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오강호 3-2

3학년2반 | 2022.03.13 06:57:06 댓글: 0 조회: 219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55527


세째날 저녁, 그는 마침 방에서 눈을 감고 진기를 운행하고 있는데 갑자기 소사제인 서기(舒奇)가 문 앞에서 작은 소리로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둘째 사형, 사부님이 오늘 물어보셨읍니다. 대사형에게 무슨 꿍궁이가 있느냐고요?]

노덕약은 쉬하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소리내지 마라. 대사형이 듣는다. 어서 나가라.]

이 두마디 말을 듣자 영호충은 가슴이 서늘해져 왔다. 자기 사부가 의심을 품고 노덕약을 자기의 옆에 붙여 암암리에 감시하도록 한 것이 아닌가? 서기가 숨을 죽이며 사라지자 노덕약은 그가 자기의 말을 들었는지 알아보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영호충은 내심 대노하여 금방이라도 몸을 일으켜 시비를 가리고 싶었으나 생각을 바꾸었다.

(이 일이 그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는 사부님의 명을 받들 뿐이다. 어찌 그가 사부님의 명을 받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는 억지로 노기를 참으며 잠을 자는 척했다. 노덕약은 가벼운 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영호충은 그가 자기의 동정을 사부에게 보고하러 갔다는 사실을 알고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오기가 치밀어 올랐다.

(난 추호도 의심을 받거나 미안한 짓을 한 적이 없다. 너희들 백명 천명이 아침저녁으로 감시해도 영호충은 하나도 두렵지 않다!)

뜨거운 피가 끓어올라 참을 수가 없었다. 자리에 엎드려 크게 한참동안 숨을 내쉬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이 가라앉았다. 몸을 일으키고 신발과 옷을 찾아 입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사부님이 나를 제자로 여기지도 않고 마치 도적을 방비하고 있는 것처럼 감시하고 있으니 내가 화산파에 남아 있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떠나니만 못하다. 먼 장래에 사부님이 나를 이해하든 못하든 간에 그분이 알아서 할 일이다.)

바로 이때 창 밖에서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엎드려! 움지이지 말아라.]

또 한 사람이 소근거렸다.

[대사형이 밖으로 나오는 모양이다.]

이 두 사람의 말소리는 극히 낮았으나 이때는 한반중이고 인적이 끊겨 영호충은 그들의 말을 분명하게 알아 들을 수 있었다. 두 명의 젊은 사제가 문 앞에 몸을 숨기고 자기가 도망가는가를 엿보고 있었다. 영호충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주먹을 힘껏 움켜쥐었다.

(만약 내가 지금 가버린다면 오히려 도둑이 제 발저리다고 수근거릴 것이 아닌가? 좋다. 내 죽어도 가지 않겠다. 다만 두고 보겠다. 너희들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갑자기 그는 큰 소리로 외쳤다.

[이봐라! 술을 가져와라? 술을 가져와?]

한참 부르자 사환이 비로소 술을 가져왔다. 영호충은 술을 한참 들이키고는 인사불성이 되었다.
다음날 아침 노덕약의 부축을 받고 수레에 올랐다. 그는 마차 위에서도 여전히 큰 소리로 외쳤다.

[술을 가져와라! 나는 술을 먹어야겠다!]

며칠 후 화산파의 모든 사람들은 낙양에 도착하여 어느 큰 주점에 투숙했다. 임평지는 혼자 외조부님의 집에 갔고 악불군 등 모든 사람들은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었다.
영호충은 약왕묘 밖에서 혈투를 했을 때 입었던 흙탕물이 범벅이 된 장삼을 아직도 바꿔 입지 않고 있었다. 이날도 역시 술에 취해 정신이 오락가락 했다. 악영산이 장포(長袍) 한 벌을 가지고 그에게 걸어 왔다.

[대사형, 이 옷으로 바꿔 입으세요.]

영호충은 말했다.

[사부님의 장포를 왜 나보고 입으라고 하지?]

악영산은 말했다.

[잠시 후에 우리는 임 사형 집에 갈 것이예요. 당신은 아버님의 옷으로 바꿔 입지 않으면 안 돼요.]

영호충은 말했다.

[그의 집에 가는데 왜 예쁜 옷을 입어야 되지?]

말을 하면서 그녀의 위 아래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비취색이 나는 비단 저고리에 아래는 옅은 녹색의 치마를 입고 있었다. 얼굴에는 약간 분을 칠하고 머리는 깨끗하게 빛어올린 후 한 송이 꽃을 꽂고 있었다. 영호충이 기억하기론 그녀는 설날 때나 이렇게 치장을 했었다. 영호충의 마음은 더욱 어지러워졌다. 몇마디 비양거리는 소리를 하고 싶었으나 생각을 바꾸었다.

[사내 대장부가 이렇게 마음이 좁아서야 쓰겠는가?)

그는 참고 말하지 않았다. 악영산은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나자 불안했다.

[당신이 싫다면 바꿔 입을 필요가 없어요.]

영호충은 말했다.

[나는 새옷을 입기 싫어해. 나는 바꿔 입고 싶지가 않군!]
악영산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장포를 가지고 문을 나섰다.
문 밖에서 늙수구레한 음성이 들려온 것은 바로 이때였다.

[악 장문인께서 멀리서 왕림해 주셨는데 나가 영접하지 못했읍니다. 정말 실례가 많았읍니다.]

악불군은 금도무적 왕원패(王元覇)가 친히 손님을 맞으러 주점에 왔음을 알고 부인을 쳐다보며 웃었다. 심히 기뻐하면서 두 부부가 나왔다. 왕원패는 칠십세 정도였다. 얼굴에는 홍조를 띄우고 턱 밑에는 한 다발의 길고 하얀 수염이 탐스럽게 가슴을 덮고 있었다. 전신은 불덩이처럼 활기에 넘치고 있었으며 좌측 바닥 위에 거위알 크기만한 금담(金膽)을 굴리고 있었다. 무림의 사람들 가운데 철담(鐵膽)을 가지고 노는 사람은 많았지만 모두들 빈철(?鐵) 또는 강철로 만든 것이었는데, 왕원패의 손에 있는 두개의 금담의 노란색을 발하고 있는 것이 철담으로 만든 것보다 몇배는 무거워 보였다. 분명 황금으로 만든 것 같았다. 그는 악불군을 보자 껄껄 웃으며 말했다.

[만나뵈서 반갑소이다. 만나뵈서 반갑소이다. 악 장문인의 명성은 무림에 자자하오. 이 몸은 이십 년 동안 항상 그리워했다오.
오늘에야 이 낙양에 오시니 정말 중주(中州)지방의 큰 경사입니다.]

말을 하면서 악불군의 오른손을 꼭 잡고 연신 흔들어댔다. 정말 크게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악불군은 웃으며 말했다.

[우리 부부가 아이들을 데리고 친구를 찾아 유람을 다니는 것은 견문을 넓히려는 것이었읍니다. 특히 이 지방을 찾아온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중주대협 금도무적 왕노야를 방문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십여 명의 불청객을 물리치지 말아 주시면 고맙겠읍니다. 하하하~]

왕원패도 큰 소리로 따라 웃었다.

[금도무적이라는 네 글자를 어찌 악 장문인 앞에서 꺼낼 수가 있겠읍니까? 그야말로 공자 앞에서 문자를 쓰는게 아니겠소? 군자검 악 선생 앞에서 금도무적을 거론하는 자가 있다면 나를 부추기는 것이 아니고 이 왕원패의 이름을 손상시키는 것이 됩니다. 악 선생, 당신이 내 외손자를 제자로 거두어주시니 그 은혜는 바다보다 깊다고 하겠소. 화산파와 금도문(金刀門)은 오늘부터 한 집안이외다. 형제끼리니 피차를 논하지 맙시다. 자자자, 모두들 우리집으로 갑시다. 설령 일년, 반년은 살지 못한다 해도 실컷 놀다가 가시구료! 악 장문인! 이 노인네가 친히 당신의 짐을 들어 드리겠소.]

악불군은급히 말했다.

[그건 천부당 만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왕원패는 고개를 돌려 뒤에 있던 두 아들을 불렀다.

[백분(伯奮), 중강(仲强), 빨리 악 사숙과 악 사모님께 인사를 올려라.]

왕백분과 왕중강은 똑같이 대답을 하고 무릎을 끓고 절을 했다.
악불군 부부도 급히 무릎을 끓고 반례했다.

[우리들은 똑같은 배분이 아니겠소? '사숙' 이라는 두 글자는 천부당 만부당하오. 고개를 숙일 필요조차 없읍니다. 제 얼굴이 뜨거워지는구료!]

왕백분 왕중강 두 사람은 악예(鄂豫) 지방에서는 명성이 자자했다. 악불군에 대해서 평소 흠모하고는 있었지만 그에게 고개를 숙여 절을 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단지 아버님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어 억지로 무릎을 끓었던 것인데 악불군 부부가 똑같이 무릎을 끓어 반례리 예로 답하니 마음이 기쁘기 그지없었다. 두 사람의 절을 하고 일어났다. 악불군이 두 사람을 바라보니 형제는 키가 컸다. 특히 왕중강은 허리가 무척 굵었다. 두 사람의 태양혈은 높게 부풀어 올라왔고 손의 근골(?骨)이 툭툭 불거져 나와 있었다.
그들의 내공이 심히 깊다는 것을 나타내 주는 증거였다.
악불군은 여러 제자들에게 말했다.

[모두들 와서 왕 어르신과 두 분의 사숙께 절을 올려라. 금도문의 무공은 중원에 자자하다. 우리 화산파의 선조께서는 일지기 금도문을 숭상하였다. 앞으로 모두들 왕 어르신과 두 분 사숙께 가르침을 청하도록 해라. 틀림없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많은 제자들은 일제히 대답했다.

[녜.]

순식간에 객주집 대청 마루에는 무릎을 꿇고 인사하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왕원패는 웃으며 말했다.

[천만의 말씀이오.]

왕백분과 왕중강은 반례했다.

임평지는 한쪽에 서서 화산파의 제자들을 하나하나 소개했다.
왕원패는 손이 무척 큰 사람이라 한 사람당 은 사십 냥을 준비해서 나누어 주었다. 임평지는 악영산을 외조부에게 소개했다.
왕원패는 껄껄 웃으며 악불군에게 말했다.

[악 선생, 당신의 이 따님은 정말 훌룡하시군요. 그래 사위분을 정하셨읍니까?]

악불군은 웃으며 말했다.

[딸 아이가 아직 나이가 어리고, 더우기 우리같이 무공을 배우는 사람의 딸들은 하루종일 무술연마나 할 뿐이지 바느질이나 밥 짓는 일은 전혀 모르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이 이런 말괄량이를 데리고 가겠소?]

왕원패는 웃으며 말했다.

[너무 겸손하신 말씀이시오. 장군의 집안에서 여자 호걸이 나는 법이 아니겠소. 그러나 여자이니 주방의 일을 배우는 것도 좋을 듯하오.]

여기까지 말하고 소리가 낮아지면서 매우 침울해 했다. 악불군은 그가 호남에서 죽임을 당한 임평지의 모친을 생각하는 것임을 알고 웃음을 거두며 말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왕원패는 무척 호탕한 사람이었다. 딸을 잃은 슬픔을 즉시 지워버리고 껄껄 웃으며 말했다.

[따님께서 이렇게 용모와 재주가 있으니 어울리는 소년영웅을 찾아 짝을 맺어주기가 여간 어렵지 않으시겠읍니다.]

노덕약은 방에서 영호충을 부축해 나왔다. 영호충은 휘청거리며 간신히 걸어나왔다. 그는 왕원패와 왕씨 형제를 보고도 고개 숙여 인사하지 않고 단지 깊이 읍을 하면서 말했다.

[제자 영호충은 왕 어르신과 두 분 사숙께 인사드립니다.]
악불군은 눈쌀을 찌푸리며 말했다.

[왜 고개 숙여 절을 하지 않느냐?]

왕원패는 벌써 외손자에게 사실을 전해 듣고 영호충이 몸에 중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알고 웃으며 말했다.

[영호 현질은 몸이 불편하니 예를 너무 따질 필요가 없소. 악 선생, 당신 화산파의 내공은 오악검파 중에 제일이라고 합니다.
틀림없이 주량도 클 것이니 나는 오늘 당신과 열 그릇의 술을 마시겠소.]

말을 하면서 그의 손을 잡고 객주집을 나갔다.
악 부인,왕백분, 왕중강 및 화산의 여러 제자들도 그 뒤를 따랐다.
주점을 나서자 밖에는 수레와 말들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여자들은 수레를 타고 남자들은 말을 탔다. 모든 말들의 안장은 화려하기 이를데 없었다. 임평지가 왕원패에게 손님이 왔음을 알린 것은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짧은 시간에 이미 수레와 말들이 준비된 것이었다. 이 한 가지를 봐도 금도왕가의 세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알 수 있었다.
왕가(王家)에 도착 하니 대궐 같은 기와집이 몇십 채나 늘어서 있었고 대문에는 주홍칠이 되어 있었으며 문에는 두 개의 커다란 구리로 만든 고리가 걸려 있었으며 눈부시게 번쩍이고 있었다.
여덟 명의 건장한 사내들이 팔장을 끼고 대문 밖에 서 있었다.
문을 들어섰다. 대들보에는 검은 칠을 한 큰 액자가 걸려 있었는데 견의용위(見義勇爲)라는 네 글자가 황금으로 박혀져 있었으며 액자 밑에는 하남성 순무(巡撫)라는 낙관이 찍혀 있었다.
이날 밤 왕원패는 크게 주연을 베풀고 악불군과 제자들을 청했으며 낙양의 무림인가들을 초청했다. 빈객들 중에는 적지 않은 벼슬아치들과 거부들이 끼어 있었다.
영호충은 화산파의 수제자이다. 멀리서 온 손님 중에는 악불군을 제외하고는 그의 지위가 가장 높았다. 모든 사람들은 그의 옷이 남루하고 의기소침한 태도를 보고 놀람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무림 중에는 독특하고 특이한 행동을 하는 인사들이 많았고 특히 개방고수들은 모두 낡고 기운 옷을 입는다는 소문을 들었던 터라 많은 빈객들은 이 사람이 바로 화산파의 둘째가는 우두머리이니 틀림없이 평범치 않으리라 생각하고 누구도 그를 업수이 여기지 않았다.
영호충은 두번째 자리에 앉았다. 이때 왕백분은 주인의 자격으로 그와 자리를 함께 했다. 왕백분은 술이 서너배 돌아도 여전히 영호충의 표정이 냉랭하고 그에게 세 마디 물으면 겨우 한 마디만 대답하는 것을 보고 자기를 안중에 두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객주깁에서 자기 아버지에게 고개 숙여 절을 하지 않고 사십 냥의 은을 나누어 줄 때도 공손하게 받지 않았던 일이 생각났다. 왕백분은 속으로 화가 났다. 무공에 관한 이야기를 이리 찔러보고 저리 찔러보고 또는 몇가지의 풀기 어려운 문제를 제기하여 가르침을 청했건만 영호충은 그의 말을 들은 척도하지 않고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왕백분에게 어떤 나쁜 감저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단지 눈 앞의 왕가가 고귀하게 보이고 사치스럽게 보이는데 반하여 자기는 보잘것 없는 가난뱅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 사람들과 비교할 때 하늘과 땅 차이임을 느꼈기에 기분이 울억했던 것이다. 임평지는 외갓집에 도착하자 바로 촉땅에서 나는 옷을 입자 더욱 고귀한 티가 나서 마치 옥(玉)처럼 빛나는 것이었다. 영호충은 이것을 보자 자기의 남루한 처지를 더욱 의식하게 되었다.

(소사매가 산에서 나와 재미있게 놀던 옛날의 일은 이제는 오직 부끄러울 뿐이구나! 부자들은 산에서 놀지 않으니 말이다!)
그의 뇌리엔 온통 악영산 한 사람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왕백분이 그에게 무슨 말을 하건 자연히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왕백분은 중주일대 무림에서 세도가 당당하여 모든 사람들이 그를 대할 때 벌벌 떨고 쩔쩔 맸는데, 오늘 저녁에 영호충이라는 청년을 만나 몇번씩이나 푸대접을 받으니 이만저만 화가 나는게 아니었다. 여느때 같았으면 벌써 발작을 하였겠으나 단지 죽은 누이를 생각하고 또 아버님이 화산파 사람들을 심히 존경한다는 점을 생각하고 노기를 꾹꾹 눌러 참으며 계속 영호충에게 술을 권했다.
영호충은 잔에 술을 따라놓기가 무섭게 단번에 마셔버렸다.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십여 잔을 마셨다. 그는 본래 주량이 강했다. 백 잔 이상을 마셔도 취하지 않았으나 그는 지금 내공이 소실되어 힘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쉽게 취해 왔다. 약 사십 잔을 들이켰을 때 그는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왕백분은 내심 생각했다.

(네놈은 세상사를 너무 모르는구나. 내 조카가 너의 사제이니 너는 응당히 나를 사숙 또는 세숙(世叔)이라고 불러야 옳은데 너는 그 소리를 하지도 않았다. 그건 그렇다 치고 나를 이렇게 상대도 안 해줄 수 있느냐? 좋다. 네놈을 취하게 해놓고 여러 사람들 앞에서 추태를 보이게 해 주마.)

영호충은 취기가 올라 이미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왕백분은 웃으며 말했다.

[영호 노제는 화산의 수제자죠. 영웅은 청년 가운데서 나오는 것인가 보오. 무공이 높으니 주량도 높을 것이 아니겠소? 여봐라.
큰 그릇으로 바꾸어라. 영호 도련님에게 술을 따랐다. 드려라.]
왕가의 하인들은 일제히 대답하고 올라와 술을 따랐다. 영호충은 일생중 다른 사람이 그에게 술을 따라주면 절대로 사양하는 법이 없어 술을 따르면 즉시 비웠다. 순식간에 대여섯 그릇을 마셨다. 취기가 올라와 들고 있던 술잔을 땅바닥에 떨어뜨렸다. 동석했던 모든 사람들이 말했다.

[영호 소협이 술에 취했군. 뜨거운 차를 마시고 정신을 차리게 해야 돼.]

왕백분은 웃으며 말했다.

[이 사람은 화산파 장문인의 제자요. 그렇게 쉽게 취할 리가 있겠소? 영호 노제, 자, 듭시다.]

그리고 술을 한잔 가득히 따랐다.
영호충은 말했다.

[내가...... 내가 취한 줄 아십니까? 마십시다.]

그리고 술잔을 들어 꿀꺽꿀꺽 마셨다. 마시면서 술을 반은 입밖으로 흘려보냈다. 갑자기 몸을 구부리며 입을 벌려 뱃속에 담아져 있던 술과 안주를 탁자에 토해내고 말았다. 동석해 있던 손님들이 놀라 일제히 피했다. 왕백분은 그 모습을 보고 냉소했다.
영호충이 토하자 대청에 있던 수백 개의 눈은 그를 쏘아보았다.
악불군 부부가 눈쌀을 찌푸리며 내심 생각했다.

(이 아이는 술좌석에 오니 못할 아이군. 많은 귀빈들 앞에서 추태를 부리다니!)

노덕약과 임평지가 도잇에 달려와 영호충을 부축했다. 임평지는 말했다.

[대사형, 좀 가서 쉬시지요.]

영호충은 말했다.

[난...... 난 취하지 않았다. 나는 술을 또 먹을 수 있다. 술을 가져오너라.]

임평지는 말했다.

[녜, 녜, 빨리 술을 가져와라!]

영호충은 취한 눈으로 비스듬히 쳐다보며 말했다.

[넌...... 넌...... 임평지...... 어째서 소사매와 함께 있지 않느냐? 나를 끌고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

노덕약은 낮은 소리로 말했다.

[대사형, 우리 가서 쉽시다. 여기는 사람들이 많으니 함부로 말씀하지 마십시오.]

영호충은 화가 나서 말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함부로 지껄였느냐? 사부다바이 너를 파견하여 나를 감시하여 않았느냐? 넌...... 넌 나에게서 무슨 증거를 찾아 내었느냐?]

노덕약은 그가 취한 다음 말을 함부로 할까봐 임평지와 좌우측에서 부축해 강제로 그를 방 안에 데려다 놓으며 쉬게 했다.
악불군은 '사부님이 너에게 감시하도록 파견했는데 너는 무슨 증거를 찾았느냐' 하는 말을들었다. 그는 비록 수가이 깊은 사람 이었지만 내심 참지 못하고 얼굴색이 변했다.
왕원패는 웃으며 말했따.

[악 노제, 나이가 어린 사람은 술이 취하면 함부로 지껄이는 법이오. 상대해 무엇하겠소? 자자자, 술을 마십시다.]

악불군도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시골 아이들이라 무엇을 모릅니다. 왕 어르신께선 너무 비웃지나 마십시오.]

연회가 끝난 후 악불군은 노덕약에게 앞으로는 영호충을 감시 하지 말고 단지 주의해 살피라고 분부했다.
영호충은 다음날 오후가 되어서야 깨어날 수 있었다. 술에 취했을 때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한 마디도 기억할 수 없었다. 단지 머리가 부서지도록 아프고 자기 혼자 방에서 잠을 자고 방안이 심히 청결한 것만이 기억에 남았다. 그는 방에서 걸어나와 밖을 살펴보니 여러 제자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하인에게 물어보니 그들은 뒷뜰 강무청(講武廳)에서 금도문 왕가의 자녀들과 무예를 겨루고 있다고 했다. 영호충은 생각했다.

(내가 그들과 섞이며 무엇 하겠는가? 밖으로 나가 거리 구경이나 하자.)

그는 즉시 문을 나섰다.
악양은 역대 황제들이 사는 곳이었다. 규모는 웅장하나 시가지는 그리 번화하지 않았다. 영호충은 아는 것이 별로 많지 않았으며 고대의 역사에 대해 아는 것도 없었다. 낙양성 내의 여러 명승고적을 봐도 그 내력을 알지 못하니 아무런 흥미도 느낄 수 없었다. 작은 골목을 들어서니 일곱 여덟 명의 할일 없는 사람들이 한 작은 주점에서 도박을 하고 있었다. 그도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왕원패가 어제 자기에게 인사할 때 준 은을 꺼내 그들과 도박을 하기 시작했다. 저녁때가 되어서야 도박을 끝내고, 술이 취해 돌아왔다. 연속 며칠 동안 그는 이 무리들과 도박을 하고 술을 마셨다. 며칠 동안은 재수가 좋아 몇푼 땄으나 네쨋날부터 털리기 시작했다. 사십 냥의 은은 며칠이 가기 전에 바닥이 났다. 도박군들은 돈이 없으면 도박을 할 수 없다고 하면서 그를 붙여주지 않았다. 영호충은 화가 치밀어 술을 시켜 연거푸 몇 주전자 들이켰다.
점원은 말했다.

[보시오. 돈을 싹 잃었는데 무엇으로 이 술값을 지불하겠소?]
영호충은 말했다.

[내일 와서 갚겠소.]

점원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 주막은 자금이 적고 이익이 없어 친척이나 친구일지라도 외상은 사절입니다.]

영호충은 크게 화가 나 말했다.

[이 도련님이 돈이 없다고 깔보는 것이냐?]

점원은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도련님이든 영감님이든 마나님이든 그건 상광 않겠읍니다. 돈이 있으면 팔고 돈이 없으면 외상을 주지 않을 것이오.]
영호충이 자기자신을 돌아보니 옷은 남루하고 돈 있는 차림새가 아니었다. 허리에 차고 있던 한 자루의 장거미마 풀어 탁자에 던지며 말했다.

[이것을 잡혀 주시오.]

한 명의 무뢰한이 그의 돈을 따고 싶어 급히 말했다.

[좋소. 내가 당신 대신 잡혀 드리죠.]

그리고 검을 안고 나갔다.
점원은 또 두 주전자의 술을 가져왔다. 영호충이 한 주전자를 다 마셔버렸을 때 그 무뢰한은 몇 덩이의 은자를 가지고 돌아왔다.

[모두 세 냥 네 푼의 은이오.]

그는 은자와 전당포 쪽지를 그에게 들이밀었다. 영호충이 은을 살펴보니 세 냥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아무말 하지 않고 다시 많은 무리들과 도박을 하기 시작했다. 저녁때까지 술에 취하여 도박을 하다가 다시 밑천을 몽땅 털리고 말았다.
영호충은 옆에 있던 입이 비뚤어진 자에게 말했다.

[세 냥만 빌려주시오. 이기면 배로 갚아드리겠소.]

입이 비뚤어진 자가 웃으며 말했다.

[만약 진다면 어떻게 하시겠소?]

영호충은 말했다.

[진다면...... 내일 갚아드리리다.]

입이 비뚤어진 자는 말했다.

[네 놈 집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무엇으로 갚겠는가? 마누라를 팔겠는가? 여동생을 팔겠는가?]

영호충은 크게 화가 나 손을 들어 뺨을 철썩 갈겼다. 이때는 취기가 이미 어리끝까지 올라 있어서 내친 김에 앞에 있던 몇냥의 은까지 빼앗아버렸다. 입이 비뚤어진 자는 외쳤다.

[큰일났다! 큰일났다! 이놈은 강도로구나!]

그 무리들은 모두 한패라 일제히 달려들어 주먹을 쥐고 영호충에게 덤벼들었다.
영호충은 손에 검도 없고 힘이 없었다. 몇명의 무리에게 떠밀려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주먹과 발길질에 그의 얼굴은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갑자기 말굽 소리가 들려오더니 몇명의 말탄 자들이 옆을 지나갔다. 말에 있던 사람이 호통쳤다.

[비켜라! 비켜라!]

말채찍을 휘두르며 무리를 흩어지게 했다. 영호충은 땅바닥에 엎드려 다시는 일어설 수 없었다. 한 명의 여자가 갑자기 외쳤다.

[어머, 이분은 대사형이 아니십니까?]

바로 악영산이었다. 다른 한 사람이 말했다.

[좀 봅시다.]

이 사람은 임평지였다. 그는 말에서 내려 영호충의 몸을 돌려 놓고 깜짝 놀라 말했다.

[대사형, 어찌 된 일입니까?]

영호충은 고개를 흔들며 쓰디 쓰게 웃으며 말했다.

[술에 취했고 도박에 졌소.]

임평지는 급히 그를 안아 말 위에 실었다. 임평지와 악영산을 제외하고 다른 네 사람이 말에 타고 잇었다. 말에 타고 있던 사람은 왕백분의 두 딸과 왕중강의 두 아들이었는데 바로 임평지의 사촌 남매들이었다. 그들 여섯 사람은 집에서 나와 낙양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망중한을 즐기고 있었는데 지금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 골목에서 영호충이 사람들에게 얻어맞고 있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그들 네 사람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화산파는 오악검파의 하나로 할아버지께서 말씀을 자주 하시고 찬양하셨는데, 그리고 요전날 그들 제자들과 무술시합을 겨룰 때 그들의 공력은 상당했는데 이 영호충은 화산파의 첫째 제자로서어찌 이 몇명의 깡패들조차 이길 수 없단 말인가?)

영호충이 얻어맞아 시뻘건 코피가 나고 얼굴이 시퍼렇게 멍들고 부은 것을 보니 정말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영호충은 왕원패의 집으로 돌아와 이틀 동안 요양하자 비로소 원상태로 돌아왔다. 악불군 부부는 그가 무뢰한들과 도박을 하고 싸움을 했다는 소리를 듣고 화가 나서 그를 보러오지도 않았다.
다섯째 날 왕중강의 작은아들인 왕가구(王家駒)가 총총히 방안으로 돌아왔다.

[영호 대형, 나는 오늘 당신의 빚을 갚았소. 그날 당신을 때린 무뢰한들을 찾아가 채찍으로 그놈들을 몇번 때려주었읍니다.]
영호충은 그 사건에 대해 기실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담담히 말했다.

[그럴 필요가 없읍니다. 그날은 내가 술에 취했고 애당초 내가 잘못했던 것입니다.]

왕가구는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당신은 우리집 손님이 아닙니까? 금도왕가의 손님이 어찌 낙양성에서 얻어터지고도 빚을 갚지 못한단 말입니까?]

영호충은 마음속 깊이 금도왕가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가 말끝마다 금도왕가 금도왕가라고들먹이는 꼴을 보자 이 금도왕가가 뮤에서 권세를 쥐고 무림을 좌지우지하는 것 같아 참지 못하고 생각나는 대로 내뱉아 버렸다.

[금도왕가가 고작 깡패를 상대하는데 필요하단 말이오?]
그는 말을 한 즉시 후회했다. 막 사과를 하려고 하는데 왕가구는 침울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영호형, 그 무슨 말씀이시오? 그때 만약 나와 의형님이 그 일곱명의 건달들을 막지 않았다면 당신이 오늘까지 생명을 부지 할 수 있었겠소?]

영호충은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애당초 두분께서 생명을 구해주신데 대해 감사를 드리려고 생각했소.]

왕가구는 영호충의 말투에 약을 올리는 의미가 들어 있자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화사파 장문인의 수제자인데 낙양성의 몇명의 건달조차 상대할 수 없으니 하하하! 그 누가 거짓으로 명성을 얻었다고 말하지 않겠소?]
[나는 본래 가진게 없고 명성도 없던 사람이오.]

바로 이때 방문 밖에서 어떤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동생, 여기서 영호 형님과 무슨 애기를 주고받고 있어?]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들어오는데 바로 왕중강의 장자 왕가준(王家駿)이었다.
왕가구는 화가난 듯 말했다.

[형님, 나는 호의로 이 사람이 당한 분풀이를 하려고 그 일곱 명을 찾아가 한놈 한놈에게 채찍질을 가하는데 뜻밖에 이 영호 대협께서 나를 책망하는군요.]

왕가준은 말했다.

[동생, 자넨 모르는게 있군. 조금 전 나는 악 사매에게 말을 들었는데 영호 형님은 쉽게 자기 능력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하네.
약왕묘 앞에서 한 자루의 장검을 가지고 단 일 초로 자려다섯 명의 일류고수의 두 눈을 찍어 봉사로 만들었다 하더군! 그것이 정말이라면 검술은 신의 경지에 도달하여 있어 천고에 보기 드문게 아닐까? 하하하!]

이 사람은 악영산의 말을 전부 믿지 않는 듯했다. 왕가구도 따라서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 열가섯 명의 일류고수들은 우리 낙양성의 깡패 조무래기보다 훨씬 무예가 뒤떨어지나 보군요. 하하하!]
영호충은 화를 내지 않고 같이 껄껄 따라 웃으며 의자에 앉아 담요로 좌측 무릎을 싸고 몸을 흔들흔들거렸다.
왕가준은 이번에는 백부와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영호충에게 말상대를 하러 온 것이다. 왕백분과 왕중강 형제는 본래 그들에게 호의적으로 말상대를 하고 절대로 무례를 범해서는 안 된다고 분부했으나 영호충이 교만하고 자기 형제들을 안중에 두지 않자 점점 화가 치밀었다.

[영호형, 소제는 한가지 여쭈어 볼 말씀이 있읍니다.]
말소리는 매우 컸다. 영호충은 말했다.

[가르침이라니요. 천부당 만부당한 말씀이오.]

왕가준은 말했다.

[평지 동생의 말을 듣자니 우리 고모부님과 고모님이 돌아가실때 영호형께서 그들 두 분의 임종을 지켜보셨다고요?]

영호충은 말했다.

[맞습니다.]

왕가준은 말했다.

[고모부와 고모님의 유언을 영호형께서 우리 평지 사촌동생에게 들려주셨다고요?]

영호충은 말했다.

[틀림없는 사실이오.]

왕가준은 말했다.

[그럼 고모부님의 벽사검보는 어찌하셨소?]

영호충은 이 말을 듣자 몸을 부르르 떨며 몸을 일으키고 큰 소리로 말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요?]

왕가준은 그의 행동을 방어하기 위해 뒤로 한 발짝 물러나면서 말했다.

[우리 고모부께선 벽사검보를 한 권 가지고 계셨는데 당신 보고평지 동생에게 갖다 주라고 부탁했는데 어찌 당신은 지금까지 그것을 꺼내놓지 않느냔 말이오?]

영호충은 그의 트집을 듣고 화가 나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누구에게 벽...... 사검보가 있다고요? 나보고 임 사제에게 갖다 주라고 부탁을 했다고요?]

왕가준은 웃으며 말했다.

[만약 그런 일이 없다면 당신은 도둑이 제발 저리다고 몸을 벌벌 떨고 말을 더듬지는 않았을 것이오.]

영호충은 화를 참으며 말했다.

[두 분 왕형, 이 영호충은 당신집의 손님이오. 당신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할아버지나 아버님의 뜻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당신네 두 분의 뜻입니까?]

왕가준은 말했다.

[그냥 물어보는 것뿐이오. 그것이 무슨 큰일이나 되오?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소. 그러나 복주 임가의 벽사검보는 천하에 명성을 떨쳤고 이 무림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소.
고모부님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그의 몸에 지니고 있던 보물 벽사검보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없소. 우리는 그의 가까운 친척이니 찾아봐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오.]

영호충은 말했다.

[그건 임평지가 당신께 물어보라고 시킨 것이오? 왜 그 사람은 자기 스스로 나에게 물어보지 않소?]

왕가구는 킥킥킥 세 번 웃고 말했다.

[평지 사촌동생은 당신의 사제이오. 그가 어찌 당신 앞에서 감히 물어보겠소?]

영호충은 비웃으며 말했다.

[이 낙양땅은 당신들 금도왕가가 잡고 있소. 하하하! 지금 나에게 자백을 강요할 생각이라면 임평지에게 와서 물어보라고 하시오?]

왕가준은 말했다.

[각하는 우리집 손님이오. 자백을 강요한다는 말은 천부당만부당하오. 우리 형제는 단지 호기심 때문에 한마디 물어보았을 뿐이고 영호형이 대답을 해 주시면 좋고 대답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어쩔 수가 없소.]

영호충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겠소. 당신들도 어쩔 수가 없다니 그만 둡시다.]

왕가구는 마른기침을 한번 하고 화제를 돌렸다.

[영호형, 당신은 일검으로 열다섯 명의 고수의 두 눈을 찔러 멀게 했다고 하는데 그 같은 신기의 검초는 그 벽사검보에서 배운 것이오?]

영호충은 깜짝 놀랐다. 그의 마음속에 불현듯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다.

[사부와 사모님, 사제들은 자기들의 목숨을 구해준데 대하여 감격하지도 않고 오히려 모든 사람이 의심을 품고 있었다. 나는 그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렇군. 알고보니 그랬어. 알고보니 그들은 내가 임진남의 벽사검보를 가로챈 줄 아는구나! 그들은 지금껏 독고구검을 구경한 적이 없고 또 내가 풍 사숙조에게 전수 받았다는 말을 하지도 않았으니 그럴 만하다. 내가 사과애에서 몇개월 묵는 동안 검술이 갑자기 진보하고 검종인 봉불평과 같은 고수조차 나를 상대하지 못했으니 만약 그 벽사검보에서 기묘한 고초를 배워오지 않았다면 어디서 배워왔단 말인가 하고 생각했겠지. 또 임진남 부부가 죽을 때 아 혼자만 그들 곁에 있었으니 모든 사람들은 자연히 나를 의심할거다. 무림고수들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벽사검보가 반드시 내 수중에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나무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사부님과 사모님은 나를 키우셨고 소사매와 나와는 오누이처럼 지냈는데 이 영호충이 어떤 사람인지를 그 사람들이 아직도 모르고 있단 말인가? 그 사람들조차 나를 믿지 못하니 정말 안타깝기 그지없구나!]

왕가구는 득의양양해졌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내 말이 맞지 않소? 그렇지요? 그 벽사검보는 어디 있소? 우리는 당신 것을 빼앗으려는 것이 아니고 단지 물건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려고 그런다오. 당신이 그 검보를 임가에게 돌려준다면 그것으로 족하오.]

영호충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난 지금껏 벽사검보라는 것을 본 적이 없소. 임 총표두께선 일찍 청성파와 새북명타 목고봉에게 잡혔었소. 그의 몸에 무슨 검보가 있다면 그사람들이 벌써 찾아냈을 것이오.]

왕가준은 말했다.

[그 벽사검보는 상당히 중요한 보물인데 내 고모부와 고모님이 어찌 그것을 몸에 지니고 다녔겠소. 자연히 아주 은밀한 장소에 숨겨 두었을 것이오. 그들은 죽기 전에 비로소 당신에게 가르쳐 주고 사촌동생에게 전해주도록 유언을 남기셨을 것이외다. 그런데...... 그런데 그것은......]

왕가구가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

[당신이 그것을 살며시 찾아낸 다음 잡수셨는지 어찌 알겠소?]
영호충은 들을수록 화가 났다. 애당초 상대를 안 하려고 했으나 일이 자기의 명성과 커다란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자기가 뒤집어 쓴 누명을 벗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임 총표두께서 정말 신묘한 검보를 갖고있었다면 적수가 없었을 것이 아니겠소? 어찌 몇명의 청성파 제자들조차 당해내지 못하고 그들에게 잡혔단 말이오?]

왕가구는 말했다.

[그건...... 그건......]

그는 입을 벌린 채 일시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왕가준은 말을 잘 하는 달변가였다.

[천하의 일이란 원래 공교로운 법이 아니겠소? 영호충께선 벽사검보를 배워 검술이 대단한데도 몇명의 깡패조무래기조차 당할 수 없었소. 그들에게 잡힌 까닭은 무슨 연유요? 하하하! 그것이 자기의 실력을 밖으로 노출시키지 않는 것입니까? 그러나 영호형, 당신의 행동이 조금은 지나친 것 같지 않소? 정정당당한 화산파 수제자가 낙양성의 몇명의 깡패조무래기에게 당하면서도 아무런 대응을 못 했으니 그런 이야기를 누가 믿는단 말이오. 절대로 믿는 사람이 없을 것이오. 그 안에는 틀림없이 어떤 음모가 숨어 있을 것이오. 영호형, 내가 권고하는데 솔직이 벽사검보의 행방을 말해 주시오.]

영호충은 평상시 성격대로라면 벌써 반격을 가했을 것이다.
그러나 손님으로 온 신분을 생각해서 꾹꾹 눌러 참았다.

[영호충은 여지껏 벽사검보인지 뭔지를 본 적이 없소이다. 복주에 있는 총표두의 유언을 나는 한 마디도 빼놓지 않고 임 사제에게 말했소. 영호충이 만약 속이고 있는 일이 있다면 백번 죽어도 좋소.]

말을 하면서 팔장을 끼었다. 왕가준은 웃으며 말했다.

[이 일은 무림비급에 관련된 큰일이오. 만약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영호형께선 이 천하를 너무 얕잡아 본 것이오.]

영호충은 억지로 노기를 참으며 말했다.

[당신 말대로라면 나는 어찌해야 하오?]

왕가구는 말했다.

[우리 형제는 감히영호형의 몸을 한번 뒤져 볼까 하오.]
그는 잠시 멈칫하다가 낄낄 웃으며 말했다.

[그날 영호형께서 그 일곱 명 깡패조무래기들에게 잡혔을 때 우리는 당신 몸을 샅샅이 뒤질 수도 있었소.]

영호충은 냉랭히 웃으며 말했다.

[당신들이 내 몸을 뒤지겠다고? 흥! 이 영호충을 좀도둑으로 보시오?]

왕가구는 말했다.

[천만의 말씀이오. 영호형께서 벽사검보를 취하지 않았다. 했는데 뭐 그렇게 몸수색하는 것을 두려워 하오? 만약 그대 몸에서 검보가 나오지 않는다면 그때부터는 혐의를 풀 수도 있으니 서로 좋지 않겠소?]

영호충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소. 당신들이 가서 임 사제와 악 사매를 불러오시오. 그 두 사람이 증인이 되어야 하오.]

왕가준은 자기가 가고 동생이 혼자 남게 되면 영호충이 어떤 짓을 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만약 두 사람이 함께 가면 이 사람은 그 검보를 다른 데에 숨길까 염려되었다.

[몸 좀 살피는 것 가지고 왜 그러시오? 영호형이 만약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면 왜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고 있소?]

영호충은 내심 생각했다.

(내가 너희들에게 몸수색을 허락하는 것은 단지 사부님, 사모님, 사매, 세 사람 면전에서 나의 깨끗함을 알리고 싶었을 뿐이다. 너희 두 놈이 나를 믿든지 안 믿든지 영호충은 거기에 연연하지 않는다. 소사매가 만약 이 장소에 없다면 내 어지 네 두 놈들의 손이 내 몸에 닿는 것을 허락하겠느냐?)

그는 즉시 천천히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당신 두 분은 아직은 내 몸을 수색할 능력이 없을 것이외다.]
왕씨 형제는 그가 수색을 거절할수록 더욱 그의 몸에 벽사검보가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들이 벽사검보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첫째는 아버님과 고모님 앞에 공을 세우기 위함이고 둘째는 평소 이 벽사검보가 매우 대단하다고 들었기 때문에 이 검보를 자기 현제들이 찾아낸다면 한번 읽어볼 생각이었다.
왕가준은 전날 영호충이 몇명의 졸개들에게 땅에 내동댕이쳐 지고 얻어맞고 있을 때 아무런 힘이 없어 항거하지 못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영호충은 단지 검법에만 능할 뿐이고 주먹질과 발길질은 보잘것 없는 줄 알고 있었다. 지금은 그의 손에 장검이 쥐어져 있지 않으니 손을 아르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느꼈다. 그는 즉시 동생에게 눈짓을 하고 말했다.

[영호충, 좋은 말로 할 때 들으시오. 얼굴을 붉힌다면 좋은 꼴은 보지 못할 것이오.]

두 형제는 말을 하면서 앞으로 다가왔다.
왕가구는 가슴을 펴고 앞으로 똑바로 달려왔다. 영호충은 손으로 밀어냈다. 왕가구는 큰 소리로 말했다.

[아이쿠! 네놈이 사람을 때리는구나!]

그리고 그의 손목을 꼭 잡고 아래로 짓눌렀다. 그느 영호충이 화산파의 우두머리이니까 섣불리하면 큰코 다친다 싶어 신중을 기해 잡고 눌렀다. 그 수법은 왕가 집안에 전해내려오는 금나(擒拿)수법이었다.
영호충은 손을 잡히자 원래 팔을 돌려 옆으로 찌른 다음 바로 공격으로 전환할 생각이었으나 자기의 내력이 전부 소실된 후라 비록 초식대로 팔을 돌렸지만 조금도 힘을 쓸 수 없었다. 오히려 '우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우측 관절이 마비되고 손목은 그에게 눌려 뼈마디가 아팠다.
왕가구의 손은 매서웠다. 영호충의 오른손을 잡고 비트니 그의 우측어깨 관절이 탈골되고 말았다.

[형님, 빨리 수색하십시오.]

왕가준은 좌측 발을 내밀어 영호충의 두 다리 앞에 비스듬히 대어 그의 공격을 방비하면서 손을 내밀어 그의 품 속을 더듬었다.
많은 잡스런 물건이 꺼내졌다. 그의 손엔 갑자기 한 권의 엷은 책이 잡혔다. 두 사람은 동시에 외쳤다.

[여기 있구나! 여기 있구나! 임 고모부님의 벽사검보를 찾아냈다!]

왕씨형제가 급히 책을 살펴보니 첫번째 페이지에 써 있기를 소오강호지곡(笑傲江湖之曲) 여섯 개의 글씨가 전서(篆書)체로 씌어져 있었다. 왕씨형제는 글을 잘 몰랐다. 이 여섯 글자가 만약 해서(楷書)라면 알아보았을 텐데 이 글자들은 전서체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한 글자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다시 한 페이지를 넘기니 거기 보이는 것은 괴상한 글자였다. 그 두 사람은 이것이 거문고의 악보인 줄 모르고 마음속으로 벽사검보라 확신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벽사검보! 벽사검보!]

왕가준은 말했다.

[할아버지께 보내드리자!]

그리고 거문고 악보를 가지고 급히 문을 나섰다. 왕가구는 영호충의 허리를 힘껏 걷어차며 말했다.

[철면피 같은 놈!]

그리고 그의 얼굴에 침을 퇘 뱉었다.
영호충은 화가 나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러나 생각을 돌렸다.

(이 두 놈들은 무식하기 짝이 없지만 그의 조부나 아버지는 이렇게까지 무식하지는 않겠지. 잠시 후에 이것이 거문고 악보인줄 알면 틀림없이 나에게 사죄를 할 것이다.)

두 어깨가 탈골이 되자 그 아픔은 참을 수 없었다.

(내 내공이 전부 소실되어 거리에서 깡패조무래기들을 만나도 대항할 힘이 없고 이미 폐인이나 다름없구나. 이 세상을 더 살아간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는 침상에 누웠으나 이마에 땀이 줄줄 흘렀다. 상심한 나머지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나왕씨형제가 금방 돌아올 줄 알고 그들에게 약함을 보여주기가 싫어 즉시 눈물을 닦았다.
한참 후 발걸음 소리가 들리며 왕씨형제가 빠른 걸음으로 돌아왔다. 왕가준은 냉소하며 말했다.

[가서 우리 할아버지를 만나봐라.]

영호충은 노해 말했다.

[안 간다. 너희 할아버지가 나에게 사죄를 하지 않는데 내가 가서 무엇을 하겠는가?]

왕씨형제는 껄껄 웃었다. 왕가구가 말했다.

[내 할아버지가 너 같은 도적놈에게 사죄를 해? 꿈도 야무지구나. 가자!]

두 사람은 영호충의 허리춤을 꽉 잡고그를 침상에서 끌어내 방문을 나섰다.
영호충은 욕을 했다.

[금도왕가는 자칭 의리를 지킨다고 말해 왔는데 이렇게 비겁하게 중상을 입은 사람을 능욕하는구나!]

왕가준이 주먹으로 영호충의 입을 후려치자 입에서 피가 흘렀다.
영호충은 여전히 욕지거리를 해대며 왕씨형제에 이끌려 후원의 대청으로 나갔다.
악불군 부부와 왕원패는 주인과 손님의 신분으로 앉아 있었고 왕백분, 중강 두 사람은 왕원패 아래 앉아 있었다. 영호충은 혼자 욕지거리를 해댔다.

[금도왕가! 치사하고 염치없는 놈들! 무림 중에서 이런 지저분한 놈들을 본 적이 없다!]

악불군은 얼굴을 찌푸리며 꾸짖었다.

[충아, 입 닥쳐라!]

영호충은 사부님의 힐책을 듣자 비로소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왕원패를 향해 화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왕원패의 손에는 거문고 악보가 쥐어져 있었다. 그는 담담하게 말햇다.

[영호 현제, 이 벽사검보를 너는 어디서 얻어왔는가?]
영호충은 껄껄 웃엇다. 웃는 소리가 한참동안 끊이지 않았다.
악불군은 질책하며 말했다.

[충아, 어르신께서 네게 물으시는데 사실대로 말씀드려라. 어찌 무례하게 구느냐? 그것은 어디 규칙이냐?]

영호충은 말했다.

[사부님 제자가 중상을 입고 난 다음 온몸에서 힘이 바졌읍니다. 보십시오. 저 두 놈이 나를 어떻게 했는지, 이것이 바로 손님을 접대하는 규칙이란 말입니까?]

왕중강은 말했다.

[만약 친구이고 손님이라면 우리 왕가는 절대로 실례를 범하거나 죄를 짓지 아니하오. 당신은 남모르게 이 벽사검보를 자기 소유로 했는데 이 어지 도둑의 행위가 아니겠소? 낙양 금도왕가는 청렴한 가문인데 어찌 도둑을 친구로 삼으리까?]

영호충은 말했다.

[당신과 손자 삼대(三代)는 말끝마다 벽사검보라고 하는데 당신들은 도대체 벽사검보를 보았소? 어찌 이것이 벽사검보란 말이오?]

왕중강은 흠칫 놀라며 말했다.

[이 책자는 너의 몸에서 찾아낸 것이고 악 사형께서도 화산파의 무공책자가 아니라고 하셨다. 벽사검보가 아니면 또 무엇이겠느냐?]

영호충은 화가 극에 달하자 오히려 껄껄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벽사검보라고 하니 그럼 벽사검보라고 칩시다. 그러면 당신들 금도왕가가 그책을 익히도록 하시구료! 천하무적의 검법을 익힐 수 있을 것이외다. 낙양의 왕가는 이 무림에서 도검쌍절(刀劍雙絶)이라고 불려질 것이오. 하하하! 하하하!]

왕원패는 말했다.

[영호 현제, 손자들이 일시적으로 죄를 지었다면 화를 풀게. 사람이 어찌 허물이 없겠는가? 허물을 알고 고친다면 그것이 바로 큰 그릇의 사람이 아니겠는가? 네가 이미 검보를 꺼내놓았느니 당신 사부의 체면을 봐서라도 우리가 끝까지 추궁할 수가 없군! 이 일에 우리 모두는 앞으로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맙시다. 내가 바로 너의 어깨를 붙여주마.]

말을 하면서 좌석에 내려와 영호충을 향해 손을 내밀어 그의 좌측 손을 잡았다. 영호충은 뒤로 두 발자국 물러나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잠깐! 영호충은 당신의 동정을 받지 않겠소!]

왕원패는 의아해 말했다.

[왜 그런가?]

영호충은 화가 나서 말했다.

[이 영호충은 허수아비가 아니오. 내 손목이 당신들이 꺾고 싶으면 꺾고 붙이고 싶으면 붙이는 것인 줄 아시오?]

그리고 좌측으로 두 걸음 가서 악 부인의 곁에 가며 외쳤다.

[사모님!]

악 부인은 한숨을 내쉬고 관절에서 떨어져 나간 그의 두 팔을 붙여 주었다.
영호충은 말했다.

[사모님, 이 책은 분명 칠현금의 악보와 퉁소의 악보인데 이 왕가의 사람들은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르면서 자꾸 이것을 벽사검보라고 합니다. 세상에 이런 웃기는 일도 다 있읍니까?]

악 부인은 말했다.

[왕 어르신, 그 악보를 나에게 좀 보여주실 수 없읍니까?]
왕원패는 말했다.

[악 부인 보십시오.]

그러면서 악보를 건네주었다. 악 부인은 악보를 몇장 보았으나 알 수가 없는지 이렇게 말했다.

[거문고 악보인지 퉁소의 악보인지 나는 모르겠소. 나는 검보를 몇번 본 적이 있는데 이 책자는 검보 같지는 않읍니다. 왕 어르신 댁에 거문고를 타고 퉁소를 불 줄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모셔다 좀 보여주면 확연히 알 것입니다.]

왕원패는 마음속으로 주저했다. 이것이 정말로 거문고 악보이고 퉁소의 악보라면 그 창피함이란 말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생각에 잠긴 채 대답을 못했다. 왕가구는 머리회전이 느린 편이었다.
그는 큰 소리로 말했다.

[할아버지, 우리 장방(帳房)에 있는 역사야(易師爺)가 퉁소를 불 줄 압니다. 그를 불러 보여주십시오. 이것은 분명히 벽사검보입니다. 어째서 거문고 악보가 되겠읍니까?]

왕원패는 말했다.

[무학의 비급종류는 많다. 어떤 사람은 비밀을 지키기 위해 고의로 무공의 도식을 악보 모양으로 써 넣는 경우가 있으니 이 또한 이상할 것이 없다.]

악 부인이 말했다.

[댁에 퉁소를 불 줄 아는 사람이 있다 하니 그럼 이것이 검보인지 악보인지 그를 불러오면 금방 알 수 있겠군요.]

왕원패는 어쩔 수 없이 왕가구에게 명령을 해서 역사야를 불러오도록 했다. 역사야는 키가 작았고 비쩍 야위었다. 오십여 세 정도 되어 보였다. 턱밑에는 수염이 나 있었으며 옷차림새는 심히 정갈했다.
왕원패는 말했다.

[이것 좀 봐주시오? 이것이 악보인지 아닌지 말이오.]
역사야는 거문고 악보를 펼치고 몇장 보더니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이건 저도 잘 모르겠읍니다.]

그러다가 뒤에 적혀 있던 퉁소의 악보를 보자 두 눈이 빛나고 입에서 낮은 소리로 흥얼대기 시작했다. 오른손과 왼손 손가락은 탁자에 대고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한참 흥얼거리더니 또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니야, 틀렸어!]

이어서 또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소리가 높아지고 또 갑자기 낮아지고 하더니 양미간을 찌그리며 말했다.

[이 세상엔 절대로 이러한 일이 없다. 이건...... 이건......
소생으로서도 알지 못하겠읍니다.]

왕원패의 얼굴엔 희색이 감돌았다.

[이 책 속에는 이상한 곳이 있지요? 이것은 일반 악보와 크게 다르지 않소?]

역사야는 악보를 가리키며 말했다.

[보십시오. 이곳 궁조(宮調)에서 갑자기 치(?)조로 변하는데가 이것은 악보의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오. 그리고 또 퉁소로는 이것을 연주할 수가 없소. 이것은 갑자기 각(角)조로 변하고 또 다시 우(羽)조로 변하니 이것 또한 지금것 보지 못한 악보입니다. 퉁소로는 어떤 퉁소라도 이런 곡을 연주하지 못합니다.]

영호충은 비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불 줄 모른다고 다른 사람도 불지 못하라는 법이 있소?]

역사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것도 맞는 말이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정말로 이런 곡조를 불 줄 아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그에게 엎드릴 것이오. 너무 탄복한 나머지 그 자리에 엎드릴 것이오. 다만...... 다만 동성(東城)에 있는......]

왕원패는 그의 말을 가로챘다.

[이것이 평범하지 못한 악보라고? 그 중에 어떤 곡조들은 퉁소로는 절대로 불 수 없다고?]

역사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너무 평범하지 않습니다. 너무 해괴합니다. 소생 생각으로는 절대 불지 못할 것입니다. 동성에 있는 그를 제외하고는......]

악 부인이 물었다.

[동성에 있는 사람은 이 악보를 불 줄 안단 말이오?]
역사야는 말했다.

[그건...... 그건 소인도 보증할 수 없읍니다만. 단지...... 오로지 동성에 있는 녹죽옹(綠竹翁) 그 사람은 거문고도 잘 탈 줄 알 뿐 아니라 퉁소도 잘 붑니다. 어쩌면 그가 볼 수 있을지 모르겠읍니다. 그의 퉁소실력은 이 소생보다 훨씬 고명하지요. 정말 잘 붑니다. 이것은 과장이 아닙니다.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왕원패는 말했다.

[이 악보가 평범치 못한다면 틀림없이 이 중간에 어떤 우여곡절이 있을 것이다.]

왕백분은 옆에서 듣고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말에 끼어들었다.

[아버님 정주팔괘도(鄭州八卦刀)의 사문육합도법(四門六合刀法)은...... 그 도법은 적혀 있지 않습니까?]

왕원패는 짐짓 놀랐다. 그리고 즉시 그 뜻을 이해했다. 아들이 자기에게 깨우침을 주고 있는 것이다. 정주팔괘도의 장문인 막성(莫星)은 낙양 금도왕가와는 수대에 걸친 사돈간인데 그의 팔괘도문 중에 무슨 사문육합도법이라는 게 없었다. 그러나 화산파는 단지 검법만 연구하고 다른 파에서 이런 도법을 익혔다고 하면 악불군을 속일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왕원패는 즉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다, 맞아! 몇년 전 그 사돈댁에서 이 일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지 악보에다 도법 검법을 적어놓는 일은 늘 있는 일이고 그리 신기한 일이 아니라고.]

영호충은 비웃듯 말했다.

[흔한 일이 아니라구요? 그럼 어르신께 묻겠는데 이 두 개의 악보에 적혀 있는 검법은 도대체 어떤 검법입니까?]

와우언패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건...... 내 사위가 이미 죽었으니 이 악보의 비밀은 그 한 사람을 제하고는 알 사람이 없을 것이다.]

영호충은 이때 '소오강호' 의 악보내력을 설명할 수도 있었으나 첫째로는 형산파 막대선생이 어떻게 대숭양수 비빈을 죽였는가를 말할 수 없을 뿐더러 사부님이 이 곡조가 마교장로 곡약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아신다면 틀림없이 이것을 없앨 것이며 그렇다면 자기는 부탁을 받았는데 그 부탁을 들어줄 수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호충은 즉시 노기를 억제하고 말했다.

[이분 역사야께서 말씀하시기를 동성에는 녹죽옹이라는 분이 음악에 정통하시다고 하는데 이 악보를 가지고 가 그분에게 맡겨 보지요.]

왕원패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 녹죽옹은 이상하고 기괴한 사람이며 마치 머리가 돈 사람 같은데 그 사람의 말을 어찌 믿을 수 있는가?]

악 부인이 말했다.

[이 일은 반드시 분명히 밝혀야 합니다. 충아도 우리 제자이고 평지 또한 우리들의 제자인데 우리들은 누구 하나를 편애할 수가 없읍니다. 결국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그 녹죽옹을 청해서 이 악보의 이치나 알아보도록 합시다.]

그녀는 이 일이 영호충과 금도왕가의 겨룸이라고 말할 수가 없어서 금도왕가라는 말 대신에 임평지를 끌어들였다. 악 부인은 다시 말했다.

[역사야, 사람을 보내 그 분을 모셔오시면 감사하겠읍니다.]
역사야는 말했다.

[그 노인네의 성질은 기괴하기 짝이 없읍니다. 다른 사람이 일이 있어 그에게 구하려고 하면 그가 관여하기 싫은 일은 대문 앞에 가서 절을 해도 그는 절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만약 자기가 어떤 일에 끼어들면 물리쳐도 물러나지 않는 사람입니다.]
악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생각해보니 그분 녹죽옹은 무림의 선배인 것 같읍니다. 사형 우리가 들은 견문은 너무 없지요?]

왕원패는 웃으며 말했다.

[그 녹죽옹은 대나무를 엮는 장인에 불과하오. 대나무 그릇이나 대방석을 짜는 사람일 뿐 무림의 사람은 아니오. 단지 그는 거문고를 잘 타고 퉁소를 잘 불고 또 그림을 그려 많은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팔고 그래서 약간 우아한 노인이어서 우리 지방에선 그를 좀 높이 쳐주는 것이라오.]

악 부인은 말했다.

[이러한 인물이라면 낙양까지 와서 안 보고 갈 수는 없지요. 왕어르신께서 비록 수고스럽지만 우리 함께 그분을 만나보는게 어떨까요?]

악 부인의 뜻이 심히 완고하자, 왕원패는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아들, 손자, 악불군 부부, 영호충, 임평지, 악영산 등과 함께 동성을 향했다.
역사야는 앞에서 길을 인도했다. 작은 골목을 지나고 하나의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 골목 끝에는 넓은 대나무 숲이 있는데 바람을 맞아 대나무가 흔들거리는 풍경이 그림 같았다.
여러 사람이 그 골목으로 들어서자 금을 타는 소리가 딩동딩동 들려올 뿐 골목 안은 조용하고 깨끗하여 밖의 낙양성과는 딴 세상 같았다.
악 부인은 낮은 소리로 말했다.

[이 녹죽옹은 정말 신선놀음을 하고 계시군요?]

바로 이대 '띵' 하는 한 줄의 가야금 울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소리가 멈췄다.
한 늙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귀하께서 왕림하신이유는 무엇입니까? 무슨 가르침이 있으십니까?]

역사야는 말했다.

[죽옹, 이상한 악보 한 권이 있는데 어르신의 높은 안목으로 감정 좀 해주십시오.]

녹죽옹은 말했다.

[악보를 나보고 감정하라고? 헤헤, 정말 이 몸을 알아주는군!]
역사야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왕가구는 말했다.

[금도왕가의 왕 어르신께서 방문하셨오.]

그는 자기 할아버지의 방문을 알렸다. 그는 생각하기를 자기 할아버지가 낙양성에서 무시 못할 인물이기 때문에 한 명의 대나무나 엮는 늙은이가 금방 뛰쳐나와 영접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녹죽옹은 비웃는 듯 말했다.

[흥! 금도인지 은도인지 이 늙은이의 대나무 깎는 솜시보다 나을려고? 이 늙은이가 왕 어르신을 방문하지 않는데 왕 어르신은 어찌해서 이 늙은이를 방문하는 거지?]

왕가구는 대노해 큰 소리로 외쳤다.

[할아버지, 이 늙은 노인네는 이치를 모르는 사람 같습니다! 그를 만나보면 뭘 합니까? 우리 집으로 돌아가요!]

악 부인은 말했다.

[이왕 왔는데 녹중옹에게 청해서 이 악보를 살펴보도록 하는 것도 괜찮을 성싶군요.]

왕원패는 쳇! 하는 소리를 내며 악보를 역사야에게 꺼내주었다.
역사야는 그 악보를 받아들고 푸른 대나무 숲으로 들어갔다.
녹죽옹의 말소리가 들렸다.

[좋소. 그것을 내려 놓으시오.]

역사야는 말했다.

[어르신께 여쭙겠는데 이것은 정말로 악보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무공의 비결입니까? 무공의 비결을 이렇게 악보로 고친 것이 아닐까요?]

녹죽옹은 말했다.

[무공의 비결이라고? 이것은 틀림없는 악보이네.]

이어서 거문고 소리가 들려 왔다. 우아하고 멋진 음률은 사람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었다.
영호충은 잠간 듣고 이것이 바로 그날 유정풍이 연주했던 곡임을 기억해 내었다. 곡은 여전히 남아 있건만 사람은 이미 떠나고 없으니 어찌 슬프지 않을 수 잇겠는가?
얼마 있자 거문고 소리가 높이 올라갔다. 거문고 소리가 울릴수록 음은 높아져 최고의 음이 울릴 때 '쨍' 하는 소리와 함께 줄이 하나 끊어져 나갔다. 다시 몇개의 음이 더 높아지자 '쨍' 하면서 거문고 줄은 또 하나가 끊어졌다. 녹죽옹은 '엇' 하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이 악보는 생소하고 기이하기 짝이 없소.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군요.]

왕원패 일가족 다섯 명은 서로 쳐다보면서 얼굴에는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녹죽옹이 말했다.

[그럼 이번엔 이 퉁소의 악보를 좀 보겠소.]

이어서 퉁소 부는 소리가 대나무 숲에서 울려나왔다. 처음에는 유연하여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고 정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러나 나중에 소리가 갈수록 낮아져 거의 들리지가 않았다. 다시 몇가지의 음률이 들려오더니 퉁소 소리는 마침내 거의 들리지 안마게 되었다. '픽픽픽' 하는 소리만 들려왔을 뿐이었다.
녹죽옹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역노제, 당신은 퉁소를 불 줄 아는 사람이오. 이렇게 낮은 음을 어찌 불어낸단 말이오? 이 금보와 퉁소 악보는 가짜는 아니지만 그러나 곡을 만든 사람은 장난을 한 모양이군요. 당신은 먼저 돌아가 계시오. 내가 자세히 연구해 보겠소.]

역사야는 말했다.

[녜.]

그리고 대나무 숲에서 물러나왔다.
왕중강은 말했다.

[그 검보는 어디 있소?]

역사야는 말했다.

[검보요? 아 녹죽옹이 놔두고 가라고 했읍니다. 자세히 연구 좀 해보시겠다고요.]

왕중강은 급히 말했다.

[빨리 가서 가져오시오! 그것은 진귀하기 이를데 없는 검보요.
무림 중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차지하려고 하는지 아시오?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에게 놔둔단 말이오?]

역사야는 말했다.

[녜.]

그가 몸을 돌려 대나무 숲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녹죽옹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모님, 어떻게 나오셨읍니까?]

왕원패는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녹죽옹은 나이가 어떻게 되오?]

역사야는 말했다.

[칠십 몇살? 거의 팔십 세는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생각했다.

[팔십 먹은 할아버지에게 고모님이 계신다면 이 고모는 백 살이 넘었겠군!]

녹죽옹은 다시 말했다.

[고모님 보십시오. 이 거문고 악보가 좀 이상합니다.]
여인이 '응' 하는 소리가 나고 거문고 소리가 울렸다. 거문고의 음을 맞추어보고 잠시 멈추는 것으로 보아 아마 조금 전에 끊어진 거문고 줄을 잇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음을 조절한 다음 연주하기 시작했다. 처음의 연주는 녹죽옹과 비슷했다. 그러나 나중에 올라갈수록 그 소리는 위험한 상태에서 평온함을 건진 듯 무거운 것을 들다가 가벼운 것을 들은 듯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 높은 음으로 올라갔다.
영호충은 놀라고 기뻐했다. 희미한 기억 속에 그날 저녁 곡양이 연주했던 곡조가 생각났다. 이 곡은 때때로 감정이 격렬히 고양되기도 했고 때때로는 부드러우면서도 온화했다. 영호충은 비록 음악의 이치는 모르고 있었으나 이 노파가 연주하는 것은 곡양이 연주하는 것과 비슷하면서도 풍기는 기상은 크게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노파가 연주하는 곡조는 평화롭고 사람이 들을수록 음악의 아름다움만 생각하게 되는데 비하여 곡양이 연주할 때는 끓는 격분을 느낄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한참 지나자 거문고 소리는 점점 멀어졌다. 마치 음악이 멀리 사라진 다음에 연주하는 사람이 수십장 밖으로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가야금 소리가 끊어질 듯 이어질 듯할 때 가끔 한두번씩 작은 퉁소 소리가 거문고 옆에서 울려왔다. 퉁소 소리는 갑자기 높아졌다가 갑자기 낮아지고 또한 갑자기 가벼워지는가 하면 갑자기 높아지며, 음의 제일 낮은 쪽으로 갈 즈음 몇번쯤 흐느적거리다가 탁하고 침울한 음으로 변해갔다. 비록 음은 낮았지만 모든 음절은 선명하고 똑똑히 들려왔다. 점점 낮아지는 소리는 어떤 때는 구슬이 구르는 듯 맑고, 폭풍우가 일어나는 듯 여기서 꿈틀 저기서 꿈틀했으며 여러 소리가 점차 높아지면서, 폭포가 떨어지는 소리, 꽃망울이 다투어 피어 꽃밭 속에서 꽃들이 환하게 피고 새들이 말을 주고받으며 노는 것 같은 음률이 퍼져가더니, 점점 모든 새들이 사라지면서 봄꽃은 지고 쓸쓸한 비가 내렸다. 처량하고 살 풍경한 모습으로 돌변한 것이다. 모든 것이 정적 속으로 빨려들었다.
퉁소 소리가 멈춘 뒤에 모든 사람은 꿈에서 깬 듯 정신이 들었다. 왕원패, 악불군 등은 비록 음률은 모르지만 마음속으로 젖어오는 소리에 흠뻑 취했다. 역사야는 더욱 혼이 나간 듯했다.
악 부인은 한숨을 쉬고 말했다.

[너무 좋습니다. 탄복합니다. 충아, 이것은 무슨 곡인가?]
영호충은 말했다.

[이 곡은 '소오강호지곡' 이라고 부릅니다. 저 할머니는 거문고와 퉁소를 신의 경지까지 연마한 것 같군요.]

악 부인은 말했다.

[이 곡의 악보는 비록 기묘하지만 저 할머니의 연주 솜시가있어야 비로소 연주를 해낼 수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음악은 아마 너도 평생 처음 들어보았을 것이다.]

영호충은 말했다.

[아닙니다. 제자는 들어본 적이 있읍니다. 오늘보다 더욱 아름다웠지요.]

악 부인은 이상하게 생각하며 말했다.

[그럴 수가? 설마 이 세상에 이 노파보다 더욱 솜시가 뛰어난 사람이 있다는 말이냐?]

영호충이 말했다.

[이 할머니보다 기술이 월등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제자가 즐었을 때는 두 사람이 합주를 했읍니다. 한 사람은 거문고를 안고 한 사람은 퉁소를 불고 연주한 것은 이 '소오강호지곡'......]
그가 말을 다하지 못했을 때 대나무 숲에서 '떵떵떵' 세 번 거문고 소리가 울리더니 그 노파의 목소리가 드릴듯 말듯 들려왔다.

[금과 퉁소의 합주라. 세상에 어디를 가서 두 사람을 찾을 수 있을까?]

녹죽옹의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역사야, 이것은 틀림없이 악보이오. 내 고모님께서 조금 전 연주했으니 가져가시오.]

역사야는 대답했다.

[녜.]

대나무 숲에 들어갔던 역사야는 두 손에 악보를 들고 나왔다.
녹죽옹이 말했다.

[ 이 악보에 기재되어 있는 곡들은 정말로 기묘하고 세상에서 보기 힘든 곡이오. 이것은 신물(神物)이오. 절대로 속인들의 손에 들어가지 말게 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볼 줄 모른다면 그것을 배우려는 망상을 버리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 몸에는 해만 있을 뿐 좋은 점은 없을 것이오.]

역사야는 말했다.

[녜, 녜. 그렇게 하지요. 절대로 배우지 않겠읍니다.]
그는 악보를 왕원패에게 건네주었다. 왕원패는 친히 거문고 소리 퉁소 소리를 들은 후 악보 속에 아무런 하자도 없다는 것을 알고 즉시 영호충에게 건네주며 어색하게 말했다.

[영호 현제, 정말 면목이 없소.]

영호충은 비웃음을 띄었다. 몇 마디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려고 했으나 악 부인이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에 영호충은 참고 말하지 않았다. 왕원패의 가족은 서로 면목이 서지 않아 먼저 돌아가고 악불군은 뒤따라 갔다.
영호충은 악보를 손에 쥐고 멍청히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악 부인이 말했다.

[충아, 돌아가지 않으련?]

영호충이 말했다.

[저는 좀더 머물다 가겠읍니다.]

악 부인이 말했다.

[일찍 돌아가 쉬거라. 너의 팔이 빠져 나왔으니 절대 힘을 쓰지 말도록 해라.]

영호충은 말했다.

[녜.]

일행이 돌아가자 작은 골목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가끔 바람이 대나무잎을 스쳐 낙엽 흔들리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영호충은 손에 들려 있는 악보를 보면서 그날 저녁 유정풍과 곡양이 합주하던 광경을 회상해 보았다.

(그 두 사람은 이런 신묘한 악보를 만들어냈다. 녹죽옹의 고모란 노파는 비록 거문고를 타고 퉁소를 불어 그 절묘함을 표현했지만,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녀는 각각 나누어 볼 수 있을 뿐 그 녹죽옹조차도 그녀와 합주를 못 했다. 이 거문고와 퉁소로 합주하는 '소오강호지곡' 의 곡은 앞으로 그 소리가 끊어지겠구나. 다시는 옛날과 같은 음을 들을 수 없게 되었구나!)

그리고 다시 생각했다.

(유정풍 사숙과 곡 장로는 한 사람은 정파고수이고 한 사람은 마교장로였으나 음악을 말할 땐 서로 의기투합하여 서로 교분을 맺고 함께 신기롭고 절묘한 '소오강호' 를 만들어냈다. 그 두 사람이 손을 잡고 함께 죽을 때 마음속에 아무런 유한이 없었다. 나 천애고아인 영호충은이 세상에서 사부님에게 의심을 받고 사매에게 버림을 받았다. 또 나만을 사랑해주던 육후아마저도 내 손에 죽었으니 나보다도 유정풍 대협이 더 쓸쓸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슬픔이 복받쳐 올라 눈물을 뚝뚝 떨구다가 끝내 울음을 참지 못하고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녹죽옹의 소리가 대나무 숲 속에서 들려왔다.

[이보게, 친구. 왜 우나?]

영호충은 말했다.

[내 신세가 가련하고 이 곡을 만든 두 분 선배의 죽음을 생각하니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고 슬픔이 복받치는군요. 죄송합니다.
어르신!]

말을 하면서 몸을 돌려 가려고 했다.
녹죽옹은 말했다.

[이보게 친구, 한 마디 물어볼 것이 있네. 좀 들어와 말 좀 나누지 않겠나?]

영호충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가 왕원패에게 말할 때 교만무례했는데 뜻밖에도 자기같이 이름도 없는 사람에게 이렇게 겸손하게 나오는 것을 보고 퍽 의외라고 생각했다.

[아닙니다. 선배님이 궁금함 점이 있으면 물어보십시오. 저는 이실직고하겠읍니다.]

천천히 대나무 숲 안으로 발을 옮겼다. 앞에는 다섯 칸짜리 작은 집이 있었는데 좌측에 둘 우측에 셋 모두가 굵은 대나무로 엮어 만든 것이었다. 한 늙은 노옹이 우측 작은 방에서 나오며 빙그레 웃었다.

[이것 보게 친구, 들어와. 차나 한 잔 하자고.]

영호충은 이 녹죽옹이 몸에 나사처럼 비틀어진 꼽추이고 머리카락은 드문드문 얼마 남지 않았으며 큰 손과 큰 발을 가졌고 눈빛이 매우 맑은 것을 보고 즉시 고개를 숙여 절을 했다.

[소인은 영호충입니다. 어르신께 인사 여쭙니다.]

녹죽옹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이 늙은이가 몇살 더 먹었다고 그럴 필요는 없네. 들어오게.
어서 들어오게.]

영호충은 그를 따라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탁자와 의자들은 모두 대나무로 만든 것이었고 벽에는 한 폭의 대나무 그림이 걸렸는데 형세는 종횡으로 그어져 있어서 심히 스산한 기분이 들었다.
탁자에는 한 대의 요금(瑤琴)과 한 자루의 퉁소가 걸려 있었다.
녹죽옹은 주전자에서 한 그릇의 파란 청록차를 따르며 말했다.

[차를 들게나.]

영호충은 두 손으로 받으며 고개를 숙이고 감사했다.
녹죽옹은 말했다.

[이보게 친구, 이 악보는 어디서 얻어왔는가? 좀 가르쳐 줄수 없겠나?]

영호충은 멈칫하고 생각했다.

(이 악보의 내력에는 커다란 비밀이 숨겨져 있어서 사부님 사모님께도 알려드리지 못했다. 그때 유정풍과 곡양이 나에게 건네 줄 때 이 곡을 후세에 전해 절대로 사라지지 말도록 하라고 했다. 이 녹죽옹과 그의 고모는 음악에 정통하고 그의 고모는 특히 이 곡조를 거의 오나벽하게 연주하지 않았던가? 이 두 사람의 나이는 비록 늙었지만 두 사람 외에는 세상에는 이 악보를 전해 줄만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설령 이 세상에 음악에 정통한 사람이 있을지라도 나의 생명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어쩌면 그런 인연을 맺기가 어려울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는 잠깐 생각해 본 다음 말했다.

[이 곡을 쓴 두 분의 선배는 한 분은 거문고에 능하고 한 분은 퉁소를 잘 부십니다. 두 사람이 지교를 맺고 이 곡을 만들었지요.
그러나 뜻하지 않은 큰 변을 당해 똑같이 돌아가셨읍니다. 두분 선배님이 죽기 전에 이곡을 제자에게 건네주며 제자에게 전할 사람을 찾아보고, 이 곡이 세상에 알려지도록 하라고 했읍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춘 후 다시 말했다.

[조금 전 이 제자가 선배님과 고모님께서 연주하시는 묘기를 들었을 때 이 곡의 주인이 나타났다고 생각했읍니다. 그러하오니 어르신께서 이 곡을 거두어주시고 고모님께 전해 주십시오. 이 제자가 졸아가신 선배님의 유언을 따르게 되었으니 소원은 풀은 것 같습니다.]

그는 말을 하면서 두 손으로 공손하게 악보를 받쳐 올렸다.
녹죽옹은 받으려하지 않고 말했다.

[내가 먼저 고모님께 여쭈어보고 받겠소. 그분이 받을지 안 받을지는 모르겠소.]

왼쪽 작은 방에서 고모의 음성이 들려 왔다.

[영호 선생의 높은 뜻을 충분히 알겠소만 우리가 물리치자니 예의가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받자니 부끄럽기 짝이 없소. 그러면 그 두 분의 성함이 어지 됩니까? 좀 말씀해 주실 수 없소이까?]
목소리는 그리 늙은 목소리가 아니었다. 영호충은 말했다.

[물어보시니 응당 말씀을 올리겠읍니다. 곡을 쓰신 두 분의 선배는 한 분은 유정풍 유 사숙이고 한 분은 곡양 곡 장로올시다.]
그 할머니는 '아' 하고 소리를 내며 대단히 몰라는 것 같았다.

[알고보니 그 두 분이었군!]

영호충은 말했다.

[그 두 분의 선배님을 아십니까?]

그 노파는 대답하지 않고 한숨을 쉬고 한참동안 깊은 생각에 잠기다가 말했다.

[유정풍은 바로 형산파의 고수이고 곡양은 바로 마교장로이다.
쌍방은 청천지 원수지간인데 어찌 둘이 합십하여 이 곡을 지었단 말이냐? 참으로 해괴한 일이군!]

영호충은 비록 그 노파의 얼굴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녀가 타는 거문고 소리와 퉁소 소리를 듣고 나서 그녀가 필시 우아하고 자애로운 사람이리라 생각했다. 절대로 자기를 속이거나 자기 명예를 더럽힐 사람이 아닐 것 같았다. 그녀가 그들의 내력을 알고 있는 걸로 보아 틀림없이 무림의 사람인 모양이었다. 그래서 사실대로 유정풍이 어떻게 금분세수를 하고 숭산파 좌맹주가 어떻게 명령을 내려 저지했고 유 선배와 곡양이 어떻게 숭산파의 고수들에게 장력을 얻어맞고 어떻게 들판에서 합주를 하고 두 사람이 죽을 때 어떻게 자기에게 이 곡을 주면서 부탁했는지 사실 그대로를 일일이 말해 주었다. 단지 막대선생이 어떻게 비빈을 죽였는지에 대해서는 상황을 말하지 않았다. 그 노파는 한 마디도 빼지 않고 경청했다.
영호충의 말이 끝나자 그 노파는 말했다.

[이것은 분명히 악보인데 그 금도 왕원패는 왜 이것을 무공의 비급이라 했소?]

영호충은 즉시 임진남부부가 어떻게 청성파 및 목고봉에게 살해 되었고 어찌하다가 임평지에게 유언을 전했는가, 그리고 왕씨 형제가 어떻게 의심을 했는가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었다.
그 노파는 말했다.

[알고보니 그랬군!]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춘 후 다시 말했다.

[이런 사정을 당신 사부와 사모님께 조금이라도 이야기했더라면 많은 의심이 풀렸을텐데...... 나는 자네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낯선 사람인데 어찌 오히려 나에게는 비밀을 숨기지 않고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오?]

영호충은 말했다.

[저도 잘 모르겠읍니다. 선배님의 고아한 연주를 듣고 난 다음 선배님의 기풍에 감동되어 이렇게 사실대로 말하는 것 같읍니다.]
그 노파는 말했다.

[그렇다면 자네는 자네 사부와 사모님께 오히려 불복하는 마음을 품고 있지 않은가?]

영호충은 감짝 놀라며 말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단지...... 저의 은사께서는 이 제자에 대해 의심을 하고 계실 뿐이지요.]

그 노파는 말했다.

[내 자네의 말을 듣건데 자네의 중기(中氣)가 부족한 것 같군.
나이 어린 사람은 이러면 안 되는데, 그 원인이 무엇인가? 최근에 무슨 큰 병을 앓았는가 아니면 상처를 받고 있나?]

영호충은 말했다.

[녜, 지극히 중한 내상에 시달리고 있읍니다.]

그 노파는 말했다.

[조카님, 그 소년을 이쪽으로 데려오시오. 내가 맥을 한번 보리다.]

녹죽옹은 말했다.

[녜.]

그는 영호충을 이끌고 왼쪽에 있는 작은 방문가로 다가갔다.

녹죽옹은 영호충의 왼손을 대나무발이 쳐져 있는 안으로 뻗게 했다. 그 대나무발 안에는 또 한 겹의 가느다란 명주실이 드리워져 있었다. 영호충은 희미하게 사람의 그림자만 보았을 뿐 안에 있는 사람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가는 구분할 수가 없었다. 세개의 차가운 손가락이 자기의 맥을 짚고 있었다. 그 노파는 한참 맥을 짚더니 '너' 하고 소리를 질렀다.

[거참 이상하군!]

한참이 지난 후 비로소 말했다.

[오른손을 들이밀게.]

그녀는 두 손의 맥을 짚고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영호충은 미소를 지었다.

[노 선배님께서는 이 제자의 죽음을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몸은 생명이 멀지 않았음을 알고 있으며 거기에 마음을 쓰지 않은지 오래 됩니다.]

그 노파는 말했다.

[어떻게 너의 생명이 오래가지 못한다고 하느냐?]

영호충은 말했다.

[이 제자는 사제를 죽이고 사문의 자하비급을 훔쳤다는 누명을 쓰고 있읍니다. 하루 빨리 그 비급을 찾아 사부님께 드린 다음 목숨을 끊음으로 사제의 넋을 위로해야 합니다.]

그 노파는 말했다.

[자하비급은 대단한 물건도 아닌데 자네는 어째서 사제를 죽었는가?]

영호충은 즉시 도곡육선이 어데게 자기에게 상처를 입히고 육선의 진기가 몸 속에서 어떻게 움직였으며, 또 사매가 사문의 비급을 훔쳐와 자기의 상처를 치료해 주려고 했고, 자기가 거부를 해서 사제인 육후아가 강제로 읽어주려고 하던 일, 그리고 육후아의 혈도를 찍고 어떻게 해서 스에게 치명상을 입혔는가를 일일이 말해 주었다.
그 노파는 다 듣고 난 후 말했다.

[자네의 사제는 자네가 죽인 것이 아니네.]

영호충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

[내가 죽인게 아니라구요?]

그 노파는 말했다.

[자네의 진기는 약하기 그지없었네. 그 두 개의 혈도를 차기었다고 해서 사람을 죽일 수는 없어. 자네의 사제는 다른 사람이 죽인거야.]

영호충은 나직이 말했다.

[그러면 누가 육 사제를 죽였단 말입니까?]

그 노파는 말했다.

[비급을 훔친 사람은 비록 자네 사제를 꼭 죽였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얼마만큼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네.]

영호충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속에 맺혔던 응어리가 풀어지는 것 같았다. 악영산과 임평지가 서로 가까와지자 그는 마음속이 심란한 나머지 이미 삶의 희망을 포기한 채 오로지 죽음만을 그리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노파가 자기를 깨우쳐 주자 분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복수! 복수를 해야 한다.]

그 노파는 또 말했다.

[자네 몸 속에는 내가 맥을 짚어 보건데 여덟 줄기의 진기가 흐르고 있는데 그건 또 어찌된 연고인가?]

영호충은 껄껄 웃으며 불계화상이 자기를 위해서 병을 치료해 준 상황을 말해 주었다. 그 노파도 살며시 웃고 말했다.

[자네의 성격이 호탕하고 명랑해서 맥이 비록 혼란에 빠지기는 했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네. 내 또 한 곡을 연주해볼까 하니 한번 듣고 평이나 해주게나.]

영호충은 말했다.

[노 선배님이 들려주신다면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겠읍니다.]
그 노파는 '음' 하는 소리를 내더니 거문고를 다시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타는 곡조는 부드럽기 짝이 없었다. 마치 한 사람이 가볍게 탄식하는 듯하고, 아침 이슬을 맞아 살며시 피는 꽃 봉우리가 바람을 맞아 하늘거리는 것 같았다.
영호충은 얼마간 듣자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그는 생각했다.

(잠잘 수 없다. 내가 노선배의 거문고 타는 소리를 듣고 있는데 만약 잠이 들었다면 크게 불경스런 일이 된다.)

그러나 비록 있는 힘을 다해 정신을 집중시켰지만 잠을 이겨낼 수는 없엇다. 곧 눈꺼풀이 잠겨지고 다시는 뜰 수가 없었다. 몸에 힘이 빠져 땅바닥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잠 속에서 여전히 은은하게 그 거문고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부드러운 손이 자기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어린시절로 돌아가 어머님의 품 속에 안겨 그녀의 사랑을 받는 듯했다.
한참 후 가야금 소리가 멈추자 영호충은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부끄럽기 작이 없었다.

[죽어 마땅합니다. 노 선배님의 연주를 마음속 깊이 듣지 못하고 결국 잠에 빠졌읍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그 노파는 말했다.

[그렇게 혼자 자책할 필요는 없네. 내가 조금 전 연주한 것은 너에게 최면을 걸어 네가 내공을 잘 관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랬다. 몸은 어떠한가?]

영호충은 크게 기뻐 말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그는 즉시 무릎을 끓고 단정히 앉은 다음 기운을 돌리니 그 여덟 줄기의 진기는 여전히 충돌했으나, 옛날같이 뜨거운 피가 용솟음치고 구토를 할 것 같은 증상이 많이 사라진 이후였다. 더 기운을 쓰자 머리가 어지러워지고 깨어질 것 같아 몸을 비틀거리며 땅바닥에 쓰러졌다.
녹죽옹은 급히 안으로 나서서 그를 부축해 세웠다. 그리고 그를 방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 노파는 말했다.

[도곡육선과 불계대사의 공력이 매우 깊다. 그래서 내 음악 소리로는 그 진기를 억누를 수 없었네. 오히려 자네에게 고통만 주었구만! 심히 미안하네.]

영호충은 급히 말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 곡을 듣고 저의 몸이 많이 좋아졌읍니다.]

녹죽옹은 붓을 들어 벼루에 먹을 찍더니 종이에다 글씨를 썼다.

[이 곡을 전수받도록 하게. 그러면 자네는 평생 좋은 이득을 볼 것이네.]

영호충은 불현듯 깨달았다.

[이 제자가 감히 어르신께서 곡을 전수해주시길 원합니다. 이 제자가 천천히 몸을 조리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녹중옹은 기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노파는 대답하지 않고 한참 후 말했다.

[거문고를 탈 줄 아는가? 한 곡조 타 보겠는가?]

영호충은 얼굴이 새빨개지며 말했다.

[제자는 한번도 배운 적이 없고 틸 줄 모르면서도 어르신의 고명한 기량을 배우려고 했읍니다. 실로 너무나 무례합니다. 이 제 자의 경망함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는 즉시 녹죽옹에게 읍을 한 다음 말했다.

[이만 물러가겠읍니다.]

그 노파는 말했다.

[잠깐만! 자네에게 멋진 곡을 선사 받고 아무 것도 보답해 주지 못해 부끄럽고, 자네의 상처가 매우 깊어 정말 염려스럽군! 조카님, 내일 거문고 타는 방법을 영호군에게 전수해 주시오. 만약 그가 인내심이 있고 이 낙양 땅에서 좀 오래 묵느다면 그러면......
그럼 나의 이 청심보선주(淸心普善呪)를 그에게 전수해 주어도 무방할 것이오.]

마지막 두 구절의 말은 너무 작아 잘 들리지 않았다.
다음날 새벽부터 영호충은 이 골목 죽사(竹舍)로 와서 거문고를 배웠다. 녹죽옹은 그에게 음률을 전수해 주었다.

[악율(樂律)은 모두 십이율이 있는데 그것은 황종(黃鐘) 대여(大呂) 태족(太簇) 협종(夾鐘) 고선(姑?) 중여(中呂) 유빈(?賓) 임종(林鐘) 이칙(夷則) 남궁(南宮) 무사(無射) 응종(應鐘) 등이다. 이것은 엣날부터 전해내려오는 것으로 그 옛날 황제가 영륜(?倫)에게 명하여 율을 지었는데 봉황의 울음소리를 듣고 이 십이율을 지었다고 하네. 요금(瑤琴)의 칠현은 궁(宮) 상(商) 각(角) 치(?) 우(羽) 오음이 있고 첫째현이 황종(黃鐘)이 되고 세째현이 궁조(宮調)가 된다. 오조(五調)는 만각(慢角), 청상(淸商), 궁조(宮調) 만궁(慢宮) 유빈조(?賓調) 등이 있다.]

그는 자세하게 해석을 해주었다.
영호충은 비록 음율에 대해 하나도 모르지만 천성이 총명해서 한번 가르쳐 주면 이해했다.
녹죽옹은 심히 기뻐하며 즉시 연주기법을 가르쳐 주고 극히 짧은 벽소음(碧?吟)이라는 곡조를 그에게 타보라고 시켰다. 영호충은 몇번 배우자 연주할 수 잇었다. 비록 많은 음이 정확하지 못하고 손가락 놀림이 숙달되지 못했으나 하늘이 파랗게 되고 만리에 구름 한 점 없는 기상으로 변했다. 그 곡이 끝나자 그 노파는 여에서 듣다가 가볍게 탄성을 토했다.

[영호충, 잔는 배우는 속도가 무척이나 빠르군! 얼마 배우지 않으면 '청심보선주' 를 배울 수가 있겠네.]

녹죽옹은 말했다.

[고모님, 영호 현제가 오늘 처음 배우는데 이 벽소음을 혼자서 탔읍니다. 소리에 나타나는 뜻은 이 조카보다 더 고명한 것 같습니다. 거문고는 마음의 소리라 그의 가슴이 넓어서 그러한 듯합니다.]

영호충은 겸손해하며 말했다.

[선배님의 과찬이십니다. 어느 때에 가서 비로소 이 제자가 선배님처럼 이 '소오강호곡'을 연주할 수 있겠읍니까?]

노파는 실소하며 말했다.

[자네...... 자네도 그 소오강호곡을 연주하고 싶은가?]
영호충은 얼굴이 빨개지며 말했다.

[제자는 어제 저녁 선배님이 타는 거문고 소리가 너무 우아하고 아름다워 마음속으로 내심 흠모하였읍니다.

그 노파는 대답하지 않고 한참 후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만약 자네가 탈 수가 있다면 그건 정말 과히......]
말소리는 점점 작아져 뒤에는 잘 들리지 않고 가벼운 탄식만 들렸다.
이십여 일 동안 영호충은 아침부터 이 골목에 와서 거문고를 배우고 저녁 늦게야 돌아갔다. 점심 식사는 녹죽옹의 거처에서 먹었다. 비록 진수성찬은 아니지만 왕가의 산해진미보다 더 맛이 있었고 더욱 묘미가 잇었으며 매 끼니마다 좋은 술이 있었다. 녹죽옹의 주량은 비록 크지는 않았지만 차려나오는 술은 가히 일품 이었다.
그는 주도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천하의 미주에 대해 그 내력을 자세히 알 뿐 아니라 생산연도를 알아낼 수도 있었다. 영호충은 이러한 것은 들어보지도 못했는데 그에게 거문고를 배울 뿐 아니라 술에 대해서도 일가견을 배웠다. 그의 술에 대한 학문도 검도나 거문고의 이치보다 모자라는 것 같지가않았다.
며칠 동안 녹죽옹은 대나무 그릇을 팔고 왔으므로, 그 노파와 벽하나의 사이를 두고 가르침을 받았다. 나중에는 영호충이 거문고에 대해 여러가지 의문점을 품었으나 녹죽옹은 대답을 할 수 없어 반드시 그 노파가 친히 지적을 해 주었고 가르침을 주었다. 그러나 영호충은 끝내 그 노파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단지 그녀의 목소리는 가볍고 부드러워 마치 아리따운 처녀 목소리 같았고 노파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는 생각하기를 그녀는 음악을 알고 어려서부터 음악에 도취되어 깊이 빠졌기때문에 말소리 조차 듣기 좋아졌고 늙어서까지 변하지 않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어느날, 그 노파는 그에게 '유소아(有所思)' 를 전수해 주었다.
이것은 한나라 때의 곳으로 부드러운 곡조였다. 영호충은 몇번 듣고 나서 그대로 거문고를 탔다. 그는 이 곡을 타면서 자기도 모르게 어렸을 때 자기와 악영산 둘이 같이 뛰어놀고 장난치던 그런 추억을 회상했다. 또 폭포에서 함께 검술을 연마하고, 사과애에 밥을 날라다 주고, 소사매는 자기에게 많은 밀어를 속삭이고 장래를 약속했는데 나중에 무단히 임평지라는 사람이 나타나자 소사매는 작에게서 멀어져 갔건 일을 회상하게 되었다. 마음이 처량하고 울적해져 갑자기 가락이 변해 자기가 어렸을 적에 있던 복건지방의 노래가 그 속에 섞여 어울렸다. 그것은 바로 악영산이 산허리를 내려갈 때 불렀던 노래였다. 그는 흠칫 놀라 손을 멈추고 타지 않았다.
그 노파는 온화한 말투로 말했다.

[이 '유소사' 곡은 자네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군. 마음과 정이 융합하여 이 곡의 이치를 깊이 깨닫게 되고 틀립없이 과거의 일을 회상했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복건지방의 노래가 그 곡조에서 나오니 실로 의아하게 생각된다. 무슨 연고인가?]

영호충의 성격은 본래 호방했다. 그 노파가 이십여일 동안 자기에게 극히 잘 해주었음을 느끼고 참지 못하고 자기와 악영산과의 관계를 다 이야기해주었다. 말을 다 하고 나자 심히 부끄러웠다.

[할머니, 제자의 진정한 마음을 말씀드렸읍니다. 쓸데없이 한참동안 떠들었군요. 정말로...... 정말로......]

그 노파는 가볍게 탄식하고 말했다.

[인연이라는 것은 억지로 구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옛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각기 자기의 인연이 있으니 부러워하지 말아라' 영호충, 자네는 오늘날 비록 실의에 빠져 있지만 다른 날 좋은 인연이 있을 걸세.]

영호충은 큰 소리로 말했다.

[제자는 앞으로 며칠을 더 살지도 모르는데 가정을 이룬다는 것은 영원히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요.]

그 노파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거문고 소리가 가볍게 들려왔다. 곡조는 바로 '청심보선주' 였다. 영호충은 잠시 듣다가 잠이 들려고 했다. 그 노파는 거문고를 멈추고 말했다.

[나는 지금부터 이 곡을 자네에게 전수해 주겠다. 아마십일 정도면 이 곡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이것을 연주하면 때때로 공력이 다 회복되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나아질 것이다.]
영호충은 대답했다.

[녜.]

그 노파는 즉시 악보의 손놀림을 전수해 주었고 영호충은 열심히 기억했다.
이렇게 나흘 동안 배웠다. 오일째 되는 날 영호충이 거문고를 배우러 가는데 노덕약이 헐레벌떡 뛰어오며 말했다.

[대사형, 사부님의 분부이십니다. 우리는 내일 떠난다 합니다.]
영호충은 깜짝 놀라 말했다.

[내일이면 간다고? 나는...... 나는......]

영호충은 '나는 아직 그 곡을 다 배우지도 않았는데' 하고 말하고 싶었으나 끝내 그 말을 하지 못했다.
노덕약은 말했다.

[사모님께서 짐을 정리하라고 하십니다. 내일 아침에 길을 떠난답니다.]

영호충은 대답을 하고 빠른 걸음으로 녹죽소사에 도착해서 그 노파에게 말했다.

[제자는 내일 떠나야만 합니다.]

그 노파는 깜짝 놀라 한참동안 말을 않더니 한참 후에 비로소 가볍게 말했다.

[그렇게 급하게 가다니, 자넨...... 자넨 이 곡을 아직 다 배우지 않았는데.]

영호충은 말했다.

[제자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단지 사부님의 명령을 어기기가 뭣합니다. 더우기 우리는 타향에 와 있고 다른 사람 집에 오래 머물 수 없는 입장입니다.]

그 할머니는 말했다.

[하긴 그렇군.]

그녀는 어제와 다름없이 그에게 곡을 전수해 주었다.
영호충은 그 노파와 며칠간 배우면서도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거문고를 탈 때와 말할 때 그녀가 자기에게 관심을 두고 염려하고 있고, 친형제와 다름없이 대해 준다는 것을 알았다. 단지 그녀의 성격이 담백하여 어쩌다가 한 마디 관심있는말을 하면 바로 다른 말로 돌리고 그에게 자기의 뜻을 밝히려고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 세상에는 영호충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은 애당초 악불군 부부와 악영산과 육후아, 네 사람이었다. 지금 육후아는 이미 죽고 악영산은 전심전력으로 임평지에게 마음을 두고 있고 사부님과 사모님은 자기에게 의심을 품고 있으니 진정 친한 사람은 바로 녹죽옹과 이 노파 두 사람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날 그는 몇번이고 녹죽옹에게 말을 하고 싶었다. 이 작은 골목에 머물면서 음악도 배우고 대나무 짜는 까술을 배워 화산파에 돌아가지 않고 지내고 싶다는 말을 하려고 했으나 악영산의 그림자가 시종 자기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는 생각했다.

(소사매가 나를 아는 체도 안 하고 쳐다보지도 않는다 해도 날마다 그녀를 쳐다볼 수 잇다면, 그녀의 뒷모습이라도 볼 수 있다면 그녀의 한 마디의 목소리라도 들을 수 있다면, 나는 만족한다.
그녀가 나에게 아는 체를 하든 안 하든 무슨 상관 있겠는가?)
그는 녹죽옹과 그 노파에게 많은 정을 느기고 있었다. 그 할머니가 묵고 있는 뜰 앞에 내려가 무릎을 끓고 절을 했다. 대나무 발 안에서 그 노파도 무릎을 끓고 예를 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비록 자네에게 거문고 타는 기법을 가르쳤지만 그것은 자네가 나에게 이 곡을 선사한데 대한 보답인데 자네는 어찌 그런 큰 예로써 나를 대하는가?]

영호충은 말했다.

[오늘 떠나면 어느날 어느때 다시 두 분을 볼 수 있겠읍니까? 영호충은 가르침을 받았으니, 죽지 않는다면 다시 낙양에 와서 할머님과 죽옹을 다시 방문하겠읍니다.]

마음속에 갑자기 생각이 떠올랐다.

(이 두분은 나이가 많아 얼마나 더 사실지...... 다음에 내가 낙양땅에 와서도 다시는 뵙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그는 인생이 꿈과 같고 이슬과 같다고 생각하며 참지 못하고 흐느껴 울었다.
그 노파는 말했다.

[영호충, 나는 지금 자네에게 한 마디 권하고 싶네.]
영호충은 말했다.

[녜, 어떤 가르침이라도 이 영호충은 절대로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노파는 대답하지 않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살며시 말했다.

[강호의 풍파는 험악하니 몸조심하게나.]

영호충은 말했다.

[녜.]

그는 마음이 시큰해져 허리를 굽히고 녹죽옹에게 인사를 했다.
왼쪽 방에서는 거문고 타는 소리가 울리는데 바로 유소사라는 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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