 고생을
겪었소. 나에게 한때나마 행복이 있었다면 그것은 빙화도에서 부
모님과 함께 생활을 한 것이 고작일 것이오. 그렇게 믿었던 조민
마저도 나를 철저하게 우롱했으니....."

주지약은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두 팔로 그의 듬직한 가슴을
끌어 안았다.

"앞으로 내가 당신 가슴에 행복을 채워드리겠어요."

장무기는 그녀의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음을 의식할 수 있었다.
그는 진심으로 주지약을 사랑해 주고 싶었다.

"지약, 당신이야말로 나의 영원한 반려자요. 당신은 줄곧 나에
게 베풀어 주기만 했소. 당신이 내 곁에 있는 한 난 행복의 의미
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오. 당신을 나에게 주신 하늘에게 감사를
드리고 싶은 생각뿐이오."

주지약은 고개를 내둘렀다.

"아니에요! 나는 쓸모없는 나쁜 여자에요. 어쩌면 당신은 나로
인해 불행을 맛보게 될지도 몰라요."

이렇게 말하는 그녀의 맑은 눈동자에 영롱한 이슬이 맺혔다.

장무기는 자신의 체온으로 그녀의 몸을 포근히 감싸주었다. 오
늘따라 달빛이 유난히 교교했다. 장무기의 귓전에 파도의 노랫소
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주지약의 가슴이 뛰는 소리도 들을 수 있
었다.

그것은 그 자신의 가슴이 뛰는 소리인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하나가되어 한참 동안 달빛에 젖어 있었다.

다음날 장무기는 조용한 동굴 속에서 구양신공을 운공해 주지약
을 위하여 독을 제거하는 일을 착수했다. 비록 옷을 입은 상태지
만 장무기의 손길이 처음 몸에 닿는 순간, 주지약은 가늘게 떨었
다.

장무기 역시 처음엔 가슴이 두근거렸다. 특히 배꼽 아랫부위는
여인의 신체 중에서도 가장 은밀한 금단의 성역이 아닌가! 장무
기는 손바닥을 통하여 그녀의 뜨거운 피와 뜨거운 숨결을 뚜렷이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뿐이었다. 그는 곧 모든 잡념을 떨쳐버리고
운공에만 전념했다.

주지약의 중독 현상은 생각보다 훨씬 가벼웠다. 그것은 십향연
근산을 풀어놓은 음식을 많이 섭취하지 않은 탓이라 생각됐다.

이날부터 주지약은 장무기에게 몸을 맡겼고, 장무기는 그녀를
위해 열심히 독을 제거해 주었다.

그런데 이레째 되는 날이었다. 주지약의 체내에서 갑자기 한 갈
래의 이상한 기운이 뻗어나왔다. 그것은 장무기의 구양진기와 상
충되는 음한지기(陰寒之氣)였다. 주지약은 안간힘을 썼지만 도저
히 구양진기를 체내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장무기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의부에게 달려가 까닭을 물
었다. 사손은 잠시 생각을 굴리더니 고개를 갸우뚱했다.

"글쎄..... 나도 확실한 원인을 모르겠구나. 아마 아미파의 역
대 장문인이 모두 여자이므로, 그들이 연마한 내력이 너무 음유
(陰柔)한 쪽에 치우쳤던 탓일 것이다."

장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달리 해석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
다.

다행하게도 주지약의 내력은 그와 비교해 상당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장무기는 구양신공을 최고 경지로 끌어올려 그녀 체내에
유전되고 있는 음한지기를 억지로나마 누를 수가 있었다. 그러자
니 사손을 도와 독을 제거해 주었을 때보다 훨씬 어려웠다.

장무기는 그녀 체내에 잠재해 있는 음유한 힘이 비록 아직은 약
하지만, 차후에 그 힘이 엄청나게 강해지리라는 것을 느낄 수 있
었다. 그는 절로 탄복해 마지 않았다.

"지약, 존사인 멸절사태는 역시 불가일세(不可一世)한 기인이
오. 그가 지약에게 전수해 준 내공이 고심막측하다는 것을 이제
야 깨달았소. 지금 상태를 바탕으로 하여 열심히 내력을 쌓아나
간다면, 장차 나의 구양신공과 어깨를 나란히 할 게 분명하오."

주지약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어요? 나를 놀리시는 거겠죠. 아미파의 무
학이 어떻게 장교주의 구양신공과 건곤이위신공에 비교가 되겠어
요?"

장무기는 진지했다.

"지약은 아직 무공 초식 면에서는 배운 게 많지 않지만, 내공의
기초를 아주 견실하게 다져놓았소. 나의 태사부님의 말을 빌리
면, 똑같은 무학이라 할지라도 각자의 자질에 따라 그 결과가 다
르게 나타난다고 했소. 내가 보기에 지약의 무학은 나중에 필시
영사이신 멸절사태를 능가할 것이오."

주지약은 눈을 곱게 흘겼다.

"일부러 나를 기쁘게 해주려고 그러시는 거죠? 솔직히 말해 난
무공이 유별나게 고강한 것을 원치도 않아요. 다만 스승님의 근
처만 따라갈 수 있어도 만족할 거예요. 언제 기회가 있으면 구양
신공이나 건곤이위신공을 한 수 가르쳐 주세요. 설령 한, 두 수
라 할지라도 나한테는 굉장한 도움이 될 거예요."

계속 ---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6 권

제 1 장 새로운 바람(風)과 구름(雲) #3/6

장무기는 생각에 잠기며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주지약은 그의 표정을 살피며 장난기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이 우둔한 주지약이 장교주의 제자가 될 자격이 없나 보죠?"

장무기는 고개를 내둘렀다.

"그게 아니라 지약의 내공이 내가 쌓은 내공과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에, 만약 지금에 와서 다시 나의 무공을 배우게 된다면 그보
다 위험한 일이 없을 것이오."

"가르쳐 주기 싫으면 그만이지 곧이 그런 구실을 갖다 붙일 필
요는 없어요. 어려운 무학이라면 배울 수 없는 게 고작일 텐데,
무슨 위험이 있다는 거죠?"

장무기는 정색을 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오. 나의 구양신공은 순수한 양강(陽剛)
의 내공으로서 지약이 연마한 아미파의 순수한 음유지공(陰柔之
功)과는 서로 상반되므로, 나의 태사부님 같은 무학의 가재라면
그 두 가지 상반된 무공을 동시에 연마하여 수화상제(水火相濟)
강유상조(剛柔相助)의 경지를 이룩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주화입마(朱火入魔)되어 목숨을 잃거나 폐인이 되기 십
상이오. 그 대신 지약이 내공을 상당한 경지로 끌어올리는 날 건
곤이위신공의 심법을 전수해 줄 수는 있소."

주지약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건 장난삼아 해본 얘기에요. 앞으로 난 언제나 당신 곁에 있
을 텐데 당신의 무공과 나의 무공이 무슨 구별이 있겠어요? 난
본디 게으르기 때문에, 설령 구양신공을 연마하라고 강요한다 해
도 꽁무니를 뺄 거예요."

장무기는 그녀의 말에 가슴 뿌듯한 행복감을 느꼈다.

행복한 나날을 빨리 지나가기 마련이다. 장무기 일행이 무인도
에 발을 내딛은지도 어느덧 몇 달이 지났다. 주지약은 자신의
내력이 완전히 회복되었다고 했다. 그 동안 장무기는 꾸준히 그
녀의 독을 제거해 주는 일을 도왔지만, 그 이상의 선을 넘지는
않았다.

이날 섬 동쪽에 복사꽃이 유난히 아름답게 꽃망울을 터뜨렸다.
장무기는 복사꽃 가지를 한아름 꺾어 주아의 무덤을 찾았다. 그
가 무덤 앞에 세워놓았던 나무 줄기로 된 묘비가 이상하게도 한
쪽에 쓰러져 있었다. 장무기는 짐승들의 소행이라 생각하고 다시
똑바로 세워놓았다. 살아 생전 편안함을 누리지 못한 채 저승으
로 가버린 주아를 생각하니 새삼 가슴이 아팠다.

그가 울적한 심정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바다 쪽에서 갈매기 떼
가 요란하게 날개짓을 하며 울어 대는 것이 들려와 고개를 돌려
보니, 뜻밖에도 배 한 척이 바람을 타고 미끄러져 오는 게 아닌
가! 장무기는 뛸 듯이 기뻐하며 얼른 소리 높여 외쳤다.

"의부님! 지약! 배가 오고 있습니다! 배가 와요!"

사손과 주지약은 즉시 그의 곁으로 달려왔다. 주지약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웬 배가 이런 외딴섬을 향해 오고 있죠?"

장무기도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는 바가 아니었다.

"글쎄..... 혹시 해적선이 아닐지.....?"

얼마 후 범선이 섬 가까이서 닻을 내렸다. 그러자 한 척의 작은
배가 범선에서 떨어져 나와 물살을 헤치며 미끄러져 왔다.

작은 배를 몰고 온 사람들은 모두 몽고 병사의 복장을 하고 있
었다. 장무기는 선뜩 뇌리에 와닿는 바가 있었다.

'조민이 뒤늦게나마 양심의 가책을 느껴 다시 섬으로 돌아온 게
아닐까?'

그는 곁눈질로 주지약의 표정을 살펴보니, 그녀는 눈살을 찌푸
린 채 큰 근심거리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육지로 올라온 다섯 명의 병사 중에서 수군군관(水軍軍官)인 듯
한 자가 장무기에게 공손히 몸을 숙이며 물었다.

"혹시 장무기 장공자가 아니십니까!"

장무기는 부인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소만 귀하는 누군지.....?"

상대방은 장무기를 확인하자 몹시 기뻐하는 것 같았다.

"소인의 이름은 발속대(拔速坮)라 합니다. 이렇게 공자를 찾아
내게 된 것은 실로 행운입니다. 소인은 분부를 받들어 장공자와
사대협을 중원으로 모서가기 위해 이곳에 온 것입니다."

그는 주지약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다. 장무기는 가장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이곳까지 오느라 수고가 많았소. 그런데 누구의 분부에 따라
이곳까지 온 것인지.....?"

발속대는 지체없이 대답했다.

"소인은 복건성(福建城)의 달화적노(達花赤魯) 수군 제독의 수
하인데, 대도(大都)에 계신 발이도사(勃爾都思) 장군의 명을 받
아 출해하게 된 겁니다. 발이도사 장군께선 모두 여덟 척의 해선
을 바다로 내보내 장공자와 사대협을 찾아 모서오라고 명하였는
데, 생각지도 않게 그 중에서 소인이 공을 세우게 된 겁니다."

그의 말을 들어보니 그 무슨 장군께서 상을 내건 모양이었다.
장무기는 몽고 장군들의 이름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조민
의 분부에 따라 명령을 내린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귀하의 상사께서 무엇 때문에 나를 찾아오라고 했는지 알고 있
소이까?"

발속대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발이도사 장군께서는 장공자가 아주 귀하신 분이며 당세에 첫
손 꼽는 영웅 호걸이라면서, 만약 장공자를 찾게 된다면 소인더
러 정중히 모시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그 외에 무엇때문에 장공자
를 중원으로 모셔오시라고 했는지는 소인의 직책이 미천하여 자
세한 지시를 듣지 못했습니다."

주지약이 이들의 대화에 불쑥 끼어들었다.

"혹시 소민군주(紹敏郡主)의 뜻이 아닌가요?"

발속대는 멍해졌다.

"소민군주라뇨? 소인은 워낙 복이 없는 놈이라 아직 뵙지 못했
습니다."

주지약은 냉랭하게 말했다.

"복이 없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죠?"

발속대는 멋적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소민군주는 우리 몽고의 제일 미인입니다. 아니, 천하에서 그
분보다 더 아름다운 미인은 없을 겁니다. 문무를 겸비했을 뿐 아
니라 여양왕의 금지옥엽입니다. 소인처럼 박복한 자가 어찌 군주
의 그림자조차 뵈올 기회가 있었겠습니까?"

주지약은 흥!하고 냉소를 날리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
다.

장무기가 사손에게 고개를 돌렸다.

"의부님, 그럼 배에 오르도록 하시죠."

사손은 턱을 한 차례 끄덕였다.

"우선 동굴로 가서 봇짐을 챙겨야 하니, 이들에게 잠시만 기다
리라고 해라."

발속대가 얼른 그의 말을 받았다.

"소인이 부하들과 함께 가서 짐을 들어드리겠습니다."

사손은 담담하게 웃으며 사양했다.

"짐이라고 할 것도 없네. 우리가 가서 간단하게 챙겨 갖고 오겠
네."

그는 장무기와 주지약의 손을 잡고 산 뒤로 들어갔다.

"조민이 갑자기 배를 보내온 것은 필시 다른 음모가 있기 때문
이야. 너희들은 이 일을 어떻게 대처할 생각이냐?"

장무기가 대답했다.

"의부님, 조..... 조민이 범선에 있을까요?"

사손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요녀가 배에 있다면 문제가 수월하게 해결될 수도 있다. 어
쨌든 배에 오르더라도 음식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그 원칙
만 고수한다면 다시는 어처구니 없이 당하진 않을 것이다."

장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우리가 그 동안 모아두었던 음식을 배로 갖고 갑시
다. 식수도 충분히 준비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사손은 잠시 생각을 굴리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에 조민은 배에 없을 것이다. 그 계집은 파사 사람들이
한 짓을 그대로 재현할 속셈으로, 우리를 배로 유인한 연후에 바
다 한가운데서 몽고의 군선(軍船)을 시켜 우리의 배에 발포케 하
여 침몰시키려고 할 게 뻔하다."

장무기는 그 말에 가슴이 철렁했다.

"그녀가..... 그렇기도 악랄하단 말입니까? 우리를 그냥 이곳에
내버려두면 영원히 중원으로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르는데, 구태
여 악랄한 살수까지..... 우리가 대관절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
러는지 모르겠군요."

사손은 입가에 냉소를 머금었다.

"네가 만안사에 갇혀 있던 육대문파의 고수들을 모두 구해 주었
으니, 그 요녀가 원한을 품지 않을 리가 있겠느냐? 더군다나 명
교의 교주가 별안간 실종되었으니 모든 교도들이 백방으로 찾아
나설 것이며, 언젠가는 이곳 외딴섬까지 찾아 올지도 모를 일이
기 때문에, 아예 우리를 죽여 후환을 없애려는 심산임에 분명하
다."

장무기는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우리가 타고 있는 배에 발포하면, 발속대와 몽고 병사들도 함
께 죽음을 당하게 될 게 아니겠습니까?"

사손은 껄껄 웃더니, 곧 장탄식을 했다.

"무기야, 내 말을 명심해서 들어라. 병권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
이라면 목적을 위해 몇몇 무고한 생명을 희생시키는 따위의 일쯤
은 서슴치 않는다. 너처럼 매사에 인의를 앞세운다면, 애당초 몽
고인이 우리의 강산을 차지하고 도처에서 만행을 저지를 수 있었
겠느냐? 자고로 만천하에 명성을 날린 영웅들은 무엇보다도 결단
력이 뛰어났단다. 그들은 매사에 망설임이 없었지. 관병의 목숨
따위는 고사하고, 필요하다면 심지어 자신의 부모와 자식의 목숨
까지도 제물로 바칠 것이다."

장무기는 그의 말에 잠시 아연해 있다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
덕였다.

"의부님의 말씀이 옳은 것 같습니다."

그는 몽고인이 매우 잔인하다는 것을 일찌기 알고 있었다. 그러
나 부하에 대해서는 성심껏 보살펴 주리라 생각했는데, 사손의
말을 듣고 나니 그 비정함에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한기를 느꼈
다. 자기가 이번에 중원으로 돌아가면 무림의 군호들을 이끌고
몽고 오랑캐를 중원에서 몰아내는 일에 앞장서겠지만, 만약 자기
더러 천하를 다스리라 한다면 도저히 자신감이 없었다.

주지약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의부님, 그럼 우린 어떻게 해야 하죠?"

사손이 그녀에게 반문했다.

"며늘애야, 너에게 혹시 무슨 묘책이 없느냐?"

주지약이 소극적인 방법을 제시했다.

"배에 오르는 것을 거절하면 어떨까요? 그 몽고 군관에게 우린
이곳이 더 좋으니, 중원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고 말이에요."

사손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우리가 배에 오르지 않는다고 하면
그들이 가만히 있겠느냐? 물론 그들과 싸워 모조리 죽여 버릴 수
도 있겠지. 하지만 그 요녀가 다시 수십 척의 군선을 보내올 수
도 있잖겠느냐? 그보다 중요한 것은 무가가 중원으로 돌아가 해
야 할 일이 많다는 데 있다. 이곳에 남아 늙어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느냐?"

주지약은 얼굴이 빨개지며 고개를 숙였다.

"역시 의부님께서 방법을 제시하시는 게 좋겠어요. 저희들은 의
부님의 분부에 따르겠어요."

사손은 잠시 생각을 굴리더니 나직하게 말했다.

".....여차여차하는 게 어떻겠느냐?"

장무기와 주지약은 그가 제시한 방법을 듣자 모두 고개를 끄덕
이며 찬성했다.

장무기는 곧 주아의 무덤을 찾아가 눈물을 뿌리며 이별을 고했
다. 이어 그들은 범선에 올랐다. 주지약은 섬에서 무료함을 달래
기 위해 많은 목각인형을 만들었는데, 한 보따리 짊어지고 배에
올랐다.

장무기는 모든 선창을 유심히 살펴보았으나, 조민의 모습이 보
이지 않았다. 병졸과 수부(水夫)들은 모두 무공을 지니지 않은
것 같았다. 그리고 특별히 경계할 만한 사람도 눈에 띄지 않았
다. 닻을 올리고 배가 바다 한가운데로 옮겨가자 장무기가 갑자
기 발속대의 맥문을 나꿔잡아 다른 손으로 그의 칼을 뽑아 목을
겨냥했다.

"내가 시키는 대로 어서 부하들에게 배를 동쪽으로 돌리라고 하
시오!"

발속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장.....장공자, 소...소인은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여러 소리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시오. 허튼 수작을 부리
면 당장 목이 달아날 것을 각오하시오!"

"네! 네!"

발속대는 황급히 대답하며 수부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어...어서 뱃머리를 동쪽으로 돌려라!"

수부들은 순순히 그의 명령에 따라 뱃머리를 돌렸다. 장무기가
다시 위엄있는 음성으로 다그쳤다.

"너희들이 나를 헤치려는 흉계를 이미 간파했으니, 모든 것을
순순히 털어놓아라! 만약 거짓이 있을 시엔 아무도 살아남지 못
할 것이다!"

그는 말을 끝내기 무섭게 오른손으로 선창을 내리치자, 나무조
각이 흩날리는 가운데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렸다.

주위에 있는 몽고 병졸들은 모두 대경실색했다. 발속대는 떨리
는 음성으로 말했다.

"공자, 굽어 살펴주십시오. 소인은 단지 상사의 명에 따라 공자
를 중원으로 모셔가려는 것뿐이며, 절대 다른 생각이 없습니다.
소인은 이번 일로 공을 세워 상사로부터 상을 받을 욕심 외엔 정
말 아무것도 모릅니다."

장무기는 그의 진지한 언동에서 거짓이 아니라고 판단돼 손목을
풀어 주고, 뱃머리 쪽으로 걸어가 좌우 양손에 제각기 육중한 닻
을 집어 들었다.

"자, 모두들 똑똑히 보시오!"

그의 외침이 뱉어지자마자 두 개의 닻을 허공으로 던졌다. 주위
에 있는 몽고 병졸들은 일제히 놀란 외침을 발했다. 백여 근이
넘는 닻이 떨어지는 순간, 장무기는 건곤이위신공을 전개해 쌍장
을 교차시켜 떨쳐내자 닻이 다시 허공으로 높이 치솟아 올랐다.
이렇게 세 번을 거듭한 후 가뿐하게 닻을 받아 뱃머리에 내려놓
았다.

몽고인은 무(武)로 천하를 장악했듯이 용무지사(勇武之士)를 가
장 숭배했다. 그들은 장무기의 가공할 무공을 보자 일제히 갑판
에 엎드려 승복을 표하며 감히 엉뚱한 생각을 가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범선은 계속 해가 뜨는 동쪽으로 향했다. 사흘 동안 그들이 볼
수 있었던 것은 하늘과 맞닿은 망망대해뿐이었다. 사손의 추측대
로라면 조민이 배치해 놓은 군선은 필시 복건성과 절강성에 포진
해 있을 것이다. 그러니 망망대해에서는 군선과 맞닥뜨릴 염려가
없었다.

닷새째 되는 날, 장무기는 비로소 뱃머리를 북쪽으로 꺾도록 명
령했다.

북쪽으로 방향을 택해 쉬지 않고 스무 날을 항진했다. 조민이
제아무리 심계가 깊다 해도, 배를 엉뚱한 방향으로 몰아 중원 땅
에 닿으리라곤 생각지 못할 것이다.

그 동안 장무기 등은 섬에서 갖고 온 양식을 먹거나 바다에서
신선한 물고기를 잡아 요기를 채웠다. 배에 비축돼 있는 음식에
는 일체 입을 대지 않았다.

이날 정오 무렵 멀리 육지가 보였다. 몽고 병정들은 오랜 항해
끝에 육지로 돌아오자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해가 서산 마루로
기울쯤에 범선은 연안에 닿았다. 이 일대는 수심이 깊어 큰 배를
직접 육지 가까이 몰고 갈 수 있었다.

"무기야, 네가 우선 육지에 올라가 살펴보고 오너라."

사손이 시키는 대로 장무기는 육지로 몸을 날렸다.

그는 신법을 전개해 조심스럽게 바닷가 주변을 살폈다. 주위는
온통 울울창창한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땅에 쌓였던
눈이 녹은 탓인지 질퍽했다. 멀리 나갈수록 숲은 태고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장정 몇 사람이 팔을 벌려 맞잡아야지만 안을
수 있는 아름드리 고송(古松)이 하늘을 가린채 그 위용을 자랑하
고 있었다.

장무기는 높은 나무에 올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생각대로 온통
끝없는 송림이었다. 사람의 그림자는 눈을 씻고도 찾아 볼 수 없
자, 장무기는 다시 범선으로 돌아갔다.

한데 그가 범선이 정박돼 있는 해변에 가까이 이르렀을때, 난데
없이 처절한 비명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장무기는 흠칫 놀랐
다. 비명소리는 바로범선 안에서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는 단정
의 진기를 맹렬히 끌어올려 한 줄기 바람으로 화해 범선 위로 덮
쳐갔다.

범선 갑판과 뱃머리 곳곳에는 시체가 널부러져 있었다. 발속대
를 비롯해 모두 몽고 관졸들의 시체였다.

사손과 주지약은 멀쩡하게 한쪽에 서 있었음, 적의 모습은 보이
지 않았다. 장무기가 경악하며 물었다.

"의부님, 괜찮습니까? 그런데 배를 기습한 적은 어디로 갔죠?"

사손이 퉁명스럽게 그의 말을 받았다.

"적은 무슨 적이냐? 적을 발견했단 말이냐?"

"그게 아니라 이 몽고인들을 죽인.....!"

"우리 두 사람이 죽인 것이다."

장무기는 더욱 의아해 했다.

"그럼 이 몽고 병졸들이 육지에 닿자마자 엉뚱한 행동을 취했단
말입니까?"

사손은 태연하게 말했다.

"그들이 감히 무슨 행동을 취하겠느냐? 내가 그들의 입을 봉하
기 위해 저승으로 보낸 것이다. 이들이 죽으므로 해서 조민은 우
리가 중원으로 들어온 사실을 모를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암암
리에 행동하기가 한결 편리할 것이다."

계속 ---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6 권

제 1 장 새로운 바람(風)과 구름(雲) #4/6

장무기는 입이 딱 벌어진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
손은 다시 담담하게 말했다.

"내 수단이 너무 지나쳤다고 생각하느냐? 오랑캐의 관졸은 우리
의 적이다. 우리가 굳이 보살의 마음으로 그들을 대할 필요는 없
다."

장무기는 웬지 죄책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발속대 등은 비
록 적이었지만 모두 고분고분하여, 구태여 죽일 필요까지는 없다
고 생각했다. 사손은 그의 마음을 꿰뚫어보고 힘주어 말했다.

"양소비군자(量小非君子) 무독불장부(無毒不丈夫)라는 말이 있
지 않느냐? 담량이 작으면 군자가 아니고, 독하지 않으면 장부가
아니라 했다. 내가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상대가 나를 죽인다는
것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조민이 우리에게 악랄한 행동을 취했
듯이 우리도 그들에게 앙갚음을 해야 한다."

장무기는 계속 침묵만 지킬 수 없었다.

"의부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러나 발속대 등의 시체를 보자 콧등이 시큰해지며 안쓰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사손이 일방적으로 제의했다.

"배에다 불을 질러야겠다. 지약아, 놈들의 시체를 뒤져 금은을
찾아내고, 만약의 경우를 위해 칼을 세 자루 추려 내도록 해라."

두 사람은 곧 배에 불을 질렀다. 선체가 제법 컸으므로 삼경반
야가 돼서야 불이 꺼지며 배와 시체가 모두 잿더미로 화해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이제 육안으로는 그들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장무기는 의부님의 철두철미한 일처리에 새삼 느끼는 바가 있었
다. 역시 강호에서 오랜 세월 동안 경험을 쌓아온 분이라, 생각
에서 행동에 이르기까지 자기가 배울 점이 많았다.

세 사람은 가까운 숲속에서 새우잠을 자고 나서, 날이 밝자마자
숲을 뚫고 남쪽으로 향했다. 이틀째 되는 날, 그들은 비로소 대
여섯 명의 심마니들을 만나 물어보니 이곳이 요동(遼東) 딸이며
장백산(長白山)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심마니들과 헤어지자 주지약이 사손에게 물었다.

"의부님, 저들도 죽여서 입을 봉해야 하나요?"

이 말에 장무기가 펄쩍 뛰었다.

"그게 무슨 망언이오?! 저 심마니들은 우리가 누군지도 전혀 모
르잖소? 앞으로 우리와 맞닥뜨리는 사람을 모조리 죽일심산이란
말이오?"

주지약은 마치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얼굴이 붉어졌다. 장
무기가 이같이 신랄하게 자기를 꾸짖기는 처음이었다.

사손이 주지약의 어색한 입장을 모면시켜 주려는 듯 얼른 나섰
다.

"나도 솔직히 말해 그들을 죽였으면 좋겠다. 하지만 교주가 많
은 살상을 원치 않으니 우린 속히 다른 옷으로 갈아입어 원래의
모습을 감추어야겠다."

세 사람은 곧 걸음을 재촉하였다. 이들은 이틀 후에야 겨우 숲
을 벗어날 수 있었다. 다시 하루 정도 걷자 비로소 농가가 나타
났다. 장무기는 여러 집을 들러 은자를 두둑히 주고 헌 옷을 구
할 수가 있었다.

주지약은 항상 몸단장을 깨끗히 해 왔기 때문에, 땀냄새에 저린
촌부(村婦)의 옷으로 갈아입자 구역질이 날 것 같았지만 꾹 참아
야만 했다.

사손은 다시 두 사람에게 얼굴에 덕지덕지 흙칠을 하고 봉두난
발을 하도록 명했다. 가까이 있는 수면에 자신의 얼굴을 비쳐본
장무기는, 스스로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둔갑한 자신의 모습
에 아연실소를 금치 못했다. 이 정도면 설령 조민과 마주친다 해
도 자기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장무기 일행은 계속 남쪽으로 향하여 만리장성 안으로 접어들
어, 이날 어느 큰 고을에 당도했다.

시장기를 느낀 세 사람은 우선 눈에 띄는 큰 주루를 찾아 들었
다. 장무기는 대뜸 석 냥 가량 되는 은자를 주루 사람에게 건네
주었다.

"선불을 할 테니, 음식을 먹고 나서 나머지를 거슬러 가겠소/"

그는 자신의 남루한 차림새를 감안해 거렁뱅이로 오해 받지 않
기 위해 미리 식대를 지불한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주루의 주
인장인 듯한 배불뚝이 중년인이 공손하게 일어나 그에게 은자를
다시 돌려주는 것이 아닌가!

"나으리들이 모처럼 저희 집을 찾아주셨는데, 대접도 변변찮게
해드리면서 어찌 은자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어서 거두어 주십
시오."

장무기는 의아해 했다. 그는 자리에 앉은 후 나직이 주지약에게
물었다.

"이곳의 주인장이 왜 우리의 은자를 받지 않는지 모르겠소. 혹
시 우리의 신분을 알아차린 게 아닌지 모르겠구료?"

주지약은 자신과 장무기, 그리고 사손의 모습을 새삼 유심히 살
펴보았다. 어느 모로 보나 영락없는 거렁뱅이였다. 사손이 나직
이 입을 열었다.

"주인장의 말투를 들어보니 두려움이 담겨 있는 것 같다. 아무
튼 조심해야겠다."

이때였다. 층계를 밟는 발자국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칠,
팔 명이 기세당당하게 주루 이층으로 올라왔다. 공교롭게도 그들
역시 거렁뱅이 차림이었다. 그들은 마치 첩집 안방으로 들어온
듯 거드름을 피우며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점원이 굽실거리며 위장된 웃음으로 그들을 맞이했다. 어쨌든
그들을 고관대작 모시듯 깍듯이 대했다.

장무기는 자연히 이 거렁뱅이들의 동태를 자세히 살피게 되었
다. 순간 그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예사 거렁뱅이가 아니
었다. 그들 중에는 등에 다섯 개의 포대를 둘러멘 자가 있는가
하면, 여섯 개의 포대를 둘러멘 사람도 있었다. 알고보니 모두
개방에서 상당한 직위를 갖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장무기가 주문한 요리가 나오기도 전에 다시 대여섯 명의 개방
제자가 나타나더니, 잇따라 또 삼삼오오 짝을 지어 올라왔다. 삽
시간에 삼십여 명의 개방 제자가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그들
중에 세 사람은 포대를 일곱 개나 갖고 있는 칠대제자(七袋弟子)
였다.

장무기는 또 한가지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개방 제자들은 오늘
이 주루에서 모임을 갖기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주루의 배불뚝
이 주인장은 자기네들도 개방 제자인 줄 오인한 것이다. 장무기
는 나직이 사손에게 말했다.

"우린 적당히 기회를 봐서 이 자리를 피하는 것이 어떻겠습니
까?"

바로 이때 점원이 요리를 갖고 왔다. 튀긴 닭고기와 쇠고기 볶
음을 커다란 접시에 푸짐하게 담아 가지고 왔다. 게다가 백주 다
섯 병을 곁들여 갖고 왔다. 사손은 오랫 동안 포식할 기회가 없
었던 차에 구수한 향기가 후각을 자극하자, 삼수갑산을 가더라도
일단 먹고 볼 심산으로 대뜸 닭고기를 집었다.

"얘야, 조선땅에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이 있다. 먹다가 죽
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고 하지 않느냐? 일단 먹고 보자, 우리가
얌전하게 음식만 먹겠다는데 설마 생트집을 잡겠느냐?"

그는 게걸스럽게 닭고기를 씹더니, 백주를 사발에다 따루어 냉
수 마시듯이 벌컥벌컥 목구멍에다 쏟아 넣었다.

"카! 술맛이 꿀맛이군. 이게 얼마만인가? 벌써 이십 년이 흘렀
군. 젠장 청상과부가 이십 년을 수절한들 이보다 눈물겹진 않을
것이다. 다시는 술맛을 보지 못하는 줄 알았는데....."

그는 내심 감개무량했다. 한 사발의 백주(白酒)를 말끔히 비우
고 나서 손등으로 입을 쓱 훔치더니, 홀연 표정이 굳어지며 나직
하게 말했다.

"조심해라. 이번에 나타난 두 사람은 보통내기가 아니다."

장무기도 층계를 밟는 가벼운 발자국소리를 들었다. 과연 대단
한 인물임에 분명했다. 두 사람이 새로 모습을 드러내자 주루에
앉아 있던 개방 제자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사손의 손짓에 따라 장무기 등 세 사람도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
어났다. 그들은 구석진 자리에 앉았으므로 다른 사람들에게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다 일어서는데 세 사람
만 엉덩이를 붙이고 있는다면, 선뜻 눈에 띄었을 것이다.

새로 나타난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턱 밑에 수염을 길게 길렀
고 차림새만 남루할 뿐, 의젓한 선비의 풍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자는 눈이 부리부리하고 덥석부리
인데다가 매우 험상궂게 생겼다. 언뜻보아 마치 절을 지키는 사
대신왕(四大神王) 중의 하나처럼 생겼다.

두 사람의 나이는 모두 오십 줄 안팎으로 등에 제각기 아홉 개
의 포대를 메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아홉 개의 포대는 손바닥 만
한 것을 실로 꿰매 엮은 것으로, 실용적인 게 아니라 단지 신분
을 나타내기 위한 상징에 불과했다.

장무기는 내심 생각을 굴렸다.

'개방은 오래 전부터 강호에서 제일 큰 방파로 알려져 왔다. 태
사부님의 말에 의하면, 왕년에 개방 방주였던 홍칠공(洪七公)은
무공이 출중하고 협의심이 강해 무림 흑백양도의 존경을 받았다
고 했다. 그 뒤를 이어 황방주, 야율방주도 역시 걸출한 인물이
었다고 한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개방의 명성이 많이 쇠퇴한 것
같다. 현임 방주인 사화룡(史火龍)은 좀처럼 강호에 모습을 나타
내지 않으므로 어떠한 인물인지 알 수 없다. 저 두 사람이 아홉
개의 포대를 메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방주를 제외하고 가장 신분
이 높은 인물임에 분명하다. 그날 영사도에서 개방 사람들도 의
부님의 도룡도를 빼앗으려 했는데 저들 두 사람도 연관되었을
까?'
상대가 상대이니만치 장무기는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룡도와 의천검은 이미 조민에게 넘어갔지만, 그의 품 속에 아
직 여섯 개의 성화령(聖火令)이 남아 있었다. 조민은 미처 그의
품 속까지 뒤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장무기는 본능적으로 품을
더듬어 여섯 개의 성화령을 확인했다.

개방의 구대 장로(九袋長老) 두 사람이 중앙의 자리에 앉자, 개
방 제자들은 다시 착석하여 먹고 마시며 부지런히 손과 입을 놀
렸다.

장무기와 사손은 구대장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신경을 곤두세웠
지만 실망했다. 그들은 먹고 마시는 데만 열중할 뿐, 진지한 대
화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구대장로중 두 장로가 식사를 마치고 아랫층으로 내려가자, 개
방 제자들도 꽁무니를 따라 떠나갔다.

남은 것은 알맹이가 멀쩡한 세 거렁뱅이인 장무기 일행이었다.
사손은 귀만 갖고도 상황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나직이 말했다.

"무기야, 내가 보기엔 어떠냐?"

장무기는 생각을 굴리고 있던 바를 얘기했다.

"개방 사람들이 단순히 먹고 마시기 위해 이곳에 모여들진 않았
을 겁니다. 제 생각엔 오늘 밤 다른 장소에 모여 중요한 회의를
가질 게 분명합니다."

사손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생각이 맞을 것이다. 개방은 여지껏 본교와 적대시해 왔다.
광명정을 불태운 일에도 그들이 한 다리 끼었을 뿐 아니라, 도룡
도를 탈취해 가는 일에도 참여했다. 그들이 본교를 겨냥해 또 무
슨 흉계를 꾸밀지도 모르니, 우리로선 그들의 동태를 낱낱이 파
악할 필요가 있다."

세 사람은 아랫층으로 내려가 식대를 계산하지 배불뚝이는 심히
당황해 하며 한사코 거절을 했다. 장무기는 내심 와닿는 바가 있
었다.

'주루의 주인이 겁을 집어 먹고 음식값을 받으려 하지 않으려는
것만 보아도, 개방 제자들이 평소에 얼마나 많은 만행을 저질렀
는지 능히 짐작이 가는군.'

세 사람은 주루를 나와 작은 객점을 찾아들었다. 개방 제자들은
방규에 따라 절대 객점에 투숙하지 않기 때문에 객점에서 그들과
맞닥뜨릴 염려는 없었다. 사손은 역시 경험이 풍부한 강호인답게
모든 일을 주도했다.

"무기야, 지금부터 개방의 동태를 살펴야겠는데, 알다시피 난
앞을 볼 수 없으니 행동하는데 불편하고 지약은 무공이 높지 않
아 역시 실수를 저지를지 모르니, 네가 혼자서 수고를 해줘야겠
다."

장무기는 이의가 없었다.

"네, 저 혼자서 다녀오겠습니다."

그는 객점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에 행동을 개시했다. 그는
행길을 따라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한데 개방 제자라곤 전
혀 눈에 띄지 않았다.

'반 시진도 안 되는 사이에 개방 사람들이 모두 어디로 사라졌
을까? 틀림없이 멀리 가진 않았을 텐데.....'

그는 무턱대고 미친 개처럼 쏘다닐 순 없었다. 문득 한가지 꾀
가 떠올라 가까운 잡화점으로 들어가, 다짜고짜 진열장을 주먹으
로 내리치며 눈을 부라렸다.

"이봐! 주인장! 우리 형제들이 어느 쪽으로 갔는지 혹시 보지
못했나?"

점포에 있는 사람들은 그의 거칠은 모습을 보자 흉신(凶神)을
만나 듯 움츠려들며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그 중에서 그래도 배
짱이 좋아보이는 한 사람이 웃음을 자아내며 북쪽을 가리켰다.

"모두들 저 북쪽으로 갔습니다. 어르신네께선 차라도 한 잔 마
시겠습니까?"

장무기는 냉랭하게 소리쳤다.

"필요없어! 차는 무슨 빌어먹을 차야!"

그는 즉시 점포를 나서 성큼성큼 북쪽을 향해 걸아가며 터져나
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았다.

고을을 벗어나 얼마 동안 걸어가자 길 옆 잡초가 무성한 곳으로
부터 한 줄기의 그림자가 번뜩이더니, 개방 제자 하나가 앞을 가
로막았다.

"누구냐!"

순간 장무기는 절묘한신법을 구사해서, 연기처럼 그 개방제자
의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잡초가 무성한 길 옆 숲속으로 몸을
감춘 것이다. 개방 제자는 멍해지며 자신의 눈을 비비적 거리더
니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니..... 내가 잘못 봤나? 분명히 누가 다가오는 것 같았는
데.....?"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뒷통수를 긁적거렸다.

장무기는 연도에 개방 제자들이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다는 것
을 알고, 숲길을 택해 계속 북쪽으로 향했다. 일단 경각심을 높
이자 개방 제자들의 관문을 통과하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
니었다. 오히려 그들이 그의 길잡이가 돼 주었다. 얼마 동안 달
리자 그는 어느 절간 앞에 당도할 수 있었다. 절문 위에 큼지막
한 현판이 걸려 있었다.

----- 미륵불묘(彌勒佛廟) -----

겉만 보아도 규모가 상당히 큰 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장
무기는 내심 생각을 굴렸다.

'이번 개방 집회에 중요한 인물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만
약 개방 제자 행세를 하며 얼렁뚱땅 끼어들다가는 발각되기 심상
이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 살펴 좌측 담장 안에 한 그루의 고송(古松)
이 하늘을 찌르듯 솟아 있는 것을 보았다. 고송 주위에는 다른
나무들이 울창하게 가지를 드리우고 있어, 일단 고송 위로 오르
면 은신하기 안성마춤이라 생각됐다. 그곳에선 뜨락 한가운데 자
리잡은 대웅보전(大雄寶殿)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을 것이다.

장무기는 재빨리 좌측으로 돌아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 돌맹이
하나를 집어 담장 우측에 던지더니, 곧이어 고송 위로 몸을 솟구
쳤다. 그의 신법은 한 줄기 연기와 같았다. 소나무 위로 오르니
과연 예측했던 대로 대웅보전이 한눈에 들어왔다. 다행하게도 그
가 소나무 위에 은신한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대전(大殿) 앞에는 개방 제자들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들의
수는 삼백 명 가량 되는 것 같았다. 이들은 모두 대전을 향해 앉
아 있었으므로, 뒤쪽에서 장무기가 신법을 전해하는 것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대전 안에는 다섯 개의 방석이 놓여 있는데 아무도 보이지 않았
다. 아마 방석에 앉을 사람이 아직 당도하지 않은 모양이다. 대
전 앞에 삼백여 명이 운집해 있었으나 조용했다. 얼마 전 주루에
서 왁자지껄하던 분위기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음..... 개방은 비록 근래에 와서 쇠퇴했지만,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전통은 과연 무시할 수가 없구나. 기틀이 잡혀 있는
방파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군.'

대전 뒤쪽 한복판에 미륵불이 모셔져 있는데, 불룩한 배를 노출
한 채 헤벌쭉 웃는 모습이 매우 자상한 느낌을 주었다. 장무기가
두루두루 살피고 있는데, 대전 옆쪽에서 낭랑한 외침소리가 들려
왔다.

"장발용두(掌鉢龍頭)께서 당도하셨습니다!"

이 외침을 신호로 하여 개방 제자들은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장무기가 주루에서 보았던 선비처럼 생긴 구대장로가 손
에 깨진 사발을 들고 천천히 걸어나와 우측에 섰다. 낭랑한 외침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장봉용두(掌捧龍頭)께서 당도하셨습니다!"

이번에는 그 덥석부리 구대장로가 손에 철봉을 높이 받쳐 든 채
모습을 나타내 좌측에 섰다.

"집법장로(執法長老)께서 오셨습니다!"

외침소리에 따라 몸집이 왜소한 늙은 거렁뱅이가 낡은 죽편(竹
片)을 쥐고, 마치 구름을 밟듯 사뿐한 걸음으로 걸어나왔다.

'이 사람의 경공술을 대단하군. 위복왕에 비해 약간 뒤떨어질
뿐이다.'

낭랑한 호명에 이어 네 번째 인물이등장했다. 흰 수염에 백발
이 성성한 늙은이로서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 그의 걸음걸
이나 외모로 보아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추측할 수 없었다. 그러
나 그를 전공장로(傳功長老), 즉 무공 전수를 맡은 장로라 칭하
는 것으로 미루어, 개방에서 독보적인 존재임을 짐작케 했다.

네 명의 개방 핵심 인물이 좌우로 나열하더니, 일제히 몸을 숙
이며 입을 모았다.

"방주님을 모시고자 합니다!"

장무기는 다소 긴장되었다. 개방의 방주가 사화룡이며 외호가
금은장(金銀掌)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무림에서 그
의 진면목을 본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가 대관절 어떻게 생긴
인물인지 자못 궁금했다.

대전 앞에 모인 개방 제자들도 일제히 몸을 숙이자, 잠시 후 병
풍 뒤에서 육중한 걸음소리가 들리더니 한 사나이가 나타났다.
육 척이 넘는 장신에다가 어깨가 딱 벌어졌으며, 안색이 불그스
름한 게 마치 고관대작 같은 느낌을 주는 인물이었다. 그가 대전
한복판에 팔짱을 끼고 우뚝 서자 제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방주께 인사를 올립니다!"

개방 방주 사화룡은 손을 가볍게 휘두르며 우렁찬 음성으로 말
했다.

"인사는 무슨 얼어죽을 놈의 인사냐? 그 동안 모두 밥 잘먹고
똥 잘 쌌느냐?"

사화룡이 가운데 방석에 앉자 모두들 비로소 제자리에 앉았다.
사화룡은 대뜸 장발용두에게 고개를 돌렸다.

"옹(翁)형제, 우선 금모사왕과 도룡도에 관한 일을 모든 형제들
에게 말해 주시오."

장무기는 <금모사왕과 도룡도>라는 말을 듣자 긴장되어 귀를 세
웠다.

장발용두는 자리에서 일어나 우선 방주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나서 입을 열었다.

"형제 여러분들이 마교와 본방은 육십 년 동안 싸움을 지속해
오면서 깊은 원한이 쌓였소.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란
말이 있듯이, 앞으로 놈들과 맞서 싸우려면 그들에 관한 모든 것
을 낱낱이 파악할 필요가 있소. 최근 마교는 장무기라는 새로운
교주를 내세웠소. 광명정을 협공한 일에 참여한 본방의 형제들은
그 자를 직접 대면했는데, 아직 젖비린내가 가시지 않은 애송이
라 하오. 그런 철부지가 무슨 큰 일을 할 수 있겠소이까? 우리
사방주님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바윗돌에 붙은 파리똥에 불과하오
이다!"

개방 제자들은 우뢰같은 함성을 지르며 그의말에 호응을 했다.
사화룡 역시 어깨에 힘을 주며 우쭐대는 모습이었다.

장발용두의 말이 계속 되었다.

"그런데 마교가 새로운 교주를 내세운 후로부터 사분오열 되었
던 내분이 종식되고 서로 힘을 모으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소.
우린 그 점을 가볍게 보아 넘겨선 아니 될 것이오. 특히 일 년
전부터 마교의 마두들이 도처에서 떼를 지어 원군(元軍)과 맞서
싸워 연승을 거두며 사기가 충천돼 있소. 사천성(四川省) 일대에
선 한산동(韓山童)과 주원장(朱元璋), 호남성(湖南省)과 호북성
일대에선 서수휘(徐壽輝) 등이 가장 두각을 나타내고 있소. 만약
그들이 소 뒷걸음질에 쥐 잡듯이 얼토당토 않게 몽고놈들을 몰아
내고 천하를 거머쥐게 된다면, 본방의 십여 만 형제들은 그들에
게 떼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오!"

즉시 곳곳에서 성난 외침이 터져나왔다.

"놈들을 미리 때려 잡아야 합니다!"

"절대 그들이 천하를 얻게 해선 안 됩니다!"

"몽고놈들을 쫓아내야겠지만, 마교에게 그 공을 빼앗길 순 없습
니다!"

장무기는 내심 생각을 굴렸다.

'내가 중원을 떠난 지 몇 달 동안 형제들이 많은 업적을 쌓았
군.개방은 오래전부터 본교와 적대시해 왔으니, 본교의 세력이
확장돼 가는 것이 마음에 걸리겠지. 그러나 본교는 그들과 묵은
원한을 청산하고 손을 잡아야 한다. 개방은 인원수가 많은데다가
걸출한 인재도 적지 않아 몽고 오랑캐를 몰아내는데 큰 힘이 될
것이다. 그런데 무슨 수로 그들과 손을 잡지.....?'

장발용두는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가라앉기를 기다려 다시 입을
열었다.

"방주님께선 줄곧 연화산장(連花山莊)에서 조용히 지내오셨지
만, 이번에 큰일을 임하게 되어 부득이 직접 강호출도를 결심하
게 되었소. 하늘의 도움을 얻어 본방이 팔대장로(八袋長老) 진우
량이 무당 제자 한 사람을 알게 되었는데, 그 자가 마교에 대한
중요한 소식을 갖고 있다 하니 특별히 이 자리에 모시도록 하겠
소."

계속 ---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6 권

제 1 장 새로운 바람(風)과 구름(雲) #5/6

여기까지 말한 그는 음성을 높여 외쳤다.

"진장로!"

즉시 뒤쪽에서 대답소리가 들리며 두 사람이 손을 잡고 걸어나
왔다. 그 중 한 사람은 서른 살 가량의 깐깐하게 생긴 인물로서,
바로 영사도에서 사손이 목숨을 살려 주었던 진우량이었다. 그리
고 또 한 사람은 이십 대 후반의 준수하게 생긴 인물로서 다름아
닌 송원교의 아들 송청서였다.

장무기는 의아해 했다.

'송사형이 어째서 개방 사람과 어울리게 되었을까?'

그러나 곧 이해가 갔다.

'무당파와 개방은 모두 협의도를 걸어온 방파이니, 쌍방이 친분
을 맺은 것은 당연지사겠지.'

진우량과 송청서는 우선 사화룡에게 정중히 인사를 올리고 나서
전공, 집법 두 잘오와 장발, 장봉 두 용두에게 공수의 예를 취하
고는, 다시 대전 앞에 예를 표했다. 장발용두가 다시 입을 열었
다.

"형제 여러분들, 이분 송청서 송소협은 무당파 송원교 송대협의
아드님으로서, 장차 무당파의 장문직을 계승할 가장 유력한 인물
이외다. 그 마교의 교주인 장무기는 그의 사제라 할 수 있기 때
문에 마교의 내부 상황을 속속들이 알고 있소. 몇 달 전 마교의
대마두인 금모사왕 사손이 동해 영사도에 나타났다고 전해 준 장
본인도 바로 이 송소협이오."

이때, 집법장로가 불쑥 나섰다.

"금모사왕 사손의 행방은 줄곧 무림의 극비로 되어 있었는데,
송소협이 그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자세한 것을 듣고 싶
소이다."

사실 장무기도 이 점에 대해 줄곧 의문을 느끼고 있었다.

'자삼용왕은 무열 부녀로 인해 의부님의 소재를 알게 되어 영사
도로 달려갔지만, 극비리에 행동을 취했는데 송사형이 어떻게 해
서 그 사실을 개방에게 알려준 것일까?'

장무기는 이 의문을 여러번 사손에게 물었지만, 사손 역시 정확
한 해답을 해주지 못했다. 장무기는 자연히 신경을 곤두세웠다.

한데 송청서 대신 진우량이 입을 열었다.

"모든 것이 우연하게 이루어진 겁니다. 동해에 금화파파가 있는
데, 워낙 항해술이 뛰어나 집념을 갖고 사손의 행방을 쫓다가 결
국 북해 끝에 위치한 어느 황도(荒島)에서 찾아냈다고 합니다.
금화파파는 사손을 영사도로 데려왔는데 마침 영사도에 두 부녀
가 갇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열과 무청영이라 하며 바로 대리
(大理) 남제(南帝) 일파의 진인들입니다. 그들은 금화파파가 중
원으로 떠난 새에 지키는 사람들을 죽이고 도망쳐 와 산동성(山
東省) 부근에서 위험에 처한 것을 송소협이 구해 준 것이 인연이
되어, 얘기 끝에 송소협이 금모사왕의 행방을 알아내게 된 것입
니다."

집법장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랬었군."

장무기도 비로소 궁금증이 풀렸다. 진우량의 말이 이어졌다.

"본인은 송소협과 생사지교를 맺은 사이로서 서로 숨기는 것이
없습니다.그로부터 소식을 전해들은 후 즉시 계(季), 정(鄭),
두 팔대장로와 같이 다섯 명의 칠대제자들을 이끌고 영사도로 달
려가 사손을 사로잡고 도룡도를 빼앗아 방주님께 바치려 했습니
다. 그런데 뜻밖에도 때마침 마교에서도 많은 고수들이 영사도에
나타났습니다. 우린 목숨을 걸고 그들과 싸웠으나 중과부적인지
라 계장노와 칠대제자 네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영사도에서
있었던 전황에 대해서는 정장로께서 직접 방주님께 보고를 드릴
겁니다."

불구가 된 정장로가 사람들 틈에서 일어나, 영사도에서 벌어진
명교와 개방의 싸움에 관해 보고했다. 그는 개방이 무더기로 사
손을 협공한 것을 거론하지 않고, 오히려 명교가 인해전술로 나
오는 바람에 자기네들이 선전분투에도 불구하고 패했다고 장황하
게 늘어놓았다. 게다가 진우량이 자기를 살리기 위해 너무나 의
연한 자세로 나오는 통에, 사손이 그의 정기(正氣)에 탄복하여
감히 살수를 전개하지 못했다고 침을 튀겨가며 추켜세웠다.

대전 안팎에 모인 개방 제자들은, 그의 열변에 모두 격양되어
일제히 갈채를 보냈다. 전공장로 역시 감격해 하는 기색이 역력
했다.

"진형제는 지용(智勇)을 겸비했는데, 그렇게 의롭기도 하니 실
로 고개가 숙여지는군."

진우량은 그에게 정중히 몸을 숙였다.

"저는 방주님과 장로님들의 가르침을 받아 본방의 대의(大義)를
위해서라면 불바다에도 뛰어들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 사소
한 일로 장로님으로부터 칭찬을 들으니, 오히려 몸둘 바를 모르
겠습니다."

개방 제자들은 그가 자신의 공을 내세우지 않고 도리어 겸허한
것을 보자 더욱 탄복해 마지 않았다.

한편, 장무기는 나무 위에서 그의 말을 들을수록 울화가 치밀었
다. 실로 뻔뻔스럽고 비겁한 소인배라 생각되었다. 분명히 친구
를 팔아 목숨을 유지한 것이거늘, 이제 오서 의로움을 앞세워 친
구를 구한 것으로 변조됐으니 이보다 더 치졸한 일이 또 어디 있
겠는가? 그는 워낙 빈틈없이 일을 해치웠기 때문에 정장로마저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실로 간웅(奸雄) 중에 대간웅이라 아니
할 수 없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장무기는 문득 가슴에 와 닿는 게 있어
시무룩해졌다.

'당시 의부님과 나도 저 자에게 감쪽같이 속았다. 그러나 조민
낭자만큼은 속일 수가 없었지..... 그녀는 역시 누구보다도 영특
해. 그녀가 우리의 적이 아니었더라면.....'

집법장로가 자리에서 일어나 냉랭하게 소리쳤다.

"본방의 많은 형제들이 또 마교에게 희생되었으니, 이 피맺힌
원한을 어찌 갚지 않을 수가 있겠소!"

개방 제자들은 앞을 다투어 고함을 질렀다.

"계장로를 위해 복수합시다!"

"광명정을 잿더미로 만들어 마교를 뿌리째 없앱시다!"

"장무기를 죽여라! 사손을 죽여라!"

"본방이 있는 곳에 마교가 존재할 수 없다! 닥치는 대로 죽여
없애자!"

"방주님! 어서 모든 제자들을 불러모아 마교로 처들아 갑시다!"

집법장로가 사화룡에게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방주님, 형제들의 피맺힌 한을 풀어 주십시오. 현명하신 분부
가 있길 바랍니다."

사화룡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말이야..... 본방의 중대사이니 음..... 음..... 칠대제
자 이하는 우선 절 밖으로 물러가 있으라고 하시오. 우리끼리 모
여 상의 좀 해야겠소."

집법장로는 대답을 하고 나서 몸을 돌려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외쳤다.

"방주님의 명령이니, 칠대제자 이하는 모두 밖으로 물러가 기다
리도록 하시오!"

이때 진우량이 앞으로 다가가 몸을 꺾었다.

"방주께 아뢰옵니다. 이 송형제는 본방을 위해 큰 공을 세웠으
니, 본방에 가입하는 것을 윤허해 주시면 앞으로 더욱 본방을 위
해 이바지 할 것입니다."

송청서는 이 말에 이내 안색이 변했다.

"아니..... 그건.....!"

순간 진우량이 고개를 돌려 그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러자 송
청서는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떨구더니, 더 이상 아마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개방에 가입하는 문제는 진우량의 일방적인
제의인 것 같았다.

사화룡은 쾌히 승락했다.

"그거 좋지. 좋고 말고. 송청서 우리 방에 들어온다면야 당분간
육대제자의 위치에서 팔대장로인 진우량의 통솔을 받도록 해라.
물론 본방의 규칙을 준수해야 된다는 것쯤은 상식이니 내가 더
이상 입을 놀리지 않아도 되겠소..... 아무튼 잘 해봐. 잘하면
상을 줄 것이고 잘못하면 벌을 내릴 거다."

사화룡은 천하 제일 대방의 방주답지 않게 말주변이 별로 없는
것 같았다. 한편, 송청서의 눈에는 분노의 빛이 띄어졌으나 곧
억제를 하고 앞으로 다가가 사화룡에게 무릎을 꿇었다.

"제자 송청서가 방주님께 큰절을 올립니다. 육대제자의 지위를
하사하신 방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이어 장로들에게도 일일이 인사를 올렸다.

집법장로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송형제, 자네가 본방에 가입한 이상 본방의 규칙을 엄수해야
하네. 설령 앞으로 자네가 무당파의 장문인이 된다 해도, 본방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게. 내 말을 알아듣겠는가?"

그의 말투는 매우 준엄했다. 송청서는 고분고분 대답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집법장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본방은 무당파와 더불어 협의를 위해 같은 길을 걸어온게 사실
이지만 나름대로 다른 뜻을 갖고 있네, 하물며 자네는 장차 무당
파의 장문직을 계승할 수 있을 텐데, 어째서 본방에 귀속되려고
하는지 그 까닭을 분명히 밝혀 주길 바라네."

송청서는 진우량을 힐끗 쳐다보고 나서 대답했다.

"진장로님이 제자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며 여러모로
이끌어 주셨기 때문에, 그 인품을 흠모한 나머지 뒤를 따르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진우량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한집안 식구이니 허물없이 말씀드리겠
습니다. 아시다시피 아미파의 장문인 멸절사태가 죽은 후에 새로
장문직을 계승한 미모의 젊은 여인 주지약은, 송형제와 죽마지우
이며 둘은 일찌기 혼례를 언약한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마교의
대마두인 장무기가 완력으로 그 여인을 납치해 바다로 데려갔습
니다. 그리고 저는 형제지간의 우애를 생각해 책임지고 그 여인
을 빼앗아 와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장무기는 들을수록 울화가 치밀었다.

'저런 터무니없는 말을 함부로 지껄이다니.....'

그는 당장 뛰쳐나가 혼쭐을 내주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이어 사화룡의 껄껄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고로 영웅은 미인을 좋아한다더니 그 말이 맞긴 맞아. 한 사
람은 장차 무당파의 장문인이 될 인물이고 한 사람은 아미파의
장문인이니 그야말로 짝자꿍 잘 어울리는군. 천생연분에다 천생
배필이야."

집법장로가 가장 신중했다.

"정녕 송형제가 억울하다고 생각되면, 왜 장삼봉 장진인 혹은
송대협에게 하소연을 하지 않고 진장로에게 도움을 청했는지 모
르겠구료."

진우량이 얼른 그의 말을 받았다.

"송형제의 말에 의하면, 장무기 녀석은 장취산의 아들로서 장삼
봉은 제자들 중에서 장취산을 가장 아꼈고, 또한 무당파가 근래
마교와 손을 잡으려는 뜻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선뜻 얘기를 꺼낼
수가 없다는 겁니다. 장삼봉과 송대협이 마교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 할 게 뻔하기 때문이죠. 당금 무림에서 오직 본방만이 마
교와 정면으로 적대시하고 있고, 또한 마교와 대결할 만한 힘을
비축해 놓고 있기 때문에 여러모로 심사숙고한 연후에 저에게 도
움을 청하기로 결심하게 된 것입니다."

집법장로는 비로소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런 이유가 있었군. 마교를 멸하고 장무기 녀석을 제거
한다면, 송형제의 염원도 자연히 이루어질 것이오."

장무기는 나무 위에 몸을 숨긴 채, 여러 가지 생각이 주마등이
되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서역 대막에서, 광명정에서, 송청
서가 주지약을 대하는 태도가 어딘지 모르게 유별난 데가 있었는
데, 이제서야 그가 주지약에게 흠모의 정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쨌든 장무기는 내심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무당 제자가 개방에 가입해선 안 된다는 법은 없지만, 미리 태
사부님이나 송사백님의 승낙을 받아야 순서이거늘, 그는 단순히
일개 여자로 인해 사문을 배반하고 부친을 배신했으니 이보다 더
어리석은 짓이 어디 있겠나? 게다가 주지약은 이미 나에게 진심
을 주었는데, 송사형이 개방의 도움을 얻는다고 해서 강제로 그
녀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한단 말인가? 송사형은 이미 강
호에 명성이 알려져 있고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인재로 인정돼
있는데, 어째서 저다지도 생각이 부족할까?'

"방주님께 아뢰옵니다. 제자는 대도 부근에서 마교의 중요한 인
물 한 명을 잡았는데, 그 자는 본방이 계획하고 있는 대업과 밀
접한 관계가 있으니 방주님께서 직접 그 자에 대한 처분을 내려
주십시오."

사화룡은 매우 기뻐했다.

"어서 끌어내도록 해라!"

진우량은 즉시 손뼉을 세 번 쳤다.

"그 마두를 데리고 와라!"

곧이어 대전 뒤쪽에서 개방 제자 넷이 한 사람을 끌고 왔다.

끌려온 자는 두 손이 뒤로 묶여 있으며 약관을 갓 넘긴 젊은이
였는데, 장무기는 호접곡 명교대회 때 그를 본 기억이 있었다.
단지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젊은이는 얼굴에 짙은 노기가 깔려, 진우량의 곁을 지날때 갑자
기 그의얼굴을 향해 가래침을 뱉었다.

진우량은 재빨리 피하며 냅다 그의 뺨을 후려쳤다. 순간 찰싹
하는 소리가 들리며 젊은이의 왼쪽 뺨이 이내 푸르딩딩하게 부어
올랐다. 그를 압송해 온 개방 제자는 등을 떠밀며 호통을 쳤다.

"어서 무릎을 꿇고 방주님께 큰절을 올리지 못하겠느냐!"

젊은이는 기침과 함께 이번에는 사화룡의 얼굴을 겨냥해 호통을
쳤다.

젊은이와 사화룡의 거리가 매우 가까왔고 또한 진력을 잔뜩 끌
어올려 침을 뱉은 탓인지 사화룡은 황급히 피한다고 고개를 숙였
으나, 팍! 하는 소리와 함께 가래침이 이마에 달라붙고 말았다.
진우량은 대뜸 그 젊은이를 걷어차 쓰러뜨리며 사화룡의 앞을 가
로막고 우악스럽게 호통을 쳤다.

"이런 발칙한 놈! 죽고 싶어 환장을 했느냐!"

젊은이는 다짜고짜 욕을 터뜨렸다.

"이 더러운 거렁뱅이야, 네놈들 손에 잡힌 이상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일찌감치 포기했다!"

진우량이 앞을 가로막는 틈을 타서 사화룡은 얼른 가래침을 닦
아 버렸다. 진우량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나 정중하게 말했다.

"방주님께 아뢰옵니다. 이 녀석은 마교의 일류 고수로서 사대호
교법왕보다 무공이 뛰어났으니, 절대 과소평가해선 아니 됩니
다."

장무기는 그의 말을 듣고 처음엔 의아했으나, 곧 깨달은 바가
있었다. 진우량은 방주의 낭패한 입장을 덮어 주기 위해 일부러
상대방의 무공을 고강하다고 과장시킨 것이 분명했다.

어쨌든 사화룡이 개방의 방주이면서 가래침을 피하지 못했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게다가 이런 엄청난 수
모를 당하고도 얼굴에 나타난 것은 분노가 아니라 당황한 빛이었
다.

집법장로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진형제, 이 자는 누구인가?"

진우량은 간단하게 설명했다.

"그의 이름은 한림아(韓林兒)라고 하며, 바로 한산동의 아들입
니다."

장무기는 암암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호접곡대회 때 그는 줄곧 부친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
라다녔을 뿐, 나하고 얘기를 나눈 바가 없었으니 선뜻 이름이 떠
오르지 않았군.'

집법장로는 기뻐하는 눈치였다.

"아, 그가 한산동의 아들이라고? 진형제, 정말 큰 공을 세웠네.
한산동이 근래에 원군(元軍)을 연패시켜 위명을 떨치고 있으며
그의 부하들 중에 주원장, 서달, 상우춘 등은 모두 마교의 중요
한 인물들이니, 이 녀석을 인질로 잡고 있으면 한산동도 어쩔 수
없이 본방에 무릎을 꿇고 말 걸세."

한림아는 다시 우악스럽게 욕을 퍼부었다.

"이 똥물에 빠져 죽을 구더기 같은 놈아! 지금 무슨 잠꼬대를
하고 있는 거냐? 나의 아버님 같은 영웅호걸이 네놈들 같은 비겁
한 소인배의 위협에 넘어갈 것 같으냐? 어림반푼어치도 없는 개
소리 말아라! 나의 아버님은 오직 장교주의 명령에 따를 뿐이다.
너희 개방이 명교와 쟁응을 하려 들다니, 뱁새가 황새 쫓아가려
다가 가랑이가 찢어진 얘기도 못들었느냐? 하기야 무식한 놈들이
니..... 너희들의 방주인지 방귀인지는 몰라도, 아마 장교주의
발바닥을 핥아줄 자격조차 없을 것이다!"

진우량은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히죽히죽 웃었다.

"한형제, 자넨 마교의 장교주를 신주단지처럼 받들어 모시고 있
는 모양인데, 우리를 그 신주단지에게 안내해 주겠나? 우리에게
도 그 신주단진지 똥단지를 배알할 영광을 줘야 하지 않겠나?"

한림아는 콧방귀를 날렸다.

"흥! 장교주는 큰 일을 맡고 있는 분인지라 본교의 형제들도 좀
처럼 뵙기가 힘든데, 네까짓 놈들을 일일이 접견할 틈이 어디 있
겠느냐?"

진우량은 여전히 능글능글하게 웃으며 말했다.

"듣자 하니 장무기는 이미 원병에게 잡혀가 대도에서 참수형을
당했다는데, 그래도 허풍을 떨 작정이냐?"

한림아는 발끈하며 침을 내뱉었다.

"주둥아리 닥쳐라! 몽고 오랑캐가 우리의 교주님을 붙잡아 갔다
고? 천군만마가 그분을 칭칭 포위한다 해도 그림자 조차 건드리
지 못할 것이다. 장교주께서 물론 대도에 간 적이 있지만, 그것
은 육대문파의 인물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무슨 참수형을 당했다
고? 네놈의 조상 중에 누가 참수형을 당해 그 귀신이 뒤집어 씌
어져 누구나 다 참수형을 당했다고 헛소리를 하는구나!"

진우량은 여전히 화를 내지 않았다.

"하지만 강호에 소문이 파다하니 믿기 싫어도 믿어야 할 게 아
니냐? 한 가지 묻겠는데, 어째서 최근 반 년 동안 명교의 그 무
슨 한산동이니, 서수휘니, 주원장, 포대화상 같은 이름만 들릴
뿐 장무기라는 이름 석 자가 자라 대가리처럼 쏙 들어갔느냐? 그
게 바로 저승길에 올랐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한림아는 화가 치밀어 눈에 핏발이 곤두서고, 이마에 지렁이 같
은 시퍼런 심줄이 솟아났다.

진우량은 턱을 삐딱하게 쳐들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장무기의 무공과 계집 홀리는 솜씨는 나도 인정하지 않는 바가
아니다. 주 낭자를 농락한 것만 보아도 그 실력을 짐작 할 수 있
지. 하지만 녀석은 비명 횡사할 운명을 타고 났어. 내가 아는 용
한 점장이가 그의 운을 꼽아보니, 올해를 넘기지 못할 거라 하더
군....."

이때 뜨락 우측에 우뚝 솟아 있는 느티나무 위에서 바스락 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대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느끼지 못했
다. 장무기는 이내 긴장되며 그쪽을 예리한 눈빛으로 훑었으나
별다른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다.

'음..... 나보다 먼저 와 있는 불청객이 있군. 내가 여지껏 느
끼지 못했으니 무공이 상당한 인물 같은데, 대관절 누구일까?'

한림아의 성난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네놈이야말로 어느 날 갑자기 피똥싸고 죽을 상이다. 장교주는
성품이 인후하여 누구보다도 천수를 누릴 분이다."

진우량은 장탄식을 하며 혀를 끌끌 내찼다.

"하지만 열길 물 속은 알아도 사람의 한길 마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잖느냐? 그는 양의 탈을쓴 늑대이니 관상에 나타난 대로
비명 횡사하는 것이 당연한 귀결이지....."

난데없이 느티나무 위에서 한 줄기의 청색 그림자가 뛰어 내린
것은 바로 이때였다. 그 자의 입에서 뜻밖의 외침이 터져나왔다.

"장무기는 여기 있다! 누가 나더러 비명 횡사했다고 했느냐?"

그는 한 줄기 회오리바람처럼 대전 안으로 뛰쳐들어갔다. 대전
문 쪽에 서 있는 장봉용두가 즉시 그 자의 뒷덜미를 향해 나꿔채
려 했으나, 날렵한 신법으로 피했다.

그제서야 나타난 자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는데, 청색 장
삼에 방건을 쓴 준수하게 생긴 서생이었다. 그리고 얼굴은 백옥
처럼 희고 눈동자는 호수처럼 맑았다.

장무기는 그 자를 똑똑히 확인하는 순간, 그만 입이 딱 벌이지
고 말았다. 뜻밖에도 남장을 한 조민이었다.

한편, 개방 제자들은 장무기를 본 적이 없었다. 단지 소문만으
로 명교의 교주가 스물 살 가량의 젊은이로서 무공이 지극히 높
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한데 방금 장봉용두의 금나수법
을 피하는 것을 보고 그 뛰어난 신법에 명교의 교주임에 틀림없
다고 믿으며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장무기는 복잡미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놀라움과 분노,
그리고 반가움과 가벼운 흥분마저 느꼈다.

진우량은 남장한 조민을 유심히 살펴보며 눈동자를 교활하게 굴
렸다. 아무리 봐도 소문에 듣던 장무기의 모습과는 똑같지 않았
다. 게다가 음성이 아무래도 여자 같은 느낌이 들어 대뜸 호통을
쳤다.

"장무기는 벌써 죽었다. 너는 누구인데 그의 행세를 하느냐?"

조민은 성난 음성으로 외쳤다.

"장무기는 이렇게 엄연히 살아 있는데, 그게 무슨 망언이냐? 하
늘의 보살핌을 받고 있어 너희들이 모두 죽은 연후에도 백 년은
더 살 것이다."

장무기는 이 말을 듣자 뭉클한 것이 가슴에 와 닿았다. 조민이
양심의 가책을 갖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이내 생각을
달리했다.

'저런 악랄한 여인이 무슨 양심이 있을까? 난 절대 저 아름다운
겉모습에 현혹돼선 안 된다.'

그는 다시 한 번 자신의 마음을 굳게 다졌다. 진우량은 냉소를
날렸다.

"넌 대관절 누구냐?"

조민의 태도는 확고했다.

"내가 바로 명교의 교주 장무기다! 네가 나의 부하를 잡은 모양
인데, 어서 놓아주지 못하겠느냐? 너도 사내 대장부라 자처한다
면 나하고 일 대 일로 승부를 짓자!"

계속 ---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6 권

제 1 장 새로운 바람(風)과 구름(雲) #6/6

이때 옆에서 한 사람이 코웃음을 치며 나섰다.

"조민 낭자! 다른 사람의 눈을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나 송청
서의 눈은 속이지 못할 것이오! 방주께 아뢰옵니다. 이 여인은
바로 여양왕의 딸로서 많은 고수들을 거느리고 있으니 각별히 경
계해야 할 겁니다."

집법장로가 즉시 입술을 오무려 휘파람을 불더니, 장봉용두를
향해 외쳤다.

"장봉장로, 속히 형제들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 적의 공격에 대
비하시오!"

장봉용두는 즉시 대답을 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삽시간에 절
간 밖에서 우렁찬 기합소리가 들리며, 개방 제자들이 만반의 전
투 태세를 갖추었다.

조민은 그들의 기세에 위압감을 느끼는 듯 안색이 약간 변하더
니, 이내 손뼉을 치자 두 사람이 사뿐히 담장을 뛰어넘어 들어왔
다. 바로 현명이로인 녹장객과 학필옹이었다.

"저놈들을 잡아라!"

집법장로의 외침에 따라 네 명의 칠대제자가 현명이로에게 덮쳐
갔다. 그러나 그들은 현명이로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눈깜짝할
사이에 네 명의 칠대제자는 모두 부상을 입었다.

그러자 백발이 성성한 전공장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다짜
고짜 학필옹을 향해 일장을 격출해 냈다.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
리며 그의 장세는 매우 위력적이었다.

학필옹은 현명패천장으로 응수했다. 순간 펑! 하는 굉음이 터지
며 쌍방의 장력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거기에 따라 주위에 무
서운 회오리가 일었다. 두 사람은 모두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 일장으로선 우열을 판가름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연거푸 삼장을 겨루자 전공장로가 뒤로 반 걸음 물러나
며 열세를 드러냈다.한편, 녹장객은 녹각장을 휘두르며 집법장로
와 장발용두를 상대해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 역시
선뜻 고하를 판가름하기 어려울 정도로 막상막하였다.

장봉용두는 전공장로의 안색이 빨갛게 상기되어 계속 뒤로 밀리
는 것을 보자, 내심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전공장로라 하면 개
방에서 첫손 꼽는 무공 고수이거늘, 그가 상대방을 당해 내지 못
한다면 더 이상 나설 만한 인물이 없을 것이다. 쌍방이 약 십여
초식을 교환하자 전공장로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백발이 헝클
어져 매우 낭패한 모습이었다.

장봉용두는 가가 누구의 도움을 받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지금의 상황으론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장봉용
두는 즉시 철봉으로 허공을 가르며 학필옹의 하체를 후려쳐갔다.

조민은 현명이로가 나타나는 순간 물러갈 생각이었으나, 진우량
이 장검을 뽑아 쥐고 앞을 가로막았다. 조민은 만안사에서 육대
문파 무학의 정수를 배운바 있기 때문에, 즉시 삼검을 떨쳐냈다.
그녀가 전개한 첫 번째 초식은 화산검법이며, 두 번째는 곤륜검
법, 세 번째는 공동파의 검법이었다. 이어 그녀는 네 번째 초식
을 전개했는데, 바로 아미파의 금정구식(金頂九式)이었다

진우량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조민의 변화무쌍한 검초를 도저
히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순간 조민의 장검이 작은 원을 그리며
그의 가슴을 겨냥해 전광석화같이 쳐나갔다.

진우량으로선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이때 창! 하는 맑은 금속
성이 들리며 한 자루의 장검이 비스듬히 뻗쳐와 조민의 검을 밀
어냈다. 느닷없이 출수한 사람은 다름아닌 송청서였다.

장무기는 높은 나무 위에서 이들이 싸우는 광경을 똑똑히 지켜
볼 수 있었다. 송청서가 전개한 무당검법은 힘이 곁들여 있으면
서도 많은 변화가 숨겨져 있었다. 과연 송원교의 진전(眞傳)을
이어받은 게 역력했다.

진우량은 측면에서 협공을 전개했다. 조민은 비록 각대문파의
절초를 배웠으나 이직은 깊이가 부족했다. 더군다나 혼자서 두
사람을 상대하자니 공격보다 수비에 치중해야만 했다.

장무기는 내심 초조해 하면서 또한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왜 평범한 검을 사용하는 것일까? 의천검을 사용하면
충분히 상대방의 검을 절단시켜 포위망을 뚫고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 텐데.....'

늘 의천검을 갖고 다니는 그녀인데, 오늘은 그 보검을 몸에 지
니지 않았다. 장무기는 잠시 초조해 하다가 절로 자신을 탓했다.

'장무기야! 저 요녀는 너의 누이동생을 해친 흉수이다. 그런데
넌 그녀의 안위를 걱정해 주다니, 장차 무슨 면목으로 저승에 있
는 누이를 대할 것이며 의부님과 지약에게도 죄를 짓는 게 아니
냐?'

이때 개방의 몇몇 고수가 다시 싸움에 가담했다. 그러나 조민
쪽에는 더 이상 나타나는 사람이 없었다. 녹장객은 시간을 끌수
록 상황이 불리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군주마마, 일단 이곳을 떠나야겠습니다."

조민도 동감이었다.

"좋아요. 이 진가 녀석은 장공자를 모함하고 저주를 했으니, 도
저히 용서할 수가 없어요. 두 분이 알아서 이 녀석 만큼은 단단
히 혼을 내주세요!"

현명이로는 일제히 대답했다.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군주께선 그 녀석을 우리에게 맡기
고 먼저 떠나가십시오."

조민이 다시 말했다.

"저 한림아는 장공자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하니, 무슨 수를 써
서라도 구해 줘야 돼요."

녹장객이 대답했다.

"어서 떠나십시오. 사람을 구하는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하겠습니
다."세 사람은 강적에게 포위당한 상태에서도 태연스럽게 말을
주고 받았다. 개방 고수들을 아예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대전에서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사화룡은 구석진
곳에 서서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전공, 집법, 두 장로는
조민 등의 대화를 듣자 즉시 명령을 내려 퇴로를 차단케 했다.

돌연, 녹장객과 학필옹은 싸우던 상대를 제쳐두고 맹렬히 사화
룡에게 덮쳐갔다. 그들은 흡사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운 것처
럼 행동을 같이했다. 그들의 신법은 어느 때보다도 신속 절륜했
다.

사화룡이 질겁하는 순간, 진우량이 황급히 그를 미륵불상 뒤로
밀어부쳤다. 알고보니, 그는 조민이 현명이로와 얘기를 나누는
사이에 심상치 않는 낌새를 채고 사화룡의 곁으로 다가간 것이
다.

현명이로가 격출한 장풍은 미륵불상에 적중되어 흙가루가 분비
했다. 아울러 대전 천장에 맞닿을 만큼 우람한 불상은 엄청난 장
풍에 의해 흔들거렸다.

학필옹은 앞으로 한 걸음 내딛으며 재차 불상을 향해 쌍장을 밀
어냈다. 꽝! 육중한 불상이 끝내 그의 장풍을 견뎌내지 못해 쓰
러져 내렸다. 개방 제자들이 신으로 받들고 있는 불상이 무너지
자, 모두들 아연실색하며 놀란 외침을 발했다. 그 바람에 혼란이
일었다.

조민은 그 혼란을 틈타 재빨리 뜨락으로 몸을 날렸다. 그와 때
를 같이하여 송청서와 장봉용두가 그림자처럼 그녀를 따라붙었
다. 순간, 절문 옆에서 세 자루의 타구봉(打狗棒)이 예리한 파공
음을 일으키며 조민의 하체를 향해 느닷없이 휘몰아쳐 왔다.

조민은 송청서의 장검과 장봉용두의 철봉을 피하며 다시 몸을
번뜩여 두 자루의 타구봉을 피했지만, 세 번째 타구봉이 왼쪽 발
꿈치에 적중되었다. 그녀는 극심한 통증을 느끼며 그만 몸의 중
심을 잃고 앞으로 쓰러졌다. 송청서는 그녀에게 숨돌릴 기회를
주지 않고 검자루로 그녀의 뒷통수를 내리쳐 갔다. 그녀를 기절
시켜 사로잡을 속셈이었다.

그런데 검자루가 그녀의 뒷통수에 적중되려는 찰나, 홀연 장봉
용두의 수중에 쥐어져 있는 철봉이 비스듬히 뻗쳐와 송청서의 장
검을 옆으로 밀어부치는 게 아닌가! 한 줄기의 그림자가 번개처
럼 담장을 뛰어넘은 것은 바로 그 다음 순간이었다.

송청서는 즉시 몸을 돌려 장봉용두에게 다그쳤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왜 그녀를 도와 달아나게 만듭니까?"

장봉용두는 버럭 화를 냈다.

"무슨 소리야?! 자네야 말로 무엇 때문에 내 철봉을 막았나?"

송청서는 대뜸 눈꼬리를 치켜 올렸다.

"분명히 철봉으로 나의 장검을 밀어부치고 나서 오히려.....!"

장봉용두는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나중에 따지기로 하고 어서 그 계집을 찾자!"

두 사람은 일제히 몸을 솟구쳐 담장을 뛰어넘었다. 담장 밖에
칠대제자 한 명이 다리가 부러진 채 쓰러져있었다. 장봉용두가
그에게 물었다.

"그 요녀는 어느 방향으로 달아났나?"

담장 밖에서 지키고 있던 일곱 명의 개방 제자는 입을 모아 대
답했다.

"우리는 아무도 보지 못했습니다."

장봉용두는 화를 냈다.

"방금 분명 한 사람이 이쪽으로 뛰쳐나왔을 텐데, 모두들 눈이
멀었느냐?"

육대제자 한 명이 그 다리가 부러진 칠대제자를 부축하며 대답
했다.

"조금 전에 이 형님이 담장 안에서 뛰쳐나왔을 뿐 그 외엔 아무
도 보지 못했습니다."

장봉용두는 멍해지더니, 그 칠대제자에게 물었다.

"자네는 무엇하려고 담장을 뛰어넘었나?"

칠대제자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토하며 대꾸했다.

"나..... 나는 내 던져진 것이오. 그 요녀의 수법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괴이했소."

장봉용두는 그녀를 놓쳐 버리자 고개를 돌려 송청서에게 화풀이
를 했다.

"방금 자네가 검으로 내 철봉을 막지 않았다면, 그 요녀를 때려
잡을 수 있었을 텐데 대관절 속셈이 뭐야? 본방에 가입하자마자
똥구멍으로 호박씨를 까려는 건가?"

송청서는 어이가 없다는 듯 펄쩍 뛰었다.

"제가 검자루로 그 계집을 제압하려는데, 장봉용두께서 봉으로
나의 검을 밀어부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요녀가 달아났는데 이
제 와서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립니까?"

장봉용두는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이런.....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내가 왜 자네의 검을 밀어부
치겠는가? 난 본방에서 수십 년 동안 몸담아 오면서 명색이 장봉
용두이거늘 어찌 외적을 도울 수 있단 말인가? 다시 묻겠는데,
무슨 속셈으로 그 요녀를 도왔는가? 흥! 이실직고하지 않으면 이
번 일을 간단하게 묵과하진 않을 걸세!"

송청서는 무당파에서 비록 제 삼대(三代) 제자지만, 무당파의
문하들은 그가 미래의 장문인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설령 유연주, 장송계 등 사숙뻘 되는 사람들도 말을 조심스럽게
했다.

그런데 지금 장봉용두로부터 힐난하는 문책을 받자 발끈했다.
게다가 그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지 않은가!

"장봉용두께선 호박씨를 운운했는데, 과연 그 말이 누구에게 해
당되는지 모르겠군요!"

장봉용두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본디 성깔이 불과
같았다. 그의 입에서 대뜸 욕설이 터져나왔다.

"이런 발칙한 놈! 너는 위아래도 없느냐? 아니면 무당파의 세력
을 믿고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는 거냐?"

그는 말을 내뱉기 무섭게 송청서의 면상을 향해 철봉을 떨쳐냈
다. 극도로 분노한 상태에서 전개한 일격이니 만치 그 위력이 엄
청났다.

송청서 역시 참을 대로 참았다. 그는 당할 수만 없어 즉시 장검
으로 맞이했다. 순간 장검과 철봉이 맞부딪치며 요란한 금속성과
함께 불꽃이 튕겼다.

송청서는 손목이 얼얼해지는 충격을 느꼈다. 장봉용두는 이미
이성을 잃고 길길이 날뛰었다.

"주리를 틀어 죽일 놈! 이제보니 네놈은 그 요망한 계집의 밑구
멍에서 기어나온 첩자였구나!"

그는 일단 이성을 잃자 개방의 고수답게 질퍽한 욕설도 서슴치
않았다. 아울러 두 번째도 철봉을 후려쳐 갔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절문 안쪽에서 한 사람이 뛰쳐나와 그의
철봉을 가로막았다. 그는 바로 팔대제자인 진우량이었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 살피며 물었다.

"그 요녀는 어디 있습니까?"

장봉용두는 송청서에게 삿대질을 했다.

"저 놈이 놓아 주었네!"

"아니오. 장봉용두가 놓아 주었소!"

두 사람이 언쟁을 벌이고 있는 사이에 현명이로가 뛰쳐나왔다.
주위를 살펴보니 조민이 보이지 않자 무사히 이곳을 벗어난 것으
로 간주해 즉시 광소를 날리며 일제히 쌍장을 밀어냈다. 가까이
있는 네 명의 개방 제자가 그들의 장풍을 맞자 그 자리에 쓰러졌
다.

진공장롱, 집법장로가 뒤쫓아 달려왔을 때는 현명이로의 광소가
이미 십여 장 밖에서 메아리쳐 왔다. 그들의 뒤를 추적하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다.

조민은 대관절 어떻게 된 것일까?

알고보니, 송청서가 검자루로 그녀의 뒷통수를 내리치려는 위기
일발의 순간, 장무기는자세한 생각을 굴릴 새도 없이 반사적으
로 고송 위에서 떨어져 내린 것이다.

상황이 상황이니 만치 그가 구사한 신법은 번개처럼 빨랐다. 그
는 한 줄기 빛처럼 떨어져내리기 무섭게 건곤이위신공을 전개해
장봉용두의 철봉을 송청서의 장검으로 밀어부치게 만든 것이다.

그가 연마한 건곤이위신공만으로도 불가사의한 행동을 연출할
수 있는데, 그간 몇 달 동안 무인도에서 소조가 번역한 <성화령
비결>까지 터득하였으니, 파사삼사(波斯三使)의 괴이한 무공보다
열 배는 더 고강했다.

그는 비록 창졸간에 행동을 개시했지만 장봉용두와 송청서같은
고수들도 그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니 장봉용두는
송청서가 장검으로 자신의 철봉을 막았다고 하고 송청서는 그가
자신의 장검을 밀어부쳤다고 굳게 믿는 게 당연했다.

장무기는 그들이 흠칫 놀라는 순가, 왼손으로 칠대제자 한 명을
나꿔잡아 냅다 담장 밖으로 집어던지는 동시에, 조민을 끌어안고
전광석화처럼 대전 지붕 위로 몸을 솟구친 것이다.

장무기가 구사한 불가사의한 신법은 전설로만 전해져 내려오는
은신술에 가까왔다. 물론 미륵불상이 쓰러져 주위에 흙먼지가 뿌
옇게 깔려 있었고, 개방 제자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혼란을
빚고 있었기 때문에, 장무기가 득을 보았지만, 칠대제자를 적시
에 담장 밖으로 집어던져 장봉용두와 송청서의 주의력을 그쪽에
쏠리게 한 것이 무엇보다도 주효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게다가 무공이 높은 자들은 현명이로를 협공하는데 정신이 팔려
있었고, 무공이 약한 자들은 전전긍긍하고 있었으므로, 아무도
그가 번개처럼 나타나 조민을 구해 연기같이 사라진 사실을 알아
차리지 못했다.

조민은 죽음의 가장자리에서 난데없이 강한 힘에 이끌려 일학충
천(一鶴沖天)의 기세로 몸이 허공으로 날아가자, 마치 춤을 추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대전 지붕 위에 사뿐히 내려선 그녀는 비로소 정신을 가다듬고
얼른 고개를 돌려 자신을 구해 준 장본인을 쳐다보았다. 짙은 눈
썹, 생기가 넘치는 서글서글한 눈동자, 바로 장무기가 아닌가!

순간, 꿈에서 갓 현실로 돌아온 그녀는 다시 꿈인 듯한 착각에
빠졌다.

"아니.....!"

장무기는 황급히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았다. 그가 조민을 데리
고 이곳을 벗어날 생각이라면 지붕 위로 몸을 날리지 않았을 것
이다. 그는 이곳에 좀더 남아 있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개방
이 명교를 상대할 대책을 극비리에 상의하고 있고, 송사형이 뜻
밖에도 개방에 가입했으니 보다 자세한 것을 알아내고 싶었다.
그리고 한림아를 구해야겠다는 마음도 작용했다.

대전 안은 흙먼지로 뒤덮힌 가운데 미륵불상이 쓰러져 아수라장
으로 변해 있었다. 장무기는 처마 쪽으로 옮겨가 절묘한 신법으
로 대전 좌측에 세워져 있는 불상 뒤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대전
안에는 부상을 당한 몇몇 개방 제자들이 쓰러진 채 신음을 하고
있을 뿐, 한림아는 다른 곳으로 끌려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장무기는 주위를 두리번 살폈으나, 몸을 숨길 만한 적당한 곳이
눈에 띄지 않았다. 조민은 그의 생각을 꿰뚫듯 커다란 가죽북을
가리켰다. 그 북은 높은 받침대 위에 올려져 있으며 우측에 걸어
놓은 거종(巨鐘)과 마주 보고 있었다.

장무기는 이내 그녀의 뜻을 알아차리고 벽에 등을 바싹 붙인 채
큰 북 가까이 접근해 갔다. 이어 북의 일면을 손가락으로 긁자
쇠가죽이 열 십자로 찢어졌다. 장무기는 잽싸게 몸을 날려 그 틈
새를 뚫고 북 속으로 들어갔다. 조민도 잇따라 행동을 전개했다.

북은 비록 크지만 바닥이 원형을 이루고 있어 두 사람이 들어가
면 몸을 포개야만 했다. 뒤따라 들어온 조민은 서슴없이 장무기
의 몸을 깔고 앉았다. 장무기는 그녀를 밀어내려 했으나 몸을 움
직이기가 불편했다. 서로의 몸이 밀착되자 그녀의 몸에서 유향
(油香)이 은은히 풍겨오는 것을 의식할 수 있었다. 그는 애증이
교차되는 야릇한 심정에 사로잡혔다. 그녀에게 문책할 말이 많았
지만, 이런 상황하에선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조민은머리에 쓰고 있는 방건을 벗어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짚으며 정감이 듬뿍 담긴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름처럼
치렁치렁한 머리결이 장무기의 얼굴에 와 닿자 흠칫했다.

'결국 또 그녀를 구해 주고 말았군. 다시는 그녀에게 현혹되지
말아야지.....'

그는 의식적으로 조민을 밀어냈다. 조민은 자존심이 상한 듯 입
을 삐쭉거리더니, 그의 가슴에 한 차례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녀
다운 오기의 표출이었다.

장무기도 오기가 생겨 무릎을 세워 그녀의 등을 찍었다. 조민은
이 뜻밖의 일격에 심한 고통을 느껴 입을 벌리며 소리를 지르려
했다. 그것을 본 장무기는 당황하여 얼른 그녀의 목을 끌어안으
며 다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이때 집법장로의 음성이 들려왔다.

"방주님께 아뢰옵니다. 적은 이미 달아났습니다. 저희들이 무능
하여 적을 제압하지 못했으니 엄벌을 내려주십시오."

사화룡이 즉시 그의 말을 받았다.

"내 어찌 벌을 내리겠소. 그 년놈들의 무공이 심히 고강하다는
것을 모두 직접 보지 않았소?! 빌어먹을, 오늘은 재수가 더럽게
도 없는 날이오. 일진이 좋지 않았던 것뿐이니, 장로와는 아무
상관도 없소."

집법장로는 정중하게 말했다.

"너그러움을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어 장봉용두와 송청서가 서로 자신들의 고집을 내세우며 언쟁
을 벌이자, 대전 안의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사화룡은 진우량의
의견을 물었다.

"진형제, 자네가 보기에 당시의 상황이 어떠했는가?"

진우량이 곧 대답했다.

"저의 의견은 이렇습니다. 우선 장봉용두께선 본방의 원로이시
니, 지금 주장하고 있는 게 틀림없는 사실일 겁니다. 그러나 송
형제도 자신의 영달을 제쳐두고 본방에 가입했으며, 또한 그 조
민이란 요녀와는 앙숙이므로 절대 고의로 그녀를 도와줄 리가 없
습니다. 필시 그 요사한 계집이 차력타력(借力打力)과 같은 괴이
한 무공을 구사해 용두 형님의 철봉으로 송형제의 장검을 뿌리치
게끔 만든 것 같습니다. 혼전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하에서 미처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해 서로 오해가 생긴 모양입니다."

장무기는 내심 혀를 찼다. 진우량은 과연 심계가 깊었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보지 못했으면서도 엇비슷하게 추측을 해
낸 것이다. 사화룡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그 분석은 상당히 이치에 맞는군. 모두는 본방을 위해 애를 써
야 하는데, 사소한 일로 대가리 깨지게 싸워서야 되겠나?"

장봉용두는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았다.

"설령 내가....."

진우량이 즉시 그의 말을 받았다.

"송형제, 용두 형님은 덕망이 높아 설령 자네를 잘못 나무라셨
더라도 성심껏 받아들여야 당연하네. 자, 어서 사과를 드리게."

송청서는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다가가 몸을 숙였다.

"장봉용두, 소제가 무례한 행동을 취한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장봉용두는 방주 등의 이목을 의식해 더 이상 노골적으로 화를
낼 수 없어, 냉소를 날리며 퉁명스럽게 한 마디 내뱉었다.

"알았네!"

진우량은 일방적으로 송청서를 몰아세운 것 같지만, 사실 그의
말을 곰곰히 따져보면 그렇지는 않았다. 그는 앞서 조민이 차력
타력과 같은 괴이한 무공을 구사해 용두 형님의 철봉으로 송형제
의 장검을 뿌리치게끔 만든 것 같다고 했고, 이번에는 용두 형님
의 덕망이 높아 설령 잘못 나무라셨더라도 성심껏 받아들여야 한
다고 말했으니, 결국 모든 게 장봉용두의 잘못이란 뜻이 아니겠
는가!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진우량은 최근 방주에게 가장 신임을 받고 있기 때문에,
아무도 그의 말을 문제삼지 않았다.

사화룡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진형제, 조금 전에 이곳에 나타나 한바탕 지랄발광을 떨다가
꽁무니를 뺀 요녀가 여양왕의 딸이었다고? 그렇다면 마교와는 으
르렁대는 앙숙일 텐데, 어째서 우리가 그 마교의 마두 새끼 장무
기를 욕하는데 괜히 나서서 열을 내는지 모르겠군."

진우량이 생각을 굴리며 대답을 하기 전에, 장발용두가 눈살을
찌푸리며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오랑캐 요녀가 유별나게 마교 교주를 옹호하고 나서는게 아
무래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이때 송청서가 나섰다.

"그 이유라면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사화룡은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럼 자네가 속시원히 말해 보게."

송청서는 또렷한 음성으로 말했다.

"마교는 비록 조정과 맞서고 있지만, 그 군주 요녀는 장무기에
게 현혹되어 그에게 시집을 가고 싶어 안달이 난 모양입니다. 그
래서 기를 쓰고 그를 감싸고 나선 겁니다."

개방 사람들은 이 말을 듣자 모두 입이 딱 벌어지며 의아해 했
다.

----- 제 6권 1장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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