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를 품다

l판도라l | 2023.01.29 03:07:35 댓글: 4 조회: 792 추천: 3
분류수필·산문 https://life.moyiza.kr/mywriting/4437459
그 무렵 나는 꽤 오랜 시간 피폐해있었다.

끝내 버티지 못할 것 같은 예감에 잠을 설친 많은 날들이 이어졌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에 지쳐 더이상 마음 다치지 않기만을 바라며 나는 참 모지름을 썼었다. 그날 내가 왜 하필 그곳을 찾아들었는지는 지금도 기억나지 않는다. 하루종일 잡다한 일처리를 하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러시아워가 지난 거리 한끝, 이 도시의 어느 산자락 귀퉁이에 자리잡은 작은 공원이 내 발목을 잡았다.

공원 잔디밭에 앉아서 풀의 머리끄덩이를 한번 잡아당기고, 한산한 주위를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그러느라니 햇빛이 바지가랭이를 붙들고 늘어졌다. 그 늘어진 햇빛의 끝자락에서 어느 한 엄마와 아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낮은 산등성이로 기울기 시작하는 해는 황혼을 맞아 붉게 달궈진 거대한 공처럼 보였다. 그 지는 해를 아이는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엄마는 아이를 향해 가방 입구를 벌렸다.

“그렇게 아쉬우면 그 해를 여기에 담아 가렴.”
“그래도 돼요?”
“그래, 그러면 너는 해를 품은 멋진 사람이 되는 거란다.”

둘의 다정한 실루엣이 멀어져갔고 그 뒤를 내 눈길이 따랐다. 한참 그들을 바라보고 있을 무렵, 갑자기 물방울이 후두둑 번지기 시작했다. 비가 오려나 싶어서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그것이 내 얼굴을 적시고 있음에 적잖이 놀랐다. 아무런 예고도 전조도 없이, 갑자기 내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동안 꾹꾹 눌러담았던 슬픔이 괴어올라 나는 순간 당황해졌다. 그리고 억제할수 없을만큼 눈물이 세차게 쏟아졌다. 나는 두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이유 없는 눈물의 기습공격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울고 울었다.

집으로 돌아온 후에야 나는 그때 내가 울음을 터뜨린 이유를 알수 있었다. 그곳은 한때 엄마와 내가 자주 놀러갔던 공원이었다. 나는 전율했다. 기시감이란 그토록 무서운 것이었다. 알수 없는 힘이 우리를 깨워 흔들 때, 운명의 신은 내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항상 내게 크고 예쁜 햇님 같았던 엄마가, 우리에게 어두운 곳 없도록 든든히 지켜주었던 엄마가, 그 무렵 전혀 비상식적인 모습과 행동을 보이고 있어서 차라리 알츠하이머 판정이나 심리질환의 일종이었으면 하는 못된 바램마저 품었었다. 지속되는 실망으로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속으로 마음이 자꾸만 꺼져 내려가던 체념과 환멸의 시간들이었다.

전 인류를 사랑할수는 있어도 자신의 부모와 평화롭게 지내는 데는 서툴수 있는 게 사람이라고 한다.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지는 해를 보듬어 품을수 있는 그릇이 나는 못되었다.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무릎이 꺽이는 좌절과 가슴 깊은 곳에서 뜨겁게 솟구치는 의욕의 메커니즘을 반복하는 내내 나는 우리의 부모들 역시 한때는 저 하늘의 해처럼 뜨겁게 작열하던 시기가 있었다는 것을 잊었다. 또한 그분들이 겪어내야 하는 오늘의 실패와 무기력함 역시 우리의 먼 훗날이 될수 있다는 사실도 말이다.

도저히 넘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장벽을 넘는 다는 것은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나는 붉은 해처럼 둥글게 세상을 껴안아본다. 상처 입은 영혼에 붕대를 감고 결락의 존재들에게 가만히 품을 내어줄 수 있는 일이 내겐 이젠 그리 벅차지만은 않을 것 같다.
추천 (3) 선물 (0명)
IP: ♡.103.♡.39
호수 (♡.111.♡.91) - 2023/01/30 23:34:02

글을 너무 멋지게 잘쓰네요.

l판도라l (♡.109.♡.184) - 2023/01/31 09:58:54

감사합니다. 이건 그냥 에세이였는데 수필 카테고리에 넣었습니다. 자주 들려주세요^^

로즈박 (♡.175.♡.27) - 2023/01/31 00:16:57

잘 읽고 가요..저도 추천 꾹~~

l판도라l (♡.109.♡.184) - 2023/01/31 09:59:15

추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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