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애의 고민

l판도라l | 2023.01.31 09:19:49 댓글: 2 조회: 981 추천: 3
분류타향수기 https://life.moyiza.kr/mywriting/4438075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빨가면 사과-사과는 맛있어-맛있으면 바나나…”

방안에서 노래를 흥얼거리던 딸애가 다급히 소리쳤다.

“엄마! 엄마!”

갓 두돌이 지난 둘째가 또 사고를 쳤나 싶어서 일을 하다말고 얼른 방안으로 뛰어들어갔다. 하지만 둘째는 조용히 자고 있었고 딸애가 보고있던 그림책을 가리키며 놀랍다는 듯 말했다.

“할머니가 사준 이 뽀로로 그림책 말이야.”
“그게 왜?”
“이 노래 마지막에 비행기는 높아-높으면 백두산이라 했잖아.”
“그래서?”
“이 백두산이 아빠 고향에 있는 그 장백산 맞어?”

네댓살정도 아이들의 기억력이란 참 아이러니하다. 방금전 놀던 장난감을 어디 두었는지도 기억 못하다가도 일년전의 연변 여행에서 나누었던 말들을 딸애는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맞어.”
“우와. 신기하다. 어떻게 그 산이 한국 그림책에 다 있지?”

나는 니가 더 신기하다. 어떻게 이런 질문들만 묘하게 골라서 묻지? 나는 입안으로 궁시렁 거리면서 하고있던 일을 계속하러 거실로 나갔다. 딸애가 따라 나와서 종알거렸다.

“엄마. 우리는 왜 한국말 할줄 알어?”

나는 다시 하던 일을 중단하고 고개를 돌려 딸애의 반짝거리는 눈동자를 보았다.

“윤이 친구중 무니싸이라는 친구가 있지?”
“어? 엄마가 어떻게 알어?”
“위챗에 엄마들끼리 친분이 있어. 그건 그렇고. 무니싸이는 한어 안하지?”
“맞아. 무니싸이는 우리랑 한어 하는데 엄마랑 다른 말 해. 한국말도 아니야.”
“무니싸이는 회족이어서 자기 가족과는 자기 민족 언어로 얘기하는 거야. 우리도 마찬가지고.”
“그럼 우리는 무슨 민족이야?”
“우린 조선족이야.”
“그럼 우리는 왜 중국에 살어?”

더이상 이야기를 이어나가다가는 5천년전 단군 신화와 삼국의 역사, 한반도의 생성과 발전, 500년 조선시대와 일제강점시기, 그리고 조선족 이주역사까지 줄줄이 나와야 할 판국이다. 나는 산더미처럼 밀린 일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우리 곧 할머니 보러 한국 가잖아. 그때 얘기해줄께.”

겨우 딸애의 질문에서 벗어났지만 여기가 끝이 아님을 나는 알고있다. 딸애가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 아니다. 일하는 와중에 다시 쳐다보았더니 아이는 방금전의 대화는 까맣게 잊은 듯 뽀로로와 그의 친구들을 앉혀놓고 일장 훈시를 하고 있었다.

“너네 잘 들어. 너넨 한국에서 왔지만 여긴 중국이야. 그러니 이제부턴 한어를 배워야 해. 알았지?”

나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딸애가 태어나기전부터 나는 아이에게 우리말은 꼭 가르치려고 마음먹었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말에 대한 자긍심과 민족문화를 계승, 발전시키려는 거창한 계획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나는 그저 아이와의 소통에서 내가 제일 잘하는 언어를 능수능란하게 사용하고 싶었을 뿐이고 그런 내게 한어는 모어가 아닌 제2언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나는 흑룡강에서 태어나 한족 대학을 다녔고 전공은 일본어였다. 조선족 집거지를 떠나 대도시, 혹은 외국에서 태어난 조선족 후세들이 굳이 우리말을 배워야 되냐에 관해서는 우리 누구나 한번쯤은 참여했던 현실적인 화제였고 나 또한 내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갑론을박의 무수한 쟁점속에서 내가 공감되는 논점들에 고개를 주억거린 적도 많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화제에서 우리 아이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쳐야 한다면서 제일 열기띈 변론을 펼쳐보이던 지인들의 아이들은 지금 거의 다 중국 유치원을 다니고 한어로 소통을 한다. 이것이 대도시에 정착한 우리가 봉착한 첫번째 교육현실의 벽이였다.

우리 아이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큰애가 두돌반이 지나자 나는 아이를 집근처 중국 유치원에 보내기로 결정지었다. 내가 살고있는 이 남방도시는 해마다 두번의 국제박람회가 열리는 경제무역이 발달한 도시이긴 하나 우리말을 접촉할수 있는 국제유치원이나 조선족유치원은 집과는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서 매일 뻐스나 택시로 다닌다는 것은 그다지 현실적이 못되었다. 다만 그동안 집에서 우리말만 하던 아이가 한족유치원 적응을 못할가봐 나는 아이를 반년동안 집근처 조기교육센터에 먼저 보내보기로 계획했다.

딸애를 조기교육센터로 보내기전 우리는 출장차 아이들을 데리고 남편의 고향에 다녀왔었다. 큰애가 두돌반, 둘째가 50일 되는 때였다. 처음 비행기를 타고 먼길을 떠나는 딸애는 비행시간 내내 쉬임없이 종알거렸고 나는 그 기상천외한 질문들에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 다행이 남편이 인내심을 가지고 딸애의 여러가지 질문에 대답을 해주었다.

“저기가 백두산이야?”

장시간의 비행에 노곤해진 내가 풋잠에서 깨어났을 때 딸애가 비행기 창문에 바싹 붙어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맞아. 우리말로는 백두산, 중국어로는 장백산이라고 하지. 백두산은 우리 민족의 영산이란다.”
“근데 왜 이름이 틀려?”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거야. 하지만 명칭은 다르지만 둘 다 엄연히 같은 산을 말하는 거고.”
“내가 아빠보고 아버지라고 해도 되는 것처럼?”
“같은 맥락이긴 하네.”
“그런데 왜 백두산이 저리 작아?”
“그건 우리가 지금 백두산보다 더 높은 하늘을 날고있기 때문이야.”

부녀간의 진지한 대화에 나는 피씩 웃은 후 계속 잠을 청했다. 그번의 일정은 빡빡했다. 고향의 일부 일들을 처리한 후 남편은 자신의 집이 있었던 마을을 한번 돌아보자고 제의했고 우리는 흔쾌히 따라나섰다. 하늘은 높고 청량했고 가을이 소슬하게 짙어가는 마을은 고즈넉하고 평화로웠다. 그날 딸애는 하루종일 망아지처럼 뛰어다니며 가끔씩 환희에 겨운 웃음을 터뜨렸다.

“엄마, 난 아빠 고향이 너무 좋아!”
“왜?”
“여긴 바람도 시원하고 맛있는 것도 많고…그리고 중요한 건 다 우리말 해.”
“응?”
“저기 이모들이랑 아저씨들 말이야. 다 우리말 해. 저기 놀이터에 오빠도 우리말 하고. 너무 좋아.”
“그런데 윤이 이제 어린이집 가면 다들 한어를 할 텐데. 괜찮아?”
“싫어. 난 우리말 하는 유치원 갈거야. 아빠 고향에서 유치원 다닐거야.”

갑자기 떼를 쓰는 딸애앞에서 우리는 난감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계획에도 없고 생각지도 못했던 변수였다. 일단 아이를 달랠수밖에 없었다.

“일단 광주 가서 한달만 어린이집 다녀보고 그래도 싫다면 다시 생각해보자.”

고향행을 끝낸 후 아이의 첫 단체생활이 시작되었다. 여느 부모들처럼 첫날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서 울고, 텅 빈 집안에 아이의 웃음소리가 없어서 울고, 하원시간이 되어 마중간 내 얼굴을 보고 딸애가 울음을 터뜨려서 같이 부둥켜안고 울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날부터 시도 때도 없이 아이의 지청구를 들어야 했다. 즉 자기를 조기교육센터에 두고 가지 말라는 말이었다.

“엄마, 나 유치원 가기 싫어요…말 못알아들어서 심심해. 부탁해요…”
“엄마랑 약속했잖아. 우리 한달만 딱 다녀보자. 한달후에도 니가 싫다면 엄마가 다시 계획 세워볼께.”

남편은 섣뿔리 아이와 약속한다고 나를 나무람했다.

“한달이 되어서 정말 가기 싫어하면 어떡할 거야.”
“보통 아이들은 보름이면 적응되어서 울지 않는다고 해. 보름후에도 운다면 그건 아이가 특별히 분리불안 정서가 있거나 그 어린이집 선생님들과 아이들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경우야. 그땐 조선족 어린이집으로 바꿔봐야지.”

의연한 태도로 대꾸했지만 내 속은 텅 비어있었다. 다행이 보름이 지나자 아이는 더 이상 울음을 터뜨리지도, 아침에 일어나기 싫다고 떼쓰지도 않았다. 특별히 컨디션이 저조한 날에는 유모차에 앉혀 어린이집에 데려갔고, 네시가 되면 첫사람으로 가서 데려오군 했다. 그렇게 한달이 지나고 두달이 지나자 아이에게 미세한 변화가 찾아왔다.

처음에는 아이가 드디어 한어에 적응을 한거라고 기쁘게 생각했다. 소꿉놀이를 놀때도, 인형놀이를 할때도 아이는 한어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나쁘지 않았다. 가끔 무슨 내용을 말하는지 귀 기울여 들으면서 가만히 웃기도 했다. 그러다가 아이가 샤워를 하면서 자신의 질문에 내가 똑같이 한어 답할 것을 요구해오자 나는 그제야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드디어 정색을 했다.

“싫은데.”
“왜 싫어? 유치원 가면 다 한어로 말해. 선생님도 친구도.”
“그건 그들이 우리 민족이 아니기 때문이야.”
“민족이 뭐야?”
“같은 말을 하고 같은 글을 쓰고….우리만의 고유정서와 의지와 한이 있는…”

아니다…사실 같은 민족이라도 다른 언어를 구사할수도 있지 않은가. 언어에 대한 이와 같은 편협한 생각은 어쩌면 종족에 대한 지나친 강조로서 그것은 우리를 민족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한정된 문화 안에 갇혀버리게 할 것이다. 아이에게 그렇게 가르칠수는 없었다. 나는 얼른 말을 바꿨다.

“그게 아니라….엄마는 한어를 못해.”
“정말?”
“응. 그래서 윤이 집에 오면 우리말 하는 게 어때? 어린이집 가면 한어로 말해도 돼.”
“그럼, 나중에 윤이 크면 엄마한테 한어 가르쳐줄께.”
“알았어.”

그렇게 아이와 협상을 했다. 아이는 충실하게 우리를 배려했다. 어쩌다 한어 한마디 하다가도 아 맞다, 하더니 바로 우리말로 바꿔주었다. 집에 오면 우리말, 조기교육센터에 가면 한어를 사용하며 아이는 차츰 이런 생활에 적응되어갔고 나는 내자신의 순발력과 임기응변에 한동안 득의양양해 있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런 행복한 시간은 내게 그리 길게 주어지지 않았다. 하루는 물건을 분실해서 택배기사와 전화로 언쟁을 하고있는데 아이가 그날따라 일찍 하원해서 아빠와 함께 집에 들어섰다. 전화를 끊은 내게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짜고짜 따지기 시작했다.

“엄마! 엄마는 한어 할줄 모른다고 했는데 잘하네? 왜 윤이한테 거짓말을 한 거야? 엄마 거짓말쟁이!”
“그게…”
“엄마는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거짓말 해? 엄마는 나쁜 어른이야!”

아이의 배신감이 꽤 컸던 모양이다. 울면서 방안으로 들어가버린 아이의 뒷모습에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순간 자신이 뭐하는 건가 싶었다. 민족과 언어…우리가 조선족이 아니거나, 아이가 우리말을 못한다고 행복하지 않았을까…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느끼는 정체성 고민과 가치관, 인생관들을 굳이 우리 아이에게 강요할 필요가 있었을까…

아이가 우리말로 재잘대고 우리 글을 구사할수 있다는 것은 구경 나에겐 어떤 의미였을까. 어쩌면 글로벌시대에 대도시 환경의 치열하고 살벌한 경쟁을 뚫고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냈다는, 그리고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우리 아이는 언어 한가지를 더 구사할수 있다는 부모로서의 내 개인적인 욕심과 이기심이 아니었던가…

어쩌면 내가 간과한 것은 비단 내 거짓말에 속은 아이의 마음 상처뿐이 아니라, 아이를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지 않고 부모의 성장환경과 생존능력에 의해 얻어낸 경험만으로 아이의 선택을 좌우지하고 아이의 인생에 개입하는 생물학적 부모로서의 꼰대짓을 그토록 혐오했으면서도 그 횡포를 답습하고 있었던 내자신의 이중적인 모습이었다.

긴 시간의 고민을 끝내고 내가 아이의 방문을 두드렸을 때, 아이는 줄느런히 인형을 모아놓고 훈시를 하고있었다.

“너희들은 거짓말을 해서는 절대 안돼? 알겠지? 그러면 내가 너무 속상하단 말이야.”
“엄마가 미안해.”

내 말에 아이는 고개를 돌렸다. 나는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고 아이의 눈높이에 내 시선을 맞추었다.

“엄마가 사과할께. 하지만 엄마는 나쁜 어른은 아니야. 나쁜 행동을 한 거지. 그러니까 우리 윤이 엄마 용서해줄수 있지? 이렇게 제때에 사과를 하고, 잘못을 반성하면 나쁜 어른이 아닌 거야.”
“윤이 알았어.”

오래 삐칠줄 알았던 아이가 순순히 대답을 했다. 아이가 내 말을 온전히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반성으로 그번 화해는 빨랐고 나는 더이상 아이에게 내가 원하는 것을 강요하지 않기로 했다.

그후 나는 최대한 아이 취미를 우선으로 모든 것을 맞춰주었다. 아이가 중국어로 라디오를 듣겠다고 하면 그대로 켜주었고, “겨울왕국” 중국어 버전을 구해달라고 해도 두말없이 응했다. 대신 아이가 내게 한어로 말을 걸어오면 나는 여전히 우리말로 답했다. 그것이 내 마지노선이었다. 그리고 나는 나대로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아이가 옆에서 기웃거리면 아이에게도 우리말과 한어로 된 책들을 무작위로 건네주었지만 꼭 어떤 것을 읽으라 요구하지는 않았다.

일년후, 아이는 집근처 중국 유치원으로 입학했다. 유치원에서 아이는 모든 것을 순조롭게 적응해나갔다. 한국에서 금방 와서 한반에 다니는 친구의 통역을 해주기도 하고, 유치원 친구들과 한어로 다투고 화해하기도 한다. 그리고 집에 오면 아빠와 호랑이 놀이를 하면서 “아빠 윤이 잡아먹지 마! 간장도 없어서 맛이 없잖아!”하고 꽥꽥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내가 남편과 언성을 높일때 남편이 “윤이 앞에서 지금 뭐하는 거야!”라고 나무람하면 “윤이 뒤로 갈께요.” 하는 썰렁개그를 선보여 우리를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만든다.

두 아이를 키우며 느끼는 건데 육아는 참으로 미숙하지만 재미있는 과정인 것 같다. 딸애의 경험에 비추어 둘째는 조기교육센터 과정을 생략하기로 했다. 큰 애가 멘토 역할을 톡톡히 해주어서인지 두돌이 갓 지난 둘째는 “엄마 왜 자꾸 나한테 짜증내?”, “아빠, 누나가 준이 장난감 빼앗고 혼냈어.”라고 비교적 긴 문구를 정확하게 구사한다. 때로는 한어도 가끔 알아듣고 말한다.

“경비아저씨 안녕하세요(保安叔叔好). 고마워요(谢谢). 다들 안녕(大家好)…”

둘째가 외출할 때 꼭 말하는 이 몇몇 단어들에 경비아저씨와 집밑 한족아줌마들은 폭소를 터뜨리기 일쑤다. 물론 이것은 다 딸애의 공로였다.

구정에 약속했던 대로 아이들을 데리고 한국에 다녀왔다. 딸애를 데리고 동대문에 갈때 달리는 택시안에서 아이는 희귀한 광경을 본 것마냥 나에게 큰소리로 말했다.

“엄마! 한국은 너무 좋은거 같아!”
“쉿, 조용히 얘기해. 왜 좋은거 같아?”
“여긴 다 한국말 잘해. 그리고 심지어 여기 기사아저씨도 한국말 잘해.”
“…”
“엄마! 나 여기 있다가 중국어 잊어먹으면 어떡하지? 그래서 고민이야.”
“보름만에 뭘 또 잊어먹어. 걱정도 팔자다.”

내가 듣다못해 퉁을 주자 운전에 열중하시던 백발의 기사아저씨는 핫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꼬마야, 넌 어디서 왔니?”
“난 중국에서 왔어요. 우리는 조선족인데 중국에서 살아요. 그런데 중국에서도 우리는 한국말 해요. 그리고 나는 중국말도 잘해요.”

나는 아예 아이의 입을 틀어막거나, 아이와 일행이 아니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딸애의 목소리는 왜 그리 또랑또랑하며, 표정은 어찌 그리 자랑스러운지…혹시라도 조선족에 대한 편견이나 선입견때문에 상처를 받을가봐 노심초사했는데 딸애는 밝고 명랑한 모습으로 자신이 조선족이라고 해맑게 대답하고 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이런 이중 정체성 고민이, 이 아이에게는 단순히 두가지 언어를 장악하고 있는, 더없이 자랑스러운 일로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은 아이의 순수한 마음처럼 가끔 이렇게 간단하게 정리될 때도 있다. 나는 고개를 들고 허리를 곧게 폈다.

“정말 대단하구나. 아저씨가 선물 줄께.”

목적지에 도착한 기사아저씨는 호주머니에서 사탕 한줌을 꺼내 아이 손에 쥐어주었다. 그리고는 머리를 숙여 인사하는 아이에게 말했다.

“참 똘망똘망하고 귀엽네. 엄마가 행복하시겠어.”
“아,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아저씨,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앵무새처럼 나를 따라 인사하는 아이의 손을 잡고 청계천을 따라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을 지나 덕수궁 돌담길을 걸었다. 늦겨울 오후의 햇볕이 따뜻하게 우리를 어루만졌고 나는 아이와 함께 한국에 대한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한편 방금전 기사아저씨의 말이 귀전에 오래도록 맴돌았다. 행복한 엄마라…

솔직히 아이가 갓 태어났을 때, 나는 내가 부모니까 그래도 아이의 삶에 어느정도 개입할 권리는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아이의 인생에 멘토 역할을 하고 중요한 조언 정도는 건넬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육아의 길은 그토록 어렵고 험난했으며 나는 급하게 성과를 내려다가 하마터면 아이의 신뢰를 잃는 부모로 전락될뻔 했다. 이제 나는 더이상 아이의 장래에 대해 불안해하지 않고 한발 떨어저 바라볼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부모라는 직책에 임하고 싶다. 아이에게 나와 같은 피가 흐르는 이상, 아이는 내게 동질감을 느끼고 모어를 결정할 것이니 그냥 기다리고 지켜봐주기로 했다. 이런 평정심이 행복이라면 행복일까.

어쩌면 지금은 단지 우리말 지킴이에 대한 작은 고민이지만, 앞으로 아이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면 수많은 질문들이 아이의 머리를 휘저으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부모로서 아이의 인생 선택에 전적으로 개입하지 않더라도, 아이의 성장과정을 지켜봐주고 인도해주며 부모로서 최선을 다한 대답들을 준비해두지 않으면 안될 일이다.

집문을 나서면 쓰는 언어가 달라지고, 인사하는 법과 문화생활도 차이가 있는 주거환경은 피할수 없는 현실이고, 이제 아이에게 정체성을 정립해주는 일은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와 아이에게 피할수 없는 운명적인 선택이 될 것이다.

철학자 에르네스트 르낭은, 민족은 지리적 조건, 언어, 종교 같은 문화·역사적 조건으로 규정되지 않고 심지어 생물학적 인종학으로도 쉽게 규정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런 논리로 르낭은 지역 주민 스스로의 의지가 귀속 여부를 결정짓는 이유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고보면 한 사람의 민족정체성의 정립은 전적으로 자신의 의지에 달렸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나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이런 고민들을 온전한 우리말로 내 아이와 소통하고 싶다. 그리고 앞으로 정체성 혼란을 겪을 아이가 만일 내게 고민상담을 요청해올 때, 그럴 때마다 나는 아이에게 신뢰를 얻은 부모로서 조금은 당당하게, 조금은 정성을 들여서 명료하게 말해주고 싶다.

“우린 중국에서 태어나서 살고있고, 우리말과 한어를 동시에 구사할수 있는 자랑스러운 조선족이야.”


(제21회 KBS북방동포 체험수기 우수상 수상작)
추천 (3) 선물 (0명)
IP: ♡.109.♡.184
로즈박 (♡.175.♡.27) - 2023/01/31 13:03:14

백번 옳은 말씀이죠..우린 중국에서 나서자란 자랑스러운 조선족이죠..저도 우리 아들을 처음엔 중국유치원으로 보냇는데 반나절도 안되서 울고불고 쌩 난리를 피워서 할수없이 조선족유치원에 보냇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잘한 일 같애요..중국에서 살려면 중국말을 무조건 잘 배워야 한다고만 생각햇던게 어쩜 잘못된 생각이엿을지도..지금은 중국말도 잘하고 우리 말도 잘해요..ㅎㅎ
글쓴님~따님 너무 똑똑하고 야무진거 같애요..옆에 잇다면 저도 칭찬해주고싶어요..이쁘게 잘 키우시길 바랄게요~~

l판도라l (♡.109.♡.184) - 2023/01/31 13:35:15

이 글을 쓸때까진 유치원이어서 우리말 곧잘 했는데 지금 소학교 2학년인데 잘 안해요.ㅋㅋㅋ그래서 다시 주말마다 온라인 한국어수업 보고 있어요. 암튼 나중에 자기가 다시 선택을 하더라도 어릴때 부모라는 이유로 독단적으로 방향 잡아주기는 좀 그래요. 다만 삶에는 정답이 없고 모범답안만 있는 것처럼, 시간이 오래 가야 어떤게 잘 된 일인지 어떤 처리가 미흡했는지 알수 있을거 같아요. 지금은 그냥 지켜보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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