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천도룡기 7-3

3학년2반 | 2022.03.07 07:27:07 댓글: 0 조회: 362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53359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7 권


제 3 장 불문(佛門)에 귀의(歸依)한 마성(魔性)


장무기가 사손의 손을 잡고 막 떠나려는데 사손이 갑자기 소리
쳤다.

그는 많은 소림 승려 중에 한 노승을 가리키며 싸늘하게 외쳤
다.

"성곤, 일어나라! 천하 영웅들 앞에서 그간에 있었던 우여곡절
을 분명하게 밝혀라!"

군호들은 깜짝 놀랐다. 그가 가리킨 노승은 등이 굽고 꾀죄죄하
게 생겨 성곤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장무기는 그가 성곤이 아니
라고 말하려는데 사손이 다시 소리쳤다.

"성곤, 넌 용모를 바꿀 수 있을 망정 음성마저 바꾸진 못했다.
너의 기침소리를 듣고 난 대번에 네가 누군지 알아냈다.

그 노승은 징그럽게 웃었다.

"지금 무슨 잠꼬대를 하고 있는 거냐? 네 말을 믿을 사람은 아
무도 없다!"

그가 입을 열자 장무기는 즉시 가슴에 와닿는 것이 있었다. 그
날 광명정에서 그는 건곤일기대 속에 들어 있었기 때문에 성곤의
얼굴을 대하기 앞서 그의 음성부터 들었기 때문에 유난히 그 음
성을 똑똑히 기억할 수 있었다. 지금 성곤이 비록 일부러 음성마
저 변성시켰지만 외모와는 달리 역시 빈틈이 남아 있었다.

장무기는 대뜸 앞으로 뛰쳐나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원진대사, 아니 성곤 선배님, 대장부라면 자신이 행한 일에 대
해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소? 이젠 자신의 진면목을 밝히시오!"

성곤은 변장을 하여 사람 틈바구니에 섞여 있었으므로 좀처럼
정체가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황삼 여인이 주지약을 제압하는
순간 너무나 뜻밖인지라 자신도 모르게 헛기침을 하게 된 것이
다.

사손은 실명한 후 청각이 유난히 예민해졌다. 게다가 성곤에 대
한 원한이 뼈속 깊이 사무쳐 하루도 잊은 날이 없었다. 사손에게
있어 성곤의 기침소리는 청천벽력과도 같았으며 즉시 그를 알아
낼 수 있었다.

성곤은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자 곧 싸늘하게 외쳤다.

"소림의 승려들은 들어라! 마교가 불문성지를 어지럽히고 본파
를 멸시하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모두들 그들과 대항해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모조리 없애 버려라!"

공지는 사형 공문이 본사의 반도들에게 위협을 받은 바 있기 때
문에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오랫 동안 분노를 억제해 왔다.
지금 원진이 명교와 정면 대결을 벌이라고 명령을 내리는 것을
듣자 안색이 크게 변했다. 만약 혼전이 벌어진다면 본사의 승려
들은 엄청난 손상을 입을 게 뻔했다. 그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므로 그도 즉시 목청을 높여 외쳤다.

"공문방장께선 이미 저 반도인 원진의 손아귀에 잡혀 있다. 모
든 제자들은 우선 저 반도를 제압하고 다시 장문인을 구하도록
해라!"

삽시간에 주위에 큰 혼란이 일었다. 장무기는 주지약이 땅에 쓰
러진 채 실의에 잠겨 있는 것을 보자 측은한 생각이 들어 곧 앞
으로 다가가 혈도를 풀어주고 부축해 일으켰다. 주지약은 그의
손을 뿌리치더니 아무 소리없이 아미파 제자들에게 돌아갔다.

이때 사손의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오늘 일은 나하고 성곤 두 사람으로 인해 비롯된 것이니만치,
모든 은원을 우리 두 사람이 해결할 것이오. 사부, 당신은 나에
게 무공을 전수해 주었소. 그러나 성곤, 너는 나의 혈육을 죽였
다. 당신은 은혜와 나의 원한을 이번 기회에 깨끗이 청산하겠
다!"

성곤은 공지가 뜻밖의 명령을 내린 것을 듣고는 가슴이 철렁했
다. 소림 승려들 중에는 비록 자기에게 포섭된 자도 적지 않지만
그보다 공지의 명령에 따르는 자가 훨씬 더 많기 때문이었다. 일
단 정면 충돌이 벌어지면 자기가 이끄는 세력이 불리할 게 뻔했
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성곤은 소림 장문인의 자리를 넘보는 야욕
마저 포기해야만 했다. 그는 내심 생각을 굴렸다.

'사손은 잔악무도한 놈으로 알려져 있다. 내가 만약 놈을 제압
한다면 모든 죄목을 그에게 뒤지어 씌울수가 있을 것이다. 그는
나에게서 무공을 배웠고 또한 앞을 볼 수 없으니 어떤 상황에서
도 나의 적수가 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재빨리 상황을 저울질해 본 연후에 결정을 내렸다.

"사손, 그 동안 얼마나 많은 강호의 영웅 철검들이 네 손에 희
생을 당했는지 아느냐? 넌 그 엄청난 죄과를 뉘우치기는 커녕 오
늘 명교의 마두들을 앞세워 소림의 불문성지를 찾아와 소란을 피
우며 천하의 영웅과 적대시하려 들다니! 내 일찌기 너에게 무공
을 전수해 준 것이 후회막급할 뿐이다. 지금이라도 무림의 협의
도를 위해 기사멸조(欺師滅祖)의 역도인 네놈을 처단하고 말리
라!"

그는 의연하게 말하며 성큼성큼 사손에게 다가갔다.

사손은 소리 높여 외쳤다.

"천하의 영웅들이여, 내 말 좀 들어보소! 나 사손의 무공은 이
성곤 사부로부터 전수받은 게 틀림없소. 다시말해 그가 나의 사
부라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겠소. 그러나 나의 아내를 겁탈하고
나의 부모와 자식을 살해한 흉수도 바로 여기에 있는 이 성곤이
오! 이 또한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오. 물론 스승을 받들어야 하
는 것이 우리 무림인의 본분이지만 멸족을 당한 원한을 갚아야
하는 것도 인간의 도리가 아니겠소? 스승이 존귀한들 어찌 나를
낳아준 부모만 하겠소? 여러분, 내가 그에게 복수를 하는 게 당
연하지 않소이까?"

사방에서 군호들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당연히 복수를 해야 하오!"

"성곤을 죽여라!"

성곤은 아무 말 없이 사손의 가슴을 향해 일장을 뻗어냈다. 사
손의 입을 봉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사손은 살짝 몸을 옆으로 틀며 급소를 피했으나 팍! 하는 소리
와 함께 성곤의 일장이 어깨쭉지에 적중되었다. 사손은 흥! 하고
냉소를 날릴 뿐 반격을 하지 않았다.

"성곤, 왕년에 네가 나한테 장홍경천(長紅經天)의 초식을 전개
해 주었을 때 그 초식이 상대의 몸에 적중되는 순간 즉시 혼원일
기공(混元一氣功)을 끌어올려야만 결정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다
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왜 혼원일기공을 끌어올리지 않았느
냐? 나이가 늙어 이제 공력을 끌어올릴 힘조차 잃었단 말이냐?"

알고보니, 성곤이 전개한 첫 번째 초식은 허초(虛招)였다. 그는
상대방이 피하지 않으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단지 사손의 입을
막기 위해 일초를 전개했기 때문에 공력을 주입시키지 않았던 것
이다. 그래서 사손도 전혀 부상을 입지 않았다.

성곤은 이번엔 왼손으로 원을 그리며 오른손을 쭉 밀어냈다. 사
손은 옆으로 미끄러져 피하며 여전히 반격을 하지 않았다.

성곤은 즉시 세 번째 공격을 연결시켰다. 세 번째 공격은 연환
퇴(連環腿)로서 사손의 옆구리를 노린 것이다. 이번에도 사손은
그의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성곤의 발이
정확히 옆구리를 강타했다. 제아무리 철탑처럼 건장한 몸을 지니
고 있는 사손이라 할지라도 옆구리를 걷어채이자 즉시 허리가 꺾
이며 울컥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해냈다.

그것을 본 장무기가 다급히 외쳤다.

"의부님! 어서 반격하세요. 왜 반격을 하지 않습니까?"

사손은 비틀거리며간신히 몸을 고정시키고는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한때 나의 사부였다. 내가 그에게 삼 초를 양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말을 내뱉기 무섭게 포효하듯 기합을 길게 토하며 성곤에게
질풍같이 쌍장을 떨쳐냈다.

성곤은 내심 아뿔싸를 토했다.

'빌어먹을 놈이 나에게 깊은 원한을 갖고 있어 싸움이 시작되자
마자 미친 개처럼 덤벼들 줄 알았는데..... 진작 녀석이 삼초를
양보할 줄 알았다면 일찌감치 살수를 전개하는 건데.....'

그는 좋은 기회를 놓친 게 후회스러웠다. 그는 사손의 장력이
매우 위력적인 것을 보자 왼손으로 막으며 반원을 그려 재빨리
사손의 등 뒤로 돌아갔다. 사손이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을 약점잡
아 소리없이 그의 등 뒤를 향해 일장을 밀어냈다. 그러나 사손은
직접 눈으로 본 것처럼 뒤쪽을 향해 발로 걷어차냈다.

성곤은 살짝 위로 몸을 솟구쳐 허공에서 거대한 독수리처럼 덮
쳐내렸다. 그의 나이는 고희를 넘겼지만 젊은이 못지 않게 몸놀
림이 민첩했다. 사손이 청각으로 그의 위치를 간파해 쌍장을 위
로 뻗쳐내자 성곤은 재차 허공으로 튕겨져 정묘하게 회전하며 두
번째 공중 공격을 시도했다. 두 사람은 처음부터 쾌속한 타법을
구사하는 바람에 순식간에 칠, 팔십 초식을 교환했다.

사손은 비록 앞이 보이지 않지만 성곤으로부터 무공을 전수받았
으므로 그의 모든 무공 초식을 낱낱이 알고 있었다. 그는 눈으로
확인할 필요도 없이 자기가 일장을 전개하면 상대방이 어떻게 대
처할 것이며 잇따라 어떤 변화를 구사할 것인지 십중팔구 짐작할
수 있었다. 게다가 사손은 성곤보다 십여 세 어리며 빙화도에서
혹한과 무더위를 견뎌가며 부단히 내공수련을 해왔기 때문에 진
력(眞力)면에선 오히려 한 수 위였다.

장무기는 한쪽에선 긴장된 표정으로 싸움을 지켜보았다. 그는
사손이 성곤에게 얼마나 깊은 원한을 갖고 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손이 처음부터 자신의 목숨 따위는 도외
시한 양패구상의 타법을 구사할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뜻밖
에도 사손은 일초일식을 매우 신중하게 전개할 뿐 아니라 공격못
지 않게 수비에도 상당히 신중을 기하는 것을 엿볼 수 있었다.

장무기는 그의 예상 밖의 행동에 처음에는 의아해 했으나 곧 그
까닭을 깨닫게 되었다. 성곤의 무공은 상상 외로 고강하여 도액,
도난 등 소림 삼승과 견줄 만했다. 그러니 만약 사손이 처음부터
혈기를 앞세워 무리한 공력을 전개한다면 필경 삼백 초식을 넘기
지 못한 채 스스로 지쳐 패배를 당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복수는 커녕 오히려 개죽음을 당하게 될 판이니, 이 점을 감안하
여 처음부터 신중한 공격을 전개하는 게 분명하리라.

치열한 싸움이 계속되는 가운데 아슬아슬한 장면이 속출되었다.
어느덧 두 사람은 또 이십여 초식을 겨루었다.

"앗!"

순간 사손의 입에서 싸늘한 기합이 토해지며 일권을 뻗어냈다.

획!

거기에 따라 예리한 파공음이 일며 그 경풍이 회오리가 되어 사
방으로 비껴나갔다. 싸움을 열심히 지켜보고 있던 군호들 중에
공동파의 관능(關能)의 입에서 놀란 외침이 터졌다.

"칠상장(七傷掌)!"

사손은 좌우 쌍권을 연속적으로 격출해 냈다. 그 위력은 실로
광풍노도와도 같았다.

공동파의 고수들은 이 광경에 모두 아연실색을 금치 못했다. 칠
상장은 공동파의 진산지학(鎭山之學)이지만 사손의 손을 빌려 전
개되는 위력이 자기네들보다 더 위맹하다는 걸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곤은 삼권을 피하더니 네 번째 주먹이 뻗쳐오는 찰나 오른손
을 수평으로 밀어냈다.

팍!

권과 장이 맞닥뜨려지자 사손은 머리카락이 고슴도치처럼 곤두
서며 제자리에 뿌리가 박힌 듯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반면, 성곤
은 비칠거리며 세 걸음 뒤로 밀려났다. 관전을 하고 있는 군호들
중에서 많은 사람이 사손에게 갈채를 보냈다.

이제 사손과 성곤이 원한을 맺게 된 원인이 적나라하게 밝혀졌
다. 군호들은 사손의 수단이 너무 악랄했다는 것에 분노를 느끼
면서도 그의 처절한 입장에 대해 동정심이가기도 했다. 아울러
성곤의 간교함에 모두 치를 떨었다. 하여 사손에 의해 무고하게
목숨을 잃은 희생자와 연관이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의 군호들이 성곤보다 사손이 이기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다.

사손은 즉시 앞으로 세 걸음 내딛으며 다시 쌍권을 연거푸 떨쳐
냈다. 그러자 성곤은 장풍으로 맞서며 재차 뒤로 세 걸음 물러났
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사손이 기선을 잡은 것이라 생각했지만
장무기는 그 반대로 내심 큰일났다고 생각했다.

'맙소사, 성곤이 지금 전개하는 장법은 소림의 구양공(九陽功)
이다! 이 구양공은 그가 공견신승을 스승으로 모신 후에 배운 것
이므로 의부님께선 전수받지 못했다!'

사손은 칠상권을 연마할 당시 하루속히 성곤을 꺾기 위해 무리
한 욕심을 부렸었다. 그래서 연마하는 도중 내상을 입어 권력(拳
力)을 펼치는데 결함이 있었다. 성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일부러 뒤로 물러나며 소림의 구양공을 전개한 것이다.
사손이 일권을 떨쳐낼 때마다 성곤은 그 권력의 칠성(七成)을 구
양공으로 와해시키는 동시에 나머지 삼성(三成)을 반탄시켜 냈
다. 즉, 구양공의 차력타력(借力打力) 수법을 암암리에 펼친 것
이다.

사손은 단숨에 십이 권을 격출했고, 성곤은 수십 보 뒤로 물러
나 언뜻 보기에는 사손이 크게 우위를 차지한 것 같지만 사실 내
상이 갈수록 심해졌다.

장무기는 다급해졌다. 당장 앞으로 나서서 의부님을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다. 그러나 이 싸움은 의부님이 꿈에서까
지 몽매불망 벼루어오던 복수의 기회가 아닌가! 장무기는 도저히
나설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의부님은 필경
피를 토하며 목숨을 잃게 될 것이 뻔했다.

이때 공지가 갑자기 냉랭하게 소리쳤다.

"원진, 나의 사형이 왕년에 너에게 구양공을 전수해 준 것은 협
의를 위해 이바지하라는 뜻이었지, 너더러 간교한 살인 수단으로
이용하라는 뜻은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성곤은 냉소를 날렸다.

"나의 은사께선 칠상장에 목숨을 잃었으니 난 오늘 은사를 위해
복수를 하려는 거다!"

난데없이 여인의 음성이 터져나온 것은 바로 이때였다.

"공견신승의 구양공은 너보다 훨씬 심후한 경지를 이룩했을 텐
데, 어째서 칠상장을 막아내지 못했겠느냐? 공견신승은 바로 간
교한 네 손에 죽은 것이다! 너는 공견신승을 충동질하여 죽음으
로 몰아넣음으로써 자신의 추악한 음모를 끝까지 숨기려 했던 것
이다. 사대협은 단지 희생물에 불과했다. 앗! 저기를 좀 봐라!
네 뒤에 서 있는 자가 누군지 똑똑히 확인해 봐라! 얼굴이 온통
피로 물들어지고 눈을 무섭게 부릅뜨고 너의 뒷통수를 노려보고
있는 자가 바로 공견신승이 아니냐?"

이렇게 엉뚱한 말을 내뱉은 장본인은 다름아닌 조민이었다.

성곤은 그녀의 허황된 말을 믿을 리 만무였다. 그러나 그도 양
심을 지닌 인간이기에 공견신승의 죽음에 대해 다소나마 죄책감
을 느껴온 것은 사실이었다. 하여 조민의 저주가 섞인 외침소리
를 듣자 자신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지는 한기를 느꼈다.

바로 이때 사손이 다시 일권을 전개해 왔다. 성곤은 즉시 장풍
으로 맞이했고 단지 몸이 약간 휘청거렸을 뿐 뒤로 물러나진 않
았다. 고수끼리 대결하는데 있어 어느 한쪽도 눈꼽만치의 방심을
해선 안 된다. 순간의 실수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지금 성곤의 집중력이 약간 흩어지는 순간 가슴에 일권을 맞자
혈기가 역류하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는 즉시 신법을 전개해
사손 주위를 맴돌며 끓어오는 혈기를 가라앉히는데 급급했다.

조민은 그가 정신 통일을 하지 못하게끔 다시 소리쳤다.

"공견신승, 그에게 바싹 따라 붙으세요! 맞아요. 그렇게 하세
요! 그의 뒷덜미에다 차가운 입김을 부세요. 당신은 제자로 인해
죽음을 당했으니 그도 제자의 손에 죽게 될게 분명해요. 이것이
바로 인과응보(因果應報)가 아니겠어요!"

성곤은 그녀의 계속되는 외침에 짜증을 느끼는 한편 마음 한 구
석에 불안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의식적으로 그 불안감을 떨쳐
버리려 할수록 더욱 진하게 그를 억눌러왔다. 그러자 정말 차가
운 입김이 뒷덜미로 뻗쳐오는 것 같았다. 사실 이곳은 절봉 위이
므로 늘 차가운 바람이 일었다. 게다가 두 사람이 계속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고 있어 등 뒤에서 차가운 바람이 이는 것은 당
연한 일이었다.

조민은 그가 움찔하는 것을 보자 다시 소리쳤다.

"앗! 성곤, 고개를 돌려 등 뒤 좀 봐라! 고개를 도릴 용기가 없
느냐? 그럼 땅에 드리워진 검은 그림자를 보아라. 두 사람이 싸
우고 있는데 어찌 그림자가 셋이냐?"

성곤은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아래로 떨구어졌다. 과연 조민이
말한 대로 두 사람 그림자 사이에 또 하나의 검은 그림자가 섞여
있는 게 아닌가! 성곤이 흠칫 놀라는 순간 사손의 주먹이 다시
날아왔다. 성곤은 미처 피할 새도 없이 역시 주먹을 뻗어내 정면
으로 맞부딪쳤다.

순간, 펑! 하는 굉음이 터지며 두 사람의 진력이 허공에서 충돌
되어 각기 비칠거리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성곤은 그제서야
땅에 드리워진 제 삼의 그림자를 똑똑히 확인할수 있었다. 그것
은 허리가 잘려져 나간 소나무의 그림자였다.

성곤은 시간이 흐를수록 차츰 초조해졌다.

'저 늙은 나의 제자는 눈까지 멀었는데 내가 계속 고전을 한다
면 주위에서 지켜보고 있는 심복들이 우선 나를 달리 평가할 것
이다. 현음지신공만 살아 있다면 이까짓 녀석쯤은 쉽게 처치할
수 있을 텐데..... 그날 장무기 놈의 순양내력에 의해 파괴됐으
니..... 어쨌든 이 녀석을 빨리 처치해야지만 명교의 기를 꺾어
그들과 원한이 있는 사람들을 충동질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래
야만 최악의 경우 이곳을 무사히 빠져 나갈 수도 있을 텐
데.....'

그는 재빨리 생각을 굴리며 서서히 위치를 옮겨 그 부러진 소나
무로 접근해 갔다.

사손이 연거푸 삼권을 전개하는 사이에 그는 자연스럽게 두 걸
음 물러나자 사손은 다시 두 걸음 내딛으며 맹공을 퍼부었다. 성
곤이 재차 두 걸음 뒤로 물러나며 그 부러진 소나무 뒤로 살짝
비켜섰다. 사손이 다시 두 걸음 정도 따라붙는다면 소나무에 걸
려 쓰러질 판이었다.

사손이 걸음을 내딛는 순간 장무기가 소리쳤다.

"의부님! 앞을 조심하세요!"

사손은 반응이 빨라 즉시 옆으로 미끄러졌다. 일단 위기를 모면
했지만 성곤은 그 틈을 타서 소리없이 일장을 밀어내 정확하게
사손의 가슴을 적중시켰다.

"윽!"

사손은 나직한 신음을 토하며 뒤로 쓰러졌다. 성곤은 그에게 숨
돌릴 기회를 주지 않고 다짜고짜 머리를 겨냥해 밟아갔다. 사손
은 반사적으로 뒹굴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의 입가에서 계속
선혈이 흘러내렸다. 성곤은 제자리에 서서 잠시 돌처럼 굳어져
있다가 천천히 오른손을 내밀었다.

사손이 그와 삼백 여 초식을 겨루어 올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
조건이 맞았기 때문이다. 하나는 상대방의 초식을 환히 알고 있
다는 사실과 또 하나는 바람소리로 상대의 위치를 판별할 수 있
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성곤의 출수는 그 두 가지 조건과 전혀 상관이 없
었다. 그는 사손의 생각에서 훨씬 벗어난 타법을 구사했을 뿐 아
니라 소리없이 느릿느릿하게 손을 밀어내 난데없이 어깨를 후려
쳤다.사손은 비틀거리며 간신히 몸을 고정시켰다. 이 광경을 본
군호들 중에서 즉시 야유를 터뜨리는 자가 있었다.

"비겁하다! 정정당당하게 싸워라!"

그러나 성곤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숨을 죽은 채 느릿하게 손
을 밀어냈다. 사손은 청각을 곤두세웠으나 상대가 상대인만치 좀
처럼 방향을 잡을 수 없었다.

찰싹!

이번에는 뺨을 얻어맞아 입가에서 더욱 많은 피가 흘러내렸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사손은 영락없이 죽게 될 것이다.

장무기는 안타까왔다. 설령 자기가 나서서 성곤을 죽인다해도
의부님은 자신의 도움을 평생의 한으로 생각할 것이다. 장무기는
다급한 나머지 덥석 조민의 손을 잡았다.

"어서 무슨 수를 생각해 내야겠소!"

조민은 나직하게 물었다.

"몰래 암기를 발출해 성곤의 눈을 멀게 할 수 있나요?"

장무기는 고개를 내둘렀다.

"의부님께선 차라리 죽음을 택할 망정 내가 그런 암습을 하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오."

이때 성곤이 다시 일장을 천천히 밀어내자 조민이 소리쳤다.

"가슴!"

사손은 즉시 오른손을 가슴 앞으로 곧장 뻗어냈다. 성곤은 그와
정면대결을 할 필요가 없어 이내 손을 거두었다. 그는 계속하여
소리없이 손을 밀어내 암습을 기도했으나 번번히 조민의 외침으
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성곤은 다른 꾀를 썼다. 그는 눈동자를 교활하게 굴리며
사손의 어깨를 향해 천천히 손을 밀어냈다. 조민은 다시 소리쳤
다.

"우견(右肩)!"

그와 때를 같이하여 성곤의 왼쪽 어깨가 미미한 움직임을 보였
다. 장무기는 대뜸 그의 속셈을 알아차리고 외쳤다.

"등심!"

사손은 조민의 외침이 떨어지는 순간 왼손으로 오른쪽 어깨를
호위하며 반격을 시도했지만 성곤의 그 일장은 허초(虛招)에 불
과했다. 오히려 조민의 외침을 빌려 사손의 주의력을 오른쪽 어
깨에 쏠리게 한 후 그 허를 찔러 팍! 하는 소리와 함께 등심을
강타했다.

장무기가 비록 적시에 소리쳐 귀띔해 주었으나, 성곤의 변초가
워낙 빨라 사손이 다음 동작을 취하기엔 이미 때가 늦었던 것이
다.

모든 사람의 놀란 외침이 터지는 가운데 사손은 반사적으로 몸
을 틀며 마치 오장육부를 입으로 쏟아내듯 붉은 핏줄기를 토해냈
다. 그 피가 온통 성곤의 얼굴에 뿌려졌다.

"앗!"

성곤은 절로 짤막한비명을 지르며 손으로 얼굴의 피를 닦았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사손은 땅에 쓰러져 짐승이 포효하듯 괴성을
지르며 뒹구는가 싶더니 별안간 두 사람 모두 중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실로 갑작스런 변화였다.

알고보니, 사손은 땅에서 뒹굴며 성곤의 다리를 붙잡고 늘어지
며 있는 힘을 다해 끌어당기자 두 사람 모두 지하 감옥으로 떨어
지고 만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사손의 철저한 계획에 의한 결과
인지도 모른다.

지하 감옥은 물이 목까지 차 있는데다가 칠흑처럼 캄캄했다. 그
속에 빠진 성곤은 즉시 눈뜬장님으로 변했다. 그는 반사적으로
뒤쪽을 향해 몸을 솟구쳤다. 일단 상대방에게서 멀리 벗어나고
볼 심산이었다.

그러나 지하 감옥 안은 너무 비좁아 몸을 튕기자 등이 호되게
석벽에 부딪쳤다. 그가 재차 몸을 솟구치려는 순간 사손의 칠상
권이 정확하게 아랫배를 강타해 왔다.

"으윽....."

오장육부가 파열되는 듯한 통증에 성곤은 허리가 꺾이며 신음을
토했다. 성곤은 이번에 맞은 일권으로 심한 내상을 입었음을 알
았다. 그가 다시 신법을 전개한다면 어둠 속에서 상대방의 무서
운 공격이 다시 뻗쳐올 게 뻔했다. 성곤은 곧 생각을 달리해 소
금나수법(小擒拿手法)을 전개했다. 소금나수법은 상대방과 몸을
밀착시킨 상황에서 전개하는 가장 적절한 공격 수법이었다.

소금나수법의 특징은 신속한 변초(變招)에 있었다. 설령 눈으로
보지 않아도 일단 손가락, 손바닥, 손등, 손목, 어느 부위라 할
지라도 상대방의 몸에 닿기만 하면 즉시 나꿔잡거나 후려치거나
갈고리처럼 긁거나 송곳처럼 후비는 공격으로 직결시킬 수 있었
다.

사물이 보이지 않는 칠흑 속에서 성곤이 소금나수법을 펼친 것
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손도 그와 마찬가지로 소금나수법으로 대
결했다.

밖에 있는 군호들은 더 이상 그들이 싸우는 모습을 볼 수 없었
으나 지하 감옥 속에서 계속 들려오는 싸늘한 기합과 고함소리로
그 처절한 광경을 상상할 수 있었다. 오히려 직접 싸움을 지켜보
는 것보다 더욱 손에 땀을 쥐었다. 그 중에서 가장 긴장되어 있
는 자는 장무기였다. 이제는 최악의 경우 의부님을 성곤의 살수
에서 구할 수 있는 가능성마저 없어졌다. 지하 감옥으로 뛰어들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장무기는 다급해진 나머지 등줄기에서 계속 식은땀이 흘러내렸
다. 과연, 군호들이 생각하고 있는 대로 지하 감옥 속에서는 치
열한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사손이 일방적으로 당하던
지하 감옥 위에서의 싸움과는 양상이 달랐다.

사손은 실명한 지 이십여 년이 되어 이전 충분히 청각으로서 눈
을 대신할 수 있었다. 그 반면 성곤은 물에 잠긴 채 갑자기 앞이
보이지 않자 당황함이 앞서 닥치는 대로 공격을 전개할 뿐이었
다. 이러니 쌍방의 전세가 이내 역전되었다.

성곤은 갈수록 당황함이 눈덩어리처럼 커졌다. 그는 광풍폭우처
럼 양팔을 떨쳐 쾌속무비하게 소금나수법 중에서도 악랄한 초식
을 펼치며 속으로 외쳤다.

'너의 일장을 더 맞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지하 감옥 위로 몸을
솟구치고 봐야겠다.'

군호들은 차츰 지하 감옥 가까이 접근해 와 주위를 빙 둘러쌌
다. 모두들 긴장된 표정이었다. 성곤과 사손의 기합과 고함소리
가 계속 들려오는 것으로 미루어 아직도 승부가 판가름나지 않았
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으악!"

갑자기 성곤의 처절한 비명이 들리더니 두 줄기의 인영이 지하
감옥 속에서 곧장 치솟아 올랐다.

군웅들이 흠칫하며 뒤로 물러나는 순간 사손과 성곤이 좌우로
갈라지며 지면에 내려섰다. 군웅들은 비로소 두 사람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성곤과 사손의 눈에서 모두 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마주 서서 잠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군호들도 숨을 죽였다. 지하 감옥속에서
어떠한 상황이 벌어졌기에 두 사람의 눈에서 모두 피가 흘러내리
는지 군호들은 궁금했다.

그 까닭인 즉 이러했다.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사손이 쌍장을 좌우로 하여 성곤의 양쪽 옆구리를 공격했다. 성
곤은 내심 이때가 기회라고 생각했다.

"얍!"

그는 짤막하게 기합을 지르며 식지와 중지를 송곳처럼 세워 질
풍같이 사손의 두 눈을 찔러갔다.

쌍룡창주(雙龍愴珠).

지극히 평범한 초식이지만 성곤의 손에 의해 펼쳐지자 그 위력
은 대단했다. 상대가 누구라 할지라도 일단 이 초식을 맞이하게
되면 얼굴의 위치를 옮겨 피해야만 했다.

성곤도 그것을 계산에 넣어 사실은 왼손으로 상대의 태양혈(太
陽穴)을 노리는데 목적이 있었다. 그가 강호에서 일찌기 많이 사
용하던 수법이었다. 한데그의 계산과는 달리 사손은 얼굴을 피
하지 않았다. 뜻밖이 아닐 수 없었다.

성곤의 계산이 빗나가는 순간 사손의 입에서도 싸늘한 기합이
토해졌다.

"이얍!"

그도 똑같은 쌍룡창주의 초식을 전개한 것이다. 물론 그가 노린
것도 상대방의 눈이었다. 성곤의 두 손가락이 사손의 눈을 파고
드는 찰나 비로소 전광석화같이 뇌리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아뿔싸!"

이어 자신의 눈에 극심한 통증이 전해져 오며 사손의 손가락이
이미 눈을 후비고 들어온 것이다.

두 사람은 똑같은 부위에 똑같은 정도의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엄청나게 달랐다. 사손은 오래 전에 실명했기 때문에
성곤의 손가락에 눈이 찔렸지만 일종의 외상을 입은 것에 불과했
다. 그 반면 성곤은 똑같은 상처를 입었지만 일순간에 맹인으로
변한 것이다.

지하 감옥 위에서 대치하고 있던 두 사람 중에서 먼저 침묵을
깬 자는 사손이었다.

"장님이 된 기분이 어떠냐?"

말을 내뱉기 무섭게 일권을 격출했다. 성곤은 앞이 보이지 않으
므로 제대로 피하지 못했다.

펑!

칠상권이 여지없이 그의 가슴을 강타했다. 사손이 왼손으로 다
시 일권을 떨쳐내자 성곤은 뒤로 대여섯 걸음 밀려나 나무뿌리에
걸려 벌렁 뒤로 나자빠졌다.

그는 울컥울컥 피를 토해 내며 전신의 뼈마디가 녹아내리는 듯
몸이 측 늘어진 채 고통스러운 신음을 발했다.

이때 도액의 음성이 들려왔다.

"인과응보로다. 업보야....."

사손은 세 번째 칠상장을 전개하려다가 도액의 음성을 듣자 도
중에서 권초를 거두고 냉랭하게 말했다.

"난 원래 너에게 십삼 권의 칠상권을 전개할 생각이었다. 그러
나 넌 이미 실명한데다가 공력을 모두 상실한 편이나 다름없어
더 이상 악행을 저지를 수 없기 때문에 십일 장을 생략한다."

장무기 등은 사손이 완벽한 승리를 거두자 모두 환호성을 치며
좋아했다. 사손이 갑자기 땅에 주저앉더니 전신 뼈마디에서 부드
득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장무기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사손이 내력을 역으로 끌어올려
스스로 자신의 공력을 폐지시키려 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즉시 소
리쳤다.

"의부님! 안 됩니다!"

그는 쏜살같이 달려가 사손의 등에 손을 붙여 구양신공으로 제
지하려 했다. 그러자 사손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다짜고짜 자
신의 가슴을 주먹으로 호되게 내리치더니 한 모금의 검붉은 피를
뱉어 버렸다.

장무기가 얼른 그의 팔을 잡았을 때는 팔에 전혀 힘이 들어 있
지 않은 것을 느꼈다. 이미 공력이 완전히 상실된 게 분명했다.

사손은 성곤 쪽을 향해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성곤, 너는 나의 혈육을 죽였기 때문에 난 오늘 너의 눈을 멀
게 하고 무공을 폐지시킴으로써 복수를 했다. 사부님, 당신은 나
에게 무공을 전수해 주었지만 난 오늘 스스로 그 무공을 전부 폐
지시킴으로써 당신에게 돌려주었소. 이제 나와 너는 서로 은혜도
없고 원한도 없어졌다. 당신은 영원히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성곤은 계속 고통스럽게 신음만 한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
다.

군호들은 서로 마주 보며 모두 표정이 굳어 있었다. 사도(師徒)
간에 얽힌 은은원원이 이렇게 결말이 지어질 줄이야 어디 생각이
나 했겠는가!

사손은 잠시 침묵을 두었다가 낭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나 사손은 온갖 악행을 일삼아 왔소. 오늘까지 목숨이 붙어 있
는 것만도 하늘이 내리신 복이라 생각하오. 여러분들 중에 친지
혹은 혈육이 이 몹쓸 놈에게 억울한 죽음을 당한 자가 있을 것이
오. 내 목숨을 내놓을 테니 누구라도 앞으로 나와서 나의 목숨을
거둬가 주십시오."

여기까지 말한 그는 장무기에게 위엄있는 음성으로 말했다.

"무기야, 넌 절대 막으면 안 된다. 복수는 더군다나 용납할 수
없다. 그것은 나의 죄업을 더욱 증가시킬 뿐이다. 내 말을 알아
듣겠느냐?"

장무기는 눈물을 머금고 대답했다.

"예....."

군호들 중에는 물론 그에게 혈육 혹은 지인이 피살당한 자가 많
았다. 그러나 그들도 사손이 성곤에게 취한 행동을 똑똑히 지켜
보았다. 성곤은 불공대천의 원수지만 사손은 그의 무공을 폐지시
키는 것으로 일단락지었을 뿐 아니라 스스로의 무공도 폐지시켰
다.

이제 사손은 반항할 힘을 상실했다. 그러한 사손에게 복수를 하
겠다고 일검을 전개하거나 일장을 전개한다면 영웅호걸의 본분에
서 어긋날 것이다.

사람들 틈에서 홀연 한 사나이가 걸어나왔다.

"사손, 나의 선천이신 안령비천도(雁翎飛天刀)께선 너에게 목숨
을 잃었다. 내 자식된 도리로서 어찌 복수를 하지 않을 수 있겠
느냐?"

이렇게 말하며 성큼성큼 사손 앞으로 걸어왔다.

사손은 울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내가 영존을 해친 게 분명하다. 어서 나에게 출수해
라."

사나이는 칼을 뽑아쥐고 두 걸음 앞으로 바싹 다가갔다.

장무기의 머리에 혼란이 일었다. 만약 나서서 막지 않으면 의부
님은 필시 이 사나이에게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자기가 사나이의 행위를 제지한다면 물론 더 이상 나설 자가 없
겠지만 의부님은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더욱 큰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다. 게다가 의부님은 눈이 실명된데 이어 무공마저 상실했으
니 도저히 그 죄책감을 견뎌내지 못해 언제라도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게 뻔했다.

장무기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는 전신에 심한 진동이
일며 자신도 모르게 덩달아 앞으로 두걸음 내딛어 사나이의 앞을
가로막으려 했다.

그 즉시 사손의 싸늘한 호통소리가 들려왔다.

"무기야, 네가 만약 그 자의 복수를 막는다면 그보다 더한 불효
는 없을 것이다. 결국 난 목숨을 끊어야 하며 저승에 가서라도
편히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사나이는 칼을 번쩍 들어올리더니 갑자기 눈물을 왈칵 쏟았다.
그는 냅다 사손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울부짖었다.

"선친께서 살아 생전 협명을 떨쳐오셨는데, 저승에 계신 그 어
르신네께서 내가 무공을 상실한 맹인에게 살수를 전개하는 것을
보시면 필시 비겁한 놈이라 나무랄 것이니....."

그는 칼을 땅에 팽개치며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사람 틈바구니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이어 중년 부인이 앞으로 걸어나왔다.

"사손, 죽은 나의 남편 음양판관(陰陽判官) 윤대지(尹大地)를
위해 복수를 하겠다!"

그녀도 앞으로 바싹 걸어와 사손의 얼굴에 침을 뱉더니 울음을
터뜨리며 물러갔다.

장무기는 의부님이 계속 수모를 당하면서도 꼼짝하지 않는 것을
보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무림인이라면 생사를 가볍게
생각하는 반면 어떤 경우에서도 수모를 참지 않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다. 그것은 목숨보다 더 소중한 명예와 직결되기 때문이
다. 그래서 사가살이불가욕(士可殺而不可辱)이라 하지 않았던가!

복수를 하겠다고 앞으로 나선 두 사람은 모두 사손의 얼굴에 침
을 뱉고 돌아섰다. 이것은 실로 참기 어려운 모독이었다. 그러나
사손은 그러한 수모를 의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죄과를 철저하게 통한해 하며 참회하고 있는 것이었다.

사람 틈에서 또 한 사람이 나왔다. 이번에는 뺨을 때렸다. 다시
발로 걷어차는 사람이 있는 가 하면 욕설을 퍼붓는 자도 있었다.
사손은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모든 것을 참고 견디었다. 그는
피하지도 원망의 소리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사손은 삽심여 명으로부터 갖은 수모를 당했다. 나
중에 수염이 긴 도인이 앞으로 나섰다.

"빈도는 태허자(太虛子)라 하오. 나의 두 사형이 사대협과 겨루
어 목숨을 잃었소이다. 빈도는 오늘 사대협의 의연한 풍도에 절
로 고개가 숙여지는 것을 솔직히 털어놓는 바이오. 빈도 역시 흑
백 양도의 무수한 호걸들을 죽였소. 내가 만약 사대협에게 복수
의 명분을 빌려 모독적인 행위를 행한다면 나 역시 다른 사람으
로부터 똑같은 수모를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할 것이오."

말을 끝낸 그가 장검을 뽑아 왼손 손가락으로 검신을 살짝 튕기
자 맑은 금속성과 함께 장검이 두 동강으로 부러졌다. 그는 부러
진 검을 땅바닥에 팽개치더니 사손에게 정중히 인사를 올리고 물
러났다.

그의 뜻하지 않은 행동으로 인해 군호들은 제각기 수군거렸다.
태허자의 명성은 강호에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그가 방금
검을 부러뜨린 무공은 실로 대단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넓
은 흉금이었다. 그가 오히려 자책을 하고 물러나자 더 이상 나설
자가 없었다.

한데 뜻밖에도 아미파 제자 중에 한 중년 여승이 사손 앞으로
걸어나왔다.

"살부지구(殺夫之仇)를 갚기 위해 나도 당신에게 침을 뱉어야겠
어요!"

그녀는 말을 끝내기 무섭게 퉤! 하고 사손의 얼굴을 향해 침을
뱉었다. 그런데 침이 날아오는 순간 예리한 파공음이 곁들여 있
었다.

사손은 즉시 그것을 알아차렸으나 이미 죽음을 각오한 터였으므
로 오히려 홀가분했다.

'난 벌써 죽어야 할 몸, 너무 늦은 감이 있구나.'

아미파 여승의 입에서 못처럼 생긴 작은 암기가 뱉어진 것이다.
그 암기는 사손의 급소를 노렸으나 사손은 전혀 피할 생각을 하
지 않으니 결과가 뻔했다.

이 아슬아슬한 순간, 갑자기 한 줄기의 황색 인영이 번뜩이며
전광석화같이 허공을 수놓았다. 바로 황삼 여인이었다.

황삼 여인이 신속무비하게 소매를 떨치자 사손을 향해 날아가던
암기가 소매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황삼 여인의 입
에서 위엄있는 호통이 터졌다.

"사태의 법명은 무엇이오?"

여승은 기습이 실패로 돌아가자 크게 당황해 했다.

"정조(靜照)라 해요."

황삼 여인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음..... 정조라..... 그대가 속세를 떠나가 전에 남편의 이름
이 무엇이었죠? 그리고 어떻게 해서 사대협에게 살해되었는지 자
세히 말해 주겠어요?"

황삼 여인의 음성은 크지 않았지만 상대방의 마음을 짓누르는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

"내가 나서는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에요. 사대협
이 스스로의 죄과를 참회하기로 작심했으니 그와 원한이 있는 자
라면 누구라도 복수를 할 수 있소. 거기에 대해선 나도 참견하고
싶지 않아요. 물론 사대협도 원치 않을 것이에요. 그러나 복수를
빙자해 살인멸구를 하려는 자가 있으면 나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나서서 제지해야 하는 게 당연한 일이 아니겠어요!"

정조는 즉시 반발하듯 그녀의 말을 받았다.

"나는 사손과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왜 살인멸구를....."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실언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안색이 창백하게 변해
자신도 모르게 주지약을 힐끗 쳐다보았다.

황삼 여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맞아요. 그대는 사대협과 하등의 원한이 없는데 왜 그를 죽여
입을 막으려 했죠? 아미파 정(靜)자 배분의 제자가 모두 열 둘이
며 그 중 정형, 정허, 정공, 정혜, 정가, 정조가 불문에 귀의했
지만, 어느 누구도 속세를 떠나기 전에 가정을 가진 자가 없다는
걸 난 잘 알고 있어요."

정조는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려 물러나려 했다.

그러자 황삼 여인이 냉랭하게 외쳤다.

"그렇게 쉽게 물러날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그녀는 몸을 번뜩이는가 싶더니 이미 정조의 어깨를 향해 나꿔
채 갔다. 정조가 황급히 옆으로 피하자 황삼 여인은 초식을 변화
시켜 오른손 식지로 그녀의 옆구리를 찍는 동시에 발로 그녀의
다리 부위 환조혈(環조穴)을 걷어찼다.

정조는 그 자리에서 신음을 토하며 쓰러졌다.

황삼 여인은 냉소를 날렸다.

"주낭자, 이 살인멸구의 수법은 실로 악랄하군."

주지약은 냉랭하게 그녀의 말을 받았다.

"정조사저는 사손에게 복수를 하려던 것뿐인데, 살인멸구라니
대관절 무슨 소리죠?"

그녀는 황삼 여인이 더 이상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스스로 음성
을 높여 다음 말을 이었다.

"여기에 무수한 정파제자들이 있지만 정사(正邪)를 분별못하고
요마들과 어울려 있으니 통탄할 일이에요! 우리 아미파는 그들과
같은 대열에 끼고 싶지 않으니 이만 떠나야겠어요!"

그녀는 곧 아미파의 제자들을 이끌고 서둘러 하산했다. 두 명의
제자가 정조를 부축해 허겁지겁 뒤를 따랐다.

장무기는 황삼 여인 앞으로 다가가 정중히 몸을 숙였다.

"여협의 도움에 뭐라고 감사드려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성함이
라도 밝혀 주신다면 가슴 깊이 새겨두겠습니다."

황삼 여인은 담담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입에서 알듯모를
듯한 말이 내뱉어졌다.

"종남산(終南山) 이후 무상한 세월이 흘러 신조협려(神조俠侶)
는 영원히 강호에서 자취를 감추도다."

이렇게 말하며 공수로서 장무기에게 답례를 하고는 곧 흑삼, 백
삼을 입은 여덟 명의 소녀를 이끌고 표연히 떠나갔다.

장무기는 얼른 한 발짝 쫓아가며 소리쳤다.

"여협, 잠깐만!"

그 황삼 여인은 그의 외침을 아랑곳하지 않고 산봉우리 아래로
차츰 멀어져 갔다.

그러자 개방의 소방주인 사홍석이 소리쳤다.

"양(陽)언니! 양언니!"

그제서야 산중턱으로부터 황삼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개방의 일은 장교주께 부탁드려 도와달라고 하려무나."

장무기는 즉시 대답을 했다.

"분부에 따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황삼 여인의 마지막 음성이 들려왔다.

"미리 고맙다는 말을 드리겠어요."

그녀의 음성은 분명 멀리서 들려왔지만 마치 지척에 있는 듯 뚜
렷했다. 장무기는 그녀가 사라진 쪽을 응시하며 무엇을 잃은 듯
한 적막함에 젖었다.

공지가 성곤 앞으로 다가갔다.

"어서 장문인을 풀어 주라고 명해라. 만약 장문인께 변고라도
생겼다면 너의 죄업은 더욱 커질 것이다."

성곤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된 이상 동귀어진하는 수밖에 없다. 내가 설령 이 시각
에 공문화상을 풀어준다 해도 이미 때가 늦었다. 너는 장님이 아
닐 테니 지금쯤 불길이 이는 게 보일 텐데."

공지는 이내 표정이 굳어지며 고개를 돌렸다. 과연 사찰쪽에서
시꺼먼 연기와 함께 불길이 치솟고 있는 게 아닌가!

공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달마당에서 불이 났다! 어서! 어서 불을 꺼라!"

군승들은 우왕좌왕하더니 곧 앞을 다투어 산 아래로 달려갔다.

공지는 비통한 표정으로 합장을 했다.

"아미타불..... 소림 고찰이 겁난을 면치 못하겠군....."

불길이 워낙 거세게 일고 있어 도저히 잡을 길이 없음을 알았
다. 그런데 얼마 후 두 승려가 헐레벌떡 달려와 보고를 했다.

"사숙께 아뢰옵니다. 원진의 수하 반도들이 달마당에 불을 질렀
으나 다행하게도 명교 홍수기의 영웅들이 나서서 쉽게 불길을 잡
았습니다."

공지는 너무나 감격하여 장무기에게 걸어가 다시 합장을 했다.

"소림 천 년 고찰이 화겁(火劫)을 면하게 된 것은 모두 장교주
의 은덕이니 빈승이 소림 중승을 대신하여 감사를 드리는 바이
오."

장무기도 포권의 예로 답례하며 정중하게 말했다.

"너무 겸손하십니다. 우리로선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공지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공문사형께서 반도들에 의해 달마원에 갇혀 있소. 비록 불길이
잡혔다 하나 사형의 안위를 알 길이 없으니 장교주와 여러 영웅
들께서는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빈승이 직접 가서 확인을 해 봐
야겠소이다."

한쪽에서 이 말을 듣고 있던 성곤이 갑자기 광소를 터뜨렸다.

"하핫.....! 공문의 몸에 쇠기름과 돼지기름을 잔뜩 부어 놓았
기 때문에 불길이 일자마자 이미 저승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홍
수기가 달마당의 불길을 잡았다고 하나 절대 공문 노화상을 구출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달려가 그의 안위를 살펴본
들 아무 소용이 없다!"

성곤은 끝까지 자신의 음흉한 성품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공지는 안색이 창백하게 변하며 눈에서 분노의 불길이 뿜어졌
다. 불심이 깊은 그에게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드문 살기였다.

성곤은 이미 죽음을 각오한 터라 오히려 여유작작한 면을 보였
다. 아니, 최후의 발악일지도 모른다. 한데 성곤의 말이 끝나자
마자 산중턱에서 한 사람의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홍수기는 불을 끄는데 비상한 재주를 갖고 있는 반면, 후토기
는 땅을 파서 사람을 구하는 재주가 있지!"

이것은 범요의 음성이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그쪽으로 쏠렸다. 곧이어 후토기의
장기사 안원과 범요가 한 노승을 부축해 절봉 위에 모습을 드러
냈다. 노승은 다름아닌 장문인 공문선사였다.

세 사람의 옷은 모두 군데군데 불에 탄 흔적이 남아 있고, 심지
어 머리카락, 수염, 눈썹마저도 불에 그을러서 낭패한 모습들이
었다.

공지는 즉시 앞으로 달려가 공문을 끌어안았다. 그는 격동된 음
성으로 외쳤다.

"사형, 무사했군요! 다친 데는 없습니까? 이 사제가 무능해 사
형이 이런 고초를 당하게 했으니 죽을 죄를 졌습니다."

공문의 보기 흉한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띄어졌다.

"이 범시주와 안시주의 도움을 받아 지하 통로를 뚫고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네. 그렇지 않았다면 사제 자네를 영원히 보지
못할 뻔했네."

공지는 놀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명교 후토기가 땅굴을 파는데 일가견을 갖고 있다는 얘기는 들
었지만 오늘 그 신통력을 분명히 깨달았소."

그는 범요와 안원에게 정중히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나서 다시
말했다.

"범시주, 노승이 앞서 무례한 언동을 한데 대하여 심심한 사과
를 드리는 바이오. 대도 만안사의 약정을 취소할 것을 아울러 밝
히는 바이오."

그의 말은 실로 뜻밖이었다. 무림인은 약조를 생명처럼 여긴다.
게다가 그것이 무공을 겨루기로 한 약정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러니 만치 약정을 스스로 취소한다는 것은 무공을 겨루어 패배
하는 것보다 백 배나 더 불미스러운 일로 여겨왔다.

그런데 공지는 범요가 위험을 무릅쓰고 사형을 구해 준 은덕에
감격하여 스스로 약정을 취소한 것이다. 두 사람은 이번 일을 계
기로 하여 더욱 상대방을 존중하게 되었으며 적대감정을 풀고 지
기가 되었다.

한편, 성곤은 자신의 계획이 모조리 수포로 돌아가자 마지막 남
은 광기마저 꺾여 아무 말 없이 그저 송장처럼 누워 있을 뿐이었
다.

그런데 소림 공문대사는 어떻게 해서 이런 수모를 겪게 된 것일
까?

알고보니, 성곤은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워 영웅대회 전날 밤
에 전혀 예측하지 못한 상황하에서 공문의 혈도를 찍어 달마원에
감금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달마원 주위에 가름과 유황 등 인화
물질을 잔뜩 쌓아놓고 심복을 시켜 단단히 지키게 했다. 그리고
나서 성곤은 공지를 찾아가 자기의 분부에 따라 움직이도록 협박
을 했다. 만약 자기의 명령을 거역할 경우 당장 심복을 시켜 공
문을 산 채로 불태워 죽이겠다고 했다. 공지는 사형의 안위가 무
엇보다 중요하므로 그가 하라는 대로 이끌려 갈 수밖에 없었다.

그 후에 성곤은 자신의 계획이 틀어지자 심복에게 신호를 하여
달마원에 불을 지르게 한 것이다. 그것은 성곤이 던진 마지막 주
사위였다. 일단 달마당에 불길이 번지면 군호와 중승들이 불길을
잡는데 급급할 것이고, 그 틈을 타서 심복들이 자기를 구출할 것
이란 철저한 사전 계산에 의해 행해진 일이었다. 한데 뜻밖에도
그 마지막 탈출구까지 봉쇄당하고 말았다.

사실 양소는 명교의 제자들이 떼지어 소실산에 오기 며칠 전부
터 후토기에게 명하여 먼저 소림사로 통하는 지하 땅굴을 파도록
했다. 그것은 사손을 구출하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손이 사내에 갇혀 있지 않았으므로 후토기는 그를 찾아내지 못
했다. 그 대신 열 여섯 개의 나한상 등에 새겨진 글을 전부 지워
버릴 수 있었다.

나중에 장무기와 주지약이 손을 잡고 금강복마권을 공격하고,
성곤의 정체가 드러나 공지와 대립하게 되자 조민과 양소는 곧
짚이는 바가 있었다. 조민과 양소는 암암리에 상의한 결과 범요
로 하여금 홍수, 후토 양기의 형제들을 이끌고 소림사로 잠입해
불을 끄고 공문을 구출하게끔 한 것이다.

그런데 성곤의 계획이 워낙 치밀하고 악랄해 일단 달마당밖에
쌓아두었던 인화물질에 불이 붙자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치솟아
후토기의 형제 다섯 명이 희생당했다. 범요와 안원이 즉시 불길
을 뚫고 달마원 안으로 뛰어들어가 공문을 구출했지만 눈썹과 수
염이 모두 불에 그을렸다.

만약 미리 파 놓은 지하 땅굴이 없었다면 그들도 불기에 휩싸여
목숨을 잃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달마원과 이웃하고 있는 몇 채
의 승사(僧舍)도 불에 타 버렸지만, 불길이 더 이상 번지지 않아
대웅보전과 장경각, 나한당 등 요지는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
다.

공문과 공지는 잠시 상의하더니, 곧 명을 내려 성곤의 심복과
일당을 모두 사로잡아 후전(後殿)에 무릎을 꿇리고 대기 시키도
록 했다.

성곤은 소림사에 오래 머물렀기 때문에 적지 않은 심복을 포섭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괴수가 제압되고 장문인이 위험에서 벗어
나자 성곤 일당은 대세가 기운 것을 알고 감히 반항을 하지 못했
다. 그래서 나한당의 수좌가 중승들을 이끌고 그들을 색출하자
모두 풀이 죽은 채 순순히 굴복했다.

장무기는 사손 앞으로 다가가 외쳤다.

"의부님!"

그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사손은 오히려 환하게 웃었다.

"얘야, 이 의부는 세 분 고승으로부터 감화를 받고 크게 깨달음
을 받아 일생 동안 저질러온 죄업을 그나마 조금이라도 씻을 수
가 있었다. 난 여지껏 이렇게 마음이 편안한 적이 없었다. 너도
이 의부를 위해 기뻐해야 당연하거늘 어찌 슬퍼하는지 모르겠구
나."

장무기는 무슨 말로 그를 위로해야 좋을지 몰라 다시 목메인 소
리로 외쳤다.

"의부님!"

사손은 공문 앞으로 걸어가 무릎을 꿇었다.

"제자의 죄업이 너무 깊어 앞으로 남은 생애를 불문에 귀의하고
싶으니, 부디 불쌍하게 여기시어 받아주시길 간곡히 부탁합니
다."

공문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도액이 입을 열었다.

"이리 오너라. 널 제자로 거두겠다."

사손은 얼른 대답했다.

"제자가 어찌 감히 그런 복연(福緣)을 바라겠습니까?"

그가 공문을 스승으로 모시면 원(圓)자 배분의 제자가 되지만,
도액을 스승으로 모시게 된다면 공(空)자 배분으로서 공문, 공지
와 사형제로 호칭하게 된다. 사손은 스스로 그것이 과분한 일이
라 생각했다.

도액이 호통을 치듯 다시 입을 열었다.

"공(空)은 공(空)이듯이 원(圓)도 공(空)이로다. 속세의 모든
것이 바로 공(空)이 아니더냐!"

사손은 처음에 멍해졌으나 곧 그 참뜻을 깨달았다. 사부와 제
자, 배분과 법명, 그 모든 것이 불가(佛家)에서는 한낱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사손은 즉시 진지하게 말했다.

"사부님께서 공(空)이시니 제자도 공(空)입니다. 이 순간부터
무죄무업(無罪無業), 무덕무공(無德無功)의 일념으로 오직 부처
님을 섬기겠습니다."

도액은 껄껄 웃었다.

"좋을씨구! 너는 내 문하가 되더라도 여전히 사손일 뿐이다. 내
말의 뜻을 알겠느냐?"

사손은 정중히 머리를 숙여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돌맹이처럼 굴러온 사손은 한낱 허상(虛像)에
불과했습니다. 무심무물(無心無物)일진대 어찌 이름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사손은 문무를 겸비하여 도액으로부터 깨달음을 얻자 이내 불가
의 심오한 정의(精義)를 성오(性悟)할 수 있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그는 불문에 귀의해 결국 일대 고승이 되니........

도액이 다시 입을 열었다.

"가자, 사바세계에서 발을 떼자꾸나."

그는 사손의 손을 잡고 도겁, 도난과 함께 천천히 하산했다. 공
문, 공지, 장무기 등은 일제히 몸을 숙여 전송했다.

금모사왕 사손, 그는 삼십 년 전에 강호에서 명성을 날리기 시
작했으며 무수한 경세지사(驚世之事)를 저질러왔다. 그러한 그가
오늘날 속세의 은원을 청산하고 불문에 귀의하자 군웅들은 모두
새로운 감회에 젖었다.

장무기는 기뻐하는 한편 가슴 밑바닥에서 뭉클한 감정이 솟는
것을 억제할 수 없었다.

공문이 그에게 넌지시 말했다.

"여러분들께서 소림을 찾아주셨는데 뜻하지 않은 변고로 인해
제대로 대접을 하지 못해 송구스러울 뿐이오. 앞으로도 여러분을
이렇게 한자리에 모실 기회가 많지 않을 테니 모두 사내로 가서
잠시 얘기를 나누심이 어떻겠소?"

군호들은 그의 청을 받아들여 소림사로 향했다. 공문은 제자들
을 시켜 그들을 융숭히 대접했다. 아울러 공문, 공지가 앞장서
제자들을 이끌고 불행하게 목숨을 잃은 영혼들을 위해 초도(超
度)를 해주었다.

군호들도 그 자리를 빌어 일일이 향을 피워 애도의 뜻을 표했
다.


----- 제 7 권 3 장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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