飛狐外傳 비호외전 5

3학년2반 | 2022.03.09 07:22:46 댓글: 0 조회: 564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54002
金庸 大河歷史長篇小說
비호외전 (3)
지은이/김용
독수약왕(毒手藥王)
호비와 종조문은 묘인봉의 눈에 입은 상처가 가볍지 않다는 것
을 잘 알고 있었다. 단장초란 이름만 들어도 무서운 독약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더구나 눈은 인체에서 가장 부드럽고 연
약한 기관이라 설사 명의를 모셔온다 하더라도 시일이 오래 걸리
면 영영 시력을 잃고 마는 것이다.
두 사람은 그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일각이라도 빨리 치
료할 수 있도록 하려면 일각이라도 시간을 앞당겨야 했다. 그들은
말이 물을 마시거나 풀을 먹는 시간 이외에는 잠시도 지체하지 않
고 길을 가면서 말을 탄 채로 요기를 했다.
그들은 자지도 않고 쉬지도 않고 길을 재촉했다. 두 사람의 무
공이 정순하기 때문에 이틀을 자지 않고도 얼마든지 지탱할 수 있
었다. 그러나 타고 있던 말은 도중에 두 번이나 바꿔야했다. 새로
산 말도 여기까지 달려오자 어느덧 발걸음을 휘청거리는 것이 더
달렸다가는 틀림없이 죽을 것 같았다.
종조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형제, 우리들은 부득이 말들을 잠시 쉬도록 해주어야겠네.]
[네, 그러죠.]
그리고 호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만약 내가 타고 있는 말이 원소저의 백마라면 지금쯤 벌써 동
정호반에 도착했을텐데.)
원자의를 생각하자 자기도 모르게 손을 품속으로 집어넣고 그녀
가 남기고 간 옥봉황을 만져보았다. 따스한 촉감이 전해지자 마음
이 한결 편안하고 부드러운 정을 느끼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말에서 내려 나무밑에 앉아서 말들이 풀을 뜯어먹고
쉬도록 했다. 종조문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멍하니 넋을 잃은
채 눈살을 찌푸렸다. 호비도 이번 일이 매우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알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종 둘째나으리, 독수약왕이란 도대체 어떤 인물입니까?]
종조문은 마치 그의 말을 듣지 못한듯 하늘만 쳐다보다가 한참
이 지나서야 갑자기 되물었다.
[자네는 방금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호비는 그가 넋을 잃고 있는 것을 보고 묘인봉의 병세를 걱정하
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호비는 이 사람이 생김새는 괴상망칙하게 생겼지만 매우 의리가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들은 본래 묘인봉과는 좋
지못한 사이였지만, 지금은 그를 위해 이런 고생을 감수하고 있다
고 생각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게 되자 호비는 자기도 모르게
불쑥 입을 열고 말했다.
[종 둘째 나으리, 엊그제 새벽에는 정말 실례가 많았습니다. 지
금 생각하니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이 후배가 세 분께서 도우
러 오셨다는 것을 진작 알았더라면 감히 세 분의 위엄을 거슬리는
일을 하지 못했을 거외다.]
종조문은 커다란 입을 헤벌쩍 벌리고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그게 뭐 대수로운 일인가! 묘대협은 쟁쟁한 호걸인데
우리 삼형제가 위기에 처한 것을 알면서도 구해주지 않는다면 어
찌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소형제, 자네 역시 그렇지 않은가
말일세. 우리 형제들은 묘대협과 교분이 없다하지만 어찌됐든 간
에 일면식이라도 있지만 자네는 그를 본 적도 없지 않은가?]
사실 호비는 몇 년전에 상가보에서 묘인봉을 한번 본 적이 있었
다. 다만 호비만 이 일을 알고 있었고, 묘인봉은 그 당시 비쩍마
른 꼬마를 보았다고 하더라도 기억은 못할 것이리라.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십팔 년전 호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
지 하루 밖에 되지 않았을때 묘인봉은 호북 창주의 조그만 객점에
서 호비를 본 적이 있었다. 이 일은 묘인봉만 알고 있는 것이고
호비는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십팔 년전 그 갓난아기가 바로 오늘날 이 얼굴도 모르는
젊은 영웅호걸 일줄이야 묘인봉이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종조문은 다시 물었다.
[자네는 조금 전에 나에게 무슨 질문을 했는가?]
[독수약왕이 어떤 인물이냐고 물었지요.]
종조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모른다네.]
호비는 이상하게 생각하며 반문했다.
[아니, 당신도 모른다구요?]
[나는 강호에서 떠돌아 다니고 있는 친구들을 적지않게 만났지
만 독수약왕이 도대체 어떤 인물인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더
군.]
호비는 답답한 마음을 달랠길 없어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당신이 그 사람의 내력을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했었지.
만약 애초에 모른다고 했으면 장비웅이란 자에게 똑똑히 알아보기
라도 했을 것이다.)
종조문은 그의 마음을 헤아린듯 입을 열었다.
[설사 장비웅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
네. 아니, 틀림없이 그도 모를 것이네.]
호비는 아! 했을 뿐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종조문은 다시 입을 열었다.
[다만 모두들 그 사람이 동정호반의 백마사(白馬寺)에 살고 있
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라네.]
호비는 물었다.
[백마사라구요? 그렇다면 절에 살고 있단 말입니까?]
[아닐세. 백마사라는 것은 고을 이름일세.]
[그렇다면 그가 은거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보지 못한
모양이군요.]
종조문은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닐세. 많은 사람이 그를 만나 보았네. 그러나 만났는데도 아
무도 그가 어떤 인물인지 모른다는 것일세. 그가 뚱뚱한지 홀쭉한
지 아니면 준수한지 추악한지, 장씨인지 이씨인지 아무것도 모른
다는 것일세.]
호비는 들으면 들을수록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그토록 많은 사
람이 그를 보았다면 설사 그의 성씨는 모른다치고 어째서 생김새
마저도 모른다고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종조문은 다시 설명하듯 입을 열었다.
[어떤 사람들은 독수약왕의 얼굴이 청아한 서생같고 키가 크면
서도 비쩍 말라 수재상공(秀才相公)처럼 생겼다고 하고, 목이 달
라붙은 땅딸보라 영낙없이 돼지를 잡는 백정놈을 닮았다고 하며,
또 어떤 사람들은 그 약왕이 늙은 화상으로 근 백살이 다 됐다는
것일세.......]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재차 입을 열었다.
[게다가 놀랍게도 어떤 사람들은 그 독수약왕이 다리를 저는 곱
추여인이라는 것일세.]
호비는 너무 어이가 없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어이가 없
어서 웃음을 지으려 했으나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종조문은 다시 설명을 해나갔다.
[그 사람이 약왕이라고 일컬어지는 이상 어찌 여자일 수 있겠느
냐 하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겠지. 하지만 독수약왕에 관하여 이
야기를 한 사람은 강호에서 명성과 덕망이 높은 사람이라 믿지 않
을래야 믿지 않을 수가 없다네. 그러나 그 독수약왕이 서생이고
백정이고 화상이라고 말을 한 사람들도 역시 함부로 이야기하는
인물들은 아닐세. 그들은 하나같이 생생하게 묘사를 하고 있다는
말일세. 자네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호비가 묘인봉의 집을 떠날 때만해도 그 사람을 찾기만 하다면
그를 데리고 와서 상처를 치료할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막상 종
조문의 말을 들어보니 가슴이 철렁내려 앉는 것 같았다.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데 누구를 찾아가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달리 생각을 하며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그 사람은 틀림없이 화장이나 역용지술(易容之術)에
능한 사람일 겁니다. 여러가지 모습으로 자신을 바꾸어 다른 사람
이 자기의 참모습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일 겁니다.]
종조문은 그 말을 받았다.
[강호의 친구들도 모두 그렇게 말하고 있네. 내가 생각컨데 그
가 독을 쓰는데 천하무쌍이라 그 동안 많은 사람을 해쳐 수많은
원한관계를 맺고 있으리라 생각되네. 때문에 이 사람 저 사람으로
둔갑하여 사람들이 복수하지 못하도록 변장을 했을 것이라고 말들
을 하지. 그러나 이상한 것은 그가 살고 있는 동정호반의 백마사
란 곳이 외딴 곳이 아니라서 찾아갈려면 누구나 쉽게 찾아갈 수
있다는 사실일세.]
호비는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그 사람은 독약을 써서 많은 사람을 해쳤던가요?]
종조문은 먼 하늘로 시선을 던지며 넋을 잃은 듯한 표정으로 말
했다.
[그것은 계산할 수 없는 일일세. 하지만 그의 손아래 죽은 사람
들은 대부분 온갖 악한 짓을 저지른 버적이나 대도적이 아니면 자
기의 세력만 믿고 날뛰던 토호들이나 졸부들로서 죽어 마땅한 사
람들이지. 나는 협의도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 그의 손아래에 죽었
다는 말은 한번도 들어 본 적이 없네. 하지만 그의 명성이 너무나
높기 때문에 누군가 독에 중독되어 죽기만 한다면 무조건 그가 죽
였다고들 말을 하고 있지. 하지만 실제로 태반은 그가 해쳤다고
볼 수는 없지. 언젠가 수천 리 떨어진 남쪽과 북쪽에서 두 사람이
동시에 중독되어 목숨을 잃은 경우가 있었다네. 그때 운남 사람들
은 독수약왕이 운남에 왔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약왕이 요동 땅
에 출몰했다고 말하고 있었지. 그와같이 떠들어대니 그 사람은 더
욱 괴상한 사람으로 변하게 되었지. 요즈음 들어서는 독수약왕을
들먹이는 사람을 보지 못했는데 뜻밖에도 묘대협의 중독사고가 그
와 관계가 있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아! 그것이 그 사람이
사용한 약이라면 아무래도.......]
그는 말을 끝내지 못하고 연신 고개를 흔들었다.
호비는 독수약왕을 찾는 일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라, 어디서
부터 시작해야 좋을지 몰랐다.
종조문은 몸을 일으키더니 말했다.
[우리 가세. 소형제, 자네는 이 한가지를 꼭 기억해야 할 것이
네. 일단 백마사에 도착하면 약왕장(藥王莊)에서 삼십 리 안으로
들어서게 된 것이므로 절대로 물 한모금이라도 마시면 안된다는
것일세. 아무리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르더라도 음식물을 절대로 입
에 대지 말아야 하네.]
호비는 그가 매우 진지하게 말하는 것을 듣고 즉시 응낙을 했
다. 그러면서 문득 종조문과 묘씨 집을 떠날 때 종조영과 종조능
이 얼굴에 걱정과 두려움을 나타내던 사실을 상기했다. 분명히 그
약왕의 독수(毒手)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서울 것이다. 그렇
기 때문에 천하무적수 묘인봉에게 감히 도전하는 종씨 삼웅과 같
은 인물도 독수약왕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호비는 그와같은 무서운 일을 모르고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다
고 느꼈다.
호비는 쉬고 있던 말을 끌고오며 말했다.
[우리들은 단지 병을 치료하기 위해 그를 청하거나 해독약을 부
탁하는 것이지, 그에게 악의를 품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소이까?
그러니 약을 안주면 그만이지 무엇 때문에 사람들의 목숨까지 해
치려 한단 말입니까?]
종조문은 천천히 말했다.
[소형제, 자네는 아직 젊기 때문에 강호의 인심이 얼마나 험악
하고 간사한지 모른다네. 자네야 그에 대해서 악의를 갖고 있지
않을지 모르지만 자네와 전혀 일면식이 없는 그로서는 어찌 자네
를 믿을 수 있겠는가? 만약 자네 말대로라면 유학진은 묘대협에
대해서 악의를 품지 않았지만 어째서 그의 눈을 멀도록 만들었는
가?]
호비는 할 말이 없었다.
종조문은 다시 입을 열었다.
[더군다나 독수약왕은 원수가 천하에 널려있고, 그와는 아무상
관도 없는 독살까지도 그의 소행이라고 몰아붙이는 판국에 자네가
그의 원수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또한
그 사람은 의심이 많은 성격이고, 손을 쓰는 것도 악독하다네. 그
렇지 않다면 약왕의 위에 독수라는 두 글자가 어찌 붙을 수 있겠
는가? 이런 무시무시한 별호는 저절로 얻은 것이 아닐세.]
호비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종 둘째 나으리의 말씀이 옳습니다.]
종조문은 말했다.
[자네가 만약에 나의 이 보잘 것 없는 재주를 얕보고 무시하지
않는다면 우리 서로 형제처럼 부르도록 하고 '나으리, 나으리' 하
고 격을 따져 부르지 말도록 하세.]
호비는 담담히 말했다.
[당신은 선배 영웅이고 이 후배는.......]
종조문은 그의 말을 가로채며 큰소리로 말했다.
[퇴, 퇴! 소형제, 솔직히 자네에게 말하는데, 우리 삼형제는 자
네와 손을 쓴 이후 자네에게 매우 탄복했네. 만약에 자네가 나를
친구로 여기지 않는다면 그만두세.]
호비는 역시 성격이 곧바르고 시원시원한 사람이라서 웃으며 불
렀다.
[종 둘째형!]
종조문은 매우 기뻐하며 훌쩍 말등으로 몸을 날리며 말했다.
[이 두 마리 짐승이 애만 먹이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날이 어둡
기 전에 백마사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네. 자네는 방금전 내가 한
말을 명심해두게. 먹고 마시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젓가락을 만
질 때도 경계를 해야할 것일세. 소형제, 자네는 젊은 나이에 그토
록 뛰어난 무공을 지니고 있는데 한 번 실수로 전신이 새카맣게
되어 강시(疆屍)로 변한다면 나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네.]
호비는 그의 말이 결코 겁주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
었다.
묘인봉이 그저 편지를 한통 찢었는데도 두 눈이 멀었는데 이제
그들은 독수약왕의 소굴로 들어가는 셈이니 독수약왕이 마음만 먹
는다면 어느 곳에라도 손쉽게 독을 뿌릴 수 있지 않은가? 종조문
역시 무림에서 떨친 인물이고 결코 겁장이가 아닌데 그토록 무섭
게 말하는 것을 보면 필시 이번 길은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
다는 것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호비는 종조문이 그렇게 위험한 줄을 분명히 알면서도 사내답게
의리를 지켜 물러섬이 없이 자기와 더불어 백마사로 찾아간다는
것은 하늘높은 줄 모르고 날뛰는 자기보다 더욱더 갸륵한 일을 하
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필의 말은 충분히 휴식을 취했기 때문에 체력은 어느 정도
회복되어 있었다.
신패시 무렵에 임자(臨資) 입구에 이르게 되었다. 얼마 후에는
백마사 고을에 도달할 수가 있었다.
고을의 도로는 몹시 즙았다. 두 사람은 혹시나 행인을 치게 되
어 쓸데없는 야단을 일으킬까봐 말고삐를 잡고 걸어서 고을안으로
들어 섰다.
종조문은 심각한 얼굴을 하며 한눈을 팔지 않았다. 호비는 그와
반대로 양쪽에 있는 점포들을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구경하고 있
었다.
어느덧 저자거리에 가까이 이르게 되었다.
호비는 모퉁이 쪽에 고약을 판다는 깃발이 걸려있는 것을 보았
다. 간판에는 제세당노점(濟世堂老店)이라고 쓰여져 있었다. 그는
생각되는 바가 있어 허리에 찬 칼을 풀어 칼집과 함께 들고 입을
열었다.
[종 둘째...... 형, 형의 판관필도 나에게 주시구려.]
종조문은 어리둥절 해졌다. 그는 호비에게 백마사에 도달하면
각별히 조심을 해야 한다고 일렀는데 도리어 자기의 무기를 내놓
으라고 하자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이 고을에 틀림없이 독수약왕의 염탐꾼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유를 캐묻지 않고 그에게 건네주며 나직이 말했다.
[조심하게. 쓸데없이 사건을 일으켜서는 아니되네.]
호비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약재상점의 계산대 앞으로 다가가
더니 입을 열었다.
[수고하십니다. 우리 두 사람은 약왕장으로 장주님을 배알하고
자 가는 길입니다. 무기를 휴대하는 것이 실례일 것 같아 귀댁에
잠시 맡겨두었다가 갈때 가져가기로 하겠습니다.]
계산대 뒤쪽에 앉아있던 늙은이는 그 소리를 듣고 얼굴에 의아
한 빛을 띠고 물었다.
[손님들은 약왕장으로 가시는 길이오?]
호비는 그가 다시 무슨 말을 하기 전에 무기를 계산대 위에 내
려놓고 읍을 하고 말을 끌고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인적이 드문 고을 밖에 이르자 종조문은 엄지 손가락을
세워보이며 입을 열었다.
[소형제, 그야말로 자네같은 사람만이 생각해 낼 수 있는 방법
일세.]
호비는 웃었다.
[체면 불구하고 호걸 노릇 한번 해본 겁니다. 어쩔 수 없는 일
아닙니까?]
원래 그는 이 고을에 약재상점은 약왕과 반드시 어떤 관계가 있
으리라고 보았고 지니고 있던 무기를 점포에 맡겨놓게 된다면 이
사람이 틀림없이 달려가 전갈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된다면 자기네들이 이곳으로 온 것이 절대 적의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릴 수 있다는 계산에서였다.
비록 맨손으로 그와같이 무서운 인물을 만나러간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지만 워낙 촌각을 다투는 일이라 한번쯤 모험을 해볼
만한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두 사람은 큰길을 따라 북쪽으로 걸어가며 행인들에게 약왕장으
로 가는 길을 물어 보려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서쪽의 조그만
언덕에 호미를 들고 약을 캐는 듯한 한 늙은이를 볼 수 있었다.
호비는 그 사람의 용모가 준수하고 호리호리한 키에 중년 서생
같이 생긴 것을 보고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다.
(설마 저 사람이 바로 독수약왕이라는 말인가?)
이윽고 호비는 앞으로 나가 공손히 읍을 하고 낭랑히 입을 열었
다.
[실례하지만 상공님께 여쭈어 보겠습니다. 약왕장으로 가려면
어떻게 가지요? 후배 두 사람은 장주님을 뵙고 부탁드릴 일이 있
어서 그럽니다.]
그 사람은 호비와 종조문 두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고 계속 호미
질만 할뿐 대꾸가 없었다. 호비가 몇 번 물었으나 그 사람은 시종
아랑곳하지 않는 것이 귀머거리인 것 같았다.
호비는 감히 더 물어보지를 못하고 머 뭇거리고 있었는데 종조
문이 그에게 눈짓을 했다. 이윽고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않고
북쪽을 향해 걸어갔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 마장쯤 나아가자 호비가 나직한 음성으
로 입을 열었다.
[종 둘째형, 아마 저 사람이 약왕인 것 같은데 형은 어떻게 했
으면 좋겠습니까?]
종조문은 말했다.
[나 역시 약간은 의심이 가지만 섣불리 아는 체를 해서 는 안되
네. 그 스스로가 인정을 하지 않는데 우리가 먼저 그를 알아본다
면 그것은 바로 그의 대기(大忌)를 범하는 것일세. 일단 먼저 약
왕장을 찾는 방법밖에 없네. 그곳을 찾아 아는 체를 한다면 그때
는 별지장이 없을 걸세.]
두 사람은 꾸불꾸불한 길을 몇 구비 돌아나아갔다.
그러자 대로에서 수십 장 정 도 떨어진 곳에 커다란 꽃밭이 있
었고 청색 적삼을 걸친 시골 처녀가 허리를 구부리고 화초를 다듬
고 있었다. 꽃밭 뒤에 세칸짜리 초가집이 한 채 있을 뿐 다른 곳
에는 인가가 보이지 않았다. 호비는 앞으로 몇 걸음 나아가서 시
골 처녀에게 읍을 하고 물었다.
[실례하지만 소저, 한마디만 여쭈어 보겠습니다. 약왕장으로 가
려면 어느 길로 가야 하나요?]
시골 처녀는 고개를 쳐들더니 호비를 한번 바라보았다. 눈이 유
난히 맑았고, 눈동자는 옷칠을 한 것처럼 새카맣게 보였다. 그 아
가씨가 고개를 쳐들자 대뜸 사방으로 정광(精光)이 뻗치는 것이
아닌가?
호비는 속으로 어리둥절해졌다.
(아니, 눈빛이 어쩌면 이렇게 빛날 수 있을까?)
그녀는 눈이 유난히 맑았으나 용모는 수수했다. 살결은 누렇게
찌들어 있었고 얼굴도 푸루둥둥해서 마치 일년 열두달 배불리 밥
을 먹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머리 카락 역시 노랗고 숱이 적었으
며 두 어깨는 깍아내린듯 말라있었다. 체구가 수척하고 왜소하여
어릴 적부터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자란 외딴산골 가난한 집
딸처럼 보였다. 그녀는 십육칠 세쯤 되어 보였지만 체격은 아직도
십사오 세 정도의 어린 계집아이 같았다.
호비는 다시 물었다.
[약왕장으로 가려면 동북쪽 으로 가야 하나요? 아니면 서북쪽으
로 가야 하나요?]
시골 소녀는 갑자기 고개를 숙이고 냉랭히 말했다.
[몰라요!]
그 음성 또한 맑고 카랑카랑했다.
종조문은 그녀가 그토록 무례한 것을 보자 얼굴을 굳히고 금방
이라도 화를 낼 것 같은 빛을 보였지만 이곳이 약왕장과 얼마되지
않는 장소임을 떠올리고 어떤 사람에게라도 함부로 대해서는 안된
다는 생각이 들어 싸늘히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 형제, 우리 가세! 약왕장은 백마사에서 유명한 곳인데 어
찌 되었든 우리들의 힘으로 찾을 수 있을 것이네.]
호비는 날이 이미 어둑어둑했고 혹시 길을 잘못들어 어두운 밤
중에 헤메고 다닌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사방을 살펴보아도 물어볼만한 인가도 없는지라 별수없이다시 그
시골처녀에게 물었다.
[소저, 부모님은 계신가요? 그 분들은 틀림없이 약왕장으로 가
는 길을 알고 계실 것이외다.]
그 시골처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풀만 뽑고 있었다.
종조문은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겠다는듯 말을 몰고 앞으로 나
아갔다. 그러나 길이 협소해서 말의 오른쪽 두 다리는 길을 밟고
있었으나 왼쪽 두 다리는 화원을 밟게 되었다. 물론 고의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성격이 원래 거칠고 또한 그 시골처녀가 무
례한 태도를 보이자 성이 나서 급히 길을 재촉하느라고 아랑곳하
지 않고 있었다.
호비는 길 가의 화초 한 줄이 말발굽에 망가질 것 같아 급히 앞
으로 달려나가 말고삐를 오른쪽으로 당기며 말했다.
[화초를 밟아 망가뜨리지 않도록 조심을 하십시요.]
호비가 말을 잡아당기자 말은 겨우 두 다리를 양쪽 길 가장자리
에 딛고 설 수 있었다. 종조문은 재촉하듯 말했다.
[빨리 가세. 이곳에서 더 지체할 것 없네!]
그는 다시 고삐를 쳐들고 말을 몰아나갔다.
호비는 어려서부터 외롭게 자라온 터라 길을 가르쳐 주지 않는
그 시골처녀가 야속하기는 커녕 오히려 측은해 보이고, 심지어 연
민의 정을 느끼고 있었다.
(이 아가씨는 화초를 심어 장에 내다 팔아 생계를 꾸려가는 모
양인데 내 말이 화초를 밟아 망가뜨릴까봐 걱정이 되는구나.)
호비는 말을 끌고 화원을 지나간 뒤 말에 올랐다.
시골처녀는 그와 같은 광경을 보더니 갑자기 큰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약왕장으로 가려는 거지요?]
호비는 말고삐를 잡아당기며 대답을 했다.
[우리 친구가 독약에 눈을 다쳤소이다. 무례인줄 알지만 약왕께
서 해약을 내려주십사 부탁을 드릴려고 찾아왔소이다.]
시골 처녀는 물었다.
[당신은 약왕을 아나요?]
[우리는 다만 그의 이름만 들었을 뿐 한번도 그를 본 적이 없소
이다.]
시골 처녀는 천천히 몸을 세우더니 호비를 몇 번 훑어보고 말했
다.
[당신은 그가 해약을 주리라는 것을 어떻게 확신하죠?]
호비는 얼굴에 난처한 빛을 띠우고 대답했다.
[그건 말하기가 어렵군요.]
그는 갑자기 머리 속에 떠오르는 바가 있었다.
(이 소저가 이곳에 살고있는 것을 보면 어쩌면 약왕의 성격이나
행동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을 지도 모르겠구나!)
그리하여 호비는 말에서 내려 깊이 읍을 하고 입을 열었다.
[아무쪼록 소저께서 길을 좀 가르쳐주십시요.]
길을 가르쳐달라는 호비의 말에는 두 가지 뜻이 포함되어 있었
다. 하나는 약왕장으로 가는 길을 가르쳐달라는 뜻이고, 다른 하
나는 약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십사 하는 것이었다.
그 시골처녀는 머리 위에서 발끝까지 다시 한번 훑어보더니 묻
는 말에 대답하지 않고 화원에 놓여있는 한 짝의 분뇨통을 가리키
며 말했다.
[저기, 분뇨 웅덩이로 가서 분뇨를 통에 반쯤 채우고 개울가로
가져가 물을 가득채워 이 곳에 거름을 주도록 해요.]
이 말은 호비에게 뜻밖이었다.
(나는 단순히 당신에게 길을 물었을 뿐인데 어째서 나보고 꽃에
똥오줌을 주라는 것인가? 더군다나 말하는 투가 명령조로 마치 나
를 자기 집 일꾼처럼 여기는 것이 아닌가?)
비록 그가 어릴적에 가난하여 고생을 많이 했다고는 하지만 한
번도 구린내나는 똥지게를 져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더욱 이상한
것은 그 시골처녀는 이 몇 마디를 하고는 다시 허리를 구부리고
풀을 뽑을 뿐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호비는 어리둥절하여 초가집 쪽을 바라보니 아무도 보이지 않았
다.
(이 소저는 몸이 허약해서 똥지게를 지려면 무척 힘들 것이다.
나는 기운 좀 쓰는 사내 대장부이니 그녀를 도와 한번쯤 똥지게를
질 수도 있는 일이다.)
호비는 말을 버드나무에 묶고 똥지게를 지고 분뇨 웅덩이로 걸
어가서 똥을 퍼담았다.
종조문은 한동안 달려갔으나 호비가 따라오는 것을 볼 수가 없
자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멀리서 그가 어깨에 한짝의 분뇨통을 떠
메고 개울가로 가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며 불렀다.
[이봐! 자네 뭣하는 것인가?]
호비는 큰 소리로 외쳤다.
[저는 이 소저의 일을 약간 도와주려고 합니다. 종 둘째형님께
서는 먼저 가세요! 곧바로 따라가겠습니다!]
종조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런 중요한 시기에 한가롭게 남의
일을 간섭하고 있다니 정말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말을 몰
아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호비는 두 짝의 똥통을 떠매고 꽃밭으로 가서 똥바가지로 분뇨
를 꽃 옆에 뿌리려고 하자 그 시골처녀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안돼요. 똥오줌이 너무 진해서 그대로 뿌리면 꽃들이 모두 시
들어 죽고 말 거예요.]
호비는 어리둥절하여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시골처녀가 다시 말했다.
[당신은 다시 분뇨 웅덩이로 되돌아가 반은 웅덩이에 다시 붓고
반만 남겨 다시 물을 채우면 될 거예요.]
호비는 약간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기왕에 돕자고 나섰으니
끝까지 도와주자고 작정을 하고 그녀가 시킨대로 똥을 붓고 물을
채워 꽃에 뿌렸다.
시골 처녀는 당부했다.
[조심하세요. 분뇨가 꽃잎이나 잎사귀에 닿지 않도록 해야 되
요.]
[그러죠.]
대답을 하고 나서 조심스레 똥오줌을 꽃 옆에 뿌리기 시작했다.
꽃송이는 짙은 남색 빛을 띠우고 있었고, 그 형상은 매우 특이
해서 마치 신발 같이 생겼으며 그윽한 향기가 풍겼지만 이름은 알
수가 없었다.
호비는 조심스럽게 한 바가지씩 똥거름을 퍼서 두 통 모두 다
뿌릴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시골처녀가 다시 명령를 했다.
[음, 다시 가서 두 통만 더 짊어지고 오세요.]
호비는 몸을 일으켜 세우고 약간 성이 난 표정으로 입을 열었
다.
[내 친구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소이다. 내가 약왕장에서 돌아
올 때 다시 당신의 일을 거들어 주면 어떻겠소?]
[당신은 아무래도 여기서 꽃에다 거름을 주는 것이 좋을 거예
요. 난 당신이 사람됨이 괜찮아 보여서 똥을 퍼달라고 한 거예
요.]
호비는 그녀의 말이 갈수록 아리송하여 어차피 지체되었으니 굳
이 시각을 다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재빨리 다시 똥오줌을 두
통 짊어지고 와서 꽃밭의 남색꽃(남화:藍花)에 모두 뿌려 주었다.
이때 시각은 이미 해질 무렵이 되어 저녁 노을이 온 대지 위를
빨갛게 수놓고 있었다. 그 빛에 반사된 꽃밭의 남화들은 휘황찬란
한 빛을 띠어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호비는 참을 수없어 찬사를 했다.
[이 꽃들은 정말 보기가 좋구려.]
그는 두 지게의 똥오줌을 뿌려주어서 그런지 이 꽃들에 약간의
정을 느끼고 있었다. 때문에 찬사의 말투에는 매우 진실된 빛을
띠고 있었다.
그 시골처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종조문이 말을 타고 되돌
아오며 큰소리로 외쳤다.
[형제! 지금이 어느 땐데 아직도 오지 않고 뭐하고 있는가?]
호비는 재빨리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지금 갑니다. 가요!]
그러면서 그는 고개를 돌려 시골처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는 부탁한다는 빛이 서려있었다.
그 시골처녀는 안색을 굳히더니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나에게 길을 가르쳐달라는 뜻에서 꽃에 거름을 준 것이
군요. 그렇죠?]
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정말 당신이 길을 가르쳐 주기를 바랬지만 당신의 일을
거들어 준 것은 순전히 당신이 약해보였기 때문에 불쌍히 여겨 도
와준 것이다. 지금 내가 그녀에게 도움을 청한다면 일부러 조그만
은혜를 베풀고 보답을 바라는 셈이 되지 않겠는가?)
홀연 그는 며칠 전 철갈자와 소축융을 잡아 원자의에게 넘길 때
그녀가 하던 말이 생각났다.
(이것은 시정잡배들이 은혜를 베푸는 것이고, 가장 나쁜 녀석들
만 그러는 거예요!)
달콤한 감정을 속으로 느끼며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이 꽃들은 정말 보기가 좋군요.]
그리고 그는 버드나무 밑으로 가서 고삐를 풀고 끌고나와 말에
올라탔다. 그러자 그 시골처녀가 외쳤다.
[잠깐!]
호비는 고개를 돌리며 그녀가 또 무슨 잔소리를 하려나 싶어 귀
찮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 시골 처녀는 남색꽃 두 송이를 뽑더니 그에게 내밀며 말했
다.
[이 꽃이 아릅답다고 하니 당신에게 두 송이를 선물할께요.]
호비는 손을 뻗어 받아들고 말했다.
[정말 고맙소이다.]
그리고는 품속으로 집어넣었다. 그 시골처녀는 다시 물었다.
[저 사람의 성은 종씨인데 당신은 성은 무엇인가요?]
[나의 성은 호가이외다.]
시골처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네들이 약왕장으로 가려면 아무래도 동북쪽으로 가는 것이
좋을 거예요.]
종조문은 원래 서북쪽으로 가고 있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호비
가 오지 않자 조급한 마음에 다시 돌아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 시
골처녀가 그러한 말을 하자 귀찮아 하던 마음이 즉시 가셔져 나직
이 입을 열었다.
[소형제, 자네는 재주가 용하군! 덕분에 이 형은 헛걸음을 하지
않게 되었구려.]
호비는 오히려 의혹에 사로잡혔다.
(약왕장이 동북방에 있다면 딱 부러지게 가르쳐주면 그만이지,
어째서 굳이 아무래도 동북쪽으로 가는 것이 좋을 거라는 말을 할
까?)
그러나 그는 다시 시골처녀에게 물어보기가 싫어서 즉시 말을
몰고 동북방으로 향했다. 두 사람이 한동안 급히 달려서 팔 구 마
장을 달려가니 커다란 호수가 나타났다. 길이라고는 서쪽으로 통
하는 작은 길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그러자 종조문은 욕을 퍼부
으며 말했다.
[그 계집애는 정말 고약하군. 길을 가르쳐 주기 싫으면 그만둘
것이지 어째서 우리에게 골탕을 먹인단 말인가. 돌아갈때 단단히
혼을 내줘야 겠군.]
호비 역시 이상하게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녀에게 잘
못한 일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자기를 우롱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종 둘째형, 그 시골처녀는 분명히 약왕장과 무슨 관련이 있을
겁니다.]
[음, 자네는 어떤 단서라도 찾았나?]
호비는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녀의 두 눈은 형형한 빛이 났고, 말하는 태도로 보아서 세상
물정을 전혀 모르는 시골 처녀같지는 않았습니다.]
종조문은 놀라서 말했다.
[그렇군. 그녀가 자네에게 준 꽃을 빨리 내버리도록 하게.]
그는 품속에서 그 남화를 꺼내서 보니 빛깔이 간드러면서도 화
사해서 그대로 버리기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말했다.
[이까짓 꽃 두 송이가 대수로울 것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그는 여전히 두 송이의 남화를 품속에 넣고 말을 서쪽
으로 몰았다.
종조문은 뒤에서 부르짖었다.
[여보게, 역시 조심하는 것이 좋을 것이네.]
어스름 빛이 온누리를 차츰차츰 뒤덮고 있었고, 떼를 지어 둥지
를 찾는 까마귀들이 그들의 머리 위를 날아 지나가곤 했다. 별안
간 오른쪽에서 두 사람이 허리를 구부리고 호수가에서 물을 마시
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호비는 말고삐를 잡아당기고는 그들에게 물어보고자 했을 때 이
두 사람은 시종 움직이지 않는 지라 속으로 이상한 생각이 들어
말에서 내려서 큰소리로 불렀다.
[수고가 많소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여전히 꼼짝하지 않았다.
종조문이 손을 뻗쳐 한 사람의 어깨를 잡아당기자 그 사람은 뒤
로 미끄러졌는데 그의 두 눈은 뒤집혀져 흰자위만 보이고 있었으
며 얼굴에는 검은 점이 가득 솟아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근육이 일
그러져 있어서 죽은지 오래된 것 같았다. 다시 다른 사람도 마찬
가지였다. 종조문은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중독되어 죽은 것이네.]
호비는 고개를 끄덕이고 두 명의 시체에 모두 다 무기가 있는
것을 보고 말했다.
[독수약왕의 짓일까요?]
종조문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기이한 독공(毒功)
두 사람은 다시 말을 타고 앞으로 나아갔다. 가면 갈수록 길가
에는 초목이 점점 드물어졌으며 나중에는 아예 풀 한 포기조차 보
이지 않았다.
호비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말고삐를 잡아 당기며 입을 열었다.
[종 둘째형, 여기 좀 보세요. 정말 이상합니다.]
종조문도 역시 이상하다고 느끼고 있는지 그 말을 받았다.
[만약 누가 풀이나 나무를 베어갔다 하더라도 풀뿌리 같은 흔적
이 있을텐데......]
그는 잠시 생각해 보더니 나직이 말했다.
[약왕장은 틀림없이 이 부근에 있을 것이네. 아마 그가 흙에 극
독을 뿌렸기 때문에 풀 한포기 나지 않는 것일게야.]
호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보따리에서 베를 꺼내 몇 조각으로 찢
어 종조문과 자기가 타고온 말의 입을 싸댔다. 종조문은 말이 독
풀을 먹고 해를 입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조치임을 깨닫고 그
의 치밀한 생각에 감탄해 마지 않았다.
얼마 가지 않아 멀리 집 한 채가 보였다. 깊은 산속에 덩그라니
있는 것도 이상했지만,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집의 모양은 더욱
이상야릇했다. 마치 커다란 무덤처럼 문도 없고 창문도 없었으며,
검은 빛깔을 띤 채 몹시 음산한 느낌을 주었다. 순간 두 사람은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집의 모양으로 보아 약왕장이 틀림없을 것이다.)
집에서 몇 장쯤 떨어진 곳에는 키가 작은 나무들이 집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나뭇잎은 마치 가을의 단풍처럼 빨간 빛깔를 띠
고 있어 보기만 해도 사람을 으시시하게 만들었다.
종조문은 한평생 대강남북 십팔만 리를 떠돌아다니며 흉악한일,
괴이한 일을 수도 없이 겪어 온 사람이었다. 더우기 그들삼형제
자신들이 상가집 상주처럼 옷차림을 하고 다녔기 때문에 사람들을
두렵게 만들었지만 지금 이러한 광경을 보게 되자, 거꾸로 종조문
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나직이 말했다.
[어떻게 하지?]
[상황에 따라서 임기응변 합시다.]
그들은 말을 몰아 앞으로 나아갔다. 키 작은 나무들이 서 있는
곳에서 수 장쯤 떨어진 지점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고삐를 잡고
종조문은 낭랑한 소리로 말했다.
[악북의 종조문과 요동의 후배인 호비가 약왕 선배님에게 문안
드리러 왔습니다.]
이 말은 한 자 한 자 모두 단전의 기를 모아 뱉어낸 것이라 우
렁차지는 않았지만 십 장 밖까지 들릴 수가 있었다. 물론 집안 사
람들은 똑똑히 들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호비가 다시 외쳤
으나 무덤같은 집안에서는 여전히 응대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마치 사람이 살지 않는 것 같았다. 호비는 더욱더 큰 소리로 말했
다.
[금면불 묘대협이 독에 중독되어 눈에 상처를 입었는데 독약을
사용한 간악한 자가 선배님에게서 훔쳐온 것이라 하더군요. 삼가
청하오니 선배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시어 해약을 주시기 바랍니
다.]
그러나 어떤 말을 하던 간에 둥근 집안에서는 시종 조용하니 아
무런 기척도 들려오지 않았다.
한동안 시간이 흐르자 날은 더욱 어두워져 갔다.
호비는 나직이 물었다.
[종 둘째형,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종조문은 힘주어 말했다.
[어찌됐든 간에 묘대협의 두 눈이 먼 것을 본 이상 우리가 어떻
게 맨손으로 돌아갈 수 있겠는가?]
호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소이다. 설사 용담호혈(龍潭虎穴)이라 하더라도 한번 뛰어
들어가 봐야죠.]
두 사람은 힘으로 밀어붙이자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비록 독수
약왕이 독을 잘 쓴다고 하지만 무공마저 뛰어나다고는 볼 수 없을
터이니 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해약을 손에 넣어야겠다고 생각했
다.
이윽고 두 사람은 말을 묶어놓고 키가 작은 나무쪽으로 걸어 갔
다. 그러고 보니 그 나무에는 날카롭게 가시가 돋혀 있었으며, 독
기를 띠고 있는 듯한 잎들은 매우 조밀하여 그 사이를 뚫고 지나
갈 수가 없었다. 종조문은 몸을 훌쩍 날리더니 나무들위로 날아
지나가려고 했다.
그가 몸을 허공에 날리는 순간 갑자기 짙은 향기가 코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대뜸
현기증이 일어 나무더미 속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그 광경을 본 호비는 몹시 놀라며 뒤따라 몸을 솟구쳤다. 그가
나무숲 위를 지나칠 때 역시 이상한 향기가 코를 진동하면서 구역
질이 나고 가슴이 답답해 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땅에 내려서자
마자 재빨리 손을 뻗쳐 종조문을 부축해서 일으켰다.
코에 손을 갖다대보니 숨은 여전히 쉬고 있었다. 하지만 두 눈
은 꼭 감은 채 손가락과 얼굴이 얼음처럼 차디찼다.
순간 호비는 앞 일이 막막했다.
(묘대협의 해약도 구하지 못했는데 종 둘째 형님마저 중독되고
말았으니 정말 낭패로구나! 필시 나 자신도 이미 독기가 침습하였
지만 아직 발작하지 않은 것 뿐이리라!)
즉시 호비는 몸을 낮추어 곧장 둥근 집 앞쪽으로 달려가며 부르
짖었다.
[약왕선배님, 이 후배는 맨손으로 찾아뵈러 왔습니다. 정말 아
무런 악의도 없습니다. 지금 만나주시지 않는다면 이 후배는 부득
이 무례한 행동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호비는 그 말을 하고 난 이후 그 둥근 집의 담장을 훑어보았다.
지붕부터 담밑까지 온통 검은 색으로 되어 있는 것이 목조건물이
아닌듯 했다. 그러나 그는 감히 손으로 만져볼 수가 없었다. 더구
나 주위는 깨끗하게 치장이 되어 있어 조그마한 돌멩이 하나 찾아
볼 수 없었다. 호비는 품안에서 은덩이를 하나 꺼내 벽을 두드려
보았다. 과연 쩡쩡쩡! 하는 금속소리가 울려 퍼졌다.
호비는 은덩이를 다시 품안으로 집어 넣으려고 고개를 숙이는
순간, 갑자기 담담한 향기가 풍기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원래
어질어질하던 머리가 그 향기를 맡자 즉시 맑게 개인 하늘처럼 개
운해지는 것을 느꼈다. 허리를 약간 더 구부리자 향기는 더욱 짙
어졌다. 이 향기는 바로 시골처녀가 준 남화에서 발출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호비는 속으로 움직이는 바가 있었다.
(필시 이 향기는 독을 해독시키는 작용이 있을 것이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둥근 집 주위를 한 바퀴 돌았지만 문과 창
문은 물론 조그만 구멍이나 틈 하나도 발견할 수 없었다. 호비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이 집에는 정말 사람이 살고 있지 않는 것일까? 바람이 통할
곳이 전혀 없으니 숨이 막혀 사람이 살 수 없을 것 같구나.)
더구나 그의 수중에는 무기를 지니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온통
무쇠로 주조된 둥근 집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잠시 생각하던
호비는 품속에서 남화를 꺼내 종조문의 코밑에 갖다댔다. 그러자
재채기를 몇 번 하더니 종조문은 천천히 정신을 차렸다.
호비는 몹시 기뻐하며 생각했다.
(그 소저가 이 독을 해독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면 차라리
돌아가서 그녀에게 가르침 받는 것이 낫겠구나.)
이윽고 호비는 남화 한 송이를 종조문의 옷깃에 꽂아주고, 자신
은 손에 꽃을 들고 종조문을 부축하면서 나지막한 나무를 뛰어넘
었다.
그의 두 발이 땅에 닿는 순간 갑자기 집안에서 누군가 큰 소리
로 '어!' 하고 놀라는 소리를 외쳤다.
그 소리는 무쇠로 된 벽을 사이에 두고 들려왔지만 매우 놀라고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호비는 뒤로 돌아다보며 큰소리로 외쳤다.
[약왕 선배님, 한번 만나주시겠소이까?]
그러나 집안에서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계속해
서 두 번을 더 외쳐 보았지만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그때, 갑자기 쿵! 털썩! 하는 소리가 연속해서 일면서 무거운
물건이 바닥에 떨어졌다. 고개를 돌리고 바라보니 자기들이 타고
왔던 두 필의 말이 동시에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재빨리 달려가 살펴보니 말은 이미 두 눈이 뒤집혀 있었고, 입
에는 검은 거품을 내뿜고 있었다. 이미 중독되어 숨이 끓어진 상
태였으나 상흔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러한 모습을 보자 두 사람은 더이상 이곳에서 머뭇거릴 용기
가 나지 않았다. 그들은 상의를 하여 그 시골 처녀에게 다시 돌아
가 가르침을 받기로 결정을 내렸다. 지체없이 그들은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서 달려갔다.
종조문은 중독이 되어 다리에 힘이 없는지 조금만 걸어도 휴식
을 취해야만 했다. 이 경 무렵이 되서야 겨우 시골 처녀의 초가집
에 당도할 수 있었다. 캄캄한 밤인데도 화원의 남화 향기는 매우
그윽하였다. 종조문과 호비 두 사람은 그 냄새를 맡자 피로가 가
시면서 기분이 상쾌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바로 이때 초가집의 창문에 갑자기 불빛이 새어 나오며 삐그덕!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 시골처녀가 밖으로 걸어나오며
신비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워낙 시골이라서 별로 대접할 것은 없지
만 간단한 식사와 차를 손님들에게 올리겠습니다.]
호비는 얼른 포권을 하며 말했다.
[밤늦게 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그 시골처녀는 미미하게 웃어보이더니 문옆으로 비켜서서 그들
두 사람을 응대했다.
초가집 안에는 나무로 만든 탁자와 걸상 등이 놓여 있었다. 가
구는 다른 농가와 별로 차이가 없었지만 지나칠 정도로 깨끗하여
티끌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방금 전에 보고 온 약왕의 집
처럼 지나치게 깨끗하여 오히려 사람으로 하여금 불안하도록 만들
었다.
시골 처녀는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종 나으리, 호 나으리, 앉으세요.]
그리고는 살며시 일어나 부엌으로 가더니 젓가락과 그릇을 가져
왔으며 이어 반찬과 국,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쌀밥을 들고 나왔
다. 반찬은 두부부침, 선순초두(鮮筆炒豆:죽순을 콩기름으로 볶은
것)와 초고자백채(草 煮白菜:버섯에 배추를 데친 것)였으며, 국은
시래기와 비지로 만든 것이었다. 소찬이기는 하나 구수한 향기가
코에 스며들었다.
두 사람은 한나절이나 달려왔기 때문에 배가 몹시 고픈 상태였
다. 호비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는 밥그릇을 들고 젓가락으로 먹기 시작했다.
순간 종조문은 속으로 의심이 생겼다.
(이 밥과 찬을 그녀가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볼 때 우리
들이 반드시 돌아오리라는 것을 짐작했던 것이 틀림없다. 차라리
굶어 죽을지언정 이 밥은 절대로 먹어서는 안되겠구나.)
시골처녀가 부엌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종조문은 호비에게 눈
짓을 하며 나직이 말했다.
[형제, 내가 자네에게 약왕장 삼십 리 안에서는 음식을 절 대로
먹어서는 안된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자네는 그 말을 잊었는가?]
그러나 호비의 생각은 달랐다.
(만약 저 소저가 나에게 앙심을 품고 있다면 나에게 꽃을 선물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비록 사람을 경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
지만 이 밥을 먹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녀의 반감을 사게 될 것이
다.)
호비가 대답을 하려는 순간 시골처녀가 부엌에서 나무 쟁반을
하나 들고 나왔다. 그 쟁반 위에는 밥이 가득 담겨 있었다.
호비는 몸을 벌떡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우리에게 이처럼 후한 대접을 해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소저
의 부모님께 인사를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시골 처녀는 담담히 말했다.
[저희 아버지와 어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이곳에는 저 혼자 밖
에 살지 않는 답니다.]
호비는 아! 하고 탄성을 지르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젓
가락을 들고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반찬이 원래 맛이 있기도
했지만 호비는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반찬 솜씨를 계속 칭찬하
며 듬뿍 듬뿍 먹었다.
이때 종조문은 나름대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네가 나의 충고를 듣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두 사람이 함께 술수에 말려들 수는 없는 일이다.)
종조문이 시골 처녀에게 말했다.
[나는 조금전 독에 중독되어서인지 아직도 정신이 몽롱하고 속
이 거북하니 밥을 먹고 싶지 않구려.]
그러자 시골 처녀는 차를 한 잔 따라주며 말했다.
[그러시다면 차라도 한 잔 드십시오.]
종조문은 푸르고 아름다운 차의 빛깔을 보자 몹시 마시고 싶었
다. 그러나 여전히 고맙다는 말만 했을 뿐 탁자에 올려놓고 마시
지는 않았다.
그 시골 처녀는 종조문의 태도에 전혀 개의치 않고 호비가 밥
한 그릇을 비우고 다시 한 그릇을 먹는 것을 보고 눈가에 엷은 미
소를 띠었다. 호비는 그녀의 그와 같은 표정을 보았지만, 어차피
먹기 시작했으니 적게 먹으나 많이 먹으나 중독되는 것은 마찬가
지라는 생각을 하고 아예 허리띠까지 풀어놓고 밥 네 그릇과 반찬
세 접시, 국 한 그릇을 모두 비워버렸다. 잠시 후 시골 처녀가 빈
그릇들을 치우려 하자 호비는 얼른 쟁반을 빼앗아 식기를 올려놓
고 부엌으로 가지고 가서 설겆이까지 한 다음 깨끗이 닦아서 찬장
안으로 집어넣었다.
이윽고 시골처녀가 집안 청소를 할 때 두 사람도 그녀를 도와
청소를 했다. 호비는 물독에 물이 조금밖에 남아있지 않은 것을
보고 물통을 들고 개울가로 가서 두 통의 물을 길어 물독을 가득
채웠다.
물독을 채우고 나서 대청으로 돌아와 보니 종조문은 이미 탁자
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시골 처녀는 넌즈시 입을 열었다.
[시골 살림이라 손님을 대접할 만한 방이 따로 없군요. 대접이
아닌 줄 알지만 부득이 의자에서 하루 밤을 지내셔야 될 것 같습
니다.]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이윽고 그녀는 내실로 들어가며 가볍게 문을 닫았다. 그러나 문
을 잠그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호비는 여자 혼자 살고 있으면
서도 외간 남자 두 명이 머무르는 것을 전혀 두려워 하지않는 것
을 보고 배짱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비는 종조문의 어깨
를 살짝 밀며 나직이 말했다.
[종 둘째형님, 걸상에 누워서 편하게 주무시지요.]
그러나 뜻밖에도 살짝 밀어낸 종조문은 그대로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나뒹구는 것이 아닌가? 호비는 깜짝 놀라 재빨리 그
의 허리를 안고 부축해 일으켰다. 그의 이마를 만져보니 불덩어리
같았다.
[종 둘째형님, 왜 그러십니까?]
등잔불을 들고 자세히 살펴보자 그의 얼굴은 마치 술에 취한 것
처럼 몹시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고 입과 코에서는 독한 술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호비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는 차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는데 어째서 눈 깜짝할 사이에
이토록 취해 쓰러진 것일까?)
종조문은 골아떨어진 상태에서 중얼중얼댔다.
[나는 취하지 않았어. 취하지 않았다니깐. 자, 자! 세 사발만
더 마시자구.]
이어 그는 상대에게 술을 권하기 위해 술잔을 내밀 때처럼 '사
계발재(四季發財)'니, '오경괴수(五經魁首)'니 하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호비는 종조문이 시골처녀의 수작에 넘어간 것이 분명하다고 생
각했다. 그러나 종조문은 아무 것도 입에 대지 않았는데 시골 처
녀가 어떤 기묘한 방법으로 그를 이토록 취하도록 만들었을까 하
고 생각하며 놀람과 의아함에 휩싸였다. 또한 그 처녀에게 치료해
달라고 부탁해야 할 것인지, 자연히 깨어날 때까지 기다릴 것인지
망설였지만 곧 생각을 바꾸었다.
(이건 중독된 것이다. 절대로 술에 취한 것이 아니니 저절로 깨
어난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바로 이때, 갑자기 멀리서 야수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깊은 밤에 들리는 그 소리는 웬지 모르게 섬칫한 기분이 들게 했
다. 그 소리는 늑대들이 울부짖는 것 같았으나, 동정호반은 대체
로 평원이라 설사 한 두 마리의 늑대가 있다 하더라도 이토록 떼
를 지어 올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소리가 점차 가깝게 들리자 호비는 벌떡 일어나 귀를 기울였
다. 늑대들의 울음소리 가운데에는 산양의 애처로운 울음소리도
섞여 있었다. 마치 늑대들이 떼를 지어 산양을 잡아 먹으려고 쫓
고 있는 것 같았다.
호비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종조문을 살펴보려는 순간 삐그덕!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방문이 열렸다.
시골처녀가 손에 촛대를 들고 걸어나왔다. 그녀는 약간 당황한
빛을 띠우며 입을 열었다.
[저건 늑대가 우는 소리이니 걱정하지 마세요.]
호비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그 처녀를 불렀다.
[저......]
그러면서 손가락으로 종조문을 가리켰다.
그러나 말발굽 소리와 더불어 양의 울음소리와 늑대의 울음소리
가 함께 뒤섞여 곧장 초가집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호비는 안색이 변하며 생각했다.
(만약 적이 기습해 온다면 이 초가집은 한 차례의 공격도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더군다나 종조문이 인사불성이 된 상태이고 옆
에 있는 이 시골처녀도 적인지 친구인지 분명하지 않으니 이를 어
떻게 하면 좋을까?)
그와 같이 생각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한 필의 말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호비는 수중에 지닌 무기가 없었기 때문에 허리를
구부려 종조문을 안고 부엌으로 달려갔다. 부엌 칼이라도 찾으려
했으나 어두워서 찾을 수가 없었다. 순간 그 시골처녀가 큰 소리
로 부르짖는 소리가 들렸다.
[맹가(孟家)네 사람이냐? 밤도 깊었는데 여기에 무엇하러 왔는
가?]
호비는 달갑지 않은 투로 그녀가 말하는 것을 듣고 그들과는 한
패거리가 아니로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호비는 종조문을 안은 채 잽싸게 후원으로 달려가 땅바닥에서
돌멩이를 한 줌 움켜쥐고 몸을 날려 버드나무로 올라갔다. 그리고
는 종조문을 커다란 나무가지 사이에 걸쳐놓고 시선을 집중하여
소리가 나는 쪽을 쳐다보았다.
별빛 아래 잿빛 옷을 걸친 한 사내가 말을 타고 어느덧 초가집
앞에 당도했다. 말 뒤에는 십여 마리의 굶주린 늑대가 흙먼지를
날리고 큰 소리로 울어대며 따라왔다. 사정을 미루어 볼때 그 사
람은 도중에 늑대의 습격을 받아 말을 몰아 도망쳐 온 것 같았지
만 자세히 보니 말 뒤에 산양 한 마리를 끌고 오는 것이 아닌가?
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사람은 십중팔구 사냥꾼인데 산양을 미끼로 해서 늑대를 잡
으려는 모양이구나.)
그런데 그 사람은 말을 몰아 화원으로 들어가더니 곧장 동쪽끝
까지 말을 내달았다. 그리고 나서 다시 말머리를 돌리더니 서쪽으
로 말을 몰아 달려갔다. 그러자 늑대들은 계속 그를 뒤쫓아가며
울부짖고 있었다. 이렇게 왔다갔다 하자 화원의 꽃들은 순식간에
엉망이 되고 말았다.
그 사내가 타고 온 말은 매우 건강했고 또한 기마술이 정묘해서
몇 번 오락가락 말을 달렸으나 배고픈 늑대들은 시종 그 산양을
덮칠 수가 없었다.
순간 호비는 깨닫는 바가 있었다.
(아, 저 녀석은 남화를 짓밟아 망가뜨리려고 하고 있구나! 내가
어찌 수수방관할 수 있겠는가?)
즉시 그는 두 발로 살짝 나뭇가지를 딛고 초가 지붕 위로 뛰어
올랐다. 순간 그 사람은 어이쿠! 하고 비명을 내지르더니 북쪽으
로 말을 몰아 질풍같이 달려갔다. 하지만 양은 화원에 남겨 놓았
기 때문에 늑대들은 대뜸 산양을 덮쳐들어 서로 물어뜯는 바람에
화원을 더욱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말았다.
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사람의 심보는 정말 악랄하구나!)
순간 그는 두 조각의 돌을 던졌다. 그러자 퍽퍽!하는 소리가 나
면서 돌멩이는 정확히 두 마리의 고약한 늑대의 정수리에 적중되
어 골수가 터져나오며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호비는 이어 다
시 돌멩이를 두 개 던졌다. 이번에는 돌멩이도 작을 뿐더러 빗나
가고 말았다. 하나는 늑대의 배에 맞았고, 다른 하나는 늑대의 등
에 맞았다. 두 마리의 늑대는 몹시 크게 울부짖었다. 뭇 늑대들은
잇따라 쓴 맛을 보게 되자 일순 당황했다. 그러나 지붕 위에 사람
이 있는 것을 보고 머리를 쳐들고 허연 이빨을 드러내며 앞발로
땅을 긁어파는데 그 기세가 매우 흉흉했다.
호비는 한떼의 늑대들의 흉악한 모습을 대하자 겁이 덜컹났다.
(나는 지금 맨손이니 십여 마리나 되는 늑대들의 이빨과 예리한
발톱을 상대로 싸우기에는 쉽지가 않겠구나.)
그는 잠시 궁리를 한 끝에 가장 크고 힘세게 보이는 늑대를 향
해 돌멩이를 비스듬히 아래로 내던졌다. 그 돌멩이는 정확히 그
늑대의 목을 적중시켰다. 그 늑대는 땅바닥에 나뒹굴더니 고통을
참을 수 없는 듯 잽싸게 도망을 치기 시작했고, 다른 한 마리 커
다란 늑대는 하얀 양을 입에 문 채 덩달아 도망을 쳤다. 그놈들이
우두머리인 듯 나머지 늑대들도 그 뒤를 따랐으며 삽시간에 울부
짖는 소리가 멀어져 갔다. 그러나 화원의 남화는 짓밟혀 그야말로
쑥밭이 되고 말았다.
호비는 지붕 위에서 뛰어내리며 연신 아깝다고 혀를 찼다. 어린
처녀가 호미질을 하고 잡초를 뽑는 등 온갖 고생을 무릅쓰고 이
남화를 보기좋게 가꾸어 놓았는데 삽시간에 엉망이 되고 말았으니
틀림없이 격노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시골처녀는 남화가 망가진데 대해서는 한 마디도 들
먹이지 않고 그저 방긋방긋 웃으면서 사의를 표하는 것이었다.
[호 나으리께서 도움을 주신데 대해 정말 감사해요.]
호비는 정중히 말했다.
[부끄럽군요. 모두 제가 미리 눈치를 채지 못하고 손을 너무 늦
게 쓴 탓이외다. 진작 그 악한을 화원 밖에서 차단했다면 이 꽃들
은 모두 무사했을 겁니다.]
시골 처녀는 미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남화는 설사 고약한 늑대들에게 짓밟혀 엉망이 되지 않는다 하
더라도 며칠이 지나면 저절로 시들게 돼요. 다만 좀 더 시간적으
로 빨랐을 뿐이니 별로 대수로운 일은 아니예요.]
호비는 어리둥절하며 생각했다.
(이 소저는 말솜씨가 비범하고 말속에 현기(玄機)가 담겨있구
나.)
그는 넌즈시 입을 열었다.
[귀댁에서 폐를 끼치면서도 아직 소저의 존성을 가르침 받지 못
했군요.]
그 시골 처녀는 잠시 생각해보더니 말했다.
[저의 성은 정(程)이예요. 그러나 다른 사람 앞에서는 저의 성
씨를 들먹이지 마세요.]
이 몇 마디의 말은 매우 다정하여 마치 호비를 자기편 사람으로
간주하는 듯 했다. 호비는 내심 기뻐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당신을 어떻게 불러야 하지요?]
시골 처녀는 담담히 말했다.
[당신은 매우 좋은 사람인 것 같으니 아예 이름까지도 말씀
을 드리지요. 저는 정영소(程靈素)라고 하는데, 영추(靈樞)의
영(靈)에 소문(素問)의 소(素)자를 쓰지요.]
호비는 영추와 소문이라는 것이 바로 중국의 의학에 관한 양대
경전(兩大經典)인 것을 모르고, 단지 시골아낙의 이름치고는 어울
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녀가 흔히 보는 시골의 소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별로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당신을 영소저라고 부르지요. 다른 사람이 들을
때에 내가 당신을 님소저라고 부르는 것처럼 들릴 거외다.]
정영소는 방긋이 웃더니 말했다.
[당신은 말을 참 재미있게 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군요.]
호비는 그녀의 모습에 갑자기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그녀는 결코 아름다운 얼굴이 아니었지만 말을 하면서 웃
는 모습은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그가 종조문이 난데없이 술에 취하게 된 일에 대해서 물어보려
는 찰나 정영소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당신의 종 둘째형이 술에 취한 것은 별일이 아니예요. 날이 밝
을 무렵이면 저절로 깨어날 거예요. 나는 지금 사람을 만나러 가
는데 함께 가시지 않을래요?]
호비는 이 소저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말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이 한밤중에 사람을 만나러 간다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속에는 필시 어떤 깊은 사연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선뜻 응낙했다.
[물론 가야죠.]
정영소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같이 가 주신다면 나와 반드시 세 가지 약속을 해야 합니다.
첫째, 당신은 오늘 밤에 절대로 다른 사람과 말을 해서는 안됩니
다.]
[좋소, 벙어리처럼 행동하리다.]
정영소는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게까지는 할 필요 없어요. 나에게 말하는 것은 물론 가능
해요. 둘째, 남에게 무력을 쓸 수 없어요. 암기를 던진다든지 혈
도를 짚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리고 세번째, 나에게서 세 걸
음 밖으로 떠나지 마셔야 해요.]
호비는 고개를 끄덕여 응낙하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는 나를 데리고 독수약왕을 만나려고 하는구나. 그녀가 나
에게 곁에서 세 걸음 이상 떨어지지 말라는 것은 내가 중독이 될
까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일게다.)
호비는 그 말을 듣자 기운이 나서 자신있게 말했다.
[지금 이대로 가는 겁니까?]
[아니요. 가져갈 물건들이 있어요.]
그리고 그녀는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그 틈을 타서 호비는 나
무가지 위에서 종조문을 떠매고 내려와 탁자 위에 엎드려 놓자 그
는 그대로 쿨쿨 자고 있었고, 여전히 심한 술 냄새를 풍기고 있었
다.
차 한잔 마실 시간이 지나서야 정영소는 두 개의 광주리를 짊어
지고 나왔다. 광주리 위에 뚜껑을 덮어 놓아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수가 없었으나 보기에 퍽 무거운 것 같았다.
호비가 나서며 말했다.
[내가 짊어지고 가리다.]
그러면서 기다란 막대기로 된 멜대를 받아들고 어깨에 얹었다.
거의 백 이삼십 근은 되는 것 같았다. 광주리에 담겨있는 것이 무
엇인지는 모르나 하나는 굉장히 무거웠고, 하나는 매우 가벼워 균
형이 맞지 않아 앞뒤로 걸어메기가 매우 불편했다.
종조문은 탁자 위에 엎드린 채로 여전히 자고 있었다.
독수약왕의 제자들
두 사람이 초가집 밖으로 나서자 정영소는 문을 닫고 앞장서서
길을 안내했다. 호비가 넌즈시 입을 열었다.
[영소저, 한가지 물어봐도 괜찮겠습니까?]
[말씀해보세요. 하지만 내가 답변해 드릴 수 있을런지 모르겠군
요.]
호비는 힘주어 말했다.
[만약에 당신이 대답을 할 수 없다면 이 세상에는 답변할 사람
이 없을 거외다. 나의 종 둘째 형님은 물 한방울 입에 대지 않았
는데 어찌 그토록 취해 버렸나요?]
정영소는 나직이 웃으며 말했다.
[바로 물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았기 때문에 피해를 본 거예
요.]
호비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건 뭐가 뭔지 영 모르겠군요. 종 둘째 형님은 강호의 노련한
선배이고, 악북의 귀견수 종씨 삼웅이라면 무림에서는 명성이 자
자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견식도 얕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인 나
는 멀쩡하고, 뜻밖에도 매사에 조심을 하던 형님이 오히려......]
거기까지 이야기하더니 입을 다물고 정영소를 바라보았다. 그녀
는 즉시 그 말을 받았다.
[말씀해도 상관없어요. 그는 매사 조심을 했는데도 오히려 나의
술수에 넘어갔다는 말씀 아니겠어요? 하지만 이곳에서 매사를 조
심한다고 해서 소용이 있을 것 같아요? 오직 당신처럼 행동해야만
이 무사태평할 수 있는 거예요.]
[내가 어떻게 했다는 겁니까?]
정영소는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똥오줌을 주라면 똥오줌을 주고, 식사를 하라면 식사를
했어요. 그와 같이 말을 잘 듣는데 어찌 당신을 해칠 사람이 있겠
어요?]
호비도 따라 웃으며 말했다.
[원래 사람은 사랑을 받으려면 남의 말을 잘 들어야 하는가 보
구려. 그러나 당신이 사람을 다스리는 방법이 너무 교묘해 난 지
금까지도 뭐가 뭔지 모르겠구려.]
정영소는 기분이 좋은듯 경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좋아요. 그렇다면 한 가지 요령을 알려드리겠어요. 객당에 조
그만 하얀 꽃이 핀 분재가 놓여있는 것을 당신은 보셨겠지요?]
호비는 당시 눈여겨 보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창가의 탁
자 위에 조그만한 화분이 하나 놓여있던 것 같았다. 정영소는 넌
즈시 말했다.
[그 화분에 있는 꽃 이름은 제호향(醍 香)이라고 하는데 그 향
기가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것으로 지극히 무섭지요. 오랫동안 냄
새를 맡게 되면 독한 술을 마신 것과 다를 바가 없어요. 나는 국
과 찻물 속에 모두 해약을 집어넣었어요. 하지만 누가 그 사람한
테 마시지 말라고 했습니까?]
호비는 문득 깨달으며 이 처녀에 대해 경외(敬畏)하는 마음이
일었다.
(예로부터 음식에 독을 쓴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지만 이 처
녀가 독을 쓰는 방법이 더 고명하구나. 오히려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면 중독이 되는 것이니 완전히 역으로 의표를 찌르는 것이구
나.)
정영소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나중에 돌아가서 그에게 해약을 줄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순간 호비는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이 처녀가 이처럼 약물을 쓰는데 정통하니 어쩌면 묘대협의 다
친 눈을 치료할 수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게 된다면 독수
약왕에게 부탁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는 반색을 하며 물었다.
[영소저, 당신은 단장초의 독성을 해소하는 방법을 알고 계시나
요?]
[말하기 어려워요.]
호비는 그녀가 그 한마디 이외에 다시 말을 하지 않자 묘대협을
치료해 달라고 부탁하기가 거북했다.
그녀는 발걸음을 가볍게 사뿐사뿐 앞장서서 걸어갔다. 경신법을
펼치는 것은 아니었지만 잠깐 사이에 예닐곱 마장을 걸어갔다. 방
향을 보니 약왕장쪽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동쪽으로 가고 있었다.
문득 한가지 사실을 떠올리고 입을 열었다.
[당신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또 한 가지 더 있는데...... 조
금전 나와 종 둘째형이 약왕장으로 가려고 했을 때 당신은 아무래
도 동북쪽으로 가는 것이 좋다고 하면서 일부러 우리를 이십리나
더 돌아가도록 만들었는데 그 이유를 나는 아직까지도 이해할 수
가 없구려.]
정영소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진정으로 나에게 묻고 싶은 것은 그 일이 아닐 거예요. 내 짐
작에는 약왕장이 분명히 서북쪽에 있는데 어째서 우리는 동쪽으로
가느냐 하는 것이겠죠?]
호비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눈치를 채버렸으니 한꺼번에 가르침을 받기로 하지요?]
정영소는 아무렇지도 않은듯 말했다.
[우리가 지금 그쪽으로 가지 않는 것은 약왕장으로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예요.]
호비는 정영소에게 또 한번 의표를 찔린 셈이라 자신도 모르게
'아!'하는 소리를 냈다.
정영소가 다시 말했다.
[오늘 낮에 당신보고 꽃에 똥오줌을 주라고 한 것은 첫째, 당신
을 시험하자는 것이었고, 둘째는 당신으로 하여금 약간 시간을 지
체하도록 했던 거예요. 나중에 당신에게 이십여 리를 돌아가도록
만든 것 역시 시간을 소모토록 한 거예요. 그렇게 되면 날이 어두
워진 후에야 약왕장에 이를 수 있는데 이는 약왕장 밖에 심어놓은
혈왜율(血矮栗)은 날이 어두워져야만 독성이 줄어들게 되고, 내가
준 남화는 그때에 이르러 가까스로 그 독성을 제압할 수 있기 때
문이죠.]
호비는 그녀의 말을 듣자 내심 탄복을 금치 못했다. 독을 사용
하고 해약을 쓰는데 이렇게 박식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평범하게 보이는 이 나이 어린 아가씨가 마음쓰는 것이 지극히 깊
어, 보통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따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즉시
동정호반에서 죽은 사람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정영소는 죽은 자의 얼굴에 검은 반점이 있고 얼굴 근육이 일그
러져 있다는 말을 듣더니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 그런 귀편복이라는 독은 치료할 해약이 없어요. 이제 그들
은 아무 것도 가리지 않는군요.]
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귀편복이라는 것이 어떠한 독인지 그녀가 말을 해도 나는 알
수 없을 것이다. 어차피 그녀의 분부를 따르기로 했으니 자꾸 물
어보았자 부질없이 내 자신의 모자람만 더 드러낼 뿐이다.)
이후 호비는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고 묵묵히 그녀의 뒤를 따
라 줄곧 동쪽으로 나아갔다.
대여섯 마장을 나아가자 어둠침침한 숲에 도달했다.
정영소는 나직이 당부했다.
[다 왔어요. 아직 그들이 오지 않았으니 우리는 이 숲 속에서
기다리기로 해요. 우선 대바구니를 저 나무 밑에 내려놓도록 하세
요.]
그러면서 그녀는 커다란 나무를 손가락질 했다.
호비는 시키는대로 무거운 대나무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정영소
는 나무와 팔구 장쯤 떨어진 우거진 풀밭으로 가더니 입을 열었
다.
[대나무 바구니를 들고 이리로 오세요.]
그리고 그녀는 길게 자란 풀숲을 헤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호비는 '누가 오지 않았느냐, 누구를 기다리느냐' 하는 말을 묻
지도 않고 세 걸음 이상 떨어지지 말라는 말을 상기하며 즉시 바
구니를 들고 풀더미 속으로 들어가 그녀가 지시한 자리에 내려놓
은 뒤 그녀의 곁에 앉았다.
고개를 쳐들어 하늘을 바라보니 달은 이미 서쪽으로 기울어 밤
이 반쯤은 지난 것 같았다. 숲 속에서는 벌레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려오고 있었고 간혹 올빼미가 우는 소리도 들렸다.
정영소는 그에게 알약을 하나 꺼내주며 나직이 말했다.
[입에 물고만 계시고 삼키지는 마세요.]
호비는 묻지도 보지도 않고 입 속에 넣었다. 몹시 쓴 약이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조용히 앉아있었다. 약 반시진이 지나는 동안
호비는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오늘 겪은 일들은 실로 이상야릇하
여 평생 한번도 겪어 보지 못했던 기이한 일들만 벌어졌다. 더우
기 이 야밤에 이토록 호젓한 곳에 젊은 처녀와 어깨를 맞대듯 하
고 앉아 있으니 온갖 잡생각이 다 들었다.
이러저러한 생각 중에 문득 원자의가 떠올랐다.
(그녀는 지금쯤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구나. 내 곁에 있는 사람
이 원소저였다면 그녀는 나한테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을까?)
호비는 원자의를 상기하자 자기도 모르게 손을 품안에 넣고 옥
봉황을 만지작거렸다.
이때 갑자기 정영소가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손으로 앞을 가리켰
다. 그녀의 손길을 따라 바라보니 멀리 하나의 등불이 점점 가까
이 다가오고 있었다. 보통 등롱의 불빛은 짙은 붉은 색을 띠워야
당연한 것인데 그 등롱은 이상하게도 발산하는 빛이 파르스름한
녹색이었다.
등롱은 몹시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가 싶더니 얼마되지 않아 그
들 앞 십여 장 되는 곳에 이르었다.
불빛에 비치는 등을 들고 있는 사람의 모습은 놀랍게도 꼽추여
인이었다. 걸을 때 왼발이 높아지고 오른발이 낮아지는 것으로 보
아 오른쪽 다리를 절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등뒤로 바짝 한
사내가 따르고 있었는데 체구는 우람했고, 허리에는 시퍼런 첨도
(尖刀)를 차고 있었다.
호비는 종조문의 말이 생각나서 자기도 모르게 몸을 흠칫했다.
(종 둘째 형은 독수약왕이 백정 모습의 대한이라고 말하는 사람
도 있었고 또한 꼽추에다가 다리를 저는 여인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저 두 사람 가운데 반드시 하나는 약왕이
겠구나.)
호비는 곁눈질로 정영소를 바라보았지만 어둠에 그녀의 안색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수정같이 맑은 눈망울을 한번
도 깜짝이지 않은 채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어 매우 긴장하고 있
는 것 같았다.
순간 호비는 의협심이 속에서 용솟음쳤다.
(저 독수약왕이 만약에 이 처녀를 조금이라도 해치려고 한다면
내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녀를 지켜주리라.)
이윽고 그들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 절름
발이 꼽추여인의 용모는 단정하고 수려한 편이었다. 몸은 불구였
지만 얼굴은 그런대로 미인이라 할 수 있었다. 함께 오는 대한은
온 얼굴이 비계살이 더덕더덕 붙어 있었고 생김새가 흉악했다. 두
사람은 모두 사십 세 정도의 나이였다.
호비는 일신에 지니고 있는 무공이 고강한 만큼 아무리 흉악한
도적 무리들에게 포위공격을 받는다 하더라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
았지만 지금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독을 사용하는
이런 고수들에게는 자신의 무공이 별로 쓸모가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 두 사람은 호비의 앞으로 칠팔 장쯤 다가오더니 갑자기 왼
쪽으로 방향을 꺽어 다시 십여장 걸어가 걸음을 멈추었다.
이윽고 대한이 낭랑하게 외쳤다.
[모용사형(慕容師兄), 우리 부부가 약속대로 찾아왔으니 이제
모습을 드러내도록 하시지요.]
그가 서 있는 곳은 호비와 별로 거리가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
문에 그가 갑자기 큰소리로 말하는 바람에 호비는 깜짝 놀랐다.
그 대한이 다시 두 번 더 소리를 쳤으나 여전히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곳에는 우리 네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는데 묘용사형
이라는 사람이 또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보아하니 저 두 사람은
부부인 것 같구나.)
꼽추 여인이 가느다란 음성으로 나직이 말했다.
[모용사형,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우리 부부는 부득이 무례
한 행동을 범할 수 밖에 없어요.]
호비는 그녀의 말을 듣고 속으로 비웃었다.
(이것이야말로 인과응보로구나. 조금전 내가 약왕장으로 찾아갔
을 때 아무리 불러도 당신들은 아랑곳하지 않더니 지금은 도리어
당신들이 완전히 무시당하고 창피한 꼴을 보이고 있구만.)
얼마 동안 기다려도 아무 응답이 없자 그 여인은 품속에서 한
묶음의 풀을 꺼내 등롱으로 불을 붙였다. 즉시 한가닥 짙은 연기
가 피어올랐다.
얼마되지 않아 숲 속은 하얀 안개와 같은 연기로 뒤덮이게 되었
다. 연기는 미미하게 박달나무의 향기가 나는 것이 별로 싫은 냄
새는 아니었다.
호비는 그녀가 부득이 무례한 행동을 범해야겠다는 말을 듣고
이 연기가 틀림없이 무서운 독연기라는 생각을 했지만 별로 불편
함을 느끼지 않자 곧 그것은 입에 물고 있는 알약 때문일 것이라
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돌려 정영소를 바라보니 그녀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
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호비는 고맙다는 생각이 들어 미미하게 고
개를 끄덕여 보였다.
연기는 점점 더 자욱해졌다. 그러자 갑자기 나무 밑에 있는 호
비가 메고 온 대광주리 속에서 누군가 큰 소리로 재채기를 하는
것이 아닌가?
호비는 깜짝 놀랐다.
(아니, 어떻게 저 대광주리 속에 사람이 들어있는 것일까? 내가
여태까지 이곳으로 떠매고 오면서도 전혀 알아차리지를 못했구나.
그럼 내가 영소저와 하는 말을 모조리 다 들었단 말인가?)
그는 독물이나 의약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지만 오랫
동안 무공을 연마해 온 까닭에 결코 사람을 떠메고 먼 길을 걸어
오면서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
각했다. 혹 죽은 사람이라면 몰라도 절대로 그럴 수는 없다는 생
각이 들었다.
그가 놀라 어리둥절하고 있던 차에 대광주리 안에 있는 사람이
다시 잇따라 재채기를 하더니 덮개를 열어젖히고 밖으로 뛰쳐나왔
다.
그 사람은 유건(儒巾)을 쓰고 있었는데 바로 낮에 언덕에서 약
초를 캐던 노인이었다. 그의 옷차림은 흐트러지고 두건은 삐뚤어
져 있었다. 표정 또한 낭패한 꼴이라 낮에 보았던 점잖은 태도는
반푼 어치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노인은 남녀 두 사람을 보자마자 노기 띤 음성으로 호통을
내질렀다.
[잘 한다! 강사제(姜師弟), 설사매(薛師妹)! 너희들은 손을 쓰
는 것이 점점 더 음독(陰毒)해지는구나!]
두 부부도 그의 몰골을 보더니 전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여인과 함께 온 대한이 냉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허허, 그런 짓을 하고도 도리어 우리의 손 씀씀이가 음독하다
구요? 당신이 대광주리 속에 숨어 있을 줄은 누가 짐작이나 했겠
소. 모용사형......]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그 노인은 냄새를 몇 번 맡더니 안
색이 변하며 급히 품속에서 알약을 꺼내 입안으로 넣었다. 그러자
꼽추 여인은 연기를 뿜어내는 약초 묶음을 발로 밟아끄더니 품안
으로 집어넣으며 입을 열었다.
[대사형, 늦었어요. 이젠 늦었다구요.]
노인은 얼굴이 흑빛이 되어 맥없이 땅바닥에 주저앉더니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좋아, 내가 졌다는 것을 인정하마.]
그러자 대한은 품안에서 청색 자기병을 더듬어 꺼내더니 손에
들고 말했다.
[해약은 바로 여기 있소이다. 당신의 사질(師姪)이 당신의 독수
에 걸렸기 때문에 해약을 서로 바꾸자는 것이지요.]
그 노인은 말했다.
[터무니없는 소리! 자네들이 말하는 것은 그 소철(小鐵)을 말하
는 것인가? 나는 몇 년동안 그를 만난 적이 없는데 무슨 독 수를
썼다는 말인가?]
꼽추 여인은 말했다.
[당신이 우리를 이곳까지 불러낸 것은 단지 그 한마디를 하기
위해서인가요?]
그리고는 고개를 돌리고 대한에게 말했다.
[철산(鐵山), 우리 가요?]
그녀는 몸을 돌려 곧장 떠나려고 했다. 그 대한은 미련이 남아
있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소철이는......]
꼽추여인은 냉소를 하며 말했다.
[흥! 그는 우리들을 뼈에 사무치도록 미워하고 있으니 자기 목
숨을 끊었으면 끊었지 결코 우리 소철을 용서하지는 않을 거예요.
당신은 여태 그것도 모르고 있었어요?]
대한은 그 자리를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는듯 말했다.
[대사형, 몇 년 전의 원한을 아직까지 마음에 남겨둘 필요가 어
디 있습니까? 소제가 한마디 권고하겠는데 해약을 서로 교환하고
지난 날의 원한을 동시에 풀어버리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군
요?]
이 몇 마디는 모두 진심에서 우러나온 소리 같았다. 노인은 물
었다.
[설사매, 소철은 무슨 독에 중독되었는가?]
꼽추 여인은 냉소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대한이 입
을 열었다.
[대사형,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고양이 쥐 생각하듯 하지 마시
구려. 소제는 대사형이 칠심해당(七心海棠)의 재배에 성공한 것을
축하하오이다......]
그 말이 끝나기 전에 노인은 큰소리로 말했다.
[누가 칠심해당 재배를 성공했단 말인가? 설마하니 소철이 칠심
해당에 중독되었다는 말인가? 나는 그런 일이 없네. 그런 일 없
어!]
그는 이 말을 하면서 공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당황하는 기색
을 역력히 드러냈다.
두 부부는 서로 쳐다보더니 속으로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저렇게 진짜처럼 내숭을 떨 수 있단 말인가?)
꼽추 여인이 입을 열었다.
[좋아요, 모용사형.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 합시다. 당신이 여기
서 우리를 만나자고 한 것은 무슨 볼 일이 있는 겁니까?]
노인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그런 일이 없네. 자네가 나를 이곳으로 데려다 놓고 어째
서 도리어 내가 약속했다고 하는가?]
그러더니 부끄럽기도 하고 화가 치밀기도 하는지 갑자기 발로
대광주리를 걷어차서 육칠 마장 밖으로 날려버렸다.
꼽추 여인은 냉랭히 말했다.
[설마하니 이 편지도 당신이 쓴 것이 아니란 말이예요? 사형의
필적을 나는 한평생 보아왔어요.]
그녀는 품속에서 종이를 한 장 꺼내더니 왼손을 쳐들어 날려보
냈다. 그 종이는 곧장 노인에게로 날아갔다. 노인은 손을 뻗쳐 잡
으려 하다가 갑자기 손을 움츠리며 일장을 내뻗었다. 순간 장풍으
로 그 편지를 공중에서 머무르게 한 뒤 곧바로 왼손의 중지를 퉁
기면서 암기를 한 대 쏘아냈다. 그 암기는 길이가 세 치 정도의
투골정(透骨釘)이었다. '팍!' 하는 소리와 함께 종이가 나무에 꽂
혔다.
순간 호비는 내심 섬칫한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들과 상대할 때는 말 한 마디 하거나 숨 한번 쉬는데도
독을 조심해야겠구나. 저 늙은이가 감히 손을 써서 종이를 받지
못하는 것을 보면 자연히 종이 쪽지에 독이 묻어있는 것을 우려하
여 저런 행동을 취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꼽추 여인은 등롱을 높이 쳐들었다. 불빛이 종이 위를 비추자
하얀 백지 위에 두 줄의 커다란 글자가 드러났다.
호비는 비록 먼 곳에 떨어져 있었지만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
종이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있었다.
<강, 설, 두 분은 삼경 이후 흑호림(黑虎林)으로 와주시게. 알
만한 사람이라 이름은 쓰지 않네.>
그 두 줄의 필체는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가늘은 편이었지만 힘
이 있어 보였다. 필체는 그 사람을 닮는다고 노인의 몸매와 은연
중에 서로 닮은 점이 있었다.
노인은 '어!' 하더니 의아한 눈빛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대한이 물었다.
[대사형, 뭐가 잘못 되었소?]
노인은 냉랭히 말했다.
[그 편지는 내가 쓴 것이 아니라네.]
그 말이 떨어지자 두 부부는 서로 눈길을 주고 받았다. 꼽추 여
인은 냉소를 하더니 도저히 노인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
다.
노인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편지의 필적은 정말 내 필적과 너무도 닮았으니 정말 이상하
군.]
그는 왼손으로 아래 턱에 있는 수염을 만지더니 벌컥 화를 내며
말했다.
[자네들이 나를 이 대나무 바구니에 담아 이곳까지 떠매고 온
것은 도대체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꼽추 여인은 동문서답을 했다.
[소철이 칠심해당의 독에 중독되었는데 당신은 치료를 해 주시
겠어요, 못하시겠어요?]
노인은 꼽추 여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는 확신할 수 있는가? 정말 칠심...... 칠심해당(七心海
棠)이란 말인가?]
'칠심해당'이란 말을 하는 그의 음성은 약간 떨리고 있었고, 그
말투에는 강렬한 두려움을 나타내고 있었다.
호비는 그들의 대화를 듣고보니 이제는 사태의 추이를 알 수 있
을 것 같았다. 틀림없이 다른 한 명의 고수가 중간에서 장난을 쳤
기 때문에 세 사람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보았지만 자꾸 말의
앞뒤가 어긋나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 고수는 누구일까?
그는 엉겁결에 고개를 돌리고 옆에 있는 정영소를 바라보았다.
밝은 별처럼 빛나는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은 어둠속에서 형형한
광채를 빛내고 있었다.
설마하니 비쩍 마른 조그만 이 처녀에게 이와 같은 능력이 있었
단 말인가? 진정 사람으로 하여금 믿기가 어려운 노릇이었다.
그가 이런한 생각에 잠겨 있을 때에 갑자기 누군가 일성대갈을
내질렀다. 그 소리가 우렁차고 무척 괴이하여 순간 고개를 돌렸
다.
자세히 살펴보니 노인과 그 부부는 서로 마주서서 노려보며 각
기 몸을 웅크린 채 두 손을 앞쪽으로 수평으로 내밀어 여섯개의
손이 서로 맞닿은 상태였다.
그들은 일제히 '우엌!' 하는 소리를 내지르고 있었다. 노인의
호통소리는 준엄하고도 날카로왔고, 대한의 호통소리는 거칠고 맹
렬했으며, 꼽추 여인의 호통소리는 높으면서도 날카로웠다. 세 사
람의 호통소리가 모두 다 느릿하고 길게 이어져 누그러짐이 없었
다.
돌연 호통소리가 멈춰지면서 노인이 몸을 날려 뒤로 물러섰다.
순간 싸늘한 광채가 번쩍하더니 한 대의 투골정이 날아와 등롱의
불빛을 꺼뜨렸다. 그러자 곧바로 대한이 큰 소리로 외쳤다.
[아이쿠!]
틀림없이 노인의 암산에 걸려 상처를 입은 것 같았다.
숲속은 칠흙같은 어둠으로 뒤덮여 있어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호비는 즉시 정영소의 손을 잡고 끌어당기
며 그녀를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그가 이러한 행동을 취한 것은
위험이 임박한 것을 느끼고 무의식적으로 행동을 한 것이었다. 순
간적으로 연약한 여자를 보호해야겠다고 느꼈을 뿐, 진정 자신의
힘으로 그녀를 보호할 수 있을런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
았다.
대한은 소리를 한번 내지르고 난 후 숲 속은 다시 잠잠해졌다.
숲 속에는 모두 다섯 사람이나 있었으나 전혀 기척을 들을 수가
없었다.
조용해진 풀 숲에서는 다시 벌레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멀리서
부엉이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순간 갑자기 부드럽고 조그만 손이 뻗쳐오더니 그의 거칠고 커
다란 손을 움켜쥐는 것이 아닌가?
호비는 몸을 흠칫했으나 즉시 자그마한 것이 정영소의 손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의 손은 부드럽고 야들야들하며 섬
세한 것이 마치 열 두어 살 먹은 소녀의 손처럼 느껴졌다.
한동안의 정적 속에서 갑자기 두 가닥의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오르고 있었다. 하나는 희고, 다른 하나는 잿빛을 띠우고 있었다.
두 가닥의 연기는 마치 두 마리의 살아있는 뱀처럼 양쪽에서 한복
판으로 기어나와 서로 부딪히는 것같았다. 동시에 칙칙! 하는 가
벼운 음향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호비는 어둠 속에서 커다란 눈망울을 뜨고 살펴본 결과 아스라
히 좌우에 각기 한 점의 불꽃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한점의
불꽃 뒤에는 늙은이가 있었고, 다른 한 점의 불꽃 뒤에는 꼽추 여
인이 있었다. 두 사람은 각기 몸을 웅크린 채 단전의 힘을 모아
숨을 몰아내쉬며 연기를 상대방쪽으로 불어내고 있었다. 이는 물
론 약초에 불을 당겨서 독기를 쏘아내 상대방을 중독시키려는 의
도였다.
두 사람이 한참동안 불어대자 숲속의 연기는 점점 더 자욱했다.
별안간 노인은 어! 하더니 고개를 쳐들고 방금 전에 나무위에 박
아놓은 그 편지를 보았다.
그 종이쪽지는 희미하게 흔들리면서 번쩍이는 광채를 쏟아내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 위에는 전혀 다른 몇 줄의 글자가 쓰여져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그들 두 부부도 크게 놀라며 고개를 돌리고 바라보니 그 몇 줄
의 글은 다음과 같았다.
<모용경악(慕容景岳), 강철산(姜鐵山), 설작(薛鵲), 세 제자는
보거라.
너희들은 서로 박해를 가하고 사문의 정을 생각지 않아 나는 무
척 혐오해 왔으나, 너희들은 마땅히 옛날의 감정을 모조리 풀고
나의 유지(遺志)를 계승해 주기를 지극히 당부하는 바이다. 내가
임종하게 되었을 때의 상황은 소(素)제자에게 자세히 들을 수 있
을 것이다.
승(僧) 무진(無嗔) 절필(絶筆).>
그 노인과 꼽추 여인은 일제히 놀라 소리를 질렀다.
[사부님께서 돌아가시다니...... 정사매, 너 어디 있느냐?]
그러자 정영소는 살며시 호비의 손을 놓더니 품안에서 양초를
꺼내더니 부싯돌로 불을 당겨 앞길을 비추며 천천히 걸어나갔다.
그러자 노인 모용경악과 꼽추여인 설작은 모두 안색이 크게 변해
서는 날카롭게 물었다.
[사부의 약왕신편(藥王神篇)은 어디에 있느냐? 네가 갖고 있느
냐?]
정영소는 냉소를 했다.
[모용사형, 설사저, 사부님께서는 당신네들을 한평생 가르치고
키워왔으니 그 은덕은 하해와 같다고 할 수 있소이다. 하지만 당
신네들은 그 어르신의 생사문제에 대해서 관심은 없고 그저 그분
이 남기신 유품에 대해서만 묻고 있으니 너무나 몰인정하군요. 강
사형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 대한은 바로 강철산으로서 상처를 입은 이후 땅바닥에 쓰러
져 있었는데 정영소가 묻는 말을 듣자 고개를 쳐들고 노하여 말했
다.
[소철이 입은 상처는 틀림없이 네가 쓴 독수일 것이다. 그리고
이곳의 모든 일은 틀림없이 네 년이 수작을 부린 것이겠지. 빨리
약왕신편을 내놓아라!]
정영소는 그를 노려볼 뿐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모용경악이
호통을 내질렀다.
[사부님이 너만 편애했으니 틀림없이 너에게 넘겨 준 것이 분명
하다!]
설작은 말했다.
[소사매, 자네는 신편을 보여주도록 하게. 우리 모두 함께 구경
을 하세.]
그 말투에는 정영소를 꼬득이려고 하는 뜻이 숨어 있음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정영소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맞았어요. 사부님은 약왕신편을 확실히 나에게 전해 주셨어
요.]
그녀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품속에서 한 장의 종이쪽지를 꺼
내고 말을 이었다.
[이것은 사부님이 나에게 써준 유서인데 세 분은 한번 보세요.]
그러면서 그녀는 설작에게 내밀었다. 설작이 손을 내밀어 그 종
이를 받으려고 하자 강철산은 호통을 내질렀다.
[사매, 조심하시오!]
설작은 갑자기 깨달은 듯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면서 몸 앞에 있
는 커다란 나무를 손으로 가리켰다.
정영소는 한숨을 내쉬더니 머리에서 은잠(銀簪 : 은으로 된 머
리핀)을 하나 뽑더니 그 종이쪽지에 끼우고 손을 쳐들었다. 그러
자 은잠은 종이쪽지와 함께 쏘아져 나가 나무에 박혔다. 호비는
그녀의 손씀씀이를 보고 보통 재간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토록 약하디 약한 어린 처녀가 이들 세 사람과 동문 사남매
라니 전혀 생각지 못했구나.)
정영소가 들고 있는 촛불에 비치는 종이쪽지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영소에게 알리노라. 내가 죽은 후 곧 사형들과 사누이에게 알
리도록 하거라. 세 사람 중에서 나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
면 약왕신편을 보여주어라. 그러나 슬픔이나 그리워하는 정이 없
는 자가 있거든 이미 사제의 연은 끊어진 것이라 볼 수 있으니 더
이상 나의 제자가 아니다. 절실한 마음으로 유언을 남기노라. 노
승 무진 절필(絶筆).>
묘용경악과 강철산, 그리고 설작 세 사람은 그 유서를 보자 서
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그저 사부님이 남긴 물건
에만 관심이 있었고, 사부가 어떻게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지 한
마디 묻지도 않았고 더구나 전혀 비통해 하거나 아쉬워하는 기색
을 찾아볼 수 없었다. 세 사람은 잠시 동안 넋을 잃고서 있더니
갑자기 대갈을 일성하며 일제히 정영소에게 덮쳐들었다.
호비는 놀라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영소저! 조심하시오!]
그리고는 나는 듯이 몸을 퉁겨 앞으로 나갔다. 순간 설작의 쌍
장이 어느덧 정영소의 얼굴을 후려쳐 오자 호비는 한 손을 뻗어
장력을 돋구어 앞으로 뻗쳐냈다. 한 손으로 두 손을 상대하는 것
이었으나 텅! 하는 소리와 함께 설작은 충격을 받고 이장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곧바로 호비는 손을 들어 강철산의 손목을 낚아채더니 태극권의
난환결을 펼쳐 비대한 강철산의 몸을 집어던졌다. 그는 설작보다
더 멀리 날아가 그대로 땅바닥에 곤두박질쳤다.
이들 두 사람은 독을 쓰는 데는 따라올 사람이 없었지만 무공은
결코 일류 고수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윽고 호비가 몸을 돌려 묘용경악을 상대하려고 했을 때 묘용
경악은 몸을 한두번 휘청하더니 갑자기 풀썩 쓰러져 다시 일어나
지 못했다.
설작은 의외의 공격을 받고 나동그라지자 씩씩거리며 말했다.
[소사매, 너는 굉장한 지원병을 매복시켜 놓았구나. 저 녀석은
누구지?]
호비가 그 말을 받았다.
[나의 성은 호씨이고 이름은 비라 하오. 당신들이 제게 볼일이
있다면 얼마든지 나를 찾아오도록 하시오......]
정영소는 갑자기 발을 동동 구르며 원망하듯 말했다.
[아니, 당신은 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호비는 어리둥절했다. 순간 강철산도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이
윽고 그들 두 부부는 호비를 매섭게 노려보더니 서로 부축하고 비
틀거리며 숲을 빠져나갔다.
악랄한 독수(毒手)와 진정한 약왕(藥王)
정영소는 촛블을 끄고 양초를 품안에 넣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
았다. 호비는 궁금증을 참을 수 없는듯 물었다.
[영소저, 이 묘용사형은 어떻게 된 것이지요?]
정영소는 냉소만 흘렸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후 호비가
한번 더 묻자 그녀는 또 다시 흥! 할 뿐이었다. 호비는 정영소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아니? 당신은 매우 못마땅한 모양이구려?]
[내가 한 이야기를 당신은 한마디도 마음에 두고 있지 않고 있
군요.]
호비는 어리둥절했으나 곧 자기가 그녀와 약속한 세 가지 언약
을 한 가지도 지키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녀는 나에게 다른 사람과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나는 비단
말을 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이름까지 알려주었다. 그리고 무공
을 쓰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두 사람이나 두들겨 팼고, 더구나 곁
에서 세 걸음 이상 떨어지지 말라고 했는데 허참! 나는 열 걸음도
더 떨어져있으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겸연쩍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말 미안하게 되었소이다. 다만 저들이 너무 흉악하게 손을
써서 당신이 혹시라도 상처를 입을까 초조해서 그만 모든 것을 깡
그리 잊고 말았구려.]
정영소는 '피이!'하고 웃더니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전적으로 나를 위해서 그랬다는 말이군요. 자기가 깨
끗이 잊어버린 일은 생각하지도 않고 자기 잘못을 남에게 모두 미
루다니 정말 부끄럽지도 않은가 봐? 호 오라버니, 당신은 어째서
묻지도 않았는데 그 잘나빠진 이름을 알려주었지요? 그들 부부는
누구보다도 원한을 가지면 평생 잊지않는 사람들이예요. 만약 그
들이 당신을 찾아나선다면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서 좀처럼 떨어
지지 않는다구요. 그들은 무공으로 당신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을테니 자연히 신출귀몰하며 몰래 뒤에서 독을 쓸 거
예요. 그렇게 되면 당신은 방비할래야 방비할 수가 없을 거예요.]
호비는 그 말을 듣고 온몸에 소름 끼치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말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태가 이 지
경에 이른 이상 두려워해도 소용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냉정하게
체념했다.
정영소는 거듭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어쩌자고 그들 부부에게 이름을 알려주었지요?]
호비는 입가에 미소만 지었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정영소는 물
끄러미 그를 바라보더니 물었다.
[당신은 그들이 나에게 달려들어 해꼬지를 할까봐 두려워 당신
을 적으로 삼도록 일부러 말을 한 거죠? 안그래요? 그대는 모든
일을 스스로 다 맡아 나서는군요. 호 오라버니 당신은 무엇 때문
에 그토록 나에게 잘 대해주는 거예요?]
마지막 두 마디 말은 퍽이나 온화하고 부드러웠다. 호비는 어둠
속이라 그녀의 표정을 살필 수 없었지만 틀림없이 부드러운 표정
을 짓고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즉시 간곡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줄곧 나를 위험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었는데, 이심전
심이라고 나도 당신을 절친한 친구처럼 대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
겠소?]
정영소는 기쁜듯이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정말 나를 진정한 친구라고 생각하나요? 그렇다면 우선
당신의 목숨부터 구해드리고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겠어요.]
호비는 깜짝놀라며 소리쳤다.
[뭐라구요?]
정영소는 담담히 말했다.
[불을 밝혀요. 등롱은 어디있죠?]
호비는 허리를 구부리고 설작이 버린 등롱을 찾았으나 어둠속이
라 어디에 버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
호비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당신은 품속에 타다 남은 초를 가지고 있지 않소?]
정영소는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살고 싶지 않으세요? 그것은 칠심해당으로 만든 초란
말이예요...... 음 아! 여기 있군요.]
그녀는 풀더미 속에서 등롱을 찾아낸듯 화접자를 흔들어 불을
켰다. 어두운 숲 속에 순식간에 한 무더기의 파르스름한 불빛이
두 사람을 휘감았다.
호비는 강철산 부부와 묘용경악이 칠심해당이라는 말을 여러번
꺼냈기 때문에 그것이 매우 무서운 독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구나 불빛에 비친 묘용경악은 땅바닥에 쓰러져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이 마치 뻣뻣하게 굳은 시체와 같아 즉시 깨닫는 바가 있어 '아
하!' 하는 소리를 내지르며 말했다.
[내가 경솔하게 손을 쓰지 않는다 하더라도 강철산 부부는 당신
에게 곧 제압을 당할 판이었군요.]
정영소는 미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당신은 나를 위해서 호의를 베푼 거예요. 호 오라버니
정말 고마워요.]
호비는 바람조차 이겨낼 힘도 없을 것 같은 연약한 그녀의 몸을
바라보며 내심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이 처녀는 나보다 몇 살 아래인데도 이토록 치밀하고 사려가
깊구나! 나는 스스로 총명하다고 자만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녀
의 반도 따라갈 수 없구나.)
호비는 그제서야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정영소의 양초는 극
독으로 만들어졌지만 불을 붙여도 전혀 냄새나 연기가 나지않아
묘용경악 등 세 명의 독을 쓰는 대가들도 그녀의 술수에 빠져든
것이었다.
만약 호비가 경솔하게 손을 쓰지 않았더라면 강철산 부부도 촛
불의 연기를 들이마시고 자연히 정신을 잃고 쓰려졌을 것이다. 그
러나 그때 두 사람은 매섭게 정영소를 협공했었고, 그들이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 전에 정영소가 먼저 화를 당할 수도 있었으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정영소는 그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 입을 열었다.
[손가락으로 제 어깨에 있는 옷자락을 건드려 보세요?]
호비는 그녀가 무슨 뜻으로 그러는지 알지 못했지만 시키는 대
로 식지를 뻗어 살며시 그녀의 어깨를 만졌다. 순간 갑자기 식지
가 불침에 맞은듯 화끈거려 자기도 모르게 펄쩍 뛰었다.
정영소는 그의 낭패한 꼴을 보더니 깔깔거리고 웃으며 말했다.
[호호호! 만약 그들 부부가 내 옷을 잡았더라면 그런 진한 감동
을 받았을 거예요.]
호비는 식지를 몇 번 흔들었으나 따가운 기운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 호비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정말 대단하군. 옷에 어떤 독약을 뿌렸길래 이렇게 무섭소?]
정영소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것은 적갈분(赤 粉)이라는 것으로 별로 대단치 않은 거예
요.]
식지를 불빛에 비추어보니 벌써 가늘고 조그마한 물집 이 여러
개 돋아 있는 것을 보고 속으로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도 다행히 그녀의 옷자락을 건드리지 않았기 망정
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큰일 날뻔 했구나. 젠장, 이 소저는 정말
자신만만할 자격이 있군...... 내가 만약 응큼한 생각을 했더라
면......)
정영소는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호 오라버니, 내가 모든 사실을 감추고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해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나는 단지 당신이 나중에 나의
세 사형제를 만나면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을
뿐이예요. 물론 당신의 무공은 그들보다 훨씬 고명하지만 당신의
손바닥을 한번 들여다 보세요.]
호비는 의아하게 생각하며 손바닥을 펴보았으나 별다른 이상을
볼 수가 없었다.
정영소는 다시 말했다.
[등롱에 대고 자세히 살펴보도록 해요.]
손바닥을 등롱 앞에 비추어 보니 손바닥에 어렴풋이 검은 기운
이 서려있는 것 같아 흠칫 놀라며 말했다.
[그...... 그들 두 사람은 독사장(毒砂掌)을 연성한 적이 있습
니까?]
정영소는 담담히 말했다.
[독수약왕의 제자들이 어찌 독사장을 연마하지 않았겠어요?]
호비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아! 원래 존사(尊師)인 무진대사님이 진정한 독수약왕이었구
려. 그 어르신은 세상을 '등진 것이오? 그런데 어떻게 당신네 사
형제들은 그토록 무정하고 의리가 없는 것이오?]
정영소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큰 나무 옆으로 다
가가 은잠과 투골정을 뽑고 사부의 유시를 접어 다시 품속에 집어
넣었다.
이때는 먼저 꽂았던 종이 위에서 빛을 발하고 있던 글씨들은 이
미 사라져 보이지 않았고 다만 '알만한 사람이라 이름을 적지 않
는다'라는 내용의 두 글귀만 남아있었다.
호비는 물었다.
[이 쪽지는 당신이 쓴 것이오?]
[그래요. 사부님에게는 우리 대사형이 받아 적은 약경(藥經)이
있어요. 나는 그의 필체를 오랫동안 보아왔기에 익히 잘 알고 있
었지만 그래도 완벽하게 흉내낼 수는 없었어요. 비록 형체는 갖추
었지만 세련됨은 따라갈 수가 없었지요. 사형의 필체에는 힘이 실
려있지요.]
호비는 무공은 고강했지만 어릴 적부터 글을 가르쳐준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서예가 어떻고 필적이 어떻고 하는 것은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녀의 그러한 말을 듣고도 끼어들어 할 말이 없었
다.
정영소가 다시 설명을 했다.
[사부님의 손으로 직접 쓴 유시는 언제나 세 번 달군 백반의 물
로 쓴 것이라 불에 구워야만 글씨가 나타나는 거예요. 나는 그 위
에다가 다시 호랑이 뼈의 골수로 글을 적어 놓았지요. 그래서 어
둠 속에서 광채가 나는 거예요. 자, 보세요!]
그러면서 등불을 켰다. 과연 종이 위에는 사부가 쓴 글들이 확
연히 드러났다. 등롱을 밝히자 반짝거리던 글자들은 사라지고, 보
이는 것은 정영소가 쓴 작은 글귀만 보였다. 그렇기 때문에 똑같
은 한 장의 종이이지만 불을 밝히면 작은 글귀만 나타나는 것이
고, 어두워지면 그녀의 사부의 유시가 나타나는 것이었다.
사실 알고보면 별로 이상야릇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묘용경
악 등은 온 정신을 격투하는데 쏟고 있었기 때문에 갑자기 사부의
유시가 나무 위에서 나타나는 것을 보자 자초지종을 따져볼 겨를
도 없이 깜짝 놀랐던 것이다. 게다가 정영소가 손에 촛불을 들고
나올 때에도 그들은 사부가 남긴 약왕신편이라는 책자에만 관심이
있었기에 촛불에서 독기가 발산되리라는 생각을 전혀 할 수 없었
던 것은 물론 방비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러한 야릇한 일들이 하나씩 풀어지자 호비는 깨닫는 바가 있
어 기쁜 빛을 띠었다. 정영소는 웃으며 물었다.
[당신은 독사장에 중독이 되었는데도 어째서 도리어 기뻐하는
거죠?]
[당신이 내 목숨을 구해주겠다고 응낙을 하셨고 또 약왕의 지체
높으신 제자분이 여기에 계신데 내가 걱정을 할 일이 무엇이 있겠
소?]
정영소는 방긋 웃더니 갑자기 등롱을 불어서 껐다. 이어 그녀는
대광주리 옆으로 가더니 바스락 바스락 거리는 기척을 내고 있었
는데 대광주리에서 무엇을 꺼내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잠시 후 그녀는 되돌아와 등롱에 불을 켰다.
호비는 눈앞이 갑자기 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이미 하얀
장삼과 남색의 바지로 갈아입고 서 있는 것이었다.
정영소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 옷에는 독가루가 없어요. 그러니 당신은 내 옷을 건드릴까
봐 마음 졸일 필요는 없을 거예요.]
호비는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은 정말 빈틈이 없구려. 나는 헛되이 주는 밥만 먹고 나이
를 채운 것 같소. 내 머리가 당신 반만이라도 따라갈 수 있다면
원이 없겠소이다.]
정영소는 담담히 말했다.
[나는 독약을 사용하는 것을 배우고 난 이후, 날이면 날마다 온
종일 어떻게 독을 써야만 다른 사람이 알 수 없을까, 다른 사람의
독을 어떻게 막아낼까 하는 문제를 꼼꼼히 생각하고 계획을 세운
거예요. 이렇게 심혈을 기울여 생각해 낸 것이 고작 요모양이예
요. 아! 그러니 어찌 당신의 하해와 같이 넓고 자유로운 마음을
어찌 따라갈 수 있겠어요?]
그녀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더니 호비의 오른손을 끌어당겨 은잠
으로 그의 다섯 손가락을 모두 찔러 조그마한 침구멍을 냈다. 그
리고 나서 양 엄지 손가락으로 손바닥부터 손가락 쪽으로 훑어내
기 시작했다. 그러자 침구멍에서는 약간 자흑색을 띤 피가 흘러나
왔다.
은잠으로 찌른 부위는 매우 알맞아 전혀 통증을 느낄 수 없었고
검은 피를 훑어내는 그녀의 손놀림은 영민하기 이를데 없었다. 잠
시 후 피는 점차 빨간 색을 띠며 흘러내렸다.
이때 땅바닥에 널부러져 있던 묘용경악이 갑자기 몸을 꿈틀했
다. 호비는 입을 열었다.
[깨어난 모양이군요!]
[깨어나지 못할 거예요. 최소한 세 시진은 더 지나야 할 거예
요.]
호비는 자조섞인 어투로 말했다.
[조금 전 내가 그를 떠매고 올 때 이 사람은 죽은 사람처럼 꼼
짝하지 않아 나는 전혀 몰랐소이다. 우스운 소리이지만 그는 기특
하게도 꼼짝달싹하지 않고 참아왔고, 나는 열심히도 낑낑거리고
짊어지고 왔구려.]
정영소는 미소를 띠었다.
[당신은 말끝마다 자기가 바보같다고 말씀을 하는데 그렇게 말
씀하시는 분들이야말로 멍청한 사람이 아니지요.]
잠시 시간이 흐르자 호비는 궁금한 듯 물었다.
[그들은 자주 무슨 약왕신편인가 하는 것을 들먹이곤 했는데 그
것은 약에 대한 책자인가요?]
정영소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요. 그것은 우리 사부님께서 필생의 심혈을 기울여 저술하
신 한 권의 책이예요. 당신께 보여드리지요.]
그녀는 품안에 손을 넣고 조그마한 보따리를 꺼냈다. 겉에 싸인
보따리를 풀자 안에는 기름종이로 싼 것이 나왔고, 기름종이 안에
는 여섯 치 길이에 넓이가 네 치인 누런 종이로 만든 책이 들어있
었다.
정영소는 은잠으로 책장을 뒤적였다. 책장마다 빽빽하게 깨알같
은 글씨가 잔뜩 적혀 있었다. 말을 하지 않아도 모든 책장마다 극
독이 묻어있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고 모르는 사람이 무심코 책을
한번 뒤적거렸다가는 크게 액운을 당하리라는 것을 짐작하고도 남
음이 있었다.
호비는 그녀가 자기를 완전히 믿고 어떤 중대한 비밀이라도 숨
기지 않는 것을 보고 내심 기쁨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이러한 독
경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중독될 것 같아 자기도 모르게 두
려운 표정을 드러냈다.
정영소는 약서(藥書)를 다시 보자기에 싸더니 품속으로 집어넣
고 황색 병을 하나 꺼내더니 손바닥에 자색가루를 쏟아 호비의 손
가락 끝에 난 침구멍에 발랐다. 그리고는 손과 팔의 관절을 몇 번
주무르자 놀랍게도 그 가루는 침구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이었다.
호비는 기뻐하며 말했다.
[대국수(大國手)이시군요. 나는 이와 같은 신기한 재간을 한번
도 본 적이 없소이다.]
정영소는 웃었다.
[별것 아니예요. 당신이 만약에 우리 사부님께서 사람들의 배를
가르고 수술하는 것과 부러진 팔다리를 다시 이어놓는 재간을 볼
기회가 있었더라면 아마 놀라서 기절을 했을 거예요.]
호비는 존경심이 우러나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구려. 존사는 독을 사용하는데 능통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뭇 사람들의 병을 치료하고 인명을 구하는데 애를 쓰셨을 겁니다.
그렇지 않고서 어찌 '약왕'이라고 일컬어 질 수가 있겠소이까?]
정영소는 기쁜 빛을 띠우며 말했다.
[우리 사부님께서 당신의 그와 같은 말을 들으셨다면 아마 그
어르신은 당신을 무척 좋아하셨을 것이고, 그 어르신의 소년지기
(少年之己)라고 말씀하셨을 거예요. 아,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어
르신께서는 이미 세상을 떠나셨어요!]
그녀는 눈시울을 붉혔다.
호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의 그 꼽추 사누이는 당신 사부님께서 편견을 가지고 있는
듯 당신만 귀여워했다고 하더니만 그 말은 틀리지 않는 것같구려.
내가 보기에도 당신 혼자만이 사부님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 같소
이다.]
정영소는 설명하듯 말했다.
[우리 사부님은 한 평생 네 명의 제자만을 거두어 들이셨어요.
당신은 오늘밤 그 어르신의 제자들을 모두 본 셈이예요. 묘용경악
은 대사형이시고, 강철산은 둘째이시며 설작은 셋째 사누이예요.
사부님은 본래 세 제자만 거두어들이려 하셨는데 우리 세 분 사형
제가 너무나 서로를 헐뜯으며 나쁜 짓을 일삼았기 때문에 백년 내
에는 그들을 제압할만한 인물이 태어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말년
에 이르러 다시 나이 어린 나를 제자로 거두어 들였던 거예요.]
그리고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말을 이었다.
[나의 이 세 사형, 사누이는 본성은 원래 그렇게 나쁜 편이 아
니었어요. 하지만 세째 사누이가 둘째 사형에게 시집을 가는 바람
에 대사형과 그들 부부와 깊은 원한을 맺게 된 거예요. 그들 세
사람은 서로 지지않으려고 했고 끝내는 수습하기 어려운 지경까지
이르렀지요.]
호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대사형도 아마 세째 사누이를 맞아들이려고 했던 모양
이구려. 그렇지 않소?]
[그런 일들은 너무 오래되어 나로서도 잘 알 수가 없어요. 다만
대사형에게는 본래 사수(師婢)가 계셨었는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는 잘 몰라도 세째 사누이가 대사형을 좋아했기 때문에 사수를 독
살했던 모양이예요.]
호비는 자기도 모르게 '아!' 하는 탄성을 내질렀다. 독을 쓰는
재간을 배우면 자연히 성격도 그 독처럼 잔인해지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따지고 보면 독공(毒功)이라는 것은 오히
려 해악이 많고 이득은 적은 것 같다고 느껴졌다.
정영소는 다시 설명을 했다.
[대사형은 홧김에 세째 사누이에게 독약을 먹여 그녀를 꼽추와
절름발이가 되도록 만들었답니다. 둘째 사형은 암암리에 세째 사
누이를 좋아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불구가 되었는데도 져버리지 않
고 혼례를 올리게 되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된 노릇인지 그들이
혼례를 올리자 대사형은 세째 누이를 칭찬하며 그녀를 추근거렸지
요. 우리 사부님은 제자들의 이런 짓거리에 번민하시며 그들을 아
무리 가르치고 깨우쳐주려고 하셨지만 그들 세 사람은 점점 서로
를 헐뜯는 것이 심해졌어요. 하지만 우리 둘째 사형은 됨됨이가
올바른 사람인지라 그래도 처만 아끼고 이해하며 딴 마음을 품지
않았어요. 그들 부부는 이 동정호 주변에 무쇠로 된 약왕장을 지
으시고 대사형이 귀찮게 추근대는 것을 막으려고 하였지요. 하지
만 그들은 강호에서 너무나 많은 원수를 맺게 되어 나중에는 약왕
장이 그들의 피난처가 되고 말았지요.]
호비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랬었군요. 그래서 강호에서 독수약왕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
다 모두 다르게 말을 했던 것이군요. 사람들마다 각기 수재나 상
공같다느니, 거칠은 대한이라고 하거나 꼽추여인이라고 했고, 어
떤 사람들은 늙이 화상이라고도 하고 있었지요.]
정영소는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진정한 독수약왕은 기실 누구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가 없어
요. 우리 사부님은 그 이름을 무척 싫어하셨어요. 그 어르신께서
는 종종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내가 독물을 사용하는 것은 사람
들의 병을 치료하고 구하기 위한 것이지만 나를 '약왕'이라고 일
컫는 것은 황승하여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 위에다가
다시 '독수'라는 두 글자를 보태 부른다면 설마하니 이 무진 노화
상이 함부로 사람을 죽인단 말이냐?' 하고요. 우리 사부님께서는
독물을 사용하는데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지만 두 사형들과
사누이가 독물을 마구잡이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어떤 때는 잘못하
여 좋은 사람에게도 독상을 입히는 수가 없지 않아 있었지요. 그
렇기 때문에 '독수약왕'이라는 네 글자는 강호에서 명성이 쟁쟁하
게 되었어요. 사부님께서는 사형들과 사누이가 각자 신분이나 성
명을 발설하지 말도록 하셨는데 그렇게 되자 희한한 독을 쓴 사건
이 일어나면 무조건 '독수약왕'의 소행이라고 딱지를 붙였지요.
당신이 보기에도 정말 억울하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호비는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의 사부님께서는 마땅히 나서서 흑백을 분명히
가려야 옳았지 않습니까?]
정영소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와 같은 일은 변명을 할래야 변명을 할 수가 없는 거예
요......]
정영소는 말을 도중에 멈추고 호비의 손가락을 주무르던 것을
멈추고 다시 약을 발라 주었다. 그리고는 몸을 일으키고 다시 말
을 이었다.
[오늘밤 우리들은 두 가지 할 일이 있었어요. 만약에 당신
이......]
갑자기 거기까지 말을 하다가 입을 다물고 살짝 한번 웃었다.
호비는 그 말을 이어받았다.
[만약에 내가 당신 말을 잘 들었다면 그 일을 쉽게 처리할 수가
있었는데 지금으로서는 일이 더 커졌다는 말씀을 하려는 것이지
요?]
정영소는 웃음을 띠우며 말했다.
[당신이 잘 알고 있으니 됐어요. 자, 가요!]
호비는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묘용경악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 분을 또 다시 대광주리 안으로 모셔야 합니까?]
정영소는 두 손을 입에 가져가서는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
다.
[거듭해서 수고를 해주십사와요.]
호비도 따라서 미소를 지으며 묘용경악을 대광주리 안에 넣고
멜대를 어깨에 짊어졌다.
정영소는 앞장을 서서 걸어나갔다. 그러나 뜻밖에도 서남쪽으로
삼 마장 정도 나아가더니 조그마한 집 앞에 이르러 큰 소리로 외
쳤다.
[왕대숙(王大叔), 가요!]
그러자 문이 열리며 한 사내가 나왔다. 그는 전신이 옷칠을 한
것처럼 검었으며 멜대를 짊어지고 있었다. 호비는 속으로 생각했
다.
(또 이상한 일이 벌어지겠구나.)
그러나 이미 실수를 연발한 만큼 그는 더 이상 묻지를 못하고
정영소의 뒤를 바짝 따랐다. 그는 세 발자국을 떨어지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정영소는 뒤를 돌아보고 빙긋이 웃으며
만족해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사내는 아무 말없이 그들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정영소는 한참 앞으로 나아가더니 다시 북쪽으로 방향을 꺽어
걸어갔다. 사 경이 지나서야 비로소 약왕장 밖에 이르게 되었다.
그녀는 대광주리 안에서 남화를 세 묶음 꺼내더니 호비와 그 사
내에게 한 묶음씩 나누어 주었다. 그들은 곧장 혈왜율로 된 담장
을 넘어 무쇠로 주조된 둥근 집 앞에 당도하였다.
정영소가 큰 소리로 불렀다.
[둘째 사형, 그리고 세째 사누이, 문을 여시지 않을래요?]
잇따라 세 번을 불렀으나 둥근집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들을 수
가 없었다. 정영소는 그 사내에게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자 그 사
내는 어깨에 메었던 멜대를 내려놓았다. 멜대의 한쪽에는 풀무가
매달려 있었다.
그는 풀무를 잡아당겨 석탄불을 새빨같게 달구더니 쇠를 녹이기
시작했는데 아마도 대장장이, 즉 철장(鐵匠)인 것 같았다.
순간 호비는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
잠시 후, 그 사내는 새빨갛게 달구어진 쇳물을 둥근 지붕 위에
뿌리기 시작했다.
새빨갛게 달구어진 쇳물은 지붕 위의 틈사이를 한줄씩 한줄 씩
메꾸어 나갔다. 무쇠로 만들어진 이 집의 문과 창문의 통로를 완
전히 봉쇄하고 있는 것이었다.
강철산과 설작은 집안에 있었으나 정영소를 두려워 한 나머지
감히 나와서 제지를 못하고 방안에서 옴짝달싹도 못하고 있었다.
정영소는 무쇠 집의 빈틈이 거의 봉쇄되어 사람이 도저히 뚫고
나올수 없게 된 것을 보고는 호비에게 손짓을 했다. 두 사람은 동
쪽으로 혈왜률을 넘어 서북으로 수십장쯤 걸어갔다. 그곳에는 온
통 커다란 바위들만 널려 있었다. 정영소는 입으로 발걸음 숫자를
헤아리면서 북쪽으로 몇걸음 가더니 다시 서쪽으로 몇걸음을 옮기
더니 이윽고 걸음을 멈추고 나직이 말했다.
[바로 여기군.]
등롱에 불을 켜서 그 곳을 비춰보니 두 조각의 바위 사이에 대
접만한 크기의 구멍이 하나 나 있었고, 그 구멍 위에는 허공에 반
쯤 걸쳐진 바위가 양쪽 바위 사이에 놓여 있었다.
정영소는 말했다.
[이것이 그들의 통풍구예요.]
그러더니 품속에 지니고 있던 반토막 남아있는 양초에 불을 붙
여 구멍 앞에 세워놓고 멀찌감치 호비를 이끌고 와서 바라보았다.
초에 불이 붙여지자 실오라기 같은 미미한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미풍을 따라 구멍 안으로 솔솔 스며드는 것이었다.
이러한 광경을 보자 호비는 정영소의 행동에 대하여 더욱더 경
외하게 되었다. 그러나 막상 무쇠로 만들어진 집안의 사람들이 이
와같은 독연기를 맡게 된다면 도저히 살아날 길이 없지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자 자기도 모르게 연민의 정이 우러났다.
(저 엷고 가벼운 연기는 미리 알아차리기가 매우 어려우며 설사
제때에 발견하여 공기 구멍을 막는다 하더라도 끝내는 질식해서
죽게될 것이며, 단지 선택의 여지는 늦게 죽느냐 일찍 죽느냐 하
는 것 뿐이리라. 그녀가 이와같이 절호멸문(絶戶滅門)의 독랄한
행동을 하는데 그냥 보고 앉아 있어야 한단 말인가?)
이때 정영소는 하나의 조그만 둥근 부채를 꺼내더니 가볍게 촛
불쪽을 향해 부채질을 했다. 그러자 촛불에서 피어오르던 가벼운
연기는 모조리 그 구멍으로 빨려들어갔다. 호비는 더 참을 수 없
어 말했다.
[영소저, 당신의 그 사형과 사누이는 당신과 도대체 어떤 뼈에
사무친 원한이 있는 것이오?]
정영소는 간단히 대답했다.
[아니요.]
[당신의 사부가 당신보고 문호를 정리하라는 유언을 남겼나요?]
[나는 아직까지 그런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어요.]
호비는 말을 더듬거렸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그는 마음이 격동되어 어떻게 말을 해야할지 몰라 일시 더듬거
렸다.
정영소는 고개를 쳐들더니 담담히 말했다.
[무슨 일이예요? 왜 당신은 그렇게 초조해서 안절부절하죠?]
호비는 정신을 가다듬고 말했다.
[만약에 당신의 사형과 사누이에게...... 반드시 죽여야 할 잘
못이 없다면 그들에게 한번 개과천선의 기회를 주어야 할 것이라
고 보오.]
정영소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요. 우리 사부님께서도 그렇게 말씀을 하셨어요.]
입으로는 말을 하면서도 부채질은 여전히 멈추지를 않았다.
호비는 마리를 긁적긁적하며 촛불을 손가락질하며 물었다.
[저 독연기...... 저 독연기는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 아니
오?]
정영소는 그제야 알겠다는 듯 말했다.
[아, 알고보니 우리 호 오라버니께서 또 자비심을 베푸시고 계
셨군요. 나는 사람의 목숨을 구하려고 하는 것이지, 결코 하늘의
도리에 어긋나는 짓을 하는 것이 아니예요.]
그러면서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살며시 웃음을 띠었다. 그 모습
은 몹시 매력적으로 보여 호비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내심 자기가 또 한번 바보같은 짓을 했구나 하고 생각했다.
물론 독연기를 안으로 들여보내는 것이 어째서 사람을 구하게
되는 것인지는 잘 이해할 수 없어도 마음 속으로는 여간 기분이
좋은 것이 아니었다.
정영소는 왼손의 새끼 손가락을 내밀어 양초에다가 손톱으로 얇
게 자국을 내더니 입을 열었다.
[나 대신 좀 봐 줘야겠어요. 촛불이 꺼지지 않도록 하시고 표시
해 놓은 자리까지 타면 촛불을 끄도록 하세요.]
그리고 부채를 호비에게 건네어 주더니 몸을 꼿꼿이 세워 사방
을 살피며 귀를 기울였다. 호비는 그녀가 했던대로 부채질하여 연
기를 구멍 안으로 들여보냈다.
정영소는 십여 장 밖까지 한바퀴 빙돌더니 별 이상한 점이 발견
되지 않았는지 둥그런 바위 위에 앉아서 말했다.
[오늘 밤 늑대를 데리고 와서 내 꽃밭을 짓밟던 사람은 둘째 사
형의 아들인 소철이예요.]
호비는 아! 하고 놀라 외치며 말했다.
[그 사람도 이 밑에 있나요?]
그러면서 바위 사이의 구멍을 손가락질했다. 정영소는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우리들이 이처럼 공을 드리는 것은 바로 그를 구하기
위한 것이예요. 먼저 이 냄새를 맡고 사형과 사누이가 정신을 잃
고 쓰러져야만 일을 하는데에 방해가 되지 않을 거예요.]
호비는 내심 모든 것을 깨닫고 암암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보니 그랬었구나!)
정영소는 다시 입을 열고 설명하듯 말했다.
[둘째 사형과 셋째 사누이에게는 맹(孟)씨 성을 가진 적수가 있
지요. 그들은 동정호가에 와서 반 년 동안이나 심혈을 기울였지만
철옥 밖에 있는 혈왜률의 독을 해소시킬 수 없어 공격해 들어갈
수가 없었던 거예요. 동정호반에서 죽어 있는 그들 두 사람도 십
중팔구 맹씨 집안의 사람일 거예요. 내가 심은 이 남화는 바로 혈
왜률의 극성(剋星)인데 둘째 사형 등은 줄곧 모르고 있다가 당신
과 종 나으리가 남화를 몸에 지니고 있어 독의 침습을 받지 않는
것을 보고 비로소 알게 된거예요.]
호비는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말했다.
[맞습니다. 나와 종 둘째 형이 찾아갔을 때 저 철옥 안에서 누
군가 놀라서 소리를 지른 것을 들었습니다. 틀림없이 그런 연고로
놀란 것 같군요.]
정영소는 설명하듯 말했다.
[이 혈왜률의 독성은 원래 해독약이 달리 없고, 반드시 이 나무
에서 열리는 밤을 자주 먹어야만이 그 나무의 냄새의 침습을 막을
수가 있는 거예요. 혈왜률의 독성이 무섭기는 하지만 다행히 사람
이나 가축에게는 별로 피해를 입히지 않지요. 왜냐하면 혈왜률이
한 그루만 자라고 있어도 주위 수십 보 안으로는 풀포기도 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벌레나 개미들도 얼씬거리지 않기 때문에 얼핏
보기만 해도 금방 알 수 있거든요.]
호비는 말했다.
[그래서 이 철옥 주위에 풀한포기 나지도 않는 것이군요. 나는
말 두 필의 입을 열심히 싸댔지만 역시 그 독성을 피할 수 없었어
요. 만약에 당신이 준 남화가 아니었다면.......]
거기까지 말을 하다가 문득 오늘밤 겁없이 날뛰었던 모습이 떠
오르자 자기도 모르게 흠칫 놀랐다.
(강호에서 독수약왕을 들먹이기만 해도 얼굴 빛이 달라지는 것
도 무리는 아니었구나...... 종 둘째형이 극력(極力)을 다해 경계
하고 조심한 것도 당연했구나.)
정영소는 담담한 어조로 호비의 말을 받아 말했다.
[그 남화는 내가 새로이 개발한 품종이예요. 어찌되었든 간에
귀찮다고 생각지 않고 중도에서 버리지 않아서 다행이예요.]
호비는 미소를 지었다.
[그 꽃의 빛깔은 간드러지고 화사한 것이 매우 보기 좋았죠.]
정영소는 넌즈시 말했다.
[다행히 그 남화가 보기가 좋았기 망정이지 만약에 아름답지 못
했더라면 당신은 아마 그 꽃을 내버렸을 테죠? 그렇지 않은가요?]
호비는 일시 어떻게 대답할 바를 몰랐다.
[그건...... 그건......]
그러면서 속으로 재빨리 생각해 보았다.
(만약에 그 남화가 정말 매우 보기 흉했다면 나는 과연 몸에 지
니고 있었을까? 그리고 그 꽃이 아름다왔기 때문에 나와 종 둘째
형의 목숨을 구하게 된 것일까?)
바로 이때 바람이 한 차례 불어왔다. 호비는 곰곰히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채를 들어 촛불을 막지 못했다. 촛불은 한 번 흔
들하더니 바로 꺼지고 말았다.
호비는 나직이 부르짖었다.
[아이쿠!]
그리고는 재빨리 화접자를 꺼내 다시 초에 불을 당기려고 했을
때 어둠 속에서 정영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두세요. 이제는 거의 다 탔을 거예요.]
호비는 그녀의 말투에 퍽 불쾌한 빛이 서려 있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자신에게 무슨 일을 시켜도 항상 제대로 하는 것이 없어서
마치 매사에 정성을 기울이지 않는 것 같다는 인상을 준 것 같아
겸연쩍은 마음으로 말했다.
[정말 미안하구려...... 오늘밤은 어찌 된 노릇인지 나는 제 정
신이 아닌가 봐요.]
정영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호비는 정중히 입을 열었다.
[나는 정히 당신이 한 말을 생각하고 있었는 중이라 갑자기 바
람이 불어오리라고는 정말 예상치 못했습니다. 영소저, 당신이 나
에게 남화를 선물로 줄 때 나는 그 남화가 목숨을 구하는 물건이
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소이다. 단지 다른 사람이 호의로 준
물건이니 마땅히 잘 간수해야 된다고 생각을 했었지요.]
정영소는 그의 몇 마디 말이 매우 간곡한 것을 보고는 '음'하는
소리를 냈다.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잠시 후에
호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어릴적부터 아버님과 어머님을 여의었기 때문에 나에게
다른 사람이 준 선물을 받아본 적이 없었소이다.]
정영소는 그 말을 받았다.
[그래요. 나 역시도 어릴적부터 아버님과 어머님이 없었지만 그
래도 이만큼 성장하지 않았어요?]
그러면서 불을 당겨 등롱에 불을 켜더니 말했다.
[가요!]
호비는 그녀의 안색을 몰래 살폈으나 성을 낸 것 같지는 않았
다. 그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더 이상 캐묻지 않고 그녀
의 뒤를 따랐다.
그 두 사람이 철옥 앞으로 돌아오자 그 대장장이는 바닥에 앉아
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정영소는 입을 열었다.
[왕 대숙, 수고스럽지만 저것 좀 잘라주세요!]
그녀는 조금전 대장장이를 시켜 쇳물로 때웠던 틈사이를 가리켰
다. 그 대장장이는 그 이유를 묻지도 않고 정과 끌을 꺼내더니 창
창창! 하고 긁어내기 시작했다. 밥한끼 먹을 시간이 되지 않아 어
느덧 봉해졌던 틈새가 트이게 되었다.
정영소는 입을 열었다.
[문을 열도록 하세요.]
대장장이는 정으로 이곳 저곳을 한번씩 두드려 보더니 쇠망치를
거꾸로 들고 망치 자루를 그 틈사이에 끼어 누르자 탕! 하는 소리
가 나면서 한 조각의 커다란 철판이 떨어졌다. 그 안에는 여섯 자
높이에 넓이가 석 자 정도되는 문이 나타났다. 이 대장장이는 이
철옥의 구조에 대해서는 손바닥을 보듯 환히 알고 있는듯 서슴없
이 문을 옆으로 잡아 당겼다. 그러자 안으로 통하는 조그만 쇠사
닥다리가 하나 내려오는 것이었다.
정영소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남화를 밖으로 버리도록 하세요.]
세 사람은 몸에 꽂았던 한 묶음의 남화를 모두 다 땅바닥에 내
던졌다. 정영소는 앞장서서 사닥다리를 밟고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냄새를 맡으면서 입을 열었다.
[호 오라버니, 어째서 당신의 몸에는 아직도 남화가 있지요? 갖
고 들어가지 마세요.]
호비는 그 말에 어! 하더니 품속에서 조그만 보따리를 꺼내 펼
치고 말했다.
[당신의 코는 굉장히 예민하구려. 내가 보따리에 싸놓은 것까지
도 알아차리는구려.]
그 보따리에는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던 권경도보와 약간의 잡
다한 물건들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낮에 정영소가 그에게 준 남화
한송이가 그 안에 들어있었다. 밤새도록 싸두었기 때문에 이미 완
전히 시들어진 상태였다. 호비는 그것을 집어서 철문의 철판 위에
다 내려 놓았다.
정영소는 그가 매우 진귀하게 그 남화를 간직한 것을 보고 조금
전에 한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매우 기분이 좋은듯 그
에게 방긋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군요.]
호비는 어리둥절해져서 속으로 생각했다.
(아니, 왜 내가 당신에게 거짓말을 해야하지?)
정영소는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안에 있는 사람들은 평소에 혈왜률의 열매인 밤을 복용해 왔
고, 이 남화는 바로 그 혈왜률의 극성이기 때문에 그들은 견디어
낼 수가 없어요. 그래서 가지고 들어가지 말라는 거예요.]
그녀는 등롱을 들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안으로 들어갔다. 호
비와 왕철장도 따라서 안으로 들어갔다.
무쇠로 만든 사다리를 지나자 협소한 통로가 하나 나타났고, 모
퉁이를 두 번 돌자 조그마한 객청에 이르렀다. 벽에는 여러가지
서화들이 걸려 있었고, 상비죽(湘妃竹)으로 만들어진 탁자와 의자
들이 놓여 있었는데 매우 우아하고 운치가 있었다.
호비는 매우 궁금하게 생각했다.
(강철산의 겉모습은 거칠어 보였는데 꾸며놓고 사는 것은 우아
하고 품위가 있어 마치 수재나 서생이 사는 집 같구나.)
정영소는 걸음을 조금도 멈추지 않고 곧장 뒷쪽으로 걸어들어갔
다. 호비는 그녀를 따라 부엌처럼 생긴 방 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눈 앞에 벌어진 광경에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호반(湖畔)의 연가(戀歌)
강철산과 설작은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는 없었다. 칠심해당으로 만든 양초의 연기가 공기 구멍으로
빨려들어갈 때, 호비는 이미 이러한 광경을 예측하고 있었지만 더
욱더 이상한 것은 김이 무럭무럭 올라오는 끓는 물이 담겨진 커다
란 쇠솥에 젊은 남자가 한 명 앉아 있는 것이었다.
이 젊은 남자는 상반신을 벗고 있었고 쇠솥 안의 물은 펄펄 끓
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보기에 매우 뜨거운 것 같았다. 그렇게 앉
아 있다가는 산채로 삶아져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비는 재빨리 앞으로 달려가 그 사람을 솥에서 끌어내려고 했
는데 정영소가 그를 제지하며 말했다.
[건드리지 말아요. 당신은 우선...... 그가 아래에 옷을 걸치고
있는지 확인해 보세요.]
호비는 솥안을 들여다보고는 대답했다.
[그는 바지를 입고 있소이다.]
정영소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솥 옆
으로 다가와 손을 내밀어 그가 숨을 쉬고 있는 지 확인한 후에 입
을 열었다.
[아궁이에다가 나무를 더 넣도록 해요.]
호비는 그 사람을 다시 바라보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는
바로 늑대를 몰고와 화원을 짓밟아 놓은 그 사람이었던 것이다.
지금 그는 두 눈을 감은 채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있었다. 그의
건장한 가슴이 조금씩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 죽지는 않은 것 같았
지만 이미 기절한 것 같았다.
호비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듯 물었다.
[이 사람이 소철인가요? 저 사람들의 아들이겠지요?]
정영소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요. 우리 사형과 사누이는 그의 몸에 스며든 독물을 땀으
로 제거하려는 거예요. 그렇지만 아무리 노력을 해도 칠심해당의
꽃가루(花粉)가 없어 결국은 치료를 하지 못했던 거예요.]
호비는 그제서야 마음을 놓고 아궁이에 불이 약한 것을 보고 장
작을 넣었으나 물이 뜨거워 사람이 다칠까봐 한 개비 밖에 넣지
않았다. 그러자 정영소가 웃으며 말했다.
[몇 개비 더 넣으세요. 더 많이 집어넣는다고 살이 익어서 물러
터지지는 않을 거예요.]
호비는 그녀의 말에 따라 다시 장작을 두 개 더 넣었다.
정영소는 솥안에 손을 집어넣고 물의 온도를 가늠해 보더니 품
안에서 조그마한 병을 꺼내 황색 가루를 손바닥에 부어 강철산과
설작의 코에 넣어주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재채기를 몇 번 하더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두 눈을 떴다.
정영소는 바가지를 들고 솥안에 물의 온도를 조절하며 물을 갈
아주는 것인지 찬 물을 한바가지 붙고는 뜨거운 물을 한바가지 퍼
냈다.
두 부부는 깨어나 벌떡 일어나며 놀람과 분노의 표정을 지었으
나 정영소가 나서서 불을 지피우고 물을 조절하는 것을 보고 이제
는 아들을 구원할 수 있겠구나 하고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착찹한 마음은 거둘 길이
없었다.
(우리 사랑하는 아들이 그녀의 독수에 걸린 것이 분명하다. 그
녀가 그러고도 다시 아들을 구하려고 하니 감사를 할 필요는 없지
만 만약 그녀가 구해주지 않는다면 아들을 살릴 수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막내임에도 불구하고 사부님의 편애를 받아 수많은 재간
을 전수받아 우리들보다 훨씬 뛰어나니 그녀를 어떻게 해 볼 도리
가 없구나.)
정영소는 김이 다시 무럭무럭 피어오르자 다시 뜨거운 물 한바
가지를 퍼내고 찬물을 부었다. 강소철의 몸에 있는 독기가 차츰차
츰 뜨거운 열기에 의해 밀려나오도록 세심하게 배려를 하고 있었
다.
몇 번을 되풀이 하더니 정영소는 문득 왕철장에게 말했다.
[지금 손을 쓰지 않는다면 원한을 갚을 기회가 없을 거예요.]
왕철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리고 나서 아궁이 옆에서 장작개비를 하나 집어들더니 갑자기
강철산을 후려팼다. 강철산은 재발리 장작개비를 움켜잡고 대노해
서 호통을 내질렀다.
[무슨 짓이냐?]
그러자 설작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철산, 우리는 사매에게 부탁을 해야 할 형편인데 그까짓 몇 대
쯤 못맞아 주겠어요?]
강철산은 어리둥절했으나 이해가 되는듯 노기에 찬 표정을 지은
채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좋소!]
그리고는 장작개비를 순순히 놓았다. 왕철장은 장작을 들고 사
정없이 후려쳤다. 그러나 강철산은 피하지 않고 오히려 때릴테면
때려봐라 하는듯 몸을 꼿꼿이 세우고 왕철장을 노려보았다.
왕철장은 후려패며 욕을 했다.
[네 놈이 내 논밭을 빼앗아 간 것도 부족해서 나를 윽박질러 강
제로 무쇠 집을 만들도록 했고, 더구나 무엇이 모잘라 내 갈비뼈
를 세 대나 부러뜨렸느냐? 이 놈아 나는 그래서 반 년 동안 일어
나지도 못했다. 이 개같은 놈아! 오늘이 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놈, 이......]
그러면서 계속 강철산을 사정없이 장작으로 후려팼다. 그는 수
십 년 동안 대장장이 일을 해온터라 무공은 모르지만 쇠를 두들기
던 오른 팔은 강맹하기 이를데 없어 몇 번 후려치자 딱딱한 장작
개비는 부러지고 말았다.
강철산을 몸을 한번 꿈쩍거리지 않고 상대가 마음껏 화풀이를
하라고 내버려 두었다.
호비는 왕철장이 욕을 하는 소리를 듣고서 그가 강철산 부부에
게 지극히 심한 핍박을 받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오
늘 정영소가 이렇게 나서서 그의 분을 풀어준 것은 매우 공정한
일처리라고 생각하며 다시 한번 그녀의 시원시원한 마음에 대하여
탄복을 하고 있었다.
왕철장은 장작이 세 개나 부러뜨리도록 때리자 강철산의 얼굴은
온통 피범벅이 되었다. 그래도 그는 이를 악물고 꼼짝하지 않았
다.
원래 왕철장은 바탕이 선한 사람이라 이만하면 분풀이를 실컷했
다고 생각했는지 장작개비를 내동댕이쳤다. 물론 그 동안 강철산
부자에게 매를 맞고 수모를 당한 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잊을 수 있다고 생각되었는지 정영소를 향해 포
권을 하고 입을 열었다.
[정소저, 소저가 오늘 소인으로 하여금 실컷 분풀이를 할 수 있
도록 만들어 준 은혜는 죽어도 잊지 못할 겁니다.]
정영소는 정중히 말했다.
[왕대숙,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어요.]
그리고는 설작에게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세째 사누이, 왕대숙에게 빼앗은 논밭을 되돌려 주세요. 그리
고 소매의 얼굴을 봐서라도 그에게 복수를 하려는 생각을 하지 마
세요.]
설작은 나직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이 호남성에 다시는 발을 들여놓지 않겠네. 그리고 이
사람을 다시는 기억하지 않을 거야.]
정영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꼭 그렇게 해야되요? 그럼 왕대숙께서는 이만 돌아가
시도록 하세요. 이제는 당신이 할일은 다 끝났어요.]
왕철장은 희색이 만면하여 땅바닥에 있는 부러진 장작 토막을
집어들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 몹쓸놈들아! 너희들이 얼마나 나를 못살게 굴었느냐? 나는
이 피묻은 장작을 가보로 대대로 물려줄 것이다.)
그는 정영소와 호비에게 인사를 한 후 밖으로 걸어나갔다. 호비
는 소박하고 순진한 대장장이가 어린애처럼 좋아하는 표정을 보자
갑자기 머리 속에서 불산진 북제묘에서 있었던 참극이 떠올랐다.
그날 악패 봉천남은, 자기에게 제압을 당하여 종아사가 그렇게
모욕을 주어도 꿀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하지
만 자기가 자리를 잠깐 비운 사이 종아사 일가족은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히 살해를 한 사실이 새삼 떠올랐다.
호비는 강철산 부부의 간사함과 잔인함이 봉천남에 못지 않는
위인들이라 생각하고 만약 정영소가 떠나면 그들이 대장장이 왕가
에게 독수를 뻗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문밖으로 쫓아나가
며 소리쳐 불렀다.
[왕대숙! 당신에게 드릴 말이 있소이다!]
왕철장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리며 바라보았다.
호비는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왕대숙, 저 강가 부부는 좋은 사람이 아니외다. 그러니 어서
논밭을 팔아버리고 멀리 떠나도록 하십시요! 그들은 수단이 매우
악랄한 사람들입니다.
왕철장은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수십 년 동안 살아온 정든 고향
땅을 떠나고 싶은 생각이 없어 입을 열었다.
[그들은 영원히 호남성 경내로 들어오지 않겠다고 응낙을 하지
않았소?]
호비는 반문했다.
[그런 사람들의 말을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왕철장은 그의 말뜻을 깨달은 듯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했다.
[맞았소. 맞았소이다! 나는 내일 당장 이곳을 떠나도록 하리
다.]
그리고 한 걸음 내딛으려고 하다가 다시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당신의 존성은 어떻게 되시오?]
[나의 성씨는 호가이외다.]
[좋소, 호 나으리 우리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합시다. 당신은 남
은 한평생 동안 정소저를 잘 대해주어야 할 것이외다.]
이번에는 호비가 어리둥절하여 반문했다.
[네? 당신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왕철장은 껄껄 소리내어 웃으며 말했다.
[호 나으리, 이 왕철장은 바보가 아닌데 어찌 그런 눈치도 없겠
소이까? 정소저로 말하면 총명하고 마음씨 또한 곱기 이를데 없소
이다. 더구나 몸에 지닌 재주는 더욱 들먹일 필요가 없지요. 상대
방이 당신에게 진심으로 대하고 있으니 당신은 한 평생 그녀의 말
을 따르도록 해야 할 것이외다. 허허허!]
호비는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으나 뭐라고 대꾸하기가
거북하여 얼버무리듯이 인사를 했다.
[안녕히 가시오!]
왕철장은 말했다.
[호 나으리, 우리 다시 만납시다. 그럼 안녕!]
그리고는 풀무와 집기를 멜대에 끼고 짊어지고는 어깨를 흔들흔
들 하며 몇 걸음 내딛더니 갑자기 목청을 돋구어 동정호반의 정가
(情歌)를 부르면서 떠나갔다.
님을 그리는 그녀의 깊은 은정
그녀의 정을 져버리지 말아라.
그녀를 만나면 애정으로 대하라.
그녀를 만나지 못하면 하루에도 수십번
마음으로 생각을 해야 하느니.
약간 쉰듯한 그의 음성이지만 조용한 밤에 울려퍼지는 노랫가락
소리는 듣는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서글픈 맛을 느끼게 만들었다.
호비는 문 입구에 서서 노랫소리가 멀어져 완전히 들리지 않게
되서야 비로소 부엌으로 되돌아왔다.
강소철은 이미 정신을 차리고 온몸이 물에 흠뻑 젖은 채 서 있
었다. 강씨 집안 세 사람은 두려워 하면서도 분노에 찬 표정을 감
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약을 처방하는 신기에 대해서
는 무척 흠모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세 사람은 냉랭히 서서 고맙다는 인사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
고 노골적인 적대감을 나타내지도 않았다.
정영소는 품속에서 세 묶음의 흰 향초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
놓고는 입을 열었다.
[당신들이 여기를 떠나면 그 맹씨 집안의 사람들은 틀림없이 뒤
쫓아와 막으려고 할 거예요. 이 세 묶음의 제호향은 칠심해당을
불에 태워 만든 것인데 충분히 적을 물리칠 수 있을 거예요. 그러
나 사람을 죽여 새로운 원한을 만드는데 사용해서는 안되요.
강철산은 이 말을 듣고 비로소 얼굴이 기쁜 빛을 띠우고 말했
다.
[소사매, 자네가 여러모로 우리들을 도와줘서 정말 고맙게 생각
하네.]
호비는 순간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자기 아들의 생명을 구해주었을 때는 고맙다는 말 한 마디하지
않더니 적을 물리칠 방법을 말해 주니까 그제서야 고맙다는 인사
말을 하는군.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상대가 틀림없이 강적
인 것 같은데 맹씨 집안의 사람들이 어느 쪽의 영웅호걸이길래 이
와 같이 독을 쓰는 고수조차도 대책없이 이 철옥 속에만 갇혀 있
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로구나.)
정영소가 입을 열었다.
[소철, 귀편복의 극독에 당한 두 사람은 모두 다 맹씨 집안의
사람이겠지? 너는 정말 손씀씀이가 매섭더구나!]
그녀는 말을 하면서 한번도 소철에게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소철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이 사실은 어떻게 알고 있을까?)
그리하여 그는 말을 더듬거렸다.
[나는...... 나는.......]
강철산이 옆에서 끼어들었다.
[소사매, 소철의 그와 같은 짓은 정말 악독한 일이기에 이 우형
(愚兄)은 이미 그를 꾸짖고 혼내 주었다네.]
그리고는 소철이 걸치고 있는 옷자락을 벗기고 등을 돌려 세웠
다. 등에는 채찍 자국이 완연했고 피가 엉켜있는 것이 모두 다 생
긴지 얼마 안된 흉터인 것 같았다.
정영소는 강소철의 독을 치료해 줄 때 이미 등의 상처 자국을
보았던 것이다. 소철이 그들 두 사람을 독살한 것도 소철의 등에
나 있는 채찍 자국을 보고서야 추측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해약
이 없는 극독을 사용하는 것은 본문의 커다란 금기 사항이기 때문
에 새삼스레 한번 더 언급한 것이었다.
그녀는 선사(先師)이신 무진대사가 신신당부하며 훈계하신 말씀
을 떠올렸다.
<본문의 장기는 독을 사용하는 것이다. 우리를 보고 사람들은
매우 악랄하고 잔인하다고 하지만 사실 독을 사용하는 것이 칼이
나 주먹질보다는 한층 자비로운 것이다. 독이란 상대가 뉘우치거
나 개과천선하였을 때나 혹은 잘못 오해를 하여 상대를 해치게 되
더라도 즉시 해약을 쓸 수가 있다. 그러나 칼이나 무기로 사람을
죽였을 때는 다시 살릴 수가 없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해약이 없
는 독은 절대로 사용해서는 안된다. 상대가 아무리 간악한 자라
해도 그 사람에게 개과천선할 기회를 주어야 하느니라.>
그녀는 본문의 대계율을 둘째사형과 셋째 사누이가 항상 소철에
게 당부했을텐데 어째서 소철이 그토록 대담하게 그 계율을 어기
게 되었는지 아리송하기만 했다.
그의 등에 채찍 자국이 완연하고 종횡으로 교차된 것을 보고 부
모들의 심한 질책을 받은 것이 틀림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끓는
물속에서 찜질을 당한 것으로 보아 매우 심한 벌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영소는 허리를 구부리고 절을 하며 입을 열었다.
[사형과 사누이, 실례가 많았어요. 다음에 또 만날 기회가 있을
겁니다.]
강철산은 읍을 하며 반례를 했지만 설작은 그저 싸늘히 코웃음
쳤을 뿐 아랑곳하지 않았다. 정영소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듯 호
비에게 눈짓을 한 후 함께 바깥쪽으로 향했다.
두 사람이 문을 나서게 되었을 때 강철산이 등 뒤에서 달려오며
불렀다.
[소사매!]
정영소는 고개를 돌리자 그는 난처한 빛을 띠우고 할 말을 망설
이고 있었다. 정영소는 이미 눈치를 채고 그에게 물었다.
[둘째 사형은 무슨 분부라도 있나요?]
강철산은 겸언쩍은 얼굴로 말했다.
[그 세 묶음의 제호향은 반드시 공력이 비슷한 세 사람이 운기
를 같이 해야만이 적에게 대항할 수 있는 것일세. 소철의 공력이
너무 미천해서 이 우형은 아무래도 사매가 좀 나서서.......]
거기까지 말을 하고는 그녀가 여기 남아서 도와주기를 지극히
바라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말하기가 거북해서 '사매가 남아
서......'라는 소리만 되풀이 해서 말할 뿐 다음 말을 잇지 못했
다.
정영소는 문 밖의 대광주리를 가르키며 입을 열었다.
[대사형은 바로 저 대광주리 안에 있어요. 소매가 남긴 칠심해
당의 꽃가루는 충분히 그의 독을 해소시킬 수 있을 거예요. 둘째
사형은 어째서 이번 기회에 그와 화해하려고 하지 않으세요? 화해
를 한다면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겠어요?]
강철산은 크게 기뻐했다. 그는 줄곧 대사형이 찰거머리처럼 따
라붙어 귀찮게 하는 것에 대해 매우 골머리를 썩어왔던 터이니 강
적을 물리칠 수 있게 된 동시에 사형제 간의 불화를 해소한다면
일거양득의 묘책이 아닌가? 그는 기쁜 마음으로 연신 고맙다는 소
리를 하고 그 대광주리를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호비는 그 철문 위에서 시들어진 남화를 자기 품안에 다시 넣었
다. 정영소는 그를 한번 힐끗 쳐다보더니 강철산에게 손을 흔들어
작별의 인사말을 했다.
[둘째 사형, 당신의 얼굴에서 피가 흘러 나왔으니 몸의 독기는
이미 다 빠져 나갔을 거예요. 소매가 무례했던 점을 너무 탓하지
마세요.]
강철산은 어리둥절해졌으나 깨닫는 바가 있어 속으로 생각했다.
(소사매가 왕철장에게 나를 때리도록 한 것은 물론 내가 저지른
흉악한 짓에 대한 죄가를 치룬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호의
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설작 누이에게는 아직도 독기가
남아있는 상태이니 그녀의 피를 뽑아주어야겠다.)
그는 모든 일을 소사매가 훤히 내다보고 안배한 것임을 상기하
고는 결코 소사매의 적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사부가 남
기신 약왕신편을 빼앗겠다는 생각을 버렸다.
정영소와 호비는 다시 초가집으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종조문은
여전히 취해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꼬박 하룻밤을 바쁘게 보내고 나니 어느덧 날이 훤히 밝아오고
있었다. 정영소는 해약을 꺼내 호비로 하여금 종조문에게 복용시
키도록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각기 곡괭이를 들고 화원으로 나
가 짓밟히지 않은 남화를 뽑아서 다시 꼿꼿하게 세워 잘 심어 주
었다.
정영소는 넌즈시 입을 열었다.
[나는 이리떼들이 달려오는 것을 보고 맹씨 집안 사람들이 남화
를 빼앗기 위해 들이닥치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 나중에 소철의
목에 약초가 한 묶음 걸려 있는 것을 보고 그제서야 그 의도를 알
아차릴 수 있었죠.]
[그는 어떻게 당신의 칠심해당에 중독이 되었지요? 어둠 속이라
나는 제대로 보지를 못했다오.]
정영소는 차분한 어조로 설명하듯 말했다.
[나는 칠심해당의 독을 묻힌 투골정을 그에게 던졌으며 또한 그
투골정에 대사형이 쓴 것처럼 가장한 가짜 편지도 매달아 보내 그
들과 숲 속에서 만나도록 한 거예요. 그 투골정은 바로 대사형이
스스로 만든 독문(獨門)의 암기라서 둘째 사형과 셋째 사누이는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았던 것이죠.]
호비는 다시 물었다.
[그런데 당신은 대사형의 암기를 어디서 구했지요?]
정영소는 웃었다.
[어디 한번 알아 맞추어 보세요.]
호비는 잠시 생각해보고 나서 말했다.
[아! 그렇구려. 그 당시 당신의 대사형은 이미 당신에게 잡혀서
대광주리 속에 기절해 있었으니 그때 그의 몸에서 찾아 낸 것이구
려.]
[맞았어요. 대사형은 나의 남화를 보고 의심을 하던 터에 당신
네들이 그에게 길을 묻자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고 당신들이 뒤를
따라와 자기 스스로 대광주리 안으로 들어가게 된 셈이죠.]
두 사람이 곡괭이를 짚고 한창 흥이나서 재미있게 이야기를 하
며 웃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소리를 쳤다.
[무엇이 그렇게 우스운가!]
두 사람은 고개를 돌려보니 종조문이 게슴츠레한 눈을 하고 초
가집의 처마 아래에 서 있었다. 얼굴이 아직도 붉으레하니 술 기
운이 가시지 않은 것 같았다. 호비는 속으로 섬뜩함을 느끼고 입
을 열었다.
[영소저, 묘대협의 상처가 가볍지 않기 때문에 우리들이 빨리
돌아가야하오. 이 해약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시구
려.]
정영소는 말했다.
[묘대협은 눈에 상처를 입었다고 하셨지요. 눈이란 사람 몸에서
가장 민감한 곳이라 약을 쓰는 양의 경중에 따라 큰 차이가 있어
요. 그런데 그의 상처가 어느정도인지 모르겠네요.]
호비로서는 정말 난처한 문제였다. 그는 허물없이 그녀에게 도
움을 요청하고 싶었지만 서로 아무런 연관도 없는 젊은 여인에게
강철산이 그녀에게 부탁을 하듯이 할 수는 없었다.
정영소는 그런 호비의 마음을 아는듯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만약 내게 부탁을 한다면 같이 가 드리죠. 그러나 당신
역시 반드시 한 가지 조건을 응낙해야 돼요.]
호비는 기뻐하며 재빨리 말했다.
[응낙하리다. 응낙하리다. 무슨 일이죠?]
정영소는 살포시 미소 짓고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어요. 생각이 나면 이야기를 하지요. 그
런데 당신이 나중에 나몰라라 잡아뗄까봐 두렵군요.]
[제가 만약에 잡아뗀다면 나는 그야말로 도적같은 후레자식이외
다!]
[갈아입을 옷을 약간 챙긴 후 우리 떠나도록 하죠.]
호비는 그녀의 수척하고 연약한 몸을 아래 위로 훑어보며 나직
이 말했다.
[하루밤을 꼬박 세웠는데 너무 지치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구
려.]
정영소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어 보이고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사
쁜사쁜 방으로 들어갔다.
종조문은 밤새도록 골아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적지 않은 변고가
있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호비도 역시 자초지종을 모
두 다 설명할 수는 없어 단지 해약을 구하게 되었으며, 정소저가
독을 해소시키는 고수인데 함께 가서 묘인봉의 눈을 치료해줄 것
을 응낙하게 되었다는 말만을 했다.
종조문이 다시 질문을 하려고 했을때 정영소가 방 안에서 걸어
나왔다. 그녀는 등에 조그만 보따리를 메고 있었고 손에는 조그마
한 분재가 하나 들려 있었다.
이 화분에 심어진 꽃잎사귀는 흔히 보는 해당화와 다를 바가 없
었다. 꽃잎들이 바짝 가지 등걸에 붙어 있었으며 줄기는 무쇠와
같이 단단해 보였고, 꽃잎에는 일곱 개의 조그만 노란 점이 있었
다.
호비는 넌즈시 물었다.
[이것이 바로 그 대명이 쟁쟁한 칠심해당인가요?]
그러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깜짝 놀라 뒤로 한걸음을 물러섰다.
정영소는 홋! 하고 가볍게 웃더니 입을 열었다.
[이 꽃의 뿌리와 줄기, 그리고 꽃잎은 아주 무서운 기독(奇毒)
을 가지고 있지만 제련(製煉)을 하지 않는다면 사람을 해치지는
않아요. 다만 당신이 이것을 먹지만 않는다면요.......]
호비는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내가 소나 염소인줄 아시오? 생풀을 먹게.]
호비가 그 분재를 받아들자 정영소는 판자문의 빗장을 질렀다.
세 사람은 백마사 고을로 들어가 근처 약제 상점에 맡겼던 무기
를 찾아왔다. 종조문은 세 필의 말을 구입하고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왔던 길로 다시 달려갔다.
백마사는 조그만 고을이라 세 필의 말을 산다는 것도 수월한 노
릇이 아니었다. 단지 세 필의 말을 살 수 있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세 필의 말들은 허약했으며 날이 어둡기까지 달렸지만 겨우
이백리 길 밖에 오지를 못했다. 세 사람이 길을 재촉하는 바람에
말들은 기진맥진해서 더 달리지 못했다. 부득이 그들은 조그만 숲
속에서 야숙을 하기로 했다.
정영소는 더이상 버티기가 어려운듯 호비가 깔아놓은 마른 풀
위에 쓰러져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 종조문은 어젯밤 이미 잤
으니 오늘밤은 자기가 지키겠다고 나섰다.
호비는 한참 잠에 빠져 있는데 갑자기 동쪽에서 호랑이가 울부
짖는 소리가 들려와 깜짝 놀라 깨어났다. 호랑이가 울부짖는 소리
는 잠시 후 먼 곳으로 사라졌지만 호비는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아
입을 열었다.
[종 둘째 형, 눈 좀 붙이도록 하세요. 어차피 나는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으니 이제부터는 내가 지키도록 하지요.]
그는 잠시 동안 앉아서 운기조식을 했다.
정영소와 종조문의 숨소리를 나직이 내며 매우 곤히 잠이 든 모
습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쓸데없는 일에 간여하느라고 며칠 동안을 지체하고 말았구나.
이제 봉천남을 뒤쫓아 간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노릇일텐데 그가
북경으로 가서 장문인 대회에 참가할런지 알 수가 없구나.)
이런저런 생각에 마음이 어지러워진 호비는 품속에서 보따리를
꺼내 풀어 보았다. 시들은 남화는 보따리 속에 얌전히 놓여있었
다. 그러자 갑자기 왕철장이 부르던 연가가 문득 머리 속에 떠올
랐다.
(그렇다면 그녀는 정말 나를 좋아하고 있는데 나는 그와 같은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일까?)
정히 넋을 잃고 있는데 갑자기 정영소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당신의 그 보따리에는 무슨 보물을 숨겨 놓았나요? 나에게 보
여주면 안되겠어요?]
호비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은은한 달빛 아래
그녀는 언제 깨어났는지 마른 풀 위에 앉아 있었다.
호비는 입을 열었다.
[나에게는 보물이지만 당신이 보시면 웃을 겁니다.]
그리고 보따리를 펼쳐 그녀 앞으로 내밀며 입을 열었다.
[이것은 내가 어릴적에 평사숙께서 깎아준 대나무 칼이고, 이것
은 나와 결의형제를 맺은 형님인 조 셋째 형이 준 한송이 홍융화
(紅絨花)이며, 이것은 우리 집안 조상대대로 전해지던 권경도보이
고......]
원자의가 선물한 옥봉황을 가르키게 되자 호비는 잠시 주춤거리
더니 말을 이었다.
[이것은 친구가 선물로 준 작은 노리개이고.......]
그 옥봉황은 달빛아래 은은한 광채를 내고 있었다.
정영소는 그의 음성이 약간 이상해진 것을 느끼고 고개를 쳐들
고 입을 열었다.
[여자친구이겠죠?]
호비는 얼굴이 빨개졌으나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래요!]
정영소는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이것이야말로 값을 따질 수 없는 보물이 아니겠어
요?]
그러면서 미미하게 웃음짓더니 보따리를 호비에게 되돌려 주고
는 다시 잠을 청했다.
호비는 한참 동안 우두커니 앉아 있기만 했다. 도대체 환희인지
애수인지 자기 자신조차도 알 수가 없는 감정에 사로잡힌 것만 같
았다.
귓가에는 왕철장이 부르던 노래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녀를 만나지 못할 때에는 하루에도 수십 번을 마음에 새겨야
하나니.)
의원과 백정(白丁)
이튿날 이른 아침 세 사람은 다시 바삐 길을 재촉했다. 올 적에
는 말이 그럭저럭 빨랐기 때문에 하루 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돌아
갈 때는 다음날 밤이 어두워질 무렵에야 겨우 묘인봉이 거처하고
있는 조그마한 집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종조문은 집 밖에 있는 나무에 일곱 필의 말들이 매어져 있는
것을 보고 수상쩍은 생각이 드는지 낮은 소리로 말했다.
[자네들은 여기서 기다리도록 하게. 내가 먼저 가서 동정을 살
펴보겠네.]
그가 집 뒤로 돌아가자 안에서 몇 사람이 큰소리로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종조문은 살그머니 창 아래로 다가가 안을 들여
다 보았다.
집안에는 묘인봉이 베로 눈을 가린 채 우뚝 버티고 서 있었고
객청의 문 입구쪽에 몇 명의 사내들이 손에 각기 무기를 들고서
험악한 표정을 한 채로 서 있었다. 종조문은 실내를 돌아보았지만
큰형 조영과 동생 조능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묘대협을 보
호하기로 한 두 사람 자리에 없는 것을 보자 그만 걱정과 의구심
이 일었다.
이때 그 다섯 명의 사내 가운데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묘인봉, 당신은 눈마저도 멀게 되었으니 이 세상에 살아있는다
는 것은 고통을 더 당해야 한다는 것 밖에 없소. 내 말대로 결단
을 내린다면 이 나으리들이 손발을 놀릴 수고를 면할 수 있지 않
겠소.]
묘인봉은 흥! 하고 코웃음쳤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
자 다른 한명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타편천하무적수라고 자칭하며 몇 십년간을 강호에서 안
하무인격으로 행세해 왔지만 오늘은 순순히 이 나으리들에게 무릎
을 꿇고 큰절을 올려야 할 거외다. 그렇게 한다면 이 나으리들이
어쩌면 당신을 몇 년 동안 더 밥을 먹고 살도록 선심을 쓸 수도
있는 일이지.]
묘인봉은 나직하고도 쉰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전귀농은 어디있소? 그는 내 앞에 직접 나타날 용기도 없다는
말이오?]
먼저 입을 열었던 사내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당신같은 장님 한 명을 처리하는데 전대야께서 직접 출두하실
필요가 있겠소?]
묘인봉은 낮게 깔린 쉰 목소리로 말했다.
[전귀농이 오지 않았다고 나를 죽일 용기조차 없단 말이냐?]
바로 이때 누군가 종조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종조문은
깜짝 놀라 몸을 앞으로 반장이나 날리며 고개를 돌려보니 호비와
정영소 두 사람이 서 있었다. 호비는 그의 옆으로 다가오더니 손
가락으로 서쪽을 가리키며 나직이 말했다.
[종 첫째 형과 셋째 형이 저곳에시 도적에게 공격을 받고 있으
니 둘째 형은 빨리가서 도와주도록 하시오. 나는 이곳에서 묘대협
을 돌보겠소이다.]
종조문은 그의 무공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게다가 형
제들이 포위되었다는 말을 듣자 더 이상 묻지도 않고 즉시 허리춤
에서 판관필을 뽑아들고 서쪽으로 질풍같이 달려갔다.
그러나 종조문이 너무 허둥대는 바람에 집 안에서는 이미 그 기
척을 알아차린듯 한 사람이 소리쳐 물었다.
[밖에 누구냐?]
호비는 웃으며 말했다.
[의원 한 분과 백정 한 사람이외다.]
그 사람은 노해서 호통을 내질렀다.
[무슨 놈의 의원이고 백정이냐?]
호비는 웃으며 말했다.
[의원은 묘대협의 눈을 치료하려고 왔고, 백정은 개돼지를 도살
하려고 왔소이다!]
그 자는 노기에 찬 음성으로 한마디 욕을 하더니 달려나오려고
했다. 그러자 다른 한 사내가 붙잡고 말했다.
[적의 조호이산(調虎離山)의 계략에 빠져서는 안되네. 전 나으
리께서는 이 묘가만 죽이라고 했어. 그러니 다른 일에는 상관할
필요가 없네.]
그 자는 몇 번 투덜거리더니 제자리에 서 있았다. 호비는 원래
묘인봉이 눈이 불편하여 적에게 공격을 받을까 봐 그들을 밖으로
유인해 내려고 했던 것이다. 뜻밖에도 그들은 그와 같은 작전에
말려들려고 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때 묘인봉이 큰 소리로 물었다.
[소형제, 자네가 돌아왔는가?]
호비는 낭랑히 말했다.
[불초는 독수약왕 어르신을 모셔 왔으니 묘대협의 눈은 틀림없
이 치료하여 낫게 할 수 있을 것이외다.]
그가 독수약왕이라고 말한 것은 허장성세로서 적에게 겁을 주자
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집안의 다섯 사람은 모두 다 안색이
변하며 고개를 돌렸다. 문입구에는 거칠고 건장한 젊은이가 한 사
람 서 있었고, 그 옆에는 수척하고도 연약하며 수줍은 듯한 소저
한 사람이 서 있을 뿐 독수약왕으로 보여지는 사람은 없었다.
묘인봉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곳의 다섯 놈의 개새끼들은 소형제가 걱정할 필요가 없네.
자네는 빨리가서 종씨 삼웅을 도와주도록 하게. 도적들은 숫자로
서 우리를 누르려고 꽤나 많이 온 모양이야.]
호비가 미처 뭐라고 대답하기 전에 발걸음 소리가 울려퍼지며
맑은 음성이 들려왔다.
[묘형은 정말 귀신같이 사리를 잘 판단하시는구려. 사실 우리들
을 사람의 수로써 이기려 하고 있소이다.]
호비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놀랍게도 키가 크고 작은 십여명
의 사내들이 손에 각기 무기를 들고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
외에도 십여 명의 장정과 하인들이 높이 횃불을 쳐들고 둘러싸고
있었다. 이미 종씨 삼웅은 두 손을 뒤로 묶인 채 포박을 당하고
있었고, 한 중년의 상공이 허리에 장검을 차고 앞장을 서서 걸어
오는 것이 아닌가?
호비는 긴 눈썹과 준수한 눈매, 기골이 장대한 것이 바로 수년
전 상가보에서 만난 적이 있는 전귀농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때 호비는 싯누런 살결에 비쩍마른 어린애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체구나 모습이 크게 변하여 전귀농이 그를 알아볼 리가 없었다.
묘인봉은 고개를 젖히고 껄껄 소리내어 웃더니 입을 열었다.
[하하하! 전귀농, 네가 나를 죽이지 않는다면 하루라도 편안하
게 잠을 잘 수가 없겠지. 오늘 데리고 온 사람들이 적지 않구만!]
전귀농은 천천히 응수했다.
[우리들은 모두 자기 분수를 지키는 양민들인데 어찌 감히 사람
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겠소이까? 다만 삼가 묘대협을 모시고 우
리 집에서 며칠 묵으시도록 할 참이오. 우리들에게는 옛 친구의
정분이 있는 사이인데 그러한 대접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소.]
이 몇 마디의 말은 매우 그럴듯 했으나 의기양양해하는 빛이 말
과 표정 속에 가득 서려 있었다. 오늘날 상악(湘鄂)지방에서 위세
를 떨치고 있는 종씨 삼웅마저도 사로 잡았고, 묘인봉의 두 눈은
이미 앞을 볼 수 없는 상태라 도움을 줄 사람이 없으니 어찌 도망
칠 수 있겠느냐 하는 수작이었다.
전귀농은 입구에 서 있는 호비와 정영소는 안중에도 두고 있지
않았으며 마치 그들 두 사람이 존재를 무시하는 것 같이 행동했
다.
호비는 중과부적이고 종씨 삼웅마저 그들에게 사로잡힌 것을 볼
때에 상대방에는 고수가 적지 않은 것 같았고, 어떻게 적을 물리
쳐야 할지 실로 난감하기만 했다. 적의 정세를 살펴보니 전귀농의
등 뒤에는 두 여인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밖에 앙상하게 깡마른
노인 한 명이 손에 점혈궐(點穴 )을 들고 있었고 다른 중년의 사
내가 한 쌍의 철패(鐵牌)를 들고 두 눈에 형형한 안광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들 두 사람이 모두 강적인 것 같았다. 그외에 칠팔 명의 사내
들이 두 가닥의 길고 가늘은 쇠사슬은 들고 있었는데 그것을 어디
에 쓰려고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호비는 잠시 생각해보다가 즉시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구나! 그들은 묘대협의 눈을 실명시키기는 했지만 여전히
두려워하여 저 쇠사슬 두 가닥으로 다리를 걸어 쓰러뜨리려고 하
는 모양이군. 그의 눈이 불편한 것을 기회로 삼아 칠팔 명이 쇠사
슬로 일단 포위를 한다면 묘인봉이 아무리 무공이 고강하다 하더
라고 쓰러지지 않을 도리가 없겠지.)
호비는 전귀농을 힐끗 쳐다보니 갑자기 가슴 속에서 참을 수 없
는 노기가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남의 처를 유인해 낸 것도 묘대협이 이미 용서를 해 주었는데
독계를 한번 펼치고도 안되니, 또 다시 독계를 펼쳐 기필코 사람
의 목숨을 앗아가려고 하는구나. 그 흉악함은 실로 금수만도 못하
구나.)
사실 전귀농이 음독(陰毒)하다고는 하지만 그에게도 그럴만한
부득이한 사정이 있었다.
묘인봉의 처인 남란과 몰래 도망을 친 전귀농은 그녀가 당대 제
일의 고수의 처라는 생각을 떠올릴 때마다 밥맛도 나지 않고 마음
놓고 잠잘 수도 없었다. 조그마한 바람 소리나 풀잎 소리에도 묘
인봉이 복수를 하러오는 줄 알고 깜짝 놀라곤 했다.
처음에 남란은 전귀농에게 열정적인 치련(痴戀)에 빠져 있었지
만 그가 온종일 겁을 먹고 안절부절하며 자기의 남편을 무서워하
게 되자 조금씩 멸시하는 마음이 생겼다.
자신은 남편 묘인봉에 대해서 조금도 두려울 것이 없다고 생각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두 사람이 진정으로 서로를 사랑한다
면 설사 묘인봉의 일검에 찔려 죽는다 하더라도 대수로 울 것이
무엇이냐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전귀농이 두 사람의 어
렵게 맺어진 애정보다도 자기의 목숨을 훨씬 더 아끼고 있다는 사
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남편을 버렸고, 또한 귀여운 딸
도 버렸으며, 정절까지도 포기하면서 그를 따른 것이다.
그러나 전귀농은 애정을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것으로 여기
지 않는 것이었다. 겁에 질린 그는 자연히 세상만사가 재미없게
되어 버렸다. 그는 점점 금(琴), 기(棋), 서(書), 화(畵)에 대해
서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고, 또한 예전처럼 그녀가 화
장대 앞에 앉아서 화장을 할 때 연지를 찍는다거나 분가루를 묻힌
다던가 하는 장난을 할 여유도 잃어버렸던 것이다. 대부분의 시간
을 오로지 검을 연마하고 좌선을 하는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벼슬아치 집 소저로 태어난 남란은 남들이 주먹질을 하거나 칼
을 휘두르는 것을 제일 싫어했다. 설사 무공이 묘인봉과 같이 고
강하게 연마한다 하더라고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하는 생각을 했
다. 더우기 그녀는 무공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지만, 전귀농
이 아무리 무공을 연마해도 묘인봉의 경지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
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전귀농은 묘인봉이 살아있는한 자기의 야심은 별수없이 일장춘
몽으로 변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무리 이 세상의 모
든 재물이 자기의 것이고 강호를 뒤덮는 권세가 있다 하더라도 그
것은 어디까지나 그림 속의 떡이요, 호수에 비친 달이란 것을 알
고 있던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자신은 묘인봉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묘인봉을 반드시 죽여야만 했다. 이제는 묘인봉이 앞을 보지 못하
도록 만들었고, 세 명의 무공이 뛰어난 그의 조력자마저도 사로잡
혀 있는데다가 방안에서는 다섯 명의 고수가 자기의 명령을 기다
리고 있었다. 또한 집밖에는 십여명의 고수들이 묘인봉을 지키고
있었으며, 그밖에도 묘인봉이 알아차릴 수없는 기다란 쇠사슬을
두 가닥 지니고 있었으니 이 얼마나 절호의 기회인가?
정영소는 꼼짝하지 않고 조용히 호비 옆에 붙어서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지만, 앞에 벌어지는 상황을 모조리 보고 있었다. 그녀
는 천천히 품안을 더듬거리더니 반 토막의 양초를 꺼내고 화접자
를 꺼냈다. 초에 불을 당기기만 한다면 십시간에 주위의 모든 사
람들은 중독되어 정신을 잃고 쓰러지게 될 형편이었다. 그녀는 등
뒤에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지도 않고 즉시 화접자를 흔들어 재빨
리 초에 불을 붙였다.
어두운 밤에 촛불을 켠다는 것은 그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할리
가 없었다. 그런데 등 뒤에서 갑자기 휙! 하니 암기가 날아들었
다. 이 암기는 가까운 곳에서 던져진 것이라 정영소가 미처 방비
할 사이도 없이 양초는 두 동강이 나서 땅바닥에 떨어지고 말았
다.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려보니 십육 세 정도 되어 보이는 나이
어린 처녀가 서 있었다.
그 소녀는 정영소를 날카롭게 쏘아보며 말했다.
[얌전하게 그대로 서 있어요. 허튼 수작 부릴 생각은 하지 마세
요!]
뭇 사람들의 시선은 일제히 정영소에게 집중이 되었다. 그들은
영문을 몰라 의아해 하는 표정이었다.
정영소는 그 암기가 철추(鐵錐)인 것을 보고 담담히 말했다.
[수작은 무슨 수작을 부린다는 거예요?]
그러나 그녀는 속으로 매우 초조하게 생각했다.
(어떻게 저 나이어린 처녀가 나의 계책을 간파한 것일까? 일이
약간 어렵게 되었구나!)
전귀농은 그저 곁눈질을 한 번 했을 뿐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듯 말했다.
[묘형, 우리들을 따라갑시다.]
그 수하의 한 사내가 호비의 어깨쭉지를 세차게 밀치며 호통을
내질렀다.
[당신은 무엇하는 사람이야? 저리 비켜! 여기에는 구경거리가
없다!]
그 사내는 호비와 정영소 두 사람의 모습이 평범하여 구경하러
온 이웃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호통을 친 것이었다.
호비는 반발을 하지 않고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멍하니
벌리며 시치미를 떼고 옆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묘인봉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형제, 어서 여기를 떠나게. 나를 걱정하지 말고 방법을
강구해서 종씨 삼웅만 구출해 낸다면 이 묘가는 평생 그 은덕을
잊지 않을 것일세.]
호비와 종씨 삼웅은 동시에 탄복을 했다.
(묘대협의 의협심은 참으로 훌륭하구나. 비록 자기의 몸이 사지
에 빠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더 생각하고 있
다니......)
전귀농은 속으로 움직이는 바가 있어 호비를 가볍게 흘겨보며
생각했다.
(설마하니 저 녀석도 무슨 재주가 있단 말인가?)
그와 같이 생각하면서 그는 소리를 질렀다.
[어서 묘대협을 모셔라!]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집안에 있던 다섯 사람은 일제히 칼과
창을 쳐들고 묘인봉의 다섯 곳의 요해를 공격해 갔다. 조그마한
집의 객청이라 본래 넓지 않았는데 여섯 명이 들어가 있으니 묘인
봉은 피할래야 피할 수가 없는 것 같았다.
순간 묘인봉는 쌍장을 휘두르며 놀랍게도 두 사람 사이를 정면
으로 돌파하는 것이 아닌가? 다섯 명의 무기는 모조리 허공으로
휘두르게 되었고, 우지끈! 하는 소리가 나면서 묘인봉이 앉아있던
의자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어느덧 묘인봉은 몸을 돌려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문을 가로 막
고 서 있었다. 그는 맨손이었고 눈은 베조각으로 가리고 있었지
만, 문을 가로막고 다섯 명의 적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
것이었다.
호비는 안으로 들어가 그를 도우려고 했으나 그가 문앞에 우뚝
버티고 서는 것을 보자 그에게 믿는 데가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
다.
설령 이기지 못한다 해도 일시에 낭패를 당하지 않으리라는 생
각이 들었다.
다섯 명의 사내들은 속으로 한결같이 생각했다.
(우리 다섯 명이 힘을 합쳐서 이런 눈먼 장님 하나도 상대하지
못한다면 이후 무슨 얼굴로 강호를 떠돌아 다닐 수 있겠는가?)
묘인봉은 소리 높여 외쳤다.
[소형제, 자네는 아직도 가지 않고 있으니 도대체 언제 떠날 참
인가?]
호비는 입을 열었다.
[묘대협, 안심하십시요. 이 개새끼들 정도로는 나의 길을 막을
수 없을 겁니다.]
묘인봉은 말했다.
[좋아, 강호에서는 후배가 두렵다고 하더니 정말 훌륭한 젊은
영웅이 나타났군.]
그 말을 외치면서 묘인봉은 갑자기 사람들 안으로 뚫고 들어가
무쇠와 같은 손을 춤추듯 휘두르며 사정없이 팔 다리를 휘둘렀다.
그 위세는 실로 대단했다.
안에 있던 다섯 사람은 범상한 무리들이 아니었으나 묘인봉의
장력이 무겁고 웅후한 것을 보고는 각자 물러나서 벽에 바짝 붙어
서서 아무소리도 내지 않고 반격의 기회를 노리려 했다. 혼란 중
에 탁자는 옆으로 쓰러지고 방안의 등불마저 꺼졌다. 순간 밖에
있던 두 사람이 횃불을 높이 쳐들고 문입구로 다가섰다.
묘인봉은 두 눈이 멀었기 때문에 불빛이 아무런 소용이 없었지
만 다섯 명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돌연 한 사람이 대갈일성을 하며 창을 뻗쳤다. 이 창은 묘인봉
의 아랫배를 겨냥한 것이었고, 그 기세는 지극히 매서웠다. 그러
나 묘인봉은 두 눈이 멀쩡한 사람처럼 오른쪽 다리를 옆으로 내디
디며 손을 뻗쳐 그 창날 끝을 잡으려고 했다. 순간 남쪽모퉁이에
서 한 사람이 기척도 없이 웅크리고 있다가 벼락같이 칼을 휘둘렀
다. 퍽! 하는 소리와 더불어 묘인봉의 오른쪽 다리에 기어이 칼이
박히고 말았다.
이 사람은 퍽이나 지략이 뛰어난 자 같았다. 묘인봉이 전적으로
귀에 의지해서 적의 기척을 듣고 바람소리에 의해서 상대방의 무
기를 판가름 한다는 것을 알고는 숨을 멈추고 꼼짝하지 않고 웅크
린 채 기다렸다가 묘인봉이 손을 쓰자 소란스런 틈을 타서 칼로
내려친 것이었다.
집 안팍의 사람들은 묘인봉이 상처를 입자 일제히 환호성을 터
뜨렸다.
종조영은 호통을 내질렀다.
[소형제, 빨리 묘대협을 구하게. 더 기다렸다가는 때를 놓치
네!]
묘인봉은 다시 어깨에 채찍을 얻어맞고 있었다. 묘인봉은 이러
한 기세를 보자 내심 생각했다.
(이 기세로 미루어 보아 무기가 없다면 포위망을 뚫고 나갈 수
가 없겠구나!)
호비 역시 이 형세를 똑똑히 보고 있는 터라 자기의 칼을 반드
시 묘인봉에게 던져주어야만 그가 적을 제압할 수 있으리라고 생
각했다. 그러나 문밖에는 강적들이 적지 않은데다가 자기에게 무
기마저 없게 된다면 자신을 어찌 보호할 수 있을 것인가?
호비는 이 난관을 어떻게 뚫고 나가 묘인봉도 구하고 자기자신
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생각을 해보았으나 일시에 뾰족한 묘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형세가 다급해져 더이상 생각할 여유도 없이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묘대협, 칼을 받으십시요!]
그리고는 내력을 돋구어서는 휙! 하니 칼을 던졌다. 이 힘은 지
극히 맹렬하여 안에 있는 사람들이 손을 뻗쳐 잡으려한다면 필시
손목이 부러질 것 같았다. 오직 묘인봉만이 그 칼을 받을 수 있었
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때 묘인봉은 왼쪽팔을 서남쪽 모퉁이로
뻗쳐 적을 유인하고 있었다. 그리고 상대가 칼을 휘두르자 기다렸
다는 듯이 잽싸게 손목을 뒤집어 상대의 칼을 낚아챘다.
호비의 칼이 파공성을 일며 날아오자 묘인봉은 빼앗은 칼의 칼
등으로 날아오는 칼을 후려쳤다. 순간 챙!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면서 날아오던 칼을 문밖으로 다시 날아갔다.
묘인봉은 큰 소리로 외쳤다.
[칼은 자네가 가지고 있도록 하고, 우선 이 장님이 적을 어떻게
죽이는지 구경이나 하게.]
그는 몸에 두 군데나 상처를 입고 있었으나 손에 무기를 들게
되자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휙힉! 하니 두 번 칼을 휘두르자
다섯 명의 적은 다시 벽에 바싹 붙어버릴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평소부터 묘가검(苗家劍)의 위세를 잘 알고 있었지만 검
술에 능통한 사람이라도 단도를 쓸 줄 아는 사람이 극히 드문터라
묘인봉이 단도를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맨손과는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다. 생각이 이에 미치자 그들은 호통을 내지르며 무기를 뻗
쳐 다시 달려들었다.
이때 문밖에서 섬광이 번득이며 다시 한 자루의 칼이 집안으로
날아들었다. 이번에는 적의 진영에서 칼을 빼앗긴 그 사내에게 던
져준 것이었다.
그 자는 재빨리 칼을 받아 들고 무기를 빼앗겨 구겨진 체면을
만회하려는 듯 무섭게 칼을 휘두르며 묘인봉을 덮쳐갔다.
묘인봉은 정면에서 칼이 날아오고, 왼쪽에서는 채찍이 뻗쳐오는
것을 느꼈으나 우뚝 버티고 서서 피하거나 막을 생각을 하지 않았
다.
칼과 채찍이 자기의 몸과 반 자도 되지 않는 곳에 이르는 순간,
별안간 몸을 돌리며 휙! 칼을 휘둘렀다.
채찍을 든 사람은 오른팔이 잘라지면서 채찍이 땅바닥에 떨어졌
다. 그 사람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고, 칼을 든 자는 깜
짝 놀라 웅크리며 옆으로 몸을 굴리며 달아났다.
호비는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저것은 요자번신도( 子 身刀)라는 우리 호씨 집안의 도법인데
묘대협이 어떻게 쓸 줄 아는 것일까? 더군다나 그가 펼치는 것은
놀랍게도 나보다 더욱 더 정묘하구나!)
안에 있던 다른 네 명은 묘인봉의 수법을 보고 어리둥절하였다.
그 중 한 사람이 부르짖었다.
[묘가가 장님이 되었는데도 칼을 쓸 줄 아는군!]
전귀농은 갑자기 과거 호일도와 묘인봉이 서로 도법과 검법을
서로 전수하면서 칼과 검을 바꾸어 무예를 겨루었다는 사실을 떠
올리고 속으로 섬칫해져서 부르짖었다.
[그가 펼치는 것은 호씨 집안의 도법이고, 묘씨 집안의 검법과
는 전혀 다르니 모두들 조심하시게!]
묘인봉은 싸늘히 코웃음쳤다.
[흥! 그렇다. 오늘 너희 쥐새끼들로 하여금 호씨 집안의 도법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도록 해주마!]
그리고는 두 걸음을 내딛으며 회중포월(懷中抱月)이라는 일초를
펼쳐 칼을 선회시키며 한 번 베는 시늉을 했다. 이것은 물론 허초
에 불과했고 곧이어 폐문철선(閉門鐵扇)이라는 일초를 펼쳐 칼을
내밀면서 옆으로 휘두르자 한 사내가 허리에 칼을 맞고 바닥에 쓰
러졌다.
호비는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펼치는 것은 정말 우리 호씨 집안의 도법이로구나. 저 두
초식은 허허실실이 내포되어 있어 저렇게 변화시킬 수가 있는 것
이었구나!)
사실 묘인봉은 호일도에게 친히 도법의 오묘한 요결을 지도받은
바가 있었다. 묘인봉은 출중한 무공을 바탕으로 호일도에게 직접
전수 받았기 때문에 호비가 권경도보를 보고 스스로 연마를 하는
것과는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정묘하고 위력적이었던 것이다.
묘인봉이 도법을 전개하자 한기를 내뿜으며 번개가 치고 비바람
이 몰아치는 듯 했다. 호통소리와 함께 사승배불(沙僧拜佛)이라는
일초를 펼치자 화창(花槍)을 든 자의 어깨가 으스러지게 되었고,
잇따라 상보적성도(上步摘星刀)라는 일초를 펼치자 다시 한 사내
가 다리를 잘리운 채 바닥에 나뒹굴었다.
전귀농은 부르짖었다.
[전사제(錢四第), 나오게. 이리 나와!]
묘인봉이 크게 위세를 떨치자 집 안에는 칼을 사용하는 전사제
만이 겁을 잔뜩 집어먹고 벽에 붙어 있었다.
전귀농은 안으로 들어가 구원을 한다 해도 승산이 없을 것 같자
묘인봉을 밖으로 유인하여 쇠사슬을 이용하여 잡아야겠다고 판단
한 것이었다. 하지만 묘인봉이 문을 가로막고 있으니 어찌 그 전
가가 도망쳐 나올 수 있겠는가?
묘인봉은 이 사람이 바로 음독한 수법으로 자기의 다리에 상처
를 입힌 사람인 것을 알고 결코 도망치도록 내버려 둘 수가 없다
고 생각했다. 묘인봉은 칼을 휘둘러 그를 객청 모퉁이로 몰아붙이
고 천수장도(穿手藏刀)라는 초식을 펼쳐 맹렬히 내리찍었다. 챙그
랑! 하는 소리와 함께 그 자는 그만 칼을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그 자는 매우 교활하게도 그 기세를 빌어 바닥에 몸을 굴리며 탁
자 밑으로 기어들었다. 그는 묘인봉이 앞을 못보는 약점을 노려
일단 몸을 숨겼다가 도망치려고 했던 것이다.
묘인봉은 그러한 상대방의 의도를 아는지 모르는지 칼을 휘두르
던 기세를 빌어 다짜고짜 걸상을 집어들더니 힘껏 내던졌다.
그 바람에 마침 탁자 밑을 바로 빠져나오려 했던 그 자는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걸상에 가슴팍을 얻어맞고 말았다. 이와 같이
내던진 힘은 얼마나 강맹하겠는가? 그 자는 갈비뼈가 부러지면서
그 자리에서 혼절하고 말았다.
묘인봉은 삽시간에 잇따라 다섯 명에게 상처를 입혔다. 하지만
그는 그 자들은 모두 전귀농의 지시를 받고 일을 수행하는 것일
뿐 자기와는 아무런 원한이 없었기 때문에 살수를 펼치지 않고 중
상을 입히는 것으로서 손을 멈춘 것이었다.
삽시간에 다섯 명의 고수가 일제히 쓰러지자 집 밖의 뭇 사람들
은 아연해져 내심 생각을 했다.
(저 사람은 타편천하무적수라는 위명에 걸맞게 그 위세가 정말
대단하구나. 만약에 그의 눈이 멀지 않았더라면 우리들은 하나도
살아남지 못하겠구나.)
전귀농은 냉랭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묘형, 당신의 무공은 갈수록 더 고강해지는구려, 소제는 정말
탄복을 했소이다. 자 자, 이리 나오시오! 소제가 천룡검(天龍劍)
으로 당신의 호씨 집안의 도법을 가르침 받도록 하겠소이다.]
이어 그는 눈짓을 하며 쇠사슬을 들고 있는 사내들에게 앞으로
몇 걸음 나오도록 했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물러서도록 했다.
묘인봉은 입을 열었다.
[좋아!]
그는 전귀농이 음흉한 계략을 꾸미고 있으리라는 것을 내다보고
있었지만 지금 형세로서는 부득이 밖에 나가서 싸우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호비는 갑자기 입을 열고 말했다.
[잠깐! 전가라는 양반, 당신이 만약 호씨 집안의 도법을 가르침
받겠다면 묘대협이 친히 손을 쓸 것 없이 불초가 몇 수 가르쳐 주
도록 하겠소!]
전귀농은 조금전 호비가 칼을 던지고 받는 수법과 공력으로 미
루어 이미 그가 평범한 젊은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
다. 하지만 애당초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던지라 한번 흘겨보
고는 냉소를 했다.
[자네는 누구인가? 감히 이 전나으리 앞에서 건방진 소리를 함
부로 하다니?]
호비는 입을 열었다.
[나는 묘대협의 친구이며 조금전에 묘대협이 호씨 집안의 도법
을 펼치는 것을 보고 여간 탄복하지 않았소이다. 그의 몇 수 초식
을 기억했기 때문에 한 번 시험삼아 펼쳐보려는 것이외다. 귀하의
손에 검이 있으니 당신이 수고스럽지만 나를 상대해주셔야 하겠소
이다.]
전귀농은 울화가 치밀어 얼굴빛이 싯누래지며 입을 열려는 순간
호비는 호통을 내질렀다.
[칼을 받으시오!]
그리고는 천수장도(穿手藏刀)라는 일초를 펼쳐 가슴팍을 노리고
맹렬히 쪼개갔다. 이것은 바로 조금전 묘인봉이 전가라는 자의 손
에 들린 무기를 떨어뜨린 일초였다. 전귀농이 검을 들어 막자 창!
하는 소리가 나면서 칼과 검이 맞부딪혔다. 그러자 전귀농은 몸을
휘청거렸고, 호비 역시 한 걸음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전귀농은 본시 천룡문(天龍門) 북종(北宗)의 장문인이었다. 그
가 펼치는 천룡검법은 어릴적부터 연마한 것으로 이미 사십 년간
조예를 쌓고 있는터라 공력은 호비보다 훨씬 심후했다.
두 사람이 칼을 맞받으며 내력을 겨루게 되자 오히려 공격하던
호비가 그만 한 수 꺽이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전귀농은 상대방
이 젊은 나이에 팔 힘이 웅후한 것을 보고 자기의 예상이 빗나간
것임을 깨달았다. 그는 자기의 일검으로 상대방의 칼을 맞받아 친
다면 분명히 상대는 칼을 떨어뜨리고 충격을 주어 피를 토하며 쓰
러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겨우 한 걸음 물
러섰을 뿐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자 내심 놀람과 의아함에 휩
싸이게 되었다.
묘인봉은 문입구에 서서 호비가 칼을 휘두르는 소리와 칼과 검
이 서로 부딪히고 호비가 뒷걸음치는 기척을 듣고 말했다.
[소형제, 자네의 그 천수장도라는 일조는 매우 정확하게 펼쳤지
만 호씨 집안의 도법의 요지는 초식의 정묘함에 있는 것이지 힘으
로써 힘에 맞부딪히는데 있는 것이 아니네. 어서 물러나시게나.
이 장님이 그를 처치하도록 해 주게!]
호비는 호씨 집안의 도법의 요지가 초식의 정묘함과 기이함에
있는 것이지, 힘과 힘으로 맞부딪히는데 있지 않다는 말을 듣자
정신이 번쩍들며 속으로 생각했다.
(묘대협의 말씀을 듣고 나니 내가 궁금하게 여기던 점들을 불을
보듯 환히 깨달을 수 있구나. 적과 마주서서 힘으로 대결한다는
것은 자기의 결점으로 적의 장점을 공격하는 것이 될 것이다.)
호비는 과거 조반산이 상가보에서 무학의 정의(精義)를 해설하
던 것이 바로 묘인봉의 말하는 것과 일치하는 것을 보자 내심 기
뻐하며 큰소리로 말했다.
[잠깐! 묘대협님! 나의 도법은 겨우 일초를 시험했을 뿐이고 아
직 십여 초가 남아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전귀농에게 말했다.
[그 천수장도라는 일초의 무서움을 당신은 이제 알겠소?]
전귀농은 호통을 내질렀다.
[이 멍청한 녀석아. 그래도 내 앞에서 물러서지 못하겠느냐!]
호비는 능청스럽게 말했다.
[좋소, 당신이 승복을 할 수 없다면 내가 호씨 집안의 도법을
일일이 펼쳐 보이지. 만약에 내가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당신에게
진다면 내 당신에게 큰 절을 하리다. 그런데 만약에 당신이 진다
면 어떻게 하겠소?]
전귀농은 가슴 가득히 끓어오르는 울화를 참지 못하고 호통을
내 질렀다.
[나도 자네에게 큰절을 하지!]
호비는 웃었다.
[그럴 필요는 없소이다. 만약에 당신이 호씨 집안의 도법을 당
해내지 못할 때는 즉시 종씨 삼웅을 석방하도록 하시오. 저 세 분
은 무공 수위가 당신보다는 훨씬 고명한 편이외다. 만약에 일대
일로 싸운다면 당신은 결코 세 형님들의 적수가 되지 못할 거외
다. 사람이 많은 것에 의지하여 손을 쓴다면 어찌 영웅호걸이라
말할 수 있겠소.]
이와같은 말은 한편으로는 상대방을 격노시키자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종씨 삼웅의 화풀이를 해주자는 것이었다.
두 손이 뒤로 포박당하고 있던 종씨 삼웅은 그 말을 듣자 매우
감격했다. 본래 전귀농은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냉철하게 타산을
하는 사람이었지만 시골뜨기 같이 생긴 호비가 그와 같이 자극을
하자 자기 성질을 억누르지 못하고 생각했다.
(네 녀석이 나에게 패하면 무릎을 꿇고 큰절을 하겠다고? 그렇
게 쉽게 내가 살려줄 것 같으냐? 오늘 너는 그 깔딱거리는 작은
목숨을 내 검에 바쳐야 할 것이다.)
그는 즉시 소매자락을 걷어부치며 검결을 외하며 비스듬히 세
걸음을 옆으로 내딛었다. 그는 내심 분노를 하고 있었으나 노련한
인물답게 경솔한 공격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그는 천룡문의 정통
검법인 일자검법(一字劍法)을 펼쳐내고 있었다.
뭇 사람들은 우두머리가 손을 쓰게 되자 일제히 뒤로 물러서서
들고 있는 횃불을 높이 쳐들어 커다란 불로 이루어진 싸움의 테두
리를 형성하고 있었다.
호비는 부르짖었다.
[회중포월은 본래 허조이고, 실초는 폐문철선이외다!]
호통을 내지르면서 칼을 밀고 옆으로 베어갔다. 조금전 묘인봉
이 펼쳤던 것과 똑같았다.
전귀농은 몸을 돌려 피하며 옆으로 검을 눕혀 급히 찔러왔다.
호비는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묘대협, 다음 일초는 어떻게 되는 거지요? 나는 상대를 할 수
가 없군요!]
묘인봉은 그가 회중포월과 폐문철선이라는 두 초식을 들먹이는
것을 듣고도 별로 놀랍거나 의아하게 여기지 않았다. 왜냐하면 호
가 도법의 초식은 겉으로 보기에는 무림의 일반적인 도법과 별로
큰 차이가 없어 누구나 쉽게 흉내를 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호가 도법을 연성하게 되면 그 변화를 기묘하게 운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 특징은 공격이 날카롭고, 수비할 때에는 문호가 엄
밀하여, 공격에 수비가 갈무리되어 있고 수비가운데 공격이 곁들
어져 상대방으로 하여금 도저히 예측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었다.
호비가 다급히 외치는 소리를 듣자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부르
짖었다.
[사승배블(沙僧拜佛)!]
호비는 그 말에 따라 한 칼을 쪼개내었다. 전귀농은 장검을 비
스듬히 눕히며 호비의 손목을 찌르려고 들었다.
묘인봉은 다시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요자번신!]
그 말이 미처 끝나기 전에도 호비는 이미 요자번신이라는 일초
를 펼쳐 찍어가고 있었다.
전귀농은 깜짝놀라 급히 한걸음 뒤로 물러섰으나 쫙! 하는 소리
와 함께 장포 자락이 어느덧 칼날에 잘려나가게 되었다. 전귀농은
얼굴이 약간 상기되더니 단번에 잇따라 세 번이나 검을 휘둘렀다.
이 삼초는 신속하기 이를데 없어 그는 자신만만하게 생각했다.
(이래도 묘인봉 네가 가르쳐줄 여유가 있을 것 같으냐?)
묘인봉은 깜짝놀라 암암리에 '야단났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런
데 오히려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묘대협, 나는 이미 그의 삼검을 모두 피했소이다. 어떻게 반격
을 하지요?]
묘인봉은 그 말을 받아 즉시 말했다.
[관평헌인(關平獻印)!]
[좋소이다!]
호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관평헌인이라는 일초를 펼쳤다. 이 초
식으로 칼을 휘두르자 세찬 바람이 일며, 그 기세는 이루 말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묘인봉이 앞서 지시를 하였기 때문에 전귀농
은 무림의 일대 종파의 장문인답게 선수를 쳐서 피하고 있었다.
호비는 곧바로 칼을 옆으로 베어갔다. 이 일초는 바로 야차탐해
(夜又採海)였다. 그의 칼이 중도에 이르자 묘인봉도 부르짖었다.
[야차탐해!]
십여 초를 겨루자 전귀농은 호비의 공세에 밀려 어찌할 바를 모
르고 사지를 허우적거리며 완전히 열세에 몰렸다. 구경하던 수하
들이 놀랍고 의아한 빛을 띠우고 있는지라 전귀농은 독한 마음을
품고 그 즉시 검법을 일변시켜 빠른 속도로 검을 찔러댔다. 호비
역시 지금까지 연마한 무학을 모조리 펼쳐 신속한 일초를 펼쳐 상
대의 초식을 맞받았다.
묘인봉은 잇따라 외쳤다.
[앞으로 나아가서 칼을 휘둘러 기세를 펼치도록 하고, 다음에는
관음좌련(觀音坐蓮), 낭자회두(浪子回頭).......]
뭇 사람들은 호비가 칼날을 휘두르는 것이 놀랍게도 묘인봉이
부르짖는 것과 맞아떨어지는 것을 보고 모두 다 아연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실 이 일은 별로 신기한 일이 아니었다.
명나라 말기나 청나라 초엽에 호, 묘, 그리고 범(范), 전(田)이
네 가문의 무공은 이미 세상에서 크게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묘
인봉은 일대의 대협으로서 전문적으로 검술을 연구했기 때문에 천
룡문의 검술에 대해서도 환히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전귀농과
호비 두 사람이 싸우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없었지만 바람 소리만
듣고도 두 사람이 어떤 초식을 펼치는 것인지 분간할 수 있었다.
호비가 초식을 펼치며 칼을 휘두르는 것은 순전히 자신이 스스
로 지금까지 익혀온 무공에 의거해서 전력을 다하는 것이었다. 만
약에 묘인봉의 지도하는 소리를 기다렸다가 초식을 펼쳐낸다면 생
사가 걸린 이 싸움에서 전귀농과 같은 교활한 고수에게 어찌 버텨
낼 수가 있겠는가?
다만 그와 묘인봉이 배운 호씨 집안의 도법은 완전히 일치하지
는 않았지만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묘인
봉이 소리치는 것과 호비가 펼치는 것은 정확히 일치하며 배합을
이루어 조금도 빈틈이 없었다. 마치 미리 익숙해지도록 연습을 하
고나서 사람들 앞에서 펼쳐 보이는 것 같았다.
전귀농은 내심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 이 자는 묘인봉의 제자가 아닐까? 아니면 묘인봉은 일부
러 눈을 가리고 장님이 된 시늉을 하며 지금 상황을 모두 보고 있
는 것이 아닐까?)
이와 같은 생각이 들자 그만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호
비의 칼날은 더욱더 빨라지고 있었다. 묘인봉은 두 사람의 손씀씀
이가 빨라지자 어떤 초식을 사용하는지 분간할 수가 없어 펼쳐낼
초식을 가르쳐 줄 수가 없었다. 그는 호비에 대하여 궁금증을 느
끼며 생각했다.
(저 젊은이의 도법이 저토록 정묘하고 기이한데 어느 고수분의
문하인지 모르겠구나!)
만약에 그가 두 눈으로 볼 수 있다면 호비가 호가 도법에 정통
하고 매우 익숙한 것을 볼 수 있어 자연히 호일도에게 전수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뭇 사람들이 애워싸고 있던 테두리는 갈수록 넓어지게 되었고,
모두 다 칼이나 검날에 다칠까봐 두려워했다.
호비는 잽싸게 몸을 돌려 정영소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녀는 싸
움의 테두리 안에 서서 얼굴 가득히 걱정어린 눈빛을 드러내고 있
었다. 그녀를 쳐다보자 어찌 된 노릇인지 한창 싸움을 벌이고 있
는 위험천만의 상황에서도 그의 뇌리에는 왕철장이 떠나가며 불렀
던 네 구절의 연가가 떠오르는 것이었다.
호비는 자기도 모르게 그녀에게 빙그레 웃어 보이고는 갑자기
고개를 돌리고 호통을 쳤다.
[회중포월은 본래 허초이외다!]
이 말이 끝나기 전에 창! 하는 소리가 나며 전귀농의 장검이 땅
에 떨어지고 손과 팔에 선혈이 낭자한 채 뒤로 물러섰다. 그는 팔
을 허우적거리며 몸을 휘청하더니 입에서 울컥 한 모금의 피를 토
해냈다.
사실 원래 회중포월은 허초이었으며, 이어지는 초식은 폐문철선
이었다. 이 두 초식 가운데 하나는 허초(虛招)이고, 하나는 실초
(實招)였다.
이날 밤 전귀농은 묘인봉과 호비가 이미 한 번씩 펼쳤기 때문에
그 초식을 훤히 알고 있었다. 한창 싸우던 차에 갑자기 '회중포월
은 본래 허초이다!'라는 한마디를 듣자 본능적으로 다음 초식인
폐문철선에 대하여 방비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호가 도법의 오묘한 점은 바로 이런 허허실실을 병행하
면서 사용하는 것으로 갑자기 허초가 실초로 변하는 것이었다.
호비는 이 회중포월이라는 초식을 느탓없이 실초로 바꾸어 칼을
선회시키듯 휘어감으며 그의 손목을 내려치고, 잇따라 장풍을 펼
쳐 그의 가슴을 강렬한 일장으로 적중시킨 것이었다.
호비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어째서 그토록 성질이 급하오. 내 말을 끝까지 다 들어
야 하지 않소? 나는 '회중포월은 본래 허초이지만 실초로 변화시
키더라도 상관 없겠소' 라고 말할 참이었는데 당신은 앞에 말한
두 마디만 듣고 다음 두 마디는 듣지 못했구려!]
전귀농은 가슴에 피가 들끓으면서 다시 또 한모금의 피를 토할
것 같았다. 오늘은 자기가 완전히 패배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묘인봉의 눈이 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마
음이 일자, 억지로 진기를 끌어올려 토해낼 듯한 피를 억누르며
부하들에게 손가락질하여 종씨 삼웅을 풀어주도록 했다. 그리고는
황급히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떠나려고 했으나 그만 더 참지 못하
고 선혈을 한모금 토해내는 낭패한 꼴을 보이고 말았다.
그 철추를 내던졌던 나이 어린 소저는 전청문(田靑文)으로서 바
로 전귀농의 딸이며 그의 전처 소생이었다. 그녀는 부친이 중상을
입은 것을 보자 급히 달려와 부축하며 나직이 말했다.
[아버님, 우리 그만 가도록 해요?]
전귀농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뭇 사람들은 우두머리가 없어지게 되자 승리를 장담하던 호기는
사라지고 비실비실 뒷걸음질 쳤다.
묘인봉은 집안에서 상처를 입은 다섯 사람을 하나 하나씩 내 던
졌다. 뭇 사람들은 그들을 부축해서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나갔다.
정영소가 부르짖었다.
[이봐요! 소저, 암기를 가지고 가세요!]
그리고 오른손을 쳐들어 철추를 전청문에게 날려 보냈다.
전청문은 암기에는 자신이 있는듯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왼손
을 뒤로 젖히며 가볍게 철추를 낚아챘다. 그 수법은 지극히 민첩
했다. 그러나 철추를 막 낚아채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펄쩍 뛰며
철추를 땅바닥에 팽개쳤다. 마치 그 철추가 매우 뜨거운 쇳조각이
나 되는 것처럼 연신 손을 털었다.
호비는 껄껄 소리내어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하하하! 적갈분이로군!]
정영소는 두 손으로 입을 막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바로
철추에다가 적갈분을 뿌려 놓았던 것이다.
삽시간에 전귀농의 일행은 한 명도 남지 않고 모두 떠나가 버렸
다.
묘인봉이 조그만 집은 다시 칠흙과 같은 어둠에 휩싸이게 되었
다.
종조영은 낭랑히 입을 열었다.
[묘대협, 저 놈들은 오늘 패해서 돌아갔으니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외다. 우리 삼형제는 보호해 드릴 능력이 모자라 정말 부끄럽
소이다. 묘대협의 두 눈이 빨리 완쾌하시기를 바라겠소이
다......]
그리고는 다시 호비에게 입을 열었다.
[소형제, 우리의 세 형제가 자네를 친구로 사귄 이상 훗날 어떤
일이 생긴다면 기꺼이 사력을 다해 도와 주겠네!]
세 사람은 포권을 해 보이더니 곧장 재빠른 걸음으로 떠나갔다.
호비는 그들 세 사람이 실수를 하여 사로잡힌 것을 몹시 부끄러
워하며 급히 떠나려 하는 것을 알고 더 이상 그들을 말리지 않았
다. 묘인봉 역시 은원을 분명히 가릴 줄 아는 사람이었지만 평소
에 말수가 적은 사람이라 그저 두 손을 마주 잡고 반례를 했다.

야속한 운명
정영소는 입을 열었다.
[두 분의 무공이 실로 놀라와서 저로 하여금 크게 시야를 넓혀
주었군요. 묘대협!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제가 눈을 봐 드리겠어
요.]
그들 세 사람은 집안으로 들어갔다. 호비는 쓰러진 탁자와 의자
를 바로 세우고 등잔불을 켰다.
정영소는 천천히 묘인봉의 눈에 두른 베 조각을 떼어내고 손에
촛대를 들고 자세히 살펴 보았다. 호비는 묘인봉의 눈은 보지도
않고 정영소의 표정만 살피고 있었다. 그녀의 태도를 보며 묘인봉
의 상한 눈이 치유될 수 있는가 없는가를 알아 보려고 했다. 그러
나 정영소의 눈동자는 청옥처럼 맑고 깨끗하여 마치 상큼한 이슬
방울 같았으며 얼굴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듯 침착한 얼굴을
하고 있어 그녀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묘인봉과 호비는 모두 담력이 새고 견식이 넓은 사람들이었지만
이 순간 만큼은 불안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강적의 포
위망에 갇힌 것보다 그 초조와 불안함은 더 한 것 같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으나 정영소는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을 뿐 아무 말
도 하지 않았다.
묘인봉이 빙긋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 독약의 약성이 독한데 상당한 시일이 흘렀소이다. 치료하기
가 어렵다면 소저는 숨기지 말고 말해보시오.]
정영소는 담담히 말했다.
[보통 사람처럼 치료를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묘대협
은 결코 보통 사람이 아니잖아요?]
호비는 의아하여 물었다.
[아니, 왜 그런 말씀을 하는 것이오?]
정영소는 설명하듯 말했다.
[묘대협은 타편천하무적수라고 일컬어지는 만큼 무공이 매우 고
강하니, 시력 또한 보통 사람들보다 뛰어난 것이 아니겠어요? 게
다가 내력이 심후하니 두 눈은 틀림없이 형형할텐데 감히 나의 변
변치 않은 의술로서 치료를 하다가 그와 같은 신채(神采)를 잃게
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어요?]
묘인봉은 껄껄 소리내어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아가씨의 말솜씨가 보통이 아닌 것으로 보아 의술 또
한 지극히 정묘하겠구려. 그런데 일진대사(一嗔大師)와는 어떻게
되시는 사이요?]
정영소는 대답했다.
[묘대협께서는 선사와 잘 아시는 분이시군요......]
묘인봉은 어리둥절하며 그 말을 가로채듯 물었다.
[일진대사는 이미 돌아가셨소이까?]
정영소는 간단히 대답했다.
[네!]
묘인봉은 벌떡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불초는 소저에게 할 말이 있소이다.]
호비는 그의 안색이 달라진 것을 보고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했
다.
(정소저의 사부는 독수약왕으로 본명은 무진이라 하는데 어째서
묘대협은 그를 일진이라 부르는 것일까?)
묘인봉은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과거 존사와 불초는 조그마한 충돌이 있었고 불초가 무례하게
도 존사에게 상처를 입혔던 적이 있었소.]
정영소는 나직이 탄성을 발하며 말했다.
[아! 선사님의 왼손에 손가락이 두 개 없는데, 그것은 묘대협의
검에 잘린 것인가요?]
묘인봉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렇소. 그 충돌이 있은 이후 존사께서는 곧바로 보복을 했기
때문에 피장파장이 되어 서로 빚을 갚은 셈이지요. 그래서 전날밤
이 소형제가 존사에게 구원을 청하러 간다고 했을 때 불초는 스스
로 부끄러워졌으며 헛되이 마음을 쓸 뿐이라고 생각했소이다. 그
런데 오늘 소저가 이곳으로 왔다 하기에 불초는 존사의 명을 받들
어 나에 대한 원한을 은혜로 갚으려고 온 것이라 생각하고 무척
감격했소이다. 그러나 존사께서 이미 세상을 떠나셨다면 소저는
그와 같은 옛일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구려?]
정영소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저는 몰라요.]
묘인봉은 몸을 돌려 내당으로 들어가더니 무쇠로 된 상자를 하
나 들고 나와 정영소에게 내밀며 말했다.
[이것은 존사의 유물인데 소저가 한번 보면 금방 알게 될 것이
오.]
그 무쇠 상자는 사방이 여덟 치 정도되는 네모 상자였다. 잔뜩
녹이 쓸어 있어 오래 전의 물건임을 알 수 있었다.
정영소가 상자의 뚜껑을 열고 보니 그 상자 안에는 조그만 뱀의
뼈가 있었고, 또 조그마한 자기병이 하나 들어 있었다. 그 병에는
사약(蛇藥)이라는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 그녀는 이러한 약병은
사부님이 항상 사용하던 물건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조그만 뱀의
뼈는 어디에 쓰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묘인봉은 담담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존사와 나는 서로 사소한 말다툼을 하다가 싸우게 된 것이외
다. 이튿날 존사께서는 사람을 보내 이 무쇠 상자를 나에게 전해
주며 다음과 같은 전갈을 했지요. '만약 담력이 있다면 상자를 열
어보시오. 그렇지 않으면 강물 속에 던져버리고 그만두시오.' 나
는 물론 자존심이 있어서 뚜껑을 열어 보았소이다. 그러자 이 안
에서 이 조그마한 뱀이 뛰쳐나와 나의 손등을 물어 버렸소. 이 뱀
은 매우 지독하기 이를데 없어 나의 팔은 금방 새카맣게 중독되어
버리는 것이었소. 그러나 존사께서는 상자에 별도로 사약을 넣어
두었기에 나는 그 해약을 먹고 생명에는 지장을 받지 않았으나 그
고통은 정말 감당을 하기가 어렵더구려.]
그리고 나서 그는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호비와 정영소는 서로 마주보며 웃었다. 이러한 행동은 독수약
왕이 아주 좋아하는 장난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묘인봉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미리 말한 것처럼 이 묘가는 결코 다른 사람의 신세를 지
지 않는 사람이오. 소저가 나를 치료해 주려는 호의는 고맙지만
그 분이 살아계셨다면 결코 그의 본뜻은 그렇지 않으리라고 생각
되는구려. 소저, 여기까지 찾아오느라고 정말 수고가 많으셨소이
다. 불초는 이에 사의를 표하는 바이오.]
그는 읍을 하고는 몸을 일으키더니 문가로 다가가 손님을 전송
하려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호비는 속으로 탄복했다.
(묘인봉의 행위는 그야말로 옛사람이 남긴 작풍을 그대로 이어
받고 있구나...... 호탕하고 시원시원한 것이 '대협'이라는 두 글
자가 정말 부끄럽지 않구나!)
정영소는 몸을 일으키지 않고 입을 열었다.
[묘대협, 사부님은 일진이라는 칭호를 버리신지 오래입니다.]
묘인봉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정영소는 다소곳이 대답했다.
[우리 사부님이 출가하기 전에는 성질이 매우 조급하고 거칠었
지요. 그러나 그가 출가한 이후에는 법명을 대진(大嗔)이라고 했
습니다. 그 후에 심성을 갈고 닦아 수양을 쌓고는 일진이라는 법
명으로 바꾸신 것이지요. 만약 묘대협이 선사와 손을 쓸때 선사님
이 일진이라고 불리지 않고 대진이라고 불리우고 있었다면 이 무
쇠 상자 안에는 오직 독사만 있었고 해약은 없었을 거예요.]
묘인봉은 아!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정영소는 다시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 어르신께서 저를 제자로 거두어 들였을 때의 법명은 미진
(徵嗔)이었으며, 삼 년 전 그 어르신은 무진이라 바꾸셨지요. 묘
대협께서는 너무나 우리 사부님을 과소평가하신 것 같군요. 사람
됨이란 수양을 쌓아 올바르게 변할 수 있다는데 더 의미가 있는
일 아니예요?]
묘인봉은 다시 아! 하는 소리를 내질렀다. 정영소는 다소곳이
재차 말을 이어갔다.
[그 어르신이 극락세계로 왕생하게 되었을 때는 이미 대철대오
(大徹大悟)하시고 무진무희(無嗔無喜)의 경지에 도달하셨는데 어
찌 그대와의 조그마한 옛날 원한을 마음 속에 두셨겠어요?]
묘인봉은 자기 무릎을 치며 말했다.
[맞았소! 나는 확실히 그 고인(故人)을 과소평가했구려. 헤어진
지 십여 년이 되었는데 그 분이라고 해서 이 묘인봉처럼 조금도
수양에 진전이 없으리란 법은 없지? 소저의 존성은 어떻게 되시
오?]
정영소는 방긋 웃어 보이며 말했다.
[저의 성은 정씨예요.]
그리고 보따리 안에서 나무상자를 꺼내더니 뚜껑을 열고 조그만
칼과 금침을 하나 꺼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묘대협, 몸을 편하게 하시고 혈도를 풀어놓도록 하세요.]
묘인봉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소곳이 말했다.
[알았소.]
호비는 정영소가 칼과 침을 들고 묘인봉에게 다가가자 갑자기
하나의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묘대협과 독수약왕은 서로 원한이 있는데 강호의 인심이란 것
은 헤아리기 어려운 법이다. 만약에 그들이 정소저로 하여금 치료
를 구실로 삼아서 독수를 쓰려는 흉악한 계책을 안배하여 놓았다
면 또 다시 살인의 방조자로 이용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묘대협께
서 전신의 혈도를 풀고 있는 상태이니 그의 요혈을 단지 금침으로
가볍게만 찔러도 그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주저하고 있는데 정영소가 고개를 돌려 작은
칼을 내밀며 말했다.
[이것 좀 들고 계세요.]
그녀는 문득 그의 안색이 달라진 것을 보고 눈치를 챈 듯 웃으
며 입을 열었다.
[묘대협은 마음을 놓고 계신데 오히려 당신이 불안해 하는군
요.]
호비는 말했다.
[만약 내 상처를 치료해 주는 것이라면 나는 백 번이고 천 번이
고 안심을 할 수가 있소이다.]
정영소는 넌즈시 물었다.
[당신은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나요, 아니면 나쁜 사람이
라고 생각하나요?]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그녀의 말에 호비로서도 전혀 생각할 여지
없이 그대로 대답했다.
[당신은 물론 좋은 사람이죠.]
정영소는 매우 기쁜듯 방긋 웃어 보였다. 그녀는 깡말라서 아릅
답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활짝 웃는 구김살없는 맑은 표정은 마
치 봄꽃이 막 피어 난 것처럼 매력이 있었다.
호비는 속으로 더 이상 의심을 하지 않고 마주보며 웃음을 지었
다. 정영소는 다짐을 받듯 물었다.
[당신은 정말 나를 믿으세요?]
그러나 그녀는 대답을 기다리지 못하고 얼굴을 살짝 붉히면서
얼굴을 돌렸다. 그녀는 감히 호비의 눈빛을 마주 대할 수가 없었
던 것이다.
호비는 손가락으로 자기의 이마에 가볍게 꿀밤을 한대 먹이고
웃었다.
[아이고! 이 멍청한 녀석!]
그리고는 내심 의아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녀가 자기를 믿느냐고 물으면서 어째서 얼굴을 붉히는 것일
까?)
그의 뇌리에는 왕철장이 불렀던 연가가 다시 떠올랐다.
(님을 기다리는 그녀의 깊은 은정, 그녀의 정을 저버리지 말아
라. 그녀를 만나면 애정으.......)
정영소는 금침을 들고 묘인봉의 눈 위에 있는 양백혈(陽白穴)과
눈 옆의 정명혈(晴明穴), 눈 밑의 승읍혈(承泣穴) 세 곳의 혈도를
차례로 한 번씩 찌르더니 다시 칼로 승읍혈 아래쪽에 피부를 약간
도려내고 다시 금침을 찢어진 살갗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엄지손가락으로 침끝을 눌렀다. 잠시 후 손가락을 떼자 금침은 속
이 비어 있는듯, 피가 금침의 끝으로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검은
피가 자색으로 변하게 되고 점차로 붉은 색으로 변했다.
호비는 의술에 대해서 문외한이었지만 피의 색깔을 보고 독액이
이미 다 빠져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어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젠 됐군요!]
정영소는 칠심해당에서 잎사귀 네 개를 따더니 그것을 다져 묘
인봉의 눈에 발랐다. 묘인봉의 얼굴 근육이 미미하게 움직였다.
그러자 앉아 있던 의자가 뚝! 하는 소리를 냈다.
정영소는 넌즈시 입을 열었다.
[묘대협, 호 오라버니의 말에 의하면 당신에게는 천금같은 딸이
있다고 하던데 매우 귀엽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지금은 어디에 있
나요?]
묘인봉은 담담히 말했다.
[이곳은 너무 시끄러워 이웃집으로 보냈다오.]
정영소는 베조각으로 그의 눈을 감싸며 말했다.
[됐어요! 사흘 후 통증이 가시고 눈이 가려울 때 베조각을 풀어
내면 됩니다. 이제 그만 들어가셔서 푹 쉬세요. 호 오라버니, 우
리는 밥을 지어야겠어요.]
순간 묘인봉은 갑자기 생각이 난듯 호비를 향해 물었다.
[소형제, 자네에게 한마디 묻겠네. 요동대협 호일도는 자네의
백부님인가 아니면 숙부님인가?]
사실 호비가 호가 도법으로 전귀농을 격퇴시킬 때 묘인봉은 친
히 목격하지는 못했지만 기척만 듣고도 그의 도법에 쌓인 조예가
엄청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만약에 호일도에게서 바로 전
수받은 것이 아니라면 결코 그와 같은 재간을 지니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호일도에게 아들이 하나 있었으나, 그 아들은 이미
살해당해 강물 속으로 던져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호비를
호일도의 조카라고 추측한 것이었다.
호비는 씁쓸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 요동대협은 저의 백부님도 숙부님도 아닙니다.]
묘인봉은 무척 이상스럽게 생각했다.
(호씨 집안의 도법은 평소 외부의 사람에게 절대로 전수하지 않
는다. 더우기 이 젊은이의 성이 분명히 호씨가 아닌가?)
이와 같은 의문이 일자 그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호일도 대협과 어떤 관계인가?]
호비는 속으로 여간 괴롭지 않았다. 다만 묘인봉과 자기의 부친
이 도대체 어떤 관련이 있는지 모르기에 이대로 자기의 신분을 밝
히기가 어려워 넌즈시 입을 열었다.
[호대협이라구요? 그 분은 세상을 떠난지 오래된 분인데 제가
무슨 복이 있어서 그 분의 이름을 들먹일 수 있겠소이까?]
그러나 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 한평생에 아버님, 어머님을 직접 부르고, 그 분들이 대답하
는 소리를 한마디라도 들을 수 있는 복을 타고 났다면 더 이상 바
랄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묘인봉은 한참 동안 호비를 바라보면서 내심 그럴리가 없다는
듯 미미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침실로 들어갔다.
정영소는 호비의 얼굴에 침울한 빛이 감도는 것을 보고 그를 기
쁘게 해주려고 말했다.
[호 오라버니, 당신은 반나절 동안이나 마음을 졸이고 있었으니
이제는 좀 쉬도록 해요.]
호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나는 피곤하지 않소.]
정영소는 말했다.
[잠깐 앉아 보세요. 제가 드릴 말씀이 있단 말이예요.]
호비는 그 말에 따라 앉았다. 그런데 엉덩이가 허전한 느낌이
드는 순간 우지끈! 하고 의자가 산산조각이 나는 것이 아닌가?
정영소는 박장대소를 하며 말했다.
[오배 근이나 되는 황소도 당신보다는 무겁지 않을 거예요!]
호비는 하반신의 단련이 지극히 착실하여 의자가 부서지는 동시
에 재빨리 다리에 힘을 주어 쓰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의자가 부
서진 이유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정영소는 웃으면서 설명하듯 말했다.
[칠심해당의 잎사귀를 살갗에 붙이면 그 고통을 칼로 찌르는 것
보다도 열 배는 더 고통스러워요. 아마 당신이었다면 입에서 '엄
마!'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을 거예요.]
호비는 그제서야 어떻게 된 노릇인지 알아차리고 씩 웃었다. 원
래 조금전 묘인봉은 극심한 고통을 내색하지 않고 참고 있었지만
한가닥의 내경(內勁)을 끌어올리는 바람에 어느덧 의자는 힘만 살
짝 주어도 폭삭 무너질 정도로 박살이 나 있었던 것이다.
호비와 정영소 두 사람은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들어 묘인봉에게
식사를 함께 하도록 청했다. 묘인봉은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물
었다.
[술을 마셔도 됩니까?]
정영소는 방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드세요. 음식을 가릴 필요는 없으니 드시고 싶은 것이 있다면
마음대로 드세요.]
묘인봉은 고량주를 세 병 가져와서 각자 앞에다 한 병씩 놓고는
입을 열었다.
[사양하지 마시고, 자기 양껏 드시도록 하시구려.]
그리고 자신은 커다란 밥그릇에 술을 반쯤 따라 고개를 젖히며
단숨에 들이켰다. 호비 역시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그와 더불어
반 그릇의 술을 마셨다.
정영소는 술을 마시지 않고 술을 반쯤 칠심해당의 화분에 부으
며 말했다.
[이 꽃은 술을 주어야지, 물을 주면 죽고 말아요. 나는 제호향
을 재배할 때 이 이치를 깨닫게 되었어요. 그러나 우리 사형들과
사누이는 이 원리를 몰라 십여 년이라는 세월을 허비했지만 끝내
재배에 성공하지 못했어요.]
그리고 나머지 술 반 병을 묘인봉과 호비에게 나누어 따라주고
자신은 그들을 벗하며 음식만 먹었다.
묘인봉은 다시 반 그릇의 술을 마시자 주홍이 오르는 듯 물었
다.
[호형제, 자네의 도법은 누가 가르친 것인가?]
[가르쳐 준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단지 도보에 그려진 도식과
해설을 보고 혼자 익힌 것이지요.]
묘인봉은 '음!'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비는 다시 설명하듯
말했다.
[나중에 홍화회의 조 세째 두령을 만나게 되어 태극권의 몇 가
지 요결을 전수받은 적이 있지요.]
묘인봉은 무릎을 탁치며 부르짖듯 물었다.
[천수여래 조반산, 그 조 셋째 두령 말인가?]
[네. 그렇습니다.]
묘인봉은 연신 고개짓을 하며 말했다.
[그러니까 무리는 아니지. 무리는 아니야.......]
호비는 영문을 몰라 반문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묘인봉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오래전 부터 홍화회의 진총타주(陳總舵主)는 호걸 중의 호걸로
서 의협의 일을 펼치고 여러 두령들도 그에 못지 않다는 소리를
들었지.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분들이 모두 은거해 버려 이 묘아
무개는 그분들을 만나빌 인연이 닿지 않았다네. 나는 이것을 실로
한평생 유감으로 여긴다네.]
호비는 그의 말 속에 조반산을 지극히 높이 평가하는 뜻이 서려
있음을 알고 속으로 무척 기뻤다.
묘인봉은 술병을 꺼꾸로 들고 그릇에 붓더니 한꺼번에 벌컥 벌
컥 마시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탁자 위에 놓인 칼을 더
듬어 잡고는 말했다.
[형제, 옛날 나는 호일도 대협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는 나에게
호가 도법을 한 수 가르쳐 주었다네. 오늘 나는 그 도법을 이용해
서 강적을 물리친 것이고, 자네 역시 그 도법을 펼쳐 전귀농을 패
배시킨 것일세. 그것이 바로 호가 도법이란 말일세. 허허허! 정말
훌륭한 도법이야. 정말 훌륭한 도법이지!]
그리고는 앙천대소를 하며 칼을 들고 밖으로 나가 호가 도법을
처음부터 끝까지 펼치는 것이었다.
그의 보법은 차분하면서도 온건하였고, 칼날을 춤추듯 하면서
때로는 우아한 곡선과 정지 상태를 이루며 서서히 펼치다가 갑자
기 강맹하고도 신속하게 펼치는 등 일초 일식이 모두 세찬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호비는 정신을 집중하고 그가 펼치는 도법을 살펴보았다. 과연
도보에 기재된 것과 다름없었지만 칼을 펼쳐내는 기세가 잘 수렴
(收斂)되어 있어 자기 자신이 펼치는 것보다 훨씬 완만하게 느껴
졌다. 호비는 그가 자기가 똑똑히 볼 수 있도록 일부러 동작을 느
리게 하며 한 동작씩 끊어서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묘인봉은 한 가지 도법의 수순을 다 마치더니 칼을 비껴들고 서
서 말했다.
[소형제, 자네가 연마한 도법의 조예만으로도 그 전귀농을 패퇴
시키기에는 충분하지만 나중에 내 눈이 완전히 치료된 이후에 나
와 겨루어 맞수가 되기에는 아직도 부족한 점이 없지 않아 있네.]
호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야 물론이죠. 이 후배가 어찌 묘대협의 적수가 되겠소이까?]
묘인봉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 말은 틀렸네. 과거 호대협은 이 도법으로 나와 꼬박 닷새를
싸웠으나 시종 승부를 낼 수가 없었다네. 그가 칼을 쓰는 수법은
자네보다도 훨씬 완만했으며 또한 수렴된 상태였다네.]
호비는 어리둥절해졌다.
[원래 그랬습니까?]
[그렇다네. 주인으로서 손님을 업수이 여기는 것보다 차라리 손
님이 주인에게 무례를 범하는 것이 낫다는 말이 있다네. 또한 여
린 것이 노련한 것 보다 낫고, 느린 것이 급한 것 보다 뛰어나다
네. 전(纏), 활(滑), 교(絞), 찰(擦), 추(抽), 절(截)이라는 것보
다 전(展), 말(抹), 구(鉤), 타(朶), 감(坎), 벽(劈)이 훨씬 뛰어
나다네.]
주인이 손님을 업수이 여긴다든지, 손님이 주인에게 무례를 범
한다는 말은 모두 칼을 펼쳐내는 기세를 말하는 것이었다. 칼끝으
로 적의 무기를 밀어젖히는 것을 여린 것이라 하고 하며, 칼자루
에 가까운 칼날로 적의 무기를 밀어젖히는 것을 노련한 것이라 했
다. 그리고 칼날이 상대에게 밀리듯 하면서 약간 늦추는 것이 느
린 것이고, 칼로 먼저 막는 것이 급한 것이었다. 그리고 전, 활,
교, 찰 등등은 모두 칼을 쓰는 여러 법문(法門)이었다.
묘인봉은 칼을 거두고 칼집에 꽂더니 다시 들어와 젓가락을 들
고 밥을 뜨면서 말했다.
[자네가 착실하게 그 이치를 깨닫는다면 훗날 반드시 무림의 영
웅이 될 것이며, 강호를 주름잡게 될 것일세.]
호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젓가락질을 하면서 속으로 그 말을 생
각하느라고 젓가락을 허공에 든 채로 넋을 잃고 있었다.
정영소는 호비의 젓가락을 자기의 젓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웃었다.
[밥을 먹지 않을 건가요?]
호비는 골똘히 도법에 대한 요결을 마음 속에서 되새기고 있는
중이라 자기도 모르게 전신의 공력이 오른 팔에 쏠려있었다. 정영
소가 젓가락으로 두드리자 자연히 자신의 젓가락에 반탄력이 생겨
탁! 하는 가벼운 음향과 더불어 정영소의 젓가락이 튕겨오르며 대
뜸 네 동강이 났다.
그녀는 아! 하고 나직이 탄성을 내지르더니 웃으며 말했다.
[정말 이렇게 자기 재간을 자랑할 거예요?]
호비는 웃으며 재빨리 말했다.
[미안하게 되었구려. 나는 묘대협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하느라
고 그만 정신이 팔려서......]
그리고는 스스럼없이 자기 젓가락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정영소
는 그 젓가락을 받아 음식을 먹기 시작했지만 호비는 계속 중얼거
리고 있었다.
[여린 것은 노련한 것보다 뛰어나고, 느린 것은 급한 것보다 뛰
어나며, 주인으로서 손님을 업수이 여기는 것보다 차라리......]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정영소는 자기가 먹던 젓가락으
로 아무 거리낌없이 밥을 먹고 있었다. 그는 그 모습을 보고 얼굴
이 붉어졌다.
그녀가 먹고 있는 젓가락을 받아서 닦아주기도 그러했고, 그렇
다고 체면치레로 공연히 한마디 한다면 더 어색할 것 같았다. 그
는 아무 말없이 부엌으로 달려가 다시 젓가락을 가져왔다.
호비는 다시 밥을 입에 넣고 반찬을 집으려고 젓가락을 내밀었
다. 묘인봉도 마침 젓가락을 뻗쳐내고 있던 중이었다. 그는 자연
스럽게 호비의 젓가락을 막으며 말했다.
[이것은 '절(截)'자의 요결일세.]
호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소이다. 공교롭게 마추친 것이지요.]
그리고 다시 젓가락으로 반격을 했다. 그러나 묘인봉은 젓가락
으로 매우 엄밀하게 수비를 하고 있어 그가 아무리 사방팔방으로
반찬을 집으려해도 시종 쟁반까지 젓가락을 뻗쳐낼 수가 없었다.
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칼을 써서 싸울 적에 그는 눈으로 사물을 볼 수는 없었으나,
무기가 일으키는 바람 소리로 무기를 구분하였고 적의 공격방향을
분명히 감지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젓가락을 뻗쳐내며 아무 소리
도 내지 않고 바람소리도 일으키지 않고 있는데 도대체 어떻게 알
아차리는 것일까?)
두 사람이 젓가락으로 밀고 밀리는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몇초를
교환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호비는 깨닫는 바가 있었다.
원래 묘인봉이 이때 사용한 초식은 그의 노련한 경험을 바탕으로
상대방의 공격을 예상하고 제압하는 수법을 쓴 것이었다. 다시 말
해 반찬 쟁반의 위치를 파악한 후, 상대방의 젓가락이 먼저 부딪
혀 오기를 기다려 비로소 임기응변의 수법을 쓴 것이었다.
이것은 바로 손님으로서 주인을 범한다는 것이고, 느린 것이 급
한 것을 제압한다는 도리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었다.
호비는 이와 같은 이치를 깨닫게 되자 다시는 젓가락을 신속히
뻗쳐 반찬을 낚아채려 하지 않고, 젓가락을 허공에 든 채 움직이
지 않고 있다가 묘인봉의 젓가락을 주시하면서 자기의 젓가락을
조금씩 조금씩 아래로 내리며 접시에 가까이 다가갔다. 끝내는 젓
가락이 반찬에 닿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동작은 전광석화
와 같이 빠르고 날쌔게 반찬을 집었다. 물론 묘인봉은 젓가락이
움직이는 것을 볼 수가 없었으므로 자연히 막을 수가 없었다.
묘인봉은 젓가락을 탁자 위로 내려놓으며 껄껄 소리내어 웃었
다.
호비는 자신이 접시에 담은 반찬을 먹을 수 있게 되자 진정 그
도법의 요결을 깨닫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또한 되돌아
볼때 쓸데없이 너무 많은 기운을 써서 전귀농을 상대했음을 깨닫
고 기쁜 마음 한구석에 부끄러운 마음이 일었다.
정영소는 그가 끝내 반찬을 집는 것을 보고 살며시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여간 기뻐하는 것이 아니었다.
묘인봉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호가 도법을 전수받은 사람을 오늘에서야 발견하게 되었구려.
아, 호형. 호형!]
그러나 그의 음성은 매우 처량하기 이를데 없었다.
정영소는 그와 호비 사이에 어떤 풀 수 없는 어려운 문제가 있
다는 것을 직감하고 그 일을 더 들먹이면 좋지 않을 것 같아 슬쩍
화제를 돌렸다.
[묘대협, 그대와 우리 선사와는 과거에 어떤 일로 원한을 맺게
되었는지 우리들에게 들려주실 수 없나요?]
묘인봉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일은 정말로 아리송하여 나는 아직까지도 이해를 하지 못하
고 있다오. 그러니까 십팔 년 전에 나는 잘못하여 절친한 친구에
게 상처를 입히게 되었는데 그 무기에는 극독이 발라져 있었소.
그 독은 피를 보면 무조건 목숨을 빼앗기게 되는 극독이라 그만
그 친구의 목숨을 구할 수가 없었지. 따라서 그 독약이 그렇게 무
서운 것을 보면 분명 존사와 어떤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는 존사에게 가서 물었소. 그러나 존사께서는 단번에 부인을 하
며 자기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라는 것이었소. 하지만 나는
말주변도 없고 또 그때는 너무 신경이 예민해진 탓에 그만 존사에
게 무례를 범하고 두 사람이 싸우게 된 것이라오.]
호비는 알언반구 말이 없다가 한참 후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그 친한 친구를 당신이 직접 죽인 것이군요.]
묘인봉은 고개를 끄덕이며 처연히 말했다.
[바로 그렇다네.]
호비는 침착한 어조로 다시 물었다.
[그 사람의 부인은 어찌 되었습니까? 함께 죽였습니까?]
정영소는 그가 칼자루를 쥐고 안색을 푸르죽죽하게 변하는 것을
보고, 환희의 축배를 드는 자리가 한차례 혈우성풍(血雨腥風)이
몰아치는 곳으로 변하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누가 옳고 그른지 알지 못했으나 조금도 의심할 수 없는
확고한 생각이 뇌리를 스쳐갔다.
(만약 두 사람이 손을 쓴다면나는 그 사람을 돕겠다.)
그녀가 마음 속으로 '그 사람'이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 분
명했다.
묘인봉은 고뇌에 찬 표정을 하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부인은 남편을 따라 스스로 자결을 한 것이라네.]
호비는 냉랭히 물었다.
[그래도 결국은 당신이 죽도록 만든 것이 아닙니까?]
묘인봉은 처연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다고 말할 수밖에 없겠지.......]
호비는 몸을 일으키며 싸늘히 물었다.
[그 친구 분의 성씨는 어떻게 되고 이름은 무엇인지요?]
[정말 자네는 알고 싶은가?]
호비는 낭랑히 말했다.
[난 알아야겠소이다!]
묘인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나를 따라오게.]
그리고는 성큼성큼 후당(後堂)으로 걸어갔다. 호비와 정영소는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묘인봉은 상방(廂房)의 문을 열었다. 방 한복판에는 백목(白木)
으로 만든 탁자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두 개의 영패가 나란히
있었다. 하나에는 '의형(義兄)요동대협(遼東大俠)호공일도지영위
(胡公一刀之靈位)'라고 쓰여 있었고, 다른 하나에는 '의수호부인
지영위(義婢胡夫人之靈位)'라고 쓰여 있었다.
호비는 두 영패를 보는 순간 손발이 얼음장처럼 차가와지면서
전신이 떨려왔다. 그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이 필시 묘인봉과 관
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위인됨이 호방하고 의협심이
많기 때문에 줄곧 자기의 생각이 틀려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
나 묘인봉이 자기가 실수로 친한 친구를 살해했다는 말을 스스로
시인하고 있으며, 그의 말하는 태도나 표정은 남모를 아픔이 서려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호비는 일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묘인봉은 뒤로 돌아서며 뒷짐을 진 채 입을 열었다.
[자네가 호대협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말하려고 하지 않으니 나
는 더이상 묻지 않겠네. 소형제, 자네는 나의 딸을 돌봐주겠다고
응낙을 했으니 그 말을 명심해 주기를 바라네. 좋아, 자네가 호대
협의 원한을 갚겠다면 손을 쓰도록 하게나.]
호비는 칼을 공중에 쳐든 채 생각했다.
(조금전 묘대협이 가르쳐준 이객범주(以客犯主)의 요결을 이용
하여 천천히 칼을 내리친다면 그는 결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렇게 된다면 나는 부모님을 죽인 원수를 갚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묘인봉의 표정은 매우 평화로웠고, 조금도 상심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자 차마 칼을 내리칠 수 없었다.
호비는 별안간 울부짖으며 몸을 돌려 사당에서 뛰쳐나갔다.
정영소는 객청에 놓아둔 칠심해당의 화분와 보따리를 챙겨들고
호비의 뒤를 쫓아갔다.
호비는 단숨에 미친듯 십여 리 길을 달려가더니 갑자기 땅바닥
에 나뒹굴며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정영소는 한참 후에 겨우 그곳까지 당도할 수 있었다. 그가 그
렇게 슬퍼하는 광경을 보고 지금은 어떤 위로의 말이라도 소용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의 옆에 조용히 앉아서 호비가 실컷 울고
마음 속의 울분을 모조리 쏟아내도록 기다렸다.
호비는 눈물이 마를 때까지 울다가 그제서야 겨우 울음을 멈추
고 입을 열었다.
[영소저, 그가 죽인 사람은 바로 저의 부모님이외다. 나는 그
원수와 절대로 한 하늘 아래에서 같이 살지 않겠다는 것을 맹세했
었소.]
그는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의 무공이 나보다 훨씬 뛰어나니 우선 무공을 더욱 연마 해
야겠지요.]
정영소는 다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가 독을 묻힌 무기로 당신의 아버님에게 상처를 입혔다면 우
리들도 그렇게 앙갚음을 할 수 있을 거예요.]
호비는 그녀가 온 정성을 기울여 자기를 감싸주고 위로하고 있
다는 것을 느끼고 여간 마음 속으로 고마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독을 써서 묘인봉을 상대하겠다는 말을 듣자 이
상하게도 섬칫한 두려움을 느끼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이 영소저의 총명함과 재주는 나보다 열 배는 더 뛰어나다.
그리고 무공 또한 나에 비해 그리 약하지 않다. 하지만 하루 종
일 독물만 만지고 있었으니 어찌 되었든 간에.......)
그 자신도 '어찌 되었든 간에' 다음에 무슨 말을 해야 할 것인
지 꼬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 그는 내심 그 말은 적절하지 못하다
는 느낌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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