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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 ---16

내고향제일 | 2021.05.07 14:22:51 댓글: 1 조회: 1450 추천: 2
분류수필·산문 https://life.moyiza.kr/mywriting/4253625

부모님이 살아계실때는 심천에서 결혼하여 자기 소가정이 있어도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이 내 진정한집인것 같고 고향만 돌아오면 몸과 마음이 힐링되고 홀가뿐했다. 고향의 익숙한 얼굴들, 고향의 공기, 고향의 하늘, 고향의 일초일목, 고향의 집들 그리고 사시장철 용솟음치며 흐르는 목단강물소리 눈앞에 보이는 모든것과 귀에 들리는 모든것이 그렇게 익숙하고 사랑스러웠다. 한사람의 인생에도 고봉이 있다. 일생에 제일 행복했던 시기가 있다. 비록 나의 인생이 아직 끝나지는 않았지만 확실한것은 나의 인생의 고봉은 이미 지나갔다. 내가 제일 행복했던 시기는 우리 부모님이 살아계실때였다. 외삼촌이나 외숙모가 살아계실때였다. 내가 남편과 함께 아들을 데리고 나의 본가집에가서 지내던 나날들이 나한테 제일 행복했던 시간이였다. 남방에서 태여나 자란 아들과 한겨울 고향에서 눈사람을 만들고 여름에는 내가 어릴때 놀던 강변에 가서 골뱅이와 조개잡이도 하고 가을철 남편과 함께 오두막에서 밤새우며 아버지가 놓은 생선발을 지키던 부모님과 우리 소가족이 함께 있을때가 나한테 제일 행복한 시각이였다. 그때 나의 웃음소리는 전신의 세포가 모두 흥분된 마음속으로부터 자연히 솟아난 통쾌한 웃음소리였다. 그이들이 세상을 떠난후 난 한번도 그렇게 통쾌히 웃은적이없다. 나의 극친(至亲)이 나와 함께 눈앞의 이 기쁨을 나누지못하는한 아무리 큰 기쁨도 나한테 전신을 짜릿하게하는 즐거움을 가져다줄수없었다.

2011년 이른봄, 어머니는 고향에서 잠결에 돌아가셨다. 나와 남편이 이 청천벼락의 소식을 듣고 아침 비행기로 고향에 도착했을때 어머니는 이미 화장터에 갈 준비가 되여있어 난 어머니의 마지막 얼굴조차보지 못했다. 그저께 통화했었는데 돌아가셨다니 정말 믿기어려웠다. 사람이 한치 코앞일을 모른다고 하지만 나도 그 도리를 너무 잘 알고있지만 정말 자기한테 이런 일이 부닥치니 제정신이 아니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귀가에 챙챙 울리는데 돌아가셨다니 정말 꿈만 같았다. 집 구석구석마다 어머니의 그림자가 얼뜰거리는데 인젠 불러도 대답을 들을수없고 다시는 따뜻한 그 품에 안길수도 없다니 너무 억이 막혔다. 땅을 치며 통곡치다가도 문뜩 입을 다물고 주위를 돌아보며 나의 허벅다리를 꼬집어보았다. 혹시 이게 꿈이 아닌가싶어서였다. 어찌 이럴수가 있단 말인가. 정말 믿어지지 않았다. 믿고싶지 않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후 나는 어머니가 자주입던 옷중에서 긴팔내의 하나를 건져냈다. 보통 고인이 입던 옷은 다 태워 천당에 가서도 입게 한다고 하지만 난 하나를 남겼다. 그 옷은 어머니가 심천에 오실때마다 가져온옷이기에 제일 눈에 익는 옷이였다. 어머니가 입기 좋아하는 내의였다. 그이를 이렇게 보낸다니 너무 억이 막혔다. 어머니의 모든것이 당장 눈앞에서 사라진다니 정말 기가 막혔다. 물에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를 잡듯이 허겁지겁 하나를 붙잡았다. 어머니의 모든것이 눈앞에서 사라지기전에 무엇인가 어머니의 체내가 스며있는것을 남기고 싶었다. 내가 이 옷을 입을때마다 어머니가 내 옆에 있는것처럼 느끼고싶었다. 우리가 함께 지냈던 나날들이 그렇게 선명하지만 오늘 어머니의 모든것을 태우고나면 남은것이란 기억밖에 없다니 가슴이 터지는것 같았다 . 삼십여년간 내가 아팠다고 느꼇던 모든 아픔을 모여도 지금처럼 이렇게까지는 아프지 않았다. 이전에 내가 아프다고 느꼈던 아픔이 이 시각의 아픔에 비하면 바늘에 살짝 찔린 정도였다. 제일 큰 아픔은 제일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야만 느낄수있었다. 나는 난생 처음으로 큰 아픔이 어떤 아픔인지 알게되였다. 그 깊은 상처가 어느정도 아물동안 나도 비몽사몽의 혼돈한 나날도 보내왔다. 다행히 고향에 외할머니가 계셔서 그나마 안위가 되였고 어쩌다 향한 고향길도 너무 쓸쓸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번만은 이전과 달랐다. 마음이 너무 무겁다.

2009년 구정때 외할머니네 집에서 찍은 가족사진이 벽에 걸려 묵묵히 이 대가족의 변화를 지켜본다. 어머니, 아버지, 셋째 외삼촌, 셋째외숙모, 작은 외할아버지, 둘째외삼촌 9년간 한마을에서 살던 여섯식구가 우리를 떠났다. 나는 이 9년간에 벌어진 일들이 악몽이기를 바랐다. 이 악몽에서 깨여나니 2009년구정이였으면 얼마나 좋을가? 잠깐 내가 꿈을 꾸었구나. 악몽이였지만 꿈이여서 다행이다. 아버지 어머니도 내 옆에 계시잖아. 셋째외삼촌도 셋째외숙모 둘째외삼촌도 다 살아계시잖아. 내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내옆에 있지 않는가. 모두들 구정준비에 바삐돌고 있지 않는가. 참 다행이야 . 이랬으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나 꿈이 아니다. 나의 허벅다리를 꼬집으니 아프다. 2009년은 소띠해였다. 나의 본명년 (本命年)이였다. 그런데 벽에 걸려있는 달력에 2018년이라 커다랗게 적혀있다. 달력에 귀여운 강아지가 앉아있다. 이 모든것이 나한테 내가 바라는것이 꿈이라 명백히 말해주고있다.

한사람의 인생이 길어야 흔히 백년을 넘지 못한다. 인생의 유한함을 알고 사랑의 소중함을 알고 우리가 아무리 이 눈앞의 사람과 함께 있는 시간을 아끼려해도 오래오래 이시각을 즐기려해도 시간은 일초도 지체하려하지않고 냉정히 우리를 지난다. 우리가 슬퍼도 우리가 기뻐도 시간은 변함없이 그 속도로 흘러간다. 기척없이 우리의 눈앞으로 우리의 귀옆으로 우리의 손끝으로 흘러간다.

마음이 쓰리다. 아픈 상처에 소금을 뿌린듯이 쓰려난다. 나도 외할머니를 닮아서인지 고집이 센편이다. 자기의 느낌을 중시하고 아니면 아닌 성격이다. 대도리로 나를 설득하려 하지말라 자기마음보다 더 솔직한 답이 어디있는가. 내 인생이고 후과도 내가 책임지니 내 행동은 내 판단대로 움직여야한다. 나는 동전에 정면과 반면이 있듯이 화복(祸福)은 언제나 동반한다고 인정한다. 이 세상에 절대적인 화()도 절대적인 복(福)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화에도 복이 숨어있고 복에도 화가 스며있다고 생각한다. 살다보니 십년전의 화가 오늘의 복이 된것도있었고 이십년전의 복이 오늘의 화가 된것도 있었다. 절대적인 화복(祸福)이 없었다. 사람이 살며 세상의 이 많은 물건을 전부 써보고 자신한테 제일 적합한 물건을 결정할수없다. 같은 도리로 세상에 사람이던 직업이던 기회던 헤아릴수 없지만 연분이있어 나와 엮이게 됐고 또 나와같이 내 인생의 한동안을 함께 보낼수 있는 사람은 나한테 소중한 인연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정성을 들여 꾸준히 연분을 이어나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스쳐지나가는 연분이라면 사람이던 물건이던 기회던 나한테 적합하지 않아서이니 너무 집착할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억지로 묶어놓은 사람이나 기회는 오래가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더우기 사람과 사람사이는 서로 마음이 통하고 편해야 오래 같이 동행할수있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연분을 아끼지만 자연에 따르자고 생각한다.(惜缘,随缘) 그래서 항상 세상에 절대적으로 정확한 결정이란 없다. 내가 결정한거라면 정확한 결정이다라고 생각하는 스타일이다. 나중에 혹시 잘못 결정한 일이라 판정이나도 내가 결정한일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그페지를 번져나가는 스타일이다. 세상에 사람의 생사(生死)에 관한 일만이 큰일이지 다른일은 별것아니라고 생각한다. 모르면 배우면 되고 병이 나면 치료하면 되고 돈이 없으면 벌면 되지 않는가. 남보다 둔하면 남이 한번 배우면 아는것을 열번배우면 모를수가 없고 오곡을 먹고 사는 인간이니 한평생 병이 안날 가능성도 적고 돈을 벌 능력이 많지 않으면 그만큼 적게 쓰면 되지않는가. 어떤 생활이던 하루세끼에 침대하나이지 않는가. 살아있는한 이러저러한 문제는 끊기지 않는다. 한사람의 문제를 크게 나누어도 건강, 사업, 혼인, 인간관계 등등이 있다. 그러나 한사람의 인생도 나 혼자만이 아니라 거미줄처럼 엃혀져있다. 나자신의 문제도 문제이겠지만 그 거미줄에 가로세로 엃혀있는 부모형제, 남편에자식, 친척, 시부모에 시집형제자매 등등 친인의 문제도 자연히 우리의 신경을 건드린다. 우리한테 친인이 있는한 사랑이 있는한 근심과 머리아픈 문제는 우리를 떠나지않는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큰 문제도 사람이 살아있는한 자신의 노력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 지난일이 될것이라고 믿는다. 아무리 큰 일도 생사에 관한 일만이 아니면 언젠가는 내가 평온한 어조(语调)그때 내한테 그런 일이 있었지하며 담담히 지나갈 날이 있다고 생각한다. 때가 되면 새싹이 트고 때가 되면 꽃이 피는듯 문제의 해결에도 시간이 필요한것이니 어떤일은 너무 서둘어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뒤죽박죽이 된 인생이라 할지라도 마음을 가라않지고 내심한 인내력과 꾸준한 노력으로 하나하나 풀어나가면 더 성장한 자신을 볼수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나한테 이런 문제를 안배한건 그이로써의 깊은 뜻이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나는 내가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은 이 세상에서 누구도 나를 무너뜨릴수 없다고 단정했다. 그런데 지금 분명 마음한구석이 무너져가고 있다.

나의 친인들이 세상을 떠나면서 외할머니의 가슴에 칼을 꽂았다면 나에게는 말없이 고향에 대한 나의 미련을 빼앗아가버렸다. 고향이 내 가슴에 담은 정과 사랑을 빼앗아가버렸다. 인젠 얼마남지 않은 마지막 미련마저 빼앗아가려한다. 그런것을 알면서도 나는 아무것도 할수없다.

나는 나를 단단하게 하는것도 친인이고 나를 약하게하는것도 친인이란것을 깨달았다. 외할머니와 같이 개울가에서 물장난을 하며 목욕하던 장면, 외할머니와 같이 고추도 따고 마늘도 캐고 같이 옥수수도 삶아먹고 그네를 타며 아이스크림을 먹던 화면….외할머니와 같이 보내온 이런 소소한 나날들이 눈앞에 영화필림처럼 나타나며 눈물이 줄 끊어진 구슬처럼 뚝뚝 떨어지다가 인츰 샘처럼 솟구쳐서 막을수 없었다. 나는 옆에 누운 친인들이 들을가봐 입술을 꼭 깨물고 눈물이 마음껏 흐르도록 내버려두었다. 불시에 그 무엇인가 온 몸에 꽉 차고 넘쳐서 나오지 않으면 폭팔할것 같았다.---계속

추천 (2) 선물 (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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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laxy4 (♡.250.♡.61) - 2021/05/14 16:16:03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심천에 와서 10년동안 우리 애들을 키워주시고 재작년에 고향으로 들어가셨어요.
십년전에 오실때는 할머니 같지 않았는데 애들 다 키워놓고 10년이 지나서 고향으로 들어가실때 공항에서 뒷모습을 보니 할아버지 할머니 뒤모습이더라구요. 코마루가 찡해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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