飛狐外傳 비호외전 9

3학년2반 | 2022.03.10 06:32:03 댓글: 0 조회: 640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54326
김용 대하역사장편소설
비호외전 (5)
지은이/김용
재기발랄한 서생(書生)
그와 같은 말을 하고 있을 때, 사람들 틈에서 한 늙은이가 걸어
나왔다.
그 노인은 등뒤에 거무튀튀한 긴 담뱃대를 꽂고서 문취옹의 시
체 곁으로 다가가더니 울먹이며 입을 열었다.
[문 둘째, 뜻밖에도 자네는 오늘 쥐새끼 같은 작자들의 손에 목
숨을 잃고 말았구려......]
호비는 그가 서천쌍협을 쥐새끼 같은 작자라고 욕을 하자 내심
노기가 끓어올랐으나 억누르고 넌즈시 곽옥당에게 물었다.
[곽 선배님, 저 사람은 누구죠?]
곽옥당은 대답했다.
[저 사람은 개봉부(開封府) 현지문(玄指門)의 장문인인데 성은
복성(復性)으로 상관(上官)이고, 이름은 철생(鐵生)이라고 하지.
자기 스스로 연하산인(烟霞山人)이라는 별호를 붙이고 다닌다네.
그는 문취옹과 한통속으로 저희들끼리 연주이선(烟酒二仙)이라고
말하고 있지.]
호비는 그가 걸치고 있는 커다란 마괘가 곳곳에 담뱃진이 묻어
번들번들하게 윤이 나며, 더우기 담뱃대 또한 특이하여 담배를 넣
는 주둥이가 주먹만한 것이 그가 담배를 지극히 좋아하는 모양이
라고 생각하며 코웃음쳤다.
(흥! 저와 같은 꼴초 주제에 신선 선(仙)자를 자기 마음대로 별
호에 붙이고 다니다니. 정말 가관이군!)
상관철생은 문취옹의 시체를 얼싸안고 몇 번 곡을 하더니 몸을
일으키며 두 눈을 부릅뜬 채 상비홍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너는 어째서 우리 문 둘째 아우를 밀어뜨려 죽였느냐?]
상비홍은 변명하듯 말했다.
[그는 분명히 놀라서 제풀에 죽은 것인데 어째서 나보고 죽였다
는 거예요 ?]
상관철생은 냉소를 흘렸다.
[멀쩡한 사람이 어째서 갑자기 놀라서 죽을 수 있단 말이냐? 틀
림없이 네가 몰래 음독(陰毒)한 수단을 써서 우리 둘째 아우의 목
숨을 해친 것일게다.]
원래 그는 문취옹이 놀라서 죽은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사실이 강호에 알려진다면 그들 두 사람의 명성이 땅에 떨어질 판
이고, 취팔선이라는 일문은 다시는 고개를 쳐들고 다닐수 없으리
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억지로 상비홍에게 시비를 걸고 나서는 것
이었다.
사실 무림 인물이 남의 암습을 받고 죽는 일은 흔한 일이고, 그
런 경우에는 명성에 누를 끼치는 , 일은 아니었다.
상비홍은 나이가 젊은 편이라 상대방이 화를 자기에게 전가 시
키는 의도를 모르고 당황하며 변명을 했다.
[나는 그와 일면식도 없는데 어째서 그를 죽이겠어요? 이곳의
수백 수천의 눈동자가 모두 지켜보고 있었는데 무엇을 근거로 내
가 암습을 했다는 거예요?]
태사의에 앉아있던 몽고의 합적대사는 줄곧 어리벙벙한 얼굴로
아무 소리도 하지 않다가 갑자기 입을 열고 끼어들었다.
[이 소저는 독수를 쓰지 않는 것을 내가 똑똑히 보았소. 그 두
악귀가 들이닥치는 것을 보고 문 나으리는 놀라 죽은 것이오. 나
는 그가 '흑무상, 백무상'하고 부르짖는 것을 들었소이다.]
그의 목소리는 우렁찼으며, '흑무상, 백무상,이라는 말을 할 때
는 문취옹을 흉내내듯 이상야릇한 표정과 괴성을 질렀다.
뭇 사람들은 일순 어리둥절하다가 갑자기 와! 하고 웃음을 터뜨
렸다.
합적은 사람들이 웃는 영문을 모르고 큰소리로 말했다.
[아니, 내가 실언을 했단 말이오? 그 두 무상귀의 추악함과 기
괴함으로 보아 사람이 놀라 죽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않소? 그러
니 이 소저를 오해하여 탓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상비홍은 열심히 변명했다.
[이봐요. 이 대사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아요. 그는 지레
놀라서 죽은 것인데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예요?]
상관철생은 허리춤에서 담뱃대를 뽑아들고 엽초를 한 웅큼 쥐어
담뱃통에 쑤셔넣더니 불을 당겨 태연히 두 모금 빨아들었다가 허
연 연기를 와락 상비홍의 얼굴에 내뿜으며 호통을 질렀다.
[이 계집년아! 내 분명히 너의 흉수를 보았는데도 억지를 쓰겠
다는 것이냐?]
상비홍은 갑자기 닥쳐온 연기를 피한답시고 피했으나 이미 때는
늦고 말았다. 코속으로 연기가 스며들자 갑자기 머리가 띵하며 어
질어질해 오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그가 상스러운 욕을 하자 더
는 참을 수 없는듯 상비홍도 욕으로 맞섰다.
[이 귀신같은 영감탱이야! 설마하니 내가 너를 두려워할 줄 아
느냐? 이렇게 우기는 것을 보니 늙은 영감탱이가 노망이 들어 함
께 죽고 싶어 환장을 한 게로구나!]
그리고는 왼손을 쳐들고 후려치는 척 하다가 순식간에 오른발을
들어 상관철생의 허리를 걷어찼다.
곁에 있던 합적대사가 두 손을 휘휘 내저으며 큰소리로 말했
다.
[어이, 늙은이! 당신은 괜한 사람에게 억지로 누명을 씌우지 마
시오. 내가 직접 목격했듯이 문 나으리는 분명히 두 악귀에게 놀
라 죽은 것이외다.]
호비는 그 화상이 어리숙한 데가 있기는 하지만 성격은 꽤나 곧
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입을 벌릴 때마다 서천쌍협을
'악귀니 뭐니'하고 칭하는 것이 귀에 거슬려 은근히 울화가 치밀
어 이 화상에게 쓴 맛을 조금 보여주어야겠다고 내심 작정했다.
그런데 갑자기 서청에서 한 명의 젊은 서생이 걸어나오더니 곧
장 합적화상에게 다가갔다. 그 사람은 스물 대여섯 쯤 되어 보였
으며, 마르고 왜소한 체구를 지니고 있었지만 용모와 옷차림은 준
수하고 우아한 편이었다. 그는 오른손에 섭선을 들고 부채질을 하
면서 합적에게 다가서더니 낭랑히 입을 열었다.
[화상, 당신께서 하신 말씀 중에 틀린 말이 있으니 고쳐야겠소
이다.]
합적은 두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무슨 말을 잘못했다는 것인가?]
그 서생은 설명하듯 말했다.
[그 두 분은 악귀가 아니라 혁혁하게 명성을 떨치고 있는 서천
쌍협 상씨 형제이외다. 얼굴 모습이 특이하게 생겼지만 그들은 무
공이 고강하기 이를데 없고 강호에서는 의협심이 강한 인물로 평
판이 높고 모든 사람들이 흠모하는 분들이란 말이외다.]
호비는 이 말을 듣자 흐뭇한 마음이 일며 내심 생각했다.
(저 서생이 저와 같이 말을 할줄 아는 것을 보니 인품이 비범한
인물이군. 기회가 있다면 그와 한번 사귀어 봐야겠구나.)
합적은 서생의 말을 받았다.
[이 문 나으리가 그들을 '흑무상, 백무상'이니 하고 부르지 않
았는가? 그러니 어찌 흑무상, 백무상이 악귀가 아니란 말인가?]
서생은 설명하듯 말했다.
[두 분의 성은 상씨이고, 이름 자 중에 한 분에게 흑(黑)자가
들어 있고, 다른 한 분에게는 백(白)자가 들어 있기 때문에 선배
격인 친구분들이 장난삼아 두 분을 백무상이니 흑무상이니
하고 불렀던 것이외다. 이 외호는 만약 신분이 있는 선배나 명
숙이 아니라면 결코 함부로 부를 수 없는 호칭이 아니란 말이외
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두 눈을 부릅뜬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댔고, 한 사람은 점잖은 표정으로 타이르듯 설명을 하고 있었다.
이 와중에 상관철생과 상비홍은 저쪽에서 이미 손을 쓰고 있었
다.
상비홍은 조금 전 예씨 형제들과 겨룰 때에는 그들 쌍자문의 무
공은 두 사람이 일심동체가 되어 펼치는 괴이한 무공이었기 때문
에 막거나 피하기에 급급해 자신의 무공을 제대로 펼치지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일대 일로 상관철생과 겨루자 추호도 열세에 몰리
지 않았다.
상관철생은 맨손인 것 같았지만 손에 들고 있는 담뱃대는 빈철(
鐵)로 만든 것으로서 이를 이용하여 서른 여섯 곳의 대혈을 노리
고 점혈권 (點點)을 펼치고 있었다.
이 현지문은 원래 몸에 있는 서른 여섯 곳의 대혈을 노리는 무
공으로 정평이 나 있었지만 상비흥의 수법이 너무나 매끄러워 시
종 그녀의 혈도를 짚을 수가 없었다. 도리어 몇 차례 상대방을 얕
보다가 그녀의 날렵한 발길질에 걷어차일 뻔 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와중에도 연신 담배를 뻑뻑 빨아들였다가 연기
를 내뿜고 있었다. 그러자 담뱃대는 놀랍게도 점차 검은 빛에서
붉그스레한 빛을 띠우며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원래 이 담배통에는 많은 정탄(精炭)이 숨겨져 있었기 때문에
그가 연신 빨아대자 빈철로 된 담배통이 점차 달아오른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평범한 담뱃대가 지극히 무섭고 기이한 무기로 바
뀌었다. 조금이라도 담뱃대에 스치기만 한다면 상비홍은 손을 데
거나 얼굴에 화상을 입을 것이 뻔했다. 상비홍은 이미 옷자락과
치맛자락이 담뱃불에 시커멓게 그을렸다.
그녀는 당황하여 손발이 어지러워지게 되었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상관철생은 별안간 허연 연기를 한 모금 그녀의 얼굴을 향해
곧장 내뿜었다. 순간 상비홍은 머리가 어지러워지면서 하늘이 빙
글빙글 돌고 땅이 요동을 치는 것처럼 느껴지며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그녀는 몸을 흔들하더니 그만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상관
철생이 들이마시는 연초 속에는 지극히 강력한 미약(迷藥)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상관철생은 평소 그 열기에 익숙해져 있었
고, 또한 입과 코에 달리 해약을 머금고 있었기 때문에 지장을 받
지 않았던 것이다.
그 서생은 한켠에 서서 합적에게 따지느라고 옆에서 싸우는 것
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코 속으로 기이한 향이
한가닥 스미는 것이 그 향기 속에는 흑도에게 사용하는 미향이 포
함된 것을 알고서는 크게 대노하여 고개를 돌렸다.
순간 상관철생의 담뱃대가 어느덧 상비홍의 무릎에 있는 혈도를
짚었다. 지지직! 하는 소리가 나면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옷과 살
이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상비홍은 치마가 타서 구멍이 뻥 뚫리고 옥 같은 처녀의 몸에
낙인이 찍히고 말았다. 상비홍은 상처를 입게 되자 비명을 내질렀
으나 상관철생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그녀의 허리를 지르려 들
었다.
서생은 노해 부르짖었다.
[손을 멈추시오!]
서생은 상관철생이 그 소리를 듣고 멈칫하는 순간 허리를 구부
리고 합적이 신고 있는 신발을 번개처럼 벗겨 들고 몸을 돌리며
시뻘겋게 달구어진 담배통을 향해 달려갔다. 그 서생의 몸놀림은
번개와 같이 빠르고 질풍과 같은 기세로 펼쳐졌다.
졸지에 신발을 빼앗긴 합적은 어리둥절해서 부르짖었다.
[당신...... 자네는 내 신발을 벗겨서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그러나 그가 소리를 지르는 동안 그 서생은 이미 두 짝의 신발
로 씨벌겋게 달구어진 담배통을 감싸더니 비틀면서 상관철생의 등
뒤로 돌렸다. 순간 지지직! 하는 소리와 나면서 상관철생의 소맷
자락이 타들어 가면서 그의 오른 팔이 담뱃통에 닿게 되었다. 그
는 비명을 지르며 황급히 담뱃대를 내팽겨치려고 했다.
서생은 담뱃대를 신발로 감싸 바깥으로 내던지고는 서둘러 상비
홍에게 다가가 그녀를 살펴보았다.
그녀는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이미 인사불성이 되어 있었다.
서생이 내던진 두 짝의 신발은 술좌석으로 떨어지며 음식을 사
방으로 흐트렸고, 그 담뱃대는 곽옥당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곽옥당은 놀라 비명을 내질렀다.
[어이쿠! 이게 뭐야!]
그는 재빨리 피하려고 했으나 날아오는 기세가 너무나 빠른데다
가 전혀 예상치 못한 터라 일시에 피할 수가 없어 두 눈을 멀거니
뜬 채 시뻘겋게 달구어진 담배대에 얼굴을 얻어맞게 될지경이었
다.
호비는 재빨리 젓가락을 한 쌍 집어들어 젓가락 끝에 내력을 보
아 허공에서 날아오는 담뱃대를 낚아챘다.
이 몇 수는 순식간에 펼쳐졌고, 변화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라 대청에 있는 군호들은 입을 벌리고 쳐다보다가 겨우 정신을 차
리고 일제히 갈채를 보냈다.
그 서생은 호비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면서 가벼운 미소를 지
었다. 이것은 본래 사람을 해칠 의도가 없었으나 창졸지간에 실수
로 비롯된 사태를 호비가 도와준 것에 감사를 표하는 것이었다.
이윽고 그는 다시 난감한 표정으로 상비홍을 바라보았다. 그는
남자의 몸으로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누워있는 처녀를 어떻게 손을
써서 구해야 할지 몰라 주저하다가 잠시 후 상관철생에게 호통을
내질렀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일신에 지닌 무공을 정당하게 겨루
자는 것인데 당신은 어째서 미약을 쓰는 것이오? 빨리 해약을 내
놓으시오!]
상관철생은 그가 민첩한 손놀림으로 담뱃대를 빼앗았으며 더우
기 자신의 무기가 없어져 감히 맞설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누가 미약을 썼다는 것인가? 이 계집애의 정기가 너무나 뒤떨
어져 몇 번 맴돌자 어지러워 쓰러진 것인대 누구를 탓한단 말이
오?]
옆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진상을 잘 모르고 있는 처지라 누구
의 편을 들 수도 없었다.
이때 서청에서 허리가 구부정한 중년의 부인이 걸어나왔다.
그녀는 술잔을 들고 나오더니 술을 입에 한 모금 머금고 상비홍
의 얼굴에 내뿜었다.
그 서생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그게...... 그게 해약이오?]
그 부인은 대답하지 않고 재차 삼차 술을 머금고 내뿜었다.
세 번째 술을 내뿜자 상비홍은 눈을 뜨더니 일시에 어떻게 된
연유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상관철생은 보라는 듯이 입을 열었다.
[보시오! 이 계집애가 스스로 깨어나지 않았소? 그런데 어째서
터무니없이 내가 미혼약을 썼다는 것인가? 여기가 어디라고......
복대수 부중에서 말을 할 때는 조심을 해야지!]
서생은 냅다 손을 뻗쳐 그의 따귀를 갈기려는 듯 달려들며 호통
을 내질렀다.
[맞았다! 너처럼 비열하고도 간악한 자가 먼저 한 대 맞아야겠
다.]
상관철생이 재빨리 고개를 숙이자 그 일장은 허공을 치고 말았
다. 그 서생의 솜씨가 상당히 교묘한 편이었지만 연하산인이라는
명성도 헛되이 얻은 것은 아니었다.
상비홍은 눈을 한번 비비더니 어느덧 정신을 차린 듯 몸을 벌떡
일으키며 상관철생의 가슴을 후려치려들며 욕을 내뱉었다.
[더러운 놈! 감히 독연기로 암습을 하다니!]
상관철생은 몸을 기울여 피하면서 그 중년 부인을 힐끗 노려보
았다. 그는 놀람과 분노를 느끼며 곰곰히 생각했다.
(저 사람은 어떻게 해서 나의 독문 미흔약을 해소시킬 수 있을
까? 나는 저 여인에게 아무 원한이 없는 데 어째서 이 일을 끼어
드는 것인지...... 원, 재수가 없을래니......)
이윽고 상비홍은 서생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상공, 도움의 손길을 뻗쳐주신데 대해 감사해요.]
그러자 그 서생은 중년 부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여협깨서 당신을 구해준 것이외다.]
그러나 그 부인은 냉랭히 말했다.
[난 당신들과 은원도 없고, 사람을 구할 줄도 몰라요.]
그리고는 몸을 돌리더니 호비의 손에 들린 젓가락을 받아서 담
뱃대를 집어 올리더니 상관철생에게 넘겨주며 쉰듯한 음성으로 말
했다.
[이번에는 잘 간수하도록 해!]
일이 이렇게 되자 그 서생과 상비홍은 말할 나위도 없고 상관철
생마저도 멍해지고 말았다. 그 부인은 도대체 어떤 내력을 지녔길
래 상비홍을 구하고 다시 마음을 바꾸어 담뱃대를 상관철생에게
되돌려 주는 것인지...... 설마하니 그녀는 시비를 가리지 않고
그저 좋은 일만 하고 돌아다니는 사람이란 말인가?
그 부인의 머리칼은 이미 반백이었으며, 얼굴빛은 싯누래서 지
극히 쇠약한 몰골이라 무공을 지니고 있으리라고 생각되지 않았
다.
뭇 사람들이 그녀를 자세히 살펴보려고 했을 때는 이미 몸을 돌
리고 제자리로 돌아간 후였다.
이는 정영소가 변장을 한 것으로, 만약 독수약왕의 제자가 아니
었다면 어찌 이렇게 짧은 시간에 상관철생이 사용한 독문(獨門)의
미혼약을 풀 수 있었겠는가?
합적은 연신 부르짖고 있었다.
[내 신발을 돌려주시오. 내 신발을 돌려달란 말이오!]
그러나 뭇 사람들은 의아해 하며 각기 상념에 잠겨 있어 그 말
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합적은 대노해서 그 서생의 등심을 움켜잡
으려 들면서 호통을 내질렀다.
[내 신발을 되돌려 주지 않겠다는 건가?]
서생은 슬쩍 몸을 기울여 비켜서더니 웃으면서 말했다.
[화상, 신발은 이미 불에 타 버렸다오.]
합적은 신발을 잃자 매우 낭패하여 허겁지겁 어지럽혀진 술자리
로 가서 자기 신발을 주어들었다. 한짝의 신발은 이미 술과 국물
에 흠뻑 젖어 있었고, 음식 찌꺼기가 안팍으로 지저분하게 붙어
있어 다시 신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체면불구하고
신발을 억지로 발에 끼우고 몸을 일으키며 그 서생을 찾아 분풀이
를 하려고 했으나 이미 그의 종적은 찾을 길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상관철생과 상비홍은 다시 어울려 싸우고 있었다.
합적은 그들 주위를 몇 바퀴 맴돌며 그 서생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자 연신 중얼거리며 자기 탁자로 돌아가 앉았다.
[제기랄! 재수가 없을래니...... 한 쌍의 무상귀를 만나는가했
더니, 또 한 명의 수재귀(秀才鬼)를 만나는군......]
그리고는 잠시도 입을 쉬지 않고 도적 같은 놈이니 얼어죽을 놈
이니 하며 끊임없이 욕을 했다. 그가 한참동안 궁시렁대고 있을
때 상관철생과 상비홍의 싸움은 갈수록 접입가경을 이루어 눈이
돌아갈 지경이었고, 일시에 고하를 판가름할 수 없게 되었다.
화상은 그만 제풀에 지쳐 입을 다물고 말았지만 입이 근질근질
한 것을 참을 수가 없는듯 다시 마구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별안간 뭇 사람들이 참지 못하고 소리내어 웃는지라 합적은 눈
을 부릅뜨고 주위를 살폈으나 웃음거리가 될만한 것이 눈에 보이
지 않았다. 그는 어리둥절해 있다가 뭇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자기만 바라보고 있는지라 얼굴을 한번 매만지고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행색을 살폈지만 한 쌍의 신발의 이외에는 달리 특이한 점
이 없는 것 같았다. 합적은 퉁명스레 말했다.
[무엇이 그리 우습단 말이오?]
그러자 뭇 사람들은 더욱 더 박장대소를 했다.
합적은 말을 하지 않고 내심 중얼거렸다.
(이 후레자식들아! 너회들끼리 실컷 웃어봐라. 나는 상관하지
않겠다!)
그리고는 그는 점잖게 의자에 앉아서는 멀뚱멀뚱 사람들을 쳐다
보았다. 그는 자신의 신발을 보고 사람들이 웃는 줄 알고 스스로
괘념치 않는다면 곧 뭇 사람들이 무료해져서 저절로 웃음을 멈추
리라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대청의 웃음소리는 가면 갈수록 더욱 요란해지는 것이
아닌가? 격투를 벌이고 있던 상비홍마저도 우연히 고개를 돌리고
자신을 바라보고는 그만 참지 못하고 방긋 웃었다.
합적은 더더욱 두 눈이 휘둥그레지고 입이 벌어졌다. 그는 정말
어리둥절해져서 사람들이 왜 읏는 것인지 알지를 못해 두리번거리
는 꼴이 더욱 더 가관이었다.
상비홍은 더이상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화상님, 등 뒤에 모셔놓은 게 뭔가요?]
합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고개를 돌려 보았다. 그러고보
니 그 서생이 편안한 자세로 그의 의자등걸이 위에 앉아서는 손짓
발짓을 하면서 무언극을 해서 뭇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리도록 만
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의자 등걸이 위에 앉은지 오래된 듯 하였으나 아무소리도
하지 않고 갖가지 괴상한 모양을 지어 보이고 있었던 것이었다.
합적은 대노해서 호통을 내질렀다.
[자네는 뭣 때문에 나를 놀리는 거지?]
그 서생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다문 채 손짓을 했는데
난 당신을 희롱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합적은 호통을 내질렀다.
[그렇다면 어째서 자네는 그곳에 앉아 있는가?]
그 서생은 찻 탁자 위에 옥룡배를 가리키면서 손에 넣어 품속에
갈무리하는 시늉을 했는데, 그 뜻은 자기가 그 옥룡배를 가지고
싶다는 뜻이었다.
합적은 다시 물었다.
[자네는 그러니까 어배를 가로채겠다는 것인가?]
그 서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합적은 물었다.
[서생, 빈자리가 있는데 어째서 가 앉지 않는가?]
그 서생은 대청의 뭇 군호들을 가리키며, 왼손을 쳐들면서 오른
손은 주먹을 쥐고 자기의 머리를 때리는 시늉을 하더니 곧 이어
어깨를 움츠리고 머리를 감싸며 겁이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순간 뭇 사람들이 왁짜하니 웃음을 터뜨렸고 합적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질문을 던졌다.
[자네는 다른 사람의 도전을 두려워서 감히 앉을 수 없다면서
또 어째서 나의 의자 등걸이 위에 앉아있는 것이지?]
서생은 발길질을 해보이며 두 손으로 후려치는 시늉을 하고서
몸을 미끄러뜨려 의자에 턱 앉는데 그 뜻은 나는 당신을 나가떨어
지도록 만들고 당신의 의자를 차지하겠다는 것이었다.
그가 미끄러지며 합적의 자리를 빼앗자 대뜸 웃음소리가 대청이
떠나갈 듯 했다.
복강안과 안 제독 등은 이번의 무공 시합이 그야말로 온갖 개망
나니들의 난장판이 되어 원래의 뜻과 어긋나게 되자 속으로 크게
불쾌했다.
그러나 그 서생의 짓궂고 괴상한 행동과 합적 화상의 우직하고
도 멍청한 행동이 마치 두 사람이 사전에 미리 연습을 하고 한 토
막의 연극을 하고 있는 것 같아 역시 웃음을 참지 못하고
미소를 띠웠다.
복강안의 쌍동이 어린애들은 이미 왕검영과 왕검걸 형제에 의해
후원으로 돌아갔기에 망정이지 만약에 대청에 있었더라면 이 재미
난 광경에 손뼉을 치며 좋아했을 것이고, 대청은 그야말로 놀이터
가 되었을 것 같았다.
정영소는 나직이 호비에게 말했다.
[저 사람의 경신법이 교묘하기 이를데 없네요.]
호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의 신법이 기이하도록 영민하여 명가의 솜씨를 가지
고 있구려. 나는 여지껏 살아오는 동안 한번도 본 적이 없구려.]
정영소는 넌즈시 말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일부러 훼방을 놓으려고 온 것 같아요.]
호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더 말을 하지 않았다.
대회에 참가한 사람 중 인식이 제대로 바로 박혀 있는 인사들이
라면 이미 겉으로는 그 서생이 합적에게 장난을 치고 있는것 같지
만 실제로는 이 복강안의 천하장문인 대회를 방해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서생이 장난질을 하여, 장엄하고 긴장
감을 주기조차 해야할 영웅호걸의 대결장을 온갖 작태가 너절하게
벌어지는 시정잡배들의 난장판으로 만들려고 한다는 것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그때 서생은 품속에서 한 자루의 섭선을 꺼내더니 합적을 가르
키며 말했다.
[당신은 나에게 무례한 행동을 하면 못쓰오. 이 부채에는 당신
의 조상님의 영정이 그려져 있단 말이오.]
합적은 고개를 갸웃하며 그 섭선을 바라보았으나 전혀 알아볼
수 없는지라 고개를 가로저었다.
[알수 없는 걸. 자네가 함부로 말하고 있는 것일 게지.]
서생은 갑자기 섭선을 쳐들어서 그에게 보이고 점잖게 말했다.
[믿을 수가 없다구요? 그렇다면 어디 한번 똑똑히 보시구려.]
뭇 사람들이 모두 그의 섭선을 보는 순간 그만 배꼽이 빠져라하
고 웃어 제끼게 되었다.
원래 그 섭선에는 한마리의 커다란 자라가 그려져 있었다. 이
자라는 배를 하늘 쪽으로 향하고, 기다란 목을 뽑아서는 몸을 뒤
집으려고 하는 중인데, 몸을 뒤집으려는 것이 제대로 되지 않아
애를 쓰고 있는 그 표정이 지극히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다.
호비는 웃음을 참고서 정영소를 한 번 바라보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읕 단정했으며, 이 서생이
일부러 온갖 준비를 하고서 훼방을 놓으려고 왔다는 것을 새삼 알
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자기도 모르게 그 서생에 대해서 탄복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었다. 이와 같은 용담호혈로 뛰어들어 천하영웅들 앞에
서 방해를 놓는데는 실로 뛰어난 담력이나 재치가 갖추지지 않으
면 안되는 것인데, 놀랍게도 이 청년은 장난같은 행동으로 천하영
웅과 복대수를 우롱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때 합적은 대노해서 우뢰와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네가 나를 자라라고 욕을 하는 것이나? 네가 책에 물려서 살기
가 귀찮아진 게로구나!]
그 서생은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자라가 되는 것이 뭐가 싫다는 것이오? 자라와 학은 장생지물
(長長生之物)로 영물(靈物)이라 하니, 나는 당신이 그야말로 백살
까지 살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외다.]
합적은 침을 내뱉었다.
[퇴! 내가 그 정도도 모를 줄 아느냐? 제 여편네를 다스리지 못
해 여편네가 서방질을 하게 된다면 그 남편을 자라라 욕하는 것이
아니냐?]
그 서생은 능청스럽게 말했다.
[아, 이거 몰라뵈어서 죄송하군요. 원래 대화상께서는 마누라까
지 데리고 있군요. 그런데 몇 명이나 맞아들였수?]
탕패는 복강안의 안색이 점차 찌푸려지는 것을 보자 정히 나서
서 수습하려고 했으나 합적이 갑자기 노갈을 터뜨리더니 손을 뻗
쳐 그 서생의 등심을 잡으려고 들었다.
이번에 그 서생은 제대로 피하지를 못하고 그에게 잡혀 몸이 쳐
들리게 되었고 땅바닥에 내동댕이 쳐질 지경이 되었다.
원래 합적은 몽고 씨름의 고수였다. 몽고 씨름이라는 재간은 모
두다 대조(大雕)와 중조(中雕) 그리고 소조(小雕) 이렇게 삼문(三
門)으로 나누어졌으며, 각기 무서운 절기가 숨겨져 있었다.
합적은 중조문의 장문인인데 허리와 허벅지의 기운을 쓰는데 가
장 뛰어난 편이었으며, 상대방의 가슴이나 등을 움켜잡는데 실수
를 한 적이 없었다. 그 서생은 그에게 잡혀서 내던져졌으며 호되
게 쓴 맛을 볼 것 같았다. 그런데 거꾸로 곤두박질하던 신형이 갑
자기 뒤집어지며 뜻밖에도 두 발이 먼저 바닥에 닿으며 사뿐히 내
려서는 것이 아닌가?
그는 천천히 섭선을 펼쳐 부치더니 여유롭게 웃으면서 입을 열
었다.
[당신은 결코 나를 쓰러뜨릴 수가 없을 것이오.]
합적은 응수했다.
[한번 더!]
그 서생도 맞장구쳤다.
[좋아, 한번 더!]
그리고는 가까이 다가가더니 갑자기 두 손을 내밀어 합적의 가
슴팍을 움켜잡았다. 뭇 사람들은 모두 다 크게 이상하게 생각했
다.
합적의 체구가 우람하고 그 서생은 비쩍 마르고 조그만 체구인
데다가 합적이 씨름에 정통한 것을 모든 사람이 친히 목격한 바와
같은데, 그 서생이 합적을 상대로 헤서 재빠른 경신법을 펼치지
않는다면 마땅히 교묘한 권초로 승리를 거둘 생각을 해야 함이 마
땅하지 어째서 자기의 단점으로 적의 장점을 공격하는가 여긴 것
이었다.
합적은 즉시 손을 뻗쳐 서생의 어깨죽지를 움켜잡고는 발을 옆
으로 휘둘러 쓸어찼다. 서생은 앞으로 넘어지면서 합적의 굵고 큰
목을 끌어안으며, 동시에 두 발끝으로 합적의 무릎을 걷어찼다.
합적은 두 다리에 맥이 빠져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앞으로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그는 비틀거리면서도 되려 그 서생의 등심을 잡고
서 비틀어 자기 몸으로 깔아 뭉개려고 짓눌렀다.
그러자 그 서생은 장난스럽게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야난났군. 야난났어!]
그리고는 그의 겨드랑이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혀를 낼름 내밀
며 군중을 향하여 걱정말라는 시늉을 했다.
이때 호비와 탕패 그리고 해란필 등 고수들은 모든 것을 환히
내다볼 수 있었다.
그 서생은 점혈수법에 정통하기 때문에 결코 합적은 적수가 되
지 못했다. 더구나 서생 역시 씨름이나 서로 밀고 당기며 싸우는
재간에 무척 익숙하여 팔힘이 합적보다는 못하지만 상대에게 떠밀
리면 절박한 상태이르러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여 벗어나곤 했던
것이다.
그가 합적을 단숨에 쓰러뜨리지 않는 것은 합적에 대해서 큰 적
대감은 없으며, 단지 그를 상대로 장난을 치면서 복강안이 선출한
사대 장문인들의 얼굴을 무안하게 만들자는 뜻이 숨어있는 것이었
다.
다른 한편에서는 상비홍이 잔재간을 펼치며 상관철생과 지구전
을 벌이고 있었다. 상비홍의 봉양부에서 가장 자랑하는 무공은 바
로 철련공(鐵蓮功)이었다. 이는 신발끝에다 뾰족한 쇠를 대고는
요해를 걷어차는 것으로 단숨에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수가 있었
다.
하지만 상관철생은 강호에서 수십 년 동안 떠돌아 다닌 사람인
데 어찌 철련공의 무서움을 모르겠는가? 그는 매번 그녀가 신발
끝으로 걷어차려고 할 때면 급히 몸을 움직여서 피하곤했다.
그는 강호에서 명성을 떨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이 젊은 아가
씨와 근 백여 초를 싸워봤지만 조금도 우세를 차지하지 못하였다.
더구나 그녀가 원앙퇴(鴛鴦腿), 괴자퇴(拐子腿), 권탄퇴(圈彈
腿), 구소퇴(鉤掃腿), 천심퇴(穿心腿), 당심퇴(撞心腿), 단비퇴
(單飛腿), 쌍비퇴(雙飛腿) 등 온갖 재간올 다 펼치면서 갈수록 초
식이 빨라지는 것을 보자 속으로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빨리 승부를 결정지으려면 한꺼번에 재간을 펼쳐야 할 것 같았
다. 그는 그녀의 심기를 흐트리려는 듯 껄껄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다 큰 처녀가 망아지처럼 덜렁덜렁 방댕이를 혼들며
이리 차고 저리 차는 것을 보니 정말 가관이군 그래!]
그리고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담배대를 입으로 가져가서는
깊이 한 모금을 빨았다. 상비흥은 그가 담배대를 들고 빨자 경계
를 하기 위해 급히 몸을 날리며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등지며 그
가 뿜어내는 담배연기에 방비를 했다.
상관철생은 담배 연기를 한 모금 들어마신 이후 또 다시 몇수를
겨루었다. 그러나 어떻게 된 노릇인지 그는 두 눈을 부릅뜨고 앞
쪽을 똑바로 바라보는데 두 눈에서는 미친 개와 같은 흉칙한 광기
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우우! 하는 괴이한 소리를 내
뱉으며 상비흥에게 달려들었다.
상비홍은 그와 같은 광경을 보자 두려움에 감히 정면으로 그와
맞서지 못하고 몸을 번개와 같이 날려서는 옆으로 피했다.
상관철생은 상비홍이 피하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앞으
로 달려 들었다. 그곳은 바로 정면에 태사의가 있는 곳으로 복강
안 쪽을 덮쳐가는 것이었다.
복강안의 신변에서 가장 가까이 서 있는 위사는 바로 응조안 행
문의 증철구였다. 그는 상관철생이 돌발적인 행동을 보이자 급히
달려들어 그의 손목을 걸어잡고는 바깥쪽으로 내던졌다.
상관철생은 휘청하니 나가떨어지자 두 눈을 멍하니 뜨고서는 두
리번거리다 곧장 동쪽의 수석으로 달려가서 마구잡이로 아무나 할
퀴고 때리려고 들었다. 놀랍게도 그는 실성을 한 것이 아닌가?
호비는 곁눈질로 정영소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웃는듯 마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호비는 그 모습
을 보고서야 가까스로 그녀가 조금전 담뱃대를 상관철생에게 되돌
려준 의도를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원래 그녀는 삽시간에 담배통에 다른 종류의 무서운 미혼약을
담배와 함께 담았던 것이다. 제 꾀에 제가 넘어간다는 말이 있듯
이 한평생 미혼약으로 사람을 해쳐온 상관철생이 자기의 담배대에
든 미혼약을 빨아들이게 된 것이었다.
그는 미혼약이 골수까지 미치자 대뜸 그만 정신이 엇갈려서 마
치 미친 개처럼 날뛰게 된 것이었다. 그가 입에 머금고 있는 해약
은 전혀 쓸모가 없던 것이었다.
동쪽의 수석에 앉아 있던 고수들은 그가 달려오는 것을 보자 즉
시 손을 휘휘 내저으며 그를 쫓았다. 상관철생은 고수들의 손에
얻어맞고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순간 그는 한번 몸을 뒤집더니 갑자기 탁자의 다리를 얼싸안고
이빨을 드러내며 마구잡이로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영락
없는 미친 개의 모습이었다.
뭇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자 모두 다 속으로 공포심을 느끼고
그 누구도 웃지를 못했다.
어째서 멀쩡하던 그가 갑자기 이토록 변할 수 있을까? 설마 음
식에 독이라도 들어 있는 것이라면 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
가?
뭇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며 일시에 사방은 조용해졌다.
조용한 대청 안에는 오로지 합적이 서생에게 지껄이는 욕만이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이 새끼! 이 버리장머리 없는 새끼!]
그런데도 그 서생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합적에게 타이르듯 말
했다.
[내 당신에게 충고하는데 점잖은 사람들 앞에서 이제 욕은 그만
하시구려.]
합적은 노해 부르짖었다.
[내가 욕을 한다고 해서 네가 감히 어떻게 할테냐? 이 도적같은
수재 귀신아!]
서생은 실실 웃으면서 약을 올렸다.
[아, 대단하신 분을 몰라뵈었군. 당신이라고 할지라도 감히 복
대수를 욕하지 못할 것이오. 당신이 용기있는 사람이라면 어디 도
적같은 대수라고 한번 욕을 해 보시구려.]
합적은 울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는지라 생각해보지도 않
고 대뜸 큰소리로 욕을 했다.
[이 도적같은 대수야!]
그런데 말을 해놓고 나서 보니 말이 크게 잘못됐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
그러나 이미 뱉어낸 말을 거두어 들일 수는 없지 않은가?
다급해진 나머지 더듬거리며 변명을 했다.
[나는...... 나는...... 그를 욕한 것이 아니라...... 너를....
.. 욕한 것이다......]
그 서생은 웃었다.
[내가 대수란 말이요. 나는 결코 그런 벼슬을 탐해 본적 조차
없는데 당신이 나를 도적같은 대수라고 욕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
오?]
합적은 복강안에게 무례를 범했다는 것을 알고 다급해진 나머지
이마팍에는 푸른 힘줄이 불거지며 온 얼굴이 씨뻘개졌다.
그는 어쩔 줄을 모르고 있다가 몸을 날려 서생에게 덮쳐 들었
다.
그러자 그 서생은 그가 제정신이 아닌 이때를 기회라고 여긴듯
몸을 옆으로 기울여 슬쩍 피하더니 그의 오른쪽 팔을 거머쥐고 상
대의 힘을 빌어 앞으로 밀었다. 그러자 합적의 비대한
몸뚱아리는 중심을 잃고 뒤뚱거리며 달려갔다.
상관철생이 정히 탁자의 다리를 얼싸안고 물어뜯고 있는데 공교
롭게도 합적이 쿵! 하니 상관철생의 등 위로 나가 떨어졌다. 그러
자 상관철생은 우! 하는 소리를 크게 지르면서 그의 두팔을 얼싸
안더니 입으로 그의 반대머리를 물어 뜯으려고 들었다.
합적은 깜짝 놀라 정신없이 팔을 휘둘러 그를 내던지려고 했다.
그런데 사람이 미치게 되면 평소에 보여 주지 못하던 힘을 쏟아내
기 마련인 모양이었다. 합적의 팔힘은 상관철생보다 본래 훨씬 강
한 편이었지만 상관철생이 물어뜯는 바람에 그만 온 머리에서 선
혈이 낭자하게 홀러내렸다.
합적은 아픈 내색을 할 겨를도 없이 다급하게 왁왁하니 고함을
내질렀다.
그 서생은 껄껄 소리내어 웃으며 부르짖었다.
[하하하, 정말 절묘하군! 절묘해.]
그러면서 천천히 여덟 개의 옥룡배가 놓여 있는 탁자 옆으로 물
러 섰다.
별안간 손가락을 떨치며 두 개의 옥룡배를 들더니 고개를 끄덕
이며 상비홍에게 하나 건네주며 말했다.
[이제 옥배를 손에 넣었으니 우리 갑시다.]
상비홍은 어리둥절해졌다.
그녀는 사실 이 서생과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 그런데 그가
자기에게 무척 다정하게 대하는지라 그만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서생을 따라 바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순간 복강안의 곁에 있던 육 칠명의 위사들은 큰 소리로 부르짖
었다.
[첩자를 잡아라! 첩자를 잡아라!]
[그를 붙잡아라!]
[어배를 훔친 도적을 잡아라!]
그리고 일제히 벌떼처럼 뒤쫓아 나왔다.
군호들은 이 젊은 서생이 자신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대담하게
도 옥룡배를 취해 떠나려고 하자 흠칫하며 모두 다 경악해 마지
않았다.
어느덧 뭇 위사들도 덩달아 호통을 내질렀다.
[옥배를 내려 놓아라!]
[어떤 놈이 이토록 맹랑한 짓을 한단 말이냐?]
[어느 가문, 어느 문파의 후레자식이냐?]
조금전에 상백지와 상혁지 형제가 지붕 위로부터 달려들어와 귀
주 쌍자문 예씨 형제를 구한 일이 있은 후에 복강안 부의 경계는
더욱 철저하게 증가된 터였다.
이때 대청에서 왁자하는 소리가 들려오자 문 밖의 위사들은 재
빨리 문을 가로 막았다. 그리고 곧이어 안제독의 명령에 따라 수
십 명이나 되는 위사들이 상비홍과 서생의 앞뒤를 에워쌌다.
그러나 서생은 여유있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감히 그 누구라도 덤벼든다면 나는 이 옥배가 정말 깨지지 않
는 물건인지 시험해 보겠소이다.]
순간 뭇 위사들은 멈칫하며 감히 경솔하게 앞으로 나서지를 못
했다. 혹시나 젊은 서생이 정말 황제께서 어사한 옥룡배를 깨뜨리
는 불충한 짓을 저지를까 두려워 한 것이었다.
위사들은 각자 손에 무기를 꼬나쥐고 두 사람을 철통같이 에워
싸고만 있을 뿐 달려들지는 못했다.
상비흥 역시 초청장을 받고 이 대회에 참석한 것은 그저 구경을
헤볼 심산으로 달려온 것이지 다른 목적은 없었다. 그런데 창졸지
간에 이처럼 커다란 화를 불러 일으키자 제풀에 놀라 안색이 창백
해졌으며, 심장이 벌떡벌떡 뛰어 목으로 넘어 올 지경이었다.
호비가 정영소를 바라보자 정영소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두 사람은 젊은 서생에 대해서 호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 만
약 손을 써서 구하려고 했다가는 헛되이 목숨을 잃게 될 뿐, 일에
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저 서생이 미친
사람이 아니라면 분명 무슨 방법을 강구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했
다.
순간 해란필이 성큼성큼 그 서생에게 다가왔다. 그가 손을 뻗치
기만 한다면 상비흥과 서생은 틀림없이 그를 감당해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나 서생은 여전히 옥룡배를 들고 실실 웃으며 입을
열었다.
[상소저, 이번에 우리는 생각을 바꾸어야 하겠소이다. 당신이
만약 이 옥룡배를 땅바닥에 내던진다면 그 옥룡배가 땅에 닿기 전
에 대대로 슬쩍하기로 이름난 집안의 귀하신 분께서 가로챌지도
모르겠구려. 그러니 차라리 이렇게 합시다. 당신은 내가 하나,
둘, 셋! 하고 부르면 손에 쥐고 옥룡배를 박살내는 것이 어떻소이
까?]
상비홍은 당황하고 있던 터라 무턱대고 고개를 끄덕였으나 잠시
후 홍안을 붉히며 자기 자신을 꾸짖었다.
(나는 저 사람과 아무 관계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처지가 아닌
가? 그런데 왜 매사에 그의 명령을 따르고 있는 것이지?)
해란필의 의도는 서생이 옥룡배를 내던지면 재빨리 손읕 뻗쳐
받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서생이 몇 마디로 말로 그의 의표를 찌
르자 그는 대뜸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이윽고 뒤에 있던 탕패가 쓴 웃음을 지으면서 서생 앞으로 다가
와 입을 열었다.
[하하하! 소형제, 존성대명이 어떻게 되는가? 오늘 천하영웅들
앞에서 보여준 솜씨는 정말 무림을 진동시키고도 남음이 있겠네.
그러니 자네가 이름을 남기지 않는다면 말이 되겠는가?]
그 서생은 웃었다.
[불초는 이름을 떨치기 위해 이런 것이 아니고, 또한 이득을 보
기 위해서도 아니외다. 불초는 그저 이 옥룡배가 그럴싸하게 보여
집에 가지고 가서 놀 생각이며 가지고 놀다가 싫증이 나면 곧 되
돌려 줄 생각이었소이다.]
탕패 역시 웃으며 그 말을 받았다.
[형제, 자네의 무공은 매우 특이하더군. 이 늙은이는 오랫동안
주의 깊게 살펴보았지만 어느 문파의 수법인지 알아낼 수가 없었
네. 존사(尊師)는 누구신가? 따지고 보면 여러 사람들과 교분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지. 젊은 사람이 조그마한 소란을 피웠다 하
더라도 대수로운 일은 아닐세. 이 늙은이의 변변치 않은 얼굴을
봐서라도 복대수께서는 벌을 내리지 않을 것이니 이제 조용히 자
리로 돌아가 술이나 마시는 것이 좋을 것같네.]
그리고는 탕패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뭇 위사들에게 말했다.
[여러분들은 물러서시오. 이 형제는 우리들의 친구라오. 그가
젊은 혈기에 좀 장난을 쳤기로소니, 이렇게 많은 사람이 달려든다
면 남들이 우리들을 소인배라고 비웃지 않겠소?]
뭇 위사들은 이 말을 듣자 모두 두 걸음 물러섰다. 그 젊은 서
생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탕씨 양반, 나는 당신의 웃음 속에 감추어진 함정에 빠지기는
싫소이다. 당신이 다시 한 걸음이라도 다가 온다면 나는 이 옥룡
배를 정말 박살내고 말겠소. 당신이 정말 책임을 질 수 있다면 내
가 옥룡배를 빌려서 집으로 가져가는 것을 허락해 주시오. 그리고
사흘 동안만 가지고 논 다음에 틀림없이 되돌려 드리겠소.]
뭇 사람들은 속으로 생각했다.
(옥룡배를 가지고 문을 나서기만 하면 어디에서 너를 다시 찾는
단 말이냐? 삼일 후에 반드시 되돌려 주겠다니 무슨 뚱땅지 같은
소린가? 누가 너를 믿겠는가 말이다.)
뭇 사람들은 일제히 시선을 옮겨 탕패를 바라보며 그가 어떻게
대답할 것인지 기다렸다.
그러자 탕패는 껄껄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하하, 그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소형제, 자네가 들고 있
는 옥룡배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네. 이 늙은 형은 복대수 은전
으로 먼저 하나를 하사받았네. 그러니까 이렇게 하도록하지. 내
옥룡배를 자네에게 빌려주지! 자네가 가지고 놀고 싶은대로 놀다
가 싫증이 나면 언제든지 전갈을 보내도록 하게. 그러면 내가 가
서 가져오도록 하겠네. 어떤가?]
그러면서 옥룡배를 놔둔 탁자 앞으로 가서 먼저 옥룡배를 깔아
놓았던 비단 깔개를 왼손으로 집어들었다. 그리고 나서는 자신의
옥룡배를 집어 그 비단 깔개 위에 놓고 정중하게 그 젊은서생 앞
으로 들고가서는 입을 열었다.
[자, 자네는 이걸 가져가도록 하게.]
탕패의 이 행동은 모든 사람들의 의표를 찌른 것이라 할 수 있
었다.
뭇 사람들은 그가 입으로는 그럴싸하게 이야기 하고 있지만 실
제로는 기회를 보아 그 젊은 서생의 수중에 들려있는 옥룡배를 빼
앗으려고 할 것이라고 내다 본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뜻밖에도 자신의 옥룡배를 빌려주겠다고 말하면서
거짓말이 아닌 듯 되려 다른 하나의 옥룡배를 내미는 것이었다.
그 젊은 서생조차 의아하게 생각했으나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당신은 '감림혜칠성'이라고 하는 명호가 정말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통이 크구려. 옥룡배는 서로 모양이 똑같으니 바꿀 필요는
없소. 상소저의 옥룡배는 저 해대인에게 빌리기로 합시다. 탕 대
협, 수고스럽지만 당신이 보증을 서 주시구려. 해대인, 아무쪼록
안심을 하시구려. 사흘 후에 상소저가 옥룡배를 내놓지 않는다면
탕대협을 추궁하도록 하시구려.]
탕패는 웃었다.
[좋아. 모든 책임은 내가 지도록 하세. 이 탕가가 혼자서 책임
을 지겠네. 어찌되었든 간에 상소저는 나를 난처하게 만들지는 않
겠지.]
그러면서 그는 상비홍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상비홍은 말을 더듬거렸다.
[저는...... 저는......]
그리고 그녀는 젊은 서생을 바라보며 어떻게 대답해야 할 바를
몰랐다.
별안간 탕패는 왼쪽 팔굽을 한번 떨치더니 휙! 하니 팔굽으로
그녀의 손목 밑을 쳤다.
상비홍은 아! 하는 소리를 내지르면서 옥룡배는 그녀의 손을 떠
나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순간 탕패는 오른손으로 비단 깔개위의
옥룡배를 잡고 왼손으로는 깔개의 한 자락을 휘둘러 어느덧 그 젊
은이의 상반신을 휘감았다.
그리고 오른손의 식지를 잇따라 움직여 젊은 서생의 운문(雲
門), 곡지(曲池), 합곡(合谷) 세 곳의 혈도를 짚더니 재빨리 손을
뻗쳐 상비홍의 손을 떠나 공중에서 떨어지는 옥룡배를 받으며, 왼
발로 날쌔게 상비홍을 걷어찬 다음 그 기세를 빌어 발끝으로 그
서생의 오금을 내질렀다.
운문혈은 어깨에 있고, 곡지혈은 팔굽에 있으며, 합곡혈은 바로
엄지 손가락과 식지 손가락 사이에 있는 것이다. 젊은 서생은 세
곳의 혈도가 짚이자 한쪽 팔이 어깨에서부터 맥이 빠지며 축 늘어
뜨렸다. 순간 탕패는 그가 떨어뜨리는 옥룡배를 가볍게 비단 깔개
로 받쳐들었다.
이 몇 수는 느닷없이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라 마치 요술을 부
리는 것 같아 뭇 사람들은 똑똑히 보지도 못한 상태였다.
탕패는 어느덧 두 사람을 때려눕히고, 세 개의 옥룡배를 들고
탁자 곁으로 가서 올려놓는 것이었다. 그리고 껄껄 웃으면서 태사
의로 돌아가 앉았다.
이때서야 비로소 대청에서는 우뢰와 같은 갈채 소리가 일었다.
곽옥당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끊임없이 찬탄을 불어냈다.
[순식간에 두 사람을 때려눕히는 것도 지극히 어려운 일이지만
더욱더 어려운 것은 세 사람의 손에 들려있던 옥룡배를 순식간에
가로챈 수법이구만. 실날같은 차질만 있었다 하더라도 그 중 하나
는 손상을 입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이번 대회의 옥의 티가 되었
겠지. 더욱더 훌륭한 것은 저와 같은 담력과 기지(奇智) 아니겠는
가? 셋째, 자네는 그렇다고 생각지 않은가?]
호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훌륭합니다.]
그는 조금전 우뢰가 치고 번개가 번득이는 듯한 한폭의 광경에
불현듯 웅심이 치솟는 것을 느끼고 속으로 생각했다.
(저 탕가는 과연 재간이 비범하구나. 만약에 인연이 닿는다면
그와 한번 겨루어 보아야겠다.)
그러다가 그는 다시 생각했다.
(저 젊은 서생과 상소저가 실수하여 사로잡히게 되었으니 설사
목숨을 건질 수 있다 하더라도 고통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니 어떻
게 방법을 강구해서 그들을 구할 수 없을까?)
이때 뭇 위사들은 어느덧 밧줄을 가져와서 서생과 상비홍을 묶
고는 복강안 앞으로 밀다시피 하여 끌고 가서 무릎을 꿇렸다.
복강안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한쪽에 잡아 두었다가 천천히 물어보기로 하고 여러 영웅들이
솜씨를 펼치는 것을 방해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안 제독, 당신은
대회를 계속 진행하시오.]
안 제독은 공손히 말했다.
[네.]
그리고 그는 즉시 명령을 내려서는 군호들에게 무공 시합을 명
령했다.
호비는 이제까지 사람들이 이리저리 싸우기는 했으나 뛰어난 재
간을 지닌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는 마춘화의 두 아이들이 어떻게
해서 다시 복강안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되었는지, 그리고 마춘화
가 혹시 또 다시 어려운 처지에 놓이지나 않았는지 걱정이 되어
더 이상 구경할 생각이 없어지고 말았다.
곧이어 십여 명의 사람이 나서서 무공을 겨루게 되었을 때 갑자
기 문밖에서 위사가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성지가 도달했습니다.]

조반산과의 재회
군호들은 모두 다 그 말을 듣고 어리둥절해졌다.
복강안 부중의 사람들은 아래 위 할 것 없이 황상께서 갑자기
하교할 것이 있다고 느끼면 야반 삼경이라도 성지를 내린다는 것
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흔히 겪는 일인지라 볕로 이상하
게 생각지 않고 즉시 향안(香案)을 차렸다.
복강안은 몸을 일으켜 물방울이 떨어지는 처마 앞에서 성지를
받으려고 무릎을 꿇었다.
물론 안 제독 이하 모든 사람들도 일제히 무릎을 꿇어 엎드렸
다.
호비는 그와 같은 광경을 대하게 되자 속으로는 욕을 하면서도
부득이 따라서 무릎을 꿇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때 신발 소리와 함께 마당으로 다섯 명이 걸어 들어왔다.
앞장 선 사람은 늙은 태감이었다. 복강안은 그가 건청궁(乾淸
宮)의 태감인 유지여(劉之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뒤로 내
반숙위(內班宿衛)가 따르고 있었다. 유지여는 대청문 입구에 이르
더니 대청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문앞에 서서 성지를 펼치고 낭랑
히 읽었다.
[병부상서 복강안은 이 성지를 받들어라. 방금 잡은 남녀 도적
두 명을 즉시 궁안으로 데리고 들어올지라. 흠차(欽此)!]
복강안은 그만 어리둥절해져 속으로 생각했다.
(황상께서 소식이 어찌 이리도 빠를 수가 있다는 말인가? 황제
가 두 명의 도적을 데려다 무엇을 하겠다는 것일까?)
그는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고 보니 유지여가 눈썹을 씰룩거리
며 눈짓을 하는데 그 표정이 매우 이상야릇했다. 게다가 곰곰히
생각해 보니 평소 사람들이 성지를 전하게 되었을 때는 틀림없이
대청 한복판에서 남쪽을 향해 읽는 법인데 이번에는 뜻밖에도 입
구에서 성지를 낭독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되었다.
유지여는 궁중에서 오랜 동안 태감 생활을 해온지라 결코 차질
을 빚을 사람이 아니니 이 가운데는 틀림없이 어떤 변고가 있으리
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하여 그는 몸을 일으키고는 입을 열었다.
[유 공공(公公)! 자, 이리 앉으시죠. 차라도 한잔 드시면서 이
곳의 영웅호걸들의 솜씨를 구경하시구려.]
유지여는 흔쾌히 응했다.
[매우 좋죠, 매우 좋아요.]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눈살을 찌푸렸다.
[복대수, 고맙소이다만 차는 마시지 않겠소이다. 황상께서 대답
을 기다리고 계시오.]
복강안은 그와 같은 말을 듣자 황연히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는 유지여가 등뒤에 있는 몇 명의 위사들의 협박을 받고서 가
짜로 성지를 전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이 네 명의 위사가 반역을 도모한 것이 아니라면 다른 사람이
가장을 한 것이라고 쉽사리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아
무런 내색을 하지 않고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유공공이 모시고 온 몇 분의 형제들은 누구시오? 매우 낯이 설
구려.]
유지여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건...... 그건...... 그들은 최근에 외성(外省 : 다른 성이
라는 뜻)에서 온 분들이지요.]
복강안은 순간 모든 사실을 확연히 깨달았다. 사실 내반 숙위는
밤낮으로 황제의 곁에서 시중을 들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만약 황
실의 종친이나 공훈을 세운 공신 중에 세습을 할 자격을 가진 집
안의 자제들이 아니고서는 임명될 수가 없었다. 더우기 타 지방이
나 다른 성에서 온 무인들은 결코 내반숙위에 임용될 수가 없었
다.
복강안은 내심 계책을 강구했다.
(저 네 사람을 떼어놓을 수만 있다면 유태감이 그들의 협박을
받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생각을 하고 그는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네 분 시위 형제들은 도적들을 데리고 가도록 하오.]
그러면서 그는 옆에 묶여 있는 젊은 서생과 상비홍을 손가락질
했다.
네 명의 시위 가운데 한 사람이 앞으로 달려 나오더니 그 젊은
서생을 끌어내려고 했다. 그러자 복강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잠깐, 이 분 시위는 존성이 어떻게 되시오?]
평소에 황제에 대한 예우라 할까, 도리라 할까 복강안은 시위에
대해서 깍듯이 대했고, 심지어 형제라고까지 존칭을 하였지만 시
위라는 벼슬은 복강안의 벼슬보다 훨씬 낮은 편이라 그와 같은 호
칭을 듣는다면 반드시 앞으로 나가 무릎을 꿇고 엎드려야 했다.
그런데 이 시위는 방약무인하게 복강안의 그와 같은 사교적인
존칭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간단히 대답했다.
[나는 장(張)가 이외다.]
복강안은 넌즈시 입을 열었다.
[장형은 궁안으로 들어온지 얼마나 되었소? 그런데 어째서 뵙지
못했을까?]
그 시위가 미처 대답을 하기 전에 위지여 등 뒤에 있는 뚱뚱한
몸집을 한 시위가 갑자기 오른손을 쳐들었다.
순간 은빛 광채가 번쩍이며 빛살처럼 암기가 쏘아져 나와 옥룡
배를 놓아둔 탁자 쪽으로 날아갔다. 이 암기는 그 모양으로 보아
섬세한 은사(銀絲)임이 분명했다. 암기가 날아가는 기세는 매우
빨라 여덟 개의 옥룡배가 금방이라도 모조리 박살나고 말것 같았
다.
뭇 위사들은 다투어 호통을 내지르며 암기술에 정통한 사람들은
각자 손을 쓰게 되었다. 그러자 수전, 비표, 철련자 등 일고 여덟
가지의 암기가 일제히 은빛 빛살 같은 암기 쪽으로 쏘아져 갔다.
그러자 그 뚱뚱한 시위는 두 손을 위로 쳐들었고, 그 역시 일고
여덟 가지의 암기를 일제히 내쏘았다.
순간 쩡쩡! 하는 소리가 끊임없이 일면서 뭇 위사들의 암기가
일제히 부딪히며 아래로 떨어졌다.
그 은사는 곧장 탁자 쪽으로 날아가 하나의 옥룡배를 휘감았다.
그런데 정말 요상하게도 그 은사는 허공에서 저절로 방향을 틀더
니 옥룡배를 휘감고서 다시 비스듬히 날아와 그 시위의 손으로 되
돌아가는 것이었다.
뭇 사람들은 이와 같이 기이한 광경을 접하게 되자 모두 아연해
지고 말았다.
호비는 그 뚱뚱한 시위가 암기를 발사하는 신기(神技)를 보고는
참을 수가 없어 부르짖었다.
[조 셋째 형]
그 뚱보 시위는 바로 천수여래(千手如來) 조반산(趙半山)이 변
장을 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서생을 구하려던 시위는 바로 홍화
회의 귀견수(鬼見愁) 석쌍영(石雙英)이었다. 이 몇 명의 사람들은
복강안 부중 밖에서 접응을 하려던 차에 젊은 서생이 그만 실수로
사로잡히게 되고 말았던 것이다.
정히 태감(太監) 유지여가 복강안 부중의 문 밖을 지나던 참이
라 유지여를 잡아 거짓으로 성지를 전할 계책을 세웠지만 이들 강
호의 호걸들은 궁전의 예절과 규칙을 몰라 복강안 부중에들어오게
되자 마각을 드러낸 것이었다.
조반산은 복강안의 얼굴 표정과 언행에서 이미 의심을 사고있다
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그가 사람을 잡으라는 명을 내리기 전에 먼
저 손을 써서 기선을 제압하려고 즉시 비연은사(飛燕銀梭)를 내쏘
아 하나의 옥룡배를 빼앗은 것이었다. 이 비연은사는 그가 특별히
고안해낸 일종의 암기로서 윈을 그리며 다시 되돌아 날아오는 것
이었다.
그가 이와 같이 옥룡배를 빼앗아 들자 별안간 그 누가 '조 세째
형!'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 소리는 진정으로 반가와하는
기색이 역력했으며, 마치 아주 절친한 친구를 오래간만에 우연히
만났을 때처럼 매우 반가워하는 목소리였다. 그는 눈을 들어 소리
가 들려오는 쪽을 바라보았으나 얼굴이 익은 사람은 보이지 않았
다.
사실 호비는 그와 헤어진지 오랜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신형(身
形)이나 용모가 모두 변해있는 상태였다. 그가 변장하고 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설사 변장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몇 년
만에 성장하여 갑작스레 상봉을 하는 처지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조반산은 용담호혈(龍潭虎穴)에 뛰어든 상태라 아는 사람을 찾
으려고 더 이상 두리번거리며 한눈을 팔 여유는 당연히 없었다.
그는 두 팔을 연신 쳐들어 재빠르게 사방으로 암기를 쏘아보냈
다. 그의 손짓 하나 하나마다 쩡쩡! 하는 소리가 끊임없이 일고
소리가 울려퍼질 때마다 붉은 초가 한 자루씩 꺼졌다. 삽시간에
대청은 칠흑과 같은 어둠에 휩싸이게 되었다. 순간 조반산은 부르
짖었다.
[복강안! 표를 받아라!]
곧이어 두 사람이 비명을 내 질렀다. 적중된 모양이었다. 그러
자 우지끈 뚝딱! 하는 소리와 함께 무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
왔다. 원래 두 명의 위사가 서둘러 달려나와 석쌍영을 가로막으려
다 조반산의 암기에 적중되어 무기를 놓치며 쓰러진 것이었다.
조반산은 부르짖었다.
[가세! 더 이상 미련을 둘 필요가 없네!]
그는 자기들이 위험한 처지에 놓여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대청에는 고수들이 구름떼처럼 모여 있으니, 사태가 어긋난다면
즉시 자리를 피해야만 했다. 아쉽기는 하지만 사람을 구하는 일은
부득이 나중에 계획을 세워 다시 도모할 수 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어둠속의 혼란을 이용한다면 그런대로 빠
져나갈 수 있지만 만약 이 기회를 놓친다면 자기자신도 곤경에 처
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석쌍영이 남에게 저지를 당하고 있었고, 곧
이어 다시 두 사람이 공격을 해 오는지라 사람을 구하기는커녕 자
신도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없게 될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호비는 그 젊은 서생이 탕패에게 사로잡힐 때부터 손을 써서 구
원을 하고자 했다. 그러나 대청에는 강적들이 늘어서서 노려보고
있었고, 단지 대청 한 복판의 태사의에 앉아 있는 사대 장문인만
하더라도 자기 혼자서는 도저히 이길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없는
처지라 여지껏 참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조반산이 대청 안의 촛불
을 모조리 꺼버리자 망설이지 않고 즉시 몸을 날려 그 젊은 서생
에게 다가갔다.
호비는 탕패가 손을 써서 혈도를 짚은 부위가 운문, 곡지, 합곡
이 세 혈도라는 것을 똑똑히 보아 두었던 것이다.
호비는 즉시 몸을 구부리고 서생의 어깨 뒤에 있는 천종혈(天宗
穴)을 짚어 그의 운문혈을 풀어주었고, 다시 천지혈(天池穴)을 주
무르려고 했을 때 갑자기 등뒤에서 경미한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호비는 손을 번개처럼 뒤집어 바람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향해 일장을 맞받았다. 그러자 적의 장세는 지극히 신속하게 들이
닥쳐 가볍게 팍! 하는 음향과 더불어 두 사람의 손이 엇갈리게 되
었다.
호비는 몸을 흠칫하며 자기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면서 내심 경
악을 했다.
(이 사람의 장력은 정말 웅후하구나!)
부득이 전력을 다해 대항을 하자 상대방의 장력이 손바닥을 통
해 무궁무진하게 밀물처럼 들이닥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호비는 속으로 야단났다고 생각했다.
(장력을 겨룬다면 일시에 승패를 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촛
불은 잠시 후면 다시 켜질 것이니 내가 이 자리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을 것 같구나.)
찰라에 불과한 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순간 갑자기 그 젊은 서생이 나직이 말했다.
[도와주셔서 정말 고맙소이다.]
그리고는 놀랍게도 몸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호비는 그가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깨닫는 바가 있었다.
(나는 단지 그의 운문혈을 풀어주었을 뿐인데...... 그의 곡지
와 합곡혈은 원래 나와 일장을 마주쳤던 사람이 풀어준 것이었구
나! 그렇다면 이 사람은 친구이지 적은 아니다.)
그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동안 상대방 역시 똑같이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단지 그의 곡지와 합곡혈을 풀어주었지 운문혈은 풀어주
지 못했다. 알고보니 나와 일장을 마주친 사람이 풀어준 모양이로
구나. 그렇다면 이 사람은 친구이지 적은 아니다.)
두 사람은 내심 같은 생각을 하고 동시에 즉시 장력을 거두어
들였다. 그 젊은 서생은 자기 옆에 누워 있는 상비흥을 잡아일으
켜서 달려나가며 급히 부르짖었다.
[복강안은 이미 나에게 피살되었다! 소림파의 여러 호걸분들께
서는 동쪽을 공격하시고, 무당파의 호걸분들께서는 서쪽을 공격하
시오. 모두들 나서서 싸웁시다. 싸워.]
어둠 속에서 무기가 마구 부딪히는 소리가 일면서 대청 안은 일
대 수라장이 된 것은 물론 사람들의 마음도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
다.
뭇 위사돌은 복대수가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모두 놀
라 식은 땀을 흘렸다. 더우기 '소림파의 뭇 호걸들은 동쪽을 공격
하고, 무당파의 호걸들은 서쪽을 공격하라'는 고함 소리를 듣자
가뜩이나 수적으로 많은 양대 문파의 사람들이 정말 반기를 든 것
인가 하고 가슴을 졸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홀연 대청에서 주철초의 음성이 크게 들려왔다.
[복대수께서는 무사하시니 도적들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마라!]
이윽고 뭇 위사들이 촛불을 당기고 보니 조반산, 석쌍영, 그리
고 젊은 서생 및 상비흥은 모두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다만 복강안은 의자에 단정히 앉아 있었고, 탕패와 해란필이 그
앞을 막고 서 있었으며, 전후좌우에 육십 여 명이나 되는 호위들
이 몸으로 병풍을 치듯이 겹겹이 에워싸고 보호를 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엄밀하게 방비를 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비록 수백 명의
고수들이 공격을 해온다 하더라도 그의 털끌하나 건드릴 수 없는
형편인데 더군다나 서너 명의 자객들로 어찌 복대수를 해칠 수 있
겠는가?
그러나 복대수 휘하의 위사들이 하나같이 대수를 보호하는데 신
경을 쓰는 바람에 조반산 일행과 서생 등은 어둠을 타고 도망칠
수가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의 무공이 아무리 고강하다 하
더라도 그처럼 쉽사리 물러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뭇 사람들은 복강안이 얼굴에 미소를 띠우며 안색이 침착한 것
을 보고 대청은 대뜸 조용해졌다.
소림파의 장문인 대지선사와 무당파의 장문인 무청자도 편안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 서생의 의도가
사람들의 마음을 동요시키고자 한 소리임을 알아차릴 수 가 있었
다.
복강안은 태연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적이 터무니 없는 소리를 지껄인데 대해서 선사와 도장께서는
개의치 마시구려.]
안 제독은 복강안 앞으로 나아가 문안을 여쭈었다.
[비직(卑職)이 무능하여 도적들을 그만 놓치고 말았으니 대수께
서는 벌하여 주옵소서.]
복강안은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이 모든 것은 나 때문에 일을 그르친 것이지 당신들의 재간이
없는 탓은 아니오. 모두들 나를 보호하느라고 그 좀도적을 아랑곳
할 여유가 없었을 뿐이외다.]
그는 속으로 무척 만족해 했다. 뭇 위사들은 모두 충성을 다했
고, 자신을 중히 여겨서 몸으로 보호한데 대해 갸륵하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입을 열었다.
[몇 명의 좀도적들이 들이닥쳐서 훼방올 놓았지만 그렇다고 무
슨 커다란 변고가 생긴 것은 아니지 않소? 옥룡배를 하나 잃어버
리기는 했지만 그것도 좋지. 어느 문파이든지 그 옥룡배를 다시
빼앗아 오거나, 그 옥룡배를 훔쳐간 도적을 잡아온다면 그 옥룡배
를 그 사람 소유로 인정하겠소. 이 일은 또 지혜와 힘으로 겨루는
것이니 여기에서 단순히 무공을 겨루는 것보다 훨씬 홍미진진하지
않겠소?]
군호들은 큰소리로 화답을 했으며, 모두 복대수의 안배가 교묘
하다고 칭찬을 늘어놓았다.
호비와 정영소는 서로 한번 쳐다보며 속으로 복강안의 임기응변
이 매우 뛰어나구나 하고 생각했다. 황제가 하사한 옥룡배를 잃어
버린 실수를 가볍게 얼버무렸을 뿐만 아니라 한번 손을 뒤집는 사
이에 홍화회에 대해 그야말로 심복대환(心腹大患)을 심어놓은 수
단에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림에서는 자연히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명성을 떨칠 욕심으로
온갖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옥룡배를 빼앗아 오려고 할 것이고,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를 막론하고 모두 홍화회로 하여금 적지 않
은 강적을 만들어 놓는 결과를 초래한 것과 마찬가지로 사태를 역
전시킨 것이었다.
복강안은 안 제독에게 말했다.
[자, 너무 괘념치 말고 계속 무공을 겨루도록 하시오.]
안 제독은 허리를 구부리고 대답했다.
[네!]
그리고는 몸을 돌리고 낭랑히 말했다.
[복대수께서 명령을 내리셨소이다. 아무쪼록 천하 영웅호걸들께
서는 무예를 계속해서 펼쳐 보이도록 하시구려. 그리고 나머지 세
개의 옥룡배가 누구에게 돌아가는지 두고 보기로 합시다.]
그는 복대수의 명령이라고는 했지만 '아무쪼록'이라는 말을 붙
임으로써 군호들의 의사를 최대한 존중한다는 표시를 하며, 결코
강제로 시합을 강행하는 것이 아니라고 완곡하게 표현을했다.
복강안은 다시 분부를 내렸다.
[남은 의자 하나는 옮기도록 하지.]
그러자 한 명의 위사가 앞으로 재빨리 나아가 태사의를 옮겼고,
대청 한복판에는 세 개의 빈 의자만이 남아 있었다. 그제서야 사
람들은 곤륜도 장문인 서령도인이 이미 의자에서 떠나고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마도 그는 각문각파에 무공이 뛰어난 사람
들이 적지 않은 것을 보고 다른 사람에게 패하여 물러나는 것보다
차라리 스스로 물러서는 것이 못난 꼴을 보이지 않는 길이라고 판
단한 모양이었다.
호비는 대회에 이미 훙미를 잃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참
에 머리 속으로 여러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복강안이 쌍동이 아이들을 어떻게 되 빼앗아 올 수 있었을까?
내가 화권문 장문인으로 변장한 것을 눈치챈 것은 아닐까? 자꾸
시간을 끌면서도 나를 지목하지 않는 것을 보면 암암리에 엄청난
함정을 이미 마련해 놓았기 때문이 아닐까? 조금전 내가 그 젊은
서생의 혈도를 풀어줄 때 일장을 교환한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
그 역시 어둠을 틈타서 손을 써서 그 서생을 구하는 것을 보면 분
명 대청에 있는 군호들 가운데 한 사람인 것 같은데 누구인지 모
르겠구나!)
그는 이곳에서 일각이라도 더 지체한다면 그 만큼 더 위험해 진
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지가 않았다. 첫째는 머리
속에 남아 있는 많은 의문이 풀리지 않았고, 둘째는 봉천남이 바
로 곁에 있는 것을 보고 이번에도 그를 놓칠 수 있겠는가 하는 생
각이었다. 그리고 셋째로는 나머지 세 개의 옥룡배가 어느 문파의
장문인에게 돌아갈 것인지 구경하고 싶었다.
기실 이와 같은 것은 모두 억지로 짜낸 핑계에 불과하고 진정한
이유는 마음 깊숙히 자리잡고 있었다.
바로 원자의가 틀림없이 어딘가에 와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그녀가 반드시 오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호비로서는 결코 이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설사 도검지산(刀劍之山)과 같은 커다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하더라도 원자의를 생각하는 그의 마음을 바꿀 수는 없는 일이었
다.
이때 대청에는 다시 두 쌍의 사람들이 무공을 겨루고 있었다.
네 사람은 모두 무기를 쓰고 있었다. 그들은 조금전 손을 쓰던 사
람들보다 훨씬 고명했다. 얼마되지 않아 삼절곤(三節棍)을 쓰는
사람이 패해서 물러났으며, 다른 사람이 손에 유성추(流星鎚)를
들고 나섰다.
호명하는 무관은 그가 태원부(太援府)의 유성간월 동회도라고
길게 호명을 했다.
호비는 수 개월 전에 종씨 삼웅과 함께 손을 쓸 때 그들이 유성
간월 동노사의 이름을 들먹이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이 동회도
는 한쌍의 유성추에 대해서 조예가 무척 심후한 편으로 겨우 십여
합에 상대를 패퇴시켰으며, 곧이어 나선 두 사람도 적수가 되지
못했다.
고수들끼리 무공을 겨룸에 있어 만약 내력을 겨루는 것이 아니
라면 종종 몇 초 안에 승부가 판가름 나게 되고, 더우기 무기를
쓴다면 생사는 순간에 결정되는지라 권각법으로 겨루는 것보다 훨
씬 흉악하고 위험했다.
쌍방은 단지 무공을 겨루는 것이고 서로 깊은 원한이 없으며,
대다수는 단지 이름만 들었을 뿐 일면식도 없는 사이인지라 무공
의 고하가 현격하게 차이가 나거나 한 수라도 실수를하여 공격을
당한 자는 스스럼 없이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섰으며, 그 누구도
목숨을 잃을 정도로 위험을 무릅쓰면서 싸우려고는 하지 않았다.
따라서 복강안처럼 그저 무학의 겉만 아는 자의 눈에는 몇 초만
에 싱겁게 사람들이 물러서곤 하는지라 무공을 겨루는 쌍방이 모
두 자기 자신의 재간을 모두 드러내는 것을 꺼려하고 있다고 생각
하게 되었다.
고수들의 겨룸이라 자연히 앞서 무공을 겨루었던 황희절, 상비
홍, 구양공정, 합적 화상 등과 같이 맹렬히 치고 받고 하면서 싸
우는 것보다 홍미가 없었다.
그러나 고강한 무공을 지닌 사람들은 겨루고 있는 사람들의 무
공이 갈수록 고명해져 승리를 획득한다는 것은 점점 어렵다고 생
각하고 있었다.
각파의 장문인들은 본래 한번쯤 나서서 도전을 해 보려는 마음
이 없지 않아 있었으나, 지금 무기를 가지고 무공을 펼치는 고수
들의 재간을 보자 이제는 모두 생각을 바꾸고 그저 구경이나 하자
고 생각하고 있었다.
때로는 두 사람이 겨루는 모습이 전혀 박진감이 없고, 평범하여
맥이 풀린 사람처럼 보였으나 탕패와 해란필 등의 고수들은 탄성
과 갈채를 아끼지 않았다. 그 도리를 모르는 후배들은 무슨 영문
인지 몰라 어리벙벙하고 있었고, 개중에 영악한 후배들은 아무 것
도 모르면서 다른 사람들이 갈채를 보내면 덩달아 그들보다도 더
갈채와 환호성을 질렀다.
대청에 나서서 무공을 겨루는 사람들은 모두 조심을 하고 있었
으나 일단 시합에 나서면 기필코 상대를 제압하려는 근성을 지닌
사람들이라 무기에는 눈이 없는 만치 희생은 불가피해져 세 명의
장문인이 즉석에서 격살당했고, 일곱 명은 중상을 입었다.
하지만 지금은 복강안의 위세가 사람들을 압도하고 있었기 때문
에 죽거나 다친 문하의 제자들은 나서거나 불평을 하지 못했지만,
장차 대대로 혈우성풍(血雨腥風)을 불러 일으킬 뼈에 사무친 원한
은 모두 이날 씨앗을 뿌린 셈이라 할 수 있었다.
청나라 순치(順治) 강희(康熙) 옹정(應政) 세 황제가 집정하고
있을 때, 무림에서는 청나라에 항거하는 의거가 곳곳에서 일어났
으며, 백여 년 동안 시종 사그러들지 않았다. 그러나 건륭 중엽
이후 무림의 인사들이 은원에 얽혀 서로 죽고 죽이는 혼란이 벌어
지면서 다시는 청나라에 반기를 들고 나설 힘이 없게 되어 청나라
조정에서는 커다란 근심걱정을 덜게 되었다.
비록 원인이야 여러 가지가 있다 하겠지만 이번 장문인 대회가
실로 커다란 동기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었다.
후에 무림에서 덕망있는 인사들이 나서서 조정을 하여 그와 같
은 분란을 해소시키려 했으나 여전히 각문 각파의 뼈에 사무친 원
한은 삭힐 수가 없었다.
따라서 복강안의 음모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여전히 초망(草莽)
의 영웅들이 서로 공격하고 서로 죽이는 일은 만주 청나라의 기운
이 크게 성할 운세라며, 모두 이것을 천운(天運)으로 돌렸다.
유성간월 동회도는 한쌍의 유성추로 반 시진도 되지 않아 잇따
라 다섯 문파의 장문 고수들을 패퇴시켰다. 다른 장문인들은 그의
유성추를 두려워하며 나서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바로 이때 대청 밖에서 한 명의 무관이 달려 들어오더니 복강안
의 면전에서 나직이 몇 마디를 했다. 이윽고 복강안은 고개를 끄
덕였고, 그 무관은 다시 대청 입구로 돌아가 큰 소리로 입을 열었
다.
[복대수께서는 천룡문 북종 장문인 전노사를 들어오랍십니다!]
그러자 대청 밖에서 그 말을 받아 전갈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복대수께서는 천룡문 북종 장문인 전노사를 들어오랍십니다!]
호비와 정영소는 서로 바라보며 내심 흠칫하며 생각했다.
(그 자들이 왔구나!)
이윽고 전귀농이 몸에 장포와 마괘(馬掛)를 걸치고 미소를 띠운
채 천천히 걸어들어 왔으며, 뒤에는 크고 작은 사람들이 여덟 명
이나 따르고 있었다.
그는 복강안 앞에 이르더니 허리를 구부리고 인사를 했다.
복강안도 약간 몸율 숙여 보이며 포권을 하고 반례를 하며 입을
열었다.
[진노사, 안녕하시오? 자, 이리로 앉으시오.]
군호들은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 모두 속으로 생각했다.
(천룡문의 무공은 천하에 명성을 떨친지 백 년이 지났다. 명나
라 말기 이래로 호씨, 묘씨, 범씨, 그리고 전씨 집안이 함께 명성
을 떨치며 고수들을 배출했다. 그런데 이 전가 역시 기세가 비범
하고 복대수도 그에게 깍듯이 대접하는 것이 다른 장문인들과는
다른 태도구나. 그런데 정말 그의 재간도 그만치 뛰어날 것일까?)
모든 문파에서 이 대회에 참가하는 인원수는 모두 세 사람으로
한정되어 있었는데 그는 여덟 명이나 되는 시종들을 데리고 왔다.
더군다나 이처럼 거드름을 피우면서 늦게 도착한 것이었다.
군호들은 그의 위명에 약간 압도되기는 했지만 내심 아니꼽게
생각하고 있었다.
전귀농은 소림, 무당 양파의 장문인에게 고개를 끄덕여 예를 표
했지만 보기에는 서로 잘 모르는 처지인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감림혜칠성 탕패와는 지극히 친한듯 탕패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아우님, 이 형은 줄곧 자네를 걱정하고 있었다네. 어째서 오지
않을까 궁금하게 여기고 있었지. 만약 자네가 늦게 와서 옥룡배를
차지하지 못한다면 이 형이 어찌 미안하게스리 혼자 옥룡배를 들
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겠는가? 자네 천룡문이 만약 오늘 옥룡배
를 얻지 못해 억울하게 생각하고 자네가 이 형을 찾아와 겨루겠다
고 한다면 나로서는 두 손으로 공손히 옥룡배를 바치고 다시는 꿈
에도 되찾을 생각을 하지 못할 것이니 어찌 섭섭하지 않겠는가?]
이어서 그는 각파가 어떻게 무공을 겨루어 옥룡배를 차지하는지
그 경과를 설명해 주었다.
그 말을 다 듣고 전귀농은 웃으며 말했다.
[이 형제가 어찌 형님과 감히 견줄 수 있겠소이까? 우리 천룡문
이 만약에 복대수의 은정을 입는다면 형님이 돌봐주신 덕택이고,
천하 영웅들 앞에서 낭패를 당하는 못난 꼴을 보이지 않는 일만으
로도 다행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리고 나서 그들 두 사람은 호탕하게 웃었다.
전귀농의 말투는 매우 겸허했으나 두 눈과 표정은 이미 옥룡배
를 자기 손에 있는 물건처럼 여기는 것이 역역히 드러나고 있었
다.
탕패는 모든 사람들과 친한 것 같았지만 전귀농을 대하는 태도
는 다른 사람들 대하는 태도와는 사뭇 달랐다. 그들 두 사람이 서
로 호칭을 하고 말을 건네는 투로 보아 그들은, 의형제를 맺은 사
이인 것 같았다.
호비는 내심 생각했다.
(저 전가는 나와 손을 쓴 적이 있다. 그의 무공은 이 사람들보
다 더 높은 편이기는 하지만 탕패나 해란필과는 비견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런데도 옥룡배를 제 주머니 속에 있는 물건처럼 여기
는 수작이 여기에 모여 있는 영웅호걸들을 모두 안중에 두지 않는
태도로구나.)
전귀농이 묘인봉을 암산하고자 했던 몰염치하고도 비열한 행동
을 떠올린 호비는 어느덧 자기 나름대로 작심을 했다.
(그가 옥룡배를 손에 넣지 못한다면 모르되 만약 요행으로 얻는
다면 그로 하여금 천하 군웅들 앞에서 낭패한 꼴을 보이도록 만들
어야 겠다.)
그는 묘인봉의 집에서 전귀농과 겨룬 적이 있었다. 그때 호비는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호가도법으로 전귀농을 물리치고 뺑소
니치도록 만든 일이 있었다. 더군다나 그 때는 호비가 묘인봉의
지도를 받기 전이라 호가도법의 정묘한 점을 터득하지 못한 때였
다. 그러나 지금은 단지 도법으로만 논한다 하더라도 호비를 따를
고수가 없을 정도였으며, 설사 묘인봉이나 조반산 같은 일류 고수
와 겨룬다 하더라도 별로 뒤떨어지지 않을 편이니 전귀농은 자연
히 그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전귀농이 대청으로 들어서자 무공 시합은 잠시 중단되었다가 다
시 무기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일었다.
전귀농은 의자에 비스듬히 다리를 꼬고 앉아 술잔을 들고 싸움
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그 표정은 지극히 여유가 있었으며 우아해
보였다. 그는 누가 이기고 지던 간에 아랑곳하지 않는 표정으로
넌즈시 미소를 띠우고 있었으며 이따금 탕패와 한담을 나누기도
했다.
뭇 사람들은 그가 겉으로는 남들보다 한 수 위라는 듯이 점잖을
빼며 다른 사람들과 다투는 것이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다른 사람들이 지치기를 기다렸다가 최후의
순간에 나서서 손을 쓰려 한다는 속셈이라는 것을 꿰뚫어 보고 있
었다. 사실 다른 사람이 지칠대로 지쳤을 때 나서서 전력을 다해
일격을 가한다면 어찌 그토록 손쉬운 일이 있겠는가?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일개 문파의 장문인인데 어찌 그의 수작을 알아차리지
못하겠는가?
유성간월 동회도는 태사의에 앉아서 오랫동안 기다려도 감히 자
기에게 도전하는 사람이 없는 것을 보자 벌떡 몸을 일으켜 전귀농
앞에 다가가더니 입을 열었다.
[전노사, 이 동가가 그대의 고명하신 초식을 가르침 받고자 하
오.]
뭇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고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시합이 시작된 이후 이긴 사람은 태사의에 앉아 있고, 다른 사
람이 나서서 겨루기를 신청하는 것이 상례인데 뜻밖에도 동회도는
스스로 자리에서 일어나 전귀농에게 겨루기를 청하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전귀농은 술잔을 들고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서두를 것은 없지 않소?]
동회도는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말했다.
[어차피 일전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으니 내가 기운이 남아 있을
때 전노사의 고명하신 초식을 가르침 받고 싶구려. 그래야만 당신
이 맨 마지막에 나서서 덕을 보는 일이 없지 않겠소?]
그는 전가의 심사를 꿰뚫어 보고 있었던 터라 그의 곧고 입바른
성격에 맞게 대뜸 정곡을 찌르는 말을 했지만 전혀 꺼리낌이 없어
보였다.
군호들 가운데 이십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속이 후련하다는
듯이 동회도의 말에 갈채를 보냈다. 이 사람들은 그 전가의 오만
불손한 태도에 이미 아니꼬움과 분노를 동시에 느끼고 있던 터였
다.
전귀농은 껄껄 웃으며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탕
패에게 입을 열었다.
[형님, 이 형제가 못난 꼴을 보이게 되었구려.]
탕패는 그 말을 받았다.
[아우님이 성공하기를 미리 공축(恭祝)해 주겠네.]
동회도는 탕패를 노려보며 거칠은 음성으로 말했다.
[탕노사, 복대수께서는 당신을 사대 장문인의 하나로 간주하고
당신을 공증인으로 내세웠는데 그런 행동은 도리에 어긋나는 것
아니오?]
탕패는 동회도의 입바른 반박에 약간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억지로 웃음을 띠웠다.
[불초가 어느 점에서 불공평하다는 것인지 동노사께서 한 번 지
적해 보시구려.]
동회도는 거리낌없이 말했다.
[내가 전노사와 아직 무공을 겨루지도 않았는데 당신은 어째서
역성을 들듯이 '아우님이 성공하기를 공축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
소? 천하 영웅호걸들이 모두 이곳에 계시고 또한 모두 들었을 것
이외다.]
탕패는 내심 괘씸하게 생각했다. 근 이삼십 년간 강호를 떠돌아
다니는 동안 사람들은 그를 볼때마다 '탕대협, 어쩌구 저쩌구' 했
지, 한 사람도 이처럼 반박하거나 핀잔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더
군다나 여러 사람들의 면전에서 잘못된 점을 곧장 지적당한다는
것은 그의 위명으로 미루어 볼때 여간 불쾌한 것이 아니었다. 그
러나 그는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답게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나 또한 동노사가 시합하는 즉시 승리할 것을 공축할 것이외
다.]
동회도는 어처구니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내심 두 사람이 겨루는데 두 사람 모두에게 공축하기를 빈
다는 말은 천하에도 결코 찾아볼 수 없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
러나 그는 더 이상 반박할 건덕지도 없고 해서 큰소리로 비아냥거
리듯 말했다.
[탕노사, 당신 역시 시합을 하는 즉시 승리를 거두고, 또한 성
공하기를 공축하오이다.]
군호들은 그 말을 듣자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전귀농은 탕패에게 이러한 무례한 후레자식의 버릇을 단단히 고
쳐 놓아 형님에게 허리를 구부리고 사죄를 하도록 만들겠다는 눈
짓을 했다. 그리고는 느릿느릿 거만한 걸음으로 대청 한 복판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동노사, 손을 쓰시지요.]
동회도는 그가 장포도 벗지 않고 손에 아무런 무기도 들지 않을
것을 보고 더욱 분노하여 거칠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전노사는 맨손으로 불초가 가지고 있는 이 한쌍의 유성추를 상
대하겠다는 것이오?]
하지만 전귀농은 지극히 심계(心計)에 뛰어난 사람이라 일을 처
리함에 있어 언제나 신중을 기했다. 그는 내심 단번에 상대방을
거꾸러뜨릴 수만 있다면 천하 영웅들 앞에서 위풍을 세우는데는
더할 나위 없지만, 상대방의 체구가 우람하고 눈빛이 형형한 것을
보고 실로 쉽게 다룰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직시하고 있
었다. 이윽고 그는 넌즈시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동노사, 진섬(晉陝) 일대의 강호의 호걸이라면 어찌 유성간월
의 절기를 모르는 사람이 있겠소? 불초가 설사 무기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동노사의 적수가 되지 못할 것이외다.]
그리고는 오른손을 들어 손짓을 하자 그의 큰 제자인 조운기(曹
雲奇)가 장검을 두 손으로 받쳐들고 다가오더니 공손하게 올렸다.
전귀농은 오른손으로 장검을 받아들고 왼손을 흔들어 보이며 말
했다.
[자, 이제는 손을 쓰시지요.]
동회도는 그가 검집에서 검을 뽑지 않는 것을 보고 당신이 이미
손에 무기를 들고 있는 이상 언제 뽑아 들던 그것은 당신마음이라
고 생각하고 즉시 손가락을 쇠사슬 중심부에 걸고 아랫쪽을 향해
돌리며 한쌍의 유성추가 일직선을 이루도록 만들었다. 그 쇠사슬
은 마치 한 자루의 철봉처럼 보였다.
군호들은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 일제히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훌륭한 재간이군!]
탄성과 갈채가 이는 가운데 그의 왼쪽 유성추는 허공에서 머물
렀고, 오른쪽 유성추는 어느덧 수평으로 곧장 뻗어나갔다.
그러나 그 유성추가 전귀농의 가슴에서 한 자 반 정도 떨어진
곳에 이르자 갑자기 멈추었으며, 그 대신 왼쪽의 유성추가 신속하
고도 민첩하기 이를데 없이 뒤에서 뻗쳐나오며 곧장 전귀농의 아
랫배를 공격했다. 앞쪽의 유성추는 허초(虛招)로서 적을 유인하는
것이었고, 뒤에서 뻗쳐나오는 유성추야말로 전력을 다해 뻗쳐낸
일격이었다. 그는 나서자마자 대뜸 유성간월의 명성을 떨친 절기
를 펼쳐낸 것이었다.
전귀농은 내심 놀라며 비스듬히 뒤로 몇 걸음 물러서더니 장검
을 앞으로 뻗쳐내며 검집 채 찔러갔다.
동회도는 크게 노하며 생각했다.
(네가 검을 뽑지 않는 것은 분명히 나를 업신여기는 것이다!)
즉시 그는 손에 힘을 보태 한쌍의 유성추로 검은 빚무리를 이루
도록 휘둘렀다. 두 개의 유성추 가운데 하나는 빨랐으며, 하나는
느렸다. 빠른 것이 허(虛)한 것이라면, 느린 것은 실(實)한 편이
었다. 또한 빠른 것이 반드시 빠르다고만 볼 수 없었으며, 느린
것 역시 반드시 느리다고는 볼 수 없었다.
일초일식에 내포된 변화는 무궁무진했으나 전귀농은 시종 검집
에서 칼을 뽑지 않고 천룡검법을 펼쳐내고 있었다. 삼십여초를 겨
루고 나서야 전귀농은 어느 정도 상대방의 유성추를 펼치는 법칙
성을 더듬어 헤아리게 되었다. 갑자기 그는 장검을 뻗쳐서는 질풍
과 같이 동회도의 왼쪽 다리의 오금에 있는 곡천혈(曲泉穴)을 찌
르려고 들었다.
이 일초는 결코 검법이라고 볼 수 없었다. 장검이 아직도 검집
에 꽃혀 있는 만큼 오히려 이는 판관필을 쓰는 법을 변화시켜 응
용한 것이었다.
동회도는 깜짝 놀라 뒤로 두 걸음을을 물러섰다. 순간 전귀농은
장검을 옆으로 쓸어쳐서 그의 허벅지를 후려쳐 왔다. 이번에는 마
치 검과 검집을 가지고 철간을 쓰듯이 사용한 것이었다. 전귀농은
순식간에 검법을 필법(筆法)으로 변화시켰고 다시 필법을 철간법
으로 변화시킨 것이었다.
동회도는 내심 당황하며 왼손의 유성추를 휘말듯이 뻗쳐내면서
전귀농의 미간을 노렸다. 이것은 일종의 양패구상(兩敗俱傷)의 타
법(打法)으로서 허벅지를 검과 검집에 찔릴 각오를 하고 유성추로
써 전귀농의 미간을 쪼개려고 하는 것이었다.
전귀농은 상대방이 자신의 공격을 피하지 않고 맞받아쳐 오리라
고는 예상치 못한 터였다. 그의 검과 검집은 동회도의 허벅지와
불과 몇 치도 되지 않는 곳에 이르자, 순간 세찬 바람이 얼굴에
덮쳐오며 무쇠로 만들어진 철추(鐵鎚)가 날아들고 있는 것이 아닌
가?
만약에 두 사람의 공격이 서로 적중된다면 동회도는 기껏해야
다리를 못쓰게 되지만 전귀농 자신은 골통이 빠수어져 골수를 뿌
리는 화를 당하게 될 판이었다.
전귀농은 장검을 거꾸로 돌리고 동회도의 쇠사슬의 중간을 장검
으로 올려치려고 했다. 전귀농이 공세에서 수세로 바꾸자 대뜸 열
세에 빠지고 말았다.
동회도는 유성추를 거두어들이는 동시에 쇠사슬로 장검을 휘감
아 안쪽으로 와락 당기며 오른쪽의 철추를 옆으로 쳐갔다.
전귀농은 무기를 제압당한 판이라 만약 목숨을 건지려고 한다면
반드시 장검을 손에서 놓아야 할 판이었다. 그런데 그순간 싹! 하
는 소리와 함께 하얀 광채가 번쩍이며 장검이 검집에서 빠져 나왔
고, 검골이 뱀의 혓바닥처럼 흔들하더니 동회도의 오른쪽 손목을
가볍게 찔러 버렸다.
이는 동회도가 쇠사슬로 장검을 휘감아 낚아채려 한 것이 공교
롭게도 검집을 뽑아버린 셈이었던 것이다.
전귀농은 동시에 잇따라 앞으로 두 걸음을 내딛으며 왼손 식지
로 연달아 동회도의 가슴팍에 있는 세 곳의 요혈을 짚어버렸다.
동회도는 가슴이 시큰거리고 마비되는 것을 느끼면서 그만 유성
추를 놓치고 말았다. 유성추는 곧장 떨어지면서 벽돌가루가 마구
튀어올랐다.
전귀농은 검을 검집에 꽃고 싱글벙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양보해 주셔서 정말 고맙구려.]
그리고는 동회도가 앉아 있었던 태사의에 앉았다.
그는 이기기는 했으나 대청에 있는 군호들은 모두 다 이번시합
에서 그에게 요행이 따랐을 뿐이고 마지막 일초는 교활하기 짝이
없어 결코 자신의 실력으로 승리를 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
었다. 따라서 탕패 등 몇 몇 사람의 갈채 소리만이 울려 퍼졌을
뿐, 그 밖의 사람들은 갈채를 보내거나 칭찬의 말을 하지 않았다.
동회도는 혈도가 짚혀 전신이 마비된 채 움직이지 못했다.
그는 유성추를 휘둘러 적을 치려는 자세를 그대로 취한 채 움직
이지 못하고, 눈썹을 곤두세우며 눈을 부릅뜨고 있었는데 그 모양
이 지극히 흉흉했다.
전귀농은 그의 혈도를 풀어주지 않고 태사의에 앉아 여유있는
태도로 탕패와 우스개 말을 하며 동회도의 참담한 모습을 보고도
못본 척 했다.
대청에는 적지않은 점혈(點穴) 타혈(打穴)의 명수들이 있었던지
라 전귀농의 잔인한 태도에 하나같이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일단 누군가 나서서 동회도의 혈도를 풀어주려 한다면
이는 바로 전귀농과 탕패에게 시비를 거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
을 알고 있기에 감히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전귀농이야 별로 대단한 존재는 못되지만 감림호칠성 탕패는 정
말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더구나 점혈, 타혈의 명수들은
그 무공 분야의 특성상 십중팔구 신중을 기하는 사람들인지라 모
두 다 이 일 때문에 탕패의 비위를 거스리는 일은 원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동회도는, 멍청하게 우두커니 서 있게 되었다. 많
은 사람들이 그를 동정하고 있었지만 정작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독수약왕의 출현
순간 왼쪽의 술자리에 앉아 있던 대한이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굵고 기다란 빈철곤을 질질끌면서 성큼성큼 걸어나왔다. 빈철곤은
바닥 위에 끌리면서 쨍그랑 쨍그랑 하는 소리가 연신 일었다.
그 대한은 전귀농 앞에 이르더니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전씨 양반, 저 사람의 혈도를 풀어주어야지 어째서 저 사람이
저곳에 꼿꼿하게 서 있도록 하는 것이오?]
전귀농은 미소를 지었다.
[귀하는 누구시죠.]
그 대한은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이정표(李廷豹)라고 하오. 당신은 들어본 적이 있소?]
그가 그와 같이 자기의 성명을 들먹이는 음성은 마치 벽력을 치
는 듯하여 모든 사람의 고막이 웅웅거릴 정도로 충격을 주었다.
군웅들은 그 사람이 바로 이정표라는 소리를 듣자 모두 다 약간
의아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정표는 오태파(五台派) 장
문 대제자로서 섬서성 연안부(延安府)에서 표국을 열고, 오랑곤법
(五郞棍法)으로 천하에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그가 경영하는 오
랑표국은 강북 칠성에서 명성이 자자한 편이었다.
뭇 사람들은 그가 유명한 표국주이니 자연히 지모가 출중하고
세상사에 노련한 인물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모두가 사
태의 추이를 내다보고 나서지 않고 있는데 나서는 것을 보고 경거
망동하는 것이 아니냐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전귀농은 태사의에 앉아서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오태파 이정
표라는 이름은 그 역시 들어본 적이 있었지만 그는 일부러 의아한
빛을 띠우고 고개를 들었다.
[들어보지 못했구려. 귀하는 어느 문파, 어느 가문이시오?]
이정표는 대노해서 호통을 내질렀다.
[오태파에 대해서 당신은 못 들었다는 말이오?]
전귀농은 여전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얼굴에는 일부러 장
난스럽게 매우 미안쩍고 황공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태파라구요? 칠태나 팔태가 아니란 말이오?]
그는 '팔태'라는 두 글자를 말할 때는 일부러 왕팔단(王八蛋:후
레자식이라는 뜻)의 팔단과 비슷한 발음을 했기 때문에 대청에 있
는 몇몇 젊은이들은 참을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다행히
이정표는 그 사실은 알아차리지 못한 듯 입을 열었다.
[오태파이외다. 모두 다 무림의 동도이자 일맥이니 당신은 빨리
동노사의 혈도를 풀어주도록 하시오. 군자는 죽일 수는 있으되 욕
을 보이지 않는 법이오.]
전귀농은 물었다.
[당신은 동노사와 절친한 친구 사이오?]
이정표는 냉랭하게 말했다.
[아니오. 나는 그와 일면식도 없소. 하지만 당신이 저와 같이
사람을 희롱하는 것은 너무한 처사인지라 그냥 보고 참을 수가 없
소.]
전귀농은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혈도를 짚을 줄만 알았지 사부님으로부터 푸는 방법을 가
르침 받지 못했다오.]
이정표는 고함을 지르듯 큰소리로 말했다.
[거짓말하지 마시오.]
복강안과 안 제독 등은 그들 두 사람이 주고 받는 말을 매우 재
미있게 보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전귀농이 이정표를 희롱한
다는 것을 알았다.
이들 친귀대관(親貴大官)들이야 뭇 무사들이 무공을 겨루는 것
을 원래 오락거리로 여기며 마치 연극을 보거나 마술을 보는 정도
로 취급하는 작자들이었다.
헌데 싸움이 벌어지는 막간에 익살꾼이 한 명 나와 재미있는 연
극을 펼치는 것 같으니 어찌 흥미진진하지 않았겠는가?
전귀농은 복강안이 싱글벙글 웃는 표정을 힐끗 쳐다보더니 더욱
더 노골적으로 이정표를 놀리려는 듯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합시다. 당신은 힘껏 그의 오금을 걷어 차 보구려. 그
러면 그의 혈도를 풀게 될지도 모르오.]
이정표는 물었다.
[그게 정말이오?]
전귀농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우리 사부님이 옛날에 나에게 그와 같이 가르켰소. 하지만 나
는 한번도 시험해 보지 못했소이다.]
그러자 이정표는 오른발을 들고 동화도의 오금을 걷어찼다. 그
는 그렇게 힘을 주어 걷어찬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동회도는 곧
장 석상(石像)처럼 쓰러지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땅바닥에서 몇
번 굴렀지만 그의 자세는 변함이 없었다.
이정표는 상대방의 속임수에 넘어가 사람을 구한다는 것이 되려
사람을 차서 쓰러뜨리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었다.
복강안은 껄껄 소리내어 웃었고, 뭇 귀족들이나 벼슬아치들은
덩달아서 배를 잡고 웃었다. 군호들 가운데는 분함을 참지 못하고
전귀농을 꾸짖으려 했으나 복강안이 즐거워하며 웃자 감히 소리를
치지 못했다.
순간 파공성이 일면서 세 개의 술잔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뭇 사람들이 일제히 허공을 바라보니 세 개의 잔은 서로 부딪히
면서 쨍쨍! 하는 소리를 내며 산산 조각이 나며 땅바닥에 떨어졌
다. 그 잔을 따라 아랫 쪽으로 시선을 옮기고 있자니 동회도가 어
느덧 몸을 일으키며 손에 술잔을 하나 들고 입을 열었다.
[어느 영웅호걸인지는 모르지만, 도와 주신데 대해 이 동회도는
한평생 은덕을 잊지 못할 것이외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품속에 갈무리하고 나서 매섭게 전
귀농올 노려 보고는 급히 대청을 떠났다.
사실 누군가 잔을 허공에 던져 서로 부딪히게 한 것은 사람들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자는 것이었다. 뭇 사람들이 허공으로 날
아오는 세 개의 술잔을 바라보는 틈을 타서 그 사람은 다른 술잔
을 던져 동회도의 등심에 있는 근축혈(筋縮穴)을 쳐서 그의 막힌
혈도를 풀어준 것이었다.
이 한 수는 대청에 모여 있는 많은 고수들을 모조리 속인 셈이
었다. 모두들 이 재간이 무척 고명하다는 것을 알아볼 수는 있었
으나 누구의 솜씨인지 알지 못했다.
순간 탕패가 몸을 일으키더니 두 개의 술잔에다가 술을 잔뜩 따
라서는 호비가 앉아있는 자리 앞으로 오더니 입을 열었다.
[형씨는 얼굴이 매우 생소하구려. 실례하지만 존성대명은 어떻
게 되시오? 귀하의 술잔을 날려 혈도를 푼 재간에 대해서 정말로
탄복했소이다.]
호비는 동회도가 종씨 삼웅의 친구라는 점과 또한 전귀농이 사
람에게 너무나 심한 수모를 안겨주는 것을 보고 의협심이 일었다.
비록 자신이 위험한 처지에 놓여 있었으나 그만 참을 수가 없어
손을 써서 동회도의 혈도를 풀어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예리한 탕패의 눈초리는 벗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호비는 정중히 입을 열었다.
[불초는 화권문의 사람으로서 성은 정씨이고 이름은 영호라 합
니다. 탕대협은 제가 잔을 날려 혈도를 풀어 주었다고 말씀하셨는
데 불초로서는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구려.]
탕패는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귀하께서 굳이 감출 필요가 어디 있겠소이까? 좌석에
있던 술잔이 지금은 네 개가 줄어들지 않았소이까?]
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는 내가 술잔을 던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단지 우리의 좌석
에 네 개의 술잔이 줄어 든 것을 보고 알아냈구나.)
그리하여 그는 고개를 돌리고 곽옥당에게 넌즈시 말했다.
[아! 곽노사, 곽노사께서 의협심이 일어 잔을 놀려 저 동가의
혈도를 풀어주셨구려. 정말 탄복했소이다.]
곽옥당은 간이 적어 겁이 많은 사람이라 혹시라도 화를 불러 들
이는 일이 있게 될까봐 재빨리 입을 열어 변명을 했다.
[나는 잔을 던지지 않았소...... 나는 잔을 던지지 않았다구
요.]
탕패는 그를 잘 알고 있는지라 그에게 그와 같은 재간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좌석을 둘러보아도 그 자리에 같이 앉
아 있는 사람 가운데 오직 화권문의 채위만이 명성을 떨친지 오래
되었으나 그의 암기 재간은 평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탕패는 이윽고 오른손에 있는 술잔을 건네주며 웃으며 입을 열
었다.
[정형, 오늘 이렇게 만나뵙게 되어 반갑소이다. 형제가 당신에
게 경의의 술을 한 잔 권하겠소.]
그는 잔을 들어서 호비의 술잔과 가볍게 부딪히도록 만들었다.
순간 퉁! 하는 소리가 나면서 호비의 손에 들린 술잔이 갑자기
산산조각 나면서 술과 술잔 조각이 호비의 가슴을 후려치는 꼴이
되었다.
원래 탕패는 술잔을 부딪히는 순간에 암암리에 공력을 돋구었
다. 호비의 무공이 어떠한지 한 번 시혐해 보리라고 생각했던 것
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두 개의 술잔이 부딪치자 화권문 장문인
정영호는 반점의 내공도 없는 듯 술잔이 박살나며 술과 잔 조각들
을 모조리 뒤집어 쓰며 낭패한 몰골이 되고 만 것이었다.
탕패의 손에 들린 술잔은 물론 완전무결했으며, 옷자락에는 한
방울의 술도 튀지 않았다.
탕패는 미소를 지으며 사과를 했다.
[미안하구려.]
그리고 스스로 자리로 돌아가서는 앉아서 생각을 했다.
(저 조그만 늙은이는 형편없군! 그렇다면 술잔을 날려서 혈도를
푼 사람은 누구일까?)
이때 전귀농과 이정표가 어느덧 대청 한복판에서 손을 쓰기 시
작했다. 전귀농은 손에 장검을 들고 푸른빛을 번득이고 있었다.
이번에는 검을 검집에서 뽑아들고 있었으며 조금도 거드름을 피우
지 않는 것 같았다.
이정표는 오랑곤법을 펼쳐서는 추창망윌(推窓望月), 배곤당종
(背棍撞鍾), 백원문로(白猿問路), 횡란천문(橫欄天門) 등 초식을
펼치면서 권(圈), 점(點), 벽(劈), 알(軋), 도(挑), 당(撞), 철
(鐵), 살(殺) 등의 요결을 운용하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그의
초식은 정교하면서도 힘이 맹렬하여 패도적인 위세를 보여주고 있
었다.
군호들은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 속으로 승복하지 않을 수가 없
었다. 사람들은 그제서야 오랑표국이 근 십여 년 동안 명성이 자
자했던 것은 이 총표사가 진정 뛰어난 재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
이라는 것을 알았다.
전귀농의 천룡검도 물론 무림의 일절이라 할 수 있었다. 격투가
진행될수록 전귀농은 점점 우세를 차지하게 되었지만 짧은 시간
내에 승리를 거둔다는 것은 실로 수월한 노릇이 아닌것 같았다.
한참 격투를 벌이고 있는데 갑자기 전귀농이 앞섭자락을 휙 뒤
집으며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단도를 뽑아 들었다. 촛불아래
드러난 단도는 휘황찬란한 광채를 사방으로 뿌리고 있었으며, 멀
리서 볼때는 보석 같기도 했고, 유리같기도 했으며, 차가운 얼음
같기도 했다.
이때 이정표는 도반건곤(倒反乾坤)이라는 일초를 펼치며 전귀농
의 머리를 쪼갤듯 빈철곤으로 내려치고 있었다. 전귀농은 장검으
로 빈철곤을 떨쳐냈다. 이정표는 다시 빈철곤을 앞쪽으로 곧장 밀
어냈는데, 바로 청룡출동(靑龍出洞)이라는 일초였다. 이일초는 쇄
후창법(鎖喉槍法)을 변화시킨 것으로서 기이하고도 위험한 수법이
었다.
그러나 이정표는 매우 익숙한 듯 펼쳐냈다. 그 정확성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며, 정히 자기가 지닌 재간과 공력의 깊이를 여실
히 나타내 보였다.
전귀농은 결코 피하지 않고 왼손의 단도를 쳐올리자 창! 하는
소리와 함께 빈철곤을 두 토막으로 잘라버렸다. 곧이어 이정표가
당황한 틈을 타서 오른손의 검으로 그의 손목의 근맥(筋脈)을 내
리쳤다.
이정표는 비명을 내지르더니 빈철곤을 내던졌다. 손목 근맥이
잘라졌으니 오른손은 이제 병신이 된 것과 다름 없었다.
그는 한평생 오랑곤법만 연마해온 터였다. 곤봉같은 무기를 휘
두른데 있어서는 반드시 두 손을 모두 사용하여야 하는데 오른손
이 못쓰게 되었으니 이는 무공을 깡그리 상실한 것과 다를바가 없
었다. 삽시간에 반생 동안 애써서 쟁취한 위명이 일패도지(一敗途
地)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표국도 문을 닫을 수 밖에 없다는 생
각이 뇌리에 파고들었다.
사실 그 자신의 돈벌이는 변변치 못했기 때문에 평소에 저축한
돈도 없었다. 그는 자기 일가족이 당장에 한기와 굶주림에 허덕이
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눈앞이 캄캄해졌다.
더구나 자기 자신의 성격이 열화와 같고 조급해서 일생 동안 적
지않은 원한을 맺었으니 이제 원수들이 집으로 찾아온다 하더라도
어떻게 상대할 방도가 없을 것 같았다. 더우기 평소 자기를 따르
던 사람들마저도 다른 표국의 후배들이나 시정잡배들의 비아냥과
조소를 받게 된다면 어떻게 견더낼까 하는 난감한 생각도 들었다.
그는 고지식한 사람이라 일각이라도 더 산다는 것은 수모를 더
많이 받을 뿐이라는 생각에 좀처럼 울분을 삭힐 수가 없었다. 그
는 왼손으로 반 토막의 빈철곤을, 집어들더니 쿵! 하는 소리와 함
깨 자기의 머리통을 내려치고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대청에 모였던 모든 사람들은 놀라서 일제히 소리를 내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본래 대청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그가 빈철을 보
고 틀림없이 전귀농과 사생결단을 하리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자기 머리를 내려치자 경악해서 사람들은 말을 하지 못했다.
안 제독은 투덜대며 말했다.
[치워라. 깨끗이 치워!]
그리고 그는 사람들에게 시체를 떠메어 내려가도록 명령했다.
이정표가 만약에 격투 중에 전귀농의 검에 찔려 죽었더라면 그
만이겠지만 이와 같이 자살하도록 만든데 대해 뭇 사람들은 한결
같이 울분을 느꼈다.
서남쪽에서 한 사람이 몸을 일으키더니 입을 열었다.
[전노사, 당신은 보도로 빈 철곤을 잘랐으니 이미 이긴 것은 기
정 사실인 데, 왜 또 그의 손목의 근맥을 잘랐소?]
전귀농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무기에는 눈이 없소이다. 만약에 불초가 무예를 제대로 익히지
못해 그의 빈철곤에 한 대 얻어맞게 되었더라면 역시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이 아니겠소?]
그 사람은 냉소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무예에 매우 정통하다는 말이겠구료.]
전귀농은 담담하게 응수했다.
[그렇게 자처하지 않소. 하지만 노형이 승복할 수 없다면 내려
와서 가르침을 베풀어 주시구려.]
그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매우 좋소.]
그 사람 역시 장검이었는데 대청 한복판으로 나서자 성명도 말
하지 않고 휙! 하니 일검을 휘둘러 전귀농의 가슴팍을 노리고 찌
르려고 들었다.
전귀농은 여전히 오른쪽에는 장검을 들고 왼쪽에는 단도를 들고
서 상대를 했는데 칠팔 초를 겨루고 나서 창! 하니 보도로 그의
장검을 잘라버리고 다시 일검으로 그의 왼쪽 가슴을 찔러 상처를
내었다.
군호들은 그의 손씀씀이가 악랄한 것을 보고 잇따라 나서서 도
전을 했다.
이 사람들은 태반이 옥룡배를 찬탈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정표의
죽음이 너무나 비참했기 때문에 울화가 치밀어서 전귀농의 안하무
인격인 콧대를 한번 꺽어 놓아야겠다는 의협심 때문 이었다. 그러
나 그의 왼손에 들린 보도가 너무나 무서워 어떤 무기든 부딪혔다
하면 잘라지거나 부러졌다.
나중에는 오행륜(五行輪) 독각동인(獨脚銅人) 등과 같은 기이한
무기들이 모두 다 나섰으나 그 어느 하나도 그의 보도의 예리함을
막아내지 못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나서서 자극을 주는 말을
했다.
[전노사, 당신의 무공은 소인배와 다름 없는데, 다만 보도만큼
은 영웅호걸답구려. 당신이 사내라면 나와 권각법으로 고하를 판
가름 합시다.]
전귀농은 웃었다.
[이 보도는 우리 천룡문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진문지보(鎭門之
寶)이외다. 오늘 복대수께서는 각문 각파의 무공을 겨루어 높고
낮음을 판가름하고자 했소이다. 그러한 처지에서 내가 천룡문의
장문인 이상 본문의 보도를 사용하지 않고 무엇을 사용하겠소?]
그는 일단 손을 쓰면 정말 사정을 두지 않고 보도로 상대방의
무기를 잘라버린 다음, 오른손의 장검으로 상대의 손과 발을 요절
내거나 치명상을 입혀서 잇따라 십여 명을 격퇴시키게 되었다. 나
가는 사람은 손이 잘라지지 않으면 발을 못쓰게 되는 등 모두 다
중상을 입게 되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전귀농보다 무
공이 뛰어나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보도에 대항할 방법을 생각해내
지 못해 하나같이 두려움을 느끼고 움츠려 들었다.
탕패는 다시 나서서 도전을 해오는 사람이 없자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오늘의 일전에서 천룡문이 천하에 위세를 진동시켰으
니 이 형으로서도 얼굴에 광채가 나는 듯한 느낌이구려, 자자자!
내가 한 잔의 경공주(慶功酒)로 경의를 표하도록 하지!]
호비는 정영소를 한 번 바라보았다. 정영소는 천천히 고개를 가
로저었다.
호비는 전귀농의 날뛰는 꼴을 보고 매우 울화가 치밀어 주체할
수 없어 저 악독한 족속을 징계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자기의 신분을 누설할 수가 없었다.
조금 전에 잔을 던져 동회도의 혈도를 풀다가 하마터면 탕패에
게 간파를 당할뻔 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전귀농의 보도가 무서운
것이 사실이고 실로 그 자신도 한평생 보지 못한 이기(利器)였다.
만약 자기가 나서서 싸운다 하더라도 먼저 칠성 정도는 지고 들
어가는 꼴이니 승부를 장담하기 어려워 선뜻 나설 수가 없었다.
호비는 문득 과거 일을 떠올렸다.
(그가 사람들을 데리고 묘인봉의 집으로 들어닥칠 때 어찌해서
저 보도를 가지고 오지 않았을까? 만약에 그때 저 보도를 지니고
있었더라면 나는 그때 살아남을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구나.)
천룡문에는 남북 두 종파가 있어 번갈아 이 보도를 보관하도록
되어 있고, 그 당시에는 남종 장문인 수중에 있었다는 사실을 호
비는 모르고 있었다.
전귀농이 의기양양해 하며 술잔을 입가로 가져가려는 순간 갑자
기 쉭! 하는 소리와 함께 한 알의 철보리가 그의 술잔 쪽으로 날
아갔다. 누군가 암기를 던져 그의 술잔을 깨뜨리려고 한 모양이었
다. 그러나 전귀농은 이를 못본 척하고 태연히 술잔을 입으로 가
져가 술을 마셨다.
그의 큰 제자 조운기가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사부님, 조심하십시요!]
전귀농은 그 철보리가 몸가까이에 이르자 그때서야 가볍게 손가
락을 뻗쳐 대청문 쪽으로 튕겨 보냈다.
뭇 사람들은 그의 위인됨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
재간을 보고 그의 무공에 대해서는 승복할 수밖에 없다는 듯 고개
를 끄덕였고, 어떤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훌륭하군!]
헌데 철보리가 질풍과 같이 날아가는 대청 입구쪽에서 정히 한
사람이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 사람은 암기가 자기의 가슴팍으
로 날아드는 것을 보고 역시 손가락을 뻗쳐 가볍게 튕기며 말했
다.
[이것이 손님을 영접하는 도리요?]
철보리는 곧장 뾰족하고도 날카로운 파공성을 일으키며 전귀농
쪽으로 되날아갔다.
힘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고, 손을 뻗쳐 받지를 못하고 몸을 옆
으로 훌쩍 날렸다. 순간 그의 등 뒤에 서 있던 복강안의 위사 한
사람이 바람 소리를 듣게 되었을 때 철보리는 이미 그의 앞에 이
르러 있었다. 그 위사는 미처 피할사이 없이 재빨리 손을 뻗쳐 낚
아챘다. 순간 뚝! 하는 소리가 나면서 가운데 손가락의 뼈가 부러
졌고, 그는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뭇 사람들은 조그만 철보리가 놀랍게도 손가락 뼈를 분질러 버
리는 것을 보고 일제히 나타난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 사람은 비쩍 마르고 키가 큰 편인데 왼손에는 호탱(虎撑)을
메고 있었고, 어깨에 비스듬히 약봉지를 걸고 있었다. 몸에 걸치
고 있는 청포(靑布)로 만들어진 장포는 낡아서 색이 바랜 상태였
으며, 진흙이 묻은 베신을 신고 있었다.
옷차림으로 미루어 볼 때 어느 시골이나 고을에서건 종종 볼수
있는 떠돌이 의원이었다.
그런데 그의 두 눈은 형형히 빛나고 번득이는 눈초리에는 안광
이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게다가 오관(五官)은 더욱 기이했다.
짙은 눈썹, 커다란 눈망울, 주먹만한 코, 쭉 찢어진 입, 그리고
두 귀는 바람을 막을 정도였으며, 광대뼈가 툭 튀어나와 있었다.
이와 같은 모습은 그 누구라도 한번만 보고도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런가 하면 머리카락은 이미 반백인 것으로 보아 적
어도 나이는 오십여 세쯤으로 짐작되는데 볼에는 검은 기미가 끼
어 있었다.
그의 등뒤로 두 사람이 따르고 있었는데, 그들은 제자나 하인인
듯 모습과 태도가 지극히 공손하고 근엄했다.
호비와 정영소는 앞장을 서서 들어오는 그 사람을 보고는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지만 그 등뒤를 따르고 있는 두 사람을 보고
그만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원래 그 늙은이의 뒤를 따르는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늙은
서생으로서 바로 정영소의 대사형 묘용경악이었고, 다른 사람은
곱추에 다리를 저는 여자로서 바로 정영소의 셋째 사누이인 설작
이었다.
호비와 정영소는 서로 한번 쳐다 보았고 모두 다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
(어쩌다가 원수지간인 저들 두 사람이 함께 오게 되었을까? 설
작의 남편 강철산은 어째서 보이지 않는지 모르겠구나!)
정영소는 호비의 두 눈에서 의문의 빛이 띠는 것을 보고, 그 의
원 차림을 한 사람이 누구인가하고 묻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
녀 역시 모르는 듯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훌연 어이쿠! 하는 비명소리가 대청에 울려퍼지며, 손가락이 부
러진 위사는 땅바닥에 쓰러져 끊임없이 나뒹굴며 한쪽 손을 쳐들
고 흔들어댔다.
뭇 사람들은 처음에는 하나같이 이상하게 생각했다.
(복대수 부중의 위사 신분이라면 자연히 고강한 무공을 쌓았을
텐데 어째서 손가락이 하나 부러졌다고 저토록 난리를 치는 것일
까?)
그러다가 그의 쳐든 손이 시커멓게 변한 것을 보고는 그가 독에
중독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번에 천하 각문 각파의 장문인들이 보이는 대회가 개최되자
복강안 부의 뭇 위사들 가운데 야심이 있은 위사들은 각파의 고수
들과 한번 실력을 겨뤄 볼 웅심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경사에서
벼슬을 하는 영웅호걸의 실력이 각지의 초망호걸(草莽豪傑)에 못
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벼르고 있었다.
손가락이 부러진 위사는 주철초가 거느리고 있는 위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주철초는 그가 그토록 못난 꼴을 보이자 눈살을
찌푸리며 앞으로 나서더니 호통을 내질렀다.
[일어나게. 일어나! 그까짓 고통을 견디지 못하다니 정말 어처
구니 없군!]
그 위사는 주철초를 매우 두려워하는 듯 재빨리 말했다.
[네. 네.]
그리고는 버둥거리며 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다시 휘청하더니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주철초가 탁자에서 젓가락을 들고 그 철보리를 집어 보니 그 위
에는 가(柯)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는 안색이 변해서는 낭
랑히 말했다.
[난주(蘭州) 가자용(柯子容) 가 셋째 나으리, 당신은 갈수록 일
취월장 하시는구려. 이 철보리에 묻은 독약은 정말 대단하구려!]
그러자 사람들 틈에서 얼굴이 얽은 대한이 일어서더니 입을 열
었다.
[주 나으리, 무고한 사람에게 엉뚱한 누명을 씌우지 마시오. 철
보리는 내가 던진 것이 틀림없지만 나는 그저 상대방이 너무 오만
방자하게 굴기에 손에 들린 술잔만 깨뜨리려고 했을 뿐이외다. 우
리 가씨 집안의 암기는 결코 독을 묻히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며,
대대로 금기사항으로 전해오고 있소. 이 가자용이 아무리 못났기
로서니 조상께서 전한 가법을 어찌 깨뜨리겠소?]
주절초 역시 견문이 넓은 사람이었다. 그는 가씨 집안이 일곱
가지 암기 수법에 능통하지만 언제나 독을 묻히는 것을 엄히 금해
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라 생각에 잠겨 고개를 갸웃했다.
(그것 참 이상하구나.)
가자용은 자리에서 걸어 나오며 말했다.
[나에게 좀 보여주시구려.]
그리고 그는 다가오더니 철보리를 집어 들고 한 번 보고는 입을
열었다.
[맞소. 이것은 나의 철보화이외다. 그런데 여기에 무슨 독이 묻
었다는 것이...... 아이쿠.]
갑자기 그는 비명을 지르며 철보리를 땅바닥에 던지고 오른손을
연신 흔들어 댔다. 마치 뜨거운 불길에 손을 데인 사람 같았다.
그러고 보니 안색이 창백해져 있고 상처입은 손가락을 주철초는
재빨리 일장을 뻗쳐내 그의 팔을 후려치며 부르짖었다.
[빨아서는 안되오!]
그의 엄지와 식지 두 손가락은 이미 상당히 부어올라 엷은 흑색
을 띠고 있었다. 가자용은 전신을 벌벌 떨며 이마에서는 콩알같은
땀방울이 솟아나고 있었다.
그 떠돌이 의원은 모용경악에게 말했다.
[저들 두 사람을 한번 치료해주도록 해라.]
모용경악은 공손히 대답했다.
[네!]
그리고 품안의 조그마한 상자에서 고약을 꺼내 가자용과 그 위
사의 손에 발라주었다. 그러자 가자용의 떨림은 점차 멈추었고 그
위사 역시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군호들은 그제서야 가자용이 철보리로 전귀농의 술잔을 적중시
키려고 던지기는 했으나 전귀농이 아무렇게나 튕겨낸 것이 마침
걸어들어오던 떠돌이 의원에 의해 재차 튕겨질 때 비로소 그 철보
리에 무서운 독약이 묻어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그러
나 떠돌이 의원은 한번 퉁겼을 뿐인데 곧바로 독이 묻은 것으로
그와 같은 재간은 강호에서 찾아보기 힘든 훌륭한 재간이었다.
적지 않은 사람이 수근덕거리기 시작했다.
[독수약왕이다. 독수약왕이야! 맞았어, 틀림없이 독수약왕이
다!]
주철초는 가까이 다가가며 그 떠돌이 의원에게 포권을 하고 입
을 열었다.
[귀하의 존성대명은 어떻게 되시는지요?]
떠돌이 의원은 빙그레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묘용
경악이 입을 열었다.
[저는 모용경악이라 하며, 이 사람은 제 처인 설작이외다.]
그리고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 분으로 말하자면 우리 부부의 사부님이신 석(石)선생이온데
강호에서 어르신에게 바친 외호(外號)는 독수약왕이라 하지요.]
독수약왕이라는 네 글자가 그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다른 사람들
은 대충 수긍하는 것 같았다.
사실 이 대회에 참석한 사람은 일파의 장문인이 아니면 십중팔
구 각파에서 명성이 자자한 장로들인 만큼 대다수가 독수약왕이
당금 세상에서 독에 있어서는 일류고수라는 사실을 익히 들어왔기
때문에 모용경악이 말하지 않았어도 이미 짐작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네 글자를 들은 정영소와 호비는 실로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정영소는 더욱 울화가 치밀었다. 이 사람이 선사의 이름을 사칭
하는 것만 하더라도 괘씸하기 짝이 없는데 그 말이 대사형의 입에
서 나왔다는 것은 더욱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 치미는 분노를 억
누를 길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 또한 한 가지 일에 대해서는 이상
하게 생각했다.
(셋째 사누이 설작은 둘째 사제인 강철산의 처이고 두 사람 사
이에는 이미 장성한 아들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어째서 대사형
은 공공연히 그녀를 자신의 처라고 했을까?)
그녀는 이 가운데 틀림없이 중대한 변고가 있다는 것을 알수가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 당장에 나서서 알아 볼 수도 없다고
판단을 했다.
주철초가 용감하다고는 하지만 독수약왕이라는 이름을 듣자 그
만 안색이 변하며 허리를 숙였다.
[익히 명성을 들었소이다.]
석 선생은 손을 뻗치면서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귀하의 존성대명은 어떻게 되시오? 우리 잘 사귀어 봅시다.]
주철초는 흠칫하며 뒤로 한걸음 물러서더니 포권을 했다.
[불초는 주철조라고 하옵니다. 석 선배도 안녕하셨는지요?]
그의 담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감히 독수약왕의 손을 잡을 엄
두가 나지 않는 것 같았다.
석선생이라는 자는 껄껄 소리내어 웃더니 복강안 면전으로 다가
가더니 허리를 구부리고 읍을 하며 말했다.
[산과 들로 떠돌아 다니는 사람이 대수에게 인사를 드립니다.]
이때 복강안 옆의 위사가 독수약왕의 내력을 이야기한 터였다.
복강안은 그가 손가락으로 가볍게 철보리를 튕겼을 뿐인데도 두
사람에게 독상을 입힌 사실을 보고받고, 이 석선생이라는 사람이
대단하다고 생각하고는 즉시 미미하게 몸을 구부려 보이고 말했
다.
[선생께서는 앉으시지요.]
석선생은 모용경악과 설작 부부를 데리고 한켠에 앉았다. 그러
자 부근의 군호들이 다투어 자리를 피했으며, 그 누구도 감히 그
들 세 사람과 가까운 곳에 있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 바람에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 세 사람 주위는 대뜸 썰렁하니 비워지게 되었
다.
한 명의 무관이 석선생 있는 곳에 다가갔으나 그 역시 다섯자
정도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추고 황제가 하사하신 옥룡배를 어
떻게 차지하게 되며, 그 서열이 어떻게 되는가를 이야기했다. 말
이 끝나자마자 즉시 뒤로 물러서는 것이 혹시라도 석선생 몸에서
한가닥의 독기가 튀어나올까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석선생은 미소를 짓고 그 무관에게 물었다.
[귀하의 존성은 어떻게 되시오?]
그 무관은 대답했다.
[본관의 성은 파(巴)씨 입니다.]
석선생은 넌즈시 입을 열었다.
[파 나으리, 당신은 나를 그렇게 두려워 할 필요가 어디 있소?
노부의 외호는 독수약왕이라고 독을 쓸줄도 알지만 또한 약을 써
서 병을 고칠 수도 있단 말이외다. 파 나으리의 얼굴에 은근히 푸
른 기운이 감도는 것을 보니 뱃속에 아무래도 지네가 잠복하고 있
는 것 같소. 만약에 속히 치료를 하지 않으면 열홀정도 밖에 목숨
을 보존하기가 어려울 거외다.]
그 파씨라는 무관은 깜짝 놀라며 반신반의했다.
[배속에 어떻게 지네가 들어갈 수 있단 말입니까?]
석선생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파 나으리, 최근에 누구와 언쟁을 벌인 적이 있지 않소?]
북경성에서 무관을 하는 사람들이 남과 언쟁을 벌인다거나 다툰
다는 것은 밥먹듯 예사로이 있는 일이었다. 자연히 그런 일이 있
었던 그 파씨 성의 무관은 놀라 입을 열었다.
[있지요! 설마하니....... 설마하니...... 그 도적이 나에게 독
수를 썼단 말입니까?]
석선생은 약주머니에서 두 알의 푸른 알약을 꺼내더니 말했다.
[파 나으리가 만약에 나를 믿을 수 있다면 술에 타서 이 알약을
먹어보도록 하시오.]
파씨 성을 가진 무관은 그의 말에 속으로 가슴이 서늘해지게 되
었고, 은연중 뱃속에 지네같은 것이 꿈틀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는 생각해 보지도 않고 알약을 입속에 넣고는 한 잔의 술
을 들어 마셨다. 얼마되지 않아 배가 아프기 시작했고, 가슴이 답
답해지면서 많은 음식물을 토해냈다.
석선생은 서둘러 세 걸음을 선뜻 다가서며 손을 뻗쳐 그의 가슴
을 주물러 주며 호통을 쳤다.
[깨끗이 토해내도록 하시오. 독물을 남기면 안되오!]
그 무관은 죽어라하고 구역질을 했다. 고개를 숙이고 토해내는
순간 얼핏보니 자기가 토해낸 오물 가운데 두 치 길이나 되는 벌
레가 세 마리나 꿈틀꿈틀 움직이고 있었다. 붉은 머리에
검은 몸통을 지닌 바로 지네가 아닌가?
파씨 성을 가진 무관은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세 마리! 지네가 세 마리나!]
대경실색하던 그는 재빨리 석선생에게 큰절을 하며 목숨을 구해
준 은혜에 대해 사의를 표했다.
즉시 낭하에서 하인들이 달려와 오물들을 청소하고 나자 군호들
은 하나같이 탄복해마지 않았다.
호비는 사람의 배속에 지네가 들어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지
만 친히 목격을 하고 나니 믿지 않을 수가 었었다.
정영소는 그의 귀에 대고 나직이 말했다.
[세 마리의 조그만 지네는 말할 것도 없이 나는 오라버니로 하
여금 뱃속에서 푸른 뱀을 세 마리 토해내게 할 수 있어요.]
호비는 물었다.
[그게 어떻게 된거지 ?]
정영소는 속삭이듯 말했다.
[오라버니에게 두 알의 구역질이 나는 알약을 먹이고, 내가 소
맷자락에 독벌레를 감추어 놓았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호비는 나직이 말했다.
[그렇군! 내가 구토를 하면서 배가 아파서 견디기 어렵게 되었
을 때에 그 독충을 오물 속에 던진다 하더라도 그 누가 알겠는
가?]
정영소는 빙그레 웃었다.
[그가 서둘러서 달려가 저 무관의 가슴팍을 안마해 주었지 않아
요. 만약에 그렇지 않았더라면 연극이 그만 재미없어지게 되죠.]
호비는 나직이 말했다.
[기실 저 사람의 무공 또한 뛰어나니 저렇게 장난과 같은 수단
을 쓸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정영소는 음성을 극도로 낮추어서는 말했다.
[오라버니, 이 대청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내가 가장 두려워하
는 사람은 바로 저 사람이예요. 오라버니, 절대로 조심하세요.]
호비는 그녀를 알게 된 이래 매사에 계획이 있는 것처럼 자신있
는 그녀의 태도를 보아왔고, 그녀로부터 두렵다는 말을 한번도 들
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가 이토록 간곡하게 말하는 것
을 보면 석선생의 무공이 실로 대단하긴 대단한 모양이라고 생각
했다.
그리고 저 사람이 그녀 선사의 이름을 사칭하여 거드름까지 피
우고 그녀 선사의 명성을 더럽히는 만큼 그녀는 끝내 수수방관만
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이때 석선생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몇 명의 제자를 거두어 들이긴 했으나 여지껏 어떤 문파
를 세운 적은 없소이다. 오늘은 바로 여러 선배님들에게 좀 배워
서 역시 큰 뜻을 밝히고 문파를 세워볼까 하오이다. 그리고 요행
으로 하나의 은리배라도 두 손으로 받쳐들고서 집으로 돌아가 제
자들에게 신바람나도록 해 주고 싶소이다.]
그리고는 천천히 걸어가더니 방약무인한 태도로 전귀농 곁에 놓
인 태사의에 앉았다.
이것은 은리배 하나를 이미 손에 넣는 것으로 만족하겠다는 것
은 말뿐이고, 팔대 문파 가운데 일석을 차지하겠다는 수작이 분명
했다.
그가 이와 같이 태사의에 앉자 독수약왕의 수십 년 간의 명성으
로 보나, 손가락으로 철보리를 튕겨내는 공력은 말할 것없고, 손
가락질하는 사이에 독을 쓰는 수법 등으로 미루어 볼때 옥룡배 하
나쯤은 틀림없이 차지할 것 같았다.
사람들은 그에게 도전할 엄두를 내기는 커녕 그에게 말을 한 번
붙여 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일시에 대청 안은 조용해졌다. 소림파의 장문방장 대지선사가
홀연 입을 열었다.
[석선생, 무진화상과는 어떻게 되는 사이요?]
석선생은 되물었다.
[무진이라구요? 모르겠는데요. 나는 모르는 사람이외다.]
그러는 그의 얼굴에는 털끌만치도 어색한 빛을 보이지 않았다.
대지선사는 두 손을 합장하며 말했다.
[아미타불!]
석선생은 다시 물었다.
[아니 왜 그러죠?]
대지선사는 다시 불어를 외쳤다.
[아미타불!]
석선생은 더 묻지 않았다.
그의 사제 세 사람이 대청 안으로 돌어온 이후 정영소는 줄곧
그들 세 사람에게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이 석선생이 천
천히 고개를 돌리더니 전귀농과 한번 시선을 교환하는 것이 아닌
가? 그 얼굴 표정은 묵뚝뚝했으며 눈초리에는 아무런 뜻을 비추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정영소는 내심 짚이는 바가 있고, 어느덧 사
태를 환히 내다볼 수가 있었다.
(그들 두 사람은 진작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다. 전귀농은 우리
사부님의 이름을 알고 있고, 무진대사야말로 진정으로 독수 약왕
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저 분 소림사의 고수 역시 알고 있는 것
이다.)
그러다가 그녀는 또한 다른 사실을 떠올렸다.
(전귀농이 묘인봉을 독으로 눈을 멀게 한 단장초는 알고보니 바
로 저 사람이 준 것이로구나.)
전귀농의 보도는 예리했고, 석선생은 독약이 무섭기 이를데 없
으니 그야말로 두 태사의를 여유있게 차지하고 앉았다.
이제 여덟 개의 옥룡배 가운데 오직 하나만이 아직 주인이 없는
셈이었다.
군호들은 하나같이 생각했다.
(팔대문파의 대열에 낄 수 있고, 없음은 최후의 옥룡배를 그 누
가 차지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내 맘이 사돈 마음이라고, 삽시간에 칠팔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달려나와 일제히 그 빈 태사의에 앉으려고 했다. 두 세
마디의 말이 오고간 후 그들은 네쌍으로 나뉘어 싸우기 시작했다.
잠시 후 패자는 물러섰고, 승자는 계속해서 도전한 사람에게 응
전했다. 이와같이 오락가락하면서 한참 동안 격투를 벌였으며, 문
밖에서 사경(四更)을 알리는 경고(更鼓)소리가 들려왔다.
서로 싸우고 있던 네 사람 가운데 두 사람이 패해서 물러서게
되었고, 이긴 두 사람이 남아서 서로 다투었다.
두 사람은 모두 웅후하기 이를데 없는 장력으로 내력을 겨루었
으며, 오랜 시간을 대치해도 결판이 나지 않았다. 겨루는 것은 고
심한 무공이었으나 겉으로 볼 때는 정말 평범하고 기이할게 하나
도 없었다.
복강안은 매우 답답한 듯 몇 번 잇따라 하품을 한 뒤 중얼거리
듯 말했다.
[별 구경거리가 없으니 심심해서 죽을 노릇이군!]
이 몇 마디의 소리는 나오는대로 중얼거린 것이었으나 정히 내
공을 겨루고 있던 두 사람은 똑똑히 들을 수가 있었다.
그들은 안색이 일제히 변하며 각기 손을 거두고 세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윽고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우리들은 원숭이처럼 재주부리자는 것도 아니지 않소. 이곳에
서 겉만 번지르한 솜씨를 자랑해서 관가 나으리들의 갈채를 받으
려는 짓은 할 필요가 없지 않겠소!]
그러자 다른 한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소. 집으로 가서 아이들이나 봅시다.]
두 사람은 그렇게 말하면서 껄껄 옷으며 다정히 손을 잡고 대청
밖으로 나갔다.
호비는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생각했
다.
(저 두 사람은 무공이 무척 고강한 편이며, 식견도 남들보다 훨
씬 뛰어나구나. 그러나 애석하게도 시끌벅적해서 그들의 이름을
듣지 못했구나.)
그는 고개를 돌리고 곽옥당에게 물었으나, 곽옥당 역시 그 시골
뜨기 같은 두 인물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었다.
곽옥당은 변명하듯 말했다.
[그들이 나섰을 때 안 제독이 그들의 성명과 문파를 물었지만
그들은 그저 씩 웃기만 하고 말하지 않았다오.]
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두 분 고수는 그야말로 신룡(神龍)이 머리를 보이고 꼬리를
보이지 않는 격으로 이름마저도 남기지 않았구나.)
봉천남의 신기(神技)
호비가 고개를 숙이고 곽옥당과 나직이 말을 주고 받는데 정영
소가 가볍게 호비의 팔을 잡아끌었다.
호비가 고개를 쳐들자 소개를 하는 무관이 이름을 길게 불렀다.
[오호문의 장문인 봉천남 봉나으리입니다.]
그러자 봉천남은 숙동곤을 들고 걸어나가더니 뒤에 있는 태사의
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어느 분이 나서서 가르침을 베풀겠소?]
호비는 기뻐하며 생각했다.
(저 녀석의 무공은 일류 고수의 경지와는 거리가 먼데도 옥룡배
에 눈이 어두워 나서는구나. 먼저 그가 다른 사람에게 망신을 당
한 후에 그를 처치하는 것이 더욱 재미있겠구나.)
그러나 봉천남은 잇따라 두 사람을 물리쳤다. 그리고 나서 의기
양양해 있을 때 칼을 든 사람이 나서서 그에게 도전을 해왔다.
이 사람의 무공이 매우 고강한 편이라 호비는 그가 삼 초를 펼
치는 것을 보고 내심 생각했다.
(저 악적은 저 사람의 적수가 되지 못하겠구나.)
과연 봉천남은 연신 비명을 내지르며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기고
있었다. 칼을 쓰는 사람은 심하게 닥달하지 않고, 그가 어려움을
알고 스스로 물러서기를 바라는 듯 결코 살수를 펼치지 않았다.
따라서 몇 번 기회가 있었지만 초식을 제대로 뻗지 않아 봉천남으
로 하여금 방비를 하도록 했다.
그런데 봉천남은 연신 뒤로 물러서면서도 패배를 시인하지 않았
다. 그러다가 갑자기 숙동곤을 옆으로 쓸어쳐왔다. 칼을 쓰는 사
람은 몸을 낮추어 피했으며 숙동곤은 그의 머리를 스칠듯 지나갔
다.
칼을 쓰는 사람은 그 기세를 빌어 초식을 뻗어내려다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어이쿠!]
그리고는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어졌다. 그는 곧바로 몸을 일으
켰으나 다리를 휘청하더니 다시 땅바닥에 쓰러지며 노갈을 터뜨렸
다.
[당신은 비겁하게도 암기를 썼군!]
봉천남은 숙동곤을 세우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복대수께서는 암기를 사용하지 말라는 규정을 두지 않았소이
다. 손을 쓰려고 나선 이상 무기이건, 권각법이건, 독약이건, 암
기이건 당신 마음대로 써보시구료.]
단도를 쓰는 사람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바짓가랭이를 걷
어올렸다. 그러고 보니 무릎 아래에 있는 독비혈(犢鼻穴)에 놀랍
게도 두 치 정도의 기다란 은침(銀針)이 박혀 있었다. 이 독비혈
은 바로 무릎 아래에 있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슬안(膝眼)이라고도
하며, 양쪽이 움푹 꺼져있는 것이 소의 코와 비슷하게 생겨 명명
된 것인데 대퇴부와 다리 사이에 있는 중요한 혈도였다. 이 혈도
를 다치면 다리 전체를 쓸 수 없게 되는 것이었다.
군호들은 모두 이상하게 생각했다. 조금전 두 사람이 격렬하게
싸우고 있어 봉천남은 암기를 던질 여가가 없었고, 또한 그가 손
놀림을 하는 것을 보지 못했는데 그 은침이 어떻게 쏘아져 나왔는
지 알 수가 없었다.
단도를 쓰는 사람은 은침을 뽑아들더니 통한에 찬 눈빛을 하고
는 물러 섰다.
이윽고 다른 한 명이 채찍을 들고 나섰다. 이 사람은 철편(鐵
鞭)을 광풍노도처럼 휘둘러 이십여 초까지는 쉴새없이 초식을 몰
아쳐 봉천남으로 하여금 숨을 돌릴 틈도 주지 않았다. 그는 봉천
남의 숙동곤법이 두려울 것이 없지만 종적도 없이 쏘아져 나오는
은침은 심히 막아내기가 어렵다고 생각했기에 나서자마자 살수를
끊임없이 펼쳐 암기를 쏘아낼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런데 근 삼십여 초를 싸우자 봉천남이 숙동곤을 어지럽게 휘
두르는 가운데 그 자는 다시 어이쿠! 하는 외마디를 내지르며 뒤
로 물러서면서 아랫배에서 은침을 뽑아들었다. 상처에서는 선혈이
샘솟듯 솟아나는 것이 매우 심한 상처를 입은 것 같았다.
대청에 있던 군호들은 일제히 놀람과 의아함에 휩싸였다. 그들
은 봉천남이 암기를 사용한다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
다. 만약 다른 사람이 암암리에 도와준다 하더라도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었으므로 쉽게 발각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두 차례
의 시합을 벌이는 동안 봉천남이 기세가 꺽여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할 지경이 되면 갑자기 상대방이 암기에 적중이 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봉천남이 사악한 수법을 써서 마음만 먹는다면 은침이
하늘에서 날아오는 것일까?
그런데도 봉천남을 만만히 보고 몇 사람이 잇따라 달려나와 그
와 겨루었다. 어떤 자는 정신을 집중하여 은침에 방비하며 봉천남
의 숙동곤을 아랑곳하지 않다가 도리어 숙동곤에 얻어맞아 어깨에
중상을 입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세 사람이 그의 무영은침(無影
銀針)에 상처를 입었다. 이렇게 되자 일시에 대청안에 있던 군호
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호비와 정영소는 봉천남이 거듭 무영은침으로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자 정신을 가다듬고 살펴보았으나 추호도 의심스러운 점을 발
견할 수 없었다.
호비는 본래 봉천남이 신이 나서 우쫄하고 있을 때 돌연 앞으로
나가 그를 죽여 불산진 종아사 집안의 원한을 갚고, 또한 화권문
의 명성을 떨치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은침이 날아드
는 곳을 찾아낼 수 없으니 부득이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만약
암기가 날아드는 곳도 알지 못하면서 경솔하게 앞으로 나가 다투
다가 실수를 한다면 스스로의 치욕은 물론이고, 저 더러운 봉천남
의 손에 자신의 목숨마저 잃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정영소는 이미 그의 마음을 짐작한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우리 저 옥룡배를 포기하는 것이 어때요?]
호비는 채위와 희효봉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 분 봉노사의 무공은 대단치 않소. 다만......]
희효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하지만 그가 쏘아내는 은침은 요상하기 이를데 없구
려. 아무 소리나 기척도 없고, 그림자나 종적을 찾을 수가 없어
은침에 적중된 사람이 비명을 내지르고서야 그가 암기에 적중된
것을 알 수 있으니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외다.]
채위도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 덧붙였다.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어야만 그와 맞설 수 있을 것 같소이
다.]
그런데 곧 어떤 무관이 진짜로 전쟁터에서 사용하는 철갑을 가
져오도록 해서는 갈아입더니 태산이라도 무너뜨릴 듯한 커다란 도
끼를 들고 나와 도전을 했다.
이 무관의 이름은 목문찰(木文察)이었다. 과거 그는 복강안을
따라 청해(靑海)까지 원정하여 적의 깃발을 빼앗고 적장의 목을
베는 등 적지 않은 공로를 세운자였으며, 청나라 군대에서는 상당
히 이름이 알려진 만주 출신의 명장이었다.
그가 커다란 도끼를 들고 대청 한복판으로 나서자 위풍당당해
보였으며, 살기등등했다. 동료나 같은 벼슬아치들은 일제히 갈채
를 보냈으며 복강안도 한 잔의 술을 내려 그에게 건투를 빌었다.
두 사람은 손을 쓰자마자 숙동곤과 도끼가 맞부딪쳤다. 창! 창!
하는 소리가 고막을 뒤흔들며 무겁고 커다란 두 무기는 공수를 병
행하며 펼쳐냈다. 무기를 휘두르자 대청 안에는 휙휙 바람이 일며
촛불이 일렁거려 어두어졌다가 밝아지곤 했다.
목문찰은 철갑을 입고 있었으므로 몸놀림이 둔했지만 자신의 팔
힘을 믿고 도끼를 휘둘렀는데, 이는 실로 엄청난 위세를 보여주고
있었다.
주철초, 증철구와 왕검영, 왕검걸 이 네 사람은 무기를 들고 숙
동곤이나 도끼가 손에서 빠져나와 복강안을 해칠까봐 앞으로 나서
서 엄밀히 방비를 했다.
십 여 합을 겨루자 봉천남은 숙동곤을 상대의 머리를 향해 휘둘
렀다. 그러자 목문찰은 고개를 숙이며 그 기세를 빌어 상대의 다
리를 찍으려 들었다. 순간 팍! 하는 가벼운 음향이 일었다. 구경
을 하던 사람들은 아! 하고 탄성을 내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은 서로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러고 보니 바닥에 붉
은 융단으로 만들어진 공이 떨어져 있었다. 이는 바로 목문찰의
투구에서 떨어진 것으로 그 위에는 하나의 은침이 꽃혀
번쩍이고 있었다.
아마도 목문찰이 고개를 숙이고 도끼를 휘두를 때 봉천남이 그
은침을 쏘아낸 모양이었다. 그러나 봉천남은 그가 복대수가 아끼
는 장수임을 알고 감히 그의 몸에 상처를 입히지 못한 것 같았다.
그 융단으로 만들어진 공은 연사(鉛絲)로 투구에 매어져 있기 때
문에 연사를 끊어야만 떨어뜨릴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간격이 가까웠다고는 하지만 창졸지간에 이토록 정확
하게 맞추는 것은 실로 대단한 암기 솜씨라고 할 수 있었다.
목문찰은 어리둥절해졌으나 상대방이 손에 사정을 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 은침이 만약 몇 치만 낮게 겨냥했다면 미간을 뚫
고 들어가 대뇌를 관통하여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것이니 설사
온몸에 철갑을 둘렀다 하더라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는 생각
이 들었다.
그는 진심으로 승복을 하고 두 손을 맞잡고 말했다.
[봉노사께서 손에 사정을 두신데 대해 정말 고맙게 생각하오이
다.]
봉천남 역시 공손하게 답례를 하며 말했다.
[소인의 무예는 목대인에 비한다면 훨씬 뒤떨어지는 편이지요.
이와 같이 암기를 발사하는 얄팍한 재간이야 전쟁터에서는 쓸모가
없는 것 아니겠소이까? 만약에 우리 두 사람이 말을 타고 무공을
겨루었다면 소인은 이미 대인의 도끼날에 몸이 두쪽으로 나고 말
았을 것이외다.]
목문찰은 웃으며 말했다.
[원 별말씀을 다 하시는구려.]
복강안은 봉천남이 조리있게 말을 하면서도 자신의 승리를 뽐내
지 않고 자기의 부하에 대해 공손한 태도를 취하자 내심 기뻐하며
말했다.
[저 봉노사의 재간은 정말 훌륭하군.]
그리고는 손에 들고 있던 벽옥 담뱃대를 주철초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상으로 내리도록 하게!]
주철초가 건네주자 봉천남은 황송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재빨리
복강안 앞으로 달려와 사의를 표했다.
목문찰은 철갑을 입은 채 도끼를 어깨에 메고 철커덕거리는 소
리를 내며 물러났다. 군호들은 수근덕거렸다. 사람들 틈에서 갑자
기 한 사람이 일어나더니 낭랑히 입을 열었다.
[봉노사의 암기 수법은 과연 명불허전이구려. 불초가 한번 가르
침을 받아보겠소이다.]
뭇 사람들이 고개를 돌리고 바라보니 그는 얼굴에 상처투성이로
방금 전에 독이 묻은 철보리에 중독되었던 가자용이라는 자였다.
그는 손에 고약을 바르고 나서 이 무렵에는 이미 독성이 해소되어
있었다.
그의 난주 가(柯)씨 집안은 일곱 가지의 암기를 가지고 문파를
창립했기 때문에 가씨칠청문(柯氏七淸門)이라고도 했다. 그렇다면
이 일곱 가지의 암기는 무엇일까? 이는 수전(袖箭), 비황석(飛蝗
石), 철보리, 철여질(鐵黎疾), 비도(飛刀), 강표(鋼標), 상문정
(喪門釘)인데 강호에서는 이것을 약칭 '전, 황, 보, 여, 도, 표,
정'이라고 했으며 이를 칠절(七絶)이라고 칭했다. 비록 이 일곱
가지의 암기는 흔히 보는 물건들이라 할 수 있었지만 그 가문의
발사 수법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칼 속에 돌을 끼우고, 정(釘)
속에 강표를 끼우기도 했다.
더우기 몇 가지 암기를 허공에서 서로 부딪히게 만들 수 있었으
며, 쏘아내면 똑바로 나아가다가 갑자기 선회를 하는 등 상대방이
막아낼 수 없도록 펼쳐냈다. 만약 넓은 장소에서 싸운다면 몸을
날리며 암기가 날아드는 방향을 정확히 관찰하여 막거나 피할 수
가 있겠지만 이 대청은 장소가 협소하여 상대하기란 매우 어려웠
다.
봉천남은 복강안을 흠모하고 있는 듯 비취 담뱃대를 수건으로
정성스레 싸서 품안에 넣고는 낭랑히 입을 열었다.
[가 노사가 만약 불초와 암기로 겨룬다면 대청 안에는 암기가
난무하게 될 것인데, 자칫 실수하여 여러 대인들에게 상처를 입힌
다면 그야말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 되겠구려.]
주철초는 웃으며 말했다.
[봉노사는 쓸데없는 걱정을 하지 말고 얼마든지 펼치도록 하시
구려. 우리 위사들이 밥을 축내고 있지만 그만한 일쯤은 해낼 수
있다오.]
봉천남은 미소를 머금고 포권을 하며 말했다.
[그럼 실례를 하겠소이다.]
호비는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 내심 생각했다.
(저 악적이 한 지방을 주름잡고 횡횡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구
나. 그는 관가 사람과 사귀는데 생각이 치밀했고 아부하는 수단
또한 고명한 편이로구나.)
이때 가자용은 장포를 벗고 몸에 달라붙는 흑색의 경장 차림으
로 나섰다. 그의 옷차림은 무척 특이했으며 곳곳에 주머니와 띠가
달려 있었다. 겉옷에만 주머니가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옷속에도
세 대의 비도를 꽂아놓는 등 목에서부터 다리에 이르기까지 온몸
에 암기를 꽃고 있었다. 심지어는 등 뒤에도 조그마한 주머니가
많이 달려 있었다.
복강안은 그의 옷차림을 보고 껄껄 소리내어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저와 같이 요상한 복장을 보시오. 온몸이 마치 고슴도
치같구나.]
그러자 가자용은 손바닥을 뒤집으며 허리춤에서 한 쌍의 바가지
처럼 생긴 무기를 꺼내들었다. 바가지처럼 생긴 병기의 주둥이는
예리한 것이 칼날 같았다.
이것은 바로 그의 가문의 독문병기(獨門兵器)로 석침대해(石沈
大海)라는 별칭이 있었다.
이 석침대해는 원래 두 가지의 용도가 있었다. 그 자체에 삼십
육로의 초식이 있었는데 그 수법은 칼과 도끼를 쓰는 수법 중간쯤
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 묘용은 암기를 낚아
채 받아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적이 어떠한 종류의 암기를 발사
한다 하더라도 그는 이 무쇠 바가지를 가지고 받아 낼 수 있었으
며 마치 돌맹이가 망망대해에 떨어져 종적이 사라지는 것과 같았
다.
그런가 하면 그는 적이 던진 암기를 받아 즉시 반격을 할 수가
있는 것이었다.
이 석침대해는 십팔반(十八般)의 병기에는 속하지는 않는 방문
(芳門)의 무기인데 강호에서는 종종 차전표(借箭杓)라고도 했다.
그 뜻은 소위 적의 화살을 빌어 사용할 수 있다는 것에서 비롯된
이름이었다.
그러나 대청에 있던 태반의 사람들은 그 용도를 알아보지 못했
다.
봉천남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가 노사가 오늘 우리들의 시야를 크게 넓혀 주는구려.]
호비는 가자용을 조반산과 비교하며 생각했다.
(똑같은 암기의 고수이지만 조 세째 형은 암기를 눈에 띄지 않
으면서도 끊임없이 던져내는 재간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저 가가
는 별볼일 없는 것 같은데 너무나 자기를 과시하려고 하는구나.)
바로 이때 가자용은 무쇠 바가지를 갑자기 뒤집더니 비스듬히
봉천남의 어깨를 내리쳤다. 봉천남은 몸을 기울여 피하며 숙동곤
으로 반격을 했다.
가자용은 입으로는 암기를 사용하겠다고 했지만 그 국자처럼 생
긴 바가지를 정묘하게 휘두르며 상대방에게 파고 들려고 했을 뿐
암기는 사용하지 않았다.
한참 싸움이 무르익게 되자 가자용은 외쳤다.
[강표를 받아라!]
그리고는 한 대의 강표를 내던졌다.
봉천남은 적지 않은 나이에 오랫 동안 호강하고 살아왔기 때문
에 몸이 비대한 상태였지만 젊은 나이에 연마한 무공이 착실하여
이러저리 민활하게 몸을 날리며 그 강표를 피했다. 가자용은 다시
부르짖었다.
[비황석과 수전이외다!]
이번에는 두 대의 암기가 동시에 쏘아져 나갔다. 봉천남은 고개
를 숙이고 한 대를 피했으며 다른 한 대는 숙동곤으로 밀어냈다.
가자용은 다시 부르짖었다.
[철여질로는 왼쪽 어깨를! 비도로는 오른쪽 다리를 공격하겠
다!]
과연 철여질은 봉천남의 어깨로 날아갔으며, 비도는 다리를 향
해 파고 들었다. 봉천남은 먼저 알려주었기 때문에 가볍게 암기를
피할 수가 있었다.
뭇 사람들은 가자용이라는 사람이 고지식하다고 생각하고 있었
다. 암기의 종류와 나아가는 방향을 일일이 상대에게 알려줄 필요
가 없는데 그런다고 모두들 고개를 흔들었다. 헌데 그가 여덟 아
홉 대의 암기를 던진 이후 암기를 던져낸다는 호통소리가 가면 갈
수록 빨라졌으며 암기마저도 가면 갈수록 많아졌다.
하지만 외침과 암기가 매번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때는 입으로는 수전을 던진다고 했지만 실은 비황석을 날려 그의
가슴을 노리곤 했다.
뭇 사람들은 그제서야 그가 호통을 내지른 것은 적의 심신을 어
지럽히자는 속셈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호통을 치며 암기를 내
던지다가 갑자기 상대방을 현혹하는 소리를 질러 상대방이 넘어가
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만약 암기가 나아가는 방향이나 부르짖는
소리가 전혀 다를 때 상대방은 그 소리를 아랑곳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었지만, 애매하게도 맞는 때가 많고 간혹 틀리는지라 방비하
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 모습을 지켜보더니 곽옥당은 설명하듯 말했다.
[가씨 칠청문의 암기 재간은 정말 또 다른 면모를 보여주는구
려. 보기에 그가 외치는 소리 역시 어릴 적부터 연마한 것 같으
며, 그 무서움은 강표나 비도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것 같
소. 그의 칠청문이라는 이름은 아무래도 팔청문(八靑門)이라고 해
야 합당할 것 같구려.]
희효봉은 그 말을 받았다.
[하지만 저와 같이 간계를 부리는 것은 결코 명문 대가의 수단
이라 할 수 없지요.]
정영소는 연하산인에게 빼앗은 곰방대를 만지작거리고 있다가
넌즈시 입을 열었다.
[저 봉노사는 어째서 은침을 발사하지 않지요? 이러한 상황이
계속된다면 끝내 저 가가에게 낭패를 면치 못할 것 같구려.]
희효봉은 설명하듯 말했다.
[내가 보기에 저 봉가는 이미 계획이 서 있는 것 같구려. 그는
정묘하게도 결코 많이 던지는 일이 없이 일격에 빈틈을 노리고 적
중시켜 승리를 얻는 것 같구려.]
정영소는 음! 하더니 말했다.
[암기로 겨루면 될 것인데 저 가자용이라는 자는 말이 많아 시
끄럽고도 번거롭게 만드는군.]
이때 대청 위로 십여 대의 암기가 춤추듯 오락가락하며 장관을
펼쳐내고 있었다. 주철초 등은 엄밀히 경계를 하면서 복강안을 보
호하고 있었다. 안 제독 등 고관대작들도 고명한 위사들이 옆에서
지키며 만약을 대비하고 있었다.
뭇 위사들은 가자용이 발사한 강표나 수전이 날아들어 복강안에
게 상처를 입히는 것도 방비해야 하지만 군호들 가운데 자객이 이
혼란을 틈타 암기를 발사하는 것을 더욱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이때 정영소는 갑자기 입을 열었다.
[저 가가 너무나 염치없어 보이니 한번 장난을 쳐보겠어요.]
그때 가자용이 다시 부르짖었다.
[철여질로 당신의 왼팔을 때리겠소!]
정영소는 그의 말투와 어조를 흉내내서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고기만두로 당신의 주둥이를 때리겠소!]
그리고는 오른손을 곰방대의 담배통에 가져가더니 그대로 손을
들어던졌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조그마한 암기가 가자용의 입
을 향해 날아갔다. 이 암기가 날아가며 파공성을 일으키지 않는
것으로 보아 매우 가벼운 것 같았다. 다만 윗쪽에 한 가닥의 불꽃
이 달려 있었다.
속담에 '고기만두로 개를 때리면, 가는 것은 있어도 오는 것은
없다'는 말이 있었다. 뭇 사람들은 고기만두로 당신의 주둥이를
때리겠다는 말이 매우 우스꽝스러운데다가 더우기 그녀의 말투나
어조가 가자용이 부르짖는 소리와 똑같았기 때문에 수십 명이나
되는 사람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가자용은 정영소가 던진 암기가 매우 특이한 것을 보고 차전표
안으로 낚아챘다. 그리고는 다시 집어던지려고 왼손을 차전표 안
으로 집어넣는 순간 펑! 하는 소리가 울려퍼지며 그 암기가 폭발
했다.
순간 가자용은 펄쩍펄쩍 뛰며 어쩔줄 모르고 있었다. 그러고보
니 종이가루가 어지러이 날아오르며 초산과 유황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것은 암기가 아니라 어린애들이 명절에 가지고 노는 조
그마한 폭죽이었다.
뭇 사람들은 일순 어리둥절했다가 곧 왁짜하니 웃음을 터뜨려
대청 안은 웃음 바다가 되었다. 가자용은 봉천남이 무영금침을 내
쏘을까 두려워 온 정신을 그에게 집중시킨 채 그와 같은 모욕을
당해도 폭죽을 던진 사람을 찾아낼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저 욕만
퍼부었다.
[사내라면 즉시 나와서 한번 겨루어 볼 것이지 누가 이와 같은
장난을 치는 것이오?]
정영소는 몸을 일으키더니 싱글벙글 웃으며 동쪽으로 가더니 폭
죽을 다시 하나 꺼내 곰방대에서 불을 당기더니 부르짖었다.
[커다란 돌맹이로 당신의 칠촌(七寸)을 때리겠소!]
흔히들 '뱀을 때리려면 칠촌을 때려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
는 뱀의 머리 끝에서 칠촌 쯤 떨어진 곳에 뱀의 급소가 있는 것을
나타낸 것으로 이번에는 가자용을 독사에 비유한 셈이었다.
뭇 사람들이 와! 하니 웃음을 터뜨리는 가운데 폭죽은 다시 날
아갔다. 그러나 가자용은 이번에는 속아넘어가지 않았고 또 한 정
영소의 폭죽은 너무 일찍 던진 감이 있었다. 가자용이 손가락으로
쌍문정을 한 대 튕겨내 폭죽을 적중시켜 도리어 그녀쪽으로 다시
날아오다가 대청의 한 복판에서 터지게 되었다.
정영소는 다시 한 대의 폭죽을 내던지며 부르짖었다.
[이번에는 청석판(靑石板)처럼 단단한 껍데기를 벗기겠소!]
이것은 가자용을 자라에 비유한 셈이었다.
가자용은 속으로 생각했다.
(당신은 나를 격노하게 만들어 그 기회를 빌어 저 봉가가 손을
쓰도록 도와주려는 모양이지만 나는 결코 너의 수작에 넘어가지
않겠다.)
그는 즉시 쌍문정을 다시 손가락으로 튕겨내 폭죽을 밀어냈으며
그 폭죽은 다시 허공에서 터졌다.
안 제독은 웃으면서 외쳤다.
[두 사람이 겨루고 있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방해를 하지 맙시
다!]
그렇게 외치더니 가자용의 두 대의 쌍문정이 떨어진 곳이 옥룡
배가 있는 탁자와 너무나 거리가 가까운 것을 보고 옆에 있는 두
위사에게 당부를 했다.
[당신들은 저쪽으로 가서 옥룡배가 암기에 맞아 깨지는 일이 없
도록 지켜주시오.]
두 위사는 네! 대답을 하고는 탁자 앞으로 가서 옥룡배를 막아
섰다.
정영소는 싱글벙글 웃으며 자리로 되돌아와 앉더니 말했다.
[저 녀석은 눈치가 빨라 한 번 속더니 다시는 폭죽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구려.]
호비는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했다.
(둘째 누이는 봉천남이 나의 원수임을 알면서도 굳이 저 가가를
농락하는 의도가 무엇인지 모르겠구나.)
가자용은 사람들이 모두 웃음을 띠우고 있는 것을 보고 체면을
세우려는 욕심에서 더욱 암기를 많이 내쏘았다. 봉천남은 손발이
어지러워져 이미 지탱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돌연 봉천남은 숙
동곤의 끝을 한번 잡아당겼다.
가자용은 그가 은침을 날리려는 줄 알고 급히 몸을 피했으나 그
는 숙동곤 안에서 어떤 물건을 꺼내며 휘둘렀다. 그 물건은 우산
처럼 펼쳐지며 하나의 방패가 되는 것이었다. 이 방패는 가볍고
엷어 마치 종이연을 연상토록 했으며, 방패의 면은 거무튀튀한 것
이 사람의 머리카락을 사용한 것인지 아니면 특수한 재료를 배합
해 만든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방패 위에는 이빨을 드러내며 포
효하고 있는 다섯 마리의 호랑이 머리가 그려져 있었는데 그 기세
가 위맹하기 그지 없었다.
뭇 사람들은 이를 보자 내심 똑같이 생각했다.
(그는 오호문의 장문인인데 그 오호문이라는 명칭은 저 방패에
서 유래된 모양이로구나.)
이때 그는 각기 숙동곤과 방패를 잡고 가자용이 쏘아내는 암기
를 모조리 받아냈다. 그리하여 그 강표, 수전, 비도, 비황석 등
날아드는 기세가 강경(强勁)했지만 그 엷고 부드러운 방패를 뚫지
못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 방패의 재료는 실로 견고하고도
질기기 이를데 없어 보였다.
호비는 그가 숙동곤 속에서 가벼운 방패를 꺼낸 것을 보고 대뜸
깨닫는 바가 있어 자기 자신의 우둔함을 질책했다.
(그는 숙동곤 안에 기관장치를 한 것은 그야말로 명백히 예견할
수 있는 일인데 어째서 짐작하지 못했을까? 그는 그 은침을 숙동
곤 안에 장치했다가 손으로 누르기만 하면 무영은침이 쏜살같이
튀어나오니 그 누가 피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암기를 발사하면
손이나 발을 주의할텐데 그는 의표를 찌르듯 숙동곤의 일정 부위
를 누르면 은침이 쏘아져 나오는 것이니 그야말로 귀신도 알아차
리기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들자 정신이 번쩍 들며 그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사라졌다. 그런데 봉천남은 싸우면서 점점 물러서며 여덟개의 태
사의가 놓여있는 탁자쪽으로 다가섰다.
별안간 가자용이 비명을 내질렀고, 봉천남은 기다란 웃음을 흘
렸다. 가자용은 뒤로 몇 걸음 물러서더니 허벅지를 누른채 천천히
몸을 웅크리고 일어서지를 못했다.
봉천남은 싱글벙글 웃으며 태사의에 앉았다.
두 명의 위사가 나서서 가자용을 부축했다. 가자용은 이빨을 깨
물고 허벅지에서 무영은침을 뽑아들었는데 은침에는 선혈이 가득
묻어 있었다. 은침이 비록 가늘기는 했으나 하음요혈(下陰要穴)에
적중되었기에 상처는 가볍지 않았다. 그는 걸음을 옮길 수가 었어
부득이 두 위사의 부축을 받고 물러났다.
탕패는 갑자기 코웃음을 치며 냉소했다.
[흥! 암산을 하는 것은 결코 호걸의 행동이라고 볼 수 없지.]
봉천남은 고개를 돌리며 응수를 했다.
[탕대협은 나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오?]
탕패는 무시하듯 말했다.
[나는 암산으로 사람을 해치는 것은 호걸다운 행동이 못된다고
했소. 무릇 사내 대장부라면 광명정대해야지 어찌 그와 같은 수작
을 부릴 수가 있단 말이오!]
봉천남은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호통을 내질렀다.
[우리들은 분명히 암기로 겨루자고 밝혔소. 암기 대 암기로 싸
우는 것이 설마 광명정대하지 못하다는 말이오!]
탕패는 매서운 눈초리로 쳐다보며 말했다.
[봉노사는 나와 한번 겨루어 보겠다는 것이오?]
봉천남은 시큰등하게 말했다.
[탕대협은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데 소인이 어찌 감히 그 위엄을
거스릴 수 있겠소이까? 아무래도 저 가가는 탕대협과 절친한 친구
인 모양이구료.]
탕패는 근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맞았소. 난주 가씨 집안과 불초는 약간의 교분이 있지.]
봉천남은 당차게 말했다.
[그렇다면 소인은 목숨을 떼어 붙일 각오로 군자를 상대해야 되
겠구려. 탕대협께서는 어떻게 싸울 것인지 말해 보시오.]
두 사람은 갈수록 언성을 높였으며 금방이라도 손을 쓸 것 같았
다.
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탕패는 관가와 교분을 트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시시비비
와 선악을 가릴줄은 아는구나.)
안 제독이 다가오더니 웃으며 입을 열었다.
[탕대협은 이번 시합에 공증인이니 오늘은 참으시오. 며칠 후
소제가 나서서 자리를 마련할테니 그때 나서서 한 수 보여 주시어
사람들의 시야를 넓혀주시도록 하시구려.]
탕패는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먼저 대인에게 술을 내리신데 대해 감사를 드리지
요.]
그러면서 그는 봉천남을 흘겨보더니 자기의 태사의를 들었다 내
려놓더니 의자를 들고 봉천남과 몇 자 떨어진 곳에 옮겨앉더니 냉
소를 흘렸다. 그는 봉천남과 가까이 앉아있는 것도 수치로 여기는
태도였다.
그런데 그와 같이 태사의를 옮기고 보니 푸른 벽돌 위에 의자의
네 다리에 깊이 파인 자국이 선명했다. 대청에는 횃불이 대낯처럼
밝혀져 있었기 때문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이 한 수의 재간은 쉬워 보였지만 기실 수 십 년 동안의
내력이 실린 것이었다.
삽시간에 대청 안은 갈채로 뒤덮였다. 뒤쪽에 있는 사람들은 볼
수가 없는지라 급히 알아보려고 질문을 했으며, 그 내력을 알고는
우르르 몰려들어 구경을 했다.
봉천남은 냉소를 했다.
[탕대협의 그 재간은 정말 깨끗하군요! 불초가 다시 이십 년을
더 연마하더라도 연성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하늘 밖에 하늘
이 있고, 사람 위에 사람이 있다는 말이 있듯이, 참된 무학의 고
수가 본다면 그것은 평범하고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는 일이지
요.]
탕패는 지지않고 응수했다.
[봉노사의 말이 조금도 틀림이 없소이다. 무학의 고수가 볼 때
정말 한푼 어치의 가치도 없는 것이지요. 하지만 봉노사를 이길
수만 있다면 나로서는 만족할 수 있다오.]
안 제독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대 두 분은 왜 자꾸 언쟁을 벌이십니까? 날이 다 밝았습니
다. 일곱 개의 옥룡배 가운데 여섯개는 이미 주인이 정해졌습니
다. 오늘 밤 옥룡배의 주인을 정했으니, 우리는 내일 밤 다시 금
봉배와 은리배롤 놓고 겨루어 봅시다. 또 어느 영웅호걸분이 나서
서 봉노사와 겨루어 보시겠소이까?]
그는 목청을 돋구고 잇따라 세 번이나 부르짖었으나 대청에서는
조용하니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안 제독은 봉천남에게 말했다.
[봉노사, 옥룡배를 차지하게 된 것을 축하하오이다!]
이때 홀연 한 사람이 나서며 외쳤다.
[잠깐! 내가 봉천남을 상대로 한번 싸워보겠소이다!]

묘령의 비구니
이윽고 꾀죄죄한 얼굴에 노란 수염을 기르고 있는 중년인이 맨
손으로 달려나왔다. 소개를 하는 무관이 창을 하듯 외쳤다.
[서악 화권문의 장문인이신 정영호 정노사시오!]
봉천남은 몸을 일으키더니 두 손으로 숙동곤을 비껴 들고 입을
열었다.
[정노사는 어떤 무기를 쓰시오?]
호비는 싸늘히 말했다.
[그건 말하기 어렵구려.]
그리고는 돌연 앞으로 뛰쳐나오더니 봉천남을 아랑곳하지 않고
전귀농이 앉아있는 태사의 앞에 이르러 읜손의 식지와 중지 두 손
가락을 뻗쳐 쌍룡창주(雙龍槍珠)라는 초식으로 갑자기 전귀농의
두 눈을 찌르려고 했다.
이 한수는 모든 사람들의 의표를 찌르는 것이었다. 전귀농은 대
경실색을 하였지만 재빨리 임기응변하며 초식을 막아냈으나 호비
는 더욱더 빨랐다.
호비는 두 손을 둥글게 하더니 어느덧 회중포월(懷中抱月)이라
는 일초로 변화시켜 전귀농의 양쪽 태양혈을 공격했다. 전귀농은
미처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두 손을 양옆으로 뻗쳐내며 방어를 했
다.
호비는 그가 두 손으로 막으면서 겨드랑이에 빈틈이 드러나자
손을 뒤집으며 전귀농이 허리에 차고 있던 보도를 거머쥐었다.
싹! 하는 소리와 함께 푸른 광채가 번쩍이더니 어느덧 호비의 손
에 들린 보도는 봉천남이 들고 있는 숙동곤을 내리쳤다.
칼은 보도이고, 초식은 바람을 가르는듯 하여 사사삭! 하는 세
번의 가벼운 음향이 울려퍼지고, 곧이어 쨍그랑 창창! 하는 소리
가 두 번 울려퍼지더니 어느덧 봉천남이 쥐고 있던 숙동곤은 가운
데가 두 토막으로 잘라지며 바닥으로 굴러갔다.
원래 호비는 잇따라 칼질을 세 번 하였고 , 봉천남은 미처 초식
을 변화시키지 못해 손에 들고 있던 무기가 어느덧 네 토막이 났
으며, 양손에 하나씩 토막난 숙동곤을 쥐고 있었다.
그렇게 되니 봉(棒)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짧았고, 자(尺)라고
하기에는 너무 길어 실로 낭패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봉천남은 황망히 옆으로 세 걸음 물러섰다. 바로 이때 대청문
입구에서 왕철악이 낭랑히 소리쳤다.
[아홉 가문 반의 총장문인께서 도달하셨소이다!]
호비는 내심 흠칫해서 대청 입구를 바라보다가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문 입구에서 들어서는 사람은 묘령의 비구니었다. 치의(緇衣)에
망혜(芒鞋)를 걸치고 있었으며, 손에는 운추를 들고 있었는데 그
여인은 바로 원자의였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하나도 없었으며, 뇌
문(腦門)이 있는 곳에는 계인(戒印)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호비는 대뜸 두 눈이 가물가물해지며 혹시 사람을 잘못 본 것이
아닌가 하고 황급히 앞으로 뛰쳐나가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어느모로 보아도 그녀는 원자의가 아닌가?
삽시간에 호비는 하늘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땅이 흔들리는 충격
을 받았으며 마음이 착잡해져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당신은...... 당신은 원......]
원자의는 두 손으로 합장을 하더니 침울히 말했다.
[소니(小尼)는 원성(圓性)입니다.]
호비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어리둥절했다. 순간 등 뒤에
있는 현추혈(懸樞穴)과 명문혈(命門穴) 두 곳의 혈도에 뼈를 에는
듯한 고통을 느끼고 휘청하면서 땅바닥에 쓰러지며 보검을 놓치고
말았다.
원자의가 노갈을 터뜨렸다.
[손을 멈춰라!]
그리고는 재빨리 호비의 등 뒤를 막아섰다.
호비가 전귀농의 보도를 빼앗아, 봉천남의 숙동곤을 토막내고,
원자의가 나타나며 호비가 상처를 입고 쓰러진 것은 순식간에 일
어난 일이었다. 대청에 있던 무사들은 모두 놀란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있는 찰라에 이러한 일들이 벌어진 것이었다.
정영소는 호비가 상처를 입고 쓰러지는 것을 보자 초조함을 감
추지 못하고 즉시 달려나왔다. 원자의는 호비를 부축해 일으키려
고 하다가 정영소가 달려나오는 것을 보고 손을 멈추고 나직이 말
했다.
[빨리 그를 부축해서 옮기도록 하세요!]
그리고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운추를 뒤로 휘둘러 암기를 막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호비와 정영소 두 사람을 뒤에서 보호했다.
정영소는 호비를 반은 부축하고 반은 안다시피하여 재빨리 자리
로 돌아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오라버니, 어떠세요?]
호비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등에 암기를 맞았구려. 현추와 명문이라오.]
정영소는 남녀의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고 재빨리 그의 장포
와 내의를 밀쳐 올렸다. 호비의 현추와 명문혈에는 조그마한 구멍
이 나 있었고 선혈이 홀러나오고 있었다. 암기는 살속 깊숙히 파
고들어간 모양이었다.
원자의는 다소곳이 말했다.
[그것은 은을 입힌 무쇠침이라 독은 없으니 안심해요.]
그리고는 운추에서 한 대의 은침을 뽑아내었다. 그리고는 운추
의 끝을 호비의 현추혈에 대고 가볍게 당겨 은침을 뽑아내었으며
다시 명문혈의 은침도 같은 방법으로 뽑아냈다. 운추의 끝에는 강
력한 자석이 장치되어 있는 것 같았다.
호비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원소저...... 그대...... 그대는......]
원자의는 나직이 말했다.
[나는 줄곧 그대를 속여왔어요. 제가 나빴어요.]
그녀는 잠시 후에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어려서 출가했는데 법명은 원성이라고 해요. 내가 원씨라
고 자처한 것은 어머니의 성이 원씨였기 때문이었고, 또한 원성이
라는 글자를 거꾸로 하면 성이 원이 된다는 뜻이 아니겠어요? 그
리고 자의라는 것은 바로 치의에 망해를 걸친다는 뜻의 치의에서
따온 거예요.]
호비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으며 도저히 그 말이 믿기지가
않았다. 그러나 눈앞에 서 있는 것은 분명 원자의였고, 그녀는 묘
령의 비구니였던 것이다.
호비는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잠시 후에 입을 열었다.
[그대...... 그대는...... 그대는 어째서 나를 속였소?]
원성은 고개를 숙이고 땅을 바라보며 다소곳이 말했다.
[저는 사부님의 명을 받고 회강에서 중원으로 들어왔어요. 생각
에 홀몸으로 비구니 차림을 했다가는 기나긴 여행길에서 투숙하거
나 음식을 사먹기에도 불편할 것 같아 부득이 속인의 옷차림을 하
고 머리에는 가발을 쓴 거예요. 음식을 먹을 때는 비린 음식을 피
했는데 아마도 그대는 알아보지 못한 모양이군요.]
호비는 일순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른 채 나직이 한숨을 내
쉬었다.
이때 안 제독이 낭랑히 입을 열었다.
[어느 분이 나서서 오호문의 봉노사와 겨루겠소?]
호비는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넋이 빠진 상태라 안 제독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안 제독이 잇따라 세 번을 물었으나 봉천남에게 도전하는 사람
이 없자 그는 복강안에 게 말했다.
[대수께 아룁니다. 이 일곱 개의 옥룡어배(玉龍御杯)를 여기 계
신 일곱 분에게 내리시는 것이 어떠하신지요?]
복강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게 하도록 하시오!]
이미 날은 밝아오기 시작하여 창틀 사이로 희미한 햇살이 배어
들어왔다. 하룻 밤의 격렬한 격투가 끝나고 일곱 개의 옥룡배의
주인이 정해진 셈이었다.
대청의 군호들은 다투어 의논을 했다.
[홍화회에서 빼앗아간 그 옥룡배를 어느 문파에서 빼앗아 올 수
있을까?]
[허허! 아무리 재간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홍화회하고는 상대할
엄두를 내지 못할걸!]
[홍화회의 진 총타주는 절정의 무공을 지니고 있고, 게다가 무
진도인, 조반산, 문태래, 상씨 형제 등 어느 누구 하나라도 명성
이 쟁쟁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오. 만약 옥룡배를 빼앗으러 간다는
말은 노수성(老壽星)이 목을 매단 격으로 목숨이 긴 것을 한탄하
는 사람이라야 할 것이오.]
어떤 사람들은 원성을 바라보며 수근덕거리며 말했다.
[아니 저 어여쁜 비구니가 아홉 가문 반의 총장문이라니 정말
요상하군!]
[아홉 가문이란 어느 문파인지 아시오? 그리고 또 반쪽 장문인
이란 무슨 말이오?]
[그녀가 진짜 무공이 고강하다면 어째서 옥룡배를 차지하려고
하지 않을까?]
[허허! 상대방 봉노사의 은침을 감히 상대할 수가 있겠소? 더우
기 그의 손에 들린 숙동곤이 네 토막으로 잘렸는데도 여전히 은침
을 쏘아내 전세를 역전시키니 정말 대단하지 않소?]
그러자 다른 한 사람이 승복할 수 없는듯 말했다.
[그렇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오. 화권문의 저 노란 수염의 장문
인은 저 아홉 가문 반의 총장문이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놀라는
바람에 저 봉가의 수작에 말려든 것이라오. 그렇지 않았다면 승패
를 짐작하기가 어려웠을 것이오.]
그러자 다른 사람이 입을 열었다.
[보기에 서 전귀농 역시 보잘 것 없는 것 같소. 그는 천룡문의
진문지보를 맨손인 그에게 빼앗기고서도 후안무치하게 여전히 태
사의에 앉아 있는 모습이 가관이 아니오. 더구나 땅에 떨어진 보
도를 다시 주어들고 앉아 있는 것이라니, 허, 참......]
한 사람이 그 말에 찬동을 하고 나섰다.
[맞았소. 물론 천룡문보다야 화권문이 휠씬 낫지!]
안 제독은 긴 탁자 끝에 가서 쟁반을 들고 중간에 서서 낭랑히
입을 열었다.
[만세야(萬歲爺)께서 은전을 베푸시어 하사한 옥룡어배를 이제
소림파 장문인 대지선사, 무당파의 장문인 무청자 도인, 삼재검
장문인 탕패, 흑룡문 장문인 해란필, 천룡문 장문인 전귀농.....]
그리고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석선생에게 나직이 물었다.
[석노사, 귀문파의 대명은 어떻게 되시오?]
석선생은 미미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 몸의 이름은 만진(萬嗔)이고, 문파로 말할 것 같으면......
약왕문이라고 해둡시다.]
안 제독은 다시 낭랑히 읊었다.
[......약왕문 장문인 석만진, 오호문 장문인 봉천남에게 내리
는 바이외다, 사은(謝恩: 황제가 은총을 내림)이오!]
그 말이 떨어지자 복강안 등 벼슬아치들은 일제히 몸을 일으켰
다. 무림의 군호들 가운데 예의를 아는 사람들은 몸을 일으켰으나
어떤 사람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자 뭇 위사들이 호통을 내질
렀다.
[모두들 일어나시오!]
그제서야 호걸들은 다투어 일어섰다. 대지선사와 무청자는 각기
승려와 도사의 법도대로 절을 했다. 그리고 탕패와 해란필은 엎드
려서 큰절을 올렸다.
안 제독은 여러 사람들이 무릎 꿇고 절을 하고 나자 웃으며 말
했다.
[축하하오이다. 축하하오이다!]
그리고는 쟁반을 내밀었다. 대지선사 등 일곱 명은 공손한 태도
를 옥룡배를 집었다.
별안간 일곱 사람은 마치 대장간에서 새빨갛게 달구어졌다가 식
은 낙철(烙鐵)을 만진듯 일제히 손을 놓았다. 쨍그랑! 창창! 하
는 맑고 투명한 소리가 울려퍼지며 일곱 개의 옥룡배는 청석바닥
위로 떨어지며 박살이 나고 말았다.
이러한 갑작스런 변고에 일곱 사람들 뿐만 아니라 복강안을 위
시한 뭇 군호들까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술렁이며 일제히 물
었다.
[아니! 어찌 된거야? 응!]
삽시간에 옥룡배를 쥐었던 일곱 명의 손바닥은 모두 불에 데인
듯 부풀어 올라 뜨끔뜨금한 통증에 참지 못하고 옷자락에 부벼댔
다. 해란필은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가 빨다가 갑자기 괴성을 내질
렀다. 그는 혓바닥에도 격렬한 통증을 느꼈던 것이다.
호비는 정영소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미하게 웃었다. 그는 정
영소가 가자용에게 내던진 두번째와 세번째 폭죽에 적갈분과 같은
종류의 독약을 넣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폭죽이 탁자 위에서 터지
며 일곱 개의 옥룡배에 독가루가 뿌려진 것이었다.
안배는 그야말로 깊고 치밀한 수법이라 전혀 흔적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한참이 지나서야 그 효과를 본 것이었다.
하지만 정영소는 차분한 표정으로 담배대를 빨며 끊임없이 연기
를 내뿜고 있었다. 그녀는 암암리에 호비와 원성에게 알약을 두
개씩 건네주며 나직이 말했다.
[삼켜요!]
두 사람은 그녀가 배려한 바가 있음을 직감하고 재 빨리 알약을
삼켰다.
대청 안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은 모조리 그 깨어진 옥룡배와 일
곱 명의 얼굴에 머물렀다. 모두 놀라고 어리벙벙한 상태라 대청
안은 쥐죽은 듯 고요하기만 했다.
순간 원성이 대청 한복판으로 나서더니 운추로 탕패를 가르키며
낭랑히 입을 열었다.
[탕패, 이것은 황상께서 어사(御賜)하신 옥룡배인데 당신이 대
담하게도 간계를 펄쳐 모조리 깨뜨려버리다니, 그게 가능한 일이
오? 당신은 발칙한 마음을 품고 홍화회와 암암리에 결탁을 하고
복대수의 장문인 대회를 망치려고 했구려. 당신같이 대역부도하고
윗어른을 안중에도 두지않는 사람을 천하의 영웅들은 결코 용납할
수 없을 것이오!]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는 매우 맑고 카랑카랑했으며 온 대청안에
울려 퍼졌다. 그녀의 어조는 준엄했으며, 조리있게 탕패가 홍화회
와 암암리에 결탁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었다. 사실 뭇 사
람들이 영문을 모른 채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그녀가 단호한 어
조로 말을 하자 선입관이 일을 좌우한다는 말이 있듯이 모두 탕패
의 소행으로 여기게 되었다.
복강안은 끓어오르는 노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손을 내젖자 왕검
영과 주철초 등 고위급 무사들이 탕패의 주위를 에워쌌다.
한평생 적지 않은 풍상을 겪어온 탕패라 할지라도 이때는 안색
이 창백해졌다. 그는 놀람과 분노에 얽혀 떨리는 목소리로 호통을
내질렀다.
[이 요망한 비구니야! 그와 같은 일을 터무니없이 지껄인다고
누가 믿을 것 같으냐!]
원성은 냉소를 했다.
[내가 터무니 없는 말을 지껄일 사람 같은가요?]
그러더니 그녀는 왕검영을 불렀다.
[팔괘문 장문인 왕노사!]
이어 그녀는 대답도 듣지 않고 고개를 돌리더니 주철초를 또 불
렀다.
[응조안행문의 장문인이신 주노사, 당신들은 내가 누구인지 알
고 있지요? 아홉 가문 반의 장문인에 나는 미련을 두지 않겠어요.
하지만 내가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일 사람인지, 아니면 한 말에
책임을 지는 사람인지 두 분께서 한번 말씀해 보세요.]
왕검영과 주철초는 원성이 대청 안으로 들어 설 때부터 가슴을
조이며 불안해했다. 그들은 그녀가 자기의 장문인 자리를 빼앗아
간 사실을 털어놓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들 두 사람은 복강안의 신변에서 가장 신임을 받고 있는 위사
들의 우두머리 격이고, 또한 북경성 안에 있는 무사들 가운데 고
명한 인물로 정평이 나 있었다. 만약 그들 두 사람이 장문인 자리
를 빼앗겼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어찌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겠
는가?
그런데 이때 원성이 자기들을 칭하여 본문의 장문인이라고 하고
아홉 가문 반의 장문인 자리를 하지 않겠다고 말한 것은 분명히
그녀가 장문인 자리를 되돌려주겠다고 밝힌 것이니 이 참수형을
받고 형장에 도달했던 죄인이 황은(皇恩)으로 사면 받은 것과 같
아 자신들로서는 그야말로 한시름 놓게 되었다. 더군다나 그들 두
사람은 그녀가 탕패를 꾸짖는 말을 듣고 십중팔구 그 말이 맞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탕패의 소행이 아니라면 어찌
옥룡배를 일거에 박살낼 수 있겠는가 하고 내심 짐작하고 있었다.
왕검영은 즉시 황송한 듯 말했다.
[사태(師太)께서는 무예가 뛰어나시어 무척 존경받고 뭇 사람들
로부터 승복받고 있지요. 또한 위인됨이 너그럽고 아량이 넓으시
니 실로 당금 무림의 걸출한 인재라 할 수 있지요.]
주철초는 일전에 그녀에게 패배를 당한지라 내심 미워하는 감정
이 있었지만 그녀가 여러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추태를 폭로할까
두려워 고분고분하게 말했다.
[불초는 사태가 책임있는 말씀만 하시고, 대국적인 견지에서 판
단하시며 무림 동도의 체면을 존중하고 있다고 믿소이다. 만약 만
부득이한 일이 아니면 결코 명성을 떨치고 있는 무림의 그늘에 가
려진 내막을 사사로운 감정으로 들추어내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
다.]
이 말은 자신과 결부된 일이라 그녀에게 넌즈시 자신의 체면을
세워달라는 부탁의 뜻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듣
기에는 한 마디 한마디가 모두 탕패를 두고 한 말이라고 여겨 지
는 것이었다.
뭇 사람들은 복강안이 가장 신임하고 있는 위사들 가운데 그 우
두머리가 되는 두 사람이 공손한 태도로 젊은 비구니에게 말을 할
때마다 '사태, 사태'하고 부르니 어찌 의혹을 가질 수 있겠는가?
복강안은 노갈을 터뜨렸다.
[잡아라!]
왕검영과 주철초, 그리고 해란필은 일제히 손을 뻗쳐 탕패를 잡
으려고 했다.
탕패는 대권수(大圈手)라는 초식을 펼쳐 내경(內勁)을 모아 뻗
쳐내 세 사람을 물리친 뒤 부르짖었다.
[잠깐......]
그리고는 복강안에게 정중히 입을 열었다.
[복대수, 소인은 그녀와 몇 마디 하고 싶소이다. 만약 그녀가
진짜 증거를 댄다면 소인은 기꺼이 복대수의 벌을 받겠으며 설사
죽는다 하더라도 원망하지 않겠소이다. 이와 같이 누명을 쓴다는
것은 입에서 피를 뿜어낸다 하더라도 소인은 승복하기 어려운 일
이외다.]
복강안은 평소의 탕패의 덕망과 명성을 들어왔기에 승락을 했
다.
[좋소. 그녀에게 물어보도록 하시오.]
탕패는 원성을 노려보며 노기띤 어조로 부르짖었다.
[나는 당신과 평소 일면식도 없는데 어째서 이토록 사람을 모함
하는 것이오? 대체 당신은 누구시오!]
원성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요. 나는 당신과 일면식도 없고,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어
찌 함부로 당신을 모함할 수 있겠어요. 나는 다만 홍화회와 깊은
원한이 있어요. 하지만 당신이 암암리에 홍화회에 가맹하고, 장문
인 대회에 잠입해 들어와 수작을 부리려 하고 있으니 나로서는 그
음모와 간계를 폭로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당신은 견식이 높고
교분이 넓어 천하 각처에 친구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나와 상관
이 없는 일일런지 모르지만, 나는 당신이 홍화회라는 도배들과 결
탁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해 용납할 수가 없는 거예요.]
호비는 그와 같은 말을 듣고 내심 커다란 의흑이 일었다. 그는
원성과 홍화회의 뭇 영웅들과의 관계가 깊은 것을 잘 알고 있었
고, 더구나 옥룡배를 박살낸 것은 정영소가 부린 수작인데 어찌
그녀가 이토록 무고한 탕패를 모함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
다.
그는 암암리에 몇 번이고 생각을 굴리다가 문득 원성이 그녀의
어머니가 봉천남에게 핍박을 받고 광동에서 떠난 뒤 탕패의 집에
서 머물렀다는 말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그녀 어머니의 죽음이 이
탕패와 관련이 있단 말인가?
그는 갑자기 자기가 몽매에도 잊지 못하고 그리던 아리따운 소
저가 놀랍게도 비구니라는 사실을 알고부터 제 정신이 아니었고,
시종 마음을 안정시킬 수가 없었다. 그의 머리 속에는 광풍노도가
몰아치며 세찬 파도가 용솟음치듯 겉잡을 수 없는 상념이 솟구쳐
올라 등에 입은 상처의 고통마저도 잊고 있었다.
복강안은 십 년 전 홍화회의 군웅들에 사로잡혀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당한 바가 있어 홍화회라면 이를 갈았으며, 이 대회를 개
최한 주목적 가운데 하나는 바로 홍화회를 상대하자는 것이었다.
복강안은 원성의 말을 듣고 탕가라는 자가 강호의 호걸들과 교
분이 두텁고, 또한 홍화회의 수괴들 하나 하나가 모두 무림에서
위맹을 떨치고 있는지라 그들과 사사로이 소식을 건네받으며 서로
내왕을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으며, 만약 내왕이
없다고 잡아뗀다면 그것은 내심 꽁꽁이 속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
하고 있었다.
탕패는 무섭게 원성을 다그쳤다.
[당신은 내가 홍화회라는 비적의 수괴들과 사귀고 있다고 했는
데 누가 보았으며 어떤 증거가 있단 말이오?]
원성은 안 제독에게 말했다.
[제독 대인, 이 간악한 탕패라는 자는 홍화회라는 비적의 우두
머리와 주고받은 서신이 있소이다. 대인은 방법을 강구해서 필적
의 진위 여부를 가려주실 수 있사온지요?]
안 제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소.]
그리고는 옆에 있는 무관에게 분부를 내렸다. 그 무관은 모서리
에 있는 탁자 곁으로 다가가 서랍을 뒤적여 몇 통의 편지를 꺼냈
는데 이는 탕패가 안 제독에게 보낸 서신이었다. 이 서신에는 탕
패가 경사의 대회에 참석하고 대회의 공증인이 되겠다고 응낙을
한 내용이었다.
탕패는 믿는 데가 있어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생각했다.
(내가 교분이 비록 넓은 편이기는 하지만 일을 처리함에 있어
매사 조심을 하며 이해타산을 했기때문에 홍화회의 인물을 사귄
적이 없다. 설사 이 요망한 비구니가 서신을 날조 한다고 해도 필
적을 대조해 보면 금방 탄로가 날 것이다.)
따라서 그는 여유가 생겨 미미하게 냉소를 머금은 채 지켜보고
있었다.
원성은 냉랭히 말했다.
[감림혜칠성 탕대협, 당신의 모자 속에 숨긴 것은 뭐죠?]
탕패는 어리둥절하며 반문했다.
[뭐가 있다는 거요. 모자는 모자일 따름이지.]
그리고는 모자를 벗어 이러저리 살피더니 아무 이상이 없는 것
을 보고 그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해란필에게 모자를 건
네주었다. 해란필은 한번 살피더니 안제독에게 건네주었다.
안제독은 한번 살펴보더니 말했다.
[아무 것도 없는데!]
원성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제독 대인께서 찢어보시기 바래요.]
만주의 풍속에는 성대한 연회가 베풀어질 때 대체로 비계가 그
대로 달려있는 커다란 돼지고기 수육이 나오기 마련이었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 수육을 자신이 지니고 있던 해수도(解手刀)
로 잘라먹었다. 따라서 안 제독도 해수도를 몸에 지니고 있었다.
그는 원성의 말을 듣자 해수도를 꺼내 모자의 실밥을 뜯어 냈
다. 그러자 모자 안에 끼워넣은 솜뭉치 가운데 과연 한 장의 서찰
이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안 제독은 아! 하더니 그 서찰을 뽑아들었다.
순간 탕패의 안색은 흑빛이 되었다.
[저건...... 저건.......]
그는 참을 수 없다는 듯 가까이 다가들었다. 그러자 휙휙! 하는
소리와 함께 왕검영과 주철조가 칼을 뽑아들고 막았다.
안 제독은 서찰을 펼치고 낭랑히 읽었다.
[불초 탕패는 삼가 진(陳) 총타주 휘하에 올립니다. 부탁한 일
은 온갖 심혈을 다 기울이겠으며 죽을 때까지 잊지 않고 수물초를
알아준 커다란 은혜에 보답하기가 부족한 형편이지요. 오직 그 자
가 대대적으로 무리들을 모아 천하의 여러 문파 장문인들을 한 자
리에 배석하도록 한다면 반드시 경계가 삼엄할 것입니다. 불초가
만약 불행히도 부탁받은 바를 저버린다면 마땅히 경사에서 피를
뿌릴 것이니 이 편지를 모자에 넣어 귀공에게 올려지도록 항배를
하겠소이다. 불초는 경사에서.......]
거기까지 읽더니 안 제독은 안색이 변해서 서찰을 복강안에게
바쳤다.
복강안이 서찰을 받아 읽어보니 그 서찰은 다음과 같은 글이 이
어져 있었다.
<......그 자의 신세에 얽힌 비밀을 알아낼 수 있다면 일일이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 머리를 들어 서쪽을 바라보며 귀공의 풍
채를 흠모하나이다. 언젠가 다시 그 우두머리를 육화탑(六和塔)
꼭대기에 감금을 하고, 다시 그 자를 자금성 안에서 사로잡는다면
그 얼마나 통쾌하겠소이까!>
복강안은 읽으면 읽을수록 울화통이 터져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원래 십 년전 건륭 황제는 항주에서 평복을 입고 출행을 했다가
홍화회의 군웅들이 마련한 계책에 빠져 육화탑 꼭대기에 감금된
적이 있었다. 후에 복강안은 다시 북경 자금성 안에서 홍화회에게
사로잡힌 바가 있었던 것이다.
이 두 가지 일은 건륭과 복강안이 한평생 가장 치욕스러운 일로
여기고 있었으며, 무릇 그 당시 이 일을 알고 있는 관원이나 시위
들은 모두 건륭에 의해 한 명씩 한 명씩 주살되어 함구하도록 만
든 것이었다. 또한 이 두 가지 일은 홍화회의 총타주 진가락(陳家
洛)의 출생에 얽힌 비밀과 연관이 있어 홍화회에서도 퍼뜨리지 않
아 강호에서 알고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 일이 있은 뒤 십년, 복강안이 그 당시 입은 상처의 기억이
점점 엷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탕패가 서찰에서 그와 같
은 치욕의 상처를 끄집어 낸 것이었다.
복강안은 속으로 궁금하게 생각했다.
(편지 안에는 그자의 출생의 비밀을 많이 알아냈다는 등의 이야
기를 했는데 얼마나 많은 추문과 그늘에 가려진 음악한 일들을 알
아냈는지 모르겠구나.)
사실 복강안은 건륭의 사생아였다. 만약 누가 이 한 마디만 떠
든다 하더라도 멸문지화를 당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복강안은 평소 침착하기 이를데 없는 사람이었으나, 이때 만큼
은 치미는 분노에 안색이 새파래지고 두 손을 벌벌 떨고 있었다.
이윽고 안 제독이 탕패가 보낸 서찰을 건네주었다. 두 통의 서
찰에 적힌 필체는 그렇게 닮지는 않은 편이었지만 매우 노한 상태
라 꼼꼼히 대조해 볼 여유가 없었다.
탕패는 자기 모자 속에서 한 통의 서찰이 숨겨져 있는 것을 보
고 놀라고 당황하여 어리둥절했다가 이내 경황 중에 생각을 더듬
어 보고는 황연히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는 암암리에 원성이 부린 수작임을 알아차렸다. 그러니까 일
찌기 그녀가 치밀한 계획을 세워 자기와 똑같은 모자를 사서 서찰
을 위조하여 모자 속에 넣고서 자기가 잠을 자거나 목욕을 할 때
바꿔치기 한 것이라는 판단을 했다.
그는 안 제독이 반쯤 읽는 것을 듣고 식은 땀이 등골을 타고 흘
러내리며, 오늘 커다란 재난이 머리 위로 떨어지게 되었구나 하고
생각을 했다. 안 제독이 편지를 다 읽지 못하고 복강안에게 넘겨
준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 뒤에는 더욱 대역무도한 말들을 써놓은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탕패는 속으로 생각했다.
(오늘 이 억울한 누명에 대헤 변명을 하려면 오로지 저 비구니
의 내력을 알아내는 길밖에 없구나.)
그는 고개를 돌려 원성을 자세히 뜯어보다가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었었다.
(저 비구니는 낯이 익은 것 같다. 옛날에 본 바가 있다!)
그러다가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부르짖었다.
[너는...... 너는 은고(銀姑), 은고의 딸이구나.]
원성은 냉소를 하며 그 말을 받았다.
[당신은 끝내 알아냈군요.]
탕패는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복대수! 이 비구니는 소인의 원수입니다. 그녀는 함정을 파 놓
고 나를 모함하는 것입니다. 대수께서는 절대로 이 여인을 믿어서
는 아니되옵니다.]
원성은 차분하고도 분노에 찬 어조로 입을 열었다.
[맞아요. 나는 당신의 원수예요. 우리 어머님이 갈 곳이 없어
당신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어요. 그런데 인면수심(人面獸心)을 지
닌 탕대협께서는 우리 어머니의 미모에 빠져 폭력을 써서 그녀를
범했어요. 이에 그만 어머님께서는 대들보에 목을 매고 자결을 하
고 말았지요. 이 일을 인정하시나요?]
만약 여러 영웅호걸 앞에서 이와 같은 추행을 인정한다면 이후
명성은 땅에 떨어지고 다시는 사람들의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다
는 것을 탕패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일의 경중을 따져볼 때
차라리 그러한 일을 그대로 시인함으로써 복강안이 요망한 비구니
가 사사로운 원한을 가지고 자기를 모함한다는 것을 강변할 수 있
으리라고 판단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했다.
[맞았네. 틀림없이 그런 일이 있었지.]
군호들은 탕패를 본래 우러러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가 위험
에 처한 사람을 구해 주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선뜻 나서서
도와주는 대협인줄 알고 있었다. 사실 그가 홍화회와 결탁했다 하
더라도, 홍화회의 군웅들은 명성이 뛰어나고 무림의 사람들에게
추앙을 받고 있던터라 그의 명예에는 전혀 손상을 가져오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때 그가 어려운 지경에 빠진 여인을 겁탈하여 그 여인
이 자결토록 만든 사실을 스스로 시인을 하자 뭇 군호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었다.
심지가 굳은 많은 사람들은 대뜸 큰 소리로 꾸짖었고, 어떤 사
람들은 그를 군자로 사칭한 간악한 자라고 욕을 했으며, 어떤 자
는 의관만 그럴듯하게 갖춘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고 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대협임을 자칭했으니 정말 파렴치한자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원성은 사람들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렸다가 낭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나는 줄곧 당신과 같이 금수만도 못한 사람을 죽여서 어머님의
원수를 갚으려고 했어요. 그러나 당신의 무공이 너무나 고강해서
이길 수가 없었지요. 부득이 나는 밤낮으로 당신 집 창문 틈으로
기회를 엿보고 기다렸어요. 호호호! 그런데 하늘이 나를 불쌍히
여기시어 나는 당신이 홍화회의 조반산과 상씨형제, 석쌍영 등과
같은 도적 우두머리와 음모를 꾸미고 사사로이 의논하는 소리를
보고듣게 된 거예요. 방금 전 옥룡배를 빼앗아간 그 젊은 서생은
바로 홍화회의 총타주인 진가락의 서동인 심연(心硯)이예요. 그렇
지 않은가요?]
그러자 뭇 사람들은 다시 한차례 소란을 일으켰다. 복강안 역시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정말 심연이구나. 매우 대담하고 당돌하게스리 내
가 알아보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날뛰다니 정말 괘씸하군!)
탕패는 조금도 지지 않고 냉랭한 어조로 반박했다.
[내가 어째서 그를 안다는 말인가? 만약 내가 홍화회와 결탁을
했다면 어째서 그를 사로잡았겠는가?]
원성은 싸늘히 냉소를 홀리며 입을 열었다.
[호호호! 당신의 손놀림이 민첩하고 깨끗하기 이를데 없어 흔적
을 남기지 않았지요. 만약 내가 사전에 당신들의 밀의(密議)를 엿
듣지 못했다면 결코 그와 같은 음모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
했을 거예요. 내 묻겠는데 당신의 점혈수법은 심오한 한가지 공력
을 갖추고 있어야 하지 않나요? 당신이 손을 써서 상대방의 혈도
를 짚는다면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풀수 없는 것이 아니
겠어요? 그러나 조금전 당신이 홍화회 비적의 혈도를 짚었을 때
어째서 대청의 불이 모조리 꺼졌으며, 또 그 비적의 몸에 지닌 혈
도가 갑자기 풀려 도망칠 수 있었지요?]
탕패는 그 말을 듣고 입을 벌린 채 혀가 굳어져 말을 하지 못했
다.
[그건...... 그건...... 누가 암암리에 구원을 해 주었겠지.]
원성은 날카롭게 외쳤다.
[몰래 구원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은 탕패 탕대협말고는
천하에서 찾아볼 수 없을 거예요! 당시 당신말고 그 누가 그의 옆
에 서 있었나요?]
호비는 그와 같은 말을 듣고 내심 생각했다.
(그녀의 언사가 매우 날카롭구나. 탕패는 입이 백 개라도 변명
의 여지가 없겠군. 그 젊은 서생의 혈도는 분명 내가 풀어준 것이
다. 그러나 나는 겨우 반을 풀어준 것뿐이고, 나머지 반은 누가
풀어준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탕패는 결코 아닐텐데......)
이때 원성은 다시 입을 열었다.
[복대수, 이 탕패와 홍화회의 비적들은 미리 짜고서 그 비적 심
연을 사로잡아 당신 곁에 두고는 다른 한 떼의 비적이 불을 끄자
심연이 어지러운 틈을 타서 복대수를 찌르려고 했던 거예요. 이
한 때의 비적들은 뭇 위사들이 그 서생의 혈도가 짚혀 꼼짝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도록 만들어 그가 자객으로 변할 수 없을 것이라
고 생각하도록 유도한 것이지요.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하늘에서
복대수에게 하해와 같은 복을 내리시어 흉악한 일에 부딪히더라도
길하게 변하도록 돌봐 주셨지요. 게다가 뭇 위사들이 충성심이 강
한 사람들인지라 촛불이 꺼지자 즉시 목숨을 돌보지 않고 대수를
보호했기 때문에 도적들의 간계가 성공하지 못한 것이지요.]
탕패는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구나! 도대체 그러한 일이 어떻
게 일어날 수 있겠느냐?]
복강안은 조금 전의 광경을 더듬어 보더니 원성의 말이 틀림없
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내심 부르짖었다.
(정말 아슬아슬 했구나!)
그리고 그는 왕검영과 주철초에게 말했다.
[당신들은 매우 훌륭했소. 곧 승진을 시켜주지.]
원성은 그 틈을 이용하여 다시 입을 열었다.
[왕대인, 주대인, 조금전 그 도적의 간계가 그렇지 않았나요?]
두 사람은 똑같이 생각했다.
(이 비구니의 비위를 거슬려 득이 될 것이 없겠구나. 더군다나
우리들은 그녀가 흉악하게 말을 하면 할수록 복대수를 보호한 공
이 더욱 높아질 것이고 나중에 더 많은 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
다. )
그리하여 왕검영 그 말을 받았다.
[그 서생은 확실히 대수 앞으로 달려들려고 했으나 다행히 성공
은 못했지요.]
그러자 주철호 맞장구를 쳤다.
[어둠 속에서 확실히 누군가 다가왔으며 무공이 매섭기 이를 데
없었지요. 우리들은 목숨을 걸고 막을 수밖에 없었는데...... 탕
패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으니 정말 아슬아슬하기 이를데 없었구
려.]
탕패는 변명하기가 어렵자 원성에게만 고함을 내질렀다.
[너는...... 너는 온갖 터무니 없는 소리를 지껄이는구나! 너는
조금전 대청 안에 있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안단 말이냐?]
원성은 그 말에 대꾸를 하지 않고 봉천남의 아래 위를 훑어 내
렸다.
봉천남은 그녀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만든 친아버지였다. 그러
나 그는 그녀의 어머니를 핍박해서 떠돌이 신세가 되어 온갖 고통
을 당하게 만들고 끝내는 비명횡사하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그녀
는 그를 세 번 구해서 부녀의 도리를 다한 이후에 다시 그의 목숨
을 빼앗아 한많은 세상을 하직하신 어머님의 원한을 갚겠다고 맹
세를 한 바가 있었다. 그녀가 이제 탕패를 모함하여 곤경에 처하
도록 만들자 봉천남을 함정으로 끌어들일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
녀는 봉천남을 한번 힐끗 바라보고는 차마 그럴 수가 없는 듯 갈
등을 하면서 일시에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탕패는 늙고 교활한 사람이라, 그녀가 봉천남을 힐끗 쳐다보며
망설이는 기색이 드러나자 내심 떠오르는 바가 있어 두 문제를 섞
어놓고 보니 어느 정도 짚히는 데가 있었다. 그는 봉천남이 암암
리에 펼친 계책이라는 생각이 들어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봉천남, 알고보니 네가 가운데서 수작을 부렸군! 내가 당신의
부탁을 받아들여 암암리에 도와주어 당신이 이 대회에서 군웅들을
압도하도록 만들어 주었는데 적반하장으로 도리어 당신딸을 시켜
나를 모함하다니!]
봉천남은 홈칫해져서는 입을 열였다.
[내 딸이라구요? 그녀...... 그녀가 내 딸이라구요?]
군호들은 두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놀람과 의아함을 금치 못했
다.
탕패는 여전히 냉소를 하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여전히 멍청한 척 시치미를 떼는군. 당신은 어디 한 번
이 비구니를 똑바로 한번 쳐다보시오! 과거 은고와 무슨 차이가
있는가?]
봉천남은 두 눈을 부릅뜨고 원성을 바라보더니 입을 벌린 채 말
을 하지 못했다.
그녀가 비록 비구니 차림을 하고 있었으나 수려한 미모는 완전
히 옛날 고기를 팔던 은고라고 할 수 있었다.
별리(別離)의 아픔
과거 은고는 딸을 데리고 광동 불산진에서 호북(湖北)으로 도망
치다가 탕패의 부중으로 들어가 하인이 되었던 것이다.
탕패는 겉으로 보기에 점잖고 의젓했으며, 의리가 깊은 협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행실이 난잡한 사람이었다. 그는
은고의 미모에 반해 강제로 그녀를 욕보이고 자신의 욕심을 채운
것이었다. 은고는 수치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기어이 대들보에
목을 매달아 죽고 말았다.
그후 원성은 아미파에서도 배분이 지극히 높은 한 분의 비구니
에게 구원을 받았다. 그 비구니는 어린 그녀를 천산(天山)으로 데
리고 들어가 어릴 적부터 그녀의 머리를 깍고 무예를 전수했던 것
이었다.
헌데 이 비구니의 거처와 천지괴협(天池怪俠) 원사소 및 홍화회
의 군웅들이 거처하는 곳과 멀지 않았고, 평소에도 서로 무학을
연구하느라고 내왕이 잦은 편이었다.
원성은 천부적인 자질이 훌륭했다. 그녀는 사부의 무공을 싫증
내지 않고 욕심을 내며 열심히 배웠으며, 매번 원사소를 볼때마다
몇 수를 가르쳐 달라고 떼를 썼다. 또한 홍화회의 총타주 진가락
과 곽청동, 심현에 이르기까지 홍화회의 군웅들 가운데 다소나마
그녀에게 무공을 전수해 주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 중에서도 천지괴협 원사소는 늙고 외로운 처지라 그녀에게
각별히 많은 무공을 전수해 주며 아껴주었다. 원사소는 천하 무학
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였고, 게다가 십 여 명의 명사들을
보태게 되니 원성은 자연히 각파의 재간을 고루 갖추었다. 또한
천부적인 총명함과 기민함으로 부족한 공력을 메꾸기도 하였다.
만약 그녀의 나이가 적어 내공의 수위가 부족하지 않았다면 곧바
로 일류 고수의 대열에 이를 수가 있었을 것이다.
어느 정도 무공을 연성하자 원성은 사부님에게 중원으로 돌아가
어머님의 원한을 갚겠다고 간청했다. 따라서 원앙도 낙빙은 중원
으로 가서 호비를 만나면 자신의 백마를 건네주라고 부탁을 한 것
이었다.
다만 원성은 조반산이 호비를 너무나 칭찬했기 때문에 젊은 혈
기에 마음 속으로 승복할 수 없는 심정이었다. 그리하여 도중에서
호비와 몇 차례 겨루는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두 사람은 서로 만나게 되자 서로의 재간을 높이 평가하고 아껴주
었으며, 두 사람은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내심 애정이 싹트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원성이 문득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따스
한 정에 얽혀 자기 스스로 헤어나오기가 힘든 상태였다. 그녀는
자기의 감정을 절제해야 했으며 호비와 자주 만나는 것을 피하며
암암리에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나중에 호비가 정영소를 사귀게 된 것을 보고 그녀는 서글픈 마
음이 없지 않았으나 자기를 위안할 계기가 되기도 했다. 어찌되었
든 자기는 방외지인(方外之人)으로 한평생 청등고불(靑燈古佛)을
벗삼아야 할 운명이었다. 그녀는 과거 사부님을 모실때 굳게 맹세
를 하고 사부님의 의발(衣鉢) 제자가 되었으며, 또한 사부의 은혜
가 깊고도 간곡하여 결코 저버릴 수 없게 된 형편이니 잘 된 일면
도 없지 않아 있다고 스스로를 자위하고 있었다.
게다가 정영소가 총명하고 지헤가 깊을 뿐만 아니라 호비에 대
해서 깊은 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 완연한듯 하여 그만한 사람이
호비의 짝이 되어 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
라서 그녀에게 옥봉황을 선물한 것이었지만 남모를 눈물을 얼마나
뿌렸는지 모른다.
사실 그녀의 가장 커다란 원수는 감림혜칠성 탕패였다. 그녀는
암암리에 탕패를 찔러 죽이거나 독을 쓰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
었다. 하지만 탕패가 한평생 거짓으로 의리가 깊고, 인정이 많은
사람처럼 행세해 오면서 그야말로 명예나 돈을 미끼로 사람들을
낚다시피 한 사람이니 천하의 호걸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위선의
가면을 벗기는 것이 차라리 일검으로 찔러 죽이는 것보다 통쾌하
다고 생각했다. 더우기 그녀는 그래야만이 차후에도 무림에서 그
러한 간악한 자들이 발붙일 곳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때마침 복강안이 천하장문인 대회를 개최하려고 사람들을 각처
로 보내 각문각파의 장문인들을 경사로 불러들여 모임을 가지려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원성은 복강안이 그 대회를 여는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첫째는 강호의 호걸들을 망라해서 공명과 재물로 꼬득여 홍화회의
군웅을 상대하도록 하여 그들이 백성들과 함께 항거하지 못하도록
하자는 것이었고, 둘째로는 각 문파를 이간질시켜 서로 다투도록
만들어 그들이 한덩어리가 되어 만주 청나라에 반항하지 못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그녀는 꼼꼼히 계획을 세우고 안배를 하여 장문인 대회 중에 먼
저 탕패의 참모습을 폭로하고 그를 죽여 어머님의 원수를 갚겠다
고 작정했다. 또한 대회 기간 중에 소란이 일어나 복강안의 간계
가 수포로 돌아간다면 비단 홍화회의 여러 백부님들과 숙부님들에
게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니, 평소 자신을 아끼며 가르쳐 준 은혜
에 보답하는 길이 될 뿐 아니라 천하 무림을 돕는 길이라고 생각
하고 있었다.
호북에 있는 탕패의 고향 집에는 탕패의 제자들이 적지 않았다.
더구나 집안에 머무르고 있는 왈패나 문객(門客)이 수십명이나 되
어 탕패의 집으로 잠복해 들어간다는 것은 수월한 노릇이 아닐 것
같았다. 그러나 일단 북경에 들어선다면 탕패가 머무는 곳이 기껏
해야 일류급 객점에 불과할 것이니 원성이 남장을 하고 객점을 드
나들게 된다면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리라.
게다가 그녀는 탕패가 몇 번 말하는 것을 훔쳐듣고 그가 부귀공
명을 탐한 나머지 그가 이 기회를 빌어 복강안에게 잘 뵈도록 처
신을 함으로써 급격한 출세를 해보겠다는 의도가 있다는 것을 알
고는 서찰을 위조하고 모자를 바꾸는 계책을 마련한 것이었다.
더불어 정영소가 옥룡배를 박살내도록 일을 꾸몄고, 호비가 심
연을 구하는 등의 일이 함께 어울어져 설사 소진(蘇秦)과 장의(張
儀 : 춘추전국시대의 세객으로 합종(合從)과 연횡책(連橫策)을 주
창하며 혀 하나로 세상을 풍미했던 역사적인 인물)의 언변이 있다
하더라도 변명을 하지 못하게 된 셈이었다.
그런데 원래 그녀는 봉천남까지도 그 함정에 몰아넣으려고 했
다. 그러나 부녀간의 천륜이라고 할까, 비록 봉천남이 못된 짓을
일삼았고 자기 자신에 대해 애비의 도리나 정을 보여준 것은 없었
지만 부녀지간의 혈육의 정에 얽매여 작정하고 있던 계책을 끝내
입밖으로 내뱉지 못한 것이었다.
병이 다급해지면 약을 가리지 않고,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
라도 잡으려 한다는 말이 있듯이 이때 탕패는 자기의 입장이 극히
불리한 상태인지라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봉천남, 당신이 한번 말해 보시오. 이 비구니가 당신 딸이 아
니란 말이오 ?]
봉천남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자 탕패는 큰 소리
로 말했다.
[복대수, 그들 두 부녀가 나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모함을 하는
것이외다.]
봉천남은 노해서 말했다.
[내가 어째서 당신을 해친단 말이오?]
탕패는 냉랭히 외쳤다.
[단지 내가 당신 아내되는 사람을 핍박하여 죽게 만들었기 때문
이지.]
봉천남은 어이가 없는듯 말했다.
[허허허! 당신이 죽게 만든 그 여자를 누가 내 아내라고 말을
합디까? 이 봉모의 손에 들어왔다가 그냥 버린 여자를......]
그는 거기까지 말을 하다가 원성의 싸늘한 눈초리를 대하자 자
기도 모르게 전율을 느끼며 말을 잇지 못했다.
탕패는 사태가 절박한지라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좋소.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이상 나로서도 더 속일 필요가
없겠군. 그 무영은침은 당신이 쏜 것이오? 내가 쏜 것이오? 당신
이 만약 쏠 수가 있다면 어디 시험삼아 쏘아보시지!]
그러자 군호들은 다시 술렁이며 소란스러워졌다.
호비는 등 뒤에 은침을 맞고 정신을 차린 후 그 은침은 결코 봉
천남이 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 당시 그는 칼로
숙동곤을 잘라버렸고,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었다. 그는 원성이 들
어오자 정신이 오락가락해지는 바람에 등에 은침을 맞은 것인데
그것은 틀림없이 등 뒤에 있는 사람이 암산을 한 것이라고 판단하
였다.
그는 탕패가 처음 봉천남이 나섰을 때 언쟁을 벌이고 봉천남에
게 암기를 써서 사람을 해치는 것은 호걸다운 행동이 아니라는 말
을 하였기 때문에 시종 탕패를 의심하지 못하고, 해란필의 소행이
아니면 초라한 행색을 한 무당파의 무청자가 수작을 부린 것이라
고 짐작하고 있었다.
누가 감히 탕패와 봉천남 두 사람이 짜고 그러한 연극을 꾸몄으
리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원래 봉천남은 불산진에서 북으로 도망을 친 후에 호북을 지나
치면서 탕패의 집에서 며칠 머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우연히 두
하인이 광동의 불산진의 풍토와 인정에 관해 이야기하는것을 보고
호기심이 일어 그 두 하인에게 은자를 몇 냥 쥐어주며 자세히 그
연유를 물은 결과 은고의 일을 알아낸 것이었다.
봉천남은 눈앞에서 사라진 구름이나 연기처럼 일이 끝난 이후에
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만큼 한번 웃고 말았으며, 탕패에게도 그
일을 들먹이지 않았다.
그는 북경으로 올라오면서 호비의 비위를 맞추려고 의당진(義堂
鎭)의 저택과 전답을 사서 주려고 했던 것이고, 또한 북경으로 올
라와서는 주철초를 내세워 화해를 시도한 것이었다.
그러나 호비의 의협심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비록 아무 관계가
없는 종아사와 그 가족을 몰살한 봉천남을 끝까지 내버려두지 않
았다.
봉천남은 속으로 생각해 보고 호비를 제거하지 않는다면 밥한끼
제대로 먹을 수 없고, 편히 잘수도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즉시 탕
패를 찾아가 상의를 한 것이었다. 그는 탕패가 협조를 하지 않을
까봐 일부러 탕패에게 겁을 주기 위해 호비가 틀림없이 장문인 대
회에 나타나 훼방을 놓을 것이라고 말했다.
탕패는 처음에 자기가 끼어드는 것을 꺼려하였다. 그러나 봉천
남은 은고의 일을 들먹이며 만약 도와주지 않는다면 그 일을 폭로
할 지도 모른다고 은근히 압력을 넣었으며, 만약 호비를 제거해
주기만 한다면 자신이 불산진으로 돌아가 다시 사업을 정리하여
매년 일 만 냥의 은자를 주겠다고 약속을 한 것이었다.
탕패는 교분을 트고 있는 친구들이 많았기 때문에 지출이 엄청
났다. 그는 인정 많고 의리가 깊은 사람이라는 명성을 얻으려는
만큼 봉천남처럼 도박장을 열거나 다른 사람의 원한을 사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는 남의 가업을 가로챈다든지 억지로 물건을 빼앗
는 일은 할 수가 없는 처지였다.
그런데 봉천남이 매년 일만 냥의 은자를 주겠다는 말을 듣자 귀
가 솔깃하였으며, 더우기 은고의 일로 은근히 협박을 했기때문에
그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돕겠다고 약속을 한 것이었다.
탕패는 술수에 능한 사람이라 신발바닥에 교묘하게 은침을 쏘아
내는 암기를 장치하였다. 그는 길을 걸을 때에도 발뒤꿈치가 땅에
닿지 않도록 조심하며 걸어다녔다. 발뒤꿈치가 땅에 닿으면 발끝
에서 은침이 쏘아져 나왔으므로 그야말로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
었고, 종적도 살펴볼 수가 없어 사람들이 실로 헤아리기가 어려웠
다.
그는 봉천남을 도와줄 바에는 아예 옥룡배를 차지하도록 도와주
어, 그가 위세를 떨칠 수 있도록 한다면 자신에게 들어오는 은자
는 더욱 확실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매번 봉천남이 겨룰 때 암암리에 은침을 쏘아내어
번번이 이기도록 만들었다. 그의 수법은 사람들의 의표를 찌른 것
이라 모든 사람들이 아무리 봉천남을 주시해도 알아낼 수 없는 것
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그런데 뜻밖의 변고가 발생한 것이었다. 느닷없이 요망한 비구
니가 와서 한 마디의 말로 탕패를 올가미에 옭아넣어 꼼짝 못하도
록 만들었다.
다급한 와중에 탕패는 그녀가 봉천남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 일을 들먹인 것이었다.
그는 약한 여자를 핍박하여 죽게 만든 죄와 홍화회와 결탁하여
반란을 도모했다는 죄명을 비교해 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야심은
이미 좌절된 것이라고 판단하고, 두 가지 죄악을 가늠하여 가벼운
죄 쪽을 택하여 즉시 봉천남 부녀에 대해 반격을 한 것이었다. 소
인배의 행동으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선택이었다.
봉천남은 탕패의 말을 듣자 그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큰소리로
외쳤다.
[나는 당신이 홍화회와 결탁해서 발칙한 의도를 가지고 간계를
짜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소. 당신이 몰래 은침을 쏘아 암암리
에 나를 도와준 것은 호의를 베풀어 내가 복대수에게 그 사실을
폭로하지 않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겠소? 허허허! 그러나 이 봉천
남은 뜨거운 피로소 충성을 맹세하고, 오로지 나라를 지키는데 한
목숨 바치기로 결심을 한 사람인데 어찌 당신과 같은 간악한 도적
에게 매수를 당할 수가 있겠소?]
탕패는 그가 도리어 자기를 물고 늘어지는 것을 보고 가면 갈수
록 더욱 심한 말을 늘어놓을 것이라는 생각에 노기가 끓어 올랐
다. 순간 그는 발뒤꿈치률 밟아 네 대의 은침을 쏘아내었고, 그
은침은 모두 봉천남의 피둥피둥한 뱃가죽에 꽃히게 되었다.
봉천남은 배를 얼싸안고 쿵! 하니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원성이 급히 달려가 부축을 하며 부르짖었다.
[아버님...... 아버님, 어떻게 된 거예요?]
왕검영과 주철초는 탕패가 흉악한 짓을 또 다시 하는 것을 보자
일제히 달려들어 그를 붙잡았다. 탕패는 반항할 생각을 하지 못하
고 그저 부르짖기만 하였다.
[억울하오. 억울해! 업보로군! 업보야!]
그는 복강안이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것
을 알았다. 더군다나 확고한 증거가 있으니 애써 변명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그는 내심 자신이 한평생 고약한 일을 많이 저
질렀으니 그것에 보응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원성은 봉천남을 부축해 일으켰으나 그는 이미 숨이 끊어진 상
태였다.
대청 안은 대뜸 아수라장이 되었다.
복강안은 속으로 생각했다.
(틀림없이 이 탕패와 공모한 사람이 또 있을 것이다. 저 비구니
도 십중팔구 그 편지 안에 쓰여져 있는 내용을 알고 있을 것이다.
비록 간악한 계책이 그녀에 의해 폭로되었지만 결코 살려두어 이
소문이 세상에 퍼지도록 할 수는 없다.)
이윽고 그는 나직이 안 제독에게 말했다.
[대청 문을 닫고 아무도 나가지 못하게 하시오. 모두 잡아들여
심문을 하도록 하시오.]
호비는 형세가 불리한 것을 느끼고 원성에게 달려가 나직이 말
했다.
[빨리 갑시다. 조금만 지체한다면 이곳에서 빠져나가기가 어렵
겠소.]
원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두 사람은 정영소 옆으로 다가
갔다.
순간 원성은 탁자에 앉아 있던 채위의 허리를 움켜잡고, 이어
그의 어깨와 등에 있는 대혈을 잇 따라 두 손으로 짚었다. 채위는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희효봉은 어리둥절하여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했다.
[당신......]
원성은 쓰러진 채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호 오라버니, 이 자가 비밀을 누설하고, 암암리에 복강안에게
두 아이들을 되돌려 보낸 사람이예요.]
호비는 아! 하고 탄성을 내지르더니 노해 말했다.
[이 자가 이토록 고약하다니......]
그리고는 발을 들어 채위의 등짝을 냅다 내리찍었다. 이 발길질
에 채위는 생명을 빼앗긴 것은 아니었지만 근맥이 손상되어 이미
폐인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혼란 중이라 다른 사람들이 두 사람이
채위를 상대한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호비는 희효봉에게 말했다.
[희형, 빰리 가시오. 여러모로 고마웠소. 우리 다시 만날 수 있
기를 바라오.]
희효봉은 정세가 다급한지라 포권을 하고 서둘러 문을 나섰다.
이때 안 제독이 부르짖었다.
[여러분들은 각기 제자리에 돌아가서 앉아 주시고 조용히 하십
시오!]
정영소는 담배통에 담배를 넣고 연기를 몇 모금 뿜어내면서 대
청을 오락가락하며 발꿈치를 들고 구경을 하는 시늉을 하고 있었
다.
갑자기 누군가 부르짖었다.
[아이고, 배야!]
그 소리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서 소리쳤다.
[아이고, 배야! 아이쿠! 배야!]
정영소는 원성과 호비 곁으로 다가와 눈짓을 하고는 배를 얼싸
안으며 부르짖었다.
[아이구, 배야! 아이쿠, 못참겠네! 아무래도 독에 중독된 모양
이구나!]
독수약왕이라고 자처하던 석만진도 배에 통증을 느끼는지 즉시
품안에서 약초를 한무더기 꺼내 불을 붙였다.
정영소는 그가 해독을 하려는 것임을 미리 짐작하고 소리 높여
부르짖었다.
[독수약왕이 독을 뿜어내고 있다!]
호비도 덩달아 부르짖었다.
[빨리 그를 잡으시오! 독수약왕이 복대수를 독살하려 하오!]
대청은 이미 난장판이 된지라 어디서 터져나오는 소리인지 알
수 없었지만 모두들 독수약왕의 위명을 익히 들은지라 모두들 그
가 손을 쓰는 것은 모두 독이라고 인정하고 있었다. 더우기 태사
의에 앉아있는 자칭 독수약왕이라는 자가 약초에 불을 붙여 허연
연기를 피워올리는 것을 보자 틀림었이 맹렬한 독연기라고 지레
짐작을 하고 모두들 재빨리 그의 곁에서 물러섰다.
순간 쉬시식! 하는 소리가 대청 안에 울려퍼지며 사면팔방에서
암기가 석만진에게 쏘아져갔다.
과연 석만진의 무공은 대단하였다. 그는 순식간에 뭇 사람들의
과녁이 되는 위기에 처했으면서도 침착하게 몸을 웅크리고 탁자를
세워 자기의 몸을 보호했다. 그러자 우박이 쏟아지듯 타다다닥!
타다다닥! 하는 소리가 일며 탁자에는 암기가 고슴도치 가시처럼
박히게 되었다.
일단 숨을 돌린 그는 탁자 안에서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누군가 차와 술에 독을 쓴 것인데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
오.]
이번 장문인 대회에 참가한 강호의 호걸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
람들이 이번 대회를 빌미로 복강안이 암암리에 음모와 독계를 펼
쳐 무림의 고수들을 일망타진 하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우
려하는 마음도 없지 않아 있었다.
무릇 선비는 문장으로 법을 어지럽히고(儒以文亂法), 협객은 무
공으로 금기를 범한다(俠以武犯禁)라는 말이 있듯이 역대에 걸쳐
시대가 바뀌면 황제나 대신들은 전 시대의 문무 재사를 자기 편으
로 끌어들이지 못하면 혹독한 탄압을 가해 모조리 멸문시켜, 화근
을 미리 뽑아버리는 법이었다.
이때 석만진이 누군가 술과 차에 독약을 넣었다는 말을 외치자
사람들은 하나같이 간담이 서늘해지며 가슴이 쿵쿵 뛰는 것을 금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복강안을 위시한 뭇 위사들도 사실 배가
매우 아픈 상태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대청은 더욱 어지러워졌으며 많은 사람들은 서로 나직이 부르짖
고 있었다.
[빨리 갑시다. 빨리 가! 복대수께서 우리를 독살하려 하고 있
소.]
[목숨을 구하고자 한다면 일단 도망치는 길밖에 없소!]
[빨리 처소로 돌아가 해약을 먹읍시다!]
사실 정영소가 담뱃대에 약초를 섞어 독연기를 뿜어낸 것이라
대청에 있던 사람들은 모조리 독연기를 들이마신 셈이었다.
그러나 이 독연기는 머리가 어지럽고 배가 찢어질듯 아프기만
할 뿐 목숨을 빼앗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 반 시진 정도만 지나면
해약을 쓰지 않아도 저절로 낫게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극심한 고통에 사람들은 석만진이 독을 쓴 것이라고 단
정을 하고 있었다. 군호들은 그가 외치는 소리를 듣고 복대수가
자신들을 불러모아 일거에 해치려고 한다는 생각을 떠올리자 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정영소는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호비와 원성이 빠져나갈 수 있
도록 계책을 세운 것이었다.
이때 군호들은 다투어 문을 박차고 나가기 시작했지만 원성은
여전히 탕패와 격렬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탕패 역시 혼란의 와중에 위사들을 밀치고 도망치려고 했는데
뜻밖에도 원성에게 저지를 당한 것이었다. 탕패의 위인됨은 간악
하기 이를데 없었으나 무공은 지극히 뛰어났다. 더우기 그는 원성
이 음모을 꾸며 자기를 모함한 사실에 울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
던 터라 검을 휘두르며 날카롭게 요해를 공격해 왔다.
원성은 왼손에는 운추를 들고 오른손으로 연편을 휘둘렀다.
그녀는 어머니의 원수를 때려죽일 작정을 하고 있던 터였다.
무공으로 따져볼 때 원성은 편법이 정묘했으며, 탕패는 웅후한
내력을 가지고 있어 일이 백 초안으로는 승부를 내기가 어려웠다.
만약 오랫동안 싸운다면 내력이 웅후한 탕패가 우세를 차지하겠지
만 그 역시 독연기를 들이마시고 머리와 배가 고통스러웠으며, 더
우기 독에 중독된 상태에서 내력을 소모하면 독성이 빨리 퍼질 것
이고, 또한 뭇 위사들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기 때문에 신중을 기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실 사람들이 독연기를 마시고 일시에 혼란에 빠졌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벌써 요절이 났을 것이다.
탕패는 원성의 편법이 정묘한 것을 보고 일시에 그녀를 죽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초조한 마음으로 빠져나갈 궁리만 하고 있
었다.
하지만 원성이 어찌 그를 내버려두겠는가? 그녀는 해약을 먹었
으므로 독은 두렵지 않았으나 탕패의 발에 장치한 무영은침은 꺼
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그녀는 이를 방비하기 위해 운추에
자력이 강한 커다란 자석을 매달아 놓았지만 은침이 종적도 없이
쏘아져 나왔으므로 가까이 다가설 수가 없었다.
그녀는 멀찌감치에서 연편을 휘둘러 그를 공격할 수 밖에 없었
다.
이때 왕검영과 주철초 등은 복강안을 호위하고 후당(後堂)으로
물러났다. 복강안은 저택의 문을 닫아 결코 아무도 나가지 못하도
록 명을 내렸다. 그리고는 급히 태의(太醫)를 불러 해약을 복용했
다.
군호들은 복강안 부중의 위사들이 문을 닫아 거는 것을 보자 복
강안이 자신들을 해치려고 한다는 것을 더 확신하게 되었다. 이제
는 생사의 갈림길에 선 셈인지라 군호들은 앞뒤를 가릴 여유가 없
었다.
설사 윗사람을 범하고 난을 일으켰다는 죄를 뒤집어 쓴다 하더
라도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지라 벌떼처럼 몰려나가려고 했다.
뭇 위사들은 무기를 들고 막았지만 군호들은 반격을 하며 오로
지 대문 쪽으로만 달려 들었다. 대청에서 대문까지 거쳐야 하는
세 곳의 문에서는 우지끈 뚝! 하는 소리가 일며 격렬한 싸움이 벌
어지고 있었다.
이 대회에는 청고(淸高)한 무림의 일류 고수는 참가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모두들 나름대로 각문각파에서 재간이 있다고 평가받는
사람들이라 평범한 무공은 아니었으며, 더군다나 살아야겠다는 일
념으로 서로 합심협력하게 되자 뭇 위사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안 제독은 아랫배를 움켜쥔 채 대지선사, 무청자, 전귀농 등 일
천한 고수들에게 말했다.
[간악한 자들이 대회장에서 소란을 일으키고 있지만 여러분은
아무쪼록 품위를 지켜주시구려. 복대수깨서는 인재를 아끼시기 때
문에 여러분들을 모신데 대해 여간 만족하고 있을 뿐만아니라 예
로서 여러 분들을 대하고 있소이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의심을 해
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해란필이 입을 열었다.
[저 탕가가 이번 일의 원흉이라 할 수 있으니 그를 먼저 잡은
후에 다시 이야기를 합시다. 그리고는 쨍그랑! 하며 몸에서 흑룡
쌍장(黑龍雙杖)을 펼치더니 대청으로 나아가 탕패를 공격했다.
호비는 원성이 오랫동안 겨루고도 이기지 못하는 것을 보고 복
강안 부중에서 일각이라도 더 지체한다면 그만큼 더 위험해 질 것
이 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상처를 돌보지 않고
칼을 뽑아들고 협공을 했다.
탕패가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나의 은침을 받아라!]
호비, 원성, 해란필 세 사람은 모두 깜짝 놀라 일순 흠칫하며
정신을 가다듬고 경계했다.
탕패는 벼락같이 솟구치며 손을 발밑으로 가져가는 척 하더니
창을 박차고 달려나갔다. 원성과 호비도 일제히 몸을 날리며 뒤쫓
았다. 순간 은빛 광채가 번득이며 한 무더기의 은침이 격사(激射)
되는 것이 아닌가?
호비는 몸을 뒤로 날려 공중에서 선회를 하며 피했고, 원성은
운추를 휘둘러 은침을 막았다. 이렇게 멈칫하는 찰라에 탕패는 어
디로 도망쳤는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순간 지붕위에서 어이
쿠! 어쿠! 하는 소리가 일며 세 명의 위사들이 아래로 떨어졌다.
탕패를 저지하려다가 그의 일검에 찔려 상처를 입은 모양이었다.
이때 정영소가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복대수를 독살한 흉수를 당신들은 어째서 잡지를 않죠?]
뭇 위사들은 깜짝 놀라 물었다.
[아니, 복대수께서 독살을 당하셨단 말이오!]
정영소는 원성과 호비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나직이 말했다.
[빨리 가요!]
세 사람은 바람을 가르듯 대청문 쪽으로 달려갔다. 문을 나서는
순간 호비와 원성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사람들에게 짓밟
혀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봉천남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호비는 순간 생각했다.
(너는 한평생 못된 짓을 일삼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벌을 받게
된 것이다.)
원성의 심기는 매우 복잡하고 어지러웠다.
[당신은 불쌍한 우리 어머니를 한 순간의 쾌락을 위해 해쳤어
요. 하지만 당신은...... 당신은 나의 친아버지임에는 틀림없어
요......]
사람이 대문을 나서려고 하자 몇 명의 위사들이 막았다. 순간
원성이 연편을 휘둘러 한 사람을 낚아챘으며, 호비는 칼을 휘둘러
한 사람을 베고, 장력을 내쏟아 다른 한 사람을 거꾸러뜨리는 동
시에 공중으로 솟구치며 오른발을 뒤로 걷어차 다른 한 명을 나뒹
굴게 만들었다.
날은 이미 밝아왔고, 바깥에서 구원병들이 속속 들이닥치고 있
었다.
세 사람은 조그만 골목길로 몸을 피했다.
호비는 넌즈시 물었다.
[마소저는 사랑하는 두 아이들을 잃고 어찌 되었는지 모르겠구
려.]
원성이 말했다.
[그 채가라는 늙은이가 어린애를 복강안에게 보내는 것을 내가
중도에서 막기는 했지만 역부족이라 마소저만 구해낼 수 밖에 없
었어요.]
호비는 고개를 숙여 보였다.
[불행 중 다행이었구려. 정말 고맙소!]
원성은 설명하듯 말했다.
[나는 마소저를 성 서쪽에 있는 폐찰에 모셔놓았어요. 그래서
늦게 대회장에 도착한 거예요.]
호비는 잠시 생각해 보고는 입을 열었다.
[그 채가가 어떻게 마소저의 신분을 알았는지 모르겠구려. 혹
우리가 빈틈을 드러낸 것이 아닐런지......]
정영소가 그 말을 받았다.
[틀림없이 그가 몰래 마소저에게 넌즈시 물어보았을 거예요. 마
소저는 정신이 오락가락하니 이야기를 했겠죠.]
호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필시 그랬을 것이오. 헌데 복강안이 대회에서 나를 잡으라고
명을 내리지 않은 것도 이상하구려.]
원성이 그 말을 받았다.
[만약 정 누이가 계책을 펼치지 않았다면 그대는 무사히 대문을
나서지 못했을 거예요.]
호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리는 오늘밤 복강안의 대회를 마구 어지럽히고 사람들을 모
두 쫓아보내 복강안의 계획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들기는 했지만
애석하게도 탕패를 놓치고 말았으니......]
그리고는 고개를 돌리고 원성에게 말었다.
[그 악적은 패가망신한 셈이고, 소저...... 그대의 커다란 원한
은 이미 반은 갚은 셈이오. 그리고 우리가 합심협력하여 탕패를
찾아낸다면 그는 우리의 손을 벗어날 수가 없을 것이오.]
원성은 침울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 자신은
출가한 사람이고 지금은 신분을 드러낸 셈인데 어찌 오랜세월 동
안 당신과 함께 행동할 수 있겠느냐고 생각하고 있었다.
정영소가 넌즈시 말했다.
[곧이어 성문이 닫혀지고 검문검색을 할지도 모르니 빨리 성문
을 빠져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세 사람은 즉시 머물던 저택으로 돌아가 자신의 물건을 챙기고
낙빙이 선물한 백마를 끌고 왔다.
정영소는 호비에게 웃으며 말했다.
[호 나으리, 당신이 노름판에서 딴 커다란 저택은 별 수 없이
주대인에게 되돌려 주어야겠군요.]
호비는 웃으며 말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적지않은 도움을 주었으니 그가 벼슬이 오른
이후에 한 밑천 잡도록 해 줍시다.]
그는 억지로 우스개 소리를 하고 있었지만 시종 원성과 시선이
마주치는 것을 피하고 있었다. 세 사람은 곧 추적하는 군사들이
도달하리라는 것을 알고 서둘러 성문 쪽으로 나아갔다. 다행히 아
직까지 성문을 닫으라는 명령을 받지 않은 상태였다.
중문을 나서자 원성이 앞장서서 마춘화가 있는 황량한 절간으로
안내했다.
이 절은 대로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기왓장이 여기저기 떨
어져 있었으며 담이 무너져 내린 것이 매우 황량해 보였다.
대전에 모셔진 신상(神像)은 푸른색 얼굴에 머리는 움푹 꺼져
있었다. 그리고 허리에는 나뭇잎을 두르고, 풀을 한묶음 들고 씹
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 신상은 온갖 풀을 맛보았다는
신농씨(神農氏)인 것 같았다.
원성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정 누이, 그대의 옛집에 온 셈이예요. 이곳은 약왕묘(藥王廟)
예요.]
세 사람은 상방(廂房)으로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마춘화는 볏
짚이 깔려 있는 허름한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겨우 한가
닥 숨만 붙어 있는 상태라 세 사람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끊임없이
부르짖고 있었다.
[우리 아가들은 어떻게 되었지?]
정영소는 그녀의 맥을 짚어보고, 눈꺼풀을 뒤집고 살펴보았다.
이윽고 세 사람은 살그머니 물러나 대전으로 돌아왔다.
정영소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녀는 살지 못할 것 같아요. 그녀는 상처를 입은 상태에서 심
기가 상했고, 게다가 아이들을 잃어버린 충격으로 하루를 넘기지
못할 것 같아요. 설사 우리 사부님이 살아 있다 하더라도 구할 수
가 없을 것 같아요.]
호비는 마춘화의 증세를 보고 정영소가 말하지 않더라도 그녀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었다. 상가보에서 그
녀가 자기를 안타까워 하던 옛정을 생각하자 자신도 모르게 주르
르 눈물을 홀렸다. 그는 복강안 부중에서 비구니 원성으로 변한
원자의와 재회를 하자 울적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는데, 한 번
눈물을 홀리기 시작하자 그 감정이 복받쳐 올라 더 참을 수가 없
어 소리내어 울었다.
정영소와 원성은 어찌해서 그가 그토록 슬피우는지 이해하지 못
했다. 정영소가 나직이 말했다.
정영소는 상방으로 들어갔으며 대전에는 두 사람만 남게 되었
다.
[제가 다시 가서 마소저를 살펴보고 오겠어요.]
원성은 호비가 소리내어 우는 모습을 보자 자신도 눈시울이 붉
어졌다. 그녀는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호 오라버니, 그대가 나에게 베풀었던 일편...... 일편......]
거기까지 말을 하더니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말을 잇지 못
했다.
호비는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을 들고 입을 열었다.
[그대는...... 그대는 어렵겠지요...... 환속할 수 없겠소? 그
대의 원한을 갚아주면 더이상 비구니가 될 필요는 없지 않겠소?]
원성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와 같이 우리 부처님을 모독하는 말은 절대로 하지 말아요.
과거 저는 사부님께 맹세를 하고 부처님께 귀의한 거예요. 이미
공문(空門)에 몸 담은 사람이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것은 계율을 어
기는 것이나 다름없어요. 그런데....... 그런데 더군다나......]
그러면서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은 멍하니 잠시 동안 마주보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수천 수만 마디의 말을 하고 싶었으나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
해야 할 지 몰랐다.
잠시의 정적이 흐른 후 원성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정소저는 사람이 매우 좋군요. 그대는 그녀에게 잘 대해 주도
록 하세요. 그리고 앞으로는 나를 생각하지 마세요. 이 몸 역시
그대를 다시는 떠올리지 않을 거예요.]
호비는 칼로 에는 듯한 아픔을 느끼며 말했다.
[아니오. 나는 영원히 그대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오.]
원성은 차분한 어조로 그 말을 받았다.
[부질없이 자신을 괴롭힌다고 해서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그리고는 입술을 깨물고 몸을 돌려 대전 문을 나섰다. 호비는
그녀를 쫓아가며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대...... 그대는 어디로 가는거요?]
원성은 말했다.
[그대가 나를 상관할 필요가 어디 있어요? 이후에는 일 년 전처
럼 당신은 내가 세상에 있다는 것을 모르고, 나 역시 이 세상에
당신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고 생각하세요. 그럼 홀가분하지 않겠
어요?]
호비는 어리둥절해서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녀는 표연
히 약왕묘를 나서며 한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호비는 휘청거리며 약왕묘 문 옆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 쓰러지
듯 털썩 주저앉아 원성이 작은 점이 되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
라보았다.
이제는 오로지 황량한 초원에 길게 드리워져 있는 황톳길에 자
그마한 그녀의 발자국만이 덩그라니 남아 있었다.
그의 마음은 텅빈 듯 했으며, 마치 수백 수천 가지의 일이 떠오
르는 것 같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는 것 같
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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