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지신

l판도라l | 2023.02.03 11:02:37 댓글: 2 조회: 621 추천: 1
분류수필·산문 https://life.moyiza.kr/mywriting/4439121
춘추시대 노나라에 미생(尾生)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어떤 일이 있어도 약속을 어기지 않는 고지식한 성정이었는데, 어느날 사랑하는 여자와 다리아래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그는 하루종일 다리아래에서 기다렸으나 여자는 나타나지 않았고 갑자기 쏟아진 장대비로 물이 불어도 자리를 뜨지 않아 종국에는 다리를 끌어안고 익사하고 말았다.

이는 ≪사기≫≪장자≫≪전국책≫≪회남자≫등에 두루 나오는 이야기다.

이같이 '미생의 믿음'이란 뜻의 미생지신(尾生之信)은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쓰인다. 하나는 약속을 굳게 지키는 것을 뜻하고, 하나는 고지식하여 융통성이 없음을 비유한다. 말하고자 하는 뜻에 맞춰 두루 인용되지만 보통은 후자, 즉 '융통성이 없는 고지식함'을 이르는 경우가 많다.

한때 나도 미생지신의 뜻을 오해한 적이 있었다. 그 이유는 어릴때부터 나는 신의를 목숨보다 중하게 여기는 중국 여러 고전소설의 영향을 많이 받아왔기 때문이다.

“삼국연의”를 보더라도 신의에 대한 이야기들이 차고 넘쳤다. 관운장은 여섯 장수를 베고 다섯 관을 넘었고, 조자룡은 장판교에서 필마단기로 아두(阿斗)를 구했다. 그리고 제갈량의 여섯번의 기산행과 두번의 출사표 또한 선주(先主) 유비와의 신의를 지키기 위한 충정어린 행동이 아니었던가. 고금중외를 보면 또 얼마나 많은 영웅인물들이 신의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선뜻 내놓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던가. 그중에서 남송시기 시인 문천상이 남긴 시구가 바로 충정과 신의를 표방하는 가장 대표적인 예라고 말할수 있다.

사람이 태어나서 죽지 않는 이 그 누구인가?
다만 나라 위한 일편단심을 청사에 비출 뿐!
(人生自古谁无死?留取丹心照汗青.)

어릴때 그런 이야기들을 보며 나는 때로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고 때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시울을 붉혔었다. 낭만에 물젖고 정의감에 불타던 치기어린 시절이었다. 가끔 융통성없는 원칙주의자라고 비난을 당하기도 했고 현실수용능력이 약한 무뇌아로 비웃음을 당하기도 했지만, 그때의 나는 그토록 고지식했고 고집스러웠다. 그래서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내 별명도 이름하여 현정식이었다.

그 별명이 붙은 것은 중학교 2학년 때 일이었다. 돌아오는 생물실험 시간에 개구리를 해부한다고 선생님이 모든 학생들더러 개구리 한마리씩 잡아오라는 과제를 내주었다. 하학을 한후 나는 줄곧 개구리를 잡는 걱정에 휩싸였고 그런 나를 보고 아버지는 멀리 논밭에 나가 참개구리 한마리를 잡아주었다. 하지만 유리로 된 통졸임통에 넣어두었던 그 개구리가 한밤중에 놀라운 점프력으로 탈출해버릴줄은 그 누가 생각이나 했으랴. 자다가 개구리가 없어진 것을 발견한 나는 손전등을 켜고 논밭으로 개구리를 찾아나선다고 설쳤고, 그런 나를 보며 아버지는 처음으로 내게 화를 내셨다.

“선생님께 사실대로 얘기하면 되지, 애가 왜 그리 융통성이 없고 고지식하냐!”

결국 나는 울면서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이튿날아침 나는 선생님께 이 일을 얘기할 때 개구리가 정말 도망을 가버렸다는 증명을 해달라고 아버지한테 부탁까지 하고서야 등교길에 올랐다. 하지만 학교에 도착해서야 나는 반학생중에 개구리를 잡아온 학생이 단 한사람도 없다는 것을 발견했고, 생물선생님이 야심차게 준비했던 개구리 해부학 강의가 그토록 쉽게 없었던 일로 되어버리는 것에 한참은 어이가 없었더랬다.

또 한번은 우리 학교가 시골 중학교라 학교에서 난로를 피울 장작을 두단씩 가져오라고 학생들에게 시켰었다. 당시 교사직에 있는 아버지와 장사에 바쁜 엄마는 다른 부모들처럼 내게 장작을 구해주지 못했다. 결국 장작을 내기로 한 날자가 되자 나는 발을 구르며 학교를 가지 않겠다고 나누웠고, 아버지는 두번째로 화를 내시더니 울타리 나무들을 와락와락 뽑아 장작 두단을 만들어주셨다. 해낙낙해서 그것을 가지고 학교로 간 나는 선생님이 장작을 가지고 오지 못한 학생들에게 내가 예상했던 것처럼 야단을 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교실 청소를 시키는 것을 보자 어안이 벙벙해졌다. 결국 그해 울타리가 없어진 우리 터밭은 동네 닭과 오리들의 천국이 되었고, 그때문에 엄마가 김장을 하려고 심은 배추며 무우들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은 우리 집만 아는 비밀이다. 현정식이라는 별명은 바로 그 두번의 일이 있은 후 아버지가 내게 농담삼아 달아준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 나이가 들면서 나는 어느정도 세상의 이치를 알게 되고 융통성이 무엇인지도 배우게 되었다. 하지만 어릴때의 고지식한 습관은 계속 남아있어서 약속의 본질을 꿰뚫고 그것을 지키는 일에 융통성을 발휘하는데엔 아직도 많이 서툴기만 하다. 상대방이 약속을 깨면 나는 항상 피해를 보거나 상처를 받았으며 그렇다고 따지거나 불만을 표시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 다음번 약속을 잡으면 또 정직하게 응했고 다시 이런저런 이유로 바람을 맞는다. 아직은 내자신이 지킬 약속과 신의있는 사람을 가려내는 융통성이 턱없이 부족한 걸로 이해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결혼을 앞두고 나는 광주에서 열린 동창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대학 동창들의 소규모 모임이었는데 대부분이 한족인 그 모임에는 거의 다 커플을 동반하고 와서 혼자 간 내가 이상한 그림이 되어버린적 있다. 술이 얼근하게 되자 여동창중 한명이 내게 솔로냐고 물어왔고, 남자친구가 있다는 내 대답에 그러면 내일 당장 데리고 올수 있냐고 물었다. 그냥 농담으로 흘려버리기에는 그번 모임 조직자라는 그 동창의 태도가 지나치게 단호했다.

“우리 지금 모인 이 사람들 모두 내일 아침 이 호텔에서 광동식차를 마시게 될거야. 오늘 여기 혼자 온 분들은 내일 아침 꼭 커플동반으로 와야 해. 내일 얼굴을 보지 못하면 자리를 파하지 않을테야!”

나는 일단 알았다고 대답을 했다. 집으로 오려고 택시를 잡는 순간에도 몇번씩이나 확답을 받아내는 그녀를 뒤로 하고 나는 급히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필이면 내일이냐고 선약이 있다는 남자친구의 말에, 나는 내가 약속을 했으니 물릴수 없다고 모를 박아 말했다.

이튿날, 약속장소와 거리가 먼 관계로 나는 꼭두새벽에 일어나 남자친구와 함께 택시를 불렀다. 거의 광주시내 한쪽 끝에서 다른 끝으로 가는 거리였고 시간도, 요금도 엄청 많이 들 것 같았다. 택시를 잡기전 시간 확인을 한번 하려고 조직자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왠지 그녀가 어물거렸다.

“부과검진이 오늘이어서 잠깐 병원에 와있어…일단 먼저 가서 아침 먹고있어. 다들 나올 거야. 우리도 금방 갈께.”

마음 한구석으로 스멀스멀 불안이 머리를 쳐들었지만 일단 택시를 출발시켰다. 가면서 다른 동창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어제 과음해서 나오지 못하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불안감이 증폭되는 와중에 남자친구는 혹시 헛탕을 치는 게 아니냐고 옆에서 궁시렁거렸다. 나는 애매한 남자친구에게 왈칵 화를 냈다.

“분명 오늘 아침 그 장소라고 약속했단 말이야.”

그번 일의 결과는 참담했다. 약속 장소에 나온 사람은 그 호텔에 든 여자동창 둘뿐이었고, 그들은 다만 아침밥을 먹으러 내려왔다가 우연히 우리를 발견했을 뿐이었다.

우리는 그래도 이십여분을 더 앉아있다가 정말 그 누구도 약속장소로 나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그 자리를 떴다. 이 일이 내게 준 데미지는 꽤 컸다. 조직자인 동창이 그날 오후 전화를 걸어와서 커플동반으로 같이 광주탑을 관광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아침약속을 펑크낸 일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이 없었다. 나는 시간이 없다고 쌀쌀하게 말한 후 그녀와의 통화를 종료했다. 그후 나는 다시는 그녀가 조직하는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 후에 그때의 남자친구는 지금의 남편이 되었고, 그번 일은 내 인생의 흑역사로 굳어져서 지금도 남편에게 가끔 놀림을 당하군 한다.

“그렇게 순진해서 이 험한 세상 어찌 살겠어?”
“그러니까, 난 아마 이 세상이랑 잘 안맞는 거 같아.”

농담조로 받아치긴 했지만 내 마음 한구석은 가끔 묵직하게 시리다. 약속이란 대체 무엇일까?약속이란 신의의 상징이고 사람과 사람사이 관계유지의 수단이며 시간과 장소 그 이상이다. 거기엔 상대를 향한 신뢰와 배려, 서로의 소통과 공감이 오롯이 담겨있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이런 약속이 합리적이라는 포장하에 그토록 쉽사리 깨지군 한다. 이럴 때 신의를 고수해야 할 때와 융통성을 발휘해야 할 때를 잘 판단하고 그 갈등을 조절할수 있는 능력을 갖춰나가는 것이 중요한데 바보같은 나는 아직도 그 중요한 걸 깨치지 못한 것이다.

신의와 원칙, 융통성은 책임감 있는 사람들의 필수 덕목임은 더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가끔 많은 사람들이 신의와 원칙을 땅바닥에 내팽개지고, 융통성을 단물 빠진 껌처럼 내다버리는 것을 볼수 있다. 잘못된 일을 바로잡기 위해 원칙을 바꾸는 것은 결코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살면서 우리가 필요한 것은 고집불통의 신의가 아니라 융통성 있는 원칙일 때도 가끔 있으니까 말이다.

다시 “삼국연의”의 예를 들어보면, 관운장은 도원결의를 했으면서도 조조에게 항복을 했었고, 조자룡 역시 전주인 공손찬을 떠나 유비에게로 왔었다. 제갈량 또한 중원 정복의 야망과 사마의에 대한 오기때문에 북벌을 여러번 진행한 것이 아니었던가?장대비에 물이 붇는 것을 보면서 몸을 피할 생각을 하지 않은 미생은 대체 무엇을 위해 그 약속을 지켰던 것일까?죽기전에 그는 어쩌면 자신의 신념이 잘못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적 있을까?

여기까지 쓰고보니 미생지신은 그야말로 논란의 사자성어인 것 같다. 신의는 지켜야 하는 것이되 적당히 융통성 있게 지켜야 한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관점이긴 하다. 어쩌면 어릴때부터 우리가 추종하고 신봉하던 믿음과 약속, 그 저변에 현실수용적인 융통성이 항상 존재하고 있다고 이해하는 편이 더 빠르긴 하겠다.

융통성 없는 믿음은 고집이고, 융통성 있는 고집은 믿음이다. 원칙이 고집으로 변할 때, 융통성 또한 궤변으로 변할수도 있는 것이다. 어쩌면 신의과 융통성을 균형 있게 유지하는 방법을 알아가는 것이 바로 이 세상을 현명하게 살아가는 우리네 삶의 지혜가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 미생지신은 단순한 사자성어가 아니라, 우리에게 이 세상의 이치를 일깨워주는 “타산지석”이 되는 것이다.


2018년 도라지 6기
추천 (1) 선물 (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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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박 (♡.175.♡.27) - 2023/02/03 14:24:22

하하..어쩜 저랑 비슷한 성격이네요..약속을 지키지 않은 사람이 잘못이지 그걸 지키려고 한 사람이 융통성이 없는건 아닌거 같애요..약속은 신뢰를 지키는거예요..저도 그래서 약속을 펑크낸 사람을 싫어햇던적이 잇는데 머라는지 아세요?약속은 어기라고 잇는거래요..참 뻔뻔스런 사람이죠..약속 같은거 가볍게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과는 손절하는것도 옳다고봐요..

l판도라l (♡.115.♡.27) - 2023/02/04 14:45:26

약속은 어기라고 있는거다…이 말 저도 들어본적이 있습니다. 그래도 약속을 했으면 지키려고 노력을 하고 최선을 다해야 신뢰가 쌓이는거죠. 저도 고지식해서 여러번 당했는데 지금은 조금 유드리 있게 약속을 대하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나는 지키되 어긴 사람도 이해를 하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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