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크밤

빨간 머리 앤 23~24

나단비 | 2024.02.14 14:08:00 댓글: 0 조회: 76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47139
23

명예를 지킨 대가





그 일이 일어나기까지 앤은 2주 이상이나 잘 견디었다. 그리고 그 진통제 케이크 사건 이후 아무 일 없이 거의 한 달이나 지나가서 앤이 뭔가 새로운 소동을 일으킬 때도 되었다. 탈지유를 돼지 밥그릇에 부어주는 대신 멍하니 부엌에 놓인 털실 바구니에 부어버린다든지, 공상에 빠져 걷다가 통나무 다리 끝에서 시냇물로 풍덩 빠져버린다든지 하는 사소한 실수들 말이다.

목사관에서 차를 마신 지 일주일 후, 다이애나 배리가 파티를 연다고 했다.

“몇 명만 골라서 초대한 거예요. 우리 반여자아이들만요.”

앤이 마릴라를 안심시켰다.

그들은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차를 마시고 정원에 나갈 때까지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런저런 놀이에 조금씩 싫증을 내며, 아이들은 자극적인 장난거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 생각은 바로 ‘도전’이란 놀이로 나타났다. 그때 도전은 에이번리 어린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놀이였다.남자아이들이 먼저 시작했지만 곧여자아이들에게도 퍼지며, 그 여름 에이번리에서는 온갖 무모한 짓이 벌어졌다. 아이들이 너도나도 모험에 도전해 그 이야기로만 책 한 권을 쓸 수 있을 정도였다.

처음엔 캐리 슬론이 루비 길리스에게 대문 앞의 커다란 버드나무에서 어딘가를 가리키며 거기까지 올라가 보라고 도전했다. 루비 길리스는 그 나무에 붙어 있는 통통한 초록색 쐐기벌레들이 무서웠고, 새로 산 모슬린 드레스가 찢어진다면 호되게 야단치실 엄마가 눈앞에서 어른거렸지만 날쌔게 나무에 올라 캐리 슬론에게 패배의 쓴맛을 안겨주었다.

다음엔 조시 파이가 제인 앤드루스에게 한 번도 쉬지 말고, 또 오른발을 땅에 대지 말고 왼발로만 정원을 한 바퀴 돌아보라고 도전했다. 제인 앤드루스는 기세 좋게 도전을 시도했지만 세 번째 모퉁이에서 기진맥진해서는 패배를 인정했다.

조시가 이겼다고필요 이상으로 좋아하자 앤 셜리가 조시에게 동쪽 끝까지 정원을 둘러싸고 있는 판자 울타리 위를 걸어보라고 했다. 판자 울타리 위를 걸으려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완벽한 기술과 균형이 필요했다. 비록 반 아이들에게 인기는 없는 조시 파이지만 판자 울타리 위를 걷는 일이라면 타고난 재주도 있었고 많은 연습으로 훈련도 되어 있었다. 배리 씨네 정원 울타리 위를 걷는 것처럼 쉬운 일은 도전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여유만만하게 걸어버렸다. 조시의 위업에 모두들 내키지는 않았지만 찬사의 말을 보내주었다. 울타리 위 걷기는 누구나 한 번쯤 시도해보았던 터라 그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도 모두들 잘 알았다. 조시가 승리의 기쁨에 얼굴이 벌게져 내려와서는 앤에게 도전의 눈빛을 던졌다.

앤이 땋아 내린 빨간 머리를 젖히면서 말했다.

“저렇게 낮고 넓은 울타리를 걷는 게 대단한 거라고는 생각지 않아. 난 지붕 마룻대를 걸을 수 있는 아이를 알고 있어. 매리스빌에 사는 아이야.”

“믿을 수 없는 일이야. 누구든 지붕 마룻대를 걸을 수 있는 사람은 없어. 넌 더더욱 절대로 못 할 일이고.”

조시가 딱 잘라 말했다.

“내가 못 할 것 같아?”

앤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럼 내가 너한테 해보라고 도전을 걸지.”

조시가 도전을 걸었다.

“저기로 올라가서 부엌 지붕의 마룻대를 걸어봐.”

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조시의 도전을 피할 수는 없었다. 앤이 부엌 지붕에 기대 세워진 사다리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 자리에 모인 5학년여자아이들 중 절반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가슴을 졸이고 있었고, 절반은 몹시 당황해하며 소리를 질렀다.

“오우!”

“앤, 도전하지 마. 넌 지붕에서 떨어져 죽게 될 거야. 조시 파이의 말 따위는 신경 쓸 거 없다고. 아무한테나 그렇게 위험스러운 일에 도전을 거는 것은 정당하지 못해.”
다이애나가 애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해야만 해. 내 명예가 걸린 일이야.”

앤이 엄숙하게 말했다.

“나는 저 마룻대를 걷든지 아니면 떨어져 죽게 될 거야. 다이애나, 만일 내가 죽으면 내 진주 반지를 네가 가져도 좋아.”

모두가 숨을 죽이고 조용히 지켜보았다. 앤이 사다리로 올라가 마침내 마룻대에 올라섰고, 똑바로 서서 위태위태한 발걸음으로 균형을 잡은 다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불안할 정도로 높은 곳에 올라섰고 지붕 위를 걷는 데는 상상력이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생각하자 어지러웠다. 앤은 용기를 내어 서너 발을 떼었지만 곧 재앙이 닥치고 말았다. 앤이 휘청거리면서 균형을 잃었고, 발을헛디디고는떨어졌다. 앤은 햇볕에 달아오른 지붕 위로 미끄러져, 그 아래의 담쟁이덩굴에 떨어지고 말았다. 아래에서 동그랗게 모여 지켜보던 아이들이 놀라서 거의 동시에 꽥 소리를 질렀다.

만일 앤이 올라간 쪽 방향으로떨어졌더라면 다이애나는 십중팔구 그때 진주 반지의 새 주인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반대편, 지붕이 현관 위로 이어져 거의 땅에 맞붙은 곳으로 떨어져 큰일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땅에 뿌리를 내린 듯 그 자리에서 덜덜 떠는 루비 길리스를 제외한 다른 아이들은 미친 듯이 집을 빙 둘러 뛰어갔다. 앤은 마구 뒤엉킨 담쟁이덩굴 속에 하얗게 질린 얼굴로 축 늘어져 있었다.

“앤, 죽은 거야?”

맨 처음 당도한 다이애나가 앤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물었다.

“오, 앤, 한 마디라도 말 좀 해봐. 정말 죽었는지 말을 해봐.”

“아니, 다이애나, 난 죽지 않았어, 하지만 감각이 없는 것 같아.”

앤이 비틀거리며 일어나 앉으며 흐릿한 목소리로 말하자 소녀들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특히 조시 파이도 상상력이 부족하긴 했지만 앤 셜리를 비극적으로 요절하게 만든 장본인으로 낙인찍힌 자기의 끔찍한 미래를 생생하게 그려볼 수 있었다.

“어디가? 오, 앤, 어디가?”

캐리 슬론이 훌쩍이며 물었다. 앤이 대답할 틈도 없이 배리 부인이 사고 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앤이 몸을 비틀며 일어나 보려고 시도했지만 다시 날카로운 통증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무슨 일이니? 어디 다쳤어?”

배리 부인이 다그쳐 물었다.

“제 발목이요.”

앤이 숨을 헐떡거렸다.

“오, 다이애나, 제발 너희 아빠께 나를 우리 집까지 좀데려다 달라고해줄래? 난 집까지 걸어갈 수가 없어. 그리고 그렇게 멀리 한 발로 뛰어갈 수도 없잖아. 제인은 이 정원도 다 돌지 못했는데.”

배리 씨가 동네여자아이들이 줄줄이 뒤따르는 가운데 배리 아주머니와 함께 통나무 다리를 건너 비탈길을 걸어 올라오고 있을 때 마릴라는 과수원에서 여름 사과를 따고 있었다. 앤은 배리 씨의 품에 안긴 채 머리를 한쪽 어깨에 힘없이 기대고 있었다.

이 장면을 본 마릴라는 놀라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돌연 심장에 심한 통증이 느껴지면서 앤이 그녀에게 어떤 의미를 가진 아이인지 깨달았다. 자기가 앤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아니 매우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는 있었지만 그때 마릴라는 앤이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은 동시에 급히 비탈길을 달려 내려갔다.

“배리 씨, 우리 애한테 무슨 일이 있는 건가요?”

아주 오랫동안 강한 자제심으로 현명하게 처신해 온 마릴라로서도 어쩔 수 없이 창백해진 채 온몸을 덜덜 떨며 물었다.

앤이 머리를 들며 말했다.

“놀랄 것 없어요, 마릴라 아주머니. 제가 지붕 마룻대를 걷다 떨어진 거예요. 발목을 삔 것 같아요. 하지만 마릴라 아주머니, 목이 부러질 수도 있었다고요.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괜찮아요.”

“파티에 가는 걸 내가 허락했을 때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 짐작했어야 했는데.”

일단 마음을 놓은 마릴라가 날카롭게 한소리를 했다.

“배리 씨, 미안하지만 앤을 집 안으로 데려가 소파에 눕혀주시겠어요? 저런, 우리 애가 기절해버렸어요!”

정말이었다. 다친 곳이 너무 아파 그만앤은 많은 소원 중 하나를 기어코 이루고 말았다. 기절해버린 것이었다.

부름을 받고 황급히 밭에서 달려온 매슈는 곧장 의사를 부르러 갔다. 즉시 달려온 의사는 상처를 살펴보더니 생각했던 것보다 심각하다고 했다. 앤의 발목이 부러진 것이었다.

그날 밤 창백한 소녀가 누워 있는 동쪽 방으로 올라간 마릴라를 침대에서 애처로운 목소리가반겨주었다.

“제가 너무 불쌍해 보이세요, 마릴라 아주머니?”

“이게 다 네 잘못이야.”

마릴라가 블라인드를 내리고 등을 켜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저를 가엷게 생각해주셔야죠. 모든 것이 다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일은 참 견디기 힘들거든요. 다른 사람을 탓할 수 있다면 제 마음이 훨씬 더 편할 텐데요. 하지만 아주머니가 지붕 마룻대를 걸어보라는 도전을 받았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앤이 말했다.

“나 같으면 단단한 땅에서 해보자고 했을 거다. 바보 같은 짓이었다!”

마릴라가 말했다.

앤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머니는 그렇게 강한 마음을 가졌지만 저는 그렇지 못해요. 조시 파이의 도전을 수락하지 않으면 그 조롱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어요. 조시라면 평생 제 앞에서 으스댔을 거예요. 이제 전 충분히 벌을 받았으니까 더 이상은 야단치지 말아주세요, 마릴라 아주머니. 또 기절하는 것도 별로였어요. 의사 선생님이 발목을 맞춰주실 때 아파서 죽는 줄 알았어요. 6~7주가량 돌아다닐 수가 없으니 새로 오신 여자 선생님도 볼 수 없어요. 제가 학교에 나갈 수 있을 때쯤이면 그 선생님도 새 선생님이 아닐 테고요. 그리고 길…… 아니, 모든 아이가 반에서 저를 앞설 거고요. 오, 전 아주 한심한 아이예요. 하지만 아주머니가 저를 야단치지 않으시면 전 용기 있게 모든 일을 이겨낼 거예요, 마릴라 아주머니.”

“알았다, 알았어.화를 내지 않으마. 넌 정말 운도 없구나, 정말. 하지만 네가 말한 대로 그런 어려움쯤은 다 이겨낼 수 있을 거다. 이제 저녁을 먹어야지.”

“그래도 제가 상상력이 많아서 다행이지 않나요? 상상을 하면 어떤 어려움도 쉽게 견딜 수 있거든요. 상상력이 없는 사람은 뼈가 부러지면 무엇을 하며 어떻게 지낼까요?”

앤이 말했다.

앤은 그 따분한 7주 동안 자기의 상상력을 몇 번이나 축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앤이 상상을 하면서만 지냈던 것은 아니다. 방문객도 많아서, 하루도 빠짐없이 친구들이 꽃이나 책을 갖다 주었고 에이번리 아이들의 세계에서 일어난 일들을 모두 이야기해주었다.

“모두가 착하고 친절했어요, 마릴라 아주머니.”

앤이 처음으로 절룩거리며 마루를걸어 나올수 있었던 날 행복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누워만 있어 즐겁지는 않았지만 좋은 면도 있었어요. 친구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있잖아요. 벨 장로님까지 저를 보러 오셨잖아요. 벨 장로님은 정말로 고매하신 분이에요. 물론 저랑 영혼이 통하는 친구는 아니지만요. 하지만 전 그분이 좋아요. 그래서 벨 장로님의 기도를 비난했던 것이 정말 죄송할 뿐이에요. 이제 그분이 진심으로 기도한다는 것을 믿어요. 그런데 기도를 습관처럼 해서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거예요. 조금만 신경 쓰면 괜찮아질 거예요. 제가 솔직하게 힌트도 드렸어요. 또 저는 기도를 재미있게 하려고 개인적으로 무척 노력한다고도 말씀드렸어요. 그런데 벨 장로님도 어렸을 때 발목이 부러졌다고 하시더라고요. 벨 장로님도 어린아이였던 때가 있었다고 생각하니까 정말 이상한 기분이 들어요. 벨 장로님의 그런 모습이 상상되지 않는 걸 보면 제 상상력에도 한계가 있나 봐요. 벨 장로님이 어렸을 때를 상상해보려고 하면, 희끗희끗한 구레나룻에 안경을 쓴 모습밖에 그려지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주일 학교에서 보는 모습이 작아진 것일 뿐이에요. 사모님을 어린 여자아이로 상상하기는 무척 쉬워요. 사모님은 열네 번이나 저를 보러 와주셨어요. 그 정도면 자랑해도 되는 일이 아닌가요, 마릴라 아주머니? 목사님 사모님을 찾는 사람도 많을 텐데요! 사모님이 찾아와 주실 때마다 기분이 무척 좋았어요. 그분은 절대로 이건 네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고, 이걸 교훈 삼아 더 나은 애가 되면 좋겠다고 하시거든요. 린드 아주머니는 저를 보러 왔을 때마다 항상 그렇게 말했어요. 물론 제가 더 나은 아이가 되기를 바란다는 느낌을 주는 식으로 말하긴 했지만 제가 착한 아이가 될 거라고는 믿지 않는 눈치셨어요. 조시 파이까지 저를 보러 와주었어요. 전 최대한 정중하게 조시를 맞아주었어요. 저에게 지붕 마룻대를 걸어보라는 도전을 걸어 미안해한다고 생각하니까요. 제가 죽었더라면 조시는 평생 죄책감이란 어두운 짐을 지고 살아야 했을 거예요. 다이애나는 정말로 충실한 친구예요. 매일 외로운 저를 찾아와서 즐겁게 해주고 했잖아요. 하지만 무엇보다 학교에 갈 수 있어 너무 좋아요. 아이들한테 새 선생님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거든요. 모든 여자아이들이 선생님을 무척 상냥한 분이라고 했어요. 다이애나 말로는 금발 곱슬머리가 눈부시게 아름답고 눈동자는 황홀할 정도래요. 옷도 예쁘게 입고, 퍼프 소매는 에이번리에서 가장 클 거라고 했어요. 또 격주로 금요일 오후에는 암송 시간을 갖고, 모든 학생이 시를 낭송하거나 대화극에 참가해야 한대요. 오, 생각만 해도 너무 즐거워요. 조시 파이는 싫다고 했다지만 조시가 상상력이 부족해서 그런 거예요. 다이애나와 루비 길리스와 제인 앤드루스는 다음 금요일에 있을 <새벽의 왕진>29)이라는 대화극을 연습하고 있대요. 암송이 없는 금요일 오후에는 스테이시 선생님이 아이들을 모두 숲으로 데려가 야외수업을 하면서, 풀고사리와 꽃과 새를 공부한대요. 또 매일 아침과 오후에는 체육 시간을 갖고요. 린드 아주머니는 그런 교육 방식을 들어본 적이 없고 모든 것이 여자 선생님을 모셔서 그런 거라고 말한다지만, 저는 너무너무 좋다고 생각해요. 스테이시 선생님은 틀림없이 저와 영혼이 통하는 친구가 될 것 같아요.”

“한 가지는 분명하구나, 앤. 네가 배리 씨 지붕에서 떨어졌어도 네 혀는 아무 탈도 없다는 것 말이다.”
마릴라가 말했다.


29) 데니슨(T. S. Denison)의《금요일 오후의 대화극(Friday Afternoon Series of Dialogues)》에 수록된 대화극.





24

스테이시 선생님과 학생들의 발표회






앤은 10월이 되자 다시 학교에 나갈 준비를 시작했다. 눈부신 영광의 10월, 모든 것이 붉은빛과 황금빛으로 어우러진 포근한 아침이 되면 계곡은 가을의 정령이 쏟아부은 듯한 옅은 안개로 가득했고, 거기에 햇살이 비치며 자줏빛, 진줏빛, 은빛, 장밋빛, 뿌연 푸른빛이 영롱하게 감돌았다. 이슬이 떨어진 들판은 은빛 천처럼 반짝였고, 울창한 숲에는 움푹한 곳마다 낙엽이 수북이 쌓여 발을 디디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작나무 길’은 노란 장막을 친 것처럼 변했고, 길옆에 늘어선 고사리들은 시들어 갈색으로 변해갔다. 대기에는 느릿한 달팽이와 달리 발걸음을 재촉하며 신나게 학교로 달려가는 작은 소녀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들뜬 분위기가 감돌았다. 앤은 다이애나의 옆자리인 작은 갈색 책상으로 다시 돌아와 너무 즐거웠다. 루비 길리스가 통로 건너편 자리에서 고개를 끄덕여주었고, 캐리 슬론은 쪽지를 날려 보냈으며, 줄리아 벨은 뒷자리에서 껌을 살짝 건네주었다. 앤은 행복한 한숨을 길게 토해내며 연필을 깎았고 그림 카드를 정리해 책상 속에 넣었다. 살아 있다는 것은 분명 즐거운 일이었다.

앤은 새 선생님에게서 진실하고 유익한 친구가 될 가능성을 엿보았다. 스테이시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사랑을 북돋워주고 감싸주며, 학생들의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장점을 끌어내주는 천부적 재능을 지닌 영리하고 동정심 많은 젊은 선생이었다. 앤은 스테이시 선생님에게 건전한 영향을 받아 꽃처럼 재능을 발휘했고, 집으로 돌아가면 뭐든 칭찬하는 매슈와 모든 것을 비판하는 마릴라에게 학교생활과 목표를 신나게 이야기했다.

“저는 스테이시 선생님을 온 마음으로 사랑해요, 마릴라 아주머니. 선생님은 진정한 숙녀예요. 목소리도 기막히게 예쁘고요. 제 이름을 부를 때도 ‘e’자를 꼭 넣는다는 걸 저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어요. 오늘 오후엔 시를 암송했어요. 제가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30)를 암송하는 것을 아주머니가 들으셨다면 좋았을 텐데요. 그 시에 제 온 영혼을 불어넣었어요. 집에 오는 길에 루비 길리스는 제가 ‘이제 내 아버지의 전투를 위해 내 여인의 품과 작별하리라.’라는 구절을 읊었을 때 자기 피가 얼어붙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말했어요.”

“그렇다면 헛간에서 나한테도 그 시를 한번 들려다오.”

매슈가 말했다.

“당연히 그래야죠. 하지만 그때처럼 잘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제 말 한 마디에 모두가 숨을 죽이면서 저를 쳐다볼 때처럼 흥분되지는 않을 테니까요. 아저씨한테 피가 차갑게 얼어붙는 것 같은 오싹한 느낌을 줄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앤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말했다.

“린드 아주머니가 그러는데, 지난 금요일에남자아이들이 벨 씨네 언덕에서 까마귀 둥지를 찾겠다고 큰 나무들을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걸 보고 오싹했다고 하더라. 스테이시 선생님이 그런 짓을 부추기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

마릴라가 말했다.

“저희가 자연 공부를 하다가 까마귀 둥지를 보고 싶다고 했거든요. 그날 오후는 야외 학습을 했어요. 야외 학습을 하는 오후는 정말 좋아요, 마릴라 아주머니. 스테이시 선생님은 모든 것을 너무 아름답게 설명하세요. 그리고 야외 학습을 하면 그것을 주제로 작문을 해야 해요. 제가 제일 잘 써요.”

“네 입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건 근거도 없이 잘난 척이나 하는 소리처럼 들린다, 앤. 그런 말은 선생님이 해야 하는 말이니까.”

“하지만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마릴라 아주머니. 제가 공부를 잘한다고 잘난 척할 입장은 아니에요. 기하학에 영 젬병인데 어떻게 잘난 척할 수 있겠어요? 하지만 기하에서도 조금 눈을 뜨기는 했어요. 스테이시 선생님이 쉽게 설명을 해주시거든요. 앞으로도 잘하지는 못할 거예요. 겸손히 생각하면 그래요. 하지만 전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해요. 스테이시 선생님은 거의 언제나 우리에게 마음대로 주제를 정하게 해요. 하지만 다음 주에는 훌륭한 사람을 주제로 작문을 해야 해요. 그런데 지금껏 살았던 훌륭한 사람이 너무 많아서 누구를 골라야 할지 모르겠어요. 훌륭한 사람이 돼서, 죽은 후에도 작문의 주제가 되면 정말 기분 좋지 않겠어요? 오, 저도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전 어른이 되면 훈련받은 간호사가 되어 적십자와 함께 자비의 천사로 야전 병원에서 일할 거예요. 물론 해외 선교사로 나가지 않으면 그렇게 한다는 거예요. 해외 선교사가 되는 것도 무척 낭만적이지만 선교사가 되려면 아주 착해야 하잖아요. 그게 큰 걸림돌이에요. 우리는 매일 체조도 해요. 체조를 하면 몸도 날씬해지고 소화도 잘된대요.”

“허튼소리!”

그런 일이 다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하는 마릴라가 말했다.

하지만 11월에 들어서면서 스테이시 선생님이 제안한 한 계획 앞에서, 야외 학습이니 암송회니 체조니 하는 이야기가 쑥 들어가 버렸다. 에이번리 학교 학생들이 크리스마스 저녁에 공회당에서 발표회를 열어, 학교에국기를 세우는 데필요한 비용을 보태자는 칭찬할 만한 계획이었다. 모든 학생들이 이 계획에 찬성해서 당장 준비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 발표회에 출연하기로 결정된 사람들 중에서도 앤 셜리만큼 기대를 많이 한 사람은 없었다. 마릴라의 반대에 부딪히기는 했지만 앤은 이 일에 온 마음과 정성을 다 기울였다. 마릴라는 이런 일이 다 어리석은 짓이라고 여겼다.

“너희 머리를 쓸모없는 생각으로 채우고, 공부에 쏟아야 할 시간을 빼앗는 짓일 뿐이다. 아이들이 발표회를 열고 연습을 한답시고 몰려다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괜히 허영심만 생기고, 쓸데없이 싸돌아다니기나 할 테지.”

마릴라가 불평을 해댔다.

“하지만 가치 있는 목적도 생각해보세요. 국기는 애국심을 고취시켜준다고요, 마릴라 아주머니.”

“허튼소리마라! 너희 중 누구도 소중한 애국심에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을 거다. 너희는 그저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고 싶은 것일 뿐이야.”

“글쎄요, 애국심에 재미를 더하면 좋은 게 아닌가요? 물론 발표회를 갖는다는 것이 즐거운 일인 건 사실이에요. 합창이 여섯 번에, 다이애나가 혼자서 독창을 해요. 전 두 개의 대화극에 출연해요. <소문을 금지하는 사회>31)와 <요정 여왕>32)이라는 극이죠. 남자아이들도 대화극 하나를 해요. 그리고 전 시 두 편을 암송할 예정이에요, 마릴라 아주머니. 그때를 생각하면 벌써부터 걱정돼서 온몸이 떨려요. 하지만 기분 좋은 떨림이죠.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활인화33)를 보여주기로 했어요.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극인데, 다이애나와 루비, 그리고 제가 출연해요. 모두가 머리를 치렁치렁 늘어뜨리고 하얀 옷을 입을 거예요. 제가 희망 역을 맡기로 했는데 두 손은 이렇게 꼭 마주 잡고 두 눈은 위로 치켜뜰 거예요. 암송 연습은 다락방에서 할 거니까, 혹시 신음 소리를 듣더라도 놀라지 마세요. 가슴이 터질 듯이 비통하게 읊어야 하는 시가 있거든요. 예술적으로 신음 소리를 내기가 정말 어려워요, 마릴라 아주머니. 조시 파이는 대화극에서 원하는 역할을 맡지 못해 골이 났어요. 요정의 여왕 역할을 맡고 싶어 했거든요. 하지만 조시처럼 뚱뚱한 요정 여왕이 있다는 말을 누구도 들어보지 못했을 테니까 조시가 그 역할을 맡으면 정말로 웃길 거예요. 요정 여왕은 날씬해야 하거든요. 그래서 제인 앤드루스가 여왕 역할을 맡은 거고 저는 여왕의 시녀예요. 조시는 빨간 머리 요정도 뚱뚱한 요정만큼 웃긴다고 말했지만, 저는 조시가 뭐라고 말하든 마음에 담아두지 않기로 했어요. 저는 하얀 장미 화환을 머리에 쓸 거고, 루비 길리스는 슬리퍼를 저한테 빌려주기로 했어요. 저는 슬리퍼가 없잖아요. 요정들은 슬리퍼를 신어야 하거든요. 아주머니라면 부츠를 신은 요정을 상상할 수 있겠어요? 더구나 끝에 구리를 덧댄 부츠를요. 우리는 구불거리는 가문비나무와 전나무 가지, 그리고 분홍색 종이 장미로 공회당을 장식할 거예요. 관객들이 자리에 앉으면, 우리는 둘씩 짝을 지어 무대에 입장하기도 했어요. 엠 화이트가 연주하는 오르간 소리에 맞춰서요. 오, 마릴라 아주머니, 아주머니가 저처럼은 이 발표회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아주머니의 어린 앤이 돋보이는 걸 보고 싶지 않으세요?”

“네가 올바로 행동하기를 바랄 뿐이다. 이 소동이 끝나고 네가 다시 안정을 되찾아야 안심이 되겠다. 지금 네 머릿속에는 대화극, 신음 소리, 그림이란 것으로 가득 차 있는데 무슨 말이 들리겠니. 정말 네 혀는 닳지 않는 대리석 같구나.”

앤이 한숨을 내쉬며 뒤뜰로 나갔다. 뒤뜰에서는 초승달이 연둣빛을 띤 서쪽 하늘에서 헐벗은 미루나무 가지들 사이로 빛나고 있었고, 매슈는 장작을 패고 있었다. 앤은 장작더미에 걸터앉아 매슈에게 발표회를 이야기했다. 적어도 그 순간에는 매슈만이 마음의 문을 열고 흥겹게 그 이야기를 들어줄 거라고 확신했다.

“그래, 아주 훌륭한 발표회가 될 것 같구나. 너도 맡은 역할을 잘해낼 거다.”

매슈가 생기 가득하고 열정에 차 있는 작은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앤도 따라 웃었다. 이 두 사람은 아주 좋은 친구였다. 매슈는 벌써 몇 번이나 앤의 교육 문제에는 상관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앤의 교육은 전적으로 마릴라의 책임하에 있는 일이니까. 만일 그것이 매슈가 할 일이었다면 앤이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은 마음과 의무감 사이에서 자주 걱정을 하고 갈등을 겪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는 매슈로서는 마릴라의 말마따나 마음껏 앤의 버릇을 버려놓아도 되었다. 그러나 결국은 그것도 나쁜 일은 아니다. 아이의 마음을 조금만 이해해주고 받아준다면 온갖 세심한 교육 방법을 다 동원한 것만큼 교육 효과가 큰 것 아닌가.



30) <Mary, Queen of Scots>: 스코틀랜드의 변호사이자 시인이었던 헨리 글래스포드 벨(Henry Glassford Bell, 1803~1874)이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1542~1587)를 주제로 쓴 시.
31) 데니슨(T. S. Denison)의 <금요일 오후를 위한 대화극(Friday Afternoon Series of Dialogues)>에 수록된 극으로, 여성들이 소문을 억제해보자고 협회를 만들었지만 남의 얘기에 더욱 빠지게 되어버렸다는 내용.
32) 영국의 토머스 퍼시(Thomas Percy, 1729~1811)가 스코틀랜드 등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요정 전설을모티프로 요정 여왕 맵과 요정들이 인간에게 접근해 장난치거나 숲에서 춤추는 모습을 묘사한 극.
33) 산 사람을 화중인물(畵中人物)과 같이 분장시키고 말없이 부동의 자세로 배치시켜 역사나 문학의 한 장면, 또는 명화(名畵)등을 모의적(模擬的)으로 나타내는 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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