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와 장자는 이렇게 말했다
3
우리는 모두 신의 한 속성이다
Nietzsche
신의 자식은 누구든 동등하다. 천국은 '지상의 위' 또는 '죽은 다음'에 오는 어떤 것이 아니라, 마음의 특정한 상태다. 신의 나라는 마음속의 특정한 경험이다. 그것은 어디에든 있고, 어디에도 없다.
『안티크리스트』
莊子
동곽자 東郭子가 묻고 장자가 대답한다.
"도라는 것은 어디에 존재합니까?"
"어디에든 존재합니다."
"어디에 있는지 분명히 말씀해 주십시오."
"땅강아지와 개미에게 있습니다."
"어째서 그처럼 시시한 곳에 있습니까?"
"돌피나 논에 다라는 피에도 있습니다."
"어째서 더욱 시시한 곳을 말씀하십니까?"
"기와나 벽돌에도 있습니다."
"어째서 말씀이 더 심해지시는 겁니까?"
"똥이나 오줌에도 있습니다."
동곽자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북유」
장자는 만물의 근원이 되는 절대적 존재를 피안의 세계에서 구하려 하지 않고 우리가 사는 이 세계 안에서 발견하고자 했다. 도는 피안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일상에 있다. 도는 충만하게 가득 차 있는 '그 무엇'이다. 도의 성격을 표현하는 단어인 '무 無'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것이 함유되어 있어 오히려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다.
가장 큰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예를 들어 우주 안의 별들이 운행할 때 내는 소리는 우리가 아는 사물들 가운데 가장 큰 소리를 낼 것이다. 하지만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소란스러움으로부터는 벗어날 수 있지만, 침묵으로부터는 멋어날 수 없다"라는 프란츠 카프카의 말대로, 도의 영향력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 '충만한 도'란 만물을 아우르기에 초월적인 존재이면서 또한 만물에 깃든 내재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도는 극락이나 천국과 같은 저편의 세계에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말할 나위도 없고, 기왓장에든 창틀에든 고양이에든, 심지어 똥에든 어디에나 존재한다.
한편, 니체는 신의 속성을 우리 인간에게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니체에게 신은 하나밖에 없는 궁극적인 실체도 아니고, 초월적 인격도 아니다. 신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따라서 인간은 단지 신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자신의 힘을 믿으면 된다. 니체가 말한 '신의 죽음'은 궁극적인 실체나 초월적 인격으로서의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선언이었다. 그리고 인간 안에 내재하는 신의 속성을 깨달아야 한다는 발언이었다. 니체의 이러한 관점은, 모든 존재는 불성을 지닌다는 불교의 가르침과도 통하는 지점이 있다.
동시에 스피노자의 범신론을 떠올리게 한다.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말한 가장 중요한 관점이 바로 "신은 곧 자연"이다. 이 관점을 종교학에서는 범신론이라고 부른다. 스피노자는 당대의 교회가 우리 삶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고 이를 초월해 있는 신만 사랑하는 것에 문제의식을 느꼈다. 니체는 스피노자의 바로 이 관점에 열광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은 물론이고 개미, 고양이, 각종 식물, 창문 등 만물이 신의 일부다. 눈앞의 모든 물체가 곧 신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들도 모두 신이다. 모든 것은 '자연=신'이라는 가치관 안에 있다. 자연은 그 외부에 있는 어떤 무엇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자연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스피노자는 신이 자연을 창조했다는 견해에 정면으로 맞섰다. 따라서 우리 삶에서 나타나는 모든 현상(죄를 짓는 것도 포함해서)은 신(자연 그 자체)에 속해 있다. 즉, 신은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서 벌을 내리는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신을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도 곧 자신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신의 한 속성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정서를 명석하게 인식하는 사람은 신을 사랑하며, 자기 자신과 자신의 정서를 더 많이 인식할수록 더욱더 신을 사랑한다."
『에티카』
내가 나의 정서를 사랑하고 명확히 인식한다는 것은 곧 신을 사랑하고 인식하는 것으로 연결된다. 나는 분명히 '나'이지만 나는 신의 한 속성이므로, 나의 '나'에 대한 사랑은 곧 내가 신을 사랑하는 것이며 동시에 신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기 몸의 색깔을 바꿀 수 있는 카멜레온을 생각해보자. 비록 카멜레온 몸의 색은 장소에 따라 이런저런 색깔로 바뀌지만, 여전히 카멜레온인 것은 변함이 없다. 나는 신의 한 속성이지만 '신'임에는 변함이 없다.
스피노자와 니체가 볼 때 내가 정신의 수준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고 확대한다면, 이는 곧 신을 발전시키고 확대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자기 내면에 깃들어 있는 어떤 '위대한 가능성(힘)'에 눈을 돌려야만 한다. 그것을 '도'라고 표현하든 '신의 속성'이라고 표현하든 '부처'라고 표현하든 크게 상관은 없다. 우리 인간의 내면에는 본인도 몰랐던 엄청난 잠재력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 중요하다. 눈을 밖으로 한없이 확장해 우주 정복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눈을 안으로 돌려 내 내면에 잠재해 있는 이 위대한 힘을 찾는 것이 아닐까?
4
다른 그 무엇도 고려하지 말고, 오직 '스스로 그러하게[자연 自然]살자!
Nietzsche
자연이 우리에 대해 아무 의견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즐겁게 자유로운 자연 속에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Ⅱ』
莊子
숙과 홀은 때때로 혼돈의 땅에서 만나곤 했는데, 혼돈은 그들을 매우 잘 대접했다. 숙과 홀은 이 혼돈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의논했다.
"사람은 모두 일곱 구멍이 있어서 보고 듣고 먹고 숨을 쉬는데, 유독 혼돈에게만 구멍이 없다. 우리가 시험 삼아 구멍을 뚫어보자."
숙과 홀은 하루에 한 구멍씩 뚫었다. 그런데 7일째가 되자, 혼돈이 그만 죽어버렸다.
「응제왕」
장자의 우화에서 혼돈은 자연 그대로 살아가는 순박한 백성을 비유한다. 그리고 남해의 제왕인 숙과 북해의 제왕인 홀은 인위적이고 폭력적인 통치자를 상징한다. 숙 儵과 홀 忽이라는 글자 자체가 각각 '빠름'과 '갑자기'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들은 인위적으로 조급하게 무엇인가를 도모하려 한다. 숙과 홀이 구멍을 뚫는 행위는 문물제도의 발생과 국가에서 행하는 여러 정책이 백성들의 생활을 그다지 윤택하게 해주지 못하고 오히려 파괴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장자의 혼돈과 비슷한 개념은 『노자』에도 나온다.
"보아도 보지 못하니, 이 夷라고 칭한다. 들어도 듣지 못하니 희 希라고 한다. 손으로 찾아 만져보려 해도 잡히는 것이 없다. 이를 미 微라고 한다. 도라는 것은 이 세 가지가 하나로 혼합된 존재다. 한계 없이 이어져있고, 무엇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도 없다. 그래서 혼돈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14장」,『노자』
우리는 혼돈 우화를 단순히 원시의 무규정 상태로 돌아가자는 메시지로 읽는 게 아니라, 현대적인 맥락에서 좀 더 세련되게 해석해 볼 수도 있다. '혼돈' 상태란 창의성이 발현되는 창조적 계기로 간주할 수도 있다. 모든 것이 섞여 있는 흐릿한 상태인 '혼돈'이야말로 새로운 것을 창출할 기회다. 이 상태야말로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브레인스토밍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는 최고의 적기다.
니체의 아포리즘도 "그를 자유롭게, 그답게 있도록 하라"고 말하면서, 본래의 자기 스타일로 존재하는 것이야말로 행복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도덕은 우리에게 '집단의 가치'를 주입해서 우리 각자가 개성을 지닌 개인으로 존재하는 것을 방해한다. 도덕적 교화의 확대는 사람의 타고난 본성을 죽일 뿐이다. 식물도 사람이 들볶지 않을 때 가장 잘 성장한다.
우리는 앞에서 '문명'을 상당히 부정적인 견해에서 바라본 바가 있다. 문명 자체가 문제라는 의미는 아니다. 문명의 발전이 '스스로 그러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충족을 방해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이다.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물질적인 풍요로움과 행복의 관계에 대해 "일정한 수준을 넘으면 GDP와 행복도의 상관관계를 찾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1인당 실질소득이 1만 달러 근처까지 올라가면 행복도 역시 상승하는 관계를 보인다. 그러나 1만 달러 수준을 넘어서면 이들 둘 사이의 상관관계를 찾기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물질문명의 발전이 인간의 행복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