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소설모음 7

3학년2반 | 2022.01.29 07:42:21 댓글: 0 조회: 636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5807






조용한 여행자
( The very silent Traveler )
by - Paul Tabori


기관차는 땅딸막한 연통이 세찬 흐느낌을 질러대며 시커먼 밤하늘에 무수한
불꽃을 내뿜었다. 불똥들은 마치 혜성의 꼬리 처럼 타닥타닥 소리를 남기며
여자의 긴 머리채처럼 달리는 열차의 후미(後尾)까지 이어졌다. 기관차는
커브에서는 좁아지고 직선 구간에서는 넓어지며, 객차의 주행이 불규칙적인
간격을 만들 때마다 끊겼다가는 다시 나타나는 모습이 흡사 마법의 융단 같
았다. 열차가 떠난 자리에는 불똥들이 차가운 대지 위에 닿지마자 꺼져 버려
마침내는 하나씩 죽어 갔다.
어두운 밤하늘에 일렬로 나란히 불빛이 나타나자, 열차는 속도를 떨구었고
브레이크는 차륜을 물었다. 포효와 덜컹거림도 사그라들었고, 두번째 신호등
의 희미한 불빛을 뒷전으로 흘려 버리며 기적이 길게 울었다.
기관차는 아르헨티나의 광활한 초원 외곽 지대의 작은 역에서 부르르 떨더
니 증기를 내뿜고는 멈추었다. 눈에 띄는 것이라고는 몇 그루의 사과나무뿐,
플랫폼도 역사(驛舍)도 전신국도 없었다. 빛 바랜 흠집투성이의 철판이 겨울
강풍에 견뎌 내도록 두 그루의 사과나무에 철사로 매어져 있었으나, 기록된
역 이름은 거의 읽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 팻말과 외로운 느낌을 주는 몇
개의 석유 램프를 제외하고는 역이라고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르헨티나에서 시체를 반송하는 일은 상당히 비용이 드는데다 몹시 까다로
웠다. 관공서의 형식주의가 각기 다른 여섯 통의 허가서와 수십 통의 신고서
등 산더미 같은 서류를 요구하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마을이라 해도 50마일
이상이나 떨어져 있는 이곳 목장 지역에서는 그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가장
빠른 말을 이용한다 해도 시체의 보존이 가능한 2,3일 안에 필요한 서류를
모두 준비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설령 운이 좋아 허가서 모두를 손에 넣을
수 있다 하더라도, 철도 회사측은 죽은 자에게 살아 있는 승객의 열 배나 되
는 운송비를 청구했다. 회사 규정상 반드시 동행해야 하는 승객의 차비는 별
도로 내야 했다. 이 지방 목장주의 대부분은 약간의 현금, 그처럼 억울한 지
출을 했다가는 파산해 버릴 정도의 액수밖에는 갖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그
들은 가족을 목장에 매장하는 것을 싫어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가족 묘지
가 있는 경우는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 지방에는 어느 정도의 기지와 모험심이 남아 있어
서, 한적한 역에서 열차에 태워진 승객도 그런 기지 덕에 여행이 가능했던
것이다. 비탄에 젖어 있는 가족들이 죽은 이를 둘러싸듯 안아서 솜브레로를
깊숙히 내려씌운 후 꽉붙들어서 쓰러지지 않도록 하여, 누군가가 보더라도
취객쯤으로 여기게끔 살짝 열차에 태워 놓은 것이다. 가족 중 하나가 차장한
테 차표값을 지불하며 팁을 집어 주어, 가엾은 병자가 조용한 객실에서 여행
을 무사히 끝낼 수 있도록 배려도 해 놓았다. 열차가 출발하자마자 세 사람
중 하나가 말에 뛰어올라 20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제일 가까운 전신국을 향
해 달렸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삼촌에게 전보를 쳐서 고인(故人)이 타
고 있는 객차와 객실 번호를 알려 주면, 휄리페 삼촌은 종착역에 대기하고
있다가 그 뒤처리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철로가에 서서 급속히 멀어져 가는
붉은 후미등을 바라보며 있는 남은 두 사람은, 표정은 굳어 있었지만 둘다
내심 한시름 놓고 있었다.

다음 정거장 -- 앞의 역에 비해 훨씬 큰 역에서, 그로데크 대위가 열차에
올랐다. 그는 독일에서 육군으로 사회 첫발을 내디뎠는데, 동료들과 카드
게임을 하던 중 사소한 오해가 발단이 되어 부득이 퇴역해야만 했다. 그
후 몇 차례 시련을 겪는 동안 혁명이 일어난 상황에서 자신의 재능을 발휘
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고, 현재는 남아메리카와 중앙 아메리카를 무대로
활약하고 있었다. 그러한 그가 흡족한 성과를 올리고 파라과이에서 돌아오
는 길이었다.
짐은 많은데 짐꾼이 없는 고로 열차 안까지 직접 날라야만 했던 대위가
하찮은 잡일을 끝냈을 때는, 온몸이 땀으로 젖었고 상처 자국이 난 얼굴은
번질거렸다. 어지간히 화가 난 그는 아르헨티나 철도 회사. 특히 짐꾼이
부족한 상황과 객차의 높은 승강대, 야간 여행이 불가피한 남쪽행 급행이
한 대밖에 없는 것에 대해 한껏 소리 높여 욕설을 퍼부었다. 좌우로 흔들
리는 좁은 통로를 슈트케이스, 상자들, 그리고 무릎 덮개까지 끌고 가야
했는데도 빈 좌석을 찾을 수 없자, 만원 객실을 지날 때마다 또 한차례
욕설을 퍼부었다.
마침내 대위는 말없이 여행자가 혼자 있는 객실에 이르렀다. 챙이 넓은
검은 솜브레로를 코끝까지 내려쓴 이 승객은 연약한 몸을 웅크리고 어두운
구석에 앉아 있었고, 푸른 깃이 씌워진 독서용 램프가 그 머리 위로 희미
한 원을 그리고 있었다. 그는 행복한 꿈의 세계에 젖어 곤히 잠들어 있는
듯했다.
"실례 좀 하겠소. 세뇨르."
그로데크 대위가 인사를 건네도 응답은 없었다. 대위는 짐들을 객실 안
에 쿵쾅거리며 내던진 후, 중앙등을 켜고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승객을 쳐
다보았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오랫동안 머리를 깎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양손은 꿰매 붙인 커다란 호주머니에 찔러넣을 채 웅크리고
있는 몸이 열차의 리드미컬한 진동에 따라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로데크 대위는 맞은편 좌석에 자리 잡았다. 좀전에 격한 규탄으로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터여서 쉽게 잠들 수가 없자, 그는 잡담이나 즐기자고
마음먹었다. 서투른 스페인어로 정중하게 첫마디를 꺼냈지만 대답이 없자,
포르투갈어, 프랑스어, 영어를 차례로 사용해 시도해 보다가, 마지막으로
모국어인 독일어로 말을 건넸으나 상대는 변함없이 잠자코 앉아 있었다.
대위는 담배 케이스에서 최상품인 하바나 시가를 뽑아 유혹하듯 내밀었
다. 그는 품질과 향기를 자랑하면서, 세뇨르가 우정의 표시로 받아 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여전히 반응은 없었다. 무언의 승객을 향한 대위의 노력은
아무런 효과를 얻지 못했다.
대위는 긴 여행에 대비해 여러 가지 소지품을 준비했음에도, 가장 단순한
필수품을 갖고 있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성냥이 없었던 것이다. 라이터는
기름이 떨어진 지 오래였다. 하는 수 없이 맞은편 승객을 향해 부탁했다.
"불 좀 빌려 주시겠습니까?"
역시 묵묵 무답이었다. 이 결정적인 무례는 그로데크 대위의 얼굴을 붉어
지게 했다. 그는 벌떡 일어서서 말없이 사나이에게 달려들어 욕을 퍼부으며
힘껏 흔들어댔다. 이미 생명이 없는 머리가 수차례 의자 등에 부딪쳤다. 솜
브레로가 벗겨져 뒷통수에 걸쳐졌고 양손은 깊숙한 호주머니에서 비어져 나
왔다. 독일인의 손에 붙잡혔다. 풀려난 말없는 승객의 몸은 앞으로 기울어
지는가 싶더니, 모래 가마니처럼 쿵 하고 객실 바닥에 고꾸라졌다. 모자는
이미 벗겨져서 죽은 것을 확인하려고 얼굴을 들춰볼 필요가 없었다.
격하기 쉬운 성격 때문에 난처한 입장에 빠질 때마다 자신의 성격을 질책
했던 대위였지만, 이것은 너무나 예상치 못한 사태였다. 홧김에 좀 세게 흔
들었다지만 의자 등에 머리를 좀 찧었을 뿐인데... 대위는 경악과 공포에
질려 시체를 응시했다. 그러나 그도 잠시뿐 서둘러 바닥에서 시체를 들어올
려 창문까지 끌고 갔다. 창문을 열자 시체를 힘껏 어둠 속으로 밀어냈다.
열차는 굉음을 지르며 계속 달리고 있었다.

이른 아침, 열차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했다. 휄리페 삼촌은 불안한
마음으로 한 시간 전부터 기다리고 있다가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가 전
보로 알려 온 객차를 찾았다.
모든 것은 계획되어 있었다. 열차에 올라 객실에 들어서자마자 "큰일났어
요, 도와 주세요." 하고 외치면 사람들이 몰려올테고, 이미 때가 늦었다고
판단될 터였다. 요컨대 사랑하는 조카는 가엾게도 여행 도중에 죽은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휄리페는 조카를 찾지 못했다. 알려 온 객실뿐 아니라 다른 객실
어느 곳에도 조카의 모습은 없었다. 뭔가 착오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다른 객차까지 찾아보았으나, 승객들은 모두 내리고 열차는 텅 비어
있었다. 무거운 가방을 플랫폼으로 끌어내리고 있는, 얼굴에 상처 자국이
있고 행동 거지가 군인 같아 보이는 사나이를 제외하고는... 사내는 조카가
타고 있어야 할 객실에서 마지막 짐을 옮기려 하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말씀 좀 묻겠습니다. 이 객실에 다른 사람은 없었나요?"
"아, 있었소."
그로데크 대위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태연히 대답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일까요?"
"그 사람 세 정거장 전에 내렸소이다."
그 말을 남기고 대위는 마지막 가방을 들고 내려가 당당하게 플랫폼을 빠
져 나가고, 휄리페 삼촌은 십자가를 세 번 긋더니 정신을 잃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프로
( The Pro )
by - Robert H. Cuttis



미세스 헨리에타 마셜은 흐릿한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았다. 거울에
맺힌 영상은 그다지 마음에 드는 것이 못 되었다. 거들을 벗고 목욕 가운을
입어도 넘치는 군살과 늙은 몸매는 감춰지지가 않았다. 평소에 낙천적이고
활동적이어서 비에 따위의 감정과는 무관했었는데, 뉴욕을 떠나려는 지금은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슬픔에 잠겨 있었다. 시내 중심가에 있는 이 비즈니스
호텔과는 사십 년 동안이나 알고 지내왔으니까, 호텔 분위기가 침울해서 그
런 것도 아니었다.
미세스 마셜은 아이오와 주의 작은 마을에 있는 자택에 있을 때보다는 여행
을 하는 편이 더 많았다. 그러니까 전국 어느 곳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이
런 호텔을 전전하면서 지내온 셈이다. 그런데 뉴욕에는 오래 사귄 친구들이
많기 때문인지, 이곳을 떠날 때는 언제나 미련이 남았다. 미세스 마셜은 한
참 동안 추억에 젖어 있다가. "그래도 은퇴하려면 아직 10년은 남았어."하고
중얼거렸다.
그녀는 방안 구석구석을 둘러보다가 떨어진 샌드위치처럼 침대 위에 벌렁
드러누었다. 짐을 챙겨 넣던 여행 가방에 시선이 멈추자 깊은 한숨을 쉬었다.
시계를 보니 오전 열한 시 사십오분이었다. 내일 아침까지는 일 관계로 시카
고에 돌아가야 한다. 미세스 마셜은 다시 거울 앞에 섰다. 바로 그때 도어의
손잡이가 돌아가더니, 천천히 문이 열리는 것이 거울에 비쳤다.
서른 살 가량의 마르고 혈색이 좋지 않은 남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미세스 마셜은 방을 잘못 찾았다고 말하려는데,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사
내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용히 해! 현금과 보석을 내놔.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이빨을 몽땅 뽑
아 버릴 테다."
"값나가는 것은 없어요."
목욕 가운을 꼭 여미면서 미세스 마셜은 대답했다.
사내는 들고 온 가방을 침대 위에 놓더니 뚜껑을 열며 말했다.
"꾸물대지 말고 핸드백을 이리 가져와."
미세스 마셜은 시키는 대로 했다. 사내는 그녀의 여행 가방을 재빠르게 뒤
지면서 왼손으로 핸드백을 받았다. 여행 가방 속에 값나가는 것이 없자. 화
를 내며 핸드백 안의 물건을 침대 위에 쏟아 놓았다. 그 모양을 미세스 마셜
은 어쩔 수 없이 바라만 보고 있었다. 사내는 지갑을 들고 안에 있는 돈을
세어 보았다.
"250달러라, 당신도 똑같구만. 멍청이 할멈들은 대개 많은 돈을 갖고 다니
지. 하긴 침대 매트리스를 껴안고 여행할 순 없으니까 말야(침대 매트리스에
돈을 숨겨 두는 사람이 많다)."
사내는 빼앗은 돈을 자기 지갑에 넣어 상의 안주머니에 집어 넣고, 금으로
만든 자그마한 콤팩트는 가방 속에 넣었다.
"삼십 분내로 공항에 가야 되니까 택시값 정도는 남겨 두어요."
미세스 마셜이 불평을 하자.
"여행자 수표가 있잖아."
사내는 딱 잘라 말하더니,
"당신은 운이 좋은 거야. 나는 현찰 외에는 가져가지 않는 주의니까, 당신
도 중요한 것은 뺏기지 않고 끝날 테니 말야."
하고 투덜거렸다.
"하긴 가끔은 큰 고기가 걸리기도 하지. 이것 좀 보라구."
사내는 가방을 열어 보였다. 미세스 마셜이 들여다보니, 도둑질용 연장 일
곱 개와 얄팍한 보석 상자가 하나 들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사내가 보석
상자 뚜겅을 열어 보았을 때, 그녀는 엉겁결에 숨을 삼켰다. 검은 비로드
위에 선명하게 떠올라 있는 것은 이제까지 본 적이 없는 훌륭한 진주 목걸이
였다. 그 매혹적인 광채에 미세스 마셜은 만져 보고 싶은 강한 유혹을 느꼈
다.
"당신 돈을 몽땅 털어도 이 진주 세 알맹이도 사지 못할 걸."
사내는 입가를 실룩거리며 웃더니 보석 상자를 닫고 가방 뚜껑도 닫았다.
그리고 경대로 가서 서랍을 뒤져 보더니 아무것도 찾지 못하자 투덜댔다.
"믿을 수가 없군. 보석 하나 가진 게 없다니!"
"내가 가진 걸 몽땅 빼앗았잖아요. 그만하면 충분하잖아요."
미세스 마셜은 그렇게 말하며 벽장 쪽을 살짝 훔쳐보았다. 그 눈동자의 움
직임을 사내가 놓칠 리가 없었다. 그는 성큼성큼 벽장으로 가서는, 안에 걸
려 있는 옷을 하나 하나 한쪽으로 치워 가며 조사했다. 마침내 카메오 브로
치를 찾아냈다. 그는 브로치를 옷에서 떼어내려 했지만, 고리 핀이 좀처럼
빠지지 않았다. 사내가 브로치와 씨름하는 사이에 미세스 마셜은 슬금슬금
침대 쪽으로 다가가서 그 위에 놓인 가방을 살짝 만졌다. 그와 동시에 사내
는 브로치 핀을 억지로 비틀어 고리에서 벗기고는, 힘들여 획득한 브로치를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는 가방이 있는 침대 쪽으로 가는데, 문득 미
세스 마셜이 카페트에 발이 걸려 비틀 거리며 부딪쳐오는 바람에 하마터면
둘이 함께 넘어질 뻔했다.
"어머! 미안해요."
미세스 마셜이 사과했다.
"바보 같으니라구!"
사내는 화를 냈다.
"이제 그만 가봐야겠군. 십 분 이내에 전화를 걸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했다
가는, 이번에는 사과 정도를 끝나지 않을 거야!"
미세스 마셜은 그가 남기고 간 말을 감히 거역하지 않았다.
사내는 비상구를 통해 단숨에 계단을 내려가서는, 누구의 의심도 받지 않고
호텔 로비의 붐비는 사람들 틈에 끼였다. 거기서부터는 여유 있게 회전문을
통과해서 렉싱턴 거리의 한낮의 인파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로부터 삽십 분 후, 그는 3번가 90번지에 있는 아파트의 엘리베이터에 올
라 있었다. 사 층에서 내리자 자기 집으로 들어가서 소파에 털썩 주저않았다.
잠시 휴식을 취하며, 여느 때보다 실적이 좋은 오전중의 수확을 이제부터 천
천히 음미할 수 있다는 즐거움에 싱글벙글했다.
이럭저럭 기분이 가라앉자 그는 작업에 들어갔다. 가방의 걸쇠를 벗기고 뚜
껑을 연 순간, 사내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이어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
다. 자신의 도구도, 금 콤팩트도, 진주 목걸이가 들어 있는 보석 상자까지도
모조리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 대신 표지가 검은 책이 한 권 들어 있을 뿐
이었다. 사내는 한동안 완전히 넋이 빠졌다가 이윽고 정신을 차리고, 목걸이
는 호주머니에 넣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주머니를 뒤지는 동안 식은땀
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목걸이뿐만 아니라 지갑까지도 없어진 것이었다.
당황해서 다시 가방 속을 들여다 보았다. 검은 책을 끄집어 내서 표지를 보
니 기디온 협회에서 발행한 성서였다. 책장을 넘기니 표지와 첫 페이지 사이
에 두터운 종이가 끼여 있었다. 종이는 석판 인쇄로 된 다소 현란한 느낌의
그림과 문자로 꽉 차 있었다.
실물보다는 젊고 날씬했지만 한눈에 미세스 마셜임을 알 수 있는 여성이 시
계, 지갑 등을 양손 가득히 쥔 채 높이 쳐들고 빙그레 미소짓고 있으며, 그
앞에는 고풍스런 야회복 차림을 한 여러 명의 남자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었
다. 그림 밑에는 이런 말이 씌어 있었다.

특별 공연
미국 제일, 신비의 마술사
마담 헨리에타 마셜
좌석 예매중





노트북
( Note Book )
by - Flyfox (197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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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지 한 1년 쯤 된 것 같습니다. 하이텔이 무료였던 케텔 시절에 썼
던거라 지금 사정하고는 많이 다른 것 같지만. 통신 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기 사건을 재판으로까지 비약시켜 진지하고 코믹하게 꾸민 것
입니다.
그리고 극중에는 다수의 아이디가 등장하는데 모두 가공의 아이디이
며 끝에 9를 붙여 혼동을 막았습니다.

노트북 - 1

Notebook: 노트, 수첩, 잡기장, 공책, 어음첩...


샅샅이 게시판을 훑고 지나갔다.


3370 오성태 sungtai9 0x/xx 5 18 노트북을 싸게 팝니다!
3363 추영현 young9 0x/xx 9 25 130만원에 386sx 노트북을!
3360 이정민 lee9 0x/xx 15 28 xx사의 노트북을 염가 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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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50 김영민 min9 0x/xx 24 9 내일이면 팔립니다kk사의 노트북!

총석은 40메가 이상의 하드 디스크와 모뎀이 내장된 386 기종의 노
트북을 찾고 있었다. 그는 1시간 이상 노트북과 관련된 게시물을 모조
리 검색하고 그중에서 내용이 괜찮다 싶으면 바로 캡춰를 잡아 추리고
추려 현제는 6개 정도만이 남아 있었다.
다시금 차분히 읽어 나가며, 중고는 제거하고 나머지 3개 중에서 확
정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3363 추영현 young9 0x/xx 9 25 100만원에 386sx 노트북을!
3356 강도혁 psycho9 0x/xx 24 55 100만원에 미국 yy사의 노트북을!
3350 김영민 min9 0x/xx 24 9 내일이면 팔립니다kk사의 노트북!

그가 3356번의 노트북을 사기로 결정하는건 일 분도 채 지나기 전이
었다. 그것은 그가 필요로하는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춘 믿을 수 있는
회사의 제품이었다. 그걸 결정하자 다른 게시물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
았으며, 오직 그 노트북에만 모든 정신이 쏠리는 것이었다. 그는 그부
분을 프린트하고 이리저리 궁상을 했다.
강도혁이라는 사람이 팔고자하는 노트북은 미국 yy사의 제품으로서
가볍기로 유명했다. 40메가의 하드 디스크와 탁상용에서나 볼 수 있는
뛰어난 확장성, 그리고 386 기종에 모뎀이 내장되어 있다. 게다가 2킬
로그램 정도의 가벼운 무게에 심플한 디자인은 제품의 품격을 더욱 높
여 놓고 있었다. yy사의 노트북은 300만원이 넘는 고가인데다가 100만
원대의 노트북을 고르는 그로서는 그림의 떡에 불과 했지만, 강도혁은
그걸 100만원에 팔겠다고 한 것이다. 이 기회를 놓쳤다간 평생 후회할
것이다.
총석은 강도혁의 프로필을 조사했다.


pf psycho9
.................(secret)


총석은 그의 비공개에 개의치 않고 그가 남긴 메시지를 다시 읽었
다. 총석은 케텔 사용자에 한하여 10개 한정 판매 한다는 부분에 진한
동그라미 그렸다. 다음 줄에 노트북은 미국에서 대리점을 경영하는 친
척을 통해 수입해 온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렇다면 이건 중고가 아
니다. 애프터 서비스에 대해서는 언급한 것이 없다. 자세한 사양도 언
급되어 있지 않다. 사고 싶으면 자기에게 메일을 보내 달라는 글로 끝
나 있었다.

그러나 우유부단하기로 소문난 그가 바로 선택하기에는 갈등 요소가
너무 많았다. 어쩌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도 그 스스로가 고민거리를
만들어 내는지도 모른다.
그가 처음으로 노트북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반년 전이다. XT를 갖
고 있었는데 일곱번의 잦은 고장으로 더이상의 수리비는 지출하지 않
겠다고 마음먹었다. 애초의 생각은 386의 구입이었으나 갑작스럽게 부
상한 노트북 컴퓨터에 생각을 고쳐 먹었다. 특별히 노트북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데스크탑 대용으로 쓰더라도 공간 확보에
무척 유리할 것 같았다. 게다가 가벼운 무게로 어디든지 갖고 다닐 수
있으니 더이상 바랄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최초의 생각이후 반년이 지난 지금까지 컴퓨터를 구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이유에 있어서 공통된 것은 물론 돈이었지만, 그기
간동안 적당한 기종을 구입할만한 자금이 없었던 것은 아이다. 완전하
게 마음에 드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고집을 부려
결국에는 수중의 돈을 대부분 탕진해 버린 것이다.
이제는 더이상 미룰 수가 없어졌다. 단호한 마음으로 케텔에 접속을
시도 했다. 러시아워 시간대라 기대조차 하지 않았는데 한번의 시도로
연결이 되고보니 뭔가 일이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는 초기메
뉴에 도착하자마자 go wmail을 타이핑했다.


안녕하세요, 최총석이라고 합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노트북을 사려고 하는데요. yy사의 노트
북이라면 200만원도 넘는 것으로 아는데, 정말 싸더군요.
꼭 갖고 싶은 컴퓨터 입니다.
어떻게 하면 물건을 구입할 수가 있을까요?
답장을 주시기 바랍니다.

최총석


전송을 완료하자 모든 고민이 해소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구입이라
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몹시 우쭐해진 것이다.


답장은 5시간 안에 그에게 배달 되었다.


행운이시네요. 마지막 10번 째 신청을 하셨어요.
아마 물건을 보시면 만족하실 겁니다. 솔직히 이런 물건을
100만원에 판다는게 조금은 아까워요. 하지만 쓰실 분들이
써야죠. 저같은 사람이 이런 물건 갖고 있어봤자 낭비니까
요.
그럼 어떻게 거래를 하는게 좋을까요. 저는 부산에 살고
있거든요. 만나서 물건을 전해 드리고 싶지만 요즘 시간이
없어서...
이렇게 하는게 어떨까요. 일단 50만원을 제 구좌에 입금시
켜 주세요. 그러면 제가 물건을 총석님 주소로 보내드리고,
그때에 다시 50만원을 제 구좌에 입금을 시키는 겁니다.
방법이 마음에 들면 답장을 주세요.
이만...


답장을 쓰려다가 잠깐 머뭇거렸다. 만약 50만원을 보내고 그가 잠적
해 버린다면? 통신하는 사람이 설마 사기꾼이려구... -- 이미 몇 번의
사기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한 달의 통신 경력을 갖고 있는 그로서는
이곳 저곳에서 정보를 구하는데 아직 익숙치가 못했다. 통신이라는 매
체에서 거래를 한다는 것이 그를 자극했다. 그는 자기가 사기를 당하
리라는 짐작은 기우라고 판단했다.
그래도 신중하게 판단해야한다.
일단 답장은 보류하는게 좋겠다. 결정은 거진 내렸지만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니까, 좀더 정보를 구한 다음에 메일을 보내도 늦지 않을 것
이다. 설마 다른 사람에게 넘기려구.
그는 대화실로 직행했다.
난잡한 대화실...
25개가 비공개고 21개가 공개였다. 그공개라는 것도 케텔의 호스트
가 어거지로 만들어 놓은 대화실이지 정작 그 방을 개설한 사람들은
그와 같은 초보자를 별로 환영하지 않는다. 내키지가 않다. 친구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예전에는 따스하고 모두들 친절하게 받아 주었다는
데.
다시 go wmail을 치려다가 문득 눈에 뜨이는 공개방이 하나 발견되
었다.

# 25 공 개 ( 1 명) 노트북에 관하여!
오경민(animal9 )


서슴치 않고 j 25를 타이핑했다.


(!)최총석(xman9 ) 안녕하세요?

오경민(animal9 ) 안녕하세요?

(!)최총석(xman9 ) 여기, 노트북에 대해서 얘기를 하나요?

오경민(animal9 ) 예!

(!)최총석(xman9 ) 저, 타이핑이 좀 느려요...

오경민(animal9 ) 괜찮아요. 천천히 치세요!

(!)최총석(xman9 ) 제가 이번에 노트북을 하나 사려고 하거든요...

오경민(animal9 ) 어떤?

(!)최총석(xman9 ) 사실은 게시판에서 보구요. 지금 결정은 거의 내
렸는데 그래도 더 알아보는게 좋을 것 같아서요...

오경민(animal9 ) 아.. 혹시 psycho9님이 올린 것을...?

(!)최총석(xman9 ) 맞아요! 그걸 사려구요!

오경민(animal9 ) 좋은걸 구하려고 하시네요. 제 친구도 싸이코님이
파는 것을 구했어요. VGA 카드도 지원하고 속도도 굉장히 빨라요. 그
러면서도 무게는 엄청나게 가볍던데, 제가 다 탐이 나더라구요."

(!)최총석(xman9 ) 그래요?

오경민(animal9 ) 예..안심하시##~~&&~!~~@~~으..~#~$@#$@$@^^#

## 오경민(animal9 ) 님이 퇴장했습니다. ##

(!)최총석(xman9 ) ?


총석은 10분을 기다렸지만, 오경민은 나타나지 않았다. 호스트의 불
안정으로 끊긴 것일까? 아니면 그 악명 높은 통화중 대기인가?
총석은 대화실을 나와 편지쓰기로 갔다. 그는 psycho9에게 이제 거
래가 이루어질 것 같으니 전화번호라도 알려 달라고 요청한 다음에 유
쾌하게 전송을 했다.

그날 저녁에 간신히 케텔에 접속을 하자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보
나마나 psycho9에게서 온 메일일 것이다. 곧바로 편지함으로 가서 그
의 메일을 읽었다. 그의 요청대로 부산의 전화 번호가 적혀 있었다.
추신 부분에는 밤늦게 걸어도 상관 없으니까 이 메일을 보자마자 걸라
고 적혀 있었다. 총석은 전화번호를 메모하고 접속을 끊었다.
수화기를 든 다음에 올바르게 버튼을 눌렀다. 잠시후 갈갈하고 건조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밤늦게 죄송합니다. 거기 혹시 강도혁씨댁 맞나요?"
"제가 강도혁입니다만..."
"저는 최총석입니다. 노트북건으로..."
"예, 궁금하신 점이라도 있으신가보죠?"
"꼭 그런 것은 아니구요. 고가품을 거래하는데, 목소리라도 듣지 않
고 한다는게 좀 그래서요."
"그렇지요. 제가 서울에 갔으면 좋겠지만 시간이 없어서요. 요즘 워
낙 일이 바빠서..."
"예. 그러면 제가 어디로 돈을 보내 드리면 될까요?"
"xx은행으로 보내주세요. 계좌번호는...xxx-yy-zzzzzz..."
총석은 다시한번 불러 달라고 요청한 다음에 메모지에 받아적었다.
"적었어요. 그러면 물건은 저희집으로 보내주시는 건가요?"
"예. 주소를 불러 주세요."
총석이 주소와 전화 번호를 불렀다. 잡음이 심하게 끼는 바람에 세
번이나 다시 불러주었다. 그가 말했다.
"예, 돈이 도착하는데로 보내드리지요. 언제쯤 보내주실건가요?"
"내일 보내드릴께요."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또 연락을 드리지요."
총석은 전화를 끊은 다음, 자기가 왜 노트북에 대해서 더 자세히 물
어보지 않았나 하고 후회를 했다.


다음 날 돈을 보내고 기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곧 있으면 노트
북이 도착할 것이다.
그리고 사일 뒤에 소포가 배달 되었다. 가로 세로가 대충 노트북이
들어 갈 만한 크기였다. 우체부에게서 물건을 받아 든 순간, 하마터면
떨어뜨릴 뻔 했다. 무게가 예상보다 훨씬 가벼웠다. 물론 yy사의 노트
북의 세계에서 가장 무게가 작은 컴퓨터다. 하지만 이건 1킬로도 안나
갈 것 같은데...
잽싸게 들고 들어와서 즐거움 반, 의아심 반을 품으며 포장을 뜯었
다. 그리고 상자를 개봉했다.
노트북.
"이게 뭐야..."
총석은 믿을 수가 없었다. 장난을 치려는 것일까? 젠장, 진짜 노트
북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씩씩 거리며 부산에 전화를 걸었다. 처음에는 통화중이었고 두
번째 걸었을 때는 아무도 받지 않았다.
그날 저녁 sell게시판에 들어가 보니까 눈에 뜨이는 제목이 있었다.

사기를 당했어요!

번호를 선택했다.

100만원에 yy사의 노트북을 판다고 하기에 돈을 보냈어요.
그런데 보내온 물건은 컴퓨터가 아닌 공책하고 책이 아니겠
어요? 사기꾼이에요! 엉엉..
이를 어떻게 하죠? 50만원이나 보내줬는데...
어떻게... 시솝은 그런 사람 단속하지 않고 뭐하는거죠?
경찰에 신고할 수는 없나요?
저 말고 다른 분들도 피해를 봤을 것 같은데...


psycho9는 사기꾼이었다.


psycho9에게 사기를 당한 사람은 총석까지 포함해서 전부 4명이었
다. 나머지 6명 중에서 2명은 도중에 생각을 바꾼 사람들이다. 1명은
사기를 당했다는 게시물을 보고 생각을 바꾸었고, 다른 3명은 psycho9
가 거래를 거절한 사람들이었다.
시솝은 그 아이디가 가짜라고 피해자들에게 통보했다. 총석은 대화
실에서 만났던 animal9라는 아이디의 오경민이라는 사람의 이름을 시
솝에게 알려 주었지만 시솝의 조사 결과 animal9라는 아이디도 가짜였
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psycho9가 이번 사기를 위해서 animal9라는
가짜 아이디를 만든 다음, 자기에게 신청해온 사람들을 교묘하게 대화
실로 유도를 하고, 그들로 하여금 결정을 내리도록 부추기게 한 것 같
았다.


범인은 통신을 하는 사람이다. 통신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어느정
도 컴퓨터에 지식이 있는 사람일 것이다. 아니, 순전히 사기를 위해서
통신을 악용한 것일까? 두가지 경우였지만, 아무튼 컴퓨터를 만진다는
점은 일치하고 있다.
범인은 그 사건 이후에도 뻔뻔스럽게 통신계를 떠나지 않았다. 그가
주로 즐기는 것은 채팅이었는데, 자신이 보유한 10여개의 아이디로 번
갈아가며 접속하여 상대를 희롱하고 특히 여성 유저에게는 음담패설을
늘어 놓으며 자신의 변태적인 취미 생활을 즐겼다.
채팅하는 사람들이 늘 그렇듯이 그도 수다쟁이였다. 그러나 자기가
저지른 범죄를 소상히 밝히고 다닐 정도로 멍청이는 아니다. 그는 이
웃지못할 사건을 다른 얘기로 바꾸어 사람들에게 들려주곤 했다. 사람
들은 그의 이야기를 즐겼으며 사기를 당한 사람이 멍청하다고 입을 모
았다.
케텔에는 허위 아이디를 갖고 있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케텔 측
에서 밝히는 가입자 수란 도대체 얼마나 정확한 것일까?
가짜와 가짜가 대화를 나누고, 진실성 없는 이야기가 대화실에 넘쳐
흐른다.
이 사기꾼도 재수 없게 다른 가짜 아이디의 임자와 만났다.


/pf harmony9

신연정 (harmony9 ) 예쁘고 귀여운 대학생이에요!
남자 꼬시는게 취미지요! 채팅에서 절 보면 초대해 주세요~~!~!~

/in harmony9
(!)김성태(middle9 ) 안녕하세요?

신연정(harmony9 ) 안녕하세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성태(middle9 ) 하하, 프로필 보구서 초대했어요. 남자 꼬시는
게 취미라구요?

신연정(harmony9 ) 호호호, 제 유일한 취미에요!

(!)김성태(middle9 ) 하하, 재밌네요. 그럼 저를 꼬셔보세요..히히

신연정(harmony9 ) 그럴까요?

(!)김성태(middle9 ) 예!

신연정(harmony9 ) 음, 그럼 시작해 보죠. 얼굴은 어떻게 생겼어요?
키는 얼마에요? 직업은? 학생이신가요?

(!)김성태(middle9 ) 아이구, 마구 질문하시네요. 얼굴은 못생기지는
않았어요. 키는 174정도 되구요. 직업은, 프로그래머에요.

... 중간 생략 ...

(!)김성태(middle9 ) 정말 웃기는 사건이에요. 아무리 싸게 판다지만
큰 돈으로 거래하는건데 사람을 만나지도 않고 산다는 것은 너무 바보
스럽지 않나요?

신연정(harmony9 ) 그런것 같아요!

(!)김성태(middle9 ) 그런 사람들은 당해도 싸요. 아무튼 그 사건 애
기를 듣고 전 마구 웃었어요. 노트북이라고 보내온게 공책이라니...하
하하하...

신연정(harmony9 ) 하하하하하~~


신연정이라는 이름으로 채팅을 하고 있는 그의 옆에 앉아 있는 사람
은 최총석이었다. 그의 얼굴은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 있었다. 그는 김
성태라는 작자을 어떻게 골려줄까하고 고심했다.
"좆같은 새끼, 너도 한번 당해봐라."
"지금 할까?"
총석이 표정으로 대답했다.

신연정(harmony9 ) 성태님은 너무 재밌는 분 같아요. 실례가 되지 않
는다면 성태님 목소리라도 좀 듣고 싶은데요...

(!)김성태(middle9 ) 하하, 그러죠. 이렇게 얘기 하다가 보이스를
하게 되면 또 다르니까요. 사람들하고 전화 많이 해보셨나요?

신연정(harmony9 ) 두번 해봤어요. 재밌든데요!

(!)김성태(middle9 ) 아주 재밌죠. 그럼 어떻게 할까요? 전화 번호
를 알려 주시겠어요?

신연정(harmony9 ) 여자가 어떻게... 성태님이 알려 주세요. 제가 바
로 걸께요.

(!)김성태(middle9 ) 그게 좋겠군요. 저희 집 전화 번호는....


총석은 민수 대신 김성태의 전화번호를 받아 적었다. 나쁜 새끼, 사
기당한 것만도 쪽팔린데, 그걸 재밌다고 놀리고 있어?
민수가 연결을 끊고 총석에게 말했다.
"넌 이 전화로 들어. 난 무선 전화기로 할깨."
"그래."
잠시후 민수가 전화기를 들고왔다.
"건다."
"빨리 걸어."
그는 조바심이 났다.
민수가 버튼을 누르고 상대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총석도 같이 수화
기를 들고 전화를 받을 그 뻔뻔스런 작자를 생각했다.
'개새끼!'
이윽고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허스키한 음성이었다. 낮은 바리톤에... 총석은 깜짝 놀랐다.
"여보세요?"
다시 상대가 말했다.
"거기 혹시 중국집 아닙니까?"
총석이 허둥지둥 말했다.
"예? 제길,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총석이 전화를 끊으면서 민수에게 끊으라고 손짓했다.
민수가 전화를 끊고 왜 그러냐고 말하자 총석이 대답했다.
"야, 그놈 목소리야."
"누구?"
"사기꾼말야. 그놈하고 목소리가 똑같아."
"정말이야? 잘못들은거 아냐?"
"...모르겠어."
그는 자신없는 투로 대답했지만 어딘지 확신에 차 있는 것 같았다.
"다시 걸어볼까?"
"그러자."
"알겠어, 이번엔 내가 말할께."
"그래."
민수는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거기 김성태씨댁 맞나요?"
민수가 신중하게 말했다.
"제가 김성탭니다만, 누구신지요?"
"...저는 연정이 오빠되는 사람입니다."
"아, 예... 그런데 연정님은 안계십니까?"
"아니요, 제 옆에 있는데 챙피하다고 저보러 전화를 걸라고 하더군
요."
"그러면, 이제는 괜찮으니까 전화를 받으라고 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민수가 신호하자 총석이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여보세요? 연정이 전화 바꿨습니다."
총석은 자신이 해야할 대사를 생각하면서 작게 끼뜩거렸다.
"야 너 장난치냐? 너 남자야 여자야!"
김성태는 화를 내면서 소리쳤다.
"저 호몬데요...우리 같이 후장이나..."
"전화끊어!"
전화가 끊기자 총석은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어때?"
"분명히 맞아. 저녀석은 목소리가 특이해서 기억에 남아."
"확실하다면 경찰에 신고해야지, 피해액이 2백 만원이나 되잖아."
"그래야겠지? 하지만 정말 같은 사람일까?"
"목소리가 똑같데메?"
"그렇긴 하지만... 다른 피해자들에게 전화해서 상의해봐야겠어. 내
가 알기로는 나 말고 다른 세명이 녀석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했거든."
"그렇게 하는게 좋겠다."
"잡아야 돼."
총석은 단호하게 말했다.


"예, 그러니까 이 전화번호로 돌린 다음에 김성태라는 사람을 바꿔
달라고 하세요. 그리고 목소리만 확인한 후에 그냥 끊는거에요."
"알겠어요. 전화해보구서 연락을 드릴께요."
"예..."


"만약 같은 사람이라면 신고를 해야겠죠."
"수고하시네요. 그럼 확인한후에 전화를 드릴께요."

"전화번호는 xxx-xxxx에요. 꼭 해보세요."
"알겠어요. 꼭 녀석을 잡아야 될텐데..."

삼 일 사이에 그의 편지함으로 세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발신자들은
모두들 그 목소리가 예전에 들었던 그 사기꾼의 목소리와 일치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전화번호도 알고 있고, 나까지 포함해서 네 명이나 증인이 되는군.
기다려라 이 사기꾼아!'

총석이 노트북 사건을 경찰에게 납득 시키는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무엇보다 컴퓨터 통신을 설명하는 것이 힘들었다. 무식한 경찰들은 컴
퓨터 통신이라는 것은 외국에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더군
다나 범죄라니.
몇일 뒤 총석은 경찰의 통보로 김성태를 경찰서에서 만났다. 총석은
험상궂게 생긴 녀석의 얼굴에 혐오감을 느꼈다.
'전형적인 사기꾼의 모습이군.'
"이리와 앉아요."
배가 나온 40대 중반의 순경이 앞 자리에 손짓하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총석군은 김성태씨의 목소리가 노트북인가 뭔가로 사기친
그 사람의 목소리와 같다는 것이지?"
순경은 짜증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예."
"혹시 잘못 듣거나 그런 것은 아니야? 목소리라는게 한번 들은 것으
로 기억하기는 좀 힘들지 않겠어?"
"아니에요. 강도혁, 아니 김성태씨 목소리는 특이해서 금방 잊혀지
지 않아요. 제가 의심스러워서 다른 분들에게도 확인을 시켰어요. 아
시잖아요."
"김성태씨는?"
그가 김성태를 쳐다보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에요? 난 노트북이 뭔지도 몰라요!"
그가 으르렁 거렸다.
'뻔뻔스런 자식 같으니라구!'
"이건 참 곤란하네. 만약 총석군이 범인의 목소리를 녹음이라도 해
두었다면 확실한 증거품이 될 수 있지만, 이런 경우는 생각 처럼 쉽지
가 않아.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구. 범인과 비슷한 목소리의 임자는 서
울에만도 수천명은 될겁니다."
'증거, 증거, 물질적인 증거... 그래!'
"있을지도 몰라요."
"뭔데?"
순경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의자에서 삐걱 거리를 소리가 났다.
"버리지 않았어요, 물건을 보내온 그 상자하고 공책... 집에 있어
요. 거기서 범인의 지문을 채취할 수는 없나요?"
"가능하지. 지문검사를 할려면 김성태씨, 수사에 협조해 주셔야겠어
요."
"제가 왜요?"
그는 노골적으로 신경질을 부리며 대답했다.
"죄가 없다면 응해도 되잖아요! 총석군도 마찬가지구. 그 물건을 만
졌던 사람들의 모든 지문을 채취해야 되니까, 모두들 협조해 주셔야해
요."
"알겠수다, 난 죄가 없으니까."
김성태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저도요."
총석이 뒤를 이어 말했다.



노트북 - 2


5일 뒤에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예전에 얘기를 나누었던 김 순경
이었다.
"총석군인가? 김성태씨 지문이 공책에서 발견됐어."
"정말요? 그러면 이제는 김성태를 체포하게 되나요?"
"이미 그렇게 했으니까 그런 걱정은 할 필요 없고... 그런데 김성태
씨가 변호사를 선임했더군. 자신에게는 죄가 없다는거야."
"미친... 그럼 뭐래요?"
"자기는 노트북을 팔았으니까 정당하다는거지. 하기야 노트북이란게
컴퓨터가 아닐 수도 있잖아? 아무튼 그게 김성태씨 주장이야."
"제길..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되나요?"
"사기사건이 분명하니까 재판을 하게 될거야. 조만간 당신에게 손영
민 검사가 연락을 취할거야. 그때 알고 있는 얘기를 모두 말하라구."
"알겠어요."


의외로 쉽게 사건이 해결될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장기전이 될 것 같
았다. 김성태는 변호사를 내세워 자기가 무죄라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경찰측에서는 간단한 사건이 형사 소송으로까지 번져나가는 것을 못마
땅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미 시작된 일이니까 끝을 보아야 한다.
"무척 재미있는 사건이군요. 노트북이라는 말이 서로다른 의미를 갖
고 있으니..."
총석은 손영민 검사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손검사를 위해서
케텔의 게시판에 올라 있던 노트북과 관련된 모든 사항을 프린트 해서
주었다.
"아주 나쁜 녀석이에요. 컴퓨터 사용자들에게 노트북하면 당연히 휴
대용 컴퓨터지..."
"음, 하지만 김성태는 당신이나 다른 피해자들에게 거짓말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아시겠습니까? 나는 당신에게서 얘기를 들은 후에야
노트북이 공책이 아니라 휴대용 컴퓨터의 일종이라는 것을 알았죠. 다
시 말해서 노트북은 컴퓨터의 일종이 될 수 있고 공책이 될 수도 있다
는 겁니다. 당신이야 컴퓨터를 전공하고 있으니까 잘 알겠지만 일반인
들은 노트북 하면 공책이나 책을 떠올린단 말입니다."
"이길 수 없다는 얘긴가요?"
그는 낙심했다.
"글쎄요... 아직 당신 밖에는 만나보지 않았으니까 다른 피해자들을
만나서 유용한 증거를 찾아내야겠죠. 당신은 김성태에게 노트북에 관
한 질문을 거의 하지 않았다고 했죠? 하지만 다른 피해자들이 당신과
같을 수는 없을거에요. 아마 누군가가 분명히 김성태에게 특별한 질문
을 했을 겁니다."
"다른 피해자들의 진술이 증거로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곧 알게 되겠죠. 아직은 뭐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더 조사를 하
고 연락을 드리도록 하죠."
"기다릴께요."


손 검사는 3명의 다른 피해자들을 만나 그들의 진술을 들었다. 김우
철씨는 기자로서 컴퓨터하고는 무관한 사람이었다. 그가 최총석 처럼
노트북에 질문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컴퓨터에 무지했기 때문에
김성태가 속여 넘기기는 무척 쉬웠을 것이다. 이경영씨는 최총석 처럼
질문을 거의 하지 않았다.
마지막 피해자인 이현석이라는 회사원과의 대화에서 작으나마 해결
의 실마리가 보였다.
"아주 영특한 놈입니다. 전 yy사의 제품을 좀 알거든요. 가격이 너
무 싸길레 그것이 386이냐, 하드는 내장되어 있냐, 용량이 얼마나 따
위를 물었어요. 제가 알고 있는 사항하고 일치하는 대답을 하더군요.
그런데 보내온 물건을 보니까, 아주 황당하더라구요."
그가 공책을 꺼내서 손 검사에게 주었다.
"전부 386 페이지로 되어 있어요. 겉 표지에는 'COMPUTER NOTE'라는
영문 표지가 있구요. 그리고 그 밑에는 하드 디스크 그림이 그려져 있
네요. 제가 질문 했던 사항을 빠짐 없이 공책에다가 첨가해 놓은 거에
요. 나참 기가막혀서."
"이걸 증거물로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물론 입니다. 제발 녀석을 이겨주세요. 그런 녀석은..."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럼..."
손 검사는 김성태가 거래를 거절 했다는 세 명도 만나 보았다. 그들
이 김성태에게 했던 질문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컴퓨터에
전문가 였으며, 그들이 했던 질문은 이현석씨가 그에게 했던 질문보다
더욱 구체적이고 자세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김성태가 공책을 위조
할 생각이었다면, 그들의 질문 사항을 그대로 공책에 첨가하기란 불가
능했을 거란 얘기다.
그러므로 김성태는 지금의 경우를 미리 예상 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김성태는 빠져나갈 구멍까지 만들어 놓고 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녀
석은 검찰을 농락할 생각인 것일까?


단순한 사건이라고 검찰은 생각하고 있지만 이 문제는 의외로 사회
에 큰 충격을 주었다. 아직 일반 시민들 사이에는 그다지 퍼진게 아닌
통신이라는 메체에서 범죄가 일어났다는게 기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했
다. 그동안 컴퓨터나 관련 통신 분야의 기사를 많이 실어왔던 스포츠
신문들이나 일간 신문사에서 기자들이 파견되어 총석에게 인터뷰를 신
청했다.
두명의 기자가 방문했다. 총석은 케텔에 접속하는 모습을 기자들에
게 보여주었다. 셔터가 눌러졌다. 그는 기자들에게 사건과 관련된 게
시물을 보여주면서 설명을 해나갔다. 간혹 우쭐해지는 기분도 들어서
이 사건에서 자기의 역할이 제일 중요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 시간
가량 인터뷰가 있고 기자들이 돌아가자, 그는 손검사에게 전화를 걸었
다.
검사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는 바로 질문을 했다.
"어떻게 됐어요?"
"방법이 있을 것도 같아요."
"뭔데요?"
"yy사에 공책에 관련된 자료를 보내 달라고 요청 했습니다. 실물 몇
개와 대조해 보면 뭔가 대응책을 찾아낼 수 있을 거에요. 너무 조바심
내지 말고 기다려요. 나중에 자세히 알려 드릴 테니까."
"알겠어요."

* * *


총석은 그날 아침부터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바로 오늘이 그 비열
한 사기꾼 김성태를 엿먹이는 날이니까.
그는 시간이 될 때까지 집 안을 서성거리며, 어제 검사가 알려준 증
언 방법과, 변호사의 심문을 피할 수 있는 몇가지 요령을 다시 상기했
다. 하지만 그다지 유용할 것 같지는 않았다. 법정에서도 지금처럼 긴
장할건 뻔한 사실이고 긴장하면 횡설수설하는 것이 그였다.
그리고 검사가 충고했듯이 그가 너무 많은 말을 하기 때문에 변호사
에게 꼬투리를 잡힐 가능성이 무척 크다는 것도 잊을 수 없는 문제중
하나였다.
그는 시계를 보고 이제 나갈 시간이라는 것을 알았다.


법원에서 총석은 검사에게 쉴새없이 떠들어대며 전략이 무엇인지 물
어보았다. 손 검사는 화는 내지 않았지만, 짜증스런 표정으로 그의 물
음을 거절 했다. 다소 안심이 되는건 그의 자신에찬 표정이었다. 그러
나 총석은 검사의 그러한 표정 보다는 그의 확신에 찬 말 한마디가 더
중요했다.
총석은 남은 시간 동안 법원의 분위기를 익히고 사람들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이따금 기자들이 나타나 질문을 하기도 했다.
"통신 사기 사건으로서는 첫 공판인데 자신 있습니까?"
검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범인의 목소리를 처음 알아 차렸다고 했지요? 어떻게 알아차렸습니
까?"
총석을 말하려고 했지만 검사의 표정을 보고 말하지 않았다.
경비원들이 그들을 내보내기전까지 몇개의 더 질문이 있었지만 아무
도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후 법원 서기가 전원 기립을 명령했고 이어 재판부 임원이 입장
했다.
몇가지 절차가 진행 된 후, 검사의 진술로 재판이 시작 되었다.
"재판장님 및 방청객 여러분들은 노트북이 무엇이라고 생각 하십니
까? 아마도 다양한 의미로 생각하고 계실 것입니다. 사전적 의미로 본
다면 공책이나 수첩 따위일 것입니다. 그러나 최근 컴퓨터 기술이 발
달하여 공책만한 크기의 컴퓨터가 개발 되었습니다. 크기가 작고 공책
만하다하여 노트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는 것입니다. 일반인들
이 그 뜻을 모른다 하여도 컴퓨터를 다루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피고인은 그런 미묘한 차이를 이용하여 범죄를 저지른 것 입
니다. 그것도 아직까지는 신성시 되는 컴퓨터 통신 망에서 말입니다."
그는 호흡을 잇고 계속 말했다.
"컴퓨터 통신이라는 것은, 개개인이 단말기나 개인용 컴퓨터를 이용
하여 케텔이라는 중앙 컴퓨터에 연결하여 다양한 정보를 주고 받고 때
로는 사람도 사귈 수 있는 첨단 정보 매체인 것입니다. 개인이나 기업
차원의 홍보도 할 수 있고 이용자들은 인쇄매체보다 빠르게 정보를 구
할 수가 있게 됩니다. 피고인은 이러한 기능을 역 이용하여 거짓 정보
를 퍼뜨리고 서로 신분을 알 수 없다는 것을 악용해 사기를 저지른 것
입니다. 피고인은 일반 공책을 노트북 컴퓨터라고 속여 팔아먹고도 전
혀 반성의 기미가 없는 것입니다!"
손 검사의 진술이 끝나자 변호사의 진술이 이어졌다. 변호사는 심호
흡으로 마음을 가다듬고 차분하게 진술 해 나갔다.
"재판장님, 피고인은 절대로 법에 저촉되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값싼 물건을 고가에 팔려고 한 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오나, 그
것을 알면서도 물건을 산 피해자들이 더욱 어리석은 것이 아니겠습니
까? 제가 케텔에 올랐던 그 게시물들을 모두 검토해 보았습니다. 피고
인은 노트북이라는 단어 외에는 절대로 컴퓨터에 대한 단어를 사용하
지 않았습니다. 피고인은 yy사의 노트북을 100만원에 판다고 했지, yy
사의 노트북 컴퓨터를 100만원에 판다고 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
리고 그 yy사는 미국의 컴퓨터 회사이름이 분명하지만 같은 이름의 공
책 회사가 있다는 것이 밝혀 졌습니다.
이상입니다."
변호사는 총석을 냉정한 표정으로 잠깐 돌아보더니 좌석으로 돌아갔
다.
검사가 그의 진술에 반박했다.
"이 사건은 명백한 사기 사건입니다. 피고인이 아무리 교묘한 방법
으로 노트북 이외의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더라도, 노트북이라는 의미
는 컴퓨터를 다루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휴대용 컴퓨터의 일종으로
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피고인 역시 컴퓨터를 다루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것을 모를리가 없겠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노트북 외에 다른 말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리고 총석을 바라보며 덧붙여 말했다.
"증인은 증인석으로 나오십시오."
총석은 선서를 하고 검사의 심문을 들었다.
"증인은 피고인이 팔겠다는 물건을 어떤 이유로 사겠다고 마음을 먹
었습니까?"
"노트북이니까요. 예전부터 갖고 싶었던 물건이거든요. 세상에 100
만원짜리 공책이 어디 있어요. 당연히 100만원이나 되는 노트북은 컴
퓨터 밖에는 없잖아요."
"좋습니다. 나는 증인이 피고인에게 물건에 대한 질문을 별로 하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어째서 그랬습니까?"
"yy사의 제품이라고 했으니까요. 물건은 새거라니까 그에 대한 질문
은 별로 할게 없었구요. yy사의 제품은 좋기로 유명하거든요."
"피고인은 공책 회사와 컴퓨터 회사가 같은 이름이라는 것까지 이용
했군요. 좋습니다, 이번엔 다른 질문을 하겠습니다. 현제 케텔에는 수
많은 허위 가입자들이 있는 것으로 밝혀 졌습니다. 피고인의 ID -- 신
분 코드는 middle9이지만 그는 psycho9라는 허위 아이디를 가지고 있
기도 합니다. 피고인은 대화실에서 <노트북에 관하여> 라는 주제로 대
화방을 개설하고, 또다른 허위 아이디로 피해자들을 유도해 결심하게
만들었습니다. 증인은 그 사실을 인정합니까?"
"글쎄요..."
총석은 검사의 표정을 보고 재빠르게 정정했다.
"예."
"그때 상황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답장을 보낼까 망서리다가 대화실에 가게 되었습니다. 우연히 <노
트북에 관하여>라는 대화방을 발견하고 들어갔었지요. 제가 게시판에
오른 노트북을 사고 싶다고 말하니까, animal9라는 사람이 psycho9님
이 파는 것을 말하냐고 묻더군요. 그렇다고 하니까 자기 친구도 그 노
트북을 구입했는데 VGA 비데오 카드도 지원하고 속도도 무척 빠르다고
했어요. 설마 보통 공책이 VGA 비데오 카드를 지원하지는 않겠죠? 게
다가 속도가 빠른 공책이라니..."
"이의 있습니다!"
변호사가 소리쳤다.
"증인은 더 말할게 있나요?"
판사가 말했다.
"아닙니다."
"이의 인정합니다."
"증인은 대화실에서 animal9라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다고 하는데
그에 대한 증거가 있습니까? 대화실에서의 글로 하는 대화란 흘러가는
것이고, 자료를 저장했더라도 그것은 얼마든지 위조가 가능한 것 아니
겠습니까? 따라서 증인의 증언은 전혀 신빙성이 없는게 됩니다. 이상
입니다."
검사가 재빨리 반격했다.
"하지만 그 시각 대화실에서 animal9라는 아이디를 본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 게다가 animal9가 허위 아이디라고 운영자들이 통보하지 않
았습니까?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아, 그리고 대화도중 끊긴것도 수상해요. 그때는 시스템의 불안정
으로 끊겼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의도적으로 끊은 것 같아
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요?"
"당시 animal9가 했던말은 제가 결정을 내리는데 꼭 필요한 정보 뿐
이었어요. 그리고 계속 얘기하다가는 꼬투리가 잡힐지도 모르니까 접
속을 끊은 것이죠."
"재판장님 이의 있습니다. 증인의 증언은 객관성이 결여되어 있습니
다. 순전히 유추에 의한 증언 뿐입니다!"
"이의 인정합니다."
판사가 말했다.
"증인은 어떤 이유로 접속이 끊긴 것인지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매우 위험한 유추를 하고 있습니다. 통신 이용시 접속이 중단되는 사
태는 굉장히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천시 잡음이나 혼선, 혹은
운영 시스템의 불안정이나 통화중 대기 서비스 같은 기능으로 끊기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것을 피고인에게 연계하는 증언은 터무니 없습
니다."
"증인은 유추하는 증언을 삼가하십시오."
판사가 경고조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손 검사가 심문을 마치고 좌석으로 돌아가자, 변호사가 반대 심문을
위해 나왔다.
"처음으로 돌아갑시다. 그러니까 증인은 피고인과의 전화통화에서도
그것이 컴퓨터라는 사실을 확인하지 않았다고 했지요?"
"예."
"훌륭하군요. 만약에 그게 컴퓨터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물건
을 사지 않았겠군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피고인은 단순히 공책을 비싼 가격에 팔 생각이었고 증인
의 어리숙함으로 엉뚱한 물건을 산 것이라는 결론이 나오는군요.
그렇지 않나요?"
그가 빈정댔다.
"그렇지 않아요. 노트북이 휴대용 컴퓨터라는 건 아는 사람은 다 안
다구요."
총석이 화를 내면서 말했다.
"받아본 공책을 보셨나요? 이 공책의 이름을 말해 보시겠어요?"
변호사가 공책을 총석에게 내 밀자 총석은 마지못해 읽었다.
"<컴퓨터 노트>요."
"글을 읽을 줄은 아는군요. 이상입니다, 재판장님."


잠시후 손 검사는 피고인에 대한 심문을 신청하고 그의 앞에 섰다.
"피고인은 어떤 이유로 허위 아이디를 다수 보유하고 있습니까?"
"허위 아이디는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습니다. 나만 갖고
그러지 말아요."
"피고인은 묻는 말에만 답하시오."
재판장이 나섰다.
"...재미 있으니까요..."
김성태가 대답했다.
"재미가 있다구요? 어째서 허위 아이디를 갖는게 재미가 있지요? 혹
시 그 아이디로 남을 속이거나 상스런 욕을 하기 위해 준비한 것이 아
닙니까?"
"날 모욕하려들지 마세요!"
그가 작게 윽박 질렀다.
"그러면 이유를 대보세요."
손 검사가 얼굴을 내밀려 작게 말했다.
"...."
그는 대답이 없었다.
"재판장님, 피고인이 대답하도록 해주시겠습니까?"
"피고인은 검사의 질문에 충실히 답변 하시오."
"제길, 당신 말이 맞는 것 같소..."
그가 작게 말했다.
"들리지 않는데 다시 한번 말해 주시겠습니까?"
"씨팔, 당신 말이 맞다구요!"
그가 크게 말했다.
"그렇다면, 피고인이 sell란에 게시물의 아이디도 그런 이유에서 허
위 아이디를 사용한 것입니까?"
검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변호사가 소리쳤다.
"이의 있습니다! 검사는 피고인에게 유도 심문을 하고 있습니다."
"이의 기각합니다. 검사는 계속 심문 하시오."
"말씀해 주십시오. sell란에도 같은 이유로 허위 아이디를 사용한
것입니까?"
"아, 아닙니다. 난 사실 내 아이디의 암호가 무엇인지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냥 집히는걸로 접속해서 글을 올린 것 뿐입니다."
검성태의 변호사는 그가 제대로 답변하자 안심했다.
"자신의 암호를 모를 정도로 허위 아이디를 많이 사용했다는 말이군
요."
그는 억양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재판장님, 그리고 방청객 여러분들 현제 피고인이 사용한 허위 아
이디는 4개로 밝혀져 있으며, 이 4개는 모두 다른 사용자를 모욕하고
협박하거나 여성 유저들을 성적으로 희롱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케텔
에는 이러한 파렴치한 사용자들이 굉장히 많다고 합니다."
"케텔 측에서 그러한 허위 사용자를 간과하는 이유는 뭔가요?"
판사가 말했다.
"우선 이용자 확보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두번째 이유는 케텔
시스템이 무료로 운영되기 때문입니다. 철저한 사용자 관리 시스템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고 따라서 누구든지 허위 아이디를 만들어 낼 수
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케텔측에도 이런 문제에 책임이 있을 수 있다는 얘기겠군
요?"
"그렇습니다만, 현실적으로 그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심문 계속 하십시오."
손 검사는 심문했다.
"본인은 피고인이 노트북이 뭐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노트북이 뭐지요?"
"...공책이요."
그가 머뭇거리다가 간신히 말하자 방청석에서 간간히 웃음소리가 터
져나왔다.
"개그를 하시나요? 변호인은 반대 심문을 하십시오."
손 검사는 변호사를 쳐다보며 말했다.
"반대심문 생략하겠소."


판사가 20분 간 휴정을 선언했다.
"멋졌어요. 꼭 이긴 것만 같은데요?"
총석이 좋아하면서 말했다.
"현제까지는 유리한 고지에 있는 것 만은 틀림 없습니다."
"결정타를 먹여야죠, 나는 언제쯤 증언하게 됩니까?"
옆에서 잠자코 있었던 그가 말했다.


개정이 되자, 손 검사는 다음 증인을 신청했다.
"이름과 직업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손 검사가 말했다.
"이름은 이현석이고 무역회사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증인이 피고인에게 했던 얘기, 그리고 들었던 얘기를 말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물건이 386 기종에 하드 디스크가 내장되어있나를 물어보았습
니다."
"그랬더니요?"
"물론 그렇다고 하더군요."
검사는 방청객을 둘러 보고는 판사에게 몸을 돌려 이렇게 말했다.
"증거물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가 서류철에서 공책 한 권을 꺼냈다.
"겉 표지에 'COMPUTER NOTE'라는 영문 표지와 하드 디스크의 그림이
있군요. 놀랍게도 공책의 총 페이지 수는 386이었습니다. 이것으로 본
다면 피고인은 거짓말은 하지 않은 결론이 나옵니다."
그는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미국 yy사의 공책이 아닙니다. 뒷장을 보면 yy사의
상표가 분명히 인쇄되어 있습니다만 yy사의 여러가지 공책을 조사해본
결과 이러한 모델의 공책을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피
고인은 증인에게서 들었던 얘기를 토대로 공책을 위조한 것입니다. 종
이질과 인쇄 형태를 조사해보면 이것이 국내 생산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즉 피고인은 증인이 요구한 물건과 다른 제품을 100만원이라는 고가
에 팔아 넘긴 것입니다. 이것은 거래법 위반에다가 명백한 사기인 것
입니다! 재판장님, 그리고 많은 방청객 여러분, 우리는 새로운 미디어
라고 할 수 있는 컴퓨터 통신 망에서 일어난 이번 사건에 대해서 확신
에 찬 결론을 내려야만 합니다.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이와 같은 사건
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일어날 것이며, 따라서 컴퓨터 통신이라는 작은
사회는 조만간 사기의 온상이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감사합니다."
검사는 좌석으로 돌아가면서 변호사에게 말했다.
"반대 심문 하시지요?"
변호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어색하게 일어섰다.
"손 검사는 논고는 무척 감동적이었으나, 피고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다가,
"공책의 개조는 아주 당연한 것입니다. 컴퓨터를 다루는 관계자들은
아시겠지만 컴퓨터란 당연히 확장성을 갖고있어야하지 않겠습니까?
286 컴퓨터를 개조해서 386으로 업그레이드하고, 모노 비데오 카드를
칼라 비데오 카드로 바꾸지 않습니까?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공책도 개조가 뒤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공
책은 원래 100페이지였으나 워낙 확장성이 좋아서 386으로 페이지를
늘린 것입니다. 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yy사의 컴퓨터는 확장성이
좋은 것으로도 유명하다고 하더군요. 따라서 피고인에게는 아무런 잘
못이 없습니다."
그는 말을 마치고 이현석씨를 잠깐 바라보더니 체념한 투로 덧붙였
다.
"증인에 대한 반대 심문은 생략하겠습니다."
변호사가 좌석으로 돌아가자 판사가 말했다.
"변호인는 본 법정을 코메디 무대로 만들지 마십시오. 개조된 공책
이 정당하다는 것은 터무니 없지 않소? 난 아직까지 이런 재판이 왜
열려야 되는지 이해할 수가 없소. 30분간 휴정하겠소!"


"이겼군요. 그렇죠?"
"판결이 나봐야 알겠죠."
"실형이 선고될까요?"
그는 대답 대신 미소로 답했다.
"빨리 개정 됐으면 좋겠어요."
"나도 그래요."
손검사가 말했다.


판사는 입장하자마자 판결문을 읽어나갔다.
"피고인이 아무리 간교한 방법을 동원 했다고는 하나 통신이라 특수
한 환경을 고려해 본다면 그가 팔고자 했던 물건은 공책이라기 보다는
컴퓨터의 일종인 것입니다. 이것을 악용한 피고인 김성태에게 형법
347조 1항에 의거하여 5년의 실형을 선고 합니다. 또한 이러한 사건이
발생하도록 방관한 케텔 측은 각 피해자들에게 100만원씩의 벌금을 지
불할 것을 선고 합니다! 탕탕--."
'얏호! 이기고 돈도 벌었군!'
그때, 피고인 석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 총석은 그쪽으로 고개
를 돌렸다.
"엠블란스를 불러, 김성태씨가 심장마비를 일으켰어!"
악당의 최후였다.



로라
( Laura )
by - Saki



"아가씨, 정말 죽는 건 아니죠? 그렇죠?"
아만다가 물었다.
"의사 선생님이 화요일까지만 산다고 그랬어요."
로라가 말했다.
"하지만 오늘이 토요일인데, 그건 너무하잖아요!"
"너무한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오늘이 토요일인 건 확실해요."
"죽는다는 건 심각한 문제예요."
"난 한번도 죽는다는 말 안했어요. 아마 로라라는 존재에선 벗어날지 모르
지만, 다른 존재로 다시 태어날 걸 뭐. 동물이나 뭐 그런 거 말예요. 사람이
한평생 살면서 착하게 살지 않으면 하등 동물로 환생한데요. 생각해 보면 난
별로 착하게 살진 못했어요. 속이 좁고 심술궂은 데다 앙심이 깊어서, 사정
만 허락하면 어떻하든 앙갚음을 했으니까요."
"그런다고 앙갚음을 해서야 되나요."
아만다는 급히 말했다. 로라는 못 들은 체 계속했다.
"언니한테 미안한 얘기지만, 오빠는 골탕먹이기에 딱 좋은 상대예요. 언니
야 오빠하고 결혼했으니까 -- 오빠를 사랑하고 존경하고 참고 견딘다고 서약
했으니까 할 수 없겠지만, 난 달라요."
"오빠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래요."
아만다는 항의조로 말했다.
"하긴 잘못은 내가 먼저 했는지도 모르죠."
로라는 별로 미안한 기색도 없이 인정했다.
"그래도 오빠는 정상 참작이란 걸 해주지 않아요. 일전에만 해도 내가 좀
뛰어 놀으라고 강아지들을 풀어 줬다고 해서, 뭐 그렇게 꼬치꼬치 따질 건
없었잖아요."
"강아지들이 병아리를 쫓아다니고 암탉을 두 마리나 둥우리에서 몰아내서
그래요. 게다가 꽃밭까지 다 망쳐 놨잖아요. 오빠가 닭하고 꽃을 얼마나
애지중지하는지 잘 알잖아요."
"그렇다고 저녁 내내 잔소리를 늘어놓을 건 없잖아요. 그리고 나서 한다는
소리 '이제 그 얘긴 그만 하자'니, 난 막 얘기가 재미있어지려는 참인데...
그래서 또 심술이 발동했죠 뭐."
로라는 우스워 죽겠다는 듯 키득거렸다.
"그래 강아지 사건이 있은 다음날, 오빠가 사랑하는 토종닭들은 몽땅 묘목
창고에 몰아넣었다우."
"어쩜 그럴 수가!"
아만다는 소리쳤다.
"간단하던데요 뭘. 암탉 두 마리는 뭐 알은 낳는 체하며 둥우리에 앉아 있
었지만, 그런다고 내가 그냥 두나요."
"우린 그런 줄도 모르고..."
"이젠 아시겠죠? 내가 다음번엔 하등 동물로 환생할 거라는 말이 충분히
근처있는 얘기라는 걸. 짐승이나 뭐 그런 걸로 말예요. 하긴 또 생각해 보면
나도 내깐에는 그리 나쁜 애는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기왕이면 좀 괜찮은 동
물로 태어날 거란 생각도 들어요. 어딘지 우아하고 발랄한 --- 개구장이로
말예요. 아마 수달(족제비과의 큰 동물)이 될 거예요."
"아가씨가 수달이라니, 상상도 할 수 없어요."
"그런다고 내가 천사가 된 모습을 상상할 것도 아니잖아요."
아만다는 할 말을 잃었다. 그건 정말 상상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내가 보기엔 수달의 일생도 꽤 재미있을 것 같아요."
로라는 계속했다.
"일년 내내 연어를 먹을 수 있지, 송어도 물에서 직접 잡아먹을 수 있으니
얼마나 근사해요. 우린 송어 한 번 잡으려면 낚싯대에 파리를 달아 담가 놓
고, 하루종일 쭈그리고 앉아 걔들이 뛰어오르길 기다려야 하잖아요... 그리
고 몸매도 또 얼마나 우아하고 멋져요."
"사냥개가 있잖아요."
아만다도 한마디했다.
"개들한테 쫓겨다닐 걸 생각해 봐요. 평생 불안해서 마음놓고 못 살 걸!"
"남들이 구경해 주니까 오히려 재미있어요. 어쨌든 토요일부터 화요일까지
이 모양으로 조금씩 죽어 가는 것보다 나쁠 건 없잖아요. 그리구 죽더라도
또 다른 존재로 환생할 걸 뭐. 수달로서 비교적 괜찮은 일생을 살면, 그다음
엔 어쩌면 다시 사람이 될지도 몰라요. 아마 좀 미개인으로 -- 그렇지, 이집
트의 흑인으로 태어날 거예요. 발가숭이 흑인 꼬마로요."
"좀 진지했으면 좋겠어요."
아만다는 한숨을 쉬었다.
"정말로 화요일까지밖에 못 산다면 이제 좀 진지해도 되잖아요."

사실 로라는 화요일까지도 못 살았다. 월요일에 죽은 것이다.
"정말 너무해요."
아만다는 작은 시아버님인 럴워스 퀘인 경(卿)에게 불만을 털어놓았다.
"골프 치고 낚시 파티를 하자고 손님을 잔뜩 청했단 말예요. 철쭉꽃도 지금
한창인데."
"그 애가 언제 남 생각을 하든."
럴워스 경은 말했다.
"태어날 때도 하필 정초라서 정신이 하나도 없을 때였어. 그것도 어린애라
면 딱 질색인 귀한 손님이 와 있는데 말이다."
"얘기하는 것도 온통 이상한 소리만 해요. 혹시 집안에 정신이 이상한 분은
안 계셨나요?"
"정신 이상? 아니. 그런 얘긴 들어 본 적 없는데. 그 애 아버지도 시골 구
석에 틀어박혀서 안 나오겠다고 고집하는 것 빼고는 매사 멀쩡한 양반이고."
"죽으면 꼭 수달로 환생할 거라고 믿고 있었어요."
"요즘은 그 환생인지 뭔지 하느 얘기가 하도 흔해서, 이젠 우리 서양에서도
그런 걸 그저 헛소리로 웃어넘길 수만은 없게 됐단다. 더구나 로라는 통 종
잡을 수 없는 애였으니, 나도 그 애가 저세상에 가서 무슨 짓을 할지 전혀
짐작이 안 가는구나."
"정말로 아가씨가 동물 같은 걸로 환생했을까요?"
아만다는 물었다. 그녀는 주위 사람의 관심을 대체로 그냥 받아들이는 편이
었다.
바로 그때 에그버트가 들어왔다. 로라의 죽음 때문이라고만은 설명할 수 없
는 비통한 애도의 표정을 띠고 있었다. 그는 부르짖었다.
"내 토종닭이 넷이나 죽었어! 금요일에 품평회에 출픔하려고 공들여 키운
건데... 하나는 끌고 가서 하필이면 이번에 새로 만든 카네이션 화단 한가운
데서 먹어치웠어. 돈도 돈이지만 그 화단 꾸미느라고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
.. 그나저나 닭이고 꽃이고 어떻게 그리 내가 아끼는 것들만 골라서 망쳐 놓
을 수 있지! 그놈의 짐승은 꼭, 어떻게 하면 단시간내에 최고로 날 거덜낼
수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것 같단 말야."
"여우가 그랬을까요?"
아만다가 물었다.
"하는 짓을 보니 긴털 족제비같은데."
럴워스 경의 말.
"아니에요."
"물갈퀴가 달린 발자국이 온통 널려 있는 걸요. 발자국을 따라가 보니 정원
끝에 있는 시냇물까지 갔더라구요. 틀림없이 수달이에요."
아만다는 문득 고개를 들어 힐끗 럴워스 경을 쳐다보았다.
에그버트는 너무 열이 나서 밥생각도 없는 듯, 닭장을 튼튼하게 뜯어고치려
고 뛰어나갔다.
"적어도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는 기다릴 줄 알았는데... "
아만다는 분개한 어조로 말했다.
"그것도 자기 장롄데 말이다."
럴워스 경이 말했다.
"이야말로 고인이 남은 가족에게 얼마만큼 경의를 표할 수 있나 하는 본보
기감이로군."
그러나 장례식을 거행하는 사람들에 대한 고인의 경멸은 다음날 한술 더
뜬 형태로 나타났다. 가족이 모두 장례식에 가서 집을 비운 사이에, 그나마
남아 있던 토종닭들이 전멸을 당한 것이다. 학살자는 이에 그치지 않고, 퇴
각로에서 정원에 있는 대부분의 꽃밭을 짓밟아 놓았다. 한구석에 따로 만든
딸기밭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장 사냥개를 데려오라고 해야지."
에그버트는 이를 갈았다.
"안돼요! 어떻게 그런 짓을!"
아만다는 무심코 부르짖었다.
"...제 말은 시기가 안좋다는 거예요. 장례식이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이건 긴급 상황이라구. 수달이란 놈은 한번 일을 벌이기 시작하면 멈출 줄
을 모르거든."
"이젠 잡아먹을 것도 없으니 다른 데로 갈지도 모르잖아요."
아만다는 은근히 말렸다.
"누가 보면 당신, 그놈의 수달 편인지 알겠어."
"최근에는 비가 안 와 냇물에 물이 거의 없잖아요."
아만다는 이의를 제기했다.
"숨을 곳도 없는 짐승을 사냥한다는 건 왠지 떳떳지 못한 것 같아요."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에그버트는 씩씩거렸다.
"난 지금 사냥 얘길 하고 있는게 아니라구. 그놈의 짐승을 어서 죽여야 한
단 말야."
그런데 아만다의 반대 의사마저 약해질 일이 벌어졌으니, 다음 일요일 모두
예배를 보러 교회에 간 사이에, 그놈의 수달이 이번엔 집안에까지 침입에 들
어와서는, 식품 저장실에 있는 연어를 절반이나 거덜 냈을 뿐만 아니라, 생
선 토막과 비늘을 온통 짖이겨서 에그버트의 서재에 깔아 놓은 페르시아 융
단을 몽땅 버려 놓았던 것이다.
"이러다간 놈이 침대 밑에 숨어 있다가 우리 발을 물어뜯을 날도 멀지 않겠
어."
에그버트가 말했다. 이 별종의 수달에 관해서 아만다가 아는 바에 비춰 봐
도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사냥은 그 다음날 저녁에 하기로 결정되었고, 그 시간에 아만다는 홀로 시
냇가를 거닐고 있었다. 어렴풋이 들려오는 저 소리는 사냥개의 울음 소리였
을까? 이런 일에 안주인 혼자만 빠진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지만, 고맙게도
사람들은 그녀가 다가올 마을 축제에 대비해서 농작물 재배를 하고 있거니
생각했다.
그날의 사냥 소식을 전해 준 사람은 이웃 친구인 오로라 버리트였다.
"같이 가셨으면 좋았을 걸. 얼마나 재미있었다고요. 그놈은 금방 잡혔어요.
뜰 저쪽 웅덩이에 숨어 있더군요."
"그래서 -- 죽였나요?"
아만다는 물었다.
"물론이죠. 암놈인데, 잘생겼던데요. 이 댁 양반은 그놈 꼬릴 잡으려다 심
하게 물리기까지 했는 걸요. 불쌍한 것. 생각하면 참 안됐어요. 글쎄, 죽을
때는 눈초리가 꼭 사람 눈 같더라니까요. 이런 말 하면 웃으시겠지만, 그 놈
을 보니까 누구 생각이 나는지 아세요? 아니 새댁, 왜 그래요?"
신경 쇠약으로 쓰러졌던 아만다가 어느 정도 원기를 회복하자, 에그버트는
아내를 데리고 나일강 유역으로 휴양 여행을 떠났다. 환경이 바뀌자 건강과
아울러 마음의 평정도 급속히 회복되었다. 다양한 메뉴를 찾아 말썽을 피우
던 개구장이 수달 때문에 일어난 소동도 이제는 정상적인 관점에서 볼 수 있
게 되었다. 평소의 차분한 성격이 고개를 든 것이다.
어느 날 저녁 카이로의 호텔 방에서 한가롭게 화장을 하고 있노라니, 옆방
에서 남편이 고래고래 악을 쓰는 소리가 들려왔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험한
말로 온갖 욕설을 퍼붓고 있었는데, 그래도 아만다는 끄떡도 하지 않고 평온
을 유지했다.
"왜 그래요? 무슨 일이길래 그래요?"
"그 짐승 같은 꼬마놈이 내 새 셔츠를 모조리 욕탕에 집어 넣었어! 이놈을
그저 잡기만 해 봐라. 이놈을 그저... "
짐승같은 꼬마라니, 누구 말이예요?"
아만다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눌러 참으며 물었다. 치미는 화를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몰라 끙끙대는 에그버트의 모습은 불쌍할 정도였다. 그는
씩씩거리며 말했다.
"그런 놈이 있어. 이집트 깜둥인데 발가숭이 꼬마야."

이제 아만다는 몸져 누워 있다.





달빛
( Moonshine )
by - W. Heidenfeld



덜컹거리는 열차 안에서 휴가중인 병사들이 하는 짓이란 마시며 지껄여
대는 것이 고작이었고, 그 중 하나가 하모니카를 갖고 있어서 이따금 떠들
썩하게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들은 한껏 소리 높여 <프레토리아 행진>
을 부르면, 식당 열차의 급사들도 그 <행진>에 잠시 끼여들었다. 그들은
병사들의 파티를 여러 차례 겪었기에 그 진행 과정을 잘 알고 있었고, 감
독하는 사람이 없을 때는 그들과 한패가 되어 어울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사람들은 하나씩 자기 객실로 돌아갔고, 텅 빈 식당차에는 아가씨와 나만
남게 되었다. 그날 밤 그녀는 근심스러운 듯 이따금 거울을 들여다볼 뿐 별
로 말이 없이 앉아 있었는데, 우리들의 거친 합창에 끼어들었을 때는 부드
러운 목소리가 좀 무리를 하는 것 같았다.
급사들이 불빛을 줄여 버리자 바깥보다 식당차 안이 더 어두워졌다. 창밖
에서는 영국 중부 지방 특유의, 기복이 심하고 달콤한 향기가 풍기는 전원
지대를 달빛이 부드러운 손길로 어루만지고 있었다. 달빛 어린 평지 저 너
머로 시꺼멓게 부풀어 오른 언덕은 친근감에 넘쳐 매혹적이었다. 눈앞에 가
로놓인 길은 달빛으로 인해 한결 더 새하애진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고, 길
양쪽 밭에는 희미한 안개가 달빛을 받아 은빛 베일이 되어 반짝이고 있었다.
대위 제복의 내 모습도 돋보인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녀 또한 얌전한
고양이처럼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아가씨였다. 혹시 이 여자와 길거리에서
마주친다 해도 쳐다본다거나 고개를 돌려 그 모습을 다시 보려 하지는 않았
으리라.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그렇다고 그녀에게 매력을 느낀 건
아니었고, 다만 알고 싶었을 뿐이다. 넓고 성실해 보이는 이마, 똑바로 상대
에게 향해 있음에도 상대를 바라보지 않는 멍한 회색눈, 그 속에 어떤 생각
이 스며 있는지 그게 알고 싶었던 것이다.
나라는 인간은 소년 시절부터 남들을 살피며, 그들에게 말을 걸고 싶다든가
그들로 하여금 내게 말을 걸게 하겠다는 욕구가 있었다. 대학 시절에는 어떤
사전을 뒤진다 해도 답을 찾지 못할 질문을 꾸며 내어 교수한테 간 적도 있
었는데, 그 또한 교수의 심리 반응을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나와 친하게 어
울렸던 여자애들 -- 그들은 키스 대신 계속 지껄여 대야만 했던 것이다. 지
금 내 앞에 앉아 있는 여자 -- 뭔가 복잡하고 성가신 사정으로 돌파구를 찾
고 있는 듯도 하고, 불확실한 문제와 맞붙어 자기 자신과 싸우고 있는 것 같
기도 한 여자... 그녀는 그런 나의 호기심의 대상인 셈이었다.
별안간 질실한 것 같은 연기가 열차내에 가득해지며 달빛을 지워 버렸다.
가까운 객실에서 흘러나오는 하모니카의 맬로디가 터널 벽에 부딪쳐 기묘한
음향으로 메아리쳤다. 우리는 심한 기침을 해댔고 그녀는 내가 내민 손수건
으로 입과 코를 막았다. 그러나 어느 터널에도 반드시 끝은 있게 마련 -- 우
리는 다시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달은 한결 높이 떠올라 한층 더 밝아진
듯이 보였다.
"아름답지 않습니까?"
나는 그녀가 돌려 준 손수건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말을 건넸다. 말붙일 계
기를 만드는 대사치곤 멋적기는 했지만, 터널을 통과하면서 혼이 났던 뒤인
지라 달이 몹시 아름답게 보인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눈썹을 찌푸
렸다. 이어 그 떠름한 표정이 눈까지 옮겨 갔다. 이제까지와는 달리 거리감
을 두려는가 싶었으나, 그녀가 지껄이기 시작한 건 바로 그때부터였다.
"꼭 오늘 같은 밤이었어요. 제가 애인을 조국에 바친 것은."
묘하도록 현실과는 거리가 먼 음향을 띤 말이었다. '조국에 바친다'라는 표
현은 어머니가 자식에 대해, 혹은 아내가 남편에 대해서 사용한다 해도 어마
어마한 느낌이 든다. 누군가를 조국에 바치다니, 마치 그 누군가가 자기 것
이므로 얼마든지 바칠 수도 있다는 것 같지 않은가 말이다. 그럼에도 그녀의
그 거창한 언사는 조금도 어색하게 들리지 않았고, 오히려 그 이면에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는 듯이 여겨졌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 눈은 어서 이야기를 계속하라고 재
촉하기보다는, 오해 없기를 바란다고 그녀를 향해 말하고 있었다.
"꼭 누군가에게 얘기하지 않으면 마음에 걸려서요..."
그녀는 잠시 후 입을 열었다.
"그저 얘기를 들어 주기만 하는 누군가에게 말이예요. 친구라면 당장 동정
을 하겠지요. 당신은 친구가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오히려 말할 수 있는 거
예요....
저는 전쟁이 시작됐을 때 육군에 입대하여 어느 비밀 부대의 상사로 임명되
었지요. 거기서 어떤 일을 했는가는 아무래도 좋아요. 아무튼 일은 마음에
들었고, 막연하나마 그럭저럭 행복했어요. 그런데 사건이 생긴 겁니다. 난생
처음으로 사랑을 하게 된 거예요. 남자의 이름은 제럴드, 그 사람은 참으로
동지다웠고 무척 다정했어요. 육체적인 사랑을 나눌 상대를 찾는 거야 쉬울
지 모르지만, 머리칼을 쓰다듬거나 손목을 어루만지는 정도로 몇 시간이나
잠자코 같이 있어 주는 남자란 드물거든요. 그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저는
제럴드가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 충분했고요.
저는 그의 과거를 조금밖에 몰랐어요. 그는 잉글랜드 북부에 있는 어느 마
을에서 성장기를 보냈고, 남아프리카에 올 ㄳ까지 그 고장을 떠난 적이 없다
고 했어요. 남아프리카에 온 건 전쟁 직전으로, 전쟁이 터지자 곧바로 입대
했다는 정도였지요. 그런데 그이가 고향에 편지 보내는 걸 한번도 못 봤어요.
그래서 왜 편지를 쓰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이는 약간 당황하면서, 편지를
쓰고 싶어도 상대가 아무도 없다고 하더군요.
사람이 어째서 누군가에게 마음이 끌리는지 그 이유를 꼭 집어 말하기는 어
렵지만, 저는 제럴드의 여러 면을 사랑했어요. 그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자
란 사람 치고는 놀랄 정도로 시야가 넓었어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제 마음에
들었던 점은, 남의 일에 대해 거북해 하지 않는, 흥미라기보다는 열정을 품
고 있다는 것과, 남의 장점을 간파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그의 상관인 소령에 관한 건데, 이름은 생략하겠어요. 제럴드의
판단에 의하면 그는 미덕의 표본이요, 지혜의 중심이 되는 인물이란 거예요.
'어쩌면 그토록 훌륭한가.'하며, 그는 묘하게 귀에 거슬리는 타고난 사투리
로 소령의 공적을 극구 칭찬하는 겁니다. 제게는 그따위 공적이 뭐가 그리
훌륭한지 도무지 알 수 없는데도 말이에요. 그렇지만 제럴드가 저에게 자기
근무 상황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는 자체가 저를 높이 평가한다는 증거이기도
했지요. 물론 그는 제가 비밀 부대 소속이라는 걸 알고 있기는 했지만, 그렇
다고 해서 군대 업무에 관한 얘기를 하는 건 아니니까요. 그이는 또한 이런
말도 했어요 -- '무심코 내뱉는 말이 해로울 때가 있는데, 대부분 병사들이
그걸 깨닫지 못한다. 스파이들은 엉겁결에 튀어나온 한마디나 눈짓등에서 조
금씩 정보를 모으는 것이다.'라고요. 그리고 제 상관 조차도 극비 사항이라
고 생각하는 상황에 대해 넌지시 말하여 저를 놀라게 한 적도 있었어요. 그
런 정보를 어떻게 손에 넣었는가는 별로 문제될 게 없지만요. 머릿속으로
'둘 더하기 둘은 얼마'하는 식으로 산출해 냈을 테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 밤, 우리는 <샘>이라는 클럽에 가서 춤을 추었어요. 그런데
다른 손님들이 너무나 떠들어대고 난폭해서, 그곳을 나와 조용한 벤치를 찾
아 다정히 앉아 달 구경을 하기로 했지요. 그는 오른팔로 제 어깨를 감싸고
있었어요. 처음에는 그가 즐겨 입에 올리는 그 소령 얘기를 하면서, 소령의
두뇌가 명석하다는 것을 제 눈앞에 펼쳐 보여 주었지요. 그러나 제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는 소령 얘기를 중단했습니다. 우리는 말없이 귀뚜라
미 우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주위의 고요함에 흠뻑 잠긴 채, 서로의 존재
와 삶의 기쁨에 취해서 자신의 실체를 잊고 있었습니다. 저는 달이 잔디 위
에 그려 낸 이상한 무늬가 갖가지 모습으로 변하는 걸 보고 있었어요. 아주
서서히 변하고 있었지요."
하모니카가 <샐리 마리>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날도 같은 보름달, 노래도 같은 <샐리 마리>였어요."
신음하듯 가냘픈 소리였다.
"하지만 그 밖의 것은 전부 달라요."
그녀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우리는 오랫동안 벤치에 앉아 있었어요. 한참 있다가 제럴드가 하늘을
올라다보며 '그는 정말 근사하지 않습니까?'하고 말하는 게 아니겠어요.
'누구 말인데요?' 나는 약간 졸린 듯한 상태에서 되물었지요.
'그야 물론 소령이지요.'라고 그는 대답했는데, 그때 그의 당황감이 제게,
보였다기보다는 느껴졌던 겁니다.
'소령 외에 또 누가 있겠습니까?'
그가 약간 반발하는 투로 덧붙이더군요. 그런데 그 말투가 전혀 그이답지
않았어요. 그는 자기가 열렬한 영웅 숭배론으로 저를 항복시키고 나면 언제
나 쇠약한 태도를 보였고, 혹시라도 제가 소령을 질투할까 봐 걱정되는지
변명 비슷한 말을 하곤 했거든요. 그런데 그때는 그렇지가 않았어요. 어렴풋
이나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일이 일어났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뭔가 형세
가 이상하고 개운치가 않았어요.
별일 아니다. 그런 건 사소한 일이며, 다만 달빛의 조화였을 뿐이다. 라고
말씀하실지 모르지만, 그 일은 며칠 동안 저를 괴롭혔습니다. 저는 그때의
정경을 머릿속에 그리며 장면 하나하나를 재현해 보았지요. 그가 어떻게 말
하고 어떤 표정을 지었으며, 어떤 몸짓을 했는지... 살아 있는 한 아마 그
일을 잊지 못할 거예요."
그녀는 잠시 이야기를 중단하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하모니카는 아직도
연주를 계속하고 있었다 --- "우리는 공군, 무적의 공군 용사..."
그녀는 그 멜로디를 허밍으로 따라 부르다가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결국은, 한시도 그 상태로는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 부태 소속 정보 담당
관에게 면회 신청해서 그날 있었던 일을 그대로 얘기하고 제가 느꼈던 점도
말했지요. 그 부서 사람들은 정말 괜찮은 분들이었어요."
그녀는 엷은 웃음을 지었다.
"일은 바로 처리되었지요. 그리고 그들은 모든 진상을 파악 했어요. 게다가
제럴드의 경우는 간단 명료했으니까요. 그 사람은 독일 스파이였습니다. 정
보 담당관들은 제럴드가 받은 훈련, 맡고 있던 비밀 임무 등 모든 것을 알아
냈고, 그는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내가 자기를 당국의 손에 넘겼다는 사실
을 그 사람은 마지막까지 몰랐습니다."
거기까지 말하고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먼곳을 바라보는 듯한 표정으로 있
다가 잠시 후 이야기를 계속했지만, 그 어조에는 쓸쓸함이 깃들여 있었다.
"그 일로 저는 보상을 받았답니다. 그래서 얻은 것이 이것이지요."
그녀는 제복에 붙어 있는 별 셋을 가리켰다.
"유다가 얻은 돈이지요. 전쟁은 이제 지긋지긋해요!"
나는 묵묵히 앉은 채, 그녀가 더 많은 이야기를 해주기를 기다렸다. 한번
더 그녀는 어떤 멜로디를 허밍으로 흥얼거렸다. 이번에는 그 계기가 되는 하
모니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는데... 그 노래는 한번 들으면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 멜로디로, 슬픈 듯하나 아름답고, 채울 수 없는 동경이 서린 가락이었다.
"독일의 민요랍니다."
그녀는 내쪽으로 돌아앉으며 말했다.
"Guter Monde, de gehet so stille(아름다운 달이여, 그대는 너무나도 고요
해)...."
"하지만 도무지."
"모르시겠다는 말씀인가요? 실은 아주 간단한 일입니다. 제가 비밀 부대에
소속된 건 독일어를 아주 잘했기 때문이었지요. 저는 독일어를 속속들이 잘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당연히 다음 같은 사실도 알고 있었던 겁니다. ---
백인들이 사용하는 언어 중에서 독일 사람만이 달을 가리킬 때 '그녀'가 아
니라 '그'라는 대명사를 사용한다는 것을."




은행의 밤
- Arthur Porgers

페이지 햄프턴은 자신의 책상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금고에 대해서 골
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시큐리티 아메리카> 은행의 은행장으로서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지만, 그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른 은행장
들과는 달리, 철근과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대형 금고 속에 혹시 강도라도 들
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 금고를 털 수 있을
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햄프턴은 그 금고 안에 들어 있는 50만 달러 이상의 현금을 어떻게든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했는 데, 그것은 그가 이미 은행돈을 80만 달러 이
상이나 유용해 버렸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80만 달러 이상의 돈
을 강탈달했다고 해야 할 판이었다.
월급이 별로 되지 않는 일반 은행원들과 비교한다면 변명할 여지가 없
을 정도로 그의 월급은 상당했다. 하지만, 햄프턴은 씀씀이가 너무 헤펐다.
얼굴도 잘 생기고 성격도 좋으며, 사회적 지위도 높은 햄프턴은 아내가 일
찍 죽자 많은 여자들과 사귀며 돈을 물쓰듯이 했다. 게다가 보통 은행장들
과 달리 그는 영국제 스포츠 카인 재규어를 몰고 다녔다. 그런 그도 은행
업무에 있어서는 상당히 보수적이었다. 한 번도 대출한 돈에 실패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차에 그의 모든 모험심을 쏟아 붇기 때문이
라고 생각했다.
햄프턴은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절벽 위의 6만 5천 달러짜리 집도 한
채 샀는 데, 그것 역시 그가 금고를 털어야 하는 이유 중의 하나였다.
집은 애초부터 분수에 넘치는 것이었고, 설살가상으로 집이 서 있는 절벽
을 깎을 때(대부분의 남가주 건설업자들이 모두 그러듯이) 절벽이 무너지
내리는 것에는 전혀 대비하지 않고 공사를 해서 큰 비가 한 번 내리자
지반이 약해져 붕괴될 위험이 생긴 것이다.
다행히 유명한 엔지니어인 제퍼슨 라드가 임시 방책을 세워 눈앞의 위
험은 일단 넘길 수 있었다. 리드는 댐을 만들 때 사용하는 기술을 이용해
집 주위의 중요한 몇몇 지점에 전기 코일을 파묻어 놓아 무너져 가는 지반
을 굳히고 파도로 지층이 무너져내리는 것을 일단 막아 놓았다. 그는 이번
장마철이 지난 후에 좀더 영구적인 공법을 이용해서 공사를 하면 안전할
거라면서 현재로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장담했다.
그것은 정말 천만다행이었다. 똥값이 될 뻔 했던 비싼 집을 구해낸 것이
다. 아무리 최고의 건축가가 지은, 태평양이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집이
라 하더라도 곧 깊은 물 속으로 떨어질 거라면 누가 사겠는가?
그러나 자금난에 허덕이는 시점에서 이런 일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햄프
턴은 미칠 지경이었다. 땅 속에 묻은 전기코일을 가동시키는 전기 요금이
엄청났다. 그래서 햄프턴은 금고에 대해서 골똘히 생각했다.
햄프턴은 일을 꾸미는 데 있어서는 아주 타고난 사람이었다. 대학에 다
닐 때도 교수들에게 잘 보여 무사히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공부를 열
심히 한 게 아니라 교수를 열심히 연구했던 것이다. 누구나 할 수 있들 듯
한 일이지만 눈치빠른 학생이 아니면 하기 어려운 일을 해낸 것이다.
최소한의 노력으로 졸업장을 따낸 햄프턴은 자신의 모든 것을 최대한으
로 이용해서 금융업계에 취직했다. 그는 용모가 깔끔하고 목소리도 부르러
우며 예지력도 뛰어났다.
잘 보여할 사람에게는 언제 어디서라도 그들의 변화무쌍한 자존심에
부합할 수 있었고, 그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을 능력도 있었다. 그러나 햄
프턴은 사람들에게 남자답고 솔직하게 보였기 때문에 그를 아첨꾼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 결과 마흔셋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은행
장이 될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그는 법적으로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사실상 범죄자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사기꾼들은 대개 위기능력이 뛰어난데, 햄프턴도 그랬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어떤 속임수를 생각해내고는 어떤 사람도 왜 이런 생각을 먼저
해내지 않았을까 하고 결코 자랑하지 않는다. 햄프턴은 자신에게 닥친 위
기를 넘길 묘안을 생각해내고는 자신도 깜짝 놀랐다.
운만 좋으면 금고를 털어서 횡령한 돈을 갚고도 50만 달러를 더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아무에게도 의심받지 않을 수 있을 뿐만 아
니라 사람들이 금고가 털렸다는 얘기를 입 밖에 꺼내지도 못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게획을 성사시키는 데는 한 가지 작은 문제가 있었다. 화약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 문제도 쉽게 해결되었다. 모
리슨 볼이라면 충분하겠지? 모리슨 볼은 군에서 폭발물 처리반에 있었고
퇴역해서 예비군의 화약고를 담담하고 있었다.
한국 전쟁 때 헴프턴은 불과 암시장에서 돈을 많이 벌었다. 햄프턴이
사기꾼이라면 볼은 완벽한 공범이었다. 볼은 시카고의 깡패 출신으로 인간
생명에 대한 존중심은 슈바이처 박사 쪽이라기보다는 살인광쪽에 더 가
까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에게는 나름대로 신조가 있었다. 한번 두목이라고
생각했다 하면 죽도록 충성을 하고, 시키는 것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해내
는 것이었다. 한국 전쟁 때 볼이 물건을 빼돌리다가 걸린 적이 있었는 데,
심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햄프턴의 이름은 불지 않았다. 햄프턴은
자신의 계급을 이용해서 여기저기 손을 써서 볼을 구해주었다. 그 결과 두
사람은 혐의를 받지 않았고 그 대신 재수없는 한국인 몇 명과 죄없는 졸
병 몇 명이 그들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죄를 저질렀다는 누명을 쓰는
것으로 일이 매듭지어졌다.
못생긴 데다가 촌티가 줄줄 흐르는 볼은 잘 생기고 세련되고 머리 좋은
햄프턴을 거의 신처럼 떠받드렁ㅆ다. 햄프턴도 필요에 의해 볼에게 스스럼
없이 잘 대해 주었다. 물론 , 그들은 미국으로 돌아 와서는 각자의 길을 갔
지만 햄프턴은 이제 옛날의 기분을 되살려 볼과 한 번 더 일을 해야 되겠
다고 생각했다.
햄프턴은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술집에서 볼에게 자신의 계획을 설
명했다.
"한 30만 달러쯤 들어 있을 거야."
햄프턴은 실제 금액을 반 이상 줄여서 말했다. 볼은 10만 달러면 충분
할 것이다. 어차피 경마로 다 날려 버리겠지만.
"나는 금고 안을 매일 들락날락 거리지. 언제든지 금요일에 돈을 다 챙겨
서 날라 버릴 수 있어. 하지만, 어디로 가겠나? 요즘은 어디를 가나 범인
송환이 가능하거든. 게다가 나는 여기가 좋아. 바나나밖에는 살 것도 없
고, 3백 마일 밖에나 의사가 있는 아마존 정글에서 살고 싶지는 않아. 곤
충과 악어에다가 식인 물고기에 식인종이 우글거리는 그런 곳은 딱 질색
이야! 난 죽어도 그런 곳은 싫어!"
볼이 흐리멍텅한 푸른 눈을 빛내며 영리한 척했다.
"그렇죠. 그리고 그런 일은 대장님같은 분에게는 누워서 떡 먹기 아니
예요? 대장님은 늘 복잡한 일을 꾸미시니까요."
햄프턴이 웃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어쨌든. 아주 멋진 계획이 있어. 그 자식들은 뭐가
없어졌는지도 영원히 모를 거야. 내 생각은 이거야. 아주 큰 폭발물이 있
다고 사정해 보게. 그 금고를 완전히 폭파시켜 버린단 말이야. 테르밋인가
뭔가를 이용해서 불도 내고 말야."
볼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루미늄 가루에 철을 연소시킨 거라서 그게 터지면 쐬도 녹지요. 뭐든
지 다 태울 수 있을 섭니다."
볼은 쇠를 쐬라고 발음하였다.
"좋아. 네이팜탄도 쓰지. 테르밋이 다 못 태운 것은 그게 태울 거야."
"어떻게 터뜨리시려구요?"
"간단해. 자네가 폭탄을 서너 개 만들라구. 크지 않고 가능하면 납작하
게 말야. 한가운데에서 터뜨리게 1개는 구두통처럼 크게 만들고. 금고 안
에는 오랫동안 열어보지도 않은 선반과 서랍이 많이 있지. 그런 곳에다가
폭탄을 여기저기 넣어두겠어. 큰 폭타은 현금이 있는 곳에 두고 말야. 참,
그게 터지면 다른 것도 연쇄적으로 터지게 되나? 아니면 타이머가 있어야
하나?"
볼은 눈살을 찌푸리며 곰곰이 생각하더니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오래된 일이라서. 예비군에선 그런 일은 하지 않거든요. 아, 참 프리
마 코드 같은 걸 사용하면 큰 게 터지면서 연쇄작용을 일으킬 거예요. 서
로 가까운 거리에 있기만 하면 말이에요. 하지만 폭탄이 안에 있다는 걸
사람들이 알게 될 텐데요. 그건 어떻게 설명하려고 그러세요?"
볼은 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금고 바로 옆에 귀중품 보관함이 있는 방이 있어. 아무나 거기 들어갈
수 있지. 비어 있는 보관함 열쇠는 내가 구할 수 있으니까, 거기에 폭탄을
넣을 수 있어. 난 금고 주위 여기저기에서 폭탄을 터뜨려서 도대체 어디서
폭발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게 하려고 하네. 아예 산산조각 내버리는 거야.
그리고는 이렇게 설명하는 거야. 내게는 협박 편지가 무수히 날아 오지. 얼
마나 많은 놈들이 은행에 앙심을 품고 있는지 자네는 상상도 못 할 거야.
모리. 6센트 때문에 수표를 부도낸 사람에게 서비스 요금이 3달러라고 해
보라구! 꼬마 넬 같으면 장님이라도 두드려팰걸."
"제이 가에 사는 키큰 금발머리 꼬마 넬 말인가요? 그얘는 길을 가로막
기만 해도 장님을 팰 텐데요."
햄프턴은 입을 씰룩이며 볼의 말을 막았다.
"그만 둬. 내 말은, 아무라도 귀중품 보관함에 폭탄을 넣어서 폭파시킬
수 있다는 거야. 한 번의 폭파로 그렇게 큰 폭발이 일어난다는 것이 좀 이
상하긴 하겠지만, 내가 말한 대로 아예 산산조각을 내버리면 아무도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를 거야. 게다가 금고를 드나드는 행원들 중에서 최소한
두 명 정도는 빚에 쪼들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 그들도 내 계획 같은
걸 먼저 생각했다면 나보다 먼저 일을 벌였을 거야!"
"그야 어쨌든, 제가 대장님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한다는 걸 아시
죠? 옛날처럼 말이에요. 그리고 저도 돈 좀 필요해요. 얼마나 주실 건가
요?"
"계획은 내가 세웠으니까...... 삼 분의 일 정도면 어떤가? 10만 달러."
"우와! 대장님은 역시 째째하지 않으세요. 좋습니다."
"좋아. 그럼 폭탄을 만들게. 하지만 조심하라구. 자네 담당 구역에서 멀
리 떨어진 화약고에서 훔쳐내. 자네가 담당하는 곳에는 손도 대지 말고.
자물통 여는 기술은 아직도 녹슬지 않았겠지?"
"두말하면 잔소리죠."
"화약을 훔쳐낸 다음에는 구두 상자 크기의 시한 폭탄을 하나 만드는
것을 잊지 말게. 보통 시계 장치면 좋겠는데, 확실한 것으로 붙여. 그게
터지지 않으면 난 평생 샌 큉턴 형무소에서 썩을 테니까. 18시간에서 24
시간짜리라면 충분 할 거야. 주중에 폭탄을 금고 안에 넣어 두었다가 금요일
밤에 경비원과 내가 금고를 잠그기 전에 타이머를 작동시킬 거야. 폭탄이
터질 대쯤이면 나는 낚시를 하면서 주말을 보내고 있을 거고."
"돈은 언제 꺼내구요?"
"마지막 순간에. 요즘, 금고 문을 닫기 전에 계속 경비원에게 심부름을
시키고 있거든. 익숙해지라고 말야. 그날도 심부름을 보내 놓고 그가 심부
름을 간 20분 동안에 싹 긁어버리는 거야. 그리고 금고를 잠그는 거지.
내 생각대로만 일이 이루어 지면 모두들 지폐가 타버렸다고 생각할 거야.
물론, 재를 남기기 위해서 채권을 많이 넣어 두겠지만 테르밋 정도면 재도
그다지 많이 남지 않을 거야. 끝내주는 계획이지. 난 돈의 일련번호를 적
어놓은 서류가 어디 있는지 잘 알거든. 그것고 없애 버릴 거야.
"좀 수상해 보이지 않을까요?"
"그다지 위험하지 않아. 사무실도 피해를 입지 않겠나?"
햄프턴이 잠시 말을 멈췄다.
"확실히 하는 게 좋겠군. 시한 폭탄을 하나 더 만들게. 금고 밖의 서류
함에도 하나 놔야 겠어. 경찰 녀석들 정신이 하나도 없을 거야. 어떤 미친
놈이 정말 앙심을 품고 한 짓이라고 볼 거야."
"사람은 몇 명이나 죽죠?"
"한 사람도 안 죽어. 은행은 비어 있을 거야. 그리고 벽돌 조각이 날아
간다 해도 아무도 다치지 않을 거야. 토요일 밤이면 아무도 얼씬거리지 않
는 상업 지구거든."
햄프턴이 차갑게 말하고는 볼에게 주의를 주었다.
"당분간은 돈을 쓰지 말게. 내가 감시당할지도 모르니까. 돈을 넣어둘
곳은 벌써 봐두었어. 자네 몫은 1 주일 후에 주겠네. 난 가능한 한 1년 동
안 한푼도 쓰지 않을 거야. 그리고는 사표를 내든지 하고 동부로 갈 거야."
"왜 감시를 당합니까? 대장님 말씀으로는......"
"우린 옛날처럼 군인 머저리들과 상대하는 게 아냐. 경찰이나 재무
부에서 나오는 애들이나 보험회사 조사원 같은 애들은 멍청하지 않다구.
그 많은 돈이 다 타버렸다면 의심할 거야. 하지만 한푼이라도 금고 밖으로
유출되었다는 건 증명 할 수 없을 거야. 내 희망이긴 하지만, 시간이 지나
면 어떤 미친 놈이 은행을 폭파하는 바람에 현찰ㄷ 타버렸다고 생각하겠
지. 난 물이 넘쳐 들어올 것도 생각하고 있어. 로비에 있는 분수에 연결괴
는 대형 파이프가 벽 속 어딘가에 있을 거야. 그러니 자네는 폭탄이나 만
들게. 나머지는 내게 맡겨두고. 그럼 우린 평생 놀고 먹을 수 있어."
"시간이 얼마나 있습니까?"
"주말인 25일경쯤 폭파시키고 싶네. 월요일은 휴일이니까 은행은 금요
일 밤부터 토요일, 일요일, 월요일까지 쉬는 거야. 난 전화도 없는 곳으로
낚시를 갈 거야. 월요일 저녁에 돌아와서 소식을 듣고는 기절초풍하는 거
지. 그때 쯤이면 사람들이 내가 돈을 훔쳐 달아났다고 의심하기 시작하겠
지. 그대 내가 나타나면 공연히 나를 의심했다며 오히려 미안해 할 거야.
그것도 내게 유리하게 작용할 거야. 심리학을 좀 이용하는 거지. 다시는
나를 쉽게 의심하지 못할 거야. 그래도 경찰은 모든 사람을 주의깊게 관찰
하겠지. 누가 갑자기 돈을 마구 쓰지 않나 지켜보는 게 경찰의 임무니까.
경찰은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는 그렇게 돈을 마구 쓰는 사람을 볼 수 없
을 거야! 그렇지 않나? 폭발은 토요일 아침 7시에서 10시 사이가 될 거
야. 타이머를 금요일 오후 6시 30분쯤에 작동시켜야 해. 6시에 은행 문
을 닫으니까. 12시간이 좀 넘는군."
"그럼 시계 2개를 같이 묶어서 하나가 12시간 후에 다른 시계를 작동
시키도록 해야겠군요. 12시간 짜리 하나만 쓰면 일이 훨씬 수월하긴 하겠
지만 그게 더 안전할 거예요."
"그래도 되겠나?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작동해야 돼. 그렇지 않으면
만사 끝장이야."
"걱정하지 마세요. 작동할 겁니다. 저 같은 프로에게는 어린얘 장난이에
요."
볼은 자존심이 상한 듯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날 이후 시간이 너무 느리게 지나갔다. 계획한 주말이 다가오자 햄프
턴은 볼에게서 폭탄을 받아 금공놔 귀중품 보관함, 사무실 책상 뒤와 서류
철 위에까지 조심스럽게 놓아 두었다.
금요일까지 모든 일들이 불안할 정도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런 행
운은 실패할 가능성이 있는 것은 반드시 실패한다는 머피의 법칙(경험에
서 얻은 지혜)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모두들 퇴근하고 햄프턴과 경비원만 남게 되자 햄프턴은 6시 12분에
경비원에게 담배 심부름을 시켰다. 그리고 경비원이 나간 사이에 금고에서
57만 2천 달러를 훔쳐 냈다. 일련 번호를 적어 놓은 서류는 한 시간 전에
불태워 버렸다. 거기에 모든 돈의 일련번호가 적혀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
만 웬지 꺼림칙했던 것이다.
경비가 돌아오자 햄프턴은 상관이 주는 심부름 값이라며 경비에게 몇
푼 쥐어 줬고 경비와 함께 금고를 잠궜다. 그 안에서 첫번째 타이머가 째
각거리기 시작했다. 햄프턴은 신경이 곤두서서 그 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했
지만 경비는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경비들이 모두 그렇듯이 그 역시 늙
어서 느릿느릿하고 관절이 잘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비상시에 손님들
에게는 강도보다 그가 더 위험할 것이었다.
최대한 조심해서 일을 처리했다고 생각하고 햄프턴은 길도 험하고 통신
도 두절된 가라파타 강 상류로 낚시를 떠났다. 그는 거기서 돈과 예쁜 여
자를 상상하는 것으로 무료함을 달래며 긴 연휴를 억지로 보냈다.
돈은 당연히 집에 두지 않았다. 햄프턴은 며필 전에 밀물이 닿지 않는
해변 위쪽의 돈 숨길 장소를 미리 준비해 두었다. 50만 달러가 넘는 돈
을 방수가 되는 박스 안에 넣고 큰 바위 밑의 모래 속에 파묻었다. 돈은
그곳에서 1년 이상 묻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볼의 몫은 경찰이 그들을 연결시켜서 조사할지도 모르니까 함부
로 쓰지 말라고 다시 한번 경고하면서 금요일 밤에 그에게 건네주었다. 한
국전 이후로는 서로 만난 적도 없고 일을 계획하며 몇 번 만난 장소도 사
람의 눈이 띄지 않을 곳만 골라서 만났기 때문에 그럴 리도 없을 것이다.
월요일 오후가 휴일이라 길이 많이 막히는 바람에 햄프턴은 집으로 돌
아오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마침내 햄프턴은 동네의 꼬불꼬불한 길로
차를 몰기 시작했다. 그러나 집이 있는 절벽 위까지 올라왔을 때 햄프턴은
너무나 놀라서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붉은 경고등과 차량 통제 표시판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고 사람들이 모여서 뭔가 구경하고 있었던 것이다.
햄프턴의 집이 없었다. 리드의 집과 해리슨의 집, 그리고 투르만의 집도
모두 사라져 버렸다. 집이 있던 자리에는 흙과 도랑이 뒤범벅되어 있을 뿐
이었다.
햄프턴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슨 일인지 어리둥절해서 서 있는 데, 뒤
에서 누가 소리쳤다.
"햄프턴 씨? 엉망이죠?"
햄프턴이 돌아서보니 자신의 집도 없어져 버린 조지 팔그레이브가 서
있었다.
"무슨 일이죠?"
"모르세요? 가만있자...... 그렇지. 휴일 동안 어딜 다녀 오셨지?"
팔그레이브는 비록 좋지 않은 일이기는 하지만 이 엄청난 뉴스를 알려
줄 사람을 만나 반갑다는 듯이 말을 시작했다.
"한 반 먹었소. 햄프턴. 절벽이 전부 무너져 버렸소. 전기가 나가서 오
랫동안 들어오지 않자 리드가 묻어놓은 코일에 전력이 공급되지 못해서.
기름이 흐르듯이 무너져 버리더군요."
"하지만, 하지만..... 전기가 36시간쯤 안 들어 와도 땅에는 아무 문제도
없을 거라고 리드가 몇 번이고 말했었쟎아요. 36시간 이상이나 전기가 안
들어왔단 말이오?"
"그렇다니까요. 당신 은행이 폭발했을 때, 이런 참, 당신은 그것도 모르
고 있겠군!"
"뭐라구요?"
"첫째로 은행이 풀썩 주저앉았소. 그래도 그 정도면 다행일 텐데, 길 건
너 변전소 있쟎아요? 은행이 폭발하는 바람에 그 변전소까지 터졌죠. 몇
블록 떨어진 곳에 있었던 사람들도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윙위거리는 소리
를 들었다는군요. 그래서 전기가 나가버렸죠. 변전소를 하룻밤 동안에 고
칠 수 있겠소? 선이 끊어진 것도 아닌데. 어이, 어디 가는 거요?"
햄프턴은 다치는 것도 신경쓰지 않고 흙과 집의 잔해가 뒤범벅이 된 곳
을 비틀거리며 넘어서 절벽 끝으로 기어 올라가 달빛 가득한 해변을 내려
다보았다.
아름다웠던 해변은 사라지고 없었다. 50만 달러나 되는 돈이 흙 속에
파묻혀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는 울보가 아니었다.
햄프턴은 혼자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그래도 횡령한 건 걸리지 않았군. 아직 일자리도 있고. 잃어
버린 은행 돈이야 정부에서 메꿔 주겠지. 집은 어차피 허상이었을 뿐이야.
볼에게서 한 5만 달러라도 받아내지 못한다면 내가 사람이 아니지."
햄프턴은 별을 올려다보고는, 근심어린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팔그레이브를 바라보았다.
"어디 갔다왔어요?"
팔그레이브가 물었다.
"낚시간 걸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업무상 갔었는 데, 좀 놀기도 했
죠. 큰 돈을 벌 수 있었죠."
"그래서요?"
햄프턴은 다시 한 번 별을 쳐다보고는 팔그레이브를 빤히 쳐다보며 차
갑게 말했다.
"너무 열심히 노력했는지 다 날아가 버렸소."



샤프 펜슬
( The Pencil )
by - Edmund Crispin


드디어 그들이 엘리엇을 잡으러 몰려온 것은 사흘째 되는 밤이었다. 좀더
일찍 오리라고 예상했던 그는, 늦으지는 것이 마음에 안들어 안달하고 있던
참이었다. 결코 사치스러운 편이 아닌 그였지만, 이곳 크라이켄웰에서 빌린
방의 더러운 침실은 도저히 견뎌내기 힘들었던 것이다. 살금살금 계단을 올
라오는 그들의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그는 청동 손목 시계를 힐끗보고
몸에 숨긴 물건을 재확인했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의자를 움직여 문 쪽을 등
지고 앉았다.
그들이 등뒤로 살그머니 다가왔을 때 그는 당황하며 권총을 뽑으려 했는데,
그 행동이 너무도 실감나서 그들 중 한 명은 헉하고 숨을 삼킬 정도였다. 그
들은 재빨리 그의 양발을 잡아 비틀어 목덜미에 총구를 들이대는 소인배다운
행동을 했다. 엘리엇은 몸부림 치는 척하면서 '어리석은 패거리'라고 내심
비웃었다. 그들에 대한 경멸은 결코 잘난 체하는 데서 기인한 것은 아니었다.
프로 살인 청부업자로서 숱한 역경을 견디어 온 그의 완강한 마음에 그 따위
자만심이 들어올 여유는 없는 것이다. 엘리엇은 딱 한 번 자신을 위한 살인
을 했다. 당시의 상황이 매우 위태로웠기 때문이었는데, 그 후로 그는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의 몸을 수색한 뒤 아래층으로 끝어내려, 대기하고 있는 차 안으
로 밀어넣었다. 한밤중이라 사람 하나 없는 길거리를 큼직한 세단이 미끄러
지듯 조용히 달렸다. 얼마쯤 가서 자동차는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잡초
가 무성한 사격장 옆에 멈추었고, 차창에서 블라인드가 내려졌다. 거기서 그
들은 엘리엇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눈을 가리고는 양손을 뒤로 묶었다. 엘리
엇이 순순히 응하자 그들은 의기 양양했다.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차 안에서
그는 이 패거리와 에디슨 일당 사이에서 다른 해결책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양쪽 모두 창고털이 전문인 소악당 패거리로 세력권 문제로 충돌 중이었고,
엘리엇이 이렇게 붙잡혀 가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차가 가는 방향을 속으로 짐작해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런 일은
부탁받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직업 살인자로서 엘리엇의 큰 장점은 하찮은
호기심을 품지 않는다는 것과 청탁 받은 일 외에는 결단코 손을 대지 않는다
는 것이었다. 차는 런던의 밤거리를 질주했다. 그는 쿠션에 몸을 기댄 채 에
디슨의 지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홀든 일당이 제멋대로 날뛰어서는 곤란해."
두목치고는 젊은 편인 에디슨은 교만한데다 머리는 늘 번쩍번쩍 윤이나게
하는 등, 헐리우드 영화에나 나옴직한 인물처럼 꾸미고 다녔다.
"홀든이 죽으면 그 일당은 흩어지게 돼 있어. 그게 자네가 할 일이야. 홀든
을 없애라구."
엘리엇은 단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구구한 설명을 듣는 것도 그로서는
지루한 일이었다.
악당 두목은 계속 지껄여댔다.
"한데 문제는 홀든 녀석을 찾을 수 없다는 데 있단 말야. 녀석의 은신처를
모르거든, 그러니까 녀석을 유인해 내야 돼. 자네는 그 미끼가 되는 거야."
말하며 그는 빙그레 웃었다.
"독을 품은 미끼로군."
엘리엇은 한마디했다.
뒤이어 두목은 엘리엇이 자기 수하에 갓들어온 졸자로서 홀든이 몹시 원하는
정보를 쥐고 있으며,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라고 했다.
엘리엇은 자기와 직접 관계가 있는 말만 귀담아 듣고 다른 사실은 무시했다.
에디슨의 계획은 꽤 그럴 듯해서 저쪽 패들이 달려들 것은 틀림없다고 판단되
었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으로 보아 놈들은 제대로 걸려든 것이었다.
긴 드라이브가 계속되었다. 무엇보다도 홀든의 부하들이 경계하는 것은, 미
행당하는 일과 엘리엇에게 그들의 은신처에 관한 단서를 주는 것이라라. 그런
고로 그들이 어떤 루트를 택한다해도 목적지로 직행하지 않을 것은 뻔한 일이
었다.
마침내 그들은 도착했다. 그들은 엘리엇을 이층으로 밀어올리더니, 방으로
들어가자 난폭하게 침대 위에 내동댕이쳤다. 낌새로 보아 이곳에는 곰팡내 나
는 이 방 외에는 없을 것 같았고, 게다가 침대까지 있으니 아주 잘 됐다고 그
는 생각했다. 계획이 성공할 확률이 더욱 높아진 것이다.
그는 몇 차례 얻어터질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소년 시절부터 육체적 고
통에는 단련돼 있는 데다 보수를 듬뿍 받는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나서야
그는 그들이 알고 싶어하는 정보를 털어놓았다. 그것은 에디슨에게 지시받은
꾸며 낸 이야기로, 상대방이 믿게끔 상당한 진실이 섞여 있었다. 엘리엇은 교
묘히 해냈고, 자신의 연기를 즐기기까지 했다. 거기에 눈을 가렸기에 상대방이
그의 표정을 볼 수 없다는 점이 유리한 조건이기도 했다.
어찌 되었든 홀든은 퍽이나 만족해 하는 듯했다. 목소리로 판단컨대 홀든은
런던 빈민굴 태생으로 신경질적이고 꽤 나이가 든 사내 같았다. 머지않아 홀든
과 에디슨, 그리고 일당 모두가 경찰에 검거될 것이고, 놈들의 쓸데없는 세력
다툼도 깨끗이 끝장나리라는 사실을 엘리엇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부탁받은 대로 처리하고 돈만 받으면 그만이니까.
얼마 동안 의논한 후 그들은 제안을 해왔다. 예상했던 바였지만 엘리엇은 잠
시 망설이는 체 하다가 승낙했다. 보수만 넉넉하다면 양다리 걸치기도 마다하
지 않는 그였다. 그들도 엘리엇의 조건을 받아들였고 저쪽에서 캐내야 할 정보
에 대해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눈 뒤, 그의 터진 입술에 담배를 물리고는 불을
붙여 주었다. 엘리엇은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그러나 그들은 눈
가리개를 풀어 주지는 않았다. 거기까지는 신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를
풀어 놓아 주기는 하겠지만 협력하지 않을 경우를 염두에 두고, 자기들의 정보
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리라.
이제는 석방시켜 주겠다는 말이 나오자, 때는 바로 지금이라고 판단한 엘리엇
은 침대에 엎드린 채 상대가 눈치채지 않도록 윗옷 끝단 밑으로 살짝 손가락을
넣어, 가늘고 매끄러운 물건이 침대 위로 굴러 떨어지도록 했다. 그리고는 몸
을 약간 움직여 손목을 묶은 줄이 허락하는 한 손을 뻗어, 그 물건을 베개 밑
으로 밀어 넣었다. 그것은 작지만 꽤 쓸 만한 물건으로, 겉보기에는 흔한 샤프
펜슬에 지나지 않았으나 속에는 강력한 시한 폭탄이 들어 있었다. 에디슨이 독
일 점령 당시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파괴 전문가로부터 얻은 것으로, 독일군
사령관저나 그 밖의 중요 지점에 놓아 두고는 하던 정교한 폭탄의 일종이라면
서 엘리엇에게 준 물건이었다. 전쟁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폭발물에 대해
서는 흥미를 품고 있던 엘리엇은 매우 감탄하기는 했지만, 살인 수단으로서는
확실한 것이 못 된다고 생각했다. 홀든이 제 시간에 당하리라는 보장도 없는데
다, 침대를 정리하러 온 하녀가 죽을지도 모르는 일인 것이다. 그러나 그 또한
엘리엇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그는 돈을 받고 부탁받은 대로 실행할 뿐이니
까.
돌아오는 길도 갈 때와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한참을 달리다가 사격장 옆에서
눈가리개와 결박을 풀어 준 후, 얼마 더 가서 하숙집 앞에 내려 주었다. 엘리
엇은 어스름한 새벽길을 급히 달려가는 홀든의 차를 배웅하고는 이층의 자기방
으로 올라갔다.
상처투성이의 얼굴을 그다지 화난 기색도 없이 거울에 비춰 보고 나서 짐을
꾸리려는데, 갑자기 피로감이 몰려와 침대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샤프 펜슬은
여덟 시에 폭발하도록 장치되어 있었다.
엘리엇이 눈을 뜬 것은 여덟 시 십오 분 전이었다. 밖은 훤하게 밝아 있었다.
우선 짐을 챙겨 놓은 다음 에디슨을 만나서 보고하는 거다. 그리고 열차에 타
기 전에 석간 신문을 보면 홀든의 생사 여부는 알게 될 테고...
그가 낡고 커다란 슈트케이스를 침대 위에 놓으려고 베개를 치우려는데, 세인
트 존스 성당의 시계가 여덟 시를 알리는 종을 울렸다.
샤프 펜슬을 본 것은 바로 그때였다. 순간 어리벙벙했지만 곧 사정을 깨달았
다.
그래, 그랬었구나, 놈들은 은신처의 비밀이 누설될지도 모를 모험 같은 건 애
당초 하지도 않았다. 놈들이 자동차로 빙빙 돌아서 나를 끌고 간 곳은 바로 이
곳이었던 거다. 여기서 놈들은 나를 심문했던 거다. 바로 내 방에서...
공포가 그를 덮쳐왔다. 그는 도망쳤다. 침대에서 문까지는 겨우 3초가 걸리는
거리였다. 그러나 그의 몸은 폭발과 함께 날아가 버렸다. 그 손이 문손잡이를
잡기도 전에.






벌레와의 대화
( Conversation with a Bug )
by - Jack Sharkey



"살려 줘요! 살려 줘요!"
찍찍거리는 가냘픈 소리가 연거푸 구원을 요청했을 때, 헨리는 너무 놀라서
혼이 나갈 지경이었다. 방금 집 근처의 이류 극장에서 < The Fly >를 보고
온 터라, 맨 먼저 떠오른 것은 클라이맥스에서 파리가 거미줄에 걸려 요동치
는 광경이었다.
"말도 안돼!"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어디 있니?"
"방 구석, 천장 가까이요!"
목소리가 말했다. 다급한 음성이었다.
들은 대로 구석을 살펴보았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하기애 방에 불이라고는
15와트짜리 스탠드 하나뿐이었으니 그도 당연했다. 그는 의자 위에 올라서서
벽과 천장이 만나는 틈서리를 자세히 보았다. 조그만 말벌이 얽히고 설킨 거
미줄에 감겨 몸부림치고 있었다. 날개를 파닥일 때마다 거미줄에 구멍이 뚫
렸으나, 오히려 끊어진 실이 끈적끈적한 해초처럼 달아붙어 몸을 움직이기
어렵게 하고 있었다. 거미줄 한모퉁이에는 거미 한 마리가 도사리고 있었다.
유리알처럼 반들거리는 눈에는 온갖 착잡한 감정이 서려 있는 듯싶었다.
"네가 말했니?"
헨리는 신기한 생각이 들어 물었다.
"네."
가냘픈 소리가 울먹였다.
"날 구해 주세요. 저 끔찍한 것이 덮치기 전에!"
헨리는 손을 뻗어 거미줄을 치우려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살려주면 뭘로 보답할래?"
"제발!"
목소리가 찍찍댔다.
"먼저 구해 주고 나서 얘기해요."
"안 되겠다."
헨리가 말했다.
"살려 준 뒤 네가 컴컴한 구석으로 도망치면 난 뭐냐. 닭 쫓던 개 꼴에 손
만 더럽힌 게 되게?"
"당신은 참 빡빡하군요."
애처럽게 찍찍거리는 소리가 말했다.
"천만에, 너무 물러서 탈이야. 그게 고민인 걸. 난 자신이라곤 통 없는 사
람이야. 사회 생활도 그렇고 생김새나 몸매도 그래. 평생을 보디 빌딩과 인
기를 얻는 비결에 관한 책만 읽었지만, 내 꼴을 좀 봐라."
잠시 대답이 없다니 목소리가 미안한 듯 말했다.
"하긴 좀 그러네요."
"아무렴."
헨리는 불만이라는 듯 동의했다.
"키는 160밖에 안 되지, 몸무게는 45킬로지, 여드름투성이에 눈에는 힘이
없고, 머리까지 자꾸 벗어져. 네가 날 크게 도울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혹
시 조금이라도 보템이 될지 누가 아니."
"사실 난 당신을 도울 수 있어요."
목소리가 말했다.
"이래뵈도 다른 애들하곤 달라요. 그러니까 이렇게 말도 할 수 있는 거죠.
실은 난 요정이랍니다. 라이벌 요정의 마술에 걸려 이 꼴이 되긴 했지만요."
"요정이라구?"
헨리는 숨을 들이켰다.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것 같은 요정 말이냐? 소원을 들어 주고 뭐 그
러는 마법사 말이지?"
"맞아요!"
작고 가냘픈 소리가 숨이 넘어가는 비명을 질렀다.
"저 끔찍한 게 날 덮치기 전에 어서 죽여 줘요. 소원을 들어 드릴 테니!"
"네게 그런 마술이 있다면 왜 저놈을 단숨에 날려 버리지 못하지?"
헨리는 의심스럽다는듯 물었다.
"요정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마법을 쓸 수 없어요. 오직 주인을 도울 때
만 쓸 수 있답니다."
벌레가 말했다. 외워서 하는 말 같았다.
"너희도 서약 같은 걸 하니?"
"그럼요. 자기를 위해 마법을 쓰면 요정이 될 수 없어요. 우주의 질서라든
가 뭐 그런 것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만약에 서약을 어기면?"
"모든 능력을 잃고 그저 떠도는 영혼이 되는 거지요. 무슨 일이건 눈앞에
뻔히 보면서도 손 하나 까딱 할 수 없는 거예요. 끔찍한 일이지요."
"상상이 간다."
헨리는 동정했다.
"하지만 왜 소원을 하나만 들어 주지? 보통은 세 가지 소원을 들어 주는
걸로 아는데."
말벌은 거미줄에서 벗어나려고 한결 맹렬히 날개를 파닥였다. 거미는 그
모양을 지켜보며 황급히 다른 구석으로 물러났다.
"사람들은 욕심이 너무 많아요. 소원을 빌 때도 너무 영악하고요. 그래서
소원을 한 가지로 줄인 겁니다. 그뿐이에요."
"목숨을 살려 주는 데 세 가지 소원도 안 들어 줘?"
헨리는 끈질겼다.
"도리가 없어요. 하나라도 초과하면 서약을 어기는 게 되어 모든 힘을 상실
하는 걸요."
"젠장!"
헨리는 한숨을 쉬었다.
"뭘 빌어야 할지 알 수가 있어야지."
"우선 살려 놓고 나중에 생각해요!"
"싫어. 요정들은 꾀가 많거든. 소원부터 들어 주면 살려 주지. 만약을 위해
서 말야."
"알았어요, 알았어!"
요정이 소리쳤다.
"어서 생각해요!"
헨리는 열심히 생각했다. 생각에 잠긴 동안 행여 자기 소원을 들어 줄 요정
이 죽을세라, 눈앞 벽 한구석에서 전개되는 극적인 장면을 초조한 마음으로
주시하면서... 그러나 즉석에서 무언가를 결정한다는 것은 지독히 힘든 일이
었다.
"부자가 되게 해 달라는 게 좋겠지."
그는 천천히 말했다.
"제아무리 못 생겼어도 돈만 있으면 인기가 좋을 테니 말야."
"돈이요?"
요정이 말했다.
"알았어요!"
싯누런 번갯불이 눈부시게 번쩍이고, 한 차례 뜨거운 바람이 몰아치더니,
펄럭이는 지폐들이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와 방안을 가득 채웠다. 그중에는
번쩍이는 에메랄드도 한두 개 섞여 있었다. 부엌 식탁에는 왕족들이나 끼는
반지가 수북이 쌓였는데, 보석도 루비에서 마노에 이르기까지 각가지였다.
또한 싱크대에는 옛 스페인 금화가 꽉 차 있었다.
"이제 날 구해 줘요!"
요정이 부르짖었다.
"그렇지만... "
그 모든 금은 보화를 보자 눈앞이 아찔하고 숨이 막힐 듯 가슴이 두근거리
면서도 헨리는 머뭇거렸다.
"돈이 전부는 아닌데... "
"뭐라구요?"
이제는 목이 쉰 찍찍거리는 소리가 거의 절망적인 어조로 말했다.
"한 나라의 왕이 될 만한 재산을 갖고도 아직 부족하단 말인가요?"
헨리는 자꾸만 숱이 줄어 가는 머리칼을 쓸어 보고는, 앙상한 몸매와 보기
흉한 똥배를 내려다보았다(똥배랬다 작은 호박덩이만 했지만, 그래도 그나마
의 몸매마저 망치고 있었다). 그는 근시인 눈을 껌벅이며 코웃음을 쳤다.
"흥! 돈이 있고 권력을 쥐면 뭘해. 친구들이 생겼댔자 그저 없는 것보다는
나은 아첨꾼들뿐일 걸. 내 눈엔 여전히 내 몸이 뵈고, 이 몸 갖고 살아야 할
텐데.... "
"좋아요, 그럼...."
요정이 울먹였다.
"갑니다!"
뜨거운 바람이 다시 한 번 몰아치고 번갯불이 번쩍이자, 느닷없이 헨리의
머리가 쿵 하고 천장을 들이받았다. 쉭쉭 하는 회오리 바람과 함께 금은 보
화가 사라지면서, 그의 키가 190센티미터로 늘어난 것이다. 어깨는 떡벌어지
고 배는 철판처럼 탄탄했으며, 손을 뻗어 머리를 만져 보니 풍성하게 물결치
는 머리칼이 잡혔다. 앞머리를 끌어당겨 살펴보니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검
은 머리였다. 충치 때문에 이빨에 숭숭 뚫린 구멍도 어느 틈에 매워지고, 이
가 빠진 자리에는 희고 튼튼한 이가 새로 돋아났으며, 여드름도 감쪽같이 사
라져 구리빛 탄탄한 피부가 만져졌다.
"나, 어떻게 보여?"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록 허드슨 같아요."
요정이 소리쳤다.
"이젠 날 구해 주세요. 제발! 왜 또 그래요?"
"아까 그 돈도 있었으면 해서... "
헨리는 말했다.
"어떻게 안 될까? 두 가지 소원을 같이 들어 줄 수는 없니? 미남에다 동시
에 백만 장자로 말야, 응?"
"불가능해요."
요정은 신음했다.
"돈하고 생김새는 전혀 차원이 다른 걸요. 그렇겐 안 됩니다. 어느 쪽을
원하세요?"
헨리는 몸을 비비꼬며 솔직히 말했다.
"모르겠어! 아무리 잘 생겨도 가난뱅이면 뭘 해."
"좋은 수가 있어요!"
요정이 열심히 말했다.
"영화 배우가 되는 거예요. 큰 돈을 벌 수 있어요!"
헨리는 한숨을 쉬었다.
"영화계에 미남이 어디 한둘인가?"
"좋아요, 그럼..."
목소리가 필사적으로 말했다.
"돈으로 미모를 사는 겁니다. 성형 수술에 가발을 쓰고, 일류 헬스 클럽에
다니며, 구두굽을 높이면... "
"그래 봤자 록 허드슨처럼 보이지는 않아."
헨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원판하고야 같겠니."
"그럼 인기는 어때요?"
요정이 애절하게 외쳤다.
"인기만 있으면, 정말로 인기만 좋다면, 생긴 건 문제가 안돼요. 사람들은
그리고 돈 문제는... 인기가 좋으면 언제든지 돈을 빌려 쓸 수 있으니까..."
"좋아."
헨리는 그 생각을 곱씹으며 말했다.
"록 허드슨도 매일 밤 데이트는 못했겠지. 하지만 인기만 있다면다..."
"됐어요!"
요정이 말했다. 또다시 번개와 바람이 몰아치고, 헨리는 바람빠진 풍선처럼
줄어들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렇다고 특별히 달라진 점도 없는 것
같았다.
"내가 인가가 있을까?"
그는 희망을 품고 뇌까렸다.
그 순간 전화 벨이 울리기 시작하고, 방문이 부서져라 활짝 열리며, 여자들
이 떼를 지어 환성을 울리며 몰려 들어왔다.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따스하고
붉은 입술로 합창하듯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는 여자들을 향해 달려갔다.
가장 가까운 여자를 붙들고는 막...
"돌아와요!"
요정의 가냘픈 목소리가 비명처럼 울려왔다.
쿵! 우지끈! 뚝딱!
헨리는 방바닥에 나자빠졌다. 품안은 텅 비어 있었다. 방안에는 여자들의
그림자도 없었다. 부끄러움을 느끼며 그는 몸을 일으켜, 어정걸음으로 구석
에 있는 의자로 가서, 다시 그 위에 올라섰다.
"미안해."
다시 거미줄을 마주하자 그는 맥없이 말했다.
"그만 깜빡 잊었어."
"그게 뭡니까!"
요정이 야단쳤다.
"나도 이젠 못참겠어요! 어서 아무거나 하나 정해요. 빨리 하지 않으면 다
끝장이에요!"
헨리는 거미줄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사태는 정말로 심각했다. 말벌은 거미
줄을 온통 뒤집어쓴 채, 거미 바로 앞 1센티미터도 못되는 곳에 대롱대롱 매
달려 있었다. 거미가 흉칙한 이빨을 드러냈다. 벌은 미칠 듯이 붕붕거리며
몸부림쳤다.
"좋아... "
"널 믿어 보자. 살려 주면 틀림없이 소원을 들어 주겠지?"
"그럼요! 그럼요!"
요정은 흐느꼈다. 흉칙한 두 벌레 사이의 간격이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뭐든지! 어서!"
헨리는 결단을 내렸다.
"좋아."
그는 의자에서 뛰어내렸다. 천장 서랍에서 망치를 꺼내 들고는, 대결의 현
장으로 쏜살같이 되돌아왔다.
"움직이지 마! 자칫하면 빗맞으니가!"
"알았어요."
요정이 흐느꼈다.
헨리는 있는 힘을 다해 망치를 내리쳤다...
거미는 찍! 하고 뭉개어져 벽지에 역겨운 얼룩을 남겼다. 헨리는 부르르
몸을 떨고는 망치를 손에서 놓았다.
"이젠 살았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침묵.
"이젠 괜찮다니까."
그는 되풀이하며, 앙상한 손가락으로 말벌을 찔러 보았다.
찌르는 듯한 통증이 손을 울리고, 그는 의자에서 굴러떨어졌다. 기가 막
혀서 말이 안나온다는 얼굴로, 벌에 쏘여 퉁퉁 부은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불현듯 화가 치밀어, 그는 쿵쾅거리며 의자에 올라섰다.
"무슨 짓이야! 어쨌든 거미한테 먹힐 뻔한 걸 살려 줬잖아, 응? 요정아?"
잠잠...
문득 꺼림칙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전화 있는 데로 달려갔다. 잡아채듯
수화기를 들어서는 과학 박물관 번호를 돌렸다.
"거미한테도 천적(天敵)이 있습니까?"
담당자가 나오자 그는 물었다.
"물론이지요."
상대가 대답했다.
"새가 그렇고 두꺼비가 그렇고, 그 무서운 나다니벌이나 말벌이 그렇고...
아, 그중에서도 사냥말벌이란 놈이 있지요."
"맙소사."
헨리는 전화를 끊었다.
벌레 두 마리를 상대로 이야기를 할 ㄳ 곤란한 점은, 도대체 어느 놈이
입술을 움직이는지를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 뒤 헨리는 새 아파트로 이사했다. 벽에 물든 그 얼룩을 볼 때마다 미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킬러
( Killer )
by - Jack Ritchie



그는 테 없는 안경을 쓴 유순하게 생긴 사람이었다. 그러나 자동권총을 다루는
솜씨는 능수능란했다. 그가 찾아온 이유를 알고도 내가 당황하지 않는 것이 나
스스로도 이상했다.
"영문도 모르고 죽나니 정말 유감인걸, 돈을 주고 나를 죽이려는 놈이 대채 누
구지?"
나는 말했다.
"나의 결정만으로 죽이는 경우도 있지."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처음 누가 방안으로 들어서는 기척이 나서 뒤돌아보았을 때, 마침 나는 술을
마시려던 참이었다.
"나는 지금 막 술을 따르고 난 참이네. 내게 원한을 품은 놈들의 얼굴을 모두
기억하지만 자네의 얼굴은 낯선걸. 자네를 고용한 사람은 혹시 내 아내가 아닌
가?"
그는 미소지었다.
"바로 맞혔어. 부인께서 왜 그런 마음을 먹었는지 잘 아실테지만... "
"음, 내게는 재신이 있고 아내는 그걸 손에 넣고 싶은 거야. 그것도 송두리째
말일세."
내가 대답했다.
그는 무엇을 어림잡은 듯한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았다.
"당신 나이는?"
"쉰셋."
"부인은?"
"수물둘."
그는 혀를 끌끌 찼다.
"어리석게도 언제까지나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나, 윌리엄스 씨?"
나는 포도주를 한 모금 마셨다.
"한두 해 지나면 불만이 나타나서 이혼하자는 등의 골치 아픈 사태가 벌어질
줄은 알았지. 그렇지만 설마 살인까지 계획할 줄이야... "
"부인이 꽤나 미인이시더군. 욕심 또한 대단하구. 윌리엄스 씨, 여태껏 모르셨
다니 기가 막힌걸."
나는 시선을 그의 권총으로 옮겼다.
"자네, 오늘 처음 하는 살인은 아니겠지?"
"물론."
"그럼 즐기려고 하는 짓이군 그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병적인 즐거움이긴 하지만 확실히 난 즐기고 있지."
나는 그를 바라보면서 하릴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내가 입을 열었다.
"자네가 온 지 벌써 2분이 지났는데, 여태 내 목숨이 붙어 있으니 어찌 된 노릇
인가?"
"서두를 필요는 없지, 윌리엄스 씨."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흠, 그러고 보니 실제 손을 대는 일은 그다지 즐기지 않는 모양이로군. 죽이기
전에 아슬아슬한 순간들을 맘껏 즐기자는 것인가?"
"맞는 말이야."
"그럼 그럭저럭 자네를 즐겁게 해주는 동안은 나의 목숨이 붙어 있을 수 있다는
건가?"
"무한정 그럴 수야 없지."
"하긴 그렇겠지. 술 한잔 어때? 그런데 이름이?"
"스미스라는 이름은 외우기 쉬울 거야. 좋아, 한잔 하지."
"고마워."
"그렇지만 술 따르는 손길은 한눈에 볼 수 있어야 하네."
"물론이지. 설마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손쉬운 곳에 독약을 마련해 둘 수야 없지
않겠나?"
그는 내가 술을 따르는 것을 빤히 지켜보고 나서야 안락의자에 걸터앉았다. 나도
의자에 앉았다.
"아내는 지금 어디 있소?"
"파티에 갔지. 당신이 살해당하는 시간에 부인의 알리바이를 증명해 줄 사람들이
수두룩하도록 말이지."
"내가 강도에게 총 맞아 죽는다는 말씀이 되겠군."
그자는 글라스를 바라 앞에 있는 칵테일 테이블에다 놓았다.
"그렇지, 당신을 살해한 다음 나는 이 글라스를 씻어서 술장에 다 갖다둔다. 나갈
때는 내가 만졌던 문의 손잡이에서 지문을 말끔히 닦아 버린다. 이런 얘기지."
"뭐든지 자질구레한 물건을 집어갈 테지. 강도가 든 것처럼 말이야."
"그런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아. 윌리엄스 씨. 순경 나리들은 범인이 사람을 죽이
고 겁에 질려서 맨손으로 줄행랑을 놓은 줄 알테니까."
"저기, 동쪽 벽에 걸려 있는 그림 보이나? 3천 달러쯤 되는 거지."
내가 말했다.
그는 그림을 힐끔 쳐다보고는 곧 시선을 내게로 돌렸다.
"재미있는 얘기를 하시군요. 윌리엄스 씨. 하지만 나는 당신과 연결되는 물건은 갖
지 않을 생각이야. 나는 그림을 알지. 특히 그 가치를 말야. 그러나 전기의자에 걸터
앉는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는 않아."
그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저 그림을 주겠다는 말인가? 당신 목숨과 교환조건으로?"
"그럴 수도 있지."
사나이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안됐지만 윌리엄스 씨. 나는 한 번 돈을 받은 사람은 끝까지 배반하지 않아. 살인
자에게도 의리는 있단 말야."
나는 테이블 위에다 글라스를 놓았다.
"내가 무서워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인가, 스미스?"
"이러저러 하는 동안에 무서워지게 마련이지."
"그때 탕 쏘아 버린다는 속셈인가?"
그의 눈이 번쩍 하고 빛났다.
"긴장하고 있는 탓이 아닐까, 윌리엄스 씨? 가슴속은 공포로 가득 찼는데 밖으로 드
려내지 않는다는 것이?"
"목숨을 살려 달라고 애원하길 기다릴 셈인가?"
내가 물었다.
"모두들 그러더군. 어쩌구저쩌구 하면서 말야."
"자네의 인간성에 호소하라는 건가? 하지만 어차피 헛소고일 테지."
"헛수고지."
"돈을 줄 테니 살려달라는 자도 있겠지?"
"툭하면 그러지."
"그것도 헛수고인가?"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지, 윌리엄스 씨."
"아까 말한 저 그림 뒤에는 벽금고가 있네, 스미스."
그자는 그림을 다시 한번 힐끔 보았다.
"그럴듯하군."
"5천 달러가 들어 있다."
"적지 않은 금액인걸."
나는 글라스를 집어들고 그림 앞으로 갔다. 금고 문을 열고는 갈색 봉투를
끄집어낸 다음, 글라스를 단숨에 비운 뒤에 그것을 금고 속에 넣었다. 그리고
재빨리 금고 문을 닫고 다이얼을 돌려 버렸다.
스미스는 눈길을 봉투에 고정시켰다.
"그 봉투를 보여주실까?"
나는 그의 눈앞에 있는 테이블에다 봉투를 올려놓았다.
그는 잠시 동안 그것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이윽고 나를 쏘아 보았다.
"당신, 정말 돈으로 목숨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오?"
나는 담배에다 불을 붙었다.
"아니에. 보아하니 자네는 돈으로 매수될 사람은 아닌 듯하네."
그는 약간 인상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하지만 5천 달러를 내 눈앞에 가져오지 않았소?"
나는 봉투를 집어들고, 속에 든 알맹이를 테이블 위에 꺼내 놓았다.
"낡은 영수증들이야. 한푼 값어치도 없는 것들이지."
그는 당황한 기색을 띠었다.
"이런 짓을 해서 몸에 이로울까?"
"난 단지 금고 속에다 자네의 글라스를 넣어두고 싶었을 뿐이야."
그의 눈이 날카롭게 번쩍이더니 바로 앞에 있는 글라스를 노려보았다.
"금고 속에 넣은 건 당신 글라스야. 내 건 아니야."
나는 소리없이 빙그레 웃었다.
"자네 걸세, 스미스. 경찰이 오면 어째서 빈 글라스가 금고 속에 간직되어
있는가 하고 심상치 않게 여기겠지. 더구나 사건이 살인인지라, 경찰에서 글
라스의 지문을 채취할 건 뻔한 일이라고 보는데 어떤가?"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 당신한테서 눈을 떼지 않았어. 단 한순간도 말야. 글라스를 바꿔치기
하는 재주는 부릴 수가 없었지. "
"그럴까? 자넨 적어도 두 번은 저 그림을 쳐다보았다고 생각하는데... "
반사적으로 그는 그림 쪽으로 눈을 돌렸다.
"고작 1초나 2초 정도였어."
"그동안이면 충분하지."
그의 얼굴에는 조금씩 땀이 솟기 시작했다.
"아냐, 그런 짓을 하지 못했을걸."
"그렇다면 경찰들 들이닥칠 때엔 간이 뒤집히겠군. 그래. 그리고 얼마 후엔
전기의자에 얌전히 걸터앉아 죽음을 맛보는 즐거운 기회를 맞이하는 거지. 자
네도 그때서야 비로소 자네한테 살해당한 많은 사람들과 똑같은 심정을 맛보
게 되겠지. 게다가 처형당하기까지 시간은 탕 하고 총알을 맞아 죽는 작자들
과 비교도 안 되게 길고 지루할 테니까, 죽음의 이미지도 풍부하게 떠오를걸
세. 전기의자에서 사형집행이라... 신문에서 읽은 일이 있겠지?"
그는 방아쇠에다 단단히 손가락을 걸었다.
"자네 자신은 침착하고도 당당한 모습으로 죽어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것은 다 자기를 위안하려는 흔해빠진 환상에 불과하지, 스미스. 싫다고 울부
짖는 사형수를 억지로 전기의자로 끌어가는 예는 수두록하다더군."
그는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금고를 열어라, 열지 않으면 쏘아 버리겠어."
나는 목청껏 껄껄 웃었다.
"이봐, 스미스 금고를 열어도 제나가 나를 죽인다는 건 뚜렷한 사실이 아닌
가?"
30초쯤 후에 그가 입을 열었다.
"그 글라스로 어쩌겠다는 거지?"
"자네가 나를 해치지 않는다면 -- 이젠 죽일 생각은 없어졌으리라고 보는데.
나는 글라스를 사립탐정에게 넘겨주어서 지문을 채취할 거야. 그리고 필요 사
항을 적은 편지와 함께, 그것을 이중봉투에 넣어서 봉인해 두지. 내가 폭력이
나 사고로 죽게 된 경우엔 당장 그 봉투를 경찰에 주라고 사립탐정에게 지시
해 둘 생각이네."
스미스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요. 난 당장 물러가겠소. 이젠 두번 다시는 오지
않겠습니다."
나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렇게는 안 되지. 자네는 내 장래를 지켜주어야 하니까."
그는 생각에 잠겨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당장 경찰에 가지 않죠?"
"거기엔 다 까닭이 있지."
그는 권총으로 시선을 옮기더니 그것을 천천히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무엇인
가를 알아차린 눈치였다.
"부인은 나 말고도 다른 살인자를 쉽게 찾아낼 거요."
"그렇지, 그럴 생각이라면 그렇게 할 수도 있겠지."
"그러니까 다른 살인자가 당신을 죽여도 나는 역시 체포되어 전기의자에 앉
게 되기 마련이라... "
"그렇겠지, 다만..."
스미스는 내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만 아내가 살인자를 고용할 수 없게 돼버린다면 얘기는 달라지지."
"그렇지만 직업적인 살인자를 구하려면 얼마든지..."
그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나는 미소지었다.
"아내의 거처를 자네는 알고 있지?"
"피터슨 식당에 있다는 것만은 알고 있소. 11시에 끝난다고 들었는데..."
"11시? 알맞은 시간이로군. 오늘 밤은 캄캄할 거야. 피터슨 식당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나?"
그는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모르겠소."
"브리지 햄프턴이지."
나는 주소를 가르쳐주었다.
우리들은 30초 가량 시선을 마주쳤다.
"이건 어디까지나 자네의 일일세."
나는 부드럽게 말했다.
"자네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는 일이니까 말야."
그자는 천천히 윗도리 단추를 끼웠다.
"11시에 어디 계시겠소, 윌리암스 씨?"
"내가 회원으로 있는 클럽에서 친구들과 트럼프를 하고 있을 거네. 아내가
살해당했다는 통지가 오면 모두들 동정해 줄 거야. 총을 쏘아 죽일 테지?"
"때와 장소에 따라 달라지지요."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당신은 정말 부인을 사랑하기는 했나요?"
나는 조그마한 비취 조각을 손에 들고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처음 샀을 당시는 이 골동품도 무척이나 맘에 들었었네, 그런데 이젠 지긋
지긋해졌어. 다른 것과 바꾸었으면 해."
그가 자취를 감춰 버린 후 내가 클럽으로 가기 전에 글라스를 사립탐정에게
가져갈 시간은 충분했다.
물론 금고 속의 글라스가 아니었다. 거기에는 나의 지문밖에 묻어 있을 않
았다.
나는 스미스가 칵테일 테이블 위에다 두고 간 글라스를 손에 들었다.
스미스의 지문은 매우 뚜렷하게 나타나 있었다.




마지막 전화

by - 김 성종


배태우(裵泰宇)는 골목을 꺾어 돌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아내는 그때까지
집 앞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멀리서 보기에도 아내의 배는 불룩해 있었
다. [신혼 6개월 = 임신 6개월]이라는 등식에 그의 얼굴에서는 즉물적인 미소
가 흘러 나왔다. 웃으면서 손을 흔들자 아내도 손을 쳐들어 보였다. 유난히
수줍음이 많은 여자였다.
골목을 벗어나 비탈진 길을 조금 내려가면 차도에 이른다. 거기에 검은 색의
6기통 승용차가 언제나처럼 대기하고 있었다. 운전수가 재빨리 뛰어나와 뒷문
을 열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올라앉았다. 부근 버스 정류소에서 버
스를 타기 위해 몰려 서있던 사람들이 부러운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침
출근 때마다 느끼는 그 따가운 시선을 묵살하면서 그는 천천히 담배를 피워
물었다. 유쾌한 아침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행복하고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출근한 그가 웬일인지 그날 밤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처음 있는 일이라 그의 아내 가희(嘉姬)는 뜬 눈으로
밤을 지샜다. 이튿날 회사에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남편은 출근해 있지 않았
다. 그날 밤도 가희는 홀로 집안을 지켰다.
이틀 밤을 지새고난 그녀는 마침내 남편에게 무슨 사고가 일어났다고 판단,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다방면에 걸쳐 신중하게 실종자의 행적을 추적했다.
그러나 추적은 실종 첫날 퇴근시간을 기점으로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했
다. 추적의 실마리가 거기서부터 뚝 끊어져버린 것이다. 그날 그는 오후 6시
조금 지나 서둘러 퇴근했다. 신혼의 단꿈이 아직 계속되고 있을 때라 직원들
은 의당 집으로 곧바로 가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시골의 가난한 농가 출신인 그는 어렵게 대학을 나와 어찌어찌 하여 미국
유학까지 가게 되었다. 머리가 좋다기 보다는 피나는 노력으로 성공의 문턱에
들어선 입지전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과거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가 맨손으로 상경하여 끼니를 굶으며 고학하고 있을 때 몸과 마음을 다 바
쳐 오로지 그의 뒷바라지를 해준 여자가 한 사람 있었다고 했다. 직업이 간호
원이었다고 하는데, 먹고 자고 하는 것은 물론 학비까지 그녀의 쥐꼬리만한
월급에서 모두 지출되었다고 했다.
"불알 두쪽만 차고 올라온 친구가 뭐가 있겠어. 다 떨어진 운동화를 비제바
노 구두로 사 신기고 꺼끌꺼끌한 무명 팬티를 백 프로 면으로 된 백양 삼각
팬티로 갈아 입혀주고, 주말이면 명동 한일관에서 불고기 4인분을 시켜 먹인
것도 모두가 그 간호원이었어. 낙태도 몇번 했나봐. 그러면서도 오로지 그가
자립해서 자기를 아내로 맞아 주기를 그녀는 바랬던거지. 바보 멍텅구리 같
은 년.... "
여직원들은 못 들을 것을 들었다는 듯 외면하고 있다가 마지막 욕설에 낄낄
거리고 웃었다.
이렇게 소문을 퍼뜨린 사람은 총무과장인 임윤표(林允豹)라는 사나이였다.
우연히도 그는 배태우와 K대 동기동창이었다. 전공도 같은 경영학과였다. 그
래서 학교 다닐 때 별로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배태우의 과거에 대해서 어
느 정도 알고 있다고 했다. 본래 입이 험하기로 이름난 사나이인 만큼 배태우
의 과거를 혼자 품고 있지를 못한 것 같기도 했다. 거기에는 또한 일종의 컴
플렉스 같은 것이 작용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 배태우는 경영학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야말
로 금의환향한 것이다. 돌아오자마자 그는 과거에 자기를 도와 주었던 간호원
이 아닌 양가집 규수와 결혼부터 했다. 36세의 미혼이었지만 앞길은 얼마든지
넓게 열려 있었다. 그는 대학 강단에 설까 아니면 일반 대기업으로 진출할까
하고 한동안 망설였다. 대학에는 외국에서 박사 학위를 따가지고 돌아온 젊은
수재들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거기에 비해 일반 기업에는 인물이 없어 스카우
트 열풍이 한창 불어닥치고 있었다. 다리를 뻗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
한 그는 처가쪽으로 손이 닿는 R종합 무역 상사의 문을 노크했다.
R측은 박사학위 소지자인 그를 대환영했다. 파격적인 대우를 약속하고 우선
그를 경영이사 자리에 앉혔다. 운전수가 딸린 6기통 승용차도 제공했다. 같은
대학 동기동창이면서 과장자리에 앉아 있는 임윤표로서는 눈이 뒤집힐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배태우가 입사하던 당시의 모습을 점심시간에 칼국수집
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 친구가 이사(理事)로 들어올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 난 그 친
구가 박사 학위 따가지고 귀국한 것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구. 그러니까 그
날 회사에 나타났을 때 처음 만난 거야. 이 친구... 아주 사람이 달라져 있더
라구. 학교 다닐 때는 빼빼 마른 갈비였는데, 아주 제법 뚱뚱해지고 안경도 근
사한 것을 썼더라구. 이마까지 훌렁 벗겨진 것이 영 딴 사람이 됐더라구."
"그래서 딱 마주쳤을 때 뭐라구 했습니까?"
짖ㄳ은 부하직원이 얼굴을 들여다 보듯이 하고 물었다. 정곡을 찌른 질문에
그는 당황하며 이렇게 대답했다.
"아, 뭐... 축하한다고 그랬지. 달리 뭐 할 말 있어?"
칼국수집을 나와 다방에서 커피를 마실 때 그는 배태우란 인간에 대해 결론
을 내리듯 이렇게 말했다.
"결국 그 친구의 오늘이 있기까지는 버림받은 간호원의 눈물겨운 뒷바라지가
밑거름이 됐다고 보는 것이 옳지."
"어머, 그 여자가 불쌍해요. 그 여자는 어떻게 됐어요?"
여직원 두 명이 둥그렇게 눈을 뜨고 물었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물어보나마나 뻔하지 뭐."
중얼거리면서 그는 잠시 허공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실종되고 열흘이 지났다. 완전한 증발이었다. 경찰은 납치로 보고 수사력을
집중해 보았지만 허사였다. 죽었다면 흔적이라도 남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변시체를 일일이 체크해 보았지만 그 역시 헛수고였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배태우의 실종으로 제일 고통을 받은 사
람은 물론 임신 6개월인 그의 아내였다.
가희는 식음을 전폐한 채 울면서 남편을 기다렸다. 그러나 보름이 지나도 남
편은 종무소식이었다. 사람의 피를 말리는데 그보다 더한 고통이 없었다. 차라
리 죽었다면 절망적인 몸부림으로 끝날 수가 있다. 이건 숫제 죽었는지 살았는
지 알 수가 없으니 그야말로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경찰은 마침내 배태우가 어떤 이유로 납치되어 살해당한 다음 깊은 산속에
암매장당했거나 바다에 내던져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완전히 손을 들었다.
편리한 쪽으로 발달되기 마련인 사고방식이었다. 실종 1개월만에 수사본부는
해체되었다. 그러나 미해결인 채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형식상 늙은 형사 하나
가 그 사건을 떠맡게 되었다.
김일기(金一基)라고 하는 그 형사는 정년퇴직을 눈앞에 둔, 그래서 그 방면에
서는 영감으로 통하는 늙은 사나이였다. 마른데다 얼굴이 온통 주름투성이라
나이보다는 댓살쯤 더 늙어 보이는 그런 사나이였다.
수사계통에서 잔뼈가 굵은 그는 그 나이답지 않게 사건이 터질 때마다 젊은
형사들과 함께 뛰곤 했다. 같은 또래의 사나이들은 모두 요직에서 부하들은 지
휘하고 있었지만 그만은 유독 밑바닥에서 헤어나지 못한 체 정년을 눈앞에 두
고 있었다. 한 마디로 그는 고여 있는 물과 같은 신세였다. 자신은 스스로 인
생의 실패작이라고 부르곤 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은 하면서도 지난 날들을 후
회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사닥다리를 기어오르기 위해 치열한 아귀다툼을 벌
이고 있는 사나이들이 볼 때 그는 바로 무능한 자의 대표적인 표본이었다.
사실 그는 무능하다고 밖에 달리 설명할 수가 없는 인물이었다. 인간적인 측
면에서 볼 때는 선량하고 양심적인 면이 강조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럼 측
면이 올바로 평가받을 수 있는 시대는 이미 지난 지 오래 였다.
그가 자신이 결코 무능하지 않다는 걸, 그리고 자신의 용기를 실증해 보인
일이 일생일대에 딱 한번 있었다. 그것은 그가 어떤 독직사건에 얽혀 뇌물을
먹었다고 인정되어 쫓겨났을 때의 일이었다. 그는 최고 실력자를 상대로 소송
을 걸었다. 3년이 걸린 그 소송은 결국 대법원에 가서야 그의 무죄로 결판이
났다. 그 동안 사방에서 받은 위협과 설득을 물리치고 드디어 승리를 거둔 것이
다. 그는 복직되었다. 그러나 말단이었다. 그 이상은 바랄 수도 없었다. 그는
거기에 만족하고, 정년퇴직하는 날 퇴직금이나 받아 아내와 함께 낙향해야겠다
는 마음을 먹었다.
배태우가 실종된 지 40일째 되는 날 변시체 신고가 하나 경찰에 접수되었다.
신고자는 등산객이었다. 혹시나 하고 달려간 김일기 형사는 도봉산 중턱까지
올라가느라고 몹시 애를 먹었다. 한여름이라 매우 무더웠고, 허덕거리며 올라
가보니 옷은 온통 땀으로 후줄근히 젖어들었다.
시체는 등산로에서 한참 벗어난 잡목 숲 속에 엎어져 있었다. 등산객의 말에
의하면 동행한 처녀와 키스하기 위해 들어왔다가 시체를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시체는 부패 할대로 부패해서 살이 모두 허물어져 있었다. 각종 벌레와 구더기
가 우글거리고 있어서 차마 눈 뜨고 보기가 역겨울 지경이었다. 수건으로 코를
틀어막고 시체를 관찰하고난 김형사는 직감적으로 실종된 배태우라고 생각했다.
옷차림과 왼쪽 손목뼈에 걸려 있는 오메가 시계가 배태우의 것과 일치했기 때
문이다. 시체를 뒤집어 보았다. 해골이 드러날 정도로 부패해버려 얼굴 모습은
전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상의 주머니를 뒤져보니 지갑이 들어 있었다. 지갑
속에서 주민등록증과 R상사 발행의 신분증이 나왔다. 두 개 다 배태우의 것이
었다.
김형사는 침을 뱉고 나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구역질은 좀 가신 것 같았다.
씁쓸한 기분과 함께 육신에 대한 허망한 생각이 슬그머니 가슴을 적셔왔다. 주
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병 두개를 발견하고 집어들었다. 두개 모두 비어 있었는
데 겉에 붙어 있는 종이에 농약이라는 글씨가 인쇄되어 있었다. 좀더 자세히
읽어보니 하나는 '농약 - 메타시스톡스', 다른 하나는 '농약 - 디프테렉스'라
고 되어 있었다.
"이런, 농약을 마셨나 보군. 쯧쯧... 그것 참... 외국에서 박사 학위까지 따
온 젊은 친구가 이거 너무 아깝지 않나, 국가적으로도 손해구말이야."
두 시간쯤 지나자 그곳은 사람들로 장터처럼 붐볐다. 지원차 달려온 형사들과
사망자측 사람들 그리고 기자들로 한 동안 주위가 몹시 시끄러웠다. 한산하던
등산객들까지 몰려드는 바람에 열기가 더했다.
기를 쓰고 달려온 새댁의 비통한 울부짖음을 들으며 김형사는 한쪽에 덜거니
앉아 줄담배만 피워댔다. 모두 빨리 돌아가 주었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때
한 사람이 그 옆으로 슬그머니 다가와 쭈그리고 앉았다. 김형사도 안면이 있는
R상사의 총무과장 임윤표였다.
"자살인가 보지요?"
"글쎄요."
김형사는 그 친구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느새 해가 지고 어둑어둑 땅거미가 내리고 있었다. 결론은 자살이었다. 이
유야 아무래도 좋았다. 자살에 대해 이의를 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데 뒤늦게 나타난 검시의가 일치된 결론을 뒤집어 놓았다.
모두가 우하니 몰려가 검시의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때까지 바지에
가려 있던 하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는데, 놀랍게도 있어야할 남근(男根)
이 잘려나가고 없었다. 그것이 그 동안 썩어 문드러져 없어져 버렸는지도 모른
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검시의의 다음 설명이 그런 생각을 일축했다.
"온통 피와 머큐로크롬액이 뒤범벅된 채 말라붙어 있지 않습니까?"
"그럼 성기가 잘려나갔다 이 말입니까?"
김형사가 성난 듯이 물었다. 검시의는 틀림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습니다. 잘린 게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게 분명
합니다. 붕대가 감겨져 있던 상태로 볼 때 환자의 솜씨는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아연한 눈길을 허공에 던졌다. 성질 급한 젊은 형사 하나가 내뱉듯이
말했다.
"그렇다면 이거 자살인가 타살인가? 제기랄 또 복잡하게 됐군."
이튿날 보다 정밀한 시체 검증이 실시되었다.
김형사는 현장에 나가지 않고 새댁을 만나러 갔다. 가희는 거의 실신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어제 산에서 기절해서 떠메오는 바람에 나중에 발견된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알았다 해도 그것은 그녀에게 차마 알
려줄 성질의 것이 못되었다. 그러나 김형사는 직업이 직업이니 만큼 사정을
가릴 것 없이 들이댈 수밖에 없었다. 주위 사람들은 물리치고 두 사람만 남게
되자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거 죄송한 말씀이지만, 생전에 부군과의 성생활은 어땠습니까?"
지치고 비탄에 젖은 부인은 이미 부끄러움 같은 것은 알지도 않았다.
"원만했어요."
"물론 결혼 후에 아기를 가지 셨겠지요?"
비로소 가희의 까만 눈에 의혹의 빛이 서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가만히 고
개를 끄덕이면서 늙은 형사를 쏘아보았다. 김형사는 시선을 피하면서 나직이
물었다.
"부군께서는 성생활을 치를 수 있는 육체적 조건이 훌륭했나요?"
"네, 훌륭했어요."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거기에는 이상이 없었나요?"
"네, 이상 없었어요. 그, 그런 건 왜 물으시죠?"
노여움과 의혹이 엇갈리는 아름다운 얼굴을 김형사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름이 아니라... 놀라지 마십시오. 하긴 놀라지 않으실 지도 모르겠죠."
"무, 무슨 말씀이 신지... ?"
"부군께서는 거기가 잘려나가고 없었습니다."
"네! 뭐라구요?"
"성기가 없었습니다. 누가 잘라버린 겁니다."
"그, 그걸 리가...!"
가희의 두 손이 이마를 짚었다. 김형사의 눈이 사납게 치떠졌다.
"혹시 부인께서 그런 짓을 한 거 아닙니까?"
"네? 뭐라구요? 아니... 아니... 그럴수가... 세상에도 그럴 수가... "
그녀가 쓰러지는 것을 보고 김형사는 일어섰다. 적이 낭패한 기색이었다.
시체에 대한 정밀검사 결과는 곧 알려졌다. 그것은 대강 다음과 같았다.
(1) 사망시간은 30일 전에서 40일 사이.
(2) 체내에서 다량의 농약성분이 검출됨.
(3) 성기 제거 후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징후가 뚜렷함.
그렇다면 배태우는 남근을 제거당한 후에 죽은 것이다. 남근이 없어지자 괴
로와하던 끝에 농약을 마시고 자살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몰골이 송연해졌다. 누군가에 의해 남근이 잘린 남자가
과연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긴 사고로 그렇다면 문제가 다르다. 그러나
만일 부인 아닌 다른 여자에 의해 그런 짓을 당했을 때 과연 세상의 어느 남
편이 사타구니를 움켜쥐고 부인 앞에 나타날 수가 있겠는가!
"여보 이게 없어졌으니 어떻하지? 이젠 모든 게 끝장이야! 으흐흐흐... "
과연 이렇게 뻔뻔스런 고백을 할 수가 있을까. 배태우 박사는 결국 현명한
방법으로 죽음을 택한 것이다. 그렇지 않을까. 나라도 그런 경우에는 자살할
수밖에 없겠는데... 남근이 없는 남자, 그것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신부
나 중도 비록 여자와의 관계는 삼가하고 있다 해도 그것만은 소중히 갈고 닦으
면서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남근 없는 신부나 중이란 얼마나 멋대가
리가 없겠는가.
늙은 형사는 슬그머니 일어나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소변기 앞에 다가서
서 30여년 동안 아내와 생사고락을 같이한 그것을 꺼내들고 마치 호기심 많은
아이들처럼 젊었을 때는 훌륭했다. 하긴 뭐 지금도 목욕탕에 가면 젊은 놈들이
흘끔흘끔 바라볼 정도니까. 섹스가 이렇게 소중한 것인 줄은 미처 몰랐다. 함
부로 굴리다가 싹둑 잘리지 않기 천만 다행이다. 흘러간 몇몇 여인들의 얼굴을
머리 속에 떠올리면서 그는 지퍼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
다.
수사는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특별한 부분에 대한 특별치료였기 때문에 병원
마다 명쾌하고 즉각적인 반응을 보여주었다. 하룻밤에 배태우를 치료해 주었던
병원이 밝혀졌다. 번화가에 자리잡은 비뇨기과 전문의 조그만 병원이었다.
"한 달이 훨씬 지났을 겁니다. 밤중에 어떤 젊은 남자가 여기를 움켜 쥐고 피
투성이가 되어 달려 왔죠. 한 손에는 잘린 성기를 들고 말입니다. 잘린 것치고
는 꽤 커보였는데... 그것을 붙여 달라고 애걸했죠. 붙일 수 없다고 했더니 대
성통곡을 하더군요."
젊은 의사가 열을 내어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우선 피를 막아야 하겠기에 지혈제를 쓰고 치료를 했지요. 사흘 동안 여기에
입원해 있었습니다."
"사흘 뒤에 어디로 갔습니까?"
"그건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참 간호원을 몹시 싫어하더군요. 간호원은 모두
죽어야 한다면서 악을 쓰는 바람에 우리 간호원들이 접근을 못했죠. 저 혼자
치료하느라고 애를 먹었습니다. 아마 제 생각에는 간호원한테 그런 짓을 당한
것 같습니다만... "
배태우의 사진을 꺼내 보이자 의사는 두말 않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김형사는 R상사로 허둥지둥 달려갔다. 그리고 여직원 다섯 명과 남자 직원 다
섯 명을 상대로 똑같은 질문을 던져보았다.
"배태우씨가 관계한 여자 중에 혹시 간호원이 있다는 말을 못 들었습니까?"
못 들었다고 잡아 뺄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총무과장으로부터
들었노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들었던 것을 모두 뱉아놓았다. 김형사는 임윤표
과장을 따로 불러 별실에서 대면했다. 임과장은 처음부터 부정적으로 나왔다.
"배태우가 대학 다닐 때 어떤 간호원이 뒷바라지를 해주고 있다는 말이 있었
죠. 전 소문만 들었지 그 여자 얼굴 한번 본 적 없습니다. 벌써 옛날 얘기죠.
그런 여자를 제가 어떻게 찾습니까?"
"그래도 아는 사람이 있을 거 아닙니까?"
"글쎄요. 저로서는 수소문해 볼만한 사람이 없는데요."
그때 옆방에서 전화벨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조금 후에 노크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여직원이 얼굴을 내밀었다.
"과장님, 전화 왔어요."
"있다가 하라고 그래."
"병원에 있는 여동생이래요. 급하다고 좀 바꿔 달래요."
"있다가 하라고 그러라니까!"
임과장은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두터운 입술을 씰룩거렸다. 여직원이 문을 닫
자 김형사는 상대에게 담배를 권했다.
김형사는 어느 새 눈매가 날카로와져 있었다.
"병원에 근무하는 여동생이 있습니까?"
"네, 하나 있습니다."
"혹시 간호원 아닙니까?"
"네? 아, 아닙니다."
담배가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김형사는 새 담배를 내밀었다. 담배를 받아드
는 임과장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김형사는 성냥을 그었다.
"오빠는 당연히 여동생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죠. 그러나 올바른 길로 인도
해야 할 의무도 있죠. 여동생 근무처가 어딥니까? 만나보면 알겠죠."
임과장의 어깨가 치켜 올라갔다. 머리가 밑으로 꺾어지면서 급기야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김형사는 임과장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진정하시오. 진정하라구요."
"제, 제 동생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상해죄로 처벌을 좀 받겠죠. 그렇지만 살인보다 더 치명적인 상처를 배태우
한테 안겨 준 셈입니다."
"나중에 일이 터진 뒤에야 저는 알았습니다. 여동생이 울면서 다 털어 놓더군
요. 저는 배태우에 대해서 일절 여동생한테 숨겼습니다. 그 친구가 박사 학위
따가지고 귀국한 것, 다른 여자와 결혼한 것, 그리고 이 회사에 이사로 들어온
것 등 모든 걸 비밀에 부쳤습니다. 그애의 상처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
이죠. 그애가 제 소개로 배태우를 알게된 건 스무 살 때였습니다. 배태우는 그
때 군에서 제대한 지 얼마 안 된 대학생이었죠. 잘 아시겠지만... 제 여동생은
그에게 모든 것을 다 바쳐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으로 유학간 뒤로는 소식
이 끊어져 버렸습니다. 그래도 제 바보 같은 동생은 배태우를 기다린 거죠. 지
금까지, 서른 한살이 되기까지 기다린 겁니다. 그러다가 뒤늦게 회사 앞에서
배태우와 마주쳤나 봅니다. 나를 만나러 왔다가 우연히 만난 거겠지요. 그애의
충격이 어떠했는가는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결국 복수의 화신으로 변한 그애는
배태우를 호텔로 유인해서 수면제를 먹이고 면도칼로... "
"그만하십시오. 됐습니다."
임과장은 눈물을 훔치며 일어섰다.
"동생이 놀라지 않게 전화나 해줘야겠습니다."
김형사는 임과장을 막으려다가 말았다. 그의 동생이 오빠의 전화를 받고 도망
칠 것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옆에 서서 임과장의 낮고 단정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나, 오빠다. 아까는 좀 바빠서 미안했다. 점심은 먹었니? 음, 잘했다. 너 그
때 나하고 약속한 거 있지? 어떤 사태가 닥치더라도 피하지 않겠다고 말이야.
음, 그래 결심은 서 있지? 그래, 그래. 지금 단단히 결심해야 할 때가 온 거야.
조금 후에 어떤 점잖으신 분이 찾아갈 거니까 예의 바르게 맞이해. 알겠지?
응응... 그래, 그래 우린 나중에 만나는 게 좋겠지."
전화를 끊고난 임과장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김형사는 손을 내밀
어 악수를 청했다. 처음과는 달리 그에게 강한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다음에 만나 술 한 잔 합시다. 내가 사지요."
밖에는 어느 새 장마를 예고하는 비가 축축히 내리고 있었다. 김형사는 비를
그대로 맞으며 천천히 걸어갔다. 어느 때보다도 힘이 없는 모습이었다.




흉터를 팔아먹는 사나이
by - Edward D. Hoch


- 1 -

9월의 그날 오후는 유난히도 태양이 맑게 느껴졌다. 조금은 더 손님들이
찾아오기 쉽게 '다알란 앤드 트래퍼 탐정사무소'의 창을 깨끗이 닦아 두라
고 설득한 보람이 있었던 것일까. 내가 몸소 페인트를 두 통을 사들고 오자,
젊은 파트너인 마이크 트래퍼는 주말에 사무실 안을 새로 칠하겠다고 약속
했다.
"일요일 아침까지는 말끔히 칠해 놓을께요, 앨."
마이크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시원한 초록색 벽을 바라보노라면 기분이 훨씬 가라앉겠지요, 그렇게 해
놓으면 장기간 고용 약속이 돼 있는 비서가 오더라도 여기에서 일하고 있다
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는 않을 거구요."
"비서보다도 손님 쪽이 먼저 필요하네."
이 일을 계속하기 위하여 그를 파트너로 삼은 뒤로 신통한 사건청탁은 별로
없었다. 그가 동업조로 투자한 돈도 얼마 안 가서 거덜이 날 판이었다.
"그렇게 걱정하지 말라구요, 앨. 비서도 손님도 몰려 오겠지요."
나는 이 마을에 찾아 온 옛 전우와 주말을 보낼 약속을 해두었기 때문에, 페
인트 깡통과 천연덕스러운 낙관을 갖고 있는 마이크를 남겨두고 사무실에서
나오면서 말했다.
"월요일에 보자구. 그렇다고 멋대로 비서를 채용하지는 말게나."
"뭣보다 먼저 정리해야 할 것은 당신의 그 낡은 금고일 겁니다."
이 말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다면 권총은 어디에다 간수해 두면 되겠나?"
"새 장소를 생각해 두어야 하겠는 걸요. 어쨌든 저 금고는 치워 버려야겠어
요."
"월요일에 만나서 이야기하세."
이 말을 뒤로 남기고 나는 사무실을 나왔다.

거의 40년 만에 만난 글리프 게일리와의 재회는 조금은 충격적이었다. 그때
나와 글리프는 아직 10대의 어린 나이로 전쟁이 마지막 여러 달을 유럽에서
싸웠었다. 그리고 12월의 날씨가 활짝 개인 어느 날 오후, 독일군의 포탄이
그의 얼굴 한 쪽을 날려 버렸을 때도 바스또뉴에서 함께 있었다. 포탄이 비
오듯 퍼붓는 속을 나는 백 야드 정도 떨어진 야전병원까지 그를 끌고 가서
그의 생명을 구해주었던 것이다. 그 일로 나는 훈장까지 받았지만 나는 그일
을 영웅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다.
처음 얼마 동안, 육군 병원으로 글리프를 문병 가서 그 얼굴을 볼적마다 나
는 그를 살려 준 일이 과연 잘한 일인지 어떤지로 생각이 흔들리곤 했다.
왼쪽 뺨이 거의 없어졌기 때문에 그의 얼굴을 처음과 같이 되살리는 일이 가
능하다고 하더라도 몇 번이나 수술을 거듭해야 할 것인지 상상도 할 수가 없
었다.
전황이 뒤바뀌어 우리들이 공격하려 나서기에 앞서 나는 여러 번 그를 문병
하러 갔다. 그리고 나는 그곳을 떠나왔고 그 뒤로부터 글리프를 만나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긴 나와 글리프는 여러 해 동안 소식을 교환하고 있었고, 전후 뉴욕에서
재회할 약속까지 해두기는 했지만 결국엔 만나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뒤
여러 번의 크리스마스 카드와 행복한 결혼을 했노라는 통지를 마지막으로 그
의 소식은 끊겨 있었다. 그런데 1주일 전에 그가 전화를 걸어 와 버스편으로
이 마을에 들리겠노라고 알려 온 것이다. 그는 여기에서 도중하차하여 주말을
나와 함께 지내려는 속셈인 것 같았다. 그에겐 이제 아내가 없고 -- 아마 죽
었던가 이혼했을 것이다 -- 외톨이 여행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목요일 밤
까지 나는 그로부터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금요일까지도 걸려 오지 않
았다.
나는 버스 정류소에서 그와 만났다.
그는 나와 동갑이니까 이제 예순이 되었을 것이다. 왼쪽 뺨에 흉터가 남아
있긴 했지만 그의 건강은 아직 좋았고 차림새도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 머리
카락은 하얗게 샜고 얼굴의 피부이식 부분이 두드러져 보였지만, 그것 말고는
나보다 훨씬 젊게 보였다.
"야아, 글리프. 육군 의사들이 꽤나 멋진 수술을 해 주었군!"
그는 내 손을 잡으며 대꾸했다.
"거의 40년 동안이나 이 얼굴로 살아왔어. 이젠 고민하지 않게 되었네. 수술
을 열 두 번이나 한 끝에 내가 그만두라고 했어. 이 흉터도 없앨 수가 있다고
말하긴 했지만, 더 이상 병원 신세를 지는 것은 진저리가 나더구만."
"물론 그랬겠지. 좌우간 이것저것 할 말이 많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런데 자네는 결혼했나, 앨?"
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내 일에 참고 견뎌줄만한 여자가 없더군. 아직도 탐정사무소를 그대로 하고
있으니 말이야."
"흐음, 그래서 자네 전화번호를 알 수가 있었지. 자네가 샘스페이드처럼 되
리라고는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어. 잘 돼가나?"
"겨우겨우야. 2년 전에 까딱했으면 문을 닫을 뻔했네. 그래서 젊은 녀석을
파트너로 삼았지. 내 자식 또래쯤 되는 녀석이야."
"내겐 아들놈이 있어."
글리프가 무뚝뚝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만나진 않아. 서해안 쪽에 살고 있지, 그 녀석은."
"자네 결혼했다고 했던가? 그랬지?"
"그래, 한 십 년쯤 살았지. 십 년 살았으면 많이 산 편이야. 헤어지고 나서
는 쭈욱 혼자 지냈어. 회사가 도산할 때까지는 세인트 루이스에서 꽤나 괜찮
은 일을 하고 있었다네. 지금은 여기저기 나라 안을 관광하면서 저금을 축내
고 있는 셈이지. 이젠 나이가 너무 들어서 아무도 써주지 않을 걸세."
"무슨 일이든지 생기겠지."
그는 내 팔에 살며시 손을 얹으며 말했다.
"자네를 만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네, 엘. 자네가 어떤 생명을 건져 주었는
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말일세."
"어떻게 살아 왔지?"
"평범한 생활이었지만 불만은 없어. 그때 끝장이 나지 않았던 게 다행이랄까?"
함께 저녁을 사 먹고 나서 나는 그를 나의 아파트로 데리고 왔다. 침대가 하
나 여분이 있었다. 그는 별로 많지 않은 내 세간들을 훑어보고 나서 물었다.
"나를 구해 주고 받은 훈장은 어떻게 했지?"
"거 어디엔가 있겠지. 저당 잡히지는 않았네."
이튿날 아침, 밥을 먹고 난 다음 글리프에게 사무소를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마이크가 사무실 벽을 새로 칠하고 있을 것이라는 데에는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사다리 덮개들을 치우면서 조심스럽게 행동하지 않
으면 안 되었다.
"내 옛전우 글리프 케일리일세."
그리고 마이크를 그에게 소개했다.
"글리프, 내 파트너인 마이크 트래퍼야."
마이크는 손에 묻은 페인트를 닦은 뒤 글리프와 악수를 나누었다.
"늘 이렇게 엉망이지는 않습니다."
"좋은 위치에 있군. 시내 중심부에서 가깝겠는걸?"
글리프의 이 말에 내가 입을 열었다.
"이 고장 변호사한테서 가끔 사건을 청탁받기도 하지. 그렇다고 해서 그다지
신통한 것은 없지만 말일세."
잠시 후, 우리는 사무실에서 나왔다. 그제서야 마이크가 다시 벽 칠을 시작
했다. 사무실이 전보다 훨씬 나이진 것을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멋진 청년이야. 좋은 조수가 돼 주겠지?"
글리프의 말이었다.
"일거리가 없을 때는 서로 괜찮은 말벗이 된다네."
"그런데 말야. 아침에 갈 테니깐 하룻밤 더 재워주지 않겠나, 앨?"
"있고 싶은 대로 머물러도 괜찮네, 글리프. 알아듣었나?"
"아냐, 하룻밤만 더 신세지겠네."
나는 얼마 동안 그를 안내하면서 마을 안을 돌아 다녔다. 내가 아파트로
돌아온 것은 오후 세 시경이었다. 방안으로 들어서기가 바쁘게 전화벨이 울
렸다. 집으로 전화가 걸려오는 것은 드문 일이어서 마이크인줄로 짐작했다.
나의 짐작은 틀림없었다. 마이크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앨, 지금 사무소에 사건 청탁인이 와있어요."
"토요일 오후에 말인가?"
"남자 두 사람이 예약도 없이 불쑥 찾아왔어요."
"월요일에 다시 와 달라고 그러라구. 자네는 그저 페인트 쟁이라고 말하고
말이야."
"이미 늦었어요. 계약금 5백 달러로 우리들을 쓰겠다는 겁니다. 그 두 사람
은 현금을 들고 와서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받아 둬. 거절하지 말고 말이야."
"거절하지 않았어요, 앨. 그런데 그들 얘기는 이래요. 얼굴에 흉터가 있는
나이 지긋한 사나이가 필요한 모양이에요. 처음 내가 생각한 것은 당신이 변
장을 해 가지고서... "
"아아니, 이 사람이... "
"그러다가 그 친구 양반 생각을 해냈어요. 이름이 뭐라고 그랬지요? 케일리?
그렇지요. 글리프 케일리. 고작 하루 일이니깐 백이나 2백쯤 주면 되겠지요.
그 사람 일정한 직업이 없는 것 같으니 말입니다."
나는 방안에 있는 글리프를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그건 그렇지만, 말하기가 곤란하군. 어떤 청탁인데, 그래?"
"이리로 나와서 이 사람들하고 만나 보지 않겠어요?"
나는 글리프를 쳐다보면서 다시 대답했다.
"내키지 않는걸. 그럼 말이야, 30분 뒤에 그 두 사람을 내 아파트로 데리고
오라구, 알아 들었나?"
"알았어요, 앨."
나는 전화를 끊고 이 일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나는 도대체 우연의 일치
라는 것은 딱 질색이다. 그래서 글리프에게 물었다.
"자네가 이 마을에 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작자가 있나?"
그러나 글리프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천만에, 이 마을에 아는 사람은 자네뿐일세."
나는 찬장을 열어 술병을 꺼내들었다.
"한 잔 어때? 너무 이른 시간일까?"
"괜찮네, 나도 한 잔 하겠네, 앨. 물을 좀 타 주게나."
"전화는 마이크 그 친구한테서 왔었어. 사무소에서 말이야. 청탁인 둘이 별
난 주문을 가지고 이리로 오네. 자네 마음에 내키기만 한다면 하루치 급료를
자네에게 지불할 수가 있게 됐어."
"얼만데?"
"백 오십, 그 이상일지도 몰라."
"무슨 일인데?"
"아직은 알 수가 없어."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얼굴에 흉터가 있는 사나이를 찾고 있는 모양이야. 이유는 곧 알게 되겠지.
이 마을에 있는 사람 가운데 누군가 알고 있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어."
글리프가 왼쪽 뺨을 문지르며 말했다.
"이게 돈이 되리라고는 생각조차 해본 일이 없었는걸."
"아직 돈이 된 건 아니야. 괜찮겠나? 마이크가 청탁인을 데리고 이리로 오고
있네. 내가 사건 청탁인을 만나 그 내용을 듣고 있을 동안 자네는 침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게 어떨까? 괜찮다고 생각되면 자네를 부를 테니까."
"좋아."
우리가 잔을 비우고 나자마자 마이크가 들어왔다. 같이 온 두 사람은 기묘한
사람들이었다. 검소한 옷을 입은 다이엘 매카디라는 사람은 은행가 아니면 변
호사로 보였다. 다른 한 사람인 필 래시라는 사나이는 허우대가 좋고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코밑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그는 새카만 재킷을 입은 데다가
헐렁한 회색 바지를 걸쳤고 셔츠는 깃을 풀어헤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처
음엔 이 사나이를 매카디의 보디가드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너무 오래 써서 닳아빠진 가죽을 씌운 소파에 걸터앉았다. 매카디
가 입을 열었다.
"아파트로까지 찾아와서 미안합니다, 다알란 선생."
"사무소 쪽은 지금 어수선해서 말씀이지요. 평소 토요일은 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거리란 어떤 것인지요?"
"내일 맡아 주셨으면 하는 일이 있습니다. 월요일까지는 기다릴 수가 없어서
말입니다."
"당신의 직업은 무엇인지요, 미스터 매카디? 우리들은 허가증을 갖고 있는
사립탐정입니다. 어떠한 불법행위도, 특히 마약에 관한... "
"마약 따위하고는 관계가 없소. 솔직하게 말하겠소, 다알란. 딸년이 달갑지
않은 녀석하고 어울려 달아났소. 게다가 두 사람은 집을 나갈 때 중요한 서류
를 들고 갔단 말입니다."
"그게 언젠데요?"
"바로 지난 달, 나와 마누라가 유럽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는 틈에 말이요."
"직업은 무엇입니까?"
내가 묻자 그제서야 그는 대답했다.
"부동산업이요."
"잃어버린 서류는 당신의 일과 관계가 있습니까?"
"그렇소. 나의 사업은 주로 도시개발 사업이요. 내가 노리는 토지에 관해서
비밀리에 개별 교섭을 하고... 교외의 새로운 쇼핑센터라든가 시가지의 사무
실 건물용 땅을 확보하는 것이지요. 비밀이 새어나가면 필요한 땅의 값이 상
당히 비싸진단 말입니다."
"따님과 그 친구가 거기에 관한 서류를 훔쳐갔다는 말씀입니까?"
"고약하게도 그렇게 됐습니다. 그걸 도로 찾고 싶습니다. 나와 캘런과의 관
계는 요즘에 와서 썩 좋았다고는 말할 수가 없소. 이 필이 중개인이 돼주고
있소."
필 래시가 여기에서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그제서야 그가 보디가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목소리가 부드럽고 교양이 배인 말투여서 나는 놀
랐다.
"나는 캘런의 대부입니다만... "
그는 쓴웃음을 웃으며 말을 계속했다.
"가족의 평화를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서시즈라는 녀석은 좋지 않은
놈이라, 댄이나 제인이 싫어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요. 그 녀석은 캘런을
빼앗아 갔고, 게다가 서류가 잔뜩 들어 있는 서류 케이스까지 훔쳐갔단 말씀
입니다. 그래도 나는 캘런을 위해서 할 수 있는데까지 하고 있습니다. 캘런
을 만나 서류 케이스를 돌려주어야 한다고 타일렀지요. 그 애도 순순히 따르
길래 우리는 내일 오후 누군가를 시켜 그걸 받으러 보내기로 했습니다."
"어째서 당신 자신이 가지 않는 겁니까?"
"서시즈가 서류 케이스를 갖고 있는 데다가 나는 그 녀석의 친구가 아닙니다.
그 녀석은 장발을 하고 귀걸이까지 달고 있지요. 그러니 그 녀석이 어떤 녀석
인가 짐작하시겠지요? 댄의 운전수인 웬트워스에게 서류 케이스를 가지러 오
도록 하라고 그 녀석이 캘런에게 말했다는군요. 그런데 문제는 웬트워스가 이
제는 댄이 있는 데서 일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매카디가 끼어들었다.
"서류를 되돌려 받는 중요한 마당에 흥정을 깨고 싶지는 않소. 웬스워스는
자동차 사고로 오래 된 흉터가 왼쪽 뺨에 있소. 그리고 내 차를 운전해 주고
있을 때는 챙이 달린 모자를 쓰고 있었소. 서서스는 웬트워스를 한번 정도 밖
에 본 적이 없을 거요. 그래서 흉터가 있는 나이 지긋한 남자라면 안성맞춤이
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오. 다른 사람을 보내면 그는 경찰관이라고 생각하고
달아나버릴 거란 말이오."
이치에 닿는 이야기인 것 같지만 나는 어딘지 석연치가 않았다. 이 사건 청
탁 자체가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만일 그 서류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라면 서시스는 벌써 사본을 백벌 정도는
만들어 놓았을 거요."
"그것이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그 녀석은 모르고 있소. 중요한 서류로는 보
이지 않거든. 게다가 다른 서류도 섞여 있고 말이오. 내가 당장 경찰을 부르
지 않도록 캘런이 서류 케이스를 들고 나오겠다고 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말
하자면 그건 흥정상의 교환물인 거요. 두 사람은 내버려두면 저절로 돌아올
것이고... "
"그래도 한 달 전의 일이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러자 래시가 설명을 덧붙였다.
"캘런하고 연락을 취하는 데는 시일이 좀 걸렸습니다. 며칠 전에 캘런하고
저녁식사를 같이 했지요. 그 뒤 캘런이 서류 케이스를 돌려주자고 서시즈를
설득하는데도 시간이 걸렸구요."
두 사람은 이런저런 나의 질문에 대답을 해주기는 했지만 나는 그래도 마음
이 놓이지 않았다.
"내일의 예정은?"
"오후 네 시에 사우드 스트리트 공원으로 서류 케이스를 갖고 오겠노라고
그 녀석이 말했답니다. 분수 곁으로 말씀이지요. 그 녀석이라면 거뜬하게 알
아낼 수 있을 겁니다."
마이크가 끼어 들었다.
"그 분수 근처에는 일요일 오후만 되면 그런 타입의 패거리들이 잔뜩 모여
듭니다."
"하지만 서류 케이스는 들고 있지 않겠어요?"
내가 물었다.
"또 한 가지, 왜 탐정 사무소에 청탁을 하러 오셨나요?"
매카디가 대답했다.
"그 서류가 꼭 필요하기 때문이오. 일요일 오후에 공원에서의 일이니깐 서시
스한테서 서류 케이스를 받은 뒤 날치기를 당할지도 모르지 않소. 사립탐정이
라면 이 일을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나와 마이크는 서로 눈길을 마주쳤다.
"그 일을 하는 것은 나도 마이크도 아닙니다, 미스터 매카디. 우리가 뒤에서
엄호하기는 합니다만."
나는 침실 쪽으로 걸어가서 침실 문을 열었다.
"나오게, 글리프."
글리프가 웃는 얼굴로 방에서 나왔다. 좋은 인상을 얻으려는 취직 희망자와
같은 얼굴이었다.
매카디가 대뜸 말했다.
"이 사람이라면 됐소. 웬트워스하고 똑같은 체구로군."
나는 마이크를 곁으로 불렀다.
"얼마라고 말했지?"
"천 달러. 계약금으로 5백, 끝난 뒤에 5백. 눈도 끔적하지 않던데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 되면 글리프한테 3백을 주자구."
나는 우연의 일치에 신경을 더 쓰지 않기로 했다.

일요일에는 소슬바람이 불고 날씨도 활짝 개었다. 마이크가 매카디네 집으로
가더니 웬트워스가 쓰고 있던 운전사 모자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 모자는 글리
프의 머리엔 조금 컸지만 티슈 페이퍼를 안에 채워 그대로 쓸 수 있도록 만들
었다. 글리프는 운전사들이 잘 입는 곤색 슈츠 재킷을 입었다.
"내 몸뚱이를 빌려준다는 일은 생각도 해보지 않은 일인걸. 게다가 수고비도
충분하고 말이야."
글리프가 환한 얼굴로 말했다.
"자네는 흉터를 빌려주고 있는 것뿐일세. 안성맞춤으로 자네가 나타났기 때문
이지."
"바스또유에 있을 때처럼 말이지? 다만 그 때는 재수 나빴을 때 만난 것이지
만."
마이크가 서둘렀다.
"그럼 갑시다. 타협은 어떻게 됐지요?"
"분수 곁에 숲이 있네. 자네와 나는 거기에서 글리프를 커버하면 되네. 권총
은 챙겼나?"
마이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것은 금고 안에 있죠, 앨?"
"하나로 충분해. 시끄러운 일이 생기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할 일은 알고
있겠지, 마이크?"
"서류 케이스를 들고 있는 젊은 녀석을 찾아서 그것을 건네받는 것이지요.
그 녀석 돈을 우려낼 생각은 하고 있지 않겠지요?"
"없어. 그 녀석은 장발이고 귀걸이를 달고 있는데, 이름은 서시스라고 했어.
자, 그럼 나설 시간이야."
나는 시계를 쳐다보며 그들을 재촉했다.

- 2 -

공원 분수 곁에는 상당히 많은 젊은이들이 몰려 들어 있었지만, 초여름 한창
때 만큼은 붐비지 않았다. 나는 숲 곁의 빈 벤치 쪽으로 걸어갔고 마이크는
그 반대 쪽으로 보냈다. 글리프는 모자를 고쳐 쓰더니 입을 조금 비틀고 웃는
얼굴로 분수 쪽으로 걸어갔다. 시간은 4시 5분이었다.
나는 서시스처럼 보이는 장발의 젊은이를 찾았지만, 서류 케이스나 큰 보따리
를 들고 있지 않았다. 4시가 지났다. 서시스는 정말 나타날 것인가?
그때 기다란 집시 스커트에 앞가슴이 패인 브라우스 차림의 검은 머리칼을 가
진 여인이 느닷없이 나타났다. 근처의 포장 지대를 빠르게 가로질러 갔다. 그
리고 글리프가 어슬렁거리고 있는 분수대 밑으로 곧장 걸어가는 것이었다. 그
여인이 글리프와 말을 건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글리프는 망설이는 모습으
로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그리고 여인과 함께 걸어나갔다.
나는 숲과 반대 쪽을 살피며 마이크를 찾았다.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상황은
타협내용과 달랐다.
별수 없이 나는 벤치 곁에서 떠나 그 두 사람을 멀찌감치에서 뒤쫓으며 마이
크도 나와 똑같이 움직여 주고 있기만을 바랬다. 내가 오후의 군중 속을 누비
고 다니는 사이에 두 사람은 오솔길로 걸어가더니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아
직 서류 케이스를 들고 있는 사나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도 그 여
인이 글리프를 진짜 흥정장소로 데리고 가는 것이리라고 생각했다.
그 순간 총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경험자의 귀에는 틀림없는 총소리였다. 나는
쏜살같이 달려갔다. 오솔길을 돌아가는 길목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글리프를
발견했다. 그 여인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글리프!"
나는 그의 곁에 무릎을 끓면서 외쳤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의 생명을 살리기엔 이미 늦었다. 글리프 케일리는 이미
숨을 거두고 말았다.
총알은 한 방, 그의 심장에 명중했다. 마이크는 한 손에 리벌버를 든 채로
숨을 헐떡이며 다가오기 전에 이미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죠? 글리프가 여자 뒤를 따라가는 걸 보았는데."
"총소리가 들려왔고 글리프가 이 모양이 된 걸 발견했네. 여자가 한 짓이거
나 아니면 서시스가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쏘았겠지."
"하지만 왜 그랬을까요?"
"영문을 알 수가 없군. 경찰을 부르는 것이 좋겠어."
마이크가 나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며 말했다.
"괜찮겠어요, 앨?"
"송장을 보는 것은 이게 처음이 아닐세."
"그런 줄은 알고는 있지만요... "
"경찰을 부르라구! 그리고 다니엘 매카디한테 전화해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
지 알려줘!"
나는 경찰관이 당도할 때까지 글리프의 시체 곁을 떠나지 않았다. 포탄이
비오듯하는 경황 속에서 글리프를 안전한 장소로 끌고 다녔던 바스또뉴에서의
12월, 맑은 그날의 일을 나는 되새겼다. 내 도움으로 그와 거의 40년이나 더
오래 살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엔 내가 그를 이 사건에 끌어들인
탓으로 그는 죽었다. 왜 우리 인생은 이렇게 장난 같을까?
경찰관이 당도하자 나는 송장에서 떨어져 그 근처를 수색했다. 멀리는 가지
못했을 것이다. 10야드쯤 떨어진 곳에서 라일락 덤블 속에 쳐박아 놓은 권총
을 발견했다. 38구경 리볼버였고 총소리를 약하게 하고 지문을 남기지 않으려
고 하얀 손수건으로 싸놓은 채였다. 손수건의 하얀 빛깔이 나의 눈에 유난히
비쳐 들었다. 그 손수건은 써 본 일이없는 것 같았는데, 탄알이 뚫고 나간 구
멍이 있었고 한 쪽에는 초록색 얼룩이 져있었다.
나는 권총을 그 자리에 두고 경찰관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형사와 감식계
원이 달려왔고 사진계원과 검시관 조수도 왔다. 나는 살인과의 고울드 부장
형사에게 내가 알고 있는 사실들에 대해 말했다. 전화를 걸고 돌아온 마이크
가 자신이 했던 일을 말했다.
"서시스의 풀 네임은 뭐지?"
고울드가 물어 온 말이었다.
"알 수가 없어. 매카디가 알려 주겠지."
그리고 나는 마이크 쪽을 향해 말을 걸었다.
"그 사람, 이리로 온다던가?"
"이 판에 온다는 것은 무리가 아니겠어요, 앨? 발목을 삐었다고 말하더라구
요. 글리프가 죽었다고 말했더니, 자기는 관계가 없는 일이라고 잡아떼더군요."
고울드가 나섰다.
"내가 그 친구 마음을 돌려주지."
그리고 그는 말을 이었다.
"자네가 본 여자가 그 친구 딸이라면 유력한 용의자야. 권총을 싸고 있던 손
수건 말인데, 혹시 이니셜 같은 건 없었나?"
"설마. 살인범은 자신의 이니셜 따위를 함부로 현장에 남기지 않을걸세."
"하지만 남자 손수건이야. 여자 것은 아니란 말일세."
"그렇다고 치더라도 아무런 의미도 없어. 자아, 다니엘 매카디를 만나러 가
자구."

매카디는 성공한 부동산업자답게 교외의 커다란 집에 살고 있었다. 리무진
승용차가 주차해 있었지만 웬트워스의 후임 운전사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들이 현관으로 다가서자 머리카락이 조금 희끗희끗한 아름다운 여성이
문을 열어주었다. 매카디의 마누라일 거라고 짐작해보았는데, 내 짐작은 맞
았다.
"제인 매카디예요."
부인이 교양이 담긴 어조로 말했다.
"어서 들어오세요. 그이가 전화를 함부로 받아서 정말 미안했습니다."
"아뇨, 아뇨. 괜찮습니다."
마이크가 우리들을 소개했다.
여인은 고울드 형사 부장이 온 것에 대해서 언짢게 생각하고 있는 눈치였다.
마치 경찰이 개입할 사건이 아닐 텐데 라는 표정이었다.
마이엘 매카디는 널찍한 거실에서 발을 절뚝거리며 걸어나왔다.
"오늘은 정말 일진 사나운 날이군요."
그는 고울드와 악수를 하면서 말을 이었다.
"뜰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발목을 삐었거든요."
내가 말을 걸었다.
"글리프 케일리에겐 더 지독한 날이었습니다. 목숨을 잃었으니까요."
"정말 안 된 일이오. 하지만 그런 경우는 당신들이 하는 장사에서 흔히 있는
일이 아니겠소?"
이때 고울드가 끼어들었다.
"매카디 씨, 당신이 피해자를 고용하고 가출한 당신네 따님의 보이프랜드와
연락을 취하게 하여 서류를 되찾으려 했던 일은 사실입니까?"
"맞습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나는 다알란과 트래퍼를 고용했다고 말해야 되
겠지요. 우리들은 예전에 고용하고 있던 운전사 구실을 대신할 수가 있는 흉터
가 있는 사나이를 찾고 있었는데, 케일리를 고용하자고 제의를 한 건 이 두 사
람이니까요."
"이전에 케일리를 만났던 일은?"
"없습니다."
"따님은 어떤 가요?"
이때 내가 끼어들어 설명했다.
"글리프 케일리는 이 마을에 잠시 들린 것뿐이오. 그 녀석은 이 마을에서
나 이외엔 아무도 모른다구."
고울드는 내 쪽을 보며 말했다.
"젊은 여인이 케일리에게로 다가갔다고 그랬지요? 혹시 행방을 감추었던 캘
런 매카디가 아니었을까요, 안 그래요?"
"그럴지도 모르지요. 집에 따님의 사진이 있겠지요, 부인?"
나의 말에 제인이 거실로 들어가더니 리무진 곁에 늘어서 있는 매카디의 가족
사진을 액자 채로 가지고 나왔다. 차 뒤에 서 있는, 제복을 입은 나이 지긋한
사나이의 뺨에는 흉터가 있었다. 리무진에는 이동 무전용 안테나가 달려 있었
으므로 무선 전화가 달린 차라는 것을 곧 알아 볼 수 있었다. 나는 가족들의
한복판에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여인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이 여자야!"
"왜 이 애가 케일리를 쏘았을까요?"
이렇게 중얼거리는 고울드의 말에 제인이 가로막고 나섰다.
"그 애는 아무도 쏘지 않았어요!"
"그러나 이 애는 글리프를 만났을 때 웬트워스가 아니라는 것을 당장에 알아
차렸겠지. 그리고 숲 속에서 그 애는 서시스에게 일러 바쳤을 거야. 그 녀석은
얼떨결에 글리프를 쏘았겠지."
나의 말에 고울드가 맞장구를 쳤다.
"그럴지도 모르겠는걸."
그는 그 상황을 골똘하게 생각해 보는 눈치였다. 그러자 재빨리 제인이 나섰
다.
"틀림없이 그럴 거예요. 우리 애는 아무도 죽이진 않아요."
마이크가 물었다.
"캘런과 서시즈의 거처를 아십니까?"
매카디가 대답했다.
"모르오. 알고만 있다면야 내가 가서 끌고라도 딸년을 데리고 돌아오겠소."
고울드가 수첩을 꺼내 들었다.
"서시스의 특징을 가르쳐 주시지요."
"히피 차림입니다. 장발에 머리띠를 두르고 귀걸이를 하고 있습니다."
제인의 대답이었다. 고울드가 제인에게 질문을 하고 마이크가 곁에 지켜 서
있는 동안, 매카디가 나를 곁으로 불렀다.
"다알란, 나는 아직 그 서류 케이스를 찾고 싶소. 찾아주면 수수료는 두 배
로 지불하겠소."
"그건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해보겠소."
내가 찾고 있는 것은 글리프를 죽인 살인범이다. 덤으로 서류 케이스까지 찾
을 수가 있다면야 더욱 좋겠지.

나는 마이크와 고울드를 매카디네 집에 남겨두고 나의 가설적인 줄거리가 맞
는지 안 맞는지를 시험해 보기로 했다. 먼저 필 래시의 주소를 전화번호부로
알아내 그가 혼자 살고 있는 고급 아파트로 차를 몰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는 이미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고 있는 것 같은 눈치였다.
"댄이 전화로 알려 주더군요. 경찰이 그 집에 있는 것 같더군요."
"예, 흥정은 제대로 안 돌아가고 케일리는 죽었습니다. 자아, 대부의 처지는
이젠 그만 두셨으면 합니다, 래시 씨."
"나는... "
"그만 둬요."
"거짓말을 듣고 있을 시간은 없소. 당신은 오늘의 흥정을 타협하기 위해 캘런
과 만났다고 말했소. 그러니까 캘런과의 연락 방법을 알고 있을 거요. 캘런과
서시스가 숨어 있는 곳을 알 거요."
"캘런은 아무도 죽이지 않았소."
"아마 그렇겠지. 하지만 서시스가 죽였다고 생각하오. 더 이상 두 사람을 감
싸고 돌 수는 없소. 이건 살인 사건이기 때문이오."
그는 소파에 앉았다. 마치 그를 매달고 있는 철사를 내가 끊어버리기나 한 것
처럼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알았소, 다알란. 무엇을 알고 싶소?"
"두 사람은 어디에 있지?"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베리 마리나에 가까운 보우트 수리장이었소. 마리나를
지나 일차선 도로를 따라가면 나오는 해변이었소. 서시스는 여름내내 거기에서
일하고 있었소. 주인이 빈 방에 그 녀석을 살게 해준 거지요."
"고맙소. 내가 찾아가는 것을 두 사람에게 알리지 마시오."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소? 나는 이 사건과 아무런 관계도 없소!"
나는 래시의 집을 나서자마자 거리의 공중전화에서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마이크가 페인트 칠을 하러 사무실에 돌아와 있기를 바랬으나 응답이 없었다.
그 길로 나는 사무실로 가서 낡은 금고에서 38구경 리볼버를 꺼내 챙겼다.
그리고 행선지를 적은 메모를 마이크의 책상 위에 남겨 두었다.
해는 이미 기울고 있었다. 베이 마리나를 지나 비포장 도로를 달려 보우트
수리장 쪽으로 갔다. 길 양쪽에 일반 요트와 고급 원항 요트가 정박해 있었다.
더러는 트레일러에 얹혀 있어, 어디론가 운반되어 겨울 동안 적당한 곳에서
보관하러 가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이맘때는 인기척이 없어서 기
분이 썰렁해지는 장소였다.
수리장 앞에서 차를 세웠다. 조그만 외국제 스포츠카가 세워져 있었다. 캘런
이 타고 돌아다닐 만한 차였다. 매카디는 캘런을 데리고 돌아와 달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되도록이면 큰 보우트 그늘에 몸을 숨기면서 사람이 살고 있을 만한 양철지붕
건물 쪽으로 걸어갔다. 50야드 쯤 다가갔을 때 캘런이 느닷없이 문간 복도에
나타났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어깨너머로 무슨 말인가를 떠들었다. 나는
달려가서 거리를 좁히려고 했다.
그녀는 안으로 도로 들어가려고 했다.
"캘런! 네 편이야!"
내가 냅다 지른 고함이었다.
그녀가 완전히 문을 닫기에 앞서, 나는 총알을 맞지 않기를 바라면서 문간으
로 달려갔다. 그녀가 달아나려고 했지만, 나는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그 녀석은 어디에 있지?"
"당신은 도대체 누구시죠?"
집 안에서 덜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나는 리볼버를 꺼내 들면서
말했다.
"서류 케이스를 되찾아 달라는 아버지의 부탁을 받은 사람이야."
그는 뒷문간 복도에 서서 저녁놀을 등지고 있었다. 나는 캘런을 풀어주고
권총을 잡은 채로 그에게 덤벼 들었다. 발이 걸려 넘어진 그는 나에게 깔린
채로 쓰러졌다.
"가만 있어, 서시스."
나는 그의 나이가 나의 절반밖에 안 된다는 것을 잊으려고 노력하면서 그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그의 긴 머리채를 나꿔채서 얼굴을 볼 수가 있도록 머리
를 틀어 돌렸다.
그의 왼쪽 뺨에는 흉터가 있었다. 글리프나 운전사 웬트워스의 왼쪽 뺨처럼,
그러나 나는 곧 이 사건에는 이상한 꿍꿍이 속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사연인지, 네가 말해 주지 않겠니?"
나는 서시스를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간 후 캘런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은 아빠가 고용한 건달이 예요?"
"앨 다알란, 사립탐정이야. 네 아버님은 서류 케이스를 되찾고 싶다고 나를
고용한 거야. 그래서 오늘 오후 나와 내 친구가 그걸 찾으려고 갔다가 친구가
죽었어. 거기에 대해서 말해 주지 않겠어? 아니면 경찰을 부를까?"
서시스가 나에게서 달아나려고 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나는 권총으로 위협
하고 나서 그의 손을 놓아주었다.
"경찰 신세를 질 만한 짓은 안 했소!"
서시스가 소리쳤다.
"살인 용의가 있는데도? 어떻게 생각하나?"
"내가 죽인 건 아냐."
"누가 죽였지?"
말하면서 나는 캘런 쪽을 힐끗거렸다.
"우리 두 사람 다 모르는 일이 예요. 그 사람을 라스 쪽으로 데리고 갔어요.
그와 헤어지고 나서 우리는 총소리를 들었어요. 겁이 나서 우린 마구 달아났
어요."
"라스라니?"
"내가 라스 서시스요."
"매카디네 운전수를 한 일이 있나?"
내가 넘겨 짚고 한 말이었다. 그러자 서시스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장발을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도록 그 거지발싸게 같은 모자 안에 말아넣고
다니지 않으면 안 됐지요. 한 달 쯤 했을 거요."
"그 동안에 당신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져 집을 나왔군."
그러자 캘런이 가로막고 나섰다.
"뭐 잘못 됐나요? 라스는 이 수리장에서 부지런히 일하면서 정당하게 생계를
꾸려 나가고 있어요."
"서류 케이스는 어떻게 했지?"
"돈이 들어 있다고 생각했어요. 간혹 들어 있을 때가 있었으니까요. 돈이
필요한 결혼식 비용을 절약시켜 드렸으니까, 그만한 돈은 챙겨도 괜찮을 거라
고 생각한 셈이지요, 뭐."
"돈은 들어 있던가?"
"아뇨, 서류 나부랭이뿐이었어요. 아빠가 찾고 싶어 하길래 아빠 심부름꾼하
고 만나기로 한 거예요."
"왜 웬트워스를 보내라고 못박았지?"
"그 녀석은 내 앞에 있던 운전수요."
서시스는 이렇게 털어놓더니 말을 계속했다.
"공원에 나타났던 사나이가 내 후임자일 거라고 생각했다구요."
"서류 케이스는 어디에 있지?"
캘런이 입을 열었다.
"총소리가 난 뒤 집어던져 버렸어요. 그 사람은 서류만 갖고 싶다고 말했어
요. 그 사람, 서류를 집더니 호주머니에 쑤셔 넣었어요."
내 머리 속은 뒤죽박죽이 돼버렸다. 그 무엇도 분명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것이다.
"왜 아가씨 부모는 라스를 그렇게 까지 싫어하지? 장발 때문이라면 애당초
저 사나이를 고용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그러자 서시스는 세게 콧방귀를 뀌었다.
"얘 엄마가 나를 싫어한 거라구요. 아니, 엄마는 나하고 불장난을 하고 싶어
했는데, 난 따님 쪽이 더 마음에 들었단 말이오."
그제서야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더 빨리 알아차렸어야 했었다. 더욱이 흉터
가 공통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 흉터는 어떻게 해서 생겼지?"
"어렸을 때 우유병 위로 굴렀어요. 우유가 아직 남아 있었지요. 엄마가 섹시
한 상처라고 정형 수술을 시키지 않았어요. 흉터를 좋아하는 여자도 있다고
말이 예요."
이 말에 내 입에서는 나도 모르게 불쑥 대꾸가 튀어나왔다.
"미시즈 매카디가 그랬겠군."
젊은 한 쌍이 숨어 있었던 양철지붕 건물에서 빠져 나올 때 차 한 대가 길
저쪽에서 이쪽으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마이크가 나를 살리겠다고 들어닥
친 것이다. 그는 나를 보더니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했다.
"죽었는 줄 알았다구요."
"아직은 자네한테 사무소를 송두리째 맡길 수가 있나. 자, 지금부터 서둘러
가야 할 데가 있네."
우리는 차를 달렸다. 나와 마이크는 제인 매카디가 커다란 집의 아래층에서
혼자 서성이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이는 외출했어요.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 있나요?"
나는 계단을 밟으며 말했다.
"진상을 듣고 싶습니다. 미시즈 매카디, 당신한테 말입니다."
"무엇에 관해서지요?"
"캘런이 운전수하고 사랑의 도주를 했다는 것을 당신도 주인 양반도 말해
주지 않았지요?"
"그 일 때문에 무슨 잘못이라도 있다는 건가요?"
나는 가족 사진이 얹혀 있는 사이드 테이블 쪽으로 다가갔다.
"이 사진에 찍힌 흉터가 있는 사나이 말씀입니다만, 라스 서시스가 아니군요.
더 나이가 지긋한 운전사 말입니다. 서시스 앞의 운전사, 그러니까 이 웬트워
스도 뺨에 흉터가 있습니다. 당신은 흉터가 있는 사나이를 좋아하시지요. 미
시즈 매카디?"
여인은 나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소리쳤다.
"당장 나가 줘요, 두 사람 모두!"
나는 사진을 제 자리에 도로 놓고 마이크에게 턱짓을 했다.
"나가자구."
차를 타고 돌아오는 도중 마이크가 물었다.
"수수료는 어떻게 되지요?"
"운 좋으면 받게 되겠지."
"매카디가 글리프 케일리의 흉터를 보고 제 여편네의 애인들 가운데 한 사람
이라고 지레짐작하고 쏘았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그렇다고 생각할 수가 있지."
"그래서 그는 현장에서 도망쳐 나올 때 발목을 삔 거군요!"
마이크의 이 말에 나는 빙긋이 웃었다.
"자네도 가장 명백한 실마리를 놓쳤네, 마이크. 우리 사무실 벽만큼이나 큰
데도 자네는 놓친 거야, 이 사람아."
"예?"
"자아, 그럼 수수료 몫의 일을 하자구."
아파트의 문을 열어 준 필 래시는 드레싱 가운을 입고 있었다. 그는 차가운
눈초리로 우리를 노려 보더니 말했다.
"사람을 방문하기엔 조금 늦은 시간이 아닐까요?"
"괜찮다고 생각하는데요. 지금부터 사건을 마무리지을 참이오. 당신이 보고
듣고 싶어할 거라고 생각했소."
"댄 매카디가 진짜 청탁인이오. 보고는 그 사람한테 하시오."
나는 자리에 앉아 수첩을 꺼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말해 주지, 처음부터 말이오. 댄 매카디의 부인인
제인은 얼굴에 흉터가 있는 사나이를 좋아했소. 더구나 흉터가 있는 운전수
를 말이오. 정신과 의사라면 그 원인을 그 여인의 어린 시절에서 발견해 내
겠지만, 그건 나의 전문분야가 아니오. 바깥 양반인 미스터 매카디는 부동산
에 관한 비밀 교섭을 많이 하고 있소. 그 집안의 운전수라면 스파이가 되어
귀중한 정보를 건네 줄 수가 있을 거요. 차 안에 전화가 있소. 운전사라면
전화 내용을 엿듣는다든가 뒷자리의 대화를 듣는다든가, 매카디가 가보는 부
동산을 기록할 수가 있다는 말씀이오."
"왜 그런 이야기를 나한테 하는 거지?"
"당신은 제인이 얼굴에 흉터를 가진 운전사를 좋아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이용하려고 생각했소. 그래서 당신은 얼굴에 흉터가 있는 사나이를 찾아다
녔소."
"당신들한테 수고를 좀 끼쳤을 뿐이오. 별로 비밀거리도 아니지."
"내가 생각하기엔, 당신은 먼저 글리프 케일리를 발견하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동료로서 끌어들인 거요. 당신은 방랑자를 찾아 버스 정류소를 뒤졌
소. 나는 글리프가 목요일 밤에 이리로 올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그는 금요
일 아침까지 전화를 걸어오지 않았소. 당신은 목요일에 그를 발견했지만,
자신이 의심받지 않고서 매카디의 주의를 글리프에게 쏠리게 할 필요가 있었
지. 글리프는 사립 탐정인 친구를 만나러 이 마을을 찾아 왔노라고 당신에게
말했소. 그러자 당신은 서류 케이스를 찾아 오는 사람으로 캘런의 운전수를
지정하고 있다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낸 거지. 캘런과 라스가 흉터 있는 사나
이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런 남자가 필요하다고 당신은 매카디에게 말했어.
그리고 우리를 고용하도록 매카디를 설득했어. 당연하게도 우리들에게는 얼굴
에 흉터가 있는 바라는 대로의 사나이가 있었지. 글리프가 서류 케이스를 찾
아오면 제인이 그를 운전수 자리를 맡길 테니까, 당신의 스파이를 들여 보낼
수 가 있다고 생각한 거지. 글리프는 아직 멋쟁이 남자고, 제인은 나이를 따
지지 않고 흉터 있는 사나이를 좋아하니까."
"혼자 꽤 똑똑한 척하고 있구먼."
래시가 오른 손을 드레싱 가운의 호주머니 속에 찌르고 있는 채로 한 말이었
다.
"하지만 글리프는 욕심을 냈어. 호주머니에 서류를 쑤셔넣고는 서류 케이스
를 가지고 가라는 캘런에게 말했지. 운전수가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지. 당신은 덤불 속에서 그걸 다 보았어. 글리프는 당신을 쳐다보면서
그 서류를 돈으로 사라고 했었지. 당신은 그 자리에서 그를 쏘고는 그의 호주
머리에서 서류를 빼앗았고, 내가 달려가자 나무 그늘에 숨었단 말씀이야."
"그렇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소?"
"할 수 있다고 생각해. 당신이 권총을 갖고 있는 까닭을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당신은 권총을 꺼내 들고 총소리를 죽이기 위해 그리고 지문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 손수건을 쌌단 말씀이지. 그 손수건에 초록색 페인트가 묻어 있
었어. 우리 사무소의 페인트야. 래시 씨, 당신은 잊어버렸는지 모르겠지만,
토요일 우리사무소에 갔다가 묻은 페인트를 손수건으로 닦았겠지. 페인트가
마르기 전에 그 사무소에 들른 사람은 당신과 매카디 그리고 글리프와 나뿐
이었소. 글리프는 제 가슴을 쏘고 10야드나 떨어진 덤불에 권총을 버릴 수가
없소. 매카디는 살인사건 5분 뒤에 교외 자택에서 마이크의 전화에 응답하고
있었소. 그러니 남는 사람은 당신뿐이란 말씀이오, 해서 당신의 손수건이오.
당신이 쏘아 죽인 거요.
래시는 생각보다도 재빨리 행동했다. 드레싱 가운 속에 감추어 둔 조그만
권총쯤으로 대단한 상처가 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권총이 호주머니에서 나오
기 이전에 마이크의 무쇠 같은 커다란 주먹이 먼저 래시의 턱을 후려갈켰다.
그제야 나는 마음을 놓았다.
"고울드 형사부장을 부르게."
나는 래시의 힘이 빠진 약한 오른 손을 발로 걷어 차 권총을 멀찌감치 나가
떨어지게 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여기에서 서류를 찾아내자고. 고울드가 욕심 내고 있는 증거가 될 것이고,
매카디한테는 수수료를 받을 수가 있으니까."
"매카디가 제 여편네하고 운전수들의 관계를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나요,
앨?"
"모른다면 해태눈깔이게."
마이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전화기로 갔다.
"글리프는 자업자득이지요, 앨? 그가 죽은 것은 당신 책임이 아니예요."
나는 맥없이 입을 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군. 오늘밤은 잠을 푹 자고 싶으니까 말이야."

- END



아마츄어 탐정과 닭튀김

by - 제임스 A. 노우블


존 에바아트 경감이 젊은 부장형사에게 호감을 사고 있는 까닭은 그가 5년
동안이나 서류 더미에 파묻혀 있던 어려운 사건을 깨끗하게 해결해 낸 것뿐
만은 아니다. 그의 논리적 사고방식과 매섭게 파고드는 끈기를 높이 사고 있
었던 것이다. 하지만 존 에바아트 경감은 그런 눈치를 티끌 만큼도 드러낼
생각은 없었고, 오히려 마아크 머피 부장형사가 종이상자를 들고 사무실로
들어서자 일부러 험악하게 말했다.
"마아크, 사건을 해결하기 전에는 나한테 나타나지 말라구."
"그러시면서도 저를 보기 싫어 하시는 건 아니지요?"
이러면서 마아크는 옆에 있는 의자에 상자를 얹어 놓고는 문을 닫았다. 그
리고 상자에서 소형 카세트 플레이어를 꺼내더니 그걸 존의 책상 위에 올려놓
았다.
"자네, 어디서 그렇게 더럽히고 왔나?"
존이 물었다. 마아크의 셔츠며 겉옷이 성한 데가 없이 새까맣게 물들고 얼룩
이 져 있었다. 마아크는 고개를 숙여 셔츠의 가슴께는 쳐다보며 말했다.
"증거를 수집하고 있었지요."
"그래서 눈 언저리에 시퍼렇게 멍이 든 수수께끼를 풀어보겠다는 얘긴가?"
"예?"
마아크가 흠칫 놀라며 한 대답이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눈두덩이에 손을
대어보았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따끔거렸다.
"앗! 따거! 시청 청소차 인부들이 그렇게 사나운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에바아트 경감의 호기심은 점점 더 부풀어올랐다.
"그래? 그 이야기만 들어두지 않으면 안 되겠군. 어떤 사건이지, 마아크?"
"매너리의 살인과 사고사에 관한 것입니다."
"그건 월요일 밤의 사건이 아닌가? 오늘은 벌써 목요일일세. 이걸 찾으려고
꼬박 사흘이나 소비했단 말인가?"
"제 딴엔 하루에 해치울 수가 있을 줄로 알았습니다만 보고서가 다 될 때까
지 기다리느라고 늦었어요. 우선 이걸 들어 보십시오."
마아크는 카세트 테이프를 플레이어에 끼우더니 리턴 보턴을 눌렀다.
에바아트 경감은 나무 회전의자의 등에 느긋하게 몸을 기대고는, 이제부터
재미있는 '수수께끼 풀이' 여행이 시작되겠지 하고 생각했다. 이것이야 말로
마아크 특유의 기발한 재치인 것이다.
마아크 머피는 이 고장에서 가장 우수했던 순경 중의 한 사람인 짐 머피의
아들이다. 5년 전, 짐이 직무 수행 중 피살된 이래 마아크는 훌륭한 경찰관이
되려고 정력을 기울여 왔다. 그리고 그 5년 만에 부장형사까지 승진했고 그가
세운 첫 공로는 자기 아버지를 죽인 범인들을 붙잡는 실마리를 찾아낸 것이었
다.
마아크는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아일랜드 사람인 아버지의 특징을 그렇게
많이 물려받지는 않았다. 그의 아버지 짐은 반곱슬머리에 차갑게만 보이는 회
색 눈동자의, 허우대가 크고 단단한 사나이였다. 비번 때는 입이 무겁고 태연
자약하게 지내다가도 막상 사건이 생겼다 하면 번갯불처럼 재빠르고 거칠게
움직였다. 한편, 아들 마아크는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키가 장대같이 큰
사람이다. 차분한 구석이라고는 없고 마누라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까지 남
김없이 자기에게로 휘말라 끌어들이는 다혈질이다. 저고리 단추는 언제나 풀
어 헤친 채였고, 넥타이는 노상 축 늘어져 있었다. 그러니 마아크가 어쩌다
일이 생겨 달음박질을 할 때면 저고리와 넥타이는 모두 흐느적거리며 그를 따
라서 날아다니는 것만 같았다. 마아크가 아버지를 닮았다고 여겨지는 점은 그
가 깊은 생각에 빠져 있을 때라든가 일을 마치고 사뭇 즐겁게 맥주를 목에 들
이 붙듯이 마실 때 뿐이었다. 그럴 때 마아크가 눈을 감고 떠들어대고 있는
것을 엿듣고 있노라면 영락없이 짐 머피의 목소리를 듣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테이프는 얼빈 매너리의 살인에 관한 고백입니다."
테이프의 리턴 동작이 멎자 마아크가 말했다.
"시체와 부숴진 카세트 테이프 레코오더가 거처하던 방에서 발견됐습니다.
이 목소리가 매너리라는 것은 친족들이 확인하고 있습니다. 들어보시지요."
마아크가 플레이어 동작 단추를 누르자 먼저 기침소리부터 나왔다. 이어서
매우 흥분한, 흐트러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얼빈 매너리. 나중에 이것을 듣는 사람에게 내가 왜 이런 행동을 저질
렀는가를 이해시키기 위해서 녹음하고 있다.
나는 오래 전부터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면 무슨 일이 있든지 아내는 지아비
에게, 지아비는 아내에게 성실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어왔다. 나는 줄곧
성실하게 살아 왔지만 아내인 오드리는 그렇지가 않았다. 최근 아내에게 딴
남자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고 있었는데 오늘 비로소 그 증거를 잡
을 수가 있었다. 나는 노이로제도 아무것도 아니다. 단지 조금 섬세한 점 --
그야말로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 --에 주의를 기울였을 뿐이고, 아내가 어디
에 있었고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과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까지 알게
된 것이다.
우선 첫째로, 아내의 자동차에 대해서 말하겠다. 오늘 점심 때가 지나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데 내가 오후 4시 15분께 집으로 돌아와 차를 차고 안에 집어
넣을 때 아내의 차가 젖어 있는 것을 알게 됐다. 주행 거리계를 살펴 오늘 아
침 집을 나설 때 적어둔 숫자와 비교해 보았다. 앞에 말한 것처럼 나는 망상
에 사로잡힌 것도 아무것도 아니다. 다만 어딘지 모르게 이상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아내의 행동을 파헤치는 실마리를 잡고 싶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주행
거리계는 아내가 딱 8마일을 운전했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래서 아내
에게 오늘 어디에 갔었느냐고 물었더니, 아내는 한 발짝도 밖으로 나간 일이
없다고 대답하지 않는가. 여기에 덧붙여서 현관 벽장에 걸려 있는 코트가 축
축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조금도 나무라지 않았지만, 그렇게 호락호락하
게 속아 넘어가지는 않는다.
다음 문제는, 아내의 옷에 대해서이다. 아내는 언제나 옷을 내가 갈아 입을
적에 같이 갈아입는다. 그리고 아랫층으로 내려가서 아침 밥을 준비하고 나의
출근길을 배웅한다. 오늘 아침에는 슬랙스에 스웨터 차림이었는데 내가 집으
로 돌아왔을 때는 푸른 스커어트에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멋을 부리고 있
기 때문에, 오늘 저녁 어디론지 나가고 싶냐고 물었더니, 아내는 나갈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렇지, 벌써 나갔다
돌아온 것이다. 갈아입은 까닭은 곧 알아챘지만, 나는 입을 벙긋도 하지 않았
다.
저녁 식사 때 아내는 또 한 가지 거짓말을 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나는
이것저것 세밀하게 관찰하고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닭튀김을
좋아한다. 어디에든 흔한 퍼스트 포오드의 가게에서 팔고 있는 것과 같은,
바싹 튀긴 놈으로 말이다. 오드리는 약간 손질만 더해서 조미료를 멋지게 친
얇은 껍질에 입혀 튀겨내는 연구를 하고 있다. 커다란 쇠냄비에 기름을 듬뿍
붓고 손수 만든 반죽으로 껍질을 입혀 튀겨내면 마치 퍼스트 포오드의 가게에
서 사들인 것과 같이 맛있는 닭튀김이 된다. 게다가 값이 아주 싸게 먹힌다.
어쨌거나 아내의 말로는 며칠전 슈퍼마켓에서 사온 통닭 튀김을 찢어서 새로
튀겨내는데 오늘 오후 내내 시간을 잡아 먹혔다는 것이다. 오늘 아침 집을 나
올 때 냉장고 안에는 통닭 튀김이 한 마리 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식탁에 앉았을 때 닭튀김이 접시에 하나 가득 있는 것
까지는 좋았으나 날갯죽지 하나가 더 있었고 다리는 두개나 더 있었다. 날개
가 세 개에 다리가 넷 달린 닭이라니, 나는 그런 걸 본 적이 없다. 그것뿐만
아니다. 아내가 언제나 장만하는 닭튀김하고는 맛이 아주 달랐다. 통닭 튀김
가게에서 사들인 것이라는 것을 곧 짐작하게 했다. 이래도 한 발짝도 바깥에
나가지 않았었다니? 나는 냉동고와 냉장고 양쪽을 다 열어보았지만, 안에 있
던 닭은 없었다. 아무래도 어디엔가 숨겨둔 것 같았다. 그 정도는 머리가 돌
아갈 것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가장 내 속을 긁어놓은 일은 아내가 딴 남자를 집으로 끌어들였던 것이 틀림
없다는 사실이다. 증거는 있다. 오늘 아침 확실히 머리에 새겨 두려고 커다란
재떨이 곁에 있는 성냥이 한 개비도 사용되지 않은 것을 기억해 두었다. 그런
데 이 집에서 나 말고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도 돌아와 보니까
성냥이 대여섯 개비 없어져 있었고, 재떨이는 아주 깨끗한 데다가 불을 켜다
가 남은 성냥개비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말하자면 사나이가 피우다 남은 담배
꽁초가 들통이 나지 않도록 말짱하게 치워 둔 셈이지만, 그 따위 잔꾀로 넘어
갈 나는 아니다. 성냥이 어김없는 증거인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와인 글라스, 그 글라스는 언제나 부엌 싱크대 위에 있는
찬장에 들어 있다. 날마다 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맨 안쪽에 정렬해 두도록
돼 있는 것이다. 오늘 오후에는 두개의 와인 글라스가 앞쪽으로 나와 있지 않
은가, 집에서도 포도주 따위를 마신 일이 없는데도 말이다. 사소한 일이지만,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면 이와같은 증거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실마리를 모두 끌어 모아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나는 생각해
보았다. 오늘 아침 나를 배웅한 뒤 오드리는 차로 그 남자네 집에까지 가서
그 녀석을 차에 태운다. 녀석은 포도주를 가지고 온다. 아내의 차를 이용하는
것은 낯선 차가 우리 집 언저리를 서성거리든가 차고로 들어가는 것을 이웃
사람들한테 들키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집에 닿자 아내와 그 남자는 침실
로 가서 포도주를 마시고, 그리고... 그녀석이 나를 속였어, 그것뿐이다! 그
다음 옷을 입고 아랫층으로 내려와 사나이는 성냥을 켜서 담배를 피운다. 내
개 마련해 둔 덫이라는 것도 모르고... "
"두 손 바짝 들었어!"
에바아트 경감이 불쑥 말했다.
테이프에서는 계속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럭저럭 재미를 보고 있는 사이에 나의 귀가 시간이 다가오자 두 사람은
허둥대고 차에 뛰어올라 때마침 내리기 시작한 빗속을 뚫고 간 것이다. 여기
에서 또 한 가지, 물에 젖은 차라고 하는 실마리를 남긴 것이다. 알아 들으시
겠소? 그 녀석을 내려준 뒤 아내는 어딘가의 통닭 튀김 가게에서 차를 세워
포장돼 있는 닭을 산다. 여기에서 또 다시 일을 그르친다. 포장 속에는 날개
죽지 세개와 함께 다리 넷이 들어 있었다. 이런 걸 가지고 얼버무리려고 했단
말인가? 집에 돌아오자 차를 차고 안에 밀어 넣고 젖은 코트를 벽장에 치우고,
내가 돌아올 때까지 오늘의 행동을 감추기 위해서 일을 시작한다. 벌써 장만이
끝난 닭튀김을 기름이 들어 있는 냄비에 넣고 가스에 불을 붙인다. 그래 놓고
냉장고 안의 닭튀김과 닭튀김이 들어 있던 봉투, 큰 재떨이에 버려졌던 담배
꽁초 등을 쓸어서 어디엔가 감춘다. 다음에는 글라스를 씻어 무심히 부엌 찬장
안의 맨 앞줄에 넣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침실을 정돈하고 있는 참에 내 차
소리를 알아듣고는 허둥지둥 아랫층으로 내려와, 여태껏 부엌에서 음식을 장
만하고 있었던 것처럼 꾸민다. 딱 한 가지, 스커트하고 블라우스를 갈아입지
않고 있다는 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말았다.
이곳이 진상의 모든 것이다. 내가 수집해서 분석한, 부정할 수가 없는 증거
인 것이다. 아내의 부정한 관한 증거인 것이다. 당신도 나의 처지가 된다면
똑같은 행동을 취했을 것이다. 나는 아내 오드리를 권총으로 쏘아 죽이고 나
도 이 녹음을 마친 뒤 총구를 나에게 겨누고..."
여기서 크고 둔한 소리가 들렸고 그 뒤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이것으로 끝이야?"
에바아트 경감이 물었다.
"예."
마아크는 대답을 하면서 카세트 플레이어의 스위치를 껐다.
"말하자면 이런 얘긴가? 집안에 두 세 가지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발견되었
기 때문에... "
이렇게 운을 떼면서 에바아트 경감은 말을 이었다.
"얼빈 매너리는 그 스스로 판사에다 배심원과 사형 집행원 노릇까지 했다.
이 말이지?"
"그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아마츄어 탐정 역할도 해 주었어요.
다섯 가지 실마리, 물에 젖은 차와 코트, 여느 때와 다른 맛이 나는, 한 마리
몫으로서는 남아 돌아가는 닭튀김, 없어진 성냥개비, 아내의 갈아입은 옷,
그리고 두개의 와인 글라스, 이런 것을 바탕으로 논리적이지만 그렇게 흔하지
않을 것 같은 줄거리를 만들어낸 셈입니다."
그러자 에바아트 경감이 말했다.
"그렇다면 말일세, 마치 그 사람이 정상이 아닌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그
건 그렇다 치고 자살해버린 사람은 이제 와서 어쩔 수가 없는 일이지."
"그 사람은 자살한 게 아닙니다. 처음에 제가 이 사건을 살인과 사고사라고
말씀드렸지요?"
"그 테이프 마지막에 나오는 굉장한 소리는 매너리가 쏜 권총 소리가 아니었
던가?"
"그렇습니다."
마아크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을 이었다.
"그건 매너리네 집에서 가스 폭발로 생긴 소리입니다. 그 직후에 테이프 레
코더가 폭풍으로 부숴진 겁니다. 다행히도 테이프는 충격으로 인해 튕겨나오
는 바람에 고스란히 살아 남았지만 말입니다."
"가스 폭발이라니? 무슨 말이야?"
마아크는 들고 들어왔던 종이상자에 손을 찔러넣더니 뭔가 공식 서류 비슷한
것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모든 것이 이 화재 현장 조사 보고에 나와 있습니다. 게다가 얼빈 매너리가
잡은 다섯 가지 실마리에도 각자 납득이 가는 설명이 덧붙여 있습니다."
에바아트 경감은 책상에서 돋보기 안경을 찾아들더니 콧잔등에 걸었다. 그리
고 마아크한테서 서류를 받아들고는 읽어 내려갔다.
화재 현장 조사 보고

1982년 11월 8일
가스 폭발 및 화재 발생 - 웨스트 민스터 가 116번지 매너리 씨 집
담당 - 제 1 중대 소방부장 겸 조사관 존 로프터

<화재의 개요>
오후 7시 01분, 매너리 씨 집에서 가스 폭발 및 화재 발생. 통보자는 매너리
가 이웃 주민 조셉 라이트 씨, 웨스트 민스터 가 118번지.
오후 7시 18분, 제 1 중대로부터 제 4 호 살수차, 제 1 호 소방차 현장에
도착.
오후 7시 35분, 경찰 도착. 현장 검증 개시.
오후 7시 40분, 제 1 중대의 화재처리반 귀환

<조사보고>
2층 짜리 목조건물의 주요한 피해는, 가스 폭발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발화
장소는 부엌 안, 이어서 발생한 화재는 작은 규모로서 주방 일부에 그쳤다.
불은 소방대에 의해 신속하게 진화됐다.
폭발 원인은 부엌에 있는, 결함이 있는 레인지에서 새어나온 가스의 축적에
의한 것이다. 그 원인에 관해서는 폭발 발생 몇 시간 전에 사고가 난 집에
있었던 이웃집 에밀리 라이트 부인에 의해 유익한 정보가 제공됐다. 진술서를
이 보고서에 첨부하여 화재 조사에 관련되는 진술 부분의 분석을 덧붙여 둔다.

<에밀리 라이트 부인의 진술서>
1982년 11월 8일, 오후 9시 10분
담당 - 제 1 중대 소방부장 겸 조사관 존 로프터
"나는 빌어 썼던 와인 글라스를 돌려주는 김에 나의 집에 남은 닭튀김을
오드리에게 갖다주려고 매너리 씨 집으로 갔습니다. 집안에 들어서자 오드리
는 엎드려서 꺼진 가스 레인지의 분화기에 성냥을 켜서 불을 붙이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두 세 시간 나도 거들어 겨우 불이 켜졌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만든 닭튀김하고 제가 갖다준 닭튀김을 튀기는 데에 꽤나 많은 기름을 쓰는
거였어요. 그러는 도중에 비가 뿌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저도 창문을 닫는 일
을 거들었어요.
오드리가 옷을 갈아입으려 2층으로 올라가기 전에, 가스 레인지를 만지작거
리는 바람에 옷이 온통 더러워졌거든요. 저는 매주 거르지 않고 레인지를 닦
고 있습니다만... 어쨌거나 그녀도 옷을 갈아입으러 2층으로 올라가기 전에
저는 차를 빌려 써도 괜찮을지 모르겠다고 물었습니다. 제 차는 금주엔 수리하
러 보냈기 때문에 말씀이에요. 예전에 한번 고장이 났을 때 그녀에게 차를 빌
려준 일이 있었어요. 빌리는 김에 현관 벽장에서 코트도 빌렸습니다. 밖에는
비가 뿌렸기 때문이었어요. 집에서 코트를 입고 오지 않았거든요.
30분 뒤에 장을 보고 돌아와 코트를 돌려주려고 그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오드리는 가스 레인지가 아직도 작동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저녁
식사용 닭튀김을 아직 반밖에 튀기지 못했기 때문에 제가 우리 집에 가지고
와서 그 나머지를 제 나름대로 맛있게 요리해서 갖다주었지요. 저는 그렇게
많은 기름을 쓰지 않죠. 닭튀김을 그녀한테 돌려주려고 갔더니 어렴풋이 가스
냄새가 나긴 했습니다만, 그녀가 아직 가스 레인지에 불을 켜려고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겠지 라고 생각하고 별로 주의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집으로 돌아
온 뒤 그 댁 주인 얼빈이 귀가하는 것을 볼 수가 있었어요. 그때가 4시 15분
쯤이었을 거예요.
7시쯤이었다고 생각되는데 굉장한 폭발 소리가 들렸고, 창밖을 내다보니 이
웃집이 날아가고 있었어요. 제가 어떻게든 도와드리려고 달려가는 사이에 제
바깥 양반 조우가 소방서에 통보했어요. 가 보았더니 가스 냄새가 났고 불이
나고 있잖겠어요? 저는 놀라서 집으로 달려 돌아왔죠.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이 정돕니다."

<조사분석>
가스 레인지 분화구가 잘 꺼진 것으로 미루어 보면, 분화구에 이어지고 있는
가스 호스에서 가스가 새어나오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주방의 창문
을 닫은 채로 있었기 때문에 새어나온 가스가 조금씩 집안에 고인 것으로 보
인다.
결함이 있던 가스 레인지를 분석해 본 결과, 매너리 부인이 분화구 가운데
하나의 불꽃을 끄는 것을 잊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때 부터 불이 꺼졌
다고 한다면, 더욱 가스가 주방에 꽉 차 있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가 있다.
얼빈 매너티 씨는 주방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에 폭발에 의한 희생자
가 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지만, 오드리 매너리 부인의 경우는 그 사인이
가스 폭발이나 화제가 아니라고 화재 조사관인 나는 판단 한다. 시체가 폭발
이 일어난 자리에서 꽤 떨어져 있다는 점과 외상의 성질이 다르기 때문에,
경찰 조사를 요청하는 바이다.
"가스 폭발 사고였다는 건가?"
에바이트 경감이 마아크에게 서류를 돌려주면서 물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얼빈은 테이프에 이렇게 녹음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권총으로 자살한다 라고요. 가스가 아닙니다. 일부러 가스 폭발을 일으키려고
계획했다든가, 레인지의 가스로 누군가를 죽이려고 했다면, 모든 분화구와 오
븐의 가스 꼭지까지 틀어 놓았을 겁니다."
"화재 조사관의 보고서에서 밝혀진 대로 말이지?"
에바이트 경감이 말했다.
"메너리 씨가 증거라고 하는 것들은 몽땅 잘못 해석한 것 같군."
마아크도 맞장구를 쳤다.
"보고서에 따르면 매너리 씨가 말하고 있는 아내의 부정에 관한 증거는 모두
근거가 없는 오판이라는 겁니다. 남아도는 닭튀김과 와인 글라스는 옆집에서
건너온 겁니다. 성냥은 레인지에 불을 켜려고 썼던 것이고, 켜다 남은 성냥
개비는 주방에 버려졌습니다. 옷을 갈아입은 것은 입고 있던 옷에 때가 묻었
기 때문이고요. 자동차하고 코트가 젖었던 것은 그 날 오후 옆집 부인이 부탁
하는 바람에 빌려주었기 때문입니다. 옆집 부인은 매너리 부인하고 요리법이
다른 방식으로 닭튀김을 장만해 주었죠. 그러니까 맛이 다를 수밖에요. 이렇
게 되면 모두 납득이 가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매너리 부인은 남편에게 어느 한 가지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거군."
에바아트 경감은 이렇게 결론을 내리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말이야. 매너리 씨의 병적인 머리는 끌어 모은 사실을 과장해석 한
끝에 기어코 아내를 죽이고 자신도 자살하게 했어. 자살 가스가 폭발하면서
대신 끝장을 내준 셈이군."
"이것으로 매너리 사건은 논리적으로 결말이 맺어진 것 같습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
마아크가 말했다.
"이 스토리가 아직 몇 페이지 남아 있는 것은 왜일까요?"
경감은 놀란 얼굴을 했다.
"뭐, 뭐라구?"
마아크는 참다 못해 웃음을 쿡쿡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나와 같이 추리소설을 열중하는 미스터리 팬이라면 쉽게 알아차릴 수 있습
니다. 처음부터 쭈욱 읽어 내려가면 어느 한 곳에서 갑자기 이것저것 모두가
납득이 가는 결론에 도달해 버립니다. 의문점은 고스란히 밝혀지고, 선과 악
은 구별이 가고, 수수께끼는 해결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뒤에 몇 페이지
나 남아 있는지 들추어 보면 아직 여러 장이 남아 있거든요. 어떻게 해서 페
이지가 남아 있을까? 하고 의문점을 갖게 되지요. 수수께끼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고 이야기는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는 거지요."
"그 밖에 도대체 또 뭐가 있다는 건가?"
에바아트 경감이 다그치듯이 물었다.
마아크는 의자에서 종이상자를 들어 올리더니, 에바아트 경감의 책상 위에
쿵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그 상자 안에는 물건이 꽉 차 있는 쇼핑 백이
있었다.
"그 속에 뭐가 있지?"
에바아트 경감이 다시 물었다.
"닭튀김이 한 마리, 포도주 빈 병, 재떨이의 쓰레기, 게다가 애니즈인스터
치킨의 종이그릇까지 들어 있습니다."
마아크의 얼굴에는 웃음이 서려 있었다.
"그래서"
에바아트 경감의 표정을 곁눈질하면서 마아크는 호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조
그만 종이봉지를 꺼내놓았다. 그리고 약간 놀라서 어리둥절한 경감에게 그것
을 건네주었다.
"이게 나의 주의를 끌게 된 사건의 열쇠입니다."
에바아트 경감은 종이봉지를 풀어헤치고 알맹이를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 맥
빠진 소리로 중얼거렸다.
"뻐다귀 아닌가?"
"바로 그겁니다."
마아크는 이렇게 외치면서 말을 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닭뼈죠."
"자네가 말하려고 하는 건, 결국 그 얼빈 매너리의 아마츄어 수사가 정곡을
찔렀다는 건가? 그렇다면 라이트 부인의 진술은 어떻게 되는 거지?"
경감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벌써 근무시간이 지났군요."
마아크는 손목 시계를 들여다보곤 능청을 떨며 말을 이었다.
"켈리네 가게에서 맥주라도 한 잔 사 주신다면 몽땅 털어 놓겠습니다."
"그러지. 여섯 병 들이 한 박스를 사지."
경감은 선뜻 사겠다고 했다.
"하지만 도대체..."
"가십시다."
마아크는 증거품을 끌어 모으더니 종이상자 속에 주워 담았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먼저 이 닭을 냉장고 안에 넣어둡시다. 그렇게 하면 상하지 않으니깐요.
그러고 나서 켈리네 가게로 가서 건배를 하기로 할까요?"
에바아트 경감은 얼룩투성이 옷을 걸친, 눈에 시퍼런 멍이 든 젊은 부장형사
를 한참 동안이나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꺽다리 저승차사 같은 허우대를 한
사나이하고 사람들 앞에 나타난다는 것은 질색이었지만, 함께 가느냐 아니면
매너리 사건의 진상을 모르는 채로 두느냐 둘중의 하나를 택해야 했다. 결국
그는 같이 가는 쪽을 택했다.
켈리네 술집은 걸어서 반 블럭 정도 쯤에 있었다. 가게는 퇴근길의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에바아트 경감이 주문을 하고 있는 사이에 마아크가 안쪽 구석
빈 자리를 용하게 확보해 놓았다.
"이거면 되겠지?"
맥주를 테이블에 날라 온 에바아트 경감은 마아크를 재촉했다.
"자아, 털어내 보라구."
"잠깐만요."
마아크는 맥주잔을 손에 들고 술을 숨도 쉬지 않고 반이나 마셨다. 에바아트
경감이 지겹기도 하고 조금은 괘씸하기도 하다는 투로 한숨인지 심호흡인지
알 수가 없는 깊은 숨을 뱉었다.
마아크가 술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방부장에게 했던 라이트 부인의 진술은 모든 의문에 대하여 대답을 해주었
고 부인의 부정을 속속들이 파헤친 얼빈 매너리의 주장을 송두리째 뒤집어 엎
어 버렸습니다. 그거 묘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 말을 듣고 보니...딴은 그렇구먼."
경감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수한 형사라면 다 그렇겠지만요. 저는 모든 가능성을 확인하지 않고는
적성이 풀리지가 않습니다. 가령 누군가의 증언 가운데 일부가 그 가능성을
부정하고 있어도 말입니다. 우선은 예전에 남편이 사들인 닭튀김은 찢어가지
고 다시 요리하는 대신, 부인이 닭튀김 포장을 어디에서 사 가지고 왔는지 의
문점부터 파고 들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그 뼈다귀가 등장한 거죠."
"문제의 닭 뼈다귀 말이군."
에바아트 경감이 말허리를 꺾으며 말했다.
"그렇죠. 실은 우리 마누라도 곧잘 피서트 포오드 상점에서 튀겨진 통닭을
사들고 옵니다. 마누라는 제가 도무지 먹고 싶지 않은 부분이 있다는 걸 알고
있거든요. 거 왜 등쪽이나 모가지쪽 살이 있잖습니까? 슈퍼마켓에서 통채로
닭 한마리를 사 가지고 와서 자기 집에서 요리해 보면 아무래도 그런 게 나오
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요리된 닭튀김을 파는 애니즈 인스터 치킨이라든가 포
장을 해서 파는 가게에서는 그런 부분은 거의 넣지 않습니다. 매너리 부인이
닭은 통째로 사다 찢어서 요리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마땅히 그런 부분이
매너리네 집 주방에서 어딘가에 있어야 할 겁니다."
"불이 나고 가스 폭발이 있었다고 해도 말인가?"
"화재 조사의 보고에 나와 있는 그대로 화재는 소규모였고, 불 기운도 그렇
게 세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벽지나 페인트를 그을리게 했을 정도니까 닭뼈까
지 재가 되어버리는 건 아니잖습니까? 매너리 부인은 모가지와 등쪽 부분을
냉장고 안에 도로 간수해 두었다든가, 우리 마누라처럼 내다버렸든지 했겠지
요. 얼빈 매너리는 저녁 식탁 닭튀김 접시에 그런 부분이 있었다고 확인하고
있지 않습니다만, 아마도 저처럼 먹지 않는 부분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냉장고에 있던 것은 그대로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공교롭게도 모가지나 등
쪽은 그 안에 없었다는 사실은, 달리 생각할 수가 있는 장소로선 주방의 쓰레
기통밖에 없죠. 문제는 폭발로 인해 쓰레기통 속의 것들이 주방 안에 온통 흩
어져버렸습니다. 그 바람에 저는 닭뼈를 찾아 헤매야 했던 겁니다."
에바아트 경감이 이 꺽다리 부장형사가 주방 바닥을 기어다니다시피 하며 나
무 조각이나 쓰레기 속을 뒤지는 모습을 떠올렸다.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지만
가까스로 참아내곤 물었다.
"무엇을 발견했나?"
"아무 것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고 말해야 되겠죠."
마아크는 말꼬리를 살짝 들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등뼈도 턱뼈도 행방이 묘연해요. 그러니까 퍼스트 포오드 상점에서 산 것이
틀림없다는 거죠. 그래서 전화 번화를 뒤져 보았더니 가장 가까운 그 가게는
꼭 4마일 거리에 있는 애니즈 인스터 치킨이더군요. 매너리가 테이프 속에서
말한 것을 되새겨 보십시오. 부인의 차는 그 날 8마일을 달렸다고 했지요? 그
러니까 4마일 거리를 왕복한 게 아닙니까?"
"그렇다면 부인이 바람피우는 상대를 마중나갔다는 매너리의 추리는 어떻게
되지?"
"만일 상대가 애니즈 인스터 치킨으로 가는 길목에 살고 있다면 거리 수는
그대로군요."
마아크가 이렇게 대답하곤 말을 이어 나갔다.
"그것 보다도 말입니다. 바람을 피우는 상대가 매너리네 집에서 걸어다닐
수가 있는 곳에 살고 있을 가능성 쪽이 짙다 그 말입니다. 만일 매너리네 집
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을 들켰더라도 이웃에서 이상한 소문이 나지 않는 인물
임에 틀림없다 이겁니다. 이건 핵심에서 벗어난 이야기입니다만."
"그렇다면?"
"오드리 매너리는 냉장고 안의 치킨을 찢어 튀겼다고 남편에게 거짓말을 했
다기 보다도 그건... "
여기에서 마아크는 손가락을 가볍게 떨면서 말을 이었다.
"에밀리 라이트가 자기 집 부엌에서 닭튀김을 요리했다고 조사관한테 진술한
것이 거짓밀이 되는 셈이지요."
"왜 그런 거짓말을 했지?"
에바아트 경감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여인은 같은 이유에서 매너리 씨가 수집한 증거를 전부 반증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매너리 부인에게 딴 남자가 있었다는 가능
성을 누군가가 파헤치는 것을 바라지 않았던 겁니다."
"뭘 어떻게 뒤집어놓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건가, 어떻게 알아냈다는 건가?"
"아주 초보적인 일입니다, 경감님."
마아크가 내뱉듯이 말을 하더니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테이프 내용을 들었던 겁니다. 남편이 소방서로 전화를 걸고 있는 동안에
라이트 부인은 구조자가 있겠지 생각하고 매너리네 집으로 달려 갔습니다.
그런데 구조자가 있기는 커녕, 오드리 매너리의 총에 맞아 죽은 시체와 거실
마루 바닥에 굴러 있는 매너리 씨의 송장을 발견한 거죠. 옆에는 권총과 부숴
진 테이프 레코더, 그리고 카세트 테이프가 있었다 이겁니다. 매너리 부인을
사살한 원인을 조사하는 데에 뭔가 도움이 되는 정보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
각한 그 여인은 경찰에 넘길 양으로 테이프를 챙겼다 이 말입니다. 다만 문제
는 집에 돌아온 뒤 자기 카세트 플레이어로 테이프 내용을 들어버렸던 겁니다.
그 여인도 이미 미심쩍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에, 테이프를 틀어보곤 짐작이
닿는 줄거리로 꿰어 맞추었죠. 오드리 매너리의 밀회 상대가 누군가를 알아차
렸던 겁니다."
"하지만 테이프는 매너리의 시체와 함께 거실에서 발견됐잖아?"
에바아트 경감이 끼어들었다.
"맞습니다."
마아크가 시인하면서 말을 이었다.
"라이트 부인은 권총과 곁에 부숴진 레코더가 있으면 경찰이 당연히 테이프
도 찾아내겠지 하고 생각한 겁니다. 그리고 경찰이 자살 미수라든가 고백 테
이프 내용의 진짜 여부를 철저하게 조사하면, 오드리 매너리의 연인이 누군가
를 캐어내고 말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말씀입니다. 그래서 불쑥 제 속편
한 대로 테이프를 이용할 것을 생각해 낸 겁니다. 테이프 내용은 이미 얼빈
매너리가 착란을 일으킨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그 뒤는 모조리 때려
없애는 줄거리를 조작해 내면 그만인 거죠. 그렇게 하면 경찰은 매너리의 실
마리는 과대망상의 산물이라고 믿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는 겁니다. 그 결과
숨은 연인이 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고 일은 끝난다 이겁니다. 하긴 부숴진
레코더와 함께 테이프도 거실로 도로 갖다놓는 것도 잊지 않고 있었고, 그런
일쯤이야 식은 죽먹기였죠. 테이프를 들은 것은 아마도 오후 7시 10분께였을
테니까, 그걸 거실로 갖다놓는 시간은 20분이나 25분 쯤이었을 겁니다. 유리
가 박살이 난 창문으로 테이프를 집어 던져넣으면 그것으로 그만인 거죠. 그
런 다음에야 현장 검증 일행이 당도했다. 이런 이야깁니다."
"알겠네. 하지만 그 여인이 왜 그런 짓을 했느냐 말일세."
에바이트 경감은 아직도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고 있었다.
"그거야 밀회 상대가 자기 남편인 조셉 라이트라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까닭이죠.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있었지만 그 여인은 남편을 감싸려고 했다
이 말씀입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얼빈 매너리의 추리를 뒷받침하는 증거품
이 들어 있는 종이봉지를 제가 발견했고, 그 여인의 음모가 드러나버리고 말
았다. 이렇게 된 겁니다."
"그런데 말일세, 그 종이봉지를 어디에서 발견했는지 나에게 들려주지 않겠
나?"
에바아트 경감이 궁금해 하자 마아크가 말했다.
"라이트네 집 바깥에 마련돼 있는 쓰레기통 속에서였죠. 조셉 라이트가 매너
리 부인과의 데이트 뒤에 자기집에 쥐도 새도 모르게 살짝 돌아왔을 적에 쳐
박아 두었던 겁니다. 에밀리 라이트는 그 장면을 발견했던 거겠지요. 그 여인
은 나중에 테이프에서 매너리가 아마 남겼을 것이라고 말한 물건과 속알맹이
를 대조해 보았겠죠. 그걸 다시 제가, 쓰레기 수거차가 그 쓰레기통을 쏟아내
려는 순간에 나꿔챘다 이 말씀입니다."
"그래서 눈에 시퍼런 멍이 들었구먼, 하하하.... "
에바아트 경감은 마아크를 놀리는 듯 익살스런 표정으로 웃음을 머금었다.
"청소부들이 그렇게나 쓰레기에 집착하고 있다고는 생각조차 못했었지요..."
마아크는 다시 눈 언저리에 손을 갖다댔다.
"아마 라이트 부인은 전에 매너리 부인 집에 놀러다니면서 그 집 가스 레인
지 상태가 나쁘다는 것도 알고 있었던 모양이지?"
"그랬겠지요."
마아크는 남은 맥주를 한 입에 털어마셨다. 그리고 말했다.
"에밀리 라이트의 지문이 빈 포도주병 여기저기에 묻어 있는 것 같더군요.
그렇군요, 감식에서 지문을 채취하느라고 사용한 가루때문에 그 닭튀김은 먹
을 수가 없게 되었겠죠? 참으로 아까운데요. 그렇게 맛 있을 것 같은 음식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으니 말입니다. 안 그래요?"
마아크의 말을 듣고 에바아트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어 온몸을 흔
들며 낄낄거렸다. 그리고 마아크에게 쏘아붙였다.
"이보게, 닭고기에서는 지문이 나올 수가 없지 않는가!"
"그렇습니다. 그 작자들의 손톱은 워낙 날카로와서 제대로 남아 있을 수가
없겠죠."
그제서야 에바아트 경감은 어김없이 가시 돋힌 농담의 표본이라고 할 서양
문명의 산물인 치킨 조우크(Chicken Joke - 바보 같은 익살에 놀아난 바보)
의 놀림감이 됐다는 것을 알고 벌렸던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무제

by - Flyfox



여자는 삼성 역에서 탑승했고 남자는 잠실 역의 반대문에서 탑
승했다. 여자는 운이 좋게 자리에 앉았지만, 남자는 자리에 앉지
못하고 그 여자 앞에 서게 되었다.
전철은 다음 역으로 출발을 했다.
'이 여자 정말로 꼴불견이군.'
남자가 비웃었다.
'긴 머리는 그럭저럭 마음에 든다만 저 옷입은 꼬라지가 다 뭐
야? 한것 뽐낼려고 입고 있지만 유치해 보이는군. 천박해. 난 저
런 여자가 싫어.'
'어머, 이 남자 왜 자꾸 나만 쳐다보지? 생긴 것은 꼭 뭐 같이
생긴게. 어쭈, 내 다리를 보고 있잖아? 불결해! 자리를 바꿀까?
하지만 다른데 자리가 없잖아. 조금만 참자.'
'저 여자 머리속에는 뭐가 들어있을까? 저 여자도 남자와 섹스
하는 생각을 할까? 아마 저 여자와 하는 남자는 신문지를 이용해
야 될거야. 신문지 가지고 될까? 전신을 다 덮어야 될텐데. 이불
을 이용하면 되겠군.'
'기분나빠. 나만 자꾸 쳐다보잖아. 저 남자는 여자들이 기지바
지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모르는가봐. 난 기지바지가 싫어. 촌티
가 나고 가난해 뵈잖아. 그리고 저 머리는 저게 뭐야? 몇일째 감
지도 않은 것 같아. 지저분해. 남자들은 저런게 멋이라고 생각하
나보지? 흥, 웃기지도 않아.'
'으, 이제 보니까 저여자 고리 바지를 입고 있잖아? 왜 여자들
은 고리 바지를 입지? 다리 긴걸 자랑하고 싶어서 일까? 하지만
저 여자는 별로 다리가 길지도 않잖아. 그래 못생긴 다리를 고리
바지 입으면 감추어 진다고 생각 하는 게 틀림 없어. 병신 같은
년.'
전철은 점차 속도를 줄이더니 이윽고 멈춰섰다. 사람들이 순식
간에 교환 되었다.
'다음 역에서 내리는데 잘됐군. 하지만 저 남자가 여기에 앉게
되잖아. 싫어. 누구 여기 앉을 사람 없나? 아, 저기 할머니가 계
시네. 할머니에게 양보해야지.'
그녀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백발이 성성한 할
머니에게 말했다.
"할머니, 자리에 앉으세요."
"괜찮아, 난 이번 역에서 내리니까."
할머니가 미소지으며 그녀의 제의를 거절했다.
그때 예의 그 남자가 그 자리에 앉는게 보였다.
'흥, 재수가 없으려니!'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고 문 앞으로 다가섰다.
전철이 멈추자 남자는 가만히 탑승하는 사람들을 주시했다. 그
때 기가차게 예쁜 아가씨가 탑승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의 앞
으로 다가왔다.
'이야, 따봉! 근사한데? 탈색한 머리가 아주 이쁜데? 눈도 크
고, 키도 크고 다리도 날씬하고. 으흐흐, 저런 여자를 끼고 다니
면 얼마나 신날까.'
그는 그녀를 위 아래로 훑어 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그녀는 예
뻤다.
'어머 이 남자 좀 봐. 날 보고 있잖아. 내가 무슨 정육점의 고
기라도 되는줄 아나보지? 다른데로 가야지.'
그녀는 다른 곳으로 사라졌다.
'젠장, 김셌군. 눈요기 거리가 사라졌어.'
이어 중년의 여자가 나타났다.
'어이쿠 맙소사. 이번에는 아줌마야. 싫어, 싫어.'
'이 청년 괜찮구먼. 이런 청년이란 잠자리를 같이 하면 얼마나
좋을까. 정력이 꽤 쎄 보이는데? 독수공방 1년만 해 보면 모두들
나 같은 생각을 할거야. 내 잘못이 아니라구.'
아줌마의 생각.
'이런, 저 아줌마 자꾸 날 쳐다 보잖아? 눈을 돌리자. 자는 척
해야지.'
'저런 저런, 졸린가 보군. 이봐 청년, 우리집에서 자. 내가 이
래뵈도 잠자리 서비스 하나는 끝내준다구.'
'아직도 날 쳐다보나?'
그는 슬그머니 아줌마를 쳐다보았다. 아줌마는 아직도 그를 쳐
다보고 있었다. 그는 다시 눈을 내리깔고 자는 척 했다.
'이 청년 눈치를 보는군. 내가 마음에 든게 틀림 없어. 하지만
내가 프로포즈를 할 수는 없지. 에구머니나, 이번 역에서 내리잖
아?'
아줌마는 문이 열리자 재빨리 뛰어 나갔다.
'드디어 갔군. 휴, 끔찍해.'
저쪽에서 소란스런 소리가 들렸다. 네 명의 잘빠진 아가씨들이
그의 쪽으로 몰려왔다.
'이야, 이게 웬 영계 떼들이냐!'
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저여자는 가슴이 크군. 잡으면 물컹하겠는데? 저 여자는 엉덩
이가 크고, 저여자는 다리가 늘씬하군. 하나같이 미인들이야. 저
4명을 끼고 자면 어떨까?'
그는 다리 사이에서 무언가 고개를 드는 그것을 느꼈다.
'젠장, 가만히좀 있어! 거북스럽잖아!'
그는 몸을 뒤척이며 그것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했다. 그
리고 다시 여자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왜 조물주는 저렇게 예쁜 여자들을 만들었을까. 이건 학대 행
위라구! 왜 건들지 못하게 하면서 저렇게 예쁘게 만들 수 있지?'
"야, 저 남자좀 봐. 우리를 자꾸 쳐다보고 있어."
단발 머리의 여자가 옆의 여자에게 속닥였다.
"정말, 정말 재수없게 생긴 남자야."
"그러게..."
'무슨 애기를 하고 있지? 혹시 내 얘기를 하는거 아냐? 분명히
잘 생겼다고 그럴거야. 그럼 그렇고 말고.'
그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윙크를 해볼까? 그건 안돼. 너무 구식이잖아. 가만히 있자.'
차가 멈추자, 여자들은 나가버렸다. 그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따분하군.'
그때 웬 아줌마가 6살 쯤 되어 보이는 계집아이를 그의 앞으로
데려왔다.
'이번에는 꼬마로군. 그래도 이쁘게 생긴 꼬만데? 크면 미인이
되겠어.'
'어머, 저 남자 혜숙이를 쳐다보잖아?'
'저런 딸아이 한 명만 있으면 좋겠는데. 그럴려면 예쁜 여자와
결혼해야돼.'
"엄마, 엄마. 저 아저씨 이상하게 생겼다."
꼬마가 그를 가리키며 엄마에게 말했다. 그러자 꼬마의 엄마는
당황해서,
"얘, 그런 소리 하는거 아냐."
그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 올랐다.
'내가 이상하게 생겼다고?'
"아니야, 엄마. 이상하게 생겼어. 꼭 외계인 같아. 맞아, 영화
에서 본 화성인 같이 생겼어."
"혜숙아!"
그녀의 엄마가 그녀를 꾸짖었다.
"응, 안 그럴께, 엄마."
그녀는 엄마의 손에 끌려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염병할, 뭐 저런 꼬마가 다 있어?'
시간은 탱자탱자 흘렀다. 그러자 맨 처음 보았던 그 못생긴 여
자가 다시 차에 타는 것이었다. 그는 이 순환 열차에 3시간이 넘
게 탑승해 있었던 것이다.
'어, 저 여자 또 탔네?'
'어머, 저 남자 아직까지 있잖아?'
'그만 내려야겠군. 같은 여자 두 번 만나면 그날은 끝이야. 언
젠가는 내 외모에 반해서 나에게 프로포즈할 여자가 있을거야.
그때까지만이라도 참아야지.'
그는 정기승차권을 꺼내들고 개찰구를 나갔다.




주정꾼 탐정 (원제 : I Like'em Tough)

by Evan Hunter
나? 나는 모든 것을 깡그리 잃어버린 전(前)사립탐정이야. 이제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은 내 목숨뿐이지.
커트 캐넌이 내 이름이야. 전에는 뉴욕에서도 손꼽히는, 제법들 무서워한
탐정이었지. 하지만 내 마누라는 엉덩이가 가볍고, 내 친구는 염치없는 녀
석이었어.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녀석을 권총으로 때려
죽이려고 했었지. 그때 누가 경관을 불렀더군. 나는 흉기소지폭행죄로 기
소되고, 사립탐정 허가증을 빼앗기고 말았지.
지금은 뉴욕의 뒷거리 바워리에서 룸펜들과 함께 살고 있어. 그러나 이 뒷
거리에서도 사람들은 역시 고민을 가지고 있더군. 이 뒷거리에서도 사람들
은 역시 나를 찾아오지. 그 사람들에게는 허가증이 문제되지 않는다네. 나
는 지금도 사립탐정이야. 뉴욕에서도 손꼽히는, 제법들 무서워하는 탐정이
라구.

- 떠나지 않는 유령 (Die Hard) -

그 술집은 황량한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둠침침한 공동변소 같았다.
지저분한 구석은 그보다 더하다. 천장에는 중앙에서 열십자가 되도록 건거
친 파랑과 흰색 테이프 다발이 느슨하게 늘어뜨려져 있다. 오래 전 이 지
구(地區)에서 출전한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귀한 축하 때 쳐두었던 것인
가보다. 카운터 뒤의 거울은 금이 가 있다. 그것이 내 얼굴의 반을 쪼개
나머지 반보다 위쪽에 가져다놓는다. 카운터에서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입
구문이 나 있다. <리틀 보이스>라는 그럴 듯한 이름이 씌어 있다. 그러나
가게 안의 나뭇결에서 풍겨나오는 퀴퀴한 냄새는 그 절반도 그럴 듯하지
않았다.
성급한 사람들이 여기저기 테이블에 마치 실끊어진 꼭둑각시 인형처럼 늘
어져 있었다. 바텐더를 빼놓으면 서 있는 것은 나뿐이다. 그런 나도 여느
때의 순서대로 나간다면 그리 오래 서 있지 못할 것이다. 죽을 때까지 술
독에 빠져 있을 사람의 미덕이라는 것이다. 가질 만큼 가졌으면 우선 거기
서 시작하는 게 좋다.
나는 카운터에서 쇼트글라스를 집어들고 우선 시작했다. 글라스를 내려놓
았을 때, 그 사나이가 내 팔꿈치 옆에 서있었다. 이제야 마음놓인다는 표정
이었다. 그가 물었다.
"캐넌 씨지요?"
작은 목소리의 작은 사나이다. 거푸집으로 대량 생산되어 잇달아 지하철
손잡이에 매달리는 사람 가운데 하나다. 둥그런 얼굴에 긴 코 끝이 입 속을
들여다보고 있다. 입술은 얇고 길다. 양쪽 눈 밑에 살이 쳐진 주머니가 매
달려 있다. 묵직한 주머니였다.
나는 말했다.
"그렇소. 캐넌이오."
사나이는 뒤돌아보고 어물어물하더니 내 얼굴에 푸르스름한 눈을 못받았
다.
"당신은..사립탐정이라고 들었습니다만..."
나는 그에게로 등을 돌리고 빈 글라스를 보았다.
"잘못 들었소."
그는 말했다.
"도와주십시오. 내 아들을...내 자식을 말입니다."
나는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나는 탐정이 아니오."
그리고 바텐더에게 눈짓했다. 바텐더는 카운터 끝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사나이가 다가섰다.
"내 아들은 마약중독입니다."
나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거 안됐군요."
"당신이 그 녀석을 막아주십시오. 내 자식을 그렇게 만든 녀석들을. 녀석
들이 내 아들에게, 그것을...그 몹쓸 것을 주지 못하도록 막아주십시오."
나는 말했다.
"해일을 막으라는 거나 같구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소. 게다가 할 생
각도 없소. 용서해 주겠소?"
"부탁입니다. 나는.."
"흥미없다고 말했잖소. 돌아가오. 단념하고."
사나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작은 사나이가 한순간 거인이 되었다. 귄리를
쟁취하려는 사람이 된 것이다.
"대체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가 대들었다. 날카로운 떨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나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부탁하러 온 겁니다. 당신이 아
니면 안되는 일입니다. 그걸 모르겠습니까?"
이만한 말을 한 노력이 그를 약하게 한 듯했다. 그는 카운터에 기대더니
뒷주머니에서 더러운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닦았다.
"나는 도움될 것 같지 않소."
내 목소리는 아까보다 부드러웠다. 꾸물거리는 바텐더가 얄미웠다.
"나는 이미 사립탐정이 아니오. 허가증을 빼앗기고 없단 말이오. 알겠소?
이 주(州)에서는 그 일을 할 수 없소."
작은 사나이는 조금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입을 다
물자 그는 말했다.
"내 아들은 허가증이니 뭐니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아는 것은 주사
기뿐이지요. 주사기를 빼앗는 데 그런 종이쪽지는 필요없습니다."
"그렇겠지요. 하지만 종이쪽지 한 장만이 아니오. 더 많은 것이 필요하
오."
"그럼, 힘을 빌려주시는 거지요?"
"천만에요!"
사나이는 깜짝 놀라는 것 같았다. 입을 여는 동시에 눈도 커졌다.
"어째서? 왜 안됩니까? 왜 힘을.."
나는 글라스로 카운터를 치며 크게 소리쳤다.
"여보게, 바텐더, 뭘 꾸물거리는가? 술이 발효되기를 기다리나?"
그리고 나는 똑바로 작은 사나이를 돌아보며 아주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
다.
"졸라봐야 소용없소. 흥미가 없단 말이오. 당신 아들이든 누구의 아들이
든, 내 어머니의 외아들이 어떻게 되든 될 대로 되라는 생각이니까, 부탁
이니 내 말 듣고 돌아가오. 이런 썩은 싸구려 술집에 언제까지나 있지 말
고, 아늑하고 기분좋은 당신 아파트로 돌아가는 편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
오. 돌아가오. 제발 돌아가주오."
작은 사나이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는 자리새끼처럼 목을 떨어뜨리
고 중얼거렸다.
"하는 수 없군. 하는 수 없어."
그가 등을 돌려 문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하는 것과 동시에 바텐더가 느릿
느릿 다가왔다.
나는 말했다.
"같은 걸 한 잔 더."
작은 사나이가 돌아가는 것을 나는 바라보지 않았다. 그 대신 바텐더를 보
았다. 병에서 글라스로 위스키가 흘러떨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권총 소리는 재빠르고 짧았다. 연속으로 두 발, 그 총소리는 스네이드럼
가장자리를 막대기로 때리는 것처럼 울렸다. 나는 얼굴을 들고 돌아보았다.
작은 사나이는 문손잡이에 손을 대고 있었다. 그는 손을 뻗은 채 몸이 천천
히 바닥으로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녹기 시작한 버터가 칼날에 미끄러져떨
어지는 것 같았다. 그 몸뚱이를 따라 시뻘건 것이 문을 붙들었다. 이윽고
사나이는 바닥에 쓰러져 생명없는 작은 공이 되었다.
나는 달려가서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문 밖은 어둡고, 엷은 부슬비 로
뒤덮여 있었다. 길모둥이에 외로운 가로등만 희미하게 주위를 비추고 있다.
아스팔트를 뛰어가는 구두 소리가 드문드문 들렸다. 그러나 그것도 곧도시
의 어둠으로 사라졌다.
나는 고개를 돌려 작은 사나이를 보았다. 바텐더가 이미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가 물었다.
"이 사람을 아십니까?"
"모르네."
"아는 사이처럼 보이던데요."
나는 손을 뻗어 바텐더의 셔츠 깃을 잡고 틀어올렸다.
"나는 모른다고 했어. 잘 기억해 둬. 이 사나이와 얼굴에 대한 것은 처음
이야. 경관들이 여기 어디 옹이구멍에서라도 기어나오거든 이 말을 생각해
내라구. "
"내 말 알겠나?"
그는 말했다.
"생각해 내겠습니다."
"좋아, 가서 핑크레이디든 뭐든 만들어."
나는 바텐더를 확 밀어주었다. 그는 시무룩한 얼굴로 카운터로 돌아갔다.
나는 작은 사나이의 맥을 짚어보았다. 짚어봐야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지갑을 찾았다.
피터 댈쇼라는 이름의 운전면허증이 들어 있었다. 나는 주소를 머릿속에
새긴 다음 면허증을 지갑에 다시 쑤셔넣었다. 플라스틱 꽂이 사이에 사진
이 몇 장 끼워져 있다. 코가 높고 눈이 맑은 귀여운 소년의 사진이다. 댈
쇼의 아들임에 틀림없다. 마약중독환자다. 그러나 그렇게는 보이지 않았다.
동글동글한 머리에 미소가 넘쳐 흐른다. 이가 튼튼하고 잇바디도 곱다. 나
는 지갑을 탁 닫아 댈쇼의 주머니에 도로 넣었다. 하기야 이제 그는 이 지
갑 속에 든 게 아무것도 필요 없게 되었지만.
나는 바텐더 앞을 지나 곧장 전화박스로 갔다. 10센터 동전을 하나 떨어뜨
려넣고 교환수를 부르는 대문자 O를 돌렸다.
교환수가 명확하게 재빨리 물었다.
"몇 번 대드릴까요?"
"경찰을 부탁하오."
"사건이 일어났습니까?"
"아니, 팬티 대매출이오."
"네?"
"아무래도 좋소. 경찰을 대주오."
지겨운 듯한 목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나는 박스에 앉아 있었다.
"12분서(分署)의 개시디요."
"살인사건을 신고하고 싶습니다만."
"어디요?"
상대의 목소리는 직업적으로 능란했다.
나는 장소를 말했다.
"직접 목격했습니까?"
"아니, 죽는 걸 보았을 뿐입니다. 누가 했는지는 못 봤습니다."
"성함을 말해 주겠습니까?"
"싫소."
나는 수화기를 놓았다.
이것으로 끝났다. 내 손은 깨끗해졌다. 나는 박스를 나와 앞만 보며 술집
을 나왔다. 댈쇼에게 눈길도 던지지 않았다. 밖은 어두웠다. 어디로 갈까,
무엇을 할까 생각하며 나는 잠시 망설였다.
다른 술집에 가볼까? 그래, 그렇게 해서 나쁠 것은 없다. 나는 걷기 시작
했다. 경찰차 사이렌이 멀리서 들려왔다, 그것은 커다란 고민을 안고 있던
작은 사나이의 시체쪽으로 차츰 가까와졌다.

그 여자는 이튿날 아침 내 호텔에 찾아왔다.
문에 노크 소리가 났을 때, 나는 이불을 머리까지 덮어쓰고 자고 있었다.
나는 물었다.
"누구요?"
덕분에 조그만 망치가 머릿속에서 날뛰기 시작했다. 나는 일어나려고 몸부
림쳤다.
"당신은 나를 모르세요."
"그럼, 무슨 일로?"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문을 열릴 거요. 들어오시오."
그녀는 방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몸집작은 가무잡잡한 여자였다. 얼
굴 양쪽에서 머리를 모아 포니테일(뒤에서 묶어 아래로 드리운 머리)로 묶
었다. 갸름한 달걀형 얼굴이 짙은 갈색 눈과 오똑한 코를 가두리하고 있었
다. 입술도 잘생겼다. 깃은 열린 흰 블라우스가 금방이라도 터져나올 듯한
젊은 유방의 무어라 말 할 수 없는 봉긋한 덩어리를 손에 잡힐 듯이 드러
내보였다.
그녀는 물었다.
"캐넌 씨지요?"
"무슨 일이오?"
"제리 댈쇼에 대해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저런."
"내가 뭐 화날 말을 했나요?"
"다른 레코드에 걸어줄 수 없소? 아버지 일이 끝났다고 여겼더니, 이번에
는..."
그녀는 방을 가로질러 침대 가까이로 섰다.
"댈쇼 씨도 ....당신을 찾아왔었어요?"
"왔었소."
"그분 돌아가셨어요. 아세요?"
"아오."
"녀석들이 한 거예요. 캐넌 씨, 그분이 제리를 어떻게 할 생각이라는 것을
녀석들이 알고 입을 막아버린 거예요."
나는 턱 밑의 꺼칠꺼칠한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보기좋게 막았더군. 그런데 나를 위해 부탁도 안한 광고를 서비스한 사람
이 누구요?
당신들은 누구한테서 듣고 나를 찾아오는 거요? 그것부터 먼저 압시다."
대답하는 그녀의 눈은 진지했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걸요, 캐넌 씨."
"그렇다면 내가 일하지 않고 있다는 것도 알 거요. 지금은 실직 중이오.
폐업으로 말미암아 재고품 대특매는 벌써 오래 전에 끝났단 말이오."
"부인에 대한 이야기군요."
나는 깜짝 놀랐다. 그녀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꺼냈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이 말이 욱신거리는 내 마음의 오랜 상처를 사정없이 쑤셔놓기 때문이
기도 했다.
나는 말했다.
"여기서 나가는 게 좋겠군, 당신은."
"비밀도 아닌데 숨길 건 없잖아요. 신문에 죄다 날 걸요."
"당신은 돌아가겠소? 아니면 엉덩이를 걷어차여 뛰어 나가고 싶소?"
그녀는 내 눈을 지켜보았다.
"화내봐야 소용없어요, 캐넌 씨, 나는 조금도 무섭지 않으니까요."
"당신은..."
그녀는 재빨리 말했다.
"부인이 바람을 피웠어요. 그게 어쨌다는 거지요? 내가 사는 데 와보세요.
아주머니들이 모두 바람피워요. 안 그러는 건 병신이나 송장뿐이에요."
"아내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소."
나는 짜증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와장창 때려부수고 싶어졌다.
그녀는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남자는 당신한테 무슨 짓을 당해도 할 말이 없었을 거예요. 얻
어 맞는 게 당연해요."
"고맙소. 하지만 경찰은 그렇게 생각지 않았소."
"45구경 손잡이를 썼으니까요. 그보다는..."
"이제 그만두, 아가씨. 막이 내린 사건을 다시 되풀이하기는 싫소."
"사건과 함께 당신도 막이 내렸군요. 순직(殉職)한 영웅님. 허가증을 빼앗
겼을 때 당신은 죽은거예요."
"당신은..."
"남자를 때리면 어떻게 되리라고 생각했지요? 훈장이라도 타리라고 여겼나
요?"
그녀는 입술을 쑥 내밀고 침대에 붙어섰다.
"사립탐정이라고 해서 여느 시민은 안 가진 권리를 가졌다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요? 흉기소지폭행죄가 그토록 뜻밖이였나요?"
나는 정신없이 말했다.
"그 여자는 엉덩이가 가벼웠소. 상대 남자는 비열한 녀석이오. 그놈을 죽
였어야 하는데. 그런 자식은 살려두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나는..."
그녀는 두 손을 허리에 짚고 가슴을 앞으로 쑥 내밀며 나를 비웃었다.
"시체를 죽일 수는 없어요. 당신은.."
쫙 벌린 내 오른손이 날아 그녀의 볼을 후려쳤다. 그 일격으로 그녀는 방
한가운데까지 튕겨져나갔다. 그녀의 손톱이 내 어깨를 파고들어 일직선으로
팔목까지 긁어내렸다.
나는 화가 났다. 그녀를 그냥 둘 수 없었다. 계기를 만든 것은 그녀다. 그
녀는 나에게 붙들려 몸부림쳤다. 나를 걷어차려던 반동으로 스커트 자락이
허벅지가 맞붙은 자리까지 말려올라가 시원스러운 흰 살이 드러났다. 나는
그녀를 반듯이 쓰러뜨리고 입술을 힘껏 상대의 입술에 눌렀다. 내 손은 흰
블라우스를 더듬었다. 이윽고 그녀의 입술은 내 입술을 호응하기 시작하고
몸부림이 멎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생각나게 했다. 그녀는 토니의 모습을 불러왔다. 등에
치렁치렁한 블론드 머리를, 웃는 입매를, 밀림의 초원 같은 깊은 녹색 두
눈을, 넉 달 동안의 결혼생활을, 거기에 나타난 파커를 생각나게 했다.
나는 총구를 들이댔어야 했다. 방아쇠를 당기고 또 당기며 녀석이 카펫 위
에 하나의 역겨운 오점이 될 때까지 당겼어야 했다.
나는 분노에 떨었다. 그 분노를 그녀의 몸에 쏟아부었다. 그녀는 목구멍
속으로 신음하며 내 목을 두 팔로 세게 감았다. 내 몸 밑에서 그녀의 몸이
휘었다. 어디를 보는지 알 수 없는 눈이 되었다. 입술은 촉촉히 젖었다. 갑
자기 그녀는 참다못해 큰 소리를 질렀다. 햇빛이 비쳐드는 방 안에서 그
비명은 크게 울렸다. 그녀는 외치고 외치고 또 외쳤다. 나도 같이 소리지르
고 싶어졌다.
이윽고 조용해진 그녀는 베개에 머리를 얹었다. 얼굴이 온통 발그레해져
있었다. 스커트는 마구 구겨져 속살을 남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가까스로 물었다.
"제리를 찾아주겠어요?"
"생각해 보지."
"무슨 뜻이지요, 그것은?"
"들은 대로의 뜻이오. 생각해 보겠소."
"알았어요."
그녀는 스커트를 끌어내리고 일어서서 머리를 쓸어내렸다.
"나는 돌아가겠어요. 난 돌아갈 테니 당신은 생각해 보세요."
그녀는 문 쪽으로 가서 손잡아에 손을 대고 돌아보았다.
"잘 생각해 보세요. 캐넌."
그리고 그녀는 가버렸다.
나는 그녀를 생각했다. 나를 화나게 만든 육체를 생각했다. 내 마음 속에
서 그녀와 토니가 뒤섞였다. 나는 다시 떨기 시작했다. 토니를, 오래 전의
그날 밤을 생각하면 나는 언제나 떨고 만다. 내 침실에 손님을 끌어들인
싸구러 갈보 같은 짓을 하고 있던 토니. 놈의 손은 그녀의 발가벗은 몸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놈의 입은 그녀의 목에 묻혀 있었다. 놈의....
나는 한쪽 주먹으로 한쪽 손바닥을 쳤다.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끝난 일이다. 불기소가 되기는 했지만, 경찰은 나를 허가증을 지니게
할 수 없는 사나이라고 생각했다.
그 두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이혼하기 위해 멕시코로 갔는데, 그 길
로 어디로 가버렸을까? 어디로 갔거나 상관없다고 나는 자신에게 말했다.
아무도 마음쓰는 사람이 없잖는가.
그러나 나는 누군가가 마음쓰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밤이면 밤마다 초특급전함이라도 띄울 수 있을 만큼 많은 알콜을 들이켜는
사나이가 마음쓰고 있다. 술은 식도를 곧장 내려가 위주머니의 구멍은 막아
주지만 마음의 상처는 막아주지 못한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추억을 지우고 싶었던 것이다. 아까의
그녀도 아무 도움되지 않았다. 더욱 토니를 생각나게 했을 뿐이다. 다른 여
자들이 다 그러했듯이, 나는 침대 옆 벽장에서 부동자세의 병정이 달린 술
병을 꺼내 가득 따랐다.
제리 댈쇼는 어쩌다가 마약중독에 걸렸을까 생각했다.
내버려두자. 남의 일이다.
나는 한 잔 더 마시고 다시 소년을 생각했다. 다시 한잔 마셨다. 또 마셨
다. 둘레의 물체가 흐려지면서 멋지게 보이기 시작했다. 마음이 좀 부드러
워졌다. 마음의 아픔은 사라졌다. 만난 적도 없는 소년에 대해 형 같은 기
분을 느꼈다. 나처럼 십자가를 진 소년이다. 다만 그 녀석의 십자가에는
내 것과 달리 끝에 바늘이 달려 있다. 그것이 네시간마다 녀석의 팔을 찌
르는 것임에 틀림없다.
나는 일어나서 웃옷을 결치고 피터 댈쇼의 운전먼허증에 적힌 주소를 찾아
나섰다.

내가 외워둔 주소에는 잿빛 빌딩이 하늘을 향해 더러운 손가락 하나를 세
워놓은 것처럼 서 있었다. 현관으로 올라가는 층계 위에 블론드 여자가 앉
아 갓난아기 요람을 흔들고 있었다. 내가 층계를 올라가기 시작하자 그녀
는 흘끗 흘겨보고 실망하는 얼굴을 했다.
나는 웃는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 내가 어떻게 보였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굴을 찌푸리지도 않았다.
그녀는 줄곧 나를 보았다. 그 눈길은 핏발이 선 내 눈에서 더부룩한 수염
으로 옮겨갔다. 다시 초라한 옷으로 옮기더니 아기 요람으로 되돌아가 심술
부리듯 마구 흔들어댔다.
나는 현관에서 성냥을 그어 울퉁불퉁한 우편함 위에서 댈쇼의 이름을 찾아
냈다. 3층 B라고 씌어 있었다. 판자벽에서 스며나오는 퀴퀴한 냄새를 맡지
않도록 숨을 죽이면서 층계를 올라갔다.
3층 B라고 씌어진 문을 두드렸다.
귀기울이니 다가오는 맨발 소리가 들렸다. 문이 크게 열렸다. 빛바랜 실내
복을 걸친 여윈 소녀가 서 있었다. 안쪽 부엌 창문에 비쳐드는 햇빛으로
아가씨의 모습은 검은 그림자로 보였다.
"누구세요?"
"커트 캐넌이오. 당신은?"
그녀는 판에 박힌 미소를 떠올렸다.
"내 이름 따윈 물어봐야 아무 쓸모도 없어요. 누구의 심부름인가요?"
"제리 댈쇼는 어디 있소?"
그녀는 어깨를 움츠렸다.
"마약으로 몽롱해져 있겠지요. 아무도 걱정하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내각 걱정하오. 당신은 누구요, 아가씨?"
"사촌누이 메리예요. 왜 제리를 찾지요?"
"제리는 여기 살고 있소?"
"네, 아빠와 함께. 하지만 아빠는 돌아가셨고, 제리는 집에 돌아오지 않아
요. 아저씨 경관이세요?"
그녀는 나를 말똥말똥 쳐다보았다.
"경관은 아닐 거야."
"그럴리 없지."
"마약이 있는 데 가면 꼭 있을 거예요. 마약파는 데를 찾아보세요. 제리는
거기서 약섞는 스푼을 쥐고 서성거리고 있을 테니까요. 수염도 그만큼 길면
깎을 맛이 나겠네요."
"나고말고."
그녀는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클레어 블래니를 만나보세요, 나중에 . 그 사람은 제리를 잟 알고 있어
요."
"몸집작은 가무잡잡한 여자요?"
"몸집작은 가무잡잡한 여자? 아, 이디스 로스 말이군요. 아니오, 클레이예
요. 그녀는 다른 케이스예요."
"무슨 뜻이오?"
"이디스와 제리는 약혼한 사이였었어요."
"였었다고?"
"네, 지금은 아니거든요."
"왜?"
"아저씨, 마약환자와 약혼한 적 없나요? 그러니 그런 얼빠진 질문을 하지
요. 이디스는 제리에게 돈을 벌어다 대려고 악착같이 일하는 게 싫어졌나
보지요."
"그런데 어째서 그녀는 지금도 제리를 도와주려고 애쓸까?"
한순간 소녀의 얼굴에서 무표정한 가면이 벗겨지고 쌀쌀했던 눈에 부드러
운 빛마저 떠올랐다.
"지난날이 생각나기 때문일 거예요. 아마 제리가 옛날에는 어땠는지, 이따
금 생각나는 거예요. 틀림없이 그래요."
나는 말했다.
"여러 가지로 가르쳐주어 고맙소."
"어머나, 돌아가시는 거예요?"
"음."
"댄스파티에 남지 않으세요?"
"어떤 파티요?"
"진짜 파티예요. 수염만 깎으면 남으셔도 돼요."
나는 무표정하게 소녀를 쳐다보았다.
"고맙지만 수염을 기르는 편이 따뜻하오."
이상한 얼굴로 문 앞에 서 있는 소녀를 뒤에 두고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갔
따. 현관을 나가면서 아까의 블론드 여자를 보았다. 그녀는 나를 보지 않았
다. 나는 그녀 곁을지나 가까운 캔디 가게로 갔다. 안으로 들어가 카운터
에 다가가서 밀크 세이크를 주문했다.
여드름투성이의 점원이 고개를 끄덕이고 만들기 시작했다. 다 되자 내 앞
으로 밀어 보냈다. 나는 입을 댔으나 밀크 세이크를 좋아하지 않는다.
"왜 그러십니까? 마음에 안 드십니까?"
나는 점원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맛있네. 하지만 흰 놈이 마음에 안 든단 말이야."
"흰 놈?"
"8킬로그램이나 되는 얄미운 흰 개 말이야. 그놈이 내 어깨를 물어 뜯는다
네."
"네?"
나는 상대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어디로 보내버리고 싶네만."
그가 물었다.
"브롱크스 동물원에 갖다주면 어때요?"
"거절당했지. 거기서는 개한테 비스킷밖에 안 준다는구먼."
상대는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지 않았다. 다만 내 얼굴을 쳐다볼 뿐이었
다.
"센트럴 파크에도 동물원이 있지요."
"그 흰 개가 얼마나 심하게 무는지..."
"우리집은 개장수가 아닙니다, 손님."
"그럼, 개장수를 가르쳐주게."
그는 눈을 껌벅거리며 말했다.
"아저씨의 그 흰 개한테 물어보시지요."
그는 나에게 등을 돌려 카운터 끝으로 걸어갔다. 돌아왔을 때는 성냥개비
를 한 개 잇새에 물고 지근지근 씹고 있었다. 나는 다른 것을 물었다.
"클레어 블래니는 어디 가면 만날 수 있지?"
그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잇새의 성냥개비가 움직이지 않았다.
"손님, 경관입니까?"
"소름끼치는 소리 말게."
그는 나를 흘끗흘끗 보며 말했다.
"모퉁이에 붉은벽돌 빌딩이 있는데요, 금방 알 수 있습니다. 6층이지요.
블래니입니다. 클레이 블래니."
"고맙네."
"흰 개를 상담하러 간다면 헛일일걸요."
"안되겠나?"
"안될 겁니다."
그는 누런 이를 드러내보이며 빙그레 웃었다.
"그녀도 한 마리 기르고 있거든요."
나는 돈을 치르고 가게를 나왔다. 붉은벽돌 빌당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복도의 어스름 속에서 방 번호를 확인하고 주먹 끝으로 문을 두번 가볍게
두드렸다. 문을 홱 열리고 여자가 복도에 꺼꾸러질 듯이 얼굴을 내밀었다.
"어머나!"
여자는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뭐예요?"
"블래니 양이오?"
"네, 네, 그래요."
그녀는 경망하게 말하며 내 어깨 너머로 복도를 두리번 거렸다.
"들어가도 되오?"
"왜요? 무슨 일이지요?"
"제리에 대해 할 이야기가 있소."
"어머나."
그녀는 다시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리고 이마에 늘어진 빨강머리를 쓸
어올렸다.
"제리에 대해서라고요. 좋아요. 들어오세요."
방 안은 징기스칸의 군대가 막 지나간 뒤 같았다. 더러운 쟁반이며 찻잔이
설겆이대에 쌓이고 바닥에는 빈 맥주병이 뒹굴고 있다. 대낮인데도 커튼이
쳐지고 한구석의 침대는 자고 일어난 그대로였다.
클래어 블래니는 그 널려 있는 것들을 흘끗 바라보고는 빛바랜 비단 실내
복 앞을 여몄다. 그녀는 키가 크고 눈부실 듯한 빨강머리였다. 넓은 이마
에 눈썹이 큰 반원을 그리고 있다. 깊은 녹색 눈은 침착없이 움직이고 있었
다. 한군데에 머무르지 못하는 마약환자의 눈이다. 미끈한 어깨의 선이 흘
러 당당하고 둥근 유방이 되어 있다. 걸을 때마다 그 유방은 얇은 실내복을
안쪽에서 밀어올려 묵직하게 움직였다. 그녀는 큼직한 엉덩이와 아래로 내
려갈수록 가늘어진 긴 다리를 가지고 있었다. 낡은 실내복은 무릎 위에 가
까스로 닿았다. 허리를 구겨진 끈으로 맸을 뿐 달리 실내복을 누르고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테이블 위의 짜부라진 상자에서 담배를 한 개 뽑아 손가락 끝으로
쭉 펴서 입술에 물었다. 화장은 전혀 하지 않았다. 입술은 보랏빛으로 켰
다. 지난 밤의 수면으로 바싹 말라 있다. 담배에 불을 붙이는 손 끝이 떨렸
다.
그녀가 물었다.
"제리가 어떻게 됐지요?"
"그 사람 어디 있소?"
"모르겠어요. 그걸 물어보려고요? 그렇다면 얼른 돌아가요. 나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으니까."
"제리를?"
"아니오."
"누구요?"
"누구든지."
"마약장이 아니오?"
그녀는 눈이 둥그래졌다.
"뭐라고요?"
"나는 당신 같은 사람을 신물나도록 보아왔소. 누구를 기다리는지 곧 알지
요. 오늘은 아직 안 왔소?"
"당신에게 놓아달라고는 하지 않아요."
"언제 오게 되어 있소?"
그녀는 벽시계를 흘끗 쳐다보았다.
"벌써 왔어야 하는데. 어디서 꾸물거리고 있는 걸까?"
그녀는 방 안을 초조하게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어깨를 펴고 발을 움직일
때마다 유방이 박자를 맞추듯 양옆으로 흔들렸다.
나는 물었다.
"피터 댈쇼는 죽었지요?"
"그걸 어떻게 알아요...당신 경관?"
"아니오."
그녀는 되풀이했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제리는 어떤 소동에 말려들었소?"
"무슨 뜻이지요?"
"마약환자의 아버지가 경찰을 찾아갈 것 같다고 해서 죽이는 녀석은 없소.
환자 하나쯤이야 업자로 봐서는 몇푼 안되거든."
"그래요?"
"그런데 왜 그랬을까? 왜 그 아버지가 살해되었을까? 이것을 나는 줄곧 생
각하고 있소."
"그토록 흥미 있거든 찾아다니면 되잖아요."
그녀는 다시 시계를 보았다.
"뭘 꾸물거리고 있을까?"
"곧 올 거요. 침착하오."
"와야 해요. 곧 와야 해요. 나는 다 떨어졌어요."
그녀는 테이블에 허리를 굽히고 담배를 껐다. 그리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제 참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마약의 굶주림이 피부를 침범하고 피를 침범하기 시작
한 것이다. 이마에 땀이 맺힌다. 손이 떨리고 있다. 그 손으로 자꾸만 실
내복을 여민다. 머리를 쥐어뜯고 긴 손톱으로 자기 팔을 할퀸다. 입술을
악물고 다시 시계를 쳐다본다.
"뭘 하고 있지? 대체 뭘 하고 있을까?"
그녀는 침대로 다가가 걸터앉았다. 앉자마자 다시 일어나 걸어다니기 시
작한다. 그 몸이 심하게 떨리는 것을 나는 지켜보았다. 이는 맞부딪쳐 덜
덜거리고 얼굴은 금방이라도 결단날 듯이 일그러진다.
나는 말했다.
"침착하오. 침착하시오."
그녀는 새된 소리를 질렀다.
"나가요. 보이고 싶지 않아요."
나는 타일렀다.
"침착하오."
그녀는 테이블로 다가가 짜부라진 상자에서 담배를 찾았다. 그러나 텅 비
었다. 그녀는 그것을 내동댕이쳤다. 내가 한 개 꺼내 그녀에게 권했다. 그
녀는 홱 낚아챘다. 내가 불을 붙여주는 동안에도 그녀는 덜덜 떨고 있었
다.
그녀는 별안간 등을 돌렸다.
"쿡쿡 쑤셔, 온 몸이 쑤신다. 벌레가 낀 것 같아. 온몸에 벌레가 꼈어."
그녀는 허리를 맨 끈을 끄르고 실내복 앞을 홱 펼쳤다.
탄력성있는 아랫바가 송두리째 드러났다. 엉덩이와 두 허벅지의 흰 부풀음
까지 보였다. 내가 앞에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은 것 같았다. 어깨를 물고
늘어지는 흰 개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찬 것이다. 그녀는 침대로 달려가 "
살려줘, 살려줘!"하고 소리치며 매트리스 위에 몸을 던졌다. 미친 듯이
몸부림친다. 등이 활처럼 휜다. 다리근육이 뻣뻣하게 굳는다. 흐느끼며 몸
을 떨고 픽 쓰러져 소리지른다.
"왜 안 오지? 왜 안 오는 거야?"
등이 다시 휜다. 유방을 치켜올리고 온 몸의 근육을 경련시키며 마약을 찾
는다.
그녀는 애원했다.
"이리 와줘. 이리 와서 어떻게 해줘. 나를 어떻게 해줘. 어떻게 해줘. 어
떻게 해줘."
나는 침대에 다가가 그녀의 몸을 쓰다듬어주었다. 그녀는 거친 숨을 내쉬
며 발가숭이 몸으로 와들와들 떨었다.
"어떻게 해줘! 어떻게 하라니까! 부탁이야. 부탁이야. 부탁해요."
나는 그녀의 빰을 때렸다.
"대강 해줘."
"더, 더, 더 세게 때려줘, 부탁이야."
이번에는 힘껏 후려쳤다. 그녀는 신음 소리를 내며 손을 뻗어 내 목에 매
달렸다. 내 목덜미를 물고 짐승처럼 몸부림쳤다. 외치는 소리로 방 안이
떨었다. 내가 그녀의 몸을 밀어내자 눈을 둥그렇게 뜬 채로 매트리스에 털
썩쓰러졌다.
마약환자를 가라앉히려면 마약을 가져오는 수밖에 없다.
나는 방을 나왔다. 그녀는 여전히 침대에서 신음하고 있다. 자기를 고통에
서 건져줄 수 있는 유일한 사나이의 이름을 불러댔다. 층계 중간에서 옆구
리에 보따리를 낀 화려한 스포츠 셔츠 차림의 가무잡잡한 작은 사나이를 만
났다.
나는 말했다.
"빨리 가는게 좋겠소. 안 그러면 단골손님을 하나 잃게 되오."
그는 흥 하고 층계를 올라갔다. 내 얼굴을 봐두려고 한번 돌아보았다. 나
도 녀석의 얼굴을 잘 봐두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 밖으로 나가지 않고 층
계 뒤로 돌아갔다. 그것 쓰레기통에 걸터앉았다.
15분쯤 기다리니 층계를 내려오는 가벼운 발소리가 들렸다. 발소리가 아래
층 바닦에 닿는 것을 기다렸다가 내다보니 현관문 쪽으로 다가가는 화려한
스포츠 셔츠가 보였다. 그가 큰길로 나가는 시간을 두고 뒤를 밟았다.
이 셔츠라면 눈보라 속에서도 미행할 수 있다. 노랑과 녹색의 화려한 무늬
가 난파선을 이끄는 등대처럼 두드러져보인다. 나는 그 뒤를 계속 따라갔
다. 상대가 걸음을 빨리하면 나도 빨리 걸으며 셔츠에서 결코 눈을 떼지
않았다. 세 블록을 가더니 그는 모퉁이를 돌았다. 놓치지 않으려고 나는 그
모퉁이로 달렸다. 재빨리 모퉁이를 돈 나는 콜트 38구경의 총구와 정면충
돌한 뻔했다.
그는 물었다.
"형씨, 무슨 일이지?"
의심이 많아보이는 갸름한 얼굴에 눈썹이 짙고 눈은 짙은 갈색이다. 코 밑
에 조그만 수염을 기르고, 이가 아랫 입술 위에 튀어나와 있다.
나는 말했다.
"대포 좀 치우게나. 이건 친구끼리의 이야기일세."
"나는 친구가 없어."
"클레어 브래니는 친구가 아닌가?"
그는 38구경을 내 배에서 떼지 않았다.
"친구라면 어쩔 셈인가?"
"제리 댈쇼도 친구가 아닌가?"
"대체 목적이 뭐요, 형씨?"
"피터 댈쇼를 죽인 녀석을 찾고 있어."
"왜?"
"찾고 싶어서 찾는거야."
그는 다그치듯 총구를 내렸다.
"그러고 싶으면 이 가까이에 얼씬거리지 않는 게 좋아."
"그뿐인가?"
"그뿐이다, 형씨."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못할 것도 없지."
나는 돌아서는 척하다가 느닷없이 오른쪽 주먹을 그의 배에 쥐어 막았다.
방아쇠를 당기려 했으나 그 손목에 내 완손의 당수 촙을 먹였다. 그는 신음
소리와 함께 권총을 떨어뜨렸다. 나는 권총을 보고 끝으로 날려보냈다. 동
시에 그를 끌어당겨 어깨에 오른손을 후리쳤다. 칼날 같은 당수 촙이다. 그
는 고통에 어깨를 오므리고 얼굴이 흑처럼 일그러졌다.
"제리는 어디 있나?"
나는 물었다.
"몰라."
나는 손등으로 그의 입을 때렸다. 입가에서 피가 뿜어 나왔다.
"이봐, 나는 지금 농담하는 게 아니야. 사람을 죽이다만 일이 한두 번 있
지. 너도 그 맛을 보여줄 생각이다. 제리가 어디 있는지 말하는 게 좋을
걸."
"다른 사람한테 물어봐. 난 몰라."
나는 한 번 더 호되게 때렸다.
"물어보고말고. 제리는 어디 있지?"
"살려줘. 난 모른다니까."
이번에는 주먹으로 그의 입을 정통으로 갈겼다. 이가 부러져나 튀어나오고
그도 말할 기분이 되었다.
"알았어. 알았어. 안내하지."
"정직하게 안내해야 돼."
"틀림없이 데려다주지. 정말이오."
나는 그의 38구경을 하수구에서 주워 허리 혁대에 꽂았다. 그를 앞세우고
아버지를 잃은 마약환자를 찾으러 갔다.

스포츠 셔츠는 좁은 골목 안쪽의 작은 문 앞으로 나를 데려갔다.
그는 문을 손가락질하고 큰 새처럼 날아가버렸다. 아직 입에서 피를 흘리
고 있다.
나는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이지 않았다. 불도 켜져 있지 않았다.
나는 다시 두드렸다.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야?"
"손님이다."
"돌아가."
나는 말했다.
"문을 열어라, 댈쇼."
"돌아가라니까."
"문을 부쉬도 괜찮나?"
"아, 부숴, 부숴. 부수고 들어와."
골목 반대쪽 벽까지 물러나서 두 발에 힘을 주었다. 어깨가 문에 부딪치자
낡은 나무판자가 우지직 부서졌다. 나는 방으로 엎어져 들어가 가까스로 균
형을 잡고 섰다.
전등 스위치를 손으로 더듬었다. 사슬 끝이 겨우 손에 잡혔다. 그것을 끌
어당기니 어둡침침한 전등이 약한 빛을 좁은 방에 던졌다.
델쇼는 침대 위에서 벽에 기대어 웅크려 앉아 있었다.
지갑 속의 사진으로 본 댈쇼가 아니다. 긴 코는 같았다. 파르스름한 눈도
같았다. 그러나 그 얼굴은 여위고 광대뼈 밑으로 피부가 푹 꺼져 있었다.
입술에는 핏기가 없고 드러난 두 팔에는 바늘자국이 해아릴 수 없이 많은
주사횟수를 알려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그의 눈이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다. 얼굴에 뻐끔히 뚫린
소용돌이 구멍처럼 쉴새없이 껌뻑이고 있었다. 눈동자는 시커맣게 퍼져 침
울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신들린 눈이다. 유령에 사로잡힌 눈이다. 헤로인이라는 이름의 유령에.
나는 물었다.
"댈쇼지?"
"당신은 누구? 문을 부수고 다니는 당신은 누구야?"
"커트 캐넌이다. "
"커트 캐넌?"
그는 목구멍 속에서 가날프게 웃었다.
"서글픈 탐정이로군."
다시 한번 킥킥 웃고 영양실조인 큰 쥐처럼 벽에 몸을 기대며 웅크렸다.
나는 말했따.
"자네를 찾아달라고 아버지에게 부탁받았네. 누군가가 아버지를 죽이기 전
에."
"그래?"
"그렇다. 아버지는 나더러 자네를 찾아내게 하여 마약을 못 맞도록 하려고
생각했지. 꿈을 꾸고 있었던 거야. 아버지는."
"당신이 알 게 뭐야!"
그는 더시 킥킥 웃었다. 앙상한 얼굴에 이만 반짝였다.
"흰 개를 쫗아버린다고? 웃기는군. 렉싱턴 시에 좋은 병원이 있다고 아버
지는 말했지. 켄터키 주 렉싱턴이래 치료할 돈도 있다고 했어. 거긴 형무
소나 다름없지."
나는 말했다.
"모두 거기서 치료받고 있어."
"붙잡힌 녀석들 말이겠지. 나는 죄짓지 않았어."
"짓고 있지."
"무슨 죄를?"
"아버지는 자네를 살리려고 했을 뿐이야, 제리. 쏠 것까지는 없었어."
댈쇼는 침대에 일어나앉았다. 눈이 커다래졌다. 그러나 여전히 흐릿한 죽
은 사람의 눈이었다.
그는 말했다.
"당신 머리가 돌았군."
"다른 사람이란 말인가? 사촌누이 메리? 그 아이는 너무 바빠. 클레어? 그
녀는 자네와 마찬가지로 마약밖에 몰라. 이디스 로시? 그녀는 자네를 구해
내려 하고 있지. 자네 아버지가 같은 기분이였다는 것도 알고 있어."
"엉터리야, 캐넌. 또 어디든 부수고 나가줘. 난 자야겠어."
"마약업자가 했을까 하고도 생각했었지. 하지만 무엇 때문에? 녀석에게 있
어 자네는 푼돈벌이밖에 안돼. 아버지는 꼭 한 사람에게만 위험한 존재였
어. 내가 도와주지 않겠다고 거절하면 아버지는 경찰에 가서 상담했을 꼭
한 사람에게만."
권총을 베개 밑에서 나왔다. 내가 혁대에 꽂은 38구경을 빼는 것보다 빨랐
다. 댈쇼는 그것을 꼭 쥐었다. 권총 뒤에서 그는 침대에 번듯이 누워 빙그
레 웃었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말을 토막토막 잘라했다.
"그것이 어떻다는 거지?"
"어떨 것도 없어. 아버지는 자네를 고치려고 했지. 그런데 자네를 고치는
데는 전기의자가 가장 좋을 것 같군. 유일한 용속 치료법이야."
"누가 의자에 데려다주지?"
"니다."
"헤, 농담이겠지."
"정말이다. 나는 3초 안에 자네한테서 권총을 빼았는다. 그런 다음 시민에
의한 체포라는 형태로 경찰국 살인과에 보내지. 내가 그것을 하겠다."
그는 말했다.
"사는 게 싫어졌나보군."
"그래. 맞았어. 그저 자네를 책망하는 게 아니야. 나를 쏘는 것은 자유지
만, 머잖아 자네는 잡힐걸. 그리고 나를 쏘아주면 고맙겠어. 자네도 아는
내 친구의 말을 들어보면, 나는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사람이니까."
나는 침대로 한 걸음 다가섰다.
"권총을 이리 내."
그는 침대에 일어나앉으며 재빠르게 말했다.
"움직이지 마!"
바짓가랑이가 구겨져 무릎 위로 말려올라갔다. 주사바늘자국은 다리에도
있었다.
나는 한 손을 내밀고 침대로 다가갔다.
그의 눈은 공포로 둥그래져 있었다.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방아쇠에
걸린 손가락을 쳐다보았다.
손가락에 힘이 주어져 관절이 하애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나는 꾸짖듯 소리쳤다.
"권총을 이리 내라니까."
한순간 쏘는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침대에 스스로 털썩 쓰
러지고 권총은 소리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눈
물이 가슴을 찢었다.
"나는 틀렸어. 나는 틀렸어."
"자네는 차를 잘못 탔을 뿐이야."
"내 아버지야. 친아버지야. 나는 틀렸어."
나는 말했다.
"자, 가자."
어두운 골목에서 햇빛이 넘치는 보도로 데려나온 뒤에도 그는 아직 울고
있었다. 살인과 사람들 앞에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의 권총을 그
들에게 넘겨주고, 탄흔(彈痕)검사를 하면 피터 댈쇼의 시체에서 나온 총알
과 들어맞을 거라고 가르쳐주었다.
치하를 기다리지 않고 경찰을 나온 나는 가까운 술집으로 달렸다.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마시면서 나는 소년의 일을 생각했다. 그를 마약과
친아버지 살해로 몰아간 유령의 일을 생각했다. 유령은 끝까지 그에게 들어
붙어 떠나지 않을 것이다. 유령은 여간해서는 죽지 않는다. 유령에 대해 나
는 모르는 것이 없다.
나는 글라스를 들어 죽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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