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타인데이의 선물

l판도라l | 2023.02.01 08:03:40 댓글: 2 조회: 645 추천: 2
분류수필·산문 https://life.moyiza.kr/mywriting/4438377
20년전의 발렌타인데이었다.아마 수능을 앞둔 고3의 마지막 발렌타인데이라 기억된다.

나는 고2때 새로 이 학교에 전학을 해온데다 전학하자마자 눈코뜰새없는 모의고사로 심신이 극도로 지쳐있는 상태였다.

그 슬럼프가 어느 정도였냐면,그때 일기를 소장해두었는데 후에 내가 펼쳐보고 유언장인줄 착각할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그때의 나는 항상 야자시간을 펑크 내고 녹상청 같은데 쭈크리고 앉아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홍콩영화들을 멍하니 쳐다보다 영화가 끝나면 숙소에 들어오군 했었다.

그러다 어느날 야자시간에 학교에 나갔는데 애들이 나를 보자마자 마구 웃어대기 시작했다.

“왔다,왔어!”
“뭐가.”

잔뜩 짜증섞인 내 대꾸에 옆책상 친구가 그 이유를 알려준다.

즉 어제 앞책상 메이뉴(美妞,이하 메이뉴로 통일)가 하얀 정장 차림에 장미꽃과 쵸콜릿을 가지고 학교를 찾아왔었다는 것이다.

이 메이뉴로 놓고 말하면 아마 세번째 모의고사때 탈락되어 학교를 그만 다니게 된 앞책상 남학생이였다.

전학한 내가 친구를 사귀지 못하고 혼자 다녔을때,수업시간에 수학교과서를 깜빡한 사실을 알고 그가 한번 빌려준 것이 빌미로 되어 가끔 간단한 대화정도 주고받던 사이었다.

“밥 먹었어?”
“응.”
“심심한데 오목 바둑(五子棋) 놀까?”
“그러지머.”

내 말이 끝나기 바쁘게 종이를 북 찢어서 신나게 바둑놀이를 하던 그의 모습이 한참은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세번째 모의고사가 끝나 수능을 보는 학생수가 반이상 줄어들었을 때였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대학 입학률을 높이기 위해 혹독한 모의고사를 통해 매번 성적이 제일 뒤쳐진 몇몇 학생들을 탈락시켰고,이 제도는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는 내게도 큰 스트레스가 되었다.가뜩이나 전학때문에 수학과 역사 등은 진도가 한참은 뒤쳐진데다,들쑥날쑥한 수학 성적때문에 모의고사 성적도 큰 데미지를 입었기 때문이다.

세번째 모의고사 성적이 예상대로 나오지 못하자 나는 일기장에 퇴폐적인 내용을 휘갈겨댔고,야자는 물론 수업시간도 펑크가 일상이었으니 메이뉴가 보이지 않는다 해도 큰 관심을 가지지는 않았던 것이다.

“걔가 왔는데 뭐?”
“이 바보야!널 찾아왔는데 니가 없어서 오늘 다시 온댔어.”
“뭐?”

멍해진 내 표정에 애들이 또 배꼽을 잡았다.나는 화가 나서 책가방에 책들을 와락와락 쑤셔넣었다.

“내가 니네 놀림거리냐?갈래.”
“저기 온다!”

누군가 다시 소리쳤다.애들은 우르르 창문가로 몰려가자 나는 책가방을 메고 창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휴우.정말로 그가 온다.

운동장 저쪽켠에서 하얀 정장차림의 한 사람이 가까워지고 있었다.한손이는 장미꽃 한송이를,다른 한손에는 곱게 포장한 초콜릿 하나를 받쳐들고 자신 특유의 걸음걸이로 느릿느릿 다가오는 그는 얼굴이 경직된 것이 사뭇 긴장된 표정이다.

여기서 잠깐 부연설명을 하자면 그가 메이뉴라는 별칭을 얻은 데에는 바로 그의 특이한 걸음걸이 때문이었다.

작달막한 체구에 가무잡잡한 얼굴,거기에 비뚤비뚤한 걸음걸이에 가끔 새끼손가락을 쳐드는 행동때문에 붙여진 이 별명은 그를 사춘기때부터 따라다녔다고 한다.

그런 그가 저런 차림으로 오고 있으니 애들이 웃을수밖에 없었다.나는 급히 교실을 빠져나가려 했으나 몇몇 학생들에게 붙잡혔고,그렇게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문쪽에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너,나오랜다.”

문에서 제일 가까운 자리에 앉았던 학생이 나를 손짓하자,애들은 이제는 책상까지 두드려가며 포복절도했다.

나는 나를 붙잡았던 학생들에게 등을 떠밀려 교실문을 나섰다.문밖에서 그가 우두커니 서있었고 나는 쌩하고 그를 지나쳤다.

“우리 얘기 좀...”
“따라와.”

교실안에서 새된 소리까지 내면서 웃는 소리가 들렸다.나는 그를 데리고 복도 한켠 비상계단쪽으로 향했다.

“말해봐.”

그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채 내가 말했다.팔짱을 끼고 싶었지만 그건 간신히 참고 계단 손잡이에 몸을 기댄후 내가 쌀쌀하게 말했다.

“시간은 길지 않게.”
“이거 받아주라.”

그가 내미는 장미꽃과 쵸콜릿을 내려다 보다가 나는 고개를 들었다.

“내가 왜?”
“그게 그러니까...”
“미안하지만 난 그런 생각 전혀 없어.공부가 우선이고 또...지금 상황에선 만사가 귀찮으니까.”

그의 말을 자르며 내가 말했다.아마 이어지는 그의 고백을 들어줄 자신이 없어서인지도 몰랐다.

“그런 뜻이 아니야.떠날때 작별인사도 못한 게 마음에 걸려서.”
“...”
“학교에도 잘 안나오는 거 같고.수능이 당금인데 지금이 제일 열심히 공부해야 할 때가 아니야?”
“그게 너랑 뭔 상관인데?”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내 말에는 가시가 돋쳐있었다.오늘 나를 학생들의 놀림거리로 되게 만든 장본인이 그여서 나는 그만 불만의 화살을 그에게 돌리고 말았다.

“부탁인데 제발 좀 그만해!바둑 좀 같이 놀았다고 그게 뭐?누가 이렇게 와서 이딴거 달래?지금 애들이 얼마나 웃는지 안들려?”
“미안하다.”

그가 고개를 떨구고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난 그저...내가 이렇게 하면 니가 잼있어할거 같아서.너 지금 모든 것에 흥미 잃었잖아..”

계속 화를 내려던 나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그는 나도 모르는 내 슬럼프를 언제 알았을까.

“전학와서 친구도 별로 없고 모의고사는 숨 쉴 틈을 안주고...수능은 다가오고 미래는 불확실하고.다 그래.”
“....”
“너만 그러는게 아니란 말이다.난 수능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어.울 엄마 많이 아프셔.울 엄마 꿈이 내가 입시장까지 들어가는 건데 말이야.”
“...”
“나 내일 여길 떠나.수능을 볼수 없으니 하루라도 빨리 큰 도시 가서 취직하려고.그런데 떠나기전 걸리더라.”
“...”
“니 일기장을 봤어.우연하게...니가 책상위에 펼쳐놓고 나간 적 있어.괴로워서 죽고...싶다고 썼더라.”
“아 그거...그냥 막 쓴거야.일기는 원래 다 그런게 아닌가?”

나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딴데로 돌렸다.

“죽고싶다고 써도...한밤중에 기차 고동소리 들으면서 저 밑에 누우면 어떤 느낌일까.이정도까지 쓰진 않아.”
“...”
“그러니까 받아줘.그냥 니가 다니던 학교에 메이뉴라는 한 우습광스러운 학생이 있었는데...그 학생이 발렌타인데이에 흰 정장을 입고 꽃과 쵸콜릿을 가지고 왔더라...그래서 엄청 웃었다...그렇게 기억 한조각으로 남겨두게.”

나는 그를 바라보면서 한마디도 말할수 없었다.머리숙여 그가 내민 것들을 한참 바라보다 내가 말했다.

“쵸콜릿은 받을께.꽃은 너 가져.”
“...도로 가져가라고?”
“뭐 어때.가서 어머님께 선물 받았다고 하렴.”

그가 고개를 들었다.가무스름한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고,눈에는 잠깐이었지만 물기가 스쳐 지나는 걸 나는 보았다.다시 얼굴을 돌리며 그가 말했다.

“공부 잘해라.”
“...고마워.”
“내가 고맙지.”

무슨 말인지 몰라 고개를 기웃하자 그가 피씩 웃었다.

“아까 화내면서도 왜 안된다는 얘긴 안하더라?공부 핑계 대줘서 고마웠어.”
“아 그거야 뭐.”

그동안 바둑 놀아준 답례라고 얘기하려다 나도 그냥 희미하게 웃고 말았다.

교실에 들어오니 그때까지도 고함소리,휫파람소리,책상 두드리는 소리에 교실안은 아수라장이 되어있었다.나는 말없이 책상에 앉았고 잔뜩 궁금한 얼굴을 한 애들 몇이 바싹 내곁으로 다가왔다.

“뭐래?좋아한대?고백받았어?대답했어?”
“했네,했어...쵸콜릿 받은거 보면 몰라?이히히히...”

서로 옆구리 쥐어박으며 킥킥대는 애들을 무시한채 나는 교과서를 펼쳐들고 조용히 복습을 시작했다.

......

시간이 아주 오래 지난후 나는 우연히 그때의 일기장을 다시 펼쳐보았다.유언장처럼 휘갈겼던 피폐한 내용뒤에는 이런 내용이 더 추가되어 있었다.

“오늘 누군가 발렌타인데이 선물을 가지고 왔다.꼭 마치 산타 할아버지가 크리스마스 선물을 가져온 것처럼.“
“그러니 이제는 그만 징징대고 마음 추스려야겠다.얼마 남지 않은 시간,열심히 공부해서 입시에 응해야겠다.”
“내가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수 있다는 걸...가르쳐준 사람 몫까지.”

연변일보 3월9일
로즈박님이 100포인트 선물하셨습니다.
추천 (2) 선물 (1명)
IP: ♡.36.♡.68
로즈박 (♡.243.♡.193) - 2023/02/02 00:33:30

메이뉴 그분 천사같은 분이네요..어쩌면 님을 좋아햇을지도..장미꽃은 아무나 주는거 아니거든요..글쓴님이 착하길래 옆에도 이렇게 착하신분이 잇는거예요..다행이 그분 덕분에 힘든 시기를 이겨냇으니 어쩜 그분은 님을 구해주신거네요..어딘가에서 아마도 잘 살고계실거예요..제가 다 고맙네요..ㅎㅎ

l판도라l (♡.36.♡.68) - 2023/02/02 11:19:56

일기삼아 끄적였던 글을 한번 수필화 해보았습니다. 물론 실화는 맞구요. 고2때 전학을 한 제게는 따뜻함을 베풀어주었던 친구라서 기억에 남았습니다.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을거라고 믿습니다.

22,915 개의 글이 있습니다.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조회
보라
2006-08-09
33
62097
강자아
2024-03-03
4
676
나단비
2024-03-03
2
172
죽으나사나
2024-03-03
1
168
죽으나사나
2024-03-02
1
188
죽으나사나
2024-03-01
1
163
죽으나사나
2024-03-01
1
149
죽으나사나
2024-02-29
3
512
나단비
2024-02-29
4
516
죽으나사나
2024-02-29
2
161
죽으나사나
2024-02-28
2
186
죽으나사나
2024-02-28
2
167
죽으나사나
2024-02-27
2
179
죽으나사나
2024-02-26
2
184
죽으나사나
2024-02-24
2
197
죽으나사나
2024-02-23
2
180
죽으나사나
2024-02-21
2
225
죽으나사나
2024-02-21
1
211
죽으나사나
2024-02-19
1
268
죽으나사나
2024-02-19
2
257
죽으나사나
2024-02-18
2
550
죽으나사나
2024-02-17
2
636
죽으나사나
2024-02-16
1
293
죽으나사나
2024-02-15
1
278
죽으나사나
2024-02-14
2
239
죽으나사나
2024-02-10
3
400
죽으나사나
2024-02-06
0
396
죽으나사나
2024-02-05
3
483
모이자 모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