飛狐外傳 비호외전 1

3학년2반 | 2022.03.09 07:17:11 댓글: 0 조회: 1182 추천: 1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53998
비호외전
지은이 / 金 庸
역자 서문
이 작품은 김용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비호외전(飛狐外傳)>을 완역한 것이
다. 작가 김용은 홍콩의 저명한 문필가이자 홍콩 제일의 신문인 <명보(明報)>의
주필 겸 사장이다.
이미 김용의 작품에 친숙할대로 친숙해진 한국의 독자들에게 더 이상 작가에
대한 소개의 말은 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유교, 불교, 도교 등 중국 전통사
상을 학문적으로 깊이 연구 통달한 그는 작품 속에 자신의 해박한 지식을 쏟아
부어 위대한 대중문화의 선도자로 공인받고 있으며, 그의 작품에 대한 연구가
문학가들과 학자들 사이에 광범하게 진행되고 있다. 심지어 <홍루몽(紅樓夢)>에
대한 연구를 <홍학(紅學)>이라고 하듯이 김용의 작품에 대한 연구는 택금학<금
학(金學)>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 작품 <비호외전>은 대협(大俠) 호비(胡斐)의 감동적인 협행(俠行)을 묘사
한 김용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데, 특히 의로운 협객인 주인공 호비의 대장부
다운 기상을 힘차게 그려내고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 호비는 <녹정기(鹿鼎記)>의 주인공 위소보와 성격상 유사한
점이 많다. 어린 나이에 걸맞지 않게 지모가 출중하고 임기응변에 능하며 거침
없이 정의를 위하여 돌진하는 당찬 일면이 그러하다. 하지만 위소보가 교활하고
이기적인데 반하여 호비는 의협심이 흘러넘치는 피끓는 젊은 영웅이다.
일찌기 김용은 그의 14부 작품에 대한 그 자신의 평가에서 <흥미를 가지고 논
한다면 작중 인물의 감정노출이 격렬한 [신조협려(영웅문 2부)], [의천도룡기
(영웅문3부)], [소오강호(열웅지)], [비호외전], 이 네 작품을 꼽겠습니다. 문
학적인 가치의 측면에서 논한다면 장편소설로 [천룡팔부(대륙의 별)], [녹정기]
를 들 수 있습니다.>라고 밝힌 바 있다. 그만큼 이 작품은 흥미로 일관되어 있
다.
서구의 향락적인 퇴폐문화가 이 땅의 젊은이들의 정신을 오염시키는 이 시대
에 역자는 이 작품이 부족하나마 청소년들에게 의협심(義俠心)을 심어주고 건전
한 기풍을 진작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심정이 간절하다.
김용은 이 작폼의 후기에서 <맹자가 말하기를 "미색에 현혹되지 않고, 부귀빈
천에 구애받지 않으며, 강한 자 앞에서 굽히지 않는 것이 대장부의 삼대조건이
다."라고 했습니다. 나는 이 작품 <비호외전>의 주인공 호비를 통해 맹자가 말
한 대장부를 형상화하고 싶었습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김용의 작품 가운데 가장 줄거리의 전개가 박진감 넘치고 남아의 기개가 흘러
넘치는 걸작 <비호외전>의 세계에 입문하시기를 감히 권하며.......
신미년 어느 봄날.

키가 크고 비쩍 마른 대한이 커다란 수레를 잡아당기자 노새는 반발짝도 걸음
을 옮기지 못하고 그대로 멈추어 버렸다. 그러자 수레안의 아리따운 부인은 마
차에서 내려 대청으로 다시 걸어들어왔다. 전귀농도 어쩔 수 없이 따라 들어오
고 있었다.
백발노파의 원한
[호일도(胡一刀)의 곡지혈(曲池穴)과 천추혈(天樞穴)!]
[묘인봉(苗人鳳)의 지창혈(地倉穴)과 합곡혈(合谷穴)!]
쉰듯한 음성이 나직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그 속에는 원한과 분노의 기운이 가득했다. 말소리는 입에서 나오는 것이 아
니라 천 년, 만 년의 영원한 저주를 담고 있는 것 같았으며 뱉어내는 한 마디
한 마디에는 피와 원한이 서려있는 듯 했다.
딱 딱 딱 딱! 네 번의 소리와 함께 네 가닥의 금빛 광채가 번득이며 금표(金
)가 잇따라 두 조각의 목패(木牌)로 쏘아져 나갔다.
두 개의 목패에는 앞뒤로 사람의 전신이 그려져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짙
은 구렛나루가 있는 거칠게 생긴 대한(大漢)으로 그림 옆에 호일도라는 석 자의
주석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 다른 조각에 그려진 그림은 비쩍 마르고 키가 큰
사내로서 그 옆에는 묘인봉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림에는 신체의 혈도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고 목패의 아래 쪽에는 자루가
달려 있었다. 두 명의 몸놀림이 민첩한 장정들이 각기 한개 씩 목패를 들고 연
무청에서 이리저리 민첩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대청 동북쪽의 한 의자에는 오십여 세의 백발 노파가 앉아서 호일도와 묘인봉
의 혈도의 명칭을 부르짖고 있었고, 이십여 세쯤 되는 경장 차림의 준수한 젊은
이가 표낭( 囊)에 십여 대의 금표를 꽂은 채 그 노파가 외치는 대로 목패를 향
해 금빛 찬란한 표창을 던졌다.
목패를 들고 있는 장정들은 머리에 철사로 엮어 만든 투구를 쓰고 몸에 두터
운 솜옷을 입은 데다가 소가죽으로 만든 조끼를 걸치고 있는 것이 실수를 대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높이 뛰기도 하고 몸을 낮추기도 했으며 목패
를 흔들어 적중시키지 못하도록 하기도 했다.
대청 밖의 창문에는 한 소녀와 젊은 사내가 엎드려 있었다. 두 사람은 창호지
에 구멍을 뚫고 안을 엿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 젊은이의 솜씨가 비범하고
금표를 던지는 것이 정확한 것을 보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놀란 빛을 띠우
고 있었다.
하늘은 어둠침침한 검은 구름으로 가득 차 세찬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한 차
례 뇌성벽력이 울리며 번갯불이 먹구름을 찢고 예리하게 뻗쳐나와 사위를 밝히
고 있었다. 콩알 같은 빗방울이 땅바닥을 후려치며 튕겨 창밖에 엎드려 있는 두
젊은 남녀의 옷깃을 적셨지만, 그들은 호기심에 아랑곳하지 않고 창구멍에 눈을
대고 바라보았다.
이때 노파가 입을 열었다.
[정확성은 그런대로 괜찮지만 힘이 실리지 않았구나. 오늘은 이 정도로 연습
을 끝내자.]
그러면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창밖에 있던 소녀는 젊은 사내를 잡아당겨 황급히 마당으로 내달았다. 그 사
내는 나직이 말했다.
[도대채 뭐하고 있는거지?]
소녀는 대답했다.
[무슨 일이긴요. 표창 던지기를 연마하고 있잖아요. 그 청년의 정확성은 꽤
괜찮은 편인데요?]
그 사내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누가 그걸 몰라서 묻나? 왜 목패에 호일도니 묘인봉이니 하는 이름을 써놓고
있느난 말이야.]
소녀는 눈망울을 굴리며 말했다.
[글쎄, 그 점은 약간 이상하네요. 하지만 사형이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알겠
어요? 가서 아버님에게 여쭤봐요.]
이 소녀는 십 팔구 세 정도의 나이로 얼굴은 동그란 계란형에 눈동자는 새카
맣고 두 뺨에 홍조를 띠고 있는 것이 청춘의 발랄한 기상이 넘치고 있었다. 젊
은 사내는 짙은 눈썹에 커다란 눈망울을 가지고 있었으며 소녀보다는 대여섯 살
더 먹어보였고 태도는 거칠었으며 얼굴은 상처로 얽은 자국이 잔뜩 나있었다.
얼굴은 못생긴 편이지만 발걸음은 경쾌하여 온몸에 활력이 넘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마당을 가로질러 갔다. 비는 더욱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고 그들의
얼굴은 빗방울로 얼룩졌다. 소녀는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았다. 발그레한 얼
굴이 빗물에 씻겨지자 더욱 간드러지고 요염하게 보였다. 사내는 멍하니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는 일부러 삿갓을 기울여 빗방울이 사내의 목덜미로 떨어지도록 만들었는
데도 그 사내는 정신이 팔려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소녀는 훗! 하고 웃더
니 가볍게 한번 불렀다.
[바보!]
그리고 그녀는 마주보이는 대청을 향해 달려갔다. 대청 안의 한 모서리에는
커다란 모닥불이 피워져 있었고 이십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주위에 늘어서서
비에 젖은 옷을 말리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몸에 검은색이나 남색의 소매가 짧
은 반팔 옷을 입고 있었으며 어떤 자는 몸에 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얼핏 보기
에 표국( 局)의 표사들과 당자수(唐子手), 그리고 짐꾼들 같았다. 또한 세 명의
무관(武官) 차림을 한 사내들도 서 있었다.
이 무관들은 비를 피하러 막 들어와서 젖은 옷을 벗고 있었다. 그들은 갑자기
아름다운 소녀가 나타나자 모두들 눈에 생기가 돌며 그녀에게 시선을 모았다.
그 소녀는 모닥불을 쬐고 있던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다부지면서도 깡마
른 한 노인을 잡아당기며 귓속말로 방금 전 후청(後廳)에서 본 일을 나직이 이
야기했다.
그 노인의 나이는 오십여 세 정도였으며 키는 다섯 자에 머리는 반백이 되었
지만 안광은 형형하게 빛나며 늠름한 위엄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소녀의 말을
듣고 눈살을 찌푸리더니 나직이 꾸짖었다.
[또 너는 사건을 일으킬 뻔 했구나. 만약에 상대가 알았더라면 그야말로 스스
로 화를 자초하지 않았겠느냐?]
그 소녀는 혀를 날름 내밀어 보이고 말했다.
[아버지, 이번에 저는 아버님을 모시고 표화물을 호송하면서 여덟번째 꾸지람
을 듣는 셈이네요?]
그 노인은 정색을 하고 꾸짖었다.
[너에게 무공을 가르칠 때 다른 사람들이 훔쳐보면 내가 어떻게 했지?]
소녀는 히히덕거리며 말을 하다가 그 소리를 듣자 그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
다. 작년에 누군가 그녀의 부친이 무공을 연습하는 것을 훔쳐보자 부친은 일언
반구 말도 없이 수전(袖箭)을 내쏘아 그 사람의 한쪽 눈을 멀게 만들었다는 사
실을 상기했다. 사실 그가 사정을 두고 던졌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
수전은 그를 즉사시켰을 것이었다.
그때 부친은 남의 무공을 훔쳐 배우려는 것은 무림의 금기(禁忌)이며 재물을
훔치는 것보다 백 배나 나쁘다고 말했던 것이다.
소녀는 사실 방금 전의 일을 후회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으나 남에게 지기 싫
어하는 성깔이라 조금도 지지않고 대꾸했다.
[아버지, 그 사람의 표법( 法)은 평범해서 누구도 그것을 훔쳐 배우려고 하지
않을 것임을 장담할 수 있어요.]
노인은 안색을 굳히며 꾸짖었다.
[너, 이 놈의 계집애야! 어째서 입만 뻥긋하면 다른 사람의 재간은 형편없다
고 하느냐?]
소녀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제가 백승신권(百勝神拳) 마(馬)표사의 딸인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죠?]
세 무관들은 불을 쬐며 곁눈질로 그 아리따운 소녀를 훔쳐보곤 했다. 두 부녀
의 말소리가 낮아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가 마지막
말은 큰 소리로 했기 때문에 무관들은 그녀가 백승신권 마 노표사의 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 무관은 왜소하고 수척하게 깡마른 노인을 바라보고, 다
시 곁눈질로 대청 입구에 꽂아놓은 노란 바탕에 달리는 말이 수놓아진 표기(
旗)를 힐끗 쳐다보고는 코웃음을 쳤다.
(흥, 백승신권이라고? 가소롭군!)
이 노인의 성은 마씨이고 이름은 행공(行空)이며 강호에서의 별호는 백승신권
이라고 했다. 그 소녀는 그의 외동딸인 마춘화(馬春花)였다. 이 이름은 약간 속
되 보였으나 강호의 무인(武人)들은 그저 춘화, 춘화하고 불렀다. 그리고 그녀
와 함께 남의 무술을 훔쳐보았던 젊은이는 성은 서(徐)씨요, 이름은 외자인쟁
(錚)으로 마행공의 제자였다.
서쟁은 모닥불 옆에서 불을 쬐고 있다가 무관들이 끊임없이 그녀를 곁눈질하
는 것을 보자 성이 나서 그들을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 한 무관이
고개를 돌리다가 서쟁과 시선이 마주치자 '네 놈이 눈을 부릅뜨면 어쩔거냐' 하
는 식으로 그 무관은 매섭게 서쟁을 노려보았다.
서쟁은 본래 불같은 성격이라 상대방이 무례하게 나오는 것을 보자 대뜸 얼굴
빛을 굳히고 그 무관을 노려보았다. 그 무관은 서른 살 정도로 키가 크고 어깨
가 떡 벌어져 다부진 인상을 안겨주었다. 그 무관은 껄껄 웃으며 왼쪽에 있는
동료에게 입을 열었다.
[어이 자네, 저것 보게. 저 녀석은 마치 닭싸움이라도 할 것 같지 않은가? 자
네, 혹시 저 녀석 마누라를 훔친 것 아닌가?]
두 명의 무관은 서쟁을 바라보며 낄낄거리며 웃었다.
서쟁은 대노해서 몸을 벌떡 일으키며 호통을 내질렀다.
[당신, 뭐라고 했소!]
그 무관은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
[젊은이, 내 말이 지나쳤나? 그렇다면 자네에게 사과를 하지.]
서쟁은 성질이 곧은 편이라 상대방이 사과를 한다는 말에 그냥 자리에 앉으려
고 했다. 그런데 그 자가 다시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 사람은 자네 마누라가 아니라 자네 누이동생을 훔쳤나 보군.]
서쟁은 몸을 벌떡 일으켜 달려들어 손을 쓰려고 했다. 그러자 마행공이 호통
을 내질렀다.
[쟁아, 앉거라!]
서쟁은 얼굴이 시뻘게지며 말했다.
[사부...... 사부님은 듣지 못하셨나요?]
마행공은 담담히 말했다.
[강호의 일을 잘 모르는 벼슬아치들이 몇 마디 농담 좀 했기로서니 큰 손해를
보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서쟁은 사부의 말이라면 언제나 한 마디도 거역해 본 적이 없는지라 매섭게
그 무관을 노려보며 천천히 주저앉았다. 그 세 명의 무관은 와! 하니 웃음을 터
뜨렸고 더욱 방자해져 거리낌없이 마춘화를 바라보는 데, 그 눈에는 음탕하고
사악한 빛이 가득했다.
마춘화는 그 사람들이 무례한 것을 보자 화를 터뜨리려고 했으나 평소에 부친
이 관부(官府)의 비위를 거스리려고 하지 않는 것을 잘 알고 있는지라 어떻게
하면 저 못난 무관들을 골탕먹일 수 있을까 궁리하고 있었다.
별안간 번개불이 번쩍하면서 온 대청 안을 환히 밝혔고 곧이어 천둥소리가 고
막을 찢을 듯 한 것이 아마 벼락이 대청 위로 떨어진 것 같았다. 이어서 하늘의
뚝이 터진 듯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빗소리 가운데 대청 입구에서 누군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허, 이거 정말 엄청나게 쏟아지는구려. 보장(堡莊)에서 비를 좀 피했다 가야
겠구려.]
장원의 한 하인이 말했다.
[대청에 모닥불을 피워 놓았으니 나으리께서는 들어가시지요?]
대청의 문이 열리면서 한쌍의 남녀가 들어섰다. 남자는 키가 훤칠하고 준수한
용모에 등에 보따리를 짊어지고 있었고 나이는 삼십 칠팔 세 정도 먹어 보였다.
여인은 스무 두세 살 정도의 살결이 눈처럼 희고 눈과 눈썹이 그린 듯 선명한
절세가인이었다.
마춘화도 미녀라고 할 수 있었으나 그 여인이 나타나자 즉시 빛을 잃고 말았
다. 그들 두 사람은 비옷을 입지 않았다. 비록 젊은 부인은 몸에 남자의 옷을
걸치고 있었지만 이미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남자는 젊은 부인의 손을 잡고 있었는데 두 사람의 표정이나 태도가 친밀해
한쌍의 신혼부부 같았다. 그 남자는 짚단을 한무더기 찾아 바닥에 깔고 젊은 부
인을 부축해 앉혔다. 그 태도가 매우 온화하고 알뜰해 보였다.
두 사람의 옷차림 또한 화려했다. 젊은 부인의 머리에는 봉황을 수놓은 구슬
이 박힌 금비녀가 꽃혀 있었는데, 그 진주는 새끼 손가락만하고 광채가 은은히
나는 것이 매우 진귀한 것처럼 보였다.
마행공은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
(이 지역은 길이 외져 강도들이 출몰을 하는 곳인데 보아하니 이 한쌍의 부부
는 부자나 귀한 집안 사람인 것 같은데 어째서 시종도 한 명 거느리지 않고 둘
이서만 길을 재촉하고 있는 것일까?)
그는 한평생을 강호에서 활동한 사람이었지만 두 사람의 내력을 알아낼 수가
없었다.
마춘화가 보기에 젊은 부인의 표정이나 태도가 위축되어 있고 눈이 불그레하
게 충혈되어 있는 것이 도중에 큰 비를 만나 고생을 한 것처럼 보였다. 더구나
이렇게 젖은 옷을 입고 불을 쬐게 된다면 습기가 몸안으로 스며들어 병을 앓기
심상이라 즉시 옷상자를 열고 자기 옷을 꺼내 젊은 부인에게 가까이 다가서며
나직이 말했다.
[낭자(娘子), 내 옷이 초라하더라도 잠시 갈아 입고 옷을 말리도록 하세요.]
그 부인은 고마운듯 그녀에게 웃어보이고 몸을 일으키더니 남편에게 시선을
던져 동의를 구했다. 그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마춘화에게도 씩 웃어 보이
며 사의를 표했다.
마춘화는 그 부인을 데리고 후청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세 명의 무관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야릇한 표정을 짓는 것이 그 부인의
감추어진 아름다운 몸매를 상상하는 것 같았다.
방금전 서쟁과 입씨름을 했던 무관이 가장 대담한듯 나직이 말했다.
[내가 보고 오지.]
다른 한 명이 웃으며 말했다.
[하(何)형, 너무 지나친 장난은 하지 말게나.]
하씨 성을 가진 무관은 눈을 깜박여 보이더니 몸을 일으켜 몇 걸음 내딛다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돌아와 바닥에 내려놓은 칼을 집어 허리에 찼다.
서쟁은 그에게 모욕을 당한지라 속으로 줄곧 성이 가라앉지 않은 상태에서 그
가 칼을 차고 후원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을 보자, 고개를 돌려 사부를 바라보았
다.
마행공은 눈을 감고서 양신(養神)을 하고 있었으며 두 표사와 다섯 명의 당자
수, 십여 명이나 되는 짐꾼들은 표차화물을 지키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서쟁은
당장 어떤 사고가 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 무관을 따라나섰다.
그 무관은 등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나자 몸을 돌려 서쟁인 것을 확인하고 헤
벌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애숭이, 볼일이 있는가?]
서쟁도 지지않고 대꾸했다.
[흥! 냄새나는 벼슬아치님, 당신은 무슨 볼일이 있소?]
무관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네 몸이 근질근질하냐?]
[그렇다. 하지만 우리 사부님께서 너를 때리지 못하게 말리시는구나. 우리 조
용히 한번 붙어보자. 어떠냐?]
무관은 자기의 무예 솜씨를 믿고, 이 좀 멍청한 데가 있는 젊은이를 안중에
두지 않았다. 그러나 서쟁의 표국 사람들은 많고 자기들은 세 사람 뿐인지라 패
싸움을 벌이면 손해를 보겠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이 삼 푼쯤 모자
라 보이는 얼뜨기 녀석이 조용히 싸워보자고 청하니, 잘 됐다 싶어 혼쭐을 내주
자고 마음을 먹고 웃으며 말했다.
[좋다. 그러면 좀더 멀리 가자! 만약에 네 사부가 듣게 된다면 네 실력을 마
음껏 발휘할 수가 없겠지.]
두 사람은 곧장 뜨락을 지나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 손을 쓰려고 했다. 그런
데 회랑 저쪽에서 한 사람이 걸어나왔다. 그는 몸에 비단 장포를 걸치고 있었는
데 이목이 청수한 것이 바로 조금전 표창 던지기를 연습하던 젊은이였다.
서쟁은 마음 속으로 움직이는 바가 있었다.
(아하, 이 사람의 연무청을 빌려 싸우는 것이 좋겠구나!)
그는 앞으로 나가 포권을 하며 입을 열었다.
[형씨, 실례 좀 하겠습니다.]
젊은이는 반례를 하며 말했다.
[손님께서는 무슨 볼일이 있으신지요?]
서쟁은 무관을 가리키며 말했다.
[불초는 이 총야(總爺:벼슬하는 무관을 높여 부르는 말.)와 유감이 있는데 형
씨의 연무청을 좀 빌릴까 하오이다.]
젊은이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집에 연무청이 있는 것을 알고 있을까?)
그러나 무예를 익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무예를 겨루고 싸우는 광경을
구경하기를 어떤 일보다 좋아하는지라 즉시 대답을 했다.
[좋소이다. 좋아요!]
그는 즉시 두 사람을 데리고 연무청으로 들어섰다.
연무청에는 이미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무관은 사면 군기가(軍器架)에
는 칼, 창, 검 등이 모조리 갖추어져 있을 뿐아니라 사포(沙包), 전파(箭 ), 석
쇄(石鎖), 석고(石鼓)가 곳곳에 놓여 있으며 서쪽 모서리 바닥에는 일흔 두 개
의 매화춘(梅花椿)까지 박혀있는 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생각했다.
(원래 이 집안 사람들은 무공을 아는구나. 아마도 무공이 괜찮을 것 같군.)
그는 젊은이에게 포권을 하고 물었다.
[불초는 귀장에 비를 피하려고 온 사람이외다. 아직까지 주인의 존성대명을
가르침 받지 못했구려.]
젊은이는 재빨리 반례를 하며 말했다.
[소인의 성씨는 상(商)이고, 이름은 보진(堡震)이라고 하오이다. 두 분의 존
호는 어떠하신지요?]
서쟁은 서둘러 말했다.
[나는 서쟁이라고 부른다오. 우리 사부님은 비마표국(飛馬標局)의 총표두로서
백승신권 마행공이라 하오이다.]
그리고 득의양양해서 그 무관을 한번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너는 우리 사부님의 명성을 들었을 터이니 너는 이제 끝장난거다!)
상보진은 두 손을 마주잡고 말했다.
[오래전부터 명성은 익히 들었소이다. 그리고 이 분은 어떻
게 되시는지요?]
무관은 대답했다.
[불초는 어전시위(御殿侍衛) 하사호(何思豪)라 하오이다.]
상보진은 말했다.
[아, 알고보니 한 분은 시위 대인이시군요. 소인은 평소 경사(京師)의 대내에
십팔 명의 고수가 있다고 들었는데 다들 하대인과 친구시겠군요?]
하사호는 대답했다.
[그들 태반은 알고 있지요.]
기실 황제의 신변에 있는 시위들은 모두 네 등급으로 나뉘어 있었다. 시위반
령(侍衛班領), 십장(什長) 그리고 삼 등급의 남령시위(藍翎侍衛)가 있는데 모두
다 황실의 친척이나 귀족의 자제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넷째 등급으로 한시위(漢侍衛)가 있었는데 이 하사호는 기껏해야 시위
가운데에서 가장 말단인 남령(藍翎) 한시위(漢侍衛)에 지나지 않았으며, 소위
대내 십팔 고수를 그는 알아도 대내 십팔 고수는 그를 알 리가 없었다.
서쟁은 큰 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공자, 당신은 공중인이 되어 주시오. 나는 이 하가와 공평하게 한번 겨루어
보겠소. 그리고 우리가 싸웠다는 것은 절대로 남에게 발설하지 마시오.]
서쟁은 사부가 알고 꾸짖을까 두려웠다.
하사호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너같은 멍청한 녀석을 이긴다 하더라도 수치스럽기 짝이 없는데 남에게 자랑
까지 하겠느냐, 이 멍청한 녀석아! 어서 덤벼라!]
그리고 장포를 걷어올려 허리춤에 찔렀다.
서쟁도 장포를 걷어올리고 땋은 머리를 감아 올리고 대권(對拳)의 자세를 취
하여 두 손을 쥔 채 상대방을 바라보는데 퍽이나 여유가 있어 보였다.
하사호는 그의 자세가 사권(査拳)의 제자들이 쓰는 기수식인 것을 알아보고
안심을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백승신권이 다 뭐냐? 이놈아, 이 사권은 세 살 먹은 어린애도 할 줄 아는데
그게 뭐가 대단하냐?)
원래 담(潭), 사(査), 화(花), 홍(洪)은 줄곧 북권(北拳) 사대가(四大家)로
지칭되어 왔다. 북권 사대가란 담퇴(潭腿)와 사권(査拳), 화권(花拳), 홍문(洪
門) 등 네 문파의 권술을 일컫는 말이며 북방에서는 상당히 넓게 퍼져 권술을
연마한 사람이라면 한 두수 정도는 알고 있는 권법의 입문 단계였다.
하사호는 상대방의 권법이 평범한 것을 보고 상보진에게 웃으며 말했다.
[못난 꼴을 보이게 되었소이다.]
그리고는 상보야마분종(上步野馬分 )이라는 초식을 펼쳐서 서쟁을 후려치려
했다. 그가 펼치는 것은 태극권(太極拳)이었다. 이 당시에는 태극권이 성행하였
고 모든 사람들이 지극히 무서워 하는 내가권법(內家拳法)으로 정평이 나 있었
다.
서쟁은 소홀히 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왼발을 뒤로 내밀며 의자에 앉는 듯한
자세를 취하면서 오른손을 밑으로 누르고 왼손을 위로 올려 후차보료장(後叉步
掌)이라는 일초를 펼쳤는데 지극히 신속했다.
하사호는 상대방의 초식에 실린 힘이 약하지 않은 것을 보고 재빨리 전신포호
귀산(轉身抱虎歸山)이라는 일초를 펼쳐 아래서 위로 찔러오는 일초를 피했다.
서쟁은 궁보가타(弓步架打)라는 일초를 펼쳐 오른 주먹으로 상대의 안면을 치
려 들었다. 하사호는 피할 틈이 없자 여봉사폐(如封似閉)라는 일초를 펼쳐 두
손으로 막게 되어 두 사람의 주먹과 손이 맞닥뜨렸다.
하사호는 은근히 손목이 아파오는 것을 느끼고 내심 생각했다.
(이 녀석의 뚝심이 꽤 세구나!)
삽시간에 두 사람은 권법을 펼쳐 십여 초를 겨루었다.
상보진은 서쟁의 발걸음이 침착하고 온건하며 주먹에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알
았고, 하사호는 신형이 표홀한 것으로 보아 경신법의 기초가 정순한 것을 알 수
있었다.
한참 싸움이 무르익게 되었을 때 하사호가 껄껄 소리내어 웃으며 일 장을 서
쟁의 어깨로 후려쳤다. 그러자 서쟁은 발을 들어서 걷어찼으나 하사호는 몸을
기울여 피하며 옥녀천사(玉女穿梭)라는 일초로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서쟁의 팔
을 걷어찼다.
서쟁은 아랑곳하지 않고 주먹을 휘둘러 공격을 취하다가 갑자기 주먹을 내뻗
으며 궁보벽타(弓步劈打)라는 일초를 펼쳐 하사호의 가슴팍을 내리쳤다.
이 주먹에 실린 힘은 지극히 무거워 하사호는 휘청하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서
더니 끝내는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자 옆에서 간드러진 여인의 음성이 들
려왔다.
[멋져요!]
상보진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두 명의 여인이 연무청의 입구에 서 있었는데
한 명은 젊은 부인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처녀였다. 상보진은 온 정신을 쏟아
싸움을 구경하느라 등뒤에 사람이 온 것도 모르고 있었다.
마춘화와 젊은 부인은 옷을 갈아 입고 이곳을 지나다가 무공을 겨루는 기척을
듣고 연무청 입구로 다가온 것이다. 마춘화는 사형이 무관과 싸움을 벌이고 있
는 것을 구경하고 있다가 사형이 이기자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러 갈채를 보
낸 것이었다.
하사호는 이 주먹이 여간 아프지 않았고, 게다가 여자들 앞에서 창피한 꼴을
당하자 수치가 분노로 변해서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허리에서 칼을 뽑아들
고 곧장 앞으로 달려들었다.
서쟁은 두려워하지 않고 여전히 사권을 펼치며 맨손으로 상대하려고 했다. 하
지만 상대방이 무기를 들게 되니 자연히 수세에 처하게 되었다.
마춘화는 무관의 얼굴 표정이 험악한 것이 목숨을 걸고 싸우려는 것 같아 내
심 걱정이 되었다.
젊은 부인은 그녀의 소매를 잡아끌며 말했다.
[우리 그만 가요? 나는 사람들이 칼을 쓰거나 주먹질하는 것을 가장 싫어해
요.]
하지만 이러한 형세에서 마춘화는 자리를 뜰 수가 없어 넌즈시 말했다.
[잠시만 더 봐요.]
젊은 부인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혼자 그 자리를 떴다.
상보진은 정신을 가다듬고 그 무관의 도세(刀勢)를 보며 한편으로는 서쟁이
피하고 공격을 하는 수법을 유의하며 한 대의 표창을 거머쥐었다. 만약에 무관
이 칼로 사람을 해치려 한다면 손을 써서 구원할 참이었다.
서쟁은 두 눈을 부릅뜨고 칼이 움직이는 방향을 예리하게 관찰하였다. 순간적
으로 하사호가 칼을 휘둘러 다리를 베려는 순간 서쟁은 기다란 팔을 뻗쳐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정확하게 그의 콧등을 쥐어박았다. 하사호가 뒤로 비틀하며
물러서자 서쟁은 잽싸게 손목을 잡아비틀며 그의 칼을 빼앗았다.
하사호는 그가 빼앗은 칼을 휘둘러 올까봐 재빨리 몸을 뒤로 날리며 손을 들
어 얼굴을 문지르니 벌겋게 피가 묻어 나왔다.
서쟁은 상대방의 칼을 땅바닥에 내던지며 입을 열었다.
[이래도 또 함부로 죄없는 사람을 욕하겠소?]
하사호는 부끄러운 빛을 띠우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상보진은 뒤에서 서쟁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눈짓을 했다. 그래도 서쟁이 알
아차리지 못하자 상보진은 큰 소리로 말했다.
[쌍방이 승부를 가릴 수가 없군요. 두 분 다 무공이 훌륭하여 소제는 정말 탄
복했소이다.]
서쟁은 펄쩍 뛰었다.
[아니....... 아니! 어째서 승부가 나지 않았단 말이오?]
상보진은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두 분의 무공은 각기 독특한 점이 있소이다. 서형의 사권은 순수하면서 익숙
하다고 할 수 있고, 하대인의 태극권과 태극도는 더욱 무섭기 이를데 없소이다.
서형, 당신은 일시 요행으로 이긴 것이고 기실 진짜 무공을 따진다면 역시 하대
인을 내세워야 할 것이외다.]
그러면서 상보진은 손수건을 꺼내 하사호의 코피를 닦아주었다.
서쟁이 항의를 하려고 하는데 마춘화가 입을 열었다.
[사형, 그를 아랑곳하지 말아요. 자, 우리 가요?]
서쟁은 하사호에게 두 대나 먹였기 때문에 어느 정도 울화는 가셨지만 상보진
이 그를 두둔하며 나서자 성이 나서 그를 한번 매섭게 바라보고는 사매를 따라
연무청을 나섰다.
뜨락으로 들어서자 하늘에서 뇌성벽력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상보진과 하사호
가 크게 웃는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틀림없이 두 사람이 그를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싸움에서 이기기는 했으나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못마땅해 씩씩거리며 모
닥불가에 앉았다. 이때 사부는 두 눈을 감을락 말락 하면서도 매우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한참 후에 하사호가 걸어 들어와 자리에 앉으며 두 무관에게 귓속말을 했다.
무슨 말을 했는지 그들은 일제히 껄껄 웃으며 곁눈질로 그 아름다운 부인을 힐
끗 쳐다보았다.
마행공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기지개를 켜며 표차 옆으로 다가가 살피더니
갑자기 서쟁을 불렀다.
[쟁아, 이리 오너라. 이것이 도대체 어떻게 된 노릇이냐?]
서쟁이 다가서자 마행공은 얼굴을 벽쪽으로 하고 표차를 정리하며 나직이 말
했다.
[이 못난 녀석아, 너의 점보단퇴(漸步 腿)는 어째서 빗나갔느냐? 그렇지 않았
더라면 그토록 싸움을 질질 끌 필요가 있었겠느냐?]
서쟁은 깜짝 놀라서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어, 어...... 어르신은 다 보셨군요.]
[흥! 이 사부 앞에서 수작부리지 말아라. 그가 제보고탐마(提步高探馬)라는
일초를 펼쳤을 때, 너는 어째서 궁보쌍추장(弓步雙推掌)을 펼치지 않았느냐? 그
때 맞은편으로 똑바로 주먹을 뻗쳐냈다면 바로 이겼을 것이다. 너는 담이 너무
적어 죽음을 두려워 했던거야!]
서쟁은 방금 싸웠던 것을 돌이켜 보았다. 사실 적의 허실을 알지 못해 두려워
한 나머지 몇 초를 신중하게 펼친 것이 틀림없었다.
사부님은 모르는 척 하고 있었지만 사실 창밖에서 다 구경을 한 것이 틀림없
었다.
마행공이 다시 입을 열었다.
[빨리 돌아가서 그 상가에게 고맙다고 인사해라. 상대방은 너보다 나이가 적
지만 훨씬 똑똑하다.]
서쟁은 의아해 하며 말했다.
[사부님, 무엇을 고마워하란 말입니까? 저 상가는 편견을 가지고 있는 좋지
못한 사람입니다.]
마행공은 냉소했다.
[그렇다. 그는 편협하게 마음을 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편협한 마음을 쓴
이유는 바로 너, 서 나으리를 위해서란 말이다. 이놈아!]
서쟁은 그만 멍청하니 사부를 바라보았다. 마행공은 나직이 말을 이었다.
[네가 때린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그는 어전시위이지만 우리는 어떠냐? 우리
는 남의 덕으로 밥이나 빌어먹기 위해 표화물을 운송하는 사람들이다. 관가의
나으리들이 정말 마음먹고 너를 괴롭히려 든다면 우리들은 일을 못하고 빌어먹
게 될 것이다. 그 젊은이가 그 사람의 체면을 세워 준 것은 너라는 멍청한 녀석
의 후환을 없애준 것이다!]
서쟁은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네, 네, 네!]
그러면서 후원 연무청으로 달려갔다. 상보진은 마침 손을 들고 다리를 내차는
등 정히 사권의 일초인 궁보벽타(弓步劈打)를 연마하고 있었다. 바로 서쟁이 하
사호를 격중시킨 그 초식이였다. 상보진은 서쟁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얼굴을
붉히며 급히 주먹을 거두어 들였다.
서쟁은 포권을 했다.
[상공자, 사부님께서 상공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라고 해서 왔소이다. 당
신의 호의를 알지 못하고 당신을 탓했구려.]
[서형, 당신의 무공은 그 시위보다 몇 배나 더 뛰어났소이다. 소제는 정말 탄
복했소이다.]
서쟁은 그가 자기를 칭찬해주자 기뻐하며 득의양양해서 물었다.
[당신이 연마하는 것은 어느 가문의 무공이오?]
[소제는 처음 배우는지라 제대로 배운 것이 없으니 어느 가문이나 어느 문파
의 무공이라고 할 수 없지요. 조금전 서형이 그 시위를 공격한 수법은 이렇게
하는 것이오?]
그러면서 오른발을 내밀고 왼손의 손바닥을 위로 올리며 오른팔을 뻗쳤다.
서쟁은 방금 전에 이 초식으로 승리를 얻었는데 그가 자기의 일초를 흉내내는
것을 보고 신이 나서 말했다.
[이 일초에는 두 마디의 구결(口訣)이 있는데 육해영문삼불고(陸海迎門三不
顧), 벽권도타불용관(劈拳挑打不容寬)이라 하지요.]
그는 두 마디의 말을 그냥 나오는대로 지껄였다가 갑자기 사문에서 전수한 심
법을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알려주었다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말꼬리를 돌렸다.
[상공자는 정말 눈이 예리하시군요.]
상보진은 물었다.
['육해영문삼불고'란 무슨 뜻입니까?]
서쟁은 당황해서 그만 말을 얼버무렸다.
[그건...... 그건...... 나도 그만 잊었구려.]
서쟁은 거짓말을 못하는 사람이라 그 한 마디를 해놓고는 그만 얼굴을 붉혔
다.
타편천하무적수(打遍天下無敵手)
상보진은 그가 알면서도 말을 하지 않는 까닭을 눈치채고 서쟁과 가까이 사귀
려는 마음에 서쟁을 추켜올렸다.
[서형, 정말 훌륭한 무예를 지니셨더구려. 저는 정말 탄복했소이다.]
서쟁은 나름대로 임기응변을 하며 말했다.
[상노제, 우리 그까짓 쓸데없는 문구를 가지고 신경을 쓸 필요는 없소. 상노
제가 권법과 각법을 펼치면 내가 부족한 점을 지적해 드리리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서로 사권 것은 더욱 보람이 있지 않겠소이까?]
상보진은 반색을 하며 그 말을 받았다.
[그야 말할 나위도 없이 좋은 일이지요.]
즉시 상보진은 자세를 가다듬고 연무청 한복판에서 권법을 펼쳐보였다. 그가
펼치는 것은 두당승괘일조편(頭 繩掛一條鞭)과 이당십자요삼첨(二 十字繞三尖)
이라는 초식으로 펼쳐내는 십이로(十二路)의 담퇴였다.
상보진은 이 권각법을 순수하고도 익숙하게 펼쳤다. 그러나 주먹을 내지르는
것이 정확하지 못했고 발걸음도 차분하지 못했다. 겉으로 드러나는 자세는 화려
했으나 직접 싸울 때에는 전혀 쓸모가 없는 것이었다.
서쟁은 머리를 흔들며 그가 십이당서우망월(十二 犀牛望月)까지 펼치게 되었
을 때 더이상 참지 못하고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형제, 오해는 마시오. 형제에게 무예를 가르친 사부가 형제를 망쳤군요.]
그리고 나서 해설을 해주려고 하는 데 대청 입구에서 마춘화가 불렀다.
[사형, 아버님이 불러요!]
이에 서쟁은 재빨리 상보진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대청으로 되돌아 갔다.
모닥불 옆에는 비를 피하러 온 사람이 두 명이나 더 늘어 있었다. 한 명은 오
른 팔이 잘라진 외팔이였는데 기다란 흉터가 눈썹에서부터 콧날을 지나 입가에
까지 뻗쳐 있는 것이 지극히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또 다른 한
명은 열 서너 살의 소년이었는데 싯누렇고 삐쩍 말라 있었다. 옷차림은 둘 다
남루했다.
서쟁은 두 사람을 한번 바라보고는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마행공 앞으로 걸어
갔다.
[사부님!]
마행공은 얼굴을 굳히며 나직이 말했다.
[여태까지 어디에 가 있었느냐? 또 그까짓 무예를 자랑한것이냐?]
서쟁은 말했다.
[제자가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이곳의 상씨라는 주인의 금표(金 )를 던지
는 실력이 괜찮길래 대단한 줄 알았더니 권각법은 형편없더군요.]
마행공은 욕을 했다.
[바보같은 녀석, 너는 남의 술수에 넘어간 것이다. 네까짓 녀석은 둘이 덤벼
도 그의 적수가 될 수 없다.]
서쟁은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그의 사부가 가르친 십이로의 담퇴는 보기만 좋았지 쓸모가
없던데요.]
[너는 그의 사부가 누군지 아느냐?]
서쟁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우리 사부님은 그 상가와 대면을 하지도 않았고 그가 권각법을 연마하는 것
도 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그의 사부가 누구인지 알고 있을까?)
그와 같이 생각하면서 서쟁은 즉시 대답을 했다.
[제자는 모르지만 아마도 쓸모없는 건달일 겁니다.]
마행공은 냉소를 하더니 나직하고도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쓸모없는 건달이라고? 흥, 네 녀석은 십오 년 전에 네 사부가 칼과 일장을
얻어맞고 삼 년이나 조섭을 해서야 겨우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잊
었느냐? 그 사람이 누구였는지 알겠지?]
서쟁은 깜짝 놀라 말했다.
[팔괘도(八卦刀) 상검명(商劍鳴)!]
마행공은 나직이 말했다.
[그래 맞다. 그 상검명은 산동(山東) 무정현(武定縣) 사람인데 바로 이곳이
무정현이고 주인의 성씨가 상씨이다. 우리가 급한 김에 들어와 비를 피하게 되
어 주의를 하지 않았지만 저것을 보아라! 대들보 위에 그려져 있는 것이 무엇이
냐?]
서쟁이 고개를 쳐들어 대들보를 바라보니 금칠로 팔괘도형이 그려져 있었다.
서쟁은 깜짝 놀라 말했다.
[사부님, 빨리 무기를 드십시오? 우리들은 원수의 소굴에 뛰어든 모양입니
다.]
마행공은 담담히 말했다.
[서두를 것은 없다. 상검명은 이미 다른 사람에게 살해를 당했느니라.]
서쟁은 자신의 사부가 과거 한 사람에게 크게 패한 적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산동의 대호(大豪)인 팔괘도 상검명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사
실은 사문의 커다란 치욕이라 사부는 그 말을 다시는 들먹이지 않았고 따라서
상검명이 죽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그는 나직이 물었다.
[어르신께서 원한을 갚으신 겁니까?]
마행공은 싸늘히 코웃음쳤다.
[흥! 상검명의 무공은 내가 한평생 두고 다시 연마한다고 해도 쫓아가지 못할
것인데 이까짓 나의 재간으로 죽일 수 있었을 것 같으냐?]
[그렇다면 누가 죽였지요?]
[그 젊은이가 목패에 그려진 사람에게 금표를 던지지 않더냐? 상검명은 그들
두 사람에게 죽은 것이다.]
서쟁의 두 눈은 휘둥그레졌다.
[아니, 호일도와 묘인봉입니까?]
마행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 표정이 음울한 것이 마치 먹구름이 낀 하늘
처럼 어두워 보였다.
서쟁은 평소에 사부를 지극히 존경하고 있었고 이 세상의 무공에서 백승신권
마 노표국주보다 뛰어난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사부의 말을 듣고 보니 비단 팔괘도 상검명의 무공이 사부보다 뛰어날
뿐만 아니라 호일도와 묘인봉의 재간은 상검명보다 더욱 뛰어나다고 하지 않는
가?
그는 놀람과 의아함에 휩싸여 나직이 물었다.
[그 호일도와 묘인봉은 어떠한 인물이지요?]
[호일도의 무공은 나보다 열 배는 강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십 년 전에 죽
고 말았다.]
서쟁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병으로 죽은 것이겠지요?]
[아니다. 그 자가 어떤 자인데 병이 들겠느냐. 어떤 사람에게 살해당했느니
라.]
서쟁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호일도가 그렇게 무서운 고수라면 누가 죽일 수 있었지요?]
[타편천하무적수(打遍天下無敵手) 금면불(金面佛) 묘인봉(苗人鳳)이었다.]
타편천하무적수 금면불 묘인봉이라는 열세 자가 단숨에 그의 입에서 흘러 나
왔는데 그 소리는 나직하고도 위엄이 있었다.
서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끼고 다시 입을 열고 물으려 했을 때,
별안간 문밖에서 말굽 소리가 들려왔다. 비가 세차게 내리는 가운데 십여 필의
말이 달려오는 것이었다.
얼굴이 준수하게 생긴 남자와 아리따운 아낙은 그 말발굽 소리를 듣자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놀라움과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 남자는 젊은 아낙
의 손을 잡고 자리가 너무 뜨거운 듯 모닥불 곁에서 뒤로 물러나는 것이었다.
십여 필의 말이 장원 앞에 이르자 다시 조용해졌다. 다시 몇차례 휘파람 소리
가 나더니 일곱 여덟 필의 말들이 장원 뒤로 돌아갔다.
마행공은 휘파람 소리를 듣자 안색이 변하며 나직이 말했다.
[주의해라!]
서쟁은 지극히 흥분되어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방금 말씀하신, 그......, 그 자들이 온 것입니까?]
마행공은 대답을 하지 않고 큰 소리로 외쳤다.
[모두들 무기를 들고 표화물을 호위하도록 해라!]
이 한 마디의 호통소리에 표국의 사람들은 표화물을 약탈하러 흑도(黑道)의
강적이 찾아온 것임을 알고 일제히 신속하게 행동을 취했다.
척씨와 양씨 두 표사와 다섯 명의 당자수는 마부와 짐꾼들을 지휘하여 십여
대의 표화물차를 둥글게 원을 그리듯 배열했다.
마춘화는 오히려 얼굴에 기별 빛을 띠우고 유엽도(柳葉刀)를 뽑아들고 말했
다.
[아버지, 어떤 도적들인가요?]
마행공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 모른다.]
그리고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 친구들은 정말 이상하군. 도상에서 염탐을 하지도 않고 곧장 이리 들이닥
치는군.]
그 말이 끝나자마자 담장 위에서는 타다닥! 소리가 잇따라 울려퍼지며 검은
옷차림을 하고 손에 무기를 든 여덟 명의 대한이 담장 위에 한 일 자로 늘어섰
다.
마춘화가 오른팔을 쳐들어 수전을 쏘려고 하자 마행공은 호통을 내질렀다.
[함부로 날뛰지 말아라! 내 지시에 따라 일을 처리 하도록 해라!]
여덟 명의 흑의의 대한들은 대청의 뭇 사람들을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
았다.
잠시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대문이 밀어젖혀지며 남색(藍色)의 비단 장포를
걸친 사내가 들어섰다. 머리통이 어깨에 붙은 듯한 자라목에 왜소한 체구라 걸
치고 있는 화려한 옷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 사람은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억수같이 내리는 비를 보고는
허! 하더니 발끝으로 사뿐히 땅을 딛으며 곧장 마당을 가로질러 대청 입구에 섰
다. 그의 신법은 너무나 빨라 장대같이 내리는 비가 어깨에 몇 방울 떨어졌을
뿐이었다.
서쟁과 마춘화는 이 사람에 대해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으나 그와 같은 경신법
을 펼치자 놀라 마행공을 바라보았다.
마행공은 오른손에 담뱃대를 쥐고 공수(拱手)의 예를 취하며 입을 열었다.
[실례지만 이 늙은 것이 눈이 어두워 알아 보지를 못하겠군요. 친구의 존성대
명은 어떻게 되며 보채(寶寨)는 어디에 있습니까?]
상가보의 작은 주인인 상보진은 말발굽 소리가 들리자 즉시 금표를 갈무리하
고 허리에는 칼을 차고 대청 앞으로 나왔다.
도적의 괴수가 벽옥(碧玉) 반지를 끼고 있고 장포에는 황금 단추가 번쩍이며
비취(翡翠) 담배대를 들고 있을 뿐, 무기를 들지 않았으며 평온한 얼굴표정이나
태도를 미루어 보아 벼락부자가 된 장사치 같다고 상보진은 생각했다.
이윽고 그 자가 입을 열었다.
[불초의 성은 염(閻)씨이고 이름은 기(其)라고 하오이다. 노영웅은 백승신권
마행공이 아니십니까?]
마행공은 포권을 했다.
[감당할 수가 없소이다. 그 별호는 강호의 친구들이 불초의 얼굴에 금칠을 한
격으로 헛되이 명성을 얻었을 뿐 입에 담을만한 이름이 못된답니다.]
그와 같이 응수하면서 마행공은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했다.
[(염기라고?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강호에서 그와 같은 인물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구나.)
염기는 껄껄 소리내어 웃더니 담장 위에 한 줄로 늘어서 있는 흑의의 사내들
을 손가락질하며 입을 열었다.
[형제들이 며칠 동안 밥을 먹지 못했는데 마 노영웅께서는 한끼 밥이라도 먹
을 수 있도록 해 주시지요.]
마행공은 정중히 입을 열었다.
[염 채주께서는 별 말씀을 다 시는군요. 쟁아, 오십 냥의 은자를 꺼내 염 채
주께 드려 형제들에게 나누어 주시도록 해라.]
마행공 이와 같은 행동은 강호 규칙에 따라서 일을 처리하려고 한 것이지만
상대방의 얼굴 표정이나 태도, 그리고 그 기세로 미루어볼 때 결코 오십 냥의
은자를 받고 순순히 물러설 사람들은 아닌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염기는 앙천대소하더니 입을 열었다.
[하하하, 마 노영웅께서는 표화물을 운송하시는 댓가로 삼십만 냥을 받은 줄
알고 있소이다. 이 염가의 시야가 좁기는 하지만 그까짓 오십 냥 정도는 눈에
차지 않소이다.]
마행공은 속으로 꺼림직하게 여겼다.
(이 자의 소식이 제법 정통하구나. 어떻게 내가 삼십 만 냥의 표은( 銀)을 호
송한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을까?)
그는 눈살을 찌푸렸으나 여전히 강호의 규칙에 따라 입을 열었다.
[이 마아무개가 무슨 재간이 있겠소이까? 오로지 도상의 친구들이 체면을 세
워 준 것 뿐이지요. 염 채주와 오늘 이렇게 만나뵈니 기쁘기 그지없소. 무림인
들은 동쪽에서 만나지 못하면 서쪽에서 만나기 마련이지요. 이 마아무개가 오늘
다시 한 분의 친구를 사귀게 되었으니 정말 기뺐오. 그런데 염 채주께서는 어떤
분부를 내리고 싶은지 모르겠구려.]
염기는 입을 열었다.
[분부라니 감당할 수가 없소이다. 다만 불초는 이 세상에 태어난 이래 재물만
보면 눈이 번쩍 뜨이는 사람임을 밝혀두고 심을 따름이외다. 삼십 만 냥의 표은
이 내 코앞에서 지나가는데도 취하지 않는다면 조상님들이 욕하실 겝니다. 하지
만 마노표국사께서 말끝마다 친구 친구 하시니 이렇게 하시지요. 불초는 겨우
반만 취하기로 하지요. 십오 만 냥의 은자를 받고 손을 떼도록 하겠소.]
염기는 마행공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담장 위에 서 있
던 여덟 명의 대한들이 일제히 뛰어내려 대청입구쪽으로 달려왔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물었다.
[모두 가져가는 겁니까?]
염기는 말했다.
[아닐세. 반은 남기고 반만 가져가는 것일세. 똥이 마려우면 모두 함께 누고
밥이 있으면 함께 먹자는 것이지.]
뭇 대한들은 우렁찬 소리로 대답을 하더니 곧장 표차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
다.
마행공은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그 대한들이 담장 위에서 뛰어내릴 때의 솜
씨가 민첩하지 못한 것이 적수가 될만한 고수가 없는 것 같아 마행공은 약간 안
심이 되어 여유있게 입을 열었다.
[염 채주는 조금의 여지도 남겨두지 않을 작정이시오?]
염기는 반문했다.
[당신, 귀머거리요? 분명히 반은 가져가고 반은 남긴다고 하지 않았소. 강호
의 형제들끼리 공평하게 거래를 하자는 것이오.]
서쟁은 더 참을 수 없다는 듯 앞으로 두 걸음 내딛더니 손가락을 뻗쳐서 염기
를 가리키며 큰소리로 말했다.
[당신도 흑도에서 빌어먹는 사람인데 설마하니 비마표국(飛馬 局)의 위명(威
名)을 들어보지 못했단 말이오?]
염기는 차갑게 내뱉었다.
[우리집 며느리는 들어본 적이 있는지 모르지만, 제미랄! 나는 처음 듣는다.]
그리고 몸을 흔들하더니 갑자기 대청 오른쪽으로 달려가 수레의 시렁 위에 꽃
아 놓은 비마표국의 표기( 旗)를 뽑아 깃대를 뚝! 두 토막으로 분질러 땅바닥에
패댕이치고는 발로 깃발을 짓밟았다.
이 일은 그야말로 강호의 대기(大忌)를 범하는 것이었다. 표화물을 강탈하는
일은 종종 있었지만 이토록 인정사정 보지 않고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일은 드물
었다. 만약에 쌍방이 불구대천의 원수가 아닌 한 이런 만행을 자행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은 행동은 생사결전을 벌이자는 의미였다. 표국의 무리들은 이
를 보자 대뜸 욕지거리를 하며 살기를 띠었다.
서쟁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달려들어 답보격장(踏步擊掌)이라는 일 장을 펼쳤
다. 왼손으로 염기의 가슴팍을 맹렬히 후려친 것이었다.
염기는 몸을 옆으로 피하며 말했다.
[네 녀석이 감히 나와 싸우자는 것이냐?]
그리고는 왼손을 쓱 내려뜨리더니 급히 서쟁의 손목을 움켜잡으려 들었다.
서쟁은 후삽보패장(後揷步 掌)으로 변화시켜 왼손을 뒤로 내밀어 갈고리처럼
걸면서 오른쪽 손바닥을 휘둘러 윗쪽으로 쳐들었다가 곧장 상대방의 목덜미를
내리쳤다.
염기는 고개를 숙여 피하는 동시에 오른쪽 주먹을 내리치며 공격해 갔다. 이
한 대의 주먹이 뻗쳐오는 수법은 지극히 괴이하여 서쟁은 급히 머리를 옆으로
기울여 피했다. 그 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서쟁은 어깨쭉지에 주먹을 얻어
맞게 되었다. 그 일권에 실린 힘은 매우 강하여 서쟁의 가슴팍과 등골이 욱신욱
신 저렸다.
서쟁의 다리가 휘청거렸다. 하마터면 쓰러질뻔 했으나 다행히 그는 젊은 데다
가 힘이 좋고 하반신의 마보(馬步)를 매우 튼튼하게 다져왔다. 그렇기 때문에
재빨리 복퇴천장(卜腿穿掌)으로 변화시켜 몸을 움츠리면서 오른쪽의 무릎을 꿇
으며 왼손을 뻗쳐냈다. 이는 상대방의 힘을 해소시키고 반격을 시도하는 것으로
써 사권 가운데 고명한 초식이었다.
염기는 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미미하게 웃더니 왼발을 뒤로 돌려찼다. 이 발
길질은 더욱 이상야릇했다. 서쟁은 깜짝 놀라 급히 몸을 날려 피했다.
그 순간 염기는 오른쪽 주먹을 직격하며 호통쳤다.
[오늘 또 떼돈을 버는구나!]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주먹은 서쟁의 가슴팍을 정통으로 내지르게 되었다. 이
한 대의 주먹에 서쟁은 그만 뒤로 벌렁 쓰러지며 땅바닥을 몇 번 구르며 왁! 하
니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해 내었다. 그는 지극히 건강한 젊은이였지만 그 주먹을
맞자 한참동안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도적들은 와! 하니 갈채를 보내며 부르짖었다.
[한 대의 주먹에 저 녀석은 작살이 났군요!]
표국의 사람들은 염기의 손씀씀이가 이토록 매서운 것을 보고 하나같이 놀람
과 분노에 휩싸이게 되었다. 마춘화는 사형을 부축하며 다급해진 나머지 울먹거
리며 물었다.
[괜찮아요?]
마행공은 한평생 강호로 떠돌아다녔고 많은 풍랑을 겪어 보았지만 이 도적 괴
수가 어떤 권각법을 펼치는 것인지 조금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세 명의 시위들도 나직이 의논을 했다.
[저 작자는 어느 파일까?]
[모르겠는걸. 오행권 같기도 하고.......]
[오행권은 저토록 요상하지 않아.]
마행공은 두세 걸음 앞으로 나아가며 포권을 했다.
[염 채주는 정말 뛰어난 무예를 지니고 있구려. 못난 제자놈의 버릇을 가르쳐
주어 정말 고맙게 생각하오. 그로 하여금 강호에 많은 고수들이 있다는 것을 알
려준데 대해서 사의를 표하오.]
염기는 웃었다.
[나의 이 몇 수 보잘 것 없는 재간으로는 마 노영웅의 신발이나 요강을 들고
다닐 자격도 없을 것이오. 그러나 다른 것은 잘 몰라도 이 한 가지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지요. 마 노영웅의 백승신권을 나는 안중에 두고 있지 않소.]
마행공은 염기의 얼굴에 개기름이 잔뜩 흐르고 말을 할 때에 야박하게 주둥이
를 놀리는 것이 에누리 없는 망나니나 무뢰한인데 어떻게 그와 같은 괴이한 무
공을 연마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행공은 우선 수비만
하면서 상대방의 수법을 확인하고 난 후에 다시 대응책을 강구해야겠다고 생각
하고 즉시 정신을 가다듬고 비스듬히 서서는 두 손을 살며시 쥐었다.
세 명의 시위와 상보진, 그리고 표국 사람들은 모두 주의를 기울여 싸움을 구
경했다. 모두 다 이번 싸움이야말로 비단 삼십 만 냥의 표은과 관계될 뿐만 아
니라 마행공의 목숨과 한평생 쌓은 위명과도 연관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대청안의 사람들은 숨소리 한번 크게 내쉬지 못하고 조용히 지켜 보았다. 그
저 탁탁! 하며 모닥불의 나무가 타는 소리만이 때때로 가볍게 들려올 뿐이었다.
마당에는 여전히 장대같은 비가 쏟아지고 있으며 전혀 멈출 기세를 볼 수가
없었다. 그 화려한 옷차림의 상공(相公)은 젊은 부인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나
직이 속삭이고 있을 뿐, 마행공과 염기의 싸움에 대해서는 조금도 주의를 기울
이지 않는 것같았다.
염기는 품속에서 금빛이 찬란한 황금 담배대를 꺼내더니 담배연기를 한 모금
들이마셨다. 그 역시 마행공이 강적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닿은 머리를 머리
위에다 휘감더니 부르짖었다.
[이 못난 놈의 조상께서는 덕을 쌓지 못해 밥 한끼 먹는데도 목숨을 걸어야
한다오! 제미랄! 어디 한번 겨뤄 봅시다!]
그러더니 별안간 몸을 옆으로 날려 곧장 달려들며 왼쪽 주먹을 맹렬히 뻗쳐내
마행공을 치려고 했다.
마행공은 그의 주먹이 가슴팍과 반자쯤 되는 곳에 이르게 되었을 때 백학량시
(白鶴亮翅)라는 일초를 펼쳤다. 그는 몸을 어느덧 왼쪽으로 돌리면서 발을 활처
럼 구부려 내딛었고, 두 팔을 뒤로 향하게 해서는 팔목을 구부렸다. 그 다음 순
간 그는 팔을 휙! 하니 가벼운 소리를 내며 오른쪽으로 휘두르면서 수평으로 쳐
들어 반격을 했다. 이 수법은 소림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권이었다. 그러나
자세가 매끄럽고 착실할 뿐만 아니라 손을 쓰거나 다리를 쳐드는 품세 역시 무
척 노련하고 매서워 보였다.
부인과 함께 나타난 상공은 표국과 강도의 싸움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는
듯 간혹 곁눈질을 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염기가 뒷발질을 하는데 그 초식이 퍽
이나 특이한 것을 보고서는 그제서야 정신을 가다듬고 구경을 하였다.
아름다운 젊은 부인은 부르짖었다.
[귀농(歸農), 귀농!]
상공은 아무렇게 '응!' 하고 대답하면서 싸우고 있는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부인은 그의 어깨를 잡고 흔들며 말했다.
[늙은이와 막되먹은 건달이 싸움을 하는 것이 그렇게도 재미있어요?]
상공은 그녀의 말 속에 불쾌한 빛이 서려있는 것을 느끼고 재빨리 고개를 돌
리고 웃었다.
[저 무뢰배의 주먹질과 발길질이 매우 이상야릇하군.]
아름다운 젊은 부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 당신네 남자들에게는 천하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바로 사람을 죽이고 싸
우는 것이군요.]
상공은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보지 말라면 나는 보지 않으리다. 그 대신 당신의 그 아리따운 모습
을 한껏 보도록 해 주구려.]
그 말에 아름다운 부인은 소리없이 웃었다. 지극히 교태롭고 요염한 자태였
다. 그녀는 고개를 쳐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눈동자가 서로 마주치자
얼굴 가득히 부드러운 정과 감미로움이 감돌았다.
이때 마행공과 도적 괴수인 염기는 격렬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마행공은
사권을 거의 다 펼쳤으나 조금도 우세를 차지할 수 없었다. 염기의 권각법이라
는 것은 다 합쳐 보았자 겨우 십여 초에 불과했다. 때로는 주먹을 뻗쳐 직격을
하고 때로는 다리를 갈고리처럼 하여 뒤로 차고, 또는 팔굽을 내려뜨리며 금나
수법을 쓰거나 혹은 손으로 치고 다리를 걸곤 했다.
세 명의 무관들은 한동안 바라보았으나 그의 초식이 단순한 것을 알 수 있었
다. 그런데도 마행공이 그를 이기지 못하는 것을 보고 모두 다 우스꽝스럽게 여
겼다.
이때 마행공은 마당추권(馬 推拳)이라는 일초를 펼쳐 다리를 벌려 말을 타는
자세를 취하고 오른손을 거두어 들이더니 왼손을 앞으로 맹렬히 뻗쳐내었다. 그
러자 하사호는 부르짖었다.
[팔굽을 내리며 금나수를 펼친다!]
과연 그의 짐작이 들어맞았다. 염기는 손과 팔굽을 내리뜨리며 금나수법으로
마행공의 손목을 잡으려고 들었다.
마행공은 급히 초식을 변화시켜 손과 팔을 움츠려 들였으며 번개처럼 몸을 돌
렸다.
하사호는 염기의 초식이 단순하게 반복되자 웃으며 또 다시 외쳤다.
[다리를 구부리고 뒤돌려 차라!]
염기는 아니나 다를까 왼쪽 다리를 구부리더니 뒤로 걷어찼다.
마행공의 무공은 하사호보다 훨씬 뛰어났다. 염기가 손을 쓰기 전에 이미 하
사호가 알아보는 데 마행공이 어찌 알아보지 못하겠는가? 그러나 마행공은 분명
히 상대방이 다리를 구부리고 뒤로 걷어차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초식을 해소
시키는 방법을 이상하게 찾을 수가 없었다.
마행공은 백승신권이라 일컬어지는 만큼 소림파 각로(各路)의 권술에 익숙했
다. 그런데도 사권으로 상대방을 격퇴시키지 못하자 갑자기 초식을 일변시켜 벼
락같이 후려치고 걷어차는 수법으로 나왔다. 주먹의 기세가 질풍같아 구경하는
사람들의 두눈을 어지럽도록 만들었는데 마행공이 펼치는 것은 바로 일로(一路)
연청권(燕靑拳)이었다.
연청(燕靑)은 송(宋)나라 때의 양산박(梁山泊)의 호걸이었는데 싸움하는 재간
에 있어서 천하무쌍이었다. 그가 창안한 연청권에서 중시하는 것은 몸을 날려서
솟구치고, 움츠리고, 자세를 낮추고 후려치는 등 한결같이 공격의 초식이었다.
마행공은 나이는 들었지만 손 씀씀이는 여전히 민첩하기 이를 데 없어 높게
뛰어오르거나 낮게 엎드리는 것이 마치 살쾡이와 비슷했다.
염기는 적이 초식을 변화시키는 것을 보면서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그 십여 초의 우둔하고 단순해 보이는 권각법을 되풀이해서 펼치는 것이었다.
상보진, 서쟁, 마춘화 그리고 척 표사 및 양 표사 등은 이 도적 괴수 염기의
무공이 이상야릇한 것을 보고 매우 의아하게 여겼다.
모든 사람들은 이미 염기가 다음 초식에서 주먹을 뻗쳐 직격을 할 지, 또는
손으로 치고 다리를 걸지를 예측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하사호를
따라서 소리를 치며 응원을 했는데도 마행공은 시종 그를 어떻게하지 못하는 것
이었다.
마 노표국주가 펼치는 상보진주귁신권(上步進 身拳), 영면창쾌타삼권(迎面
快打三拳), 좌우과타(左右跨打), 반신재추(反身裁錘), 척퇴료음십자권( 腿 陰十
字拳) 등 하나하나의 권각법은 너무나 삐르고 힘이 있어 마치 문밖에서 쏟아지
는 광풍폭우와 같았다.
그러나 염기는 다만 잔재주와 같은 단순한 수법으로 팔을 뻗치고 직격함으로
써 그의 모든 교묘한 초식을 간단히 깨뜨리는 것이었다.
외팔이와 누렇고 비쩍마른 소년은 줄곧 집안 모퉁이에 웅크리고 앉아 마행공
과 염기가 겨루는 것을 보고 있었다.
이때 외팔이가 나직이 말했다.
[도련님, 자세히 저 도적 괴수를 보십시오. 그리고 절대로 그의 모습을 잊지
않도록 하세요.]
소년은 물었다.
[왜 그래요? 어째서 그를 눈여겨 보라고 하죠?]
[도련님은 저 사람을 기억하고 영원히 잊지않도록 해요.]
소년은 다시 물었다.
[그는 아주 나쁜 사람인가요?]
외팔이는 어금니를 깨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공교롭게도 여기서 그를 만나게 되었군요. 그를 눈여겨 보시되 그가 알아차
리지는 못하도록 하세요.]
잠시후 외팔이는 다시 말했다.
[도련님은 언제나 무공을 체계적으로 연습할 수 없다고 했는데 저 자를 자세
히 살피게 된다면 어쩌면 무예의 체계를 갖출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소년은 물었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돼요.]
외팔이는 눈물을 글썽이며 나직이 말했다.
[지금은 말할 수 없으나 도련님의 나이가 많아지고 무예를 제대로 연성하게
되었을 때 자초지종을 이야기해 드리리다.]
소년은 염기의 주먹질과 발길질하는 자세를 자세히 바라보다가 문득 깨닫는
바가 있는 듯 갑자기 큰 소리로 불렀다.
[사숙(四叔)!]
외팔이는 재빨리 말했다.
[큰 소리로 말하지 마세요.]
소년은 응! 하고 대답을 하더니 소근거렸다.
[저 사람의 주먹과 발길질을 나는 어느 정도 알 것 같아요.]
[맞았어요. 잘 봐두세요. 도련님의 권경도보(拳經刀譜)의 앞부분 두 장이 없
어졌기 때문에 도련님이 아무리 보아도 모른다고 한 거예요. 그 없어진 두 장은
바로 저 도적 염기의 몸에 있어요.]
소년은 깜짝 놀라서 싯누렇고 비쩍마른 조그만 얼굴이 붉게 상기된 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염기를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어째서 저 사람의 몸에 있지요?]
외팔이는 말했다.
[나중에 도련님에게 이야기해 드릴 기회가 있겠지요. 저 녀석은 원래 무공을
몰랐어요. 다만 두 장의 권경도보(拳經)을 얻어 십여 초의 불완전한 권법을 익
혔을 뿐인데 일류 권사(拳師)와 막상막하로군요. 그러니 도련님, 생각해 보세
요. 그 권경도보는 삼백 장이 넘으니 그것을 도련님이 통달한다면 얼마나 훌륭
한 재간을 지닐 수 있을 지를.......]
소년은 그러한 말을 듣고 격동되어 눈에서 흥분된 빛이 번쩍였다.
마당 한복판에서 두 사람이 무공을 겨루고 있었으나 볼만한 것은 마행공 한
사람뿐이었다. 염기는 기껏 펼쳐보았자 십여초에 지니지 않아 모두들 흥미를 잃
게 되었다. 하지만 마행공의 권초는 변화가 무쌍했다. 연청권의 권법으로 상대
를 꺽을 수 없게 되자 다시 권법을 변화시켜 노지심취질(魯智深醉跌)이라는 권
법을 펼쳐냈다. 그는 실성한 듯 혹은 술에 취한 듯, 갑자기 땅바닥에 눕는가 하
면 벌떡 일어나는 등, 나한사와(羅漢斜臥), 성인갈순(仙人渴 ) 등의 수법을 펼
치며 마구잡이로 싸우는 것 같았으나 그 속에는 정심한 초식이 있었다.
이렇게 되자 염기의 십여 초의 단순한 권법은 점점 소용이 없게 되었고 상대
방의 권법과 각법의 내력도 알아볼 수 없어 염기는 더욱 당황해 했다.
별안간 마행공이 호통을 내질렀다.
[이얍!]
그는 발로 이어번신교사퇴( 魚 身攪絲腿)라는 초식을 펼쳐 정확히 염기의 허
리를 걷어찼다. 그러자 염기는 고통을 느끼며 허리를 움켜쥐었다.
마행공은 염기에게 비록 요해를 적중시켜 상해를 입혔지만 무공이 뛰어나기
때문에 치명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평소에는 이 발길질 한 번으로 승리
를 하고 손을 멈출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번의 싸움은 삼십 만 냥이라는 표은
이 관련되었으니 어찌 적에게 잠시라도 숨돌릴 틈을 줄 수 있겠는가? 싸움이 재
차 벌어진다 하더라도 반드시 상대방을 이긴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리하여 마행
공은 자기가 유리하자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몸을 날려 괴자각(拐子脚)으로 다
시 그의 등을 걷어차려고 했다.
뭇 도적들은 일제히 큰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자 염기는 갑자기 한쪽 다리로
구퇴반척(鉤腿反 )이라는 수법을 다시 펼쳐 걷어차 왔다. 그 빠름과 변화는 필
설로 형언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마행공은 경험이 풍부했지만 미처 그러한 발길질을 예상치 못했던 터라 그만
아랫배를 걷어차이고 뒤로 벌렁 나가떨어지게 되었다.
마춘화와 서쟁이 달려들어 부축해 일으켰다. 마행공의 안색은 백지장처럼 되
었고 연신 기침을 해대며 겨우 한 마디를 할 뿐이었다.
[죽음을 무릅쓰고 표화물을 지켜라!]
서쟁과 마춘화는 각기 칼을 들고 마행공의 양쪽을 지켰다. 염기는 허리의 통
증을 참으며 손짓을 했다. 그러자 두 명의 호의 대한이 다가왔다.
염기는 그들에게 명령을 했다.
[표은을 가져가자. 무엇을 기다리느냐?]
뭇 도적들은 각기 무기를 들고 일제히 표국의 사람들에게로 다가갔다. 마춘화
와 서쟁, 척씨와 양씨 두 표사는 크게 소리를 지르며 적을 맞았다.
뭇 도적들은 인원수가 많았고 염기 이외에 고수가 없다고 하지만 마춘화와 서
쟁은 마행공을 돌봐야 하기 때문에 뭇 도적들이 양쪽에서 공격을 해오자 상황이
위급해졌다.
이를 본 상보진이 칼을 뽑아들고 부르짖었다.
[세 분 시위 대인, 우리 함께 손을 씁시다.]
하사호는 대답했다.
[좋소. 강도들을 몰아낸 이후 다시 이야기하도록 합시다.]
그리하여 네 명이 합세했다.
상보진은 마춘화가 두 명의 도적을 상대하다 점차 궁지에 몰리는 것을 보고는
즉시 달려들며 호통을 내질렀다.
[사내대장부가 아가씨를 못살게 굴다니! 더군다나 두 사람이나 달려들다니 부
끄럽지도 않소?]
그러면서 휙! 한 칼을 휘둘러 키가 큰 도적의 머리를 찍으려 들었다.
그 도적은 채찍을 돌려 막았으며 몇 합을 싸우게 되자 상보진은 칼을 휘두르
는 동시에 손을 뻗쳐 왼손으로 그의 가슴팍을 후려쳐 곧장 나가떨어지도록 만들
었다.
마춘화는 가뿐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고마워요. 나머지 한 명은 내가 처리를 하지요.]
상보진은 웃으면서 물러서서 즉시 서쟁을 도와 세 번의 칼질과 두 번의 손짓
으로 다시 한 명의 도적을 처치하였다.
서쟁은 여간 고맙지 않았다. 이제서야 사부의 눈썰미에 탄복했으며 젊은이의
무공이 자기보다 한 수 위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이렇게 되자 대청의 정세는 변화되어 뭇 도적들이 다투어 패퇴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서둘러 문쪽으로 달려가려고 했다.
그런데 별안간 한 사람이 길게 휘파람을 내불더니 소리쳤다.
[모두 손을 멈추시오. 할 말이 있소이다.]
뭇 사람들이 한창 신나게 싸우는 판이라 그 사람을 아랑곳 하지 않았다.
갑자기 그림자가 번뜩이면서 나타난 사람이 손을 뻗쳐 상보진을 가로막으며
손을 내저었다. 상보진은 즉시 칼을 들어 베려고 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오른
손을 구부리며 잡아당겼는데 어느덧 상보진의 칼을 빼앗아 땅바닥에 던지는 것
이었다. 상보진은 깜짝 놀라 급히 뒤로 물러서서 자세히 그 사람을 바라보니 그
는 놀랍게도 바로 젊은 부인과 함께 온 사내였다.
그 상공은 성큼성큼 사람들 틈으로 들어가더니 두 손을 거머쥐고 사람들의 무
기를 낚아챘다. 쩡쩡! 창창! 하는 소리가 끊임없이 일면서 무기돌이 땅바닥애
떨어졌다. 그가 펼치는 소금나수법(小擒拿手法)에 모두 무기를 빼앗긴 것이었
다.
뭇 도적들과 표국의 사람들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나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
다.
염기도 멍하니 쳐다보다가 갑자기 십여 년 전의 일이 떠올라 기뻐하며 외쳤
다.
[전(田)상공! 당신이로군요!]
그 상공은 그가 누구인지 몰라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당신은 나를 아시오?]
염기는 웃었다.
[십삼 년 전 창주부( 州府)에서 소인은 한때 어르신을 시중 든 적이 있지요.]
그 상공은 고개를 숙이고 생각해보더니 그제서야 생각이 난듯 말했다.
[그렇군. 당신은 바로 타박상을 치료하던 그 의원이군. 그런데 어떻게 무공을
배워 채주 노릇을 하게 되었소?]
염기는 앞으로 나아가 정중히 문안을 드리며 말했다.
[모든 것이 어른신의 덕택이지요.]
이 상공은 바로 천룡문(天龍門) 북종(北宗)의 장문인인 전귀농(田歸農)이었
다.
표국의 사람들은 이제 뭇 도적들을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무
공이 지극히 고강한 전상공이 도적의 괴수와 구면인 것을 보고 이번에야말로 큰
일났다고 생각했다.
마행공은 모두들 표차를 보호하라고 당부를 했다.
전귀농은 뭇 사람들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나서 다시 뜨락에 퍼부어지
고 있는 빗줄기를 바라보다가 표차에 시선을 멈추고 염기에게 말했다.
[염형, 오늘 장사는 당신이 아무래도 조금은 손해를 보아야 할 것 같구려.]
염기는 웃음짓는 얼굴을 했다.
[어르신께서는 너무 나무라지 마십시오. 형제들이 먹을 밥이 없고 나아갈 길
도 없기 때문에 부득이 이와 같이 밑천 안드는 장사를 하게 되었소이다. 우리들
을 어여삐 보아주신다면 개과천선할 것이며 전상공의 은덕도 잊지 않겠습니다.]
전귀농은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어째서 나에게 속된 예의를 차리는 거요. 채주, 당신은 오만 냥의
표은만 가지면 충분히 쓸 수 있겠지요?]
염기는 어리둥절 해졌다가 웃음을 짓고 말했다.
[어르신께서는 농담도 잘 하시는군요.]
전귀농은 말했다.
[농담을 하다니, 이곳에 삽십 만 냥의 표은이 있소. 내가 십오 만 냥을 가져
가고 나머지에서 당신이 오만 냥을 가져가시오. 그래도 십만 냥이 남는데 그것
은 어떻게 나누면 좋겠소?]
염기는 뜻밖의 결과에 기뻐서 말했다.
[어르신네가 다 가져 가시죠. 나누기는 뭘 나눕니까?]
전귀농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말이 안되고 또 그렇게 한다면 강호의 의리를 저버리는 일이 아니오?
조금전에 내가 비를 피하려 들어왔을 때 나...... 나의 아내가 옷이 젖어
서.......]
그 아름다운 젊은 부인은 그가 '나의 아내'라는 말을 하자 얼굴을 붉히며 얼
굴에 더욱더 겸연쩍은 빛을 띠우면서 전귀농에게 미미하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전귀농은 역시 그녀에게 싱긋 웃고 계속해서 말했다.
[그런데 이 표국의 아가씨가 그녀에게 옷을 빌려 주었구려. 이같은 은혜에 보
답을 하지 않을 수가 없구려....... 마소저에게 오만 냥을 넘기기로 합시다. 그
리고 이곳에 세 분의 시위대인이 계시오. 보는 사람에게도 한 몫이 있다고 했
소. 세 사람에게 각기 일만 냥씩 나누어 줍시다. 그리고 나머지 이만 냥은 이곳
주인에게 내어줍시다. 당신은 이렇게 나누는 것이 공평하다고 생각지 않으시
오?]
염기는 연신 손뼉을 치며 큰 소리로 말했다.
[아주 공평합니다. 공평하구 말구요. 나는 일찌기 전상공이야말로 천하에 으
뜸가는 호탕한 대영웅이라고 말한 적이 있지요.]
마행공과 서쟁, 그리고 마춘화 등은 전귀농이 도도하게 이야기할 뿐만 아니라
방약무인한 태도로 마치 자기 주머니에 삼십만 냥의 은자가 있는 것처럼 하는
말에 어이가 없었다.
마행공은 몸에 중상을 입고 있는 데다가 전귀농이 말하는 소리를 듣고 울화가
치밀어 머리가 돌 지경이었다.
서쟁은 사부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쩌죠? 어떻게 해야 되죠?]
마춘화는 화를 내며 말했다.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요?]
그리고 그녀는 허리를 구부려 땅바닥에 떨어진 칼을 집어 들고는 부르짖었다.
[전가라는 양반, 당신은 우리들을 죽은 시체로 여기나요? 아니면 살아있는 사
람이라고 여기나요?]
마춘화는 단도를 쳐들고 곧장 전귀농에게로 달려갔다.
전귀농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이쿠, 내가 당신과 손을 쓰도록 강요하지 마시오! 우리 마나님이 질투를
한단 말이오.]
그 아름다운 젊은 아낙은 칙!하고 침을 뱉는 시늉을 하고서 웃으며 꾸짖었다.
[말은 번지르르하군!]
그녀는 그의 경박한 말투를 오히려 좋아하는 것 같았다. 마춘화는 전귀농의
무례한 말을 듣고 더욱더 노기가 끓어올라 달려들어 한 칼을 휘둘러 그의 허리
를 비스듬히 베어갔다.
전귀농은 웃었다.
[아이쿠, 야단 났구나. 나의 마나님께서는 내가 지분 냄새나는 외간 여인과
싸우는 것을 용서하시지 않는단 말이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칼등을 쨍! 소리가 나도록 찍었다. 마춘화는 제
대로 잡지 못하고 그만 칼을 놓치고 말았다.
전귀농의 수법은 지극히 빨랐다. 오른손으로 칼자루를 낚아챘고 왼손으로는
그녀의 손목을 내려치려는 자세를 취하고 전귀농은 싯구를 읊듯이 말했다.
[꽃과 같이 어여쁘고 달과 같이 고운 얼굴을 내 어찌 아끼지 않으랴!]
상보진과 서쟁은 그가 마춘화를 희롱하는 것을 보자 일제히 달려 나왔다. 상
보진은 오른손을 쳐들어 한 대의 금표로 전귀농의 오른쪽 눈을 향해 던졌다.
서쟁은 다급한 나머지 미처 땅바닥에 떨어진 무기를 집어들사이도 없이 발을
들어 전귀농의 등을 걷어차려고 했다.
전귀농은 벼락같이 몸을 돌리며 칼을 거두고 금나수법을 써서 서쟁의 발목을
잡아 위로 끌어올렸다. 서쟁은 몸이 휙! 쳐들리는 순간 다리에 격렬한 통증을
느끼고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바로 상보진이 던진 금표가 서쟁의 오른
쪽 다리에 맞은 것이었다.
전귀농은 곧 손을 휘저으며 한번 떨쳤다. 순간 서쟁의 몸뚱아리는 빗자루처럼
옆으로 쓰러지며 마춘화의 다리에 부딪혀 두 사람은 한데 뒤엉켜 나뒹굴었다.
뭇 사람들은 그가 두 사람을 어린애를 데리고 희롱하는 듯하자 감히 앞으로
나설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전귀농은 염기에게 말했다.
[염형, 당신은 내가 이야기한대로 표은을 나누고 수레 한 대는 나에게 주시구
려. 우리는 급한 일이 있어 당장 길을 떠나야 한다오.]
염기는 기뻐하며 연신 '예, 예'하고 대답을 했다.
뭇 도적들은 표차에서 은초(銀 )를 꺼내서 오만 냥을 한 무더기를 쌓고, 삼만
냥과 이만 냥을 각기 한 무더기씩 쌓고는 마부들에게 호통을 내질렀다.
[얌전하게 길을 떠날 채비를 해라!]
북쪽의 강호 도상에는 규칙이 있었는데 이는 녹림호객이 표화물이나 표은을
약탈할때 결코 마부들에게 상해를 입히지 않으며 심지어 짐꾼들에게는 상례에
따라 술값까지도 지급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부가 만약에 분부를 듣지 않을
때는 물론 상황이 달라진다.
뭇 마부들은 이와 같은 형세를 보자 그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어 큰 비를 무
릅쓰고 표은을 실은 수레를 한 대 한 대 밖으로 끌어냈다.
마행공은 표은을 실은 수레가 한 대씩 나갈 때마다 마음이 쓰렸다. 노새가 끄
는 마차가 정원 앞에 이르자 전귀농이 부인을 부축해서는 수레 위로 오르려고
했다.
이 마차가 떠난다면 마행공은 그야말로 패가망신을 하는 것이고, 한평생 해온
고생은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것이었다. 마행공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더니 갑
자기 몸을 솟구치며 부르짖었다.
[이놈! 사생 결단을 내겠다!]
마행공은 두 손을 갈고리처럼 하여 맹렬히 전귀농의 얼굴을 할퀴려 들었다.
아름다운 젊은 부인은 놀라 소리를 질렀다. 전귀농은 몸을 옆으로 기울이고 즉
시 손을 뻗쳐 그의 어깨쭉지를 후려쳤다.
마행공이 중상을 입지 않았더라면 그 일장을 당연히 피했겠지만 지금은 전신
의 근골이 말을 듣지 않았다. 손이 뻗쳐오는 것을 멀쩡하게 쳐다보면서도 피하
지 못하고 텅! 하는 소리와 함께 마당 한복판에 고꾸라졌다.
별안간 한 사람이 나직하고 무거운 음성으로 허허허! 하고 냉소를 흘렸다.
이 소리가 대청 안으로 들려오자 전귀농과 젊은 부인은 대뜸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소리를 들은 것처럼 새파랗게 질려 몸을 벌벌 떨었다.
전귀농은 젊은 부인을 수레 안으로 밀어넣고 몸을 솟구쳐 노새의 등에 타고서
두 발로 급히 노새의 배를 차며 황망히 길을 재촉했다.
전귀농은 연신 채찍을 휘둘렀으나 노새는 겨우 두 걸음을 내딛을 뿐 걸음을
멈춘 채 앞으로 반 자도 나아가지 못했다.
대청 입구에 서 있던 뭇 사람들은 장대같은 빗줄기 속에 한명의 키가 크고 비
쩍마른 대한이 왼손에 보따리를 들고 오른손으로 수레의 지렛대를 잡아 당기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노새는 전귀농이 급하게 재촉하게 되자 머리를 숙이고 엉덩이를 뒤틀며 네 발
굽에 힘을 주었지만 대한이 수레의 지렛대를 끌어당기자 수레는 땅바닥에 박힌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 사람의 괴력은 실로 놀라웠다.
그 대한은 다시 냉소를 터뜨렸다.
전귀농이 여전히 노새를 재촉하고 있었다. 수레 안의 아리따운 부인은 마차
안에서 걸어나오더니 대한을 한번 거들떠 보지도 않고 가슴을 편 채 뚜벅뚜벅
대청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전귀농도 어쩔 수 없이 노새의 등에서 내려 대청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전귀농은 전신이 비에 흠뻑 젖어 있었는데도 전혀 개의치 않고, 눈은 촛점을
잃어 마치 혼이 빠진 사람 같았다. 아름다운 부인은 손짓을 해서 전귀농을 불러
그녀의 곁에 앉도록 했다.
키가 크고 비쩍마른 대한은 성큼성큼 대청 안으로 들어오더니 모닥불 옆에 앉
으며 다른 사람을 아랑곳하지 않고 보따리를 풀었다. 그 안에는 두 살 정도 먹
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들어있었다. 그 대한은 아기가 감기에 걸릴까봐 아이를
안고 불가에서 불을 쬐었다. 그 아기는 곤히 잠이 들어 있었는데 울다가 잠이
들었는지 동그란 눈가에는 눈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마춘화와 서쟁 그리고 상보진 세 사람은 마행공을 부축해 일으켰다. 그들은
전귀농이 그 비쩍마른 대한을 그토록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 모두 놀라면서도 기
뻐했다.
마춘화가 마행공에게 물었다.
[아버지 상처는 어떠세요? 저...... 저 사람은 누구죠?]
마행공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그는...... 그는...... 타편천하무적수인...... 금...... 금면불묘인
봉......]
마행공은 그 한 마디를 미처 끝내지도 못하고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대청에는 비마표국의 표사와 당자수들이 동쪽 귀퉁이에 모여 있었고, 염기와
뭇 도적들은 서쪽 귀퉁이에 모여 있었다.
세 명의 시위와 상보진은 의자 뒤에 서 있었는데 각자의 선은 모두다 묘인봉
과 전귀농, 그리고 아름다운 젊은 부인 사람에게로 집중되어 있었다.
묘인봉은 품속에 있는 어린애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사랑과 연민의 빛이 흘러 넘쳤으며 자애로움과 부드러운 정으로 가득 차 있었
다. 조금전 그가 한 손으로 건장한 노새가 끄는 큰 수레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
던 놀라운 신력을 보지 못했더라면 그 누구도 이 평범해 보이는 사람이 천하를
통털어도 적수가 없다는 천하제일의 무공을 지닌 사람이라고 믿지 않았을 것이
다.
아름다운 젊은 부인의 표정과 태도는 태연자약했다. 멍하니 모닥불을 바라보
고 있었지만 입술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으며 마음속으로 심히 불안해 하는 듯
했다. 그러나 입가에는 한 가닥의 냉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전귀농은 백지장처럼 창백한 안색으로 억수처럼 쏟아지고는 빗줄기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이들 세 사람은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을 뿐, 그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눈길을 던지지 않고 조용히 앉아있었다.
그러나 세 사람의 마음 속에는 거대한 파도가 용솟음치고 있었으니...... 그
누가 알겠는가?
그 격동의 파도 속에는 환희와 애수와 분노가 서려 있었고 또한 공포감도 있
었다.
처절한 살육전
묘인봉은 품속의 어린 딸의 곤히 잠든 앙증맞고도 고운 조그만 얼굴을 바라보
며 삼 년 전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미 삼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건만 사흘
밖에 지나지 않은 것처럼 기억에 생생했다.
지금은 억수같은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삼 년 전 그 날은 거위 털 같은 눈송
이가 흩날리며 온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그것은 하북(河北) 창주( 州)의 길가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설 대목이라 행인
은 드물었다. 묘인봉은 황마를 타고 고삐를 잡은 채 묵묵히 북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십 년 전 섣달, 그는 요동대협(遼東大俠) 호일도와 창주에서 무공을 겨루는
도중에 일순간의 실수로 독이 묻은 칼로 호일도에게 상처를 입혀 죽게 만들었
다. 이에 호부인은 부군을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와 호일도는 무공뿐만 아니라 호방한 기상마저도 비슷해 두 사람은 적에서
친구로 되어 서로를 존경했다. 그런데 일초의 실수로 말미암아 한평생 유일한
지기를 해치고 만 것이었다. 그는 타편천하무적수라 일컬어졌으며 이 세상을 주
름잡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요동대협을 만나 닷새를 두고 무공을 겨루며
밤새도록 이야기를 한골에 진정한 호적수를 만나게 되었고, 동시에 진정 의기투
합하는 친구가 되어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사이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묘인봉은 이 일로 십 년 동안 마음 아파하면서 좀처럼 웃음을 띠우는 일이 없었
다.
호일도 부부가 세상을 떠난 지 꼭 십 년째 되는 기일이라 묘인봉은 천리길을
멀다 하지 않고 절남(浙南)에서 달려와 친구의 묘 앞에서 친히 제사를 올리려
했다.
눈보라는 마지막 가는 해를 아쉬워하는 듯 대지를 뒤덮고 있었고, 묘인봉의
마음은 창주가 가까워지면 가까와질수록 어두워지는 날씨만큼이나 점점 무거워
졌다.
묘인봉은 천천히 말을 몰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만약 그때 실수를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호씨 부부와 함께 천하를 주
유하며 탐관오리나 못된 도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고 있었을텐데. 그렇게 되
었다면 그 얼마나 멋진 일이었을 것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뒤에서 수레바퀴 소리와 마부가 노새
를 채찍질하며 다그치는 소리가 들렸다. 수레를 모는 건장한 노새는 연신 허연
김을 내뿜으며 눈보라를 무릅쓰고 네 발굽을 신속히 놀리며 빠른 속도로 달려오
고 있었다.
커다란 수레가 묘인봉의 곁을 지나칠 때, 수레 안에서 간드러진 여인의 음성
이 들려왔다.
[아버지, 경사에 가면 궁화(宮花)를 사주셔야 해요. 그걸 머리에 꽂으면 멋질
거예요.......]
그 다음 말은 명확히 들리지 않았지만 강남 땅에서 자란 듯 부드럽고 청아한
강남의 말투라 끝없이 펼쳐져 있는 북방의 황량한 풍설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처
럼 들렸다.
그런데 별안간 노새의 왼발이 허공을 밟으며 대뜸 앞으로 기울어졌다. 마부가
손을 뻗쳐 들어올리자 노새는 그 힘을 빌어 발을 뽑아내고 계속 앞으로 달려나
갔다.
묘인봉은 이와 같은 광경에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했다.
(저 마부가 들어올리는 수법은 매우 뛰어난 솜씨다, 실로 훌륭한 완력이구나.
보기에 풍진기사(風塵奇士)같은데 어찌하여 마부가 되었을까?)
이러한 생각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또 다시 발걸음소리가 울려퍼지며 뒤에서
한 명의 짐꾼이 막대기에 봇짐을 걸고 성큼성큼 달려오고 있었다. 한 자루의 대
추나무로 만들어진 멜대가 휘어진 것으로 보아 짐은 퍽이나 무거워 보였지만 그
짐꾼은 아무렇지 않는 듯 눈이 덮인 땅위에 발을 때어놓은 것이 무척 경쾌해 보
였다.
묘인봉은 더욱더 이상하게 생각했다.
(이 짐꾼은 힘이 대단할 뿐아니라 경신법 또한 뛰어나구나.)
묘인봉은 이 가운데 반드시 어떤 사정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 짐꾼은 마치 그 마차를 뒤쫓고 있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한바탕 원한을
갚으려는 복수극이 벌어질 것 같구나.)
그는 말채찍을 휘두르며 일정한 거리를 두고 수레의 뒤를 따라가며 어떻게 되
는가 두고보기로 하였다.
수 마장을 나가게 되었지만 그 짐꾼은 어깨에 무거운 짐을 메고도 여전히 나
는 듯이 달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등뒤에서 징소리가 쩡쩡쩡! 울려퍼지며 한 사내가 솥을 때우는
기구를 담은 상자를 메고서 두둥실 날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이 사람은 눈위를
걷는데도 발을 떼어놓는 것이 더욱더 가벼워서 답설무흔(踏雪無痕)의 경지, 눈
을 밟아도 발자국을 거의 남기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한 훌륭한 경신법은 실로
무림에서 보기 드물었다.
묘인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또 한 사람이 늘어났군. 이 사람은 어느 파의 사람일까?)
그 사람의 삿갓과 도롱이 위에는 백설로 뒤덮여 있었는데 눈보라를 해치며 질
풍같이 나아가고 있었다.
묘인봉은 즉시 깨닫는 바가 있었다.
(아! 그의 경신술은 악북(鄂北) 귀견수(鬼見愁) 종(鍾)씨 집안의 무공이구
나.)
칠팔 마장을 나가자 날이 어두워졌다. 그는 한 조그만 고을에 당도하였다.
묘인봉은 그 커다란 수레가 객점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자신도 그 객점 안
으로 들어가 방을 빌렸다. 객점은 작은 면이었으나 고을에는 이 한 집밖에 없었
다.
손님과 장사치들은 모두 다 대청에 몰려들어 불을 쬐며 고량주를 마시고 있었
는데 그들 중에는 길을 오면서 본 마부와 짐꾼, 땜쟁이도 있었다.
묘인봉은 천하에 명성을 떨치고 있었으나 근 십년 동안은 절강성 이남에서 은
거해왔기 때문에 무림에서는 그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짐꾼과 마부, 땜쟁
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묘인봉은 아무말 없이 조그만 탁자에 앉아서 술과 밥을 시켰다. 짐꾼과 마부
와 땜쟁이는 각자 따로 술을 마시고 밥을 먹는 것으로 보아 결코 한 패거리가
아닌 것 같았다.
홀연 내원(內院)에서 한 사람이 큰소리로 말했다.
[남대인(南大人), 그리고 남소저, 조그만 곳이라 대접이 말이 아니군요. 부득
이 바깥 대청에서 식사를 하셔야겠습니다.]
무명베로 만든 휘장이 들춰지면서 점소이가 관원(官員) 한사람과 소저를 모시
고 대청으로 들어왔다. 앉아 있던 나그네들과 장사치들은 관원을 보자 다투어
몸을 일으켰다.
묘인봉은 아랑곳하지 않고 술만 마시고 있었다.
그 관원은 자색 비단을 댄 여우가죽 장포를 입고 있었으며 피부가 멀쑥하고
통통한 것이 재물 복을 타고 난 사람 같았다. 그 소저의 얼굴은 매우 아름다왔
으며, 피부 역시 희고 고왔는데 북쪽 지방에서 보기 드문 미녀인 것은 말할 나
위도 없고 강남땅에서도 극히 찾아보기 힘든 미녀였다. 그녀는 몸에 파르스름한
비단을 댄 가죽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 빛깔이 무척 고왔다. 그러나 그녀의 환한
얼굴에 비하면 아무리 찬란한 비단이라 하더라도 빛을 잃을 것 같았다.
사람들은 눈앞이 환히 밝아오는 것을 느끼자 불현듯 열등감을 느끼게 되었으
며 어떤 사람들은 겸연쩍은 표정으로 복도로 물러섰기 때문에 대청에는 대뜸 커
다란 공터가 비워졌다.
점소이는 잇따라 대인이니 소저니 하면서 밥을 나르고 술을 나르는 등 접대하
는 것이 필요 이상으로 지극히 친절했다.
묘인봉은 점소이가 술과 음식을 시킬 때 내지르는 고함소리에 중기(中氣)가
충만한 것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주의하여 그의 신형(身形)과 보법(步法)을 살
펴보았다. 과연 그는 무공을 아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양쪽 태양혈이 불룩 솟아
있는 것이 내공에 퍽이나 깊은 조예를 지닌 것 같아 의아하여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들은 틀림없이 무엇인가 도모하는 바가 있을터이니 그들이 좋은 일을
하는지, 나쁜 일을 하는지 구경이나 하자. 그런데 이 벼슬아치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구나.)
묘인봉은 이렇게 생각하며 관원과 소저를 몇 번 더 힐끗 쳐다보자 관원이 갑
자기 탁자를 두드리며 묘인봉을 손가락질하며 꾸짖었다.
[너는 뭣 하는 놈이냐? 관원을 보고도 피하는 것은 고사하고 도적같은 눈동자
를 띠룩띠룩 굴리며 쳐다보다니 어쩌자는 것이냐? 거친 손에 발이 큰 것이 꼭
도적의 쌍판이구나. 또 다시 쳐다본다면 현감에게 보내 가죽이 터지고 살이 문
드러지도록 매질을 해 주겠다.]
묘인봉은 고개를 숙인 채 술만 마실 뿐 아랑곳하지 않자 그 관원은 더욱 노해
서 부르짖었다.
[너는 문안을 여쭈거나 사과를 할 줄도 모른단 말이냐? 건방지게 떡 버티고
앉아 있다니?]
그러자 그 소저가 부드러운 어조로 권했다.
[아버지, 그렇게 화를 내실 필요가 어디 있어요? 원래 시골사람들은 예법을
모르는 사람이 많아요. 왜 저런 거친 사람과 똑같이 행동하려고 하세요. 자, 한
잔 드세요.]
그러면서 그녀는 술 한잔을 아버지의 입가로 가져갔다. 그 관원은 꿀꺽 한 모
금의 술을 마시며 노기를 술과 함께 삼키는 듯 했다. 그는 묘인봉을 한번 흘겨
보았다. 묘인봉이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보자 두려워서 그런
다고 생각하며 자기의 잔에 술을 따라 딸과 함께 웃고 이야기를 하며 술을 마셨
다.
그들이 주고받은 말은 모두 다 북경으로 가서 벼슬자리에 앉게 되면 어떻게
하겠다 하는 것이었는데, 그 표정으로 미루어 볼 때 북경에 가서 직책을 얻으려
는 관원 후보 같았다.
이때, 대문이 활짝 열렸다. 눈보라가 휘몰아쳐오며 다른 관원이 들어섰다. 이
사람은 노란 살결에 몸은 깡말라 먼저번의 관원과 같은 위풍당당한 기세는 없었
다. 그는 큰소리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살다 보면 어디선가 만난다고 하더니, 인통(仁通)형과 이곳에서 마주치게 되
다니 정말 세상 일은 묘하군요.]
그러면서 다가와 남씨 성의 벼슬아치인 남인통(南仁通)과 인사를 했다.
남씨 부녀는 일제히 몸을 일으키게 되었고 남인통은 두 손을 맞잡아 보였다.
[조후(調侯)형, 반갑소이다! 이리로 앉으시지요.]
조후라는 사내는 고맙다는 말을 하고 탁자 곁에 앉았다. 점소이가 잔과 젓가
락을 더 가져왔으며 술과 음식을 가져왔다.
묘인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조후라고 불리우는 사람까지 모두가 다섯 명의 고수가 모인 셈이로구나.
저 남씨 성을 가진 부녀는 무공을 지니고 있지 않는 것 같은데, 대지약우(大智
若愚)라고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닌지 모르겠구나.)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게 되자 그는 자기도 모르게 암암리에 경계를 하며 감히
그들을 쳐다보지 못했다. 사실 묘인봉의 타편천하무적수라는 별명은 너무 거창
하고 거만해 보였기 때문에 천하의 영웅호걸들은 누구나 그를 꺽어 망신을 주려
고 벼르고 있었다. 따라서 그가 한평생 겪게 된 풍상과 위험은 다른 사람보다
백 배나 더 되었는데 그 대부분이 이 별호 덕택이었다.
묘인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들은 어쩌면 나 때문에 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이 떼를 지어 일제
히 덤벼든다면 상대하여 싸우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어딘가에 더 강한 고
수가 매복을 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구나.)
조후라고 불리는 사람은 남인통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소리높여 지껄여대고 있
었다. 그 내용은 모두 다 관계(官界)에서 벼슬이 승진하고 강등된 것에 대한 소
문이나 일화들이었다.
이때 복도에 있던 짐꾼과 땜쟁이가 큰소리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다투는 것은 이 세상에 정말 무쇠를 무우 자르듯 하는 보검이나 보도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었다.
짐꾼이 입을 열었다.
[뭐가 무쇠를 무우 자르듯 한다는 것이냐? 모두 다 허풍에 지나지 않아, 보도
(寶刀)라고 해봤자 약간 더 예리할 뿐이겠지. 그럴리가 있겠는가?]
땜쟁이는 그 말을 받았다.
[자네가 이 세상을 얼마나 살았다고 그런 소리를 하는가? 자네가 알면 또 얼
마나 알겠는가? 보도라고 하면 보도인 줄 알라구. 만약 자네가 놀라 자빠지지만
않는다면 내가 구경시켜 주지!]
짐꾼은 소리쳤다.
[자네에게 보도가 있단 말인가? 잠꼬대 같은 소리 하지말게. 보도가 있다면
땜쟁이가 되지도 않았겠지. 고작해야 손도끼나 녹슨 식칼 한두 자루 있을 뿐이
겠지.]
그 말을 듣고 뭇 사람들은 모두 소리내어 웃었다.
땜쟁이는 씩씩거리며 상자에서 한자루의 칼을 꺼냈다. 녹색가죽으로 만든 칼
집은 입구가 금으로 장식되어 있어 비범해 보였다. 그는 휙! 하니 칼을 칼집에
서 뽑았다. 순간 칼날이 불빛에 반사되자 감추고 있던 요기(妖氣)를 드러내듯
예리하게 빛났다. 이에 뭇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칭찬의 말을 던졌다.
[훌륭한 칼이다!]
땜쟁이는 칼을 들어 짐꾼을 찌르려는 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짐꾼은 머리를
얼싸안고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아이구머니나! 제발 살려줍쇼!]
그 모양을 보고 뭇 사람들은 다시 한번 우렁찬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묘인봉은 두 사람의 표정과 태도를 보고 생각했다.
(저 두 사람은 알고 보니 한 패거리로군. 저렇게 연극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
까? 나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땜쟁이는 입을 열었다.
[어이, 점소이! 훌륭한 손도끼나 식칼이 있다면 한자루 빌려주게.]
점소이가 대답하더니 부엌으로 들어가 한 자루 식칼을 가져왔다. 땜쟁이는 말
했다.
[잘 들고 있게나!]
점소이는 식칼을 높이 쳐들었다. 땜쟁이는 칼을 옆으로 휘둘렀다. 창! 하는
소리가 나면서 식칼은 대뜸 두 토막이 났다.
뭇 사람들은 일제히 갈채를 보냈다.
[정말 보도로다!]
땜쟁이는 의기양양해서는 큰소리치며 그 보도가 얼마나 무서우며 얼마나 진귀
한 것인가를 떠벌이는 것이었다. 복도에 있던 뭇 사람들은 얼굴에 부러운 빛을
띠우고 흥미진진하게 그 보도를 바라보았다.
남인통은 그와 같은 광경을 묵묵히 바라보더니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비웃는 표정을 지었다.
조후라는 사람이 입을 열었다.
[인통형, 저 칼은 정말 보(寶)자를 붙일만 하구려. 그런데 하루 벌어 하루 먹
는 짐꾼들에게 저와 같은 예리한 무기가 있으니 뜻밖이구려.]
남인통은 대꾸했다.
[예리하기는 예리하되 보자를 보태야 할 가치는 없는 것 같소이다.]
조후라는 사람이 입을 열었다.
[인통형의 그 말씀은 틀렸소이다. 저것 보시오! 저 칼은 무쇠를 무우 자르듯
했는데 이 세상에 저 칼보다 나은 것이 어디 있겠소?]
남인통은 말했다.
[형은 너무나 호들갑을 떠는 것같구려. 이 형제에게는 더욱 훌륭한....... ]
다시 말을 계속하려고 했을 때 남소저가 갑자기 불쑥 끼어들었다.
[아버지, 너무 술을 많이 드셨으니 빨리 밥을 드시고 주무시러 가시지요.]
남인통은 웃었다.
[허! 계집애들이란 누구나 자기 아버지를 간섭하기 좋아한단 말이야.]
그러면서 밥을 먹기 시작했고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조후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 형제는 어찌됐든 간에 시야를 넓힐 수 있었구려. 저와 같은 보도는 형도
한평생 처음 볼 것이외다.]
남인통은 냉소했다.
[저 칼보다 열 배나 나은 칼도 이 형제는 종종 본다오.]
조후라는 사람은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농담도 잘 하시는군. 인통형은 문관인데 어떻게 보도를 볼 수 있단
말이오?]
땜쟁이는 두 사람이 주고 받는 말을 듣더니 큰소리로 입을 열었다.
[세상에 이보다 더 뛰어난 보도가 있다면 나는 머리를 잘라 저 분에게 바치겠
소이다. 허풍을 떠는 것이야 그 누가 못하겠소? 하! 내 아들이 오품(五品)의 벼
슬을 하고 있다면 당신들은 믿을 수 있겠소?]
뭇 사람들은 남인통의 눈치를 살피며 재빨리 호통소리를 내질렀다.
[터무니 없는 소리를 하다니. 빨리 아가리 닥치게! 관원을 우롱하다간 뼈도
추리지 못할 것이야.]
남인통은 울화가 치미는듯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성큼성
큼 방쪽으로 걸어갔다. 남소저는 연신 불렀다.
[아버지, 아버지!]
그러나 남인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즉시 석자 길이의 만도(彎刀)를 가지고 나
왔다. 그 칼집은 시꺼먼 것이 특이한 점이 없었다. 그는 큰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봐, 땜쟁이! 내게 칼이 있는데 너의 것과 한번 겨루어 보도록 하겠다. 네
가 지면 머리통을 잘라야 한다.]
땜쟁이는 말했다.
[만약에 나으리께서 진다면요?]
남인통은 성이 나서 말했다.
[내 머리통을 잘라 너에게 주마.]
남소저는 말했다.
[아버지, 과음하셨어요. 그들과 쓸데없는 말을 할 필요가 어디 있어요? 어서
방으로 들아가도록 하세요?]
남인통은 깨닫는 바가 있는듯 싸늘히 코웃음 치더니 칼을 받쳐들고 방으로 되
돌아 가려고 했다.
땜쟁이는 그가 방으로 들아가려는 것을 보자 다시 자극적인 한 마디를 던졌
다.
[만약에 나으리께서 지게 된다면 소인이 어찌 나으리의 머리를 자를 수 있겠
습니까? 그 대신 나으리, 소인을 사위로 삼아 주시지요?]
뭇 사람들은 와! 하고 웃었고 어떤 사람은 그가 터무니 없는 말을 지껄인다고
꾸짖었다. 남소저는 울화가 치밀어 얼굴이 새빨개져 더 권하지 않고 횅하니 자
기 방으로 돌아갔다.
남인통은 자기 방으로 돌아가려다 천천히 몸을 돌려 칼을 뽑았다. 겨우 반 자
정도 뽑혔는데도 싸늘한 푸른 광채가 격사(激射)되어 나왔고 칼이 완전히 뽑혀
지자 광채가 번쩍번쩍하여 눈을 부시게 했다. 남인통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의 이 칼은 이름이 있다. 냉월보도(冷月寶刀)가 그것이다! 너희들은 똑똑
히 보았겠지!]
땜쟁이는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았다. 칼자루에는 금실과 은실로 초생달 보양
이 상감되어 있었다. 그는 찬찬히 훑어보더니 말했다.
[나으리의 칼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좋군요.]
묘인봉은 뭇 사람들이 충동질하여 남인통이 보도를 꺼내오도록 한 것을 보자
이 사람들은 이 보도 때문에 이곳까지 온 것임을 명백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무공을 익히는 사람들은 보검과 같은 예리한 무기를 지니면 그의 무공이 수십
배로 증강되는 것이므로 생명처럼 중시했다. 그 보도를 보고 뭇 사람들이 눈이
벌개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런데 남인통은 문관인데 어디서 칼이 났을까? 그리고 이 사람들은 어떻게
알고 쫓아온 것일까?
묘인봉은 처음 몇 사람이 음모를 꾸미는 것이 자기를 상대하는 줄 알고 경계
를 했으나 그들이 보도 때문에 온 것임을 알게되자 당사자에서 방관자로 변하여
마음이 놓였다.
보도가 칼집에서 뽑혀지게 되자 조후라는 자와 점소이, 짐꾼, 땜쟁이는 일제
히 옆으로 다가들었다.
묘인봉은 그들 다섯 사람이 모두 칼을 노리고 있으나 서로를 견제하느라 감히
손을 쓰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남인통은 그 땜쟁이가 경박한 말을 하자 그와 겨루어 보려고했으나 그 자가
가진 칼이 예리해 보이고 보통 물건이 아니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인통은 싸우
다가 쌍방이 손상을 입게 된다면 품위를 손상시키는 일이라 생각하고 담담히 입
을 열었다.
[알면 됐다. 또 다시 터무니 없는 말을 찌껄이겠느냐?]
그리고서 칼을 꽂으려하자 조후라는 관원이 갑자기 그 칼을 빼앗아 획! 소리
를 내며 땜쟁이의 칼을 후려쳤다. 그러자 쨍그랑! 하면서 땜쟁이의 칼이 두 토
막이 나며 바닥에 떨어졌다.
땜쟁이, 짐꾼, 마부, 점소이 등 네 명은 조후라는 관원을 에워싸고 즉시 덤벼
들려고 했다. 조후라는 자는 보도를 손에 들고 있었으나 중과부적이라고 느끼고
즉시 칼을 남인통에게 돌려주고 엄지 손가락을 내밀며 추켜세웠다.
[과연 훌륭한 칼이구려. 훌륭한 칼이야!]
남인통은 안색이 변해 꾸짖었다.
[허참, 당신은 너무 경망하구려.]
그러나 남인통은 자신의 보도가 아무 이상이 없음을 발견하자 싱글벙글 웃으
며 칼을 꽂고는 자기방으로 돌아갔다.
묘인봉은 다섯 사람이 남인통을 자극하여 칼을 시험해 보았으므로 곧 한바탕
유혈참극을 벌리게 될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묘인봉은 협의심을 품고 있었지만 남인통이 제 멋대로 행세하는 것을 보고 좋
은 인물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 보도 역시 간교한 술책을 써서 빼앗은 것이라
고 짐작했다. 그는 지금 제사를 모시러 가는 길이라 그들의 불손한 행동에 대해
서 아랑곳하지 않기로 작정했다.
이튿날 묘인봉이 일어나보니 남인통은 이미 출발을 하였고 땜쟁이 등도 객점
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더구나 점소이마저도 사라지고 없었다. 주인에게 물어보
니 아니나 다를까 그 점소이는 어제 해질 무렵에 찾아온 고약한 손님인데 열 냥
의 은자를 주며 점소이 노릇을 하겠다고 자청했다는 것이었다.
묘인봉은 탄식했다.
(보물이 있으면 도적이 꼬인다는 말이 있는데 그게 사실이구나!)
묘인봉은 돈을 치루고 말에 올라 길을 떠났다.
한 이십여 리를 가게 되었을 때, 갑자기 서쪽 산기슭에서 여인의 애절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살려줘요. 목숨만 살려주세요!]
바로 남소저의 음성이었다. 묘인봉은 생각했다.
(저 악독한 도적들이 칼을 빼앗고도 모자라 사람을 죽이려고 하니 상관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즉시 묘인봉은 말에서 내려 경신법을 펼쳐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달려갔다. 모
퉁이를 돌아서자 눈덮인 땅 위에 새빨갛게 피가 흩뿌려져 있었다. 남인통은 머
리통이 떨어져나가 죽어 있었다. 그 옆에 냉혈보도가 떨어져 있었으나 어느 누
구도 감히 먼저 집어들려고 하지 않고 빙둘러 서 있었으며 남소저는 그 옆에서
땜쟁이에게 두 손이 잡혀 꼼짝을 못하고 있었다.
묘인봉은 바위 뒤에 몸을 숨기고 동정을 살폈다.
조후라는 자가 입을 열었다.
[보도는 한 자루인데 사람은 다섯이니,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소?]
그러자 짐꾼이 대답했다.
[무공으로 승부를 겨루어 이기는 자가 칼을 갖는 것이 공평한 거래가 될 것
같군.]
조후라는 자는 남소저를 힐끗 쳐다보더니 말했다.
[보도와 미인을 한 사람이 독차지할 수는 없겠지.]
땜쟁이가 입을 열었다.
[나는 보도 따위는 필요없소. 나는 이 여인을 데리고 가겠소.]
점소이는 능글맞은 웃음을 입가에 흘리며 말했다.
[그 누가 미녀를 마다하겠소? 당신만 남자인 줄 아슈? 무공이 으뜸가는 사람
이 보도를 얻고 두번째가 미인을 얻도록 합시다.]
짐꾼과 마부는 동시에 소리쳤다.
[옳소! 바로 그렇게 합시다.]
점소이는 땜쟁이에게 말했다.
[노형, 수고스럽지만 그만 그 손좀 놓으시지. 어쩌면 불초의 무공이 두번째
갈 지도 모르오. 남의 여편네 손을 마음대로 잡아서야 쓰겠소?]
조후라는 자가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도 일리가 있군.]
그러면서 고개를 돌려 매서운 어조로 남소저에게 외쳤다.
[네가 다시 소리를 지른다면 먼저 너의 머리통을 두 쪽 내고 말테다!]
땜쟁이는 손을 놓자 남소저는 부친의 시신 옆에 엎드려 흐느껴 울었다.
마부는 다정한 목소리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소저, 울지 마오. 나중에 내가 성합(性合)의 즐거움을 만끽하도록 해드리리
다.]
그러면서 마부는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음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묘인봉은 더이상 참을 수 없어 성큼성큼 바위 뒤에서 걸어나오며 나직하면서
도 무거운 음성으로 호통을 내질렀다.
[치사한 녀석들 같으니라고. 모두 꺼져!]
다섯 사람은 깜짝 놀라 일제히 호통을 내질렀다.
[웬 놈이냐?]
묘인봉은 원래 말이 없는 성격이라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모두들 꺼져.]
땜쟁이는 성질이 가장 급했다. 느닷없이 몸을 솟구치며 오르며 두 손으로 묘
인봉의 가슴팍을 공격하며 호통을 내질렀다.
[너나 꺼져!]
묘인봉은 왼손을 휘둘러 장풍을 쏟아내자 땜장이는 허공에 솟구쳐 올라 일장
밖으로 나가떨어지더니 다시는 일어날 줄을 몰랐다.
나머지 네 사람은 묘인봉이 그토록 절묘한 무공을 구사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던 그들은 한참 후에야 겨우 이구동성으로 물었
다.
[당신은 누구요?]
묘인봉은 여전히 손을 내저었을 뿐 꺼지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마부는 허리춤에서 한 자루의 연편(軟鞭)을 꺼냈고, 짐꾼은 대추나무로 만든
짐을 달아매는 멜대를 비껴 들었다. 그 두 사람은 동시에 좌우 양쪽에서 덮쳐
들었다.
묘인봉은 두 사람이 강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공격을 해 온다면
일시에 이기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손을 쓰자마자 매서운 초식을 펼치기로 작정
하고 몸을 돌려 연편을 피하며 멜대의 끝을 잡고 힘주어 떨쳤다. 그러자 우드
득! 하는 소리가 나며 대추나무로 만든 멜대가 대뜸 두 토막이 났다. 다음 순간
묘인봉은 왼발을 벼락같이 날려 마부를 곤두박질치게 만들었다. 짐꾼은 뒤로 피
하려고 했으나 어느덧 묘인봉의 긴 팔이 뒷덜미를 움켜잡았다. 묘인봉은 일성을
대갈하며 내던지자 짐꾼은 마치 실 끊어진 연처럼 곧장 날아가 눈덮인 땅 위에
내동댕이쳐지고 말았다.
조후라는 자는 대적하기 어려움을 알고 입을 열었다.
[탄복했소이다. 정말 탄복했소이다. 이 보도는 마땅히 귀하가 가져야 겠구
려.]
그러면서 보도를 집어들고 공손히 내밀었다. 묘인봉은 냉랭히 말했다.
[나는 이 보도를 가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니, 원래 주인에게 되돌려 주시오.]
조후라는 자는 어리둥절하여 속으로 생각했다.
(어? 요즘 세상에 아직도 이런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사람이 있었나?)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들고 보니 묘인봉의 얼굴이 황금처럼 노란데다가 위
풍이 당당한 것을 보자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공손히 입을 열었다.
[귀하는 금면불 묘대협이시군요.]
묘인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후라는 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눈이 있어도 태산을 못 본다고 하더니, 우리들이 몰라 뵈었으니 무슨 할 말
이 있겠습니까?]
그리고는 다시 보도를 내밀며 말했다.
[소인은 장조후(蔣調候)라 합니다. 당금 세상에서 천하제일 고수이신 묘대협
을 만나뵈어 더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 이 보도는 묘대협이 처리하십시요.]
묘인봉은 다른 사람이 잔소리를 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기 때문에 보도를 받아
서 남소저에게 돌려주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칼자루를 쥐었다.
묘인봉이 칼을 잡으려 했을 때 갑자기 쉭쉭! 소리가 나며 다리에 미미한 통증
을 느꼈다.
조후는 일 장 밖으로 몸을 피해 도망치며 부르짖었다.
[저 자는 나의 절문독침(絶門毒針)에 적중되었으니 빨리 달려 붙으시오!]
묘인봉은 절문독침이라는 말을 듣자 탄식하며 생각했다.
(운남(雲南) 장(蔣)씨 문중의 독침이 천하에서 가장 유명한데 저 자의 간계에
빠지고 말았구나!)
묘인봉은 이 암기가 극독을 묻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악독한 것임을 짐작
하고 즉시 몸을 날려 장조후를 덮석 잡으며 옆구리를 찔러 혈도를 봉쇄하고 내
동댕이쳤다.
짐꾼과 마부는 일패도지(一敗塗地)하여 땅바닥에 쓰러져 있다가 적이 독침에
맞았다는 소리를 듣고 기뻐하며 벌떡 일어나 멀찌감치 떨어져 묘인봉이 독이 퍼
져 죽기를 기다렸다.
묘인봉은 경신법을 펼쳐 질풍같이 짐꾼을 쫓아갔다. 그 짐꾼은 혼비백산하여
죽어라 하고 미친듯 달아났지만 어느덧 묘인봉의 오른손이 그의 등짝을 후려쳐
오장육부가 파열되며 피를 토하고 절명하고 말았다.
묘인봉은 기세를 늦추지 않고 흘연 마부에게 달려들었다. 마부는 연편을 휘둘
러 몸을 보호하며 시간을 끌려고 했으나 묘인봉이 텁석 솥뚜껑같은 손을 뻗쳐
연편을 잡아 당기자 연편은 거꾸로 되돌아가 마부의 머리통을 박살내는 것이었
다.
묘인봉이 잇따라 두 사람을 죽이고 나자 다리가 마비되어왔다. 하지만 생사의
고비길에서 숨을 들릴 틈도 없었다.
점소이와 땜쟁이는 될 수 있는대로 멀리 도망쳐 묘인봉이 중독되어 죽기를 기
다리려고 했다.
묘인봉은 제사를 지내러 가던 길이라 본래 목숨을 해치고 싶지 않았으나 지금
이들을 놓치면 자신이 죽게 된다는 생각을 하고 이를 깨물며 손에 연편을 쥔 채
점소이를 뒤쫓았다.
점소이는 교활하게도 될 수 있는 한 진흙 구덩이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
러나 묘인봉의 경신법이 어떠한가? 점소이는 더 도망칠 수 없음을 깨닫자 비수
를 꺼내 덮쳐들었다. 묘인봉은 즉시 몸을 돌리면서 점소이를 돌아보지도 않고
비각술(飛脚術)을 날렸다.
그 발길질은 그대로 점소이의 가슴팍을 걷어차게 되었고 점소이는 입으로 선
혈을 미친듯 토해내며 그 자리에서 뻣뻣히 선채로 숨을 거두었다.
땜쟁이의 무공은 그렇게 강한 편이 못되었지만 악북 귀견수 종씨 집안에서 전
수한 경신법이라 빠르기 이를데 없었다. 묘인봉은 힘을 쓰게 되자 독기가 빨리
퍼지게 되어 다리를 휘청거렸으며 땜쟁이를 뒤따를 수 없게 되었다.
땜쟁이는 그 모습을 보자 '하늘이 나를 도와 보도와 미녀를 얻게 하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내심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그 감흥이 채 가시기도 전에 허공에
바람 소리가 일면서 검은 물체가 날아들었다. 그는 그 물체를 피하려고 했지만
이미 때는 늦고 말았다.
묘인봉이 그를 따라잡지 못하자 연편을 내던진 것이었다. 이 강철 연편은 그
대로 땜쟁이의 전신을 휘감고 목을 조이며 이마를 후려쳤다. 땜쟁이는 싸늘한
시체가 되어 눈덮인 땅위로 쓰러졌다.
그러나 묘인봉도 더 견디지를 못하고 쓰러졌다.
남소저는 부친의 시신 위에 엎드려 이러한 광경을 보고 그만 놀라 멍해졌다.
남소저는 묘인봉이 쓰러지는 것을 보자 재빨리 다가와 부축하려 했으나 그녀
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묘인봉은 아직 정신은 맑은 편이었으나 하반신은 마
비된 터라 장조후를 가리키며 부탁을 했다.
[그의 몸을 뒤져 해약을 꺼내 주시오.]
남소저가 그의 말에 따라 장조후의 몸을 뒤져서 조그마한 자기 병을 찾아내고
는 묘인봉에게 물었다.
[이것인가요?]
묘인봉은 어느덧 정신이 가물가물해져 더듬거리며 말했다.
[맞든 틀리든 일단...... 먹고 봅시다......]
남소저는 병마개를 뽑고 황색 약가루를 손바닥에 부어 묘인봉의 입속으로 털
어넣었다.
묘인봉은 노란 약가루를 겨우 삼키더니 장조후를 가리키며 말했다.
[빨리 저 자를 죽이시오.]
남소저는 깜짝 놀라 말했다.
[저는...... 저는....... 사람을 죽일 용기가 없어요.]
묘인봉은 매섭게 말했다.
[저 자는 당신의 부친을 죽인 원수요!]
남소저는 여전히 주저했다.
[저는...... 저는 감히.......]
[몇 시진이 지나면 그의 혈도가 풀어지게 될 것이오. 나는 심한 상처를 입었
소....... 저 자가 일어나면 우리 두 사람을 죽여버 릴 것이오.]
남소저는 두 손으로 보도를 집어들고 칼을 뽑았다. 그러나 장조후는 눈물을
글썽이며 애걸하는 빛을 띠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어릴 적부터 닭 한마
리나 벌레 한마리도 죽여본 적이 없으니 어찌 눈물을 글썽이며 애걸하는 사람을
찌를 수 있겠는가?
묘인봉이 외 쳤다.
[당신이 그 자를 죽이지 않겠다면 차라리 나를 죽이시오!]
남소저는 그 소리에 깜짝 놀라 흠칫 하는 순간 보도가 그만 손에서 떨어졌다.
이 칼은 금을 자르고 옥을 쪼갤 수 있을 만큼 예리했다. 공교롭게도 칼날은 장
조후의 머리통을 겨냥하고 있었다. 남소저와 장조후가 동시에 비명을 지르고 부
르짖는 가운데 한 사람은 정신을 잃고 쓰러졌고, 한 사람의 머리통은 몸에서 떨
어져 나와 데굴데굴 굴러갔다.
묘인봉이 여기까지 회상하고 있을 때, 품 속의 어린 딸이 갑자기 '응!' 하며
깨어나더니 울면서 칭얼거렸다.
[아빠, 엄마는? 나는 엄마한테 갈래요.]
묘인봉이 미처 대답을 하기 전에 그 어린애는 고개를 돌렸다. 아기는 모닥불
가에 앉아있는 아름다운 부인을 보고 두 팔을 짝 벌리더니 큰소리로 부르짖었
다.
[엄마! 엄마! 난란(蘭蘭)이를 안아주세요!]
그리고는 기뻐서 묘인봉의 품안에서 깡총깡총 뛰며 그 젊은 부인이 와서 안아
주기를 기다렸다.
뭇 사람들은 그 어린애가 묘인봉을 아빠라고 부르고, 다시 그 아리따운 부인
을 보고 엄마라고 부르자 모두 의아하게 생각을 했으며 저 부인은 전귀농의 처
인데 어째서 어린애가 엄마라고 부르는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어린애가 '엄마, 엄마!' 하고 부르자 대청 안은 더욱 긴장이 고조되었다.
수십 명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엄숙한 빛을 띠우고 있었는데 오직 어린애만 좋
아하고 있었다.
젊은 부인은 몸을 일으키더니 묘인봉 곁으로 다가와 어린애를 안았다. 그러자
어린애는 입을 열었다.
[엄마, 난란이 엄마를 얼마나 보고싶어 했다고요. 엄마, 집으로 돌아가요?
응!]
아리따운 부인은 그 여자아이를 꼭 껴안고 뺨을 부볐다. 그 어린애는 꿈속에
서도 엄마를 그리며 눈물을 흘렸을까? 꼬마의 동그랗고 조그마한 눈가에는 눈물
이 맺혀있었다. 거기에 다시 엄마의 눈물까지 보태지게 되었다.
대청 모퉁이에 서서 조용히 여러 사람을 지켜보던 소년과 함께 온 외팔이가
슬그머니 도적의 괴수인 염기 곁으로 다가가 귀에다 나직이 소근거렸다.
염기는 안색이 변하며 몸을 벌떡 일으키며 묘인봉을 한번 쳐다보더니 두려운
빛을 띠우며 천천히 품안에서 기름종이로 된 봉지를 꺼냈다.
외팔이는 험악한 인상을 지으며 그 봉지를 낚아채고 펼쳐보았다. 그 안에는
싯누런 두 장의 종이조각이 있었다.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그것을 싸서 품안에 넣고는 대청 모퉁이로 돌아갔다.
젊은 부인은 눈물을 훔치며 어린애의 얼굴에 입맞춤을 하더니 눈시울을 붉히
며 다시 눈물을 흘렸으나 긑내 어린애를 묘인봉에게 넘겨주었다.
어린애는 묘인봉의 품안에서 발버둥쳤다.
[엄마, 엄마!]
젊고 아리따운 부인은 등을 뒤로 돌리고 굳어진 듯 시종 몸을 돌리지 않았다.
묘인봉은 분노를 누르고 기다렸다. 그는 부인이 고개를 돌려 딸애를 다시 한
번 보아주기를 기다렸다. 묘인봉은 그녀를 당장 끌고와 발로 짓이기고 쳐 죽이
고 싶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무공은 강맹했지만 마음은
여렸다. 또한 그 젊고 아리따운 부인을 너무도 사랑했다.
그 젊은 부인은 귀머거리인가? 아니면 그녀의 마음은 목석처럼 무정한 것일
까?
아......! 어린에는 여전히 애걸을 하고 있었다.
[엄마, 엄마! 난란이를 안아줘요.]
그러나 엄마는 꼼짝도 하지 않았으며 옷자락하나 흔들리지 않고 서 있었다.
묘인봉은 전신의 피가 분노로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고 있었고 어린 딸애가 부
르는 소리에 마음이 산산조각이 나는 것 같았다.
남소저는 처찬한 결투를 보고는 멍하니 넋을 잃고 있었다. 그러다가 묘인봉
마저 절문독침에 중독되어 쓰러지는 것을 보고 그녀는 말을 끌고와 부드러운 손
으로 묘인봉의 솥뚜껑같은 손을 쥐고 일으키려 했다.
모정(母情)보다 애정을
선택한 여인
삼 년전 창주의 눈쌓인 벌판 위에서 벌어졌던 그 일이 다시 묘인봉의 뇌리에
떠올랐다.......
눈덮인 땅 위에 여섯 구의 시체가 뒹굴고 있었다. 묘인봉은 다리에 장조후가
던진 두 대의 절문독침에 적중되어 하반신이 마비되어 꼼짝할 수가 없었다.
남소저는 천천히 정신을 차리
게 되자 자기가 묘인봉의 품안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는 황급히 몸을 일
으켰으나 두 다리에 맥이 빠져 다시 눈 위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녀는 놀라고
당황해서 어쩔줄 모르고 있었으며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묘인봉이 그녀에게 말했다.
[저 말을 이리 끌고 오시오.]
그 소리는 너무도 엄숙해 남소저는 그의 말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말
을 끌고와 부드러운 손으로 묘인봉의 솥뚜껑 같은 손을 잡고 일으키려고 했다.
묘인봉은 어색해 하며 말했다.
[옆으로 비키시오.]
그러나 그의 다리는 마비되어 있었다. 묘인봉은 다리를 쓰는 대신 상반신을
일으키며 말등자를 움켜잡았다. 그리고는 손에 불끈 힘을 주어 거꾸로 몸을 솟
구쳐 말등에 올라탔다.
[저 칼을 가져오시오!]
남소저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보도를 집어들었다. 묘인봉은 왼손으로 그녀
의 허리를 잡고 가볍게 끌어올렸다.
이윽고 두 사람은 다시 객점으로 돌아왔다.
묘인봉은 공력을 돋구어 겨우 객점 앞까지 오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그만
눈덮인 땅 위로 떨어지고 말았다. 두 점소이가 그를 부축해 안으로 들어갔다.
객점 안으로 들어간 묘인봉은 바지 가랭이를 말아올리고 두대의 독침을 뽑아
내며 점소이에게 많은 보수를 줄테니 다리에 독혈(毒血)을 빨아내달라고 부탁했
으나 점소이는 두려워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남소저가 나셨다. 그녀는 부
드럽고 조그만 입을 대고 독혈을 한모금 한모금씩 빨아냈다.
이 순간 그녀는 두 남녀가 살갗을 접촉하게 된 이상 자기는 바로 이 남자의
사람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남자가 도적이라도 좋고 역적이라도 좋았다. 이제 그녀로서는 선택의 여지
가 없었다.
묘인봉 역시 여인이 독혈을 빨아내는 순간 이제부터는 강호를 종횡하며 떠돌
아 다니는 나날들이 끝장났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이 여자를 한평생 보호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 천금소저(千金小姐)의 즐거움과 괴로움은 이제부터 자기의
즐거움과 괴로움이 되는 것이었다.
묘인봉은 제때에 장조후의 해약을 먹게 되어 목숨은 보존할 수 있었지만 그
독성은 맹렬하여 열흘 이상 조섭을 하지 않는다면 두 다리를 쓸 수 없었다.
그는 은자를 꺼내 점소이에게 주며 남소저의 부친을 수렴해 달라고 했으며,
또한 다섯 명의 보도를 탈취하려던 호객(豪客)들도 수렴을 해달라고 청했다.
남소저는 옆에서 시중을 들었으며 그를 벗하여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고를
겪은 남소저는 눈만 감으면 그 참상이 아른거렸고 부친의 참혹한 모습이 눈에
선했다. 이리하여 그녀는 종종 울면서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었다.
묘인봉은 말주변이 없어 그녀를 따뜻한 말로 위로해 주지 못했다. 그러나 남
소저는 그의 침착한 태도와 온화한 눈길을 대할 때마다 두려움을 잊을 수 있었
다.
그녀는 부친 남인통이 강남(江南)에서 벼슬을 하던 중 강양대도(江洋大盜) 한
사람을 잡아 이 냉월보도를 얻게 되었다고 말했다. 남인통은 경사로 보직을 받
게 되었고, 그는 권세있는 사람에게 그 보도를 바치고 출세할 생각이었는데 뜻
밖에도 그 보도가 화근이 되어 목숨을 잃은 것이었다.
묘인봉은 그 강양대도의 성을 물었으나 남소저는 다만 그 대도가 옥중에서 병
사한 것만 알고 있었다. 그 강양대도는 어느 호걸인지는 모르지만 암습을 받고
해침을 당한 것 같았고, 보도를 빼앗으려는 다섯 명은 그 대도적에게 보도가 있
다는 것을 알고 행방을 쫓고 있었던 것 같았다.
닷새째 되던 날, 남소저가 약그릇을 들고 묘인봉에게 내미는 순간 창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틀림없이 누군가 엿보고 있었지만 묘인봉의 위명에 눌려
감히 손을 쓰지 못하는 것임을 그 순간 알아차렸다.
묘인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십중팔구 칼을 빼앗으려는 자들의 잔당일 것이다. 대엿새 지나면 괜찮겠지만
지금은 다리가 시큰거리고 힘이 없으니 야단났구나.)
이 때 팍! 하는 소리가 나면서 하얀 빛이 번쩍하더니 창밖에서 비수가 한자루
날아들어 탁자 위에 박혀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비수에는 하안 쪽지가 묶
여있었다.
남소저는 놀라 비명을 지르며 그의 곁으로 달려왔다.
묘인봉은 누워 있었고 거동이 불편했기 때문에 비수를 잡을 수가 없자 탁자
모서리를 쳤다. 그러자 비수는 대뜸 튕겨져 그의 옆으로 떨어졌다. 창밖의 사람
은 칭찬의 말을 했다.
[금면불, 과연 명불허전이구려. 대단하오. 대단해.]
그리고는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나더니 두 사람이 담장을 넘는 기척이 들렸
다. 곧이어 말발굽 소리가나며 두 필의 말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묘인봉이 쪽지를 펼쳐보니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악북의 종조문(鐘兆文), 종조영(鐘兆英), 종조능(鐘兆能), 돈수백배(頓首百
拜).>
남소저는 그의 얼굴이 무뚝뚝한 것이 화를 내는 것 인지 근심을 하는 것이지
알 수가 없어 넌즈시 물었다.
[적이 찾아온 것인가요?]
묘인봉은 고개만 끄덕였다.
남소저는 다시 물었다.
[당신이 탁자를 치니까 놀라서 도망간 거 아니예요?]
묘인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들은 편지를 전하러 왔을 뿐이오.]
[당신이 그런 재간을 지니고 있으니 그들은 틀림없이 두려움을 느꼈을 거예
요.]
묘인봉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속으로 생각했다.
(악북의 귀견수 종씨 삼형제가 찾아온 것을 보면 나를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
다.)
남소저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공포심을 억누를
수 없어 잠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우리 당장 떠나도록 해요. 그러면 그들은 우리를 찾아내지 못할
거예요.]
묘인봉은 묵묵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타편천하무적수인 금면불 묘인봉이 어떻게 적의 면전에서 도망칠 수 있겠는
가? 설사 남소저를 위해서 잠시 욕됨을 참고 피한다 하더라도 귀견수 종씨 형제
들이 어찌 피하는 것을 가만히 내버려 두겠는가?
이러한 일을 남소저는 알 리가 없었다. 그는 언제나 말이 없는 사람이었고 또
한 이러한 말을 그녀에게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날밤 남소저는 몸을 뒤척이며 한잠도 자지 못했다. 그녀는 자기의 운명이
이 손발이 거친 시골사람에게 좌우되고 있음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묘인봉은 꿈속에서 꽃가마를 보았다. 꽃가마에는 붉은 비단으로 온 몸을 두른
새색시가 타고 있었고 나팔 소리가 어우러져 흥겨운 가락이 흐르고 있었다. 그
아가씨는 어릴 적에 마음을 졸이며 훔쳐보곤 했던 어여쁜 소저 같기도 했으나
누군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 보려는 순간 잠이 깨고 말았다. 잠
을 깨어서도 꿈결 속의 흥겨운 가락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부용꽃 같은 남소저의 부드럽고 평화로우면서 간드러지
고도 요염한 얼굴 위로 촛불의 그림자가 하늘하늘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한송이 꽃은 웃을 줄을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잠을 이루면서도 두려움을 느끼
고 있었고 촛불이 어른거리자 그녀의 얼굴에 더욱 짙은 음영(陰影)이 드리워졌
다.
이튿날 묘인봉은 일찍 아침을 먹고 점소이에게 의자를 가져다 달라고 하여 객
청 한복판에 앉아 있었다. 냉혈보도는 바로 그 옆에 놓아두었다.
사실 그는 계획같은 것을 미리 세워두는 법이 없었다. 왜냐하면 무림의 일은
변화무쌍한지라 차라리 임기응변이 효과를 거둘 때가 더 많았기 때문이었다.
남소저는 그의 표정이 무서워 그에게 말을 걸었지만 묘인봉은 대답하지 않았
고 더이상 묻지도 않았다.
진시(辰時) 무렵,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지며 세 필의 말이 객점 앞에 멈춰서
며 세 명의 손님이 들어섰다. 객점 사람들은 그들의 옷차림을 보고 깜짝 놀라
황급히 피했다.
그들은 모두 희고 거칠은 삼베옷을 입고 있었으며 신발마저도 하얀 것이 막
부모를 잃은 상주의 복장이었다. 그들의 옷차림을 볼 때 상을 당한지 어느 정도
지난 것 같았다.
묘인봉은 악북의 귀견수 종씨 문중이 형양(荊襄)을 주름잡고 있는 만큼 무공
에 있어서도 조예가 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원래 그 땜쟁이는 종씨 문중의 제자였기에 종씨 삼형제가 친히 찾아온 것이었
다. 그들의 얼굴은 서로 닮았는데 모두 안색이 창백하고 코는 납작하고 콧구멍
은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다만 수염으로 나이를 분간할 수 있었다. 반백의 수염을 기른 사람이 큰 형인
종조문인 것 같았고, 검은 수염이 둘째인 종조영, 수염을 기르지 않은 사람이
셋째 종조능 같았다. 그들은 안으로 들어설 때 발걸음이 날렵한 것이 과연 경신
법에 정심했고 강적이 도래했음을 직감적으로 느끼게 했다.
묘인봉은 한평생 적이 강하면 강할수록 정신이 더욱 맑아지는 편이었으나 그
들의 기세가 범속한지라 자신도 모르게 잔뜩 긴장을 하고 있었다. 더구나 지금
은 두 다리를 쓸 수가 없는 처지가 아닌가?
종씨 삼형제는 앞으로 나와 동시에 읍을 하며 말했다.
[묘대협, 안녕하시오.]
묘인봉도 손을 맞잡아 반례를 했다.
[안녕하시오. 불초는 다리에 상처를 입이 일어날 수가 없구려.]
종조문이 말했다.
[묘대협, 다리가 불편하시니 번거로움을 끼쳐 드려서는 안되겠지만 제자를 죽
인 원한을 갚지 않을 수가 없는 바이니 아무쪼록 묘대협께서 양해를 하시구려.]
그는 완전히 호북 사투리을 썼다. 묘인봉은 고개를 끄덕였을 뿐 대답하지 않
았다.
종조문은 다시 입을 열었다.
[묘대협의 위세는 천하를 진동시키고 있으니, 우리 세 형제가 일대일로 싸워
서는 당신의 적수가 되지 못할 것이오. 그러니 셋이 함께 덤벼야겠소이다.]
종조영과 종조능은 괴이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래요. 노대(老大), 함께 공격해요!]
이 삼형제는 무림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인물이었다. 비록 음성이나 태도가
이상야릇하고 옷차림도 기이했지만 강호에서의 교분은 매우 좋은 편이라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중후한 면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양호(兩湖) 일대에서는 이
미 큰 가업을 이루어 놓고 있었다.
세 사람은 괴이한 소리를 지르며 각기 몸에서 한쌍의 판관필을 꺼내 들었다.
객점의 사환들과 손님들은 이미 피해버려 객청은 썰렁했으나 남소저는 묘인봉
의 안위가 걱정되어 한 모퉁이에 앉아 있었다.
묘인봉은 그녀가 갸날프고 연약한데도 자신을 위해 남아 있는 것을 보고 기뻐
하며 적지 않이 위로가 되었다. 그는 남소저와 생사를 같이하며 한평생 사랑하
리라 다짐하며 그녀를 향해 씽긋 웃어보이며 냉월보도를 뽑아들었다.
종씨 형제는 칼에서 푸른 빛이 감도는 것을 보고는 찬탄을 금치 못했다.
[훌륭한 칼이오!]
그리고는 일제히 괴상한 소리를 내지르며 세 방위로 공격을 해왔다.
묘인봉은 단정히 의자에 앉아서 칼을 비켜들고 움직이지 않았다. 여섯 자루의
판관필이 그를 찔러오자 묘인봉은 갑자기 보도를 휘둘러 각기 한 칼씩 내리쳤
다. 종씨 삼형제는 절기를 지니고 있었다. 묘인봉의 도세를 보자 그들은 신형을
표연히 움직이며 번개처럼 피했다. 그들은 묘씨 가문의 검법이 천하에 독보적인
존재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닥쳐보니 과연 그 위세는 맹렬하기 그지
없었다.
묘인봉이 사용하는 것은 호일도가 전수한 호가의 도법이라 변화가 무쌍했지만
몸을 움직일 수가 없어 좀처럼 연속해서 공격할 수 없었다.
네 사람이 손을 쓰게 되자 객청에는 칼빛과 판관필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며 아
슬아슬한 광경이 펼쳐졌다.
종씨 삼형제의 경신법은 무척 뛰어났으며 세 사람이 공격을 해오는 것이 손발
이 척척 맞아 마치 여섯 자루의 판관필이 열 두 자루로 느껴질 정도였다.
묘인봉이 도법을 펼쳐 공격하거나 방어하는 수법도 상대방에게 조금도 뒤떨어
지지 않았다. 그는 이 싸움은 사정없이 살수를 써서 삼형제에게 중상을 입혀야
지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자신과 남소저의 목숨을 보존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
았다. 다만 종씨 형제가 정도(正道)를 지키고 있고 나쁜 행동을 하지 않아 강호
의 명성이 좋은 편이라 목숨을 빼앗을 필요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들 삼형제의 초식은 갈수록 긴밀해졌고 모든 초식이 대혈을 노리고 공격했
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방심을 하게 된다면 한평생 쌓은 영명(英名)이 물거품이
될 뿐 아니라 아리따운 남소저마저도 적의 수중에 떨어져 능욕을 당할 판 이었
다.
이러한 생각이 들자 그가 휘두르는 칼의 초식이 더욱 무거워졌으며 종씨 삼형
제는 그의 무공에 두려움을 가지고 감히 보도와 맞닥뜨리지 않도록 했다.
이리하여 포위망은 점점 멀어졌다.
종조영은 좀처럼 승리를 하기가 어려운 것을 알고 갑자기 소리를 내지르며 땅
바닥을 뒹굴어 묘인봉의 등뒤에서 하반신을 공격했다. 이 한 수는 무척 음독한
것으로, 묘인봉이 의자에 앉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에서 의자를 공격한
것이라 피할 길이 없었다. 대뜸 뚝! 하는 소리와 함께 의자 다리가 부러지며 의
자는 옆으로 기울어지고 묘인봉의 몸도 덩달아 기울어졌다.
남소저는 놀라 소리를 질렀다. 순간 묘인봉은 벼락같이 왼손을 뻗쳐 종조영의
얼굴을 할퀴려 들었다.
종조영은 놀라 피했으나 탕! 창! 하는 소리와 함께 종조능의 손에 들린 판관
필이 보도에 의해 잘려지고 말았다. 종조문은 어깨에 통증을 느꼈다. 바로 보도
에 의해서 상처를 입은 것이었다.
묘인봉은 한 칼로 세 사람을 공격했는데 이는 운룡삼현(雲龍三現)이라는 일초
로서 바로 호가도법(胡家刀法)의 정묘한 초식이었다.
종씨 삼형제는 급히 피하며 놀라 서로 바라보며 경악의 빛을 띠었다. 종조영
은 입을 열었다.
[노대, 상처를 입었소?]
[지장 없네.]
종조문은 묘인봉의 의자가 기울어져 있는 것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흔
들리는 것을 보자 속으로 이런 기회는 다시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의 보도가 너무 예리해 꺼리는 마음이 있어 포권을 하고 입을 열었다.
[무기에 있어서는 우리 삼형제가 적수가 되지 못하는구려.
우리는 당신 집안의 권초(拳招)와 장법(掌法)을 가르침 받고 싶소이다.]
이 말은 당당했지만 결코 좋은 뜻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묘인봉은 그의 계략을 간파했지만 재간이 뛰어나고 담이 큰 사람이라 냉소를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보도를 칼집에 꽂았다.
삼형제는 판관필을 내던지고 껑충껑충 뛰면서 공격을 해왔다. 그들은 뛰어다
니며 신속히 움직였으나 묘인봉의 장법이 매우 위맹하여 일단 펼치게 되자 삼형
제는 여덟 자 안으로 접근하지 못했다.
종조영은 사람됨이 가장 기민하고 영리한지라 묘인봉의 의자다리가 부러져 그
대로 앉아있기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의자다리를 하나 더 부러뜨린다면 반드시
묘인봉이 넘어지리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지당권법(地堂拳法)을 펼쳐 묘
인봉의 의자 뒤로 굴러들어가 다리로 걷어차 의자 다리를 하나 부러뜨렸다.
의자가 원래 약간 기울어져 있었는데 다리가 하나 더 부러지자 즉시 뒤로 쓰
러지려고 했다. 그러자 묘인봉은 손으로 의자를 누르더니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는 종조영이 간사하고 교활한데 울화가 치밀어 독수리가 먹이를 덮치듯 그에
게 덮쳐들어갔다. 종조영은 그만 깜짝 놀라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노대! 노삼!]
종조문과 종조능은 양쪽에서 그를 도와주러 달려왔다. 묘인봉은 장력을 내쏟
아 오른손으로 종조문의 어깨쭉지를 후려쳤고 왼손으로는 종조능의 가슴팍을 적
중시켰다. 두 사람은 감당해 내지 못하고 바깥쪽으로 나가떨어졌다. 종조영은
그 기회를 빌어 몸을 굴리며 객청 문으로 도망을 쳤다. 그러나 묘인봉 역시 땅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종씨 형제는 그의 위용을 보고 다시 들어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
종조영이 얼핏 보니 객점 문옆에 노새에게 줄 풀과 먹이들이 잔뜩 쌓여있는
것을 보고 마음 속으로 짚히는 바가 있어 화접자를 꺼내 풀더미에 불을 당겼다.
그 밀짚은 바짝 말라 있었기 때문에 대뜸 불이 일어 바람을 따라 객점의 커다란
객청으로 타 들어가기 시작했다.
객점의 사환들이나 손님들은 불을 보자 어지러이 다투어 달려나왔다. 종씨 삼
형제는 객청의 문입구를 지키며 부르짖었다.
[그 누구도 저 다리병신을 구하려 한다면 우리들이 그 사람의 머리통을 박살
내고 말 것이다!]
뭇 사람들은 스스로 도망을 쳐 목숨을 건지기에도 바쁜 터인데 그 누가 감히
나서서 묘인봉을 구하고자 하겠는가?
삽시간에 바람을 타고 불길은 짙은 연기를 내며 혀를 날름거리듯 객청 안으로
번져드는 것을 묘인봉은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자기는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고
또한 적이 문를 지키고 있었다.
묘인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설마하니 내가 한평생 영웅호걸 노릇을 해 왔는데 오늘 이렇게 산 채로 이곳
에서 불에 타 죽어야 한단 말인가?)
그가 눈을 돌려 바라보니 남소저는 이미 뭇 사람들을 따라 도망쳐나가 마음이
약간 놓였다.
문득 불길 속을 보니 객점의 모퉁이에 한 무더기의 붉은 밧줄이 놓여있는 것
이 아닌가?
그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
그는 멍금엉금 기어가서 그 밧줄을 풀어 손과 팔에 십여 번을 감았다.
종씨 삼형제들은 연기와 불길이 문을 에워싸게 되자 천하무적 묘인봉이 불더
미 속에서 재가 될 것이라 믿고 기뻐하며 서로 마주보고 웃었다.
남소저는 위급하게 되었을 때 문으로 도망쳐 나오기는 했으나 묘인봉이 아직
도 객청 안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였고, 또한 묘인봉이 자기를 구하기 위해서
상처를 입었으며 목숨까지잃게 되었음을 생각하자 너무 괴로워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별안간 객청 안에서 커다란 호통소리가 들리며 밧줄이 불꽃 속에서 뻗쳐 나오
더니 어느덧 문밖의 커다란 은행나무를 휘감는 것이었다. 곧이어 밧줄이 그네처
럼 흔들거리며 묘인봉이 훌쩍 날아나왔다.
뭇 사람들은 묘인봉이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자 그만 아연해지고 말았다.
묘인봉은 왼손으로 밧줄을 잡고 허공에서 종씨 삼형제를 덮쳐갔다. 종씨 삼형
제는 그만 혼비백산하여 투지를 잃고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쳤다. 그들 세
사람의 경신법은 비범했으나 밧줄을 잡고 그네 타듯 날아다니는 묘인봉보다는
신속하지 못했다.
묘인봉이 솥뚜껑같은 손을 뻗쳐 하나씩 잡아 던지자 종씨 삼형제 모두 불더미
속으로 쳐박히게 되었다. 세 사람의 무공은 고강한 편이라 신속히 빠져나왔지만
눈썹과 수염이 모조리 그을려 낭패하기 이를데 없는 몰골이었다. 이 지경이 되
자 종씨 삼형제는 감히 더이상 지체하지 못하고 말도 내버린 채 남쪽으로 줄행
랑쳤다.
그들의 등뒤에서 묘인봉의 호방하고도 우렁찬 웃음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묘인봉은 과거 종씨 삼웅(三雄)을 상대로 애써 싸우던 광경을 떠올리게 되자
입가에 자기도 모르게 한가닥의 웃음을 띠었다. 그러나 이것은 괴롭고 서글픈
가운데 떠올린 한 가닥의 미소였다. 상심한 가운데 반짝하고 사라지는 일순간의
기쁨이랄까?
다리가 나은 후 묘인봉은 남소저와 부부로 맺어지게 되었다. 그가 온 마음을
기울여 아끼고 사랑한 처가 바로 눈앞의 이 아리따운 젊은 부인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와는 다섯자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그것은 오천 리, 오
만 리보다 더 요원한 것같았다.
묘인봉은 신혼 초기의 즐거웠던 날들을 머리에 떠올렸다.
묘인봉은 아내인 난(蘭:남소저의 이름은 남란(南蘭이었다.)과 함께 달려가 호
일도 부부의 무덤을 찾아가서는 제사를 올리게 되었고 묘인봉은 냉월보도를 무
덤 속에 넣어주고 속으로 생각했었다.
(세상에 호일도 이외에 이 보도를 쓸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없다. 그는 이
미 이세상 사람이 아니지만, 이 보도는 응당 그를 벗해 주어야 할 것이다.)
이윽고 호일도의 무덤 앞에서 그는 과거 무공을 겨루다가 잘못하여 호일도를
해치게 된 경과를 자기의 처에게 이야기했다. 그는 여지껏 말이 없었으나 이날
만은 오히려 수다스러울 정도였다. 이 일은 그의 마음속에 십년 동안이나 간직
해온 것이었는데 그날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가장 가까운 사람 앞에서 토로하게
된 것이었다.
묘인봉은 많은 술과 음식을 장만해서는 호일도의 묘 앞에 가득 차려놓았다.
이는 마치 과거 호부인이 그들이 무공을 겨루던 때에 차려내온 음식처럼 풍성한
것이었다.
묘인봉은 적지 않은 술을 마시게 되었고 마치 한평생 유일하게 사귄 지기가
다시 살아나 담소를 나누면서 술을 마시는 것처럼 느꼈다.
그는 술을 곤드레가 되도록 마셨고 많은 말을 하였다. 이러이러한 것은 요동
대협이 뛰어났고 존경스러웠으며, 야속한 운명이 서로를 갈라놓도록 하여 원망
스럽다는 이야기를 하였고 또한 이 세상의 무상함을 탄식했다. 또 호부인의 남
편에 대한 애정에 대해서까지 이렇게 지껄였다.
[그의 아내라면 만약 남편이 불속에 있으면 불속에 뛰어들 것이고, 물에 빠진
다면 그녀 또한 물속으로 뛰어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자기 신부의 안색이 변하며 얼굴을 가리고 벌
떡 일어서서 달려가는 것이었다.
그는 뒤쫓아가서 설명을 하려고 했지만 너무 취해 있었고 말주변도 없었다.
더군다나 객점에서 종씨 삼웅이 자신을 불태우려고 했던 기억이 술기운에 되살
아나 지껄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불속에 있었는데 그녀는 홀로 먼저 도망을
쳐 나갔던 것이었다.......
그는 시원시원하고 마음이 넓은 협객이었으며 평소에 조그만
일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란은 그가 생사를 걸고 사
랑한 여인이었다. 그는 남란이 마땅히 도망을 쳤어야 한다고 느꼈다. 그녀는
여인이고 무공을 전혀 모르니 짙은 연기와 뜨거운 불길을 자연히 두려워 할 것
이고 그 당시 그녀는 아직 그의 처가 되기 전인데 그와 더불어 죽는다고 해서
무슨 이득이 되겠는가 하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는 자기
가 곤란에 처했을 때 사랑하는 여인이 옆에서 지켜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
고.......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를 버리고 먼저 도망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어찌 없겠는가?
그는 줄곧 호일도를 부러워했으며 속으로 호일도에게는 진심으로 사랑하는 부
인이 있었지만 자기에게는 불행하게도 없다고 생각했다. 호일도가 비록 일찍 죽
었으나 그의 한평생은 그야말로 자기보다 더욱더 행복했으리라 생각되었다.
비록 술에 만취되어 호일도의 무덤 앞에서 무심코 한마디를 잘못 지껄였지만
그것은 마음 깊은 곳의 진심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이 한마디로 그들 부부 사이에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틈이 벌어지고 말았으
니......, 물론 묘인봉은 시종 진실되게 아내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는 이 일을
다시는 거론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호일도란 이름조차도 꺼내지 않았다. 남란
역시 들먹이지 않았다.
그 후에 딸 약란(若蘭)이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다. 약란은 엄마처럼 아름
다웠으며 간드러진 데가 있었다. 따라서 부부간의 정은 한층 깊어지게 되었다.
묘인봉은 가난한 집안 출신의 강호의 협객이었지만 처는 관가의 천금소저였
다. 그는 천성적으로 말이 적은 편이고 표정도 무뚝뚝했으나, 처는 부드럽고도
알뜰했다.
하지만 그녀는 남편의 감미롭고 애틋한 사랑과 정을 원하는 여인이었다. 그녀
는 남자가 점잖으면서도 풍류를 즐길 줄도 알고 여자의 마음을 잘 이해해 주기
를 바랐으며, 농담도 잘하고 기나긴 밤의 뜨거운 여심을 달래줄 줄도 아는 남자
를 요구하였다.......
하지만 묘인봉은 그야말로 천하무적 무공만 지니고 있을 뿐 여인이 은연중에
바라는 것은 하나라도 제대로 갖춘 것이 없었다. 만약 남소저가 무공을 알았더
라면 어쩌면 남편의 재간에 탄복을 하게 되었을 것이고, 그가 당금 천상천하(天
上天下)에 적수가 없는 절륜한 협사임을 존경하게 되었을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녀는 무공을 업수이 여겼고 심지어는 마음 깊숙한 곳으로부터 무공
을 혐오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부친이 무공을 아는 사람에게 살해를 당했고 그
원인은 한 자루의 칼 때문이었다. 또 자기를 구해준 보은으로 그녀는 자기의 이
상과 맞지 않는 남자에게 시집을 오게 되어, 고관대작의 자제와 시를 읊고 피리
를 불며 언덕을 거닐고 싫은 한 소녀의 황홀한 꿈이 물거품이 된 것이었다.
그녀는 한평생 동안 지극히 짧은 시일만 무공에 대해서 약간의 흥미를 느꼈
다. 그것은 남편의 한 친구가 손님으로 찾아왔을 때였다.
그 남편의 친구는 바로 이 잘 생기고 훤칠한 전귀농이었다. 그는 남의 호감을
살만큼 언변이 뛰어났으며 눈빛은 무한히 부드러워 여인으로 하여금 가슴이 울
렁이게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남편은 이 전상공을 결코 높이 평가한 적이 없으며 아예
아랑곳하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손님을 접대하는 일은 그녀에게 맡겨졌다. 만나
게 된 첫날밤, 그녀는 침대위에 누워서 내심 서글픔을 느꼈다.
(어째서 그날 나를 구한 사람이 고상하고 풍류도 아는 전상공이 아니고, 하필
이면 목석과 같이 옆에서 잠만 자고 있는 이 사람이었을까?)
며칠 후 전귀농은 그녀와 무공을 논하다가 그녀가 무공에 대해 조금도 모른다
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다정하게 설명하며 그녀에게 몇 가지의
권법과 각법을 가르쳤다.
그녀는 신이 나서 배웠다. 그녀는 여전히 무공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전귀농이
자상하게 농담도 하며 가르치자 흥이 나서 배운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는 전귀농에게 말했다.
[당신과 우리 남편의 이름은 마땅히 바뀌어야 옳을 것 같아요. 그는 바짓가랭
이를 걷어 부치고 논에 가서 물을 대거나 씨를 뿌리는 것이 가장 어울릴 것이
고, 당신이야말로 진정으로 남자 가운데 봉황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미 전귀농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 아니면 그와 같은 그녀의 말을
들었기 때문인지.......
어느 무더운 밤에 손님은 주인을 모욕하게 되었고, 처는 남편을 모욕하게 되
었으며, 어머니는 딸을 저버리게 되었다.......
그때 묘인봉은 달빛 아래서 검법을 연마하고 있었고 그들의 어린 딸 묘약란
(苗若蘭)은 달콤한 잠에 빠져 있었다.......
남란은 머리 위에서 봉황이 수놓아져 있는 금비녀를 침대 위에 풀어놓게 되었
다. 닫혔던 여인의 뜨거운 열정이 봇물처럼 터졌고 그녀는 팔로 지아비의 친구
의 목을 휘감았다. 열정의 시간이 흐르고 전귀농이 부드럽게 꽂아주는 봉황 금
비녀는 가볍고도 부드럽고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으니.......
이윽고 그녀는 결심을 내렸다.
남편과 딸, 집안, 명성......, 모든 것과 작별을 했다.
그녀는 부드러운 사랑을 원했으며 열정을 그리며 수많은 나날들을 지샜다. 그
리하여 그녀는 이 훤칠한 상공을 따라 도망쳐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난 후 남
편은 딸을 안고 비바람을 맞으며 쫓아나왔고 딸은 울부짖으며 엄마를 찾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결심을 내렸다. 전귀농과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며칠이
라도 모든 것을 바칠 수가 있었다. 그녀는 딸을 무척 사랑했으나 이 딸은 묘인
봉의 딸이지 전귀농과 그녀 사이에 생겨난 아이는 아닌 것이었다.
그녀는 어린 딸이 울면서 하소연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전귀농의
다정한 미소를 마주하게 되었고 다시는 어린딸에게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묘인봉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나를 따라 집으로 가주기만 한다면 이번 일을 한마디도 거론하지 않
을 것이며 더욱더 그녀를 사랑해 주리라. 내가 그녀를 필요로 하고 어린 딸이
엄마를 원하고 있으니......)
하지만 묘부인의 머리 속에는 다른 생각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가 귀농을 때려 죽이지 않을까? 그는 나를 무척 사랑하니 나를 해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귀농은......?)
묘약란의 조그마한 어린 가슴에도 생각이 일었다.
(엄마는 어째서 나를 아랑곳하지 않는 것일까? 어째서 엄마는 나를 안아주지
않지? 내가 미운 짓을 해서 그런 것일까?)
전귀농 역시 상념에 잠겨 있었다. 그의 상념은 깊고 무거운 것이었다. 그는
틈왕( 王) 이자성(李自成)이 남긴 진귀한 재보(財寶)를 생각했다. 묘부인은 바
로 그 보고(寶庫)를 열 수 있는 열쇠였던 것이다. 물론 그녀는 매우 아름답고
간드러지게 요염하기 이를 데 없지만 더욱더 중요한 것은 틈왕의 냉월보도(冷月
寶刀)가 있는 곳을 아는 여인이었다.
전귀농은 묘인봉이 자기를 때려죽이지 않을까 하고 겁을 내고 있었다.
묘인봉은 기다리고 있었다. 대청의 표국의 사람들이나 뭇 도적들, 시위들, 상
가보의 주인은 말할 것도 없고 외팔이와 소년 등, 모두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고 어린 아이의 울부짖는 소리만이 공허하게 대청에서 울
려퍼지고 있었다.
[엄마! 엄마! 난란을 안아줘요!]
모든 사람들은 그녀가 몸을 돌려 딸을 한번쯤 안아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상가보의 대청으로 들어선 후 묘인봉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며 한 쌍의 눈동
자는 마치 독수리처럼 아내만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밖에는 소나기가 쏟아지고 있었고 번개가 번쩍였으며 우르릉거리는 뇌성이 대
청 안에 울려퍼졌다. 소나기는 조금도 멈추지 않았으며 끊임없는 뇌성이 울려퍼
지고 있었다.
마침내 묘부인의 고개가 약간 옆으로 돌려졌다. 묘인봉의 가슴은 몹시 뛰고
있었다. 묘인봉은 아내가 미소를 짓고 있으며 눈빛에는 부드럽기 이를데 없는
깊은 정을 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전귀농에게 향해져 있었다.
이와 같이 깊은 정이 담긴 눈빛은 신혼 초에도 본 적이 없을뿐만 아니라 묘인
봉으로서는 평생 처음 보는 사랑이 깃든 그런 표정이었다.
묘인봉의 마음은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져 갔다. 그는 더 이상 바라지 않았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기름을 먹인 베로 정성스레 어린 딸을 싸서 자기의 품에 품었다.
그는 매우 조심을 했다. 이 세상에서 다시는 이와 같이 자애로운 아버지를 찾
아볼 수 없을 것 같았고 이처럼 상심한 아버지도 찾아볼 수 없으리라!
그는 성큼성큼 대청을 걸어 나갔으며 묵묵히 말 한마디 하지 않았고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그는 아내의 그 깊은 사랑의 눈빛을 처음으로 보았기 때문이었
다.
그의 건장한 어깨 위로 세찬 비가 떨어지고 있었고 천둥소리는 그의 머리 위
에서 요란하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어린 아이의 울음소리가 빗줄기 속에서 들려오고 있었지만 묘인봉은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그는 딸을 안고 있었으며 그토록 몰아치는 비바람속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후 어느 누구도 그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으
니.......
그 남자 아이는 큰소리로 말했다.
[당신의 딸이 안아달라고 했는데 당신은 어째서 그애를 아랑곳 하지 않는 것
이오? 당신은 엄마로서 어찌 그렇게 양심이 없소?]
그리고 손가락질하며 꾸짖는데 옷차림이 남루한 어린애였지만 그 모습은 위풍
이 당당했다.
찢겨진 권경(拳經)
묘인봉은 딸을 안고 억세게 퍼붓는 비바람을 뚫고 상가보를 떠나갔다. 그는
떠나갔으나 그 위세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가 대청 안으로 들어왔다 나가기
까지 일언반구 말도 없었지만 뭇 호걸들은 모두 압도되었고, 그를 아는 사람이
건 모르는 사람이건 모두 그의 위엄에 무릎을 꿇는 것 같았다. 어떤 자는 놀랐
고 어떤 자는 부끄러움을 느꼈으며, 어떤 자는 그를 존경했고 어떤 자는 두려워
했다. 한참이 지나도록 여전히 말이 없이 각자 깊은 상념에 잠겨 있었다.
묘부인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입가에는 억지로 웃음을 띠우고 있었다. 그러
나 눈물이 그녀의 눈동자에서 감돌더니 끝내 백옥같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전귀농은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왼손으로 그녀의 허리에 찬 장검의 검자루
를 쥐고서 다섯치 정도 뽑더니 창! 하니 다시 그 검을 검집에 꽃았는데 그 한
수는 날렵하면서도 깨끗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리고 그는 나직이 말했다.
[난(蘭) 누이 갑시다.]
말을 하면서도 그는 커다란 수레 안의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은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태도는 여전히 우아했지만 음성은 약간 떨리고 있어 공포를 느꼈던
마음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음을 감추지 못했다.
마행공은 아직도 전귀농이 표화물을 약탈할 마음이 있음을알고 상처를 무릅쓰
고 몸을 일으키며 부르짖었다.
[춘화야, 무기를 가져오너라!]
마춘화는 부친의 상처가 가볍지 않은 것을 보고 눈물을 머금고 불렀다.
[아버님!]
마행공은 위엄에 찬 음성으로 말했다.
[빨리 가져오너라!]
마춘화는 부친이 십여 년 간 표화물을 지키며 사용해 온 금사연편(金絲軟鞭)
을 배낭에서 꺼냈다. 막 내밀려고 할 때 갑자기 등뒤에서 기침소리가 나며 한
노파가 걸어나왔다. 그 노파는 파란 솜옷을 입었고 아래에는 검은 치마를 둘렀
으며 등이 약간 구부러지고 귀밑머리는 백발이었다. 다만 정수리의 머리카락은
아직 검게 남아 있었다.
상보진은 전귀농에게 얻어맞아 쓰러지기는 했으나 상처를 입은 것이 심하지
않아 달려나가면서 불렀다.
[어머니, 이곳의 일은 신경쓰지 마시고 아무쪼록 돌아가 쉬도록 하세요.]
원래 이 노파는 바로 상보진의 모친이었다.
상노태(商老太)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입을 열고서 물
었다.
[남의 손에 패했느냐?]
그 음성은 목이 쉰듯하여 듣기가 역겨웠다. 상보진은 얼굴에 부끄러운 빛을
띠우고 고개를 숙였다.
[이 아들이 미천하여 전(田)가의 적수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는 전귀농을 손가락질하며 수치와 분노의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상노태는 두 눈을 반쯤 감은 상태로 무표정하게 전귀농을 한번 바라보다가 다
시 묘부인을 바라보더니 중얼거리듯 말했다.
[정말 뛰어난 미인이군!]
별안간 싯누렇고 비쩍 마른 외팔이와 함께 온 소년이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기
어나오며 묘부인을 손가락질하며 부르짖었다.
[당신의 딸이 안아달라고 하는데 어째서 당신은 그 애를 아랑곳하지 않는 것
이오? 당신은 엄마로서 어찌 그토록 양심이 없소?]
이 몇 마디의 말은 모든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생각했던 것이었지만 뜻밖에도
한 명의 거지같은, 남루하고 비썩 마른 소년의 입에서 흘러나오게 되자 뭇 사람
들은 모두 다 어리둥절해졌다.
바로 이때 우르릉, 쾅! 쾅! 하는 천둥소리가 울려퍼졌다. 그 소년은 여전히
큰 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양심이 없으니 뇌공(雷公)이 당신을 벼락쳐 죽일 것이오!]
그리고 손가락을 칼날처럼 세워 노해 꾸짖는데 옷차림이 남루한 어린애였지만
그 모습은 위풍이 당당했다.
전귀농은 잠깐 움찔하다가 휙! 하니 장검을 뽑으며 호통을 내질렀다.
[이 작은 거지새끼야! 무슨 터무니 없는 소리를 지껄이느냐?]
도적의 괴수인 염기도 전귀농을 거들어 달려들며 호통을 내질렀다.
[이 녀석! 빨리 전상공...... 부...... 부인에게 사과의 절을 해라!]
그 소년은 그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정의감에 찬 표정으로 여전히 묘부인을
손가락질 하며 부르짖었다.
[당신은...... 당신은 정말 양심이 없군!]
전귀농은 장검을 들고 정히 그 꼬마의 가슴을 찌르려고 들었다. 묘부인이 갑
자기 아! 하는 소리와 함께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고는 흐느끼며 억세게 퍼붓는
빗속으로 달려나가는 것이었다.
전귀농은 그 소년을 죽일 여유도 없이 검을 든 채 뒤쫓아 나갔다. 그는 몸을
날리더니 어느덧 묘부인 곁으로 쫓아가서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란 누이, 저 어린 거지 녀석은 터무니 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니 그를 아
랑곳할 필요가 없소.]
묘부인은 목이 메어 말했다.
[나는...... 나는 정말 나쁜 사람이예요.]
울먹이며 여전히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전귀농은 손을 뻗쳐 그녀의 팔짱을
끼려했으나 묘부인은 힘주어 뿌리쳤다.
전귀농이 힘주어 잡으면 묘부인은 무공이 약하여 결코 그를 뿌리칠 수 없을
것이지만 전귀농은 억지로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손을 놓고 그녀를 따라가며
부드러운 말로 권고를 했다.
그들 두 사람은 줄기차게 퍼붓는 빗속을 뚫고 점점 멀리 가더니 모퉁이를 돌
자 늘어선 버드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빗방울이 땅바닥에 튕기며 물방울이
사방으로 춤을 추는데 두 사람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뭇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눈길을 돌려 그 어린 소년을 바라보며 속
으로 저같이 어린 나이에 용기는 대단하지만 전귀농에게 목숨을 잃을뻔 했다고
생각했다. 염기는 냉소를 하더니 호통을 질렀다.
[그렇다면 더 잘 되었군. 이 염나으리께서 혼자 배를 두둑히 채우고 살 팔짠
데 어째 이상하다했지. 형제들, 빨리 은표를 옮기게!]
뭇 도적들은 우렁차게 대답을 하더니 흩어져서는 은표를 끌어모았다.
염기는 갑자기 왼발로 그 어린 소년을 곤두박질 치도록 내차며 그 기세를 빌
어 외팔이를 움켜쥐고 호통을 내질렀다.
[빨리 내놔!]
상노태는 목쉰 음성으로 물었다.
[염노대, 이곳이 상가보 맞지?]
염기는 대답했다.
[그렇소. 상가보가 어쨌다는 것이오?]
[내가 상가보의 주인이 아니던가?]
염기는 한 손으로 여전히 외팔이의 가슴을 움켜잡고 앙천대소했다.
[하하하! 상씨 집 이 할망구야. 당신은 무슨 말을 하려고 말을 빙빙 돌리는
것이냐? 상가보는 담장이 높고 문이 넓은 것을 보니, 재물이 적지 않을 것 같은
데 혹시 국물이라도 조금 형제들에게 나누어 주겠다는 것이냐?]
뭇 도적들은 마지막 말을 함께 따라하며 왁자지껄 떠들며 박장대소했다.
상보진은 울화가 치밀어 안색이 창백해지며 말했다.
[어머니, 그와 더 말할 것 없어요. 이 아들이 그와 사생결단을 내겠어요.]
그리고는 표국의 당자수에게서 한 자루의 칼을 빼앗아 들고 염기를 가리키며
도전을 했다.
염기는 외팔이 사내를 밀면서 매섭게 말했다.
[이 녀석, 딴데 가지 말고 기다려라. 나중에 너와 따지마!]
그리고 손뼉을 치고 어깨를 건들건들하며 상보진을 노려보는데 얼굴표정은 건
방지기 짝이 없었고 시골에서 거들먹거리는 건달같았다. 염기는 애시당초 상보
진을 안중에 두지 않는 것같았다.
상노태는 정중히 입을 열었다.
[염노대, 나를 따라와요. 당신에게 할 말이 있소.]
염기는 어리둥절해졌으나 뻔뻔스럽게 말했다.
[어디로 가자는 것이냐? 이 염나으리는 함부로 여자의 방에 들어가지 않는
다.]
상노태는 듣지 못한 듯 거듭 말했다.
[나는 당신에게 긴히 할 말이 있소.]
염기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할망구가 약간 이상한데? 나를 어디로 데리고 가려 하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고 '이 염나으리는 할망구와 잔소리를 할 시간이 없다'라고 말
을 하려고 했을 때 상노태는 어느덧 몸을 돌려 내당으로 걸어들어가며 쉰 목소
리로 말했다.
[너에게 그만한 용기가 없다면 그만 둬라.]
염기는 앙천대소했다.
[하하, 내가 용기가 없다고?]
그리고는 즉시 그녀의 뒤를 따랐다.
둘째 채주는 위인됨이 좀 꼼꼼해서 염기에게 귀두도를 내밀자 염기는 왼손으
로 받아들었다.
상보진은 어머니가 그를 안으로 불러들이는 것이 어떤 이유인지 몰라 뒤를 따
르려고 했다. 상노태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아들의 발걸음 소리를 알아듣고는
말했다.
[진아, 너는 여기 남아 있거라! 그리고 염노대, 당신은 형제들에게 잠시 손을
멈추라고 하시구려.]
이 몇 마디의 말을 할 때도 아들과 염기를 한번도 쳐다보지 않았지만 그 어조
에는 한가닥 위엄이 서려있어 마치 명령을 내리는 것처럼 들렸다.
염기는 말했다.
[좋다. 형제들! 모두들 움직이지 말고 내가 돌아온 이후 처리하도록 하세!]
뭇 도적들은 우렁차게 대답을 했고 둘째 채주는 강호의 은어로 명령을 내려
표국의 사람들을 감시했다.
본래 상보진과 세 명의 시위가 표국의 사람들을 돕게 됨으로써 뭇 도적들은
열세에 몰렸지만, 상보진과 서쟁이 전귀농에게 상처를 입고 마행공이 염기의 발
길질에 걷어차인 후, 다시 전귀농에게 일 장을 얻어맞아 상처가 더 심해져 형세
는 또 다시 역전되고 말았다.
도적들이 표화물을 당장 약탈하려고 하지 않자 표국의 사람들도 조용히 상황
을 지켜보고 있었다.
염기는 상노태의 뒤를 따라서 걸음을 옮겨놓고 있었다. 그리고 보니 그녀는
등이 구부정했으며 걸음이 느릿느릿했다. 마음속으로 삼푼쯤 경계하고 있던 마
음이 이 꼴을 보자 완전히 사라져 웃으며 물었다.
[상씨 할망구, 나를 불러들인 것은 보물이라도 바치려는 건가?]
상노태는 대답했다.
[맞았소. 보물을 바치는 거외다.]
염기는 속으로 움직이는 바가 있었다. 그는 재물을 가장 탐내는 성격이었다.
이 상가보의 고대광실을 대하게 되자 재산이 무척 많아 보였고 어쩌면 상노태가
강도들이 나타난 것을 보고 간담이 찢어질듯 놀라 스스로 주보(珠寶)를 바쳐 목
숨을 부지하려고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주체할 수 없는 기쁨에 휩싸이게 되었
다.
그녀는 줄곧 뒷쪽으로만 걸어가고 있었다. 잇따라 세곳의 마당을 가로질러 맨
뒤에 있는 집 앞에 도달하여 드르륵! 문을 열어젖히고 먼저 들어서며 말했다.
[자, 들어와요!]
염기는 고개를 내밀고 방안을 엿보았다. 그곳은 벽돌로 만든 이 장 정도 되는
집인데 방안은 텅비어 있었다. 다만 네모난 탁자가 하나 있을뿐 다른 물건은 찾
아볼 수 없어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안으로 들어서서 큰소리로 말했다.
[할 말이 있으면 빨리 하고 농간을 부릴 생각은 하지 말아라.]
상노태는 대답하지 않고 손을 뻗쳐 나무문을 닫더니 다시 빗장을 걸었다.
염기는 이상하게 생각되어 사방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탁자 위에는 한 조각
의 영패(靈牌)가 놓여 있는데 그 위에는 '선부(先夫) 상검명지영위(商劍鳴之靈
位)'라고 쓰여 있었다. 염기는 속으로 생각했다.
(상검명...... 상검명, 어!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도대체 누구지?)
그러나 일시에 누구인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상노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감히 상가보에 와서 방자하게 굴다니 정말 대담하구나. 만약에 선부가
이 세상에 살아계셨더라면 열 명의 염기라도 목이 잘려 나갔을 것이다. 오늘날
상가보에는 비록 애비없는 자식과 과부만 남아있지만 결코 쥐새끼처럼 도적질
하고 개나 훔치는 도배들이 찾아와서 업수이 여기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이 몇 마디의 말을 끝내자 갑자기 허리를 쭉 폈으며 두 눈에서는 형형한 안광
을 쏟아내며 매섭게 쏘아보는데, 걸음도 제대로 옮기지 못하던 노파가 삽시간에
영기발랄한 모습으로 변한 것이었다.
염기는 약간 놀라서 속으로 생각했다.
(알고 보니 이 노파는 일부러 구부정하니 힘이 없는 척 했구나.)
그러나 한낱 아녀자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우습다고 생각하고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래. 찾아온 것도 사실이고 사람을 업신여긴 것도 사실이다. 따져서 어쩌겠
다는 거냐?]
상노태는 탁자 곁으로 가더니 영패 뒷쪽에서 노란 보따리를 하나 꺼냈다. 그
보따리에는 먼지가 가득 쌓여 있었고 영패 뒤에 있었기 때문에 조금도 사람의
눈을 끌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는 먼지도 털어내지 않고 그대로 매듭을 풀어 보따리를 펼쳤다. 그 속에
는 자색빛이 번쩍번쩍 돌고 싸늘한 기운이 어리는 한 자루의 등이 두텁고 날이
엷은 자금팔괘도(紫金八卦刀)가 들어 있었다.
염기는 별안간 십여 년 전의 옛일이 떠올라 뒤로 두 걸음을 물러서며 왼손에
쥐고 있던 귀두도를 오른손에 옮기고 부르짖듯 말했다.
[팔괘도 상검명?]
상노태는 안색을 굳히며 부르짖듯 말했다.
[영웅호걸이 사라졌지만 강철칼은 그대로 남아있다. 이 몸은 선부의 이 칼로
너의 그 절묘한 초식을 가르침 받아볼까 한다!]
그녀는 갑자기 칼자루를 쥐더니 동자배불(童子拜佛)이라는 일초를 펼쳐 영위
(靈位)를 향해 절을 하고서 몸을 돌리는데 어느덧 그녀의 자세는 팔괘도법 가운
데의 제일초인 상세좌수포도(上勢左手抱刀)를 취하는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그녀는 어깨를 내려뜨리고 팔을 떨어뜨리면서 기(氣)를 가다듬고
신(神)을 모으는데 전혀 노쇠한 기색을 볼 수가 없었다.
염기는 속으로 경계하는 마음이 약간은 있었으나 백승신권 마행공과 같은 영
웅호걸도 자기 손에 대패를 한마당이니, 상검명이 다시 살아난다면 몰라도 이
상노태쯤이야 하는 생각으로 즉시 귀두도를 허공에 대고 한번 쪼개는 시늉을 한
후 웃으며 입을 열었다.
[도법을 시험해 보려면 어째서 대청에 있을 때 시험해 보지 않고, 수고스럽게
도 이곳까지 온 것이냐? 설마하니 죽은 네 남편의 위패가 옆에 있어야만 재간을
나타낼 수 있는 거냐?]
[그렇다. 선부의 위엄있는 영패는 쥐새끼같은 도배들을 압도하게 될 것이다!]
염기는 자기도 모르게 그 영패를 한번 바라보았다. 순간 모골이 송연하여 급
히 일을 끝내고, 이 어둡고 얼음장처럼 썰렁한 영당(靈堂)에서 나가고 싶었다.
[상노태, 어서 손을 쓰시오.]
상노태는 말했다.
[당신이 손님이니 염채주, 먼저 손을 쓰시구려.]
그녀는 염기가 칭호를 바꾸자 자신도 말투를 누구러뜨리며 염기를 채주라고
불렀다.
염기는 말했다.
[불초는 상가보와 아무런 원한이 없고 이번의 표화물을 취하려는 사업도 바로
마 늙은이를 노린 것 이외다. 상노태가 반드시 나서야겠다면 우리들은 손이 먼
저 몸에 닿는 것으로써 끝을 내도록 합시다. 서로 진짜로 내리치고 죽이려고 할
것까지는 없을 것 같소.]
상노태는 두 눈썹을 곤두세우더니 나직하고도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렇게 용이한 일은 아무데도 없다오. 상검명은 한평생 영웅호걸이셨소. 그
가 친히 세운 상가보를 어찌 아무나 마음대로 들락거릴 수 있도록 내버려둘 수
가 있겠소?]
염기 역시 화를 내며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것이오?]
상노태는 단호하게 말했다.
방신이 내 손에 들린 칼을 이기게 된다면 나의 머리를 베어가고 나의 아들마
저도 함께 죽이도록 하시구려!]
염기는 깜짝 놀라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너와 아무런 원한도 없고 그저 무심코 위엄을 거슬렸을 뿐인데 목숨을
걸고 싸울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만약에 이 몸이 일초반식이라도 이기게 된다면 염채주의 목 위에 달린 머리
통을 남겨두어야 할 것이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상노태는 호통을 내질렀다.
[공격하시오!]
염기는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끼고 큰소리로 말했다.
[당신의 모자의 목숨을 빼앗아 어디에 쓰겠소? 다만 당신의 밭과 이 저택을
포함한 상가보를 요구할 뿐이오.]
그러면서 그가 칼을 흔들하며 공격을 하려고 했을 때 상노태는 어느덧 조양도
(朝陽刀)라는 일초를 펼쳐 쪼개왔다.
이 한 칼은 빠르고도 맹렬해서 염기는 급히 머리를 옆으로 기울여야 했다.
그러자 휙! 하는 파공성이 일며 오른쪽 귓구멍에서 윙윙거릴 정도로 충격을
주었다. 그 칼은 오른쪽 뺨을 스치듯 베어내려 갔는데 그 간격이 한치도 채 되
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피하는 것이 늦었다면 그의 머리통은 그녀에 의해 두 조
각이 나고 말았을 것이다.
이 한 칼은 이미 상대방의 기를 꺽어놓았다. 염기는 그녀의 맹렬한 공격에 깜
짝 놀랐다. 이윽고 그녀의 두번째 초식은 틀림없이 칼을 빙글 돌리며 허리를 배
어오리라는 것을 알고 재빨리 귀두도를 내려 막았다. 그러자 창!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칼이 서로 마주치며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염기는 그녀의 팔힘이 평범해 자신에 비해 훨씬 뒤떨어지는 것을 느끼고 꺼리
던 마음이 다시 사라져 추도할후(推刀割喉)라는 일초를 뻗쳐 밀어냈다.
상노태는 싸늘히 코웃음치더니 몸을 옆으로 기울여 피하며 말했다.
[사문도법(四門刀法)으로는 어림도 없소.]
염기는 웃었다.
[기이한 데가 없고 평범하지만 당신은 이길 수 있을 것이오.]
그 말이 끝나기 전에 그는 성큼 앞으로 내딛으며 진수연환도(進手連環刀)라는
일초를 펼쳐내었다. 상노태는 지체없이 삭이료사(削耳 四)라는 일초를 펼쳐 칼
을 들고 비스듬히 찍어왔다.
염기는 깜짝 놀라 속으로 생각했다.
(어째서 목숨을 돌보지 않고 싸우려는 것일까?)
본래 무술 가운데에는 자기자신을 구하지 않고 적에게 반격하는 초식이 있었
다. 하지만 이와 같이 양패구상(兩敗俱傷)을 각오한 타법은 언제나 구푼 정도의
위험을 무릅써야 했으며 적의 초식이 풀기가 어렵다거나 만부득이 한 경우가 아
니면 결코 사용하는 법이 없었다.
이때 상노태는 칼을 들고 막기만 한다면 적의 초식을 막아낼 수가 있었는데,
뜻밖에도 그녀는 위험을 무릅쓰고서 자기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마주 공격해 나
온 것이었다.
그녀는 생명을 돌보지 않았지만 염기로서는 돌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무나
위급하여 그는 땅바닥에 몸을 굴리며 뒤로 한번 발길질을 했다.
이 발길질의 기세는 기묘하여 상노태의 손목이 하마터면 걷어차일뻔 하였다.
상노태가 재빨리 팔괘도를 뒤집자 염기는 그제서야 발을 거두고 몸을 돌렸다.
원래 염기는 심여 초의 기이한 권각법을 연마하여 익숙해지게 되었고 근년에 이
르러서 강호의 싸움에서 진 적이 없었다.
물론 도법은 평범하나 그에게는 다른 기묘한 초식이 있어 그 십여 초의 괴기
한 긴각법을 도법 속에 응용하여 사용하자 삼류나 사류밖에 되지 않는 사문도법
(四門刀法)이 대뜸 썩은 물건이 신선하게 되살아나듯 놀랍게도 적지 않은 영웅
호걸들을 대패시킨 바 있었다.
이때 역시 도법에서는 열세에 몰렸으나 그 기이한 초식을 배합하여 권법이나
각법을 한번 사용하자 즉시 열세를 반전시킬 수 있었다.
삽시간에 노파와 도적 괴수는 두 칼을 질풍과 같이 휘둘렀고 벽돌로 만들어진
집안은 흙먼지가 뿌옇게 일었다.
염기는 상노태의 도법이 정묘하여 자기가 만약에 그 십여 초의 비급에 의지하
지 않았다면 벌써 팔괘도 아래 목숨을 잃게 되었으리라 판단했다. 실로 일개 노
파에게도 이와 같은 무공이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 속으로 생각했다.
(이렇게 질질 끌며 싸우다가 만약에 순간적으로 빈틈을 보여 머리통이 반쪽이
나면 그것처럼 낭패한 꼴은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염기는 즉시 자기의 장점을 이용하고 대청에서 마행공을 상대했던
방식으로 끊임없이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차는 것을 위주로 하면서 도법을 배합했
다.
이와 같은 방법은 과연 효과를 나타내어 상노태는 좀처럼 대항하거나 막아내
지 못하고 끊임없이 뒤로 물러섰다.
염기는 의기양양해서 입을 열었다.
[헤헤헤, 상검명이 무슨 대단한 영웅호걸이라고 뽐내는 것이오? 팔괘도법도
겨우 이 정도에 불과하군.]
상노태는 선부를 마치 하늘처럼 존경하고 받들어 왔다. 염기의 그와 같은 말
은 그녀의 대기(大忌)를 범한 셈이었다.
별안간 그녀는 두 눈에 흉칙한 광채를 번쩍이며 도법을 일변시켜 빙글빙글 돌
아가며 하안 광채를 번쩍이며 사면팔방에서 공격을 해왔다. 그녀의 매 일초는
모두 다 목숨을 건 것이고 매초가 공격 일색으로 자기의 생사를 도외시하고 있
었다.
염기는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당신은 실성을 했소? 이봐요, 상노태! 당신 남편은 내가 죽인 것도 아닌데
당신은 어째서 나와 목숨을 걸고 싸우려는 것이오? 이봐요, 당신 내 말 듣고 있
소?]
한편으로 소리를 치고 한편으로는 도망을 쳐야했다. 그가 투지를 상실하자 상
노태는 더욱 열화와 같은 공격을 하였고 칼을 쓰는 것이 더 빨라졌다. 다급해진
염기는 그 괴이한 권각법를 미처 사용할 생각도 못하고 오직 빗장을 풀고서 도
망칠 궁리만 했다.
그야말로 미친 암호랑이 한마리를 대한 꼴이라 염기는 승부나 영욕(榮辱)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오로지 생각나는 것은 어떻게 하면 도망을 쳐 목숨을 구
할까에만 신경을 쓸 뿐이었다.
그는 여러 차례 문쪽으로 가서 빗장을 뽑으려 했지만 상노태의 공격이 워낙
거센지라 그럴 틈이 없었다. 이때 그녀는 야차탐해(夜叉探海), 상보요도(上步燎
刀), 선인지로(仙人指路) 등의 수법을 연이어 펼쳤는데 갈수록 맹렬해졌다.
염기는 마음을 모질게 가다듬고 뒷발차기를 하며 부르짖었다.
[실례하오!]
그리고 왼발에 힘을 주어 창문을 뚫고 달아나려고 했다. 한데 상노태는 그 발
길질을 맞을 각오를 하고 그림자처럼 따라붙으며 칼을 내리쳐 왔다.
순간 두 사람은 아이쿠! 소리를 내지르며 동시에 창문 아래로 뒤엎어지고 말
았다.
상노태는 어깨쭉지를 발길에 걷어차이기는 했으나 즉시 몸을 일으켰다. 그러
나 염기는 허벅지에 칼을 정통으로 맞아 제대로 일어설 수도 없었다.
상노태가 충혈된 눈으로 칼을 내리치려 하자 염기는 그만 혼비백산하여 재빨
리 손을 뻗쳐 그녀의 다리를 잡고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목숨만 살려주십시요!]
상노태는 어릴 적에는 부친을 따라, 결혼을 한 후에는 남편을 따라 강호를 떠
돌아 다녔으며 한평생 적지 않은 무림호걸들을 만났지만 면전에서 이렇게 여자
의 바지 가랭이를 붙잡고 늘어지는 못난 후레자식은 한번도 본 적이 없는지라
어이가 없어 칼을 내리치지 못했다.
염기는 아예 땅바닥에 엎드려서 쿵쿵! 하니 머리를 땅에 박으며 애걸했다.
[대인(大人)은 소인배(小人輩)의 잘못을 기억하지 않는다고 했소이다. 나야말
로 개가 낳은 후레자식이외다. 노태께서 근(筋)을 뽑고 가죽을 벗기더라도 그
칼만은 거두어 주십시오!]
상노태는 한숨을 내쉬었다.
[좋다. 목숨은 용서하겠지만 여기서 무공을 겨룬 일은 절대로 누설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해라.]
염기는 연신 허리를 숙이며 대답을 했다.
[네, 네, 네.]
상노태는 명령을 했다.
[기시오!]
염기는 십년 감수했다는 듯 헤벌쭉 웃음을 지어보이고 다시 두 번 절을 한 후
몸을 일으켜 칼로 땅을 짚고서 절룩이며 뛰어나갔다.
상노태는 매서운 어조로 말했다.
[게 섯거라! 우리가 겨루기 전에 그 누가 지던 간에 상가보에 머리통을 남겨
야 한다고 약속을 하지 않았느냐? 너야 자기 말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설마하니 나마저 너같이 후레자식이 되어야 한단 말이냐?]
염기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상노태의 얼굴은 서리가 내린
듯 엄숙하여 결코 농담으로 한 것은 아닌 것같았다. 그는 노태의 진의를 몰라
어리둥절하여 애걸을 했다.
[당신은...... 당신은 나를 용서헤 주지 않았소?]
[너의 목숨은 용서해 주겠지만 너의 그 머리만은 결코 용서할 수 없다!]
그러더니 들고 있던 팔괘도를 쳐들고 날카롭게 외쳤다.
[상검명의 팔괘도가 한번 뽑혀진 이상 한번도 그냥 집어넣은 적이 없다. 이리
오너라!]
염기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상노태의 수법은 매우 빨라 그의 변발을 잡고는 팔괘도를 휘둘러 머리카락을
뭉텅 잘라내고 호통을 쳤다.
[땋은 머리카락은 상가보에 남겨둘 테니 지금부터 삭발하고 중이 되어 다시는
흑도에서 빌어먹지 않도록 해라!]
염기는 연신 대답을 했다. 상노태는 다시 명령을 했다.
[다리의 상처를 싸매고 모자를 쓴 후 대청으로 나가 졸개들을 이끌고 상가보
를 떠나거라!]
대청 안의 사람들은 내당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가 없
었다. 반시진이 지나서야 상노태가 몸을 끌듯이 하며 걸어나오고 염기가 뒤따라
느릿느릿 걸어나오고 있었다.
염기는 태연하게 큰소리로 말했다.
[형제들, 은자는 그냥 놔두고 모두들 산채(山寨)로 돌아가세.]
그 말이 떨어지자 졸개들은 어리둥절해 했다. 둘째 채주가 입을 열었다.
[형님.......]
[돌아가서 말을 하세.]
그리고 손을 휘두르며 대청에서 걸어나갔다. 염기는 허벅지에 상처를 입은 티
를 낼 수가 없어 억지로 참고 팔을 휘휘 내저으며 똑바로 걸어나갔다.
뭇 도적들은 영문도 모르고 무더기로 쌓여있는 은자를 아쉬운 듯 바라보며 물
러갔다.
제 아무리 견문이 넓고 경험이 많은 마행공이라 하더라도 사태의 진행을 종잡
을 수 없었다. 다만 염기가 핏방울을 뚝뚝 떨구며 걸어나간 것을 보고 그가 내
당에서 상처를 입었고, 내당에 어떤 고인이 있는 모양이라고 짐작을 했을 뿐이
었다. 마행공 역시 이 노파가 염기와 한바탕 생사결전을 벌인 줄은 짐작도 하지
못했다.
마행공은 딸의 어깨를 잡고 몸을 일으켜 상노태에게 사의를 표하려 했는데 상
노태는 냉랭히 자기 아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진아, 이리 들어 오너라.]
그녀는 마행공을 아랑곳하지 않고 내당으로 들어갔다.
일이 이렇게 되자 표국 사람들과 세 명의 시위들은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은 상노태가 옛날에 그 도적 괴수와 알고 있는 사이이고 그
에게 은혜를 베푼 적이 있을 것이라 했으며, 어떤 사람들은 상노태가 설득하자
어전시위를 적으로 삼을 수는 없음을 깨닫고 약탈하는 것을 포기한 것이라고 제
각기 떠들어댔다.
이렇게 각자 나름대로 짐작을 하고 있는데 상보진이 걸어나오며 입을 열었다.
[저의 어머님께서는 마 노표국주님을 내당으로 모셔 차를 대접하고 싶어하십
니다.]
마행공이 내당에 들어가자 상노태는 마행공에게 남아서 몸을 조섭하라고 권유
하는 한편 사람을 표국으로 보내 동업자들의 도움을 요청해 표은을 원래 목적지
인 금릉(金陵)으로 옮기라고 충고했다.
싸움에서 연달아 패하게 되자 마행공은 웅심(雄心)이 사그라졌다. 백승신권이
라는 명호가 부끄럽게도 한낱 시정잡배같은 도적에게 굴욕을 당하자 표화물을
호송할 의욕이 사라지게 되었다.
상노태가 표화물을 지켜준 은혜가 너무 고마워 그녀의 뜻을 받들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것보다는 염기를 대패시킨 그 무림의 고인을 만나고 심은 생각이
더욱 간절했기 때문이었다. 마행공은 즉시 호의에 감사를 드리며 그렇게 행하겠
노라고 응낙했다.
해질 무렵이 되자 그렇게 쏟아지던 비도 멎게 되었다. 세 명의 어전시위들은
감사의 말을 하고 떠나갔으며 상보진은 그들을 대문 밖까지 전송해 주었다.
외팔이도 남자애의 손을 잡고 작별을 고했는데 상노태는 그 남자애를 보면서
묘부인을 꾸짖던 늠름하고 정의감에 찬 표정을 떠올리고 생각했다.
(조그마한 어린애가 그러한 승기를 가진 것은 정말 가상한 일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물었다.
[두 분은 어디로 가는 것이오? 노자 돈은 충분하오?]
외팔이는 대답했다.
[저희 숙질(叔姪)은 강호로 뛰쳐나와 뜨내기로 지내는 터라 이세상을 집으로
삼고 있는 셈입죠. 따라서 어디로 간다고 말할 처지는 못되지요.]
상노태는 그 남자애를 훑어보며 잠시 생각을 한 후 입을 열었다.
[두 분이 불편하지만 않으시다면 이곳에서 허드렛일이나 도와주며 살도록 하
시구려. 우리 집은 크기 때문에 한 두 사람 더 밥을 먹는다 하더라도 지장이 있
는 것온 아니외다.]
외팔이는 따로이 생각하는 바가 있어 그 말을 듣자 즉시 감사를 표했다.
상노태가 그의 성명을 묻자 외팔이는 스스로 평사(平四)라 말하고, 그 소년은
그의 조카로서 평비(平斐)라 한다고 하였다.
이날 밤 평사와 그의 조카는 서쪽의 조그만 방으로 안내되어 기거를 정했다.
창문을 닫아 걸은 후, 평사는 추악한 얼굴에 기쁜 표정을 가득히 띠우고 나직이
말했다.
[도련님, 도련님과 세상을 등진 아버님, 어머님이 보호하여 그 앞쪽 두 장의
권경을 끝내 되찾게 되었으니 이것이야말로 하늘이 무심치 않은 것이지요.]
평비는 말했다.
[평사숙(平四叔), 사숙은 절대 나를 도련님이라고 부르지 말아요. 잘못하여
다른 사람이 듣게 된다면 공연히 남의 의심을 받을거예요.]
평사는 연신 그렇다고 말을 하면서 품 속에서 염기에게 빼앗은 기름종이에 싼
봉투를 꺼내 두 손으로 공손히 평비에게 내밀었다. 평사는 아이에게 공경을 표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두 장의 권경을 되찾을 수 있게 만들어준 그
은인을 떠올린 것이었다.
평비는 궁금한듯 물었다.
[평사숙, 염기에게 무슨 말을 했길래 그가 기꺼이 이 권경을 내놓았지요?]
평사는 나직이 말했다.
[나는 그저 "당신이 찢어간 두 장의 권경은 어떻게 했소? 묘대협이 당신에게
받아오라고 하는구려" 하고 두 마디만 했지요. 묘대협이 바로 그의 앞에 있었기
때문에 천재일우의 기회라 할 수 있었지요. 묘대협이 빤히 보고 있는데 그가 아
무리 간이 크더라도 어찌 내놓지 않을 수 있겠어요?]
평비는 잠시 생각을 해보고는 입을 열었다.
[이 두 장의 권경이 어째서 그 도적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지요? 그리고 평
사숙은 어떻게 그의 모습을 기억할 수 있었죠? 또 그는 어째서 묘대협을 그토록
두려워 하지요?]
평사는 대답하지 않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의 얼굴은 더욱 흉칙하게 되었
고 눈물이 눈가에 맺혔으나 억지로 참는 것같았다. 평비는 그 모양을 보고 입을
열었다.
[평사숙, 더 이상 묻지 않겠어요. 평사숙은 내가 장성하고 무공을 다 연마하
고 난 후에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일을 이야기해 주시겠다고 했죠. 두 장을 마
저 찾았으니 이제 착실히 무공을 배우겠어요.]
이리하여 숙질 두 사람은 상가보에 살게 되었다. 평사는 채소밭에 거름을 주
고 채소를 심고 거두는 일을 거들었고, 평비는 연무청에서 바닥을 닦고 무기를
정리하는 일을 도왔다.
마행공은 상가보에서 조섭을 하고 있었는데 한가할 때에는 딸과 제자, 그리고
상보진 세 사람을 데리고 권각법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들은 연무청에서 무공을 연마하거나 권법을 익힐 때 평비를 간혹 쳐다보기
는 했지만 염두에 두지는 않았다. 그들은 이 누렇고 비쩍 마른 애가 대담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가 무공을 알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간혹 평비가 그들을 바라볼 때, 강호의 풍상을 겪은 마행공은
물론이고 총명한 상보진도 그가 그들이 연마하는 권법의 오묘함을 주의하여 보
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 소년은 무예를 훔쳐 배우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가 마음 속으로
품고 있는 생각은 마행공 등으로서는 상상할 수 조차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매번 그는 그들이 펼치는 초식을 본 이후 마음 속으로, '그런 변변치 않은 무공
으로는 용렬한 인재는 상대할 수 있겠지만 영웅호걸을 상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라고 업신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는 평씨가 아니고 호(胡)씨였다. 따라서 그의 이름은 평비가 아니라,
호비(胡斐)였다. 그는 호일도의 아들이며 바로 그 묘인봉과 닷새를 싸워 승부를
내지 못한 요동대협 호일도의 아들이었다. 그의 부친이 남겨준 무림절학이 기록
된 한 권의 권경도보는 바로 호씨 집안의 권법과 도법의 정의(精義)였던 것이
다.
이 권경도보는 본래 앞쪽 두장이 찢겨져나가 기틀을 다지는 입문의 초식이 없
었고 도법의 총결(總訣)이 없었던 셈이라 그가 총명하고 열심히 연구를 했었지
만 언제나 무예에 입문할 수는 없었다.
이제 우연히 기연(機緣)에 의해 염기가 훔쳐갔던 총결을 되찾아온 것이었다.
따라서 다시 합쳐 뜻을 연결시키게 되자 그의 무공 진도는 일사천리격이 되었
다.
염기는 두 장의 권경에 있는 십여 초의 괴상한 초식에 의지해서 무림에서 마
음대로 날뛰었고 백승신권 마 노표국주도 그의 손아래 대패를 당했던 것이다.
물론 호비는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다 배운 것이었다. 그의 나이가 아직 어
려 공력이 낮기 때문에 수많은 정묘한 점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권경
도보에 의지하여 그가 하루동안 연마하는 것은 서쟁 등이 한 달을 연마하는 것
보다 나은 것이었다. 제아무리 서쟁 등이 십 년 이십 년을 두고 수련한다 하더
라도 천하의 절예인 호씨 집안의 권법과는 비교가 될 수 없는 것이었다.
매일 야밤에 호비는 살그머니 장원을 빠져나가 황야에서 권법과 도법을 연마
했다. 그는 목검으로 연습을 했는데 매번 칼을 내리칠 때마다 부친을 죽인 원수
의 머리통을 내리찍는다고 상상을 했다.
비록 호비는 원수가 도대체 누구인지 모르지만 평사숙이 장성하고 무예를 연
성하면 알려준다는 말을 믿고 열심히 무공을 연마하며 머리 속에 깊이 새겨두었
다.
최상승의 무공은 머리로 연마하는 것이지 몸으로 연마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칠 팔 개월이 흐르자 마행공의 상처는 다 치유되었으나 상노태와 상보
진은 간곡히 더 머물기를 청했다.
마행공의 표국은 이미 휴업을 한터라 주인의 은근한 대접을 받자 상가보에 더
머물게 되었다.
상보진은 마행공을 사부로 모시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상노태는 팔괘도가 상
검명의 절예로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데 어찌 외문(外門)의 사부를 모실 수 있느
냐 하며 오기를 부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행공은 상보진의 집에서 표화물을
보호해준 은혜가 고마웠기 때문에 상보진을 마치 자기 제자처럼 생각하여 배우
려는 모든 것을 알려주었으며, 심지어 그가 터득한 권기(拳技)의 정묘한 요결들
을 모조리 전수해 주었다.
백승신권이라는 별호가 요행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권술에 있어서는 확
실히 조예가 깊었기 때문에 상보진은 많은 것을 배운 셈이었다.
마행공은 상가보가 와호장룡(臥虎藏龍)한 곳도 아니고 고인이 있는 것도 아닌
데 어째서 염기가 총총히 떠났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해답을 얻을 수가 없었다.
한번은 우연히 화제를 그 일로 가져갔는데 상노태는 미미하게 웃을 뿐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마행공은 주인이 꺼리는 것을 알고 다시는 들먹이지 않았
다.
마행공은 나이가 많아 기혈이 허했기 때문에 밤에 깊이 잠이 들지 못했다.
어느날 삼경 무렵, 그는 창밖에서 우두둑 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누군가
마른 가지를 밟아 부러뜨린 모양이었다.
마 노표국주는 한평생을 강호에서 떠돌아 다닌 인물이라 그 기척을 듣게 되자
즉시 야행인(夜行人)이 집 밖을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그러나 다시 잠잠해져 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마행공은 비록 상가보의 손님으로 와 머물고 있는 처지였지만 주인이 자기에
게 은혜를 베풀고 평소에도 온정으로 대접해 주었기 때문에 어느덧 상가보의 안
위를 자기 집보다 더 중시하게 되었다. 그 즉시 그는 살그머니 일어나 벼개 밑
에서 금사연편을 꺼내 허리에 두르고 조용히 방문을 열고 담장 위로 올라갔다.
그러고 보니 담장 밖으로 사람이 어른거리고 누군가 뒷산으로 달려가는 것이
얼핏 보였다. 마행공은 그 사람의 경신법이 퍽이나 뛰어나자 이상하게 생각했
다.
(혹시 염기가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이곳에 와서 농간을 부리려고 하
는 것이 아닐까? 그 일은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인데 이 마(馬)아무개가 어찌 수
수방관할 수 있겠는가?)
이윽고 그는 담장 밖으로 달려나가 그 검은 그림자의 뒤를 쫓았다. 수십 마장
을 쫓았으나 종적이 묘연해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야단났군. 적의 조호이산(調虎離山)의 술수에 빠져서는 안되지.)
그리하여 그는 급히 상가보로 돌아와 보니 다행히 아무 기척이 없어 안심했으
나 의혹은 더욱 깊어졌다.
(조금전 그 사람의 솜씨가 비범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강적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신형(身形)이 수척하고 적은 것이 염기는 아니다. 도대체 어떤 고수가 도
래했는지 알 수가 없구나!)
그는 연편을 거머쥐고 손에 몇 번 감고 허리를 구부리고는 장원의 뒷쪽으로
걸어갔다. 어떻게 된 노릇인지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십여 장을 달려 장원의 끝에 이르게 되었을 때, 갑자기 서쪽에서 은은히 무기
가 바람을 가르는 파공성이 휙! 휙! 하고 들려왔다.
마행공은 속으로 부르짖었다.
(정말 부끄럽구나. 침입한 사람이 누군가와 손을 쓰고 있는 것도 모르다
니.......)
그는 두 발로 땅을 차며 몸을 솟구쳐 민첩한 솜씨로 담장에 손을 집고 몸을
뒤집으며 가볍게 넘어서 소리가 나는 곳을 찾고보니 그 소리는 후진(後進)의 한
벽돌집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말 이상한 것은 싸우는 사람은 벙어리인듯 기합 소리도 내지 않았으
며 무기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어떤 사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뛰어들어 도울 생각은 잠시 미루
고 창문 틈으로 집안을 엿보았다. 순간 그는 실소를 터뜨릴뻔 했다.
그 방안은 썰렁했는데 탁자 위에는 두 사람이 각기 강철 칼을 들고서 격투를
벌이고 있었다. 한 사람은 작은 주인인 상보진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바로 상보
진의 어머니인 상노태였다. 원래 모자 두 사람이 도법을 연습하고 있었던 것이
었다.

대협의 아들
마행공은 잠시 살펴보다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상노태의 손씀씀이는 매
서웠으며 도법 또한 정묘하여 낮에 돌아다닐 때의 초라하고 늙은 티는 전혀 찾
아 볼 수 없었다. 상보진이 펼치는 팔괘도 역시 획획!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상노태만 사실을 감추고 드러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상보진 역시 일부러 무공
을 감춘 것이었다. 마행공은 평소에 상보진에게 권각법만을 가르쳤을 뿐, 도법
은 결코 가르친 적이 없었는데 상보진의 도법은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말없이 잠시 서 있다가 십오 년 전 감량도상(甘凉道上)에서 상보진의 부
친 상검명과 손을 쓰다가 일장을 얻어맞아 삼년을 조섭한 후에야 회복된 사실을
떠올렸다. 그 당시 그는 무공이 상검명에 비해 너무 뒤떨어졌기 때묻에 원한을
갚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다시는 감량지방으로 발길을 옮기지 않았다.
상검명은 이미 죽었고 상노태는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었으니 그 때의 감정은
마음에 두지 않았는데 오늘밤 다시 그 원수의 처인 과부와 아들이 대련을 하고
있는 광경을 보니 너무나도 뜻밖이었다.
마행공은 초조한 마음으로 생각에 잠겼다.
(상노태의 무공은 나에 못지 않는데 어째서 그녀는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았을
까? 우리 부녀를 장원에 잡아둔 것은 혹시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닐까?)
잠시 생각을 한 후 다시 창가로 다가가 보니 모자의 도법은 일변해 있었다.
팔괘유신도법(八卦遊身刀法)을 펼치며 집안을 오락가락하다가 갑자기 장법을
펼쳤고 어떤 때는 칼을 휘두르는 등 갈수록 빨라지고 있었다. 사십 육 초인 수
세(收勢)에 이르러 도법을 마친 후 서로 뒤로 물러나 규칙에 따라 칼을 들어 경
의를 표하는 것이었다.
상노태는 아무렇지도 않은 기색인데 그녀의 아들 상보진은 오히려 씩씩거리며
가뿐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상노태는 엄숙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너는 언제나 호흡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는구나. 진도가 이렇게 느려서야
어느 천년에 너의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수 있겠느냐?]
마행공은 속으로 섬짓한 느낌을 받았다. 상보진은 고개를 떨구고 부끄러운 빛
을 띠웠다. 상노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묘인봉의 무공을 너는 보지 못했겠지만 그가 수레를 끌어당기는 신력은 친히
목격하지 않았느냐? 호일도의 무공은 묘인봉에 못지 않다. 묘가와 호가, 두 도
적의 무공은 지금의 너와는 천지 차이가 나지만 네가 부지런히 배우고 연마한다
면 너는 매일 일푼씩 증진될 것이고, 반면에 그 두 도적은 일푼씩 늙어갈 것이
니, 때가 되면 두 도적을 팔괘도로 갈기갈기 난도질해 죽일 수 있을 것이다.]
마행공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두 모자는 두문불출하고 무공을 익히고 있었으므로 호일도가 이미 십여
년 전에 죽은 것을 모르고 있구나.)
상노태가 한숨을 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참, 얘야! 내보기에 너는 요즘 그 마씨 집 계집애에게 온통 정신이 팔려 무
공도 제대로 연마하지 않는 것 같더구나.]
마행공은 깜짝 놀랐다.
(설마하니 우리 춘화와 상보진 저 녀석 사이에 무슨 말 못할 사연이라도 있단
말인가?)
상보진은 얼굴이 새빨개져서 변명을 했다.
[어머니, 저는 마소저를 대할 때면 언제나 예의 바르게 행동을 했고 말도 몇
마디 나누지 않았습니다.]
상노태는 싸늘히 코웃음을 쳤다.
[흥! 네가 누구의 젖을 먹고 자랐느냐?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이 에미가
모를줄 아느냐? 너는 마씨 소저에게 반했단 말이다. 물론 그녀의 인품과 무예로
보아 그녀를 존경하고 좋아하는 것을 탓할 수는 없겠지만......]
상보진은 그 말에 매우 기쁜듯 큰소리로 불렀다.
[어머니!]
상노태는 왼팔을 들어 그의 말을 막으며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너는 그녀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느냐?]
상보진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마 노표국주가 아닙니까?]
[누가 아니라고 했느냐? 그 마 노표국주가 우리 집안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
는지 너는 아느냐?]
상보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상노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얘야, 그는 너의 아버지의 원수이니라.]
상보진은 너무도 뜻밖의 일이라 자기도 모르게 나직이 신음소리를 냈다.
마행공은 온몸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상노태는 다시 입을 열었다.
[십오 년 전, 너의 아버님은 강호도상에서 마행공과 손을 쓰게 되었다. 너의
아버지는 그 당시 절세의 영웅이셨으니 물론 그 마가가 적수가 되지는 못했지.
너의 아버지의 일장에 그는 중상을 입었지. 그러나 마가 역시 평범한 시골사람
은 아니어서 너의 아버지도 내상을 입게 되었느니라. 그런데 그 내상이 아물기
도 전에 우리의 원수인 호일도가 야심한 밟에 달려와 너의 아버지를 해쳐 돌아
가시게 한 것이다. 만약 네 아버지가 마가와 먼저 겨루는 일이 없었더라
면....... 허허, 팔괘도의 위세가 강호에서는 대단했었는데....... 호일도가 어
찌 너의 아버지를 해칠 수 있었겠느냐?]
그녀의 최후의 몇 마디 음성은 참담하고 매서웠으며 목도 쉬어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마행공은 파란만장한 세월을 살아왔지만 이러한 말을 듣게 되자 자기도 모르
게 몸서리쳐지는 것이었다.
(호일도가 어떠한 무공을 지니고 있었는지 저 노파는 잘 모르는군. 설사 몸에
내상을 입지 않았더라도 그 액겁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웠을 걸. 이 놈의 할망구
가 남편의 참담한 죽음에 상심한 나머지 엉뚱하게 나에게 화풀이를 하려는구
나.)
다시 상노태의 말이 들렸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늙은이가 표화물을 호송하다가 우리집으로 찾아들어
비를 피하게 되었다. 이 상가보는 너의 아버님이 친히 건축한 것인데 어찌 쥐새
끼 같은 작자들이 이곳에서 방자하게 약탈을 하는 것을 용납할 수 있겠느냐? 너
는 내가 왜 마씨 부녀를 이곳에 잡아두는 지 아느냐?]
상보진은 떨리는 음성으로 더듬거렸다.
[어머니...... 어머니는 저...... 저보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라는 것입니
까?]
상노태는 매섭게 외쳤다.
[못하겠다는 말이냐? 그 마가라는 계집애에게 넋이 빠졌다, 이 말이겠지?]
상보진은 어머니의 눈에서 금방이라도 불을 뿜어낼 듯한 기세라 그만 두어 걸
음 물러서며 감히 대답을 하지 못했다.
상노태는 냉소를 했다.
[그래 좋다. 내가 그 마가에게 청혼을 하마! 우리 집안을 봐서라도 마행공은
결코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이 말은 마행공이나 상보진에게 너무도 뜻밖의 일이었다.
마행공은 창문을 사이에 두고 상노태가 이를 갈며 통한스럽게 여기는 표정을
보면서 잠시 그 의도를 생각해보니 전신의 솜털이 모조리 곤두서는 것을 느꼈
다.
(저 할망구는 심보가 정말 악랄하기 이를데 없구나. 나를 죽이는 것도 부족해
나의 꽃같은 딸을 며느리로 삼아 그 애를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려고 하는
구나! 하늘이 나를 도와 오늘밤 이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해주었구나. 그렇지
않았더라면....... 나의 기구한 춘화는......)
상보진은 나이가 젊고 경험이 없어 모친의 깊은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마냥
기뻐했지만 약간의 의아함은 떨쳐버리지는 못했다.
마행공은 여기까지 듣고 상노태에게 발각이 될까봐 진기를 끌어올려 살그머니
물러났다. 그는 자신의 방에 들어와 이마에 식은 땀을 훔치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렇다면 뒷산으로 달려간 그 삐쩍 마르고 조그만 검은 그림자는 도대채 누
구란 말인가?)
이튿날 오후, 마행공은 장포와 마괘(馬 )를 걸치고 드릴 말씀이 있다며, 상보
진에게 어머님을 모셔오도록 했다.
상보진은 놀람과 기쁨에 얽혀 생각했다.
(설마하니 어머니가 이토록 빨리 청혼을 했단 말인가? 이분의 태도나 옷차림
으로 미루어 볼 때 심상치 않은 일은 분명한 것 같구나.)
이윽고 그는 달려가 어머니를 모셔오고 마행공을 후청(後廳)으로 모셨다. 두
사람을 예의를 갖추어 앉게하고 상보진 자신은 아랫쪽에서 두 분을 모셨다.
그는 어머님과 마행공을 번갈아 보았으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 노표국주는
표은을 지켜준 데 대하여 사의를 표하고 그 동안의 배려에 감사한다는 치하의
말을 했다.
상노태도 지극히 겸손하게 그 말을 받았다. 옆에 있는 상보진은 얼른 본론으
로 들어갔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건만 두 사람은 형식적인 인사말을 주고받을
뿐이었다.
한참 말이 오고 간 후에 마행공이 입을 열었다.
[저의 딸애 춘화의 나이가 적지 않은데, 저는 상노태와 한가지 일을 의논하려
합니다.]
상보진은 가슴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상노태는 이상하게 생각했
다.
(여자쪽에서 먼저 청혼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는데 이상하구나.)
이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깍듯이 예의를 갖추고 말했다.
[마노사(馬老師)께서는 기탄없이 말씀해 보십시오. 우리는 한집안 사람과 다
름없는데 어찌 사소한 예의에 구애를 받으시는지요?]
마행공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
[저에게는 이 여식 이외에 한평생 한 명의 제자만 거두어 들였지요. 그 제자
는 자질이 우둔하고 성질이 급하기는 하지만 어릴적부터 그를 친아들처럼 여겨
왔소이다. 그리고 이 애가 춘화와 상당히 친밀히 지내기 때문에 저는 귀장(貴
莊)에서 두 남녀의 약혼식을 올려주고 싶소이다.]
상보진은 뭔가 잘못 되어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말이 떨어지자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셨다.
상노태는 속으로 크게 노했다.
(이 늙은이도 굉장히 무섭구나. 틀림없이 나의 아들이 눈치를 보인 모양이구
나.)
그러나 그녀는 즉시 얼굴 가득히 옷음빛을 띠우고 연신 축하한다는 말을 하고
상보진에게 큰소리로 외쳤다.
[얘야! 너는 빨리 마 노백부님에게 축하 인사를 드리도록 해라!]
상보진은 머리가 멍해지고 얼떨떨한 상태에서 곧장 밖으로 달려나가고 말았
다.
마행공은 다시 상노태와 겸손의 말을 한차례 늘어놓고는 방안으로 돌아와 딸
과 제자를 불러 그들 두 사람의 약혼식을 거행하겠다고 말했다.
서쟁은 기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고 마춘화는 고운 두 뺨에 홍조를 띠고 고
개를 돌린 채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마행공은 말했다.
이곳에서 먼저 약혼을 하자꾸나. 물론 혼사는 집으로 가서 해야 할 것이다.]
그는 딸과 제자가 입이 싼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젯밤 듣고 본 바를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마춘화는 순진하지만 활달하고, 화사하여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상가보
에서 팔 개월 정도 머무는 동안, 상보진은 매일같이 그녀를 만나게 되었고 마소
저에게 홀딱 반해 버린 것이다.
그는 어젯밤 어머님으로부터 자기를 위해 청혼을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으므
로 일이 잘 되리라고 짐작했고 가슴 가득히 흐뭇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러데 마행공의 청천벽력과 같은 말을 듣게 된 것이다.
그는 홀로 자기 방에 앉아서 창문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저 멍하니 마당의 은
행나무를 쳐다보며 조금전 들은 말이 마행공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고 도저히 믿
어지지 않았다. 얼이 빠져 그는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고 있었다. 한 명
의 가정(家丁)이 들어와 말했다.
[도련님, 무예를 연마할 시간이 되었답니다. 노마나님께서 도련님을 기다린지
오래 되었습니다.]
상보진은 멍청하게 무공을 연마할 시간도 모르고 앉아 있었으니 틀림없이 꾸
중을 듣겠구나 생각하며 벽에서 표낭을 내려 재빨리 연무청으로 갔다.
상노태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
다.
[오늘은 독맥(督脈)과 등뒤에 있는 여러 혈도를 연마하도록 하자.]
그리고 고개를 돌리고 두 명의 목패를 든 가정에게 외쳤다.
[목패를 똑바로 들고 움직이도록 해라!]
상보진은 속으로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
(마 노표국주가 그런 말을 했는데도 어째서 어머니는 전혀 개의치 않을까?)
그러나 상노태는 평소에 아들을 지극히 엄하게 가르쳐 왔고 무공을 연마할 때
는 가차없이 꾸짖었고 실수를 할 때는 매질을 하는 판이라, 상보진은 금표를 움
켜쥔 채 정신을 가다듬고 어머니가 혈도의 이름을 외치는 것을 기다렸다.
상노태가 부르짖었다.
[묘인봉의 명문혈(命門穴)과 도도혈(陶道穴)!]
상보진은 오른손에 쥐어진 두 대의 금표를 날려보내 정확하게 목표에 그려져
있는 인물의 등뒤에 있는 혈도를 적중시켰다.
상노태는 다시 부르짖었다.
[호일도의 대추혈(大椎穴)과 양관혈(陽關穴)!]
상보진이 왼손을 쳐들며 혈도를 노리고 대뜸 금표를 날려보냈다. 텅텅! 소리
가 나면서 한대는 대추혈을 정확히 적중시켰지만 양관혈을 노린 금표는 약간 어
긋났다.
그런데 문득 목패가 이상하다고 느껴져 어! 하며 자세히 바라보니 목패 위에
쓰여있던 세 글자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그는 손짓을 해서 그 목패를 들고 있는 가정을 다가오라 하여 목패를 들여다
보았다. 호일도라는 세 글자는 예리한 무기로 파여 없어지고 대신 삐뚤삐뚤하게
상검명(商劍鳴)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상보진은 원수를 향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부친을 향해 금표를 던진 꼴이라 다
급하고 분노한 나머지 냅다 일장을 들어 가정의 뺨을 후려치고 발로 걷어찼다.
상노태는 부르짖었다.
[잠깐!]
그녀는 그 가정이 어릴 적부터 이곳에서 자랐으므로 그런 일을 저지를 만큼
대담하지 못 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틀림없이 외부인의 소행이라고 단정했
다. 마음 속에 짚히는 바가 있어 그녀는 마행공 부녀와 그의 제자를 떠올리고
입을 열었다.
[마노사에게 할 말이 있으니 모셔 오너라.]
상보진은 총명한 사람이었으나 오늘은 실의한 나머지 경망되게 사람을 때린
것이었다. 어머니가 마노사를 청한다는 말을 듣자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쓰러
진 장정을 일으켜주며 사죄를 하고 목패에 박힌 금표를 뽑으려했다. 상노태는
가로막으며 말했다.
[잠시 동안이라도 그가 통쾌함을 느끼도록 뽑지 말거라!]
그리고 얼굴을 돌려 한 명의 가정에게 상검명의 영당으로 가서 자금팔괘도를
가져오도록 명했다.
마행공은 딸과 제자를 데리고 연무청으로 들어오는 순간 상노태의 일그러진
안색을 보고 경계를 하며 생각했다.
(이 할망구 정말 대단하구나. 내 말을 듣자 벌써 안면을 바꾸려 하는군.)
그러나 태연히 두 손을 맞잡아 보였다.
[노마나님께서 어인 일로 부르셨습니까?]
상노태는 냉소했다.
[선부는 이미 세상를 떠났소. 마노사, 과거에 선부와 감정이 있다하더라도 죽
은 사람을 상대로 화풀이를 해서야 쓰겠소?]
마행공은 어리둥절해졌다.
[불초는 우둔하여 잘 모르겠으니 분명히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상노태는 목패를 가리키며 말했다.
[마노사라면 강호에서 쟁쟁한 사내대장부인데 이토록 비열한 짓을 하실 리는
없겠지요? 실례지만 영애(令愛)가 한 짓인가요, 아니면 제자의 솜씨인가요?]
그러면서 마씨 집안의 세 사람을 훑어보았다. 마춘화는 한번도 그녀의 이런
매서운 표정을 본 적이 없는지라 움찔 놀랐다.
마행공은 목패 위의 사람 이름이 바뀌어진 것을 보며 놀라 말했다.
[딸애와 제자가 우둔하기는 하나, 결코 이토록 버르장머리 없는 짓은 안 한
답니다.]
상노태는 큰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상씨 집안 사람이 저지른 수작이란 말이오?]
마행공은 어젯밤에 본 그 비쩍 마르고 조그만 사람의 모습을 상기하고 말했
다.
[외부 사람이 들어올 수도 있는 일이지요. 불초는 바로 어젯밤......]
상노태는 그 말을 가로채고 날카롭게 호통을 쳤다.
[설마하니 그 호일도라는 개도적 같은 작자가 친히 와서 이런 응큼한 수작을
벌였단 말인가요?]
그 말이 막 끝나자 밖에서 누군가 그 말을 받았다.
[감히 그 사람을 찾아가서 손을 쓰지는 못하고 목패에 이름을 새겨 화풀이를
하는 것이야말로 비열하고도 응큼한 수작이지!]
상노태는 앉아 있었기 때문에 누구인지 알아볼 수가 없어 부르짖었다.
[누구냐? 당장 이리 나와라!]
그러자 두 명의 장정 사이를 비집고 비쩍 마른 어린애가 걸어나오는 데 바로
호비였다. 그야말로 모든 사람들의 의표를 찌른 것이라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
었다. 상노태는 나직이 물었다.
[비(斐)야, 알고 보니 너였구나.]
호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이다. 내가 한 짓이외다. 마노사는 전혀 모르는 일이지요.]
[너는 무엇 때문에 이런 짓을 했느냐?]
[나의 눈에 거슬렸기 때문에 그런 짓을 했소이다. 영웅호걸이라면 이런 수작
은 부리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니겠소?]
상노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옳다. 얘야, 너는 정말 배짱이 있구나. 이리 다가오너라. 내가 찬찬
히 너를 살펴봐야겠구나.]
그러면서 다정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호비는 그녀가 굉장히 노하리라고 생각
했는데 전혀 노기를 띤 빛을 볼 수 없자 가까이 다가섰다. 상노태는 가볍게 그
의 두 손을 거머쥐더니 나직이 말했다.
[착한 애기, 정말 착한 애로구나.]
그러면서 그녀는 갑자기 두 손을 홱 뒤집더니 단숨에 호비의 왼쪽 손목 회종
혈(會宗穴)을 움켜쥐고 다른 손으로는 오른 손목의 외관혈(外關穴)을 거머쥐었
다. 그녀의 동작은 번개 같았다. 호비는 경계를 전혀 하지 않은 상태에서 꼼짝
없이 당하고 말았다. 즉시 전신이 마비되고 시큰거려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는 적과 싸운 경험이 없었으므로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험악하고 간사한지
모르고 있었다. 상노태는 호비가 발버둥치지 못하도록 그의 양문혈(梁門穴)을
발로 걷어차 봉쇄하고 장정들에게 쇠사슬과 삼베 밧줄을 가져오라 하여 손과 발
을 꽁꽁 묶어 연무청에 매달았다.
상보진은 즉시 채찍을 가져와 머리통이건 어디건 상관하지 않고 사정없이 호
비를 매질했다. 호비는 입을 다물고 신음소리 조차 내지 않았다. 상보진이 노기
찬 음성으로 물었다.
[누가 너에게 그렇게 하라고 시켰느냐?]
그리고는 장정에게 명하여 그의 숙부인 평사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감시하라고
명을 내렸다. 상보진은 실의(失意)의 분노를 모조리 호비에게 쏟는 것 같았다.
마춘화와 서쟁은 이미 호비의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것을 차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어서 몇 번이나 말리려고 했지만 마행공이 아랑곳하지 말라는 눈짓을 보
내자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상보진은 족히 삼백여 차례나 채찍을 가했으나 끝내 교사한 사람이 누구인
알아내지 못하고 더 때렸다가는 죽을 것 같아 채찍을 놓고 호비에게 욕을 했다.
[이 쥐새끼 같은 도둑놈아, 그 간악한 호일도가 너를 보낸 것이냐?]
호비는 갑자기 입을 열고 껄껄 웃었다. 그는 피투성이가 되었는 데도 아직까
지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매우 기쁜 듯 웃는지라 뭇 사람들
은 깜짝 놀랐다.
상보진이 다시 채찍을 집어들고 때리려 하자 마춘화는 더 참을 수가 없어 부
르짖었다.
[그만 하세요!]
상보진은 채찍을 들어 올렸다가 마춘화의 눈빛과 마주치자 힘없이 채찍을 내
려뜨렸다.
호비는 채찍이 가해질 때마다 상대방을 경계하지 않고 있다가 스스로 적의 수
중에 떨어진 우둔함을 후회하면서, 자기는 맞아도 싸다고 생각했다. 온몸이 피
로 물들고 정신이 아물거리는 중에도 마춘화가 그만 때리라는 말을 하자 눈을
떠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춘화의 얼굴에는 동정과 연민의 빛이 가득차 있었다.
호비는 가슴 속 깊이 고마움을 느꼈다.
상노태는 아들이 여색에 눈이 어두워 아가씨의 한 마디에 손을 멈춘 것을 보
고 속에서 불이 났으나 나직이 코웃음치고는 입을 다물었다. 마행공이 점잖게
입을 열었다.
[상노태, 매질을 해서라도 모든 것을 밝히시구려. 춘화야, 쟁아, 우리들은 나
가자.]
그는 포권을 하고 딸과 제자를 데리고 나왔다.
마춘화는 연무청을 나서자 아버지를 원망했다.
[아버지, 그토록 참혹하게 때리는데 어째서 아버님은 그 불쌍한 애를 구하려
고도 하지 않고 오히려 더 매질을 하라고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마행공은 담담히 대답했다.
[강호의 인심은 험악하기 짝이 없다. 계집애가 무엇을 알겠느냐?]
부친의 그와 같은 말을 마춘화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날밤 마춘화는 전신이
피로 물든 호비의 모습이 자꾸만 머리에 떠올라 괴로와했다. 그리하여 한밤중이
되었지만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며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녀는 일어나
백보낭(百寶囊)에서 금창약을 꺼내 살그머니 방문을 열고 연무청으로 걸어갔다.
낭하(廊下)에 이르렀을 때 한 사람이 오락가락하며 연신 한숨을 내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상보진이었다.
그 역시 마춘화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추며 나직이 물었다.
[마소저, 그대요.]
[그래요. 그대는 어째서 아직도 자지 않고 있나요?]
상보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늘과 같은 일을 당하고 어찌 잠을 이룰 수가 있겠소? 그런데 그대는 웬일
이오?]
[나 역시 그대와 마찬가지로 오늘 일이 마음에 걸려 여간 괴롭지 않네요.]
그녀가 말하는 오늘의 일이란 호비가 매질을 당한 일이었다. 그런데 상보진은
그녀가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가게 된 것을 슬퍼하는 줄로 착각했다. 그녀 역시
마음 속으로 괴로와 한다는 말을 듣자 상보진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
며 생각했다.
(그녀는 정말 나에게 깊은 정을 가지고 있구나. 서(徐)가라는 멍청한 녀석과
짝 지워진 것은 부친의 명을 거역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것이겠
지.)
그렇게 생각한 그는 대담하게 한 걸음 나서며 부드러운 어조로 불렀다.
[마소저!]
[응! 상소야(商少爺), 한가지 부탁이 있어......]
[부탁은 무슨 부탁, 그대가 요구한다면 무엇이든 다 들어 줄 것이며 설령 당
장 죽으라고 해도 마다하지 않겠소.]
이 몇 마디의 정열적인 말을 그는 용감히 뱉어내고 말았다. 사실 그는 마음속
으로 이 말을 하고 싶었지만 줄곧 입을 열지 못한 터였다. 내심 실의에 차 있는
데 마춘화가 부탁이 있다는 말을 하자 더이상 참지 못하고 토로한 것이었다.
마춘화는 평소 그가 자기에게 부드럽게 대해주는 것이 그저 대가집 공자로서
의 습관이려니 여겼을 뿐, 이토록 자기에게 깊은 정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
했으므로 어리둥절했으나 즉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내가 그대에게 죽으라고 할 수 있겠어요?]
상보진은 사방을 둘러보더니 나직이 말했다.
[이곳은 불편하니 우리 바깥으로 나가지요?]
마춘화는 고개를 끄덕여 응낙했으며 두 사람은 담장을 넘어 밖으로 나갔다.
상보진은 그녀의 손을 잡고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로 가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았다. 마춘화는 살며시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상소야, 그대는 응낙해 주시는 거죠?]
상보진은 손을 뻗쳐 다시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한번 말하면 끝이지 또 물어볼 필요가 어디 있소?]
마춘화는 다시 그에게서 손을 뽑으며 말했다.
[나는 그대에게 비(斐)아를 그만 놓아주고 다시는 괴롭히지 말아 달라는 청을
드리고 싶어요.]
이때 나무 위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며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기척이 들
렸으나 두 사람은 주의를 하지 못했다.
상보진은 그녀가 그러한 말을 하기 전에 전귀농과 묘부인의 관계를 상기하고
있었다. 그는 마춘화가 가슴 가득히 끓어오르는 연정을 품고 그녀를 데리고 멀
리 도망쳐 달라는 것을 부탁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그녀의 부탁이 어린 도적
을 놓아주라는 것이 아닌가?
그는 너무도 실망하여 침울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춘화는 대답
이 없자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그대는 응낙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그대가 그러기를 바라고 기뻐한다면야 어머님에게 꾸지람을 듣는 한이 있더
라도 응낙을 해야겠지요.]
마춘화는 기뻐하며 말했다.
[정말 고마와요. 정말로.]
그녀는 몸을 일으키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우리 그를 놓아주러 가요?]
상보진은 간청하듯 말했다.
[조금만 더 앉아 있습시다.]
마춘화는 자기의 요구가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그 뜻을 거역하기가 거북해 다
시 천천히 앉았다. 상보진은 넌즈시 말했다.
[그대의 손을 한번만 잡게 해 주구려.]
마춘화는 그의 순정을 볼 때 측은한 생각이 들어 방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상보진은 그녀의 부드럽고 매끄러운 조그만 손을 가볍게 쥐자 만감이 교차하
여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뻔 했다. 잠시 후 마춘화가 입을 열었다.
[비아가 천장에 매달려 있으니 얼마나 불쌍해요. 그를 놓아준 후에 다시 손을
잡도록 해주겠어요. 어때요?]
그러면서 손을 움츠리며 몸을 일으켰다. 상보진도 따라 몸을 일으키며 한숨을
쉬었다.
갑자기 나무 위에서 휙! 하는 소리가 나면서 검은 그림자가 떨어지더니 두 사
람 앞에 서더니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놓아줄 필요없이 나는 이미 이렇게 나와 있소!]
마춘화와 상보진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나타난 사람은 그 깡마르고 조그마
한 호비가 아닌가?
그들은 일제히 물었다.
[누가 너를 놓아주었지?]
호비는 웃으며 대답했다.
[누가 놓아줄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어디 있겠소? 내가 나오고 싶으면 나오는
것이지.]
원래 그는 상노태에 의해 혈도를 짚히게 되었으나 네 시진이 지나자 혈도가
스스로 풀리게 되었다. 따라서 쇠사슬이나 밧줄로는 그를 더이상 묶어둘 수 없
었고, 수기축골(收肌縮骨)의 수법을 써서 가볍게 빠져나온 것이었다.
채찍을 얻어 맞았으나 다행히 찰과상에 지나지 않아 몸을 움직이는 데는 지장
이 없었다. 숙부 평사를 구하러 가려고 했는데 마춘화와 상보진이 담장을 넘어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 따라와 나무 위에서 그들의 말을 몰래 엿들은 것이
었다.
상보진은 스스로 빠져 나왔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틀림없이 또 다른 첩자가 상가보에 잠입한 것일게다.)
그는 재빨리 달려들어 호비의 가슴팍을 움켜잡으려 했다.
호비는 몸을 피하며 두 손을 들어 철썩철썩 삽시간에 네 대의 따귀를 상보진
에게 안겨주었다. 그에게 얻어 맞은 수모를 어찌 호비가 잊었겠는가?
상보진은 급히 막으려고 했으나 호비는 왼손으로 때리는 척하다가 느닷없이
오른손으로 그의 콧잔등을 후려쳤다. 상보진은 악! 소리를 질렀다. 코피가 흘러
내렸다.
상보진은 급히 몸을 솟구쳤다. 호비는 허공에 뜬 그를 그대로 발로 걷어차 곤
두박질 치도록 만들었다.
이 몇 수는 신속하기 이를데 없었고 상보진은 연신 주먹과 발길질에 얻어 맞
아 땅바닥을 뒹굴었다.
호비는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았으나 마춘화가 옆에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
다. 다시 더 때렸다가는 그녀가 나서서 관여를 할 것이고, 또 그녀가 자기에게
호의를 베풀고자 한 이상 은원(恩怨)관계는 분명히 해야하기 때문에 그녀의 말
을 들을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 가볍게 손을 털며 말했다.
[상가야, 네가 감히 나를 쫓아올 수 있겠느냐?]
그러면서 몸을 돌려 냅다 도망을 쳤다.
상보진은 그야말로 단꿈을 꾸다가 엉겹결에 얻어맞은 꼴이었다. 상대의 손이
비록 빨랐지만 그보다는 자신이 정신을 판 까닭에 어이없이 얻어맞은 것이라 생
각하였다. 이 어린 소년이 자신의 가전 무공인 팔괘문의 무공을 이길 수 있으리
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더구나 마음에 두고 있는 여인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데 어찌 채면을 잃고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그는 즉시 호비의 뒤를 쫓았다. 호비의 경신법은 그보다 훨씬 뛰어난 편이라
그가 쫓아오기를 기다렸다가 달아나곤 하면
서 칠팔 마장 달려갔다. 마춘화가 따라오기는 했지만 거리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호비는 마춘화를 멀찌기 떨쳐버리자 발걸음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상가야, 오늘 이 도련님께서 네 에미의 간계에 빠져 욕됨을 당한 것인데 이
제 이 도련님의 재간을 너에게 구경시켜 주겠다.]
그리고는 몸을 날려 독수리처럼 덮쳐들었다.
상보진은 한번도 이와 같은 수법을 본 적이 없는지라 그만 깜짝 놀라서 급히
몸을 피하려 했다. 그런데 호비는 왼발로 땅바닥을 살짝 딛는가 싶더니 갑자기
방향을 틀며 덮쳐들었다.
상보진은 피하려 했으나 이미 늦은 것을 깨닫고 즉시 호통을 내질렀다.
[좋다!]
그는 두 손을 모아 공격을 해왔다. 이것은 그의 집안에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팔괘장의 무서운 수법이었다. 그러나 호비는 살짝 그의 손을 잡고 비틀었다. 상
보진은 손목이 격렬하게 아파오는 것을 느끼며 재빨리 움츠렸다. 호비는 연이어
주먹과 발길질을 날리고 날렵한 신법을 전개하여 상보진은 거의 무방비가 되었
다.
호비는 부친이 남긴 권경(拳經)을 연마하기는 했으나 한번도 시험을 해 본 적
이 없다가 오늘 처음으로 손을 쓴 것인데 뜻밖에도 완전한 승리를 거둔 것이었
다.
상보진은 전신을 움츠리고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그저 얻어맞기만 했다. 십
년간 무공을 고되게 연마했으나 이 얼뜨기 같은 소년에게는 전혀 먹혀들지 않았
다.
호비는 왼발로 걷어차는 시늉을 하며 상보진이 오른쪽으로 피하기를 기다렸다
가 벼락같이 오른발로 상보진의 허리에 있는 경문혈(京門穴)을 걷어찼다. 상보
진은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호비는 그의 장삼을 벗기더니 쫙쫙 찢어 손과 발을 묶어 길 옆의 버드나무 가
지에 매달아 놓으려고 했는데 힘이 부족해 끌어올릴 수가 없었다. 그는 큰 가지
를 가늠해 보고는 대뜸 '가거라!' 하고 일성을 대갈하며 집어 던져 상보진을 나
무 위에 걸리도록 만들었다. 이어 호비는 버들 가지를 꺽어 채찍으로 삼아 상보
진의 머리통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상보진은 놀람과 분노에 얽혀 가슴 가득 피가 끓어올랐으나 그가 자기와 똑같
이 보복한다는 것을 알고서 이빨을 깨물었다. 근 삼사십 번 채찍질을 했을 때
마춘화가 달려왔다. 그녀는 그 광경을 보더니 멍하니 서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
다.
호비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마소저, 나는 그대가 부탁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이 녀석을 용서해 주겠소.]
그리고는 껄껄 웃었다. 비록 십여 세의 소년이었지만 행동거지나 호기는 사람
을 압도하는 면이 있었다. 그는 회초리를 던지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마춘
화는 소리쳐 물었다.
[소형제, 당신은 도대제 누구지?]
호비는 고개를 돌리고 낭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저가 물으니 말하지 않을 수가 없구려. 나는 바로 호일도의 아들 호비외
다!]
말이 끝나자 다시 껄껄 소리내어 웃더니 삽시간에 버드나무 뒷쪽으로 사라졌
다.
나는 대협 호일도의 아들 호비외다!]
사람은 멀리 갔지만 그 말소리는 길게 꼬리를 남긴 채 허공에 울려퍼지고 있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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