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크밤

빨간 머리 앤 31~32

나단비 | 2024.02.16 12:06:27 댓글: 0 조회: 98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47593
31
시냇물과 강물이 만나는 곳44)




앤은 즐거운 여름을 마음껏 누렸다. 앤과 다이애나는 거의 집 밖에서 지내면서 ‘연인의 오솔길’이나 ‘드리아드의 샘’, ‘버드나무 연못’과 ‘빅토리아 섬’이 안겨주는 즐거움에 푹 빠져 지냈다. 여름방학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났던 일로 인해 마릴라도 앤이 밖으로만 나돈다고 나무라지 않았다. 미니 메이가 후두염에 걸렸던 날 밤 스펜서베일에서 왔던 의사 선생이 어느 날 우연히 환자 집에서 앤을 보게 되었다. 입술을 찡그리고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앤의 안색을 유심히 살피던 의사가 사람을 통해 마릴라 커스버트에게 이런 전갈을 보냈다.
“댁의 빨간 머리 아이를 여름 내내 밖에 나가 놀게 하세요. 걸음새가 더 활기에 넘칠 때까지 책은일절읽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마릴라는 놀라 가슴을쓸어내려야했다. 이 말을 따르지 않으면 앤이 폐결핵으로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경고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앤은 황금 같은 여름 방학을 보낼 수 있었다. 산책도 하고, 배도 타고, 딸기도 따며 공상도 마음껏 할 수 있는 자유롭고 풍요로운 생활이었다. 9월이 되자 앤의 눈은 생기에 넘쳐 다시 반짝거렸고 몸에서도 활기가 느껴졌으며 발걸음도 스펜서베일의 의사가 보았더라면 틀림없이 만족할 정도로 힘에 넘쳤으며 가슴속에는 또다시 포부와 열의가 가득 차올랐다.
“전력을 다해 다시 공부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앤이 다락에서 책들을 갖고 내려오며 말했다.
“아, 정다운 내 친구들아, 다시 너희의 정직한 얼굴을 보니 반갑구나. 기하야, 너까지도 반갑다. 전 완벽하게 아름다운 여름을 보냈어요, 마릴라 아주머니. 그리고 이제는 강인한 몸으로 경주에 다시 씩씩하게 나설 거예요. 앨런 목사님이 지난 일요일에 말씀하신 것처럼요. 앨런 목사님은 정말 설교를 잘하시지 않아요? 린드 아주머니도 목사님이 매일 나아지고 있대요. 그래서 어떤 도시의 교회에서 낚아채 가면 우리가 또 풋내기 목사를 모셔와 길들여야 할 거라며,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댔어요. 하지만 제 생각에는 지레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것 같아요. 앨런 목사님이 우리와 함께 있는 동안 목사님과 잘 지내면 그걸로 충분하잖아요. 저도 남자라면 목사님이 되고 싶어요. 건전한신학 이론만 갖고 있다면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훌륭한 설교를 굉장히 잘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다면 너무 좋을 것 같아요. 왜 여자는 목사가 될 수 없는 거죠, 마릴라 아주머니? 린드 아주머니께 그렇게 물었더니 아주머니가 깜짝 놀라시면서 큰일 날 소리라고 하셨어요. 미국에야 여자 목사님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며, 있을 거라고 믿지만, 다행히 캐나다는 아직 그런 수치스러운 단계에 이르지 않았고 말하셨어요. 앞으로 그런 불상사가 절대로 있어서도 안 된대요. 하지만 전 그 이유를 모르겠어요. 전 여자도 훌륭한 목사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교회에서 친목 모임을 열고, 차 모임을 준비하고, 기부금 모으는 일도 모두 다 여자들이 하잖아요. 아마 린드 아주머니라면 벨 장로님보다 기도를 잘하실 거라고 확신해요. 또 조금만 연습하면 설교도 매우 잘하실 거예요.”
“그래, 린드 부인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거다. 지금도 사람들한테 설교를 많이 하고 다니니까. 린드 부인이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니까 에이번리에서는 누구도 나쁜 짓을 할 수가 없지.”
마릴라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마릴라 아주머니, 아주머니께 꼭 상의를 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아주머니는 그 일을 어떻게생각하세요?”
앤이 갑자기 비밀 얘기를 털어놓겠다고 했다.
“전 정말 걱정인데요. 일요일 오후 같은 때 이 문제를 더 심각하게 생각하면 더 걱정이 돼요. 전 정말로 착한 사람이 되고 싶거든요. 제가 아주머니나 앨런 부인이나 스테이시 선생님과 함께 있으면 더 착해지고 싶고 그분들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일이나 그분들이 허락하는 일만 하고 싶어요. 하지만 린드 아주머니하고 있을 때는 정말이지 나쁜 짓이 하고 싶어요. 아주머니가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일만 자꾸 하고 싶어진다니까요. 그 유혹을 떨칠 수가 없을 정도로요. 제가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요? 제가 정말 못된 아이라서 그럴까요?”
마릴라가 잠깐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바라보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서 네가 못된 애라면 나도 못된 사람이겠다, 앤. 린드 부인을 보면 나도 그렇거든. 네가 말한 대로 린드 부인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고 모두가 올바른 행동을 해야 한다고 그렇게 잔소리를 하고 다니는데 그 잔소리가 더 나쁜 영향을 주는 것 같다. 나도 그렇게 잔소리를 하지 말아야겠어.레이철은 선량한 기독교인이고 좋은 뜻으로 그러는 거지만 말이다. 린드 부인이 아니면 에이번리에서 누가 그렇게 남의 일에 발 벗고 나서겠니?”
“마릴라 아주머니도 그렇게 느끼신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앤이 안심한 듯 말했다.
“저한테 위안이 돼요. 이제부터 그 문제로 크게 걱정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항상 다른 걱정거리들이 생겨요. 그런 걱정거리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하나를 해결하고 나면 다른 걱정거리가 금방 또 생기거든요, 어른이 되기 시작하니까 깊이 생각해서 결정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요. 그런 문제를 생각해서 어떤 게 옳은지 결정하느라고 항상 바빠요. 어른이 되는 것은 아주 진지한 일이에요. 그렇죠, 마릴라 아주머니? 하지만 아주머니나 매슈 아저씨, 그리고 앨런 부인과 스테이시 선생님이 친구처럼 제 곁에 있으니까 저는 훌륭하게 자라야만 해요. 그렇지 못하면 그것은 제 잘못이에요. 그래서 막중한 책임감을 느껴요. 기회는 한 번밖에 없잖아요. 제가 올바른 어른으로 자라지 못한다고 어린아이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마릴라 아주머니, 전 이번 여름에 키도 5센티미터나 자랐어요. 루비의 파티에 갔을 때 루비 아빠가 키를 재주셨어요. 아주머니가 제 새 옷을 더 길게 만들어주셔서 다행이에요. 그 진한 초록색 옷은 정말 예뻐요. 그리고 치맛단에 층층으로주름 장식도 달아주셔서 너무 기뻐요. 물론 저도 그게 꼭 필요한 것이 아니란 것은 알아요. 하지만 그주름 장식은 이번 가을에 아주 유행이어서 조시 파이의 옷에는 모두 그런주름 장식이 달렸어요. 그 옷 덕분에 공부도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장식을 생각하면 마음이 한없이 편안해진다니까요.”
“너도 이젠 그런 옷을 입을 자격이 있다.”
마릴라가 말했다.

에이번리 학교로 돌아온 스테이시 선생님은 학생들이 모두 다시 한 번 공부에 열정을 불태울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특히 퀸스 준비반 아이들은 그해 말이 되자 전투태세를 갖춘 병사들 같았다. 이들의 앞길에는 벌써 ‘입학시험’이라는 운명적인 일이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했다. 그 생각만 하면 아이들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면! 겨우내 앤은 깨어 있는 동안 늘 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일요일 오후까지도 그 생각에서 놓여날 수가 없어 이제는 도덕적인 문제나 종교 문제는 아예 염두에 둘 수조차 없었다. 그리고 입학시험 합격자 명단 맨 꼭대기에 길버트 블라이드의 이름이 빛나고 앤의 이름은 흔적조차 없는 것을 비참한 모습으로 쳐다보는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러나 겨울은 즐겁고 분주하게, 또 행복하게 쏜살같이 지나갔다. 공부는 흥미로웠고 경쟁은 나날이 치열해져 갔다. 아직 탐구해보지 않은 신선하고 환상적인 세계인 사상, 감정, 야망의 새로운 세계가 앤의 눈앞에 그 문을 열어 보였다.

“언덕 너머에 또 언덕, 알프스 너머 또 알프스가 우뚝 솟아 있다.45)”

그 대부분이 스테이시 선생님의 능숙하고 세심하며 대범한 지도 덕이었다. 선생님은 학생이 스스로 생각하고 탐구하도록 유도했고 혁신보다는 기존 방식을 선호하는 린드 아주머니나 학교 교육위원회가 들으면 충격을 받겠지만 구시대적인 낡은 방식에서 벗어나 좀 헤매더라도 새로운 방식을 찾아보도록 격려했다.

앤은 공부 외에 사교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마릴라는 스펜서베일 의사 선생님의 지시를 항상 마음에 담고 있어서 가끔씩 나서는 외출을 막지 않았다. 토론회는 여전히 성황이었고 발표회도 몇 번이나 열렸다. 거의 어른의 것과 같은 파티도 두어 번 열렸고 썰매 드라이브도, 스케이트 놀이도 했다.
그러는 동안앤은 몰라보게 자랐다.어느 날 앤과 나란히 서본 마릴라는 앤이 자기보다 키가 더 커진 걸 알고 깜짝 놀랐다.
“세상에나, 앤, 몰라보게 컸구나!”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 말 다음에는 한숨이 이어졌다. 앤의 키가 자라고 있는 것에 마릴라는 묘한 아쉬움을 느꼈다. 자기에게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준 아이가 사라져버리고 이렇게 키가 크고 진지한 눈빛과 생각 깊은 이마를 가진 열다섯이나 먹은 아이가 자랑스럽게 머리를 뒤로 젖히고 서 있었다. 마릴라는 예전과 다름없이 그 아이를 사랑했지만 뭔가를 잃어버린 듯한 슬픈 기분이 이상하게 밀려왔다. 그날 밤 앤이 다이애나와 기도회에 가버렸을 때 마릴라는 싸늘한 황혼의 어둠 속에 혼자 앉아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그때 매슈가 등불을 들고 들어왔고, 마릴라는 우는 모습을 들켜버려서 눈물 젖은 눈으로 웃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앤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이제 다 컸어요. 내년 겨울이면 집을 떠나게 될 거 아니에요. 그렇게 되면 앤이 너무나 그리울 거예요.”
“집에 자주 오겠지. 그때면 카모디에도 철도가 연결된대.”
매슈가 위로해주었다. 매슈의 눈에는 앤이 아직도 4년 전 6월 어느 날 저녁 브라이트 리버 역에서 데리고 왔을 때의 모습 그대로 진지한 눈빛을 가진 그 작은 소녀이고, 그것은 영원히 변함이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항상 우리 곁에 있는 지금과는 같지 않을 거예요.”
마릴라가 울적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위로도 필요 없고 실컷 슬픔에 빠져 있고 싶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여간, 남자들이란 이런 감정을 이해하지 못한다니까!”
앤에게는 신체적인 변화보다는 덜 드러나지만 다른 변화도 생겼다. 그중 한 가지는 말수가 훨씬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생각은 예전보다도 더 많이 하는 것 같았고 상상에 빠져 있는 시간도 예전과 다름없이 많은 듯 했지만 확실히 말은 줄었다. 마릴라도 이 점을눈치채고 말했다.
“앤, 네가 전보다 말을 절반도 하지 않는구나. 어떻게 된 일이니?”
앤이 얼굴을 붉히며 살짝 웃었다. 그러고는 책을 내려놓고 꿈을 꾸듯 창밖을 내다보았다. 붉고 탐스러운 새순들이 봄 햇살의 유혹에 화답하는 것처럼 담쟁이덩굴에서 돋고 있었다. 앤은 생각에 잠겨 집게손가락으로 자기 볼을 톡톡 건드렸다.
“잘 모르겠어요. 요즘엔 말을 많이 하고 싶지 않아요. 소중하고 아름다운 생각들을 보물처럼 제 가슴에 간직하고 있다는 게 더 좋아요. 말을 많이 해서 괜히 비웃음을 사고, 상처받고 싶지 않아요. 또 이제는 거창한 말도 쓰고 싶지 않아요. 제가 원하면 언제라도 그런 말을 써도 될 만큼 진짜로 컸다는 게 정말 아쉽기는 해요. 이럭저럭 거의 어른이 됐다는 게 재미있기는 하지만 제가 기대했던 재미는 아니에요, 마릴라 아주머니. 배우고 실천하고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서 거창한 말을 할 틈도 없어요. 게다가 스테이시 선생님은 짧게 말하는 것이 훨씬 설득력이 있고 효과적이라고 가르쳐주셨어요. 또 수필을 쓸 때도 가능하면 간결하게 쓰라고 하셨어요. 처음에는 힘들었어요. 제가 생각해낼 수 있는 멋지고 거창한 단어를 전부 동원해서 글을 쓰는 데 익숙했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글을 간결하게 쓰는 데 익숙해졌고, 그런 글이 훨씬 낫다는 걸 깨달았어요.”
“너희들 이야기 클럽은 어떻게 됐니? 네가 이야기 클럽을 얘기하는 걸 한동안 못 들었는데.”
“그 이야기 클럽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요. 이제는 시간도 없고, 사실 좀 싫증도 났어요.사랑이니 살인, 사랑의 도피 행각이니 미스터리니 하는 이야기를 쓰다니 바보 같은 짓이었어요. 스테이시 선생님이 때때로 우리에게 글쓰기 연습으로 이야기를 쓰게 하시기는 하는데요, 우리가 사는 에이번리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만 쓰라고 하셔요. 그리고 선생님은 우리가 쓴 글을 매섭게 비판하시고 우리에게도 자기 글을 스스로 비판해보라고 하세요. 제 글도 그렇게 보기 시작하니까 결함이 엄청나게 많다는 걸 그때서야 알았다니까요. 너무 부끄러워서 완전히 포기하고 싶을 정도였어요. 하지만 스테이시 선생님은 저에게 자신에게 가장 엄격한 비평가가 되는 훈련을 거듭하면 글을 잘 쓰는 법을 터득할 수 있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노력 중이에요.”
“입학시험까지는 이제 두 달밖에 남지 않았구나. 합격할 수 있을 것 같니?”
마릴라가 물었다.
앤이 몸서리를 쳤다.
“잘 모르겠어요. 가끔씩은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때로는 정말 두렵고 걱정돼요. 우리가 열심히 공부했고 스테이시 선생님도 철저하게 우리를 가르치셨지만 그래도 합격하지 못할 수도 있어요. 우리 모두에게 조금씩 부족한 부분이 있거든요. 물론 저는 기하가 약하고, 제인은 라틴어가 약해요. 루비와 찰리의 약점은 대수이고, 조시는 산수에 자신이 없대요. 무디 스퍼전은 영국 역사에서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대요. 스테이시 선생님은 6월에 입학시험만큼 어려운 모의고사를 보고, 채점도 엄격하게 하실 거라고 했어요. 그러면 입학시험이 어느 수준인지 우리가 대략 짐작할 수 있을 거라고 하셨어요. 모든 게 얼른 다 끝났으면 좋겠어요, 마릴라 아주머니. 시험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아요. 가끔 밤에 자다가도 깨서 시험에 떨어지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을 한다니까요.”
“그럼 내년에 다시 시험을 보면 되지.”
마릴라가 태연한 듯 말했다.
“오, 전 자신이 없어요. 시험에 떨어지면 너무 창피할 거예요. 특히 길…… 이랑 다른 아이들은 다 합격했는데 저만 떨어지면요. 시험 볼 때 너무 긴장해서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날지도 몰라요. 저도 제인 앤드루스처럼 조금은 뻔뻔했으면 좋겠어요. 제인은 어떤 경우에도 떠는 법이 없어요.”
앤은 한숨을 내쉬고, 마법에 빠진 듯한 봄의 세계에서 눈길을 거두었다. 산들바람과 푸른 하늘, 그리고 정원에 돋은 초록 생명체들의 유혹을 이겨내고 다시 책을 파고들었다. 봄은 되풀이되지만, 입학시험에 떨어지는 날이면 영원히 봄을 즐길 수 없다고 앤은 자신을 다독였다.





44) 롱펠로(Henry Wadsworth Longfellow, 1807~1882)의 시 <소녀 시절(Madenhood)>에 나오는 구절. 시내와 강이 만나는 곳은 소녀에서 여인으로 변화되어 가는 시기를 의미함.
45) 포프(Alexander Pope, 1688~1744)의 《비평론(From An Essay on Criticism)》 제2부에 나오는 ‘알프스 너머 또 알프스(Alps on Alps)’의 마지막 연.





32
합격자 명단이 발표되다





6월이 되어 학기가 끝남과 동시에 에이번리 학교에서의 스테이시 선생님의 계약기간도 만료되었다. 그날 오후 앤과 다이애나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학교에서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왔다. 붉어진 눈과 축축한 손수건은 스테이시 선생님의 작별 인사도 3년 전 비슷한 상황에서 있었던 필립스 선생님의 작별 인사만큼이나 감동적이었다는 분명한 증거였다. 다이애나는 가문비나무 언덕 기슭에서 학교를 돌아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것이 끝나버린 것 같아. 그렇지?”
다이애나가 너무나 쓸쓸한 듯 말했다.
“넌 내 절반도 슬프지 않을 거야. 넌 이번 겨울에 다시 학교로 돌아오지만 난 이 정든 학교를 영원히 떠나야 하잖아. 만일 행운이 따른다면 말이지만.”
앤이 손수건에서 마른 곳을 찾아보았지만 헛일이었다.
“그래도 똑같지는 않을 거야. 스테이시 선생님도 안 계실 테고, 너도 없을 거잖아. 제인이나 루비도 없겠지만. 너 말고 다른 아이하고 짝이 되면 견딜 수 없을 테니, 나 혼자 외롭게 앉아 있을 거야. 아, 앤, 우리는 너무나 재미있게 보냈어. 그렇지, 앤? 그런데 그런 시간이 끝났다고 생각하니 끔찍해.”
다이애나의 코로 두 줄기의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네가 눈물을 멈추지 않으면 나도 멈출 수가 없어. 내가 손수건을 집어넣자마자 네 눈에 눈물이 넘쳐흐르니까 나도 다시 눈물이 나와 버리잖아. 린드 아주머니 말씀처럼 정말로 기분이 내키지 않더라도 애써 기운을 내보자. 나도 내년에 다시 학교에 나와야 할 수도 있어. 지금 기분이 그런데, 시험에 붙지 못할 것 같아. 불길하게도 이런 느낌이 아주 자주 들어.”
앤이 말했다.
“왜 그런 생각을 해,넌 이번 모의고사 시험에서 성적이 아주 좋았잖아.”
“그래. 하지만 그 시험을 볼 때는 긴장이 되지 않았으니까. 진짜 시험을 본다고 생각하면 무섭도록 써늘한 느낌이 내 심장을 파고들어. 넌 상상도 못 할 거야. 게다가 내 수험번호가 13번이야. 조시 파이가 이 숫자는 엄청나게 재수 없는 숫자라고 했어. 난 미신을 믿지 않고, 수험번호가 뭐래도 달라질 것은 없다는 걸 알지만 13번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긴 해.”
“나도 너랑 같이 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럼 우린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넌 밤마다 공부를 해야 하는데 방해가 되겠지.”
다이애나가 말했다.
“아니야, 스테이시 선생님은 이제부터 책을 보지 말라고 하셨어. 지금 책을 보면 피곤하기만 하고 혼동만 된다고. 시험 생각은 하지 말고 산책이나 하다가 일찍 잠자리에 들라고도 말씀하셨어. 좋은 충고이긴 하지만 좋은 충고는 지키기가 어려워. 프리시 앤드루스는 입학시험을 치른 그 주에 매일 거의 밤을 새우면서 벼락치기로 공부를 했다고 하더라고. 나도 프리시만큼 버티고 앉아 공부할 생각이야. 내가 시내에 있는 동안조제핀할머니가 너도밤나무 집에 머물게 해주셔서 너무 감사하게 생각해.”
“거기 머무는 동안 편지 쓸 거지, 응?”
“화요일 밤에 편지를 보낼게. 첫날을 어떻게 보냈는지 써서 말이야.”
앤이 약속했다.
“그래, 난 수요일에 우체국에서 꼼짝하지 않고 기다릴게.”
다이애나도 맹세했다.
다음 월요일에 앤은 시내로 떠났고, 다이애나는 수요일에 내내 우체국을 번질나게 들락거렸고 마침내 편지를 받았다.

사랑하는 다이애나,

지금은 화요일 밤이야. 난 너도밤나무 집 서재에서 이 편지를 쓰는 거야. 어젯밤에는 내 방에서 혼자 얼마나 쓸쓸했던지, 네가 내 옆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몰라. 스테이시 선생님과 벼락공부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서 늦게까지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수업 시간 전에 소설책을 읽는 것을 참았던 것만큼 역사책을 펴지 않으려고 참는 것도 어려웠어.
오늘 아침에 스테이시 선생님이 나를 데리러 오셨고 제인과 루비, 조시랑 모두 같이 학교로 갔어. 루비는 내게 자기 손을 만져보라고 했는데 얼음처럼 차가웠어. 조시는 내가 한숨도 자지 못한 사람처럼 보인다고 하면서 내가 합격을 하더라도 힘든 교사과정을 무사히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어. 나한테 조시 파이를 좋아하고 싶은 날이 올 것 같지가 않아!
학교에 도착하니까 섬 전체에서 온 학생들이 아주 많았어. 거기에서 무디 스퍼전을 만났는데 계단에 앉아서 혼자 뭘 중얼거리고 있더라고. 제인이 도대체 뭐 하는 거냐고 묻자, 무디 스퍼전은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구구단을 반복해서 외우는 거니까 제발 방해하지 말라고 했어. 잠깐이라도 멈추면 너무 겁이 나서 아는 것까지 몽땅 잊어버릴 것 같다면서 말이야. 하지만 무디 스퍼전이 알고 있는 것을 구구단이 지켜주나!
우리가 교실을 배정받았을 때는 스테이시 선생님과도 헤어져야 했어. 나는 제인의 옆에 앉게 되었는데 제인은 정말 부러울 정도로 침착했어. 제인은 너무 차분하고 분별력이 있어서 구구단 같은 것은 필요도 없어! 나는 그때 내 마음이 표정에 나타나고, 심장이 두근대는 소리가 교실 끝까지 들리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때 한 남자가 들어와서 영어 시험 문제지를 나누어주기 시작했어. 시험지를 집는 순간 내 손이 차가워지고 머리가 빙빙 도는 것 같았지. 정말 무서운 순간이었어, 다이애나. 4년 전에 내가 마릴라 아주머니께 ‘초록 지붕 집’에서 살게 되는 건지 묻던 때와 똑같은 기분이었다고. 그런 다음 모든 것이 정리가 되면서 심장도 다시 뛰기 시작했어. 내가 말하는 걸 깜빡했는데, 내 심장이 잠깐 동안 멈추어버렸었거든! 어쨌거나 나중에는 시험지를 풀 수 있을 것 같았어.
점심때는 모두들 집으로 돌아가서 점심을 먹고 왔고 오후에 돌아와 역사 시험을 치렀어. 역사 시험은 꽤 어려웠어. 연대가 마구 헷갈렸거든. 그래도 내 생각에 오늘 시험은 꽤 잘 치른 것 같아. 하지만 오, 다이애나, 내일은 기하학 시험이 있어. 그 시험을 생각하면 기하학책을 펼치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내 마음이 조금씩 무너져 가는 것 같아. 그 구구단 외우기가 정말 도움이 된다면 나도 지금부터 내일 아침까지 구구단을 외울 텐데.
저녁때는 다른 애들한테도 가봤어. 가는 도중에 우울한 모습으로 어슬렁거리는 무디 스퍼전을 만났단다. 무디는 역사 시험을 망쳐버렸다면서 자기는 부모님을 실망시키려고 태어난 아이라며, 내일 아침 기차로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어. 어쨌거나 목사보다는 목수가 되는 게 더 쉽겠다면서 말이야. 나는 무디에게 용기를 북돋워주고, 시험을 끝까지 보라고 설득했어. 그렇지 않으면 스테이시 선생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게 아니잖느냐고 했지. 가끔씩은 나도 남자로 태어났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하지만 무디 스퍼전을 보면 내가 여자이고 그 애의 누나가 아닌 것이 천만다행이란 생각이 들어.
루비가 묵고 있는 기숙사에 가보니까 루비는 히스테리를 일으키고 있었어. 영어 시험에서 큰 실수를 저지른 것을 그때서야 알았다는 거야. 루비가 마음을 가라앉힌 후에 우리는 시내로 나가서 아이스크림을 사먹었어. 너도 같이 있었으면 좋았겠다고 모두들 말했단다.
오, 다이애나, 기하 시험이 끝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렇지만 린드 아주머니의 말씀처럼 내가 기하 시험을 잘 보든 그렇지 않든 간에 태양은 여전히 떠오르고 지겠지. 그것은 진실이지만 그래도 위로가 되지는 않아. 내가 실패하면 차라리 태양도 뜨지 않는다고 한다면 조금 위로가 될지도 모르겠어!

너를 사랑하는 친구,

드디어기하 시험을 비롯한 다른 시험도 모두 끝났고 앤은 금요일 저녁에 집으로 돌아왔다. 약간 피로하긴 했지만 승리의 만족감을 억누르는 듯한 기운도 느껴졌다. 앤이‘초록 지붕 집’에 도착했을 때 다이애나가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떨어져 있다 다시 만난 사람들처럼 반가워했다.
“앤, 다시 만나게 되어 너무 반가워.네가 시내로 나간 게 몇십 년은 된 것 같아. 시험은 어땠어?”
“기하만 빼고 모든 과목을 꽤 잘 본 것 같아. 합격할지 떨어질지 모르지만, 떨어질 것 같은 기분 나쁜 예감이 슬금슬금 밀려와. 어쨌든 집에 돌아와서 너무 좋아!‘초록 지붕 집’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편한 곳이야.”
“다른 애들은 어떻게 봤을까?”
“여자아이들은 합격하지 못할 거라고 말하지만 내 생각엔 모두 다 잘 본 것 같아. 조시는 기하학이 너무 쉬워서 열 살짜리 애들도 풀 수 있었을 거래. 무디 스퍼전은 역사 시험을 망쳤다고 생각하고, 찰리는 대수에서 실패했다고 말했어. 하지만 결과가 발표될 때까지는 우리가 뭘 알겠어. 2주일이나 있어야 합격자 발표가 있을 텐데, 어떻게 2주일을 기다리지! 모든 게 끝이 날 때까지 잠을 자면서 깨지 않았으면 좋겠어.”
다이애나는 길버트 블라이드도 시험을 잘 보았는지는 물어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오, 모두들 합격할 거야, 걱정하지 마.”
“좋은 성적으로 붙지 않으면 차라리 떨어지는 게 나을 거야.”
앤의 말이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다이애나는 알았다. 길버트 블라이드보다 더 좋은 성적이 아니면 합격한다 해도쓰디쓴기분일 거라는 얘기였다.
이런 경쟁심을 품고 있어서 앤은 온통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리고 그건 길버트도 마찬가지였다. 이 둘은 길에서 열 번도 더 마주쳤지만 서로 아는 척도 하지 않고 그냥 지나쳐 버렸다. 그때마다 앤은 고개를더욱더높이 치켜세우고 지나쳤지만 마음속으로는 길버트가 사과해왔을 때 받아주고 다시 친구가 되었으면 좋았을 걸 하는 후회가 일었고, 그런 한편 시험에서 보기 좋게 길버트를 누르고 싶다는 열망도 더욱 커졌다.
앤은 에이번리 아이들이 앤과 길버트 둘 중에서 누가 더 좋은 성적을 받느냐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고, 지미 글로버와 네드 라이트는 이 문제로 내기까지 걸었을 뿐 아니라 조시는 틀림없이 길버트가 더 좋은 성적을 낼 거라고 장담했다는 것까지 모두 알고 있었다.앤은 시험에 떨어진다면참을 수 없을 만큼 자존심이 상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앤의 이런 바람에는 다른 더 고귀한 동기도 있었다. 앤은 매슈 아저씨와 마릴라 아주머니를 위해, 특히 매슈를 위해 좋은 성적으로 시험에 합격하고 싶었다. 매슈는 앤이 섬 전체를 놀라게 할 거라고 앤에게 말하기도 했었다. 앤이야 그런 일을 바란다는 게 허황된 꿈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앤도 10등 안에라도 들어서 매슈 아저씨의 다정한 갈색 눈동자가 앤의 성취를 자랑스레 생각하며 빛나는 것을 보고 싶었다. 그거야말로 지금까지 전혀 낭만적이지 않은 방정식이나동사 활용과 씨름하면서 열심히 공부한 가장 큰 보답이 될 것이다.
그 2주일이 끝나가고 있을 무렵 앤도 조시나 루비와 더불어 불안스럽게 우체국 주변을 맴돌다가 떨리는 손으로 <샬럿타운> 신문을 받아 펼쳐보곤 했다. 그 일 역시 입학시험 못지않게 손이 덜덜 떨리고 땅바닥으로 꺼져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힘든 일이었다. 찰리와 길버트도 이 일에 예외가 아니었지만 무디 스퍼전만은 단호하게 이 대열에서 물러나 있었다.
“난 거기 가서 냉정하게 신문을 볼 용기가 없어. 누군가 와서 내가 합격했는지 떨어졌는지 알려줄 때까지 기다릴 거야.”
무디는 앤에게 그렇게 말했다.
합격 통지서는 오지도 않은 채 3주나 지나버리자 앤은 더 이상은 이 긴장감을 참을 수 없다고 느꼈다. 식욕도없어져 버렸고매사에 흥미를 잃었으며, 에이번리의 모든 일이 시들하기만 했다. 린드 부인은 토리당이 교육부의 우두머리를 맡고 있는 마당에 뭘 기대하느냐는 말을 했고, 앤이 매일 오후마다 창백하고 냉담한 얼굴로 발을 질질 끌며 돌아오는 것을 지켜보던 매슈는 다음 선거에서는 그리트당에 투표해야 하는 것 아닌가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느 날 오후 드디어 올 것이 왔다.그때 앤은 시험 걱정과 세상의 모든 걱정거리를 잠시 잊고 창문을 열고 앉아, 정원에서 피어오르는 꽃들의 향내와 미루나무 잎들이 부딪치며 바스락거리는 소리로 어우러진 아름다운 여름 저녁에 취해 있었다. 전나무 위로 동쪽 하늘은 서쪽 하늘의 노을에 영향을 받아 옅은 분홍빛을 띠고 있었다. 색채의 정령이 그런 모습이라고 상상하고 있던 앤의 눈에 전나무 숲을 빠져나와 통나무 다리를 건너 비탈길을 부리나케 달려오는 다이애나의 모습이 보였다. 다이애나의 손에서는 신문이 쥐어져 있었다.
앤이 저 신문에 뭐가 실려 있는지 즉시 알아채고 벌떡 일어섰다. 합격자 명단이야! 머리가 핑핑 돌고 심장은 아플 지경으로 뛰었다. 발이 움직여지지 않았다.너무 흥분해 있어 다이애나가 노크도 하지 않고 문을 박차고 들어올 때까지 한 시간은 지난 것처럼 느껴졌다.

“앤, 너 합격이야.일 등으로. 길버트와 네가 동점으로 같이일 등인데, 네 이름이 먼저 나왔어. 네가 너무 자랑스러워!”
다이애나가 탁자 위에 신문을 탁하고 놓더니 앤의 침대 위에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너무 숨이 차서 더 이상은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등에 불을 밝히려는 앤의 손이 어찌나 떨리는지 성냥갑이 뒤엎어지고 성냥개비도 여섯 번이나 버리고 나서야 겨울 불을 붙일 수 있었다. 그런 다음 신문을집어 들었다. 그랬다. 앤은 합격했다. 앤의 이름이 200명의 명단에서 가장 위에 있었다. 삶의 보람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앤, 너 정말 잘했어.”
다이애나가 겨우 앉을 수 있게 되자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앤은 눈만 반짝이며 멍하니 앉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빠가 이 신문을 브라이트 리버에서 가져오신 지 채 10분도 안 됐어. 오늘 오후 열차로 온 거니까, 우편으로는 내일이나 되어야 여기 도착할 거야. 내가 이 명단을 보자마자 그냥 미친 듯이 달려왔어. 너희 모두가 합격했어. 무디 스퍼전까지도. 무디 스퍼전은 역사에서 조건부 합격이긴 하지만. 제인과 루비도 상당히 잘했어. 중간 이상이야. 찰리도 잘했고. 조시는 합격점에서 겨우 3점 위야. 하지만일 등이라도 한 것처럼 뽐낼 것이 뻔해. 스테이시 선생님도 기뻐하시겠지? 오, 앤, 합격자 명단에서 이처럼 네 이름이 맨 위에 있는 걸 보니까 기분이 어때? 나라면 너무 기뻐서 미쳐버렸을 것 같아. 난 지금도 정신이 반쯤은 나가버린 것 같아. 그런데 넌 꼭 봄날 저녁때처럼 조용하고 차분하구나.”
“나도 속으로는 그렇지 않아. 하고 싶은 말이 셀 수 없이 많지만 말이 나오질 않아. 이런 일은 꿈도 꾸어보지 못했어. 아니, 꿈을 꾸어본 적은 있어, 딱 한 번! 딱 한 번은 ‘만일 내가일 등을 한다면?’ 하고 생각하도록 내버려두기도 했지만 그런 생각을 하기가 두려웠어. 내가 섬 전체에서일 등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허황되고 주제넘은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잠깐만, 다이애나. 나, 밭에 나가서 매슈 아저씨께 이 소식을 알려드리고 싶어. 그런 다음에는 마을로 올라가서 다른 아이들한테도 이 좋은 소식을 전하자.”
두 사람은 매슈가건초 작업을 하고 있는 헛간 아래 건초 밭으로 급히 달려갔다. 마침 린드 부인이 울타리에서 마릴라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앤이 소리쳤다.
“오, 오, 매슈 아저씨! 저 합격했어요,일 등으로요. 정말일 등했어요! 제가 헛꿈을 꾸지 않았다고요, 정말로 감사해요.”
“그래, 내가 항상 그렇게 말했지 않니. 나는 네가 모두를 쉽게 이길 줄 알았지.”
매슈가 흐뭇한 표정으로 합격자 명단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잘했구나, 앤.”
마릴라는레이철의 비판적인 눈을 의식해 앤을 향한 한없는 사랑을 감추려 애쓰며 말했다. 하지만 마음 좋은 린드 부인도 이 일을 기꺼이 기뻐해주었다.
“앤, 너 아주 잘했구나, 칭찬을 하지 않을 수 없지. 넌 우리들 모두의 자랑이야. 그럼. 우리는 네가 무척 자랑스럽다.”

그날 오후 목사관에서 앨런 부인과 진지한 얘기를 나눈 것으로 가슴 벅찬 하루를 마친 앤은 열린 창가로 비쳐든 달빛을 받으며 무릎을 꿇고 앉아 진정으로 가슴에서 곧바로 우러나오는 감사와 열망의 기도를 올렸다. 과거를 생각하면서는 감사를 드렸고, 미래를 위해서는 정중하게 자기의 소망을 간구했다. 그리고 하얀 베개에 누워 잠자리에 들자 소녀다운 화려하고 아름다운 꿈이 찾아왔다.




46) 아주 얇게 평직(平織)으로 짠 가볍고 비치는 면직물.
47) 엘리자베스 베렛 브라우닝(Elizabeth Barrett Browning, 1806~1861)의 장편 서사시 <오로라 리(Aurora Leigh)> 제4권 103연.
48) 처녀의 맹세(The Maiden’s Vow): 스코틀랜드 시인인 캐롤라인 올리펀트(Carolina Oliphant, 1766~1845)의 시.


추천 (0) 선물 (0명)
IP: ♡.252.♡.103
23,499 개의 글이 있습니다.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조회
나단비
2024-04-20
1
113
chillax
2024-04-19
2
92
나단비
2024-04-19
0
56
나단비
2024-04-19
0
33
나단비
2024-04-19
0
35
나단비
2024-04-19
0
42
나단비
2024-04-19
0
35
chillax
2024-04-18
2
97
나단비
2024-04-18
0
29
나단비
2024-04-18
0
37
나단비
2024-04-18
0
44
나단비
2024-04-18
0
41
나단비
2024-04-18
0
48
나단비
2024-04-17
0
58
나단비
2024-04-17
0
44
나단비
2024-04-17
0
33
나단비
2024-04-17
0
51
나단비
2024-04-17
0
38
나단비
2024-04-16
0
63
나단비
2024-04-16
0
105
나단비
2024-04-16
0
59
나단비
2024-04-16
0
57
나단비
2024-04-16
0
48
나단비
2024-04-15
0
70
나단비
2024-04-15
0
51
나단비
2024-04-15
0
85
나단비
2024-04-15
0
55
나단비
2024-04-15
0
48
나단비
2024-04-14
0
65
나단비
2024-04-14
0
166
모이자 모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