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종 - 비련의 화인 3

3학년2반 | 2022.01.30 08:02:20 댓글: 0 조회: 626 추천: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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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낙화

장만두는 수사망에 걸린 대어급 용의자라고 할 수
있었다. 충분히 신문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이었다.
허걸로부터 장만두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를 듣고 난
조태는 손바닥으로 책상을 쳤다.
"당장 데려다가 신문해!"
"좀더 두고 보는 게 어떨까요?"
허걸은 좀 망설였다.
"시간이 없어, 이건 시간을 다투는 일이란 말이야!"
사실 시간을 다투는 사건이었다.
"알겠습니다. 먼저 송태하 기자의 이야기를 들어
보고 나서 그 사람을 데려오죠."
"송 기자는 왜?"
"아무래도 송 기자가 그 사람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아서입니다."
"우선 장만두 신병을 확보해 놓으라구. 그리고 나서
송 기자 이야기를 들어 봐도 되잖아. 장 교사가 그
동안에 잠적이라도 해버리면 곤란하잖아."
"그럼 그렇게 하죠."
허걸은 누구를 한 사람 데리고 갈까 하다가 혼자
찾아가 보기로 했다. 이미 그의 집을 알고 있기
때문에 집으로 직접 찾아갔다.
오후 세 시경이었는데 장만두는 집에 없었다. 그의
노모가 나와 허걸을 맞았는데 매우 쇠약해 보이긴
했지만 인자한 인상이었다. 반백의 머리에 깔끔한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데 차마 경찰에서 왔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곧 올 테니 들어와서 기다리라는 것을
사양하고 계단을 내려왔다.

송태하 기자는 펄쩍 뛰었다.
"그건 넌센스입니다!"
그는 한마디로 형사들의 말을 일축해 버렸다.
"송 기자는 왜 그 사람을 굳이 옹호하려고 드는
거지요?"
조태가 알 수 없다는 듯 실눈을 뜨고 상대방을
쳐다보며 물었다.
"옹호하는 게 아닙니다. 그럴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말하는 겁니다. 그 사람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그
사람은 신문을 보고 사건을 알았고, 그래서 병문안을
갔던 것뿐입니다. 그것도 제가 안내해 준 겁니다."
"두 사람은 육 년 동안이나 사랑하던 사이였어요.
그리고 결혼까지 굳게 약속한 사이였어요. 그런데
일방적으로 송묘임 씨는 장 교사를 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해 버렸어요. 장 교사가 배신감을 느꼈을
것은 뻔한 이치 아닌가?"
"차암, 반장님두……. 그건 벌써 구 년 전의
일입니다, 구 년 전의 일이란 말입니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는 지금도 독신으로 지내고
있고 이제 와서 병원에 문병까지 갔어요. 송 기자
누님을 잊지 않고 있다는 얘기야."
"그래서 장만두 씨가 청미를 유괴했다는 겁니까?"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지. 사람이란 평생을 두고
복수의 칼을 가는 수도 있으니까."
"그 사람은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태하는 격해서 말했다.
"어떻게 그렇게 단정할 수 있지요?"
허걸이 물었다.
"저는 그 사람의 인품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절대
그런 흉악한 짓을 저지를 사람이 아닙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히는 수도 있지요. 알다가도
모르는 것이 사람 속이니까요."
"그렇긴 해도 그 사람은 아닙니다."
"그 사람에게 단단히 반해 있군요."
조태가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바로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형사 한
명이 방 안으로 들어오더니 조태의 귀에다 대고
무엇인가 속삭였다. 송태하는 기자의 본능으로 그들이
하는 수작을 신경을 곤두세우고 바라보았다.
조태의 안색이 창백해지고 있었다. 형사가 나가고
나자 조태는 얼어붙은 표정으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앉아 있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송 기자가 답답하다는 듯 물었다. 허걸은 잠자코 조
반장이 입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야기해도 괜찮겠지?"
이윽고 조 반장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곤란하면 제가 자리를 피해 드릴까요?"
"아, 그럴 필요 없어요. 어차피 알게 될 테니까
그대로 있어요."
두 사람은 긴장해서 조태의 표정을 살폈다. 조태는
얼른 담배를 한 대 피워 물고 나서 연기를 한번 길게
내뿜었다. 그런 다음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고,
"청미 시체가 발견됐대."
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얼빠진 표정으로 서로 쳐다보기만 했다.
그 한마디는 너무도 큰 충격을 그들에게 안겨 주었던
것이다. 청미가 아직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느다란 희망마저 이제 날아가 버린 것이다. 긴장이
확 풀리면서 허탈감이 밀려 왔다.
"부산역에서 발견됐대. 대형 가방 속에 들어 있는
것을 승무원이 발견했나 봐. 조금 전에
발견했다는군."
"열차 속에서 발견했나요?"
"그런가 봐."
"그럴 수가……."
조태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더니 벌떡 일어섰다.
"지금 바로 가면 일곱 시 비행기를 탈 수 있겠어.
자, 빨리 가자구."
이렇게 되면 장만두를 만나는 것은 뒤로 미루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 허걸도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송묘임에게는 충격에 견디지 못할 것을 생각해서
다음에 알려 주기로 하고 우선 홍상파에게만 송
기자가 연락을 취하기로 했다. 부모 중의 누구 한
사람이 직접 부산에 내려가서 청미의 시체임을
확인해야 하기 때문에 형사들은 홍상파와 함께
내려가고 싶어했다.
수사관들이 직접 지켜보는 앞에서 태하는 매형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매형의 집과 같은 아파트 건물
아래층에 수사본부를 차리고 있었기 때문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직접 올라갈 수도 있었지만 그는
차마 마주 대하고 말할 수가 없을 것 같아 전화로 그
불행한 소식을 전했다.
"저……태하입니다."
그는 목이 잠겨 말을 꺼내기가 몹시 힘들었다.
귀여운 조카의 죽음에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지만 그것을 목구멍으로 집어삼키면서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저기……조용히 제 말을 들어 주십시오. 청미에
대해 좋지 않은 소식이 지금 막 들어온 것 같습니다."
"무, 무슨 소식……?"
상파는 펄쩍 뛰는 것 같았다. 그는 집 안에
칩거하고 있었다. 거의 넋이 빠져 아무 일도 못 하고
있었다.
"방금 소식이 들어왔는데……청미가……."
태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면서 수화기를 바꾸어
들었다.
"청미가 어떻게 됐다는 거야?"
"죽은 것 같습니다."
"뭐라고?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자네
미쳤나? 다시 한 번 말해 봐!"
"청미의 시체가 부산에서 발견되었답니다.
그래서……."
"개소리 말아!"
"그래서……."
"개소리 말란 말이야!"
전화를 동댕이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송 기자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면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제 말을 믿지 않습니다. 조금 기다려 보죠.
내려오실 겁니다."
"시간이 없는데……."
조 반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조금 있자 홍상파가 수사본부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청미가 죽었다고? 누가, 누가 그런 말을 해?"
금방이라도 누구를 때려죽일 듯이 노려본다. 그
기세에 눌려 사람들은 차마 말을 못하고 서로 눈치만
보았다.
"당신이 그런 말을 했지?"
상파는 급기야 조 반장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이러지 마십시오. 진정하십시오."
조 반장은 곤혹스런 얼굴로 상파의 손을 떼어
내면서 말했다.
"우리 청미는 어딨어? 말해 봐, 우리 청미는
어딨느냐 말이야!"
송 기자가 두 사람 사이에 끼여들어 상파를 떼어
냈다. 상파는 길길이 뛰면서 거의 울부짖다시피
소리치고 있었다. 그는 청미의 죽음을 믿으려 들지
않았다.
형사들은 발광하는 부정(父情)에 한동안 어쩔 줄을
모르고 쳐다보기만 했다.
"우리도 연락을 받고 현장에 가보려고 하는
참입니다.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뭐라고
단정을 내릴 수 없습니다. 지금 빨리 가면 일곱 시
비행기를 탈 수 있으니까 함께 좀 갑시다."
"난 갈 수 없어! 내가 왜 거길 가? 당신들이나
가보라구!"
안 가겠다고 버티는 그를 억지로 데리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들은 하는 수 없이 그를 거기에 남겨
두고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그들이 공항으로 막
출발하려고 할 때 상파가 뛰어나와 차에 올라탔다.

청미의 시체는 발견됐을 때 그대로 가방 속에 든 채
어느 병원 영안실에 놓여져 있었다.
가방을 열자 시체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죽은 지 닷새쯤 됩니다."
이것은 검시의의 말이었다.
"그렇다면 21일에 죽었다는 말입니까?"
조 반장이 날카로운 어조로 물었다.
"네, 그쯤 됩니다."
검시의는 머리가 훌렁 벗겨져 있었다.
대형 가방은 검정색 가죽으로 만들어졌고 밑에는
바퀴가 달려 있었다.
"시체는 비닐 속에 봉해져 있었습니다. 냄새가
밖으로 새지 않게 하려고 그렇게 한 모양입니다."
관할 구역의 형사 반장이 말했다.
"사인은 뭡니까?"
"다량의 수면제를 먹여서 죽였습니다."
검시의는 대머리에 달라붙은 파리를 손으로
쫓으면서 말했다. 그들의 이야기는 상파의 통곡소리
때문에 때때로 막히곤 했다.
시체는 몰라볼 정도로 썩지는 않았기 때문에 아직은
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청미 양이 맞습니까?"
조 반장이 상파를 보고 냉정하게 물었지만 그는
거기에는 대답하지 않고 시체를 끌어안고 목놓아 울고
있었다.
사실 물어 보나마나한 일이었다. 자기 자식이
아니라면 썩은 시체를 부둥켜안고 그렇게 통곡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형사들은 확인을 받고 싶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송 기자를 붙들고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청미가 맞습니까?"
"맞습니다."
태하는 울음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 반장은 형사들에게 상파를 데리고 나가라고
눈짓을 보냈다. 형사 두 명이 몸부림치는 상파를
끌다시피 밖으로 데리고 나가자 비로소 실내가 좀
조용해지는 것 같았다.
청미는 지난 7월 15일 아침 학교에 갈 때의 그 차림
그대로 노란 비옷을 입고 있었다. 그것은 나중에
상파의 입을 통해 확인한 사실이었다.
허걸은 시체의 머리카락을 만져 보았다. 숱이 많은
검은 머리칼은 양 갈래로 길게 땋아져 있었다. 그런데
가만 보니 한쪽 갈래가 짧아 보였다. 대충 보아
5센티미터 이상은 짧은 것 같았다.
허걸은 그 부분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조 반장을
쳐다보았다.
"머리가 잘렸는데요."
"음, 그렇군."
"일부러 자른 모양인데요."
조 반장은 잘린 머리를 힐끗 쳐다보고 나서 관심이
없는 듯 시선을 돌려 버렸다.
"유괴되기 전에도 한쪽 머리가 이렇게 짧았나요?"
허걸은 송 기자에게 물어 보았다.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제가 청미를 본 지는
서너 달 전이었으니까요."
상파에게 딸의 시체를 다시 보인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었지만 의심나는 것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하는 수 없는 일이었다.
다행히 상파는 더 이상 울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를 데리고 들어와 시체를 보이고 필요한 것들을
물어 볼 수 있었다.
"청미 양 머리가 원래 이렇게 짧았나요?"
허걸은 잘린 머리칼을 만지며 물었다. 상파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오, 이렇지는 않았습니다. 양 갈래 길이가
똑같았습니다. 아내는 매일 딸애의 머리를 땋아 주곤
했습니다."
그렇다면 범인이 머리칼을 자른 모양이라고 허걸은
생각했다. 왜 아이의 머리칼을 잘랐을까? 겁을 주려고
그랬던 것일까? 참혹한 기분에 이어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만일 범인을 잡으면 내 손으로 죽일 겁니다.
반드시 내 손으로……."
상파는 주먹을 쥐고 몸을 떨었다. 눈물이 볼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까처럼 비통하게
울부짖지는 않았다.
시체를 맨 처음 발견한 사람은 역 구내에서 일하는
잡역부였다.
7월 26일 낮 열두 시 정각에 서울을 출발한 새마을
열차는 정확히 오후 네 시 사십 분에 부산역 플랫폼에
들어섰다.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고 조금 있자 잡역부들이 객실
칸으로 올라갔다. 그들은 의자에 씌워 놓은 커버도
벗기고 객실을 청소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이 객실 안 선반 위에서 큼직한
가방을 한 개 발견한 것이다. 가방을 들어 보니
묵직했다. 호기심에서 가방을 열어 본 그는 기겁을
하고 뒤로 물러났다.

청미의 시체가 발견됨으로써 사건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수사본부는 거의 절망적인 분위기 속에 빠져
있었다. 범인은 이제 골칫거리를 해치워 버리고
영원히 잠적해 버릴 셈인 것 같았다.
서울로 돌아온 송태하는 왠지 장만두에게 연락을
취하고 싶었다.
전화를 걸자 그는 이미 뉴스에서 들었다며 청미의
죽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목이 메어 말을 잘 잇지
못하고 있었다.
"누님은 알고 있나?"
"네, 조금 전에 하는 수 없이 이야기해 주었지요."
누님이 눈을 뒤집으며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는
말만은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바쁘십니까?"
"아니,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가 않아 그냥 앉아
있네."
"그러지 말고 나오시죠."
장만두는 송태하를 보자마자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어린애를 죽이다니……세상에 그럴 수가……."
그의 비통해 하는 모습은 태하가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였다.
태하는 조카가 살해되긴 했지만 그 정도로 비통해
하지는 않았었다. 감정이 무딘 편이기도 하지만 사실
조카와 그렇게 정이 든 것도 아니어서 비통한
감정에서 빨리 헤어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가 알기로는 장 교사도 청미와 그렇게 정이 든
것은 아니었다. 정이 들기는커녕 얼굴도 제대로
모르고 있을 것이다. 그는 오 년인가 육 년 전에
고궁에서 우연히 청미를 한 번 본 적이 있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지금쯤은 그 애의 얼굴도 제대로 기억하고
있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비통해 할 수
있을까. 누님을 아직 사랑하고 있기 때문일까.
그렇더라도 누님이 죽은 것은 아니지 않은가.
태하는 상대방의 비통해 하는 모습을 보고는 오히려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경찰에서 무슨 연락이 없었나요?"
"아니……."
만두는 충혈된 눈으로 송태하를 바라보았는데, 조금
놀라는 눈치였다.
"사실은 경찰이 형님의 과거를 캐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누님과의 관계를 캐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비통에 잠겨 있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지고 있는 것을 송태하는 놓치지 않고
관찰했다.
"어떻게 그걸 알았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만두가 물었다.
"아마 우리가 병원에 찾아가던 날 경찰이 미행한 것
같습니다."
"사실은 어제 내가 없을 때 집으로 누가 나를
찾아왔었나 봐."
"아마 경찰일 겁니다."
"경찰이 나를 의심하고 있나?"
"저한테 형님에 관한 것을 꼬치꼬치 캐물었습니다.
형님한테 혐의를 두는 것 같기에 저는 그럴 리가
없다고 펄쩍 뛰었지요.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겁니다.
원래 수사관들이란 아무것도 아닌 걸 가지고 신경을
쓰는 수가 있으니까요.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마음의 준비를 하고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입니다."
"고맙네, 생각해 줘서……."

허걸이 장만두의 집에 도착한 것은 만두가 송
기자를 만나기 위해 집을 나간 지 십 분도 채 못
되어서였다.
허걸은 이번에는 돌아가지 않고 집에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만두의 모친은 차를
끓여 온다, 과일을 깎아 내온다 하면서 허걸이 지루해
하지 않게 신경을 써주었다.
17평 아파트라 몹시 비좁아 보였다. 더구나
날씨까지 무더워 더욱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집 안은 구석구석 손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다.
집 안을 한번 휘 둘러본 허걸은 검소하고 근면한
인상을 받았다. 만두의 모친은 허걸을 아들의
친구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장 교사는 결혼하지 않을 겁니까?"
"아이고, 말도 말아요."
그녀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렇게 장가를 가라 해도 통 듣지를 않아요.
작년까지만 해도 선 보자는 데가 더러 있었는데
올해는 그것도 없어요. 이젠 나도 지쳐서 더 말을 못
하겠어요. 자식 눈치가 보여서 함께 있기도 불편해요.
걔도 나한테 미안한가 봐요. 하여간 이해할 수 없는
애예요. 옛날에 아가씨를 한 명 데리고 온 적이
있는데, 아마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니었는가
생각되는군요. 그 후로는 여자를 집으로 데려온 적이
없었으니까요. 난 그 아가씨하고 결혼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봐요. 아주 집안도 좋고 예쁜
아가씨여서, 우리 애 형편에는 좀 과분하다
싶었는데……아니나다를까,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아가씨가 다른 남자한테 시집을 가버렸나 봐요. 그
애가 상심하는 걸 옆에서 보자니까 내가 더 마음이
아프더군요. 그 뒤로는 여자라면 고개를 흔들어요."
그녀는 의외로 말을 술술 잘 늘어놓았다.
"왜 결혼하지 않는 겁니까?"
"글쎄, 나도 모르겠어요. 하여간 그때 그 아가씨
때문에 너무 상심을 했나 봐요."
"하지만 벌써 오래 전 일 아닙니까?"
"그렇지요, 오래 전 일이지요. 내 자식이긴 하지만
그 애 속은 아무래도 모르겠어요."
작은 아파트라 조그만 방이 두 개 나란히 잇대어
붙어 있었다. 그 중 조금 큰 방을 장만두가 사용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만두의 방에 앉아 있었다.
창가에 앉은뱅이 책상이 하나 놓여 있었고 한쪽
벽에는 책장이 두 개 세워져 있었다. 책장 속에는
책들이 가득 꽂혀 있었다.
방 안을 더듬던 허걸의 시선이 문득 책장 한쪽에
머물렀다. 책장의 중간쯤 되는 선반 위에 인형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요새는 그 애한테서 홀아비 냄새가 나요."
그녀는 말끝에 입을 가리고 소리 없이 웃었다.
"친구분들이 주위에서 서둘러서 장가를 좀 보내
줘요."
"잘 알겠습니다."
그것은 앞치마를 두른 소녀 인형이었다. 소녀는 한
손에 바구니를 들고 웃고 있었다. 눈이 큰 소녀였다.
머리칼이 유난히도 까맣게 빛나고 있었다. 얼른
보기에도 잘 만든 인형 같았다.
만두의 모친이 밖으로 나간 틈을 타서 그는 인형
앞으로 다가섰다. 마흔 살의 노총각 방에 인형이
있다는 것은 어쩐지 이상했다. 그가 인형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만두의 모친이 들어왔다.
"예쁘게 생긴 인형이군요."
"아, 그건……."
노파는 입을 벌린 채 의아한 눈으로 인형을
바라보았다.
"어머님께서 사다 놓으신 겁니까?"
"아니에요. 우리 애가 작년에 어디서 사가지고 온
건데…… 프랑스에서 만든 거래요."
"왜 이런 걸 사다 놓았을까요?"
"글쎄요, 장가도 못 가는 것이 자식은 가지고
싶었던 모양이죠. 그런데 참 이상하네……."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뭐가 이상합니까?"
"그때는 머리가 금발이었는데 지금 보니까
까만색이네. 잘못 보았나? 내가 죽을 때가 됐나
보지요?"
그러면서 그녀는 쓸쓸하게 웃었다.


20. 알리바이를 대시오

기다리기에 지쳐 허걸이 가려고 막 일어서는데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장만두의 모친이 달려가
문을 열어 주자, 장만두가 땀에 젖은 모습으로
들어서다가 허걸을 보고는 그만 안색이 창백해진다.
"손님이 오셨어. 한참 기다리셨다."
허 형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해 보였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구청에서 왔습니다."
장만두의 눈에 혼란이 이는 것 같았다.
"난 친구분이신 줄 알았는데……."
만두의 모친도 당황하는 것 같았다.
만두는 화장실로 들어가 얼굴을 씻고 나왔다.
방으로 들어온 그는 문을 닫았다. 어머니에게
말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려고 그러는 것 같았다.
"구청에서 오신 게 아니죠?"
그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목소리까지 떨리고
있었다.
"네, 어머님께서 놀라실까 봐 그렇게 말씀드린
겁니다. 경찰에서 왔습니다."
"오실 줄 알았습니다."
한숨 섞인 소리로 그가 말했다.
"준비하고 있었다 이 말씀이군요?"
"준비할 것도 없죠, 뭐."
문이 열리더니 만두의 모친이 저녁식사를 차려도
되겠느냐고 물어 왔다.
"이따가 먹겠습니다."
"저녁을 먹어 두는 게 좋을 겁니다."
수사본부에 연행되면 먹는 것이 시원찮기 때문에
하는 말이었다.
"아뇨, 지금은 생각이 없습니다."
하긴 지금 무슨 정신으로 저녁을 먹겠는가.
모친이 나가자 허 형사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함께 좀 가주셔야겠습니다."
만두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고 하면 갈 수밖에 없겠지만……무슨 이유로
저를 연행하려고 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군요."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유괴 살해된 청미 양 사건
때문에 뭐 좀 알아볼 게 있어서 그럽니다. 강제로
연행할 수도 있지만 장 선생은 교육자이시니까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저를 의심하시는군요?"
"그 이야기는 가서 합시다."
두 사람이 심각한 표정으로 나가려고 하자 만두의
모친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 밤중에 식사도 하지
않고 어디 가느냐는 어머니의 근심 어린 물음에
만두는 웃으며 말했다.
"잠시 다녀올 데가 있어서 나갔다 오겠습니다. 혹시
오늘 밤 못 들어오더라고 기다리지 마십시오."
택시를 타고 수사본부로 가는 동안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입을 굳게 다문 채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장만두는 참담한 표정으로 창 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수사본부에서는 조태가 토끼눈을 한 채 허 형사가
장만두를 데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허걸은 장만두를 조태에게 넘기면서 귓속말로,
"청미 양 시체는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아직 집에 있을 거야."
조태는 턱으로 위를 가리켰다.
"내일 화장할 모양이야."
"잠깐 다녀오겠습니다."
"뭣 하러? 공기가 험악하던데……."
허걸은 거기에는 대답하지 않고 얼른 밖으로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팔 층으로 올라갔다.
청미네 집에는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거의가
친척들 같았는데,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 무겁고 침통한 분위기에 압도된
허걸은 안으로 들어서기가 망설여졌다.
더구나 그를 쳐다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하나같이
적의가 번득이고 있었다. 그것은 유괴범 하나
체포하지 못하고 결국 아이를 죽게 한 무능한 경찰에
대한 적대감이었다. 그렇다고 발길을 돌려 나가기도
뭣했다.
그때 다행히 송태하 기자가 방에서 나오다가 그를
발견하고는 안으로 맞아 들였다. 허 형사가 눈짓을
하자 송 기자는 그를 아무도 없는 방으로 안내했다.
"청미 양이 지금 여기 있습니까?"
"네, 자기 방에 있습니다. 내일 화장할 겁니다."
"시신을 다시 한 번 봤으면 하는데……."
"뭐 하려구요?"
송 기자가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보이며 물었다.
"그럴 일이 있어서 그럽니다. 잠깐이면 됩니다."
"무슨 일인지 말씀해 보십시오."
"지금은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럼 시신을 보여 줄 수 없습니다. 절대로……."
송 기자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이건 수삽니다. 수사상 필요해서 그러니까 보여
주십시오. 보여 주지 않으면 강권을 발동할 수도
있습니다."
"강권?"
송 기자는 코웃음을 쳤다.
"웃기지 마시오. 애가 이미 죽어 버렸는데 수사는
해서 뭣 합니까? 그건 당신네 경찰이 할 일이고, 이제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송 기자는 상당히 격해 있었다. 허걸은 난감했다.
"사건 기자라면 누구보다도 우리 경찰을 잘 이해해
줄 줄 알았는데……."
허걸이 섭섭하다는 투로 말하자 송 기자는 또
코웃음을 쳤다.
"이해하라구요? 더 이상 어떻게 이해하라는
겁니까!"
허걸은 송 기자를 쏘아보다가 하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 알고 싶다면 말하죠. 일단 시신을 보여 주시오.
그 방에는 지금 누가 있습니까?"
"누님 내외가 있습니다."
"누님도 와 계십니까?"
"병원에 그대로 입원해 있으라고 했지만
막무가내였어요."
그들이 청미의 방에 들어갔을 때, 상파와 묘임은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들은
벽에 등을 기댄 채 무릎 위에 올려놓은 팔 사이에
얼굴을 묻은 채 죽은 듯이 앉아 있었다.
태하가 매형을 부르면서 조심스럽게 어깨를 흔들자
상파가 고개를 쳐들었다. 하지만 허걸은 상파의
충혈된 눈에 살기가 서려 있는 것을 보고 주춤했다.
태하는 다음에 누님을 불렀다. 어깨에 손이 닿자
그녀는 부르르 떨면서 얼굴을 쳐들었다.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로 공포에 젖은 두 눈이 두 사람을 이상한
듯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 자리를 좀 비켜 주십시오."
송 기자가 두 번 되풀이해서 말하자 그들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잠자코 일어섰다. 쓰러질 듯
비틀거리는 묘임을 상파가 재빨리 부축해서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방 안에는 향 냄새가 가득했다. 윗목에 병풍이 쳐져
있었고 병풍 앞에는 상이 놓여 있었다. 상 위에는
청미의 사진을 넣은 액자가 세워져 있었다. 볼우물을
지으며 웃고 있는 귀여운 사진이었다.
허 형사는 향불을 피우고 나서 선 채로 고개를 숙여
어린 영혼의 명복을 빌었다. 송 기자가 문을 잠궜다.
두 사람은 병풍을 걷었다. 조그만 관은 흰 천에
덮여 있었다.
"뚜껑에 못질을 했나요?"
"아직 못 했습니다. 누님 내외가 한사코 말리는
바람에……."
"다행이군요. 염은 했나요?"
"아뇨, 그것도 반대하는 바람에……."
"하긴 뭐 화장할 거라면……."
송 기자가 흰 천을 걷어 내고 뚜껑을 열었다.
소녀는 색동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묘임이 입혀 준
모양이라고 허 형사는 생각했다. 관 속에는 청미가
좋아하는 인형들이 시체와 함께 가득 들어 있었다.
움푹 꺼진 눈자위를 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허
걸은 호주머니 속에서 성냥갑을 하나 꺼냈다. 그것은
빈 성냥갑이었다. 허 형사는 갑 속에서 실같이
가느다란 것 두 개를 끄집어냈다.
"그게 뭡니까?"
송 기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머리카락 같습니다. 이것이 청미 양의 잘린
머리카락인지 아닌지 알아보겠습니다"
"그건 어디서 났습니까?"
거기에는 대답하지 않고 허 형사는 시신 위로
허리를 굽혔다.
양 갈래로 땋아진 머리칼 중 5센티미터쯤 짧은
쪽에다 손에 들고 있는 머리카락을 갖다 대보았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그렇게 대보니 긴쪽
머리칼과 길이가 비슷해 보였다. 머리카락의 촉감이나
빛깔도 비슷해 보였다.
"이럴 수가……."
허걸은 창백해지면서 중얼거렸다. 그리고 송 기자를
돌아보았다.
송 기자의 안색도 창백해지고 있었다.
"송 기자가 직접 한번 살펴보세요."
허걸은 손에 들고 있는 머리카락을 송 기자에게
건네 주었다.
송 기자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고 허걸이
했던 것처럼 짧은 쪽에다 대보았다.
"똑같군요. 이럴 수가……."
이윽고 그는 허리를 펴면서 허걸을 쏘아보았다.
"육안으로 정확히 판별하기는 어렵지만 촉감과
빛깔까지도 비슷한 것 같아요. 정확한 것은
전문가에게 의뢰해야겠지만……."
"도대체 이건 어디서 났습니까?"
송 기자는 흥분을 억제하고 물었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목소리까지 떨리고 있었다.
"놀라지 마십시오."
"놀라지 않을 테니까 말해 주십시오. 어디서
났습니까?"
"약속했으니까 말해야겠지요. 하지만 당분간 비밀로
해야 합니다. 약속하지 않으면 말해 줄 수 없어요."
"약속합니다. 허락 없이는 절대 공개하지
않겠습니다."
"장만두 선생 집에서 가져 온 겁니다."
허걸은 그것을 가져 오게 된 경위를 이야기해
주었다.
"정말 우연이었습니다. 장 교사의 모친이 인형의
머리칼이 금발에서 검정색으로 바뀐 것 같다고 말하는
순간 퍼뜩 머리에 짚이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전에
부산에 가서 청미 양의 시신을 보고 머리 한쪽이 잘린
것을 보아 두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전혀
생각지도 못했을 겁니다. 장 교사를 기다리는 동안
모친 몰래 머리카락을 두어 개 그 인형에서 떼어
냈지요. 비교해 보려고 말입니다."
"장만두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송 기자의 얼굴에 살기가 돋고 있었다.
"우리가 이미 신병을 확보해 두었습니다. 아직
단언하기는 일러요. 전문가의 검사가 필요해요.
그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장만두는 지금 어디 있어요?"
"수사본부에 데려다 놨어요."
"그 새끼를!"
뛰쳐나가려는 송 기자를 허걸이 붙들었다.
"이거 왜 이래요? 다된 밥에 재뿌리는 거요?
약속했으면 가만 있어야지 왜 이래요?"
"그런 놈은 모가지를 비틀어 버려야 합니다!"
송 기자는 분을 이기지 못해 씩씩거렸다.
"냉철해야 할 기자 양반이 왜 이렇게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요? 아직 화를 내기는 일러요. 시간을
두고 증거를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첫째, 그
인형을 가져 오지 않으면 안 됩니다. 둘째,
전문가에게 양쪽 머리칼을 보여야 합니다. 셋째,
화장을 연기시키든지 시신을 매장하든지 해야 합니다.
넷째, 이건 첫 번째 증거에 불과합니다. 범행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물을 계속 찾아내야 합니다."
듣고 보니 옳은 말이었다. 성미 급한 송 기자는
금방 수그러졌다.
"화장을 연기시키든지 매장해야 하는 문제가
간단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내일 화장해
버리면 이 머리카락을 대조해 볼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증거로 채택하려면 청미 양의 머리를 이
상태로 당분간 보존해 두어야 합니다."
"머리카락을 잘라 두면 되지 않을까요?"
"과연 부모가 동의할까요? 더구나 어린것을 욕되게
하는 것 같고……."
허걸이 망설이는 눈치를 보이자 송 기자는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오히려 그것이 그 애를 덜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럴지도 모른다고 허 형사가 생각했다.
화장을 연기할 경우 시체는 더운 날씨에 더욱 썩을
것이다. 그런 것을 사람들에게 보인다는 것은 어린
영혼을 욕되게 하는 짓이다. 가매장을 해둔다 해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머리칼은 두 갈래로 되어 있는 것을 몽땅 잘라
내야 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제가 매형한테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여러 사람이 입회해야 하니까 내가
연락할 때까지 허락만 받아 놓으십시오."
허 형사는 송 기자에게 가위를 가져 오게 하여 우선
검사용으로 청미의 머리카락 몇 가닥을 잘라 냈다.

그 시간에 수사본부의 한 방에서는 조태가 장만두를
심문하고 있었다.
조 반장은 옷을 벗어부치고 본격적으로 심문에
나서고 있었다. 그가 먹이를 앞에 놓고 입맛을 다시고
있는 고양이라면 장만두는 공포에 떨고 있는 한 마리
생쥐 같았다.
그는 정말 보기에 애처로울 정도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조태는 수건으로 얼굴과 목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매서운 눈초리로 장만두를 노려보고 있었다.
"청미 양이 유괴된 날의 알리바이를 대지 못하면 장
선생의 입장이 매우 불리해진다는 걸 알아야 해요."
청미가 유괴된 날은 7월 15일이었다. 그 날은
금요일이었으므로 모든 학교는 정상 수업을 가졌다.
그러나 장 교사가 근무하는 K여고만은 그 날이 하필
개교 기념일로, 관례에 따라 수업을 하지 않았다.
장 교사는 청미가 유괴된 날이 하필 K여고의 개교
기념일과 겹치게 된 것을 자못 한탄했다.
"자, 그 날 낮 열두 시 전후해서 어디서 무얼 했죠?
개교 기념일 같았으면 기억날 거 아니오?"
만두는 앞에 버티고 앉아 있는 뚱뚱한 형사가
무서웠다. 흡사 자기를 지옥으로 데려갈 염라대왕
같다고 생각했다.
도저히 이 무지막지하게 생긴 사나이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조태는 상대방의 표정 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듯,
조그만 눈을 날카롭게 치뜬 채 만두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 자의 입을 찢어서라도 자백을 받아 내고야
말겠다고 그는 결심하고 있었다.
유괴된 아이가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는 바람에 그의
신경은 극도의 흥분 상태에 놓여 있었다.
"학부형을 만나러 갔었습니다."
만두는 가까스로 입을 열어 말했다.
"구체적으로 말해 보시오. 언제 어디서 무슨 일로
누구를 만났는지 자세히 말해 보시오."
책상 위에는 소형 녹음기가 작동하고 있었다. 그
밖에 메모지와 볼펜도 놓여 있었다.
"그 날 아침 어느 학부형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김수희라는 학생의 어머니라고 하면서
수희의 생일인데 꼭 점심을 대접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저는 말씀은 고맙지만 사양하겠다고
했습니다. 수희 양은 제가 맡고 있는 반의 학생으로
자주 말썽을 일으키는 문제 학생입니다. 학급 석차는
하위 그룹에 속해 있습니다. 아버지가 큰 사업을 하고
있는 유복한 가정의 딸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학부형의 대접을 받는 게 싫었을 뿐만 아니라 그 날
따라 비바람이 몹시 치고 있었기 때문에 수희
어머니의 요청을 거절했던 겁니다. 그런데 수희
어머니는 제가 거절하자 아주 노골적으로 유감의 뜻을
표시했습니다. 수희가 선생님한테 드릴 선물까지
사놓았는데 그럴 수가 있느냐는 거였습니다. 차를
보낼 테니 잠시만이라도 들러 달라는 거였지요. 저는
몹시 난처했습니다. 학부형이 점심을 대접하겠다고
집요하게 나오는 데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하는 수 없이 응하고 말았지요. 수희 어머니는 차를
보낼 테니까 그걸 타고 R호텔 커피숍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R호텔은 얼마 전에 수희 아버지가 신축한
호텔로 거기서 수희의 생일 파티를 한다는
거였습니다. 열한 시 반쯤 되니까 우리 집 앞으로
수희 어머니가 보낸 자가용이 왔습니다. R호텔에
도착한 것이 아마 열두 시 조금 지나서였을 겁니다.
R호텔은 아주 크고 호화롭게 지은 호텔이었습니다.
저는 수희 어머니의 말대로 커피숍에 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거의 한 시간 넘게 기다리고 있었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호텔 직원한테 물어
보았습니다. 이 호텔 주인 딸의 생일 파티가 있는
걸로 아는데 어디서 열리고 있느냐고 물었지요. 그
직원은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보더니 그런 파티는
없다는 거였습니다. 덧붙여 말하기를 이 호텔
사장님한테는 아들만 있지 딸은 없다는 거였습니다.
저는 몹시 당황했습니다. 그때처럼 당황해 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고 하면서 한 시간
정도 더 기다려 보았습니다만 역시 저를 데리러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호텔을 나온 것은
그러니까 두 시가 넘어서였습니다."
조태는 담배 연기 사이로 냉소를 띤 채 만두를
바라보고 있다가, 급히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상체를 앞으로 구부렸다.
"아주 그럴 듯한 말이군요. 꾸며 내느라고 수고가
많았습니다."
"꾸민 게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만두는 주눅이 들어 말했다.
"그 말을 증명해 줄 증인이 있습니까?"
"그 호텔 직원이라면……."
"당신이 그 호텔 직원한테 물어 본 것은 한 시가
지나서였어요. 호텔에 도착해서 한 시간 넘게
기다리다 지쳐서 그 사람한테 물어 본 거예요.
그렇죠?"
"네, 그렇습니다."
"바로 그 시간에 청미는 유괴되었어요. 내
생각으로는 청미는 열두 시 조금 지나 유괴되었어요.
청미를 차에 태워 가지고 한 시경에 R호텔에 도착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해요. R호텔에 도착해서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호텔 직원한테 말을
걸었겠지요."
만두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럼 열두 시에서 한 시 사이에 당신이 그 호텔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 줄 증인을 말해 봐요! 그걸
증명하지 못하면 당신 말은 모두 거짓말이야!"
"저를 태워다 준 운전사가 있습니다."
"수희네 자가용 운전사인가?"
"아닙니다. 나중에 알아봤더니 수희네와는 관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차도 물론 수희네 것이
아니었습니다."
"무슨 차였어요?"
"정확히는 잘 모르겠습니다. 흔하게 굴러 다니는
로얄 같았는데 검정색이었습니다."
"차 넘버는?"
"모릅니다."
조 반장은 볼펜을 집어 던지고 상체를 뒤로 젖혔다.
팔꿈치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통통히 살찐 두 손을
깍지 끼었다.
"당신은 절망적이야. 가능성이 없어.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꾸며 내 가지고 빠져 나가려고 하지 마.
교육자라면 교육자답게 솔직히 털어놔. 교육자로서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으면 말이야. 우리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당신이라는 사람은 교육자의 탈을 쓰고
어린 여학생들을 농락해 온 사이비 교육자야."
장만두의 시선이 밑으로 떨어졌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못했다. 마치 가장 아픈 곳을 찔린
것처럼.
"당신이 꾸며 낸 알리바이만 해도 그래. 김수희라는
학생의 어머니가 왜 그런 허무맹랑한 전화를 했겠어?
그 전화 확인해 봤어요?"
"나중에 알아보았습니다. 다음 날 학교에서 수희
양을 불러 알아보았더니 모두 거짓말이었습니다. 수희
양의 생일은 12월이고, R호텔도 자기 아버지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오후에는 정말로 수희
어머니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수희한테서
들었다면서 어제 자기는 저한테 그런 전화를 건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목소리도 그 여자와는 달랐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누가 저를 골탕 먹이려고 그런
전화를 했던 게 분명합니다."
"골탕 먹이려고 차까지 보냈다는 말이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조태는 코웃음을 쳤다.
"그런 말이 통할 것 같아요?"
"통하든 안 통하든 사실입니다."
"그야 당신만이 아는 사실이겠지. 아무도 증명해
주지 않는 사실 말이야."
"누군가가 저를 불러내려고……."
말끝을 흐리며 만두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의 입에서 괴로운 신음소리가 흘러 나왔다.


21. 네가 범인이다!

빨리 올라와 보라는 허걸로부터 연락을 받고 조태는
만두를 취조하다 말고 수사본부를 나와 상파의
아파트로 올라갔다.
"이걸 한번 맞춰 보십시오."
조 반장은 허걸이 내주는 머리카락을 받아 들고
청미의 시체 위로 허리를 구부렸다.
이윽고 상체를 일으킨 그는 그때까지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허걸로부터 설명을 듣고서야
안색이 확 변했다.
"지금 당장 급한 건 장 교사의 집으로 가서 그
인형을 확보하는 겁니다. 그것이 없어지기 전에
말입니다."
"뭘 꾸물거리고 있는 거야? 당장 가서 확보해!
그리고 그 밖에 증거가 되는 것이 있을지 모르니까
샅샅이 뒤지라구!"
조 반장은 자못 흥분해서 소리쳤다.
"가택 수색 영장이 없어서……."
허걸이 난처한 표정을 짓자 그는 벌떡 일어섰다.
"영장이라구? 영장 좋아하네! 이럴 때 그런 거
기다리다가는 다 놓치고 말아. 가택 수색 영장이
아니라 장만두 구속 영장을 받아 오겠어.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어, 뒤따라 갈 테니까!"
허걸은 다른 형사 한 명과 함께 쫓기다시피
수사본부를 나와 장만두의 집으로 향했다.
아들 하나만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가랑잎 같은
노파를 놀라게 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아무리 직업이
형사라고 하지만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허걸은 마음을 다부지게 먹고, 놀란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노파를 묵살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노파는 그를 알아보고는 어떻게 된 일이냐,
우리 아들은 어떻게 됐느냐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사실은 구청에서 온 게
아니라 경찰입니다. 아드님은 아마 오늘 밤 못 오시게
될 겁니다. 조사할 일이 좀 있어서요."
"아이고, 우리 아들이 무슨 죄를 지었나요?
착하기만 한 우리 아들이……."
노파는 털썩 주저앉으며 눈물부터 닦았다.
허걸은 먼저 만두의 방에 들어가 보았다. 다행히 그
인형은 그가 처음 보았던 그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이 인형이 그전에는 분명히 머리가 금발이었나요?"
노파는 눈물을 찍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우리 아들이 사가지고 왔을 때는
금발이었어요. 그 동안 머리 색깔이 변했나 봐요."
"그랬나 보군요."
두 명의 형사들은 얌전히 앉아 있었다.
두 시간쯤 뒤에 나타난 조태는 그때까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앉아 있는 부하들을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다가 벌컥 화를 냈다.
"도대체 뭣들 하고 있는 거야? 영장 받아 왔으니까
빨리 시작해! 인형은, 인형은 어딨어?"
그는 노파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었다.
"여기 있습니다."
허걸이 턱으로 책상 선반 위에 놓여 있는 인형을
가리키자 조 반장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는 그것을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다가 이윽고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것을 집어 들고 머리 부분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참, 기가 막힐 노릇이군! 어린애 머리칼을 잘라
붙이다니……. 이건 엽기야, 엽기. 자, 이거 집어
넣어!"
조 반장이 인형을 형사에게 넘기자 그는 그것을
미리 준비해 온 대형 가방 속에다 넣었다. 그것을
보고 노파가 의아한 얼굴로 항의를 했다.
"아니, 그건 왜 가져 가나요?"
"미안합니다. 저희가 좀 보관했다가 나중에
돌려드리겠습니다. 사실은 압수 수색 영장을 가지고
왔습니다."
노파는 허걸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는 눈치였다.
공포에 떠는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기만 했다. 경찰이
가져 가겠다면 가져 가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있겠느냐고 그 눈은 말하고 있었다.
"압수 수색 영장이란 법적으로 증거가 될 수 있는
물건을 압수할 수 있고 또 집 안을 수색할 수 있는
권한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필요한 물건을
가져 갈 수 있고 또 집 안을 조사할 수가 있습니다.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허걸이 말을 끝내자 조 반장이 영장을 내보였다.
그러나 노파는 여전히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거기에
상관없이 형사들은 집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조그만
아파트였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릴 것도 없었다.
세 명의 남자들이 깡그리 뒤집어 놓는 동안 노파는
한쪽에서 부들부들 떨며 서 있었다. 우리 아들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도 크게 일어났구나, 불안에 떠는
노파의 표정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허걸은 장롱 서랍을 차례로 열어 보았다. 그것은
아주 낡은 장롱이었다. 서랍 속에는 옷가지들이 들어
있었다.
서랍은 세 단으로 되어 있었다. 그는 옷들을 모두
꺼내 바닥까지 훑어본 다음 도로 그것들을 대강 집어
넣고 서랍을 제자리에 밀어 넣었다. 마지막 칸에도
증거가 될 만한 것은 없었다.
서랍을 제자리에 밀어 넣었다가 문득 생각이 달라져
그것을 도로 완전히 빼냈다. 빈 공간이 나왔다. 밑은
방바닥이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가 않았다. 손을
넣어 휘저어 보았다. 먼지만 묻어 나왔다.
손을 턴 다음 라이터를 꺼내 들고 엎드렸다. 손을
깊숙이 넣어 라이터불을 켰다. 불을 이리저리
옮기면서 안쪽 끝까지 비춰 보았다. 맨 구석 쪽에
무엇인가 희끄무레한 것이 보였다.
어깨 부위까지 팔을 밀어 넣자 손끝에 와닿는
감촉이 있었다. 팔이 짧아 잡히지가 않았다. 볼펜을
꺼내 쥐고 팔을 다시 뻗어 보았다. 볼펜 끝으로
긁어대자 그것이 밀려왔다.
꺼내 보니 무엇인가 신문지에 둘둘 싸여 있었다.
풀어지지 않게 중간에 고무줄이 둘러쳐져 있었다.
먼지를 대강 털어 내고 노파를 돌아보았다.
"이게 뭡니까?"
"글쎄, 아들이……."
노파는 모르겠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고무줄을 벗겨 내고 신문지를 풀자 돈다발이
나왔다. 빳빳한 만 원짜리 묶음이 네 개나 되었다.
사백만 원인 것 같았다.
"돈이군요, 미안합니다."
그것들을 신문지에 도로 싸려다 말고 그는 갑자기
생각이 나서 주머니 속에서 수첩을 꺼내 펴보았다.
그가 펼쳐 든 페이지에는 지폐 번호가 적혀 있었다.
그것은 지난 7월 18일 홍상파로부터 범인의 손에
넘어간 일억 원의 일련 번호였다.
그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번, 세 번
양쪽의 번호를 대조해 보았다. 장롱 밑에서 꺼낸 네
다발을 풀어 놓고 수첩에 적어 놓은 번호와 맞추어
보니 놀랍게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허걸은 처음에는 몹시 놀랐고, 그 상태가 지나자
희열을 느꼈다. 그것은 결정적인 증거를 자신이
찾아냈다는 데서 온 희열이었다. 그는 들뜬 목소리로
조 반장을 불렀다.
"이걸 보십시오, 번호가 일치합니다!"
조태의 눈이 번득였다. 눈을 번득이면서 양쪽의
번호를 맞추어 본 그는 무릎을 치면서 기쁨에 넘친
목소리로,
"됐다, 됐어!"
하고 소리쳤다.

그들이 결정적인 증거물들을 가지고 수사본부에
도착했을 때, 장만두는 형사들을 상대로 마지막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다.
장만두가 갇혀 있는 방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허걸은
마침 거기에 대기하고 있는 송태하 기자의 제지를
받았다.
"나 좀 봅시다. 그자가 범인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까? 구속 영장이 떨어졌다는데……."
"거의 결정적입니다. 확실한 증거를 또 하나
잡았습니다."
허걸은 낮은 소리로 지폐건을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듣고 난 송 기자는 살기 어린 눈으로
만두가 있는 방을 노려보았다.
"기다리십시오, 이럴수록 냉정해야 합니다. 처리는
우리 경찰에 맡기십시오."
송 기자는 분노의 눈물을 삼키느라고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믿을 수가 없군요. 하지만 청미가 죽은 마당에
그놈이 범인이면 뭐합니까? 그렇다고 청미가 살아나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송 기자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얼굴로 허걸을 바라보았다.
"뭐라고 할말이 없군요."
"청미는 내일 예정대로 화장될 겁니다. 하지만 청미
머리칼은 자르기로 했습니다. 누님 내외가
동의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따가 봅시다."
허걸이 혼자 방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송 기자가
뒤따라 밀고 들어왔다.
"나도 협조했으니까 취재를 방해하지 마십시오."
워낙 거세게 밀고 들어오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다. 마침 수사본부엔 기자라고는 그 한
명뿐이었기 때문에 형사들은 그가 밀고 들어오는 것을
마지 못하는 체 받아 주었다.
장만두와 송 기자의 시선이 뜨겁게 부딪쳤다.
장만두가 당황한 표정인 데 반해 송 기자는 살기 어린
얼굴이었다. 먼저 황망히 시선을 거둔 쪽은 장만두
쪽이었다.
그때 조 반장이 책상을 치면서 소리쳤다.
"수갑을 채워!"
구속 영장이 떨어진 만큼 손목에 수갑을 채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옆에 서 있던 형사가 장만두의
손목에 수갑을 채운 다음 두 손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만두의 얼굴은 완전히 흙빛이었다. 그는 공포에
질려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너무 떨어대고 있었기
때문에 보기에 딱할 정도였다.
"당신은 어린이를 유괴했어. 그것만도 큰 죄야.
그런데 그 애를 살해했어. 그 결과가 어떤 건지 알아?
교사니까 그 정도는 알겠지."
"난 아, 아무것도……."
떠느라고 만두는 제대로 말도 못 하고 있었다.
"살고 싶어서 끝까지 부인하겠지. 죽으면서까지
아니라고 부인하겠지. 극악무도한 파렴치범은
죽으면서도 거짓말을 하니까. 그러지 말고 이왕 죽을
거 깨끗이 죽는 게 어때? 솔직히 털어놓고 유족들한테
용서를 빈 다음 편안한 마음으로 죽는 게 어때?"
장만두는 절망적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저한테는 노모가 계십니다. 저는 어머님보다 먼저
죽을 수가 없습니다."
"어린것은 먼저 죽어도 좋단 말인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어떻게 유괴했는지, 그것부터 이야기해 봐.
차근차근 자세히 이야기해 봐."
실내는 팽팽한 긴장과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이제
만두로부터 자백을 받아 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만일의 경우 그가 자백하지 않는다 해도 결정적인
증거들이 있기 때문에 그가 유죄를 받는 데 문제될
것은 없었다.
아직 재판만 받지 않았다뿐이지 그는 분명한
범인이었다. 머지않아 그에게는 사형 언도가 내려질
것이고, 그리하여 그는 노모를 홀로 이 세상에 남겨
둔 채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질 것이다. 이것은 모든
수사관들의 생각이었다. 심지어 송 기자까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장만두가 왜 청미를 유괴해 살해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 이유를 듣고 싶어 그는
분노를 누르며 거기에 버티고 있었다.
"저는 청미 양을 유괴하지 않았습니다."
만두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더럽게 살고 싶은 모양이군. 왜 그 애를 유괴했지?
배신에 대한 앙갚음이었나, 아니면 돈이 필요했나?"
만두는 힘없이 머리를 가로 젓는다.
"그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변태 성욕자인가? 어린
소녀만을 유괴해서 강간 살해하는……."
만두는 심하게 경련했다.
"말해 봐, 변태 성욕자지? 그래서 지금까지 결혼도
못한 거지?"
"어떻게 그런 말씀을……."
"시간 끌지 마! 시간 없어! 우리는 처자식이 있고
가정도 있어! 얼른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가 옷도
갈아입고 목욕도 하고 잠 좀 자야겠어. 7월 15일부터
차근차근 이야기해 봐. 그 날 청미를 어떻게 유괴해
갔지? 유괴해서 어디로 데려갔지? 집으로 데려갔나?
당신 어머니한테 물어 보면 알겠군."
"아, 안 됩니다! 어머니한테만은 제발……."
만두는 수갑찬 두 손을 쳐들었다가 책상 위로
힘없이 떨어뜨렸다. 그 바람에 수갑이 쩔그럭 소리를
냈다.
"끔찍이 어머니를 생각하는군. 청미를 택시에
태워서 데리고 갔나? 아니면 공범이 자가용을 몰고
왔었나?"
"저는 청미 양을 유괴하지 않았습니다. 왜 제가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겠습니까?"
만두는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거짓말 마!"
조 반장은 주먹으로 책상을 치면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조 반장의 무서운 눈초리에 만두는 조그맣게
위축되어 어깨를 움츠렸다. 그것을 보고 조 반장은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흘렸다.
"이 밤이 다 새도록 끝까지 거짓말을 하겠다 이
말이지? 양심에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그는 자리에 도로 앉더니 오른손을 밑으로 뻗어
가방을 열고 그 안에서 인형을 꺼냈다.
"이건 당신 집에서 가져 온 인형이야."
조 반장은 인형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이제부터 가장 민주적이고 과학적인 심문을
하겠소. 장 선생, 이거 당신 방에 있는 인형 맞지요?
당신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가져 왔으니까 부인하지는
못하겠지."
만두의 두 눈이 흡사 무슨 괴물을 보듯이 커졌다.
"맞아, 안 맞아?"
조 반장이 신경질적으로 고함을 질렀다.
"마, 맞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는 만두의 표정은 수학 교사치고는
더없이 바보스러워 보였다.
"그래도 범행을 부인하겠나?"
조 반장은 상체를 앞으로 구부려 만두의 얼굴을
들여다보듯이 하고 묻는다. 만두가 침묵을 지키자
그는 마침내 참을 수 없다는 듯 손을 들어 인형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이게 무슨 색깔이지?"
"검정색입니다."
"당신이 처음 이 인형을 샀을 때는 금발이었어.
그렇지 않았나?"
만두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옆에 서 있는
형사가 그의 어깨를 눌러 앉혔다.
"금발이었어, 금발이 아니었어?"
"그, 금발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뭐야? 모르는 사이에 퇴색되어 검정색으로
변했다는 거야? 수학 교사가 그런 비논리적인 주장은
하지 않겠지."
조태는 코웃음을 쳤다.
둘러서 있는 형사들 모두가 코웃음을 쳤다.
"저도 이제야 알았습니다. 그것이 왜 검정색으로
변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만두는 변명하려고 기를 쓰고 있었다.
그럴수록 심문자는 더욱 기세 등등하게 나오고
있었다.
"검정색으로 변한 게 아니야! 금발이 어떻게
검정색으로 변하겠어? 금발이 어떻게 흑발로 둔갑이
됐는지는 당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지 않아? 이게 누구
머리칼이지?"
조 반장은 머리카락을 몇 가닥 집어 올려 비벼댔다.
만두의 얼굴은 온통 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것은
더워서 흘리는 땀이 아니라 곤혹스러워서 흘리는
진땀이었다.
"누구 머리카락인지 말해 보란 말이야!"
"모, 모르겠습니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조 반장은 손을 뻗어
만두의 머리칼을 움켜쥐고 흔들었다.
"거짓말하지 마! 거짓말도 논리가 있어야 되는
거야!"
손을 놓자 만두의 머리칼은 수세미처럼 뒤엉켜
있었다.
"이거, 입이 아파 죽겠군. 일일이 다 이야기해야
하니 말이야. 허 형사, 이야기해 줘."
허걸은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장 선생, 우리는 자백을 강요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강요된 자백은 하나도 도움이 안 되니까요.
장 선생이 끝까지 부인하더라도 우리는 결정적인
증거를 가지고 있으니까 당신을 검찰로 송치할
겁니다. 굳이 밤을 지새면서까지 입씨름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 결정적인 증거란 게 도대체 무엇입니까?"
처음으로 만두는 따지듯이 물었다.
"바로 이겁니다."
허걸은 인형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머리카락은……우리가 조사한 바로는 유괴
살해된 청미 양의 머리카락입니다. 청미의 시체를
우리가 발견했을 때 청미의 머리카락 한쪽이 잘려
있었습니다. 양 갈래로 땋아진 머리의 한쪽이 잘려
있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만두는 놀라 부릅뜬 눈으로 허걸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말이 끝나고 한참이 지날 때까지도 그는
그런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흘러 나온 것은 신음 같은
한마디였다.
"믿어지지 않는 일입니다."
"네, 정말 믿어지지 않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청미 양의 머리카락입니다. 아직 과학적으로
입증되지는 않았지만 청미의 머리카락임에 거의
분명합니다. 장 선생이 자신의 방에 사다 놓은 인형의
머리카락이 죽은 청미의 머리카락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지요?"
"당신은 엽기적인 살인자야!"
조 반장이 소리쳤다.
"내가 설명할까? 당신은 청미를 살해한 다음 그 애
머리를 잘랐어. 아니, 죽이기 전에 잘라 냈는지도
모르지. 아무튼 잘라 냈어. 그것을 집으로 가져 가
인형의 머리에서 금발을 떼어 내고 본드로 청미의
머리칼을 하나하나 옮겨 붙였어. 바로 그 점이
엽기적이란 말이야. 그 심리는 심리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될 거야. 안 그래?"
"기가 막힌 말씀이군요."
만두가 자조하듯 중얼거렸다.
"기가 막히고말고. 어린애를 살해하고 나서 그
머리카락을 인형에다 옮겨 심다니, 정말 기막힌
이야기이고말고. 이건 변태야!"
모두가 증오하는 눈길로 만두를 쏘아보고 있었다.
특히 만두를 쏘아보는 송 기자의 두 눈에는 불길이
활활 일고 있었다. 그래도 얼굴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사람은 허걸이었다.
"장 선생, 그런데 이 인형을 구입하신 게
언제였나요?"
하고 그가 물었다.
"작년 봄이었습니다. 백화점에서 샀습니다."
"외제 인형인 것 같은데, 비싸게 줬겠군요?"
"네, 좀 비싸게 줬습니다. 프랑스제인데 육만
원인가 줬습니다."
"어느 백화점에서 샀습니까?"
"시내 H백화점에서 샀습니다."
"이상하군요. 결혼도 안 한 사람이 이런 비싼
인형을 사다니, 아무래도 이해할 수가 없군요. 이유가
뭡니까?"
만두의 얼굴이 다시 당혹감으로 일그러졌다. 그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는
대답을 못 하고 머뭇거렸다.
"왜 대답을 못 합니까? 이유가 있어서 샀을 게
아닙니까?"
"그냥……사고 싶어서 샀습니다. 인형이 예뻐서
샀습니다."
허걸은 머리를 흔들었다.
"그 정도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처녀가 예쁜
인형을 모은다면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당신은
사십대의 남자입니다. 파이프 같은 것을 수집해야
어울릴 중년 사내란 말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만두의 어두운 얼굴이 밑으로 숙여졌다. 그는
대꾸할 말을 잊은 듯했다.
"그런 거야 아무래도 좋습니다. 문제는 이 인형의
머리카락이 청미의 것이라는 데 있습니다. 왜 당신의
인형에 청미의 머리카락이 붙어 있을까요?"
"모르는 일입니다."
조 반장이 가방을 들어 뒤집었다.
책상 위로 네 개의 돈다발이 굴러 떨어졌다.
"당신 집 장롱 밑에서 나온 돈이야. 사백만 원이야.
지난 7월 18일 청미와의 교환 조건으로 범인이 가지고
있던 일억 원 중의 일부야. 우리는 지폐 넘버를 모두
적어 놨는데, 번호가 모두 일치해! 이래도
잡아떼겠어?"
만두는 돈다발을 얼빠진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머리를 가로 저으면서
말했다.
"뭐가 뭔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송 기자가 거친 숨을
내쉬며 그에게 돌진했다.
"모르긴 뭘 몰라? 이 살인자!"


22. 아빠의 눈물

장만두에 대한 심문은 계속되었다.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심문은 가혹할 정도로 계속되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결정적인 증거들을 확보한 경찰은 그를 진범으로
단정하고 밤 사이에 자백을 받아 내기 위해 혹독하게
추궁해 들어갔다.
그러나 장만두는 쉽게 자백하려 들지 않았다.
증거물에 대해서 추궁하면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고
완강히 잡아떼는 것이었다. 그는 겁에 질려
떨어대면서도, 그리고 더없이 나약해 보인만큼 쉽게
무너질 것 같으면서도 좀처럼 자백하려 들지 않았다.
밤 사이에 끝날 줄 알았던 심문은 이튿날까지 하루
종일 계속되었다. 장만두에게는 휴식이 전혀 허용되지
않았다. 책상 위에 엎드려 잠깐 눈을 붙이는 것도
금지되었다. 그가 기진맥진한 나머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입을 열 때까지 그러한 고통은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수사관들은 휴식을 취하면서 교대로 그를
상대했기 때문에 얼마든지 버텨 나갈 수가 있었다.
그들은 장만두가 보기보다는 의외로 끈질기고 강한
사나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하긴 흉악범이니
그럴 만도 하겠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겉으로 나약한
체 구는 것은 위장일 것이라는 데 그들은 의견을
같이했다.
그가 여간해서는 자백할 것 같지 않자 경찰은 그의
모친까지 연행해 왔다. 좀 가혹한 짓이었지만 사건을
빨리 종결짓기 위해서는 부득이한 일이었다.
장만두의 모친은 허걸이 맡아서 심문했다. 그는
아주 공손하고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아드님께서는 왜 지금까지 결혼을 하지 않았나요?"
이 질문은 처음 장만두의 집을 방문했을 때에도
그녀에게 물어 본 말이었다. 그녀는 똑같은 대답을
했다.
"글쎄,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함께 살고 있기는
하지만 그 애 속을 통 모르겠어요. 아무리 결혼하라고
해도 통 듣지를 않아요. 작년까지만 해도 그래도
중매가 들어오곤 했는데 마흔 살에 딱 접어드니까
중매쟁이 발길도 끊어지네요. 본인이 우선 서둘러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으니까 결혼이 자꾸만 늦어질
수밖에 없지요. 이젠 제가 그 애하고 함께 있기가
민망해져요."
"사귀는 여자도 없습니까?"
"없는가 봐요. 그전에 한 아가씨를 집에 데려온
적이 있는데……난 그 색시하고 결혼할 줄 알았는데
그 색시가 결국 우리 애를 떠나 다른 남자한테 시집가
버렸나 봐요. 인물도 곱고 집안도 좋은 색시라 우리
애한테는 좀 과분하다 싶었는데 아니나다를까 결국
우리 애 가슴에 못을 박고 가버렸지요."
"그 여자 이름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혹시나 해서 물어 봤는데 그녀는 그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네, 알고 있어요. 제 기억이 정확하다면……그
색시 이름은 송묘임이라고 했을 거예요."
그녀는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았다.
"아드님께서는 지금도 그 여자를 못 잊어하고 있는
게 아닙니까?"
그 말에 그녀는 희미하게 웃었다.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지만……벌써 아주 오래 전
일인데 여태껏 그럴려구요. 애들도 아니고 나이
마흔이나 됐는데 그렇지는 않을 거예요."
"인형 말인데 그건 육만 원이나 되는 비싼
인형입니다. 아드님은 왜 그런 비싼 인형을
샀을까요?"
"글쎄요, 저도 처음에는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묻지는 않았어요."
"혹시 누구를 주려고 산 게 아닙니까?"
"글쎄, 그건 잘 모르겠어요."
"그 전에도 인형을 산 적이 있습니까?"
"아니오. 그런 걸 산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만두의 모친은 머리를 가만히 흔들었다.
독신의 중년 남자가 비싼 인형을 샀다. 앞치마를
두른 소녀 인형을. 그는 돈 많은 사람도 아니다. 겨우
월급을 받아 생활하는 처지이다. 그런데 육만 원이나
주고 인형을 구입했다. 왜, 무슨 이유로 그것을
구입했을까? 그 이유를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허걸은 답답했다. 뚫릴 것 같으면서도 뚫리지 않는
시야가 말할 수 없이 답답하기만 했다. 장식용으로
사다 놓은 것일까? 아니야. 허걸은 머리를 저었다.
누구를 주려고 샀던 게 분명해. 누구를 주려고
샀을까? 혹시 청미를 주려고 샀던 게 아닐까? 왜
청미한테 그 인형을 주려고 했을까?
"그 인형을 산 지가 일 년이 훨씬 넘었는데……그
동안 그것은 쭉 집에만 있었습니까?"
인형이 살아 움직이지 않는 이상 집주인이 놓아 둔
그 자리에 언제까지고 놓여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허걸의 질문은 그런 뜻이 아니었다. 만두의
모친이 미처 그의 말뜻을 못 알아듣는 것 같자 그는
다시 말했다.
"혹시 그 동안 그 인형이 다른 집에 가 있지 않았나
물어 보는 겁니다."
"아니오, 그런 적은 없어요."
그녀는 천부당만부당하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쭉 집 안에서 굴러다녔어요."
"굴러다녔다는 건 한 곳에만 놓여 있지 않고
여기저기에 놓여 있었다 이 말씀입니까?"
"네, 그래요."
"아드님은 그 인형을 아꼈습니까?"
"네, 몹시 아꼈어요."
그 인형을 청미한테 주고 싶었다면 누구를
통해서라도 전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인형은 청미 손에 들어가지 않은 채 그의 집 안에서
굴러다니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아드님은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습니까?"
"아이들을 무척이나 좋아해요."
그녀는 떨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성실히 답변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 얼굴에 역력히 나타나고 있었다.
"만일 결혼하지 않을 생각이라면 어디서 아이를
하나 데려다가 기르고 싶을 만도 하겠군요?
아드님께서 혹시 아이를 하나 데려다가 기르겠다고
하지 않던가요?"
허걸은 처음으로 눈을 치뜨고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녀는 당황해서 머리를 흔들었다.
"아, 아니오. 그런 말 한 적은 없어요."
"두 식구만으로 적적하니까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결코 이상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네,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 애가 아이를
하나 데려다가 기르고 싶다고 말한 적은 없어요. 그런
말은 들어 보지 못했어요."
허걸은 마침내 청미의 사진을 꺼냈다.
"이 사진을 한번 봐주시겠습니까?"
만두의 모친은 허걸이 내민 사진을 떨리는 손으로
받아 들고 한참 동안 그것을 들여다본다. 허걸은
그녀의 표정의 변화를 읽으려고 눈을 날카롭게
치떴다.
"자, 솔직히 말씀해 주십시오. 이 아이를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당혹감으로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더욱
떨어댔다.
"이 아이가……누구, 누구 아이인가요?"
그녀가 더듬거렸다. 허걸은 울화가 치밀었다.
"이 아이를 모른다는 말씀입니까?"
"네, 모르겠어요. 처음 보는 아이예요."
"이럴 수가……."
허걸은 벌떡 일어났다가 도로 주저앉았다.
"이 아이를 정말 모르시겠습니까?"
"네, 모르는 아이예요."
"이 아이가 며칠 동안 댁에 갇혀 있었다는 거 다
알고 있어요. 아드님은 이미 자백했어요. 아드님은 이
아이가 댁에 며칠 동안 있었다고 자백했습니다.
그런데 왜 모친께서는 부인하십니까?"
그녀의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윽고 완강히 머리를 흔들었다.
"그럴 리가 없어요. 그 애가 그런 거짓말을 할 리가
없어요. 우리집에는 이런 어린아이가 머문 적이
없어요. 하늘에 맹세코 이 아이는 처음 보는
아이예요. 우리 애가 지금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는
몰라도 난 거짓말은 할 수 없어요.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런 터무니없는 말은 할 수 없어요."
허걸은 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내심 적지 않게
놀랐다. 그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다가 자신 없는 투로 이렇게 물었다.
"네, 좋습니다. 제가 오해했나 봅니다. 미안합니다.
그건 그렇고……. 장롱 밑에서 발견된 돈다발에
대해서 좀 말씀해 주십시오. 그건 사백만 원이나 되는
돈이던데 어디서 난 돈입니까?"
"그건 정말이지 전 모르는 돈이에요. 거기에 그런
돈이 들어 있는 줄도 몰랐어요. 아마 우리 애가 놔둔
모양이죠."
경찰은 일억의 행방을 찾기 위해 만두의 집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장롱 밑에서 발견된 사백만 원이
전부였다. 그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다.
집 안에서 찾아낸 두 개의 통장에 입금되어 있는
저금액의 총액은 팔백만 원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입금 날짜는 7월 5일로 되어 있었다.
7월 5일이라면 청미가 유괴되기 훨씬 전이다.
다시 밤이 찾아왔다. 취조관들도 이젠 지쳐 있었다.
"더 이상 진척이 없습니다. 시간 낭비인 것
같은데요."
부하의 보고에 수사본부장은 조서를 작성해서
검찰로 송치하라고 명령했다.
허걸은 아무래도 마음이 개운치가 않았다. 움직일
수 없는 물증을 확보했기 때문에 그것을 근거로
장만두가 유죄 판결을 받을 공산은 컸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기분이 납덩이처럼 무겁기만 했다.
마치 위 속에서 고깃덩이가 삭지 않은 채 그대로
덩어리째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왜 그럴까.
"그대로 검찰로 송치할 겁니까?"
"빨리 치워 버린 다음 발이나 뻗고 자고 싶어. 더
이상 질질 끌 필요가 없잖아."
조 반장은 지긋지긋하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그는 자백하지 않았습니다."
"자백은 아무 증거도 될 수 없어. 자신한테 불리한
자백일수록 말이야. 물증이 모든 걸 말해 주고 있지
않아? 그게 골치도 아프지 않고 가장 합리적으로 일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이야."
"하지만 그가 자백해 준다면 그것을 근거로 해서
더욱 구체적인 증거를 확보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를테면 청미를 유괴한 방법이라든지, 청미를 가둬
둔 곳이라든지, 청미의 시체를 담은 가방을 구입한
곳이라든지, 일억의 행방 따위를 알게 되면 보다
구체적인 증거물들을 확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공범 관계도 드러나야 하고 강치수를 살해한 것도
장만두의 짓인지 밝혀 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성급히 검찰로 송치한다면 나중에 문제가 생길지도
모릅니다."
"문제가 생기면 그때 가서 처리하면 되는 거고 일단
확보된 물증을 가지고 처리하는 거야. 이미 확보된
물증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해."
허걸은 장만두를 검찰에 송치하기 전에 한 번 더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진정으로 그와 속을
털어놓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가 취조실에 들어갔을 때 장만두는 책상 위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책상을 두드려도 그는 쉽게
깨어나지를 않았다. 이름을 부르며 어깨를 잡아
흔들자 가까스로 얼굴을 쳐들었는데 두 눈은 수면
부족으로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확보된 증거들을 우리는 포기할 수 없습니다. 장
선생한테서 억지로 자백을 받아 내려고 했던 우리가
잘못이었습니다. 지금까지 확보된 물증만으로도
당신은 충분히 기소될 수 있고 유죄 판결을 받게 될
겁니다."
지칠 대로 지친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다.
처음의 그 공포 어린 빛도 이제는 보이지 않았다.
"당신은 곧 검찰로 송치될 겁니다."
알겠다는 듯 그는 끄덕였다.
"당신은 일을 어렵게 만들고 있어요."
"그런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거짓말을 해서까지
죄를 뒤집어쓸 수는 없지 않습니까?"
"당신이 범인이 아니라면 우리가 확보한 물증에
대한 납득할 만한 해명이 있어야 해요. 그런데 당신은
그저 처음부터 끝까지 모르겠다고만 일관하고 있어요.
그런 식의 답변은 통하지가 않아요. 당신 말이 맞다면
누군가가, 물론 그 사람이 범인이거나 범인을 도운
공범이겠지만, 그 누군가가 있어 당신 집에 몰래
들어가 인형의 머리칼을 금발에서 흑발로
바꿔치기했다는 말이 됩니다. 아니면 똑같은 인형을
구해 미리 머리칼을 청미의 머리칼로 바꾼 다음
그것을 들고 당신 집으로 가서 당신의 인형과
바꿔치기했을 수도 있지요. 그리고 또 바로 그 사람이
장롱 밑에 사백만 원을 넣어 두었다는 말이 됩니다.
당신 말대로라면 이와 같은 결론이 나오고, 당신은
결국 그 누군가에 의해 함정에 빠졌다는 말이
됩니다."
장만두는 어깨를 웅크린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때까지도 그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자, 그렇다면 누가 과연 당신을 함정에
빠뜨렸을까요? 그럴 만한 사람이 생각납니까?"
장만두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생각나지 않습니다."
"당신을 함정에 빠뜨려 이득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모르겠습니다."
"당신 집에 도둑이 들었던 적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렇다면 최근에 당신 집을 방문했던 사람들을
기억할 수 있습니까?"
"우리 집에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요."
"일 년 전 일을 한번 기억해 주기 바랍니다. 작년
봄에 당신은 H백화점에서 그 인형을 구입했다고
했는데 그것은 프랑스제로 흔한 인형은 아닐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네, 흔한 건 아닙니다."
"내가 보기에는 구하기 어려운 인형일 것 같은데,
당신이 작년에 그것을 구입할 때 그곳에는 그와 같은
인형이 몇 개나 있었나요?"
만두는 생각에 잠기는 표정을 지었다. 한참 후 그는
입을 열었다.
"두 개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 중에 하나를 당신이 샀군요."
만두는 끄덕였다.
"그때 백화점 여점원이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할 수
있겠습니까?"
"네, 어느 정도는……."
그는 다시 생각에 잠기는 표정을 지었다가 말을
이었다.
"그 인형들을 내놓으면서 어떤 사람이 프랑스에게
가져 온 것으로 매우 귀한 것이라고 말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그 인형이 H백화점에 남아 있을까요?"
"그건 모르겠군요."
허걸은 시간을 내어 H백화점을 들러야겠다고
생각했다.
"제발 이번 질문에는 대답해 주십시오. 다른 것은
몰라도 이번 질문에는 대답할 수 있으리라고
보는데……."
"어떤 질문입니까?"
"왜 비싼 돈을 주고 그런 인형을 구입했습니까?"
"그냥 지나다가 예뻐서 샀습니다."
"이해가 안 가는군요. 계속 똑같은 대답으로 답변을
회피하는군요. 당신이 대답하지 않아도 나는 알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당신의 솔직한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와 있던 만두의 두 눈이
갑자기 커지는 것 같았다. 형사를 바라보는 그의 두
눈에 일말의 불안한 그림자가 스쳐갔다.
"당신이 왜 그 인형을 구입했는지 내 입으로 꼭
말해야 되겠습니까?"
허걸의 쏘아보는 눈초리를 견디지 못한 만두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청미한테 주려고 산 게 아닙니까?"
만두는 황급히 머리를 흔들었다.
"부인하지 마십시오!"
"내가 왜 청미한테 인형을 사줍니까? 그건
비약입니다."
그는 형사의 입을 틀어막기라도 하려는 듯 두 손을
들어 올렸다.
허걸은 언성을 높였다.
"거짓말 말아요! 당신은 청미한테 주려고 그 인형을
구입한 겁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로 전해 주지 못하고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오해가 아니에요, 나는 사실을 말하는 겁니다!
나는 당신이 왜 그 인형을 청미한테 주려고 했는지 그
이유를 밝히고 말 겁니다. 나는 충분히 밝힐 수가
있어요."
만두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허걸은 사정없이
상대방을 몰아붙였다.
"내일이면 밝혀 낼 수 있어요! 아니, 오늘
밤중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밝혀 낼 수 있어요.
그럴려면 먼저 당신의 혈액형을 검사해 봐야겠지요."
만두의 손끝이 떨리고 있는 것을 허걸은 놓치지
않고 바라보았다.
"당신의 혈액형, 청미의 혈액형, 송묘임의 혈액형,
그리고 끝으로 홍상파의 혈액형을 조사하는 겁니다.
그러면 청미가 누구의 자식인지 드러나겠지요."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만두는 두 손으로 그의
앞을 막았다.
"아, 제발……제발 그만하십시오!"
만두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다가 원망스런 눈으로 허걸을
쏘아보았다.
"당신 같은 사람은 처음 보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들춰내다니 당신이라는 사람이 원망스럽습니다."
"직업이니까요."
진땀을 흘리고 있기는 허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문득 한 고비를 넘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알았습니까?"
만두가 여전히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이제는
입장이 뒤바뀐 것 같았다.
"짐작이었지요. 당신 집에서 청미의 머리칼을 붙인
인형이 발견됨으로써 어차피 문제는 당신과 청미를
결부시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갔어요. 나는 당신 주위를 살펴보았어요.
조카들한테 줄 인형이라면 그렇게 비싼 걸 살 리도
없을 거고 또 사놓고 일 년이 넘게 집에 보관해 둘
이유도 없는 거고……. 그래서 그 인형이야말로
특별한 아이, 자기 분신이나 다름없는 아이한테
주려고 산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게 된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청미의 머리칼이 붙은 것이 발견됨으로써 내
생각을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인형을 주려고 했던
아이를 자기 손으로 죽이다니, 이건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했죠. 당신이 만일 청미를 죽이지 않았다면
청미는 당신 자식이 분명합니다."
"나는 청미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장만두는 갑자기 두 팔 속에 얼굴을 묻더니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놀라운 변화였다. 그는 심문을 받는
동안 한 번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울음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며
흐느꼈다. 그것은 가슴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가슴을 찢는 것 같은 비통한 울음이었다.
허걸은 그를 차마 건드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가
실컷 울도록 내버려두었다. 실컷 울고 나면 속이 좀
풀릴 것이다. 그러고 나면 보다 깊은 이야기를 토해
낼지도 모른다.
문이 열리고 조 반장이 들어왔다. 안으로 들어서다
말고 그는 만두가 책상 위에 엎드려 흐느끼고 있는
것을 보고 눈이 휘둥그래졌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눈짓으로 묻자 허걸은 미간을 찌푸리며 빨리 나가
달라고 눈짓을 보냈다.
조 반장은 회심의 미소를 던지면서 밖으로 도로
나갔다.
만두는 오랫동안 울지는 않았다. 얼마 후에 그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면서 상체를 바로했다.
"청미가……그 어린것이 그렇게 비참하게
죽었는데도……나는 마음놓고 울어 보지도
못했습니다. 울 자격도 없는 놈이지만 그 어린 것이
너무 불쌍하군요. 어떤 놈이 청미를 죽였는지는
모르지만……그 자를 내 손으로 죽이고 싶군요."
선량해 보이기만 하던 얼굴에 처음으로 살기가
돋았다.
"생전에 그 애를 한 번도 안아 보지 못한 게
한스럽습니다. 그 애한테 아빠라는 말을 들을 자격도
없는 놈이지만 그래도 단 한 번만이라도 그 애를 안아
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그런 기회를 가져 보기도
전에 그 애는 가버렸습니다. 그 애는 나의
희망이었지요."


23. 혈액형

허걸은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막연히
추측했을 뿐이었던 것을 한번 넘겨짚어 말해 본
것이었는데 그것이 그만 딱 들어맞아 버린 것이다. 이
자는 청미가 자기 피를 받은 딸이라고 고백하지
않는가!
창백하고 고뇌 어린 표정으로 봐서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은 너무도 놀라운
사실이었기 때문에 허걸은 오히려 저항감을 느꼈다.
"청미가 정말 당신 딸입니까? 이왕 말이 나왔으니까
정직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허걸은 반신 반의하는 기분으로 물었다.
만두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결심한 듯 대답했다.
"네, 청미는 제 자식입니다."
"무엇으로 그걸 증명할 수 있죠? 과학적으로 그걸
증명할 수 있습니까?"
"아니오.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 불가능하죠?"
"이건 공개되어서는 안 되는 비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과학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송묘임을
끌어들여서도 안 되고……더구나 청미는 죽었습니다."
"그래도 청미가 당신의 자식이라는 사실을 말로만
가지고 입증할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그 사실을
당신말고 또 누가 알고 있습니까? 송묘임 씨는 알고
있겠죠. 자기가 낳은 자식이니까……."
"사실은 저도 묘임이 말을 해서 알았습니다."
"그 여자의 말만 듣고 청미가 당신 자식이라고
믿었다는 겁니까?"
만두는 당연하다는 듯 끄덕였다.
"네, 저는 굳게 믿었습니다. 그 여자가 왜 그런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뱃속에 있는 아기가 누구의
씨인가는 아기를 배고 있는 여자가 잘 압니다. 그
여자는 제 아기를 가졌다고 고백했고, 내 말을 듣지
않고 청미를 낳았던 겁니다. 이런 사실을 제발
송묘임에게 추궁해서 확인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
여자는 지금 너무 큰 충격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
여자한테 또 그런 것을 추궁한다는 것은 지독한 고문
행위나 다름없습니다. 제발 제 선에서 끝내 주시기
바랍니다."
만두는 애걸하는 조로 말했다.
"그것은 당신이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습니다. 청미가 당신 자식이라는 사실을 납득할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말해 보십시오."
만두는 다시 한숨을 내쉬고 나서 괴로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구 년 전 초겨울이었죠. 그녀가 결혼하기
일 주일 전이었습니다. 우리는 저녁때 늘상 만나는
찻집에서 만났지요."
그는 그때를 회상하듯 잠시 허공에 시선을 던졌다.

두 남녀는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이미 전날
묘임의 어머니로부터 묘임이 곧 다른 남자와 결혼하게
될 것이니 딸과 손을 끊어 달라는 말을 들었던 터라
만두는 얼굴이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묘임은 자기 어머니와 만두 사이에 그런 말이
있었다는 것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 역시
이제 자기 입으로 결혼하게 됐다는 말을 해야 하기
때문에 긴장된 표정으로 상대방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찻집을 나와 조용한 양식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녀가 저녁을 사겠다고 제의를 했고, 만두는
거기에 잠자코 응했던 것이다.
한동안 만두의 눈치를 살피다가 묘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저……결혼하게 됐어요."
가까스로 그렇게 말한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알고 있어."
그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묘임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어머님이 말씀하시지 않던가? 나 만났다고
말이야."
그의 목소리는 격앙되어 있다기보다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얼굴빛도 창백했다.
"아뇨, 못 들었어요. 언제 우리 엄마 만나셨어요?"
"어제. S호텔 커피숍에서 만났어. 갑자기 만나자고
전화 연락이 와서 나갔더니 그런 말씀을 하시더군.
결혼하게 됐으니 제발 헤어지라고 말이야."
그는 노한 눈길로 그녀를 한 번 쏘아보더니 그만
말하기 싫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녀의 배신을 탓하지도 않았다.
숨막힐 듯한 무거운 침묵이 한참 흐른 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저도 이렇게 될 줄 몰랐어요."
그는 식사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허공에다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사람 같았다.
"하지만 선생님을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에요."
곤혹스런 빛이 그의 얼굴 위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다른 남자와 결혼하더라도 저는 선생님 아기를
낳을 거예요."
허공에 머물러 있던 만두의 시선이 곧장 묘임의 눈
속으로 파고들어 왔다.
그들은 한 달 전에 육체 관계를 가졌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달마다 정확히 있어 왔던 월경이 없어졌다.
그 전에도 자주 관계를 가졌지만 두 사람은 임신을
피하려고 서로 노력했기 때문에 별 문제가 생기지
않았었다.
그런데 한 달 전에는 너무 격정에 몸을 맡기다 보니
그만 조심한다는 것을 서로가 잊고 말았다. 별일
없겠지 하고 그들은 하던 짓을 계속했었는데, 그게
그만 문제의 씨가 되었던 것이다.
책임은 남자 쪽이 더 컸다. 그는 평소에 사정을
하지 않든가 밖에다 사정하곤 했는데, 그때는 그만
참지 못하고 그녀의 몸 속에다 그 뜨거운 것을
분출하고 말았던 것이다.
달마다 있던 월경이 없자 묘임은 산부인과에 가서
진찰을 받아 보았다. 결과는 임신 이 개월이라는
진단이었다. 그때는 이미 홍상파와 데이트가 시작되고
있을 무렵이었다.
묘임은 임신한 사실을 만두에게 알렸다. 그녀는
임신으로 심한 갈등을 겪고 있었지만 그녀와의 결혼을
굳게 믿고 있던 만두는 그녀의 임신 사실에 내심 크게
기뻐하며 결혼을 서둘러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러고 있는 차에 그녀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나온 것이다.
"그게 무슨 말이야? 다른 남자와 결혼하려면 당연히
아기를 떼야지."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싫어요, 그럴 수는 없어요! 아기를 그냥
낳겠어요!"
그는 어리둥절했다. 그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 사람하고
결혼하면 그 사람 아기를 낳아야지 왜 내 아기를
낳겠다는 거야? 그게 무슨 짓이야. 결혼이 어린애
장난인 줄 알아? 지금 당장 나하고 병원에 가!"
"싫어요! 아기를 낳고 안 낳고는 제 자유예요!
선생님이 간섭하실 일이 아니에요!"
"왜 내가 간섭할 일이 아니야! 아기 아빠가 누군데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거야? 지금 감상적으로 일을
처리해서는 안 돼. 묘임이는 한 남자의 아내가 될
몸이야. 당연히 그 남자의 아기를 낳고 행복하게
살아야 해."
"선생님 아기를 낳고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어요."
"바보 같으니! 남편이 그걸 알면 가만 있을 것
같아? 당장 이혼하고 말 거야!"
"비밀로 하죠, 뭐. 영원한 비밀로……남자들은
바보니까."
"비밀이 지켜질 줄 알아? 어리석은 소리 하지 마!"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저하고 선생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 두 사람만 입을 다물고 있으면
돼요."
갈수록 가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몸으로 결혼해서 아기를 낳으면 예정보다 한두
달 빨리 아기를 낳는 결과가 돼. 그래도 남편이
의심하지 않는다는 거야?"
"한 달쯤 빨리 낳는 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어요.
조산했다고 그러죠, 뭐. 멍청한 남자가 뭘 아나요?"
만두는 그녀를 노려보다가 차마 때리지는 못하고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정신 좀 차려! 그리고 현실을 직시해!"
"전 지금 정상이에요. 그리고 현실을 똑바로 보고
있어요."
그때는 그에게 죄의식을 느낀 나머지 괜히 한번
그렇게 말해 본 것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결혼하기 전 꼭 병원에 가서 아기를 떼라고 이른 다음
그녀와 헤어졌었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서는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지
않은 채 그녀의 결혼식에도 참석했다.
그는 그녀의 배신으로 입은 상처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다. 그때는 그것이 최대 과제였다. 상처에서
벗어나 담담한 마음가짐을 유지하기까지는 상당한
기간이 걸렸다.
다음 해 여름. 장마가 계속되던 어느 날 아침,
만두는 느닷없이 걸려 온 묘임의 전화를 받았다.
생각지도 않은 전화였기 때문에 그는 기쁘기도 하면서
꽤 당황했다. 그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녀가
말했다.
"저 지금 병원에 있어요. 병원에서 전화를 거는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는 약하디약하게 들려 왔다. 마치
중병에 걸린 사람처럼. 정말 그는 묘임이 중병에 걸려
병원에 입원한 줄 알았다. 그런데 그녀의 다음 말은
그게 아니었다.
"어젯밤 아기를 낳았어요. 선생님의 아기를
낳았어요. 딸이에요. 선생님을 닮은 딸이에요."
그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뭐라고 말은
해야겠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이 흐른
다음 그녀가 다시 말했다.
그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녀가 다시 입을 연
것이다.
"정말이에요. 그때 그랬잖아요, 선생님의 아기를
낳겠다구요."
"어느 병원이야?"
그는 겨우 그렇게 물었다. 그 이외의 다른 말은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빨리 달려가 아기를 보고 싶었다.
"오실려구요? 아기가 보고 싶으세요?"
"……."
"안 돼요, 오시면 안 돼요."
그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녀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허걸은 막혔던 시야가 갑자기 확 트이는
느낌이었다. 그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상대방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무거운 침묵이 한참 동안 흘렀다. 장만두는 다음
말을 꺼내기가 싫은지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몹시
어두운 얼굴빛이었다.
허걸은 기다리다 못해 물었다.
"그 뒤에 어떻게 됐나요?"
만두는 한숨을 내쉬고 나서 할 수 없다는 듯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 뒤로는 아무 연락도 받지 못했고 만날 수도
없었습니다. 저도 굳이 만나 볼 생각은 없었습니다.
아니, 만나 보고 싶었죠. 아기도 보고 싶었죠. 하지만
참았습니다. 그리고 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삼 년인가 흘렀는데 어느 가을날 고궁에서 우연히
묘임과 딸애를 보게 되었지요. 저는 그때 머리를 식힐
겸해서 혼자서 고궁에 들렀더랬죠. 그 날은
토요일이었습니다. 학교 수업을 일찍 파하고 나자
마땅히 갈 곳도 없고 해서 고궁에 갔던 겁니다.
고궁에는 은행잎이 노랗게 깔려 있었습니다. 거기서
묘임이와 딸애를 보게 된 겁니다. 딸애는 낙엽 위를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고 묘임은 사진을 찍어 주느라고
열심이었습니다. 딸애는 정말 귀여웠습니다. 아장
걸음으로 뛰어다니는 모습이 그렇게 귀여워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저 애가 정말 내 피를 받은 아이일까
하고 생각하니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얼마 후
묘임이 저를 발견하고 놀라는 것 같았습니다. 그녀는
제 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외국에
출장중이라 딸애를 데리고 놀러 나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딸애가 갈수록 저를 닮아 간다고
말했습니다. 묘임은 딸애를 저한테 안겨 주었습니다.
그 애 이름이 청미라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죠.
청미는 이상할 정도로 저를 어려워하지 않고 제 품에
안겼습니다. 자세히 뜯어 보니 정말 저를 닮은 데가
많았습니다. 저는 그 애를 보는 순간 그 애가 제 피를
받았다는 것을 거의 본능적으로 느꼈습니다. 그 애도
그것을 느꼈는지 제 목을 끌어안고 놓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묘임에게 남편이 아기를
귀여워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것은 다시 말해 남편이
청미를 자기 자식으로 알고 있느냐는 물음이나
같았습니다. 묘임은 남편이 끔찍할 정도로 딸애를
귀여워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행복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질투가 나면서도 다소
안심이 되었습니다. 그 날 우리는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고궁에서 놀았습니다. 그리고 저녁을 먹은 뒤
헤어졌습니다. 헤어질 때 청미는 저한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마구 울어댔습니다. 우리는 언제 다시
만나자는 약속도 없이 헤어졌습니다. 그 뒤로 두 번
다시 저는 청미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묘임도 물론
만나지 못했습니다. 만나려고 했다면 만날 수
있었겠지만 저는 일부러 만나는 것을 피했습니다.
묘임과 딸애가 행복하게 살고 있다면 그것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한 거죠. 저는 될수록 그들을 생각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럭저럭 하는 사이에 어느새
수년이 흘러갔습니다. 그런데 작년 봄에 H백화점에 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기성복이나 하나 사입을까 하고
갔었지요. 그런데 장남감 코너를 지나다가 우연히 그
인형이 눈에 띄었던 것입니다. 똑같은 게 두 개
있었습니다. 그걸 보고 있자니 불현듯 청미 생각이
났습니다. 견딜 수 없도록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정신없이 호주머니를 털어 그 인형을 샀습니다.
그것을 살 때는 청미에게 선물로 주어야겠다는
생각이었지요. 그런데 막상 사고 보니 전해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을 전해 주기 위해 그 아이를
불러낸다는 것이 그렇게 힘들게 느껴질 수가
없었습니다. 만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습니다. 그 애가 제 피를 받았다고 해서 그 애를
제 자식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생각이라고
저를 타일렀습니다. 그 애는 내 자식이 아니고
홍상파의 자식이라고 타일렀죠. 그렇게 생각하니까
인형을 전해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집에다 놔두었던 겁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없애기도
싫었습니다. 누구한테 주기는 더더욱 싫었습니다.
언젠가 우연히 만날 기회가 있으면 그때 주리라고
막연히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만두가 이야기를 마쳤을 때 허걸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는 한손으로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윽고 그는 만두를 보지 않은 채 물었다.
"장 선생의 혈액형이 뭐죠?"
"AB형입니다."
만두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허걸은 수첩을 뒤적여 보았다. 장만두가 근무하고
있는 K여고에 가서 그의 인사 기록 카드를 보고 적어
두었던 것을 찾아내 읽어 보았다. 거기에도 장만두의
혈액형이 AB형이라고 적혀 있었다.
허걸은 갑자기 허탈감과 함께 현기증을 느꼈다.
그는 녹음기를 집어 들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어디 한번 조사해 봅시다. 혈액형을 조사해 보면
알 수가 있겠지요."
"묘임과 그녀의 남편한테는 비밀로 해주십시오!"
만두가 벌떡 일어나 허걸의 등뒤에다 대고
소리쳤다. 허걸은 대꾸 없이 문을 닫았다.
"어떻게 됐어? 만두가 자백했나?"
밖에서 이제나저제나 하고 그를 기다리고 있던
조태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잘못 짚은 것 같습니다. 이걸 한번 들어
보십시오."
허걸은 녹음 테이프를 뒤로 돌렸다가 앞으로
전진시켰다. 장만두의 목소리가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조태는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고 녹음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안색이 점점 굳어지는 것을 허걸은
흥미 있는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마침내 장만두의 진술이 모두 끝났을 때 조 반장의
얼굴은 온통 땀으로 젖어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그는 숨이 차는지 숨을 몰아 쉬며 물었다. 허걸은
상사를 잠자코 쳐다보기만 했다.
"이걸 사실이라고 믿나?"
"거짓말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무슨 말이 그래? 사실이면 사실이고 아니면
아니지."
"사실인 것 같지만 아직 확인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뭐라고 단정을 내리지는 못하겠습니다."
"어떻게 확인하지? 송묘임한테 가서 직접 대놓고
물어 볼 텐가?"
"그건 마지막에 가서나 해보는 거죠. 우선 필요한
것은 혈액 검사입니다. 네 사람의 혈액 검사를 해보는
겁니다. 장만두, 송묘임, 청미, 그리고 홍상파에
대해서 말입니다. 장만두의 혈액형은 알고 있습니다.
그는 AB형입니다."
"혈액형을 가지고 친자 확인을 하겠다는 거야?"
"네, 그렇습니다."
"만일 장만두와 홍상파의 혈액형이 같으면 어떡할
텐가?"
"그렇게 되면 확인이 불가능한 거죠.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지만 혈액형이 다르기를 기대해 볼 수밖에
없죠."
"청미의 혈액형은 어떻게 알아보지? 이미
화장했는데……?"
"어딘가에 청미에 대한 서류가 있을 겁니다. 거기에
혈액형이 밝혀져 있을 겁니다. 청미 엄마에게 물어
봐도 되구요."
"그건 안 돼. 그 여자는 거짓말을 할 수도
있으니까."
"그렇군요."
"만일 청미가 장만두의 말대로 그의 친자식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그렇게 되면 장만두의 혐의가 일단 벗겨지는 거죠.
자기 자식을 죽이는 부모는 없을 테니까요.
정신병자가 아닌 다음에야 말입니다."
조태는 할말을 잃은 것 같았다. 그는 잠시 허공을
바라보다가,
"자, 그러면 빨리 혈액형을 알아봐."
하고 말했다.

조 반장은 형사 한 명을 홍상파가 근무하는 회사로
보냈다.
웬만한 회사에서는 거의 다 사원에 대한 건강
체크를 정기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따라서 사원에
대한 건강 기록 카드가 비치되어 있게 마련이다. 조
반장이 부하에게 내린 지시는 홍상파의 건강 기록
카드를 은밀하게 복사해 오라는 것이었다.
허걸은 먼저 경찰 법의를 찾아갔다. 살인사건이
일어났을 때 언제나 피살체를 다루는 그 의사는 일흔
가까운 노인이었다. 머리는 거의 빠지고 얼굴이
홀쭉한데다 돗수 높은 안경까지 끼고 있어서 가운만
벗으면 정말 볼품없는 노인이었다.
수없이 많은 피살자를 다루어 온 그는 아무리
끔찍한 시체라 하더라도 무슨 물건을 다루듯 얼굴
하나 찌푸리지 않고 처리해 냈다. 허걸은 그런 그가
싫었다. 그러나 오늘은 그를 만나 보아야 할 일이
있었다.
노인은 자기 방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가 그를
맞았다. 스위치를 얼른 끄는 것으로 보아 비디오
테이프를 돌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무슨
테이프였을까?
"어서 오시오. 허 형사가 여기엔 웬일이오?"
노인은 태연한 척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뭐 좀 알아볼 게 있어서 왔습니다."
"뭔데요? 자, 앉아요."
노인은 허걸에게 자리를 권한 다음 간호원을 불러
커피 두 잔을 시키라고 일렀다. 그리고 나서 무슨
일이냐고 다시 물어 왔다.
"다름이 아니고 혈액형에 대해서 좀 여쭤 보려고
왔습니다."
"네, 물어 봐요."
"남자가 AB형일 경우 자식의 혈액형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그걸 알고 싶어서 왔습니다."
"아, 난 또 뭐라고. 그거야 간단히 알 수가
있지요."
허걸이 알아낸 것은 다음과 같았다.

다음에는 ‘모자의 혈액형으로 부권을 부정할 수
있는 남자의 혈액형’에 대해서도 알아보았다.
* 어머니가 O형이고 자식이 O형일 경우 아버지는
AB형일 수가 없다.
* 어머니가 O형이고 자식이 A형일 경우 아버지는
O형이나 B형일 수 없다.
* 어머니가 O형이고 자식이 B형일 경우 아버지는
O형이나 A형일 수 없다.
* 어머니가 O형일 때 자식은 결코 AB형일 수 없다.
* 어머니가 A형이고 자식이 O형일 경우 아버지는
AB형일 수 없다.
* 어머니가 A형이고 자식이 A형일 경우 아버지는
부정될 형이 없다.
* 어머니가 A형이고 자식이 B형일 경우 아버지는
O형이나 A형일 수 없다.
* 어머니가 A형이고 자식이 AB형일 경우 아버지는
O형이나 A형일 수 없다.
* 어머니가 B형이고 자식이 O형일 경우 아버지는
AB형일 수 없다.
* 어머니가 B형이고 자식이 A형일 경우 아버지는
O형이나 B형일 수 없다.
* 어머니가 B형이고 자식이 B형일 경우 아버지는
부정될 형이 없다.
* 어머니가 B형이고 자식이 AB형일 경우 아버지는
O형이나 B형일 수 없다.
* 어머니가 AB형일 때 자식은 결코 O형일 수 없다.
* 어머니가 AB형이고 자식이 A형일 경우 아버지는
부정될 형이 없다.
* 어머니가 AB형이고 자식이 B형일 경우 아버지는
부정될 형이 없다.
* 어머니가 AB형이고 자식이 AB형일 경우 아버지는
O형일 수 없다.
그것을 그는 도표로 그려 보았다.

* 모자의 혈액형으로 부권을 부정할 수 있는 남자의
혈액형

(―):실제 불가능한 모자의 혈액 조합
(×):부정될 형이 없음.


24. 혈액형을 찾아라

병원을 나선 허걸은 다음에 을지로 4가에 있는
김효선 산부인과 의원을 찾아갔다. 그곳은 그전에
송묘임의 동생인 지회를 통해서 알아낸 병원으로
청미는 바로 그 산부인과 의원에서 태어났던 것이다.
김효선 산부인과 의원은 바로 큰길 가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눈에 띄었다.
신생아 기록 카드가 제발 지금까지 비치되어 있기를
바라면서 그는 길을 건너 병원 쪽으로 다가갔다.
병원에 들어서기 전에 그는 그 앞에 있는 공중 전화
부스 안으로 들어가 수사본부로 전화를 걸었다.
"송지회를 은밀히 불러내서 청미의 생년월일을
알아봐 주십시오. 조금 후에 다시 전화를
걸겠습니다."
조태는 십 분 후에 전화를 걸어 달라고 말한 다음
전화를 끊었다.
허걸은 부스에서 나와 십 분 동안 그 곁에 서서
서성거렸다.
그는 초조하게 담배를 두 대나 피우고 나서 십 분이
지나 다시 부스 안으로 들어가 수사본부로 전화를
걸었다. 지금이 1982년도이니까 아마도 청미는
1975년생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조 반장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가 생각했던 대로 청미는 1975년생이었다.
"청미는 1975년 4월 28일생이야. 송지회 씨가 여기
수사본부에 와 있는데 한번 통화할 텐가?"
"네, 좀 바꿔 주십시오."
"여보세요."
지회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 왔다.
얼마 전에 허걸은 홍상파 부부가 청미를 낳은 후
지금까지 아기를 가지지 않은 데 대해 알아본 적이
있었다. 그 결과 그들 부부는 아기를 가지려고 하지만
임신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어느 쪽에 책임이 있는지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서
그들이 출입한 병원을 찾아가 볼 생각으로 지회에게
그 병원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다.
그는 묘임 쪽보다는 상파 쪽에 더 초점을 두고
있었다. 그것은 묘임은 이미 청미를 낳은 적이 있고,
그 청미가 상파와의 관계에서 낳은 딸이 아니고
장만두의 자식이라는 점에서 묘임에게는 결점이
없다고 이미 단정을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안녕하십니까? 그전에 부탁한 일
알아보셨는지요? 홍상파 씨가 출입했던 병원
말입니다."
"못 알아봤어요. 알아볼 수가 없었어요. 언니도 그
병원은 모르고 있었어요. 형부 혼자만 알고 있는
모양이지만 어떻게 그런 걸 물어 보겠어요?"
"네, 잘 알겠습니다."
허걸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부스에서 나와 김효선
산부인과로 들어갔다. 다행히 그때까지 청미의 카드는
그 병원에 비치되어 있었다.
산모의 이름을 대고 청미의 출생 연도와 날짜를
알려 주자 간호원은 잠시 후에 신생아 기록 카드철을
가져 왔다. 그것은 날짜별로 철해져 있었기 때문에
청미의 카드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물론 그 카드에는 신생아의 이름은 없었고 산모의
이름인 송묘임의 이름만 적혀 있었다.
허걸은 신생아 기록 카드를 훑어보았다.
생년월일 1975년 4월 28일 1시 8분, 체중 3.4kg,
신장 52cm, 머리 둘레 35cm, 가슴 둘레 34cm…….
혈액형은 나와 있지 않았다. 허걸은 실망했다.
그곳을 나온 그는 다시 수사본부로 전화를 걸었다.
"청미를 받은 산부인과에 가서 신생아 기록 카드를
검토해 보았는데 거기에는 혈액형이 나와 있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청미가 드나들었던 소아과
병원을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오 분 후에 다시 전화를 걸어 봐, 내가 지회한테
알아볼 테니까."
"지회를 직접 바꿔 주십시오."
"알았어."
허걸은 전화를 끊고 기다렸다. 지회한테 직접
전화를 걸 수도 있었다. 그러나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그녀를 아래층에 자리잡고 있는 수사본부로 내려오게
하여 전화를 받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오 분 후에 그는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직접
지회와 통화했다.
"청미가 단골로 다니는 병원이 있나요?"
"네, 있어요. 저도 한 번 청미를 데리고 간 적이
있는데, 여기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있어요."
삼십 분 후, 허걸은 지회가 알려 준 소아과 병원에
도착했다.
병원 안으로 들어서자 대기실에 지회가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보자 그녀는 발딱 일어섰다.
허걸은 반갑기도 하면서 당황했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서 왔어요."
그녀가 탐색하듯 예민한 눈길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청미의 혈액형을 알아보러 왔습니다."
"그건 뭐 하려고요?"
거기에는 대답하지 않고 허걸은 그녀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한 다음 원장실로 들어갔다.
용건을 이야기하고 청미 이름을 대자 원장은,
"아, 그 애라면 잘 알고 있죠."
하면서 안색이 굳어졌다.
"그 아이, 정말 귀여운 아이였는데 정말
안됐습니다."
원장은 보도를 통해 이미 청미의 죽음을 알고
있었다.
조금 있자 간호원이 청미의 기록 카드를 가져 왔다.
다행히 거기에는 청미의 혈액형이 나와 있었다.
청미는 B형이었다.
밖으로 나오자 지회가 다가서며 물었다.
"알아냈어요?"
"네, B형이더군요. 혹시 언니 혈액형을 알고
있나요?"
"언니는 O형이에요."
그녀는 서슴없이 말했다.
"어떻게 그걸 알고 있죠?"
"어릴 때부터 알고 있어요. 언니하고 저는 학교
다닐 때에 혈액형을 놓고 서로 자랑하고 그랬어요.
그래서 알고 있어요."
"그래도 보다 정확히 알 수 없을까요?"
소아과 병원을 나온 그들은 가까운 찻집을 향했다.
"제가 커피 한잔 사죠. 형사 아저씨들 정말
수고하시는데 제가 커피 대접해 드리겠어요."
"고맙습니다."
그곳은 손님이 별로 없는 조용한 찻집이었다.
자리를 잡고 앉은 다음 지회는 커피 두 잔을
시켰다.
"언니 혈액형이라면 산부인과에서 알아보지
그러세요? 제가 그때 알려 드렸잖아요, 김효선
산부인과라고. 거기 가면 언니 카드가 있을 거예요."
그는 멀거니 그녀를 바라보다가 무릎을 탁 쳤다.
"그렇군요.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청미 카드만
봤는데, 원 이럴 수가……."
"거기에는 산모와 신생아 카드가 함께 있을걸요?"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청미 카드만 보고 왔어요.
이런 바보 같으니."
그는 한심하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그런데 혈액형은 왜 그렇게 조사를 하세요?"
"그럴 이유가 있어요."
이 아가씨는 무엇인가 정보를 얻으려고 나온 게
아닐까 하고 허걸은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이 들자
함부로 입을 놀릴 수가 없었다.
"잠깐 전화 좀 걸고 오겠습니다."
허걸은 카운터로 가서 수사본부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조 반장이 기다리고 있다가 전화를 받았다.
"청미 혈액형이 밝혀졌습니다. B형입니다. 지금
송지회하고 함께 있습니다."
"아니, 그 아가씨는 왜 거기 있지?"
"소아과 병원에 갔더니 거기 기다리고 있더군요. 뭘
알아보려고 온 것 같습니다."
"조심해, 함부로 입을 놀리면 안 돼."
"네, 알고 있습니다. 그 아가씨의 말이 송 묘임의
혈액형은 O형이랍니다. 그렇다면 청미가 만두의 피를
받았다는 것은 맞습니다. 혈액형상으로는 말입니다.
만두는 AB형이고 묘임은 O형입니다. 그 사이에 태어날
수 있는 자식의 혈액형은 A형 아니면 B형이거든요."
그는 수첩을 보면서 말했다.
"홍상파의 혈액형은 알아냈나요?"
"응, 방금 연락이 왔어."
"무슨 형입니까?"
"홍상파는 O형으로 밝혀졌어. O형과 O형 사이에
B형이 태어날 수 있나?"
"잠깐 기다리십시오."
허걸은 재빨리 수첩에 적어 놓은 것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외치듯 말했다.
"안 됩니다. 어머니가 O형이고 자식이 B형일 경우
아버지는 O형이나 A형일 수 없습니다. 그건 틀린
조합입니다."
"음, 그렇다면……."
조 반장의 신음소리가 나직이 들려 왔다.
"지금부터 더 조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홍상파가 출입했던 병원을 찾는 일입니다. 제 생각에
홍상파는 분명히 아기를 낳고 싶어서 병원에
찾아갔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자기한테 여자를
임신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그걸 알려고
병원을 찾아 다녔을 겁니다. 그 병원에 가서 기록
카드를 찾아보면 그가 여자를 임신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밝혀질 겁니다."
"그걸 알아서 뭐하지?"
"그걸 알아내면, 만일 자기가 생식 기능이 없다는
것을 이미 알았다면 청미가 자기 자식이 아니라는
것도 그는 이미 알고 있었을 겁니다."
"응, 그렇겠군."
"지원을 받아서 시내 비뇨기과 의원을 전부 뒤지면
될 겁니다. 그런 건 비뇨기과 의원에서
치료하니까요."
"알았어, 즉시 알아보지."
전화를 걸고 나서 자리로 돌아가자 지회는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바쁘시군요."
"바빠질 것 같습니다. 두 분은 좀 어떻습니까?"
홍상파와 송묘임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청미가 죽은 후 그들 부부의 동태는 거의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들이 문 밖으로 나오지 않고 집에서
두문 불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수사진도 거의 밖에서만 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만날 기회가 없었다. 비통에 잠긴 그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걸고 싶지도 않았다.
"다들 잘 있어요. 어떡하겠어요, 슬퍼하고만 있을
수도 없고 잊어야죠."
그렇게 말하는 지회는 이미 슬픔을 극복한 것
같았다. 허걸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새삼
그녀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혈액형을 조사하는 것이 혹시 청미가 누구
자식인가를 알아보려고 그러는 것 아니에요?"
허걸은 깜짝 놀라 그녀를 쳐다봤다.
"상당히 눈치가 빠르시군요."
"그거야 어렵지 않잖아요? 청미 혈액형, 언니
혈액형, 그리고 장만두 씨와 홍상파 씨의 혈액형을
알면 뭔가 결과가 나오겠죠. 두 남자분 혈액형은
알아냈나요?"
"알아냈습니다. 장만두 씨는 AB형이고 홍상파 씨는
O형입니다."
"그러면 청미는 누구 자식인가요?"
"청미는 B형이니까, 장만두와 송묘임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입니다."
지회는 허걸을 빤히 쳐다보다가 허공으로 시선을
던졌다. 한참 말없이 허공을 응시하다가,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군요."
라고 말했다.
"그게 열쇠였던 것 같습니다."
"언니는 그걸 알고 있었겠군요?"
"물론이죠. 자기가 낳은 자식이니까 누구 피를
받았는지는 잘 알고 있었겠죠."
"장만두 씨도 그걸 알고 있었나요?"
"물론 알고 있었습니다."
"형부는요? 형부는 청미를 끔찍이 사랑했는데……."
"형부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아닌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그 결과는 곧 밝혀지리라고
생각합니다."
"범인도 곧 밝혀지겠군요?"
"장만두는 적어도 범인은 아닙니다. 자기 자식을
죽이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그럼 누가 범인인가요?"
"조금 더 기다려 보면 밝혀지겠죠."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죽은 청미가
그렇다고 살아나나요?"
"그렇다고 범인을 그대로 내버려둘 수야 없지
않습니까?"
그녀는 머리를 격렬히 흔들었다. 그리고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믿을 수가 없어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요.
청미가 장만두 씨 딸이라는 건 정말 믿을 수 없어요."
하고 중얼거렸다.
"나도 처음에는 믿을 수가 없었죠. 장 선생이
그렇게 자백했을 때 믿어지지가 않았기 때문에
혈액형을 조사해 본 겁니다. 홍상파 씨도 O형이고
송묘임 씨도 O형입니다. 지회 씨가 언니 혈액형이
O형이라고 했기 때문에 나는 송묘임 씨 혈액형이
O형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O형과 O형 사이에서는
B형인 청미가 태어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청미는
홍상파의 자식이 아니라 장만두의 자식이
분명합니다."
침묵이 흘렀다. 무거운 침묵이 한참 동안 흐른 뒤
지회는 다시 머리를 흔들었다.
"무서워요,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무서워요."
"이미 결과는 나타난 것 아닙니까. 청미는
살해됐습니다. 청미는 그러니까 장만두 씨와 송묘임
씨가 만든 비련의 화인이었던 셈이죠. 비극적인
사랑의 씨는 불로 지진 도장 자국처럼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었던 거죠."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죠?"
지회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결과에 모두가
승복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거기에 승복하고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나는 거죠."
지회는 무엇을 생각해 보는 듯 한참 침묵을
지키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형부는 아마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예요.
그래요, 형부는 모르고 있어요. 형부는 청미를 얼마나
끔찍이 사랑했다구요. 청미가 자기 자식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면 그렇게 사랑할 수 없었을 거예요.
그리고 벌써 언니하고도 이혼했을 거고요."
"그건 모르는 일이죠. 아무도 사람 속은 알 수
없으니까요."
허걸은 냉정히 말했다.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어요. 형부는 모르고
있었어요. 부탁이에요, 제발 형부한테 이런 사실을
밝히지 말아 주세요."
"물론 가정을 파탄시키는 일은 가급적 피할 겁니다.
홍 선생이 어쩔수 없이 알게 되는 건 할 수 없지만
그렇지 않고서는 일부러 그 사람을 불러서 이런
사실을 말하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어쩐지 내
생각에는 홍상파 씨가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군요. 좀더 두고 봐야겠지만……."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어요. 형부는 모르고
있어요."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얼굴에 분노의 빛이
나타났다.
"언니가 나빠요. 세상에 어떻게 그렇게 함께 살면서
남편을 속일 수가 있어요? 언니가 그런 여자인 줄
몰랐어요. 언니는 남편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를 속인
거예요."
분노의 눈물이 그녀의 뺨 위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허걸은 그녀의 분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언니가 미워요, 저주스러워요! 이렇게 된 건 모두
언니 탓이에요. 청미가 죽은 것도 언니 탓이에요."
허걸은 할 말이 없었다. 지회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닌 것 같았다.
잠시 후 지회는 눈물을 훔치고 일어섰다.
"전 언니를 만나야겠어요. 언니를 만나서
따지겠어요."
"그러면 안 됩니다. 갑자기 그런 사실을 들이대면서
따져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아도 언니는 충격이
큰데 거기다가 그런 질문을 던지면 안 됩니다. 우리도
그래서 삼가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지회는 듣지 않았다. 밖으로 나서자 그녀는
택시를 타고 혼자 가버렸다.
허걸은 김효선 산부인과를 찾아갔다. 거기서 청미를
임신했을 당시 묘임의 기록 카드를 찾아보니 다행히
아직까지 그 카드가 보존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카드에는 분명히 묘임의 혈액형이 O형으로 나와
있었다.

아파트에 도착한 지회는 집 안으로 뛰어들었다. 집
안은 무거운 정적 속에 잠겨 있었다.
그 날부터 홍상파는 회사에 출근하고 있었고 그
동안 집에 와 있던 친척들도 모두 가버리고 없었다.
묘임 혼자서 집을 지키고 있다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뛰어들어오는 지회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언니, 세상에 그럴 수 있어요?"
지회는 소파에 핸드백을 내던지며 털썩 주저앉았다.
묘임은 의아한 눈으로 동생을 바라보았다.
"언니는 나빠요! 모든 게 언니 때문에 일어난
거예요! 청미가 죽고 난 후에도 언니는 그 비밀을
지금까지 지키고 있어요! 형부한테 버림받기 싫어서
말이에요! 형부가 언니를 버릴까 봐 겁이 나서 비밀을
지키고 있는 거죠?"
순간 묘임의 표정이 홱 변했다. 얼굴이 하얗게
굳어지더니 경련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동생을 무섭게 노려보더니 갑자기 손을 들어
지회의 따귀를 후려갈겼다. 철썩 하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두 자매는 한참 동안 서로 쏘아보다가 지회가 먼저
울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자세가 흐트러졌다. 묘임은
흐느끼는 동생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 말을 어디다가 함부로 지껄이는 거야?"
"왜, 못 할 게 뭐가 있어요? 청미가 무참히 죽은
마당에 왜 그런 말을 못 해요?"
"넌 지금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어. 내가 무슨
거짓말을 했다는 거야? 내가 이혼당할 것이 두려워서
뭘 숨기고 있다는 거야! 도대체 너 무슨 말을 하는
거니?"
"제 입으로 꼭 말해야겠어요? 언니는 왜 제 뺨을
때렸죠? 어디 그 이유나 들어 봐요."
지회는 언니 곁으로 바싹 붙어 앉았다.
"비켜! 가까이 오지 마!"
묘임이 그녀를 떠밀었다.
"언니가 꼭 말하기 싫다면 제 입으로 말하겠어요.
청미는 홍상파 씨의 자식이 아니고 장만두 씨의 피를
받은 자식이에요. 언니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거예요. 언니 자신이 낳은 자식이니까요."
"아니, 뭐라고?"
묘임이 부들부들 떨었다.
"제발 더 이상 거짓말하지 마세요. 더 이상
부인하지 마세요. 모든 게 다 드러났어요. 장만두
씨가 자백했어요. 자기 자식이라고요. 그리고
경찰에서는 혈액형을 모두 조사해 갔어요. 언니는
O형이고 형부도 O형이에요. 그리고 청미는 B형이고요.
O형과 O형 사이에서는 B형이 나올 수가 없어요.
장만두 씨는 AB형이에요. AB형과 O형 사이에서는
B형이 나올 수가 있어요. 이보다 더 분명한 사실이
어디 있어요? 그래도 부인하겠어요?"
묘임은 경악한 표정으로 동생을 바라보다가 밑으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꼼짝 하지
않고 그렇게 앉아 있었다. 무거운 침묵이 한동안
흘렀다.
지회도 더 이상 언니를 몰아붙이지는 않았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 묘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안방 쪽에서 언니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 오자
지회는 발딱 일어섰다. 그리고 안방으로
뛰어들어갔다.
묘임은 침대 밑에 무릎을 꿇은 채 그 위에 머리를
묻고 흐느끼고 있었다. 온몸이 격하게 떨리고 있었다.
지회는 언니를 내려다보다가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언니, 울지 마. 내가 잘못했어요."
묘임은 미친 듯 머리를 흔들었다.
"모두 내 탓이야. 맞아, 네 말이 맞아. 청미는
장만두 씨의 자식이야. 홍상파 씨하고는 관계 없는
아이야. 하지만 우리 가정은 행복했었어. 그 사실
때문에 불행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 형부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으니까. 형부는 청미를 끔찍이
사랑했어. 나도 사랑하고 말이야. 그런데 내가 왜 그
사실을 밝혀 가지고 불행을 자초하겠니? 너라면
그러고 싶겠니?"
묘임은 얼굴을 들고 눈물 어린 눈으로 동생을
바라보았다.
"너라면 그럴 수 있겠니?"
지회는 할 말을 잃었다.
모두가 행복을 추구한다. 거짓말을 해서라도 행복을
추구하는 게 사람의 마음이다. 언니라고 별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나는 그 사실 때문에 청미가 살해됐다고
생각지는 않아."
"경찰은 이제 장만두 씨가 범인이 아니래요."
"범인일 수가 없지.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그럼 누가 범인이라는 거예요?"
"난 모르겠어.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25. 불임 환자

"언니는 형부하고 계속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럼,살아야지. 함께 못 살 게 뭐가 있니?"
"정말 언니는 위선 덩어리이군요. 언니는 자신을
기만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장만두 씨가 기다리고 있잖아요. 언니와 장만두 씨는
그때 결혼했어야 했어요. 언니는 지금도 그 사람을 못
잊고 있어요. 저는 분명히 알아요."
"그만, 그만하라고! 그런 말 하지 마. 나는 지금
형부하고 헤어져서도 안 되고 헤어질 필요도 없어.
제발 나에게 상관하지 마.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네 일이나 하란 말이야."
지회는 언니를 쏘아보다가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녀는 망설이다가 수사본부로 내려왔다. 거기에는
허걸이 이미 돌아와 있었다.
"언니 혈액형을 알아보셨나요?"
"네, 알아봤습니다. 역시 말씀하신 대로
O형이더군요."
"형부가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지회가 생각에 잠기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
말은 즉 청미가 홍상파의 피를 받은 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과연 홍상파가 알고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그렇다고 그것을 본인한테 직접 물어 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언니는 그것을 홍상파 씨한테 비밀로 했나요?"
물론이라는 듯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는 그것을 조금도 개의치 않는 것 같았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언니한테 실망했어요."
그때 송태하가 나타났다.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다무는 것을 보고 그는 금방
눈치를 채고는 두 사람 사이에 끼여들어 무슨
일이냐고 캐물었다.
지회는 허 형사의 눈치를 보고 나서 오빠에게
내용을 이야기해 주었다. 이야기를 듣고 난 그는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흥, 말세군."
하고 중얼거렸다.
"형부는 청미가 자기 자식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요?"
허 형사가 두 오누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알았을 리가 있어요? 알았다면 벌써 헤어졌겠죠."
지회의 말에 태하가 머리를 흔들었다.
"그렇지도 않아.그 양반, 워낙 내색을 하지
않으니까 말이야."
홍상파에 대해서 송태하는 별로 좋은 감정을 품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럼 그 사실을 알고서도 모른 체하고 있을지
모른다 이 말입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인물이죠."
"오빠, 말 함부로 하지 말아요!"
지회가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함부로 말한 게 아니야. 난 사실대로 말한
것뿐이야."
"그런 엄청난 사실을 알았다면 어떻게 가만 있을
수가 있어요?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은 삼가는 게 좋겠지. 청미가
죽은 마당에 그런 건 따져서 뭐 하겠어?"
두 오누이가 주고받는 말을 들으면서 허걸은 생각에
잠겼다.
그가 가장 알고 싶은 것은, 홍상파가 과연 청미가
자기 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을까
하는 점이었다. 그와 동시에 만일 그가 그것을 알고
있었다면 과연 언제 그것을 알았겠느냐 하는
점이었다.
송묘임이 남편한테 그 비밀을 직접 이야기하지 않은
것은 거의 확실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가 이미 그
비밀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가정할 때 그는 그것을
언제 어떻게 해서 알게 되었을까.
"범인이 아주 가까운 주변에 있다는 것은 이번 일로
더욱 확실해졌습니다. 강치수가 살해됐을 때 우리는
정보가 새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즉
범인이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장만두가 범인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그 가능성은 더욱
확실해졌습니다. 우리의 가까운 곳에서 범인은 수사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 내내 지켜보고 있습니다.
주목할 점은 범인이 장만두 씨와 송묘임 씨와의
관계도 알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범인은
장만두 씨를 범인으로 만들기 위해 인형에다가 청미의
머리칼을 붙여 두는 기상 천외한 짓을 저질렀고, 또
돈을 장롱 밑에다 숨겨 두기도 했던 것입니다."
허걸의 말에 송태하와 지회는 얼굴빛이 굳어졌다.
"그리고 범인은 혼자가 아니지. 범인은 둘
이상이야."
어느새 들어왔는지 조태가 조그만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범인이 가까운 곳에 있다면 빨리 체포하지 않고 뭘
하는 겁니까? 말씀들 하시는 걸 보니까 범인의 윤곽이
잡힌 것 같은데……."
송태하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지회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형사들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아직 확실한 증거가 없어요. 증거를 확보할
때까지는 두고 볼 수밖에 없어요."
조태는 여유 있는 태도로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을 겁니다. 두 번 다시
실수를 저질러서는 안 되기 때문에 우리는 아주
조심하고 있죠. 서두를 것 없습니다."
"자신만만하군요. 기대해 보겠습니다."
송태하는 빈정거리는 투의 반응을 보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지회가 입을 열어 물었다.
"경찰이 대강 윤곽을 잡고 있는 범인은
구인가요?"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하고 허걸이 딱 잘라 말했다.
"우리가 범인일 수도 있지."
송태하가 누이동생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혹시 형부를 범인으로 점찍고 있는 거 아니에요?"
지회의 날카로운 물음에 형사들은 입을 다물었다.

수사관들은 서울 시내에 산재한 비뇨기과 병원들을
이 잡듯이 뒤지고 다녔다. 그들이 찾는 것은 지난 구
년 동안의 환자 기록 카드에서 홍상파의 카드를
찾아내는 일이었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웬만한 병원에는 콤퓨터 시스템이 설치되어
있어서 환자들에 대한 기록이 입력되어 있었기
때문에, 버튼 하나로 조사를 끝낼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런 설비가 되어 있지 않은 병원이 문제였다.
그런 경우에는 산더미 같은 서류철을 앞에 쌓아
놓고 하나하나 뒤져 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인내와
끈기를 요하는 일이었다.
또 하나 문제되는 것은 지난 구 년 동안의 기록
카드를 모두 비치해 두고 있는 병원이 많지 않다는
점이었다. 최종 진료일자로부터 오 년이 넘은 기록
카드는 대부분 파기되어 있었다.
그런저런 문제점들이 있었지만 조사는 끈기 있게
계속되었다.
조사가 시작된 지 사흘째 되는 날, 마침내
수사본부로 반가운 소식이 하나 날아들었다.
병원을 뒤지던 어느 수사관으로부터 걸려 온
전화였는데, 드디어 홍상파의 카드를 발견했다는
연락이었다. 연락을 받은 조태와 허걸은 지체하지
않고 그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곳은 설립된 지 삼 년밖에 되지 않은 종합
병원이었다. 어느 재벌이 돈을 아끼지 않고 투자해서
지은 병원이었기 때문에 최신 시설이 많다는 소문이
나 있었고, 그래서 다른 병원에 비해서 환자가 많이
몰리고 있었다.
그 병원의 비뇨기과 과장은 바쁜데도 불구하고 일을
제쳐놓고 수사관들을 맞아 주었다.
과장이 보여 주는 환자 기록 카드를 보니 분명히
홍상파의 카드임이 분명했다. 혹시 동명 이인일지도
몰라 생년월일·주소·본적 등을 확인해 보니
틀림없는 송묘임의 남편인 홍상파의 카드였다.
"이 환자는 작년, 그러니까 81년 12월 9일 처음
여기에 온 걸로 되어 있군요. 원인은 불임증 여부를
검사하기 위해 왔습니다."
오십대의 비뇨기과 과장은 카드를 짚어 가며
수사관들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검사 결과는 어떻게 나왔습니까?"
성미 급한 조 반장은 그것부터 우선 알고 싶어했다.
"임신 능력이 없는 것으로 결과가 나왔습니다."
형사들의 얼굴에 긴장이 감돌았다.
"이 카드는 선생님께서 직접 작성하신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이 환자는 저를 지명해서 특진을
요청했기 때문에 제가 특별히 본 겁니다."
"그 환자와 잘 아는 사이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환자로서 알게 된 거죠."
"그 환자에 대해서 좀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십시오."
과장은 기억을 더듬는 듯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불임증 환자의 경우 거의가 한 병원에만 가지
않죠. 이 병원 저 병원을 돌아다니며 원인을 알려고
하죠. 이 환자도 여러 군데를 돌아다니다가
마지막으로 이곳에 온 것 같았습니다. 나이가 서른
일곱에 결혼한 지 칠 년인가 팔 년이 됐다는데
그때까지 자식이 없다고 했습니다. 부인은 병원에서
검사 결과 이상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며칠을 두고 그 환자에 대해 세밀한 검사를
해보았습니다. 병력 조사·신체 검사·면역
검사·정액 검사·호르몬 검사·고환 조직 검사 등을
해보았는데, 두 가지 원인을 찾아낼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정자 형성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임신이 되려면 고환에서 정상 정자가 하루에 약 이억
마리 정도는 생산되어야 하는데 이 환자는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여기 보면 아시겠지만 정액 1밀리리터에
정자의 수가 천 마리 정도에 불과합니다. 거기다
운동성 정자는 반 수도 못 됩니다. 이래 가지고는
임신을 시킬 수가 없죠. 정상인이라면 검사시 정액
1밀리리터에 일억 마리 정도는 있어야 합니다. 이
경우 임신시키는 데 필요한 최저치는 이천만 마리인데
환자는 그 수에도 못 미치고 있죠. 그리고 운동성
정자가 오십 퍼센트 이상이어야 하는데 이 환자의
정자는 그렇지가 못합니다. 둘째, 이 환자의 경우
정로가 폐쇄되어 있었습니다. 정자는 성숙되면서
정로를 통해 체외로 사출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정로가 폐쇄되어 있으면 정자가 몸 밖으로 나갈 수가
없게 되는 거죠. 그렇게 되면 임신이 불가능해질
수밖에 없는 거죠. 홍상파 씨의 경우 이와 같은 두
가지 결함이 있었기 때문에 그때까지 자식을 못
가졌던 거죠."
"그래서 치료를 받았습니까?"
"네, 수개월 동안 치료를 받았습니다. 폐쇄된
정로는 수술로 개통시켰고, 정자 형성 장애는
약물요법을 이용해서 제거했습니다. 정자 형성
촉진제를 삼 개월 이상 썼더니 상당한 효과가
있었습니다."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는 건 완치됐다는 말입니까?"
허걸이 처음으로 입을 열어 물었다.
"네, 충분조건까지는 못 미쳤지만 임신을 시킬 수
있는 최저선에는 도달했었습니다. 그런데 치료가 거의
끝나갈 무렵 환자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사실은
자기한테 일곱 살 먹은 딸이 있는데 그 애를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말입니다. 그 말을 듣고
저는 당황했습니다. 문제가 꽤 심각하다고 생각했죠.
그 사람 말대로 일곱 살 먹은 딸이 있다면 그 딸은 그
사람의 피를 받은 아이가 아닌 것이 분명했죠. 홍
씨는 저한테 그걸 확인하고 싶어했습니다. 저는
생각다 못해 낳은 자식만 자식이 아니고 기른 자식도
자식이다, 오히려 기른 정이 더 무서운 법이라고
말했습니다. 더 달리 어떻게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날 이후 홍 씨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소식도
없었습니다."
홍상파의 진료 카드는 복사되었다. 복사된 것은
경찰 수사진의 손에 넘어갔다.
"자, 어떡하지?"
병원을 나서면서 조 반장이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허걸은 잠자코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이제 어떡하지? 홍상파는 청미가 자기 자식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어. 알고 있으면서
시침을 떼고 있었던 거야."
"놀라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결정적인
증거는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에 대한 수사를 집중적으로 전개해야
해."
"병원에 대해서도 더 좀 알아보는 게 좋을 겁니다.
그 사람에 대한 진료 카드가 많이 나오면 나올수록
좋을 겁니다."
그 다음 날은 두 개의 수확이 더 있었다. 역시
비뇨기과 의원에서 찾아낸 홍상파의 진료 카드였는데,
거기에도 처음과 같은 진료 내용이 기재되어 있었다.
사건이 발생하던 날, 그러니까 청미가 유괴되던
날의 홍상파의 알리바이는 같은 회사의 김덕기라는
상무에 의해서 입증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가
증인인 셈이었다.
증인은 그말고도 두 사람이 더 있었다. 미국인 마크
스코트와 그의 여비서인 소피아 양인데, 그들은
미국에 있기 때문에 증언을 듣기가 사실상 어려웠다.
따라서 자연 김 상무의 증언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김 상무의 증언은 처음 수사가 시작됐을 때에도 한
번 들은 바가 있었다. 그때 김 상무를 만난 사람은 조
반장이었다. 그러나 그때에는 다분히 형식적으로 만나
보았기 때문에 그의 증언을 재검토하기 위해서도 다시
한 번 만나 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조 반장과 허 걸은 점심 시간을 이용해 김덕기
상무를 밖으로 불러냈다. 회사로 찾아갔다가 혹시
홍상파의 눈에라도 띄게 되면 좋지 않을 것 같아
밖으로 몰래 불러냈던 것이다.
김 상무는 협조적이었기 때문에 불쾌한 기색 없이
수사관의 요구에 응해 주었다. 그들은 회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다방에서 만났다.
"또 뵙게 됐습니다. 나오시라고 해서 미안합니다.
사실 우리 같은 사람은 만나지 않을수록 좋은
건데……미안합니다."
조 반장이 미안해 하자 김 상무는 펄쩍 뛰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조금도 그런 생각
갖지 마시고 얼마든지 물어 보십시오. 저는 경찰
쪽이지 범인 쪽은 아닙니다. 범인을 체포하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도와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홍상파 씨는 요즘 어떻습니까?"
김 상무는 한숨을 내쉬고 나서 무겁게 입을 열었다.
"많이 변했더군요. 아직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겠지만 하루 종일 가야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일만 합니다. 너무 일에만 집착하기 때문에 말을
걸기도 두렵습니다."
"그렇겠군요. 지난번에 만났을 때 들은 바
있습니다만……홍상파 씨의 딸이 유괴되던 지난 7월
15일의 일을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 날
홍상파 씨와 함께 점심식사를 했다고 들었는데……."
"네, 맞습니다. 그 날 우리는 S호텔에서 외국
바이어와 점심 약속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열두 시경에 회사를 출발해서 곧바로 S호텔로 갔죠.
그리고 식사를 끝내고 회사로 돌아온 게 세
시경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쭉 함께
행동했습니다. 화장실에 갈 때 외에는 계속 붙어
있었습니다."
"그 바이어는 누구였습니까?"
"마크 스코트라는 미국인으로 신발 회사
부사장입니다. 거기서는 인건비가 비싸니까 인건비가
싼 여기서 신발을 만들어 주면 전량 수입하겠다는
조건이었습니다. 그 일로 그 사람과 만난 겁니다."
"그래서 신발은 수출했나요?"
"못 했습니다. 계약을 하고 돌아갔는데 얼마 후
우리 직원이 미국에 가는 길에 그 회사에 들렀더니
사무실에 전화 한 대만 달랑 있더랍니다. 그러니까
유령 회사였던 셈이죠. 정말 큰일날 뻔했습니다."
"그 날 세 사람이 점심식사를 했나요?"
"아닙니다. 바이어 쪽에서 두 명이 나왔습니다.
스코트라는 작자가 여비서라고 하면서 소피아 뭐라고
하는 여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쪽 두 명, 이쪽 두
명 모두 넷이서 식사를 했죠."
"그 미국인과 연락할 수 있습니까?"
허걸의 물음에 김 상무는 머리를 흔들었다.
"불가능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도 연락을
해보려고 했지만 연락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때 무슨 식사를 했습니까?"
"중국식 뷔페를 먹었습니다. S호텔내에
양자강이라는 중국 음식점이 있습니다. 거기서
먹었습니다."
"그런 비즈니스 관계로 식사를 하면 물론 회사
공금으로 식사비를 내겠죠?"
"네, 그렇습니다. 나중에 영수증을 첨부해서 내면
경리과에서 돈을 내줍니다."
"그 영수증은 보관되어 있겠군요?"
"네, 그럴 겁니다."
"그걸 좀 보고 싶은데……."
허걸은 집요한 데가 있었다. 그는 김 상무의
알리바이 증언에 거짓이 없는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김 상무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일어서더니 카운터로
가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회사로 전화를
걸겠거니 생각하면서 조 반장과 허걸은 잠자코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26. 숫자의 비밀

김덕기 상무가 전화를 걸고 난 지 십오 분쯤 지나자
오피스걸로 보이는 제복 차림의 예쁘장한 아가씨 한
명이 다방 안으로 들어와 곧장 김 상무 쪽으로
걸어와서는 잠자코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김 상무는 봉투 속에 들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그녀에게 가도 좋다고 고개를 끄덕해 보였다. 그리고
그녀가 돌아가자 봉투 속에 들어 있는 것을 꺼내
형사들 앞에 내놓았다.
조 반장과 허걸은 재빨리 그것을 집어 들고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계산서였다. 계산서를 발급한
곳은 S호텔내에 있는 '양자강'이라는 중국
음식점이었다. 지난 7월 15일에 발급한 것으로 합계
금액은 사만삼천이백 원으로 나와 있었다.
"이건 제가 당분간 보관하고 있겠습니다."
허걸은 상대방의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고 그것을
주머니 속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 조 반장이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서는 것을 보고 뒤따라 일어섰다.
화장실에 들어가 나란히 서서 소변을 보면서 허걸은
조 반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가 돌아올 때까지 김 상무를 붙들고 이야기를 좀
나누십시오. 스코트라는 자와 소피아라는 여비서에
대해 집중적으로 물어 봐 주십시오. 제가 좀 늦으면
김 상무를 보내도 좋습니다."
"어디 갈려구?"
"홍상파를 만나고 오겠습니다."
자리로 돌아온 조 반장은 허걸이 시킨 대로 김
상무에게 미국인들에 대해 물어 보기 시작했다.
건성으로 물어 보는 게 아니라 세밀한 부분에까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먼저 마크 스코트라는 자에 대해 물어 보았는데
그의 인상 착의를 김 상무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대머리에 둥글둥글한 얼굴. 머리칼 색깔은 엷은
갈색, 눈은 부리부리하고 회색, 코밑 수염을 길렀음.
중키에 뚱보. 배가 몹시 나왔음. 가는 금테 안경을
끼었음. 시가를 즐겨 태움. 상하 흰색 양복 차림.
노란 와이셔츠에 파란 줄무늬 넥타이를 맸고 목소리는
허스키.
"코는 어떻게 생겼습니까?"
집요한 물음에 김 상무는 당황해 하고 있었다.
조 반장은 그들이 함께 식사를 했다면 그 정도쯤은
기억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물은 것이었다.
그런데 상대방이 의외로 당황하는 것을 보고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욱 자세하게
캐물었다.
"뭐 보통 미국 사람들처럼 큰 편이었습니다."
"코가 뭉툭하거나 휘어지지는 않았던가요?"
"좀 뭉툭한 것 같았습니다."
다방 안에는 냉방이 잘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김
상무는 땀을 흘리고 있었다.
"구두 색깔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거기까지는 보지 못했습니다."
"휴대품 같은 것은 없었나요? 가방 같은 것
말입니다."
"007가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가방은 무슨 색이었나요?"
"검정색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느 호텔에 투숙하고 있었나요?"
"S호텔에 투숙하고 있었습니다."
"몇 호실에 투숙하고 있었나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홍상파 씨는 알고 있겠군요?"
"아마 알고 있을 겁니다."
"수첩 같은 데 메모해 뒀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네, 아마 그랬을 겁니다."
소피아는 금발 아가씨였다. 나이는 이십대 후반.
팔등신에 파란 눈을 가진 미녀. 젖가슴이 크고 히프의
곡선이 몹시 선정적. 키는 175센티 정도. 상아
목걸이를 목에 걸고 있었고 코발트색 블라우스에 흰
바지 차림. 양쪽 손가락에 반지를 끼고 있었고
선글라스도 끼고 있었음.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구요?"
조 반장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7월 15일은 비가 억수같이 쏟아진 날이었다. 그런
날에, 그것도 실내에서 선글라스를 쓴 채 식사를
하다니 어쩐지 걸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데 눈이 파랗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었는가?
"네, 끼고 있었습니다."
김 상무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려는 듯 분명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 날은 비가 많이 내렸습니다. 비오는 날, 더구나
실내에서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는 게 좀 이해가 안
되는군요. 그리고 선글라스에 눈이 가려 있었을 텐데
그 여자 눈이 파랗다는 건 어떻게 알 수 있었습니까?"
정곡을 찔렸는지 김 상무는 완전히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식사할 때는 선글라스를 벗고 있었습니다."
"아, 그러니까 선글라스를 벗었다 끼었다 한
모양이군요?"
"네, 그렇습니다."
"핸드백은 어떤 걸 가지고 있었나요?"
"숄더 백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깨에 메고 다니는 백 말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건 무슨 색이었나요?"
"밤색이었습니다."
구두는 흰 색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그 시간에 허걸도 홍상파를 향해 비슷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그는 몹시 야위어 있었고 얼이 빠진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허걸이 새삼스럽게 미국인들에 관한
것을 캐묻자 그의 두 눈은 적대감으로 번득였다.
그러나 이내 다시 얼빠진 것 같은 표정으로
돌아가면서 무거운 음성으로 대답해 주었다. 허걸은
상대방이 말해 주는 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일일이 수첩에다 적어 나갔다.
한 시간 뒤 홍상파와 헤어져 다방으로 돌아가니 조
반장은 혼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수첩을 펴놓고 김 상무와 홍상파의 진술
내용을 비교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의외로 서로
엇갈리는 진술이 많이 드러나고 있었다. 첫째
머리에서부터 그들의 진술은 상반되어 있었다.
"대머리라구요? 홍상파는 스코트가 금발의
사나이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혹시 대머리가 아니냐고
하니까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코밑 수염이
아니고 턱수염을 기르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허걸은 흥분해서 말했다. 조 반장 역시 바짝 긴장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안경을 끼었다고 하던가?"
"아닙니다, 안경은 끼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나한테는 금테 안경을 끼고 있었다고 했어.
이거……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이렇게 다를 수가 있나?
옷차림은 뭐라고 했지?"
"체크 무늬 상의에 밤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말도 안 돼! 나한테는 아래위 흰색 싱글을 입고
있었다고 했어!"
조 반장이 흥분해서 큰 소리로 말하는 바람에
주위에 있던 손님들의 시선이 그들에게 쏠렸다.
"뭔가 이상하군요. 소피아라는 비서 아가씨에
대해서는 뭐라고 하던가요?"
조 반장은 김 상무한테서 들은 내용을 수첩을
들여다보며 말해 주었다. 그것을 듣고 난 허걸은
고개를 흔들었다.
"저하고는 완전히 다른데요. 홍상파는 그 아가씨가
자그마하다고 했습니다. 머리가 금발인 것은 맞는데
옷차림이 다릅니다. 소피아는 흰색 블라우스에 검정
바지를 입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선글라스 같은 것은
가지고 있지도 않았구요. 핸드백은 검정색이었고
구두는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조 반장은 수첩을 닫았다. 그리고 날카로운 어조로,
"바로 여기에 함정이 있었어!"
하고 말했다.
"두 사람 다 거짓말을 하고 있든가 아니면 둘 중 한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바로 그래서 알리바이가 성립되었던 거야. 이제 그
알리바이를 깰 수가 있어."
"어떻게 할까요? 누구를 먼저 연행할까요?"
"그야 물론 김 상무이지. 표나지 않게 조용히
데려다가 심문해."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함께 밖으로 나와 한 사람은 제양 상사
쪽으로, 다른 한 사람은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 동안 쌓였던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송태하는
수사본부 안에 있는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잠 속에
빠져 들고 있었다. 그는 조카를 죽인 범인의 윤곽이
드러남에 따라 갑자기 말이 없어지고 극적인 순간을
맞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가 악몽에 시달리고 있을 때 그를 급히 찾는
전화가 걸려 왔다. 형사가 그를 흔들어 깨웠다.
전화를 걸어 온 사람은 사회부장이었다. 데스크의
목소리는 긴장되어 있었다.
"일가족이 자살한 사건이야. 연탄 가스 자살인데
강치수의 가족이야. 황 기자한테 연락이 왔어. 지금
현장에 나가 있으니까 한번 가보라구."
황 기자는 태하보다는 몇 년 후배인 신출내기 사건
기자였다.
"강치수라니요?"
미처 정신을 차리지 못한 태하는 그렇게 물었다.
"강치수도 몰라? 얼마 전 이스탄불에서 살해된 사람
말이야. 송 기자 조카 유괴 사건 관계로……."
"아, 알겠습니다!"
택시를 잡아타고 천호동 쪽으로 달리면서 송태하는
수첩을 뒤적였다. 곧 강치수라는 이름과 '243'이라는
숫자가 눈에 띄었다. 243은 강치수가 칼에 찔려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뇌까린 말이었다.
그 동안 경찰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 궁리 저
궁리 해보았지만 결국 지금까지 그 암호 같은 것을
풀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송태하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그 집 앞에는 동네
사람들이 잔뜩 몰려와 있었다. 집 앞에는 경찰관이
지키고 서서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먼저 와서 취재를 끝낸 후배 기자가 송태하에게
사건 전말을 대강 이야기해 주었다.
"강치수의 유족들은 이 집 단칸 셋방에 살고
있었습니다. 강치수와 부인 안계영 씨 사이에는 일곱
살 먹은 아들이 하나 있었고 강치수가 피살됐을 당시
부인은 임신중이었습니다. 안계영 씨는 일 주일 전에
딸을 낳았습니다. 남편이 죽고 나서 부인은 남편을
원망하고 세상을 몹시 비관했다고 합니다. 아기를
낳고도 미역국 하나 끓일 형편이 못 되어 주인집에서
끓여 주었을 정도였습니다. 주인여자 말로는 오늘
아침까지는 별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아홉 시경에
부인이 마당에 나와 빨래를 너는 것을 봤다니까요.
그런데 그 뒤부터는 방에서 나오지를 않았답니다.
그런데 아기가 몹시 울어대서 한 시경에 문을
두드렸는데 응답이 없어 문을 열려고 하니까 안으로
잠겨 있더랍니다. 부엌 쪽으로 돌아갔더니 그쪽 문도
잠겨 있었답니다. 창문도 물론 잠겨 있었구요.
심상치가 않아 아들을 시켜 창문을 뜯어 내고 방
안으로 들어갔더니 연탄 가스가 방 안에 꽉 차 있어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답니다. 부인은 부엌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 놓고 자살을 꾀했습니다. 연탄 아궁이
뚜껑을 열어 놓고, 부엌으로 통하는 문까지 열어
놓았기 때문에 가스는 고스란히 방 안으로 흘러
들어온 거죠. 부인은 유서도 써놓았습니다."
"뭐라고 써놓았나?"
"유서는 경찰이 보관하고 있습니다. 내용은 여기다
적어 놓았습니다."
황 기자는 수첩을 들여다보며 유서 내용을 읽어
주었다.
'모든 이들에게 죄송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 좋은
일 한번 못해 보고 떠나는 이 몸을 용서해 주십시오.
아이들이 너무 불쌍해서 함께 데리고 갑니다. 무덤을
만들지 말고 화장해 주십시오. 무덤을 돌볼 사람이
없어서 그럽니다. 죄송합니다. 유란이 엄마, 빌려 준
돈 갚지 못하고 떠나서 미안합니다. 집 보증금 이십만
원 중에서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나머지 돈은
화장하는 데 써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송태하는 가슴이 미어져 오는 것을 느꼈다.
"안에 시신이 있나?"
"없습니다. 병원에 모두 실려 갔는데 부인과 일곱
살짜리 아들은 숨지고 갓난아기만 목숨을 건진
모양입니다."
"난 지 일 주일밖에 안 된 아기가 살아났단
말이지?"
송태하는 놀라서 물었다.
"네, 살아났답니다."
"신기한 일이군."
그들은 강치수의 유가족이 살았던 단칸 셋방으로
들어가 보았다.
조그만 방 안은 온갖 것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짓밟고 지나간 흔적이 마치 썰물이
빠지고 난 후의 갯벌처럼 황량하게 남아 있었다.
"이 방에서 보증금 이십만 원에 월 사만 원을 주고
살고 있었습니다."
황 기자의 말을 들으며 송태하는 이곳저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친척 하나 없는 모양입니다. 부인은 고아로
자랐답니다."
태하는 잠바를 벗어부치고 본격적으로 방 안을 뒤져
나갔다.
"아마 그래서 자식들을 고아로 남겨 두기 싫어서
부인은 아이들을 데리고 간 모양입니다. 살아남은
갓난아기가 문젭니다. 무얼 그렇게 찾으십니까?"
송태하는 잠자코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것을 보고
황 기자도 방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조금 후에 그는
부엌으로 나갔다.
"여기에 뭐가 있는데요!"
황 기자의 말에 송태하는 부엌으로 고개를
디밀었다.
황 기자는 부엌 선반에서 라면 박스를 내리고
있었다. 그 박스 속에서 조그만 노트들이 나왔다.
그것은 부인이 쓴 일기장들이었다.
"이걸 읽어 봐야겠군."
송 기자는 박스째 들고 밖으로 나왔다.

호텔 양자강 지배인은 제양 상사 국제 부장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조 반장이 홍상파의 사진을
보이자 반색하며 말했다.
"아, 홍 부장님 말씀이군요? 네, 잘 알고말고요.
손님들하고 여기 자주 들르시는 편이죠. 저희는 제양
상사 간부들을 VIP로 모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인도
가능하죠."
지배인은 홍상파의 딸이 유괴 살해된 사건도 잘
알고 있었고, 그 사건이 발생한 이후 홍 부장은 한
번도 양자강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7월 15일 홍 부장과 김 덕기
상무라는 사람이 여기에 왔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점심때 여기서 누구와 식사를 했는지 알고 싶습니다.
이건 그 날 여기서 발급한 계산서죠?"
지배인은 그것을 들여다보더니 틀림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기를 그것은 삼 인분 식사
계산서라는 것이었다.
"뷔페는 일 인당 만이천 원씩입니다. 삼 인분이면
삼만육천 원……거기에 부가 가치세 십 퍼센트와
서비스 차지(Charge)가 십 퍼센트 붙습니다. 그래서
합하면 사만삼천이백 원이 나옵니다."
"그럼 그 날 세 사람이 식사했다는 말이군요?"
"네,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조 반장은 어떤 가능성을 향해 한 발짝 더 가까이
접근했다.
"그 날 미국인 두 명하고 식사했다고 하던데 기억
안 납니까? 미국인 두 명 중 한 명은 여자였다고
하던데……?"
지배인은 종업원들을 불렀다. 그리고 조 반장의
말을 그들에게 되풀이 들려 주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그날 점심때 홍 부장님이
외국인 두 사람하고 식사를 한 것으로 아는데……누구
기억하고 있는 사람 없어?"
그렇게 말하면서 지배인이 종업원들을 둘러보자
예쁘장하게 생긴 아가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네, 맞아요. 그 날이었을 거예요. 외국인 두
사람하고 식사하셨는데 한 사람은 여자였어요. 제가
시중을 들었거든요."
그녀는 홍 부장이 식사를 끝내고 돌아갈 때
그녀에게 팁까지 주고 갔다고 덧붙여 말했다.
"팁은 계산에 다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거절했거든요. 그런데도 굳이 받으라고 해서……."
그때 그녀가 홍 부장으로 받은 팁은 오천 원이었다.
"그러니까 그 자리에는 홍 부장과 외국인 두 명만
있었나요? 그 밖에 다른 사람은 없었나요? 김덕기
상무가 함께 식사한 줄로 알고 있는데요."
조 반장의 말에 그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홍 부장님하고 외국인 두 사람만 식사하셨고 그
밖에 다른 분은 없었어요."
"틀림없나요?"
"네, 틀림없어요."
"틀림없을 겁니다. 계산서에도 삼 인분 계산으로
나와 있으니까요."
지배인이 옆에서 그녀를 거들었다.
"나는 정확한 시간을 알고 싶습니다. 이건 아주
중요한 겁니다. 뷔페 점심은 몇 시부터 시작합니까?"
"열두 시부터입니다."
"홍 부장이 나타난 시간을 정확히 알 수 없을까요?"
조 반장은 침을 삼키며 예쁘장한 아가씨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한참 생각을 더듬는 표정이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때 그러니까……자리가 거의 찼을 때 홍
부장님이 외국인들하고 들어오셨거든요. 좋은 자리가
없어서 할 수 없이 저기 문 쪽에다 자리를 잡아 드린
기억이 나요."
"그렇다면 한 시쯤 됐겠군. 한 시가 지났으면
지났지 그 이전은 아닐 거야."
하고 지배인이 말했다.
조 반장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지배인이 이어서
말했다.
"손님이 거의 찼을 때 들어오셨다면 시간이 그쯤
됩니다. 문을 열자마자 손님들이 몰려들어오지는
않거든요. 대개 한 시간쯤 지나야 자리가 모두
찹니다. 그러니까 한 시경으로 잡으면 될 겁니다."
중요한 수확이었다. 바라던 증언을 얻어들은 조
반장은 증인을 데리고 수사본부로 급히 돌아갔다.

수사본부에서는 허걸이 김덕기를 상대로 마지막
담판을 벌이고 있었다. 허걸도 김덕기도 땀을 흘리고
있었다.
석양의 붉은 놀이 창문을 통해 비쳐 들고 있었다.
그 빛을 받은 두 사람의 얼굴은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조 반장은 상의를 벗어부친 채 러닝 셔츠 바람으로
심문에 가세했다.
상대방은 일류 회사 간부인데다 명석한 두뇌를 가진
엘리트였다. 그런만큼 만만하게 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이 또한 약점일 수도 있었다.
이런 자들은 두뇌 회전이 빠르기 때문에 가능성이
없다 싶으면 재빨리 포기하고 나온다. 그리고 자신이
빠져 나갈 수 있는 구멍을 찾기에 혈안이 된다는 것을
허걸은 잘 알고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김덕기는 완강히 부인하고 나왔다.
자기는 그 날 홍상파와 함께 틀림없이 S호텔내에 있는
중국 음식점에서 외국인 두 명과 함께 식사를 했다는
것이었다.
"홍 부장한테 물어 보시면 알 게 아닙니까? 제가 왜
가지도 않은 것을 갔다고 거짓말하겠습니까? 뭔가
잘못 생각하시고 그러시는 것 같은데 다시 한 번
조사해 보십시오,."
"그럼 왜 두 사람의 진술이 이렇게 다르나요?
당신은 스코트가 대머리라고 했어요. 그런데 홍
부장은 대머리가 아니라고 했어. 당신은 스코트가
금테 안경을 끼고 있었다고 했는데 홍 부장은 안경
같은 것은 끼지 않았다고 대답했어요. 왜 이렇게 서로
정반대되는 대답을 하지요? 두 사람의 진술이 어느
정도 비슷하면 나도 이해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건
그게 아니란 말입니다. 달라도 너무 달라요. 또 말해
볼까요? 당신이 말한 스코트는 아래위 흰색 싱글
양복을 입고 있었는데 홍 부장은 그 사람이 체크 무늬
상의에 밤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고 했어. 도대체 어느
쪽 말이 맞는 건가요?"
"왜 그런 차이가 나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홍
부장이 착각을 해도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사실 홍 부장은 딸을 잃고 나서 약간
정신 상태가 이상해진 것 같습니다. 회사에서도 그
점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한테 뒤집어씌우지 말아요!"
"뒤집어씌우는 게 아닙니다."
"상반된 진술이 한두 가지가 아니란 말입니다.
소피아라는 여자에 대한 인상 착의도 상반된 점이
많아요. 당신이 그 날 거기에 갔다면 그럼 홍 부장이
빠졌겠군요? 그렇지 않나요? 홍 부장의 알리바이를
위해 이렇게까지 곤욕을 치를 필요가 뭐 있나요?"
김덕기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표정에 변화가 일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괴로운 표정으로 허걸을 바라보았다.
물을 한 잔 청하고 나서 그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허걸과 조태는 숨을 죽이고 그를 응시했다. 담배가
거의 타들어갔을 때 마침내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답변하기 정말 곤란하군요. 일이 이렇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정말 난처한데요."
"당신의 진술 내용은 비밀로 부치겠소. 당신 입장을
곤란에 빠뜨리지는 않을 테니까 사실대로 말해
주시오."
"약속은 지키셔야 합니다."
"틀림없이 지킵니다."
김 상무는 담배를 비벼 끄고 나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사실대로 말씀드리죠. 저도 더
이상 곤욕을 치르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홍 부장은
학교 후배이고 제가 제일 아끼는 사람입니다. 그는
얼마든지 뻗어 나갈 수 있는 인물이기 때문에 저도 그
친구를 적극 밀어 왔죠. 그 날 열두 시경에 우리는
미국인들을 만나기 위해 회사를 나왔습니다. 우리는
제 차로 S호텔로 향했습니다. 차는 제가 몰았죠.
그런데 중도에 홍 부장이 자기는 긴한 볼일이 있어서
식사에 참석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아주 중요한
일인 것 같아 저도 그러라고 했습니다. 홍 부장은 그
사실을 비밀로 해달라고 했습니다. 누가 물으면
미국인들과 함께 식사한 걸로 해달라고 하기에 염려
말라고 했습니다. 호텔에 도착하자 홍 부장은 제 차를
빌려 타고 어디론가 갔습니다. 그리고 두 시 반쯤에
호텔로 돌아와 저를 만났습니다. 저는 그때
미국인들과 헤어져 커피숍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커피 한 잔씩을 마시고 회사로
돌아갔습니다."
"매우 도움이 되는 말씀을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
미국인들을 만나기 위해 회사를 나선 것이 정확히 몇
시쯤이었습니까? 미국인들과는 몇 시에 만나기로
했었나요?"
그때까지 잠자코 있기만 하던 조 반장이 처음으로
질문을 던졌다.
"열두 시였습니다."
"그렇다면 열한 시 삼십 분쯤 회사에서
나왔겠군요?"
"네, 아마 그쯤 될 겁니다."
"네,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그럴 듯하게 꾸며서
말입니다!"
김덕기를 바라보는 조 반장의 눈초리가 날카로운
빛을 띠기 시작했다. 그는 여러 말 할 필요가 없다는
듯 일어서서 문을 열었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 있는
아가씨를 향해 방 안으로 들어오라고 말했다.
"이 아가씨는 S호텔에 있는 중국 음식점 양자강에
근무하고 있는 직원입니다."
김덕기의 얼굴 표정이 순식간에 창백하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피살된 강치수의 아내 안계영의 일기는 결혼과 함께
시작되고 있었다. 조그만 글씨로 또박또박 적어 나간
일기는 지난 팔 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계속되고
있었다.
단지 강치수가 살해되던 날부터는 일기가 중단된
상태로 있었다. 아마 충격이 너무 큰 나머지 일기
쓰는 것을 그만둔 것 같았다. 일기는 작은 노트로
열다섯 권이나 되었다.
그것들을 읽고 싶은 강한 충동에 사로잡힌 송태하는
후배 기자인 황 기자와 함께 여관방에서 그것들을
나누어 읽기 시작했다.
"정보가 될 만한 게 있으면 놓치지 말고
체크하라구."
황 기자에게 단단히 일러 놓고 읽어 나가는데, 문장
같은 거야 대수로울 게 없었지만 가난한 생활을
어떻게든 꾸려 나가려고 애쓰는 그녀의 애틋한
마음씨가 구구절절이 배어 있어 마치 그녀의 애절한
호소를 듣는 것만 같아 가슴이 찡해 왔다.
그녀는 남편이 좋은 직장을 구해 하루빨리 가정이
안정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사흘 거리로 집을
비우는 남편이 제발 마음을 잡고 집에 안주해 주기를
빌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을 원망하지 않고 남편이 밖으로만
나도는 것을 그녀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이 밖에서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니고 있는지
전혀 눈치를 못 채고 있었다.
그런데 아기를 낳고 얼마 안 있어 강치수는 강도
강간범으로 체포되었고 사 년 징역을 언도받는다.
"이거 보십시오, 강치수가 교도소에 있을 때 부인이
남편을 면회한 기록이 나오는데요. 죄수 넘버는
2438……."
송태하는 자신이 읽고 있던 일기를 집어 던지고 황
기자가 들고 있는 일기장을 홱 나꿔챘다.
"어디야?"
"이 부분입니다."
송태하는 황 기자가 짚어 주는 부분에다 눈을
박았다. 그 일기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2438――이것이 그의 죄수 번호다. 처음에는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았었다. 내가 너무 울다 보니까
그 동안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2438――그것이
그의 이름이다. 오늘 그 번호는 유난히도 크게 내
눈에 들어왔다. 그이가 그렇게 된 것은 모두 내
탓이다. 내가 아내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방세 낼 돈으로 그이한테 사식을 넣었다.
그이는 면회오지 말라고 하지만 나는 매일매일 가고
싶다. 아기가 보채고 젖을 잘 먹지 않는다. 머리를
만져 보니 열이 있다. 병원에 갈 돈도 없는데
걱정스럽다.'
송태하는 손바닥으로 자신의 무릎을 탁 쳤다.
"바로 이거야!"
"뭐가 말입니까?"
태하는 거기에는 대답하지 않고 방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강치수가 죽으면서 뇌까린 말 '243'은 그가 교도소
생활을 할 때의 죄수 번호인 '2438'이 틀림없다. 그는
왜 그 번호를 유언처럼 중얼거렸을까? 그 번호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부인은 정말 열녀인데요? 강치수가 교도소에
들어가 있는 동안 행상으로 생계를 꾸려 갔는데,
시장에서 떡을 받아다가 팔았습니다."
황 기자가 태하에게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그는 왜 죄수 번호를 말했을까 하고 태하는
생각했다. 그러다가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27. 마지막 얼굴

송태하가 수사본부로 들어섰을 때 거기에는
대낮처럼 불이 환히 켜져 있었고 수사관들은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나 태하를 보고
그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태하는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온 것 같은 분위기를
느끼고 허걸 옆에 주저앉았다.
"밤 늦게까지 회의를 하고 있는 것이 심상치가
않군요. 저도 좀 들어 봅시다."
허걸은 조태를 바라보았다. 조태는 그의 시선을
피해 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우리 서로 바꿉시다. 나도 기막힌 정보를 하나
가져 왔으니까."
그 말에 허걸의 눈이 번쩍 빛났다.
"뭔데요?"
"243……강치수가 죽으면서 내뱉은 숫자 말입니다.
그걸 풀었거든요."
조 반장이 고개를 돌려 송태하를 쳐다보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하고 일어났다.
"저 방으로 들어갑시다."
송태하는 조 반장을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허걸이 따랐다.
"먼저 회의 내용을 듣고 싶은데요."
태하의 말에 조 반장은 허걸에게 말해도 좋다는 듯
고개를 끄덕했다. 허걸은 손가락으로 건너편 방을
가리켰다.
"지금 저 방에는 제양 상사 상무인 김덕기 씨가 와
있습니다. 청미양이 유괴되던 날 그 시간에 홍상파
씨는 김 상무와 함께 S호텔 안에 있는 중국
음식점에서 미국인 바이어와 함께 점심 식사를 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조사 결과 김 상무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홍상파 씨 혼자 미국인
바이어를 상대한 거죠. 김 상무와 홍상파 씨는 그 날
열한 시 삼십 분경에 회사를 나와 도중에
헤어졌습니다. 김 상무가 차를 몰고 나왔는데, 김
상무는 볼일이 있었기 때문에 S호텔 앞에서 홍상파
씨를 내려 주고 볼일을 보러 갔습니다. 그리고 두 시
반경에 호텔로 돌아와 홍상파 씨를 태우고 세 시쯤에
회사로 돌아간 거죠. 이것은 증인들이 있기 때문에
충분히 입증이 가능한 것이고 또 김 상무 자신이 조금
전에 자백한 사실입니다. 수사가 시작되었을 때 김
상무가 홍상파 씨의 알리바이를 입증해 주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우리는 아무 의심도 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홍상파 씨는 청미의 아버지였으니까 의심할
여지가 없었지요. 그런데 이제 그 알리바이가 깨진
겁니다. 김 상무가 홍상파 씨의 알리바이 조작에 더
이상 동참하는 것을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얼른 이해가 안 되는데요. 청미가
유괴되는 그 시간에 매형은 바이어와 식사를 하고
있었다면서요?"
"네, 그건 엄연한 사실입니다. 중국집 종업원이
증언을 해주었으니까요. 그런데 그 시간이
문제입니다. 청미가 유괴되던 그 날 7월 15일은
토요일이었습니다. 그 날 청미 담임 교사는 열두 시에
수업을 끝내고 아이들을 돌려보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청미는 바로 정문으로 나오지 않고 집과는
반대 방향인 학교 후문 쪽으로 갔습니다. 최민기라는
소년이 우산을 가져 오지 않았기 때문에 후문까지
함께 우산을 쓰고 간 거죠. 그 아이는 아파트 단지가
아닌, 후문 쪽 방향에 있는 빈민촌에 살고 있습니다.
후문에서 아이들은 헤어졌습니다. 청미가 정문 쪽으로
돌아왔을 때는 열두 시 십오 분 내지 이십 분쯤 됐을
겁니다."
허걸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그 날 홍상파는 열한 시 삼십 분쯤 회사를 나와 김
상무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S호텔로 갔다. 회사에서
S호텔까지는 십 분 거리. 따라서 호텔에 도착한
시간은 열한 시 사십 분.
김 상무는 홍상파를 호텔 앞에 내려 주고 볼일을
보러 가고, 홍상파 혼자 남는다. 홍은 즉시 차를
잡아타고 청미가 다니는 학교로 달려간다(홍이 잡아탄
차가 공범의 차인지, 아니면 일반 택시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S호텔에서 청미 학교까지는 이십 분 거리. 적어도
그는 열두 시 십 분까지는 학교 앞에 도착했을
것이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다가 뒤늦게 나오는 청미를
유괴했다는 겁니까?"
송태하는 소리를 죽여 물었다.
"시간적으로 볼 때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더구나 아빠가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고 청미는
기뻐서 뛰어가 안겼겠지요."
"그 점을 매형한테 이야기했나요?"
"아직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해결해야 할
일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하던 이야기를 다시
계속해 봅시다. 이건 어디까지나 가정입니다. 아빠는
딸을 차에 태우고 학교 앞을 떠났습니다. 집으로 가지
않고 다른 데로 갔습니다. 어디로 갔는지는 모릅니다.
아무튼 한 시경에 그가 S호텔에 다시 나타났을 때는
청미 양을 데리고 있지 않고 혼자였습니다. 그는
기다리고 있던 바이어를 데리고 중국 식당으로 가서
태연히 식사를 했습니다. 그런 다음 두 시 오십
분경에 볼일을 마치고 돌아온 김 상무와 함께 회사로
돌아갔습니다. 미국인 바이어는 나중에 유령 회사를
운영하고 있음이 밝혀졌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김 상무는 말했습니다. 결국 홍상파
씨의 알리바이 조작을 도와 줄 사람은 김 상무
혼자뿐이었습니다. 그는 결국 홍상파 씨를 도와
주었고, 우리는 그의 말을 믿고 지금까지 속아
왔습니다. 그런데 그가 왜 남의 알리바이 조작을 도와
주었는지 그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곧 밝혀질 겁니다."
송태하는 두 주먹을 부르쥐고 형사들을 쏘아보았다.
"왜 매형을 체포하지 않습니까?"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조 반장이 눈을 가늘게 뜨면서 말했다.
"공범 관계가 아직 밝혀지지 않았어요. 청미가
유괴되고 난 다음 전화를 걸어 온 그 기분 나쁜
목소리의 주인공, 일억을 챙겨 간 그놈이 누구냐 하는
것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어요."
"매형을 잡아다가 자백시키면 될 거 아닙니까?"
조 반장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 사람이 끝까지 부인하고 나오면 우리로서는
어쩔 수가 없어요. 결정적인 증거가 없기 때문이에요.
홍상파 씨가 청미 양을 유괴했을 거라는 심증은
가지만 목격자가 없어요. 그 밖에 다른 증거도
없어요. 이제 알리바이가 없어졌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는 없어요. 자, 우리 이야기는
그만하고 243에 대해서 들어 봅시다. 그 암호를
풀었다면서요?"
송태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건 암호도 뭐도 아닙니다."
"그건 공범 관계를 알아낼 수 있는 열쇠일 텐데요?"
허걸이 긴장한 눈빛으로 송태하를 쳐다보았다.
"네, 그렇습니다. 그건 강치수의 교도소 시절 죄수
번호입니다. 그의 번호는 2438이었습니다."
"뭐라구요?"
형사들은 놀라고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태하는 그것을 알게 된 경위를 이야기했다.
잠자코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난 형사들은 아직
수수께끼가 풀리지 않은 듯 깊이 생각에 잠기는
모습이었다.
"그게 강치수의 죄수 번호라면 그건 무얼 의미하지?
왜 그는 죽어가면서 그 번호를 중얼거렸지?"
"그건 그의 교소도 생활에 초점을 맞춘 게
아닐까요? 2438번을 달고 죄수 생활을 하던 그 시절
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가능성은 없는 것
같습니다."
송태하의 말에 허걸이 끄덕였다.
"그런 것 같아요. 교도소 시절의 감방 동기생들을
추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군요."
"그 중에 강치수를 살해했던 자가 있을지 몰라.
목소리가 듣기에 기분 나쁘고, 키가 작고,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턱이 뾰족한 얼굴의 사나이를 찾으면 돼.
손에는 금반지를 끼었고 이에도 금을 해박았어.
나이는 삼십에서 사십 사이……."
조 반장이 수첩을 보면서 말했다.
그때 노크소리가 나고 문이 열렸다. 형사 두 명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조 반장의 지시를 받고 7월
15일 점심때의 김덕기 상무의 알리바이를 확인하고
오는 길이었다.
"김 상무의 자백대로입니다. 가르쳐 준 대로 그
아파트에 찾아갔더니 젊은 여자 혼자서 살고
있었습니다. H여대 3학년 학생이었지요. 집 안에는 김
상무의 옷으로 보이는 것들도 걸려 있었습니다. 7월
15일 김 상무가 그 집에 온 것은 열두 시경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점심 시간을 이용해서 애인을 찾아간
거죠."
"점심 시간에 즐기러 간 거군. 그렇게 비가
왔는데도 말이야. 쯧쯧쯧……."
조 반장이 혀를 찼다.
"그는 거기서 점심을 먹고 시간을 보내다가 두 시쯤
떠났다고 합니다."
"이제 알겠어, 김 상무란 사람. 불륜의 관계가
밝혀질까 봐 그 시간에 바이어와 함께 식사했다고
거짓말 한 거야. 하지만 그의 불륜 관계는 우리가
터치할 일이 아니지."

이튿날 수사팀은 강치수의 감방 동기생들에 대한
소재 수사에 나섰다. 강치수가 2438번을 달고
복역했던 교도소를 찾아가 당시의 기록철을 뒤진 끝에
열다섯 명을 가려냈다.
그들의 소재를 추적하는 한편으로 그들의 사진을
당구장 종업원인 황미숙 양과 이스탄불 웨이터에게
보였다. 결과는 신통치가 않았다.
아무 소득 없이 시간만 자꾸 흐르자 수사팀은 다시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사흘째 되는 날, 허걸은 혹시나 하고
강치수의 복역 당시 그를 면회 왔던 사람들을 조사해
보았다.
면회철 기록에는 강의 아내 안계영과 또 한 명의
여자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 이름을 본 순간 허걸은
놀라기보다 차라리 어리둥절한 느낌이었다.
허걸은 수사본부로 달려가 조 반장에게 보고했다.
"면회자 중에 김옥련이라는 이름이 나왔습니다."
"김옥련? 듣던 이름인데?"
"송묘임의 고등학교 동기생입니다. 제가 만나 본
적이 있습니다. 지금 S여대 회화과 전임 강사로
나가고 있고, 남편도 대학 교수죠. 역시 장만두 씨
제자로 그를 사모했으면서도 송묘임에게 가려 빛을
보지 못한 여자였죠. 송묘임이 시집가면서 그
여자한테 장 선생을 부탁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당장 만나야 해! 홍상파가 돌아왔나 알아봐!
돌아왔으면 연행하라구!"
조 반장은 허걸과 함께 뛰어나가다가 돌아서서 두
사람 더 따라오라고 말했다. 네 명의 수사관들은 조
반장이 운전하는 낡은 차를 타고 김옥련의 집으로
향했다.
밤이 되면서 비가 퍼붓기 시작하고 있었다. 교통
체증으로 짜증이 난 조 반장은 거칠게 차를 몰아댔다.
김옥련의 집까지는 한 시간 이상이나 걸렸다.
그녀의 집은 시외의 숲 지대에 자리잡고 있었다.
서구식 별장처럼 지은 그 집은 어둠 속에서도 멋있어
보였다.
"안에 들어가면 더 근사합니다."
한 번 가 본 적이 있는 허걸의 말이었다.
집 앞 수 미터 앞에 차를 세웠을 때 돌연 문이
열리더니 자가용 한 대가 달려나왔다.
지나갈 때 보니 운전석과 조수석에 두 남자가 앉아
있었다.
"운전석 옆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은 홍상파입니다!"
형사 한 명이 말했다.
"운전하고 있는 자는 광대뼈가 튀어나온 것이
강치수를 살해한 자 같은데요!"
이것은 허걸의 말이었다. 그때는 이미 조 반장이
액셀러레이터를 밟아대고 있을 때였다.
앞서 가던 차는 미행을 눈치챘는지 갑자기 속력을
내어 달려가기 시작했다. 조 반장도 앞을 노려보면서
액셀러레이터를 더 세게 밟아댔다.
시 외곽 지대이긴 하지만 차 두 대 정도가 비켜 갈
수 있을 정도의 차도였기 때문에 위험 부담이 많았다.
더욱이 밤이었고, 비까지 퍼붓고 있었다.
"위험한데요. 포기하죠."
허걸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말했지만 조태는 이를
악문 채 정면만 응시하고 있었다. 속도계 바늘은 백십
킬로미터를 오르내리고 있었다.
앞서가는 차는 새 차였다. 두 차의 간격은 좀처럼
좁혀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커브길이 보이면서 동시에 헤드라이트 불빛이
시야를 가렸다. 급브레이크를 밟는 소리에 이어
'쾅'하는 금속성 소리가 둔중하게 들려 왔다.
조 반장은 브레이크 페달을 힘껏 밟으면서 머리를
숙였다. 다른 사람들도 반사적으로 고개를 깊이
숙였다. 차는 수 미터 앞으로 미끄러지다가 앞차
꽁무니를 '쿵' 하고 받으면서 멈춰 섰다.
네 사람의 몸뚱이가 일제히 앞으로 쏠렸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들은 다투어 밖으로
뛰쳐나갔다.
앞서가던 차는 트럭 앞에 우그러져 있었다.
운전대에 앉아 있던 사내는 길바닥에 튕겨져 나와
있었고 조수석의 사내는 피투성이가 된 채 우그러진
차체 속에 처박혀 있었다.
그를 꺼낼 수가 없었기 때문에 형사들은 길바닥에
누워 있는 사내 쪽으로 몰려갔다. 가발이 반쯤 벗겨져
있는 것을 보고 허걸은 그것을 잡아 젖혔다.
남자인 줄 알았던 그 얼굴이 가발을 벗기는 순간
여자 얼굴로 변했다. 그것은 분명히 김옥련의
얼굴이었다. 그녀는 괴로운 듯 신음하며 몸을
뒤틀었다.

홍상파는 즉사했고, 김옥련은 목숨만은 건졌지만
중상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커브길에서 갑자기 트럭이 나타나는 바람에
과속으로 차를 몰고 가던 그녀는 피할 길이 없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핸들을 왼쪽으로 홱 꺾었던
것이고, 그 바람에 차의 오른쪽 부분이 트럭과
충돌하면서 걸레처럼 우그러졌다.
운전석은 조수석처럼 심하게 찌그러 들지 않았고
그녀는 충돌과 동시에 밖으로 튕겨져 나갔기 때문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중상을 입었기 때문에 그녀의 입을 열게 하는 데는
일 주일이 걸렸다.
입원한 지 팔 일째 되는 날 밤 조태와 허걸은
가까스로 그녀의 입을 여는 데 성공했다. 홍상파가
죽었다고 하자 그녀는 마침내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던 것이다.
그녀는 사실상 남편과 이혼 상태에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현재 교환 교수로 미국에 가 있었다. 법적으로
아직 이혼 절차를 밟지 않았지만 그들 부부는 사실상
이혼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이 별거 상태에 들어간 것은 결혼한 지 일 년쯤
지나서였다.
문제는 그녀 쪽에 있었다. 지나칠 정도로 병적인
결벽증이 남편의 사소한 실수까지도 용납하려 들지
않았고, 결국은 부부 관계를 파탄으로 몰고 갔던
것이다.
그녀가 홍상파를 알게 된 것은 꽤 오래 전부터였다.
아직 미혼이었을 때 그녀는 여학교 동창 송묘임의
집에 놀러 갔다가 거기서 홍상파와 첫인사를
나누었다.
그때의 홍상파의 인상은 꽤 매력적으로 그녀의 눈에
비쳤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 뒤에도 오래도록 그녀의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그 뒤 수년이 지나, 그러니까 지금부터 이 년 전
그녀는 홍상파를 개인적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것은 전혀 뜻하지 않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때 그녀는 여자의 나체를 소재로 한 서양화
개인전을 어느 화랑에서 열게 되었는데, 오픈
파티석상에 홍상파·송묘임 부부가 나타났던 것이다.
그녀로서는 송묘임에게 초대장을 보냈던 터라 그들
부부의 출현은 조금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런데 다음 날 홍상파 혼자서 그 화랑에 나타났다.
화랑이 그가 근무하는 회사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점심 시간을 이용해서 잠깐 들렀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그런데 그는 여자의 나체화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았고, 그가 한 작품에 욕심을 내는 것을 보고
그녀는 그것을 그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녀로서는 아주 파격적인 일이었지만, 그 작품에
대해 찬탄을 금치 못하는 그에게 그녀는 왠지 그것을
주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일이 있고부터 그들은 만나는 횟수가
잦아졌고, 그때마다 하나하나 성을 허물어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연인 사이가 되었을 때 그들은 각자의
고뇌까지도 털어놓게 되었던 것이다.
홍상파의 입을 통해 청미가 그의 자식이 아닌 것을
알았을 때 그녀의 놀라움은 실로 컸다. 그녀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직감적으로 청미가 장만두의
자식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홍상파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녀의 놀라움은 송묘임과 장만두에 대한 증오로
변했다. 특히 송묘임에 대한 증오는 장만두 선생을
사이에 두고 여고 시절부터 싹터 왔던 만큼 그녀의
병적일 정도의 결벽증과 함께 상당히 심각한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홍상파는 기회 있을 때마다 그녀에게 청미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고 호소해 왔고, 송묘임에게
속아 온 것을 분해 했다.
이혼 정도로 끝낼 게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 고통을
가해야겠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고, 그의 그러한
생각은 김옥련의 송묘임에 대한 증오심과 어울려
하나의 구체적인 계획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청미를 유괴해서 살해한다는 것은 생각지도
않았었다. 유괴는 하되 일정 기간 동안 다른 곳에
가둬 두었다가 불법적으로 해외 입양을 시킬
생각이었다. 그 동안 그들은 송묘임의 고통을 즐길
심산이었다.
7월 15일, 낮 열두 시 삼십 분경 김옥련은 홍상파가
데리고 온 청미를 자기 차에 옮겨 태워 집으로 데리고
갔다.
아이는 밤이 되자 울기 시작했고, 감기에 걸렸는지
고열로 괴로워했다. 홍상파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조심스럽게 옥련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 왔다.
김옥련에게는 특출한 재능이 있었다. 그것은
목소리를 남자처럼 바꿀 수가 있는 점이었다.
고교 시절, 그리고 대학 시절 연극반에서 활동할 때
그녀는 언제나 남자로 분장하고 남자 목소리로
이야기하곤 했었다. 그녀에게는 언제나 그런 역만
맡겨졌고, 그녀는 사람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남자
역을 잘 해내곤 했다.
그때의 실력을 살려 그녀는 홍상파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 일억 원을 요구했다. 쥐가 무엇을 갉아대는 것
같은 그 음침하고 기분 나쁜 목소리를 여자가 내는
목소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계획대로 홍상파는 당구장으로 일억 원을 가져
왔고, 그녀는 수사망을 피해 그 돈을 빼돌리는 데
성공했다. 그 돈은 그들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당구장에서 우연히 강치수를
만나게 될 줄이야!
처음 강치수는 그녀의 변장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녀와 함께 당구를 치면서 수상쩍다는 듯 자꾸만
쳐다보더니, 이윽고 가만히 옆으로 접근해서는 혹시
옥련이 누님이 아니냐고 묻는 것이었다.
강치수는 친구의 남동생이었다. 그 친구는 결혼해서
미국으로 건너가 버렸고, 질이 좋지 않은 강치수는
옥련을 친누이처럼 따랐다.
옥련도 자기를 따르는 치수를 결국은 친동생처럼
생각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그가 교도소에 들어가
있을 때 그곳으로 면회를 하러 가기까지 했다.
그녀는 한 달에 한 번 내지 두 번꼴로 면회를 갔고,
그것은 그가 출옥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사 년 동안 옥살이를 하고 나온 치수는 사람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는 그녀를 누님으로 생각지 않고
그녀의 몸을 범하려 들었다. 놀란 그녀는 그에게
절교를 선언했고, 그 뒤 이 년 동안 그를 보지
못하다가 당구장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된 것이었다.
그녀가 당구를 칠 줄 아는 것은 치수와 어울려 다닐
때 배운 것이었다. 치수는 당구광이었다.
얼마 후 치수는 집으로 그녀를 찾아왔다. 그는
그녀가 남장을 하고 무슨 짓을 했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궁지에 몰린 그녀는 그의 요구를 들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녀의 몸을 범한 다음 이천만
원을 챙겨 돌아갔다.
홍상파로부터 다급한 전화가 걸려 온 것은 그 날
저녁때였다.
형사대가 강치수라는 인물을 체포하기 위해
이스탄불을 급습할 모양인데, 도대체 강치수와 어떤
관계냐고 따져 물어 왔다.
그녀는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듣고 난
그는 무슨 수를 쓰든지 강치수의 입을 막으라고
말했다.
증오에 사로잡힌 그녀는 남장을 하고 이스탄불에
잠입, 웨이터를 통해 강치수에게 쪽지를 전해 준 다음
골목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화장실 창문으로 빠져 나온
그를 칼로 찔러 죽였다.
경찰은 그 쪽지의 필체와 김옥련의 필체를 비교해
보았다. 두 필체는 누가 보아도 한 사람의 필체임을
알 수 있었다.
"장만두 씨 집에 있던 인형과 돈은 어떻게 된
겁니까?"
"제가 한 짓이에요. 저는 장 선생님 댁에
자연스럽게 드나들 수 있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인형의
머리를 청미 머리칼로 바꾸고 돈을 장롱 밑에다 숨겨
둔 거예요. 장 선생님한테 혐의를 씌우기 위해서
그랬어요."
"7월 15일, 장만두 씨는 어느 학부형의 초대를 받고
나갔다가 바람을 맞았는데, 그 전화도 당신이 한
건가요?"
"제가 누구를 시켜 건 거예요. 선생님이 제
목소리를 알기 때문에……."
"청미는 왜 죽였나요?"
"죽인 게 아니고 저절로 죽었어요. 울기만
해서……그리고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고 계속
수면제를 먹였더니 결국 깨어나지 않더군요."
"시체를 가방에 넣어서 열차편으로 보낸 것은
당신이었나요?"
"네……."
"왜, 왜 그렇게 했나요?"
"모르겠어요,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어요……."
눈물이 얼굴에 감긴 붕대를 적시고 있었다.
조태와 허걸은 넋 빠진 표정으로 가만히 병실을
빠져 나왔다.
"비가 많이 오는군. 한잔 하러 가지."
"싫습니다, 저는 좀 걷겠습니다."
허걸은 빗속으로 걸어갔다.
조태는 허걸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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