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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판타지가 찾아올 때

l판도라l | 2023.02.08 18:00:34 댓글: 4 조회: 722 추천: 1
분류수필·산문 https://life.moyiza.kr/mywriting/4440728
다섯 살이 된 딸아이가 문득 나에게 물었다.

“엄마, 우리는 왜 매일매일 살아야 하나요?”
“글쎄, 이미 태어났기 때문에. 그렇다고 죽을 수도 없잖니.”

이렇게 성의 없게 대답하면 어린 딸아이는 죽음이라는 낱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명색이 지성을 추구하는 신세대 엄마의 대답이 이렇듯 영혼 없는 멘트여서는 결코 안될 일이다.

“글쎄다. 왜 사는가면, 우리 삶이 너무 행복하기 때문이란다.”
“행복하지 않으면요?”
“그래도 살아야 하겠지. 앞으로 행복해지기 위해서.”
“그래도 쭉 행복하지 않으면요?”
“언젠가는 행복해진다는 희망만 있으면 우리는 매일 살게 되어있어.”
“맞아요. 나는 매일매일 엄마랑 함께 살 거에요. 꼭 그럴 거에요.”

나름 긍정적인 대답을 고민해서 들려주었다. 딸애가 만족할만한 대답이 되었는지는 모른다. 암튼 딸애는 수긍을 했고 다짐도 했다.

하지만 며칠 안 지나 딸애는 또 난감한 질문을 해왔다.

“엄마, 엄마도 나처럼 어릴 때가 있었죠?”
“그럼.”
“그러면 앞으로 엄마도 할머니처럼 되는 거에요?”
“맞아.”
“누구도 다 똑같은 거에요? 나도요?”
“그렇…지.”
“그럼 나도 죽을 수도 있어요?”

비록 내가 알려주지 않았지만 다른 경로로 아이는 이미 삶과 죽음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피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응. 인간의 생로병사는…”

나는 지극히 냉정하고 현실적인 대답을 잇지 못하고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딸애의 눈에 어느새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있었기 때문이다.

“왜 그래야 하는 거에요? 왜 꼭 그렇게 되는 거에요? 난 싫어요!”
“아직 당면한 일이 아니야. 그리고 그것은 아주 먼 훗날이 되는 거란다. 우리 삶의 가치는 죽음에 따라 소멸되는 게 아니야…죽음은 삶의 한 부분이고 삶의 연장이란다…”

이런 대답이 소귀에 경 읽기라는 걸 안다. 그 어떤 말을 해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안다. 오랜 시간 해답을 찾지 못해 방황할 거라는 것도 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언제까지였는지는 생각이 났다. 정확히 일곱 살 때까지, 내가 아버지한테 했던 질문들을 지금 딸애가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었다. 유전의 메커니즘은 참으로 기이하고 오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작 다섯 살인 애가 삶의 존재적 가치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으니 요즘은 부모 노릇 하기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세월이다.

“사람은 왜 태어났나요? 그리고 왜 살아야 할까요?”

기억 속에 소환된 일곱 살의 나는 지금의 딸애와 비슷한 질문을 했었고, 아버지는 내 질문에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해주셨다.

“저기 책장 보이지? 저기에 있는 책들에 그 답들이 있을 것이다.”

나름 현답이었다. 중학교 조선어문 교원이었고 자유 기고인이었던 아버지는 벽 세면을 차지하는 책장을 소유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그 안의 책들을 다 읽으면 더 이상 이상한 질문을 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신 모양이다.

시간이 오래 흐른 뒤에야 나는 아버지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책장의 책들을 거의 다 읽었고 틈나는 대로 주변에 구해지는 모든 책들을 섭렵했다. 그 무렵엔 아마 종이에 글씨가 씌어 있는 것을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명작들은 물론 한창 유행하던 석견, 경요 로맨스 소설들도 읽었고 후에는 무협, SF 장르까지 닥치는 대로 보았다. 수업 시간에 소설책에 교과서 책갈피를 씌우고 열심히 읽다가 가끔은 선생님께 발각되어 크게 혼나기도 했다. 하지만 책을 읽을 수록 그 어디에도 내가 구하는 답은 없었고 오히려 더 많은 의문들만 무수히 파생되었다.

“우주는 왜 끝이 없을까요? 사람의 생명은 왜 유한할까요? 지구는 언제 멸망할까요? 외계인은 진짜 존재하는 걸까요? 명왕성으로 가는 데 왜 90년이나 걸릴까요?... 가우촌은 홍루몽에서 어떤 역할을 하나요? 그리고 옥황상제와 석가여래는 누가 더 세요? 서유기엔 왜 도교와 불교가 같이 나올까요…”

후에 아버지가 그러셨다. “십만 개 무엇 때문에?”를 내 덕분에 경험했다고 말이다. 나는 지적 호기심이라 미화했지만 아버진 공포의 기억이라고 하셨다. 나를 보기만 하면 두통이 도질 정도였다고도 하셨다.

질문에 해답을 찾지 못하자 내 고민은 계속되었다. 엄마가 혹시라도 슈퍼에 간장 심부름을 시키면 나는 두 시간이 걸려도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마을 우물정자 옆의 나뭇가지 사이로 비쳐 들어오는 햇볕은 왜 그리 따스하며, 그 나무 위에서 작열하는 둥근 태양의 빛은 어찌 그리도 찬연할까. 나는 내가 속한 대자연의 아름다움에 전율을 느껴 차마 걸음을 뗄 수 없었다. 청량한 공기와 시원한 바람은 왜 까닭 없이 슬프고, 맑은 하늘과 높은 구름은 왜 새삼스레 경이롭던지… 이 세상에서 크고 높고 신비스러운 존재에 대한 경탄과 사색은 항상 고민하던 그 한 곬으로만 흘렀다. 정말이지, 대체 우리는 왜 태어났고 무엇 때문에 살아가야만 하는 것일까.

나는 그렇게 이상한 고민이 많은, 좀은 괴짜 아이로 자랐다. 혼자 있기 좋아하는 시간이 많았고 그래서 다른 아이들과의 커뮤니케이션도 원활하지 않았다. 삶의 의미와 존재적 가치에 대한 내 고민도 계속되었다. 가끔은 이런 생각의 매듭을 풀 수 없어 삼라만상이 고요한 밤중에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고, 그런 비정상적인 현상이 자주 반복되자 부모님은 나를 두고 정신과 상담이라도 받아야 하나 한동안 번민하셨다고 한다.

중학교 때 나는 아버지의 권고대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삶의 의미와 죽음의 가치에 대한 고민, 인성에 대한 혼돈과 불안으로 가득 찬 그 일기장은 나 혼자만이 알아볼 수 있는 두서없는 낙서장에 불과했다. 그래도 그 일기장 때문에 나는 이상한 아이라는 낙인을 지워갈 수 있었다. 내 젊은 날의 방황은 꽤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되었다.

글쓰기는 대학을 졸업하면서 시작했던 것 같다. 그 무렵에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로 인한 체념까지 더해져 매일 뭔가 쓰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 없었다. 어쩌면 미미하지만 내 삶에 나름대로의 흔적 같은 것을 남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온라인에서의 첫 연재는 그렇게 일기식 실화로 어설프게 시작되었다. 당시 아껴주고 공감해준 모든 독자들에게 지금도 고마운 마음뿐이다. 글 같지 않은 글이었고 자기 분출식 문구에 불과했지만 기꺼이 박수를 보내주었고 소중한 댓글들을 달아주었다. 그 피드백이 기다려졌고 그 소통들이 즐거웠다. 그 과정에서 글쓰기라는 같은 취미를 가진 많은 친구들도 만났고 그들과는 십여 년 후인 지금까지 소중한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처음 글을 시작할 때 나는 단순히 치기 어린 내 생각들과 가치관들을 기록해두고 싶었다. 행여 먼 훗날 그것을 보며 유치함과 민망함에 손발이 오그라들 수도 있겠지만, 그 치부 또한 내 삶의 일부가 되기에 온전히, 있는 그대로 글 속에 박제해두고 싶었다. 나는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던 삶의 의미에 대한 내 고민들을 적었고 글을 쓰는 과정에서 그 해답을 구하고자 했다.

하지만 삶에는 정의(定义)가 없었다. 두어 편의 실화 연재를 끝낸 후 나는 슬럼프에 빠졌다. 2-3년 동안 짧은 문구 하나도 써내지 못한 고통스러운 시간들이 있었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에 나는 판타지를 접하게 되었다.

처음 본 판타지 소설은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나무“였던 걸로 기억된다. 물론 어릴 때에도 천문학 지식이 포함된 과학 환상소설을 즐겨 읽은 적은 있지만 한동안 판타지 소설은 그닥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내 생활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어른이 되어 처음 접한 이 판타지 소설에서 나는 작가의 기발한 상상력과 신박한 세계관에 정신이 황홀해질 지경이었다. 책을 덮으며 나는 생각했다. 앞으로 이 작가의 모든 소설은 다 읽어야 하겠다고.

그 후 몇 년 동안 나는 주로 판타지 소설과 영화, 드라마에 빠져들었고 다시 필을 들었을 때에는 나도 판타지를 쓰기 시작했다. 나는 나비효과, 평행우주, 시간 여행, 도플갱어, 영혼 체인지 등 모든 판타지 주제에 열광했고 상대성이론을 제기한 아인슈타인과 시간 여행을 연구한 스티븐 호킹 박사를 숭배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간들은 물론 내가 흥미를 가질만한 판타지 소설들을 모조리 수배해서 탐독했다. 그렇게 내 삶에는 서서히 판타지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나는 열심히 글을 썼다. 때로는 하루에 두세 편씩 업뎃할 때도 있었고 한부의 연재를 끝내는데 보름이면 될 때도 있었다. 그렇게 써내려온 결과 나는 온라인에서 6,7부의 장편소설을 완결 지을 수 있었다. 그중 역사 판타지 소설 두 편은 백여 편까지 이어졌다. 거의 다 즉흥적으로 쓴 글들이라 완성도가 떨어졌고 기교도, 문학성도 턱없이 부족했다. 내게 창작의 즐거움을 가져다준 것만으로 그 가치와 사명을 완성한 글들이었다.

판타지 소설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한마디가 있다. 그것은 바로 “판타지라는 허구를 쓰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이야기가 매우 현실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솔직히 나 스스로도 판타지가 현실과 동떨어진 허황한 이야기들이라 생각했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현대인의 삶의 무게가 견디기 어려워질수록 사람들은 팍팍한 현실에 대한 탈출구를 찾 듯이 판타지 속의 이야기에 매료당하고 위로를 받는다. 그런 독자들을 위해 최대한 현실을 반영하는 상상의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것, 그것은 내게 있어서 참으로 매력적인 시간들이었다. 그 시간만큼은 삶에 대한 모든 고민이 사라졌다. 창작 과정도 즐겁기만 했다.

판타지 소설을 쓰면서 나는 늘 미지의 세계에 대한 무한한 상상을 한다. “해리 포터”의 작가 조앤처럼 빗자루를 타고 푸를 하늘을 날아다니는 멋진 마법소년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내 소설 속의 주인공들도 먼치킨 유형이 많다. 그런 주인공들을 통해 세상을 보고, 그 주인공들의 생각이나 능력이 내가 구축한 허구의 세상에 어떤 영향을 주고 움직일 수 있는지 관찰하면서 나는 더없이 행복해졌다.

이것은 어릴 때 거듭해왔던 상상과 고민의 연속이었다. 달라진 것은 나는 이제는 해답을 찾지 못해 한밤중에 울음을 터뜨리던 어린 여자아이가 아니다. 나는 더 이상 우주의 비밀과 빅뱅의 현상에 대해 막연해하지도 않고, 더 이상 천체물리학과 생명공학의 연구에 대해 경외심을 품지도 않는다. 다만 그 모든 궁금증을 버무려서 내 작품 속에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고, 스스로 만족스러운 답을 구할 때까지 글 쓰는 행위를 반복할 뿐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언제부터인가, 나는 내 안의 그 헛헛함이…지난 삼십여 년간 끊임없이 나를 괴롭혀왔던, 말로도 설명이 안되는 그 공허감이 드디어 채워지는 감을 느꼈다. 그것이 무엇일까 고민할 시간은 별도로 주어지지 않았다. 의외로 간단해서 머릿속에 뜨거운 바람이 훅 불어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동안 수많은 질문을 받았지만 미처 대답하지 못했던, 낮에 일과 육아를 겸하고 밤엔 두 아이를 재운 후 새벽까지 글을 쓰는 행위에 대한 해답을 드디어 찾았다. 그 이유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거슬러 올라가서, 그것은 우리네 삶의 의미와 존재적 가치에 대한 질문에도 답으로 적용될 수 있다. 이제는 딸애의 질문에 나는 보다 쉽게 대답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아주 판타지적인 대답을 말이다.

“엄마, 우리는 왜 매일매일 살아야 할까요?”
“삶을 사랑하기 때문이지.”
“우리는 언젠가 죽을 수도 있나요?”
“죽음의 끝은 또 다른 삶의 시작이야. 삶을 사랑한다면 그 모든 과정, 시작과 끝이 두렵지 않는 법이란다. ”
“그러면 나는 죽어도 다른 사람으로 살수 있나요?”
“꼭 사람으로 산다고 할 수는 없지, 우리의 삶은 동물이나 화초, 공기가 될수도 있고, 구름이 될수도 있어. 태양이 될 수도 있고, 우주가 될 수도 있단다. 니가 사랑하는 그 모든 것이 될 수도 있어.”
“알았어요. 나는 엄말 사랑해요. 그러니 난 엄마가 될 거에요. 엄마도 날 사랑하죠?”
“당연하지.”

나도 너를 사랑한다, 그리고 내 주위 모든 것들을 사랑한다는 말은 쑥스러워 아껴두었다. 사랑은 영원한 것이며 사랑 자체가 바로 현실 속의 판타지다. 그래서 나는 판타지를 사랑한다. 판타지를 쓸 수 있는 글과 글을 쓸 수 있는 내 삶을 사랑한다.

삶에 판타지가 찾아올 때, 나는 비로소 사랑을 알 수 있었다.

……

나는 오늘도 내 삶의 판타지를 사랑으로 옮겨 쓰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물론 그것이 작품으로 승화되면 의미 있는 일이겠지만, 그렇지 않다 해도 유감은 없다. 나는 그저 판타지를 좋아하고 글 쓰는 것을 사랑하니까. 그것을 위해 기꺼이 내 에너지를 쏟아부을 수 있다. 그리고 이것 또한 나만의 판타지라고 조심스레 고백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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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ntongshui (♡.83.♡.208) - 2023/02/09 10:38:00

어림때부터 고민이던 삶의 의미는,전 아직도 방황하고 잇답니다.ㅠㅠ

l판도라l (♡.21.♡.220) - 2023/02/09 13:32:09

사실 다 그렇지 않을까요^^ 어떻게 보면 삶의 존재적 의미에 대한 고민은 철학적인 고민이죠.

로즈박 (♡.175.♡.27) - 2023/02/09 14:22:58

따님이 너무 똘망똘망하네요..전 어릴적 기억이 잘 안나지만 그때에는 죽음이라는게 먼지는 몰랏던게 확실해요..그때는 먹고사는데만 집중햇을가요?ㅎㅎ
암튼 작가님이랑 그 유전자를 물려받은 따님이랑은 어려서부터 생각하는것부터가 다르네요..난 죽음이라는건 또 다른 삶의 시작이라는 말이 너무 마음에 와닿아요..
사람은 죽어도 영혼만은 살아잇다고 생각해요..
원래는 만화랑 판타지는 별로 그렇게 접해본건 아니여서 알쏭달쏭이랫는데 지금부터는 판타지에 아마 푹 빠질거 같애요..ㅎㅎ

l판도라l (♡.21.♡.220) - 2023/02/09 23:53:43

삶과 죽음에 대한 고민은 항상 진행형인거 같아요. 다만 크면서 그보다 더 의미있는 일을 하는데 시간을 할애하기로 마음먹었고요.^^ 아직도 어릴때의 그 절망감이 생생하게 살아있을때도 있는데 그럴수록 더 바쁘게 돌아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원래 몸이 편하면 이상한 궁리를 많이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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