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크밤

빨간 머리 앤 7~8

나단비 | 2024.02.10 09:38:21 댓글: 2 조회: 148 추천: 1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46440
7

앤이 처음으로 기도하다





그날 밤 마릴라가 앤을 침대로 데려가며 엄하게 주의를 주었다.

“앤, 어젯밤에는 옷을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벗어놓았더구나. 그건 올바르지 못한 습관이야. 앞으로는 그러면 가만두지 않을 거다. 옷을 벗으면 얌전하게 개서 의자에 두어라. 단정하지 못한여자아이는 우리 집에 필요 없으니까.”

“어젯밤에는 제 마음이 너무 괴로워서 옷 같은 건 신경 쓸 겨를이 없었어요. 오늘 밤에는 옷을 단정하게 개어두겠어요, 아주머니. 고아원에서도 늘 그렇게 해야 한다고 들었는걸요. 절반은 잊어버리곤 했지만요. 빨리 침대로 들어가야겠어요. 전 상상할 게 아주 많거든요.”
앤이 말했다.

“여기서 살고 싶다면 잊어버리는 일이 그렇게 많아서는 안 된다. 그래, 그렇게 하는 거야. 이제 기도를 하고 침대로 가거라.”

마릴라가 말했다.

“전 기도를 해본 적이 없어요.”

앤의 고백이었다.

마릴라가 깜짝 놀라 앤을 바라보았다.

“뭐라고, 앤, 그게 무슨 말이야? 기도를 해본 적이 없다니, 하느님은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기도하기를 원하신다. 혹시 하느님도 모르는 거 아니니, 앤?”

“하느님은 무한한 생명이시고, 영원하며, 변치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에요. 신성하고 지혜가 넘치시며, 정의롭고 선하시며 진실하신 분이지요.”

앤이 즉각 거침없이 대답했다.

마릴라는 좀 안심이 되었다.

“네가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건 아니로구나. 천만다행이야! 네가 하느님도 모르는 야만인은 아닌 모양이다. 그건 어디서 배웠니?”

“음, 고아원 주일 학교에서요. 거기서 교리 문답서를 통째로 외우게 했어요. 내용이 재미있기도 했고 어떤 말들은 굉장히 멋지기도 했어요. ‘무한, 영원, 불변’ 같은 말들은 웅대하지 않나요? 큰 오르간을 치고 있는 것처럼 뭔가 가슴을 울리는 감동이 느껴지거든요. 그것을 시라고 부르지는 않죠? 그렇지만 시랑 많이 비슷한 거 같아요. 그렇지 않나요?”

“우리는 지금 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야, 앤. 기도 이야기를 하는 거지. 매일 밤 기도를 올리지 않으면 끔찍한 죄를 범하는 일이라는 걸 모르니? 네가 아주 나쁜아이가 될까 봐 염려스럽구나.”

“저처럼 빨간 머리를 가진 사람은 착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나쁜 사람이 되기가 더 쉽다는 것을 모르세요? 빨간 머리가 아닌 사람은 그 심정을 모를 거예요. 토머스 아주머니는 하느님이 제 머리를 일부러 붉게 만들었다고 말했어요. 그 이후로 전 하느님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죠. 그리고 전 너무 피곤해서 밤마다 기도를 올리기도 힘들었어요. 쌍둥이를 몇 쌍이나 돌보아야 하는 사람에게 기도를 기대할 수는 없어요. 아주머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앤이 항의하듯 물었다.

마릴라는 앤에게 종교 교육부터 시켜야겠다고마음먹었다. 당장에 시작해야 할 일이었다.

“네가 내 지붕 밑에 사는 한은 기도를 해야 해, 앤.”

“네, 그렇게 하겠어요. 아주머니가 원하시는 일이라면 전 어떤 일이든 아주머니 말씀에 따르겠어요. 하지만 이번 한 번은 기도를 어떻게 올리는 건지 알려주셔야 해요. 그럼 제가 침대로 들어간 다음 앞으로 기도를 어떻게 할지 상상해두겠어요. 기도도 상당히 재미있는 일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앤이 밝게 말했다.

“그럼 무릎을 꿇어라.”

마릴라는 무슨 말로 대꾸를 해야 할지 몰라 그렇게만 말했다.

앤이 무릎을 꿇은 채 마릴라의 무릎께로 다가가 마릴라를 진지하게 올려다보았다.

“기도를 하려면 왜 무릎을 꿇어야 하죠? 제가 정말로 기도를 하고 싶을 때는 어떻게 하는지 아세요? 저 혼자 넓고 넓은 들판이나 깊고 깊은 숲 속으로 나가서, 하늘을 올려다봐요. 푸른색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아름다운 하늘을 높이, 높이, 높이 올려다보지요. 그런 다음 마음속으로 기도를 생각해요. 자, 이제 기도할 준비가 되었어요. 뭐라고 기도를 해야 하나요?”

마릴라는 점점 더 난처해졌다. 앤에게 ‘저는 이제 잠자리에 들려고 누웠습니다.’로 시작하는 고전적인 어린아이의 기도문을 가르치려고 생각했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마릴라는 유머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 말은 곧 무슨 일에나 적절한 방식이 있다는 것을 안다는 말이다. 마릴라는 돌연 하얀 잠옷을 입고 엄마 무릎을 베고 누운 어린아이의 더듬거리는 기도문이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 이 주근깨투성이의 아이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 아이가 인간의 사랑을 매개로 얻을 수 있는 신의 사랑을 알 턱이 없고, 관심도 없을 테니 말이다.

“넌큰애니까충분히 혼자 기도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를 드리고, 네가 원하는 일을 겸손하게 부탁드리면 되는 거야.”

“그럼 한번 해볼게요.”

앤은 마릴라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기도를 시작했다.

“은혜로우신 하느님 아버지, 목사님이 교회에서 그렇게 기도를 시작하시니까 제가 혼자 기도를 할 때도 그렇게 하면 되는 거죠?”

앤이 잠깐 고개를 들어 묻고는 다시 기도했다.

“은혜로우신 하느님 아버지,‘환희의 하얀 길’,‘반짝이는 호수’, ‘보니’, ‘눈꽃 여왕’을 만나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정말로,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감사해야 할 것으로 지금 생각나는 것은 그것이 전부예요. 제가 원하는 것은 너무나 많아서 그중 가장 원하는 일 두 가지만 말씀드릴게요. 제발 저를‘초록 지붕 집’에 살 수 있게 해주세요. 그리고 제가 어른이 되었을 때는 예쁜 모습으로 바뀔 수 있도록 해주세요. 안녕히 계세요. 앤 셜리 올림.
제가 잘했나요? 제게 생각할 시간이 좀 더 많았더라면 기도를 더 멋지게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앤이 기도를 마치고 일어나며 진지하게 물었다.

마릴라는 너무 어이가 없어 아무런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앤이 올린 기도란 것이 어처구니가 없긴 해도 앤이 종교적인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해서 그렇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이를 잠자리에 눕게 하면서 마릴라는 당장 내일부터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촛불을 들고 방을 나가려는데 앤이 마릴라를 다시 불러 세웠다.

“지금 생각이 났는데요, 제가 ‘안녕히 계세요.’라고 하는 대신 ‘아멘’이라고 해야 했죠? 목사님이 하시는 것처럼. 제가 깜박했어요. 하지만 기도를 마치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그 말이 나와 버렸어요. 그 두 말에는 무슨 차이가 있는 건가요?”

“아니, 아니다. 이제 착한 아이처럼 잠이나 자거라. 잘 자거라.”

마릴라가 말했다.

“오늘 밤은 정말 잘 잘 수 있을 것 같아요.”

앤이 만족스러운 듯 베개 속에 얼굴을 파묻으며 말했다.

마릴라는 부엌으로 내려와 탁자에 촛불을 내려놓고 매슈를 쏘아보았다.

“매슈 오라버니, 저 아이를 좀 가르쳐야지 안 되겠어요. 저 애는 거의 이교도나 마찬가지예요. 믿기지 않겠지만 저 애가 지금까지 기도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대요. 내일 목사관에 가서 <새벽>12) 시리즈를 빌려와야겠어요. 그리고 적당한 옷을 만들어 입힌 다음 주일 학교에도 보내고요. 저 애 때문에 제가 얼마나 바빠질지 눈에 훤히 보여요. 모두가 각자에게 주어진 고난을 극복하면서 사는 거겠지요. 지금까지는 별 어려움 없이 살아왔는데, 아무래도 이제 제게도 고난이 닥쳐온 것 같네요. 그렇지만 최선을 다해 잘 극복해나가면 되겠지요. 뭐.”



12) <The Peep of the Day>: 1830년 보스턴에서 출판된 어린아이들을 위한 종교 지도서.



8

앤의 교육이 시작되다





마릴라는 다음 날 오후까지도 앤을 ‘초록 지붕 집’에 두기로 했다는 사실을 앤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물론 그러는 편이 낫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마릴라는 점심을 먹기 전까지 앤에게 이런저런 일을 시키면서 앤이 일하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점심때쯤 되자 앤이 영리하고 고분고분하며, 열심히 하면서도 뭐든 빨리 배운다는 판단이 섰다. 앤의 가장 큰 단점은 일하다 말고 곧잘 백일몽에 빠져버려 야단을 맞거나 무슨 실수를 저지르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다는 것이었다.

설거지를 마치고 난 앤이 갑자기 최악의 상황에 맞닥뜨려 더 이상 나갈 길이 없는 사람이나 된 양 마릴라 앞을 막아섰다. 앤의 작고 여린 몸이 머리에서 발끝까지 떨리기조차 했고 얼굴은 붉어졌으며 눈은 전체가 검은색으로 보일 만큼 눈동자가 커져 있었다. 앤이 양손을 단단히 쥐고 간청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 제발, 커스버트 아주머니, 저를 다른 곳으로 보내실 생각인지 아닌지 말씀해주세요. 오전 내내 참을성 있게 기다리려고 애썼지만 더 이상은 못 견디겠어요. 정말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제발 말씀을 해주세요.”

“너는 내가 시킨대로행주를 삶지 않았구나. 더 질문을 하기 전에 그것부터 해놓으렴, 앤.”

마릴라가 무표정하게 말하자 곧 나가 행주를 삶아놓고 돌아온 앤은 다시 마릴라에게 간청하는 눈빛을 고정시켰다.

“글쎄다.”

더 이상 뒤로 미룰 핑곗거리도궁해서 마릴라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너에게 얘기를 해주어야 할 것 같긴 하구나. 매슈 아저씨와 나는 너를 여기 두기로 결심했다. 단, 네가 착한 아이가 되도록 노력하고, 감사하게 여기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아니, 왜 그러니, 얘야?”

“전 울고 있는 거예요.”

앤이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왜 그런지는 모르겠어요. 전 더 이상은 기쁠 수 없을 만큼 기뻐요. 그냥 기쁘다는 말만으로는 제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없어요. 하얀 길이나 벚꽃을 보고도 기뻤지만 이 기쁨은, 단순히 기쁜 것 이상이에요. 전 너무 행복해요. 전 착한 아이가 되려고 노력할 거예요. 힘들기는 하겠지만요. 토머스 아주머니는 늘 제가 아주 고약한 애라고 했거든요. 그러나 전 최선을 다하겠어요. 그런데 제가 왜 울고 있는지 얘기 좀 해주실래요?”

“그건 네가 너무 흥분해서 그럴 거다.”

마릴라가 핀잔을 주듯 말했다.

“그 의자에 앉아서 흥분을 좀 가라앉혀라. 너는 울기도 웃기도 잘해서 걱정이야. 그래, 우린 널 여기 둘 거고, 너를 위해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너는 이제부터 학교도 다니게 될 거야. 하지만 2주만 있으면 방학이니 9월에 학교가 다시 문을 열면 그때부터 다니는 게 좋겠다.”

“아주머니를 어떻게 불러야 하죠? 미스 커스버트라고 부를까요? 아니면 마릴라 숙모라고 부를까요?”

앤이 물었다.

“아니야, 그냥 마릴라라고 부르렴. 난 미스 커스버트라는 호칭에는 익숙지가 않아. 듣기가 거북해.”

“그냥 마릴라라고만 부른다면 너무 버릇없어 보이는걸요.”

앤이 말했다.

“네가 조심스럽게 존중하는 마음으로 부르면 그리 버릇없어 보일 것은 없다. 에이번리 사람들은 젊은 사람이나 나이 든 사람이나 모두 나를 마릴라라고 부른다. 목사님은 미스 커스버트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그것도 생각날 때만그런단다.”

“전 마릴라 숙모님이라고 부르면 안 될까요? 제게는 숙모님이 없고 친척이라곤 없었거든요. 할머니도 없었어요. 아주머니를 숙모라고 부르면 제가 정말 이 집의식구가 된 기분일 거예요. 마릴라 숙모라고 부르게 해주세요.”

“안 된다. 난 네 숙모가 아니잖니. 숙모도 아니면서 그렇게 부르는 건옳지 않은일이야.”

“하지만 제 숙모님이라고 상상할 수는 있잖아요.”

“난 그렇게 할 수 없어.”

마릴라가 단호하게 말했다.

“어떤 일이건 사실과 다르게 상상해본 적 없으세요?”

앤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없다.”

“휴우!”

앤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마릴라 아주머니는 정말 재미없으셨겠네요.”

“난 사실과 다르게 상상하는 일은 좋아하지 않는다. 주님께서 우리를 어떤 상황에 부닥치게 했다면 그건 그 상황을 받아들이라는 뜻이지 상상으로 피해버리란 뜻이 아니야.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구나. 거실에 가서 벽난로 위에 있는 그림 카드를 가져오너라. 앤, 발을 깨끗하게 씻는 거 잊지 말고, 파리가 방으로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된다. 기도문이 그 카드에 적혀 있다. 오늘 오후에는 그 기도문을 외우도록 해라. 이제는 어젯밤과 같은 기도를 올려서는 안 돼.”

마릴라가 말했다.

“저도 굉장히 이상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앤이 잘못했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전에 해본 적이 없잖아요. 처음부터 기도를 잘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설마 그러길 바라시는 건 아니겠죠? 하지만 침대에 누워서 생각하니까 멋진 기도가 떠올랐어요. 아주머니께 약속드린 대로요. 그 기도는 거의 목사님 기도만큼이나 길고 또 매우 시적이었어요. 그런데 말이에요, 오늘 아침에는 그 기도가 한 마디도 생각이 나질 않지 뭐예요. 또다시 그렇게 멋진 기도를 생각해내기는 힘들 거 같아요. 뭐든지 두 번째로 생각해낼 때는 처음만큼 좋질 못하잖아요, 아주머니도 그런 느낌을 받아본 적이 있으신가요?”

“앤, 네가 조심해야 할 일이 있다. 내가 뭘 시키면 냉큼 가서 하고, 거기 서서 이러쿵저러쿵 말만 늘어놓아서는 안 된다. 이제 가서 카드를 가져오너라.”

앤은 곧장 복도를 지나 거실로 갔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10분이나 기다린 마릴라는뜨개질거리를 놓고 화가 난 표정으로 앤을 찾으러 갔다. 앤은 두 창문 사이 벽에 걸린 그림을 꼼짝도 하지 않고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손은 뒷짐을 지고, 얼굴은 위로 향한 채 두 눈은 꿈을 꾸듯 멍해 있었다. 창밖 사과나무와 덩굴 식물 사이로 들어오는 흰색과 초록색 빛줄기가 황홀경에 빠져 넋을 잃은 아이 위로 예사롭지 않은 광채를쏟아붓고 있었다.

“앤, 뭘 그렇게 넋을 놓고 생각하는 거니?”

마릴라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제야 깜짝 놀란 앤이 제정신을 차렸다.

“저거요.”

앤이 ‘어린이를 축복하는 그리스도’라는 제목이 붙은 화려한 석판화를 가리켰다.

“제가 저 아이들 중 하나라고 상상하고 있었어요. 저 구석에 혼자 서 있는 파란 옷을 입은 아이가 저라고 생각했어요. 저 아이는 저처럼 가족이 아무도 없나 봐요. 외롭고 슬퍼 보여요, 그렇지 않나요? 엄마 아빠도 없는 것 같아요. 저 아이는 그래도 축복을 받고 싶으니까 예수님을 빼고는 아무도눈치채지 못하도록 사람들 곁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가고 있는 거예요. 전 저 아이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어요. 심장이 두근거리고 손바닥에는 땀이 났을 거예요. 제가 아주머니께 여기 살게 해달라고 애원할 때처럼. 저 아이는 예수님이 자기를 알아채지 못할까 봐 두려웠지만 예수님은 저 아이를 알아봤을 거예요. 그렇죠? 전 모든 것을 상상해보려고 했어요. 아이가 조금씩 더 예수님 가까이로 가다 보니 바로 옆까지 와버린 거죠. 그러자 예수님이 아이를 바라보았고 아이의 머리에 손을 올리셨어요. 아이는 너무 기뻐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죠! 하지만 저 그림을 그린 사람이 예수님을 저렇게 슬픈 표정으로 그리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걸. 잘 보면 예수님 그림은 모두가 다 그래요. 하지만 전 예수님이 저렇게 슬픈 얼굴이거나 아이들이 예수님을 두려워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앤, 그런 식으로 말을 하면 안 된다. 다 네가 지어낸 이야기잖아. 사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마릴라가 왜 더 빨리 앤의 말을 중단시키지 않았을까 의아해하며 말했다.

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머, 저는 저 그림에서 느낀 대로 말을 한 거예요. 이야기를지어낼뜻은 없었어요.”

“내 생각에도 네가 그럴 뜻은 없었던 것 같지만, 넌 어떤 일을 아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를 하는데 그건 옳지 못한 일이야. 그리고 또 한 가지, 앤, 내가 뭘 가져오라고 보냈으면 곧바로 와야지, 그림 앞에 멍하니 서서 상상이나 하고 있으면 어떻게 하니.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거라. 그 카드를 갖고 당장 부엌으로 가자. 자, 이제 저 구석에 앉아서 그 기도문을 외워라.”

앤은 식탁을 장식하려고 꺾어온 사과꽃을 꽂아놓은 꽃병에 카드를 세워놓고, 양손으로 턱을 괴고 앉아 몇 분 동안 말없이 열심히 기도문을 외웠다. 마릴라는 곁눈질로 힐끔 그 꽃을 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는 이 기도문을 좋아해요. 정말 아름답기도 하고 전에 들어보기도 했어요. 고아원 주일 학교교장 선생님이 이 기도문을 외운 적이 있거든요. 그때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갈라진 목소리로 신음 소리를 내듯 기도를 올렸으니까요. 그 선생님은 기도가 별로 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았어요. 이 기도문은 시는 아니지만 시를 읽을 때 같은 느낌이 들어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 이름을 거룩하게 하오시며’ 이건 노래 가사 같아요. 마릴라 아주머니가 저한테 이걸 외우라고 해주셔서 전 너무 기뻐요.”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고 있던 앤이 말했다.

“잠자코 외우기나 하렴.”

마릴라가 잘라 말했다.

앤은 사과꽃병을 기울여 분홍색 화병에 살짝 입을 맞추고는 다시 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마릴라 아주머니, 저에게도 흉금을 털어놓을 수 있는 단짝 친구가 곧 생길까요?”

잠시 후에 앤이 물었다.

“뭐, 무, 무슨 친구라고?”

“흉금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요. 아주 가까운, 가슴속 아주 깊은 곳까지 다 털어놓을 수 있는 단짝 친구 말이에요. 전 그런 친구를 만날 날을 고대해왔어요. 현실로 이루어질 일이라고 여기진 않았지만 제 멋진 꿈들이 한꺼번에 다 이루어졌으니 이 꿈도이루어지지 않을까요?”
“다이애나 배리가 저‘비탈길 과수원집’에 살고 있는데 너랑 나이가 같단다. 아주 착한 아이니까 우리 집에 놀러 와도 되고 너랑 잘 어울릴 수 있을 거다. 지금은 카모디에 있는 숙모 댁에 가 있단다. 하지만 네가 행동을 조심해야 할 거야. 배리 부인 성격이 아주 까다로워서 착하고 점잖은 아이가 아니면 다이애나와 놀지도 못하게 하거든.”

사과꽃 사이로 마릴라를 바라보는 앤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났다.

“다이애나는 어떻게 생겼어요? 머리가 빨간색은 아니죠? 아, 제발 아니기를 빌어요. 저 혼자만 빨간 머리로도 족하니까요. 단짝 친구까지 빨간 머리라면 정말이지 참을 수 없어요.”

“다이애나는 아주 예쁘게 생긴 아이야. 눈과 머리는 검고, 볼은 장밋빛이지. 거기에 착하고 영리하기까지 하단다. 그 점이 예쁜 것보다 더 중요한 거지.”

마릴라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공작부인처럼 교훈을 좋아해서 자라는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할 때는 항상 교훈으로 끝맺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렇지만 앤은 교훈은 제쳐두고 흥미로운 이야기만귀담아들었다.

“아, 다이애나가 예쁜 아이라니 너무 기뻐요. 제가 예쁘다면 더 좋겠지만 그건 불가능한 얘기니까요, 예쁜 단짝 친구가 생기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을 거예요. 토머스 아주머니 집에는 거실에 유리문이 달린 책장 하나가 있었어요. 그 안에 책을 넣어둔 건 아니고 토머스 아주머니가 아끼는 도자기 접시와 절임 음식을 넣어두었는데,유리문하나는 깨져버렸어요. 토머스 아저씨가 어느 날 밤 술에 취해 주먹으로 깨버렸거든요. 하지만 한쪽 유리문은 온전하게 남았고, 전 거기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 작은 소녀가 그 안에 살고 있다고 상상했어요. 전 그 애를 캐티 모리스라고 불렀고 우리는 정말 막역한 사이가 되었죠. 전 그 아이와 늘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특히 일요일에는 얘기를 아주 많이 했죠. 그 애에게 제 마음을 모두 털어놓았어요. 캐티는 저를 위로해주고 편안하게 해주었거든요. 우리는 그 책장이 마법에 걸려 있다고 상상했어요. 오직 저만 그 마법을 푸는 주문을 알아 캐티 모리스가 살고 있는 방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요. 도자기 그릇과 절임 음식이 들어 있는 칸은 말고요. 그러면 캐티 모리스가 제 손을 잡고 이상한 나라로 저를 데려가 주었어요. 햇살이 가득 퍼져 있고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한 요정 나라였죠. 우리는 거기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제가 하몬드 아주머니 댁으로 가게 되었을 때에는 캐티 모리스와 헤어지는 게 너무 가슴 아팠어요. 캐티 모리스도 저랑 똑같이 마음 아파했죠. 문을 통해 제가 캐티에게 작별의 입맞춤을 건넬 때 울고 있어서 캐티도 슬퍼하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하몬드 아주머니네는 책장 같은 것은 없었어요. 하지만 집에서 조금 올라가면 강 상류에 기다란 푸른 골짜기가 있었는데 거기 아름다운 메아리가 살았어요. 별로 크게 말하지 않아도 제가 하는 말을 모두 따라했죠. 그래서 전 그 작은 소녀를 비올레타라고 부르고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되었어요. 캐티 모리스만큼은 아니더라도, 아니 거의 그만큼이나 저는 비올레타를 좋아하게 되었죠. 제가 고아원으로 떠나오던 날 밤에는 비올레타하고도 작별 인사를 해야 했어요. 비올레타 역시 너무 구슬픈 목소리로 제게 작별 인사를 했죠. 전 비올레타에게 너무 마음을 빼앗겨서 고아원에서는 다른 단짝 친구를 상상할 가슴이 남아 있지도 않게 되어버렸어요. 상상거리가 있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그럴 가슴이 없었다니 다행이구나. 넌 네가 상상으로 만들어낸 것들을 절반은 믿고 있는 모양이지만 난 그런 일에 찬성할 수 없다. 네 머릿속에서 그런 말도 안 되는 것들을 없애버리려면 진짜 친구를 사귀는 게 좋겠어. 하지만 배리 부인 앞에서 캐티 모리스니 비올레타니 하는 이야기는 하지 마라. 네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할 거야.”
“오, 아니에요. 이런 얘기를 어떻게 아무한테나 할 수 있겠어요. 그 두 친구와의 추억은 제겐 너무나 소중한 것이거든요. 하지만 전 아주머니한테는 이야기를 해드리고 싶었어요. 어머, 이것 보세요. 큰 벌이 사과꽃에서굴러떨어졌어요. 사과꽃에서 살다니, 얼마나 멋진 집이에요. 이 꽃집이 바람에 흔들릴 때면 어떤 기분이 들까요? 제가여자아이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벌이 되어 꽃들 사이를 날아다니며 사는 것도 좋았을 거예요.”

“어제는 갈매기가 되고 싶다더니.”

마릴라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넌 정말이지 변덕도 심하구나. 그리고 그 기도문을 외우라고 했지 내가 언제 떠들라고 했니? 네 말을 들어줄 사람이 옆에 있으면 말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는 모양인데 네 방으로 가서 외우도록 해라.”

“전 벌써 거의 다 외웠는걸요, 마지막 한 줄만 빼고요.”

“그래, 알았다. 어쨌거나 네 방으로 가서 마저 외우거라, 내가 식사 준비를 도와달라고 할 때까지는 꼼짝 말고 방 안에 있어.”

“제가 친구 삼아 이 사과꽃 화병을 가져가도 될까요?”

앤이 애원하듯 말했다.

“안 돼, 방이 꽃잎으로 다 어질러지잖니. 그러니까 애초에 꽃을 나무에 그대로 두고꺾지말아야 했어.”

“저도 그렇게 생각하긴 했어요.꽃을 꺾어 이 아름다운 생명을 단축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긴했지만 그만 유혹에 지고 말았어요. 제가 사과꽃이라도 꺾이고 싶지는 않을 것 같아요. 아주머니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 생기면 어떻게 하시나요?”

“앤, 네 방으로 가라는 소리를 들었니, 못 들었니?”

앤이 한숨을 내쉬면서 동쪽 방으로 올라가 창가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마지막 줄도 계단을 올라오면서 다 외워버렸으니 이제 기도문은 다 외웠고. 이제부터는 상상으로 이 방을 꾸며야겠어. 상상을 다 해놓은 다음에는 이 방이 상상한 대로 되어 있다고 여길 거야. 마루에는 분홍색 장미꽃이수 놓인하얀 벨벳 천이 깔려 있고, 창문에는 분홍색 실크 커튼이 걸려 있어. 벽에는 금색과 은색의비단 실로 짠 벽걸이가 걸려 있고 가구들은 전부 마호가니야. 그런 가구를 본 적은 없지만, 마호가니라! 너무 근사하게 들리잖아. 이 의자는 분홍, 파랑, 다홍, 금빛 색깔의 우아한 실크 쿠션이 가득 놓인 소파이고 난 거기에 비스듬히 기대고 앉아 있지. 내 모습이 저 벽에 걸린 크고 반짝이는 거울에 비치지. 난 키가 크고 기품이 있는 숙녀야. 바닥까지 끌리는 레이스가 달린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어. 가슴에는 진주로 된 십자가 목걸이를 걸었고 머리에도 진주 장식을 달았지. 내 머리는 칠흑처럼 검고, 내 피부는상앗빛처럼 고와. 내 이름은 코델리아 피츠제럴드 아가씨야. 아니, 이건 너무 심해서 전혀 진짜 같지가 않잖아.”

앤은 벌떡 일어나 작은 거울 앞으로 가서 자기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뾰족한 주근깨투성이 얼굴과 진지한 잿빛 눈이 앤을 쳐다보고 있었다.

“너는‘초록 지붕 집’의 앤이야. 네가 코델리아 아가씨라고 상상할 때마다 바로 이 모습이 네 앞에 나타날 거라고. 하지만‘초록 지붕 집’의 앤이라고 하는 것이 집 없는 앤이라고 하는 것보단 백만 배나 더 낫지 않아?”

앤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앤은 몸을 앞으로 숙여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에 애정 어린 입맞춤을 해준 다음 열려 있는 창가로 갔다.

“사랑하는 ‘눈꽃 여왕’ 님, 안녕하세요. 그리고 저 분지의자작나무 님도 안녕! 저 언덕의 회색집도 안녕! 난 다이애나가 내 단짝 친구인지 궁금해. 그렇게 되길 바라고. 난 다이애나를 굉장히 좋아하게 될 거야. 하지만 캐티 모리스와 비올레타를 잊는 일은 없을 거야. 내가 그 친구들을 잊는다면 무척 가슴 아파할 테니까. 난 누구든 마음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아무리 작은 책장 안의 소녀나 메아리 소녀라 할지라도. 난 그 친구들을 항상 기억하면서 매일 키스를 보내줄 거야.”

앤은 손가락 끝에 두 번 입을 맞추어 벚꽃 쪽으로 날려 보냈다. 그런 다음 기분 좋게 턱을 괴고 앉아 공상의 세계로 여행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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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썬2뉘썬2 (♡.169.♡.51) - 2024/02/29 04:40:13

공상을 잘하는 앤.그림방의 공상이 앤이엿군요.고아인 앤이 얼마나 외로웟으면 상상속에서
친구를 만들엇을까요?

말도 또랑또랑하게 잘하고 빨간머리를 가진사람은 좋은사람보다는 나쁜사람이 되기싶다는
당돌함과 엉뚱한 기도문과 끝없은 상상력.앤은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처럼 도무지 그속을
알수없고 어떤말들이 갑툭튀할지 예측불가네요.

20세기 유럽소설중 거개가 종교얘기 나오네요.그럼저도 기도한번 할께요.

거룩하고 은혜로운 하나님 아버지시여.단비가 정성스레 소설을 올려줘서 너무 재밋게 봣어
요.단비가 많이 피곤해하니 잠깐편히 쉴수잇도록 도와주시옵소서.변덕많은 봄날씨에 재감기
들지않도록 은총을 베풀어 지켜주시옵소서!
아멘~

나단비 (♡.252.♡.103) - 2024/02/29 15:47:01

저는 엉뚱발랄하고 상상력 천재, 외로운 앤에게서 위로를 받았어요.
저를 위해 기도해주셔서 감사드려요.
여신님을 위해 기도할게요.

은혜로운 하나님 아버지. 여신님께서 제가 올린 소설을 읽어주셔서 너무 감사하고 보람을 느껴요.
여신님이 매일매일이 행복과 즐거움이 가득하기를 바라요.
우리 여신님이 다가오는 봄날의 낭만을 만끽하며 건강하게 보내시길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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