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크밤

빨간 머리 앤 11~12

나단비 | 2024.02.11 08:59:03 댓글: 0 조회: 88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46532
11

앤이 주일 학교에 가다





마릴라가 물었다.

“자아, 마음에 드니?”

하지만 동쪽 방 침대 위에 펼쳐져 있는 새 옷 세 벌을바라보는 앤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한 벌은 칙칙한 면직으로 만든 짙은 밤색 옷으로 작년 여름에 굉장히 실용적일 것 같아 행상에게 산 것이었다. 또 하나는 지난겨울 물물 교환소에서 고른 검은색과 흰색 바둑판무늬 공단으로 만든 옷이고, 나머지 한 벌은 이번 주에 카모디 가게에서 산 옷감으로 만든 파란색무늬 옷인데 이것 역시 예쁘다고 할 수 없었다.

옷은 마릴라가 손수 만들었고 모두 똑같은 모양이었다. 치마에 주름도 잡히지 않았고 허리선 모양도 평범했으며 소매도 허리나 치마와 마찬가지로 몸에 딱 달라붙었다.

“제 마음에 든다고 상상을 하겠어요.”

앤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내가 원하는 건 네 상상이 아니야. 이 옷들이 네 맘에 들지 않는구나! 뭐가 어째서? 모두 다 점잖고 깨끗한 새옷이잖니?”

마릴라가 언짢아하며 말했다.

“네.”

“그런데 왜 맘에 안 든다는 거야?”

“이 옷들은, 이 옷들은 예쁘지가 않잖아요.”

앤이 주저하며 대답했다.

“안 예쁘다고! 애초부터 너에게 예쁜 옷을 만들어주려던 생각은 없었다. 나는 허영심을 좋아하지 않아. 넌 그 점을 명심해야 한다, 앤. 이 옷들은 주름이니 장식이니 하는 쓸데없는 것들 없이 점잖고 실용적이잖니. 올여름 너는 이 옷으로 지내야 돼.”

앤의 말에 마릴라가 코웃음을 쳤다.

“갈색 면직 옷과 파란색 무늬 옷은 학교에 입고 다닐 것이고 공단 옷은 일요일 주일 학교에 나갈 때 입을 옷이다. 단정하고 깨끗하게 입도록 해라. 찢어 먹거나 하지 말고. 지금까지는 이런 보잘것없는 면모 교직 옷만 입고 지냈는데 감사해야지.”

“그럼요, 전 감사해요. 하지만 제게 퍼프 소매12) 옷을 만들어주셨더라면 훨씬 더 감사했을 거예요. 지금 퍼프 소매가 굉장히 유행이거든요. 그런 옷을 입는다면 너무 기분이 좋아서 가슴이 짜릿해질 것 같아요.”
앤이 말했다.

“그럼 넌 가슴이 짜릿해질 일은 없을 거다. 난 퍼프 소매에 허비할 천이 없으니까. 그리고 그런 소매가 뭐가 좋다는 거야, 바보스럽게만 보이는걸. 난 평범하고 얌전한 옷이 더 보기도 좋더라.”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모두 바보 같아 보인다면 저 혼자만 평범하고 얌전해 보이기보다는 저도 같이 바보 같아 보이는 게 좋겠어요.”

앤이 처량하게 고집을 피웠다.

“바보 같은 소리 그만두어라! 자아, 이 옷들을 옷장 옷걸이에 잘 걸어두고, 앉아서 주일 학교 공부를 해라. 벨 장로님한테서 교리 문답서도 받아왔고 내일부터 주일 학교에 가야 한다.”

몹시 못마땅한 마릴라가 말을 마치고는 계단을 내려갔다.

앤은 두 손을 모아 쥐고 그 옷들을 바라보았다.

“퍼프 소매가 달린 하얀 드레스였다면 얼마나 좋아. 그런 옷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건만. 별로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하느님이 어린 고아의 옷에 신경 쓸 시간이 있으리란 기대는 나도 하지 않았어. 그저 마릴라 아주머니가 만들어주신 옷이나 입어야지. 하지만 괜찮아. 난 이 옷 중 하나는 예쁜 레이스와 3단 퍼프 소매가 달린 하얀 모슬린 드레스라고 상상할 테니까.”

앤이 실망한 모습을 감추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다음 날 아침 마릴라는 두통 때문에 앤과 함께 주일 학교에 갈 수 없었다.

“가다가 린드 부인 댁에 들러서 같이 가도록 해라. 부인이 네가 들어가야 할 반을 알려주실 거야.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 거 잊지 말고. 공부가 끝나도 설교 시간까지 교회에 있어야 한다. 린드 부인한테 우리 가족석을 가르쳐달라고 해. 여기 1센트로 헌금을 해라. 사람들을 빤히 쳐다본다거나 들썩들썩 움직거리지 말고. 집에 돌아오면 오늘 배운 성경 말씀을 내게 다 이야기해주어야 한다.”

앤은 반듯한 옷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뻣뻣한 흰색 공단으로 만든 옷은 길이도 적당했고 꼭 끼지도 않았지만, 앤의 마른 몸 구석구석을 강조했다. 번들거리는 새 세일러 모자도 작고 납작한 모양에 너무나 평범해서 옷만큼이나 앤을 실망시켰다. 앤은 리본이나꽃장식이 달린 모자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으니까. 그러나꽃장식은 큰길로 나서기 전에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오솔길을 절반쯤 걸어 내려가자 바람에 산들거리는 미나리아재비와 들장미가 만발해 있어 앤은 꽃들을 잔뜩 꺾어 큰 화환을 만들어 모자에 얹었다.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앤은 만족스러웠다. 머리를 분홍색과 노란색으로 화려하게 꾸미고 매우 기분이 좋아진 앤은 의기양양하게 길을 내려갔다.

린드 부인의 집에 갔지만 부인은 이미 집을 나가고 없었다. 그렇지만 앤은 아무렇지도 않게 혼자서 교회로 향했다. 어린 소녀들이 흰색과 파란색, 분홍색의 화려한 옷을 입고 교회 베란다에무리 지어있다가 이상한 머리 장식을 하고 나타난 이 낯선 아이를 모두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에이번리의 모든 아이가 이미 앤에 관한 이상한 소문은 들어 알고 있었다. 린드 부인은 앤의 성깔이 보통이 아니라는 말을 했고‘초록 지붕 집’에서 일하는 제리 부트는 이 아이가 정신 나간 사람처럼 항상 나무나 꽃한테 말을 한다고 소문을 냈다.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교리 문답서로 얼굴을 가리고 앤을 흘깃거리며 서로 소곤댔다. 베란다에서나 로저슨 선생의 반에 들어가서나 앤에게 친절하게 다가와 말을 거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로저슨 선생은 중년의 숙녀로 20년째 주일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로저슨 선생의 교육 방식은 교리 문답서에 적힌 질문을 던지고는 아이 하나를 골라 근엄한 눈길을 주면서 대답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앤을 자주 그렇게 바라보았다. 마릴라가 미리 연습을 시켜준 덕분에 앤은 즉각 대답할 수 있었지만 앤이 질문이나 대답을 얼마나 많이 이해했는지는 의문이었다.

앤은 로저슨 선생님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자기를 제외한 반의 모든 아이가 퍼프 소매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에 몹시 비참한 기분을 느꼈다. 앤은 퍼프 소매 옷을 입지 않는다면 인생을 살 가치도 정말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 주일 학교는 마음에 들었니?”

앤이 집으로 돌아오자 마릴라가 궁금해서 물었다. 모자에 꽂았던 장식은 시들어버려 오솔길에서 버려서 마릴라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눈곱만큼도 맘에 들지 않았어요. 끔찍했다고요.”

“앤 셜리!”

마릴라가 나무랐다.

앤은 긴 한숨을 내쉬며 흔들의자에 앉아 보니의 잎사귀에 입을 맞추어주고 꽃을 피우고 있는 바늘꽃에도 손을 흔들어주었다.

“제가 없는 동안 이 꽃들이 외로웠을 테니까요.”

앤이 변명했다.

“주일 학교에서는 아주머니께서 말씀하신 대로 전 얌전하게 행동했어요. 린드 아주머니가 안 계셔서 저 혼자 교회에갔고요. 다른여자아이들이랑 교회로 가서 예배 시간에는 창가 구석에 있는 의자에 앉았어요. 벨 장로님은 정말로 기도를 길게 하셨어요. 제가 창가에 앉아 있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지루했을 거예요. 하지만 창문으로‘반짝이는 호수’가 바로 보여서 전 호수를 바라보며 여러 가지 멋진 상상을 했어요.”

“교회에서 그러면 쓰니. 벨 장로님의 기도를 들었어야지.”

“하지만 벨 장로님은 저에게 말을 한 게 아니잖아요.”

앤이 항의했다.

“장로님은 하느님께 얘기했어요. 그것도 별로 열심히 하는 것 같지 않았지만요. 하느님이 너무 멀리 계셔서 기도를 해도 별 소용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저도 짧게 기도를 드렸어요. 하얀 자작나무들이 호수 위로 가지를 죽 늘어뜨리고 있었고, 햇살이 그 위를 지나 아래로 내려가서 물속까지 비추었죠. 마릴라 아주머니, 정말 아름다운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어요. 저는 너무 가슴이 벅차서 ‘하느님, 감사합니다.’를 두세 번이나 말했답니다.”

“설마 큰소리로말한 건 아니겠지?”

마릴라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 아니에요, 작은 소리로 말했어요. 벨 장로님의 기도가 겨우 끝나고 난 후에 사람들이 저더러 로저슨 선생님의 교실로 가라고 말해주었어요. 교실에는 모두 아홉 명의 아이들이 있었고 다들 퍼프 소매 옷을 입고 있었죠. 저도 퍼프 소매 옷을 입고 있다고 상상하려 했지만 잘 안 되었어요. 왜 그랬을까요? 동쪽 방에 혼자 있을 때는 그런 상상이 잘되었거든요. 하지만 퍼프 소매 옷을 입은 아이들이 많은 곳에서는 그렇게 상상하기가 정말로 힘들었어요.”

“주일 학교에 가서 소매 생각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선생님 말씀을 잘 들어야지, 너도 그 정도는 알고 있지 않니?”

“그럼요. 전 그 많은 질문에 대답도 다했는걸요. 로저슨 선생님은 정말로 질문을 많이 했어요. 그렇게 혼자서만 질문을 다 하는 건 공평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도 묻고 싶은 게 아주 많았으니까요. 하지만 그분이 제 질문에 친절하게 답해주실 것 같지가 않아서 그만두었어요. 그런 다음 모든 아이기성경 구절을 암송했어요. 선생님은 저한테도 알고 있는 게 있느냐고 물었죠. 저는 모르지만 괜찮다면 <주인 무덤 앞의 충실한 개>를 암송할 수 있다고 대답했어요. 그 시는 3학년 읽기 책에 나오는 거예요. 종교적인 시는 아니지만 종교적인 것만큼이나 슬프고 우울한 기분이 들거든요. 선생님은 안 된다고 하면서 다음 주일 학교에 올 때는 성경 열아홉 번째 구절을 외워오라고 했어요. 교회에서 그 구절을 읽어보았는데요, 정말 멋졌어요. 그중 두 줄이 특별히 더 제 가슴에 와 닿았어요.

미디안의 악의 날에,
살육당한 기병대처럼 빠르게 무너졌다.14)

전 기병대나 미디안이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만 정말로 비극적인 일로 들렸거든요. 빨리 다음 주일날이 와서 그 성경 구절을 암송했으면 좋겠어요. 이번 주 내내 연습할 거예요. 주일 학교가 끝난 다음 로저슨 선생님에게 우리 자리가 어딘지 물었어요. 린드 아주머니는 너무 멀리 앉아 있었으니까요. 전 움직이지도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고, 성경 말씀은 요한 계시록 제3장의 2절과 3절 말씀이었어요. 아주 긴 구절이었어요. 만일 제가 목사님이었다면 전 짧고 멋진 구절로 골랐을 거예요. 설교는 정말이지 무지하게 길었어요. 설교를 성경 구절에 맞춰야 한다고 생각하신 모양이에요. 목사님도 설교하는 일이 조금도 재미가 없는 것 같았어요. 제 생각에 목사님한테 상상력이 부족한 게 문제인 것 같아요. 전 목사님 말씀에는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고 제 마음에 떠오르는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었죠. 굉장히 멋진 것들이었어요.”

마릴라는 엄하게 야단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앤의 말에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도 있어서 그렇게 할 수도 없고,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특히 목사님의 설교와 벨 장로의 기도는 입 밖에 낼 수 없었지만 마릴라 역시도 수년간 그렇게 생각하던 차였다. 그동안 자기가 말로 표현하지 못하던 비밀스럽고 비판적인 생각이 아무것도 아닌 이 조그만 아이의 입을 통해 모양과 형태가 갖추어져 갑작스레 밖으로 드러나 버린 꼴이었다.



13) 어깨 끝이나 소매 끝에 주름을 넣어 약간 부풀게 한 소매.
14) 스코틀랜드 교회 등에서 쓰는 운문(韻文)으로 된 성경의 장절. 인용된 구절은 이사야 9장 2절~8절 내용.




12

엄숙한 맹세와 약속





마릴라가 화환으로 장식한 모자 이야기를 들은 건 그다음 금요일이 되어서였다. 린드 부인의 집에서 돌아오자 마릴라는 앤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보도록 했다.
“앤, 린드 부인이 네가 지난 일요일에 장미와 미나리아재비로 모자를 요란스럽게 치장하고 교회에갔다고 하던데 어떻게 그렇게 바보 같은 짓을 할 생각을 했니? 모두들 흉보았을 거 아니야?”

“네, 저도 노란색과 분홍색이 저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알아요.”

앤이 말을 시작했다.

“어울리고 안 어울리고를 말하는 게 아니잖아! 네 모자에 꽃을 꽂았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거지, 무슨 색깔을 꽂았거나 바보스럽기는매한가지였어. 넌 정말 못 말릴 아이다!”

“꽃을 옷에 다는 건 괜찮고 모자에 다는 건 그렇게 바보스러운 일인가요? 많은 애들이 옷에 꽃을 달았던데요. 그게 무슨 차이예요?”

앤이 따지고 들었다.

마릴라는 구체적인 사실을 추상적이고 모호한 말로 듣기 좋게 돌려 말할 줄 몰랐다.

“그렇게 말대답하지 마라, 앤. 어쨌건 네가 한 짓은 아주 바보스러운 짓이었어.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마라. 린드 부인은 네가 그런 꼴로 교회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너무 놀라 바닥으로굴러떨어지는 줄 알았다더라. 그 꽃들을 떼어버리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자리가 너무 멀어서 그럴 수도 없었대. 사람들이 무척 흉을 보았다는 말도 했어. 물론 내가 교양이 없어 너를 그런 꼴로 내보냈다고 생각하고들 있을 거다.”

“아, 정말 죄송해요. 전 그것이 아주머니가 그렇게 싫어하시는 일인 줄 몰랐어요. 그 장미와 미나리아재비는 너무 향기가 좋고 예뻐서 제 모자에 꽂으면 아주 보기 좋을 거라고만 생각했죠. 많은 애들이 모자에 조화를 달고 다니잖아요. 제가 아주머니께 큰 잘못을 저질렀어요. 저를 고아원으로 돌려 보내셔도 좋아요. 끔찍한 일이기는 하지만요. 제가 또다시 그런 생활을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저는 분명 폐병에 걸려버리고 말 거예요. 전 이렇게 비쩍 말랐으니까요. 하지만 아주머니를 힘들게 하느니 차라리 그게 나을 것 같아요.”

앤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쓸데없는 소리!”

앤을 울린 자신에게 화가 나서 마릴라가 말했다.

“난 너를 고아원으로 돌려보내지 않아. 내가 원하는 건 단지 네가 다른 아이들처럼 행동해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스스로 웃음거리가 될 짓은 하지 말고. 이제는 울지 마라. 네가 좋아할 만한 소식이 있다. 다이애나 배리가 오늘 오후에 집으로 돌아왔다는구나. 배리 부인에게 치마 본을 빌리러 가려고 하는데 원하면 너도 같이 가서 다이애나를 만나보아라.”

앤이 양손을 꼭 쥐고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그릇을 닦던 행주가 바닥으로떨어져 버렸다. 볼에는 아직도 눈물이 반짝였다.

“어머나, 마릴라 아주머니, 전 두려워요. 드디어 때가 되었군요! 전 정말로 두려워요. 다이애나가 절 좋아하지 않으면 어쩌지요! 그럼 제 인생에서 가장 비극적인 일이 되고 말거예요.”

“자, 그렇게 당황할 거 없다. 그리고 그렇게 거창한 말은 좀 쓰지 말았으면 좋겠다. 조그만 애가 그런 말을 쓰면 어울리질 않아. 그리고 다이애나도 너를 좋아할 거야. 문제는 다이애나의 엄마야. 만일 다이애나의 엄마가 너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다이애나가 너를 아무리 좋아해도 다소용없는일이 될 거다. 린드 부인에게 성질을 부린 이야기나 모자에 꽃을 달고 교회에 간 이야기를 들었다면 나도 배리 부인이 너를 어떻게 생각할지 장담 못 하겠다. 예의 바르고 얌전하게 행동해야 해. 사람을놀라게할 말은 좀 하지 말고. 어머나, 세상에, 너 떨고 있는 것 아니니!”

앤은 정말로 온몸을 바들바들 떨고 얼굴은 창백하게 굳어버렸다.

“오, 마릴라 아주머니, 아주머니도 단짝 친구가 될 아이를 만나러 가는데, 그 애 엄마가 아주머니를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 두렵다면 이렇게 떨리겠죠?”

서둘러 모자를 가지러 가며 앤이 말했다. 두 사람은 지름길을 통해 개울을 건너고 전나무가 무성한 언덕을 올라가‘비탈길 과수원집’에 도착했다. 마릴라가 노크를 하자 배리 부인이 부엌문으로 나와 맞아주었다. 배리 부인은 키가 컸고 눈과 머리는 검은색이었다. 입술에서는 굳은 의지가 엿보였다. 또한 아이들을 무척 엄하게 다루는 것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어떻게 지내세요, 마릴라? 어서 들어오세요. 이 아이가 입양한 아이인 모양이로군요.”

배리 부인이 다정하게 인사를 건넸다.

“네, 앤 셜리라고 해요.”

마릴라가 말했다.

“‘e’자가 붙은 앤이에요.”

앤이 얼른 덧붙였다. 아무리 떨리고 긴장이 되어도 이 중요한 일에 오해가 있어서는 안 되었다.

배리 부인은 그 말을 못 들은 건지 이해를못 한건지 친절하게 앤의 손을 잡고 흔들기만 했다.

“잘 지내고 있니?”

“제 마음은 상당히 뒤엉켜 있지만 몸은 잘 지내고 있어요.”

앤이 진지하게 말했다. 그런 다음 마릴라를 향해 모두에게 다 들릴 정도의 큰 소리로 속삭였다.

“제가 거창한 말을 하지는 않았죠, 마릴라 아주머니?”

다이애나는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가 두 사람이 들어오자 얼른 책을 내려놓았다. 엄마의 눈과 머리, 장밋빛 볼을 닮았고 아빠에게서는 밝은 표정을 물려받은 무척 예쁜 아이였다.

“이쪽은 우리 다이애나란다.”

배리 부인이 말했다.

“다이애나, 앤을 정원으로 데리고 나가 네 꽃밭을 보여주어라. 책만 보는 것보다는 밖에 나가 노는 것이 더 좋을 거야.”

아이들이 밖으로 나가자 배리 부인은 마릴라를 향해 말했다.

“다이애나는 온종일 책만 읽어요. 아이 아빠가 책을 사주면서 부추기는 통에 전 말리지도 못하겠어요. 항상 책만 붙들고 있다고요. 같이 밖에 나가 놀 상대가 생겨 다행이에요.”

뜰에는 부드러운 저녁노을이 서쪽 전나무 고목 사이로 비쳐들었다. 앤과 다이애나는 화려한 참나리꽃 덤불을 사이에 두고 부끄러운 듯 서로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배리 씨네 정원은 온갖 꽃들이 만발해 있어 운명을 결정하게 될 이런 초조한 순간만 아니었더라면 앤은 몹시 신이 났을 것이다. 정원 가장자리로는 큰 버드나무 고목과 키가 큰 전나무들이 빙 둘러서 있고 그 밑으로는 음지를 좋아하는 꽃들이 탐스럽게 피었다. 조가비로 가장자리를 장식한 단정하고 반듯반듯한 통로가 잔뜩 물을 머금은 빨간 리본처럼 정원을 가로지르고, 그 사이 자리 잡은 화단에는 정열적인 장미와 화려한붉은색깔의 모란과 같은 아름답고 기품 있는 꽃들이 한껏 자태를 뽐냈다. 향기로운 하얀 수선화와 가시 많고 우아한 스코틀랜드 장미, 분홍, 파랑, 흰색의매발톱꽃, 라일락꽃과 비슷한 색깔이 나는 패랭이꽃, 남유럽 원산의 국화과 쑥류와 리본초, 박하, 보라색의 아담과 이브, 나팔 수선화도 피어 있고, 귀여운 하얀 클로버 꽃들도 잔잔한 향기를 뿌리며 무더기로 피어났다. 단정한 흰색 사향 위로는 불타오르듯 붉은색 꽃들이 차지했다. 이런 아름다운 정원을 떠나기가 아쉬운 듯 햇빛도 꾸물거리고 벌들이 한가로이 윙윙댔으며 바람은 부드럽게 나뭇가지 끝을 어루만졌다.

“음, 다이애나.”

드디어 앤이 손을 마주 잡고 거의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 나랑 단짝 친구가 될 수 있을 만큼 나를 좋아할 수 있을 것 같니?”

다이애나가 웃었다. 다이애나는 항상 말하기 전에 웃는 버릇이 있었다.

“그래,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네가‘초록 지붕 집’에 살게 되어 무척 기쁘고, 같이 놀 친구가 있어서 너무 좋아. 우리 집 근처에는 같이 놀 만한 여자 친구도 없고, 내 동생은 너무 어려서 나랑 같이 놀 수 없거든.”

다이애나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영원히, 영원히 내 친구가 되어준다고 맹세할 수 있어?”
앤이 진지하게 물었다. 다이애나가 놀란 듯 바라보았다.
“맹세하는 것은 나쁜 일인 것 같지 않니?”

다이애나가 말했다.

“아, 아니, 그런 맹세가 아니고, 맹세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어.”

“한가지밖에들어본 적이 없는데.”

다이애나가 의심스러운 듯 말했다.

“정말 그런 종류가 있어. 전혀 나쁜 게 아니야. 그저 엄숙하게 맹세하면서 약속하기만 하면 되는 거야.”

“글쎄, 그거라면 괜찮아. 어떻게 하는 거지?”

다이애나가 안심이 되는 듯동의했다.

“우리가 서로 손을 잡아야 하고, 그리고 흐르는 물 위에서 해야 하는 건데. 그냥 이 좁은 길이 흐르는 물이라고 상상을 하자. 내가 먼저 맹세를 할게. 나는 해와 달이 사라지지 않는 한 나의 단짝 친구 다이애나 배리에게 충실할 것을 엄숙히 맹세합니다. 자아, 너도 해. 내 이름을 넣어서 맹세를 해야 해.”

앤이 심각하게 말했다.

다이애나도 웃음을 터트린 후 그 맹세를 따라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웃은 다음 말했다.

“넌 참 별난 아이구나, 앤. 전에도 네가 좀 별난 아이라는 얘기는 들었어. 하지만 난 네가 정말 좋아질 것 같아.”
마릴라와 앤이 집으로 돌아올 때 다이애나는 통나무 다리 있는 곳까지 둘을 배웅해주었다. 이 두 소녀는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걸었다. 개울가에서 둘은 내일 오후에 다시 만나기로 수없이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그래, 다이애나와 마음이 통하던?”

‘초록 지붕 집’의 뜰로 들어서면서 마릴라가 물었다.
“오, 그럼요.”

마릴라의 빈정대는 말투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앤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오, 마릴라 아주머니, 저는 지금 이 순간 프린스에드워드 섬에서 가장 행복한 소녀예요. 오늘 밤에는 기분 좋게 기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다이애나와 저는 내일 윌리엄 벨 아저씨의 자작나무 숲에서 소꿉놀이 집을 만들기로 했어요. 저 장작 두는 곳에 있는 깨진 도자기 그릇들을 좀 가져가도 될까요? 다이애나의 생일은 2월이고 저는 3월이에요. 이것도 심상치 않은 인연이라고 생각되지 않으세요? 다이애나는 저한테 책도 빌려준다고 했어요. 말할 수 없이 재미있고 감동적인 책이래요. 쌀백합이 피어 있는 숲 속에도 데려가 준다고 했어요. 아주머니도 다이애나가 감수성이 풍부해 보이는 눈을 가졌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저도 그런 눈을 갖고 있다면 좋겠어요. 다이애나는 <개암나무 골짜기의 넬리>란 노래도 가르쳐주기로 했어요. 그리고 제 방에 둘 수 있도록 그림도 주기로 했어요. 푸른 실크 드레스를 입고 있는 아름다운 숙녀를 그린 무척 아름다운 그림인데, 재봉틀을 파는 사람이 준 거래요. 저도 다이애나에게 줄 것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다이애나보다 키는 2센티미터 정도 더 크지만 다이애나는 저보다 훨씬 더 통통해요. 다이애나는 마른 사람이 더 우아해 보인다면서 자기도 마르고 싶다고 하지만, 그냥 제 기분을 생각해서 한 말인지도 모르겠어요. 바닷가에 가서 조개껍데기도 주울 거예요. 그리고 우리는 통나무 다리 옆에 있는 샘을 ‘드리아드15)의 샘’이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아주 우아한 이름이죠? 전에 책에서 그런 이름의 샘을 읽은 적이 있거든요. 드리아드는 어른 요정일 거란 생각이 들어요.”

“다이애나가 못 참을 정도로 말을 많이 하지는 마라. 항상 이 말을명심하고 있어야 해, 앤. 온종일 놀러만 다녀서도 안 되고. 우선은 해야 할 일들을 마친 다음에 놀아야 해.”

마릴라가 말했다.앤의 행복의 잔은 이제 가득 채워졌다. 그런데 매슈가 이 잔이 넘쳐흐르게 해주었다. 카모디가게에 갔다 돌아와서는 마릴라를 간청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내놓은 것이다.

“네가 초콜릿 캐러멜을 좋아한다고 했던 말이 생각나서 좀 사왔다.”

“흥, 그런 것은 이도 썩고 배도 아프고, 암튼 이나 위장에 좋지 않아요. 알았다, 알았어, 그런 슬픈 표정으로 바라보지 마라, 앤. 매슈 아저씨가 일부러 가서 사오셨는데 당연히 먹어야지. 차라리 박하를 사왔으면 더 좋았으련만. 그게 몸에는 더 좋잖아요. 한꺼번에 다 먹어서 배탈이나 나지 않도록 조심해라.”

“네, 한꺼번에 다 먹지 않아요. 오늘 밤에는 한 개만 먹을 거예요, 마릴라 아주머니. 그리고 절반은 다이애나에게 줄 거예요. 그래도 되나요? 그렇게 하면 나머지 반이 두 배는 더 맛있을 거 같아요. 다이애나에게 줄 것이 생겼다고 생각하니 너무 좋아요.”

앤이 진지하게 말했다.

“저런 점이 저 아이의 좋은 점이에요. 전혀 인색하지 않아요. 아이들이 욕심이 많으면 보기 싫은데 다행이지 뭐예요. 세상에 나 좀 보게, 앤이 온 지 3주밖에 안 됐는데, 여기 항상 살았던 것처럼 느껴지다니. 이제는 저 애가 없는 집은 상상할 수도 없어요. 그것 보란 듯이 쳐다보지 좀 마세요, 오라버니. 그런 표정은 여자가 지어도 보기 싫은데 남자가 그러면 정말 꼴불견이라고요. 저 아이를 데리고 있자는 오라버니 말에 따라 아이를 데리고 있게 되었고 나도 저 애가 점점 더 좋아진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걸 갖고 자꾸만 기분 상하게 하지 말라고요, 매슈 오라버니.”




15)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나무의 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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