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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길시 신화서점 조선말 도서

엄마의 상도

l판도라l | 2023.02.02 18:38:44 댓글: 6 조회: 796 추천: 2
분류타향수기 https://life.moyiza.kr/mywriting/4438913
내가 기억이 있을 때부터 우리 엄마는 장사를 하셨다.

처음엔 아마 우리 세 남매의 학비를 보태기 위해 시작한 얼음과자 장사였던 것 같았다. 아이스박스를 하나 구해다가 테이프로 꽁꽁 감고 노끈을 양쪽으로 달아맨후 엄마는 자전거 뒤쪽에 그것을 달고 마을들을 다녔고 가끔 영화관 앞에 장사진을 치고있는 장사아치들속에 끼어앉아 있기도 했다. 희고 곱던 얼굴은 해볕에 까맣게 그슬렸고 때이르게 서리앉은 머리며 흰 셔츠에 할머니들의 몸뻬바지를 입고 돈가방을 허리에 질끈 동인 엄마의 모습은 영낙없이 동네 아이들의 웃음거리로 되었다.

“야, 너네 할머니가 영화관 앞에서 얼음과자를 팔아.”

겨우 서른여덟의 나이에 할머니 소리를 들은 엄마의 마음은 오죽했을까. 하지만 그때는 그런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기 보다는 내 자신의 수치심과 열등감이 우선인 나이었다.

“엄마, 장사 좀 안하면 안돼요? 아니면 제발 우리 동네에서만 하지 말아요.”

철없는 내 요구를 엄마는 순순히 들어주셨다. 그렇게 이어간 것은 찰떡과 김치장사였다. 엄마는 매일같이 꼭두새벽에 일어나 찰떡을 치고 떡고물을 만드셨다. 우리가 등교할때쯤 엄마는 어느새 자전거에 찰떡과 김치를 양쪽 가득 싣고 인근 한족동네로 출발하신다. 그렇게 하루를 돌아치다가 우리가 거의 잠들 때에야 지친 몸을 끌고 집에 들어오시는데 가끔은 너무 힘들어서 들어온 옷 그대로 쓰러져 주무시다가 이튿날 새벽에 다시 칼같이 일어나시군 했다. 우리 세 남매의 학비와 장기환자인 동생의 약값은 엄마가 그렇게 억척스럽게 일한 대가로 조금의 보탬이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장사는 오래 가지 못했다. 어느 늦은 저녁, 자전거를 타고 돌아오다가 마주오는 트럭과 충돌사고가 날뻔 했었고 엄마는 핸들을 틀어 길옆 도랑으로 깊숙히 박히고 말았다. 상한 다리로 자전거를 끌고 이십여리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온 엄마는 몸은 둘째치고 자전거가 형편없이 망가져서 더이상 장사를 하기 어려워진 것에 더 안타까워했고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후 엄마는 삼륜차를 하나 사서 채소와 물고기 장사를 시작하셨다. 오이와 콩나물은 겨울에 비싼 가격에 팔수는 있었지만 얼어서 상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엄마는 삼륜차위의 채소 광주리에 솜옷들을 모조리 덮고 당신은 덜덜 떨면서 찬바람에 서있었다. 가끔 몸이라도 녹이라고 소매점 주인이 선심을 베풀면 눈치껏 들어가 있으면서 소매점 일손을 거들어주기도 했다.

그때는 나도 철이 들어 가끔 엄마를 도와 삼륜차를 밀기도 하고 채소를 나르기도 했다. 그렇게 두번의 겨울이 지나고 내가 삼륜차 모는 방법도 익숙해질 무렵, 엄마는 소매점을 인수받았다. 엄마에게 선심을 베풀던 그 소매점 주인이 한국으로 나가느라 급하게 양도를 했던 것이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데 엄마가 인수의향을 밝히자 소매점 주인은 잠시 고민하더니 그러면 양도비를 받지 않겠다고 했다.

그렇게 또 여섯번의 계절이 지났다. 그 6년동안 엄마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문을 열었다. 심지어 구정에도 어김없이 영업을 하는 엄마에게 마을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다. 정월 초하루날 술이 딱 끊겨 소매점을 찾는 손님이 있다는 것이 엄마의 이유였다. 식구들은 설날마저 오붓하게 쉬지 못한다고 의견이 분분했지만 그날 하루 매상이 평소 열흘의 매상과 맞먹는다는 엄마의 고집에 타협할수밖에 없었다. 엄마 덕분에 우리 생활은 차츰 안정되기 시작했다.

경상도와 전라도가 섞여사는 우리 마을은 일찍 한국바람이 불었다. 그무렵 친지방문과 노무송출도 거의 수속이 끝나고 그외에 출국할 방법이 없는 사람들은 밀수배를 타기 시작했다. 몇년간 꾸준한 매출을 이어나가던 엄마의 소매점은 마을의 청장년들이 빠지기 시작하면서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남은 사람들은 거개가 노인과 아이들이 아니면 할일없이 빈들거리는 건달 청년들이었다. 그 청년들은 하루가 멀다하게 소매점에 와서 외상으로 담배와 술을 가져갔고 그 금액이 천정부지로 치솟자 엄마는 그들의 우두머리에게 외상값을 재촉했다. 그날 저녁 소매점에는 도적이 들었고 담배와 술 등 값나가는 상품들은 물론 다른 재고들까지 깡그리 수탈해갔다. 피해금액이 커서 파출소에 신고를 했으나 혐의가 있는 청년들이 이미 모조리 마을을 떠난 뒤었다. 엄마는 분을 삼키며 소매점을 정리한 후 마을 장정들과 밀수배를 올랐지만 엄마가 탄 배는 동태평양을 보름동안 떠돌다가 단동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 후 엄마는 하해를 결심했다 엄마는 북경에서 가이드를 하고있던 언니에게서 그무렵 한국으로 출국하는 사람들이 다 북경 영사관을 통해 비자를 발급받아야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공직에 계시지만 건강 상황이 안좋은 아버지를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엄마는 당시 고향에서 고중을 다니고있던 나만 남겨놓고 결연히 이사짐을 꾸렸다.

북경에서 엄마는 작은 삼합원 주택을 임대하고 영사관 앞에서 줄을 서서 비자접수를 기다리는 조선족 상대로 민박을 운영하고 출국수속 대행업무까지 겸했다. 그때의 대행업무에는 대신 영사관앞 줄 서주기, 결혼비자 교제 및 혼인 경위서 쓰기, 비자연장 사유서 제출하기, 비자대행해주는 여행사와 연결시켜주기 등 여러가지가 있었는데 엄마가 경위서나 사유서를 잘 작성한 덕에 비자처리가 순조롭게 된 손님들이 있었다. 이것이 입소문을 타 너도나도 경위서나 사유서를 써달라고 민박에 찾아왔다. 엄마의 민박은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내가 방학때 집에 가면 엄마 주위는 항상 출국준비하는 아주머니들로 붐비었다.

한국으로의 출국붐은 정책이 여러번 변하면서 차츰 다른 편법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중국측 브로커에게 6만원을 내기로 하고 한국땅을 밟는 동시에 그 금액을 브로커에게 넘겨주는 방법이었다. 여기에는 중국측 담보인이 필요했는데 민박을 거쳐간 엄마의 지인 두명이 엄마를 담보인으로 써넣으면서 일이 터졌다. 그 두사람은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선후로 잠적을 해버렸고, 엄마는 그들의 수속비 12만원을 빚으로 고스란히 떠안게 되었다. 그때는 바로 내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이었고 엄마는 북경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광주로 이사를 했다.

광주에서 엄마는 북경에서 하던대로 민박을 꾸렸지만 이번에는 출국비자 대행이 아닌 도매무역대행을 겸했다. 대신 민박에 주숙하는 손님에게는 가이드 비용을 따로 청구하지 않고 엄마가 가이드를 자청해나섰다. 민박손님들은 제품을 사입해서 물류사를 통해 보낸 후 엄마에게 후속적인 무역대행을 부탁했다. 그중에는 엄마에게 무료가이드만 실컷 시키고 몇일후 다른 민박으로 옮기는 얍삽한 손님들이 있는가 하면 보름씩 주숙하다가 마지막엔 돈이 없어 민박비를 내지 못한다고 칼을 휘드르는 무지막지한 손님도 있었다.

금방 졸업을 하고 광주로 온 나는 이런 불의의 일들이 내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을 허용할수 없었다. 엄마는 경찰에 신고하려는 나를 말렸고 내가 없는 틈을 타서 그 손님에게 차비까지 줘서 집으로 보냈다. 나는 그런 엄마를 나약하다고 비난했지만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차츰 엄마의 일처리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내 마음속의 크다란 우상이었던 엄마는 지금은 손해를 보고도 아무 소리 못하는 겁쟁이로 전락해가는 것만 같았다.

“왜 엄마는 항상 이렇게 수지 안맞는 장사를 해요? 우리가 남들보다 적게 받고 안받는다고 그 사람들이 언제 한번 치하라도 해줬어요? 괜히 시장룰만 흐리고 이게 엄마의 상도인가요? 요즘 세상엔 그러면 만만하게 본단 말이에요!”

엄마는 놀란 기색으로 한참이나 나를 보았다. 나도 안다. 오랜 시간 세파에 부대껴온 엄마는 어쩌면 엄마 나름대로 기준이 있겠지만 그때 광주의 무역시장에서는 좀이라도 야비한 사람을 만나면 일만 실컷 부려먹고 물품대금도 주지 않은 채 잠적을 해버리는 경우도 많았다. 나의 이런 걱정은 공연한 노파심이 아니었다.

그해 구정을 앞두고 민박에 주숙한 한 손님이 사입비를 환전하려고 엄마를 찾았다. 납기를 맞추려면 급히 써야 하는 돈인데 당시 은행에는 하루에 오천원밖에 환전하지 못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엄마는 은행근처에서 진을 치고 앉아있는 개인환전상에게 환전하면 어떻겠냐고 제의했고 그 손님은 흔쾌히 허락했다. 하지만 분명 환전당시에는 만삼천이었는데 민박에 돌아와서 다시 헤어보니 6백원이나 부족했다. 엄마 돈으로 그 6백원을 보태주려다가 불길한 생각이 든 엄마는 바꾼 인민폐를 은행에 들고 가서 문의했고 은행에서는 그 돈이 확실히 모두 가짜라는 것을 확인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조사를 받고 민박으로 돌아온 엄마는 얼굴이 백지장처럼 질린 손님에게 집의 전 재산인 만이천원을 털어서 내놓았다. 설 쇠느라 모은 돈이지만 일이 이렇게 되어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손님은 돈뭉치를 받아들고 반나절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튿날 비행기 시간을 앞두고 그 손님은 엄마에게 구정준비를 하라고 삼천원을 내놓았다. 그리고는 여러번 중국을 다녀갔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고 또 그 돈을 받아서 미안하다는 말을 남겼다. 엄마는 괜찮다고 웃으면서 그 손님을 보냈지만, 그 일로 구정내내 나의 지청구를 들어야만 했다.

“아무리 이 일에 엄마 책임이 있다고 해도 도의상 반반씩 부담해야지 엄마가 독박 쓰는 게 어딨어요? 대체 엄마는 왜 그런 거에요?”
“글쎄…그래야만 할 거 같아.”

엄마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리고 구정이 지난 후 그 손님은 다시 크다란 짐을 끌고 민박을 찾아왔다.

“실례가 되겠는지는 모르겠는데...이모님, 저랑 한번 일해보지 않으시겠어요?”

그렇게 그 손님은 엄마의 사장이 되었고, 함께 일하는 10년동안 엄마에 대한 사장의 신뢰는 굳건했다. 엄마는 그동안 전에 진 빚을 깡그리 청산하고 광주에 작은 집 한채를 마련했다. 비록 다른 사람들에 비해 화려한 성공담이라 할수 없었지만 물질적인 재부외에 엄마가 쌓은 무역노하우도 결코 무시할수 없는 자산이었다.

십년후 그 사장은 중국에서의 사업을 정리하고 해외로 이민을 갔고 엄마는 다시 프리랜서로 돌아와 무역대행을 진행했다. 얼마 안지나 엄마는 엄마를 이모라고 부르며 극진하게 따르는 한 안휘성 젊은이의 조언대로 규모가 꽤 큰 융자회사에 투자를 했다가 3년만에 회사의 부도소식을 접했다. 그때 엄마는 처음으로 열흘 몸져누운 듯 했다. 나는 엄마가 병이라도 얻을가봐 가끔 친정을 방문했다.

“엄마, 윤이 좀 봐요. 벌써 말을 하기 시작했어요.”

주구장창 사기당한 일만 생각하다가 마음의 병이라도 얻을가봐 나는 엄마에게 부지런히 말을 걸었다. 엄마는 누워서 천정만 쳐다보았다.

“피해금액이 커서 그런가요? 십만정도면 다른 피해자들보다는 괜찮아요. 다들 몇백씩 되어서 티비에까지 나오던데요.”
“어디로 갔을까. 잡히지나 않았는지…”
“네?”
“그 안휘총각 말이다. 회사 가보니까 경찰들이 와있고 직원들은 다 잡히거나 흩어졌다고 하던데...”
“아이고, 지금 남 걱정할 때에요? 그리고 난 그 사람때문에 엄마가 피해 본 거 같아서 열불 나는데.”
“아니야. 두달전에 그 아이가 나보고 회수하라고 했는데 내가 말을 듣지 않았어. 그나저나 젊은 사람이 안됐어. 돈이야 다시 벌면 되지만 잡혀가기라도 했으면 앞길을 그르치는 게 아니냐.”
“그러니까 왜 그런 회사에 다녔냐 말이에요. 다 자업자득이에요.”
“엄마가 아파서 돈이 무진장 들어간다더구나. 다 사정이 있으니까...”
“아니, 그러면 엄마는 지금 그 피해금액때문에 몸져 누운 게 아니었어요?”

내가 아연해져서 묻자 엄마는 도로 나를 쳐다보았다.

“누가 그래? 난 허리병이 도졌을 뿐이야. 그때 북경에선 이보다 더 큰 피해를 봤댔다. 아마 지금의 몇배 정도였지.”

엄마는 담담하게 웃었고 나는 눈을 화등잔만하게 떴다.

“네? 그리 큰 일을 왜 우리는 모르고 있었던 거죠?”
“말해봤자 걱정만 할 거 같아서. 브로커가 인도네시아 취업비자로 20명정도 사람을 내보냈는데 다른 브로커한테 사기를 당했어. 난 그 브로커가 배정하는대로 우리 민박에 그 손님들을 투숙시켰는데 결국 그 사람들은 다 강제송환을 당했고 그중 몇몇은 날 찾아와 수속비를 도로 받아갔지. 인당 6만원이었어.”
“아니, 그걸 왜 엄마한테 받아가요?”
“그 브로커가 잠적을 했으니까. 그전에 나더러 피하라고 했는데 내가 피하지 않았고. 그 사람들이 찾을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는데, 그들은 내가 그 브로커와 언젠가는 연락이 닿는다고 생각했는 모양이야.”
“엄마는 왜 피하지 않았나요? 그 브로커는 후에 다시 나타났는 가요?”
“내가 피하지 않은 건, 평생 이 일로 떳떳하게 살수 없을 거 같아서였어. 그 브로커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어. 대신 당시 다른 한 민박 주인 부부가 날 도와줬지. 그분들이 내게 거금을 빌려줬는데 이자도 차용증도 없이 내가 갚을수 있을 때 갚으라더구나.”
“…참 좋은 분들이네요. 지금도 연락이 있나요?”
“그 빚을 내가 광주 와서야 갚았는데 그분들 연락이 닿지 않아 여러 사람을 거쳐서야 겨우 찾아냈다. 좋은 분들이시지. 그때 그분들 덕분에 한가지 도리를 깨달았다. 돈은 돌고 도는 것이고, 세상엔 돈보다 중요한 것이 더 많다는 걸 말이다. 그리고 아무리 사정이 절박하다 해도 정당하지 않은 이익을 쫓아서는 안된다는 것도. 그분들 지금은 심양에서 민박을 하고 계신단다.”

나는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알고보니 엄마는 홧김에 몸져누운 게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장사 마인드도 내 상상을 초월했다. 내가 우리 엄마를 몰라도 한참 몰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학교때 남들보다 좋은 핸드폰을 쓰고 남들보다 좋은 숙소에 들 때 엄마는 남들과 치열한 경쟁으로 날을 세웠어야 했고, 내가 졸업후 내게 맞는 일자리를 찾는답시고 허송세월을 할때 엄마는 익숙한 고장을 떠나 새로운 터전에서 삶의 도전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무역 초입자인 내가 이윤만 따지며 계산기를 두드릴 때, 엄마는 기존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새로운 인맥을 알아가기에 정력을 몰부었다. 심지어 실패와 좌절을 맞이할 때에도 두문불출하고 폐인 생활을 하던 나에 비해 엄마는 지금 부득이한 사정으로 전정을 그르친 다른 젊은이의 삶을 안타까워 하고있지 않았던가...

어쩌면 현시대의 인간경시, 배금주의 등 경제적 박탈감 속에서 삶의 정도(正道)를 이탈해 가는 우리들에게, 엄마는 자신의 경험과 행동으로 대체 어떠한 삶의 방식이 올바른 것인지 몸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동안 엄마를 비난했던 일들이 새삼 부끄러웠다.

그 일이 있은 후로 나는 엄마와 많은 일들에 대해 서로 조언을 주고받군 했다. 물론 단기간의 이익을 창출하는데엔 내가 한수 앞서기도 하지만 큰 그림을 그리는데엔 엄마의 조언이 빛을 발하기도 했다. 엄마와 나는 그후 여러 일들을 겪으면서 서로 든든한 업무파트너가 되었다.

몇일전 베트남 무역건으로 이천원의 피해사례가 발생했다고 엄마가 내게 말했다. 물어보니 무역대금을 송금하지 않은 게 아니라 물류대금이 예산치를 초과했기 때문에 먼저 물류대금을 정산해준 자기 탓이라고 엄마가 후회했다.

“그러면 그 물류회사에 연락을 넣어봐야죠?”
“그 사장이 물류쪽이 잘 안되어서 베트남 무역건 이후로 회사를 접고 지금 해외에 나가있다고 하더구나.”
“베트남에선 뭐래요?”
“전과 얘기가 틀려진다고 대금 일은 정산이 끝난 게 아니냐고 하더라.”
“됐어요, 그럼. 그런데 엄마, 엄마는 장사한지 얼만데 아직 이런 손해를 봐요?”

내가 묻자 엄마는 시무룩히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도 베트남쪽에서 바이어 소개가 들어왔어. 두군데나.”
“엄마가 손해를 잘 감수하니 자기들한텐 좋은 파트너라 싶어서 그러겠죠. 이런 게 엄마의 상도(상업지도)인가요.”

하등 쓸모가 없는 줄 알면서도 또 잔소리가 나간다. 엄마는 웃기만 하고 나도 잠시후 석연하게 따라 웃고 말았다.

“이문을 남기는 것은 작은 장사요, 사람을 남기는 것은 큰 장사다.” 유명한 드라마 “상도”에서 거상 임상옥이 몸소 실천했던 삶의 철학이 머리에 떠올랐다. 시대가 변하고 경제가 발전하지만 유독 변해서는 안되는 게 인간성이다. 그동안 내가 줄곧 의문을 가졌던 엄마의 상도(商道)는 바로 참된 사람의 도리 그것이었다. 어쩌면 나는 언녕 그것을 알면서도 인정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할머니, 어디 가요?”
"우리 윤이. 할머닌 일하러 가. "

쫑도르르 달려나와 묻는 외손녀에게 엄마는 활짝 웃어보인다. 서른여덟에 할머니로 불렸던 엄마는 이제는 정말 예순여덟의 할머니가 되였다. 하지만 세월의 무상함도 엄마를 비껴가는 듯 엄마는 오늘도 여전히 신발끈을 든든히 고쳐매고 씩씩하게 일터로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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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상하게하소서 (♡.116.♡.252) - 2023/02/02 20:46:18

吃亏是福라는 말이 떠오르네요. 어머님 너무 멋지시네요~

l판도라l (♡.115.♡.27) - 2023/02/04 14:40:55

네, 그 말 도리는 아는데 행동에 옮기긴 쉽지 않죠^^ 저도 이제야 터득해가는 중입니다.

로즈박 (♡.193.♡.139) - 2023/02/03 00:30:36

나도 글을 읽으면서 드라마 상도가 떠오르더군요.. "이문을 남기는것은 작은 장사요, 사람을 남기는 것은 큰 장사다.” 우리 어머님께서는 드라마 주인공보다도 더 배포잇고 더 상도가 잇으시네요..판도라님은 참 훌륭한 부모님을 두신거같애요..

l판도라l (♡.115.♡.27) - 2023/02/04 14:42:27

과찬이십니다. 장점도 많지만 또 단점도 만만치 않은 부모입니다^^ 이젠 다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나이가 되었더라구요.

bantongshui (♡.83.♡.170) - 2023/02/06 15:54:33

현재같은 사회에서 이런분이 계신다니,어머님이 너무 멋지십니다.

l판도라l (♡.42.♡.82) - 2023/02/06 22:23:08

아닙니다. 그냥 보통 엄마일뿐인데 우리 윗세대 분들은 너무 양보나 배려가 몸에 배이다보니 저렇게 처리하는 게 보편화가 된 것 같습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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