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종 - 서울의 만가 3

3학년2반 | 2022.01.31 07:46:04 댓글: 0 조회: 594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6060
서울의 만가(하) - 김성종
사라진 증인
심문은 만 이틀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되었다.
심문을 받는 쪽도 심문을 하는 쪽도 모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가운데, 그것도 밀폐된 방에서의 심문이었기 때문에 그 괴로움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다.
냉방이 잘 된 방이어서, 아니면 적어도 선풍기라도 틀어 놓고 심문을 한다면야 그러한 괴로움을 어느 정도 감소시킬 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봉우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유는 아주 단순한 데 있었다.
조금이라도 상대방에게 고통을 더 주기 위해 그는 찜통같이 밀폐된 방에서 심문을 계속하고 있었다.
육체적 고통이야말로 심문을 받는 쪽이 가장 겁내는 것이다.
고통이 심하면 심할수록 그로부터 헤어나기 위해 그만큼 자백하는 시간이 빨라진다.
고통이야말로 자신이 버티는 인간의 의지를 가장 빨리 무너뜨릴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여우는 오랜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상대방에게 일시에 집중적으로 고통을 가하면 제아무리 강철 같은 의지를 지닌 자라 해도 금방 무너져 버리고 만다.
그러나 그 같은 방법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고, 여우 자신도 그것을 야만적이라 보고 한사코 기피하고 있었다.
일시에 집중적으로 고통을 가한다는 것은 이른바 고문을 의미한다.
심문을 맡고 있는 담당자들에게는 그 방법이야말로 가장 손쉽고 매력적인 방법이다.
피의자가 새빨간 거짓말로 일관하면서 한사코 자백하려 들지 않을 때 신문관은 화가 치밀고 지칠 대로 지쳐 버린다.
그리고 쓸데없이 시간만 잡아 먹는 데 초조해진다.
그럴 때 생각나는 것이 바로 고문이다.
고문은 모든 문제를 아주 간단히 해결해 주기 때문이다.
고문을 가하면 시간을 절약할 수도 있고, 속에 쌓인 울분을 해소시킬 수가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확실한 자백을 받아 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 줄을 알면서도 여우는 손이 간질간질한 것을 참고 있었다.
그는 고문만은 한사코 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에게는 고문에 얽힌 쓰라린 경험이 하나 있었다.
십 년 전쯤의 일이라 하나의 추억처럼 되어 버렸지만 당시에는 꽤 심각한 문제로 괴로움을 겪어야 했다.
상대는 강도 전과가 5범이나 되는 자였다.
홧김에 자백을 받아 내기 위해 고문을 가한 것이 화근이었다.
고문을 잘못 가한 바람에 그는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끝내 한 쪽 다리를 절게까지 되었다.
그로 인해 물질적, 정신적으로 그가 겪어야 했던 고통은 자못 컸었다.
그 일로 그는 징계까지 받았고 하마터면 피고로 법정에까지 서게 될 뻔했었다.
다행히 돈으로 상대방을 무마시켜 그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그로 인해 그가 받았던 고통은 결코 지울 수 없는 상처로 가슴 속에 남게 되었다.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그의 고문으로 다리 병신이 된 그 자가 그가 보는 앞에서 유난히도 다리를 절룩거리며 돌아다닐 때였다.
사건이 마무리된 뒤에도 그 자는 툭하면 그를 찾아와서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것이었고, 그러면 그는 죄인이 된 심정으로 그에게 돈을 꺼내 주면서 겨우 달래 보내곤 했었다.
그러한 괴로움은 삼 년 동안이나 계속되었고, 어느 날 갑자기 그 자가 자살해 버림으로써 끝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사건이 있은 이후, 그는 어떠한 경우에도 피의자를 신문할 때 고문이란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상대방에게 직접 손을 대지 않고도 고통을 가할 수 있는 간접적이고 소극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상대방에게 잠을 재우지 않거나 물을 주지 않는 것, 찜통처럼 더운 방에서 신문을 계속하는 일 같은 것들이 그런 방법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방법은 많은 시간과 인내심을 요했다.
상대방과 함께 고통을 맛보며 참고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부산에서 마치 납치되다시피 전격적으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온 애꾸는 만 이틀 동안 잠을 재우지 않고 물 한 모금도 주지 않고 신문했는데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버텨 내고 있었다.
그에게는 확실히 악종같이 독한 데가 있었다.
여우는 애꾸를 신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착잡한 기분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김종화의 전화 때문이었다.
그는 전화로 자신에 대한 경찰의 수배를 늦추어 달라고 했다.
여우는 그의 요청을 거절했지만 사실은 아직 그를 수배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김종화가 오지애를 살해한 것이 분명한 이상, 그리고 그가 계속해서 살인사건을 일으킬 가능성이 큰 이상 그를 하루빨리 체포해야 하는 것이 경찰의 의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가 전화를 통해 말한 것만 봐도 그의 다음 행동은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그는 자기 딸을 유괴해다가 팔아먹은 인간 쓰레기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었다.
용서하지 않겠다는 것은 바로 살인의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다.
김종화는 지금 딸을 찾겠다는 집념 못지않게 병적일 정도의 복수심에 불타 있었다.
그리고 그 같은 복수심에는 지식인으로서의 인격 같은 것도 맥을 못 추고 있음이 분명했다.
김종화를 당연히 체포해야 하는데 여우는 그것을 주저하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히 직무 유기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김종화 건을 상부에 보고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만일 그 사실을 상부에서 알게 되면 그는 직무 유기로 징계를 받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런 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의 기분이 착잡해진 것은 경찰로서의 자신의 입장과는 달리 마음은 김 교수의 행위를 이해하고 그것을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묵인하려는 데 있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 그는 김 교수의 행위에 속으로 박수를 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법을 집행하는 입장에 있지만 법 이전에 악을 단죄하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경찰관이라는 의식이 그러한 충동에 제동을 걸었고, 그런 의식이 아니더라도 감히 법을 어겨 가면서까지 폭력으로 악을 단죄할 만한 배짱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감정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마치 찌꺼기처럼 몸 속에 쌓이기만 하던 그러한 감정이 김 교수의 행위를 통해 일부 발산되었다고나 할까.
아무튼 그의 현재 심정은 착잡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김 교수의 행위에 박수를 보내고 있었고 김 교수의 행위를 끝 가는 데까지 방해하지 않고 지켜보고 싶은 것이다.
앞으로 사태가 어떻게 돌아갈지는 그 자신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김 교수에 대해 어떤 조처도 취하고 싶지 않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던 것이다.
8월 3일 새벽 네 시 조금 지나 사무실 의자를 몇 개 잇대어 놓고 그 위에 누워 잠깐 눈을 붙이고 있는 여우를 지 형사가 깨웠다.
"애꾸가 입을 열려고 합니다."
여우는 충혈된 눈을 비비면서 일어나 취조실로 들어갔다.
"물 한 잔만 주십시오."
애꾸는 탈진할 대로 탈진한 모습이었다.
벌거벗고 있는 상체는 온통 땀으로 젖어 있었고 외눈은 초점도 없이 풀려 있었다.
그는 부르튼 입술을 움직이며 물을 달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여우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지 형사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지 형사는 물이 들어 있는 주전자와 컵을 옆 방에서 가져와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자, 마음대로 마셔."
여우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애꾸는 주전자째 들고 정신없이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숨도 쉬지 않고 물을 들이킨 다음 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다시 입 속에다 주전자 주둥이를 틀어박았다.
그의 홀쭉하던 배가 금방 장구통처럼 부풀어올랐다.
이윽고 애꾸는 주전자에서 입을 떼면서 격렬하게 기침을 토했다.
기침은 한참 동안 계속되다가 멈췄다.
여우는 잠자코 그에게 담배를 권했다.
애꾸는 말없이 담배 한 대를 다 피우고 나더니 한숨을 푹 내쉬면서 마침내 입을 열었다.
"조건이 있습니다."
"말해 봐."
여우는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첫째, 자백과 동시에 저를 석방시켜 줘야 합니다. 수배 리스트에서도 물론 빼주어야 합니다."
"좋아. 하지만 즉시 석방시키는 것은 곤란해. 자백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니까 말이야. 확인과 동시에 석방시켜 주겠어."
애꾸는 동의한다는 듯 끄덕였다.
"둘째, 내가 발설했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누구한테도 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이지."
"마지막으로 내가 위험해지면 도움을 청할지도 모릅니다. 그때는 나를 보호해 주어야 합니다."
"물론 보호하고말고."
여우는 입가에 비웃음을 담으며 말했다.
애꾸는 담배 한 대를 더 청해 피우고 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장미라는 아이는…… 칠칠이 아줌마라는 여자한테 팔렸습니다. 오지애가 십 만 원을 받고 넘겼습니다."
"그 여자의 본명이 뭐야? 그리고 어디에 살고 있어?"
"본명이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그냥 칠칠이 아줌마로 통하고 있습니다. 바보 딸 하나를 데리고 살기 때문에 그냥 붙은 겁니다."
"과분가?"
"아닙니다. 남편이 있는데 빈대라는 별명으로 통합니다. 빈대처럼 콧잔등이 움푹 꺼져 있습니다."
"장미는 지금 그 집에 있나?"
"그 집에 없습니다. 벌써 다른 데로 팔려 갔습니다. 바로 그 날로 팔려 갔습니다."
"어디로 팔려 갔어?"
"오 사장의 부하들이 와서 데리고 갔습니다. 삼십 만 원을 주고 사 갔습니다. 나는 그때 다른 데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이야기를 듣고 알았습니다."
"오 사장이 누구야? 어디 사는 사람이야?"
"확실한 것은 잘 모릅니다. 그냥 오 사장이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비밀에 싸여 있는 사람으로 좀처럼 얼굴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저도 그 사람을 지금까지 두 번밖에 보지 못했습니다."
오 사장이라는 자는 대부 같은 존재라고 했다.
그는 앞에 드러나지 않은 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은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사창가를 주무르고 있는 자들 위에 군림하고 있기 때문에 실상 그들의 대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사창가의 비린내 나는 사소한 일들에 대해 시시콜콜하게 간섭하는 게 아니고 예쁜 여자들만 골라서 그것도 정당하게 돈을 지불하고 사간다거나 또는 그들로서는 처리하기 곤란한 문제들을 해결해 준다거나 하는 것이었다.
처음 오 사장이라는 자는 아주 조심스럽게 사창가에 손을 뻗쳐 왔었다.
그때만 해도 그의 존재라는 것은 별 볼일 없는 것이어서 아무도 그라는 존재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존재가 점점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강력한 힘과 돈이 있었다.
조직적인 힘과 돈으로 손을 뻗어 오는 데는 오합지졸에 불과한 기존의 주먹들은 대항할 재간이 없었다.
그에게는 그에게 맹종하는 강력한 친위대가 있었다.
모든 일은 그들이 처리하곤 했다.
사창가의 주먹들은 그 친위대 앞에 마침내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러나 오 사장이란 자는 교활해서 그들에게 굴욕적인 복종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종전처럼 그들이 그들의 영역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 내버려두었고, 그 결과 그들은 오 사장이라는 사람이 그들을 지배하는 게 아니고 그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보다 완전한 지배를 노리는 계략이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얼마 후 그는 마침내 신망 있는 대부로 그들의 머리 위에 군림하게 되었던 것이다.
"……잘못 걸려든 것을 알았지만 이미 너무 늦어 있었습니다. 그 자와 맞서 싸운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싸우느니 그에게 붙어서 사는 게 오히려 낫겠다 싶어 지금까지 이렇게 지내 온 겁니다."
"내가 알기로 너는 실력자야. 안 그런가?"
"네, 그건 오 사장에게 충성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를 통해 사창가를 지배했고…… 나는 그의 후광을 업고 지금까지 움직여 왔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에 대한 감정이 없는 건 아닙니다."
"그 감정이란 게 뭐야?"
"언제까지나 그 자의 그늘 밑에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내가 당한 것처럼 언젠가는 그 자도 당할 겁니다."
"그러니까 도로 밀어내겠다는 건가?"
"때가 오면 그렇게 할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젠 모든 게 끝났지 않습니까?"
"오 사장이라는 자는 여자들을 사다가 어떻게 하나?"
"어떻게 하는지는 잘 모릅니다. 그 자에 관한 것은 모두 비밀에 붙여져 있습니다."
"오 사장이란 자는 그 밖에 무슨 일을 하고 있나?"
"잘 모르지만 마약도 취급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자의 부하들이 사창가에 약을 뿌리고 다니는데, 거래 규모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장미 양을 찾아야 해. 그 일이 제일 중요하단 말이야. 협조해 줄 수 없겠나?"
"협조해 드리고 싶지만 더 이상 아는 게 없습니다."
"오 사장을 만날 수 있게 해줘야겠어. 자네라면 그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알아낼 수 있을 거야."
"오 사장의 친위대 두어 명을 만나게 해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갇혀 가지고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그걸 미끼로 당장 석방시켜 달라 이 말인가?"
"장미 양을 빨리 찾으려면 달리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하긴 그래."
여우는 한참 생각에 잠겼다가 애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장미 양을 직접 본 적이 있나?"
"네, 칠칠이 아줌마 집에 붙잡혀 있을 때 잠깐 봤습니다. 잠들어 있는 걸 봤습니다. 수면제를 먹여 잠을 재워 놨더군요."
"잠든 모습이 어땠어?"
"예뻤습니다."
애꾸는 잠든 얼굴이 그렇게 예쁜 소녀를 보기는 처음이었다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는 지금도 장미라는 소녀의 손 한번 잡아 보지 못한 채 그녀를 오 사장에게 빼앗긴 것을 생각하면 화가 치밀었다.
그때 그가 칠칠이 아줌마 집을 방문한 것은 그 집에 예쁜 소녀가 들어왔다는 보고를 받고 그녀를 한번 보기 위해서였다.
비가 쏟아지고 있는 밤이었는데, 방 안으로 들어가 보니 소녀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흔들어도 깨어나지 않는 것이 마치 송장 같았다.
그는 옷을 벗으려다가 그만두었다.
아무리 예뻐도 송장같이 뻗은 애를 범하고 싶지는 않았다.
두 눈을 뜬 채 무서움에 떨며 자신을 지키려고 발버둥치는 애를 폭력으로 제압시켜야만 제맛이 난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마침 그때 급히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생겼기 때문에 그는 나중에 다시 오기로 하고 그곳을 떠났었다.
그러고 나서 새벽녘에 돌아와 보니 이미 그 소녀는 오 사장 패가 데리고 간 뒤였다.
그는 칠칠이 아줌마 앞에서 분노에 차 길길이 날뛰었지만 그렇다고 장미가 되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해서 결국은 분만 삼키고 돌아서고 말았었다.
"좋아. 지금 바로 나가게 해줄 테니까 오 사장 친위댄가 뭔가 하는 놈들을 우리한테 가르쳐 줘. 하루 여유를 줄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잘해 봐.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마!"
여우의 말에 애꾸는 묘하게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애꾸를 풀어 주고 나서 여우는 그 길로 애꾸가 가르쳐 준 칠칠이 아줌마의 집을 찾아나섰다.
사창가 골목으로 들어섰을 때는 이미 날이 훤히 밝아 있었다.
밤잠을 설친 창녀들이 골목에 나와 쭈그리고 앉아 하품하고 있는 모습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그것은 측은하면서도 천박스러운 모습들이었다.
사창가에서 하룻밤을 보낸 사내들이 도망치듯 골목을 빠져 나가는 모습들도 보였다.
그들은 도둑질을 하다 들킨 것 같은 표정으로 시선이 마주치는 것을 피하면서 허둥지둥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한 창녀에게 칠칠이 아줌마 집이 어디쯤 있느냐고 물으니 ‘저기요’ 하면서 턱을 치켜들어 보였다.
지 형사가 먼저 우중충한 회색 건물 안으로 들어가 주인을 찾으니 한참 만에 콧잔등이 움푹 꺼진 사내가 어두운 방 안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당신이 주인이오?"
"네, 그런데요."
사내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지 형사를 쳐다보았다.
그의 입에서 술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그가 바로 칠칠이 아줌마의 남편인 빈대라는 자였다.
"경찰입니다. 칠칠이 아줌마를 만나려고 왔습니다."
"없어요, 안 들어왔어요."
사내는 머리를 흔들었다.
"언제 나가서 안 들어왔어요?"
"어제 저녁때 다방에 간다고 나갔는데 아직 안 왔어요."
사내의 말에 의하면 칠칠이 아줌마는 어제 저녁때 여느 때처럼 그녀가 경영하는 다방에 간다고 나갔는데 아직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다방 문을 닫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 날 치 수입금을 챙겨 들고 집으로 걸어서 돌아온다고 했다.
"이상해서 새벽 세 시쯤에 다방에 가 봤는데 이미 두 시간 전에 돈을 가지고 나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이걸 주웠습니다."
사내는 문지방 밑에 뒹굴고 있는 여자용 슬리퍼 한 켤레를 가리켜 보였다.
"제 아내가 신고 나갔던 건데 골목에서 발견했습니다. 아무래도 그 사람한테 무슨 사고가 난 것 같습니다."
사내가 비로소 불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칠칠이 아줌마의 집으로부터 다방까지는 걸어서 십 분 거리였다.
그 거리는 차가 한 대 정도 통과할 수 있는 좁은 골목으로만 이어져 있었다.
빈대가 자기 아내의 슬리퍼를 발견한 곳은 다방으로부터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골목에서였다.
여우는 직접 다방에 가서 칠칠이 아줌마가 지난 밤 한 시경 그 날 치 수입금을 챙겨 들고 집에 간다고 나간 것이 사실이었음을 확인했다.
"다방과 집 사이의 골목에서 실종됐군. 신고 있던 슬리퍼가 골목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해. 납치되었을 가능성이 커."
"오지애가 살해되더니 이번에는 칠칠이 아줌마까지 납치됐군요. 우리가 접근하기 전에 꼭 사고가 터지는군요."
"글쎄 말이야."
"김 교수의 짓이 아닐까요?"
"막연한 추측 따위는 하지 마."
여우가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바람에 지 형사는 찔끔해서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다시 칠칠이 아줌마의 집으로 돌아가 빈대를 데리고 부근에 있는 여인숙으로 들어갔다.
여자가 없는 이상 그 남편이라도 신문해 볼 생각이었다.
빈대는 애꾸와는 사뭇 달랐다.
형사들이 웃통을 벗어부치면서 본격적으로 취조에 들어갈 기세를 보이자 자진해서 술술 털어놓았다.
그는 장미의 사진을 보더니 그녀가 자기 집에 팔려 왔었음을 시인했다.
"하지만 바로 그 날 오 사장 패가 와서 데리고 가 버렸습니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2.
방관자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은 모두 여섯 명쯤 되었다.
모두가 십칠팔 세 정도의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청소년들이었다.
그 중에는 여자들도 끼여 있었다.
여학생은 두 명이었다.
그들은 모두 등산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텐트까지 가지고 있는 것이 산에서 캠핑을 할 모양이었다.
갖추고 있는 물건들이 기타며 대형 카세트 라디오 등 꽤 요란스러워 보였 는데, 카세트 라디오에서는 팝송이 시끄럽게 흘러 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이윽고 차도를 벗어나 산으로 이어지는 소로로 접어들었다.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야산지대 뒤쪽으로 높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었다.
그들은 그곳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얼굴에 여드름이 난 여학생은 소로로 접어들면서 맨 뒤로 처졌다.
그녀는 차를 타고 올 때부터 소변이 마려웠기 때문에 차에서 내리자 마자 소변 볼 데부터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속도 모르고 키다리 남학생 하나가 그녀와 보조를 맞추려고 슬그머니 뒤로 처지고 있었다.
키다리는 처음부터 그녀를 점찍고 그녀 주위를 맴돌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보다도 얼굴이 깨끗하고 예쁘장하게 생긴 남학생에게 마음이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키다리는 눈치도 없이 그녀의 주위를 맴돌며 추근대고 있었다.
"그거 이리 줘, 내가 들어 줄게."
어떻게든 호감을 표시하기 위해 키다리는 여드름이 들고 있는 침낭에 손을 뻗었다.
"괜찮아."
여드름은 쌀쌀맞게 대꾸하면서 침낭을 다른 손에 바꿔 들었다.
그리고 그를 흘겨보면서,
"빨리 가란 말이야!"
하고 쏘아붙였다.
"왜 그래? 뒤에 처지면 안 돼. 빨리 가."
남학생은 가려고 들지 않았다.
여드름은 화가 치밀었다.
"아이, 빨리 가란 말이야! 난 볼일이 있단 말이야!"
그녀가 울상을 지으며 발을 동동 구르자 그제서야 키다리는 그녀의 사정을 알아차리고 씨익 웃었다.
"난 또 뭐라고. 일 보고 천천히 와, 저기서 기다릴 테니까."
키다리가 저만치 걸어가는 것을 보고 나서 그녀는 재빨리 오른쪽 으로 나 있는 오솔길로 들어섰다.
조금 떨어진 곳에 창고처럼 생긴 건물이 하나 있었는데 아까부터 그녀는 그곳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그 건물은 여기저기에 구멍이 나 있고 창문 같은 것들이 온통 부서져 있는 것이 멀리서 보기에도 오랫동안 버려져 있는 빈 건물 같았다.
그녀는 그 건물에 이르기도 전에 허리를 죄고 있는 가죽띠를 풀고 청바지 지퍼를 내렸다.
그리고 안으로 뛰어들어 바지를 끌어내리고 허연 엉덩이를 엉거주춤 밑으로 내리다 말고 멈칫했다.
저만치 떨어진 안쪽에 웬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던 것이다.
그때는 이미 오줌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발발 떨면서 그대로 엉거주춤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소변을 보는 동안 시선은 줄곧 누워 있는 사람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누워 있는 사람은 여자였다.
그녀의 손발은 묶여 있었고 얼굴은 피투성이었다.
처음에는 죽은 줄 알았는데 가만 보니 조금씩 몸을 움직이고 있었고 신음소리도 조그맣게 들려 오고 있었다.
바지를 끌어올리자마자 그녀는 허리춤을 움켜진 채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종합상황실로부터 수사본부로 전화가 걸려 온 것은 그 날 오전 열한 시경이었다.
"수배 인물과 비슷한 인물이 발견됐다는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현재 안양에 있는 A병원에 입원시켜 놓았는데 중태라고 합니다."
"좀더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발견된 사람은 삼십대 여인으로 노란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두 눈이 칼에 찔려 실명 상태라고 합니다."
여우가 병실 문을 열었을 때 안에서는 남자의 흐느낌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울고 있는 사람은 칠칠이 아줌마의 남편인 빈대였다.
그는 아내의 손에 얼굴을 비벼대면서 흐느끼고 있었다.
여우는 그 흐느낌이 조금도 실감 있게 들리지가 않았다.
창가에는 정복 차림의 순경이 한 명 서 있었다.
더위를 몹시 타는지 그는 모자를 벗어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칠칠이 아줌마의 얼굴은 두 눈을 중심으로 온통 붕대에 감겨 있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는 신음소리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여우는 병실을 나와 담당 의사의 방을 찾아갔다.
담당 의사는 안과 전문의였다.
여우가 신분을 밝히고 환자의 상태를 묻자 의사는 머리를 흔들었다.
"두 눈 다 실명입니다. 동공을 크게 다쳤기 때문에 전혀 가망이 없습니다. 흉기에 찔린 것 같은데 목숨을 건진 것만도 기적입니다. 저런 경우 대개 쇼크로 즉사하기 마련인데 저 여자는 목숨만은 다행히 건졌습니다. 당분간 안정을 취해야 하니까 이야기는 삼가 주시는 게 좋겠습니다."
안과 전문의실을 나온 여우는 다시 병실로 칠칠이 아줌마를 찾아갔다.
빈대와 순경을 내보내고 나서 그는 그녀의 머리맡에 다가앉았다.
"칠칠이 아줌마, 서윤자 씨…… 내 말 들려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입 속에서 신음소리만 흘러 나오고 있을 뿐이다.
"난 경찰이오. 누가 당신을 이렇게 했지?"
여우는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에 대해서는 털끝만큼도 동정심이 일지 않고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숨길 필요 없이 말해 봐요. 당신은 두 눈을 잃었어. 완전히 잃었단 말이야. 의사가 그러는데 전혀 가망이 없다는 거야. 당신은 이제부터 장님으로 평생을 살아야 해."
신음소리가 멎는가 싶더니 그녀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둘러싸고 있는 붕대를 쥐어뜯으려고 했다.
여우는 거칠게 그녀의 손을 밀어냈다.
"당신은 가망이 없어."
"아니야……아니야……난 볼 수 있어……내 눈 어딨어……."
그녀는 낮게 그러나 숨가쁘게 중얼거렸다.
"난 누가 그랬는지 다 알고 있어요. 김장미 양의 아버지가 그랬지? 그렇지?"
경련하던 그녀의 몸뚱이가 순간 굳어 버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움직임을 멈추고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김장미 양의 아버지가 당신한테 복수를 한 거야. 당신이 김장미 양을 팔아먹은 걸 알고 복수한 거란 말이야. 그렇지?"
마침내 그녀가 거칠게 숨을 몰아 쉬기 시작했다.
그녀는 온몸을 떨어대면서 울부짖기 시작했다.
"나가! 나가! 나가란 말이야!"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녀의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그러는 것 같았지만 여우는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그녀의 귀에다 입을 대고 더욱 잔인한 말을 속삭였다.
"서윤자 씨, 당신은 두 눈을 잃었지만 그 사람은 딸을 잃었어. 당신은 억울해 할 필요가 없어. 왜냐하면 아주 당연한 보상을 받았으니까 말이야."
그녀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휘둘렀다.
그를 때리려고 그러는 것 같았다.
그는 그녀의 손을 밀어내고 말을 이었다.
"당신은 딸을 잃은 부모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생각해 보았어? 그 사람은 지금 물불을 가리지 않고 있어. 당신 딸도 납치해 갈지 몰라. 자기 딸을 잃은 보상으로 말이야. 당신 딸은 지금 아무도 돌보고 있지 않아. 아마 골목에서 놀고 있을걸."
그녀의 손이 그의 옷자락을 움켜잡았다.
그녀의 손은 남자처럼 우악스러웠다.
"안 돼! 그건 안 돼! 우리 애를 지켜 줘요!"
"경찰에 협조해요. 그러면 지켜 줄 테니까."
"뭘 어떻게 협조하라는 거예요?"
그녀가 숨넘어가는 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해서 납치됐는지 하나도 숨기지 말고 상세히 이야기해 봐요. 죽은 오지애가 장미 양을 유괴해서 당신한테 팔아먹은 건 이미 다 아는 사실이니까 숨길 생각은 하지 말아요."
수 분이 지나 그녀는 마침내 지난 밤에 납치된 경위, 그리고 납치된 뒤에 받은 가혹 행위 등에 대해 더듬거리면서 비교적 자세하게 이야기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난 여우는 김종화가 장미를 찾기 위해 우회적인 방법을 쓰지 않고 직선적으로 달려들고 있으며 매우 빠른 속도로 접근해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혼자서 경찰 수사진보다도 한 발 앞서 달려가고 있었다.
그가 경찰 수사진보다 한 발 앞서 달려갈 수 있는 것은 문제의 인물들에게 무자비하게 잔혹 행위를 가함으로써 빠른 시간 내에 그들로부터 자백을 받아 낼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여우는 생각했다.
반면 경찰은 피의자들에게 그런 식의 잔혹행위를 할 수 없는 약점을 안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쪽은 수가 월등히 많은 데다 전문가들이고 국가 권력을 등에 업고 일하고 있다.
단 한 사람을 당해 내지 못하고 한 발 뒤처져 따라가고 있다는 것은 창피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여봉우는 김종화를 수배하는 일을 뒤로 미루었다.
그에게 공권력을 행사하는 일은 맨 마지막에 가서 해도 늦지 않다.
그는 김종화의 행동을 막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가 마음대로 뛰도록 내버려두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는 문득 게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빨리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지는 아직 단언할 수 없다.
게임은 공정해야 한다.
이런 게임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은 상대방이 너무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김종화는 지금 위험 부담을 안은 채 필사적으로 달려들고 있고, 그 위험 부담은 시간이 흐를수록 증가하고 있다.
그것을 알면서도 그는 김종화를 그대로 내버려둘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칠칠이 아줌마로부터 마지막으로 기대를 걸었던 것은 오 사장이라는 자의 주소를 알아내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알아내는 데 실패했다.
그녀는 그의 주소를 정말로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다만 그녀로부터 장미를 빼앗아 간 오 사장의 부하 두 명에 대해서만 조금 알아냈을 뿐이었다.
그것도 그들의 본명은 모르고 별명 정도만 알아냈을 뿐이었다.
그 별명이란 것이 우스꽝스럽게도 문어와 오랑우탄이라고 했다.
그리고 들은 소문에 의하면 그들은 H호텔 나이트 클럽에 자주 나간다고 했다.
"장미 아버지한테도 이런 말을 해주었어요?"
"네, 똑같은 말을 해주었어요."
병실을 나온 여우는 그 길로 H호텔을 찾아갔다.
중요한 일은 문어와 오랑우탄의 사진을 입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현재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김종화도 경찰 수사진도 사진 한 장 없이 별명만을 가지고 그들을 찾아내야 한다는 점에서 똑같은 어려움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그 어려움은 김종화의 경우 더욱 컸다.
그는 혼자였고, 경찰까지 경계해야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그 날 초저녁 김종화는 H호텔 나이트 클럽을 찾아갔다.
초라한 차림으로는 그런 데 어울리지가 않았기 때문에 이발소에 들러 머리 손질을 하고 돈푼깨나 있어 보이는 양복 차림으로 나이트 클럽에 들어섰다.
초저녁이었기 때문에 아직 손님이 들지 않아 넓은 실내는 텅 비어 있었다.
웨이터와 호스티스로 보이는 아가씨들 몇 명만이 한쪽에 어울려 앉아 있을 뿐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웨이터 한 명이 그를 보고 달려왔다.
"지배인을 좀 만나고 싶은데……."
김 교수는 담배를 천천히 꺼내 물었다.
자신감에 차 있어야 하고 강해 보여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어디서 오셨는가요? 좀 앉으시죠."
웨이터는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면서도 공손했다.
김 교수는 앉지 않고 그대로 버티고 서 있었다.
그리고 바쁘다는 듯 손목시계를 힐끗 들여다보았다.
"지배인 있으면 좀 불러 주게."
"어디서 오셨는가요?"
김 교수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웨이터를 쏘아보았다.
그러면서도 목소리는 부드럽게 흘렸다.
"그런 건 묻지 말고 있으면 좀 불러 줘. 김 사장이라고 하면 알 거야."
"잠깐 기다리십시오."
웨이터가 안쪽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김 교수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여봉우도 담배에 불을 당겼다.
그는 동행도 없이 혼자였다.
그는 의자를 거꾸로 놓고 등받이 위에 턱을 괸 채 앉아 있었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그는 거의 하루 낮을 기다린 끝에 김종화를 발견한 것이다.
그는 길을 사이에 두고 H호텔 나이트 클럽이 마주 내려다보이는 건물의 이 층 창가에 앉아 있었다.
그가 잠복해 있는 곳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방으로 사용되던 곳이었는데 한 달 전에 불이 나서 한 사람이 타죽기까지 했고, 지금은 내부 수리중이었다.
다방 주인에게 양해를 구한 다음 내부 수리에 바쁜 인부들 틈에 끼여 있자니 이만저만 고역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가 알기로는 김종화는 첫 손님으로 나이트 클럽에 들어간 것 같았다.
그 나이트 클럽은 지하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호텔 밖으로 출입구가 나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곳에 출입하는 사람들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볼 수가 있었다.
김종화가 클럽 앞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여우는 흥분해서 망원경을 눈에다 갖다 댔다.
김종화는 그가 생각하고 있던 것과는 전연 다른 차림을 하고 있었다.
말쑥하게 차려 입은 모습이 딸을 찾아 헤매는 아버지의 모습과는 아주 거리가 멀어 보였다.
거기서 여우는 의외라는 느낌보다는 한 인간의 무서운 집념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더욱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김종화는 주위를 한 번 휘 둘러본 다음 나이트 클럽 안으로 사라졌다.
그것을 보고 여우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김종화는 탁자 위에 돈 봉투를 내놓았다.
"십만 원입니다. 선금입니다. 그들을 가르쳐 주면 그때 가서 십만 원을 더 주겠소."
중키에 매끄럽게 생긴 지배인은 얇은 입술을 혀로 축이며 돈 봉투를 힐끗 내려다보았다.
그는 문어와 오랑우탄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자기 입으로는 아직 알고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종화가 문어와 오랑우탄을 찾고 있다고 하자 표정이 굳어지면서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이었다.
그것을 보고 종화는 지배인이 그들에 대해 알고 있다고 확신했다.
"난 그런 사람들 잘 모르는데요."
지배인은 처음에는 모른다고 잡아뗄 것처럼 나왔다.
그러나 종화가 집요하게 파고들면서 적지 않은 돈을 주겠다고 하자 슬그머니 태도를 바꾸어,
"무슨 일로 그 사람들을 찾는 겁니까?"
하고 물었다.
"그 이유는 모르는 게 서로 좋을 겁니다."
지배인은 눈을 깜박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만일 그 사람들이 나타나지 않으면 어떡하죠?"
그의 시선이 돈 봉투 위에 머물렀다.
종화는 그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안 나타나면 할 수 없죠, 선금을 돌려 받지는 않겠습니다. 일 주일 기한으로 기다렸다가 안 나타나면 그만두겠습니다."
"그 사람들은 가끔씩 여기에 옵니다."
마침내 지배인이 그들을 알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그 사람들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을 좀 말해 줄 수 없겠소?"
그 물음에 지배인은 고개를 내저었다.
"별명만 알고 있지 그 밖에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잘 알겠습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들이 나타나는 대로 전화를 걸어 주십시오."
종화는 지배인에게 전화 번호가 적힌 쪽지를 건네 주었다.
"여기가 어딥니까?"
"아파트입니다."
그것은 그가 사글세로 급히 얻어 놓은 조그만 아파트의 전화 번호였다.
장미를 찾을 때까지는 그는 집에 들어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긴 집에 들어갈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렇다고 매일 여관이나 호텔을 전전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그래서 생각 끝에 마련한 것이 아파트였다.
"전화를 걸어 주면 즉시 이곳으로 달려오겠습니다. 그때 그 두 사람을 알려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지배인은 슬그머니 돈 봉투를 집어 들었다.
"비밀은 지켜야 합니다. 내가 그 사람들을 찾고 있다는 말을 그 사람들은 물론 그 누구한테도 해서는 안 됩니다."
"그야 물론이지요."
"만일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난 가만 있지 않을 겁니다."
지배인은 입가에 냉소를 흘리면서 돈 봉투를 호주머니 속에 집어 넣었다.
"그건 내가 할 소리 같은데요."
여우는 망원경을 통해 김 교수가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보았다.
망원경 없이도 볼 수는 있었지만 보다 확실하게 보기 위해 그것을 준비해 두었던 것이다.
망원경을 통해서는 그의 표정까지 읽을 수가 있었다.
김종화는 나이트 클럽 앞에서 한동안 머뭇거리며 서 있다가 이윽고 굴러온 택시를 잡아타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제서야 여우는 망원경을 내리면서 일어섰다.
초저녁이었지만 거리는 몹시 무더웠다.
퇴근 무렵이었기 때문에 거리에는 차량들이 홍수를 이루고 있었다.
여우는 길을 건너 나이트 클럽으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안으로 들어선 그는 우선 맥주부터 한 병 시켰다.
"조금 전에 여기 들어왔던 사람 말인데…… 여기서 무얼 했지?"
그는 맥주병을 놓고 돌아서려는 웨이터를 불러 세웠다.
"지배인 만나고 갔습니다."
"그래? 지배인 좀 오라고 해."
"어디서 오셨는가요?"
"경찰에서 왔다고 해."
잠시 후 지배인이 창백한 표정으로 나타났다.
그는 연달아 낯선 사람들이 나타나자 꽤 놀란 것 같았다.
여우는 그에게 신분증을 보였다.
"조금 전에 여기 들렀던 그 사람하고 아는 사이요?"
시원한 맥주가 목을 타고 내려가자 비로소 더위가 조금 가시는 것 같았다.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하고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별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다."
여우는 맥주잔을 내려놓고 상대방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지배인은 당황해서 그의 시선을 피했다.
"당신, 여기서 얼마 동안 일했지?"
"육 개월 됐습니다."
"여기서 계속 일하고 싶지 않은가?"
지배인은 그의 말뜻을 얼른 알아차리지 못하고 당황해서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당신이 거짓말하면 난 당신을 데리고 갈 거야. 한 일 주일 동안 경찰서에 가두어 두면 당신은 어쩔 수 없이 여기서 쫓겨나겠지. 하지만 난 그러고 싶지 않아."
비로소 말뜻을 알아차린 지배인은 더욱 창백한 표정이 되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 사람하고 나눈 이야기를 하나도 빼놓지 말고 말해 봐요."
여우는 두 번째 맥주잔을 비웠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여우는 끄덕이면서 상체를 뒤로 젖혔다.
3.
위험한 추적 애꾸눈 최동파는 저녁때가 돼서야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새벽에 여우한테서 풀려난 그는 지난 이틀 동안 잠 한숨 못 자고 시달렸던 탓으로 우선 잠자는 것이 급했다.
똘마니들에게 오 사장 패거리를 오늘 중으로 꼭 찾아내야 한다고 지시한 다음 그대로 잠에 떨어졌다가 깨어난 것이 오후 세 시경이었다.
늦은 점심을 먹고 나서 그는 창녀와 한 번 관계를 맺었다.
마치 그래야만 직성이 풀리기라도 하는 듯.
그러고 나서 다시 잠 속으로 빠져 들었다가 날이 저물어서야 깨어난 것이다.
그의 똘마니들이 깨우지 않았다면 그는 그때까지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문어하고 오랑우탄을 찾았습니다!"
애꾸는 눈을 비비고 일어나 담배부터 찾았다.
"그 자들 어디 있어?"
"사우나탕에 들어갔습니다. B호텔 사우나탕입니다."
애꾸는 전화통을 끌어당겼다.
문이 열리면서 두 명의 젊은 남자가 밖으로 나왔다.
한 명은 쥐새끼처럼 조그맣고 기민해 보였고 다른 한 명은 말상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호텔 밖으로 나온 그들은 주차장 쪽으로 걸어갔다.
"바로 저 자식들입니다."
애꾸가 여우에게 그들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애꾸와 여우는 차의 앞자리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뒷자리에는 수사관 세 명이 잠복하고 있었다.
"말대가리처럼 생긴 놈이 오랑우탄이고 쥐새끼 같은 놈이 문어 입니다. 쥐새끼 같은 놈은 디스코를 추는 것이 꼭 문어 같습니다. 저는 이제 가도 되겠습니까?"
"꺼져."
여우는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좋은 소식 기대하겠습니다. 저하고 한 약속 잊으시면 안 됩니다."
애꾸는 당부하듯 말하고 나서 차에서 내렸다.
오랑우탄과 문어가 탄 차는 이미 주차장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
두 대의 차가 그 차를 미행했다.
한 대는 낡은 승용차였고 다른 한 대는 택시였다.
녹색의 그 택시는 물론 영업용이 아닌 수사용으로 사용되고 있는 위장 택시였다.
그 차에도 네 명의 형사들이 타고 있었다.
무더운 밤이었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두터운 구름이 낮게 드리워져 있었지만 비는 내리지 않고 있었다.
김종화는 초조했다.
그는 방구석에 처박혀 언제까지고 전화가 걸려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만도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달리 좋은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그 지배인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방문을 모두 열어 놓았지만 방 안은 몹시 더워 움직이지 않고 가만 있는데도 온몸에서 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초조하게 담배를 피다가 비벼 끄고 한숨을 내쉬면서 창가로 다가갔다.
창문 바로 앞을 대형 건물의 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 아파트는 지은 지 아주 오래 되어 낡을 대로 낡은 아파트로 도심에 자리잡고 있었다.
크기가 협소한데다 슬럼화되어 있고 앞뒤가 대형 건물들로 막혀 있었으며 가난한 서민들이 주로 살고 있었다.
질식할 것 같은 곳이지만 숨어 있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시야를 가로막고 있는 시커먼 벽면을 바라보고 있다가 그는 생각난 듯 전화통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 호텔 나이트 클럽으로 전화를 걸어 지배인을 찾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지배인은 전화를 받았다.
"전화 바꿨습니다."
"나……아까 전화를 걸어 달라고 부탁했던 사람입니다. 오랑우탄과 문어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들이 그곳에 나타나면……."
"뭐라구요? 잘 안 들리니까 좀 큰 소리로 말씀하십시오!"
시끄러운 음악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그의 귀에까지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종화는 큰 소리로 되풀이해서 말했다.
상대방은 비로소 그를 알아본 것 같았다.
"아, 난 또 누구시라고. 무슨 일입니까? 바쁘니까 용건만 빨리 말씀하십시오."
"다시 한 번 부탁드리려고 전화 건 겁니다."
"아, 그거라면 염려 마세요."
"이쪽 전화 번호 잊어 먹지 않으셨죠?"
"잊어 먹다니요."
지배인이라는 자는 어쩐지 건성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난 지금 전화통 앞에서 당신의 전화가 걸려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염려하지 말라니까요!"
"그 사람들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나타났으면 제가 벌써 연락을 드렸죠."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종화는 전화를 끊고 벽에 등을 대고 앉았다.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얼굴을 묻었다.
사랑하는 딸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가슴을 칼로 도려 내는 것 같은 통증이 전해 왔다.
장미는 지금 어디 있을까.
어디서 어떻게 고통을 당하고 있을까.
어깨가 떨리면서 신음소리에 가까운 흐느낌이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아주 오래도록 그는 그렇게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이 H호텔 나이트 클럽 안으로 사라진 것을 여우가 확인한 것은 밤 열 시 조금 지나서였다.
수사관들을 모두 나이트 클럽 안으로 들여보내고 나서 그는 혼자서 호텔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오랑우탄과 문어가 나이트 클럽 안으로 들어섰을 때 지배인은 미처 그들을 보지 못했다.
웨이터의 귀띔을 받고서야 그는 그들을 발견하고는 그쪽으로 재빨리 다가갔다.
"아이구, 어서 오십시오!"
그는 그들과 악수를 나누고 나서 그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의 빈 의자에 앉아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우리를 찾았다고 하던데 무슨 일이지?"
쥐새끼처럼 생긴 자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지배인은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떤 사람이 형님들을 찾고 있습니다. 형님들 별명을 대면서 여기에 잘 나온다는 말을 듣고 왔다고 하면서……."
갑자기 음악소리가 커지는 바람에 그의 말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말상이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잘 못 알아듣겠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지배인은 그들 쪽으로 더욱 상체를 기울인 다음 아까보다는 큰 소리로 되풀이해서 말했다.
"뭐 하는 놈인데 우리를 찾고 있는 거야?"
지배인의 이야기가 끝나기 무섭게 말상이 눈을 굴리며 물었다.
"뭐 하는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물어도 가르쳐 주지를 않았습니다. 나이는 사십대로 보였고 차려 입은 것이 돈푼깨나 있어 보였습니다. 형님들이 나타나면 즉시 자기가 있는 곳으로 연락해 달라고 하면서 전화 번호까지 적어 놓고 갔습니다."
지배인은 그들 앞에 전화 번호와 이름이 적힌 메모지를 꺼내 보였다.
거기에는 이상호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혹시 형사 아니야?"
쥐새끼처럼 생긴 자가 잔뜩 경계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형사는 아닌 것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형사가 나타났 으니까요."
"뭐? 형사가 나타났어?"
그들의 얼굴에 긴장이 서리는 것을 보고 지배인은 목을 움츠렸다.
"네, 형사가 찾아왔었습니다. 이상호라는 사람이 가고 난 뒤 조금 지나서 형사가 왔었습니다."
지배인은 형사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자세히 그들에게 들려주었다.
이야기를 듣고 난 그들은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기까지 했다.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형사는 그 사람한테 눈독을 들이고 있었지 형님들한테 관심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 사람한테 전화를 걸어. 우리가 나타났다고 전화를 걸란 말이야. 어떤 작자인지 만나 봐야겠어."
문어가 오징어를 씹으며 말했다.
기다리다 지친 종화는 앉은 채로 얼핏 잠이 들었다.
잠이 들자마자 장미의 모습이 나타났다.
옷이 갈기갈기 찢긴 채 거리를 헤매고 있는 모습이었다.
머리는 산발한 채였고, 그녀의 뒤를 아이들이 막대기를 들고 왁자지껄 떠들며 따르고 있었다.
그녀는 울지도 않았고, 오히려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우리 장미가 미쳤구나!’ 종화는 꿈 속에서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경찰에 체포되어 철망이 쳐진 시커먼 차 속에 갇혀 있었다.
차는 신호에 걸려 잠시 멈춰 서 있었다.
그는 창문을 두드리며 장미를 불렀지만 그녀는 듣지 못했는지 그대로 걸어가고 있었다.
차가 움직였다.
차는 장미 앞을 지나쳐 갔다.
그는 미친 듯 창문을 두드리면서 장미를 불렀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점점 멀어져 가는 장미를 애타게 부르다가 그는 눈을 떴다.
전화벨이 울리고 있었다.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H호텔 나이트 클럽입니다."
그것은 지배인이 걸어 온 전화였다.
"그 사람들이 조금 전에 나타났습니다. 지금 클럽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데…… 오시겠습니까?"
"지금 가겠습니다."
"빨리 오십시오. 가버릴지도 모르니까요."
종화는 어깨에 메는 여행가방을 들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H호텔 쪽으로 차를 몰고 가면서 그들이 유난히도 빨리 나타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그저 얼핏 스쳐 지나간 것에 불과했다.
그에게는 그런 것을 곰곰이 따져 볼 여유가 없었다.
나이트 클럽은 소음과 사람과 불빛이 뒤엉켜 만들어 낸 기묘한 분위기 속에 휩싸여 있었다.
종화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지배인이 그를 알아보고 급히 다가왔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그는 재빨리 은밀하게 속삭였다.
종화는 그를 따라 구석진 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 사람들 어디 있습니까?"
"저쪽에 앉아 있습니다. 저기 플로어 쪽에 아래위 흰 양복 입은 사람 있죠? 기둥 옆에 말입니다. 그 사람이 앉아 있는 테이블 오른쪽 테이블에 네 사람이 앉아 있는 거 보이지요? 여자 둘하고 남자 둘 말입니다. 그 남자들이 바로 찾고 계시는 사람들입니다."
그가 앉아 있는 곳에서는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들의 얼굴을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꽤나 떠들어 대고 있다는 점이었다.
"틀림없나요?"
"제가 알고 있는 바로는 저 사람들이 틀림없습니다."
"고맙소."
종화는 돈 봉투를 꺼내 놓았다.
지배인은 별로 달가워하는 기색도 없이 그것을 챙겨 들고 자리를 떴다.
종화가 맥주 한 병을 거의 비웠을 때 앉아 있던 네 사람이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플로어 쪽으로 가지 않고 출구 쪽으로 가고 있었다.
종화도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거리가 가까워졌을 때 보니 남자들은 두 명이 다 키가 커보였고 복장도 비슷한 감색 양복 차림이었다.
여자들은 눈에 띄게 예뻐 보였다.
밖으로 나간 그들은 주차장 쪽으로 걸어가 차에 올랐다.
코발트색의 소형 승용차였다.
차에 시동이 걸리는 것을 보고 종화도 자기 차에 뛰어들었다.
코발트색의 승용차가 주차장을 천천히 빠져 나가 차도로 들어서고 있었다.
종화는 액셀러레이터를 밟다 말고 급히 브레이크 페달로 발을 가져갔다.
뒤늦게 차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급히 내려서 보니 뒷바퀴 하나가 푹 찌그러져 있었다.
당황한 그는 팽개치듯 차문을 닫은 다음 차도 쪽으로 뛰어갔다.
코발트색 승용차는 이미 저만치 달려가고 있었다.
종화는 발을 구르며 택시를 잡으려고 했지만 그를 위해 서주는 빈 택시는 없었다.
그때 주차장 쪽에서 나오던 승용차 한 대가 그 옆에 멈춰 섰다.
새로 빼낸 듯한 주황색 신형 차였는데 앞자리에 두 남자가 앉아 있었고 뒷좌석은 비어 있었다.
"사장님, 타고 가시죠. 모셔다 드릴 게 기름값 정도만 생각해 주십시오."
운전석에 앉아 있는 쥐새끼처럼 생긴 자가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말했다.
종화는 그 차가 불법으로 영업 행위를 하는 자가용인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차들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런 차를 이용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 차를 이용하는 것을 그는 몹시 싫어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그런 것을 따지고 있을 계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감사해야 할 판이었다.
그는 그 차의 뒷문을 열고 들어갔다.
"빨리 좀 갑시다. 이쪽으로!"
주황색 신형 차는 오른쪽으로 커브를 틀면서 차도로 들어섰다.
"바로 쭉 갑시다!"
코발트색 승용차의 모습이 불빛 사이로 가물가물 사라지고 있었다.
"빨리 좀 갑시다! 앞에 간 차를 따라잡아야 합니다!"
그는 안절부절못하며 말했다.
"어떤 차 말입니까?"
말상처럼 생긴 자가 물었다.
"코발트색 승용차인데 지금은 보이지 않아요. 빨리 가면 따라잡을 수 있을 거예요."
"코발트색 승용차란 말이죠? 따라잡아 봅시다."
쥐새끼처럼 생긴 자가 껌을 잘강잘강 씹으며 말했다.
주황색 차는 갑자기 속력을 내어 달리기 시작했다.
"기름값 정도 가지고는 안 되겠는데요?"
"차비는 충분히 드릴 테니까 그 차나 따라잡아요."
쥐새끼는 곡예하듯 차를 몰아갔다.
오 분도 못 돼 코발트색 승용차의 모습이 보였다.
"아, 보이는군!"
"저 차입니까?"
"네, 저 차를 따라가요! 눈치 채지 않게 따라가야 합니다."
"골목으로 들어가는데……."
쥐새끼가 중얼거렸다.
코발트색 승용차가 골목으로 막 꺾어져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주황색 차도 속력을 줄이면서 보도 쪽으로 차선을 바꾸어 나갔다.
이윽고 골목 쪽으로 꺾어 들자 저만치 코발트색 차가 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도중에 그 차는 다시 오른쪽으로 꺾어져 사라졌다.
종화가 탄 차도 오른쪽으로 돌아 들어갔다.
저만치 코발트색 차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차는 골목 중간에 길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차를 세워요!"
김 교수가 다급하게 소리쳤지만 쥐새끼는 못 들은 척하고 그대로 차를 몰아갔다.
"가면 안 돼요? 세워요!"
쥐새끼는 웃으며 브레이크를 밟았다.
주황색 차는 이미 코발트색 자가용의 뒤꽁무니에 바싹 다가서 있었다.
종화는 당황해서 앞 차를 바라보았다.
앞 차에서 두 사나이가 내리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곧장 뒤에 서 있는 차 쪽으로 걸어왔다.
뭔가 잘못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모든 것이 너무 갑자기 돌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멀거니 그들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들은 거침없이 다가와 종화가 앉아 있는 뒷좌석의 양쪽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를 밀어붙이며 들어와 앉았다.
졸지에 건장한 두 사나이 사이에 끼이게 된 종화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밖으로 빠져 나가려고 했지만 옆구리에 찌르듯이 들어오는 강한 일격에 멈칫하고 말았다.
"잠자코 있어!"
팔꿈치가 이번에는 그의 약한 가슴을 내찔렀다.
그는 숨이 막혀 입을 벌렸다.
목에 와닿는 차갑고 섬뜩한 감촉에 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랄하면 목을 잘라 버려!"
운전대를 잡고 있는 쥐새끼 같은 자가 뒤를 힐끔 돌아보며 내뱉듯이 말했다.
코발트색의 차가 천천히 굴러가기 시작했다.
그 차에는 여자들만 타고 있었다.
그 차가 사라질 때까지 주황색 차는 그대로 서 있었다.
"얌전히 굴어! 그리고 묻는 대로 대답해!"
쥐새끼가 위협조로 말했다.
종화는 지배인에게 속은 것을 알자 비로소 화가 치밀었다.
그것은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분노였다.
이윽고 차가 움직였다.
종화는 그를 납치한 네 명의 남자들을 눈여겨보았다.
하나같이 위협적인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골목을 빠져 나가기 전에 차는 잠시 섰다.
쥐새끼와 말상이 자리를 바꾸어 앉았다.
차가 다시 움직였다.
차가 큰길로 들어서서 달리기 시작하자 이윽고 쥐새끼같이 생긴 자가 뒤를 돌아보면서 질문을 던졌다.
"왜 우리를 찾고 있는 거지?"
그의 말투는 빠르고 날카로웠다.
종화는 그를 똑바로 쏘아보았다.
쥐새끼는 손바닥으로 그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너 뭐 하는 놈이야?"
종화는 대답하지 않고 그를 노려보기만 했다.
그의 기세에 눌렸던지 쥐새끼는 경계 태세를 취하면서 건장한 사나이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이 새끼 손 좀 봐야겠어."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양쪽에 버티고 있던 사나이들이 움직였다.
그들은 양쪽에서 팔꿈치로만 종화를 가격했다.
턱과 가슴, 옆구리로 충격이 가해질 때마다 그는 뼈가 부러져 나가는 것 같았고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다.
그는 아무 저항도 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 저항한다는 것은 그 같은 선비로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때리는 대로 맞으면서 고통을 참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쥐새끼는 종화의 여행가방을 나꿔채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을 꺼내 보았다.
모두가 이상한 물건들이었다.
나일론 줄, 철사 줄, 칼, 망치, 테이프, 송곳, 약병 같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
"야, 이것 봐라!"
쥐새끼는 눈을 반짝이며 어이없다는 듯 김 교수를 바라보다가 도로 그것들을 가방 속에 집어 넣었다.
"뭐 하러 이런 것들을 가지고 다니는 거야? 이런 걸 가지고 우리를 찾아다녔다 이 말이지? 그 새끼 묶어. 단단히 묶어!"
쥐새끼가 철사 줄을 던져 주자 한 명이 종화의 팔을 뒤로 꺾어 손목에다 철사 줄을 감기 시작했다.
"호주머니를 샅샅이 뒤져 봐."
그들이 호주머니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을 꺼내는 동안 종화는 몸에서 완전히 힘을 뺀 채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자신이야 어떤 고통을 당해도 상관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딸을 찾을 수만 있다면 어떤 고통도 감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호주머니 속에서 꺼내 놓은 물건들을 뒤적거리던 쥐새끼는 이윽고 사진 한 장을 집어 들었다.
불빛에 그것을 가까이 대고 들여다보던 그는 조금 놀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종화를 쳐다보았다.
"당신 이 사진 어디서 났지?"
종화는 말없이 떨기만 했다.
그것은 증오의 떨림이었다.
"이 애하고 어떤 관계지? 당신 형사야?"
종화는 머리를 가로 저었다.
"그럼 뭐야?"
쥐새끼는 이번에는 신분증을 집어 들었다.
그것은 그가 재직하고 있는 S대학교에서 발급한 대학교수 신분증이었다.
그것을 들여다보는 쥐새끼의 눈이 점점 커졌다.
차는 외진 길을 달리고 있었다.
주택가의 불빛들이 점차 멀어져 가고 있었고, 그 대신 강바람이 불어 오고 있었다.
"당신 대학교수야? S대 교수야?"
김 교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교수가 왜 우리를 찾았지? 왜 이런 사진을 가지고 다니는 거지?"
모두가 놀라는 표정들이었다.
차가 몹시 흔들렸다.
"아직도 모르겠어? 그 애는 내 딸이야."
차는 강변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모래 더미가 마치 피라밋처럼 쌓여 있는 것이 보였다.
갑자기 벙어리가 된 듯 쥐새끼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바보 같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나는 장미를 찾고 있어. 그래서 당신들을 만나려고 한 거야. 당신들이 내 딸애를 데리고 갔으니까."
피라도 토하며 울부짖고 싶은 것을 간신히 억누르면서 그는 침착하게 말했다.
4.
해바라기 농장 이미 목숨을 내놓고 있었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은 없었다.
그보다도 그는 장미의 행방을 빨리 알고 싶었다.
차는 여기저기 동산처럼 쌓여 있는 모래 더미 사이로 이리저리 빠져 나가다가 이윽고 멈추어 섰다.
그곳은 차도 쪽에서 보면 모래 더미에 가려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였다.
그들이 납치해 온 인물이 생각지도 않았던 의외의 인물이었던 때문인지 그들은 차에서 내릴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신분을 알게 된 그들은 그가 자진해서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종화는 뒤로 손이 묶인 채로 차에서 내려섰다.
그들은 묵묵히 그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내려서자 그들은 그의 묶인 손을 풀어 주며 그를 에워쌌다.
종화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이 걷히면서 달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달은 구름 사이를 재빨리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달은 그 자리에 떠 있었다.
그는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장미는 내 외동딸이오. 제발 내 딸을 돌려줘요. 내 딸을 돌려주기만 하면 난 당신들을 원망하지도 않을 거고 당신들을 찾아다니지도 않을 거요. 제발 내 딸을 돌려줘요."
그는 격정에 못 이겨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애걸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를 상대하고 있는 사내들의 태도는 냉담하기만 했다.
"장미라고? 우린 그런 애 몰라!"
어둠 속에서 쥐새끼처럼 생긴 자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잡아떼지 마십시오. 난 다 알고 있으니까 거짓말하지는 마십시오. 내 딸은 어디 있습니까?"
"그런 애 모른단 말이야!"
쥐새끼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종화의 두 손이 앞으로 나가더니 쥐새끼의 앞가슴을 움켜잡았다.
"거짓말하지 마! 이놈, 이 나쁜 놈! 내 딸 내놔, 내 딸 내놓으란 말이야! 이 나쁜 놈들! 더러운 놈들! 내 딸 어딨어? 내 딸 어딨냔 말이야!"
힘껏 움켜쥐고 흔드는 바람에 쥐새끼의 남방이 북 하고 찢어졌다.
달이 구름 속에 들어가자 주위는 다시 어두워졌다.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 이 새끼 봐라. 이 새끼가 죽을려고 환장했나?"
쥐새끼는 발끈해서 주먹으로 종화의 얼굴을 갈겼다.
종화가 두 손으로 얼른 얼굴을 가리는데 이번에는 옆에 서 있던 자가 그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괴로운 신음을 토하며 비틀거리는 종화를 뒤에 서 있던 자가 팔꿈치로 내찔렀다.
종화는 앞으로 쓰러졌다가 두 손으로 땅을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입 밖으로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는 딸을 내놓으라는 말만 흘러 나왔다.
"내 딸 어딨어? 이 나쁜 놈들…… 내 딸 내놔."
"네 딸 여기 있다."
건장한 자가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종화를 붙잡더니 무릎으로 얼굴을 올려찼다.
종화는 뒤로 벌렁 나가떨어졌다가 다시 상체를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자 다시 무릎이 올라와 그의 얼굴을 위로 강타했다.
그는 또 쓰러졌다가 무릎으로 땅을 짚으며 가까스로 상체를 세웠다.
안경이 깨지고, 코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침침한 눈으로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내 딸 어딨어……내 딸 내놔……."
그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면서 왠지 울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울지는 않았다.
"교수, 딸 찾을 생각 같은 건 하지도 마."
쥐새끼가 종화의 뺨을 철썩철썩 갈기며 말했다.
종화는 머리를 흔들었다.
"내 딸 내놔라, 이 죽일 놈들…… 내 딸 내놓으란 말이야……. 내 딸 내놓지 않으면 네 놈들을 모두 죽이고 말 거야……. 난 내 딸을 꼭 찾아내고 말 거야……."
쏴아 하고 소낙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종화를 때리기 시작했다.
소낙비 쏟아지는 소리와 자신의 몸뚱이에 날아와 부딪치는 주먹과 발길질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종화는 사랑하는 딸이 받고 있는 고통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자신의 몸뚱이에 가해지는 충격이 조금도 고통스럽지가 않았다.
얼마 후 그는 캄캄한 하늘을 보고 누워 있었다.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쥐새끼가 그의 가슴 위에 구둣발을 올려놓았다.
"교수, 우리를 찾으려고 하지 마. 두 번 다시 그러면 아예 죽여 버릴 거야. 알았어?"
"내 딸 내놔…… 이놈아……."
그의 목소리는 끊어질 듯 말 듯 아주 가늘게 흘러 나왔다.
"지독한 놈인데."
말상처럼 생긴 자가 종화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종화는 두 손으로 가슴을 누르고 있는 쥐새끼의 구둣발을 움켜잡았다.
"내 딸을 돌려주기만 하면 너희들이 달라는 대로 돈을 주겠다. 일억도 좋고 이억도 좋아. 얼마든지 줄 테니까 내 딸을 돌려줘."
"돌려줄 수 없어. 돈이 문제가 아니야. 돈을 아무리 많이 줘도 소용 없어. 당신 딸은 이미 우리 손을 떠났어. 이미 늦었단 말이야!"
"어디로 떠났다는 거야?"
종화는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가슴이 짓눌리고 있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멀리 떠났어. 찾을 생각하지 마."
쥐새끼는 종화의 가슴에서 발을 떼고 뒤로 물러났다.
그들은 돌아갈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종화는 여기서 그들을 놓치면 끝장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든 그들을 붙잡고 늘어져 그들의 입에서 장미의 행방을 알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차에 오르는 것을 보고 종화는 몸을 일으켰다.
그는 비틀거리며 헤드라이트 불빛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두 팔을 벌리고 서서 필사적으로 외쳐댔다.
"안 돼! 갈 수 없어! 내 딸을 내놓기 전에는 갈 수 없어!"
엔진소리가 높이 주위를 울렸다.
차는 그대로 달려오다가 종화 앞에서 급정거했다.
"이 새끼, 저리 비켜!"
차 속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종화는 비키지 않았다.
그는 두 손으로 보닛을 짚었다.
"내 딸을 내놔!"
그는 보닛을 주먹으로 두드리며 소리쳤다.
"깔아 버려!"
차 속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차가 갑자기 뒤쪽으로 달려가는 바람에 종화는 앞으로 쓰러졌다.
그가 비틀비틀 몸을 일으키는데 차가 다시 앞으로 달려왔다.
그는 두 손을 앞으로 뻗어 차를 막으려 했다.
"안 돼!"
그것은 제3의 목소리였다.
헤드라이트 불빛 속에 여봉우의 모습이 보였다.
쿵 하는 소리가 주위를 울렸다.
그 소리와 함께 종화의 몸뚱이가 공중에 떠올랐다가 땅 위로 굴러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차에 부딪치는 것과 동시에 종화는 의식을 잃었다.
그의 몸뚱이 위로 차가 굴러갔다.
차는 난폭하게 경사진 길을 올라가다가 또 한 사람을 칠 뻔했다.
"서라!"
여우는 헤드라이트 불빛 속에서 권총을 빼들고 차를 겨누면서 고함쳤다.
그러나 차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고 그대로 돌진해 왔다.
그는 얼른 옆으로 비켜 섰다.
차는 아슬아슬하게 그를 스쳐 갔다.
수 미터 앞 차도에 대기해 있던 경찰의 위장 택시가 차도를 올라오는 길을 가로막았다.
위로 올라가던 승용차는 그 바람에 위장 택시의 옆구리를 들이받고 멈춰 섰다.
범인들이 탄 차는 순식간에 권총을 뽑아 든 형사들에게 포위되었다.
"모두 내려! 머리에 손을 올리고 모두 내려!"
김종화는 병원에 입원해서야 의식을 차렸다.
그가 눈을 떴을 때 옆에서는 그의 아내 양미화가 병상을 지키며 울고 있었다.
"장미…… 장미는 어떻게 됐어?"
그는 헛소리처럼 아내에게 물었다.
양미화는 흐느끼면서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장미는 어떻게 됐어, 우리 장미는 어디 있어?"
그는 고개를 돌리다가 다른 얼굴을 발견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여우는 피우고 있던 담배를 창 밖으로 던지고는 종화를 향해 목례를 보냈다.
병실에는 불이 환히 켜져 있었다.
비 오는 소리가 병실 안에까지 들려 오고 있었다.
"제발 장미 찾는 건 경찰에 맡겨요. 이러다가는 당신이 죽겠어요. 장미 때문에 당신이 죽겠어요!"
양미화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삼키며 말했다.
종화는 머리를 흔들었다.
"나 죽는 건 상관하지 마. 난 살 만큼 살았어. 내 목숨하고 장미하고 바꿨으면 좋겠어."
창가에 기대 서서 차가운 눈으로 그를 쏘아보던 여우가 몸을 움직였다.
그는 창가에 그대로 기대 서서 몸만 움직였다.
"김 교수, 당신은 너무 어리석었어요. 그렇게 어리석을 줄은 정말 몰랐어요."
종화는 가만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콧잔등은 주먹만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고 한 쪽 눈은 시퍼렇게 멍이 든 채 찌그러져 있었다.
"그런 식으로는 장미 양을 찾을 수가 없어요. 그렇게 날뛴다고 해서 딸이 찾아지는 건 아니에요. 당신은 오히려 일을 어렵게 만들었어요. 이제 당신은 더 이상 딸을 찾기가 어렵게 됐어요."
종화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것은 당신이 뭐라고 하든 나는 상관하지 않겠다는 그런 태도였다.
"김 교수, 당신이 더 이상 딸을 찾기가 어렵게 된 이유를 설명하지요. 첫째 당신은 살인을 했어요. 오지애를 죽인 살인범이란 말입니다. 부인하지 않겠지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종화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여우의 차분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그것뿐이 아니지요. 당신은 칠칠이 아줌마를 납치해다가 잔인한 고문을 가했고, 그 결과 그 여자는 두 눈을 잃고 말았어요."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때까지 울고만 있던 양미화가 발끈해서 말했다.
"우리 딸이 납치돼서 고통받고 있는 건 생각지 않나요? 그런 쓰레기 같은 인간들은 죽어도 싸요!"
갑자기 쏘아붙이는 말에 여우는 주춤했다가 다시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네, 말씀대로 그런 자들은 죽어도 싸지요. 그 자들은 정말 쓰레기 같은 자들이지요. 이 사회에 아무 보탬도 되지 않는, 오히려 해만 끼치는 쓰레기 같은 자들이지요. 내 마음 같아서는 그런 자들은 일거에 빗자루로 쓸듯이 쓸어 없애 버렸으면 좋겠어요. 하루에도 몇 번씩 그런 쓰레기들을 쓸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폭력을 폭력으로 다스릴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되면 이 사회는 인간이 사는 사회가 아니라 야만 사회가 되고 말지요. 아무리 죽이고 싶은 흉악범이라 할지라도 우리한테 그의 죄를 단죄할 권한은 없습니다. 그의 죄를 단죄할 수 있는 것은 법밖에 없습니다. 법을 통해서만 우리는 그를 단죄할 수 있을 뿐입니다. 케케묵은 말 같지만…… 이런 사건이 있을 때마다 나는 그 말이 아주 새롭고 신선하게 느껴집니다. 죄송합니다, 이런 말씀을 드려서……."
"그 말씀의 뜻을 모르는 바 아니에요. 하지만…… 하지만 그러면 우리 장미는 어떻게 되는 거지요? 법을 믿고 그 애가 돌아오기만을 마냥 기다려야 하나요?"
"불행하게도 법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런 모순이 어딨어요!"
양미화는 날카롭게 쏘아붙이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여우는 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가 종화 쪽으로 돌렸다.
"김 교수가 더 이상 장미 양을 찾을 수 없게 된 이유가 또 하나 있습니다. 의사의 말에 따르면 당신은 불구가 될 것 같습니다. 한쪽 다리, 아니 양쪽 다리인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다리를 못 쓰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양미화의 흐느끼는 소리가 더욱 커졌다.
그녀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차에 치인 것이 직접적인 원인인 것 같습니다."
여우는 종화의 반응을 기다렸지만 그로부터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고 있었다.
종화는 무표정하게 천장만 바라보고 있있다.
문이 열리더니 간호원 두 명이 스트레처 카를 밀고 들어왔다.
"자, 일어나세요. 수술실로 가야 해요."
간호원 한 명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하면서 종화의 상체를 부축해 일으켰다.
여우가 다가가 종화의 다리에 손을 대자 그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신음소리를 냈다.
종화는 카 위에 실리고 나서야 고통에 일그러진 표정을 풀고 여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놈들을 잡았습니까?"
말라붙은 입술 사이로 가늘게 말소리가 흘러 나왔다.
"네, 모두 잡았습니다."
"그놈들이 장미가 있는 곳을 말했나요?"
"아니오, 그들은 모르는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놈들은 알고 있습니다. 사실대로 자백시켜야 합니다."
그의 찌그러진 눈에서 빛이 번득였다.
여우는 끄덕였다.
"그렇게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종화는 밖으로 나가기 전에 다시 여우에게 말을 걸었다.
"나를 어떻게 할 셈입니까?"
"수술이나 끝나고 나서 이야기합시다."
어두운 복도로 나오자 종화는 눈을 감았다.
양미화가 흐느끼면서 그의 뒤를 따랐다.
"울지 마, 우는 건 질색이야."
종화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미화는 울음을 삼켰다.
경찰은 김 교수를 폭행한 자들을 분리 신문했다.
여우는 그들을 상대하면서 또다시 지루하고 인내심을 요하는 싸움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 싸움은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싸움에 이겨야만 되는 것이 경찰의 입장이었고, 그리고 그들은 그 싸움에서 이기도록 되어 있었다.
날이 밝아 왔고, 수사관들은 해장국을 먹어 가며 신문을 계속했다.
신문은 하루 내내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백하려 들지 않았다.
마침내 그들의 입을 열게 하기 위해서는 비상 수단을 써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여우는 그 점에 대해서 상부에 건의할까 하다 그만두기로 하고 비상 수단을 사용해도 좋다고 부하들에게 허락했다.
그 자신은 직접 손을 대지 않기로 하고 부하들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그는 신문 장면을 보고 싶지 않아 밖으로 나왔다.
복도에서 서성거리며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안에서 갑자기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것은 뼈 속으로 녹아드는 것 같은 소리였다.
다른 방에서도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는 머리를 흔들면서 복도를 걸어가다가 밖으로 나와 다방으로 들어갔다.
다방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한 시간 가까이 신문을 들여다보다가 돌아가니 지 형사가 쥐새끼처럼 생긴 자로부터 자백을 받아 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지 형사는 의미 있는 눈짓을 보내 왔다.
다른 방에서도 수사관들이 말상처럼 생긴 자로부터 자백을 받아 내고 있었다.
수사관들은 하나같이 밝은 표정들이었다.
"놈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독종이라도 견뎌 낼 수야 없지요."
여우를 따라 밖으로 나오면서 형사 한 명이 만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우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기분이 언짢았다.
그런 방법을 써 자백을 받아 낸다는 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하는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날이 저물었다.
낮에 내리던 비는 가는 비로 변해 밤이 되어서도 계속 내렸다.
여우가 지휘하는 수사진이 출동한 것은 밤 아홉 시가 지나서였다.
두 대의 봉고차와 두 대의 승용차에 나누어 탄 인원은 거의 서른 명 가까이나 되었다.
본래의 수사진만으로는 수가 모자라 지원 병력까지 태우고 출발했던 것이다.
맨 앞 차에는 여우와 함께 쥐새끼처럼 생긴 자가 앉아서 차의 방향을 가리켜 주고 있었다.
출발할 때 쥐새끼는 차에 타지 않으려고 완강히 저항했지만 뒤에 가서 여우의 설득에 고개를 떨구고 차에 올랐다.
그에게는 경찰 수사에 협조할 경우 정상 참작의 여지가 클 것이라는 정도의 언질이 주어졌다.
그는 조직을 비호하기보다 자기 살 길을 찾아 기를 쓰기 시작하고 있었다.
서울 외곽을 북쪽으로 빠져 나와 달리던 수사진의 차량은 한 시간쯤 지나 강물을 오른쪽으로 보면서 달려갔다.
얼마 후 네 대의 차는 아스팔트 길을 벗어나 왼쪽으로 나 있는 소로로 접어들었다.
"바로 저겁니다."
쥐새끼가 소로의 입구에 세워져 있는 초라한 간판을 가리켜 보였다.
나무 사이에 세워져 있는 그 간판에는 ‘해바라기 농장’이란 글귀가 까만 색깔로 씌어져 있었다.
"해바라기 농장……."
여우는 중얼거리면서 피우고 있던 담배를 껐다.
그리고 무전기로 차의 불을 모두 끄라고 지시했다.
"불을 끄고 모두 내려!"
네 대의 차는 소로의 입구에서 엔진을 껐다.
사나이들은 조용하면서도 신속하게 움직였다.
불을 끈 채 좁은 길을 차를 타고 올라간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에 거기서부터는 걸어서 가기로 했다.
차를 타고 가면 오 분 정도밖에 안 걸리지만 걸어가기 때문에 이십 분 이상은 걸릴 것이라는 것이 쥐새끼의 말이었다.
"안에는 사나운 셰퍼드가 두 마리나 있기 때문에 아주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될 겁니다."
앞장서 걸어가면서 쥐새끼가 주의를 주었다.
그의 손목에는 수갑이 채워져 있었고, 허리에는 줄이 감겨 있었다.
그리고 그 줄 끝을 형사 한 명이 잡고 있었다.
"그 개를 유인해서 마취시켜. 자네가 그 역할을 해내야 해."
여우의 말에 쥐새끼는 고개를 끄덕였다.
플래시 사용도 금지됐기 때문에 일행은 삼십 분이 지나서야 농장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들은 멀리 불빛이 보이는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똑바로 가면 정문이 있습니다. 뒤쪽에도 문이 하나 있기는 한데 그건 비상시에 사용하려고 만들어 놓은 겁니다."
쥐새끼의 설명을 듣고 나서 여우는 우선 다섯 명을 정문이 마주 보이는 곳에 배치시켰다.
그리고 나머지 요원들을 데리고 뒤쪽으로 돌아갔다.
뒤쪽으로는 길이 없었기 때문에 돌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나뭇가지에 긁히기도 하면서 가까스로 전진했다.
주위에는 이중으로 철조망이 쳐져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넘어 들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들이 거의 뒷문 쪽에 도달했을 때 갑자기 개 짖는 소리가 들려 왔다.
개 짖는 소리는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이윽고 철조망 안쪽에서 두 마리의 개가 미친 듯 날뛰며 울부짖는 것이 보였다.
"메리, 쉿! 메리, 쉿!"
쥐새끼가 다시 한 번 부드럽게 부르자 개들은 꼬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형사가 고깃덩이가 들어 있는 비닐 봉지를 건네 주자 쥐새끼는 수갑 찬 손으로 고깃덩이를 꺼내 철조망 안으로 던졌다.
그러자 개들은 미친 듯 달려들어 그것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오 분도 못 돼 개들은 조용해졌다.
놈들은 땅바닥 위에 길게 드러누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수사관들은 밑에서부터 철조망을 잘라 나갔다.
이윽고 사람 한 명이 엎드려 기어들어갈 수 있는 구멍이 생기자 여우가 제일 먼저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5.
미로의 동굴 구멍은 더 넓혀졌고, 경찰관들은 여유 있게 한 사람씩 차례로 구멍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여우는 그들이 안으로 모두 무사히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움직였다.
비가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고, 그것이 움직이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빗발은 가늘었지만 모든 사람들의 옷은 하나같이 후줄근히 젖어 있었다.
여우는 후문 쪽에 다섯 명을 배치시킨 다음 나머지 인원으로 집을 포위하고 조금씩 포위망을 좁혀 갔다.
경찰관들은 모두가 권총 아니면 M16 소총을 들고 있었다.
그것들은 형식적으로 들고 있는 게 아니었다.
거기에는 실탄이 장전되어 있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정문 쪽 경비실에 있는 자를 먼저 처리하기 위해 여우는 네 명을 그쪽으로 보냈다.
경비실 안에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검은 운동모에 역시 같은 색의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상체를 뒤로 젖힌 채 두 발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있었는데 발에는 검정 군화를 신고 있었다.
작업복 상의 왼쪽 가슴 위에는 모서리가 여섯 개인 노란색 별표가 붙어 있었다.
그것은 그 조직의 표시인 것 같았다.
별표의 중앙에는 25라는 검정색 숫자가 적혀 있었다.
경비원은 껌을 짝짝 씹으며 녹음기에서 흘러 나오는 일본 유행가를 큰 소리로 따라 부르고 있었다.
그는 일본 유행가를 배우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에 문이 열리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경비실 안으로 숨어 들어간 전투복 차림의 경찰관은 먼저 총구로 경비원의 뒤통수를 찔렀다.
"꼼짝 마! 움직이면 쏜다! 두 손을 천천히 머리 위에 얹어!"
기습을 당한 경비원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상체를 일으키려 하다가 어깨를 심하게 한 번 얻어맞고는 도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네 개의 총구가 자기를 겨누고 있는 것을 알고는 그는 저항을 포기하는 것 같았다.
경찰관 한 명이 그의 팔을 거칠게 뒤로 꺾어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그때 그는 책상 밑으로 발을 뻗어 거기에 장치되어 있는 비상 벨 버튼을 힘껏 눌렀다.
순식간에 비상 벨이 요란스럽게 울리기 시작했고 철조망 곳곳에 걸려 있는 전등에 불이 들어왔다.
그 바람에 집 주위는 대낮같이 밝아졌다.
당황한 경찰관 한 명이 개머리판으로 경비원의 턱을 후려치자 그는 의자와 함께 뒤로 벌렁 나가떨어졌다.
또 한 명의 경찰관은 밖으로 뛰어나가 철문을 열어젖혔다.
밖에 대기하고 있던 경찰관 다섯 명이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비상 벨 소리에 몇 명의 남자들이 몽둥이를 들고 집 안에서 뛰쳐나왔다.
그들은 미처 옷을 입을 새도 없이 뛰쳐나왔기 때문에 모두가 팬티 바람이었다.
"꼼짝 마!"
고함치는 소리와 함께 총성이 밤하늘을 울렸다.
그제서야 사내들은 경찰에 포위된 것을 알고는 질겁을 하고 도로 집 안으로 뛰어들었다.
오 분 정도 아무 소리도 아무 움직임도 없었다.
이윽고 주위가 갑자기 캄캄한 어둠 속에 잠겼다.
집 안에서 전원을 끊어 버린 모양이었다.
그제서야 여우는 마이크를 들고 그들에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당신들은 지금 경찰에 포위되었다! 완전히 포위되었다! 빠져 나갈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다! 만일 빠져 나가려는 자가 있으면 가차 없이 사살당할 것이다! 오 분 여유를 주겠다! 오 분 이내에 불을 켜고 모두 밖으로 나와 자수해 주기 바란다! 그것이 당신 자신들을 위하는 길이다!"
그러나 안에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거기에는 캄캄한 어둠과 침묵만이 있을 뿐이었다.
오 분이 지났다.
밖으로 손을 들고 나오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여우는 다시 마이크를 들었다.
"오 분이 지났다. 그런데도 당신들 중 아무도 자수하지 않았다. 자수하지 않고 버틴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는 당신들 자신이 더 잘 알 것이다. 그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다. 경찰은 결코 물러나지도 않을 것이고, 시간이 흐를수록 포위망은 더욱 두터워만 질 것이다. 당신들은 지금 어둠 속에 숨어 있지만 몇 시간만 지나면 날이 샌다. 경찰과 대치하고 싸우겠다는 생각은 버리는 게 좋다. 이것은 상대가 안 되는 싸움이다. 모두 손을 들고 나와라! 다시 오 분 여유를 주겠다!"
마이크 소리가 꺼지자 다시 무거운 적막이 찾아왔다.
조금 있자 창문이 열리면서 '개소리 하지 마라!' 하는 외침이 들려 왔다.
그 뒤로는 도로 잠잠해졌다.
다시 오 분이 지나자 여우는 발사 명령을 내렸다.
수십 발의 총성이 요란스럽게 주위를 울렸고, 거의 동시에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가 들려 왔다.
유리창이란 유리창은 순식간에 모두 박살나고 말았다.
뒤이어 쥐죽은듯한 적막이 다시 찾아왔다.
십 분쯤 지나자 문이 열리면서 남자 한 명이 손을 들고 나왔다.
"자수할 테니까 쏘지 마시오!"
하고 그는 소리쳤다.
뒤이어 두 명이 또 손을 들고 나왔다.
그들이 나오는 것과 동시에 집 안에 불이 켜졌다.
안에서는 계속 사람들이 나왔다.
남자들의 뒤를 이어 앳된 소녀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네 명이었는데 제멋대로의 차림들이었다.
허벅지가 드러나는 짧은 란제리만 입고 있는가 하면 티셔츠 차림에 아래에는 팬티만 입고 있는 소녀도 있었다.
어떤 소녀는 브래지어와 팬티만 걸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들의 얼굴에는 부끄러워하는 기색 같은 것은 조금도 없었다.
부끄러워하기는커녕 하나같이 얼굴에 바보 같은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제정신들이 아니군."
여우가 어둠 속에 몸을 가리고 서서 중얼거리자 쥐새끼가,
"약을 먹여서 저렇습니다."
하고 말했다.
"모두 나온 것 같습니다. 남자 여덟 명, 여자가 네 명입니다."
지 형사가 뛰어와 보고했다.
"저 중에 오 사장이란 자가 있는가?"
여우가 쥐새끼 같은 자에게 물었다.
"없습니다, 보이지 않습니다."
여우는 다시 마이크를 집어 들었다.
"안에 있는 사람은 모두 나와야 한다. 단 한 명도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 특히 오 사장이란 자는 잘 들어라. 당신은 숨을 생각하지 말고 나와야 한다. 집 안에 있는 거 다 알고 있으니까 빨리 나와라! 도망 갈 구멍은 없다!"
그러나 오 사장이란 자는 한사코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다른 자들에게 오 사장이 집 안에 있느냐고 묻자 이구 동성으로 없다는 대답이었지만 경찰은 그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여우는 여자들 쪽으로 가서 장미의 사진을 꺼내 들고 그녀를 찾았지만 장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장미 보지 못했나? 이렇게 생긴 아이 말이야."
소녀들은 웃으며 고개를 살랑살랑 흔들기만 했다.
여우는 남자들 쪽으로 갔다.
"장미란 아이는 어딨어? 이 아이 말이야?"
"모르겠습니다."
남자들은 일제히 모른다고 잡아뗐다.
"장미 양이 이 집에 있는 거 다 알고 왔어. 어딨나?"
여우는 분노를 누르고 물었다.
"모릅니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은 대답을 되풀이했다.
"안으로 들어가서 샅샅이 뒤져! 장미 양하고 오 사장이란 자를 찾아내지 않으면 안 돼! 빨리 움직여!"
여우가 분노에 차서 소리치자 수사요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집 안으로 우르르 몰려들어갔다.
구석구석을 뒤지는 동안 그들은 사치스러운 내부 시설에 하나같이 입들을 벌렸다.
집 내부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기상 천외한 시설들로 꾸며져 있었다.
그런데 그 시설들이라는 것이 모두가 다 쾌락을 추구하는 데 필요한 것들뿐이었다.
수입 대리석으로 꾸며진 대형 욕실, 천장과 벽이 온통 거울로 된 침실, 여러 명이 한꺼번에 뒹굴 수 있는 대형 회전 침대, 다량의 정제된 히로뽕과 그 제조 시설 등등.
그것들을 바라보는 경찰관들의 두 눈은 하나같이 놀라움과 분노에 차 있었다.
"이건 완전히 별천지 아닌가. 기막힌 일이군."
여우는 혀를 내두르며 돌아다녀 보았지만 장미와 오 사장이란 자는 끝내 보이지 않았다.
집 안은 경찰관들의 발짝 소리로 시끄러웠고 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여우는 거실에 놓여 있는 가죽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갑자기 피로와 현기증을 느꼈던 것이다.
그가 앉아 있는 자리 뒤쪽 벽에는 벽난로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것은 장식용이 아닌, 불을 지필 수 있게 만들어진 아주 큰 벽난로였다.
뒤통수가 써늘해지는 것을 느끼고 그는 뒤돌아보았다.
그쪽에는 창문도 없었기 때문에 바람이 들어올 만한 데가 없었다.
그러나 분명히 그쪽으로부터 바람기가 느껴졌다.
세 번째 뒤돌아보았을 때 그는 바람이 어디서 불어오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소파에서 일어나 벽난로 쪽으로 다가갔다.
바람은 벽난로 안에서 불어오고 있었다.
성냥불을 켜서 난로 앞으로 가져 가자 불이 바람에 날려 금방 꺼져 버렸다.
그는 담배연기를 날려 보았다.
담배연기는 밖으로 나와 위로 올라갔다.
벽난로 안에서 바람이 불어온다면 분명 굴뚝을 타고 불어오는 바람임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담배연기는 위에서 아래로 날아가야 한다.
나중에 난로 밖으로 나와 위로 흩어지더라도 처음에는 위에서 아래로 날리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담배연기는 그렇게 날리지가 않았다.
그것은 처음부터 위로 날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바람은 굴뚝을 타고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난로 바닥 쪽에서 위쪽으로 불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난로 바닥에서 바람이 올라온다는 것이 아무래도 이상했다.
손을 대봐도 분명히 바람이 올라오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바닥에는 장작이 몇 개 놓여 있었다.
거기는 모두가 한 번 들여다 보기만 했을 뿐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보이는 것이라고는 장작 몇 개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여우는 장작을 들어내 보았다.
그 밑에는 철제망이 놓여 있었다.
그것을 들어내자 구멍이 나왔다.
손을 넣자 닿는 데가 없다.
당연히 바닥이 있어서 재를 받을 수 있어야 하는데 팔 하나를 다 집어 넣어도 닿지가 않는다.
그 구멍은 한 사람이 충분히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컸다.
플래시로 그곳을 비춰 보던 그는 멈칫했다.
놀랍게도 그 구멍 안쪽 벽에는 철제 사다리가 부착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곳을 통해 바람이 올라오는 이유를 비로소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건 비상 통로인 것 같아. 놈은 이곳으로 빠져 달아난 모양이야. 이게 어디로 통하지?"
그러나 오 사장의 부하들 중에도 그 비상 통로가 어디로 통하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도 처음 그것을 발견한 듯 하나같이 놀라는 표정들이었다.
"당신들은 그에게 충성하고 있지만 그 자는 여차할 때는 이렇게 혼자서만 빠져 나갈 길을 확보해 두었어. 당신들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고 자기 혼자서만 살아 나갈 궁리만 했단 말이야. 그런 자에게 충성한 당신들이야말로 정말 어리석고 한심하기 짝이 없어."
여우의 말에 그들은 동요하는 것 같았다.
얼굴에 동요의 빛을 뚜렷이 드러내고 있던 자가 갑자기 분노에 차서 입을 열었다.
"그 자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 집에 우리와 함께 있었습니다!"
여우는 플래시를 켜 들고 벽난로의 아궁이 속으로 들어갔다.
그것을 보고 지 형사가 그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제가 들어가겠습니다."
"정 들어오고 싶으면 뒤따라와."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앞장은 내가 서겠어."
여우는 구멍 속으로 다리부터 집어 넣었다.
철제 계단은 지하로 곧장 수미터나 내려가고 있었다.
그 계단이 끝나는 곳에 조금 넓은 공간이 있었다.
그 공간은 원통형으로 한쪽 면을 빼 놓고는 콘크리트 벽으로 되어 있었다.
한쪽 면에는 한 사람이 기어갈 수 있을 정도의 폭을 가진 구멍이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뻗어 있었다.
"이건 그야말로 미로인데요."
"무섭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난 좀 무서운데."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그럴 것까지는 없어."
여우는 좁은 통로를 무릎으로 기어가는 동안 온몸이 공포로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이러다가 죽으면 유언도 없이 개죽음을 당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유언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몸집이 큰 지 형사는 몹시 힘들어 하면서도 따라오고 있었다.
깊이 들어갈수록 바람기가 더욱 세어지고 있었다.
그것으로 보아 바깥이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았다.
통로의 천장은 통나무로 되어 있었다.
통나무를 촘촘히 잇대어 붙여 놓은 사이로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벽과 바닥은 거친 바위로 되어 있었다.
울퉁불퉁한 바닥을 무릎으로 기어가자니 고통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더구나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로 바닥은 젖어 있었다.
여우는 수사관 생활을 오래 했지만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만일 그런 곳을 한 시간 이상 혼자 기어간다면 미쳐 버릴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십여 미터쯤 기어갔다고 생각했을 때 통로가 끝나면서 다시 수직으로 뻗어 내린 구멍이 나타났다.
거기에는 사다리 대신 튼튼한 밧줄이 늘어뜨려져 있었다.
밑에서는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여우는 플래시로 아래를 비춰 보았다.
아래에는 연못 같은 것이 있었다.
바닥이 뚜렷이 보이는 것이 별로 깊은 것 같지가 않았다.
물은 신비스러울 정도로 맑아 보였다.
"자, 지금부터 신비의 세계로 들어가는 거야."
여우는 불안감을 줄이려고 일부러 장난하듯 말하면서 줄을 타고 밑으로 내려갔다.
밑에까지는 오 미터쯤 되었다.
밑으로 내려서니 물의 깊이가 정강이 높이쯤 되었다.
써늘한 냉기가 온몸을 휘감아 돌았다.
그는 몸을 움츠리면서 플래시로 주위를 비춰 보았다.
"놀라운 일이야! 정말 여긴 신비의 세계야! 이럴 수가!"
"무슨 일입니까!"
위에서 지 형사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건 정말 보여 주기 아까운데."
"내려가도 됩니까?"
"조심해서 내려와."
끙끙거리며 밑으로 내려오던 지 형사는 마지막 일 미터쯤을 남겨 두고 줄을 놓치는 바람에 물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물 속에 첨벙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주위를 요란스럽게 울렸다.
조그만 소리도 거기서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허우적거리며 일어서던 지 형사는 여우가 비춰 보이는 곳을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니, 여긴 동굴 아닙니까?"
"저길 보라구. 저 형형색색의 순을 보라구. 우린 신비의 세계에 들어온 거야."
"놀랍군요. 동굴로 통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저쪽에서 바람이 불어 오고 있어. 저쪽이 출구 같아."
두 사람은 움직일 줄 모른 채 한동안 물 속에 그대로 서 있었다.
"이건 정말 놀라운 발견인데요."
지 형사는 완전히 흥분해 있었다.
"놈은 이미 도망쳐 버린 것 같아. 앉아서 숨을 돌린 다음 가보자구."
그들은 물 속에서 나와 바위 위에 나란히 앉아 담배를 나누어피웠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처녀 동굴 같아. 다만 오 사장이란 자만이 도주로로 이용하기 위해 알고 있었던 것 같아."
"저는 좀 다르게 보고 싶습니다."
"어떻게?"
"이 멋진 동굴을 그대로 놔 뒀을 것 같지 않습니다. 이 동굴을 이용해서 뭔가 일을 꾸몄을 것 같습니다."
"그랬을 가능성도 없지 않지. 그건 차차 알아보기로 하고 자, 가보지!"
동굴은 넓고 높았기 때문에 그들은 더 이상 기어가지 않아도 되었다.
동굴의 천장 높이는 이 미터가 훨씬 더 돼 보였다.
그들은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걸어갔는데 바닥에는 바위가 깔려 있어 뛰어가도 될 정도로 걷기에 편했다.
활처럼 휘어진 굴 속을 오십 미터쯤 걸어가자 마침내 나뭇가지가 앞을 가로막았다.
비바람이 그들의 얼굴을 때렸다.
동굴 앞은 마치 그물로 덮여 있는 것처럼 나무와 덩굴 같은 것들이 뒤엉켜 있었다.
너무 들어차 있어서 허리를 굽히고 헤쳐 나가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
십 여 미터쯤 헤쳐 나가자 집채 더미만한 거대한 바위가 앞을 가로막았다.
그 바위를 왼쪽으로 돌아가자 나무 사이에 조금 공간이 생겼다.
그리고 거기서부터는 비탈이었다.
비탈을 따라 한참을 내려가자 놀랍게도 아스팔트로 덮인 차도가 나왔다.
차도 옆으로는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저기 보십시오!"
지 형사가 강 쪽을 가리켰다.
"뭐야?"
"사람입니다!"
지 형사가 비춰 주는 곳을 보니 웬 사람이 나무를 붙잡고 강 쪽으로부터 차도로 올라오려고 기를 쓰고 있었다.
그들은 차도를 가로질러 그쪽으로 뛰어가 보았다.
"상처가 큰데요."
지 형사가 그 사람을 차도 위로 끌어올리면서 말했다.
그 사람의 얼굴과 머리는 온통 피에 젖어 있었다.
그는 삼십대의 마른 남자였다.
"여, 여자를 구해 줘요……. 여자가 있어요……."
그가 허덕이는 목소리로 강 쪽을 가리켰다.
형사들은 플래시로 강기슭을 비춰 보았다.
"저기 있습니다!"
지 형사가 소리쳤다.
여자가 한 명, 물 속에 반쯤 잠겨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지 형사가 강기슭으로 내려가는 동안 여우는 무전기를 꺼내 연락을 취했다.
"죽었는데요!"
지 형사가 여자를 물에서 끌어내면서 소리쳤다.
"어떻게 된 일이오?"
여우는 마른 남자를 가로수에 기대 앉혀 놓고 물었다.
"집사람하고 차를 타고 오는데…… 어떤 사람이 길에 쓰러져서…… 도와 달라고 손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차를 세우고 봤더니 아주 뚱뚱한 사람이었습니다. ……얼굴에 피를 흘리고 있었습니다. ……내가 부축해 일으키자 갑자기 돌로 제 머리를 쳤습니다. ……아내가 도망치자 따라가서 아내도 돌로 내리쳤습니다. ……그러고는 강에 우리를 내던졌습니다. ……힘이 엄청 나게 센 놈이었습니다……."
"놈이 차를 뺏어 타고 갔나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앞으로 꼬꾸라지면서 의식을 잃었다.
조금 있자 지 형사가 여자를 어깨에 메고 차도 위로 올라왔다.
"죽었습니다."
그는 숨을 몰아 쉬면서 여자를 차도 한쪽에 내려놓았다.
갈색 스커트가 물에 젖어 하체에 감겨 있었고, 녹색 블라우스는 갈갈이 찢겨 있었다.
애처로울 정도로 자그마한 젊은 여자였다.
"임신했군."
스커트 위로 불룩하게 솟아 있는 배를 내려다보다가 여우는 얼굴을 돌려 버렸다.
그는 어둠 속을 노려보면서 분노에 차서 말했다.
"놈은 차를 뺏어 타고 도망쳤어!"
6.
밀항
"오늘도 글렀어."
뺨에 칼자국이 있는 자가 문을 열어 보면서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바다는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캄캄했고, 열린 문을 통해 비바람이 몰려들어왔다.
그 집은 바닷가에 자리잡고 있는 그야말로 다 쓰러져 가는 오막살이였다.
지붕은 함석으로 되어 있었고 벽은 돌을 쌓아 올려 만든 것이었다.
집 주위에 둘러쳐져 있는 돌담은 반쯤은 허물어져 있었고, 대문 같은 것도 없었다.
파도소리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그 집은 바닷가 가까이 자리잡고 있었다.
방 안에는 몇 명의 사내들이 술판을 벌이고 앉아 있었다.
삼십 촉 전등이 방 안을 침침하게 밝혀 주고 있었다.
방 안에는 담배연기가 자욱했다.
모두가 담배를 열심히 피워대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담배연기 같은 것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정말 지긋지긋한 날씨야. 기상 예보도 다 엉터리야!"
뺨에 칼자국이 난 사내가 다시 말했다.
고수머리의 중년이 소주를 입 속에 털어 넣고 나서 칼자국을 힐끗 쳐다보았다.
"목숨을 걸고 하면 세상에 못 할 일이 없지요."
"아니, 이런 날에도 갈 수 있어요?"
"갈 수야 있지요."
그는 빈 잔을 칼자국 앞에 내려놓고 술을 따랐다.
"누굴 죽이려구요? 살자고 하는 짓인데 물귀신 되라는 겁니까?"
"겁이 너무 많아요. 위험을 무릅쓰지 않으면 큰돈이 어디 굴러 들어오기나 하나요."
"다른 일이면 몰라도 난 바다 사나운 건 딱 질색이에요."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말없이 앉아 있는 안경 낀 사내한테 슬쩍 시선을 주었다.
안경 낀 사내는 젓가락으로 안주를 하나 집어 들다 말고,
"이젠 기다리는 데도 지쳤어."
하고 말했다.
퍼머 머리의 청년 두 명은 그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듣지를 못했기 때문에 불안한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일본 청년들이었다.
그들 가운데 한 명이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안경에게 무슨 말이냐고 일본말로 물었다.
안경이 웃으며 설명해 주자 그제서야 표정을누그러뜨리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오야붕한테서 왜 전화가 안 오지?"
칼자국이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벌써 한 시군. 그만 마시고 잠이나 잡시다."
고수머리도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그는 뒤로 물러앉더니 옆방과 통하게 되어 있는 미닫이문을 홱 열어젖혔다.
놀랍게도 좁은 방 안에는 사람들이 발 들여 놓을 틈도 없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더구나 그들은 어린 여자들이었다.
모두 열여섯 명이나 되는 그들은 아무렇게나 쓰러져 잠들어 있었고, 그 중 몇 명은 벽에 기대어 앉아 무릎 위에 얼굴을 파묻고 있기도 했다.
한 소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다가 남자들을 보고 고혹적인 미소를 던지기까지 했다.
"넌 왜 안 자고 있어?"
고수머리가 눈을 부라리자 그녀는 생글거리며 웃었다.
그녀는 팬티 차림에 파란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었기 때문에 하체의 곡선이 도발적으로 뚜렷이 드러나 있었다.
허벅지로부터 엉덩이로 퍼져 내린 피부는 뽀얀 우윳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너무도 피부가 고와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저 애 한번 안아 봤으면 좋겠다."
고수머리가 침을 삼키며 말했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 그는 일본 청년들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여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장미 한번 안아 보면 난 회춘하겠어. 어떻게 안 될까?"
칼자국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또 그러시네. 저 애만은 안 된다고 했잖습니까. 저 애는 특별한 애라 우리도 마음대로 손 못 댑니다. 일본 애들이 잠도 안 자고 이렇게 지키고 있지 않습니까. 보스한테 진상할 거라 손을 대면 안 됩니다. 잘못 건드렸다간 칼부림납니다. 이 애들은 이래봬도 일류 주먹들입니다. 그리고 이미 계약이 끝났기 때문에 함부로 손댈 수도 없습니다. 계집애들은 사실상 우리 손에서 떠난 거나 다름없습니다."
그 말에 고수머리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 일본인들을 힐끗 쳐다보았다.
한국인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대강 눈치를 챈 것 같은 일본인들은 금방 긴장한 표정을 지으면서 자세를 바로했다.
"제기랄, 회춘 한번 해볼까 했더니 다 글렀군. 배 타면 선장 맘대로라구! 바다에 나가 만일 내가 저거 안 주면 안 가겠다고 하면 어쩔 거야? 선장 기분 상하게 하면 어떻게 된다는 거 잘 알면서 그래."
고수머리는 화가 나는지 소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칼자국은 그의 눈치를 보면서 부드러운 어조로 달래듯이 말했다.
"잘 압니다. 배를 타면 선장이 최고라는 거 잘 압니다. 하지만 어떡합니까, 이해를 해주셔야죠. 그러지 말고 다른 애를 하나 품으십시오. 다른 애라면 얼마든지 가능하니까요."
칼자국이 안경을 쳐다보자 그는 일본 청년들에게 일본말로 뭐라고 말했다.
일본 청년들은 이마에 주름을 잡으면서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 마지못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장미만 빼놓고 다른 애를 골라 보랍니다. 하지만 임신시켜서는 안 된답니다. 임신시키면 책임 추궁을 당하게 되고, 몸이 빨리 상하기 때문에 상품 가치가 그만큼 떨어지게 되고……."
그가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고수머리는 손을 내저었다.
"알았어요, 알았어! 제기랄, 하는 방법까지 가르쳐 주지 그래?"
그는 거슴츠레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머리가 천장에 닿을 정도로 몸집이 큰 거한이었다.
나머지 사내들은 그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고수머리 사내는 옆방으로 들어서더니 잠들어 있는 여자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찬찬히 들여다보다가 갑자기 장미의 팔을 덥석 움켜잡고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매가 병아리를 낚아채듯 그녀를 품에 안아 들고는 그녀의 입을 자신의 입으로 덮쳤다.
"무슨 짓이야!"
일본인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고수머리 사내는 그대로 장미를 안은 채 장난기 어린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뭐 내가 잘못한 거 있나? 내 기분을 상하게 하면 현해탄을 건너갈 수 없다는 거 잘 알고 있을 텐데. 왜놈들이 뭔데 까불어? 한국 놈이 한국 아가씨하고 사랑을 나누겠다는데 왜놈이 왜 나서서 지랄이야? 왜놈이 한국 아가씨 차지할 권한이라도 있어? 왜 째려 봐? 너희들이 한국 아가씨 소유권이라도 가지고 있느냔 말이야?"
고수머리 사내는 서툴긴 하지만 일본말로 닥치는 대로 내뱉았다.
"거기서 손을 떼라!"
일본인 한 명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나한테 명령하는 거냐? 왜놈의 새끼가 감히 어디다가 명령하는 거야?"
"손을 떼라!"
이번에는 다른 일본인이 소리쳤다.
그러나 고수머리는 코웃음치면서 장미를 더욱 힘주어 끌어안았다.
"닥쳐, 이 쪽발이들아!"
일본인들은 약속이나 한 듯 칼을 빼들었다.
칼을 쥔 그들은 조금 전까지의 얌전하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그들은 표독스럽고 잔인한 표정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것이 그들 본래의 표정이라는 듯이.
"한번 해보겠다 이건가? 가소롭군."
고수머리는 장미의 허리를 감았던 팔을 천천히 풀면서 뒤로 물러섰다.
호탕하던 그는 어느새 맹수처럼 몸을 도사리고 있었다.
"나를 찌르겠다 이건가? 이 쪽발이 새끼들아, 어디 한번 찔러 봐라."
그는 부엌으로 뛰어내려가더니 식칼을 들고 들어왔다.
문턱을 사이에 두고 그들은 대치했다.
질식할 것 같은 침묵과 긴장의 시간이 한동안 흘렀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먼저 달려들지 않고 있었다.
침묵과 긴장이 깨진 것은 전화벨 소리 때문이었다.
칼자국이 재빨리 수화기를 집어 드는 것을 모두가 지켜보았다.
일본인들과 고수머리는 슬그머니 칼 든 손을 내리고 있었다.
"……이렇게 비바람이 치는데 말씀입니까?……네네 ……아무리 그렇지만 이렇게 험악한데 만일 도중에 사고라도 나는 날에는……네네……알겠습니다.……네, 그렇게 하겠습니다……아닙니다……모두 잘 있습니다……네, 장미도 잘 있습니다. ……아니, 그게 정말입니까? 그럼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알겠습니다.……네, 알겠습니다. ……몸조심하십시오. ……네, 장미는 잘 있습니다. ……곧 출발하도록 하겠습 니다……."
칼자국은 전화통에다 대고 머리를 조아리다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를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다가 고수머리 사내한테 시선을 고정시켰다.
"선장님, 우리 왕초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지금 당장 출발하라고 합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누굴 물귀신 만들려고 그러는 거야? 바보 같은 소리하지 말라고 해! 왕초보고 이리 오라구 해!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한번 봐야겠어."
고수머리는 어림없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안경의 눈이 번득였다.
"아까 한 말하고 다르지 않소? 아까는 이런 날에도 갈 수 있다고 했잖소!"
"아까는 괜히 해본 소리였어."
선장은 칼을 내던지고 털썩 주저앉더니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안경이 그 곁으로 가까이 다가붙더니 그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누굴 놀리는 거요? 갑시다!"
"못 간다니까!"
"이 새끼가!"
등 뒤에서 칼자국이 무릎으로 고수머리의 등을 찍었다.
앞에 서 있던 안경도 무릎으로 그의 얼굴을 내찔렀다.
"어이쿠!"
선장은 보기와는 달리 힘없이 무너졌다.
안경은 칼끝으로 고수머리의 턱을 받쳐 올렸다.
칼끝이 닿은 고수머리의 턱 밑으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고수머리는 턱을 잔뜩 치켜 든 채 몸을 일으켰다.
무릎에 얻어맞은 코는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나를 이렇게 때렸겠다. 어디 두고 보자."
그는 손등으로 코 밑을 쓱 문질렀다.
"잔말 말고 빨리 출발해!"
"죽일 테면 죽여 봐, 난 갈 수 없어. 그 돈 가지고는 목숨을 내놓을 수 없어. 내 목숨이 너무 아깝단 말이야! 하긴 죽으면 돈을 가지고 가는 것도 아니지만……처자식은 먹고 살게 해 놓고 죽어야 할 거 아니야!"
"얼마를 더 내놓으라는 거야?"
"두 장은 더 줘야지."
안경과 칼자국이 구석 쪽으로 가서 귀엣말을 주고받았다.
"해바라기 농장이 경찰의 습격을 받았대. 왕초는 지금 도망중인가 봐. 왕초는 더 이상 기다리지 말고 지금 당장 출발하라는 거야. 왕초도 일본에 갈 모양이야. 도쿄에서 만나자고 했어. 저 새끼가 움직여 주지 않으면 안 되니까 우선 달라는 대로 주는 게 어때?"
안경은 심각한 얼굴로 듣고 나더니 일본인들에게 가서 작은 소리로 사정을 이야기했다.
일본인들은 자기들끼리 쑤군대더니 그 중 한 명이 일본 돈을 꺼냈다.
안경이 그 돈을 받아 고수머리한테 내밀었다.
"오십만 엔이오. 이거면 이백만 원이 충분히 되고도 남을 거요."
고수머리는 그것을 받아 침을 발라 가며 헤아리고 나더니 만족한 듯 끄덕였다.
"자, 그럼 준비들 하고 나와요. 준비할 게 두 개 있어요. 하나는 멀미 준비하는 것, 또 하나는 죽을 준비하는 것. 멀미하다 죽든 바다에 빠져 죽든 난 상관하지 않을 테니까 날 원망하지는 말아요."
그렇게 말한 다음 그는 밖으로 나갔다.
방 안에 남은 사람들은 선장이 내뱉고 간 말을 음미하기라도 하는 듯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다가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미 시작된 것을 거꾸로 돌릴 수는 없어. 자, 출발합시다!"
누구 하나 밝은 표정을 짓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어느 정도는 겁을 집어먹은 것 같은 그런 얼굴들이었다.
"모두들 일어나! 빨리 일어나란 말이야!"
칼자국이 잠들어 있는 아가씨들을 발로 걷어차기 시작했다.
"일어나! 일어나 옷들 입어! 출발이다!"
잠에서 깨어난 소녀들은 밖으로 끌려 나가다가 두려운지 몸을 도사리며 울기 시작했다.
"약 기운이 떨어지기 시작했어."
안경이 투덜거리며 가방 속에서 주사기를 꺼냈다.
칼자국은 주사를 맞지 않으려고 버티는 장미를 방바닥에 엎어 놓고 그 위에 타고 앉아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
안경은 병 속에서 투명한 액체를 뽑아 내더니 장미의 팔에다 무자비하게 주사 바늘을 꽂았다.
"아아……."
장미는 고통스럽게 신음하면서 저항을 포기했다.
일단 주사를 맞고 나자 그녀는 자기 의지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시키는 대로 흐물흐물 움직였다.
그런 그녀는 마치 인형 같기도 하고 로봇 같기도 했다.
나머지 열다섯 명의 소녀들한테도 환각제가 주입되었다.
그것은 고통이나 불안, 수치심 같은 것을 씻어 주고 환각 상태에 빠져 들게 하는 약이었다.
밖으로 나서기가 무섭게 비바람이 얼굴을 후려쳤다.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운 밤이었다.
그러나 불을 켜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바다에 나가기 전까지는 조그만 소리도 내서는 안 되었다.
그런데도 환각 상태의 소녀들은 킬킬거리기도 하고 괴상한 소리를 지르기도 하면서 끌려갔다.
그럴 때마다 남자들은 사정없이 그녀들을 후려쳤지만 그녀들은 그럴수록 더욱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배가 정박해 있는 곳까지는 이백 미터 거리밖에 되지 않았지만 거기까지 가는 동안 마치 물 속을 헤엄쳐 가기라도 하는 듯 모두 비에 흠뻑 젖었다.
배는 방파제 안쪽에 정박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심하게 흔들리지는 않았다.
그것은 도무지 파도를 헤쳐 나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조그만 배였다.
그리고 그런 배에 스무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탈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아니, 저런 배로 간단 말입니까?"
일본인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겁에 질려 항의했지만 선장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왜, 이 배가 어때서? 이 배가 지금까지 몇 번이나 왔다갔다한 줄 알아? 스무 번도 더 넘게 갔다왔다구! 자신없으면 안 타면 될 거 아니야!"
선장이 그렇게 나오는 데야 일본인들이라도 하는 수가 없었다.
선장은 배 위로 올라온 사람들을 한 사람씩 갑판 아래로 내려 보냈다.
본래가 근해에서 고기나 잡던 조그만 통통배라 선실 같은 것이 따로 있을 리 없었다.
일단 배에 올라온 사람들은 선장의 명령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 고기나 그 밖의 잡동사니들을 넣어 두는 배 밑창에 기어들어가 짐짝처럼 이리저리 겹쳐서 앉거나 누워야 했다.
"도착할 때까지 밖으로 나올 생각하지 마. 그 안에 통이 있으니까 똥오줌도 거기서 해결해."
선장은 밑에다 대고 소리친 후 뚜껑을 쾅 하고 닫은 다음 안에서 열지 못하게 밖에서 빗장을 질렀다.
만일 배가 뒤집히거나 하면 모두 몰살될 판이었지만 누구 하나 항의하는 사람이 없었다.
사실 밖으로 나온다고 해서 있을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선장실이래야 한두 사람 정도 겨우 들어설 자리가 있을 뿐이고, 갑판 위는 파도에 휩쓸릴 위험이 있기 때문에 사람이 나와 있을 곳이 못되었다.
죽으나 사나 배 밑창에 웅크리고 있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선장실에는 일본인 청년 한 명만이 들어오도록 허락되었다.
그는 죽으면 죽었지 배 밑창에는 있을 수 없다고 하여 선장실에 남게 된 것이다.
여자 열여섯 명에 남자 다섯, 모두 스물한 명을 태운 통통배는 서서히 방파제 끝으로 미끄러져 갔다.
거기서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서치라이트 불빛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멀리서부터 서치라이트 불빛이 다가오더니 그들이 탄 배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저것이 돌아오려면 오 분 걸린다. 그 사이에 여기를 빠져 나가 저쪽으로 돌아가야 해. 이렇게 비바람치는 날에는 보이지도 않을 거야. 어느 미친 놈이 이런 때 배를 띄우겠어?"
선장은 배를 출발시키면서 일본인이 알아듣거나 말거나 한국말로 지껄여댔다.
배가 방파제를 채 빠져 나가기도 전에 눈앞에 시커멓고 거대한 것이 몰려왔다.
배는 낙엽처럼 갑자기 위로 솟구쳤다가 아래로 곤두박질치듯 미끄러져 내려갔다.
서너 번 그러고 나니 배는 어느새 바다 가운데 나와 있었다.
갑판 밑에서는 비명과 신음소리, 갑판을 두드려대는 소리가 계속 들려 오고 있었지만 선장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파도를 피해야 하기 때문에 그런 데 일일이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일본인 청년은 숫제 주저앉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배가 파도에 한 번씩 부딪칠 때마다 그는 바닥에 뒹굴었다.
그러나 선장은 재미있다는 듯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는 그 정도의 파도쯤이야 겁날 것 없다는 그런 태도였다.
7.
도착 동편 하늘로부터 먼동이 뿌옇게 터오고 있었다.
밤새 휘몰아치던 비바람은 어느새 가는 비로 변해 있었다.
해바라기 농장 건물 앞마당에는 남자들이 꿇어앉아 있었다.
모두 열다섯 명이나 되는 젊은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오 사장이란 자가 두목으로 있는 조직 X의 회원들이었다.
그들은 꿇어앉은 자세에서 밤새 고스란히 비를 맞고 있었다.
그들의 주위에는 경찰이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다.
삼엄하다 못해 살벌하기까지 한 분위기였다.
여봉우는 그때까지 장미의 행방을 캐고 있었지만 그들은 갑자기 벙어리라도 된 듯 하나같이 입들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면 좋다! 입을 열 때까지 너희들은 땅에 꿇어앉아 있어!"
화가 난 여봉우는 이렇게 소리쳤고, 그래서 그들은 날이 샐 때까지 꿇어앉아 있었던 것이다.
아직 장미도 찾지 못했고, 오 사장이란 자는 사람을 죽이고 도망쳐 버렸지만 경찰로서는 전혀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범죄 조직의 실체에 보다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다는 것이 소득이라면 소득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조직에 관한 파일을 발견함으로써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 파일에는 조직의 강령이랄까 하는 것들이 적혀 있었는데, 그 제1조는 '본회는 그 이름을 X라고 칭한다'라고 되어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X의 의미에 대한 설명이 덧붙여 있었다.
'X는 아무도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이자 무한대로 뻗어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의 미지수이다.
회원 외에는 아무도 우리의 실체를 알아서는 안 되고, 우리는 무한히 뻗어 나가 모든 것들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대체로 이런 내용의 치졸한 설명이었다.
강령 가운데에는 회원들이 지키지 않으면 안 될 규칙 같은 것들도 있었고, 만일 그것을 어겼을 경우에 대비한 벌칙도 적혀 있었는데, 그 내용은 하나같이 살벌하고 무시무시한 것들이었다.
이를테면 이런 내용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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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령을 어기는 자는 그 경중에 따라 왼손 엄지손가락으로부터 왼손목 및 목을 차례 순으로 자른다(목을 잘라야 할 경우 본인에게 자결할 기회를 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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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회를 이탈하는 자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두 다리를 자름으로써 이탈을 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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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자는 무조건 돌로 쳐서 그 목숨을 끊는다(그에게는 자결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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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회의 비밀을 누설하는 자는 혀를 자른다.
규칙을 위반하는 자에 대한 징벌이 이 정도로 가혹하니 회원들이 죽어라 하고 입을 열지 않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여우 역시 온몸이 비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차가운 빗물도 분노로 달아오른 그의 몸을 식히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는 꿇어앉아 있는 자들을 향해 X의 강령이 적혀 있는 파일을 흔들어 보였다.
"이것 때문에 그렇게들 무서워하고 있나? 이런 건 이제 무용지물이 됐어! 너희들의 보스는 도망쳤고, X는 붕괴됐어! X가 재기할가망은 조금도 없어! 너희들의 보스가 체포되는 건 시간 문제야! 그놈은 임신한 여자를 살해했기 때문에 체포되면 사형이야!"
말을 마치고 나서 여우는 그들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들은 고개를 숙인 채 죽은 듯이 앉아 있었다.
도대체 그들의 귀에는 그의 말이 먹혀 들어가지를 않고 있었다.
그들은 전혀 피가 통하지 않는, 마치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로봇 같았다.
아니면 주인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잘 훈련된 개 같기도 했다.
그때 앰뷸런스 한 대가 비탈길을 힘겹게 올라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앰뷸런스는 정문을 통과해 계속 올라오다가 그들 앞에 이르러 멈춰 섰다.
차의 뒷문이 열리더니 경찰관 두 명이 안에서 들것을 끌어냈다.
들것은 흰 천에 덮여 있었다.
여우는 손짓으로 그것을 자기 앞에 내려놓으라고 지시했다.
X의 회원들은 숨을 죽인 채 흰 천에 덮인 들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우는 침통한 표정으로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손을 뻗어 시트를 천천히 걷어 냈다.
피가 엉겨붙은 젊은 여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여자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는 납빛이었다.
그것은 이미 생명을 잃은 얼굴이었다.
거기에는 고통도, 기쁨도, 그 밖의 어떤 감정도 나타나 있지 않았다.
다만 인간의 접근을 거부하는 차가운 무표정만이 나타나 있을 뿐이었다.
시체는 하늘을 보고 반듯이 누워 있었는데, 스커트에 가려진 배가 위로 불룩 솟은 것이 아마도 해산 때가 가까웠던 것 같았다.
여우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나서 범인 일당을 쳐다보았다.
"이 여자는 너희들 두목의 손에 살해된 사람이야. 아무 죄도,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었는데, 우연히 지나치다가 이렇게 참혹하게 살해된 거다. 이 여자의 남편도 습격을 받아 중상을 입고 병원에 실려 갔다."
사내들은 숨을 죽인 채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조금 전과는 달리 하나같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이 여자는 다음 달에 아기를 낳을 예정이었어. 그런데 이렇게 살해된 거야. 이 뱃속의 아기는 어떻게 되는 거지?"
그의 목소리는 사뭇 떨리고 있었다.
사내들은 그의 시선을 슬슬 피했다.
"너희들의 두목은 두 사람을 살해한 거야! 다음 달이면 세상에 태어날 아기까지 죽인 거야! 그놈은 악마야! 솔직히 말해 내 손으로 직접 그놈을 죽이고 싶다!"
그는 주먹을 부르쥐고 떨다가 갑자기 권총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허공을 향해 총알이 다할 때까지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탕! 탕! 탕! 탕! 총소리는 골짜기를 뒤흔들며 멀리까지 퍼져 나갔다.
꿩 몇 마리가 놀라서 울부짖으며 높이 날아올랐다가 건너편 숲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이 여자한테는 두 살짜리 아기가 있다. 그 아기는 누가 키우지? 너희들이 인간으로서 조금이나마 양심을 가지고 있다면 그 악마 같은 살인자를 위해 더 이상 입을 다물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임신부의 시체는 다시 앰뷸런스에 실려 비탈길 아래로 사라져 갔다.
여봉우는 마지막으로 한 명씩 불러 심문해 보기로 했다.
그들 중 어느 한 명이 최소한의 양심이라도 있어 입을 열어 주기를 기대하면서.
그는 집 안으로 들어가 한 명씩 불러들였다.
"장미는 어디 있나?"
그는 간단히 물었고, 상대가 모른다고 하면 더 이상 묻지 않고 내보냈다.
여섯 명이 들어왔다가 모르겠다는 대답을 남기고 나간 뒤 일곱 번째 사내가 들어왔는데, 그는 앞서 나간 여섯 명과는 뭔가 달라 보였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눈물을 글썽이며 여우를 쳐다보았다.
"용서해 주십시오. 죽을 죄를 졌습니다. 죄값은 받겠습니다."
여우는 차가운 얼굴로 끄덕였다.
"장미는 어디 있지?"
"다른 아가씨들과 함께 일본으로 팔려 갔습니다."
"어떻게?"
여우는 눈을 크게 뜨면서 앞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얼마 후 제주도에서 일본으로 빠지는 항로에 비상이 걸렸다.
그러나 들어오는 보고는 비관적인 것들뿐이었다.
"여자들을 태운 밀항선은 적발되지 않았다."
이것은 해양 경찰대에서 맨 처음 보내 온 보고였다.
육지의 바람은 어느 정도 자고 있었지만 바다에는 그때까지도 강풍이 불고 있어서 파도가 높았다.
그래서 해양 경찰대에서는 경비정을 바다 멀리까지 띄우기는 어렵다고 통보해 왔다.
"이런 날씨에 바다를 지킨다는 것을 불가능하다. 그러나 엄밀히 말한다면 지킬 필요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악천후에 항해하는 바보 같은 배는 없기 때문이다. 이런 날씨에는 육지에서 해안선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본다."
대강 이런 보고였다.
여봉우는 다음과 같이 물었다.
"만일 지난 밤에 그 밀항선이 출발했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이미 침몰했을 것이다."
"침몰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럴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다. 그 가능성에 대비해서 이미 일본 경찰에 통보해 두었다. 이런 풍랑이라면 그 배는 아직 일본에 도착하지 못했을 것이다."
장미는 이미 바다 속에 빠져 고기밥이 되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자 여우는 맥이 탁 풀렸다.
고수머리의 선장은 기진맥진한 채 키에 매달려 있었다.
그의 몸뚱이는 끈으로 키에 붙들어 매어져 있었다.
키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곁에 있던 일본인 청년은 벌써 오래 전부터 걸레처럼 구겨진 채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처음에는 괴로운 신음이라도 토하더니 지금은 기절해 버렸는지 아예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있었다.
배가 파도에 한 번씩 세차게 부딪칠 때마다 그의 몸뚱이는 공처럼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선장은 그의 존재를 완전히 묵살하고 있었다.
자신의 몸을 가누기도 힘들었을 뿐 아니라 가물가물해지는 의식을 놓치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다 보니 그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배가 침몰하느냐 마느냐 하는 순간순간이 그의 가물거리는 의식의 끝에서 춤을 추고 있었고, 그는 그 사이사이에서 침몰하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있었다.
그것은 순간적인 판단을 요하는 일이었다.
경험이 미숙하거나 정신력이 부족한 사람이 키를 잡았다면 배는 이미 여러 시간 전에 침몰했을 것이다.
고수머리는 경험이 풍부하고 기술면에서 뛰어난 사람이었다.
거기에다 승부 근성과 집념이 강하고 힘이 또한 장사였다.
그런 장점들을 옳은 방향에다 썼다면 지금쯤은 안정된 생활을 누리고 있을 그런 사람이었다.
산더미 같은 파도 위에서 가랑잎처럼 떠 있는 배를 제 방향으로 몰고 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는 배를 몰고 가는 것은 고사하고 키만이라도 놓치지 않고 붙잡고 있는 것만도 아주 대단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키를 놓치면 배는 파도에 휩쓸려 그대로 뒤집어지고 만다.
삶과 죽음의 순간이 수없이 반복되다 보니 그는 거기에 대한 감각이 무디어져 있었다.
고수머리는 기계적으로 키를 움켜쥐고 있었다.
갑판 아래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있었다.
두어 시간 전까지만 해도 신음소리며 아우성, 비명, 갑판을 두드리는 소리 등이 끊임없이 들려 왔었는데 지금은 약속이나 한 듯 조용하기만 했다.
선장은 갑판 아래에 갇힌 그들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해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사실 신경을 쓸 여유도 없었던 것이다.
배 밑창에 갇힌 여자들과 남자들은 모두가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그렇다고 죽은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시체나 다름없이 쓰러져 있었다.
침침하게나마 실내를 밝혀 주던 불빛까지 사라져 실내는 그야말로 캄캄한 암흑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아래위로 쏟아 낸 토사물로 하여 악취가 진동하고 있었다.
악취가 워낙 오래 가득 차 있다 보니 나중에는 냄새에 대한 감각조차 마비되어 버렸다.
사람들은 남자 여자 구별 없이 서로 이리 얽히고 저리 얽혀 뒹굴고 있었다.
배가 파도 위로 솟구치거나 아래로 곤두박질 칠 때마다 그들은 짐짝처럼 여기저기에 사정없이 부딪치면서 나뒹굴었다.
토하고, 배설하고, 부딪치고, 뒹굴고…….
멀미와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는 동안 그들의 몸과 마음은 지칠 대로 지쳐 마침내 죽음과 같은 마비 상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 상태에서는 더 이상 고통이나 공포 같은 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장미 역시 의식을 잃고 악취와 어둠 속에 누워 있었다.
약 기운이 떨어졌을 때는 고통과 공포로 울부짖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도 느끼지 못한 채 사람들한테 걸레처럼 깔리고 짓뭉개지고 있었다.
날은 완전히 밝아 있었다.
선장은 이런 날씨에는 일본측 경비정도 감히 나다닐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전히 파도는 높았고 시야마저 흐렸다.
갑판 위는 물론 선장실 안으로까지 파도가 부딪쳐 오곤 했다.
배는 물 속에 완전히 잠겼다가도 불사조처럼 다시 위로 솟구쳐 오르곤 했다.
앞으로 가고 있는 것인지 표류하고 있는 것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웠다.
엔진이 꺼지지 않고 살아 있는 것만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날씨가 좋으면 벌써 목적지에 도착했을 것이지만 악천후이다 보니 배는 파도에 막혀 거의 제 속력도 못 내고 있었다.
바람이 조금씩 자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파도가 낮아지기 시작했을 때 저 멀리 안개비 사이로 검은 것이 흐릿하게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하는 것이 보였다.
선장은 비로소 제정신이 들었다.
키를 흔들리지 않게 움켜잡고 앞을 노려보았다.
검은 것이 점점 그 모습을 뚜렷이 드러내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것은 섬이었다.
섬의 모습이 그 윤곽을 확실히 드러냈을 때 선장은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배는 그 험한 파도를 헤치고 제 방향대로 와주었고, 마침내 목적지를 눈앞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선장은 떨리는 입 속으로 소주를 병째로 나발 불면서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다 왔다, 다 왔어! 흐흐흐…… 다 왔단 말이야!"
그는 머리에서부터 바닷물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이게 마지막이야! 다시는 여기에 오지 않을 거다! 난 농사를 지을 거야! 바다는 꼴도 보기 싫어!"
섬에 이르는 데는 거의 두 시간 가까이나 걸렸다.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이는데도 파도 때문에 그렇게 시간이 오래 걸렸던 것이다.
이제 배가 침몰할 위기는 사라졌다고 선장은 생각했다.
그는 섬을 향해 곧장 배를 몰아가다가 왼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 섬은 나가사키에서 가까운 조그만 무인도였다.
그곳이 밀항자들을 위한 은신처로 이용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섬에는 발 들여 놓을 틈도 없이 나무들이 빽빽히 자라고 있었고, 온갖 새들이 서식하고 있었다.
밀항 운반책들은 밀항자들을 일단 그 섬에다 풀어 놓는다.
대개 날이 새기 전에 도착하여 하루를 그곳에서 숨어 지내다가 밤이 되면 일본 쪽에서 보내 온 배에 바꾸어 태워 본토 쪽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섬의 왼쪽 편은 항로의 반대쪽이기 때문에 지나 다니는 배들이 볼 수 없는 시야의 사각지대였다.
그쪽으로 돌아가자 동굴 같은 것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조그만 배가 한 척 정도 드나들 수 있는 넓이에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고 있는 굴이었다.
그리고 천장 부분이 막히지 않고 뚫려 있어 그곳으로 빛이 흘러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굴 속은 어둡지가 않았다.
선장은 굴 속으로 배를 몰아넣었다.
일단 그 안으로 들어가자 그곳은 파도 하나 없이 잔잔했다.
굴은 상당히 길었다.
백 미터 정도 안으로 들어가다가 그는 오른쪽으로 배의 방향을 돌렸다.
오른쪽에도 굴이 하나 뚫려 있었다.
그러나 그 굴은 깊이가 십여 미터밖에 되지 않았다.
그 끝에 이르러 선장은 마침내 배의 엔진을 껐다.
그리고 몸을 묶었던 줄을 풀었다.
그는 쓰러져 있는 일본인을 냅다 걷어찬 다음 비틀거리며 갑판으로 나갔다.
빗장을 벗겨 내고 뚜껑을 열었다.
열기와 함께 악취가 확 뿜어져 나왔다.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뒤로 물러섰다가 다시 앞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허리를 굽히고 소리쳤다.
"이놈들아, 다 왔다! 모두 나와!"
그러나 선뜻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선장은 몇 번 더 고함을 지르다가 그래도 나오는 사람이 없자 바닷물을 퍼다가 그 안에다 들이부었다.
그제서야 안에서 사람들이 꿈틀거리며 신음을 토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맨 처음 일본인이 올라왔다.
제 힘으로 올라오지 못했기 때문에 선장이 끌어올려 주어야만 했다.
밖으로 나온 그는 일어서려다가 갑판 위로 도로 쓰러져 버렸다.
두 번째로 칼자국이 올라왔다.
그는 제 힘으로 가까스로 올라왔다.
그리고 비틀거리며 일어서더니 선장을 노려보았다.
그의 얼굴은 온통 오물로 뒤범벅되어 있었다.
그것을 보자 선장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가 입을 크게 벌리고 으하하하 하고 웃자 칼자국은 머리로 그의 얼굴을 받으려다가 쓰러지고 말았다.
안경을 낀 사내는 선장이 내미는 손을 뿌리치고 갑판 위로 기어올라 오더니 벌렁 드러누워 사시나무 떨듯 떨어대기 시작했다.
여자들은 한참이 지나서야 나왔다.
그녀들은 남자들보다 더 참담한 모습이었다.
그녀들도 나오는 대로 갑판 위에 드러누워 버렸다.
장미는 맨 마지막에야 나왔다.
그것도 제 발로 걸어 나온 게 아니고 선장이 안으로 들어가 데리고 나왔던 것이다.
그녀는 아무리 불러도 꼼짝 않고 누워 있었고, 혹시 죽었나 싶어 선장이 안으로 들어가 밖으로 안아 올렸던 것이다.
그녀는 기절해 있었다.
초죽음이 된 그녀는 아무리 흔들어도 깨어나지 않았다.
밖으로 데리고 나와 맑은 공기를 쐬자 숨을 몇 번 깊이 들이켜고 나서는 가늘게 신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모두가 갑판에 드러누워 신음하는 것을 보고 선장은 바닷물을 길어 그들의 얼굴과 몸 위로 쏟아 부었다.
얼굴과 몸에 붙어 있던 온갖 더러운 오물들이 씻겨 갑판을 통해 바다로 흘러내렸다.
바닷물을 뒤집어쓴 사람들은 비로소 한두 명씩 일어나 앉았으나 아직도 제정신이 돌아오지 않는지 선장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꼴들 좋다!"
선장이 조소를 보내자 칼자국이 발끈해서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다가 도로 주저앉는다.
"사람을 그렇게 가둬 두면 어떻게 하는 거야! 만일 배가 침몰했다면 우리는 모두 꼼짝없이 죽었을 거 아니야! 그렇게 문을 두드려도 열어 주지 않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넌 우리가 죽기를 바랐지!"
"바보 같은 소리하지 마! 갑판 문을 열어 주었다면 너희들은 모두 죽었어. 파도가 갑판에 들이치는데 어떻게 밖에 나와 있겠다는 거야! 그 속에 있었기에 망정이지 밖에 나와 있었다면 너희들은 이미 고기밥이 되고 말았을 거야. 무사히 데려다 줘서 고맙다는 말은 안 하고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여기까지 죽지 않고 무사히 온 것은 기적이야! 그것은 하느님 덕분도 아니고, 배가 크고 좋아서 그런 것도 아니고 순전히 내 덕이었다는 걸 알란 말이야! 내가 아니었다면 너희들은 여기까지 올 수 없었어! 내 실력이 누구보다도 뛰어났기 때문에 침몰되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야! 도대체 그런 파도 속에 배를 몰고 나오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거야. 다른 사람이 키를 잡았다면 출발하기도 전에 침몰되었을 거야. 너희들은 죽을 때까지 나를 생명의 은인으로 생각해야 해. 내 평생 그렇게 무시무시한 파도를 헤쳐 보기는 처음이야!"
그는 호주머니에서 물에 젖지 않게 비닐에 싸둔 담배를 꺼내 남자들에게 한 대씩 권했다.
남자들의 얼굴에서 공포와 분노의 빛이 스러지고 생기가 피어 오르기 시작했다.
반면 여자들 쪽에서는 흐느끼는 소리가 흘러 나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정신이 들기 시작한 그녀들은 비로소 자신들의 운명에 대해 새로운 공포를 느끼고 무서운 나머지 울기 시작한 것이다.
8.
어둠 속의 여로 모두가 갑판 위로 올라와 맑은 아침 공기 속에서 차츰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 지 한 시간쯤 지났을 때 갑자기 장미가 비명을 질렀다.
"죽었어요! 수자가 죽었어요!"
그녀는 옆에 꼼짝 않고 누워 있는 소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바들바들 떨었다.
"저것이 미쳤나."
선장이 장미에게 다가가 그녀의 뺨을 철썩 하고 갈겼다.
그래도 그녀가 계속 곁에 누워 있는 소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그는 수자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야, 일어나!"
그러나 수자라는 이름의 소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까 갑판에서 끌어올려졌을 때는 분명히 움직였고 신음소리도 냈는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선장은 허리를 굽혀 그녀의 뺨을 철썩철썩 갈겼다.
"야, 일어나! 일어나란 말이야!"
칼자국이 달려들어 선장을 밀어내고 수자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쥐었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흔들어대다가 맥을 짚어 보고 눈을 까뒤집어 보았다.
그러고 나서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몸을 일으켰다.
"죽었어."
"뭐? 죽었다구?"
선장이 반문하며 그녀의 맥을 짚었다.
"원, 이럴 수가……."
선장은 맥 풀린 모습으로 중얼거리다가 혀를 끌끌 찼다.
안경은 고개를 돌리고 안경을 벗어 닦았고, 여자들은 다시 울기 시작했다.
그들의 머리 위로 파란 하늘 조각이 보였다.
그렇게 험하던 날씨가 어느새 맑게 개어 있었다.
일본인들도 수자가 죽은 것을 확인하고는 자기들끼리 작은 소리로 쑤군거렸다.
조금 후에 그들 중의 한 명이 나서서 말했다.
"우리는 아직 여자들을 정식으로 인계받지 않았다. 여자가 죽은 것은 어디까지나 당신들 책임이다. 우리는 죽은 여자에 대해서는 돈을 지불할 수 없다."
칼자국과 안경은 일본인을 흘겨 보기만 할 뿐 아무 말이 없었다.
"어떻게 할 거야?"
선장이 답답하다는 듯 물었다.
아무도 대꾸하지 않자 그는 울고 있는 여자들 쪽을 향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조용히 하지 못해! 죽지 않은 것만도 다행으로 알란 말이야!"
여자들은 숨을 죽였다.
그렇다고 울음을 그친 것은 아니었다.
그녀들은 소리를 죽여 가며 흐느꼈다.
"어떻게 할 거야? 죽은 거 놓고 구경만 하고 있을 게 아니라 빨리 결정을 내려야 할 게 아니야. 도로 가져 갈 수도 없는 거고, 공짜로 가져 가라 해도 가져 갈 사람도 없으니 결국 고기한테나 줄 수밖에 없잖아. 난 시체를 가지고 갈 수는 없어. 그건 정말 재수 없는 일이야."
선장이 하고 싶은 말을 마구 쏟아 내자 안경이 결심한 듯 손을 들어 선장을 제지했다.
"바다에다 버립시다."
"수장시키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야. 땅에 묻으나 바다에 묻으나 결국 다 마찬가지야."
죽은 탓인지 죽은 소녀의 몸뚱이는 유난히도 작아 보였다.
"불쌍한 것, 뉘 집 딸인지는 몰라도 이제 이승에서 부모 만나기는 영 글렀구나, 쯔쯧……."
선장은 혀를 차면서 시체를 헌 마대 자루 속에 집어 넣었다.
시체의 발목에 돌멩이를 달아맬 때는 여자들이 소리내어 울었다.
그 중에 장미가 제일 서럽게 울었다.
선장은 더 이상 여자들이 우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실컷 울도록 내버려두었다.
"야, 느그들 절하고 싶으면 절해라. 바닷속에다 던져 넣을 테니까 그 전에 절하고 싶으면 절해라."
소녀들은 울음을 그치고 서로 얼굴만 쳐다보았다.
장미가 제일 먼저 몸을 일으켰다.
마대 자루 속에 들어 있는 시체는 너무 작아 보였고, 그래서 무슨 물건처럼 보였다.
장미는 눈물을 흘리면서 이마에 두 손을 대고 두 번 엎드려 절했다.
뒤이어 다른 소녀들도 차례로 절을 했다.
남자들은 잠자코 구경만 하고 있었다.
맨 마지막에 선장이 시체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절은 하지 않고 마치 산 자를 대하듯 입을 열어 말했다.
"자, 내 술이나 한 잔 받아라. 우리가 몸을 섞은 것도 다 전생에 인연이 있어서 그런 거다. 너무 일찍 죽었다고 서러워 말아라. 나고 죽는 것이 어디 사람 맘대로 된다냐. 더러운 세상사 안 보고 일찍 죽은 것이 차라리 좋을지도 모른다. 여기 있는 우리도 언젠가는 다 죽게 마련이다. 지옥에 갈지 천당에 갈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저승에서 만나거든 이 천가 놈 너무 괄시하지 말고 사랑해 다오. 잘 가그라, 불쌍한 것……."
그는 병에 조금 남아 있는 소주를 잔에 담아 시체 주위에다 뿌렸다.
그러고 나서 뒤에 멍청하게 서 있는 남자들을 돌아보았다.
"당신들은 그러고만 있을 거요? 하다못해 술이라도 한 잔씩 줘야 할 거 아니야!"
그래도 그들이 가만 있자 선장은 발끈해서,
"원, 무정한 사람들……."
하면서 저쪽으로 가 버렸다.
그는 선수 쪽에 가서 걸터앉더니 여자들을 향해 말했다.
"자, 느그들이 수장해라. 느그 친구니까 느그들이 바다에다 던져라. 혼자 하면 무섭고 힘드니까 여럿이서 힘을 합쳐 던져 넣어라."
그 말에 소녀들은 놀라는 표정으로 몸들을 웅크렸다.
그녀들은 움직이려 들지를 않았다.
"아, 뭣들 하는 거야? 거기다 두고 있으면 죽은 사람이 살아난다냐? 거기다 두고 있으면 시체 썩는 냄새만 날 테니까 얼른 던져 넣어! 미련 두지 말고 얼른 던져 넣으란 말이야!"
그러나 그녀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더욱 몸들을 웅크리기만 할뿐이었다.
"참말로 환장하겠네."
선장이 투덜거리자 칼자국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거침없이 시체를 들어올렸다.
그때 소녀들 가운데서 날카로운 소리가 터져 나왔다.
"손 대지 말아요!"
날카롭게 소리치면서 나온 사람은 장미였다.
그녀는 무서운 눈으로 칼자국을 노려보았다.
그 서슬에 칼자국은 시체를 슬그머니 내려놓고 뒤로 물러섰다.
장미가 그렇게 무서운 표정으로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기는 처음이었다.
남자들은 적이 놀란 표정으로 장미의 다음 행동을 주시했다.
장미는 시체에 손을 가져 갔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 혼자 들기에는 너무 무거웠다.
그것을 보고 다른 소녀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그녀들은 시체를 들어 앞뒤로 흔들다가 바다 위로 힘껏 던졌다.
첨벙하는 소리와 함께 물결이 일었다.
시체는 검푸른 바닷물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일렁이는 물결 위로 소녀들의 흐느낌이 번져나갔다.
이윽고 시체는 깊은 바다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소녀를 삼킨 바다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잠잠해졌다.
갑자기 배 위에는 한동안 적막감이 감돌았다.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고, 소녀들도 더 이상 울지 않았다.
갈매기 한 마리가 날아와 바위 위에 올라앉더니 그들을 쳐다보았 다.
그들도 이상한 듯이 일제히 갈매기를 바라보았다.
아무도 그 갈매기를 쫓으려고 하지 않았다.
"벌써 갈매기가 되어 날아온 거야."
하고 선장이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남자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소녀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갈매기를 바라보았다.
그녀들의 얼굴에는 차츰 감동 어린 표정이 나타났다.
그때 입구 쪽에서 배의 엔진소리가 들려 왔다.
모두가 놀란 눈으로 그쪽을 바라보았다.
눈부시게 하얀 것이 막 모퉁이를 돌아 그들이 있는 쪽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왔다!"
일본인들이 기쁨을 감추지 못해 두 손을 들어 흔들며 소리질렀다.
그것은 온통 흰색으로 치장한 호화 요트였다.
요트에서는 팝송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선수에는 티셔츠 차림에 흰 모자를 쓴 남자 두 명이 서 있었다.
그들이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배가 가까이 오자 갈매기는 놀란 듯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다가 출구 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요트는 바위에 부딪치지 않으려고 느린 속도로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소녀들은 숨을 죽인 채 창백한 표정으로 그 배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고 요트는 통통배의 선미에다 선수를 갖다 댔다.
요트에서 날아온 밧줄을 선장이 선미에다 붙잡아 맸다.
요트는 통통배보다 세 배 쯤이나 커보였다.
"여기다 대니까 이건 배도 아니군."
칼자국이 두 배를 비교하면서 말하자 선장이 발끈했다.
"이거 봐, 이래봬도 이건 태풍을 뚫고 온 배라구. 길고 짧은 건 대 봐야 알아! 겉만 번지르르하다고 다 좋은 배인 줄 알아? 저런 배는 태풍 만나면 풍비 박산이야."
"모두 다 이리 올라오시오."
요트 위에서 일본인들이 올라오라고 손짓을 보냈다.
일본인들이 먼저 요트 위로 올라갔다.
그 다음에 안경이 올라가 일본인들과 악수를 나누었다.
요트의 선장실 문이 열리더니 얼굴이 검고 바짝 마른 사내가 밖으로 나왔다.
선글라스에 가려진 두 눈은 초점이 서로 엇갈리는 심한 사시였다.
그는 거만한 자세로 안경과 악수를 나누었다.
"장미는?"
사팔뜨기 야마다의 입에서 흘러 나온 첫마디였다.
그는 통통배 쪽을 내려다보았다.
"저기 있습니다. 저기 뒤쪽에 서 있는 애가 장미입니다."
장미와 함께 배를 타고 왔던 일본인 청년이 등을 돌리고 서 있는 장미를 가리켜 보였다.
"꼴이 말이 아니군. 저건 완전히 거지 같은데?"
"오는 동안 고생이 심했습니다."
"데리고 가서 목욕시키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혀."
"네, 저 애들한테는 목욕과 휴식이 필요합니다."
"알았어, 목욕시킨 다음 좀 쉬게 해."
"어젯밤에는 정말 죽는 줄 알았습니다. 살아서 온 게 정말 기적입니다."
"나도 너희들이 여기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어. 모두 죽은 줄 알았어. 혹시나 해서 와본 거야. 바보 같은 짓을 했어. 그런 날씨에 배를 띄우는 바보들이 어딨어? 만일 침몰했다면 문제가 꽤나 심각해질 뻔했어. 이 사람이 그 바보 같은 선장인가?"
그는 요트 위로 막 올라온 선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렇소, 내가 바로 그 바보 같은 선장이오!"
선장은 충혈된 눈으로 야마다를 노려보았다.
야마다는 웃으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당신은 보통 선장이 아니군요. 아무튼 다행이오, 무사히 와서."
"여자 한 명이 죽었소. 왔을 때까지는 살아 있었는데 갑판 위로 끌어내 놓았더니 죽어 버렸소."
사팔뜨기의 표정이 굳어지는 듯하다가 도로 풀어졌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시체는 어디 있나요?"
"물 속에 던졌어요."
"잘했습니다."
소녀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야마다는 다른 소녀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로지 장미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저 애, 보통 애가 아닙니다."
일본인 청년이 야마다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그는 배 위에서 있었던 일을 무슨 비밀이나 되는 듯 은밀한 어조로 야마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저 애가 먼저 시체에 손을 대니까 그때까지 가만 있던 다른 애들도 우르르 달려들어 시체를 들었습니다. 저 애의 기세에 눌려 남자들은 잠자코 구경만 했습니다. 상당히 당돌하고 용감한 애였습니다. 보기와는 아주 딴판이었습니다."
"그래애? 장미한테 그런 데가 있었단 말이지?"
야마다는 웃으며, 요트 위로 올라오지 않으려고 기를 쓰는 장미를 대견한 듯 바라보았다.
요트를 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소녀는 장미뿐이었다.
다른 소녀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시키는 대로 순순히 말을 들었지만 그녀는 끝까지 말을 듣지 않고 버텼다.
한 사람이 밑에서 밀어올리고 위에서 두 사람이 잡아 끌어서야 그녀를 가까스로 요트 위로 올릴 수가 있었다.
"너 말 안 들으면 주사 놓을 거야!"
칼자국이 눈을 부라리며 주사기를 꺼내 들자 그제서야 장미는 겁에 질려 몸을 움츠렸다.
"아, 그럴 필요 없어. 장미는 나한테 맡겨."
사팔뜨기가 장미의 손을 잡아 끌며 말했다.
그를 보자 장미는 기겁하며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
"장미야, 나 모르겠니?"
야마다는 능글맞게 웃으며 장미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장미는 몸을 떨며 저주스런 눈으로 그를 노려보다가 얼굴을 홱 돌렸다.
그런 그녀를 야마다는 난폭하게 낚아채서는 선실로 데리고 내려갔다.
선실에는 욕실까지 딸린 호화로운 방이 있었다.
그 방으로 장미를 끌고 들어간 사팔뜨기 사내는 그녀의 옷을 벗기고 손수 그녀의 몸을 구석구석 씻어 주기 시작했다.
그것도 건성으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정성 들여 씻어 주는 것이었다.
어린 장미는 눈을 감은 채 그 치욕을 견뎠다.
"내 말 잘 들어. 넌 어디를 가나 내 손을 벗어날 수 없어. 내 손을 벗어나려고 생각해서도 안 돼. 나는 너를 잘 키워서 일류로 만들 거야. 내 말만 잘 들으면 너는 팔자 늘어지게 아주 멋지게 살 수가 있어. 여왕처럼 말이야. 네가 누구한테 가 있든 너는 나 이외에 그 누구도 사랑해서는 안 돼. 네가 죽을 때까지 사랑해야 할 사람은 오로지 나뿐이란 걸 알아야 해. 내 말만 잘 들으면 나는 너를 보석처럼 아껴 줄 거야. 세계 최대의 다이아몬드처럼 말이야. 알겠어?"
그는 비누를 잔뜩 묻힌 손으로 장미의 배를 슬슬 쓰다듬어 주면서 그녀를 바싹 끌어안았다.
그 바람에 비누 거품이 그의 옷에 허옇게 묻었지만 그는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더러움이 모두 씻겨 나가자 장미의 육체는 비로소 본래의 아름다움을 되찾아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사팔뜨기는 찬탄의 눈으로 그녀의 육체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역시 네 몸은 일품이야. 너처럼 아름다운 몸을 가진 여자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어."
그는 그녀를 번쩍 안아 침대 위에 눕히고 시트로 그녀의 몸을 덮어 주었다.
"나는 다시는 너를 못 볼 줄 알았지. 고기밥이 된 줄 알았는데 이렇게 살아서 만나다니 정말 기쁘다. 너는 다시 태어난 거나 다름없어. 피곤할 테니까 푹 쉬어."
그는 장미가 일본말을 알아듣거나 말거나 계속 지껄여댔다.
이윽고 그는 장미의 볼에 입을 맞춘 다음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간 지 오 분도 못 돼 장미는 깊은 잠 속으로 빠져 들었다.
그녀의 긴 속눈썹은 눈물로 촉촉히 젖어 있었다.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남자들은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술만 진탕 마셔댔다.
그리고 그들이 그러고 있을 때 대강 샤워를 끝낸 여자들은 선실에 모두 드러누워 정신없이 잠 속에 빠져 있었다.
여름 해라 몹시 길었다.
두 척의 배가 그곳을 빠져 나온 것은 밤 아홉 시가 지나서였다.
일단 그곳을 빠져 나온 배들은 제각기 반대 방향으로 헤어져 갔다.
통통배에는 선장 혼자 타고 있었다.
요트 위에서 사람들이 열심히 손을 흔들어댔지만 그는 그들을 못 본 체 외면했다.
그는 연방 술병을 입으로 가져 가면서 한 손으로 키를 잡고 있었다.
낡은 녹음기에서는 유행가가 흐드러지게 흘러 나오고 있었다.
"개새끼들!"
그는 누구에게랄 것 없이 욕설을 내뱉었다.
"개새끼들, 쓰레기 같은 놈들!"
그는 자신이 저주스러워졌다.
자신이야말로 이 세상에 쓸모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미가 눈을 떴을 때 요트는 이미 어딘가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실내에는 일본 유행가 가락이 은은히 흐르고 있었다.
푸른 바닷물이 넘실거리던 창 밖은 검은 칠을 한 듯 어둠뿐이었다.
그녀는 다시 잠이 들었다.
이번에는 잠이 들자마자 악몽에 시달렸다.
그녀는 캄캄한 바다 위에 혼자 내버려져 있었다.
어디선가 엄마와 아빠가 그녀를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지만 그 소리는 파도소리에 막혀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비로소 그녀는 엄마와 아빠가 조그만 고무 보트 위에 올라앉아 그녀를 향해 미친 듯이 손을 흔들어대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그녀는 나뭇조각 하나를 움켜잡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엄마 아빠를 부르면서 그들 쪽으로 열심히 헤엄쳐 갔지만 좀처럼 거리는 좁혀지지 않고 산더미 같은 파도에 밀려 오히려 더 멀어지기만 할 뿐이었다.
마침내 그들의 모습도 그들의 외침도 사라지고 말았을 때 거대한 파도가 그녀의 머리 위로 덮쳐 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꿈을 꾼 모양이구나."
사팔뜨기가 그녀의 어깨를 잡아 흔들며 말했다.
그는 그녀의 이마에 번진 땀을 수건으로 닦아 주고 나서 그녀의 상체를 일으켜 앉혔다.
"다 왔다. 얼른 일어나 옷을 입어."
그는 침대 위에 새 옷을 내려놓았다.
"맞는 것으로 골라 입어."
그러나 그녀는 얼빠진 모습으로 앉아 있기만 했다.
"뭐하고 있는 거야? 빨리 내릴 준비를 하란 말이야."
야마다가 시트를 홱 젖힌 다음 그녀의 뺨을 토닥거려 주었다.
"여기가 어딘가요?"
그녀는 그를 쳐다보지 않은 채 물었다.
야마다는 한국말을 어느 정도 알아듣고 있었다.
"일본이야, 넌 일본에 온 거야.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어서 일어나 옷을 입어."
그녀는 천천히 침대 아래로 내려섰다.
야마다는 술 냄새를 풍기며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녀의 몸을 바라보았다.
장미는 그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지 않는 듯했다.
약을 먹이지 않았는데도 그녀는 수치심 같은 것을 조금도 느끼지 않는 듯했다.
야마다가 볼 때 그것은 놀라운 변화였다.
그의 눈에는 그녀가 포기할 것은 빨리 포기하고 새로운 상황에 재빨리 적응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린 나이치고는 그야말로 놀라운 변신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장미는 이옷 저옷을 입어 보고 나서 마지막으로 분홍색의 원피스를 골라 입었다.
그것은 어깨가 훤히 드러나고 아래가 넓게 퍼지는 원피스였다.
그것을 입고 나자 그녀는 눈부시게 아름다워 보였다.
그녀가 머리에 빗질을 하고 얼굴에 가볍게 크림을 바르는 것을 지켜보면서 야마다는 자기도 모르게 가만히 머리를 흔들었다.
요트가 정박한 곳은 조그만 어촌이었다.
어촌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어촌 주민들을 깨우지 않으려는 듯 요트에서 내린 사람들은 아주 조용히 움직였다.
장미는 야마다와 함께 요트에서 내리자마자 그 앞에 서 있는 승용차에 올랐다.
이윽고 그 고급 승용차는 어두운 포장도로 위를 천천히 미끄러져 갔다.
9.
긴자의 요정 변태수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긴자의 번화가로 들어섰다.
그의 양옆에는 건장한 체격의 사내 두 명이 따라붙고 있었다.
그들은 변태수처럼 그렇게 취한 것 같지는 않았다.
행인들은 그들의 우람한 체격과 험한 인상에 눌려 그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슬슬 시선을 피하곤 했다.
밤이 되었는데도 거리는 무더웠다.
그 무더위만큼이나 긴자 거리에는 환락의 열기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휘황한 네온 사인 불빛 속을 마치 부유 동물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행인들 가운데는 단연 취객들이 많았다.
태수는 도수 높은 안경 너머로 흘러가는 여자들을 훔쳐보면서 비틀비틀 걸어갔다.
그는 여자들의 엉덩이와 가슴 쪽을 주로 눈여겨보았다.
가슴과 엉덩이가 큰 여자를 보면 고개를 돌리면서까지 쳐다보는 것이었다.
이윽고 그들은 외호통(外濠通)이라고 부르는 스치바시로 들어섰다.
거기서부터 한큐 백화점과 소니 빌딩을 끼고 있는 거리까지가 긴자에서는 제일 번화한 곳이다.
변태수는 서울 명동 거리만큼이나 그 거리에 익숙했기 때문에 관광객처럼 두리번거리거나 하지 않고 자연스럽고 여유 있는 취객의모습을 보여 주면서 걸어갔다.
그가 서울에서 도쿄로 놀이터를 옮긴 것은 오 년쯤 전부터였다.
서울에서만 놀기에는 너무 답답했기 때문에 외국으로 눈을 돌렸던 것인데, 그가 처음 기웃거린 곳은 도쿄가 아닌, 교포들이 많이 몰려 사는 로스앤젤레스였다.
그러나 그곳은 그가 마음 붙여 놀기에는 적당치가 않았다.
그곳은 어쩐지 낯설기만 하고 도무지 정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두 번째로 눈을 돌린 곳이 도쿄였는데, 그곳은 그가 마음놓고 놀기에는 그야말로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그는 삼십대 초반의 조그마한 사내였다.
정확한 나이는 서른셋이었다.
키가 유난히 작은 데다 도수 높은 안경까지 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외모는 그야말로 볼품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외모가 볼품없다는 것을 항상 의식하고 있었고, 그래서 그것을 커버하기 위해서, 그리고 거기에 대한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해할 수 없는 괴상한 짓들을 서슴없이 저질렀고, 그 가운데서도 특히 병적이라고 할 만큼 낭비벽이 심했다.
그는 돈으로 자신을 과시하려 들었고, 돈이면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의 성격은 종잡을 수 없는 데가 많았다.
난폭한 일면이 있는가 하면 어린 소년처럼 나약한 모습을 보이면서 훌쩍훌쩍 울기도 하고, 쾌활하게 놀다가도 갑자기 우울병에 걸린 듯 침울한 모습으로 돌변하기도 해서 주위를 당황하게 하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만일 그러한 그에게 돈이 없었다면 아무도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행히 그에게는 많은 돈이 있었고, 그래서 그의 행동은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많은 돈을 가지게 된 것은 순전히 그의 아버지 덕분이었다.
그의 아버지 변상구는 국민학교밖에 못 나온 사람이었지만 처음 택시업으로 꽤 돈을 벌었다.하지만 그 사업만으로 그렇게 큰돈을 번 것은 아니었다.
그는 택시업으로 벌어들인 돈을 그때그때 땅에다 투자했다.
서울 변두리가 아직 개발되기 전에 헐값으로 근교의 땅들을 마구잡이식으로 사 두었는데 그것이 나중에 그에게 수백억의 재산을 안겨 주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그 돈의 일부로 건설업에 손을 대어 큰 재미를 보자 호텔, 백화점, 극장, 슈퍼마켓 같은 데까지 사업을 확장하여 불과 십 년 사이에 신흥 재벌로 부상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번 돈을 써보지도 못한 채 쉰네 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교통 사고로 급사한 것이다.
그에게 자식이라고는 아들 하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아들이란 것이 영 변변치가 않았다.
병신은 아니었지만 병신 같은 데가 많아 재벌 업체를 맡기에는 문제가 많은 인물이었다.
본인 역시 사업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가 관심을 두는 것은 돈을 버는 것보다 오히려 돈을 쓰는 쪽이었다.
변상구가 죽자 그의 아내인 김복자는 아들한테 사업을 맡겨 보려고 해보았지만 마음대로 되지가 않았다.하는 수 없이 가까운 친지에게 남편이 하던 일을 맡겼지만 언젠가는 아들한테 모든 것을 물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들이 나이를 좀더 먹으면 괜찮으려니 생각했지만 남편이 죽은 지 사 년이 지났는데도 아들은 그 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악화되어 가고 있는 것 같았다.
변태수는 명색이 W그룹의 부회장이었지만 부회장으로서 회사에 나가 집무를 한 적은 거의 없었다.
회장실보다 더 화려하게 꾸며진 그의 사무실은 언제나 비어 있었고, 가끔씩 그의 어머니와 별거중인 그의 부인이 들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W그룹의 회장직은 변태수의 외삼촌이 맡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월급을 받고 있는 경영인에 불과했지 실제 소유주는 아니었다.
김복자는 남동생에게 경영권만을 주었지 그 이상은 결코 주지 않았다.
그녀는 사랑하는 외아들이 언젠가는 제자리로 돌아와 남편의 유업을 맡을 것으로 굳게 믿고 있었고, 또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변태수 일행이 긴자의 번화가를 걸어가자 그를 알아보고 목례를 보내거나 미소를 던지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를 보고 자기들끼리 쑤군거리는 일본인들도 상당수 있었다.
워낙 그 거리에 알려진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긴자의 번화가에 퍼져 있는 그에 대한 평판이란 것은 돈이 무지무지하게 많은 재벌의 후계자로, 일보다는 놀기를 좋아하고 돈을 물쓰듯이 하며 여자를 유난히 좋아하는 괴짜 한국인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그에게는 네로 황제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이 붙어 있었다.
긴자의 내로라 하는 호스티스들은 네로 황제를 한 번 모셔 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것은 그가 매력적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그의 팁이 탐이 나서 그러는 것이었다.
그가 뿌리는 팁은 웬만한 사람은 흉내도 내지 못할 만큼 많은 액수였기 때문에 그녀들이 그에게 눈독을 들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재수 좋게 그와 잠자리를 같이하여 그의 마음에 들게라도 해주는 경우에는 승용차 한 대쯤 선물로 받는 것은 문제도 아니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고 있었다.
그가 방문하는 업소에서는 그에게 최고의 미녀를 소개했다.
미녀가 아니면 그가 거들떠보지도 않기 때문이었다.
미녀 중에서도 그는 가슴과 엉덩이가 큰 풍만한 여자를 좋아했다.
긴자의 호스티스들은 네로 황제의 섹스 이야기가 나오면 손으로 입을 가리며 킥킥거렸다.
그와 관계했던 호스티스들이 흘린 말들이 눈덩이처럼 부풀어 믿을 만한 소문처럼 떠돌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 소문인즉슨 황제께서 그토록 여자를 밝히시는 데도 불구하고 막상 여자를 안고 행위를 하는 것을 보면 꼭 어린애 장난하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 이유로 그녀들은 새끼손가락을 세워 까닥거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여자를 즐겁게 해주기에는 그의 성기가 어린 아이의 그것처럼 새끼손가락만하다는 뜻이었다.
그런데도 여자를, 그것도 미녀만 찾는 것을 보면 우스워 죽겠다는 것이 그녀들의 말이었다.
"그게 작을수록 여자 생각은 더 나는 모양이지?"
네로 황제 일행이 세브리느에 들어섰을 때에도 그곳 호스티스들은 그의 섹스에 대해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었다.
늦게 출근한 호스티스 하나가 네로가 긴자 거리에 나타난 것을 보았다고 호들갑을 떠는 바람에 그에 대해서 이야기하게 되었던 것이다.
"네로는 자식은 만들지 못하겠네?"
"자식이 둘이나 있다고 들었어. 아내하고는 별거중이라지만 말이야."
"그럼 그렇게 작아도 자식을 만들 수 있는 모양이지?"
"아무리 작아도 안에다 대고 힘차게 발사하면 깊은 데까지 들어갈거 아니야."
그 말에 모두가 배를 잡고 웃어댔다.
"그게 아니라도 요새는 인공 수정이란 게 있잖아. 그게 작아도 아기 만드는 건 문제없어."
"황후께서는 얼마나 괴로우실까?"
"괴로운 정도가 아니겠지."
"그래서 별거하고 있나 보지?"
"누가 그 속을 알아."
"아무튼 죠센징이 이렇게 화제를 뿌리기는 처음이야. 이 거리에서 말이야."
"쉿! 네로 황제께서 들어오셨으니까 조용히들 해요."
보이가 들어와서 입에 손가락을 대는 바람에 아가씨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호위병을 거느리고 왔어."
보이는 어깨를 들썩해 보인 다음 도로 급히 밖으로 사라졌다.
변태수는 가장 호화롭게 꾸며진 방으로 안내되었다.
그가 자리잡고 앉자 부장이라는 사람이 직접 와서 구십 도 각도로 허리를 꺾어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찾아 주셔서 영광입니다."
부장은 사십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세련된 매너를 보여 주는 사내였다.
그는 자기 인사를 끝내고 나서 한쪽으로 비켜 섰다.
그러자 마마라는 여인이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굽혔다.
한국으로 말하면 마담격에 해당되는 여인이었는데 삼십대 초반의 원숙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녀의 뒤를 이어 차장과 지배인이 머리를 조아렸다.
그들은 모두 부장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간부들이 설치는 바람에 보이는 감히 황제 앞에 얼굴도 내밀 수가 없었다.
잠시 후 네로 곁에는 마마만 남고 모두 물러갔다.
황제의 호위병들은 다른 곳에서 대기했다.
"왜 이렇게 오랜만에 오셨어요?"
"어디 다녀오느라고……."
그는 일본말을 곧잘 했다.
체계적으로 일본어를 배운 것이 아니고 몇 년 동안 일본에서 살다시피 하다 보니 일상 용어 정도는 불편하지 않게 그럭저럭 하게 된 것이다.
"어디 다녀오셨어요?"
"서울에……."
그는 허공을 쳐다본 채 두 눈을 깜짝거렸다.
그런 그의 모습은 마치 공상에 사로잡힌 소년 같았다.
쌍꺼풀진 그의 두 눈은 유난히 동그랗게 보였다.
코도 입도 작아서 오목조목한 인상이었다.
차림새로 보아서는 전혀 재벌 후계자나 긴자의 일류 술집에 드나드는 사람 같지가 않았다.
외모에는 전혀 신경을 쓴 것 같지 않은 지저분하고 초라해 보이기까지 한 모습이었다.
그는 오른쪽 다리를 왼쪽 무릎 위에 포개 놓은 채 앉아 있었는데 그 때문에 오른쪽 구두가 탁자 위로 올라와 있었다.
자연 마마의 눈에 그 구두가 잘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 구두는 그야말로 거지나 신으면 어울릴 것 같은 그런 것이었다.
뒤축은 한쪽으로 홱 닳아 있었고 삥 둘러 진흙이 말라붙어 있었다.
진흙탕 속을 걸어온 것 같은 그런 구두였다.
그가 갑자기 다리를 바꾸어 포갰다.
바짓자락에도 흙이 말라붙어 있었다.
"어머나, 세상에……."
그녀가 터지려는 웃음을 손으로 막으면서 손가락으로 그의 양말을 가리켰다.
"양말이 짝짝이에요. 잘 좀 보세요. 이건 밤색인데 저쪽은 감색이에요."
그 말에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려면 어때, 이것도 유행일 수 있잖아!"
"세상에, 그런 유행이 어딨어요?"
"내가 만들면 그게 바로 새 유행이 되는 거야."
"서울에 한번 데리고 가신다고 해놓고 왜 혼자 가셨어요? 약속이 틀리지 않아요?"
마마가 눈을 흘기자 그는 소년처럼 얼굴을 붉혔다.
"미안해. 다음 번에는 꼭 데려가지."
"약속해요!"
그녀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그도 새끼손가락을 세워 거기에다 걸었다.
"그 멋진 애 데려와 봐. 도대체 얼마나 멋지기에 그렇게 전화에다 대고 야단법석이야? 누군데 그래?"
마마가 그의 맨션으로 전화를 걸어 온 것은 그저께 저녁때였다.
외출했다 돌아오니 가정부가 전화를 받아 메모를 해놓았는데 급히 세브리느로 전화를 걸어 달라는 내용이었다.
네로는 그 메모 내용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어제 저녁때에야 생각이 나서 마마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그녀는 전화를 받자마자 빨리 와달라고 성화였다.
돈 주고도 볼 수 없는 기막히게 매력적인 아가씨가 새로 들어왔으니 남들이 손대기 전에 빨리 와서 시식해 보라는 것이었다.
그런 전화는 그전에도 서너 번 있었기에 그는 알았다고 해놓고 가지 않고 있다가 하루가 지난 뒤에야 못 이기는 척하고 나타난 것이다.자자
"이번 아이는 지금까지의 애들하고는 완전히 달라요. 우선 스타일부터가 달라요."
그녀가 늘어놓는 칭찬은 여느 때와는 좀 다른 것 같았다.
그런 칭찬을 늘어놓는 그녀 자신이 흥분해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흥분해서 칭찬을 늘어놓는 동안 그는 멀거니 맞은편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표정하게 앉아 있었지만 그는 그녀가 하는 말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귀담아듣고 있었다.
그는 티셔츠 위에 점퍼를 걸치고 있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가볍고 자연스러운 차림이었다.
그는 그런 차림으로 어디나 돌아다녔다.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매는 것은 질색이었다.
"잠깐 기다리세요. 데리고 오겠어요."
마마가 일어나 밖으로 나가자 그는 그제서야 몸을 움직였다.
그 방에는 ㄱ자 형으로 고급 가죽 소파가 놓여 있었다.
바닥에는 푹신한 카펫이 깔려 있었다.
벽에는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는 추상화가 하나 걸려 있었다.
그 옆에는 소녀의 나체 사진이 붙어 있었다.
한쪽 벽에는 진홍의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 커튼을 젖히면조그만 문이 나타나고, 그 문 저쪽에는 밀실이 있었다.
그 밀실은 신방처럼 꾸며져 있는데 손님이 술을 마시다가 정 참을 수가 없으면 특별 요금을 내고 그 방을 이용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아무한테나 그 방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었다.
밀실이 딸린 방은 그 방 하나뿐이었다.
그 방은 가장 호화로운 방으로 그 방을 이용하는 사람만이 그 밀실을 이용할 수가 있었다.
밀실까지 사용하려면 방값이 터무니없이 비싸기 때문에 아무나 이용할 수가 없음은 물론이었다.
그런데도 변태수는 그곳에 오기만 하면 그 방을 독점해서 사용하곤 했다.
그는 혼자 앉아 있기가 무료했다.
나간 지 십 분이 지났는데도 마마라는 여자는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는 텔레비전 스위치를 눌렀다.
화면이 밝아지더니 남자의 거대한 성기가 나타났다.
포르노 영화였다.
링 위에 벌거벗은 두 남자가 서 있었다.
한 명은 백인이고 다른 한 명은 흑인이었다.
링 주위에는 관중들이 삥 둘러앉아 있었다.
주심은 여자였다.
한쪽에는 아나운서가 앉아 있었는데 역시 여자였다.
그녀는 마이크에다 대고 뭐라고 계속 지껄여대고 있었다.
두 선수는 링 가운데 마주 서서 상대방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의 성기는 축 늘어져 있었다.
어깨에 타월을 걸친 두 여자가 각 선수의 성기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그것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주심이 세계 챔피언 타이틀전을 개최한다고 소리치자 관중들이 환호했다.
두 선수는 발기한 성기를 한 손으로 쥐고 흔들어대면서 그것으로 상대방 선수의 그것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관중석에서는 사람들이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나 소리소리 질러대고 있었고, 여자 아나운서는 상체를 흔들어대며 열심히 중계를 하고 있었다.
변태수는 포르노 영화를 신물나게 보았지만 그렇게 재미있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소파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손뼉을 치며 크게 웃어댔다.
문이 조용히 열리고 두 여인이 들어섰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들 쪽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계속 깔깔대고 있었다.
한 라운드 게임이 끝나자 선수들은 자기 코너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는데 그때를 이용해서 어깨에 타월을 걸친 미녀들은 자기 쪽 선수의 늘어진 성기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온갖 서비스를 다한다.
"하하하하하…… 아이구, 죽겠다…… 하하하하하……."
네로 황제는 어린애처럼 두 다리를 쳐들고 웃었다.
"우리는 쳐다보시지도 않는 거예요?"
마마가 볼멘소리로 말하자 그는 손을 쳐들었다.
"앉아, 앉아서 저걸 좀 봐. 하하하하…… 아이구 배야…… 아이구 배야……."
그는 여전히 여자들 쪽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여자들은 한쪽에 다소곳이 앉았다.
"저거 보라구, 저렇게 큰 거 봤어? 저건 몽둥이야, 몽둥이!"
"어머나, 징그러워요!"
마마는 반응을 보였지만 그녀 곁에 앉아 있는 여자는 아래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 소녀티가 가시지 않은 어린 여자였다.
눈처럼 흰 원피스를 입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청순하다 못해 청초해 보이기까지 했다.
얼굴에는 화장기 하나 없었다.
네로는 한참 만에야 그녀의 존재를 의식했는지 그녀를 한 번 힐끗 쳐다보았다.
조금 후에 그녀를 다시 한 번 쳐다본 다음 마마 쪽을 바라보았다.
마마는 그의 표정에 변화가 이는 것을 미소를 머금고 지켜보고 있었다.
네로는 담배를 피워 물고 나서 다시 어린 소녀를 눈여겨 쳐다보았다.
그의 관심은 어느새 텔레비전 화면으로부터 그녀 쪽으로 옮겨 와 있었다.
그것을 보고 마마가 텔레비전을 껐다.
"인사 드려."
마마의 말에 소녀는 일어서서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한국말로,
"마야라고 합니다."
하고 말했다.
그녀의 한국말이 너무 능숙했기 때문에 네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너 한국인이냐?"
"그래요."
마마가 대신 대답했다.
"그래? 그렇다면 문제가 달라지는데. 하여간 거기 앉아."
네로는 자세를 고쳐 앉은 다음 그녀를 찬찬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실내에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그것은 여자들 쪽에서는 아주 중요한 시간이었다.
네로가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에 따라 그 자리에 남아 있든가 아니면 밖으로 쫓겨나든가 결정되기 때문이었다.
"예쁘구나!"
이윽고 네로의 입에서 낮은 탄성이 흘러 나왔다.
마야는 얼어붙은 듯 앉아 있었고 마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몇 살이지?"
"열일곱 살이에요."
그녀는 정확히 표준말로 대답했다.
"너무 꼬치꼬치 캐묻지 마세요. 그건 실례 아니에요?"
마마가 눈을 흘기면서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 질투와 선망의 빛이 엇갈려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네로는 정색하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마, 수고했어."
그 말은 나가 달라는 뜻이었다.
마마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나가자 그는 마야를 가까이 오게 했다.
"꼭 천사 같구나!"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그녀는 멈칫하다가 그대로 손을 내맡겼다.
그는 보드랍고 따뜻한 그 손을 입으로 가져가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한국 이름이 뭐지?"
"장미예요."
그녀가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쳐다보았다.
그녀의 까만 두 눈이 흑진주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노크소리가 나고 문이 열리더니 보이가 술을 가져 왔다.
보이가 나가자 그녀는 두 손으로 양주병을 들고 잔에 술을 따랐다.
그녀의 술 따르는 솜씨는 아주 서툴러 보였다.
그것이 그의 눈에는 더욱 좋게 보였다.
"자, 너도 한 잔 들어."
"전 술 못 해요."
"그래도 한 잔 해, 축하하는 뜻으로."
그는 손수 그녀의 잔에 술을 따랐다.
"자, 건배."
두 사람은 잔을 들고 그것을 서로 가볍게 맞부딪쳤다.
10.
마야의 미소 세월은 빨리 흘러갔다.
장미가 현해탄을 건너 일본에 온 지도 어느새 일 년이 지나고 있었다.
그녀가 유괴된 것은 작년 여름이었다.
그리고 일 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도쿄에서 그 첫 번째 여름을 맞고 있었다.
지난 일 년 사이에 그녀는 너무 많이 변해 있었다.
이제 그녀는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도쿄의 유흥가에 데뷔하고 있었다.
그것은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것은 이미 현실로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에게 있어서 가장 큰 변화는 지난 일 년 동안 그녀가 완전히 과거에 대한 망각 속에서 살아 왔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서울에 있는 부모를 생각하거나 그리워하지도 않았고, 그들에게 연락을 취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연락을 취하려면 그럴 수 있는 기회가 없는 것도 아니었는데도 그녀는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의 부모가 그녀를 보았다면 그녀의 너무도 많이 변한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그녀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지난 일 년 동안 어디서 어떻게 지냈으며 일 년 후 어떻게 하여 긴자의 유흥가에 신데렐라처럼 등장하게 되었는가는 완전히 베일에 가려진 비밀이었다.
그녀는 이제 겨우 열일곱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더 이상 엄마 아빠를 찾으며 훌쩍거리는 소녀가 아니었다.
일 년 사이에 그녀는 더 아름다워지고 더 성숙해졌으며 온몸에 성적인 매력을 발산하는 여인으로 성장해 있었다.
그녀는 이제 어린 소녀가 아닌 남자로 하여금 욕망을 느끼게 하는 여인으로 변해 있었다.
그녀는 세브리느에서 마야라는 이름으로 통하고 있었다.
장미라는 이름은 더 이상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세브리느에 나오기 시작한 것은 이제 겨우 열흘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녀의 출현으로 하여 세브리느에는 신선한 돌풍이 불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 바람은 물론 마야가 몰고 온 것이었다.
그녀는 세브리느에 들어올 때 이미 주위에 한국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녀의 출현과 함께 세브리느에는 갑자기 유명한 인사들, 이를테면 기업가, 배우, 탤런트, 가수, 의사, 변호사 등등 그 방면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는 사람들이 속속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는 어김없이 마야가 소개되었고, 그들은 하나같이 그녀의 신선한 미모에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그런 손님들이 몰려드니 세브리느가 자연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술집들이 포진해 있는 긴자의 번화가에는 어느새 그 소문이 퍼져 나갔고, 그래서 그 이야기로 거리는 술렁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야기가 꼬리를 물고 이어진 것은 그녀의 신상에 관한 것들이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에 관해서 알려져 있는 것은 그녀가 한국 출신이라는 것, 그리고 현재 나이가 열일곱 살이라는 것 정도였다.
그 밖의 것들, 이를테면 어떻게 해서 그 어린 나이에 그것도 한국인으로서 긴자 거리의 호스티스가 되었으며, 과거에는 무엇을 했고, 어디서 누구와 살고 있는가 하는 것 등등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세브리느의 종업원들조차도 그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녀의 신상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그녀에 관한 것을 알아보려고 했지만 이미 알려져 있는 사실 이외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녀에 대해서는 이런 말이 떠돌고 있기는 했다.
그것은 그녀의 배후에 무시할 수 없는 조직이 버티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그것은 확인할 수 없는 소문에 불과했지만 사람들은 그 소문을 은연중에 믿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마야는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로 어느새 그들 사이에 인식되어지고 있었다.
물론 손님들이야 그런 것을 알 리 없었다.
그러나 세브리느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그 거리에서 벌어먹고 사는 사람들은 지금까지의 일반 호스티스들과는 다른 차원에서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은 한 가지만 보더라도 여느 호스티스들과는 분명히 달랐다.
자정이 지나 퇴근할 무렵이면 클럽 후문 좁은 골목에는 언제나 백색의 벤츠가 조용히 들어와 대기하고 있다가 마야를 태우고는 어디론가 사라지곤 했다.
그 백색의 벤츠는 그녀가 퇴근할 때에만 나타나곤 했다.
그리고 그 차 속에는 언제나 운전사로 보이는 남자 한 명만이 타고 있었다.
그 운전사는 마야가 후문을 통해 밖으로 나오면 얼른 차에서 뛰어나와 그녀가 차에 오를 수 있게 뒷문을 열어 주곤 했는데, 그 태도가 너무도 정중해서 마치 무슨 공주라도 모시는 그런 모습이었다.
퇴근 때는 벤츠가 나타나지만 출근 때는 다른 차가 그녀를 태워다 주곤 했다.
그것 역시 고급차로 스웨덴제 볼보였다.
그 차는 빨간색이었다.
운전사도 다른 사람이었다.
이런 것만으로도 화제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도대체 이제 열일곱 살밖에 되지 않은 애송이 호스티스가 출퇴근 때 운전사가 딸린 고급 승용차를, 그것도 출근 때 다르고 퇴근 때 다른 차를 타고 다니니 그것을 훔쳐보는 사람들, 특히 같은 호스티스들로서는 눈이 뒤집힐 수밖에 없었다.
"저 죠센징 병아리의 후견인은 누구래?"
"누가 알아? 저런 차를 타고 다닐 정도라면 대단한가 보지."
"정말 눈꼴사나워 못 보겠어."
"저 정도라면 굳이 이런 클럽에 나올 필요 없잖아. 돈 벌 필요가 없을 테니까 말이야."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본토박이 호스티스들은 질투로 눈을 번득이며 마야가 없는 데서 제각기 한 마디씩 내뱉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들 중 마야가 보는 데서 그녀를 질시하거나 구박하는 여자는 아직 아무도 없었다.
그러고 싶어도 자기한테 돌아올지도 모르는 어떤 보복이 두려워 그러지를 못하는 것이었다.
그 두려움은 그녀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다는 그 무시 못 할 조직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그녀들은 마야가 처음 출근하던 날 부장이 그녀들을 앉혀 놓고 들려준 말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부장은 이렇게 말했었다.
"조금 있으면 죠센징 아가씨가 한 명 올 거야. 아주 예쁘게 생긴 아가씨야. 앞으로 함께 일하게 됐으니까 귀여워해 줘요. 말해 두는데 그 애를 울리거나 괴롭혀서는 안 돼요. 죠센징이라고 멸시해서도 안 되고. 그 애는 보통 애들과는 성분이 다르다는 것만 알아 둬요. 여러분들하고도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특별하게 취급해 줬으면 좋겠어. 그 애의 배후에는 무시할 수 없는 후견인이 있으니까 잘못 건드려서 혼쭐나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조심해요. 사실은 나도 그 애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어요."
세브리느의 사장은 오십대의 가네마루라는 인물이었다.
유흥가의 밑바닥에서부터 잔뼈가 굵어 오늘에 이른 그는 어떤 상황에 적응하고 대처하는 데 있어서 뛰어난 재주와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한 통의 전화를 받았는데 그것은 일방적으로 명령하는 전화였다.
"국화와 칼을 알고 있나?"
조용한 남자 목소리에 가네마루는 처음에는 어리둥절했다가 다시 한 번 되풀이 묻는 말에 안색이 창백해지면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아, 알다마다요!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명성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직접 만날 필요는 없게 됐어. 내일 모레 저녁 때 아가씨를 한 명 보낼 테니까 호스티스로 써줘. 아름다운 여자니까 그렇게 알고 보석처럼 다뤄 줘. 갈고 닦으면 일류가 될 수 있는 아가씨야. 나이는 17세, 이름은 마야, 죠센징……. 알려 줄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야. 그녀에 대해서 다른 것은 알려고 하지 마. 마야에 대해서는 일반 호스티스들과는 다르게 대접해야 한다. 특별 대우를 하란 말이야. 그리고 시시한 손님들한테는 보여 주지 마. 일류한테만 소개시키란 말이야. 다시 말하지만 그 아가씨를 아주 소중하게 다뤄. 공주처럼 말이야. 무슨 문제가 있으면 전화로 알려 줘. 그리고 혼자만 알고 있어. 함부로 입을 놀리면 모가지를 잘라 버릴 테다."
상대방이 불러 주는 전화 번호를 가네마루는 급히 받아 적었다.
그가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에 전화는 끊어졌다.
그는 비로소 자신이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상대는 완전히 반말로 명령했지만 그는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전화에다 대고 굽신거렸던 것이다.
그리고 반대 의사를 밝히거나 묻거나 하지도 못했다.
단지 '국화와 칼'이라는 말에 식은땀만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지만 그 역시 국화에서는 신비감을, 칼에서는 잔인함을 느끼고 있었다.
국화와 칼은 신비한 베일에 싸인 정체 불명의 조직이었다.
경찰은 그것을 범죄 단체로 보고 수사를 확대하고 있지만 아직 아무것도 알아내지를 못하고 있었다.
국화와 칼은 단순한 범죄 단체가 아니라는 것이 일반인들의 생각이었다.
거기에는 정치적인 색깔이 있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그들이 자행하는 범죄 행위가 그 횟수를 거듭함에 따라 그 색깔이 점차 노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색깔이 가장 분명히 나타난 것이 한 달 전에 있었던 적군파 본부 습격 사건이었다.
극좌 테러 조직인 적군파 본부를 습격해서 대원 다섯 명을 잔인한 수법으로 살해한 국화와 칼은 그때 비로소 세상에 그 본색을 드러냈다.
경찰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 벽에는 검붉은 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휘갈겨져 있었다.
'일본 정신을 저해하는 모든 것에 선전 포고한다! 대일본 건설을 위하여!' 참혹하게 죽어 자빠진 시체의 입에는 국화가 한 송이씩 꽂혀 있었고, 여자 대원의 음부에도 국화 한 송이가 꽂혀 있었다.
악명 높은 극좌 테러 조직인 적군파를 습격하여 그 대원들을 잔인하게 살해한 것을 보면 그 이상의 악마적인 단체임이 틀림없었다.
그들이 피로 벽에다 휘갈겨 쓴 구호는 과거 일본을 파멸시킨 제국주의적이고 침략적인 내용이었다.
일본 지식인들은 그들의 잔인함에 전율했고 그들의 구호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것은 과거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들이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삼 년 전부터였는데 그 어느 범죄 단체보다도 잔인 무도하게 인명을 살상한다는 점에서 단기간 내에 악명을 떨치게 되었고 사람들 사이에 가장 무시무시한 공포의 대상으로 부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어린아이들까지도 무참히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그런 것을 볼 때 세브리느의 가네마루 사장이 국화와 칼이라는 한마디에 사색이 되어 식은땀을 흘린 것도 이상할 게 하나도 없었다.
그는 가장 정상적인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전화를 받고 난 가네마루는 즉시 부장을 불렀다.
그리고 새로 들어오게 될 죠센징 아가씨를 각별히 신경 써서 대우 하라고 단단히 지시했다.
물론 국화와 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변태수는 마야를 만나고 온 날 밤 잠이 오지 않아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한국 아가씨가 그토록 자기를 몸살나게 할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었다.
도쿄의 유흥가에는 한국 출신 아가씨들이 더러 있었다.
물론 재일교포 출신들이 아니고 한국에서 불법으로 취업하기 위해 건너온 아가씨들이 대부분이었다.
변태수는 그런 아가씨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얼마나 닳고 닳았으면 일본에까지 건너와 불법으로 웃음을 팔고 있을까 하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도쿄 유흥가에 와 있는 한국 아가씨들에 대한 그의 생각을 일시에 바꾸게 한 사람이 바로 마야였다.
마야를 본 순간 그는 자신의 잠자고 있던 혼이 깨어나 걷잡을 수 없이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마야를 처음 소개받던 날 밤 그는 그녀의 모습을 곁에서 쳐다보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나왔었다.
그녀의 모습이 너무 청순했기 때문에 자신이 손을 대면 그녀의 몸이 오염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는 마치 자신이 십대 소년으로서 첫사랑의 소녀를 본 듯한 설레임으로 밤을 밝히고 있었다.
그 나이의 그에게 그런 감정이 남아 있다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지기조차 했다.
그런 소녀라면 하루 종일 함께 있어도 지루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날이 훤히 밝아 왔을 때 그는 마야를 평생 곁에 두고 볼 수는 없을까 하고 생각했고,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하고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그는 지금 새로 장가를 들어야 할 입장이었다.
지금의 아내와는 정식으로 이혼하지는 않았지만 오래 전부터 별거해 왔기 때문에 사실상 이혼 상태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의 아내 임순애는 한사코 이혼을 반대하고 있지만 그것은 위자료를 많이 타내기 위한 수작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아내가 싫었다.
아내가 결혼 전에 유명한 바람둥이였고 한때는 배우와 동거 생활까지 한 적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나서부터는 그는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 할 수 없었다.
그가 그 소문을 추궁하자 임순애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것은 억울한 모함이라고 호소했지만 한 번 돌아선 그의 마음은 다시는 그녀 쪽으로 기울어지지 않았다.
임순애는 성적으로 강한 욕구를 지닌 여자였다.
글래머인 그녀는 변태수보다 키도 더 컸고, 잠자리에서 그와 관계할 때는 강렬한 힘과 탁월한 기교로 그를 압도했고 그를 마치 어린애처럼 데리고 놀았다.
그리고 언제나 욕망을 채우지 못한 아쉬움을 안고 그를 놓아주는 것이었다.
그런 아내를 볼 때마다 그는 아내가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언제나 성에 굶주려 있다는 것을 알았고, 아내를 만족시켜 주지 못하는 자신의 무력감에 심한 콤플렉스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결혼 전의 그녀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던 것이다.
콤플렉스는 분노와 질시로 변했고, 그때부터 그는 아내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튿날 변태수는 다시 세브리느를 찾아갔다.
그가 안으로 들어서자 호스티스들은 눈들이 휘둥그래졌다.
"어머, 네로 황제 좀 봐. 또 나타났어."
"어머나, 오늘은 아주 딴판이야. 아주 깔끔하게 차려 입었어. 저렇게 차려 입으니까 꼭 소년 같애."
"어제 같은 차림으로는 안 되겠다 싶었던 모양이지? 반해도 단단히 반한 모양이야."
네로는 아래위 흰 양복으로 말쑥하게 차려 입고 목에는 녹색 바탕에 점이 있는 나비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그가 그런 차림을 한 것은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었다.
그것은 그가 앞으로 만나야 할 사람에게 몹시 신경을 쓰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변화였다.
그는 룸으로 안내되기 전에 화장실에 먼저 들어가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쳐 보았다.
눈처럼 흰 소녀에게 어제 자신의 지저분한 모습을 보였다는 것은 큰 실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소녀는 더러운 것을 제일 싫어할 것이다.
그녀에게는 더할 수 없이 깨끗한 인상을 심어 줘야 한다.
팁을 주더라도 깨끗한 지폐로 주어야 한다.
그는 이발소에서 손질한 머리를 손으로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머리는 기름이 발라진 채 깨끗이 빗질이 되어 있었다.
이윽고 화장실을 나온 그는 지정된 룸으로 들어갔다.
마마가 따라 들어와 그 옆에 찰싹 붙어 앉는다.
"오늘은 정말 멋지게 차려 입으셨네요. 그렇게 입으시니까 새신랑 같아요."
그는 부끄러워하면서 마마의 손을 잡았다가 놓았다.
"그 애를 불러 줘, 마야라는 애 말이야."
"어머나, 그 애를 못 잊어서 오셨군요?"
"아, 아니야."
그는 소년처럼 얼굴을 붉혔다.
"거짓말 말아요. 얼굴에 다 씌어 있는걸요."
마마는 정색을 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섭섭해요! 전 저를 보고 싶어서 오신 줄 알았는데 정말 섭섭해요. 이 요코는 어떻게 해야죠? 이 수모를 어떻게 보상받아야 하죠?"
그는 수표책을 꺼내 백 달러짜리 수표에 사인한 다음 그것을 떼어 내 그녀에게 주었다.
마마의 얼굴이 환해졌다.
"어머나, 고마워요. 이런 고마울 데가, 회장님은 역시 생각이 깊으셔요."
그녀가 기모노 자락을 쥐고 일어서자 그는 그녀를 붙잡아 앉혔다.
"잠깐 앉아 봐요, 마야에 대해서 아는 대로 말해 봐요."
"적을 알아야 이길 수 있기 때문에 그러시는 거죠?"
"궁금해서 그래."
"미안하지만 저도 그 애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어요. 한국에서 온 열일곱 살 소녀라는 것밖에는 아는 게 없어요."
"그런 어린애가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오게 됐지?"
"네, 그건 정말 수수께끼예요. 밀항해서 왔거나 뭐 그랬겠죠. 이 거리에 있는 한국 아가씨들 중에는 그렇게 해서 왔다는 여자가 적지 않나 봐요."
"그렇게 구름 잡는 이야기 말고 정확한 이야기를 해봐."
"정말 몰라요. 우리는 그 애를 보고 하늘에서 떨어졌다고 그래요. 어느 날 갑자기 세브리느에 출현했는데 그녀가 어떻게 해서 우리 클럽에 나오게 됐으며 과거에 무엇을 했는지 아무것도 모르거든요. 정말 수수께끼 같은 애예요. 부장님도 잘 모르시나 봐요. 사장님이 특별히 지시를 했기 때문에 그 애를 받아들였나 봐요. 이런 말은 있어요. 그 애의 배후에는 어마어마한 후원자가 있다는 말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소문에 불과해요. 정확한 것은 아무도 몰라요."
"어마어마한 후원자라구?"
네로는 코웃음치면서 내심 그녀의 후원자는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기 같으면 그녀를 세브리느에서 끌어내 따로 살림을 차려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애 다른 손님들한테도 인기 있나?"
"그야 당연하잖아요? 미인이겠다 나이 어리겠다, 갖출 거 다 갖추고 있잖아요. 일류 멋쟁이들이 줄을 서고 있어요. 회장님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마야를 잃고 말겠어요. 한국 남자가 이기나 일본 남자가 이기나 어디 두고 봐야겠어요. 잠깐 기다리세요, 마야를 불러오겠어요."
그녀가 기모노 자락을 흔들고 나가자 네로는 가슴 속에서 조용히 질투의 불꽃이 이는 것을 느꼈다.
'일본의 일류 멋쟁이들이 줄을 서고 있다고? 흥, 그건 안 되지.
그 애는 엄연히 한국 애야.
그렇게 아름다운 애를 일본놈들에게 빼앗길 수는 없어.
없고말고! 그건 천부당만부당한 이야기야.
그 애를 놈들에게 빼앗긴다는 건 민족적인 수치야! 놈들이 그 애를 차지한다는 건, 그건 강간이야!' 그는 창백해지면서 눈을 감았다.
마야의 아름다운 몸이 일본 사나이들에게 처참하게 짓밟히는 모습이 뇌리를 스쳐 갔다.
그는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가 거기서 민족적인 수치심까지 느낀 것은 정말 뜻밖이었다.
그는 민족이니 국가니 하는 말을 의식적으로 받아들인 적이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솔직히 말한다면 그에게는 그런 데 대한 의식이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민족이니 국가니 하는 것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지구는 하나이며 그 속에서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세계인으로 인생을 즐기면 된다는 것이 그의 지금까지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여자 문제를 놓고 민족 감정을 들먹이게 된 것이다.
확실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기다린 지 이십 분이 지났는데도 마야는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다른 때 같으면 가만 있지 않았겠지만 마야에 대해서만은 그는 인내심있게 조용히 기다렸다.
소년처럼 무릎 위에 두 손을 올려놓은 채 똑바로 앉아서 그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처럼 포르노 영화를 보기 위해 비디오를 켜지도 않았다.
마야는 삼십 분이 지나서야 나타났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그럼 재미 보세요. 마야, 이분을 잘 모셔야 해."
마마는 그들 두 사람에게 윙크를 던진 다음 문을 닫고 사라졌다.
변태수는 문 앞에 두 손을 모으고 서 있는 마야를 눈이 부신 듯 쳐다보았다.
어제와 달리 그녀는 진홍빛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불 타는 장미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옷 색깔 때문인지 그녀의 몸에서는 요염하고 정열적인 기운이 발산되고 있었다.
드레스의 가슴선이 깊이 패어 젖가슴이 터질 듯 부풀어 있었는데 그것은 눈이 부실 정도로 희었다.
드레스 밖으로 뻗어 나온 긴 팔도 희디 희었다.
크고 검은 두 눈이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윽고 그것은 꿈꾸는 빛으로 변하면서 그의 얼굴 위에 조용히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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