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소설모음 1

3학년2반 | 2022.01.27 09:51:41 댓글: 0 조회: 1037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5464

미 끼 (상)

by 한 대 희

< 1 >
밀가루 장사를 하면 바람이 불어 제끼고 소금장사를 할라치면 비가 쏟아
진다더니 내가 바로 그 짝이 날 모양이었다.
옛말 하나도 안 그른것 처럼 나의 불운은 어느날 갑자기 슬그머니 시작되
었다.
그날은 여느때와 조금도 다름없는 평범한 하루였다. 아니,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눈코뜰 새 없이 바빴다고 하는편이 더욱 정확한 표현
일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경영하고 있는 한강유통주식회사의 의류전문 판매장은 그날따라 손
님들로 무척 붐볐다. 업계에서 짭짤하기로 정평이 나 있는 회사인 만큼 평
소에도 고객들로 붐비는 편이었지만 매장은 그날따라 유독 붐볐다.
내가 거래처를 돌아보고 회사로 돌아 온 시각이 오후 여섯 시무렵이었고,
영업 마감시각이 임박한 매장은 한층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황전무가 각 코너를 부지런히 돌며 결산 준비를 서두르는 모습이 첫눈에
들어 왔고, 고객을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여직원들의 애교스런 미
소들도 나의 마음을 흡족케 했다. 모두들 나의 영업 방침을 충실히 지키는
셈이었다.
고객은 왕이다. 나의 모토는 가장 평범한 진리에서부터 출발되었다. 처음
채용하는 여직원들은 입사 첫날부터 인사하는 법과 애교있는 미소를 띠는
방법을 배우느라 금방 진저리를 치게 되지만, 나의 집요한 교육 덕택에 이
제는 모두 웃음을 입가에 달고 다닐 정도가 되었고 눈웃음과 애교띤 미소는
거의 생활화 되어 있었다. 그녀들은 나에게도 상품화 된 미소를 예사롭게
선사하곤 했다.
방금도 그랬다. 내가 매장으로 들어 섰을때 직원들은 몸에 밴 미소로 반
겨 주었고 나 역시 익숙한 웃음으로 격려를 마지 않았다. 나는 매우 흡적
함을 느꼈다. 아직 총각이어선지는 몰라도 여직원들 사이에서 내 인기가 제
법 좋은 편이었다. 나는 늘상 느꼈다. 상품화 된 미소의 뒤언저리에는 언제
나 은근한 부러움과 존경심이 담긴 경이의 시선이 나를 지켜보고 있음을.
어쩌면 나 스스로도 그런 나의 위치를 은근히 즐기고 있는지도 몰랐다. 맨
손으로 엄청난 부를 창출한 총각 기업인, 총각사장. 나를 따라 다니는 꼬리
표는 언제나 온몸의 세포를 일깨우는듯한 쾌감을 동반하고 있었으므로.
매장은 늘 활기에 차 있었고 나는 그 활기를 즐겼다. 회사를 들어오고 나
갈때 매장을 한바퀴 둘러 보는 것은 그래서 버릇이 되어 있었다.
오늘도 유별난 상황은 눈에 뜨이지 않는듯했다. 단지 숙녀복 코너의 최숙
영양이 오래도록 전화통을 붙들고 있어서 나의 신경을 건드린것 밖에는.
얼핏 짜증스런 그녀의 표정으로 보아 전화상대는 그녀의 남자친구인 하동
우라는 청년인 모양이었다. 하동우의 열렬한 프로포즈는 회사 안팎으로 소
문 나 있어 그녀를 곤경에 빠뜨리곤 했다. 나는 짐짓 못본 척 매장을 건성
으로 둘러본 후 이층의 집무실로 돌아왔다.
나의 불운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정확히 표현하면 나의 집무책상에 놓
여있는 사각봉투를 발견하는 순간부터였다.
청첩장인가?
무심코 봉투를 개봉하여 내용물을 읽던 나는 소스라치듯 놀라고 말았다.

양승일 사장 친전.
젊은 청년 실업가로서 재계의 촉망아래 순탄한 부를 쌓아 오리는 귀하의
행운에 우선 축복을 보냅니다.
그리고 본의 아니게 이런 서신을 보내는점에 깊은 양찰 있으시기 바랍니
다.
내가 누군지는 알려고 하지 마십시오.그러나 나는 당신의 업보라는 사실
만은 알려드림니다.당신이 딛고 올라선 업보의 그늘에서 신음하는 본인의
처지를 양지하시고 다음 요구사항을 필히 이행해 주실것을 촉구합니다.
1. 내가 필요한 1억원의 위로금을 내일까지 준비하십시오.
2. 이 사실은 당신 혼자만 알고 있어야 할것이오.
만일 경찰이 냄새를 맡게 된다면 당신은 철저하게 파멸 될 것입니다. 내
말을 믿고 안 믿고는 당신의 자유일것이오. 다만 오늘밤 열두시 정각 내 말
이 허튼소리가 아니라는 그 첫번째 증거를 보여 드리겠소.

나는 급히 인터폰을 눌렀다. 그리고 몸속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전
율과도 같은 흥분을 가만히 억눌렀다.
요란한 발소리와 함께 황전무가 허겁지겁 방으로 뛰어 들었다.
"부르셨습니까?"
인터폰을 통해 심상찮은 나의 기색을 감지한 듯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 보았다. 나는 목소리를 한껏 낮추어 말했다.
"내가 없는 사이에 누가 내 방에 들어 왔습니까?"
"예?"
"이걸 내 방에 갖다 놓은 사람이 누구요?"
나는 조용히 봉투를 건네 주었다.
"글쎄요, 전 계속 매장에 있어서..."
황전무는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편지를 읽어 보세요."
내용물을 읽어 내려가던 황전무의 안색이 대번에 일변했다. 나는 백짓장
처럼 하얗게 질렸다가 붉게 변해가는 그의 표정을 가만히 지켜 보았다.
"아니, 이건?...."
"우선 전 매장의 문을 닫읍시다."
"아직 마감시간이 남아 있는데요?"
"서둘러야 합니다. 그 내용이 사실이라면 그 놈이 우리 매장에 무슨 못된
짓을 해 놓았을지도 모를테니까요."
"아,알겠습니다."
황전무는 말을 더듬었다. 어지간히 당황한듯 그는 흥분의 기색을 감추지
않은채 내 방을 뛰쳐 나갔다.
나는 침착해야 한다고 자신을 달래면서 소파에 몸을 묻은채, 내가 다음에
취해야 할 행동을 가만히 머리속에 그려 보았다.
그때 인터폰이 울렸다.
"사당님! 숙녀복 코너인데요. 매장을 닫으라고 하셨어요?"
"그래요. 급한 일이 생겼소."
"어쩌죠? 손님이 금방 찾으러 온다고 맡겨 둔 물건이 있는데요?"
숙녀복 코너의 최숙영이었다.
"무슨 물건입니까?"
"내용물이 뭔지는 모르겠구요. 우리회사 포장지로 된 큼직한 상자예요.
아마 여기서 구입한 물건 같은데..."
그녀는 손님이 맡겨 둔 물건의 처리를 묻는 셈이었다.
"미스 최가 무슨 물건인지를 살펴봐요. 뜯어보고 고가품일거 같으면 다시
포장해서 내방에 보관해 두도록해요."
그렇게 지시를 내리고 일분가량이나 지났을까? 나는 아랫층에서 들려오는
폭발음과 급박한 비명 소리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내가 매장에 뛰어 내려갔을 때 매장에는 매캐한 내음과 함께 연기가 자욱
하게 깔려 있었고 바닥에는 숙녀복 코너의 최숙영과 민옥지가 나뒹굴고 있
었다.

< 2 >

"이 협박장을 발견한 시각이 언제였습니까?"
타이프로 또박또박 찍혀있는 편지를 한참이나 검토하던 도 형사가 이윽고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폐점하기 삼십분 전이니까....여섯시 반쯤 될겁니다."
"오늘 이 방을 비우신건 얼마나?"
"오후내내 비어 있었어요. 저희들 각 체인의 월례 회의가 있어서요."
"제가 여기 들어 오면서 잠깐 살펴 봤는데, 외부인은 이 방의 침입이 어
려워 보이던데요? 내부 사정에 밝은 자라거나 내부의 소행...이런 생각은
안드십니까?"
"전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도 형사는 내가 가장 꺼리는 쪽으로 의문점을 던져왔고 나는 강력히 부인
을 했다.그때 방문이 열리면서 낯선 사내 하나가 비죽이 안을 들여다 보았
다. 도 형사가 반기며 그를 맞아 들였다.
"아, 반장님. 이 분이 양승일 사장이시고...저희 반장님이십니다."
사내와 악수를 나누면서 나는 그를 찬찬히 뜯어 보았다. 시경 강력계의
손삼수 반장. 그의 소개를 들으면서 나는 고소를 금치 못했다. 형사반장이
라면 얼핏 형사 콜롬보의 허술한 모습이나 바바리 코트차림의 노회한 중년
사나이를 연상하기 일쑤였는데 눈 앞의 반장은 그렇지 못했다. 말쑥한 양복
차림의 손반장은 뜻밖에도 아직 젊은 나이로 보여 더욱 그랬다.
어쨋든 도무지 형사반장답지 않은 그런 모습이 나에게 일말의 안도감과
친근감마저 들게 할 정도였다.
"감사합니다. 결단을 내리고 신고를 해주셔서요."
"잘 부탁드립니다."
"부탁은 저희들이 해야죠. 범인을 잡을때까지 우리 용기를 내어서 한번
해봅시다."
그는 겸손한 미덕을 한껏 내보여 나를 더욱 매료시켰다.
"도형사, 문제의 그 폭발물 조사해봤나?"
"네. 바로 이겁니다."
도덕록 형사가 현장에서 수거해와 내 집무책상 위에 늘어 놓았던 폭발장
치들을 집어들었다.
"이게 문제의 시한 발화장치인데요. 여기 자명종 시계와 9볼트짜리 건전
지가 1밀리짜리 전화선으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 옆에 성냥뭉치와 황이
있고 휘발유 기름걸레와 휘발유2리터가 비닐 봉지에 담겨 있었습니다. 아마
이 장치가 제대로 작동되었다면 발견한 사람은 물론 이 건물은 완전 전소될
뻔했습니다, 더구나 장소가 의류판매장이었으니까요."
"범인은 그 점까지 계산에 넣었을테지."
"범인이 맞춰둔 시각까지 가지 않고 조기에 발견된게 불행중 다행이었습
니다."
"그 시각이 몇시에 맞춰 있습니까?"
"열두시 정각입니다."
나는 깊은 신음을 토해내었다. 그것은 정확하게 범인이 예고해 두었던 시
간이었다.
"범인은 만약을 생각해서 뚜껑에도 스위치를 달아 두었어요. 뚜껑을 열때
도 합선이 되어서 터질 수 있게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폭발이...."
나는 못내 궁금하던 부분을 물어보았다.
"성냥뭉치의 황까지는 발화되었는데 휘발유 봉지가 터지지 않은 건 상자
내부가 너무 밀폐되어 있어서 산소 부족으로 불길이 채 일어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천만다행이라는 거죠."
나는 가볍게 안도의 한숨을 내어 쉬었다. 그제서야 지금의 상황에 대한
의문이 일시에 풀리는 듯 했다.
"근데 도형사, 이 자명종 시계 이거 국산 아니잖아?"
"네. 이탈리아젠제...아, 여기 글씨가 있는데요."
"어디... 증, 서일제약주식회사?"
역시 형사는 어딘가 달라도 달랐다. 그들은 내가 미처 느끼지도 못했던
부분에서부터 수사를 풀어나가고 있었다.
손반장은 이번엔 피해 당사자인 최숙영과 민옥지를 불러들여 당시의 정황
진술을 들었다.
미스 최와 미스민은 다행히도 손과 얼굴에 가벼운 화상과 찰과상을 입은
정도라 손에 붕대를 감고 볼에 파스를 붙인 정도로 응급처치가 되었다. 그
러나 아직 놀라움이 채 가라앉지 않은 듯 그녀들로부터의 정황청취는 제대
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잘 좀 생각해 보세요. 기억을 더듬어서요. 물건을 맡기는 손님이니 특이
해서 인상에 남을 텐데요."
"글쎄요...."
최숙영은 아직도 어리둥절하기만 한 듯 곤혹스런 얼굴을 풀지 않고 있었
다.
"폐점 직전이라 무척 붐볐어요. 때마침 미스 최를 찾는 전화까지 걸려와
서 제대로 살펴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정황청취는 미스 민의 보충설명을 듣는 것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미끼 (중)

by 한 대 희

< 3 >

수우트 케이스를 탁자위에 올려놓고 나는 연신 담배를 빨아댔다.
광화문의 번화가에 면해 있는 황실 그릴은 제법 분위기있는 실내장식으로
깔끔한 느낌을 던져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운치있는 분위기도 나의 무료하고 들뜬 감정을 가라앉히지
는 못했다. 벌써 한시간째 나는 황실 그릴의 구석자리에서 초조하게 담배만
축내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면 벌써 세번째 장소로 이동된 오늘의
작전은 완전히 실패로 끝날 것 같았다.
범인과의 접선을 위해 나는 현금이 가득 채워진 수우트 케이스를 준비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의 계획은 경찰의 제지로 중단되고 말았다. 비록 범
인의 요구에 응하는 체하고 접선에는 응하되 진짜 현금을 건네주어선 안 된
다는 것이 경찰의 완강한 방침이었다.
나는 결국 나의 주장을 철회하고 신문지 조각을 가득 채운 수우트 케이스
를 들고 약속장소로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첫번째 장소인 사직공원
주변에는 아베크족으로 위장한 남녀와 땅콩 리어카를 끌고 있는 형사, 그리
고 각종 행상으로 변장한 형사들이 삼엄하게 나를 호위하며 깔려 있었음도
물론이다.
그러나 인근의 신문배달 소년으로부터 약속장소를 변경한다는 쪽지를 건
네받은 후 영동의 호텔 커피숍으로 달려갔다가 다시 광화문의 황실그릴로
옮겨진 지금까지 범인의 모습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제기랄. 나는
마음 속에서 끓어오르는 울분을 견뎌낼 재간이 없었다. 아무래도 뭔가 잘못
되고 있다는 막연한 예감이 나의 조바심을 더욱 부채질했다. 그렇게 30분
가량이나 더 지났을까? 나는 결국 황실 그릴을 빠져나오고 말았다.
회사로 돌아온 나는 집무책상에 틀어박힌 채 갖가지 착잡한 상념에 젖어
있었다. 당장 어떻게 해야 한다는 의욕도 희박해졌고 무엇부터 손을 대야
할는지 방향감각을 상실한 느낌마저 들었다. 어쩐다? 웬지 몰랐다. 무언가
일을 해야 한다는 자신감마저 잃어버린듯 나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손삼수 반장이 나의 방을 찾은 것은 내가 심란한 마음 가닥을 바로잡기위
해 낙서를 휘갈기고 있을 때였다.
"뭘 그렇게 열심히 하십니까?"
그는 특유의 너털웃음을 흘리며 천천히 방안으로 들어섰다.
"어이구, 어서 오십시오. 이리 앉으세요."
불쑥 찾아온 그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어 나는 자리부터 권했다.
"사업가가 다르긴 다른 모양이죠?"
"예?"
"이런 분위기에서도 일에 몰두하시는 걸 보니 말입니다."
"일은요....낙서를 갈겨대던 중이었습니다."
"낙서요?"
"제 버릇입니다. 일이 잘 안 풀리곤 할때 낙서를 갈겨대면 속은 좀 풀리
거든요."
"아, 네...."
나는 씁쓰레한 마음을 애써 감추고 담배를 권하고 불을 붙여주었다.
"접선이 실패했다면서요?"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그는 그제서야 본론을 꺼내놓았다.
"네. 두시간이나 기다렸었는데...더이상 연락이 없었습니다."
나는 허공으로 담배연기를 뿜어내었다.
"음...."
"놈이 눈치를 챈 모양이에요."
"....."
나는 이번 작전의 실패가 당신들 때문이라는 원망이 담긴 눈길로 손반장
을 쏘아 보았다.그는 눈길을 내리깔고 묵묵부답이었다. 방안엔 잠시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았다.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시선을 내리깔고 있던 손반장이
이윽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한가지 알고 싶은게 있습니다."
"...."
"솔직히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나는 똑바로 그를 쳐다보았다.
"양사장님, 누군가에게 원한을 살만한 일을 하신 적이 있습니까?"
나는 입술을 꼬옥 물었다.
"어떤 일이라도 좋아요. 비밀은 지켜드리겠습니다. 사실대로만 말씀해주
세요 양사장님은 지금 누군가에게 위협을 당하고 계십니다. 양사장님뿐만
아니라 이 사업체까지 말입니다. 이번 사건은 단순하게 금품을 뺏기 위한
협박으로만 보긴 어렵습니다."
"...."
"제 생각으로는 금품보다는 누군가가 양 사장님께 앙심을 품고... 심하게
말해서 양사장을 몰락시키려는 심뽀를 가진 자의 소행으로 보여진다는 겁니
다."
"......"
"협조해 주세요."
"그런 일은 없습니다."
이윽고 나는 입을 열었고, 그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믿지 않으셔도 할 수 없죠. 하지만 사실입니다."
이번엔 그가 침묵을 지켰다.
"젊은 나이에 이만한 사업체를 거느릴 수 있게 되고 유통업계에서도 발언
권이 있을 정도로 기반을 닦은 것은 제 수완과 운이 좋았다고도 볼수 있겠
죠. 전혀 그런 일이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오늘이 있기까지 남의 피
눈물을 뽑아낸 적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알겠습니다."
수긍이 가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그가 몸을 막 일으킬 찰나였다. 요란하
게 울리는 전화벨이 그의 동작을 중단시켰다. 나는 천천히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네, 한강체인입니다."
"양사장!"
수화기 저쪽에서 컬컬한 사내의 목소리가 나의 귀청을 울려왔다. 나는 재
빨리 눈짓을 보냈다. 날쌔게 몸을 일으킨 손 반장은 집무실 책상으로 달려
가 그쪽 수화기를 가만히 집어들었다.
"누구십니까?"
"왜 내말을 안들었어?"
"여, 여보세요..."
"경찰엔 알리지 말라고 했잖아!"
"무슨 소리요? 그건 오햅니다."
"닥쳐!"
"여, 여보세요."
"이건 당신이 자초한 일이야, 뜨거운 맛을 보고 싶다면 얼마든지 보여주
지."
그리고 전화는 끊어졌다. 나는 온몸의 힘이 한꺼번에 빠져나간 듯한 나른
함을 느끼며 소파에 주저앉고 말았다. 손반장은 심각한 얼굴로 나를 지켜보
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내가 최숙영의 피살 소식을 접한 것은 다음날 아침이었다.

< 4 >

내가 전화 연락을 받고 사건 현장인 최숙영의 집앞에 당도했을때 현장은
이미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형사기동대 마이크로 버스와 페트롤 카, 그리고 감식반 차량이 도착해 있
었고 일대는 밀려드는 인파로 수라장이었다. 내가 인파를 헤집고 안으로 뛰
어들자 마침 최숙영의 방에서 나오던 손 반장이 나를 맞아들였따.
"무슨 일입니까? 미스 최가 왜?"
나는 하소연이라도 하듯 손 반장의 소매를 잡아 끌었다. 도무지 영문도
모를 뜻밖의 사태에 당황하고 있는 나에게 당장 위로의 말을 찾지 못한듯
손반장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일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또 무슨 사건이 터질는지...이래도 양사장
님은 입을 다물고 계실겁니까?"
"내가 뭘 숨기고 있다는 거요?"
"협조해 주십시오. 저희들은 티끌만한 거라도 알아내야 합니다."
"......"
"저는 확신합니다. 사장님께 누군가 원한을 품을만한 사연이 있습니다.
우린 그걸 알아야 합니다."
손반장은 나에게 질책이 담긴 눈길을 던졌다. 그러나 나는 할말이 없었
다. 그에게 제공할 수 있는 정보 따위가 사실 나에게 있을 리 없었던 것이
다.
손반장은 크게 난관을 느끼고 있었으나 수사는 여러 갈래로 진척이 되고
있음을 도 형사를 통해 이따금씩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첫번째 방향은 물론 나에게 협박장을 보낸 인물이 지난 번 사제폭탄 불발
사건을 일으켰고, 이번 최숙영 살해사건과 동일범이라는 확신아래 나와 원
한관계가 있을 법한 인물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처음엔 원한관계 따위가 있을 리 없다는 나의 진술에 미심쩍은 눈길을 보
내던 손반장도 차츰 나의 진술에 담긴 진실성에 공감을 하는 눈치를 보였
다.사실 수사력의 대부분을 집중시켜 나의 어린시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를 발가벗기듯 해부해 보았으나 그들의 수사망에 걸려든 혐의자나 단서라
곤 없었으니까.
두번째는 유일한 단서라고 할 수 있는 사제폭탄의 제조원을 찾아내는 일
인데 첫번째 방향이 벽에 부닥친 것과는 달리 이쪽은 약간의 진척을 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우선 사제폭탄에 장치되었던 자명종 시계의 출처를 밝혀냈던 것이다. 문
제의 자명종 시계는 2년전 서일제약주식회사에서 전국의 대리점에 회사 선
전용으로 보낸 백개 중의 한개로 밝혀졌으니 그것만으로도 수사는 큰 진전
을 본 셈이었다. 일단 수사망이 100분의 1 확률로 줄었다는 것만도 큰 수확
인 모양이었다.
세번째 수사방향은 살해된 최순영의 주변인물에 대한 탐문이었는데, 이쪽
에선 최순영의 애인인 하동우가 첫번째 용의자로 떠올라 한때 수사반은 환
호를 터뜨린 모양이었다.
그러나 하동우는 범행사실을 완강히 부인하고 나섰다.
"믿어주세요. 전 아녜요. 제가 왜 숙영이를 .. 전 안 죽였어요."
"자, 차근차근 얘기해! 자네가 미스 최를 지겹도록 쫓아다닌 건 사실이
지?"
"예."
"며칠전 미스 최 근무처에서 사고나 나던 날 전화를 한것도?"
"....."
"그리고 바로 그날 미스 최를 미행해서 산부인과까지 몰래 따라갔고 임신
4개월이란 사실까지 확인했다고 자네 입으로 그랬었잖아!"
"그, 그건 사실이에요."
"그래서 자네하고 미스 최가 옥신각신했겠지? 둘 사이에 아이가 생기자
겁이 덜컥 난 자네는 숙영 양에게 아이를 떼라고 시켰을 테고 미스최는 책
임지라고 떼를 썼을테고, 안그래?"
"아닙니다!"
"솔직히 얘기해 봐!"
"그 아이는 제 아이가 아닙니다."
"뭐?"
"사실입니다. 우리 사이는 순수했습니다. 깨끗했어요. 전 숙영이가 임신
했다는 사실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전 그제서야 모든걸 깨
닫게 되었어요."
"무슨 소리야?"
"요즘 우리 사이는 순탄치 못했습니다. 웬지 몰라도 최근들어 숙영이는
절 피했어요. 어쩌다 만나면 헤어지자고 했습니다. 제가 아무리 설득해도
막무가내였어요. 전 숙영이가 임신했다는 소리를 듣고서야 모든 걸 알았습
니다. 숙영이는 딴 남자가 있었던 겁니다!"
"그 남자가 누구라든가?"
"말하지 않았어요. 아무리 구슬러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홧김에 죽였나?"
"아니라니까요, 전!"
"자네 옷에 묻은 그 피는 어떻게 설명할 거야? 게다가 자네가 첫 목격자
야!"
"아녜요. 이피는, 다시 한번 설득하려고 숙영이를 찾아 갔을때,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던 숙영이는 이미 가슴에 칼을 맞고 죽어 있었습니다. 전 죽
었나 살았나 확인하고 병원으로 업고 갈려고 했는데...그때 묻은 겁니다."
"확실해?"
"믿어주세요. 정말입니다."
첫번째 용의자로 떠올랐던 하동우는 그렇게 수사선상에서 제외되었다. 하
동우의 친구이자 직장 동료인 김진봉도 그 진술을 뒷받침하는 증언을 하고
나섰다.
"동우 그 자식 정말 순진한 놈이에요. 제가 말예요. 미스최가 고무신 거
꾸로 신었으니 맘잡으라고 아무리 타일러도 막무가내로 미스 최만 철석처럼
믿는 거예요. 또 설사 미스최가 과거가 있더라도 상관없다는 겁니다. 그런
놈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요?"
어쨌든 이렇게 되어 수사는 다시 난관에 부닥치고 있는 모양이었다.

< 5 >

그 사이에 나의 신변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여러 가지 문제로 한때 위험 수위에서 휘청거릴 뻔 했던 사업이 정상궤도
로 올라섰는가 하면, 그동안 차일피일 끌어오던 나의 결혼 문제가 확정이
되었다.
결혼 상대는 이름만 대면 누구나 대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정평이 나 있
는 명문세도가의 막내딸이었다.
사실 나의 사업이 일찍부터 정상 수위로 달리고 있는 것도 초기에 그 가
문의 은근한 후광과 영향력에 힘입은 바 컸던 것도 솔직한 사실이다.
어쨌든 최근의 불미스런 몇 가지 사건들만 제외한다면 나는 더 없는 행운
아로 순조로운 행진을 계속하는 셈이었다.
경찰 수사가 지지부진해지면서 수사는 거의 미궁으로 빠지기 직전이었고,
수사본부가 해체된다는 소문까지 들려왔다.
나는 정말 이런 상태가 계속되기를 갈망했다. 한동안 집념에 들떠 있던
형사들의 식어가는 열기를 느끼며 거기에 보조를 맞추느라고 그런지 협박자
도 더 이상의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 나로선 더할 수 없이 좋은 현상이었
다.
그러나 아직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는 일말의 두려움이 완전히 씻겨나간
것은 아니었다. 다만 폭풍전야의 고요처럼 팽팽한 긴장을 남긴 채 나의 마
음 속에 앙금처럼 존재할 따름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한동안 뜸하던 손반장이 불쑥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그는 기어코 애써
잠재운 내 마음 속 불안의 존재들을 돌연 일깨우고 말았다.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마음 속의 앙금을 밖으로 드러내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수사는 언제나 끝나겠습니까?"
나는 지나가는 말처럼 물어보았다.
"글쎄요... 노력은 하는데..통."
그는 고민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요즘 타격이 큽니다. 저희들은...."
"......"
"모든 걸 쉬쉬하고 극비에 붙이는 데도 어떻게 소문이 새어 나간 건지 ..
소문이 한바퀴 돌면서 손님도 매상도 다 떨어지고 있어요."
"면목 없습니다."
그는 그게 마치 자신의 죄인양 사과를 했다.
"아참, 축하드립니다."
"......?"
"곧 약혼하신다는 말이 들리던데요? 상대가 굉장한 분이시라구요?"
"그런 개인적인 사생활도 조사를 다 하십니까?"
"죄송합니다."
그는 겸연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그 미소의 언저리에는 그 특
유의 자만심이 얼핏 깔린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어쩐 일일까요? 요즘은 그놈이 더 이상 연락이 없으니."
"이 정도로 목적달성이 된 건 아닐겁니다."
"예?"
"별뜻은 아닙니다. 저희들도 열심히 뛰고 있으니까 곧 뭔가가 나올 겁니
다. 내부 소행이라는 확증도 이미 잡았으니까요."
순간 나는 차가운 전율이 등줄기를 스쳐감을 느꼈다.
"무슨 뜻입니까? 내부 소행이라니?"
"그 협박장 말입니다. 타자지와 글자를 분석해 본 결과 바로 이 회사내에
서 작성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내었습니다."
"아니 그럴리가...."
"하하..두고 보십시오. 저희들의 과학수사 체계를 말입니다. 바빠서 오늘
은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그러고 손반장은 총총 걸음으로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그의 너무나 엉뚱한 발상에 나는 한동안 우두커니 서서 할말을 잃고 있었
다. 내부 소행이라니? 어떻게 그런 결론이 내려질 수 있을까? 소파에 몸을
파묻은채 한동안 머리를 굴려보아도 그런 결론이 났다는 사실은 도저히 납
득이 되지 않았다.
범인이 남긴 협박장은 일상적인 평범한 타자 종이에 타자 글씨가 찍혀있
을 뿐이었다. 타자기는 워낙 보편화되고 대중화된 사무기기가 아닌가.타자
글씨만 보고 그 문서가 작성된 타자기를 찾아낸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
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이거야말로 서울에서 김서방 찾는 격이 아니
고 또 뭐겠는가?
그러나 손반장이 너무나 자신있게 내뱉은 한 마디에는 마음 한 구석이 걸
리지 않을 수 없었다.
과학수사, 손반장은 그렇게 말했다. 하긴 오늘 날처럼 과학 문명이 발달
한 시대에 수사기술이라고 발달하지 말란 법은 없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그런 말을 들은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범인이 장갑을 끼고 범행을
저지르더라도 지문을 찾아내는 최신기계가 발명되었다고.
그렇다면 손반장이 내부소행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하
다. 나 역시 그렇게 믿어도 좋을 것이다.




미 끼 ( 하 )

by 한대희



< 6 >

약혼식은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식장을 가득 메운 하객들은 진심으로 새로운 커플의 탄생을 축하해마지
않았고 나는 날아갈 듯한 심정이었다.
오늘은 오로지 나를 위한 날이다. 나는 그렇게 느꼈다. 수많은 귀빈들은
모두 내게 선망의 눈초리와 격려의 시선을 아끼지 않았다.
그 분위기는 리셉션장으로 계속 이어졌고 나는 신부의 손을 잡고 귀빈들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그리고 나의 벌어진 입은 다물어질줄 몰랐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하객들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점퍼차림의 사내를 보는
순간 나의 표정은 굳어지고 말았다.
분위기에 도통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로 인파를 헤치고 들어 온 사내는 바
로 손삼수 반장이었던 것이다.
"무슨 일입니까?"
나는 재빨리 그를 밖으로 끌어냈다. 자칫 꾸물거리다 분위기를 망칠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급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혀 급하지 않은 표정을 지어보이며 흘끔흘끔 식장의 분위
기를 훔쳐보았다.
"아무리 급한일이라도 그렇지...."
내가 볼멘 소리를 터뜨리기도 전에 그가 나의 말문을 막아버렸다.
"회사로 빨리 돌아가셔야겠어요. 지배인이 발견해서 신고를 했습니다."

이제 모든 건 끝났다.
오후 여덟 시 정각, 판매장을 폭파시켜 버린다!

손반장이 내민 메모지를 읽어본 나는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이, 이게 어디서 나왔습니까?"
"사장님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답니다. 이제 불과 한 시간 남았습니다. 한
시간내에 판매장 안에 감춰진 시한폭탄을 찾아내야 합니다."
손반장과 내가 날을 듯이 회사로 돌아왔을때 회사는 온통 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매장은 폐쇄되었고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여 앰블런스와 페트롤카 그리고
소방차들이 큰도로를 완전히 차지한 채 대기하고 있었고, 소방수들이 긴 호
스를 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었다.
매장은 더욱 가관이었다.
정복경찰 수십 명과 폭약이란 붉은 글자가 쓰여진 완장을 두른 폭약반원
수십 명이 매장 안을 벌집 쑤시듯이 헤집으며 이잡듯 뒤지고 있었다.
너무 기가 막혀 나는 말이 잘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아니...이건 다 뭡니까?"
"만약을 대비해섭니다. 시한폭탄을 찾아내지 못할 경우를 생각해서요."
손반장의 냉정한 판단에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묵묵히 내방으로 올라왔다. 우리 회사에서 그나마 앉아 쉴 수 있는 곳은 이
방뿐인 듯했다.
그러나 나는 앉지도 못하고 실내를 서성거렸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습니까?"
나는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구원을 청하듯 손 반장을 바라보았다.
손반장은 힐끗 손목시계를 살펴 보더니 품속에서 무전기를 찾아 쥐었다.
"반장이다! 남은 시간은 13분! 아직 진척이 없나? 폭약반! 응답하라!"
"폭약반입니다. 시간이 너무 촉박합니다!"
무전기 속에서 다급한 소리가 흘러 나왔다.
"무조건 찾아내!"
손반장은 신경질적으로 내뱉고 소파에 주저앉았다. 결국 모든걸 체념한
듯한 그의 표정에 나는 울화를 터뜨리고 말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꼴입니까? 경찰은 뭘하는 겁니까?"
"......"
"이런 사태가 생길 줄 알았다면 애초부터 그놈이 요구하는 대로 돈을 줘
버렸으면 깨끗하게 끝났을 것 아닙니까!"
"그건 악순환입니다."
"뭐요?"
"한 번 재미본 놈이 그 한번으로 그만둔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놈을 체포해야 하잖소! 사람을 이렇게 불안에 떨게 만드는게
경찰이 할일이오?"
"우선 진정하세요."
나는 애꿎은 보조의자에다 화풀이를 해댈 수 밖에 없었다,
"앞으로 남은 시각 7분!"
그는 냉정하게 무전기와 초읽기만 거듭했다. 그리고 분통이 터져서 씩씩
거리는 내 모습이 안스러운듯 그윽히 바라 보았다.
"양사장님. 어쨋든 최선을 다해 봅시다."
"이제 와서 뭘 어쩌겠다는 거요? 이 지경까지 와서."
"양 사장님께서도 책임이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
"뭐요?"
"협조를 해주셨어야죠."
그는 마지막 한 가닥 남은 내 분통마저 터뜨려 버릴 모양이었다.
"범인은 양사장님의 주변에 있습니다. 내부 인물이든 같은 업계의 라이벌
이든 친구이든 어떤 원한이 있든 간에 주변의 누군가는 틀림없을 겁니다."
"그런 식으로 수사를 하니까 아직 범인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거요."
나는 조롱하듯 그를 쏘아 보았다.
"남은 시간 3분!"
그는 내말엔 대꾸도 없이 무전기에다 악을 쓰기 시작했다.
"2분 50초! 아직 소식이 없나?"
그러나 반응이 있을리 없었다.
"2분 30초!"
순간 귓가로 증폭되는 듯한 초침 소리를 들으며 견딜 수 없는 무서움이
나에게 엄습해 오기 시작했다.
"2분!"
그 소리에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나갑시다.! 우리도 함께 찾읍시다."
손 반장이 무서운 눈길로 나를 잡아세웠다.
"안됩니다! 밖에는 전문가들이 총 동원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나가면 오
히려 짐만 될 거요."
"1분 50초 전!"
나는 좌불안석이 되어 서성거렸다. 도무지 마음을 잡을 수 없었다.
"이 건물에선 그래도 이곳이 제일 안전할 겁니다. 그래서 사장님을 이쪽
으로 모신 겁니다. 만약 시한폭탄을 못 찾아내더라도 이곳에만 있으면..."
그의 태평스런 소리를 나는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자칫 이건물이 폭파
라도 된다면, 그리고 생매장이 된다면 이제 막 꿈 같은 미래가 펼쳐질 찰나
에? 그건 안된다. 나는 발작적으로 소리를 쳤다.
"나갑시다! 이 건물 밖으로 나갑시다!"
그리고 그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이거 왜 이래! 지금 방해하면 당신도 죽고 나도 죽어!"
뜻밖에도 그는 거센 완력으로 몸을 비틀었다. 나는 맥없이 바닥에 나뒹굴
고 말았다.
"51초전!"
그는 냉정한 시선으로 나를 쏘아보더니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48초, 47초, 46초,,,,,35초, 34초, 33초!"
피를 말리는 초읽기가 급박하게 계속되었다.
"32초! 31초! 30초전!전원 수색중단하고 대피하라!대피하라!"
악을 써대는 그의 고함을 귓등으로 흘리며 나는 마치 최면이라도 걸린듯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집무책상으로 달려간 나는 의자를 밀어제끼고
그 아래에 감추어진 폭약상자를 끄집어냈다.
그리고 한달음에 창가로 달려가 그 폭약상자를 창밖으로 던져버릴 찰나였
다.
"그대로 서!"
벽력 같은 소리가 나의 지각을 돌이켜세웠다. 그 순간 방문이 열리면서
도 형사가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갑작스런 상황변화에 얼이 빠져버린 나는 폭약상자를 얼싸안은 채 우두커
니 서 있었다.
"그건 터지지 않으니 내려 놔!"
손반장의 말투는 어느새 반말로 바뀌었다. 그는 빙글 웃음을 흘렸다.
"우리가 이미 뇌관을 빼고 바꿔치기 해 두었으니까."
순간 나는 뒤통수를 한방 얻어맞은 듯한 강한 충격을 느꼈다.
"그...그럼...지금까지..."
"물론 연극이었어. 우리가 그 폭탄을 찾아내봐야 당신이 숨긴게 아니라고
발뺌을 하게 되면 증거불충분으로 공소유지가 어려울 테니까. 그래서 당신
의 술수에 속아 넘어가는 척하면서 역습을 한 셈이지."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오면서 더이상 몸을 지탱할 기력마저 상실해버린 나
는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말해봐요...어떻게 알아냈는지..."
"당신은 완전범죄를 계획했겠지만 허점투성이였어. 당신이 피해자로 위장
해 버린 술수에 한때 속아넘어갈 뻔했었지. 우린 당신이 처한 상황을 정밀
하게 탐색하면서 비로소 당신에 대한 심증을 굳혔던 거요. 회사는 부실경영
으로 사채투성이에다 빛좋은 개살구 꼴이고 결혼을 미끼로 기사회생을 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맞이했는데, 엉뚱하게 당신이 심심풀이 삼아 우연히
손대었던 여점원 최숙영이 임신이라는 올가미를 당신에게 씌워왔던 거요.
그래서 당신은 최순영을 제거하고자 두 번에 걸친 공작 끝에 최숙영을 없애
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다시 우리의 의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번 사건을
저질렀던 거요. 그러나 그게 당신의 마지막 실수였소! 당신은 당신 꾀에 넘
어갔소. 이번 사건만cGⓖlSGK 우리가 당신을 체포할 수 있는 물
증을 확보할 수 없었으니까. 결국 내가 며칠 전 타자기와 과학수사 운운하,0Rr혈O.s

H빎索 붙였던 것은 결국 내가 당신한테 던진 미끼 였소. 그
런데 당신은 그걸 보기좋게 덥석 물었던 거요."
손반장은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 끝 -


지옥에서 적에게



-- 오 헨리 --



이 열혈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젊은 독자들이 지루해 하는 것을 양해하
고 기하학의 이야기를 조금 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
자연이 원을 그리는 한쪽에서 인간은 직선적으로 나아간다. 자연의 것은
둥글고 인공적인 것은 각이 져 있다. 눈 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완벽한 원을 그리며 헤매게 된다. 그러나 도시에 사는 인간
은 직각을 이루는 도로나 건물 때문에 자연을 잃은 채 걸으면 걸을수록 본
래 있었던 장소에서 멀어진다.
어렸을 때의 둥글고 귀여운 눈동자는 순진무구함의 상징이지만, 바람둥이
의 가느다란 눈은 명확히 자연의 둥그스름함이 침범당한 것을 나타내고 있
다. 그리고 수평으로 다문 입술은 교활함의 상징이다. 그에 비해 키스를 위
해 둥글게 오므린 입술에 순수한 열정을 느끼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미는 자연의 완전한 모습이며 둥글다는 것은 미의 특징이다. 보름달, 매
혹적인 황금공, 장려한 사원의 굴뚝, 결혼반지, 서커스의 무대. 웨이터를
부르는 벨소리, 그리고 술을 ' 돌려 마시는 ' 것을 보라.
한편 직선에는 자연의 비뚤어짐이 나타나 있다. 예를 들어, 비너스가 몸
에 두른 천이 형태를 바꾸어 ' 똑바른 앞치마 ' 가 된 장면을 상상해 보라!
우리가 직선을 따라 움직이고 급격한 모퉁이를 돌게 되면 성질까지 변하
기 시작한다. 그 결과, 인공적인 것보다 순응성이 있는 자연은 보다 엄격한
규칙에 적응하려고 차례로 약간 기묘한 것을 낳게 된다. 예를 들면, 품평회
용의 국화, 메틸 알콜의 위스키, 공화당 지지의 미주리주 의원, 양배추 그
라탕 (요리 이름), 그리고 뉴욕인 등이다.
자연은 대도시 속에서 가장 잃어버리기 쉽다. 원인은 기하학이지 정신에
의한 것이 아니다. 대도시의 도로나 건축물의 직선, 각이 진 법률이나 사회
의 관습, 우회하는 일이 없는 포장도로, 엄격함과 융통성이 없는 규칙, 게
다가 오락이나 스포츠의 규칙까지 자연의 곡선을 냉담히 조소한다.
대도시는 원을 사각형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을 실제로 증명해 왔다. 이
러한 대도시에 흘러 들어온, 어떤 켄터키주의 두 가족간의 복수극을 이야기
하려면 이 수학적인 전제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 숙명적인 싸움의 원수는 퍼웰가와 하크네스가로서 시초는 켄버랜드 산
이었다. 복수극의 첫번째 희생물은 빌 하크네스가 기르던 사냥개였다. 하크
네스가는 퍼웰가의 가장을 살해해 이 슬픈 손실에 대한 앙갚음을 했는데,
퍼웰가의 보복도 재빨랐다. 그들은 소총을 준비하고 빌 하크네스의 애견을
이용해 그를 꾀어낸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를 먼 나라로 보내 버렸다.
숙명적인 싸움은 40년간 화려하게 지속되었다. 하크네스가의 사람들은 밭
에서 일을 하다가 사살되거나 방에 있다가 창으로 쏜 총에 맞았다. 교회에
서의 귀가길이나 자고 있을 때 습격을 당하기도 하고 결투를 해서 사살된
적도 있다. 맨 정신이든 술에 취해 있든 혼자 있든 가족이 모여 있든, 응전
태세가 갖추어져 있든 없든 습격을 당했던 것이다. 퍼웰가도 이와 마찬가지
로 가계의 가지들이 잘려 나갔다고 한다.
결국 이 전정에 의해 쌍방의 집에 남은 생존자는 각각 1명씩이 되었다.
여기서 칼 하크네스는, 이 이상 싸움을 계속하면 40년 간이나 싸워온 역사
에 종말이 오므로 당사자로서는 재미없게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사
람이 줄어 버린 켄버랜드에서 사라져 숙적 퍼웰가의 마지막 사람이 쌤의 복
수의 손에서 숨어 버렸다.
1년 후 쌤 퍼웰은 불구대천의 숙적이 뉴욕 시내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
았다. 쌤은 커다란 솥을 뒤집어 그 속의 검댕을 떼내어 긴 부츠를 닦았다.
검게 물들인 스판의 기성복에 칼라가 달린 하얀 셔츠를 입고 여행 가방에
속옷 등을 챙겼다.
그리고 벽에서 소총을 꺼냈으나 한숨을 푹 쉬고 다시 제자리에 돌려 놓았
다. 켄버랜드에서는 이 풍습이 어울리고 그럴 듯하지만 뉴욕의 브로드웨이
에 늘어선 마천루 사이에서 다람쥐를 쫓는 듯한 이런 모습이 허용될 리가
없다. 그때 선반에 노인 구식이긴 하지만 믿을만한 콜트총이, 대도시에서의
모험과 복수에는 자신이 가장68Hnl州>l{콜트 총과 가죽 칼집에 든 사냥용 나이프를 쌤
은 여행 가방에 넣었다.
노새를 타고 역을 향해 가면서 퍼웰가의 마지막 남자는 안장 위에서 고향
을 뒤돌아 보았다. 히말라야 산목의 숲속에서 작은 무리를 이루고 있는 퍼
웰가의 묘표들이 눈에 들어왔다.
쌤 퍼웰은 그날 밤 뉴욕에 도착했다. 아직 자유로운 자연의 원 속에서 돌
아다니던 습관 때문에, 그는 대도시의 무정하고 영악한 무수한 암흑 속에
버티고 서서 이제까지 몇 백만 명을 그렇게 해왔듯이 그를 각이 진 인공의
틀에 끼워맞추려 하고 있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마차 한 대가 이곳 저곳을 헤매고 있는 쌤을 주웠다. --바람에 날아온 낙
엽 속에서 쌤이 나무열매를 주웠듯이-- 그리고 쌤의 부츠와 여행 가방에 어
울리는 호텔로 인도했다.
다음날 아침, 퍼웰가 최후의 생존자는 하크네스가의 마지막 생존자를 감
추고 있는 시내로 들어갔다. 콜트 총을 웃옷 밑에 숨겨 가느다란 가죽벨트
로 고정시키고, 사냥용 나이프를 목 뒤의 칼라에서 반인치 아래에 매달았
다.
칼 하크네스가 시내의 어딘가에서 급행 짐마차를 운영하고 있다는 것과
자신이 칼을 죽이러 왔다는 것 ...... 이것만은 확실한 사실이었다. 그런
까닭에 보도로 나가는 쌤의 눈은 충혈됐고 가슴에는 증오의 불이 타올랐다.
번화가의 소란스러움에 이끌려 쌤은 그쪽으로 향했다. 프랑크푸르트나 로
렐시에서처럼 칼이 조끼와 채찍을 들고 셔츠 차림새로 거리로 나오는 게 아
닐까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 시간이 지나도 칼은 나타나지 않았
다. 칼은 문이나 창가에서 자신을 쏘려고 기다리고 있는게 분명하다. 그렇
게 쌤은 생각하고 한동안 문이나 창에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점심 때쯤, 쥐와 노는 것에 지친 대도시는 갑작스레 사정없이 쌤을 거세
게 붙잡았다.
쌤 퍼웰은 2개의 간선도로가 직각으로 교차하는 지점에 서 있었다. 사방
을 둘러보니 세계는 그 원 궤도에서 벗어나 수준기와 자로 테두리를 잘라
각을 이룬 평면으로 변해 있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틀에 맞춰져 순서대
로 정해진 구역 안에서 기계적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생활의 근본 토대는
세제곱근이며 존재의 척도는 면적이었다. 사람들은 똑바로 열을 이루고 흐
르듯이 나갔고 쌤은 그 굉장한 소음에 망연자실했다.
쌤은 돌로 된 건물의 직각을 이룬 모퉁이에 기댔다. 사람들의 얼굴이 몇
천 갠가 그의 앞을 지나쳐 갔고, 그 중 하나가 우연히 그에게로 향해졌다.
갑자기 쌤은 자신이 죽어서 유령이 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모
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어리석은 공포에 시달렸고 동시에 도시의 고독에 휩
싸였다.
사람들의 흐름 속에서 뚱뚱한 한 남자가 빠져나와 2, 3 피트 정도의 장소
에 서서 마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쌤은 그 남자 곁에 다가가 소음에 지지
않게 남자의 귓가에서 외쳤다.
" 란킨즈 씨네 돼지는 모두 우리 돼지보다 살이 쪘었어. 근데 그쪽 나무
열매가 우리보다 훨씬 많아서 말야....."
뚱뚱한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은듯 그 장소를 떠났지만 놀란 것을 감추기
위해서 군밤을 샀다.
쌤은 위스키로 목을 축이고 싶어졌다. 거리 저편에서는 자재문으로 사람
들이 들락날락거리고 있었다. 그때마다 빛나는 술집 내부와 장식이 엿보였
다. 복수의 귀신이 된 쌤은 거리를 건너서 술집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여기
서도 익숙한 원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쌤은 문의 둥근 손잡이를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손잡이는 없고 손은 직
사각형의 놋쇠판과 잡으려고 해도 바늘머리만크의 것도 달려 있지 않은 떡
갈나무판 위를 허무하게 미끄러질 뿐이었다.
당황해서 얼굴이 빨개지고 비탄에 젖어 쌤은 문에서 떠나 계단에 앉았다.
경비원의 방망이가 그의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
" 산책이라도 하는게 어때 " 하고 경관이 말했다.
" 꽤 오래 전부터 이 주위를 어슬렁거리고 있잖아. "
다음 길 모퉁이에서 삐익 하는 기적소리가 들렸다. 돌아다 보니 증기자동
차에 가득 쌓인 땅콩 너머로 검은 눈썹의 무섭게 생긴 남자가 그를 노려보
고 있었다.
그는 놀라서 거리를 횡단하기 시작했다. 무척 큰 소방차가 노새가 끌지도
않는데 소 울음소리 같은 소리를 내며 그의 다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주위
의 모든 것이 그에게 상냥한 말 따위는 이런 곳에는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
닫게 했다. 노면전차의 운전사가 쓸데없이 자주 벨을 울리며 지나갔다. 옥
색 블라우스를 입은 덩치 큰 여성이 쌤의 등을 팔꿈치로 쳤다. 신문팔이 소
년은 생각에 잠긴 체하며 쌤에게 바나나 껍질을 던지고 투덜거렸다.
"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하지만 본 사람 있으면 못 본 걸로 해줘
! "
한편 쌤의 숙적 칼 하크네스는 하루 일을 마치고 뻔뻔스러운 건축가가 면
도칼을 세워놓은 듯한 건물의 날카로운 모퉁이를 막 돌아서고 있었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오가는 인파 속의 3야드 전방에 있는 그의 숙적 일가의 마지
막 생존자를 발견했다.
칼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한순간 망설였다. 너무도 갑작스러웠던 것이
다. 그러나 쌤 퍼웰의 날카로운 눈은 이미 칼을 발견하였다. 갑자기 펄쩍
뛰어오르는가 싶더니 통행인의 물결 속에 파도가 일며 쌤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 여, 칼 아냐 ! 너를 만나서 정말 반갑다. 진짜야. "
그리고 브로드웨이와 23번지의 길 모퉁이에서 켄버랜드의 숙적들은 악수
를 나누었다.


==The End==


인심 후한 집
-- 호시 신이찌 --


어느날 밤, N 씨가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방문이 살며시 열리면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있었다.
" 누구요 ? "
화들짝 뒤돌아보니 거기엔 얼굴을 검은 천으로 가리고, 손엔 칼을 든 사
내가 서 있었다.
사내는 험악하게 말을 했다.
" 조용히 해. 떠들면 혼내줄 테다. "
사내의 낮고 음침한 목소리에 아랑곳 없다는 듯이 의외로 N 씨는 침착한
어조로 대답했다.
" 뭐야, 그 꼴은 ? 강도놀이라도 할 셈인가. 그런건 딴데 가서 해. 여긴
내 집이야. "
" 딴청부리지 마, 나는 돈을 노리고 온 거란 말이야. 어서 돈을 내놔 !!"
" 아아, 그러고보니 진짜 강도나리로군. "
" 당연한 걸 묻다니, 귀찮을 정도로 멍청한 녀석이군. 이 집은 경기가 좋
은 것 같다고 이웃간에 소문이 자자해. 게다가 하인은 밤에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이 집에 당신 혼자 산다는 것도 조사해 봤어. 그러니까 마음놓
고 쳐들어온 거야. "
" 사전조사도 빈틈없이 했다, 그 말인데..... "
" 돈이 없다곤 말 못하겠지, 어서 그 금고를 열어 ! "
" 싫은데. "
" 싫다면 먼저 너를 없앤 다음 준비해 온 폭약으로 금고를 열면 돼. 그러
나 그렇게 되면 너는 목숨을 잃고, 나는 쓸데없는 수고를 해야 하니 피차
손해를 보는 행동은 되도록이면 하고 싶지 않아. 자아, 어떻게 할 건가 ?
"
강도는 칼을 휘둘러 보였다. 이윽고 N 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으음 ~ 상당히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녀석이구먼. 죽는 한이
있어도 금고를 열지 않을 작정이었는데, 그 논리적인 점이 마음에 들었
다. 열어 주지. "
N 씨가 다이얼을 돌려 금고를 열자, 안에는 금화가 가득 들어 있었다. 강
도는 눈을 지그시 뜨면서 탄성을 질렀다.
" 굉장하군 ! "
" 이건 동서고금의 금화로서 내 수집품이지. 이걸 빼앗긴다고 생각하니
정말 유감스럽군. "
강도는 그것들을 주머니 속에 옮기곤 탐욕의 눈을 이글거리며 말했다.
" 이 정도라면 이밖에도 뭔가 있겠구먼. 자아, 값나가는 것을 더 내놔. "
" 그건 무리야. 약속이 다르잖아. "
" 약속 같은 거 안했어. 계속 투덜대고 어물쩡거리면 이번에는 정말 가만
두지 않겠어. "
" 알았네, 알았어. 내놓겠네. 기회를 잡으면 놓치지 않고 끝까지 이용하
는 그 성미가 마음에 들었네. 실은 여기에도 있다네. "
N 씨는 벽에 걸린 액자를 옆으로 치우고, 그 뒤에 있는 비밀 금고를 열었
다. 거기에도 금화가 한 궤짝 있었다. 강도는 그것을 나꿔채며 말했다.
" 되게 인심이 좋군. 어쩐지 이상하긴 하지만..... "
" 마음에 걸린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아. 신고는 하지 않을테니 금화를
두고 이만 돌아가는게 어때 ? "
" 농담 말아 ! 강도에게 그런말을 하다니 당신은 너무 뻔뻔하군. 좀 봐주
려 했더니 안되겠어. 빨리 이것저것 모조리 내놔 ! "
" 욕심이 많군.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한데. "
" 이러쿵 저러쿵 잔소리 말아. 그 대신 앞으로 두번 다시 오지 않을테니
까. "
강도는 다시금 험악하게 칼을 휘두른다.
" 몽땅 가져가면 두번 다시 올 필요도 없겠지. 음... 알았네. 모두 내주
지. 자네의 욕심, 아니 지극한 이익추구 정신에 감탄했기 때문이야. "
N 씨가 책상 서랍을 열자, 그곳에는 각종 은화가 한가득 들어있었다.
" 많군..... "
" 이것으로 마지막이야. 넣을 것이 없을테니, 가방을 주겠네. 다소 구식
이라 무겁긴 하겠지만 가는 도중 흘리지는 않을 걸세. "
" 지나치게 친절하군. "
" 양심에 가책이 된다면 일치감치 반성하고 몽땅 놓고 돌아가는게 어떤가
? "
" 말도 안되는 소리 마. 이런 걸 두고 가다니 당치도 않아. 여길 나가면
대기시켜 놓은 오토바이로 잽싸게 사라질 거야. 그럼 잘 있게나. "
강도는 금은 보화를 가득 넣은 가방을 들고 방을 나가려 했다. 그러나 그
의 생각대로 잽싸게 달아날 수는 없었다.
방문을 나가려는 순간, 문 부근의 마루바닥이 갈라지고 아래로 굴러 떨어
졌던 것이다. 강도는 함정 속에서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이윽고 소리를 질렀
다.
" 어이, 이건 어찌 된 거야 ? "
" 이건, 내가 발명한 방범용 비상장치라네, 중량계와 연결이 되어 있어
들어올 때에 비해 중량이 늘어나면 자동적으로 바닥이 갈라지고, 사람을 떨
구는 장치란 말일세. "
" 지독하군. 빨리 꺼내 줘. "
" 그건 안 돼. 경찰이 올 때까지 거기 있게."
" 잠깐 기다려. 그것만은 곤란해. 금화나 은화는 모조리 돌려줄테니 용서
해 주게. "
경찰을 부르겠단 소리에 함정에 빠진 강도는 무섭게 칼로 위협하던 좀전
의 상황과는 달리 애절한 목소리로 다급하게 소리쳤다.
입장이 바뀐 N 씨는 강도로부터 가방을 돌려 받으면서 말했다. 조용하면
서도 강경하게....
" 칼도 주게나. 그걸 놔두면 또 휘두를게 분명해. "
" 할 수 없군. 자아, 가져가게. "
" 그리고 말야, 종이와 펜을 줄 테니, 이곳에 강도로 들어왔다는 자백서
를 쓰고 지문을 찍어 주게. 그것을 받고 내가 믿는 친구에게 우송한 뒤에
꺼내 주겠네. 요컨대 앞으로 내게 반항하지 못하도록 자네 약점을 잡아두자
는 것이지. "
강도는 투덜거렸지만, 이대로 경관에게 체포되는 것보다는 낫겠다고 생각
해서인지 그가 시키는대로 했다. 대충 일이 끝나자 N 씨는 강도를 함정에서
꺼내 주며 말했다.
" 그럼 이제부터 자넨 내 밑에서 일을 해야만 하네. "
" 에잇, 호되게 당했군, 하지만 싫다고 하면 경찰서행이 될 테고.. 도대
체 어떤 일인데 ? "
" 판매를 하는 걸세. 세일즈맨이 되어 크게 매상을 올려 주게. "
" 뭘 말이야 ? "
" 내가 발명한, 이 방범장치를 파는 거야. 효과가 기막힌 건 자네가 뼈저
리게 체험했을 테니까, 제품을 설명하는덴 부족함이 없겠지. 게다가 자네의
계획성, 끈기, 이론, 기회를 놓치지 않는점, 이익추구의 정신 등등을 감안
해 볼때 큰 성과를 올리리라 생각하네. "
" 아, 그런 짜임새였던가 ? "
" 그렇다네, 자네 덕택에 내 경기는 더욱 좋아지겠지. 우리 회사에 한해
선 사람을 구하는데 어려움이 없다네. 판매원은 자네를 포함해서 이젠 30
명이나 되었으니까. "





=== The End ===



정도의 문제
-- 호시 신이찌 --


자신이 맡은 임무의 중대함을 가슴깊이 느끼면서 N 은 어느 나라의 수도
에 도착했다.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스파이로서 말이다.
어린 시절부터 동경해 왔던 이 직업에 뛰어든 그는 갖은 우여곡절 끝에
기회를 잡았고 드디어 첫번째 임무를 맡게 됐다.
의욕은 불꽃처럼 타오르고, 용기는 온몸에 넘쳤으나 긴장된 신경은 시간
이 갈수록 날카로워지기만 했다.
그는 어깨를 당당히 펴고 용기백배한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 그런 태도를
취했다간 당장에 의심을 받게 될 것이다. 수수한 복장과 남의 눈에 띄지 않
는 거동 등, 되도록 평범한 외관을 가장해야만 한다. 표면상으로는 고대미
술연구가로 되어 있다. 남에게 온순한 인상을 주는, 알맞은 직업인 셈이다.
N 은 가구가 딸린 아파트를 빌리고, 그곳을 활동무대로 삼기로 했다. 그
러나 아파트라 해도 결코 안심할 수는 없다. 어딘가에 도청장치가 되어 있
을지도 모르고, 초소형 TV 카메라 감시장치가 숨겨져 있지 않다고 단정지을
수도 없는 일이다.
N 은 방안을 철저하게 조사하기 시작했다. 테이블이나 침대, 의자 등의
다리를 떼보기도 하고 라디오를 분해했으며, 전화기의 뒤를 열어 보고 꽃병
에 꽂힌 꽃을 뽑아 속을 검사했다.
그뿐 아니라 통풍장치나 욕실의 설비를 부수고 양탄자를 걷어 마루를 조
사했으며, 쿠션이나 베개 속을 뒤지고 거울 맞은편에서 엿보고 있지는 않은
가 확인하는등 구석구석 빠짐없이 검사했다.
그러나 아직 안전하다고 볼 수는 없다. 벽이나 천정의 바닥을 똑똑 두들
겨 보고 음향반응에 귀를 기울이며 무언가가 숨겨져 있지 않나 하고 이잡듯
이 찾아 보았다.
조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N 은 즉각 방어
태세를 갖추며 물었다.
" 누구십니까 ? "
" 이 아파트의 관리인입니다. "
들은 적이 있는 중년부인의 목소리였다.
" 무슨 일이신데요 ? "
" 벽이나 마룻바닥을 두드려 시끄럽다고 다른 방 사람들로부터 불평이 있
었습니다. 도대체 뭘 하고 계십니까 ? 문을 열어 주세요. 관리인으로서 집
안을 확인해 보고 여러분들께 설명할 책임이 있으니까요. "
거절하면 오히려 의심을 받고 소동이 커질 것이다. N 은 어쩔 수 없이 문
을 열었다. 관리인은 방안을 보더니 눈이 둥그래졌다. 세살짜리 어린애라도
이렇게까지 어질러 놓지는 않을 정도로 방안은 난장판이었다.
" 대체 무슨 일입니까 ? 도둑이라도 들었나요 ? "
" 아니, 저어...... "
N 은 설명하기가 난처해서 허둥댔다.
" 장난으로 그랬다면 용서할 수 없어요. 두번 다시 이런 짓을 하시면 방
을 비워주셔야 합니다. 망가뜨린 물건은 배상해 주세요. "
N 은 호되게 책망당하며 진땀을 흘렸다.
다음날 저녁 N 은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주변의 상항을 잘 알아 두려
는 게 목적이었다.
그때 공이 굴러왔다. 저쪽에서 소년이 " 아저씨, 공 좀 던져 주세요. "
하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는 손을 뻗으려다가 갑자기 바로 곁에 있는 벤치 밑에 엎드렸다. ' 폭
탄인지도 모르잖아. 나는 스파이란 말야. ' 라고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상
대가 어디에 있는지, 어떤 방법으로 나올 것인지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공을 쫓아온 소년은 사뭇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 보았다. 다 큰 사나이가 공을 무서워 하다니...
공원을 나온 N 은 레스토랑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그러나 요리를 입에 넣
으려다 잠깐 생각해 보았다. 이곳의 급사가 적의 스파이인지도 모르지 않는
가 ? 그러고보니 그의 태도에 이상한 점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마침 한 부인이 개를 데리고 가게로 들어왔다. N 은 고기를 조금 잘라서
개에게 던져 주었다. 개는 기뻐하면서 고기를 먹고 별탈이 없었으나, 그는
부인에게 호된 비난을 받아야 했다.
" 무슨 짓입니까 ? "
" 개가 너무 귀여워서요. "
" 칭찬해 주시는 것은 괜찮지만 멋대로 먹을 것을 주는 것은 곤란해요. "
N 은 미안하다며 거듭 사과했다.
그는 식당을 나와 조심스럽게 걸어서 어느 술집으로 들어갔다. 술을 마시
고 있는데 옆의 사나이가 말을 걸어왔다.
" 선생께선 무슨 일을 하십니까 ? "
" 고대미술을 연구합니다. "
N 은 대답하면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상대는 라이터를 켜서 내밀었다. 순간 N 은 라이터를 든 상대의 손목을
내리쳤다. 독가스가 나올지도 모르지 않는가.
" 이런 실례가 어디 있소? "
그가 성내는 것은 당연했고 금새 난투극이 벌어졌다.
때마침 한 젊은 여성이 술집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N 과 같은 조직에 소
속된 스파이로 이곳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그녀가 사과해 준 덕분으로
소동은 더이상 커지지 않고 가까스로 수습되었다.
N 은 그녀와 밤길을 거닐면서 일에 대한 의논을 하고 그녀의 아파트까지
배웅했다. 그녀는 상냥하게 말했다.
" 잠깐 들어가서 홍차라도 한잔 마시지 않겠어요 ? "
" 고맙소. "
그녀는 따뜻한 홍차를 내놓았다. N 은 생각했다. 그녀는 틀림없는 동료
다. 그러나 적에게 매수된 이중 스파이가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
가. 경계하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스파이는 비정한 직업이기 때문
에...
그는 틈을 보아 살짝 홍차컵을 바꿔쳤다. 차를 마시자 바로 졸리기 시작
했다.
아침이 되어 눈을 뜨자 그녀가 말했다.
" 어째서 내 홍차를 마셨죠 ? 내가 불면증이라서 자기 전에 홍차에 수면
제를 넣어 마시고 있어요. "
얼마 되지 않아 N 은 상사로부터 귀국 명령을 받았다.
그 후 과거 유능한 스파이였던 N 은 줄곧 사무직만을 맡아 보고 있다...




== The End ==


도적 회사
-- 호시 신이찌 --


나는 도적주식회사의 사원이다. 명칭으로 보아 도둑놀이의 장난감이나 뭔
가의 제조, 판매라도 하는 회사일 것이라고 억지로 호의적으로 생각해 주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숨김없이 말하자면 도둑질 자체가 영업인
것이다.
' 그런 직장이 있었던가 ? ' 하고 겉으로는 얼굴을 찌푸리나, 내심 부러
워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런지. 미지근하고 평범한 나날이 싫증이 난 사람이
라면...
도적회사라지만, 일반회사와 크게 다를것이 없다. 우선 복장부터 수수하
고 단정한 것을 요구당하고 있다. 아무리 더운 날이라도 알로하셔츠를 입는
다는 건 당치도 않다. 선글래스를 끼면 호되게 꾸중듣는다. 말씨 역시 그렇
다. 약간 더듬거리는 정도로 성실하게 보여야 한다.
요컨대, 누가 보아도 선량한 시민이 아니면 안된다. 경관에게 주목받는
모습은 안된다는 것이다.
사원은 거의 100명가량. 너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많은 편
이 일하기 좋다.
기획부의 사원은 각양각색의 안을 놓고 회의를 하고 있다. 물론 사장도
참석한다. 젊은 측의 발언은 모두 활기에 차있다.
" 어떨까요, 보석상을 습격하는 것은 ? "
" 창고에 있는 자재를 몽땅 털면 이익이 크다고 생각됩니다만.... "
" 롤즈 로이스를 훔쳐 타고 달아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
여러가지로 활발한 의견이 나오긴 하나, 그와 같은 제안을 사장은 좀처럼
채택하지 않았다.
" 그렇게 눈에 띄는 짓은 안돼. 설령 성공한다 해도 큰소동이 벌어질 것
이며, 우리 앞날의 활동에 지장이 생기네. 조금씩이나마 횟수를 늘여가면서
무엇보다도 안전 위주로 하는 것이 우리 회사의 방침이야. "
결국 그들의 계획은 다시 세워지게 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뇌물로
다달이 상납되는 돈을 훔치는 일로 낙착되었다. 이번도 마찬가지.
사장의 결정에 따라, 세밀한 실행계획이 세워진다. 회사에는 ' 어디에 사
는 누구가 모기관의 누구에게 뇌물을 주기 위하여 어느 길을 지나간다 ' 라
는 자료가 갖추어진다. 그러면 그 가운데 적당한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런 자료가 있으면 차라리 협박을 하는 편이 좋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
도 있을 것이다. 틀림없이 손쉬운 방법이긴 하나, 체포될 위험도 많다. 우
리 회사는 그와같이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는다.
계획이 세워지면, 기술진이 동원된다. 먼저 메이크업 계, 그의 손이 닿으
면 얼굴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바꿔진다.
또한 소매치기 베테랑이 두 명, 그들의 솜씨는 가히 예술적이며 또한 중
요한 역할이기도 하다.
그 다음은 우리들 일반 사원. 제각기 역할과 배치를 명령받고, 연습을 한
다. 나는 대부분의 경우 " 와아, 큰일났다 ! " 하고 외치며 달리는 역. 단
순한 일이다.
드디어 실행. 정찰계가 소형 무전기를 가지고 목표의 인물을 쫓으며, 그
움직임을 모두에게 알린다. 범행은 원칙적으로 큰 거리에서 이루어진다. 그
편이 좋기 때문이다.
결정 단계에 이르면, 우리 사원이 운전하는 자동차가 목표의 인물 옆에서
작은 사고를 일으킨다. 타이어 펑크 소리를 내는 정도로 족하다.
누구나 놀란다. 그 순간을 노리고 소매치기계가 지갑을 훔치는 것이다.
소매치기 담당이 두 명 있는 것은, 정 부 두명을 말하며, 예비조는 예측 못
한 사태가 발생할 때 대신해서 행동한다.
대체적으로 잘 진행되며, 지금까지는 거의 성공하고 있다. 그러나 상대가
눈치챌 가능성도 있다. 그 때를 위한 대비가 있기 때문에 그야말로 도적회
사인 것이다. 아마튜어와는 얘기가 다르다.
어찌 되었든 간에, 목표인물의 옆을 전혀 상관없는 척 걸어 가고 있는 30
명 가량은 모두 우리 회사의 직원들이다. 피해자가 소리를 지르면 --
" 왜 그러십니까 ? "
" 뭡니까 ? 괜찮으십니까 ? "
제각기 지껄이며 다가간다. 쫓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한편 근처의 공중전화에 매달려 있는 것도 우리 사원이다. 경찰에 전화하
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옆 가게에서 물건을 사고 있는 사람도 마찬가
지. 가게에서 일하는 점원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가는 귀가 먹은 사나이가 되어, 파출소에서 큰 소리로 길을 묻고 있는 사
람도 그렇다. 길바닥에서 거지 노릇을 하고 있는 것도 그런 경우가 있다.
또한 적당한 시기를 보고 내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소리치며 황급히 달려간
다.
" 와아, 큰일이다. "
어쩌다가 참견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쫓아와서 ' 무슨 일이냐 ' 고 물을
수도 있다. 그때는 " 데이트 약속을 잊었습니다 " 라고 답한다. 또다른 경
우에 대비해서 갑자기 졸도하는 여사원도 있다.
이처럼 만반의 준비하에 일하기 때문에 실패하는 일은 없다. 이 정도의
인원수가 동원되면 어떻든 잘 되기 마련이다.
우리의 성공률은 100퍼센트. 절대로 안전하다. 피해자건 경찰이건 간에
지갑 하나를 백여명의 사람이 노린다고는 생각치도 않는다. 게다가 미리부
터 조사를 하고, 생활에 지장있는 돈은 가로채지 않기 때문에 신문에 기재
되어 사회의 분노를 사는 일도 없다.
때문에 우리들은 체포되어 유죄를 받을 염려같은 건 한번도 해본 적이 없
다. 말하자면 평온한 나날인 셈이고...
월말이 되면 급료를 받는 날. 배당금을 받게 된다. 세금은 없지만, 사원
적금이라든가, 보험료 등, 이것 저것 공제하고 실제로 받는 금액이란 대단
치 않다.
언젠가 사원이 조합을 만들고, 봉급 인상을 요구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경영자측의 답은 이러했다.
" 현재는 불경기야. 크게 한탕하면 좋겠지만, 그 일에는 위험이 따르네.
만전에 만전을 기하는 것이 회사의 방침이야. 발각되어 회사가 무너지고,
자네들이 거리를 헤매게 되어도 괜찮다면 거물급을 노릴 수도 있지만 말
야... "
우리들로서도 실업자가 되는 건 노땡큐다. 공개된 경리장부를 조사해 보
았는데 수입과 지출이 정확했고, 중역들에게 부정도 없었다. 이렇다면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귀가길에 나는 술을 한잔 마신다. 하지만 상사의 명령으로 무모한 유흥은
허용되지 않는다. 고주망태가 되어서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면 안되기 때문
이다. 나는 맥주 한병으로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 TV를 보고 잠자리에 든다.
최근, 회사의 일이 부쩍 싫증이 났다. 너무나 평범하고 지루해서 재미가
없다. 직장을 옮기고 싶은데 좋은 곳이 없을까 ? 당신의 회사는 지금 내가
나가는 회사보다는 좀 더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되는데...



== THE END ==


저주받은 의자

- 닐 보이드

내가 죽음의 의자 이야기를 처음 귀담아 들은 것은 사제관(司祭館)에서
아침을 먹고 있을 때였다. 런던 서부에 있는 이 교구의 주임사제인 찰즈 더
들즈웰 신부가 자기 고향인 코크 사람들이 무척이나 미신에 빠져 있더라는
그곳 실정을 재미있게 전해주던 끝에 화제가 이 의자 이야기로 번졌던 것이
다. 나는 성(聖) 유다성당에 보좌신부로 온지 넉달을 지내면서 더들즈웰 신
부로부터 퍽이나 많은 세속적 이야기를 들어왔다. 그러는 동안 나는 안경을
끼고 뚱보인 이 늙은 아일랜드 출신 신부가 어지간히 교활한 인물이라는 인
상을 받아왔다. 이 교구는 노동자 계층이 많이 살고 있는 고장인데 더들즈
웰 신부는 그들 이야기라면 나로선 도저히 따라가지 못할만큼 소상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선 그 따위 미신같은 걸 아무도 믿지 않겠지요, 신부님 ?" 하
고 나는 물어봤다.
"마음 약한 친구들이 그런 엉성한 것에 홀리기로는 어디서나 매한가지지,
닐 신부, 안그래요 ?" 그러면서 그는 사제관의 가정부 프링 부인의 눈치를
힐끗 살펴 보고 나서 말했다. "뭐니뭐니해도 미신에 얽매여 끌려다닌다는
것은 역시 신앙이 모자란 탓이야." "그러니까 신부님은 미신 따윈 아예 믿
지 않으신다는 말씀이죠." 프링 부인은 한마디 톡 쏘고는 나에게 찡긋 윙크
해 보인다. 나는 또 논쟁이 벌어지는구나 생각했다. 서로 상대방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게 하는 그런 논쟁이. "그렇다면 그 죽음의 의자를 어
떻게 생각하세요 ?"라고 부인이 빈정댔다.
부인의 설명을 들으면 그것은 '피그 앤드 휘슬(돼지와 휘파람)'이라는 이
근처 선술집에 있는 의자인데, 누구든지 앉기만 하면 영락없이 1주일 안에
저 세상행이 된다고 전해지고 있는 의자라는 것이다.
"그건 무식하기 짝이 없는 그집 영감 프레드 보울비가... 그러니까 하느님
을 두려워 할줄 모르는 못된 놈이 꾸며낸 거야."더들즈웰 신부가 서슬이 퍼
래서 침방울을 튀긴다.
그러나 프링 부인도 쉽사리 물러서질 않았다. "요전 성 패트릭(아일랜드
의 수호성인)축제날 보울비씨가 동네 사람들에게 선언했지 않아요 ? 아일랜
드 사람이라면... 신부님까지 포함해서... 누구든 그 의자에 한번 앉아보라
고. 대신 앉기만 하면 마시는 값은 공짜라고요."
"내가 죽어도 다른데서 죽지 왜 보울비 따위의 술집에서 죽는단 말요 !"
"그게 아니고 사실은 죽을까봐 겁이 나서 안가셨으면서 뭘." 프링 부인이
약을 올렸다. "그래서 성 유다성당의 신부님 만한 분이 겁내는 걸 보면 십
중팔구 죽음의 의자라는 것이 허풍만은 아니라는 말이 퍼져버렸던 거죠. 결
굇 우리 신부님이 미신을 믿어버리신 바람에 소문이 더욱 커진 셈이죠,뭐."
더들즈웰 신부는 이 말을 듣더니 냉큼 나이프와 포크를 놓더니 식탁을 주
먹으로 꽝 치면서 "부인, 무슨 소리요 ? 나는 미신따위는...믿지...않아 !"
하고 소리쳤다.
식기들이 공중으로 튀고 그 바람에 벽에 걸린 거울마저 떨어져 산산조각
이 났다. 그러자 제풀에 놀란 더들즈웰 신부가 중얼거렸다. "제기 7년동안
재수없겠군."

그날 점심전 나는 문제의 '돼지와 휘파람' 선술집을 찾았다. 놋쇠 장식의
손잡이가 달린 문을 두드렸다. 해쓱히 표정이 굳어진 중년부인이 들어오라
며 곧 차를 내왔다.
"주인양반은 아직 주무세요."보울비 부인은 미안스럽다는 듯 말했다."가게
를 늦게까지 열기 때문에 아침이 늦어요. 차 한잔 더드시겠어요, 신부님 ?"
나는 내 목을 가리키며 "많이 먹었습니다. 여기까지 찬 걸요."하고 말했
다.
"저도 그래요..." 보울비 부인은 갑자기 눈물어린 목소리로 대꾸하면서 손
수건을 꺼냈다. "죄송합니다. 이런 꼴을 보여드려서... 신부님. 그렇지만
전 저 의자에 아주 진절머리가 납니다. 모두 저 의자 탓이죠."
보울비 부인은 피아노와 다트 보드(던지기 표적)사이를 가리켰다. 거기에
는 황금색 방석이 깔린 등나무 의자가 놓여 있었다. 벽에 달린 고리에 쇠사
술과 맹꽁이 자물쇠로 묶여져 있었고 의자의 등받이에는 '죽음의 의자'라고
새겨진 은판이 붙어있었다.
"저 의자를 처분하자고 몇번이나 남편에게 졸랐는지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우리집 양반은 장사에 도움이 된다고 막무가내로 들어주지 않는답니다. 하
긴 저 의자 때문에 해마다 몇백명의 관광객들이 우리 가게를 찾아오기는 합
니다마는... 대부분이 미국사람들인데 박물관에 있는 여왕님이 대관식때 쓰
신 보석을 보러 런던에 온 김에 저 의자도 구경하러 들르는 거지요."
나는 부인을 위로해 주려고 "뭐 별로 해로운 것은 없지 않아요 ?"라고 말
해 주었다. 그 순간 "그렇습니다. 바로 내 기분을 그대로 대변해 주셨습니
다." 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돌아다 보니 어깨가 딱 벌어진 장년의 사나이가 어
느 사이에 홀 안에 들어와 있었다.
"성 유다성당에 새로 오셨다는 보좌 신부이시군요."그는 말을 이었다. "죽
음의 의자를 보러 오신 게로군, 그렇죠 ? 신부님."
보울비 부인은 눈물을 글썽이며 뛰쳐나갔다. 남편인 프레드 보울비는 한
발 다가섰다.
"집사람이 지나치게 신경을 씁니다요, 신부님. 제 말 좀 들어보시려우 ?
당신네 가톨릭 신자들도 무척 미신을 믿더군요, 안그래요 ? 목에는 언제나
큼직한 십자가를 걸고 다니질 않나, 집에는 예수나 마리아상을 놓아두고 키
스하며 살풀인가 액때움을 않나..."
"보울비씨." 나는 가로막았다. "우리들 신앙의 자세는 미신을 믿는다는 것
과는 이야기가 달라요...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의자얘기나 들어봅시다."
보울비는 3년전 이 선술집을 사가지고 왔을때 지하실 술창고에서 이 의자
를 발견했었다고 한래 화덕속에 쳐넣어 태워버렸죠. 그대신
의자는 장사에 이용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나, 들어내다 홀 한복판
에 딱 모셔놨죠. 왜 죽음의 의자라느냐고 동네 사람들이 묻길래 그 내력을
설명해 주었더니 모두 겁을 집어먹고 누구 하나 앉으려고들지 않더군요. 앉
기만 하면 술은 공짜랬는데도 말입니다... 하하하."
"신문스크랩은 태워버렸다고 했지요 ?"
"예, 저거 말입니까 ?" 프레드는 게시판을 가리켰다. 그 게시판에는 '살인
의자'라든가 '죽음의 의자, 또 희생자를 내다'는 따위의 신문 재목들이 오
려 붙여져 있었다.
"저건 최근의 기사랍니다. 한 1년 전일까요, 얼굴이 불그스름한 멋쟁이 신
사 한분이 들어오시더니 다짜고짜 '난 저런 뚱단지 같은 건 겁나지 않소'하
며 털썩 앉아버렸지 뭡니까 ! 그랬더니 다른 손님들이 박수갈채를 하며 '허
풍장이가 드디어 덜미를 잡혔다 ! 어쨌든 약속대로 공짜 술을 들어야지.'하
며 왁자지껄 떠들어댔습죠. 한데 말입니다, 그 신사는 우리 가게 최고의 비
터(쓴맛 나는 맥주)를 한모금 받아마시더니 그 자리에서 쓰러져 숨이 넘어
가 버렸어요, 정말입니다요. 그래그래 신부님이 지금 서 계시는 바로 그 자
리쯤입죠."
"심장마비였군." 하며 나는 몸을 좀 비켜섰다.
"그럴지도 모르죠마는, 그러나 다음은 단골 찰리 스키너 차례였답니다. 그
친구 생전에 모두들 그에 관해 자주 입방아를 찧었죠. 찰리 녀석 해부해보
면 몸에 흐르고 있는 것은 알콜뿐이지 피는 한 방울도 없을 거라고 말예요.
그런 모주인 찰리가 석달 전쯤이던가요, 우리 가게에서 위스키를 더블로 몇
잔 거푸 마시고 있었습죠. 그러다 녀석이 깜빡했는지 무심코 저 의자에 앉
아버렸답니다요. 그리곤 비틀비틀 가게를 나가더니 밖에 세워둔 제 차를 타
고는 곧장 강물로 몰고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려, 막바로 익사지요."
여기까지 한숨에 늘어놓은 프레드 보울비는 갑자기 신바람이 나 애지중지
고와서 못 견디겠다는 듯 의자의 은판을 소맷부리로 닦기 시작했다. "제 둘
도 없는 보배올시다, 신부님. 일부러 특제 자물쇠를 맞추었고 열쇠는 밤이
나 낮이나 제 허리춤에 차고 다니죠."
남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뭇사람들의 고지식한 성향을 미끼로 장사하고
있는게 아니냐고 다그쳤더니 그렇다고 태연스레 대꾸했다. 그뿐더러 오히려
"그토록 너절한 미신 따위를 때려 부수는게 댁네들 종교가들의 할일이 아니
겠습니까 ? 그러나 저러나 저 의자에 앉으시면 1백파운드 드리겠다고 더들
즈웰 신부님께 말씀 올린 적이 있는데... 성당에 돌아가시거든 그 약속이
아직도 유효하다고 전해줍쇼. '일금 1백파운드정' 빳빳한 지전으로 드리겠
다구요. 이쪽에서 보면 이렇게 안전한 내기란 없다고나 할까요... 하하하."
하며 빈정대더니 나한테도 도전해 왔다. "어떻습니까, 신부님도 한번 해보
지 않으시려우 ?"
이걸 거절하기 위해 그 말막음으로 성경에 무슨 그럴싸한 귀절이 없었나
하고 머리를 쥐어짜고 있노라니 보울비 부인이 돌아왔다. 잘 됐다고 어물어
물하며 빠져나오긴 했지만 도통 머리가 휘진 나는 신도집들을 돌아볼 겨를
도 없이 곧바로 사제관으로 돌아왔다. 더들즈웰 신부에게는 시치미를 떼고
보울비가 나에게 그 의자에 앉아 보지 않겠느냐고 하더라고 말을 붙였다.
더들즈웰 신부는 흥미롭다는 듯 바싹 다가앉으며, "그래, 앉았소, 닐 신
부 ?" 하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 친구가 1백파운드 내겠다고 약속했다면서요 ?
아직도 그 약속이 유효하다더군요."라고 했더니 더들즈웰 신부는 마치 기도
드릴때와 같이 두 손을 모았다. 얼마동안 무엇인가 생각에 팔린듯 하더니
느닷없이 "울화가 치밀어 못견디겠소. 참는데도 한이 있지."하며 펄펄 뛰었
다. "내 꼭 하고야 말테야 ! 프레드 고놈, 너무 까불고 있어. 덤벙거리는
놈의 뒷덜미를 잡는게 교구사제인 내 의무이구말구 !"


그로부터 2,3일 후 더들즈웰 신부는 몹시도 지친 얼굴로 아침 식사에 대
나왔다. 밤을 새워가며 기도라도 한 양 핼쓱했다. "오늘밤 틈 좀 내주지 않
으려우 ? '돼지와 휘파람'에 쳐들어갈 참이니 닐 신부가 좀 도와줘야겠소."
그날 밤 더들즈웰 신부와 내가 선술집의 문을 밀치고 들어선 것은 8시 조
금 전이었다. 손님들 틈을 누비며 카운터까지 다다른 더들즈웰 신부는 마침
비어있던 둥근 의자를 잡고 그 위에 올라섰다. 좀 비틀거렸다. 그리곤 손님
들을 한 차례 훑어 보았다.
"친애하는 형제... 아니 신사 숙녀 여러분, 제 말씀 좀 들어주세요. 이 술
집에서 하느님을 두려워 할 줄 모르는 불법 비도(非道)의 짓이 방자하게 저
질러지고 있어 나는 벌써부터 이건 어떻게 해야만 되겠다고 생각해 왔습니
다. 이것은 주님의 천한 종인 바로 나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부터 이 죽음의 의자에 앉겠습니다. 앞으로 1주일 동안 매일 밤 같은
시각에 여기에 와 앉겠습니다. 1주일이 지나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이 의자는 내 것으로 했으면 좋겠는데 어떠신가요, 프레드 보울비씨 ?"
보울비는 마지못한 듯 끄덕였다. 벽시계가 여덟 점을 치자 더들즈웰 신부
는 '급조강단'에서 내려서더니 큰 제스처로 십자성호를 긋고는 의자에 털썩
앉아버렸다. 그리곤 몹시 점잖은 자세로 입을 열었다. "마실 것은 어디 있
소 ? 보울비 부인, 한 잔 주실 수 있겠습니까 ? 지장이 없으시다면."
더들즈웰 신부는 선언한 대로 다음날인 일요일 밤에도 선술집에 나타났
다. 그리고 월요일에도. 의자에 앉았다고 해서 그의 마음이 흐트러진 것 같
은 기색은 조금도 보이질 않았다. 지켜보고 있는 모두가 앞으로 며칠 밖에
남지 않은 목숨이라고 측은히 여기고 있는데도 그렇게 잠잠할 수 있는 사람
을 나는 지금껏 본 적이 없었다. 한편 가정부 프링 부인은 자기가 들쑤셔서
이런 사태까지 빚게 됐다고 스스로를 책망하는 나머지 얼이 빠진 사람 모양
허둥지둥 몸둘 바를 몰라 했다. 신부 음식을 모조리 시식도 하고 신부가 가
는 곳이면 어디든지 졸졸 따라다녔다. 요란스런 1주일이었다. 수요일에는
벌써 이 이야기가 전국에 뉴스로 퍼졌다. 토요일 아침미사에는 설령 교황님
께서 몸소 미사를 집전해 주셨다 해도 도저히 미치지 못했을 구름떼같은 인
파가 성당을 뒤덮었다.
그날밤 '돼지와 휘파람'은 숨쉬기조차 겨울 정도의 손님들로 파묻혔다.
더들즈웰 신부는 '특설강단'위에서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여러분 ! 보다시피 나는 이렇게 피둥피둥 합니다. 미신의 의자는 나에게
손하나 까딱대지 못했습니다. 그 뿐입니까, 전능하신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
인 믿음을 통해 오히려 내가 그 미신을 죽이고 있습니다."
시계가 8시를 울렸다. 더들즈웰 신부가 글라스를 한 손에 들고 죽음의 의
자에 마지막으로 앉았다. 박수갈채가 지붕이 떠나가라고 터졌다.
그날 밤 늦게 더들즈웰 신부가 신앙의 위력으로 쟁취한 그 의자를 나는
조심스레 그의 서재에 옮겨 놓았다. 너무나 소심했던 스스로가 웬일인지 자
꾸 부끄러워져서 나는 "정말 저는 겁장입니다. 신부님이야 말로 신앙에 투
철하신 분입니다." 라고 인사했다.
더들즈웰 신부는 겸연쩍다는 표정을 잔기침으로 얼버무렸다. "아니요, 그
렇지 않아요, 닐 신부. 당신은 본능에 따라 당연한 행동을 한 거요. 실은
내 좀 고백해야할 것이 있어... 얘기인즉 난 실제로 죽음의 의자에 앉은게
아니란 말이요 !"

더들즈웰 신부가 띄엄띄엄 입을 연 뒷사연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런던
의 고물시장 포트벨로우가(街)에서 죽음의 의자를 쏙 뺀듯 닮은 의자를 찾
아냈다고 한다. 고작 2파운드주고 그걸 사들여 지난주 토요일 새벽까지 차
고에 숨겨두었다. 그날 동트기 전인 3시, 미리 의논한 계획에 따라 보울비
부인이 더들즈웰 신부를 가게 안으로 살짝 불러들였다. 맹꽁이 자물쇠의 열
쇠는 보울비 부인이 코를 골고 있는 남편의 허리춤에서 몰래 빼가지고 있었
다. 부인과 신부는 둘이서 진짜 의자와 새 의자를 바꿔친 뒤 등받이의 은판
도 새의자에 나사못으로 옮겨 달았고 황금색 방석도 사뿐이 얹어놓았다는
이야기였다.
더들즈웰 신부의 <고백>을 듣고도 줄곧 지금까지 감탄을 아끼지 않아왔던
나의 심경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하긴 감탄의 내용이 조금 변질되긴 했
지만). 그 진짜는 어떻게 했느냐고 물었더니 더들즈웰 신부의 얼굴빛이 퇴
색한 홍당무같이 변했다.
"난 미신같은 건 믿질 않아요. 이 점은 당신도 알고 있지요 ? 한데 다만
만에 하나라도... 하는 문제가 있단 말이요. 그래서 성수를 뿌렸지. 그리곤
가톨릭 전례서(典禮書)중의 악마를 쫓는 기도(驅魔祈禱)를 외었고 다음엔
우리 마당에 묻어버렸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불쑥 가정부 프링 부인이 프레드 보울비를 데
리고 들어왔다. 프링부인이 물러나자 프레드 보울비는 속죄하려는 죄수같은
차분한 어투로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신부님, 사실대로 말씀드리면 제 가게에 있는 그건 진짜 죽음의 의자가
아니올시다. 신부님도 아시다시피 전 미신 따위는 티끌만치도 믿지 않아요.
그러나 찰리 스키너의 익사사건 후부터 웬일인지 그 의자를 처분해 버리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게 됐습죠. "
"흐음, 그래서 ?" 더들즈웰 신부는 그 뒤를 재촉했다.
"근데 그것과 똑같은 의자를 발견했었습니다요."
"포트벨로우의 가게에서 말이지 ?" 신부는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니고 확인
하려고 서두르고 있었다.
"그래 그걸 사다가 진짜와 바꿔치기했죠. 물론 집사람에겐 몰래말입니다."
"그 진짜는 어떻게 했지 ? 프레드."
"애초엔 마당에라도 묻을까 했는뎁쇼마는 마누라가 마당가꾸기를 좋아해서
안되겠다 싶어 새 의자를 산 그 고물상에 도로 떠맡겼죠. 다른 가구와 어울
리지 않는다고요." 그는 슬쩍 신부에게 다가왔다. "제가 오늘 밤 찾아 뵈러
온 건 신부님이 정말로 진짜 죽음의 의자에 앉지 않으셨다는 말씀을 여쭈러
온거랍니다요. 그러나 어쨌든 신부님은 진짜라고 알고 앉으셨으니까 역시
훌륭하세요. 그 용감하신 데에는 손들었습니다." 그는 두툼한 돈뭉치를 내
밀었다.
프레드가 돌아가자 더들즈웰 신부는 안락의자에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얼굴은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부삽을 준비해주시오, 닐 신부."그는 맥없
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당장 마당에 구멍 하나를 더 파주구려."


해변의 살인 - C.S.포레스터 (1934년作)

"THE TURN OF THE TIDE"

1934 BY C.S.FORESTER



"결국 언제나 그들을 당혹하게 만드는 것은 시체를 어떻게 처리하느
냐 하는 문제야. 물론 자네는 그 사실을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을거야."
의사 매슈가 말했다.
"맞아." 슬레이드가 대꾸했다. 매슈는 이 문제가 우연히 대화의 주제
가 되었다고 믿고 있으나 슬레이드는 매슈가 짐작하는 것 이상으로 이
문제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 왔다.
매슈는 슬레이드가 교묘하게 유도해 낸 주제에 빠져들어 계속 떠들어
댔다. "사실상 그건 매우 어려운 문제라네. 그래서 나는 인간이 왜 어
리석게도 살인을 저지르는지 언제나 의아하게 생각한단 말이야."
'자네에게는 모든 일이 다 잘 되어 나가니까 인간이라면 부닥칠 수도
있는 궁지에 대해 알지 못하는거야'하고 슬레이드는 생각했다. "나도
자네와 똑같은 생각을 가끔 하곤 하지." 그는 큰소리로 말했다.
"그래." 매슈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시체
란 말이야. 시체도 함께 없애 버릴 수만 있다면 살인자는 훨씬 안전해
지지. 희생자가 있다는 걸 증명할 수 없으면 살인혐의로 재판을 받을
수 없거든. 자네들 법률가들이 말하는 소위 범죄의 주체라는 게 있어야
범죄가 성립되지. 아무리 어떤 사람에 대한 혐의가 짙다 할지라도 시체
가 없으면 경찰은 그를 살인혐의로 체포할 수 없단 말이야. 슬레이드,
자네나 내가 소설가라면 그 문제를 주제로 삼아 소설을 쓸 수도 있을텐
데."
"응, 자네 말이 옳아"하고 맞장구치면서 슬레이드는 껄껄 웃어 댔다.
그러나 곧 그런 말을 입 밖에 낸 것을 후회했다. 그는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가려고 애썼다. 그는 자기가 즐거워하고 있다는 사실이 겉
으로 들어날까 두려웠다. 젊은 스폴딩, 그 건방진 놈의 죽음에 관한 소
문은 결코 없을 것이다.
"그러고보니 우리는 꽤나 소름끼치는 얘기를 나누었구먼, 안 그런
가?" 자기친구에게서 평상시와 다른 어떤 기색도 눈치채지 못한 매슈가
말했다. "이젠 얘기도 다한 것 같군. 그게 다 자네가 베푼 훌륭한 저녁
식사 덕분이지. 이제 나는 가 보는 게 좋겠네. 날씨가 그리 좋지 않을
것 같으니까 말일세."
슬레이드는 매슈가 차에 오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밖에는 비가 세차
게 쏟아지는 데다 바람까지 꽤 강하게 불고 있었다. 슬레이드는 즐거웠
다. 이런 날씨라면 골목이나 해변가에 나와 서성이는 사람들이 없을 것
이다.
슬레이드는 거실로 돌아와 벽시계를 쳐다보았다. 아직도 한 시간이
남았다. 그는 자기 계획이 완벽한지 다시금 확인해 보며 시간을 보내리
라고 마음먹었다. 슬레이드의 법률회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법
률회사를 운영하는 젊은 스폴딩은 남의 일에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성가
신 친구였다. 그는 슬레이드가 어떤 신용기금을 빌린 뒤 투기성 사업에
투자했다가 모두 날려 버린 사건을 샅샅이 알고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지금 그의 말 한마디면 슬레이드를 감옥에 집어 넣을 수도 있었다.
슬레이드는 조석표(潮汐表)를 쳐다보았다. 됐다, 꼭 알맞아. 대조(大
潮. 조수의 간만의 차가 대략 반 달 주기로 증감하여 최대가 될 때의
밀물과 썰물). 따라서 오늘밤 썰물일 때 모래펄의 바닷물은 수위가 가
장 낮아질 것이다. 게다가 운이 좋게도 수위가 가장 낮아질 때의 시각
이 오전 1시 30분이라는 점이다. 스폴딩은 95km 떨어진 그 사무실 지점
에서 하루를 보낸 뒤 매주 수요일 밤 12시 30분 기차로 돌아오곤 한다.
시계 바늘이 매우 빨리 돌아가는 것 같았다. 쇠사슬과 쇠뭉치는 이미
차 뒷좌석에 넣어 두었다. 슬레이드는 자기 책상에서 묘하게 생긴 기구
를 꺼냈다. 고리를 만들 수 있도록 양끝에 15cm 길이의 나뭇조각을 묶
은 45cm의 튼튼한 줄이었다. 그는 그것을 자기 호주머니에 넣었다.
밖에 나서자 더욱 심해진 바람에 날려 얼음처럼 차가운 빗방울이 얼
굴을 때렸다. 그는 차를 후진시켜 차고를 나와 역을 향해 조심스레 운
전해 갔다. 역을 지나 골목길로 꺾어 들어가서도 차를 돌려서 대로를
향해 정차시키고 나서 헤드라이트를 끄고 운전석에 앉은 채 기다렸다.
역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는 기차의 불빛이 보였다. 그러나 세찬 비바
람 소리에 파묻혀 기차가 달려오는 소릴 들을 수는 없었다. 기차가 떠
나자 역사의 전등불이 하나하나 꺼지기 시작했다. 짐꾼들은 집으로 돌
아갈 준비를 서둘렀다.
곧이어 바짝 긴장하고 있는 귀에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스폴딩이
큰길을 성큼성큼 걸어내려오고 있었다. 앞쪽에서 몰아치는 비바람 때문
에 머리를 숙이고 걸어갔으므로 그는 골목길에 정차해 있는 자동차를
보지 못하고 지나쳐 버렸다. 슬레이드는 200까지 세고 나서 헤드라이트
를 켜고 시동을 걸어 한길로 나가 스폴딩의 뒤를 쫓았다. 헤드라이트의
불빛에 스폴딩의 뒷모습이 나타나자 그는 옆으로 차를 댔다.
"스폴딩인가?" 그는 가능한 한 자연스런 어조를 꾸미느라 애쓰면서
물었다. "내 차를 타지 그래. 내가 바래다 주겠어."
"대단히 고맙습니다." 스폴딩이 말했다. "오늘밤은 걷기에 좋지 않군
요."
그는 차에 올라 문을 닫았다. 아무도 그들을 보지 못했다.
"나는 지금 클레이 부인 집에서 카드놀이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일세." 슬레이드가 말했다. "그런데 기차가 들어오는 걸 보니 오늘이
수요일이라, 자네가 집으로 돌아올거란 생각이 들더군. 그래서 길을 좀
돌아 가더라도 자네를 태워다 주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지."
"매우 고맙습니다." 스폴딩이 말했다.
"사실은 자네 편의만 생각한 것은 아니라네. 나는 자네에게 베르 신
용기금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어." 슬레이드가 말을 꺼냈다.
"아, 그랬군요. 그러고보니 제가 지난 주에 기금을 상환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었죠."
"그에 앞서 오래 전에 내가 자네에게 얘기했었지. 해먼드가 외국에
있으므로 지금 당장은 힘들다고 말이야."
"제 생각으로는 해먼드와 그 일과는 아무 상관이 없을 것 같은데요.
왜 당신은 당장 그 돈을 상환하지 않습니까? 나로서는 더 이상 어쩔 수
가 없읍니다. 나는 내 고객에 대한 의무가 있으니까요."
슬레이드는 차를 멈추었다. "이것 보게, 스폴딩. 지금까지 내가 자네
한테 부탁이라곤 해본 적이 없었네. 하지만 이번만은 자네에게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부탁하고 있네. 단지 석달이야. 그때까지면 나도 형편이
풀릴거야."
슬레이드는 그의 부탁이 받아들여질지도 모른다는 작은 기대를 품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 기대는 너무 희박해서 나무 조각이 묶인 줄
을 쥐고 있는 오른손을 호주머니에서 꺼냈다. 그리곤 스폴딩의 좌석 뒤
쪽으로 팔을 둘렀다.
"단지 석 달일세, 석 달만 기다려 주게나." 슬레이드는 애원조로 되
풀이했다.
"이런 얘기는 더 이상 계속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난 내려서
집까지 걸어가는 게 낫겠군요." 스폴딩이 강경하게 말했다.
스폴딩은 손을 뻗쳐 도어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 순간 슬레이드는 그
의 목에 올가미를 걸어 잡아당겼다. 슬레이드는 손목을 회전시켜 스폴
딩의 목에 감긴 줄을 죄었다. 가늘고 앙상한 노인의 손목이었으나 미친
듯한 그 순간에는 강철같이 강했다. 슬레이드는 나뭇조각을 양손에 잡
고 자리에서 몸을 회전시켜 가며 정신없이 꼬았다. 꽉 다문 이빨 사이
로 거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스폴딩은 전혀 숨을 쉬지 못했다. 죽기
전에 의식을 잃은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목을 감은 줄은 슬레이
드가 감아쥐고 있었기 때문에 시체가 앞으로 쓰러지지 않았을 뿐이다.
이제 시체를 처리하는 일이 남아 있었다. 슬레이드는 죽은 자의 무릎
을 앞으로 잡아당겨 시체를 한쪽 옆으로 비스듬히 뒤로 눕혔다. 그리곤
폭풍우가 내리치는 밤의 어둠을 뚫고 급히 차를 몰았다. 썰물 때여서
모래는 15km나 멀리 드러나 있었다. 그는 그 길을 훤히 알고 있었다.
길을 잘 기억해 두기 위해 전에 몇 번이나 그 길로 차를 몰았던 것이
다. 그가 해변가에 당도했을 때, 깜깜한 하늘 아래 세찬 바람이 몰아치
고 있었다. 비바람소리에도 불구하고 펀펀한 모래사장을 가로질러 저
멀리에서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차에서 내려 반대편 도
어 쪽으로 돌아갔다. 문을 열자 죽은 사람이 그의 팔 안에 떨어졌다.
슬레이드는 시체를 부축한 채 차 뒤쪽으로 가서 쇠사슬과 쇠뭉치들을
더듬어 찾았다. 쇠뭉치들을 시체의 호주머니에 쑤셔넣고 사슬로 시체를
빙빙 감았다. 그 정도의 무게라면 시체가 뜨지 않을 것이다. 또 그것도
지금 같은 대조의 썰물 때 바닷 속에 집어 넣는다면 아무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슬레이드는 시체를 들어올려 운반하려고 애썼다. 어질어질하고 긴장
되어 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체력이 부족했다. 슬레이드는 마르고 몸
매가 보잘것없는데다 나이도 이미 한창때가 지나 있었다. 이마에서 솟
는 땀이 싸늘한 바람을 받아 차가왔다. 순간적으로 그는 두려움에 휩싸
였다. 체력의 부족으로 모든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는 건 아닐까?
그는 죽은 자를 치켜세운 채로 돌아서서 몸을 굽혀 시체를 어깨에 걸
쳐메었다. 그리곤 필사의 노력을 기울여 시체의 팔을 끌어당겨 자기 목
에 감고 시체의 두 다리가 자기 허리를 감게 했다. 허리를 굽히고 어깨
를 숙여 시체를 업자 간신히 무거운 시체를 운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파도소리가 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 비틀거리며 경사가 느린
해변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발이 부드러운 모래 속에 푹푹 빠졌다. 바
닷물은 거의 3km나 빠져 있었다. 그 긴 길을 따라 내려가는 동안 내내
매서운 바람이 비명을 지르면서 몰아쳤다. 슬레이드가 이곳을 택한 이
유도 바로 그때문이었다. 한겨울이므로 앞으로 몇 달 동안은 썰물일 때
아무도 이곳으로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는 비틀거리면서 쉬지 않고 걸어갔다. 물이 다시 밀려 들어오기 전
에 물가에 도착해야만 했다. 마침내 어둠 속에서 하얀 해안선이 눈에
들어왔다. 파도가 굉음을 내며 부서지고 있었다.
슬레이드는 몸의 균형을 잡으면서 물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비교적
깊은 물 속에 시체를 처넣을 수 있도록 한 걸음 한 걸음 더 멀리 바다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무릎, 허벅지, 이제 거의 그의 허리까지 물이
차 왔다. 그제서야 그는 어둠 속에서 걸음을 멈추고 숨을 헐떡였다.
슬레이드는 등에 업은 시체를 굴러 떨어뜨리려고 한 쪽으로 몸을 기
울였다. 그러나 시체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시체의 양 팔을 잡아당
겼다. 그러나 목을 감은 팔을 풀 수가 없었다. 그는 몸을 마구 흔들어
댔다. 허리부근에서 조여진 시체의 다리를 뜯어내려 했지만 꽉 조여진
다리들을 풀 수가 없었다. 공포에 사로잡힌 그는 등에 진 시체를 떨쳐
버리려고 미친 듯이 몸부림쳤다. 그러나 시체는 마치 살아있는 양 계속
달라 붙었다.
파도가 밀려와 그의 주위에서 하얗게 부서졌다. 썰물에서 밀물로 조
수가 바뀌고 있었다. 이제 파도는 질주하는 말처럼 거세게 모래 위로
밀려 올라오고 있었다. 그는 짐을 벗어 던지기 위해 다시 한번 안간힘
을 썼다. 그러나 시체는 꿈쩍도 하지 않고 착 달라붙어 있었다. 기운이
다한 그는 이제 물이 차오르는 바다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허우적댔다.
그러나 시체의 무게와 시체의 호주머니 속에 집어 넣은 쇠뭉치와 쇠사
슬의 무게에 눌려서 그는 넘어졌다.
그는 하얀 물거품이 빛을 발하는 칠흑같은 바다 속에서 버둥거리며
일어섰다. 그러나 간신히 몇 걸음 떼고 나서는 또다시 쓰러졌다. 그리
고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스폴딩의 근육은 사후경직이 시작되어 풀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두 팔은 마치 목을 조르듯이 살인자의 목을 감고 있었다.


런던경시청의 범죄박물관 - 빌 왜들


통상 스코틀랜드야드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런던 경시청 안
에 있는 이 독특한 박물관에는 지난 100여 년 동안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각종 사건의 증거품들이 보관되어 있다.

아직 새파란 풋나기 경찰관이었던 1953년에 나는 서부 런던의 해머
스미스경찰서에 파견되어 유치장 간수 일을 맡은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내가 담당한 사람은 175cm의 키에 머리가 벗겨진 중년 남자였다. 다소 무
뚝뚝한 것만 빼고는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보통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정상인이 아니었다. [존 레지널드 핼러데이 크리
스티]라는 이름을 가진 이 사나이는 자기 아내를 포함하여 6명의 여인을
살해한 살인범이었다. 피살자의 유해들은 그가 세들어 살던 노팅힐의 릴
링턴플레이스 10번지에 있는 방 3개짜리 1층집 여기저기서 발견되었는데,
발견 당시 이 집은 으스스한 납골당으로 변해 있었다.
나는 악마의 짓이나 다름없는 범죄를 저지른 이 사나이가 보통 사
람과 하나도 다를게 없는 정상적인 외모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
어지지가 않았다. 이 때문에 나는 범죄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
여 런던대학교에 다니게 되었고, 결국 런던경시청 범죄박물관(the Black
Museum) 관장일을 맡게 되었던 것이다.
이 독특한 박물관은 범행의 실패와 성공적인 수사에 관련된 각종
전시품을 진열해 놓은 세계 최대의 범죄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은 1875년
에 당시의 런던시경이 취급한 중요한 범죄의 증거물을 상설 전시하는 장
소로 설립한 것이었다. 그동안 계속 새로운 전시품들이 추가되어 지금은
테러, 첩보활동, 납치, 마약밀매, 악덕행위, 위조, 절도 그리고 갖가지
방법의 살인 등 각종 범죄에 관한 증거품들이 망라돼 있다. 최근에 추가
된 전시품에는 영국의 금세기 최대의 엽기적 살인범으로 1983년에 무기징
역형을 선고받은 [데니스 닐슨]이란 런던사람이 자기가 살해한 15명의 남
자 시체의 수족을 절단하여 숨겨두었던 욕조와 화덕도 포함돼 있다.
지금은 런던경시청의 새 청사 한복판에 위치한 이 박물관에는 원래
이 소장품들이 보관되어 있던 어두컴컴한 전시실이 옛 모습 그대로 복원
되어 있다. 이 방에는 빅토리아시대에 교수형을 당한 37명의 남자들이 갖
가지 올가미를 목에 걸고 있는 석고두상이 있는가 하면, [살인마 재크
(Jack the Ripper)]에게 희생당한 사람들을 그린 소름끼치는 초상들이 범
죄사의 한 장을 장식하고 있다. 또한 영국에서 마지막으로 교수형을 당한
[루스 엘리스]라는 여인이 1955년에 자기 애인을 쏘아 죽인 총도 보관되
어 있다. 전시품 중에는 평화를 지키기 위해 치른 인간의 값비싼 댓가가
어떤 것인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들도 있다. 1974년 런던 세인트제임
스공원의 숲속 길에서 [앤공주]의 납치기도를 저지하다가 3발의 총탄을
맞고도 목숨을 건진 한 경찰관이 입고 있었던 피투성이의 옷가지도 그중
의 하나다.
전문가들에게만 개방되는 이 박물관에는 전세계에서 매년 약 5000
명의 경찰관, 법의학자, 범죄학자, 변호사, 법원 관계자들이 찾아오고 있
다. 방문자들이 이곳에서 연구할 수 있는 300건의 런던경시청 취급사건
중에서 대표적인 5건의 살인사건과 그 해결에 결정적 단서가 된 증거품들
을 소개한다.

=[땀으로 얼룩진 지문]=
은 1905년 뎁트포드에서 잡화상을 하는 노부부를 잔인하게 살해한
사건을 해결하는 단서가 되었으며 런던경시청이 과학적 수사의 시대를 개
척하는 계기가 되었다.
주거침입전과가 있는 [알프레드 스트래튼(22세)]과 그의 동생 [알
버트(20세)]가 용의자로 체포되었다. 그러나 경찰은 이들에 대해서 정황
증거만 잡았을 뿐 중요한 단서가 될만한 것이라고는 피살된 가게 주인의
금고에 찍힌 땀으로 얼룩진 엄지손가락의 지문 하나뿐이었다. 이 지문은
알프레드 스트래튼의 지문과 똑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영국 법정에서는 지문이 살인사건의 증거로 제시된 적이 없었다.
지문을 증거로 채택하는 것을 가능케 한 사람은 범죄수사에서 지문
활용 방법을 개척한 당시의 런던시경국장 [에드워드 헨리]경이었다. 그는
여러 해 동안의 실험 끝에 사람마다 지문의 모양이 분명히 다르기 때문에
범인을 찾아내서 범죄사실을 밝히는데 지문을 사용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그는 지문의 보존 및 분류 방법을 발전시킴으로써 이를 범
죄 수사에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스트래튼 형제의 재판에서 런던시경 지문과장 [스토클리 콜린스]경
감은 손가락 한개의 지문이 최고 20가지의 특징을 나타낸다고 재판관들에
게 설명했다. 그는 10여 년에 걸쳐 100만 개의 지문을 조사해 본 결과 어
떤 두 사람의 지문에서 3가지 이상의 특징이 동일하게 나타난 경우를 한
번도 발견한 적이 없었으며, 따라서 두 사람의 지문이 똑같을 확률은 10
억분의 1인 셈이라고 설명했다. 콜린스는 알프래드 스트래튼의 지문을 배
심원에게 제시하면서 가게주인의 금고에서 발견된 지문은 이 지문과 12가
지 이상의 공통점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 증거에 근거하여 금고에서
발견된 지문은 스트래튼의 것임에 틀림없다고 증언했다.
이에 대해 피고측 변호인은 이 검증할 수 없는 지문"학"에는 증거
능력이 없다고 역설했으며, 재판관들도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배심원 중 한 명의 지문을 찍어 실제로 이 과정을 실험해 본 결과 그들은
결국 지문을 증거로 채택하는 역사적인 결정을 내리게 되었고, 이에 따라
스트래튼 형제를 교수형에 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곁들인 사진에는 법정에서의 스트래튼 형제의 모습을 스케치한 그
림과 금고 위에 찍힌 지문 사진, 그리고 이들에 범행에 사용한 도구가 보
인다.)

=[핏자국이 묻은 성냥개비]=
도 런던경시청의 과학적 수사를 진일보시키는 단서가 되었다.
1927년 5월, 런던의 채링크로스역 수하물계에 맡겨진 트렁크에서
사지가 절단된 여인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조지 코니시]총경은 트렁크에
서 발견된 옷가지를 보고 나서 피살자가 첼시구(區)의 창녀인 [미니 보나
티(36세)]라는 결론을 내렸다. 증거를 확인한 결과 보나티여인이 웨스트
민스터의 로체스터로우에 있는 한 사무실에서 살해되었다는 것이 밝혀졌
다. 유력한 용의자로 이 사무실에 세들어 있던 파산한 부동산업자 [존 로
빈슨]이 떠올랐으나, 그는 이 여인에 관해 전연 아는 바가 없다고 부인했
다.
코니시총경은 트렁크를 판 상점주인, 이 트렁크를 로체스터로우에
서 채링크로스역까지 운반한 택시 운전사, 그리고 트렁크가 무겁다고 투
덜거리며 수하물계로 운반한 짐꾼 등을 추적했지만, 이들 모두가 로빈슨
이 범인이라고 확언하지는 못했다. 필요한 것은 로빈슨과 보나티여인, 그
리고 이 여인과 그의 사무실을 연결해 주는 직접증거를 찾는 일이었다.
로빈슨 사무실은 말끔히 청소되어 있었기 때문에 살해 흔적은 찾을
길이 없었다. 그러나 수사관 두 명이 다시 사무실을 찾아가 정밀조사를
한 끝에 휴지통 틈새에 끼어있는 성냥개비 한 개를 찾아냈다. 이 성냥개
비에는 피살자가 남긴 것으로 보이는 길이 3mm 가량의 조그만 핏자국이
있었다. 과학자들은 새로운 혈액검사법을 사용하여 이 혈흔이 보나티여인
의 혈액형과 동일한 형임을 밝혀냈다.
결국 로빈슨은 자기의 범행을 시인했다. 보나티여인이 길거리에서
그를 유혹하면서 함께 그의 사무실까지 따라왔는데 화대 문제로 말다툼이
일어나 그 여인을 때렸더니 의자에 머리를 부딪치는 바람에 죽었다는 것
이었다.
그러나 검시 결과 로빈슨이 다시 거짓말을 하고 있음이 들어났다.
보나티여인이 매를 맞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여인은 실은 질식사했던 것
이다. 결국 로빈슨은 살인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photo-존 로빈슨과 보타니여인의 사진과 함께 증거품인 성냥개비,
트렁크)

=[빌려입은 비옷]=
은 1947년 4월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총기살인죄로 수배된 3명의 범
인들을 일망타진하는 단서가 되었다.
샬로트가의 한 보석상을 털려다가 실패한 이 3인조가 밖으로 나와
보니 자기들이 타고 온 승용차를 화물트럭이 가로막고 있었으므로 차를
버리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조그만 오토바이상점 주인이며 6살 난 아이의
아버지인 [알렉 드 안티키스(34세)]는 이들을 잡으려고 오토바이를 타고
쫓아가 범인들의 길을 가로막았다. 일당 중 한 명이 총을 쏘아 그의 머리
에 관통상을 입히고 이 3인조는 군중들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 사건의 수사를 맡은 [로버트 패비언]총경-39회에 걸쳐 방영된
텔레비전영화 [런던경시청의 패비언]의 주인공 모델:우린 볼 기회가 없었
죠. 그러나 그만큼 지명도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쓴 것임.-은 막
막하기만 했다. 그때 어떤 택시 운전사가 사건 당일에 손수건으로 얼굴
아래부분을 가린 2명의 사나이가 토터넘가의 사무실 밀집구역으로 들어가
는 것을 목격했다고 신고해 왔다. 수사관들은 이 일대의 사무실들을 수색
한 끝에 옷 임자의 이름이 찢겨져 나간 비옷 한 벌을 발견했다. 그러나
안감에 상호 표시가 붙어 있었으므로 패비언총경은 요크셔에 있는, 이 비
옷을 만든 공장을 찾아갔다. 공장에서는 이 비옷이 런던의 3개 상점에 출
하된 것 중에 하나라고 확인했다. 이 비옷을 판매한 상점에서 구매자의
이름과 주소를 알 수 있었다.
이제 사건수사는 묘하게 전개되어 1944년 12월에 발생했던 이와 유
사한 사건과 연결되기에 이르렀다. 그 당시 퇴역 해군대령인 [랠프 비니]
는 4인조 보석상 강도를 추격했었는데, 그때 범인 중 한 명이 자동차로
그를 들이받고 나서는 차 밑에 깔려 죽어가는 그를 1500m나 끌고 갔었다.
그런데 이 비옷의 주인은 비니대령 살해죄로 투옥된 [토마스 젠킨
스]의 처남이었다. 그리고 토마스의 동생 [찰스 젠킨스(23세)]가 이 비옷
을 빌려 입었던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결국 그는 두 명의 공범 [크리스토퍼 제러티(21세)] 및 [테런스 롤
트(17세)]와 함께 체포되었다. 총을 쏜 것은 제러티였으나 세 사람 모두
살인죄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미성년자인 롤트만 교수형을 면했다.
(photo-찰스 젠킨스의 얼굴과 증거품인 비옷이 실림.)

=[과부의 틀니]=
는 1949년에 사람을 황산이 든 통에 넣어 죽인 잔인하고 교활한 살
인범 [존 조지 헤이]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헤이에게 마지막으로 희생된 사람은 69세의 돈많은 과부 [올리브
듀런트-디컨]할머니였는데, 그와 이 할머니는 모두 켄싱턴호텔에 묵고 있
었다. 헤이는 발명가 행세를 하면서 이 과부와 인조 손톱 제조계획에 대
한 얘기를 하다가, 어느 날 서섹스주의 크롤리에 있는 자기의 공장으로
그 여인을 초청했다. 그리고 나서 듀런트-디컨 여인은 호텔로 돌아오지
않았다.
투숙중인 어떤 부인이 걱정을 하자, 헤이는 그 여인과 함께 스스로
첼시경찰서에 출두해서 과부 할머니의 실종을 신고했다. 그러나 39세의
헤이는 몇 가지 사실에 관해 여자 경찰관인 [알렉산드라 램번]경사에게
거짓말을 했다. 전과기록실에 알아보니 그는 사기 및 절도죄로 세 차례나
투옥된 기록이 있었던 것이다.
경찰은 헤이의 최근 행적을 수사해 보기로 했다. 수사관들은 그가
듀런드-디컨부인이 지니고 있던 보석을 팔았다는 사실과 또 그 여인이 입
던 페르샤 양털 코트를 세탁소에 맡겨 놓았다가 팔아버리려 했다는 사실
도 밝혀냈다. 그가 어떻게 해서 그 여인의 물건들을 손에 넣게 되었는지
는 곧 밝혀졌다. 그의 공장에서 최근에 사용한 적이 있는 38구경 연발 권
총 한 자루와 황산 3병, 펌프 하나와 드럼통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내가
그 할머니를 황산에 녹여 없애 버렸읍니다." 헤이는 수사관들에게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체가 없는데 어떻게 살해 사실을 입증할겁니까?"(당
시엔 녹음기가 없었음.)
그러나 황산은 범인이 생각했던 것처럼 부식력이 그렇게 강하지는
못했다. 통 속을 조사해 보니 인체에서 나온 9개의 담석과 뼈 조각, 그리
고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듀런드-디컨 여인의 틀니가 나왔던 것이다.
헤이는 첫번째 방벽이 무너지자, 이번에는 자기는 정신이상자라고
호소했다. 그는 그전에도 5명을 살해했다고 자백하면서, 그때마다 피살자
들을 황산으로 처리하기 전에 듀런드-디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먼저 그
들의 피를 마시곤 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기가 흡혈귀와 같은 광인 행세를 하면 목숨을 구할 수 있으
리라고 믿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원즈워스교도소에서의 마지막 날
아침, 그를 맨 나중에 찾아온 사람은 교수형 집행리였다.
(photo-듀런드-디컨과 존 조지 헤이의 사진, 그리고 그를 재판장에
세운 증거물들:틀니포함)

=[독약이 든 작은 총알]=
은 1978년 9월 런던에서 사망한 불가리아 태생의 반체제 작가 [게
오르기 마르코프]의 사망 원인을 밝힘과 동시에 미궁에 빠진 국제 테러리
스트들의 음모를 폭로해 주었다.
직경이 1.5mm에 불과하기 때문에 확대경 아래에 전시되어 있는 이
작은 총알은 백금과 이리듐의 합금으로 만든 것으로서 현미경으로나 볼
수 있을 정도로 작은 구멍 두 개가 뚫려 있다. 이 총알은 아마도 암살범
의 우산에 장치한 대롱에서 압축공기의 힘으로 발사되어 마르코프의 허벅
지에 박혔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일단 총알이 박히면 이 작은 구멍을 통
해 독약이 전신에 퍼지면서 백혈구가 급속히 증가하는 백혈병을 유발시켜
결국 신체 곳곳에서 피를 흘리며 죽게 된다. 마르코프는 처음에 패혈증
진단을 받았지만 나흘 만에 사망했다. 암살범이 누군지는 밝혀지지 않았
으나, 범인은 소련의 사주를 받은 불가리아정부의 명령에 따라 활동하는
살인청부업자였을 것이다.
영국 과학자들은 이 작은 총알에 든 독약이 리신이라는 물질일 것
이 거의 틀림없다고 보고 있는데, 피마자열매에서 추출되는 이 물질은 독
성이 매우 강해 100분의 1g만 가지고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치명적인 물질은 앞으로 곧 인명구제를 위해 사용될 전망이다. 미국 텍사
스주립대학교의 한 실험에서 이 물질을 사용하여 실험용 쥐의 골수내에
있는 백혈구를 99.9까지 제거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지금은 이 물질이
몇 가지 종류의 암세포 증식을 영구히 억제해 줄 수 있으리라는 기대하에
인체에 대한 임상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만일 이것이 성공한다면, 이 작
은 총알은 범죄박물관에서 가장 값비싼 전시품이 될 뿐 아니라-개발 비용
이 200만 파운드(약 26억원)로 추정됨-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기여를 하게
될 것이다.
(photo-게오르기 마르코프와 그를 죽인 독이 든 총알)

내가 해머스미스 유치장에서 집단 살인범 크리스티를 감시하던 그
당시에 비해 지금은 살인 기법이 훨씬 더 정교하게 발달했다고 볼 수 있
다. 그러나 범죄와 싸우면서 범법자들을 법의 심판대에 세우는 경찰의 임
무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다. 범죄박물관의 진열품들은 1세기 이
상에 걸친 런던경시청의 투쟁 성과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증거들이라 할
수 있다.





표범 조련사


-- 잭 런던 --



그는 꿈을 꾸는 듯한, 먼 곳을 바라보는 눈을 하고 있었다. 젊은 아가씨
처럼 상냥하게 말하는, 우수어린 그의 목소리는 형언할 수 없는 고독함을
부드럽게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표범 조련사였으나 외관상으로는 전혀 그러한 느낌이 없었다. 그의
직업은 많은 관객들 앞에서 재주를 부리는 표범우리 속에 들어가 용기있는
행동을 보여주고, 관객들이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것이었다. 고용주는 그가
만들어내는 스릴에 대해 보수를 주고 있었다.
앞서 말했듯이 그는 그러한 인물로 보이지 않았다. 허리도 가늘고 어깨도
좁았으며, 다소 빈혈기가 있는 듯했으나 슬픔을 온건하게 참아내는 것으로
보아 그다지 우울해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한시간 가까이 이야기를 끌어내려고 했으나, 그에게는 상상력이 결
핍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의 화려한 직업에는 로맨틱한 곳이란 전혀 없고
대담무쌍함같은 것도 없었다. - 있는 것이란 오로지 회색의 단조로움과 끝
없는 지루함뿐이었다.
" 사자 말인가요 ? 물론 싸운 적이 있지요. 별로 이렇다 할 건 없어요.
필요한 건 냉정을 잃지 않는 겁니다. 흔한 채찍만 있으면 누구나 사자를 조
용하게 할 수 있어요. 언젠가 30분동안 사자와 싸운 적이 있어요. 상대가
달려들 때마다 대들면 콧잔등을 채찍질하고, 상대가 영리해져서 고개를 숙
이고 대들게 되면 그때는 한쪽 다리를 들이미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에 달
려들면 다리를 당기고 다시금 콧등을 갈기는 겁니다. 그렇게만 하면 되는
거예요. "
그는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눈으로 부드럽게 말하면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상처를 보여주었다. 그중 어깨의 상처는 암호랑이의 일격을 받아 뼈까
지 다친 것이었다. 나는 그의 상체가 정성들여 꿰매진 것을 보았는데, 특히
오른팔 부분은 팔꿈치에서 손등까지 마치 탈곡기 속으로라도 말려든 것 같
았다. 모두가 맹수의 손톱과 송곳니에 할퀸 자국이었다.
" 그러나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예요. "
하고 그는 얘기했다. 다만 약간 귀찮은건 비가 오는 계절에 옛 상처가 아
리는 것 뿐이라고.
느닷없이 무슨 생각나는 일이 있는 듯이 그의 표정이 생기를 띠웠다. 내
가 열심히 듣고 있는 것에 못지않게 그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좀이 쑤셨던 것이다.
" 사자 조련사가 어떤 자에게 미움을 받은 이야긴데 들으신 적이 있습니
까 ? "
그는 말을 멈추고 맞은편 우리 속에 있는 병든 사자를 지그시 바라 보았
다.
" 이빨이 아픈 거예요. 녀석은. " 하고 그가 설명했다.
" 그건 그렇고 그 사자 조련사의 십팔번 재주는 사자의 입 속에 머리를
집어 넣는 것이었어요. 그를 미워한 사나이는 언젠가 사자가 그를 물어뜯는
걸 보고 싶어서, 조련사가 출연할 때에는 반드시 관객석에서 지켜보고 있었
어요. 그는 서커스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나 따라다녔습니다. 그리하여 긴
세월이 흐르고 사나이도, 조련사도, 사자도 함께들 늙어갔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어느날 객석의 맨 앞줄에 앉아 있었던 그는 오랫동안 기다리고 바랐
던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자가 사자 조련사의 머리를 깨물었는데 의사
를 부를 사이도 없었습니다. "
표범 조련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자기 손톱을 홀낏 보았는데 그것은
그의 특유한 슬픔이 따르지 않았다면 냉혹하다고조차 말할 수 있는 태도였
다.
" 저로 말하면 그거야말로 인내력이라는 겁니다. " 하고 그는 말을 이었
다.
" 저도 실은 그런 식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제가 아는 그의 방식은 달랐습
니다. 그자는 키가 작은 사나이로, 칼을 삼키는 재주를 부리는 프랑스인이
었습니다. 이름을 드 빌 이라고 했는데, 아내는 대단한 미인이며 공중 그네
를 타고 천막 바로 밑에서 그물까지, 멋지게 회전하면서 다이빙을 했습니
다. 드 빌은 무대에서 보이는 재빠른 솜씨만큼이나 성미도 급한 사나이로
서, 민첩한 행동은 호랑이의 앞발에 못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어느날 서커스 단장이 그를 프랑스 놈이라고 욕을 하자 - 혹은 그 이상
심한 말을 했는지는 모르나 - 화가 난 그는 평소 나이프를 던지는 배경으로
쓰고 있는 부드러운 송판에 단장을 밀어 붙이고, 상대에게 무슨 짓을 당할
지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관객의 목전에서 느닷없이 나이프를 잇달아 던
지기 시작했습니다. 나이프는 단장의 옷을 꿰뚫고 살갗에 상처를 낼 정도로
가깝게 그의 주위에 꽂혔습니다. 단장은 핀에 꽂힌 곤충처럼 꼼짝도 못했
고, 광대들이 나이프를 뽑아 주고 나서야 간신히 정신이 들었습니다. 그로
부터 드 빌을 경계하라는 소리가 서커스단 내에 퍼져, 그의 아내에게조차
달갑지 않은 태도를 보이는 남자는 한사람도 없어졌습니다. 그 여자는 상당
히 바람기가 많았음에도, 드 빌이 무서워서 아무도 그녀에게 손을 댈 수가
없었습니다.
한데 워레스라는 사나이가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 무서울 것 없다는 사
나이었지요. 그도 사자 조련사였고 역시 사자의 입에 머리를 넣는, 같은 기
술을 보이는 이였습니다. 게다가 상대가 어떤 사자라도 거리낌없이 그 짓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오거스터스라는, 덩치는 크지만 기분이나 마음을 알
수 있는 상냥한 사자를 상대로 할때 끔찍한 일이 일어난 겁니다. 되풀이하
는 것 같지만 워레스는 - 우리는 워레스 대왕이라고 불렀습니다 - 살아 있
든 죽어 있든 무서운 것이 없겠지요. 어느날 술에 취한 그가 사나워진 사자
우리 속에 들어가는 내기를 하고는, 채찍 한번 쓰지 않고 사자를 온순하게
만든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사자의 콧대를 주먹으로 쳐서 온순하게 만든
거지요. "
등 뒤에서 소란이 벌어져 표범 조련사가 조용히 돌아 보았다. 그건 두 칸
으로 막은 우리였고 칸막이 저쪽에 손을 뻗친 한 마리의 원숭이가 반대쪽의
커다란 회색 늑대의 괴력에 끌려가고 있었다. 원숭이의 팔은 굵은 고무줄처
럼 자꾸만 길어지는 것 같이 보이고 한패의 원숭이들이 깩깩거리며 큰 소란
을 피우고 있었다. 가까이에 사육계원이 없었으므로 표범 조련사가 우리에
접근하여 손에 든 가는 채찍으로 늑대의 콧대를 꺾고, 슬픈 변명과 같은 미
소를 띠고 돌아오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야기를 계속했다.
" 워레스 대왕에게 드 빌의 아내가 애교를 떨고 대왕도 그녀에게 추파를
던지는 걸 보고, 드 빌이 대단히 불쾌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우리는 워레스
에게 경고했지만 전혀 효과가 없었습니다. 우리에게 조소를 퍼붓고, 그러다
가 드 빌에게 싸움을 걸 생각으로 그의 얼굴을 풀이 든 양동이에 쳐박고,
그 얼굴이 우습다고 놀려대는 판입니다. 드 빌의 꼴은 형편 없었지요. - 나
도 풀을 닦아 내는 걸 도울 정도였으니까요. 한데 그는 냉정했고 도전에 말
려드는 낌새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맹수의 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 타는 듯한 빛이 있었으므로 나는 부질없는 참견이라 생각하
면서도 워레스에게 최후의 경고를 했습니다. 그는 웃고 있었지만 그 후로는
드 빌의 마누라에게 추파를 던지지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몇개월 동안은 아무 일도 없었지요. 그래서 나도 공연하 노파심
이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무렵 우리는 서부 지방을 순회 중이라
서, 샌프란시스코에 천막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날 오후, 내가 포켓 나이프
를 빌려준 시설주임 렛드 데니를 찾아갔을 때. 커다란 텐트 속은 아녀자들
로 만원이었습니다. 분장실인 텐트 하나를 지나쳤을때 나는 혹시 그 속에
렛드 데니가 있을까 하고 캔버스의 구멍으로 안을 들여다 보았지요. 그는
없었지만, 눈 앞에 타이즈 차림의 워레스 대왕이 나갈 차례를 기다리고 있
었습니다. 그는 공중그네타기팀의 말다툼을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
습니다. 무대 뒤에 있던 다른 단원들도 이 언쟁에 정신이 팔려 있었는데,
드 빌만은 증오를 드러내고 워레스를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워레
스와 다른 패들은 싸움에 정신이 팔려 드 빌의 표정에도, 잇달아 일어난 일
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캔버스의 구멍을 통해 모조리 보았습니다. 드 빌은 주머니에
서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는 시늉을 하면서 - 그 날은 몹시 더웠지요 - 워
레스의 뒤로 걸어 나갔습니다. 도중에 한번도 멈추지 않고 손수건을 나풀거
리며 똑바로 문까지 걸어 가더니, 나갈 때 잽싸게 돌아서서 힐긋 쳐다보았
습니다.
그 시선의 의미를 저는 헤아릴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눈초리에는
증오뿐 아니라 승리감도 보였으니까요. ' 드 빌을 감시할 필요가 있단 말이
야. ' 하고 나는 자신에게 타일렀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가 서커스 부지에
서 나와 시내행 전차를 타는 것을 보았을 때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 정도
였으니까요.
그리고 몇분 후에 나는 큰 텐트 속에서 렛드 데니를 찾아냈습니다. 때마
침 그곳에는 워레스 대왕이 멋진 연기로 관객을 매혹시키고 있었습니다. 그
는 사자들이 송곳니를 드러내고 으르렁댈 때까지 화를 돋구고 있었습니다.
- 하긴 늙은 오거스터스만은 별도였는데, 오거스터스는 너무나 살이 찌고
늙었지 때문에 아무리 다구쳐도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 이윽고 워레스는
륵은 사자의 무릎을 채찍으로 갈겨 앉혔습니다. 늙은 오거스터스가 온순하
게 눈을 깜박거리며 입을 활짝 버리자 워레스의 머리가 그 속으로 들어갔습
니다. 그 순간, 뼈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사자의 턱이 닫혔습니다. "
표범 조련사는 그리운 듯이 미소를 짓고 먼 곳을 바라보는 눈초리를 했
다.
" 그것이 워레스 대왕의 마지막이었습니다. "
그는 낮고 슬픈 목소리로 계속 했다.
" 소란이 가라앉을 무렵, 나는 짬을 보아 시체 위에 엎드려 워레스의 머
리 냄새를 맡아보았습니다. 순간 나는 재채기가 나왔습니다. "
나는 급히 말을 더듬으면서 물었다.
" 그건 코담배였어요. - 빌이 무대 뒤에서 워레스의 머리에 뿌렸어요. 사
자는 그를 죽일 생각이 아니었지요. 단지 재채기를 했을 뿐이지요. "



== THE END ==



지나치게 소문을 모은 사나이
by 石澤英太郞 (Ishizawa Eitaroh)



현청소재지(縣廳所在地)인 F시의 현경수사 1과 고오노 겡이찌 수사주
임은 차를 탄 순간 (이 사건은 아무래도 오래 끌 것 같군) 이런 예감
을 느꼈다.
전후(戰後) 과학적 수사를 슬로건으로 하고 있는 경찰계에서는 <제6
감>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꺼리는 풍조가 있다. 그러나 육감이란
다년간의 경험에서 오는 수사 기술축적의 결론 같은 것이라고 고오노
는 이해하고 있다.
"본부는 어디다 설치했나?"
고오노는 사건이 일어난 S온천가의 파출소에서 고오노를 안내하러 온
고오하라 순경에게 물었다. 본부란 물론 재빨리 설치된 우사미 모꾸
다로오 피살사건의 수사본부를 가리키고 있다.
"넷." 핸들을 잡으면서 고오하라 순경은 대답했다.
"사이와이야 여관 근처의 민가를 빌렸읍니다."
"민가를?" "네. 그 고장 유력자인 사까이상 사랑채입니다."
"그건 잘 됐군." 고오노는 아렇게 말했다.
사건은 여관에서 발생하고 있다. 손님들이 붐비는 여관에 수사본부를
설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하물며 S온천가의 파출소는 너무나 좁다.
"고오노 주임께서 오시는 것을 다까하시 서장께서도 기다리고 계십니
다."
이렇게 고오하라 순경은 말했다.
"그래?" 고오하라의 말을 듣고 고오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것이
베테랑 형사의 말이었다면 소위 아이들 말대로 알랑방귀라고 무시했을
테지만, 백밀러의 고오하라 순경의 동안(童顔)은 사뭇 긴장하고 있었
다.
순경으로 임명된 지 2년, 이렇게 고오노는 어림했다. 고교를 졸업하
고 경찰학교에 들어가 즉시 파출소 근무, 그것도 1년 반쯤 되리라.
학교에서 배운 <시민을 위한 경찰>을 글자 그대로 믿고, 또한 몸소
실천하고 있는 활기찬 순경으로 보인다.
"파출소 근무는 어떤가?" "네. 재미있읍니다. 아뇨, 보람이 있읍니
다."
"그래? 다행이구먼."
고오노는 부드러운 대화로 고오하라 순경의 긴장을 풀어 주면서 머리
속으로는 오늘 아침 기무라 수사 1과장이 한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이 역시 아부라고도 할 수 있다.
기무라 과장은 어젯밤에 일어난 우사미 모꾸다로오 살해사건의 수사
본부 부부장으로 고오노를 파견하기로 되었다고 전하고는 이렇게 말했
다.
"자네가 가게 돼서 현지 수사본부에서는 벌써 사건이 해결된 것처럼
기뻐하고 있네. 특히 다까하시 서장이 말일세. <회사가 얽혀 있는 사
건은 고오노에게 맡겨라?> 핫하. 잘 해보게."
사람을 다루는 기술로서 추켜세우고, 아니 개성을 이끌어내서 사용하
는 상사와 마구 재촉하면서 부리는 상사가 있다. 기무라 과장은 전자
였다. 어쨌건 칭찬하면서 부린다. 고오노에게 한 말도 그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회사가 얽혀 있는 사건은 고오노에게 맡겨라> 라는 말은 기
무라 과장이 만든 것은 아니다. 현경의 형사들 사이에서 나온 말이였
다. 살인 사건도 회사의 내부사정이 얽혀 있게 되면, 고오노는 100프
로 범인을 검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 하나는 고오노가 2과에 오래 근무한 경험에서 오고 있다. 2과는
오직, 사기등 지능범을 다루고 있다. 따라서 관청이나 기업에 관련된
사건이 많다. 이 담당을 10년이나 하고 보면, 싫어도 회사의 조직,
중역과 사원의 심리상태를 알 수 있게 된다. 고오노가 살인을 다루는
1과로 옮긴 것은 1년 전이거니와, 과거의 경험은 충분히 참고가 되
었다.
차는 F시를 벗어나 S온천으로 향하는 국도를 달리고 있었다.
오전 9시 반.
차의 흐름은 약간 더디었다. 러시아워 시간이었던 것이다. 긴 자동차
의 행열 속에서 이 경찰차도 맥을 못추고 있다. 이 정차시간이 고오
노에게 있어 사건을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다. 대략적인 내용은 기무라
과장의 요령 있는 설명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신속한 조치야) 고오노는 이렇게 생각했다.
사건이 일어난 것은 12월 13일 금요일 오후 9시 반, S파출소의 상부
기관인 T경찰서장 다까하시 경부가 직접 현장에 나타나 수사본부를 설
치한 것이 오전 8시, 매우 신속한 조치라고도 할 수 있는 수사본부의
설치였다.
고오노가 관할 서장으로서 수사본부장이 된 다까하시 경부의 조치를
기민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 경우 <타살>이냐 <자살>이냐를 결정하기
에는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면에 이런 속단에 의구심을
느낀 것도 확실했다.
사건 자체는 단순했다. F시에 있는 삼영전기주식회사 총무국의 직원
13명, 나중에 전무가 오게 되어 14명이 되었다. 망년회 개최시기는 가
장 그럴듯한 보너스 지급 5일 후였다.
오후 7시 부터 시작되어 9시가 되자 파아티는 절정에 달했고 좌석은
어수선했다.
F시와 S온천가는 자동차로 30분 걸리는 거리지만, 남자사원의 대부분
은 여관에서 묵을 예정으로 와있었기 ㄳ문에 해방무드도 곁들여 난장
판이 된 모양이다. 이 온천가는 손쉽게 여관 종업원이나 바아의 호스
테스가 같이 잔다는 소문으로 이름난 유흥가였다.
오후 9시 반.
인사과장인 우사미 모꾸다로오가 갑자기 가슴을 움켜쥐며 괴로워했
다. 사망까지 5분간이라는 빠른 템포였다. 굉장한 소동이 벌어졌다.
S파출소에서 상부인 T경찰서로 연락, 즉시 사건 관련자 13명의 사건
청취를 시작한 것 따위, 수사의 스피드하며, 면밀함하며 완벽했다고
할 수 있다.
다까하시 서장은 사건청취 결과 여관의 조리관계자를 무혐의로 판정,
우사미의 죽음을 타살로 인정, 현경본부와 연락 우사미 모꾸다로오
살해사건 수사본부의 설치를 보았다.
우사미의 죽음은 청산가리가 투입된 위스키를 마신 것이 직접적인 사
인 이었다. 우사미는 정년퇴직 1년 전이었다.
(기민한 처치로군)
고오노는 다까하시 서장의 기민한 조치와 타살, 즉 그날밤 모인 삼영
전기 망년회 참가자 가운데에 범인이 있다는 단정을 <용기 있는 조
치>라고 생각한다. 무릇 사건의 해결은 초기 수사의 재빠른 움직임과
타살이냐, 사고사냐의 결단에 있다는 것이 고오노의 평소 부터의 생
각이다.
하지만 이 차를 탔을 때 (오래 끌는지 모르겠군) 이렇게 느낀 것이
자신이 생각해도 이상했다.
차는 어느새 S온천가로 들어가 있었다. 이윽고 민가 현관의 수사본부
라고 적혀 있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수사본부는 활기에 넘쳐 있었다. 현관으로 한 걸음 발을 들여 놓았을
때, 고오노는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여어." 낯익은 다까하시 서장이 이내 현관으로 나타났다. 서장, 아
니 이 사건의 수사본부장이 직접 마중을 나오는 것을 보고, 고오노는
자기에게 돌려지고 있는 기대를 느꼈다. 기쁘기는 하지만, 어깨가 무
거워지기도 한다.
"지금 두번째 청취를 하고 있네."
다까하시는 고오노를 현관 옆 작은 방으로 안내하고는 어젯밤부터의
사건 관계자의 청취내용을 꺼냈다.
<딴은> <그렇군요> 이러면서 고오노는 다까하시의 이야기를 들었다.
다까하시의 이야기는 대충 두 가지 중대한 점으로 요약된다.
하나는 피해자인 우사미는 결코 사원의 누구에게도 원한을 품게 할
인물이 아니였다는 것. 또 하나는 우사미가 마신 위스키에 독물을 투
입할 찬스는 그 때 자라에 있던 13명 누구에게나 있었다는 것.
"망년회가 시작된 게 오후 7시, 그로부터 두 시간 반, 모두들 굉장히
취했던 모양일세. 우사미가 그 술잔을 언제 마셨는지조차 전혀 모르
는 판이란 말야."
"그 술은 누가 조합을?"
"아니지. 알고 있듯이 여자들이 부족하잖나? 술은 적당히 데운 것을
들여왔고, 위스키는 각자가 적당히 조합해서 마셨지. 요컨데 셀프 서
비스 파아티였다네."
"딴은."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은 우사미의 인망(人望)이야. 모두 칭찬하는 게
야. 그게 아무래도 거짓말은 아닌 것 같다구. 상당히 원만한 인물이었
다네. 이렇게 되고 보니 살해된 동기를 잡을 수가 없단 말야."
<곤란하다>는 말을 다까하시 서장은 두 번이나 썼다.
"하긴 듣고 보니 장사가 잘 되는 회사야. 보너스 액수를 듣고 깜짝
놀랐다네. 내 보너스하고 이 삼영전기 여사원 하고 같은 액수라니까."
"그렇죠. 삼영전기는 재미 있는 회사지요."
"자네 알고 있나?"
"네. 칠 년 전 시청의 독직혐의 때 삼영에도 불씨가 튀었었죠. 그래
서 조사한 일이 있읍니다."
"과연 회사통(會社通)이군." 다까하시 서장은 감탄해서 말했다.
그것은 그렇다. 지금 경찰서에서 자기가 가장 잘 삼영전기의 경영내
용을 알고 있을 것이라는 자부가 고오노에게는 있었다. 2과에 있을
때부터 주시하고 있던 기업이었다.
아까 다까하시 서장에게 <재미 있는 회사>라고 했거니와, 이는 함축
성 있는 표현이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삼영은 <업적이 기막히게 좋
고, 그리고 불안정> 하다고 보여지는 회사이다. 업적이 좋은데 불안
정하다는 것은 딴은 모순된 표현이지만, 고도경제성장기에 발전한 기
업에는 가끔 이런 타입의 회사가 있다.
업적이 좋다는 것은 주주배당도 좋고, 내부유보(內部留保) 또한 두터
운 화사를 가리킨다. 삼영은 그점에서는 틀림이 없었다.
불안정하다는 것은 중역진의 파벌항쟁과 노조관계의 대립이 이 회사
의 암으로 되어 있었다. 그럴 것이 5년 사이에 사장, 전무 축출극이
(逐出劇)이 두 번이나 있었다. 이렇듯 경영진의 구조변화가 심한 회
사도 드물다. 그리고 노조관계로 말하더라도 60명의 종업원이 두 조합
으로 분열되어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삼영은 15년 전, 마침 기업이 고도경제성장의
문턱에 서 있을때 영세한 전기공사관계의 10개 회사가 합병해서 생긴
회사였던 것이다. 합병회사에 중역진의 암투란 필수적인 것이다.
하기는 이런 미묘한 회사 내부의 정세도 2과에 오래 있었던 고오노였
으니까 알 수 있는 것이지 게다가 경제에 어두운 다까하시 서장에게
설명을 해보았자 무리일 것이다.
"그럼 두번째 사건청취에 입회해 주게나." 다까하시 서장은 일어섰
다.
"그러죠" 고오노는 서장의 뒤를 따랐다.
첫번째 청취는 오전 7시부터 시작되어 오전 10시에 일단 끝내고 있
다. 두번째는 첫번째의 개별청취에서 상호간 모순이 있는 점을 알아내
자는 것이 목적인 것 같았다.
고오노 수사주임은 다까하시 서장에게 받은 우사미 인사과장의 이력
과 용의자 13명의 리스트를 들여다보았다. 그는 우사미의 이력을 특히
주의해서 읽었다. 13명의 리스트는 인원이 너무 많아, 실제로 입회해
보기 전에는 도저히 이미지를 잡을 수없다. 그래도 이름과 사력은 머
리에 집어넣었다.

전무취체역 요꼬미조 겐조오 58 사력 5년
총무국장 미스미 요오조오 40 사력 5년
총무과장 아쓰다 아끼라 33 사력 4년
총무과원 마쓰시다 사부로오 26 사력 5년
하라다 싱고 28 사력 2년
오자끼 요시오 28 사력 2년
나가이 하루꼬 28 사력 2년
인사과원 시바우라 시로오 31 사력 5년
나까니시 유우조오 31 사력 5년
나까지마 도오루 26 사력 1년
이께나미 야스꼬 25 사력 1년
타이피스트 무라세 유미꼬 33 사력 5년

가까운 사이와이야 여관에서 한 사람 한 사람 호출되어, 전무와 사
원들은 경찰관의 날카로운 질문에 대답하고 있었다. 겁을 집어먹고
있는 자도 있고, 침착한 자도 있었다.
고오노는 그 청취에 입회하면서 애오라지 신경을 쓴 것은 피해자 우
사미에 대한 것이었다. 이런 종류의 사건에서는 피해자의 회사에 있어
서의 권한, 입장, 그리고 인품, 성격을 올바르게 잡지 못하면, 가해
자의 이미지 역시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 고오노의 신념이었다.
고오노가 던진 질문은 모두 우사미에 관한 것 뿐이었다. 요꼬미조 전
무에게는 이렇게 물었다.
"우사미 인사과장은 사력 10년으로 제일 오래 됐고, 또 대학도 나오
고 있는데도 승진이 더딘 것같이 생각되는데, 무언가 이유가?"
미스미 총무국장에게는 "우사미상은 현장의 기술자들한테 인망이 있
었나요?"
타이피스트인 무라세 유미꼬에게는 "여사원간의 우사미 과장의 인기
는?"
따위였다. 그래서 우사미의 이미지가 그제서야 뚜렷해진 것이다.
그리고 중역 또는 노동조합간의 알력이 심하며, 5년마다 총무국 전원
이 바뀌는 이 회사에서 우사미가 인사과장 자리를 고수한 비밀을 뚜렷
이 캐치할 수 있었다.
10년 전 우사미와 같이 입사한 동료는 이제 삼영에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다. 중역간의 파벌싸움에 말려들어 퇴사하지 않을 수 없게
된 무리가 많았다. 이 사이 우사미는 계속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다.
소위 <안보노라, 안 듣노라, 말 않노라>의 자세이다.
그러면 이런 중립적 입장을 고수하는 공평한 인간이 왜 출세를 못하
느냐, 하는 의문이 생긴다. 하지만 회사란 역시 생물, 즉 살아있는
물체인 것이다.
터놓고 말해 중립적인 인물은 적대하는 쌍방에게 다 같이 좋지 않게
여겨지는 것이다. 믿음직스럽지 못하다, 이렇게 보여지기 십상이고,
또한 두 다리를 걸치고 처세하는 어물쩡한 인물로도 보여진다.
우사미 모꾸다로오가 만년인사과장으로 앉혀져 있던 것은 이상과 같
은 사정에서였다. 그러면 이 <안 보노라, 안 듣노라, 말 않노라>하는
주의를 의식적으로, 또는 공리적으로 우사미가 취하고 있었느냐 하면,
아무래도 그렇다고는 할 수 없는 면이 있다.
그의 성격, 인품에서 그것은 나온 것이라고 여겨진다. 우사미는 45세
때 삼영전기에 입사하고 있다. 그 전에 20년의 샐러리맨 생활이 있
다. 이런 무사주의(無事主義)가 30년간의 월급생활 속에서 습성이 되
어 버린 것이 아닐까, 이렇게 고오노는 생각했다.
그것을 단순하게 나타내는 증거로 그의 별명이 있다. <모꾸상>이라는
것이 우사미의 별명이다. 물론 모꾸다로오니까 <모꾸상>이라 불리우
는 것은 부자연스럽지가 않다. 그러나 별명을 부르는 사람들은 <모꾸
상>을 침묵의 모꾸(주:일본 발음으로 默이 모꾸임)라는 <모꾸상>의 뉘
앙스로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노상 묵묵하다. 그리고 쓸데 없는 소
리는 안하는 사나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우사미는 말은 없었지만, 교활하지는 않았다. 그 증거로 흔히
어려운 일에 대한 상의역(相議役) 노릇을 해온 흔적이 역력하다. 그것
은 <모꾸상>한테는 무슨 말을 해도 절대로 남에게 새어나가지 않는
다는 안심감에서 온 모양이다.
그리고 우사미도 이 사람 저 사람 가리지 않고, 상의해 온 일에는 곧
잘 응했고, 또한 그 푸념이나 불만이나 비밀을 듣는 너그러움을 나타
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건청취에 입회한 고오노가 강하게 느낀 일이었다.
"아뭏든 입이 무거운 것으로는 따를 사람이 없었고, 그래서 우사미는
절대 신용하고 있었지요."
이렇게 요꼬미조 전무는 말하고 있었다.
"의지할 수 있다는 것보다도 어떤 푸념도 잘 들어 줬읍니다. 우사미
상을 만나고 돌아갈 때는 무언가 막혀 있던 것을 토해낸 것 같은 기분
이 들곤 했죠. 정말 좋은 사람이였읍니다." 이렇게 하라다 총무과장
은 말했다.
"무슨 일을 지껄여도 우사미 과장이라면, 절대로 새어나가지 않을 거
에요. 그 점 믿을 수가 있었어요." 이렇게 나가이 하루꼬는 죽은 우
사미를 추모하는 표정을 보였다.
누구에게나 상의역이 될 수 있는 사나이. 입이 무겁다고 굳게 신용받
고 있는 사나이. 이런 사나이가 과연 살해될 것인가? 이것은 고오노의
의문이였다.
그와 동시에 <타살>로 단정을 내린 다까하시 서장의 고민이요, 동요
였다.
다까하시 서장이 타살이라고 단정한 것은 우사미가 괴로워하기 시작
할 때까지 그가 여느때의 태도였다는 데에 있다. 자살자에게는 어딘
지 동요가 엿보이게 마련인 것이다. 그런데 우사미는 지극히 평온하
게 마시고 있었다는 것이다. 결코 자살자의 태도는 아니였다.
하지만 이렇게 우사미의 소문이 좋아서야... 다까하시 서장에게 조바
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오후 4시에는 삼영전기의 사원들을 이미 돌려
보내고 있었다.
"우사미 과장의 가정생활은 원만, 부채는 한 푼도 없고, 게다가 취미
는 돈이 안드는 정원가꾸기야. 노상 미소를 잃지 않고 있고, 자택 근
처의 소문도 썩 좋단 말야. 한 군데도 나무랄 데가 없는 사회인이지.
이제까지의 실정으로 보아 이런 사나이가 살해되는 것은 단 한 가지
케이스 밖에 없다구,"
다까하시 서장은 약간 흥분해서 연설투로 말했다.
"어떤 케이스입니까?"
이상한 얼굴로 이이즈까라는 경부보가 물었다. 그리고 그런 표정은
이이즈까 뿐만 아니라, 다른 수사원의 얼굴에도 나타나 있었다.
"이것은 내 짐작이야. 어떤 사원이 중대한 사실을 우사미 과장한테
말했어. 그런데 말해 버리고나서 그 사원은 아차하고 생각한 게야.
우사미가 그 사실을 남한테 얘기했다간 끝장이 나는거지. 그래서 그
사원은 우사미에게 살의를..."
"그렇지만 우사미는 입이 무겁다고들 하지 않습니까?" 다른 수사관이
반발하고 나섰다.
"하지만 말해버린 내용이 워낙 중대문제였다면, 안심할 수 없다고 생
각 할 수도 있지."
고오노는 다까하시 서장의 이런 의견에는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비약이 심한 것 같다.
"그렇지만..." 이렇게 다른 수사원이 발언했다.
"서장님 의견은 너무 상상의 요소가 지나치신 것 같은데요..."
하기는 그렇다. 다까하시 서장은 입을 다물었다. 무거운 침묵이 수
사회의를 지배했다.
수사원의 일부 중에 <혹시 자살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번지기 시작
했음을 고오노는 느꼈다. 그러나 수사의 방침이 타살을 취하고 있고,
그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는 이제, 그 말을 입 밖에 내는 사람은 없었
다.
"본부장, 자살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까요?"
호소베라는 베테랑 형사가 발언 했다. 회의의 무드로 보아 용기있는
발언 이었다. 그러나 고오노는 다까하시 서장과 이 호소베가 서로 뜻
이 안맞는다는 소문을 들은 일이 있다.
"난 현재로서는 자살이라곤 생각지 않네." 다까하시 서장이 뚜렷하게
말했다.
"우사미의 일상생활에 자살을 연상케 하는 것이 전혀 없어. 이것이
첫째의 이유. 둘째로는 청산가리 투입이라는 수법이 무언가 계획범죄
의 냄새를 풍기게 하지. 그밖에 유서가 없다든가, 망년회 출석 직전
에 이틀 뒤의 도오꼬오출장의 항공기표를 본인이 직접 구입했다든
가...."
"하긴 그렇군요."
호소베 형사는 일단 납득한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타살의 선으로
달리고 있는 이 회의에 제동을 걸 만한 확신은 없었던 모양이다.
"고오노군, 어떻게 생각하나?"
다까하시 서장은 고오노에게 얼굴을 돌렸다.
"네? 타살이냐 자살이냐 말씀입니까?" "우선은 그거야." "글쎄요."
고오노는 팔짱을 끼고 약간 생각하고나서 말했다.
"나는 본부장 말씀대로 타살의 냄새를 느낍니다. 추상적인 표현이어
서 안됐읍니다마는."
"수사가 막혀 버린 느낌인데, 그것에 관한 의견은 없나?" 또다시 서
장은 고오노에게 물었다.
"아까 본부장이 말씀하신, 우사미한테는 남에게 말할 수 없는 것을
모두들 털어놓는다, 거기에 무언가 원인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
견. 그것이 이번 사건에 직접 연결될 것인지는 별도로 하고, 회사 안
에서 일어난 이런 종류의 사건을 보는 시각으로서는 매우 날카로운 관
찰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러면서 고오노는 좌중을 보았다.
"요즘의 기업, 또는 기업구성원은 자기방어의식이 강합니다. 알기 쉽
게 하나의 예를 든다면, 은행 내부에서 변상 가능한 유용사건(流用事
件)이 있었다고 하죠. 금액은 모백만원이라고 할까요? 이것은 절대로
내부에서 해결해 버리기 마련이죠. 외부엔 절대 안샙니다. 은행은 신
용으로 유지하고 있는 기업이니까요. 본부장이 추측했듯이 만일 우
사미가 누구에겐가 중대한 비밀을 듣게 됐고, 그것이 원인으로 범죄로
까지 발전했다고 가정한 경우, 이 수사는..."
고오노는 다시금 말을 끊었다가 천천히 덧붙였다.
"매우 어려운 수사가 되는 거죠."
계원이 들어와 다까하시에게 귓속말을 했다.
"음, 음." 다까하시는 끄덕이면서 듣고 있었다. 그리고 계원의 말이
끝나자 이마를 찌푸리고 말했다.
"우사미가 마신 위스키의 감식 결과가 나왔어. 컵에서 뚜렷하게 검출
된 지문은 우사미의 것이었다는군. 분명치 않은 지문도 검출됐지만.
누구 것인지는 몰라."
그리고 다시금 덧붙였다.
"또다시, 청산가리의 입수 경로, 삼영에서는 업무상 청산가리를 사용
하고 있기 때문에, 물론 관리는 엄중히 하고 있다지만, 그럴 뜻만 있
으면 사원은 누구든지 입수 가능하다는 게야."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날밤....
고오노 수사주임은 좀체로 잠을 들 수가 없었다. 물론 우사미살해사
건에 대해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는 탓이었다.
이 사건을 고오노는 육감으로 <타살>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움직일 수 없는 신념이다. 이 역시 육감이지만, 고오노는 이 사건
뒤에 무언가 또하나의 비밀이 있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아까 고
오노는 회의석상에서 기업 및 기업구성원에는 강렬한 자기방위본능이
있다고 설명하고 은행의 예를 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은행만은
아니다.
회사라는 조직에도 자기방위본능이 있다. 이렇게 고오노는 본다
우사미살해사건에도 이 회사의 자기방위, 나아가서는 사원 개인의 자
기방위가 관련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다년간의 경험에 의한 후각으로 고오노 수사주임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잠을 못이룬 것은 고오노 수사주임 뿐만은 아니었다. 우사미살해사건
으로 청취를 받은 삼영전기 13명의 사원 모두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요꼬미조 전무취제역도 그랬다. 몸을 뒤척일 때마다 눈이 초롱초롱해
진다.
사건청취 때 나는 결코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그것은 분명하다. 다
만 그 이야기를 자신해서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왜 자기는 그런, 중역으로서 지껄여서는 안되는 비밀사항을 우사미에
게 털어놓은 것일까? 그 사나이의 평가는 틀림이 없다. 독으로도, 약
으로도 쓸 수 없는 사나이다. 재능은 없다. 업무에 대한 적극성도 부
족하다. 착실하게 근무하고 있을 뿐인 사나이다.
그런데도 그 사나이와 단 둘이 있게 되면, 그만 무언가를 지껄여보고
싶어진다. 이 사나이 한테 지껄여도 절대로 남에게 새어나가지 않는
다는 안심감에서 그것은 나오고 있다.
그날 회사를 나와 우연히 우사미를 만나서 작은 음식점으로 데리고
갔다. 술잔을 거듭하고 있는 사이에 입이 자연히 매끄러워졌다.
"여보게, 이건 절대 비밀로 해둬야 하네." 이렇게 나는 말을 꺼내고
있었다.
큰 회사인 K전기에서 요꼬미조에게 은밀한 상의가 있었던 것은 지난
달이었다. 합병타진이다. K전기는 대체로 냉난방부문이 약하다. 삼
영전기의 뛰어난 기술자를 흡수하고 싶은 것이다.
기요세 사장의 대기업을 싫어하는 성질을 충분히 계산하고, 전무인
요꼬미조에게 손을 뻗쳐 온 것이다. 조건은 유리하다. 성공하게 되면
K전기의 취제역 자리를 준비해 놓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요꼬미조는
이내 응했다. 기요세 사장과의 사이는 벌써 어찌 해볼 도리가 없을 정
도로 막혀 있다.
작전은 비밀을 요한다. K전기 계열 회사명으로 삼영의 잡주(雜株)를
사모은다, 총회꾼을 고용해서 주주총회에서 기요세 사장의 퇴진을
요구한다, 취재역들을 회유한다.... 그리고 그 작전은 조용히 진
행되고 있다.
이런 중대한 일을 왜 우사미에게 지껄인 것일까? 하고 요꼬미조 전무
는 입술을 깨문다. 게다가 8일에 우사미에게서 온 그 편지와 그것에
응한 그 행위---- 이 역시 절대로 입밖에 낼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럴 것이 그 말을 했다가는 자기는 우사미살해사건의 주요용의자가
되어 버릴 것이다....

미스미 총무국장에게도 불면의 밤은 찾아오고 있었다.
<우사미는 필경 살해되었다, 이렇게 미스미는 생각한다.
그러나 결코 내가 죽인 것은 아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나는 왜 그런
중대한 이야기를 우사미에게 말해 버렸을까?
불과 4개월 그 관계는 끊기고 있다. 이제 생각하면 그녀의 장난이었
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무렵 당뇨병에 걸린 남편과 교섭이 끊
기고 있던 그녀의 욕구불만의 대상이 되었다고도 생각된다. 남의 아
내와의 정사는 미스미는 처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드러나는 일 없이 모두 끝났다.
그러나 이 정사가 드러나면----이것은 미스미에게 있어 파멸이다. 상
대가 나쁘다.
그날....
번화가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여자가 차창 밖으로 보였다. 그녀였다.
"바라다 드리지요." 시장백을 든 그녀를 보고 미스미는 말했다.
"괜찮을까?" "괜찮읍니다. 타시지요."
그녀는 미스미의 차에 탔다.
"어머, 아직 세 시네요?" 그녀는 팔목시계를 보고, 밖의 맑게 갠 날
씨를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와서 생각하면 교묘한 유혹이었다.
"잠깐 Y해변까지 달릴까요?" 미스미는 이렇게 받아 들였다.
"일은?" "회의는 끝났고... 괜찮습니다."
미스미는 커어브를 틀었다.
"미스미상, 여자들한테 인기가 있다구요?"
"내가요? 원 천만에요." "남편이 그러던데"
대화의 내용이 부드러워졌다.
어느쪽이 먼저 손을 내밀었는지, 이제와서는 아리송하다 예민한 태도
로 서로의 기분을 잡았다고 하면 맞을 것이다.
소문대로 그녀의 몸은 나이에 비해 싱싱했다. 과연 <영감 견뎌낼 재
간이 없을 텐데> 이런 말을 들을만도 했다.
그녀의 이름은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다 이렇게 생각했었는데... 그
녀가 기요세 사장의 아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우사미 뿐이었
다. 그럴 것이 미스미 자신이 그 정사를 우사미 한테 말해 버렸기 때
문이다. 이제는 기요세 시게꼬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만나도 서
로 모르는 체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제아무리 과거의 정사라 하더
라도 드러나는 일이 만일 있다면... 사장 부인과의 정사이다. 개인의
프라이버시만으로는 끝낼 수 없는 위험을 안고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8일의 스템프가 찍힌 우사미의 그 편지. 이 역시 절대로 입 밖에 낼
수 없다. 그랬다가는 살인 용의자로 마크된다.

시바우라 인사과원은 우사미가 죽은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만일 그가 살아있고, 또다시 그런 편지를 보내온다면, 아마 내가 그
사나이를 죽이게 될 것이다. 이렇게 시바우라는 생각하고 있다. 그러
나 그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다. 죽어도 지껄일 수 없다.
그런데 그런 중대한 사실을 왜 우사미에게 고백한 것일까? 그렇다,
그는 그리스도교 교회에서의 신부같은 무드를 지니고 있었다. 신자가
신부에게 참회를 한다. 신부는 교회의 규칙에 따라 절대로 그것을 입
밖에 내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히치콕의 영화에 이것을 역으로 잡아 서스펜스를 풍기게
한 영화가 있었다. 아마 제목이 <나는 고백한다>였겠다. 아니, 영화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그 때 나는 신부에게 참회를 하는 신자의 심정
이었다....들어 주십시오.
우사미에게 매달려 울면서 말을 꺼낸 자기는 그야말로 참회를 하는
신자의 그것이었다.
사건은 뺑소니였다. 그러나 그 경우 내가 나쁜 것이 아니였다는 사실
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바에서 돌아가는 길이었다. 장소는 T맨션
앞이다.
뚱뚱한 사나이가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다. 미처 어찌 할 틈도 없었
다. 상대방이 나쁘다는 의식과 맥주 한 병이건 간에 음주운전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그대로 스타트를 시키고 있었다.뒤를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이튿날의 신문을 훔쳐보듯 겁을 잔뜩 먹고 읽은 기억이 난다. 뜻밖에
도 피해자는 삼영전기의 단골거래선인 S상사의 상무였다. 뿐만 아니
라 그 상무가 남 몰래 살림을 차려 준 애인의 맨션에서 나오다가 사
고를 당했다는 사실도 드러나, 한 때 업계의 소문이 자자했다.
그 상무의 스캔들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애인과의 사이의 일만이
과대화되어 정작 뺑소니를 친 범인에 대해서는 과히 화제에 오르지
않았다. 뺑소니사건이 이제는 별 놀라운 이야기거리가 못되기 때문이
리라.
그런 만큼... 내가 가슴속에 비밀히 간직만 하고 있다면, 이제 그
사실은 아무에게 알려지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저쪽에서 갑자기 덤
벼든 것이니까 내게는 죄의식은 과히 없다. 어찌 되었건 나 혼자만이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 사실을 무엇 때문에?'
우사미에게 고백할 생각이 들었는가? 이것은 신부에게 고백하는 것으
로 면죄부를 받으려는 그 심리에 빠졌다고 하는 수 밖에 없다. 우사
미상은 끄덕이며 들어 주었다. 그것은 참회를 듣는 신부의 태도와 똑
같았다. 고백하고 돌아가는 길에 자기는 이제 그 죄의 고뇌에서 풀
려났다고 느끼고 우사미상한테 감사한 것이다.
"그런데..." 그 8일 날짜의 편지.
나는 놀라고 두려워, 우사미상을 죽여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누군가가 죽인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입
이 찢어져도 입밖에 낼 수 없다.
가장 냉정하게 이 일을 처리한 것은 타이피스트인 무라세 유미꼬였는
지도 모른다. 8일 날짜로 된 그 편지를 유미꼬가 뜯어 본 것은 9일
오후 7시이다. 유미꼬가 살고 있는 Q시는 F시의 위성도시이다. 따라
서 8일 발송된 편지가 9일 오전 중에 닿았고, 퇴근한 유미꼬가 그 편
지를 읽은 것은 오후 7시 경이었다. 유미꼬는 그 편지를 보았다. 글귀
는 간결하다.

<돈이 필요해졌읍니다. 12월 11일까지 S은행 종합구좌 821의 5613으
로 10만원 넣어주십시오. 우사미 모꾸다로오>
편지의 예치요구는 11일.
유미꼬는 11일 아침 회사에 한 시간 지각한다고 연락하고는 오전 9시
10분 Q시에 있는 M은행지점의 도어를 밀었다. 삼영전기는 급료나 보너
스를 사원거주지의 가장 가까운 은행에 예치해 주고 있다. 유미꼬의
M은행 구좌에는 7일에 겨울보너스가 입금되어 있을 터였다.
유미꼬는 자기 구좌의 지불신청서에 10만원의 금액을 기재하고, 송금
표에 S은행 종합구좌 821의 5613의 넘버를 적어넣고는 송금의뢰의 수
속을 마쳤다.
유미꼬가 그 M은행지점에서 나와 잠시 걷기 시작했을 때 반대쪽 행길
에서 종종걸음으로 은행을 향해 걸어오는 사나이를 보았다. 아쓰다 총
무과장이었다. 얼굴이 창백하다. 보나마나 그 역시 우사미의 우아한
협박장을 받고 달려온 것이 틀림 없었다.
'아쓰다 총무과장은 어떤 비밀을?'
그 우사미에게 말한 것일까? 이렇게 유미꼬는 생각했다.
유미꼬의 경우 어느 회사에서도 있을 수 있는 상사와 부하 여사원과
의 흔히 있는 관계였다.
1년 전...
유미꼬는 기술부의 S라는 남자한테 반해 임신을 하고 말았다. S에게
는 처자가 있었고,유미꼬와는 애초부터 결혼할 의사가 없었다는 것
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호쾌한 매력적인 남성이었다. 유미꼬가 좋아
하는 타입의 남자였다.
올드 미스인 33세. 과히 예쁘지도 않은 유미꼬에게 접근한 S의 말은
그야말로 거칠기 이를 데없는 것이었다. 심야의 스넥에서 둘이 취한
뒤의 S의 세리프.
"보나마나 빈 집 아냐? 빌려 줬다고 해서 닳을 것도 아닐 테고. 오늘
밤 어때?"
유미꼬는 S의 이 무례한 한 마디에 반대로 몸이 저려왔다. 호텔로 직
행. 그 뒤 서로의 몸이 싫증이 날 때까지의 정사. 유미꼬가 임신했다
는 사실을 알았을 때
"굉장히 비싼 집세군."
S는 이렇게 말하며 중절비 20만원을 유미꼬에게 넘겨주었다.
"이것으로 모두 끝이라구." 이런 세리프와 더불어...
그 뒤의 굴욕감. 병원 수술대 위에서 유미꼬가 취한 그 포즈. 두 다
리를 들어올리고, 의사라고는 하지만 남이 만져서는 안될 부분을 멋대
로 주무르도록 내버려 두어야 했는 데다가 유미꼬가 가장 싫어하는 메
스마저 거침 없이 침입해 들어왔다. 자업자득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쓰라린 상처는 남았다.
그런데.... 팔리지 않는 올드미스는 올드미스로서의 긍지가 있다. 그
런데 S에 대한 푸념을 유미꼬는 몽땅 우사미에게 고백했다. 상처의
고름을 모조리 씻어낸 기분이었다. 그 우사미로부터의 뜻하지 않은
돈요구. 응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우사미의 사무적인 협박장에 응한 사람들에게 있어 우사
미의 죽음은 진정 쇼크였다.
요꼬미조, 미스미, 마쓰시다, 시바우라뿐만 아니라... 총무과장인 아
쓰다도, 인사과원 나까니시, 무라야마, 나까지마....
그리고 이들에게 공통된 점이 있었다. 우사미는 누군가에게 살해되었
을 것이라는 추정과 우사미 독특한 버릇이 강한 오른쪽이 비스듬히
올라간, 말이 차낸 것 같은 글자체를 공포와 분노와 고통으로 생각해
낸 점이 그것이다.
또하나의 공통점.
이들은 우사미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그리고 협박장건도, 그것에
응한 사실도 일체 입을 다물자고 결심한 것 역시 서로 비슷했다. 왜
냐하면 자칫 잘못되는 날에는 중요한 살인 용의자가 되기 때문이다.

우사미 모꾸다로오 살해사건 수사본부는 일단 해산이 되었다. 사건발
생 후 6개월이 지나고 있었다. 발생 당시는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날씨도 5월 말로 접어들고 보면 눈을 빼앗는 신록이었다.
수사가 길어짐에 따라 수사원 중에 자살설이 퍼져간 것도 해산이 된
한 가지 이유였다. 수사에도 정열이 필요하다. 자살설의 대두는 수사
원의 사기를 저하시켰다.
"십삼 일 금요일에 일어난 사건인 데다 용의자가 십삼 명, 그러니미
궁으로 빠질 밖에..." 이렇게 속삭이는 형사도 있었다.
해산 전에 기무라 수사1과장과 고오노 주임과 다까하시 서장의 회동
이 있었다.
수사1과장의 해산의 의지는 강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 무렵 사건이
연발하는 통에 수사의 손은 부족했다. 가망이 없는 수사에 많은 수사
원을 그대로 투입할 수는 없었다.
"타살판정은 잘못 짚은 것 같군."
기무라 과장은 따분한 듯이 말했다. 고오노도, 다까하시도 잠자코 있
었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다만 다까하시의 표정이 안타까운 것 같았다.
고오노는 말했다.
"해산에 반대의사는 없읍니다. 이 이상 수사를 계속해도 새 사실이
나올 가능성은 없을 것 같군요. 단 사건종료라는 것이 아니고, 수사규
모 축소라는 것으로 해두고, 그 담당을 제게 맡겨 주실 수 없겠습니
까?"
"아직 단념을 못하겠다는 말인가?" 과장의 말이었다.
"그렇습니다." "고집인가?"
"아닙니다. 기다리는 수사라는 게 있죠. 결국 끈기 있게 기다리고 있
는 사이에 저쪽에서 무언가 드러낸다, 저는 이 사건은 이런 것에 해
당되리라 봅니다."
"기다리는 수사라?"
"시바다하고 가와니시 형사를 달려 주십시오."
"좋아." 기무라 수사1과장은 고오노 주임의 요구를 승낙했다.
삼영전기의 타이피스트인 무라세 유미꼬가 퇴직한 것은 사건이 일어
난 지 6개월 후였다. 약간 다른 투로 말하자면, 사건이 미궁에 빠진
지 몇 달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가사를 돌볼 사람이 필요해졌어요. 아버지도
워낙 연로하시고, 집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무라세 유미꼬가 상사에게 말한 이유였다. 유미꼬의 모친이 사망한
것은 사실이었고, 고교 2학년인 남동생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이런 가정형편이고 보면 퇴직을 말리기란 힘든 법이다. 그래도 상사
는 한두 번 유미꼬의 숙련된 타이프 솜씨를 칭찬하며 되도록 그대로
다녀달라고 당부해 보았다. 실상 유미꼬의 업무 능력은 신속하고 정확
했다. 그러나 유미꼬는 어디까지나 퇴직을 고집했고, 상사는 부득이
그녀의 사표를 수리했다.

사직한 날 유미꼬는 여행백 하나의 가뿐한 차림으로 아파트를 나섰
다.
손을 들어 택시를 세웠다.
"1비행장." 유미꼬는 행선지를 알린다.
회사사람이 이 행선지를 듣는다면, 아마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유미꼬의 고향은 열차로 3시간, 그리고 버스로 2시간 걸리는 산골이었
다. 한 시간 뒤 유미꼬는 비행기 안에 있었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F
의 풍경이 작은 유리창에서 내려다 보였다.
'이 F시하고도 영영 작별이야'
유미꼬는 이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감상은 없었다.
고향의 집이 이웃의 눈이 귀찮아, 현재의 유미꼬에게 있어 하루도 있
을 수 없을 정도로 혐오를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F시 또한 이러쿵
저러쿵 소문이 나기 쉬운 지역사회였다.
항공기는 도꾜를 향해 날아가고 있다. 1,200만명이 모여 있는 거대도
시.------ 이웃집 시체를 1년 동안이나 눈치채지 못했다는 차가운 인
정의 도시.------ 범죄자가 도망쳐 들어가기 쉬운 도시.
<범죄> 유미꼬는 차갑게 미소지었다. 웃음을 머금은 것은 <완전범
죄>를 이루었다는 긍지에서였다. 곁에 있는 백을 살며시 눌렀다. 완
전범죄의 수확이 들어있다. 그 네개로 나눈 예금통장의 금액에는 숫
자 뒤에 많은 0이 늘어서 있다.
'지혜의 승리야' 이렇게 유미꼬는 생각했다.
범죄를 계획한 것은 1년 전니었다. 마침 결혼이야기가 일어났을 때
다. 그 때 문득 생각했다.
'우사미 인사과장이 S와의 교섭이나 중절수술을 한 사실을 미끼로 돈
을 요구해 온다면?' 이런 추리소설적인 발상이었다.
역시 무리를 해서라도 자기는 돈을 만들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혼담이 깨어졌을 때 유미꼬는 그 발상을 부풀려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우사미 인사과장은 돈이 되는 나무, 즉 모두의 프라이버시를 가슴이
부풀 정도로 넣어두고 있다. 출세와는 담을 쌓아 버린, 아니 출세를
할 수 없는 우사미니까 이 모든 사람의 고백을 돈으로 바꾸어야 하지
않은가? 만일 우사미가 그 짓을 안한다면 내가 하자고 결심했다.
그로부터 1년. 유미꼬는 신중하게 준비를 했다. 가장 고생한 것은
우사미의 필적을 흉내내는 일이었다. 우사미의 버릇이 있는, 오른쪽
으로 비스듬히 올라간, 말이 차내고 있는 것 같은 글씨를 그대로 쓰게
되기까지에는 1년이 걸렸다.
둘째로 고생한 것은 누구한테 몇 만원을 요구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결국 윗사람에게 두껍게, 밑사람에게 얇게 했다. 이는 사회적 공정
원리에도 맞으며 의적(義賊)의 모럴로도 되어 있다. 그리고 글은 간
단한 편이 좋다. 쓸데 없는 말은 안하는 것이다. 암시만으로도 족한
것이다.
<돈이 필요해졌읍니다. 12월 11일까지 S은행의 종합구좌 821의 5613
으로 X만원 넣어주십시오. 우사미 모꾸다로오>
유미꼬는 펜을 들어 요꼬미조 전무 앞 편지내용에 <5백만>이라고 적
어넣고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금액이 너무 많지 않을까? 하지만
고개를 흔들고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이것은 내기, 즉 도박이다. 도박은 배짱으로 한다. 경영에는 생소한
유미꼬도 최근의 요꼬미조 전무의 움직임에는 무언가 수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5백만원이라는 선이 맞는다. 일이 경영의 비밀이고 보면, 이
정도는 군소리 없이 내놓을 테지.
마지막으로 자기앞으로 협박장을 유미꼬는 썼다. 드러났을 때의 대책
이다. 10만원이라는 숫자를 적어넣었을 때 문득 S에게서 받은 중절비
20만원이 떠올랐다. 마음이 아팠다.
합계 3천 2백 17만원.
12일 아침 유미꼬는 은행에 문의해 보았다. 우사미 모꾸다로오 명의
로 유미꼬가 개설한 구좌였다. 놀랍게도 요구대로의 금액이 자기ㄳ을
넣어 13명으로부터 예치되고 있었던 것이다. 현금자동불출기로 그것을
인출하기란 손쉬운 일이었다.
"그렇지만..."
우사미 모꾸다로오에게는 딱하게 되었다고 유미꼬는 생각했다. 범죄
를 완전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는 죽어 주지 않으면 안되었다.
좌중이 난장판이 되었을 때 청산가리를 넣은, 위스키에 탈 물을 지문
이 묻지 않게 조심하면서 우사미 앞에 놓았다.
이제 그런 과거의 일은 그만 생각하자고 유미꼬는 생각했다. 내게는
미래가 있다.
항공기는 하네다 상공에 닿은 모양이다.

고오노 수사주임은 도꾜로부터의 업무용 직통전화로 시바다 형사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또렷또렷한 시바다의 목소리가 귀에 흘러온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잔뜩 부풀어 있었다.
"상경 후의 무라세 유미꼬의 행동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부동산
소개소에서 중고 맨션의 ZDK 방을 빌렸읍니다. 장소는 신쥬꾸 반슈우
쪼오. 50만원이 들었죠. 이어 목하 맨션 근처의 다방을 사려고 교섭
중인데, 집기 포함 양도권리금 2천 5백만원입니다. 유미꼬가 삼영전
기에서 받은 퇴직금은 3백만. 주임이 추리하신 대로 범인은 무라세 유
미꼬가 틀림 없는 것 같습니다. 기다리는 수사의 승리군요. 그렇기는
하지만 우사미 모꾸다로오는 정말 안됐습니다. 그는 소문을 지나치게
모았습니다..."


- The End -



절대적 언론자유

프레드릭 포사이스

- 선량한 시민인 그는 하루 아침에 신문에 실린 기사 때문에
부정에 개입한 사기꾼이 되고 말았는데...

어느 일요일 아침 8시 반, 전화벨이 열 번 울리고 난 후에야 빌 채드윅은 침대
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웃간에 알고 지내는 헨리 카펜터에게서 온 전화였다.
"'선데이 꾸리에' 읽어보셨소 ?"
"아니오."
"한번 읽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댁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채드윅은 침실로 돌아와 파자마 위에 바지와 스웨터를 껴입
었다.
"'꾸리에'지를 사와야겠어." 그는 아내에게 말했다. "헨리 카펜터가 그러는데
나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는군."
채드윅이 돌아왔을 때 아내는 아침식사를 차려놓고 있었다. 그는 신문을 읽기
시작했다. 마침내 경제란 제 3면에 자기가 전에 잠깐 관련을 가졌으나 지금은 도
산한 한 회사의 이름이 눈에 띄었다. 기사를 읽어 내려가던 그의 입이 딱 벌어졌
다.
"내게 대해서 이런 말을 하다니..." 그는 중얼거렸다. "이건 사실이 아니야."
그는 아내에게 신문을 건네주었다. 기사를 다 읽고 나서 아내가 말했다. "이
사람은 당신이 부정에 개입된 것처럼 암시하고 있군요."
"암시하는 게 아냐." 충격이 가시자 화가 치민 채드윅이 말했다. "이 작자는
그렇게 단언하고 있는 거야. 빌어먹을 ! 나는 그 사람들로 인한 희생자였는데 말
이야. 나는 성실하게 그 회사의 제품을 팔았지. 이 기사 때문에 내 신세를 망칠
수도 있어. 그런데 나는 이 글을 쓴 작자를 만나본 적도 없단 말이야. 이름이 뭐
지 ?"
"게이로드 브랜트에요." 기사의 필자난을 읽으면서 아내가 말했다.


월요일. 런던 교외에서 조그마한 사업을 하는 채드윅은 자기 변호사를 만나보
았다. 변호사는 동정어린 표현으로, 이제는 청산이 끝난 그 회사와 자기와의 관
계를 설명하는 채드윅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선생 말을 들어보니 명예훼손을 당한 것이 틀림없는 것 같군요." 변호사가 말
했다. "우선 일단계 조치로 편집인에게 기사의 취소와 사과를 요구하는 서신을
보내겠습니다."
몇주일이 지나도 회답이 없었다. 그러는 동안 채드윅은 따내기를 바랬던 두 건
의 계약을 성사시키지 못했다. 마침내 '선데이 꾸리에'가 보낸 답장이 변호사에
게 배달되었다. 비서의 서명으로 된 서신이었다. 편집인이 서신의 일부 내용을
수정하는 권한을 채드윅이 인정한다면 그의 편지를 신문에 게재해 주는 것을 "고
려"할수도 있다는 내용이었다.
"받아들일 수 없다는 소리가 아닌가요 ?" 채드윅이 물었다.
변호사는 한참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그렇지요. 신문사는 가능한 한 정정기사
를 내지 않으려고 합니다. 언론평의회에 제소할 수도 있지만, 명예훼손사건은 법
정에서 시비를 가릴 문제라는 태도를 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언론평의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경고를 발하는 일이 고작이고요."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요 ?"
변호사는 한숨을 쉬었다. "소송하는 길 밖에 없지요. 명예훼손으로 법원에 소
송을 제기하여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것은 그야말로 금방 시시비비가 가려질 사건이 아닙니까 ?"
"명예훼손의 경우에는 그렇게 쉽게 시시비비가 가려지지 않는답니다. 명예훼손
은 관례법에 따르는 것이고 과거 수백년에 걸쳐 나온 판례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그 해석이 구구합니다. 선생의 경우, 아주 사소한 것일망정 어떤 면에선
가 앞서 발생한 소송사건들과도 다른 것이 되겠지요. 또한 선생이 그 회사에 관
계하고 있었을 때 자신은 회사의 부실한 신용상태를 전혀 모르고 있었음을 증명
해야만 할 것입니다."
"소송을 제기하지 말라는 것인가요 ?"
"선생은 부자신가요, 채드윅씨 ?"
"아니요, 집과 차가 있고 몇 천 파운드의 저금이 있을 뿐이지요."
"재판을 하면 알거지가 될 수도 있습니다. 명예훼손사건의 경우 재판에서 이긴
다 할지라도 소송비용은 자기가 부담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 비용이 판정된 손
해 배상액의 열 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거기에다 중상모략이 따릅니다. 소송을
유리하게 끌고 나가기 위해 신문사 쪽의 법률 고문들은 정직한 사업가로서의 선
생의 평판에 대해 먹칠을 하려고 들 것입니다. 법정에서 행한 모든 진술은 공개
적으로 보도될 수 있고 증거를 들어서 그렇게 실증할 필요도 없는 거예요. 저는
선생에게 소송을 제기하라고 부추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말해서 내가
당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소송에 따르는 위험을 있는 그대로 설명해
드리는 일일 것 같군요."
채드윅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솔직하게 말씀해 주신 데 대해 정말 고맙게 생
각합니다."

이튿날 아침 채드윅은 신문사로 찾아갔다. 제복을 입은 덩치가 커다란 수위 앞
에서 그는 자기의 성명, 주소, 만나고자 하는 사람, 용건 등을 면회신청용지에
기재했다. 반시간 정도 지난 후 단정한 젊은이가 나타났다.
"저는 에이드리안 세인트 클레어라고 합니다. 벅스턴씨의 개인 보좌관이지요.
무슨 일로 오셨나요 ?" 그가 물었다.
채드윅은 편집국장을 직접 만나서 자신에 관한 기사가 사실이 아니며 그것이
자신의 생업을 위협하고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고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벅스턴씨와의 면담은 불가능합니다.그분은 매우 바쁘시니까요."
"그럼, 게이로드 브랜트씨를 만나볼 수 있을까요 ?"
"아무 소용이 없을 겁니다." 세인트 클레어가 말했다. "댁의 변호사가 다시 서
신을 보낼 것 같으면 그것을 우리쪽 법률담당 부서에서 검토하도록 하겠습니다."
채드윅은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려 도서관으로 가서 신문 스크랩을 뒤져 보았
다. 최근에 있었던 한 명예훼손 사건은 그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한 인기
작가에 의해 명예훼손을 당한 사람이 3만 파운드의 손해배상과 소송배용을 제기
하여 승소하였다. 출판사측의 항소로 열린 항소심에서 고등법원은 배상판정을 파
기함으로써 양측 당사자가 각기 소송비용을 부담하도록 판결했고, 원고는 고등법
원의 판결을 번복하여 손해배상을 하도록 판결을 내렸지만 소송비용에 관해서는
판결을 하지 않았다. 재판이 5년이나 끄는 동안 재판비용은 4만 5000파운드에 이
르렀다. 출판사 측에서도 비슷하게 재판비용이 들어 결국 7만 5000파운드를 잃게
되었지만 그들은 보험에 들어 있었다. 원고는 승소했으나 재정적인 면에서는 완
전히 파산했던 것이다.
빌 채드윅은 결코 그런 꼴을 당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변호사가 한 말이
머리속을 떠나지 않았다. "법정에서 행한 모든 진술은 공개보도될 수 있고, 증거
를 들어서 그것을 실증할 필요도 없는 거예요." 그것이 아무리 명예를 실추시키
는 발언일지언정 그 누구도 손을 쓸 수 없는 이러한 면책은 "절대적 면책"이라고
불리는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하나의 묘안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다음 일요일 아침, 채드윅은 게이로드 브랜트의 집 앞에 섰다. 30대 중반의
사근사근해 보이는 여자가 문을 열었다.
"브렌트씨 계신가요 ?" 채드윅이 물었다. "'꾸리에 '지에 실린 기사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하는데요."
브렌트부인은 돌아서서 복도쪽을 향하여 "여보" 하고 불렀다. 잠시 후 40대 중
반의 한 사나이가 나타났다.
채드윅은 신문 스크랩을 내밀면서 말했다. "방해를 해서 미안하오. 그러나 이
기사에서 당신은 나의 명예를 훼손시켰으며, 또 이 기사는 나의 사업과 사회생활
에 상당한 피해를 입혔소."
"아니 여보시오." 브렌트가 말했다. "적절한 경로가 있는 법이오. 먼저 변호사
를 통해 서면으로..."
"그렇게 했었지요. 하지만 효과가 없었소. 나는 편집국장을 만나려고 했지만 그
는 만나주지 않았소. 그래서 당신을 찾아온거요."
"당치도 않은 짓이요." 브랜트는 짜증을 내며 문을 닫으려고 했다.
"당신에게 줄 것이 있소." 채드윅은 부드럽게 말했다. 그는 주먹을 쳐들어 브
랜트의 코 끝을 쳤다. 연골을 상하게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윽 !" 하는 소리를
내지르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그의 눈에는 물기가 돌았고 코피가 뚝뚝 떨어졌다.
그는 마치 미친 사람과 맞닥뜨린 것처럼 쏘아보다가 문을 꽝 닫았다.
채드윅은 길모퉁이에서 경간을 찾아냈다. 그가 말했다. "순경 양반, 폭행사건
이 났어요."
"폭행사건이라고요 ? 어디에서요 ?"
"나를 따라오시오." 채드윅은 이렇게 말하면서 재빠른 걸음을 떼어놓았다. "바
로 여깁니다. 32번지요."
수상쩍은 눈길로 채드윅을 바라보면서 순경은 벨을 눌렀다. 브렌트부인이 나타
나더니 채드윅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부인 !" 채드윅이 말했다. "이 순경께서 댁의 남편을 잠깐 볼 수 있을까요 ?"
브랜트부인은 머리를 끄덕이고나서 집안으로 사라졌다.
"몇분전, 이 사람은 코를 얻어맞았습니다." 채드윅이 말했다.
"그게 사실입니까 ?" 경관이 브랜트에게 물었다.
"그렇소." 채드윅에게 눈을 부라리며 브랜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경관이 말했다. "그런데, 누구의 짓입니까 ?"
"내가 가해자요." 채드윅의 말. "경찰서에 가서 해명하겠소."
순경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좋습니다. 함께 가셔야겠습니다."
경찰서에서 채드윅은 자기의 행동을 법정에서 해명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정식
으로 기소되었고, 100파운드의 보석금을 내고 풀려나왔다.

재판을 앞둔 전주(前週)에 런던의 주요 신문사 사회부장들에게 익명의 전화가
걸려왔다. '꾸리에'지의 게이로드 브랜트 기자가 폭행사건에 관련되어 다음주 월
요일 노스 런던의 치안재판소에 출두하게 되었으며, 취재할 만한 가치가 있을 것
이라는 이야기였다.
빌 채드윅이 법정에 들어왔을때 취재기자석은 꽉 차 있었다. 채드윅은 스스로
를 변론하기로 했으므로 자신은 "무죄"임을 주장하였다. 채드윅은 변호인 역할을
함으로써 선서를 하지 않고 그렇게 주장할 수 있었다.
검사는 사건의 진상을 대략 설명하고 나서 클라크 순경을 호출하였고 순경은
채포경위를 증언하였다. 그 다음에는 브랜트 기자가 호출되었다. 그는 증인석에
올라가서 선서를 했다. 채드윅이 몸을 일으켰다.
"재판장님." 그는 치안판사를 향해서 말했다. "저는 저의 주장을 '유죄'쪽으로
바꾸겠습니다."
"이의 있습니까 ?" 치안판사는 검사에게 물었다.
"이의 없습니다. 판사님. 피고인은 논고한 이 사건의 내용에 대해서 더 이상
반론을 제기하지 않는 것으로 보겠습니다."
"반론을 제기하지 않겠습니다." 채드윅이 말했다.
치안판사는 브랜트에게로 몸을 돌렸다. "수고를 끼쳐서 미안합니다. 그러나 이
제는 증인이 필요가 없어진 것 같습니다." 브렌트는 증인석을 떠나 방청석에 가
서 앉았다.
"채드윅씨, 당신은 증인을 채택하시겠습니까 ?"
"아닙니다, 판사님. 저는 다만 저의 감형을 호소하기 위해서 몇 마디 진술하고
자 합니다."
"그것은 당신의 권리이자 특권이요."
판사석을 향해서 진술하고자 일어선 채드윅은 착착 접은 신문스크랩을 꺼냈다.
"재판장님, 6주일 전 게이로드 브랜트씨는 '선데이 꾸리에'지에 이런 기사를
썼습니다. 재판장님께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사건과 관련이 있는 것인가요 ?" 치안판사가 물었다.
"예, 그렇다고 확신합니다."
치안판사는 그 스크랩을 받아들고 읽어 내려갔다.
"그 기사 속에서 게이로드 브랜트는 저에게 악의에 찬 중상을 퍼부었습니다."
채드윅이 말했다. "그 기사는 파산으로 청산을 하게 된 어떤 회사에 관한 것입니
다. 저는 그 회사에 기만당한 피해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사실인즉 저의 실수로
돈을 날린 것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실수였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기사를
쓰기 전에 충분한 조사를 하지도 않고 자기 말에 책임질 줄 모르는 형편없는 신
문쟁이놈으로부터 그 사건에 공모하였다는 근거없는 비난을 받았던 것입니다."
방청석에서 동요가 일었다. 기자석에서는 연필이 맹렬한 속도로 굴러갔다. 그
때 분노로 얼굴이 일그러진 브렌트기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것 봐요 !" 그가 외쳤다.
"법정에서는 조용히 하시오 !" 정리(廷吏)가 소리쳤다.
"당신의 분노는 이해하겠소, 채드윅씨." 치안판사가 근엄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것이 죄의 경감과 무슨 상관이 있겠소 ?"
"재판장님." 채드윅이 공손한 자세로 말했다. "조용하게 살아오던 사람이 느닷
없이 다른 사람을 때렸을 경우, 그의 동기를 참작하는 것이 적절한 일인줄 믿습
니다. "
"당신의 동기를 설명해 보시오."판사가 말했다. "그러나 말은 삼가서 하시오."
"이 거짓말이 실린 후,"하고 채드윅이 말을 이었다. "저의 사업은 심각한 타격
을 입게 되었습니다..."
브렌트가 벌떡 일어섰다. "재판장님." 그가 언성을 높였다. "나는 다만..."
"법정에서는 조용하시오 !" 정리가 다시 외쳤다.
채드윅은 말을 계속했다. "그래서 저는 도대체 무슨 권리로 사건을 잘 알지도
못하는 광대가 너무나도 게을러서 자기 주장의 근거를 확인하지도 못한 채 유력
한 신문의 법적, 재정적 울타리 뒤에 숨어서, 자기가 한번 만나 볼 생각조차 해
보지 않은 사람을 파멸시킬 수 있는 것인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명예훼손에 대해서는 달리 취할 방법들이 있소." 치안판사가 말했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보급되는 신문과 맞설수 있는 개인은 거의 없다는 사실을
참작해 주셔야만 합니다. 저는 편집국장을 만나 문제의 기사가 전적으로 잘못된
것임을 설명하려고 했지만 그는 저를 만나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게이로
드 브랜트를 직접 만나 보러 갔던 것입니다."
"아," 치안판사가 말했다. "마침내 동기가 나왔군요. 당신은 그에게 해명하기
위해 집을 찾아갔나요 ?"
"해명하려고 갔었지요. 하지만 그는 제가 신문사에서 당했던 것과 똑같은 모욕
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 치안판사가 물었다.
"저는 그의 코를 한번 쥐어박었습니다. 제 평생에 그 순간 처음으로, 저는 자
제력을 잃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그는 자리에 앉았다.
치안판사는 법정을 훑어보고 나서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당신은 자제력을
잃어서 고무줄로 콩코드기를 날려 보냈군.' 판사는 언성을 높여 말했다.
"당신은 명예훼손을 당했다고 느꼈겠지만 분명히 브렌트씨를 구타했소. 사회생
활을 하면서 우리는 시민들이 사적으로 언론인들을 쥐어박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
소. 50파운드의 재판비용과 아울러 100파운드의 벌금을 선고하는 바이오."
빌 채드윅이 수표를 끊는 동안 기자들은 부산하게 전화기와 택시를 향해 달려
갔다. 그가 법원 건물의 계단을 내려오는데 누군가가 그의 팔을 잡았다. 돌아보
니 분노로 얼굴이 창백해진 브렌트가 서 있었다.
"개새끼." 그가 말했다. "거기서 그렇게 말해 놓고 무사하기를 바랄 수는 없을
걸. "
"천만에." 채드윅이 말했다. "법원에서의 진술은 탈이 있을 수 없소. 그것이
바로 '절대적 면책특권'이라는 것이야."
"하지만 남을 그런 식으로 대할 수 없소."
"왜 못해 ?" 채드윅이 조용하게 말했다. "당신도 그렇게 했는데."



제 목 : 집을 사러 돌아온 사나이 - 헨리 슬레서,1960


CLEAN CRIMES AND NEAT MURDERS



아론 해커의 부동산소개소 앞에 선 붉은 색 컨버터블(천정의
포장을 접을 수 있는 차)에는 뉴욕시 번호판이 붙어 있었다. 자동
차 주인도 그곳 아이비코너스에서는 낯선 사람이었다.
한 뚱뚱한 남자가 차에서 내리더니 사무실쪽으로 향했다. 무더
위로 그의 여름 양복에는 온통 땀이 배어 있었다. 한 오십쯤 돼 보
였다.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작은 두 눈은 마냥 맑고 서릿발
처럼 차가왔다. 그는 아론에게 목례하고,"해커씬가요?"하고 물었다.
"그렇습니다." 아론은 미소지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미스터-"
"나는 워터베리라고 합니다." 남자는 이렇게 자기 이름을 대고
는, "나는 시간이 별로 없어요. 그러니 당장 흥정에 들어가는 것이
어떨까요?" 했다.
"좋습니다. 워터베리씨. 특히 마음에 드시는 집이라도 있으신지
요?"
"실은 그렇습니다. 이 동네 끝에 낡은 빌딩이 하나 있죠. 그 건
너 편에 있는 집입니다."
"기둥이 있는 집이던가요?"
"바로 그집입니다. '매가'라는 표시를 본 것 같은데요."
아론은 냉담하게 웃었다.
"맞습니다. 우리 장부에 기재는 돼 있읍니다."
복덕방주인은 루스리프식 장부(페이지를 마음대로 뺐다 끼웠다
할 수 있는 장부)를 뒤적이다가 타이프로 찍힌 한 페이지를 손으로
가리켰다.
160년 묵은 고가. 방 8개, 욕실 2개, 자동기름보일러.
현관이 넓고 정원수가 있음. 상가와 학교에서 가까운
거리. 7만 5000달러.
"그래도 마음이 있으세요?"
남자는 불편하게 몸을 움직이면서,"마음에 안들 게 없죠. 그 집
에 무슨 흠이라도 있나요?"하고 물었다.
"글쎄요," 아론은 말했다. "집주인 새디 그라임스 여사가 졸라
서 장부에 올려 놓긴 했읍니다만 그 할머니가 달라는 값을 내고 살
만한 집이 못되지요. 바위처럼 단단한 옛날집 축에는 못 낀단 말입
니다. 정말 낡은 집입니다. 나무가 썩지 않도록 페인트칠 같은 건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집이죠. 몇 해 못가서 대들보 몇 개가 내려
앉을 겁니다. 일년 중 반은 지하실이 온통 물바다지요."
"그런데도 왜 그렇게 비싼 값을 부르지요?"
아론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감상적인 이유겠지요, 뭐. 아마
독립전쟁 이후 줄곧 그 여자 집안 소유였다지요."
뚱뚱한 사나이는 마루를 한참 내려다 보았다.
"그럼 곤란한데." 그는 이렇게 말하고 아론을 쳐다보며 수줍은
듯 웃었다.
"나는 어딘지 모르게 그 집이 마음에 들었거든요. 그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나한테 알맞은 집 같아서."
"수리해서 들 수는 있지요. 그러나 1만달러라면 모르지만 7만
5000달러나 달라니!" 아론은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그
할머니의 생각은 나도 알 것 같아요. 돈도 얼마 없는 부인입니다.
도시에 돈벌이를 잘 하는 아들이 있어 어머니를 돌봐 주었답니다.
그런데 5년 전에 그 아들이 죽었읍니다. 그래서 할머니는 집을 파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한 거지요. 그러면서도 그리운 옛집과 헤어질 결
심이 서지 않아 아무도 감히 엄두도 못낼 그런 값을 붙여 놓았읍니
다. 그럼으로써 양심의 부담을 덜어보자는 생각일 겝니다." 그는 서
글픈 듯이 머리를 젓고,"이상한 세상이죠,안 그래요?"했다.
"그렇군요." 워터베리는 듣는 듯 마는 듯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러면서 일어섰다.
"이러면 어떨까요? 제가 그 할머니를 찾아가 만나보고 값을 좀
깎는다면?"
워터베리는 조용한 거리로 천천히 차를 몰고 나갔다. 그라임스
댁에 닿자 그는 마치 무질서하게 늘어선 보초처럼 서있는 나무담장
곁에 차를 세웠다. 정원에는 잡초가 우거져 밀림을 이루고 있었다.
문간에 나온 여인은 키가 작고 백발인데 얼굴에 진 주름살은 작
고 고집스럽게 보이는 턱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 무더위에도 두꺼운
양모로 짠 가디간을 입고 있었다.
"워터베리씨죠." 할머니는 말했다.
"아론 해커가 당신이 찾아오실거라고 알려 줬지요. 좀 들어오시
죠."
"바깥은 지독히 더운데요." 워터베리는 씩 웃었다.
"그럼 들어오세요. 아이스박스에 레모네이드를 좀 넣어 두었다
오."
안은 어둡고 시원했다. 커튼이 쳐져 있었다. 그들은 육중한 바
로크풍의 가구를 놓은 네모난 응접실에 들어갔다. 노파는 흔들의자
에 앉아 팔을 근엄하게 포갰다.
"자 그럼?" 할머니가 물었다.
뚱뚱한 남자는 헛기침을 했다.
"그라임스여사, 조금 전에 댁의 부동산 중개인과 이야기를 나눴
읍니다만..."
"그건 다 알아요!" 할머니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혹시 내 마음을 바꿔볼까 해서 당신을 여기까지 보내다니, 아
론은 바보란 말이오."
"어,글쎄요. 제가 그런 생각으로 온 것은 아닌데요. 그라임스여
사, 저는 그저 이야기를 좀 나눠보았으면 했을 뿐입니다."
노파가 뒤로 기대 앉자 흔들의자가 비명을 지른다. "말하는 건
돈이 안드니까,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 해보세요."
"예." 그는 하얀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이렇게 말씀드리죠.
저는 사업가입니다. 한데 독신입니다. 여러 해 동안 일을 하다 보니
꽤 돈을 모았읍니다. 이제는 은퇴할 생각인데 될 수 있으면 조용한
데가 좋겠어요. 저는 아이비코너스를 좋아합니다. 여러 해 전에,올
버니로 가던 길에 이곳을 통과했었지요. 그때 언젠가는 이 고장에
자리를 잡고 살리라는 생각을 가졌어요. 오늘 이 거리를 다시 차를
몰고 지나다가 이 집이 눈에 띄었읍니다. 저한테 꼭 알맞은 집인
것 같더군요."
"나도 이 집을 좋아한다오,워터베리씨. 그러니까 그렇게 공정한
값을 부르는 거죠."
워터베리는 눈을 깜박였다. "공정한 값이라고요? 그라임스여사
는 시인하셔야 합니다. 요즘 시세로 이런 집은 많이 나가보았자..."
"그만 하면 됐어요!" 노파는 소리쳤다. "워터베리씨,당신하고
따지고 싶지는 않아요. 내가 제시한 값을 내놓지 않겠다면 몽땅 없
었던 일로 해둡시다."
"하지만 그라임스여사..."
"안녕히 가십시요,워터베리씨."
노파는 일어섰다. 손님도 일어서라는 암시였다.
그러나 그는 안 일어났다. "잠깐만,그라임스여사," 그는 말했
다. "이건 미친 짓이라는 걸 알지만...좋습니다. 요구하시는 대로
내겠읍니다."
노파는 그를 한참동안 쳐다보더니, "정말입니까,워터베리씨?"하
고 물었다.
"예,그만한 돈이 있으니까요. 꼭 그돈을 받아야만 하신다면 별
도리 없지요?"
할머니는 희미한 미소를 흘렸다.
"레모네이드가 꽤 차졌겠군. 좀 갖다 드릴께요. 그리고 나서 이
집에 얽힌 사연을 이야기해 드리지."
뚱뚱한 남자가 이마의 땀을 닦고 있는데 할머니가 쟁반을 들고
돌아왔다. 남자는 차디찬 레모네이드를 꿀꺽꿀꺽 들이켰다.
"이 집에서," 할머니는 흔들의자에 몸을 기대면서 말을 꺼냈다.
"1802년부턴 우리가족이 살았어요. 나도 이 집이 아이비코너스에서
제일 견고하게 지은 집이 아니라는 걸 알아요. 아들 마이클이 태어
난 다음 해 지하실에 물이 들었는데 그 물은 좀처럼 뺄 수 없었지
요. 아론씨는 흰개미도 있다고 합니다만 나는 그래도 옛집이 좋거든
요,이해하시겠죠?"
"물론이죠." 워터베리가 맞장구를 쳤다.
"마이클의 아버지는 그애가 아홉 살때 세상을 떠났어요. 우리에
게는 벅찬 시련이었지요. 마이클은 아버지를 무척 그리워했지요. 어
쩌면 나보다도 더 보고 싶어했는지 몰라요. 그후로 그애는 성장하면
서 자꾸...글쎄,거칠어졌다는 말밖에는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
군요."
뚱뚱한 사나이는 동정이 간다는 듯이 껄껄거리고 웃었다.
"아들아이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도시로 나갔어요. 야심에 가
득 차 있었지요. 난 그애가 뭘 했는지 몰라도 어쨌든 성공했던 게
틀림없어요. 정기적으로 나한테 돈을 부쳐 보냈거든요." 여기까지
말한 노파의 눈은 흐려졌다. "난 9년 동안이나 그애를 못보았어요.
그런데 드디어 집에 돌아왔을 때는 무엇인가 잘못돼 있었어요. 한밤
중에 불쑥 나타났는데 수척해지고 늙어보였어요. 짐이라곤 없고 자
그마한 검은 옷가방만 하나 들고 왔더군요. 내가 그 가방을 받아들
려 했더니 그애는 나를 때리려고 하더군요. 제 친어머니를 때리려
하더란말요!"
"이튿날 그애는 나더러 몇 시간만 집을 비워 달라고 합디다. 뭘
하려고 그러는지 설명도 안하고. 그런데 집에 돌아와 보니 그 옷가
방이 없어졌더군요."
레모네이드를 마시고 있던 뚱뚱한 사나이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날 밤 왠 남자가 우리집에 왔어요. 어떻게 들어왔는 지 모르
겠어요. 마이클 방에서 사람목소리가 들리길래 나는 문에다 귀를 대
고 걔가 어떤 사건에 말려들었는지 알아보려 엿들었지요. 그러나 고
함소리,협박하는 소리밖에 안들리더군요. 그 뒤에..."
할머니는 말을 잠시 멈추고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리고 총소리..." 할머니는 말을 이었다."한 방의 총소리가
들렸어요. 내가 그방에 들어가 보니까 침실창문은 열린 채 낯선 사
람은 간 곳이 없었고 마이클은 마루에 누워 있었는데...죽어 있었어
요."
"이것은 5년 전 이야깁니다. 경찰이 사건의 경위를 이야기해 준
것은 한참 후였어요. 마이클과 그 또 한 남자도 범죄에,그것도 중대
한 범죄에 관련되었다는 거였어요. 그들은 엄청나게 많은 돈을 훔
쳤답니다. 그런데 마이클이 그 돈을 들고 뛰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돈을 이집 어디엔가에 숨겼대요. 나도 아직 어딘지 모르지만. 그
러자 그 또 한 사나이가 자기 몫을 챙기려고 내 아들을 찾아왔지요.
그런데 돈이 없어진 것을 알고 그는 내 아들을 죽인거죠."
할머니는 얼굴을 들었다."그래서 나는 이 집을 7만 5000달러에
팔겠다고 내놓았지요. 내 아들을 죽인 자가 언젠가는 돌아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내 아들을 죽인 그놈은 어떤 값을 치르
더라도 이집을 사려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나는 오로지 이
집을 엄청난 가격을 내고서라도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기
다리기만 하면 되었던 거예요."
이렇게 말한 할머니는 가볍게 의자를 흔들거렸다.
워터베리는 빈 컵을 내려놓고 입술을 핥았다. 그의 눈은 이제
촛점을 잃고 있었으며 머리가 어깨 위로 떨어져 제멋대로 흔들거렸
다.
이윽고 그는 "윽"하고 소리지르더니,한마디를 내뱉었다. "레모
네이드가 왜 이리 쓰지!"



제 목 : 반 고호의 귀 - 커티스 슬레피언 (1983)

귀를 잘라가는 정신병자가 파리에 나타났다.
역사의 사건현장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간
수사관이 마침내 밝혀낸 진범은?



별빛이 영롱히 빛나던 어느 추운 밤, 나는 몇시간에 걸쳐 <빈센트
반 고호>를 미행하고 있었다. 오전 3시, 나는 문간에 몸을 숨기고 그가
비틀거리며 라마르띤광장을 가로질러 자기집으로 향하는 것을 지켜보았
다. 그 다음 순간 내가 느낀 것은 에이는 듯한 매서운 고통이었다. 누
군가가 나의 옆구리를 강타했던 것이다. 허리를 꺾으며 주저앉는 순간,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땅바닥에 얼굴을 쑤셔 박으면서, 나는 이번 사건
이 만만치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이야기의 발단은 서기 2043년 캘리포니아에서 비롯되었다. 산페
드로의 술집에 앉아 독주를 홀짝거리면서, 어느 여성과 나누었던 키스
의 감촉을 떠올리려고 하는 판에 전화가 걸려왔다.
"<슬레지 해머> 씨, 나는 <랠프 마인더> 박사입니다. 일에 대해서
의논할 것이 있는데요."
역사상의 사건을 다루는 수사관으로서, 나는 6개월 전 아틀란티스
의 비밀을 밝혀낸 후로는 이렇다 할 활동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의
타임홉스(시간을 뛰어넘는 여행)는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있는 정도였
다. 어쩌면 내 운세가 바뀔 모양이다.
"해머씨, 나는 [비벌리힐스 정신의학연구소]에서 열릴, 빈센트 반
고호의 노이로제 증세에 관한 강연을 준비하고 있읍니다. 나의 강
연의 핵심은, 어떻게 그가 자신의 귀를 잘라냄으로써 상징적으로
부모를 배척했느냐 하는 점입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이 그 행위의
전후에 걸친 그의 행동을 관찰해 주었으면 합니다."
기상천외의 주문이었지만, 돈은 그가 대는 것이었다.
이튿날 아침, 나는 타임머신을 1888년 12월 24일 오후, 프랑스의
아를르에 맞추고 올라타 손에 익은 작동버튼을 눌렀다. 다음순간, 나는
그곳에 가 있었다. 이 허술한 마을에서 반 고호를 찾아내기란 쉬운 일
이었다. 그와 그의 단짝 <뽈 고갱>은 까페 드 라 뉘에서 첫번째 포도주
병을 막 비운 참이었다. 그 거나한 시점에서, 두사람은 각기 상대방의
그림이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 뽈, 아무도 자네처럼 정확한 기억으로 그림을 그리지는 못하
네."
"여보게, 빈센트, 자네야말로 렘브람트 이후 아무도 따를 수 없는
필치를 지니고 있어."
네 병을 비운 후, 이들은 각기 상대방의 그림이 걸려야 하며, 더이
상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다. 반 고호는 유리잔을 집어들고 그것
을 고갱에게 내던졌다. 이런 법석이 벌어지는 동안, 나는 굵은 시가를
입에 물고 턱수염을 기른 말쑥한 신사가 반 고호를 응시하고 있음을 알
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 화가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그날 밤, 이들 거나한 젊은이들은 가비스-영업시간 후에도 문을 여
는 저속한 술집인데, 값싼 여자들과 어울릴 수도 있다.-에서 판을 끝냈
다. 그들은 오전 2시경에 자리를 떴다. 갈짓자걸음으로 거리를 내려가
면서 그들은 다시금 논쟁을 벌였다. 갑자기 고호는 날쌘 주먹을 날려
고갱을 쓰러뜨린 후 미치광이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집에 도착하기까지
그는 나로 하여금 아를르의 거리를 온통 헤메고 돌아다니게 만들었다.
누군가가 내 뒤로 몰래 다가와 손을 쓴 것은 바로 이때였다.
크리스마스날 아침, 나는 머리에 오렌지만한 혹을 붙인 채 깨어났
다. 길 건너에는 몇 명의 경관들이 반 고호의 집 주위에 모여 있었다.
일은 벌어졌군. 그가 자기의 귀를 잘라냈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나는
그 장면을 놓친 것이다. 마인더는 굉장히 화를 낼 것이다. 나는 한걸음
에 달려가서 역사상의 사건을 수사하는 수사관 신분증을 잽싸게 내보이
며 경찰들 옆을 통과했다.
2층에 있는 반 고호의 방은 온통 빨간 색, 피처럼 빨간 색깔이었
다. 방안에는 이렇다 할 장식이 없었다. 그림 몇점, 책, 그리고 귀퉁이
가 새로 떨어져나간 게 분명한 테라코타 흉상이 전부였다. 그 흉상엔
고갱의 서명이 들어 있었다. 책상 서랍을 열어보니 <뚤루즈-로트렉>에
게 보내려던 미완성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친애하는 앙리, 우리가 사
소한 문제로 다툰 것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오.> 아래층에서는 한 이
웃사람이 반 고호는 절단작업을 한 후에도 가비스로 가 라셸이라는 아
가씨와 이야기를 나눌만큼 기력이 있었다는 말을 들려주었다.
나는 가비스로 갔다. 라셸은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다. 그 여자는
그런 타입이 아니었다.
"새벽 세시경, 누가 문을 두드렸어요. 제가 나가봤어요. 반 고호였
는데, 얼굴을 온통 스카프와 모자로 가리고 있었어요. 그는 웃으면
서,<메리 크리스마스. 빈센트로부터>라는 글이 쓰인 조그만 상자를
내밀었어요. 그 속에 든 귀를 보고 나는 까무러치고 말았어요."
"귀는 어디 있소?"
"모르겠어요. 내가 깨어났을 땐 없었으니까요."
신문기자 행세를 하면서, 나는 읍 외곽의 한 병원으로 반 고호를
찾아갔다. 그에겐 스트레이트자ㄳ이 입혀져 있었다. 담당 외과의사
<레이> 박사가 그에게로 몸을 굽히고 있었다. 레이가 반 고호의 귀가
달려 있었던 부위를 싸맨 붕대를 매만질 때, 나는 그 화가의 옆머리에
생긴 생생한 상처와 커다란 혹을 보았다. 나는 그 혹에 대해서 반 고호
에게 물어보았지만, 그의 머리는 텅 빈 화폭과 같았다.
"엊저녁 일은 하나도 생각이 안 납니다."
그가 말했다.
"나는 다시 그림을 그리고 싶을 뿐이오. 그런데 내 시각에 무슨 이
상이 있나봐요. 모든게 흔들리고 움직이는군요."
병원에서 나오기 전에 나는 레이에게 전날밤 어디에 있었는지 따져
물었다. 외과의사는 왕진을 갔었노라고 말하고 나더니 묵비권을 행사했
다. 접수창구를 지나치면서, 나는 까페 드 라 뉘에서 보았던 시가를 문
사나이를 보았다.
아를르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수많은 의문이 꼬리를 물고 나를 괴
롭혔다. 반 고호는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친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미치광이일까? 그의 머리에 생긴 혹과 나의 머리에 있는 혹은 무
슨 연관이 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도대체 그의 귀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어둠이 깔린 후, 나는 뤼뒤푸에 있는 레이박사의 집을 방문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집에 없었다. 나는 쇠지레로 문을 비틀어 열었다. 서재
에서 나는 유리병이 늘어서 있는 선반을 발견했다. 인체의 여러 기관들
이 포름알데히드(방부제)속에 잠겨 있었는데, 모두 깔끔하게 레테르가
붙어 있었다. <파스칼>의 뇌, <나폴레옹>의 엄지손가락, <플로베르>의
발가락 등등. 역겨웠다. 책상 위에 놓인 병에는 귀가 들어 있었는데,
너덜너덜한데다 거의 두조각으로 동강이 나다시피한 상태였다. 거기 붙
은 표를 읽을 때 나의 피부는 마치 독거미의 집처럼 오싹 오므라들었
다. <V.G>라고 적혀있었던 것이다.
이튿날 아침, 병원의 직원은 레이가 파리에서 열리는 [마취학회]의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떠났다고 알려주었다. 나는 북쪽으로 여행길을
떠나야만 했다.
그날 저녁, 리옹역에 도착하여 기차에서 뛰어내리던 나는 시가를
문 사나이가 두 칸 떨어진 객차에서 내려서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의
존재를 머리속에서 밀어내고 <뚤루즈-로트렉>을 찾아내는 일에만 몰두
했다.
덩치가 작은 이 화가는 어느 서커스단에서 그네에 매달려 있거나
대말에 타고 있는 몇 명의 난장이 광대들을 스케치하고 있었다. 로트렉
과 이들 광대들은 사이좋은 친구들 같았다.
"나는 반 고호의 주치의입니다."
내가 그에게 말했다.
"내 환자가 자기 귀를 잘라냈는데요, 그의 정신 상태에 대한 당신
의 인상을 듣고 싶습니다."
"나는 인상파 화가가 아니오."
정말로 약은 친구다.
"이만 실례하겠소. 난 그림을 끝내고 싶소."
이튿날 아침 레이와 마주 앉았을 때, 그는 그 귀가 담긴 병에 적혀
있는 <V.G>는 자기의 옛 환자 <빅토르 귀르네이>의 약칭이라고 주장했
다. 그는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을 눈치였다.
내가 마지막으로 찾아본 사람은 고갱이었다. 그는 물랭 드 라 갈레
뜨에 혼자 앉아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내 이름은 해머고 사설탐정이오. 내 고객으로부터 빈센트 반 고호
의 사건을 조사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소. 그가 자기 귀를 잘라냈다
는 것을 알고 계신지요?"
"네, 예기를 들었읍니다."
"경찰에서는 반 고호가 정신이상이라고 합니다. 당신의 의견은 어
떠신지요?"
"맞아요, 그는 괴짜요. 많은 화가들이 그렇답니다. 당신은 무엇이
화가들을 돌게 하는지 아시나요? 시기 때문이요! 그들은 모두 나의
재능을 시샘하고 있답니다."
수다를 떨면서도 고갱은 반 고호의 프로필을 스케치해 나갔다. 반
고호의 귀가 붙어 있었을 자리의 살덩어리도 나타나 있었다.
이튿날 이른 아침, 나는 걸어서 뤼드라 쁘띠뜨로 갔다. 로트렉은
막 이륜마차에 올라타는 참이었다. 나는 다른 이륜마차에 뛰어올라 반
쯤 완성된 에펠탑까지 그를 뒤따랐다. 나는 텅 빈 2층으로 그를 뒤쫓아
올라갔고, 그곳에서 이 조그마한 유미주의자는 나와 마주섰다.
"아, 의사양반, 아직도 왜 반 고호가 자기 귀를 잘라냈는지 규명하
고 있는 중인가요?"
"아니오, 왜냐하면 반 고호는 자기 귀를 잘라내지 않았으니까요.
다른 사람이 잘라낸거요. 그의 귀를 잘라낸 작자는 먼저 그를 쳤답
니다. 옆머리에 혹이 생기고, 그의 시력을 상하게 할 정도로 세게
말이지요. 사용된 흉기는 테라코타 흉상이었는데, 그때의 충격으로
인해 귀퉁이가 떨어져 나갔답니다. 그리고 나서 그 악한은 반 고호
에게 정신이상의 딱지를 붙이기 위해 반 고호의 귀를 가비스로 가
져갔던 거요. 레이는 그날 밤 가비스에 있었어요. 그는 그 귀를 손
에 넣어, 그의 광적인 수집목록에 첨가시켰답니다.
"그러나 레이는 귀를 자르지는 않았소. 그는 메스를 다루는 전문가
이기 때문에 귀를 그 모양으로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지는 않습니
다. 그러니까 가장 혐의가 짙은 사람은 고갱이지요. 하지만 고갱은
우연히 자신의 결백을 밝혀 놓았답니다. 그림에 관한 한 그는 거의
사진에 못지 않은 기억력을 가지고 있지요. 그런데, 그가 그린 반
고호의 스케치에는 왼쪽 귀가 아니라 오른쪽 귀가 없었어요. 분명
히 그는 어느쪽 귀가 잘려나갔는지 몰랐던 겁니다."
"그렇다면, 누구의 짓일까?" 로트렉이 물었다.
"당신이오, 선생. 결과적으로 서커스단 친구들의 도움을 받은 셈인
데요. 그들은 무심코 당신에게 대말 타는 법을 가르쳐 줬었죠. 대
말을 타면 당신의 키는 반 고호의 키 만해지죠. 크리스마스 이브에
당신은 대말을 탄 채 기차로 파리에서 아를르로 왔고, 크리스마스
에는 다시 돌아갔지요. 당신은 대말을 탄 채 그 귀를 가비스까지
가져갔고, 그래서 누구나가-얼이 빠진 반 고호까지 포함해서-그것
이 반 고호 자신의 소행으로 생각하게끔 해놓은 거요. 그러나 당신
은 늘 대말을 타고 있지는 않았어요. 크리스마스날 이른 새벽, 반
고호가 집에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당신은 문간에서 나를 보았
어요. 그리고 당신은 남의 눈에 띄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나를
쳤던 것이오. 그리고 당신의 손이 내 머리에 닿지 않기 때문에, 우
선 내 옆구리부터 쳤소."
로트렉은 미소를 지었다.
"사실, 반 고호는 자기가 거물인 양 생각하고 나를 깔보았소. 그래
나는 그에게 본때를 보여준 것이오. 금상첨화격으로 그는 그것을
자기 짓이라고 생각하오, 그러니 그는 미친 놈이 되어버릴 것이오.
"당신은 스스로 올가미 속에 들어가버렸소, 로트렉."
"그렇지는 않을거요."
그의 지팡이 밑으로부터 10인치쯤 되는 칼날이 튀어나왔다. 나는
그에게로 덤벼들었지만 미끄러져 쓰러졌다. 로트렉은 그 순간 내 위로
올라타 크고 힘센 손으로 나를 찍어눌렀다. 다른 한손에 든 칼날이 천
천히 내려왔다. 누군가가 로트렉을 거머잡고 난간쪽으로 팽개쳤을 때,
나는 탐정의 수호성인이 누구인지 궁금했다. 나의 구세주는 까페 드 라
뉘에서 본 시가를 문 말쑥한 사나이였다.
"내 소개를 하겠소."
그가 말했다.
"<지그문트 프로이드>라고 합니다."
대가는 겸손한 법이다! 프로이트는 자기가 마취학회에 가는 도중에
아를르에 들렀던거라고 나에게 설명하였다. 화가들의 정신상태에 관심
이 있었으므로 그는 절단사건에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떤 동기로 발작을 일으키게 되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나는 병원
에 가서 반 고호를 만나보았소. 분명히 그는 미치지 않았고, 자기
자신의 귀를 자르지 않았던 것이오. 그것은 다른 사람의 소행이었
소. 나는 어느쪽이냐 하면 당신을 의심했었고, 그 후 파리에서 당
신을 본 후로는 당신을 감시하고 있었소. 다행히 당신은 나에게 진
짜 미치광이를 만나게 해주었소."
나는 프로이트에게 사의를 표하고 나서, 아를르로 갔고, 그리고 집
으로 향하여 떠났다.
24시간 후, 나는 마인더의 사무실에 와 있었다. 그는 프로이트가
반 고호에게 정상이라는 건강증명을 내린 것이 못마땅했다.
"이것은 내가 강연을 취소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 강
연료를 못 받게 되지요."
마인더는 울기 시작했다. 나는 걸어나오면서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때로는 그렇게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 # # # # # # # #



--- 어느 시인의 죽음에 관하여 ---
(스포츠 서울 '93 신춘문예 추리소설 당선작)

--- 이 채린


범죄 냄새가 난다. 저 기름기 없이 푸석푸석한 얼굴, 아무렇게나 빗어넘긴 머
리카락과 붉게 충혈된 눈, 그리고 다듬어지지 않은 구렛나룻이 범죄의 전형적인
냄새를 풍겨내고 있다. 그는 밤을 쪼아대는 상습 도박꾼일 지도 모른다. 아니면
마약중독자일지도. 저 꿈 꾸는 듯 졸린 두 눈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그는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혁명을 꿈 꾸고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혁명?
새벽잠에서 얼핏 깨어난 박은 맞은편 거울속에 뿌옇게 얼룩져 있는 자신의 모
습을 오랫동안 바라다본다. 피곤과 불면에 시달린 온몸이 납덩이처럼 무겁게 가
라앉아 있다. 매일 밤의 야간근무는 이제 망망대해를 표류하듯 암담하기만 하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고 하던가? 사건은 조작되고 음모는 숨을 죽인다. 그곳에
사람들이 있다.허황된 꿈을 쫓아, 밤이면 그들은 불나비처럼 날아든다.그리고 타
버린다. 소문만 무성한 채, 흔적도 없이.
지난 밤에는 두건의 폭력과 한건의 방화 그리고 세건의 음주난동이 있었다. 온
밤을 난리 북새통치던 보호실은 차를 떠나보낸 뒤의 아침역사처럼 느슨한 잠에
빠져 있다.

그래도 비교적 조용한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박은 지긋지긋하게 따라 붙는 졸음을 쫓아내기 위해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리
고는 담배가 타들어가는 한가로운 시간을 벌기 위해 왼손 새끼손가락으로 타자기
의 자판을 천천히 두드려 보았다.톡 탁 톡 탁.타자기의 작은 소음들이 경박한 춤
을 추고 있다.
나이:서른 다섯. 외모:각진 턱에 근육질형. 신체특징:오른쪽 뺨에 푸른 칼자
국. 결혼유무:미혼. 직업:XX경찰서 강력계 근무. 종교:없음. 전과:없음. 현실:쫓
기는 중.미래:쫓는 중,그러나 오리무중.

이제 조간보고를 마치고 나면 집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온기 하나 없이 침
침한 공간. 벗어던진 옷가지들이 퀴퀴한 냄새를 풍기고 있을 것이고 형광등의 마
른 눈빛만이 때 이른 주인을 맞아들일 것이다. 라면으로 하루의 시작을 때우고는
또 그곳에서 잠이 들어야 할 것이다.
그는 서류와 조서용지들로 어지러운 책상 위를 쓸어담듯 정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기증과 오한으로 몸이 휘청거린다.아침 출근으로 바쁜 걸음들이 어
깨를 스치며 맥 없는 인사를 해온다. 휴일날의 정상근무가 씁쓰름하다는 표정들
이다.
"박 형사님! 메리크리스마스! 어제 야근하셨나보죠? 따뜻한 성탄절날,따뜻한
커피한잔 하시겠어요?"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내고 있던 김순경이 호들갑스럽게 인사를 해준다. 그녀
의 꾸밈없는 웃음과 날렵한 정장이 오늘따라 화사하다.아직 캐롤이나 따라 부르
며 거리를 배회할 이십대의 풋풋함이 경직된 정복의 분위기를 돋보여주고 있다.
박은 마주 인사하며 지나치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열살 차이라... 산전수전 다
겪은 그도 이런 종류의 사건에는 아직 미숙한 우범자인 것이다.
"오늘 사건을 저질러봐? 날도 날이겠다,눈도 오시겠다,저녁이나 같이...?"
박은 화장실 거울에 얼굴을 바짝 붙여 놓고는 충혈된 눈을 이리저리 굴려본다.
비누를 먹지 않는 얼굴 위에서 일회용 면도기가 자꾸 헛손질을 해대고 있다.
그때,누군가가 그의 등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박은 무엇을 들키기라도한 것처럼 얼굴을 붉히며 뒤돌아 보았다.
반장이었다. 그의 얼굴도 지난 밤의 야근으로 초췌해 보인다. 고단한 사십대를
꽉 채운 나이다.반장은 아주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힘들여 입을 열었다.
"한 숨도 못잤지? 또 사건이야. 지금 출동해야겠어. 어떡하냐? 다들 야근에다
정상근무에다 마찬가지 형편인데. 난 딸네미 얼굴 좀 알현하고 바로 뒤따라 갈테
니 먼저 수고 좀 해주라구"
빌어 먹을.가족없는 놈 어디 서러워서 살겠나.
무딘 날 끝에 얼굴을 베이고 말았다.
눈발이 어지럽게 날리고 있다. 거리는 화려한 치장과 밝은 캐럴로 한껏 들떠
있다. 한 푼의 동냥과 가족없는 처지들만이 외로울 뿐, 아이들은 부모 손에 매달
려 축복을 노래한다. "구주 나셨도다.구우주 나셨도다아..."
이런 날의 핏빛 살인은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니다.늘상 마주 대하는 처지이
지만 매번 섬ㄳ한 기분은 어찌할 수가 없다. 처참한 주검을 뒤적거리며 부러 만
들어내야 하는 자신의 사무적인 표정이 더욱 끔찍스러운 것이다.
박은 그 와중에서도 콧노래가 흥겨운 김순경의 웃음을 떠올린다.
"박형사님은 그 나이에 좋은 사람도 없으세요? 제가 대신해 드릴까요?"

현장은 산동네의 끝자락에 붙어 있었다. 겨우 한대 남은 낡은 봉고를 빌려 눈
비탈을 낑거리며 기어 올라온 것이다.
땀을 뻘뻘 흘리며 차를 끌고온 민수경이 쌓이는 눈발을 걷어차며 투덜거려댔
다.
"박형사님! 저도 어젯밤 야근조에 걸려 제대로 못 잤슴다. 일 끝나고 사우나나
한바탕 치르죠?"
사건이 난 곳은 "동방 고시원"이라는 이름을 붙인 연립주택식 사기숙사(私寄宿
舍)같은 곳이었다. 이 동네의 거의 모든 가구들은 산자락을 함께 끼고 있는 A대
학 학생들의 자취와 하숙을 받는 것으로 고만고만한 생활들을 꾸려나가고 있었
다. 적지않은 수의 지방학생들이 철새처럼 드나드는 구역이므로 각종 폭력사건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곳이다. 학교 주변은 밝은 광장 만큼이나 어두운 구석도
만만치 않다. 각종 윤락업소들이 기생하고 있으나 그 성격상 법망의 손길이 느슨
한 곳이기도 하다.
일찌감치 달려온 듯한 관할파출소의 순경과 방범대원들이 동네 주민들을 통제
하고 있었다. 이십여명 남짓한 사람들이 불구경을 하듯 호기심 가득한 머리를 기
웃거리고 있었다.그들은 무언가 충격적인 장면을 기대하고 있는 듯 했다.
문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던 최순경이 아는 체를 하며 달려왔다. 지난해까지 경
찰서에서 함께 근무하였으므로 꽤 친분이 있는 처지였다. 신혼재미에 아직도 깨
가 쏟아지고 있는 중인지 얼굴은 마냥 싱글벙글이다.
박은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고는 업무수첩을 펼쳐들었다.
"피해자 신분은 파악됐어?"
"이름은 K**인데 좀 희한한 성이죠? A대학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생이래요. 나
이는 서른둘,아직 미혼이고... 고향은 전남 광준데 외할머니 한분이 연초에 돌
아가셨고 연고자가 한명도 없는 것 같아요. 일단 현장을 한번 들러보시죠?"
건물은 4층으로 2,3,4층은 학생들의 자취방이었고 1층은 취사장과 주인부부가
기거하는 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들어선 지 몇 년 안된 듯 했지만,날림공사 탓
으로 흉하게 입을 벌리고 있는 균열들이 조금은 음침한 기분을 던져주고 있었다.
피해자의 방은 유별나게도 1층 취사장 건너편의 외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
는 이 건물이 들어설 때부터 입주하여 주인부부와는 친숙한 처지였고, 이제 갓
이십대를 넘긴 학생들과는 꽤 나이 차를 두고 있던 터라, 창고로 사용하던 곳을
올 초에 개조하여 기거하게 되었다고 한다. 어떤 소음과도 단절된 듯 외따로 위
치해 있었다. 방은 대 여섯평 정도로 독신자가 생활하기에는 그리 넓지도 좁지도
않은 편이었다.
방을 들어서자마자 박은 양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엄청난 양의 책들에 기
가 질리고 말았다. 어림 잡아 천 오백에서 이천여 권 정도의 책들이 작은 열람실
처럼 좁은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문 맞은 편으로 창문이 간신히 뚫려 있
는 곳에는 책상과 컴퓨터, 의자가 있었다. 그나마 커피포트와 찻잔, 가방과 화장
품 따위들이 멋대로 널려 있는 공간은 한 사람이 다리를 쪼그리고 누워도 꽉 찰
정도로 비좁아 보였다.
피해자는 책장에 등을 기댄 채 졸고 있듯 앉아 있었다. 그의 명치 부분에는 과
도같은 것이 손잡이 부분까지 깊숙히 꽂혀 있었다. 반항은 심하지 않은듯 하였고
토사물인 듯한 것과 책 세권이 피해자의 무릎 주위를 덮고 있었다. 얼굴에 술기
운이 남아 있었고 왼쪽 눈 언저리가 무엇에 얻어 맞은 듯 조금 부어 있었다.칼이
상처 부위를 압박하여 출혈이 심하지 않은 탓으로,현장은 비교적 깨끗했다.
박은 단서가 될만한 것을 찾아 구석 구석을 더듬어 보았다. 겨울임에도 눅눅한
습기가 배어 있었고, 전체적으로 어두운 조명 따위들이 박의 자취방을 닮은 데가
있었다.혼자서 시간을 구기는 자들은 누구나 한결 같은 냄새를 풍기고 있는 것이
다.
이를테면 외로움이나 지긋지긋한 고독 따위의.
"이곳에서 생활하는 학생들은 전부 몇 명이나 됩니까?"
박은 피해자의 상처부위를 유심히 살펴보며,최형사의 등 뒤에 쭈뼛이 서있는
주인에게 말을 건넸다.이른바 칼침 한 방의 즉사였다.
"죽은 K선생을 합치면 총 스물하고도 여덟명이죠.따로 정한 정원은 없지요. 방
이 각 층마다 여덟개씩 스물네개, 아니 이 방까지 스물다섯개인데, 둘이서 함께
투숙하는 학생들도 있어요.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서 안 돌아오는 녀석들도있고,
친구 방에 놀러와서 말없이 무단 투숙하는 녀석들도 있고......방학 때라서 열
아홉은 집으로 내려갔고, 지금 인원은,가만 있자, 여덟명이군요"
주인은 예순을 훨씬 넘긴 나이에 마음씨 좋은 동네 할아버지같은 인상을 주고
있었다. 최순경의 언질에 따르면, 주인은 한때 이 곳의 동장이었고 인심도 넉넉
하여 몇 달씩 월세가 밀린 학생들의 생활비까지 보태주는 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인심이나 인간성만을 신뢰하여 용의자를 놓쳐서는 안된다. 모든 것은
고리로 연결되어 있고 수사의 사각지대는 보이지 않는 곳에 몸을 숨기고 있기 때
문이다.
일단은,스물 여덟 명이라. 그들의 행적과 알리바이를 조사하려면 보통 수월치
않은 것이 아닐 것이다. 남아 있는 여덟 명이 우선 문젠데.크리스마스 이브라 여
섯명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고.......
박은 피해자의 무릎을 덮고 있는 책들을 유심히 뒤적여 보았다. "현대국가와
혁명", "제국주의론", 조기천의 "백두산". 이른바 마르크시즘의 고전이라는 책들
과 항일 빨치산의 시집이었다. 예전에는 좌경시되었지만,요즘은 누구나 한 두 권
쯤 꽂아 놓고 있는 책들이다.
"혹시 이거, 나와는 업종이 다른거 아닌가? 그렇다면 그치들이 먼저 튀어왔을
텐데?"
그는,우연히 쏟아진 것인지도 모르지만 단서가 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서,
세권의 책을 옆구리에 끼고 일어섰다.
"혹시 피해자의 여자 관계 같은 것 알고 계시는 거 있습니까? 아니면 돈문제라
든지,뭐 그런 종류의?"
"돈은 아닐겁니다. 아직도 공부하는 사람이라서, 월세도 간신히 내는 형편이에
요. 여자라면, 가만 있자, 약혼자라고 한 명 있다던데 조 뭐시기라고 하던가? 그
리고 가끔씩 놀러오는 여자 후배가 하나 있었는데, 빨래도 해주고 여간 따르는
눈치가 아니었어요"
박은 칼자루에 묻어 있을 지문과 방바닥에 널려 있는 머리카락 따위들을 채취
하는 등, 의례적인 작업들을 마치 습관처럼 치러냈다. 온몸이 오한에 들떠있고
콧속이 시큰거리기 시작한다. 몸살이 허락도 없이 기어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부
족한 수면 탓이리라. 박은 약이라도 한 첩 지어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성에
가 뽀얗게 끼어 있는 창문을 통해 늦은 아침의 거리를 내려다 본다. 눈발이 그
치고 있다.어디선가 성당의 예배종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오고 있다. 크리스마스
날의 살인이라.그는 착잡한 심정이었다.
두 시간 쯤이 지나서야 반장과 두 명의 이형사들이 현장에 도착하였다. 모두
하나같이 지난밤의 피곤으로 죽을 맛이라는 울상들이다.
박은 그들에게 현장을 인수 인계해주고 민수경과 함께 사우나를 찾아 산동네를
내려왔다.
"치정 문제 아닐까요? 대학원 박사과정이라면 일단 돈 문제는 아닐겁니다. 대
학원생들은 기생충같은 존재들이에요. 요즘은 할 일 없는 애들이 대학원 들어 온
다니까요. 부모한테, 여자한테 용돈 얻어 쓰고,남은 돈 있으면 유학 가고. 요즘
은 박사 실업자들이 몇 바구니씩 넘쳐난다잖아요.국가적 낭비예요"
냉탕에서 연신 자맥질을 하고 있던 민수경이 머리의 물기를 털며 다가왔다. 전
산학과 석사 과정을 졸업하고 늦은 나이에 전경으로 차출된 그는, 자신이 대학원
을 다녔다는 사실을 지독히도 혐오하고 있었다. 쓸데 없이 머리만 부풀리는 지식
이 역겹다는 친구이다. 그런 편견 때문이었는지,전산요원의 편한 보직을 마다하
고 이년이 넘는 시간을 운전병으로 썩고 있는 것이다.
글쎄,그럴까?
박은 온탕의 미지근한 물 속에 한참을 누워 있다가 사우나탕 속으로 들어갔다.
손님이라고는 그들 둘 뿐이었다.연휴인지라 문을 연 곳이 없어 구역을 한참 맴돌
다가 겨우 찾아 들어온 것이다.
박은 모래시계를 뒤집어 놓고는 턱을 괸 채 실날 같이 떨어지고 있는 모래들을
바라다 본다. 무엇인가 석연치 않은 느낌들이 앙금처럼 가슴 밑바닥으로 가라앉
고 있다. 그리고는 그 밑바닥으로부터 불현듯 죽은 자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이
다. 핏기 없이 푸른, 그러나 어떤 고통도 입에 악다물지 않은 채 숨을 멈춘 그
얼굴. 순한 초식동물같은 그의 얇은 인상. 어디서 본 것일까? 어디서 시간을함께
나눈 것일까? 그는 다리를 쭉 펴고는 자리에 누워 두 눈을 감았다. 밀렸던 잠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A대학은 전체적으로 작은 느낌을 주는 캠퍼스를 형성하고 있다. 정문에서 마지
막 건물까지의 거리가 십 분 남짓이니,아담하다고나 할까? 정문 밖의 상가들이
더욱 화려한 탓에,대학은 차라리 그것들에 부설된 동네 공원같은 인상을 주고 있
는 것이다. 방학이 깊어가고 있는 때인지라,학교는 철지난 고궁처럼 적적하기만
하다.
박은 커피라도 한 잔 호호 불겸해서,학생회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대 여섯
명의 남학생들이 구석에 모여 앉아 포커를 즐기고 있었고 드문 드문 자리를 채우
고 있는 학생들 속에서 간간이 웃음이 섞여 나오고 있었다.
학력이라는 것이 던져주는 컴플렉스는 참으로 묘한 것이다. 평등을 부르짖고
있는 이 사회는 모순되게도 고졸자들을 소외시키고 도태시키는데 전력을 기울이
고 있다. 그 심각함은 당해보지 않은 자는 느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방송통
신대학의 문을 두드렸던가? 삼년째 일학년에 머물러 있으니 말단 경찰공무원에게
는 벅찬 시간들이었다.
손교수와의 약속까지는 아직 삼십 분쯤 여유가 있다.
박은 커피를 홀짝거리며 창 밖의 풍경들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성탄절을 장식
해 주었던 눈들이 도로의 양편으로 곱게 개어져 있고 플라타너스의 마른 잎사귀
들이 하릴없이 눈뭉치들을 만지작거리고 있다.바람이 쓸쓸하게 배회하고 있다.
사건은 예감했듯이 미궁속으로 슬며시 몸을 빼고 있다. 여느 사건과 마찬가지
로 단서의 "단"자도 잡히지 않는 것이다. 이번 경우에는 그 느낌이라는 것도 전
혀 전달되지 않고 있다. 숙소에 머물러 있는 여덟 명의 학생들과 주인부부의 알
리바이는 아직까지 신빙성이 있는 편이고 두 명의 이(李)형사들이 피해자의 연고
지와 나머지 열 아홉명의 행방을 추적하기 위해 출장 중이지만 그것도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머리카락 한 올,지문 한점 없다.계획적인 살인이었다.그리고 범인
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분명 가까운 곳에서 박의 우스꽝스러운 몰골
을 비웃고 있겠지만.

사건 이튿날, 박은 약혼녀라는 여자를 찾아갔다. 종로 부근의 약국에서 근무한
다고 하였으나 아프다는 이유로 결근 중이었다. 한시간여를 헤매고 또 한시간여
를 기다린 끝에 그녀의 집 부근 커피숍에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이런 경
우마다 용의자들의 집으로 쳐들어가지 못하는 자신의 유약스러움에 또 한번 화가
치밀었다. 언제나 이런 식으로 사건을 우회하고만 있는 것이다.
여자는 미인이었으나 화장기 없이 소탈해 보였다. 얼굴이 조금 부어오른 듯 했
고 스물 여덟의 나이가 눈가의 기미로 확연히 드러나 있었다.
"약혼을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그는 시선을 창 밖에 고정시킨 채 입을 열었다. 여자와의 대화는 더욱이 이런
경우의 자리는 껄끄럽기만한 것이다.
그러나 여자는 오히려 담담한 표정이었다.
"아니에요.그렇지만 육년동안 교제해 왔으니 약혼한 셈이나 마찬가지였죠"
"두 사람이 결혼 적령기를 지나신 것 같은데 왜 아직 결혼을 안하셨습니까?"
박은 이말을 간신히 뱉어냈다.자신의 처지가 더욱 우스꽝스러운 것이다.
"집안에서 반대가 심했어요. 아버지는 군 장성 출신이시고 큰오빠가 현역 중령
이에요. 워낙 완고하고 보수적인 사람들이에요. 앞날을 알 수 없는 실업자에게
그것도 피붙이 하나 없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딸을 맡길 수 없다는 거였지요. 더
욱이 글쟁이같은 고리타분한 짓거리에 매달려 있는 사람에게는요. 이해하실 수
없겠지만 저 역시 그런 편견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글쟁이요?"
박은 수첩에 스스로도 알 수 없는 기호들을 끄적거리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예.시를 쓰는 사람이었어요.별로 알려진 이름은 아니었지만"
'시'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여자의 눈시울에 물기같은 것이 고여들고 있었
다.
"흠! 시인이라"
박은 수첩에 "시인"이라는 글자를 굵게 덧칠하면서 이야기가 좀 낭만적인 방향
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였다. 그에게 "시인"이란 막연한 용어
인 것이다. "의례적인 질문입니다만 K씨가 살해 당하던 시간에는 어디서 무얼
하셨는지를..."
"네. 그날 저희 가족의 모임이 있어서 그 사람과 함께 저녁 여덟시쯤 저희집으
로 갔었죠. 결국에는 집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했어요. 저희집 남자들은 그 사람만
보면 눈에 불을 켜는 거예요.실랑이가 있었죠.한 시간쯤 걸렸을거예요. 그 사람
이 아버지에게 대들었고 큰오빠가 몇 대쯤 때렸을거예요. 둘이 쫓겨나서는 요 길
건너 보이는 호프집에서 자정까지 술을 마셨어요. 그리고 그 사람 기숙사까지 걸
어가서 헤어졌지요. 그 사람은 거의 인사불성 상태였어요. 못돌아간다고 우격다
짐하는 걸 간신히 떼어 놓고 돌아 왔어요. 그때가 한시 반쯤 되었을거예요.그런
다음에 그 일이..."
여자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채 소리없이 울고 있었다.
박은 잔뜩 어색한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담배를 빼어 물었다. 여자가 울기 시작
하면 그날의 수사는 마감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사
람이 많은 곳에서 만나자고 했던 것인데... 박은 주윗 사람들의 의아해하는 시선
들을 외면하며 길 건너 호프집을 바라다 보았다.
열 두 시까지 그녀의 알리바이는 확인될 것이다. 그러나 죽은 자와 함께 했다
는 시간 속의 행적들은 묘연한 것이다. 그리고 무엇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야기로 미루어 경황이 없던 상황이었을텐데 시간을 정확히 기
억해내고 있다는 점이 오히려 미심쩍었다. 눈물이 여자의 무기라면 아니 이런 경
우에 누구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이 여자는 오히려 차분한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이다.
여자는 눈물을 닦으며 자꾸 시계를 훔쳐보고 있었다. 마치 버릇처럼. 그는 여
자에게 몇 가지를 더 물어본 뒤 자리에서 일어나 그길로 서울 변두리부대의 대대
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그녀의 큰오빠를 만났다. 마흔을 조금 넘겼을 사내의 첫
인상은 빈 틈 없는 군인의 그것이었다. 사무적이었고 아주 불쾌하다는 표정을 노
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대화, 아니 수사는 처참했다. 군인과 경찰 용무로 본
다면 박에게 승산이 있었지만 그는 계급에서 밀리고 있었다. 불쾌한 것은 오히려
박이었다.
그는 부대를 빠져나와 그 부근의 극장에서 석간보고까지의 두시간 남짓 시간을
구기고 있었다. 영화를 즐기는 편이기도 하지만 사건이 영 안 풀리는 날에는 극
장에 쳐박혀 어지러운 머리를 정리하는 것이 그의 오랜 습관이었다. 때로는 영화
속에서 기발한 단서를 끄집어 냈던 적도 몇번 있었다. 그러나 그날의 영화는 형
편 없었다. 무딘 상상력마저 억제시키는 국산 멜로물이었고 신마다 남용하는 눈
물에는 골치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몸살이 온몸을 쑤셔대고 있었고 콧물까지 염
치없이 흘러 내렸다.
그는 전화로 하루일과를 대충 보고한 뒤 어스름 저녁이 밀려올 때쯤 해서야 자
취방으로 기어들어갔다. 라면을 씹어 먹는 것으로 저녁을 때우고는 이불속에 파
묻혔다. 그러나 영 잠이 오지를 않았다. 이상스럽게도 죽은 자의 인상이, 그의
갸름한 얼굴이 부산한 생각들 속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죽은 자가 말하려 하는 것일까?'
몸살과 혼령에 시달리며 밤새 신음을 토해내다가 새벽에서야 간신히 잠이 들수
있었다.
박은 자리에서 일어나 바람만이 쓸쓸하게 배회하고 있는 교정을 가로 질렀다.
어디선가 풍물패의 기운찬 장단소리가 청아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손교수의 연구실로 가기 위해서는 이십여 개의 계단을 밟아 오른뒤 길고 어두
운 복도를 통과하여야 했다. 한강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연구실은 좁고 어두웠다. 파이프담배의 감미로운 냄새가 은은하게 배어 있었다.
책들이 대부분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는 등을 돌린 채 원고같은 것을 정리
하고 있었다.
손교수는 TV를 통해 낯이 익은 사람이다.각종 대담프로에 단골로 출연하고있어
서인지 교수라기 보다는 연예인같은 인상이 강하였다.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한때 운동에 빠져 걱정스럽기는 했지만 대학원에 들어
온 이후로는 무척 열심이었죠. 실천의 부분을 학문에 적응시켜 보려는 자세가 참
진지했어요. 그런데 그 뭐랄까. 선천적인 반항심이 너무 강했어요. 예를 들자면,
박사학위 논문에 관한 부분인데 저희 과 선생님들의 반대가 심하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너무 고집을 부려서 문제가 있었죠. '친일문학'에 관련된 논문으로
알고 있는데 왜 자꾸 그때의 불미스러운 사건들만을 끄집어내려고 애를 썼는지,
지도교수인 저로서도 납득하기가 힘들었지요"
교수는 시종 밝은 웃음을 잃지 않은 채 수사에 임해 주었다.그러나 명사(名士)
의 숙련된 대화법이 더욱 건조했다. 지도교수로서 제자를 향한 애정이 없었고 사
람들에 대한 신뢰감이 없는 듯 했다. 녹차는 중국산 녹차에 비할만한 것이 없다
는 문화적인(?) 이야기들로 껄끄러운 자리를 모면하고 있었다.
박은 녹차에서 파이프담배로 건너 뛰는 그의 문화강론을 말없이 듣고 있다가
녹차향기가 참 좋았다는 인사를 던지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학을 빠져나오면서 박은 무엇인가를 정처없이 쫓고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마치 죽은 자와 함께 걷고 있는 기분이다. 처음에는 사무적인 수사였다. 동년배
의 나이에 박사과정이라는 신분상의 차이가 묘한 열등감을 자극하였었다. 대학을
나왔고 시를 썼다는 배경들이 더욱 낮설었으므로 죽은 자에 대한 동정심은 조금
도 없었다. 그러나 죽은 자는 외로웠다. 그는 어디서든지 겉돌고 있었다. 무엇인
가 뜨거운 분노를 안고 있는 듯 했다. 역설적으로 고통없이 숨을 멈춘 얼굴표정
이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었다. 그는 무엇을 쫓다가 사라진 것일까?
박은 마른 기침을 연신 뱉어내며 뒤돌아 보았다. 짧은 그림자가 함께 걸음을
멈추었다.
'나는 무엇을 쫓고 있는 것일까?'
지하주점은 어두웠다. 낮고 습기찬 천정, 작은 불빛을 끌어안고 있는 형광등은
수명을 다 했는지 양쪽 끝에 검은 테를 둘러낀 채 파르를 떨고 있다. 그 희미한
불빛아래 모든 사물들이 시간을 뒤로 넘긴 빛 바랜 달력처럼 우두커니 저마다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안주를 준비하고 있는 중년부부,어깨를 웅크린 자세로 술잔
을 마주하고 있는 술객 너댓명, 삐그덕거리는 의자의 소음과 도마질 소리만이 지
하실의 침묵을 잘게 썰어주고 있었다.
"박형사님이시죠? 제가 바로 김**예요"
구석자리에서 혼자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여학생이 두리번거리고 있는 그에게
먼저 아는 체를 해왔다. 불빛에 드러난 작고 까무잡잡한 얼굴이 당차 보였다. 소
주 한병이 거의 비워져 있었다.
"이름은 김**, 고향 전남 화순, 직업 A대학 국문과 4학년 재학중, 전과 90년집
시법으로 집행유예 일년 육개월, 남자관계 K**를 혼자 짝사랑하고 있는중, 이게
제 이력이에요.후후,제가 좀 취했죠? 전 경찰앞에 있으면 알레르기와 이데올로기
가 심한 편이에요. 건방지고 불순하지요"
여자아이가 그에게 술잔을 돌렸다.그녀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박은 술을 거부하려다가 꽉 막힌 목을 컥컥거리며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몸살
이라는 핑계로 스물 몇살 여자아이의 도전을 피하기에는 알량한 자존심이 허락지
를 않았다. 여자아이는 쉽게 취해 있었지만 자신의 감정을 차분하게 조절하고 있
는 듯 했다. 무서운 이십대다.
"그날 밤이요? 오빠와 함께 있었어요. 저녁 내내 찾아다니다가 그 술집에서 오
빠를 찾아냈죠. 오빠는 많이 취해 있었고 제가 자취방까지 바라다줬죠. 그러니까
저에겐 알리바이가 없는 셈이네요?... 그 여자가요? 나쁜 기집애. 거짓말이에요.
그 여자는 다른 남자와 함께 있었어요. 아니 그 술집에서 오빠도 함께 있었죠.
말다툼이 있었고 그 남자가 엉망으로 취한 오빠를 마구 두드려 팼어요. 그때 저
는 문밖에서 지켜보고 있었죠. 그 다음에는 비틀거리는 오빠 뒤를 쫓아갔죠...그
여자요? 삼류예요. 처음에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오빠를 버린 여자예요.오빠
혼자 병신처럼 쫓아다닌 거죠. 그 여잔 올 봄에 다른 남자와 약혼을 해버렸어요.
후후, 그 남자를 등장시키지 않기 위해서 뻔한 각색을 꾸민거네요. 아직도 감이
안잡히세요?"
여자아이는 사건을 읽고 있다는 듯 단정을 내리면서 혼자 술잔을 거푸 비웠다.
박은 혼란스러워지고 있는 머리를 정리하기 위해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러나
불은 붙이지 않았다. 후두부가 상당히 부어오른 느낌이다. 그는 차갑게 식어 있
는 파전을 뒤적거리며 고개를 숙인 채 무엇엔가 골똘히 빠져있는 여자아이를 바
라다 본다. 당차다기 보다는 작고 쓸쓸해 보인다. 저 작은 몸 어디에서 역사를
일구어 내겠다는 힘을 길러내고 있는 것일까?
"또 궁금한게 몇가지 있는데... 이를테면, 그 오빠라는 사람의 "분노"랄까, 아
니면 삶에 관해서 알고 있는대로 말좀 해주시겠어요?"
"분노요? 분노없는 청춘이 어디 있겠어요. 아저씨에게는 그 칼자국말고는 상처
가 없나보지요? 하긴 경찰이시니까... 죄송해요.자꾸 말이 거칠어지네요. 오빠는
분노덩어리였어요. 84년 사학년 때 보안법으로 제적당했고, 징역 일년을 산 뒤
87년에 다시 복학할 수 있었어요. 전과자는 취직이 안된다고 돈 한푼 없는 처지
에 대학원에 들어갔대요. 운동을 계속하기에는 이미 몸과 마음이 늙어버렸죠. 조
직이 그를 버린게 아니라 그가 조직을 버린거죠. 패배자였어요. 그렇다고 대학원
에 들어가면 뭐 하나요? 교수들한테 학부때 찍힌 몸인데. 사회도 마찬가지 아니
에요? 저희같은 빨갱이가 아저씨들한테 한번 찍히면 영원히 찍히는 것처럼. 그런
데 왜 그사람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우리에게 오빠는 팔십년대 항쟁
의 고전이었어요. 결국 패배자였지만 동지애를 느꼈지요. 그 동지애가 어느날부
터인가 그리움으로 비약하더군요.나도 모르겠어요..."
여자아이는 맑은 눈빛으로 빈 소줏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툭 건드리면, 굵은
눈물이 금방이라도 주르륵 흘러내릴 것만 같은 눈빛이었다.
음악이 낮게 흐르고 있었다. 장구의 낯익은 장단같은 것이, 아니면 축축 쳐지
는 드럼의 고동소리같은 것이 느린 목소리로 얼굴을 적셔주고 있었다.
박은 그녀의 빈 술잔에 술을 채웠다.

수사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약사인 여자와 그녀의 약혼자가 이틀동안 불
려와 조서를 받았으나, 치정사건으로 막을 내리기에는 내용들이 너무 조잡했다.
반장은 그들에게 심증을 굳히는 것 같았다. 어쨌든 알리바이가 묘연했고, 그날
의 상황은 그들에게 불리한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러나 심증은 있되 물증은
없었다. 반장은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로 구속영장을 신청해 놓고 있었
다.
박은 아연해하고 말았다. 또 두건의 살인 사건이 발생하여 인원이 모자라는형
편이었으므로 용의자를 묶어 놓으며 시간을 벌겠다는 속셈이었으나, 발상이 허무
맹랑했다. 고발이 없는, 그것도 죽은 사람에 대한 폭력이라니....
단서,어쨌든 단서가 필요한 것이다.
박은 새삼스럽게 죽은 자의 삶의 궤적에 대해 너무 무관심했다는 생각을 하였
다. 죽은 자는 시인이었으므로 필경 많은 말들을 남겼을 것이다. 적어도 '시인'
이라는 형용사를 이름 앞에 내걸어 놓은 이상, 그는 '시'속에 살다가 '시'처럼
죽은 것이 된다.
석간신문 사회면의 짧은 기사 속에서도 그의 죽음 앞에는 '시인'이라는 명함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그의 죽음은 문화면으로 옮겨갔다. 몇명의
문화부 기자들이 찾아왔다. 반장은 '단순한 치정사건으로 심증을 굳힌다'고 얼버
무렸으나, 기자들은 한 술 더 떠 사건을 '자살'로 몰고 갔다. 그들에게 '시인의
죽음'은 당연히 자살이어야 했다. '단순한 치정에 의한 타살'이라 하더라도 그
의 죽음은 '문학적 자살'이라는 것이다. 문학적 자살? 그의 불우했던 시절과 운
동경력들 그리고 그 속에서 맛보아야 했을 실의와 좌절들이 그를 죽음으로 내몰
았다는 것이다. 그는 미화되고 있었다.
"최근 몇 년간 그는 단 한 편의 시도 쓰지 못했습니다. 시인이 시를 쓰지 못했
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곧 시인의 시적인 좌절이지요.그
것은 현실에 대한 좌절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는 온몸으로 그리고 '시
적인 행위들'로 저 암울했던 팔십년대를 살아왔습니다. 그의 일련의 시들이 그
것을 잘 말해주고 있지요. 그러나 현금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시인이 더 이상 시
를 쓰지 못하는 상황, 시인을 죽음으로 내몰 수 밖에 없는 상황...."
박은 몇 군데의 서점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그의 이름으로 출간된 시집은 없
었다. 시인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출판사에 전화를 걸었으나 곧 유고집이 간행
될 예정이라는 답변들뿐이었다.
다시 눈이 내리고 있었다. 흰 백설기 같은 눈발들이 거리를 점묘화로 그려놓
고 있었다. 눈은 곧 빙판이 되었고 그 위에서 아이들이 동화처럼 미끄럼을 타고
있었다.
몇 명의 사람들을 더 만났으나, 얻어낸 것은 죽은 자의 신변잡기들 뿐이었다.
그는 지독한 골초였으며 바둑이 아마의 수준을 넘어섰다는, 아니면 늘 술에 취해
있기가 일쑤였고 무엇에 쫓기는 듯한 인상이 강했다는, 그 속에서 죽음의 그림자
를 엿볼 수 있었다는 등의 단편적이거나 추상적인 이야기들이었다. 여자의 약혼
자에 대한 구속영장도 취소되었다. 그에게 어떤 숨어 있는 힘이 있었는지에 대해
서는 의혹을 가질 필요도 없었다.
사건 후 일주일이 지나기까지 박이 얻어낸 것은 죽은 자가 남긴 몇 편의 시들
뿐이었다. 며칠 동안 시속에 파묻혀 끙끙거려 보았지만, 그는 그 시들이 무엇을
이야기하려는 것인지 조차 감 잡을 수 없었다. 시는 그냥 시였고, 그는 일선 수
사관일 뿐이었다.

해가 바뀌었고 죽은 자는 잊혀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상술은 수사 이상의 조직망을 갖고 있어서 이십여일만에 유
고집이 출간되었고 시집은 날개돋친듯 팔려나가고 있었다.
박은 시집 한 권을 손에 달랑 든 채 다시 그 언덕길을 걸어 올라갔다. 매일 사
건은 발생하고 있었고, 혼자서 매달려 있기에 그는 너무 지쳐 있었다. 이젠 사건
현장을 철수할 때가 온 것이다. 좋은 시인 한 사람을 발굴했다는 아니 만났다는
기분만이 헐거운 시집처럼 펄럭이고 있었다.
주인을 잃은 방은 더욱 낯설고 쓸쓸해보였다. 시계소리만이 저 혼자 방을 지키
고 있을뿐, 사물들은 빛을 잃은채 침묵하고 있었다.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책들의 무게가 더욱 안쓰러워 보였다. 박은 들고 있던 시집을 책장 한 귀퉁이에
꽂아 넣었다. 얇은 부피의 시집이 사소하게 자리를 잡았다. 이 시집을 위해서 이
많은 책들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는 책장에 등을 기댄채 눈을 감았다.
"어머니가 첩이였대요. 부모 얼굴도 모른채 외할머니 손에서 자라났대요. 호적
에 올라 있는 큰집과는 연락도 없었나봐요. 자신의 핏줄을 증오한다고 하더군요.
노가다, 미싱사, 선반공, 신문팔이, 안 해본게 없대요. 검정고시로 대학에 들어
왔으니 출세한거죠. 대학 때나 대학원에서나 형편은 마찬가지였어요"
후배 여자아이의 낮은 목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박이 죽은 자에게 미련을 두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둘은 흡사한 구석이 있
었다. 학력과 생활의 방편만을 제외한다면, 그것은 곧 박의 이야기였다. 그 후배
라는 애 말마따나, 부모도 모르던 몸이 검정고시의 학력만으로 경찰에 몸을 담고
있으니 출세한 것이 아닌가?
박은 의자에 몸을 걸친 채 쓸쓸하게 웃어보았다.
컴퓨터가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끝'이라는 단어를 그 속에 입력시켜놓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다. 어쨌든 이것
으로 그와 나와의 만남은 끝이 아닌가?
박은 전원을 넣고는 화면이 떠오르기를 기다렸다.컴퓨터를 만질 수 있게 된
것은 순전히 민수경의 덕택이었다. 컴퓨터 두 대가 할당되었으나, 그것은 한글이
나 찍어대는 타자기에 다름 아니었다.
"몇 년 더 지나면, 컴퓨터 모르는 사람은 원시인 취급 받게될 겁니다. 최소한
게임은 할줄 알아야죠"
몇 달 동안 게임을 두드리며 컴퓨터를 익혔으나, 그는 곧 싫증을 느끼고 말았
다. 컴퓨터는 흥미를 유발시킬지는 모르겠지만, 온기를 전달해주지는 않았기 때
문이다. 성격 탓이었다.
박은 자판기를 두드려 보았다. 박사님들은 컴퓨터에 무엇을 내장시키고 있는지
가 궁금하였다. 혹시 재미 있는 게임이라도 있으면 복사를 해서 며칠 동안을 소
일할 작정이었다. 반장이 눈치를 보이며 또 닥달을 하겠지만.
그러나 그 속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화면만이 허옇게 배를 드러내고 있을 뿐
아무 것도 내장되어 있지 않았다.
혹시?
그는 중요한 것을 빠뜨렸다는 생각들에 쫓기며, 허겁 지겁 주인집의 전화기를
들었다. 허탈감과 자책감에 얼굴을 들 수 없을 지경이다. 반장의 사기그릇깨지는
듯한 목소리가 당장이라도 수화기 속에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초동수사에 초
자도 모르는 이 얼빠진...,책임 지고 옷 벗어, 당장'
"나야, 나, 박 형사라구. 거기 민수경 있나? 있으면 빨리 바꿔줘... 응, 민이
냐? 컴퓨터 재생할 일이 있으니까, 빨리와 봐. 급한 일이다. 여기? 죽은 K자췻방
이야. 잔 말 말고 디스켓들 들고 빨리 튀어와"
민 수경이 프로핏 디스켓 한박스를 들고 투덜거리며 방으로 들어온 것은 삼십
분쯤이 지나서였다.
"고장은 아닌데요. 누군가 일부러 지워버렸네요.재생해보라구요?...... 안되
는데요. 패키지들까지 완전히 날려버렸어요.좀 만질줄 아는 사람 짓이네요......
죽은 사람이 직접 날린 게 아니냐구요? 미쳤어요? 멀쩡한 집 두드려 부수는 것과
똑같은데, 기껏 공들여 지은 집 허무는 사람 봤어요?"
박은 컴퓨터의 하드웨어와 죽은 자가 남긴 백여장의 디스켓들을 민수경의 편
에 실려 보내고는, 나머지 방들을 샅샅이 뒤져보았다.컴퓨터가 비치되어 있는 방
은 총 다섯개였다. 그러나 그 기계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혐의를 지울
수는 없는 일이다. 요즘 학생들은 개인적으로 컴퓨터를 소유하고 있지 않다 하더
라도 그 정도의 조작은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박은 무엇인가의 꼬리를 밟고 있다는 생각을 하였으나,그 꼬리가 어떤 모습인
지를 전혀 감 잡을 수가 없었다. 그 컴퓨터 속에 어떤 비밀이 숨어 있는 것 만은
분명하다. 그래서 그 비밀과 관련된 어떤 누군가가 이 방으로 스며들어와 컴퓨터
의 내용물들을 지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살인을 불러일으킨 것이다.무엇이 저
장되어 있었던 것일까?
꼬리는 엉뚱한 곳에서 또 모습을 드러냈다. 민수경이 가지고 간 백여 장의 디
스켓 중 네 장이 완전히 지워져 있었다. 그것 역시 재생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단서는 그 플로피 디스켓들에 남아 있었다. 내용물을 잃어버린 디스켓 표면의 색
인표가 사람들을 비웃듯 의젓한 모습으로 달려 있었다.
-논문1:서론,본론 논문2:본론 논문3:본론,결론 논문4:참고문헌-
박은 논문의 내용과 제목을 알아보기 위해 A대학으로 전화를 걸었다.
통과가 되지 않은 상태라 논문의 내용은 남아 것이 없으나, 논문의 제목과 목
차는 찾아볼 수 있으니 팩스로 받아보라는 대답이었다.팩시밀리가 느리게 움직이
며 몇 개의 암호같은 문장들을 찍어냈다.
'친일문학을 통해서 본 한국현대문학의 서자적 배경'
(親日文學을 通해서 본 韓國現代文學의 庶子的 背景)
'-수하(水下),K**를 중심으로-'

'K**씨를 중심으로'라는 부제가 은유의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박의 눈길에 달라
붙었다. 제목 밑의 부제가 무엇인가를 시사해주는 듯하다.
K라는 성씨는 남한 인구중 총 천여명에 불과하다고 하니, 좀처럼 보기 드문 성
씨이다.조선 중엽에 귀화한 여진족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한다.
"수하(水下),K**"는 1930년대를 풍미한 소설가였다. 고등학교 국정교과서에서
그의 글을 본 적이 있으나, 그가 친일문학을 했다는 사실은 금시초문의 일이다.
그러나 죽은 K가 자신의 친족일 K**를 중심으로 친일문학을 파헤치려 했다는 것
을 이해해주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K는 자신의 핏줄을 증오한
다고 하였다. 그는 말하자면 서자였다. 어머니는 그를 낳은 뒤 이 년 후 행방불
명 되었고, 얼굴도 모르는 부친과 큰집 식구들은 그의 나이 열 살 때 브라질로
이민을 떠나버렸다. 외할머니 손에서 자라난 고아나 다름 없던 첩의 자식.
죽은 K와 소설가 K**. 이 두 사람의 동일한 성씨 속에는 묘한 은유가 숨어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것이 어쨌다는 말인가?
성 같다고 해서,죽은 자가 자신의 성을 증오했다고 해서, 그리하여 자신의 친
족일 한 소설가의 친일성을 파헤치려 했다고 해서,그런 이유들이 사건과 무슨 관
계가 있다는 말인가 ?
박은 다시 끈적끈적한 수렁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 속에서 무엇
인가가 그의 발목을 붙잡은 채 매달리고 있는데, 그는 허우적거리고만 있을 뿐이
다. 감은 잡히지만, 잘못 빠져든 것이다.
그날 하루를 프린터기 앞에서 한참을 끙끙거리던 민수경이 다음 날 아침 한아
름 분량의 컴퓨터 용지를 들고 왔다. 죽은 자가 디스켓 속에 남긴 시와 잡문들이
었다.
- 내가 사랑하는 것은 결코 그녀는 아니다. 나는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대상을
사랑하고 있을 뿐이다.
- 이제 더이상, 이상이는 싫어. 마약같은 존재야. 냄새가 나. 지성이 썩어들어
가는 음흉스러운 산문들일 뿐이야.
- 시의 끝은 절망이다. 나는 이제 나의 시를 폐기처분하련다.
- 혁명이 아니면 자살이다. 그러나 용기가 없다.
박은 타인의 일기장을 훔쳐보듯 불안한 눈길로 종이들을 더듬어 나갔다. 생의
마지막에 다다른 절망의 기록들이었다. 굳이 타인의 손을 빌리지 않았다 하더라
도 스스로 자신의 삶에 마침표를 찍고 말았으리라는 느낌들이 서늘하게 와 닿았
다. 그런 느낌들은 컴퓨터 용지의 분량이 줄어들수록 더욱 심해졌다.
그때 박의 눈빛이 불을 튀기는 섬광처럼 빛났다. 그는 낮은 신음을 토해내며
종이들을 거꾸로 뒤져나갔다.

- 그에게 미안할 뿐이다. 그의 조부라고 한다.

박은 두명의 이형사들과 함께 A대학 근처를 배회하였다.
정문 앞에서 십여명의 학생들이 시위를 하고 있었다. 구속학생들의 석방을 위
한 시위였으나, 전경들이 출동하지 않고 있는 소수의 깃발이 쓸쓸해 보였다. 어
제 오후에 A대학과 H대학 학생들의 **당사 점거농성이 있었고, 한 시간여의 소란
끝에 모두 체포되었다고 한다. 그 속에서 그 여자 후배아이의 모습이 스쳐 지나
갔다.물과 최루탄 가스에 범벅이 되어 두명의 전경들에게 끌려 나오는 모습이 화
면에 잠깐 클로즈업 되었었다.
"분노요? 분노없는 청춘이 어디 있겠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깃발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K**는 당구장에 있었다. 자취방에 들어오지 않고 친구집을 전전하였을 그의 행
색이 초췌해 보였다.
"왜 이러십니까?제가 K선배를 죽이기라도 했다는 말입니까? 알아보셨지 않습니
까? 저는 그 시간에 과 친구들과 술자리를 하고 있었단 말입니다" 알리바이를 주
장하는 목소리는 당당했으나, 눈길은 불안을 감추지 못한채도망치고있었다.
박은 K**의 팔을 힘주어 잡았다.
"알아봤지. 자네 말대로 자네는 친구들과 함께 있었어. 모두들 취해 있었고 들
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자네는 잠깐 화장실을 다녀온 것으로 되어 있었지.
하지만 그중 전혀 술을 하지 못하는 친구가 한명 있더군. 그 친구 말대로라면,자
네에게는 화장실을 다녀오기까지 사십분 정도의 공백이 있었더군. 우연의 일치인
지 아니면 운명의 장난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공교롭게도 그 술집은 자네 자취방
까지 걸어서 십분, 그러니까 왕복 이십분, 아니 뛰어갔다 내려왔다면 시간은 그
반밖에 걸리지 않을 거리였어"
"그렇다면 증거라도 있다는 말입니까?있으면 대 보세요"
박은 들고있던 서류봉투 속을 뒤졌다. 침착하였지만 머뭇거리는 손동작이었다.
이것은 감일뿐이다. 그런데 그 감이 흔들리고 있다. 용의자가 부정한다면 이것은
증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을 놓치면 사건은 영원히 서류로만 남
겨져 캐비넷 속을 겉돌게 될 것이다.
박은 내용물이 비어있는 디스켓 네장을 K**앞에 던져 놓았다.
"여기에 남아있지,자네의 흔적이"
반응은 생각보다 빨리 나타났다.
K**는 두손으로 얼굴을 가린채 흐느끼기 시작했다.
박은 울고있는 그에게 담배를 건넸다. 잔뜩 조여 놓았던 긴장이 풀려 나가는
탓에 자신도 담배를 피우고 싶었다.
"왜 그랬지?"
"죽이려고 했던건 아닙니다.정말입니다. 아니,사실은 제가 죽인게 아닙니다...
그런데 결국은 제가 죽인 겁니다"
울음을 멈춘 K**는 담배연기를 깊숙이 들여 마시며 횡설수설을 하고 있었다.
"K**선배와 저는 친 형제나 다름없었죠. 저희 성을 가진 사람들이 몇명 되지
않았기 때문에 쉽게 친해질 수 있었죠. 그런데 형이 저희 할아버지에 관한 자료
를 부탁한다고 하더군요. 할아버지는 소설가였어요. 저는 그런 할아버지를 늘 자
랑스럽게 생각해왔죠. 그런데 알고보니 선배가 쓰고 있다는 논문이 할아버지의
친일문학에 관한 것이었어요. 제발 그러지 말아 달라고 매달렸죠. 눈물을 보이면
서까지 말입니다. 설령 그가 민족반역자였다고 할지라도, 도대체 자기 할아버지
와 다름없는 사람을 폭로해서 뭘 어쩌자는 말인지... 선배가 가증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죽이기로 결심한거군.머리카락과 지문조차 남기지 않았으니"
"아닙니다. 머리카락과 지문이 남지 않았다는 건 제가 그날 빵모자와 장갑을
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계획적인건 절대 아닙니다. 그건 우연한 사고였습니다.
저는 단지 디스켓들만을 지우려고 했을 뿐입니다. 하드의 패키지들까지 날린건
아마 제가 너무 조급했기 때문일겁니다. 그런데 선배가 들어오더군요.제가 뭘 하
고 있었는지도 모르면서 절 죽여버리겠다는 거였어요. 정말 저를 죽일 기세였어
요. 많이 취해 있었던 것 같아요. 저는 옆에 있던 칼을 들어 그에게 내밀었죠.
그건 위협일 뿐이었어요.그런데 형이 달려와 그 칼에 꽂혀버리는 거예요. 저는
정말 손에 들고있을 뿐이었어요.저는 정말..."
박은 K**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며,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죽여버리겠다는게 아니라,죽어버리겠다는 거였을 거야,아마.'

박은 지친 몸을 의자속에 구겨넣은채 책상 위를 내려다 보았다. 김순경의 청첩
장이 책상 한 귀퉁이에 무심하게 던져져 있었다. 한달 후에 결혼을 한다고 한다.
봄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는 그녀의 밝은 웃음이 눈송이의 젖은 물기처럼
축축하게 남아있다.
박은 새끼 손가락으로 타자기의 자판을 천천히 두드려 보았다.
사.람.들.은.모.두.꿈.을.꾸.고.있.나.보.다.그.리.고.사.람.들.은.모...
그는 청첩장을 안주머니에 집어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명의 고등학생들이 젊은 이형사에게 취조를 받고 있다. **동모녀강도, 살인
사건의 용의자들이다. 동기는 만 원짜리 지폐 다섯장이었고, 현장은 참혹했다.
그들에겐 죄의식이 없었다. 조서용지만이 파지를 날리고 있었다. 박은 우산을 펼
쳐들고 거리로 나왔다.
어둠이 먹물빛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 위를 뽀얀 분말의 눈송이들이 흰
덧칠을 하고 있다. 사람들의 느린 걸음들이 함께 휘날리고 있다. 유난히도 눈이
많은 겨울이다.
박은 약국으로 들어가 약 한 첩을 주문하고는,골목을 돌아 나와 부근의 극장으
로 들어갔다. 몸살이 젖은 가래처럼 끈적 끈적하게 고여있다. 너댓 명의 젊은 아
이들이 난로 주변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음담패설을 나누고 있었다.
그는 객석으로 들어가 맨 끝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영화는 벌써 반 넘게 진행중이었다.화면에는 육십년대의 비가 내리고 있었고,
연기자의 동작과 성우의 목소리가 힘겹게 엇갈리고 있었다.영화는 지루했다.
멀어지는 화면속으로 졸음이 나른하게 밀려왔다.
그 속으로 누군가가 걸어 들어와 박의 옆자리에 기대 앉았다.
박은 얼핏 고개를 돌렸다. 순한 초식동물 같은 얇은 인상이 희미한 빛속에서
얼룩거리고 있었다.
이 사람을 언제 보았던 것일까?언제 함께 시간을 나누어 가졌던 것일까?
큰 가방을 어깨에 짊어진 채,그 무게 만큼의 삶을 힘겨워하며 극장 안을 들
어서던 사내,늘 맨 끝 자리에 앉아 소줏잔을 홀짝거리며 취해 있던 사내,영화가
끝나고 사람들이 모두 돌아가 버리고 나면 혼자 남아 울고 있던 사내.
"뭐가 그렇게도 슬픈 겁니까?"
박은 혼잣소리를 중얼거리며 의자 깊숙이로 몸을 밀어 넣었다.
어떤 목소리가 내레이터의 음성처럼 무겁게 울려오고 있었다.
"저 모든 것들이......,슬프기 때문입니다."
박은 천천히 깊은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들통난 완전범죄
by D. M 디즈니


그는 천천히 손을 떼면서 일어나 아내를 내려다 보았다. 아내는 꿈쩍도 않
고 옆으로 누워 있을 뿐... 죽었으니까 당연하다. 지금 자기가 교살한 것이
다.
한 발 뒤로 물러서서 의례적으로 방 안을 휙 둘러 보았다. 블라인드가 열
려 있었다. 공터로 향해 있는 창문이긴 하지만 재빨리 블라인드를 닫았다.
다리가 휘청거렸다. 잠깐 침대에 엎드려 보았지만 할 일이 시급하여 초조
한 마음뿐이다.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집어 들고 불을 붙였으나 두어 모금
빨고는 그냥 꺼 버렸다. 혓바닥이 바짝 마르고 심한 갈증을 느꼈다. 일어서
서 세면대로 물을 마시러 나갈 기운도 나지 않았다.
연거푸 물 두 컵을 마시고 나니 기분이 좀 가라앉고 정신이 드는 것 같았
다. 떨리는 손도 한결 나아졌다. 시계를 보니 오후 3시. 8월 초순의 금요일
로서 휴가가 시작되는 날이다.
20분쯤 전에 그가 집에 돌아 왔을 때, 아내는 짐을 꾸려놓고 옷을 갈아 입
을 채비를 하고 있었다. 휴가 여행의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부터 아내는 원하던 대로 어디오건 여행을 떠날 것이다. 아내가 꿈꾸
던 것과는 다른 여행이긴 하지만.
며칠 전부터 살인과 그 후의 처리에 대해 면밀한 계획을 세웠던 그는 "빠
르면 빠를수록 좋아"라고 중얼거리며 세면소를 나왔다. 우선 제빙회사에 가
서 드라이 아이스를 사야한다. 18개나 혹은 20개 정도 필요할 것이다. 서둘
러야 겠다.
문을 잠그고 차고에서 차를 꺼냈다. 제빙회사에서 드라이아이스를 살 때,
내가 사는 양이 너무 많아 무엇에 쓰느냐고 물을지도 몰라. 그러면 교회에
서 피크닉을 가는데 쓴다고 해야지 라고 대답할 말을 생각해 놨으나 얼음계
원은 그 양에 대해 물어 보지도 않고 원하는 대로 잘라 주었다.
집으로 돌아와 자동차를 차고에 넣고 방 안에 들어가 보니 웬지 나갈 때와
상태가 달라져 있는 것 같았다. 짧은 시간 동안 집을 비웠지만, 아무도 없
는 빈 집의 조용함과는 다른 기분이었다. 죽음의 정적이 방 안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당연한 거야'라고 스스로 위로하며 용기를 내어 작업을 시작하였
다. 아내의 시체는 침대 옆에 모로 뉘어져 있었다. 아까 그대로의 상태였
다.
아내를 가만 들여다보니 또다시 몸이 떨려오는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벌
떡 일어나 앉을 것 같아 무섭기도 했다. 그는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다. '빨
리 서둘러야 해' 그렇지 않으면 낭패가 될지도 몰라'
빠른 걸음으로 지하실로 내려갔다. 미리 준비해 둔 나무 상자가 있었다.
아내의 신장과 체중과 또 드라이 아이스를 넣을 수 있는 여유분을 계산해서
상자를 재어보니 뚜껑이 잘 닫히지않을 것 같았다. 나무상자 안에는 로프와
옷과 망치가 들어 있었다.
그는 침실로 돌아와 아내의 의복과 준비물을 챙겼다. 아내는 자색으로 변
한 얼굴에 눈을 뜬 채로 죽어 있었다. 섬ㄳ하여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 없
었다. 교살할 때 사용했던 스타킹도 벗겨냈다. 나중을 생각해서 단서가 될
만한 것은 모두 없애고 홑이불 하나를 벗겨 시체를 싸서 묶으니 어깨에 메
기가 한결 수월했다.
주위를 살펴 보았으나 역시 조용하다. 다행히 집은 교외에 있기 때문에 인
가는 꽤 떨어져 있었다.
지금부터 2-3분 간은 더욱 위험한 시간이라고생각하며 크게 숨을 내쉬었
다. 지하실로 내려가서 나무상자에 담요를 깔고 시체를 넣었다. 상자는 시
체보다 작은 치수였다. 그래서 시체의 무릎을 꺽어 턱 밑에 대고 집어넣으
니 들어갔다. 둘레에는 드라이 아이스를 집어 넣었고, 그래서 상자의 여분
은 모두 채워졌다.
이제 힘든 일은 끝난 셈이다. 나무 상자의 뚜껑을 닫고 못질을 했다. 그는
원래 늘씬한 체격이었으나 중년이 되면서 몸이 불어 뚱뚱해졌다. 그래서 일
하는데 무척 불편하였으나 그렇다고 쉴 수는 없어 땀을 뻘뻘 흘리며 작업을
끝냈다.
시내까지는 금방이면 도착하니까 로프로 나무 상자를 묶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나무 상자를 멀리까지 싣고 갈 수는 없을 것이다. 주 경계에서
검열이 있을 테니까. 지난번에도 사업 차 지나는 길에 주 경계에서 자동차
트렁크를 열어 보라는 검열관의 명령을 받은 경험이 있었으니까.
나무 상자는 급행 철도 편으로 부치면 된다.
집 안으로 들어가 고무장갑을 벗어 버리고 아내의 슈트 케이스와 화장도구
그리고 자켓 등을 챙겨 밖으로 나와 현관 문을 잠궜다. 이제 여행을 떠날
준비는 완료되었다. 차고에서 자동차를 꺼내 도로 변에 내다 놓았다.
이 시각이 오후 4시 40분. 휴가 여행이 시작되었다.
통운회사의 사무실에서 직원이 나와 자동차에서 나무상자를 내리는 것을
도와 주었다. 상자는 몹시 무거웠다. 그래서 그는 책이 들어 있어 그렇다는
설명을 붙였다.
부치는 사람의 이름은 가명으로 하고 수취인은 낚시를 할 때 배를 빌였던
이름으로 기입했다. 나무 상자의 운송지는 낚시배가 있는 호수 가까이의 시
내로 정했다.
2-3일 후면 그곳에 도착할 것 같았다.
그로부터 몇 분 후, 그는 통운회사에서 나와 차를 몰고 북으로 향했다.
8시 경이 되어 식사를 해야겠기에 도로변에 차를 세우고 한 레스토랑에 들
어갔다. 진토닉을 시켜 두 잔을 마시고 나니 긴장이 푸리면서 갑자기 배가
고팠다. 생각해 보니 하루종일 아무 것도 먹지 않은 것 같았다.
식사 중 어둠이 밀려왔다. 여행 중에는 언제나 그러했듯, 완전히 어두워
지기를 기다려 모텔을 찾았다. 그가 원하는 모텔은 휴가 여행의 동행으로서
아내가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곳이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
텔의 사무실이 너무 정면에 있어서는 곤란하다.
그날 밤, 조건에 맞는 모텔을 발견했다. 그는 더블 베드의 방을 얻어 본명
으로 숙박부에 부부가 함께 투숙한 것으로 기재했다.
방에 들어 가서는 연기를 했다. 자기와 아내의 양복 모두를 꺼내 놓고 아
내가 함께 있는 것처럼 큰 소리로 얘기를 했다. 화장대 위에는 아내의 머리
핀도 하나 얹어 놓았다.
침대 속으로 들어가니 하루의 피로가 엄습하여 금방 잠에 빠져 들었다.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아직 6시가 채 되지 않았다. 느긋하게 휴가 여행
을 즐기는 사람이 기상하기에는 이른 시각 같아서 그냥 가만히 엎드려 있었
다.
어저께의 일이 생생하게 떠 올랐다. 혹시 미비한 점이 없었나 하고 생각해
보았으나 모든 것은 완벽했고 만족할 만했다.
문제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시체는 지금쯤 안전하게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을 것이다. 최종적으로 시체를 버릴 호수 근처에는 인가도 별로 없고 몇
척의 낚시배만이 있을 뿐이다.
월요일부터 2주일 간 낚시배를 쓰기로 이미 계약해 놓았고 통운회사의 화
물 통지서는 월요일이면 도착해 있을 것이므로 호수에서 30마일 떨어진 우
체국에 가서 찾으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워 있는 채로 생각은 계속 꼬리를 물었다. 낚시배의 열쇠도 받아야 하겠
고 식료품도 사다 놔야 되겠군. 참 뗏목을 만들 재료도 사야지. 그리고 망
치와 옷등을 사서 배 있는 곳에 갖다 놔야지.
그리고 화요일에는 통운회사에 가서 나무 상자를 인수해 와야지. 최악의
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으므로 그 다음 일을 계획했다.
저녁 때까지는 뗏목을 완성시켜 매어 놓아야겠군. 시멘트를 반죽하여 시체
가 든 나무 상자의 뚜껑을 열고 시체의 아래 위 그리고 옆 주위를 바르는
작업도 그리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을 거야.
시멘트 굳기에는 6시간이 걸릴 것이다. 뗏목에 나무 상자를 싣고 배에 묶
어 호수 한가운데까지 가서 나무 상자를 호수 속으로 버리면 아내는 시멘트
관에 묻혀 영원히 잠들겠지.
그 다음 남은 일이라면 뗏목과 석유램프 등 모든 것을 부수어 없애고 하루
이틀 더 쉬다가 이제 그만 휴가가 끝나기 전에 돌아가야겠다는 구실로 배를
열쇠와 함께 주인에게 돌려주면 모든 것은 깨끗이 끝난다.
이 예술적인 세공을 생각만 해도 웬지 기분이 밝아지는 느낌이다. 마치 아
내가 다시 살아나 자기의 모든 죄가 면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도로변에서 신문을 보았으나 시체가 든 나무 상자에 관한 기사는 없었다.
엽서를 사서 '즐겁게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써서 부부의 이름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띄웠다.
3일째 되는 날 밤의 모텔은 목적지에서 20마일 떨어진 곳에 정했다. 잠에
떨어 졌다가 깨어 보니 새벽이었다. 일어나서 방안을 이리저리 걸어 다니면
서 해 뜨는 광경을 지켜 보았다. 빨리 행동을 개시해야 겠다는 생각을 했지
만, 사람들이 모두 움직이는 시간까지는 모텔의 방에 쳐박혀 있는 수밖에
없었다.
9시에 목적지인 호수에 도착하니 상가는 이제 문을 여는 중이었다. 낚시배
를 빌린 사람에게 가서 나머지 요금을 지불하고 열쇠를 받았다. 모두들 호
수의 아름다움을 얘기하면서도 통운회사에서 시체가 든 나무 상자가 발견
되었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다음 역으로 갔다. 차 안에 앉은 채로 긴 차고와 같은 역사(驛舍)를 둘러
보았다. 웬지 주변이 스산한 느낌이었다. 주차장에는 2-3대의 다른 자동차
가 대어 있었다.
그는 역 뒤에다 차를 주차 시켜 놓고 커피를 마실 수 있도록 마련해 놓은
간이식당에 들어가 앉아 의도적으로 종업원과 잡담을 하였다. 그곳에서도
역시 시체가 든 나무상자가 발견 되었다는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
안심이다.
이제 화물 통지서를 받아서 나무상자를 찾기만 하면 된다고 자신에게 위로
하면서 식당을 나왔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 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과 함께.
이 단계까지 가서 일이 안될 리는 없지... 체포되는 살인범들은 모두가 사
전 계획이 치열하지 못했던 때문이야...라고 중얼거리면서.
우체국 창구에 가서 직원이 내어 주는 통지서를 받았다.
갑자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통지서엔 나무상자라고 쓰여져 있었다. 떨
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차에 오르면서 그는 굳게 마음을 먹었다. 앞으로 24
시간 후면 일은 감쪽같이 끝난다. 다 잘 되어 가고 있다.
이제 통지서를 통운회사의 사무실에 내어 주고 나무 상자를 인수 받으면
된다.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 일을 상상만 하는데도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리니 참으로 이상했
다.
통운회사 사무실에는 장부를 기입하는 직원 한 사람만이 창구에 있었다.
그 직원은 눈을 들어 "안녕하십니까"라고 밝게 인사했다. 그는 통지서를 내
밀었다. 이름을 확인하던 직원은 순간 표정이 굳어졌다.
순간적이었으나 상대의 경계를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몸을 돌려 도망
을 쳐야 겠다고 하는 순간, 제복 차림의 경찰관 세 명이 다가섰다. 그 중
한 사람의 손에는 권총이 쥐어져 있었다.
몇 시간 후, 그는 부정과 항의를 거듭 하다가 결국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말았다. 그러면서 자신의 계획이 매우 서툴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신은 드라이 아이스를 너무 많이 넣었어. 그 때문에 책 상자가 꽁꽁 얼
어 버렸지"라고 경찰관은 말했다.
"거기다 시체를 둘러싼 담요가 2중의 효과를 냈지. 냉기를 전도해 주는 동
시에 드라이 아이스의 증발 속도를 지연 시킨 것이지. 어젯밤, 나무 상자가
도착 했을 때, 통운회사 직원이 <책을 넣은 상자의 한 쪽이 왜 서리가 끼었
을까>하고 의심스러워 경찰에 신고해 왔지. 결국 당신은 그다지 영리하지
못했어, 어때? 아니면 당신의 지혜가 너무 지나치게 좋아서였나, 너무 정성
을 많이 들인 탓인가?"


- The End -





한여름밤의 킬러

by 강형원


카페 출입문이 열리면서 사내 하나가 나타났다.
손님이 오기에는 좀 이른 시간이어서 조금 전까지만해도 입을 쩍쩍
벌리면서 하품을 해대던 웨이터가 용수철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는 쟁반에다 엽차잔을 받쳐들고 사내가 자리를 잡고 앉은 구석진 테이
블로 다가갔다.
"뭘로 드시겠습니까?"
그러나 사내는 테이블 위에 너댓개의 석간 신문을 펴놓고 하나씩 그
것들을 펼쳐볼 뿐 도대체가 응답이 없었다.
"손님을 기다리시니까?"
웨이터가 한차례 더 묻자 비로소 사내가 고개를 들어 이쪽을 바라보
았다. 웨이터는 흠칫 놀라 뒷걸음질 쳤다. 웨이터의 앳되보이는 얼굴
이 순식간에 공포로 물들었다. 사내의 뱀처럼 가늘게 찢어진 눈빛이
몸에 닿는 순간 마치 자기몸이 면도날로 오려져 두쪽이 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웨이터는 쭈뼛쭈뼛거리다 뒷걸음으로 자기 자리로 겨우 돌
아왔다. 살기(殺氣)다. 웨이터는 몸을 떨면서 중얼거렸다. 눈빛만이
아니었다. 백지처럼 창백한 얼굴, 한일자로 굳게 닫힌 가늘고 차가운
입술 , 거기다 빰에는 세로로 길게 칼자국까지 나있었다. 그렇게 무시
무시한 얼굴은 웨이터 생활 이후 처음이었다.
사내는 신문을 하나씩 펼쳤다.
다른 것들엔 눈길이 가지 않았다. 오로지 토막광고만 살펴보고 있었
다. 신문쪽을 넘기던 그의 빠른 손길이 딱 멈췄다. 드디어 그가 기대
하던 것을 찾아낸 듯 했다.
<흰점 살모사. 급매도. 407-6885>
사내의 입술 주변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지면서 얼음처럼 차가운 미소
가 떠올랐다.
조직이 지금 자기를 찾고 있었다.
직업이 직업이니만치 그들 조직은 점조직이었다. 전화번호는 수시로
바뀌었고 서로간의 연락은 신문토막 광고로 이루어졌다. 그러잖아도
손이 근질근질 거리던 참이었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큰키였지
만, 군살이 없는 근육질의 건장한 몸매 였다. 사내는 천천히 공중전화
박스로 걸어갔다. 송수화기를 들고는 뱀처럼 빛나는 눈초리로 주위를
돌아다 보고는 아무도 없음을 확인 했다.
신호음이 몇번가더니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다.
"케이 아이 엘 엘 이 알이다(Killer)" 사내가 또박또박 말을 끊으며
말했다.
"오랫만이다. 킬러"
"정말 그렇군. 오늘에서야 비로소 신문광고를 읽었다."
"오리엔트 호텔 커피솝 카운터에 키를 맡겼다. 키를 찾아 잠실 전철
역으로 가라 행운을 빌겠다."
상대는 짤막하게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사내는 수화가를 내려놓고는 카페를 나섰다. 밖은 무더웠다. 태양이
그를 삼키기라도 할 듯 혀를 낼름거렸다. 사내는 오리엔트 호텔 커피
숍 카운터에 가서 키를 찾았다. 그리곤 잠실 잔철역으로 갔다. 사내는
매표소 부근 무인 화물 보관대애서 호텔 커피솝에서 찾아쥔 열쇠로 보
관함을 열었다. 거기엔 서류봉투 하나가 들어 있었다. 사내는 ㅜ근 다
방으로 들어갔다.
서류봉투에는 이번 임무와 그것에 대한 정보, 그리고 착수금이 들어
있었다.
사내는 타이핑된 임무를 세번쯤 반복해서 읽었다.
드디어 일거리가 생겼다. 몸에서 갑자기 생기가 용솟음쳐 올라왔다.
남자란 일이 있어야하는 법이다. 그동안 빈둥빈둥 놀다보니까 몸에 살
이 찌고 머리속은 늘 잡념으로 가득찮었다. 그는 즐겨 애용하던 사우
나로 가 벌거벗고 몸을 담궜다. 사내는 새로 임무가 떨어지면 그때부
터는 만사 제쳐두고 휴식에 들어간다.
그는 눈을 감고 흘러내리는 땀을 닦았다.
사내는 비록 은밀하게 퍼지기는 했지만 이 바닥에서는 1급으로 소문
이 자자했다.
그러나 쉽게 베테랑에 오른 것은 결코 아니었다. 남모를 고초와 수없
이 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뒤에야 비로소 오늘의 위치를 잡게 된 것이
다.
처음 그가 취직한 곳은 무허가 심부름센터였다. 거기서 남의 빚을 대
신 받아주는 일, 소위 해결사 노릇을 했다. 어느날인가 동료 하나와
함께 그로서는 첫 영업을 나갔다. 채무자 집에 도착했다. 안주인이 문
을 열어주자 예행연습했던 대로 신발을 신은 채 쿵쾅거리며 거실을 지
나 안방문을 이마로 박치기해서 열 참이었다.
단방에 문이 열려야 한다.
만일 그렇게 되지 않으면 채무자에게 위력을 보여주기는 커녕 비웃음
을 사기 딱 알맞고 거기다 그의 이마빡이 성하지가 못할 것이다. 그동
안 심부름센타 고참의 감독하에 이부분의 예행연습을 무수히 한바 있
었다. 그는 우렁찬 기압소리와 함께 몸을 뒤로 한껏 젖히고는 문에다
김일처럼 이마를 들이박았다. 어찌나 충격이 강했던지 문이 단방에 열
린 것까지는 좋았는데, 문에 닿은 것이 아니라 그만 코쪽이었다. 그의
몸은 방문과 함께 안방바닥으로 쑤셔 박았다. 그는 아예 감각조차 없
는 코를 두손으로 싸맸다. 코피가 방바닥에 주르르 흘러 떨어졌다.
스타일이 말이 아니었다.
안방 이불 위에 누워 있던 채무자가 벌떡 일어났다.
그는 아픈 코를 쥐고는 그래도 정신을 차려, 한쪽 눈을 감고 온갖 불
량한 폼을 다 잡고는 채무자를 쏘아 보았다. 그러나 그게 하나도 먹혀
들어가지 않았다. 사실 이 부분에 보스의 책임이 컸다. 채무자가 프로
레슬러라는 사실을 귀뜸이라도 해주었어야 했다. 자기 두배쯤 되는 채
무자는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이단 옆차기로 그의 얼굴을 강타했
다. 눈에서 별들이 수없이 튀었다. 쓰러진 그에게 채무자는 넉사자(四
字)굳히기로 들어가더니 이어서 틈을 주지 않고는 코브라 트위스트로
허리를 꺽기 시작했다. 눈 잎이 보라색으로 변했고 사타구니에서는 생
땀이 났다.
채무자는 그것으로도 성이 차지 않았던지 방 한쪽에 있는 테이블 위
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야호소리를 외치면서 사내의 몸 위로 고릴라 같은 자신의
몸을 던져 버렸다. 인정사정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자였다. 그는
그날 완전히 빈대떡이 돼버렸다. 성한 몸을 이끌고 그집을 도망쳐 나
온 것만도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두 번째 영업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사람을 내쫓는 일이었다.
고객은 담보로 아파트를 잡았는데, 채무자가 빛을 갚지 않으니 아파
트에서 채무자를 내쫓아 달라는 의뢰를 해왔다. 그는 전번 일을 교훈
삼아 사전 조사를 철저히 했다. 다행히 상대는 운동과는 담을 쌓은 30
대 후반의 허약체질 소유자 였다. 그리고 60대 후반의 노부모와 이제
겨우 대여섯 먹은 아이들 둘이 가족의 전부였다.
그는 이번에는 실수없이 모든 일을 다 처리했다.
이마로 안방문을 정확히 열어 젖혔고, 온갖 흉악한 인상을 얼굴에 담
아 상대에게 혐오감과 공포심을 심어 주었다. 그들 일행은 살림도구를
하나도 남김없이 아파트 밖으로 내동댕이쳐버렸다. 며칠만 참아 달라
고 두손을 싹싹 빌어대는 채무자와 노부모를 포함한 그 가족들도 아파
트 밖으로 내쫓았다. 일은 순조롭게 마무리 되는 듯 했다.
그러나 이틀도 채 되지 않아 사내는 골치 아픈 일을 당해야만 했다.
퇴근하여 집에 도착해보니 마당에 난데없는 천막이 쳐져 있었고, 안
방에는 노인네 둘이 큰 대자로 누워 있었다. 며칠 전 그가 아파트에서
쫓아냈던 그 사람들이 아예 살림도구를 싸가지고는 그의 집으로 쳐들
어왔던 것이다.
"이제 얼마남지 않은 목숨. 내 명에 죽나 네 손에 죽나 어차피 마찬
가지니까."
노인네들은 이미 죽기를 각오하고 있었다.
남이 의뢰한 일은 부담없이 처리하던 그도 막상 자기 앞에 일이 벌어
지자 난감하기만 했다. 다음날부터 꼬마들이 제멋대로 놀아나 화단을
깡그리 망가뜨렸다. 거기다 마당은 천막과 각종 살림 도구로 너저분했
고, 안방은 노인네가 차지해 버려 그의 가족들은 건넌방으로 피신할
수 밖에 없었다. 일주일도 채 못돼 그는 빚을 내 무단 침입자에게 조
그만 사글세 방을 하나 마련해 주고서야 비로소 그들을 내보낼 수 있
었다.
세상에 쉬운 일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의 심부름센터는 큰 빛을 보지도 못하고 문을 닫았다. 그들은 전
업을 했고, 사내는 손에 피를 묻히는 일로 먹고 살게 됐다. 보수가 해
결사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이 좋았다. 흠이라면 경찰이 냄새를 맡지
못하게 더욱 신경을 써야 했고, 일의 특수성 때문에 수주(受注)의 한
계가 있어 일거리가 흔치 않다는 점이었다.

그는 저녁 10시 집을 나서기 직전에는 최종적으로 장비를 점검했다.
전번에도 썼던 해머를 다시 손봤다.
그는 총이나 칼 같은 기구를 아주 싫어했다. 총은 소리가 나고 칼은
손에 피를 묻힌다. 그러나 해머는 소리가 나지 않고 피를 묻히지 않으
면서도 상대를 단한방에 빈대떡으로 만들 수 있어 좋았다. 그는 장비
를 승용차 뒤 트렁크에 집어 넣고는 집을 출발했다.
낮에는 구름 한점 없이 맑던 하늘이 밤이 되자 빗방울이 하나씩 떨어
지기 시작했다.
고속도로 서울 톨게이트를 벗어날 때는 빗방울이 제법 굵어졌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음산한 밤이 된 것이다. 일을 눈앞에 두게 되자
갑자기 신이 났고 저도 모르게 콧노래까지 흘러 나왔다.
두시간 가량 달리자 회덕 인터체인지가 나왔다. 5분쯤 더 달려 그는
고속도로 오른쪽 편에 바짝 붙여 차를 세웠다. 임무를 완수한 뒤에 대
전 톨게이트를 통해 대전으로 들어갔다가 유성으로 가 유성 톨게이트
를 통해 서울로 올라 갈 참이었다. 뒤에 경찰이 냄새를 맡아도 그는
경찰 수사망에서 한참 벗어나 있을 것이다. 자정이 이미 넘어섰기 때
문에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량은 뜸했다. 그는 해머를 손에 쥐고는 고
속도로를 벗어나 산길로 접어 들었다. 그리고는 대전 쪽으로 걸어 올
라갔다. 멀리 마을에 켜있는 불빛이 빗속에 가물가물 거렸다.
1킬로미터쯤 걸었을까. 앞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케이 아이 엘 엘 이 알?"
그쪽에서 먼저 물었다.
드디어 소개책과 접선이 이루어졌다.
"어디야?"
"쉿. 백미터 전방이야."
"모두 몇이지?"
그들은 나란히 걸었다. 고속도로 위에 다섯대 쯤의 트럭이 서 있는
것이 어둠 속에사 흐릿하게 보였다. 그 아래 개울쪽으로 30마리쯤의
소가 입마개가 씌워진채 서 있었다. 남자 하나가 갑자기 튀어 나왔다.
첫눈에도 밀도살자 냄새가 짙게 풍겨났다.
"준비는 다 됐겠지요?"
"물론이죠."
"빨리 서둡시다. 오늘은 숫자가 너무 많아요."
그것은 그도 바라던 바였다. 그는 해머를 싸맸던 비닐을 벗겼다. 그
리고는 맨 앞 소부터, 정수리 부분을 힘차게 내리치기 시작했다. 소는
단한방에 고꾸라졌다. 그는 이 방면에 이미 정통해 있었다.

- 끝 -




검은 표적
노 원


서울대학 병원은 민 충신(閔 忠信)을 살리는 일로 해서 발칵 뒤집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앰뷸런스에 실려온 것이 새벽 2시! 총탄이 가슴을 관통했는데
아직도 숨을 쉬고 잇다고 하니 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 사람을 살려야 합니다.이건 온 국민의 소망입니다.
허박사,내 말을 명심하세요.그를 살려야 해요.]

이것이 도대체 몇 번째의 전화든가.그리고 어디 한두 사람만의 전화라야 말이지.
그 중 뻔질나게 전화가 걸려오는 것은 법무장관에게서였다.그 어른 속깨나 타고
있을거라는 생각은 들지만 병원장인 허 준(許 俊) 박사로서는 짜증스럽기만 했다.
한밤중에 뛰쳐나와 수술팀을 편성하고 지휘하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해도 모자랄
지경인데,모두가 한결같이 병원장을 바꾸라고 아우성이다.
[그가 죽으면 국민 감정이 용서치 못해요.내 말을 알아들으시겠지요?
그러니 그를 살려야 합니다.]
애써 억누른 법무장관의 목소리가 귓전에 간절한 울림으로 전해왔다.
[우린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허박사로서는 이 대답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 기도나 올리면서 기다려 주면 오죽이나 좋을까.
[허박사,내가 뭐 도울 일이라도 없읍니까?]
[현재로서는 없읍니다.]
[뭣하면 미국에서 권위 있는 전문 외과의를 불러오셔도 좋습니다.
그쪽에서도 돕겠다고 했습니다.]
[고마운 말이긴 합니다만,지금으로서는 그럴 시간도 없읍니다.]
[여보세요,허박사.그쪽에서 전용기라도 내 줄수 있다고 했습니다.]
[한번 우리 의료진에 맡겨보시죠.우리 의료 기술도 알고 보면
상당히 발달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내가 그걸 왜 모르겠읍니까.국민의 여망이 하도 간절하기에 드리는 말이고,
행여 실수라도 있을까 해서 하는 말이지요.]
[염려 놓으셔도 될 겁니다.]
허박사는 말해 놓고 아차 싶었다.절대로 장담할 성질의 것이 아니잖는가.
총탄이 심장을 건드렸을는지도 모를 일이 아니든가.
[정말 염려를 놔도 되겠소?]
허박사는 더는 대꾸를 아니했다.
[그럼 잘 부탁합니다.]
장관도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전화를 끊는 것이었다.

매스컴도 온통 법석이었다.국내 기자들에 외신 기자들까지 들이닥쳐 병원은 마치
소란스런 연회장과도 같았다.병원은 임시대변인을 두어 민 충신의 수술 경과를
수시로 발표했다.신문의 지면도 텔레비전의 화면도 민 충신의 삶과 죽음에 대해
촌각을 다투어 보도했다.민 충신을 살려야 한다는 국민의 소망은 한결같았다.
국민적인 영웅이라고 한들 민 충신만큼 관심의 대상은 되지 못했으리라.

첫번째 뉴스는 총탄이 심장을 건드리지 않았다는 소식이었다.
[브라보 !]
수상기 앞에 몰려 있던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누구보다도 기뻐한 사람은 높은 사람들에게 시달릴 대로 시달려 온 허박사였다.
[됐어.이젠 살릴 수가 있겠구먼.]
허박사는 기쁜 소식을 전해 준 부속실의 미스 김에게 마냥 감사를 표시했다.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소식에도 사람들은 크게 만족감을 나타냈다.
일단 안도감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민 충신에 대한 관계 당국의 경비 소흘을
문제삼아 맹렬히 들고 일어 나기 시작했다.그를 경비했던 사람들은 낯빛을 잃었고
할말을 잃었다.아무튼 민 충신은 의식을 회복했다.마침내 우리 의료진이
그를 살린것이다.

허박사는 난생 처음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마이크의 수풀 앞에 앉아 수술 경과를
전국에 생방송했다.허박사가 방송을 끝내자 이내 법무장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허박사,수고하셨어요.이번에 공이 큽니다.]
[아닙니다.장관께서 애 많이 쓰셨읍니다.]
[그 사람,의식은 완전히 회복된 거죠?]
[네,회복되었읍니다.]
[말짱하게요?]
장관은 아직도 못 미더운 것일까?
[네,말짱하게요.]
[앞으로 얼마나 지나면 거동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까?]
[아마 열흘쯤 지나면 가능할 겁니다.]
[그렇다면 허박사, 열흘 후에 그에 대한 사형을 집행해도 되겠읍니까?]
[가능할 겁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할 수는 없읍니다.국민 감정이 용서치 않아요.]
[알고 있읍니다.]
[그가 어떤 사람입니까.국가에 대한 반역자가 아닙니까.그런 그에게
자살의 은전을 베풀 수는 없읍니다.스스로 목숨을 끊게 할 수는 없다는 얘깁니다.
그에게는 국가의 이름으로 사형이 집행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응어리가 풀립니다.]
[그래서 그를 살리려고 무진 애를 쓴 것이 아닙니까.]
[그를 살린 건 여간 다행이 아닙니다.]
[총살형으로 집행된다고 들었읍니다.]
[그래야 하지 않겠읍니까.그의 행동에 대한 상응한 보답입니다.]
한순간 허박사의 시야에 가슴에 검은 표적을 달고 총살대 앞에 선 민 충신의 모습이
스크린의 한 영상처럼 떠올랐다.
[처형은 공개될 겁니다.]




제 19의 날

by 어슐러 K 르귄(Ursula K Le Guin)


동부 칼하이드의 민화. 고린헤링 마을의 트볼
드 촐하워가 이야기한 것을 G A가 기록했음.
93/1492

베로스티 렘 일이페경이 상게링의 성채에 나타나 예언의 댓가로서 40
베릴과 과수원의 반년치 수확물을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댓가는 받아
들여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베짜는 사람 오드렌(예언가임)에게 물었습
니다.
"나는 언제 죽겠습니까?"
예언자들은 모두 어둠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어둠의 가장자리에서 오
드렌은 물음에 대답했습니다.
"그대는 오드스트레스(제 19의 날)에 죽으리라."
"어느 달? 어느 해의?"
베로스티 경은 부르짖었지만, 그가 지불한 댓사로는 그 이상의 대답
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로스티 경은 울타리 안으로 뛰어들
어가 오드렌의 목을 죄며 대답하지 않으면 목을 부러뜨리겠다고 소리
쳤습니다. 옆에 있던 사람이 베로스티 경을 억지로 떼어놓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손을 뿌리치려고 날뛰며 계속 외쳤습니다.
오드렌이 말했습니다.
"대답은 했소. 댓가도 받았소. 자아, 가시오!"
베로스티 렘 일 이페 경은 미친 듯이 날뛰며 찰세---조상대대로 물려
받은 제 3의 영지, 북 오스노리넬의 가난한 영지, 예언의 댓가를 지불
했기 때문에 더욱 가난해진 영지---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마을의 탑 꼭대기 방에 틀어박힌 채 친구도 만나지 않았고,
씨뿌릴 때도 거두어 들일 때도, 케멜 시기(일종의 발정기, 이 겨울혹
성의 사람들은 케멜기라는 발정기가 한달에 한번씩 있음)에도 분쟁의
시기에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그 달도 그 다음달도, 그 다음다음달도.... 여섯 달이 지나고 열 달
이 지나도 죄수처럼 방 안에 틀어박힌 채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입니다. 매달 오네셀하드(제 18의 날)과 오드스트레스(제 19의 날)에
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잠도 자지 않았습니다.
베로스티와 케멜의 맹세(우리식으로 따지자면 결혼한 사이, 그러나
겨울혹성에서는 남녀의 구분이 없다)를 나눈 사람은 게나넬 클랜의 헬
볼이었습니다. 헬볼은 그렌데 달(14월, 겨울혹성은 14월까지 있다)에
상게링의 성채에 가서 베짜는 사람 오드렌에게 말했습니다.
"나에게 예언을 들려주시오."
"무엇을 지불하겠소?" 하고 오드렌은 물었습니다.
왜냐하면 상대는 옷차림도 초라했고 신발도 다 떨어졌으며, 썰매도
낡았고, 가진 것이 모두 수선해야 할 것들뿐이었으니까요.
"내 목숨을 주겠소"하고 헬볼은 말했습니다.
오드렌이 갑자기 고귀한 사람을 대하는 듯한 말투로 물었습니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습니까? 그밖에 주실 만한 것은 없습니까?"
헬볼은 대답했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 목숨이 당신에게 값어치있는 것인지 어떤지
는 모르지만."
"당신의 목숨은 나에게 아무 가치도 없습니다."
오드렌의 말을 듣자 헬볼은 굴욕에 짓눌려 무릎을 꿇고 외쳤습니다.
"부디 나의 물음에 대답해 주시오. 나 때문에 부탁하는 것이 아니
오!"
"그럼 누구 때문입니까?" 하고 오드렌이 물었습니다.
"나의 케멜 반려 아셰 베로스티 경을 위해서요."
헬볼은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는 여기서 대답이 되지 않는 대답을 듣고 돌아온 뒤부터 사랑도
기쁨도 힘도 잃고 말았소. 그 때문에 죽을지도 모르오."
오드렌이 다시 말했다.
"그럴 테지요. 죽음을 두고, 그밖에 죽을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도 헬볼의 열성에 감동되어 마침내 다시 덧붙였습니다.
"당신 물음의 대답을 찾아봅시다. 하지만 댓가는 필요없습니다. 보통
의 경우라면 댓가가 필요하지요. 묻는 사람은 반드시 댓가를 지불해야
하는 법입니다."
헬볼은 감사의 표시로 오드렌의 두 손을 눈에 대었습니다. 이리하여
예언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언자들은 모두 어둠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헬볼은 그 뒤를 따라가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 질문은 이런 것이었습
니다.
"아셰 베로스티 렘 일 이폐 경은 앞으로 얼마나 살겠습니까?"
이렇게 물으면 앞으로 며칠이라든가 몇 년이라든가 확실한 대답을 들
을 수 았으리라, 그러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도 편안해지리라 생각했
던 것입니다. 예언자들은 어둠속에서 움직이며 돌아갔고, 마침내 오드
렌이 살아 있는 몸뚱이가 불에 오그라드는 듯한 끔찍한 고통의 비명
소리를 질렀습니다.
"게가넬의 헬볼보다 오래 살 것이다!"
이것이 주어진 대답이었는데, 헬볼이 바라던 대답과는 달랐습니다.
그러나 헬볼은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었으므로 그 대답을 가지고 그렌
데의 눈을 헤치며 찰세로 돌아갔습니다. 영지로 돌아가 부리나케 탑에
올라가보았더니 그의 케멜 반려 베로스티 경은 여전히 힘없이 타는 불
옆에서 붉은 돌탁자 위에 두 손을 얹어놓고 고개를 푹 숙인 모습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헬볼이 말을 걸었습니다.
"아셰, 나는 상게링의 성채에 가서 예언자의 대답을 가지고 돌아왔
소. 당신이 앞으로 얼마나 살 것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이러했
소---베로스티 경은 헬볼보다 오래 살 것이다."
베로스티 경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습니다. 마치 목의 경첩이 녹슬어
버린 듯이. 그리고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내가 언제 죽느냐고 물어보았단 말이로군?"
"나는 당신이 앞으로 얼마나 더 살겠는가 물었소."
"얼마나 더 살겠느냐고? 바보같이 당신은 예언자에게 물을 때 어느
해 어느 달 어느 날에 죽느냐, 나에게 남겨진 날이 앞으로 며칠이냐고
묻지 않았단 말이로군!---앞으로 얼마나 더 살겠느냐고 물었다니, 정
말 별수없는 바보로군! 당신보다 오래 산다고? 흥, 당신보다 오래 산
다고?"
베로스티 경은 커다란 붉은 돌탁자를 마치 은종이나 그 비슷한 것을
들 듯 번쩍 들어올려 헬볼의 머리 위로 내리쳤습니다. 헬볼은 털썩 쓰
러졌고, 탁자가 그 위에 얹혔습니다.
베로스티 경은 한참 동안 광란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윽고 돌을
들어올려보니 헬볼의 머리가 짓이겨져 있었습니다. 베로스티 경은 돌
탁자를 다시 제자리에 놓았습니다. 그리고 죽은 사람의 옆에 누워 그
몸을 끌어안았습니다. 마치 케멜을 하듯이...
찰세 사람들이 탑에 올라가보고 두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그 뒤 베로
스티 경은 미쳐버려 자물쇠가 잠긴 방에 갇혀 있어야 했습니다. 왜냐
하면 헬볼이 아직도 어딘가에 살아있다고 생각하여 찾아나서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리하여 베로스티 경은 한 달을 더 살았습니다. 세른 달(1월) 제 19
의 날, 오드스트레스 날에 그는 스스로 목매어 죽었습니다.

- The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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