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5~6

나단비 | 2024.02.10 09:35:53 댓글: 4 조회: 147 추천: 1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46439
5

앤의 지난 이야기





앤이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 말했다.

“있잖아요, 아주머니. 전 이 여행을 즐겁게 하기로마음먹었어요. 전 무슨 일이든 즐겁게 생각하자고 마음을 먹으면 거의 그렇게 할 수 있거든요. 물론 마음을 아주 강하게 먹어야 하지만요. 거기에 가는 동안만큼은 고아원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생각은 잊어버릴 거예요. 그냥 이 여행만 생각하겠어요. 아! 저기 좀 보세요, 일찍 피어난 들장미가 있어요! 정말로 예쁘지 않아요? 장미로 태어난 것이 아주 기쁜 모양이에요. 장미가 말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럼 우리에게 아주 아름다운 얘기를 많이 들려줄 거예요. 분홍 색깔은 이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색깔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전 분홍색이 아주 좋아요. 그렇지만 전 분홍색 옷은 입을 수가 없답니다. 빨간 머리를 가진 사람은 분홍색 옷을 입을 수 없어요. 상상만 하는 것도 안 돼요. 아주머니, 젊었을 때는 빨간 머리였지만 어른이 된 다음 머리 색깔이 바뀌었다는 사람을 혹시 모르세요?”

“아니, 그런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리고 네 머리카락 색깔도 바뀔 것 같지는 않구나.”

마릴라가 냉정하게 대답했다.

앤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또 하나의 희망이 사라져버렸네요. 제 인생은 완전히 ‘꺼져버린 희망의 묘지’ 같아요. 아, 이 말은 제가 읽은 책에 나온 말이에요. 실망스러운 일이 일어날 때마다저 자신을 위로하려고 하는 말이기도 하고요.”

“난 그 말이 왜 위안이 되는 말이라는 건지 모르겠구나.”

마릴라가 말했다.

“아주 고상하고 낭만적으로 들리잖아요. 소설 속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전 낭만적인 것을 아주 좋아하거든요. 꺼져버린 희망의 묘지는 최고로 낭만적인 말이에요. 안 그런가요? 저도 그런 묘지를 마음속에 갖고 있다는 게 너무 기뻐요. 우리가 오늘‘반짝이는 호수’를 지나가나요?”

“배리의 연못을 말하는 거라면, 아니다. 해안가 길을 따라갈 거야.”

“해안가라니 너무 근사해요.”

앤이 마치 꿈을 꾸듯 말했다.

“그런데 이름처럼 아름다운 곳인가요? 아주머니가 해안가라고 말씀하시자마자 제 마음속에 그림이 그려졌답니다! 그리고 화이트 샌즈도 참 예쁜 이름이에요. 하지만 에이번리만큼은 아니에요. 에이번리는 정말로 아름다운 이름이거든요. 꼭음악 소리처럼 들려요. 화이트 샌즈까지는 얼마나 되죠?”

“8킬로미터쯤 가야 한다. 네가 말을 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한 모양인데, 차라리 지금까지 네가 살아온 얘기를 해보지 그러니.”

“아, 제 얘긴 별로 할 게 없어요.저 자신에 관해 상상한 얘기가 훨씬 더 재미있을 거예요.”

앤이 애원이라도 하듯 말했다.

“아니, 난 네 상상 얘기는 별로 듣고 싶지 않다. 그냥 사실 얘기만 해보렴. 처음부터 말이야. 넌 어디서 태어났고 몇 살이나 되었니?”

“전 지난 3월에 열한 살이 되었어요.”

앤이 사실만을 얘기하기로 체념을 한 듯 한숨을 푹 내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전 노바스코샤의 볼링브로크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 이름은 월터 셜리이고 볼링브로크 고등학교의 선생님이셨어요. 어머니 이름은 베르타 셜리예요, 월터와 베르타, 멋진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제 부모님이 멋진 이름을 갖고 있어 기뻐요. 아버지 이름이 제데디아 같은 이름이었다면 정말 창피했을 것 같아요, 그렇지 않나요?”

“이름이 무슨 상관이니, 이름이야 어떻든 행실만 올바르면 된단다.”

바르고 유익한 교훈을 가르쳐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마릴라가 말했다.

“글쎄요, 전 잘 모르겠어요.”

앤은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장미는 다른 이름을 갖고 있어도 장미향이 날 거라는 얘기를 전에 책에서 읽은 적이 있긴 하지만5) 그 말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었어요. 만약 장미를 엉겅퀴나 양상추라고 부른다면 장미가 그렇게 아름다운 꽃이 될 수 있었을까요? 하지만 우리 아빠 이름이 제데디아라 해도 여전히 좋은 분일 거라는 생각은 들어요. 그렇다고는 해도 시련이었을 거예요. 엄마도 아빠랑 같은 학교 선생님이었지만 결혼을 하고 나서는 일을 그만두었다고 해요. 남편을 내조하는 일만도 힘겨운 일이잖아요. 토머스 부인의 말로는 둘 다 어렸고 교회당의 쥐처럼 아주 가난했대요. 두 분은 볼링브로크의 아주 작은 노란색 집에서 결혼 생활을 시작했어요. 물론 전 그 집을 본 적이 없지만 머릿속으로 상상이야 한없이 해보았죠. 응접실 창문에는 인동꽃 덩굴이 덮였고 앞뜰에는 라일락 나무들이 그리고 대문 안쪽으로는 은방울꽃이 피었을 거예요. 창문마다 모슬린 커튼이 걸려 있고, 모슬린 커튼을 걸면 집이 아주 우아해 보이거든요. 저는 바로 그 집에서 태어났어요. 토머스 아주머니는 저처럼 못생긴 아이는 처음 봤다고 하셨답니다. 너무 마르고 작은 몸에 눈만 왕방울처럼 커서 볼품이라고는 없었대요. 그래도 엄마는 제가 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아기라고 생각했대요. 전 우리 엄마가 남의 집안일이나 돕는 가난한 아주머니보다는 더 올바른 판단을 하셨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생각지 않으세요? 어쨌거나 엄마가 제 모습에 만족하셨다니 전 기뻐요. 제가 엄마를 실망시켰다면 너무 슬펐을 거예요. 그 후로 엄마가 곧 돌아가셨거든요. 제가 태어난 지 석 달 만에 열병에 걸려 돌아가셨대요. 제가 엄마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만이라도 사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엄마’라고 부르면 마음이 너무 포근해져요. 그렇지 않나요? 엄마가 돌아가신 지 4일 만에 아빠도 같은 열병으로 돌아가셨다고 해요. 그래서 전 고아가 되어버렸고 마을 사람들은 저를 어떻게 해야 할지 무척 난감해했대요. 토머스 아주머니도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고 했어요. 그때도 저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대요. 그게 제 운명인가 봐요. 엄마와 아빠 모두 먼 곳에서 와서 친척이라곤 없었거든요. 결국 토머스 아주머니가 저를 맡기로 했대요. 아주머니도 가난하고 남편은 항상 술에 취해 사는 사람이었지만요. 토머스 아주머니는 우유를 먹여 저를 키웠대요. 그런데 아주머니, 우유를 먹고 큰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나아야만 하는 무슨 이유라도 있는 건가요? 제가 못된 장난을 칠 때마다 토머스 아주머니는 우유를 먹여 키웠는데 어떻게 그렇게 못된 짓을 할 수 있느냐며 저를 야단치셨거든요.

토머스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볼링브로크에서 매리스빌로 이사를 했어요. 저도 함께 가서 여덟 살이 될 때까지 거기서 살았죠. 그 집에는 저보다 어린아이들이 넷이나 있어서 제가 아이 돌보는 일을 거들었어요. 그 집 아이들은 모두 다 거의 똑같이 생겼었어요. 그런데 얼마 안 있어 토머스 아저씨가 기차에서 떨어져 돌아가셨어요. 그러자 토머스 아저씨의 어머니가 토머스 부인과 아이들을 데려가겠다고 했지만 저는 데려갈 수 없다고 했어요. 토머스 아주머니는 저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난처해하셨죠. 그러던 차에 강 윗마을의 하몬드 부인이 저를 데려가겠다고 나섰어요. 제가 아이들을 잘 본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전 강 상류에 있는 하몬드 아저씨 댁에서 살게 되었어요. 나무 그루터기가 여기저기 남아 있는 작은 개간지였는데 정말로 쓸쓸한 곳이 었답니다. 저한테 상상력이란 게 없었더라면 그런 곳에서 절대 살 수 없었을 거예요. 하몬드 아저씨는 그곳에 있는 작은 제재소에서 일을 했고, 아이들이 모두 여덟 명이나 됐어요. 세 번이나 쌍둥이가 태어났지 뭐예요. 전 아기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줄줄이 세 쌍둥이는 너무 했어요. 그래서 마지막 쌍둥이가 태어났을 때는 하몬드 아주머니께 너무 했다고 말을 했죠. 그 많은 아이를 돌보다 보면 너무 끔찍스럽게 피곤했거든요.

하몬드 아주머니 댁에서 2년이 넘게 살았어요. 그런데 하몬드 아저씨가 돌아가시고 아주머니 혼자서 아이들을 키울 수 없게 되자 아이들을친척 집에 나누어 맡기고는 미국으로 떠나버렸답니다. 전 호프타운의 고아원으로 갈 수밖에 없었어요. 저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요. 사실은 고아원에서도 저를 원하지 않았어요. 아이들이 너무 많아서 저를 받아줄 수 없다고 했죠.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절 받아주어 스펜서 아주머니가 올 때까지 넉 달 동안 그곳에서 살았어요.”

앤이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며 이야기를 마쳤다. 이번에는 안도의 한숨이었다. 자기를 환영해주지 않았던 세상에서의 경험을 이야기하기가 괴로웠다.

“학교에는 다녔니?”

마릴라가 마차를 해안가 길로 돌리며 물었다.

“조금요. 토머스 아주머니와 살던 마지막 해 얼마간 다니긴 했지만 강 상류로 올라가 살 때는 학교가 너무 멀었고 겨울철에는 걸어 다닐 수도 없었어요. 여름엔 학교가 방학을 해서 못 다녔고요. 봄철과 가을철에만 학교에 갈 수 있었죠. 하지만 고아원에서 는 학교에 다녔어요. 전 글도 꽤 잘 읽고 외울 수 있는 시도 아주 많아요. <호엔린든의 전투>6), <플로든 전투 이후의 에든버러>7), <라인 강 변의 빙겐>8), <호수의 여인>9), 그리고 제임스 톰프슨의 <사계>10)도 거의 외울 수 있어요. 아주머니는 등골이 오싹해지게 하는 시들을 좋아하지 않으세요? 5학년 읽기 책에 나온 <폴란드의 멸망>11)은 정말로 감동 그 자체였어요. 물론 전 4학년이라 5학년 읽기 책을 갖고 있지 않지만 언니들이 저한테 책을 빌려줬거든요.”

“토머스 부인과 하몬드 부인이 너한테 잘해주기는 했니?”

마릴라가 곁눈으로 앤을 바라보며 물었다.

“네에.”

앤이 주저하면서 대답했다. 감수성이 풍부한 작은 얼굴이 갑자기 붉게 달아오르며 이마에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음, 그분들도 제게 될 수 있는 한 잘해주려고 했지만…… 잘해주고 싶은 마음만 있다면 항상 그렇지는 않더라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거잖아요. 그분들도 걱정거리가 많았어요. 항상 남편이 술만 마시거나연달아 한꺼번에 태어난쌍둥이가 세 쌍이나 된다면 힘들지 않겠어요? 하지만 저는 그분들이 제게 잘해주고 싶어 했다는 것은한 번도의심해본 적이 없어요.”

마릴라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앤은 넋이 나간 듯 조용히 해안가를 바라보았고, 마릴라는 깊은 생각에 잠겨 말을 몰았다. 갑자기 앤에 대한 동정심이 걷잡을 수 없이 밀려왔다. 이 아이는 지금까지 얼마나 배가 고프고 애정에 굶주린 채 살아왔을까. 그동안 살아온 앤의 얘기를 들으며 마릴라는 앤이 보살펴주는 사람도 없이 얼마나 고되고 힘들게 살아왔을지 짐작이 되었다. 이제는 가족이 생긴다는 기대로 얼마나 기뻤을지도 상상이 되었다. 아이가 고아원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면 정말 안 될 일이었다. 마릴라는 매슈의 무책임한 변덕을 곱게 받아들이고 이 아이를 집에 두도록 해야 할 것 같았다. 매슈가 바라는 일이기도 하고 괜찮은 아이 같기도 하니 가르치면 반듯하게 자랄 것도 같았다.

‘말이 좀 많긴 하지만, 그것도 잘 가르치면 나아질 것이고 아이가 하는 말에 거칠거나 속된 말투 같은 건 없지 않은가. 얌전하기도 하고. 점잖은 집안의 아이답기도 해.’

마릴라는 생각했다. 둘은 우거진 숲과 황량한 들판과 인적 없는 길을 지났다. 해안가 오른쪽으로는 숲을 이룬 전나무들이 오랜 세월 바닷바람에도 꿋꿋하게 서 있었고 왼편에는 가파른 붉은 사암 절벽 낭떠러지가 바로 길옆으로 나 있어, 혹여 이 밤색 암말보다 더 불안정한 말을 타고 그 길을 달렸더라면 간담이 서늘했을 것이다. 절벽 아래에는 파도에 시달려 울퉁불퉁해진 바위들이 층층이 쌓여 있었고 바다의 보석 같은 자갈들이 점점이 박힌 작은 모래사장이 펼쳐졌다. 더 멀리로는 푸르게 물결치는 바다 위를 나는 갈매기들의 날개가 햇살에 은빛으로 반짝거렸다.

“참 아름다운 바다예요. 그렇죠, 아주머니?”

눈을 크게 뜨고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고 앉아 있던 앤이 입을 열었다.

“매리스빌에 살 적에 토머스 아저씨가짐 마차를 빌려 우리 모두를 태우고 멀리 12킬로미터나 떨어진 해변으로 데려간 적이 있었어요. 전 그날 아이들한테서 잠시도 눈을 뗄 수 없었지만 매 순간 가슴이 얼마나 벅찼는지 몰라요. 그 후로도 몇 년 동안이나 그날의 순간순간을 행복하게 꿈꿀 수 있었어요. 하지만 이 해변은 매리스빌 해변보다도 훨씬 더 아름다워요. 저 갈매기들도 멋있지 않나요? 아주머니는 갈매기가 되어보고 싶지 않으세요? 전 갈매기가 되고 싶어요. 소녀가 될 수 없다면요. 해가 떠오를 때 해와 함께 일어나 수면으로 스윽 내려가 저 아름다운 푸른 바다를 온종일 날아다니다 밤이 되면 둥지로 돌아간다면…… 정말 멋질 것 같아요. 아, 제가 저 갈매기가 되어 바다 위를 나는 상상이 돼요. 그런데 저 앞에 보이는 큰 집은 뭐죠?”

“저건 화이트 샌즈 호텔이란다. 커크 씨가 운영하고 있는데 아직 손님들이 찾을 철은 아니지. 여름이 되면 미국사람들이 찾아온단다. 그 사람들은 이 해변이 여름을 보내기에 좋은 곳이라고 여기나 보더라.”

“전저 집이스펜서 씨 댁이면 어쩌나 했어요.저기에 도착하고싶지가 않아요. 모든 것이 끝나버릴 것 같아서요.”
앤이 신음하듯 말했다.


5)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줄리엣이 하는 말로, 어떤 것이든 그 본질이 중요하지 이름이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
6) <On the Battle of Hohenlinden>: 스코틀랜드 작가인 토머스 캠벨(Thomas Campbell)의 시집(1803)에 수록된 시로, 1800년 12월 나폴레옹 전쟁 때 프랑스 혁명군이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한 장렬한 사투를 묘사한 시.
7) <Edinburgh After Flodden>: 스코틀랜드 시인 W. E. 에이튼(Aytoun)의 시로, 1513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국경지대였던 플로덴에서 벌어졌던 전투에서 스코틀랜드 국왕과 병사들이 모두 죽음을 맞자 비탄에 빠진 에든버러의 모습을 묘사한 시.
8) <Bingen on the Rhine>: 스코틀랜드의 작가 캐롤라인 엘리자베스 노톤(Caroline E. Norton, 1808~1877)의 시로, 라인 강 변을 함께 거닐었던 여인을 생각하며 죽어가는 병사의 이야기를 쓴 시.
9) <The Lady of the Lake>: 스코틀랜드 작가 월터 스콧(Walter Scott, 1771~1832)의 서사시. 앨런이라는 한 여인을 둘러싸고 세 기사가 결투하는 내용으로 1810년에 출판.
10) <The Seasons>: 스코틀랜드 시인 제임스 톰슨(James Thomson, 1700~1748)의 시. 겨울(1726)을 시작으로 여름(1727), 봄(1728), 가을(1730)이 나왔고 1744년에 개작되었다.
11) <The Downfall of Poland>: 스코틀랜드 작가 토머스 캠벨(Thomas Campbell)의 시.




6

마릴라 커스버트의 결심





그러나 두 사람은 기어코 도착하고 말았다. 스펜서 부인은 화이트 샌즈 만의 커다란 노란 집에 살고 있었다. 얼굴 가득 놀라움과 환영의 미소를 담고 부인이 문가로 달려 나왔다.

“어머나, 세상에, 마릴라가 오늘 우리 집에 방문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질 못했어요. 어쨌거나 반가워요. 말을 들여놓으세요. 잘 있었니, 앤?”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대답하는 앤의 웃음기 없는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가득 드리워져 있었다.

“말이 잠깐 쉴 동안만 머물도록 하지요. 매슈 오라버니에게 일찍 돌아가겠다고 했어요. 사실은 스펜서 부인, 어딘가에서 이해할 수 없는 실수가 벌어졌어요. 그래서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려고 왔답니다. 매슈 오라버니와 저는 고아원에서 사내아이를데려다 달라는 말을 전했거든요. 우리는 부인의 동생 로버트에게 열 살이나 열한 살 된남자아이를 원한다고 말했어요.”

마릴라가 말했다.

“정말이에요?”

스펜서 부인이 당황해하며 물었다.

“로버트가 딸 낸시를 보내 마릴라 당신이여자아이를 원한다고 했어요. 플로라 제인, 너도 그렇게 들었지?”

부인이 계단에 나와 있는 딸에게 동의를 구했다.

“낸시가 분명히 그랬어요, 미스 커스버트 아주머니.”

플로라 제인도 맞장구를 쳤다.

“정말 죄송해요. 안타깝기는 하지만 제 잘못도 아니에요. 저는 최선을 다해 부탁받은 대로 했으니까요. 낸시도 정말 못 말릴 아이예요. 그렇게 건성이라 항상 혼이 나는데도 그러네요.”

스펜서 부인이 말했다.

“제 잘못이에요. 우리가 직접 와서 말을 했어야죠. 중요한 일인데, 그런 식으로 말이 잘못 전해질 수도 있다는 걸 미처 생각지 못했어요. 실수는 이미 벌어졌으니, 이제 일을 바로잡아야죠. 이 아이를 고아원으로 다시 돌려보내도 될까요? 고아원에서 다시 받아 줄까 모르겠어요.”

“아마 그럴 거예요.”

대답을 한 스펜서 부인이 생각을 좀하더니 덧붙여 말했다.

“하지만 아이를 고아원에 돌려보낼 필요는 없을 거예요. 피터 블루엣 부인이 어제 우리에게 자기 일을 도와줄여자아이를 구해달라고 했거든요. 피터 부인네 집은 식구가 아주 많아서 도와줄 사람을 구하기가 쉽지 않은가 봐요. 앤이라면 마음에 들어할 거예요. 이거야말로 신의 뜻인 것 같네요.”

마릴라는 이것이 왜 신의 뜻이라는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달갑지 않은 고아 애를 보내버릴 기회가 기대치도 않게 찾아오긴 했지만 도무지 잘되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마릴라도 피터 블루엣 부인을 본 적이 있었다. 몸집이 작고 잔소리가 심할 것 같은 인상에 몸에 살이라고는 한 점도 없는 여자였다. 거기다 소문에 ‘사람을 호되게 부리는’ 사람이라고 했다. 블루엣 부인 집에서 일하다 해고당한여자아이들로부터 들은 얘기로는 부인의 성질이 무척 까다롭고 인색하다고 했다. 게다가 아이들도 버릇이 없고 서로 싸우기만 한다고 했다. 마릴라는 앤을 그런 인정 없는 여자한테 보내자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글쎄요, 잠시 들어가서 의논을 좀 해보도록 하죠.”

마릴라가 말했다.

“어머나, 마침 저기 블루엣 부인이 오네요!”

스펜서 부인이 환호하며 손님들을 응접실로 맞아들였다. 응접실 창문에는 초록색 블라인드가 드리워져 있었다. 거실 공기는 그렇게 오랫동안 블라인드에 가려 따뜻한 바깥 공기로 바뀌지 못하고 갇혀만 있었던 듯 썰렁했다.

“우리가 이 문제를 당장 해결할 수 있어 천만다행이에요. 거기 안락의자에 앉으세요, 마릴라. 앤은 거기 긴 의자에 얌전히 앉아 있어라. 모자는 이리 주고. 플로라 제인, 가서 주전자를 좀 올려놓겠니? 안녕하세요, 블루엣 부인. 우리는 방금 부인이 마침 와주어 잘되었다는 얘기를 하고 있었어요. 두 분을 소개해드릴게요. 블루엣 부인이고요, 이쪽은 미스 커스버트.아 참, 잠깐 실례해야겠어요, 깜빡 잊고 플로라 제인에게 오븐에서 빵을 꺼내라고 말하지 않았네요.”

스펜서 부인이 블라인드를 올리고는 서둘러 방을 나갔다.앤은 무릎에 두 손을 마주 잡아 올려놓고 긴 의자에 앉아 넋이 나간 사람처럼 말없이 블루엣 부인을 바라보았다. 내가 이 뾰족한 얼굴에, 매서운 눈을 가진 부인에게 보내지는 걸까?앤은 목이 메어오고 눈에는 고통스러운 눈물이 번졌다. 눈물이 왈칵 쏟아져버리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는데 스펜서 부인이 웃음 띤 얼굴에 달뜬 걸음걸이로 돌아왔다. 그 걸어 들어오는 품새가 어찌나 당당한지 육체적인 문제든 정신적인 문제든 어떤 역경이라도 닥치기만 하면 바로 이 자리에서 해결해줄 수 있다고 온몸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이 아이의 일로 실수가 있었던 것 같아요, 블루엣 부인. 전 커스버트 남매가여자아이를 원하는 줄 알았거든요. 하지만남자아이를 원하고 있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부인이 어제 말한 대로여자아이를 원하신다면, 바로 이 아이를 데려가시면 될 것 같아요.”

스펜서 부인이 말했다.

블루엣 부인의 눈길이 앤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내렸다.

“넌 몇 살이나 되었고 이름은 뭐니?”

부인이 물었다.

“앤 셜리요.”

잔뜩 움츠러든 아이가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이때만큼은 스펠링이어쩌고저쩌고할여유도 없었다.

“열한 살이에요.”

“흐흠! 볼품은 별로 없지만야무지기는 하겠다. 야무진 애가 아무래도 낫지. 그래, 내가 너를 데려갈 테니 말을 잘 들어야 할 거다.고분고분하게 굴고, 똑똑하게, 예의 바르게 말이다. 내가 너를 먹여주는 만큼 밥값을 해야 한다고. 내 말을 명심해야 해. 그래요, 제가 이 아이를 데려가겠어요. 아기가 얼마나 보채는지 제가 완전히 지쳐버렸어요. 괜찮으시다면 지금 당장 이 아이를 우리 집으로 데려가고 싶은데요, 미스 커스버트.”

마릴라가 앤을 바라보았다. 말은 없었지만 비참한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앤의 창백해진 얼굴에 마릴라의 마음이 흔들렸다. 무력한 작은 생명이 방금 빠져나왔다고 믿었던 불행의 함정에 다시 빠져버린 것 같은 모습이었다. 마릴라는 지금 이 아이가 말없이 호소하고 있는 것을 모른 척한다면 평생 마음이 편치 못할 것 같았다. 더군다나 블루엣 부인이 마음에 들지도 않았다. 잔뜩 긴장해 있는 아이를 저런 여자에게 넘겨준다면! 안 돼, 그런 무책임한 짓을 할 수는 없어!

“글쎄, 판단이 잘 서질 않는군요.”

마릴라가 천천히 입을 뗐다.

“매슈 오라버니도 저도 저 아이를 되돌려 보내겠다고 완전히 결정한 것은 아니랍니다. 사실 오라버니는 저 아이를 우리가 키웠으면 해요. 저는 단지 이런 실수가 어떻게 일어나게 됐는지 그 이유나 알아보려고 왔어요. 다시 아이를 집으로 데려가 매슈 오라버니와 상의를 해봐야겠어요. 오라버니와 상의를 하지 않고 제 마음대로 무슨 일을 결정할 수는 없거든요. 만일 우리가 저 아이를 두지 않기로 결정하면 내일 밤에 댁으로 보내드릴게요. 만일 그런 일이 없으면 우리가 데리고 있기로 한 거니 그렇게 아세요. 그러면 되겠죠, 블루엣 부인?”

“그렇게 하도록 하세요.”

블루엣 부인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마릴라가 그렇게 말하자 앤의 얼굴은 활짝 피어났다. 처음에는 절망의 표정이 사라졌고, 다음으로는 희망이 슬며시 나타났으며, 이어 두 눈이 새벽별처럼 빛나면서 마치 딴 사람으로 바뀐 것 같았다. 잠시 후 블루엣 부인이 빌리러 온 요리법을 적은 노트를 찾아주려고 스펜서 부인과 블루엣 부인이 나가자 앤이 벌떡 일어나 방을 가로질러 날 듯이 마릴라에게 달려갔다.

“오, 커스버트 아주머니, 저를‘초록 지붕 집’에 데리고 있겠다니, 진심이세요?”

앤은 큰 소리로 말하면 이 꿈같은 일이 사라져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정말로 그렇게 말씀하신 거예요? 아니면 제가 상상을 하고 있는 건가요?”

“상상과 현실이 구별이 안 될 정도라면 너의 그 상상력을 통제하는 법을 좀 배워야겠구나.”

마릴라가 핀잔을 주었다.

“네가 들은 그대로지, 더 이상은 아니야. 아직 결정된 것은 아니라고. 우리가 너를 블루엣 부인에게 보낼지도 모르고. 그 부인이 나보다 너를 훨씬 더 필요로 하니까.”

“그 집에 가서 살아야 한다면 차라리 고아원으로 돌아가겠어요. 그 아줌마는 꼭 송곳처럼 생겼단 말이에요.”

앤이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마릴라는 웃음이 나오려고 했지만 앤에게 그런 말을 하면 안 된다고 훈계하느라 억지로 웃음을 참았다.

“너처럼 어린아이가 어른에게, 그것도 낯선 사람에게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 네 자리로 돌아가서 조용히 앉아 있어라. 입도 꼭 다물고. 얌전하게 굴어야지.”

마릴라가 엄히 말했다.

“절 아주머니 댁에 있게만 해주신다면 전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어요.”

앤은 자기 의자로 돌아가 다소곳하게 앉으며 말했다.

그날저녁때둘이‘초록 지붕 집’으로 돌아오자 매슈가 오솔길까지 나와 있었다. 저 멀리에서 매슈가 서성대는 모습을 본 마릴라는 그 이유를 짐작하고도 남았다. 매슈의 얼굴에는 마릴라가 다시 앤을 데리고 돌아온 것을 보고 안도하는 표정이 역력했고 마릴라도 당연히 그럴 줄 알았지만 이 일에 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두 오누이가 헛간 뒷마당에서 젖소 우유를 짤 때에야 마릴라는 간단하게 앤의 과거와 스펜서 부인을 만난 이야기를 해주었다.

“블루엣 부인 같은 여자에게라면 개라도 주고 싶지 않겠다.”

매슈가 평상시와는 다르게 기세 좋게 한마디 던졌다.

“저도 그 부인 같은 사람은 좋아하지 않아요.”

마릴라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앤을 그 부인에게 보내든가, 우리가 데리고 있든가 해야 할 텐데, 오라버니도 저 아이가 맘에 드는 것 같고 저도 그럴 생각이 있는지,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을 하는 건지 여하튼 그러네요. 그 생각을 하도 많이 해서 이제는 아이를 데리고 있어야 하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의무감 같은 거죠. 전 아이를 키워본 경험이 없으니까, 더군다나여자아이라면 더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해볼 참이에요. 제 생각에는 매슈 오라버니, 앤이 우리 집에 있어도 될 것 같아요.”

내성적이기만 하던 매슈의 얼굴이 기쁨으로 빛이 났다.

“그래, 나도 네가 결국에는 그렇게 결론 내릴 줄 알았다, 마릴라. 저 아이는 정말 재미있는 아이니까.”

매슈가 말했다.

“오라버니가 저 아이를 쓸모 있는 아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거예요. 하지만 저 아이를 쓸모 있는 아이로 가르치는 일이 제가 해야 할 일인 것 같네요. 그러니 오라버니는 제가 아이를 다루는 방식에 상관할 생각일랑 마세요. 나이만 많은 독신녀라 아이를 어떻게 기르는지는 잘 모를지 몰라도 나이 든 독신남보다야 낫겠죠. 그러니까 저 아이 교육은 저한테 맡겨두시라고요. 제가 실패한다면 그때 참견하시든가 하시고요.”

마릴라가 대꾸했다.

“그래, 그래야지, 마릴라. 네가 원하는 대로 해라. 난 그저 저 아이를 버릇없는 애로 만들지 않을 만큼은 다정하게 대해주었으면 한다. 아이가 널 따르기만 한다면 네 마음에 들게 교육시킬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

매슈가 동의했다.

매슈가 여자 일에 너무 나선다 싶은 생각에 마릴라는 흥하고 코웃음을 치고는 우유 양동이를 들고 제유실로 휙 가버렸다.

“앤에게 여기서 지내게 되었다는 걸 오늘 밤에는 하지 말아야겠어. 너무 흥분해서뜬눈으로 밤을 새울지도 모르잖아. 마릴라 커스버트, 너도 저 아이가 꽤 좋은 모양이구나. 고아여자아이를 입양하게 될 줄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 정말 놀라자빠질 일이지. 그렇지만 매슈 오라버니가 먼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더 놀랄 일이지 뭐야.여자아이라면 기겁을 하고 싫어하더니만. 어쨌거나 결정을 하긴 했지만 앞으로 일이 어떻게 될지는 알 수가 없는 노릇이지.”

우유를 크림제조기에 부으면서 마릴라가 혼잣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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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 ♡.38.♡.37
뉘썬2뉘썬2 (♡.169.♡.51) - 2024/02/29 04:07:28

메리는 열살.앤은 열한살.가장 소녀소녀한 나이인데 메리두 못생겻다고 표현을 하더니
앤도 못생긴 이미지로 나오네요.머리가 빨간색이여서 분홍색옷을 못입는다니 쫌 슬퍼요.
나도 분홍색을 좋아해요.

앤을 성질이 까다로운 블루엣부인한테 보내기 싫어서 집으로 데려오는 마릴라두 참 착
한거 같아요.그보다두 영리한 앤에게 빠진듯.이래서 남자들이 딸을더 선호하는 같아요.
쫑알쫑알 쏼라쏼라 재밋으니까요.

그리고 달뜬 걸음걸이.소설에서는 평소안쓰던 단어들이 많이나와서 참 신비로와요.ㅋㅋ

나단비 (♡.252.♡.103) - 2024/02/29 15:28:29

앤이 꾸미지 않아서 못생겼다고 처음에는 표현된 것 같아요. 곱슬머리에 빨간머리, 주근깨까지 다 컴플렉스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그게 사랑스러운건데 말이죠.

뉘썬2뉘썬2 (♡.169.♡.51) - 2024/03/01 04:39:29

눈아래만 잇는 주근깨는 사랑스러워요.일부러 그런화장을 할때두 잇잖아요.
남자애두 주근깨가 잇는건 잇더라구요.ㅋ

나단비 (♡.252.♡.103) - 2024/03/01 04:51:47

제 친구가 얼굴에 주근깨가 많은데 어려보이고 귀엽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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