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을 길러 그 죄를 묻다

l판도라l | 2023.02.04 19:31:15 댓글: 4 조회: 734 추천: 1
분류수필·산문 https://life.moyiza.kr/mywriting/4439581
춘추시기 정백(鄭伯)의 한사람가운데 정장공이라는 인물이있었다.정장공의 이름은 오생(寤生)으로서,그 어머니인 강씨가 잠결에 낳았다고 지은 이름이었다.

강씨는 잠결에 아기를 낳은 것이 불길하다고 느껴져 줄곧 오생을 꺼렸다.오생의 동생으로서 태숙 단이라고 있었는데 어려서부터 강씨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다.

강씨는 총명한 태숙 단으로 하여금 정백의 뒤를 있게 하고싶었으나,그의 제의는 장유의 질서를 깊이 알고있는 정무공에게 건납되지 않았다.

정무공의 뒤를 이어 즉위한 정장공은 주평왕(周平王)의 좌경사(左卿士)가 되어 조정을 장악했다.일찍이 왕명을 빌어 송(宋)나라를 정벌했고 제(齊)나라,노(魯)나라와 연합해서송나라,위(魏)나라와 전쟁을 치르면서 세력 확장에 주력했다.

한편 강씨는 그런 정장공으로 하여금 태숙 단에게 두번째로 큰 경성을 떼주게 했다.정장공이 어머니의 뜻을 받들자 대신들은 의논이 분분했다.

“태숙은 주공의 동생이십니다.주공이 위를 이으면 태숙은 멀리 떨어진 작은 도읍을 떼여주어 살아가게 하는것이 도리입니다.태숙에게 나라에서 경성을 떼준다는것은 화를 불러오는 일입니다.”
“어머님이 그리 분부하셨는데 어떻게 어긴단 말이요.”

정장공은 대신들의 말을 듣지 않았고,경성을 받은 태숙 단은 비밀리에 강씨의 명을 받들어 사냥을 핑계로 군사훈련에 열중했다.그리고는 주변의 이웃마을들을 무력으로 쳐서 빼앗아 땅을 넓혔다.땅을 빼앗긴 관장들이 이를 고하자 정장공은 잠잠히 아무 말도 없었다.

공자 여가 정장공을 찾아가자 정장공은 이렇게 말했다.

“과인은 이미 대책을 세웠으나 아무런 증거가 없다.지금 군사를 일으킨즉 모친이 반대하려니와 모든 사람들의 입에도 오를 것이다.차라리 단의 잘못을 길러 그가 반역하기를 기다려 그 죄를 묻는다면 모친의 입도 막고 다른 사람들이 내 뜻을 알 것이다.”

결국 태숙 단은 시기를 엿보아 강씨와 내응하기로 하고 군사를 일으켰으나,미리 준비가 있은 정장공의 방비로 크게 실패하고 낡은 공성으로 쫓겨갔다가 정장공이 공성을 함락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자 제 손으로 목을 찔러 자결하고 말았다.

이 이야기에서 파생된 전고(典故)는 여러가지가 있다.

바로 “불의를 저질러 화를 자처하다(多行不义必自毙)” “잘못을 길어 그 죄를 묻다” “황천에 가기전에는 만나지 않는다” 등이다.

정장공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상당히 엇갈린 것으로 알고있다.

우선 정장공은 정치적으로는 큰 업적을 이루었으나,태숙 단의 내란을 키워 진압하는 과정에 국력소비가 엄청나서 패권을 잡는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 제일 안타까운 일이다.

그리고 그 어머니 강씨에게 한 “황천에 가기전에는 만나지 않겠다.”는 맹세는 대신 영고숙의 지혜를 채택하여 후세사람들의 질책과 비난을 다소나마 줄이긴 했지만,“잘못을 길러그 죄를 묻다”라는 것은 정치적으로 자신의 통치를 강화하기 위해서 형제간의 우애와 부모에 대한 효성에까지 허위와 가식의 수단을 아끼지 않은 방식으로 지금까지 부정적인 평가를 피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고금중외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 주위를 둘러봐도 “잘못을 길러 그 죄를 묻는”것은 과연 정장공 한사람뿐이었을까.

돈을 빌리기 좋아하는 지인이 있었다.그 지인은 처음엔 소액으로 돈을 빌리다가 후에는 점점 그 액수가 커졌다.소액으로 돈을 빌릴때는 친구사이 그정도 돈도 안빌려주겠냐 싶어서 거절을 하지 못했다.후에 금액이 커졌을 때에는 줄곧 빌려주다가 갑자기 끊어낼수 없어서 역시 거절을 하지 못했다.

결국 그 지인은 마지막 한번 적지 않은 금액의 돈을 빌려간후 연락을 두절했다.일년후 다시 어렵사리 연락이 되었지만 그는 그 일을 기억해내지 못했다.연락이 두절된 일에 대해서는 다만 개인 사정으로 외부와의 연락을 단절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나는 더이상 그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만일 내가 처음부터 돈을 빌려주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혹은 돈을 빌려가는 횟수가 잦아졌을때 따끔하게 충고를 주었더라면 친구를 잃지 않았을수도 있지 않을까.물론 그친구와는 다른 일로 버성길수도 있는 일이지만 적어도 내가친구의 잘못을 키운 책임에서 자유로울수 없음을 나는 깨달았다.

비슷한 예로 번역을 가끔 부탁하는 친구가 있었다.처음엔 간단한 단어를 물어보는 정도였는데 후에는 문구,단락,지어는 좀 더 긴 문장에 이르렀다.나중에 꽤 내용이 많은 문서 파일로 보내오면서 언제까지 번역해서 넘겨달라는 부탁까지 곁들였을 때에는 이미 그 빈번함이 도를 넘어서 내 생활에 퍼그나 영향을 주는 정도였다.

나는 몇번이나 거절하려고 했으나 딱히 거절의 이유를 찾지 못하여 한번,또 한번 번역에 임했다.생각해보면 나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 것으로 알고 부탁해온 사람에 대하여 내가 더이상 그 재간이 없다라는 말이 차마 입밖에 나오지 않은 경험이었다.후에 나는 기한을 미루는 것으로 완곡하게 거절의 태도를 표시했으나 오히려 시간을 맞춰달라는 재촉을 당하고 끝내는 짜증을 내버렸다.그리고 이번에는 그 친구는 나와 연락을 중단했다.

나는 두번의 경험에서 거절에 약한 내 성격이 쉽게 타인에게 뭔가를 권하거나 부탁하는 사람들의 잘못을 길러주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그리고 누군가의 권유나 부탁을 거절하면 그 사람의 마음을 거절하는 걸로 오해받을까 염려했지만,나중에 감당하지 못할 청을 무리하게 들어주어 관계가 불편해지거나 그에 관한 인간관계를 정리해야 하는 것 보다는 처음부터 명료한 입장을 취해주는 편이 더 나은 거라고 뒤늦게야 깨달을수 있었다.

그렇다면 잘못을 길러 그 죄를 묻지 않고 잘못이 크지기전에 그 잘못 된것을 바로잡는 방법에는 주로 어떤 것들이 있을까.

첫번째는 거절을 자주 연습해야 한다.거절은 나쁜 것이라는 편협한 사고방식을 버리고 우선은 사소한 부탁이라도 사양하고 금지시키는 방법을 쓰는 것이 우선이다.

둘째로는 불필요한 인간관계의 유실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타인에게 자잘한 부탁을 자주 하는 사람중에는 이기적이고 배려심이 없는 부류의 사람들이 많다.그런 인간관계는내 삶의 긍정적 에너지와 시간적 여유를 갉아먹는 인간관계일수도 있기때문에 과감히 버릴수도 있으며 그 관계를 잃는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는 정작 마음을 넓게 포용해야 하는 때에 이르러 감정적인 기질을 발휘하는 모순적인 성격을 버려야 한다.상대방이 부탁을 해올때 그것이 나를 불편하게 하는 일이라면 제때에 불편한 감수를 표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연민이 지나쳐 도와줌으로써 상대방에 대해 호의적이라는 착각을 주면서,속으로 그 상대방에 대해 불만이 생긴다면 애초에 돕지 않는 편이 낫다.평소에는 심성이 너그러운척 습관적으로 수용하다가 한계에 이르러 갑자기 화를 내면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돌발상황이라 분명 억울한 느낌도 없지 않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내가 상대방에 대해 진심으로 관심하고 상대방과의 인간관계를 소중히 생각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하지만 여기서 간과한 것이 하나 있다면,바로 첫 이야기에서 정장공은 태숙 단에 대해 진정 혈육의 정으로 대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마찬가지로 나 역시 돈을 빌려간 지인,번역을 부탁한 친구와의 관계를 진정한 우정으로 대했던 걸까.그리고 그 우정에 걸맞게 최선을 다한 충고를 건넨적이 있던가.

춘추의 오패에서 유감으로 사라진 정장공의 진심이 무엇이었든간에,그가 남긴 “잘못을 길러 그 죄를 묻는” 방법이 후세에 이렇게 화자되어 인간관계의 시금석으로 쓰일줄은 아마 정장공 본인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동생의 존재가 불안해지자 제거할 명분을 얻기 위해 계략을 써서 천하를 속이고 후세에 골육상잔의 예를 남긴 정장공의 졸렬함이 결국 그를 춘추오패의 자리에서 밀어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새삼스레 든다.

생각해보면 나 또한 졸렬하게도 항상 좋은 말만 해주는 친구를 가까이하고 쓴소리를 하는 친구를 멀리하지 않았던가.그리고 친구의 잘못에 대해 함구하다가 그 잘못이 서로의 관계를 불편하게 하면 우정마저 버리지 않았던가.

“잘못을 길러 그 죄를 묻다”,진정한 우정은 어떤 방식으로 영위해가야 하는지,그리고 대인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진솔함,성실함뿐만 아니라 옳바른 처세술도 한몫 한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하는 말이다.

살면서 나는 누구의 잘못을 길러준 사람이었을까,아니면 누군가에게 잘못이 길러져 있는 사람일까…많은 사색을 하게 되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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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박 (♡.193.♡.135) - 2023/02/05 05:24:08

저도 잘 거절을 못하는 성격이라 지금은 그나마 바른 소리도 하고 싫으면 싫다고 똑 부러지게 말하는데 옛날에는 부탁을 거절하지 못햇던적이 많앗어요..특히 돈을 빌려달라는 부탁에는 안된다는 말을 못하겟더라구요..나한테 잇는걸 빤히 알고 빌려달라는데 말주변도 잘 없어서 돌려서 거절하지 못하고...미국에 잇으면 돈을 막 끌어모으는줄 알아요..그 먼 중국에서도 한국에서도 돈 빌려라는 전화가 가끔 와요..참 답답해요..안 빌려주면 인연이 끊어질거 같고 빌려주자니 못 받을거 같고..그래서 1.2만원 같은건 마음을 비우고 빌려줘요..액수가 크지 않으니 받으면 좋고 못 받아도 그만이라고..
하..돈 빌리는 사람도 급해서 여기까지 손 내밀겟지만 그 사람 한사람이 아니고 또 다른 사람이 빌려달라할때에는 정말 짜증나더라구요..
그래서 인젠 안 빌려주려고요..빌려주고 받으면 좋은데 못 받으면 인연이 끊기는거고 안 빌려줘도 인연이 끊기는데 차라리 안 빌려주고 안 보고사는게 마음이 편한거 같애요...근데 남은 안보고 살아도 괜찮은데 친척이나 형제는 머리가 아파요..이럴때면 빌리는 사람이 잘못이 큰지 안 빌려주는 사람이 잘못이 큰건지..ㅠㅠ

l판도라l (♡.21.♡.52) - 2023/02/08 14:40:44

와우, 긴 댓글은 항상 기분이 좋아요.^^ 돈을 빌려주는 사람이 받아낼때는 항상 어렵게 받아내는 세상이 되어버렸네요. 저는 만원 이만원은 마음 비우지 못하겠고 삼천원까진 마음 비울수 있을 거 같습니다. 만원대 올라가면 그걸로 우리 애들 맛있는거나 더 사줄껄 하는 후회가 따를거 같습니다. 거절을 못하는 데로부터 이젠 거절을 자주 하는 습관을 키우는 중인데 그러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겠습니까. 다시한번 댓글 감사합니다.^^

앞을봐요 (♡.70.♡.20) - 2023/02/08 09:15:16

님 글들은 사람을 끄는 힘이 있습니다.일전에 삼기에 실린 소설을 본적 있습니다.감정 몰입이 되면서 착잡하기도 하고 감회가 깊었습니다.모티브는 온라인 소재인가요?
정장공이 그러한 행동을 한데는 원인 제공자는 모친과 동생인데 효심으로 우애로 덮고 넘어가기엔 많이 억울할것 같습니다.동생이 반란에 성공했다면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사람은 정장공일것이니까요.
나라를 창건한 통치자들은 왕권을 다지기 위해 건국 공신들에 누명을 씌워 무자비하게 숙청하군했죠.정장공은 창건자는 아니지만 도전하는 주변인에게 적어도 없는 누명을 씌워서 제압한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그 위치에서 어쩔수 없는 선택이 아니였을까 생각됩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이라크 파병을 하면서 대통령으로서 국익을 위해선 하기 싫어도 해야할 일이 있다고 했습니다.

l판도라l (♡.21.♡.52) - 2023/02/08 14:49:21

삼기의 소설이라면 어느 소설이었죠?^^ 모티브는 현실소재일 때도 있고 순 허구를 구상할 때도 있습니다. 님의 댓글을 보면 정장공에 대한 또 다른 접근이네요. 저도 동주열국지를 보면서 제일 안타까웠던 인물이 정장공인데, 어쩌면 여러 제후들 가운데서 가장 진솔한 인간이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님 말씀대로 그 위치에서는 하기 싫어도 해야만 하는 일도 분명 있었을 테니까요. 동생과 결탁해서 자기를 죽이려던 어머니를 용서하는 부분은 정장공으로서는 자신의 본연의 의지를 극복하고 세간이 만족할만한 답을 내놓았다고 생각해요. 어쩌면 용서를 받고 평생 효도를 받으며 산 그 어머니 마음도 착잡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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