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천도룡기 6-2

3학년2반 | 2022.03.06 07:03:45 댓글: 0 조회: 370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53190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6 권

제 2 장 빗나간 연심(戀心) #1/6

한편 장무기는 북 속에서 송청서의 얘기를 듣자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는 속으로 자신에게 물었다.

'그게 정말이란 말인가? 정말로 그녀가 나에게 일생을 맡길 생
각이란 말인가?'

장무기는 절로 조민을 올려다보았다. 조민 역시 그의 몸을 깔고
앉은 채 호흡이 좀전보다 가빠지는 것 같았다. 북 속은 비록 침
침했지만 공력이 심후한 장무기는 그녀의 표정을 똑똑히 읽을 수
있었다. 조민의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 햇볕처럼 빛났다. 그 눈에
는 무한한 감정이 넘실거렸다.

장무기는 단전으로부터 뜨거운 기운이 용솟음쳐 올라 그녀의 양
손을 힘있게 움켜쥐었다. 그 순간 조민의 앵두 같은 입술이 동백
꽃처럼 확대되어 그의 눈으로 빨려 들어오는 것 같았다.

장무기는 끓어오르는 충동으로 인해 그녀의 입술을 삼키고 있었
다. 강렬한 본능이었다. 그러나 그 본능은 이성(理性)에 의해 억
눌려졌다. 조민의 붉은 입술이 갑자기 주아의 선혈이 낭자한 얼
굴로 음각되었기 때문이다. 끓어올랐던 열정이 삽시간에 증오로
둔갑했다. 그러자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며 손에 힘을 주었
다. 그 바람에 조민은 손이 으스러지는 듯한 아픔을 느껴 하마터
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비명을 내지 않으려니 눈물이 찔끔 흘러내렸다. 조민은 암팡스
럽게 그를 노려보았으나 장무기는 의식적으로 그녀를 외면하듯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러한 장무기가 너무나도 얄미웠다. 발로
그의 턱이라도 걷어찼으면 속이 후련할 것 같았다.

이때 진우량의 호기심이 담긴 물음소리가 들려왔다.

"자네가 그것을 어떻게 알았지? 정말 그런 해괴한 일이 있단 말
인가?"

송청서는 이를 갈아부치듯 열을 내며 말했다.

"장무기 녀석은 생김새가 평범하여 영웅스런 데라곤 한 군데도
없지만, 마교의 사술(邪術)을 배워 계집을 홀리는데는 비상한 재
주를 갖고 있습니다. 많은 여자들이 그의 마수에 걸려들어 농락
당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집법장로는 납득이 간다는 듯이 턱을 끄덕였다.

"맞아. 마교에 몸담고 있는 음도(淫徒)라면 남녀를 막론하고 상
대를 홀리는 요사스러운 수법을 알고 있겠지. 아미파의 기효부는
마교 양소의 사술에 걸려들어 몸을 더럽히고 목숨까지 잃게되었
으며, 장무기의 부친 장취산도 백미응왕의 딸이 쳐놓은 요법(妖
法)에 빠져 역시 패가망신하지 않았나? 장무기는 요녀의 피를 타
고났으며 명색이 마교의 우두머리이니, 채화보양술(採花補陽術)
에 일가견을 갖고 있을 게 분명하지. 아마 그 오랑캐 군주도 그
의 마수에 걸려들어 몸을 더럽혔을 걸세. 생쌀이 이미 익은 밥으
로 변했는데 그 계집이 소마두에게 매달리는 것이 당연하지."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동감이라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중에서 전공장로는 분개를 금치 못해 한 마디 했다.

"그런 강호의 패륜아들은 하루속히 죽여 없애야지. 그렇지 않으
면 얼마나 많은 양가집 규수가 그들의 희생물이 되겠는가!"

사화룡은 혓바닥을 내밀어 입술을 천천히 핥더니 음흉하게 웃으
며 말했다.

"빌어먹을, 어쨌든 장무기 녀석은 여복이 터져 살맛 나겠군."

장무기는 이들의 대화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울화통이
터질 것만 같았다. 분명 자기는 아직까지 동자지신(童子之身)이
거늘 아미파 멸절사태부터 말끝마다 자기더러 음적이니, 음도라
고 몰아붙이니 이보다 더 억울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지
금 이곳에선 한 술 더 떠 자기가 이미 조민의 몸을 더럽혔다느니
생쌀이 익은 밥이 됐다느니, 멋대로 말을 주워삼키니 실로 어처
구니가 없었다.

이때 조민이 갑자기 그의 가슴을 꼬집었다. 장무기는 흠칫하며
공연히 당황해졌다.

'조 낭자와 내가 이곳에서 몸을 맞붙인 채 숨어 있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정말로 누명을 뒤집어 쓰게 되겠군.'

전공장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미파의 주지약 낭자가 정녕 그 음적의 손에 걸려들었다면,
이미 청백(淸白)을 잃었을 가능성이 농후하군. 송형제, 아무 염
려 말게. 우리가 자네를 도와 틀림없이 주 낭자를 빼앗아 오겠
네. 절대 기효부의 일이 재현되게끔 하지 않을 걸세."

집법장로도 한 마디 거들었다.

"형님의 말이 맞습니다. 무당파는 왕년에 은이정을 돕지 못했으
니 이번에도 송형제를 돕지 못할 게 뻔합니다. 송형제는 무당에
서 가장 장래가 촉망되는 인재인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본방에 가
입하기로 작심했으니, 우리가 어찌 그를 돕지 않을 수가 있겠
소?"

개방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일처럼 흥분하여 장무기를 음적으로
몰아붙이는 동시에 송청서를 위해 주지약을 되찾아 주겠다고 다
짐했다.

이즈음 북 속에 있는 조민이 장무기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당신이 얼마나 음탕하다는 것을 이제 알았죠? 나를 생쌀에서
익은 밥으로 만든 것도 당신이라면서요?"

그녀의 말 속에는 다소간의 분노와 질책, 그리고 장난이 섞여
있었다. 그러한 것들이 묘한 색깔로 어우러져 묘하게도 장무기의
본능을 자극했다. 일순 장무기는 본능적인 힘에 이끌려 그녀의
목을 끌어안고 말았다. 그 즉시 소녀 특유의 감미로운 채취가 그
를 아찔한 현기증 속으로 몰아넣었다.

장무기는 언제까지나 이런 상태로 그녀와 더불어 함께 있고 싶
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원초적인 욕심일 뿐, 결코 현실로
이루어질 수 없는 환상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사랑과 미움,
그는 두 개의 상반된 감정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자신을 발견하자
공연히 짜증이 났다.

'이 여인이 음탕하지 않다면, 아니 나의 사촌누이를 죽이지만
않았더라도 난 모든 것을 다 팽개치고 그녀와 일생을 같이 할 텐
데.....'

송청서는 개방 사람들에게 형식적이나마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러자 사화룡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음적이 무슨 방법으로 오랑캐 군주를 유혹해 수중에 넣었는
지 자세히 알고 있는가?"

송청서는 고개를 한 차례 갸우뚱하며 대답했다.

"그 자세한 내막은 당사자가 은밀하게 음수(淫手)를 뻗은 것이
니 만치 제 삼자로선 알 도리가 없습니다. 아무튼 그날 요녀가
조정의 무사들을 이끌고 태사부님을 잡기 위해 무당산에 나타났
는데, 그 음적의 얼굴을 보자 순순히 물러갔습니다. 그로 인해
무당파는 큰 화를 면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나의 삼사숙께서 지
골(肢骨)이 부러져 이십 년 동안 행동에 불편을 겪어왔는데, 그
요녀가 준 약으로 뼈를 잇게 되었습니다."

집법장로가 그의 말을 받았다.

"바로 그것이네. 조정은 줄곧 무당파를 눈에 가시로 생각해 왔
는데, 그 오랑캐 군주가 만약 음수에 걸려들어 몸과 마음을 바치
지 않았다면, 선뜻 약을 내주어 유삼협을 도울 리가 있겠는가?
어쨌든 그 음적은 질이 좋지 않은 녀석임에 틀림없지만, 태사부
님과 사숙백들에게 도움을 준 것만큼은 부인할 수가 없군."

송청서도 그 점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네, 맞습니다. 녀석은 태사부님과 사숙백님들의 은혜를 잊을
만큼 아직까지는 배은망덕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진우량이 교활하게 눈동자를 굴리며 얼른 나섰다.

"방주께 아뢰옵니다. 지금 송형제의 말을 듣고 보니 한 가지 좋
은 수가 떠올랐습니다. 그 수가 성공한다면 녀석을 꼼짝 못하게
굴복시켜 마교의 모든 마도들이 우리 명령에 따르게끔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사화룡은 솔깃했다.

"그런 기똥찬 묘책이 있다면, 뜸들이지 말고 어서 말해 보게."

진우량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모두 한집안 식구지만, 이런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유리합니다."

이 말에 주위에 있는 개방 고수들 중에 십여 명이 스스로 대전
밖으로 물러나 직책이 높은 몇몇 핵심 인물만 남았다. 그래도 진
우량은 마음이 놓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 일이 조금이라도 누설되면 엄청난 결과가 벌어질 테니, 송
형제와 두 분 용두 형님께서 혹시 엿듣는 자가 있는지 다시 한번
주위를 살펴봐 주십시오."

장봉용두와 장발용두는 즉시 대전 지붕 위로 몸을 솟구쳤고, 진
우량과 송청서는 대전 앞뒤를 자세히 살폈다. 심지어 여러 개의
신상 뒤와 휘장 뒤, 액자 뒤까지 확인해 보았다.

장무기와 조민은 숨을죽인 채 긴장에 싸여 있었다. 장무기는 조
민의 지혜에 다시 한번 감탄을 금치 못했다. 대전 안에 이 거고
(巨鼓)이외에는 완벽하게 몸을 숨길 만한 곳이 없었다.

네 사람은 구석구석 살펴보고 나서 다시 대전에 모였다. 진우량
은 비로소 나직하게 말했다.

"이번 일은 성사시킬 수 있는 열쇠를 쥔 자가 바로 송형제요."

송청서는 멍해졌다.

"내가.....?"

진우량은 그를 똑바로 주시했다.

"그렇다네. 이제부터 내 말을 잘 듣게."

북 속에 숨어 있는 장무기도 진우량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긴장된 채 신경을 곤두세웠다.

진우량은 이번에 장발용두에게 고개를 돌렸다.

"수고스럽지만, 장발용두께서 오독실심산(五毒失心散)을 만들어
주셔야겠습니다. 그것을 송형제에게 내주시면 됩니다."

진우량은 다시 송청서에게 고개를 돌렸다.

"자네는 그 오독실심산을 갖고 곧장 무당산으로 달려가 암암리
에 장진인과 무당 대협들의 음식에다 풀어넣게. 우린 산 아래서
기다리고 있다가 자네가 일을 성사시키면 한꺼번에 잡아오겠네."

여기까지 들은 중인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장진인
등을 납치해 무슨 소용이 있다는 것인가?

진우량은 본격적인 계획을 털어놓았다.

"그들을 인질로 삼아 장무기 녀석을 위협하면, 녀석은 틀림없이
본방의 명령에 따르게 될 겁니다."

사화룡이 먼저 손뼉을 치며 찬성을 했다.

"그거 아주 좋은 수군. 좋아, 좋아. 훌륭해!"

집법장로도 고개를 끄덕였다.

"시도해 볼 만한 계획이야. 본방의 오독실심산을 음식에 풀어넣
을 수만 있다면, 설령 장무기라 하더라도 영락없이 우리 손에 걸
려들기 마련이지. 하지만 마교의 경계가 워낙 삼엄해 직접 그들
에게 오독실심산을 전개하기는 어렵지만, 송형제는 무당의 제자
이니 무당파 사람들을 상대하기엔 아주 쉬울 걸세. 그래서 집안
도둑이 무섭다는 말도 있지 않는 가? 송형제가 나서 주기만 한다
면, 일은 감쪽같이 해치울 수가 있을 걸세."

송청서는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건..... 그건 곤란합니다. 어떻게 내 손으로 태사부님과 아
버님께 해로운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진우량이 그를 설득했다.

"오독실심산은 본방의 독특한 영약으로 잠시 동안사람의 정신
을 잃게 할 뿐 몸에 전혀 해로움을 주지 않네. 우린 영존과 장진
인을 누구보다도 존경하는데 그들에게 해가 되는 짓을 할 리가
있겠는가?"

송청서는 그래도 승낙하지 않았다.

"제가 사전에 태사부님과 부친의 승낙없이 본방에 가입한 것만
도 나중에 큰 꾸지람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 대신 본방과 무당
파는 모두 협의도를 근본으로 삼고 있으므로, 큰 죄가 되지 않는
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번 일은 다릅니다. 저는 절대 그런
불효막심한 짓을 할 수 없습니다."

진우량은 끈질겼다.

"송형제, 왜 그다지도 생각이 좁은가? 자고로 큰일을 위해선 작
은 일을 희생시킬 수 있으며, 대의(大義)를 위해서 혈육까지도
외면해야 된다고 하지 않는가? 더군다나 우리의 목적은 단지 마
교를 섬멸하는데 있을 뿐, 무당파의 여러분을 모셔 오겠다는 것
은 그 방법에 불과하네. 그들도 나중에 우리의 굳은 뜻을 알게
되면 이해해 줄 걸세. 왕년에 육대문파가 마교를 협공할 때도 무
당파 역시 큰 역할을 하지 않았던가?"

송청서는 여전히 표정이 일그러져 있었다.

"제가 만약 이번 일을 실천에 옮긴다면, 평생을 두고 죄책감을
느낄 겁니다. 그리고 강호인의 손가락질을 받게 될 것이니 무슨
면목으로 얼굴을 들고 다니겠습니까?"

진우량은 그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말했다.

"방금 내가 무엇 때문에 팔대장로들까지 자리를 피하게 했는지
그 이유를 아는가? 주위를 다시 샅샅이 확인한 것도 이 일을 극
비리에 진행하기 위함이네. 자네도 약을 풀은 후 정신을 잃은 척
하게. 우리가 자네까지 붙잡아올 테니 아무도 자네를 의심하지
않을 걸세. 이곳에 있는 우리 일곱 명을 제외하고 세상에서 이
비밀을 아는 자가 없을 게 아닌가? 우리야 자네의 능력을 높이
평가할 것이니 조금도 위축될 게 없네."

송청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정녕 방주님과 진형님의 분부라면 따라야 마땅하지만, 사람이
라면 누구나 효(孝)와 의(義)를 근본으로 삼아야 하거늘, 내 어
찌 부친에게 해를 끼치는 불효를 저지를 수 있겠습니까? 이번 일
만큼은 분부에 따를 수가 없습니다."

개방은 늘 효(孝)를 강조해 왔다. 그래서 송청서가 효를 앞세워
거절하자 더 이상 강요할 수 없었다. 한데 진우량이 갑자기 냉소
를 날렸다.

"아랫 사람으로서 윗 사람에게 해로운 일을 한다는 것은 물론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도 잘 알고 있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히 묻고 싶은 말이 있네. 막칠협과 자네의 관계는 어떻
게 되는가? 그의 배분이 높은가, 아니면 자네의 배분이 높은가?"

진우량의 물음은 실로 엉뚱한 것이었다. 장무기는 그가 왜 갑자
기 이런 어리석은 질문을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송청서는 다시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가 그의 입에서
뜻밖의 대답이 나왔다.

"좋습니다. 방주님과 여러분들의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그 대신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저의 부친께 해가 되는 행위를 해선 아니 됩
니다. 만약 이 약속을 지켜주지 않겠다면 절대 이번 일을 행하지
않을 겁니다."

사화룡, 진우량 등은 그가 승낙하자 모두 기뻐했다.

진우량은 쾌히 그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 점에 대해서는 조금도 염려를 말게. 진형제는 우리와 서로
형제로 칭호하고 있으니 송대협 역시 우리의 존장임에 틀림없네.
그러니 송형제가 그런 제의를 하지 않더라도 우린 그 어르신네를
정중히 모실 걸세."

장무기는 내심의혹을 금치 못했다.

'송사형은 줄곧 승낙을 하지 않다가 진우량이 막칠숙을 거론하
자 왜 생각이 달라진 것일까? 필시 무슨 곡절이 있을텐데.....
나중에 막칠숙을 뵙고 직접 여쭈어보면 알게 되겠지.'

이어 집법장로와 진우량이 나직이 상의를 했다. 장삼봉 등이 중
독된 후 어떤 방법으로 연락할 것이며, 어떻게 그들을 납치해 올
것인가에 대해 소상히 의견을 나누었다.

한편 사화룡은 별다른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진우
량의 의견에 따라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장발용두가 마지막으로 한 마디 했다.

"지금은 엄동설한이니 오독사(五毒蛇)가 땅 속에 깊이 들어가
동면을 하고 있을 것이오. 소제가 바로 장백산으로 달려가 몇 마
리 잡아오겠습니다. 빠르면 스무 날, 늦어도 한 달이면 돌아올
겁니다. 동면을 하는 오독사로 오독실심산을 만들면 가장 독성이
강할 뿐 아니라 무색무취의 효과도 거둘 수 있어, 설령 장진인
같은 고수들도 절대 사전에 눈치를 채지 못할 겁니다."

집법장로가 그의 말을 받았다.

"진형제와 송형제는 장발용두와 함께 장백산으로 가게. 우린 먼
저 남쪽으로 내려갈 테니 한 달 뒤에 노하구(老河口)에서 만나기
로 하세. 오늘이 섣달 초여드레이니 해를 넘기고 정월 초여드렛
날 만나면 되겠군."

그는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다음 말을 이었다.

"그 한림아는 쓸모가 많은 놈이니, 장봉용두가 특별히 잘 지켜
줬으면 좋겠네. 마교에서 놈을 구하러 올지도 모르게. 자, 이제
우린 적의 이목을 피해 서로 흩어져 이곳을 떠나도록 하세."

그들은 분분히 방주에게 작별을 고하고 나서 송청서, 진우량,
장발용두가 먼저 북쪽으로 향했다. 삽시간에 미륵묘 앞에 운집했
던 개방 제자들이한 명도 남지 않고 모두 떠나 버렸다.

장무기는 그들이 멀리 떠나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자, 비로소
조민을 밀어내며 북 속에서 내왔다. 조민도 따라서 뛰어내리더니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그를 요염하게 쏘아보았다.

장무기는 억눌렸던 울화가 터졌다.

"흥! 무슨 염치로 나를 만나려 왔지?"

조민 역시 차가운 표정으로 쏘아부쳤다.

"왜 그렇게 화를 내죠? 내가 장교주께 무슨 죄라도 졌다는 건가
요?"

장무기의 얼굴에 서릿발이 깔렸다.

"월내 욕심이 많은 여자이니 의천검과 도룡도를 훔쳐간 것은 그
런 데로 이해하겠소! 그리고 나를 무인도에 버려두고 떠난 것도
용서할 순 있소. 하지만 중상을 입은 주아에게 다시 독수를 전개
한 것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소! 당신같이 악랄한 여인은 세상에
서 둘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오! 그리고서도 뻔뻔스럽게.....!"

여기까지 말한 장무기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제할 수 없어 앞
으로 한 걸음 내딛기 무섭게 다짜고짜 조민의 뺨을 후려쳤다. 조
민은 그와 가까운 거리에 있었으므로 도저히 피할 새가 없었다.
찰싹!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호되게 뺨을 얻어맞아 얼굴이 이
내 불그죽죽하게 부어올랐다.

조민은 이 갑작스러운 일에 아픔과 분노보다도 놀라움이 앞섰
다. 그녀는 눈물을 주루루 흘리며 소리쳤다.

"당신은 내가 의천검과 도룡도를 훔쳤다고 하는데, 그것을 본
사람이 있나요? 그리고 내가 주아에게 독수를 전개했다는데 그녀
를 불러와 대질을 시켜 주세요!"

장무기는 그녀가 모든 것을 부인하자 더욱 울화가 치밀었다.

"좋아! 저승으로 보내 그녀와 대질케 하지!"

장무기는 전광석화같이 두 손으로 그녀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
는 너무나 흥분한 나머지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배신감에 그는 치를 떨었다.

조민은 숨이 막힐 것 같아 본능적으로 그의 가슴을 향해 지풍을
날렸다. 그러나 지풍이 그의 가슴에 닿자 흔적도 찾아볼 수 없이
사라졌다. 장무기가 구양신공으로 몸을 호위했기 때문이다. 삽시
간에 조민은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더니, 혀를 내밀며 그만 까무
라치고 말았다.

장무기는 원래 그녀를 목졸라 죽일 생각이었으나 까무라친 것을
보자 그만 마음이 약해졌다. 결국 그는 조민의 목에서 손을 풀고
말았다. 조민은 그 즉시 축 늘어진 체 쿵하는 소리와 함께 되로
쓰러졌다.

한참 후에야 조민은 나직한 신음을 토하며 깨어났다. 장무기의
얼굴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얼굴에 분명 염려와 당황함
이 엇갈려 있는 것을 조민은 확연히 간파할 수 있었다. 게다가
조민이 깨어난 것을 확인하자 안도의 숨까지 내쉬었다.

조민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그를 똑바로 주시하며 물었다.

"주아가 세상을 떠났다고 말했나요?"

장무기는 다시 분노가 치밀었다.

"그녀 얼굴에 난도질을 했는데 살아 있겠소?"

조민은 떨리는 음성으로 반문했다.

"누가.... 누가 그런 터무니 없는 말을 했죠? 내가 왜 주아의
얼굴에 난도질을 하겠어요? 주낭자가 그렇게 말했겠죠?"

장무기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주낭자는 절대 뒤꽁무니에서 남의 나쁜 말을 할 사람이 아니
오! 자기가 적접 눈으로 보지 않은 이상 함부로 당신을 모함하지
않소!"

"그럼 주낭자 자신이 그렇게 말했나요?"

"주아는 벌써부터 말을 할 수 없는 상태였소! 그 무인도에 우리
다섯 명밖에 없었는데 의부님이 그런 짓을 했겠소? 아니면 내가
했겠소? 주아가 스스로 자신의 얼굴을 난도질 할 지는 더더욱 없
지 않소! 흥! 아무리 발뺌을 한다 해도 이번엔 호락호락 속지 않
을 것이오. 내가 그녀와 혼례를 올릴까 봐 그런 독수를 전개한
것 같은데 똑똑히 들으시오! 그녀가 죽었든 살았든 간에 난 그녀
를 영원한 반려자로 생각하고 있소!"

계속 ---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6 권

제 2 장 빗나간 연심(戀心) #2/6

조민은 고개를 숙인 채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해서 중원으로 돌아오게 되었죠?"

장무기는 냉소를 날렸다.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정말 얼굴에 철판을 깔았군. 사람을 시켜
우리를 배로 유인한 연후에 육지에 가까이 이르면 포격을 해서
몰살시키려 했지만, 나의 의부님이 그 음모를 사전에 알아차려
무사히 중원 땅에 발을 내딛게 되었소. 음모가 제대로 성공되지
않아 몹시 서운하겠군!"

조민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멍하니 쳐다보더니, 눈동
자에 연민의 빛깔이 띄어지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장무기는 그녀의 미색과 요염한 자태에 행여나 자신이 다시 빨
려들까 봐 얼른 고개를 돌려 냉랭하게 말했다.

"난 누이동생을 위해 복수해 주기로 맹세했지만, 워낙 모질지
못한 놈이라 오늘은 이대로 떠나겠소. 하지만 계속 악행을 저지
른다면 언젠가는 내 손에 죽게 될 것을 명심하시오!"

말을 끝낸 장무기는 곧 성큼성큼 미륵묘 밖으로 걸음을 떼어놓
았다.

그가 약 십여 장쯤걸어나갔을 때 조민이 뒤쫓아와 소리쳤다.

"이봐요! 지금 어디로 가려는 거죠?"

장무기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내가 어딜 가든 무슨 상관이오?"

조민은 계속 뒤따라오며 말했다.

"사대협과 주낭자에게 물어볼 말이 있으니 그들에게 안내해 주
세요."

장무기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의 의부님은 나처럼 자비롭지가 못하시니, 그대를 보면 당장
죽여 버릴 것이오!"

조민은 코웃음을 쳤다.

"당신의 의부님은 수단이 악랄할지 몰라도 당신처럼 생각이 좁
진 않을 거예요. 그리고 사대협이 나를 보자마자 살수를 전개한
다면, 당신은 자연히 누이동생의 복수를 하게 되는 셈이니 바라
는 바가 아니겠어요?"

장무기는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내가 어째서 생각이 좁다는 거요? 어쨌든 난 그대를 의부님께
데려갈 수 없소!"

조민의 입가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봐요! 마음이 약하고 소견이 좀은 양반! 속으로는 날 끔찍이
도 생각하고 있죠? 그래서 내가 행여나 사대협에게 죽음을 당할
까 봐 데려가지 않으려는 거죠?"

장무기는 그녀가 자신의 정곡을 찌르자 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당황함을 감추려는 듯 호통을 쳤다.

"닥치시오! 그렇게 잘난 척만 하다가는 언젠간 자신의 무덤을
파게 될 것이오! 아무튼 부탁이니 나에게 좀 멀리 떨어져 주시
오. 언제 어느 순간에 내 마음이 달라져 그대를 죽이게 될지도
무르니까!"

조민은 그에게 바싹 다가왔다.

"난 사대협과 주낭자를 만나 직접 물어볼 말이 있어요. 그전에
내 추측만으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요."

장무기는 은근히 호기심이 생겼다.

"그들에게 대관절 무슨 말을 물으려는 거요?"

조민은 직접적인 대답을 회피했다.

"그들과 대면하면 자연히 알게 될 거예요. 내가 기꺼이 위험을
무릅쓰겠다는데 왜 당신이 겁을 먹는 거죠?"

장무기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좋소. 그대신 이것은 그대가 스스로 원한 일이니, 나의 의부님
이 살수를 전개한다 해도 날 원망하진 마시오!"

조민은 턱을 치켜올리며 도도하게 말했다.

"당신이 염려할 일이 아니에요!"

장무기는 다시 비위가 뒤틀렸다.

"내가 왜 염려를 하겠소!? 흥! 그대가 죽기를 학수고대하겠소!"

조민은 빙긋이 웃었다.

"그럼지금이라도 직접 날 죽이면 되잖아요?"

장무기는 그녀와 더 이상 입씨름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입을 굳게 닫아 버리고 성큼성큼 고을 쪽으로 걸어갔다. 막상 고
을에 당도하자 장무기는 다시 망설여졌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조낭자, 내가 세 가지 조건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소?
그 첫 번째 요구에 따라 도룡도를 찾아주었으니, 아직 두 가지
일이 남았소. 난 그 약속을 지키고 싶소. 그런데 낭자가 만약 나
의 의부님을 만나게 되면 십중팔구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오. 그
러니 이대로 떠나시오. 내가 나머지 두 가지 조건마저 들어주어
빚을 청산한 연후에 다시 나의 의부님을 뵈어도 늦지 않을 것이
오."

사실 이것은 장무기의 궁색한 변명이었다. 조민은 그의 속마음
을 꿰뚫어보고 생긋이 웃었다.

"당신은 내가 죽는 게 겁이 나서 억지로 구실을 내세우는 것 같
은데, 구태여 그럴 필요가 있나요?"

장무기는 그녀를 한 대 쥐어 박고 싶을 정도로 얄미웠다.

"설령 그 말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대관절 어떻게 하겠다는 거
요?"

조민은 정감이 듬뿍 담긴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어떻게 하겠다는 게 아니라 아주 기뻐요. 당신이 진심으로 날
좋아하는지 줄곧 확인할 길이 없었는데, 이젠 확신을 얻었어요."

장무기는 조민에게 손발을 들고 말았다.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
며 이젠 사정투로 나왔다.

"조낭자, 제발 부탁이오. 어서 떠나가시오."

조민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싫어요. 꼭 사대협을 만나야겠어요."

장무기는 그녀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걸 알고 객점으로 향했
다. 사손이 머물러 있는 객방 밖에 이르러 잠시 주춤하다가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의부님!"

그는 자신의 몸으로 조민의 앞을 가로막고 두어 번 불렀으나 방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들려오지 않았다.

장무기가 문을 밀어보니 문은 안에서 잠겨져 있었다. 그는 웬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의부님은 워낙 청각이 예민하여 자기가
문 밖에 이르면 설령 깊은 잠에 빠져 있다 하더라도 깨어날 것이
다. 그리고 만약 외출을 했다면 안에서 문을 잠그어 놓을 리가
없지 않는가!

장무기가 힘을 주어 문을 밀자 빗장이 끊어지며 문이 열렸다.
과연 사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대신 창문이 반쯤 열려 있
는것으로 보아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
다.

장무기는 다시 주지약의 방문 앞으로 달려가 소리쳤다.

"주낭자!"

역시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문을 밀고 들어가 보니
침상에 옷가지가 가지런히 놓여 있을 뿐, 주지약의 모습은 보이
지 않았다.

장무기는 가슴이 철렁했다.

'혹시 강적과 맞부딪친 게 아닐까?'

점원을 불러 물어보니 두 사람이 나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했
다. 그리고 두 사람 방에서 싸우는 소리가 나는 것도 듣지 못했
다고 했다.

장무기는 다소 마음이 놓였다.

'둘이 함께 잠시 어디를 간 모양이군.'

사실 장무기가 염려하지 않아도 되었다. 사손은 비록 실명했지
만 무공이 뛰어나 당금 무림에서 적수가 될 만한 자가 많지 않은
것이다. 더군다나 세심한 주지약과 함께 있으니 별다른 불상사가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장무기는 사손이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 주위를 유
심히 살폈으나, 아무런 이상도 발견하지 못해 다시 방안으로 돌
아왔다.

조민이 다시 그의 비위를 슬슬 긁었다.

"당신은 사대협이 방에 없는 것을 확인하자 왜 안도의 숨을 내
쉬었죠?"

장무기는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그게 또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요? 내가 언제 안도의 숨을 내
쉬었다는 거요?"

조민은 그가 화를 내는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이 빙글빙글 웃었
다.

"당신의 얼굴만 봐도 금방 알 수 있어요. 당신은 문을 열어 아
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긴장돼 있던 안색이 이내 풀리는 것
을 똑똑히 보았어요."

장무기는 더 이상 그녀와 입씨름을 벌이지 않고 침상에 걸터앉
았다.

조민은 짓궂게 의자를 끌어당겨 바로 그의 앞에 앉으며 싱글벙
글했다.

"당신의 마음을 다 알아요. 사대협이 날 보자마자 살수를 전개
할지 모른다고 전전긍긍하다가, 막상 그 분이 없는 것을 알자 천
만다행이라 생각했겠죠? 그렇게도 날 끔찍하게 생각해 주는 지
예전엔 정말 몰랐어요?"

장무기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나 차마 그녀에게 다시 손찌
검을 할 수 없었다.

"그래, 그대를 끔찍이 생각한 나머지 밤잠을 설쳐 왔으니 어떻
게 할 생각이오?"

조민은 여전히 입가에 웃음을 띄운 채 말했다.

"그래서 기쁘다고 했잖아요. 아주 기분이 좋아요. 구름 위를 둥
실둥실날으는 기분이에요."

장무기는 이를 갈았다.

"그럼 왜 거듭해서 날 죽이려 했소? 그렇게도 날 끔찍하게 죽이
고 싶었단 말이오?"

조민은 얼굴을 약간 붉히더니 나직하게 말했다.

"그건 부인하지 않겠어요. 예전에 당신을 죽이려 했던 건 사실
이에요. 하지만 녹류장에서 당신을 만난 후로부터는 그런 생각이
없어졌어요. 하늘에 맹세할 수도 있어요. 만약 내가 한 말이 거
짓이라면 벼락을 맞아 십팔 층 지옥에 떨어질 거예요."

장무기는 그녀가 진지하게 맹세를 하는 것을 듣자 다소 누그러
졌다.

"그렇다면 왜 의천검과 도룡도를 훔쳐가면서 나를 무인도에 버
려 두었소?"

조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이 끝끝내 그렇게 인정한다면 나로선 입이 열개 있어도 변
명하기가 어려워요. 사대협과 주낭자가 돌아온 후 넷이서 대질하
면 자연히 모든 진상이 밝혀질 거예요."

장무기는 냉소를 날렸다.

"감언이설로 날 속일 순 있어도 의부님과 주낭자를 속이진 못할
것이오?"

조민은 다시 그의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당신은 왜 내 감언이설에 속는 거죠? 그게 바로 날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장무기는 말로서 그녀를 당할 수 없었다. 그는 오기가 뻗쳤다.

"그대를 진심으로 좋아한다면 또 어떻게 하겠소?"

조민은 활짝 웃었다.

"왜 자꾸만 그런 투로 묻죠? 내 대답은 마찬가지에요. 아주 기
분이 좋아요."

장무기는 그녀가 오뉴월의 장미처럼 웃는 모습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그 웃음 속으로 빨려들 것 같아 얼른 고개를 돌려 버렸
다.

조민은 매우 느긋했다.

"미륵묘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더니 배가 고파요."

그녀는 점원을 불러 작은 황금 덩어리를 내주며 가장 좋은 술상
을 차려오라고 했다. 점원은 연신 굽신거리며 물러가더니, 잠시
후 푸짐한 과일부터 갖고 왔다.

"의부님이 돌아오면 식사를 같이하도록 합시다."

조민은 막무가내였다.

"사대협께서 당도하시면 내 목숨이 달아날지도 모르는데, 미리
배불리 먹어두어야 하지 않겠어요? 배불리 먹고 죽은 귀신은 혈
색도 좋대요."

장무기는 그녀의 너무나 태연한 태도가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되
었다. 조민이 다시 말했다.

"금덩어리는 얼마든지 있으니, 그들이 오면 다시 한 상 차려오
라고 하면 되잖아요?"

장무기는 냉랭하게 말했다.

"낭자와 더 이상 식사를 함께 하지 않겠소. 어느 순간에 다시
십향연근산을 음식에다 넣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니까!"

조민은 이내 토라졌다.

"좋아요. 강요하진 않겠어요."

이렇게 말한 그녀는 혼자서 과일을 맛있게 먹었다.

장무기는 점원을 불러 국수를 말아오게 하여 그녀와 멀찌감치
떨어져 게걸스럽게 먹었다.

조민의 식탁에는 이미 진수성찬이 차려졌다. 그녀는 얼마동안
혼자서 먹더니 갑자기 눈물이 주루루 흘러내렸다. 그래도 장무기
가 아랑곳하지 않자 아예 젓가락을 팽개치며 식탁에 엎드려 훌쩍
훌쩍 흐느껴 울었다. 그래도 장무기는 한 마디 위로의 말도 하지
않았다.

조민은 한참 동안 혼자서 울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것
같았다. 그녀는 창 밖을 살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한 시진만 지나면 날이 어두워지겠네요. 그 한림아는 어디로
끌려갔을까? 그의 행방을 놓치면 다시 찾아내기란 쉽지가 않을
텐데....."

그 말에 장무기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내가 깜박 잊고 있었군. 난 우선 그를 구하려 갔다 와야
겠소!"

조민은 입을 삐쭉거리며 그에게 눈을 흘겼다.

"정말 얼굴이 두껍군요. 누가 당신에게 말했나요? 왜 내가 혼자
서 중얼거린 말에 신경을 곤두세우죠?"

장무기는 그녀에게 속수무책이었다. 못된 계모 낯짝처럼 흐렸다
풀렸다 하니, 도무지 그녀의 마음을 종잡을 수 없었다. 입을 열
었다가 또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그는 곧장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 즉시 조민이 따라나섰다.

"나도 함께 가겠어요!"

장무기는 앙갚음을 하듯 쏘아부쳤다.

"그대는 나의 누이동생을 죽인 원수인데, 어찌 원수와 동행을
할 수 있겠소?"

조민은 턱을 치켜세우며 토라진 표정으로 한 마디 내뱉었다.

"좋아요! 혼자 가세요!"

장무기는 밖으로 나가려다가 갑자기 몸을 돌려 물었다.

"혼자 이곳에 남아 무엇을 하려는 거요?"

조민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이곳에서 당신의 의부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려야 하잖아
요!"

장무기는 내심 당황해졌다.

"나의 의부님은 악을 원수처럼 여기는 분이라 그대의 목숨을 살
려두지 않을 것이오!"

조민은 장탄식을 했다.

"그래도 어쩔 수가 없죠. 그게 내 운명이라면 순순히 죽음을 받
아들이는 수 밖에요."

장무기는 잠시 생각을 굴리더니 입을 열었다.

"잠시만이라도 이곳을 피해 줬으면 좋겠소. 나중에 나하고 다시
만나기로 약속합시다."

조민은 거절했다.

"이곳 외에는 몸을 피할 만한 곳이 없어요."

장무기는 더 이상 얘기해 봤자 우이독경임을 알았다.

"좋소. 나와 함께 한림아를 구하려 갑시다. 갔다 와서 다시 의
부님과 대질하면 될 테니까."

조민의 입가에 득이한 미소가 띄어졌다.

"이것은 당신의 요구에 따라 내가 함께 가는 것이지, 결코 내가
생떼를 써서 같아 가는 게 아니라는 걸 명심하세요."

장무기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그대 같은 여성을 만나게 된 것도 나의 운명인 것 같으니 감수
하는 도리밖에."

조민은 생긋이 웃으며 장무기를 방문 밖으로 밀어냈다.

"밖에서 잠시만 기다리세요."

이어 방문을 닫았다.

잠시 후 방문이 다시 열렸을 때 조민은 이미 여장으로 갈아입었
다. 붉은 비단 옷에 양피로 만든 피풍(披風)을 걸쳐 매우 호화스
러운 차림새였다.

장무기는 그녀가 몸에 지니고 다니는 작은 봇짐 속에 이런 귀중
한 옷이 들어 있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이 여인은 심계가 깊고 하는 일마다 허실을 종잡을 수 없구
나.'

장무기가 생각을 굴리고 있는 사이에 조민의 눈가에 웃음이 번
졌다.

"왜 그렇게 넋빠진 사람모양 날 쳐다보죠? 이 옷이 예쁜가요?"

장무기는 푸념을 하듯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용모가 꽃처럼 예쁘면 무슨 소용이 있겠소? 마음이 사갈(蛇蝎)
같은데....."

조민은 까르르 웃었다.

"장교주의 그 말을 가슴 깊이 새겨두겠어요. 장교주, 당신도 새
옷으로 갈아입는 게 어떻겠어요?"

장무기는 냉랭하게 말했다.

"난 어려서부터 남루한 차림새로 자라왔소. 내 차림새가 누추해
그 화려한 옷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멀찌감치 떨어져
뒤따라 오도록 하시오."

"또 심술을 부리는군요. 난 단지 당신이 멋있는 옷을 입은걸 보
고 싶어서 한 말이에요. 이곳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내가
가서 옷을 한 벌 사오겠어요. 그 거렁뱅이들은 관도를 따라 산해
관(山海關) 방향으로 갔으니, 우리가 걸음을 재촉하면 충분히 따
라잡을 수 있을 거예요."

그녀는 장무기의 대답을 듣지 않고 객점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러나 장무기는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가 맥없이 침상에 걸터앉으며
자책감에 빠졌다. 자기가 아무리 마음을 모질게 먹어도 그녀에게
질질 끌려가는 것 같았다. 상대방은 분명 자기의 누이동생을 죽
음으로 몰아넣은 흉수이거늘 애당초 맹세한 대로 도저히 그녀에
게 살수를 전개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자꾸만 그녀에게 마음
이 쏠리고 있지 않은가! 그러한 자신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계속 ---



제 2 장 빗나간 연심(戀心) #3/6

장무기는 내심 자신에게 채찍질을 했다.

'무기야! 이 못난 놈아! 너도 사내 대장부라 자처할 수 있느냐?
네가 무슨 면목으로 명교를 이끌며 천하의 군호를 호령한단 말이
냐?'

한참 동안 기다렸는데도 조민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느덧 날이
어둑어둑해지며 주위에 땅거미가 깔렸다. 그는 웬지 초조해졌다.

'내가 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거지? 나 혼자서 한림아를 구하
러 갈까?


그러나 그의 생각은 이내 바뀌어졌다. 만약 그녀가 새 옷을 사
가지고 돌아와 사손과 맞부딪친다면, 사손은 다짜고짜 그녀의 천
령개에 일장을 전개할 것이고, 그럼 그녀는 뇌장이 파열되어 목
숨을 잃을 게 아닌가? 그녀가 사온 옷은 주위에 널부러질 것이
고.....

그런 상황을 상상하자 장무기는 절로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는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 뒷짐을 지고 진 채 방 안을 왔다갔다 거닐
었다. 그의 뇌리에 오만가지 생각이 다 떠올랐다. 그때 가벼운
발자국소리가 들리며 조민이 보따리 두 개를 들고 들어왔다.

장무기는 내심 반가왔으나 겉으론 퉁명스럽게 말했다.

"왜 이제야 오는 거요? 난 지금 떠나려던 참이었소. 옷을 갈아
입을 시간이 없으니 어서 떠납시다!"

"이왕 오래 기다렸으니 옷을 갈아입는 시간을 갖고 논쟁을 벌일
필요는 없어요. 내 이미 말을 두 필 구해 왔으니 밤을 새워가며
길을 재촉해도 될 거예요."

이렇게 말하며 보따리를 풀어 옷가지를 꺼내 주었다.

"여긴 작은 고을이기 때문에 좋은 옷이 없어요. 잠시 이 옷으로
갈아입었다가 대도에 당도하면 가죽 옷을 새로 사드리겠어요."

장무기는 이내 표정이 차가와졌다. 그는 심각한 음성으로 말했
다.

"조낭자, 혹시 나에게 부귀영화의 허울을 뒤집어 씌워 조정에
귀순하도록 유인하는 것이 아니오? 만약 그런 속셈이라면 일찌감
치 포기하는 게 현명할 것이오. 나 장무기는 당당한 한족(漢族)
의 자손으로서, 설령 왕작(王爵)에 봉해진다 해도 절대로 몽고에
투항하지 않을 것이오."

조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장교주, 그렇게 흥분하시지만 말고 이 옷이 몽고 의복인지 한
인의 의복인지 확인부터 하세요."

그녀는 회색 비단 장포를 펼쳐 보였다.

장무기는 그녀가 구입해 온 옷이 한인의 의복임을 확인하고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조민은 그가 보는 앞에서 천천히 한 바퀴 돌더
니 물었다.

"나의 이 차림새가 몽고의 군주 같나요? 아니면 한인의 낭자 같
나요?"

장무기는 그녀가 묻는 말에 그만 멍해지고 말았다. 처음에는 단
지 그녀의 의복이 몹시 화려하다고만 느꼈을 뿐 몽고 의상인지
한인의 의상인지는 아예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그녀
의 말을 듣고 비로소 그녀가 한인 낭자의 차림새를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조민은 얼굴을 약간 붉히며 정이 듬뿍 담긴 눈동자로 그를 응시
하고 있었다. 장무기는 그녀의 눈빛에서 선뜻 가슴에 와 닿은 것
이 있었다.

조민이 나직하게 말했다.

"당신이 나를 진심으로 좋아해 준다면 난 더 이상 아무것도 바
라지 않아요? 당신이 한인이든 몽고인이든 상관이 없어요. 당신
이 한인이라면 나도 한인이고, 당신이 몽고인이라면 나도 몽고인
이에요. 당신의 마음 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담겨져 있겠죠.
한인과 몽고인의 분쟁, 한인의 흥망성쇠, 권세위명 등등..... 하
지만 내 마음 속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에요. 그것이 바로 당
신이에요. 당신이 좋은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상관없이 나에겐
가장 소중한 존재예요."

장무기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한한 정감이 담긴 그녀의
말을 듣자 절로 의지가 흐려지며 뇌리에 혼란이 왔다. 그는 잠시
동안 넋잃은 사람처럼 굳어져 있다가 진지하게 물었다.

"나의 누이동생을 죽인 이유가 무엇인지 솔직히 말해 보시오.
내가 그녀를 아내로 맞이할까 봐 죽인 게 아니오?"

조민은 고개를 내두르며 음성을 높여 부인했다.

"은낭자를 해친 것은 내가 아니에요! 당신이 믿든 믿지 않든 내
가 한 말은 거짓없는 사실이에요."

장무기는 장탄식을 했다.

"조낭자, 그대가 나에게 베풀어 준 정의는 잘 알고 있소. 나도
목석이 아니거늘 어찌 그 고마운 정을 외면하겠소? 그런데 이제
와서 굳이 날 속일 필요가 있겠소?"

조민의 표정은 매우 진지했다.

"예전에 난 똑똑하기만 하면 모든 일에 우위를 차지할 것이라
생각했어요. 그러나 세상 일이 모두 자기 뜻대로만 되지는 않는
군요. 장교주, 오늘 이곳에 남아 끝까지 사대협과 주낭자를 기다
리도록 해요."

장무기는 멍해졌다.

"왜 갑자기 생각이 달라졌소?"

조민의 표정은 여전히 심각했다.

"그 이유는 묻지 마세요. 그리고 한림아를 구하는 일은 염려 마
세요. 내가 책임지고 그를 구해 주겠어요."

말을 끝낸 그녀는 밖으로 나가더니, 주지약의 방으로 들어가 문
을 닫아 버렸다.

장무기는 그녀의 속셈을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그는 침상에
홀로 앉아 곰곰이 생각을 굴리다가 문득 뇌리에 떠오르는 게 있
었다.

'혹시 그녀는 내가 주지약과 혼약을 한 사실을 알아차린게 아닐
까? 그래서 주아를 죽인 걸로 부족해 다시 주지약을 해치려는 것
이 아닐까? 어쩌면 현명이로가 미륵묘를 떠난 즉시 이곳으로 달
려와 의부님과 주지약을 해쳤을지도 모른다!'

현명이로가 연상되자 그는 가슴이 철렁했다. 녹장객과 학필옹의
무공은 막강하여 사손이 설령 실명되지 않았다 해도 그들 두 사
람의 협공은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장무기는 벌떡 일어나 조민이 들어 있는 객방으로 달려갔다.

"조낭자, 현명이로는 어디로 갔소?"

조민은 방문을 열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들은 내가 미륵묘를 벗어나 산해관 쪽으로 갔을 것이라 생각
하고 남쪽으로 쫓아갔을 거예요."

"그게 정말이오?"

조민은 냉소를 날렸다.

"흥! 내가 아무리 진실을 얘기해도 믿지 않으면서 무엇 때문에
쓸데없이 질문을 하는 거죠!"

장무기는 말문이 막혀 잠시 멍청하니 문 밖에 서 있었다. 그러
자 조민이 그의 비위를 긁듯 다시 말했다.

"만약 내가 현명이로를 시켜 이 객점으로 달려와 사대협과 당신
이 사랑하는 주낭자를 죽이려고 시켰다면, 내 마을 믿겠나요?"

그녀의 말은 예리한 화살처럼 장무기의 정곡을 찔렀다. 그것이
자기가 가장 두려워하던 가상이 아니었는가!

장무기는 대뜸 방문을 걷어차며 안으로 뛰쳐들어가 살기띤 음성
으로 외쳤다.

"방금 뭐라고 했소?"

조민은 그의 살기등등한 모습을 보자 겁이 났다. 아울러 공연한
말을 내뱉은 것이 후회되었다.

"그렇게 화를 내지 마세요. 난 다만 당신을 놀리기 위해서 한
말이에요. 절대 그런 일은 없었어요."

장무기는 그녀를 뚫어지게 주시했다.

"한사코 나의 의부님을 기다려 대질하겠다고 느긋한 태도를 취
해 온 것이, 혹시 그들을 이미 저승으로 보냈기 때문이 아니오?"

조민은 그의 살기띤 눈을 주시하며 정색을 했다.

"장교주, 내 말을 똑똑히 들으세요. 세상만사는 복잡 미묘하여
자신이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전엔, 남의 망언에 좌우되거나 스
스로 경솔한 판단을 내려선 안 돼요. 정녕 나를 죽이고 싶으면
얼마든지 살수를 전개하세요. 그대신 당신의 의부님이 무사히 돌
아와 당신의 추측이 빗나갔다는게 밝혀지면 어떻게 할 생각이
죠?"

장무기는 그녀의 말에 마치 찬물 세례를 받은 듯 정신이 확 들
었다. 그는 자신이 경솔한 행동을 하려던 것이 부끄러웠다.

"나의 의부님이 무사히 돌아온다면 그 이상 바랄 것이 있겠소?
앞으론 의부님의 생사안위를 갖고 실없는 얘기를 하지 마시오."

조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쓸데없이 입을 놀려 미안해요. 앞으론 그런 일이 없도록
조심하겠어요."

장무기는 그녀가 잘못을 시인하자 마음이 봄눈 녹듯 풀렸다.

"나 역시 경솔한 행동을 해서 미안하오."

그는 다시 사손의 방으로 돌아갔다.

이날 밤을 꼬박 세우고 이튿날 동이 터올 무렵까지 사손과 주지
약은 돌아오지 않았다.

장무기는 다시 걱정이 되었다. 날이 완전히 밝자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마친 그는 조민과 진지하게 상의를 했다. 그러나 조민도
그들 두 사람의 행방에 대해 짚이는 바가 없었다.

조민은 한참 생각을 굴리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정말 이상한 일이군요. 차라리 사화룡 일당을 쫓아가 소식을
알아보는 게 좋겠어요."

장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부님도 내가 개방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떠났다는 것을 알고
계시니,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두 사람은 곧 계산을 치렀다. 장무기는 객점 주인에게 만약 사
손과 주지약이 돌아오면 객점에서 자기를 기다려 달라고 신신당
부했다.

그들이 객점을나서자 점원이 밤색 준마 두 필을 끌고왔다. 장
무기는 두 필의 준마가 건장하며 털에 윤기가 흐르는 것을 보고
아주 귀한 명마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조민은 어제 이
두 필의 준마를 구하느라고 밖에서 시간을 오래 지체했던 것 같
았다.

조민은 장무기가 감탄해 하는 것을 보자 몹시 만족해 하며 입가
에 미소를 띄우고 안장에 올랐다. 곧이어 두 필의 준마는 남쪽을
향해 질주해 갔다. 길가는 행인들은 준수하게 생긴 한 쌍의 젊은
남녀가 화려한 차림새로 준마를 몰고가는 것을 보자 모두 부러워
하는 눈치였다.

두 사람은 이날 하루 종일 길을 재촉해 이백여 리를 벗어났다.
그들은 밤이 깊어서야 객점을 찾아 하룻밤을 유하고 날이 밝기를
기다려 다시 길을 재촉했다.

이날 정오 무렵, 삭풍이 갑자기 기승을 부리는가 싶더니 먹장구
름이 낮게 주저앉으며 날씨가 잔뜩 흐려졌다. 다시 이 십여 리
가량 달리자 하늘에서 닭털 같은 함박눈이 펑펑 쏟아졌다. 길을
재촉하는 동안 두 사람은 줄곧 말이 없었다. 눈발은 갈수록 굵어
졌다. 두 사람은 그래도 아무 말 없이 길을 재촉하는데만 열중했
다.

이날 그들이 거쳐온 곳은 거의 가 황산준령이었다. 저녁쯤 되자
눈이 한 자 가량 쌓였다. 그들이 타고 온 말은 비록 보기 드문
준마였지만 더 이상 지탱하기가 어려웠다.

땅거미가 깔리기 무섭게 주위는 어두컴컴해졌다. 두 사람은 안
장에서 내려 어둠을 뚫고 주위를 살펴보았으나 민가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장무기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조낭자, 낭자의 생각으론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무리하게 계
속 길을 재촉한다면 말이 견뎌내지 못할 것이오."

조민은 앙칼지게 쏘아부쳤다.

"당신은 타고 온 말만 걱정해 줄 뿐, 내가 지쳐서 죽든 말든 전
혀 신경을 쓰지 않는군요!"

장무기는 아차 하며 내심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체내에 구양신공이 축적돼 있어 피로와 추위를 이겨낼 수
있지만, 그녀는 여지껏 쉬지 않고 길을 재촉해 오느라고 몹시 길
을 재촉해 오느라고 몹시 지쳐 있겠군.....'

장무기는 적당한 곳을 찾아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두 사람이
말에 올라 다시 얼마쯤 가자 바스락소리가 들리며 길옆에서 한
마리의 노루가 뛰쳐나와 산 속으로 달려가는 게 눈에 띄었다.

장무기는 즉시 소리쳤다.

"저놈을 잡아 저녁 식사를 합시다."

말을 내뱉기 무섭게 안장 위에서 몸을 날려 노루새끼의 뒤를 쫓
아갔다. 눈이 쌓인 산길에 노루 발자국이 찍혀 있어 뒤를 쫓기가
수월했다. 언덕배기를 넘어서자 야음이 깔린 가운데 그 노루가
어느 동굴 안으로 들어가려는 것이 보였다.

장무기는 시위에서 벗어난 화살처럼 몸을 날렸다. 노루가 미처
동굴 안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그는 재빨리 노루의 뒷덜미를 움켜
잡았다. 노루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그의 손목을 물려 했지
만, 장무기가 손에 힘을 가하자 으드득 소리와 함께 노루의 목뼈
가 부러졌다.

동굴을 살펴보니 비록 넓지는 않지만 두 사람이 쉬기엔 충분했
다. 장무기는 곧 노루를 짊어지고 조민에게 돌아가 넌지시 제의
했다.

"저쪽에 작은 동굴이 있는데, 하룻밤 쉬었다 가는 것이 어떻겠
소?"

조민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갑자기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답지
않게 수줍어하는 것을 보자 오히려 장무기가 쑥스러웠다. 장무기
가 말고삐를 잡고 노루를 안장 위에 올린 채 앞장서 걷자, 조민
은 묵묵히 뒤를 따랐다.

어제는 객점에서 따로 방을 정해 하룻밤을 지냈지만, 오늘은 부
득이 함께 동굴 속에서 밤을 새우게 되었다. 부부가 아닌 젊은
남녀로서 사실 예사로운 일은 아니었다.

장무기는 두 필의 말을 언덕배기 아래 늙은 소나무가 마주보고
있는 곳으로 끌고가 눈을 피하게 했다. 동굴 앞으로 돌아온 그는
마른 나뭇 가지를 주워 불을 피웠다. 불빛을 빌려 다시 동굴 안
을 자세히 살펴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깨끗했다. 동굴 안쪽은 칠
흑같은 어둠에 묻혀 잘 보이지 않았다.

장무기는 노루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뜨더니, 눈(雪)으로 물을
대신해 깨끗이 씻어 굽기시작했다. 한편 조민은 가죽 겉옷을 벗
어 동굴 바닥에 깔았다. 앞쪽에서 모닥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어
동굴 안은 봄날처럼 훈훈했다.

장무기는 고개를 돌려 다시 동굴 안을 살폈다. 불빛이 명암(明
暗)되는 가운데 조민의 달덩어리처럼 아름다운 얼굴이 비치자,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묘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일었다.

조민의 모습은 마치 신방을 꾸미고 있는 화사한 새색시 같았다.
이 순간 조민도 마침 고개를 돌리자 두 사람의 눈동자가 마주쳤
다. 그러자 약속이나 한 듯 그들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피어올
랐다. 오늘 온종일 추위와 허기에 시달려 온 것이, 서로 마주 보
며 짓는 미소로 인해 말끔히 씻어지는 것 같았다.

노루 고기가 알맞게 익자 두 사람은 모닥불 앞에 둘러앉아 맛있
게 뜯어먹었다. 장무기는 조민이 입김을 후후 불어가며 노루고기
를 열심히 뜯어먹는 모습을 지긋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는 온
갖 부귀 영화를 누려온 몽고족의 군주가 자기로 인해 추위를 무
릅쓰고 이런 고생을 하는 것이 한편으론 안스럽게 느껴지기도 했
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에는 안스러운 빛깔보다는 사랑스러운 색
채가 더 진하게 담겨져 있었다.

조민의 지금 모습은 한없이 천진난만했다. 그녀가 강호의 효웅
(梟雄)들을 좌지우지하는 여걸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
다. 더우기 누이동생의 얼굴을 난도질한 악랄한 여인이라고는 더
더욱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조민은 한창 게걸스럽게 노루고기를 뜯다가 그의 눈길을 의식했
는지 홀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양볼이 불그스름하게 물들어지
며 눈을 곱게 흘겼다.

"내가 음식을 먹는 것을 처음 보나요? 그렇게 빤히 쳐다보고 있
으니까 고기가 넘어가지 않잖아요!"

장무기는 얼른 얼버무렸다.

"하도 맛있게 먹길래 부러워서 쳐다본 것뿐이오."

조민은 티없이 맑게 웃었다.

"여지껏 산해진미를 다 먹어 보았지만, 이렇게 맛있는 고기는
처음이에요. 아마 당신이 직접 구워서 그런가 봐요."

장무기는 그녀의 웃는 모습이 해당화(海棠花)처럼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는 흔들리는 자신의 마음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
여 고기를 뜯었다.

'낭자가 원한다면 매일 고기를 구워줄 수도 있을 텐데.....'

그는 이 말을 고기와 함께 삼켜 버렸다.

식사를 마치자 장무기는 모닥불에 마른 장작을 충분하게 집어넣
고 조민과 함께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어느덧 눈발은 그치고 먹구름 사이로 하현달이 수줍은 처녀처럼
삐끔히 얼굴을 내밀었다. 주위는 조용하기만 했다. 이따금 어디
선가 밤새가 우는 소리가 들려와 모닥불이 타들어가는 소리와 더
불어 정적에 생기를 불어넣어 줄 뿐이었다.

장무기는 동굴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으나 잠이 올리가 만
무였다. 그는 살며시 눈을 떴다. 조민은 그의 맞은편에서 세운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있었으나, 역시 잠을 못 이루는 것 같
았다. 장무기는이러한 침묵을 견디기가 어려웠다. 정적이 이렇
게 어색하게 느껴지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그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잠들었소?"

그가 나직이 묻자 조민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담담하
게 웃으며 고개를 내둘렀다. 당돌하고 매사에 적극적인 그녀가
침묵을 지키자 장무기는 오히려 불편했다.

"몹시 피곤할 텐데 눈을 좀 붙이시구료."

조민은 잔잔한 미소에 싸여 있는 앵두 같은 입술을 열었다.

"잠이 오지 않는군요. 당신과 만났던 순간들을 생각하고 있었어
요."

동굴은협소하여 두 사람은 비록 떨어져 앉아 있지만 서로 손을
내밀면 맞잡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왔다. 장무기는 그녀에게서
야래향(夜來香)의 향기가 은은히 풍겨오는 것을 느꼈다.

조민이 다시 말했다.

"당신이 내 신을 벗기고 발바닥을 간지럽히던 일이 생각나나
요?"

그 말에 장무기는 얼굴이 붉어졌다.

"그 때는..... 사실....."

그는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몰랐다. 한밤중에 단둘이 심산 동굴
에 있으면서 그녀가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내자 당황함이 앞섰다.
당시는 단지 그녀를 굴복시키기 위해 즉흥적으로 취한 행동이었
지만, 나중에 그 생각을 할 때마다 공연히 가슴이 두근거렸던 게
사실이었다.

조민은 역시 당돌하고 도전적이었다.

"어쩌면 그 일로 인해 내가 당신에게 마음이 쏠렸는지도 몰라
요....."

그녀는 장무기를 똑바로 주시하며 다음 말을 이었다.

"사실 이틀 동안 아무 말 않고 참아왔지만, 미륵불묘에서 거렁
뱅이에게 곤봉으로 발뒤꿈치를 맞은 게 은근히 아팠어요. 오늘
하루 종일 추운 데 있다가 이렇게 따스한 곳에 들어오니 더 쑤시
는군요. 당신은 의술도 능통하다고 들었는데 좀 살펴 봐 주겠어
요?"

장무기의 시선은 절로 그녀의 발에 쏠렸다. 비록 가죽신을 신고
있었지만, 그의 뇌리에 그녀의 고운 맨발이 뚜렷하게 떠올랐다.
만안사에 잠입해 들어갔을 때 비녀가 대청에서 그녀의 맨발을 씻
겨 주던 광경을 창문 틈으로 훔쳐보지 않았던가! 그 당시 장무기
가 느꼈던 감정은 처음 아무 생각 없이 그녀의 발바닥을 간지럽
혔을 때와 또 달랐었다. 당시 가슴이 설레였던 게 아직도 기억해
생생했다.

한데, 오늘 밤 조민이 스스로 자기에게 맨발을 보이겠다고 한
것은 또 의미가 달랐다. 물론 장무기도 미륵불묘에서 그녀가 곤
봉에 발뒤꿈치를 맞고 쓰러진 것을 똑똑히 보았고,그래서 그녀를
구해 준 것이기도 했다. 당시 곤봉으로 호되게 맞았기 때문에 그
아픔이 아직 남아 있는 게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설령 그러한
이유를 내세워 자기에게 발을 치료해 달라고 한 것을, 장무기는
그저 단순하게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조민은 몽고의 형통을 타고 났기 때문에 한인(漢人)의 풍속에
구애받지 않을지 모르지만, 한인의 규수라면 평생을 함께 할 반
려자가 아닌 이상 절대 맨발을 보여 줄 수 없었다. 다시 말해,
한인의 풍속대로라면 그녀가 맨발을 맡김으로써 자신의 확고한
마음을 표하는 것이고, 장무기가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녀의
마음까지 받아들이는 걸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장무기는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그가 다시 바라본 조민의 눈동자는 뜨거웠다. 장
무기는 왈칵 그녀를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바로 이때였
다. 갑자기 멀리서 말굽소리가 들려왔다. 정적을 깨며 들려오는
그 말굽소리는 그의 사슴을 질타했다. 조민의 표정은 이내 긴장
되었다.

계속 ---



제 2 장 빗나간 연심(戀心) #4/6

장무기가 조용히 귀를 기울여보니, 남쪽으로부터 달려오는 말은
모두 네 필이었다. 동굴 밖을 보니 멎었던 눈발이 다시 뿌려지고
있었다.

'야심한데 눈보라를 무릅쓰고 길을 재촉하는 것을 보면 필시 급
한 일이 있는 사람들 같은데.....'

그가 생각을 굴리는 사이에 말굽소리는 언덕 아래에 이르러 갑
자기 멎었다. 그러더니 곧 이어 동굴 쪽으로 옮겨져 왔다.

장무기는 긴장되었다.

'이 동굴은 언덕 넘어 은밀한곳에 위치해 있어 노루의 뒤를 쫓
지 않았다면 발견하지 못했을 텐데, 저들이 어찌 이쪽을 향해 다
가오는 것일까?'

그는 의혹을 느꼈으나 이내 그 의혹에 대한 해답을 찾아냈다.

'맞아 우리가 눈 위에 발자국을 남겨놓았으니 저들은 그 발자국
을 따라 이곳으로 오는 게 분명하다.'

조민이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상대가 적일지도 모르니, 일단 몸을 숨겨 상대방의 정체부터
파악하는 게 좋을 거예요."

그녀는 먼저 동굴 밖으로 나가 눈을 쓸어모아 모닥불을 껐다.

이때 말굽소리가 멎고 대신 네 사람이 눈을 밟으며 다가오는 발
자국소리가 들려왔다. 삽시간에 그들은 동굴에서 십여 장 떨어진
곳까지 접근해 왔다.

장무기가 나직하게 말했다.

"네 사람의 빠른 신법으로 미루어, 무공이 상당한 경지에 도달
해 있는 고수인 것 같소."

지금의 상황에서 만약 동굴 밖으로 나가 다시 몸을 숨길만한 곳
을 찾는다면, 영락없이 상대방에게 발각될 것이다.

장무기가 엉거주춤하고 있는 사이에 조민이 그의 손을 잡으며
동굴 안쪽으로 들어갔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동굴은 협소해졌
다. 그러나 생각보다 깊었다. 그들이 약 이 장 가량 들어갔을 때
밖에서 한 사람의 음성이 들렸다.

"이곳에 동굴이 있습니다!"

장무기는 그 음성을 듣자 갑자기 눈동자가 빛났다.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임에 분명했다. 다음 순간, 그는 음성의 주인공이 누
구인가를 떠올렸다. 뜻밖에도 사숙부인 장송계였다.

곧 이어 다른 음성이 들려왔다.

"발자국이 이 동굴까지 연결돼 있군요."

이번에는 은이정의 음성임을 대번에 알아들었다. 장무기는 당장
소리쳐 자신을 알리려 했다. 한데 조민이 난데없이 손으로 그의
입을 막으며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우리가 단둘이 이곳에 있는 게 누구에게 발각되면 공연한 오해
를 사게 될 거예요."

장무기는 그녀의 말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와 조민은
비록 아무런 관계도 없었지만, 야밤중에 단둘이 동굴 속에 있는
것이 사숙백들에게 발각된다면 입장이 난처해질 게 뻔했다. 자기
가 아무리 변명을 해도 상대방은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더군
다나 조민은 원조(元朝) 황실의 군주로서 장송계, 은이정 등을
만안사에 감금했던 장본인이 아닌가! 쌍방이 맞닥뜨린다면 필경
심상치 않은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물론 자신의 입장은 더욱 난
처해질 게 분명했다.

'역시 장사숙과 은육숙이 떠날 때까지 잠자코 있는 게 좋을 것
같다.'

그가 속으로 이렇게 결정을 내리는 순간 유연주의 음성이 들려
왔다.

"여기 보십시오. 타다 남은 솔가지와 노루의 가죽과 피도 있군
요."

다른 한 사람이 그의 말을 받았다.

"난 줄곧 불길한 감정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칠제(七弟)가 무
사하길 바랄 뿐이네."

이번에 들려온 것은 송원교의 음성이었다.

장무기는 표정이 굳어졌다. 네 분의 사숙백님이 일제히 강호로
나온 것도 뜻밖이지만, 그들의 말투를 들어보니 막칠숙께서 위험
에 처해 있는 것 같았다. 장무기도 은근히 염려가 되었다.

장송계의 낭랑한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대사형께선 막사제를 아직도 철부지 소년으로 생각하시는 모양
이군요. 근래에 와서 막사제의 위명은 강호에 널리 알려졌습니
다. 예전의 막내둥이가 아닙니다. 설사 강적을 만났다 해도 혼자
의 힘으로 충분히 상대해 낼 수 있을 겁니다."

그의 말을 이은 사람은 은이정이었다.

"저는 칠제에 대해선 별로 염려를 하지 않습니다.오히려 장무
기가 걱정됩니다. 지금 어디에 있는지 소식이 없으니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는 이제 명교의 교주이니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는 말이 있듯이 어려움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는 비
록 무공은 강하지만 마음이 모질지 못해, 험악한 강호의 풍파를
잘 헤쳐나갈지 의문입니다."

장무기는 그 말에 심히 감동되었다. 사백님과 사숙님들이 자기
를 얼마나 염려해 주고 있는지 새삼 깨달았다.

조민은 그의 귀에 대고 다시 나직하게 말했다.

"나같이 사악한 사람이 당신 곁에 꼭 붙어 있다는사실을 알면
모두들 기절초풍하시겠군요."

송원교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칠제가 북쪽으로 장무기를 찾으러 내려갔다가 무슨 단서를 잡
은 게 분명한데, 그가 천준 객점에 남긴 글이 이해가 가지 않는
단 말야. 물을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 급히 남긴 글 같은데....."

장송계가 그의 말을 이었다.

"문중에 변절자가 있으니 처리해 달라고 글을 남겼는데, 우리
무당파에 변절자가 있을리 있겠습니까? 혹시 무기 그 애가....!"

여기까지 말한 그는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은이정이 단호한 음
성으로 말했다.

"무기는 절대 문중의 명예를 더럽힐 애가 아닙니다. 그 점에 대
해서는 제가 장담을 할 수가 있습니다."

장송계는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내가 염려하는 것은 그 조민이란 요녀가 너무 간교하다는 사실
이네. 무기는 젊은 나이에 혈기가 왕성해 미색에 현혹되기가 쉽
네. 그는 절대 부친처럼 불행한 과정을 밟지 말아야 할텐데...."

네 사람은 모두 침묵을 지키며 제각기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부싯돌로 불을 지피는 소리가 들리더니, 솔가지가 타는 소리와
함께 불길이 피어올랐다.

그 불빛은 동굴 안까지 비쳐서 장무기와 조민은 비록 한번 꺾어
진 동굴 안쪽에 몸을 도사리고 있지만, 그 불빛의 혜택을 조금이
나마 받을 수가 있었다.

장무기는 어렴풋이 조민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조민의 얼굴
에는 분노가 깔려 있었다. 아마 장송계의 말에 기분이 몹시 상한
모양이었다. 장무기는 문득 가슴에 와닿는 것이 있어 섬뜩한 느
낌이 들었다.

'장사숙님의 말씀이 옳을지도 모른다. 나의 어머님은 아무런 잘
못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결국 아버님을 최악의 경우로 몰아넣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 조낭자는 명문정파의 공적일 뿐 아니라 나
의 누이동생을 상해했고, 태사부님과 사백, 사숙님들을 모독했으
니 오죽하겠는가?'

이때 송원교가 갑자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장사제, 난 줄곧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네. 이미 작고
한 오제를 생각해 차마 그 생각을 입 밖에 내지 못했는데....."

장송계가 천천히 말했다.

"사형께선 혹시 칠제가 무기에게 독수를 당했다고 염려하시는
게 아닙니까?"

송원교의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지만, 장무기는 그가 고개를 끄
덕였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장송계가 다시 말했다.

"무기는 천성이 착해 절대 그럴 리가 없겠지만, 칠제의 성질이
워낙 직선적인데다가 다혈질이므로 무기를 진퇴양난의 궁지로 몰
아붙일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그런 상황하에서 그 요녀가 충동질
을 했다면 사형께서 우려하는 불행이 벌어졌을지도 모르죠. 어쨌
든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마음 속은 예측할 수 없
다고 하니..... 게다가 자고로 영웅은 미색에 약하다는 옛말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로선 무기가 이성을 잃지 않길 바라는 도리
밖에 없습니다."

은이정은 그들과 생각이 다소 달랐다.

"대사형, 그리고 장사형, 지금 두 분이 갖고 있는 생각은 모두
지나친 기우가 아닐까요? 무기가 아무리 이성을 잃는다 해도 천
륜을 저버리는 짓을 할 리가 만무합니다."

송원교의 음성은 여전히 염려가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칠제의 장검을 발견한 순간부터 불길한 생각을 떨쳐버
릴 수가 없었네."

유연주가 그의 말을 이었다.

"그 일은 정말 납득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처럼 무공을 연마한
자는 무기를 목숨처럼 여기는데, 더군다나 그 장검은 스승님께서
하사한것이 아닙니까? 그 귀중한 검인데 검만 발견되고 사람이
보이지 않으니....."

여기까지 말한 그는 입을 다물었다.

장무기는 그들의 대화를 듣고 막칠숙의 안위가 염려되는 한편
자신이 의심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울적했다. 일이 이렇
게 된 이상 몸을 도사려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굳어져다. 만약 발
각되는 날이면 자신과 조민의 관계를 오해받게 될 뿐 아니라, 자
칫 막사숙을 불리하게 만든 누명까지 뒤집어 쓰게 될 것이다.

장무기는 감히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조민의 손을 잡고 살금
살금 동굴깊숙이 기어들어갔다. 그런데 깊이 들어갈수록 이상한
냄새가 풍겨왔다. 비릿한 것이 들짐승의 냄새 같기도 하고 피비
린내 같기도 했다.

장무기는 손으로 앞을 더듬으며 좁은 동굴을 꺾어 돌자, 갑자기
손끝에 이상한 물체가 와 닿았다. 물렁물렁한 것이 사람의 몸이
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순간 장무기는 소스
라치게 놀랐다. 그의 뇌리에 전광석화같이 어떤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 자가 친구든 적이든 간에 소리를 내는 날엔 사백숙님들에게
발각될 것이다!'

그는 반사적으로 지풍을 날려 상대방의 가슴 앞 다섯 군데 혈도
를 찍는 동시 손목을 나꿔잡았다. 그러자 차가운 감촉이 손을 통
해 전달돼 왔다. 상대방은 이미 숨이 끊어진 지 오래된 것이다.

장무기는 희미한 불빛을 빌려 상대방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순
간, 장무기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는 눈 앞에 벌어
져 있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이럴 수가.....!'

동굴 깊숙한 곳에 시체로 변해 있는 사람은 뜻밖에도 그의 칠사
숙인 막성곡이었다.

장무기의 놀라움은 실로 형용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시체를 끌어안고 동굴 바깥쪽으로 다시 얼마 정
도 걸어나갔다. 불빛이 잘 새어 들어오는 지점에 이르러 다시 확
인해 보았으나 틀림없는 막성곡 막칠숙이었다.

장무기는 청천벽력을 맞은 듯 그 자리에 굳어져 버렸다. 그가
막성곡의 시신을 안고 반사적으로 동굴 바깥쪽을 향해 뛰쳐나오
는 바람에 동굴 밖에 있는 송원교가 인기척을 느끼고는 대뜸 소
리쳤다.

"동굴 안에 누가 있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싸늘한 검광이 연거푸 번뜩였다. 무
당 사협이 모두 검을 뽑은 게 분명했다.

장무기는 내심 아뿔싸를 토했다.

'내가 막칠숙을 살해한 대역무도한 죄명을 뒤집어 쓰게 되었군.
사백님과 사숙님들이 동굴 입구를 가로막고 있어 달아날 수도 없
고.....'

막칠숙이 자기에게 베풀어 주신 여러 가지 고마움을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송원교 등이 동굴 안으로 들어오면
어떻게 변명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역시 조민의 생각은 그보다 빨랐다. 그녀는 갑자기 동굴 밖으로
몸을 날리며 장검을 떨쳐 연거푸 사검(四劍)을 전개했다. 그녀가
펼친 검초는 모두 아미파의 무서운 살초였다. 물론 그녀가 노린
것은 무당 사협이었다.

무당 사협은 그녀의 갑작스러운 기습에 재빨리 수비 자세를 취
했다. 그 틈을 타서 조민은 무당 사협이 타고 온 네 필의 준마
중의 한 필을 골라 전광석화같이 안장 위로 올라타며 송원교가
반격해 오는 일검을 뿌리침과 동시에 말의 복부를 힘껏 걷어찼
다. 그 말은 고통을 못 이겨 곧 앞을 향해 치달렸다.

그 순간 조민은 등줄기에 심한 충격을 느끼며 눈앞이 캄캄해지
고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유연주가 전개한 일장을 맞은 것이
다.

무당 사협은 지체하지 않고 경공을 전개해 뒤쫓아 왔다.

조민은 자신의 안위보다 오직 한 가지 생각만 했다.

'내가 멀리 달아날수록 그가 굴 안에서 무사히 벗어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꼼짝없이 누명을 뒤집어 쓰게 될 것이다. 넷이 모
두 날 쫓아오는 것으로 보아 동굴 안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걸
미처 생각지 못한 모양이니 천만다행이다!'

그녀는 등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을 참음 검으로 말의 엉덩
이를 살짝 찔렀다. 그러자 준마는 길게 울부짖으며 죽을 힘을 다
해 앞으로 달려나갔다.

한편, 장무기는 조민이난데없이 동굴 밖으로 뛰쳐 나가자 멍해
졌으나 이내 그녀의 뜻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자기를 위해 위험
을 무릅쓰고 조호이산지계(調虎離山之計)를 전개한 것이다. 장무
기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그녀의 행동을 만류하기엔 때가 너무
늦었다.

장무기는 조민의 호의를 헛되게 할 수 없었다. 그는 즉시 막성
곡의 시신을 안고 동굴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는 예민한 청각으
로 조민과 무당 사협이 동쪽으로 달려간 것을 알고 반대쪽으로
신법을 전개했다.

약 이 리(里)쯤 벗어나 커다란 바윗돌 아래 막칠숙의 시신을 감
추고 나서 나무 위로 몸을 솟구쳤다. 그의 가슴은 아직도 심하게
뛰고 있었다. 막칠숙의 처참한 죽음을 생각하자 절로 눈물이 흘
러내렸다.

'우리 무당파는 왜 계속 이런 불상사를 겪어야 한단 말인가? 도
대체 사숙님을 살해한 흉수는 누구일까? 등뼈가 으스러진 것으로
보아 내가장력(內家掌力)에 의해 목숨을 잃은게 분명한데.....'

약 반 시진이 지나자 세 필의 준마가 동쪽으로부터 달려왔다.
송원교와 유연주가 제각기 준마 한 필씩 몰고 은이정과 장송계가
말 한 필에 같이 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먼저 유연주의 음성이 뚜렷이 들려왔다.

"그 요녀는 나의 일장을 맞고 말을 탄 채 절벽 아래로 떨어졌으
니 살아나기 어려울 거야."

장송계가 그의 말을 받았다.

"오늘에서야 만안사에서 당했던 수모를 갚게 되었습니다. 그런
데 그 요녀가 이런 황량한 동굴 속에 있었다는 게 도저히 믿어지
지 않습니다."

은이정이 그에게 물었다.

"사형, 그녀가 혼자 동굴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장송계가 대답했다.

"글쎄..... 워낙 요사스러운 계집이라 종잡을 수가 있어야지.
그 요녀를 죽인 것은 통쾌한 일이지만 그보다는 칠제의 행방을
속히 찾아내는 게 시급하네."

장무기는 숨을 죽이고 있었다. 네 사람의 모습이 차츰 멀어질수
록 더 이상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장무기는 송원교 등이 멀어지자 나무에서 뛰어내려 말굽자국을
따라 동쪽으로 치달렸다. 그는 초조하면서도 가슴이 아팠다.

'그녀는 비록 교활하지만 이번만큼은 자신을 희생해 가면서 날
도와주었다. 만약 이로 인해 그녀가 불상사라도 당하게 된다면,
나는..... 난.....'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신법을 전개했다. 약 사,오 리 가량 달리
자 깎아지른 듯한 벼랑이 나타났다. 눈이 쌓인 그곳 벼랑 가장자
리에는 선명한 핏자국이 얼룩져 있었다. 그리고 발자국과 말굽자
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뿐만 아니라 벼랑 가장자리에 있는
돌더미의 일부가 무너져 버린 흔적 역력했다. 조민이 말을 몰고
허겁지겁 달아나다가 그만 길을 잘못 택해 벼랑 아래로 말과 함
께 떨어진 게 분명했다.

장무기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여 벼랑 아래를 향해 소리높여
외쳤다.

"조낭자! 조낭자!"

연거푸 외쳐 불렀으나 메아리만 멀리 퍼져 갈 뿐 대답이 들려오
지 않았다.

장무기는 더욱 조급해졌다. 벼랑 가장자리에 서서 아랫쪽을 살
펴보니 칠흑같은 어둠에 잠겨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벼랑은
깎아지른 듯하여 도저히 발을 내딛을 곳이 없었다. 게다가 응달
진 탓인지 두꺼운 얼음층에 덮혀 있었다.

장무기는 가만히 서서 그녀의 대답이 들려오길 기다릴수 만은
없었다. 그는 곧 몸을 돌려 열 손가락에 진력을 모아 마치 갈퀴
처럼 빙층을 찍어 꽂으며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갔다. 벼랑은 생
각보다 깊지 않았다. 얼마 후에 그는 벼랑 밑바닥에 발을 내딛을
수 있었다. 그 순간 그의 발밑에 말랑말랑한 느낌이 와 닿았다.
그는 흠칫 놀라며 즉시 옆으로 몸을 피했다.

알고보니 그가 밟은 것은 말의 시체였다. 좀더 자세히 살펴보니
조민은 말의 목을 껴안은 채 그곳에 함께 있었다. 장무기는 얼른
그녀의 손목을 잡아 맥을 짚어 보았다. 천만다행하게도 맥박이
미약하게나마 뛰고 있었다. 단지 심한 충격에 의식을 잃었을 뿐
이었다. 장무기는 그녀가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자 그나마 안
도의 숨을 쉴 수 있었다.

골짜기 안은 어둠침침하고 눈이녹지 않아 허리까지 쌓여 있었
다. 아마 조민은 안장에서 이탈하지 않은 채 사력을 다해 말의
목을 껴안았기 때문에, 떨어져 버린 충격이 단지 말에게 가해져
말은 그 자리에서 죽고 조민은 구사일생으로 목숨만은 건진 것
같았다. 장무기는 그녀가 비록 심한 중상을 입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걸 알았다.

장무기는 곧 그녀를 끌어안고 자신의 구양신공으로 우선 그녀의
얼은 몸을 녹여 주었다. 이어 운공료상을 하니 반 시진 후에 조
민은 드디어 천천히 깨어났다.

장무기는 지체하지 않고 그녀의 등에 쌍장을 붙이고 구양진기를
체내에 주입시켜 주었다. 다시 한 시진 가량이 흘렸다. 어느덧
동녘 하늘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조민은 갑자기 울컥하고 안 모
금의 검붉은 피를 토해 내더니 비로소 미약하게 입을 열었다.

"그들은 모두 갔나요? 당신의 얼굴은 보지 못했죠?"

그녀는 장무기가 누명을 쓰지 않았는지 그것이 가장 염려되는
모양이었다. 장무기는 그녀의 마음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 염려 마시오. 나를 보지 못했소. 나 때문에 이런 위험을
무릅쓰다니.....'

장무기는 말을 하면서 계속 그녀의 체내에 진력을 주입시켜 주
었다. 조민은 눈을 지긋이 감았다. 비록 사지가 나른하여 전혀
힘을 쓸 수 없지만 마음은 한없이 뿌듯했다. 구양진기가 그녀의
체내에 다시 몇 바퀴 유전되자 몸이 한결 개운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담담한 미소를 띄운 채 말했다.

"이제 됐어요. 좀 쉬도록 하세요."

장무기는 두 팔로 그녀의 허리를 껴안으며 자신의 볼을 그녀의
왼쪽 볼에 대었다.

계속 ---



제 2 장 빗나간 연심(戀心) #5/6

"낭자는 나의 명예를 구해 준 것이오. 그것은 나의 목숨을 열
번 구해 준 것보다 더 귀중하오. 난 결코 그 은혜를 잊지 않겠
소."

조민은 하늘을 날 듯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까르르 웃으며 말했
다.

"나는 간사하고 악랄한 요녀이니, 당신의 명예보다도 당신의 생
명이 더 중요해요."

바로 이때였다. 벼랑 위에서 갑작스레 유연주의 싸늘한 외침이
들려왔다.

"이 요망한 계집! 과연 죽지 않았구나. 네가 막칠협을 어떻게
죽였는지 어서 이실직고하지 못하겠느냐!"

장무기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네 분 사백숙님들은 분명 떠나갔
는데 어째서 다시 되돌아온 것일까?

조민이 황급히 그에게 말했다.

"어서 얼굴을 돌리세요. 그들이 당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하
세요."

이번에는 장송계의 냉랭한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이 악랄한 요녀야! 어서 대답을 하지 않으면 돌을 던져 당장
분신쇄골시키겠다!"

조민이 별아 위를 올려보니 송원교 등이 벼랑 가장자리에서 제
각기 커다란 바윗돌을 높이 쳐들고 있었다. 그들이 돌을 던진다
면 벼랑 밑 골짜기가 협소하여 자기와 장무기는 목숨을 부지하기
가 어려울 것이다.

그녀는 장무기의 귀에 대고 나직하게 말했다.

"우선 옷자락을 찢어 얼굴을 가리고 날 안고 달아나세요."

장무기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옷자락을 찢어 복면을 했다. 그리
고 털모자를 눌러 쓰자 두 눈만 노출되었다.

무당 사협은 강호의 경험이 많은 만치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
들은 조민을 벼랑 밑으로 몰아넣었지만, 조민이 군주의 신분이므
로 틀림없이 주위에 호위병이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일
부러 말을 몰아 멀리 떠나는 척하다가 은밀한 곳에 말을 숨겨두
고 다시 되돌아온 것이다.

그들은 조민이 나왔던 동굴부터 살폈으나 별다른 이상을 발견하
지 못했다. 그대신 동굴 밖에서 장무기의 발자국을 찾아서 곧장
뒤쫓아갔다. 그곳에서 뜻밖에도 막성곡의 시체를 발견한 무당 사
협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특히 은이정은 까무라칠 정
도로 통곡을 터뜨렸다.

한참 후에야 유연주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조민 그 요녀는 비록 무공이 약하지 않지만 그 혼자의 힘으로
선 절대 막칠제를죽이지 못할 것이니, 필경 주위에 고수들이 있
을 걸세. 우린 이곳에서 슬퍼만 할 게 아니라 그들을 일일이 찾
아내 복수를 해야 하네."

장송계가 그의 말을 받았다.

"우린 일단 동굴 주위에 은신해 있도록 합시다. 날이 밝으면 요
녀의 부하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는 지혜가 뛰어나 송원교는 항상 그의 의견을 존중해 주었다.
그들은 곧 슬픔을 억제하고 각자 동굴 주위에 몸을 숨겼다.

한데 날이 밝아올 무렵까지 아무도 나타나지 않자 무당 사협은
다시 조민이 떨어졌던 벼랑 쪽으로 달려갔다. 뜻밖에도 벼랑 아
래서 사람의 음성이 들려와 내려다보니, 비단 옷을 입은 남자가
조민을 뒤에서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무당 사협은 그제서야 요녀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막성곡의 사인을 다그치기에 이른 것이다. 그것을 캘 생각이 아
니었다면, 벌써 큰 바윗돌을 던져 두 사람을 공격했을 것이다.

지금 장무기와 조민이 있는 골짜기는 커다란 우물처럼 사면이
막혀 있고 단지 서북쪽에 좁은 출로가 있을 뿐이다.

장송계의 호통이 다시 들려왔다.

"이 몽고 오랑캐들아! 어서 이쪽으로올라오지 못하겠느냐? 더
이상 꾸물댄다면 돌을 던지겠다!"

장무기는 사사백님이 자기를 몽고인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
고 일단 안심이 되었다. 그는 호화스러운 차림새로 조민과 함께
있기 때문이었다.

장무기는 주위를 두리번 살펴 몸을 피할 만한 곳이 없다는 걸
알았다. 사백숙님들이 큼지막한 바윗돌을 던진다면 자기는 충분
히 위기를 모면할 수 있지만, 조민은 목숨을 부지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지금으로선 상대방이 시키는 대로 하는 도리밖에 별 수가 없었
다. 하여 그는 조민을 안고 협소한 벼랑 틈새로 천천히 기어올라
갔다. 그리고 무공이 약하다는 인식을 주기 위해 일부러 몇 번
미끄러지곤 했다. 이 협소한 틈새로 기어오르는 일은 결코 쉬운
게 아니었다. 게다가 일부러 미끄러지는 바람에 벼랑 위까지 올
라가는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자연히 그는 숨을 몰아쉬며
낭패한 모습까지 보여 주어야만 했다.

일단 골짜기를 벗어나면 조민을 안고 달아날 작정이었다. 자신
이 신법을 최고 경지로 전개하면 설령 조민을 안고 있다 해도 능
히 무당사협의 추격을 뿌리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송계는
관찰력이 예민하여 그가 일부러 낭패한 모습을 만들어 내고 있다
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나머지 사람에게 알려 장무기가
올라오자마자 선제공격을 취해 제압하기로 서로 약정해 놓았다.

과연 장무기가 벼랑위로 오르는 순간 네 자루의 장검이 날아와
그의 몸에서 반 자 가량의 간격을 두고 진로를 완전히 봉쇄했다.

송원교가 이를 갈아부치며 호통쳤다.

"이 악랄한 오랑캐놈아! 얼굴을 가린다고 해서 목숨이 부지될
것으로 생각했느냐? 무당 막칠협에게 살수를 전개한 놈이 누군지
냉큼 밝혀라! 조금이라도 거짓말이 있을 시엔 난도질을 면치 못
할 것이다!"

송원교는 본디 성품이 차분하여 좀처럼 흥분하지 않았다. 그러
나 막성곡의 죽음으로 인해 말투가 거칠어졌다.

조민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노금시화(盧金時化) 장군,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모든 것을 솔
직히 털어놓는 도리밖에 없을 것 같군요."

그녀는 앞서 이미 장무기에게 성화령의 무공을 전개하도록 귀띔
을 해준 바가 있었다.

장무기는 본디 사백숙님들에게 무공을 전개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부득이한 상황하에선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는 아랫 입술을 깨물며 갑자기 조민의 몸을 번쩍 들어올려 은
이정을 향해 던지는 동시에 허공으로 몸을 솟구쳐 괴성을 지르며
장송계를 겨냥해 공격해 갔다.

은이정은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 멍해졌으나 생각을 굴릴 겨를도
없이 일단 조민의 몸을 받아 혈도를 찍어 한쪽에 팽개쳤다. 그
순간 장송계는 그의 신랄한 금나수법을 피하기 위해 뒤로 한 걸
음 물러났으며, 장무기는 성화령의 괴이한 무공으로 각법(脚法)
을 전개했다.

모든 것이 눈깜박할 사이에 이루어졌다. 장송계가 뒤로 물러나
자마자 그에게 반격을 시도했을 때 장무기는 이미 은이정에게 몸
을 번뜩여 그의 손에서 장검을 빼앗아 왔다. 실로 상식을 초월한
몸놀림이었다.

무당 사협은 자타가 공인하는 무림의 일류 고수지만, 그가 단
숨에 전개한 여러 가지 괴이한 초식으로 인해 자중지란이 생겼
다.

눈속에 쓰러져 있는 조민이 무당 사협을 혼란시키기 위해 소리
쳤다;.

"노금시화 장군! 이번에는 우리 몽고인의 특기인 씨름 묘기를
보여 주세요!"

장송계는 적시에 소리쳤다.

"저 오랑캐의 초식이 괴이하니 태극권(太極拳)으로 상대해야겠
습니다!"

네 사람은 즉시 검법에서 권법으로 변화시켰다. 일단 수비망이
구축되었다.

장무기는 무엇보다도 상대방의 혼란을 야기시키는데 중점을 두
었다. 그로선 상대방을 해치는 게 목적이 아니라 조민과 함께 달
아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는 갑자기 땅에 주저앉더니 두 주먹
으로 자신의 가슴을 마구 두드렸다. 무당 사협은 여지껏 살아오
면서 숱한 적을 상대해 왔다. 그런데 지금 상대방이 난데없이 땅
바닥에 주저앉아 자신의 가슴을 치는 것을 보자 눈이 휘둥그래졌
다. 이러한 괴초는 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생전 들어본 적도 없
었다.

무당사협은 이미 장검을 거두고 각자 태극권을 전개해 수비망을
구축했지만, 상황이 바뀌자 송원교, 유연주, 장송계가 다시 장검
을 뽑아쥐고 장무기에게 덮쳐갔다.

한편 은이정은 장무기에게 장검을 빼앗겼지만, 막성곡이 남긴
검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 검을 다시 뽑아들고는 사형들과 보
조를 맞추었다. 순간 장무기는 상반신을 일으키는가 싶더니 반원
을 그리며 땅에 쌓여 있는 눈을 냅다 걷어찼다. 거기에 따라 허
공에 눈보라가 난비하며 무당사협을 항해 휘몰아쳐 갔다.

이 초식은 바로 성화령의 괴초로서 산중노인이 즐겨 사용하던
것이었다. 산중노인이 교를 창립하기 전에 파사국 사막에서 행상
을 해왔는데, 가끔 흉악한 여상(旅商)들을 만나면 이 수법을 사
용하곤 했다. 일단 멀리서 여상의 행렬이 나타나면 그 자리에 주
저앉아 가슴을 치며 괴성을 지른다. 그러면 여상들이 가까이 다
가와 영문을 물을 것이고, 그 순간을 이용해 냅다 몸을 회전시키
며 모래를 걷어찬다. 여상들은 난데없이 날아오는 모래에 눈을
뜰 수 없게 되고 그 틈을 이용해 칼을 전개하면 삽시간에 수십
명의 여상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지곤 했다. 실로 악랄한 수법이
었다.

지금 장무기가 눈보라를 일으키자 모래바람을 일으키는 것과 똑
같은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무당사협은 눈보라로 당황함을 금치 못했으나 임기웅변이 빨라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장무기의 몸놀림은 그들보다 훨씬
빨랐다. 그는 다짜고짜 유연주의 다리를 끌어안고 땅에서 한 바
퀴 뒹굴며 전광석화처럼 세 군데 혈도를 찍었다. 이어 용수철에
의해 튕겨지듯 은이정에게 덮쳐가 단숨에 다섯 군데 혈도를 찍자
은이정은 그 자리에 쓰러졌다. 송원교가 적시에 뒤에서 덮쳐왔지
만, 장무기가 팔꿈치를 뒤로 쭉 밀어내는 동시에 흡사 자석에 끌
리듯 몸이 뒤로 미끄러져 송원교의 몸과 맞부딪쳤다. 그러한 동
작이 어찌나 빠른지 송원교는 미처 검초를 전개하기도 전에 가슴
에 심한 충격을 느끼며 혈도가 찍히고 말았다. 그는 장무기의 머
리 위로 쳐들었던 장검을 떨어뜨리며 주저앉고 말았다.

장송계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네 사람 중에 이제 남은 것은 자
기 혼자뿐이었다. 그는 차라리 상대방과 죽음을 함께 하겠다는
각오로 장검을 싸늘하게 떨치며 양패구상(兩敗俱傷)의 타법을 전
개했다. 그러나 장무기와의 실력 차이가 너무나 현격했다. 그는
얼마 가지 않아 역시 아랫배와 왼쪽 허벅지에 혈도가 찍혀 쓰러
지고 말았다. 장무기가 노린 것은 그의 하체였다. 단지 그를 쓰
러뜨려 움직일 수 없게끔 하기 위해 혈도를 찍은 것이다. 한데
장송계는 쓰러지자마자 갑자기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전신에 심
한 경련이 일어나는 게 아닌가!

장무기는 흠칫 놀랐다. 혹시 장사백님께서 숨겨온 질환이 있는
데, 지금 발작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퍼뜩 뇌리에 스쳤다. 그
는 크게 당황하여 얼굴 앞으로 달려가 가슴을 더듬어 보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장송계가 별안간 왼손을 쭉 뻗어내 그의
얼굴을 가렸던 복면을 벗겼다. 너무 뜻밖의 행동이라 장무기는
미처 방어할 새도 없이 복면이 벗겨지고 말았다. 일순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모두 돌처럼 굳어졌다.

한참 후에야 장송계가 한맺힌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무기..... 이놈! 이제 봤더니 네가..... 배은망덕도 유분수
지....."

그는 너무나 놀랍고 분노한 나머지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
았다. 오히려 눈에서 눈물이 먼저 흘러내렸다. 그는 배신감에 치
를 떨 수밖에 없었다.

알고보니, 장송계는 도저히 상대방의 적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이대로 눈을 감을 수는 없었다. 원수가 누구이며
대관절 어떤 누구인지 알기 위해 일부러 비명을 질러 복면을 벗
기게 된 것이다.

장무기는 정체가 탄로나자 혼백이 달아난 듯 뇌리에 혼란이 오
며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사사백님! 제가 아닙니다! 네가..... 어찌 칠사숙님을.....!"

장송계는 처연하게 웃었다.

"좋다, 좋아! 어서 우리마저 죽여라. 대사형, 이사형, 그리고
육제, 모두들 똑똑히 보셨죠? 이 오랑캐의 앞잡이가 다름아닌 우
리가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무기입니다!"

송원교, 유연주, 은이정은 몸을 움직일 수 없어 그저 넋빠진 사
람모양 멍하니 장무기를 쳐다볼 뿐이었다. 그들은 눈앞에 전개된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장무기는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그는 갑자기 땅에서 한자루의
장검을 주워들어 자신의 목을 향해 베어갔다. 그것을 본 조민이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잠깐만! 대장부라면 모든 진실을 밝혀야 할 줄도 알아야 해요!
만약 당신이 이대로 헛된 죽음을 택한다면, 막칠협을 살해한 진
짜 흉수가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지도 몰라요. 그것은 결코 무당
제협들이 바라는 바가 아닐 거예요."

장무기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녀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좋단 말이오?"

그는 조민에게 다가가 혈도를 풀어주었다. 조민은 부드러운 음
성으로 그를 위로했다.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당신이 이끄는 명교에 많은 고수가 있
고 내 수하 중에서도 지혜가 뛰어난 인물이 있으니, 틀림없이 원
흉을 찾아낼 수 있을 거예요."

장송계가 소리쳤다.

"무기야! 네놈이 눈꼽만큼이라도 양심이 남아 있다면 어서 우리
에게 살수를 전개해라!"

장무기는 안색이 창백해져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조민은 그
를 똑바로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 쓴 기분이 어때요? 당신은 나더러 주 낭
자를 죽인 흉수라 고집했는데, 이제 내 심정을 이해하겠어요?"

장무기는 비로소 그녀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졌다.

'그럼.....그녀가 정말 나와 마찬가지로 억울하게 누명을.....'

조민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은 사백숙님들에게 혈도를 찍었는데 그들이 스스로 풀 수
있나요?"

장무기는 고개를 내둘렀다.

"성화령에 수록된 점혈수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풀지 못할 것이
오. 하지만 열 두 시진 후에는 스스로 풀어지게 될 거요."

조민은 잠시 생각을 굴리는 듯하더니,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선 이분들을 동굴로 데려다 놓고 우린 떠나요. 진짜 흉수를
잡기 전엔 이분들과 피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장무기는 도저히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 그녀의 의견에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알았소."

그는 무당 사협을 안아 커다란 바윗돌 뒤로 옮겨놓았다. 일단
풍설을 피하게 해주기 위해서였다.

무당 사협은 계속 욕을 해댔지만, 장무기는 눈물을 글썽이며 아
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민이 그를 거들었다.

"네 분은 모두 무림고인인데 어찌 이다지도 생각이 얄팍하죠?
만약 장상공이 흉수라면 이 자리에서 당장 네 분을 죽여 입을 봉
하면 문제가 간단하게 해결될 게 아니겠어요? 만약 네 분이 계속
욕설을 한다면 각자의 뺨을 후려치고 내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들
겠어요. 나는 원래 사악한 요녀이기 때문에 그 정도의 일쯤은 서
슴없이 해낼 수가 있다는 걸 어려분들은 잘 알고 있겠죠?"

송원교 등은 아연실색해졌다. 대장부는 목이 떨어지는 한이 있
어도 모욕을 당할 수는 없는 법, 만약 이 요녀에게 뺨을 얻어맞
고 무릎을 꿇리게 된다면, 평생을 두고 그 치욕감을 떨쳐 버리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곧 입을 다물고 더 이상 욕을 하지 않았다.

조민은 빙긋이 웃으며 장무기에게 말했다.

"내가 가서 말을 끌고 올께요. 나를 남겨두고 당신이 말을 끌러
가기엔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을 테니까요. 그렇죠?"

장무기는 그녀의 말을 부인할 수 없었다. 조민은 워낙 성격이
당돌해 사백숙님들에게 무슨 행동을 전개할지 사실 염려가 되었
다.

"그럼 수고를 좀 해주시오."

조민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당신은 저들을 끔찍이 생각하고 있지만, 저들은 당신을 믿지
않으니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장무기는 그녀의 투덜거림에 대꾸할 말이 없었다. 조민은 곧 천
천히 걸어나갔다. 그녀는 상세가 심한 탓인지 걸음이 비틀거렸
다. 장무기는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고마움과 미안함이 엇갈
렸다.

한데, 조민이 앞으로 얼마정도 걸어나갔을 때, 북쪽 대로로부터
급박한 말굽소리가 들려왔다. 한 필의 말이 앞서 달리고 있으며
두 필의 말이 얼마간의 간격을 두고 뒤따라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민은 그 소리를 듣자 다시 되돌아왔다.

"누가 이곳을 향해 말을 몰고 오는 것 같아요."

장무기는 그녀와 함께 바윗돌 뒤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유연주
의 몸이 바윗돌 밖으로 조금 노출돼 있는 것을 보고 안으로 끌어
들였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무당 사협의 아혈(啞穴)을
찍어 입을 열 수 없게 했다.

곧이어 앞서 달리던 말이 그들로부터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까
지 이르렀다. 뒤를 따르고 있는 두 필의 말은 약 이,삼 십장의
간격이 떨어져 있었다. 앞서 달리는 말에 쫓기고 있는 게 분명했
다. 순간, 장무기는 앞서 달려온 말에 탄 사람을 알아보고 나직
이 외쳤다.

"앗! 송청서 사형이.....!"

조민이 즉시 그에게 귀띔을 했다.

"어서 그를 막으세요."

"아니.....? 무엇 때문에?"

"그 이유는 묻지 마세요! 미륵묘에서 있었던 일을 벌써 잊었나
요?"

장무기는 그 말에 불현듯 느끼는 바가 있어 얼음조각을 집어 냅
다 던지자 정확하게 송청서가 몰고 오는 준마의 무릎뼈에 적중되
었다.

준마는 그 즉시 무릎이 꺾이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 바람에
송청서의 몸도 허공으로 날아올라 한 바퀴 회전하더니 사뿐히 땅
에 떨어져 내렸다.

장무기는 다시 작은 얼음조각을 던져 그의 오른쪽 다리의 혈도
를 찍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두 필의 준마가 가까이 달려왔으며 송청서
는 나직한 신음과 함께 쓰러졌다. 뒤따라 말을 몰고 달려온 두
사람은 바로 개방의 진우량과 장발용두였다.

장무기는내심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저들 세 사람은 실심산을 만드는 독물을 구하기 위해 장백산으
로 가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쫓기고 쫓으며 이곳까지 온 것일
까?'

진우량과 장발용두는 즉시 안장에서 뛰어내려 무기를 뽑아 쥐었
다. 그들은 송청서의 말이 지쳐 쓰러진 것으로 생각했다. 송청서
는 장무기가 얼음조각으로 자신의 무릎 혈도를 찍은 것을 꿈에도
생각지 못해 단지 낙마하면서 무릎을 다친 것으로만 알았다.

장무기가 다시 얼음조각을 집어 진우량에게 던지려는데 조민이
만류했다. 그녀가 턱으로 진우량과 송청서를 가리키며 눈짓을 하
자 장무기는 비로소 그녀의 뜻을 알아차렸다. 하여 일단 그들이
무슨 대화를 나눌 것인지 들어보기로 했다.

장발용두가 먼저 성난 음성으로 외쳤다.

"송가야, 야밤중에 몰래 달아난 이유가 무엇이냐? 우리의 계획
을 너의 부친께 알리기 위해서냐?"

계속 ---


제 2 장 빗나간 연심(戀心) #6/6

그는 팔괘도(八卦刀)를 좌우로 떨치며 당장이라도 송청서의 목
을 내리칠 기세였다.

송청서는 냉랭하게 대꾸했다.

"아버님께 알릴 생각은 없었소. 그러나 아버님을 해치는 일에
협조할 순 없었소. 그것은 짐승만도 못한....."

장발용두는 대뜸 호통을 쳤다.

"닥쳐라! 네가 감히 방주의 명을 거역할 작정이냐? 방을 배신하
는 자는 어떠한 벌을 받는지 모르는 모양이구나!"

송청서는 길게 숨을 들이켰다.

"나는 천하에 둘도 없는 죄인이오. 더 이상 살고 싶은 생각도
없소. 요 며칠 동안 눈만 감으면 막칠숙의 혼백이 내 목을 조르
는 악몽에 시달려 왔소. 장발용두, 제발 단칼에 날 죽여 주시오.
그러면 감사를 할 것이오!"

장발용두는 팔괘도를 번쩍 들어올렸다.

"좋다! 소원이라면 기꺼이 막성곡의 곁으로 보내 주마!"

진우량이 얼른 나섰다.

"용두 형님, 송형제가 우리를 협조하지 않겠다면 죽여도 아무런
이득이 없습니다. 자신의 일을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
십시오."

장발용두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놓아 주자는 뜻인가?"

진우량은 교활하게 눈동자를 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는 자기의 손으로 막성곡을 죽였으니 무당파가
알아서 처리할 겁니다. 저런 대역무도한 자는 언젠가는 우리를
배신할 수도 있을 겁니다. 저건 비겁한 자를 죽이기 위해 구태여
우리 협의도의 칼을 더럽힐 필요가 있겠습니까?"

장무기는 미륵묘에서 진우량이 막성곡을 언급하자, 송청서가 갑
자기 태도를 바꿔 고분고분하던 생각이 떠올랐다. 그런데 송청서
가 바로 막성곡을 살해한 흉수일 줄이야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
이었다. 그는 청천벼락을 맞은 듯 심한 충격을 받았다.

송원교 등 네 사람은 바윗돌에 가려져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
황을 볼 수 없지만 그들의 대화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들
역시 기절초풍할 정도로 놀랐다.

단지 조민만이 어느 정도 예측하고 있었는지 입가에 경멸에 찬
웃음이 스쳐가며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송청서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진형님, 그 일은 절대 누설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지 않았습니
까? 사나이로서 어찌 그 약속을 저버릴 수가 있습니까?"

진우량은 냉랭하게 웃었다.

"자넨 내가 한 맹세를 기억하고 있군. 자네가 스스로 맹세한 것
을 잊었는가? 자네는 분명 모든 일을 내 명령에 따라 움직이겠다
고 하지 않았던가? 자네가 먼저 약속을 저버렸기 때문에 나도 그
사실을 이 자리서 털어놓은 걸세."

송청서는 안색이 참담해졌다.

"나더러 태사부님과 아버님의 음식에다 독을 풀어 넣으라는 명
령은 도저히 따를 수가 없으니, 어서 날 죽여 주시오!"

진우량은 느긋하게 말했다.

"송형제, 흐름을 잘 타는 사람만이 현명한 인물이네. 난 자네더
러 그들을 죽이라는 뜻이 아니라, 단지 정신을 잃게 하는 미약을
먹이라고 했네. 미륵묘에서 자넨 분명히 그렇게 하겠노라고 대답
하지 않았는가!?"

송청서는 세차게 고개를 내둘렀다.

"난 단지 미약을 풀어넣겠다고 약속했을 뿐이오! 그런데 알고보
니 장발용두가 잡으려는 오독사와 지네 따위는 모두 살인을 할
수 있는 독약이오. 절대 미약에 쓰여질 수가 없소!"

진우량은 천천히 장검을 거두었다.

"아미파의 주 낭자는 세상에서 둘도 없는 미인인데, 자넨 그 여
인이 장무기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을그냥 방관만 하겠다는 건
가? 그날 밤에 자넨 아미파 여제자들의 침실을 훔쳐 보다가 막성
곡에게 들켜 달아나는 바람에 막성곡은 뒤쫓아가게 되었고, 결국
석강(石江)에서 맞부딪쳐 싸움을 벌여 자네가 막성곡을 죽이지
않았던가? 그 엄청난 일을 저지른 원인도 따지고 보면 자네가 그
미모의 주 낭자에게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인데, 이제 그녀를 아
내로 맞이할 수 있게 된 마당에 포기하려 하다니 나로선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네."

송청서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악을 쓰듯 성난 음성
으로 외쳤다.

"그날 밤 난 막사숙을 당해 내지 못해 차라리 그의 손에 죽으려
했소. 그런데 당신이 난데없이 나서서 날 돕지 않았소? 난 결국
당신의 간계에 넘어가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지르게 된 것이
오!"

진우량은 간사하게 웃었다.

"이제와서 나를 원망하다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군. 그날 밤 막
성곡에게 치명상을 입힌 진천철장(震天鐵掌)은 내가 전개한 것인
가? 아니면 자네가 전개한 것인가? 그건 분명 자네 무당파의 무
공이잖는가? 그날 밤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나서서 자네의 목
숨을 구해줬을 뿐 아니라 명성까지 지켜 주었는데, 이제 와서 오
히려 날 원망하다니! 그리고서도 자네는 인간이라 할 수 있나?
아무튼 좋네. 자네를 사귀게 된 것도 내 전생의 업보일지 모르니
더 이상 지난 일을 따지고 싶지 않네. 그리고 자네가 사숙을 죽
인 일도 더 이상 입 밖에 내지 않겠네. 기회가 있으면 다시 만나
게 되겠지. 난 이만 가야겠네."

송청서는 그가 이렇게 고분고분 물러갈 위인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대..... 대관절 날..... 어떻게 할 생각이오?"

그의 표정은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진우량은 태연하게 말했
다.

"내 자네를 어떻게 하겠는가? 그렇게 불안해 할 필요는 없네.
참, 자네에게 보여 줄 것이 있네. 이게 무엇인지 똑똑히 보게."

장무기는 바위 뒤에 숨어 있다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었다.
진우량이 송청서에게 무엇을 보여주는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이때 송청서의 입에서 놀란 외침이 터졌다.

"앗! 그것은..... 아미 장문인을 상징하는 철지환이 아니오? 분
명히 주낭자의 반지인데 어째서..... 당신 손에.....!"

놀란 것은 장무기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지약과 헤어졌을 때 분명 저 철지환을 손에 끼고 있는 것
을 보았는데, 어째서 진우량의 수중에 들어간 것일까? 음.....
틀림없이 진우량이 또 무슨 흉계를 꾸미기 위해 가짜를 만든 게
분명해!'

진우량이 교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 자세히 보게. 이 철지환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부터 확인해
보게."

잠시 후 송청서의 격동된 음성이 들려왔다.

"나는 서역에서 멸절사태에게 무공을 가르침받은 적이 있는데,
당시 이 반지를 끼고 있었소. 내가 보기엔 진짜인 것 같소."

이어 검으로 반지를 연거푸 내리치는 금속성이 들려오더니, 진
우량이 입을 열었다.

"만약 가짜라면 벌써 토막났을 걸세. 자세히 보게. 이 반지 안
쪽에 유태양녀(留胎襄女)라는 네 글자가 선명하게 박혀 있지 않
은가? 바로 왕년에 대협 곽정이 그의 딸이자 아미파의 조사이신
곽양 여협에게 준 것으로, 역대 아미파 장문인의 징표로 전해져
온 철지환이네."

"그것을 어떻게..... 그럼 주 낭자는.....!"

"하핫.....!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네. 장발용두 우린 이만 떠
나도록 합시다."

진우량은 즉시 몸을 돌려 장발용두와 떠나가려 하자 송청서가
다급히 그를 불러세웠다.

"진형님!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주낭자가 어떻게 되었소? 주
낭자가 이미 진형님의 수중에.....?"

진우량은 몸을 돌려 다시 앞으로 다가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네가 생각하고 있는 데로 주낭자는 이미 내 손아귀에 들어왔
네. 남자라면 누구나 그 같이 아름다운 여인에게 마음이 끌리지
않는 자가 없을 걸세.자네가 정녕 그녀를 포기하겠다면 나라도
그녀를 차지해야 할 게 아니겠는가? 물론 자네가 지금이라도 마
음을 돌려 우릴 돕는다면 문제가 달라지겠지만, 자네같이 뜻이
확고한 자가 마음을 돌릴 리가 있겠나?"

그는 다시 몸을 돌려 떠나가려 했다. 그러자 송청서가 황급히
외쳤다.

"잠깐만!"

진우량은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는 듯이 천천히 몸을 돌려 그를
주시했다. 송청서는 안색이 창백해진 채 눈가에 파르르 경련이
일었다. 그는 모종의 결단을 내리기 위해 괴로워하고 있는게 분
명했다.

장무기는 자신도 모르게 송원교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송원교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비통함이 극에 달해 있는 모습
이었다.

이때 송청서의 음성이 들려왔다.

"진형님, 용두형님, 소제가 한때나마 어리석은 생각을 한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무든 것은 진형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진우량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래! 진작 그렇게 나와야지. 자넨 역시 나의 좋은 형제
일세. 나만 믿게. 곧 자네와 주낭자가 혼례를 올릴 수 있게끔 주
선을 해 주겠네. 일단 우리를 협조해 장진인과 영존 등을 제압시
키면 장무기 녀석도 틀림없이 우리에게 무릎을 꿇게 될 걸세!"

"그렇고 말고, 거듭 말하지만 우린 단지 장진인과 영존 등을
당분간 연금하려는 것뿐이네. 그들을 인질로 잡고 있지 않는 한
장무기를 굴복시킬 수 없기 때문이네. 우리가 만약 장진인 등을
해친다면 장무기는 필시 혈안이 되어 우리 개방을 찾아와 복수하
려고 날뛸 텐데, 그 결과는 오히려 우리에게 해로울 게 아니겠는
가?"

진우량이 다시 입을 열었다.

"개방이 장무기를 굴복시킨 다음 오랑캐들을 몰아내 천하를 거
머쥔다면 자네야말로 개국공신이 될 것이고, 아름다운 아내와 더
불어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게 될 걸세."

송청서는 고개를 떨구었다.

"소제는 부귀영화를 바라지 않습니다. 우선 주낭자부터 만나보
고 싶으니....."

"하하.....! 염려 말게. 지금 방주님과 모든 장로께서 노룡(盧
龍)에 와 있네. 물론 주낭자도 함께 있네."

송청서는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주 낭자는 어떻게 해서 진형님에게.....!"

진우량은 빙긋이 웃었다.

"그것은 용두형님의 공로였네. 그날 장봉용두와 장발용두가 주
루에서 술을 마실 때 낯설은 세 사람이 본방 제자로 위장해 있는
것을 발견했네. 당시는 내색을 하지 않고 나중에 암암리에 조사
해 보니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천하일색 주낭자라는 것을 알았
네. 장발용두께서 곧 사람을 시켜 그녀를 모셔오게 되었지. 주낭
자는 머리카락 하나 다친 데 없이 편안하니 조금도 염려를 말
게."

장무기는 내심 아뿔싸를 토했다.

'이제보니 그나 주루에서 이미 들통이 났군. 의부님께서 실명만
하시지 않았다면 미리 낌새를 알아차렸을 것인데.....'

그런데 이상하게도 진우량은 사손에 대하여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득의하게 말했다.

"주낭자가 자네와 혼례를 올리면 아미, 무당 두 문파가 모두 개
방의 분부에 따라야 할 걸세. 게다가 명교까지 흡수 될 것이니
그 기세가 얼마나 호호탕탕한가를 한번 상상해 보게. 몽고 오랑
캐만 몰아내면 이 금수강산은 하하.....주인이 바뀌게 될 걸세."

그는 마치 개방이 천하를 얻으면 자기가 용좌에 오를 것 같이
득의양양했다. 그는 송청서에게 물었다.

"송형제, 무릎을 다친 것 같은데 괜찮은가?"

송청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타고 온 말이 갑자기 고꾸라지는 바람에 얼음조각이 튀어 공교
롭게도 무릎 혈도에 맞았는데 이젠 괜찮습니다."

진우량은 껄껄 웃었다.

"막칠협이 이 부근에서 죽음을 당했으며 그의 시체를 숨겨둔 동
굴도 이곳에서 멀지 않기 때문에 귀신에 씌운 모양일세. 그렇지
않고서야 멀쩡하게 달리던 말이 갑자기 여기에서 고꾸라질 리가
있겠는가? 하핫..... 자, 이제 그만 떠나세."

송청서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세 사람은 곧 말에 올라타
고 떠나갔다.

장무기는 그들이 멀어지자 얼른 송원교 등 네 사람의 혈도를 풀
어 무릎을 꿇고 백배사죄했다.

"사백님, 사숙님, 제가 죽을 죄를 지었으니 중벌을 내려 주십시
오."

송원교는 장탄식과 함께 두 눈에 눈물을 가득 담은 채 아무 말
도 하지 않았다.

유연주가 얼른 장무기를 부축해 일으켰다.

"조금 전에 우리가 너를 오해했으니 잘못이 있다면 우리에게 있
다. 우린 한집안 식구이니 더 이상 얘기하지 말자. 청서가.....
청서가..... 정말 뜻밖이다. 만약 우리가 직접 듣지 않았다면 도
저히 믿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송원교는 장검을 뽑아쥐더니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 짐승만도 못한 놈! 아미 여협의 침실을 훔쳐봤기 때문에 막
사제가 혼을 내주려고 했던 건데, 그놈이 감히 그런 대역무도한
짓을..... 이놈을 당장 쫓아가 내 손으로 죽여 없애겠다!"

그는 즉시 신법을 전개해 송청서 등이 사라진 방향으로 달려갔
다.

장송계가 얼른 소리쳤다.

"형님! 고정하십시오. 심사숙고한 연후에 행동을 취해야 합니
다."

송원교는 그의 만류를 무시하고 계속 앞으로 치달렸다.

그러자 장무기가 즉시 신법을 펼쳐 눈깜짝할 사이에 그의 앞을
가로막고 공손히 몸을 숙였다.

"대사백님, 사사백님께서 하실 말씀이 있는 모양입니다. 송사형
께선 사교한 무리에게 현혹되어 일시적으로 그릇된 일을 저질렀
지만 차후에 틀림없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겁니다. 그때 가서
다시 벌을 주셔도 늦지 않을 겁니다."

송원교는 울먹였다.

"칠제..... 칠제..... 이 못난 사형을 용서해 주게."

그의 뇌리에 갑자기 왕년에 장취산이 자결한 일막이 떠올랐다.
당시 장취산은 유대암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목숨을 끊지 않았던
가! 지금에서야 당시 오사제의 심정을 뼈저리게 공감할 수 있었
다. 그는 홀연 검끝을 돌리더니 자신의 목을 향해 그어갔다.

장무기는 소스라치게 놀라 건곤이위신공을 전개해 맨손으로 장
검을 집어 빼앗았다. 전광석화와도 같은 출수였는데도 불구하고
송원교의 목줄기에 혈흔이 그려졌다.

이때 유연주 등이 달려왔다. 장송계는 간곡하게 말했다.

"형님, 청서가 저지른 대역무도는 마땅히 처벌을 받아야겠지만
그보다 강산을 되찾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소(小)로 인해 대
(大)를 그릇쳐서는 아니됩니다."

송원교는 대뜸 눈을 부라리며 성난 음성으로 말했다.

"그..... 그럼 그 대역무도한 놈을 그냥 내버려 두란 말인가?
내 아들이 그런..... 엄청난 짓을 저지를 줄이야.....!"

장송계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 진우량의 말을 들어보면, 개방은 청서를 앞세워 우리의 은
사를 모해(謀害)하고 무림을 어지럽혀 천하를 넘보는 것 같습니
다. 이러한 마당에 은사님과 본문의 안위가 먼저 해결해야 할 급
선무이며, 천하무림과 만백성의 화복은 더욱 중요한 일입니다.
청서의 행위는 언젠가 댓가를 치루게 될 것이니 우린 먼저 대사
(大事)를 상의하는 게 급합니다."

송원교는 그의 말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장검을 거
두었다.

"내가 너무 흥분했던 것 같네. 자네의 말에 따르도록 하겠네."

은이정이 약을 꺼내 그의 목에 난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장송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개방이 은사님께 불리한 행동을 취할 음모를 갖고 있는 이상
우리는 속히 문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진우량은 교활한 자이므
로 음모를 앞당길지도 무르기 때문입니다."

송원교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맞네. 난 아들 녀석을 벌하는데만 흥분하여 은사님의
안위를 잊고 있었으니..... 자, 어서 무당산으로 떠나세."

장송계가 장무기에게 말했다.

"무기야, 주낭자를 구하는 일은 너에게 맡기겠다. 일을 무사히
마친 후에 무당에 들려주길 바란다."

장무기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사백님의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장송계가 다시 나직하게 말했다.

"저 조낭자는 무슨 속셈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없으니 각별히 조
심하도록 해라. 남아 대장부가 미색으로 인해 큰 일을 그릇쳐서
는 아니 된다. 내 말을 명심하겠느냐?"

무당 사협과 장무기는 곧 막성곡의 시신을 묻어주고 눈물을 뿌
리며 재를 올렸다.

이어 송원교 등이 먼저 떠나갔다.

그제서야 멀찌감치떨어져 서 있던 조민이 장무기 곁으로 다가
왔다.

"당신의 사사백이 이 요녀에게 현혹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
셨죠? 그리고 송청서가 좋은 본보기라고도 말했겠군요."

장무기는 멋쩍어하며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조민은 냉소를 날
리며 다시 말해다.

"송대협께선 나중엔 아들보다도 주낭자를 더 원망하게 될테니
두고 보세요. 틀림없이 주낭자가 자기 아들을 유혹해 신세를 망
치게 만들었다고 할 거예요."

장무기는 속으로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겉으로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나의 대사백님은 사리에 분명한 정인군자이신데 함부로 무고한
사람을 원망할 리 있겠소?"

조민은 다시 코웃음을 쳤다.

"군자로 자처하는 사람일수록 잘못을 타인에게 돌리기 마련이에
요."

그녀는 말끝을 멈칫하더니 생긋이 웃었다.

"자, 이젠 당신의 사랑스러운 주낭자를 구하려 갈 차례군요. 송
청서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날엔 산통이 깨질 테니까요."

장무기는 공연히 얼굴이 붉어졌다.

"산통이 깨진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솔직히 말해 가슴이 찔리는 바가 없지 않았다.

----- 제 6권 2장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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